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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4 00:28:51 조회 : 1066         
존재와 기능 170113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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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IP:122.♡.188.127) 17-01-24 23:43 
서울 의존교회 170113a (존재와 기능)-이 근호 목사

 

오늘부터는 디도서입니다. 신약성경 348페이지입니다. 디모데후서 바로 연이어 디도서가 있습니다. 디도서라고 하는 것은 디도한테 보낸 편지. 디도는 누구냐, 디도는 사도바울의 충실한 제자죠. 그 사람은 어디에 있는 사람이냐, 그레데 섬이라는 데에 있다. 성경에 지중해 섬에 두 가지 중요한 섬이 있는데, 하나는 터키 밑에 있는 구브로 섬이 있고, 요새는 키프로스 섬이라고도 해요. 그리스가 있고 터키 있고 터키 밑에 구브로 있고 그리스 쪽으로 그레데 섬이 있어요. 그레데 여기에 디도가 담임목사로 가 있어서 사도바울이 편지를 했습니다.

 

편지를 했는데, 그 편지 내용이 사도바울이 쓴 편지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시가 되는 겁니다. 편지 썼다고 다 계시가 되는 것이 아니지만 성령께서 다 편지를 성경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이 디도서에 나오는 그레데에 디도를 보낸 이유가 1장 5절에 보면 나옵니다.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바로잡고 나의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6절,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 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찌라” 7절,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뭐 그렇게 되어 있어요.

 

뭐, 장로나 감독이나 역시 교회 감당할 사람들은 다 마찬가지인데, 장로나 감독이 될 때, 사람들은 교회에 장로나 감독이 어떤 사람들이 되는가를 굉장히 궁금하실 거예요. 사도행전 20장 28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감독자라 하는 것은 무엇을 위해서 있느냐 하면, 하나님이 교회를 교회답게 하기 위해서 감독이 있는데요. 그 교회가 뭐냐 하면 사도행전 20장 28절에 보면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

 

그럼 참된 교회는 뭐만 증거 해야 돼요? 하나님의 피. 하나님의 피만 최종적으로 나타나겠죠. 하나님의 피만. 그럼 여기서부터 복잡해집니다. 하나님의 피로 산 교회다, 그럼 그 교회 예배당 앞에다가 플래카드로 “하나님의 피로 산 교회입니다.” 이렇게 하면 저절로 그 교회가 하나님의 피로 산 교회가 될까요? 안 되겠죠. 앞에 뭐가 있느냐 하면 성령께서 치게 하셨으니까. 여기서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 계시다면 플래카드라든지, 교회 건물이 몇 층짜리라든지, 평수라든지, 얼마냐 하는 것이라든지, 그런 것에 대해서 성령께서 신경 안 쓰시겠죠. 가정집에서 모여도 괜찮고 어디든지 괜찮아요.

 

성령께서 이미 확정했어요. 교회는 하나님이 피로 산 교회다. 그럼 하나님이 피로 산 교회는, 그럼 우리가 뭘 하면 되느냐, 예수그리스도께서 피로 산 취지와 의미를 드러내면 되죠. 참 쉽죠. 진짜 쉽죠. 예수님이 피로 산 취지와 의미를 드러내면 되는 겁니다. 노아 방주 마지막에, 방주에 다 타고 내릴 때, 그들이 뭘 했어요? 제사 드렸잖아요.

 

그럼 방주 안에 뭐가 실려 왔다는 겁니까? 하나님이 정결한 제물로 죄 값을 치른다는 그 내용이 내내 그 방주 안에 담겨있었죠. 담겨 있었던 것이 그 방주가 육지에 부딪히고 난 뒤에 제일 먼저 한 것이, 노아의 나무판자 그런 것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진짜 그것은 형식이고, 취지는 하나님의 정결한 것의 제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 물의 심판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그걸 보여주는 거예요.

 

그럼 그 제사 드리고 난 뒤에 뭐 또 한 것이 있습니까? 없죠. 그게 최종적이죠. 최종적. 그래서 뭘 할 거냐? 할 때, 뭐를 시작으로 할 거냐 하고, 뭐를 최종목표로 할 거냐 하고, 이게 같은 말이 아닙니다. 같은 말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피로 사셨기 때문에 바르게 하자.” 그러면 예수님의 피로 사셨다고 치고, 그 다음에 뭐가 붙게 되게 되면, 그것은 예수님의 피 가지고는 모자라고, 뭔가 더 행함이 붙여져야 이게 교회다운 것처럼 그렇게 오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목표가 예수님의 피로 사신 교회라고 한다면, 교회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일이라도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교회에 저해한다든지, 그것을 왜곡시킨다면 그거는 추방해야 되겠죠. 그 일을 누가 하느냐, 성령의 인침을 받은 감독과 장로들이 해야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그레데 교회가 모자랐던 부분입니다. 그게 잘못인 거예요. 그게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그 취지가 영 안 드러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디도에게 니가 당회장하면서 장로를 세우고, 또 감독을 세워서 하나님의 그 교회다움의 취지에 합당하도록 하라고 그렇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전혀, 별로 어려운 것이 없죠? 근데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자기 죽음으로 흘리신 피로 자기 교회를 치게 했던 그것이 실제적으로,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해야 그게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가 되느냐? 그게 어려운 거예요. 애가 공부를 못했다. 그래서 엄마가 “종아리 걷어!”라고 해서 매로 때렸습니다. 애 종아리에서 피가 좀 났습니다. 그런데 애는 시험 한 번만 치는 것이 아니고 시험 치고, 또 치고 해야 되니까, 그럼 엄마가 그 매를 없앨까요? 놔둘까요? 그 매를? 회초리를? 딱 딴 데다 놔두죠. “또 성적 내려가면 맞을 줄 알아?”하고 매를 딱 놔두죠.

 

교회라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피라면, 하나님의 죽음의 피라면 수시로 등장하는 것이 뭐겠습니까? 예수의 피를 근거로 해서 그렇게 교회 됐다, 안 됐다를 이야기하겠죠. 그러면 예수의 피라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인데, 예수님은 누구 때문에 죽었습니까? 사람들의 죄 때문에 죽었잖아요. 그렇죠? 죄 때문에 죽었단 말이죠. 그럼 죄 때문에 죽었다면, 죄가 있으면 예수님의 피라는 것이, 그 의미가 순간순간 살아날까요? 안 살아날까요? 순간순간 살아나죠.

 

그러면 우리가 죄인인 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그 형편에, 그레데 교회의 형편에 맞는 새로운 지시와 명령들이 사도를 통해서, 예수님을 통해서 계속해서 주입이 되어야 되겠죠. 주입이 된다 이 말이죠. 예를 들면 “이제부터 너는 중국음식만 먹고 한 달간 버텨라.” 이렇게 할 때, “나는 한식 먹고 싶은데? 중국음식 어떻게 먹어?” 그러면 “회초리 한 번 맞아봐? 시키면 시키는 대로 중국음식 먹으라고 하면 먹으란 말이야!” 그런데 맞는 것이 싫어서 중국음식 먹죠. 오늘은 자장면, 내일은 짬뽕. 그 다음날은 자장면, 그 다음날은 짬뽕. 이렇게 먹는 거예요.

 

애가 한 일주일 번갈아서 먹어보니 자장면, 짬뽕이 너무 맛있는 거예요. 졸지에 의인되어 버린 거예요. 아, 이거는 뭐 회초리의 존재 의미가 없는 거예요. 그 다음에 딱 가니까, 울면이 딱 나오네. 그 다음에 탕수육이 딱 나오고. “싫어.” “맞을래? 회초리 가져와!” 중국음식은 자장면, 짬뽕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볶음밥도 있어요. 기스면도 있고. 지금 제가 아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팔보채도 있고. 있다 이 말이죠. 사람은 고만 몇 개 지키게 되면 그게 습관이 돼가지고 잘 지켜요. 스스로 잘 지킨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추가적인 어떤 계명과 지시가 없으면 자기는 예수 믿고 난 뒤에 새 사람이 되었다고 착각을 합니다. 그러면 회초리라는 십자가를 갖다 치워버려요. “나같이 착한 사람을 때릴 것이 어디에 있다고 때려?” 이래 나온다 말이죠. “때릴 것이 어디에 있다고?”

 

그렇게 돼버리면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가 아니고, 인간들의 친목단체가 되죠. 취미 맞는 사람, 레벨이 맞는 사람, 수다 떨 수 있는 대상자, 그렇게 돼서 슬슬 교회가 커지면 사기 치는 사람도 오게 되죠. “이자 20퍼센트 줍니다.” 해가지고 덤벼드는 사람도 있고, 세상편리를 위해서 오는 사람도 있고, 장학금 준다고 하니까 교회 다니려고 하는 사람도 있고, 그런 일이 생기는 거예요. 그럼 그 사람들은 뭡니까? 만약에 어떤 교회에서 장학금 준다고 하니까 그 교회에 등록한다면, 그거는 뭐냐 하면 둘 중의 하나겠죠. 하나님의 덕을 보자고 하는 경우가 있고, 어차피 절인데 돈이나 빼먹어야지 하는 경우가 있고, 이런 생각이 들겠죠. 어쨌든 간에 둘 다 옳은 생각은 아니에요.

 

상대방의 약점을 노리고, 상대방이 무식하다고 해서 함부로 대할 수 있는 권한은 우리한테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본인이 키우지, 스스로 자기를 키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주지 않는 한 뺏을 권리는 없어요. 주지 않는데 뺏겠다는 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이 땅에서 더 살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죽이면 그냥 곱게 죽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늘 말하는 것은 하루치만 사세요. 하루치만. 더도 덜도 말고 딱 하루치. 저와 여러분이 몇 시간 안 남았어요. 우리의 수명이. 열두시 넘어가면 땡입니다. 더는 욕심내지 맙시다. 딱 하루만 삽시다. 온갖 세상 걱정, 병든 어머니는 누가 돌보나, 그거는 주님이 돌보게 되어 있으니까. 쓸데없이 병든 아버지는 어떻고, 자식 셋은 어떻게 키우나, 주께서 키우죠.

 

어차피 자식이라는 것은 출몰했기 때문에, 니 어느 별에서 왔니? 이런 대상이기 때문에, 그걸 내 소유라고 그렇게 애달아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항상 어떤 행동을 할 때,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잖아요. 그럼 그걸 갈라디아서 2장 20절로 번역하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죠. 그럼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들의 모임이 교회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럼 교회는 뭐냐, 이미 죽은 자들의 집합이 되는 겁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죽은 자들.

 

이미 죽은 자들이라는 말을 구태여 왜 붙여야 되느냐 하면, 내가 죽은 자가 되지 아니하면 그리스도가 살아 있다가 증거 되지 않기 때문에. “니 죽었는데 왜 살았나?” “그리스도가 살려줬어.” 그리스도에게 모든 책임을, 주체자리를, 주도권을 주 앞에 넘기는 기능을 하라고 교회가 있잖아요. 그래서 교회에서 모이는 것은 괜찮아요. 교회에서 살면 안 됩니다. 교회에서 모이는 것은 괜찮은데 교회에서 살면 안 돼요. 왜? 어차피 산다는 것은 역시 안 죽고 살겠다는 거거든요. 여러분들이 같이 모여, 그 다음에 뭐냐 하면 “같이 모여 죽읍시다.” 하면 괜찮은데, “같이 모여삽시다.”라고 나오니까 문제가 되는 거예요. “같이 모여 삽시다.”라고 하는 것이.

 

교회에서 복음 전하니까 설움 받더라, 복음 아는 사람끼리 나옵시다. 좋아요. 근데 복음 아는 사람끼리 나와서 우리끼리 삽시다. 하면 안 돼요. 나옵시다. 그래서 우리끼리 죽읍시다. 이래 돼야 하는데, 우리끼리 삽시다. 하면 나온 교회나 이쪽 교회나 마찬가지에요. 자존심 싸움, 체면싸움 한 것 밖에 한 게 없어요. 그래놓고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백날 해봐야, 주께서는 나는 니한테 그런 간판 준 적 없다고 이래 나오는 겁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라고 이야기할 때, 그 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춥다고, 길이 미끄럽다고, 차 못 몬다고 많이 안 나오신 것 같은데, 참 하나님께서 눈 잘 오게 하셨죠. 원칙은 공식이 하나 있는데, 요새 제가 왜 이렇게 공식을 좋아하는지 모르겠어요. 원칙이라 할 수 있는데, 원칙은 뭐냐 하면, 먼저 이스라엘이란 이스라엘 속에 있어요. 이스라엘 속에 진짜 이스라엘이 들어있습니다. 이스라엘 속에.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교회 속에 교회가 들어있어요. 원칙이고 공식이에요.

 

그럼 이스라엘 속에 이스라엘이 들어있다고 하면 두 겹이라고 보면 되잖아요. 그럼 바깥의 이스라엘은 이게 깨어져야 하는 거예요. 균열이 일어나요. 금이 막 가야 돼요. 금이 갈 경우에만 안에 있는 진짜 이스라엘이 보이는 겁니다. 금이 갈 경우에만. 금을 내는데, 여기에 동원되는 것이 율법이죠. 산상설교 같은 것. 유대인들, 자기들은 이스라엘이에요. 그럼 이스라엘 되게 하는 유대인의 법을 자기들이 알고 있습니다. 이혼할 때는 증서만 써주면 된다. 이미 자기들이 알고 있어요.

 

그런데 증서만 써주면 이혼이 가능하다고 하는데, 예수님은 뭐라고 했습니까? 안 되죠. 예수님이 간음이라든지, 살인이라든지, 할 때 이런 것의 기준이 따로 있어요. 기준은 뭐냐 하면 주님에 대한 사랑, 주님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그거는 어떤 모양을 아무리 흉내 내도 그거는 들통 나게 되어 있어요. 주님에 대한 사랑은. 그럼 주님에 대한 사랑의 기준이 뭐냐 하면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처럼 그거와 동일하게 사랑하지 아니하면 그거는 사랑이 아닙니다.

 

그럼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열 두 제자들도 아니고, 일반 70인의 제자들도 아니고, 그리고 유대인은 물론 아니고. 누가 있어요? 없어요. 아무도 없죠. 백부장도 아니에요. 그 누구도. 막달라 마리아도 아니에요.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위해서 울었다고 구원받습니까? 아니죠. 울었다고 하면 저도 울고 향수, 스킨 같은 것 뿌리고하겠어요. 나도 울겠어요. 사람이 행함으로 구원받지를 못해요.

 

그런데 예수님한테 칭찬받는 백부장이나, 사람들의 그런 행위가 이렇게 군데군데 나오잖아요. 군데군데 나오죠.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그들의 행위 안에, 그것을 인간의 행위로 보지 마시고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취지에 합한 행위가 그 사람에게 있는 겁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 돌아왔죠.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행하신 그 취지가, 예수님과 간음하다 잡힌 여인의 관계에서 이미 그게 담겨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담겨있기 때문에.

 

세상이 너를 죄인이라고 하더라도 기죽지 말라는 겁니다. 백 오십만이 촛불 집회하더라도 박근혜는 기죽지 마라. 너무 정치적인 발언인데. 박근혜를 두둔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절대로 박근혜를 두둔하는 것이 아니에요. 예를 든다면 지금 수세에 몰렸으니까, 간음한 여인하고 비교해서. 천만인이 너를 친다고 하더라도 두려워하지 마라.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너의 관계다. 이 말이죠.

 

예를 들어서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소경 같은 경우에, 소경이 실로암에 갔다 와서 구원받았습니까? 아니에요. 소경이 행한 모든 행위 가운데, 예수님 자기가 할 일을 소경에다가, 소경하고 손잡고 일을 벌인 거예요. 연출을 하신 거예요. 그걸 통해서 소경은 알죠.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내 뜻이 아니옵고 주님 당신의 뜻입니다.” 고 관계가 그 사람을 구원하는 겁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났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앉은뱅이가 도로 앉은뱅이가 안 되고 걸었잖아요. 가다가 음주운전 차에 치어가지고 도로 앉은뱅이가 되어도 그 앉은뱅이는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그 앉은뱅이가 일어난 것은, 그것은 하나의 일시적인 증거물이지 그걸 계속 붙들고 있으면 안 돼요.

 

오늘날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어떤 권사님이 40년 동안 온갖 좋다는, 실력 있다는 미장원을 다 다녀도 머리가 마음에 안 드는 거예요. 근데 이상하게도 촌 허름한 곳에 가서, 뭐 바쁘다보니까 머리 한 번 하자고 가서 했는데, 41년째 비로소 마음에 맞는 머리가 나왔다면 이거는 주님의 은혜입니다. 근데 머리 안 깎고 한 20년 귀신처럼 길러서 갈까요? 기르면 잘라야 되지 않습니까? 은혜인줄 알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머리 잘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또 다른 주님의 관계에서 주신 선물이 따로 있으면 이제는 그런 것은 잊어야죠. 은혜 받아서 머리 잘나왔다는 그것을 간증으로 할 수 있겠습니다마는, 그게 좀 억지라는 느낌이 들긴 들어요.

 

25년간 만두 같은 만두를 먹고 싶어 하다가, 주의 은혜로 기도 가운데 응답받아서 어느 만두집에 갔는데 만두가 맛있더라. 감사하죠. 그래서 뭐든지 감사하면 주의 은혜인데, 문제는 그 만두가 주의 증거물이라고 하면 곤란해요. 그 다음부터는 만두에서 자장면으로 바꾸든지 해서 바꿔야지, 거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돼요. 순간순간, 하루하루 살면 주님께서 또 증거물을 주시기 위해서 내일의 삶을 주께서 또 살게 하시기 때문에.

 

오늘은 눈 오는 것으로, 그래서 많이 참석하지 않은 것으로 주께 감사한다면, 내일은 내일 또 뭐, 일이 있어서 그 일 통해서 또 감사하게 만들고. 모레 되면, 뭐 모레까지 살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또 살게 된다면 모레까지 또 있을 것이고. 그 다음날에 뭐 귤 먹다가 목이 막혀서 죽게 된다면 죽는 그 순간까지, “죽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하면서 꽥하고 죽죠. 이것도 내 몸 덩어리가 하나님이 함께 있음의 증거물이 되는 겁니다.

 

그런 일을 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부서져야 하는데, 이스라엘이 부서진다고 하면 이스라엘이 지진이 일어난다는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사고방식 자체가 균열이 일어나는 겁니다. 사고방식 자체가. 왜냐하면 좋던 사고방식도 시간만 지나가게 되면 그게 자기의가 되어버려요. 이게 옳다가 되고 진리가 되거든요. 진리가 돼버리면 아까 처음에 이야기한 것처럼 회초리를 쳐야 돼요. 회초리를. “아이고, 이제 뭐 진리 알았으니까, 하나님! 우리가 잘 알아서, 아주 의견 맞추어서 잘 하겠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이 그래서 이단이라는 이유가 옳은 주장을 막 해가지고 그것만 남기다보니까, 그 옳은 주장이 마치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성경에는 십자가라고 했는데, 옳은 교리, 옳은 신학이 구원의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모든 사람들은 그러한 사고방식에 대해서, 같은 아담의 자손들이니까, 얼추 동의 할 수밖에 없어요. 아담의 자손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남 구원이 아니고 내 구원이잖아요. 내 구원. 구원받으려면, 뭐 영어 시험을 쳐도 학원에 가야되듯이, 천국 가는데도 학원이 필요한데, 그 학원이 뭐냐 교회고. 교회가면 천국 가는 아이디어와 정보를 제공할 것이 아닙니까?

 

천주교에 가면 뭐 시키는 것이 많잖아요? 고해성사하고 일곱 가지 성례하고. 그럼 교회는 뭐 하지? 성찬식하고 세례식 하는데, 교회는 교회 나름대로 뭐가 있느냐 하면 4가지 교회다운 것이 있답니다. 교제를 해야 되고, 예배에 참석해야 되고, 교육을 해야 되고, 전도를 해야 되고. 가만히 따져보면 삼성생명하고 다를 것이 전혀 없어요. 그런데 예배시간에 무슨 시간이 있느냐 하면 헌금시간이 있거든요. 교제 나눌 때 회비내야 되거든요. 전도할 때 선교헌금 내야 되잖아요. 교회 가면 교육관 짓는다고 돈 내잖아요. 결국 돈 내라는 거잖아요. 네 가지 다 돈 내라! 에요. 돈 내라. 돈 내라. 돈 내라. 돈 내라. 돈 내라. 돈이 돈을 굴려가는 그거 한 겁니다.

 

그런 교회가 이렇게 두께를 차지해요. 우리는 신자 되고 싶어도, 이미 우리는 두 겹 바깥에 있어도 들어가야 돼요. 들어가서 남들이 다 그렇다고 하면 자기도 그런 줄 알아요. 그러니까 이 안, 속에 있는 이스라엘은 없는 거예요. 백 퍼센트 이거는 신자라고 여기기 때문에, 하나의 원만 있어요. 신자가 신자답게 신자 만들 생각을 하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정된 자를 구원한다면 이게 아닐 수 있다는 것, 교회로 구원된다는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교회 사기꾼이 와서 뭐 160억 원을 사기 쳤을 경우에, 이럴 경우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그러니까 처음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나 구원받으려고 교회를 이용했는데, 나 구원받기 위해서 필요한 그런 것들이 이게 상당히 불신적이고 자꾸 의문점이 생기는 거예요.

 

헌금을 하되 십일조만 하면 된다고 해놓고 십의 이조, 삼조, 가만히 계산 따져보니까 십의 일조를 막 넘어서는 거예요. 이거 어디까지 해야 되느냐, 나중에는 교육관 짓는다고 하면 십의 이조가 아니라 이거는 빚내야 할 판이다 이 말이죠. 애를 교회에 보내야 한다. 그래야 구원받는다고 하는데, 이미 애한테는 고3때 일요일에 학원 특강이 있고, 학교에서 불러내면, “주여 이 시험을 이기게 하옵소서.” 해서 뭐 그것까지는 좋다고 합시다.

 

“그래, 니가 주의 은혜로 안식일까지, 주일 다 지켜가면서 했으니까, 앞으로 앞일은 책임져주겠지. 보상해주겠지.” 이런 미신을 가지고 대학에 또 들어가거든요. 문제는 교사를 해야 하는데 이 교사 시험 치는 것이 주일에 시험 친다. 어떻게 할 건데? 교사 되려고 했는데 교사 시험이 주일에 있으면 어떻게 할 거예요? 논산훈련소에서 소집하는데 일요일에 모집한다고 안 가면 탈영병이 되는데? 그럼 군대 대신 자식 교도소에 보낼까요? 여호와 증인인가?

 

지금 그 사람이 어디에 걸려들었습니까? 무조건 안식일, 주일을 지켜라. 여기에 걸려들었죠. 이 말은 뭐냐, 법을 믿는 이유가 뭡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법을 믿어요? 자기 구원받으려고 법을 믿습니까? 그러니까 법을 지켜서 누가 이득을 봐요? 법을 지켰을 경우에 누가 혜택을 받습니까? 법은 내가 지키고 남이 혜택 받나요? 법 지킨 내가 혜택을 받잖아요. 그렇죠? 그러니까 이걸 벗어나려면 뭐가 골칫거리입니까? 내 구원이 골칫거린 거예요. 내 구원이. 내 구원위주로 성경이 되어 있는가를 보게 하시는데, 이거는 성령이 아니면 이렇게 될 수가 없어요. 성령이 아니면.

 

왜냐하면 성령이 아니면 육이거든요. 육은 어디서부터 출발합니까? 나로부터 출발한다고요. 나로부터. 니고데모가 온 것처럼 나로부터 출발하는데, 성령은 어디서부터 출발해요? 예수님부터 출발한다고요. 내가 구원되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의 구원을 드러내기 위해서 기능적으로 활용하는 겁니다. 이게 지금 어디까지 이어져 있느냐 하면 교회가 지금 장로를 세우는 것이 아니에요. 장로 기능이 교회를 구성하게 되어 있어요. 장로 기능, 감독 기능이.

 

교회 있고 장로가 두 명 필요하다. 이게 아니고, 장로 값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제대로 장로 값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미 그것은 장로가 세워진 겁니다. 집사하는 사람이 있다면 집사로 세워진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 성령님은 인간의 조직과 싸우기 때문에. 인간의 조직은 항상 의식적으로, 겉으로 이스라엘 만들듯이, 형식적 교회를 자꾸 만들고자 하는 거예요. 만들고자 해요.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그런 생각이 우리에게 나오기 마련입니다. 이번에 수련회에 그걸 했어요. 목사님, 수련회 강의 들어보셨어요? 첫째, 둘째 시간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물질적 매개물을 통해서 신에게 나간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금송아지잖아요.

 

금송아지 이름이 뭡니까? 금송아지라고 불렀습니까? 뭐라고 불렀습니까? 여호와로 불렀잖아요. 여호와로. 신기하죠. 인간이 왜 그 물질적인 그것을 통해서 신을 찾습니까?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에요. 누가 그 더러운 것을 그렇게 만들었어요? 사랑만 남겨놓고 떠나간 그 얄미운 사람이 있잖아요. 사랑만 남겨놓고 간 그 주체가 누구에요? 악마 아닙니까? 악마.

 

아담이 하나님 앞에서 뭘 해 입었어요? 되도 않는 치마는 왜 입었어요? 치마는? 이게 타락 후에 범죄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수련회 때 이거 설명한다고 온갖 노래까지 다 불렀는데. “alba lux, diva mea, diva es silentissima”[팬텀싱어]에 나온 라는 노래 가사에요. 여신을 찬양하는 거예요. “새벽의 빛이여, 나의 여신이시여 고요함은 영원하다.”

 

왜, 여신을 찾습니까? 왜, 해와 달과 별을 그렇게 찾습니까? 신이 만들었잖아요. 신이 만든 것을 찬양하게 되면 신이 좋아하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신을 만든 것이 아니라 달을 아예 여신으로 보는 거죠. 달을. 신이 만들었다는 것은 핑계고 실제로는 해와 달, 별. 해는 이집트에서 섬기죠. 안 그렇다고요? 1월 1일에 사람들이 어디에 가요? 1월1일에 사람들이 교회 갑니까? 어디에 갑니까? 저 해 뜨는 데 가죠. 그리고 정월대보름에는 달뜨는 데 가요. 달은 자기 집 옥상에도 뜨는데 뭐하려고 가는지 모르겠어요. 순서 기다리면, 시간되면 다 올라오게 되어 있는데. 먼저 독점하려고. 찜하려고. 달에도 좌석 표 있는가? 달에도 뭐 0순위 있습니까? 1순위 있고? 주택청약할 일이 있습니까? 쫓아가서 먼저 빌고 난리고.

 

하나님은 인간을 너무 많이 압니다. 잘 알아요. 자기가, 그걸 토테미즘, 애니미즘이라고 하는데, 어떤 자연을 통해서 신을 섬기겠다고 하는 그것은 뭐가 누락이 안 됐느냐 하면, 본인이 스스로 자기를 부정할 수 있는 어떤 토대가 없어요. 개혁주의 신학이 이단인 이유가 그 신학 앞에서 자기를 부정할 수 있는 어떤 근거가 개혁주의 신학에는 없습니다. 신학이라는 그 정보만 달랑 외우면 되는 거잖아요. 삼위일체 특징이 뭡니까? 삼위일체 외우면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삼위일체 외운 내가 지옥 간다는 근거를 내부에서는 알려주지 않고 있어요. 그게 제시가 안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근데 십자가 피는 뭡니까? 십자가 피는 달랑 외우면 구원받습니까? 십자가 피가 우리에게 뭘 의미해요? 니는 죄인이라는 거예요. 뭘 해도 죄인이죠. 그러면 예수님 피를 믿어도 뭐가 돼요? 죄인이잖아요. 그게 십자가 피의 특수성 아닙니까? 특수성. 주님은 우리하고 거래하지 않습니다. 열두 제자하고 거래하지 않습니다. 도마가 뭘 보고 예수님은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습니까? 창자국과 못 자국 봤죠. 그건 뭐냐 제자들이 예수님을 내팽겨 쳤다는 거예요. 내팽겨 쳤다는 말은 예수님 안에 뭐가 들어있다? 제자들은 스승님을, 주님을 내팽겨 쳤다는 정보가 주님 안에 들어있는 거예요. 그게 십자가 안에 들어있는 거예요.

 

그래서 십자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나로 인하여 주님께서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습니다, 라는 것을 십자가를 보고서 그걸 발견하는 겁니다.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를 발견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십자가 앞에서 콩 내놔라, 팥 내놔라, 자식이 어떻고, 병 고쳐 달라, 사업 잘 되게 해 달라, 교회 부흥되게 해 달라, 그런 소리가 나오겠어요? 안 나오겠어요? 교회는 점점 물질화, 이걸 물성화 라고 해요. 물성화. 물질의 성질을 갖고 있는 변화. 자꾸 물성화 돼요.

 

그게 대표적인 것이 천주교잖아요. 그냥 가다마 입고 나오면 밋밋한지, 온갖 도포로 다 덮고, 도포가 또 밋밋한지 금박으로 해가지고, 모자는 빵모자 쓰고, 뭐 애들 누가누가 잘하나 재롱잔치 하는 것도 아니고, 나이 80넘은 다 큰 어른이, 그리고 또 지팡이는 왜 들고 나와요? 그게 물성화 된, 신의 가현체로 보는 거예요. 신은 우리와 함께 있다는 가현체로 보는 겁니다. 그것에 사람들이 쉽게 동조하죠. 그리고 거기다가 지정된 날짜에 교회에 나오죠. 주일성수에다가. 장소까지, 집에서 예배드리면 안 된다는 거예요. 교회 나와야 된다는 거예요. 이게 전부다 물성화 된.

 

그래서 장소까지 갔다 오게 되면 뭔가 자기 할 일 다 한 것처럼 속이 시원하다는 거예요. “주님, 오늘도 주일 지켰심데이~복 안 주기만 해봐라?” 자기 십자가는 어디로 갔는지 관계없고, 내 위주로 하는 그것,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뭘 의미하느냐,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이 어떤 짓거리를 해도 십자가에 죽을 수밖에 없는 죄가 된다는 것을 고백하는 거예요. 그래서 주의 십자가 앞에, 말씀 앞에 모일 때는 원 없이 실컷 죄를 짓고 와야 돼요. 그 죄를 가지고 와야 됩니다. 뭐 죄 안 지었는데 어떻게 하느냐? 절대로 그런 거짓말 하면 안 돼요.

 

왜? 죄 지으라고 한 주일 동안 충분하게, 넉넉하게 주께서 보낼 사람 보냈고, 일어날 사태 일으켰고, 부부싸움 하게 만들었고, 자식과의 갈등 일으키게 만들었고, 돈 문제 다 걱정하게 만들었고. 주님의 자료가 최순실 자료보다 더 많아. 이만큼, 이만큼씩 쌓였어요. 특검 조직해서 천사 보내가지고, 니 죄는 이만큼, 이만큼 돼요.

 

그 죄는 바로 제일 가까운 산상설교 보면 알 수 있잖아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만약에 어떤 가난한 사람을 내가 도와줬는데, 도와준 그 사람의 형편이 약간 나아졌을 때, 길을 가면서 딱 생각나죠. 내가 도와준 그 사람 집 앞에 발걸음이 멈추어지는 순간이 바로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아는 순간입니다.

 

그렇다면 전에 그 사람을 도와준 것은 죄를 더욱더 죄 되게 하기 위한 주님의 시나리오에 말려든 거예요. 주님의 시나리오에. 어찌 그리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자기가 한 착한 일을. 제가 지난 낮 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죠. 인생이라 하는 것은 자기 잘남을 위한 방어술의 축적이라고 했죠? 기억이 안 나십니까? 중간에 수련회가 있어서 다 잊어버렸습니까? 방어술의 축적이다.

 

이렇게 이야기만 해봐라. 나는 이렇게 했다고 딱 나오는, 항상 자기를 변호하고 방어하는 그 기술이, 누적이 된 것이 바로 인생살이입니다. 인생살이. 늙어빠진 게 무슨 연애고? 이 나이가 어때서? 갑자기 이 나이가 어때서? 자식 다 키우고 연애 좀 하면 어때?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이지. 힘자랑 해볼까? 하면서 갑자기 팔굽혀 펴기 하고. 팔 굽혀 펴기 하는 것하고 연애하고 무슨 관계인지 모르겠지만. 아이고, 주책도 그런 주책이. 뭐든지 자기 정당성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무너뜨리는데, 이 자체가 자기 동일성화 되어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가, 교회 전체가 나를 대변해주기 때문에 그래요. 나를 대변해주는 것. 그럼 이건 뭐냐 하면 주님의 십자가를 봐야 될 것을, “내 교회입니다.”라고 밀어붙이는 거예요. “주님 이건 내 교회입니다. 잘 되게 해주세요.”

 

그건 뭡니까?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셨다는 것이 빠져버렸어요. 회초리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행전 20장 28절에서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해놓고, 그 뒤에 29절에는 조용한 것이 아니라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이리도 그냥 이리가 아니라 흉악한 이리에요.

 

어디 아프리카 대초원에 교회를 지어놨어요? 갑자기 이리가 왜 나옵니까? 양이 나오기 때문에 이리가 나온 거예요. 그러면 이리라는 것은 뭘 노리고? 양을 노리고 하는 거예요. 또 30절에 보면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있다 이 말이죠. 그럼 감독하는 사람들은 뭡니까? 이런 사람들이 오기 때문에, 양떼를 노리고 사기를 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교회에다가 감독을 세웠다면, 그 감독은 정말 자기 교회가 양인지, 양이 아닌지를 계속해서 확인할 필요가 있죠.

 

양이 양 되게 하는 그 기준은 뭐 밖에 없어요? 예수님의 피 앞에서 우리는 뭐다? 의인이 아니고 죄인이다. 그 이야기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가지고 그것을 실생활 속에다가 파급을 시켜버린 거예요. 파급을 시켜버리면, 말씀이 실생활 속에 들어가 버리면, 오늘 안양에서도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마는, 현실에 말씀이 들어온 것이 아니고 말씀 자체가 사우나 실이에요. 말씀으로 사우나 실을 해놓고 그 안에서 현실을 꾸역꾸역 만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현실은 항상 누구의 표적이 되고 누구의 지적을 받습니까? 말씀의 지적을 받는 거예요.

 

우리가 말씀 지킬 때만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라는 그 폐쇄된 공간에 들어서게 되면, 적어도 CCTV 한 오천만대가 찍어대는 거예요. 말씀으로. 내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우리를 카메라로 찍어버린다니까요. 찍어버리면 우리는 이 숱한 성경말씀의 CCTV 안에 의인이라고 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러나 그걸 고마워할 줄 알아야 해요. 왜? 그럴 때 우리는 말씀이 통합이 된, 완성이 된 십자가의 피를 또 다시 느낄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십자가 가운데 어떻게 실생활과 연관되는가, 거기에 대해서 복음 전하는 목사들은 그 연관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 말씀을 실생활에 했을 때 거기서 나오는 것은 우리 행함으로는 그걸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줘서, 그러니까 용서받았기에 죄를 짓는 겁니다. 회개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았기에, 이미 구원받았기에 계속해서 자기 지은 죄에 대해서 회개가 가능해요. 구원받은 사람만이 죄를 지을 수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뭡니까? 구원받았으니까 착해야 한다고 하죠. 착해야 된다고 하잖아요. 이 방향이 한쪽은 천국가고 한쪽은 지옥가요. 물론 어느 방향인지 다 아시죠? 십자가만 계속 크게 보여야 할 텐데, 이거는 지 잘난 맛에 나오니까 그거는 지옥 갈 수밖에 없죠. 예수 믿고 착해집시다가 아니라, 예수 믿고 왜 내가 어떤 점에서 죄인인가를 더욱더 알아갑시다.

 

그러기 위해서 뭐 하라는 말씀을 우리는 거부하지 말고, 하라는 말씀에 엑스레이 찍히듯이 찍힙시다. 찍히게 되면 자기 딴에 잘 지켰다고 하는 그것, 그것은 몇 개 안 되고, 못 지킨 것이 더 많이 나와요. 못 지킨 것이. 그래서 매일매일 살면서 매일매일 하나님께 영광과, 특히 마지막에 감사가 나옵니다. 감사가.

 

자, 한 번 정리해봅시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에 감독자를 세운다면, 이 감독자는 바로 존재가 아니고 기능이 되는 거예요. 오늘 강의 제목은 존재와 기능이에요. 존재와 기능. 존재에서 어떻게 기능이 되느냐 하는 겁니다. 더 어려운 이야기에 대해서 합시다. 어떤 가정이 있다. 그 가정은 아빠, 엄마, 자식이 있다고 합시다.

 

가장된 남자(아빠)가 장로가 되었다고 합시다. 어떻게 될 수가 있습니까? 이미 존재적으로 그 집안의 가장인데? 가장인데 어떻게 장로가 될 수 있어요? 사람들은 말합니다. 목사님, 그 쉬운 것도 몰라요? 자기 집에서는 가장이었다가 교회 와서 장로 임직 받으면 장로잖아요. 이렇게 이야기하잖아요. 그게 틀려먹었다는 거예요. 그게. 그게 틀려먹은 거예요.

 

교회가 임직을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 가장이 가장이면서도 가정에서 장로의 모습을 보이게 되면, 그 교회에서 그 사람을 장로로 추인을 해줘야 해요. 추인. 추인이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차후로 인정을 해주는 거예요. 차후로 인정해주는 것. “정말 저 사람은 성령께서 세운 것 같아.” 그렇게 해서 장로 되게 하는 거예요.

 

거기에 대한 항목이 뭐냐 하면 오늘 본문 디도서를 보게 되면 1장 6절,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 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찌라” 이런 자라고 하는 말씀이, 디도서가 말씀이죠. 그 말씀이 배후의 십자가에서 나오죠. 강의 다시 해야 됩니까? 하나님이 교회 세울 때 자기 피로 세웠죠. 십자가 있죠. 그럼 십자가 외에 모든 기능의 말씀들은 뭡니까? 십자가를 더욱더 나타나게 하기 위한 말씀이라고 아까 제가 얼른 말씀 드렸는데.

 

이 십자가가 현실화 될 때에, 십자가로 모아지는 많은 말씀들이 주어지잖아요. 그 주어진 말씀들이, 말씀의 능력으로 주어지게 되면, 어떤 사람이 자기 집에서 그냥 소박하게 아빠로서 사는 거예요. 그런데 디도서에 있는 말씀의 기능이 그 사람에게 덮쳐버리면, 그 사람은 졸지에, 이거 덮치고 난 뒤에도 맨 가장이에요. 가장인데 옆집에서 와서 하는 말이 “아이고, 그 사람 장로감이네.” 하면 그 사람은 졸지에 장로가 돼버린다는 이런 말입니다.

 

교회가 있어서 시키는 것이 아니고, 누가 봐도 저 사람은 저 사람의 솜씨가 아니고, 십자가에서 죽었던 예수님의 능력이 저 사람으로 하여금 장로에 합당한 기능들이 발휘되고 있으니 우리가 어찌 저 사람을 장로로 안 세울 수가 있으랴! 이래 된다 이 말이죠. 이렇게 할 때, 우리가 임직했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의 능력으로 그 사람을 임직했다. 이래 되는 거예요. 그게 베드로전서 4장에 나오는 겁니다. 무슨 일을 하던 간에 주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하라 이 말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능력과 말씀으로 하라(벧전4;11).

 

장로 임직식이 왜 필요하죠? 뭐 돈 우려낼 일이 있습니까? “저 사람은 장로하면 안 돼. 왜? 최씨기 때문에. 김씨가 돼야 해.” 이런 일은 도저히 용납이 안 돼요. 투표하는 것 까지는 좋다 합시다. 투표했는데 저 사람은 내가 원하는 장로가 아니라고, 이미 장로 됐는데, 물러가라고 하면 그 장로가 뭐라고 합니까? “내가 이러려고 장로 됐나? 하죠.” 교회 꼬라지 참 좋습니다.

 

10분 쉽시다.
 이미아(IP:122.♡.188.127) 17-01-24 23:44 
서울 의존교회 170113b (존재와 기능)-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첫째 시간에 장로라는 사람의 존재는 그냥 아빠에요. 그냥 남자죠. 남자. 가장이에요. 자식이 있고. 그럼 여기서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뭐냐 하면, 가장이라면 마땅히 책임감이 있을 거란 말이죠. 어디에? 자기 가족에게. 그럼 우선순위가 돼버려요. 자기 가족을 우선하면서 교회를 우선한다. 그럼 우선이 둘이 돼버리잖아요. 그럼 우선되는 기능이, 가장으로서의 기능과 장로라는 기능이 이게 충돌을 일으키고 순서가 매겨진다 이 말이죠. 그게 과연 가능할까? 하는 겁니다. 그게 가능할까?

 

자, 장로의 기능이 뭐냐 하는 그걸 통해서 이걸 알아봐야 해요. 장로의 기능은 교회를 세우기 위함입니다. 장로, 감독, 집사도 마찬가지고요. 그럼 교회를 세운다고 하면 교회 해놓고 장로 지명하고 집사 세운다고 하면, 이건 이미 있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에요. 이미 있는 교회는. 그거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가리거든요. 그럼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아까 했죠. 이스라엘 속에 이스라엘 있다고. 교회 안에 교회 있다고.

 

그럼 교회 안에 교회 있을 때, 우리 교회 안에 또 교회 있겠지. 이런 것은 없어요. 항상 우리 교회는 이미 백퍼센트 다 교회라고 간주하고 교회를 시작하는 겁니다. 백퍼센트까지는 안 되더라도, 팔십 퍼센트라도 교회 안에 교회라고 우기고 있는 거예요. 만약에 이십 퍼센트를 교회라고 우기는 교회는 없습니다. 팔십 퍼센트가 가짜기 때문에. 팔십 퍼센트가 가짜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우리는 가짜라도 좋다고 하는 이런 교회는 없잖아요. 대략 봐서 우리 교회는 참된 교회가 맞다. 다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그렇지 않는 교회는 없어요.

 

인간은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다 엉터리는 아니다. 이게 인간의 생각입니다. 교회라는 것을 두고 두 가지의 측면이 있어요. 하나는 뭐냐, 사람들이 교회라고 보는 것 하고 주님이 교회를 생각하는 것이 달라요. 왜냐하면 교회라고 할 때 사람들은 뭐냐 이게 존재입니다. 존재에서 교회라고 할 때 이 교회는 존재의 의미로 교회를 생각합니다. 교회 여기 있다. 교회에 모였다. 모였다가 흩어져도 일단 모였으니까 교회잖아. 이런 경우를 말합니다. 모였다가 흩어져도 각자 다 무슨 동, 무슨 동에 살기 때문에, 머릿속으로 계산해요. 점 조직들을 모아보면 하나의 교회가 되고, 흩어져도 하나의 교회로 규정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어쨌든 간에 그거는 흩어지든 모이든 관계없이, 가식이다 불가식이다 관계없이 그거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존재적 교회밖에 몰라요. 본인이 존재기 때문에. 내가 여기 있다는 것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장로가 하나의 가장이라고 했죠. 그럼 가장은 가정이 있잖아요. 있음은 뭡니까? 존재잖아요. 하나의 가장으로서의 있음입니다. 있음인데, 성경에서는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 이 장로가 주님이 볼 때는 이게 기능이거든요. 기능.

 

그러면 주님의 존재에서 어떤 기능을 해야 교회가 되느냐, 이 원칙과 가장의 존재에서 어떤 기능을 해야 교회의 장로가 될 수 있느냐 하고, 그 원리가 같은 원리가 되는 겁니다. 같은 원리가 돼요. 예수님만이 존재에요. 그걸 가지고 이번 수련회에 했죠.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죠. 그리스도의 몸은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몸과 지체 사이에는 존재가 아니고 기능이 되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비유, 은유라고 하죠. 인간은 하나의 안개 같은 존재가 되는 거예요. 이 땅에 잠시 나타나 자기 역할을 하고 죽어서 사라지면 그만인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무너지거나 하지 않아요. 그리스도의 몸은 그대로 유지하기 때문에. 2001년 9월 11일에 탈레반인지, 알 카에다인지, 비행기가 미국 쌍둥이 빌딩 세계무역센터와 충돌했습니다. 이게 철근구조물로 되어 있고 콘크리트 구조물로 안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철근구조물로 되어 있어서 충격 받으니까 와르르 무너진 거예요.

 

분명히 존재인데 비행기라는 기능이 와서 때려버리니까, 빌딩이라는 존재가 날아가 버렸어요. 다 무너졌어요. 삼천 몇 명이 죽었어요. 그래서 그 자리에다 미국에서 제일 높은 건물을 새로 지었습니다. 이거는 콘크리트로 해서 비행기가 와도, 뭐가 와도 내려앉는 법이 없어요. 세계에서 가장 단단한 건물로 지어놨습니다. 꼭 절벽 같아요.

 

예수님의 교회가 그런 거예요. 어떤 인간이 타락한다, 뭐 방탕 한다고 해도 교회 건물은 끄덕도 없어요. 왜? 기능을 바꾸면 되니까. 일곱 교회, 일곱 교회 다 망해도 괜찮아요. 그래도 일곱 교회는 유지해요. 그 일곱 교회 기능이라고 하는 것은 계속해서 영원하기 때문에. 영원하거든요. 그래서 장로 하나 나갔다고 무너지고, 이거는 뭐 알 카에다인지,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어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러면 책임자가 누구에요? 예수님이 책임자죠. 책임자가 어설프게 일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레데 교회에 장로가 필요한데 너희 중에 괜찮은 사람 없어?”라고 주님께서 아쉬워서 사람들한테 묻지를 않아요. “협조 좀 해라. 협조. 나 그리스도 몸인데 지금 팔이 하나 없다. 딴 데는 다 팔이 있는데 그레데 교회는 팔이 하나 없어. 지체로서 팔 기능을 해야지.” 주님한테는 이런 게 없어요. 주님께서는 성령의 은사, 기능을 통해서 이미 다 확보해놨어요. 장로 될 사람, 집사 될 사람, 다 확보해놓고, 장로는 이래야 되고, 집사는 이래야 되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딱 맞는 기능을 추인하는 겁니다. 딱 맞는 기능을.

 

어떤 회사에서 여자에게 일을 많이 부려 먹기 위해서 “짧은 치마 입는 여자는 뽑지 않습니다. 남자처럼 바지 입고 활동성 있는 여자를 원합니다.”하고 통보를 딱 해놨는데, 회장님 딸이 미국에서 왔는데 치마를 그렇게 좋아해. 그런데 그 자리에 회장님 딸이라는 백으로 고만 됐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다른 직원들이 “치마 입는 여자는 안 된다고 했는데 왜 합니까?” “바꿨다. 고거 바뀌었다.” “왜 바꿨습니까?” 회장님 딸 넣기 위해서 바꾼 거예요. 그럼 치마 입은 사람은 안 된다는 법을 왜 했는가? 회장님 딸이 올 때까지 전부 다 그걸 거절하기 위해서, 배제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그 말씀을 한 거예요. 의도적으로.

 

그래서 어떤 사람이, 어떤 남자가, 가장이 장로다 되었다는 말은 그 기능이 유효하면 장로가 되지, 만약에 장로라는 기능을 유지하고, “나는 어차피 가장인데 교회 가서는 장로하지.” 이렇게 하고 있는데, 그런데 갑자기 “나는 앞으로 장로다.”라고 이렇게 돼버리면 기능이 뭐로 바뀝니까? 기능이 존재로 바뀌잖아요. 그러면 땡! 탈락이에요. 그 장로는 뭘 가리느냐,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가려버립니다. ‘내가 아니면 장로 될 잽이 없지? 장로 될 그런 자격이 없지?’ 이래 나오면 땡인 거예요. ‘나나 되니까 우리 교회 목사하지, 누가 목사 하겠어?’ 이러면 땡인 거예요.

 

기능이어야 해요. 기능. 그러면 존재라는 것은 기능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까? 그 사람의 기능은 그 사람의 존재에서 나온 것이 아니에요. 그 사람의 존재는 가장이에요. 가장에서 장로가 안 나온다니까요. 그러면 어디서 나옵니까? 존재는 예수님에게서 나와요. 하나님의 피로 사신, 피 흘리신 예수님으로부터 그 기능이 나와서, 비록 가장이지만 예수님의 장로의 기능을 하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그 장로의 기능은 뭐냐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을 증거 하는 겁니다. 그럼 예수님의 피 흘리심을 증거 한다고 장로가 되어서 기도할 때 “기도합니다. 피. 피. 피.”하고 내려오면 되는 겁니까? 아까 이야기 했죠. 모든 말씀이 피에 수렴된다면, 그 모든 말씀을 가지고 실생활에 성령께서 다 적용을 시켜버립니다. 적용을 시키면 거기서 뭐가 나온다? 죄가 나오죠.

 

죄라는 것은 굉장히 다양해요. 굉장히 다양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다양해도, 이 현실 생활이 아무리 사건이 있고 변화가 있고 다양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의 범주 안에서 다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되게 하기 위한, 말씀의 티를 내기 위한 범죄만이 일어나요. 모든 게. 아무리 도망쳐도 새로운 법이 추가될 필요가 없습니다. 있는 법의 해석 안에서 모든 범죄는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 모든 계명에 총괄해서, 무슨 뜻입니까? 바로 사랑이죠. 그래서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뭘 받는다? 저주받는다. 결국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하지 않는 것은 믿음도 아니에요. 사랑으로 하지 않는 것은 소망도 아니고.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뭐라고 했습니까? 사랑이라. 모든 것이 사랑이라는, 근데 그 사랑이 어떤 사랑이냐, 예수님이 죽으신 사랑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폐쇄된 공간은 주님의 사랑으로 덮여 있고, 그 사랑을 거부한 자는 바로 지옥 가는 거예요.

 

그 사랑을 알아먹는 사람은 죄인으로서, 이미 구원받은 의인으로서 이 땅에서 죄인의 모습을 계속해서 들추어 보여주는 겁니다. 자기가 죄인인 것을 이야기하면서, 나타나는 것은 후회가 아니고 감사로 이어져요. 그래서 안양에서도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마는, 제가 우리교회 이강진 성도님의 글에 댓글을 달아놨는데, 여러분 보신 적이 있습니까? 강도가 구원받는 것은 강도 외에는 구원받을 길이 없기 때문에 강도가 된 거예요.

 

그러면 자기기 강도짓 한 것에 대해 뭘 느낍니까? 감사를 느끼죠. ‘어휴! 그때 강도가 아니고 강도 잡는 형사도 되었다면 큰일 날 뻔 했다.’ 딱 그 강도짓을 해야 십자가에 같이 죽게 되고 구원을 받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 강도짓에 대해서 굉장히 감사를 느끼죠. 감사를 느끼는 것은 좋은데 자기가 강도생활 할 때 죽은 사람과 그 가족들을 생각해보세요.

 

사도바울은 사람 죽였어요? 안 죽였어요? 스데반 집사부터 죽이기 시작했잖아요. 그 스데반 집사한테 돌 던진 사람이 누구의 하청업자에요? 사울의 하청업자입니다. 사울이 전부 다 강남파하고 신사동파 조폭들 동원해서 죽인 거예요. 그 주동인물은 사울이죠. 그리고 많은 사람을 잡아 죽였다고 본인 입으로 말했잖아요. 잡아 죽이려고 신바람이 나서 다메섹에까지 갔다고 하잖아요. 그러면 자기가 사도 됐으면 책임을 져야지. “삼가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하고 찾아가던지. 뭐 그런 것이 없잖아요. 세상에 뻔뻔하기도.

 

그래서 제가 그 댓글에서 자기 인생에 책임지지 말라고 했죠. 자기 인생에. ‘내가 참 부모를 잘 모셨으면..’ 더 이상 우에 모셔야 되는데? 자기 인생에 책임지지 마세요. 그거는 마귀의 장난입니다. 그래서 제 말을 듣고 하는 말이, “목사님. 그 말씀은 막 살라는 말씀보다 더 즐겁습니다. 더 신납니다. 이제는 뭐 술 먹고 남의 상점 다 때려 부숴도 내 책임 아니고 주님의 책임이라고 하면 되겠네요?” 그럴 용의가 있으면 해봐요?

 

그래가지고 교도소에 가거든 그것도 자기 책임이 아니고 주님의 책임이고. 교도소 가게 하신 구원의 코스에요. 그거 하다가 더 얻어맞아 가지고 이빨 네 개 나가면 주께서 네 개 나가게 하신 거예요. 자기가 때린 것만 생각하지 말고 얻어맞아가지고, 형사한테 잡혀가서 10년 징역 사는 것도, 그것도 주의 은혜로 그렇게 생각할 각오가 되어 있거든.

 

자, 지금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이겁니다. 어떻게 존재에서 기능이 나오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걸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제가 수정란을 예를 들겠어요. 난자와 정자가 결합하면 이게 수정란이 되죠. 수정란이 되게 되면 여기서 뭐가 일어나느냐 하면 세포분열이 일어나요. 두 개에서 네 개. 네 개에서 여덟 개...막 불어납니다. 나중에는 진짜 많이 불어나요. 불어난 거기에서 포배가 돼요.

 

포배라는 것이 있는데, 이 포배라는 것이 뭐냐 하면 수정란이 있는데, 이 수정란에서 난자한테 에너지가 공급이 줄어들게 되면 더 이상 크지를 않아요. 그럼 이게 수정란이 동그랗게 되어 있다가 움푹 이렇게 함몰이 되는데, 함몰되는 이유가 산소를 얻기 위해서, 산소 많은 표면층을 넓히게 되면 동그랗게 되어 있다가 가운데 옆이 들어간 강낭콩 모양처럼 돼요. 이렇게 되면서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내배엽 외배엽 중배엽, 하는 배엽이 생겨요. 아직까지는 눈, 코, 입, 이런 것이 없다는 이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왜 이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여기 난자, 정자에너지가 계속해서 나오잖아요. 나오면서 나중에 어떤 눈과 코가 될 때에 그 층위가,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에너지 기능이 층위를 이룬다. 어떤 경계선을 이루어요. 경계선을 이루가 되면 눈, 코, 입, 아무것도 없다가 점차 눈이 될 것은 눈으로 모이고, 귀가 될 것은 귀로 모이고, 소위 기관들이 생겨나죠. 기관들이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이 이야기를 제가 왜 하느냐 하면, 성령이 임하게 될 때, “나 장로 할래.” 이렇게 해서 장로가 되는 것이 아니고, “나 집사 할래.” 이렇게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나 감독 할래.” “나 설교 잘해” 이렇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성령이 은사를 주게 되는데, “은사 줄 사람은 딱 보면 안다.” 이런 게 없다는 말입니다.

 

자연세계도 아까 한 이걸 규명하는데 힘들어요. 우리가 이걸 딱 딱 구분을 지어서 이거는 눈, 이거는 코, 이거는 입, 이렇게 되어야 되는데, 처음에는 그게 뒤죽박죽으로 혼란 상태에 있는 거예요. 혼란 상태에 있다가, 뭐 어떻게 했더니만 나중에는 코 나오고, 입 나오고, 구부러진 곳이 나중에는 눈이 되겠죠. 눈. 이거는 발 튀어나오겠죠. 왜 하필 눈 쪽이 발이 안 되고 눈이 되느냐? 이거는 어떤 이유도 없어요. 그냥.

 

에너지가, 기능이 있으면 힘이 있으니까, 힘의 에너지가 자연스럽게, 자연스럽다는 것은 모르겠다는 뜻이에요. 우리는 모르지만 그렇게 결과로 볼 뿐이에요. 그래서 제가 이번 수련회 할 때, 나뭇잎이 노란 잎이 되거나 붉은 잎이 될 때에, 우리는 분명히 중간 중간에 색깔이 변하는 것을 보면서도, 그 색깔 변한 그 중간을, 왜 이렇게 되는지를 어떻게 규명할 수가 없어요. 규명할 수가. 왜 그렇게 되는지를.

 

“너 언제부터 그렇게 성경을 좋아했어?” 이걸 우리가 어떻게 말로 설명합니까? “서울대학 갔는데 어떻게 갔어?” “공부가 제일 쉬워요.” “나는 공부가 제일 안 쉽던데?” “그건 니 생각이고. 나는 쉽다니까.” “왜 쉬운데?” “몰라. 그거는. 공부가 쉬운 것을 쉽다고 하는데 왜?” 니 기준 가지고 그거는 아니라고 그럴 필요가 없다는 이 말이에요.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의 다양성은 인간의 개인적인 기대사항이나 희망사항이나 이런 게 소용이 없어요.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히 성경에서 무엇이 있어야 할 것을 아시니까 달라는 기도를 하지 말라고 했죠. 달라는 기도를.

 

어떤 분이 태국을 갔는데, 11명이 곗돈 모아서 태국을 갔어요. 수련회 기간이지만 1년 전부터 되어 있던 거라 할 수 없이 수련회를 빠지고 갔는데, 11명이에요. 11명. 11명인데 꼭 방을 6개 안 만들고 5개 만들어요. 그럼 어떻게 되느냐, 호텔방에 2명, 2명, 2명, 2명 들어가다 맨 마지막에는 3명이 들어가야 되거든요. 아무래도 2명보다 3명이 불편하니까, 그 3명 들어갈 때는 가위바위보를 해야 돼요. 가위바위보를. 그런데 수련회 빼먹고 간 집사님이 하기만 하면 두 명이 자는 방에는 못 가고 맨 세 명이 자는 방에 끼여 자게 된 거예요. 몇 번이나 그랬거든요. 근데 그 동행자 중에 어떤 권사가 있었던 모양이에요. 그 권사가 하는 말이 “손 줘봐라. 내가 안수 기도해줄게. 니는 저주받은 손이기 때문에” 이게 바로 주께서 그런 기도를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뭐가 필요하다는 것을 기도하지 마라. 그래서 끝까지 2명 방에서 못자고 3명이 자는 방에서 잤어요. 아주 간증을 해요. 간증을.

 

인간의 보통 기능은 이미 자기가 자아 됨을 기준으로 해서 기능이 나옵니다. 따라서 내가 이 비타500이 맛있다고 할 때는 어떤 기능으로 나오느냐 하면 나한테 좋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이 비타500을 먹어야 되겠다는, 자기만을 위한 이기적인 기능이 발산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모든 인간입니다. 아담에 속한 모든 인간이거든요.

 

근데 여기 장로 보세요. 디도서 1장 6절,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이것은 사람의 능력으로, 역량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이것은 어떤 경우라도 일단은 자기가 좋은 쪽으로, 자기 유리한 쪽으로, 자기 도움이 되는 쪽으로, 자기 이익이 되는 쪽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7절에 보면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이렇게 한다는 것은, 이거는 본인의 역량이 아니고 어디서 온 성품이냐 하면 성령을 통해서 이 사람에게 은사를 준 거예요. 그렇게 되면 그 어떤 가장이 장로의 기능을 해야 하는데 존재가 뭐냐, 자기 육이 존재죠. 근데 이 장로 기능은 주님의 존재에서 나온 기능이죠. 이게 싸우겠어요? 안 싸우겠어요? 매일같이 싸우죠. 매일같이.

 

“아이고, 장로님 이렇게 훌륭하십니까?” “훌륭하기는 개코나 훌륭해요? 매일같이 싸웁니다. 내 고집대로 뭘 하고 싶어도 주님이 허락하지 않네요.” 그러니까 누구만 증거 하겠습니까? “나는 고집대로 하는 죄인인데 주께서 주의 말씀대로 이렇게 하게 하시니까 나는 죽을 지경입니다.” 나는 죄인이라는 이 말이거든요. 결국 이 말은 뭐냐, 하나님이 피로 사신, 그 하나님을 증거 하는 교회가 되는 거예요. 교회가.

 

그러니까 이거는 장로하고 싶다고 손들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돈 내고 장로질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장로직 기능이 지금 누구한테 덮쳐서 그 사람을 못 살게 구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집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는 집사가 안 나오는데. 자, 그렇다면 이렇게 디도서 1장 5절부터 봤는데, 그래놓고 이제 1절부터 봅시다. 1절,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2절,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이걸 한마디로 줄이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약속에 위배되거든 일체 동정이나 천히 여길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지금 교회의 문제점이 뭐냐 하면 주님의 약속도 모르는데 너무 많이 동정하고 있고 위로하고 있어요. 격려하고 있어요. 주의 약속도 모르는 사람한테.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생의 소망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너무 두둔하고 있어요.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자기 피를 줬는데, 교인이라는 작자들이, 또 교인입네 하는 작자들이 휴머니즘을 너무 많이 발휘하고 있어요. “아휴, 괜찮다니까.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주님께서는 피를 주고 산, 피를 줘야만 교회된다고 그렇게 했건만, 자기들은 그 놈의 정 때문에, 인정에 끌려서, 이거는 뭐 같은 성도라고 얼싸안고 바리케이드를 치는 거예요. 피 앞에서.

 

“목사님. 이 분은요, 교회 나왔는데, 세상에 때 끼니가 없어가지고, 굶어죽을 판입니다. 우리 교회가 안 도와주면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근데 복음은?” “복음은 뭐 모르죠. 만날 시장에 가서 장사한다고 뭐 압니까? 도와줍시다. 교회로 도와줍시다.” “안 돼요. 그냥 죽으라고 해요. 그냥 죽으라고. 잘 됐네. 나도 죽는 것이 소원인데. 축하합니다.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 소원인데 잘 됐습니다.” 이래야 된다니까요.

 

1장 1절에서 4절을 왜 줬습니까? 교회 만들라고 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이 세상의 어느 나라, 어느 민족, 어느 국가, 지구상에 있는 모든 것보다도 예수님의 피가 더 소중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디도를 보낸 거예요. 디도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보다 딴 걸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은, 그것은 교회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근데 여기서 주의할 것이 있어요. 이런 것이 참 어려워요. “목사님! 목사님! 저 사람은 복음을 고백 안 합니다.” 이렇게 고자질을 하는 사람이 막 있는데, 꼭 고백을 해야 되겠어요? 고백을 하게 되면 이번 수련회에도 나왔죠. 공식 나왔습니다. 진짜 좋은 공식인데. 공식이 뭐냐, 10미터와 3미터 공식, 나왔잖아요. 들어본 사람은 알 거예요. 10미터 앞에서는 꼭 신자 같아. 근데 3미터에서 보니까 신자 되려고 그렇게 애를 써. 10미터쯤에서 볼 만한 신자 되기 위해서 3미터부터 지금 자기에게 애쓰고 있는 거예요.

 

디도를 보내고 사도바울이 하나님의 종이라고 한 것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종을 개무시 한다는 것을 전제로 깔아놓은 겁니다. 이번 수련회에서도 그런 이야기했지만,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이사야보고 “이사야야! 니 백성한테 외쳐야지? 누가 가겠나?” “제가 가겠습니다.” “가라!” 이래 하신 것이 아니고, 이사야로 하여금, 먼저 이사야를 부르죠. 찾아오잖아요. 이사야가 놀래버려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이 정도가 아닙니다. 뭐라고 했어요? 망하는 백성들 가운데 하나가 되어서 화로다 망하게 된 거예요. 그러면 자기한테 주어진 사명이 뭐냐 하면 내가 화로다 망하게 된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 유다백성, 전부다가 망해도 이의 걸 수 없는, 망해야 될 그러한 소식을 누구보고 전하라고? 미리 망하게 된 이유를 알게 된 나(이사야)보고 전하라고 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아주 장단을 맞추죠. 니가 가서 전한다고 해서 그 백성들이 믿을 위인들이 아니라 이 말이죠. 이사야는 알아요. 왜? 망하는 백성은 망해야 하는 백성이기 때문에, 망하는 백성이 알아들을 리가 있겠습니까? 망하는 백성이 분명히 망한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주께서 자기를 보내잖아요. 망하는 백성한테 맞아 죽어도 그건 당연한 것이죠. 왜? 그래야 망하는 백성이니까. 이 이사야의 이 성격이, 이 성질이 예수 그리스도한테 그대로 주어졌고, 그 성격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에게 주어졌고, 그 성격이 디도한테 그대로 전해져야 된다 이 말이죠.

 

뭘 기대해요? 뭘? 성령 전하면 믿을 줄 압니까? 사도행전 마지막에 보니까 나오죠. 성령이 충만해서 전했는데 어떻게 됩니까? 결과가? 흥! 칫! 뿡! 하고 다 가버렸어요.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그 대목이 나오죠. “내가 갈 줄 알았어. 믿을 리가 없지.” 이게 사도바울의 태도라니까요. 왜? 예수님의 죽으심을, 예수님을 떠나보낸 이 세상에 계속 흔적을 남겨야 되기 때문에 그래요. 흔적을 남겨야 되기 때문에.

 

이 거룩한 말씀 시간에 또 연예계 이야기를 해서 안 되겠지마는, 복음을 위해서는 뭔들 못하겠습니까? 복음을 위해서 뭔들? 홍상수 감독하고 사귀는 여자 이름이 뭡니까? 김민희죠. 하여튼 TV보기는 되게 많이 봐. 홍상수 감독이 자기 부인하고 이혼소송 중에 있잖아요. 소송 중에 있다고요. 그러면 홍상수 감독이 어디에서 영화를 촬영한다. 그럼 사람들은 그 촬영장에 김민희가 같이 있겠네. 가보니까 거기에 김민희가 같이 있는 거예요. 같이 산다는 소문도 있고. 그럴 줄 알았어. 이렇게 되잖아요. 그럴 줄 알았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그러면 사도가 가게 되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인 그 인간들이 어딜 가도 가득한 거예요. 어떤 교회 가면 수천 명이 되고, 어떤 교회 가면 수만 명이 된다고요. 전부 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인 사람들이에요. 그게. 그렇다면 성령을 받은 주의 종은 거기서 뭘 봐요? 십자가 복음을 전해버리죠. 그럼 어떻게 됩니까? 뭐 욕하고 난리가 나죠.

 

그렇게 십자가 복음 전하면 우리가 돈 바치고 재산 바친 이 교회는 어쩌란 말이에요? 이 교회는? 이 부동산 어쩌란 말인가? 이 교회 운영을 누가 하는데? 분명히 교회가지고 복음을 반대할 거 아니냐? 이 말입니다. 그래가지고 분명히 교인 수가 삼천 명에서 삼십 명으로 줄어들면 책임질래? 이렇게 나올 게 뻔하다는 말이죠.

 

근데 그걸 누가 안다? 십자가 복음 전하는 사람이 그걸 미리 알거든요. 예수를 죽인 자가, 예수를 죽인 그 현장에, 홍상수 감독이 영화 촬영하는 곳에 김민희가 있다는 것을 뻔히 알고, 김민희가 있는 곳에 홍상수 감독이 있다는 것을 뻔히 아는 것처럼, 예수를 죽인 자들이 있는 곳에는 주님의 소식, 복음 다 거부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그들은 뭐냐, 예수 이름을 빙자한 유대교, 유대인들이죠. 그러면 그들이 예수를 반대한다고 이러면 안 돼요. 반대한다고 하지 말고 반대하는 이유는 바로 유대교 성격에다가 예수라는 껍데기, 기독교라는 용어만 갖다가, 거기다가 입힐 뿐이겠죠. 그걸 가지고 흉악한 이리라고 하는 겁니다. 흉악한 이리가 되는 겁니다.

 

자, 정리해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는지 정리해봅시다. 자, 십자가에 죽었던 이유가 뭐라고 했습니까? 내 구원받고자 하는 거죠. 정리할 때 여러분이 분명히 정리해야 해요. 우리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이유가 자기 구원받으려고 하잖아요. 자기구원. 죽어서 좋은 데 가려고.

 

그럼 오늘날 복음을 반대하는 소위 개혁주의 교회가 왜 십자가 복음을 반대합니까? 개혁주의 신학에 입각해서 교회 만들면 그것이 누굴 구원한다? 나를 구원한다는 생각이 강렬하기 때문에 유대인처럼 예수를 죽일 수밖에 없는 거예요. 지금껏 돈 투자하고, 십일조 하고, 친목단체까지 되고, 땅 바치고, 장로 되고 했던 이 모든 것이 졸지에 뭐가 되느냐 이 말이에요.

 

그럴 때 디도서를 이야기해야 돼요. 예수님의 십자가, 하늘나라 영생보다 니가 갖다 바친 돈 중에 어느 것이 더 소중하냐고 디도를 보낸 겁니다. 거기에다가. 오늘날 디도만한 설교자가 있겠어요? 사람들이 자꾸 헌금 많이 하면 믿음 좋다고,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만 증거 한다고 하는데, 제가 수련회 때 했잖아요. 복음 전한다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믿지 말라고.

 

복음 전하는 그걸 빌미로 해서, 복음 전하는 그게 몇 미터냐 하면 10미터거든요. 가까이 가보니까 복음 티내는 3미터 작업하고 있는 거예요. 온갖 것 다 끌어당겨요. 언약에다, 십자가에다, 오직 또 복음만 이야기하고. 어디서 베꼈는지 온 흉내는 다 내고. 교회는 없다. 그리스도의 몸이 교회다. 들은풍월은 있어가지고 다 이야기해요. 어디서? 10미터에서. 가보면 참, 신자 아니에요. 그렇게 이야기하고 신자인 사람을 거의 못 봤어요.

 

딱 한 마디만 하면 돼요. “그렇게 복음 전했어요.” “전했는데? 그래서? 그게 죕니다.” “그게 어떻게 해서 죈데?” 실컷 10미터에서 해놓고 3미터에서 그것도 죄라고 하니까 그만 나자빠져버려요. “예수 믿었으면 거룩한 행동을 하라고 성경에 나와 있는데 왜 그러느냐? 거룩하라고 해서 우리가 거룩 하려고 애썼는데 그게 왜 죄냐?” “복음을 받았으면 본격적으로 죄 짓습니다.”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왜 그런가 하면은 교인들도 문제에요. 성도 되는 것도 성령의 은사가 있어야 되는데, 성도가 아니고 교인이 돼버리면 교회 갔다가 후딱 자기 집으로 가요. 자기 집의 가장이거든요. 왜? 존재거든요. 자기 존재에서 오는 기능밖에 없어요. 내가 가장으로서 교회 가는 기능을 하게 되면, 나뿐만 아니고 우리 가정이라는 존재가 천국 갈 것이다. 역시 개인적인 이득을 위해서 교회에 가주는 것이 돼요. 교회 가주는 것. 신년예배니까 가주고. 신년예배니까 또 돈 들고 가서 헌금함에 넣고. 또 올해도 무사히 해가지고 기도하고 빌고 오고. 이게 점집이지 무슨 교회에요? 점집이지.

 

2절에 봅시다.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거짓이 없다는 말은 사람한테 양보 안 한다는 이 말이에요. “하나님 좋은 게 좋고 우리 협상하고 타협합시다.” 이런 게 없다 이 말이죠. O아니면 ☓고, ☓아니면 O에요. 왜? 주님은 거짓을 모르기 때문에. 그러면 디도가 할 일은 굉장히 간단해요. 거짓이 아닌 것만 증거 하면 돼요. 거짓이 아닌 것을 증거 하면 돼요. 그게 뭐냐, 우리 존재는 몽땅 다 거짓이다. 우리 존재는.

 

그러나 주님의 존재는 거짓이 없다. 따라서 주님의 존재로부터 오는 기능, 다시 말해서 성령이죠. 성령이 없으면, 성령세례가 없으면, 성령 안 받았으면, 그러면 성도가 아니죠. 성령세례 받은 사람의 특징은 뭡니까? 특징이 바로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 어디 앞에서?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기 때문에 십자가 졌다는 사실. 그겁니다. 이게 성령의 기능입니다. 은사입니다. 믿는 것도 은사에요. 존재가 아니죠.

 

근데 이렇게 이야기하면 “예수 믿는 내 존재는 뭐하면 됩니까?” 하고 기능으로 가다가 갑자기 존재로 가버려요. 예수 믿는 내 존재는 뭐합니까? 그러면 이렇게 할 수밖에 없죠. 매일같이 죄 짓는 기능을 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이미 죽었다고 했잖아요. 죽었는데 왜 자꾸 거기다가 미련을 둡니까? 죽은 놈인데.

 

이렇게 하면 그쪽에서 답답해가지고, 왜 죽었어요? 볼때기 땡겨 보면 아픈데 왜 죽었어요? 누가 힘줘서 땡기게 합니까? 주께서 힘줘서 땡기게 하죠. 어? 살았네? 살았죠. 주님 주시는 힘으로 살았죠. 우리는 죽고 주님이 주신 힘으로 우리가 사는 겁니다. 그러니까 볼때기를 땡기는 것도 주님이 주신 힘으로 땡기는 거예요. 살았는지 죽었는지 한 번 시험하려고 오후 3시 45분에 땡기게 하신 거예요.

 

이게 거짓이 없고 영생의 소망입니다. 어떻게 그런 것도 모르고 그냥 봐버리면, 사도바울이 그레데에 선교센터를 짓게 해서 교회하려고 했는데, 교회를 보니까 장로가 없어서 장로 세우려고 디도를 보냈구나. 이래 돼버려요. 그리고 그 내용은 잡다하게, 하나님의 종, 영생의 말씀, 십자가가 어떻고, 이런 것을 줄줄이 외우면 구원되는 줄로 알고 있어요. 성경을 이렇게 보는 것이 기존의 교회들이 자기 정당화 때문에 그런 식으로 성경을 보는 거예요.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라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빨리 장로 세워서 하나님 앞에 교회라는 티를 내려고 하는 거예요. 티를 낼 때, 여기 보니까 한 아내의 남편이 되고, 책망할 것이 없고,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 없다고 이렇게 하니까, 일단은 이런 사람을 안 뽑아요. 장로 뽑을 때 흠 많은 사람을 안 뽑습니다. 어떤 사람을 뽑느냐, 돈 되는 그런 사람을 뽑아놓고, 장로 됐으니까 하나는 처리해야지. 돈이 목표에요. 돈이.

 

돈이 목표기 때문에 까짓것 돈 챙겨놓고 차차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면 되잖아요. 방탕 덜 하고. 술집에 덜 가고. 일주일에 세 번 가는 것 두 번으로 줄이고. 농땡이 자녀 교회로 불러내고. 장로 됐는데 니가 안 오면 교회에서 뭐라고 한다. 빨리 나온나! 나오면 십만 원씩 준다고 해서, 일당 줘서, 우리 애 여기 모셔놨습니다. 불순종 하는 일이 없는 자녀입니다. 우리 가정은 없어요. 좀 전에는 있었는데, 장로 되기 전에는 있었는데 이제는 없습니다. 이거 할라고.

 

7절도 마찬가지에요.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감독이라는 말은 그냥 설교자라고 보면 되죠. 이 감독위에 뭐가 있습니까? 사도가 있죠. 사도가 있다는 말은 위에 말씀이 있다. 말씀이. 주의 복음의 말씀이 있는 거예요. 감독은 지 맘대로 하는 것이 감독이 아니고, 복음의 말씀을 증거 하는 거죠. 증거자니까. 그럼 누가 감시를 하겠어요? 그 교회에 성령 받은 성도들이 감시를 하겠죠. 누가 너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친히 성령께서 너희를 가르치리라. 요한일서 2장 27절. 그 말씀대로 견제 받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감독이 처음에는 한 몇 개월 동안 십자가 복음 외치다가 서서히 이제 갑질 하고 싶은 거예요. “지들만 고기 먹고.” 이래가지고. 중이 쓴 책 제목에 그런 게 있습니다마는. 책 제목도 희한하지만. “자기들은 맛있는 것 다 먹고 목사는 홀대하고. 나 안 해. 나 목사 안 해.” 이래 나오면 성령 받은 교인들이 어떻게 나오겠어요? “언제 니가 그만둘지 우리가 기다리고 있었어.”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각자 성령의 기능 안에서, 성령 안에서 교회입니다. 성령의 기능 안에서 서로 필요한 대로 하면 되는데, 누가 성령의 기능이 아니고 육적인 기능을 해버리면 다른 성령의 기능을 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상처를 입고 힘들게 되겠죠. 그러면 뭡니까? 설교자로 누가 오기를 고대하겠죠.

 

그러니까 어떤 존재자가 감독 된다고 할지라도 그걸 계속 부재 한다는 생각은 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그럼 나는 목사 안 하고 교인 될래.” 교인되더라도 마찬가지죠. 교인은 성령이 계속 있을 때 교인되죠. 성령이 있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까 성령이 없었다. 10미터에서는 있는 줄 알았는데 3미터에서는 아니다. 그러면 성도가 그 교회를 나가든지, 안 그러면 성도 아닌 것을 감추기 위해서 그 교회를 장악하든지 해야죠. 니가 가라 하와이! 해가지고 성령 받은 교인들은 천국 다 보내고, 자기가 다니는 교회는 지옥 돼버려요.

 

8절을 봅시다.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을 좋아하며” 나그네를 대접한다. 나그네를 대접할 때, 커피 몇 잔 드려야 대접하는 겁니까? 한 잔 하고 리필 할까요? 말까요? 나그네 대접을 어떻게 한다는 말입니까? 어디 FM이 있어요? 기준이 있어요? 그냥 나그네를 대접하게 되어 있어요.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을 좋아하고. 이게 뭐냐 하면 어떤 기준이 없죠. 감독 집에 나그네가 왔을 때는 커피 한 잔과 녹차 두 잔을 마셔야 한다는 그런 법이 있습니까? 갈 때는 차비 받아가고. 이런 게 있어요? 없어요? 없죠. 그냥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이죠.

 

이런 이야기를 감독이나 일반 성령 받은 성도에게 줬을 때, 이게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성령이 임하지 아니하면 대접하는 것도 법으로 대접한다고 해서 아무리 해봐야 무한판단이 되기 때문에. ‘이보다 더 할 수 있는데.. 아니야. 용돈 차비하라고 이십 오 만원 주고, 커피 석잔 주고 했는데.. 아니야. 이십 칠 만원을 줘야해. 이십 오 만원 줘서 나빠.’ 법적으로 돼버리면 계속해서 마귀의 시험이 들어버려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나그네를 대접하더라도 “주여, 제가 아무리 해도 온전하게 못했습니다.” 이것이 대접하고, 라는 말을 주님이 던진 이유입니다.

 

그래가지고 전화해서 “제가 제대로 대접을 못했죠?”라고 하면, 나그네가 “어데요? 무슨 그런 이야기를 하십니까? 세상에, 이런 황공할 데가? 나 같은 죄인이 이런 대접을 받다니? 목사님의 대접에 황공할 뿐입니다. 저는 주의 은혜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누가 그 마음을 주셨겠어요? 성령께서 그 마음을 주신 거예요. 목사를 통해서 대접받게 하신 거예요. 그러면 나그네나 목사나 둘 다 이번 일의 성사 공로자는 누굽니까? 예수님이 그렇게 한 거예요. 주의 이름으로, 주의 힘으로 하신 것처럼 하라. 이 말이 또 다시 반복되는 겁니다. 말씀에 의해서.

 

또 어떤 목사는 나그네를 대접하기가 싫어요. “그저 냉장고 열어가지고 살코기 가져가지 말고 옆에 있는 목살 가져가시고. 우유 네 병 있죠? 두 병만 가져가시라고. 나는 대접할 줄 몰라. 원피스 다섯 벌 있는데 두 벌만 가져가라고. 신발장에 새 신발 네 켤레 있는데 두 켤레만 가져가시고. 나는 대접할 줄 몰라. 당신 대접 안 하겠어.” 무슨 이런 횡재가 다 있나? 하겠죠. 근데 목사는 지금 “주여, 또 나그네를 대접하지 못했습니다.” 이러고 있단 말이죠. ‘그때 우유 네 병 다 주는 건데. 뭘 먹겠다고 두 병밖에 안 주고.’ 이러는 거예요. 근데 전화해보니 “목사님. 대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누구 공로에요? 주께서 하신 공로에요. 전혀 나는 대접한 적이 없어요.

 

이게 뭐냐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면 온유와 화평과 양선과 자비와 형제우애가 막 나오는 겁니다. “내가 무슨 대접을 해? 내가 무슨 성도다워? 나는 장로 값도 안 돼.” 이걸 늘 유지케 하는 능력, 그게 우리가 가진 존재를 주의 존재에서 나온 십자가 기능으로 늘 이렇게 박살낼 때, 이게 바로 교회를 운영하는 운영방식입니다.

 

설교해놓고 죄짓고, 강의해놓고도 그게 죄고, 요약을 아주 잘해서 아주 백퍼센트 정답지 딱 내놨는데, 실컷 해놨는데, 백날 해도 “나는 깨지기 바빠서 수련회 내용이 하나도 생각이 안 납니다.” 이런 정답에 미치지를 못하니! 이런 정답에! “수련회 때 뭐 했는지 모릅니다. 나는 깨지기 바빠서.” 세상에! 저는 전화하고 한방에 가버렸습니다. 속으로 ‘졌습니다. 아이구, 죄만 졌구나. 죄만 졌어.’ 이게 바로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진짜 성령께서 나오게 하는 고백이 이 고백인데. 이 이야기를 하면 안 돼. 또 송민선 성도님 이 이야기 듣고 존재로 변하겠다. “내가 그 정도였어.” 또 존재로 변해. 내가 또 사람을 버려놓아.

 

그러니 이 모든 택한 백성, 여기 예정된 택한 백성, 영생 줄자에게는 반드시 영생이 가도록 주께서는 디도서라는 그레데 교회를 빙자해서 사실은 오늘날 우리보고 이 말씀을 주시는 겁니다. 너희는 죄인 아닌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모든 것은 주님 앞에 십자가만 바라보고 감사할 것밖에 없는 것. 이게 지금 현재적, 내일은 죽을지 살지 모르니까 지금의 교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디도서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보면서 감사만 나오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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