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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4 00:29:25 조회 : 627         
고난과 영광 180413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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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IP:122.♡.178.64) 18-04-15 19:00 
서울의존강의20180413a 베드로전서1장 8-11절(고난과 영광)-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1장 8-11

8절,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런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10절,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절, 자기 속에 계속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 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베드로전서 1장 8절,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사람이 뭘 본적이 있어야 사랑이 돼요. 아무것도 안 봤는데 사랑한다는 것은 구라입니다. 이건 백퍼센트 구라예요. 거짓말이에요. 본 게 있어야 돼요. 본 게. 왜냐하면 인간의 몸이라는 것은 보지 않는 것은 없는 거예요. 인간의 몸이라는 것은. 본다든지, 듣는다든지, 어두운 가운데 피부로 접촉한 게 있다든지, 뭔가 있어야 돼요.

멀리서 본 적이 있다든지, 사진을 통해서 봤다든지, 그림을 통해서 본 적이 있다든지, 뭔가 감각적인 접촉이 없다면 그것은 귀신이든지 아니면 유령이든지. 결국 귀신, 유령이라는 것은 이 사회에서 없는 존재로 분류됩니다. 없어요. 사람이 뭔가 볼 때에 있다는 것은 감각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이 제일 확실하겠죠. 뭔가 봐야 돼요. 보고, 그 다음에 저 사람이 믿을만한지, 안 믿을만한지를 검토하는 겁니다. 보든지 듣든지 뭔가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모세 같은 경우에는 시내산에 올라갔습니다. 시내산에 올라갔는데, 모세는 보이지를 않아요. 모세가 보이지 않는데, 그들은 본 게 있었습니다. 뭔가 하면 시내산 정상이 번쩍번쩍 거리고 시내산이 흔들리더라 이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여호와께서 그 산에 계시다고 인정해요. 그러나 모세는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모세가 나중에 와서 말씀을 이야기할 때, 보이지 않는 모세가 이제는 보이는 모세로 나타났죠. 나타났는데, 모세가 올라갈 때하고는 달라요. 뭘 들고 왔어요. 돌판을 들고 왔습니다. 근데 돌판을 중간에 성질나서 깨버렸죠.

자, 그럴 때 시내산 밑에 있는 백성들은, 모세가 있다가 없었으니까 그들의 마음이, 그들의 인간성이 좀 달라졌겠습니까? 안 달라졌겠습니까? 없는 모세가 나타났다. 그래서 그 모세한테 하나님에 관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면 그들이 변화했겠어요? 안 변화했겠어요? 자꾸 시간이 가니까 답변은 제가 해야 되겠죠. 인간은 변하지 않습니다. 정보를 추가했을 뿐이죠. 정보를.

인간이 뭐가 문제냐 하면은, 인간에게 몸이 있다는 게 문제거든요. 인간에게 신체, 육체, 몸이 있잖아요. 몸이 있으니까, 모든 매사에, 외부에서 오는 듣는 것, 보는 것, 누가 이야기하더라, 율법을 이야기하더라, 하는 이 모든 것은 뭘 해도 몸의 허락이 있어야 돼요. 몸의 허락. 누구 몸? 내 몸의 허락이 있어야 돼요. 내 몸의 허락.

근데 이 몸은 누구를 위해서 존재하느냐 하면 내 몸 자체를 위해서 존재해요. 내 몸이 기분 좋을 때, 내 몸이 유리하다고 여겨질 때, 내 몸이 이익이라고 느껴질 때만, 그럴 경우에만 바깥에 있는 외부정보를 내가 믿습니다, 라고 하든지, 나는 지키겠습니다, 라고 하든지, 여러 가지 표현방법이 있지만, 어쨌든 간에 받아들일 용의가 있습니다, 나는 그걸 인정합니다, 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런데 그 조건이 뭐냐 하면 내 몸이 유리할 때, 내 몸이 그냥 지켜질 때, 안정적으로 보존이 된다고 하는 그 조건 하에 받아들인다 이 말이죠. 그러면 내 몸은 결국 누구한테 충성하느냐 하면, 현재 기존에 있는 내 몸에 충성하게 되어 있어요. 환자가 병원에 가서 주사 맞는 아픔을 견디는 이유가 병원을 위해서입니까? 이 아픔만 견디면 내 몸은, 내가 다시 아프기 전으로 돌아갈 수 있고, 더 튼튼해질 수 있다는, 내 몸의 본성적인 요구조건에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몸에 주사를 맞는 겁니다.

병원에 가서 “내 몸을 가져가세요. 내 몸을 죽이세요. 나를 이것보다 더 아프게 해서 죽이세요.”라고, 그걸 요청하려고 병원에 안 가잖아요. “내 몸을 바칠 테니까 이 몸 가지고 장사 잘하세요.” 이러지 않는다 이 말이죠. 병원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 몸이 중요하니까. 내가 잘 되기 위해서 병원에 가잖아요. 그래서 거기서 요구하는 모든 귀찮은 검사도 감당이 되고 참아내는 것은 다 건강한 내 몸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 버릇이 어디에 가겠어요? 안 가는 겁니다. 그 버릇이 갈 수가 없어요.

8절에 보면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라고 해서, 이 말의 의미가 뭐냐 하면 보는 식으로 믿는 방식을 하나님께서는 채택한 적이 없다. 이래 되는 거죠. 보여주는 것으로 믿으라는 구원방식을 주께서는 아예 채택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보지 않았는데 사랑하게 되니까. 보지 않았는데 사랑하게 돼요.

아까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보지 않으면 없는 건데, 없는 존재를 뭘 사랑해요? 인간은 평소에 자기 신체가 거기 있음을 사랑하기 때문에, 보지 않고 한다는 이건 뭐 성립될 수 없는, 터무니없는 주장처럼 그렇게 들립니다. 그래서 지난달에 뭐라고 했습니까? 베드로가 희대의 사기꾼이라고 했잖아요. 희대의 사기꾼.

뭐 사기도 걸려들 만한 내용으로 한 게 아니에요. 먹혀들지 않는 이야기를 지금 하고 있는 겁니다. 베드로가 사도거든요. 안 먹혀들면 할 수 없고! 이런 배짱이에요. 이런 배짱입니다. 자기가 몇 명을 더 꼬셔가지고 천국 보냈다는 그러한 성과는 전혀 이거는 베드로하고는 상관이 없는 거예요. 베드로는 지금 자기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주의 일을 하고 있죠.

가게 주인하고 가게 직원하고 차이점이 그거잖아요. 자기 가게가 아니기 때문에 월급 준만큼, 아니 월급 준만큼도 하지를 않아요. 월급 준만큼만 하지 더는 안 하잖아요. 그러나 가게주인은 근무시간이 20시간이 넘죠. 밤이나 낮이나 자기 가게 신경 쓰고, 직원은 근무시간이 한 댓 시간이 되나 몰라요. 6시간 중에서 3시간은 엉뚱한 짓 하면서, 시계나 보면서 빨리 퇴근이나 하려고 하지 전적으로 하지는 않아요. 직원들이 딴 짓 할 때, 그 시간도 주인은 가게에서 충성을 다합니다. 물론 그렇지 않는 주인도 있어요. 직원한테 맡겨놓고 자기는 낚시하러 놀러가는 사람들의 퍼센트도 제법 돼요. 그러면 가게는 망하죠. 할 필요가 없죠. 가게를 할 때 놀려고 가게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주위에 있어요.

어쨌든 간에 베드로 같은 경우에는 지금 전개되는 그 이야기에 대해서 이야기할 뿐인데, 전개되는 일이 인간 쪽에서 어떻게 시도하느냐 그거하고는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봐야 믿는다는 것은 인간 쪽에서 생각이고요. 주님 쪽에서의 구원의 방법은, 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자가 내 백성이라는 식으로 주님께서는 일하시는 거예요.

“뭘 체험하고 뭘 느껴야 믿겠습니다.”하는 쪽은, 그거는 인간들이 하는 짓이에요. 뭐 구시렁구시렁 거리면서. “잘 믿고 싶어도 주님께서 사도바울처럼 그런 획기적인 체험을 준 적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내 믿음이 요 모양 요 꼴이죠? 뭐 체험을 줘야 믿죠?”라고, 이렇게 믿음 없는 것도 전부 다 하나님 탓이고, 주님께서 나를 사랑 안 한 탓으로 돌리는 그런 방식이 인간이고요. 주님은 아무 체험도 없는데 나를 사랑한다고, 그런 식으로 구원하겠다는 겁니다.

근데 그런 베드로의 주장에 대해서, 주님의 주장에 대해서 인간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럴 리는 없다는 거예요. 그럼 주님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니가 그럴 리가 없다고 여기는 그것을 의도적으로 비켜가면서 건지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는 겁니다. 믿고 싶어서 오는 사람은 천국에 오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야! 믿을만해서 믿어야 되겠다.” 이런 사람은 오지 말라는 겁니다.

“오히려 반대로 뭐지 이거?! 뭐지? 보지도 못하고 내가 사랑하네! 나한테 그런 요소가 있었어? 내가 그런 인간이었어? 나는 뭔가 따지고 빈틈없이 분석하고 나한테 뭐가 이익이며 손해는 얼마냐, 그걸 따지는 그런 본질을 갖고 있는 내가, 아무것도 준 것도 없고 받은 것도 없고, 아무것도 뭐 장래에 잘 되겠다는 그런 것도 없는데 내가 예수를 사랑한다? 뭐 이런 일이 다 생겼냐?!” 이게 바로 그 당시에 베드로가 이야기하는 방식이에요.

지금 베드로전서 1장 8절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그 공식에 대해서. 이 공식은 주께서 양보할 수 없는 공식입니다. 제가 지난 수요일에도 그런 설교를 했습니다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줘도 문제에요. 은혜를 주게 되면 은혜를 더 달라고 하는 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이게 왜 중요하느냐 하면은, 진짜 은혜를 은혜로 받아버리면 “아이고, 안 주셔도 되는데 왜 주셨습니까? 이거는 제 노력과 상관없이, 내 노력여하에 관계없이 그냥 공짜로 주시네요. 고맙습니다.” 이렇게 할 때 은혜를 은혜답게 아는 사람이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사람이 염치없게 더 주세요, 라고 할 일은 없을 거 아니냐 말이죠. “더 주세요.”라고 하는 일은 없다 이 말이죠. 그런데 뭔가 마땅히 얻을만한 짓을 했기에 얻었다고 하는 사람은 “주여! 이게 뭡니까? 내 노력에 비해서 너무 은혜가 적습니다. 더 쭈세용~!”하고 이렇게 또 손을 내미는 거예요. 그래서 더 주면 “더 주세요!” 이래 나와요. “옆에 있는 김집사  보다 박집사 보다 더 주세요!” 이래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가 완전히 은혜받기 쟁탈전이에요. 은혜받기 쟁탈전. 이래서 건수 올렸다, 뭐 이래서 은혜 받았다, 뭐 난리도 아니에요.

과연 은혜라는 것이, 은혜 받을만하다고 여기는 사람에게 과연 그 은혜를 주셨을까요? 은혜를 진짜 주셨으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되겠어요? 마음 자체가 이미 바뀌어져 있을 거예요.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그래서 은혜란 있는 것에다가 하나 더 추가하는 것이 아니고, 은혜로 말미암아 있는 것 자체에 대한 인식 자체가 돌변해야 그게 은혜가 온 사람이죠. 돌변해야. “지금껏 교회생활 잘했기 때문에 그래도 이 정도는 하나님께서 기본적으로 우리 가정의 태평과 애들이 잘 되고 뭐 남편 돈 잘 버는 게 있어야 됩니다.”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전혀 지금 달라진 게 없어요. 그건 성과급이지 은혜라고 말을 붙일 수가 없습니다.

자, 그러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고린도전서 13장에도 나오지만,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이게 행함의 대가일까요? 은혜일까요? 사랑이라는 게. 고린도전서 13장에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셨는데, 은사라는 말이 은혜라는 말이거든요. 믿음, 소망, 사랑이, 이게 행함의 대가에 속하겠습니까? 아니면 은혜에 속하겠습니까? 은혜에 속하죠. 은혜라고 하는 것은 나는 안 행했는데 왔다는 뜻이잖아요.

그러면 누군가 내 대신 나한테 은혜를 주도록, 그 근거가 주어지는 행함을 내가 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분이 했겠죠. 그 다른 분이 누구라는 말입니까? 그 다른 분이 예수님이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를 보지 않고 사랑하는 거예요. 이제 공식이  풀렸습니까? 주님 쪽에서 주신 게 뭔가 나한테 도달된 거예요. 도달된 시점부터 추정해보니까, 내가 행한 게 아니고 주님께서 행하셨고, 그 행하신 결과물이 나한테 도달된 거예요.

근데 그 도달된 것이 뭐냐 하면 바로 그냥 도달된 것이 아니고, 그냥 있는 것에다가 뭔가 더 추가적인 것을, 뭔가 하나 덤으로 더 주는 것이 아니고, 내가 평소에 내 마음 위주로 살았던 마음 자세가 도달된 은혜로 말미암아 이게 변화가 일어난 겁니다. 아, 내 인생이라는 것이 내가 노력해서 꾸려나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내 집안의 살림이 내가 가계부 써서 진척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에게 추가적인 은혜가 온다는데, 그 추가적인 은혜가 뭡니까? 라고 한다면, 바로 냉장고에 있는 모든 반찬, 그게 인간의 마음만 바뀌면 반찬 하나, 깍두기 하나, 전부 다 그게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보이는 겁니다. 그게. 식은 밥부터 시작해서 저 냉장고 깊숙한 데에 집어넣어놓고 일주일째 안 먹고 있는 밑반찬부터 시작해가지고 락앤락에 넣어놓은 그런 것 있잖아요. 인기없어가지고 뒤에 처박아놓고 그냥 썩기를 바라고 있는 그런 반찬들. 그런 것조차도 은혜 아닌 게 없는 거예요. 그런 것조차도 전부 다 은혜에 속했다는 것으로 변화가 되는 겁니다.

전에는 내가 시장가서 사와서 다듬어서 반찬 했다고 이렇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고 그것 자체가 전부 다 주님께서 그렇게 되도록 이끄셨다는 은혜성을 놓치지 않게 되죠. 그러면 주님의 공식은 보지 않고 사랑하는 게 주님의 공식이죠. 보지 않고 사랑하는 거. 냉장고의 밑반찬을 주의 은혜라고 한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냉장고에서 까꿍! 하고 얼굴 내밉니까? 아니죠. 냉장고 속에 예수님의 얼굴이 수염나가지고 이래 있습니까? 예수님이 수염이 난지 안 난지도 확인되지 않지만. 뭐 예수님을 봐야 예수님이다, 아니다가 판정 나는데 본적도 없는데요?

그러니까 예수님을 본 사람이 이건 예수님이다, 이건 예수님이 아니고 악마다, 라고 이렇게 하겠는데, 보지도 않은 사람이 이건 예수님이고, 이건 악마라는 판정을 못 내리잖아요. 판정을 못 내리면 자기가 받았던 것이 마귀가 준 것인지, 주님이 준 것인지 어떻게 판정하느냐, 그 문제가 계속 생기겠죠. 주님의 은혜라고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주님의 은혜가 아니고 마귀의 은혜였더라. 이럴 경우도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럴 때 어떻게 판정하느냐,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바로 나의 변화에요. 내 자신이, 내가 행한 것은 행한 거고, 내가 행하지 않은 것은 주의 은혜다. 이게 아니고, 소급해서 나의 모든 것이, 나의 난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일괄적으로 몽땅 다 딸딸 긁어서 그렇게 주의 은혜로 전환되는 겁니다. 자, 그렇게 되려면, 그런 현상이 일어나려면 뭐 부터 다루어야 하느냐 하면, 아까 우리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 뭐냐 하면 몸이라고 했죠.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누구의 허락을 맡는다? 내 몸의 허락을 맡는다고 했죠.

그런데 이제는 이게 아니고 몸 자체가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되어야 해요. 몸 자체가. 몸 자체가 은혜가 되어야 한다면, 내가 없을 때에 하나님께서 몸을 주셨다. 이러면 없었는데 생겼으니까 은혜라고 쉽게 할 수가 있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내가 없을 때를 내가 상상을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없을 때, 이미 40년, 50년 살았는데 다시 내가 없을 때로 돌아갈 수 없잖아요. 이건 니고데모의 난처한 입장하고 똑같다는 말이죠. 내가 다시 모태에 들어가서 태어납니까? 이렇게 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주님의 방식은 니가 모태에서 다시 태어나는 방식이 아니고, 니가 없을 때는 니가 뭐 하면 됩니까? 니가 죽으면 되죠. 죽으면 없어지는 것 아닙니까? 굉장히 간단하죠. 내가 없을 때를 상정해야, 기본적으로 해야 현재 내가 있다는 것이 은혜라고 인정을 하겠는데, 현재 있는 몸을 다시 리마인드remind, 기억해서 돌아갈 수 없잖아요. 주님의 방식은 뭐냐 하면 이 몸을 없애는 방식으로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는 말은, 육으로 난 것은 육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봅니까? 못 봅니까? 볼 수가 없어요. 볼 수 없는 몸을 가지고 어디에 써먹으려고 해요? 써먹을 데가 없어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나라, 천국을 못 가는데도 불구하고, 그 뭐 미용에 좋다는 거 여러 가지 바르고, 보톡스로 고치고 이게, 이 몸 가지고는 천국에 못 들어간다 이 말이죠. 천국에 못 들어가요. 못 들어가는 몸 가지고 이 몸을 지키려고 하니까 이게 헛방이라 이 말이죠. 뭐 이렇게 앉아있지만 시장에 나가보세요. 뭐 하려고 그렇게 분주하게 사는지 모르겠어요. 결국 아무리 살아도 천국을 구경 못할 쪽으로 계속 살고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몸을 지키려고 하기 때문에. 그 몸을 놔야 되는데, 그 몸을 버려야 되는데, 모든 판단도, 예수 믿을까 말까, 교회 갈까 말까, 모든 판단을 자기 몸의 허락을 맡는 거예요.

그런데 그 몸 자체가 고장이 나버렸어요. 이게. 이 몸 자체가 주님께서 안 받아주는 몸이라니까요. 안 받아주는 몸 가지고 십일조하고, 안 받아주는 몸 가지고 기도하고 헌금하고 예배참석하고,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발하고. 가만히 보니까 이발했네요. 이발하면 구원에 좀 도움이 되는가요? 우리 몸을 우리가 손대면 그거는 아무리해도 지옥가지 구원 못 받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친히 우리 몸을 다루어주셨어요. 다루시는데 어떻게 다루셨느냐, 몸을 없애버리는 쪽으로 해요. 늙어 죽이는 쪽으로 처리를 합니다. 늙어 죽이는 쪽으로. 얼마나 감사한지요. 없애버려야 돼요. 없애버리는데, 그냥 없애버리면 자살하고 똑같이 돼요. 안 그래도 불신자도 없어지는데. 그거 없어진다고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없어질 때 없어지는 방법이 영을 통해서 없애야 돼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기 때문에. 성령이 와서 우리 육을 손대야 된다 이 말이죠. 성령이 와서.

성령이 와서 손을 대게 되면, 성령께서는 뭐냐 하면 이게 인수인계를 해요. 지금 이 몸은 우리 거잖아요. 우리 거라고 우겨봐야 소용이 없어요. 구원 못 받습니다. 우리 것에서 인수인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면, 주님의 성령이 와서 이 몸을 인수인계를 한다니까요. 니 것이 아니고 이제는 누구 것이냐 하면 성령님의 것, 주님의 것으로 이걸 바꿔버려요. 바꾼다 이 말이죠. 바꾸게 되면 내 몸을 내가 관리할 때는 어떻게든 구원받겠다는 일념이 강해요. 구원받겠다는 것.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인수하면 구원문제에 대해서 니가 이제는 손을 놓으라는 겁니다. 구원받겠다는 데에서 왜 손을 놔야 하느냐 하면, 구원받겠다는 그 열의, 열망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이 썩어빠진 몸의 욕구에서 나왔거든요. 썩은 몸을 가지고 구원을 받겠다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죄는 죄대로 지으면서 의에 나라에 가겠다는 것은, 이건 말도 안 되는 억지거든요. 성령이 온다는 것을 뭐로 아느냐 하면, 성령이 왔으면 내 몸을 구원해달라는 거예요. 그러나 성령은 우리 몸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우리 몸을 없애죠. 왜냐, 구원 안 되는 몸이기 때문에 없애주는 거예요.

없애주시면서, 성령께서는 우리 몸을 뭐로 보느냐 하면 우리 몸을 예수님의 몸으로 바꾸어주셔서, 예수님의 몸으로 바꿔진 것을 구원하죠. 어떻게 뭐 동의가 되십니까? 동의는 이상하게 되는데, 말은 이상하게 동의가 되는데, 둘러치나 메치나 뭐 이런 생각이 안 듭니까? 결국 내가 구원받는 것은 동일하잖아, 라는 뭐 이런 생각이 안 들어요? 아까 제가 인수인계라는 말을 한 이유가 그것 때문에 그래요. 성령을 통해서 내 것을 어떻게 구원해 달라, 이거는 안 된다는 말이죠.

인수인계라는 말을 왜 하느냐 하면 내 것에서 손을 떼라는 거예요. 옛날 주인으로서의 행세를 그만두라 이 말이죠. 니 몸을 고물단지로 쳐주는데, 폐차처분 하는데, 니가 알아서 니 몸을 폐차처분 하는 것은 안 된다 이 말이죠. 그것은 기껏 자살하는 것 밖에 안 돼요. 가룟 유다가 그 대표적인 사람이 아닙니까? 자살했잖아요. 지 몸을 지가 폐차처분 하겠다는 거예요. 왜 지 몸을 지가 목 졸라 죽입니까? 자기 게 아닌데, 자살하면 성령 받습니까? 힘들어서 자살했다고요? 누구 건데 힘들어요? 누구 건데? 힘들다는 말은 뭐냐 하면 내 몸은 누구 거다? 내 것이라는 그 고집을 아직도 유지하고 있습니다.

“목사님. 우울증은 마귀 들려서 그렇잖아요?”라고 이렇게 하는데, 아니 마귀 안 들린 사람이 어디에 있어요? 다 마귀 들렸지. 어디 우울증만 마귀 들렸습니까? 다 마귀 들렸는데. 인간은 태어나면서 음부의 권세, 죽음이 권세에 있는데요? 안양강의에서 마태복음 16장 18절을 했거든요.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이 세상은 이미 지옥의 권세가 이겼다는 말이에요. 이 세상은 지옥의 권세가 이겼어요. 주님께서는 교회 빼놓고 나머지기는 누가 이겼다? 지금 지옥의 권세가 이겼다는 거예요.

그럼 지옥의 권세가 이겼다는 말을 세상 사람이 “마귀가 이겼다”라고 이래 이야기합니까? 아니면 “내 몸은 내가 알아서 구원받겠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어느 쪽입니까? 지옥의 권세가 딴 게 아니고 내 몸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거예요. 목사가 시킨 대로 헌금하고 십일조하고 예배참석하고 성의 있게 다 하고. 예수도 믿을 때 그냥 믿는 것이 아니고 진실 되게 성의 있게 믿고. 참 이게..., 교회가 지옥이에요.

제가 어제 낮에 집에 있는데 전화가 왔어요. 국제전화에요. 국제전화가 간혹 오니까 그럴 수 있다 싶어서 전화를 받았어요. 국제전화의 내용이 뭐냐 하면, 등기를 붙였는데 두 번씩이나 빵꾸가 나서 전화를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뭐 내용을 알려거든 1번을 누르시고 뭐 하려거든 2번을 누르라는 거예요. 1번을 딱 누르니까 아까 그 내용이에요. 등기가 두 번씩이나 빵꾸가 났다는 그 내용. 근데 말씨를 들어보니까 말씨가 이상하게 한국 말씨인데도 불구하고 뭔가 이상해요. 그래서 전화를 끊고 우체국에 전화해보니까 그게 바로 보이스피싱이라는 거예요.

근데 그거는 보이스피싱 근처에도 안 갔어요. 제가 보이스피싱이 뭔지 알려드릴게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되 진실 되게 믿어야 된다.” 이게 보이스피싱이에요. 그냥 보이스피싱은 돈만 날아가죠. 이거는 완전히 인간의 영혼이 날아가요. 영혼이. 왜 그러냐 하면 이 세상은 누구의 권세 아래에 있어요? 지옥의 권세가 지배하고 있어요. 이게 생뚱 맞는 것이 아니고, 이게 비현실이 아니고, 지금 예수님 안목에서는 이게 실제라는 거예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예수님 안목에서는 모두가 지금 지옥의 권세에 있어요. 지옥의 권세, 악마의 권세에 있다 이 말이죠. 오히려 특이한 게 뭐냐 하면 거기서 빠져나와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 그런 사람이 있다는 그것을 이상하게 느껴야 된다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여기 9절에 보세요.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영혼의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이상해요. 영혼의 구원을. 그것도 예수님을 보지 않고 사랑한다. 이게 이상해야 된다는 거예요. 악마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거예요. 있을 수 없는 일. 간만에 보이스피싱한테 전화가 왔네. 이게 다 오늘 복음전하라고 그렇게 된 건가?

성경대로 이렇게 이야기하게 되면 사람들은 굉장히 낯설어 해요. 그러면 낯설지 않은 이야기 해드릴게요. 제가 오늘 서울 올라오면서 오송역을 이렇게 지나갔어요. 오송역에서 ktx가 섰거든요. 섰다가 그 다음에 천안으로 가는데 창가를 보니까 뭐가 나오느냐 하면 철도시설공단이 나와요. 그게 뭐냐 하면 철도, 열차를 수리하고 개선하는 그런 작업장이 나와요. 철도공사에 소속된 작업장이. 오송역 하고 거의 붙어있어요. 굉장히 넓고 열차도 있고 거기에 보면 사원들 숙소도 있어요. 열차위에서 보니까 보인다 이 말이죠.

그걸 보면서 옛날 20대가 생각이 났어요. 20대에 대학졸업하고 취직하고자 했던 그때에 그 감정이 확 올라왔어요. 뭐냐 하면 그때에는 시설공단이 없었지만, 만약에 저 철도시설공단에 취직이 됐다고 합시다. 20대에 취직하고 싶었는데 취직이 돼보세요. 그것도 공기업이 아닙니까? 그러면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큰소리를 치고 싶어 할 거예요. “나 취직했다!” 이게 뭐냐 하면 이제 내 인생은 내가 밥 먹고 살게 되었고, 그리고 사원 숙소까지 있으니까 거기서 출퇴근하면 되고, 그래서 돈 모아가지고 나는 어떤 여자와 가정을 이룰 수도 있고, 가정을 이루고 애를 놓을 수도 있고, 아담한 작은 아파트라도 마련할 수 있고. 그러면 나는 뭐냐, 취직만 하면 사는 거예요. 군에 갔다 와서 20대에.

그때는 아무생각도 없이 그냥 취직해서 돈벌어가지고, 돈모아가지고, 결혼도 하고 아파트도 사고 그거만 하고 싶어요. 그게 바로 음부의 권세라니까요. 지금 생각하니까. 그렇게 할 때 국가나 세계평화를 생각했어요? 시리아의 평화를 기대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까? 시리아의 평화. 아니죠. 누구 몸입니까? 시리아의 남의 몸까지 신경 쓸 수가 없어요. 누구 몸입니까? 내 몸은 내가 살아야 되겠다는 겁니다. 단지 그것뿐이에요. 거기에 대해서 더 깊은 의미 같은 것은 없어요. 그냥 본성이고 그냥 본능이라니까요.

나이가 20대 중반인데 지가 밥벌이 못하면 남자도 아니고 뭐 어떻고 그런 게 있잖아요. 누구보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마는. 어쨌든 간에 그 당시에 결혼할 때니까 빨리 취직해서 돈 모아가지고 집도 사고 애기도 놓고. 뭐 대통령도 필요 없어요. 그것만 족해요. 취직해서 가방 들고 숙소에서 왔다갔다 해가지고 월급타서 적금 부어가지고 돈 모으는 것. 단지 그것뿐이에요. 뭐 다른 세계평화도 필요 없어요. 그냥 내 몸만 하나 건사하면 더는 소망이 없어요. 그게 전부에요. 전부. 그게 바로 음부의 권세입니다. 물론 그때 교회에 나갔어요. 교회 나가서 목사 설교하는 꼬라지나 내가 기도하는 꼬라지나 왜 그렇게 죽이 잘 맞는지. “주께서 살아계셔서 너의 소원을 이루어준다. 믿고 기도하면 된다.” 그것에 빨려들었거든요.

결국 누구냐 하면, 예수님은 관계없이 눈에 보이는, 몸에 근사한 것, 이것 지키는 게 급선무에요. 이것 지키는 게. 요한복음 3장 6절,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라는 그 말씀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아요. 목사는 그런 소리 한 적도 없고. 육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할지라도, 나는 이걸 뭐라고 해석합니까? 영으로 살면 내 몸이 잘 된다. 분명히 이렇게 해석을 했을 거예요. 내 몸은 무조건 잘 돼야 돼요. 우리 가정은 무조건 잘 돼야 되고. 이러니까 확 실감이 나죠.

그런데 말입니다. 여기 10절에 봅시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자, 이 구원에 대해서 설명을 해요. 설명 안 했으면 좋겠는데. 설명 안 했으면 나는 교회 나가서 하나님의 은혜로 취직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결혼도 했다. 주여! 이게 축복이다. 이 축복을 받았다는 말은 내가 나이 들어서 죽으면 천국에 간다는 그런 보장이겠죠. 우리는 이런 이야기로 끝내고 싶은데, 성경에서는 “구원은 말입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거예요. 베드로가.

그 구원이 뭐냐, 선지자에요. 아, 이거는 바로 흔히 말하는 20대 초반에 지 몸만 건사하면 주께서 주신 축복이고, 그래서 나는 신자고 천당 간다는 그 사고방식과 성경에서 베드로가 이야기한 선지자의 사고방식과 달라도 너무 달라요. 달라도. 만약에 20대에 이런 이야기를 봤다고 하더라도 나는 이렇게 생각했을 거예요. 선지자 그거는 특별한 사람이고, 그거는 믿음 좋은 사람이고, 나 같은 평신도는 이쯤해서 봐줘야 되지 않습니까? 라는 생각을 했겠어요? 안 했겠어요? 무슨 성경에 평신도가 있고 무슨 선지자가 따로 있습니까? 성경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성령을 받으면 모든 사람이 뭐다? 그리스도의 종이잖아요. 주님의 증인이고. 아니, 이런 이야기를 해준 사람도 없었어요.

누가 있어요? 목사는 완전히 높은 계급이고, 바리새인, 사두개인하고 똑같아요. 나는 20대 청년이니까 시킨 대로 하고, 시다발이 같은 청년회 회원이고. 목사님은 저 위에 있고. 그래서 청년은 강대상에 올라가지도 못해요. 그 밑에 부목사, 양쪽 어깨에 장로들, 그리고 거기서 가지  하나 쳐가지고 부목사 계열이 또 나오고. 꼭 인간의 뼈 구조처럼, 머리 있고 어깨 있고 갈비뼈 있는 것처럼. 이 갈비뼈가 뭐냐 하면 장로책임 하에 있는 각 조직들. 선교부, 친교부, 여전도회, 남전도회 있는 것처럼. 그런 조직에 익숙해졌어요.

익숙해져서 장로는 배나 존경하라고 해서 무조건 굽실거리고 존경했죠. 뭣 때문에 존경했는지 모르지만. 나도 언젠가는 장로가 되어서 교회의 언약궤 메고 가는, 벧세메스에서 언약궤 끌고 가는 암소처럼 나도 장로가 되어 교회를 섬겨야지. 장로가 되게 되면 목사를 섬겨야지. 부흥사의 설교에 의하면 목사급 따로 있고, 장로급 따로 있고, 평신도급 따로 있고, 평신도는 저 부끄러운 구원, 상급도 없고, 천당 가더라도 저 구석에 앉아서 부끄러운 구원받는다고 이래 이야기하니까, 천국에 가도 계급이 있는 줄 알았어요. 보이스피싱이었습니다. 사기꾼들이었어요. 사기꾼들. 

목사가, 장로가, 그들이 노리는 것은, 예수님을 원하는 것이 아니었어요. 교회가 필요해서 교회 만들기에 나선 사람입니다. 그들은 교회를 통해서 구원받고자 시도한 거예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 여기 교회 있잖아요. 교회. 교회 있으니까 내치지 마세요.”라고 주장한 사람들이에요. 사기꾼들입니다. 진짜 교회는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게 교회에요. 음부의 권세가. 아까 음부의 권세는 뭐라고 했습니까? 누구 중심이다? 기존의 뭐 중심이다? 내 몸 중심이에요. 자기 몸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이게 음부의 권세, 악마의 권세라니까요.

주님께서는 우리 몸을 없애려고 하는 거예요.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그게 선지자들입니다. 스데반집사가 성령 받고 난 뒤에 돌에 맞아 죽었어요. 스데반집사가 굉장히 아쉬워했습니까? “이거 뭐 예수 잘 믿으려고 하다가 조기에 죽네.” 이러면서 섭섭해 했습니까? 주님 앞에. 이미 소유권이 넘어갔어요. 소유권이 넘어갔다고요. 내 몸이 내 몸의 주인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스데반집사가 성령이 충만한 거거든요. 성령으로 넘어가버렸어요. 성령으로 넘어가버리면, 이제는 나의 구원자체도 날아가 버려요. 내가 있어야 뭐 구원이고 말고 하죠. 내가 없는데요. 내 구원이 없어요.

내 몸이 있을 때는, “나 구원시켜주세요. 천국가게 해주세요.”라는, 이런 요구조건이 성립이 되지만, 내가 없는 이상은 뭐냐 하면 주님의 구원 작업에 참여한 게 돼요. 주님의 구원 작업에. 집에 내가 있고 몸이 아파서 병원에 못가서 동네의사를 초빙해서 왕진할 때는 주인공이 내 몸이 주인공이에요. 요새 왕진은 거의 없잖아요. 하도 비싸니까. 옛날에는 왕진이 있었어요. 왕진비를 주던 말든 이렇게 하는 것 하고. 내가 간호사 자격증 따가지고 그 의사 병원에 취직하는 것하고 다르잖아요. 그렇죠.

이거는 내 몸을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 의사가 필요하지만, 간호사가 되어가지고 그 병원에 취직하게 되면, 나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뭘 위해서? 병원이 잘 돌아가야 돼요. 그래야 내가 계속 일할 수 있으니까. 그 병원이 잘 되게 하기 위해서 이제는 병원 쪽에 서서 손님들에게 친절하게 대해야 해요. 병원 잘 되게 하기 위해서. 나 잘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그렇다면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났다는 말은 결국 누구 잘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까? 주님만 잘 되면 돼요. 주님만 영광스럽게 되고, 주님만 증거 되게 되면, 그걸로 군말 없어야 돼요. 아무 군말이 없어야 돼요. 사나 죽으나 그것은 주께서 할 소관이기 때문에. 이제는 내 구원은 걱정하는 것이 아니고 아예 애초부터 있었다? 없었다? 없었어요.

내 구원은 없고, 무슨 구원이 있느냐 하면 우리 구원이 있어요. 우리 구원. 내 구원이 아니고 우리 구원이 있다니까요. 우리 구원. 이거는 뭐냐 하면 집합 구원이거든요. 이게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방법하고 똑같아요. 이스라엘 구원할 때 하나님께서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르라고 했죠. 처음에 이스라엘이 나올 때. 이스라엘이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해서 구원받았습니까? 피 없이, “하나님이여 우리 가정이 착합니다.”라고 해서 구원받았습니까? 개인의 어떤 자질이나 그 어떤 것을 새삼 묻지를 않죠. 고관대작이든, 그때 고관대작도 없었지만, 누구든 관계없이 문설주에 뭐 발라야 돼요? 피를 발라야 돼요. 피를 발라야 된다고요.

베드로전서 1장 2절에,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이라는 것은 뭐냐, 지금 예수님께서 유월절이라는 경계선에 서 있는 거예요. 이쪽은 애굽이고 이쪽은 새로운 이스라엘이고. 주님께서는 경계선을 형성하면서 출몰하거든요. 그 출몰하는 현장에 바로 우리 자신들의 변화가 있는 거예요. 변화가. 제가 수요일에 설교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구원을 챙기는 것이 아니에요. 뭐냐 하면 “이쪽은 천국이고 이쪽은 지옥입니다.”라는 경계선의 그 역할을 하라고 우리를 구원하신 거라니까요. ‘우리’라는 집단 구원.

그러니까 내가 잘났다, 못났다가 아니라, 주님께 은혜 받은 사람은 동일한 소감, 반응을 드러내게 되어 있어요.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은.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받았습니다.”라는 동일한 고백이 나오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동일한 고백이. 그런 동일한 고백이 억지로 나올까요? 감사함으로 나올까요? 감사함으로 나오죠. 자, 아까 이야기한대로 우리의 소유권이 예수님께로 바뀌면 우리의 몸을 죽이잖아요. 죽어져야 우리가 없이 되고. 없는 데서 다시 있게 되면 우리는 은혜라고 느끼죠. 육은 사라지고 영의 사람으로 다시 생기면 그게 은혜가 아닙니까?

근데 그 육의 몸이 점점 더 늙어죽어 갈 때 죽어가는 이유가 있어야 돼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바로 우리는 죄 때문에 죽어요. 자기가 죽는 이유가 자기의 죄 때문에 죽죠. 그러면 자기 속에서 성령이 역사할 때에, 우리 속에서 뭘 계속 유발시키겠습니까? 우리의 죄가 이렇게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일들을 하겠죠. 왜냐하면 성령은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하기 때문에 그래요. 니들이 생각하는 죄와 니들이 생각하는 의와 니들이 생각하는 심판이라는 것은 근원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새롭게 죄의 규정, 의의 규정, 심판의 규정이 있어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십자가 앞에서 제자들이 다 떠났잖아요. 열 두 제자 다 갔죠. 그러면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 아닌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 대신에 십자가 졌잖아요. 그 사람 죄인이에요? 죄인 아니에요? 죄인이죠. 그거 뭐 십자가 졌다고, 노가다 했다고, 죄인이 의인됩니까? 옆에 구원받은 강도는 죄인입니까? 죄인 아닙니까? 죄인이죠. 본인이 이야기했잖아요. 우리는 십자가에 달릴만한 짓을 했다고요.

그래서 로마서 3장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을 우리가 즐거워해야 합니까? 슬퍼해야 합니까? 하품할 문제가 아니고. 의인은 하나도 없다는 문제가 즐거워해야 될 문제에요? 슬퍼해야 될 문제에요? 둘 중의 하나에요. 수능보다 더 쉬워요. 둘 중의 하나인데. 우리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을 기뻐해야 될 거예요? 슬퍼해야 될 거예요? 그럼요. 기뻐해야 되죠. 기뻐해야 될 문제라고요.

이게 특이하다 이 말이죠. 이게 특이한 거예요. “이근호 목사는 뭐 말만 하면 지적해서 못 가겠다.” 지금 이러면 안 된다고요. 지금 뭘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뭘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그놈의 자존심을 지키려고 하는 겁니까? 체면 지키려고 하는 겁니까?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 번 해보자.” 그런 식으로는 안 돼요.

왜냐하면 음부의 권세에서 ‘우리’라는 교회만이 이겨요. 내가 이긴 것이 아니고 주와 함께 있기 때문에 이긴 게 돼요. 음부의 권세에서. 개인적으로 백날 남한테 이겨봤자, 음부의 권세를 못 이기면, 그거는 지옥에서 하는 게임이고, 거기서 이긴들 그게 이긴 거겠어요? 지옥에 갔다, 축구장이 있더라, 5대 0으로 이겼다, 메시가 한 3골 넣고 호날두가 한 2골을 넣었다, 그럼 거기서 박수쳐야 됩니까? 지옥에서? 상품이 지옥불인데요?

젊은 사람들은 완전히 야구, 축구, 스포츠에 목메어있다고요. 지옥에서의 게임을 벌이고 있다고요. 지옥에서는 괴로우니까 계속 게임을 개발해요. 계속 개발해서 지금 올림픽 경기수가 얼마나 많습니까? 되지도 않는 게임, 족구까지 올림픽 나오려고 덤비는데. 그렇게 하는 이유가 이 세상에서는 자기가 이기고 싶은데, 세상이 만만치 않잖아요. 그 스트레스를 어디서 풀어야 돼요? 스포츠로 풀어야 되죠.

그건 점잖은 데 속하고. 스포츠 푸는 그것도 시시하면 이제는 화투, 도박, 스포츠 도박, 로또가 시작되는 거죠. 그게 뭐냐 하면 지기 싫다는 거죠. 내가 보니까 이혼하는 것도, 이것도 하나의 게임 같아요. 지기 싫어서 이혼하는 것 같아요. 네가 찼니, 내가 찼니, 그 시합하는 것 같아요. 아무나 차면 어때요. 둘 다 헤어졌는데. 근데 헤어질 때 내가 차야한다는 거예요. 안 그러면 쭈글스럽다는 거예요.

제가 지난 수요일에 설교했듯이, 세상이 주는 수모와 수치가, 참 예수님 고난처럼 아파요. 하지만 지옥에 들어있는 그 수모와 수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뭐 서울시장 누가 나왔니, 지옥시에서 지옥시장 해서 뭐 하려고? 아! 뭐 할라꼬?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그게. 주님께서는 우리 몸에다가 제사를 가동시켜요. 율법의 제사법을 가동시켜버려요.

그러면 우리 몸은 뭐냐, 주님이 귀하게 쓰시는 성물이 됩니다. 거룩한 몸이 돼요. 어떤 조건하에? 내 안에 십자가의 피 중심으로 제사가 진행된다는 조건하에. 성령께서는 바로 구약 전체를 다 들고 옵니다. 율법 전체를 다 들고 와요. 율법을 다 이루었다는 것을 우리 영혼에다가, 마음에다가 그걸 집어넣어요. 그걸 집어넣는다고요. 그러면 뭐냐, 선지자들이 생각했던 그 뿌리에서 다시 예수님을 바라보는 안목이 생기도록 그렇게 조치합니다.

10분 쉽시다.
 이미아(IP:122.♡.178.64) 18-04-15 19:02 
서울의존강의20180413b 베드로전서1장 8-11절(고난과 영광)-이 근호 목사

지난 시간에 주님께서 육을 죽일 때, 그냥 늙어 죽이는 것이 아니고 이유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니가 죄로 죽는다는 것을 들이대기 위해서 계속 죄를 끄집어내는 겁니다. 근데 그 죄를 끄집어내면서 주어지는 것이 뭐냐 하면 율법이라는 것이 주어져요. 율법이라는 것이. 율법이 주어지면서, 율법을 지킨 분과 지키지 않는 쪽을 계속 대비시킵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은 쪽이 뭐냐, 집단적으로 누구냐 하면 이스라엘이 율법을 못 지켰어요. 우상숭배 했으니까 못 지켰단 말이죠.

율법을 못 지켰다는 이유가 뭐냐, 우상숭배에요. 우리가 구약을 보면서 느끼는 것이 뭐냐 하면, “걔네들 우상숭배 좀 안 하면 안 되나?” 이러거든요. 그건 우상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우상이라는 게 뭐냐 하면은, 우상은 이스라엘 주변의 이방민족들의 육에서 나온 신이에요. 이방민족들의 그 몸하고 이스라엘 몸하고 동일한 몸이에요. 동일한 몸이니까, 몸에서 발생된 신이 뭐냐, 이스라엘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게 우상이 된다 이 말이죠.

몸과 친화적인 것, 내 몸을 잘 되게 하는 것, 그것이 우상이고, 그 우상이 나중에 유대교까지 오게 되면 뭐냐 하면 행함으로 얻을 것을 얻어내겠다는 인식에 설정되어 있는 신, 그게 뭐 여호와든 하나님이든 삼위일체든 관계없어요. 이쪽에서 요구하는 대로 응답해주셔서 내가 얻을 것을 챙길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신, 그게 우상이다 이 말이죠.

그런데 베드로전서 1장 10절에 보면 선지자는 그렇지 않았어요. 이스라엘 중에서 유일하게 선지자들이 자꾸 다른 신을 이야기해요. 여호와를 이야기하면서도 이스라엘 니들이 알고 있는 다른 여호와를 계속 언급하는 거예요. 그 여호와를 언급하는 것이 바로 고난이라는 겁니다. 고난 받는 선지자 속에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11절을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11절,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자, 됐습니다.

고난 받는 선지자 속에 지금 뭐가 있다고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계셨다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영이 계셨다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있다는 말은 다른 사람은, 선지자 말고 다른 사람은 그리스도의 영이 있다? 없다? 없죠. 없으니까 고난이 나오는 거 아닙니까? 없으니까. 고난이라는 게 뭔가 오해에서 오잖아요. 오해에서 비롯해서. 복음 전하면 고난 받아요, 안 받아요? 복음 전하면 고난 받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설명이 이래 됩니다. 예수님이 부활했잖아요. 예수님이 부활하고 이 땅에서 활동하는 방법은 성령을 통해서 이야기를 해요. 성령은 뭐라고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자의로 이야기를 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다 이루신 것을 내가 앞장세워서 성령이 일한다는 겁니다. 그 앞장세운 것이 뭐냐, 바로 사도바울이 말한 십자가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에서 니가 성령을 받지 않고서는 십자가를 안다, 모른다? 모른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성령을 받은 자는 그 출발점을 뭐로부터 출발한다? “아! 이게 십자가구나!”라고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그 십자가가 뭐냐 하면 구원의 능력입니다. 그 구원의 능력을,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에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미련하게 봤잖아요. 쓸모없이 봤잖아요. 십자가가 그걸 반복해줘요. 십자가의 영, 성령을 받은 사람은 특징이 뭐냐 하면 예수님이 당했던 그 수모를 이 땅에서 같이 받게 되어 있어요. 왜? 오해하니까.

세상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어리석다는 거예요. 소용없다는 겁니다. 미련하다는 거예요. 여러분 제가 안 찾아봐도 알죠. 십자가 이야기할 때. 그러나 사람이 어리석은 것이 하나님의 지혜고, 그들이 쓸모없다는 것이 주님을 믿는 자에게는 십자가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다. 이래 되어 있어요. 로마서 4장에 보면 아무것도 일한 것이 없이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 이야기를 하면서. 아브라함은 아무 일한 것도 없는데, 구원을 받았어요. 의롭게 되었어요.

이거는 사람이 일을 해서 대가를 얻을 것 같으면, 이것은 삯으로 여기지 은혜로 여기지 않는데, 이거는 노동의 대가없이 그냥 얻었다는 거예요. 근데 그 얻은 것을 뭐로 표현하느냐 하면 로마서 4장에 보면 그걸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고, 그 은혜의 내용이 담겨있을 경우에만 그걸 이 지상에서는 믿음이라고 이야기해요.

행함과 믿음의 차이를 로마서 4장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은 행함이고, 하나님의 은혜로 움직이는 것은 믿음이 되는 거예요. “믿습니다.”가 믿음이 아니고, 뭘 이렇게 부지런떨어도 믿음이에요. 왜? 그걸 은혜로 알기 때문에. 제가 물을 마신다. 이걸 은혜로 안다면 이게 믿음이라니까요. 이게. (물을 마시면서)믿음이에요. 믿음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그 은혜를 드러내기 위해서 거침없이 자기 인생이 주님 앞에 쓰여 졌죠. 그게 바로 믿음이에요. 아브라함의 믿음이라니까요.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거든요. 그러면 믿음의 후손들도 똑같이 아브라함처럼, 그냥 자기 인생을 은혜가 무엇인지를 드러내기 위해서 함부로 쓰시는 거예요.

이걸 제가 낮에 안양강의에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처분불가’라고 했는데, 내가 내 몸을 처분할 수 없다 이 말이에요. 내가 내 몸을 처분하는 게 아니에요. 처분은 누가 해요? 주님이 처분해요. 우리는 처분불가입니다. 살고 싶어도 살 수 없고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어요. 모든 되어가는 이거는 주께서 알아서 처리해주시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아까 첫째 시간 마지막에 이야기한, “네 마음속에 제사가 가동 중”이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11절에,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영이 받으실 고난과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그 뒤에 무슨 말이 나오죠? 받으실 고난과 그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 “후에”죠. 그러니까 순서가 뭐냐 하면 고난 후에 영광이 떨어지죠. 그렇죠.

그러면 고난 받을 때, 그게 고난입니까? 영광입니까? 그거는 영광이 아니고 고난이죠. 주께서 영광 받을 때는 뭘 반드시 경유했습니까? 이 세상에서 십자가 지는 척을 한 게 아니에요. 십자가 지는 시늉을 한 게 아닙니다. 죽는 척을 한 게 아니고 죽는 시늉을 한 게 아니에요. 진짜 죽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처럼. 진짜 죽었어요.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 되었습니다. 진짜 죽었어요. 나흘이라는 간격이 생겼어요. 간격. 나흘 동안 절단면이 생긴 거예요.

자, 어떤 사람이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다. 자, 살아있는 사람이 그 죽은 사람을 보고 뭐라고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저 사람은 안 죽었다. 주님만 살아있다.”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안 하죠. “에구, 저래 살다가 죽을 것을...쯧쯧!”하고 측은해하겠죠. 측은해한다는 말은 무엇에 위로를 받는다는 말입니까? 죽은 사람이 참 안됐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나는 아직까지 안 죽었으니까 안심이다. 괜찮다.”라는 그런 뜻이죠. 그게 바로 믿음이 아닌 거예요. 여전히 자기 관리를 자기가 하려고 하는 겁니다.

근데 나사로를 주께서 죽인 것은, 나사로가 죽은 것은 나사로 본인의 의사가 아니고, 주의 관리 하에 있는 사람은 나사로처럼 저렇게 다루어진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마리아와 마르다가 오빠가 아플 때에 소식 전했습니다. 전갈 보냈습니다. 빨리 오시라고. 예수님이 오셔서 병 낫게 해달라고. 남의 동네에 있는 사람들만 병 낫게 해주지 말고. 그만큼 받아 챙겼으면 우리 오빠도 병 낫게 해 달라. 그동안 받아 챙겼잖아요.

예수님이 오시면 마르다는 요리한다고 그렇게 분주했고, 그것도 고추 반 갈라서 거기에다가 잡채 넣어가지고 고추튀김 한다고 했고. 마리아는 싸가지 없이 언니 안 도와주고 예수님 앞에 앉아서 말씀 듣는다고 했고. 그래가지고 그 가정의 자매가 분란이 일어나고. 그런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그만큼 섬겼다 이 말이죠. 섬겼으니까, 지금 남의 동네 병이나 고쳐주지 말고, 좋은 관계 유지한 우리 가정의 오빠 아플 때에 빨리 와서, 0순위로 빨리 와서 고쳐달라고 전갈을 보냈는데, 주님께서는 죽을 때까지 안 갔어요.

죽을 때까지 안 갔다는 말은 뭐냐 하면, 나사로를 선지자 역할처럼 사용하겠다는 겁니다. 나사로가 인생을 어떻게 살았는가, 지금 그것을 써내려가려고 한 것이 아니고, 나 이 예수가 누구인가를 나사로를 통해서 지금 알리고자 하는 겁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11:25). 자, 죽어서 산 사람은 나사로죠. 만약에 나사로처럼 믿음을 갖고 있다면, 살아도 죽지 않죠(요11:26). 죽어도 죽음이 아니니까. 살아있을 때 이미 살았으니까. 미리 산 채로 믿음이 있을 때 살았으니까. 사느냐 죽느냐 하는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니에요. 사소한 문제에 해당되는 거죠. 아주 사소한 문제.

어느 정도로 사소한 문제냐 하면은, 편지 봉투에 우표붙일 때 똑바로 붙였느냐, 거꾸로 붙였느냐, 그럴 정도로 사소한 문제. 거꾸로 붙였다고 편지가 안 가는 것이 아니잖아요. 우표가 붙어있기만 하면 되잖아요. 아주 사소한 문제. 이래나 저래나 운명에, 팔자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 그런 사소한 문제. 이발을 어느 이발소에서 했는지, 그런 것은 아주 사소한 문제거든요. 머리 좀 잘 안 나왔으면, 두 달만 참으면 다른 데서 이발하면 되니까. 집에서 사모님이 해줬는지, 이발사가 해줬는지, 그거는 아주 사소한 문제에요.

사소하지 않는 문제는 예수님이 누군가를 드러내는 일만 사소하지 않아요. 너무너무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내 인생에 관여한 문제는 모든 게 사소해요. 내가 어떻게 잘 되고 어떻게 하고 이거는 사소한 문제입니다. 집에 강아지를 두 마리 키우나 한 마리 키우나 사소한 문제라니까요. 고양이까지 덤으로 키우느냐 마느냐, 그건 사소한 문제라니까요. 선지자에게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사소한 문제에요. 심지어 비가 오지 않는 것도 사소한 문제입니다. 죽으면 되니까.

선지자는 목숨 걸고 하는 싸움을 싸우고 있어요. 선지자가 올인 한다는 말은, 목숨을 건다는 말은 이제는 더 이상 따로 챙겨놓은 게 없다는 말이에요. 선지자의 특징이. 물론 선지자가 기특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만들어요. 선지자가 말을 하나 내뱉는다는 말은 거기에 자기 목숨을 뒤에 붙여가지고 담보로 내면서 하는 거예요. “나 이거 안 되면 내 목 쳐도 좋다.”이런 식이에요.

실제로 북쪽 여로보암 왕에게 남쪽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찾아가죠(왕상13장). 하나님이 조건을 걸었어요. 너는 이야기만 하고 빨리 돌아오라고 했거든요. 빨리 돌아갔어요. 갔는데, 변수가 생긴 거예요. 이거는 하나님께서 미리 안 한 요소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사실 이야기를 했긴 했지만, 좀 더 상세하게 이야기를 안 해줬어요. “어떤 사람이 자기도 선지자라고 우기면서 와가지고, 나도 하나님께 계시 받았으니까 나한테 대접받고 가라고 할 때, 그때 주의해라.” 이렇게 아주 상세하게 이야기를 해줬다면, “당신 사기야.”하고 가겠는데, 그게 아니고 누구에게도 대접받지 말고, 이렇게만 나오니까. 그 조건은 알고 있었는데 자기가 상상한 그 조건에서만 그걸 해석했어요.

근데, 벧엘에 한 늙은 선지자가 와서 하는 말이 “진짜 나도 같은 선지자인데, 하나님의 천사가 와서 하는 말이, 당신을 대접하라고 계시 받았다. 당신이 어떤 계시를 받았는지 나도 아는데, 하나님께서 새로운 정보를 추가해가지고 착하니까 더 하라고 왔다.”(왕상13:18). 그 꾐에 빠져가지고 결국은 사자한테 물려죽었잖아요. 사자가 물어놓고 먹지도 않았어요(왕상13:28). 왜냐하면 사자조차도 하나님이 보냈으니까. 그래서 그 북쪽 선지자는 너무 애가 닳아서, 내 잘못 때문에 그 귀한 분을 죽였다고, 죽을 때 같이 묻어달라고 하는 이런 이야기가 나와요(왕상13:29-31).

이 이야기가 뭐냐 하면 선지자가 어떤 말을 던질 때는, 한 마디를 할 때는, 그것은 뭐냐 하면 입만 살아서 말만 하는 것이 아니고, 그 말이 자기 목숨을 아예 송두리째 가져가버려요. 이 말에 대해서 너는 이 말이 살아있는 것이 중요 하냐, 니 목숨이 있는 게 중요하냐를 묻고, 내 목숨보다도 이 말씀이, 복음이 복음대로 전파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라는 그런 조건하에 선지자는 발설해서 이야기를 하게 되어 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다는 거예요.

왜 그리스도의 영이 하는가, 그리스도의 영은 성령이잖아요. 예수님의 십자가 영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할 때에 자기 목숨을 연연하면서 일을 안 했잖아요. 죽었다고 치고 일을 했어요. “나 산 사람 아니야. 죽은 사람이야.”라고 한 거예요. 오늘 낮에 한 안양강의의 제목이 뭐냐 하면, 제목이 네 글자입니다. ‘저승사자’ 저승사자의 특징이 뭐냐 하면 택한 백성 데려가기에요. 성령의 역할도 마찬가지고.

고고학자들 중에서도 생물학자. 고고생물학자들이 우리나라 경남 고성에 가면 동굴이나, 공룡 발자국 조사하는 사람들이고, 뭐 이렇게 화석 조사하는 그런 사람들이 도시의 노래방에 가겠습니까? 아니면 외진 곳에 가겠습니까? 외진 곳에 가겠죠. 오래된 암석 조사하려고 가겠죠. 왜 갑니까? 거기에 뭐 놀이터가 있어요? 왜 가요? 뭘 찾는 거예요? 옛날에 있었던 고고학적 생물의 화석을 찾으려고 하죠. 그걸 발견했다.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그 근처를 딱 뜨죠. 귀한 거니까. 그 부분을 떠서 박물관에 가져오잖아요.

그러면 성령 있는 성도가 할 일이 뭡니까? 목숨 걸고 하는 일이 뭡니까? 내 구원이 아니고 우리구원이니까. 나처럼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찾아가는 작업을 하겠죠. 그게 바로 구약의 선지자들이었다 이 말이죠. 근데 그들은 그리스도의 영을 받았으니까, 그들은 목숨에 연연하지 않잖아요. 왜? 고난이니까.

세상 사람들이 찾는 것과 선지자가 찾는 것이 이게 달라요. 목적이 다르다니까요. 세상은 자기 몸을 안위하고, 자기 가정이나 자기가 가진 것을 키우는 게 목적이지만. 선지자는 뭐냐, “택한 백성 어디에 있는가 보자~ 보지 않고 주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가 보자~ 나처럼 성령 받은 사람이 있는가 보자~” 그거 찾는 작업이에요.

마치 고고학자들이 산속을 헤매면서 남들이 가지도 않는 엉뚱한 곳을 가가지고, 뭐 탁본 뜨고 하는 그거 있잖아요. 남들은 관심도 가지지도 않는. “그거해서 뭐하는데?”하는 그거. 그걸 해서,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한 마리의 양이 발견된다면 하늘나라에 잔치가 나서 난리도 아니에요.

어떤 아가씨가 동전을 잃어버렸어요. 동전 하나 그거 얼마하지도 않는데, 그게 뭐 그리 귀하다고 하루 종일 찾다가 나중에 그 동전을 찾았어요. 찾고 난 뒤에 친구들을 불러서 잔치를 벌였어요. 잔치비용이 146,000원이에요. 동전은 10원인데 146,000원이 들었어요. 146,000원은 성경에 안 나오지만. 하여튼 잔치를 벌였어요. 비용이 더 들었어요.

근데 그 비용이 왜 아깝지가 않습니까? 잃어버린 자를 찾는 거니까. 마귀한테 잃어버린 자를, 마귀의 세계에서 어느 구석에 박혀있는지도 모를 화석 같은 거를 찾는 거니까. 사람들의 관심밖에 있는 거. 하지만 분명히 있는 그 누구. 근데 그 화석은 스스로 일어날 수 없어요. 왜? 음부의 권세, 지옥의 권세에 파묻혀있기 때문에. 스스로 몸부림친다고 해서 거기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완전히 플라스틱으로 만들었는데 그 안에 조개도 들어있고 산호도 들어있고 해서 고정된 이런 거 있죠. 유원지에 가면 기념품들을 파는 곳에 이런 게 있잖아요. 들여다보면서 “아이고, 예쁘다.”하는 그런 게 있다 이 말이죠. 박혀 있는 거예요. 누가 칼 가지고 뜯어내야 열리거든요. 굳어져있죠. 어디에? 음부의 권세에. 지옥의 권세에 굳어져있어요.

뭐 교회가나 어디가나 걱정은 뭐냐 하면 내 새끼 잘 되고, 내 가정 잘 되어야 되고, 우리 집안 잘 되어야 되고. 내 몸과 관련된 것이 다 잘 되어야 되고. 그러한 걱정근심에서 떠날 날이 없어요. 몸이 완전히 굳어져있어요. 경직되어 있고, 굳어져 있고, 긴장되어 있고. 인생을 살면서 주눅 들어 있어요. 주눅 들어. 모든 드라마를 보세요. 공통점이 그거에요. 하나하나 전부 다 주눅 들어 살아요. 나의 아저씨도 그렇고 너의 아저씨도 그렇고. 모든 드라마가 알 수 없는 공포가 흐르고 있습니다.

뭔가 세상을 살면서 만끽하는 게 없어요. 만끽하는 게. 그리고 한번 이겼다고 해서 이긴 게 아니에요. 그 다음부터는 또 이기기를 요구받고 있어요. 성적 한번 오르면 그 다음부터는 그 수준에서 더 올라가야 돼요. 내려가게 되면 못난 놈이 돼버려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사는데, 이 사회가 돈 버는 사회인데, 아까 20대 이야기를 했죠. 취직만 된다면 더는 소용이 없다고요. 그게 최고라고요. 내가 취직해서 월급만 받으면, 그 돈 가지고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하고 결혼도 할 수 있고, 집도 살 수 있고, 애도 놓을 수 있고, 가정도 이룰 수 있고, 그러면 됐지 뭐 더 필요가 없다. 그런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 젊은 20대가 사회에 나가서 취직한다고 할 때, 문제는 그 사회가 뭔지를 몰라요. 사회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는 뭐냐 하면 부자가 점점 더 부자 되도록 요구하는 그 동네가 사회입니다. 계속해서 돈을 벌지 않으면 도태되어 있는 게 사회에요. 한번 어느 정도 돈을 벌면 그걸로 끝이 아니에요. 회사도 더더더더... 꼭 음주운전 측정하는 것 같아요. 더더더더....계속 더더더더...를 추구해요. 이 더더더더가 없으면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지는 것처럼, 이 사회는 그 사람을 퇴보시켜버립니다. 한 어느 정도 됐다고 해서 스톱이 되는 것이 아니에요. 그건 철이 없어서 스톱인줄 알죠.

자, 20대에 결혼했다. 공무원시험에 합격했다. 9급이 되어서 이제는 좋다고 하죠. 제가 들은 이야기인데, 어느 동네에 가니까 9급 토목과 합격했다고 플래카드placard 걸어놓은 동네가 있어요. 9급 공무원 토목과. 참! 그 정도면 대단하죠. 백 대 일이 넘는데. 특히 기술과는 비율이 세거든요. 백 대 일이 어디에요. 자, 백 대 일로 토목과 합격하면 인생이 끝났습니까? 9급은 됐는데 만약에 몇 년이 지나도 7급이 안 되면 어떻게 돼요? 이제는 그 공무원 세계에서 견디기 힘들죠. 후배가 팀장이 되고, 후배가 막 차고 올라오면, “아이고, 선배님! 선배님! 형님! 형님!”하다가 이거는 나이도 어린 게 나이 많은 자기보고 “김대리!” 하면 우에 하겠어요? 이거는 나가라는 소리밖에는 안 되잖아요.

근데 나가면 뭐 할 거예요? 나가면 할 게 파리바케트, 치킨집, 피자집. 카페베네. 뭐 없잖아요. 이것도 일억씩 대출받아서 집어넣어야 될까 말까인데. 햄버거집, 피자집, 많아도 너무 많아요. 서울시에 피자집이 한군데만 있어도 장사가 잘 될 텐데. 한군데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이 동네만 해도 열 군데가 넘잖아요. 이 골목에도 치킨집이 있데요. 강호동 치킨집이. 많아도 너무 많아요. 중국요리사 시험 쳐서 요리사 됐는데, 중국집이 너무 많아요. 따는데 힘들지, 학원 다닌다고 힘들지, 조리사 자격증 따놓고 중국집 차리니까 너무 많아요. 문 닫는 중국집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 나는 한 종목에만 매진한다. 짬뽕. 구수한 짬뽕국물. 짬뽕국물 하는 집이 한두 군데가 아니에요. 전부 다 짬뽕, 특화짬뽕, 짬뽕이에요.

도대체 한번 끄집어낸 아이디어가 몇 개월이 가지를 못해요. 식상해져버려요. 세상이 왜 그런 겁니까? 계속해서 이유도 모르고 계속해서 쫓기고 있어요. 벌 때 더 벌어야 된다고요. 그래가지고 아무리 과거에 돈벌어줘도 지치면 회사에서 나가라고 합니다. 젊은 사람이 가는 앞길을 구닥다리가 된 니가 막는다고요. 회사에 효율성이 떨어져요. 월급은 많지, 성과를 그만큼 안 낼 때는 알아서 나가줘야죠. 자기만 나가주면 되죠.

20대 젊을 때는 “취직했다! 이제는 결혼한다!” 근데 그 20대가 나중에 60대 되어가지고, “여보! 미안해.” “버티고 있지. 한창 애 돈 들어갈 때인데.”이러면, “니가 나가서 벌어라.” “이 나이에 내가 뭘 버나? 식당에 가나?” 또 여자가 벌이할 게 뭔데요? 식당, 식당, 식당. 뭐 있습니까? 할 게 뭐가 있어요. 식당에 가서 월급 받아가지고 약값으로 50만원 들어가고. 식당 아니면 청소. 전부 다 갱년기하고 겹쳐가지고 약값이 더 들어가는데.

선지자가 그 당시 집단 이스라엘로부터 고난을 받아요. 그때 그 멸망해야 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줄 때, 처음에 율법 조항들이 많잖아요. 율법 조항들이 많으니까 사람들은 뭐냐 하면, “이 법은 안 지켰지만 이 법은 지켰다. 아홉 개는 지켰으니까 한 개는 안 지켜도 봐주겠지.”라고 하는 것처럼. 법과 법 사이에 그리고 죄와 죄 사이에 뭔가 벌어져있고 구분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구약이 진행되면서 선지자가 딱 등장하니까, 선지자의 말을 이해 못하는 그 모두가 뭐가 되는가 하면 죄가 되는 겁니다. 오히려 선지자가 등장함으로서 없던 죄가 나와요. 사울 왕이 전쟁할 때에 제사를 지내고 했어요(삼상13:9-10). 관행이니까. 제사드릴 때는 의당 여호와께 제사 드리고, 우림과 둠밈, 제사장 주머니 속에 있는 거 다 보셨죠.

거기서 끄집어내어가지고 “이길 거다, 못 이길 거다.” 부채도사처럼 그거 하는 거. 그거 물어보고 하거든요. 그런데 사울 왕이 그렇게 했다 이 말이죠. 할 때에 사무엘이 일부러 안 갔습니다. 결국은 사울 왕이 제사를 드리고 하는 말이 “제사보다 순종이 낫습니다.”(삼상15:22)라고 할 때, 왜 진작 그렇게 이야기를 하지 않았느냐 하는 겁니다. 꼭 일이 터지고 난 뒤에 이야기를 해요.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다룰 때, 율법을 줄 때, 그 율법을 지켰다고 해놓고 초를 치는 방법으로, 뒤늦게 와서 죄라고 규정합니다. 오늘날하고 똑같아요. 우리로 하여금 일을 저질러놓게 하고, “참, 내가 잘했죠?”라고 할 때에, “잘했죠? 같은 소리 하고 있네.”이래 가지고 초를 쳐버립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자이기 때문에. 유일자 누구 이름 또 생각이 나는데. 온리Only, 오직, 유일한 분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 분의 행함으로 구원받습니다. 주의 말씀 순종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그 분의 행함으로 구원받아요.

그래서 선지자들은 그 당시에 그리스도의 영이 임해서, 그 당시 시대에 예수님이라고 보면 돼요. 선지자들은 기존에 있는 백성들의 죄를 들추어주기 위해서, 백성들이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 못할 그런 내용을 행위를 통해서 보여주게 됩니다. 자, 제 말이 굉장히 어려운 말인데,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제가 질문하는 취지로 말씀을 드릴게요. 제 9계명이 뭐죠? 10계명 탐내지 말라 앞에 거짓증거하지 말라고 있죠. 자, 거짓말하지 말라는 계명이 있습니다. 7계명은 간음하지 말라. 6계명은 살인하지 말라. 그렇게 있잖아요.

이 계명이 있고 선지자가, 엘리야 같은 경우에, 엘리야가 마차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지금 이 사람들이 거짓말하지 말라고 해서 거짓말 안 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이 의롭습니까? 새로운 요소가 들어왔죠. 뭡니까? 엘리야가 불 말을 타고 올라갔잖아요. 그 취지를 모르면 십계명을 지켜도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가 되어서 죄가 돼버려요. 이제 초친다는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인간은 뭔가 처음에 시도할 때, 자기 몸이 있고 자기 몸 앞에 법이 있잖아요. 그러면 자기 몸을 자기가 구원하기 위해서, 그 법에 대해서 순종하려고 시도를 해요. 시도를 하면서 그걸 순종했다, 안 했다는 것을 누가 평가를 하느냐 하면 본인이 판단한다니까요. 본인이. ‘이번에는 참 열심히 했기 때문에 순종에 해당될 걸.’ 자기가 일방적으로 그렇게 정해버려요. 그러면 그게 자기에게 뭐로 누적이 되느냐 하면, 자기 의로 누적이 돼요. 자기 의로 누적이 된다고요.

그러면 선지자에게 계명이 없는 새로운 요소가 추가가 돼버려요. 그런 거 많죠. 사르밧 과부에게 통의 가루와 기름이 나오게 한다든지(왕상17장). 갈멜산에서 엘리야가 제단 열두 개 쌓아놓고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 도랑을 다 핥아버린 거 했죠(왕상18장). 그게 십계명에 나옵니까? 안 나오는데,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엘리야를 무시했다는 죄로 무려 850명, 바알 450명, 아세라400명 선지자들이 다 죽어버리잖아요. 그렇죠. 다 같은 이스라엘 민족이지만.

지금 제 뜻을 잘 모르는데, 사사기이야기를 해봅시다. 사사기19장-20장에서 레위인이 유다 베들레헴에 있는 첩을 얻었는데, 그 첩이 행음해서 다시 유다 베들레헴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서 거하였다가 레위인이 다시 데리고 예루살렘 지나서 기브아로 갔거든요.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에 유숙을 하게 됐는데, 기브아 불량배들이 첩을 욕보이고 죽여 버렸어요. 그래서 레위 사람이 그 시체를 열두 토막을 내서 각 지파에 보내가지고, 우리 이스라엘이 이런 잔악한 짓을 했다고 했다 이 말이죠. 베냐민 지파에게 그 불량배들을 죽이라고 하니까, 합심해서 우리 지파 건드리지 말라고 해서 싸웠잖아요. 열한지파하고 한지파가 싸웠잖아요.

근데 처음에 누가 이겼습니까? 처음에 베냐민 지파가 이겨요. 이상하죠. 누가 봐도 잘못은 베냐민 지파가 했는데. 열한지파가 대패를 해버렸어요. 왜 그러냐면, 자동적으로 우리는 나쁜 일 한 것을 우리가 징벌할 수 있는, 정의의 이름으로 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여긴 거예요. 그들이.

우리는 그런 나쁜 짓을 안 했기 때문에 저쪽을 칠 수 있는 의로운 고난이 있다고 본 거예요. 하나님의 새로운 지시를 그들은 따를 필요가 없다고 여긴 겁니다. 아니까. 우리는 나쁜 짓을 안 했으니까 우리는 의롭고, 나쁜 짓 한 저들은 죄인이니까. 죄 없는 자가 죄 있는 자를 칠 수 있다고 여긴 겁니다. 법적으로 따지는 거예요. 법적으로.

그러나 처음에 누가 졌습니까? 두 번째도 졌지만. 유다지파가 올라가자고 하다가 졌어요. 나중에 그들은 묻습니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올라갈까요? 말까요?”라고 한 이유가 뭐냐 하면, 이번 일이 일어난 일에 대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대신 할 수 있는 그만한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자, 그걸 오늘날 우리한테 적용시켜봅시다. 우리는 자신이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뭐냐, 내가 정당하고 내가 옳다고 여기는 쪽으로 우리는 행동합니다. 죄를 적게 짓는 내가, 죄를 많이 짓는 쪽을 내가 나무라고 잔소리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들은 빨리 죽어도 나는 오래 살아도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을 한 겁니다.

거기에 만약에 우리의 선지자 예수님이 십자가를 졌다고 생각을 한다면 어떻습니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죠. 바로 나는 저 사람에게 잔소리할 수 있다고 하는 이것이, 저 사람이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드러난 나의 죄가 되는 겁니다. 그 사람이 우리 앞에 죄를 짓기 전까지는 내가 이만큼 평소에 의로운 체 하는 그런 인간인줄을 상상도 못한 거예요.

우리는 평소에 내가 잘못한 게 없기 때문에, 이 땅에 더 살아야 할 권한이 있다고 여긴 겁니다. 우리 교회는 아무 문제가 없기 때문에 부흥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거예요. 숫자가 늘어나고 헌금도 늘어나야 한다고 교인들이 그렇게 생각해요. 왜? 평소에 죄 짓지 말라고 새벽기도 하고 수요기도 때마다 기도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결한 제단이 되고자, 교회가 되고자, 그동안 얼마나 노력했습니까? 자기교회 말아먹자고 기도한 교회 봤어요? 모든 교회가 부르짖고 기도하는 이유가 뭡니까? 우리교회를 키워서 이 서울 땅에 하늘나라를, 우리교회의 주도하에 확장시켜나가겠다고 전부 다 그렇게 기도하잖아요.

그리고 그렇게 하게 되면 또 부스러기가 떨어져요. 뭐냐 하면 하늘나라 확장했기 때문에, 그 교회에 등록된 나도 우리 가정에서 원하는 뭐 소소한 것, 큰 거 말고, 뭐 차 바꾸는 것, 한 50평짜리고 이사 가는 것, 아주 사소한 것 있잖아요. 그거는 뭐 덤으로, 이 괜찮은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교회 다닌 우리 모두가 복을 받아서, 그만큼 헌금하고 헌신했기 때문에 줄 거라는 은근한 기대가 있죠. 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빠져있는 교회입니다. 그리스도가 빠져있는 교회에요. 바로 옛날 구약 이스라엘이 실패한 것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겁니다.

자, 다시 한 번 정리해봅시다. 선지자의 특징은 뭐라고요? 고난에 있습니다. 그럼 고난의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선지자가 하는 말을 기존의 인간들이 오해를 하고 있는 거예요. 뭔가 모르고 있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그래도 고난 뒤에는 영광이 있지 않습니까? 이래 이야기해요. 고난 후에 영광이잖아요.

그러면 처음에 어디에 있어야 해요? 지가 고난을 탈출해야 돼요? 고난 속에 그냥 머물러 있어야 돼요? 어떻게 해야 돼요? 탈출해야 돼요? 머물러 있어야 돼요? 머물러 있어야 이게 고난이 된다고요. 왜냐하면 이 고난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왔기 때문에, 영광도 그리스도의 영으로 와야 되거든요. 예수님 때문에 고난 받는다면 그 영광도 예수님 때문에 받아야지. ‘이쯤 받았으니까 이제는 그만하고 주께서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겠지.’ 뭐 상거래 합니까? 뭐 돈 먹고 돈 먹기 하는 거예요?

“이만큼 헌신했으니까 철딱서니 없고 믿음 하나도 없는 내 아들을 위해서 이 어미가 대신 새벽기도 나와 주고, 걔 대신 수능치기 전에 내가 다 기도하고 했으니까, 엄마가 이만큼 헌신했으면 아들내미 성적은 이번에는 좀 올라줘야 하지 않습니까?” 이건 뭐. 그래서 나온 찬송가가 ‘어머니기도 못 잊어’, 뭐 그런 거예요? 이 세상에 엄마는 없어요. 엄마 같은 엄마는 없습니다. 엄마는 자기 자존심을 위해서 존재하는 존재에요. 엄마는. 자식이든 남편이든 전부 다 자기 자존심 챙기기 위해서 사는 게 엄마에요. 아빠는 자식도 모르고 아내도 모르지만.

고난 뒤에 영광이라는 말은, 그 고난 자체의 의미를 아는 것이 영광스럽다 이 말입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는 그것도, 스데반 집사는 주님의 이름으로 맞는다는 이것을 굉장히 영광스럽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 영광 받는다고 하지 않고, “저들은 하는 짓을 나처럼 알지 못합니다. 저들을 용서해주옵소서.” 그렇게 이야기를 하죠.

고난 받는 이 특혜가 보통이 아니라는 겁니다. 아무나 고난 받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모든 세상은 자기가 돈 못 벌어서 고생하잖아요. 고난도 아니에요. 고생이에요. 자기 자존심 챙기고 남한테 으스댈 게 없어서 고생한다고 하는데, 그거는 자기 위신과 체면과 관련된 거예요. 제가 안양강의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제가 여기서 다시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이게 뭐냐 하면은, 세상 모든 사람은 누굴 위해서 사느냐 하면은 자기를 위해서 살죠. 근데 세상 돌아가는 것은 누굴 위해서 돌아갑니까? 골로새서 1장 16절에 보면, 예수님중심으로 돌아가죠. 이게 맞습니까? 맞을 턱이 있어요? 없어요? 맞을 턱이 없죠. 자기중심으로 살아가는 것하고, 주님중심으로 살아가는 것하고, 이게 생각이 일치되지를 않잖아요. 자기중심은 나로 인하여 내가 기뻐하겠다는 뜻이고, 주님중심은 세상 모든 것을 통해서 범사에 감사하겠다는 거고. 이게 맞아요? 안 맞아요? 안 맞죠.

그러니 안 맞는다는 말은 뭐냐 하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때 구시렁구시렁하지 말라는 말이에요. 이게. 씩씩거리고 짜증내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뭣도 모르고 살아가는 인간 그걸 채택해가지고, 성령께서 딱 납치해가지고 주님의 고난에 선지자로 동참시켜줬으면 고마운 줄 알아라 이것들아! 이래 되는 거예요. 이게. 감사한 줄 알아야 돼요. 그게 얼마나 영광스러운 임무인데요.

고난이라는 말은 자기 고난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내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고난 받았습니다.”라는 것이 자기 인생을 통해서 바깥으로 발산된다 이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수모를 당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오해를 당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세상은 무엇의 권세다? 악마의 권세죠. 그러나 교회는 악마의 권세가 이기지를 못하죠.

마치 뭐와 같은가 하면은, 섬에다가 성벽을 지어놓고 어떤 세찬 파도가 쳐도 이 성벽은 무너지지 않고 단단한 것처럼. 그걸 보여주고자 성벽을 세운 것처럼. 외딴 데다가. 그 성벽세우는 것이 바로 옛날의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서, 이 성벽에 있는 성벽 같은 선지자들은 주님의 장차 올 영광을 바라보면서, 세상이 주는 모든 곡해와 오해를 끄덕도 하지 않고 그들은 전부 다 받아냈다. 지금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베드로가.

이 이야기를 했다면, 그렇다면 이거는 오늘날 누구보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옛날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동일한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너희들아! 너희들도 옛날 선지자들이 갔던 그러한 자태로, 너희들도 똑같은 입장으로, 너희들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외부에서 어떤 악마의 권세가 오더라도 너희 성벽은 무너지지 않도록,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도록 버티기 하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음부의 권세가 뭘 노리고 들어오는가를 알아야 되겠죠. 음부의 권세가 뭘 노립니까? 그것은 바로 선악과 따먹은 날에는 정녕 니가 하나님처럼 되리라는, 옛날 그 수법을 그대로 사용하죠. 악마가 아담한테 유혹했던 거. 그것은 “니가 돛대다.” 이 말입니다. “니가 최고다.” 이 말이에요. 니가 최고가 되는 것.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거예요.

끝으로 이 말씀을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제가 안쓰러운데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잖아요. 성경에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해놓고 꼭 뭐를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다 이 말이죠. 원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한 이유가 뭐냐 하면, 바로 우리 모두가 이미 예수님의 원수라는 거예요. 원수라고 하면 잘 안 다가오죠. 그러면 이래 합시다. 웬수!

우리가 하나님의 웬수에요. 의인은 없어요. 우리는 하나님의 웬수입니다. 근데 그 웬수를 누가 사랑한다? 주님이 웬수 사랑해서 자신의 영을 우리 속에 집어넣은 거예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까(롬8:9). 집어넣었다 이 말이죠. 집어넣으니까 육에서 뭐가 돼요? 육을 접수해서 등기이전, 인수인계해버리는 거예요. 주께서.

이제는 육의 사람이 아니고 영의 사람이 되게 하시는 거예요. 영의 사람이 됐으니까, 이 웬수도 내가 너를 천국가게 했다는 것을 만방에 보이게 하는 겁니다. 십자가 옆에 달린 강도처럼. 그리고 세리나 창기처럼. 얼마나 감사한지요. 참으로 감사할 일이에요. 감사할 게 아니라 기절초풍할 일입니다.

우째 그런 일이! 저한테 우째 그런 일을 발생시키십니까? 제거 뭐가 잘난 게 있어서 그런 화끈한 일을! 주님의 십자가라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아들이 기뻐하시는 그 화끈한 일을! 그냥 못 본 체하고 지나가셔도 되지만, 못 본 체 지나가지 않고, “너!” 딱 집어서 그리스도의 영을 딱 집어넣어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오해를 받든 말든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게 하신 그 은혜. 이미 박힌 은혜를 뭐 어쩌란 말입니까? 주홍글씨처럼 지울 수도 없고. 안 지워집니다.

주어진 성령을 주께서 집어넣었기 때문에 힘으로 뺄 수가 없어요. 마치 음부의 권세에서 우리 힘으로 마귀를 못 빼어내듯이. 음부의 권세보다 더 센 성령의 권세가, 음부의 권세를 이기신 분의 영이, 음부의 권세에 박혀 있는 우리에게 옴으로, 고고학자처럼 그 돌을 딱 떠가지고, 주께서 “봐라! 내 솜씨다.”하고 세상 만방에다가 자랑하시는 거예요. 주님께서 자랑하시는 겁니다. 같이 참 기뻐하고 감사하면 좋겠는데, 우리는 부끄럽다고 가리고.

“나 아니라예~ 나는 신자 아니라예~” “니 신자 아닌 것 알고 구원했다.” 신자 아닌 것을 알고 구원하신 거예요. 그 관계가 바로 은혜라고 했죠. 그 관계가 믿음이라고 했죠. “저 안 믿어예~” 안 믿으니까 구원한 거예요.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 어디에 있어요?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 인간이 믿는다는 것은 거짓말이에요. 왜? 믿을만해서 믿는 거잖아요. 믿을만하다는 내 판단에, “저 예수 믿을만하다.” 이래 되면 그 예수는 백퍼센트 가짜입니다.

믿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는데, 주께서 일방적으로 성령을 선물로 주니까, 우리는 도달된 그 은사로 인하여 주님을 보지 않고, 이제는 내 것이 아니고 주의 것이라는 이러한 변화가 발생될 때, 그러한 변화가 발생되는 그런 사람이 혹시 있어요? 하는 그런 식으로. 8절에,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혹시 이런 사람이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성령께서 일하죠. 있지요. 누구세요? 손들어보세요! 하고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 율법대로 살지 못했지만, 웬수 같은 우리를 일방적으로 사랑해주셔서, 그 사랑이 십자가의 형식으로 우리에게 도달케 해주셔서, 그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인 것을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비록 세상적으로 오해받더라도, 오히려 신나게 그 오해를 감사로 바꿀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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