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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지역강의 > 서울강의
2017-07-15 00:37:53 조회 : 656         
억지 170714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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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IP:122.♡.183.206) 17-07-23 00:49 
서울의존강의20170714a 디도서2장13절(억지)-이 근호 목사

 

디도서 2장 13-15절입니다.

 

13절,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14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 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15절,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한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내용이 나와야 되겠죠. 예를 들어서, 아침에 설거지를 내가 한다, 청소를 내가 한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이잖아요. 근데 여기 복스러운 소망과 그리스도의 영광, 이걸 인간이 할 수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할 수 없는 거잖아요.

 

할 수 없는 것을 이렇게 성경을 통해서 제시했을 때는, 그만큼 인간들이 생각하는 현실이라는 것이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에 갇혀있다는 거예요. 내 현실이라는 것은,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현실이라고 여기지 않고, 할 수 있는 것만 나만의 소박한 현실로 자꾸 경계선을 만들어가는 겁니다. 여기서 여기까지는 내가 그만큼 한 것이다, 이거는 어디까지나 내가 주인공이다, 라는 그런 쪽으로 나서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없는 이야기가 사도바울을 통해서 이렇게 주어지게 되면 우리의 관심사가,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또는 내 생활에 관심이 있다 보니까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는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도 더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어 있습니다. 안 중요한 게 돼요.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됩니다. 그럼 이게 뭐냐 하면, 이게 하나님의 일에 대한 훼방, 훼방꾼이 되는 거예요. 방해꾼.

 

복음도 모르고 교회도 안 다니는데, 열심히 장사하면서 자기 자식들 잘 키우는 그런 착실한 아주머니가 계시다고 한다면, 그 사람의 문제점이 뭡니까? 복음도 모르고, 성경도 모르고, 교회도 안 다니지만 착실하게 일해서 자기애들 공부시키고 집안 잘 건사한다면, 그럼 그 사람의 문제점이 뭐예요? 문제점이?

 

진짜 주의 현실은 외면해버리고 그 안에서 독자적인 나름대로의 자기 현실을 만들려고 하죠. 그게 뭐냐 하면 억지입니다. 이게 억지에요. 그 사람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서 자기를 위한, 자기만의 소박한 현실을 꾸리려고 합니다. 뭐 그 아주머니가 세계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것도 아니고, 남북핵문제를 위해서 설치는 것이 아니고, 그저 내가 낳은 자식들 잘 키우고, 우리 가정 잘 가꾸고, 유지하는 것, 그것뿐이죠.

 

그런데 그렇게 억지를 부리면서 꾸미는 그 아주머니의 이 현실이 거대한 현실을 원(◯)이라고 하면, 그 안에서 따로 만들죠. 따로. 원 안에 있는 점처럼(☉). 나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내가 이 땅에 태어나서 여러 가지 일을 해서 이만큼 일구어냈다, 아파트 한 채라도 얻었다, 애들 한 세 명 키웠다, 이걸 자기 것이라고 여기죠. 그러면 자기 것이라고 여기는 이 현실(☉,원 안에 있는 점)은 전체 하나님의 현실(◯,원) 바깥에 있습니까? 안에 있습니까? 안에 있죠(☉).

 

그런데 이 하나님의 현실은 사도바울이 말씀을 통해서 이미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디도서에서 전달하고 있죠. 그럼 이 현실의 성질(◯)과 이 아주머니의 현실(●)의 성질이 맞겠어요? 안 맞겠어요? 안 맞죠. 안 맞는다는 말은 방해꾼이 된다는 겁니다. 방해꾼. 예를 들면 중국에서 있었던 일인데, 밭도 있고 집도 있는데, 택지조성을 위해서 다 갈아버렸어요. 보상금 주고 다 했어요. 했는데, 유독 한 집만 보상금 더 달라고 안 나가는 거예요.

 

사진에 보니까 불도저가 다 밀어내는 것을 봤는데, 근데 30미터 높이 위에 오직 이 집만 달랑 있는 거예요. 이 집만 보상 안 받고 버티고 있는 거예요. 올라가는 계단이 있는가요? 계단 없습니다. 못 내려옵니다. 포클레인 가지고 집 옆에 터를 다 깎아버린 거예요. 점점 더 깎여질 거예요. 왜? 이 집은 손을 안 댔으니까. 허허 벌판에 이 집만 달랑 남은 거예요. 이 집의 존재는 시에서 하는 택지조성에 결국 뭐가 됩니까? 방해가 되죠. 훼방꾼이죠.

 

이 훼방꾼을 시에서 그냥 놔두겠어요? 처벌하겠어요? 처벌하죠. 그럼 오늘날 복음을 모르는 자들을 주께서 가만두겠어요? 처벌하겠어요? 처벌하죠. 그럼 시에서 처벌할 때는 뭘 보내겠습니까? 계고장(일정 기간 안에 행정상의 의무를 이행하지 아니한 경우, 강제 집행을 한다는 뜻을 알리는 문서나 글)을 보내겠죠. “당신은 시에서 하는 일에 방해가 됨으로 처벌대상입니다.”라고 보내잖아요.

 

그러니까 오늘 디도서 2장 13, 14, 15절 말씀은, 결국 이 세상에 대해서 뭘 보내는가 하면은, “당신은 처벌대상입니다.”하고, 지금 처벌통고장을 보내는 겁니다. 어떤 스무 살 먹은 젊은 애가 집에 있는데 뭐가 날아왔느냐 하면 “논산훈련소에 입대하세요.”라고 입영통지서가 날아왔다고 합시다. 그 애가 그걸 찢어버리면 군에 안 갑니까?

 

그걸 찢어버리면? 또 날아오겠죠. 성경 이거 덮고, 안 보고, 찢어버리면, 주께서 심판 안 합니까? 심판하죠. “에이, 나 할 일 많은데 군에 안가.”하고 입영통지서를 찢어버린다고 해서 군에 안 갑니까? “아이고, 종이 찢었어요? 그럼 군에 안 와도 돼요.”라고, 이렇게 되는 거예요?

 

자기가 종이 찢었다고 해서 군에 간다는 현실이 변경될 수가 없듯이, 이 성경을 덮고 안 보고, 복음도 안 듣고, 이 성경책 불태운다고 한다고 해서 자기가 하나님의 현실에 방해꾼이 안 되는 겁니까? 여전히 방해꾼이 되는 거죠. 그리고 그 심판에 대한 계고장, 통보, 통보한 내용이 성경 안에 꽉 들어있는 거예요.

 

그리고 성경은 봐도 되고 안 봐도 되고 하는 선택사항이 아니고, 자신의 운명에 관한 내용이 이 성경 안에 들어있다는 거예요. 자신의 운명에 관한 내용이. 무협소설은 봐도 되고 안 봐도 돼요. 무협소설은. 드라마는 봐도 되고 안 봐도 돼요. 드라마는. 그러나 성경은 안 본다고 해서 하나님이 다른 현실을 우리에게 제시한 적이 없습니다. 다른 현실을.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럼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하고 나는 나대로 하면 되지.”라고 하죠. 그게 아까 이야기한 ‘억지’, 인생을 억지로 사는 거예요. 억지로. 인생을 억지로 사는 겁니다. 만약에 그 사람의 나이가 95살이 되었다면, 95살이 되어서 취직을 할 겁니까?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 할 겁니까? 잘 걷지도 못하는데, 숨도 제대로 쉬지도 못하는데, 이러고 있는데, 그래가지고 이력서 내겠어요? “실례지만 연세가?” “95살인데 숨을 잘 못 쉽니다. 뭐, 딴 건 잘하는데 숨을 잘 못 쉽니다.” 이래 가지고 취직이 되겠어요? 안 되죠.

 

그리고 그렇게 숨을 못 쉬다가는 그 날 밤에 어떻게 됩니까? 죽잖아요. 본인은 평생을 살고 싶어 했습니다. 근데 하나님은 그 사람을 죽였습니다. 누가 현실에 맞게 살았습니까? 누가 제대로 자기 자신을 아는 거예요? 하나님이 알아요? 본인이 알아요? 본인은 모르죠. 근데 그 사람은 죽을 때까지 자기가 왜 죽어야 하는지를 모르고, 처음부터 죽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이유도 몰라요. 그냥 맹목적으로 사는 거예요. 아무 이유도 없이 사는 거예요.

 

유명한 거지나사로 나오죠. 부자하고. 부자와 거지나사로를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같이 붙여놓은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세상에서 남들이 평가하는 그것은 비현실적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생각하는 현실 자체가 비현실이에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 뜻대로 세상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그 이야기입니다. 뭔가 인생을 잘못살고 있는 겁니다. 그냥 잘못 살았다가 아닙니다. 주님의 일에 방해꾼으로서 심판받게 되어 있어요.

 

심판에 대한 계고장이 뭡니까? 이 성경이 바로 계고장이에요. “너 죽는다.” 성경에서는 너 죽는다고 이야기를 하고 조건이 붙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영생이 없으면 너 죽는다.” 그냥 죽는다고 하면 그 정도야 교회 안 나가도 늙어 죽는다는 것을 다 알죠. 성경에서는 죽는데 늙어 죽는 것이 아니고, 본격적으로 죽는 것은 죽고 난 뒤의 저주스러움입니다. 그게 죽는 건데, 그 저주스러움은 이유가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죽는 겁니다.

 

이 점에 대해서 문재인 대통령이 기자회견 할 용의가 있는가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면 다 저주받습니다.”라고 할 용의가 있습니까? 그러면 문재인 대통령이 그걸 공개적으로 말을 못한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인생을 억지로 사는 거고, 그 다음에 인생에 대해서 방해꾼으로 사는 겁니다. 주님에 대해서 완전히 무시하고 모독하는 식으로 사는 겁니다.

 

제가 이 정도 협박을 해놨다고 친다면, “그렇다면 주의 일을 방해하고 싶지 않습니다. 방해하지 않으려면 책을 다 외워야 됩니까? 읽어야 됩니까? 뭐 믿어야 됩니까? 제가 어떻게 하면 이렇게 주의 일을 방해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겠죠. 여러분의 대해서 염려부터 하겠죠. 근데 그 생각이 또 방해가 돼요. 그 생각이. 왜냐하면 “네가 뭔데 살고자 하느냐?”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 기차가 한 300킬로미터로 달립니다. 기차가 빠른 속도로 달리는데, 그 기차 안에 들어있는 사람이, “내가 여기서 노래를 부르면 시속 300킬로에서 150킬로가 되겠나? 내가 여기서 춤을 추면 시속 한 50으로 줄어들겠나?” 하는 이런 생각을 하는 자체는 하나님의 하는 일에 아무 소용이 없죠. 기차가 300킬로미터로 달리는 것은 기차 자체 내에서 생각할 문제지, 내가 기차 안에서 손뼉치고 춤을 추고 빨간 양말 신고 노래를 부른다고 해서 속도가 줄고 하는 그런 것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성경대로 될지어다.”하는 것에 대해서 공감하고 동의하면 되는 거예요. 공감하고 동의하고. 그러면 주께서 인도하는 그 속도를 온 몸으로 느끼게 될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주의 뜻대로 오늘도 나는 일어났고, 주의 뜻대로 치카치카 양치질 하고, 주의 뜻대로 세수하고, 주의 뜻대로 모든 것이 되어간다는 것. 내가 움직이면서 하는 모든 활동도 주의 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걸 느끼는 거죠.

 

논산훈련소에 입대하라는 그 통지서를 받는 동시에, “입대할 때는 어떻게 머리를 깎을까?”라는 그런 생각과 관련되어 있잖아요. 논산훈련소에 입대하라는 통지서를 순간 받자마자, “자, 지금부터 머리를 어느 정도로 많이 기르면 되겠어?”라는 그런 생각은 안 하잖아요. 곧 입대할 사람이 머리 기를 생각은 안 하잖아요. 그러면 “머리를 군대 앞에 이발소에서 깎을까? 동네 이발소에서 깎을까?”라는 이런 생각을 한다는 자체가 뭘 전제로 하는 겁니까? 입대하라는 명령을 의식하면서 나오는 행위들이겠죠.

 

그게 바로 명령에 따라 행하는 순종적인 행위가 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라는 주님의 이 계고장, 명령서가 딱 등장하게 되면, 그때부터 성도는 이 명령이 최우선적인 행동지침이 되는 겁니다. 이 명령이. 그러면 그 명령에 대한 최우선지침이 되게 되면 나의 존재기반, 토대가 주의 명령 위에서 모든 것이 움직이겠죠. 그렇죠.

 

그렇다면 그 사람한테는 걱정이 없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독자적인 자기 계획이 날아가 버렸으니까 걱정이 없는 거예요. 주님의 계획은 왜 걱정이 없느냐 하면 미래까지 보장한 거예요. 미래까지 우리에게 계획을 소개한 겁니다. 그런데 주님의 계획이 없이 독자적으로 내 인생 계획을 내가 설계해버리면, 과거는 우리가 기억이 나지만 미래는 아직 불확실하잖아요. 그 불확실한 그만큼 우리에게 뭐가 주어지게 되느냐 하면, 미완료니까, 염려와 걱정과 두려움으로 그것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길에 가시든지, 누굴 만나든지, 그 사람이 걱정근심을 하거든, 그 사람은 지금 논산훈련소에서 나온 입영통지서를 아직 안 받은 거예요. 주의 명령하고 전혀 상관없이, 독자적인, 독보적인 자기만의 인생을 자기가 계획 짜고 가는 겁니다. “우리 애 성적이 중간쯤인데 어떻게 하면 일등으로 올라갈 수 있는가?”라는 걱정이 되죠. “너희 애 성적은 일등이 되어야 하느니라.” 예레미야 15장 35절. 뭐 이런 것이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런 것 없어요.

 

그거는 독보적인 자기입니다. 아까 이야기한 그 집, 중국에서 택지조성 하는데 보상 더 받으려고 안 나간 그 집이에요. 불도저가 그 주위 터를 다 깎아내고 달랑 남은 그 집이에요. 완전히 모래사장에서 게임하는 것 같아요. 깎아내고 깎아내면 언젠가는 넘어지긴 넘어질 거예요. 집으로 올라갈 사다리도 없어요. 사다리 치워버립니다. 독보적인 자기세계에서 꿈꾸는 거예요.

 

여러분 꿈이라는 것은 특징이 있어요. 꿈의 특징이 뭐냐, 주인공이 자기가 되는 거예요. 주인공이 자기에요. 모든 꿈의 공통점은 자기가 꿈의 주인공입니다. 안 그런 꿈 봤습니까? 남의 꿈을 내가 왜 꿉니까? 그렇죠. 자기가 주인공이죠. 느부갓네살을 보세요. 꿈의 주인공이 누굽니까? 자기 자신이잖아요. 왜 꿈의 주인공이 자신이냐, 낮에, 평소에 무심코 했던 모든 행동들이 본인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그래요. 본인이 주인공이 되었다가 잠을 자니까, 잠을 자도 계속해서 자기가 주인공이 되는 거예요. 아침에 잠을 깨도 마찬가지고.

 

근데 이 성경의 주인공은 누굽니까? 예수 그리스도거든요. 맞을 리가 있습니까? 평소에는 내가 주인공이고, 성경은 예수님이 주인공이고. 내가 주인공이 아닌데 구태여 성경말씀을 듣거나 성경공부를 하거나 성경을 보거나 할 필요가 뭐가 있어요. 내가 주인공이 되는데 보탬이 안 될 게 뻔한데. 그렇지 않습니까? 왜 성경말씀을 기피하느냐를 제가 설명하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설명하는 것은, “복스러운 소망”, 소망도 그냥 소망이 아니고 복스러운 소망, 행복한 소망이란 말이죠. 요 앞에 보니까 행복나눔교회가 있던데. 행복한 소망을 준다 이 말이죠. 그럼 이 편지를 썼던 사도바울에게 한 번 물어봅시다. 행복합니까? 행복 안 합니까? 행복하죠. 성령 받은 사도바울은 행복하죠.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행복한, 복스러운 소망의 말을 건넨다는 것은, 사도바울의 이 말이 궁극적인 행복과 궁극적인 기쁨으로 위로가 통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성도 아니죠. 성도 아닌 거예요. “아, 나 되게 행복한데, 이 소식 듣고 너무 행복한데, 아저씨도 행복하죠?”라고 이 편지를 보내는 거예요. “아주머니도 행복하죠?”라고 보내는 거예요. 근데 우리는 “뭐? 뭔데? 이거 뭐야? 도대체 어느 대목에서 행복 하라는 이야기야? 어느 대목에서?”라고 이래 돼버리면 복음의 훼방꾼입니다. 인생을, 세상을 자기에게 맞춰서 억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의 디도서의 편지는 “이렇게 지키세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대로 순종하시면 구원받습니다.”라는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이 말씀을 보는 저는 너무 다행스러워요.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저처럼 다행스럽게 느껴지죠? 그지요?”라고 묻는 거예요. 지키고 안 지키고는 나중 문제고. “이런 소식이 있다는 그 자체로 불행 끝 행복시작 아닙니까?” 이래 묻는 거예요. “너무 다행스럽죠, 그죠?”

 

오늘 제목을 이걸로 할까? “그지요?”라고. “너무 다행스럽죠? 그렇죠? 물가도 비싸고 경제도 어려운 이 험한 세상에서 이런 복된 소망이 있고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이 소식이 너무 반갑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 정도로 행복해도 돼요? 정말? 우리가 과연 그런 잽이 되고 그런 것을 누릴 수 있는 정말 대단한 사람들인가요? 정말 부끄럽습니다. 너무 좋아요.”라는 그런 식의 반응을 기대하면서 보낸 거예요. 이 편지가.

 

지키고 안 지키고, 지킨다는 것도 억지고, 억지를 부리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성령 받았고, 이 책을 보는 사람이 성령 받아야, 성령으로 쓴 이 책이 이해가 되고 해석이 되는 겁니다. 왜?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썼기 때문에, 성령으로 썼기 때문에 성령 받은 사람에게만 이게 유효한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효과가 없게 되어 있어요. 이 성경책의 특징이 그래요. 영생주기로 작정한 사람에게만 성경이 기쁨으로 다가옵니다.

 

이렇게 보니까, 이 성경 해석을 해석한다는 그 자체보다도 우선 반가운 마음부터 앞서야 되죠. 반가운 마음부터. “고맙습니다. 아, 난 살았군요. 이렇게 죽어야 될 인간을 이렇게 살려주셨군요.” 지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게 같이 공감하고 기뻐하기 때문에 이미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그 내용에 대해서는 그 다음부터 사도바울 쪽에서 설명에 들어갑니다. 성령께서 또 설명해주세요.

 

자, 이제 본격적으로 들어가 봅시다.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이 점을 처음에 이야기한 것을 다시 이야기해볼게요. 주님의 현실(◯)이 이렇게 주님의 계획대로 진행되는데, 인간은 어느 자리에, 어느 지역에서 응애~(☉)하고 태어나서 성장하면서 자꾸 자기 세계에 대한 확장, 폐쇄적인 자기 세계의 확장(◉)을 도모합니다. 누가 어기에 시집을 오게 되면 시집까지 보태서 확장되고. 누가 장가가면 장가간 것까지 보태서 또 확장되고. 아들 장가가면 아들 뺏기고, 딸이 시집가면 사위까지 받아 챙기고. 어쨌든 간에, 하는 것이 전부 연결이 되는 거예요.

 

이 큰 것(◯)을 가지고 거대담론이라고 합니다. 대화하는 내용이 거대하다는 거예요. 근데 이거는 뭐냐, 원 안에 있는 점(☉)은 너무나 개인적이죠. 사적담론이라고 합니다. 담론이라는 것은 디스커션discussion,대화의 장, 의견의 장이라고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근데 이 거대담론, 거대한 디스커션discussion,대화의 장이 이게 어디와 관련되어 있느냐 하면 창조의 원천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창조의 원천과. 창조의 원천과 관련되어 있거든요. 그럼 여기(☉)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성도라면 창조의 원천(◯)과 늘 수시로 교류가 일어나야 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디도서에 나오는 2장 13절 그 한절, 14절 그 한절, 15절 그 한절 속에, 그 밑에 뭐가 받쳐있는가 하면 창조의 원리가 받쳐져 있다는 겁니다. 창조의 원리가. 거대한 솥이 있는데, 솥에다가 팥죽을 끓였습니다. 설에 팥죽을 끓일 때 새알이라고 그런 것 넣죠. 새알 맞죠? 어릴 때는 그것만 골라먹었는데. 자, 동짓날에 팥죽을 솥에다가 끓였는데, 그 안에 새알이 막 있습니다. 그럼 그 솥 안에 있는 새알을 솥 위쪽에서 건져내나, 남쪽에서 건져내나 전부 다 한 솥에서 건져내는 거죠.

 

건져낼 때는 새알이 하얗지만 팥이 묻어 있잖아요. 디도서 2장 13절이든, 14절이든, 15절이든, 그게 하나하나의 새알이라면 뭘 끄집어내도 전체의 거대담론이 다 같이 묻혀서 나와야 된다는 겁니다. 묻어있기에 해석이 다 이해가 돼야 된다 이 말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자칫 그런 사람이 없겠지만, 디도가 그레데라는 섬에 있는 교회에 대해서 편지를 한 거거든요.

 

그러면 우리들은, 여러분들은 지금 서울에 살잖아요? 그럼 그레데 사람은 아니잖아요. 내게 대한 이야기가 아니니까 나는 넘어갈란다고 해요. 왜? 나는 서울사람이지, 그레데사람이 아니니까. 새알을 그레데 사람한테 준 것이지, 서울 사람한테 준 게 아니다 이 말이죠. 지리적으로. 근데 지리적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요. 지리적 뿐만 아니라 시대적으로도 나는 그때하고 다르니까, 지금 21세기니까 나 성경 안 볼래, 라고 이래도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창조의 원리라고 하는 것은 도넛처럼, 그런 도넛은 없겠지만 도넛 원 둘레가 42,500킬로미터 라면요? 도넛이 42,500킬로미터라면 그 위에 개미나 인간들이 있다면, 우리는 둥글다고 느끼겠습니까? 아니면 평평하다고 느끼겠습니까? 평평하겠죠. 지평선이 보이니까. 어딜 봐서 둥글어요? 그래서 옛날에도 지구가 평평하다고 봤잖아요. 그런데 주님의 창조의 원리는 모든 것이 주로부터 둥글게 연결되어 있단 말이죠. 둥글게.

 

그리고 우리 인생은 짧게 태어나서, 길어봐야 90이 아닙니까? 짧게 태어나서 죽으니까, 이 세상은 시작과 끝이 없고 그냥 살다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아니고 시작과 끝의 일부로서 너는 이 땅에 태어났고, 니가 경험했던 시대는 모든 게 하나로 되어 있는 세상에서 그중의 일부라는 거예요. 일부. 일부라는 사실을 어떻게 아느냐, 바로 새알 같은 성경구절 하나하나가, 밑에서 창조원리를 받치고 있기 때문에 그걸 알 수가 있다 이 말이죠.

 

지역별로도, “나는 그레데 사람이 아니니까 소용이 없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 시대별로도, “나는 지금 21세기 사람이니까 관계없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 이것은 오늘날 주어진 현실 전부가 디도서 2장 13절, 14절, 15절의 말씀대로 진행 중 입니다. 말씀 그대로 적용하고 있어요.

 

근데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적용을 하는데, 적용이 계고장, 또는 심판통보죠. 하나님이 너는 내 일에 방해했다는 것입니다. “니가 방해했어. 니가. 그것도 모르고 사적인 니 것 밖에 모르는 니가.” “나는 몰랐습니다.”라고 해봐야 소용이 없어요.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있는 거예요.

 

그럼 방해를 안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건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복스러운 소망”이라고 하면 “아이고, 행복해라.”라고 하면 돼요. 사도바울처럼 동일한 각오를 가지고 보면 되는 거예요. 그럼 그렇게 연출을 할까요? 연기를 할까요? 그것도 억지가 되는 겁니다. 이것은 사도바울이나 주님께서 안 믿는 사람을 믿게 하려고 주는 것이 아니고, 이미 이 말씀을 보는 순간 말씀을 통해서 성령께서 믿는 자로 확정지은 사람에게 일어나는 그 변화를 동시에 수반하게 되어 있어요.

 

이 말씀을 듣는 순간, 그야말로 성경말씀에 가슴이 뜨겁지 아니 하냐, 라는 말씀이 있죠.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성경을 풀어줄 때에 뜨겁지 아니 하더냐, 라는 말씀이 있죠.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들에게 하신 그런 말씀이.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눅24:32).

 

이 성경 말씀이 뜨거울 때에 그 사람은 그 순간 뭘 잊어버리느냐 하면 사적인 자기 영역을 잊어버려요. 사적인 것. 그렇게 자기 게 소중해요. 인간에게는 자기 것 밖에는 소중한 것이 없습니다. 근데 성령을 통해서 말씀을 깨닫게 해주게 되면, 그 사람은 창조의 원리 속에 침잠, 창조의 원리 속에 잠기면서, “뭣이 중헌디? 뭣이 중혀? 뭣이?” 라는 곡성에 나오는 대사처럼. 아버지가 귀신 들린 딸에게 물어보니까 딸이 하는 말이 “뭣이 중헌디?”라고 해요. 전라도 말로. 뭣이 중헌지 모른다는 거예요. “아버지 귀신이 중요해요? 내가 중요해요?”라는 식으로.

 

말씀이 들어오는 순간, 내가 걱정하고 근심하는 것이 다 부질없는 걱정근심이에요. 그 걱정근심이 나에게만 부질없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이름을 방해하고 훼방질하는 걱정근심이었습니다. 성경에 분명히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적인 것을 쥐고 범사에 감사하려고 하니까, 감사가 되지를 않는 거예요. 사적인 것을 따로 챙기면서 감사하려고 하니까.

 

그래서 억지로 생각하기를, “그래. 뭐 이거, 이거 부도나서 집 날아가고, 집에 불이 나서 이불 다 탔지만, 그래도 베개는 남아 있잖아. 그 베개 남은 것을 감사해야지.”라고 이런 식으로 억지로 감사를 하는데, 그거는요 이순신 장군이 “아직도 신에게는 열 두 척의 배가 남아있나이다.”라고 하는 소리하고 똑같은 소리에요. 감사라고 하는 것은 뭔가 소유하고 있음을 감사한다면, 그 감사는 지금 주님 앞에 꼼수를 쓰고 있는 거예요. 그거는 통하지도 않는 감사입니다.

 

감사는 내 게 없다는 데서 오는 감사입니다. 질문하신 그대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날아가 버리고, 내 게 없다는 것. 내 이름으로 내 게 없으니까 자연적으로 내가 주인공을 하고 싶어도 뭐 있어야 주인공을 하죠. 없는데요. “그럼 목사님 거지는 은혜 받겠네요?” 거지는요, 남의 것을 탐내기 때문에 은혜가 안 돼요. 내 것이고 싶다는 이상, 그거는 여전히 자기 것이 있는 것이 돼요. “이렇게 감사드리면 저 것이 내 게 되겠지.”라는 이런 노림수, 이런 반칙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있더라도 주의 것으로 등록된 가운데 있는 거예요. 주의 것으로. 누구마저? 나마저 주의 것으로 있는 겁니다. 여기서 어려운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는데요. 본문에 나와 있는 13절에 보면,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죠? “예수 그리스도”라고 되어 있죠. 이게 상당히 중요해요. 예수 그리스도가. 예수 그리스도가 왜 중요하냐 하면, 이게 실제 인물이라는 거예요. 실존인물. 실제로 이 땅에 왔다는 인물입니다.

 

그냥 “하늘에서 온 중보자다.” 이게 아니고, “하늘에서 온 메시아다.” 이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는 실제로 이 땅을 밟았던, 이 땅에서 수모를 받았던 그 분이라는 거죠. 그 분이 영광스럽게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이 땅에서 수모를 당했죠. 아주 무시를 당하고 모멸을 당하고 무가치하게 취급을 받았잖아요. 왜요? 왜 우리는 그 분을 그렇게 처리했습니까? 또 이렇게 물으면 “저는 보지도 못했어요.”라고 발뺌을 하지 않겠습니까?

 

어떤 시간이든, 어떤 지역이든 관계없이 다 우리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사적인 것 때문에 그래요. 개인적인 것. 내가 주인공이다. 내가 내 것의 주인공이다. 그럼 내가 내 것의 주인공이라는 말을 이렇게 하면 되겠죠. 거울 앞에 자기 몸이 있잖아요. 거울 앞에 자기 몸의 주인공은 누구다? 나다. 거울 앞에 나타나는 모습, 이미지, 만져지는 내 몸, 신체. 이것을 개체라고 하고, 나를 주체라고 하는 겁니다.

 

근데 인간은 이 개체가, 자기 몸이 잘 안 보이니까 큰 거울 앞에서 보면 자기 몸이 드러날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만지는 모습이 다 드러나죠. 그러면 거울 앞에 나타나는 이미지는, 이게 실체죠. 다시 말해서 물건이죠. 만져지니까. 만져지는 것을 실체라고 해요. 귀신을 실체라고 하지 않습니다. 추상적이고 모호하잖아요. 근데 만져지는 것은 무조건 실체잖아요. 실체.

 

과학은 뭘 대상으로 합니까? 실체로 하죠. 달이 환상입니까? 아니면 실체로 있어요? 실체로 있으니까 달에 가서 착륙을 했잖아요. 목성도 마찬가지고. 태양이 실체로 있으니까 낮에 더웠죠. 낮에 왜 더웠습니까? 갑자기 누가 보일러 땠기 때문에 더운 거예요? 실체로 있으니까 그렇잖아요. 그럼 내 몸은 실체로 있죠? 내 몸이 실체로 있으니까. 실체라는 말이 어려우니까 그냥 물건이라고 합시다. 물체. 물건이라고 봅시다.

 

그 물건에 나는 어디에 있어요? 이 물건에 나는 어디에 있습니까? 거울 앞에 있는 물건의 어깨, 무릎, 발, 어디든지 점을 한 번 찍어보세요. 나는 어디에 있는지? 지금 물건만 있죠. 그럼 그 물건을 바라보면서 나라고 하잖아요. 나. 이 나라는 위치, 관찰의 지점, 이 관찰의 지점이 물건 가운데서 어느 지점에 있습니까? 팔에 있어요? 발에 있어요? 지금 어디에 있어요? 이걸 실체로 보는, 만지면 만져진다는 물건으로 보는 나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어디를 점유하고 있고, 어디에 자리 잡고 있습니까?

 

제가 너무 어려운 질문을 한 것 같아요. 물건에 나라는 게 있어요? 없어요? 없죠. 나라는 게 없는 거예요. 나라는 것이 없다 이 말이죠. 제가 지금 말장난에 마술을 부리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꼭 귀신같아요. 나는 어느 자리에도 없어요. 어느 자리를 점유하지 않으면 없는 겁니다. 반드시 있다고 할 때는 어느 지정된 자리에 가 있어줘야 해요.

 

그런데 나라고 있는 자리는 없어요. 나는 없고, 신체라는, 육체라는 실체, 물체만 있어요. 그런데 아무도 그렇게 생각을 못합니다. 관찰하는, 내가 응시하는 대상으로서 나라는 게 있고, 다시 말하면 응시 하는 자리, 그걸 바라보는 응시의 자리가 따로 있는데, 그 자리가 나라는 거예요. 이게 말도 안 되지만, 말도 안 되게 살아가요. 전부 다. 모든 사람이. 그게 왜 그러냐 하면 그 이유가 있어요.

 

없는 주체와 개체를 이렇게 연합해서 바로 나라고 하는 이런 현상이 왜 일어나느냐 하면, 이게 환상이기 때문에 그래요. 환상. 이 주체라는 것, 환상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이 주체는 날마다 변덕이 심해요. 날마다. 어느 정도 심하냐 하면 내가 있는데, 내가 있다는 말은 지금 내 육체가 있는데, 어떤 사람이 지나가면서 욕을 했습니다.

 

욕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어떤 사람이 입을 벌려서, 발성을 해서, 소리에너지를 파장으로, 1초에 340미터의 파장으로 내 귀에 진동을 만들어내는 것이 소리죠. 근데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욕을 했다고 합시다. 그럼 욕하는 소리하고 칭찬하는 소리하고 그게 물리적으로 차이가 납니까? 물리적으로? 아이, 착해라. 아이, 더러워라. 똑같은 톤으로 이야기하면 물리적으로 차이가 나요? 안 나요? 물리적으로 차이가 안 나죠.

 

지금 인간이 얼마나 망상적인지 한 번 보세요. 그러면 칭찬할 때는 귀가 나풀나풀하다가, 욕을 할 때는 귀가 흔들흔들 이렇습니까? 아무 변화 없이 똑같죠. 똑같은데, 갑자기 내 신체가 일어나서 “너 이리와!”하고 흉기 들고 덤벼든다면, 도대체 그 신체를 누가 움직였습니까? 뭐가 움직였겠어요? 주체는 변덕스러워요. 주체는. 음파로 따져가지고 욕을 하나 칭찬을 하나 그 톤으로 하게 되면 아무 변동될 이유가 없어요. “아이고, 착해라.”하면 가만히 있어요. “아이고, 나쁘다.”하면 성냅니다.

 

근데 이걸 조합하면, ㅇㅏㅇㅣㄱㅗㅊㅏㄱㅎㅐㄹㅏ...이거거든요. 이거. 기역ㄱ, 니은ㄴ..이런 것들이 막 날아와서 되거든요. 음성이. 이거 듣고 자기가 발작을 일으키고 반응을 일으키는 이유가 뭡니까? 그냥 소리에 불과한데? 왜 욕한다고 기분 나빠야 하냐 이 말입니다. 욕 한다고 왜 기분 나빠야 되냐 이 말입니다. 그 사람은 내 신체를 보고 이야기했지, 내 주체를 보고 이야기한 게 아니에요. 내 신체보고 이야기했어요.

 

자, 내가 어떤 의자에 앉아있으면 어떤 물건이 의자에 앉아있는 거예요. 물건이. “아이고, 그 물건 더럽다.” 하고 가요. 하고 간 거예요. 물건이에요. 물건. 물건이라는 말을 그렇게 낯설게 듣지 마세요. 사람은 자기 빼놓고 다 물건이에요. “에이, 더운데 물건 좀 치워라! 엉덩이 좀 치워라!” 좀 떨어지라고 하는 이 말이거든요.

 

따라서 이 주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신체와 관련이 없이 다른 곳에서 온 거예요. 다른 곳에서.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걸 영적이라고 합니다. 영적. 그래서 인간은 과학적으로 봐서는 영적이 아니에요. 인간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게 되면, CT촬영하게 되면 절대로 영혼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평소의 모든 행동은 객관적인, 물리적인 신체만이 아니라, 다른 요소가 있어서, 울고불고 좋고 화내고 사랑하고 미워하고...난리가 나는 거예요. 걱정하고 근심하고 스트레스 받고. 그 다른 요소는 나라는 주체 말고 다른 주체에서 관련된 내 몸일 경우에만 이게 해명이 되고 설명이 돼요.

 

그 다른 주체를 성경에서 창조의 원리로 보는 겁니다. 그 다른 주체가 뭐냐, 아담의 몸입니다. 아담의 몸. 모든 인간은 누구의 몸을 인수받았어요? 아담의 몸의 확장입니다. 아담의 몸을 받았어요. 아담의 몸을 받았으면, 아담의 몸이 영적이라면 우리도 영적이 되죠. 그럼 영적이라는 것은 관계성을 이야기하거든요. 아담의 몸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성 속에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아셔야 할 게,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었죠.



따먹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주어진 벌칙이 뭐였습니까?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되어 있죠. “이 죽으리라”에 대해서 인간의 환상, 망상에 의하면 내 신체의 숨이 끊어지는 것을 죽으리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주체의 죽음을 생각 안 하고, 개체의 죽음이 죽음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이 주체라는 것은 영적으로 다가가야 한다고 했죠. 다가가기 위해서는, 아담이 처음 하나님과 관계 했던 것이 영적이에요. 그럼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그 말은 그 당시에 육신이 늙어 죽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여기에 뭐가 있느냐 하면 필히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아야 될 타당성이 우리에게 오늘날 주체로서 계속 내려오고 있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의 일을 우리가 그냥 방해한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방해하게 되면 거기에 합당한 징벌이 영적으로 적용된다 이 말이에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거든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다.”라는 말을 해버리면 이것은 복음이 아니고 불교에요. 그렇잖아요. 육이 흩어지면 흙이 되고, 흙이 모아지면 육이 되고. 끝. 더는 없는 거예요. 더는 없어요. 그런 불교신자에게 “그걸 하나의 개체로 보고 물건으로 본다면 당신은 뭐야?”라고 질문하면 그것은 나도 나중에 신체가 흩어지면 나도 없어지니까, 결국은 나도 공중에 산산조각이 나서 없어진다는 거예요. 없어졌다가 뭔가 다시 선행이 있으면 착한 소로 바뀌었다가 개로 바뀌었다가 바뀐대요. 그 사람은 거대한 도넛에서 그냥 자기가 느꼈던 것밖에는 몰라요.

 

거대한 도넛이, 우주가 나사렛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을, 그 거대한 시작과 끝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것을 모르고, 그저 태어나가지고 곁눈질해가면서, 자기와 똑같이 바보 같은 자들에게 물어가지고 지혜를 짜낸 것이, 그게 바로 불교입니다.

 

걸핏하면 이래요. 세상 살기 힘들면 내가 그냥 꽉 죽어버린다고. 하여튼 가족끼리 뭐라고 이야기를 하면, “내가 꽉 죽을게. 나 집 나갈게. 엄마 혼자 살아.” 사춘기 자식처럼. “여보! 또 술 먹었어요?”라고 하면 “그래, 나갈게. 내가 나갈게. 니 혼자 잘 살아.” 술김에 또 그런 소리하고. 도대체 죽는 게 뭔지 몰라요. 죽는 게. 자기 물건만 치우면 죽는 겁니까? 그게? 자기 신체만 자살하면 그게 죽는 거예요? 자기 손으로 넥타이 매거나 번개탄 피워서, 넥타이로 안 되면 넥타이 매고 번개탄 피우고, 이중삼중으로 완벽을 기해서 그렇게 죽으면, 그러면 이제는 안 죽는 겁니까?

 

인간 자체가 창조의 원천과 관련이 되어 있어요. 지금 홀몸이 아닙니다. 자기가 독자적으로 자기 생각한다고 해서 그게 아니에요. 그건 억지에요. 억지. 계고장 날아왔습니다. 경고장 날아왔어요. 이렇게 성경에 그리스도만 믿으면 복된 소망이라는 것이 무슨 소리입니까? 안 믿는 사람에게는 무시무시한 영원한 형벌이 기다리고 있다는 거예요. 왜? 주체는 주님이 독점하고 있어요. 우리가 주체가 아니에요.

 

예수님은 두 번째 아담이에요. 기존의 아담은 두 번째 아담을 위해서 그는 죄 지어야 하고, 죄 짓고 거기에 대한 형벌을 받아야 되는 겁니다. 그게 첫 번째 아담이 해야 할 피조물로서의 역할이에요. 자기배역이고 자기담당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제발 이 세상에서 복음을 모르는 사람은 부러워하지 말라는 거예요.

 

머리 허해가지고 그 염색이 잘 됐다고 그걸 부러워하지 마세요. 그리고 최순실을 안타까워하지 마세요. 유치장에 있으나 바깥에 활보하고 다니나, 자기물건, 자기밖에 모르는, 살면 살수록 저주받는 짓거리만 증가시키는, 그런 사람을 왜 부러워합니까? 삼성이 어떠니, 현대가 어떠니.....,

 

세상 모든 움직임이 뭐냐, 본인만 살라고, 본인이 꿈의 주인공이니까. 본인 살라고 그 짓하는 거예요. 정규직 되게 해 달라! 나 같으면 모든 정규직을 비정규직으로 만들어버리고 싶어요. 왜? 왜 하는데? 살아야지! 니가 복음을 알아? 우리에게 복음을! 이건 데모 안 하죠.

 

자기 사는 게 복음입니까? 자기 사는 게? 왜 그런 데모를 하느냐 하면 정규직을 부러워하기 때문에 그래요. 부러워 할 게 있다는 말은 앞으로 걱정근심을 한 트럭 싣고 다니겠다는 겁니다. 해답도 모르고, 소중한 것이 뭔지도 모르고, 무엇이 정답인지도 모르고.....,

 

10분 쉽시다.
 이미아(IP:122.♡.183.206) 17-07-23 17:04 
서울의존강의20170714b 디도서2장13절(억지)-이 근호 목사

 

아까 첫째 시간 끝에 했던 영적, 영적세계, 영의 세계란 뭐냐 하면 우리 신체라는 이 물질의 주인공과 관련성이 있는 것을 말합니다. 관련성이 있는 것. 가인이 아벨을 죽일 때에 그냥 염력으로 “죽어라 동생아!”라고 하면서 이래 죽인 게 아니거든요. 실제로 나서서, 뒤에서 돌로 쳐 죽이든지 해서 죽였을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행동에 나설 때, 그 행동의 주인공이 누구냐 하는 겁니다. 창세기 4장에서는 그걸 죄라고 봤어요.

 

쉽게 말해서 악마가 덮친 거예요. 가인을. 이게 왜냐하면 평소에 가인은 동생을 죽이고 싶은 것이 취미가 아닙니다. 그 순간 동생이 밉고 죽이고 싶은 충동이 악마가 덮쳐서 그렇게 했고, 그리고 그는 저항할 수 없는 힘에 의해서 동생을 죽였습니다. 저항할 수 없는 힘에 의해서. 똑같은 방식으로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할 때, 이미 예수님께서 떡을 한 조각 줬습니다. 떡을 받은 동시에 사탄이 떡 따라서 그 가룟 유다 속에 쏙 들어갔어요. 그리고 주님이 이야기합니다. “니 할 일을 해야지!” “너 누구야?” “니 할 일 해야지!”

 

사실 옆에 있는 제자들은 뒤돌아 있다가 ‘아, 빵 값 계산하라는 말이구나.’라고 이래 생각했다 이 말이죠. 빵 값 계산하라는 소리가 아니에요. 빵 값 계산하라는 소리가 아니고, 강시처럼 이래가지고 예수님 잡아 죽일 권력자를 찾아다니는 거예요. 뛰지는 않았지만 팔 앞으로 쭉 뻗어가지고. 누구도 못 말려요. 말릴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이미 아담이 범죄하고 난 뒤에 주도권이 자기가 주인공이 아니에요. 주도권이 악마한테 넘어갔습니다.

 

악마한테 넘어갔는데, 그 해결책은 새로운 주체가 등장해야 돼요. 그 새로운 주체의 이름은 뭐냐, 생명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의 이름이 남자한테 붙었을까요? 여자한테 붙었을까요? 여자죠. 생명이라는 이름이 아담한테 붙었을까요? 하와한테 붙었을까요? 하와죠. 하와라는 뜻이 생명이라는 뜻이에요. 저주받은, 생명나무를 못 따먹은 채로 쫓겨난 그 영역에 드디어 생명이 얼굴을 내밉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그냥 여자가 아니라 생명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할 일이 있어요. 여자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하느냐, 여자의 자손이 하는 거예요. 여자의 후손. 여자하고 여자의 후손이 달라요. 여자의 후손으로 온 그 분이, 현재 이 뱀 말고, 뱀의 후손으로 온 자가 있어요. 그 두 인물의 전투가 영적전쟁입니다. 영적전쟁이에요. 그 영적전쟁인데, 우리에게 영적전쟁이라고 하면 모호하잖아요. 물질이 아닌 것, 이래 생각하잖아요. 우리 속의 영혼, 이래 생각해요.

 

그게 아니고, 영적전쟁에 있어서 구체적으로 여자 이름이 하와라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여자이름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은 이미 영적전쟁이 개시가 되었다는 겁니다. 여자이름, 생명이라는 하와 이름이 있는 한, 이미 여성 자체가, 존재 자체가 이미 영적생명, 영적전쟁에 활발하게 관여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여자의 이름이 뭐라고 했습니까? 하와죠. 생명이죠.

 

이 여자의 후손의 이름이 뭐냐 하면, 여자의 후손의 이름이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주의 이름입니다. 주의 이름. 그러니까 주의 이름은 우리가 생각하는 개체, 몸을 어떻게 하느냐에 관계하지 않고, 영적전쟁에 대상자가 있어요. 그것은 우리의 몸을 종 부리듯이, 주체의 자리에 앉아서 우리의 몸을 가지고 노는 그 악마, 뱀의 후손, 그 뱀의 후손을 척결하고, 그 권세에서 빼내는 일을 주의 이름이 해요. 그걸 오늘 본문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14절에 보면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이래 되어 있어요.

 

여기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 주셨다는 것이 제일 어려워요. 자기를 내놨다는 거예요. 자기를 내놓은 거예요. 출애굽기에 보면 어린양을 잡았잖아요. 제가 울산강의에서 했는데, 어린양을 예쁘게 해서, 어린양에게 뜨개질해 만든 니트 옷을 예쁘게 입혀서 죽음의 심판이 넘어갔습니까? “천사님! 우리 집 양을 이렇게 예쁘게 했습니다. 우리 집 양에게 예쁘게 꽃도 꽂아서 장식했습니다. 우리 집 양을 이렇게 귀히 여깁니다.”라고 하면 그냥 넘어가는 거예요? 천사가 “아이고, 이 집은 어린양을 얼마나 귀히 여기는지..내가 그냥 넘어갈게. 다음 집!” 스토리가 이래 나오던가요?

 

어린양을 어떻게 처리합니까? 어린양에게 밥을 더 먹입니까? 어떻게 합니까? 죽여 버리죠. 어린양을 죽여서 그 피를, 심판의 천사가 찾아오는 그 문설주에다 처발라버리는 것이죠. 페인트칠하잖아요. 그럴 때 죽음의 천사가 넘어가죠. 그런 경험들 안 했습니까? “아이고, 목사님 그거는 옛날이야기죠. 요새 그런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요즘이야기에요. 요즘이야기. 모든 말씀에 창조의 원리가 담겨있다니까요. 관련되어 있습니다. 요즘이야기에요.

 

무슨 말인가 하면은요, 너는 오늘도 니 대신 누굴 죽였는가를 묻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그 자리가 놀랍게도 생명이 있는 자리에요. 그리스도와 함께 죽지 아니하면 생명이 없어요. 또 이렇게 이야기하면 제가 지어낸 이야기 같죠.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와 죽지 아니하면 생명이 없습니다. 약속된 분의 죽음을 통해서, 기존의 주체, 개체가 세팅된 그 세트set자체의 그 의미를 무산시켜버립니다.

 

아까 한 이야기를 다시 해봅시다. 우리 집에는 양이 있는데, 그 양을 예쁘게 꾸며놓았다. 천사가 온다. “애들아! 우리 양한테 절하자.” 양은 멍하고 있는데 전부 다 엎드려가지고, 우리가 이 정도로 양을 모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뭐와 같은가 하면요, 우리 집에는 예수님 사진도 걸어놓고, 이집의 주인은 예수님이다, 해가지고 눈 덮인 사진 찍어놓은 것 앞에다가 촛불 켜놓고 밥도 한 사발 갖다 놓고, “애들아! 이 밥은 주님의 것이니까 밥 더 먹지 마라!” 볼록하게 머슴밥해가지고 갖다 놓고. 그래가지고 “자, 천사님! 우리는 이렇게 예수님을 사랑하고 모십니다.” 이러면 그 가정이 구원받아요?

 

그리스도는 죽이라고 있는 거예요. 죽이라고. 그리스도를 죽여야 돼요. 그리스도를 죽이지 아니하면 자기가 죄인이면서도 죄인이 아닌 척 하는 사람이에요. 그럼 맨날 집에서 머리 풀어헤치고 쓱쓱~ 칼 갈면서 “오기만 와봐라.” 이러면서 죽일까요? 죽이는 방법은 죄입니다. 자기가 일상으로 죄 짓고 있음을 알면, 그것은 주님의 죽으심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대신 내어주심이거든요.

 

자, 이 내어주심을 좀 더 설명을 자세히 하기 위해서 성경을 찾아보겠습니다. 로마서 8장을 보겠습니다. 8장 31절을 한 번 봅시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절,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 하시겠느뇨”

 

32절을 보기 전에 먼저 31절을 보면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라고 나와 있죠. “우리가 기안하고 우리가 계획한 것이 아니잖아.”라는 뜻이에요. “이 세상 사람들아, 이 서울 사람들아, 우리 대한민국이 잘 살자고 의논한 게 아니잖아.” 이런 뜻이에요. 어떻게 하면 우리끼리 국민소득을 높이고, 어떻게 선진국이 되느냐를 회의한 게 아니라는 뜻이에요.

 

이거는 우리가 알든 모르든 관계없이 이미 현실로써 우리 속에 들어와 있다 이 말입니다. “나는 그거 몰라요.”라는 핑계가 통하지 않아요. “나는 평생 내 자식만 생각하고 돈 번다고 바빠서 교회 갈 시간이 없었습니다.”라는 그런 핑계는 통하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너희들과 의논하거나, 너희들의 의견을 개진(어떤 사실이나 내용을 밝히기 위하여 자신의 의견이나 생각을 펼침)하거나, 청중 하는 차원이 아니에요. 이거는.

 

따라서 “무슨 말 하리요”라는 이 말씀이 딱 들어오는 순간, 우리가 애를 세 명 키우든 두 명 키우든 다 부질없는 짓이에요. 이게. 나의 행복과도 관련이 없고, 나의 출세와도 관련이 없고, 나의 미래에 확정된 운명과도 관련 없어요. 나의 운명은 무슨 말 하리요, 하고 그 뒤에 나온 말씀으로 결정되는 것이지, 내가 얼마나 바르게 살고 착실하게 살고 남한테 해코지한 적 없고, 파출소 끌려간 적 없고, 지금껏 남한테 싫은 소리 안 듣고 살았다는 것하고 상관이 없어요. 에이, 안 듣고 지옥가라. 우리 가정은 얼마나 행복한데, 행복한 채로,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즐거운 나의 집, 전부 다 지옥 가서 노래 불러요. 지옥 가서. 지옥 가서 그 노래 불러요. 행복한 가정 지옥에 왔네.

 

“아이고, 하나님은 우리하고 좀 의논하지?” 지금 의논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바로 “무슨 말 하리요.”입니다. “입 다물어!” 그런 뜻이에요. “입 다물어!” 일방적 조치에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뭘 내줬다? 우리를 위해서 자기 아들을 내준 거예요. 아들을 내줬다는 것은 우리가 처리하라는 말이 아니고, 니는 빠지라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물건이니까. 우리 주체는 없는 거예요.

 

물건을 보고 악마가 자아라고, 주체라고, 자꾸 이야기하라고 부추겨서, 거울에 비친 내 신체, 키는 얼마, 몸무게는 얼마, 이게 난 줄 알고 있었던 거예요. 난 줄 알고 있었어요. 배후에 악마가 그렇게 조종한 거예요. 사실은 이 신체는 누구 거다? 내 것이 아니고 아담의 것이고, 그 아담의 것은 사실은 죽은 자에요. 그 죽은 인간이, 다시 말해서 저주받을 그 영이, 주님 주신 머리카락, 발가락...이 신체를 내 거라고 장악하고 그동안 우리를 속여 온 겁니다.

 

그런데 새로운 아담이 등장해요. 새로운 아담이 등장하면 그 아담 뒤에 있는 아버지와 아들사이의 관계가 정상적이 관계, 다시 말해서 정상적인 관계라는 것은 의로운 관계라는 겁니다. 의로운 관계가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주체가 돼버리면 하나님의 의를 증거 하는 소재가 돼버려요. 자료가 된다니까요. 재료가 되고요. 그러면 우리는 뭡니까? 범사에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범사에.

 

그대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염려하지 마세요, 라고 이렇게 하면 억지로 또 걱정 안 하려고 하는 지시에 따르려는 사람이 있어요. 그대여 걱정하지 말아요, 염려하지 마세요, 라는 이 말은, 이것은 “무슨 말 하리요”에요. 우리가 내 몸을 조치할 사항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그래, 걱정은 되는데 웃어야 한다고 하니까 억지로 입을 잡아당겨가지고 웃어버리면 이건 조커가 돼요. 조커. 배트맨에 나오는 조커.

 

그걸 언캐니uncanny라고 하는데, 괴리하다는 겁니다. 언캐니uncanny라고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인간이 로봇을 만들었을 때에, 어느 선까지가 괴기 하냐, 어느 선까지가 약간 인간답냐, 그 경계선을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라고 해요. 4차 산업에서.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신조어. '인간과 흡사한' 로봇과 '인간과 거의 똑같은' 로봇 사이에 존재하는 로봇의 모습과 행동에 의해 느껴지는 거부감이 존재하는 영역을 말함). 그래서 아무리 로봇을 만들어도 언캐니uncanny하게 되면 사람들이 질겁하겠죠. “이 괴물!” 그런데 얼마나 과학을 발달시켰으면 이제는 굉장히 다정하게 보여요. 언캐니uncanny하다가 굉장히 친근하게 느껴지면 그때는 정을 줘가지고 나중에 유산도 로봇한테 줘요. 앞으로 인공지능한테 유산 남기게 될 거예요. 마치 반려견한테 주듯이.

 

예수님께서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이 육 말고, 신체, 물건 말고, 영적 세계에서는 인간은 빠져있습니다. 이 신체가 니 것이 안 돼요. 뱀의 것이냐, 아니면 여자의 후손 것이냐, 둘 중의 하나밖에 없어요. 마태복음 12장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도둑이 담을 타넘어 들어가서 그 집 물건을 훔쳤는데, 물건 훔치기 전에 먼저 절차가 있어요. 집주인을 꽁꽁 묶어놓는 거예요.

 

여러분, 그 대목이 기억이 납니까? 하늘나라에서 벌이는 구원이 뭐냐, 도둑이 담을 타넘고 온다는 거예요. 도둑이. 도둑이 담을 타넘고 오지, “안녕하세요?”라고 하면서 오지 않잖아요. 타넘고 와가지고 물건을 훔치기 전에 먼저 집주인을 꽁꽁 묶어놓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하시는데, 도둑은 예수님 본인이에요. 집주인은 뭐냐, 악마입니다. 악령이에요.

 

그리고 그 집주인에게 꼼짝 못하고 놓여있는 세간은 뭐냐, 예수님이 찾고자 하는, 천국 가야 될 자기백성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성도가 수동적이에요? 피동적입니까? 그 말은 뭐냐, 인간에게는, 성도라 할지라도 주인이 따로 있다는 거예요. 노예라는 거예요. 그 주인이 누굽니까? 그동안 누가 주인행세 했습니까? 악마가, 악령이 집주인노릇 한 거예요. 꼼짝 못하게 한 거예요. “꼼짝 마라!” 탈출을 못한 거예요.

 

그러니까 도둑이 도둑으로 왔지만 사실은, “내 물건 내가 가져간다.”라고 해요. 창세전에 예정된 내 물건 내가 찾아가는 거예요. 이게 안 믿겨지는 것 같아요. 믿든 말든 일방적인 통고니까. 주님이 와서 자기 물건 가져가는 겁니다. 가져갈 때 뭐가 남겨져야 하느냐 하면 영적인 징후가 그 세간에 남겨져 있어야 해요. 그게 뭐냐 하면 나는 수동적이고, 나의 집주인은 마귀였는데, 우리 주님께서 외부에서 침입해서 나를 데려간다는 그 내용이, 그 내용이 증명되는 딱지가 우리 안에 딱 붙어있어야 돼요. 이 연출을 죽을 때까지 반복해야 되는 거예요.

 

그럼 우리는 뭐해야 됩니까? “우리는 마귀한테 속했다.” 이래 되겠죠. 아까 한 이야기를 다시 해봅시다. 아담이 마귀한테 속하고 난 뒤에 갑자기 아담이 정신이 나갔습니까? 그게 아니고, 아담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악마가 준 심성이 뭐냐 하면 이거에요. 나도 뭐처럼 되리라? 나도 신처럼 되리라. 그게 불교 아닙니까? 내가 나의 주인공이라는 거예요.

 

내가 나의 주인공이 되면 이 현실 속에서 나만의 사적인 공간, 아지트를 형성하겠죠. 그게 오늘날 흔하고 흔해빠진 우리 생활이 아닙니까? 우리 일상 아닙니까? 고층아파트 저녁이 되어 불 켜진 것을 한 번 보세요. 다 불이 켜있다고요. 서로 통하는 데가 아닙니다. 각자 칸막이가 되어 있어요. 성냥갑처럼 다 칸막이가 되어 있어요. 레고랜드 같아요. 레고랜드Legoland(덴마크 조립식블록완구브랜드 놀이공원). 각자 단락, 단락 한 아파트에 있다고요. 이쪽은 울고 있고, 저쪽은 싸우고 있고, 지금 난리가 났어요. 같은 아파트인데 다 달라요. 각자 달라요. 갑(작은 상자)처럼, 박스처럼 각자 논다고요. 그게 각자 신이에요. 자기가 주인공이에요. 근데 보게 되면 약간 넓은 갑이 있을 거예요. 재벌이에요. 재벌이나 마나 단지 면적이 넓다 뿐이지, 같이 폐쇄적인 구조는 마찬가지라니까요.

 

그 안에서 사람들은 자기가 주인공들이에요. 그래놓고 자기는 마귀하고 관계가 없고, 전신거울에 비친 저 모습이 나라는 겁니다. 얼마나 흔하디흔한 그러한 모습들입니까? 오랫동안 인류역사는, 인류역사가 6000년이 됐는데, 그런 식으로 길들여져 왔기 때문에, 그게 역사가 되어서 전통으로 내려오다 보니까, 의당 그런 것이 정상인양 그렇게 느끼죠. 그런데 말입니다. 이게 문제가 있어요. 뭐가 문제냐 하면 갑(☐)을 만들어 각각 자기 공간을 차지하면 되는데, 각각 갑(☐☐☐)안에 있는 주체가 가만히 멈추고 있는 것이 아니고, 확장을 노립니다. 욕망. 여분의 욕망.

 

인간의 주체는 뭔가 보는 순간 더 갖고 싶어 해요. 더, 더 갖고 싶고 내 거는 안 잃어버리려고 노력하고. 그런 것이 뭐냐 하면 세월호 사건이라든지, 누구 집에 불이 난다든지, 그렇게 되면 우리는 약간의 기쁨과 행복을 느낍니다. 왜? 내 거는 괜찮으니까. 누구 집 도둑맞았다고 하면, 다시 한 번 감사하게 되죠.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자기 게 있는 것으로 감사하는 것은 감사가 아니라고요. 또 누구 하나 이혼했다고 하면, “아싸!” 하죠. ‘내가 헤어질 줄 진작 알았어.’ 이혼했는데 다시 재혼해서 더 잘됐다고 하면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아요.

 

옛날에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가 계신데요. 그 할머니가 굉장히 화가 난 것을 봤어요. 뉴스를 보고. 그때 그 뉴스가 무슨 뉴스냐 하면 1987년 KAL858기 폭파범 마유미 김현희가 사람들을 죽였잖아요. 비행기가 공중에서 폭파해서 115명 전원 사망했죠. 근데 체포됐다 이 말이죠. 체포됐는데, 우리나라에서 그 여자를 안 죽이고 살려줬거든요. 우리 할머니가 살려줄 때까지는 참았어요. 근데 그 여자가 시집갔을 때, 격분을 했습니다. 사람 죽여 놓고 지는 시집가서 행복하게 산다고 하니까 참을 수가 없는 거예요.

 

인간의 주체가 하는 것은 이처럼 본인이 관리가 안 될 정도로 여분의 욕망이 거기서 나오게 됩니다. 이 욕망은 새로운 환상을 자기 것으로 일치시켜요. 그 환상을 자기 것으로 일치시킨다고요. 그걸 이상적 자아라고 합니다. “나 저거 되고 싶어.” “엄마! 나 저거 사줘.” “아빠! 나 저 장난감 사줘.” 그거 이상적 자아에요. 그걸 갖고 노는 친구와 그게 없는 나를 생각해보니까 끔찍하거든요. “저거 사줘.” 그래서 걔가 없는 것이 나에게 있을 때의 우월감. 이게 점점 절대적인, 독자적인 신이 되는 거예요.

 

그 인간의 주체에서는 계속 지층이 갈라지면서 욕망이 뿜어져 나오는 거예요. 욕망이. 그게 뿜어져 나오는데 결핍되어 있으니까, 그 결핍을 스스로 타협을 해서 계속 채우는 겁니다. 보충하는 거예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대리보충이라고 합니다. 새로운 것을 보충하는데, 이게 전부 다 물질이에요. 물질. 물질이고 물건들입니다. 이게 바로 구약에서 말하는 우상숭배입니다. 우상숭배.

 

구약에서 우상숭배라고 하는 것은 신의 형상을 명목상으로 구리나 동이나 금으로 만들어서 우상숭배라고 했는데, 골로새서 3장 5절에 보면 우상숭배는 그게 아니고, 탐심을 가지고 우상숭배라고 했어요. 탐심을. 특정한 것을 우상숭배라고 한다면, 그거는 개인적인 문제지만. 개인 그 사람이 잘못한 것이지만.

 

신약에 와서는 땅에 있는 모든 인간의 욕망이, 탐심이 우상숭배가 돼버리면, 지금 우상숭배하지 않더라도 내일이나 모레, 한 달 뒤에 또 어떤 것이 탐이 난다면, 그 사람은 탐심이라는 우상숭배의 계명을 저지르고 마는 겁니다. 지금 안 지켰다는 것은 그냥 지연될 뿐이지, 결국 땅의 유혹에서 탈피할 수가 없는 거예요. 안 돼요.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방식은 뭐냐, 그 땅에서 아예 죽여 버리는 겁니다. 그게 골로새서 3장에 나옵니다. 그걸 다중현실이라고 강의할 때 했는데, 벌써 6개월이 됐어요. 1절,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절,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절,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그래놓고 그 뒤에 5,6절에, “땅에 것은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고 되어 있어요.

 

여기다가 만약에 제가 보탠다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고 해놓고 보탠다면,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기쁘지 아니한가, 나는 너무 기쁜데 당신도 나처럼 기쁘죠? 그죠?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이 말씀이 최우선적이고 이게 소중한 겁니다. 이게 소중한 거예요. 내가 죽었다는 사실이 소중한 거예요. 왜 소중 하냐, 주의 말씀은 틀림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내 몸이 내 것이 아니고 주의 것이라고 할 때는, 그 내 것이라는 것은 이미 죽은 자로 쳐주는 겁니다.

 

우리 옛사람이 남아있는 육신은 계속해서 욕망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아담의 몸이거든요. 아담의 몸. 아담의 몸이라고요. 아담의 몸이기 때문에, 아담의 속성으로 다루어지는 겁니다. 자, 한 번 예를 들어봅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십자가에 죽을 때에 분명히 누가 봐도 그 십자가에는 달랑 그리스도만 있어요. 옆에는 두 강도도 있지만. 어쨌든 초점은 뭐냐, 예수님의 몸이 죽은 거죠.

 

그리고 그걸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한테는 간격이 있잖아요. 거리가 있잖아요. 예수님 몸 따로, 그걸 쳐다보는 내 몸 따로 있잖아요. 맞잖아요. 제 말이 틀렸습니까? 분명히 십자가 근처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이 “아파, 아파, 손가락 아파!”라는 이런 게 없잖아요. 아픈 것은 주님 몸 혼자 아프지, 구경하는 사람들도 뭐 어디 아파요? 갑자기 구경하는 사람 얼굴에서 피가 막 나오고 이렇습니까? 뭐 귀신 영화 찍어요? 그렇지 않죠. 분명히 몸이 딴 몸이죠. 딴 몸이라고요.

 

그런데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에 지진이 일어났죠. 일식, 해가 어두워졌죠. 예수님의 몸은 뭐와 관련되어 있습니까? 태초에 천지를 창조한 그 창조와 연계되어서 움직이는 거예요. 동반해서.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연동이라고 해요. 연동해서 움직여요. 연동해서. 예수님은 죽었는데 무덤이 열리면서 시체가 살아났잖아요. 엘리사처럼.

 

이거는 인간이 생각하는, 인간들끼리 머리 맞대고 이 자연을 잘 관리하고, 우리끼리 조화롭고 평화로운 질서를 만들자고 하는 여기에다가 지금 완전히 창을 꽂는 거예요. 그럼 관통이 되겠죠. 그렇게 되면 모든 질서가 무용지물이 되고, 무의미하게 돼버리는 거예요. 이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뭐가 응축되어 있느냐 하면 마지막의 심판대의 양상을 미리 앞당겨서 잠시 보여준 겁니다.

 

그리고 십자가이후에, 십자가는 새 언약이거든요. 그 다음부터는 어느 언약에 저촉을 받는가, 모세 언약이 아니에요. 다윗 언약이 아니고. 새 언약에 의해서 앞으로 세상이 구성됩니다. 구성되게 되면, 이게 참 어렵다. 아담의 몸에서는 각자 몸 따로 에요. 내가 이가 아픈데 네가 이가 아프고 하는 그런 것은 없어요. 몸이 따로 놀아요. 몸이 다른 몸이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 몸이 되고, 예수님도 내 몸을 너한테 내어주었다고 한다면, 내 몸은 폐기처분이 되고, 오늘 본문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영광으로 오시죠.

 

그럼 올 때, 그리스도만 영광스럽게 됩니까? 성도도 영광스럽게 됩니까? 성도도 영광스럽게 되죠. 성도의 몸도. 새 몸을 입는 거예요. 해같이 빛난다. 해같이. 그때는 너희들이 천사와 같이, 해같이 빛난다고 했어요. 김천사! 박천사! 뭐 이래 돼요. 이걸 가지고 고린도후서 15장 49절에서 하늘에 속한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는다고 했어요. 눈부셔! 눈부시게 되는 거예요.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이 된다 이 말이죠.

 

그렇게 되려면 옷을 벗어야 되죠.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옷을 갈아입는 거예요. 우리의 장막 집, 우리 몸을 갈아입는 겁니다. 새로운 몸으로 갈아입어야 돼요. 갈아입으려면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우리 안에 뭐가 반복되느냐 하면 예수님의 하신 일이 반복되면서, 이게 그 작용으로 우리가 옷을 갈아입는 겁니다. 그럼 예수님은 그 죄 때문에 죽었죠.

 

그러면 이 사람 몸이나 저 사람 몸이나 폐기될 몸인데, 폐기되는 몸이 되려면 죄를 적게 짓고 많이 지었다가 아니라, 다 같이 폐기된다면, 폐기될 수 있는 원리는 동일하게 똑같은 책임감으로 주어진다 이 말이에요. 참 말도 어렵다. 간음한 사람이나, 살인한 사람이나, 간음도 하고 살인도 한 사람이나, 형벌은 똑같다 이 말입니다. “쟤는 25억 훔쳤고 나는 2000원 훔쳤는데 나도 벌 받아야 되나?” 이런 것 없어요. 똑같아요. 지옥에도 뜨뜻한 방이 있고, 뭐 A급 시설이 있고...그런 게 없어요.

 

예수님만 안 믿는 사람은 다 저주받아요. 괜찮은 저주가 어디에 있어요? 여러분, 깨끗한 쓰레기 봤습니까? 쓰레기는 쓰레기지 무슨 깨끗한 쓰레기기 있어요? 쓰레기를 분류할 때 이미 더럽다고 판정내리고 하는 건데요. 주님 아니면 다 속된 거고 더러운 거예요. 인간이 얼마나 사적으로 계산하고 놀았으면 남하고 비교합니까? ‘나는 교회는 안 갔지만 나는 저 사람보다 악한 자는 아니니까. 저 사람은 나보다 더 악하다.’

 

그래서 단테의 신곡을 보면, 하여튼 지어내기도 잘 지어냈어요. 이게 불교인지 기독교인지 분간이 안 돼요. 그 사람의 죄목에 따라서 벌이 더 많아지고 적어지고, 경중을 따지고 있어요.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나 소크라테스 같은 이런 사람들은, 착하기는 착한데 복음을 모른다는 이유 때문에 약하게 처벌을 내리고, 복음을 알면서도 일부러 안하는 사람은 악한 데 간다고 하고, 하여튼 자기들이 재판관이 되어서 심판을 다 내려버려요. 형벌을 다 때려버려요.

 

제가 여러분들에게 형벌을 말씀드릴까요? 이제는 말한다. 이 땅에 사는 것이 형벌이에요. 이 땅에 사는 게. 사도바울이 오죽했으면 빨리 죽고 싶다고 했겠어요? 얼마나 복음이 깊었으면 이 땅에 사는 것이 형벌이겠어요? 그래서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사도바울이 뭘 봤는가 하면 삼층천을 봤죠.

 

그 사람이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모르겠다고 했죠. 그러니까 몸이라고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거예요. 몸을 쥐고 있는 그 주체가 중요한 거예요. 몸 안에 있든지, 몸 밖에 있든지, 어쨌든 간에 사도바울은 형용할 수 없는 셋째 하늘까지 십 사년 전에 올라간 겁니다.

 

그걸 봤잖아요. 그걸 지금 알았죠. 세상 살고 싶겠어요? 세상 살고 싶습니까? 경제가 어려우니까 월급 50만원 줄 테니까 다시 입대하라고 하면 입대하겠어요? 50만원 준다고 군에 가고 싶어요? 누가 이 땅을 더 살고 싶어 하느냐 하면, 주체가 바뀌지 않은 사람들은 이 땅에서 더 살고 싶어 할 거예요. 다른 대책이 없으니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써 십자가에 달렸던 몸이 사실은 우리의 몸이에요. 우리의 몸을 대신 가져갔기 때문에. 우리의 몸이 먼저고 주님의 몸이 나중이고, 그 나중 된 몸이 먼저고 그 나중 된 몸이 하늘에 속한 우리의 몸이 되고. 우리의 몸을 복사해서 주님의 몸이 됐고, 그 몸이 아버지한테 저주받았고, 저주받아서 사흘 만에 영광스럽게 된 그 부활의 몸을 복사를 하게 되면 우리의 장래의 몸이 되고. 그런 거예요.

 

오늘 본문을 보면서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복스러운 소망이 있다는 거예요.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이라고 할 때 그 앞에 우리 자신을 내놔야 해요. 아담의 몸과 결합된 이 주체를 내놓아야 합니다. “나 때문에 돌아가신 것 맞아요.”라고 인정을 해야 돼요. “나 때문에 돌아가신 것, 이 땅에서 밥 먹고 살라고 아등바등하는 이런 모습 때문에 돌아가신 것을 제가 알아요. 인정합니다.”라고 이야기를 해줘야 한다니까요.

 

14절 봅시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을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여기 불법이 뭐냐 하면 바로 새 언약에 도전하는 모든 것이 불법이에요. 제가 주체이야기를 계속하는 이유가, 만약에 우리의 사적인 몸의 주체가 나라고 한다면, 우리에게서 뭐가 나와요? 우리의 욕망 플러스(+) 여분의 욕망, 생각지도 않았는데 욕심이 더 나오죠. 그러면 계속 나오는 이 욕망을 가지고 어떤 착한 일을 한다고 합시다.

 

근데 이 착한 일로 성이 차겠습니까? 착한 일을 하는데 욕망이 가만히 있겠어요? “주님이여! 이렇게 착한 일을 하는데, 나로 하여금 절대적인 내가 되게 하옵소서.”하면서 착한 일을 하잖아요. 내가 고아원에 가서 구제를 했다면, 그 구제한 효과가 다른 사람에게 가면 화가 나잖아요. 왜? 내가 선한 일을 했는데 저쪽에서 혜택을 받아버리면 나에게 돌아오는 이익이 없잖아요. 그러면 돌아오는 이익이 있다면, 그 이익이 모아져서 뭐가 돼요? 사적인 나의 공간이 되고, 그 공간 속에는 나의 잘남으로 가득 차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런 욕망으로 선한 일을 백날 해봐야 결국 누구의 몫으로 돌아와요? 내 것으로 돌아오잖아요. 그럼 뭐가 탈락이 돼버리느냐 하면, 나 대신에 돌아가신 분의 내용이 없어지겠죠. 근데 왜 주님이 내 대신에 죽었습니까? 내가 어떤 착한 일을 해도 이게 불법이기 때문에 그래요. 불법이기 때문에. 어떤 착한 일을 해도. ‘대신’이란 말은요, 협조가 아닙니다. 단합대회 한 게 아니에요. 의논한 게 아니라 이 말이죠. 몽땅 대신해요. 몽땅 대신. 착한 일이고 나쁜 일이고 몽땅 대신한 거예요.

 

여러분, 아무리 선한 일을 해도 여운이 남아요. ‘좀 더 잘할 걸. 좀 잘할 걸.’ 어머님이 편찮다고 밑반찬 100가지에다 용돈 한 달에 100만원 드리고, 늘 체크하고 찾아가고, 어머님이 주무시는 방이 따뜻한지 손을 넣어보고, 어느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효자처럼, 어머님이 주무시는 걸 보고 나서야 자기가 자러가고. 이렇게 하면 그 사람이 만족합니까? 인간의 욕망은 반드시 더 여분의 것이 나오죠. “주무시고 난 뒤에 10분 후에 떠나다니..이 불효자식아! 2시간 30분은 있어야지. 왜 10분 뒤에 나왔어? 이 불효자야! 밑반찬이 100가지가 뭐야? 156가지는 해야지. 도대체 이게 뭐야?”라는 게 자꾸 남아요.

 

그리고 악한 일도 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악한 일을 했다고 하지만 돌아서면, ‘그 정도는 봐 줄 수 있는 거 아니야?’라는 이런 생각이 들 수가 있어요. 선악과를 따먹었거든요. 선이든 간에 악이든 간에, 아무리 악을 저질러도 이게 악 같지가 않고, 아무리 선을 행해도 선 같지가 않아요. 기부천사 가수 김장훈이 수 십 억을 어려운 사람들 줬잖아요. 그래놓고 지는 담배 피워가지고 비행기에서 걸리고. “수 십 억 기부했는데 담배 좀 피우면 어떤데?” 이게 뭐냐 하면 그게 악이 아니라고 보고, 용납할 만한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한 거예요.

 

불법요? 불법은 누가 정하는데요? 예수님이 정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악하다 하기 전까지는 그들은 악을 몰랐습니다. 너희들에게 죄 있다고 하기 전까지는 죄를 몰랐어요. 죄 있다고 하니까 그들은 비로소 죄 있는 거예요. 그들은 예수님을 인간 대 인간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적인 분이에요. 인간 배후에 있는 뱀의 후손을 바라보는 거예요.

 

예수님은 주의 이름으로 왔어요. 주의 이름은 어디서 온다고 했어요? 여자의 후손에게서 오는 거예요. 원래 여자의 이름이 없어요. 남자의 소속이기 때문에 이름이 없어요. 하와라는 이름은 기능입니다. 장차 오실, 내내 그렇게 할 기능이에요. 무슨 말이냐 하면 하와라는 이름이 있다고 해서 하와가 안 늙습니까? 점점 더 젊어지고 이럽니까? 뭐 세월이 거꾸로 가서 50대에서 40대로 이래 되는 거예요? 아니죠. 갑자기 청춘으로 유지되고 그런 것이 아니죠. 늙어 죽었잖아요. 하와도 늙어 죽었잖아요.

 

생명의 기능은 하와를 통해서, 여자의 후손의 생명의 기능이, 여자 쪽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생명이라는 이름을 붙인 겁니다. 괜히 사적인 문제가 아니에요. 이건 영적인 문제고, 인간 배후에 관한 문제라 이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은 항상 창조의 원리, 창세기 1장, 2장, 3장, 그것과 연관되어서 해석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을 다시 한 번 봅시다. 14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 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선한 일이라는 것은 결국 이 소식, 이 소식을 말하는 겁니다. 선한 일을 할 때에, “선한 일을 어떻게 하지?”라고 하는데, 사도바울을 보세요. 사도바울의 선한 일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십자가 복음 전하는 것뿐이에요.

 

십자가 복음 전한다고 하는 것은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모든 사도바울의 행동과 그리고 갈 길, 로마 가는 길이라든지 그리고 그에게 닥쳐졌던 모든 일들이 전부 다 복음과 연관되어서 일어났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도 복음과 관련성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해요. 모든 것은 복음과 관련되어 있어요.

 

백화점에 가서 티 하나 고를 때도 복음과 관련되어 있어요. 죄인 주제에 옷을 보는 눈은 있어가지고... 다 관련되어 있어요. “이 옷 사고 나니까 저 옷이 욕심이 나네. 아, 이것도 죄구나. 이왕 죄 진 것 좀 더 죄짓자. 바꿔주세요!” 모든 것이 십자가와 관련되어 있어요.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고 했어요.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 예수 십자가가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 지켜보는 몸,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이제 예수님이 부활해버리면 새로운 몸이 등장해요.

 

이제는 각자의 몸이 아니고, 주께서 각자의 몸을 가지고 활용하시는 몸이 돼요. 각자의 몸 같은데 보게 되면 한 몸으로 되어 있어요. 우리는 그걸 머리라고 하고, 우리는 그걸 지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어떻게 살든지 간에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지체로서 움직이도록 주께서 그렇게 조치를 하시는 겁니다. 주님이라는 개별자가 보편성을 낳는 겁니다. 수많은 보편성을 전부 다 분여, 나누어주고 있었던 겁니다. 분여, 나누어주는 것. 주 예수님이 머리 되시고 우리는 몸으로서 되는 겁니다.

 

그래서 지난 수요모임에 그런 이야기를 했죠. 대구 살다가 서울 간다고 그렇게 섭섭해 하지 말고, 대구 살더라도 창조의 원리와 교류를 해야 되고, 서울 가더라도 창조의 원리와 교류를 하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대구에 가나 서울에 가나 영국에 가나 나이지리아에 가나 그게 무슨 상관이냐 이 말이죠. 자식이 군에 가나 군에서 제대하나 무슨 상관이 있어요. 항상 그리스도와 교류되게 된다면. 그리스도의 머리되심과 지체로서 유지되게 된다면. 심지어 마리아 마르다의 오빠 나사로는 죽어서도 교류를 했잖아요.

 

죽은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뭘 했습니까? 말을 던졌죠. “나사로야! 나오너라!” 다른 사람들 같으면 말렸을 거예요. “예수님, 아직 모르시는가본데 죽었습니다. 죽은 사람한테는 말을 거는 법이 아니에요. 죽어서 못 듣습니다. 죽었습니다.” “시끄럽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회당장의 딸이 죽었습니다. 죽었는데 뭐라고 했습니까? “소녀야! 일어나라! 너희들 보기에는 죽어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자고 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 몸은 아담의 몸이에요. 아담의 몸은 마귀한테 질 수밖에 없는 몸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맨날 죄 지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마귀를 못 이기니까. 근데 주님께서 대신 하셨거든요. 주님이 마귀를 이겼죠. 그러면 우리를 불법에서, 죄에서 건져주시는 겁니다. 죄에서 건짐 받으려면 우리가 어떤 상태가 되어야 해요? 우리가 알아서 죄 안 지은 상태가 돼야 합니까? 아니면 죄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합니까? 죄 있는 상태 정도가 아니라, 죄가 날마다 생산되는 상태가 되어야 해요. “나는 뭐 착한 일만 하니까 죄를 짓고 싶어도 도무지 죄 지을 기회가 있어야지.”라고 하는데, 이게 아니에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강의 끝나고 나면 다 잊어버리니까. 인간의 죄라는 것은 뭐냐 하면 아담의 속성을 받은 거고, 아담의 속성은 뭐냐, 내가 주인공이 되는 거예요. 내가 주인공이라는 것은 뭐냐, 내가 이만큼 살기까지 내가 얼마나 노력을 많이 했는데, 라는 겁니다. 자식 이만큼 키우고, 이만한 생활하고, 이만한 아파트 마련하고, 내가 얼마나 노력했습니까? 물론 그런 노력에 행운도 많이 따라주고 보상금 탄 것도 있지만. 얼마나 노력을 많이 했는데....., 이 말은 내 것을 빼앗기기 싫다 이 말이거든요.

 

나는 내 것으로 행복 하고 싶고, 나는 내 것으로 즐기고 싶다는 겁니다. 나는 나로 인하여 기쁨을 만끽하고 싶다. 그게 우리가 정의내린 해피니스happiness,행복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남 잘 되는데 내가 기쁘던가요? 그거 미친 것 아니에요? 나는 나로 인하여 기쁘도록, 그런 식의 아담의 몸으로 훈련되어 있는 겁니다. 나는 나로 인하여 기뻐요. 미장원에 갔는데 옆에 손님은 너무 머리가 잘 나오고, 나는 엉망이 됐어요. 기쁩니까? 머리 뒤에서 쥐어뜯었으면 좋겠다. 기뻐요? 그렇지 않죠.

 

바로 그런 경우를 주께서 계속 일으킵니다. 왜? 공생애이기 때문에. 십자가가 여전히 우리한테 필요하다는 것, 십자가 없이는 우리가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것, 저주아래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그것을 상기시키는 방식으로 말씀을 주는 겁니다. 사도바울의 인생이 그랬어요. 사도바울의 인생이. “십자가가 보인다. 나는 십자가에 참여한다. 내가 가는 길이 십자가의 길, 생명의 면류관의 길이다.”라고 한 것은, 자기가 잘났다는 말이 아니고, 이게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는 말이에요.

 

사도바울의 소망은 빨리 죽어서 그리스도의 몸을 입는 거예요. 그리스도를 보고 싶은 거예요. 그리스도를 만나볼 그 날을, 그때는 희미하게 보이나 지금은 얼굴을 맞대고 보고. 사도바울이 그렇게 하면 세상 사람들은 한 마디로 말해서 “미쳤다.”고 하죠. 미친 거예요. 우리는 왜 그런 소리를 못 듣느냐 하면, 남한테 그런 소리를 듣는 것이 싫고, 미쳤다는 소릴 들을 용기가 없어서, 우리는 정상인척 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우리를 그냥 두지 않죠. 기어이 이 세상에 대해서 재미와 흥미를 못 느끼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러면 우리는 갑자기 불행을 느끼게 되죠. 왜? 내가 믿던 것, 내가 생각했던 것이 다 깨지니까. 사적공간이 주님의 주신 감사의 공간으로 전환이 되려면 이럴 수밖에 없어요. 돈을 달라고 합니까? 떡을 달라고 합니까? 그냥 반가이 주의 것으로 등기이전해서 살면 되는 거예요. 이 몸까지라도 주의 몸으로 살면 됩니다.

 

자,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목사님, 우리도 그렇게 살고 싶은데요, 딱 3초만 되고 그렇게 안 돼요.”라고 하시는데, 살고 싶어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겁니다. 왜 솔직하지 못합니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우리의 마음이 아니고, 우리는 그걸 반가워하기는커녕, 이 강의를 안 들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이 우리의 솔직한 마음인데, 그게 솔직한 마음이에요. 주께서 이 몸을 어떻게 조지는가 한 번 보세요. 강제로 난입해가지고 인생을 어떻게 이끄시는가를 한 번 보세요.

 

그러면 예상 밖의 기쁨이 있어요. 내가 예상한 그게 아니고, 우리 존재가 예상 밖으로 가벼워지는, “나 바보 아니야. 쓸데없는 걱정을 하다니!”라고 하는 그 짧은 순간이지만, 그간의 모든 피로감, 스트레스를 다 씻어내고, 심장이 폭발할 지경에 있는 그 불안과 걱정이 한 순간에 훅하고 없어집니다. “어디로 갔지?” 그냥 가벼운 깃털처럼, 그냥 이대로 죽었으면 좋겠어요. “여보! 미안해. 자식들아! 미안해. 나 그냥 간다.” 그냥 갔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 때, 그게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인력으로 되지 않는, 오직 주께서 계획하신 바가 적용됨으로, 예상 밖의 기쁨과 즐거움과 복된 행복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나보다 더 소중한 것이 덮친 이 기쁨이, 계속 연속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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