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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1 00:53:51 조회 : 1100         
인생브리핑 170210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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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IP:122.♡.188.127) 17-03-16 18:04 
서울 의존교회 170210a (인생브리핑)-이 근호 목사

 

자, 해봅시다. 디도서 1장 3절부터 해봅시다.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4절, “같은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참아들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의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라고 했죠.

 

이 편지는요, 지중해에 그레데라는 섬이 있잖아요. 그 섬에 목회하는 디도에게 편지를 보낸 겁니다. 그렇다면 이건 누가 봐도 사람이 사람에게 편지를 보낸 거예요. 사람이 사람에게. 사람이 사람에게 편지를 보내게 되면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나타내느냐 하면, 나한테 편지를 쓴 너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이니까 판단은 내가 알아서 할게, 라는 현상이 나타나는 겁니다. 왜냐하면 너나 나나 똑같은 인간이니까, 네가 편지 쓰면 나도 편지 쓸 수가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 수가 있어요.

 

그래서 사도바울의 디도서에 보면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3절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고 붙이는 이유가 “니 눈에 이게 사람 글로 보이냐?” 이래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 편지를 받는 사람은 뭘 해야 되느냐 하면, 분명히 사람이 썼는데, 이게 사람의 글이 아니고 하나님의 글이라는 도약을 해야 돼요.

 

편지를 받았으면, 보통 편지는 그냥 사람이 사람에게 보낸 편지로 봐야 하는데,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을 가지고 썼다고 한다면, 그 편지 가운데서 뭘 찾아내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요소를 찾아내야 해요. 누구 쪽에서? 편지를 받는 쪽에서. 만약에 찾는데 실패하면 어떻게 하느냐? 실패를 한다는 것은, 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썼는데 받는 쪽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지 못한다면 이건 애초부터 편지를 받을 자격이 못 된다는 그러한 결정이 나버리죠.

 

그래서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편지를 받았다고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편지를 받았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이 말씀, 이 편지를 쓴 사람과 하나님의 글이라는 느낌과 동일하게 같이 공감이 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럼 그 공감을 하는 원칙이 있어요. 그 원칙을 지금 제가 여기다가 쓸려고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에 하나님이 쓰는 원칙이 어떤 원칙이냐 하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 사람들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막 대할 때 두 가지의 반응이 나타나요.

 

하나는 성도의 반응은 뭐냐 하면 1.설명, 그것을 설명하는 거예요. 근데 불신자의 반응은 뭐냐 하면 2.여기에 합당한 행위를 만들려고 하는 거예요. 이 두 가지 가운데서 어느 쪽이 신자 쪽이냐 하면 설명하는 1번이 성도 쪽이고, 행위를 나타내려고 하는 2번은 불신자가 되는 겁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반대로 바뀐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는데, 제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세요.

 

하나님께서는 벌써 이 세상에서 일하시잖아요. 그러면 보탤 일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인간이, “이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데 나도 한 번 보태볼까?” 이렇게 자기가 일을 만들어서 하나님의 일에 보태버리면, 이거는 순전히 하나님의 일만 있는 세상이 아니고, “저도 좀 보탰습니다.”라고 자기가 개입이 되겠죠. 그게 불신자다, 이 말입니다. 그게 불신자에요.

 

그럼 신자는 뭐냐 하면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의 일이 아닌 게 없어요. 다 하나님의 일이에요. 머리카락 자라는 것, 시장에 가서 장보고 온 것, 목욕탕에 갔다 온 것, 전부 다 하나님의 일이에요. 그럼 남는 것은 뭐만 남아요? 설명만 남아요. 설명만. 참 쉽죠잉~ 성도로 살기 참 쉽죠. 설명만 하면 돼요. 자기 일에 대해서 마치 내 일이 아닌 것처럼, 내가 내 일에 대해서 설명하는 거예요.

 

“어제는 주님께서 누굴 만나게 하셨습니다.” 이게 설명하는 거잖아요. “어제 동창생을 커피숍에서 만나도록 주께서는 꾸몄습니다.” 이래 하는 거예요. “내가 전화해서 동창생을 만났습니다.” 이게 아니고. 내가 만약 동창생에게 전화해서 카페에서 만났다면 이거는 내가 원하는 행위를 내가 만들어내는 셈이 되는 겁니다. 무슨 뜻인지 여러분이 이해하시겠지요?

 

그럼 같은 예를 들어봅시다. “어제는 집에 지붕에서 비가 새서 세 식구 껴안고 울었습니다. 근데 주께서 지붕이 새도록 했죠?” 이거하고, “아, 지붕이 새가지고 우리는 울기만 했을 뿐입니다. 그냥 울기만 했습니다.” 뭐 상당히 울기만 했다는 그 말의 느낌이 불만이 그득한 느낌으로 하는 거예요. 그럼 제대로 하려면 “어제는 비가 왔는데 지붕이 새서 하도 사는 게 힘들어 세 식구 껴안고 엉엉 울면서 얼마나 감사했는지요?” 이게 인간 쪽에서 앞뒤가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엉엉 울면서 얼마나 감사했는지요? 감사하면 울지를 말아야지. 우는데 무슨 감사에요? 이건 억지라도 그런 억지가 없어 보이지만, 행함이 들어가면 안 되고 설명만 할 뿐이에요. “주께서 지붕이 새도록 해서 물이 떨어질 때 우리는 욱하는 마음, ‘이게 사는 것도 아니고 죽는 것도 아니고, 내 인생이 왜 이렇게 생겼어?’하고 엉엉 울면서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지금 울게 만드신 주께 감사!”

 

지금 말을 만들다보니까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습니다만, “어제는 비가 왔어요. 지붕이 샜어요. 우리는 인생 서글퍼서 울게만 하는 일을 주께서 만들어주시니 오늘 얼마나 감사한지요!”이래 되는 겁니다. 오죽 답답했으면 제가 이렇게 억지로 꼬이게 하겠습니까? 명확하게 구분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께서 만드는 인생, 우리 인생은 없습니다. 주께서 만드신 인생을 우리는 남한테 소개하고 설명할 뿐이에요. 주께서 이렇게 감사할 일을 주셨고 저렇게 감사할 일을 주셨고, 설명한 뿐이고. 불신자는 뭐 어떻다, 믿습니다, 할렐루야! 백날 소리쳐 봐도, “하나님이 이렇게 해주셨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나? 우리가 찬양으로 응답해야지?” 이거 일 만든 거예요. “찬양으로 응답해야지, 기쁨으로 응답해야지, 이거는 주님 저 어때요? 저 괜찮은 존재죠? 괜찮은 놈이죠?”하고 아주 자기 고집을 부리는 겁니다.

 

그러면 디도서의 해석은 뭐냐, 다 나왔어요. 뭐냐 하면 설명만 해야 될 일을, 일을 만드는 사람이 있으니까, 일을 만드는 이 사람이 불신자라고 지적하기 위해서 디도에게 편지를 보낸 편지. 이래 보시면 됩니다. 그레데 섬에 교회 있지? 교회 있다는 말은 분명히 불신자가 있다는 뜻인데, 불신자를 어떻게 구분하느냐, 이렇게 구분하라고 보낸 편지가 바로 디도서가 되는 겁니다.

 

이거는 디도서뿐만 아니고 모든 성경에서 다 해당이 돼요. 모든 성경에서 다 해당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일단 사도바울의 편지를 보고, 또는 성경을 대하는 그것이 이미 정착이 되었어요. 정착이 다 되었는데 늦게 오셨으니까 다시 한 번 정착해드리죠. 늦게 오신 벌로 다시 한 번 해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편지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담아내고 있다. 근데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편지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온 천지에, 지금, 지금 다 주어지고 있죠. 지금 주어지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사람보고 편지를 납득하라, 설득하라, 이해하라가 아니라, 천국 갈 사람과 지옥 갈 사람을 편지를 통해서 구분 짓는 겁니다.

 

구분 짓는 방법이 뭐냐 하나님이 모든 일을 하시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설명 또는 다른 말로 거기에 대해서 동조하는 반응을 나타내듯이 자기 인생에 대해서 자기가 브리핑을 하는 거예요. 마치 내 인생이 아닌 것처럼. “내가 만들어낸 인생이 결코 아닙니다.” 하는 것을 늘 강조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내 뜻대로 살아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다만 나는 내 인생에 대해서 제 3자라고 여기고 그냥 설명하는 거예요.

 

키는 몇 센티미터고, 머리카락은 어떻고, 얼만 전에 염색했고, 이런 식으로 브리핑하듯이. “주께서 이렇게 하셨습니다. 주께서 저렇게 하셨습니다. 주께서 요렇게 하셨습니다.” 브리핑하듯이 이렇게 하는 것은 성도고, 그게 아니고 불신자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보답해야 되고 영광 돌려야 하기 때문에 우리가 따로 어떤 일을 추진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건 불신자, 지옥 가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지옥 가는 사람이 뭐, 하나님 모른다고 하는 이것만 지옥 가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 앞에서도 독자적인 자기영역을 따로 구축하는 사람은, 그거는 결국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를 사랑하는데 있어서 탈락이 되는 거예요.

 

자, 그러면 여기까지는 한 것이고요, 그 다음에 이제부터 문제가 굉장히 어려워져요. 어떻게 어려워지느냐 하면 용어 자체가 굉장히 그러한데,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고 진도를 그냥 밀어붙이겠습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1번. 모든 게 원인이 된다 하는 것하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2번. 목적 있다는 것하고, 이렇게 둘로써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원인이 되십니다. 근데 그 목적은 이러합니다.”라고 할 때 원인이 이러하니까 목적이 이렇다고 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 2번은 보류되어야 해요. “하나님이 원인이 된 목적은 이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이 목적 자리에 누가 들어오느냐 하면 슬그머니 자기의 소망이 여기에 끼어들어갑니다. “하나님이 원인이 되시는데 목적은 이러합니다.”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쉽게 말해서 예를 들면 “하나님이 천지를 만드시고 그 목적은 예수님의 주되심입니다.” 정답이에요? 정답이 아니에요? 제가 묻는 것이 이제는 무섭죠? 혹시 틀릴까봐.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만드신 목적이 예수님의 주되심입니다.” 골로새서 2장에 나오잖아요. 분명히 맞는 이야기죠. 근데 거기에 뭔가 끼어든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은 그렇게 순수하지 않거든요.

 

“하나님의 주 되심을 위해서 만들었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구체적이 아니고 굉장히 모호한 거예요. 주되심이. 맞는 말인데 거기에 대해서 분명한 증거를 제시해봐라. 사례를 제시해봐라, 라고 하면 난감하기 짝이 없어요. 그럴 때는 인간이 자기가 되고 싶은 목적을 여기 2번 목적에다 집어넣어버려요. 집어넣습니다.

 

그러면 “내가 이번에 차를 하나 구입한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께서 원인이 되셔서 차를 샀습니다.” 들어보면 틀린 말이 하나도 없고, 딩동댕~♬ 참 잘했어요. 이거는 송해가 와도 딩동댕동~♬ 합격할 만한 그런 내용인데, 이상하게 느낌이 이상해. 마치 차를 산 것을 정당화하는 것 같아요. 앞에 무슨 핑계를 대느냐 하면 “주께서 주셨기 때문에 차를 샀어.” 그렇게 돼버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주께서 하는 일과 내가 하는 일과 다툼이 일어나지 않고, 갈등이 안 일어나고 같이 순하게 묻혀가는 셈이 됩니다. 고거 거짓말입니다.

 

주의 하는 일은, 진짜 주의 하는 일이 오게 되면 우리를 뭐로 만드느냐 하면 죄인으로 만드는 거예요. 죄인으로.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시고 일하십니다. 목적이 뭐냐, 예수님의 주되심입니다. 그럼 너는 어떤 식으로 그 목적에 들어가느냐, 나는 그 목적에 반대자로서, 이게 빠진 거예요. 이게 빠졌어요. 나는 주님의 하신 일에 대해서 시큰둥하고, 불만덩어리고, 입 툭 튀어나오고, 그런 식으로 참여하면서 “뭐 주님이 주 되심을 위해서 하겠다는데 뭐 어쩌겠어? 나는 인간인데 할 수 없지. 뭐.” 투덜댐. 오늘 제목은 투덜댐입니다.

 

뭔가 투덜거리면서 “주께서 다 알아서 하시겠다는데 누가 말리겠어?” 이런 게 성경 여러 군데에 나와요. “예. 주님 잘하셨습니다.” 뭔가 찬동은 아니고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억지로 찬동하는 척 하면서 “예. 잘했습니다. 뭐랬어요? 잘하셨네요.” 이런 식으로. 그걸 삐짐. 이런 식으로 투덜댐. 특히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투덜대는 그런 사람들이 많았죠.

 

대표적인 사람이 요나 같은 경우인데, 회개하니까 니느웨 사람들을 용서해줬거든요. 그러니까 “아이고, 자알~ 하셨습니다. 예~예~예~ 자알~ 하셨습니다. 나 죽으러 갑니다. 잘하셨습니다. 고국에 있을 때 이러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분명히 40일 지나면 망한다고 했는데? 아이고, 자비가 넘치시네요. 자비가? 그 넘치는 자비로써 용서해준다고 했다고요? 예~예~자알~하셨습니다. 나는 삐짐.” 요나가 그렇게 나왔습니다. 그래서 요나가 죽겠다고 했을 때에, 박넝쿨 치우라고 죽겠다고 해놓고 박넝쿨을 치워버리니까 또 덥다고 불만, 불만 하는 겁니다.

 

왜, 요나의 그렇게 삐진 이야기가 그대로 노출되었을까요? 그게 오늘날 소위 하나님에 대해서 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안다, 그런 사람들에게서 요나가 하는 경우처럼 계속해서 반대자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정리해보면 하나님이 원인이 되셨다, 그럼 목적도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잘 되겠네? 아니요. 거기서 뭐가 나오는가, 목적은 목적대로 이루어지되, 거기서 뭐가 나온다? 반대자가 나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시편 89편 2절에 보면 “내가 말하기를 인자하심을 영원히 세우시며 주의 성실하심을 하늘에서 견고히 하시리라 하였나이다” 여기 주의 성실하심이 나오죠. 성실하심. 이 성실하심 때문에 이스라엘이 망합니다. “나는 성실하게 일한다.”라고 그 말을 들은 그 민족이 망해요. 왜? 성실하심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평소에 아버지의 뜻을 따랐죠. 그러면 우리의 계산에 의하면 아버지 뜻을 따랐기 때문에 끝까지 아버지의 뜻대로 줄곧 갈 것이라고 여기겠죠. 그러나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했습니까? 주춤하죠.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떠나게 하옵소서.”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래 되어 있죠.

 

그러면 우리는 뭘 생각합니까? 평소에는 아버지의 뜻을 안 따랐다는 이야기밖에 더 되겠어요? 평소에는 내 맘대로 하다가 위급하니까 아버지의 뜻대로 했고, 정작 중요한 시기에는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줄곧 내 뜻대로 한 것이 한계가 드러났으니까 이제는 더 이상 내 뜻은 철회하고 아버지의 뜻에 일임할 테니까, 아버지가 죽이든지 살리든지 마음대로 하옵소서. 이렇게 느껴지잖아요.

 

느껴지는데, 왜, 예수님이 그렇게 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누구냐 하면 인자에요. 인자라고 하는 것은 무엇의 대표냐 하면 구약 이스라엘의 대표자들이에요. 시편 8편에 보면 다윗이 자기를 보고 인자라고 했거든요. 그러니까 인자 속에는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인간의 부족함, 죄성, 그리고 육신됨, 인간이 자기 본성대로 했을 때 아버지한테 버림받는 것, 이게 전부 다 인자 안에 포함이 됩니다. 그래서 인자를 뭐라고 했느냐 하면 고생 받는 인자, 고난 받는 인자라고 했단 말이죠.

 

아버지의 뜻과 인자됨, 이게 이꼴equal(=), 같이 되려면 뭘 끄집어내야 하느냐 하면 아버지의 뜻대로 인자가 되면서 튀어나오는 것이 있어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 죄, 반발, 반역, 반항.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이 죽어야 되고, 인간이 그동안 마귀한테 통치를 받았던 악마성. 이 악마성이 여기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대로 인자됨이 완성하는 그 가운데서 반드시 필연적으로 나와야 되는 겁니다. 이게 나와야 하는 거거든요.

 

그럼 오늘 강의의 핵심은 뭐냐, 디도서에서 말씀을 주셨잖아요. 그럼 디도서를 해석하면서 뭐가 나와야 돼요? 요 악마성, 죄, 반발, 반역, 반항이 필히 나와 주는 해석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나와 주는 해석이 돼야 돼요. 하나님은 모든 것의 원인이다. 알지. 목적을 이룬다. 알지. 뭐? 그래서? 그건 우리가 아는 건데? 끝. 이래서는 안 되고, 반드시 주께서 목적을 이루는데 뭐가 나온다고 했습니까? 반드시 내가 은근히 노렸던 목적이 거기서 실체가 들통이 나야 해요.

 

“나는 주님을 높입니다. 나는 주님께 영광 돌립니다.”라고 했을 때, 남들 보기에는 굉장히 순수해보이죠. 그러나 주님 같으면 어떻게 보겠습니까? “그 소리를 니가 왜 하는데? 니가 뭘 노리고 뭘 얻고자 하는데? 갑자기 신앙생활이 쉬웠다고 하는 것처럼 그게 취미야? 반드시 노리는 것이 있어? 니 뭐 아쉬운 것이 있지? 8월에 집 계약하는데 집값 좀 내렸으면 하고 노리는 것이 있잖아?”

 

그러니까 말씀이 제일 중요한 거예요. 말씀이 안 올 때는 자기 자신을 모르는데, 말씀이 딱 오면서 주님의 뜻을 이룬다고 하지만 동반해서 뭐가 드러나느냐 하면 내가 얼마나 내 뜻을 고집하고 있는가가 수반해서 그게 들통 나고 말아요. 그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즐거움이어야 해요. 그게 분통이 아니고 즐거움이어야 돼요. 그래야 내 뜻대로 마옵시고, 라는 것을 알 게 아닙니까?

 

우리 안에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죄, 반발, 반역, 반항, 악마성이 있죠. 그럼 하나 물어봅시다. 아, 이건 어려운 질문이지만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물어보는데요. 욥이 고난 받기 전에 하나님이 믿음을 인정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고난 받기 전에, 욥이 마귀로부터 고난 받기 전에 하나님이 욥의 믿음을 인정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인정했죠.

 

그럼 욥기의 그 긴긴 이야기 속에서 욥이 한결같이 믿음의 고백을 했었습니까? 안 했습니까? 그 긴긴 이야기 속에서. 구체적으로 불만이 없었어요? 따짐이 없었습니까? 투덜댐이 없었습니까? 막 나왔죠. 그러니까 욥기가 어려운 거예요. 분명히 그렇게 들어있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주님은 욥이 합당한 믿음이라고 아주 규정을 해버린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뭘 오해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규정했다고 해서 우리가 그 규정에, 주님께 합한 것이 자동적으로 이미 완성되었다고 착각하는 버릇이 있어요. 주님은 욥이 믿음 있다고 규정해버리면, 욥이 믿음이 좋게 되는 것이 주님의 목적이 돼요. 목적이 된다고 해서 이미 완성단계에 도달한 것이 아니고, 그 목적에 부합되기 위해서 반대로 욥의 어설픔과 반발과 반항과 투덜댐을 다 끄집어내는 거예요. 끄집어내게 하는 거예요.

 

저는 개고기 안 좋아하거든요. 옛날 촌에서 개 잡는 것도 본 적이 있어요. 닭 잡는 것도 본 적이 있는데, 닭 내장 이런 것은 잘 안 먹잖아요. 그런데 집에서 오늘은 백숙 해먹자. 오늘은 닭 잡자. 옛날에는 닭을 잡았어요. 집에서 닭을 다 잡았거든요. 우리 어머니 같은 분은 닭을 잘 잡습니다. 모가지 딱 잡아서 단칼에 치지, 누구처럼 어설프게 닭이 불쌍해서 서서히 치다가는 닭도 골병들고 고통을 당하죠.

 

분명히 닭 잡는 날이에요. 그럼 닭 잡는다는 원인이 있고 나중에 집에 가보면 분명히 백숙이 나와 있단 말이죠. 뭐가 생략이 되었습니까? 우리 먹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자식입장에서는? 내장을 버리는 그것이 다 생략이 되었죠. 그러면 우리가 그것도 모르고 “엄마! 닭 잡는다고 해놓고 내장 없네? 온전한 백퍼센트 닭을 잡아야지? 내장은 어디 갔어? 내장까지 있어야 닭이잖아?”라고 하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오늘은 닭고기 먹는 날이라고 하면 내장 빼고 먹는 날이에요.

 

주님께서 욥이 믿음이 좋다고 하는 것은 주께서 팔을 걷은 거예요. “자, 함 잡아보자! 욥을 함 잡아볼까? 내가 욥이 믿음 좋다는 확신을 온 우주에다가 욥의 믿음은 대끼리다! 최고다!” 이미 성취를 했기 때문에, 그 말씀한 성취, 그걸 가지고 아까 시편 89편에 하나님의 성실함, 하나님께서 성실함으로 이루어낸다 이 말이죠.

 

쉽게 생각합시다. 하나님께서 성실하게 이루신다는 이 말은, 그 다음부터는 우리 속에 있는 악마성을 노출시키는 작업이 개시됐다는 이 말입니다. 개시된 겁니다. 구원받았기 때문에 남들이 모르는 악마성과 반발심과 반항심이 막 나오는 겁니다. 대듦도 나오고, 삐짐도 나오고, 투덜댐도 나오고, 나 신앙생활 안 해! 이것도 나오고, 왜? 이미 성도기 때문에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작업을, 닭은 칼로 잡지만 우리한테는 지금 뭐냐, 디도서가 있잖아요. 디도서를 가지고 주께서는 신자를 신자 되게 하고 불신자는 절대로 신자 되지 못하고 하고 불신자 되게 만듭니다. 왜? 목적이 불신자 되어야 되니까. 자, 여기서 여러분이 아는 이야기를 한 번 해보겠습니다.

 

신명기 28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언약이 실효성을 발휘하게 되면 갈래가 이게 두 갈래가 나와요. 하나는 뭐냐 하면 내 말씀을 지키는 자는 뭘 받고? 복을 받고. 내 말씀을 안 지키는 자는 뭘 받고? 저주를 받고. 반드시 축복과 저주, 절대로 합할 수 없는 서로 다른 두 개의 노선으로 이게 갈라지는 겁니다.

 

디도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디도서는 하나님의 새 언약이잖아요. 복음이니까. 다른 말로 하면 새 언약, 복음. 복음이 실효성을 발휘하게 되면, 우리는 자꾸 이것만 생각해요. 복음이 나한테 와서 구원받는다. 이것만 생각하는데, 이렇게 하면 안돼요. 그거는 해석이 잘못된 거예요. 반드시 저주가 있고 축복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로 가냐, 마음이 하나의 마음이기 때문에 말씀을 대하면서 축복으로 가서 저주로 가면 안돼요. 저주 쪽으로 가서 축복으로 이렇게 가야 합니다. 왜? 우리 쪽에서 뭐가 나와야 하기 때문에? 반항과 반발, 반역, 악마성, 죄가 나와야 하기 때문에. 이것은 저주받을 짓이지 복 받을 짓이 아니에요. 천국 가서 데모할 일이 있습니까? 아니잖아요. 영원한 나라에 가기까지 내장 다 빼내는 거예요. 다 빼는 겁니다. 낱낱이 다 빼는 거예요.

 

그래서 이 저주성이 우리한테서 나오는 겁니다. 근데 사람들은 자기한테서 이 저주성이 나온다고 해서 자기가 신자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처음부터 신자 아닌 사람이에요. 이런 저주성, 반발, 반항이 나올 때, 제대로 주께서 나를 잡는구나! 잡아! 잡아요. 자, 지금까지 쭉 달려왔으니까 한 번 복습해봅시다.

 

하나님의 목적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뭐가 나타난다고 했습니까? 내가 은근히 노리던, 슬그머니 눈치 안 채게 집어넣었던 나의 목적성이 반발이라는 이름으로, 삐짐으로, 투덜댐으로, 그것이 바깥으로 튕겨져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목사님. 우리는 뭐 성경보고 아무것도 생각 안 하면 될 거 아닙니까? 절대로 인간은 잠시도 자기의 꿈과 포부와 이상을 생각 안 해 본적이 없어요. 집안에 가만히 있으면서도 항상 뜻이 있고, 심지어 남자들이 축구 게임을 보면서도 속으로 굉장히 기도를 합니다. “우리 손흥민 일본하고 붙을 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2골만 넣게 하옵소서.” 손흥민하고 예레미야하고 무슨 관계있습니까? 디도서하고 관계없어요.

 

성경에 아무 내용도 없는데 우리는 그걸 소망하고 있다니까요. “그저 우리 애가 성적 좀 오르게 하옵소서.” 성적 오른다는 것이 어디 시편에 나옵니까? 안 나와요. 왜, 주의 뜻도 아닌데 그게 나옵니까? 나온다는 것은 그게 주께서 지금 다루고 있다는 뜻이에요. 물론 신자한테만 그래요. 신자한테만. 그렇게 다루고 있으니까 쓸데없는 것이 계속 나오는 거예요. 쓸데없는 것이.

 

어떤 분이 저한테 전화로 30분 동안이나 상담을 하고 이렇게 했는데, 그 분이 솔직하게 이야기해요. 몸이 아플 때는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다가 몸이 좀 편하니까 어디 괜찮은 남자가 없나? 하고 자꾸 생각이 난다는 거예요. 얼마나 솔직합니까? 몸이 아플 때는 남자고 여자고 뭐고 다 귀찮아요. 자식도 귀찮아요. 다 귀찮은데, 늘 몸이 아픈 것은 아니잖아요. 몸에 활기가 차잖아요.

 

그러면 뭔가 꽃놀이도 가고 싶고, 연애도 하고 싶고, 그렇게 해놓고 질문은 그거에요. “목사님. 제가 정상입니까? 정상 아닙니까?” 그럼 제 답변은 간단해요. 컨디션이 괜찮은 모양이죠? 일단 컨디션이 괜찮은 것에 대해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괜찮으니까 자꾸 딴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플 때는 주님을 생각하다가 막상 건강하게 되면 “고맙습니다.”해놓고는 그 다음부터는 자기가 은근히 노리는 것에다가 집중해서 “주여, 이 소망은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고 나오는 겁니다.

 

이 디도서가 그런 관점으로 보면 굉장히 쉬워요. 다시 한 번 정리하게 되면 디도서라는 내용이 뭡니까? 우리가 현재 감추고 있는 우리의 불만 요소라든지, 반항하는 요소를 디도서를 만남으로써 우리에게서 그게 본격적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고 드러나는 것이 우리의 굉장히 순수해 보이는 목적, 주께서 주셨잖아요? 라고 핑계대면서 주님의 목적으로 가야되는데 내 목적으로 오는 거예요.

 

그러면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럼 이제부터는 내 목적 안 챙기고 나는 주의 목적만 위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는데, 그 사람 정말 바보에요. 왜? 주의 목적은 우리가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중요한 점이에요. 주의 목적은 우리가 일을 저질러야 알아요.

 

한 네 살 먹은 애가 TV가 얼마나 비싼지를 몰라요. 그런데 TV를 깨봐야, 이놈의 자슥아! 이것 때문에 세달치 월급이 나가고 어떻고 엉엉 울고 하면, 아, 그게 굉장히 비싼 거였구나. 이제 알듯이. 우리가 얼마나 철딱서니가 없습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은혜를 받으면 공짜로 무상으로 주는 줄로 생각하는데, 이게 전부 다 비용처리가 되어 있어요. 전부 다 비용처리가 되어 있는 거예요. 공짜는 없어요. 다 비싼 돈 주고 산거예요.

 

우리는 내 인생 맘대로 산다고 하는데, 전부 다 비싼 돈 주고 산겁니다. 울산강의에서 속건제 할 때 제가 약간 언급을 했어요. 이래 봐도 우리 몸이 굉장히 비싸요. 주님의 피 하고 바꿀 정도로 굉장히 비쌉니다. 천사도 부러워할 정도입니다. 천사도 우리처럼 양자,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가 없어요. 근데 우리는 별로 시큰둥해요. 우리는 재벌이 더 좋지, 하나님나의 천국 가는 이런 몸이 되는 것은, 그건 당연한 것 아닙니까? 이래가지고 별로 가치를 안 쳐줘요. 고물로 해봐야 얼마 받겠나? 이런 생각이 들죠.

 

우리 안에 귀한 피가 들어있습니다. 안에 언약이 들어있죠. 천국의 값어치만큼 귀한 거예요. 그래서 마태복음 16장 26절에 사람이 온 천하를 주고도 어떻게 자기 목숨을 얻겠느냐? 우리가 주님 주신 이 생명이라는 것은 지구의 온 천하보다 값이 더 나갑니다. 세상에서 제일 부자가 누구죠? 그런 사람들도 영생을 얻을 수가 없어요. 영생은 돈 주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은 돈 주고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영생에 대해서 보답 할 생각하지 마세요. 그냥 그 무한한 값어치에 대해서 얻어터질 일만 남았지, 그걸 어떻게 보상으로? 보상으로 안 됩니다. 그래서 얻어터지고 난 뒤에 그 값어치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놀라면서 감사할 일만 남았지, 이 은혜에 대해서 보답하겠다는 그런 철없는 짓을 해서는 안돼요.

 

그냥 사시는 대로 사시면 디도서가 와서 여러분들에게 디도서의 현실이 덮쳐질 것이고, 이게 성경말씀입니다. 이 말씀대로 21세기가 그대로 이루어지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거기서 뭐만 하면 돼요? 반항과 반발하면서 우리의 닭 내장만 줄줄이 끄집어내어지면서 주님이 이미 확정한, 규정하신 구원에 대해서 감사하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자, 그러면 본격적으로 한 번 봅시다. 이래놓고 5절을 봐야 해요.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바로잡고 나의 명한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무슨 안 좋은 소문이 들렸던 모양이죠. 6절,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지라” 우와!! 사람이 자기 자식이라도 자기 맘대로 됩니까? 안 되잖아요.

 

근데 아무리 아버지가 장로로서 합당하다 할지라도 자식이 불순종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니까 장로 사표 내라는 그 이야기에요.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그럼 장로는 누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자녀를 둔 자고, 또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고. 그 다음에 또 뭐가 나옵니까? 감독이 있어요. 보통 이렇게 해요. 장로는 유대교인들이 있을 때는 장로라 하고 헬라교인들이 있을 때는 감독이라고 하라. 그렇게 뭐 편하게 생각하세요. 나중에 그게 분명히 구분되는 것이 아니지만 편하게 그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7절,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면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 8절,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을 좋아하며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9절,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도대체 몇 가지에요? 제가 볼 때는 십계명보다 더 많은 것 같아요. 이어서 9절에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그렇게 되어 있죠.

 

지금 이 말을 하시면서 뭐냐 하면, 아까 배운 것 또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사람이 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왔을 때는, 반드시 그것이 현재화되면 우리에게서 뭐가 나온다? 우리의 쓰레기 같은 악마성과 반발이 반드시 유출되게 되어 있다고 했죠. 그게 안 나온다면 처음부터 편지를 할 이유가 없어요.

 

그래서 이 말씀을 잘 이해를 해주셔야 해요. 자, 그러면 편지를 받았다고 칩시다. 그럼 이 편지를 받은 그레데 교인들이 딱 보면서 제일 먼저 뭘 생각하겠습니까? 우리 장로는, 또는 우리 감독은 이 편지에 부합되는가를 생각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생각하죠. 제일 먼저 감독 된 자 라고 나오니까 우리 감독은? 하고, 장로 된 자 라고 나오니까 우리 장로는? 이 말씀에 합하냐? 라고 하겠죠.

 

잘 들어보세요. 그러면 감독, 장로한테 준 편지입니까? 아니면 장로, 감독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준 편지에요? 감독, 장로를 포함해서 교회 전체에 준 편지입니까? 이거는 전체에 준 편지죠. 그러면 감독, 장로가 아닌 사람들도 자기는 아니니까 나 몰라라 할 수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겠죠. 왜? 감시를 해야 하니까.

 

자, 감독님 한 번 봅시다. 구타하지 아니하고, 라고 되어 있는데, 어제 보니까 감독님 가정에 아내하고 싸워가지고 뭐 울고불고, 뭐 야구방망이 들고 하는 것이 실루엣으로 다 보이던데, 하려면 불 끄고 하지 불 켜고 해서 다 알게 하고, 또 술을 얼마나 퍼마셨는지 비틀거리면서, 홍도야 울지마라~♬ 악을 쓰면서 돌아다니면서, 자, 그렇게 했을 때에 그 감독을 그만두어야 해요? 아니면 본인이 교회를 그만둬야 합니까? 그렇게 평가하는 일반교인들이 그 교회를 안 가야 합니까? 어떻습니까? 참, 제가 어려운 문제를 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 문제를 쉽게 내봅시다. 요한복음 8장에서 어떤 여인이 간통했습니다. 근데 신명기나 십계명에 보면 돌로 쳐죽이라고 했습니다. 지난 오후설교에서 했죠. 신명기 22장에서 둘 다를 돌로 쳐죽이라고 했습니다. 돌로 쳐죽이라고 하는 것을 왜 했느냐 하면, 하나의 인간의 욕정도 이스라엘 내에서는 그게 사회성으로 장착이 되어야 하고, 장착이 되지 아니하면 사회성에서 비사회성으로, 동물적인 것을 보복하는 의미에서 한 거예요.

 

그들이 미워서 던진 것이 아니고, 우리 이스라엘 정도가 되면 인간의 타오르는 욕구마저 율법에 딱딱 맞도록 서랍에 착착 넣어가지고 그 충동이 남한테 유발되지 않도록, 그 정도는 돼야 된다. 율법에 어긋났기 때문에 죽인 거예요. 간음해서 죽인 것이 아니고 율법이 지시한 대로 안 했기 때문에 치는 거예요. 이런 말들이 굉장히 어려워요.

 

나쁜 짓이라고 회개하는 것이 아니고 율법에 어긋났기 때문에 회개하는 거예요. 문제는 그거보다 더 어려워요. 율법을 어겼다, 안 어겼다는 판단을 누가 합니까? 이게 가장 어려운 문제라니까요. 요한복음 8장에서 누가 간음을 했잖아요. 그러면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저 사람은 지금 간음중이라는 것을 알았잖아요. 그럼 그 순간 뭐가 됩니까? 본인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 정도로 지금 자기는 간음을 안 하고 있다고 우길만한 것이 된다는 이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경말씀이라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죄를 지었을 때만 적용되는, 제한적인 법이 되고 말아요. 그게 무슨 성경입니까? 그거는 마치 뭐와 똑같으냐하면 예수님이 보험회사하고 똑같은 거예요. “혹시 차사고 나거든 전화하세요.” 보람상조하고 똑같아요. “혹시 집에 어른 돌아가시거든 전화하세요.” 보험이 매일같이 전화하지 않잖아요. 병들었을 때, 070-0000-0000하는 전화번호. 보험 들어놓고 어려울 때만 상의하잖아요.

 

예수님은 뭐냐 하면 용서해주는 보험회사밖에 안 되는 거예요. 전화 건 사람은 가입자가 판단해서 전화하는 거예요. 자기 죄 지었을 때 십자가 찾는 것. 그거는 보험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보험을 보험 되게 하기 위해서는 찾아가는 보험, 진짜 보험이에요. 안 지어도 죄를 짓게 만들어버려요.

 

간음죄는 간통한 여자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니고, 간통했다고 그 여자를 질질 끌고 온 그들에게 간음죄를 뒤집어씌우는 겁니다. “니가 간음을 알아?” 간음을 하는 것이 죄가 아니고 간음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그것도 간음죄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저와 여러분이 이제 알아야 돼요. 돌 던질 자격이 없다는 것을, 그걸 알아야 돼요.

 

간음죄가 간음한 그것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간음죄는 간음하기 전부터 모든, 방금 태어난 애들까지 그게 다 적용된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망했죠? 인간들 보기에 다 나쁜 사람들입니까? 진짜 착한 사람 한 사람도 없는 거예요? 의인 열 명도 없는 거예요? 우리보기에는 열 명이 넘게 있어요. 적어도 한 백만 명 중에서 의인 열 명이 있는데, 주님께서는 열 명이 없게 만드는 새로운 율법을 줘버려요. 세상에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어요.

 

“선생님께서 어제 수학숙제 냈죠? 숙제 한 사람?” “선생님! 쌤요! 어제 숙제 어려웠어요.” “시끄럽고! 됐고, 어제 수학숙제 한 사람?” 진짜 수학 천재가 있어서 손들었어요. “저 했습니다.” 그럼 선생님이 “수학숙제 다시 낸다. 취소.” 결국 수학숙제를 언제까지 다시 냅니까? 단 한 명도 했다고 손을 안 들 때까지. 그게 나오는 것이 없도록 숙제를 다시 내는 거예요. 이게 율법의 추가적인 기능이에요.

 

율법이 추가되어서 추가적인 기능도 되고, 있는 율법에, 그 내용에 무지하니까 아직까지 율법의 정신을 몰라. 그래서 점점 더 율법의 깊이를 더해가면서, 모든 인간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게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오후설교 했잖아요. 정죄함이 없이는 사함이 없다. 정죄함이 없는 이상 사함이 없어요. 마귀를 보낸 이유가 정죄함을 받게 하고, 군소리 못하게 만들고, 그런데 그런 자리에 있을 경우에만 우리는 뭘 아느냐 하면 아, 복음을 위해서 내가 존재하지 내 구원을 위해서 복음이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그제야 아는 겁니다.

 

그래서 감독, 장로이야기는 의외로 어려워요. 감독, 장로한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감독, 장로는 빠져나가야 해요. 감독, 장로를 쳐다보고 있는, 요한복음 8장에서 간통한 여인에게 돌을 들고 내려치려고 하는 그런 자들에게, 어쩌면 그 간통한 여인은, “간통한 여자가 나타나기만 해봐. 돌로 쳐죽임으로써 나의 정의감을 노출시킬 거야.” 하고 마음 준비하고 있는 그 사람들을 죄인 되게 만들기 위해서 간음을 공개적으로 들통 나도록 주께서 그렇게 조치를 하신 거예요.

 

그리고 거기서 예수님이 끼어들고. 쉽게 말해서 “니들이 나를 알아? 니들이 나를 알기는 알아? 이 잘난 인간들아! 니들이 얼마나 못난 인간들인지 모르지?” 제가 그런 이야기를 한 이유가 간음을 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그 다음에 그 사람들이 아브라함 자손이기 때문에 우리는 죄 지은 적이 없다는 이야기가 계속 나와요. “우리는 죄의 종이 된 적이 없습니다.”라고 이렇게.

 

이미 죄의 종이 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반항이나 악마성을 노출시킬 수가 없어요. 항상 변명으로 일관해요. “최선을 다해 노력을 다했고, 완전하지는 않지만 노력중입니다. 가상히 여겨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식으로 나온다고요. “그래도 저 사람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간통한 저 사람보다 안 낫습니까?” 이런 식으로 나와요. 율법이 나 빼놓고 저쪽에 적용해달라고 요청하는 거예요.

 

그럼 평소에 우리가, 이 교회는 한 적이 없지만, 금요철야기도나 예배시간에 기도할 때 기도내용을 보세요. 기도내용을 가만히 보게 되면 “나를 스타로 만들어서 저 사람을 기어코 죽게 만들어 주시옵소서.”라는 내용이 밑에 깔려 있어요. 내 기도의 응답대로 이루어진다면 나는 얼마나 우쭐돼도, 우쭐될 만한 자격자가 된다는 것이, 그게 자기 은밀한 포부입니다.

 

그래서 오늘 장로, 감독이야기는 뭐냐 하면 장로, 감독에 대해서 반드시 판단할 수밖에 없죠. 그 판단할 수밖에 없는 일반교인들까지 포섭해서 이 말씀을 주는 겁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아무도 감독할 사람 없고, 아무도 장로 될 사람 없습니다.

 

그게 정답이에요. 아무도 없는 거예요. 교회 꼬라지하고는, 문 닫아야 해요. 그걸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레데 교회 교인들아! 너그들은 교회로 보이나? 나는 교회로 보이지 않는다.” 그런 차원에서 이 말씀을 주신 겁니다. 어째서 그런가? 그건 10분 쉬고 합시다.
 이미아(IP:122.♡.188.127) 17-03-16 18:07 
서울 의존교회 170210b (인생브리핑)-이 근호 목사

 

흔히 성경 좀 알고, 믿음 좋고, 복음 좀 안다고 하는데, 막상 실생활에 보면 복음과 관련이 없어요. 관련성을 짓지를 못해요. 예를 들어서 디도서에 나오는 감독된 자, 장로 된 자, 이 말이 딱 나오면, 갑자기 복음, 복음, 십자가 피로 구원받는다고 그렇게 외쳤던 그 사람이 역시 교회는 감독이 감독다워야 하고 장로가 장로다워야 한다. 이렇게 딱 나와 버려요.

 

당신이 믿기는 뭘 믿는데? 괜찮은 감독이 나타나길 바랐어요? 괜찮은 감독과 장로가 있음으로 해서 우리 교회는 참된 교회라는 그게 그렇게 보고 싶고, 그걸 염원으로 삼아서 교회 다녔습니까? 이렇게 묻고 싶어요. 물어도 소용이 없는 게, 아니 복음하고 윤리도덕하고 어떻게 연관이 있는지, 연관을 짓지를 못하겠다는 거예요. 그 연관을.

 

복음이야기 하면 다 믿는 건데, 갑자기 복음이야기 다 빼버리고 감독된 자는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이 말씀이 딱 나오면 문자대로 하자,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자, 뭐 이렇게 나오더라는 말이죠. 그럼 그게 바로 바리새인들이 했던 것하고 똑같은 레벨에 있는 거예요. 거기서 벗어나지를 못했어요.

 

그래서 주일 낮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그걸 육에서 영의 세계로 점프하지 못했다. 이렇게 이야기 한 겁니다. 오토바이 헬맷 뒤집어쓰고 노래하는 걸그룹 크레용팝이라고 있죠. 점핑~♬ 점핑~♬하잖아요. 올라갔다 내려갔다가. 점핑 예~ 점핑 예~Everybody 점핑~♬하잖아요. 그 모습을 보면서 오늘날 교회 같아요. 자꾸 영적인 세계에 니고데모처럼 천국에 가려고 애를 쓰는데, 점핑에 실패하잖아요.

 

도약 할 수가 없어요. 뛰어내릴 수가 없어요. 실컷 복음 안다고 하면서, 주를 만났다고 하면서 막상 들어가면, 그래 감독은 어떻고 저렇고 이렇게 나오니까, 결국 당신은 이 땅에서 보지 않고 믿는 것이 아니고 눈에 보이는 어떤 증거를 보고, 역시 바른 교회니까 다녀야지. 이런 식으로 당신은 믿음이 아니고 행함에서 끝나는구나, 라고 우리가 판정을 내려야 됩니다.

 

자, 그러면 제가 방금 제시한 그것, 복음과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이번 시간에 설명해드릴게요. 그걸 설명하려면 시편 44편을 한 번 봐야 돼요. 시편 44편에 보면 3절에, 지금 제가 설명하는 것은 복음과 이런 말씀과, 이런 말씀이 윤리, 도덕적으로 나타나도 윤리도덕이 아니고 복음이라는 것.

 

복음이 이런 식으로 나타났을 때 어떻게 이해해야 되느냐, 거기에 대해서 설명하는 겁니다. “저희가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저희 팔이 저희를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팔과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저희를 기뻐하신 연고니이다” 이래 되어 있습니다.

 

‘아니요’를 먼저 봅시다. ‘아니요’를 먼저 보면 저희 팔이 저희를 구원함도 ‘아니요’죠. 저희 노력으로 ‘아니요’죠. 그럼 디도서에 와가지고, 디도서에 나오는 감독은 이래해야 되고 장로는 이래해야 되고, 하는 것을 알고, 그레데 교인들이 거기에 합당한 인물이 있어서 그 사람들을 감독과 장로로 세웠다 칩시다. 세워놓으면 감독 장로는 누구 힘으로 된 거예요? 자기들 힘으로 된 거잖아요.

 

근데 시편 44편에 보면 하나님의 구원은 자기의 팔이 아니죠. 자기 행함이 아니죠. 행함도 아닌데 디도서에 보니까 마치 감독, 장로 할 때는 이런 것을 다 살펴보고 이런 자에 합당한 자만 세우라고, 어떤 행함을 그레데 교인들에게 유도하고 강요한 것처럼 그렇게 보인다 이 말이죠. 그럼 일관성이 깨지는 거예요. 일관성이. 진짜 갈라디아서 3장 말씀처럼 십자가로 시작했다가 행함으로 끝나버리는 거예요. 그 당시에 얼마나 그런 사람들이 많았겠습니까? 십자가, 십자가 해놓고는 나중에는 돈과 권력으로 끝나버리잖아요.

 

근데 이거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우선 방법을 알려드릴게요. 뜸 들인다고 소용없어요. 뜸들일 것이 아니고. ‘~아니요’를 끄집어낼 수 있어야 해요. 우리는 이번에 감독 뽑는데 기도 빡세게 했기 때문에 절대로 우리 행함으로 뽑은 것이 아닙니다. 이런다고 해서 주님의 오른손이 한 게 아니에요. 주님의 오른손은 짝을 이루어야 해요. 뭐냐 하면 ‘아니요’가 나와요. ~아니요, ~아니요.

 

그러면 주님의 하는 일에 빡세게 열심히 기도할 것이 아니고, 뭘 열심히 해야 돼요? 우리 판단에 의한 결론 맺기에 열심을 내야 돼요. 열심을 내놓고, “저 사람은?” “아니야.” “이 사람은?” “아니야. 우리는 만장일치야.” 그렇게 온 신경을 다 써놓고 뭘 해야 합니까? 그 사람을 장로, 감독으로 안 세워야 하죠. 왜? 거기에 우리의 판단력과 우리의 모든 뜻이 거기에 몽땅 다 담겨있기 때문에.

 

무슨 뜻인지 좀 알기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시편에 의하면 이스라엘에게 전쟁이 옵니다. 전쟁이 왔을 때 “야! 이 전쟁은 주의 이름이 할 것이지 우리가 해야 할 전쟁이 아니다.” 그렇게 편하게 이야기할 때는 적이 정면에서 약 100킬로미터에 왔을 때는 그렇게 돼요. “백성여러분! 동요하지 마세요. 이번 전쟁은 하나님께 속했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럴수록 믿음으로 단결해야 됩니다.” 백성들이 동조하겠습니까? 동조하죠. 왜? 100킬로미터 전방에 있으니까.

 

그런데 그런 이야기했는데 적이 물러갈 기색이 안 보이네요. 다음날 아침이 되니까 적이 20킬로미터 앞까지 도착했다는 전령의 소식을 받습니다. 그럼 어떻습니까? 왕의 목소리에 떨림이 있어요. “에에에...여러분! 이번 전쟁에서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 돼야 합니다. 할렐루야! 믿습니까?” 이러면서 벌벌 떠는데, “여러분! 이럴수록 옛날을 한 번 보세요. 인간적으로 하다가 다 패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믿음이 있는지 시험하러 온 것이기 때문에 이럴수록 우리는 찬양하고, 아사 왕처럼 찬양으로 이기고 해야 됩니다. 헉헉! 아이고, 걱정되고 하는데 합시다.” 이쯤 했으면 20킬로미터에서 물러가면 참 좋은데, 아침에 일어나보니까 150미터 앞에 와 있는 거예요. 소리가 더 커. 항복하라고 난리라.

 

진즉에, 솔직하게 믿음 없는 것을 들통 내면 되지 않습니까? 근데 꼭 믿음 없는 것들이 믿는 티를 내요. 그러면 주님이 그 꼼수에 넘어가겠어요? 안 넘어가겠어요? “요것들 봐라! 어이, 적군 앞으로 진격!”하고 약을 올려버립니다. 약을 올려버려요. 고3인데, 다른 애들은 다 고3때 일요일에 교회 안 보내고 학원 보내고, 심지어 학교에서 일요일에 뭐 하라고 하면 다 했는데, 우리는 목사 가정이고 장로가정이기 때문에 우리 애는 모범으로 키운다고, 일부로 모범이 돼야 된다고, 부모가 학원도 안 보내고, 사실 돈이 없어서 안 보내지만, 하여튼 학원도 안 보내고 학교에서 일요일에 뭐 하라고 하는 것은 신경도 쓰지 말라고 했는데, 대학교에 떨어졌어.

 

뭔가 그 정도로 성의를 표했으면, 우리가 얼마나 초조한 가운데 성의를 했습니까? 했으면, 주께서 홍해를 열어 줘가지고 “그래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뭐 이렇게 주고받는 것이 딱 예상된 것이 있는데, 근데 조용해. “엄마! 떨어졌어.” “왜 떨어졌을까? 부모는 왜 떨어진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은 다 알아요. 공부 안 해서 떨어졌어요. 공부 안 하고 못해서 떨어졌어요. 그거 뻔한 것 아니에요.

 

그러면 고3이 되어서 뭘 합니까? 솔직하게 공부 안 하면 성적 안 오른다는 것을 알고 공부에 매진해야 되지 않습니까? 매진해야 되죠. 그 아들이 하는 말이 “엄마. 우리는 장로가정이고 하니까 믿음으로 살아야지? 그지? 내가 일요일에 게임하고 놀더라도 닦달내지 마! 일요일에는 안식하라고 했으니까 이건 쉬는 거야.” 이렇게 하더라도 엄마가 “이게 미쳤나? 그렇게 해서는 안 돼. 공부 더 해야 돼. 신앙인 같으면 교회와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더 일꾼이 되기 위해서 공부 더 해야지. 아마 하나님께서 봐주실 거야.” 그럼 아들이 “애걔? 엄마가 지금까지 살아온 신앙이 이 정도밖에 안 돼?”

 

그럼 부모가 어떻게 해야 해요? 그때는 매 들어야죠. “이게 믿음도 없으면서 부모 믿음을 닦달내? 니는 믿음 있어?” 우리 다 같이 믿음 없음을 솔직하게 하자 이 말이죠. 그러니까 애들이 지가 공부하기 싫으면 그런 핑계를 댄다고요. “우리 믿는 가정 맞지?” 이렇게 하면 공부하기 싫었는데 잘 된 거예요. 신앙 핑계대고 농땡이 부려도 엄마가 한 말이 있기 때문에, “믿는 가정은 안식일 지켜야 한다.” 이게 있기 때문에 말을 못하는 거라.

 

아이고, 인간이라고 하는 게 기껏 이정도 수준밖에 안 돼요. 그걸 마귀가 다 알고 있거든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전쟁에 일이 딱 터졌다. 그러면 가장 마귀적인 것은 그거에요. 우리 안에 있는 마귀적인 것을 노출시키는 하나님의 기회가 온 거예요. 그러니까 마음껏 불신앙적인 것을 보일 수밖에 없어요. 마음껏.

 

지금 바깥에서는 전쟁하고 있는데, 사무엘하 12장에서 거기 암몬자손하고 전쟁하잖아요. 암몬자손하고 전쟁하는 거예요. 다윗을 한 번 봅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부하가 암몬자손하고 전쟁하고 있으면 다윗은 정신 차리고 기도해야지, 지는 왜 여자를 밝히고 있느냐? 라고 하는데, 여자를 밝히고 싶어서 밝히는 것이 아니에요. 뒷태가 너무 아름답다는 이 말입니다. 뭐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해야지, 뭐 아름답지 않다고 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다윗은 그냥 자기에게 충성스럽게 살뿐이에요. 그냥 막살았어요. 아니, 막사는 것을 절제한다고 막사는 것이 사라집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죠.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 몰라요. 우리하고 지금 흥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밀당하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시편 44편 3절의 말씀처럼 이것은 우리의 팔, 우리의 노력으로 한 것이 아니요, 라고 성경에 나왔으면, 결국 그 말씀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태를 일으키는데, 사태가 어떤 사태냐 하면 인간들이 반항하는 것을 총동원하여 끄집어낼 수밖에 없는 사건을 의도적으로 유발시킵니다. 왜? 시편 44편 3절의 말씀을, 이걸 현실화시키기 위해서.

 

사실은 우리의 삶이 그렇잖아요. 교회 와서 믿음 좋다고 믿음으로 살지만 돌아서면 역시 우리의 본때를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왜? 주께서 그렇게 하신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믿음으로 자기의 허술한 것, 자기의 불신앙 드러난 것을 감사해야 돼요. 언젠가 제가 낮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자기가 불신자라는 것을 아는 것이 신자라고요. 신자기 때문에 불신자라는 것을 아는 거예요. 불신자는 지가 누군지도 몰라요.

 

주께서 말씀대로 하는 상황 속에 놓여있다 이 말이에요. 니가 니 팔로 한 것이 아니요, 라고 한다면 우리는 충분히 모든 각양 노력이 결국은 하나님, 하나님 하지만 내가 아는 지혜와 지식을 다 총동원해서 내 힘으로 이 사태와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그것이 우리의 평소에 하는 행세입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을 위한다고 할 때에, “그러면 나는 내 뜻대로 안 하고 주의 뜻대로 따르겠습니다.”라고 하지만 주의 뜻을 모른다니까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은근히 노리는 내 뜻밖에 없어요. 주의 뜻은 뭐냐 내 뜻이 뭉개질 때, 그 현장에만 비로소 얼굴을 내미는 것이 주의 뜻이에요. 아예 그냥 사세요. 그냥 사시면 주께서 뭉개질 것은 뭉개주고, 깨질 것은 깨지고, 노출될 것은 노출되면서, 그와 동반해서 주의 뜻이 나타나요. 그러면 범사에 감사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주의 뜻이 나타납니다. “바보같이 이런 사실을 몰랐네.”라고 무릎을 치면서 그 뜻을 알게 될 거예요. 너무 쳐서 무릎에 담 걸리게 그렇게 하지 마시고.

 

우리의 하는 것이 아니요, 라고 되어 있죠. 그러면 전쟁을 일으킬 때에 지금 어디까지 밀어붙였느냐 하면, 지금 홍해 앞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애굽 군대의 소리가 다 들리도록 그렇게 할 게 아니고, 군대가 아예 안 쳐들어오도록 할 수도 있었는데, 그리고 홍해 가기 전에 홍해 문을 활짝 열어놓고, “어서 옵쇼!” 이렇게 반기면서 할 수도 있는데, 홍해 앞에 섰는데 대책이 없네. 대책이 없는 것은 좋아요. 아직 시간이 여유가 있으니까.

 

근데 뒤에서 무슨 소리가 들립니까? 이미 애굽 군대가 다 따라왔어요. 그리고 곧 애굽 군대가 손만 내밀면 비무장으로 있는 히브리인들은 다 죽어요. 근데 성경에는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구역을 둘로 나누었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이름으로 하는 것과 주의 이름으로 하는 것의 차원에서 구역을 나눈 거예요.

 

그러니까 이 나누는 것도 그들의 소원이 아니었고,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하신 일이에요. 결국 우리 성도의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순전히 백퍼센트 주님의 일방적인 강제조치입니다. 강제조치에요. 내 인생은 왜 이 모양이라고, 자기 인생에 대해서 점검할 수 있는 권리가 없어요. 그런 권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내 인생을 조사하는 검침원들이 아니에요. 맨날 제복입고 와서 어디까지 왔나? 하고 검침하지 마세요. 장부에 적으면서 “이번 달 전기세 많이 나오겠네.” 이러지 마세요. 검침을 해도 주님이 알아서 검침합니다. “아이고, 잘 빠졌네. 잘 나왔네.” “정전이 이번 달에 다섯 번이나 됐는데요?” “그래도 여섯 번은 아니잖아?” “한 달 반이 수돗물이 안 나왔어요?” “그래도 반은 나왔잖아?”

 

주님의 자기 작품은 아주 치밀하게, 아주 섬세하게 관리하고 있으니까, 애프터서비스가 아주 대단해요. 철저하게 고객관리하십니다. 마귀한테 안 빼앗기게 하기 위해서. 근데 우리가 우리를 관리하게 되면, 진즉에 마귀한테 다 넘어갔어요. 진즉에 지옥 간다고 춤추고 있어요. 우리한테 내 인생 맡겨놓으면. 세밀하게, 세밀하게, 그때그때마다 작용해서, “우리 뜻이 아니요”라는 것을 항상 인식시키는 작전을 꾸며온 거예요.

 

홍해가 딱 갈라졌을 때, 그때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리가 죽을 때가 없어서 공동묘지 삼으려고, 집단적으로 죽이려고 우리를 여기까지 몰고 왔느냐?” 하고 누구한테 대들어요? 모세한테 대들어요. 그럼 모세는 또 누구한테 원망합니까? “왜 자꾸 나보고 그래?” 전두환이 이야기한 것처럼, “왜 나만 가지고 그래?” “왜 자꾸 나한테 따지느냐, 내가 뭘 했다고?” 그게 바로 감독이고, 그게 바로 장로입니다. 감독, 장로에요.

 

하나님이 주신 감독, 장로의 그 표준은 어떤 경우에만 해당이 되느냐 하면 이 감독, 장로를 세우는 것은 절대로 우리의 뜻이 아니요. 우리의 행함도 아니라는 것이 납득이 되는 사람만 그게 교회가 되는 겁니다. 교회가. 저 인간 감독으로 세운 것, 저 인간 장로로 세운 것, 우리 더러운 것을 노출시키려고 세웠다는 거예요. 왜 하나님께서는 그레데교회에게 처음부터 완벽한 장로, 감독을 주지 않았습니까? 줘놓고, 엉망진창 만들어놓고, 디도 보내서 수정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왜, 그렇게 일을 번거롭게 해요? 그건 아까 욥 이야기 할 때 이야기했습니다. 욥은 이미 믿음 좋죠. 믿음 좋으면 욥하고 마귀하고 직접 대면하면 되잖아요. 근데 믿음 좋은 꼬라지하고는? 믿음 좋다고 했는데 막상 마귀가 오니까 마귀의 말이 맞아요. 재산 뺏고, 건강 뺏으니까 원망이, 아주 기다렸다는 듯이 폭포수처럼 원망이 터지는데, 자식들이 생일에 죄짓는가 싶어서 그렇게 경건하게 제사 드리던 그 욥이 이제는 뭔가 지퍼 열렸듯이, 뭔가 왈칵 토하듯이, 뭔가 불평이 쏟아지는데, 엄청나게 쏟아지죠.

 

만약에 하나님이 인간 같으면요, “내가 사람을 잘못 봤구나. 아이고, 나는 니 자랑했는데, 니 꼬라지하고는, 이래가지고는 마귀한테 얼굴을 못 들겠다.” 이럴 정도로 원망해요. 얼마나 원망을 했으면 친구들이 말려요. “욥아! 니가 너무 심한 것 아니가? 니가 믿는 하나님한테 그렇게 대들면 대겠어?” 그래서 욥의 친구들의 권고에 이런 것이 있어요. 인간은 어떤 일을 당해도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욥의 친구들의 입에서 나와요. 욥의 친구들 입에서.

 

근데 욥의 친구들의 입이 옳습니까? 친구들이 조언을 잘 한 거예요? 욥은 한 마디로 이야기합니다. “니가 내가 돼봐라. 그런 소리가 나오는가?” 그 욥의 내용이 인간의 모든 철학을 추월합니다. 완전히 인간의 철학과 견주지를 못하는 깊은 철학이 나와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가 아니면 해석이 안 됩니다.

 

욥처럼 살자고요? 뭘 노리고요? 나중에 이쁜 딸 얻는다는 그것 또 노리고요? 고난을 안 주고도 할 수 있는데, 고난을 주시는 이유가 그게 하나님의 구원이기 때문에 그래요. 더러운 것을 다 토해내게 하는 그게 구원의 필수 코스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것 피해서 구원받은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예레미야도 그렇고, 엘리야도 그렇고, 모세도 그렇고, 모세도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갔잖아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한 거예요.

 

모세가 그렇게 성질 나쁜 사람이 아닌데, 백성들이 일부러 성질을 돋우었잖아요. 성질나서 “이 바위에서 나온다 말이야!”라고 하면서 두 번이나 쳐버렸어요. 치니까 주께서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이 시편대로 한다면 “구원은 인간의 팔로 하는 것이 아니다.” 해가지고. 구원은 주의 이름으로 한다고 할 때, 주의 이름은 항상 감추어진 이름이라는 사실.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할까? 내 팔로 할까? 이게 선택할 사항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 자신을 가지고 주님의 말씀을 이루는데, 우리 자신을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선택 안에서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나의 선택을 기대하지 마시고, 이런 어떤 짓도 주의 선택임을, 그걸 수용하면서 감사하면 되는 거죠.

 

오늘 디도서를 다시 한 번 되돌아봅시다. 되돌아보면 우리가 아는 것은,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고 급히 분내지 아니하고 술을 즐기지 아니하고 구타하지 아니하고”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 사람들은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우리 목사는? 우리 장로는? 하고 반드시 판정을 내리게 되어 있죠.

 

근데 아까 이야기한 것을 해봅시다. 판정을 내리게 되면 본인도 감독이나 장로가 아니더라도 판정관으로서 이미 이 말씀에 저촉을 받는다 이 말이죠. 저촉을 받아버리면 어떤 경우가 있느냐 하면은 구타한 장로, 그리고 술 먹은 감독, 이들만 말씀으로 지적을 받는 것이 아니고, “저 사람은 되게 나쁜 장로에요. 저 사람은 되게 나쁜 감독이에요.”라고 하나님한테 고자질하는 니도 마찬가지로 똑같은 인간이라고 지적받아야 될 말씀으로 주신 겁니다.

 

그렇다면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사람의 팔, 쉽게 말하면 힘이라고 합시다. 우리의 구원은 사람의 팔이 아니요, 라고 되어 있죠. 그럼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끄집어내라고 했죠. 다 끄집어내봅시다. 감독은 술을 즐기지 아니하고, 라고 되어 있죠. 이 단어가 너무 추상적이에요. 구체적이지 않아요. 그러면 이 감독이 있는 교회에 교인들이 열 명 있다고 합시다. 열 명은 너무 많으니까 다섯 명이 있다고 칩시다.

 

첫 번째 사람은 술을 하루 두병 먹어요. 두 번째 사람은 술을 네 병 먹어요. 세 번째 사람은 폭탄주를 마셔요. 네 번째 사람은 술 냄새만 맡아도 얼굴이 벌개져서 한 잔도 못 마셔요. 잘 들어보세요. 술을 안 마시는 것이 아니고 못 먹어요. 먹으면 열이 올라서 못 먹습니다. 다섯 번째 사람은 술이 나쁘다는 것을 알고 안 먹는 사람입니다.

 

자, 그럼 술을 즐기지 아니하고, 라는 이 말씀에 대해서 각자의 기준을 제시하라고 하면 각자의 기준이 다 같을까요? 다를까요? 다 다르죠. 그러면 이 다섯 명 가운데 어느 것이 주의 뜻입니까? 아무도 없죠. 어차피 말씀을 판단할 때는 곱게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내 경험상 판단하는데, 내 경험상이라는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나는 지키지롱~”라는 것이 들어있어요.

 

두 병 먹는 사람은 “나는 술 세 병은 안 먹지롱~”이라고 말할 것이고, 네 병 먹는 사람은 “나는 술 다섯 병까지는 나쁜 사람으로 보거든요.”이라고 말하겠죠. 폭탄주를 마시는 사람은 “폭탄주 정도는 먹어줘야 남자답지. 일을 하려면 이 정도는 먹어줘야지. 이렇게 안 마시면 회사에서 사귐이 안 된다.”라고 말하고, 술 냄새만 맡아도 얼굴이 벌개져서 못 마시는 사람은 술을 못 먹는 사람이지 안 먹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체질이 뭐 음양인지 뭔지 그래서 그렇고, 술이 나쁘다는 것을 알고 안 먹는 사람인데 북한의 김정은한테 걸려가지고 한 잔 먹었어요. “이거 먹을래? 아님 니 목숨을 내놓을래?” “그럼 한잔 마시면 살려줍니까?” “그래 살려줄게.” 이렇게 나올 때 먹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에요. “니가 이번에 취직하는데 이거 반잔만 먹으면 취직해 줄게.”라고 할 때 반잔 먹고 취직할 사람이고. 근데 아주 독해가지고 “내가 취직이 안 돼도 안 먹습니다.” 하다가 여섯 번째 탈락해서 도저히 안 돼서 일곱 번째에 면접 보면서 먹은 사람.

 

결국 윤리라는 것은 뭐냐 하면, 윤리라는 것은 시편 44편 3절에서 “인간의 힘으로 되지 아니하고”라고 할 때 너무나 추상적이에요. 인간의 힘, 인간의 팔로 되지 아니함이 너무나 추상적이에요. 그 추상성을 구체화하려면 인간이 익히 아는, 인간의 항목들을 노출시킬 수 있는 그런 사례들을 실제로 그레데 교회에서 주께서 만들어나가시는 거예요.

 

요한복음 8장에서 간통한 여인을 체포할 때, 평소의 유대인들이, 나는 말씀이 그냥 지식이 아니고 실천으로 옮길 수 있다는 것을 얼마나 장담했는지, 주께서 그 간통의 현장을 목격되도록 한 거예요.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 참에 본때를 보여줄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질질 끌고 예수님께 온 거예요. “이래도 우리가 죄인입니까? 이래도 우리가 죄의 종입니까?” 그렇게 온 거예요.

 

그 사람들은 간음죄를 지금 간통한 사람한테만 국한한 거예요. 근데 간음죄는 죄의 끝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간통죄 안 지어도 살인죄로 지옥가고, 살인죄, 간통죄 안 지어도 탐내기만 해도 지옥 갑니다. 왜? 율법이라는 것은, 언약이라는 것은 저주와 축복으로 되어 있으니까. 완전한 하나님의 의가 아니면 어느 누구도 천국 못 갑니다. 완전한 의가 아니면.

 

그래서 오히려 윤리적으로 보이는 말씀을 줬다는 것은 굉장히 우리로 하여금 가만히 있으면서도 실습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거예요. 이 말씀은 추상적인 믿음이 아니고 실제적으로 니가 믿음이 있는지를 보라는 거예요. 방금 제가 한 문장, 실제적으로 믿음이 있는지는 그 사람의 실생활에서 알 수 있다. 이 이야기는 모든 교회가 다 이야기하는 거예요. 근데 그렇게 이야기하는 뉘앙스가 다르죠. 그들이 말하는 것은 뭐냐 하면 “믿는다고 까불지 말고 지식인지 아닌지 한 번 해봐라 교회에서 얼마나 봉사하고 얼마나 바르게 사는지 보자.” 이렇게 하잖아요. 근데 그게 아니라니까요.

 

그게 아니고 실제적으로 내가 얼마나 죄인이고, 나는 주의 이름이 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내 팔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고, 그것을 근거로써 나는 이만큼 훌륭한 사람으로 변모하고 있다는 것을 자랑질 하려는 자기 나름대로의 목적이 있었던 겁니다. 그것은 바로 윤리적, 도덕적으로 보이는 말씀을 줄 때 걸려든 겁니다. 그레데 교회는 영원히 여기에 해당되는 감독과 장로를 만날 수가 없습니다. 몇 년이 지나든, 몇 백 년이 지나든 여기에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을 줄 세워서 모든 면접을 다 봐도 이런 인간은 없습니다.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고, 그 다음에 제 고집대로 아니 하고” 여기 7절에 나오죠. 고집대로 아니 한다는 것을 교인 백 명 모아놓고, 자 어떤 것이 고집대로 아니 한 거고, 어떤 것이 고집대로 한 겁니까? 라고 물어보게 되면, 개인적으로 감정이 있는 사람들한테는 감독이 순하고 이야기해도 전부 다 “저건 고집이야.”라고 하거든요. 미운 놈은 뭘 해도 밉거든요. 내가 밉다는데 왜 말이 많아? 이렇게 나온다고요. 내가 밉다는데? 그리고 진짜 고집대로 해도 이뻐 보이는 사람들은 그게 귀여워. “우리 목사님은 한 번도 고집대로 한 적이 없어요.” “니 같은 편이지?” “어. 같은 편이다.”

 

다시 말해서 말씀은 감독, 장로한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감독, 장로를 판단하고자 하는 모든 교인들이 이 말씀에 엮이도록 그 말씀을 준 겁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보고 “자, 우리 감독은 어떤가 보자. 우리 장로는 어떤가 보자.” 이렇게 나오지 마세요. 니부터 판단이 잘못됐다는 것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니부터 잘못됐다.

 

아는 사람이라고 봐주고, 원수의 가족이라고, 술을 즐기지도 않고 억지로 와서, 산소에 가서 누가 또 술 먹으라고 해서, 사무총장이 대선 후보로 나온 지가 얼마 안 됐는데 술 한자 먹으라고 해서 먹었는데, 세상에 대권주자가 술 한 잔 했다고 욕 되게 얻어먹었어요. 반총장이. 그게 술을 즐긴 겁니까? 아니에요. 카메라가 막 돌면서 찍었다니까요. 그것 때문에 지지율이 팍 떨어지고. “나 안 해!” 해가지고 안했잖아요. 자기 주제파악을 한 거예요.

 

뭐가 어떻고 정치판이 더러워서가 아니라, 본인이 하나님을 믿는다면, 안 믿지만 믿는다면 주의 뜻에 의해서 대권주자로 나와 가지고 볼 것 못 볼 것 다 보게 하시고 추한 것 다 노출시킨 주님의 멋진 연극무대였습니다. 세계유엔사무총장이 되어 얼마나 멋집니까? 그 멋짐이 실제로는 별로 안 멋지다는 것을 노출시킨 겁니다.

 

그 다음에 “급히 분내지 아니하고” 자, 그렇다면 목사님, 이 말씀은 왜 준거냐? 라고하신다면, 말씀이 계속 남아있는 한,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어떤 백 명이 있는 교회에 어떤 감독이 왔는데, 정말 이상하게 백 명이 다 동의했어요. 책망하지 않고 고집부리지 않고 분내지 않고 술을 즐기지 아니하고...다 했는데, 그래가지고 그 교회에서 15년 동안 했는데, 15년 지나서 하루 지나고 이틀 지나고 그 다음 오후 2시 46분에 성냈어요. 한 번도 성낸 적이 없는데 성냈어요.

 

그러면 그때 그만두어야 합니까? 아니면 애초부터 감독될 자격이 없는 겁니까? 애초부터 감독이 될 자격이 없었던 거예요. 그게 15년 동안 묵혀있다고 15년이 지나고 난 뒤에 들통 난 거예요. 분화구가 폭발해서 나온 거예요. 그러면 그 교인들은 제대로 감독이 되지도 못한 감독을 잘못 뽑은 거죠. 15년 이후를 봐야죠. 이 말은 교회가 우선이 아니고 뭐가 우선이다? 사람의 팔이 아니요, 주의 팔이 우선인 것을 유지시켜줘야 그게 바로 교회가 되고 감독이 되고 장로가 되는 거예요.

 

이건 뭐 틈만 나면 반주飯酒다 해서 술을 먹고, 틈만 나면 성질부리고, 고집대로 하고, 틈만 나면 자기 마누라 구타하고, 그런데 온갖 술책을 다해서 감독이 됐습니다. 감독이 됐는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감독이 못되고, 나는 디도서에 있는 그런 감독의 자격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이라도 그만두라고 하고 주께서 그만두라고 하면 그만둘 용의가 있습니다. 나는 이 감독 근처도 못 갑니다.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한다면 어떻습니까? 교인들에게 그런 목사의 고백이 디도서 1장 7절이 그대로 매주 나오는 거예요. 멋진 감독이에요.

 

인쇄화 된 그런 말씀이 아니고 살아 있는 사람의 입에서 이게 실감나게, 지는 술을 먹으니까, 구타 진짜 하니까, 실감나게 계속 나오면서, 실감나는 디도서 1장 7절이 살아있는 말씀으로 계속 나오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나같은 감독을 뽑은 것이 여러분의 실수고 여러분들도 죄인입니다.”라고 이렇게 할 때, 그 교회는 사람의 팔로 이루어진 교회가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된 교회입니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주의 이름으로 한 교회는 나타난다? 안 나타난다? 전혀 모른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인간이 자기 힘으로 했던 모든 것이 그대로 노출된 그 현장이 주의 이름의 긍휼로 한 거예요. 시편 44편 5절 보면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러 일어나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 6절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도 나를 구원치 못하리이다” 7절 “오직 주께서 우리를 우리 대적에게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로 수치를 당케 하셨나이다”

 

자, 활로, 칼로 구원하지 못한다는 말은, 자, 묻겠습니다. 칼을 사용했다는 말입니까? 안 했다는 말입니까? 했다는 말이죠. 활을 사용 했다는 말입니까? 안 했다는 말입니까? 사용했다는 말이죠. 주몽이에요. 활을 잘 쏴요. 쏘는 것마다 백발백중했어요. 그런데 활로 한 게 아니에요. 칼을 잘 써요. 이소룡 저리가라에요. 공유가 한 번 지나가면 30명이 죽어요. 근데 하는 말이 이거는 내 칼로 한 게 아니다. 니는 뭔데? 나는 마치 내 칼로 한 것처럼 여기는, 다시 말해서 내 힘으로 구원됐다고 우길 수밖에 없는 이런 인간을 주께서는 죄인 만드시는 방법으로, 이 죄인을 가지고 주의 일을 드러내는데 활용했습니다.

 

이게 바로 교회입니다. 디도서에서 요청하는, 사도바울이 말하는 교회가 이 교회에요. 이런 교회입니다. 이게 뒤에도 계속해서 반복해서 나옵니다. 이 말은 감독을 뽑아놓고 이 말씀을 적용시켜라. 그래서 감독도 회개하고 또 이런 감독을 뽑아놓은, 무슨 친척인지 모르지만, 뽑아놓은 니들도 다 같이 이 말씀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나야 된다. 그게 바로 주의 이름으로 유지되는 그레데교회에요. 이게 교회에요. 교회라고요.

 

들어보면 결론은 굉장히 간단한데, 그 과정 속에서 인간 안에 들어있는 반역과 반발이 안 나올래 안 나올 수가 없어요. 만약에 개판 같은 어떤 인간, 자기는 그 감독이 되는데 반대했는데도 불구하고 표수가 모자라서 감독이 됐을 때에, 그 감독이 “나는 죄인입니다. 감독 될 자격도 없습니다.”라고 하면 그 사람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내 말이 맞지? 그지? 내가 감독이 될 자격이 없다고 했지?” 이래 돼버리면 그 사람만 교회 아니에요. 왜? 지 잘난 체하기 때문에. “역시 나의 오른팔이 멋졌어! 나의 판단이 옳았어!” 이래 돼버리니까.

 

지금 트럼프 대통령이 된 뒤에 문제가 많잖아요. 제가 미국의 대통령이라면 여자들 머리에 쓰는 수건부터 다 벗겨버리겠어요. 멕시코 장벽 다 해버리고. 7개국이 아니라 아예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은 단 한명도 미국에 못 들어오게 하겠어요. 이게 내 이름의 팔입니다. 이게 옳은 것이 아닙니다. 내 팔로 하는 거라니까요. 왜? 나는 기독교신자니까, 그 지옥 가는 일을 만들 일을 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미국에서 트럼프가 하고 난 뒤에 누가 반대해요? 트럼프 안 찍어 준 사람이 반대하잖아요. 그럼 그들이 잘난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씀을 잘 이해하면 돼요. 모든 인간이, 감독, 장로뿐만 아니고 모든 교인들도 이 말씀을 들어야 해요.

 

“여기 보니까 감독들은 나그네를 대접하라고 했는데 당신은 나그네 대접했어요? 라고 손가락질 하지 말고, 그렇게 말하는 니는 했나?” “나는 감독 아니거든?” 이러지 말라는 말이죠. “나는 감독 아니거든?” 이러지 말라는 말입니다. 감독 아니라고 여기서 발을 빼면 안돼요. 모든 사람에게 다 해당되는 사항입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9절에 나옵니다.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자,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는 것은 지금까지 강의한 내용을 정리하면 돼요. 교회는 “우리 참 착하죠?”라고 하는 것이 교회가 아니고, 날마다 무슨 요소가 나와야 하느냐 하면 책망 받아야 할 요소가 계속해서 나와야 된다는 말입니까? 안 나와야 된다는 말입니까? 계속 나와야 돼요.

 

거기다가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책망 받으면 기분 나빠야 됩니까? 감사해야 됩니까? 감사해야 되죠. 그럼 설교자가 뭐해야 돼요? 설교자는 “요것도 책망 받아야 할 건데?”라고 끄집어낼 줄 알아야 해요. “아니 그것마저?”하면서 교인들도 같이 웃어줘야 해요. 전에 했잖아요. “여러분 믿는다는 것이 신자가 아닙니다.” “아니, 믿는 것도 책망 받아야 해요?” “오케이!” 믿는 것도 책망 받아야 해요. 감사하게도.

 

얼마나 감사한지. 왜? 어차피 구원은 나와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나 말고 다른 분이 이미 합격통지서가 끝났거든요. 근데 인간은 아침마다 누굴 쳐다봅니까? 내가 말씀대로 살았는지, 만날 자기만 바라봐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자기 오른팔을 의지하는 거예요. “주께서 그렇게 십자가 졌는데 내가 협조해야지.” 협조하지 마세요. 근데 협조하겠다는 거예요. 그게 얼마나 잘못된 생각입니까?

 

성령이 하신 일은 뭐냐 하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우리를 책망하는 거예요. 그걸 한 번 적어볼까요? 말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몰라요.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책망한다고 했죠. 요한복음 16장 8절에서. 심판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이걸로 바꿔 봐요. 책망으로. 그러면 죄와 의와 책망에 대해서 책망을 받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나의 오른팔로 성도되고, 성도를 유지하고, 그렇게 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성령은 뭐한다? 책망하시는 겁니다. 니가 그렇게 인간다울라고 하는 그 의도가 뭐냐? 그게 사적구원이에요. “남은 안 그러는데 나는 괜찮거든요. 쟤는 안 그러는데 저는 괜찮아요. 이렇게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이 죽을 때까지 여전히 계속 됩니다.

 

그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자기 집착을 어떻게 하느냐, 사도는 깨버립니다. 띄어서 12절을 한 번 봅시다. 12절에 “그레데 인 중에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 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쟁이라 하니” 어떤 철학자가 이야기한 것을 성경에다 집어넣은 거예요. 근데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외계인이 아니고, 그레데 토박이에요. 그레데 토박이가 한 이 말, 그레데인은 항상 거짓말쟁이라는 이 말에 본인도 포함이 되어 있죠.

 

그러면 그레데인은 거짓말쟁이라는 말은 거짓말쟁이가 이야기한 말이기 때문에 그 말도 거짓말이 돼버리죠. 십자가마을에 이런 경우가 있었어요. 십자가마을 사람들은 이단이라고 했거든요. 십자가마을은 이단이다. 그러니까 십자가마을을 공격하는 사람들은 어이가 없는 거예요. “어이가 없네~” 왜, 그런 말을 하느냐 하면 이단이냐, 아니냐를 판단하려면 우선 본인은 이단에 속해야 돼요? 안 속해야 돼요? 본인은 정통이야 돼요. 이단이 아니어야 해요.

 

그러면 누구든 이단이라는 말 뒤에 항상 뭐가 붙느냐 하면 “우리는 아니지롱~” 이게 포함이 돼요. “우리만큼은 절대로 이단이 아니야. 그러니까 우리는 판단할 자격이 있어.” 이런다 이 말이죠.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해요. 그러니까 “십자가마을 사람들, 너희들도 그렇게 하고 싶지? 그지?” 라고 우리한테 요청하는 거예요. 근데 어떻게 했느냐 하면 “십자가마을도 이단인데?” 이랬단 말이죠.

 

그러니까 그들과 어떤 차이가 나느냐 하면 “우리는 이단이 아닌데 쟤네들은 이단이다.” 이렇게 나온 것이 그들 방식인데, 십자가마을도 그럴 줄 알고 “십자가마을은 진짜 복음입니다.” 이렇게 나올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십자가마을은 이단인데요? 우리교회는 이단인데요? 우리교회는 교회도 아니에요. 엉텅리에요.”라고 하니까, 무슨 공격을 해야 할 건데, 공격할 표적을 놓쳐버렸어요. 공격할 건수가 없어져버렸어요. 건수가.

 

양무리마을이라는 것이 있어요. 양무리마을 사이트가 처음 생긴 것이 뭣 때문이냐, 저를 공격하려고 생긴 사이트에요. 희한한 사이트에요. 죄인을 공격하려고 만든 사이트인데, 공격을 하면서 반대급부로 같이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교회 한 번 해보겠다는 겁니다. 참 교회하는 방식도 희한한 방식이에요.

 

자, 사도바울이 그레데인은 항상 거짓말쟁이라고 한 이 말은 제가 아까 드린 말씀 그대로입니다. 뭐냐 하면 이렇게 이야기하는 그 그레데교회 본인들도 책망 받아야 된다는 것을 각오하라는 이 말입니다. 우리는 교회고 우리같이 안 하면 이단이라고 이래 하지 말고, 우리가 이렇게 유지되고 있는 것은 우리의 뜻 때문에 유지되는 것이 아니고, 바로 주님께서 지금 가장 적합하게, 가장 합하게 이렇게 조성해놓은 겁니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지금 가장 합당하다고 여겨서 가장 합당하게 만드신 거예요. 그래서 맛있게 먹자고 만든 비빔밥을 내가 떠먹고서는 맛있네, 없네, 하지를 마세요. 그게 바로 아까 시편 44편 3절에 나온 끝의 말씀 “오직 주의 오른손과 팔과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저희를 기뻐하신 연고니라”

 

우리에게 이 기뻐하신 연고라고 하신 순간이 와요. 어떤 순간이냐 하면 자기한테 너무 실망스러울 때. 자기가 너무 한심스러울 때. 그때서야 비로소 아는 순간이 뭐냐 하면 이 구절입니다. “나는 너무 한심스러운데, 주여! 이것마저 기뻐하십니까?” “그래.” “나의 기쁨과 주의 기쁨이 이렇게 다르구나.”

 

나의 기쁨은 나의 오른팔 가지고 작업매긴 그런 기쁨이라면, 주님께서는 거기에 가려진, 차라리 그것이 가려져서 내가 미처 몰랐던 다른 기쁨을, “니는 그렇게 사는 것이 가장 적합해!”라는 그 기쁨을 우리가 매일같이 놓치고 있는 거예요. 매일같이.

 

매일같이 감사해야 될 우리는 매일같이 놓치고 있는 거예요. <십년 전 오늘>이라는 그 노래가 안 뜬다고 우리는 매일같이 짜증내고 불평할 수가 있잖아요. 좀 뜨면 되는데, 발길로 차도 안 떠요. 얼마나 우리가 평소에 주님을 가립니까? 그리고 죽을 때까지 그럴 수밖에 없어요.

 

근데, 그것이 바로 책망거리로 일부러 유발했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으로 말씀에 대해서 우리가 설명해야 될 입장이어야 할 텐데, 우리가 변명하거나, 그 말씀에 대해서 순종한답시고 나름대로 어떤 작업을 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주께서 늘 책망하시는 시선을 보내심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했는데 그 말을 못 알아듣는 저희들, 이제는 알아듣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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