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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3 00:41:48 조회 : 681         
노예 180112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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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IP:122.♡.178.64) 18-01-17 01:05 
서울의존강의201801012a 빌레몬서1장(노예)-이 근호 목사

 

오늘은 빌레몬서입니다. 신약성경 351페이지, 1절로 3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은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및 자매 압비아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 지어다”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천국이 무엇이냐, 천국이 어떻게 생겼느냐, 라고 궁금해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천국은 이렇다, 라고 이야기할 때는 과정으로 이야기하고, 천국 그 자체의 존재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어떤 원칙을 두고 이야기하는데, 그 원칙이 3절에 나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으면 그게 천국입니다.

 

사람들이 세상사는 것이 너무 힘드니까, 거기에 대한 보상책으로 넉넉하게 여유롭게 살 생각을 합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입장에서, 고통스러운 자기가 표 나게 고생 안 하고자 하는 그런 요소를 자꾸 기대하고 있는 거예요. ‘천국가면 쉬겠지. 천국가면 맘 편하겠지. 천국가면 고생 안 하겠지.’라는 기대를.

 

그러면 그것은 자기로부터 고통이 없게 해서 자기가 편한 데로 가기 때문에 자기의 생각에서 벗어나질 않아요. 그것은 자기나라지 천국이 아닙니다. 천국이 아닌 거예요. 천국을 이야기할 때는 자기를 빼고 이야기해야 해요. 내가 어떻게 되든지, 어떻게 고생하든지, 그거는 완전히 제외시키고 이야기해야 돼요. 세상 사람들에게 교회에서 천국을 전할 때, “여러분! 곧 괜찮게 됩니다.”라는 것을 꼭 집어넣는데, 사실은 성경적으로 하게 되면 “여러분은 잘 됩니다.”라는 것을 빼고 이야기해야 돼요.

 

우리가 잘 된다는 것은 한도 끝도 없어요. 1년에 몇 억을 벌어야 잘 되는 겁니까? 한 20억 벌면 그걸 잘 된 것으로 알고 스톱할 거예요? 20억 노리지 않겠어요? 노리죠. 그럼 얼마나 잘 돼야 잘 되는 것일까요? 얼마나 좋아해야 나는 천국 왔다는 만족감을 본인이 느끼겠습니까?

 

인간은 밑 빠진 독과 같아서, 밑에서 욕망이 올라오고 그 욕망에 대해서 세상은 충족시키지 못합니다. 본인을 포기하지 못하고 생각하는 모든 천국은, 그건 지옥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본인 자체가 천국에서 만든 것이 아니고 지옥에서 만들었기 때문에, 아담의 저주 속에서 우리가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 자체에 무슨 이상이 있어요. 문제 있습니다. 고장나있어요. 고장 난 것을 가지고 고장 난 인간이 원하는 천국은 고장 난 천국이죠. 엉터리 천국이다 이 말이죠.

 

우리 자신과 예수님하고 한번 비교해보세요. 예수님에 비해서 우리는 가짜입니다. 인간 아닙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아들 아니고요. 그럼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면, 아들이 간 곳이 천국이라면, 아들이 아닌 자는 어디에 가야 당연한 거예요? 그 아들의 나라가 아닌 곳에 가야 당연하죠. 지옥가야 당연한 거예요. 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이 있는 나라, 그 나라에서 뭔가 주어지는데, 3절에 보면 “그리스도를 좇아”, 이것은 ‘그리스도를 따라서’입니다. 이게 원천이고 그 원천에서 뭔가 제공된다는 뜻에서 ‘좇아’입니다. 그 다음에 뭐가 나옵니까?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 것이다.’라고 했죠.

 

그러면 이 말은 인간에게는 천국 갈 수 있는 은혜와 평강이 생산되지 않죠. 생산되지 않는 것, 그리고 인간이 아무리 돈을 준다고 해도 살 수 없는 은혜와 평강. 이것을 예수님으로부터 부여받고 아버지로부터 부여받는다면, 더는 딴 것 욕심내지 맙시다. 더는. 다른 것은 더 욕심내지 맙시다. 은혜와 평강, 이것이 주어지기 위해서 그냥 하늘에 있는 은혜와 평강을 나누어준 게 아니에요.

 

그냥 하늘에 있는 평강과 은혜를 나누어주게 되면, 이건 구원받을 사람이 예수님과 그리고 하나님과 늘 있었던 천사들밖에 없어요. 탕자는 집에 들어와도 받아주질 않아요. 그러면 천국에, 은혜와 평강에 무슨 요소가 더 추가되어야 하느냐 하면, 집 떠난 탕자도 받아줄만한 은혜와 평강이 있어야 되거든요. 이 토대, 이 근거를 위해서 하늘에 그냥 계셔도 되실 분이 사서 고생하시는 겁니다. 고생할 필요도 없는 분이 사서 고생을 하셨어요. 영화 15도에 이 땅을 오셨습니다. 오셔가지고 은혜와 평강을 주시는데, 은혜와 평강이 드러나도록 주시죠.

 

은혜와 평강이 드러나려면, 은혜와 평강에 반대되는 사고방식을 지닌 자에게만 그 가치를 보여주는 겁니다. 의인들은 소용이 없어요. 조금이라도 자기에게 수완이 있고, 능력이 있고, 자질이 있고, 자기가 스스로 개과천선할 수 있은 잠재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이 은혜와 평강은 모독을 받습니다. 쓸데없는 것 저리가라고 차버리죠. “내가 열심히 하고 있고, 하고 있는데, 뭐 나보고 아무것도 못한다고? 무능력자라고? 내가 뭔가 이렇게 종교적인 경건과 거룩을 할 수 있는데 해봤자 소용이 없다고? 기도해봤자 안 들어준다고? 그러려면 은혜와 평강 가져가!” 하고 배척하겠죠.

 

그 일을 누가 했느냐 하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한 거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나름 경건한 사람들이었어요. 성경에 나오잖아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 하는 이 모든 것들, 자기가 한 행동들을 남 안 줍니다. 자기의 거룩에 눈 쌓이듯이 소복소복하게 쌓이는 겁니다. 적금통장에 쌓이듯이. 거기에 비해서 죄인은 아무것도 자기 스스로 누적할 생각도 못하고 적금 부을 생각도 안 해요. 적금은커녕 그냥 반대로 노출시킬 생각을 하죠. “주님, 저 이것밖에 안 됩니다. 나는 나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자입니다. 내 것 지킨다고 그거 때문에 분주하고 그거밖에는 생각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패턴이 굉장히 단순해보이지만, 사실은 구원받는 죄인들의 패턴은 세상 전부를 잘 알고 있다는 거예요. 뭐 공부를 많이 해서 잘 아는 것이 아니고, 살아봤자 죄밖에 지을 게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러한 논리와 세상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빌레몬에게 편지라고 하는 것은 천국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래 보시면 되는 겁니다. 천국의 내용을 담고 있으니까, 우리가 여기서 해야 하는 것은 그 내용을 형성하는 천국의 그 원리와 원칙, 그 방식을 뽑아내면 되겠죠.

 

그런데 이 빌레몬서에 그게 공식으로 나와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식으로 나와 있느냐 하면, 사도바울이 오네시모라고 하는 그 노예, 그 노예가 있는데, 노예한테는 반드시 주인이 있죠. 그 노예의 주인이 누구죠? 빌레몬이 주인이고 그 종이 오네시모죠. 노예가 있는 거예요. 옛날에는 요새 가정부라고 하는 그 정도의 의미가 아니에요. 주인은 노예의 생명의 은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노예라는 제도를 나쁜 의미로 생각하잖아요.

 

옛날에는 안 거둬들여도 되는 사람인데, 주인이 워낙 마음이 착해서 그 사람에게 일시키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어서 생존을 보장하는, 그러한 어진 분들, 그게 바로 주인과 종의 관계입니다. 요즘말로 하면 정신병자들 데려다가 새우 잡이 시키는 겁니다. 염전에 가두어놓고 일시키는 것. 그 사람들에게 나라에서 주는 최저생계비 다 빼돌리고. 소 키우는데 소하고 같이 풀에서 자게하고. 죽든지 말든지 일만 직사하게 시키는 그런 관계. 그걸 주인과 노예라고 보시면 돼요. 세상적으로 볼 때는 주인은 약한 자들을 등쳐먹는 악하고 나쁜 인간이잖아요.

 

그런데 정신병자나 그 가족의 입장에서는 자기 가족도 감당 안 되는 것을 감당해주는 고마운 분이라고, 정신병자를 부려먹는 인간이 정신병자나 가족에게 그런 식으로 갑질을 하고 있는 겁니다. “고마운 줄 알아. 이것들아! 내가 10년 동안 데리고 있었기에 밥이라도 먹고 살았지. 네 집에 가면 소문 다 나고, 이상한 형제 있다고 해서 네 동생 결혼도 못해. 혼사도 다 깨져. 니들이 귀찮게 여기는 것을 내가 거둬서 10년 동안 재워주고 밥 먹여줬으면 됐지. 그래서 나라에서 주는 보조금 가로채도 마땅하지”라는 그런 정신자세가지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나쁜 사람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옛날에는 다 그렇게 했어요. 노예라고 하는 것은 내가 안 거둬주면 굶어죽어요. 옛날에는 농경시대기 때문에 토지가 없는 사람은 도적질이 아니면 살 길이 없습니다. 도적질하다 잡히면 빨리 죽고, 종으로 살면 죽는 게 약간 지연되는 그 차이뿐이에요. 따라서 그 당시의 노예라고 하는 것은 포로 잡힌 자, 전쟁에서 승리한 쪽이 전쟁에서 패배한 쪽의 그 백성들을 포로 잡는데, 그 종으로 잡힌 것도 고마운 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실은 그 적이라고 하는 것은 곱게 온 것이 아니에요. 우리하고 전쟁했잖아요. 전쟁했다는 말은 조금 전만 해도 너 죽인다고 달려들던 사람들이에요. 죽인다고 달려들었는데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니까, “살려주세요!”가 된 거예요. “그러면 살려줄 테니까 뭐든지 다 할 수 있느냐?” “뭐든 못하겠습니까? 다 하겠습니다.”라는 그런 계약이 된 사람들이에요. “살려주는 대신 종이든 뭐든 다 하겠습니다.”하고, 동의하에 종이 되었기 때문에 그거 뭐, 할 말이 없죠. 계약이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그럼 그게 싫으면 이기든지. 저쪽이 이긴다는 말은 뭡니까? 저쪽의 칼 부리가 전쟁에서 진 우리를 향하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전쟁할 때는 그냥 단순히 지고이기고 정도가 아니고, 지게 되면 반대 상황으로 우리가 그쪽의 노예가 되는 거예요. 이기니까 주인행세를 하지, 졌으면 입장이 반대로 바뀌는 거예요. 따라서 야무지게 노예로서 다뤄야지 노예를 사람 취급해버리면, 순국선열에 대한 모독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몸 바쳐서~♬ 몸 바쳐서~♬ 모든 가정을 버리고 추운 날 남한산성에서 전쟁했던 그 모든 군사들, 오랑캐 물리치기 위해서 전쟁했던 군사들의 그 희생정신을 짓밟는 거예요.

 

전쟁을 했으면 야무지게 끝까지 그 전쟁에서 희생정신의 빛을 내기 위해서라도 노예를 절대로 정상인으로 봐줘서는 안 돼요. 그렇게 되면 이 나라를 지켜왔던 선조들의 희생이 아주 무가치하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성경 잠언서에도 나오죠. 노예를 마치 아들로 취급해주면, 잘 해주면 자기가 아들인양 겁 없이 까분다 이 말이죠. 고양이 예뻐해 주니까 침대에 올라오죠. 강아지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하물며 사람일까 보랴. 사람인 노예가 어디서 주인하고 맞먹으려고 합니까? 말이 안 되죠. 노예라고 하는 것은, 노예의 임무는 자기를 잃어버리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아이고, 목사님 요새 무슨 노예가 있습니까?”라고 하는데, 노예 없었던 적이 없습니다. 앞으로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노예는 계속 됩니다. 요즘 노예는 뭐냐 하면 자기를 잃어버리지 않고 자기를 챙기는 그것이 죄의 노예가 돼요. 죄의 노예. 악마의 노예가 됩니다. 자, 악마의 노예란 뭘 노리느냐 하면 자기의 의로움, 다른 말로 하면 자기 정당성을 챙기는 것입니다. 악마의 노예란 자기 정당성입니다. 독자적으로 홀로 살라고 하는 자. 악마는 숨어서 안 보이니까. 악마는 자기 앞에 종을 내세웁니다.

 

악마가 하는 일이 뭐냐 하면 예수그리스도를 부정하게 만드는 거예요. 그러나 악마는 정면에 나타나서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사람, 인간을 앞장세워서 철저하게 예수그리스도가 하는 일을 부정하게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공로가 뭐예요? 모든 인간은 죄인인데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받죠.

 

예수님의 공로가 뭐냐, 사람은 할 수 없으되 예수님의 의로, 예수님의 공로로 천국 가는 것이잖아요. 그러면 거기에 대척되어 있는, 예수님이 하는 일에 반대하는 쪽의 핵심은 뭐예요? 예수 당신 덕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누구 덕으로 간다? 내 덕으로 간다는 정신이 형성될 때, 그게 바로 악마의, 사탄의 집단이라니까요. 사탄의 종이라니까요. 오늘날 교회가 그렇다는 겁니다. 교회가. 예수 믿는 것도 자기가 열심히 해서 믿는 것이고.

 

모든 게 자기가 선택을 하는 거예요. 자기 선택. 자기 결심, 자기 선택이에요. 선택이란 언제나 둘 중의 하나. 선택이라는 것은 둘 중의 하나에요. 그렇잖아요. 선택은 둘 중의 하나잖아요. 선택을 왜 하느냐, 선택하는 내가 좋으라고 하잖아요. 내가 만약 선택했다면 그 선택 자체는 자기 자신이 얼마나 정당하고, 내 자신이 얼마나 의로운가를 티내기 위해서 선택이라는 행위를 보여주거든요. 근데 선택 할 때는 언제나 둘 중의 하나에요. 둘 중의 하나라는 말은 뭐냐 하면 나한테 선택당하지 않는 것은 나의 적이라는 뜻입니다. 나한테 선택당하지 않은 자는 나의 적이다.

 

드라마가 이렇게 스토리가 전개되게 되면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하는 그런 법은 별로 없어요. 여자가 주인공이라면 꼭 남자는 적어도 두 명 내지 세 명은 붙어요. 여자 비서 하나에 남자 세 명 달라붙어요. 도경이에다가, 5년 전에 사귀었던 남자에다가, 현재 상무에다가 ,전무에다가, 백진희 다 좋아해요. 뭐 저글러스인가 뭔가, 거기에 보면 나와요. 자, 선택을 강요하게 되는데, 그 선택을 본인의 정당성을 위해서 선택하면서 사람들은 무슨 말을 집어넣느냐 하면 역경이라는 말을 집어넣어요. 역경. 고난과 역경. 웃기죠? 누구를 위한 고난과 역경입니까? 누구를 위한? 이번 수련회 바빠서 참석 못했습니까? 뭐 선택을 잘못해서 그랬습니까?

 

사람들은 걸핏하면 징징대요. 하여튼 슬픈 눈을 다해서 동정심을 유발하려고 해요. 동정심을 유발한다는 것은, 징징대고 어린애처럼 그렇게 한다는 것은 그 전제가 뭡니까? “나는 동정 받을 가치가 있고, 징징대든 뭐하든 간에 당신은 나를 도와줄 의무가 있습니다.”라는 그런 뜻이잖아요. 그렇죠. 그렇게 해서 도움을 받으면 그게 어디에 저장됩니까? 어디에 저장이 돼요? 남의 창고에 저장이 됩니까? 주님의 창고에 저장돼요? 하늘나라에 저장됩니까? 따로 챙긴 내 나라, 내 자리, 내 통장, 내가 확보하려고 하는 정당성, 나는 이만큼 정당하고 나는 살만한 가치가 있고, 나를 건드리면 안 된다는 거기에다가 다 이렇게 모아놓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만나는 사람과의 만남이라는 것은 그냥 신체와 신체의 만남이 아니에요. 그 사람의 신체가 신체답게 되게 된 지난 모든 과거사가 그 신체를 앞장세워서 대동하고 다 만나는 거예요. 이쪽 신체하고 저쪽 신체, 이쪽 과거하고 저쪽 과거하고 만나는 겁니다. 선 볼 때나 상견례 할 때는 물론이고. 회사에서 면접 볼 때도 마찬가지고. 그 누구와 그냥 길에서 우연히 만날 때도 마찬가지고. 제일로 안 만났으면 하는 좋은 경우가 뭐냐 하면 차와 차끼리 부딪치는 겁니다. “뭐야 이거? 운전 똑바로 안 해!”라고 하면서 내릴 때, 안 만났으면 좋을 뻔 했던 거예요.

 

전에 제가 그런 예를 들었죠. 대구 인구가 250만인데, 어떤 아주머니, 그 어떤 아주머니가 우리 고모죠. 우리 고모가 차를 타고 가는데, 뒤차가 와서 박아버렸어요. 지금 자기 스케줄 있고 바쁜데, 바쁘기도 바쁘고 차 수리비도 나오잖아요. 물론 수리비 보험청구하면 나오지만, 그게 얼마나 짜증이 나는 거예요? 누구야? 하고 내리니까, 자기 오빠, 친오빠였어요. 우리 삼촌이 우리 고모하고 만났어요. 그것도 차사고로. 야, 이거 대단한 확률이죠. 그렇게 만나도 그 사람의 가정환경, 학력, 평소의 생활태도, 스타일 다 나옵니다. 말하다보면 다 나와요. 다시 말해서 “나는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고집하겠다.” 저쪽도 “나는 내 식대로 살아가는 것을 포기할 마음이 없다.” “이렇게 할까?” “안 돼!” “그럼 이렇게 할까?” “오케이!” 이렇게 되죠. 근데 둘 다 자기 의를 포기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자기 의를 포기 안 했죠.

 

제가 강의 처음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빌레몬서는 성경이죠. 성경은 무엇을 증거 합니까? 천국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천국을 이야기할 때는 그 속에서 천국의 원리를 우리가 알아내야 하죠. 근데 그 천국의 원리를 설명하는데, 천국은 이런 것이다, 라고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와 누구의 만남이에요. 여기 사도바울과 누구와의 만남이냐 하면 빌레몬과의 만남이에요. 그 두 사람의 만남 가운데서 사도바울은, 물론 성령 받았으니까 어느 쪽에 속하는 겁니까? 천국에 속하죠. 빌레몬도 하나님의 은혜니까 천국 쪽에 속하죠. 그럼 둘이 만나서 대화를 하면서 결론이 좋게 나겠어요? 틀어지겠습니까? 둘 다 천국에 속했으니까. 좋게 나겠죠. 오늘날 우리보고 바로 그 모습을 보이라 이 말입니다.

 

우리가 같은 성령 받은 성도라면 틀어지는 법이 없어야 돼요. 왜냐하면 천국의 원리를 과거사로 갖고 있기 때문에. 과거사로. 자기의 과거가, 본인이 노동한 그것이 과거의 전부가 아니라, 그렇게 노동하도록 하나님의 원리로 성령께서 그렇게 인도했다는 것을 본인들이 알고 있어요. 저쪽도 알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우리 생각에는 성도끼리 만나서 “됐나?” “됐습니다.” “아이고, 이거 뭐 성도끼리 만나면 문제될 게 없네.” 이렇게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에요. 왜 그러냐 하면 천국의 원리는 은혜와 평강이거든요.

 

은혜와 평강이 나타나려면 뭐가 나타나야 합니까? 은혜 아닌 요소가 발생되고, 평강 아닌 요소가 발생돼야 돼요. 분명히 두 사람이 살아온 과거사를 둘 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끌어왔지만, 과거사가 같을까요? 다를까요? 내용이? 다 달라요. 원칙은 같지만 은혜와 평강이 다 달라요. 왜냐하면 지문이 다르고 얼굴이 다르듯이 살아온 환경이나 그 모든 것들이 다 달라요. 그러면 이 만남에서, 다른 것과 다른 것이 만났으니까, 처음부터 만나자마자 “오케이, 예”가 되겠습니까? “안 돼!”가 되겠습니까? “아니요!”가 되겠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아니요!”가 되죠. “안 돼! 안 된다.”가 됩니다.

 

“해주세요.”라고 할 때, “안 돼!” 또는 “아니요!”라는 분위기가 형성되죠. 제가 말하는 아니요, 라는 말은 들어보고 아니요, 라고 말을 한다는 것이 아니고, 서로 살아왔던 환경으로 이질적인 층들이 있잖아요. 과거사끼리 처음부터 만나니까 틀어지게 되어 있다 이 말이죠. 그런 점에서 “아니요!”에요.

 

그럼 은혜와 평강은 “아니요!”에서 뭐가 나오겠습니까? 이게 둘 다 예, 또는 예스가 되겠죠. 출발을 뭐부터 하느냐 하면 NO가 나올 수밖에 없는 환경을 하나님께서 사도바울과 빌레몬에게 조성해놓고, NO를 뭐로 바꾼다? YES로 바꾸는 거기에 천국의 원리인 하나님의 평강과 은혜가 개입한다 이 말입니다.

 

부부간에 만났다. 같을 리가 있습니까? 식성도 다르고, 환경 다르고, 사고방식 다르고, 교육환경 다르고, 전부 다 달라요. 그럼 각자 과거에 나름대로 마음의 상처들을 다 갖고 있습니다. 상처는 노출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상처는 무의식이 아니고, 무의식보다 더 깊은 층, 이거는 의식도 안 한 상태에서 자동적으로 계속 그 상처를 가리고 덮고자 하는 그 본능이 계속 작용해요. 무의식속에서. 좀 특이한 몸짓이나 행동, 다른 사람은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어떤 단어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을 나타낸다든지 하게 돼요.

 

예를 들어서 도심에 멧돼지가 나타났는데, 남편이 “와! 종로에 멧돼지가 나타났다.”라고 하면, 갑자기 부인이 남편보고 “그런 소리 하지마라!”고 하는 거예요. “멧돼지가 나타나서 멧돼지 나타났다고 했는데 왜 그러느냐?” 남편이 그러죠. 부인은 “그냥 하지 말라고 하면 하지 마!”라고 해요. 나중에 보니까 친정 쪽이 전부 다 돼지들이에요. 돼지라는 그 단어에 트라우마가 있는 거예요. 트라우마가. 그래서 TV보다가 저 배우 못났다고 하면 그 못났다는 소리에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이 있고. “야, 머리 되게 크다. 화면 다 가리네.”라고 이렇게 하면 또 가만히 있다가 화를 내는 사람이 있고. 서로가 그런 경우가 참 많이 있거든요. 서로가.

 

그래서 모든 인간의 만남은 하나의 전쟁이라고 보면 돼요. 인간의 만남은 전쟁입니다. 그게 피곤해서 아예 사람을 안 만나고 싶은 사람도 굉장히 많아요. 근데 사람을 안 만나고 살려면 돈이라도 있어야 돼요. 돈도 없으면서 안 만나려고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그래서 돈을 벌기 위해서 사람을 만나야 되는데, 쉽게 벌려면 많은 사람을 만나야 되고, 어렵게 벌려면 사람을 안 만나는 대신 공부를 많이 해야 되고, 뭐 그런 게 있어야 돼요.

 

사람들 만나는 것이 왜 피곤한 줄 알아요? 각자 서로가 살아온 환경이 다 다르기 때문에 적절하게 그걸 다 조정해야 된다는 것이 굉장히 스트레스 받고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거든요. 은행창구의 직원들이 온갖 사람들을 다 만납니다. 근데 은행 지점장은 자기 밑에 차장이나 과장들만 만나면 돼요. 근데 그런 데까지 올라가려면 얼마나 많은 과정들을 다 거쳤겠어요? 왜 사람들이 자꾸 승진하려고 합니까? 사람 안 만나려고 하는 거예요. 사람 안 만나려고. 같은 사람이면 되는데 자꾸 다른 사람들을 만나기 때문에 이게 화가 나는 거예요. 왜,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 화가 나느냐 하면 나하고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그 사람이 나의 정당성과 의로움에 대해서 시비를 걸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사람들은 악마의 종이거든요. 사탄의 종이에요. 다시 한 번 정리해봅시다. 사탄의 종들은 인간을 어떤 식으로 앞장세운다? 각자, 각자 자기 잘남을 내세우고 종으로 부리는 겁니다. 아까 종이라는 말을 했죠? 종이라는 말은 뭐가 없다고 했습니까?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정도가 아니라 의무가 되어 있어요. 그런데 어떻게 이 종의 관계에서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고 돋보이게 하느냐, 저쪽 맞은편이, 사탄하고 전쟁을 해야 될 대상자가, 예수님이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거든요. 이게 여자의 후손하고 뱀의 후손,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원칙이 그겁니다. 창세기 3장 15절의 약속이에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그러니까 우리는 뱀의 후손, 여자의 후손을 다 알아야 해요. 각자의 통하는 원리가 무엇인지를. 여자의 후손, 뱀의 후손이 나왔던 그 원리가 뭐냐 하면 창세기 4장에서 한쪽은 가인이고 한쪽은 아벨이잖아요. 형제라고 둘 밖에 없는데, 그 둘이 한 몫을 담당했어요. 가인은 아주 맞춤 같아요. 가인은 뱀의 모습, 사탄의 모습. 아벨은 무슨 모습? 여자의 후손 모습.

 

이게 완전히 딱 맞춤이에요. 왜냐하면 아벨과 사가랴의 피까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고 다 담당하라고 해서 예수님을 그 계통에다가 세웠거든요.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해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마23:35).

 

아벨, 스가랴, 또는 사가랴, 이 사가랴는 요아스 왕 때 살해당한 제사장. 사가랴의 아버지는 여호야다인데, 요아스가 8살 때 사가랴의 아버지 여호야다 덕분에 왕이 됐단 말이죠. 요아스가 여호야다의 지도를 받을 때는 성전 회복을 하는데 힘썼어요. 성전에 헌금해서 개축하고 했다 이 말이죠. 그 말은 뭐냐 하면 성전을 수호하는 것이 왕의 임무여야 된다. 왜? 백성들은 왕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고 성전으로 인하여 생긴 백성이기 때문에. 이번 수련회에서 했거든요. 듣고 돌아서면 남는 게 하나도 없지만.

 

그런데 그 요아스가 스가랴를 죽어버렸어요(역대하 24:20-22). 왜 죽였느냐 하면 독자적으로 자기 정당성, 나는 성전의 종이 되기 싫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예언과 하나님의 말씀의 종이 되기 싫다는 거예요. 그러나 종이 아닌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종이 되든지 아니면 사탄의 종이 되든지. 그걸 로마서 6장에 의하면, 의의 종이 되든지 아니면 죄의 종이 되든지. 그러나 이것은 본인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에요. 인간은 처음부터, 날 때부터 무엇의 종입니까? 죄의 종이에요. 예수님 빼놓고 다 죄의 종입니다. 그래서 천국을 설명하면서 노예, 종이라는 개념부터 시작하는 것이 정당합니다.

 

심지어 빌레몬서는 서신서 편지라고 하는데, 이 편지를 주신 분이 예수님이에요. 그러면 편지를 주신 분이 예수님이니까, 편지의 내용에 복음을 담는 것도 누구의 몫입니까? 예수님의 몫이죠. 그럼 편지의 내용을 성령으로 썼으니까,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거든요. 예수님의 영이 편지를 썼다는 말은, 그 예수님이 이 땅에 이 편지의 내용과 동일한 활동을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활동을 하면서 귀신에 매인 자, 죄에 매인 자를 구원하셨거든요. 귀신에 매였다고 하는 것은, 그거는 단순 패턴으로 보면 귀신에 매인 거고, 보다 더 넓은 패턴, 전체적으로 보게 되면 모든 인간은 죄에 매인 겁니다.

 

귀신에 매였으니까 병이 들 수도 있고, 그래서 중풍병자가 왔을 때에, 중풍병자가 생각하는 것은 중풍병이 들지 않았을 때의 나, 중풍병이 든 나, 이 나의 차이를 봅니다. 중풍병자 자기가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중풍병자가 예수님한테 왔을 때는 뭘 기대하느냐 하면 중풍병이 들지 않았던 때를 기대해서, “이 병 고쳐주세요.”라고 네 명의 친구들이 그 사람을 들고 지붕 뚫고 내려왔잖아요. 근데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소원을 안 들어줘요. 자기 백성일 때는 그 사람에게 소원이 어떤 소원이 있든지 간에, 그 사람을 구원할 때는 구원자 예수님의 일방적인 소망과 소원과 기대를 그 사람 속에 집어넣어버린다 이 말이죠.

 

그게 뭐냐 하면 바로 “네 죄에서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마9:2 막2:5)라고 되어 있어요. 네 죄에서. 그러니까 중풍병자가 나는 중풍병이 걸리기 전부터 죄의 노예라는 생각을 했겠어요? 안 했겠어요? 안 했죠. 멀쩡하고 잘 나가는데, 아무 하자 없고 문제없는데, 무탈한데, 나한테 문제 있다는 그런 생각을 절대로 안 합니다.

 

문제가 있다면 벌을 내릴 건데, 밥 잘 먹고 건강하고 가정화목하고 친구들 네 명이나 되고, 네 명이니까 네 명이 들었을 거 아닙니까? 최소한 네 명 이상이고. 친구가 많다는 말은 인간성이 좋다는 뜻이고, 인간성이 좋다는 것은 그만큼 기존의 생활에서 밥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어서 좀 여유가 있다는 이 말이거든요. 막 지어내면, 사고를 연결시키면 그런 가능성이 있거든요. 추적해보면.

 

만약에 그 중풍병자가 나는 중풍병이 걸렸으니까 나는 죄인이구나, 라고 할 때는, 그거는 중풍병이 걸렸기 때문에 죄인이다. 다시 말해서 중풍병 걸릴 만큼만 죄인이라는 뜻이지, 나는 중풍병이 안 걸려도 죄인이라는 생각은, 이거는 어느 인간도 추호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두 살 쯤 지난 애가 기껏 해야 엄마 것, 네 것, 이것밖에 몰라요. 하여튼 소유관념은 대단해. 엄마 것, 네 것, 이것밖에 없는데, 어떤 애는 나는 죄인이다, 라는 말도 할 수도 있어요.

 

그거는 본인의 의사에 의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할머니가 주입시키는 거예요. “너는 죄인이다. 너는 죄인이다. 십자가 피가 아니면 구원 못 받아.” 글쎄, 두 살 애한테 그렇게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울산의 황전도사님은 그럴 가능성이 있는 모양이라. 어릴 때부터 아주 북한 세뇌 교육시키는 것보다 더 심하게 시켰으니까. 김일성 장군님은 우리의 어버이라고 하는 것하고 똑같이, 그렇게 나는 죄인이라고 시켰겠죠.

 

근데 이렇게 흉내 내는 것 말고, 문장 반복해서 외우는 것 말고, 진정으로 인간이 죄인이라고 아는 것은 성령이 아니면 안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네 죄 사함을 받았노라고 하는 순간, 그 죄인은 비로소 자기가 중풍병이 걸렸든 안 걸렸든 상관없이 나는 어떤 정당성도, 나의 어떤 정당성도 애초부터 일찌감치 포기해야 된다는 거예요. 포기해야 해요.

 

자, 이야기를 다시 해봅시다. 차사고가 났습니다. 두 사람이 만났습니다. 어떤 차가 와서 내 차를 박았습니다. 내가 내리자마자 “주여 죄인입니다. 백번 박아도 합당합니다.”라고 이래 나오면 돈도 못 받고 손해는 혼자 다 보겠죠. 그들의 만남은 우연이지만 사실은 우연이 아니거든요. “당신이 먼저 박았습니다.” “아니, 나는 잘못 없습니다, 백퍼센트당신이 잘못입니다.”라고 뭐 이렇게 다투겠죠. 그게 바로 “안 돼!”에요. “안 돼!”

 

모든 인간의 만남은 서로 좋게 만나자고 약속을 해도 막상 협의해보면 “안 돼!”라는 요소가 한 두 개가 아니고, 심지어 부부사이처럼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안 돼가 더 많이 풍성하게 나옵니다. 안 돼가. 그래놓고 무슨 풍성한 복을 받는다고요? 안 돼가 더 많이 나와요. 안 돼가. 1년 지나고 2년 지나고, 처음에는 뭐 눈에 콩깍지가 씌었는지 뭣도 모르고 결혼했다가 나중에는 6개월도 안 돼서 왜 그리 안 돼가 많이 나오는지, 이것도 틀어지고 저것도 틀어지고, 안 돼가 굉장히 많아요.

 

그때 건드리지 말아야 하는데, 건드리지 말아야 할 단어가 많이 나오죠. “너 친정에서 이래 가르쳐주더냐?”부터 해서 “결혼할 때 혼수 얼마나 해왔노?”라고.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리고. “네 친가 쪽 아버지, 엄마 보니까 네 행세도 참 뻔하다.” 그래놓고 아무것도 모르는 두 살 애한테 네 아버지 닮지 말라고 하면서, 중립에 있는 애까지 갑자기 포섭해가지고 1대1에서 2대1로 숫자 늘리고. 그렇게 안 돼가 너무 많아요. 너무 많기 때문에 나중에는 서로 포기상태에 들어가죠. 무한히 지연된 휴전상태에 들어가는 겁니다. 무한히 지연된 휴전상태. ‘애들 결혼 할 때까지만 참는다.’ 뭐 이런 식으로.

 

이처럼 모든 인간이 죄의 노예, 사탄의 노예 속에 있다면, 사람과 사람의 만남 속에서는 어떤 경우도 예라는 것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장에는 이렇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께서 “정당성이 없는 인간들아! 의가 없는 인간들아! 네 본성만 드러내라. 뭐 이렇게 해주면 저걸로 맹세하겠습니다. 이걸로 맹세하겠습니다. 목숨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맹세한다는 그런 소리 하지 말라.” 마태복음 5장 37절에 보면,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리라”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이게 뭐냐 하면 “안 돼!”하고 “돼요!”하고 같은 말이라는 뜻이에요. 왜? 같은 인간에게서 나온 뭣도 모르는 고백이기 때문에. 자기밖에 모르는 고백이기 때문에. 예, 한다고 해서 진리 아니고 아니요, 한다고 해서 진리 아닌 게 아니라 이 말이죠. 쉽게 말해서 상대방이 나하고 다르다고 해서 내가 진리 되는 것은 아니라 이 말이죠. 그리고 상대방이 내 의견에 동의한다고 해서 둘 다 진리도 아닌 것은 아닌 거예요.

 

발람 선지자가 있죠. 발람 선지자가 예언하러 갈 때 뭘 탔습니까? 나귀를 탔죠. 나귀가 평소에 발람 선지자하고 사이가 좋았어요? 나빴어요? 좋았어요. 한 번도 나귀가 주인 되는 발람의 지시를 어긴 적이 없습니다. 한 번도. 근데 발람을 태운 나귀가 잘 가다가 과수원 길을 가는데 갑자기 뻗대면서 앞으로 안 나가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이랴! 앞으로 나가라고 하니까 나귀가 하는 말이 안 돼,에요. 안 돼. 이렇게 말을 안 했겠지만 하여튼 버티는 거예요.

 

그래서 때리니까 갑자기 말을 하는 거예요.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때립니까? 짐승이 하는 최초의 말이 그거에요. 물론 뱀이 말을 한 것 치면 두 번째이겠지만. “잘못 한 것도 없는데 왜 때리십니까? 내가 평소에 시키는 대로 했는데 안 돼, 라고 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습니까?”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거예요. 눈을 떠보니까 누굽니까? 하나님의 사자, 천사가 와서 딱 버티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발람이 이스라엘에게 저주를 내린 것이 아니고, 저주를 바꾸어서, 저주내리고 싶어도 하나님의 신이 임하니까 이거는 망해 버려라가 아니라, 창대해버려라. 팽창하고 성장해버려라, 하고 축복을 해버렸죠(민수기 22장-23장).

 

제가 하는 말은 뭐냐 하면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이 다 다르잖아요. 얼굴이 다르듯이 다 다르죠. 다르니까 처음에 안 돼, 아니요, 라고 하는 거예요. 민수기 22장에 보니까, 31절 “때에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시매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머리를 숙이고 엎드리니” 33절 “나귀가 나를 보고 이같이 세 번을 돌이켜 내 앞에서 피하였느니라 나귀가 만일 돌이켜 나를 피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벌써 너를 죽이고 나귀는 살렸으리라” 나귀가 안 피하였으면 발람이 죽어요. 그래서 발람은 그 뒤에 23장에 보면 이스라엘을 축복합니다. 물론 나중에는 제 정신으로 돌아오죠. 그러니까 축복한 것이 제 정신이 아니었죠. 아니요에 대해서, 그러니까 저주를 해야 될 대상을 향하여 하나님이 개입해버리니까 뭐예요? 안 돼가 오케이가 된 거예요.

 

바로 빌레몬서는 그걸 이야기하는 겁니다. 자, 여기서 종, 노예에 대해서 언급을 해야 되겠어요. 이건 약간 복잡한 거예요. 두 번째 시간에도 계속 이야기하겠지만. 노예라는 것이 인권에 대한 모독이 아니냐 하는 겁니다. 인간 위에 인간 없고 인간 밑에 인간 없는데, 옛날에는 전부 다 노예가 있었어요. 여기 빌레몬도 노예가 있었잖아요. 뭐 전쟁을 하던 뭘 하던 어쨌든 간에 노예가 있잖아요.

 

노예가 있다면, 노예 없는 사회, 민주주의 사회보다 덜 발달된 거라면, 그러면 노예를 거부하고 노예를 부정하고 노예해방을 외치는 사람은, 그 사람의 신앙과 관계없이 정신상태가 천국의 상태와 동일한 상태가 아닐까요? 인권을 주장했기 때문에. 그리고 과거 사람들은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노예제도가 잘못됐다는 것조차도 몰랐다는 말은 신앙의 질이 훨씬 떨어지는 사람이 아닐까요? 라는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죠.

 

그러나 “뭐, 믿음이 좋다고 한 빌레몬은 자기 노예를 갖고 있고, 빌레몬 이 사람 안 되겠네.”라고 해서 사도바울이 정신 차리고 노예를 해방하라고 했다면, 이건 복음이 아니고 사회운동이 돼버리죠. “예수 믿는 자들아! 예수 믿는 믿음을 천당 가는데 써먹지 말고 사회혁명을 하고 사회를 변화하는데 빛과 소금이 되어야지. 뭐 하느냐? 노예부터 풀어줘라! 집에 있는 노예 다 풀어줘라!” 근데 풀어주면 노예 다 굶어죽는데요? 최저임금 올리니까 다 쫓겨나는데요? 압구정동 아파트 경비부터 다 쫓겨나는데요? 제가 압구정동 아파트 부녀회장이라면 경비들 다 내보내버립니다.

 

편리가 아니라, 현대인들은 자신의 사적 사생활을 철저하게 보호하는 쪽으로 가요. 그래서 자기 아파트 단지에 외부인이 어슬렁거린다는 자체가 돈 문제가 아니고 이게 굉장히 스트레스 받는 문제에요. CCTV를 달아서 하는 것이 낫지, 인간이 하게 되면 인간은 말을 전파하기 마련이라니까요. 아무리 노인네라고 하지만, 뭐 택배 받아주고 애들 노는 것 봐주고 다 좋은데, 그게 문제가 아니고 나의 사적인 비밀을 외부에 유출시킬 가능성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 관계자 외에는 내보내는 것이 마음적으로 편한 거예요. 이건 돈 문제가 아니에요. 돈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들의 상식을 좀 더 깊이 분석해나가야 해요. 돈이 있다. 그러면 될 수 있는 대로 비밀을 유지하고 싶지, 비밀을 공개하고 싶은 사람은 없어요. 돈 없는 인간이 앞집 보면 다 보이고 그렇지. 세상에! 이건희 회장이 사는 것, 돈 많은 연예인들이 사는 것 좀 보세요. 이거는 사람 하나 코빼기도 안 보입니다. CCTV만 쫙 있고. 외판원들 근처도 못 가요. 저 멀리 앞에 있는 경비한테 다 퇴출입니다. 옆집이 옆집을 모르고 옆집이 옆집을 몰라야 이게 고급아파트라니까요.

 

이사 왔다고 떡 가지고 코빼기도 보이지 말라는 거예요. 고독사인지, 뭐 내 맘대로 고독사할 테니까 고독사 했다고 찾아오지도 말고. 얼마나 돈 번다고, 사람하고 상대하는 게 얼마나 피곤했으면. 제발 집구석이라도 남의 눈에 안 띄었으면 좋겠고. 창을 남으로 내서 하늘만 보이고 옆집은 안 보이게 하고. 완전 차단해서 부부싸움을 하든 뭘 하든 소리 안 들리고. 아래층에서 뭘 해도 안 들리고. 오직 스스로 자체적으로 자기 감옥을 만드는 거예요. 자기 감옥을.

 

우리는 그 안에서 사회생활하면서 받은 스트레스를 혼자서 인터넷 게임을 하던 뭘 하든, 하여튼 혼자 노는 재미, 시체놀이죠. 시체놀이를 하든 뭘 하든 다 귀찮은 거예요. 옛날에는 남자가 그리워서 20대에 결혼했지만, 이제는 남자 볼 것도 없어요. 옛날에는 여자가 그리웠는데, 이제는 20대에 여자를 다 알아 버렸어요. 그래서 이제는 결혼도 안 해요. 결혼도 귀찮아요. 결혼도 귀찮고 부모도 귀찮고 혼자 배낭 메고 여러 나라 여행이나 가는 그거지 뭐. 집에서 있는 것 그것도 짜증나. 제발 좀 가만히 놔둬. 건드리지 말고. 10분 쉽시다.
 이미아(IP:122.♡.178.64) 18-01-17 01:06 
서울의존강의201801012b 빌레몬서1장(노예)-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작을 하겠습니다. 여기 보면 사도바울이 갇혀있다는 이야기를 해요. 갇혀있다는 말이 9절에 있거든요.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갇혀있다는 말은, A.D.60-61년 사이에 로마에 두 번이나 세 번, 하여튼 많이 갇혀있었어요. 갇혀있었을 때에 누굴 만났느냐면 거기서 오네시모를 만났는데, 그 오네시모가 감옥에 왜 들어왔는가 하면 주인한테서 도망을 쳤다 이 말이죠.

 

그러면 주인으로부터 도망을 치면 왜 안 되는가? 하는 겁니다. 왜 노예가 주인으로부터 도망을 치면 왜 안 되느냐? 라는 질문이 성립이 안 되는 시대에요. 그 시대는. 왜냐하면 노예는 본인의 주체가 없어요. 주체가 없다는 말은 뭐가 없다는 말이냐 하면 신체가 없어요. 일종의 가구죠. 가구. 신체는 있고 주체는 없어요. 신체는 일종의 가구거든요. 집 안에 있는 가재도구다 이 말이죠. 가재도구인데, 이렇게 좀 움직여요. 근육이 있고. 이 가재도구는 반드시 주인이 있기 마련입니다.

 

근데, 어떤 사람의 가재도구가 이렇게 도망을 쳤다 잡혔으면 다시 그 주인에게 돌려줘야 사회질서가 유지가 돼요. 만약에 종이 도망가는데 그걸 봐주는 법이 돼버리면 사회 전체의 모든 노예들은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아무것도 없는 노예들이 더 피해를 많이 보게 되어 있습니다. 없는 자들이. 뭔가 조금 모자라고 힘들더라도, 안정이 된다는 말은 각자 자기 자리가 딱딱 마련이 될 때 정서적으로 심리적으로 안정이 돼요. 애굽 나라에서 살던 히브리인들이 안정이 되니까 식구가 많이 늘어났어요. 안정이 되니까. 불안할 때는 자식도 유산이 되고 안 돼요. 안정이 되게 되면 자식도 순풍, 순풍 많이 낳잖아요.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그 애굽에서 나갈 생각을 안 했어요. 너무 힘드니까 법을 좀 완화해달라는 요청이지. 만약에 히브리인들한테 바로를 따를래? 아니면 모세를 따를래? 라고 선택을 하라고 한다면, 그들은 당연히 바로를 따릅니다. 모세는 나가자는 이야기고 바로왕은 힘들지만 이 자리에 있으라는 이야기고. 그게 노예죠.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노예생활을 한 거예요. 안정된 노예가 낫지, 이건 죽도 아니고 밥도 아니고 길거리에 나앉게 된다는 것은, 이건 애굽보다 더 심한 노예가 될 가능성이 많아요. 땅이 없다는 것은 양식을 구할 수 없다는 말이고, 근데 애굽에서는 양식이 없으면 자기 신체를 팔아가지고 아무 주인이라도 찾아서 밥이라도 얻어먹을 수는 있다는 말이죠. 밥이라도.

 

남자들이 직장 힘들다고 나오게 되면, 미생이라는 드라마에 나왔어요. “직장생활은 전쟁이다. 하지만 직장 그만두고 밖에 나가면 지옥이다.”라고. 전쟁할래? 지옥갈래? 지옥보다 전쟁하는 게 낫다. 힘들더라도 버텨야지 그냥 직장 나오면 이거는 지옥생활이다. 이 말이거든요. 이게 히브리인들한테 딱 적용이 되는 거예요. 살아온 가락이 있잖아요. 살아온 노하우가 있고. 이미 애굽 사람들하고 친하게 지내고 있는데, 힘들고 싫겠지만 애굽 사람들이 죽지는 않을 만큼 해요. 노동력이 없어졌기 때문에. 옛날에는 기계가 노동한 것이 아니고, 옛날에는 사람의 힘이 기계를 대신했습니다. 피라미드를 만들 때도 그랬고요. 전부 다 사람의 힘이기 때문에 노예들이 그렇게 필요한 거예요. 엘리트들은 쉬고 노예들은 일을 하고.

 

그래서 그 자체로 질서가 정교한 하나의 기계처럼 잘 돌아가는 겁니다. 노예 하나 빠져버리면 전체가 안 돌아가요. 안 돌아갈 때는 전쟁을 해서라도 그 빈자리를 다른 나라에서 잡아와 메우는 일들을 왕들이 해야 되는 겁니다. 국가가 이런 사회질서를 갖추는데요. 리즌 reason, 이성이죠. 이것이 바로 이성체제가 되는 겁니다. 이성체제. 이성적인 것. 따져서 하는 것. 따라서 노예의 특징이 뭐냐, 따지지 말라. 그냥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하면 해야 돼요. 창세기 39장에 보면 유명한 노예가 나옵니다. 이름이 요셉이죠. 종으로 팔렸잖아요. 요셉이 종으로 팔린 것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낮아진 것과 같은 겁니다.

 

종으로 팔렸는데, 요셉이 준수하니까 애굽 바로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을 하죠. 유혹을 했을 때, 요셉이 보디발을 생각해서 거절했어요. 이 집의 모든 것은 다 허락받았지만 누구는 허락받지 않았다? 보디발의 아내만큼은 허락받지 않았다. 이렇게 되거든요. 허락이라는 말이 무슨 뜻이에요? 본인이 알아서 결정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이거 이거는 네가 알아서 하라고 이미 지정해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요셉의 이 종의 모습이라든지, 신체는 있고 주체는 없는 이 모습이,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지금 우리의 이야기라고 보면 돼요. 우리의 이야기. 우리가 지금 이런 입장에 있어요.

 

우리는 사탄의, 죄의 종이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 낮추거나 겸손하거나, 안 그러면 자기 의를 포기하고 싶어도 욱하는 내 깊은 심정에서 자기주장과 자기 정당성을 놓치기 싫어해요.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쉽게 말해서 모든 인간은 누구를 대적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십자가를 배척하는 속성들을 지니고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모든 인간이.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다면, 오히려 그걸 다시 한 번 조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거 뭐 구라 아냐? 그럴 리 없어!”라는. 어떻게 인간이 복음을 받아들일 수가 있어요? 인간이? 자기 정당성, 자기 의를 어떻게 하루아침에 그걸 왕창 다 버릴 수가 있어요? 뭐 인간은 자존심도 없는 거예요? 자기 의, 자기 자존심 전부 다 같은 이야기가 아닙니까?

 

예수님의 복음을 받는다는 말은 십자가 앞에서 나의 자리는 어느 자리다? 죄인의 자리거든요. 제가 말 틀리게 했습니까? 십자가에서 누구보고 피를 흘렸습니까? 잘난 사람보고 피를 흘렸습니까? 십자가와 연계되어 있는 자가 누구에요? 스스로 자기 죄를 못 벗어나는 사람이죠. 아닌가? 저는 이걸 맞는다고 보는데요. 스스로 자기 죄를 못 벗어나게 되면 그 사람은 갇혀 있죠. 죄에 갇혀 있는 죄인이 맞죠. 십자가 바라볼 때마다 “나는 착합니다. 내 주장이 옳습니다.”라는 그런 소리를 하면 안 되죠. 어떤 손해가나도 아니요, 안 돼요, 라는 소리를 하면 돼요? 안 돼요? 그냥 예, 예, 하는 겁니다. 의의 종이 그런 겁니다. 의의 종이. 예, 예, 그렇게 할뿐이다 이 말이죠.

 

그런데 죄의 종은 사탄이 배후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뭐든지 다 시키면 해주겠지만, 아예 나의 의도 없고, 나의 정당성도 없다는 그 소리만큼은, 그 말만큼은 제발 하지 말아달라고 하는 거예요. 제발 그 말만은. “너는 지금 죽어도 마땅해, 라는 그러한 부정적인 소리는 저한테 하지 마세요. 저한테 용기를 부여해주시고 위로해주세요. 외로워요. 위로받고 싶어요.” 이런 식이다 이 말이죠. 다 같은 인간이 다 이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다 같은 인간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특이한 인간이 등장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 질 때에 양쪽에, 사이드에 십자가 두 개가 또 있었어요. 그러면 십자가가 세 개에요. 십자가 달린 사람이 세 명이죠.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 라고 할 때 예수님은 기본적으로 의인이니까 구원받고, 그러면 나머지기 두 사람도 기본적으로 십자가 졌으니까, 예수님하고 십자가 졌으니까 구원받겠네요? “아니요”죠. “아니요”에요. 그러면 예수님은 의인이기 때문에 구원받고 나머지기는 죄인이기 때문에 구원 못 받는다? 그것도 “아니요”죠. 아니요.

 

그렇다면 이게 다 같은 죄인이고 강도인데, 예수님의 은혜를 입는다면 둘 자체를 가려내는 기준이 투입이 되어야 되겠죠. 그러면 그 기준은 어디서 나와야 돼요? 가운데 있는 십자가에서 나와야 되겠죠. 십자가는 뭐냐, 십자가는 외부에서 볼 때는 똑같은 인간인데, 똑같이 보이는 것이 아니고 둘 사이를 따로 분류되게 하는 능력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나를 구원하는 용도의 십자가가 아니라, 저쪽에서 나를 떼 내었음을 내가 알 수 있게 하는 것이 십자가에요. 저 사람과 내가 다를 바가 없는데, 똑같은데, 하나님께서 이런 혜택을 전혀 줄 필요도 없어요.

 

이번 수련회 9강, 제일 마지막에 왁스의 ‘화장을 고치고’라는 노래가 나오죠. 이무 것도 해준 게 없고 받기만 했는데, 나 같은 여자를 왜 사랑하는지. 그 뒤에 가사는 안 하겠어요. 왜 떠나야 하는지 하게 되면 이게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에. 나 같은 여자를 왜 사랑하는지. 아무것도 한 게 없고, 그 다음에 뭡니까? 그 다음이 참 은혜롭죠. 뭡니까? 받기만 했죠. 명품가방에다가, 놀러가는 것에다가, 식사에다가... 뭐 받기만 했는데, 해준 게 없고 받기만 했는데, 그 다음에 나온 게 뭐냐 하면, “그래, 이 정도 예쁘니까 나한테 해줘야 된다.”라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왜 나에게 알아서 주인 노릇을 하십니까? 주여!” 이 말이에요. 나는 누구의 종인 게 지극히 지당하다는 그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그 가사가 참 특이해요. 보통은 스스로 일어서라, 네가 결심하라고 하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선택이란 언제나 둘 중의 하나라고 했잖아요. 그렇죠. “처음으로 돌아가겠어. 이곳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아.”서울의 달이라는 드라마 주제곡이에요. 장철웅이 부른 노래가 있어요. 한석규 나오고 채시라 나오고 하는 드라마인데, ‘서울의 달’ 그 노래에요. “어울리는 사람끼리 끼리끼리 놀아라. 나는 이곳이 어울리지 않는다.” 여기서 처음으로 돌아가겠다는 거예요. 처음으로. 선택을 하는데, 선택은 언제나 둘 중의 하나에요. 그런데 처음이 어딘데? 이 가사를 보면 자기가 종이 아니고 자기 미래는, 자기 운명은 본인이 결정할 수 있다고 계속 우기고 있는 거예요.

 

오늘 빌레몬의 이야기는 뭐냐 하면 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종에 관한 이야기인데, 이 종은 누가 편드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이 사도바울이 누구 편을 드는가 하면 오네시모라는 종의 편을 들어버려요. 그럼 이 오네시모는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가, 다시 노예가 돼야 합니까? 이 빌레몬의 노예로 돌아가는 게, 처음으로 돌아가야겠어, 이게 해결책입니까? “오네시모 이리와. 왜 주인이 따로 있는데 도망쳤어? 예수 믿는다고 하니까 봐줄게. 집에가!”라고 이렇게 했습니까? 이 빌레몬의 내용이?

 

집에 가는 것이 아니고, 빌레몬의 허락을 맡고, 그 다음부터 다시 빌레몬에게 보내지 않고, 누구의 동역자로 삼겠다? 사도바울이 복음 전하는데 오네시모를 나와 같은 동등한 형제로 간주해서 내가 복음 전파에 사용하겠다. 이 내용이잖아요. 요즘 사람들은 이 내용을 보면 “뭐, 사람이 쓸 만하면 그럴 수도 있지.”라고 하잖아요. 근데 옛날 노예를 몰라서 그래요.

 

옛날 노예란 이성적체제입니다. 이성적 체제란, 따지고 판단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성에서 뭘 만들어내느냐 하면 지식을 만들어내요. 이 지식은 곧 뭐냐 하면 경제생산으로 이어집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뭐 경제생산을 한다고 해서 노동자들만 지식이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생산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를 지배하는 관리체계 전부 다 이성적 지식이 필요해요.

 

이 말이 약간 어렵기 때문에 쉽게 하겠습니다. 이번 수련회 때 첫째 강의 제목이 뭐였던가요? 패턴이죠. 자연세계는 전부 다 무작위죠. 무작위. 01010110, 제가 이렇게 했잖아요. 왜 이렇게 합니까? 1234566789 또는 13141516...뭐 이렇게 하지 왜 이렇게 합니까? 라고 하는데, 인간이 보기에 인간의 선택은 항상 이거 아니면 저거에요.

 

나는 히아신스를 좋아한다고 하면 그 선택하는 순간 뭡니까? 나는 히아신스라는 꽃을 좋아하는 사람인 동시에, 내가 히아신스를 좋아함으로서 히아신스를 싫어하는 사람을 의식하게 되어 있어요. 나는 빵을 좋아한다는 그 순간, 예를 들어서 선을 보는데 “우리 식사는 조금 있다가 하고 빵을 시킬까요?”라고 하는 순간, 여자 쪽에서 “저는 알레르기가 있어서 단 빵을 못 먹어요.”라고 하는 순간, 벌써 0과 1이 구분이 되어 버렸죠.

 

처음에는 아무 구분이 없던 것이 한쪽이 자기 의사를 나타냄으로써 저쪽과 구분이 되죠. 그럼 자기가 1이라면 저쪽은 0이 되고. 저쪽이 1이라면 당연이 나는 0이 되는 거예요. 인간은 자연적으로 무슨 체제를 만들어낼 때는 따지게 되어 있어요. 따지는데 누굴 위주로 따져요? 자기의 성질, 자기의 속성, 자기의 취향, 이런 입장으로 모든 것을 분류를 해나가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세계를 형성하게 되어 있다 이 말이죠. 자기의 세계를.

 

자식이 친구를 데려오면 엄마는 몰래 분류체계에 들어갑니다. 저 친구를 계속 사귀라고 해야 될 친구인지, 사귀지 말아야 될 친구인지. 그러면 거기에 해당하는 게 이성적인 판단이 들어가죠. “그 애 너희 반에서 몇 등 하노?” “너그 아버지 뭐하시노?” “조폭인데요.” “놀지 마라” 시계 풀어 놓고, “이 자식이 지금 장난치나? 이게 친구가?” 모든 것은 이성적 판단입니다. “너그 아버지 뭐하시노?” “교도소에 있습니다.” “교도소?” “이게 어디 장난치나?” “우리 아버지 교도소 소장인데요.” “아이고, 알았다. 미안합니데이.”

 

‘슬기로운 감빵생활’이라는 드라마를 보게 되면 어떤 할머니가 촌에서 음식을 해가지고 바리바리 싸들고 그 새벽에 택시를 탔는데, 택시 운전사한테 우리 애가 잘 있는지 걱정을 하면서 이야기해요. 그래서 택시 운전사는 ‘감옥에 있는 자기 아들한테 면회 가는구나.’라고 이렇게 생각해서 택시 값을 안 받고 그냥 보냈어요. 나중에 보니까 교도소에 잡힌 자식을 면회 가는 게 아니라 교도소에서 근무하는 직원 면회를 간 거였어요. 택시 운전사가 깜빡 속았어요. 시험 쳐서 합격해 교도소 직원이 된 아들 면회를 간 거예요.

 

그래서 제가 수련회에서 했잖아요. 남 도와주지 말라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정보를 알고 하라 이 말이죠. 징징댄다고 다 도와주면 안 돼요. 징징댄다고 예, 하면 안 돼요. 안 될 때는 안 된다고 하란 말이죠. 사람이 왜 징징댑니까? 아까 했죠. 자기 정당성, 나는 징징댈만한 권리가 있다고 징징대고 있는 거예요. 인간에게 무슨 정당성이 있어요? 없는데.

 

자, 여기서 어렵습니다.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대목이 나와요. 왜 사도바울은 남의 물건에 개입합니까? 옛날의 종은 물건이었어요. 물건. 신체라는 물건덩어리만 있고 주체가 없는 거예요. 주인이 따로 있다 이 말이죠. 그 주인이 빌레몬인데, 왜 이 주인과 종 사이에 사도바울이 개입을 합니까?

 

사도라고 해서 너무 건방진 게 아니에요? 만약에 목사가 이사 가면서 목사라는 이름으로, 교인이 월급주고 데리고 있는 그 교인 직원을, 목사라고 자기 맘대로 우리 집 이사하는데 일 좀 해달라고 하면 되겠어요? 안 되죠. 월권이죠. 월권. 이사 자기가 하면 되지, 이삿짐센터 많이 있잖아요. 얼마 전에 천주교 신부가 이사하는데 도와준 거 있어요. 실제로 이런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사도바울이 왜 개입하느냐, 문입니다. 무슨 문? 천국의 문이거든요. 물론 천국의 문은 예수님이죠. 이 예수님의 원칙을 누구한테 전합니까? 사도한테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전하잖아요. 지금 예수 믿고 난 뒤에 형제간에 어떻게 사느냐, 어떻게 친하게 지내느냐, 이게 문제가 아닙니다. 항상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 복음이 어느 지점에, 어느 장소에, 어느 순간에, 어디에 있더라도 그것은 천국의 문입니다. 문이라는 말은 열려있다는 의미보다도 현시국은 닫혀있다는 것에 더 우선이 되어야 해요. 닫혀있다.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복음은 문이에요. 그러면 교회는 문이다, 문이 아니다? 천국의 문이 아닌 거예요. 복음이 없는 교회는 천국의 문이 아니에요. 그냥 벽돌로 가두어졌지, 벽돌 채 다 지옥 갑니다. 왜 교회에 복음을 전해야 되는 이유가 뭐냐, 교회에 사람들이 건물 중심으로 모였다고 해서 그게 천국의 문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길이 아니고, 진리가 아니고, 생명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난 낮 설교에 제가 생명이야기를 하면서 두 개를 대비했어요. 자기 몸 챙기기 위해서, 자기 몸은 아까 이야기한대로 신체죠. 자기 신체 챙기기 위해서 꾸역꾸역 먹는 그 먹는 행위와, 이쪽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 행위와, 한쪽은 죽음을 먹고 한쪽은 더 살고 싶어서 음식 처먹고. 주님보시기에 어느 쪽이 복음 쪽이에요? 죽음을 먹는 거예요. 죽음을. 살과 피 죽음이라는 것을 먹는다고요.

 

그래서 교인들이, 성도도 마찬가지지만, 제가 보기에 가장 답답한 것은 본인들이 알고 있는 복음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몰라요. 본인들이 시시하게 간주해요. 시시하게. 복음이야기를 했는데 그걸 자기 자존심과 관련시켜서 처리해버려요. 그 진정성과 취지를 못 알아들어요. 복음과 관련해서 제안을 했는데, NO! 라고 단칼에 거절해버려요. 복음인데.

 

자, 정리해봅시다. 복음이란 뭐다? 십자가. 십자가만 복음입니까? 아까 강도이야기 했죠. 강도를 이 사람과 저 사람으로, 둘로 분류했잖아요. 그럼 복음을 전했을 때, 한쪽은 뭐냐 하면 우선 나부터 풀어주라고 나오고, 한쪽은 나는 죄인이라고 나왔죠. 그러면 십자가 복음은 상대의 짝이 있어야 해요.

 

뭐냐 하면 피를 흘리신 분과 자기 죄를 아는 거예요. 아까 인간은 돌아간다고 했는데 어디로 돌아간다고 했습니까? 늘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쪽으로 돌아가 있어야 해요. 죄인의 자리로 후딱 가야 돼요. 그 자리가 본인의 자리에요. 그 죄인의 자리에 가게 되면, 죄인의 자리가 자기의 자리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요청하면 안 돼요.

 

그 자체가 글러먹었어요. 죄인이면 벌을 받아야지 왜 구원을 해달라고 해요. 그래서 죄인의 자리에 옹기종기 모여 있으면 건져갈 자는 건져가고 내버려두면 그건 지옥가고. 뭐 그런 거지 뭐예요. 그런 거예요. “우리에게 문을 달라!”라고 요청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냥 문이 와서 “내가 문이다.”라고 알려주면 열린 문으로 천국에 가고, 그게 없으면 가둬져 있고 닫혀있는 거예요.

 

제가 얼마 전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인간은 수용소에 갇혀있으면서도 수용소에 갇혀있는 줄 모른다고 했어요. 수용소에는 갇혀있는데, 수용소 자체를 느끼지를 못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안이 너무 살기 좋으니까. 이게 이성의 체제에요. 이성의 체제에서는 질서를 갖게 되어 있고, 여기서 질서를 갖는데 질서를 가지는 그 위치는 이성의 체제에서 생산된 지식이 많은 쪽이 갑이 되고 주인이 되고, 지식이 없는 쪽은 을이 되고 종이 되는 관계에요. 이 관계가.

 

이 전체를 옛날에는 국가가 대표적으로 이야기를 했지만 지금은 미시권력이라고 해서 병원, 학교, 군대, 공장, 감옥, 교회, 그리고 가정, 공장을 기업으로 봅시다. 그러면 요새 농사도 기업이니까. 고기 잡는 것도 기업화됐으니까. 병원, 학교, 군대, 공장, 감옥, 교회, 가정. 여기에 빠진 게 없어요. 예술계까지 전부 다 들어있는 거예요. 이걸 하나로 누가 묶는가 하면 국가가 전체를 묶는 것이 아니에요. 자본주의라는 경제원리가 하나로 묶어요.

 

왜냐하면 자본주의라고 하는 이것은 이성적 체제거든요.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물건을 사기 위해서 돈을 버는 것이 아니고, 돈을 벌기 위해서, 돈이 돈을 벌기 위해서 물건을 사는 겁니다. 돈부터 모아놓고, 처음에는 뭘 사기 위해서 돈을 구했지만 이제는 돈부터 모아놓고 뭘 살 것을 결정하는 거예요. 근데 그걸 사더라도 그냥 물건을 구입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자본이 재생산되는 쪽으로 물건을 구입해요. 차를 구입한다든지, 아파트를 구입한다든지 할 때, 이것을 나중에 팔면 얼마나 이윤이 남을 것인가를 계산하는 거예요. 빌라보다는 아파트. 왜? 나중에 팔 때 살 수요층이 많으니까.

 

이 사고방식이 뭐냐 하면 쓰기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고, 돈을 모으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근데 돈을 모아서 뭐 할 거냐? 돈 모아서 돈 모으기 위해서 돈 모으죠. 그럼 돈 모아서 돈을 왜 모으나? 또 돈 모으기 위해서. 왜냐하면 돈을 모아 놓아야 선택권이 넓어지니까요. 저 사람을 부릴지 말지 내가 결정하고, 저걸 살지 말지 내가 결정하니까. 근데 돈이 없어버리면 구매권이 없잖아요. 옛날에는 구매 결정을 누가 했느냐 하면 왕이 했어요. 왕은 모든 것에 약탈권을 갖고 있어요. 약탈권. 그냥 일방적으로 가져오라고 하는 수용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왕입니다.

 

지금은 이걸 누가 하느냐 하면 자본가들이 해요. 돈이 있는 사람이 물건을 가지고 와서 사고팔고 해요. 자본가가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 돈의 노예가 된 상태에요. 잘 사는 사람이나 못 사는 사람이나 모든 사람이 돈의 노예가 된 상태입니다. 죄의 종이죠. 사탄의 종이에요. 돈을 왜 모으는가, 돈이 있을 때 비로소 사회에 나가서 내가 여기에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사회는 나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갖고 있는 돈, 그것을 신용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내가 갖고 있는 그 돈을, 신용을 인정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신용을 많이 확보한 사람이 자본가고, 신용이 없는 사람은 바로 빈털터리에요.

 

그러면 이건 뭐냐, 옛날에는 신체를 위해서 돈이 필요했는데, 이제는 돈의 신체가 돼요. 돈을 표현하는 신체. 이 신체덩어리가 얼마짜리 돈인지, 돈으로 표현하는 그런 신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남녀가 선을 본다. 두 돈 덩어리가 만나는 거예요. 돈 덩어리가. 정상이 아니죠. 이건 미친 거예요. 그래도 교회가 있잖아요? 교회도 돈이 없으면 안 된다니까요. 돈이 없으면. 교회라는 기업자체도 돈이 없으면 안 돼요. 돈을 모으려면 손님 모아야 되고. 손님 모으기 위해서 고객이 왕이라고 해야 되고. 사람을 기쁘게 해야 돼요.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 사람을 좋게 하면 주의 종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건 굶어죽는다는 소리에요.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으면 교회가 안 된다니까요. 교회이름부터가 사람을 기쁘게 해야 돼요. 행복나눔교회. 축복교회. 행복의 나라. ‘행복의 나라로’라는 노래가 있잖아요. 창문을 열어라~♬ 하여튼 교회 이름도 너무 긍정적인 이름들을 많이 해요. 긍정적인 이름을. 죽자 교회 봤습니까? 피 교회 없어요. 제가 알기로는 피 교회라는 이름은 없어요. 저거 정육점인가? 이러니까. 행복나눔교회라고 해놓고 밑에 표어도 해놓죠. 표어도 뭔가 희망적으로 해놓아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뭐 이런 거.

 

하나님은 사랑이 아니고 저주입니다. 이 엉터리 같은 죄의 몸을 죽여 버리는 거예요. 죽이시는 주님이십니다. 죽여주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잖아요. 그 십자가에 같이 달려야 해요. 혼자 십자가에 달리면 안 돼요. 우리를 죄인으로 달리도록 주께서, 성령께서 이끄십니다. 우리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실 때, 그 옛사람에게서 쏟아지는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이러한 것들을 따지는 것, 이성적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탄의 종의 특징이 뭐냐, 나는 종이 아니다. 나는 자유자다. 나는 모든 결정을 내가 할 권한이 있다. 그래서 천하의 인권운동이 사탄의 종이에요. 그러나 정작 주님의 종은 뭡니까? 나는 주님의 종이다. 복음의 종이다. 복음이 나를 낳았다. 이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빌레몬서 1장 10절에 나오죠.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니”라고 이렇게 되어 있죠. 오네시모가 재벌입니까? 이 사람에게서 어디 얻을만한, 챙길만한 내용이 있어요? 십일조 꼬박꼬박 할 사람 같아요? 아니죠.

 

그냥 복음의 종이잖아요. 복음의 종.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말은, 천하보다 귀한 것을 갖게 된 사람, 얻게 된 사람을 말합니다. 천하보다 귀한 것.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교인이나 성도 자체가, 자기가 얼마나 귀한 줄을 몰라요.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1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께는 모든 것이 예가 되고 아니라는 말은 있었다고 했습니까? 없었다고 했습니까? “아니요”가 없어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아니요”가 없죠. “아니요”가 없다는 말은 안 돼요, 라는 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복음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안 돼!”라는 말을 주님의 성령에 의해서, 누구한테 꿇릴 필요도 없이, 확신 가운데서 안 돼요, 라고 말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너희의 종이 아니다. 나는 주님의 종이니라.” 그럴 때 우리는 그 사람이 성질 더럽다고 하지 말고, 박수를 치면서 반가워해야 해요. “세상에! 주님이 살아계시는구나.” 안 돼, 라고 하면 당하는 불이익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오케이 하는데 안 된다고 한 사람이 있죠. 400대 1로 붙은 사람이 있습니다. 미가야 선지자.

 

아합하고 여호사밧하고 아람나라하고 전쟁할 때(왕상22장), 미가야 선지자가 나서서 과감하게 “안돼요!”라고 했어요. 자, 미가야 선지자가 과감하게 나서서 “안돼요!”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은 뭡니까? 다른 사람은 수평적인 것을 봤죠. 수평적인 세상, 같은 인간들을 본 거예요. 인간들의 안정적이고 밥 먹여 살리는 그러한 이성적 질서체제를 본 겁니다.

 

다시 한 번 봅시다. 이성적 질서체계는 지식을 생산하죠. 그러면 지식의 양으로 하게 되면, 지식이 높은 사람은 지도자 위치에 있고, 지식이 낮은 사람은 이건 어쩔 수 없이 종이 되어야 합니다. 그 이유를 설명할게요. 지식의 체제가 피라미드(△)형식이거든요. 맨 위쪽에서는 많은 지식이 요구가 돼요. 만약에 종을 이 자리에 집어넣게 되면 이게 돌아갑니까? 안 돌아갑니다. 이 자리는 많은 지식이 필요한 자리에요.

 

일반직원들이 한 보고서를 대리가 받고, 대리가 과장한테, 과장이 차장, 차장이 부장, 부장이 사장, 사장이 회장이나 임원들한테 하죠. 그러면 맨 위에 있는 사람들은 노는 사람들처럼 보이죠. 이 사람은 세 명의 부장이 갖고 있는 것 그것을 검토를 하는데, 그럼 세 명의 부장이라고 하는 것은 세 명의 부장의 개인적인 사견입니까? 아니죠. 세 명의 각 부장은 세 명의 차장이 갖고 있는 것을 부장이 관리했잖아요. 그럼 세 명의 차장은 자기 의견이 아니에요. 세 명의 과장이 갖고 있는 것을 가지고 하잖아요. 그럼 과장은 자기 의견입니까? 아니죠. 세 명의 대리, 이 대리는 세 명, 다섯 명, 열 명의 직원들이 갖고 있는 것이죠. 이 모든 것을 맨 위에서 총괄하고 결정한다는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전체를 다 봐야 되는 거예요. 패턴이 단수한 것이 아니고, 패턴이 복잡한 거예요. 복잡하기에 전체를 유지하고 관리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맞는 규칙을 세우는데 그게 무슨 체계냐 하면 법체계에요. 법체계. 이성체계는 뭐로 나간다? 결국 이성체계의 표면은 법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이 법을 아주 정교하게 만든 쪽이 뭐냐 유대교 아닙니까? 예수님이 누구한테 죽었습니까? 유대교한테 죽었잖아요. 유대교는 주장하기를 율법해석 자체를 하늘의 문이라고 주장한 겁니다. 하늘의 문.

 

제가 하늘의 문이라고 주장했다고 했는데, 주장했다는 말을 빼고, 만약에 우리가 랍비라면, 지도자의 위치에 있다면 이건 주장이 아니고 진리가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이유가 유대교는 전통적인 조직이에요. 그 시대에 자기들이 단순하게 결정해서 법을 만든 게 아니에요. 아브라함 때부터 내려오고 누적되어 있는 신학 체제가 있어요. 말씀에 대한 주석들이 있어요. 그 주석들을 어릴 때부터 달달 외우게 합니다.

 

이거는 현재에 있는 인간들의 지혜뿐만이 아니고, 자기의 선배들, 고매한 신앙인, 순수한 신앙인이라는 것을 자랑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했어요. 그 해석으로 신앙이 월등히 높다고 소문이 났기 때문에, 그 해석도 진리에 근접했다고 우리가 이성적으로 판단이 가능하거든요. 하나님 보시기에 아, 정말 진리에 가깝구나, 하는 지식들을 모아 모아서, 집대성해서 거기다가 현시대를 맞췄기 때문에 선배들이 미처 몰랐던 새로운 사태에 대해 거기에 대한 적절한 대응책과 규칙들이 추가가 되겠죠.

 

그래서 제가 주일날에 설교하면서 한국교회의 모든 이론은 유대교라고 했어요. 신학이 유대교입니다. 유대교의 특징을 뭐라고 했던가요? “기적으로 구원받고 그 기적의 은혜에 감사한 사람이 말씀 지켜서 영광 돌린다.” 이게 유대교의 논리가 아닙니까? 이게 유대교의 논리에요. 유대교는 두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성전 자체를 기적으로 보기 때문에 하나님이 성전을 지켜줄 것이다. 스가랴의 예언에 의하면 감람산에 메시야가 와서 두 발을 딛고 설 것입니다. 그걸 하기 위해서, 오실 때 원활하게 맞이하기 위해서 우리는 바리새인처럼 말씀에 충실해서, 말씀에 충실하려면 뭐가 생산이 되어야 하느냐 하면, 말씀이 지식이잖아요. 이 지식을 누적시키면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 이게 거룩이 되고 이게 경건이 된다는 겁니다. 말씀덩어리니까.

 

어떻습니까? 방금 이야기한 이것이 하늘의 문입니까? 자,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여러분이 한 번 이야기해보세요. 이 유대교사상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습니까? 예수님이 지적했거든요. 예수님은 그들의 배후를 지적합니다. “너희들은 악마의 자식이다. 너희 애비는 악마다. 다시 말해서 너희들은 악마의 종이다.” 그들의 이성 자체가 결국은 뭘 변호하느냐 하면, 오실 메시야와 정반대가 되는 논리를 지금 유포시키고 있는 거예요.

 

자, 강의를 잘 들었는지 한 번 확인해보겠습니다. 자, 인간의 타고난 논리가 뭡니까? 뭘 항상 상상한다? 자기 결정에 대해서 정당성과 자기 의로움을 항상 유지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굉장히 자유롭게 보이죠. 내가 결정했으니까. 근데 배후에, 자기 정당성과 자기 의로움을 추구한다는 것은 배후에 누가 있다? 마귀가 그렇게 한 거예요. 가인이 아벨을 죽일 때, 자기는 정당하죠. 그러나 배후에 누가 있었습니까? 사탄이 가인을 시켜서 죽여 버린 거예요.

 

그러면 인간은 아니요, 라고 누가 누구보고 이야기를 해야 돼요? 남보고 이야기할 게 아니고 매일같이 누가 누굴 보고 이야기해야 돼요? 내가 나보고 너는 아니야! 라고 해야 돼요. 너는 아니야!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이 계속 만들어지고 솟아오르거든요. 뭔가 알게 되면 그것이 천국에 보탬이 되는 줄로 알고 있어요. 천국의 문은요, 우리가 지식을 보탠다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로만 열리게 되어 있어요. 그걸 아셔야 돼요. 예수님의 피가 중요하지, 피 더하기 우리의 행함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우리는 예수님 앞에서 어떻게 들어가든 우리는 죄인이라는 그 고백이 더욱 우리에게 표면적으로 피의 효과로서 나타나야 되는 겁니다. 지금 사도바울은 망가지는 거예요. 내가 빌레몬의 편에 서는 것이 아니고 오네시모의 편에 선다는 말은, 사도이면서도 그 당시에 가장 천한 종의 편을 들어버린 거예요.

 

이건 사도바울이 문인데 망가져 보이는 문이 된 거예요. 그렇다면 빌레몬이 사도바울의 말에 동의하려면 주인 입장에서 종을 포기해야 될, 그 시대에서 이성자체를 포기하고 비이성적인 행동을 해야 돼요. 자기도 같이 망가져야 해요. 따라서 사도바울은 빌레몬 복음 내에서 오네시모도 망가지고, 이건 자칫하면 잡혀 죽어요.

 

지금 사도바울이니까 보호해주지 다른 사람한테 걸렸으면 죽어요. 경찰한테 걸렸으면 죽는다고요. 오네시모도 망가졌고, 몰락이죠. 몰락. 사도바울도 몰락. 사도바울 배후에서 해주셨던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몰락. 빌레몬도 몰락. 이 말을 달리하면, “나는 나라고 할 게 따로 있으면 안 돼.”라고 나를 지적하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나를 나에서 떼 내어야 해요.

 

이번 수련회에서 마지막에 히스기야 이야기를 했죠. 하늘의 징조가 있는데, 이미 물 건너갔는데, 자기가 왕으로서 더 살겠다고 이야기한 것은 왕 노릇 더하겠다는 거예요. 이 이스라엘을 바벨론에 넘겨주지 않고 자기가 왕 노릇해서 자기 힘으로 한 번 버텨보겠다는 거예요. 그 히스기야 시대가 이사야 선지자 때 시대거든요. 주님께서 “히스기야 힘내라! 힘!” 이랬습니까? 아니죠. 이미 노선이 어디로 갔습니까? 히스기야 노선이 아니고 이사야를 통해서 나온 미지의 노선,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는 그쪽 노선으로 갔잖아요.

 

그렇다면 선지자가 제시한 그 노선에 비해서 히스기야가 버티려고 하는 그 노선은 하자를 드러내야 하죠. 그 하자가 살려달라고 기도해서 15년 더 산거예요. 제가 이번 강의하면서 했죠. 왕들의 특징이 뭐냐, 살려주세요! 선지자의 특징은 죽으면 죽으리라! 어느 쪽이 하늘의 징조입니까? 오실 메시야의 모습이 어느 쪽입니까? 예수님이 살려달라고 빌었어요? 어떻게 했어요? 내 영혼을 거두어달라고 했죠. 자기 영혼을. 죽어야 된다는 사실, 이 쓴잔을 마셔야 된다는 것을 아는 거예요.

 

우리 자신들은 워낙 나의 정당성, 나의 결정은 옳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남들로부터 수모를 당해도 괜찮아요. 왜냐하면 우리는 십자가에서 구원받은 강도기 때문에. 지금 십자가에 매달렸다고 생각해보세요. “야, 저리 안 가나! 웃어?”라고 화 낼 잽이 못되죠. 우리는 주님만 쳐다봐야 하는데, “개들 좀 치워라!”라고 하면서 십자가에 달려서도 화내고 있고. 아마 지옥 간 십자가에 달린 한편 강도는 그렇게 했을 거예요. “사진 찍지 마! 사진 찍지 마!”

 

이쪽은 찍든 말든, 개가 짖든 말든, 애들이 놀리든 말든, “너는 이 세계를 몰라. 주여, 저를 용서해주세요.” 나를 생각해달라는 이야기가 용서해달라는 이야기에요. 주님 용서해달라고 할 때, 용서해달라는 말은 강도 자신이 이성적으로 한 게 아니고 이미 믿음이 왔기 때문에, 주님께서 일부러 십자가가 어떤 효과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한 강도에게 이미 믿음이라는 것을 줬어요. 줬기 때문에 이런 고백이 나온 거예요. “네가 오늘밤에 낙원에 나와 함께 있으리라”

 

낙원에 가면 된 거 아닙니까? 어떤 분의 따님이 공무원 시험 봐서 합격됐는데, 공무원 합격된 것도 좋아요. 뭘 했는지 모르겠어요. 공무원 시험 합격은 에듀윌, 공인중개사 합격도 에듀윌, 서경석이 찍은 광고가 있는데, 그거 해서 합격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더 소중한 것이 있잖아요. 온 천하를 얻고도, 합격하고도 네 목숨 잃으면 그 합격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무슨 소용이 있어요? 남한테 내 정당성에 대해 예스, 라는 소리를 들으려고 하는 즐거움을 생각하지 말고, 아니요, 라는 소리를 들음으로써 내가 남한테 인정받으려고 하는 것도 욕심이라는 생각을 한번쯤 해봐야 합니다.

 

지금 사도는 망가졌어요. 그 당시 같으면 이 사도는, 안 그래도 체포당했지만, 체포에다 또 체포당해야 할 감이에요. 그러나 사도는 문입니다. 천국의 문입니다. 복음을 갖고 있어요. 그렇다면 사도만 갖고 있습니까? 우리도 갖고 있어요. 거침없이 이 세상의 모든 법과 정당성에 대해서 우리는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천국의 문이지, 내가 행동을 반듯하게 하고 있는가, 내가 이렇게 YES, NO, 예, 아니요, 라고 함으로서 남이 나를 어떻게 봐줄 것인가, 이건 전혀 고려대상이 아닙니다.

 

지금 주께서 나로 하여금 예! 할 것은 예! 하게 할 것이냐, 아니요! 라고 할 것은 아니요! 라고 하게 할 것이냐, 그 관계가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를 몰랐는데, 사도바울의 편지를 통해서 보니 이 세상이 사탄의 종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탄 말 들으면서 평생을 살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사탄의 눈치나 살펴서 훌륭한 소리 들으려고, 출세했다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 살지 않게 하옵시고, 주의 복음의 문, 천국의 문을 증거 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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