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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12 00:36:18 조회 : 590         
사고와 운명 170811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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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IP:122.♡.181.188) 17-08-17 23:10 
서울의존강의20170811a 디도서3장1절(사고와 운명)-이 근호 목사

 

디도서 3장 1절입니다.

 

1절, 너는 저희로 하여금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예비케 하며

 

권세에게 복종한 것과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한 것과, 이걸 달리 생각해야 돼요. 왜냐하면 모든 정사와 권세는 누가 쥐고 있느냐 하면, 예수님이 쥐고 있습니다. 그럼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려면 조건이 있어요.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최종 권세 됨에 의해서 움직여 줄 것인지, 그 여부에 달려있습니다. 대통령이나 왕이 예수님을 믿느냐를 따지자는 말이 아니고, 저 사람이 대통령으로서 하는 저 일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는 일의 대리자로서 한다는 것으로 오게 되면 거기에 대해서 복종해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정사나 권세 잡은 이런 것을 그 사람의 존재로 보지 말고 기능으로 보자 이 말입니다. 참 저 사람 훌륭하다고 보지 말라는 거예요. 개인이 얼마나 훌륭하냐를 생각하지 말고 그 사람이 하는 기능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고자 하는 기능을 나타내면, 그 기능에 대해서 옹호하고 복종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그렇게 봐요. 그 비슷한 이야기가 로마서 13장에 보면 또 나와요. 권세 잡은 자를 누구로 보느냐 하면 주의 사자로 봐요.

 

이런 이야기가 어려운 것 같은데, 어려운 게 아니에요. 예를 들어서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이 하라고 하잖아요.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한다고 해서 남편을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이 말이죠. 남편이라는 그 자리, 그 기능의 모습이, 주님께서 이 땅을 다스리는 것처럼 나온다면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고, 기능에 대해서 동의하고 수긍하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것이죠.

 

그래서 주께 하듯이 하라고 하잖아요. 주께 하듯이. 그리고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주님이 교회를 위해서 목숨 바친 것 같이 하라. 남자가 여자를 위해서 목숨 바치라고 하면 저 여자가 뭐가 잘났는데 귀한 내 목숨을 바치라고 하냐? 이래 나온다면 그거는 자기 존재가치에 의미를 두고 하는 거예요. 사람이 사람을 믿으면 안 돼요. 사람들은 다들 우깁니다. 내가 알아서, 내 의지로, 내 선택에 의해서, 내 결정에 의해서 이 일을 했다고 하지만, 그 말 믿지 마세요. 그건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에요.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리기 위해서 그런 일이 일어나야만 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다니엘 시대에 느부갓네살 왕이 있잖아요. 우리가 알기로는 느부갓네살 왕이 짐승도 되고 우사스러운 일도 많이 당했죠. 벨사살 왕도 마찬가지고. 다니엘 세 친구를 불에 집어넣은 사람이 누구에요? 느부갓네살 왕이잖아요.

 

자, 그렇다면 다니엘 세 친구를 불에 집어넣었다, 느부갓네살이란 인간은 인간도 아니죠. 근데 불 속에서 살아났어요. 그렇다면 느부갓네살은 왕이 될 자격도 없고 왕의 권한도 없으니까 그럼 왕을 바꿔야 됩니까? 느부갓네살 왕을? 그렇게 했다고 느부갓네살 왕을 바꿨습니까? 아니죠.

 

자, 어떤 나라에서 어떤 사람이 담을 타넘고 와서 장독에 있는 된장을 훔쳤다, 절도죄죠. 된장을 훔쳤는데, 그 나라 경찰이 와서 그 사람을 절도죄로 체포를 했다, 자, 그러면 그 된장 도둑을 잡은 것이 잘했습니까? 못했습니까? 남의 집에 가서 된장을 훔쳤는데, 훔친 도둑을 잡은 그 일이 잘한 거예요? 못한 거예요? 자꾸 어려운 것 한다고 이것도 어려운가본데, 아니, 된장 훔친 도둑을 경찰이 잡은 것이 잘한 거예요? 못한 거예요? 잘했죠.

 

근데 그 나라가 북한이라면 어떻게 하겠어요? 북한이라면? 너희는 북한이니까 풀어줘라! 이렇게 해야 됩니까? 아니죠. 북한말로 아니디요? 그런 게 아니디요? 북한은 북한이고 도둑질한 것은 도둑질 한 것이고, 그런 건 북한과 관계없이 나쁜 짓이 된다 이 말이죠.

 

하나의 북한이라는 그 기능을 누가 쥐고 있어요? 주님이 쥐고 있죠. 주님이 쥐기 위해서 북한에서 낸 법대로 합니다. “도둑질 하면 체포합니다.” 그게 나쁜 짓이에요? 아니라 이 말이죠. 그러면 만일에 북한에서 도둑질해도 안 잡는다고 하면, 북한 시민들의 생활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가진 자가 아주 난리를 칠거예요. 서로 못 믿고, 서로 죽이고 해서 지옥 그 자체일겁니다.

 

질서를 잡아주기 위해서는 어느 누구도 상식에 합당하지 않는 도둑질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런 것들의 법을 지키려면 거기에 대한 관리나 관료들이 있어야 되겠죠. 북한의 인민을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관리들이 활동하는 것을 허락하셨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북한 자체는 나빠. 북한은 엉터리야. 그래서 나는 북한 가서 된장 훔칠래.” 이거는 말도 안 된다 이 말입니다. 그거는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어떤 대통령이 잘못됐고 국가가 잘못된 길로 간다고 해서,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 누구나 합당한 그것까지 없앨 수 없다 이 말이죠.

 

자, 또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회사에서 수익이 났는데, 원래 수익이 났을 때는 거기에 직접 고생한 사람이 70퍼센트를 먹고, 나머지기 30퍼센트는 사무 본 사람에게 준다. 회사에서 그렇게 규례를 세웠어요. 그게 나쁜 겁니까? 땀 뻘뻘 흘리면서 바깥에서 애쓰고 수고한 사람에게는 70퍼센트를 주고, 안에서 약간의, 뭐 컴퓨터를 만진다든지, 전화를 받는 사람에게 30퍼센트를 가도록 했다. 이게 나쁜 짓이에요? 나쁜 짓 아니에요? 이런 내부적인 규례가? 아니죠.

 

근데 그게 조폭인데요? 그 땀 흘린 사람이 연장 챙기는 사람인데요? 나이트클럽 장악하기 위해서, 땀 뻘뻘 흘려가면서, 연장 챙겨서, 야구방망이 가지고 상대방 조폭들 한 열댓 명 잡는다고 땀 뻘뻘 흘리고. 그 안에 있는 여직원은 망보고, 아는 경찰관한테 우리 아무 일 없다고 하면서 경찰들이 사전에 안 오도록 사전에 방비하고.

 

그래서 70퍼센트 먹고 30퍼센트 먹었다. 이게 뭐가 나쁜 거예요? 그럼 조폭이라고 그냥 그런 복도 없으면? 상대방 조폭 잡는다고 땀 뻘뻘 흘렸는데 N분의 1로 갈라버리면? 그렇게 해서 조폭 세계가 운영이 되겠습니까? 안 되죠.이제 주님의 종이라는 의미를 알겠죠. 그 조폭들이 나쁜 짓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 내부의 질서를 유지해야 하는 것. 그럼 질서도 없어야 된단 말입니까? 그 조폭 자체의 질서가 얼마나 엉망인데?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주께서 허락하신 것이 있다 이 말입니다. 주께서 허락한 게.

 

참 재미가 있는데, 또 한 예를 들어봅시다. 어떤 학교에서 출석 잘하면 개근상 주고, 공부 잘한 학생한테는 상장도 주고 10퍼센트 장학금을 지불한다. 그거 나쁜 겁니까? 나쁜 것 아니죠. 근데 그 학교가 안식교 대학인데요? 통일교 대학인데요?

 

하나님 보시기에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간섭받아야 돼요. 죄인이 간섭받지 않으면 죄가 범람을 해버려요. 그러면 주님의 멸망할 때가 되지 않았는데 넘쳐버리면, 주님이 점차 점차적으로 하시고자 하시는 것이 과도한 범죄로 인하여 혼란스럽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라고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훌륭하니까 복종하라는 뜻이 아니에요. 그 하는 기능이 있잖아요. 그 하는 기능에 복종하라는 거예요.

 

갑자기 정전이 되어서 신호등 불이 나갔습니다. 그래서 경찰이 와서 수신호로 교통을 원활하게 합니다. 근데 그 수신호 하는 경찰관이 신천지인데요? “이게 어디 신천지가 가라마라 하냐? 신천지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의 복음을 알기 때문에 그냥 가겠어.”하고서 그렇게 가면 질서가 엉망이 되잖아요.

 

사람에게 나는 착한데 너는 악하다고 판단할 권한이 없습니다. 죄인이기에 죄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해요. 너는 신천지로 죄 짓고 나는 복음 아는 것으로 죄 짓고. 죄인은 마찬가지에요. 복음을 안다고 해서 나를 체포하지 말라고 한다든지, 나는 뭘 해도 된다는 것이 아니에요. 막 살고 막 체포되면 되는 거예요. 왜? 그게 그리스도의 기능이니까. 주님의 권세의 기능이니까. 거기에 복종하는 거니까.

 

내가 성질이 나서 우리 엄마를 팼다. 반대로 해봅시다. 나는 성질이 나서 내 자식을 팼다. 이게 굉장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경찰은 가족문제에 관여하면 안 되죠. 내 자식이잖아요. 내 자식을 내가 패는데 경찰이 오니까, “어이, 경찰 니 자식이야? 내 자식이야?” “아저씨 자식입니다.” “그래, 내 자식이라 내가 패는데 니가 왜 남의 사생활에 간섭을 하느냐?”

 

이게 말이 되는 거예요? 안 되는 거예요? 말이 안 되면 말이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해보세요. 그냥 말이 안 된다고 하지 말고. “너무 때리니까 시끄럽잖아요. 살살 때리지.”라고 하든지요. 근데 지금 너무 때렸다고 신고 들어온 것이 아니고, 살살 때리든 막 때리든 부모가 자식을 때리면 신고감이에요. 폭행죄라니까요. 폭행죄.

 

심지어 자식이 부모를 때리면요, 존속상해죄가 돼요. 존속상해죄가 더 커요. “내 엄마 내가 때리는데 니가 와?”라고 했을 때, 엄마 용돈 니가 드렸어? 아니죠. 엄마 집 사는데 니가 돈 대줬어? 아니죠. 내가 용돈 드리고 집사드리고 내가 모시는 분인데, 내가 때린들 니가 돈 한 푼 보태준 적이 없는데 니가 와 간섭을 하느냐? 이 말이죠.

 

그럴 때 경찰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나는 당신과 상관없는 이웃 사람이 아닙니다.” 또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공직을 수행하는 중입니다.”라고 하죠. “나는 공직수행중입니다.”

 

자, 공직이 등장하면 여기에 반드시 개인적인 사직이 등장하죠. 제가 수련회 때 잠깐 언급을 했는데, 헤겔이라는 철학자가 한 국가관에서 핵심이 뭐냐 하면 헤겔이 1800년도 사람인데, 그때는 벌써 회사라는 것, 소위 부르주아라고 하는데, 부르주아 아시죠? 중간계층. 금융자본주의. 이런 자본주의가 팽창하기 시작한 겁니다.

 

최초의 자본주의는 네덜란드부터 시작을 했어요. 그렇게 팽창을 하고, 헤겔은 독일 사람이니까 독일까지 자본주의 국가가 됩니다. 그럼 자본주의 국가라는 것은 뭐냐, 자본가 계급이 경쟁해서 발전하는 거거든요. 누가 더 좋은 기술을 개발해서 더 좋은 상품을 만든다는 것이거든요.

 

근데 만약에 경찰이 없다고 봅시다. 공직이 없다고 봅시다. 그럼 공직이 없으면 남는 것은 뭡니까? 개인적인 사적인 조직만 있겠죠. 사직. 그러면 회사와 회사 사이에서 이익을 추구하는 이익단체들만 하게 되면 여기서 반드시 충돌이 일어납니다.

 

“내 가게 앞에서 포장마차 하지 마라.” “포장마차라고 무시하나? 이 포장마차도 장산데, 니만 장사하나?” 이게 어떻게 해결이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해결이 안 되겠죠. 그럼 둘이 화난다고 해서 폭력을 쓸 게 아닙니까? 마누라까지 동원해서 막대기 들고 한다 이 말이죠.

 

그럼 거기에서 다른 사람도 다 위협을 느끼니까, 생존에 위협을 느끼니까 불편하죠. 우리 동네에서 싸우고 이러면 시끄럽기도 하지만, 저게 또 술 먹고 언제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위험하잖아요. 그러면 공동체가 와해돼요. 이사 간다고 해서 숫자가 줄면 공동체가 와해되겠죠.

 

국가라는 것은 헤겔이 이야기하기를 개인적인 사익, 이익단체가 되면 서로 싸운다는 거예요. 서로 싸우게 되면 폭력이 일어나겠죠. 이걸 작은 폭력이라고 하면, 국가 공직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보다 더 큰 폭력으로 작은 폭력을 잠재우는 기능을 국가가 할 테니까 너희들은 그 일을 하는 자들에게 세금내서 월급 주라는 겁니다. 이게 국가의 법이에요.

 

그럼 그 국가의 법에 복종해서, 국세청에 돈을 낸다는 말은 뭘 함유하고 있느냐 하면, 내가 내 자식을 패도 경찰이 와서 체포하면 곱게 잡혀가겠다고 하는, 이것이 함유가 되어 있어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사적으로는 억울해도 전체 국가가 고요한 게 나중에 보면 개인적으로도 이익이 된다는 거예요.

 

어떤 구두쇠가 내가 열심히 해서 돈 벌었다. 세금 안 낸다. 내가 번 돈으로 왜 남 좋은 일 시켜? 라고 이랬는데, 마침 그쪽에 일본사람이나 조선족이 들어와서, 재산 많다는 소문을 듣고 금고 열어서 절반 정도의 재산을 강탈해갔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돼요?

 

그럼 그 구두쇠는 이렇게 해야 돼요. 자기 힘으로 용병을 월급 주고 사가지고, 자기 힘으로 탐정 사가지고, 조선족을 체포해서 자기 돈을 돌려받든지 해야 돼요. 근데 탐정 한 명에 부하직원 서너 명 한다고 하면 범인을 언제 잡겠습니까? 그런데 그걸 용산 경찰서에 신고를 하게 되면, 거기에 CCTV도 다 검사할 수 있죠, 돈도 안 들죠,

 

그럼 그 구두쇠는 나라에 세금을 내야 되겠어요? 안 내야 되겠어요? 내 돈 내가 지키는데 세금을 왜 내야 되냐고 하는데, 나중에 보니까 그 조선족을 아예 처음부터 밀항하지 않도록 막았더라면, 조선족이 안 들어왔다면 자기 금고에 손을 안 댔을 거예요. 그런데 그 조선족을 막는 데는 또 해경이 필요하네요. 해경이 있으려면 또 돈이 필요한 거예요. 세금 냈는데 똑바로 하란 말이야! 라고 국민들이 요구할 수는 있어도, 세금도 안 낸 인간이 지켜달라고 하는 요구는 할 수가 없어요. 그런 건 없다 이 말이죠.

 

그래서 국민에게는 4대 의무가 있는 거예요. 국방, 납세, 노동, 교육의 의무가 있어요. 그러면 하리수는 무슨 의무를 어겼느냐 하면, 군방의 의무죠. 군대 갔는지 안 갔는지 모르겠어요. 안 갔을 수도 있죠. 정신병으로 속여서 안 갈 수도 있는 문제인데, 개인의 취향이거든요. “나 여자로 살래.” 개인의 취향은 뭐냐 하면 사적인 거예요. 나 여자로 산다고 해서 여자 행세하고 돌아다니는데, 아이고, 이거 더러워서 못 보겠다고 해서 이웃집 아저씨가 패버렸어요.

 

그러면 그 하리수는 세금을 냈으니까 누굴 호출해야 돼요? 경찰을 불러서 폭행죄로 신고를 해야 되겠죠. 그러니까 국가가 성전환자까지 지켜줘야 하는 거예요. 왜? 세금을 냈기 때문에. 세금을. 세금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내가 남에게 피해를 입을 때 국가가 나서서 지켜줘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게 포함이 되어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 자체가 뭐냐 하면 정사와 권세에게 복종하게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든 국가는 이 권세를 어디에 사용하느냐 하면 세금납부와 그리고 치안유지가 기본 모토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개인들의 사소한 다툼, 술 먹고 싸우는 것, 그거 폭력이거든요.

 

그 폭력은 이웃들이 나서서 말리는 것이 아니고, 그걸 더 큰 폭력, 그들은 주먹다짐했지만 경찰은 테이저건 같은 것도 있다 이 말이죠. 미국 같으면 진짜 실탄 든 총도 있고. 더 강력한 폭력으로 작은 폭력을 잠재울 때, 그 나라는 살만한 나라가 되겠죠. 치안이 유지가 되니까.

 

브라질 같은 이런 데 가게 되면 큰일 나죠. 브라질은 길거리에서 휴대폰 보고 있는데 와가지고 그냥 뺏어가요. 뺏어가서 신고해도 경찰이 안 와요. 왜? 경찰이 월급 적다고 파업했기 때문에. 경찰 안한다고 파업했어요.

 

그래서 나중에 온전한 자본주의가 되면 모든 것을 사적인 사설기관에 이관합니다. 경찰, 전기, 철도, 그리고 교도소까지 모든 것을 이관합니다. 현재 개인이 교도소까지 운영하는 나라가 더러 있어요.

 

왜냐하면 그건 국가의 권력이 너무 세면, 강화되면 국가의 지도자가 그 권력을 쥐고 자연적으로 독재가 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전부 다 분배를 해서 돈 보고 운영을 하도록 해요. 국가는 다만 감시만 하도록 하죠. 그런 회사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어요. 교도소회사. 경찰회사. 그 다음에 군대회사. 용병들이 그런 거예요. 돈으로 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는 겁니다.

 

제가 지금 이야기한 것이 헤겔의 국가관이라는 겁니다. 그럼 헤겔의 국가관 이전에도 국가가 분명히 있었는데, 그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 법을 제정할 때 어떤 철학적인 바탕이 있었을 게 아닙니까? 우리는 이런 국가를 기대하고 염원한다는 어떤 체계가 있어요.

 

그 체계가 줄곧 서유럽에서 많이 내려오는데, 그게 뭐냐 하면 플라톤의 국가론입니다. 플라톤은 기독교복음 들어오기 전에 500년 전의 사람이에요. 그리스 사람인데, 플라톤의 국가관이 모태가 되어가지고 모든 현대 국가는 플라톤의 국가관에서 나왔습니다.

 

플라톤의 국가관은 네 가지로 계급이 되어 있어요. 네 가지 계급으로 되어 있으니까, 이거는 인도의 카스트제도를 생각하면 되는데, 차이점이 뭐냐 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계급의 내용과 반대로 되어 있다는 거예요. 반대가.

 

예를 들면 플라톤의 국가관에서 제일 지도자가 누구냐 하면 철학하는 사람이에요. 철인, 생각과 말이 일치되는 사람이 통치자가 돼요. 왜 그런 사람이 통치자가 되어야 하느냐 하면, 기존에 많은 정치제도가 나왔는데 전부 다 실패로 끝났다는 거예요.

 

여러 사람이 하는 것을 참여정치라고 하고, 한 사람이 하는 것을 독재정치라고 하죠. 그리고 무식한 일반사람들이 하는 것을 제가 수련회 때 중우정치라고 했죠. 어리석은 대중들이 한다고. 흔히 우리는 민주주의라고 하지만, 옛날에 그리스 아테네에서 민주주의가 벌써 나왔잖아요. 어리석은 정치인 거예요. 어리석은.

 

왜 어리석으냐면 전쟁할 때 되면 다 내빼니까. 나 여잔데 해서 남자가 여자로 잠시 피해버리고. 나 이제 여자로 살래 해서 전쟁 끝날 때까지 딱 있다가, 끝나고 나면 “헤헤 남자지롱!” 이렇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거예요. 결집력이 없어서 안 되잖아요.

 

그럼 결집력을 발휘하기 위해서 “군에 와 주시옵소서. 아저씨 군에 와 주이소~” 이럽니까? 길가는 아저씨 보고 군에 와서 총받이 좀 해달라고 하면 예하고 옵니까? 안 오죠. 그러면 내가 종이에 써서 길에 가는 젊은 사람보고 “당신은 이제부터 논산훈련소에서 훈련받으세요.”라고 써 주게 되면 그 사람이 다음날에 논산훈련소에 갑니까? “니가 뭔데 나를 호출해? 니가 뭔데?”

 

자, “니가 뭔데?” 입니다. 아무나 그런 법적인 명령과 지시를 할 자격이 없어요. 없다는 말은 누구는 된다는 말입니까? 최고 정점의 한 사람은 반드시 있어야 되겠죠. 그게 바로 명령하는 자입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명령하는 자가 이 국가를 사익, 개인적인 이익과 그 가정의 착취를 위해서 국가를 운영한다면, 최고 일인자가 그렇게 한다면 그걸 누가 말릴 수 있습니까? 일인자가 그렇게 한다면, 일인자보다 더 높은 자가 있어요? 없죠. 그러면 말릴 수 있어요? 못 말려요? 못 말리죠. 그렇게 독재를 싫어하면서 지금 독재됐잖아요.

 

아니, 조선시대 때 왕들 보세요. 처음 조선시대 때 왕들은 이게 선비들 밑에 있었어요. 선비들이 지시한대로 했어요. 하루 스케줄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공부였어요. 그저 공부만 하고, 뭐 맛있는 거 먹여줘 봐야 체력도 안 됩니다.

 

그래서 왕들이 일찍 죽어요. 40하고 몇 살이 안 되게 일찍 죽는다니까요. 세종대왕도 그렇게 오래 못 살았어요. 태정태세문단세예성연중인명선광인효현숙경영정순헌철고순, 이 사람들 다 일찍 죽은 사람들이에요. 조선시대 왕들 있잖아요.

 

플라톤은 말합니다. 그러니까 왕에게는 한 가지 조건만을 주면 된다. 뭐냐 하면 사유재산을 없애는 거예요. 보통 높은 사람 같으면 낮은 사람보다 재산이 많아야 권위가 서고 위엄이 있고 거기에 품격이 있다고 보잖아요. 플라톤은 반대로 이야기합니다. 가장 똑똑하면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이 왕이 돼야 된다는 거예요.

 

우리의 보통 생각은 아는 것이 부자가 된다고 할 수가 있어요. 안만큼 수입이 비례해서 늘어나야 되는 것이 우리가 아는 상식인데, 플라톤은 그걸 엎어버립니다. 국가를 위해서 희생하되 아무 재산도 가지지 마라. 두 번째 장가가지 마라.

 

자식이 있으면 나라를 자식에게 물려줄 가능성이 있다. 재산가지지 말고 장가들지 말고. 거지도 그런 상거지가 없는데, 공부는 되게 많이 했어요. 똑똑해요. 그 똑똑한 것으로 치면 그 나라에서 최고의 부자가 되어도 합당한데, 근데 재산도 없고 결혼도 못하고. 왕으로 태어난 그 비극적인 운명 때문에 결혼도 못하고. 그런 자를 왕으로 세워라.

 

자, 그런 왕이 이 세상에 있을까요? 없어요. 처음에 비슷하게 겸손한척 그렇게 한 사람은 있었어요. 사울왕. “아이고, 저 같은 게 어떻게 왕이 됩니까?”라고 하다가 나중에는 “이 나라 내 거다.”이러죠.

 

플라톤은 인간의 욕망을 몰랐어요. 인간의 욕망이 지금 돋아나지 않는다고 해서 잠복되어 있다는 사실을 몰랐어요. 어떤 특수한 상황이 주어지게 되면 거기서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이 불쑥 튀어나온다고요.

 

착한 사람이요? 착한 남자? 착한 여자? 어디서 착함이 붙어요. 마귀와 함께 있는데 무슨 착함이 붙어요. 마귀가 착하면 착할지 몰라도... 가인이 평소에 동생 죽이는 게 취미가 아니었습니다. 엄마가 동생 낳으면 “보자~오늘 또 한 번 죽여 볼까?”하면서 동생 죽이는 게 취미가 아니고, 그냥 평범한 사람인데 욱해서 그냥 죽여 버린 거예요. 동생 아벨을.

 

제가 옛날에 박사교회 있었을 때, 그 마을에 똑똑한 초등학생 5학년이 아이가 있었어요. 엄마는 좀 똑똑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어른들이 집안에 무슨 일이 있으면 애한테 하소연을 하는 거예요. “아이고, 경우야! 경우야! 엄마 못 살겠다. 니라도 내 맘 좀 알아 도!”이러는 거예요. 근데 경우라는 애는 똑똑했어요. “내 맘도 모르는데 엄마 마음을 우에 아노?”이러는 거예요. 초등학교 5학년 애가. “내 맘도 모르는데...”라는 이게 만고의 진리 아닙니까?

 

더 놀라운 사실은, 내 맘도 모르죠. 내 맘도 모르는데 ‘나’라는 명칭을 왜 붙입니까? 모르면서? 알고 붙여요? 모르죠.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에 대해서 책임지고 싶어도 책임질 수가 없어요. 이건 내가 나를 관리하는 게 안 돼요. 우당탕탕퉁탕~이에요.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를 모르니까.

 

플라톤의 국가관 참 멋있죠? 왜? 결혼 안 해서 여자가 없고, 가족이 없으니까 뭐만 생각하겠어요? 스물 네 시간 백성들만 생각하고. 재산을 가질 권리가 없으니까 모든 생긴 이익은 국민들에게 나눠주고. 임금 하나 제대로 뽑아서 이익은 누가 본다? 대중들이 이익을 보니까 이것처럼 완벽에 완벽을 가한 왕이 어디에 있겠어요? 그런 분이 딱 한 분이 있어요. 결혼도 안 하고 재산도 없는 분이.

 

누굽니까? 예수 그리스도시죠.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죠. 백성들이 좋아했습니까? 죽였습니까? 죽이죠. 백성들이 죽인 게 아닙니다. 가룟 유다가 죽인 것도 아니에요. 가룟 유다 속에 있는 사탄이 죽였죠. 놀라운 것은 그 사탄을 누가 집어넣었습니까? 예수님이 집어넣었습니다. 예수님이 집어넣고, 예수님이 집어넣은 그 사탄에 의해서 자기가 살해당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 땅에서 어느 누구도 나 착하다고, 나 존재 가치가 있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게 만들어놨어요. 그래서 사탄은 할 수 있는 한 노력을 다해서 예수님의 그 복음의 소식을 안 듣게, 안 들리도록, 지금도 사탄은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을 동원해서 복음을 막아버립니다. 북한뿐만 아니고 모든 국가가 다 그래요.

 

기독교는 옹호하되, 북한도 기독교 있어요. 교회도 있어요. 그러나 기독교는 옹호하되, 복음은 용납이 안 돼요. 중국도 마찬가지고요. 한국도 마찬가지고요. 국가의 대통령이 기독교 신자냐, 아니냐 하는 그런 것은 아무상관이 없어요. 신자가 되었고 장로가 되었다 할지라도, 국가에 대해서 복음의 이름으로 어른 노릇을 하는 것을 국가는 용납하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대혼란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래요. 대혼란이. 왜 혼란이냐, 이 국가에 불교 신자가 세금을 내요? 안 내요? 내죠. 이슬람 사람도 세금 내죠. 한국 사람인데 이슬람교라고 해도 군에 가죠. 필리핀 남자가 귀화해서 한국 국적이면 자원하는 한에서 군에 갑니다. 근데 그런 사람들을 기독교 이름으로 그들을 유배 보낸다든지, 바다에 다 빠트린다든지, 이렇게 하면 돼요? 안 돼요? 안 되죠.

 

이상현 목사님한테 물어봤어요. 왜 예루살렘이 이슬람, 그들의 구역이 되어있느냐고요. 그들이 세금 내거든요. 장사 잘 해가지고, 예수님이 갈보리 언덕에 가는 길이 아주 비좁은데, 전부 다 이슬람 구역이에요. 장사해서 그걸 가지고 막대한 세금을 이스라엘 당국에 내요. 만약에 그들 사이에 개인적인 폭행 사건이 있다고 하면 어떤 경찰이 동원됩니까? 이스라엘 경찰이 와서 더 큰 폭력으로 체포할 사람은 체포하고, 벌금 낼 사람은 벌금내고, 이렇게 하는 거예요. 치안이 그렇게 확보되니까 그들은 마음 놓고 사적이익을, 개인적인 장사를 잘 할 수 있는 겁니다.

 

만약에 김또깡(김두한)이 같은 그런 깡패들이 난데없이 나타나가지고, “뭐야 이게?”하면서 발로 차고 하면 장사 하겠어요? 장사 못하잖아요. 그렇게 깡패질 하는 것을 경찰이 보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해결해 주겠습니다.”하게 되면 경찰하게 감사해야겠어요? 주 예수께 감사해야겠어요? 주님께 감사해야 하죠. 왜? 주님이 기능을 하기 때문에. 이제 이 본문을 이해하시겠죠?

 

대통령이 기독교 신자니까 복종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인간은 개인적으로 약해요. 약합니다. 폭력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습니다. 여성 같으면 성추행이라든지, 뭐 이런 것에 노출이 되겠죠. 특히 여성은 약하잖아요. 여성들 중에서도 가장 약한 여성이 누구냐 하면 과부입니다. 왜? 남편이 있으면 아내를 보호하는데, 남편이 죽어버리면 이거는 노출상태입니다. 아무 남자나 다 건드려요.

 

그래서 여호와께서 보호해요. 모세율법에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보호하라고 했죠.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의 특징들이 뭐냐 하면 나와바리, 영역이, 자기 동네가 아니에요. 특히 나그네 같은 경우에는 자기 동네가 아니고, 고아와 과부는 하나님으로부터 분배받은 조상의 땅에서, 노동력을 보태 농사지어 그걸 돈으로 바꿀 그런 능력이 없어요.

 

고아나 과부도 생계비는 매일같이 들죠. 돈은 없죠. 결국에는 그 땅을 조금씩 팔아먹어야 하잖아요. 팔다 팔다가 팔 것이 없으면 자기 몸도 팔고 자기 자식도 노예로 팔려나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고엘, 후견자가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욥이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한테 부탁했던 게 그거에요. “억울합니다. 날 변호할 변호사 좀 보내주세요.” 그게 고엘이에요.

 

그 변호사가 뭐냐,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는 분이에요. 그러면 하나님 입장에서는 뭐냐 하면, 하나님입장에서는 권세자가 누굽니까? 진짜 최종의 권세자가? 하나님이잖아요. 하나님인데, 하나님께서 허락한 지상의 권세자들이 사적인 이익으로 해버리면, 국가의 인민들이나 모든 것을 사사로이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 학대를 했을 경우에는, 최후의 공직이신 분, 예수님이 그런 그들의 사직(공직임에도 불구하고)을 그냥 가만히 두겠습니까? 작살내죠.

 

작살내는 방법이 다른 나라로 교체를 시켜버립니다. 침략을 당해서 망하도록 하는 거예요. 아까 질문하신 것처럼, 열왕기상에 보면 그렇게 선지자들이 외쳤건만 갈수록 점점 더 그 백성들이 죄를 더하더라고 되어 있죠. 더하더라.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북쪽은 722년에, 남쪽은 586년에 다 망하잖아요.

 

그 망하는 것이 당연한 스케줄이에요. 그래야 다니엘에 나오는 느부갓네살이 세운 신상의 그 마지막 발 부분을, 사람 손으로 받칠 수 없는 뜨인 돌이 그 발 부분을 탁 치게 되면, 앞에 있던 모든 국가가 한꺼번에 팍하고 역사라는 지평위에 박살난 채로 누워버립니다.

 

그리고 그 돌이 커져서 태산을 이루죠. 큰 산을 이루죠. 그게 바로 무슨 나라냐 하면 인자의 나라, 예수님의 나라입니다. 그럼 예수님의 나라라는 의미는 뭐냐 하면 아버지 앞에 제대로 된 권세자라는 뜻이에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모든 권세자들은 “아니올시다.”를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종으로서 그 나라 민족을 맡기신 거예요. “예수님처럼 그렇게 정치하는 사람이 이 땅에 아무도 없었더라.”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오늘도 문재인 대통령께서는 휴가까지 반납하면서, 노심초사 북한의 핵문제, 청년 일자리 문제를 위해서 이렇게 애를 쓰고 있습니다. 장군들 문제도 있겠지만.

 

전부 다 어설퍼요. 믿지 말라는 말입니다. 믿을 것은 그 위에 있는 권세자, 왕 중의 왕이신 그 분을 믿어야지, 권세자들에게 순종하라고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믿으라는 말이 아니에요. 아니, 박정희 죽었다고 수천만이 울고불고, 조의하고, 육영수 죽었다고 반 이상이 조의하고, 박정희 육영수 아니면 나라가 망하는 것처럼, 다들 학교에서 애들한테 강제로 추모하도록 그렇게 시켰습니다.

 

그리고 남쪽에서 그렇게 할 때, 북쪽에서도 똑같은 짓을 하고 있었던 거예요. 김일성 섬기라고 다 한 거예요. 노골적이죠. 김일성이가 재산도 하나도 없고, 결혼도 안 하고, 진짜 인민을 위해서 했다면 존경받을 만하죠. 근데 김일성이가 왜 그렇게 여자가 많고 자식이 많은지. 이거 종교단체입니다. 사이비 종교단체거든요. 종교단체는 절대적인 복종을 가합니다.

 

행복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때리면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 있고, 사디즘이죠. 절대적인 복종을 함으로써, 얻어맞는데서 안정적인 쾌감을 느낄 수가 있고, 마조히즘이죠. 그럴 때, 최고의 정치가 바로 그런 겁니다.

 

때려줌으로써, 저쪽에서 눈물 흘리면서 더 때려달라고 하고 있으니 정치 할 게 있어야죠. “어이!” 하면 “예”하고 알아서 기는데. 정치만 그런 것이 아니고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목사가 “허이!”하면 “예”하고, 최고의 목회에요. 그걸 가지고 영적카리스마 목회라고 하는 거예요. 영적카리스마 목회.

 

카리스마라고 하는 것은 영적인 초법이거든요. 법은 니가 지키는 것이지 나는 법 안 지켜도 된다. 이게 초법입니다. “주의 수장은 주께서 직접 다루지, 하찮은 아마추어 같은 너희들이 날 다루어서는 안 돼!” 이걸 계속해서 거기다가 세뇌를 시키는 겁니다. 그게 커지면 신천지, 구원파, 모든 사이비이단들이 다 튀어나오는 거예요.

 

근데 날 때부터, 청소년 때부터 거기에 취미가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DNA, 유전자가. 이상하게 구라 쳐서 사람 영혼을 쏙 빼놓는, 거기에 그렇게 재주가 있고 솜씨가 있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아요. 그런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신학교에 다 오게 되어 있어요. 신학교에. 쌍시옷만 넣으면 되거든요. 욕하라는 말이 아니고, 믿쑵니까? 믿쑵니까? 믿쑵니까? 이거하고 반말하면 돼요. 일종의 무당과 같은 부류에요. 무당의 특징은 반말한다는 겁니다.

 

이게 고린도후서 11장에 나와요. 제가 이렇게 하니까 목사님이 또 오버하고 지어낸다고 하는데, 지어내는 게 아니에요. 고린도후서 11장 20절 봅시다.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히히~하고 이건 바보도 아니고, 할렐루야! 아이고, 더 때려주세요!

 

지금 여기서는 폭력을 이야기하지만, 현재에는 돈으로 이야기해요. 돈, 이걸 마인mine,채굴이라고 했죠. 광산에서 금광 채굴하듯이, 교회에서 돈을 채굴하는 거예요. 채굴할 때, 명령자가 큰소리친다니까요.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명령자가 명령받은 자의 로망이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못하는 것을 대신 명령해주니까.

 

“내가 그렇게 되고 싶었는데, 당신이 대신 명령자가 되어줘서 나는 행복합니다. 남을 지배하고, 지시하고, 다스리고, 나무라고, 짓밟고 하는, 이게 나의 어릴 때 소망이었는데, 그 소망을 당신이 대신 해주니까, 당신이 대신하도록 제가 후원해줄 테니까 당신은 명령만 하소서. 나는 복종하겠나이다.” 마조히스트적인, 자학적인 심리가 쾌감을 더욱더 증가시키죠.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 다양한 직업적인 판로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약장사, 목사, 신부, 사기꾼들, 다단계, 그런 사람들. 허세부리는 사람들. 사기꾼들이 대부분 이런 사람들이죠. 남 밑에서는 기는 것은 싫고, 남한테 명령하고 허세부리는 것을 좋아하는데, 사기 안 치면 안 되죠.

 

그럼 이런 사람들한테 명령받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냐, 겁 많고, 남이 욱하고 한마디 했는데 걱정은 오만가지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한마디로 하면 “나는 밥이야.” 완전히 이런 사람들은 밥이 되죠.

 

그런데 성경에서 예수님은 뭐라고 합니까?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했습니다. 제자들 중에도 그런 성향들이 많았던 모양이죠. 예수님!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더 높습니까? 아예 예수님 빙자해서 이미 자기 본색을 드러냈어요. 누가 최고의 자리에 앉습니까? 라고 할 때에,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를 딱 등장시키죠.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처럼 하나님 나라를 받들지 아니하면, 높은 자리는커녕 들어가지도 못한다. 들어가지도 못해요.

 

그리고 주님께서는 내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아니, 너희는 마셔야 돼! 강제로 마셔야 돼! 그래야 사도가 돼요. 그 잔을. 그 잔은 한 번 마신다? 두 번 마신다? 평생 마셔야 돼요. 평생. 평생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아버지와 예수님께서 하셨던 그 뜻대로 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목사님, 그렇게 되면 사도한테는 이익이 없잖아요? 손해잖아요? 남 좋은 일만 시키고 자기는 무슨 이익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일찌감치 알았던 거예요. “주여! 죽여주옵소서.” 나그네입니다. 그게 바로 나그네에요.

 

이 땅을 떠나면 될 것을 미적거리면서 “희생 하겠나이다, 봉사하겠나이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빨리 와!” “아닙니다. 봉사하겠나이다.” 얼마나 살고 싶으면 봉사를 근거로 한 번 더 개기는 겁니다. 기둥 붙들고, “아니 되옵나이다. 통촉하옵소서. 지금 가면 내 꿈을 못 이루어서 안 됩니다.” 하고 붙들고 있어요.

 

스데반 집사님 믿음 같으면요, 총회장감입니다. 총회장해야 되는데 돌에 맞아죽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바보라고 했습니까? 아니면 서서 마중 나왔습니까? 서서 마중 나왔습니다. 누구를? 스데반집사를요.

 

오늘 강의 제목을 미리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사고와 운명”입니다. 사고라는 것은 생각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사고 나는 것을 말합니다. 자, 권세이야기를 할 때, 그리고 여기에 정사이야기를 할 때,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것은 대통령의 “만수무강 하옵소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발 치안이나 교통질서 잘해가지고 나한테 사고 좀 덜 나도록 정치를 똑바로 하란 말이야!” 그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건만, 이 정사와 권세자들에 대해서 아무리 이야기를 해봤자, 개인은 그저 무탈, 아무 탈 없이 나하고 싶은 대로 다 용납이 되고, 자유로운 사회가 되어서 사고 없이 잘 지내면 나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너무나 이기주의고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이 성경을 볼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면 그거는 해석의 출발이 벌써 잘못된 거예요. “사고 나도 좋으니까 권세가 권세답게 하옵소서.”라는 이런 생각을 우리가 안 한다니까요. “미쳤어요? 우리가 손해 보게?”이게 우리의 본성이거든요.

 

그렇다면 이 정사와 권세 문제는 어떤 문제와 관련되어 있느냐 하면, 인간이 사고 안 나고 무탈하게 살기 원한다는 그 자체에 대해서 정사와 권세가 그걸 뭉개버려야 해요. “이게 어디서 사적인 이익만 추구해?” 하고 뭉개버려야 한다고요.

 

그렇게 안 하면 이 성경 해석은 우리한테 하나마나입니다. “아니, 저 세금 잘 냅니다. 국방의 의무 했습니다. 그러니까 권세자여! 내가 활동할 때 지켜주고 내가 도움 달라고 할 때 도움 달란 말이야. 왜? 나는 소중하니까.” 이렇게 성경해석이 돼버리면, 이게 무슨 해석입니까? 자기부인이 되겠습니까? 그리스도가 나오겠습니까?

 

그러면 정사와 권세가 뭐냐, 이게 운명입니다. 빼도 박도 못하는. 하나의 정사와 권세에 묶였다는 말은, 그 나라에 속했다는 말은, 본의 아니게 그 나라가 당하는 모든 역사와 수모와 상처와 아픔과 부귀와 영화를, 단지 그 나라에 속했다는 국민이라는 이름 때문에,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옴팡 다 덮어써야 됩니다.  10분 쉽시다.
 이미아(IP:122.♡.181.188) 17-08-17 23:10 
서울의존강의20170811b 디도서3장1절(사고와 운명)-이 근호 목사



성경을 보면서, 아까 첫째 시간 끝에서도 이야기를 했지만,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이 나오면, 정치하는 사람들한테 나 보호해 달라는 의식이 먼저 딱 나온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이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해야 되는데, 내가 나를 지키는데 역량이 모자라니까, 정사와 권세까지 이용을 해서 나만 잘 되면 된다는 식이 정당화돼버려요. 정당화가. 그걸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세금 내니까 지켜달라는 거예요. 세금 내잖아!

 

자, 어느 나라에 이슬람이 한 10퍼센트 된다. “세금 내니까 지켜 줘!” 그럼 이슬람이 구원받습니까? 성경은 구원에 관한 책이에요.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책이라고요. 자기 정당성을 보장하는 책이 아니에요. “나 대통령에게 투표했고, 대통령에게 잘하고 있고, 4대 의무를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이시여, 나를 지옥 보내지 말고 천당 보내주소서.” 이럴 수는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이게 정사와 권세자가 등장한다는 자체는, 결국 복음을 설명하기 위한 배경으로써 필수적으로 이런 자들이 등장해야 돼요. 그럼 복음의 배경이라는 말은 뭐냐 하면 복음에서 나오는 정사와 권세하고, 그리고 복음이 아닌, 복음을 대적하고, 반-복음적이고, 비-복음적인 정사와 권세의, 그 내용상의 차이가 뭔가를 알아야 해요. 그 차이가 뭔지를. 하나는 짐승이고, 하나는 인자의 나라죠. 뭐, 어떤 결론적인 용어를 띤다면 그런 거죠.

 

다니엘에 보면 네 마리의 짐승이 나오죠. 아주 흉측하죠. 바다에서 기어 올라옵니다. 땅의 한계가 끝났다는 겁니다. 원래 바닷물은 땅으로 넘치지 못하도록 되어 있어요. 노아언약에 의해서. 여기까지만 파도치고 그 다음부터는 파도치지 말라는 겁니다. 근데 바다의 내용물이, 바다의 내용물이라고 하는 것은 은밀한 내용물 또는 시원적인 내용물, 원초적인 내용물, 원초적인 것은 바로 묵시적인 괴물이 숨어서 살았던 그것. 그게 바다에요.

 

그러면 땅이 제대로 가동되면, 바다는 땅을 침범하지 못하고 그냥 으르렁대기만 하면 돼요. 으르렁~으르렁~ 아이돌 가수들 엑소EXO처럼. 으르렁 대면서 참고 있는데, 땅이 개판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물어! 물어! 해가지고, 바다의 그 괴물이 땅을 침범하게 되면 완전히 땅은 멸망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바다에서 올라왔기 때문에, 기존의 땅에서 다루었던 것처럼 그렇게 다룰 대상이 안 돼요. 그걸 쳐부술 무기는, 그동안 바다를 대적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길 무기가 없어요. 이 짐승도 하여튼, 이건 뭐 사자면 사자고 곰이면 곰이든지 해야 하는데, 하이브리드hybrid,복합체가 되어가지고, 사자에게 대항하기 위해서 무기를 만들었는데 곰이 되고, 그럼 곰한테 맞춰 만들었는데 독수리가 되어서 날아가 버리고. 도대체 땅의 존재가 바다를 이겨낼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면 왜 마귀로 하여금 땅을 통치하게 했느냐? 패망하라고, 지옥 되라고 일부러 한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 이 땅의 정사와 권세는 뭐냐, 하나님이 쓰시는 충실한 하나님의 사자에요. 까불거든 줘 패라 이 말이죠. 패버리란 말이죠. 패면, 아야! 하죠. 아야! 할 거 아닙니까? 그때 맞아도 싼 거예요. 왜? 그래야 우리가 이 땅에 미련을 두지 않죠. 미련을.

 

너희는 땅에서 죽었고 너희 생명은 하늘에 있다는 이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가 성취한 그 의미를, 그냥은 몰랐는데 줘 패니까, “에이, 살 곳이 못 되네. 날씨도 덥고 살 곳이 못 돼. 아이고, 주여! 어서 내 영혼 받아주시옵소서.” 그런 고백을 하라 이 말이죠.

 

좀 무책임하지만, 자식이 엄마한테 밥 달라고 하는데, “엄마 밥 줘요.” “나 떠난다. 니가 알아서 밥 챙겨먹어라. 라면 끓여먹든지, 진라면을 끓여먹든지, 나는 간다.” 상당히 무책임하긴 한데, 자식도 그 엄마의 자식이기 때문에 각오를 해야 해요. “그래. 나는 엄마한테 밥도 못 얻어먹는 저주의 땅에 태어났구나. 나도 주님만 믿어야지.”라고 이래 나오면 얼마나 좋아요.

 

꾸준히 하나님은 정사와 권세를, 계속 매로 때리는 그 권력의 힘을 발휘하도록 부추깁니다. 패야 됩니다. 이 땅에 미련두지 않도록. 심지어 그 정사와 권세의 내막이 드디어 밝혀집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못 박아 죽였던 그것이 바로 원형입니다. 예수님을 못 박아 죽이라고 했던 그 정사와 권세가, 모든 정사와 권세의 원형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자, 그러면 이 내용이 어렵기 때문에 아까 이야기했던 것을 다시 한 번 해보겠습니다. 어느 나라에서 어떤 사람이 소매치기를 했는데, 그 나라의 법에 의해서 그 소매치기를 잡았다면, 그게 나쁜 일일까요? 좋은 일일까요? 이거는 정당한 일이죠. 좋은 일이죠. 근데 그 나라가 예수님 죽인 유대나라라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 죽인 악마의 나라한테는 나는 이제부터 말 안 듣는다.” 말 안 들으면 누가 손핸데요? 자기가 남한테 도둑맞았는데 신고 할 데도 없으면 누가 손핸데요? 그게 아니죠.

 

그러니까 존재로 보지 말고 기능으로 봐야 해요. 기능으로. 비록 그들이 예수님을 잡아 죽인 기능을 했더라도, 그들은 꾸준히 정상적으로 질서를 유지하는 기능을 주님으로부터 부여받아서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건방지게 내가 경찰의 힘을 믿는다, 안 믿는다, 라고 할 수 있는 그럴 잽이나 그럴 권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잘못했으면 맞아야죠. 왜? 주님께서 그거 하라고 우리에게 권세자를 줬기 때문에.

 

그럼 어떤 때 맞아야 됩니까? 그건 그 뒤에 나와요. 2절, “아무도 훼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3절,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으나”라고 나오죠.

 

이 사람들이 교회에서만 이런 일을 하겠어요? 아니면 세상에 나와서도 이런 일을 하겠어요? 그 성질이 어디에 갑니까? 똑같이 일어나죠. 그러면 교회 와서는 은혜로 봐주자고 이렇게 되지만, 밖에 나가서는 은혜로 봐주면 큰일 나죠. 잡아 가두든지 해야 되겠죠. 그 일을 누가 합니까? 장로가 나서서 합니까? 집사가 합니까? 목사가 합니까? 누가 합니까? 그때는 장로, 목사, 집사 다 필요 없어요. 하나님의 관료로서 권세 받은 사람이 이 일을 다 해야 하지 않습니까? 본문이 어렵지 않죠.

 

자, 이렇게 하면 더 쉬워요. 인간은 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났다. 이 죄는 잠복되어 있어요. 잠복. 불쑥 튀어나오죠. “이거는 내가 한 게 아니고 내 죄가 했으니까 나는 책임 없다.”라고 하게 되면, 책임 없는 것은 맞아요. 근데 맞는 책임은 있어야 돼요. 맞는 책임은. 배고픈데 빵이 있다. “배고프게 한 것은 주님이 배고프게 했고, 내 눈에 빵을 목격되게 했기 때문에, 내가 그 빵을 먹는 것은 내 책임이 아니다.”라는 그 말이 맞아요.

 

맞는데, 법에 어긋났기 때문에 때리는 책임자는, 그 책임을 부여해준 분이 예수님이에요. 배고프다고 돈 안 내고 빵 먹으면 빵집 장사가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보자~아이고, 빵집이 있네!” 장발장도 아니고 빵 그냥 먹으면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배고픈 것도 본인 의사가 아니었고, 배고팠기에 빵을 그냥 먹은 것도, 이놈 잡았다고 하는 그 책임자도, 그 배후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거예요.

 

왜냐? 우리의 어떤 행동도 그것이 처벌대상이 됨을 우리에게 통보하기 위해서. 죄인이기 때문에 나는 처벌 안 받는다가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은 맞지만, 맞을 매는 맞아라 이 말입니다. 이 말이 맞잖아요. 죄 짓고 안 맞겠다고 하면 이게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잖아요. “죄 졌나? 그럼 맞아도 싸네.” “그렇습니다.” “그래. 때려줄게.”

 

그러니까 사람들의 생각이 이래요. “니 죄 졌지?” “예. 죄졌습니다.” “맞아야 되겠네?” “예. 맞아도 쌉니다.”라고 하면서 뒤에 무슨 뉘앙스가 붙느냐 하면, “주여, 이 정도로 내 죄를 자복했으니까, 죄가 면제가 되게 해주시고, 저 경찰이 알고 보니까 초등학교 옆자리에 앉은 친구인데, 친구인 걸 알아봐서 그냥 4만 원짜리 끊어주게 해주세요.” 뭐, 이런 것 까지 계산을 다 하는 거예요. 4만 원짜리 끊어주면 그거는 주님한테 얻어맞습니다. 왜냐하면 그거는 제대로 권세자의 기능을 안 했기 때문에.

 

결국 이거는 믿느냐, 안 믿느냐와 관계없이 국가라는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죄를 더욱더 죄 되게 하는, 멋진 구조적인 틀이 되는 거예요. 멋진 구조적인 틀이. 목사님, 그렇게 한다고 해서 우리가 개과천선이 됩니까? 라고 한다면, 개과천선하라고 있는 권세자들이 아니에요. 자꾸 오해를 하지 마세요. 권세자들이 많다고 해서 우리가 인간되는 것이 아니에요. 인간 안 돼요.

 

맞은데 또 맞을 뿐이지, 그게 인간 안 된다니까요. 그게 율법적 기능이에요. 율법적 기능. 율법이 있다고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 지켰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율법의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 율법의 행함으로 의가 안 나와요. 율법의 행함으로 죄가 나온다니까요. 율법이 있는 곳에 뭐가 있다? 저주가 있다. 처음부터 저주받아야 될 자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율법을 준 거예요.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자기 입장도 모르고, 법을 지키려고, “나 지켰다. 십계명 지켰다.”라고 이래 나오더라는 말이죠. “나는 간음하지 않았습니다. 살인하지 않았습니다.” 이거 누가 이야기한 거예요? 누가복음 18장에서 바리새인이 세리하고 비교해서, 나는 저들과 같지 않다고 하죠. “저들과 같지 아니하고”라고 이걸 수련회에서 세 번 제창했잖아요.

 

제가 이렇게 하면, “저는 안 들키고 매도 안 맞는데요?” 그거는 아직 경찰력이 못 미쳐서 그래요. “어제 길거리에 오줌 쌌는데도 안 맞았는데요?” 그거는 니가 알아서 처리해서 그래요. 경찰이 있다는 것은 우리 안에 자생적으로 나를 치안하는, 나를 정죄하는 율법이 양심이라는 이름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겁니다. 작용하고 있는 겁니다.

 

자, 그러면 정사와 권세가 변질되면 어떻게 하느냐? 변질되면서 오늘 강의의 핵심부분에 들어갑니다. 주님의 지시에 의해서 율법대로 해야 돼요. 그리고 그렇게 행한 그 사람도, 자기가 지도자이면서, 자기가 가르치면서 가르친 자가 그렇게 하면 안 되겠죠. 마찬가지로 권세 행한다고 해서 법에서 벗어나면 안 돼요. 그 법에 대해서 똑같이 하나님께 책임추궁을 당합니다. 그 대표자가 바로 느부갓네살이에요. 자기가 왕으로서 행정적 처리를 하면서 왕 자체가 잘못되었을 때는 하나님이 다니엘을 통해서 통보해주는 겁니다.

 

어느 누구도 그 법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그 저주스럽고 매 맞게 하는 그 법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없어요. 다 그렇게 얻어터져야 되고, 얻어맞아야 돼요. 그래서 죄 값은 사망이잖아요. 그런데 말입니다. 그 국가가 변질이 되었어요. 운명적으로, 우리는 저주받아야 될 운명을 담당해야 할 그 법이, 사고 뒤처리로 바뀌어버렸어요. 현대국가가. 왜 사고 뒤처리로 바뀌어졌느냐 하면, 우리는 세상에 있는 모든 법을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내 안에 있는 짐승이, 마귀가 그걸 요청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시작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공권이 시작이 아니고, 나라는 존재가 시작이 돼버려요. “나를 행복하게 지켜주면 나는 세금내고, 너를 지도자로, 대통령으로 표 찍어줄게.” 이래 나오더란 말이죠. 누가요? 모든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과학이 그들에게 용기를 줬기 때문에 그래요. 과학이. 이제는 미신시대는 지나갔다. 미신시대는 지나가고 과학의 시대가 오리니! 연구해라! 기술발전이 우리를 풍족하게 할 것이다. 진보가 아니고 진화로. 진화라는 것은 늘 변화한다는 뜻이에요. 과학에 매진하자! 아는 것이 힘이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는 될 수 있는 대로 뭘 줄이면 되겠어요? 사건, 사고를 줄이면 되겠죠. 그럼 경찰 월급 많이 주고 과속단속하면 되겠죠. 그게 바로 사람들이 꿈꾸고 있는 살기 좋은 나라에요. 왜? 나를 행복하게 해주고 나한테 사고가 일어나지 않으면 되니까요. 이건 어려운 문제가 아니에요. 교회 가서 기도 열심히 한다. “저, 아주머니! 왜 이렇게 새벽기도를 길게 하십니까?” “글쎄 우리 애가 사고를 당했어요.” 주의 영광을 위해서 우는 것이 아니고, 자식이 사고를 당해서 울어요.

 

플라톤 국가론에서는 철인, 철학자는 뭘 한다? 통치는 지혜롭게 하되, 뭐는 없다? 사유재산과 결혼은 못하게 했어요. 죽으면 다른 사람과 바꾸면 되니까. 나머지기 사람은 자기 역할을 맡아야 돼요. 자기 역할을. 이걸 칼빈주의 소명론으로 보면 돼요. 사람은 백정이든지, 빵장사를 하든지, 이발사든지, 경찰이든지 관계없이 자기가 맡은 일을 하는 것이 사명이다. 이게 칼빈주의입니다. 소명, 부르심을 받았다. 너는 어부로서 부르심을 입었고, 너는 농사짓는 자로 부르심을 입었으니까, 부르심에 합당하게 그냥 살아라. 이거는 주님의 영광이 아니고, 칼빈주의가 그 당시에 부상하고 있는 자본주의와 개인주의 사고방식을 편드는 거예요.

 

칼빈주의가 제일 발달한 나라가 네덜란드고, 세계 최초의 주식거래소가 생긴 나라가 네덜란드잖아요. 주식거래소라는 것이 뭘까요? 장래의 신용을 지금 돈 주고 사겠다는 거예요. 이 말은 앞으로 인류사는 내리막길이 많이 없다는 거예요. 계속해서 성장할거니까. 성장한 미래를 지금 내 것으로 만들겠다는 것이 주식거래소입니다. 상장하는 것.

 

그러니까 주식을 한다는 말은, 내일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주식투자해야 돼요. “뭐 그냥 하루 먹고 하루 살지.” 이러면 주식투자할 거 없어요. 아니, 목사님, 주식투자한다고 부자 됩니까? 라고 반박하겠죠. 부자 된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부자 될 것이라는 그 희망이 지금의 어려움을 완화시킨다니까요. 지금의 고통을 부드럽게 만들어요. 사람이 희망이 있으면 어려워도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달려라 하니! 달려라 하니는 엄마 잃고 외롭지만 육상 하나로 성공하는 거예요. 라면 먹고 금메달 따는 것. 하긴 그게 낭설이라던데, 하여튼 그게 유명해졌어요. 라면 먹고 금메달 땄다는 게.

 

그럼 어느 희망 말입니까? 문제는 희망이 끝이 없다는 거예요. 왜? 욕망이 끝이 없기 때문에. 하나의 희망이 끝나면 그 다음 희망이 거기서 또 시작됩니다. 산 너머 산이라는 말은 저 뒤쪽 산이 안 보이게 되어 있는데, 이쪽 산을 넘는 그 순간 안 보이는 그 뒤쪽 산이 나오잖아요. 나는 3억만 있으면 더는 욕심이 없다고 도달하는 그 순간, 7억이 보이는 거예요. 다시 3억을 밑천으로 해서 7억을 내다보는 희망을 갖는 겁니다. 부자가 안 되도 나로 하여금 살만한 세상을 만들어주는 거예요.

 

아까 스데반 집사가 빨리 죽었다고 했죠. 세상의 모든 권세는 매 때리는 권세죠. 그럼 때리는 권세를 제대로 했다면, 율법이 없고 다시는 정죄가 없는 어느 나라를 사모하겠습니까? 주님의 나라를 사모하겠죠. 그러나 요새는 주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사람이 없어요. 유럽에서는 교회 가는 사람이 없고 전부 다 세상나라를 사모해요. 주식이 환원되니까. 점점 미래가, 과학의 발달은 곧 돈의 발달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교회 가서 기도할 이유가 없다 이 말이죠.

 

교회는 누가 갑니까? 곧 내일모레 하는 사람들. 호스 꽂고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와서 “주여, 죄 용서해주옵소서. 저를 천국에 넣어주옵소서.” 어디 그래가지고 천국에 들어갑니까? 죄를 알아야 용서가 되는데, 자기가 죄도 모르면서 용서가 됩니까? 용서해달라고 하는 것이 죄인 줄을 꿈에도 생각 못해요. 용서해달라고 하는 것이 죄에요.

 

왜? 용서해달라고 하는 그 순간, 그 사람은 누구한테 관심이 있어요? 본인한테 집중해 있어요. 본인한테 집중해있으면 본인의 나라에 가야지, 주님의 나라에 못가요. 주님의 나라는 주님한테만 관심 있는 사람만 가지, 본인한테 관심 있는 사람은 주님의 나라에 못 간다니까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또 이렇게 반박해요. 목사님처럼 해가지고는 우리나라에 교인들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왜? 두 명이 되면 왜 안 되는데요? 에이, 확률적으로는 두 명이 더 되겠죠. 그거는 과학이고요. 두 명이 되면 왜 안 되는데요? 주께서 두 명만 건지면 건지는 거지, 세 명이 돼야 된다고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까? 없어요.

 

몇 명이냐가 아니고 원칙이 뭐냐는 겁니다. 우리는 어느 나라에 갑니까? 예수의 나라에 가요. 나의 나라에 가지 않아요. 나의 나라에서 예수님 나라에 가려면 내가 죽어야 돼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내 삶을 대신해야 갈 수가 있어요. 왜? 주님이 최종권세자이기 때문에.

 

그런데 주님의 권세자가 변질되었습니다. 뭘 위해서? 죽이라고 준 율법과 법집행이 나를 위로해달라는 것으로 법이 바뀌었다니까요. 이번 수련회 때 그런 이야기를 했죠. 수련회뿐만 아니라 다른 데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원래 국가는 행복추구권만 줬어요. 미국의 제 3대 대통령 제퍼슨이 독립선언문을 할 때에, 국가는 국민의 행복추구권을 허락할 의무가 있어요. 국가는. 공직은 사직의 행복추구권리를 보장할 필요가 있어요. 그러나 충족은 시키지 않아요. 추구와 충족이 달라요.

 

나는 남자지만 남자하고 연애 할래. 해! 해! 그건 국가가 안 말려요. 그런데 우리 부부가 되게 해달라고 하는 이것은 안 돼요. 이건 안 된다고요. 그거는 무리한 요구에요. 부부로서 모든 권리를 요구하는 것, 그거는 안 돼요. 그거는 충족이 되니까 안 돼요. 나의 성향이 남자지만 남자를 좋아한다. 해! 누가 말려? 지가 좋다는데 어떡해?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보상금 주세요. 이건 안 된다니까요. 나는 이상하게 소매치기가 재밌어요. 해! 그런데 잡지마세요. 이건 안 돼요.

 

추구는 할 수 있어요. 병이니까 할 수는 있어요. 누가 말려요? 그런데 그걸 허락해 달라? 미쳤어요? 안 되죠. 추구는 하는데 허락은 안 돼요. 나는 여호와 증인이기 때문에 여호와를 믿습니다. 믿어! 누가 뭐래? 군에 안 가겠습니다. 미쳤어! 3년형 때려버려야 해요. 왜? 국가는 충족해주는 것이 아니고 추구만 보장해주기 때문에. 무슨 차이인지를 아시겠습니까?

 

그런데 그 국가가 말입니다. 변질된 국가라니까요. 왜? 이제는 개인이 우상화된 거예요. 원래 국가의 최종배후자는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근데 예수 없어요. 없고, 개인이 예수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내 행복을 누가 보장할까? 나는 내 행복을 보장 안 하면 이민 갈 거야. 가! 이민 가!

 

젊은 베트남 여자가 “이 나라는 희망이 없어. 백날 해봐야 농사만 짓고...” 근데 TV에 한국의 드라마나 가수들이 나오죠. 한국의 드라마처럼 전부 다 재벌인줄 알고, 가수들처럼 전부 다 노래 잘하는 줄 알고 있다면, 그럼 뭐가 희망이겠어요? 주재원 만나서 꼬셔가지고 결혼하든지, 안 그러면 한국에 여행비자로 와서 시골 노총각 만나서 살든지, 그렇게 하면 베트남 캄보디아나 라오스보다는 낫잖아요.

 

라오스라는 나라가 있어요. 공산주의나라에요. 투자 제로에요. 투자가 안 되면, 설비투자가 안 되면 공장이 안 세워지죠. 취직이 안 되죠. 놀고먹는 나라에요. 공산주의니까. 있는 것 그냥 먹고 살자. 되게 평화로워요. 되게 평화로운데 취직은 안 돼요. 하는 일은 태어났다가 때가 되면 죽으면 돼요. 의료보험도 안 되어 있으니까. 의사할 필요가 없어요. 의사되려고 공부해도 나라가 보장을 안 해줘요. 의사하나 놀고 있으나 수입이 똑같으니까. 이게 공산주의 사회니까.

 

공산주의 사회는 뭡니까? 능력에 따라서 일하고 필요에 따라서 얻는 거잖아요. 엥겔스나 레닌이 그 이야기를 했다 이 말이죠. 공부 잘 한 놈이라고 해서, 공부 잘한 것은 알겠는데, 니는 왜 월급을 더 받아야 돼? 라고 하는 이것이 공산주의입니다. 이게 공산주의입니다. 여러분 이상하지 않습니까? 나는 공부가 제일 쉬워서 백점 받고, 나는 공부가 어려워서 백날해도 빵점인데, 어떻게 같은 인간이면서도 나는 백점 맞았으니까 월급을 백만 원 주시고, 쟤는 빵점이니까 십만 원 주라고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왜? 니는 니가 잘한 공부를 했기 때문에 니도 오십만 원, 나도 오십만 원. 이게 공산주의 사회에요.

 

어째 좋은 사회 같습니까? 놀고먹는 사람한테는 최고죠. 노동자들이 하루 일을 얼마 합니까? 8시간. 그럼 자본가들은 일을 얼마 합니까? 20시간. 돈을 누가 더 가져가야 돼요? 자본가가 가져가야 되죠. 집에서도 회사걱정 하니까. 근데 노동자들은 뭐라고 합니까? 돈을 똑같이 나누자고 하는 거예요. 이게 뭐 공산주의지, 그럴 것 같으면 누가 사업을 하겠어요? 아르바이트 한 시간에 만원. 8시간 했습니다. 그럼 8만원. 한 달 일했어요. 240만원. 주인은 50만원 가져가는데요?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안 되죠.

 

그래놓고 성경에서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고 했다고 해요.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고 하는 것은 스마트 폰 사주라는 말이 아니에요. 최선의 먹을 것을 주라는 거예요. 복지부에서 최선의 먹을 것은 줘요. 밥맛이 없어서 그렇지. 먹을 것 준다고요. 심지어 교도소에 가도 콩밥이 안 나와요. 쌀밥이 나온다고요. 교도소가 북한의 인민군보다 나아요. 한국의 거지는 추리닝 입어요. 아프리카 중산층이 추리닝 입어요. 도대체 인간의 욕심이 어디까지 가야 됩니까?

 

플라톤은 역할을 하라고 말해요. 역할을. 자기 역할을 한만큼 수입을 가져가란 말이죠. 요만큼 일해 놓고 남의 것 탐내지 말고. 역할로 하는 거예요. 역할로. 그렇게 하는 목적이 뭐냐, 국가가 국가답게 운영이 된다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정의라고 합니다. 정의. 정의로움. 정의는 보통 네 가지의 이론들이 있어요. 네 가지 다 들어가면 복잡하니까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능력대로 일하자. 이게 정의다.” 그러면 능력자가, 땅 만평 가진 사람이 한 달에 백만 원 받고, 땅 천 평 가진 사람이 한 달에 십만 원 받으면 정의롭죠. 열배 일했으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신약에 가게 되면, 만 평 일한 사람이 백만 원을 가져가는 것이 아니에요. 백오십만 원을 가져가게 됩니다. 왜? 많이 생산해서 덤핑처리를 해버려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많이 생산한 체제에서 단가가 낮아가지고, 천 평 일한 사람은 십만 원 가질 것을 오만 원 가지게 만들어버리는, 사회구조적으로 시장에 모순이 있다고요. 시장에서는 같은 제품이면 싼 걸로 사잖아요.

 

아이고, 세상에! 천 평에서 일했어요? 만 평 가게에서 일했어요? 그러면 똑같이 해야죠. 그런 것을 계산할 사연 같은 것을 몰라요. 왜? 내 맘도 모르는데 남까지 우에 알아요? 인간은 그런 남들의 사연을 모른다고요. 코앞에 있는 자기 사연밖에 몰라요. 그러면 능력자끼리 일하면 안 되겠죠. 시장에 맡기면 안 되겠죠. 왜? 독과점이 돼버리니까, 이건 자기 노동력까지 가진 자에게 탈취를 당하니까. 마르크스가 이야기하는 거예요.

 

두 번째가 뭐냐 하면, 그러면 지도자가, 똑똑한 지도자가 나와서 이걸 조정하면 되지 않겠는가? 이게 계약법에 의한 정의론이에요. 문제는 그 지도자가 자기 사리사욕을 채우고, 자기 가족만 챙긴다면 그 법을 금지할 법이 없는데요? 그러면 사리사욕을 채우지 말라는 법을 만들면 되지 않느냐? 근데 법은 누가 만듭니까? 지도자가 만들어요. 자기 편리를 위해서. 통치를 하려면, 그냥 통치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통치에 합당한, 대통령 법이라는 규칙을 만들 수 있는 권한을 거기에다가 넘겨준다니까요. 잘해볼라고 하다가 말을 사줬다고 하는 거예요. 잘해볼라고 하다가. 나라에서 젊은 애들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주려고 최순실한테 말을 사줬다고 이렇게 나와요.

 

 

이거는 누구의 권한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권한이기 때문에 이거는 법이 판단할 사항이 아닙니다. 이렇게 나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또 촛불 들래요? 지도자가 괜찮아야 한다는 조건을 걸고 했는데, 지도자가 인간이잖아요. 죄가 잠복되어 있다고요. 죄가. 괜찮은 인간이 어디에 있습니까? 몰라요. 한 3년, 4년, 지금 문재인 대통령이 1년도 안 됐잖아요. 근데 만약에 5년 되고, 또 해서 6년 되고, 10년이 되면 어떻게 되겠어요? 현재 터키, 아프리카 북부나라, 아랍, 보통 몇 년씩 해요? 심지어 50년 한 사람도 있어요. 50년. 지도자가 자기밖에 없어요? 자기보다 뛰어난 지도자는 다 죽였어요. 그걸 금지할 법이 없어요.

 

세 번째가 뭐냐 하면 존 롤스의 이론인데, 사회가 복지를 하되 어떤 순위로 하느냐 하면 어려운 사람들 순위로 피자를 자르자는 거예요. 어려운 사람들 순위로. 그러니까 강자가 처음 순위가 돼버리면 약자는 자기가 한 노동마저 강자의 횡포에 눌려서 다 빼앗기니까, 약자 순으로 피자를 3등분 할 때, 제일 마지막에 먹는 사람한테 그걸 자르게 하자는 말입니다. 전에 이건 한 건데, 마지막 먹는 사람이 3등분을 하게 되면, 그 사람이 하나는 크게, 또 하나는 중간으로, 또 하나는 작게, 요렇게 자르지는 않는다는 거예요. 왜? 자기가 제일 마지막에 먹기 때문에, 제일 작은 것이 자기 몫이 되니까. 정신 바짝 차리고 가장 똑같이 3등분을 나누는 거예요. 이렇게 하자고 하는 것이 존 롤스의 정의론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문제가, 기게스 반지Gyges ring라는 것이 있어요. 옛날 신화에 반지를 돌려버리면 모습이 투명하게 되어서 안 보였다가, 다시 돌려버리면 원래 모습대로 돌아오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몰래 나쁜 짓 해놓고 안 한 것처럼, 정상인 행세 하는 사람을 찾아낼 수가 없다는 거예요.

 

“우리 집은 너무 가난해요. 우리 집에 있는 정원사 세 명도 가난하죠, 어제는 집에 있는 에스컬레이터가 고장이 나버렸어요. 우리 집에서 일하는 식모가 일곱 명이 있는데, 일곱 명 다 가난해요. 선생님, 그래서 우리 집은 다 가난해요.” 순진한 초등학교 애가 가정환경을 밝히는데, 자기 집에 에스컬레이터 있고, 2층 이상 있다 이 말이죠. 정원사 3명이 있고, 식모가 7명이 있다고 다 알려줘요.

 

그래놓고 그 사람들이 다 가난하니까 나도 가난한 측에 속하는 게 맞다 이 말이죠. 부잔데 세금 안 내요. 낼 돈이 없대요. 이럴 때는 어떻게 할래요? 그럴 때는 또 찾아내야 되겠죠. 찾아내려면, 그 찾아내는 과정에서 정말 가난한 사람이 대우를 받지 못하고 치안의 대상이 돼버려요.

 

왜 죄 짓습니까? 소소한 죄를 왜 짓습니까? 이유는 단 한 가지 가난하기 때문에. 가난하기 때문에 상식적인 것도 학교에서 배운 적이 없어요. 이게 나쁜 짓인지, 좋은 짓인지도 몰라요. 그래서 제가 말하잖아요. 역시 인간도 잘 사는 집안의 인간이 인간성이 좋아요. 왜? 가졌으니까 배려심이 있어요. 아쉬운 게 없잖아요.

 

그러나 못 사는 애들은 이것 뺏기면 굶어죽으니까 눈에 핏발이 서요. 이기적일 수밖에 없어요. 죽느냐 사느냐 문제입니다. 가진 자들의 애들은 신발 하나 버려도, 줘도, 자기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돼도, 자기 집에는 먹을 것이 많아요. 누가 성품이 좋습니까? 역시 부잣집 애가 성품이 좋아요. 강북보다 강남 애가 성품이 좋아요. 인간성도 좋아요. 여유가 있으니까. 사람에게 여유가 있다는 말은, 융통성이 많다는 것이고 용납을 해준다는 겁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은 그게 안 되잖아요. 인간성도 날카로워요. 돈이 인간성을 만드는 세상이에요. 돈이. 따라서 좋은 집안에서 계속 좋은 사람이 나오죠. 좋다는 것은 그만큼 면접을 볼 때 유리하죠. 그러면 많은 자손을 가진 그 위에 계층은 점점 더 높아지겠죠. 뽑을 때 분명 착하고 능력이 있어서 뽑았는데, 뽑고 나서 보니까 이미 그 집안이 그 집안이라. 계급차가 확연하게 드러나죠.

 

그러면 이걸 완전히 혁명으로 뒤바꾸자고 하는데, 뒤바꾸면 나라 발전이 안 되는데요? 라오스 돼요. 라오스.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혁명을 일으켰죠. 배운 사람을 다 죽였잖아요. 200만 명이나 죽였잖아요. 나라꼴이 어떻게 됐어요? 완전히 엉망진창 됐어요. 지옥 됐어요. 어디 아골 골짜기인가? 해골이 엄청나게 쌓여있죠. 얼마나 많은지.

 

네 번째가 바로 마이클 센델 교수가 주장한 거예요. 공동체 주의가 있습니다. 공동체 주의. 협의해서 하자는 거예요. 협의해서. 이게 바로 문재인 대통령이 추구하는 거예요. 협의해서. 원자력 그만 두냐, 마냐를 협의해서 하자. 지금 이게 성경 말씀과 관계없는 것이 아니에요. 이러한 인간의 모든 아이디어가 바로 적그리스도고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 자들을 거부하고 있는 악마적인 지혜라 이 말입니다.

 

공동체 주의가 뭐냐 하면, 협의를 하게 되면 최소한의 불평불만이 줄어들게 아니냐 이 말이죠. 협의했기 때문에. 이거는 독일의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가 이미 주장한 거예요. 뭐든지 공론화하자. 이게 뭐냐, 대화중심이에요. 소통중심이에요. 소통을 어느 광장에서 하는데요? 그럼 그 대화할 때 순서를 누가 정하는데요? 그리고 모든 의제의 발제를 다 할 수 있습니까? 이거는 말도 안 되니까 넣지 말라는 것을 누가 정하는데요? 이거는 넣을만한 발제고, 저거는 빼야할 시답지 않는 발제라는 것을 누가 정하는데요?

 

그거는 기존에 세력을 가진 자에게 있는 거예요. 공동체라고 해놓고, 공동체를 운영하는 또 하나의 특수 상위계층이 돼버리는 겁니다. 숫자 한 서너 명으로 공동체를 합니까? 서너 명이 해도 안 맞아요. 짬뽕 먹자, 간짜장 시키자, 탕수육 소자로 하자, 중자는 시켜야 된다, 대자로 하면 안 된다, 뭐 서너 명이 해도 안 돼요. 중국의 어느 목사님은 교인이 여덟 명인데, 여덟 명이 한국 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비리는 다 경험을 했답니다. 달랑 여덟 명이. 십일조니 당회장이니... 뭐, 나올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나왔어요.

 

자, 그 이유를 밝히겠습니다. 제목이 뭐라고 했습니까? 액시던트accident,사고죠. 사고와 운명. 우리는 운명에 속했습니까? 아니면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는 그러한 가치가 있습니까? 우리는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는 그러한 권한이 없어요. 왜? 모든 사고는 운명에서 주기 때문에. 주님의 뜻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러면 권세는 뭘 위한 권세입니까? 내 사적인 사고를 방비하기 위한 권세자가 아니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증거 하는 겁니다. 어떻게? 이 땅에서 손 떼라는 겁니다. “저, 경찰한테 맞았어요.” “잘 맞았어. 그러니까 떠나! 미련 갖지 말고.” “그거 제가 한 게 아닌데요?” 니가 했던 안 했던 간에 그걸 묻는 것이 아니에요. 때리는 자도 주의 종이니까. 니도 때리면 맞아야 돼요.

 

자,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나라에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부모공경하고, 형제우애 있고, 어려운 사람들 잘 돌봐주고, 휴지도 줍고, 병자도 자기가 나서서 도와주고, 자기 재주를 무상으로 나누어주고, 그 마을에서 너무나 사랑받는 사람인데, 그 사람이 25년 노동형을 받았다. 죄목이 뭐냐 하면, 노동신문에 찍힌 김정은 사진이 바람에 날려 그 사람 구두를 덮은 거예요. 그걸 본 자들이 신고를 했어요. “더러운 신발에 사진을 덮다니! 25년형!”하고, 25년 형을 받았어요.

 

그러면 그 사람은 억울합니까? 억울 안 합니까? 억울하다고요? 억울할 게 없어요. 태어나기가 속인주의에요. 속인주의가 뭐냐 하면 그 나라 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무조건 그 나라 운명에 어쩔 수 없이 받도록 예수님께서 그렇게 한 거예요. 억울한 게 없어요. 왜? 우리는 날 때부터 죽기로 되어 있기 때문에. 죄인이기 때문에.

 

이왕이면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게 하시지...아니, 니가 그런 것을 선택할 권리가 없다는 겁니다. 자기 엄마, 아빠가 북한 사람이면 북한에서 태어나서, 바람이 잘못 불어서, 구두를 덮어 25년형을 받아야 돼요. 김정은 사진으로 신발을 덮었다고 그렇게 받아야 돼요. 아무리 착해도 소용이 없어요. 착하면 복 받는다고요? 아니에요.

 

인간은 복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복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복이라고 하지, 우리는 복 받을 자격이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지금 대통령을 욕해도 잘 살잖아요? 욕해도 잘 사는데 이게 복이 아니고 뭡니까? 근데 지금 대한민국에 있으니까, 우리끼리니까 잘 살죠.

 

만약에 미국에 이민가게 되면, 더 잘 사는 나라에 가게 되면, 지금이 2017년도죠. 우리나라 2017년도 국민소득이 29,000불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내년에 문재인이 죽어버리고, 갑자기 강호동이라는 대통령을 뽑았는데, 그때부터 국민소득이 140,000불이 됐습니다. 140,000불이 됐는데, 29.000불을 받으라고 하면 받겠습니까? 140,000불이 돼서 다 공짠데, 자기는 29,000불이었을 때, 그때가 좋았다고 해서 돈 안 내도되는 의료비, 50,000원을 내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없지요.

 

그러면 당신은 왜 감기 걸려도, 암 걸려도 공짜로 받습니까? 그거는 운명이기 때문에 그래요. 운명. 내가 대통령을 잘 뽑은 게 아니에요. 우리한테 어떤 선택권이 주어진 게 아닙니다. 이거는 어쩔 수 없는 거예요. 어쩔 수 없는 거. 우리는 운명을 크게 봅시다. 운명을 액시던트accident,사건으로, 그걸 거대한 하나의 사건으로 보자 이 말이죠. 십자가사건으로 보자 이 말이죠. 십자가사건을 믿는 사람이 땅을 샀는데 백배나 올랐어요. 사건이죠. 그게 무슨 사건이냐 하면 사자성어로 ‘대박사건’입니다. 대박사건이죠.

 

대박사건으로 인해서 갑자기 땅값이 200억이 됐는데, 200억 돈 가지고 오다가 갑자기 죽어버렸어요. 대박사건이죠. 200억 돈 들고 오다가 차사고 나서 죽어버렸다 이 말이죠. 이것도 사건이죠. 200억 오를 때는 감사하다고 했다가, 그렇게 죽었다고 하필이면 나에게...하고. 이렇게 자기 맘대로 분리해서 괜찮은 고백을 할 권한이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그냥 주어진 대로 살 수밖에 없어요.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운명입니다. 왜? 어차피 이 땅은 떠나야 할 곳이에요. 어차피. 어떤 수모를 당하고, 어떤 사건을 만난다 하더라도, 그걸 사건이라고 보지 말고 말을 바꿉시다. 이건 운명이라고 보자 이 말입니다. 운명.

 

옛날에 군에 있었을 때 갈치국이 나왔어요. 취사병이 눈 감고 딴 짓하다가 상사한테 가야 될 갈치 큰 토막이 이등병한테 올 수가 있어요. 한 눈 팔아가지고. 그거는 운명이에요. 십자가는 아무도 못 믿어요. 믿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마귀한테 속했기 때문에, 우리는 나를 보호하는 그 권세자, 그리고 그 배후의 하나님, 나를 보호해주고 사고를 줄여주는 그런 하나님을 믿어요. 나를 불행하게 하지 않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게 이방종교, 이방신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앞장세우는 것은, 그거는 아무도 안 믿어요. 안 믿는데, 믿게 되었어요. 운명입니다. 그걸 창세전에 예정된 뜻이라고 해요. 따라서 그게 운명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3절에 보면,

 

이 사람들이 아담의 자손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담의 자손입니까? 아닙니까? 아담의 자손이죠. 이것이 잠복되어 있었던 거예요. 그러면 아직은 안 튀어나왔지만 언제 튀어나올지 장담 못하는 거잖아요. 우리가 같은 아담이니까, 아담의 속성을 같이 물려받았기 때문에, 그쪽에서는 나오는데 나는 안 나온다는 이 말이 성립이 안 돼요.

 

그러나 그 나오는 타이밍은 운명적으로 튀어나와요. 운명적으로. 크레용팝이에요. 니 한 번 올라가면 나 한 번 내려가고...서로 다르게 점핑을 하죠. 운명적이에요. 그러니까 남 잘 된다고 부러워 할 필요가 없고, 남 못된다고 좋아할 필요가 없어요. 니는 니 역할을 하면 되고 나는 내 역할을 하면 돼요.

 

내 역할은 한 달 수입이 2,500이다. 그거 가지고 골프치고 여행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역할에 제발 충실하세요. “주여! 오늘도 제 역할에 충실하게 해주시옵소서. 나이스 샷!” 왜? 그게 자기 운명이니까. 그것 가지고 자기 자랑하면 안 돼요. 그거는 교만이에요. 어떻게 그런 죄인에게 돈을 줄 수가 있어요? 이거는 죄인이지만 주시는 하나의 운명이니까.

 

그래서 부자가 어디에 가기 힘들다? 천국가기 힘들어요. 왜? 주제파악이 안 되니까. 돈에 눌려서 주제파악이 안 돼요. 그런데 그 부자도 천국 간 사람이 있습니다. ‘삭’씨 집안이에요. 삭개오. 같은 부잔데, 하나는 천국가고 하나는 지옥 갔잖아요. 부자청년은.

 

이제 주님께서 권세를 다루시는 이유를 알겠죠. 권세는 패는 겁니다. 니는 처음부터 죄인이라서 죄인을 패는데, 팸으로 말미암아 맞아도 합당하니이다, 라고 살면서 한 달 수입 700건지고, 골프 치면 돼요. 부자 되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요. 부자 되도.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역시 부자가 인간성이 좋아요. 가난한 사람은 인간성이 날카로워요.

 

여기 3절에 보면 항목이 너무 잘 되어 있어요.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으나” 가난하다고, 아르바이트 한 돈으로 오면서 술 한 잔 했어요. 이게 정욕이잖아요. 행락이고, 어리석은 거고.

 

그래놓고 나도 돈이 없어서 그렇지, 나도 돈만 있으면 이렇게 안 한다고 해요. 이렇게 핑계를 대는데, 핑계대지 마세요. 그게 운명이라니까요. 내가 태어날 가정을 내가 골랐습니까? 운명이에요. 이걸 운명이라고 하니까 너무 이방종교인 용어가, 색채가 강하죠. 그러면 이렇게 하죠. 그게 예수님의 뜻입니다. 주의 뜻이에요. 범사에 감사하세요. 진작 죽어야 되는데 아직도 살아 있어서, 주께 감사할 수 있도록 해준 것에 대해서 감사하세요.

 

어차피 우리는 스데반 집사처럼 합류합니다. 예수 십자가를 믿는다는 말은 본인의 능력이 아니고, 성령이 주셨기 때문에, 성령은 뭔가 뒤에 로봇 팔이 있어가지고, 성령을 중간에 끊을 수가 없어요. 환란, 고통이 와도 괜찮아요. 왜? 환란이나 고통이 와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 것이 더욱더 확인되기 때문에, 환란, 고통이 당연히 일어나야 될 운명이고, 절차 같은 거예요. 환란이 인내를.....,

 

그래서 5절에 봅시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우리가 구원받았는데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않죠. 오직 그의 긍휼하심입니다. 긍휼하심. 긍휼하심이 원래 하나님의 의무에요. 은혜 줄자에게는 은혜를 주고 긍휼이 여길 자에게만 긍휼히 여겨 준다고요. 출애굽기 33장에 나와 있단 말이죠.

 

모세가 만난 하나님이 그 하나님이란 말이죠. 자, 그 하나님보고 달라지라고 요구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에요.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주시고 나면 하나님께서는 손 털어버립니다. 자꾸 다른 하나님을 상상하지 마세요.

 

긍휼을 받고 용서를 받았잖아요? 다 받았어요. 다 받은 거예요. 니 맘대로 사세요. 타고난 본성 가지고. 받을 것 다 챙겼다니까요. 용서 받았으면 죄가 없죠? 그거보다 더 큰 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람이 온 천하를 받고도 용서를 못 받으면, 그 온 천하가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왜 사람이 엉터리 같은 짓을 하느냐 하면 소중한 것을 몰라서 그러고, 감사할 게 따로 없기 때문에 그래요. 감사할 게. 감사할 게 없기 때문에 자기 쾌락을 감사하려고, 쾌락을 얻기 위해서, 쾌락 쪽으로 나가버린 거예요. 감사할 게 있는데, 그건 시시하다는 거예요. 내 즐거움이 나한테 자랑거리가 된다는 거예요. 그 말은 주 예수의 긍휼하심은 별로 돈도 안 되고, 시답지 않고, 주면 주고 말면 말라는 식이고, 나는 그게 행복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맴매해야죠. 누가요? 세상 권세 잡은 자들과 이웃들이 욕하고. 그럴 때 우리는 항의하지 말고 나의 팔자요, 운명이다. 감사하게도 주께서 그렇게 해주셨구나! 이게 얼마나 간단한 이야기입니까? 신앙생활이. 막사시되, 매로 때리면 맞으시고. 제가 막살라고 하면 사람들은 자꾸 뒤에 딴 걸 생각해요.

 

막살았는데 탈 없다. 자꾸 탈 없다는 걸로 연결시키지 말고요. 막사시고, 브레이크 고장 나서 차 박으시고, 편하게 다 망가지시고. 막사시는 것은 니 할 일이고, 때리는 것은 주께서 할 일이시고. 그래도 긍휼하심과 용서하심을 가지고 싱글벙글하시고. 그렇게 살면 될 것을, 이게 뭐가 어렵습니까?

 

자, 끝으로 이게 왜 이렇게 안 되는 이유는 바로, 성경 볼 때에 이미 우리 속에 “나만 행복하면 되지.”라는 악마적인 부추김이, 악마가 그렇게 나에게 자꾸 설득시키고 몰아넣었어요. “다른 사람 좀 봐! 니는 별 거 아니야. 니도 다른 사람처럼 살아야지.”라고.

 

남들처럼 살고 싶은 그 욕망이, 욕심이 잉태해서 죄를 낳죠. 자꾸 마귀가, 세상이 그렇게 만들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그게 어쩔 수는 없으니까, 떠나요! 제주도로 떠나는 것은 아니고. 떠나요! 내가 손 댄 나라가 아닌 나라로 갑시다. 내가 환영받지 않는 나라로 갑시다. 나는 쪼다가 되어서 가는 나라! 십자가 옆에 달린 강도가 되어서 가는 나라! 오늘 밤에 너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강도가 되어도 싱글벙글 할 수 있는, 세상에서는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어떤 것으로도 살 수 없는, 예수님의 피 용서를 영원히 감사할 수 있고 고마워 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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