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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9 00:26:42 조회 : 776         
자기 증명 171208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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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IP:122.♡.178.64) 18-01-09 15:33 
서울의존강의20171208a 디도서3장9절(자기 증명)-이 근호 목사

 

디도서 3장 9절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이 디도서에 있는 사람들에게 사도바울이 편지를 할 때에 그들로 하여금 그레데 교회를 믿게 하기 위함이겠어요? 아니면 예수님을 믿도록 하는 겁니까? 이 편지를 보낸 목적이 교회가 있으니까 교회 믿으라고 하는 거예요? 아니면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하는 겁니까? 교회 믿어서 구원받는 거예요? 아니면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받는 거예요? 예수그리스도죠.

 

그런데 이 사도바울이 편지를 할 때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는 이 지상에 계시지 않죠. 예수님 당시에는 열 두 제자가 주변에 포진되어 있었는데, 예수님과 더불어서 함께 활동을 했죠. 그때에 사람들이 “제자들이 활동하네.”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아니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활동하네.”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반드시 예수님을 언급 했겠죠.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저렇게 활동한다고.

 

그러면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제자들이 중요한 게 아니고, 누가 중요하냐면 예수님이 중요한 거예요. 그게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이에요. 그렇다면 그 제자들이 옆에 있는 이유는 뭐냐, 제자 본인들도 알아요. 자기들이 중요한 게 아니고 예수님이 중요하기 때문에 자신들은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다. 다윗의 자손이다. 우리의 구세주다. 세례요한에 의하면 예수님은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이시다.

 

세례요한이 이 세상을 심판주로, 심판이 왔다는 것을 언급할 때는 이 세상이 심판받아 합당하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하죠. 이 세상이. 이 세상이 심판받아 마땅하다는 그 사실에 대해서 세례요한은 그 기준을 잘 몰랐어요. 그냥 세례요한이 아는 수준 내에 알곡은 거둬서 창고에 들어가고 쭉정이는 불에 태운다. 이렇게 했는데, 무엇이 알곡이 되는 기준이고 무엇이 가라지가 되는 기준인지, 그 기준에 대해서는 세례요한도 뚜렷하게 이야기를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예수님이 하실 일이 많기 때문에.

 

세례요한 같은 경우에는 그냥 상식선에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자기의 기준을 정한 데에 있어서 “심판 날이 가까이 왔으니까 여러분이 각자 생각하는 그 상식선에서 자기 죄를 고백하고 심판주의 처분을 기다립시다.” 이렇게 생각을 했는데, 세례요한이 깜짝 놀랐어요.

 

심판받아야 될 사람들을 물에서 세례를 주는데 거기에 예수님이 합류가 된 거예요. 합류가 되니까, 자기 기준선에서는 이거는 생기지 말아야 될 일이 생기게 된 겁니다. “예수님이 죄인이 되다니!” 그 물속에 들어간다는 것은 죄인들만 들어가는 자리인데, 예수님이 죄인이 된다고 한다면 세례요한의 입장에서는 도리어 예수님에게 물을 수밖에 없어요. “예수님은 이럴 필요가 없는데 왜 이렇게 하십니까?”

 

세례요한이 제시하는 것은 예수님을 심판주로 보는 거죠. 심판주. 심판주를 선도해서 가져오는 거고요. 그럼 심판주 앞에서 세례요한이 제시하는 것은 회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회개하라. 회개. 세례요한이 회개하라는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죄가 있다. 이걸 물세례를 통해서 정화하자. 지금 이 정도까지는 아는 겁니다. 그럼 물세례로 정화 받으면 심판주 앞에서는 죄가 없어지니까 심판주 되시는 예수님께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러한 스케줄을 세례요한은 생각을 했는데, 놀라운 것은 이 물세례에 누가 관여를 했습니까? 예수님이 여기에 들어와 버린 거예요. 들어와 버리니까 세례요한이 생각했던 그 심판의 기준에 대해서 모순이 생긴 겁니다. 난감한 거예요. 왜냐하면 회개할 필요도 없는 예수님이 들어왔으니까.

 

회개해서 심판에서 면제를 받으라고 했으면 예수님은 안 들어오고 그냥 심판주 자리에 앉아있고 인간들이 회개해야 하고, 이렇게 돼야 모든 것이 제대로, 정상적으로 이 구원스케줄이 가동된다고 생각하는데, 심판주가 죄인 속에 합류를 해버리면 결국 이거는 뭐냐 하면 심판에서 구원이 되려면, 천국가려면 무슨 내용이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은 심판주께서 죄인 되어야 했다는 내용이 제대로 납득이 되면서, 이것까지 심판의 기준으로 들어가 있어야 되는 것을 세례요한의 입장에서는 하나의 부담으로 느끼는 겁니다.

 

시험을 치는데, 25페이지까지만 시험을 친다고 했는데 25페이지가 아니고 마지막 교과서 끝까지에서 시험문제를 낸다고 하면, 25페이지까지만 나온다고 했던 반장의 전달사항은 반장 자신에게 부담을 느끼게 하는 거예요. 50페이지에서 문제가 나온다고 하면 자기는 거짓말을 한 셈이 되니까.

 

그래서 세례요한이 예수님에게 물은 겁니다. “오실 분이 당신 맞습니까? 내가 아는 기준하고는 이거는 전혀 맞지를 않습니다.” 예수님이 죄인이 됐다는 말은, 이 말은 세례요한 측에서 제시하는 그 어떤 기준도 결국은 구원이 될 수 있는 기준은 안 된다는 겁니다. 미흡하다는 거죠. 제일 중요한 것이 빠졌다는 겁니다. 어떤 기준을 받아들여야 구원받느냐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죄인 됐대.”라는 그 기준까지 받아들인 자만 구원이 됩니다. 예수님이 죄인 되었다는 것.

 

그러면 예수님이 죄인 되었다는 그 기준을 받아들이려면 무엇까지 알아야 하느냐 하면, 왜 심판주가 심판받는 자리에까지 합류를 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되죠.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죄인 되었다는 사실을 알려면 그 내력을 알아야 하죠. 그 내력을. 그냥 죄인 되었다고 문장 외우면 구원받는 겁니까? 그건 아니잖아요. 진정성 있게 그 내용이 자기 안에 자리 잡아야 되지 않습니까? 자리 잡아야 되죠.

 

예수님이 심판주인데, 심판주라고 하는 것은 엄해야 되고, 단호해야 되고, 흠도 티도 없는 완벽한,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이에요. 그래서 심판할 수 있잖아요. 죄도 없고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인데, 왜 죄 속에 자기자리를 잡느냐 이 말이죠. 왜 죄 속을 자신의 자리라고 잡아버리느냐 이 말이죠. 그 취지에 대해서 모른다는 말은 곧 예수님에 대해서, 구원의 스케줄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다는 말과 같은 말이 되는 겁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그건 당연히 그 당시 유대사회가 갖고 있는 잘못된 선입감을 뒤집어놓는 겁니다. 모래시계의 한쪽이 다 됐으면 밑을 위로 뒤집어놓는 거죠. 그래서 제가 제시하는 것은 모래시계처럼 밑을 위로 뒤집어놓는 것도 되지만,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겉은 속으로, 속은 겉으로 이렇게 바꾸어주는 겁니다. 속옷을 겉에 입은 사람이 누구죠? 슈퍼맨이죠. 슈퍼맨처럼 되는 거예요. 슈퍼맨처럼.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구원을 받느냐 하면 소경과 절름발이 병든 자가 구원을 받죠.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속사정이 바깥에 드러났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모든 인간이 예수님 보기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잖아요. 죄인이잖아요. 죄인 같으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죄인의 표시를 보여주겠습니까? 아니면 소경된 자, 절름발이, 병든 자가 죄인의 표시를 보여주겠습니까? 어느 쪽이겠습니까? 병든 자, 가난한 자, 소경된 자, 이런 자들이 소위 죄인이기에 받는 징벌을 지금 한껏 받았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이겠죠.

 

바로 그들과 같이 하시는 주님, 그들을 깨끗케 하시는 주님의 취지가 무엇과 일관성이 있느냐 하면 죄인들, 자기가 죄를 알고, 나는 이런 죄를 가지고 있으니까 주여, 이런 죄를 메시야로서 용서해주셔서 그 용서받은 그 상태로 구원해달라고 하면서 요단강 속에 빠진 사람, 물속에 들어간 사람, 그 들어간 사람과 예수님이 합류한 취지와 같은 취지라 이 말이죠. 같은 취지.

 

그러니까 예수님은 죄인 속에 들어오고 싶은 거예요. 예수님이 죄인 속에 들어온다는 말은 죄인이 새삼스럽게 자기 구원을 위해서 할 게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죠. 없다 이 말입니다. 어느 집에서 피자가게에 피자를 배달시키는데, 승윤301호에 피자 열판, 꿈같은 이야기지만 피자 열판을 배달해달라고 했다 이 말이죠.

 

가게 주인이 신나게 피자 열판을 가지고 자전거를 타든지 오토바이를 타든지 해서 열판을 가지고 출발을 하려고 하는데, 이 추운 날 피자집까지 전화를 했던 사람이 가가지고 자기한테 달라고 하면 좀 이상하겠죠. 그럼 가게 주인이 “추운 날에 왜 왔는데요? 우리가 알아서 가는데...”라고 하겠죠. “손수 이렇게 오면 좀 깎아줄까 싶어서 왔습니다.”라고 하면 말이 안 되죠. 깎는 것 없이 그냥 제 값 받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쪽에서 하나님에게 나아간다고 해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하면 죄 있는 자리에서 우리 죄를 그대로 노출시키는 거죠. 그러면 예수님께서 소경된 자, 절름발이, 병든 자를 낫게 하신다는 그 말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지금껏 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준 것은 죄를 더욱더 죄 되게 하시는 거예요. 죄를 더욱 죄 되게.

 

그럼 여기서 우리가 한 번 생각해봅시다. 같은 범죄를 해도 어떤 사람은 소경되었다, 또 어떤 사람은 눈 벌겋게 뜨고 신나게 당구치고 있고 놀고 있고 골프치고 있다, 그러면 어느 쪽이 더 유리하겠습니까? 그렇게 죄를 지었는데도 불구하고 멀쩡하게 살게 되면 사람들이 그렇게 된 본인이 ‘아이고 나는 죄인이야.’라고 이렇게 하겠어요? 아니면 ‘하나님 보시기에 역시 나는 건강하게 살만한 충분한 자격과 권리가 있어’라고 그렇게 생각을 하겠어요? 후자를 생각하겠죠. 왜? 나는 아무 탈이 없으니까.

 

무슨 일을 해도 안 되고, 밥도 못 먹고, 빌빌 거리면, 이거는 분명히 전생에 무슨 죄가 있다든지, 남은 모르고 하나님만 아시는 죄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징벌을 받는 것이라고 누구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벌 받는다는 것은 그 원인이 오직 죄가 있을 경우에만, 신에게 나쁜 짓을 했을 경우에만 벌이 있고. 그 벌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 인간이 힘들게 사는 것만 벌이라고 보잖아요.

 

근데 어떤 사람은 아주 여유만만하고 집도 몇 채 있고 현찰도 많고 죽을 때까지 다 못 쓰고 애도 공부도 잘하고 가족들끼리 하하 호호 웃고, 늘 이렇게 평화롭고 아주 인자하고 인격 있게 산다. 근데 그 집안을 보고 “이 집안 아주 죄도 많이 지었어. 이거 봐. 이번에 애가 사법고시 수석 된 거 봐. 얼마나 죄를 많이 지었으면. 아이고, 이 집이 얼마나 죄를 많이 지었으면 작년 순수익이 26억이었다던가? 아이고, 참 죄 많이 지었구나.”라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렇게 생각하겠어요? 생각 못하죠. 생각 못한다 이 말이죠.

 

그럼 누가 불리 하느냐 하면 슈퍼맨 아닌 사람들이 불리한 거예요. 계속 자기 속에 죄를 자기가 인생을 행복하게 살고 평안한 그것을 가지고 꾹꾹 누르는 겁니다. 무슨 시루떡처럼. 찐빵이라고 하면 찐빵 안에 팥은 쪼끔 들어있고 밀가루 층이 10센티, 앙꼬 층은 0.2센티, 이렇게 되게 되면 그게 찐빵입니까? 밀가루덩어리죠.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은 의 덩어리에요. 의 덩어리.

 

물론 완벽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어요. 참 인간 부족하지, 특히 교회가면 부족한 사람들이 왜 그리 많은지. “부족합니다. 할렐루야!” 왜 그리 많은지 몰라. 그러나 자체적으로 반성하는 기재, 메커니즘이 가동된다는 말은 죄 지어봐야 반성이 곧장 따라붙기 때문에, 죄 지은 것도 자체적인 반성 때문에 이미 반성한 걸로 되어서 이게 죄가 아니고 하나님 앞에 의로움으로 계속 누적이 되겠죠. 자체적으로 처리하는 거예요. 자체적으로. 자체적으로 처리가 되는 거예요.

 

아무리 죄를 지어도 자체적으로 죄가 의롭게 되는 그런 장치가 자기 안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러면 생각날 때마다 반성하면 되니까. 그 일을 잘 했던 자들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입니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 하면 이거에요.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과 제자들과 함께 있었던 그때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있어서 어느 누구도 예수님모임, 예수님집단이라고 생각했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지금 여기 디도서는 예수님이 하늘나라에 가시고 디도서에 나오는 그레데교인들이 있잖아요. 거기에 사도들이 이 편지를 보내잖아요. 그럴 때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이 함께 있었을 때의 그 예수님의 취지나 뜻이, 이렇게 예수님이 떠나고 난 뒤에 아무 하자가 없이 누수가 되지 않고, 복음의 내용이, 진리의 내용이 그대로 전달되고 있다고 어떻게 보장을 할 수가 있느냐, 라는 취지로 제가 말씀드리는 겁니다.

 

예수님 떠나고 난 뒤에 그 제자들이 뭘 알겠느냐는 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고 싶지 어떤 그레데교회를 믿고 싶지는 않잖아요. 계속해서 예수님 믿고 싶은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 떠나고 난 뒤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겁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예수님하고 함께 있을 때, 예수님이 평소에 사람들과 싸웠던 그 대목들이 있잖아요. 싸웠던 대목.

 

그 싸웠던 대목들 중 제가 일부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죄를 바깥에 드러내는 그런 작업을 주님께서는 계속하시는 거죠. 그 근거를 뭐라고 했느냐 하면 제가 예수님이 세례요한이 물세례를 주는, 죄인들의 죄를 씻으라고 있는, 죄인들 정화하라고 있는 그 물에 예수님이 풍덩 뛰어들었다는 사실. 예수님은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심판을 하시는 분이 아니고, “피고들 이리와! 내가 재판한다.” 이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고, 그 심판하시는 분이 죄인이 되신 거예요.

 

심판하시는 분이 죄인이 되니까, 죄인을 심판하려면 누구도 같이 덤으로 심판을 해야 됩니까? 예수님도 같은 죄인이니까, 예수님을 죄인으로, 같은 기준으로 같이 심판을 해줘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구원자를 누구 손에 죽인다? 사람 손에 의해서 죽여 버리면 결국 구원자를 죽였다는 말은, 오실 메시야를 죽였다는 말은 더 이상 구원자를 통해서 구원되는 그 마지막 기회마저 휑하니 날라 가버리는 거죠.

 

그래서 히브리서에서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가 되고”(히6장4절). 그리고 계속 히브리서 12장에 보면 나오잖아요. 이미 주신 그 피라는 것을 외면한 자는 더는 더 기회가 없다는 거예요. 더는 기회가 없는 거예요. 예수님 피를 줬다는 것은 결정적 기준을 준 거예요. 하나님의 심판의 결정적 기준을 준 거예요.

 

예수님께서 우리 죄인 속에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는 인간들을 바라볼 때에 니 속에 의인 몇 퍼센트 있고 죄인 몇 퍼센트 있고를 묻는 것이 아니고, 몇 퍼센트를 일체 따지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백퍼센트 니는 죄인이야!” 그걸 선언하시는 취지에서 주께서 죄인 되셨잖아요. 주님께서 물세례에 뛰어들지 않으면, “보자~보자~ 착한 사람 있는가 보자~ 내가 심판 할게.” 이래 될 텐데. 만약에 착한 사람이 아무도 없고, 천국 갈 사람은 있어야 되겠고, 그럼 방법은 뭐에요?

 

심판주가 구원받을 사람을 심판주 손에서 새롭게 생산해내야 되죠. 그 생산하는 자리가 어디입니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 때문에 결국 자기 백성을 어디서 건져야 돼요? 의인들 이리오라고 해서 건지는 것이 아니고, 의인은 없으니까 죄인 속에서 예수님께서 자체적으로 죄인을 의인되게 하는 그 작업을 하셔서, 그래서 의인된 자만을 골라가는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어요.

 

마태복음 8장 한 번 봅시다. 2절에,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이래 되어 있죠. 문둥병자입니다. 문둥병은 저주받은 것이죠. 다시 묻습니다. 문둥병만 저주받았습니까? 문둥병 안 걸린 우리도 저주받았습니까? 어떻습니까? 둘 다 저주받았죠. 근데 멀쩡한 사람이 “예수님 저 구원해주세요.”라고 하면서 올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멀쩡한데 왜 와요? 멀쩡한데? 자기가 멀쩡하다고 생각하는데 왜 옵니까?

 

근데 문둥병자는 예수님께 와서 “주께서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했죠. 그러면 주님께서 이 사람을 낫게 한 거예요? 아니면 이 사람의 죄를 예수님이 같이 한 거예요? 어느 쪽입니까? 예수님께서 문둥병자가 되신 거예요? 안 그러면 예수님은 멀쩡한 채 이 사람만 그냥 건지신 거예요? 어떻게 된 겁니까? 예수님이 그냥 건지신 거예요? 예수님이 같이 문둥병자가 되신 거예요? 어떻게 된 겁니까?

 

같이 문둥병자가 됐죠. 그 증거가 뭐냐 하면 4절에,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 하라”라고 하셨죠. 그래서 하나의 문둥병자를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 자신이 그 문둥병자와 같이 되는 겁니다. 문둥병자는 구원받을 수 없어요. 자, 문둥병자를 시커멓게 그려봅시다. 그리고 예수님은 멀쩡합니다. 죄가 없으시니까.

 

근데 예수님께서 죄인 되셨다고 했죠. 문둥병자는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어떤 근거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왜냐하면 자기는 죄 때문에 문둥병자가 됐기 때문에. 문둥병자는 죄에 대한 저주가 합당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같이 문둥병자가 돼버립니다. 같이 문둥병자가 된다는 것이 뭐냐 하면 예수님이 제물이 돼요. 예수님=제물

 

예수님이 제물이 되어서 문둥병자하고 합세하는 겁니다. 합세해서 이 제물이 완성이 되게 되면, 그 제물은 어떤 제물이냐 하면 문둥병자 되었다가 하나님의 자비를 받아서 문둥병을 치료받고 난 뒤에 드리는 제물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8장에서 드리라고 했거든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문둥병자와 같이 했다는 자체가 이거는 예수님께서 그 문둥병자를 불쌍히 여겨서 모든 죄를 용서한 셈이 되죠.

 

제물이니까. 제물. 제물이 뭐냐, 전에는 문둥병자였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따라서 그 과정 속에서 주님의 자비와 긍휼이 개입이 됐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제물이거든요. 근데 예수님께서 제물이 되었다는 말은 이 사람이 죄인인데 의인되는 중간 과정에 누가 개입했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이 개입했다는 말이 돼요. 예수님이 개입했다는 말이.

 

근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문둥병자는 구원될 자격이 없어요. 권리도 없어요. 없는데, 예수님이 친히 그 문둥병자의 제물이 되심으로써 예수님의 그 의지, 그 결심이 그 문둥병자로 하여금 의인되는 결과를 낳은 거예요. 그러면 그 문둥병자는 누구를 증거 하겠습니까? 내가 예수님 찾아갔던 자기 결심을 증거 하겠어요? 아니면 예수님 증거 하겠어요? 예수님을 증거 하겠죠.

 

그게 바로 예수님과 자기백성의 관계가 아닙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서 자기백성을 만드시는 방법이 그 방법이에요. 의인인데 죄인에 합류하는 것. 그 방법이다 이 말이죠. 거기에 대해서 바리새인들은 왜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까? 자기는 멀쩡하고, 귀신들리지 않았다고 자부하고, 그리고 나는 저들과 같지 아니하고, 뭔가 착한 구석이 있기 때문에 병도 안 들고, 사는 것도 괜찮고, 자기보기에 경건하고 거룩하게 보여서 뭐가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그 심판주가 내 속의 죄에 들어올 건덕지가 없기에 나에게는 그 심판주가 아무런 필요가 없는 게 돼버려요. 그러면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주님 없이는 구원이 안 된다는 사람이 구원이 되죠. 주님 없이는. 나의 어떤 결심과 각오, 이런 것 소용이 없는 거예요. “주님이 친히 오시지 않으면 구원될 수 없습니다.” 이게 바로 구원될 수 있는 기준이 되는 겁니다.

 

본분 디도서 3장 9절을 봅시다.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벌써 변론 앞에 어리석다는 말이 붙어 있죠. 그 다음에 “족보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이런 것들은 무익하고 헛되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난 뒤에 제자들이, 사도들이 편지를 보냈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 안에도 역시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편지를 쓰게 하셨기 때문에 복음이 담겨 있겠죠. 그 복음이 담겨 있기 때문에 그 복음과 비교해 볼 때 무익하고 헛된 것들이 이제 드러나는 겁니다. 그러면 복음이 무엇이냐 할 때에, 오늘 본문을 통해서 “목사님 복음이 뭡니까?”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 출발점을 어디다 두느냐 하면 무엇이 복음 앞에서 무익하고 헛된 것이냐를 정리하는 그것부터 출발하게 되면 이제 복음이 무엇인가가 드러날 수 있겠죠.

 

지금까지가 서론입니다. 서론이 이렇게 길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떠나도 디도서라는 이 편지 자체에서 예수님의 뜻이 가득 계속 흐르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뜻이 무익하고 헛되다고 이렇게 이야기했으면, “그래. 이제 우리는 족보이야기 하지 말자.”라고 이렇게 끝날 문제가 아니고, 무익하고 헛되다는 이 말씀은 왜 이들이 족보이야기, 변론, 분쟁, 율법에 대한 다툼을 왜 해야만 했던가를, 우리가 이걸 놓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이걸 놓치면 복음도 같이 놓치는 것이 되는 겁니다. 이 시대에 복음에 대해서 알려면 주께서 이런 것은 무익하고 저런 것은 헛되다는 이 힌트를 우리가 딱 포착해야 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어리석은 사람들이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이야기, 분쟁과 율법에 대해서 다투는 이유가 뭐냐 하면 사람이 행동한다든지 말을 할 때는 이런 이유 때문에 그래요.

 

어떤 이유냐 하면 ‘~가 증명하려고 한다.’ 무엇에 대해서 자기 자신을 증명하려고 하는 겁니다. 족보, 왜 족보이야기 합니까? 지금 족보이야기를 하는 당사자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뭔가 증명하려고 하는 거예요. 이것은 하나님보시기에 합당한 족보라는 거예요. 율법해석도 마찬가지고. 증명이 제대로 됐다면 자기는 율법에 대해서, 족보에 대해서 자기가 현재 제대로 된 해석을 하고 있다고 증명이 돼버리면 그 순간 자기는 죄인이 됩니까? 의인이 됩니까? 의인되겠죠.

 

우리가 법을 위반한다는 것은 우리가 뭔가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위반하잖아요. 모르기 때문에. 자, 도적질하지 마라는 것이 십계명에 나오죠. 도적질 하지 말라는 것이 십계명에 나온다 말이죠. 그러면 도적질 하지 마라를 아홉 살, 열 살, 열두 살, 스무 살, 서른 살, 마흔 살에게 도적질 하지 마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전부 다 설문조사를 해보자 이 말입니다.

 

설문 조사를 하게 되면 남의 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도적질이라고 했겠죠. 남의 것을 내 것으로. 그러면 왜 남의 것을 내 것으로 삼고자 하는 겁니까? 그게 남의 것이 탐이 나서 그렇죠. 전에 언제 십계명 강의할 때 그랬거든요. 십계명이 십계명이잖아요. 근데 안에 들어가 보면 전부 다 관으로 다 연결이 되어 있어요. 전부 다 연결이 되어 있다는 말이죠. 12345678910 앞에 표면적으로는 문장으로 열 개가 구분이 되어 있지만, 안에 들어가 보면 전부 다 서로서로가 교차되어 있고 연결되게 되어 있어요. 2는 4로, 9는 10으로, 4는 1로... 이런 식으로 전부 다 연결되어 있어요.

 

이게 골로새서 3장에 보면 나오는데, 탐심, 욕심이 잉태하여 뭘 낳습니까? 죄를 낳죠. 근데 십계명에서 어기면 뭐가 된다? 죄가 되죠. 십계명에서 죄를 낳는 것이나 욕심이 잉태해서 죄를 낳는 것이나. 결국은 이 십계명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십계명이 오기 전에 인간들의 존재는 처음부터 자기가 자기 자신을 몰라요. 자꾸 인간은 존재하면서 자기를 증명하는 식으로, 자기가 정당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식으로 인간은 존재하고 활동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인간들입니다. 인간들은.

 

자꾸 증명하고 싶을 때 뭘 증명하느냐 하면은, 자기가 살아왔다는 것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그렇게 살만한 권리와 권한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거예요. 그렇게 증명하고 싶은데, 근데 남들에게 안 먹히니까 성경가지고 증명하고 족보가지고 증명하는 겁니다. 특히 유대인들이 족보가지고 증명할 때는 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 자손 가운데 할례를 행해버리면 이거는 창세기 17장에 의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민족이 돼요. 거룩한 민족이냐, 아니냐는 유대민족에게는 뭐에 달려있다? 할례를 행하느냐, 행하지 않느냐에 달려있다 이 말이죠.

 

마찬가지로 십계명에서 도둑질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이거는 뭐 도둑질하지 말라는 경우가 나이에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수천가지가 넘죠. 담을 타넘고 넘어가서 남의 집 물건을 가져오는 것. 그걸 도둑질이라고 한다면, 그 집에 감나무가 우리 집에 넘어왔을 때 감 따는 것은 도둑질이 안 되는 거예요.

 

왜? 감나무가 어디 내 공간을 차지해! 오성과 한음이라는 책에 있잖아요. 어린 이 항복이가 대감 집에 가서 “우리 집 감을 왜 따먹었습니까?” “넘어와서 따먹었다.”라고 하니까, 어린 이 항복이가 창호지 문에 주먹을 팍 집어넣고 “이 주먹은 대감님 주먹입니까? 내 주먹입니까?”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대감이 하는 말이 “내 주먹이겠냐? 니 주먹이지.”라고 하죠. 선을 넘었어도 주먹이 내 주먹이잖아요. “이게 대감님 주먹입니까? 내 주먹입니다. 마찬가지로 감이 넘어왔어도 이거는 우리 집 감이지 대감님 감이 아닙니다.” 어린 아이가 하여튼 싸가지 없어.

 

그러면 탐심까지 더 수준을 높여봅시다. 추상적으로 해봅시다. 누구를 탐을 내는 것. 탐은 냈지만 도둑질은 안 했다. 이게 죕니까? 죄 아닙니까? 자, 그러면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죠. 죄가 어디서 나온다? 욕심에서 나왔죠. 욕심에서. 그러면 욕심이 나오는 것은 마음이 부패한 거잖아요. 그러면 마음이 부패한데 십계명을 줬다. 그러면 1계명, 8계명, 7계명은 지켰는데 5계명 이건 약간 점수가 안 나오고, 9계명 이건 일등급이 나올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안 되는 거예요?

 

마음 자체가 썩었는데 1계명을 주던 2계명을 주던 다 못 지키고, 3계명을 줘도 못 지키고 10계명을 줘도 못 지켜요. 자칭 자기가 의인이라고 여겼던 다윗이 간음하고 살인하고 난 뒤에 그 사람 땡 잡았어요. 무슨 수로 자기 자신을 알겠습니까? 평생을 살아도 내가 내 자신에 대해서 모를 거란 말입니다. 근데 하나님께서 간음하게 하고 살인하게 하니까 성령에 의해서 본인이 본인에 대해서 알았어요.

 

본인이 뭡니까? 본인은 뭐예요? 모친의 죄 중에서 잉태된 죄인이잖아요. 죄인이니까 번제와 속죄제를 지키라는 것도, 죄인에게 그 법이 주어졌다는 말은 죄인이 번제와 속죄제를 드린다고 용서받습니까? 용서받지 못합니까? 용서 받아요? 못 받아요? 시편에 보면 번제와 속죄제를 드리라고 했어요? 하지 말라고 했어요? 하나님이 원한다고 했습니까? 원치 않는다고 했습니까? 시편 51편에서 원치 않는다고 했죠. 16절,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왜 줘놓고 원치 않는다는 거예요? 다윗이 안 거예요. 이미 우리의 심령이 부패한 가운데 번제를 주나 속죄제를 주나 십계명을 주나, 그거는 전혀 내가 의인이 되는데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는 겁니다. 그러면 나는 어느 자리가 내 자리입니까? 주께서 원하는 것은 번제도 속죄제도 아니고 십계명 지키는 것도 아니고 율법을 지키는 것도 아니에요. 주께서 원하는 것은 심령인데, 어떤 심령이죠? 상한 심령이죠. 17절, “주께서 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상한 심령. 유통기한 지난 것, 푸른곰팡이가 핀 것, 얼룩덜룩 푸른곰팡이가 핀 것.

 

예수를 믿으라고 해도 못 믿어요. 푸른곰팡이 핀 이것으로 무슨 예수를 믿어요? 삼위일체이야기해도 소용이 없고 교회 다녀도 소용이 없고. 그것을 제가 지난 낮에 이야기했잖아요. 잠자는 자여 깨어라 죽은 자여 살아나라고 했죠. 이미 우리는 죽은 자에요. 죽은 자는 외부에서 건드려줘야 한다고 했죠. 자기가 자기를 건드려봐야, 내가 깼다고 하면 그건 꿈꾸는 거예요. 전혀 현실성이 없는, 혼자서 꿈을 꾼 겁니다.

 

정말 깨어났다면 내가 죽어 마땅하며, 내가 무슨 말씀을 지켜도 내 죄가 나올 뿐이지, 결코 나의 정당성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사하면서, 이게 중요해요. 고마워하면서, 내가 무슨 수로 내 자신을 알겠느냐 하고 감격하면서 찬미할 때, 그게 바로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집안이 엉망진창이 되고, 걷잡을 수없이 나락에 떨어질 때에 “주여 어찌합니까?”라고 누구나 그렇게 할 가능성이 많아요. 자기 힘으로 하다하다 안 되니까 하나님께 비는 것. 그런데 자기가 건강하고 수입이 많고 아무리 뭘 해도 너무 행복해. 그럴 때 “주여 이렇게 살아도 됩니까?”라고 탄식하는 사람은 없어요. 그러니까 그때 감사할 때는 진정한 감사가 아니에요.

 

감사는 뭘 경유해야 됩니까? 죄를 경유해야 돼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죄인이 되셨기 때문에. 의인이 죄인 되는 그 방향을 같이 함유하고 있어야 돼요. 그게 안에 있는 것을 나타내 보여줘야 그게 성도에요. 의인인데 죄인된 것, 그 모습이 그 안에 그대로 노출 될 때 그게 성도죠.

 

“뭐 착하게 사니까 복을 안 받으려고 해도 복이 오는데 뭐 어떡해?” 본인이 받을만한 자격이 있다고 우기는 거예요. 왜? 너무 모든 일에, 매사에 잘 되니까. 그렇게 복받을만한 어떤 짓거리를 했기 때문에 복 받았다는 거예요. 그럼 뭐가 없어져요? 주님이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죄 속에 합류하신 그 대목이 그 사람 속에는 없는 거예요. 없으면 뭐가 돼요? 지옥 가죠. 뭐. 살아있을 때 호강이나 실컷 해라. 죽으면 니는 그걸로 불구덩이다 이 말이죠.

 

그런데 목사님, 그럼 가정이 어렵고 약간 어려워도 주님께 안 찾아오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건 아직도 숨쉴만하고 견딜만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에어포켓이 아직도 있다고 보는 겁니다. 낚싯배 밑에서 숨 쉴 공간이 있기 때문에 아직도 자기는 이렇게 죽을 만큼의 죄인은 아니라고 본 거예요. 그러니까 복음을 안 듣죠. 기어이 살아보겠다는 거예요.

 

왜? 살아있는 그것이 나중에 내가 살게 됐을 때 나는 살만해서 살았다는 자기증명이기 때문에. 자기존재증명이거든요. 인간은 자꾸 증명하려고 해요. 근데 그 증명하는 것이 복음 앞에서, 9절에 뭐라고 했습니까? 다 무익하고 헛되다 이 말입니다. 사람이 족보를 거론한다는 것, 뭔가 변론한다는 것, 율법에 대해서 다툼을 한다는 것, 그걸 한다는 것은 뭐냐 하면 결국은 나는 아직도 이만큼 복받을만한 여지는 있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알리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유대인들,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주동자 짓을 한 이유를 이제 아시겠죠. 예수님 하나 살리든 죽이든 그게 문제가 아니고, 예수님 때문에 파급되는 그 영향력이 뭐냐 하면, 이렇게 착한 내가 예수님의 말에 의하면 뭐가 돼요? 졸지에 뭐가 됩니까? 세리와 창기보다 더 못한 인간이 된다고요. 아니, 병든 자나 고쳐주고 배고픈 사람에게 빵이나 주면 손 안 댑니다.

 

세상에 자기가 죄인인 이유를 알려달라고 교회에 온 사람이 어디에 있어요? 자기가 챙길 것 챙기겠다고, 전능한 신에게 혜택 입겠다고 다 교회에 오잖아요. 그럴 때는 목사가 “왜 왔느냐? 육을 위해서 왔느냐?” 라고 고함을 쳐야 돼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냐? 이 교회는 떡을 먹고 배부른 교인도 없겠지만.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냐, 이 말이죠.

 

사람들에게 “이러면 삽니다. 이러면 배부르게 삽니다. 이러면 부자 됩니다. 이러면 행복합니다.”라고 하는 것은 마치 뭐와 같은가 하면 “당신들은 마땅히 이 땅에서 오래오래 살 자격이 있습니다.” 이게 돼버려요. 그러면 그 하나님은 내가 상상한 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이에요. 죄인의 자리에 찾아오신 그 심판주가 아닙니다. 인간들이 만들어낸, 지어낸 그 하나님이에요.

 

그 당시 예수님을 죽였던 유대인들, 그 유대인들에게 어떤 사상이 있느냐, 그걸 우리가 한번 생각을 해봐야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죽였다고 생각을 하는데, 도대체 그들의 사고방식은 뭐였는가 하는 겁니다. 특히 사두개인의 경우에는 바리새인과 차이점이 뭐냐 하면 사두개인은 모세오경만 주장하고 바리새인은 다른 성경을 인정한다고 하거든요. 사두개인의 입장에서는 모세오경이에요.

 

우리는 모세오경이라고 하지만 그들 말로는 이걸 토라라고 해요. 토라. 그들은 일종의 말씀신비주의라고 할 수 있어요. 하나님께서 모세오경, 그 말씀에 의해서 세상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래서 이 세상은 모세오경의 원칙만 계속해서 지금도 가동되고 있다고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얼른 들으면 그게 틀린 말은 아니죠. 세상 모든 것은 주의 말씀으로 된 거죠. 말씀으로 되었기 때문에 말씀의 자체적인 능력으로 이 세상은 계속해서 움직인다. 그거는 뭐 시편에도 나와 있고 이사야에도 나와 있고.

 

“세상의 모든 부귀와 영화는 풀의 꽃 같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사40:8). 맞잖아요. 그 다음이 문제에요. 말씀이 구체화 된 것이 어떤 것이냐 하는 겁니다. 말씀이 이렇게 역사한다. 오케이. 그럼 그 말씀이 지상에 남긴 것이 뭐냐고 할 때, 그들은 이스라엘 역사를 들고 나옵니다. 그게 족보에요. 모든 족보가 우연이 아니라는 거죠. 그러니까 족보를 거론하고 율법을 받았다는 겁니다. 율법. 토라. 토라가 율법이거든요.

 

모세가 직접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율법을 받고 그 다음에 그 율법에 의해서 만들어진 민족, 백성들이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거예요. 그럼 이스라엘 민족이 역사적으로 뭐를 계속해서 뒤로 표출하겠어요? 율법의 정신, 말씀의 정신을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계속해서 나타내왔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역사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그것이 유대교의 사상입니다.

 

그러면 너희 나라 이스라엘이 왜 망했느냐고 하면, 이거는 망한 것이 아니고 징계라는 거죠. “이놈아! 똑바로 하란 말이야. 정신 차렸어?” “예. 정신 차렸습니다.” “정신 차렸으니 이제는 옛날 조상들같이 나쁜 짓 안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메시야를 보내주마.” 유대인에게 메시야는 하나님이 아니에요. 사람으로 와요. 사람으로 와서 그 목표되는 목표에 도달점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다윗나라의 재현입니다. 다윗나라.

 

다윗 당시에 이스라엘 수도가 어디였죠? 다윗왕국 당시 유대나라 수도가? 예루살렘이죠. 예루살렘. 그럼 예루살렘을 수도로 잡고 거기다가 성전 다시 회복하고 거기서 제사를 다시 드리게 되면, 그거는 메시야가 와서 그렇게 하게 하시든지, 안 그러면 메시야가 오기 위해서 그렇게 하게 되면, 그러면 이 세상은 끝이 되는 거죠. 이스라엘 역사가 최종지점에 도달하는 것이 곧 천지를 만드신 말씀이 최종상태에 도달한 것과 같이 보는 거예요.

 

그러니 이스라엘 역사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족보가 얼마나 중요해요? 하나님의 말씀과 연관성을 지음으로써, “우리의 이 족보는 말씀에 의해서 만들어진 족보기 때문에 우리를 건드리면 하나님을 건드린 것이다.”라고 대외적으로 말씀의 권위를 역사적 상황가지고 충분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며칠 전에 트럼프 대통령이 이스라엘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확정했잖아요.

 

지금 예루살렘은 동쪽, 서쪽 전부 다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어요. 그냥 봐주고 있는 거예요. 팔레스타인은 힘이 없어요. 국제적인 압력에 의해서 그냥 공통수도가 되어야 된다는 것뿐이지, 실제적인 점유자는 이스라엘이에요. 그래서 트럼프 대통령이 이스라엘의 수도라고 하나로 정한 거예요. 점유자가 수도를 가져야지 점유하지도 못한, 종속된 사람들의 수도가 왜 되냐, 이래가지고 하게 한 겁니다. 이스라엘은 아주 좋아하죠.

 

그래서 유대인들은 말씀이 그렇게 천지를 만들었기 때문에 성스러운 곳과 속된 곳의 구역이 사실은 따로 없어요. 모든 직업이나 일상생활 자체가 거룩해야 돼요.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 주께서 주신 그 토라, 말씀이 그때 그 당시의 생활상이기 때문에 점점 더 이스라엘 역사가 복잡해지게 되면 말씀을 계속 만들 필요가 있겠어요? 없겠어요? 계속해서 세부세칙이 만들어지겠죠. 그게 율법의 온전인 거예요. 이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왜냐하면 일상에서 거룩을 표현해야 되니까.

 

10분 쉽시다.
 이미아(IP:122.♡.178.64) 18-01-09 15:34 
서울의존강의20171208b 디도서3장9절(자기 증명)-이 근호 목사

 

유대인에게 있어서 종교적 영역과 비종교적 영역이 구분되지 않습니다. 매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죠. 바리새인들의 사상도 그거에요. 말씀을 실천하자. 그래서 자기들이 모범을 보이죠. 어떻게 모범을 보이느냐 하면 인간의 행위가 하나님의 의지와 일치하는 방법이 토라에게 있다고 본 겁니다.

 

내가 결심한 것이 하나님의 결심이고, 내 행위가 하나님의 행위가 되고, 내 의지가 하나님의 의지가 되는, 그렇게 일치될 때 그들은 자기들의 사회가 신성화, 거룩한 사회가 된다고 이렇게 본 겁니다. 사탄이 이야기한 “신처럼 되리라” 뭐, 이걸 그대로 구체화 한 거죠.

 

그래서 그들은 이 신성한 작업을 위해서 무엇을 강요하느냐 하면 ‘식탁’을 강요해요. ‘밥상머리’ 밥상머리,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인데, 식탁에서 하루에 세 번씩 기도, 또는 예배를 드린다고 보면 돼요. 아침, 점심, 저녁으로. 정통유대인들 사이에서는 그렇게 해서, 뭐 그냥 아침, 점심, 저녁이라기보다 온종일 하나님의 뜻이 임하기를. 그렇게 해서 자기들은 하나님 일의 대행자로서 자신의 일이 곧 하나님의 일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되려면, 성경에는 그것이 일일이 구체적으로 안 나와 있잖아요. 안 나와 있으니까, 토라를 확대시킵니다. 모세오경을 성문토라라고 해요. 글로 쓰여 있는 것, 성문 토라. 그리고 그 다음에 그들은 거기다가 구전 토라를 집어넣습니다. 구전토라라고 하는 것은 성문 토라를 해석하기 위해서 계속 역사적으로 만들어내는 겁니다.

 

왜냐하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스라엘 역사를 누가 만든 겁니까?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만든 역사기 때문에, 이 성문 토라의 내용을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나라에 역사라는 것을 만들어줬으니까. 이 역사를 통해서 알게 된 그 내용, 그 지혜를 성문 토라의 해석법으로 계속 첨가하고 추가해야 된다는 거죠. 이 해석을 랍비들이 하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해서도 그 랍비 중에 한 사람이라고 본 거예요. 랍비여! 제자들도 마찬가지고. 그 사람들도 랍비여! 라고 했죠. 랍비여! 라고 하니까 뭐는 아니라는 겁니까? 최종적인 메시야는 아니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인자를 누구라고 하더냐? 선지자들 중에 한 사람이라고 합디다. 보통 랍비라고 하죠.

 

그래서 산상설교를 다 하고 난 뒤에 사람들이 그걸 듣고 놀라죠. 그 권세에. 가르치는 것이 기존에 가르치는 것하고 좀 다르다. 이 말입니다. 제가 많이 듣던 소리죠. 기존에 가르치는 것하고 다르다. 이래 되는 거예요. 그럼 기존에 어떻게 가르쳤습니까? 오늘 본문에 의하면 헛되고 무익한 것을 가르친 거예요. 헛되고 무익한 것을. 하나님의 행위를 자기 행위로 증명하려고 한 겁니다. 그렇게 증명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더 치밀하게 율법을 만들어내고 또 만들어내고 그렇게 하죠.

 

그런데 사람들의 문제는 이렇게 자기들의 행위와 하나님의 행위로 같이 보는 것에 있어서 뭐가 문제냐 하면, 그들이 이 짓을 한다는 겁니다. 생략한다. 생략. 생략하는 이유가 자기가 어떤 행동을 하잖아요. 그릇을 씻는다. 행동하면서 그냥 행동하는 게 아니고 이 행동으로 인해 생긴 어떤 결과를 상상하겠죠. 물로 깨끗이 씻으니까 우리 가정은 거룩한 가정이 되겠다. 성경, 토라에 의하면 말씀을 지킨 자에게 뭐가 주어집니까? 복이 주어지죠. 이 복을 은근히 기대하겠죠.

 

그럼 뭐가 생략되었다는 말입니까? 그들이 상상한 여기에 그들은 일방적으로 생략해버렸어요. 왜 생략했느냐 하면, 이런 행동을 하기 위해서 주어진 여러 가지 변수들이 있잖아요. 변수들. 예를 들면 어느 교회에서 가스 배달하는 어느 집사가 예배시간에 늦었다. 그럼 목사님이 “예배시간이 11시인데 왜 자꾸 11시 10분에 오십니까?” “가스 배달하는데 오늘따라 차가 밀려서 늦었습니다.”라고 하면 목사는 “앞으로 일찍 오세요.”라고 하겠죠.

 

자, 그럼 11시 예배시간에 참석했다고 한다면, 뭘 상상하는 겁니까? 11시 참석했으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 것이 되고, 지켰으니까 복이 오겠죠. 근데 11시 10분에 오면 어긴 것이 되니까 어긴 자에게는 무엇이 상상이 됩니까? 재수 없는 저주, 징벌이 또 상상이 되겠죠. 근데 뭘 생략했다는 말입니까? 왜 하나님께서 하필이면 차가 밀리게 했는지, 이런 것들은 다 생략해버렸죠.

 

모든 발걸음, 심지어 가스가 어디서 오느냐 하면 가스가 중동지하에서, 사막지하에서 오잖아요. 그러면 뭘 생략한 거예요? 땅속에 있는 가스를 파내서 운반하는 파이프라인, 그 파이프라인을 조립하는 그 조립법까지 다 생략한 거죠. 그렇죠.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여러분들 아시겠습니까?

 

지금 그 사람이 가스 배달로 생계를 이어가는데, 가스 배달로 생계를 하려면 가스가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가스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가스는 중동사막 지하에 있거나 안 그러면 우즈베키스탄 지하에 가스가 있다 이 말이죠. 시베리아에도 가스가 있잖아요. 있으면 뭐합니까? 그걸 미국의 금융투자회사에서 거기에 투자를 해가지고, 기계 돌려가지고, 어느 구멍에 있는지 모르니까 백군데 파다가 하나 나오면 횡재한 거잖아요.

 

그 백 군데를 팔 때, 그것을 팔 때 목사는 돈 얼마 냈습니까? 가스 배달하는 집사가 예배시간에 늦게 온다고 닦달하는 그 목사는 가스 뽑아내는데 얼마 투자했어요? 투자했어요? 투자한적 없죠. “내가 투자해서 가스 뽑아냈는데 왜 예배시간에 늦게 오느냐?” 뭐 이래야 생략이 되도 중간에 약간 덜 생략이 되잖아요. 근데 무조건 예배시간에 늦게 왔다고 하잖아요. 그 가스 배달 때문에. 그럼 그 가스 배달하는데 자기가 뭐 보태준 것 있어요? 가스를 수입했다. 대리점에 가스가 있다. 자기가 가스통 메고 3층까지 올라가본 적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법이라는 것이 뭐냐 전부다 생략한 거예요. 생략. 어디까지 생략했느냐 하면 내가 이렇게 했으니까 내가 상상한 데까지 그 중간은 다 생략한 거예요. 개구리가 뛰는 것 같아요. 펄쩍뛰는 거예요. 펄쩍. 펄쩍뛰어서 이정도 왔으니까 벌은 안 받겠지, 예배시간 11시 참석했으니까 벌은 안 받겠지, 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가스 배달하는 집사가 정말 11시에 예배참석을 해서, “목사님. 예배시간 1분전에 왔어요.”라고 하니까 목사가 화를 내면서 “오늘 주차담당이잖아요. 10시 30분까지 와야죠.” 가스 배달하는 집사는 생략했어요. 지난주에 하도 닦달을 해서 11시까지 참석해야 된다는 거기에 집중하다보니 뭘 놓쳤느냐 하면 주차당번이라 10시 30분까지 와야 된다는 그걸 또 놓쳐버렸어요.

 

그러면 도대체 이 법이라는 것은, 결국 법을 제정하고 구전 토라와 성문 토라를 자꾸 만들어내는 이유가 뭐냐 하면 될 수 있는 대로 소경이 안 되고, 절름발이 안 되고, 문둥병자 안 되고, 창기 안 되고, 저주 안 받고, 지옥 안 가려고 지금 몸부림치는 거죠. 지옥 안 가려고 몸부림친다는 것은, 잘만하면 지옥 안 갈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다고 본인들이 스스로 상상하고 있는 거예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사람들이 지옥 안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 것 같으면 주님께서는 물세례에 뛰어들지 않았습니다. “보자~보자~ 누가누가 잘하나 누가누가 착한가 한 번 보자~” 그냥 지켜보기만 했을 거예요. 근데 주님께서 친히 여기에, 죄 속에 들어왔다는 말은, 너의 일상에 어떤 처참하고 망가지는 일들이 있다 할지라도 그거는 원래 너한테 일어나야 될 합당한 조치라는 거예요.

 

큰 낭패, 엄청난 큰 낭패가 주어진다 할지라도, 니가 상상한 그것보다 더 심각하고, 모든 것이 처참하게 바닥을 쳤던 그러한 악한 사태라 할지라도 너는 거기에 대해서 입을 열 자격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구약에 나오는 욥기라는 거예요. 욥기. 그리고 욥기의 결론에 도달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솔로몬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욥의 사정과 솔로몬의 사정이 반대잖아요. 욥은 살면서 다 빼앗겼죠. 솔로몬은 모든 걸 누렸습니다. 모든 것이 금으로 치장된 마당에서 여자가 천명이 넘어요. 그것도 남방여왕이 찾아올 정도로. 노는 레벨이 달라요. 여왕이 찾아오는 거예요. 여왕이. 요새 같으면 영국 수상이 찾아오는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그랬는데 솔로몬 말년에 한 이야기가 뭡니까?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오늘 본문 디도서 3장 9절의 이야기에요.

 

모든 것이 무익하고 모든 것이 헛되다. 이게 결국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인간의 자기존재 증명은 할 필요도 없는 것을 하고 있다는 거예요. 이걸 누가 배후에서 시키겠어요? 내 행위가 주님의 행위와 일치된다고 우기고 싶도록 누가 배후에서 장난질을 칩니까? 누가 부추깁니까? 사탄이죠. 악마가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악마는 일종의 우상 같은 거라서, 구약에서 헛되다고 하는 거예요. 우상을 헛되다고 하는 거예요. 악마도 헛되고. 유다서에 나오죠. “저희는 기탄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희 애찬의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나무요 자기의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유1장12-13절). 그게 바로 악마다 이 말입니다.

 

잡초. 나훈아가 부른 잡초. 그렇게 잡초 같은 거예요. 풀의 꽃같이 아무것도 아니에요. 잠시 살다가 늙으면 뿌리 채 뽑히잖아요. 뽑히면 다른 사람이 내가 살던 자리에 또 살아요. 나는 이미 뽑혀서 없어지고 광풍에 날아가 버려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 존재는 처음부터 잡초였어요. 갑자기 오늘 제목을 잡초라고 유혹을 받네.

 

인간은 처음부터 잡초로 태어나서 잡초로 살다가 잡초로 가는 겁니다. 헛되고 무익한 거예요. 신자도 마찬가지에요. 헛되고 무익해요. 신자 인생이라고 뭐 오래가는 것이 아닙니다. 버틸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신자라고 해서 몸 건강하고 부자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 잡초에요.

 

그러나 신자는 차이점이 뭐냐 하면 우리가 그래야 마땅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죠. 그게 당연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에요. 남한테 우사당하고 수치당하고 놀림당하고 욕 얻어먹고, 당연하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자살은 하지 마세요. 신자가. 당연한데 왜 자살해요. 살아있으면서 그 수치스러움을 계속 보여줘야지. 지가 뭐 잘났다고 자살합니까? 왜 삐져서 자살합니까? “내가 이런 수모를 당하다니?!” “니 원래 그래. 원래.”

 

아니, 다윗이 간음하고 살인한 뒤에 자살했습니까? 자살했어요? 아니면 감사했습니까? 그런 짓해서 복 받았어요? 저주받았어요? 노골적으로 이야기해서. 복 받았기 때문에 간음한 그 여인 밧세바에게서 누가 태어났어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잖아요(삼하12장 24-25절). 그 짓해서 사랑받았어요. 그 짓해서. 그게 바로 우리가 생각하는 방향과 완전히 반대방향이에요. 겉에 있는 것을 속으로, 속에 있는 것을 겉으로 드러내는 겁니다.

 

주님의 강제력에 의해서 다윗은 속에 들어있는 것이 겉으로 나왔고, 나오는 그 과정에서 간음했고 살인했던 거예요. 겉으로 나오게 된 사람, 그게 바로 복된 사람이에요. 자기 주제를 아니까. 그런 사람이 또 있죠. 바로 사울.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였잖아요. 스데반 죽일 때 죽이라고 선동했고. 그런데 그 사람은 나중에 어떻게 되었어요? 복 받았죠. 복 받고 난 뒤에 사도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자랑삼아서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하잖아요. 그리고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다시 말해서 내가 헛되고 무익한 이 율법을 지켰다는 것은 이제는 뭐다? 전부 다 배설물이에요. 배설물. 그러니까 성령이 임하면 계속해서 우리 몸에서 뭐가 나오느냐, 우리 마음에서 ‘내가 착하다 내가 의롭다. 나는 수치 안 당해야 해. 나는 칭찬받아야 해.’라는 이런 배설물들이 계속 나와야 된다 이 말입니다. 왜냐하면 옛날에 그런 더러운 똥오줌에 근거해서 복 달라고 손을 내밀었던 그 생활들이 배설물로 나오게 했던 그 육이에요. 육이 녹아서 배설물이 된 겁니다. 근육이 녹아서. 뭐 어지간하면 다 녹았을 텐데 계속 나오네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아까 이야기했던 것처럼 사람들은 자꾸 생략하죠. 자기 상상을 자꾸 생략하는데, 주님께서는 생략을 하는 것이 아니고 제거를 해버려요. 제거하면 우리가 어떻게 된다? 제거하면 죽어야 되지 않습니까? 제거하면 죽어야 되죠. 근데 제거해도 살아있네요. 사도바울은 날마다 죽는다고 하면서 계속 살아 있잖아요. 지금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에요.

 

나는 날마다 죽으면 죽은 자가 무슨 말이 필요합니까? 근데 날마다 죽는다고 말은 하면서도 이게 계속해서 펄펄하게 살아있지 않습니까? 그럴 때 “당신은 죽었다고 하면서 왜 살아있습니까?”라고 물으면 사도바울은 뭐라고 이야기를 해요? “니 눈에는 지금 내가 살아있는 걸로 보이냐?” 나한테는 누가 살아 있다? 나는 날마다 죽고 내 안에 누가 살아있다? 예수님이 살아있는 거예요. 살아있는 예수님이 나를 죽이는 작업을 계속하는 겁니다. 나를 죽이는 방식으로 예수님은 자기가 살아있음을 우리에게 드러내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살아있다는 말은 결국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준 것만을 우리가 증거 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준 것만을 우리가 증거 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준 것에 의해서 우리의 옛날 육적인 고집이 계속 방해를 놓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준 것이 뭐냐 하면 아까도 이야기했죠. 주님이 우리같이 죄인 된 것. 우리가 문둥병자인데 주님께서 문둥병자의 제물이 되어 주셨다는 그 사실을 주신 거예요. 피죠. 피. 십자가 피.

 

피인데, 우리의 평소 모든 행동이, 육의 입장에서 본성이 뭡니까? 뭘 가려요? 자기의 잘났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하죠. 자기의 잘났다는 것을 증명하고 예수님은 니가 못난 놈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그럼 두 증명이 상충되잖아요. 그럼 성령께서 뭘 바깥으로 내보냅니까? “내가 이렇게 잘난 맛에 살았다가 완전히 개피(완전히 얻어터짐)봤습니다.”라는 그 점을 자꾸 바깥에 내놓는 거예요.

 

그 말은 그 안에 뭐가 들어있다는 말입니까? 그 안에 내 잘남을 쫓아내는 힘이 들어있다 이 말이죠. 그 힘이 뭐냐, “니는 오직 나의 피의 공로야”라는 원리가 계속 가동되고 있는 겁니다. 원리가. 자, 다 같이 배설물로 나가는 원리가 뭐냐 하면 자기존재 증명을 하고 싶어서 내가 이만큼 산 것은 누구 덕이다? 내가 열심히 산 덕이고, 내가 열심히 노력한 덕이고, 그것이 주님 앞에서 착하다고 인정받아서, 주께서 복을 주셔서 살아있다는 것.

 

그러니까 어쨌든 간에 나는 착해서 복을 받는다는 거예요. 결국은. 내가 의로워서, 의로운 만큼 이런 의로운 상이 주어진다는 것을 계속해서 증명하고 싶은 거예요. 그런 것 때문에 교회에 가잖아요. 그런데 반대로 주님은 뭐라고 합니까? 니가 살아있는 것은 니 덕이 아니고, 사도바울 같은 경우에 예수님께서 너에게 계속 복음적인 일을 벌인 결과로 니가 살아있다는 거예요. 말이 참 어렵죠.

 

쉽게 하기 위해서, 흔히 아는 노래가사 하나 적어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적어보겠습니다. 그대를 만나기 위해 많은 이별을 했는지 몰라~♬ 김민우가 불렀던 <사랑일뿐야>라는 노래입니다. 자, 이 대목을 한 번 보세요. 지금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그대를 만난 게 지금 현재지점이죠. 현재. 현재지점에 와서 그동안 많은 이별을 한 것이 누굴 위함이다? 지금의 그대를 만나기 위해서 많은 선택적인 이별을 당했다는 거예요. 이게 지금 주부노래교실 같으면, 다 같이 따라 해보라고 하겠는데 제가 지금 참습니다.

 

여기 그대에다가 예수님을 집어넣으면 얼마든지 찬송가처럼 되죠. 억지다 그죠. 내가 봐도 억지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많은 이별을 했는지 몰라. 이별한 사람이 가족들이죠. 가족들. 친구들. 예수님의 피를 만나기 위해서 많은 이별을 했는지 몰라. 이런다고 이 노래가 찬송가 되지는 않습니다. 이런 억지는 하지 마세요. 누가 봐도 억지에요. 노래제목도 <사랑일뿐야>에요. 오직 남은 것은 사랑뿐이다 이 말입니다.

 

자, 이게 굉장히 난해한 거예요. 사도바울 같은 경우에는 자기의 육적인 것을 배설물로 내보냈잖아요. 그럼 내보냈다는 말은 안에 뭐가 가동이 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동이 되고 있죠. 그러면 이 가상내용대로 라면 이 사람이 이별을 하고 싶어서 이별을 했습니까? 이별도 한 두 번 하게 아니라 많은 이별을 했잖아요. 이별을 할 때마다 얼마나... 여자한테 명품가방 사주고, 놀러가서 음식 값 다 내고, 그런 것 할 때마다 얼마나 가슴이 아팠습니까? 그럴 때마다 하나님 앞에 얼마나 원망했겠어요? ‘내가 이렇게 했는데, 사랑한다는 것이 이렇게 힘드나? 결혼하는 것이 이렇게 힘드나?’라고 하면서 얼마나 했겠습니까?

 

그런데 정말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을 때, 아! 이 여자를 만나기 위해서 그동안 자기가 예상을 못한 거죠. 그러니까 주께서 하신 일은 뭘 못한다? 예상을 하지 못하고, 일이 터지고 난 뒤에 뒤돌아보고 소급해보니까 주께서 좁은 길, 영생의 길을 가게 하기 위해서 그동안 가슴앓이 했던 숱한 세월을 소모해야 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죠. 물론 이 여자가 최후의 여자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이 여자하고 또 이별하고 그 다음 여자를 만났을 때 이 노래를 또 불러요. 사랑은 항상 마지막 사랑밖에 없어요. 지나 간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이 아니었다는 그것도 어디서 들은 것 같은데.

 

항상 마지막 사랑이 사랑인데, 그 마지막 사랑은 항상 현재에 본인이 그렇게 해석하는 거예요. 자, 이렇게 될 때, 이런 해석이 가능하려면 그것은 뭐냐 하면 주님과 동행할 수밖에 없어요. 이 구원이라는 것을 내가 챙기는 것이 아닙니다. 동행하신 분의 몫이에요. 그분의 숙제고 그분의 과제입니다. 우리는 그분 곁에서 덤으로 얻을 수밖에 없어요. 천국가기 위해서.

 

여러분 지난 온 세월을 한 번 보세요. 지난 세월이 오늘의 삶과 복음을 위해서 그동안 반드시 주께서는 배설물을 내쫓아야만 될, 내가 예상한 모든 것들은 다 십자가를 가린다는 이유 때문에 주께서 다 내쫓아야만 했다면, 지금의 사정에 대해서 우리는 고맙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거예요.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그대를 만나기 위해서 많은 이별을 했는지 몰라’, 이것을 찬미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지금 현재 어떤 사람이냐 하면 복음에다 목숨을 바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내 목숨을 계속 챙기려고 한다면 이 노래는 이조차도 무익하고 헛된 거예요. 아직 다 도달하지 않았어요. 아직은 마감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마감이라고 하면 더 이상 내 생명, 내 목숨에 연연하지 않는 지경이 되어야 돼요. 그 정도의 자리에 있어야 돼요. 내가 나를 위해서 살면 나는 개다. 이정도가 되어야 해요. 이 말은 뭐냐, 죽여주옵소서! 이제는 더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을, 억지가 아니고, 억지로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고, 흉내 내는 것이 아니고, 만세를 부르는 거예요. 더는 소원이 없는 거예요. 이제는 주님을 바라는 것 이상 더 바라면 나의 바람은 죄가 됩니다. 더는 소용이 없어요. 더 바라면 죄가 됩니다.

 

어떤 지경이냐 하면 옛날에는 나를 위해서 사랑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을 했는데, 이제는 사랑이 사랑되기 위해서 내가 존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 있기에 이제 내 목숨은 내가 손 놔도 된다는 것입니다. “죽는 것도 주님의 사랑이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 “내가 이 시간 죽는 것도 사랑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성경에 나옵니다. 바로 예수님 십자가 옆에 있던 어떤 강도. 사랑이었죠.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 사랑하기에 자기의 모든 것, 귀한 향수를 아낌없이 다 깨트려서 울면서 예수님의 발을 씻깁니다.

 

사랑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에요. 사랑은 반드시 상대가 있습니다. 결국 동행하는 주님이, 십자가 지신 주님이 사랑하지 않으면 이런 현상이, 노래가사처럼 일어나지 않겠죠. 그래서 고린도후서 16장 22절에 보면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뭐를 받을지어다?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제 이해되시죠. 그 이야기가. ‘아, 사랑이 사랑 앞에서 내 목숨, 내 생명을 따로 챙길 수 없는 지경이 돼야 그게 사랑이구나.’

 

그리고 난 뒤에 고린도전서 13장을 보세요. 이해가 다 돼요.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이게 뭐냐 하면 자기 게 없으니까, 자기 것을 배설물로 다 내놓아버렸으니까, 그 순간에 사랑은 오래참고 성내지 아니하고, 성낼 건덕지가 있어야죠. 자기 게 따로 있어야 성을 내죠. 자기 게 없는데 뭐. 내 게 없는데 무슨 성을 내요. 누가 나를 욕하고 핍박한다 할지라도 오히려 우리는 기뻐하리로다. 자기 게 없으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이게 이해가 되는 거예요. 오리를 가라고 하거든 십리를 가라. 겉옷을 달라고 하거든 속옷까지 줘라. 이게 이해가 돼요. 맹세하지 말라. 자기 게 없는데 뭘 맹세해요. 오른 손이 범죄 하거든 잘라버려라. 다 잘라버리세요. 죽겠다는데 뭐. 죽겠다는데 이렇게 자르면 아프고 저렇게 자르면 아프고, 뭐 그런 것 없어요. 죽겠다는데 이리 자르던 저리 자르던 관계없어요. 다 가져가세요. 죄 덩어리 다 잘라서 가져가세요.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 죽겠다는데 뭘 염려해요. 죽겠다는데 굶어죽으면 감사하죠. 그 나라 그 의를 구하라.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다.

 

주께서 이야기하는 그 기준점은 이미 이 세상에 주님은 떠나도 사도의 편지를 통해서 우리에게 충분하게 주어졌습니다. 그 결과가 뭐냐 하면 자기 것을 지키는, 족보이야기나 변론, 분쟁, 율법의 다툼, 이런 것들은 다 무익하고 헛된 것이다. 어떤 사람은, 저한테 노골적으로 묻는 분은 없지만, 보통 그런 것들을 묻고 싶을 거예요. “목사님. 무엇이 법입니까?” 그러면 저는 늘 지금껏 설교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그냥사세요. 그냥 사는 게 그게 사랑의 법입니다. 그냥 사는 것.

 

왜 사람들은 그냥 못살까요? 내가 다칠까봐 겁나서 못살아요. 내가 다칠까봐. 내가 다칠까봐 겁나서 못산다는 것은 법을 지킬 때 또 생략해버려요. 나한테 유리한 것만 지키고 불리한 것은 다 생략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의 은혜를 자기가 고의적으로 누락시킨 게 돼요. 주님의 은혜를 누락시키면 남는 것은 뭡니까? ‘역시 내가 정신 차려서 제대로 행동하니까 이런 복을 받지.’ 결국 모든 공로가 자기 잘난 맛에서 나와요. 자기 잘난 맛에서.

 

항상 자기생각을 하게 되면, 사람이 어려울 때는 행동을 조심하게 되고 성경도 보고 그러는데, 뭐든지 넉넉할 때는 ‘야, 집안의 돈이 이렇게 남아도니까 어지간한 벌은 좀 받아도, 몇 천 만원 날아가도 몇 십억이 있으니까 농땡이 부려도 괜찮겠네. 좀 매 맞아서 없어져도 괜찮겠네.’라고 하죠. 그럼 교회 안 나오죠.

 

왜? 교회 안 나가서 매 맞아도 여유분이 있기 때문에. 느긋해요. 아쉬운 게 없어요. 아쉬운 게 없다는 말은,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살겠습니다,”라는 뜻이에요. “내가 스스로 법 만들어서 그 법을 지켜가면서 내가 하나님 앞에 그다지 피해보지 않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하는데, 그게 바로 예수님의 죄인 됨을 가려버리는 행동이라니까요. 그게.

 

10절에 봅시다.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왜 멀리 하느냐 하면 이단에 속한 사람을 누가 허락했습니까? 주님이 허락했어요. 그러면 이단이 왜 발생되고, 이단이 왜 설치고, 사탄의 종들이 왜 설쳐댑니까? 그거는 우리가 이 세상에 미련두지 않기 위해서, 이 세상한테 나 알아달라고 하면 안 되거든요. 그렇게 되면 내가 또 부각돼요. “나 바른 복음 전한다. 알아 달라.” 이러면 내가 지금 억울해서 못 죽어요. 남이 좀 알아주고 괜찮은 존재되고 난 뒤에 죽어야 한이 없잖아요.

 

그래서 이단들의 특징은 뭐냐 하면 자꾸 유명해지려고 하는 거예요. 유명해지려고.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는 거잖아요. 유명해지는 거예요. 사탄이 예수님한테 이단 되라고 부추긴 장면이 마태복음 4장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 두 번째 시험이 뭐냐 하면 니가 위에서 뛰어내려라. 뛰어내리면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하겠어요? 진짜 말씀대로 하는 메시야가 왔다고.

 

사탄이 예수님한테 그렇게 유혹하는 이유는 일반인들이 사탄의 마음을 그대로 교육받았기 때문에 ‘아, 메시야가 와서 진짜 하늘을 날아다니고 절벽에서 뛰어내려도 안 아프고 천사들이 말씀대로 탁 받쳐주게 되면, 그런 메시야 같으면 내가 진짜로 정말로 믿는다.’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그 메시야관을, 사실은 일반인이 아니고 일반인 뒤에 숨어있는 악마가 개인적으로 다 그걸 심어준 거예요.

 

심어주니까 소위 교회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평소의 생각이 뭐냐 하면, 아, 살기 빡빡한데 주께서 뭐 기적적으로 해서 어디 취직자리 좋은 데 안 주나, 월급 많이 올려주지는 않나, 지금 내 딸이 시집을 안 갔는데 누가 멋진 남자, 키 크고 성격 좋고 돈 되고, 3종 세트 아닙니까? 키 크고 성격 좋고 돈 되고. 키 커야 자식들이 키 크고 성격 좋아야 자기한테 푹 빠지고 돈이 돼야 자기는 돈 쓰는 재미로 살 게 아닙니까? 이 세 가지 아닙니까? 키성돈(키 크고 성격 좋고 돈 되고). 키성돈 말고 뭐 있어요?

 

교회 다니고 안 다니고 관계없이 여자들이 시집갈 때, 지금 여자들을 말하는 것은 20대, 30대, 40대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50대, 60대 다 마찬가지에요. 70대 할머니가 새롭게 시집가고 싶은데 어떤 할아버지를 원합니까? 키성돈. 70대 할머니라고 다른 게 아니라 마찬가지라니까요. 마찬가지. 남자는 무조건 이이이~! 이쁘고! 이쁘고! 이쁘고! 육의 본성이거든요. 육의 본성.

 

이단이라는 게 뭐냐 하면 바로 남들의 욕망에 짝을 이루고 싶은 거예요. 왜? 자기 증명이 되려면 증명 받을 타인들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킬리만자로 산에 혼자 가서 결혼할래요? 혼자서 살림할래요? 하필 그 멀리 가서 아무도 없는데? 또 몰라? 세상 버리면 그리 될지. 대부분 사람들은 돈이 있으면 돈 꽤나 자랑질 하는 곳에 살아서 남에게 부러움을 사고 싶은 거예요.

 

이게 악마가 심어준 본성이 그거에요. 우선 안 죽어야 되고, 이왕 사는 것 인기가 있어야 되고, 이왕 사는 것 세상 모든 것을 내 소유로 삼고 싶은 것이, 광야에서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한 시험의 내용입니다. 마귀가 시험했다는 말은, 그 마귀 말을 듣지 말고 일반적으로, 보편적으로 공유된 이데올로기로 보면 돼요. 이 세상 모든 사람의 공통된 이념이라고 보면 돼요.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못 빠져나옵니다. 못 빠져나와요. 아까 잡초라고 했잖아요. 못 빠져나옵니다. 못 빠져나오면 그냥 못 빠져나올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그 못 빠져나온 데에 합류하신 분에 의해서 구원이 되는 거예요. 구원이 되면서 내 속에 있는 그러한 악마적인 심성, 속에 있는 죄가 이제는 어디로 나온다? 밖으로 나오죠. 밖으로 나오면서 그것에 대해서 감사하죠. 다윗처럼. “하나님. 제가 처음부터 죄인인 것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자, 이렇게 하면 “목사님. 그 말은 맞지만 그것은 십자가로 한 번이면 끝나는 것이 아닙니까?” 이러거든요.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냐? 여러분 법이라고 하는 것은요, 갈수록 점점 더 세밀해져요. 갈수록. 예상 못한 세밀함이 어떤 현장에 가면 또 거기서 새롭게 또 만들어져요. 죽을 때까지 계속 만들어져요. 아주 세밀해요.

 

만약에 어떤 사람이 어떤 집에 불이 났는데 남들은 가만히 있는데 자기가 뛰어들어서 불난 집에서 열 명을 건져내고 자기도 시커멓게 되어서 나왔다고 칩시다. 마지막으로 살아 나와서 사람들이 카메라 찍고 열 명이나 건졌다고 환호하고 있다 이 말이죠. 근데 그 사람이 힘들고 목이 말라 물을 마실 게 아닙니까? 물을 마신다고 칩시다. 물을 마셨는데, 옆에 있는 부인이 하는 말이 고함을 지르면서 “내가 물 마실 때 흘리지 말라고 했잖아!”

 

내가 물 마실 때 흘리지 말라고 했다는 것, 그걸 지금 따질 군번입니까? 그걸 따질 상황이에요? 지금 죽을 뻔하고 사람을 열 명이나 구했는데? “그러니까 남들 앞에서 물 하나도 흘리지 말고 똑바로 마시라고 얼마나 잔소리를 했는데!” 이래 나오는 거예요. 그럼 그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해요? 사람 열 명 구하고 그 다음에 정신 바짝 차려서 물 흘리지 말아야 된다. 흘리지 말아야 된다. 이래야 온전한 의를 이루는 겁니까?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사람이 아무리 큰일을 하고 훌륭한 일을 해도, 그걸 파고 들어가 보면 변변치 않고, 법에 위반되는 것이 20개 100개 1000개 계속해서 만들어낼 수가 있다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MBC기자가 “어떻게 열 명이나 구했습니까? 힘들지 않았습니까?”라고 물으니까 “아이고, 정말 힘들었지만 한 명이라도 구하는 것이 내 목숨보다 중요했습니다.”라고 이렇게 했는데, 그걸 보고 CBS기자가 당신 말할 때 행동을 왜 똑바로 안 하고 옆으로 했냐고 또 말하는 거예요.

 

지금 여러분들이 “목사님 너무 과장 아닙니까? 남이 어떻게 그렇게 따지겠습니까?”라고 하는데, 남이 따지는 것이 아니고 본인이 따진다니까요. 본인이. 그때 열 명 구하고 물 마실 때,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드디어 어떤 사람이 열 명 구했다고 나올 때에, 그 사진 찍을 때 각도가 48도였어요. 45도면 인물이 괜찮게 나오는데. 본인이 그걸 참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때 약간만 옆으로 돌릴 걸.’ 이게 인간의 심리입니다. 이게 심리에요.

 

잘했는데 뒤돌아보게 되면 후회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한두 가지가. 그때 이왕 잘난 것 좀 더 잘날 수 있었었는데. 공부 잘해서 졸업식 때 우등상 받을 때 엄마는 우리 딸 잘했다고 하고 있는데, “야야! 기쁘지?” “엄마. 안 기뻐 화가 나.” “왜?” “평소에는 바지 입었는데 오늘은 내 다리가 예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치마 입혔어?” 이러고 있다고요. 생각이 딴 데 가 있어요. 다리가 예쁘지 않아서 평소에는 바지 입는데, 지금 엄마가 우겨서 치마를 입었는데, 자기가 그 사진을 아무리 봐도 다리가 안 예쁘대요.

 

생각해보세요. 지금 예수님은 피를 흘렸습니다. 예수님은 피를 흘려서 우리에게 찾아왔는데, 우리는 계속해서 신경을 어디에다 쓰고 있습니까? ‘내가 이렇게 하면 예쁠까? 남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남들이 나를 우습게 생각하면 내가 갖고 있는 명예는 추락이 되고, 내가 잘났다는 것을 증명할 꺼리가 박탈되면 나는 우째 살지? 이렇게 나한테 손가락질 하면 나는 못산다. 못살아.’

 

지금 관심사가 어디에 있습니까? 자기에게 있는 것. 이게 마귀가 우리한테 심어준 거예요. 니가 신처럼 되리라고. 그게 이단이에요. 그러니까 이단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에요. 이단을 멀리하라는 말은 어떤 사람에게 해당이 돼요? 정말 복음을 위해서 목숨 던진 사람만 이단이 나와요. 다른 사람은 이단인지 삼단인지, 자기도 이단이면서 무슨 남을 이단이라고. 똑같은 인간들끼리 서로 이단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 다음에 11절, “이러한 사람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서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느니라” 여기 죄라는 것은 복음을 모르는 것. 다시 말해서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이 예수님 피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 죄죠. 그 다음에 12절, “내가 아데마나 두기고를 내게 보내리니” 여기 두기고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면 사도바울의 편지배달부에요. “그때에 급히 니고볼리로 내게 오라 내가 거기서 과동하기로 작정하였노라” 니고볼리는 지명이고, 과동, 거기서 겨울을 나기로 작정했다.

 

자, 이것이 사도바울의 개인적인 편리를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겁니까? 아니면 복음을 위해서 하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이건 복음을 위해서라고 말을 하지 않아도 자기는 주의 사도라고 명백하게 밝혔어요. 자기가 주의 사도라고. 그리고 사도가 하는 이 모든 일은 사실은 사도가 아니고 주께서 장기 알을 옮기듯이 이리저리 지금 옮기고 있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오늘날 성령 받은 사람들도 자기가 하는 행위를 이거는 내 이익을 위해서 했다고 생각하지 말고,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나는 이런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해야 된다는 말이죠. 이 사도바울을 보면서.

 

그 다음에 13절, “교법사 세나와 및 아볼로를 급히 먼저 보내어 저희로 궁핍함이 없게 하고” 교법사 세나는 누군지 모르고요. 아볼로라는 사람은 말씀을 잘 증거 하는 사람. 사도행전 18장에 보면 나옵니다. 사도행전 18장 24절을 한 번 볼까요?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 이래 되어 있죠. 이 사람을 이번에는 어디로 보내느냐, 14절, “또 우리 사람들도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다시 그레데에 파견시켜가지고 사도바울 대신 복음을 전파하도록, 디도를 돕도록 그렇게 하는 겁니다.

 

15절, “나와 함께 있는 자가 다 네게 문안하니 믿음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너도 문안하라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자, 디도서가 끝나는데요. 마지막으로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은혜가’ 그 다음에 무슨 말이죠? ‘너희’죠. 너희가 누구냐 하면, 그러니까 누구, 누구를 지칭하지 않고 너희라고 한 것은 사도바울이 누구한테 일임하느냐 하면, 너희 됨을, 성도의 성도됨을 이거는 주님께 일임하는 거예요.

 

다만 주님께 속한 사람은, 사도바울이나 성도들은 공통점이 있다는 게 뭐냐 하면 항상 주님의 은혜가 떠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은혜가 떠나지 않는다는 말은 무슨 뜻이다? 속에 있는 죄가 바깥으로 노출된다는 뜻이죠. 그건 다른 사람은 몰라요. 본인만 알아요. ‘내가 이렇게 죄인인구나.’

 

그래서 이 세상 어떻게 살더라도 칭얼대지 말고 분내지 말고,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할게 아니라, “참 내가 봐도 지루하지만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라면 주님 마음대로 하세요. 살리는 것도 주의 복음을 위해서, 죽이는 것도 주의 복음을 위해서 하시옵소서.”

 

그래서 성경에 보면 사나 죽으나 누구 것이다? 살아있어도 내 것 아니고 죽어있어도 내 것 아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는 말을 그렇게 바꿔야 돼요. 살아있을 때도 내 것 아니고 죽어서도 내 뜻대로 죽는 것이 아님을 믿는 거예요. 오늘 밤에 죽더라도 낙원가면 되니까.

 

늘 우리는 갈 데가 있어요. 빌립보서 3장 20절에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우리의 시민권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늘에 있죠. 그럼 지금 이 땅에 사는 것은 남의 동네에요. 남의 동네에 사는 거예요. 남의 동네에.

 

예를 들면 저기 멀리 동탄에 아파트가 하나 있다. 예를 들어서요. 예를 들어서 아파트가 하나 있는데 이 동네 신월동에서 어슬렁거린다. 그러면 아는 사람이 보고 “왜 너희 집에 안 가고 여기에 있느냐?” “갈 거야. 갈 거야. 해지면 버스타고 동탄까지 갈 거야.” 이게 뭐냐 하면 “니 예수 믿고 왜 그리 사나?”할 때, “갈 거야. 갈 거야. 우리 시민권은 하늘에 있어. 하늘에 갈 거야.”라는, 그런 넉넉함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모세가 애굽에 살았습니까? 아니면 광야를 지냈습니까? 모세는 애굽에 살 수 있는 권한이 있었어요. 그러나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살기를 거부하고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원했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하신 상, 약속의 땅이 있기 때문에. 히브리서 11장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거기에 보면 약속의 땅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곧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 성이라고 했어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들어가 있던 그 장소에.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면, 마지막으로 이걸 크게 쓰겠습니다. 지난 수요일에 기도제목으로 내걸었던 이야기인데, 우리는 이 세상을 농담으로 살아야 돼요. 농담으로. 전혀 심각하지 않습니다. 전혀 심각할 것 없습니다. 왜냐하면 남의 동네거든요. 여긴 신월동이잖아요. 자기 집은 동탄에 있고. 우리의 시민권은, 우리의 고향은 하늘에 있기 때문에, ‘땅에서 구경이나 한 번 해볼까?’ 이렇게 어슬렁거리면서 살아야 되는데, 오늘 어슬렁거리지 않고 바쁜 사람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게 하옵소서. 어차피 잘 살아봤자 그것마저 죄가 된다는 사실을 이제는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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