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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10 00:37:26 조회 : 1116         
세상 사랑 161209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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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IP:122.♡.188.127) 16-12-18 20:31 
서울 의존교회 161209a (세상사랑)-이 근호 목사

 

자, 시작하겠습니다. 성경은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 다 아시죠? 설교할 때, 누구한테 증거 할 때 모든 성경구절이 예수님의 복음에 대해서 언급하는 겁니다. 복음은 고린도전서 1장, 또는 2장에 나와 있는 말씀처럼, 1장에서는 복음이 사람들에게 미련하고 어리석게 보일 것이라고 말씀하죠. 그럼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이는 것이 복음이라면, 그리고 성경 전체가 복음에 집중되어 있다면, 성경은 사람보고 믿으라고 준 것이 아니고, 너희들은 믿지 못할 존재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 성경을 준 겁니다.

 

믿고 천국가라고 준 것이 아니고, 천국에 막혀있는 존재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성경을 준 거죠. 성경을 보면서 일단은 ‘아, 이래서 우리가 천국에 갈 수 없구나!’ 라는 것을 분명히 하신다면, 그 사람은 그 사람이 알아서 가는 것이 아니고 자기 주제파악을 하게 하신 그 하나님의 일이 그 사람에게 도달된 거예요. 그렇게 도달이 되었으면, 그 사람은 본인의 기대나 의사에 의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자기에게 도달한 복음의 능력으로 가게 됩니다.

 

주님이 손을 내민다고 해서 인간이 손을 덥석 잡을 수는 없어요. 오히려 잡는 것이 아니고 뿌리치게 되어 있습니다. 뿌리치게 되어 있는데 끝까지 주님께서는 손을 잡죠. 그 손이 어떤 손이 되느냐 하면 피 묻은 손이 되는 겁니다. 피 묻은 손이 도달하게 되면 인간은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예수님의 피를 흘리게 하는 요인이 되었고, 원인제공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죠. 그럼 그때부터는 어떻게 내가 하는 행동들이 내가 보기에는 굉장히 점잖고 예의바르고 교양 있는 행동인데 그게 어떻게 예수님의 피 묻은 행동일 수밖에 없는가?

 

이미 관계가 설정되어 있죠. 예수님의 피로써 나타나고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 미련하고 어리석게 보이고, 그리고 피 묻은 손이 능력이니까 우리가 저항할 수 없습니다. 그냥 찾아옵니다. 찾아오게 되면 내가 하는 모든 것은 예수님의 피를 흘리게 된 그런 근거로써 작용하게 되죠. 이 관계가 이미 연결이 되었습니다. 형성이 되었어요. 그 형성된 그 안에다가 모든 성경을 다 집어넣어야 해요. 그래야 오직 복음으로만 구원이 되는 것이 윤곽이 드러날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었다, 근데 피 묻은 손이다, 우리가 여기 있다, 예수님의 피 묻은 손으로 우리에게 오게 된 이것만이 십자가 복음이거든요.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들에게는 어리석고 미련하다고 되어 있잖아요. 그래서 인간이 자진해서 미련하고 어리석게 행동할 인간은 없죠. 나는 뭘 해도 미련하고 어리석기를 원해서 행동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리석지 않기를 원하죠. 어리석지 않기를 원하기 때문에 우리 인간 쪽에서 예수님 쪽으로 가는 길은 없는 겁니다.

 

이미 예수님이 피를 흘렸다는 말은, 그 피의 내용이 우리한테 도달될 때는 어리석고 미련하게 도달되는 거예요. 미련하고 어리석게 도달되면 우리는 주님 쪽을 보는 것이 아니고 딴 곳을 쳐다보고 있다는 말이죠. 딴 곳을 쳐다보고 있으니까, 이러한 모든 마음과 행위가 피를 흘리게 했다면, 그리고 이 관계가 유일하게 구원이 되는 길이기 때문에, 그때부터 인간들이 알고 있는 모든 성경내용은 전부 다 어떤 경로를 하든지 간에 예수님의 피로써만 구원하는 것에다가 다 투입하고 투입해야 됩니다. 모든 성경을 예수님의 피에다 다 집어넣어야 해요.

 

그러면 모든 것을 다 집어넣는다는 말은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비춰볼 때에, 어리석음의 반대말은 똑똑함이죠. 현명함. 다른 말로 하면 경건함, 착함, 순수함, 우수함, 뭐 이런 것들이에요. 그리고 보니까 오늘 애가 없네. 뭔가 다르다 싶었는데. 이런 관점에서 자기를 똑똑하게 만들고, 현명하게 만들고, 경건하게 만들고, 착하게 만들고, 순수하게 만들고, 우수하게 만들고, 위대하게 만들고, 값어치 있게 만드는 이런 모든 것들로 성경이 여기에 쏠리도록 되어 있어요. 성경을 인간에게 보게 함으로 말미암아 이 자체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 배격하고 반발하고 반항하는 그런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성경을 준 겁니다.

 

따라서 성경은 인간으로 하여금 구원받지 못하게 하는 책이죠. 구원받지 못하게 하는. 이젠 성경이 구원받지 못하게 하는 책이라는 것을 이해하시겠죠? 왜냐하면 성경을 보는 눈이 두 개의 눈이 있어요. 하나는 인간이 보는 눈, 또 하나는 예수님이 보는 눈. 인간이 보는 눈으로 성경을 보는 것은 구원받지 못하게 하고, 그것을 자꾸 확대시키고 그걸 드러냄으로 말미암아 구원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의 피의 능력으로만 구원된다는 것을, 그런 식으로 증명하고 확인해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은 이렇게 보게 되면 굉장히 단순화되고 간편하고 간단해요. 어떻게 간단하느냐 하면, 자기가 성경을 보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전혀 구원에 보탬이 되지 않고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성경해석을 해나가시면 되는 겁니다. 참 쉽죠? 굉장히 편하죠? 이미 이런 것을 성경을 통해서 알게 되면 구호가 이렇게 돼야 돼요. 보다 어리석게! 보다 미련하게! 표어를 그렇게 해야 돼요. 보다 어리석게! 보다 미련하게! 더 위대하게가 아니라 보다 미련하게! 그렇게 하는 거예요. 평생을 어리석고 미련하게 사는 즐거움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어리석고 미련하게 산다는 것은, 이거는 행복이 안 올래야 안 올 수가 없어요. 어리석고 미련하게. 우리가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는 것은 남보다 더 똑똑하게 보이려는 쓸데없는 오기 때문에 그런 일이 생기잖아요. “니는 똑똑해라. 나는 어리석을란다. 니는 현명해라. 나는 바보처럼 살 거야.” 그런 식으로 사는데, 그냥 바보처럼 사는 사람도 있죠. 노래에도 있지만. 그런 사람들은 기준이 없고. 우리는 느긋한 마음으로 바보가 되고, 우리는 느긋한 마음으로 영구 없다~는 식으로 지혜롭지 못하게 살아가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들어가게 되면, 거기서부터 우리가 본문을 가지고 계속해서 질문을 해대면 되죠. 질문을 하게 되면, 이게 질문 자체도 어리석고 나오는 답변도 어리석은 답변이 계속 나오는 겁니다. 그러한 편안감과 안정감과 즐거움이 성경에서 우리에게 제공됩니다. 첫 번째 질문이 뭐냐 하면 오늘 본문에 디모데후서 4장 9절,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10절,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사도바울을 버릴 위인을 왜 처음부터 마치 복음을 전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하나님께서 붙여줬느냐 하는 거죠. 근데 이 질문이 어떤 질문이죠? 어리석은 질문이죠. 근데 우리의 질문은 어리석은 것 밖에 나올 것이 없어요. 아니 처음부터 천국 못 갈 사람을 왜 붙여줬느냐 이 말입니다. 헷갈리게. 마음 쓰게 만들었느냐 이 말입니다.

 

데마라는 사람은 통역자에요. 오늘 본문에는 데마라는 사람이 사도바울을 떠났다고 되어 있지만 골로새서 4장 14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사도바울은 누가 의사와 데마가 내편에 속했다고 하는 거예요. 지금 사도바울이 우리라고 하는 그 우리 속에 누가도 들어있고 데마도 들어있는데, 이렇게 우리가 골로새서 너희들에게 안부를 전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잘 있느냐고, 이렇게 위로와 격려를 한다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사도바울을 볼 때 사도바울만 보지 말고 데마와 누가도 사도바울과 함께 복음을 아는 사람으로 그렇게 이해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하는 이야기를 골로새서 4장 14절에, 하나님의 계시 책에서, 성령이 임한 계시 책에서 나와요. 그럼 이 당시에는, 골로새서가 언제 썼냐 하면 로마에서 옥에 갇혔을 때거든요. 옥에 두 번 갇혔습니다. 처음에 옥에 갇혔을 때 썼다 이 말이죠. 그걸 옥중서신이라고 하죠.

 

그렇게 했으면 누가 들어도 이 데마는 사도바울을 배신하지 않을 사람이고, 사도바울과 끝까지 가서 천국에 합류할 사람이고, 동역자고, 통역하는 사람이고, 이 사람이 데살로니가 사람이거든요. 사도바울의 사역을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도와주는 사람이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디모데후서 4장 10절에 보게 되면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떠났다 했죠. 왜 떠났냐 이 말입니다. 떠날 필요가 없는데 왜 떠났느냐 이 말입니다. 나중에 떠날 사람 같으면 처음부터 함께 안 해서, 헷갈리지 않도록, 혼동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저 사람은 아무래도 우리 편이야.” 이렇게 안심 푹 시켜놓고 왜 뒤통수치느냐 이 말입니다.

 

이 질문 자체가 무슨 질문이라고요? 어리석은 질문이죠. 어리석은 질문이지만 어리석은 질문을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는 어리석다고 생각하기 전에 우리는 똑똑하다고 생각하고, 그 똑똑함 속에 뭐가 있느냐 하면 구원 받을 사람은, 복음 전하는 사람은 사도바울과 함께 있어서 이제는 두 번 다시 세상으로 가는 일이 없을 것이다. 왜? 사도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워낙 위력이 있고, 하나님 말씀 그대로이기 때문에, 사도바울과 함께 협력했는데 나중에 세상을 사랑해서 사도바울을 배신 때리고 세상으로 나갈 일은 없을 것이다. 이런 생각에서 우리는 데마가 사도바울을 떠난 것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이렇게 질문을 할 수 있는 겁니다.

 

“하나님 왜 처음부터 붙여 줘가지고, 이 골로새서 4장 14절 같은 경우에는 문안하라고 해가지고 누가 뭐래도 데마는 하나님과 함께 있는 사람이라고 골로새서 온 교인들로 오해하게 하는 그런 혼선을 일으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라고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에게 물을 수 있죠. 근데 그 질문이 무슨 질문이라고요? 어리석은 질문이죠. 어리석든 말든 간에 그 질문밖에 할 게 없어요. 왜, 그 질문밖에 할 게 없느냐 하면, 우리가 복음 안지 10년 되었다고 하면 내년에 세상을 사랑해서 떠날 수도 있잖아요? 왜? 데마도 이랬으니까. 우리는 그냥 복음 전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냥 설교 듣는 사람이지만, 데마는 사도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파했던 사람이에요.

 

전파하는 사람이 이렇게 천국에 이르지 못하고 도중하차한다면, 그러면 사도바울 본인은 천국이야기 했는데, 본인은 천국 갔느냐 이 말입니다. 이런 문제가 생기잖아요. 디모데후서 4장 18절에 보면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 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사도바울 본인은 천국에 들어가도록 하신다는 겁니다. 그럼 이러한 발언을 데마도 평소에 했을 것인데, 데마는 왜 탈락했느냐?

 

다시 한 번 어리석은 질문이지만 요약하게 되면, “목사님, 어떤 경우에 탈락합니까?” 결국은 이 이야기에요. “어떤 경우에 복음을 알고도 탈락할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이거든요. 그럼 그 질문을 왜 하십니까? 행여 나도 그렇게 되면 안 되잖아요. 그럼 제가 묻죠. “왜 그렇게 되면 안 되는데요?” “내가 곤란하잖아요.” 본인이 곤란한 것과 성경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본인이 왜 안 곤란해야 되죠? 본인은? 본인은 왜 안 곤란해야 돼요? 본인은 왜 탈락해서는 안 되는 존재입니까? 그 질문을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내리고 그 답변을 제시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제시할 수 없죠. 탈락입니다. 탈락이죠.

 

왜 그러냐 하면 복음을 이야기하면서 복음을 하나의 정보로 아는 거예요. 세상의 여러 가지 정보 중에서, 아니 이것도 천국 가는데 도움이 되네! 하고 십자가 복음을 가지고 내 것 만들어놓는 거예요. 내 것 만들어놓고 그 다음에 뭐냐, 내가 만든 내 것에서 떠나지 않기 위해서 결속을 더하는 겁니다. 나는 복음을 안다, 나는 복음을 안다, 맨날 애들이 시험 칠 때, 시험 직전에 막 외우는 것처럼. 훈민정음 누가 만들었고 하면서 외우는 것처럼. 나는 복음을 안다, 십자가복음이다, 이러다 치매 걸리면? 그러면 탈락해버려요? 어떻게 돼요?

 

복음이 전에는 내 것이 아니었는데, 이제 복음을 알아서 내 것 만들어버리면, 내 소유 만들어버리면, 내가 소유한 복음이 나를 구원할 것이라는 그 아이디어, 탈락입니다. 그게 바로 탈락이에요. 그렇게 해서 천국 간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어떤 정보를 알 때, 성경에 나오는 정보를 획득해서, 괜찮다는 것은 다 주섬주섬 모아서 끌어안고 있으면, 이게 구원이라는 것이 될까? 그게 가당치 않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뭘 해야 하느냐, 복음은 인간들이 선호하고 나한테 유익하라고, 나한테 도움 되라고 끌어 모으는 그런 식이 바로 주님께서는 복음과 전혀 무관하다는 것을 아주 일깨워 줍니다. 예수님의 열두제자가 그런 사람들이에요. 열두제자가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이유 때문에 구원이 되리라고 생각했죠. 그리고 예수님께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요한복음 13장 1절에서 내가 너희를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한다 했습니다. 끝까지 사랑한다고 할 때에 열두제자들은 주께서 끝까지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탈락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들을 했죠. 근데 그 생각이 자기 구원에 아무런 연관이 안 돼요. 관련이 없는 생각이에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피를 흘렸잖아요. 예수님의 피 묻은 손이니까, 예수님께서 피를 흘렸잖아요. 그러면 여기에 열두제자가 있다고 합시다. 열두제자나 사람들이 있다고 칩시다. 이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신 말을, 멘트거든요. 문장 또는 언어가 나왔을 때, 이 사람들은 여기에 마중을 나왔어요. 그 단어가 인간들의 단어기 때문에. 마중을 나가면 이미 여기에 공용되고, 소통되는 무슨 의미군意味群이 있어요. 그룹. 형성된 의미의 그룹이, 의미의 장場, 의미의 필드field가 형성돼요. 그러면 예수님의 그 의미를 인간들끼리 통용되는 의미를 가지고 마중을 나온다고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끝까지 사랑한다고 했으니까, 사랑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피에서 나오는데, 예수님의 희생, 피에서 사랑이라는 멘트를 날렸는데, 이 중에는 뭐가 없느냐 하면 예수님이 피 흘릴 정도로 우리는 죄인이라는 의식이 이 의미군, 언어의 단어 내용에 이게 전혀 들어있지를 않아요. 이쪽, 인간 쪽에 없는 의미를 주께서는 단어를 사용한 거예요. 근데 같은 단어니까 인간들은 납득이 되고 이해된다고 생각해서 인간들끼리 통용되는 의미를 가지고 이걸 덥석 물은 거예요.

 

주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는다? 주님은 인간을 버립니다. 인간을 버리지 아니하면, 이게 구원이라는 것이 성사가 되지를 않아요. 왜냐하면 구원은 반드시 모든 것을 다 축출하고 딱 한명만 남아야 돼요. 한명만 구원이 돼야 돼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주님은 인간의 숫자가 아무리 많더라도 그 인간의 숫자를 단 한 명의 본질로서 다루거든요. 모든 인간이 많더라도 그게 누구의 후손입니까? 아담의 후손이라 말이죠. 아담 한 사람이 담고 있던 그 질, 성질을 가지고 모든 인간에게 전부 다 골고루 차별 없이 분배를 했기 때문에, 그렇게 차별 없이 분배하는 그 안목은 오직 한 사람의 안목에서만 이게 출발을 해야 돼요.

 

그런데 아담과 예수님 사이에는 이미 단절되어 있단 말이죠. 하나는 죄고 하나는 의니까. 이미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끊어졌잖아요. 그런 입장에서는 인간세계에서 아무리 머리를 맞대고 해도 거기에서는 진리가 안 나옵니다. 진리가 나올 수 없어요. 나올 수 없고 나름대로의 진리라는 것을 형성시킨 겁니다. 나름대로의 진리를. 그걸 가지고 일자라고 합니다. 하나밖에 없는 一者. 모든 의미를 하나로 궁극적으로 모으는 것. 신이죠. 일자一者. 이게 인간들이 갖고 있는 모든 종류를 가지고 개념들을 모으고 또 모으고, 추리고 또 추려서 제일 끝에 보면 모든 일어나는 존재와 사건과 사항을 하나의 머리에 담아놓고 거기서부터 쏟아져 나옵니다. 인간들은.

 

그렇게 쏟아지는 관계 속에서 인간들이, 나는 신을 버려도 신에 의해서 버림받아 마땅한 합당한 이유를 인간들 본인이 가질 수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죠. 왜? 일자와 자기는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구상하고, 구상하고, 구상하고, 마지막은 논리적으로 신이 나온다면, 신과 나는 연결된 상태에요. 끊어진 상태가 아니라 연결된 상태라고요. 다만 내가 무식해서, 공부를 못해서, 성경을 제대로 몰라서, 신을 못 찾아갈 뿐이지, 내가 이 땅 밑에서 저 위에 있는 하나님께 차근차근히 밟으면 내가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거는 누굴 탓하지 마세요. 모든 아담의 족속은 다 그래요.

 

그 찾아가는 단계는 선악적인 요소를 집어넣어서 다가가는 거예요. 단테의 신곡이라든지, 그리고 천로역정 같은 그런 것들이 대표적인 소설 아닙니까? 밑바닥에서부터 노력하고 역경을 딛고 어떤 유혹도 이겨버리면 결국은 신과 하나로 만날 수 있다는 것. 천로역정의 이야기나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이야기나 모든 것은 오늘날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충분히 동의합니다. ‘아, 참, 지혜롭다. 똑똑하다. 현명하네.’ 아까 강의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벌써 다 잊어버렸죠? 복음은 지혜롭고 현명한 것이 없어요. 이리보고 저리보아도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이죠.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납득이 안 된다는 것은, 이미 고유의 우리끼리 납득이 되고, 수용이 되는 논리구조가, 논리단계가 이미 딱 형성되어 있고 우리는 거기서 못 빠져나옵니다.

 

따라서 못 빠져나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열두제자를 채택한 거예요. 열두제자가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뭐 병도 고치고, 예수님 능력으로 귀신도 쫓아내고 말씀도 듣고 3년 동안 합숙훈련도 했다고 하잖아요. 합숙훈련 하면서 온갖 기적은 다 구경 했어요. 오병이어부터 물 위를 걷는 것, 심지어 베드로는 본인이 물 위를 걷기도 하고, 물고기 아가리 벌리니까 거기에서 동전 나오고, 귀신 쫓아내는 것은 기본이고, 여러 가지 일들을 했을 때, 철석같이 이만한 분 같으면 우리가 기대했던 그 일자一者, 최후의 구세주, 하나님과 함께 있다고 나름대로 그렇게 의미를 형성시켜왔습니다. 자기가 탈락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죠. 탈락 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피를 믿는다는 것은 반드시 먼저 선행되는 과정이 필요해요. 탈락자 속으로 우리가 되돌아가줘야 돼요. 거기서 벗어나서 주님을 만나기 백 미터 전, 백 미터 전 하니까 뭐가 생각나네요. 200미터 앞, 100미터 앞, 50미터 앞...이렇게 가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본 자리를 되돌려주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의 사랑이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바로 사랑을 마중 나오라는 말이 아니고, 너의 원래 자리로 가 있으라는 뜻이에요. 원래 자리. 너밖에 모르는, 나만 구원받으면 오케이 하는 그런 사고방식. 나를 위한 신. 나를 위한 하나님. 그 자리로 되돌아가라는 겁니다. 이게.

 

그래서 되돌아간 자리가 어디입니까? 오늘 본문 4장 14절,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갔잖아요? 이게 정상이잖아요? 아까 우리가 질문 할 때는 왜 데마는 버렸습니까? 라고 물은 취지가 잘못된 거예요. 데마가 세상 따라 갔잖아요. 우리하고 똑같잖아요. 뭐 이상합니까? 어느 게 정상이냐를 잘 봐요. 어느 게 정상인지를. 지금 사도바울 버리고 세상으로 가는 것이 정상이에요. 어느 게 비정상입니까? 어느 게 인간세계에서 있을 수 없는 일입니까? 바로 사도바울이잖아요. 주께서 나를 천국에 넣어준다. 이게 비정상이에요. 이게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거예요.

 

우리는 현명하고 똑똑한 사람들의 무리입니다. 만약에 이 세상이 저주스러운 세상이 아니고, 우리가 살만한 세상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이것이 서로 통용되고 이게 정상적인 생각이라면, 이 좋은 세상을 버리고, 얼마나 좋은 세상입니까? 이제는 대통령도 바뀌고 얼마나 좋은 세상이에요? 우리 뜻대로 주님 뜻대로 됐으니까. 이 좋은 세상을 버리고, ‘더러운 세상! 나는 천국이나 갈란다’ 이게 비정상이잖아요. 박근혜가 만약에 하야 안 하고, 만약에 김정은이가 쳐들어와서 공산주의가 된다면, 그때는 ‘에이, 더러운 세상! 주여 저는 어서 천국 갈랍니다.’ 그때는 그러죠. 그게 비정상인 거예요. 뭐냐 하면 이 세상이 고생스럽고 지 뜻대로 안 됐다는 것에 삐져가지고, ‘에이!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없네. 그러면 죽는 것이 낫지.’ 그런다고, 뭐 천국이 지 속 편하라고 가는 곳입니까? 속 편한 내과에요? 속 편하자고 가는 천국입니까?

 

천국은 못 가요. 갈 수가 없어요. 갈 수가 없는데, 어떻게 좀 해보다가 안 되면 천국이나 간다고 해요. 해보다가. 재미있게 살다가 재미없으면 그때는 천국 가야지. 뭐 누구한테 맡겨 놓았어요? 천국을? 누가 보내준대요? 성경을 똑바로 보라는 겁니다. 데마가 세상을 사랑했으면, 이 데마의 심성이 여전히 우리 안에 작동하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래야 돼요. “아이고, 데마 정신 차렸네. 데마 인간 됐네. 이제 똑바로 지 정신 돌아왔네.”라고.

 

사도바울의 말이 전부 다 헛된 말이고, 참 이상한 말이에요. 예수님 당시에 열두제자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을 어떻게 들었습니까? 마귀 들렸다고 했어요. 마귀. 예수님이 귀신 쫓아내는 것, 병 고치는 것은 마귀대장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지, 예수님은 정상이 아니에요. 율법을 모르는 자고, 율법을 위반한 자고, 요한복음에 다 나오는 이야기 아닙니까? 모세의 법을 다 거슬리는 자에요. 모세의 법이 있는데 지가 뭐라고 모세보다 더 세게 나오는 거예요. “모세는 이혼증서를 쓰면 된다고 하지만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니가 뭔데 말해? 니가 뭔데?” 사람들에게 체포되어가지고 맥없이 죽을 인간이 지가 무슨 권세로 그런 이야기를 해요? 그럴 수 없거든요.

 

열두제자가 예수님을 떠나는 것은 그건 당연한 겁니다. 열두제자가 정상인이에요. 그 중에 미친 사람은 가룟 유다밖에 없고. 그것도 가룟 유다가 얼마나 양심적인지, 스승의 날 스승 버렸다고 자살하는 그런 착한 제자가 어디에 있어요? 학원 다니면서 선생님이 비밀과외 하는 것을 교육청에 찔러가지고, 선생님이 잡혀가는 것을 보고 회개하고, 받은 보상금 학원 유리창에 던지고 지는 자살하고, 그런 착한 제자가 어디에 있어요? 그야말로 의리 아닙니까? 의리.

 

다시 말씀드리면 성경은 아무도 구원 될 사람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책이 성경입니다. 성경을 그렇게 보도록 주께서 허락을 해주셨어요. 그렇게 해놓고 성경을 보는 다른 눈이 있다는 겁니다. 그거는 예수님이 이 성경을 보는 거예요. 예수님이 성경을 보게 되면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피해서 주님께서 우리를 건지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성령을 받게 되면, 성령을 받은 입장에서 내가 성경을 정상적인 안목으로 보는 것과 해석이 같을까요? 다를까요? 하는 족족이 해석이 달라요.

 

우리의 출발점은 내가 내 구원에 대해서 어떤 기여를 하고 어떤 모션motion을 하고 어떤 행위를 하면 얻을 것인가를 잔뜩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설교자가 1대지, 2대지(말이나 글에서 대강의 내용이나 뜻)해가면서, 무슨 돼지가 그렇게 많은지, 멧돼지가 나오는지, 그렇게 해가지고 “이렇게 하시면 구원됩니다. 이렇게 하시면 복 받습니다. 이렇게 하시면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이렇게 하시면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습니다. 이렇게 하시면 빛과 소금이 됩니다.” 라는 요소를 마구 줘요. 그러면 우리는 납득이 돼요. 그게. “우와! 성경 말씀 그대로 전하네. 역시 우리 목사님은 성경 그대로 하시는 분이야.” 성경대로 하면 우리는 이해를 하지 못하게 되어 있어요. 성경대로 하는데 이해된다는 말은 목사나 그 신자나 전부 다 한통속이에요. 한통속이에요.

 

하나의 예를 들게요.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자, 백 명의 목사가 설교한다면, “여러분! 데마는 세상을 사랑해서 자기 고향 데살로니가로 갔고 사도를 버렸습니다. 여러분! 성경말씀을 왜 줬겠습니까? 적어도 성령 받은 우리는 절대로 세상으로 돌아가지 맙시다.” 근데 촛불집회는 왜 참석해요? 뭐가 미련이 있어서. ‘그래, 예수 믿고 새사람 되었으니까 절대로 세상으로 돌아가지 말아야지.’ 도대체 뭐예요? 그게 바로 마귀의 설교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데마가 사도바울을 따라다녔죠. 통역 일을 했죠. 데마는 세상에 있었습니다. 세상에 간 게 아니고 한 번도 세상을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고무줄이 있어가지고 아무리 천국 문 앞에 갔어도 팅하고 다시 오게 되어 있어요. 성령세례 받은 사람은 어떤 경우도 세상을 떠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본인이 성령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관리는, 성령의 지시는 누가 하느냐, 십자가의 능력에서 나오는 거예요.

 

성령 받고 난 뒤에 떠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데마는 끝까지 하나님의 계시의 노릇을 하기 위해서 사도바울과 함께 합류하고 있었습니다. 성령은 분류라고 해요. 떠날 사람은 떠나고 건질 사람은 건지는. 사도바울 가장 근처에서, 근접해서 분명하게 보여 준 사람이 데마입니다. 데마한테 박수 한 번 쳐야 해요. 자기 역할에 아주 충실한 사람이에요. 자기 역할에.

 

이것은 사도바울이 데마의 정체를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어요. 왜냐하면 사도바울 본인이 데마의 영혼을 장악한 사람이 아닙니다. 관리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사도바울은 누굴 관리하는 입장에 있지를 않습니다. 본인이 본인의 가는 길도 주님이 관리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여기 계시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보낼 때 이게 성령세례에요. 성령세례라는 것이 뭐냐 하면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의 총합을 한꺼번에 여기에다가 담아서 자기백성에게 퍼붓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받으신 총합이 뭐냐 하면 두 개의 세례가 있죠. 하나는 무슨 세례입니까? 첫 번째는 물세례죠. 예수님께서 죄 없으신 분이 죄인 속에 들어오신 것이 물세례입니다.

 

왜냐하면 물세례는 회개할 것이 있는 사람만 들어가요. 근데 회개할 것도 없는 분이 물세례에 참여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인간 세계의 죄를 푹 적시려고 오는 거예요. 그러면 물세례가 성령세례의 총합이니까 이게 담겨있겠죠. 그러면 우리들이 한평생은 뭐가 돼요? 우리의 한 평생은 아직 경험하지 않아서 몰랐고, 아직 느끼지 못한 모든 죄를 이 땅에서 살면서 겪게 만드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겪게 만들도록 이미 지뢰밭을 깔아놓았습니다. 마음속으로 간음해도 무슨 죄다? 그게 간음죄가 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생각하는 것도 이게 지옥 갈 이방인들이 하는 염려거리라고 다 정해놓았어요.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말은 뭐냐 하면 형제를 미워하는 것도 이게 살인죄가 되는 거예요.

 

이 말씀들은 뭐냐 하면 이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나처럼 푹 적시고 오너라!” 하시는 말씀입니다. 적시고 오게 되면 우리는 뭐로 드러나요? 죄인이 되겠죠. 죄인은 절대로 죄를 믿어서는 안 되죠. 왜냐하면 죄를 죄 되게 하는 원인제공자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아는 죄는 선악과에서 비로소 아는 죄고. 주님의 성령세례를 통해서 아는 죄는 십자가와 니가 이미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죄가 되는 거예요. 선악적인 죄는 뭐냐 하면 자기가 나쁜 짓 했다는 인식이 있을 때만 그게 죄가 되고. 문제는, 그게 왜 문제가 되느냐 하면, 그 짓을 안 했으면 선이 되어서 문제가 돼요.

 

몽땅 죄가 되어야 되는데, 우리가 판정하는 죄는 반드시 선을 전제로 한 죄가 되어버리는 거예요. 운전하면서 옆에 사람한테 욕을 안 하는 건데 욕을 했다. 욕을 안 했으면 선이 되거나 안 그러면 중간 상태가 돼요. 중간상태가 되는데, 욕을 했으면 죄가 되고. 그러니까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죄도 아니고 의도 아니고 중간상태는 확보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럼 평생 중간상태로 살지. 우리 인간들 보기에 중간상태로 살았던 사람들이 있어요. 낙태했던 아기들. 자식들. 낙태한, 엄마 뱃속에서 낙태된 아이들.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자궁 안에서 엄마 배를 발로 찼는데, 이중옆차기로 차서, 엄마를 아프게 해서 그게 죄가 되는 거예요? 태어난 적도 없는데?

 

칼빈은 복음을 몰라요. 그래서 복음을 모르기 때문에 교회가 교회답기 위해서 죄를 새로 해요. 죄가 되는 것이 따로 있고 선이 되는 것 따로 있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간지역이 따로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칼빈주의 목사들은 좋은 거예요. 뭐냐 하면 중간지대 빼놓고, 죄 지은 것에 대해서 지적해가지고 회개하고 그 죄를 상쇄하기 위해서 돈만 내면 되는 겁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는 모든 인간들이 동조하고 납득이 돼요. 왜냐하면, 예수 믿는 티를 내기 위해서는 그 다음부터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되니까, 착한 일을 해서, 너의 선행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했으니까, 이제 남은 것은 착한 일의 양을 늘려가기만 하면 되는 거죠.

 

그러니까 그때는 뭐냐 하면 나쁜 일을 줄이면 되겠죠. 착한 일을 하는 것도 되지만 나쁜 일을 줄이는 것도 되죠. 줄이다 보면 다른 사람하고 이게 뭐가 되게 돼있어요? 경쟁이 붙죠. 착한 일도. 다른 사람은 그냥 헌금 냈는데 옆에 사람은 다리미질을 해서 헌금을 냈다. 그 다음부터 다리미질을 하는 거예요. 나는 그냥 기도하는데 어떤 사람은 기도할 때 손가락을 모으고 꿇어앉아서 기도했다. 얼마나 아픔을 갖고 겸손하게 기도하겠어요. 그럼 나도 손가락에다가 중국집에서 자장면 먹을 때 쓰는 나무젓가락을 끼워서, 고통을 더 가중시켜서, 뼈가 두두둑 소리가 나도록 하면 되겠죠. 그것도 모자라면 기둥 위에 올라가서 도를 닦든지. 이게 바로 인간들이 이미 알고 있는 선악체제의 수준의 죄입니다.

 

근데 성령세례에서 오는 죄는 뭐냐 하면 이미 구원을 받은 상태, 구원의 능력을 주신 분이 어떤 경로를 밟아서 왔던가를, 거기에 합류하게 만들어요. 그러면 내가 어떤 일을 했을 때 죄라고 느끼는 것은, 주께서 그렇게 구원받았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나로 하여금 주님이 가신 경로를 밟도록 구체적으로 실습을 하게 하신 거예요. 이게 바로 주님과 관련된 죄가 됩니다. 그럼 주님과 관련된 죄 같으면 어떤 죄냐 하면 모든 율법이 우리를 뭐로 만든다? 죄인 만들었죠. 그러면 주님과 관련된 죄인은 죄 아닌 게 없는 거예요. 죄 아닌 게. 모든 게 죄가 되는 거예요.

 

그걸 즐거운 죄라고 하는데, 모든 것이 죄가 되기 때문에 죄 아닌 게 없죠.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역설적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모든 것을 하게 하신 주님 앞에 순종합시다. 모든 일을. “안 해요. 나는 성도기 때문에 이런 더러운 짓은 안 해요.” 라고 빼지마시고. 그거 뺀다고 더 착한 자가 되는 것이 아니니까. 닥쳐진 상황에서 모든 것을 기꺼이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기꺼이 받아주시면 그것이 주님이 인간 속에 들어왔고, 물세례 받고, 난 뒤에 성령세례 받았죠. 그럼 우리도 똑같이 뭘 해도 죄라고 알고 난 뒤에 비로소 그 죄에서 뭐를 발견하느냐 하면 그 죄를 씻어주는, 용서해주시는 십자가 피의 위력으로 모든 성경이 구조적으로 짜여져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성경을 증명하기 위해서 뽑혀 나온, 채용된, 하나의 성경 말씀의 구조를 보여주기 위해서 채용된, 그런 역할극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종들이 되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서? 뭐든지 하면서. 왜? 그 모든지가 내가 추진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죄를 체험케 하시는 하나님의 친절하심으로 우리는 이미 주님 안에, 구원 안에 들어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외부적으로 나타내는 증인으로서 살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세례 받으면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거예요. 나의 증인이 되는 것이 아니고. 그래서 우리에게는 구원이라는 것이 없어요. 나의 구원이란 없습니다. 구원은 공동구원이에요. 그 공동의 대표자가 누구냐, 예수님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구원받지,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큰 전함이 있다고 합시다. 그 전함에는 식당도 있고 수병들이 잠자는 곳도 있고 대포도 있고, 평소에는 비 맞지 말라고 대포를 막아놓는 뚜껑도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대포 뚜껑에 포함된다면, 그 전함이 구원받는다면 대포 뚜껑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뚜껑도 구원 되잖아요. “이 뚜껑이 어디서 구원받아?” 이러지 않죠. 대포 뚜껑도 구원받는다 말이죠.

 

근데 전체 뚜껑은 뭐냐 하면 예수님의 공생애를 말하거든요. 예수님의 덩치. 그럼 예수님의 덩치는 주님이 이 땅에서 했던 기능을 반복하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다녀가셨던 그 세상과 동일한 세상이기 때문에. 동일한 세상. 주님이 다녀가신 똑같은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증거 하려면 그 수밖에 없어요. 주님께서 똑같은 상황을 우리 성도에게 똑같이 반복시켜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하는 존재의 위상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이냐를 밝히 보여 주게 되죠.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이냐? 첫 번째는 뭐냐 하면 데마가 어디로 갔습니까? 그냥 세상으로 갔죠. 잊어버렸을까봐 걱정되는데, 여러분 이게 정상입니다. 세상으로 가는 것이 정상이에요. 박수 한 번 쳐줍시다. 그 다음에 뭐냐, 또 뭐가 정상이냐 하면, 여기 14절 봅시다. 구리 장색, 구리세공업자 알렉산더는 내게 해를 많이 보였다. 정상인 게 또 나왔어요. 세상으로 갔다, 그리고 여기 구리 장색 알렉산더는 마치 열두제자의 가룟 유다와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이에요. 만약에 가룟 유다를 증인으로 세워가지고, 아이고, 증인하니까 지겹다. 증인을 세웠다 칩시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가?” “이름도 안 들어봤다. 이래도?” 증거자료대면서. “처음 들어봤다.” 이 구리 장색 이 사람한테 얼마나 상처를 입었던지, 디모데전서 1장 19절을 보면 나옵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20절,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 준 것은” 이래 되어 있죠. 사단에게 내어 준다고 하니까 꼭 예수님이 누구보고 이야기한 것 같아요? 가룟 유다한테 한 이야기하고 똑같죠.

 

그러니까 첫 번째 데마는 세상으로 갔고, 이게 정상이고. 알렉산더가 사도바울에게 핍박 했잖아요. 이게 얼마나 정상입니까? 사람이 가만히 있는데 핍박하겠어요? 뭔가 심기를 건드렸잖아요. 당신은 죄인이고, 예수의 피로만 구원받는다. 이게 건드렸다고요. 건드렸으니까 어떻게 됩니까? 달려드는 거죠. 왜? 니하고 있던 세월이 아까워서. 보복이 들어오는 거죠. 그래서 사도바울이 알렉산더한테 보복을 받았잖아요.

 

세상 보세요. 얼마나 예수님 때 세상의 반복입니까? 우리가 지금 그런 세상에 살고 있어요. “목사님, 그런데 우리는 왜 이런 게 없습니까?” 본인이 지금 그런 게 없는 이유가 본인이 지금 데마고 본인이 지금 알렉산더인데 이런 일이 생기겠어요? “목사님, 그런 욕하지 말고 우리는 사도바울편입니다.” 아니, 데마는 그런 소리 안 했겠어요? 알렉산더는 그런 소리 안 했겠습니까? 내가 예수님하고 한 패라고 하지 말고, 정말 답답하다. 나는 주님의 원수라고 이야기해야죠. 나는 맨날 주님 앞에 대들고 나는 주님을 피해서 세상으로 달아난 데마 같은 존재입니다. 이러면 지옥 갈래도 지옥 갈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이게 하나님의 계시니까.

 

그런데, “우리는 세상으로 두 번 다시 가지 맙시다.” 목사 지가 세상으로 벌써 갔는데? 지는 성경 마치고 드라마 안 봅니까? 푸른 바다의 전설 안 보는 모양이라. 목사 본인이 세상을 좋아하면서 데마 할 때는 마치 자기는 깊은 기도원에 혼자서 tv끊고, 스마트 폰도 없고, 그냥 도 닦고 살아가는 것처럼. 여러분 tv끊고 스마트 폰 없애고 지리산으로 도 닦으러 가도 장날에는 내려와야 돼요. 왜? 약초 캔 것 팔아먹어야 되거든요. 내려 올 때 맨발로 내려오지 않고 나이키 신고 내려와요. 나이키가 얼만데? 신발 신고 내려오거든요. 신발 살 때 그냥 사지 않습니다. 요새 메이커, 유행이 뭔가 살펴요. 그것은 이미 세상을 살핀 겁니다.

 

여러분 세상없이는 외로워서 못삽니다. 외로우면 자살해요. 우리가 이만큼 세상 산 것도 세상과 짝했기 때문에, 세상과 더불어서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웃으면서 살잖아요. 그래서 이 세상이 우리를 버리지 않는 한, 우리가 세상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꼭 붙어 다닙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강제조치에 나서십니다. 그럴 때 우리는 잠시나마 알렉산더가 됩니다.

 

“주여, 이러시면 주님 더 이상 못 믿습니다. 해도, 해도 너무합니다. 십일조 갖다 냈잖아요? 그거로 우리 퉁 칩시다. 왜 이러십니까? 이러면 저는 진짜 못 살아요. 이러면. 자식 키워야 되고, 아파트 부금내야 되고, 이래가지고는 도저히 못삽니다. 내가 예수도 아니고 사도바울도 아니고, 신앙 없는 사람에게 더 무리하게 밀치면 자빠집니다. 더 무리하게 하지 마세요.” 그렇게 변명하는데, 그거는 설교를 복음적이지 않는 목사가 설교를 하다보니까 강한 반발을 했는데, “그냥 막삽시다.” 라고 설교한 이런 목사한테 그렇게 강하게 반발할 수 있어요? 없어요? 아니 막살라는데 왜 그렇게 갑자기 그런 반발이 나와요. 너무 꼬아서 해석했는가? 그냥 꼬지 마세요. 그냥 막사시면 알아서 다 인도하십니다.

 

오늘 본문 어렵지 않아요. 지금 내 두 발이 어디에 섰느냐가 문제에요. 데마에서 벗어나면 어려워지고, 알렉산더가 아니라고 하면 어려워져요. 사도바울은 미쳤어요. 마치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미친 사람이라고 보는 것처럼. 사도바울 당시에 사도바울을 미친 자로 본 거예요.

 

그리고 우리도 매일같이 그런 경험을 하게 됩니다. 언제 성경만 쳐다보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요? 눈만 뜨면 헥헥 거리면서 돈 벌기 바쁘지. 사도바울 언제 좋아라고 했습니까? 어쩔 수 없이 천당 간다고 하니까 성경 한 번 보러 왔지. 항상 사도바울은 우리 마음속에, 우리 마음 적으로, 사도바울은 이방인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미아(IP:122.♡.188.127) 16-12-18 20:33 
서울 의존교회 161209b (세상사랑)-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알렉산더가 핍박을 했다는 것은, 조금만 머리를 한 번 써보세요. 사람이 가만히 있으면 서로 모르는 사이에서는 핍박이라는 것이 없어요. 아는 사이에서 뭔가 잔뜩 기대했는데, 자기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때, 그러니까 저 사람을 이용하려고 했는데 자기 이용의 표적에서 뭔가 변경되었을 때에, 그동안 그 사람에게 투자한 것이 아까워서, 자기 정성과 애정과 사랑이 아까워서 이걸 핍박을 하는 거예요.

 

그걸 무슨 관계라고 하죠? 애증관계라고 하죠. 사랑이 곧 증오가 되는 거예요. 너무 사랑하기에 나하고 헤어지게 되면 증오를 하는 겁니다. 이거는 성경에 나오잖아요. 암논이 다말을 그렇게 열렬히 사랑해놓고는 나중에는 도리어 사랑할 때보다 더 몇 배나 미워하잖아요. 성경에 나온 가운데서 제일 여자한테 밉상 받을 남자가 그 남자에요. 배다른 오빠죠. 뭔가 핍박을 한다는 것은 미련 없이 홀가분하게 떠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당한만큼 갚아줄게. 하는 식으로 못된 곤조를 가지고, 못된 성질을 가지고 공격해대는 거예요.

 

이 요소가 예수님에 대한 미움을 아주 잘 대변해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가신 전철을 밟아가는 거예요. 그러면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얻고자 하는 것은 뭐냐, 니들이, 인간들이 사는 세상이 얼마나 수상하고 이게 지옥 같은가를 계속해서 연이은 성도들의 모습을 통해서 그걸 분명히 하는 겁니다. 이 세상이 예수님께서는 어두움이라고 하는데, 과연 어두움이구나!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해도 우리는 이 세상이 마냥 좋고, 봄이 되면 꽃이 피고 여름 오면 과일 있고, 가을 되면 낭만 있고, 겨울 되면 하얗고, 봄, 여름, 가을 , 겨울, 사철이 얼마나 살기 좋아요. 이렇게 좋은 세상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노래 부르면서 그렇게 하늘에는 별이 있고 달도 있고, 얼마나 살기 좋습니까? 왜 이런 감각을 우리는 갖지를 못하는가? 아까 제가 이야기했지만, 우리 자신에게 주어지는 것이 평소에 내가 노력하고 애써서, 내가 나를 관리 잘해서 복 받은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죄인인데도 불구하고, 주님의 희생 덕분에 은혜로 주신 인생인줄 모르고, 역시 잘났으니까, 복 줄만 했으니까 복 줬겠지. 그런 자기 의가 아직도 우리에게 녹록치 않게 있는 겁니다. 나보다 못난 자에게 벌이 오고, 나보다 잘한 자가 복을 받는 것은 당연하고, 내가 현재 누리는 것은 적당량에 합당하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욥의 세 친구였습니다. 욥의 세 친구였어요. 그들이 나중에 하나님 앞에 나설 때 얼마나 잘못됐는지, 욥의 희생 제사가 없이는 그들은 용서받을 길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욥이 그들의 그러한 경우의 잘못을 아는 것은 이유 없는, 난데없는 고난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잖아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그냥 목수의 아들로 우리와 같이 살면 되는데, 난데없이 고난을 받아버리니까 우리는 졸지에 그런 고난을 받는 것과 나와 뭔가 엮여져 있다는 생각을 하지를 못하는 거예요. “아이고, 착한 예수님을 그 당시에 사람들의 인식이 나빠서 죽였구나. 주님, 저는 안 죽일 거예요.” 이러고 있다는 말이죠. “주님 절대로 저는 절대로 안 죽일 거예요. 저는 주님 앞에서 옷이라도 받아 주고 십자가가 무거우면 옆에서 거들어줄 거예요. 나는 절대로 주님을 배신하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나오죠.

 

여러분, 히틀러 밑에 있는 부하들을 보세요. 개개인이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고 자기 집안에서는 다 착한 장자들이고 아들들이에요. 부모한테 효도할 줄 알고 형제우애가 있어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들 죽일 때 보세요. 눈물도, 인정도 완전히 메말라서 기계처럼 죽이잖아요. 기계처럼. 인정사정없죠. 그냥 죽이죠. 그 사람을 전범 잡아서 물어보세요. 보면 그 사람이 얼마나 성품이 어질고 착하고 양심 있는 사람인데요.

 

누가 그렇게 만들었어요? 권력의 장場이, 그가 위치한 그 자리가, 권력에 둘둘 감긴 그 자리가, 그 자리에 부합하도록, 본인이 그렇게 처신들을 하고 있는 거예요. 본인이 그렇다가 아니라 본인이 본인 되게 만든 그 권력이, 나를, 우리 자신들을 그렇게 몰아세운 겁니다. 그렇게 하나의 작품을 만든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처신 잘한 덕분에 우리는 헤헤거리고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는 겁니다.

 

독일 나치 영화 같은 데서 그런 것을 보게 되면, 만약에 우리가 유대인들 편에 섰다면 어떻게 하고, 우리가 독일 편에 섰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영화에 보면 이런 대사가 나와요.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에요. 베를린에 아이들에게 산수를 가르칩니다. 산수. 여러분 이 산수는 악합니까? 선합니까? 중립입니까? 우리네 상식에서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고 우리는 중립이라고 했죠. 그럼 문제 내겠습니다. 그 독일 나치 당시에 장애자를 관리하는데 1인당 하루에 4마르크가 필요하다. 그런데 독일 전국에 30만 명의 장애자가 있다. 그러면 이들을 다 죽이면 몇 마르크가 절약이 되는가? 이게 초등학교 2학년 산수 문제에 나왔어요.

 

분명히 산수는 중립적이죠. 중립적인 것에 권력이 와 닿아버리니까 어떻게 됩니까? 절대로 중립일 수가 없죠. 북한의 핵을 만드는 물리학자들이 수학을 못합니까? 물리를 못해요? 똑똑하죠. 근데 그들은 무엇과 연결되어 있어요? 권력과 연결되어 있죠. 정부 요직에 있는 사람들이 다 미국에서 박사학위 받은 사람들입니다. 똑똑한 사람들이에요. 오죽 했으면 소년급제 패가망신이라는 말이 나왔겠어요. 소년급제 패가망신. 다 똑같은 사람이에요. 근데 무슨 물을 먹었어요? 권력의 물을 먹었죠. 똑똑하니까.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 주변의 시선을 보고 살아가는 겁니다.

 

내가 어떻게 행동하게 되면 저들이 좋아해서 나를 외롭지 않도록 거두어주겠는가? 심지어 교회도 마찬가지거든요. 내가 어떻게 행동하게 되면 이 교회의 장로나 목사가 얼마나 칭찬하고 내가 교회에 매주 나오는 보람을 마음껏 가지겠는가? 내가 여기서 뭔가 티 나는 행동을 하게 되면 그동안 내가 20년 동안 다니는 이 교회에서 나를 얼만 배척하겠는가? 배척하게 되면, 나는 본의 아니게 나오게 되면, 그동안 여러 가지 경조사에 부조했는데 언제 회수하지? 내 딸 시집가게 생겼는데, 그동안 부조한 것 생각하게 되면, 저 장로한테 이십 만원 하고 또 저 사람한테 얼마하고...계산해보면, 근데 거기에서 나오면 그 돈 못 받잖아요? 그러니까 죽치고 계속 앉아있는 거예요. 계속 앉아있어야 되는 거예요. 결국 돈 문제에요.

 

그리고 나는 그 교회에서 나오고 싶은데, 시어머니가 같이 나온다면, 이거는 교회 나오는 정도가 아니고 가정문제까지 확산되게 되면, 그럼 나는 칭찬받는 며느리가 못 되잖아요. 못 되면, 이런 내용에서는 기도할 것이 없어요. “하나님. 욕 얻어먹는 며느리가 됩니다.” 라고 기도를 하려고 하면, 주님께서 “왜, 욕 얻어먹으면 안 되는데?” 이런 질문 나올까봐 걱정이 돼가지고 기도를 못하는 거예요. 이 모든 것이 살아온, 그리고 누적되고, 축적한 나의 명예와 나의 위신과 체면과 나의 노하우와 그리고 저 사람들에게 베풀어줌으로 말미암아 나에게 유익이 된 힘, 비축된 힘으로 작용한 이 장場에서, 내가 복음소리해가지고 그걸 몽땅 하루아침에 날리는 그런 어리석은 일을 할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왜? 나는 똑똑하니까. 오늘 제목을 똑똑이로 할까?

 

처음시간부터 이야기했어요. 우리는 똑똑하고, 현명하고, 행동을 위대하게 하고, 착하고, 교양 있게 하고, 경건 되게 한다고요. 이걸 왜 잃어버려요. 그동안 이거 한다고 얼마나 많은 공을 들여놨는데요. 왜 다 날립니까? 가족 간에 원수 질 일이 있습니까? 결국에 보니까 나라는 것은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주위 사람들과 옆에 사람들의 끊임없는 교류를 통해서, 주고받고, 주고받고 하면서, 우리는 이 공동체에서 나를 내치지 말아달라는 간절함으로 사이좋게 서로 붙어있는 겁니다. 말도 좋게 해서 사랑받는 그 재미로, 그 사람이 나를 인정하는 그 재미로, 그 집단과 그 조직에서 우리는 포근함을 느끼고, 마치 시편에 나오는 젖 뗀 아이가 어미 품에 있는 것처럼, 이 조직이라는 이 세계에서 만족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근데 거기다가 당신은 죄인이라고 사도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전하면 뭐 알렉산더가 될 수 있는 요소가, 얼마든지 그런 가능성이 아주 농후합니다. 제가 또 이러면, “그러면 목사님, 우리는 데마 되고 알렉산더가 되어서 쫓겨나면 안 되잖아요?” “왜, 안 되는데? 그게 왜 안 되는데?” 그게 더 궁금해요. 그럼 그쪽에서 “나니까!” “니가 뭔데?” “나는 되고 우리는 왜 안 되는데?” 내가 평소에 나를 지키는 습관 같은 것이 있어가지고, 나를 지키려면 어느 것이 효율적인가? 옳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어야 돼. 왜?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의 능력이니까. 그래가지고 십자가를 끌어와 봤자, 뭐가 안 바뀌어요? 끌어 온 그 심보가 안 바뀌는 이상은 천국 못 갑니다.

 

심보가 바뀌어야 되는데, 어디서 좋은 것만 다 끌어 모았어요. 어디서 들은 풍월은 있어 가지고, 언약이고, 십자가고, 복음이고, 오직 한국교회는 기복신앙이고, 니나 잘하세요! 기복신앙 욕하지 마시고 니나 잘하세요! 나쁜 것은 다 버리고 좋은 것만 끌어 모으면 그게 좋은 교회 됩니까? 그래서 기존 교회에서 헌금 많이 하라는 설교 듣고 실망해서 이쪽 교회에 와서 인터넷 설교 들으면, 그럼 구원되는 거예요? 택도 없는 소리에요. 그런 식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에요.

 

오늘 본문은 뭐냐 하면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나오잖아요. 이 사람이 아주 해를 입혔죠. 그러면 못 본 척 지나가지 마시고, 주께서 하나의 좋은 코스를 주시는 거예요. “이번에는 니가 한 번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돼봐라.” 그럼 우리는 이제 알렉산더가 돼야지. 돼야지, 할 것 없어요. 평소에 알렉산더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닙니다. 속으로는 화가 나지만 신자기 때문에 참는 그런 이중적인 알렉산더가 어떤 의미에서는 매일의 삶일 수가 있어요.

 

하나의 예를 들게 되면 만약에 오늘 새누리당에서 반대해서 탄핵이 안 됐다고 칩시다. 그러면 저 시청 앞에 있던 120만이 범사에 감사합니까? 이럴 수는 없습니다. 정의가 죽었다고 하거든요. 주께서는 “니나 잘하세요. 정의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정의를 누가 판정하는데? 정의를 우리가 입에 달 입장도 못되고 그럴 권리도 없어요. 정의가 뭔데요? 그거는 내 이익에 따라서 그걸 정의라고 하는 거예요. 나한테 손해나면 정의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나에게 이익 되는 게 정의에요.

 

제가 일곱 살 때 읽었던 만화책이 <정의의 사자 라이파이>에요. 제 또래는 알아요. 특히 남자들. 태백산 골짜기에 비밀기지가 있어요. 비행기 막 날고. 자기 마누라도 가면 쓰고 있는 것이 아직도 기억나고 있는데. 그걸 보면서 우리는 감정이입을 하게 됩니다. 나도 커서 이렇게 정의롭게 살아야지. 근데 살라고 하니까 그 만화에 뭐가 있느냐 하면 어벤져스거든요. 힘이 세요. 그렇지! 힘이 있어야 정의를 이룬다. 예수님은 바로 그 정의 때문에 돌아가셨어요. 그게 복음입니다. 무슨 힘이 있어서 정의가 아니고, 진짜 하나님은 이 땅에서 가장 힘이 없는 분으로 오셨어요.

 

그래서 힘이 없는, 힘을 쓰고 싶어도 양심의 가책이 있어서 힘을 못 쓰는 세리와 창기와 강도, 이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어요. 백부장 이런 사람들.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겠나이다.” 완전히 힘을 빼고 살았어요. “그럼 저도 힘 빼고 천당 가겠습니다.” 그 자체가 어깨에 힘들어간 거예요. 그러면 코스를 밟아줘요. 알렉산더가 되게 되면, 니가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되고, 니가 데마가 되면, 자, 힘 뺀다는 것이 1분1초도 그런 일이 안 생긴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걸 알 때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물세례에 동참하고 있는 중입니다. 내가 죄인인 것을 알아서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죄 짓고 있는 현장에 주님은 또 다시 물세례의 풍덩하는 소리를 내시면서 우리 옆에 와 있는 거예요.

 

대구 서문시장에 불이 났습니다. 피해가 천억인데 지금 모인 성금이 십억 들어왔어요. 1퍼센트 들어왔습니다. 앞으로 얼마 들어올지 모르겠는데, 그 사람들이 근처에 서문교회에 다녀요. 대구에서 제일 유명한 교회가 대구제일교회가 유명하고, 거긴 통합 측이고. 합동 측에서 제일 유명한 교회가 서문교회에요. 둘 다 라이벌이에요. 투톱이에요. 얼마나 새벽마다 교회에 가서 장사 잘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겠습니까? 장사 잘 되게 해달라고. 연말연시가 되어서 가득가득 물건을 채워놨어요. 평소에 얼마나 믿음이 좋고, 권사들도 많이 되고, 제가 아는 권사들도 몇 돼요. 4지구에. 야채장사 하시는 분들, 옛날에 같이 성경공부 했거든요. 그때 성경공부 잘 했으면, 아하,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딴 데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바로 알렉산더라는 것을 알았을 거예요.

 

왜냐하면 그 가득 쌓은 물건이 누구냐 하면 주님 거거든요. 주님이 예수님 증거 하라고 주신 물건인데, 따라서 그걸 증명하는 방법은 그걸 홀라당 태우는 방법밖에 없었어요. ‘뭐, 내 것 아닌데? 왜 이리 마음이 편하지.’ 이건 비정상이에요. 이건 돌은 거예요. 근데 “주님. 이거 팔아서 십일조 많이 할라고 했는데, 이렇게 방해하십니까?” 이래 나온다니까요.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 몸에 대한 미련을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지난 가락강의 때 제목이 뭐라고 했죠? 자기를 향한 거절. 참, 제목도 무서워. 자기를 향한 거절.

 

인간은 자기를 향해 거절을 해본 적이 없어요. 자기를 향한 옹호입니다. 항상 나를 두둔해요. 오늘 제목을 나를 위한 두둔이라고 해볼까? 항상 인간은 나를 두둔해요. 구리 장색 알렉산더이면서도 곧잘 자기는 신자라고 우기는 것이 인간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한테 속아 넘어 갈 리가 없어요. 자, 첫 번째 데마 했죠. 그 다음에 알렉산더. 건드리니까 같이 복수하겠다고 건드리는 거예요. 가룟 유다하고 똑같아요.

 

세 번째 인물이 뭐냐 하면 마가입니다. 11절에 보면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마가 이 사람은 삐지기 대장이에요. 원래 마가가 처음에 주님의 제자들한테 잘 했어요. 예수님께서 떡을 떼는 그 다락방이 마가의 다락방이고, 오순절이 되기 전에 기도했던 그 다락방도 마가의 다락방이에요. 주님이 하신 일에 기여자였고 협력자였고. 주요임원이죠. 주요임원. 핵심멤버중의 하나에요. 비선실세 그 정도 되는 사람이 마가죠.

 

근데 안디옥에서 1차전도하면서 바나바와 바울을 보내면서 마가를 데리고 가고 이쪽은 실라를 데리고 갔거든요. 근데 둘이 틀어졌어요. 무엇 때문에 틀어졌는지는 성경에 안 나오는데, 대략 앞뒤의 분위기를 보게 되면, 바나바하고 마가는 유대인입니다. 첫 전도에요. 아직 전도 경험이 없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율법의 범주 안에서 전도하자는 것이 바나바와 마가의 생각이에요.

 

뭐냐 하면 어떻게 헬라인에게 복음이 왔으면 그들이 율법을 개무시 하지 않게 하는 것이 옳지 않느냐 하는 거예요. 이게 바나바와 마가의 생각이라는 말이죠. 구체적으로 그게 나온 것이 아닌데, 다투었을 때 그 주변의 환경이 율법을 지켜야 된다, 말아야 된다, 그 다툼이 있었어요. 안 그러면 의견이 하나같으면 다툴 일이 있겠어요. 전도 팀 자체가 둘이 분열이 돼가지고, 아예 삐져서 “그래, 가라 가! 잘 가라!” 해가지고, 마가는 구브로 섬으로 가버렸어요.

 

갔는데, 그 대목을 다시 한 번 생각해봅시다. 잘 들어보면 일리가 있어요. 뭐냐 하면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율법을 줬죠. 근데 율법이 옛 언약이잖아요. 옛 언약. 그런데 예수님이 오셨어요. 메시아다 말이죠. 그렇다면 메시아가 어디서 왔느냐 말이죠. 메시아가 어디서 왔느냐, 메시아는 옛 언약 범주 내에서 메시아가 왔다는 겁니다. 옛 언약 범주 내에서. 그러니까 언약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거예요. 옛 언약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폐기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되는데, 콘cone, 원뿔 모양으로 되어 그 안에 아이스크림을 담는 과자로 된 아이스크림이 있잖아요. 위에는 아이스크림이 있고 밑에는 과자부분이 있잖아요. 위에 아이스크림이 녹아 있잖아요. 그러면 콘, 과자, 이게 있어서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다. 이게 누구 생각이냐 하면 바로 바울과 실라 생각이에요. 과자 먹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스크림을 먹으려고 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유대인의 생각은 그게 아니에요. 이런 아이스크림 같은 모습이 아니고 소시지 모습이에요. 소시지가 길게 있는데 먹다 보면 소시지 마지막까지, 완성의 모습을 다 먹을 수 있으니까, 이 전체가 다 하나님의 언약으로 계속 유지가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해 안 되죠?

 

이게요, 오늘날 총신이나 신학교에서 계속 논쟁하고 있어요. 율법을 폐기했느냐, 아니면 율법의 대표 율법이 됐느냐, 폐기라는 말은 건물 짓고 난 뒤에 보조사다리, 보조물이 있잖아요. 그거는 치워버려야죠. 건물이 남으니까. 그런데 건물을 철근으로 다닥다닥 연결해서 짓고 나서 어떻게 합니까? 그 건물 속에 있는 철근을 빼버립니까? 그렇게 하면 건물이 무너지잖아요. 기초부터 이미 건물의 요소가 되는 겁니다. 율법 자체가.

 

그럼 뭘 믿는가? 구약부터 신약 전체를 우리는 건물 바깥에서 다 믿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거예요. 유대인들이. 그럼 그 증거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감람나무와 참 감람나무가 나오죠. 그러면 이방인들이 구원받았다, 그럼 우리가 감람나무니까 이스라엘은 발로 치워버려야 되겠네? 아니죠. 접붙였다는 말이 무슨 뜻이에요? 그냥 기존에 있는 것도 살린다는 뜻이거든요. 기존에 있는 것도 살린다.

 

이렇게 예를 들면 제일 쉬운 것을 가지고. 그림을 그릴 때 초가집도 그리고 시냇가도 그리고 죽 그리는데 제일 중요한 것은 초가집 안에 있는 어르신네를 그리는 것이, 그게 완성이라면, 만약에 어르신네 이마에 점이 있다면 그 어르신네 이마에 있는 점까지 딱 찍어버리면 그림이 전체 완성이 된다는 것은 유대인들의 생각이에요. 메시아가 이 그림을 전제로 하고 메시아가 왔기 때문에, 그 그림이 있어줘야 메시아가 메시아답다는 겁니다.

 

근데 사도바울은 뭐 이 콘 아이스크림이 최고죠. 마지막은 메시아를 위해서 있기 때문에, 부속물들은, 보조사다리 같은 것은 발로 차버려도 괜찮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보면 둘 다 다 나와 있어요. 히브리서에 보면 율법이 완성되게 되면 폐기해야 된다는 것도 있고, 그리고 마태복음에 보면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폐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고. 예수님은 폐하지 않는다고 하시고 사도바울은 폐한다고 되어 있고. 그래서 그 헛똑똑이 신학자들이 내릴 결론이 뭐냐, 이겁니다. “우리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만 믿고, 사도바울의 편지는 그냥 보조로 하자. 왜? 그거는 사도바울이 썼기 때문에 예수님보다 권위가 떨어진다.” 이래 이야기해요.

 

여러분 사도바울은 본인이 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사도바울을 통해서 전한 거예요. 그런 소리 나올까봐 편지마다, “나 예수 그리스도의 종 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전하노라” 사도바울의 생각이 아니라 주님의 생각입니다. 자, 그렇다면 왜 이런 혼란이 있는가? 제가 첫째 시간에 했어요. 왜 혼란이 있습니까? 헛똑똑이. 저희들이 똑똑해서 구원에 필요한 것만 골라서, 수집해서, 부케 만들어 가지고, 그것 가지고 천당 들어가려고. 누가? 그렇게 똑똑한 본인이, 지식을 소유한 본인이 천당 가려고 그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그런 식의 구원은 애당초에 없습니다. 바보 안 되면 구원 못 받아요.

 

마가는 그래서 삐졌습니다. 삐졌는데 골로새서 4장 10절에 보게 되면 다시 첫 번째 옥에 갇혔을 때에 사도바울은 마가를 자기와 함께 있는 자라고 했어요.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그래서 이건 뭐냐 하면 첫 번째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가버렸고, 두 번째 알렉산더는 아주 심한 반발을 했고, 가룟 유다처럼. 세 번째 마가는 마치 베드로 같아요. 나는 예수님을 저주 한다고 세 번씩 부인해놓고는, 예수님께서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니까. 자, 사랑하느냐? 라고 했거든요.

 

처음에는, 요한복음 13장 1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묻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끝까지 사랑한다 했어요. 사랑한다고 하니까 제자들이 오해하기를 우리가 무엇을 해도 주께서 사랑으로 지켜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본인이 어떤 색으로 변색이 된다는 생각을 못하고, 본인은 그냥 아까 이야기한대로 중립적이에요. 뭐 용감하지는 않지만 배신까지는 안 할 거고, 그냥 의리는 마음속으로 있지만 육신이 약해서 그냥 버티고 있지, 적극적으로 주님 반대편에 선다는 그런 생각은 못한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이방인들을 구원할 때 주님의 에너지가 100이 필요하다면, 자기들은 너무나 3년 동안 훈련을 잘 받았기 때문에 100까지는 필요 없고 한 35정도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똑같이 동일하게 이들이, 처음 믿는 사람이나 제자들이나 구원받는 일은 오직 보탬이 필요 없는, 예수님의 홀로의 공로, 자신의 희생,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린, 단지 그것만 필요해요. 거기다가 더 이상 섞으면 안 돼요. 딱 그거만 필요해요. 주님의 피만 필요해요. 거기에 베드로의 피가 섞이고, 요한의 피가 섞이고, 사도바울의 피가 섞이고, 스데반 집사의 피가 섞이면 안 돼요. 딱 그거에요. 다른 피는 필요 없어요.

 

그럼 제자들은 뭘 증거 해야 해요? 왜, 내 피와 내 희생은 필요 없는가? 그걸 증거 하겠죠. 왜 증거 하겠어요? 증거 할 때 어떤 마음으로 증거 하겠어요? 우리가 제자로서 하는 모든 짓거리가 사실은 세상 사람들, 아담의 죄를 대변해주는 짓거리였음을, 우리가 다 보여줬다는 쪽으로 증거 하겠죠.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바울을 예수님 찾아온 시점이 언제입니까? 주님을 위해서 회개하고,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을 너무 많이 죽여서 양심에 가책을 갖고 있었다. 이럴 때 찾아왔습니까? 심지어 신학자 가운데 그런 사람도 있어요. 사도바울이 예수님 만나서 헛소리 하는 것이 예수님 믿는 사람을 너무 많이 죽여서 양심에 가책을 받아서 그렇다는 거예요. 그게 신학교 교수라니까요. 왜? 그 사람들은 똑똑하니까. 납득이 되는 소리를 해야 되니까.

 

그러나 선교사나 복음을 전하는 이런 사람들은 상대방을 납득시켜서 구원하려는 생각을 버리세요. 그건 정말 위험한 거예요. 선교사나 복음 전하는 자들이 왜 사기꾼인가 하는 사실을 이제 아시겠습니까? 선교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들이 선교사에요. 그냥 자기마음대로 사는 것이 선교사에요. 근데 그 사람들은 선교라는 것은 이런 것이라고 아예 곽을 짜놨어요. “이게 선교다.”라고 곽을 짜놨어요. 이렇게 해서 훈련받고 나면 그들은 꼬임 당한다. 물론 잘 꼬시죠. 왜? 종교니까. 복음이 아니니까 잘 꼬시는 거예요.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니까. 이렇게 하시면 구원받습니다. 그런 소리 하니까 잘 꼬시는 거예요.

 

그러나 성경은 사람들을 꼬셔가지고 구원시켜주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 안 되게 하죠. 왜? 예수님께서 성도를 다시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전개하시기 때문에. 제2의, 제3의, 예수님의 고난을 받을 사람을 계속 보내기 때문에. 그럼 고난을 받으려면 알아서 구원받는 사람이 있어야 돼요? 없어야 돼요? 예수님 당시나 오늘날이나 절대로 없어요.

 

구원받은 사람의 고백이 뭡니까? 사도바울의 고백이 뭡니까? 내가 회개했을 때 오신 것이 아니고, 그냥 주님 쪽에서 먼저 쳐들어 왔으니까 비로소 내가 죄인 중의 괴수인 것을 알고,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진지한 고백이 나오잖아요. 똑같은 방식이에요. 이 시대에 누구나 구원받은 사람은 내가 주님 앞에 한 게 있어서 구원받았다는 소리를 할 수가 없어요.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구원받고 난 뒤에는 도대체 얼마나 내가 더 썩었는가를 확인하는 차원에서 평생을 살게 됩니다. ‘아, 이런 것도 죄가 되는 것을 미처 몰랐네.’ 이렇게. ‘아니, 이것도 죄구나. 이것도 내가 권력의 장을 눈치 보기 위해서 머뭇거리는 이 모습이 이 모습이구나.’ 근데 그 모습을 안 하고, 지리산에 못 들어가고, 항상 우리는 하나님의 지정된 장소가 와요.

 

만약에 여러분 가운데 그런 분이 없지만 국회의원이 있다, 만약에 여러분 가운데 새누리당의 친박이다, 앉아 있다, 그런데 본인은 복음을 안다, 근데 어떤 분이 투표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으러 왔다, 그럼 답변은 간단해요. 죄지으면 되는 거예요. 죄 지으면 되는데, 바른 투표를 하려고 하니까 머리가 복잡한 거예요. 비박이 아니고 비 복음적으로 하려고 하니까. 복음적으로 한다면 뭘 해도 죄가 되는데, 거기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잖아요. 거기에 찬성, 반대한다고 지옥 갑니까? 밥을 현미를 할까요? 아니면 얼마나 섞을까요? 현미를 하든, 흰밥을 해서 탄수화물이 너무 많아 일찍 뒈지든, 구원받는데 아무 상관이 없는 거예요. 해독주스를 마시든 말든 간에 아무 상관이 없어요. 아무 상관이. 독감 예방주사를 맞을까요? 말까요? 그건 니 맘대로 하세요. 맞아도 죄고, 안 맞아도 죄에요.

 

칼빈 같으면 “그거는 중립에 관한 문제기 때문에, 그건 의도 아니고 죄도 아닙니다.” 이렇게 이야기할거예요. 그게 아니에요. 역할이 데마가 하는 역할이 있고, 알렉산더가 하는 역할이 있고, 그 다음에 마가가 하는 역할이 있는 거예요. 마가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디모데후서 4장 13절,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1차 옥에 갇히고 잠시 풀려나왔는데, 풀려 나왔는데 어디에 가있느냐, 드로아지방, 현재 그리스 북쪽 지방에 가서 잠시 전도하고, 다시 로마에 와서 두 번째 투옥되고 그 다음에 사형 당했어요. 그때 드로아 지방에 카시미론(합성섬유)인지 뭐 무슨 두꺼운 외투가 있었던 모양이에요.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 오라” 이게 구약일 경우가 많죠. 하여튼 겨울이 되기 전에, 날씨가 추워지기 때문에 그렇게 했어요.

 

아! 참, 아까 그 이야기하다가 그만 잊어버렸는데, 그 해답을 내려야지요. 그냥 마무리하면 안 되고. 두 가지가 있다고 하면 안 되고. 이거는 간단한 문제에요. 이 사람들이 복음을 몰라서 그러는데. 구약시대의 구약은 없습니다. 없고, 신약의 복음을 위해서 구약이 새롭게 의미가 주어지는 거예요. 이게 정답이에요. 구약에서 하라고 해서 구원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면 구약을 없애버릴까요? 아니에요. 신약이 왜 완성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구약이 주어집니다. 그러면 우리 이방인들이나 유대인들이나 하나님께서 어디로 보내느냐 하면 구약 성경 세계 속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고, 신약화 된 구약 성경 세계 속으로 보내는 거예요.

 

복음과 연결되어 있는 구약 성경으로 보내버리면, 구약의 창세기 1장부터 모든 성경 해석이 뭐로 해석이 되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해석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창세기 1장 1절부터. 예수님만 증거 하는 창세기 1장이 되어야지, 창세기 1장 1절은 천지창조이야기 하다가 신약 때 예수님 증거 하는 것이 아니에요. 모든 성경은 누구를 증거 하는 것이다? 예수님만 증거 한다. 거기에 부응하도록 성령께서 그렇게 해석을 내립니다. 실제로 그런 예가 있죠. 다윗이 했던 시편의 이야기가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어떻게 설교합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부터 출발해서 시편 2편을 설명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그 해석은 구약학자들이 아무리 봐도 모르는 거예요. 이거는 오버한다, 이거는 논리가 안 맞다, 이렇게 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사도행전 1장을 잠깐 볼까요? 이거는 말보다도, 그냥 건성으로 넘어가는 거보다도 봐야 해요. 여기 1장 20절에 보면,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시편의 이 내용을 뭐로 적용시킵니까? 열두제자 중에서 한 명이 빠졌을 때 그걸 채우는데 이 내용을 사용한 거예요. 그러나 시편을 아무리 봐도 그 내용이 안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구약은 없는 거예요. 신약적인 구약은 예수님과 더불어서 함께 모든 것이, 이제는 신구약의 책이 아니라 이제는 전부 다 복음의 책이 돼버린 거예요. 구약 따로 신약 따로가 아니라 합쳐서 어느 구절이든 복음을 위한,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한 책이 되는 겁니다. 심지어 사도바울의 편지까지라도 성령에 의해서 쓰여 집니다. 이건 이번 주일 낮에 제가 설교해야 될 것 같아요.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봅시다. 첫 번째 데마는 세상으로 갔습니다. 오늘날 우리 모습이죠. 알렉산더 갔습니다. 우리 모습이죠. 마가는 갔다가 다시 왔습니다. 우리 모습이죠. 누가는 아직 안했는데, 우리 모습입니다. 우리 모습이 네 가지입니다. 알아서 우리 인생에서 다 겪어야 될, 하루에 다 이 네 가지를 겪을 수도 있고, 사흘 잡아서 겪을 수도 있고, 3년 잡아서 겪을 수도 있고, 하여튼 우리는 어떤 구절도 우리와 무관한 구절이 없어요.

 

주님한테 대들고도 싶고, 일이 안 되니까 되고 싶고, 어떤 때는 슬그머니 결혼하는데 궁합도 보고 싶고, 뭐 장난인데 궁합 한 번 봐야 되지 않겠나? 이런 생각도 들고. 어떤 교회 교인은 “주여, 빈손으로 찬송 부르며 왔나이다.” 하고 왔다가 갈 수도 있고, 갔다가 또 올 수도 있고, 왔다가 또 갈 수도 있고, 만날 어지러워. 본인도 어지러워요. 매일 이것이 순환처럼 반복됩니다.

 

그 다음에 네 번째 사람이 필요하겠죠. 네 번째 사람은 누가가 나옵니다. 누가는 한결같아요. 이 사람은. 희한한 사람이야. 이 사람은 2차전도 때 참여하고, 3차 때도 있었고, 예루살렘에 가서 고생할 때도 있었고, 심지어 1차, 2차 투옥당할 때도 있었고, 투옥하고 난 뒤에는 사도행전 썼고 누가복음 써가지고 나중에는 사형 당했다는 소문이 있어요. 그런 소문이 있는데, 그런 소문은 믿을 필요는 없지만.

 

여러분이 다 아시지만 누가 이 사람의 직업이 의원입니다. 골로새서 4장에도 나오죠. 그래서 의사들이 선교 팀 만들거나 하면 전부 다 누가 선교 팀이에요.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저는 처음에 그것도 모르고 누가 과자인지 알았어요. 동네병원 보면 누가 내과. 누가 의원. 천주교 신자 아니면 기독교 신자. 천주교 신자는 누가가 아니고 루가죠. ‘루가 내과’ 하면 천주교 교인이고 ‘누가 내과’ 하면 장로 교인이고. 의사인데 장로 안 될 수가 있어요? 의사니까 장로 시켜줘야지. 돈 많이 내니까.

 

그런데 누가 이 사람이 한결같이 이렇게 가는 것, 그럼 뭐 이 사람은 괜찮은 사람 아니냐? 괜찮은 사람이 비정상이죠. 이럴 수가 없습니다. 그럼 결국 여기에 나와 있는 사람들은 우리 인생에서 한 사람이라도 각각 다 겪어야 할 거예요. 누가는 어떻게 겪는가? 아무리 데마가 되고, 알렉산더가 되도, 그 밑둥치에는 항상 누가처럼 이렇게 하도록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또 있어요. 한결같이.

 

그럼 누가가 사도바울을 도와 준 그 목적은 뭐냐, 문제는 목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게 오늘 중요한 거예요. 누가가 사도바울을 도와 줄 하등의 목적이 없어요. 사도바울이 고생하는데 함께 고생했거든요. 옥에 두 번이나 갇혔는데 함께 있었고, 예루살렘 그 위험한 곳에도 함께 갔고, 1차, 2차 함께 갔다고요. 하여튼 자기 병원 안 보고 돌아다니며 했어요. 왜 그렇게 했는지를 누가보고 물어보면 “그것은 제 뜻이 아닙니다.”라고 했을 거예요. 바로 누가가 이렇게 붙어있었다는 것은 바로 오늘 우리의 고백이어야 해요.

 

“제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가장 원천적인 것을 구성하게 돼요. 누가가 제 뜻이 아니라면 알렉산더도 제 뜻이 아니고, 데마도 제 뜻이 아니고, 그리고 마가도 제 뜻이 아니죠. 지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니니까. 결국은 이 모든 것이 하나가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서 자기 백성을 마음대로 다루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데 이 네 명의 사람이 누구 중심으로 모여지죠? 사도바울 중심이죠. 그럼 사도바울 중심이라면 사도바울이 뭘 갖고 있다? 복음을 갖고 있죠. 복음이 어떤 치마를 입었다면, 사도바울이 입었던 복음 치마를 벗어놓으면 중앙에 모이게 되고, 나머지기 모든 것은 하나의 복음적인 적용이 되겠습니다. 오늘 강의를 정리하면서 다시 한 번 분명히 해봅시다.

 

데마는 세상으로 갔다, 알렉산더는 대들었다, 마가는 갔다가 다시 왔다, 누가는 한결같이 떠나지 않았다, 이 모든 기준이요, “당신은 세상을 향해서 갔어.” 라는 기준을 누가 발설합니까? 누가 기준이 돼서 세상으로 떠났다고 본 거예요. 그것은 이 땅의 사도바울을 기준으로 해서 지금 하나의 수금지화목토천해명 태양계처럼 사도바울을 중심으로 해서 돌고 있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종이 되고.

 

그러면 이것은 뭘 이야기하느냐, 사도바울이 갖고 있는 그 복음의 내용의 풍성함을 이야기해주고 있는 겁니다. 왜 풍성함이냐 하면 사도바울의 복음을 딱 듣게 되면 그걸 가지고 무엇에 이용하느냐 하면, 확정된 자기 인생을 그쪽으로 일관되게, 자기 쪽에서 아스팔트 도로를 깔아버려요. “나는 이제 세상으로 떠나지 않고, 나는 이제 대들지 않고, 나는 두 번 배신하지 않고 누가처럼 그렇게 살렵니다. 사도바울처럼 살렵니다.” 하는데, 바로 그것을 뭉개버리고, 그것을 없애버리기 위해서 이런 경우를 만든 거예요.

 

우리한테 묻는 것은 뭐냐 하면 사도바울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더 나아가서 사도바울의 복음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우리한테 묻는 겁니다. 그렇게 묻는 것은 답변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너는 사도바울이 전하는 십자가 중심으로 아직도 뺑뺑 돌고 있느냐를 우리한테 확인시켜주는 것이죠. 자, 15절에 봅시다. “너도 저를 주의하라” 여기 너는 디모데한테 이야기하는 거죠.

 

그러니까 방금 제가 한 이야기를 디모데한테 먼저 이야기하고 오늘날 우리한테 이야기하는 거예요. 사도바울과 디모데 관계는 사도바울이 당했던 것을 너도 똑같이 당한다는 것입니다. 왜? 같은 세상 속에 있기 때문에. 16절,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나를 버렸지만 그것도 주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내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는 이 말입니다.

 

자, 그 다음에 봅시다. 17절,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먼저 복음적 해석이 아닌 것을 이야기하면, “주님께서 나를 건강케 하셔서 나는 복음을 전합니다.” 이것이 복음적 해석이 아니에요. 그것은 상대방에게 뭘 요구하느냐 하면 “교인들이 되어서 보약정도는 지어줘야지. 목사가 복음 전하는데 힘내라고 보약 줘야지. 보약. 비타500만 주지 말고, 뭐 이렇게 인삼 같은 것 다려줘야지.” 해석이 이래 돼버려요. 그렇게 되면 뭐가 생기느냐 하면 행함이 생겨요. 행함. ‘그래, 목사한테 해주는 것이 곧 주께 하는 것이다.’ 이래 돼버려요. 그럼 그렇게 하게 되면 그 교회는 뿌듯한 느낌이 들죠. 그럼 그 교회는 똑똑해져요. 위대해지고, 경건해지고, 착해져버려요.

 

이 말은 이렇게 해석되어야 합니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뭐냐 하면 강건케 해서 복음 전하는 것이 아니고 복음이 우선이기 때문에, 참, 이 말이 제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들어보세요. 복음을 위한 강건이란 말은 강건해서 복음 전하는 것이 아니고, 복음 전할 때만 무조건 그 상태가 강건한 상태다. 이 말입니다. 왜? 복음을 제대로 전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이 강건해져버리면 복음 전하는데 한 20퍼센트 쓰고 나머지기 70퍼센트는 등산하는데 써요. 독도에 놀러가서 낚시하는데 쓰고. 괜히 목사한테 보약 지어 줘봐야 20퍼센트만 쓰고 70퍼센트는 노래방에 가서 노래 부르는데 쓴다고요. 이러면 안 되고. 그것도 20퍼센트가 어디냐고 하는데.

 

복음은 절대로 누수가 없어요. 손해 보는 장사가 없어요. 딱 맞아요. 그리 아파도 복음 전할 때만 강건해요. 제가 잘 아는 아마존 강 허운석 선교사가 저한테 이야기한 겁니다. 그리 아파도 설교할 때는 하나도 안 아프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복음에 대한 강건이에요. 내려오면 또 아파요. 그리고 얼마 전에 암으로 돌아가셨지만. 그게 뒤에 나옵니다.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그러니까 이 말을 더욱더 확대시켜보겠습니다. “이방인 너희들 때문에 나는 그냥 죽지 못하고 복음 전하면서 나는 죽어가야 한다.” 이 말이에요. 이방인 너희들 때문에. 주님께서 너희들에게 복음 전하라고 나로 하여금 복음 전하는 고만큼만 강건케 했다는 거예요.

 

그 다음에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사자의 입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악한 그것을 짐승으로 의인화시킨 거죠.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내 일이다? 주의 일이다? 주의 일이 되기 때문에 자꾸 나보고 착하다느니, 경건하다느니, 제발 그런 소리 좀 하지 마라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이 있어야 일 합니다.” 사도바울이 있어야 일이 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있어야 일이 되게 되어 있어요.

 

사도바울은 아무 쓸모없는 인간이에요. 계속 쓸모없는 인간을 쓸모없는 인간으로 들통 나게 만드는 겁니다. 왜? 그래야 온전히 주님의 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복음을 알게 되면 그 사람을 함부로 못하는 이유가 주님께서 그 사람을 귀한 존재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 사람을 함부로 하게 되면 귀한 주님을 공격하는 셈이 돼버려요. 알렉산더가 된다고요. 오늘 알렉산더 좋은 것 배웠네. ‘아이고, 저 사람이 복음을 알기는 아는데 무시하고 싶다.’ 그건 주님을 무시하는 거예요. 이 소자한테 하는 것이 주님한테 한 것이 돼요.

 

그래서 복음을 알게 되면 사실은 그 사람을 함부로 대하면 안 돼요. 왜냐하면 그 사람은 원래 정상인데 복음 때문에 사람이 비정상 되었잖아요. 이것은 비정상적인 주님이 함께 했다는 뜻이거든요. 그래서 내가 만약에 정상적으로 건드리면 건드릴만하다고 하는 것이 이게 정상적인 생각인데, 비정상적인 주님께서 어떤 식으로 나올지, 정상적인 내가 알 수가 없죠.

 

자, 마지막으로 18절,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이 말도 좀 어려운 말인데요. 지금 이런 멘트, 이런 말을 하는 나에게 뭐가 있다? 천국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내가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내가 전한 복음이 천국과 유일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겁니다. 유일하게.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어떻게 됩니까? 저주받죠.

 

그러니까 너희들 보기에 내가 사람으로 보이냐? 아니다. 그냥 나는 주의 사도다. 너희들이 진짜 너희 자신을 알려면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께서 사도바울 중심으로 전 세계를 뺑뺑이 돌려 순환시키는 것을 알아라. 그리고 너는 데마가 될지언정, 알렉산더가 될지언정, 마가가 될지언정, 누가가 될지언정, 어쨌든 간에 이 말씀은 예수님의 계시라고 알아듣는 사람은, 비록 한때 데마고, 한때 알렉산더고, 한때 마가고, 한때 누가더라도 이미 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왜? 이 말씀이 그대로 인생을 통해서 증거 되도록 주께서 다루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이 위험한 세상인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다시 알게 하옵소서. 주님을 죽였던 세상, 사도바울을 힘들게 했던 세상, 왠지 우리는 이 세상이 좋아 보이고, 친근해 보이고, 떠나기 싫고, 죽치고 눌러앉아 있고 싶은 심리가 오히려 대다수를 차지합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주님의 증거 된 말씀이 확인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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