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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15 00:31:24 조회 : 999         
심판 161014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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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IP:122.♡.188.127) 16-12-18 20:25 
서울 의존교회 161014a (심판)-이 근호 목사

 

자, 디모데후서 4장 1절부터 할 차례입니다. 1절,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2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이렇게 되어 있죠.

 

여기서 우리가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을 발견해야 됩니다. 구약에서는 누가 심판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심판한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외에 심판하죠. 구약에서 그것을 정리하기가 복잡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외에 민족을 심판하십니다. 근데 조건이 있어요.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는 조건하에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다른 민족들을 심판해버리는 겁니다.

 

심판한다는 것은 이스라엘을 도드라지게 드러내기 위해서, 모래 속에 있는 어떤 보물을 끄집어내다보면 거기에 덮여 있는 모래들이 치워져야 되겠죠. 우르르 쏟아져야 되겠죠. 건질 것을 건지다 보니까, 구원을 이렇게 하시다 보니까, 뭔가 다른 것, 더 특이한 것, 기존의 이방민족적인 그런 것들은 제거가 되면서 부각이 되어 올라오는 겁니다. 그러면 저쪽은 자동적으로 저주를 받고, 이스라엘은 자동적으로 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거는 어제 제가 수요설교 할 때 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복을 줄 때에 아브라함이 복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 자체와 아브라함 민족에게 복이 만들어진다고 이야기했죠. 아브라함이 복을 받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이 엑기스가 되어서 복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핫도그 안에 뭐가 들어 있죠? 프랑크소시지가 들어있죠. 소시지 안에 뭔가 둘렀습니다. 밀가루에다 튀김가루를 입혀서, 하여튼 생각만 해도 몸에 안 좋은 기름기가 붙어있겠지만. 그 핫도그 모양새는 프랑크소시지가 눈에 안 보입니다. 보이지를 않는데, 먹다 보면 소시지가 보이죠.

 

만약에 소시지가 없는 핫도그라면 그거는 고발해야 합니다. 사직당국에 고발하세요. 프랑크소지가 들어있지 않는 핫도그는 핫도그가 아닙니다. 이건 가짜죠. 근데 알 수가 없죠. 알 수가 없습니다. 안에 들어있는지 알 수가 없을 때는 하나님께서 심판을 함으로써 드러내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자체가 구원받은 백성이 아니고, 이스라엘 안에 이스라엘이 들어있죠. 그래서 이스라엘을 구원한다, 구원한다 하시면서 계속 이스라엘을 양파껍질 벗기듯이 벗겨내는 겁니다. 진짜 구원하고자 하는 이스라엘은 어디에 있다? 이스라엘 안에 들어있는 겁니다.

 

이스라엘 안에 들어있기 때문에, 그 이스라엘 안에 들어있는 것을 구원을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방민족과 자꾸 부딪히게 만들고 접촉을 하게 만들어요.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해를 하는 겁니다. “우리 민족은 하나님이 건져주시고 다른 민족은 멸망한다.” 방금 제가 그걸 오해라고 했는데, 오늘날 교회가 오해를 하는 것처럼 똑같이 오해해요. 오해를 하게 되면 이방민족이 져야 되는데 이겨버려요. 그리고 이스라엘이 패배합니다.

 

그렇게 되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뭔가 정리가 잘못되어 있다, 우리가 뭔가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를 했다, 라고 하면서 거기에 대해서 다시 부르짖게 됩니다. 그 부르짖을 때, 그 부르짖는 장소가 뭐냐 하면 성막이고 언약궤고 그리고 성전이 되는 겁니다. 장소가. 아주 알기 쉽게 말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안에서 뭘 건지고자 하느냐 하면 이것을 건지고자 해요. 언약(궤). 이것을 건지고자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이 사람이 아니므니다. 사람이 아니었어요. 하나님의 구원대상은 사람이 아니었어요. 언약, 언약궤를 건지는 겁니다. 이 언약(궤)을 범위를 넓혀버리면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 같은 이야기인데, 성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건지려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라는 말만 딱 해버리면 백이면 백 명이, 천이면 천명이 이 말씀을 딱 보는 순간 무슨 생각이 드느냐 하면 “대처해야지. 대처해야지, 뭔가 대비해야지. 심판하시는데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안 되잖아. 심판에서 건짐 받아야지.” 라고 대책을 강구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오해의 길로 접어드는 거예요. 대책 세워서 심판에서 면제되는 방법은 애당초에 없습니다.

 

그래서 정말 성령 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심판을 하신다면, “하나님의 심판에 저의 역할이 뭐죠?” 이렇게 물어야죠. 제 역할이 뭐냐? 지나가는 행인2냐? 아니면 어떤 역할을 맡을 것이냐? 안 그러면 내시역할을 할까요? 이런 것.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이것은, 심판의 역할에서 제가 심판에 참여하게 될 것인데, 성도는, 성령 받아서 참여하게 될 것인데, 어떤 식으로 하나님의 심판에 가담하게 될 수 있습니까? 라고 묻는데, 그렇게 묻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에요, 바로 구약에서는 거기에 대해서 다양한 직업군이나 형편에 있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신약에서는 대표적인 것이 바로 세리와 창기들이 있고, 구약에서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들이었어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들.

 

방금 세리, 창기, 고아, 과부, 나그네들, 이런 사람들. 또 강도, 소경된 자, 거지, 거지나사로는 비유지만 하여튼 거지라고 치고. 또 더 놀라운 사실은 탕자, 그리고 불의한 청지기. 바로 이런 분들의 직업이나 형편에 있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심판을 하는데, 그들은 본인이 심판을 받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심판에서 구원될 겁니까? 심판 받을 겁니까? 라고 묻는 것 자체가 많이 건방진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에 똑같은 매직이 다섯 개가 있는데, 제가 혼자서 이야기합니다. ‘내가 여기 쌍둥이 매직 다섯 개 하고 한 번 놀아볼까?’ 이래 이야기했는데, 여러분들이 “그러면 제가 가지고 놀까요?” 이렇게 나오면 “아니, 그냥 저 혼자 놀래요.” 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심판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 혼자 노는 게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하나님이 혼자 노시는 게임이에요. ‘아이고, 하나님이 심판하신대. 심판하시면 안 되는데. 그럼 우리 가정은 다 구원받아야지. 열심히 기도하자.’ 이래 나왔다는 말은 하나님이 혼자 하는 게임인 것을 곡해해서 그래요.

 

근데 여기 매직 다섯 개가 동원됐잖아요. 여기 매직 다섯 개 동원된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주님께서 혼자 게임을 하고 있음을 증거 하는 증거자로서, 아까 말한 세리, 창기, 고아, 과부, 나그네...이런 사람들이 등장하는 겁니다. 이런 사람들이 등장해요. 그게 뭐냐 하면, 아! 심판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이 시작해서 주님으로 마감될, 그냥 주님 혼자 하실 일이지. 우리가 협조하거나 도와줄 일이 아니고, 어떻게 심판에서 한 번 구원될까, 하고 애써서 거기에 끼어들 문제가 아닌 겁니다.

 

주께서 심판하시면 심판이 어떻게 진행되는가, 그것만 증거 하게 되고 소개하라고 하는 것이 오늘 본문 4장 2절의 말씀입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어떤 말씀? “주께서 홀로 심판 작업을 하신대~^^” 이 사실을 전파하라 이 말씀입니다. 그것도 어떻게? 굉장히 기쁜 얼굴로. ‘아이고, 나는 심판 없는 줄 알았지. 하기는 하시는구나.’ 이런 것. 예를 들면 어떤 서울 광진구에 빈터가 있는데, 빈터가 한 20년 동안 방치가 되어 있다고 하는 거예요. 광진구에 빈터가 한 20년 동안 있었는데, 주민들에게는 거기에 불량배가 끊이지 않고 하니까 여러 가지 환경이 굉장히 안 좋잖아요. 그런데 광진구가 거기에다가 드디어 체육시설을 짓겠답니다. 이걸 전파하라 이 말입니다. 이걸 전파하라 이 말이죠. 마치 나와 전혀 상관없는 작업을 주께서 팔 걷어붙이고, 한 번 해봐! 하고 나서는 겁니다.

 

그래서 심판은 하나님이 안 하시는 거예요. 누가 하느냐? 누가 해요? 본문에 보니까 그리스도 예수님이 심판하시는 거예요. 그리스도 예수님이. 왜냐하면 심판의 주체자, 심판의 자격자가 드디어 마지막 때에 나타났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행사할 자가 어떤 누구도 없었는데, 드디어 마지막 때에 심판주가 확정되었다. 심판주가 확정됐다는 말은,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그분 외에 제 3자가 끼어들 여지는 전혀 없다. 예수님이 계시다면 예수님의 모든 활동 자체가 이미 심판으로 시작해서 그분이 마감하실 거예요.

 

그 마감을 가지고 여기에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그의 나라가 뭔 나라입니까? 아들의 나라, 예수님의 나라죠. 예수님의 나라, 예수님의 나타나실 것,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광진구의 체육시설. 그리고 지하에는 폐기물처리시설이 또 들어선다는 거예요. 그래서 주변에 있는 광진구 아파트들이 데모하고 난리가 났어요. “웬 폐기물이냐? 약속이 틀리지 않느냐?” 광진구에서는 이야기합니다. “이거는 오래전부터 이미 계획한 바이다. 끝.” 너희들이 데모한다고 해서 안 할 것이 아니고 데모하든 말든 밀어붙이는 거예요.

 

심판은 인간을 심판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예수님이 심판주 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심판 행위가 필요했다는 겁니다. 마치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엄마가 식탁에 음식을 잘 차려놨습니다. 근데 애들이 학교에서 돌아와 배가 고프니까 맛있는 음식을 보고 이러는 거예요. “이야~! 엄마가 우리 저녁 맛있게 먹으라고 음식을 차려주셨군요?” 엄마가 하는 말이 “아니야. 이거는 아버지 혼자 잡수실 저녁식사야.” 아버지 혼자 잡수실 저녁식사야, 이걸 누가 알았느냐 하면 바로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수로보니게 그 여인네가 알았습니다.

 

예수님에게 도움을 요청하니까, 나는 개한테는 구원을 안 준다고 했습니다. 언약이 없는 개들한테, 개들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언약이 되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언약되지 않은 사람한테는 구원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 누구의 고집이고 누구 의견입니까? 그거는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이미 이야기가 끝나버린 예수님의 소견이죠. 예수님의 소견이에요. 저 심판받으니까 구원해달라는 요청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없다? 권리가 전혀 없는 거예요. 근본적으로 구원과 심판은 누구 소관입니까? 예수님의소관이죠.

 

심판을 하던 구원을 하던 간에 우리한테는 아무 의미 없는 이야기라니까요. 이게. 우리가 호들갑을 떨 이유가 없어요. 호들갑은 신천지가 떨고 난리가 아니죠. 한국교회나 떨고.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어요. 식탁에 밥을 차려놓았으면 이거는 아버지가 먹을 거예요. 그러면 자식들은 어떻게 해야 해요? “아, 이거는 아버지거구나. 우리 것이 아니구나.” 그러다 이제 아버지가 퇴근하고 왔습니다. 아버지가 식사하는데 애들이 셋이 죽 전부 다 앉아 있어요. “이 식탁에 있는 음식은 내가 먹을 거야. 알겠어?” “예. 잘 압니다.” “어라! 알아? 그럼 너는 왜 아버지가 먹는 식탁에 숟가락 대면 안 되는데?” “우리는 개거든요.” “개? 오! 아네. 자 먹어라!” 하고 주는 겁니다. 아버지 식탁에 개한마리가 던져졌다는 말은, 이거는 예수님께서 의외의 인물에게 줬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원래 심판의 계획에 합당한 거예요? 심판의 계획에 합당한 거죠.

 

그 합당한 것이 뭐죠? 심판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심판주 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심판한다고 했죠. 누굴 주고, 누굴 안 주고는 누구 마음대로다? 예수님 마음대로죠. 그러면 그 대목을 다시 한 번 봅시다. 처음에 예수님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떡을 하나님의 자녀한테 주지, 개 같은 이방인한테는 안 준다고 했거든요. 참 이 말이 굉장히 어려운 말이에요. 하도 어렵기 때문에 한 번 적어봅시다. 그냥 말로 해서는 도저히 얼굴들이 납득이 안 되는 얼굴들 같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문장 자체가 자녀한테는 영생을, 개한테는 뭐다? 그냥 지옥 간다는 이 말이거든요. 개한테는 지옥 간다고 이렇게 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자가 누구라는 말이죠? 예수님 본인이 권한이 있는 자에요. 이거는 인간들의 의견을 개무시 하는 거예요. 인간들의 요구사항, 구원해달라고 하는 것을 개무시 하는 겁니다. 이거는 일체 고려하지 않아요. 구원해주고 안 해주고는 예수님 자기 마음대로에요.

 

요한복음 8장에서 어떤 여자가 간통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는데 용서받았잖아요. 그 말은 뭐냐 하면 간통하도록 시킨 거예요. 이 말이 참 이상하지만. 그것도 시키고 또 들키라고 유도를 했어요. 들키라고 유도를 했다니까요. 어떤 사람이 소경되었다, 왜 소경되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만들었어요. 날 때부터 소경되도록. 그러면 인간들 입장에서 뭘 생각합니까? 어떻게 하나님께서? 해도, 해도 너무하다고 하거든요. 그게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은 자기 아들이 주 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동안 줄곧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주관해 오셨던 겁니다.

 

자녀한테는 영생을 주고 개한테는 지옥을 보내는 거예요. 그 이야기의 발언을 예수님 입에서 쏟아냈습니다. 그러니까 여인이 뭐라고 했습니까? “옳습니다.” 라고 했죠. 이게 굉장히 어려워요. “예. 옳습니다.” 이거는 예수님이 자녀한테는 영생을 주고 개한테는 영생을 안 주는 일은 참 잘하셔도 너무 잘하신 일입니다. 왜냐하면 심판주 되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은 당연한 조치입니다. 그런데 개한테도 뭘 준다? 자녀의 먹다 남은 부스러기가 떨어질 수 있지 않습니까? 라고 이야기하니까, 이걸 누가 옳다고 했습니까? 예수님이 그 여자보고 “니가 옳다.” 니가 옳다는 거예요.

 

그럼 이 이야기가 성경에 나왔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은 자녀에게만 영생을 주고 개한테는 영생을 안 준다고 했을 때에, 이걸 보는 사람이 누구나 자기 자신을 개로 여기겠습니까? 자녀로 여기겠습니까? 자녀로 여기겠죠. 그게 바로 예수님의 심판주 되는 것을 반대하는, 왜곡하는, 대드는, 진짜 지옥 가는 개 같은 인간들이에요.

 

그게 왜 그런 해석이 나오느냐 하면 이 발언을 할 때 십자가 지기 전이에요? 십자가 지고 난 후에요? 십자가 전이죠. 십자가 지기 전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의미가 반대로 바뀌어져야 해요. 반대로. 모든 것이 반대로 바뀌어져야 예수님께서 살해당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예수님을 살해해야 모든 인간들은 결국 예수님의 주 되심을 통째로, 모든 것을 다 통합해서 반대했었다가 드러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주 되지 못하게 하게 만드는 그 취지가 뭐냐, 왜, 어떤 의도로 예수님을 반대하도록 했는가, 그게 바로 디모데후서 4장 1절에 나옵니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신다고 했죠. 유대인들은 이미 죽을 때에 심판받고 죽는다고 알고 있어요. 죽을 때에. 하나는 낙원에 가고 하는 지옥 불에 가고. 그게 나사로의 비유에서 나오죠. 십자가 전입니다.

 

나사로의 비유는 십자가 지기 전의 이야기에요. 거기에는 예수님이 안 나오고 아브라함의 품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하는 것은 유대자손이 누구 자손이냐 하면, 혈통적으로 아브라함 자손이에요. 그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 하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돼서 할례를 받은 사람은 죽어도 아브라함 품에 간다는 그것이 그들에게는 다 인식되어 있습니다. 그래야 뭘 받기 때문에? 할례를 행하고. 아브라함 혈통 같으면 택하신 민족이라는 것이 이미 그걸로 그들의 진리로써 유통되고 있기 때문에. 이미 그것이 진리로써 통용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거예요.

 

특히 그걸 누가 가르쳤습니까? 바리새인들이 가르친 거예요. 근데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지켜보고 딱 겨냥해서 하는 겁니다. 그들이 돈을 좋아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지기 전이니까 그들을 전복시켜야 되겠죠. 반대로 해야 되겠죠. 유대인들은 아브라함 자손이 부자 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복을 받게 되면 부자 되기 때문에. 그들이 복 받아 잘된다는 것은 어디에 근거해서 그러냐 하면 신명기 28장에 근거해서, 그게 말씀을 지켜서 복 받았다 그렇게 해야 되는데,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부자 되었으니까 분명히 말씀을 지켰을 것이라고 하는 거예요.

 

마태복음 19장도 마찬가지죠. 어떤 부자청년이 왔는데, 부자청년의 논리가 뭡니까? 내가 부자 된 것은 그저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다 지켰기 때문에 그 성과급으로 부자가 되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부자청년에게 뭐라고 합니까? “그 모든 것을 한 번 비워봐라. 그 모든 것을 한 번 제거시켜봐라.” 이래 나와요. 모든 것을 제거시켜보라고 한다면, 이거는 돈을 없애보라는 정도가 아니고 뭐도 없애야 돼요?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기 때문에 나는 영생 얻을 자격이 있다고 하는 그것 자체를 전부 다 게워내야 되고 그걸 전부 다 없애라 이 말이죠. 쉽게 말해서 나의 의는 전혀 없다는 그런 것으로 해서 나를 따를 수 있느냐고 묻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한테 묻는 것하고 똑같아요. 뭐 30년 믿었습니다. 40년 믿었습니다. 하는데, 30년 믿고 40년 믿은 것 다 죄라고 간주하고 나를 따를 용의가 되어 있느냐고 묻는 것하고 똑같습니다. 근데 부자가 어떻게 했습니까? 근심해서 그냥 유턴했죠. 그냥 돌아갔죠. 근심해서 돌아갔죠. 어디로 돌아갔습니까? 자기 자리로 그냥 돌아갔죠. 어떤 자리입니까? 자기의 부자도 그대로 유지되고, 자기 의도 그냥 붙들고 있겠다는, 나의 의를 포기 못하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보면서도 ‘예수님 앞에서는 나의 의를 생색내면 안 돼!’ 라는 그런 관계로써 예수님을 바라볼 줄 몰랐었어요. 잘못되었습니다.

 

간단하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왜? 예수님이, 하나님이 심판주가 아니고 왜 예수님이 심판주가 되느냐, 예수님은 이미 죽었거든요.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선이 허물어졌어요. 죽은 자도 살았고 산 자도 살아있어요. 조건이 있어요. 심판받기 위해서 그들은 계속 살아있어야 돼요. 심판받기 위해서. 왜냐하면 심판이라는 것은 누가 지옥가고 천국 가는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의 주 되심을 증거 하기 위해서 심판 작업이 있어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이미 죽은 자는 심판이 없어요. 이미 죽어서 낙원에 갈 사람은 낙원에 분류되고 지옥 갈 사람은 지옥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누가복음 16장 20절에 거지나사로 있죠. 한 번 죽고 난 뒤에는 분류가 끝나기 때문에 더 이상 심판이 없는 거예요. 근데 주님은 “누구 마음대로?” 그렇게 되면 죽는다는 것이 하나의 도피처가 되는 겁니다. 죽는다는 것이. 죽게 되면 더 이상 나의 죄에 대해서 묻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죠. ‘까짓 것 뭐 순교하지.’ 내가 주님을 위해 결정적인 일을 했다는 그 순간에 죽어버리면, 순교했다는 그 성과로 천국 가게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충분히 남아있죠.

 

강의 처음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제가 잘못됐는지, 여러분들이 못 알아듣는지, 제 취지를 전혀 모르는 것 같아요. 인간에게 심판한다는 것은 인간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주 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는 작업이죠. 그래서 인간은 심판에 대해서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어요. 식탁에 반찬이 있는데, 남편이 “여보! 오늘 계란말이가 왜 이렇게 맛이 없어?” 하고 남편이 자기 밥상이니까 남편이 아내한테 물었는데, 둘째 아들이 나서서 “저는 맛있는데요?” 이러면 이거는 맞아야 돼요. 니가 왜 끼어드느냐 말이죠. “니가 왜 끼어들어?”

 

“하나님 아버지. 쟤는 천국 보내고 쟤는 지옥 보내겠습니다.” 라는 이야기를, 거기에 해당되는 인간이 들었다 칩시다. 어떻게? 반발할거에요? 대들 거예요? 아니면 대법원에 고소할거예요? 뭐 어떻게 할 거예요? “맞습니다. 저, 개니까 마음대로 하시옵소서.” 이런 자가 구원받는 거예요. 왜? 그런 발언을 한 그 속에 뭐가 포함이 되어 있습니까? “심판은 예수님 마음대로입니다.” 라는 것이 포함이 되어 있는 고백을 내놓잖아요. 그게 포함이 되어 있는 고백을.

 

그러니까 우리가 심판에 대해서 전혀 주눅 들거나 고민할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없죠. 대책을 세울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대책을 세우지 마세요. “주님이 심판주로서 주님 마음대로 심판한대.” 라는 소식만 전하면 돼요. 협박이나 공갈을 할 입장이 못 됩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까 회개하라! 예수를 믿어라! 이러면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요. 누굴 위해서? 본인을 위해서. 그럼 본인은 자기를 산 자로 보겠어요? 죽은 자로 보겠어요? 살아있을 때 야무지게 구원받아놓겠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이거는 산 자와 죽은 자의 구분이 허물어지고 경계선이 없는 셈이 돼버려요. 예수님은 산 자나 죽은 자의 주가 돼버렸어요. 산 자, 죽은 자, 구분이 없습니다. 죽었다고 해서 어드밴티지advantage를, 유리함을 얻는 것이 아니에요. 살았다고 해서 더 유리한 것이 아니에요. 죽어도 살아있고, 살아도 살아있는 거예요. 그런데 죽어도 살아있고 살아도 살아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음으로 말미암아 살아있는 인간도 죽어있는 인간이고, 살아있다고 여기는 그 인간도 죽어있는 인간이고, 죽었다고 여겼는데 살아있는 그 인간도 죽어있는 인간이에요.

 

세종대왕이 죽었습니까? 살았습니까? 세종대왕이? 세종대왕은 분명히 죽은 자죠? 하지만 지옥에서는 살아있어요. 살아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순간 세종대왕도 죽은 자가 되는 겁니다. 세종대왕 하니까 확 들어오죠. 그러니까 세종대왕을 왜 구원 안 시킵니까? 라고 말할 자격이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이미 죽은 자에요. 이미 죽은 자를 세종대왕은 착하니까 살려달라고 건의할 인간도 없어요. 건의할 자격이 있는 인간도 없어요. 어떤 누구도.

 

목사님. 복음이 그때에는 안 전해졌으니까, 복음이 들어온 것은 19세기 말인데, 그 전에 있는 사람은 복음도 못 듣고 너무 억울하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한테는 복음 말고 다른 걸로 어떻게 구원시켜줄 수 있는 혜택을, 기회를 부여해줘야 자기 잘못한 책임으로 지옥 갈 것이 아닙니까? 라고 발언을 하는 그것이 바로 연옥설이에요. 연옥설은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 죽은 사람은 복음을 못 들었기 때문에, 그래서 시험을 친 적이 없기 때문에 채점이 안 되는 사람들, 시험을 친 적이 없기 때문에, 시험 문제가 완성되기 전에 살았기 때문에 채점이 안 되는 사람들을 위해서 있는 거예요.

 

그래서 세종대왕이 복음 들어오기 전에 살았기 때문에, 뭐 파피뉴기니아에, 아프리카에 기독교가 오기 전에 죽었던 사람도 해당되고, 그 다음에 이 아기가 몇 개월 되었어요? 9개월 15일이 되기 전에 죽었던 아기들도 해당되고, 자기 의지로 죄를 지을 수 없는 그러한 애들한테는 그냥 특별히 기회를 주어야 되지 않느냐 이 말이에요. 왜? 자기 의지로 죄를 안 지었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라는 그런 훌륭한 철학자가 있었는데 그때까지 복음이 안 들어왔잖아요. 그런 사람들. 소크라테스 같은 훌륭한 성자 같은 사람들한테는 패자부활전 주어서, 일단 연옥가가지고, 연옥의 온도가 뜨겁다 싶으면 착한 일 할 거고, 좀 괜찮다 싶어서 살만하네 하면 지옥 보낼 거고. 그때서 다시 결정하겠다는 거예요.

 

그 천주교가 이단인데요, 천주교만 이단이겠어요. 기독교도 마찬가지지만. 근데 뭘 모르느냐 하면,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이미 모든 인간은 저주받은 자입니다. 모두 저주받은 자고 되고 이미 죽은 자가 돼요. 왜냐하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가면서 “그래, 아리스토텔레스 니는 죄가 없기 때문에 니를 위해서 대신 지지 않고, 너는 괜찮고, 니는 니 힘으로 구원받을 수 있고, 니 말고 다른 죄진 사람들을 위해서 대신 죽는다.” 이런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니거든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뭐냐 하면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그러면 언약을 이룬다는 말은, 모든 인간이 죄를 지었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해요. 그러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조상은 누굽니까? 아담이죠. 아담이 뭘 따먹었죠. 선악과 따먹었죠.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했죠. 그 죽음을 예수님이 자기 죽음으로 가져온 거예요. 그 죽음을.

 

그 죽음을 자기 죽음으로 가져와버리면, 아담의 죽음을 자기 죽음으로 가져왔다는 말은 무슨 취지로, 무슨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느냐 하면, 이 세상에 모든 일어나는 일은 심판과는 상관없이, 예수님의 심판주 되심과 상관있어서 벌어져야 될 일들이라는 말이죠. 이게. 북한의 김정은, 북한의 김정은은 예수님의 심판주 되심에 꼭 필요한 존재라서 지금도 살아있고 활동하고 있게 된 거예요. 꼭 필요한 존재라서.

 

어떤 인간도 주님의 심판주 되심과 무관한 인간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게 뭐냐, 산 자와 죽은 자를 뭐한다? 주께서 심판주시기 때문에 산 자와 죽은 자를 향하여 심판을 해버리는 겁니다. 어떻게? 나는 너를 지옥 보냄으로써, 심판주 되기 위해서 너 같은 인간을 내가 만들었다. 니 입장에서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 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니 입장이고, 내 입장에서는 가룟 유다 너는 태어나야 된다는 거예요. 그리고 거지나사로나 세리, 너는 천국 가기 위해서, 사랑받기 위해서 너는 이 땅에 태어났어야 했었다는 거예요.

 

그렇게 태어날 때부터 이미 심판이 결정됐기 때문에 이 땅에 어떤 존재도 예수님의 심판주 이심을 증거 하지 않는 증거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갑자기 세상이 환하게 밝아졌죠. 왜? 할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저 사시면 되는 거예요. 사시면서 가는 길이 갈라지면 돼요. 각도가 벌어지면 되는 겁니다. 갈 길이 달랐다~♬ 이 갈 길이 점점 더 달라지는 거예요. 너는 상행선~♬ 나는 하행선~♬ 갈 길이 달라요. 점점 더 벌어져요.

 

한쪽은 뭐냐, 천국 가는 사람은 예수님의 심판주 되심에 아주 신이 났어요. 기분이 좋아요. “주여, 이 땅에서 개같이 살아도 상관없습니다. 거지가 되어도 상관없습니다. 세리가 되어도 상관없고 창기가 되어도 상관없습니다.” 희희낙락하면서 살아가고 있어요. 근데 지옥 가는 사람은, ‘이러다 지옥가지... 이러다 지옥가지...’ 이러는 거예요. 이러다가 지옥가지...그게 지옥 가는 표시입니다. 심판에 대해서 염려를 하지 말아야 되는데, 심판에 대해서 염려하겠다는 말은 대처하겠다는 말이에요. 뭔가 심판 앞에서 나름 대책을 세우겠다는 겁니다. 대책을.

 

제가 미국 가서 강의할 때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캘거리강의인가? 하도 많이 해서 어디인지 모르겠다만. 대학 합격했는데 수학정석을 왜 봅니까? 볼 필요가 뭐 있습니까? 정철종합영어 볼 필요 없죠? 물론 제가 이야기하는 참고서 구경도 못한 사람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아니, 대학 합격했는데 또 대입학원에 다니는 사람이 또 있습니까? 학원 다닐 필요가 있어요? 대학 합격했는데? 없죠.

 

그러면 만약에 원하는 서울대에 들어갔다고 칩시다. 서울대에 들어갔는데, 만약에 고3학생 자율학습하는 학원 앞에 지날 갈 때 기분이 어떻습니까? 기분 좋죠. 이미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고 난 뒤에 노량진 학원 앞에 걸어가 보세요. 합격하고 난 뒤에. 합격한 그 다음날에. 이거 누구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열심히 해! 열심히 하라고!” 한번 걸어가 보라고요. 얼마나 기분 좋은지 모릅니다. 성도입니다. 성도에요. 꼴에 돈도 없어서 거지꼴로 살고, 개같이 살아도 혼자 신났어. 혼자 기분 좋아. 이게 말씀 전하는 중입니다. 이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 전하는 중이에요.

 

만약에 남편이 복음을 모르고 여자가 복음을 아는데, 남편이 걸핏하면 행패를 부린다고 할 때, “그런 식으로 할라카거든 우리 갈라서자!” 그러면 복음을 아는 아내가 “니 그걸 나한테 무기라고 던지나? 니 그걸 지금 나한테 협박한다고 던지는 무기냐? 그게? 좀 더 센 거 없어? 센 거?” “그러면 니 청부살인해서 죽인다?” “아니, 죽인다는 것 보다 더 센 거 없어?” 여기서 죽으나 필리핀에 가서 죽으나. 톨게이트에서 불타서 죽으나. 주님은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가 없어요.

 

마르다와 마리아가 그래서 오해한 거예요. 자기 오빠 죽인다고 난리도 아니었죠. 진작 오지 죽고 난 뒤에 무슨 소용이 있느냐 말이죠. 무슨 소용이 있느냐. 마리아와 마르다는 아직도 뭘 구분해요? 산 자와 죽은 자를 구분하는 거예요. 그러나 사람이 살아있으나 죽어있으나 그거 의미가 없어요. 살아있어도 역시 예수님은 심판주가 되고, 죽어있어도 역시 예수님이 심판주가 되면 되지. 내가 살아있다, 죽어있다는 것은 심판주 됨에 대해서는 무의미한 거예요. 무의미한 겁니다. 아무 의미 없는 겁니다.

 

세상에! 이거보다 더 기쁜 복음이 있겠어요? 얼마나 기뻐요. 히브리서 말씀에 의하면 세상이 감당치 못한다. 톱에 켜는 것과 그리고 광야에 유리하고, 뭐 헤매고 있어도, 그것마저 예수님의 심판주 되심을 드러내기 위한 주님의 절묘한 해프닝이고 이벤트거든요. 뭐 이벤트 치고는 좀 아프고 배고프다마는. 진짜 공무원 합격해가지고, 그것도 3차까지 합격해가지고, 2차 합격했다가 3차에 떨어지지 말고, 3차 딱 합격해가지고 출근하라는 소식 딱 듣고 노량진에 가가지고 약 올리기 한번 좀 해보라는 말이죠. “고생 더 해! 수고하라고!” 그럼 그쪽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니는 뭐 믿고?” 딩동! 그게 정답이에요. 니가 뭐 믿고?

 

그게 아까 안양강의에서 이야기했지만, “어리석고 미련한 인간됨.”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심판주 되심을 인정하는 구원된 자의 이 세상의 삶의 양식이고 모습입니다. 늘 미련하고 늘 어리석어서, 미련하고 어리석기 때문에, 미련하고 어리석은 십자가만 자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말은 어느 인간도 자진해서 미련하고도 어리석을 사람이 없는 이유가, 그들은 불합격했기 때문에 그래요.

 

그들은 아주 심판을 면제하고 구원받기 위해서 모든 똑똑이는 다 동원해요. 모든 똑똑한 것, 신학하고, 성경공부하고, 막 이성적으로 따지고, 자기 기도한 것 막 적고, 오늘은 30분 기도했고, 내일은 35분 돌파하고, 뭐 이렇게 해가지고. 그 돌파하면 뭐해요? 기도하면 할수록 이게 점점 더 현명해지고 똑똑해지는데. 왜냐? 지가 한 것이 있거든요. 기도한 것이 있기 때문에. 헌금했다는 것을 다 인식하잖아요. 분명히 성경에서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독하게도 말을 안 들어요. 세상에! 오십년 지난 일을 다 기억하고 있어요. 이건 자칭 똑똑한 거잖아요.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이 아니고. 나보다 더 믿음 좋은 사람 있으면 한 번 붙어보자고 하잖아요. 배틀battle, 싸워보자는 거예요. 누가, 누가 믿음이 좋은지.

 

구원은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에 소유가 되어야 돼요. 구원 작업에 소유가 되는 거예요. 말씀을 가지고 전파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에 사로잡혀야 삶 자체가 전파하는 삶이 돼요. 그게 뭐냐 하면, 2절에 보면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이걸 세 글자로 이야기하면 무시로. 무시로에요. 때가 없이.

 

때가 없다는 것은 항상 할 때냐, 안 할 때냐 하는 결정을 본인이 내릴 입장이 못 된다는 겁니다. 아니, 개가 개같이 살면 되지, 지가 주인처럼 살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개가 주인입니까? 개는 주인이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오면 되지. 그게 바로 자유잖아요. 자유. 그 자유를 요한복음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다시 한 번 이 시간을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심판을 하시겠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보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정신 차려라. 깨어 기도하면 구원해줄게. 니가 회개하면 구원해줄게.” 그런 것 없어요. 회개하는 것조차도 결과적입니다. 회개라는 것도 돌아보니까 회개가 된 상태에요. 회개해가지고 따내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했으니까 주세요!” 라고 하는 권리가 없어요.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그럴 권리가 박탈되었다는 것을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발생되었기 때문에 그래요.

 

만약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안 죽은 상태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하면 그들은 뭘 하겠습니까? 회개한다고 나름대로 회개에 애쓰겠죠. 나를 사랑하라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을 열심히 사랑하겠죠.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계획이, 아예 그런 계획이 없다면 결국은 누가 구원받아요? 바리새인만 구원받아요. 왜? 가장 최선의 노력을 가장 많이 했던 자들이 바리새인이기 때문에. 그래서 너희 의가 바리새인보다 낫지 아니하면 어디에 못 간다? 천국에 못 간다 했죠.

 

근데 문제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져버렸단 말이죠. 십자가 진 상태에서 나를 사랑하라는 말은 무슨 뜻이에요? 십자가도 믿어야 하고 사랑도 해야, 그래야 구원받습니까? 두 가지 다 해야 해요? 두 가지가 있으면 안 되죠.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으니까(딤전6:10), 거기에 한 가지 더 붙여서 세 가지만 하면 거기서 끝입니까?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으라(롬15:5), 이거 네 가지네. 들추면 들출수록 점점 더 많네요.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이거 지켜야 할 조항이 점점 더 늘어납니다. 여기에 대책이 있어요?

 

이거는 여러분 보고 물어볼 이야기가 아니고 기존교회한테 물어볼 이야기에요. “저기, 권사님. 지금 몇 단계까지 뗐습니까?”하고 한 번 물어보세요. “성경 중에서 몇 퍼센트 지키고 몇 퍼센트 못 지켰습니까?”하고 한 번 물어보세요. 꼭 뒤에 남겨두는 것이 있어요.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면 내게 합당치 않다. 이런 것은 꼭 뒤에 남겨둬요. 왜냐하면 수능이 며칠 안 남았기 때문에. 아들 장가보내야 하기 때문에.

 

십자가를 안 졌다면, 그런 게 의미가 있을 거예요. 그리고 십자가를 진 능력이 안 왔다면, 우리는 십자가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을 거예요. 십자가를 열심히 믿는 믿음으로써 구원받을 겁니다. 하지만 십자가 지고 난 뒤에, 십자가 능력이 온다면 뭐도 죄가 돼요? 내가 십자가 믿는 것도 뭐가 됩니까? 죄가 돼요. 왜? 십자가를 믿는다고 자부했기 때문에. 십자가를 믿는다는 그것이 내가 하나의 공로가 되어가지고 그걸 근거로 해서 새삼스럽게 구원받은 자가 되어 버려요.

 

무슨 뜻이냐 하면, 지금 우리가 죄인 된 것이 아니고, 십자가 졌으면 우리가 죄인 되어야 하는데, 자꾸 죄인이라고 생각 안 하고, 뭐냐 하면 중립적인 지역에 있으면서 나의 잘못된 선택이 나를 죄인 만들고, 옳은 선택은 나를 의인 만든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렇다면 중립적인 지역에 있으면서 예수님 십자가 졌고 성령이 왔다고 한다면, 성령을 달라고 기도하고 십자가 믿겠다고 나선다면, 이건 자기 스스로 뭐 하는 겁니까? 이거는 자기가 행할 수 있는, 중립에서 의로 바꿀 수 있는, 자기 스스로 이행과정이라고 보는 거예요. 나는 중립에 있었는데 이제는 십자가 믿고 성령 받아서 충만했기 때문에 나는 의인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게 아니에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찾아오게 되면, 이 자체가 뭐가 되느냐 하면, 이 자체가 우리가 사전에 뭘 생각했든 그것마저 뭐가 된다? 그게 몽땅 사망이 되고, 죄가 되고, 죽음이 되는 거예요. 안 믿어져요? 안 믿어지면 답변해보세요. 사도바울이 예수님 만나기 전에 어떤 착한 일을 했습니까? 사도바울이 오늘도 예수 믿는 30명을 잡아 죽였다. 35명 마저 채우게 되면 주님이 나를 만나러 올걸? 그걸 사전에 예상했습니까? 예상 안 했죠.

 

사도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본인 스스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한 착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안 했어요? 안 했죠. 예수님은 죽일 이단인데 예수님을 왜 생각했겠어요?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하면서 일을 했죠. 그런데 사도바울에게 누가 왔습니까? 예수님이 찾아왔죠. 그럼 사도바울은 뭘 느낍니까? 내가 예수님을 만나는데 자기 쪽에서 공로가 있어요? 없어요? 없죠. 그럼 사도바울은 부끄러운 구원 받나요? 아무 상급도 없이? 나쁜 짓해서 구원받았는데?

 

사도바울이 이렇게 생각했습니까? “하나님. 지금 가면 부끄러운 구원받으니까 업적을 많이 이루고 가겠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아니면 “주여, 어서 내 영혼을 받아주옵소서.” 라고 이야기했어요? 죽여 달라고 했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어서 죽여 달라고 했죠. 그럼 옆에 상급 주장하는 사람은 뭐라고 합니까? “지금 가면 천국 가도 상급, 보너스 하나도 없는데, 저 사람 왜 카지?” 하면서 오히려 걱정하겠죠. 기존교회에서 예수만 믿으면 안 되고, 천국 가기 전에 많은 성과급을 거둬야 높은 자리에 간다고 이야기하거든요. 그걸 빗대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걸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하면서 하는 거예요.

 

다시 묻습니다.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어떤 착한 일을 했습니까? 한 적이 있어요? 없어요? 한 적이 없죠. 도리어 지금 내가 예수 믿게 된 것은 지난 모든 일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인 것이 도리어 뭐였다? 하나님의 은혜였다. 은혜였다. 여러분, 이게 납득이 됩니까? 이게 얼마나 충격적인 발언이에요? 그 유족들을 생각해보세요. 울산 언양에서 고속버스 기사가 과속해서 열 명 죽이고 잡히고 난 뒤에 성령을 받았어요. “당신은 왜 과속했습니까?”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과속했습니다.” 한다면 이게 말이 통합니까? “당신이 열 명 죽였다.” “열 명 죽인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죽였다.” 이렇게 하면 이게 통하는 이야기에요?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지난 시간 내내 제가 말이 안 되는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10분 쉽시다.
 이미아(IP:122.♡.188.127) 16-12-18 20:26 
서울 의존교회 161014b (심판)-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작하겠습니다. 아직도 우리가 해결할 것이 있는데, 우리가 해결하는 것이 아니지만,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이 뭐냐 하면, 왜? 하나님 아버지가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왜 아들이신 예수님께 다 맡기냐는 그 문제입니다. 아버지가 심판하시면 되는데 왜 아들에게 맡기느냐?

 

그게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나옵니다. 22절,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왜 그래야 되는가? 왜? 그 이유에 대해서 제가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심판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아버지께서 심판이 뭔가 알려주기 위해서, 세상을 먼저 심판하신 것이 아니고 자기 아들을 먼저 심판을 해버렸어요. 심판의 원형, 심판의 모델, 죽음의 원형, 죽음의 모델을 예수님께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었습니다. 아버지께서 하실 그 모든 심판을.

 

그래서 두 분이 하신 일이 이 세상 전부에요. 아버지와 아들, 아들과 아버지, 두 분이 하신 일이, 그 일어난 관계가 구체화 된 것이 이 현실세계입니다. 이 현실세계 그 어떤 것도 아버지와 아들의 창세전에 있었던 계획에 대해서 벗어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계획에 의해서 꼭 필요한 존재가 뭐냐 하면 바로 사탄이 꼭 필요해요. 여자의 후손이라고 하는 것은 뱀의 후손이 없으면 여자의 후손도 의미가 없어요.

 

반드시 머리를 맞아야 해요. 누구한테? 여자의 후손한테 정수리를 얻어맞아야 해요. 그리고 뱀의 후손은 반드시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뜯어먹어야 해요. 그걸 공격해야 해요.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물고, 물었을 때 뱀의 후손은 자기의 본색을 드러내게 되어 있고, 뱀의 정수리를 칠 때 비로소 여자의 후손의 본색이 드러나는 거예요. 이 이야기는 우리 인간들의 실생활과 일상생활 하고, 신곡시장에서 콩나물 파는 것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 거예요.

 

이게 우리가 평소에 인식하는 것하고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모든 우리 인생은 내가 뭘 노동하면 이것이 나에게 밥벌이가 되어가지고 그저 한 평생을 그럭저럭 밥 먹고 사느냐, 그게 우리 관심사에요. 그게 관심사인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이제 늙어 죽게 되면 죽어서 어디에 갈지, 굉장히 궁금하거든요. ‘죽어서 어디 갈까?’ 생각하다가 ‘그럼, 죽은 자들이 한데 모인 곳이 있겠지. 집합하는 장소가 있겠지. 그럼 장소가 어디에 왜 있을까? 아! 거기서 심판이 있을 거야. 그럼 심판은 어떻게 이루어지지? 그렇지! 이 땅에서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심판이 결정될 거니까, 그래 지금부터 업業을 많이 쌓는 거야.’

 

이걸 복을 짓는다고 이야기해요. 적어도 불교에서 보살쯤 돼야 이런 용어가 나와요. 복을 짓는다. 복을 만들어낸다. 설립한다. 그런 이야기를 불교신자들이 해요. 왜 자꾸 도와줍니까? 우리 좋아라 도와주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도와주게 되면, 이게 업이 쌓이게 되면, 업은 마일리지라서 자기가 못다 쓴 업은 후손들에게, 자자손손으로 그 성과가 혜택이 주어지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부모가 평소에 덕을 많이 쌓게 되면 그 혜택은 자손이 계속 받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의도가 뭡니까? 결국은 그 의도가 심판을 희석시키고 심판에서 면제되겠다는 몸부림이죠.

 

근데 제가 방금 불교이야기 했지만 기독교는 안 그렇습니까? 기독교도 마찬가지에요. 교회 왜 나갑니까? 지옥가기 싫어서 교회 나오는 거예요. 그럼 지옥가기 싫다고 하면 지옥 안 보냅니까? 교회 나와서 아부 떨면 천국 보냅니까? 이게 전부 다 교회 오든 가든 누구 생각이냐 하면 본인에게서 나와서 본인에게 되돌아가는 생각들이죠. 모든 사고방식들이 이런 생각들이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이거는 개인주의죠.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이 하시는 이야기는 개인주의가 아니고 아버지의 뜻을 예수님이 그대로 반영하는 겁니다. 드러내는 겁니다.

 

드러낼 때,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심판을 먼저 받아버립니다. 먼저 받거든요. 제가 방금 먼저라는 말을 했어요. 먼저. 일찍 받는다,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참 이 말이 굉장히 어려운 말인데, 왜냐하면 구약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신약 있고 신약 좀 지나가면 십자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십자가는 구약보다도 늦게 온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입니다. 근데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찍 죽임을 당했다는 말, 일찍 이라는 말은 뭐냐 하면 모든 시간을 초월해서 이미 죽임을 당하기로 이미 이야기가 끝난 거예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아버지께서 아들을 죽음에 넘기고, 그 다음에 죽은 아들을 아버지가 되살림으로써 하나님이 내뱉은 그 하나님의 약속을 아들을 통해서 성취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숨겨놓은 계획입니다. 이게 창세기 22장에 나타나있죠. 아버지가 이삭을 죽이는데, 그것도 그냥 아들이 아니고 사랑하는 아들, 그것도 둘이나 셋이 되는 것이 아니고 사랑하는 독생자 이삭을 죽이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죽이는 대신 숲에다가 수양을 미리 준비해서 그 수양하고 바꿔치기 해가지고, 이삭을 어떤 아들로? 이미, 이왕에, 일찍 죽임을 당한 아들로 간주해서 살게 하는 거예요.

 

그냥 태어난 이삭과 아버지한테 죽을 뻔 했다가 태어난 이삭의 차이점은 뭐냐 하면 그냥 살아있으면, 그냥 존재하게 되면, 이삭이 죽음을 언제 경험하게 되느냐 하면, 이것은 나이 많아서 죽을 때, 그때 죽음을 경험하게 돼요. 이거는 일찍 죽임을 당한 그 죽음이 아닌 거예요. 여러분! 죽을 때 십자가 믿을까요? 일찍 십자가 믿을까요? 사실은 이것은 우리가 결정할 문제가 아닌데, 성령이 십자가를 앞장세워 와버리면 이거는 일찍 십자가의 의미를 알게 됩니다. 그러면 이미 우리는 일찍 죽임을 당한 자가 돼요.

 

살아있어도 이미 십자가 안에서 살아있지, 사실은 십자가 밖에 나가면, 십자가 없다면 우리는 이미 죽은 자가 되는 겁니다. 왜 그래야 되는가, 그게 구약 때문에 그래요. 아브라함과 이삭 사건 때문에 그래요. 아브라함이 이삭 바칠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니가 믿는 자의 조상이 된다는 겁니다. 믿는 자의 조상이라는 말은, 모든 믿는 자라면 아브라함과 일어났던 일과 똑같은 일이 반드시 재현되어야 해요. 한평생 가운데서 반드시 그런 일이 일어나야 돼요. 그럼 목사님, 우리 아들 잡아야 됩니까? 근데 다행히도 우린 딸이 있기 때문에 좀 낫긴 나은 것 같은데, 딸은 안 받으니까. 여자는 안 받으니까. 그럼 남자 있는 자식은 죽어야 됩니까? 하는데, 십자가가 그걸, 우리를 대신합니다.

 

십자가를 믿는 것이 이미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걸로 간주가 돼요. 결국은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에게 있었던 그 정보가 내장되어 있어야 합니다. 내장되어 있을 때만 이게 산자가 되는 겁니다. 이미 영생 얻은 자가 돼요. 목사님, 그렇게 하는 이유가 뭡니까? 하나님은 언약을 위해서, 하나님은 자기가 내뱉은 언약을 위해서만 일하시기 때문에 그래요. 언약을 위해서. 그래서 구약의 하나님은 무슨 하나님이냐 하면 언약의 하나님이에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이 자기 속에 있는 뜻과 마음을 아브라함을 통해서 나타냈고, 이삭을 통해서 나타냈고, 야곱을 통해서 나타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공통점이 있어요. 모두 다 자기 자식을 잃어버렸다는 거예요. 아브라함은 이삭을 자기 손으로 죽이려고 했으니까 잃어버렸고, 이삭은 자기가 믿었던, 자기가 복 주려고 밀었던 자식은 저주를 받아버리고, 자기가 염두에 두지도 않고 밀지 않았던 야곱이 장자가 돼버렸죠. 이거는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이삭의 생각을 거부한 거예요.

 

이삭 생각을 거부한 이유는 하나님의 일에는 인간의 생각이 개입될 수 없다는 원칙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누가 구원받고 누가 저주받는지, 저주받고 구원받는 거기에 대해서 인간의 뜻이 가미될 수 없고 섞일 수가 없어요. 본인의 뜻이. 야곱은 여러분이 아시죠. 야곱의 아들이 죽은 이유는 유명하잖아요. 야곱이 사랑하는 아들이 누구였죠? 요셉이에요. 옷도 특별하게 베옷, 채색 옷을 지어줬어요. 근데 그 베옷에 피가 물들 줄이야! 물론 그게 짐승의 피지만, 야곱의 입장에서는 짐승의 피로 믿어지지 않고, 죽은 사랑하는 자기 독생자, 하나밖에 없는 사랑하는 아들인 요셉의 피라고 처절히 믿고 자기에게 이미 요셉은 죽은 자였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구약의 지평에서, 구약의 평지에서는 결국 뭐냐 하면 사람은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다. 죽으면 끝났네. 이래 되잖아요. 그런데 그 죽으면 끝난다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이 경계선의 범위가 넓어졌어요. 죽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고 난 뒤에도 주의 일은 멈추지 않고 주의 일은 계속된다 이 말이죠.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여기 탁구대가 있는데 이쪽은 산 자, 저쪽은 죽은 자가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살아 있을 때 하지 죽은 자는 찬양하지 못한다는 시편115편에 17절에 나오는 말씀처럼, 죽은 자는 소용없고 살아있을 때나 잘하자, 라고 그렇게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죽으신 가운데 살아났죠. 그러므로 말미암아 여기 탁구대 경계선이 없어졌어요. 죽은 자나 산 자나 모든 자의 주가 되죠.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죽은 자가 도리어 이쪽에 범람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넘쳤다고 생각해봐요. 죽은 자가 넘치는 거예요.

 

이걸 캘거리강의에서 그림으로 설명했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완료를 하고 난 뒤에, 완료된 상태에서 이미 모든 게임이 끝나고, 끝난 그 이후의 상태가 성령을 통해서 이 지상에 덮쳐버리면, 역사 위에 묵시가 덮치는 양상이 돼버립니다. 그러면 뭐가 되냐, 요한복음 5장 24절의 말씀이 되죠.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네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뉘앙스가 무슨 뉘앙스입니까? “시험 끝났는데?” 이런 뜻이에요. “저 대학 입학시험...?” “아이고, 야! 합격자 발표 났어야. 벌써 끝났어. 합격자 발표 났어.” 이거라 말이죠.

 

합격자 발표 났는데 그 당사자에게 통보는 누가 와서 합니까? 성령이 와서 통보해주는 거예요. “주께서 너를 사랑하신대. 끝” 근데 주께서 너를 사랑하신다는 통보는 받는데, 주께서 너를 미워하신다는 통보는 사람들에게 전해줘도 사람들이 거부해버려요. “아니, 나는 못 믿겠어. 그럴 리 없어. 그럴 리 없어. 아니야. 아니야. 거짓말이야. 제발 거짓말이라고 해줘!” 통보를 이렇게 합니다. “주께서 너를 이미 저주하기로 작정했었어.” 라고 온다면, “참 잘하셨습니다.” 라고 하는 자가 영생을 얻은 자입니다.

 

그게 로마서 9장 3절에 나옵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 “주께서 하신 일이라면 내가 수용하겠습니다.” 진짜 구원받은 사람은 구원을 챙기는 것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고, 이 구원은 주님의 일방적인 조치였음을 받아드리는 거예요. 그리고 그 구원은 나한테 구원이 온다는 것이 아니고, 이미 심판과 구원 작업이 이미 주님께서 실시하고 있음을, 그 주체자가 주님임을, 우리가 아님을 인정할 때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안 믿는 거예요. 이 세상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자기가 관여할 것이 없고, 모든 것이 주체자가 되는 그 결과물로서 우리는 하루하루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그렇게 연결된 상태에서 보는 거예요. 왜? 나는 죽은 자니까. 십자가에서 이미 죽은 자이기에. 십자가에서 이미 죽은 자에게 니는 구원받았다, 니는 지옥 간다, 라는 이러한 평가는, 그거는 의미 없고요. 구원받았으면 구원받은 티를 내게 되어 있고, 저주받았으면 저주받은 티를 내게 되어 있지, 내가 구원을 소지하고 저주를 소지하는 그것은 아니에요.

 

어떻게 우리가 예수님을 소지할 수가 있습니까? 주님의 우리를 소유해야죠. 주님이 우리를 소유해야지 왜 우리가 주님을 소유해요? 어디 뭐 셰퍼드처럼 부릴 일이 있습니까? 어떤 경우도 우리로 하여금 구원받게 하는 꼼수를 쓰는 것은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시작하신 일이 지금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 믿어진다는 것은, 이거는 성령을 받아야 가능합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었습니다. 그것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셨습니다, 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저에게 이것을 믿게 하셨군요. 내가 구원받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 문장, 이 말씀이 내 인생을 통해서 이 말씀을 늘 확인시켜 주는데 참여시킨 거예요. 그러니까 나의 직업이 세리냐, 창녀냐, 고아냐, 과부냐, 하는 것은 전혀 우리한테는 이것이 심각한 문제가 되지 않는 겁니다. 거지가 되던.

 

안양에서 그런 이야기했는데, 이런 점을 확인하는 방법을 한 번 생각해봅시다. 확인하는 방법을. 아까 디모데후서 4장 2절 할 때도 했지만, 거기 디모데후서 4장에 나오는 사람이 두 사람이 있죠. 한 사람은 바울이고 또 한 사람은 디모데죠. 맞죠? 뭐, 두 사람 어떻습니까? 세상적으로 뭐 대단한 재벌쯤 됩니까? 뭐, 세상적으로 부러워할만한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까? 별로 없죠. 사도바울은 장가도 못 간 사람이에요. 자식이 이쁜 것도 몰라요. 9개월 돼서 기는 것은 구경도 못했어요. 뭐, 사도바울에게 부러운 것이 있어요? 전혀 부럽지 않아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사람을 내세워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니가 니 상태를 그냥 복음으로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라는 말은 뭘 하라는 말이 아니고 주께서 너를 갖고 다니신다 이 말이거든요. 다니시면 그때가 바로 복음 전하는 때가 되는 거예요. 왜? 주님이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다시 로마서 5장으로 돌아가 봅시다. 왜 하나님께서는 자기 심판을 자기가 하지 않고 예수님께 맡기셨습니까? 왜 맡기셨는가? 이 질문 자체에 대해 언약을 이루는 그것이 주님의 목적이라고 이렇게 대답한다면 바로 그게 정답이 됩니다. 언약 상대자가 누구밖에 없다? 이 세상에 믿을 것은 아들이신 예수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그냥 아들이 있다고 해서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 당사자가 진짜 아들입니다. 그러면 이루었다, 안 이루었다는 것을 무엇으로 판정하느냐,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기 때문에, 사망이라는 것도 우리가 죽는 죽음은 사망이 아니거든요. 예수님에게 일어난 사망이 사망이고, 예수님에게 일어난 부활이 영생이고 그런 거거든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증거 하라는 말이 그거에요.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이거에요. 하나님이 보내신 자가 죽었다가 살아났다.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에 죽고 하나님의 의 때문에 살아났다는 겁니다. 거기에 해당되는 죄와 의라는 개념은 우리가 갖고 있는 죄, 의, 개념하고 전혀 상관없이 오직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에 그렇게 단어를 붙인 거예요. 예수님에게 일어난 모든 사태를 의와 죄, 거룩, 사랑, 이런 걸로 해서, 거기서 예수님께서 새롭게 의미를 뽑아내는 겁니다. 뽑아낼 때, 예수님께서 어디서 뽑아내는가, 이것은 요한일서 할 때 했죠. 어디서 뽑아내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의 몸에서 뽑아내요. 예수님의 몸에서.

 

몸에서 뭐가 나왔느냐, 물이 나왔고 피가 나왔고 성령이 나왔는데, 이 세 가지가 있을 때 예수님의 몸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증명한다고 했습니다. 요한일서 5장에서. 그러면 성령, 물, 피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한다면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은 뭘 증명하겠어요? “예수님이 주가 되십니다. 예수님이 바로 모든 언약을 이루신 주님입니다.” 그걸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제 말을 충분히 이해했다고 치고, 슬슬 예를 한 번 들어봅시다. 만약에 배가 고파서 갑자기 빵이 먹고 싶었는데, 아무도 안 본 것 같아서 빵을 하나 훔쳤습니다. 이게 복음적일까요? 복음적이지 않을까요? 안다고 치고 묻는 겁니다. 성도한테는 이게 복음적입니다. 왜 복음적이냐 하면 성도의 눈에는 모든 세상 돌아가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존재하고 일하시고 계심을 증거 하기 위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봤죠.

 

그렇게 되려면 그 전제가 뭐냐 하면, 성도 본인이 왜 주의 일에 관여하지 못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가담할 입장이 못 되기 때문에, 죄인이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은 자기 언약을 이루는 것이 목적인데, 그 이루는 목적의 언약대상자는 누구밖에 없었다? 예수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살과 피가 유일하게 새 언약의 완성입니다. 누구든지 내 살을 먹지 않고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영생이 없다고 했거든요.

 

예수님이 살과 피를 제시하는 것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몸, 살과 피만 원하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의 살과 피, 몸은 원하지 않아요. 백날 수혈해봐야 그거는 주의 뜻이 아닙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가 하는 행위 하나 자체가, 우리는 도둑질하는 것을 나쁜 것이라고 보잖아요. 내가 물건 훔치면 나쁘다는 것이 어디에서부터 생겨서, 어디를 경유해서, 어디로 나온 결론이 나쁘다는 겁니까? 내가 빵 훔치는 것이 나쁘다면, 그럼 빵을 훔치지 않는 것은 뭐가 돼요? 중립이 돼요? 선한 것이 돼요? 선한 것이 되는 겁니다.

 

그럼 우리는 졸지에 뭐가 됩니까? 선할 수가 있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에게 뭐가 나쁘다, 선하다, 라는 말은 뭐를 포기를 못하는 겁니까? 선악적인 지식을, 선악체제를 때려 죽여도 나는 못 버리겠다고 고집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성도가 배고팠다, 누가 배고프게 했습니까? 주께서 배고프게 했겠죠. 근데 아무것도 없으면 되는데, 하필이면 여기에 빵이 있더라. 빵이 그냥 있더라도 사람들의 눈들이 있으면 되는데, 진짜 아무도 없어요. CCTV빼놓고는.

 

세계에서 제일 맛있는 빵, 단팥빵을 먹었다고 칩시다. 먹었는데, 하필 그 빵 주인이 CCTV를 단 이유가 벌써 몇 달 전부터 단팥빵만 골라먹는 도둑놈이 있어가지고 지금까지 245개나 없어졌기 때문에. 돈으로 치면 하나에 천 원씩 하면 이십사만 오천 원이에요. 그래서 어디 한 번 걸려봐라 하고 CCTV달고 난 뒤에 한 오 분 만에 걸렸어요. 지는 처음 훔쳤는데. 지금까지 없어진 빵 값을 다 물어주게 돼버렸어요. 지금까지 니가 훔쳤다고 해가지고 억울하게 다 물어주게 생겼어요. 실제로 그런 일이 있어요. 그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사적인 일이라 말은 못하지만. 아다리あたり,당첨됐다고 하죠. 이상하게 일이 꼬여서 그런 경우가 굉장히 많이 있거든요.

 

그렇게 했을 때에 성도가 느끼는 것은 뭐냐 하면, 빵을 주께서 주셨다고 보지 않고 자기가 훔쳤다고 보는, 이미 죽어버린 인간이, 죽어버려야 될 이유가, 선악체계가 배고픔을 통해서 바깥으로 다시 한 번 터져 나온 거예요. CCTV보고 이야기하든지, 주인보고 이야기하든지, 배고프니까 빵이 먹고 싶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고, 아무도 없으니까 몰래 먹었다고 생각하면서 양심에 가책을 느낀, 그 가책이 문제가 되는 거예요. 양심의 가책이.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는 말은 내가 안 훔치면 건전한 인간이고, 주께 영광 돌리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데, 훔쳐가지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다 깨지게 했다. 그 책임자가 누구다? 바로 내가 그 책임자로 느끼는 순간, 뭐가 다 날아가요? 그 회로에서 뭐가 누락됐어요? 그렇게 생각하는 그 회로에서 뭐가 빠졌죠?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는 빠져버렸죠.

 

그걸 나중에 와서 성령이 깨우쳐주시니까, 성령 받은 성도는 성령이 반드시 깨우치게 해요. 일련의, 내가 이미 구원받았다고 자처하면서 그리스도를 증거 한다고 하지만, 막상 배고프고 할 때는 배고파서가 문제가 아니라 저걸 훔치면 안 돼! 라는 선악체계, 기제(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심리의 작용이나 원리)라고 하는데, 메커니즘, 선악체계가 여전히 살아서 작동하고 있는 자기 자신이 미워! 자기 자신이 너무나 실망스럽고 너무나 미운 거예요.

 

그러면 십자가를 훼방하는 자는 누굽니까? 본인이 십자가를 훼방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선교를 누가 합니까? 주께서 그렇게 선악체계를 들통 나게 하신 본인을 상대로 해서 주께서 선교를 벌이신 거예요. 이걸 빵 주인한테 그대로 전하는 거예요. “주인님. 제가 당신의 빵을 훔쳤다니 정말 나쁩니다. 25만원이 아니라 250만원 물어줘도 할 말이 없습니다. 정말 나쁜 짓을 했다고 저는 착각했습니다.” 그럼 주인은 “갑자기 이 사람이 무슨 소리하는 거야?”

 

250만원 물어주면서도 제가 나쁜 짓 했다고 착각했습니다. 처음부터 나는, 훔치기 전에, 내 돈 내고 빵 먹어도 나쁜 놈인데, 자기 돈 내고 빵 먹을 때는 착하다고 여기고, 주님한테 영광 돌리고, 주님의 형상을 본받는다고 착각했는데, 막상 배고플 때는 같은 인간인데, 같은 성도인데, 어떤 때는 스스로 착하다고 착각했고, 어떤 경우에는 주님의 영광을 가렸다고 착각했고, 도대체 내가 나에 대해서 그렇게 평가내릴 자격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다시 말해서 내가 나를 뭐 할 자격이 없다? 심판할 자격이 없어요.

 

심판할 자격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왜, 나는 매일같이 나에게 반성문 쓰게 만들고, 나를 스스로 책망하고, 채찍질하고, 나를 혼내고, 니 오늘 나쁜 짓 했지? 성경 두 장 더 읽어! 자꾸 나한테 벌칙을 가하고, 오늘 예배 참석하는데 늦게 왔으니까 천원 더 얹어! 천원 더 얹고, 10분 늦으면 얹은 데다 더 얹고. 왜 자꾸 자기 자신을 곱게 가다듬으려고 하고 정돈시키려고 합니까? 그러면 햇빛이 활짝 웃고 별들이 활짝 웃습니까? 세상이 마치 나를 보고 같이 환호해주고 칭찬해줄 것 같아요?

 

아까 질문 다시 합니다. 사도바울이 예수님 만나기 위해서 어떤 착한 일을 했습니까? 그냥 지 맘대로 살았어요. 지 맘대로. 자기 마음대로 살았어요. 근데 예수님께서는 마음대로 찾아오신 거예요. 그것도 역사 위에 묵시로써 덮친 거예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어요. 이미. 옮기고 보니까 과거에 자기가 예수 믿은 사람 죽인 것도 하나님에게 뭐가 되었다? 하나님의 하나의 준비된 절차요 카페트였어요. 그 코스를 밟아야 돼요.

 

강도는 강도 돼야 되고, 창녀는 창녀 되어야 되고, 소경은 소경 돼야 되고, 귀신 들려야 되면 귀신 들려야 돼요. 12년 동안 귀신 들렸다고 낫게 해주니까 내 청춘을 돌려달라고 나중에 뒤에 와서 주님한테 따지면서, 내 청춘을 돌려다오! 열아홉 살 때부터 서른 한 살 까지 한창 꽃다운 나이에 귀신 들려 가지고, 올해 서른 두 살 되었는데 이제는 결혼하고 싶어도 선 볼 자리도 없고. 애기가 깨서 너무 미안하네. 너무 떠들어서 미안해. 내가 또 잘못을 했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요한일서에 나오는 대목인데요. 그 대목을 한 번 봅시다. 신약 392페이지입니다. 4장 18절, 사랑에는 뭐가 없나니?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은 뭘 내쫓는다?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온전한 사랑이 뭐냐 하면 앞에 나오죠. 우리가 주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화목제물 되셨다는 이게 사랑이죠.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신 이게 사랑이잖아요.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 화목제물 이게 사랑이잖아요. 이 화목제물이 우리 내부까지 들어오게 되면 두려움을 내어 쫓는 거예요.

 

이런 현상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께서 우리에게 더욱더 계속 두려움을 유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 거예요. 왜? 우리로 하여금 사랑을 전파하는 종으로 살게 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어떤 자리에서 구원되었는지를 반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배고파서 빵 훔치게 만들고. 자식이 내 뜻대로 안 되게 해서 자식에게 화를 내고. 부모가 자식에게 화를 낸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두렵다는 거예요. 내 뜻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성적이 안 나올까봐 자식한테 닦달 내는 겁니다.

 

성적이 안 나오게 되면, 내가 자식 잘 키웠다고 소문내고 싶은, 나에게 기대를 거는 친정엄마부터 시작해가지고 가족들이, “니 아들 이번에 몇 등 했나?” 그 물을 것을 미리 대비해야 될 거 아닙니까? “아, 이번에는 한 개 밖에 안 틀려서 학급에서는 1등 안 뺏겼는데, 전교에서는 1등 못 할지 싶다.” 이런 식으로 자랑질 하고 싶은 것을 미리 생각한다면 속이 흐뭇하죠. 그런 애가 한 개 틀린 것이 아니고 한 개만 맞았을 때, 갑자기 두려움이 찾아오잖아요.

 

이런 일이 죽을 때까지 계속 반복돼요. 죽을 때까지. 왜? 그래야 주님만 증거 되기 때문에. 그렇지 않으면 예수 믿는 자기를 자랑질 해요. 나 성령 받았다. 나 그리스도 형상 본받았다. 맨날 지 자랑만 하기 때문에 그거는 물과 피와 성령이 나오는 그런 바닥이 아니잖아요. 뭔가 빠졌어요. 십자가회로가 빠져버렸어요. 이거는 하나님이 원하는 새 언약이 빠져버리니까, 이거는 껍데기만 남으니까, 이거는 천국갈래도 안에 내용물이 없네. 배터리에 불났어요. 스마트폰 갤럭시7이 날아갔어요. 안 돼요. 벌써 갤럭시7이 폭발해버렸어요.

 

반드시 우리 안에 화목제물이 있다면, 화목제물만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뭐로 드러난다? 죄인으로 들추어지는 상황들이 계속해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줄기차게 들이닥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순간, 순간이 뭘 전하는 순간입니까? 시도 때도 없이 복음 전하는 순간이죠. 또 예를 들게 되면 드라마를 봐야 하는데, 아, 이거 또 남편이 야구를 좋아해가지고, LG하고 넥센 하고 준 플레이오프전 한다고, 아까 여섯시 반에 넥센이 1대0으로 이기고 있었는데, 그 뒤에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 죽겠다.

 

근데 금요일 이 저녁에 드라마 뭐 하는지 모르지만, 드라마 하나 하는 것이 있는데 남편이 야구 보겠다고 해가지고, 화가 나니까 당신은 스마트 폰으로 보라고 하면서 리모컨을 뺏었어요. 뺏고 난 뒤에, 이게 복음적으로 정리가 되어야 되거든요. 뭔가 두려웠어요. 뭐가 두려웠어요? 드라마 못 볼까봐, 본방 놓칠까봐 두려웠던 거예요. 본방 놓치면 왜 안 되는데? 본방 놓쳐버리면 친구 만날 때 이야기 할 게 없어지고, 재방은 또 언제할지 모르고. 모든 게 두렵기 때문에 화를 냈거든요.

 

화를 낸다는 것은 뭔가 두려운 것이 있다 이 말이죠.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아하! 드라마를 통해서 나로 하여금 또 다시 화목제물 아니면 구원 못 받는 죄인인 것을 깨우치게 한 거예요. 그게 복음 증거 하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드라마 다 보고 난 뒤에 남편한테 가가지고 “여보! 오늘 당신한테 복음 전했는데 눈치 챘나?” 남편이 하는 말이 “나는 니가 예수 믿는 자 답지 않고 화를 내는 거만 느꼈다.” “그게 바로 복음이야! 당신은 복 받은 줄 알아라. 그게 바로 복음이야. 십자가 앞에 죄인하고 같이 사는 것이 복음이야. 우리 다음에 또 싸우자.”

 

모든 되어 가는 것이 복음 전파하는 것은 누구 소관이냐 하면 주님의 자기 소관이에요. 어떤 것도 인간에게 떼 준 적이 없고 하청 준 적이 없어요. 우리보고 이거는 니가 담당하라는 그런 업무를 준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 혼자 했어요. 모든 것을. 욥은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심지어 끝까지 한 게 없어요. 친구를 위해서 기도한 것도 주께서 다 시켜서 한 거예요. 거기에 거부할 수 없습니다. 뭔가 거부한다는 것은 두렵다는 건데, 인간이 언제 두렵지 않느냐 하면, 십자가 앞에서, 주님의 사랑 앞에서, 화목제물 앞에서 죄를 느낄 때는, 그 순간만 두려움이 없어요.

 

죄인인데 이런들 어떠리 저런들 어떠리 이렇게 되지, 아이구! 이래 되면 장차 뭐가 깨지고 뭐가 손해나고 하는 이런 생각이 든다는 말은 아직도 내가 죄인인 것을 인정 못하겠다는 거거든요. 그렇게 되면 주님께서 우리를 점점 낭패에 이르게 만들죠. 모든 것을 은근히 기대했는데 기대한 족족 다 실패로 끝나게 만들어요. 계속 낭패로, 낭패로 몰아넣어버립니다. ‘아이고만 될 대로 돼버려라!’ 그 말 나올 때까지. 그게 바로 자유라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정리할 단계죠.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모든 것을 맡긴 것은 이미 그 자체가 언약의 완성이라고 했죠. 이 언약이 완성됐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해서 주가 되시면 아버지는 박수치고 계십니다. “아이고, 내 아들 참 잘했다. 참 잘했다. 모든 뜻을 다 이루었으니 너로 하여금 만유의 주가 되게 해줄게.” 하고 아버지가 만든 모든 만유로 예수님을 주로 찬양하게 만듭니다. 그러한 상태가 되면 아버지는 대만족입니다.

 

자, 그렇게 될 경유에, 그러면 제가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은 이겁니다. 마귀의 역할은 뭐냐? 악마의 역할은 뭐냐? 아까 이야기했죠. 이미 서울대 합격했는데 또 학원 다닐 필요 없고, 또 참고서 꺼낼 이유는 없잖아요. 그러면 구원받았으면 성경공부도 하지 말아야지, 왜 자꾸 구원받았다고 해놓고 자꾸 성경을 왜 보느냐 하는 겁니다. 또 어떤 사람이 질문하는 것처럼 이미 예수님이 다 이루었는데, 왜 마귀는 아직도 설칩니까?

 

그게 오늘 디모데후서 4장 한 번 봅시다. 1절에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죠?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그의 나타나실 것과, 이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재림을 하시는 거죠. 재림의 원 뜻은 나타난다는 뜻이에요. 그냥 나타난다는 거예요. 없는 분이 나타난다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원래 여기 계셨던 분이 자기의 본 모습을 드러내는 겁니다.

 

어디 안드로메다에 갔다 오시는 것이 아니고. 북극성에 계시다가 슈퍼맨~해가지고 바지위에다 팬티입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원래 우리와 함께 있었는데, 그게 우리가 육의 몸이 있으니까 안 보였을 뿐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어서 육의 몸을 벗고 그때는 주와 함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지금 주님이 함께 있잖아요. 함께 있으니까 이 세상의 모든 일이 벌어지고, 어제도 버스사고 일어나고, 경주에 지진 일어나고, 다 주께서 일으킨 사건들이에요. 주께서 함께 하신 거예요. 이제 본색을 나타내는 그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마귀는 왜 있고, 그리고 우리한테는 마귀의 있음이 무슨 의미가 되느냐,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더 깊은 죄의 자리까지 내려가야 해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어디까지 내려갔습니까? 그냥 잔소리만 하고 올라갔습니까? 어디까지 내려갔어요? 십자가에 죽기까지 내려갔죠. 이 자리가 뭐냐, 너희는 이 마음을 품으라(빌2:5). 곧 무슨 마음?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예수의 마음이 어디에서 다 완성됩니까? 십자가에 죽으실 때 예수의 마음이 다 드러났잖아요.

 

성령께서 이 자리를 가지고, 십자가의 자리를 가지고 우리에게 그대로 덮쳐버리면 우리는 죄의 극단까지, 죄의 마지막까지 경험을 해야 하는데, 여기에 충실한 하인이 있어요. 열심히 일해야 할 일꾼이, 보조 조교가 있습니다. 조교가 누구냐 하면 욥에게 찾아왔던 사탄입니다. 사탄이에요. 얼마나 이 유격조교가 일을 잘하는지, 욥에게 찾아와서 뭘 뺏어갔습니까? 자식 열 명 다 뺏어갔죠. 또 그 많던 재산이 다 날아갔습니다.

 

욥의 대응도 만만치 않습니다.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신 자도 하나님이요.” 사탄이 가져갔는데? 아니에요. 사탄은 하나님이 지시해서 허락한 대로만 움직이지, 지 마음대로 못 움직여요. 사탄은 피조물이에요. 골로새서 1장에 보면 사탄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만들어져야 해요. 악마가.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만들어져야 하기 때문에.

 

자, 강의를 한 번 정리해봅시다. 그러면 내가 이렇게 들어보니까 결국 목사님 주장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예수님이 이미 깔아놓은 계획대로 착착 진행된다 그 말이에요? 라고 여러분에게 들려올 거예요. 그 말은 맞는데, 제가 강조한 것이 있잖아요. 언약을 위해서. 아버지와 아들이 맺은 언약을 위해서 그랬다고 했어요. 그러면 그 말은 제가 이해하겠는데, 그 말 이해했다고 해서 내가 달라질 것이 뭐가 있습니까? 라고 묻게 되면, 사랑을 알게 되면 뭐가 없나니? 두려움이 없다 했죠. 근데 두려움이 언제 없어진다고 했습니까? 내가 죄인인 것을 알 때죠.

 

어느 정도 낮아질 때까지? 십자가 앞에서 “참, 나는 인간도 아니네요.” 라고 느껴질 때, 십자가가 드러나기 위해서 죄인 되는 관계에 있었을 때에, 우리는 내가 죄인 되는 것이 절대 두렵지 않고 오히려 기쁨이 와요. 우리가 왜 두렵냐 하면 죄인 안 되려고 하기 때문에 두려운 거예요. 기어이 마지막 착함을 손에 쥐려고 하니까 두려운 거예요. 이것 빼앗기면 안 된다는 거예요. 이것 빼앗기면. 내가 가진 힘보다 가질 수 없는 힘이 더 세요. 하나님의 성령의 힘이 더 세다니까요.

 

지금 9개월 된 애기라면 돌아다니면서 온갖 것 다 뜯어먹을 거예요. 이런 것이 먹는지 못 먹는지도 모르면서. 그때마다 엄마가 따라다니면서 손에서 다 떼어내잖아요. 사랑 앞에서 우리가 죄인이 되어야 두렵지 않는데 우리는 왜 두려우냐 하면, 십자가와 결별해버리고, 십자가가 참 고마운데, 이제는 혼자 살겠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마귀가 그런 쪽으로 우리에게 작용을 하는데 얼마나 마귀가 고마운지, 고맙다고 하면 좀 이상한데, 마귀의 자기 성질이 있잖아요. 자기 성질. 자기 성질을 고스란히 우리한테 줘요.

 

그게 뭐냐 하면 지고는 못산다는 거예요. 지고는 못산다. 정말 지고나버리면 자살해버려요. 복수하듯이. “이래도 내가 돈 해먹었나? 나는 이렇게 결백하다.” 결백을 증명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북한산에 올라가가지고 나무에 매달아 죽는 거예요. “나는 결백하다. 세상 더러워서 못살겠다. 나 빼놓고.” 그러고 자살해요. 나 빼놓고 더러워서 못살겠다는 거예요.

 

만약에 우리가 십자가 앞에서 진짜 죄인인 것을 안다면, “죽겠습니다.” 하지 않고 “고맙습니다.” 해요. “그동안 살려주셔서 고맙습니다. 계속 살려주신다면 고맙게 계속 살겠습니다.” 이래 나오죠. 죽겠다고 나오는 것은 속이 뒤집어져서, 더 이상 화딱지 나서 못살겠다고 죽는 거예요. 그게 뭐냐, “왜 이렇게 깨끗한 나를 괴롭히십니까? 신이면 다에요? 예수님이면 다가? 왜 행정처리를 잘못해가지고 저 나쁜 놈은 잘되고 나는 벌 받고, 이런 불합리와 부주의를 눈뜨고는 더 이상 못 보겠다. 에이! 죽을란다.” 그래서 죽은 사람이 있었으니 그 이름이 유명한 가룟 유다에요. 가룟 유다한테 사탄이 들어갔다니까요.

 

그러니까 사탄은 뭐냐 하면 속에서 배알(성미나 자존심)이 꼬이거든 자살해버리라고 부추기고 있어요. 너의 가치를 흠집 냈거든 하나님 앞에 보란 듯이 죽어버려라. 번개탄 피워놓고 죽어버려라. 앞으로 번개탄 값 팍팍 오를 거예요. 아마 물어보고 팔 겁니다. 그냥은 판매 못하게 만들 거예요. 하도 번개탄을 피워대싸서. 혼자 죽지 또 계 모아서 죽고. 사탄이 도와줘서 우리를 십자가로 데려가는데 항상 십자가는 사후적으로, 일이 끝나고 난 뒤에 소급해서 알게 되는 거예요. 미리 아는 십자가는 이거는 이론이지 실제가 아닙니다.

 

정말 우리가 마귀노릇을 해가지고, 실컷 우리가 잘난 체 하다가 그게 깨졌을 때에 오는 그 죄인 됨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 사탄이 노리는 성질이 뭐냐, 이겁니다. 우위성. 오늘 제목입니다. 참 어렵죠. 너무 어려우면 바꿉시다. 우월성. 남한테 지고는 못산다. 내가 니보다 낫다는 것. 이게 자기 의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자기 의. 순서 세우고 계급정하고 석차정하는 겁니다. 누구하고 상대하느냐 하면 우선 나하고 석차를 매기죠.

 

어제보다 보다 더 나은 오늘. 오늘보다 보다 더 나은 내일. 이게 어떤 사는 보람처럼 느낍니다. 날마다 십자가로 떨어져야 되는데, 날마다 십자가에게서 멀어지기를 소원하고 있어요. 십자가? 에이, 십자가 알지. 알고 이제 남은 것은 성화하는 것만 남아있어서 이제는 보다 더 착하게 살아가지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고, 전에는 어두움에 있었으나 이제는 빛의 자녀라. 빛의 자녀답게 살라는 그 말씀에 순종해가지고 멋들어지게 한 번 살아보겠다는 겁니다. 뭐예요? 결국은? 결국은 누구 자랑한다? 자기자랑.

 

자기자랑하면 무엇이 생길까요? 사랑에는 무엇이 없다고 했는데, 갑자기 자기관리에 나서게 되면 뭐가 생길까요? 그때부터 마귀가 사방에서 끌어 모은 불뱀들이 와가지고 물어뜯습니다. “니가 이렇게 하게 되면 전보다 성적이 떨어지는데 안 되겠지? 더 열심히 해야지. 더 충성해야지. 더 헌신해야지. 더 완벽해야지.” 사람이 바짝바짝 마르거나 아니면 터지듯이 살이 찌거나. 바짝 마르거나 살이 찌거나. 스트레스 받아가지고 폭식하거나 안 그러면 거식증에 걸리거나.

 

“요새 니 무슨 고민 있나?” “고민은 무슨 고민?” “고민 있는 것 같은데?” 자기가 표현을 못해요. 자기가 왠지 불안하고 두렵고 무섭다는 것을. 뭔가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이유 없이 무섭고 두렵고 떨리니까. “요새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얼굴이 화끈거리고, 갱년기인가? 갑상선 암 조사해볼까? 갑상선인지?” 갑상선이 아닙니다. 마귀성입니다. 십자가에 가기 싫어하는 그 증상. 보다 높아지려는, 남보다 위에서려고 하는.

 

이 시험거리에 가장 잘 걸리는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목사들이에요. 지가 가르치는 교인보다 지가 질적으로 낫다고 여기는 겁니다. 지가 나아줘야 말이 먹혀들고 권위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자기는 죄 안 짓고 교인들은 죄만 짓는 인간으로 보겠다는 거예요. 날마다 가르치는 자나 배우는 자나 십자가 앞에서 똑같은 존재라는 것.

 

산 자나 죽은 자나 주 앞에서 그리스도만 주가 되면 되지, 단독적으로 내가 더 낫다, 더 못하다는 것은, 그것은 마귀 짓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마귀 짓이라고 깨닫는다고 지옥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성도에요. 내가 또 마귀한테 말려들어가지고, 나는 니보다 낫다는, 그것이 내 안에 차오르는 두려움을 어떻게 해소해볼까? 하는 해소책으로 비겁한 변명들을 늘어놓는, 그런 식으로 평생을 신앙생활을 한답시고 하고 있는 거예요.

 

주께서 일어나게 하시는 모든 일은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 앞에 죄인 만드는 작업이기 때문에, 그래서 “주여 이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라고 감사하시면 여러분! 성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헛짓 많이 하고 헛수고 많이 했습니다. 십자가를 누락시키면서 스스로 높아지려고 했던, 마귀에게 놀아났던 이 장난질을 이제는 십자가 앞에서 안 해도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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