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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10 00:25:21 조회 : 214         
소유권 정리 180209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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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IP:122.♡.178.64) 18-02-11 22:09 
서울의존강의20180209a 빌레몬서1장(소유권정리)-이 근호 목사

 

오늘은 빌레몬서 1장 11절부터 보겠습니다.

 

11절, 저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12절, 네게 저를 돌려보내노니 저는 내 심복이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오네시모는 종이고 빌레몬은 오네시모의 주인이고. 여기 종과 주인 사이에 누가 끼어드느냐, 사도바울이 끼어듭니다. 사도바울은 개인적인 자격으로 끼어드는 것이 아니고 사도바울은 하나님께 받은 사명이 있어요. 기능이 있다고요. 그 기능이 뭐냐, 복음 전파하라는 기능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은 결국 본인의 위상을 본인이 결정하지 못하고, 사도바울의 주인이 따로 있죠. 우리 주님의, 복음의 종이죠. 그러면 예수그리스도와 사도바울의 관계, 그 관계를 빌레몬과 오네시모와의 관계에다가 그대로 대입을 하는 겁니다. 대입을 하면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오네시모가 너의 종은 맞는데 그걸 형제라고 할 수 없겠느냐?”라고 제안을 해요. 형제. 형제까지 돼버리면, 지금 사도바울과 빌레몬과 갖은 관계가 형제관계입니다. 예수 안에서 형제. 그 형제관계까지 오네시모가 격상하게 되는 겁니다. 신분이 격상하게 되는 거죠.

 

그런데 여기서 오늘날 자본주의, 현대사회에서는 그런 게 별 의미가 없어요. 왜냐하면 현대사회에서는 뭐가 없느냐 하면 종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집에 강아지하고 고양이는 있죠. 그러니까 개(오네시모)한테 물어보지 않고, 사도바울이 빌레몬한테 “너희 집에 있는 개(오네시모)를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쳐주면 안 되겠느냐?”하는, 이런 파격적인 제안을 한 것이라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현대인들은 인간을 개라고 보지 않죠. 민주주의 사회니까 형식적으로써는 인간위에 다른 주인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종이라는 것이 헌법상으로 용납이 되지를 않죠.

 

그런데 경제적으로 종속이 될 경우에는 종은 아닌데 흔히 종 부리듯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종 부리듯. 상대적으로 정신적으로 박약하고 정상이지 않는 그런 사람을 값싼 노동력으로 부려먹기 위해서, 살살 달래서 계약서에 도장 찍게 만들고 나라에서 장애자들에게 주는 모든 비용을 자기가 가로채고, 그렇게 그 사람을 종 부리듯 하죠. 종 부리듯 한다고 해서 종은 아니에요. 왜냐하면 그 계약 관계가 끊어지게 되면 언제든지 자유인이 될 수가 있고, 정신적으로 아이큐가 떨어지는 사람의 친척이 와가지고 내 아이 내놓으라고 하면 그건 고발감이 되는 겁니다. 종에서 다시 자유인이 되는 거죠. 그거는 무슨 관계냐 하면 경제적인 관계 때문에 그렇게 된 거죠. 신분 자체가 종이 되지를 않아요.

 

그런데 옛날의 종이라고 하는 것은 경제적 관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고 신분 자체가 종이에요. 신분 자체가. 왜 그런가 하면 이게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오게 되면 그게 종이 되고, 종들이 필요했다는 그 이유가 농경시대에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전쟁을 해서 가지고 오는 겁니다. 여자든 남자든 전부 다. 이것은 이스라엘도 예외가 아니에요. 민수기 31장에 보면 미디안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모압을 통해서 40년 뺑뺑이 돌고 애굽에서 올라온 사람 중에서 두 사람 빼놓고는 다 죽어요.

 

갈렙과 여호수아 빼놓고는 다 죽고 난 뒤에 그 후에 태어난 사람을 데리고 모세가 요단강을 통해서 약속의 땅의 진입을 노리게 되는 겁니다. 근데 그 가는 길, 풀이 잘 나있는 길에 주인이 없을 리가 없죠. 주인이 있죠. 그 민족들하고, 미디안이고 모압이고 간에 전쟁을 하게 됩니다. 민수기 32장에 보면. 홍해를 건너와서, 여기가 지중해고, 사해있고, 위로 100킬로 요단강 있고, 그 다음에 갈릴리 호수가 있고, 여기 광야에서 40년 동안 다 죽이고, 요단강을 통해서 공격한다 이 말이죠.

 

근데 이 땅이 괜찮은 땅이에요. 풀도 나고 목축하기 좋은 땅이에요.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의 그들이, 자기 아이들 많고 목축이 많으니까 가나안 땅에 들어갈 생각도 안 하고 여기가 좋사오니, 하다가 눌러앉고자 하다가 모세한테 아주 혼나죠. “니들은 어떻게 살 궁리부터 하느냐? 하나님이 주신 목적은 여기에 있는 가나안 열 족속을 치라고 올라가게 했는데, 살 궁리부터 하지 마라!” 그래서 그들은 마음을 고쳐먹고 다 치고서 다시 이 땅을 차지해도 되냐고 해서, 그러면 그 땅을 차지하라고 하게 되는 겁니다.

 

여기 모압 암몬 미디안, 여기서 칩니다. 치면서 하나님이 승리케 하죠. 그럼 여기서 뭐가 생깁니까? 필히 포로가 생기는 거예요. 이 포로를 뭐라고 규정을 해야 하느냐 하면 진즉에 죽어야 될 존재가 포로입니다. 하나님께서 다 죽여 버려라. 그런데 남자를 안 여자는 다 죽여 버리고 남자를 모르는 여자는 그냥 데리고 살아도 괜찮다고 하십니다. 근데 그때그때마다 조건이 달라집니다. 토실토실한 양하고 이런 것들은 챙겨라 이 말이죠.

 

그러면 이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스라엘 외에는, 이스라엘 민족 앞에 다른 이방민족은 사람으로 쳐줍니까? 쳐주지 않습니까? 사람으로 간주를 하지 않아요. 이게 성경에서 참으로 기본적으로 중요한 거예요. 기본적으로. 존재하는 사고방식 자체가 이래 돼야 해요. 이스라엘 민족 외에 다른 민족은 사람으로 쳐주지 않아요. 그냥 뱀의 후손들이에요. 하나님의 적이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스라엘은 사람입니까? 사람 아닙니까?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로 사람 아니에요. 항상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동행할 때는, 이게 조건부에요. 조건이 있어요. 조건이.

 

성막에서 제사 지낸다는 조건하에 동행하는 겁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동행이 안 돼요. 원래 동행할 수가 없어요. 십자가마을에 손승범씨가 질문을 했죠. 원래 동행이 안 되는 겁니다. 인간이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전부 다 가짜에요. 왜 동행이 안 되느냐, 동행할 가치조차도 없기 때문에 동행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동행할 가치가 언제 생기는가, 그들 속에 하님을 대표해서 하나님의 이름이란 분이, 하나님의 이름이란 분이 거기에 같이 동행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보고 같이 동행해요. 그 이름이 일어나는 곳에서 일어나는 표시와 사인이 있는데, 그게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는데, 오늘날 교인들이 자기의 삶에, 현대 생활에 보탬이 되고 싶어서 성경을 보는 경향이 있어요. 구약성경부터 죽 내려와야 하는데, 김밥 옆구리 터지듯이 옆으로 기어들어갈라고 하는 거예요. 옆으로. 그 대표적인 것이 뭐냐, 삼위일체라고 하는 겁니다. 삼위일체. 성부, 성자, 성령님이 계시다. 어디 앞에? 인간 앞에. 인간이 성부, 성자, 성령, 세 분이라고 하면 문제가 있으니까, 삼(三), 위(位)라고 해놓고, 이 분이 전부 다 하나니까 일체(一體)라고 해서 삼위일체(三位一體)라고 그렇게 하자.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세 분이니까 삼위고, 그 분이 전부 다 하나니까, 여기서 한 분이라고 하면 안 돼요. 하나라고 했어요. 하나니까 일체라고 하자고 용어를 붙인 거예요.

 

그러나 인간이 김밥 옆구리 터진 것으로 볼 수 있는 위치가 없어요. 인간을 만날 때 하나님께서 누굴 보내십니까? 성자를 보내시죠. 성자.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죠. 그럼 아들은 몇 분입니까? 한 분이죠. 아들은 한 분이죠. 그럼 예수님을 누가 보냈습니까? 성령이 보냈잖아요. 한 분이잖아요. 신약 마태, 마가, 누가 공관복음에서는 성령께서 예수님을 보냈지만, 지금은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셨죠. 성령께서 한 분이고, 성자가 한 분이고, 성부가 한 분이고.

 

그럼 인간은 한 분만 믿으면 되는 겁니다. 이렇게 세 분을 김밥 옆구리로 옆에서 보면 안 돼요. 이런 자리가 없다니까요. 이런 자리를 하나님이 허용한 적이 없어요. 성령이 한 분 오셔서, 성령이 한 분 오신다면 거기에 누가 계십니까? 성자하나님 계시고 성부하나님 계시잖아요. 그러면 됐잖아요. 무슨 삼위일체가 왜 필요합니까? 믿음이 없으니까 믿음을 지식으로 때우려고 하는 거예요. 지식이라는 것은 언어의 나열이잖아요.

 

근데 그 언어가 어떻게 구성되고 어떻게 성사가 됩니까? 그거는 그 사회에 통용되는, 일반적인 통념에 의해서 언어가 만들어져요. 이게 병이다. 병이라고 하면 한국 사람은 아는데 미국사람은 모르죠. 병이 뭐지? 병byung? 이러잖아요. 병이라고 하는 것은 한국 사람끼리 통하는 단어를 동원한 겁니다. 예수, jesus도 마찬가지고. 예수아도 마찬가지고. 다 그런 거거든요.

 

인간의 지식은 단어에 담겨서 지식이 오게 되고, 그 단어는 어떻게 만들어지느냐 하면 인간이 알 수 있는 그림으로써 만들어져요. 그림부터 먼저 구상이 되고 그 그림에 단어를 맞추는데, 그림과 단어가 이게 일치가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비슷하게 맞추지 일치되는 것은 없습니다. 코끼리도 마찬가지고 개도 마찬가지고. 고양이도 마찬가지고. 고양이 당사자에게 물어본 적이 없습니다.

 

인간들의 편리에 따라서, 자기들의 분류방법으로 제 3자의 대상을 일방적으로 그렇게 했기 때문에 동물과 식물한테도 그것이 안 통하는데, 하나님에게 성부성자성령을 붙인다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어요? 통하겠어요? 안 통하죠. “하나님 어떻게 부르면 좋겠습니까?” “니가 알아서 뭐할래?” 왜 하나님의 이름을 알려고 하죠? 모세가 왜 하나님의 이름을 알려고 했습니까? 하나님은 모세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은 이름을 알아버리면 그걸 결과적으로 딱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게 병인데, 병이 무엇입니까? 아, 이게 병이구나! 하고 가져올 수가 있다 이 말이죠. 근데, 하나님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여호와다. 아, 여호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소유대상이 될 수가 있어요. 안 되죠. 이름을 부르면 하나님이 하늘에서 쪼르르 쫓아와야 됩니까?

 

인간들이 부르는 이름은 인간들끼리 부르는 이름이에요. 호명하고 호칭하면 쪼르르 앞에 달려와야 할 이름. 전화하면 전화 받아야 할 이름. 여러분 전화번호부에 하나님의 전화번호 있습니까? 하나님 전화번호가 몇 번입니까? 010- 그 다음에 몇 번입니까? 2384- 뭐 이렇게 되는 겁니까? 호출하면 오는 겁니까? 전화번호부에 성부성자성령 전호번호 뭐 이런 거 없죠. 이름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내가 저쪽을 부를 때 이름이라고 하는 겁니다. 내가, 그러니까 내가 건사하는 거예요. 내가 굳게 토대를 잡고 있는 마당에서 누구 이름을 부르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버리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그렇게 이름 부를 자격이 있는가에 대해서 하나님은 다시 생각하시는 거예요. 인간은 죽은 존재기 때문에 이름 부를 자격도 없어요. 미친 사람이 중얼중얼한다고 다 내려올 필요가 없어요. 인간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왜 부르는지, 뭣 때문에 부르는지, 왜 불러야 되는지 아무 이유를 몰라요. 그냥 어느 유력한 타인 부르듯이 그냥 답답해서 불러보는 거예요.

 

인간을 부를 때는 정확하게 누구누구라고 불러야 됩니다. 이름이 다 다르기 때문에. 어이~! 해가지고는 여러 명이 올 수가 있고 아무도 안 올수가 있잖아요. 정확하게 김OO 이OO, 라고 불러야 오듯이, 하나님을 호칭할 때는 정확하게 불러내야 하는데, 불러낼 수 있는 그런 걸려있는 이름이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이름이 뭐냐, 하나님의 이름은 그게 따로 계셔요.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분이. 하나님의 이름이 따로 있다는 말은 하나님과 상대할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분만 상대하지, 그 외에는 상대를 안 하는 겁니다. 인간은 죽은 존재기 때문에 상대를 안 해요.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이스라엘 속에 삽입을 시켜놓고, 이름이 있다는 조건 때문에 하나님은 그 이스라엘과 동행하는 겁니다. 주님을 보고, 동행하시는 분을 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거예요. 내 인간요소 말고 주님의 요소를 심어놓고 우리와 동행한다 이 말이죠.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뭐냐 하면 나는 죽고 내 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사는 조건하에 하나님은 우리를 상대하는 겁니다.

 

죽어라 철야하고 금식하고 웃기지도 않아요. 부르면 부를수록 누가 오겠어요? 귀신만 들끓죠. 귀신만 와요. 귀신만. “그래, 왜 불렀느냐?”하고 호리병 속에서 나타나고, “왜 불렀느냐?” “누구십니까?” “나는 니가 부른 예수잖아.” 마귀가 예수를 왜 인정을 못하겠습니까? 마귀는 인간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데. 예수를 원하면 예수를 주고, 뭐 하면 다 주는 거예요. 예수 만났다고 좋다고 하고. 진짜 하나님을 만났으면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자격도 없고, 부를 필요도 없고, 내 죄 때문에 그냥 지옥가도 합당합니다, 라는 그러한 느낌으로 다가와요.

 

그게 바로 사울(바울이 되기 전)이 예수님을 만날 때 이미, 사울이 예수님에게 제시하기도 전에 예수님 쪽에서 이미 사울을 규정해버렸습니다. 뭐라고? 니는 나를 뭐하는 자라고 했습니까? 핍박하는 자. 핍박하는 자예요. 핍박하는 자를 주님께서 안 만나도 되는데 만나주시잖아요. 안 만나도 돼요. 근데 만나주시잖아요.

 

그래서 인간이 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기가 뭔가 안다는 것이 문제인데, 아는 것 때문에 인간은 엉터리 하나님을 부르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때는 알 필요도 없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필요도 없고,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열심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교회봉사해도 하나님 보시기에 그게 아무것도 안 한 짓이 되기 때문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항상 나로부터 시작하는 일이기 때문에, 이거는 하나님께서 애초부터 거부할 수밖에 없는 짓이에요. 그런 짓거리를 하고 온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럼 아무것도 안 하면, 평생을 아무것도 안 하다가 늙어 죽어서 지옥가면 나만 손해가 아니냐, 라고 생각이 되겠죠. 나만 손해라고. 뭐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고 찔러야지, 뭐 아무것도 안 하고, 해봐도 소용이 없지만 답답하잖아요. 참을 수가 없죠. 아무것도 안 한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죠.

 

그런데 하나님에게만 참을 수가 없는 것이 아니에요. 인간의 행동은 반드시 참을 수 없어서 나온 행동들만 행동하게 되어 있어요. 대표적인 게 소변 누는 것. 그 다음에 집에서 밥하는 것. 사흘 동안 밥 안 한다고 하다가 참을 수가 없어서 밥해요. 모든 행동은 하고 싶어서만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하게 되어 있어요. 어쩔 수 없이. 주님에 대해서 마중나간 것도 주께서 먼저 건드려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주님을 고백하게 되어 있어요. 주님 쪽에서 먼저 건드려줬기 때문에.

 

그래서 저는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한번 테스트해보라고 해요. ‘이제부터 내가 예수 믿으면 나는 개다. 안 믿겠다.’하고 한번 테스트 해봐요. ‘교회도 안 나오고 성경도 안 보고 기도도 안 하고 나는 그냥 나쁜 친구와 같이 살래.’ 같이 살든지 한번 해보란 말이죠. 해봐가지고 그게 아주 자연스럽고 거기에서 안식을 누리거든, 편하거든 그건 처음부터 믿음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동안 남 믿는 것 시늉이나 한 사람이에요. 자기가 유발한 ‘가짜 나’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안 하려고 하니까 아무것도 안 할 수가 없어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요.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그래서 뭔가를 하게 됩니다. 뭔가를 했을 때, 그게 바로 하나님께서 죄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답답증을 준 겁니다. 답답해서 기도했는데, 그 기도가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기도가 아니에요. 인간은 뭘 해도 인정 못 받아요. 다만 내가 답답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는 그것이 바로 그동안 꿍하고 참고 있었지만 비로소 나의 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죄만 짓고 구원받는 거예요. 의를 한 번도 한 적도 없이 구원받는 겁니다. 이게 구원받는 사람의 보편적, 모든 공통점이에요. 진짜 천국 간 사람의 공통점이 내가 죄인 중에 괴수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나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그게 분명해지고, 그러니까 감사에 감사의 꼬리를 물고 계속 터져 나오는 겁니다.

 

전에는 내가 힘들게 일하고 돈 벌어서 밥과 반찬을 했다. 그래서 이거는 내 공로라고 생각을 했는데, 일하게 된 것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이, 나만을 위해서 살아온 나에게 하나님께서 이런 진수성찬을 차려줬다는, 그 앞에서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그러한 기회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식사시간을 통해서 주시는 겁니다. 식사시간을 통해서.

 

한 가지 쉬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자식이 세 명이 있다. 세 명인데 우연히 자식 한 명 주워가지고 네 명이 됐다 칩시다. 하나는 재벌 집 아인데 훔쳐 와서 네 명이 됐어요. 그러면 아버지가 자식들을 보면서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저 자식들을 어릴 때부터 이만큼 누가 키웠다고 생각합니까? 본인이 키웠다고 생각을 해요. 본인이. 이게 바로 죄인 거예요. 본인이 키웠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자식은 절대로 부모가 키웠다는 생각이 안 듭니다. 아무리 아빠엄마가 밥을 해줘도 그 밥을 먹고 안 먹고는 누가 결정한다? 내가 결정한다는 것을 세상에! 두 살도 안 된 애가 그걸 보인다니까요. 두 살도 안 된 애가. 난지 3개월도 안 돼서 그 모습을 보여요. 6개월 되서부터 으음~ 싫다고 고개를 돌리죠. 엄마는 김치하나 얹어가지고 쫓아다니고, 애는 도망치기 바쁘고, 밥 한 번 먹어주면 뭐 하나 줄게, 라는 거래가 형성되어가지고 그래서 밥 한 번 먹어주고. 또 해주고. 모든 결정은 본인이 하는 거예요.

 

그런데 부모는 착각하기를 저 자식은 내가 키웠다는 거예요. 자식은 거기에 절대 수긍을 안 합니다. 내가 인간성이 좋아서 아버지라고 대해주고 고맙게 여긴다고 하죠. 내가 인간성이 좋아서. 다른 자식 같으면 아버지한테 효도를 안 하는데 내가 워낙 인간성이 좋아가지고 아버지한테 효도한다는 거예요. 엄마한테 효도하고.

 

그게 바로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고 인간들끼리 민족을 이루고 국가를 이뤄버리면, 거기에 각자의 정답이 있어요. 뭐냐 하면 내가 여기에 존재함이 유일한 진리고 그게 정답이에요. 각자의 입장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은 우리 민족이 여기 존재한다는 것이 진리고 정답이에요. 그런데 이스라엘민족이 광야에서 모압 민족을 맞닥뜨리죠. 여러분 광야 없는 천국은 없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오해한 것은 애굽에서 나오자마자 천국이기를 원했어요. 약속의 땅이기를 원했어요. 그러한 텀이 있는 것을 몰랐어요. 광야라는 텀.

 

사전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렇게 언질을 준 적이 없어요. 착각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착각한 거예요. 히브리인들이 착각을 한 거예요. 그러면 그들의 말하는 약속의 땅은 어떤 땅이냐 하면 애굽에서 갖고 있었던 사고방식의 연속이었습니다. 애굽에 있을 때 그들은 살기 위해서 살았잖아요. 그러면 약속의 땅이라는 것은 뭐다? 나를 살리기 위한 땅이라고 오해한 겁니다. 나를 살리기 위한 땅. 나를 살리기 위한 땅이라는 말은 절대로 나를 죽일 일은 없을 것이라고 오해를 했던 거예요.

 

그런데 그 오해를 털어내지 아니하면 약속의 땅에 못 갑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런 이야기에요. 사도바울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의 종이라고 했죠. 사도바울은 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히브리인들은 애굽에서 종으로 대우를 받았지만, 자기들은 종이 아니고 인간이라고 여겼던 거예요. 비록 바로한테 압제를 받았지만, 노예 생활을 했지만, 그들이 억울하다고 반발하는 것은 종도 아닌데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반발하는 거예요. 하나님께 부르짖은 거예요.

 

여러분, 뭔가 부르짖을 때는 뭡니까? 현재 이 상태가 내가 보기에 내 가치와 일치되지 않는다, 균형이 안 맞는다고 해서 부르짖고 기도하는 거예요. 수능을 앞두고 부모들이 자식을 위해서 기도를 하잖아요. 기도할 때 뭐라고 기도합니까? 좋은 점수가 나오도록 기도하잖아요. 근데 좋은 점수를 그냥 달라고 하면 이거는 염치없고 도둑놈심보기 때문에, 뭐라고 앞에 단서를 붙이느냐 하면 아주 온화하게 붙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공부한대로 나오게만 해주시고, 실수 없이 답 밀려 쓰지 않고 공부한대로만 나오게 해주시옵소서.” 실수 없이 공부한대로만 나오게 해달라고 해서, 공부한대로 나온 것이 500점 만점에 75점 나왔는데요. 공부한대로만. 그래놓고 기도했는데 점수가 이거밖에 안 나왔다고 또 난리에요.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몰라요. 다만 그들이 아는 것은, 어떤 존재라는 것은 완전히 불문에 붙이고 무조건 나는 가치 있게 존재해야 된다는 것이 인간이라고 여기는 모든 인간은 한결같이 죽을 때까지 계속 유지하는 것이 자기의 진리에요. 이 진리는 손톱을 가지고 흠집 내면 난리가 납니다. 난리 나요. 모닝차타도 벤츠한테 기 안 죽습니다. 왜? 언젠가는 벤츠를 타고 말거야, 라는 그런 노림수가 있기 때문에, 내 존재를 무시하지 말라고 이래 나와요.

 

인간은 누구의 종이 아니에요. 본인이 인간이라니까요. 주님께서는 이 인간을 종으로 바꿉니다. 지금 이 텀이 뭐냐 하면 광야40년이에요. 광야를 통해서 니가 인간이냐고 한번 스스로 물어보라는 것입니다. 니가 인간이냐? 쉽게 말해서 니가 인간이라는 조건을 니가 어디서 얻었느냐 이 말이죠. 어디서 배웠느냐 이 말입니다. 그거 어디서 배웠겠어요? 애굽에서 배웠겠죠. 그렇죠. 애굽에서는 인간들끼리 같이 살았잖아요.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우기면서 살았다 이 말이죠. 히브리인들이.

 

그런데 바로 왕이 요셉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 압제를 하니까, 자기는 부당하다고 해서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그 부르짖음에 부응해서 하나님께서는 누굴 보냈습니까? 모세를 파견근무 시켰잖아요. 모세를 파견했다고요. 모세를 파견할 때 모세는 인간이었습니까? 종이었습니까? 하나님 앞에. 종이죠.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신발 벗어라!”에요. 떨기나무에서. “신발 벗어라!” 그럼 이거는 모세이름으로 가는 거예요? 아니면 여호와 이름으로 가는 겁니까? 여호와 이름으로 가는 거예요. 성도가 그래야 되는 거 아닙니까?

 

수능 쳐서 75점 나왔다. 누구 점수에요? 본인점수 아니에요. 누구 점수입니까? 하나님의 종 아무개의 점수에요. 하나님의 종의 점수에요. 참 하나님 점수 안 주죠. 500점 만점에 75점. 어쨌든 간에 감사해야죠. 75점을. 점수가 좋아서, 나빠서 감사가 아니고, 계속 주의 종으로서 수능을 치게 했고, 그 점수가 나오도록 하는 그 상황을 통해서 종 됨을, 종의 관계를 견지한다는 것. 그걸 계속 지켜준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되지 않습니까?

 

내가 어떻게 개인적으로 했다가 아니라, 종한테는 개인적인 자기의 위상이라든지, 위신, 체면, 명예, 이런 것은 허용이, 용납이 되지를 않습니다. 종에 대해서 성경에 이야기가 참 많은데, 다 이야기 할 수는 없고 시간이 되는대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2장을 한번 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2장에서 예수님께서 아주 제자들을 철저히 밟습니다.

 

35절부터 보면,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36절,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37절, “주인이 와서 깨어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종이죠. 예수님께서 주인이라면 제자들은 뭐가 돼야, 무슨 역할을 해야 예수님의 사역에 적합한 역할이 됩니까? 종의 역할을 해야 되는 거예요. 종의 역할.

 

다시 말해서 “니가 내 종이 됨을 영광으로 알겠느냐?” 이 말입니다. 그걸 영광스러운 지위로서 니가 수용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주님의 종이 되면 반드시 이거는 기능이 돼야 돼요. 종은 개인적인 목적이 없어요. 그게 용납이 안 됩니다. 개인적인 목적이나 계획이 용납이 안 돼요. 자기 인생도 없어요. 주님이 오면 문열어줘야 해요.

 

그러면 주인의 시기에 종속이 되는 거예요. 주님의 타이밍에 종속이 되는 거예요. 언제 올지 누가 알아요? 주인의 시간에 종속이 된다면 그러면 종은 개인적인 시간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사적으로 자기만의 보람과 자기만의 인생가치를 따로 챙길 수 있는 시간이 허용이 돼요? 허용이 안 돼요. 그러면 자기 시간이 없죠. 자기 시간이 없으면 자기 역사가 없죠. 자기 역사 없으면 자기 인생사 없죠. 그러니까 자기 인생사가지고 울고불고 할 이유가 없다 이 말입니다.

 

내 인생 왜 이렇게 됐냐고 스스로 자기 인생보고 그걸 감사하지 않으면서 탄식할 필요가 없다 이 말입니다. 모든 유행가를 보세요. 전부 다 자기의 시간대가 있어요. 모든 유행가. 어찌합니까, 뭐 이런 거 있잖아요. 모든 유행가가.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지금 나훈아 리사이틀 하고 있어요. 모든 끝이 자기 시간이 확보되어 있다니까요. 자기 시간이. 자기 스케줄. 그게 지금 종이에요? 아니면 자유자 흉내를 내는 겁니까?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미리 땡겨서 천국에 들어오지 않으면 죽어서 천국 못 갑니다. 미리 땡겨서 지금 죽기 전에 천국에 입성해야 해야 해요. 죽기 전에. 죽기 전에 성령을 받아야 돼요. 가서 성령을 주는 것이 아니고.

 

ROTC에 보면 가입대가 있어요. 3(육해공)사관학교나 여사관학교나 이 모든 군에 갈 때는, 이 사람이 군대훈련을 견딜 수 있는가를 추려내기 위해서 가입대, 입대가 아니고 가짜 입대를 해요. 그래가지고 인간을 아예 기계로 만들어요. 그거 자존심 상해서 못 견디면 나가라 이 말이죠. 퇴교조치 당합니다. 월급도 요새 많이 주는데, 돈 많이 나가는데 억지로 뭐 하려고 다 입대시키겠어요. 그런데 군에 징병은 가입대가 없어요. 왜? 자기가 자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월급제직업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무조건 강제입대하기 때문에.

 

만약에 강제입대 했는데 적합하지 않다고 나가라고 하면 전부 다 병신역할을 한다고요. 이럴 게 빤한데 그게 어떻게 되겠어요? 군에 수급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회사에 인턴제도가 있는 겁니다. 인턴제도. 인턴제도 해가지고 휴가도 없고 퇴직금도 없고 보너스도 없어요. 하도 왔다 갔다 하니까. 회사에서 키워놓으면 딴 회사로 가기 때문에. 회사입장에서는 노무자한테 놀아나면 안 되잖아요. 자기가 주인인데. 철저히 인턴해가지고 미생 만들어서, 미생에서 완생이 되는지 그건 모르겠지만.

 

종이라고 하는 것은 누가복음 12장 38절에 “주인이 혹 이경에나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의 이같이 하는 것을 보면 복이 있으리로다” 39절,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적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그러니까 종은 철저하게 사전에 주인이 어느 때에 온다는 정보를 알아야 돼요? 몰라야 돼요? 절대로 몰라야 돼요. 알게 되면 이거는 종이 같은 급인 줄 알고 착각하기 때문에. 철저하게 종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신약에 와서 제자나 성도들을 종이라고 생각한다면, 나중에 로마서 6장에도 우리를 의의 종이라고 해요. 그러면 구약에서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종으로 만들었습니까? 라고 이래 질문할 수가 있죠. 레위기 25장 5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품꾼이 됨이라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나의 품꾼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품꾼이라는 말은 같이 지내려고 해서 뽑아낸 것이 아니고 일을 맡기려고 이스라엘을 뽑아낸 것입니다. 그 일은 뭐냐 하면 약속의 땅이 왜 약속의 땅이냐를 드러내기 위한 역할을 맡아야 해요. 역할을. 그럼 약속의 땅을 드러내는 역할을 맡는다는 말은 간단히 해요. “내가 주인이 아닙니다.”라는 말을 해야 돼요.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닙니다.” 내 인생은 너의 것. 내 인생은 너의 것~♬

 

왜 그렇게 합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자진해서 당신에게 주춤주춤 바치는 것이 아니고, 아낌없이 몽땅 다 그대에게 드리죠. 다 드려야 돼요. 모든 것을 다 바치겠다는 거예요. 참 이러면... 만약에 자기 딸이 어떤 남자를 알았는데, 남자가 너무 좋아서 나 그대에게 모든 걸 다 드리리, 라고 하면 친정에서 등짝 때립니다. “이 등신아! 애 없을 때 좀 살아보고 아니거든 헤어져라! 등신도 아니고 어떻게 남자를 믿어도 그렇게 허술하냐? 나는 니가 똑똑한 줄 알았는데 이렇게 등신인줄 몰랐다.” “엄마 나 그이 없으면 못 살아요.” “이 등신 하는 짓 좀 봐라. 니가 지금 결혼생활 몇 개월이나 됐다고, 애 낳고 한번 살아봐라. 니가 지금 하는 소리가 얼마나 바보짓인지 알거다.” 그러면 딸이 “엄마는 격려는 안 해주고 왜 자꾸 초를 치느냐”라고 하죠. “나도 다 살아보고 다 해봤거든. 인간은 믿을 것이 못되더라.” 막 이런 것. “그럼 엄마는 왜 아빠하고 사는데?” “이 나이에 돈이 어디서 나오노?” 결국 연금보고, 돈보고 그냥 각방 쓰면서도 한집에 있는 거예요. 돈보고.

 

종이 된다고 할 때, 인간 입장에서 너무 서러워하지 마세요. “아이고,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어놓고서는 인간을 종으로 삼다니! 내 나름대로 고유의 계획도 인정 안 해주고, 나의 희망도 인정 안 해주고, 주인이 시킨 대로만 해야 되니까, 에이, 나는 이게 뭐지?”라고 이렇게 하는데, 이 종이라는 원형이 누구냐 하면 아버지 앞에서 예수님이 종이 된 거예요. 예수님이 말씀의 종이 되신 거예요. 하나님의 아들도 이 땅에서는 종이 되지 않으면 구원이 안 됩니다.

 

그것을 가지고 구약에서는 여호와의 종이라고 해요. 여호와의 종이라. 이게 바로 이사야 53장이 아닙니까? 때리면 때리는 대로 군말 없이 맞아야 되고, 마치 도살할 양 같다고 했습니다. 도살할 양같이. 양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모가지 쥐고 올무해서 질질 끌고 가죠. 어디로 갑니까? 죽는 곳으로. 죽기까지 복종해야 할 종. 죽기까지 복종함으로서 무슨 자리가 만들어지느냐 하면, 비로소 이 지옥 같은 이 세상에 구원의 자리가 확보가 되는 겁니다. 구원의 자리가.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시게 되면 우리를 모가지 쥐고, 목덜미 쥐고 질질 끌어서 구원의 자리, 주님이 가셨던 그 구원의 자리, 십자가 자리까지 끌고 옵니다. 쓴잔을 마시게 하죠. 그래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하는 이 말은 바로 예수님이 시범조로 그 코스를 먼저 갔다 이 말입니다. 갔으니까 그게 way,길이 되는 거예요. 없는데 길이 만들어졌어요.

 

예수님이 오셔서 길을 만들고, 그 길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진리라고 이야기하고, 그 진리의 길에 들어선 사람만 생명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질질 끌고 간다는 거예요. 인간의 자발적 의지는 하등의 소용이 없습니다. 자발적 의지는 소용이 없어요. 인간들은 자발적 자기의지로 가게 되면 좁은 길이 아니고 넓은 길,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거기는 숫자가 많은 거예요. 숫자가.

 

어느 교회든 숫자가 늘어나거든 그건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해요. ‘설교가 뭐 잘못 되었나? 분명히 사람을 좋게 하는 것이 아닌데, 뭔가 내가 사람을 좋게 한 요소가 섞여 있었나?’ 왜냐하면 종한테는 소유개념이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거든요. 어차피 종은 주님의 소유잖아요. 종 소유가 따로 있습니까? 그런 게 없어요. 종이라는 말은 자기 것도 주의 것이니까. 내 것이라는 것이 성립이 안 되잖아요. 그러면 내 교인, 내 수입, 이게 종한테는 기쁨의 대상이 안 된다니까요. 기쁨의 대상이.

 

종이기 때문에 죽으면, 죽으라고 해서 죽을 정도로. 그만 살라고 해서 지진이 일어나 깔려가지고 한 서른 세 살 살다가 죽으면 죽을 수밖에 없죠. 근데 40대 쯤 된 모르는 사람이 와가지고, 사실은 니가 모르지만 출생의 비밀이 있었다. 나는 니 할아버지가 보내서 온 사람인데, 할아버지가 다 생각이 있어서 너를 마음속으로 양자삼아서 니 허락 없이 호적에 올려놨다. 너에게 뭐 얼마 되지 않지만 이제 할아버지가 죽을 때가 됐으니까, 할아버지 유산 176억을 너한테 몽땅 다 준다.

 

그래서 난데없이 세금 빼고 한 150억을 받았어요. 오직 너밖에 줄 사람이 없다고 해서. 그럼 그 사람은 푹 고민에 잠기는 거예요. “내 것도 아닌데 왜 집을 또 주십니까? 이 150억을!” 그럼 하나님께서 “그동안 골프 못 쳤지? 골프 치고. 여행 못 갔지? 1년에 2번씩 여행가고.” “아휴~ 나 비행기 못 타는데?” “미국 LA에 수영장 두 개 딸린 저택사가지고 팔아먹을 때 좀 괜찮거든. 산불 난데 말고 산불 안 나는데 해가지고, 한국이 춥다 싶으면 거기 LA에 좀 쉬었다 오너라.” “아, 나 LA이 거기 싫은데?”

 

이게 종입니다. 이게 종이에요. 어차피 내 게 아니니까. 어차피 내 것이 아니니까. 그러니까 십일조 낸다는 이게 얼마나 나쁜 짓인지 몰라요. 십일조 내게 되면 나머지기 십의 구는 뭐다? 누구 것이다? 세상에! 자기 것이라고 만들잖아요. 그러니까 십일조내서는 안 되는 거예요. 내 것이 없는데 십분의 일을 내게 되면 나머지기는 내가 알아서 처분하겠다는, 자기 처분이 거기에 개입되기 때문에, 이거는 갑자기 종이 아니죠. 종이 아니면 어디를 안 거쳤다? 광야라는 지대를 지금 안 거친 게 돼요.

 

광야지대를 안 거치게 되면 어디에 못 갑니까? 광야지대 안 거치고 약속의 땅에 들어간 사람이 없어요. 자기가 주인공인데 뭐. 인간을 주인공으로 삼는 그런 천국은 없습니다.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종이라는 것은 무슨 시간이 없다? 내 시간이 없어요. 그래서 송재원씨가 저한테 질문했는데, 뭐냐 하면 나의 모든 시간은 누구의 시간으로 채워야 하는가, 주님의 시간으로 채워야 하기 때문에 싫든 좋든, 내가 힘들다, 좋다, 그런 소리를 하면 안 돼요. 어디 지옥에 와가지고 쉬려고 합니까? 쉬려면 천국 가서 쉬지, 지옥에서 왜 쉬려고 해요? 지옥은 쉬는 곳이 아닙니다. 고생해야 할 곳이고 천벌 받아야 할 곳이지, 쉬는 데가 아니에요.

 

그러면 예를 든 LA이 별장은요? 그건 쉬는 곳이 아니죠. 그냥 수영복입고 고생하는 거죠. 따뜻한 햇볕 받으면서. 맨날 바비큐 해먹으면서 고생하는 거예요. “에이, 바비큐만 해먹으니까 지겹다. 바비큐보다 더 맛있는 거 없나?” 그걸 고르는 고생, 고난. 주가 주신 고난입니다. 여러분, 가뭄으로 고생하고 있는 사람에게 메뉴판 들이대보세요. 가뭄 때문에 굶어 죽어가고 있는 사람에게 메뉴판 들이대면 그건 모독이잖아요. “뭘 잡수겠습니까?” 이건 말도 안 된다니까요. 뭐든지 먹죠. 뭐든지 감사해야지 않겠습니까? 왜 메뉴판 줍니까? 선택할 게 뭐가 있다고?

 

내 인생이 아닌데? 판사 되라면 판사 되어 종. 검사되라고 하면 검사되어 종. 의사되어서 종. 판사, 검사, 의사, 내가 맡은 종이에요. “공부하는 게 제일 쉬워요. 아무 때 시험 봐도 백점이에요.” 그건 주께서 맡긴 종이에요. 니는 공부가 제일 쉬우니까 공부하라고 해서 판사 되는 것, 그건 그 사람이 맡은 종이라니까요. 집안 좀 잘 살고 얼굴 좀 된다는 여자 분들은 꼭 시집을 판사, 검사, 의사, 재벌, 삼성임원들한테 시집을 가려고 하는데, 그 사람들 전부 종이에요. 물론 성령 받아야 종이지만. 종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아내감을 고를 때는 자기 맘대로 못해요. 성령 받은 사람에게 국한됩니다. 성령 받은 사람에게. 지금 우리끼리 하는 이야기에요. 우리끼리. 저쪽 말고 우리끼리. 그래서 남자 쪽이 결혼해줄 때 내가 조건이 맞아서 했다고 하지마세요. 그 사람은 주의 지시에 따라서 나라는 아내를 맞이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쪽이 좀 산다고 해서 기죽지 마세요. 벌써 기죽었어요. 기죽어서는 안 됩니다. 기죽어서 10분 쉽시다.
 이미아(IP:122.♡.178.64) 18-02-11 22:10 
서울의존강의20180209b 빌레몬서1장(소유권정리)-이 근호 목사

 

이 빌레몬서에서 유념해야 될 것은, 유의해서 볼 것은 뭐냐 하면 오네시모라는 종이 아무것도 한 게 없다는 겁니다. 이게 빌레몬서가 전하는 복음이에요.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그러면 종이라는 것이 이미 내가 자유인이 되겠다는 의식을 가졌을 때는, 종이라는 그 신분이 나의 적폐가 돼요. 인생의 오점이 돼버립니다.

 

그런데 “종이 되어야 마땅해. 종, 이것은 하나님이 허락한 내 신분이 맞아.” 이럴 경우에는 구태여 자유인이 되려고 애를 안 쓰겠죠. 그러면 이상한 논리가 뭐냐, 종이 자유인이 돼버려요. 왜? 내려갈 대로 다 내려갔기 때문에. 제가 1강에서 현대인들은 종을 다루듯이 하지, 종은 아니라고 했죠. 종 다루듯이 한다고 할 때 기분이 나빠요. 왜 기분이 나쁘냐 하면, 나는 종이 아니라는 의식이 강렬하기 때문에. ‘내가 돈만 있다면 내가 너한테 굽실거리는지 봐라.’

 

제가 지난 설교에서 그랬잖아요. 인생은 평생에 굴욕적인 웃음을 띤다고요. 평생에 굴욕적인 웃음을 흘리면서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어요. 평생을 그래요. 이거는 가진 자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에요. 이거는 주인이라도 고객들에게 해야 하고, 고객도 마찬가지로 주인에게 해야 되는 겁니다. 야릇한 웃음이죠. 우습지도 않은데 웃어주는 것. 교회도 마찬가지고요. “형제님 사랑합니다.” 언제 봤다고?

 

형제님 사랑한다는 그 말보다 자매님 사랑한다는 그게 더 문제가 돼버려요. 이게 고객관리거든요. 단골확보고. 단골만 꼬박꼬박 나와도 교회장사 됩니다. 목회자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은 뭐냐 하면 단골이 딴 데 이사 갈 때에요. 돈이 나가거든요. 사람이 아니라 돈이. 장사해보신 분은 알잖아요. “아줌마 좋아했는데 제가 캐나다로 이민 갑니다. 한국 올 때 들를게요.” 한국에 몇 번 온다고? 아예 이민을 가버렸는데.

 

자유인이라는 의식 자체를 하나님께서 지금 문제 삼고 있는 겁니다. 종이라고 하면 사람은 이게 사랑이 아니고 견디는 거예요. 사랑이 아니고 견디는 것. 오기죠. 오기. 오기로 구원받습니까? 두고 보자는 식이에요. 오기는 반드시 뒤에 뭘 깔게 되어 있느냐 하면 복수의식이 있어요. 복수의식. 보복이죠. 그런데 로마서 14장에 나오잖아요. 심판은 누구한테 맡기라? 심판은 누구에게 맡기라고 했어요? 심판하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라 이 말이죠. 이 말은 너의 원수는 없어요. 이 세상에 나의 원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재한다면 주님의 원수가 있지, 나의 원수는 없어요.

 

그런데 주님의 원수인지 아닌지를 누가 판정합니까? 주님이 판정하는데, 이게 나의 원수가 되면 내가 복수하려고 한다니까요. 내가. 내가 복수하려고 해요. 모든 막장드라마나 아침드라마가 전부 다 복수하는 거잖아요. 복수하는 거. 60년, 70년대 무대배경 합천에 가서 촬영해가지고 고물지프차 같은 거 나오고 하는 그런 게 있어요. KBS2에서 하는 아침드라마. 제화회사 뺏어가지고 죽여 버리고 하다가 결국은 또 다시 딸이 신고해서 그 인간 죽이고. 나까무라인가 뭔가 하는... 물론 제가 아침드라마 보지 않는데 나까무라만 들려가지고... 오늘로서 그 드라마 끝났어요. 나까무라고 뭐고. 전부 다 복수하는 겁니다.

 

복수극을 좋아한다는 말은 전부 다 거기에 한이 맺혀있다는 거예요. 용감한 사람들 나오는 어벤져스가 아니고 악인들만 나와서 설쳐대는 것. 그게 리턴이라는 드라마거든요. 고현정이 나오는 거. 악인들 3인방 나와서 자기들끼리 재벌3세하는 그것. 그것도 지금 시청자들을 달궈놨어요. 복수 신나게 해줄 테니까 보라는 거예요. 시청률15.7퍼센트. 계속 복수 어떻게 할 건지 기다리는 겁니다. “좀 기다려봐. 복수해줄 테니까.” 뭐 이런 식이라. 그러니까 시청자들은 “빨리 복수해줘. 복수해줘. 고현정이 왜 나가는 거야?” 이러고 있단 말이죠. 모든 사람들이 마찬가지에요.

 

중국에서 열린 바둑대회에 한국선수 박정환이가 세계 1위인 중국선수 커제를 이겼다. 한국의 바둑 팬들이 난리가 났어요. 드디어 그 1등을 박정환 9단이 이겼으니까. 시원하게 복수하는 거예요. 시원하게. 모든 것은 내가 갖고 있는 이 한을 누가 나서서 대리해주게 된다면 우리는 아낌없이 그 사람에게 박수를 보내고 찬미를 보내겠다는 겁니다. 왜 자기가 한이 맺힙니까? 도대체 인간이 왜 한을 갖게 되죠? 한이 없는 인간은 없잖아요. 철야기도, 새벽기도가 한 푸는 데잖아요. “쭈여! 쭈여!”가 뭡니까? 한이 맺혀서 쌍지읒이 나오잖아요. 차마 욕은 못하고 고상하고 경건하게 한다고 그나마 쭈여, 쭈여로 한다고요.

 

도대체 한은 어디서 오고, 한은 왜 생기는 거고, 한이 왜 맺히는 거죠? 주는 햇볕 쬐고, 비타민 확확 받고, 주는 공기, 가끔은 미세먼지가 생긴다만, 그 시원한 공기 마셨지, 공짜로 하늘에서 단비주시지, 공짜로. 뭐가 아쉬워서 한이 맺힙니까? 누가 키워줍니까? 참새가 한 맺히는 거 봤어요? 한 맺힌 참새를 봤습니까? 한(恨)참새, 참새한(恨), 뭐 이런 게 있어요? 한 맺힌 들풀 봤어요? 인간이 참새나 들풀보다 더 못해요. 인간은. 주께서 친히 기르신다고 했잖아요. 그들은 곧이 믿어요. 참새나 들풀은. 안 믿는 것은 인간밖에 없다고요. 인간이나 그 뒤 배후 악마밖에.

 

이래도 인간은 악마가 아니에요? 이래도 이 세상이 지옥이 아닙니까? 한과 한의 충돌이죠. 대물림이에요. “절대로 저 최씨 집안을 용납하지마라” 유언처럼 한다고요. “그 집이 나한테 얼마나 악하게 했는지..” 자기가 예수님도 아닌 게 왜 그런 유언을 합니까? 자기가 다윗입니까? “시므이를 용납하지마라” 뭐 이래되는 거예요?

 

내 개인적인 한을 언약적인 한으로 바꿔주는 것이 바로 약속의 땅 백성의 특징입니다. 사적인 한을 뽑아내버리고, “니 같은 인간은 한을 품을 자격도 없어.” 빼버리고 그 빈자리에 여자의 후손이 갖는 한, 뱀의 후손에 대한 저주를 그 속에 담아서, 하나님의 추동력에 의해서, 하나님의 계속해서 미는 힘에 의해서 이 세상에서 자기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전쟁하는 겁니다.

 

그래서 야곱이 아니고 이스라엘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전쟁하는 거예요. 복의 근원은 야곱이 아니에요. 지난 수요일에 이야기했죠. 복의 근원은 야곱이 아니고 복의 근원은 따로 있어요. 이스라엘. 이스라엘을 등장하게 하는 것은 불임의 원칙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불임이죠.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불임이죠. 야곱의 아내 둘 다가 불임이죠. 불임의 원칙이에요. 언약으로 태어나야 되는, 사람으로서 불임적인 요소를 품은 자가 이 세상에서 복의 근원이다.

 

복의 근원, 없는 존재가 복을 준다면 모든 존재는 무슨 존재입니까? 복이 아니고 저주받아 마땅하죠. 이 저주 속에 없는 존재가 삽입이 되면 이게 언약맨, 언약의 사람인데, 삽입이 되면 저주 속에 있을 때, 비로소 저주 속에 있음으로서 복을 증거하고 복을 보일 수가 있는 겁니다. 죄가 있는 곳에 의가 있고 저주가 있는 곳에만, 천벌이 있는 곳에만 천국이 있는 거죠. 저보고 탓하지 마세요. 스데반집사를 보세요.

 

스데반 집사가 어떻게 죽었습니까? 죽을 때 한 맺혀 죽었습니까? ‘내가 죽어서도 너 두고 볼 거야.’ 이래가지고 스데반집사가 한에 맺혀서 죽었습니까? 아니면 스데반 집사의 마지막 기도가 뭐였던가요? 저들을 다 죽여 버리라고 기도를 했던가요? 아니면 뭐라고 기도했던가요? “주여, 저들을 용서해주옵소서. 저들은 저들이 하는 짓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기도했죠. 꼭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릴 때, 그때 했던 기도를 해요. 왜냐하면 예수님이나 스데반집사나 다 같이 성령의 충만을 받았기 때문에. 성령의 충만을.

 

쉽게 말해서 “노는 물이 다른데 꼭 그것 가지고 한 맺혀야 되겠느냐?” 이 말이에요. “아휴, 어른이 됐으면서 그 딱정벌레 같은 것하고 싸우나? 사람이 그 정도밖에 안 되나? 그 정도밖에 돼서는 안 되잖아.”라는 그런 뜻이라고요. “노는 물이 다른데 어떻게 같이 놀려고 하느냐? 그 철딱서니 없는 것하고.” 그 사람들 앞에 나이아가라 폭포가 있어요. 무슨 뜻입니까? 넓은 길로 가면 앞에 나이아가라 폭포 있어요. 폭포에 빠지면 죽습니다.

 

그들은 지금 지옥 불에 빠지고 있는 중이에요. 그것도 맥주 마셔가면서. 아모르-파티( Amor Fati, 운명을 사랑하라) 내 인생 축하한다고, 내 운명을 경배하라는 거예요. 김연자가 부른 노래에요. 그들은 지금 인생을 즐기기 위해서 사는 거예요. 틈만 나면 즐기기 위해서. 혼자 즐기면 재미가 없잖아요. 여러 명이 모여서 즐기는 거예요.

 

어떤 사람들이 교회에 왜 남자는 없고 여자만 많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하는데, 그건 교회에 2차, 3차가 없어서 그래요. 교회 예배마치고 노래방가고 술 먹고 그런 게 없어서 그래요. 뭐, 독서 모임이요? 독서모임에 숫자가 없는 것은 2차, 3차가 없어서 그래요. 그 독서모임에 술 먹고 해보세요. 남자들 우르르 옵니다. 뭐, 학술모임? 학술모임에 왜 가는 줄 알아요? 술 먹으러 가요. 공부 언제 했다고 학술모임이에요? 그쪽은 회의계속하고 빨리 2차, 3차가려고 하는 거예요. 검사들 회식이요? 그것도 2차, 3차 때문에 모이는 거예요. 2차, 3차 때문에. 아모르-파티.

 

그거 못해서 한이 맺힌 거예요. 왜 한이 맺혔는지 이제 아시겠습니까? 지옥 가는 짓을 못해서 한이 맺힌 거예요. 인간은 날 때부터 지옥 가는 성향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재밌다. 할 수 있다. 내가 하고 싶다. 전부 다 지옥에서 집어넣어준 속성들입니다. 그러니 언약이 와서, 주님의 피가 와서 그걸 덜어내지 아니하면 그 속성을 가지고 그대로 나이아가라 폭포,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요.

 

제가 이번에 강남강의에서 유튜브 10분짜리 했거든요. 거기에서 누가복음 4장 이야기했어요. 엘리야 시대 때 모든 곳에 가뭄이 들었지만 오직 한 사람 사렙다 과부한테 찾아갔고, 그리고 엘리사 시대 때 그 많은 문둥병자가 있지만 단 한 사람, 그것도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에요. 시리아, 수리아 사람 나아만 장군에게만 찾아갔다고 했죠. 무슨 뜻입니까? 세상의 더러운 것을 기반으로 깔아라 이 말입니다. 세상이 지옥 쪽으로 전부 다 기울어져 있음을, 아니 지옥 됨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계속 확장시켰다는 것을, 그걸 전제로 깔아라 이 말입니다. 그걸 전제로.

 

그러면 한이 맺혔다는 자체가 이거는 사치에요. 이거는 자기를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떻게 보시는지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왜 저 인간한테 인삼뿌리 주고 나한테는 왜 무 뿌리냐?”라는 이런 식으로 남과 남을 비교하면서 그렇게 한이 맺힌 거예요. 모든 한은 어디서 생기는가, 남하고 비교하면서 생기는 거예요.

 

제가 옛날에 경상북도 봉화에 살았거든요. 옛날 봉화에는 귀향 오는 사람만 산다고 했어요. 왜냐하면 골짜기라서. 봉화하면 보통 뒤에 붙는 것이 있어요. 봉화골짜기. 뭔가 사업실패한 사람, 망한 사람, 갈 데가 없어서 이쪽으로 온다는 것. 사람의 낯을 피하기 위해서, 돈 떼먹고 도망치기 위해서 오는 거예요. 골짜기니까. 찾으려고 해도 못 찾으니까. 그래서 봉화골짜기에요. 그 봉화골짜기에 결혼해서 몇 년간 있었거든요. 한 3년간 있었고 제 아내는 더 오래 있었고.

 

그렇게 있었는데, 봉화에 있었을 때는 우리 옷차림이 얼마나 촌스러운지 몰랐어요. 전부 다 고만고만한 옷차림이기 때문에. 한 3년 만에 대구를 갔어요. 근데 신발부터 해서 미장원에서 한 머리모양까지 어쩜 그렇게 한결같이 촌스러운지, 음식도 왜 그렇게 맛이 없는지. 그런데 그 안에 있는 사람은 모른다고요. 이처럼 예수님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를 이 세상 사람들은 몰라요. 그저 자기 의 있잖아요. 나름대로 자기 의를 내세워요. 이만하면 되겠습니까, 이만하면 되겠습니까, 라고 이렇게 제시하는 거예요.

 

손승범씨가 율법에 대해서 질문을 했는데 질문을 잘했어요. 법에 대해서 질문을 했는데, 답변을 이렇게 했습니다. 법이라고 하는 것은 막상 어떤 법을 지켰다고 생각하는 순간, 내가 지켰다고 하는 순간에 새롭게 알게 되는 많은 세칙들이 있습니다. ‘누굴 도와줄 때 좀 더 친절하게 말할 걸.’ 이건 안 도와주면 몰라요. 도와주는 순간, 그때 내가 말 한마디를 친절하게 안 했다는 것을 도와줌으로써 새롭게 나한테 오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내장된 내면적법이에요. 내면법. 법이 외부에 있지만 내부의 법이 외부의 법을 이렇게 마중 나가는 거예요. 그러면 자기 내면에서 법이 자꾸 증가돼요. 자꾸 확장이 돼요. 확장되게 되면 항상 미흡하고 찝찝해요. 마치 설교하고 난 뒤에 그 느낌같이. ‘아휴, 안 돼. 안 돼. 그 이야기를 안 하는 건데 왜 했을까? 그 이야기를 집어넣어야 하는데 왜 또 안 집어넣었을까?’ 바둑에서 복기하는 것처럼, 수를 이렇게 놓아야 되는데... 항상 미흡하단 말이죠.

 

그래서 그 미흡하다는 그 자체가 한을 만드는데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나는 독자적으로 인간답게 살아야 되겠다는 것이 계속 견지되고 있습니다. 그게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천국에 안 넣어줍니다. 애굽에서 만들어진 인간은 천국에 안 넣어주거든요. 그럼 뭘 경유해야 하느냐 하면 죽음의 갭을 통과하게 됩니다. 죽음의 갭을. 그게 바로 홍해입니다. 인간들의 기본적인 한 맺힘, 그들의 행동을 유발시키는 동기가 어디에 있느냐, 그거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살아남아야 되겠다는 것. 죽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신이시여! 날 죽이지 마소서”

 

신이시여, 그 뒤에 붙는 것이 뭐냐, 뭐 여러 가지가 붙겠지만, 그걸 솔직하게 말해서 “신이시여! 나를 계속 존재케 해주옵소서.” 이거에요. 아무리 뒤에 하나님의 영광이 어떻다 해도 딱 이거에요. “저를 죽이지 마시고 계속 살려내 주시옵소서.” 그럴 권리가 우리한테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간의 기도를 받지를 않습니다.

 

성령님의 기도를 받는 이유가 성령님이 자기를 위한 기도를 한 게 아니에요. 이 땅에 와서,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죽었던 분을 위한 기도기 때문에 성령님의 기도가 응답이 되는 거예요. 죽었던 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서 성령께서 일하거든요. 성령은 본인을 위해서 일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일해요. 그러니까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라니까요. 그리스도의 영.

 

근데 예수님은 이 땅에서 어떤 분입니까? 죽으려고 오신 분인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내가 있는 한 천국에 못 갑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나를 누군가가 죽여주셔야 돼요. 사도바울은 성령이 왔을 때 말하기를, 나는 날마다 죽고 내 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산다는 아주 해괴망측한 이야기를 했어요.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산다고 할 때 뭐가 날아가 버리느냐 하면은 이게 날아가요. 내가 뭘 한다가 날아가요. 내가~~한다. 자, 앞에 뭐가 붙어요? 내가 시작해서 뭔가 일을 벌이죠. 내가 시작해서 일을 벌이는 것은 반드시 나를 살리는 쪽으로만, 이게 그렇게 할 때만 우리는 그걸 인정하려고 하는 거예요. 누가? 내가. 내가 사는 쪽으로만 움직이기 때문에, 나로부터 시작된 일이 나를 더욱더 윤택하게, 풍부하게, 행복하게 살려내는 일이 있을 경우에만, 나는 그런 신에게만 기도하겠고, 그런 신이라고 기도했습니다. 이게 바로 우상이거든요. 이게.

 

예수라고 했다고 하든, 하나님이라고 했다고 하든지, 뭐 그런 명칭하고는 관계없어요. 이게 바로 우상이에요. 우상은 내가 만들어요. 내가. 그래서 우상은 특징이 있어요. 공식이 있어요. ‘나를 위하여’입니다.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하는 모든 기도라든지 헌금, 다 우상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헌금을 했잖아요. 누굴 위해서 했습니까? 모습은 하나님을 위해서 한 것 같지만 누굴 위해서 했습니까? 자기를 위해서 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뭐했다? 나는 헌금했다. 그러니까 제가 주일에 설교했잖아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잘못한 게 뭐였냐 하면 자기가 개입해야 헌금이 구성되는 줄 알고 있어요. 주께서 주께 헌금하게 했는데, 자기들은 하나의 종이거든요. 종이 또 나오는데. 종이라고 하는 것은 개인적인 ‘나’가 없어야 돼요. 주인은 나를 죽이고 종으로 만들어요. 날마다 나를 죽이고 주님의 종이 되게 해요. 그걸 로마서 6장에서 의의 종이라고 하는데. 그리고 그 전에 우리는 무슨 종이냐면 죄의 종이에요. 죄가 있는 이상, 죄의 종을 의의 종으로 날마다 바꾸는 작업을 하시는 거예요.

 

자, 다시 빌레몬서로 돌아와 봅시다. 빌레몬서에서 오네시모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면 오네시모가 한 것이 없는데 이 사태를 누가 몰고 가느냐, 빌레몬하고 사도바울하고 지금 두 분이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오네시모는 그냥 가만히 있어요. “저, 자유인이 되고 싶어요.”라고 한 것도 없어요. 하여튼 누가 자유인인지 분간도 안 돼요. 그럼 뭘 벗기느냐 하면 소유권정리를 해주는 겁니다. 소유권정리.

 

오네시모의 뒤집어진 소유권을 정리해주는 거예요. 소유권정리를 해주면 오네시모는 뭐가 되느냐, 자유인이 되느냐? 지금 제가 묻는 겁니다. 오네시모에게 소유권을 정리해주면, 그럼 종에서 자유인이 되는 거예요? 이게 성경 전체에 흐르는 오묘한 이야기에요. 인간을 어린양의 피와 홍해로 죽이죠. 인간이 홍해를 건너올 때 이미 그들은 죽은 자에요. 왜? 뒤따라오는 애굽 군대도 같은 인간이거든요. 하루 세끼 먹고 잠자고. 근데 그들은 홍해에 빠져죽었잖아요.

 

인간이 바다에 빠지면 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까? 이상한 일입니까? 그게 자연스럽죠. 인간은 물에 빠지면 죽죠. 누가 자연스럽냐 하면 애굽 군대가 자연스러운 거예요. 오히려 누가 이상하느냐 하면 바다를 통과한 이들이 이상한 사람들이에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바다를 통과하기 이전에 그들은 모세에게 대들었잖아요. “우리를 죽이려고 하느냐, 어디 죽일 데가 없어서 공동묘지를 만들라고 하느냐?”라고. 주께서 바닷길을 내줬습니다.

 

그러면 이거는 죽음을 통과한 거예요. 죽음을 통과하게 되면 인간에서 종으로 만들죠. 종이 뭐냐 하면 그 다음부터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봉사에요. 봉사. 봉사를 신약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성령이 임하면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어디에도 인간은 없어요. 나라는 게 없다니까요. 나라는 게. 누구누구를 봉사하기 위해서, 마찬가지로 누구를 증언하기 위해서 내가 한다가 아니라, 내가 들어가면 안 돼요.

 

주께서 나에게 이런 일을 하도록 이렇게 내 인생을 주님의 것으로 채우게 하시는 거예요. 노래에 이런 노래가 있어요. 제목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내게 남아 있는 사랑을 뭐 어떻게 채운다고 하는 그런 노래가 있어요. 남아 있는 사랑을 드리겠다고 하는 그 노래 말고 딴 노래가 있어요. “당신의 남아 있는 인생에 내 사랑으로 채워드리겠습니다.”라는 그런 노래에요. 하여튼 말은 잘해. 꼬시려고 하면 무슨 말을 못해요. 온갖 좋은 말을 다하죠.

 

봉사하고 하는 것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봉사는 하고 싶어도 해서는 안 돼요. 봉사할 여건은 누가 마련하는가, 주님께서 마련해 줄 때 봉사가 봉사 값이 되는 겁니다. 지금 오네시모가 종에서 자유인이 되고 봉사하게 되는데, 이러한 경험을 누가 먼저 하는가, 사도바울이 먼저 했고, 그걸 오네시모한테 알려주기 전에 누구한테 먼저 알려주느냐 하면 빌레몬한테 알려주기 위해서 이렇게 긴긴 아부성 있는 편지를 보내는 겁니다.

 

“내가 오네시모를 그냥 할 수도 있지만 내가 너한테 허락 맡고 한다. 좀 잘 봐줘라.” 여기 20절에 보게 되면 “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를 인하여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이렇게 한다 이 말이죠. 이 말은 뭐냐 하면 빌레몬으로 하여금 소유권정리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빌레몬이 이웃사랑 하듯이 오네시모를 내놓는 것이 아니고, 사도바울이 빌레몬에게 강제로 오네시모와의 관계, 종과 주인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겁니다. 빼앗아버리는 거예요. 말은 좋게 하지만.

 

그리고 빌레몬에게 하는 말이 “뺏길 때 영광으로 알아라 이것들아! 니가 뺏길 때 복 받은 줄로 알아라.” 이 말입니다. 뺏기는 것을. 근데 사도바울이 뺏습니까? 사실은 누가 뺏습니까? 사도바울이 누구의 종이에요? 주님이 빌레몬에게 사도바울을 보내서 빌레몬의 재산인 오네시모를 강제로 빼앗아버리는 겁니다.

 

보통 전쟁이 일어날 때 나라에서 공출하는 것이 있죠. 개인적인 차나 트럭이나 이런 것이 전쟁에 필요해 나라에서 강제로 가져가죠. “우리가 쓰겠습니다.” 강제로 가져간다고요. 심지어 수사영화 같은 것 보면 범인이 막 도망가는데 형사가 뛰어가면서 못 잡으니까, “잠시 공출하겠습니다.”하고서는, 젊은 애 엉덩이 차버리고 오토바이를 뺏어 타고 가서 범인을 잡잖아요. 그리고 오토바이 부서진 그것은 경찰서에서 갚아주고. 지금 급한데 뭐 아무거나 걸리는 대로 뺏어서 따라가야죠.

 

우리는 지금 공출되어야 될 대상이에요. 우리는. 나를 위한 세계는 없어요. 처음부터 피조물이기 때문에 나를 위한 세계는 없다 이 말이죠. 근데 주님 앞에 공출되면서, 사도바울을 좀 한번 보세요. 사도바울은 어떤 점에서 공출되었습니까? 자기는 지금 예수님을 핍박하면서 공출되었잖아요. 그러니까 공출된다고 할 때는 공출해주시는 분의 의의가 중요하지, 공출되기 전에 니가 얼마나 죄를 많이 지었으며, 얼마나 니가 흉악질을 했느냐, 그거는 전혀 공출의 장애요소가 아닙니다.

 

강도냐, 창기냐, 세리냐, 그거는 공출에 있어서 문제가 되지를 않아요.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삭개오한테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공출하죠. 삭개오가 “우리 집에 못 들어옵니다.”라고 이랬습니까? “나는 당신 같은 사람 우리 집에 못 들입니다.” 이랬어요? 여기서 오늘 강의의 가장 핵심부분은 이렇습니다. 공출이든 봉사든 간에 시작하시는 분이 따로 계시다는 거예요. 우리가 마음 정갈하게 먹어가지고, “이 몸 드리겠습니다.”라고,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받아주시는 것이 아니에요.

 

자, 그렇다면 가만히 기다리면 옵니까? 이래 되거든요. 가만 기다리면? 여러분, 기다릴 때 방금 어떻게 기다린다고 했어요? 가만히 기다린다고 했어요. 인간은 가만히 기다릴 인간이 없어요. 반드시 나를 앞장세워서, 나의 가치를 더 높이기 위해서, 뭔가 꿈쩍거리게 되어 있어요. 뭔가 활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노리는 것은 누구누구의 봉사? 아닙니다. 인간은 그렇게 만만하지가 않아요. 누구누구의 봉사로 하는 것을 희망삼지 않습니다.

 

뭐냐 하면 인간이 원하는 것은 안식입니다. 안식. 그저 몸이 편한 게 최고에요. 어서 힘든 세상 거치고 천국 가서 편안하게 쉬고 싶은 겁니다. 자, 만약에 천국의 침대가 있다고 하고, 침대 위에서 “아이고, 도착했다. 이제 갈 데 없다. 이제 쉴래.”라고 할 때, 그 쉬는 상대자가 누굽니까? 본인이죠. 그때 만약에 조교천사가 와서 조교모자 삐딱하게 눈 안 보이게 써가지고 하는 말이 “여기 빨딱 일어납니다. 여기가 당신 집입니까? 복창소리 봐라! 5분 내에 일어난다. 군장꾸리고 집합!” 이러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왜, 장정들에게 군대가 그렇게 힘드냐 하면 나를 위해서 살다가, 나를 위해서 산다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 공간속에 강제로 들어간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옛날에 나를 위했던 그 습성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있죠. 한 3개월 하면 없어집니까? 군대 생활 한 1년 하면 없어집니까? 우리 할 때는 군대생활 34개월 했어요. 저는 교련 혜택 봐가지고 32개월에 나왔지만. 우리 선배들은 36개월 했어요. 더 선배는 38, 40개월 했어요. 왜? 북에서 간첩이 내려와 가지고. 그러면 40개월 했다고 그야말로 국가에 대해서 봉사합니까?

 

아무리 군대에서 억압으로, 강제로, 강제로 철조망 쳐놓고 “탈영하면 니는 영원히 인생 끝난 거야. 니 청춘은 교도소에서 다 보내게 된다.”라고 협박을 하지만, 마음은 벌써 달력에 가위표를 치죠. 이 가위표 왜 칩니까? 가위표가 끝나는 날 도로, 이게 도로묵인데, 도로남이죠. 님에다가 점하나 붙이면 남이죠. 도로 뭐가 됩니까? 나는 자유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을 군대에서 다루어서는 천국으로 못 보냅니다. 백날 억압해서 나라에 봉사해도 제대날짜 되면 개판돼버리고 결국은 ‘에이, 정말 하나님한테 진짜 더러워서 해줬지.’라고, 본래 성격과 성질은 절대로 양보 안 합니다.

 

그만큼 마귀의 능력을 무시하지 마세요. 마귀는 어떤 식이냐 하면은, 마귀는 반드시 목표가 있어요. 마귀의 목표는 뭐냐, 니가 잘 돼야 된다는 거예요. 니가 잘 돼야 된다는 것을 악마가 우리한테 심어준 거예요. 왜냐하면 악마는 우리를 뭐로 만들었느냐 하면 절대자로 만들었거든요. 절대자. 천상천하유아독존으로 만들었거든요. 불교가 노골적이 아닙니까? 불교가 노골적이거든요.

 

절대자기 때문에 절대자가 절대자 값을 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포기를 모릅니다. 우리가 악착같이 고생하고, 수요일 설교에 야곱 할 때 했잖아요. 고생하고, 희생하고 하면서도 결국은 뭐냐 자기를 복의 근원이라고 자부하고는 그걸 위해서, 사랑하는 아내를 얻기 위해서 14년 동안 품삯을 안 받고 일했잖아요. 거기다가 자기 것 말고 삼촌 것을 위해서 6년 동안 하고. 20년 동안 진짜 무임금으로 일했고, 임금을 열 번이나 바꿨고, 자기도 속이는데 라반은 더 속여요. 이게 수요설교에 나옵니다.

 

더 속이죠. 근데 나중에 반전이 일어나서 속인 자에게 더 속여 버리죠. 얼룩덜룩한 양을 골라보라고 해놓고는 라반은 자기 아들 시켜서 얼룩덜룩한 양은 다 빼돌리고, 진짜 야곱에게 몇 마리 안 남도록 하고. 나머지기는 얼룩덜룩한 것도 아닌데 다 맡겼어요. 야곱은 버드나무 껍질 벗겨가지고 물 먹을 때 “여기보세요!” 짝짝짝! “여기 봐야지!” 짝짝짝! 해가지고, 그걸 보고서 전부 다 임신해서 얼룩덜룩한 것을 낳아버렸어요. 이 아이디어는 야곱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가르쳐줬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거 DNA연구해봐야 안 나옵니다. 여기보세요! 한다고 해서 안 되거든요.

 

얼마나 악착같이 하나님도 나를 도와줬다는 거예요. 근데 그 야곱은 죽어야 될 야곱이에요. 죽여주는 것이 복이에요. 그걸 만약에 안 죽여주면 바꿔치기가 안 되기 때문에, 바꿔치기가 안 되게 되면 혼자서 태어났다가 혼자로, 영원히 혼자로, 혼자서 지옥 불에 가야 됩니다. 차사와 함께 지옥 불에 가야 됩니다. 차사 신과 함께 지옥 불에 가야 돼요. 지옥 불에.

 

그래서 인간은 자기 잘 되는 것, 자기 영광, 안식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근데 이것을, 포기 안 되는 이것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원시키느냐. 그러니까 이 구원하시는 방법이 이 빌레몬서에서는 소유권정리인데, 오늘 설교제목을 뭐라고 할까를 생각중입니다. 소유권정리를 하는데, 사실은 이것도 중요해요. 어떻게 구원하느냐, 결과물입니다. 결과물. 내가 손대지 않았는데 하나님의 일에 관여하신 분들의, 그 다음이 중요해요. 봉사에 의해서 결과물로 나온 거예요.

 

제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인데 인간을 죽여서 뭐로 만든다? 인간을 죽여서 종 만들죠. 종이 해야 할 일은 봉사입니다. 봉사라는 것은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죠. 자기를 위한 봉사가 어디에 있어요? 자기 말고 누구를 위한 봉사죠. 이 봉사는 그냥 하는 것이 아니고, 종과 함께 동행 하신 그 하나님께서, 먼저 인간을 위해서 봉사한 거예요. 사도바울이 먼저 오네시모를 자유인 되게 해서, 사도바울 쪽에서 먼저 빌레몬에게 부탁하는 거예요. “빨리 내놔라!”라고 이럴 수도 있는 문제에요.

 

왜? 빌레몬은 자기의 제자고 자기에 의해서 구원받은 사람이고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존경하고 사도로 인정하기 때문에 복음 전파를 위해서 오네시모를 내놓으라고 이렇게 할 수도 있는데, 빌레몬서의 구절마다 보게 되면 이 편지 자체가 마치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봉사하는 자세로서 이렇게 아부하듯이 쭉 한 거예요. 굉장히 친절하게 해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서 어떤 사람은 모순된다고 하는 사람도 있어요. 처음 교회 나와 가지고 성경보기는 봤는데 뭐 앞뒤가 안 맞더라. 뭐가 앞뒤가 안 맞느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나는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고 섬기려고 왔다고, 그렇게 해놓고는 왜 자기를 주로 섬기라고 하느냐? 그러니까 앞뒤가 안 맞는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섬기지 아니하면 결과물이 안 나오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이 섬겨봐야 자아가 주체가 되어가지고 주인공으로 등장하거든요. 그래서 설교할 때 “여러분 주님 섬깁시다.”가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주님한테 섬김 받은 사람이 누구십니까? 주님의 희생을 얻어먹은 사람이 누구십니까?”라고 묻는 게 옳죠. “주님의 희생의 결과물이 누구십니까?”

 

그러나 사람은 자기가 마땅히 얻어먹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결과물을 줘도 그런 사람한테는 결과물이 도달되지 않죠. ‘이건 마땅히 내가 챙겨야 돼.’ 이래가지고서는 주님의 결과물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께서 봉사하되, 그 봉사의 기능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니는 죽었어.”가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니는 죽었어가. “니 긁어낼 거 다 긁어낼 거야.” 이게 봉사에요.

 

내가 스스로 나를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나를 부인하게끔 환경과 여건이 만들어지는 그것도 나를 주님의 결과물로 만들고자 하는 주님의 애씀이고, 희생이고, 노력이고, 그리고 은혜고 공로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까지. 인간이 자기를 부인할 수 없는 이유가 있어요. 그거는 이간이 하나의 개인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단체로 움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인간을 개인으로 생각하는데 개인이 아니고 서로 일가친척, 아는 사람들 해서 그 단체 안에서 움직입니다. 그 단체 안에서. 그 집단 안에서 움직여요. 자기가 뭔가 결정하고 싶어도 결정을 못해요. 눈치보여가지고. 선배부장검사가 뭐 성추행을 한다. 그 현장에서 아니요, 라고 못합니다. 이미 한통속이 되어 있기 때문에. 한통속이. 이제 와서 고은시인이 뭐 여자시인을 가지고 상습적으로 성추행을 했다고 이 음흉한 늙은이! 라고 이렇게 하는데.

 

참네! 이게 말이 안 되는 게요. 왜 그때 아니라고 못했어요. 왜 아니요, 라고 못했습니까? 그리고 그 술자리에 왜 참석했습니까? 이 바닥에서 출세하려고. 사람들이 하는 말들이 문학바닥이 이렇게 지저분한지 몰랐다는 거예요. 이거 바보도 아니고, 인간들이 모인 집단에 안 지저분한 게 어디에 있습니까? 안 지저분한 게?

 

목사가 여전도사하고 같이 심방 다니다가 심방 끝나고 모텔에 가가지고 했다. 그 소리를 딱 들을 때 사람들은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그 목사 밟아야 된다. 그거는 악마지 목사가 아니다. 누구야? 신원 밝혀라! 내가 밟아줄게.” 이렇게 막 그 교회의 교인들이나 외부에서 흥분하면서 정의는 없다고 고함지르잖아요. 근데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조건이 하나 있어요. 뭐냐 하면 그렇게 당했던 여전도사의 얼굴은 이쁠 것이라는 조건하에 그렇게 흥분해요. 얼굴이 이쁠 것이라는 조건하에.

 

그런데 막상 기자회견에서 보니까 전도사가 얼굴이 못 생겼어요. 이쁘면 시집가지 전도사 할 일이 있겠어요. 누가 채가도 채가죠. 이거 삭제해야 되는데. 삭제. 하여튼 간에 생각해보세요. 여자가 이쁘면 시집가지 놔두겠어요. 시집못가니까 전도사 하잖아요. 이혼한 전도사 말고. 근데 기자회견장에서 보니까 여전도사가 못생겼어요. 그럼 사람들은 전부 다 아무소리 안 합니다. 못 생긴 거 건드려 준 것도 영광인 줄 알아라. 어떻게 왕의 총애를 받았으면 회임이나 하지...

 

이 세상에서는요, 이걸 안양강의에서 했는데 딴 이야기지만. 지킬만해서 지키는 것을 그걸 정의라고 하는 거예요. 못생긴 것은 이건 진화론에 의해서 도태되어야 해요. 못생긴 것은 태어나지도 말아야 되고 살지도 말아야 돼요. 못생긴 것은. 그게 바로 창세기 3장에서 나오는 남성중심의 세계입니다. 지옥입니다. 이 세상은 지옥이에요. 지옥에서 무슨 정의를 찾습니까?

 

그러면, 정 그렇거든 그것을 밟아버려야죠. 왜? 밟아버리면 누가 죽어요? 여전도사 잘려가지고 월급 없어서 굶어죽습니다. 그 시인은 도태당하죠. 그러면 이건 뭘 의미합니까? 곧 누구의 죽음? 나의 죽음. 이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아닙니까? 이 땅에서.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거잖아요. 아무도 입 못 벌리고 있을 때 주님께서는 죽으시는 거예요. 살려고 하니까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살려고 하니까.

 

고은 시인이 뭐 여시인을 성추행했다고요? 그럼 지금 살아남은 모든 여자 시인은 뭡니까? 다 성추행 할 때 다 용납했다는 거거든요. 그런 선배들한테 아부했다는 거예요. “출세만 할 수 있다면 뭐라도 드리겠습니다.” 이거다 이 말이죠. 하여튼 못생긴 것들이 정의를 부르짖으면 남들에게 공분을 사죠. 공분. “못생겼으면 밥이나 줄 때 고마운 줄 알아야지. 뭘 까부노?” 왜냐하면 이쁜 것은 국보가 되거든요. 모든 사람이 손대면 안 돼요.

 

그거는 나라의 자랑거리에요. 김연아. 만약에 체육회회장이 김연아를 추행했다고 하면, 체육부장관부터 시작해서 다 날아갑니다. 아마 촛불집회 일어날 걸요. 이 세상은 다윈의 진화론에 의하면 이쁜 것들만 남을 가치가 있고, 못생기고 가난한 것은 없어져야 이게 문명의 진보가 이루어져요. 그게 다윈의 진화론이고 그걸 어릴 때부터 다 배웁니다. 어릴 때부터 학교에서 진화론에 대해서 다 배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서 느낀 점은 개인적으로 한 맺힐 자격도 안 된다는 것을, 우리는 예수님을 보면서 인정해야 돼요. 나는 개인적으로 한 맺힐 자격도 없다. 인간들끼리도 못생긴 것을 그렇게 설움 받게 하는데,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우리가 못생긴 정도가 아니고요. 이거는 지옥에 밟아도, 지옥에 처넣어도 우리는 할 말이 없어요. 근데 고만고만한 인간들끼리 비교하기 때문에, 나는 자기는 정의를 부르짖으니까, 나는 한국교회 개혁이 되어야 한다고 하니까, 마치 자기는 뭐 하나님이 가치가 있어서 살려주는 것 인양 그렇게 여기는 것입니다.

 

정말 본인이 생명이 있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이 무가치한 우리를 아버지 앞에 대신해서, 봉사해서 그 결과물, 결실물로 우리가 이렇게 생명을 얻고 있음을 아는 겁니다. 그것을 어디서 아느냐,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품꾼이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너희들이 동행하는 나 때문에 너희들이 일꾼이 되었잖아. 그러니까 너희들은 약속의 땅에서 그 약속이라는 것을 구현해야 되는데, 그게 뭐냐 하면 “이 땅은 내 소유가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주님의 품꾼입니다.”라는 고백이에요.

 

다시 한 번 정리하게 되면 인간은 자기 자신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준다는 그 천국 되게 좋아하고요, 천국가면 편히 쉰다는 거예요. 마치 침대에 누워서 편히 쉬고 아무 할 일도 없고. 그래서 니체 같은 철학자는 천국가면 할 일이 없으니까 나는 천국 안 갈란다고 이렇게 착각하는 거예요. 천국은 노는 데가 아니에요. 주를 위함이, 주를 위함 때문에, 주를 위한다는 입장이 너무 영광스러워서, 그게 감사해서 날마다 찬양하는 곳, 그게 천국입니다.

 

그래서 죽어서 가지 말고 미리 살아있을 때에 천국에 이미 들어가 있어야 돼요. 그럼 들어가 있다면 그 성도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맨날 세상하고 똑같죠. 자기영광, 영광 하다가 성령이 와서 여건을 조성해 줘버리면, “나 같은 인간은 지옥가도 마땅한데”라고 하는 순간, 나 같은 인간이 지옥 가야 마땅한데 천국 가니까, 이거는 자진해서 이런 결과물을 만들어주신 분에 대해서 봉사가 뭡니까? 아낌없이 주께서 쓰시는 대로 쓰시라고 내세우게 돼요. 3초. 딱 3초.

 

“주여! 쓰시옵소서.”라고 딱 3초 내세우게 되는 겁니다. “원하는 대로 쓰시옵소서.” 이것도 4초가 되면 벌써 끝났어요. “나는 주의 종이다.” 이러고 또 자랑질 한다고요. “나를 쓰신단다. 쓰신단다.”라고 자아가 또 붙어요. 이게 인간의 의식이 그렇게 짜여 있기 때문에. 그래서 날마다 성령께서 탄식을 하면서, 예수님에 근거해서, 예수님의 결과물로 계속 유지될 수 있도록 질질 끌고 이끄시는 겁니다.

 

우리는 넓은 길 되게 좋아하고, 남들한테 인정받는 것 되게 좋아하고요, 같이 섞여서 으쌰~ 으쌰~하면서 놀러가는 것 되게 좋아해요. 외톨이 싫어하고, 왕따 되는 것은 더더욱 싫어하고. 우리는 왕따 되면 복수하고, 분노하면서 하나님한테 꼬질러서 “저 인간 다 불바다로 만들어 주옵소서.” 이러고 있단 말이죠. 우리를 따르지 않는 자들에게 주께서 불을 내려달라고 제자들이 이야기했잖아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뭐라고 했습니까? 귀신이 떨어지는 것보다도, 그 구절은 아니지만 같은 맥락이에요. 니 이름이 생명책에, 니가 주님의 소유에 의해서 결과물이 된 것을 니가 영광인줄 알아라. 어디 저 하찮은 저런 것하고 같이 놀려고 하느냐? 너는 격이 다른데, 천사도 부러워하는데, 노는 사고방식을 좀 다르게 해야지. 나 봐라! 하나님이지만 이 땅에서 뭐가 됐다? 자발적으로 죽기까지 사람의 종이 됐잖아. 귀싸대기 맞았잖아요.

 

주께서 복수했습니까? 복수는 하겠죠. 그러나 그것 때문에 “씨~ 누가 때렸노?”라고 했습니까? 아니죠. 순한 양같이, 도살할 양같이, 아버지의 뜻으로 알고 자기 백성을 위해서 봉사하기 위해 그냥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스데반집사처럼. 그런 넉넉한, 여유 있는, 세상을 위에서 볼 수 있는 안목, 그게 바로 봉사자의 자세, 봉사할 때는 자기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얼마나 우리 속에 깊숙이 박혀있는지, 뭘 해도 이거 하면 얼마주시겠습니까? 라는 계산과 타산 식으로 나오는, 우리의 이 죄악 된 모습을 저희들에게 다시 밝혀주셔서 우리가 이렇게 못난 인간이지만 주의 결과물로, 십자가의 피의 결실로, 영생의 열매로 살아감을 저희들이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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