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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5-16 00:59:34 조회 : 4057         
Re..부천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01 - 인간론1 이름 : 이장우(IP:)
05부천강의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01 - 인간론1
                                                
                                                                05,02,21    강의: 이근호 목사


◈ 인간론 - 창세기 1장인가? 아니면 3장인가?

오늘은 인간론에 대해서 강의하겠습니다.  종말인 신약시대에 인간론을 정립할 때, 제일 되는 정점이 무엇인가 하면, "창세기 3장 이후로부터 인간론을 정립할 것인가? 아니면 창세기 1장에서부터 정립할 것인가?" 하는 것으로, 인간론이 첨예하게 둘로 나누어집니다.  

이것이 간단하지 않고 상당히 복잡한 문제가 있습니다.  창세기 1장부터 인간론을 정립하면, 죄 지은 것은 하나의 에피소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실수는 있을 수 있지, 죄 지어도 하나님인 내가 회복시켜주마!" 하는 회복 쪽으로 강조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창세기 1장부터 인간론에 들어가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좀 봐준다고 하면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니, 너희들이 연약해서 죄 지은 것을, 내가 그 죄를 보상하고 대가를 치름으로 원래인간으로 만들어줄게" 하는 '회복' 쪽에 강조가 있다는 것입니다.  

◈ 창세기 1장부터 시작하는 문제점 - 지옥은 왜 만드셨는가?

그러니 1장부터 하게 되면 문제가 큽니다.  예수님께서 1장을 염두에 두고 활동을 하셨다면, 예수님은 무엇을 만들면 안 되는가 하면, 지옥을 만들면 안 되는 것입니다.  지옥이 있더라도 그곳에는 마귀만 들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그 때에도 지옥이 있다면, 그 지옥에는 인간은 들어가면 안 되고 악한 마귀, 그 마귀와 합세한 악한 천사들의 무리만 거기에 들어가야지,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난점이 있습니다.  지옥을 만들더라도 사람 편에서 보면, 그것이 남의 이야기이고 옆 동네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1장의 관점에서 회복을 시켜주시겠다고 하는데, 그런 지옥에는 못된 악마들만 들어가야지 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이 들어가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야고보서와 창세기에 나오잖아요.

(약 3:9)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형상이 담겨진 인간들을 지옥 불에 보내서, 그렇게 목말라하는 모습을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보시고 계시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즐겁고 신이 나겠습니까?  물론 인간이 악마의 형상을 입었다면 한번 당해보라고 할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이 그 지옥에서 1,2년도 아니고, 3,4년도 아니고, 영원토록 고생을 한다는 것은 자비로운 하나님의 형상과 상충되는 것이 아닌가 라는 문제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3장부터, 즉 인간이 죄 짓고 난 뒤에부터 인간론을 설정하게 되면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사람들이 가장 거부하는 이유가, 창세기 3장은 1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책을 볼 때에 1장부터 2장 3장을 보아야지, 아니 생뚱맞게 3장부터 툭 튀어나와서 보게 되면, 이것은 반칙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 창세기 3장부터 시작 - 아니, 성경이 1장부터인데 ??

그러므로 성경을 보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신학을 가지고 조작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1장과 2장은 때내어 버리고, 3장부터 인간론을 시작한다는 것은, "1장과 2장에서 나오는 인간의 이야기는 눈을 감고 입을 다물어야 하는 것입니까?" 라고 하는 의견이 있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3장부터 시작하면 또 무엇이 켕기는가 하면, 아니 구원받은 인간이 창세기 1장의 레벨로 올라가야지, 그것이 회복 아닙니까?  여호와의 증인도 그렇게 하고, 개혁주의 신학 한다는 쪽도 그렇게 하고, 기존 교단에서도 회복을 많이 이야기를 하지요.  

특히 창세기 2장에 보면 에덴동산이 나오는데, 개혁주의 신학을 한다는 분들의 내용을 보면, 하나님 나라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창세기 2장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본래 모습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 인간과 함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는데 마태복음 1:23절에 보시면 '임마누엘' 이라고 합니다.  이 임마누엘의 뜻은 이사야 7:14절의 예언대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라는 뜻이고, 요한 계시록에도 '새 하늘과 새 땅'에 하나님이 함께 계시니, 신학이 딱딱 아귀가 맞아 들어간다는 인상을 주는 것입니다.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그러니 신학생들에 조직신학은 머레이나 박형룡 쪽의 신학을 하고, 성경신학은 하나님의 나라에 초점을 맞춘 웨스트민스터 신학 쪽으로 결합시키면 신학은 다 된 것이죠. 조직신학도 되고 성경신학도 되니 온전한 신학이 구축되었다는 희망을 보이는 것입니다.

◈ 인간론인가, 인죄론인가?

그런데 창세기 1장부터 시작하면 박형룡 조직신학에서처럼 인죄론, 즉 인간은 처음부터 죄인이라는 입장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닌 인간론으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3장부터 시작을 하면 '인죄론'이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부터 시작하면 어떤 장점이 있는가하면, 예수님께서 영생을 주실 때 그냥 광야에서 만나를 내리시듯이 우두둑 내려서 영생을 얻기를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영생을 줍게 하시는, 그런 방식으로 영생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받아가라고 영생을 주신다고 하시고는 막상 어떤 한 인물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인물이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 인물을 가져야만 영생을 얻는다고, 모세가 광야에서 만나를 준 것처럼 마지막에는 자기 살을 먹고 자기 피를 마시는 자는 살 수 있다고, 그렇게 자기 몸을 영생이라고 하니, 사람들은 심리가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 원하는 영생만 딱 챙겨서 가기를 바라지, 예수라는 덩치가 오는 것을 상당히 부담스러워하는 것입니다.

아니 영생을 주시려면 영생만 주시면 되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따르라고 하든지, 처나 자식이나 아비나 간에 자기보다 더욱 사랑하면 합당치 않다고 하시는 것은, 도대체 영생을 주겠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말겠다는 것입니까?

◈ 영생은 좋은데, 피 흘리신 분은 부담스러워 !!

이러한 모습은 영생을 주신다고 하고서는, "봐라, 인간의 능력으로는 영생을 가질 수 없지 않느냐?" 하면서 약 올리시는 식으로 엄청나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영생 얻는다고 하면서, 슈퍼에 가서 물건 사듯이 그렇게 가져가면 그만인데, 영생을 가지려고 하니 그 뒤에 덩치가 큰 피 흘린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이 뒤 따라 오게 되니, 사람들은 예수는 싫고 영생은 좋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과 영생을 칼로 자르듯이 자르고 싶은 것입니다.  자르는데 어떻게 자르는가 하면, 영생은 창세기 1장처럼 하나님께서 인간을 불쌍히 여기셔서 회복시켜 주시려고 주신 것이고, 예수님은 심부름꾼이니 일단 영생을 주시고, 택배회사 사원처럼 심부름을 하였으니 "이제는 가세요" 라고 하면서 밀어 부쳐버리는 것입니다.

물론 영생을 얻었으니 고맙다고 인사는 하겠지만,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과 직접 교제할 것이니 예수님은 이제 일을 그만하셔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율법을 못 지켰지만 이젠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성령을 주셨으니, 성령 받은 우리가 율법을 지켜 나가면 되고, 십자가는 지나간 아득한 이야기로 돌리고 싶은 것입니다.  정말이지 이러고 싶은 것입니다.  

30분 늦게 시작했으니 30분 늦게 마치겠습니다.  저에 대한 약속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얼마나 미안하든지 나이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39분 차를 49분으로 착각을 해서 기차를 두 번이나 놓쳤습니다.  표 바꾼다고 줄서 있다고 놓쳐버리고 말입니다.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그것이고, 아무튼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택배회사의 사원처럼 영생을 전달해 주는 매개체로, 즉 '매개체=중보자' 개념으로 받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일단 챙길 것을 챙기고 나면 예수님은 따로 하나님을 섬기고, 자기도 독자적인 노선에서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동안 죄 때문에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였는데, 그러나 이제는 성령을 받았으니 자기도 따로 하나님을 제대로 섬겨나가면, 예수님과 한 형제가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처럼, 하나님의 약속이 회복되어 거듭난 피조물로 살아간다는 자긍심이 생겨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지요.

◈ 성경해석은 사도에게 물어보아야 !!

그러나 성경이 과연 그렇게 이야기하는가 하는데는 문제점이 굉장히 많습니다.  특히 우리가 성경을 볼 때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을 볼 때 주의해야 할 점은, 나름대로의 해석이 다가오면 설교할 때나 성경을 볼 때에 이 해석이 옳다고 보았는데, 그 뒤에 바울서신이나 베드로서와 같은 서신 서에서  사도들의 예수님에 대한 해석이 나왔을 때에, 우리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의 해석권이 우리에게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해석권이 없는데 성경을 펼치고 눈이 있고 글자에 대한 이해력 있으니, 보고 직접 우리의 해석으로 받아들이면 좋지 않겠느냐 하겠지만,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되어 있지 않고, 예수님의 모든 해석은 그 해석조차 사도들이 해석한 그 범위를 벗어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는 어떻게 해석을 했습니까?  영생을 챙겼으면 예수님의 십자가와 이별해도 괜찮으니, 이제는 독자적으로 성령체가 되었으니 독자적으로 행동하면 된다는 식으로 가르친 것이 아니고, 사도바울의 중요한 신학 가운데 하나가, 그것이 중요하여서 어떤 사람은 그것으로 박사학위 받은 사람도 있고 말입니다.

◈ 사도바울의 성경해석 - 예수 안 !!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예수 안' 이라는 것입니다.  이 '예수 안' 이라는 이 개념을 놓쳐버리고 독자적으로 하나님과 교류가 성사된다고 여기고 나서면 누가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까?  복음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 사도바울이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점을 좀 더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게 됩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사실상 이런 이야기를 하는 분들이 한 두 분이 아니지만 말입니다.  "이근호 목사, 당신은 왜 그렇게 논쟁적이냐?" 라는 것입니다.  그냥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말씀이 나오면, 있는 그대로 하라고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비판하지 말라' 라고 하면 비판하지 말라고 그대로 옮기면 되고, 마음속에 음란을 품으면 음란이니 그렇게 살지 말자고 하고, 형제를 보고 '라가' 라고 욕하면 안 되니 욕하지 말자고 하면, 듣는 사람들도 쉽게 납득이 되고, 호응이 되어서 고개를 끄덕일 텐데, 그렇게 예수님이 말씀하신 산상보훈처럼 좁은 길로 가자고 하면 녹음기처럼 옮기면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좁은 길로 가기를 원하십니까?  '가' 하시면 '예'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 하면 설교가 끝난 것 아닙니까?  이게 얼마나 쉬운 것입니까?  "이제 우리 교회는 좁은 길로 갑니다. 좁은 길에 대한 노래 한번 부를까요?" 라고 하면 쉬운데, 왜 좁은 길로 가라는 그 말씀에 대하여 곁가지 해석을 같다 붙이느냐고 저에게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 말씀은 우리가 해석할 권한 없는데 !!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기를, 예수님께서 좁은 길에 대한 그 말씀의 개념과 해석은 우리가 해석할 권한이 없고, 사도바울이 그 좁은 길을 어떻게 해석했는가를 한번이라도 살펴보았느냐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이, 사도 베드로가, 사도 요한이 그 좁은 길을 어떻게 해석하였는지에 대하여 복종하고 존경하고, 그것이 진짜 복음인줄 알고 머리를 숙였느냐는 것입니다.

◈ '거룩하라' 라는 말 한 마디에도 !!

사람들은 거기까지 연관을 안 시키려고 합니다. 디모데전후서에도 있고 베드로전후서에도 있지요.  '거룩하라' 라는 말씀입니다.  목사가 있고, 교인도 있고, 그 사이에 성경이 있습니다.  주님이 지금 보고 계시니, "주님이시여, 이 성경으로 교인들에게 어떤 말을 할까요? - 성경대로 하라. - 알겠습니다. - 여러분 거룩합시다" 라고, 그러면서 끝났습니다.

그러자 교인들이 그 목사를 보고 "목사님, 거룩하세요" 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목사가 화가 나는 것입니다.  목사인 자기가 그 사람을 보고 거룩하라고 했는데, 그것은 자기 말이 아니고 성경을 말하지 않았냐는 것입니다.  그러자 교인이 하는 말이 "그러니 성경에 나온 대로 제가 목사님을 보고 거룩하라고 했잖아요" 라는 겁니다.  목사가 말하기를, "당신이 말하는 거룩하라는 개념이 무엇입니까?" 라고 하니, 교인이 있다가 "목사님, 당신의 거룩의 개념은 무엇입니까?" 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 논쟁적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거룩하다' 라는 개념을 목사는 자기의 인생경륜, 인생체험과 학력 등으로 구축된 나름대로의 개념을 '거룩하다'는 그 뒤에다 붙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즉 "여러분, 성경에 거룩 하라 말이 있는데요. 제가 보기에 사도가 이러한 내용들을 거룩하다고 한 것입니다" 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거룩하라'는 말 뒤에, 그 거룩이 어떤 거룩인지 어떤 레벨의 어떤 기준의 거룩인지를 목사 개인의 경험을 붙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붙이면 교인들이 말하기를, "목사님이 말하는 거룩이 겨우 그 정도입니까? 제가 아는 기도원의 원장의 거룩보다 못하네요. 또는 내 조카가 비록 청년이지만 하나님을 위한 열심이 목사님의 거룩이라고 말하는 그것보다 훨씬 더 거룩해 보이는데요! 바로 저 옆의 목사님보다 내신 성적이 훨씬 낮아 보이는데요!" 라는 겁니다.  그러면 목사가 뭐라고 합니까?  "당신이 신학 했소?" 라는 것입니다.  

거룩의 논쟁이란, 베드로전서 후서에 또 바울의 서신 서에 낱낱이 다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이 남긴 말씀이나 사도들이 남긴 말씀이 논쟁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철학에서는 '개별성' 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개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개별성인데, 성경은 이 전체를 '아담 안'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인륜성' 이라고 했습니다. - '철학의 함정'을 참조

인륜성이라는 개념을 여러분이 아시지요.  결혼은 인륜지 대사라는 그 인륜성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인륜성이란 사회라는 한 모퉁이에서 나온 것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즉 사회가 만든 인륜이 인간이지, 인륜이라는 전체적인 껍데기를 벗어나서 "나 혼자 인간이다. 나는 주체를 가지고 있다. 나는 자의식이 있다' 라는, 이런 식의 주장은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는 맞아 죽는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인륜성속에 포함되어 있으며 하나의 부속품처럼, 신이 내린 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하여 각자에게 부여된 역할을 할뿐이라고 본 것입니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근대 16세기까지의 사고방식이었던 것입니다.

◈ 개신교 - 신앙도 개별성이다 !!

그런데 근대 이후에 과학이 발달되면서 신을 차버리고 난 뒤에, 이 우주보다도 이 우주를 해석할 수 있는 인간의 이성이 얼마나 대견하고 똑똑하고 스마트하고 얼마나 뛰어나냐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개별성이 강조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학만이 개별성인가요?  무엇도 개별성입니까?  신앙도 개별성이라는 말입니다.  "목사나 신부는 저리가. 내 신앙은 내가 알아서 한다" 라고, 이렇게 나온 것이 개신교가 아닙니까?  이것이 개신교인 것입니다.  즉 개신교가 나오게 된 것은 개별성 때문에 과학이 발달되면서 나온 것입니다.  

이렇게 과학이 발달되면서 중세에 시민계급이 등장을 하게 됩니다.  그 당시에 토지위주에서 금융과 상공위주로 되면서, 이 시민 계급은 자신들의 자발적인 노력으로 생계를 책임지게 되니까, 자기 신앙도 자기가 알아서 관리해야지, 목사나 신부나 교회가 관리하면 안 되고, 즉 자기가 직접 하나님과 상대하겠다는 주체의식이 발달되게 되는 것입니다.

◈ A.A.하지 - 모일 때만 총회이고 흩어지면 총회가 없다 !!

그러한 사람들을 호응하고 그런 사람들을 정당화하기 위한 신학이 개신교의 신학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개신교의 정치원리는 총회가 관장하는 것이 아니라, 총회는 개별교회에 봉사하는 단체이기 때문에 모일 때만 총회이고 흩어지면 총회가 없다는 것이, 19세기에 미국에서 장로교를 할 때 A.A.하지가 기본적으로 한 것입니다.  물론 이런 것은 천주교에서는 상상도 못하는 일이고 말입니다.  

여러분이 아셔야하는 것은, 개신교에서는 직접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기적이 가능합니다.  직접 성령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주교에서는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천주교에서는 성령은 교회를 통해서 옵니다.  특히 무엇을 통해서 오는가하면 성만찬과 함께 일곱 가지의 성례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성찬식을 '은혜의 수단' 이라고 합니다. 은혜가 내려오는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아마 여기 계신 목사님들도 신학교에 다닐 때에 이런 것을 다 배웠는데, 수업 시간에 스포츠 신문을 보고, 리포트나 족구를 한다고, 그리고 수요일에 영화를 보러 간다고, 아마 이런 전체적인 내막들을 제대로 다 몰랐을 것입니다.

◈ 개신교와 천주교 !!

아무튼 개신교는 성령이 개별적으로 직접 옵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개별적인 것은 항상 집단 속에 개별입니다.  개별은 따로 인데, 그러니 이런 개별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은 집단이며 은사의 지체이지, 개별적으로 독단적으로 다른 지체 없이 혼자 "내가 성령 받았다. 그래서 다른 사람 없이 나 혼자 구원받는다" 라는 개념은 천주교에서 용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미묘한 차이들이 교리들의 차이인데, 이러한 교리들의 차이가 무슨 소용 있느냐고 자꾸 말하며 싫어하시는데, 그러나 그런 교리가 사실 우리 속에 다 잠재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게을러서 교리를 하나하나 분석을 안 해서 그렇지, 따지고 보면 지금 세상이 나와 있는 숱한 교리가 우리 속에 접혀져서 다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 각양각색의 인간론 - 골라잡아 !!

우리가 '인간론'을 하면서 우리 속에 각양각색으로 접혀져 있는 교리들을 부채처럼 한번 펼쳐봅시다.  골치가 조금 아플 것입니다.  온갖 종류의 아이디어가 다 쏟아져 나올 것입니다.  같은 성경을 펼쳐놓고 인간론을 이야기하면 각양각색의 인간론이 다 나오게 됩니다.  그 중에서 여러분들은 골라잡으면 되는 것입니다. "아, 저런 경우는 저렇고, 이런 것은 이렇구나! 나는 이것이 마음에 든다" 라고,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ㅋㅋㅋ

조금 엇길로 갔습니다만, 특히 창세기 해석에서 1장 중심으로, 죄 지은 것은 하나님이 용서해주시고, 안셀무스의 '보상론'처럼, 우리가 마귀 속에 있었는데 마귀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마귀에서 대가를 지불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삼았다는 보상설과 만족설을 해서, "보라, 너희들이 못하는 것을 하나님이 했지 않으냐. 그러니 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 예 알겠습니다" 라는 식으로 '회복' 쪽에 강조점을 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에 보면, 인간이란 것은 1장과 2장의 인간으로 회복되지 않습니다.  그 시절은 끝났습니다.  에덴동산도 끝났다는 것입니다.  아니, 끝난 것을 무엇 하려고 되돌아보는가 하는 말입니다.  더 나은 게 있는데 끝난 이야기를 왜 하느냐는 것입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합당치 않다는 말씀도 있는데. 이미 1,2장은 끝난 이야기입니다.  왜 그것을 돌아보고 그 에덴동산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것입니까?

여러분이 청소년 시절에, 저는 절대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만, 절대로 말입니다.  19세미만 출입금지가 되어있는 영화를 보려고 애를 썼지요?  그런데 지금 어른이 되어 가지고 허름하고 비 새는 영화관에 몰래 숨어 들어가서 영화를 보라고 하면 시간 주어도 가지 않습니다.  그곳을 왜 갑니까?  허름한 천막 같은 60년도 70년도 영화관에 왜 갑니까?  

물론 여러분이 살던 다 떨어진 초가집에 가서 한번쯤은 낭만 삼아서 사진 찍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빠가 옛날에 이곳에 살며 고생했는데, 그러므로 너희들은 공부하란 말이야!" 라고 하면서 훈계조로 보여줄 수는 있지만, 그러나 아이가 "아빠, 우리 여기서 살까?" 라고 하면, 그러면 "웬 미친 소리냐?" 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마음속으로 "고생을 했으면 옛날 한 것으로 다 되었지" 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 그때 죄 지은 것이 있지만, 다시 죄 없던 시절로 되돌아갈 이유는 없다 !!

그런데 창세기 1장과 2장을 왜 그렇게 미련을 두고 있는 것입니까?  기차는 앞을 보고서 달리게 되어 있습니다.  좍 좍 앞으로 보고 달리게 되어 있다면, 그때 죄 지은 것이 있지만 다시 죄 없던 시절로 되돌아갈 이유는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세기 3장에서 본 인죄론의 강조점인 것입니다.

◈ 칼빈 - 창세기 1장이냐, 3장이냐 !!

"창세기 1장이냐 3장이냐"에서, 사실 그 유명한 칼빈도 이랬다 저랬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몸으로 오실 때 "그 몸이 죄지었던 몸이냐, 죄를 안 지었던 몸이냐?" 라는, 그런 문제입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오실 때에 죄가 있어버리면 죄 값을 치를 자격이 안 되지요.  

흠이 없는 어린양이라고 하였으니, 당연히 흠이 없이 오셔서 자체로서는 전혀 죄가 없으신 분이 흠 없이 마리아에게서 잉태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천주교와 개신교의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마리아에게 원죄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처럼'이 아니라 진짜 인간이고 예수님의 어머니가 마리아라면, 마리아에게서 인간의 몸으로 태어난 예수님이 마리아의 그 죄가 전가될 것인가 말 것이냐의 문제가 생깁니다.  예수님께서 죄 없는 몸으로 오셨다고 해도 문제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죄 없는 몸으로 오셨다면 우리의 죄를 대신할 자리, 어떤 그릇이 없다는 것입니다.  

"너의 죄를 내가 가져갔다" 라고 할 때에, 처음부터 죄 없는 상태에서 태어나서 자라면서 죄를 가져갔느냐, 아니면 처음부터 죄 있는 채로 태어났느냐는 것입니다.  죄 없는 채로 태어났다면, 일단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죄는 안 가져 간 것이 되는 것입니다.  마리아 이후에 예수님의 동시대 사람들의 죄는 십자가로 대신 가져가는 것이 되지만, 죄 없이 태어났다면 마리아의 원죄를 인수하기에 합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이 말을 바꾸어서 말한 것입니다. 어떤 책에선 로마서 8:6절의 말씀처럼, 죄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왔다고 하다가, 막상 그렇게 되면 처음부터 죄 없는 상태가 되어야 죄를 대속할 수 있다고 하는 헷갈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이 공격을 받았는데, 그런 공격을 받으면서도 상반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를 대신 담당하셨다면 예수님의 어느 부분으로 대신 하셨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롬 8:6)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목사님의 죄를 예수님께서 가져가셨다고 하면 어디에 가지고 가셨을까? 예수님의 영혼 속에 가져갔다고 하면 되지 않습니까?" 라고, 그렇게 하면 큰일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혼은 죄 있는 영혼이 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죄를 대신 지셨는데 그 대신 지심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대신 지셨는데, 그런데 행동하시는 것은 전혀 죄 없는 행동이 나오잖아요.  이것은 지금 시비 거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행동에서는 죄가 없습니다.  히브리서 4:15절에도 예수님은 죄가 없다고 분명히 나오잖아요.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예수님의 행동에는 죄가 없어요.  그러나 그 속에는 죄가 있잖아요.  다시 말해서, 존재론적으로는 죄가 있고 행위로는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행위란 어디에서 나옵니까?  다 그 존재에서 나오지 않습니까?  같은 존재에서 나왔는데 죄 없는 행위가 나왔으면, 그러면 그 존재도 죄가 없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죄를 대신 지셨다는 것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붕' 떠버린 느낌이 아닙니까?  어느 대목에서 예수님이 죄와 함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을 머리 좋다는 루터나 칼빈이나 이야기 한번 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2000년 역사상 한 명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믿으라는 것입니다.  

◈ 조선시대 사람은 다 죽으면 어디로?

그게 어저께든가요?  어제 우리 주일학교 학생이 우리 집사람에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인데 이렇게 질문한 것입니다.  사모라서 잘 모를 수도 있지만, 집사람이 안심이 되었지요.  틀려도 괜찮으니까 말입니다.  "조선시대 사람이 참 불쌍해요 그때는 목사도 없었고 복음도 없었으니까, 조선시대 사람은 다 죽으면 어디에 간 것입니까?" 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제 아내가 목사 딸인데, 제 아내가 어릴 때에 그런 질문을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제 장모님이 부흥회를 많이 다니셨기에 대답이 그들은 양심심판을 받는다고 대답을 한 것입니다.  제 아내가 마침 그 말이 생각이 나서 대답을 해주었더니 아이가 미심쩍어서, 사모니까 말입니다.  설교를 마치자 말자 자기 엄마를 통해서 제게 물어왔습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죽어서 어디로 갔습니까?" 라고 해서, "하나님 품으로 갔다. 그런데 그곳이 지옥이란다" 라고 했다는 말입니다.  

◈ 사람이란, 하나님이 만든 인형 !!

사람이란 하나님이 만든 인형입니다.  인형이 갈 곳이 어디입니까?  인형이 마땅히 갈 주인집이 있어야지요.  그런데 주인집은 방이 두개 있잖아요.  하나는 천국 방이 있고, 하나는 지옥 방이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지옥 방의 인형으로 만들어내기 위해서 따로 인형을 제작하신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안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맨 날 하는 소리가 불쌍하다는 것입니다.  뭐가 불쌍합니까?

나중에 인간론을 마칠 때에 나오게 됩니다만, 좀더 자세히 이야기하면, 예수님의 하나님 형상 됨을 증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제조하십니다.  그러니 그 아이는 무엇을 모르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왜 제조하시는가?" 하는 그 목적을 싹 빼버리고, "현재의 인간이 앞으로 어디에 갈 것인가?" 하는 것을 물은 것입니다.  

왜 흔히들 복을 받아서 천당에 간다고 하면, 이럴 때에 자기는 꼭 천당에 가는 것으로 간주하고 말하지요.  다른 사람들이 자기가 가는 곳에 가지 못하는 것이 불쌍하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처음부터 없었는데 왜 있게 되었는가?" 라는 것을 묻는 것이 아니라, 항상 현재 있는 것으로 말을 하니 불쌍하다는 것입니다.

◈ 창세기 3장 이후 - 여자의 후손, 즉 하나님의 형상이 주도권을 쥐면서 싸움에 등장 !!

이미 창세기 3장 이후에 들어오면 인간에게 주도권이 없고, 하나님의 형상도 없습니다.  주도권이란, 여자의 후손, 즉 하나님의 형상이 주도권을 쥐면서 이제는 싸움에 나서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마귀와의 싸움에 나서시기 위하여 제작에 나서시는 것입니다.  시나리오를 짜 나가는 것입니다.  그 싸움을 위하여 한 쪽에는 여자의 후손이라는 인간이 있고, 한 쪽에는 뱀의 후손이라는 인간들이 제작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장보고를 그린 드라마 '해신'을 아시지요. 해신이라는 드라마를 위해서, 배도 만들고, 칼도 만들어야 되지 않습니까?  제작을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이후가 되면, 이제는 창세기 1장과 2장의 낭만을 잊어버리세요.  잊어버리고 창세기 3장 이후는, 하나님이 내세우시는 하나님의 형상 되시는 그분을 인하여, 그분을 위하여, 그분을 목적으로, 그분을 바라보면서 세상은 진격 진격을 감행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14절부터 봅시다.  여기서 아들의 이야기가 나오지요.  아까 우리가 성경을 해석할 때에 직접 하지 말라고 하였지요.  반드시 사도의 해석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가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해석했는가?" 라는, 그걸 꼭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골 1: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왜냐하면, 사도가 해석하면서 예수님의 말씀만 해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속성, 위치, 본질,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 등에 대해서 사도들이 신학을 꽉 쥐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는 자기 해석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계시를 받아서 성령을 받아서 해석한 것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사도의 말을 거역하면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 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예수님에 대한 속성과 그에 대한 계획을 들어야 합니다.  듣는 정도가 아니라 복종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 안에서' 라는 말이 너무 어려운 말이라서, 다음시간에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죄 사함을 받는 것은 조금 전에 어떤 방이라고 했지요?  그 방 속에 들어가는 것이지, 죄 사함을 자기가 소유할 자격이 안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이후로는 우리에게 소유가 허용이 되지 않습니다.  "나는 구원을 소유했다" 라는 것이 허용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죄를 소유했다' 라는 것도 아닙니다.  죄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 안에 있으면서 죄의 영향을 받고 죄에 굴복을 당하는 것이지, 우리가 공기를 소유할 수 있습니까?  공기 안에서 공기를 마시면서 살지, "너는 공기 몇 리터 가졌느냐, 너는 그만큼 소유하였으니 얼마나 더 살겠구나" 라고 하지 않습니다.  요즈음은 산소호흡기 만들어서 공기를 가진다고 말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렇게 사람들이 죄를 짓고 나서는 독자적으로 계산하는 것입니다.

◈ 영역개념 - 내가 지금 어디에 속해 있는가?

이렇게 독자적으로 계산하면서 양적으로 계산하는 것입니다. "나는 어느 정도로 거룩하냐? 영생은 어느 정도며 성화는 어느 정도냐?" 라는 식으로, 자기의 존재와 존재권 사이에서 소유의식으로 생각하는데, 그런 것이 아니라 영역개념이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지금 사우나 안에 들어있습니다.  그러면 그 뜨거운 열기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열기에 쌓여있고 열기에 놓여 있습니다.  사방에서 열기가 마구 쏟아져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의에 의하여 쏘임을 받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대상이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의(義)의 대상이 되고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요한일서 4장에 의하면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요일 4: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 인간은 예수님을 사랑할 수가 없다 !!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주님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사랑개념과 주님의 사랑개념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랑개념은 소유개념이고 주님의 사랑개념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사랑을 포기해야 하는데 어떤 경우에도 그것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을 찌르듯이 하나님의 의로 찔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악과에 속하였기에 "이것이 선일까, 악일까?" 하고 있는데, 그 선과 악을 마늘 찍듯이 찍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길을 걸을 때마다 "내가 기차를 놓쳤는데, 이것이 옳았을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라고 있는 뒤통수에다가 마늘 찍듯이 윙하고 찍어버리는 것입니다.

도대체 그것이 무슨 의미냐는 말입니다.  차를 놓쳐도 하나님의 의안에 안 놓쳐도 하나님의 의안에 있는데, 우리는 그 의를 쳐다볼 생각은 하지 않고 항상 "이것은 내가 잘했을까? 이 행동은 못했을까?" 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사도가 보았던 예수님과, 우리가 보는 예수님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어서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입니다.

지금 골로새서 말씀 보다가 이렇게 나왔는데 15절부터 다시 봅니다.  15절에 보면, "예수님이 먼저 태어났다 - 그래 어쩌라고, 먼저 났겠지" 라고 하면 우리하고 관계가 없는데, 그런데 그 뒤에 16절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골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 만물이 주를 위하여 !!

무슨 뜻입니까?  '만물이 주를 위하여' 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지옥에 갈 인간들도 주를 위하여 지옥가야 되고 지옥 가기 위하여 조선시대 사람들도 만들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종대왕 만들어 달라고 요청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주님께서 필요해서 만드셨고 그리고 지옥으로 보내신 겁니다.  양심심판이 아닙니다. 즉 "너 잘못되었다" 라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 율법은 저주 구덩이를 만들어낸다 !!

사실 양심 심판이란 것은 하나 마나 입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2장에 보니, 이 양심이 이방인들에게 율법적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율법적 기능의 특징이 무엇인가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율법적인 기능을 어떻게 말하는고 하니, "이것은 옳다, 저것은 나쁘다" 라는 것을 율법적 기능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그것이 아닙니다.  

율법적 기능은 없던 죄도 만들어내는 기능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저주가 없으면 필요가 없습니다.  저주 구덩이를 유발시키는 것이 율법이라는 말입니다.  이 율법이 들어오면 저주가 들어온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죄가 있는데 율법이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또 이단소리 듣겠지만, 율법이 우리의 마음도 만들고 '나' 라는 자아도 만드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바쁠 때는 자아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가할 때는 좀 다르지요.  "내가 누구인가?" 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아도 만들고, 그 자아에다 죄도 만들어 내는 것이 율법적 기능인 겁니다.  율법이 그냥 노는 게 아니라, 율법적 기능은 없던 죄도 만들고 없던 마음도 만들고, 그 마음에다 죄도 집어넣는 그 일까지 몽땅 다 하는 것이 율법적 기능이라는 말입니다.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라는, 어디서 많이 듣던 가사이지요!  최백호가 노래한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 시장바닥에서 콩나물 장사를 하고 채소를 팔고 있는 그 아주머니와 할머니들에게, "할머니, 지금 할머니 마음에 어디에 가있나요?" 라고 하면 할머니가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이게 지금 바빠서 죽겠는데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느냐" 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란 어디에 있는가? 내가 누구인가?" 라고 하는 것은 한가할 때, 그리고 어떤 심각한 위기가 닥쳤을 때, "내가 왜 사는가?" 싶을 때에, 그때 잠시 등장하는 것이지, 평소에는 자기 마음과 자기 자아에 대한 생각도 나지 않는 것입니다.  기도하는데 옆에서 아이가 똥을 사보세요.  얼른 기저귀 치워야지, "내 마음은 어디에?" 라고, 그런 생각할 틈이 어디에 있습니까?

◈ 인간의 마음이란, 율법이 만들어낸 그때 그때의 그림책 !!

그러므로 인간의 마음이란 율법이 만들어낸 그때 그때의 그림책입니다.  아침 마음 다르고 저녁 마음 다르고, 이렇게 그때 그때마다 다르게 만들어내고 영글어내는 하나의 꿈이고 환상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이 있다고 간주하고, 거기에 착한 것만 고운 것만 "나는 이슬만 먹고살아야지' 라고 하면서 순수한 것만 지고지순한 것만 담으려고 해보세요.  그러면 그 마음자체가 자기 의(義)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원래의 마음을 만들 필요도 없는데, 괜히 만들어놓고 착한 마음이 되려고 그기에 하얀 마음이니 푸른 마음이니 하면서 그려 넣으려고 하니, 개념이 잘 안 잡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 목사님을 닮을까? 한경직 목사님을 닮을까? 주기철 목사님을 닮을까? 저 사람을 모델로 삼을까?" 라는 방식으로 자기 마음에 담으면서, "하나님, 제가 이렇게 착하게 살아가는데 저를 팍팍 안 도와주십니까?" 하는 식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다가 안 도와주니 화나서 삐져 있고 말입니다.  도대체 이게 뭡~니까?

◈ 성경에서 인간은, 그냥 육이고 몸이고 그것이 전부 !!

성경에서 인간의 마음이란, 인간에서 나오는 하나의 표상에 불과하지, 성경에서는 마음자체라는 것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인간은 그냥 육이고 몸이고 그것이 전부입니다.  거기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이 마음이고 영혼이라는 그런 것들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안 보고 인간 쪽에서 다가서니까, 영혼도 있어야 되고, 육도 있어야 되고, 혼도 있어야 되고, 그리고 이것을 조립해서 '혼'과 '육'과 '영'의 세 부분으로 되어있는 것을, "예수여, 제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라고 하면서, 조직신학을 만들어내고, 그것으로 싸우고 난리를 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생각들을 하는 자체가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 다 율법이 만들어내는, 즉 법적으로 신학적 체제를 갖추어 보겠다는 욕심에서 나온 탐욕의 결과물인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나는 여기 있다. 어떻게 구원받을까? 예수 믿어야지!" 라고 하는, 이것 자체가 성경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내가 여기 있다 죽어서 어디가지? 예수 믿어야지!" 라는, 이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왜 잘못되었는가하면, "'너'라는 '너'가 없었는데, 원래 없었는데, 예수님께서 있게 하심으로 생긴 몸이 있을 뿐인데, 즉 나는 없다" 라는 말입니다.

◈ 성경에 과연 '나' 라는 것이 있는가?

말이 너무 어려워서 죄송합니다.  현재 우리 몸이 이렇게 잡히잖아요.  그래서 꼬집으면 아프잖아요.  그런데 왜 없어요?  예수님께서 몸을 만드셨지요.  예수님이 몸을 만드셨는데 여기서 '나' 라고 끄집어낼 '나' 라는 것이 엉뚱하다는 겁니다.  성경을 보세요.  거기에 '나'가 어디에 나옵니까?  예수님과 예수님이 만드신 몸이 있지, '나'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근호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목사든 교인이든 일반이이든 모든 인간은 이미 죄를 지었기에 항상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어디서 왔는가는 생각하지 않고, 나는 구원받아야 해, 행복해야 해, 평안해야 하고, 그 평안이 강같이 흘러 차고 넘쳐야 하고, 비록 가정은 엉망진창이지만 내적인 기쁨을 맛보아야 돼! 나는 이렇게 되어야 돼! 나는 사랑 받아야 돼! 하나님으로부터" 라는 것입니다.

'나' '나' '나'가 있는 이런 사람들을 불러모으기 위해서 접촉점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없는 '나'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고 끄집어 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살았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삽시다. 다윗은 이렇게 살았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사시면 복을 받습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는 인식자체가 이러하니 사실 손을 어디서 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이 땅에 인형처럼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면서, 제가 창세기 1장과 2장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1,2장으로 돌아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돌아가도 이미 하나님이 먼저고 그 다음에 생긴 것이 우리입니다.  우리가 왜 있습니까?  하나님의 창조를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서 피조물이 있다는 것입니다.

◈ 단독적으로 '나'를 규정짓지 말자 !!

이 말은 단독적으로 '나'를 규정짓지 말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단독적인 '나'를 먼저 내세우지 말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되어 있는 '나'로 뒤에다 집어넣으라는 것입니다.  지옥에 가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주되심을 드러내기 위하여 나는 지옥 가야 돼!" 라고 하면서, 뒤에 집어넣으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어디 그렇게 인간을 보았습니까?  "나는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지옥에 가야해" 라는 인간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왜 그런가요?  그런 사람들은 지금까지 제가 말한 모든 것을 다 절단시키고, '나'부터 출발하였기에,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서 지옥에 간다는 말을 도저히 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농담으로도 말입니다.  

◈ 구원받은 자 -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해서, '나는 누구인가?' !!

그러므로 '나'부터 출발하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출발한 사람들 중에 지옥 가는 사람은 한 명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해서 "나는 누구인가?" 라는 것을 생각하는 그 사람은,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위한 나' 라고 '나'를 제일 뒤에 집어넣어야 하는데,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된다" 라고 하면서, '나'를 앞에 집어 넣어버리면 뒤에 숨으라고 했는데, 그렇게 되면 뒤따라오는 예수는 뭡니까?  자기의 똘마니(?)에 지나지 않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를 위하여 "내가 목사다" 라고 자신을 뒤에 집어넣어야 하는데, 그런데 "나는 교회를 세워놓았는데, 주님은 무엇으로 도와주렵니까?" 라고 나오면 곤란하지요.  정말 곤란하지요.  

◈ 예수 안에 있으면 얻을 것 다 얻은 것이다 !!

여기에 대하여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님께서 당신을 호되게 다루실 것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뒤에 것이 앞에 오고 앞에 것이 뒤에 가도록 호되게 다루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개척교회를 몇 번 말아먹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말아먹더라도 구원을 받았으면 다 받은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얼마나 고생했냐는 것은 사실 사치인 것입니다.  그것을 따지는 자체가 사치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론'으로 접근해 가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서 구원을 받았으면 얻을 것은 다 얻었다는 겁니다.  즉 예수 안에 있으면 얻을 것 다 얻었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욕심내면 안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일반적인 조직신학에서는 허용이 안 되는데, "구원은 기본이고 보너스로 어떤 혜택을 받을 것인가?" 라고 나온다면, 그것은 종교이지 성경에서 나온 복음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제가 힘들어서 한 5분 쉬겠습니다.              


2005. 5. 12일 오전 10:55분 이장우 녹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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