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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11 00:25:39 조회 : 1119         
경건 160610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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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IP:122.♡.165.245) 16-08-27 21:35 
서울 의존교회 160610a (경건)-이 근호 목사

 

디모데후서 3장 12절. 신약성경 345페이지입니다.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12절,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오늘 강의 제목은 이겁니다. “몸의 용도”입니다. 용도라는 말이 상당히 개인적으로 보면 기분 나쁜 이야기에요. 왜냐하면 용도라는 말 자체가 이 육체 덩어리는 다른 분에 의해서, 용도, 쓰인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내 몸은 절대로 나를 위해서 쓰라고 만들어 진 것은 아니라는 거죠. 왜냐하면 내가 태어 날 때 나한테 물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몸의 용도를 일반 가정에서는 부모를 위해서 또는 그 집안의 대대의 가문을 위해서 쓰는 용도로 쓰라고 이미 어릴 때부터 압박 적으로 강압적으로 양육을 받고 교육을 받습니다. 너의 몸은 우리 집 가문을 위해서 우리 뼈대 있는 집안을 위해서 쓰라! 그렇게 하려면 그렇게 요구하는 쪽에서 요구 받는 쪽이 만족스럽게 해 줘야 돼요.

 

“내가 우리 집 가문을 위해서 일어 설 테니까 부모님은 내가 원하는 대로 다 해 줄 용의가 되어 있습니까?” 그렇게 되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지 무슨 말이 많아!” 이렇게 나오죠. 몸의 용도가 예를 들어서 우리 집 가문을 위해서 한다면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가문이 잘 되는 것이 이것이 진리가 되고 이게 선이 되고. 악한 것은 우리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이 악이 되는 이것이 어릴 때는 가능한데, 우리의 몸이 나중에 성인이 되면 이것은 독자적으로 권리를 하게 됩니다.

 

독자적으로 친구 만나서 집에 늦게 오고 집에 안 들어오고 되면 “너 왜 부모 말 안 들어?”하면 “이제 나도 다 컸어요.”하는 것이 있어요. 코미디 프로를 보면 이런 것이 있어요. 80이 넘은 아버지가 딸에게 잔소리를 하니까 뚱뚱한 딸이 하는 말이 “아버지, 저도 나이 50이에요. 힘으로 안 져요.” 힘으로 안 진다는 거예요. 다른 말로 번역하면 내 몸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언제 까지 아버지의 원하는 용도로 제공 할 의사가 없습니다. 그런 뜻이거든요.

 

그러면 아버지가 너는 우리 집 가문을 위해서 살지 않고 네가 독자적으로 산다면 그러면 네 몸은 무슨 용도로 그렇게 너는 몸을 굴리느냐? 하면 글쎄 그것을 내가 모른다니까요. 이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부여 받기는 집안을 통해서 부여를 받았는데, 왜 나는 여자가 아니고 남자이고 왜 나는 키가 180이 아니고 170 얼마이고 왜 나는 인물이 송중기처럼 잘 생기지 못하고 송중기하고 전혀 없는, 아니면 송사리하고 닮았던지. 왜 이 용도가 내가 원하는 것과 내가 기대하는 것과 다른 몸이 이렇게 주워졌는지는 살아가면서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갭을 메울 수가 없어요. 왜 나는 금수저가 아니고 입에 흙만 묻었느냐? 이렇게 나올 때 해답은 없고 짜증만 난다, 해답이 없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몸의 용도를 일방적으로 누구를 위해서 사느냐? 어릴 때는 부모 말을 듣지만 사실은 본색을 드러내게 되면 이 몸의 용도는 누구를 위해 사느냐 하면 나를 위해서 사는 겁니다. 나를 위해서 살아요. 그런데 나를 위해서 사는 “나”가 없습니다. 나중에 치매 걸리면 나가 흐리멍텅해가지고 정신이 없어요. 나인지 귀신인지 분간도 안 되게 돼요. 나라는 것이 있지도 않은 나를 위해서 자기 몸을 쓰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나는 뭐로 되어 있느냐 하면 이게 욕망으로 되어 있고 욕망에는 무슨 욕망이냐 하면 주변의 욕망으로 되어 있어요. 주변이라는 것은 나에게 뭔가 기대를 하고 있고 나에게 시선을 보내고 있는 주변 사람들, 나라는 것은 남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나라는 것을 이렇게 구축을 해 놓은 거예요. 남의 장단에, 남이 치는 북장단에 평생을 놀아나는 겁니다. 인간이. 나에게 기대하는 사람에게 실망스럽지 않은 인생, 그것은 자기 인생이 아닙니다. 나의 인생이 아닙니다. 그것은 남의 인생입니다.

 

내 몸은 힘들어도 내가 언제 한 번이라도 주인공 된 적이 없어요. 내가 참아야 돼! 왜 참는데? 참을 때 주위 사람들이 “역시 너는 참, 우리 집안의 훌륭한 장손이다” 이미 기존에 상주해 있는 그러한 시선들. “그렇지 그래야 너는 내 자식답지!” 하는 그러한 따가운 시선들 속에 그동안 힘들게 내 몸을 그들의 입맛을 맞춘다고 놀아난 겁니다. 백날 해 봐야 나중에 유산이 남아야 주지, 없는 유산 주지도 않아요. 그저 유산 생길까 싶어서 아부하는데, 나중에 아파서 돈 다 썼다고 하면 끝나는 거예요. 도대체 왜 그런 장단에 놀아난 거예요. 내 몸인데 주변의 욕심에 욕망에 기대에 왜 그렇게 부응을 했어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우리 앞집에 부부가 살고 있는데 부부가 아주 금슬이 좋아요. 뭐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하는 그런 정도로 부부 사이가 좋은데, 74밖에 안 된 할머니가 계단에서 내려오다가 넘어져서 허리가 다쳐서 요양병원에 갔어요. 어느 날 76인지 78인지 된 할아버지가 나무에 목을 매고 축 늘어져 자살을 했어요. 근처에서 봤습니다. 그래서 제가 뭘 봤느냐 하면 중력의 법칙을 느꼈죠. 그때 119 와 있고, 경찰이 와서 사진 찍고 했어요. 금슬이 좋아서 자살한 거예요. 할머니가 요양병원 가니까 외롭잖아요. 외로우니까 살맛이 안 나서 이렇게 살아서 뭐하냐 하고 자살한 겁니다.

 

자살이 나쁘다 좋다를 떠나서 그동안 자기 몸이 자기 몸이 아니었던 거예요. 아내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그러한 기쁨조로서 몸이었던 겁니다. 아내가 죽고 난 뒤에 외로우니까 그때서 비로소 아는 거예요. 내 몸이라 하는 것은 주변에 읽히고 설킨 관계에서 쥐었다 당겼다는 밀당 하는 것에 같이 밀리면서. 그런 식으로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면서. 그러니까 이 부부가 좋은 의미에서 서로 사랑한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랑한 것이 아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 때문에 내가 존재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 몸은 자기 몸이 아니라 누구의 것이냐? 아내를 기쁘게 하기 위한 기쁨조처럼 그렇게 살아온 거예요.

 

주변에서 뭐라 하느냐 하면 금슬이 좋다는 거예요. 금슬이 좋은 것이 인생을 망쳐놨어요.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자살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포기 하는 것이냐 하면 내일에 주어질 행복을 제거하는 것이 돼요. 내일에 어떤 행복과 기쁨이 있다는 것을 본인이 일방적으로 없다고 취소시키고 죽는 거잖아요. 내일되면 또 살만한 이유가 있을 건데, 자꾸 과거에 살았던 그 익숙한 몸이다 보니까 내일 무슨 좋은 낙이 있겠어? 이렇게 죽으면 그만이지! 이렇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그 죽은 할아버지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 것도 없고 궁극적으로 자기가 누구인지 몰랐던 거예요. 평생을 살아도 남에게 휘둘리면서 살아온 거예요. 남들의 시선과 이런데 휘둘려 온 거예요. 너 그렇게 하면 내가 때찌한다. 이런 것에 휘둘려 온 거예요. 자기 몸인데도 남이 시킨 대로 사는 겁니다.

 

제가 몸의 용도를 써서 그런데 이 말을 용도라는 말을 쓰지 않고 그냥 여기 몸이 있습니다. 하면 사람들은 그 몸은 제 거 에요. 전부 다 이렇게 이야기 할 거예요. 자기 것 아닙니다. 그동안 나의 자리를 대신 침범했던 그들의 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변에 누가 있었느냐 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몸의 용도에 대해서 분명히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 나온 말씀인데 아버지께서 내게 주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수 없다고 보는 거예요. 예수님의 입장에서 볼 때에 제자의 몸은 럭비공입니다. 축구공입니다.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축구하는데 거기에 왔다리 갔다리 하는 그 축구공이 제자들입니다. 그게 몸의 용도에요. 그게 “경계”, 예수님 같은 경우에 제자들을 통해서 뭘 만드느냐 하면 이 세상에 있던 그 몸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창조, 원래 원하시는 창조의 취지에 부합되는 몸과 그 사이에 양쪽을 다 품고 있는 그 경계 선상에 있는 몸으로 12제자를 택하여 세웠습니다.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택하여 세웠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제 해답 나왔습니다. 몸의 용도가 뭐냐? 이질적인 두 세계의 경계선을 보여 주는 용도, 그게 12제자의 용도에요. 이질적인 두 세계, 그 가운데서 양쪽을 다 보여 주는 것, 그런데 그 양쪽의 세계는 결코 결합될 수 없는, 서로 대치되는, 달라도 너무 달라. 성격, 성질이 너무 다른 두 개의 중간에 대치되어 서 있는 것이 바로 12제자 몸입니다. 그 몸을 먼저 시범적으로 보여 준 몸이 누구의 몸이냐, 바로 예수님의 몸입니다.

 

오늘 본문 12절을 봅시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 여기서 경건이라는 말이 어디서 나와야 되느냐 하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만 경건이 나와요. 그런데 우리 인간의 몸에서 나오는 경건은 경건의 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몸은, 자기는 자기 몸의 용도를 모르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 딴에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경건 하 냐, 안 하냐를 본인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주변 사람들에게 일단 물어보고 되돌려 받은 그 응답이 조립되어서 나온 경건이에요. “목사님. 저 어때요? 경건합니까?” “아이구, 경건하네.” “저 어떻습니까?” “그거는 죄지.”

 

아까 집사님하고 식사하면서, 뭐 늘 듣는 이야기지만 또 화가 나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어떤 교회, 어떤 교회 할 것 없어요. 그냥 우리들 교회에요. 우리들 교회 모임에 장로가 와서 자기가 출장 가서 바람피운 것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했는데, 사람들은 얼마나 용기 있느냐? 저렇게 바람피운 것 까지 공개석상에서 이야기를 하니까, 하면서 박수를 쳤다는 겁니다. 박수 친 사람 중에 집사님도 포함됐고. 그게 마귀가 그런 짓하고 있는 거예요. 마귀가.

 

자기의 사적인 이야기를 공개석상에서 할 이유가 없어요. 그거 왜 그런 이야기를 합니까? 자기가 바람피운 이야기를 했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다른 죄는 감추었다는 이야기에요. 비겁한 사람이에요. 바람피운 것이 죄라고 하는 것은 본인 생각이라고 생각하죠? 천만의 말씀. 주변에서, 이 한국사회, 모든 사회가 바람피운 것은 죄다. 어떤 죄보다 더 나쁜 죄고, 가정을 파탄하는 죄라고, 평소에 자기가 몸이 태어나면서 누누이 거기에 숙지되도록, 누누이 반복해서 그런 소리를 들어왔기 때문에, 그게 항상 각인되어 있어요. ‘이거 나쁜 죄야. 나쁜 죄야.’

 

근데 시편 136편에 보세요. 별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별을 보고 감사하지 않은 사람은, 주님의 인자하심을 발견하지 못한 것은 죄입니다. 성경대로 합시다. 그거 죄거든요. 그러면 그 사람이 그 공개석상에서 그렇게 자기 죄를 고백한다면, 뭘 해야 해요? 시편 136편이 왜 있습니까? 성경이 왜 있는 거예요? 자기 간음은 그게 계시가 아니에요. 그럼 뭐라고 해야 합니까? “성도 여러분! 내가 이런 지독한 죄를 고백하게 되어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저는 북두칠성을 보면서 저는 주의 인자하심을 발견치 못했습니다. 돌로 치세요. 저는 죽어도 마땅합니다.” 이렇게 해야죠. 이렇게. 이렇게 해야 안 됩니까?

 

여기 시편 136편에 보면 “해로 낮을 주관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8절). 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7절).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9절).” 이렇게 되어 있잖아요. “그런데 목사님. 간음은 율법에도 나왔잖아요? 죄라고?” 이거 설명하고 방금 그거 설명하겠습니다. 하여튼 질문 한 것도 주의 뜻이에요. 무심코 나온 것이 아니고, 기초를 다지라고 주신 질문이거든요.

 

10계명 나오죠. 십계명 제일 밑에 나오는 것이 있어요. 뭐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을 사랑한 그 사랑으로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해야 된다고 나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의 움직임을 10가지 계명으로 커버가 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예를 들면 여기 3층이잖아요. 여기서 쿵쿵 거리면 2층하고 층간소음이 일어나죠. 그러면 이 10계명에다가 11계명이 뭐냐 하면 층간소음을 유발하지 말라. 이게 있어야 돼요. 왜냐, 그것은 이웃에 대한 사랑이 아니기 때문에.

 

그럼 제 12계명은 뭐냐 하면 부부싸움 할 때, 절대로 남자의 소리가 바깥으로 나와서는 안 된다. 여자소리는 나와도 되지만. 남자의 소리는 절대로 바깥으로 나와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이거 개그우먼 김숙이가 윤정수한테 이야기한 거예요. 김숙이라는 사람이 있어요. 가짜부부해가지고 하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어디 남자의 소리가 집 밖으로 나오느냐, 그거 집안 망한다는 거예요. 이거는 여자의 소리가 문 밖으로 나가면 집안 망한다는 조선시대 윤리를 반대로 바꾼 거예요. 의도적으로. 요새 시대는 그런 시대라는 말이죠. 여자가 나오는데 남자가 가만히 죽치고 앉아 있느냐 말이죠.

 

그렇다면 십계명에 주님의 사랑이 열 개로 충족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계속 조항이 늘어나겠죠. 365가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열 가지 계명으로 멈추느냐, 마지막 계명을 몰라서 그래요. 마지막 계명은 이거에요. 아까 욕망이야기 나왔잖아요. 마지막 계명이 뭔 줄 알아요? 아시죠. 남의 것을 탐내지 말라. 탐내는 것이 뭡니까? 욕망이죠. 욕망. 인간의 몸을 지배하고 있는 욕망 자체가 이 십계명, 하나님의 사랑을 훼방하고 있는 중이다 하는 것을 까발리기 위해서 계명을 준 거예요. 계명은 죄를 더욱 더 죄 되게 하기 위해서.

 

10계명을 위반하기 이전부터 이미 죄고, 그것이 이런 뜻에서 들통 내는, 내 속에 이런 게 왜 들어있지? 라고 털어내기 위한 용도가 계속 10계명부터 추가적으로 계속해서 나옵니다. 그 추가적으로 나오는 율법적인 것이 뭐냐 하면, 제사지내는 것도 죄가 되고, 십일조 하는 것도 죄가 되고, 안식일 지키는 것도 죄가 되고, 그리고 성전을 경배하는 것도 죄가 되고, 찬송하는 것도 죄가 되고, 전도 하는 것도 죄가 되고, 교회 봉사하는 것도 죄가 되고, 계속 모든 게 죄가 나와요. 나중에 털털 털어버리면 죄 아닌 게 없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사도바울의 권면은 더욱더 심합니다. 예수님의 산상설교도 만만치 않거든요. 오른손이 한 것은 왼손이 모르게 하라, 기도할 때 달라고 기도하지 말라, 있어야 할 것을 주께서 아시느니라. 왜 자꾸 달라고 하느냐, 그것도 죄가 되는 겁니다. 오른 눈을 빼어버려라. 오른 손이 한 것은 잘라버려라. 나머지기 가지고 지옥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주께서는 지옥을 전제로 깔고 하는 이야기에요.

 

그런데 사도바울의 권면은 그보다 더 셉니다. 우겨쌈을 당해도 싸이지 아니하고, 나는 남들 보기에 없는 자 같으나 있는 자요. 그렇다면 없는 자 같으나, 아무것도, 통장도, 재산도 없는데, 있는 자라는 것이 실감나지 아니하면 그거는 범죄입니다. 그건 범죄에요. 자기를 부인하라. 자기 십자가 지라. 전부 다 그거거든요.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이거는 산상설교에 나온 거고.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그런 말씀들은 어떻게 매직으로 지울까요? 안 그러면 어떻게 없는 걸로 할까요? 어떻게 할까요?

 

인간은 간음을 모릅니다. 간음을 모르기 때문에 간음죄에서 회개하고 있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내가 그때 간음을 안 했으면, 나는 간음죄 짓지 않은 자라는 것을 전제로 깔고 그 다음에 간음죄를 회개 한 거예요. 그 사람 거꾸로 세워서 탈탈 털어보세요. 간음죄하기 전부터 이미 간음죄가 우르로 쏟아집니다. 그걸 감췄다는 말은, 감추고 간음했다고 생각하는 기준인데, 그 기준은 어디서 나오느냐, 그거는 성경에 나오지 않는 기준이에요. 어디서 나오느냐, 주변사람들이 성경을 왜곡해서 자기 자신한테 전달되었어요. 이런 짓 하면 안 된다. 남녀가 손잡는 것이 간음입니까? 간음 아닙니까? 말을 하는 게 간음입니까? 간음 아닙니까?

 

간음은 어떤 단절이 있으면 안 돼요. 간음하도록 유발시킨 그 원인을 계속 동질성으로, 연속성으로 이어가다 보면 처음부터 그 여자에 대해서 뭔가 뿅하고 반한 것부터가 간음의 시작입니다. 그걸 중간에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는 간음죄라고 끊을 수가 없습니다. 끊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옛날 고대부터 근친상간이라고 하는 것을 최초로, 모든 민족의 최초의 법은 근친상간이에요.

 

왜냐하면 자체적으로 의로움과 정의로움을 구현할 수가 없어서, 이웃집 마을과 이쪽 딸을 교환시키는 가운데 법을 만들어서 자기 속에 구멍을 만들어버려요. 우리 딸이지만 우리끼리는 결혼해서는 안 되고, 저쪽 옆집 총각과 결혼한다고 해서, 어떤 빈자리를 만들어놓고 여기서 그 빈자리를 뭐로 채우느냐, 그걸 하나님의 정의, 의로 간주해가지고 이것 중심으로 모든 게 돌아가게 되어있어요. 문화인류학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놓고 왕 자기는 해당이 안 돼요.

 

왜? 왕은 법을 초월하지 않으면 왕이 될 수가 없어요. 당신도 법대로 하라고 하면, 이러면 나라꼴이 안 돼요. 자기 빼놓고 예외적인 조항이 있어야 돼요. 예외적인 조항 빼놓고 전부 다 법대로 해야지 이게 나라꼴이 돼요. 교회법은 누가 절대 지켜서는 안 되죠? 목사가 지키면 안 돼요. 목사는 교회법에 해당이 되면 안 됩니다. 그러면 교회가 개판되니까. 누가 훅하는 카리스마가 있어야 되거든요. “당신은 뭔데 안 지키느냐?” “나는 교회지도자거든.” 이래야 교회가 돌아가요. 그게 재판관입니다. “목사님. 우리 이집사하고 김집사하고 싸우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판정할 때는 판정관은 반드시 법을 초월해줘야 해요.

 

이게 말이 어려워지는데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가정에서 문제 있을 때, 가장된 아버지가 법을 지키든가요? 안 지키든가요? 절대로 지키지 않아요. 그걸 만일 지키게 되면 애들이 우습게 봐요. 아버지를. 딸보고는 일찍 들어오라고 해놓고 아버지는 늦게 들어와요. 왜? 아버지니까. 그럴 때 가족은 법을 초월한, 우리하고 같은 동급으로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법의 제정자입장이라는데 마음에 안심을 가져요. 나라는 몸에 뭘 정착시키느냐, 체계적인 정신이라는 질서가 몸에 부착이 됩니다. 그러면 그 애는 가정교육 잘 받은 애가 되는 거예요.

 

가정교육 잘 받은 애가 어떤 특징이 있느냐 하면 아버지가 지킬 만한 범위 내에서 가정교육 잘 받은 것이 돼요. 제가 말을 해놓고, 이게 뭔 뜻인지 모르겠죠? 이런 거예요. 대학생인데 어디 모임에 가서 술을 먹는다. 근데 어떤 학생은 술을 먹는데 그냥 먹지 않고 몸을 돌려서 이렇게 먹더라. 야, 웃기게 왜 이러 노? 우리 집에서는 아버지가 교훈하기를 반드시, 그러니까, 양육 받는데 몸이 있거든요. 몸의 용도. 몸을 아버지가 계속해서, 니는 어디가도 내 자식은 이래야 돼! 훈계를 시켜놓은 거예요. 그게 뭐냐 어른 있을 때는 앞을 보고 마시지 말고 돌아서서 예의를 갖춰서 마시는 것이다. 이렇게 되거든요.

 

그런데 다른 여학생은 술을 아예 안 먹어요. 니 왜 안 먹는데? 우리 집에서는 여자는 술을 먹으면 안 된다는 게, 그게 법이 되는 거예요. 같은 인간의 몸인데, 그게 상충되는 두 개의 분위기가, 환경이 따로따로 노는 겁니다. 서로 다른 정신세계를, 서로 다른 자아상이 성립되어버려요. 그럼 몸이 충돌돼서 친구하든지, 아이구, 니 잘났다. 니 집은 술 안 먹고 그래. 좋겠다. 이래 된다 이 말이죠. 그 아버지가 술을 왜 못 먹게 하느냐, 그 집이 바로 기독교 집안이거든요. 그럼 기독교 집안은 술 먹지 말라는 것은 어디서 나온 겁니까?

 

이미 한국의 기독교 150년 역사 가운데서 담배와 술을 금한다는 것이 들어와 있는 거예요. 술을 안 먹고 담배 안 피움으로써 집사로 교회에서 고위직을 차지할 수 있고, 다른 사람한테는 대외적으로 산상설교에서 말씀한 것처럼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교회에서 대대로 교사들이 그렇게 가르쳐 왔거든요. 근데 그 가르침에 대해서 예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죠? 예수님 어디 한 마디 하시죠. 예수님 이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은 이거에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기독교 집안의 영광을 위해서, 그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그런 공식에 의해서 훈계 받았지만, 직접 우리의 모든 몸은, 인간의 어떤 가문에 속한 몸이 아니고, 예수님의 용도를 보여주는,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한 용도거든요.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열두 제자는 자기의 가족과 자기의 친척을 버려야 했던 겁니다. 중요한 거 처음으로 나왔죠.

 

예수님의 성도의 몸은 먼저 조건이 뭐가 있다? 처나 자식이나 아비나 남편이나 그 가정을 떠나야 한다는 겁니다. 육을 떠나야 해요. 아브라함처럼. 이삭처럼. 야곱처럼. 육을 떠나야 돼요. 육을 떠날 때 그냥 떠나지를 못해요. 떠난다고 하니까 성경구절이 어디 있느냐고 하는데, 어떤 제자가 가기는 가지만 아버지 장례 치르고 가겠다고 할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섭섭한 이야기하죠. 부조도 안 하고 하는 말이,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했습니다. 그걸 제자들한테 이야기 한 거예요.

 

너희들의 입장은 바로 산자와 죽은 자, 죽은 자와 산자, 천국과 지옥의 경계선을 보여 줄 용도로써 쓰여 진다는 거예요. 용도로써. 그런데 저쪽세계, 죽을 세계에는 이미 누가 선점하고 있느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아이디어를 갖고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그들의 모든 윤리 도덕적 아이디어가 어디서 나오는가, 그들이 구약을 나름대로 해석해서 한 거예요.

 

그럼 구약을 나름대로 해석할 때, 그들이 도입한 것은 뭐냐 하면 바로 역사적 해석이라는 거예요. 역사적 해석이라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전통적 해석이라고 해서, 전통적 해석인데, 전통적 해석에서 좀 더 설명이 필요해요. 이게 뭐냐 하면 옛날에 이랬으니까 해석하자. 그런 뜻이 아니고, 전통이 스스로 해석을 낳는다는 뜻입니다. 전통적으로 이런 해석입니다. 우리 그냥 수용합시다. 그게 아니고 전통적으로 오더라도, 이 시대에 그 전통이 합리적으로 맞느냐, 안 맞느냐에 따라서 적합한 것만 우리에게 적용시킵시다. 새롭게 전통을 만들어낸 그 해석이다 이 말이죠. 그 해석, 얼마나 합리적입니까? 누가 뭐래도 이것은 이성적으로 이의를 걸 수가 없죠.

 

과거를 답습하라는 것이 아니에요. 과거를 답습하라는 것이 아니고 과거의 좋은 것 가운데서 지금에 적합한 것을, 그것을 약간의 수정을 해서라도, 그걸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해석으로 삼자는 것이 전통적 해석입니다. 그런데 그 단어에서 적합하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적합하다는 게? 적합하다는 것이 뭡니까? 상황에 맞다는 뜻이에요. 그럼 자기가 처한 상황을 자기가 판단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그게 나오잖아요. 이 상황은 지금 위기상황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적용하자. 근데 그 상황 판단은 누가 일방적으로 합니까? 그 공동체가 일방적으로 하거든요.

 

그럼 공동체 하나하나, 개인 속에 뭐가 들어있죠? 욕망이 들어있죠. 아까 그대로입니다. 욕망은 뭐로 만들어졌습니까? 어릴 때부터 익숙해지고 들어왔던 윤리도덕체계가 그들의 욕망을 이루어줬잖아요. 이것은 해도 되고 이것은 안 해도 된다는 것이 이미 거기에 누적되어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말합니다. 바로 그것들이, 그것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거예요. 그 윤리도덕이. 그럼 그 윤리도덕을 로마서 10장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들의 성경해석은 무슨 행위냐, 그 근거가 있는데 그게 “자기 의” 라는 겁니다. “자기 의.”

 

그럼 자기 의는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남의 몸은 다 죽고 고생해도 내 몸은 평안해야 하고 행복해야 되고 오래오래 살아서 천국가야 됩니다.” 라고 자기 몸에 대해서는 그렇게 좋은 이미지를 남기는 겁니다. 왜, 남보다 자기 몸은 그렇게 평안해야 되고, 영원토록 행복해야 될 근거는 어디서 가져왔습니까? 그거 어디서 가져오죠? 그것은? 어디서 가져 올 데 있습니까? 없습니까? 가져올 데가? 성경에 그런 게 있어요? 여기 누구누구는, 이름 안 적혀 있죠? 그 근거가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놀라운 사실은 없는 근거가, 우리의 실감나는 현실이 된다는 것이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근거도 없으면서 이상하게 예수이야기는 거부하고 싶고, 그렇게 당신은 무조건 사랑받아야 되고, 당신은 사랑받기위해서 태어난 사람~당신은 무조건 행복해야 된다는 근거는, 듣기만 들어도 흐뭇해지는 이 몸은 숨어있는 보이지 않는 권력입니다. 그게 바로 악마의 권력이에요.

 

유대인들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성경해석은 딱 하나입니다. 이래나 저래나 무조건적으로. 무조건, 무조건, 유대나라는 해방되어야 된다. 그게 전제조건이었습니다. 이유를 묻지 마세요. 왜? 무조건 그렇다는 거예요. 어떻게? 하나님의 약속이 그렇다는 겁니다. 모세가 그렇게 했다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영원하리라. 이게 모세의 약속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야기하죠. 모세가 너희들을 저주한다. 너희 애비는 악마다. 예수님하고 이렇게 충돌할 만하죠. 예수님이 과장된 발언을 하신 것이 아니에요. 진실을 이야기한 겁니다.

 

피조물을 대표해서 창조주인 나를, 천지를 창조하신, 별과 해와 달을 만드신 나를 죽이라고 하나님께서 너희 유대인들을 남겨뒀다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에요. 그 해석을 유대인들이 “예. 아멘. 할렐루야!” 하고 받아들이겠습니까? 안 받아 들이겠습니까? 예수님이 하신 이야기를 그들이 그걸 안 받아들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생각했던 하나님과 충돌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정리합시다. 사람들은 몸을 갖고 있는데, 외형적으로서는 뭐냐, 타인의 욕망이 가득 차 있다. 근데 타인의 욕망 중에서 나를 칭찬하고, 사랑하고, 나를 위해주고 보호해주는 그 이야기만 유독, 왜 내가 좋아하느냐, 그 근거는 없어요. 없는데, 무조건 내 위주로, 내 중심적으로 너는 잘 할 것이라는 그 격려와 위로에 대해서는 내가 굉장히 선호한다는 이 자체가, 그것을 선호한다는 그 자체의 이유를 몰라요. 이거는 아무리 박사라 해도 몰라요. 남들은 박사학위 안 따는 게 섭섭하지 않고 내가 박사학위 따는 것이 좋다. 이유를 모른다니까요.

 

자기 애 유치원에서 달리기 하는데, 남의 애가 엎어지게 되면, 잘한다. 할렐루야! 하고 자기 애가 엎어지게 되면, 야야 애가 왜 이러나? 왜 그런지 이유를 모른다니까요. 내가 왜 자꾸 내 편인지를 몰라요.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 많은 철학자나 학자들이 분투노력합니다. 두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하나는 채식주의자. 한강이라는 사람이 지었던 채식주의자. 아버지가 동물 학대한 것에 죄책을 느끼고, 본인이 속죄하는 의미에서 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결혼 한지 5년 된 아줌마가. 근데 그게 속죄가 되던가요?

 

잘 들어보세요. 외형적으로, 어릴 때 자기는, 월남전 참전했던 아버지가 개를 진짜로 개같이 다루었던 것에 대한, 그렇게 학대해서 잡은 그 개고기를 어릴 때는 어쩔 수없이 고기를 먹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외형적으로 남들이 아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채식만 고집하는 것은 아버지가 동물 학대했기 때문에, 동물한테 미안해서라도 내가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 했는데, 그것으로 자기가 속죄가 되느냐, 이것은 외형적으로 되는 것인데, 내면적으로 들어가 보니까, 두 번째 몽골 반점만 보게 되면 거기에 이런 내가, 속에 내가 뭘 깔고 앉아 있느냐 하면 성적인 욕망을 깔고 앉아서 이런 짓 하고 있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진짜 성적인 욕망은 가득 찬 데, 그걸 누른 방법이 뭐냐 하면 나는 착하다고 설치므로 말미암아 나에게 이런 꿈틀거리는 더러운 욕망이 있다는 것을 안 들키고, 그게 외부에 터져 나오지 않도록 고이고이 지금 땜질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형부하고 관계를 가지면서 들통이 나버렸어요. 그래서 이 문제로 그 앞에 문제, 동물학대 문제는 날아가 버렸어요. 해답이 없습니다. 왜, 나는 그렇게 성적인 욕심이 아직도 있는지, 그게 왜 그런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이미 생물학적으로 나왔습니다. 인간은 짐승 같아서 짝짓기 하게 돼있어요. 이게 본성이에요.

 

그러나 소설에서는 과학책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나라는 것은 없고, 그냥 작업적인 욕망덩어리로 그게 내부에, 지하실에 있다는 것을 알아요. 근데 그걸로 끝나지 않잖아요. 제 3부, 내가 무기물이 되는 겁니다. 내가 다시 사람이 아니고 나무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무기물 위에 짝짓기 한 욕망이 있고 그 욕망 위에 껍데기만 살아있는 것이 있다. 이게 한강이라는 작가가 보는 이 세상의 군상이다. 상 받을만하죠.

 

감추고, 감추고 있고. 숨기고, 숨기고 있고. 그런데 그거는 남성들은 몰라요. 해병대 나오고 월남전 참전한 아버지는 몰라요. 남성들은 철이 없어서 눈에 보이는 것 가지고 설쳐대고 게임 벌이는데, 그걸 아는 것은 누구의 몫이냐 하면 여성의 몫입니다. 여성만이 세밀하게 인간의 기본을 알 수 있다고 했는데, 결국은 무기물이 기본이었습니다. 무기물이 기본이라는 것은 이미 프로이드가 이야기한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오늘 재미있죠? 아가씨라는 영화가 뭐냐 하면 남성들 역시, 철딱서니 없는 남성들이 음란서적을 읽어주는 여성을 노리개 삼아서 고급책을 팔면서 귀족생활하고 있는, 이 일제시대 껍데기만, 그 껍데기에 놀아난 여자가, 어릴 때부터 그런 것을 훈련받다가 이제 이걸 뒤엎는 거예요. 뒤엎어버려요. 세상에서 정치권력 가진 것, 귀족이라는 것, 일제시대 정치, 경제, 문제 이 모든 것은 철딱서니 없는 남성들이 구축했지만, 그것은 여성에 대한 학대와 여성에 대한 무시, 여성에 대한 모멸, 그걸 근거로 해서 그렇게 세워진 거예요.

 

따라서 그 밑바닥에 깔렸던 그 카페트를 확 걷어버립니다. 남성들보다 더 여성적인 면에서 성적인 것을 까발림으로 말미암아 여성이야 말로 진실 된 숨어있는 진리를 찾아낼 수 있다. 이게 칸 영화제에 초청받은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라는 영화에요. 영화 봐도 잘 모를 거예요. 결국 이 세상의 학문이라는, 철학이라는 이것은요, 근본적으로 왜 나는 나를 사랑하는지 그 이유를 몰라요. 그런데 예수님이 분명히 이야기했다고요. 바로 그런 너가 나를 미워함으로써 비로소 나를 미워하기 위해서 인간은 자기만 사랑하게 돼있다는 것이 예수님이 내린 결론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창조주와 결부될 때 진실이 밝혀져요. 그런데 지금까지 모든 학문은 예수님, 창조주, 이런 것을 완전히 끊어버리고, 자기가 도 닦듯이, 도를 백날 닦아봐야 소용없습니다. 황진이라는 조선시대 기생은요, 살아있는 부처라는 그 사람도 꼬셨어요. 지족선사, 서경덕이라는, 당대의 투톱이죠. 최고의 윤리, 지혜로운 학자도 꼬시고, 그 당시 불교적으로, 종교적으로 최고의 살아있는 부처라는 그 사람도 꼬셨어요. 미모에 안 넘어 가는 남자가 어딨어요? 이래 되는 거예요. 근데 꼬셨는데, 해답이 있습니까? 왜, 해답이 없습니까? 조선시대 때 누구 이야기가 없어요? 예수그리스도 십자가 이야기 없잖아요. 이방민족이니까.

 

사람이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이것이 마귀적인 이유가 예수님 제치고 따로 경건하겠는 거예요. 예수님 제치고. 예수님을 모델로 삼아서. 나도 당신처럼 열심히 하면 할 수 있다는, 그런 라이벌의식을 갖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미 결정지었어요. 그것마저 결국은 너가 너를 사랑하는 극단적인 최정점의 방법이 뭐냐 하면 자기학대, 자기를 부인해서라도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려는 모든 시도. 그게 악마의 최후의 모습이 그겁니다.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어디 못 간다고 했습니까? 천국이죠. 바리새인들이 그 당시 사람들 보기에 율법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에요.

 

심지어 바리새인의 그 당시 율법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남이 싫어하는 행동을 니가 하지 말라는 거예요. 어렵지 않습니까? 어디서 많이들은 이야기 같죠. 남이 싫어하는 것을 니가 하지 마라. 산상설교에 보면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 그것하고 비슷하죠.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 바리새인 율법에 나와요. 심지어 공자이야기도 나옵니다. 공자이야기에. 그런데 그걸 통해서 사람들이 그걸 보는 순간 뭘 느낍니까? 나는 나를 사랑해서라도 저 말씀을 안 지키겠다고 나오겠습니까? 지키겠다고 나오겠습니까? 안 지키면 미워할 거야. 누굴? 나를. 내가 목표가 있는데 숙제를 안 한다는 것은 찝찝하거든요.

 

내가 안 들었으면 몰라도 이미 들은 이상은, 그걸 숙제를 할 때 뭔가 성취감이 있습니다. 세상에! 이런 말씀까지 내가 준수하는구나. 야, 이정도면 내가 대단한 신자네. 자기의 괜찮은 이미지에 자기가 매료되어가지고요, 자기가 자기 교주가 되고, 자기한테 유일한, 충실한 신자가 돼요. 자기 집구석은 성전이 되고. 집에 올 때 신발 벗고 와가지고 자기한테 경배하는 것. 심지어 찬양하면서도 경배하죠. 오늘 목소리 왜 이리 잘나오는지 모르겠다. 오늘 음정도 안 틀리고 와, 미치겠다. 정말. 나 이렇게 잘 나와도 되는가?

 

기도해놓고 은혜 받으면 와, 이렇게 은혜 받아도 돼? 자기를 인하여 즐거워하는 거예요. 시편하고 전혀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로 인하여 즐거워하는 거예요. 나를 끄집어내는 과정을 통해서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의 하나님, 구원이라는 것이 끄집어내는 것, 나를 질질 끄집어내는 그 과정 자체가 즐거운 것이 아니고, 끄집어냄을 당하는 내가 내 모습을 보고 좋아하고 있다니까요. 세상에 뭐 이런 정신질환이 다 있어요? 참, 이게 아담 안에 모든 인간은 정신병 환자입니다.

 

오늘 본문에 분명히 예수 안에서라는 말씀이 나왔어요. 예수 안에서. 근데 "예수 안에서"는 실제로 보이지도 않아요. 딱 떼버리고 뒤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이게 뭐냐 하면 핍박을 받으면 이거는 반대로 경건이고, 핍박 없으면 경건 아니다. 이렇게 돼버리죠.

 

그러면 핍박을 유도하기 위해서, 요즘 시대에 가볍게 핍박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있어요. 비행기타고 북경에서 연변에 갑니다. 두만강 건너가면 돼요. 특히 미국 시민권가지고 건너가게 되면 2년 만에 풀려나옵니다. 기자회견 한 번 하고. 인민들의 존엄성을 내가 목독했다고 인사하고. 한 2년 만에 풀려나와서 책 하나 쓰면 돼요. 얼마 전에 그랬죠. 미국 시민권 있는 목사가 가서 이상한 복장하고 기자회견해서 우리 어버이, 김정은께 잘못했다고 하고. 2년 있다가 나왔어요.

 

핍박은 그렇게 요란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에요. 핍박은 누가 하느냐, 본인이 본인을 핍박하고 있어요. 매일같이 핍박합니다. 때찌! 때찌! 본인이 본인을 때려요. 좀 더 열심히 해야지. 니가 이래서 되겠어? 이래가지고 너를 주시하는 시선이 한 둘이 아니고, 얼마나 너에게 실망스럽겠어? 남들 보기에, 너한테 기대 거는 사람들한테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더욱더 매진하고 열심히 해야지. 이래가지고 되겠어? 내가 나한테 계속 꾸중하고 그렇게 합니다. 이게 인간이 할 수 있는 경건의 한계입니다. 이러지 마세요. 정말 인간이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건 나를 위한 몸의 용도지, 절대로 주님을 위한 몸의 용도는 아닙니다.

 

그럼 목사님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열두제자 있잖아요. 열두제자. 어떤 열두제자? 성령받기 전의 열두제자 있잖아요. 그 코스가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코스에요. 열두제자 성령받기 전에 참 착했습니까? 참 착하게 살았더니만 오순절에 성령 받았어요? 어떻게 살았습니까? 그냥 지 맘대로 살았죠. 지 맘대로. 그냥 막살았죠. 그냥 고기 잡으러 가고. 예수님 부인하고. 예수님 부인한 베드로는 용감하기라도 하지, 나머지기는 코빼기도 안 비치고 다 도망가 버리고요. 사도요한은 옷 벗겨도 그것도 모르고 도망가 버리고요. 나중에 비겁하다고 해가지고 마리아하고 여자들 틈에 섞여가지고 십자가 멀찍이 바라보고. 그랬던 사람들이에요.

 

왜? 내 몸은 귀하니까. 내 몸을 아끼니까. 경건은 둘째 치고 살고 보자. 이게 열두제자가 보여주는 거거든요. 그러니 열두제자의 존재가 얼마나 감사합니까? 어쩌면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거의 똑같은 거예요. 예수님하고 기적 일으키고 해도 항상 생각하는 것은, 우리 중에 누가 높은 사람 되겠습니까? 그거 미래의 천국에서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생각하는 거예요. 성과급 바라는 겁니다.

 

저 인간을 꺾을 때, 심지어 치맛바람까지 해서 두 엄마가 와서 자기 아들들을 높은 자리에 해달라고 하니까 다른 제자들이 화를 내는 거예요. 화를 내는 제자들도 문제고, 뇌물 써서 치맛바람 일으키는 두 엄마도 문제고. 철저하게 우리의 본질을 십자가 앞에서 밝혀주는 그 과정이 열두제자의 3년의 과정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30년이 되고 50년이 되고 연금 타먹으면서 죽을 때까지. 하늘이 부를 때까지 계속해서 열두제자의 그 되지도 않는 것을 계속해서 반복해서 내놓아야 되는 겁니다.

 

왜? 그들이나 지금이나, 그들은 그런 짓해서 성령 받았지만 우리는 이미 그런 짓하고 있으면서 성령을 받고 난 뒤에 그 열두제자의 모습을 반복해서 보여줌으로써 우리 몸의 용도를 다하는 겁니다. 세상에 이런 기쁜 소식이 어디에 있어요? 죄지으면서 주님의 실험실에 좋은 재료가 된다는 것. 얼마나 이건 가벼운 겁니까? 나만 가볍나? 주님이 십자가를 증거 하는데 있어서 열두제자뿐만 아니라 우리까지 충분하게 활용을 해주신다는 그 점에 대해서, 더 이상 내 몸에서 내가 손을 떼라 이 말입니다. 어떤 좋은 기대를 가지고 내 몸에다가 부담감을 주지 마시라는 이 말입니다.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뱃전에 파도가 부딪치는 대로 그냥 사시다 보면 그게 몸의 용도에요. 나를 나보다 더 사랑하시는 분이 나로 하여금 나를 잡고 있는 손목을 억지로 꺾어서 제발 놓게 만들어요. 제발 좀 놔라. 니가 안 붙들어도 되거든. 내가 니 멱살을 쥐고 있기 때문에. 안 놓잖아요? 안 놓으니까 환란과 곤고와 핍박과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온갖 것 동원해서, 제발 니가 너를 붙잡지 마라. 다 놓아버려라. 그럴 때, 떨어지지 않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비로소 너가 느껴질 것이다.

 

10분 쉽시다.
 이미아(IP:122.♡.165.245) 16-08-27 22:22 
서울 의존교회 160610b (경건)-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작하겠습니다. 다른 것은 다 없어도 된다, 라고 이야기 할 수 있지만, 자기 몸에 대해서는 없어도 된다, 라는 말을 할 수가 없어요. 그런 말 하는 자체가 이미 있기 때문에, 그런 말 하는 자체가 몸이 있으니까 그런 말하잖아요. 사람의 어떤 운명이나 팔자라는 것이 뭐냐 하면, 싫든 좋든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폐기처분 할 수도 없고, 이 몸이 죽는다고 해서, 이 몸이 내 원대로 사라져 줄지 안 줄지도 보장 못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이미 있다는 것, 그 이미 있는 것과 나와 결부됐다는 것이, 내가 나를 처분을 못합니다. 그걸 처분불가능성이라고 이렇게 이야기해요.

 

처분불가능성이 있는데, 문제는 이게 바탕을 차지하고 있는 거예요. 바탕이 있기 때문에 여기서 그 위에 보면 처분가능이 돼버립니다. 처분가능을 다른 말로 하면 선택을 이야기하거든요. 어떤 취사선택하는 것. 바탕 자체가 처분 불가능함, 이것은 이유 없음이 되는 겁니다. 이유 없음으로 그걸 밑에다 깔고,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운명을 개척하겠다고 선택을 하게 되는 겁니다.

 

선택을 하게 되면, 선택하면서 느끼는 것이 뭐냐 하면, 왜, 남들의 선택은 괜찮은 선택이 되는데, 왜, 나의 선택은 처참하게 느껴지는 이 말이죠. 부자 집 애가 공부해서 검사될지, 판사가 될지, 선택하라고 하면 굉장히 행복해 보이는데, 못사는 애가 공사현장에서 미장할래?, 노가다 할래? 이런 선택을 하라고 한다면, 선택 자체가 비참하잖아요. 왜, 나는 괜찮은 선택을 못하고, 선택을 해도 꼭 제한된, 불쌍하기 짝이 없는 그게 선택의 항목으로 자리 잡느냐 이 말이죠.

 

왜 그러냐 하면 이게 아무리 내 인생을 하려고 해봐도 내게 주어진 선택의 폭 자체도 참 눈물 날 폭만 제공되는 게, 밑(바탕)에 뭐가 있기 때문에? 처분불가능성. 다시 말해서 어쩔 수 없음. 어쩔 수 없음이 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걸 캐가지고 나는 왜 이렇게 하느냐, 비참한 선택밖에 못하느냐, 맨날 해봐야 그거는 이유가 없어요. 타고난 것이, 니가 태어난 것이 그 집에서 태어나서 어쩔 수 없어. 그냥 받아들여. 니 운명이야. 니 팔자야.

 

운명이야, 팔자야, 라는 말을 써버리면 무엇이 죽느냐 하면 그럼 내가 내 의지로서 판단해서 미래를 개척하고, 나는 옳은 길로 선택하겠다는, 선택 자체가 의미가 없어져버려요. 그래서 제가 주일 낮에 그런 이야기했어요. 선택을 선택할 수 있는 선택은 없다고 했어요. 몰아넣어놓고 주스 먹을래? 커피 먹을래? 하는 이런 선택은 제한된 범위 내에서의 선택이잖아요. 이게 바로 처분불가능성, 다시 말해서 인간의 자신의 몸은 왜 있는지를 처음부터 모르고 태어난 겁니다. 내 몸이 왜 있는지를 모르고 태어난 거예요.

 

자기 몸이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고, 내 몸이 왜 있는지 모르면서, 디모데후서 3장 11절, 12절, 13절...쭉 보면서 ‘그래, 경건하게 살아야지!.’ 하는 이것은 밑에 뭘 감추고, 처분불가능성을 감추고, 위에 ‘이거는 경건해. 이거는 경건하네.’ 일방적으로 처분 가능한 것처럼 착각해가지고 선택한다는 것은, 이것은 결국은 이 처분불가능성내로 침투가 불가능합니다. 침투가 되지를 않아요. 위선자만 교회에서 양산할 뿐이에요. 위선자만. 가증한 위선자만.

 

교회가 하나의 경쟁 장이 되어서, 나도 너처럼 기도 오래 할 수 있어. 너처럼 헌금할 수 있어. 이래돼버리면 이거는 교회가 아니고 게임하는, 게임 판이 돼요. 게임하는 장이 돼요. 상대를 꺾음으로써 일시적인 쾌감을 느끼는 겁니다. 그 쾌감을 느끼는 것은 새디즘적인 쾌감이지만, 남한테 짐으로써 그걸 핍박이라고 착각하는 매조키즘 쾌감. 이래나 저래나. 그저 일시적인 쾌감, 그것만 챙기면서 살아가는 게, 그게 근본적인 대책이나 아무것도 될 수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처분불가능성은 어디서 나왔는가, 처분불가능성이라고 할 때, 문제가 뭐냐 하면 몸을 개인적인 몸으로 간주한 것, 이게 반칙, 이게 틀려먹은 겁니다. 인간은 개인적인 몸은 없고 이게 아담 몸이라는 집단의 일부로서 몸이 되는 거예요. 아담의 몸. 아담의 몸 안에서는 모든 개성이라든지, 특징이라든지, 이게 다 무효가 되는 겁니다. 의미 없어요. 전부 다 모든 것이 다 보편화가 돼버려요.

 

그래서 내 몸을 없애버리고, 아담의 몸이 쭉쭉 엿가락처럼 늘어난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덩치 큰 아담의 몸의 일부가, 연계된 것이 내 몸이라고 보시면 돼요. 그렇게 보시게 되면, 처분불가능성인 이유가, 나 말고, 대표자 아담과 창조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의 존재 이유가 밝혀집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죄 때문에 아담은 이 땅에 만들어져야 했다는 겁니다. 죄 때문에. 인간은 죄지으라고 만들어진 거예요. 죄지으라고. 왜, 죄지으라고 인간은 만들어졌느냐, 그 이유가 뭐냐, 인간이 처음 살았던 에덴동산에 인간만 살았던 것이 아니고, 이상한 두개의 물체가 함께 있었습니다. 하나는 선악과가 있었습니다.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생명나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옆에 있는 선악과에서 선악과 과실을 맛있게 만들어놓고,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저것을 따먹는 날에는 정녕, 기필코 죽으리라고 하셨어요. 죽으리라. 그렇다면 인간의 목적은 간단해요.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인간보다 우선이 되는 겁니다. 죽으리라고 명령을 했으면, 죽음이 뭔가를, 그 죽음을 현실상태로, 현실화시키기 위해서 인간이 필요했던 거예요.

 

이게 바로 죽음이야, 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말씀이 말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게 실제화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 선악과 죽음에다가 인간을 갖다 붙인 거예요. 인간보다 뭐가 우선되는 거예요? 선악과나무가 우선되고 생명나무가 우선되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제 3의 것이 끼어들었다는 말이에요. 선악과, 생명나무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끼어들었어요.

 

인간은 그 자체로 영원하지 않습니다. 니가 만일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가 돼요. 죽는다는 것은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일시적인 존재에요. 도로 흙으로 돌아가 버리면, 언제 니가 인간이었었어? 하고 한시적으로만 잠깐 등장했다가, 다시 흙으로 돌아가야 되는 겁니다. 인간 이름이 뭐예요? 흙이에요.

 

흙이니까, 흙이 되는 것이 정상이고, 흙이 아닌 것으로 잠시 인간의 모습을 띠었다면, 이것은 흙인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흙으로 만들었던, 어떤 다른 분의 본질과 속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잠시 한시적인 존재로 인간을 인형처럼 만든 거예요. 그 분이 누구냐?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에 보면 인간을 만들 때 앞에 조건이 있습니다. 어떻게 만든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드신 거예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그러니까 말할 때, 이렇게 말해야 해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그냥 말하면 안 되고, 하나님의 형상대로(....)형상대로(....) 형상대로 뭐? 형상대로 만들었단 말이죠. 목적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을 만든 거예요. 방법은 뭐냐, 선악과를 옆에 갖다 붙임으로써. 선악과 뭔데?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럼 아담이 선악과를 안 따먹으면 어떻게 되는가? 몇 년 째 견디겠어요? 15년째 안 따먹으면 선악과가 ‘에이, 안 되겠네.’ 하고 선악과가 알아서 죽거나 안 그러면 뽑힙니까? 누가 고집 센지 보는 거예요. 니가 안 따먹는 기간이 긴지, 내가 따먹도록 기다리는 기간이 긴지, 한 번 버텨보자는 겁니다. 누가 고집이 세겠어요? 죽으리라는 말씀의 실현상태가 오기 위해서 어떻게 해요? 갈 때까지 가보는 거예요. 언제까지? 따먹힐 때까지. 그래서 뭘 드러낼 때까지? 아, 이게 죽음이구나!를 드러낼 때까지.

 

그래서 여기서 정리할 수 있는 것은, 죽음 없는 하나님의 형상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에서 주가 돼요. 죽음을 경유해서 주가 되는 겁니다. 인간은 그거는 모르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존재로서 창조되면 이게 인간인 줄 알아요. 그러나 그 존재가 한시적 존재며,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그거는 어떻게 설명할 건데요?

 

하나님께서 “인간아! 나는 너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 “아이구, 감사합니다. 이제 바이바이 합시다.” 이거 없어요. “까불지 마! 니 언제든지 흙으로 환원될 수 있어.” 라는 요소가 계속 있는 한, 인간은 독자적인 존재성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나는 인간이란 말을 할 수가 없다 이 말입니다. 조건이 붙어요.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한에만 뭐가 된다? 인간이 된다. 창세기 1장 26절 말씀이 그 말씀이에요. 하나님이 우리의 형상대로 만들었다.

 

그동안 왜 이렇게, 이런 식으로, 예수님 중심으로 해석을 못할까요? 그것은 성경을 보는 당사자가 본인을 뭐로 단정 지었어요? 나는 인간이다. 이제 남은 것은 천국 가는 것 밖에 안 남았다. 나는 영원히 살래. 지금 주객이 반대되었어요. 본인의 존재자체가 목적이 아닌데, 목적은 따로 있는데, 자기가 이렇게 태어나고 보니까, 이제는 마음이 뭡니까? 이미 태어난 것, 이걸 도저히 취소하고 싶지가 않은 거예요.

 

이미 챙긴 이상, 예를 들면 애들한테 “애야! 이건 엄마가 준 거야.” 하면 “엄마. 고맙습니다.” 하죠. 양육을 그렇게 받았으니까. 엄마의 욕심이라니까요. 근데 줘놓고 “애야 그거 엄마 줘!” 하면 줍니까? 안 줍니까? 안 줘요. 줘놓고 뺏는 게 어디에 있어요. 줬으면 내 소유인데, 왜 그걸 도로 뺏느냐 이 말이죠. “그럼 어떻게 할까?” “그건 내 허락 하에, 드리고 말고는 내가 결정하겠습니다.” 이래 나오겠죠.

 

여러분, 욥이 1장에서 뭐라고 하던가요? 주신 자도 하나님이시오 가져가신 자도 하나님이시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때 그 안에 어떤 내용이 들어있다는 말입니까? 언제든지 가져가도 내놓아야 되는데이~ 라는 것이 그 안에 포함이 됐음을 욥이 알았어요? 몰랐어요? 알았어요. 그러면 우리의 생명, 우리의 목숨, 우리는 흔히 이야기합니다. 기독교 신자라서 “주께서 주셨습니다.” 하죠.

 

그러면 “주께서 주셨습니다.” 하는 말에 뭐가 포함이 되어야 해요? “에이, 가져가려면 가져가세요.” 하는 이게 포함이 되어야 해요? 안 돼야 돼요? 포함 돼야 되죠. 그걸 겐세이(방해) 놓는 거예요. 마귀가. 이미 챙겼으면 됐지 그걸 왜 줘야 해? 기어코 니 살아야지. 그렇게 되면 그거는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고, 어떤 형상이냐 하면, 이게 자기의 형상이 돼버려요.

 

이 자기 형상을 창세기 5장에 보면 아담의 형상이다. 결국 아담의 형상과 누구의 형상이 싸움이 벌어집니까? 아담의 형상과 하나님의 형상이 싸움이 벌어집니다. 나를 위한 예수님이냐, 예수님을 위한 나냐, 이 문제에요. 이미 정답은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영광을 위해서 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묻죠? 그래서? 그래서 누가 좋은데? ‘내가 주님의 영광을 살게 되면 반대급부로 나에게 잘해주겠지.’ 하거든요. 근데 주님께서 그것마저 내놓으라면 내놓겠습니까? 그러면 우린 또 믿음 있는 척을 해야 되니까, 그것마저 내놓죠.

 

그럼 그걸 왜 선뜻 내놓습니까? 그렇게 내놓으면 반대급부로 ‘더 괜찮은 나를 주시겠지.’ 하는 거예요. 바퀴가 두 번 돌았어요. 욥의 해석을 잘못된 해석을 하고 있는 거예요. 욥을 보면서 사람들이 느끼는 것이 뭐냐 하면 이렇게 욥이 인내하고 참았더니만, 무지하게 예쁜 딸을 세 명 주었고, 재산을 배나 줬다는 거예요. 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릴만하죠.

 

그런 죄가, 욕심이 욥기가 없었으면 안 나타날 겁니다. 욥기가 있으니까 욥을 보면서 희망과 꿈을 갖게 되는 거예요. 이참에만 참으면 욥처럼 나중에 다 잃어버린들 낙을 누릴 것이다. 조금만 참자. 어떤 시험도 참으면 낙을 볼 것이다. 주께서 새로 시작합니다. 그 참아서 누렸던 낙을 도로 달라고 했을 때 우리는 아까워서 못 내놓을 가능성이 있어요.

 

잘 이해가 안 되시는 것 같은데, 어떤 사람이 암에 걸렸습니다. 젊을 때 암에 걸렸습니다. 처음에 하나님 원망하다가, 간증집회에서 은혜 받아서, 아, 이것도 하나님의 징계구나. 모든 것이 다 의미가 있는데, 이 의미는 나보고 신앙생활 똑바로 하라는 의미인줄 알아야지. 근데 보니까 그 간증한 강사가 기도원에 가서 나무뿌리 두 개 뽑고, 소나무 뽑고, 하여튼 산림훼손은 다해. 산에 올라가서 울며 통성기도해서 목 다 쉬고, 이렇게 했더니만 주께서 불쌍히 여겨서 성령 충만 응답을 줬다. 근데 돌아보니까 병이 낫더라. 이렇게 된 거에요. 그럼 간증한 강사, 니도 됐는데 나는 왜 안 되냐 해서, 라이벌 관계니까. 니 됐는데 내가 왜 안 돼? 오기거든요. 남아 있는 것은 오기밖에 없어요.

 

그래서 오기대로 해본다고요. 해보니까 병은 낫지 않았는데, 나았다는 감은 와요. 나았다는 감이 와서 엑스레이 찍어보니까 의사가 놀랩니다. “도대체 당신 몸에 무슨 짓을 했습니까? 어떻게 깨끗해졌습니까?” 그래가지고 감사했는데, 그러고 나서 간증하러 돌아다니면서 차비나 얻고 돌아다니는 거예요. 이런 생계수단이 있구나 하면서 돌아다니는데, 문제는 그거 하면서 뭐가 포함이 되어 있느냐 하면, 큰소리 쳤잖아요. 기도해서 나았기 때문에 병 나은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나는 누가 뭐래도 신의 사자고 하나님의 성도 맞다고 하면서 늘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처분 가능한 거예요. 내가 기도해서 했기 때문에.

 

문제는 뭐가 찝찝한가 하면, 그게 처분불가능성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주께서 그렇게 괜찮게 믿음이 좋다고 소문난 나를, 도로 전보다 배나 더 암이 걸리게 한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우사(쪽팔림, 경사도 사투리)도 그런 우사가 없단 말이죠. 간증한 거 다 물어내야 해요.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신경이 어디에 쓰이느냐 하면, 암에 다시는 안 걸리는 방법으로 계속해서 활동을 해야 되죠. 받은 돈 가지고 얼마를 기부한다든지, 착한 일 한다든지, 온갖 아부를 떨고 재롱을 다 떠는 거예요. 다시 몸 안 아프도록 자기 조치를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한다는 것이 처분불가능성을 처분 가능한 것으로 이미 전환을 시킨 겁니다. 이걸 그들은 경건이라고 이야기하고 거룩이라고 이야기하고 성화라고 이야기하고 말씀대로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고 그렇게 자꾸 위장을 하는 거예요. 교인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 희망을 주게 되면 교인수 늘어나니까, 하늘나라 확장되니까 마귀가 얼마나 싫어하겠나, 이런 식으로 있지도 않는 신앙을 막 동원해서 도배를 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뭐가 있느냐, 불안해요. 정말 성령이 임한 사람은, 주여! 병 낫게 하지 말고 이참에 데려가 주시옵소서. 이래야죠. 병 낫게 하지 말고. 그럼 주님의 응답이, 그렇다면 죽여줄게. 죽여주는 방법 중의 하나가 병이 없어지는 방법도 죽여주는 방법이에요. 그럼 그 사람이 어디 자기 신앙 간증 할 때 뭐라고 하겠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이 건강하든, 병이 낫든 상관없이 십자가가 중요합니다.” 라고 이야기하겠죠.

 

그게 바로 사도바울이고 사도들이 쓴 이 성경내용이에요.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나는 언제든지 처분을 어떻게 하든 처분대로 할 따름입니다. 다시 암에 걸리든 그것은 내 소관이 아닙니다. 내가 관여할 소관이 아닙니다. 왜? 나는 이미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해야 된다는 거죠. 그게 바로 십자가의 반복되는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자, 이제부터 어려운 거 해봅시다. 아담의, 인간의 개인적인 사적인 몸은 없습니다. 개인이 개인의 자기 몸을 지키려고 하지 마세요. 그것은 다 의미 없어요. 자기 몸 지키기 위해서 성경 백날 백독하고 기도해도 다 소용없어요. 다 거짓말입니다. 벙커 만들어서 생수 쌓아놓고 핵폭탄 피하기 위해서, 전 천년주의, 첫 번째 환란이오기 전에 벙커 만들어서 자기들끼리 살겠다고 곗돈 넣고 하지 마세요. 세상에 그런 이기적인 것이 어디에 있어요.

 

이 세상을 떠날 생각을 해야지 왜 자꾸 이 세상에 죽치고 있을 생각을 합니까? 뭐 좋다고. 생각해보세요. 벙커 안에서는 핵폭탄 피할지는 모르지만 자기 죽음의 폭탄은 우에 이깁니까? 점점 더 피부가 늙어 가는데. 이건 핵폭탄보다 더 센 폭탄이에요. 세월 따라서 주름살 생기는 이 폭탄은 어떻게 할 건데. 결국은 거기서 죽잖아요. 죽음보다 더 센 것이 어디에 있어요? 인간은 죽음을 못 이겨요. 그래서 죽음에 해당되지 않은 몸이 필요한 겁니다. 죽음에서 이미 벗어난 몸이 필요해요.

 

그것은 바로 부활의 영이 필요하기 때문에, 부활은 반드시 부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게 세트가 돼요. 십자가 결합된 부활이 오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몸은 십자가 이 코스를 밟아야 하기 때문에 사도바울이나 우리나 육신의 몸은 이게 늙어가야 돼요. 늙어야 돼요. 늙어가는 것에 대해서 참, 어떠하든지 십자가에 참여해서 부활에 이르는, 이래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십자가 제거해버리고, 부활의 영이 와서 나를 더 탱탱한 피부로 만들기를 원해요. 새 생명이라. 이름이 멋지잖아요. 새 생명. 이거 새 생명운동이거든요.

 

새 생명운동 하니까 이거 뭐 윤기 나는 피부 밖에 생각이 더 납니까? 특급칭찬이라고 하는 김희애의 물광 피부, 그거밖에 생각이 더 나겠어요? 정력에 좋다고 장어 먹고 이런 거. 몸에 좋은 거. 새로운 몸을 바꾸려면 여기 열두제자와 예수님의 관계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항상 열두제자는, 12라는 숫자가 뭐냐, 하나님이 잃어버린 이스라엘을 재창조하는 숫자가 12라는 숫자입니다. 12는 야곱에게 받은 복을 이야기하고요.

 

복의 가현체, 또는 복의 현실태, 또는 실현태가 이스라엘이에요. 하나님께서는 복 받으라는 것을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을 봐라. 주변에 아무리 악한 민족들이 와도 이스라엘을 못 이기잖아? 왜? 내가 함께 동행 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이스라엘은 뭐냐 하면 집단적으로 아들이 돼요. 집단적 아들이에요. 아들이 단수에요. 아들이 되는 이유가 사적인 것이 아니고, 아들에서 나왔던, 하나의 줄기에서 나와서 이게 파생된 거예요.

 

이것을 저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참 빛(×) 아니지요. 참빗. 제가 어릴 때 골목에 방물장수들이 있어요. 이동슈퍼가 있었습니다. 거기에 참빗이 있어요. 옛날에 이가 많이 있었거든요. 여자들이 이 쓸어내릴 때 쓰는 그 참빗을 팔았어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숨어 있는 아들께서 이 땅에서 아들의 속성을 사람과 구애 없이, 그 안에 속한 사람만 이렇게 골고루 내려줍니다. 근데 이게 다 다양하게 만들어놓고 이걸 단일하게 만들어요.

 

사람마다 다 다른데, 그들의 운명은 동일하게 아들로부터 혜택을 입도록 그렇게 조치를 취합니다. 그 실상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과 예수님과 그들 사이에 뭐냐, 아들의 모형을 집어넣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제물을 바침으로써 어떤 죄를 지었든 간에 동일한 혜택을 일괄적으로 받습니다. 일괄적으로. 참 좋은 말입니다. “일괄적으로.” 다른 말로 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것.”

 

일괄적으로 용서를 해주시는데 조건이 있어요. 어떤 조건이냐 하면, 우리의 이름을 반납해야 합니다. 아무개, 아무개 이름을 제거해버리고, 이제부터는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것이 점령당해야 하고 접수당해야 합니다. 우리 이름이 아닙니다. 그래서 접수당한 사람한테 “야! 니 이름이 뭐야?” 하면 “주의이름입니다.” 이럴 때, 주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는 거예요. “접수 당했습니다. 나, 당신한테 점령당했습니다.” 하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것을 모르고 어떤 대상을 생각해요. 어떤 객관적인 대상이 있고 나라는 주관이 있고. 주관적인 나의 의지력에 동원된 어떤, 믿는다고 하는 이 발언 자체가 저쪽에 도달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믿습니다가 안되면 쌍시옷을 넣어서 믿씁니다. 믿씁니다. 해가지고 저 대상에게 다가서려고 하는데, 그것은 제자들을 통해서 이미 실패한 적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믿씁니다. 믿씁니다. 해도 중간에 계집애가 “베드로 당신도 저 사람하고 한 패죠?” 이 말 한마디에 나는 믿씁니다가 아니고 저 사람 저주합니다로 바뀌어버렸어요. 심지어 베드로가 자기 목숨을 내놔도 주께서는 그 목숨을 뇌물로 받아서 천국을 넣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냥 니 목숨 갖고 있어. 니 구원은 니 목숨 상관없이 내 목숨으로 가는 거지 니 목숨으로 가는 것이 아니야.

 

그러나 우리의 목숨은 반드시 우리의 명예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내 이름과 관련되어 있어요. 내 이름과 관련된 귀한 것은 하늘나라에 아무짝도 쓸모없습니다. 내게 귀한 것, 주님 앞에 귀하지 않습니다. 뭘 바쳐도 쓰레기입니다. 뭘 바쳐도. 어디 뭐 천국이 쓰레기장입니까? 자꾸 그런 거 갖다 바치게. 일체 사람의 것을 받지 않습니다. 왜? 더러워서. 주께서 받으시는 것은 주께서 주신 것만 받습니다.

 

그걸 두자로 은사라고 해요. 믿음과 사랑, 소망을 받습니다. 하늘에서 주신 것을, “이것은 주께서 주신 거잖아요?” 하면서 도로 반납하는 식으로 받지, 우리 것은 안 받습니다. 왜? 거기에 우리 노동이 담겨있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의 잘남과 자기의 가치성이 담겨 있어요. 근데 인간의 가치성 속에는 뭐가 빠졌느냐 하면 처분불가능성이 빠져있어요. 처분불가능성이.

 

예를 들어서 애가 여기에 예쁜 색종이가 있다면, 색종이 가지고 새를 만들었어요. 보통 장학사나 선생들은 “아이고, 이 학교 아동들은 종이접기를 참 잘하네요.” 이렇게 칭찬할 건데, 또 이거 이상하게 보는, 삐딱한 장학사는, 학생이 “장학사님! 이 새 잘 만들었죠?”하니까 “학생! 잠깐만 이 종이는 누가 줬죠?” “누가 줬더라?” “그거는 학교문교부에 감사해야지, 너의 솜씨에 감사하면 돼?” 이렇게 하면 또 애들이 막 울죠. “엄마한테 이를 거야.” 하는데, 일러봤자 소용없고.

 

현재 자체 우리 몸이 왜 이런 몸인지를 내가 모른다니까요. 내가. 왜 머리카락이 빠지고 하는 이런 몸인지를 모른다니까요. 모르는 것을 기초로 해서 안다고 우기니까 진짜 웃기지도 않는 거예요. 종교인도 마찬가지고, 목사, 신부, 중, 박사들도 마찬가지에요. 과학박사 땄습니다. 이래 나오거든요. 왜 기쁩니까? 이유가 없네. 기쁜데 무슨 이유가 있어요? 기쁜데. 근데 왜 기쁩니까? 이유가 없죠. 그러면 그 이유에 대한 정답의 힌트를 줍니다.

 

우리나라 인구가 오천만 있는데, 오천만 인구가 다 박사입니까? 다 박사가 아닙니까? 박사는 몇 명 안 되죠. 그러니까 당신이 기쁜 거예요. 아무나 하면 안 기뻐요. 이게 문제에요. 결국은 인간이 수상한 거예요. 기쁨 속에 뭔가 수상한 기운이 들어있어요. 니는 못하는데 나 잘났잖아. 자기 의와 자기 가치와 결부돼서 이게 기쁜 거예요. 그거 누가 했겠습니까? 독자적으로, 너 말고 나의 독자적, 이걸 가지고 바로 악마가 피조물이면서도 독자적인 주장을 내세웠던 것이 바로 최초에 악마가 그렇게 했고, 그 악마가 뱀을 이용해서, 선점해서 인간에게 다가 온 겁니다.

 

선악과 심어놓은 하나님의 노림수고 덫이었습니다. 마귀야! 빨리, 빨리 유혹해야지. 기다렸던 거예요. 옳지! 옳지! 미끼 물었어요. 창세기 5장에 보면 아담은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음의 보편화라고 합니다. 죽음의 보편화. 살아있어요? 결국은 죽습니다. 그러면 살았다는 것은 거짓말이고 전부 다 죽음밖에 없어요.

 

자, 그렇다면 경건한 몸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느냐, 그 이야기를 해주시기 바란다고 한다면, 경건한 몸은 바로 죽음 속에서 나오는 몸이 경건해요. 모든 죽음이 죽음을 붙잡아도 죽음을 떨쳐버리고 죽음의 위세를 뚫어버리고 거기서 솟구쳐 나오는 몸. 그 죽음이 죽음 되는 이유가 뭐냐, 죄의 삯은 죽음이거든요. 사망이거든요. 그렇다면 죄의 권세에서 빠져나온 유일한 몸이 바로 무슨 몸이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경건한 몸입니다.

 

경건한 몸은 기초가 이제는 처분불가능성에서 나왔어요. 우리의 몸도 처분불가능이죠. 왜 이런 몸인지 모르죠. 우리의 구원받은 몸도 우리가 손댈 수 없는 몸이에요. 뭐냐 하면 죽음에서, 다른 말로 하면 죄에서, 또는 악마의 권세에서 빠져나온 몸이 경건한 몸입니다. 이 몸이 되기 위해서 어디서 오느냐 하면 우리의 썩어가는 아담의 몸에게 연결되어야 하는데, 연결된 몸이 어디서 나오느냐, 예수님의 몸에서 나온 영이 있어요. 그게 성령이거든요.

 

성령을 받게 되면 성령 안에서 어떤 경로를 밟느냐 하면 십자가 죽었다가 부활한 그 이후에 성령이 오시기 때문에, 십자가 부활을 우리 몸을 가지고 반복해서 발산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발산하느냐, 죄인데 의다. 이게 죈데 의다. 왜? 사람은 무심코 행동할 때 따져보면 이게 다 내가 살고자 하는 거잖아요. 근데 주의 말씀은 뭐가 됩니까? 누구든지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고, 예수님을 위해서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라 했잖아요.

 

평소에 무심코 하는 행동조차도 성경말씀에 비춰보면 이게 죄가 되는 거예요. 아이구, 내 새끼! 하는 순간 뭐가 나타났습니까?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사랑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 이렇게 되거든요. 아버지 받으소서. 하는 순간에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사하게 하라. 이게 무슨 관계가 안 되는 거예요. 돈 좀 적금 탔다고 좋아할 때, 니는 빈손으로 돌아다니고 모든 소유를 버려라. 이것도 안 되는 거예요.

 

니 보물을 땅에 쌓아놓으면 되냐? 땅에 쌓아놓기는, 전부 다 보험 다섯 개씩 여섯 개씩 들어가지고. 건강보험, 무슨 보험, 보험은 왜 그렇게 많은지, 포트폴리오(분산투자)로 화려하게 투자해가지고. 그저 살라고, 백세인생 대비한다고 그렇게 사는 거예요. 그리 안 살면 왜 안 되는데? 왜? 이상하거든요. 비참하거든요. 누가 이야기하느냐 하면 주변사람들이, 나에게 기대 거는 주변사람들이 “아이구, 인간아 니 왜 이리 됐느냐?” 하는데, 뭐, 그렇게 하면 어떤데? 내가 부끄럽잖아요. 왜 그렇게 부끄러운데? 이유를 몰라요. 그게 왜 부끄러운지 이유를 몰라요.

 

왜냐하면 나라는 것은, 몸은 따로 인데, 나라는 몸은 안 부끄러워해야 된다는 것. 그런 수준을 맞춰야 된다는 것이 이미 주변으로부터 전통적으로 누적되어 있어서 그래요. 누적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환경 따라서 목적하는 바가 다 달라요. 얼마 전에 설교 시간에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마는, 우리교회가 그 장소에 11년째 있는데, 오자마자 11년 동안 한 번도 화장실 문을 잠그지 않았습니다. 아래쪽에 상가화장실이라고 온갖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들어와서 담배피우고 해서 맨날 고장 났거든요.

 

근데 얼마 전부터 술집이 이사 가면서 그 화장실 문을 잠갔습니다. 제가 설교시간에 그걸 숙원사업이라고 했습니다. 숙원사업. 얼마나 감사한지. 그런데 대부분 상가는 화장실 문이 잠겨 있어요. 그쪽에서 보면 그게 무슨 감사거리냐고 해요. 근데 우리는 감사거리에요. 그동안 그렇게 애를 먹였으니까.

 

이게 사람마다 다 다르다니까요. 사람마다. 다 다른데 죄인인 것은 마찬가지고. 아무리 수준을 낮추어도 나를 미워하는 수준까지 내려갈 수가 없어요. 인간은. 그냥 나를 미워하는 그 나를 사랑하기 마련이거든요. 한강이든 낙동강이든 어떤 작가든 간에 아무리 해도 해답이 없어요. 결국 그들이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이 사람 해답이 없다. 결국 그들이 내놓는 것이 그거에요. 해답이 없어요. 해답이 없으니까 어떻게 됩니까? 갈 때까지 가보자. 강남스타일이에요. 갈 때까지 가볼까 하면서 춤추고 난리에요. 갈 때까지 가보자는 거예요. 해답이 없으니까.

 

그래서 자식이 엄마가 안다고 해서 물으면, 결국은 엄마가 화가 나가지고, 에이, 니 맘대로 해라. 그래 갈 때까지 가보자. 해답이 없어요. 그러면 성도는 해답이 있습니까? 아니요. 해답을 가질 필요가 없어요. 해답가지면 꼭 자기한테 짓을 하려고 해요. 괜찮은 인간이 되려고 해서 이게 탈이 돼요. 그냥 사시면 살아가는 것 그 하나하나가 어떤 짓을 하든, 주님의 결과물로 매일같이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게 되는 겁니다. 굿모닝이에요. 날마다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는 거예요. 새로운 아침을.

 

왜냐하면 내 작품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께서 오늘도, 주님 처분대로 누굴 만나든지, 또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든지 그것은 주님 처분대로 할 거예요. 미리 예상하지 마세요. 미리 기대하지 마세요. 왜? 우리는 없어져야 하기 때문에. 없어져야 하는데, 만약에 있음을 생각한다면 이거는 주님의 처분불가능성이 아니라 나의 처분가능성으로 전환해가지고 은근히 내일은 보다 더 좋은날이기를 기대하게 돼요. 그렇게 되면 그것이 나의 우상이 되어 버립니다.

 

우상이 된다는 말은, 실망스러운 하루가 이미 시작된 거예요. “이참에도 안 되면 나는 실망할 거예요.” 라고, 이미 시작하고 들어가는 거예요.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고 “요렇게 해주지 않으면 나는 화 낼 거예요. 주님.” 하고 시작하게 된 거예요. 새벽기도해도 소용없어요. 새벽기도하면서 미리 주님한테 압력을 가하는 겁니다. “주님 내가 새벽기도 나왔으니까 이래, 이래 안 해주면 나 진짜 오늘 삐질 거야!” 이게 협박인지, 압력인지, 그게 새벽기도에요. 그것도 고함 다 지르면서.

 

기도문제 나왔으니까, 잠깐 언급하는데, 반드시 기도하라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이게 간단한 건데, 이걸 몰라요. 기도하라가 아니고 반드시 앞에 붙는 것이 있어요. 경건한 기도를 하게 되어 있어요. 경건한 기도를 하라고 되어 있는데 이게 성경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주 안에서 기도하라고 되어 있어요. 주 안에서. 주 안이라는 것은 성령 받은 사람에 의하면 주 안에서 계속해서 동일한 어떤 사건이 되풀이해서 일어나야 해요.

 

뭐냐 하면 나는 죽고 내 안에 누가 산다? 주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바깥으로 방출하고 증거 하는 기도가 되어야 해요. 그러면 그 기도를 어떻게 하느냐, 그럼 그 기도를 말로 해가지고, 지금 나는 죽었다. 그리고 내 안에 주님이 산다. 기도시작! 째깍째깍. 이렇게 해봤자, 니가 그렇게 하는 의도가 뭐냐 물으면, 다 내가 경건한 기도하기 위해서 이렇게 했습니다. 이렇게 한다면, 니는 또 니한테 기대를 했구나. 이래되어가지고, 그것도 탈락이에요.

 

그럼 어떻게 하면 되느냐, 막 기도 하면 돼요. 막국수 나오잖아요. 막국수. 그냥 막 기도 하면 돼요. 막 기도 하게 되면 일단은 흥분상태에다가 그 다음에 분노와 항의, 항변 막 나와요. 그렇게 하는 가운데,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다는, 이것을 기도하는 가운데, 이것이 개선이 되고 이게 변화가 일어나요. 실컷 떠들어놓고, 주여, 내 안에 이런 것들이 들어있군요. 나는 죄인입니다. 이렇게 나온다면 그게 바로 경건한 기도에요. 이게 성령께서 관여한 기도입니다.

 

기도할 바를 우리가 알지 못해요. 알지 못한다는 그것을 전제로 하고 기도하시면 되는 거예요. 어차피 하나 안 하나 모른 것인데 해보는 겁니다. 해보게 되면 살아계신 주께서, 정말 성령 있는 사람들은 그걸 자체적으로 수정해줘요. 니가 이렇게 기도하는 이유가 뭐냐? 이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지금 이걸 감사하지 않는다는 뜻이냐? 그건 아니고...., 안에서 계속해서 대화가 돼요. 그렇다면 니가 이런 기도해놓고 양심에 걸리지 않나? 걸립니다. 그럼 기도 끝. 바로 이것은 주님 안에 내밀한 어떤 교제 같은 것, 이런 것이 계속 있는 거예요.

 

예를 들면 세례요한이 옥에 갇혔잖아요.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믿어요. 하지만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 거예요. 믿는데, 내면은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됩니까? 제자 보내가지고 예수님한테 알아봐야죠. 예수님 당신이 오실 자 맞습니까? 해야 되겠죠. 그걸 오늘날 우리가 그대로 반복하면 돼요.

 

분명히 이런, 이런, 내가 별로 나쁜 짓 하지 않았는데 이런 낭패를 주니까,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이걸 개선하려면, 다시 원상복귀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모르겠습니다. 그런 마음이 들면 그대로 표현하는 거예요. 기도로써, 숨기지 말고, 자꾸 아름답게 꾸미지 말고, 남북통일하지 말고, 정치인도 아닌데, 당회로부터 주일학교까지 그런 것 좀 하지 말고.

 

정말 답답한 것이 있잖아요. 답답한 것이 있으면 답답한 것을 그대로, 사람한테 찾아가지 말고 자꾸 자기 안에 있는 자기한테 답답함을 푸는 거예요. 풀면서 세례요한이 예수님한테 묻듯이 그렇게 하듯이 하게 되면, 세례요한한테 이야기해라. 앉은뱅이가 걷고, 소경이 눈뜨고, 벙어리가 말하고, 죽은 자가 살아난다고 해라.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세례요한한테 가라. 너는 마땅히 앉은뱅이고, 벙어리고, 소경이고, 죽은 자인데, 아직도 멀쩡한 거보니까 이게 니 잘남이 아니라 하나님의 처분불가능성, 하나님의 은혜인줄 알아라. 가서 빨리 전해! 그렇다면 세례요한이 재수 없는 것이 아니고, 이게 자기 일이 아니고, 옥에 갇힌 일이 누구 일이냐, 주님의 일이에요. 그래서 쟁반에 목이 잘리든, 어떻든, 이것도 누구 일입니까?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끝까지 선지자 노릇을 하면서 가야 되고, 우리도 지금 그 길을 성령을 통해서 가게 하는 겁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뭐냐 하면, 십자가와 부활의,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던 은밀한 그 언약의 완성을, 이제는 그 완성품을 가동시키는 거예요. 썩어가는 우리 몸에다 가동시켜버리면, 죽을 몸인데, 아직 멀쩡하게 있으면 이거는 있을 수 없는 크나큰 혜택이다. 이래 되는 거예요. 범사에 모든 것을 감사하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나한테 감사 할 것이 안 나오잖아요? 감사할 것도 없는데 감사하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겁니다. 삼중감사죠. 감사 안 하면 되는데 감사케 하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감사에 뭐가 포함이 되는가, 짜증내고, 분통내고, 주님한테 욕하고 대드는 것도, 뒤돌아보니까 그것도 감사거리가 되죠. 그래서 내린 결론이 뭐냐, 막살면 되는 거예요. 막살면. 막사는데 불안하다? 신자아니죠. 막사는데 하나도 불안하지 않다? 성도입니다.

 

왜? 지나간 열두제자들이 조심껏 살았는데, 막 산 게 돼요. 그 조심스러움이 뿔뿔이 예수님 곁을 다 떠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주님 보시기에는 그래야 되는 거예요. 왜? 목자를 치면 누가 흩어져야 해요? 양들이 흩어져야, 이게 원래 연극스케줄대본에 그렇게 나와 있어요.

 

근데 그 사람들은 나름대로 스승 섬긴다고, “주여! 제가 지키겠나이다.” 이러니까 “안 가나? 가!” “아닙니다. 제가 지키겠습니다.” “가라니까! 저한테 검이 있나이다.” “검을 꽂아라!” 검을 쓰는 자는 뭐로 망한다? 검으로 망한다. 이 말은 망한다 이 말이에요. 우리가 검쓰나 안 쓰나 망한다 이 말이에요.

 

망하는 자를 안 망하게 하는 것은 주님 솜씨로 돌려야지, 내가 거기에다 협조했다든지, 보탰다든지, 나의 의지와 용기, 과감한 결단성, 나의 선택성, 성령께서 완전히 그런 것들을 확 베어버립니다. 그런 것들은. 왜? 천국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에. 천국에 그런 것이 끼어들면 안 돼요. 합당치 않아요.

 

그렇다면 우리의 교회생활은, 이건 위험한 거고, 바깥의 생활이 오히려 신앙생활다운 면모를 보입니다. 왜? 막사니까. 교회는 조심스럽잖아요. 주님이 계셔서 그런 것이 아니라 타인의 눈이 교회에서 괜찮은 인간이라고, 내가 사랑받고 싶은 욕망을 유발시키죠. 교회가. 그래서 13절 봅시다.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하고 속기도 하리니” 이제 이해되시죠. 악한 사람들이 악하다고 생각이 안 들어요. 그들은 최선을 다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경건한 몸으로 봐서는 이게 뭡니까? 평가하기를, 악한 사람은 더욱더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리니. 자기 나름대로 나는 남을 속여야지가 아니라 최선을 다하고 살고 싶어서 모든 노력을 다하고 속이더라도 양심껏 속이지만, 그러나 주님보시기에는 그게 자기 속임에 또 속아 넘어가는 짓을 하나니. 오히려 너는 그렇게 하지 말고, 무엇과 관련시키느냐, 그 다음에 성령과 관련시킵니다.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바로 16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거예요. 하나님의 감동으로. 그렇다면 이 성경책 안에 하나님의 감동이 들어있다면, 감동은 성경책 문자에 묶이지 아니하고, 바깥으로 반드시 이게 터져 나오게 되어 있죠.

 

아까 이야기해볼게요. 사람들은 성경을 보든, 하나님을 보든, 예수님을 보든, 삼위일체를 보든, 전부 다 자기 주관 밖에 있는 하나의 개체로 봐요. 하나의 대상체로 봅니다. 그러면 대상체와 자기 주관과 연결할 때는 뭐냐 하면 자기 지와 정과 의를 동원시켜요. 의라는 것은 의지고 정은 감정이고 지는 지식을 말합니다. 인간의 이성적 지식. 성경공부하고, 그 다음에 뜨겁게 사랑하고, 그 다음에 전도하고. 교회에서 이걸 가지고 동원시키거든요. 심지어 이것 뿐만 아니고 영과 혼과 육 삼분설이 막 나오고. 온갖 되도 않은 어설픈 솜씨로 숫자놀이 3가지고 다 해가지고, 부흥회 6일 동안 다 보내고 있어요. 그리고 마지막 시간에 돈 내는 시간에 돈까지 내야하고.

 

인간의 의지 이런 것들이 마중을 나가게 되면, 이쪽에는 뭐가 나오느냐 하면 성경말씀을 문자로 마중 나오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앞장세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니가 내 성경을 볼 때에 니 의식은, 너의, 너의 잘남을 위한 그런데서 나온 엉터리개념이죠. 이 엉터리개념을 가지고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면서 계속해서 엉터리개념에 합치되는 행동과 의지를 총동원시켜서 이걸 몰고 쭉 나와요.

 

이걸 어려운 말로 권세인데, 나를 옹립하는 권세를 몰고 성경으로 나가게 되면, 주님은 이 모든 성경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습니다. 다 이루었기 때문에 십자가를 가지고 마중을 나와요. 마중을 나오면 여기서 두 개의 종류의 의가 부딪치게 됩니다. 한쪽은 자기 의가 되고 이쪽은 예수님의 십자가 의가 되는 겁니다. 어느 의가 천국에 합당한 의냐, 자기 의는 탈락이요, 예수님의 의만 올라가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예수님의 의를 받을 때, 어떤 성경말씀 일부를 쪼개서 받을 수는 없어요. 왜냐하면 이 예수님의 의는 일점일획이라도 모든 말씀을 다 이룬 의이기 때문에. 창세기 의나 에베소서 의나 모든 동일한 의가 될 수밖에 없어요. 동일한 의가 되려면 인간의 행함은 여기서 저지되어야 합니다.

 

인간의 행함이 아니고 그 자리에 예수님의 행함이 들어가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행하심으로 의로움을 얻어내야 해요. 그냥 거룩함이 덮쳐져야 돼요. 거룩함에. 에라, 바께스로 물을 확 부어버리면, 등목 하듯이 내가 혼자서 문지르고 있는데, 갑자기 아이! 차가워! 해가지고 온 천지가 디비지는(뒤집히는 경상도방언)물 천지가 되가지고 옴팍 덮어쓰는 거예요.

 

그럼 그 안에서 우리는 뭐가 됩니까? 천하에 죄인으로 드러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죄인으로 드러나게 되면, 그 다음부터 어떤 행복이 기다리느냐, 내가 내 인생에 손을 놓는, 나는 새털처럼 가벼운 영혼이 되는 거예요. 신경 안 써도 되는데, 쓸데없는 내 미래상에서, 현재 내 행위와 내 미래를 직접 연결시킨 이 오류, 이 부담감, 이 스트레스를, 백날 약 먹어도 소용없어요. 이렇게 행동하면 이렇게 되겠지. 아니면 요렇게 행동했을 때는 요렇게 되겠지. 그래! 결심했어! 딴라라따~이휘재처럼. 이렇게 되면 이렇게 되고 저렇게 하면 저렇게 되는 그런 것 없습니다. 우리한테는.

 

지금 내가 결심한 그것이 예수님의 결실물이에요. 예수님이 개입한 결과물이 지금 내가 선택한 겁니다. 소급해서 모든 일에 감사하시면 그것이 바로, 그 마음가지고 성경말씀을 읽게 되면, 어떤 말씀을 해도 예수님은 주가 되시고 나는 그 앞에 죄인 됩니다. 어떤 말씀 앞에서도, 십계명 앞에서도, 나는 죄인 맞는데, 왜? 이미 구원받았기에, 나는 너무 기쁜 마음으로, 죄인이 어디에 있느냐? 할 때, 여기 있나이다. 제가 죄인입니다. 죄인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게 하고 손들고 나오는 것, 그게 바로 찬미, 찬송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선입감이 문제였습니다. 우리의 어설픈 문자적 개념, 그것이 얼마나자기의로 돌아오는지를 깨닫게 해주시고, 십자가의 능력 앞에서, 그 내 의가 무참하게 주님의 의 앞에 패배 당하게 해주시옵소서. 늘 주님한테 지는 즐거움과 행복이 있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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