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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10 00:37:39 조회 : 174         
예언자 181109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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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IP:122.♡.170.138) 18-11-13 00:04 
서울의존강의20181109a 베드로전서2장 10-13절(예언자)-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2장 10-13절

10절,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11절,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12절,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13절,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베드로전서 2장 10절이죠.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이렇게 규정짓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라도 아니고 일방적으로 그렇게 지칭을 해버려요. 본인이 그것을 어떻게 느끼든, 인식을 하든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규정을 그렇게 확정을 지어버렸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 본문을 우리에게 주실 때에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뭐냐 하면, 백성이 아니었더니 이제는 백성이라고 했다 이 말이죠. 그러면 백성 아닌 것과 백성인 것과 어떤 차이가 있느냐, 그 차이를 발견하면 되겠죠. 그 차이도 모르면서, “나 백성이래, 나 백성이래.” 나 백성이라고 하면, 전에는 백성이 아니었는데 지금은 백성이라고 하면 그럼 전에 백성 아닌 것하고 지금하고 어떤 변화가 있었느냐고 물어보면, “변화? 모르겠는데.”라고 하면 안 되겠죠.

그 차이를 아셔야 되고요, 그 다음에 그 차이를 우리 힘으로 이겨낼 수 있었습니까? 아니죠. 그렇죠. 백성이 아닌 자가 어떻게 사느냐를 먼저 우리가 확실하게 아셔야 됩니다. 백성인 자와 백성 아닌 자가 차이가 있다면, 그럼 백성이 아닌 자는 어떤 자인가를 분명히 해야 되겠죠. 백성이 아닌 자, 그 대표적인 자들이 누구냐 하면 놀랍게도 이스라엘, 유대인들이에요. 백성이 아닌 자가.

왜 그러냐 하면 그들은 예수그리스도를 지난 강의 때에 어떻게 했습니까? 건축자들의 버린 돌(7절), “아이고, 쓸데없어. 갖다버려!” 예수님을 갖다버린 거예요. 갖다버렸을 때에 그 갖다버린 그 취지가 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왜 예수그리스도가 그들에게는 쓸모없는 존재이었던가를 우리가 살펴봄으로서, 백성 아닌 자의 특징이 확연하게 드러나죠. 우리가 유대인들에게 고마워해야 됩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갖다버림으로서 “아, 백성이 아닌 자는 저렇게 예수님을 갖다버리는구나.”라고 이미 어떤 기준이 정해져버렸단 말이죠.

그렇다면 오늘날 교인들이나 사람들을 만날 때, 예수님을 증거 하게 되면 그 백성이 아닌 자는 유대인들처럼 똑같은 반응을 나타날 게 분명합니다. 똑같은 반응을. 백성이 아닌 자는 아닌 자들끼리 똑같은 반응이죠. 그럼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이 나중에 죽어서 가는 곳이 어디겠어요? 지옥이죠. 죽어서 뭐 불구덩이도 좋지만, 그들이 죽기 전에 하는 행세, 죽기 전의 태도, 그것을 미리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반가워요.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일단의 무리, 사람들이 있다 이 말이죠. 사람들이 있는데, 여기에 예수님이 오셨죠. 이 사람들은 내가 죽어서 좋은 데를 가야지, 라는 생각을 누구나 갖고 있을 것입니다. “죽어서 좋은 데를 가야지. 죽어서 지옥 안 가고 천국가야지.”라고 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지옥과 천국의 주가 되신 주님께서 미리 오신 거예요. ‘내가 죽어서 가보면 알겠지.’ 또는 ‘갈 때 내가 선택 제대로 하면 되겠지.’라는 생각을 이 사람들이 먹고 있었는데, 일찌감치 천국과 지옥을 가름하시는 분이 그들 속에 들어오셨잖아요. 이 무리들이 유대인들이고.

그래서 이 유대인들한테 고마워하라 이 말입니다. 유대인들한테. 유대인들이 우리들이 하는 태도를 미리 다 보여줬다는 점에서 좋은 선례가 된 거예요. 먼저 예가 된다 이 말이죠.  그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대접했습니까? 베드로전서 1장 7절에 보니까,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라고 했잖아요. 쓸모없다고 버렸다고 아까 제가 말씀드렸죠. 쓸모없다고 버렸잖아요. 예수님이 쓸모없는 거예요. 예수님이 불필요하다 이 말이죠.

자, 그러면 이 이야기를 한번 끄집어내봅시다. 유대인들이 있고 이쪽에 예수님이 있고, 예수님과 유대인들은 서로 대척관계다. 예수님은 쫓겨난 거고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밀어냈다. 예수님은 밀려나가신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첫째로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억지로 구원할 의사가 있다? 없다? 없는 거죠. 예수님이 “어디 나를 밀어내!” 하면서 권총하고 칼 들고 “이래도 안 믿어?” 목 조르면서 이러지는 않았다 이 말이죠. 미니까 그냥 밀린 거예요.

지금도 하늘나라 천군천사 보내가지고 “나 이런 존재다.”라고 해서 “아이고! 깜짝 놀랐습니다. 진작 말씀하시지. 그럼 믿어줄게요.” 이런 식으로 유대인들에게 한 게 아니고, 약해도 너무 약하게 하신 거예요. 약해도. 그리고 예수님이 잡힐 때 천군천사가 나타나지도 않았어요. 창조주가 마귀한테 잡혀서 죽는데도 불구하고 천군천사는 그냥 대기상태에 있었어요. 조용했어요. 물론 빛이 없었지만. 어쨌든 소규모적이었지만 대규모적인 것은 아니었잖아요. 무덤 속에 있는 사람이 살아나기는 했지만. 그때 뭐 단군의 조상들이 있었습니까? 고조선시대에 뭐 있었어요? 없었죠. 그냥 조용하게 넘어갔잖아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니 싫다는데 강제로 믿게 하지는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드러냈죠. 목 졸라서 강제로 믿으라고 이러지는 않았다 이 말이죠. 예수님은 밀면 쉽게 자빠질 정도로 약하게 오신 거예요. 그럼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왜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교회에서는 그렇게 부르짖는데, 실제로 예수님은 우리가 싫다고 하면 곱게 물러갈 정도로 그렇게 약하게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그 이유가 뭐냐 하면은 이 땅에서 예수님이 강할까요? 인간이 강할까요? 이 땅에서 인간이 강한 자로서 행세를 해왔다는 것을 그대로 들추어내주는 겁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강자한테 붙어있는 사람은 필히 예수님의 약자 됨을 이해 못하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우리가 결혼생활, 사회생활하면서 여러분 가정에 가훈이라고 붙여놓을 글씨를 쓴다면, 저한테 좋은 가훈 하나 이야기해달라고 한다면, 약하게 살자! 이런 것. 목사님. 착하게 살자가 아닙니까? 으응, 약하게 살자. 차카게 살자는 조폭들이 하는 거고. 약하게 살자. 뭐 그 밑에 다른 것 없습니까? 지는 게 남는 거다! 뭐 이런 것. 또 없습니까? 가자! 패배의 길로! 뭐 이런 것.

어느 누구도 그걸 선뜻 받아들이지 못할 거예요. 왜냐하면 정말 그 말씀대로 된다면, 우리가 평소에 생각했던 내가 되고 싶은 것이 다 없어지죠. 그래서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것은 뭔가 있다는 것입니다. 뭔가 있음에 하나님께서는 혐의를 두시는 겁니다. 수상하다는 거예요. 뭔가 있음에.

지난 낮 설교에 이야기했지만, 사도바울은 성경해석에 끝판왕을 보여줬다고 했죠. 우리도 성경해석의 끝장을 한번 봅시다. 뭔가 내가 있어서 착하게 사는 것이 착함입니까? 아니면 내가 없어지는 것이 이게 우리의 운명이에요? 어느 게 운명이에요? 바르게 사는 것이 운명이에요? 내가 이 땅에서 없어지는 것이 운명이에요? 서서히 늙어서 결국 없어지잖아요. 그렇죠. 착하게 살면 안 늙는다든지, 안 죽는다든지, 뭐 그러한 보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착하게 살든 나쁘게 살든 없어지죠.

이게 전도서 내용이에요. 의롭게 살아도 악인이 사는 것 다 받고요. 종로 고시원에서 화재가 나서 죽은 사람들 중에서 나쁜 사람들만 있겠습니까? 착한 사람들도 있지만, 뭐 불나면 소용이 없네요. 죽죠. 그리고 악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일찍 죽는 것도 아니고, 벼락 맞아 죽는 것도 아니고, 고생고생 하는 것도 아니고, 벌 받는 것도 아니에요. 만사형통해요. 그걸 어떻게 설명할 건데요? 악한데, 어떻게 설명할 겁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이렇게 설명하죠. 내가 착하게 있다든지 악하게 있다 할 때, 착한 것 악한 것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고, 뭔가 있다는 의식 자체가 문제가 되는 거예요. 있다는 의식이. 내가 있다가 돼버리면 무엇을 거부하느냐 하면, 자꾸만 없어질 거라는 것을 나는 싫어할 거라고 자기의 본색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되는 겁니다. 나 여기 있으니까 나 계속 있을래가 되는 거예요. 지금 얼굴들을 보니까 전혀 동의하지 않는 얼굴들인데.

아까 가훈부터 시작해봅시다. 가훈이 뭐냐 하면, 패배하자! 약하자! 죽자! 근데 이런 가훈들을 선뜻 안 받아들이는 이유가 뭐냐 하면 그냥 인간은 있음 그거부터 출발해서 이왕 있는 것을 계속 있고 싶어 하는 그 본성이 있는 거예요. 있고 싶어 하는 것. 근데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말씀은 뭐냐 하면 자기가 없어지는 거예요. 인자가 고난 받고 죽는다. 자기가 없어지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게 아버지의 뜻이다. 아버지의뜻은 뭐냐 하면 요한복음 10장에서 내가 죽는 것이라는 겁니다. 교회에서 목사들이 설교할 때, “자, 본문 요한복음 10장 봅시다.여러분들에게 물어봅니다. 여러분 예수님처럼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게 하면 뭣도 모르고 “아멘. 예.”라고 할 거라 이 말이죠. “그러면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이 땅에서 온 것은 죽으러 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 죽겠습니까?” “노멘. 안 됩니다. 아니 되옵니다.” 뭐 이렇게 나올 거란 말이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쓸데없다고 밀치고 버린 이유를 여러분들이 분명히 아셔야 돼요. 하나님의 백성은 없어요. 항상 주님은 이 땅에서 없어지거든요. 그렇다면 성경에 나오는 백성도 예수님이 없어지면 결국은 이 땅에서 백성은 없는 겁니다. 없는데, 오늘 본문에 너희들은 백성이 아니었는데 백성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면 없음에서 있음이 있을 때, 여기에 다른 것을 집어넣는 겁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있어서 착해서 백성이 된 것이 아니고, 있어서 악해서 백성이 된 것이 아니고, 이 있음 자체를 갈아치우는 겁니다. 다른 있음으로 바꿔치기 하는 거예요. 쉽지요? 이거 쉽지 않습니까? 내가 있다는 것 말고 주님이 계시다는 것으로 바꿔치기 하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밀쳤는데 자기 몸 그대로 가겠다는 거예요. 이게. 내 몸을 바꿔치기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냥 가겠다는 거예요.

유대인들이 이러한 주장을 하는 것은 정말 이거는 무식하고 철딱서니 없는 일이에요. 왜냐하면 그들은 구약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전혀 구약을 안 믿고 있어요. 구약 요엘 2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28절,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9절,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라고 되어 있죠.

이 말씀에서 도대체 그 꿈의 내용은 뭐고, 그들에게 성령이 왔을 때 장래일은 뭐냐 라고 궁금해 할 거예요. 그 궁금한 것에 대해서 그 다음 구절에 나옵니다. 30절,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세 가지, 피와 불과 연기 기둥. 피와 불과 연기는 뭐하는 용도냐 하면 이 세상을 작살내는 용도에요. 세상 없애버리는 겁니다. 지금 제가 계속 강의하는 내용이 뭡니까? 있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 이야기를 제가 계속 했죠.

자, 아주 더 쉽게 해봅시다. 유대인들에게 누가 왔습니까? 예수님께서 오셨죠. 자, 그러면 말을 바꿉시다. 유대인들에게 피와 불과 연기가 온다면? 유대인들은 있음입니까? 없음입니까? 유대인들은 없어지죠. 심판하는데, 불로 사그리 다 싸질러버릴 건데 뭐 사람이고 개고 소고 남을 것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그들이 마지막 때에 피와 불과 연기가 오게 되면 그들은 다 없어지는 거예요. 사이판에 태풍이 불었다. 아주 심하게 불었어요. 그러면 태풍에 나무들이 날아가면 어제까지 있던 그 나무의 자리에 나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나무가 없죠. 나무가 없잖아요. 그러면 피와 불과 연기가 오게 되면 그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와버리면 없는데, 예수님이라는 사람이 와버리니까 그들은 없다고 여기지 않고 자기들이 있다고 여기는 거예요. 만약 그들에게 피와 불과 연기가 온다면 그들의 모든 흔적은 날아가 버리고, 그러면 있는 것은 뭐만 있습니까? 불과 연기와 피만 그 자리에 남겠죠. 노아 홍수 때 비가 많이 왔잖아요. 거기에 인간의 문명이나 문화가 있을 게 아닙니까? 근데 많은 비가 싹쓸이해가면 거기에 뭐가 남습니까? 없지요. 남기는 뭐가 남아요. 없죠.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남는 것은 물밖에 없죠. 물은 뭐냐 하면 심판의 도구다 이 말입니다. 심판의 도구만 달랑 남죠. 요엘서에서 자녀들은 장래 일을 말할 것이고 젊은 자들은 이상을 볼 것이고 늙은이는 꿈을 꾼다는 이 말이 뭐냐 하면 이 세상은 시원하게 싹쓸이해서 날아간다는 예언을 지금 성신에 의해서 보여주는 거예요. 세상에 있던 모든 것이 다 없음으로 바뀐다는 예언이다 이 말이죠.

오늘 제목은 뭐냐 하면 ‘예언자’에요. 이거는 우리가 지난 시간에도 했지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은 그냥 백성이 아닙니다. 전부 다 뭐냐 하면 예언자집단이 되는 거예요. 예언자집단.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보면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렇게 되어 있죠.

이걸 한마디로 말해서 뭐냐 하면 예언자에요. 예언자. 예언자의 특징은 본인이 있는 것이 아니에요. 기능이 있고 그 기능이 있으매 따라붙는 것이 뭐냐 하면 자신의 몸이라는 말이죠. 역할이 먼저 있고, 있고 없고는 역할이 먼저 결정되는 거예요. 내가 있다, 없다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겁니다. 내가 있다, 없다는.

어떤 드라마를 찍는데 어떤 사람은 딱 1회에 나와 가지고 죽는 역할이에요. 그게 끝이에요. 1회, 2회, 3회... 쭉 그 사람은 안 나타나요. 왜? 1회에서 죽어버렸어요. 1회에. 그러면 그 드라마를 보는 사람이 첫 회에 나왔던 그 사람을 안 찾아요. 왜? 그 사람의 역할이 끝났기 때문에 안 찾아요. 유대인들의 역할은 뭐냐, 주님 앞에 심판받고 죽는 역할이에요. 예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죽어 마땅하잖아요.

예수님 하니까 또 잊어버렸죠. 예수님 말고, 예수님이야기 할 것 없이 아까 이야기한 요엘서 이야기를 해봅시다. 피와 불과 연기 앞에서 모든 인간은 살아남을 수 있습니까? 화성에서 한번 살아볼래요? 화성에서요. 못살죠. 이 땅을 주님이 접수한다면 이 땅이 화성이 되는 거예요. 지구에는 한명도 못살아요. 주님이 오실 때, 현재 우리가 사는 방식을 그대로 인수인계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방식을 고집해요.

그러면 주님의 방식과 맞지 않은 사람은 주님과 더불어 살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살아요. 어디에 맞느냐 하면 피와 불과 연기가 여기에 부합이 돼요. 그곳은 뭐냐 하면 지옥이에요. 주님께서 이 땅을 지옥으로 만드시는 이유는, 불심판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다녀가시고 보니까 이 땅은 예수님이 사는데 적절한 땅이 아니에요.

그러면 예수님 자신이 예언자거든요. 예언자고 왕이고 제사장이잖아요. 그 예수님 자신이 세상을 볼 때 그렇게 보는 그 예언의 기능을 이제는 내 백성이, 전에는 내 백성이 아니었는데 이제는 내 백성이 되었다고 할 때 그 기능을 인수인계 받는 겁니다. 예언자 아닌 백성은, 예언자 아닌 자는 백성이라고 입에 붙이지 마세요. 백성 아니에요. 사명 없는 사람은 주의 백성이 아닙니다. 어디 놀러가는 줄 알아요? 예수 믿고 그냥 놀러 가면 되는 줄 아는데.

예수 믿고 그냥 놀러 가면 되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게 주님의 예언적 사명과 관련되어 있어요. 자, 전에는 사명이 없었어요. 그냥 인간 있음이 인간인줄 알았어요. 그러나 예수님이 오시고 난 뒤에 사명 있음이 주님과 함께 있어요. 주님과 함께 살려면 주님이 주시는 기능과 역할과 사명이 있을 경우에만 주님과 함께 사는 환경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유대인들은 백성입니까? 백성 아닙니까? 자, 유대인들의 문제점이 뭐냐 하면 본인이 있음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다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다. 내가 여기 왜 있느냐 하면 공기와 그리고 따뜻한 햇볕과 단비, 이런 것이 있으니까 그거 덕분에 내가 여기 있잖아, 라고 우기는 거예요.

그러나 요엘서 2장에 보면 이게 시효가 다 돼가요. 다 끝난다고요. 마지막 때는 피와 불과 연기, 아주 싹쓸이 하겠다고 작심하고 오시는 거예요. 거기에 인간들이 과연 살아남을 수 있느냐? 이 가운데서 계속 있음이 되겠느냐? 안 되죠. 노아가 방주에 들어갈 때까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했잖아요. 근데 그건 비 안 올 때 이야기고, 하나님의 약속대로 홍수가 왔을 때 거기에서 노아식구 빼놓고, 노아도 마찬가지고, 그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살았다, 시집가고 장가갔다, 인간으로서 했다는 이게 과연 변명이 되겠느냐 이 말이죠.  안 되죠.

그러면 노아는 왜 살았어요? 노아에게 새로운 기능이 부여되어진 겁니다. “언약 안에서 놀아라. 언약 안에 들어가라. 방주를 만들어라.” 그거잖아요. 노아는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사명과 역할이 있다 이 말이죠. 사명에 빨려 들어가 버리니까, 사명이 있음에 의해서 살아가는 노아 가족 여덟 명과 사명 없음의 사람한테는 완전히 물귀신이 다 됐죠.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뭐 베드로전서 이야기하니까 노아는 잊어도 되고 그러는데, 그런 거 아니에요. 

성경말씀은 하나같이 일관됩니다. 모든 것이 하나로 통합니다. 전부 다 뚫리게 되어 있어요. 왜 우리가 이런 해석을 못하느냐 하면 교회가 너무 많아서 그래요. 행복한 교회부터 해가지고. 교회가 너무 많아가지고, 그거는 사람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위락(위로와 안락)단체, 친목모임 있잖아요. 사람들이 만들어낼 수 있어요. 하나님이름으로 만들어낼 수 있거든요. 더 크게 만들고. 그루밍인가, 나는 처음에 구루마인줄 알았어요. 대한예수교합동측이다 이 말이죠. 큰 교회다 이 말이죠. 인천에 있는 큰 교회.

예배당 크게 지으면 다 채워지게 마련이고, 가서 좋은 소리만 하는데 안 모일 리가 있어요? 손해 아닌데. 그러나 그들이 교회에 올 때 뭘 포기를 못해요? 나 여기 있음을 포기 못하는 거예요. 살려달라는 거예요. 미쳤어요? 왜 살려주는데. 지가 뭐라고. 아니, 하나님의 언약이 살려주심입니까? 아니면 요엘서에 있는 불과 연기와 피 입니까? 완전히 불 심판이에요. 그게 언약이라니까요. 제가 만든 거 아니에요.

저보고 멱살 잡지 말고. 제가 만든 게 아니고, 아, 그냥 나중에 이 지구상이 불 심판을 받는구나! 그걸 미리 알아 당겨서 챙겼으니까 얼마나 신납니까? 지금 SK가 이겼는지, 두산이 이겼는지, 그 문제는 지금 중요하지 않아요. 김 광현이 투수로 던졌는지, 누가 던졌는지 그거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겁니다. 이번에 지면 내년에 한국시리즈 나가면 되고. 그건 큰 문제가 아닌데. 중요한 것은 김 광현이가 공 던지다가 죽어버렸다면 이제는 문제가 되는 거예요. 김 광현 투수가 죽었다. 원래 죽게 되었어요. 예언에 의하면.

이 땅의 속성은 모든 것이 있는 것도 없어지는 속성이 계속해서 솟구쳐 올라오고 있습니다. 제가 지난 오후설교 때 초반에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요, 샌드위치이야기를 했어요. 샌드위치는 빵이 두 조각이잖아요. 안에 샐러드가 들어있고. 성도는 빵조각이 두 개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가족들이나 일반사람들은 자기라는 빵조각 하나밖에 없어요. 어쨌든 간에 이 하나밖에 없는 것을 계속 월급 받고 해서 계속 살려내야 돼요. 운동을 하든지, 똥배가 들어가게 하든지, 안 그러면 요양병원에 가든지, 계속 살려내는 거예요. 

그러나 성도는 조각이 몇 조각입니까? 두 조각이에요. 하나의 몸은 날아가도, 이 몸은 아담과 연결이 되어 있고, 다른 몸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는 거예요. 따라서 한 조각이 날아가도 다른 조각이 주와 함께 영원히 사는 겁니다. 샌드위치 빵조각이 두 개에요. 지금 계속 이야기하는 것이 백성 아닌 사람과 백성인 사람의 차이가 뭡니까? 빵조각 두 조각의 차이에요. 이쪽은 두 조각인데, 이쪽은 조각이 하나밖에 없어요.

조각이 하나밖에 없으니까, 계속 살려달라고 교회 다니고 난리도 아니에요. 그러나 이쪽은 뭐냐 하면 이왕 살았으니까 죽어도 좋다는 거예요. 죽어도 좋다고 하니까 요새 드라마이야기  인데, 아침에 일어났는데 수요일, 그 다음도 수요일, ‘죽어도 좋아’라는 괜찮은 드라마에요. 여러분은 볼 필요 없어요. 아침에 깨보니까 11월 7일, 그 다음도 똑같은 11월 7일... 아이디어가 좀 특이하다는 그런 생각을 했는데... 저도 바빠요.

학교 교육에서 가르치는 것은 네 몸은 시간과 공간으로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이 중첩되어 있다는 거예요. 이중이다. 이중. 오늘 이거 샌드위치 하나만은 아세요. 밥 먹고 사는 것 똑같은데, 차이점이 이 두 조각이라니까요. 두 조각인데, 근데 둘 다 건재한 것이 아니고 한쪽이 한쪽을 밀어내요. 아담에 속한, 살고자하는 이것을 주께서 밀어내는 거예요. 밀어낼 때 뭐로 밀어내느냐 하면 바로 예언, 기능으로 밀어내는 겁니다.

이걸 밀어내면 산다가 아니라, 니가 사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맡긴 사명과 기능이 살아야 돼요. 이쪽 안 믿는 사람은 누가 살아야 돼요? 내가 살아야 돼요. 내가 죽으면 하나님이고 예수님이고 다 소용이 없다는 거예요. 일단 나부터 살고 그리고 내 가족도 살리고, 살리고, 살리고 맨날 살리는 것밖에 안 하는데, 이쪽 성도는 뭐냐 하면 주님만 살리는 거예요. 주님만 살아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겁니다. 그리고 주님 때문에 내가 진즉에 가야 되는데 안 죽고 있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예언의 내용이 되는 겁니다.

그런 것을 상상해 볼 수 있거든요. 마치 노아가 방주해놓고, 비도 오지도 않아요. 구름도 하나도 없어요. 비 올 기미가 하나도 안 보이는데, 자꾸 이웃들한테 비 온다고 이야기 하는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주변사람들은 노아가 짜증이 나요. 짜증나고 밀치고 싶고 진짜 건축자들의 버린 돌처럼, 제발 두 번 다시 내 눈 앞에 띠지 말라고 밀어내고 싶은 거예요. 바로 그 기능, 노아의 기능을 누가 인수인계 받게 되었다? 바로 오늘날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인 사람들이 인수인계를 받게 된 겁니다. 그것을.

그러니 예수 믿고 예수님한테 뭘 도와달라고 찾지 마세요. 안 도와줍니다. 왜냐하면 도움을 받으려고 하는 그 의도자체가, 전제가 뭐냐 하면 나는 무조건 오래 살아야 되겠다는 그러한 심보를 가지고 주님이라는 이름을, 인간이 감히 이름을 거론하게 되어 있어요. 뭐 주님 언제 보고 싶었다고 주님, 주님 합니까? 꼭 아쉬울 때, 답답할 때, 내 뜻대로 안 될 때, 쭈여! 쭈여! 하잖아요.

물론 인간이 그럴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아랫조각이 쭈여! 하다가 관심을 다시 윗조각 주님한테 돌리거든요. 이게 사사기입니다. 자기 생존이 위태위태하니까 주여! 하거든요. 근데 주께서 도와주는 것은 생존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로서 해야 될 자기 직능을 다시 수행케 하시는 거죠.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는 것이 아니에요. 내 미흡함을 채워준다고 하는 이것은 유대인들이나 하는 짓이고, 지옥 갈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고, 주께서는 내가 원하는 것을 안 줘요.

이미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그냥 확인시켜줄 뿐이죠. 니 소원과 니 뜻은 나한테는 완전히 폐기처분 되었다. 니가 사는 것은 니 소원을 위해서, 니 욕망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자기 욕망이에요. 자기 뜻을 위해서 살아있는 거예요. 그것을 다시 되새겨주면서 우리에게 그때그때마다 일을 하시죠. 자, 물어봅시다. 중요한 대목인데, 내가 만약에 살아있지 않고 죽어있다면, 그동안 나를 괴롭히던 뭐도 죽은 거죠? 그동안 나를 괴롭히던 악마가 심어준 구조가 있어요.

그걸 무슨 구조라고 하죠? 악마가 따먹으라고 해서 따먹은 것이 있잖아요. 선악구조. 내가 죽었다면 나의 선도 이미 죽었죠. 죽은 걸로 간주하죠. 나의 악도 이미 죽은 걸로 간주하죠. 만약에 우리가 주님의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아까 요엘서 예언대로 말세의 신을 받지 아니하면, 우리는 누구한테 쫓기느냐 하면 이 선과 악에 늘 짓눌러서 늘 쫓겨요. 왜? 선을 행하면 복 받은 것 같고 악을 행하면 벌 받아서 집안 꼴 작살이 나는 것처럼 느껴지잖아요.

이런 의식, 이런 마음, 이런 생각으로 인하여 우린 계속해서 마귀로부터 쫓기는데, 우리 양심과 마음이 쫓기는데, 쫓길 때 도망치면서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하느냐 하면, ‘그래도 악착같이 내가 살아남아야지.’라는 생각을 하는 겁니다. 쫓길 때, 쭈여! 쭈여! 부르짖는 이것이 자꾸 뭔가 쫓기고 있는 거예요. 어디로 쫓기는가, 한번 보라 이 말이죠. 그 쫓기는 것을 크게 쓰겠습니다. 오늘 제목이 될 수도 있는데요. “망상”

사람들은 이 망상을 뭐로 보느냐 하면, 망상을 해석하면서 자꾸 현실이라고 억지로 본인이 해석을 합니다. 망상을. 망상은 망상인데 망상으로 해석하지 않고, 그게 현실로 실현이 될까봐 벌벌 떨고 있어요. 뭔가 내 뜻대로 안 되잖아요. 내 뜻대로 안 된다는 말은 간단해요. 내 뜻대로 안 된다. 이게 정상일까요? 비정상일까요? 내 뜻대로 안 된다는 이게 주님보시기에 정상입니까? 비정상입니까? 내 뜻대로 안 되는 게 정상이죠.

그런데 무슨 악마가 고집이 있어가지고, 이 세상이 내 세상이 아니고 주님의 세상인데도 불구하고 왜 내 뜻대로 돼야 된다고 그렇게 우깁니까? 이게 뭐냐 하면 망상이에요. 이게 망상이에요. 망상의 원인은 내가 살아남아야 된다는 것, 이왕 살아남는 것 잘된 쪽으로 살아남아야 된다는 이게 인간이 갖고 있는 망상입니다. 악마가 뒤에서 그렇게 부추겼죠. 오늘 제목을 미리 정하겠습니다. 망상과 예언.

망상과 예언하면 여러분들에게 딱 떠오르죠. 망상은 내 소원, 예언은 누구 소원? 예수님 소원.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내 소원은 내가 악바리처럼 빌어서, 그리고 예언은 빈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강제로 나를 다루어서 예언이 예언되게 하는 거예요. 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냐 하면은, 바로 망상을 예언이라고 잘못해석해서 그래요. 자기가 잘 되고 이 나라가 잘 되는 것이 자기 뜻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오늘날 대표적인 집단이 뭐냐 하면, 태극기 흔드는 집단들. 미국이 도와주고 이스라엘이 도와주고 하나님의 뜻은 이스라엘과 한국에 있다고 우기면서 열심히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이 한국을 지켜주옵소서. 공산악당마귀로부터 지켜주시고 미국이 잘 되어서 우리나라가 다시 기독교국가와 연합해서, 이 세상을 기독교국가로 정복케 하옵소서. 기독교국가로 주께 영광이 되게 하옵소서.” 이게 태극기 집회의 망상이에요. 망상. 이런 이야기들에서 위에 콩고물을 다 털어내 보세요. 남는 게 뭡니까? 남는 게. 누가 살아야 됩니까? 내가 살아야 된다는 겁니다. 내가 살아야 된다. 왜 살아야 되는데? 이유를 묻지 말라. 그거는 이유를 묻지 마라.

주께서 살려주셨다. 이게 예언입니다. 내가 살아야 된다. 이건 망상입니다. 망상인데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면 치매현상입니다. 모든 인간은 정신병자입니다. 이유를 따지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무조건 내가 살아야 된다는 그것부터 출발하는 것이 바로 정신병자들입니다. 마귀 들린 자들이에요. 예수님께서 오셔서 귀신 쫓아내셨는데, 마귀 왜 들렸습니까? 쫓기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악마의 밥이 인간들이에요. 또는 악마의 취미가 사냥인데, 그 사냥감이 누구겠어요? 인간이에요. 아이고, 잘 갖고 놉니다.

조금만 잘못하면 와가지고 “니 잘못했지? 이번 주에 니 벌 받았어.”라고 하면, “안 되는데요. 한번만 용서해주옵소서. 뭘 바칠까요? 이렇게 제 희생을 받아주옵소서.” “그래. 그럼 내가 한번 봐줄게.” 일평생 하는 짓거리가, 나의 사고방식 안에서 일평생 순환되는 모든 순환구조는 선이 악이 됐다가 악이 다시 선으로 됐다가 선에서 까불다가 다시 악이 됐다가 하는 돌고 도는 그 구조. 악마가 심어준 선과 악, 악과 선의 자리바꿈. 착한일 했다고 좋다고 까불다가 터져가지고 또 회개하고. 그 사고방식, 그 망상에 쫓깁니다.

그러면 이 망상에서 우리가, “이건 망상이야!”하고 거기에서 탈출이 가능할까요? 가능하지 않습니다. 탈출하기 위해서 주께서 오셨잖아요. 오실 때, 강의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처음으로. 제가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여러분! 강한 것이 좋습니까? 약한 것이 좋습니까? 라고 하면 약한 것을 좋다고 할 사람은 없죠. 예수님은 되게 약하게 왔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을 따를 수가 없어요.

예수님이 귀신 쫓아내고 할 때는 베드로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강자인줄 알았어요. 그런데 잡힌다는 소식을 듣고 베드로가 실망에 실망을 했어요. 내가 제대로 믿을 사람을 믿었는지 후회스러운 거예요. 마지막에 물론 후회했지만. 나 저사람 모른다고 변절자까지 했지만, 은근히 뭔가 주님한테 원한 게 있었어요. 그게 뭐냐, 출발점이 뭐냐 하면 주님 덕분에 누가 잘 된다? 기존에 있는 내 모든 뜻과 희망이 주님의 도움으로 잘 될 것이라고 여긴 겁니다.

그 비슷한 노래가 ‘아빠 힘내세요!’라는 것 하고 그리고 ‘거위의 꿈’이나 뭐 그런 노래. ‘잘 될 거야!’ ‘마이 웨이’ 프랭크 시나트라가 부른 것 말고 우리나라 가수 윤태규가 부른 ‘마이 웨이’도 있어요. 그런 노래들을 보게 되면 전부 다 억지스러워요. 굉장히 억지스럽거든요. 그런데 그거 아니라면 우리는 그냥 약한 쪽으로 가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는데, 사람들이 약한 쪽으로 갈 의사도 없을뿐더러, 약한 쪽으로 가면 자기가 뭐라고 인식을 하느냐 하면은, 이건 성공의 길이 아니고 나는 지금 실패하는 쪽으로 인생의 길을 가고 있다고 이렇게 벌벌 떠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해석의 끝장을 보려면 아예 쫄딱 망합시다. 이걸 목표로 삼아야 돼요. 지금 마귀한테 왜 쫓기느냐 하면 안 망하려고 하는 의식이 강렬하기 때문에 그래요. 마귀를 쓰러뜨리고 마귀를 이기려고 하는 이유가 계속 강자로 남으려고 하는 그것 때문에, 그 일이 더 화근을 키운 거예요. 망하라고 나온 존재면 망하면 되고, 낮아지라고 하는 인간이면 낮아지면 되고, 죽으라고 하는 인간이면 죽으면 되는 거예요.

아니, 우리를 만드신 창조주도 이 땅에서 그렇게 살았잖아요. 망했잖아요. 돌아가셨잖아요. 죽었잖아요. 매 맞았잖아요. 채찍 맞았잖아요. 주님께서 왜 그 모습을 우리한테 보였습니까? 나는 길이고 진리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께서 가신 길과 진리가 아버지께로 갈 수 있는 생명의 유일한 길인데, 그 길이 어떤 길입니까? 이게 보통으로 해서는 그 길이 보이지를 않아요.

오늘 낮에 안양강의에서 했는데, 거기에서 한 예를 다시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서울 번화가 강남에 고층빌딩들이 있죠. 있는데, 이 빌딩에 가려져서 이 길들이 안 보여요. 근데 만약에 북한이 핵폭탄을 터트려서,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터트린 것처럼 전부 다 잿더미가 됐다면 비로소 보이는 것이 뭡니까? 비로소 보이는 게 길이 보여요. 길. 주님 가신 길이 보인다고요. 요엘서 2장에 의해서 피와 불과 연기로 사그리 다 쓸어버릴 때, 비로소 주님 가신 길이 보이는 거예요. 주님 가신 길.

그걸 보려면 이 고층건물 부러워하지 말고, 삼성, 현대 부러워하지 말고, 망해도 폭삭 망해야 하고, 종로고시원 화재로 7명이 죽었는데 8번째로 제가 간다고 할 정도로, 노숙자로 빌어먹고 하는 것을 상상할 정도로 어떤 것이라도 좋으니까,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주님 가신 길이 보이느냐가 관건이에요. 내가 얼마나 착하냐, 악하냐 하는 것은 누구한테 쫓기는 겁니까? 악마한테 계속 시달리게 되어 있어요. 악마한테. “니 오늘 나쁜 짓 했지? 니 죽었어.” 계속 시달린다고요. 계속해서.

언제까지, 도대체 몇 년째 속아 넘어갑니까? 악마가 보이스피싱이에요. “지금 니 아들은 피 흘리고 있다. 빨리 돈 바쳐라.” 이런 것처럼. “니 인생은 지옥가고 있다. 니가 빨리 회개하고 십일조 내라.” 계속해서 우리 속에서 보이스피싱이 있고. 우리 속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고 목사도 덩달아서 그런 주장을 하잖아요. 벌벌 떨면서.

이번 주에는 교회 참석했으니까, 출근도장 찍었으니까, “이번 주는 중요한 바이어와 계약이 있기 때문에 봐주세요. 이번 주는 제가 성가대까지 앉았습니다. 이번 주 금요일까지 건드리지 말고 가만히 좀 있으세요.” 맨날 쫓기고 있어요. 맨날. “이번 주 목요일에 수능인데 수능까지는 제가 일찍 나오겠습니다.” 전에는 늦게 나왔는데 오늘은 좀 강의 일찍 나오고. 시험 앞두고 조신해야지 경망스럽게 하다가는 우리 애가 대학에 떨어질 수가 있으니까. 그럼 수능 끝나면 끝입니까? 학교 또 잘 찍어야 되지 않습니까?

도대체 언제까지 보이스피싱한테 당하겠습니까? 요 근래 보이스피싱에 당한 사람이 왜 그리 많은지 모르겠어요. 왜 좀 그렇게 용감하지가 못해요? 왜? 자기주장, 분수를 좀 아셔야 돼요. 내가 노력해서 살아온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노력해서 살게 하신 거예요. 이제는 안 속을 때가 됐는데.. 이제는 안 속을 때가 됐는데.. 아까 이야기했죠. 착하다고 복 받는 거 아닙니다. 착하다고 고시원에서 죽는 수가 있어요. 그리고 악하다고 해서 일찍 돌아가시는 것이 아니에요. 청담동에 악한 사람들 잘 살고 있습니다. 풀장까지 갖추어서.

한국미래기술 양진호 회장 막 이래가지고 사람 치대요. 잘나갔잖아요. 그 사람이 회장의 자리에 있으면서 자기가 노숙자라는 생각을 한번이라도 했겠습니까? 내가 회장이고 아니고 간에 나는 이 땅에서 노숙자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예수님이 길인 것을 알리기 위해서 나는 기능의 일부를 내가 부여받은 것이라는 것을 생각했겠어요? 베드로전서 2장 9절 말씀처럼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서의,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기 위해서 그 회장자리에 앉아있는 겁니까? 앉아있으면서 막 이러면서 사람 치고 있어요? 아니죠.

자,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이 뭐냐 하면, 백성 아닌 자가 왜 백성이 아니냐 하면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살려내라는 거예요. 땡깡도 이런 땡깡이 없어요. 늘 술 한 잔 먹은 사람처럼 살려내라는 겁니다. 니가 뭔데? 무조건 살려내면 당신한테 푼돈이나 주겠다는 겁니다. 그러한 개소리는 뭐냐 하면 아까 요엘서 이야기한 것처럼 피와 연기와 불이 없을 경우에 그게 가능하죠.

그러나 정말 말세에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사람은, 이 세상은 큰소리치고 무슨 소리쳐도 인간은 전부 다 없다는 거예요. 이걸 여러분들이 이렇게 실습하면 돼요. 거리에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잖아요. 그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세요. 사람이 없다고 하면 나를 지적할 사람도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악마가 무저갱에 잡혀있거든요. 그럼 악마가 잡혀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부림에 의해서 일부일부 활동한다고요. 지금 잡혀있는 상태에서. 그러면 악마가 잡혀있는 상태에서, 악마 지도 지 앞가림도 못하면서, 지옥에 갇혀있으면서 나한테 지적질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라고 했잖아요. 아무도 정죄할 사람이 없죠. 사람은 죽어서 정죄 못하죠. 악마는 잡혀있어서 정죄 못하죠. 꿇릴 게 뭐가 있습니까? 뭘 꿇립니까? 왜 꿇려요? 아무도 우리를 지적하지 않고 주님조차도 지적하지 않는데, 왜 우리가 초조하게 우리 자신을 지적질 합니까? 무슨 권한으로? 왜? 또 지적질해가지고 괜찮은 사람 만들어서 우리가 천당 가는데 유리하게하려고요?

아닙니다. 길이에요. 멸망할 때 비로소 보이는 주의 길이고(he way), 진리고(the truth), 생명(the life)이거든요. 주님이. 그동안 빌딩에 가려진 거예요. 잘난 놈들한테, 잘난 인간들한테 가려진 거예요. 그리고 나도 덩달아서 잘나 보이려고 3층에서 살다보니까 길이 안 보인 겁니다. 낮아지지 않았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 지상에서 혼자 고생스럽게 갔던 주님의 그 고생길과 신음소리가 들리지 않은 겁니다. 들리지 않고, 부어라 마셔라 하면서 잘나고 있는 그러한 재벌들과 잘나가고 있는 그런 사람들만 눈에 들어온 거예요. 부자 되고, 잘나고 하는 그런 사람만 있지, 주님가신 그 비참한 길은 보이지 않는 겁니다.

근데 그 비참한 길에 가게 되면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 비참한 길에서부터 우리가 사명을 부여받았다면, 우리는 비참하지 않더라도 상관없어요. 정말 잘 먹고 잘 살아도 이거 때문에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니까. 그 잘 먹고 잘 사는 것조차도 그게 사명이라면 우리는 그 부자 된 것을 감당해야죠. 좀 싫지만, 괴롭지만 좀 해야죠. 어떡해요. 부자 되어서 이 재산 날리면 어떻게 하나?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요.

주신 분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신 분도 하나님이요. 욥 자체가 믿음이 있다는 말은 사명이 있다는 말이에요. 주시고 빼가고 하는 것은 주님 소관이지 내가 이거해서 밥 먹고 살라고 이 짓하고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사명이 살아있으면 나는 살고, 사명이 없으면 나는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고 죽은 것이고. 그런 관계가 오늘 본문에서 새로운 백성이고 소유된 백성입니다.

정리하고 첫째 시간을 쉽시다. 뭘 정리하느냐 하면 모든 인간이 우후죽순처럼 살아있다고 자랑질 했을 때, 예수님은 홀로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죽음이 곧 뭐냐 생명이거든요. 죽음=생명이에요. 그렇다면 죽어서 생명이 되는 그 기능을 부여받은 사람 같으면 키가 안 커도, 대나무처럼 안 뻗어도 이게 바로 소유된 백성이에요. 쭉쭉 안 커도. 그러면 이들한테 “니 나처럼 하면 부자 된다. 니 나처럼 하면 잘 된다.”라고 하는 이러한 개소리를 들을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없다고 생각하고 모든 인간을 아주 개무시 하라니까요. 무시하고, 또 마귀는 사로잡혔으니까 무시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이것은 내가 착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고, 또 악해가지고 벌 받아서 주어진 것도 아니고, 주님이 가신 길을 눈여겨보라고 지금 우리가 이런 삶을 살고 있다 이 말입니다.

10분 쉽시다.
 이미아(IP:122.♡.170.138) 18-11-13 00:06 
서울의존강의20181109b 베드로전서2장 10-13절(예언자)-이 근호 목사

첫째 시간의 말씀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려냈으면 주님의 기능이 있고, 그 기능을 위해서 계속 우리를 살려낸다는 그것이 예언자라는 말씀이라고 이렇게 여러분들이 정리를 했을 거예요. 근데 그렇게 정리를 했다면, 그 정리는 어설프기 짝이 없는 정리입니다. 왜냐하면 12절을 한번 보세요.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이래 되어 있죠.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의 기능으로, 예언자로 예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한다고 하니까, “그럼 우리가 할 일은 딱 나왔네요. 뭐 선하게 살면 되겠네요.”라고 한다 이 말이죠.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바로 유대인들이 그 당시에 예수님을 생각한 것하고 똑같아요.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선한 일을 도모하기 위해서 이 땅에 택한 백성이다. 이제 바르게 살게 되면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신다.” 이 사고방식하고 다를 바가 없이 똑같아요.

그렇게 내가 예언자로서 바르게 살면 된다고 했을 때, 우리가 뭘 놓쳤느냐 하면은, 예언이라는 것이 이게 말이잖아요. 말. 또는 말씀이죠. 말씀은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여기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새로움이 창조되는 거예요. 새로움이. 선한 일, 이거 밀어붙이는 거예요. 선한 일이 아니고 새로운 선한 일이 되는 거예요. 이걸 놓치면 안 돼요. 우리가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대목에 와있습니다.

하나님의 예언대로, 예언이란 말씀이다. 그럼 우리가 말씀을 지키게 되면 선한 일이 되고, 그러면 하나님의 기능을 제대로 완수하게 되니까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지, 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그거는 잘못된 겁니다. 우리가 알고 있던 선함 말고, 예상도 못한 “그게 선한 거야?!”라고 하는, 그런 예상 못한 새로운 선함이 예언의 기능으로서 이게 도출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예언의 기능으로서.

그렇게 되려면 우리는 우리가 익히 아는 그런 선함을 포기를 해야 돼요. 그리고 주님이 우리를 예언자라고 한다면, 성도가 예언자 맞아요. 신약의 예수님 기능 자체가 예언의 기능이고,  그 성령의 기능이 우리한테 왔으니까 예언자가 맞는데, 그 예언자 기능을 하면서 우리가 익히 아는 선행은 선행이 아닙니다. 아니고, 예수님이 지금 일하면서 새롭게 만들어내는 새로운 선행이 우리를 통해서 창조되도록 조치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와중에서 누가 죽었는가요? 우리 자신들의 자기부인, 자기부정이 계속해서 유발되고 연발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오늘 착한 일 했다. 그게 부정되어야 해요. 그거는 예상하고 익히 아는 그러한 선행입니다. 그 선행은 예언된 선행이 안 돼요. 그건 창조적인 요소가 빠져있어요. 선이 아닌데도, 아, 이거마저 선이었구나! 라고 새롭게 창조되는 거예요. 새로운 일이 있어야 돼요. 새로운 일이.

자, 그럼 새로운 일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내시는가? 아까 샌드위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여기 우리 몸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백성이 아니었는데 백성이 되게 하신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여기에 들어오십니다. 예수님께서 들어오신다고 할 때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원칙이 있어요. 그 원칙이 무슨 원칙이냐 하면 새 언약 원칙입니다. 그 새 언약 원칙이라고 하는 것은 기존의 인간들의 율법적 기능을 완전히 무시하는 그 바탕위에 새 언약이 나왔습니다.

쉽게 하겠어요. 예수님의 새 언약은 뭐냐 하면 피와 살을 먹는 거잖아요. 피와 살을 먹는 거. 평소에 인간들이 피와 살을 먹습니까? 안 먹죠. 그러니까 예수님의 새 언약은 그 방식이 어떻습니까? 새로운 거예요. 인간이 기존에 해왔던 그 방식을 완전히 인정하지 않는 방식이에요. 어제까지 나는 착한 일 했다. 그러면 오늘의 예언은 뭐냐 어제까지 착한 일 한 그 착함을 주께서는 인정하지 않는 거예요. 날마다 우리의 착함을 인정하지 않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우리는 뭘 포기해야 돼요? 내 착한 것이 이틀치, 사흘치 계속 간다는 그걸 인정해야 돼요? 그걸 포기해야 돼요? 사흘 간다, 나흘 간다, 이걸 인정하면 안 되겠죠. 그러면 선행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한 성과가 아니고 이건 우연적인 사건이 되는 겁니다. 선이라고 하는 것은 우연적 사건이에요. 우연한 사건이에요.

우연한 사건의 특징이 뭐냐 하면 예상 못한 사건이거든요. 예상 못했다는 것은 내가 은근히 기대하거나 내가 노렸던 사건이 아닌 것이죠. 그렇다면 이거는 우리의 행함과 관계가 없어요. “나는 오늘 착한 일 해야지.”라고 하는 것과 전혀 상관이 없어요. 하다보니까 그것이 주님께 영광이 되는, 이거는 마치 그 일을 하면서도 내가 깜짝 놀랄 정도로. “어떻게 내가 그 일을 하게 되었지?” 행사한 본인도 “이건 내가 한 게 아니야.”라고 설레발을 칠 정도의 일.

그럴 때 그 공로가 누구한테 돌아가겠습니까? 주님의 일하심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주님이 주신 기능은 주님 쪽으로 공로가 돌아가는 조건 하에 준 거예요. 주님이 주신 기능가지고, 자기가 어른 행세하고 자기가 모든 영광을 중간에 가로채라고 주신 기능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 이름으로 착한 일 해봐야 그건 착한 일이 아니고, 사실은 도둑질 한 거예요.

그러면 이 이야기를 쉽게 한다면 이렇습니다. 모든 있음을 없다고 잊어버리는 거예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농촌에 봉사를 갔잖아요. 갔다 왔잖아요. 그러면 그 봉사한 것을 잊어버리세요. 남편이 바쁜데도 아내를 도와서 애 봐줄 테니 하루쯤 아내는 놀게 하고 자기는 노는 날 안 쉬고 하루 종일 애를 봤다. 누가 봐도 참 착한 남편이라고 하겠죠. 그렇게 하시되 그거는 선행이 아닙니다. 뭐가 선행이냐 하면 그 다음날 그 사실을 잊어버릴 때, 그게 선행이 되는 거예요.

왜? 나와 결부가 안 되어 있으니까. 내가 여기 있음과 결부가 안 되어 있으니까. 주님께서 유발하신 사건이에요. 주님께서 애보라고 했고, 주님께서 애를 제때에 잠 잘 자게 했고, 전부 다 주님께서 한 걸로 하려면 그 현장에서 결국 나는 제3자로 빠져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그게 내가 한 일이 돼버리면 이건 새로운 일이 아니에요. 내가 했던 행세를 그냥, 내가 잘하고 있었던 나의 테크닉을 또다시 써먹었을 뿐이지, 이거는 본인한테 전혀 새롭지 않은 일이 돼버렸어요.

애를 일주일동안 봤다면, 일주일동안 보면서 월요일에 애를 본 것, 화요일에 애를 본 것, 일주일 내내 새롭게 느껴져야 돼요. 새롭게. 그걸 만약 옆에서 카메라로 쭉 찍는다면 월요일에 애를 본 것, 화요일에 애를 본 것이 남들 보기에는 똑같이 보인다 해도, 본인은 날마다 그것을 새롭게 느껴야 됩니다. 새롭게 느끼려면 지나간 것은 잊어야 돼요? 안 잊어야 돼요? 그걸 완전히 잊고 부정해버려야 되죠.

이 말이 통째로 되려면 주님께서 이 세상을 주도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돼요. 매트리스가 하나 있는데 그 안에서 애가 논다고 합시다. 그냥 혼자 놀면 놀긴 놀아도 약간 재미가 없어요. 근데 아빠 엄마가 양쪽 붙잡고 매트리스를 기우뚱기우뚱하게 흔들면 애가 재미있다고  깔깔깔 대죠. “또 해줘! 또 해줘!” 이렇게 하죠. 왜 그러냐 하면 평평하다고 여겼던 이 매트리스가 요동치고 있잖아요. 주님께서는 똑같은 날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장담할게요. 똑같은 날을 주신 적이 없어요.

그런데 인간은 왜 그날이 그날이라고 생각을 하느냐 하면은, 인간이 자기한테 맞추기 위해서 동일한 날로 일방적으로 그렇게 규정을 해버린 것이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것을 형식화라고 하는데, 그것이 자기 일을 도모하는데 합리적이고 편리하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는 동일하게 생각을 하는 거예요. 똑같은 해는 뜬 적이 없는데 우리는 똑같은 해가 떴다고 우기는 겁니다.

그러니까 뭡니까? 본인한테 본인이 새로운 것을 느낍니까? 못 느낍니까? 전혀 못 느껴요. 사는 게 지겨워요. 주께서는 지금 매트리스 흔들 듯이 요동치고 있는데, “아휴! 사는 것 재미 하나도 없다.” 이러고 있거든요. “뭐, 특별한 일을 해볼까?” 이러고 있다고요. 주께서 이끄시고 인도하는 이 세계창조, 이 세상을 주께서 창조를 하셨는데, 그 창조하실 때 그 바탕이 뭐냐 하면 주님의 십자가 희생에서 나온 거예요. 골로새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서 세상은 만들어졌거든요.

자, 지금까지 한 것을 여러분들이 다 아시는지 복습해봅시다. 골로새서 1장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서 세상이, 세계가 거기서 나온 거예요. 창조의 바탕은 뭐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의 바탕위에 세상이 창조된 겁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흐르는 유일한 원리는 뭐냐 하면 예수님의 희생에 있죠. 왜냐하면 모든 세상은 그리스도로 통일되기 때문에. 피 흘림으로 의롭게 되는 거예요. 전부 다 희생이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 세계에서 희생이 유일한 기준이라면 이 땅에서 무엇이 선이겠습니까? 주님의 희생을 이해하면 그게 선이 되고, 주님의 희생을 모르게 되면 악이 되겠죠. 그러면 희생을 외면한다, 희생을 모른다는 말은 결국 이 세상을 꾸려나가는 데에 있어서 내가 누구를 의지한다는 말입니까? 주님의 희생을 도외시했고 안 봤으면, 그러면 이 세상은 무슨 원리에 의해서 나를 계속 이 땅에서 살게 하겠다는 겁니까? 이것은 나의 열성과 노력과 나의 조심스러움 나의 윤리와 나의 도덕이겠죠.

이게 바로 이 세상에서 주님께서 이야기하는 선이겠어요? 악이겠어요? 이게 악인 거예요. 왜? 주님의 십자가 희생을 고려하지 않고, 그것을 삽입하지 않고 살아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희생을 왜 외면할 수밖에 없는가? 그거는 내 인생을 누구 인생이라고? 내 인생을 내 인생이라고 이야기를 했거든요. 나만 잘되면 돼요. 내가 편하고 내가 칭찬받고 내가 성공하면 그걸로 돼요. 더 바라면 죄가 됩니다. “바램은 죄가 될 테니까” 김동규의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 내가 잘 되고 나 편하고 내 가정 잘 되고 내 소원대로 되면 더는 소원이 없다는 거예요.

이게 성경입니까? 이게 성경이 아니잖아요. 이게 진리입니까? 이게 진리가 아니죠. 누가 인간을 이렇게 만들었어요? 자기 행복이 복이 아니거든요. 자기 행복은 저주다 이 말이죠. 왜? 뭐가 빠졌습니까? 내 행복을 추구하라고 내가 이 땅에 살아온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희생과 연관 지으라고 이 땅에 태어났다 이 말이죠. 근데 자꾸 마귀는 니만 잘 되면 돼! 니 가족만 행복하면 돼! 자꾸 우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교회 가서 무슨 기도합니까? 주님께 십자가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우리 집구석 잘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거예요. 맨날 기도하는 게 우리 집구석 잘 되게 해달라는 거예요. 우리 집구석 망하게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주께서 답답해서, 주님 계시 가운데에서 응답하겠죠. “왜 망하면 안 되는데?” 주님께서 이렇게 나옵니다.

“기도 좀 그만 치워라. 내가 시끄럽다. 내가 시끄러워서 못 듣겠는데, 기도 잠깐만 멈춰봐라.” 내가 더러워서 못 듣겠다고 하는 이게 이사야 1장에 나온 거예요. 니가 가져온 모든 것을 안 받겠다는 거예요. “니 말만 하지 말고 내 말 좀 들어라. 니 하고 싶은 말만 자꾸 쏟아내지 말고 내 말 좀 들으라. 왜 니 가정이 행복해야 하는지 이유를 대봐라.”

언약도 아니고 세상의 구성원리도 아니에요. 왜 그걸 주장하느냐 하면은, 그동안 새로운 것을 없애버렸어요. 주님은 날마다 새로운데, 사람은 자기 소원이 있기 때문에 그 새로운 것이 들어오면 전부 다 잘라가지고 다 버려버렸어요. 그걸 전부 다 밀어내고, 내가 익숙한 것,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 이거는 내 기쁨이다 하는 그것만 골라서 그것만 챙겨가지고, 이것이 유지되도록, 이것이 하자가 없도록 이렇게 보호해달라고 요청하는 겁니다.

이 보호라는 말이 나왔는데, 세상에서 많이 통용하는 사랑이라는 말은 뭐냐 하면 “날 보호해주오.”에요. “날 보호해주오!” 사랑이라는 말을 정확히 말해서 나를 보호해달라는 거예요. 누구를 보호해달라고요? 나. 날. 나를. 그러니까 사랑이 어디서 나온 거예요? 내가 잘 되는 것이 사랑이라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통념되고 있는 이 사랑이라는 게. 사랑~사랑~ 누가 말했나? 사랑은 지가 말했다고요. 자기 보호해달라는 거예요.

여자가 남자하고 선 볼 때, “취미가 뭡니까?” 그런 구시렁구시렁 다 치워버리고, 그 밑바탕에는 뭐냐 하면 “당신이 나를 지켜줄 수 있어요?” 딱 한 마디로 요약이 돼요. “당신이 나를 지켜줄 수 있습니까?” 그것도 헌신적으로. “내 인생을 위해서 당신 인생 포기할 수 있습니까?” 그 뜻이라 이 말이죠. 여자 쪽에서 그렇게 나오니까, 남자가 그 현장에서 그 여자를 차지하기 위해서 무슨 말을 못하겠어요?

무슨 거짓말을 못하겠습니까? 거짓말 하죠. “이 몸 바쳐서 당신 지켜드리겠습니다.” 결혼하고 난 뒤에는 지 친구하고 놀러 다니기 바쁘죠. 여자 혼자 놔두고 지는 놀러 다니기 바쁘죠. 그것가지고 또 “당신은 결혼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이야기하더니 결혼해놓고 왜 그러냐?”라고 하면, “왜 자꾸 과거를 들춰내느냐 애까지 있는데.” 이런 식으로 넘어가자고 이렇게 나오죠. 결국 여자가 남자한테 지켜달라고 결혼했지만, 남자한테 버림받았을 때 여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자기통장 챙기는 것밖에는 할 게 없어요. 너는 죽도록 돈 벌어 와라. 나는 내 통장에다 꼬박꼬박 넣겠다는 것이죠.

결국은 뭐냐, 내가 나를 지키는 방법밖에 없어요. 내가 나를. 어떤 경우라도 여자든 남자든 자기를, 나라는 것을 포기를 못했죠. 세상에 돌아가는 모든 것을 나, 너로 정립시키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합리화라고 합니다. 합리화적인 사고방식, 정돈된 사고방식, 안정된 사고방식이라고 해요.

그래서 여자들끼리 하는 계모임이나 동창모임에 가서 하는 이야기가 뭐냐, 니는 어느 정도로 안정되어 있느냐, 어느 정도로 챙겼느냐, 그 이야기 쭉 하는 거예요. 거기서 뭐 예수그리스도이야기를 끄집어내면 큰일 납니다. “나 우리교회에서 집사로서 인정받는다.” 이게 뭐냐 하면 자기중심이에요. 보호를 받는 거예요. “우리 목사님은 나를 좋아해서 천당 가는데 내가 천당 안 가면 누가 천당 가느냐고 한다.” 전부 다 자기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겁니다.

자, 그런 입장에서의 선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은 내가 편하고 내가 잘 되는 것을 이미 선이라고 규정을 해버렸어요. 악이라고 하는 것은 비-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나를 해코지하고 나를 보호하는데 지장이 된다면 그걸 악이라고 규정하는 겁니다. 이 말을 오늘 강의대로 하면 이게 전혀 새로울 게 없어요.

이게 문제에요. 그냥 새로움을 자기 엉덩이로 눌러앉아버렸어요. 주께서는 늘 매일같이 새로운데, 왜 우리는 새로운 줄을 모르느냐, 이미 선과 악을 내 중심으로 확정지어놓았기 때문에 주님의 선이, 주님의 일하심이 완전히 나한테 짓밟혀버린 거예요. 완전히 짓밟혀서 우리가 주님이 하신 일을 훼방질하고 반발하고 공격하고 있는 중입니다.

자, 그러한 육적인 입장에서 12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이것을 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의 뭐냐 하면은, ‘그래. 나는 이정도 가치 있어. 내가 선을 행하게 되면 나로 인하여 주께 영광이 되는 거야.’ 백이면 백이 다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뭐가 잘못된 거예요? 해석이 잘못된 거예요. 유대인들의 해석하고 똑같이 된 거예요. 그 선한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내가 날마다 새로운 다른 내가 되어야 해요. 내가. 내가 새로운 내가 되려면 고체가 되면 안 되고 액체가 되어야 해요. 기체가 되면 너무 많이 날아가니까. 액체가 되어야 해요. 액체가 되어가지고 주께서 나를 주물럭거릴 때마다 나는 늘 변형이 될 각오를 하고 있어야 됩니다. 변형이 될 각오가. 주께서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설거지하다가 그릇을 깼다. 주께서 깨게 하신 거예요. 오늘 컨셉은 그릇을 깨는 컨셉이에요. 덜렁거리는 컨셉이에요. 덜렁거리다 깨진 거예요.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게 새로운 일이 되면 그게 뭐가 된다? 그게 선행이 되는 겁니다. 선행한다고 집에 있는 그릇 다 부수지 말고. 내 자신이 내 자신을 붙들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는 그것이 주께서 원하는 선행이에요. 그 선행을 보고 다른 사람이 주께 영광을 돌린다니까요. “저 사람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기 자신을 고려하지 않는 삶을 사는구나.” 이게 바로 선행입니다.

선행의 주체는 바로 주님이에요. 우리는 그 선행에 의해서 매트리스 흔들리듯이 흔들리는 거예요. 동일한 내가 되면 안 돼요. 똑같은 내가 되면 안 됩니다. 그거는 인형이지 사람 사는 것이 아니에요. 오늘도 주님께서 나를 어떤 식으로 바꿔줄 것인가? 예를 들어봅시다. 아침에 일어났다. 밥 먹었다. 다 했다. 출근했고 퇴근해서 집에 갔다. 그 다음날도 똑같이 그렇게 했다. 내가 보기에는 똑같은 일인데, 그 가운데서 뭘 찾아내야 하느냐 하면 똑같으면서 똑같지 않는, 아침 먹을 때 젓가락을 앞에 놨는데 오늘은 옆에 놓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어제의 날이 아니죠. 어제는 이렇게 되어 있었는데 오늘은 이렇게 되어 있으니까. 같은 젓가락을 놓았더라도 어제는 나란히 놓았는데 오늘은 비뚤게 놓았다. 이게 벌써 다른 날이죠. 이런 게 뭐냐 하면 이런 것을 통해서 주께서 이렇게 놓게 했고 저렇게 놓게 하는 이 모든 것이, 이 모든 사고방식, 이건 미친 것이 아닙니다. 정신병자 아니에요. 모든 것이 주께서 오늘 하루 일과를, 스케줄을 갖고 노신다는 것을 표현할 때, 그게 자기가 보기에나 다른 사람이 보기에나 지금 주님이 살아있음을 증거 하는 중입니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이 하루하루가. 실제로 그런 경험이 많아요. 같은 버스를 타도 전에는 종점이 가깝기 때문에 늘 자리를 잡았는데, 오늘은 보니까 어떤 할아버지가 내 자리에 앉았다. ‘에이, 안 비키나?’라고 속으로 이러지 마시고,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인생지루하지 않도록.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전에는 버스에서 내릴 때 카드 찍고 내렸는데, 오늘은 딴 생각하다가, 그것도 복음 생각하다가 못 찍고 내렸다. 그래서 약간의 돈이 더 나가게 되었다.

재밌지 않습니까? 변화가 일어나니까. 아, 내가 나를 붙들고 갈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거예요. 나를 붙드신 분이 따로 존재하는 겁니다. 그분이 매일같이 나에게 어떤 새로운 일을 창출하는데, 그 일은 내 인생이 아니고 주님께서 만들어가는 주님의 새로운 인생. 내가 예상 못한 새로운 인생이 되는 거예요. 옆에서 누가 뭐라고 하든, “백날 니가 그렇게 해도 내가 보기에는 똑같아.”라고 아무리 해도, 다른 사람 말을 듣지 말라고 했어요.

그 사람은 있다? 없다? 그 사람은 얼마 안 가서 죽을 사람이니까, 있지도 않는 인간 말을 듣지 마세요. 오늘 강의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의 말도 듣지 말라는 것. 심지어 부부라도, 남편은 아내 말 듣지 말고 아내는 남편 말 듣지 마세요. 자식은 부모 말 듣지 말고 부모는 자식 말 듣지 말고. 아무 말도 듣지 마세요. 왜? 어차피 다 죽을 사람이에요.

나도 죽을 사람이고. 나도 죽을 사람이니까 남한테 과도하게 간섭하지 말고 잔소리 하지 마세요. 나도 언제 죽을지 몰라요. 이렇게 하다가 오늘밤에 주께서 “니 오늘 새로운 일 보여줄까? 교통사고!” 이렇게 해서 죽을 수도 있어요. 교통사고로 죽는 것도 이건 내가 애통하거나 애 닳을 일도 아니에요.

왜냐하면 평소에 주께서 늘 새로움을 창조하듯이, 이번에는 깜짝 놀랄만한 일, 죽음이라는 것을 해가지고 아예 천국에 보내버리는 일을 하시더라도 이거는 내 권한 밖입니다. 내가 거기에 대해서 관여할 필요가 없어요. 그래서 이 이야기가 바로 마태복음 6장에 나온 이야기에요.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마라. 그거는 이방인들이, 내 백성 아닌 자들이 하도록 내버려둬라.

그 사람들은 그러다가 자기 가는 길도 모르고 가는데, 너희는 예언자란 말이죠. 예언자라면, 뭐 말만 잘한다고 예언자가 아니고, 이 몸 자체가 예언에 요동치는 그러한 몸으로서 주께서 친히 다루고 있거든요. 너는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마라. 그 나라 그 의를 구하라. 

다시 말해서 그 나라의 의에서 지금 너를 조종하고 있음을 니가 인정하라. 그리고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뭡니까? 내일 염려는 내일 오거든 그때 하고, 내일 오지도 않는, 올지 안 올지 니가 주제넘게 하지 말고, 오늘 하루치만 살아라. 살다 잠들면 그건 죽음이거든요. 왜? 잠들면 내가 내 몸을 관리 못하니까.

내가 내 몸을 관리 못한다고 하면 일단 그거는 죽은 자와 똑같은 거예요. 여러분, 죽은 사람 얼굴 본적이 있어요? 그분이 잠잘 때 얼굴하고 똑같아요. 우리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 얼굴 보니까 지금 주무시는지, 죽었는지 분간이 안 돼요. 똑같아요. 그러니까 우리 어머니는 평소에 매일같이 밤에 죽었어요. 제가 그걸 몰랐던 거죠. 목사면서도. 이제는 알았죠. 내가 매일 죽는다는 사실을.

사도바울처럼 내가 매일같이 죽는 거예요. 죽고, 또 주님의 기능이 있으면, 있을 것 같으면, 주님이 맡길 일이 있을 것 같으면 내일아침에 또 깨울 거고. 깨워서 주님께서 또 매트리스 흔들어서 요동칠 것이고. 그게 바로 평소에 주님께서 아버지께 하셨던 일과였습니다. 그게 유일한 선행이에요. 그럴 때만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겁니다. 자기부정, 자기부인이 계속 깔리는 겁니다.

12절까지를 다시 한 번 정리한다면, 주님에 의해서 예언자 집단이 되었어요. 예언자 집단이라고 할 때, 예언자 집단이 할 일은 예수님을 선전하는 것이고 광고하는 것인데, 그것은 내가 알아서 하는 게 아니라 주께서 기능으로 살리고, 니는 죽든 말든 기능만 살아야 돼요. 그 기능이 뭐냐, 주께서 계속 너를 가지고 활발하게 움직여나간다는 것입니다. 그거죠.

특히 시장에서 장사하신 분들은 저걸 많이 느낍니다. 늘 왔던 단골 또 오겠지 하면 딴 데로  빠지는 수가 있고, 저 사람은 안 올 거겠지 하면 들어올 수가 있고. 매 순간이 은혜의 순간입니다. 매 순간이 주님이 살아있음을 체험할 수 있는 순간입니다. 왜냐하면 손님은 지 맘대로 오거든요. 실컷 다 보고 둘러보고 온다고 해놓고 여덟 시간째 안 보이는 사람이 있어요.

신앙생활이 이렇게 되면, 자, 신앙생활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신앙생활 없죠. 신앙생활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믿음 소망 사랑 없죠. 본인의 몸을 본인이 관리하는데, 이거 뭐할 건데? 주님의 믿음이 들어오고, 주님의 소망이 들어오고, 주님의 사랑이 들어와서 그게 하나의 은사, 기능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내가 나를 관리하게 되면 그걸 가로막는 셈이 돼버려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저 믿음 좋습니다. 저 소망 있습니다. 제가 주님 사랑합니다. 제가 알아서 하겠어요.” 이게 바로 악이에요. 이게 백성 아닌 자의 모습이에요. 자기 자신을 자기가 관리하려고. 관리라는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관리할 때 누굴 참조하는지 알아요? 남들이 뭐라고 하느냐, 귀 기울이면서 관리해요. 죽은 자의 말을 들어서 뭐 할 건데? “내가 어떻게 해주면 좋겠어?” “내가 이렇게 해줄게.” 자꾸 남들한테 의견을 구해요.

그러면 그 사람은 누구한테 매여 사는 사람이에요? 같이 죽을 수밖에 없는 허약한, 아무 권한도 없는 인간들에게 평생 이용당하기만 하면서 살아갑니다. 참, 부부라는 것이 주님의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기회의 장이 될 수가 있어요. 처음에 결혼할 때는 서로서로가 말을 잘 듣고 하려고 애를 씁니다. 좋은 가정이 되려고. 그거 부질없는 짓을 한 거예요.

인간은 혼자 산다는 것을 몇 년 지나야 깨닫겠습니까? 그 도를 언제 터득할 거예요? 니는 니 따로 나는 나 따로 사는 거예요. 이제 와서 그 말을 꼭 해야 되겠습니까? 따로따로에요. 따로따로라고요. 처음부터 따로 살면 되는데 괜히 기대했다가 실망만 했잖아요. 그리고 욕하고. 욕할 것도 없고 실망할 것도 없어요. 지는 지 인생 나는 내 인생 따로 사는 거예요. 살아온 환경이 다 다르기 때문에. 살아온 머릿속의 기억이 다 다르기 때문에.

백날해도 안 고쳐집니다. 고쳐지는 것이 이상해요. 고쳐지면 그거는 또 다른 대륙지표 밑에 해양지표가 되어서 지진이 일어나요. 그냥 하던 대로 하세요. 괜히 나한테 잘해주려고 하지 말고. 뭐래도 잘해주면 뭔가 혐의가 있어요. ‘바깥에 나가서 뭐 잘못한 것이 있나? 왜 나한테 잘해주지.’ 그냥 하던 대로 해요. 어떤 계약 같은 것이 있어야 돼요. 뭐냐, 나는 니 할 일에 간섭 안 할 테니까 니도 내 할 일에 간섭하지 마라. 처음부터 부부는 부부가 아니었더랬습니다. 왜? 모든 인간은 인간이 아니었었으니까.

자, 13절을 봅시다.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해서 순복하되” 제 말이 그 말이에요. 이거 인간이 세웠습니까? 주님이 세웠습니까? 이거 인간을 통해서 누가 세웠어요? 주님이 세우신 거예요. 데모하지 마라 이 말입니다. 제가 응용문제를 한번 낼게요. 파키스탄 여자입니다. 파키스탄 여자인데 일하러 나갔어요. 자기는 예수 믿는 것을 숨겼어요. 숨겼는데, 일하는 아줌마들끼리 일하다가, “이 컵은 신성한 컵이기 때문에 알라신에게 기도하고 먹자.”라고 했을 때에, 예수 믿는 여자 입에서 무심코 튀어나왔어요.

“미쳤나! 이건 그냥 컵이지. 알라신하고 무슨 관계가 있어?”라고 이랬다가 고발이 들어가서 사형직전까지 갔어요. 그래서 계속해서 파키스탄 대법원에 항고해서 사형은 면했어요. 그 여자가 이태리에 적극적으로 망명 신청했는데, 이태리에서 받아주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 파키스탄 지역에서 그 여자를 망명 보내면 우리는 시위하겠다고 해서, 파키스탄 정부에서 망명 보내지 않을 테니까 시위하지 말라고 해서 타협이 된 거예요.

자, 그런데 이 파키스탄 여자가 예수를 믿는데, 무심코 튀어나와서 알라신을 모독했답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들 같으면 어떻게 했겠어요? 오늘 본문 13절과도 적용을 한번 시켜보세요. 아까 강의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우선 알라신을 믿는 사람이 있어요? 없어요? 사람이 있어요? 없어요? 사람이 없어요. 들을 필요가 없죠. 그래서 “알라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알라 그거 마귀지 그게 뭐냐?”라고 이야기했을 때에, 이거는 어제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오늘 이야기했다면, 어제하고 또 다른 나에게 새롭게 주께서 주신 기능으로 다루었죠.

그러니까 그 여자 분은 사실은 대법원에 상고할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만약에 제가 상고할 필요가 없다고 했는데, 그 여자 분이 하는 말이 “어이, 이 목사 나는 재미로 했다.” 재미로 하면 돼요. 살려고 하지 않고, “알라 이거 귀신들린 것이 어디까지 까부는가 보자.”라고 재미로 했다면 괜찮아요. “대법원 판사 이 똑똑한 인간들이 뭐라고 판결을 내리는가 한번 보자.” 그게 궁금해서, 이왕 사는 거 재미로 사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재미로 살아요. 어차피 이 세상에 살 이유가 없어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늘 밤에 잠들면 그게 죽은 거니까. 내일 되면 내일의 살아계신 주님께서 내일의 일을 주면 그 다음에 재미로 대법원에 상고하는 거예요. 재미로. 판사가 뭐라고 하는지 재미로 듣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재미로 파키스탄 국민들과 당국에서 뭐라고 하는지 재미로 하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우리가 파키스탄 여자라면 자기 말 한마디에, 자기 말 한마디가 아니라 주의 말이죠. 주의 말 한 마디에 세상이 들썩거리는 그 요동. 그 요동 자체를 누가 조작한 겁니까? 누가? 주님이 조작하신 거죠. 순복 안 할 리가 없죠. 순복해야죠. 주님이 조작했으니까. “물러가라 대법원! 파키스탄 죽어라!” 뭐 이럴 필요가 없어요. “그거 참 재밌네.”라고 순복하면 돼요. “내가 눈물을 머금고..” 이럴 필요 없고. 눈물을 머금으면 신자 아니죠. “내가 참 더러워서.. 하나님이 살려줄 거야.” 이런 식으로 대법원에 상고하면 안 돼요.

그럼 그건 뭡니까? 하나님을 빙자해서 누가 더 살라고 한다? 내가 더 살라고 하는데, 그거는 살 권한이 없어요. 왜냐하면 사명이 살아야 하고 주의 복음이 살아야 하지, 내가 살면 안 됩니다. 만약에 내가 살라고 하면 누구한테 쫓긴다? 아까 들었잖아요? 선악을 가지고 마귀한테 쫓기는 거예요. “니가 이번에 이렇게 착했으면 대법원에서 망명 통과되어 니는 살았는데.” 계속해서 마귀가 뒤에서 쫓아오는 거예요.

“그래, 다음에 할 때는 내가 겸손하게 해가지고, 알라신에게 잘못했습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뭐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 자기가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조정하는 것, 그거는 주의 백성이 아니죠. 그러니까 13절의 말씀은 11절, 12절하고 통하는 겁니다. 똑같은 이야기를 계속 반복하고 있어요. 빨리 이야기했지만 다시 천천히 해보면 예수 믿는데, 안 들키고 싶은데 무심코 들켰어요. 그러면 그 들키도록 한 그 변수가 있을 게 아닙니까?

하필 오늘 아침에 일 안 나가려고 하다가 일을 나갔다. 일 안 나가고 싶은데, 아줌마들이 일 나가는데 같이 섞이게 한 분이 누굽니까? 발걸음을 인도하신 분이 누구에요? 주님이잖아요. 모든 시작을 주님부터 시작했잖아요. 오늘 일과에 매트리스 요동치는 거. “아이고, 재밌다. 오늘 니 이런 재미한번 해볼래? 니 알라 신 욕해가지고 감옥소에 갇히는 그런 거 재밌겠지? 그거 내가 해볼게. 가만히 있어봐. 내가 시켜줄게.” 이래가지고 주께서 그걸 시켜준 거예요. 

어차피 알라신 믿는 인간은 없어요. 인간은 나이 들면 다 죽어요. 아니, 죽은 인간 말 들을 필요 없는데 왜 들어요. 근데 거기서 뭐가 들어와요? 협박이 들어오잖아요. 협박이 뭐로 들어오겠습니까? 어떤 협박이 들어옵니까? 죽는다! 죽는다! 아닙니까? 근데 주님이 어떻게 됐습니까? 주님이 죽었죠. 이거 영광스럽잖아요. 주님이 알라신 믿는 사람들의 음성을 통해서, 주님의 음성이 아니고 알라신을 믿는 음성을 통해서 뭡니까? 너는 죽는다가 되는 거예요. 이게 내가 원했던 거잖아요. 어차피 오늘밤에 잠잘 때 죽기 때문에.

그러니까 오늘밤만 버티면 되는 거예요. 오늘 안 죽여도 오늘밤에 죽으니까. 교도소에 있다가 다음날에 눈뜨면 그건 누가 살려준 거예요? 교도소장이 살려준 게 아니잖아요. 알라가 살려준 게 아니고 주님이 살려줬잖아요. 어차피 인간은 재밌게 살자는 게 전도서의 내용입니다. 어차피 재밌게 살자는 거예요. 참 이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처럼, 뭐 동화이야기 같지만. 이런 응용문제가 나와야 과연 우리가 정리한 게 제대로 정리한 것인가, 이게 파악이 돼요.

자, 그럼 또 예를 들겠습니다. 내가 파키스탄 여잔데, 몰래 전도 받아 예수님을 믿는데, 이야기를 하려고 하다가 안 했다. 그날의 컨셉은 이야기를 하려고 하다가 안 하는 컨셉이에요. “주여,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순교를 해야 되는데. 맨날 입으로는 죽어서 천당 가는 게 제일 낫다고 하면서도 제가 비겁합니다. 제가 참 비겁하게 주님을 섬겼습니다.” 자, 비겁, 비겁하다고 누가 뒤에서 이렇게 윽박지른 거예요? 누가 강요하는 겁니까? 마귀가 그러잖아요. 마귀가 그런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뭐라고 해석을 하느냐 하면 “니가 순교해도 마땅한데 니가 신자야? 니가 거기서 이야기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왔는데 니가 입을 다물었어? 니는 신자 아니지? 그치?”라고 하면서 마귀가 계속 윽박을 가한다면,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벌벌 떤다면, 결국 그 이야기는 뭡니까? 조심스럽게 살면, 조심스럽다는 그 성과로, 그 공적으로 주께서 천국에 넣어줄 수도 있겠다. 이래 되겠죠. 

요한계시록 2장 10절,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이 말씀을 우리보고 지키라고 한 거예요? 아니면 주의 기능입니까? 어떻습니까? 주의 기능이죠. 주의 기능입니다.

호텔 뷔페에서 배터지게 먹는 것도 환난이에요. 이 세상사는 것 자체가 환난이에요. 그런데 이걸 지키려고 한다면 환난을 연출해야 돼요. 어떤 알라신 믿는 여자가 와가지고 “니 예수 믿어? 알라신을 믿어? 예수 초상을 밟아라!” 자꾸 뭐든지 연출을 하려고 해요. 연출은 누구 몫이냐 하면, 연출은 우리 몫이 아니고 예수님이 친히 하실 몫이에요.

다시 정리해봅시다. 이 세상은 지금 누가 활동하고 있어요? 주님이 활동하죠. 그럼 우리는 뭐만 받았어요? 주님의 그 활동하심을 받는 그 기능만 받지요. 우리가 주님께 받은 기능을 꺾고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왜? 주님은 우리를 쥐고 있기 때문에. 따라서 우리가 어디에 박혀있든지 간에 그건 주께서 하실 일이에요. 그래야 내가 고정된 내가 안 되고 매일같이 요동치는 내가 되는 겁니다. 요동치는 자아. 요동치는 나. 요동치는 나라는 말이죠.

이게 주께서 요동치기 때문에 내가 요동치는 거예요. 우리는 요동치는 것을 싫어해서 매일같이 똑같은 스케줄로 내가 임의로 조정해나가요. 스케줄을. 오늘은 이거 했다. 자꾸 내가 했다, 내가 했다는 것으로 나가요. 아침에 설거지 하고 내가 이불개고 자꾸 내가 했다가 되는데, 내가 하는데 만약에 바빠서 틀어졌다고 하면, 그 틀어진 것을 뭐로 보느냐 하면 일종의 내가 죄악을 행한 것으로 여겨가지고 거기에 대한 벌칙을 간구하게 돼요. “주여, 오늘도 어떤 벌칙을 내리실 겁니까? 살려주옵소서.” 이건 뭐, 자기를 위한 세상밖에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일곱 귀신이 다 쳐들어오는 거예요. “쟤 갖고 노니까 재밌다. 그지?” 계속 추적해가지고 계속 양심에 호소하게 되고 괴롭히는 거예요. 자식이 괴롭히고 남편이 괴롭히고 아내가 괴롭히고 집안이 욕하고. 여러분, 신자가 뭐냐를 한번 생각해보세요. 내가 신자가 되는 것이 신자가 아닙니다. 이미 주께서 신자 되게 하셨기 때문에 주의 성령을 보내시고 주의 기능이 되게 하셨어요.

그 다음부터는 니가 니 인생 만들기 위해서, 니가 너에 대해서 손을 떼라. 내가 살아 있잖아. 니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살아 있잖아. 내가 알아서 만들어줄게. 만들어주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스타가 되는 거예요. 방탄소년단 되는 거예요. 방탄소년단인지 방패소년단인지가 되는데. 우리는 뭐냐 하면 그래가지고는 길이 안 보여요. 주님가신 십자가의 길이 안 보인다고요. 그렇잖아요.

아니, 잘난 것이 보이는데, 배부를 때 이게 언제 주님께서 이 땅에서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이 보입니까? 나는 잘 살고 있으니까. 아, 잘 살아도 내일 되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것이고. 주님의 스케줄에 있으면 그대로 따라야지 어떻게 하겠어요? 오늘은 오늘로 감사해야지. 범사에 감사해야지. 이런 마음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주기도문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사실은 일용할 양식만 줘도 우리한테는 고맙다는 거예요. 오늘 살게 하셔서 일용할 양식만 주신 것도 감사하니, 그저 우리가 할 것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달라는 거예요. 우리의 모든 허접한 것을 용서해주신 그 주님의 용서하심. 그걸 용서해달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는 뭔가 움직이면 선악구조 안에 쫓겨 다니기 때문에 내가 스스로 판단해요. 나는 오늘 착해서 뿌듯하다. 나는 오늘 못나서 절망스럽다. 맨날 평소에 마귀한테 쫓겼던 그 행세를 그대로 품고 가기 때문에, 주께서 주님의 기능을 가지고 계속 새로운 사태를 해서 결국은 내가 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 더 이상 선과 악이라는 악마가 심어준 그 구조에서 니가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 거기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매일같이 확인시켜줍니다.

그 일을 위해서 13절에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14절, “혹은 악행 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해서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어떻게 하라? 순복하라 이 말입니다. 순복하라. 어차피 세상은 주님 손에서 노니까. 그런다고 해서 이 왕이나 이런 사람들이 천당 가는 것이 아니에요. 지금 천국, 지옥은 판정이 끝났어요.

천국, 지옥은 판정이 끝나버렸어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아는 자는 천국이고, 그 십자가를 모르는 사람은 지옥이에요. 그 다음에 나머지기 모든 일들은 뭐냐, 주께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그 속에 쑥 집어넣는 겁니다. 왜 집어넣느냐, 주님가신 길이 그 길이기 때문에. 주님이 이 지옥 같은 세상의 길을 가셨잖아요.

너도 그걸 반복해서 가게 하시는 거예요. 내가 갔던 경험을 니도 한번 경험해보라는 거죠. 주님께서 어디에 쫓기고 어디에 휘둘렸는지를. 니가 지금 휘둘리고 쫓기는 경험을 똑같이 경험한 거예요. 생뚱맞게 우리 혼자 고생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주님도 똑같은 시험을 받은 거예요. “니가 이 잔을 마실 수 있느냐” 그것도 주님께서 우리가 당한 시험을 그대로 보여줬죠.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이 내게서 떠나게 하옵소서.” 그게 우리가 죄인 된 평소의 모습이 그렇잖아요.

그렇지만 그 다음이 뭡니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오늘 강의의 결론입니다. 내 뜻은 알아요. 내 뜻은 내 위주로 살아서 알아요. 하지만 이러면 내 영광이지 주의 영광이 안 되니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주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게 바로 우리가 그 누구한테도 구애받지 않는. 오늘 죽으면 그만이고. 누가 간섭하면 니가 뭔데? 이러면 되고.

어떤 누구한테도 구애받을 필요가 없어요. 주님 살아계심만 증거 하면 되는 겁니다. “나보고 탓하지 마! 주님이 살아계셔서 주님이 알아서 했어.” “니 그거 너무 뻔뻔한 변명이 아니야?” 아니죠. 내가 못난 자로 인정하면서 그런 소리하니까 그건 주의 뜻이죠. 주의 뜻은 나를 못난 자로, 나를 부인하게 만드는 작업을 하거든요. 

이거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했죠. 주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잖아요. 그 말씀을 우리가 못 지켜요. 우리가 못 지키니까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매일의 삶을 통해서 그걸 지키게 하시는 거예요. 실컷 착한일 해놓고 내가 한 게 아니다. 실컷 나쁜 짓 해놓고 어쩔 수 없었어. 이렇게 해서 계속해서 어떤 경우라도 지 잘났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관여한 일인 것을 증거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성도가 가는 길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 현실에 대해서, 왕의 모든 제도에 대해서 순복할까요? 말까요? 이건 당연히 순복해야 되죠. 정치적 이슈를 내세우지 마세요. 태극기나 촛불 같은 것을 참여하지 마세요. 어떤 목사 더러우니까 물러가라고 그런 소리하지 마세요. 물러가고 안하고는 주께서 알아서 하실 거예요.

“그러면 목사님. 일반교인은 목사가 다스려도 주의 종 목사는 주님께서 다 해줍니까?” 그런 뜻이 아니고 죽은 놈으로 보라 이 말이죠. 저것도 주의 허락이 아니면 강단에서 설교 못 할 게 아닙니까? 주의 뜻대로 되도 않는 소리를 한다고 생각하면 돼요. 그러다 “목사님. 그거는 지옥 갈 소리인데요?”라고 하게 된다면, 목사가 “이게 감히 주의 종에게! 베드로전서 2장 13절에 인간에 세운 제도에 순복하라고 했는데 당신은 이 말씀을 어깁니까?”라고 나온다면, “나도 내 맘대로 순복하는 겁니다.” 이러면 끝나는 문제 아닙니까?

나도 내 마음대로 순복해서, 이게 내 뜻이 아니고 내 속에 성령께서 당신 그거 엉터리 설교라고 하라고 했다는 이것도 내 뜻이라고 하면 되잖아요. 누구한테 구애받습니까? 도대체 무엇에 겁내요? 겁내지 말고, 지금껏 겁내고 살았는데, 오늘부로 겁 없이, 눈에 봬는 사람 없이 삽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리 생각해도 주님 살아계셔서 우리의 발걸음과 우리의 호흡과 우리의 모든 행동까지 다 주관하는데, 그동안 누구를 의지했고 누구 말을 따랐습니까? 이제는 주님만 살아있음을 증거 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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