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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5-26 18:24:17 조회 : 3353         
Re..부천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02 - 인간론2-2 이름 : 이장우(IP:)
◈ 지키는 것도 행함이지만, 안 지키는 것도 일종의 행함 !!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성경은 우리가 지켜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니, 사람들이 성경은 아예 지키면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지키든 안 지키든 상관없이 구원된다고 하니, 그 사람들이 머리를 굴려서 "안 지켜도 구원을 받는데, 굳이 내가 무엇을 하려고 지키는가?" 라고 하면서 안 지키는 쪽으로 나가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하나의 행함인 것입니다.  지키는 것도 행함이지만 안 지키는 것도 행함인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이란 제 삼자가 주어서 구원받는 것이지, 자기가 무슨 행동을 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무슨 짓을 하고 살았느냐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믿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입니까!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행동여하에 따라 구원이 된다고 여기고 있는데, 어떤 사람은 농땡이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여기고, 어떤 사람은 열심히 말씀을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여기는데, 그러나 둘 다 아닙니다.  예수님 때문에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 목사님, 다 좋은데 그것만은 !!

쉽게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오늘 아침에 목사님의 강의 녹취를 보았는데 참 산뜻하고 매끄럽고 복음적으로 잘 전하고 있습니다.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좀 삼가주셨으면 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한국교회 90%가 썩었다고는 말은 좀 하지 말고 복음만 전했으면 좋겠습니다. 엘리야가 자기만 남았다고 하는 것처럼 목사님도 교만을 떨 수 있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런 이야기 제가 수백 번도 더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답변을 했습니다.  "지금 엘리야 같으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만 아니라 다른 괜찮은 목사가 있다고 엘리야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로마서 11장의 말씀그대로입니다. 사람의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남은 자가 있다는 것을 엘리야가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제가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이야기 하니, 이 이야기는 생각지 아니하고 "너만 목사냐, 너만 복음 아느냐" 라는 것으로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질문하시는 분이여, 제발 주님의 은혜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라고 한 것입니다.  

만약에 복음을 전하는 어느 목사가 있다면 그 목사와 함께 모여서 계모임 할까요?  그것도 또 하나의 집단이 되는데 말입니다.  그렇게 모여서 우리는 복음 아는 목사라고 해서 노회를 만들었는데, 그 모인 목사를 누가 관리합니까?  자기가 스스로 관리합니까?  여러분이 관리합니까?

어떤 사람은 복음 안다고 하고서는 15년 뒤에 떠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러면 누가 관리하는 것입니까?  주님이 관리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함께 모여서 "우리는 복음을 안다. 죽어서 천당 갈 때까지 우리는 함께 한다" 라고 하다가도, "나중에 복음이 무언데?" 라고, 그렇게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어떻게 확증하느냐는 것입니다.  

◈ 지금도 주님이 전도하고 계신다는 그 사실을 기뻐하자 !!

그러므로 진짜 복음을 아는 사람은, 그 사람이 어떠하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떤 교회가 괜찮은 교회인가를 바라보는 그런 재미로 살지 말고, 지금 주님이 선교하고 계시고, 전도하고 계신다는 그 사실을 기뻐하면 그만 이라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끼리 모여서 한국교회를 개혁하자는 자체도 행함 !!

그러면 "부천에 어떻게 이런 교회가 다 있는가!" 라고 하면서 고마움과 감사와 기적으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물론 "울산에도 저런 교회가 다 있다니" 라고 하다가 한 5년 뒤에 다르게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오직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끼리 모여서 한국교회를 개혁해보고자 하는 그 자체도 저는 행함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행위의 주체가 주님이 아니라 너무나 인간적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환상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시도하다가 그 일이 안 되면 속에서 무엇이 나오겠습니까?  또 주님에 대한 적개심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는 나는 주님의 일을 못합니다. 이렇게 해도 안 도와주시는데, 나는 주님의 일 때려치우고 장사나 하렵니다" 라고, 이렇게 나올 것이 뻔한데 말입니다.  

이러한 것은 구약에서 인간들이 다 해본 일입니다.  사실은 인간들이 해보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 시키신 것입니다.  "성전을 지어라. - 예! - 거기서 제사를 지내라. 그러면 죄 용서해주겠다. - 예!" 라고 해서, 그들은 제사를 잘 지내겠습니다.  이렇게 이미 다 해보았다는 것입니다.  

◈ 유대인들의 실패 -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전쟁에서 인간은 개입불가 !!

그러나 이러한 구약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성전을 짓고 제사를 지내면서 말씀을 지키겠다던 유대인들은 모두 다 실패를 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하면, 그것은 이미 창세기 3장에서 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전쟁에서 사람이 개입할 수 없는, 그 원칙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본문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제가 읽습니다.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  여자의 후손 - 인간으로서는 배태가 되지 않는다 !!

여기서 '여자의 후손' 이란 것은, 인간으로서는 전혀 배태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이란,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하나님에 의하여 태어날 자가 여자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여자의 후손이란 예수님인데, 마지막 때에 여자의 후손을 노리고 악마가 달려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 유대인들은 - 그 여자를 알아야 후손을 알 것이 아닌가?

그런데 여자의 후손이 예수님이라고 할 때 우리의 사고방식이 무언가 하면, "그래, 여자의 후손이면, 그 여자가 누구냐?" 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여자를 알아야 후손을 알 것이 아니냐?" 라는 질문이 형성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자의 후손이란 역사상 나중에 마리아의 몸으로 태어납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여자란 하와입니까, 마리아입니까?  둘 다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왜 하나님의 말씀을 못 지켰습니까?  성경은 예수님으로 출발해서 나오는 말씀인데, 그러나 유대인들은 성령을 받지 않아서 그렇게 볼 수 있는 아이디어가 없기에, 그냥 역사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의 후손' 이라고 말하면, 누가 보아도, 즉 어린아이가 보아도 그 여자는 '하와'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당연히 그 하와의 후손으로서 연결된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몸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이것은 후손이 그 여자를 규정하는 것인데, 유대인들은 여자가 먼저 있어야만 그의 배에서 후손이 나올 것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지금 분위기가 제 말을 아무도 못 알아듣는 것 같은데...  

◈ 다윗이 메시아를 주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이 되겠는가?

이 논쟁은 예수님과 바리새인 사이에 있었던 논쟁으로 제가 지어낸 논쟁이 아닙니다.  메시아가 누구의 후손으로 오겠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바리새인들은 다윗의 후손으로 온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다윗이 메시아를 주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다윗의 후손이 되겠느냐고 되물으시자, 바리새인들이 답변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장차 올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으로 온다는 말은 다윗이 생각한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입니다.  

(눅 20:41)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눅 20:42) 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눅 20:43)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의 발등상으로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눅 20:44) 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뇨 하시니라

◈ 유대인들의 한계 - 다윗의 틀까지만 !!

다윗까지 알았더라면 다윗의 틀에 맞는 후손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다윗까지는 누가 알았습니까?  유대인들이 알았습니다.  그러면 다윗은 누구 틀에 있는 것입니까?  아브라함의 틀에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요?  다윗은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알고 있다면 장차 메시아가 어떤 식으로 온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7장에 보면,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으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게 되어 있는데, 그러니 예수님은 베들레헴 사람이 아니기에 메시아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왜 예수님이 메시아가 아니라고 하는지 꼼꼼히 생각해보세요.  

(요 7:42)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사실 그들의 주장에 일리가 있어요.  이미 아브라함이 약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면, 다윗이 약속한 그 사람이어야만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봐도 예수는 다윗이 약속한 그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 니고데모의 방문 - 말씀의 경찰관 !!

요한복음 4장에서 니고데모가 밤에 찾아 왔잖아요.  니고데모가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말씀의 경찰관인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하는 일은, 민중들 속에서 말씀에 어긋나는 자들을 색출해서 법에 있는 대로 돌로 쳐죽이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때 강사가 성경책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는데), 그 이유는?  ㅋㅋㅋ

그런 사람이 와서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여, 당신은 스승입니다" 라고 하면서, "사람이 어떻게 하면 천국을 볼 수 있습니까?"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네가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를 볼 수가 없다" 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내용은, 그들이 배워온 아브라함으로부터 줄줄이 내려온 그 신학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신 "다윗의 후손이 어떻게 다윗의 주가 될 수 있는가?" 라고 하시는 질문은, 바리새인이 절대 담을 수 없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으로부터, 예수님의 입장에서 거꾸로 구약을 봐야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무엇이 깨어지는가 하면, 착실하게 역사적으로 다지고 다져왔던 모든 신학이 다 무용지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신앙을 본받자는 것도 엉터리였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할례를 행하였고, 그 할례를 행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다고 여겼는데,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너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고 너희 아비는 마귀이다" 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 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그때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말하기를, "당신이 그렇게 주장하는 해석의 근거를 보여라" 라고 했습니다.  할례를 행하는 자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다는 근거가 창세기 17장에 있는데, 당신은 무슨 자격으로 우리가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라고 하는 그 해석을 근거를 대보라는 것입니다.  

(창 17:9)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창 17:10)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창 17:11)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예수님의 해석은, 아브라함이 자기를 보고 기뻐하였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8장 56절에서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라고, 정말로 엉뚱한 이야기를 하신 것입니다.

(요 8:55)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 같이 거짓말장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요 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요 8:57) 유대인들이 가로되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요 8: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정말 아브라함보다 예수님께서 먼저 계셨다면 성경책에 무엇이 있어야 됩니까?  창세기 11장에 아브라함 이야기보다 먼저 예수님의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장차 마리아에게서 아기가 태어나 고생을 많이 하다가 십자가에 죽게 될 것인데, 그가 예수다 기억하라" 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아브라함이 보았다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게 창세기에 실제 있습니까?  11장에는 없고 창세기 3장에 있잖아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우잖아요.  여기에 여자의 후손이란 인간이 빠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누구입니까?  인간 아닙니까?  인간인데 건방지게 그 속에 해석을 통하여 들어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 아브람을 아브라함 되게 하신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 자신 !!

쉽게 합시다. 쉽게 한다고 하고서 어렵게 하곤 하는데, 하나님이 아브람을 아브라함 되게 하셨습니까?  아니면 아브람 자신이 아브라함 되게 하였습니까?  하나님께서 우상 만들고 있던 그 인간을 그냥 당겨서 만드셨는데, 즉 아브람을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옮기신 것입니다.  

그렇게 옮기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자기 자신으로 예수님께서 그렇게 보신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에게는 그것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추상적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옮겼다고, 그렇게만 본 것입니다.  여기에 예수님께서 직접 개입하였다는 사실을 다 빼먹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의 후손으로서 마귀와 싸우기 위해서 아브람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빼 버리고, 그들은 여자의 후손들인 본인들이 해야 한다고 본 것입니다.  그것을 하라고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구경하라고 준 것이 아니라, 이것을 지켜서 마귀를 이기고, 이방민족을 이기고, 그래서 언약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이 되라고 준 것임을 그들이 믿었잖아요.  사실 우리도 그 현장에 있었다면 우리도 그렇게 믿지 아니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과 마귀와의 싸움에 있어서, 계속하여 택한 인간을 집어넣어 인간들이 그동안 얼마나 하나님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는지, 그 오해는 바로 악마의 지배로 인하여 일어나게 된 현상인가를 지적하기 위하여, 계속하여 자기 택한 백성들을 데리고 다니신 것입니다.

◈ 예수님은 자기 택한 백성들을 왜 데리고 다니시는가?

이렇게 택한 백성들을 데리고 다니셨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지옥으로 보내기 위해서 데리고 다녔다는 말이 아니라, 인간들이 평소에 하나님에 대하여 얼마나 잘못 생각하고 있는가를 깨우치기 위해서, 그들을 대표서 선택하여 데리고 다니신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하여 그들에게 들어있는 죄를 들추어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싸울 때 제일먼저 무엇을 합니까?  제사를 드리지요.  제사를 드리는 것이 사무엘상에 나오지만, 제사를 드리는 것은 이미 민수기에 나옵니다.  전쟁에 나갈 때에는 법칙이 있습니다.  항상 언약궤를 들고 나가야 합니다.  언약궤만을 들고 가는 것이 아니라 제사를 지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적들이 물러가게 된다고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저와 여러분이 그 현장에 있다면 무엇을 할 것입니까?  그때에 생기지도 않은 예수님께 빌 것입니까?  무엇을 하겠습니까?  성경에 시키는 대로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사를 드리고 나서 전쟁에서 패배하고 언약궤도 빼앗겨 버린 것입니다.  

◈ 왜 사무엘에 약속시간에 늦었는가?

사울도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제사를 먼저 드렸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나타나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나은데 사울을 순종하지 않았다고 책망한 것입니다.  그 순종이란 사무엘을 기다리지 않았던 것이고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 사울은 기다렸습니다.  약속 시간은 이 사무엘이 어겼습니다.  사울 자신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패배는 사울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아니, 왜 그렇게 되는 것입니까?  

그래서 우리는 사울이 왜 나쁘냐고 물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마치 "내가 착하지요?" 하고 묻는 것과 마찬가지로 잘못된 것입니다.  사울이 왜 나쁘냐를 묻지 말고, 하나님께서 사울을 택하신 것은, "이러므로 인간은 안 된다" 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사울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물론 사울이 나쁜 놈이지요.  결국 사울을 통하여 인간의 내면에 이런 것들이 들어 있는데, "너에게도 들어있지 않느냐?" 라고 알리시기 위하여 사울을 집어넣으신 것입니다.  

◈ 사울은 사울대로, 다윗은 다윗대로 !!

다윗이 간음하고 살인하였지요.  다윗이 잘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런데 사울은 회개하여도 안 받아 주시고 다윗은 회개하니 받아 주시고, 이게 무슨 짓입니까?  하나님께서 우왕좌왕 하시고 이렇게 불공평한 하나님이십니까?  이게 무슨 뜻입니까?  다윗을 사용하신 것은, 이런 인간도 용서된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하나의 인형으로 사용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은 사울 나름대로, 아무리 제사를 지내도 해도 순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나간 업적이 다 날아 가버리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작용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사울을 또 하나의 인형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보면서, "다윗처럼 되어야지 사울처럼 되지 않아야지" 라고 하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왜 안 됩니까?  사울은 사울이고 자기는 자기인 것입니다.  다윗은 다윗이고 자기는 자기인 것입니다.  사울을 다루었던 그 하나님이 우리를 다룬다고 생각을 해야지, "사울처럼 밀고 다윗처럼 살자" 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는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나'를 따로 다루시는 것입니다.  무엇이 어렵습니까?  

그래서 다윗처럼 어떤 죄를 지어도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면 구원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인간이 원래부터 죄인이기에, 제사도 받지 않으시고, 번제도 받지 않으시고, 오직 상한 심령만 받으시구나" 라고 하는 것을, 그래서 "이것이 구원이구나!" 라는 것을 알면 되는 것이지, "나도 다윗처럼 어떻게 해야겠다" 라는 것이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사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생각하기를, "다윗처럼 사울에게 행동하신 것처럼 이제 우리에게도 똑같이 구원을 주실 것이다" 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이고 엉터리냐는 것입니다.  

◈ 하나님은 언약을 주시는 분이고, 하나님의 이름은 언약을 이루시는 분 !!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이 다릅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주시는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이름은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분이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는데, 이분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인 것입니다.  그러면 축복이 어디서 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 오는 것입니다.  

사실 이름을 부르기야 쉽지요.  '여호와여!' 라고, 그렇게 부르면 엄청 쉽지요.  그러나 그렇게 부르면 안 됩니다.  부르는 방식이 있습니다. 그것이 제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 중에서 번제가 있고, 그 번제에 '하나님'의 이름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일반인이 가지고 있는 종교성과는 전혀 엉뚱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것은, "내가 혀가 있고 입이 있으니, 하나님을 향하여 여호와든 야훼든 부르면 응답하시겠지" 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주문이고 주술인 것입니다.  그런 것은 남묘호랑게교 하고 똑 같은 것입니다.  순복음 하고 똑 같은 것입니다.  주여 3창하면 응답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기분 푸는 것이지 하나님은 꿈쩍도 안 하시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하는 이 방식을 '언약' !!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절차가 있습니다.  그것이 출애굽기 20장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하는 이 방식을 '언약' 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인데, 이것을 모세 때에는 모세 언약이라고 하고 말입니다.  

(출 20:24)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으로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그러면 노아 때는 어떻게 합니까?  방주를 통해서 구원하십니다.  그런데 모세 때는 모세 언약을 통해서 구원하시는데, 모세 언약에는 제사법도 있고, 그 당시 여러 가지 사회법도 있고, 십계명도 포함되어 있고,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주시는데, 이런 것은 여러분들이 다 아시는데, 문제는 유대인들이 이 언약을 인간이 이룰 수 있다고 착각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 언약은, 장차 오실 예수님께서만 이루신다 !!

모세언약은 누가 이루십니까?  장차 오실 예수님께서 이루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시는데,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율법을 모르는 자라고 요한복음 7장에서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을 보고는, "너희는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다" 라고 하시면서, "너희를 정죄하는 자는 너희가 바라는 모세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하며 율법을 충실히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율법을 지키지 않다고 자꾸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을 지키는 분은, 즉 언약을 이루시는 분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 이 세상은 자기 의와 예수님 의와의 대 전쟁터 !!  

사실 처음부터 인간을 율법을 언약을 못 지키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자의 후손은 예수님뿐이고, 나머지는 다 뱀의 후손인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이 세상의 신에 속하여 있기에, 이 세상 신에 속한 사람들이 법을 지키게 되면, 예수님이 지키는 법의 완성과 전쟁이 벌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의와 예수님 의와의 대 전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컷 지켜보았자, 하나님의 화만 돋우는 그런 일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 약속에 땅에 들어간 것은, 자기 자신의 실패를 인정할 때 !!

그러므로 어떤 사람도 모세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은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님, 그들이 약속에 땅에 들어갔잖아요?" 라고 하신다면, 그들이 들어간 것은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였기 때문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키시지 자기가 못 지킨다는 것을 인정할 때, 그때 들어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들어갈 수 있다고 여긴 사람들은 중간에 모두 탈락되어 버리고, 오직 주님의 긍휼과 자비를 아는 사람들만 가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놋뱀을 드는 사건인 것입니다.  "쳐다보아라!" 라는 것은, "네 지은 죄를 인정하고 쳐다봐" 라는 것입니다.  자기 지은 죄를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적개심을 품었지만, 그러나 그러면서 놋뱀을 쳐다 본 자는 나음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원리원칙 그대로 약속의 땅에 들어간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요단강 사건인데, 요단강이 흐르는데, "요단강에 들어가라" 라고 하면, 못 들어간다고 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 들어가니 요단강이 멈추어버린 것입니다.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습니다.  홍해는 열리고 들어갔지요.  그러나 요단강은 미리 열리고 들어간 것이 아니고, 열리지 않았는데 들어갔습니다.  그러면 어느 편이 어렵습니까?  사실 둘 다 어렵습니다.  둘 다 말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세 번째, 여리고 성 사건입니다.  성을 그냥 도는 것이 어렵습니까?  아니면 칼을 가지고 싸우는 것이 어렵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기생 라합이 자기 조국을 버리고서 정탐꾼 숨겨주는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입니까?  그리고 완전히 망해버린 시어머니 집에 따라 가겠다고 나선 룻이 나올 때 얼마나 어려운 것입니까?  

이 세상에 아무 공로도 없는 세리와 창기가 예수 믿음으로 천국 간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자기 힘으로 언약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자인할 때 나오는 결과들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의 전쟁에 우리 힘이 개입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공로와 열심과 찬양과 기도와 헌신들이 하나님의 전쟁에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자인할 때 나온다는 것입니다.  

◈ 성도, 예수 안 -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다는 것을 증거할 때 !!

그러면 "나는 뭐냐?" 라고 하고 싶지요?  그러면 "나는 뭐냐?" 라고 질문할 것이 아니라, "나는 무엇 때문에 있는가?" 라고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다는 것을 증거하라고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증거될 때 이것을 신약에서 '성도' 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두고 '예수 안'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 모세 언약 - 모세의 생명을 담보로 !!

모세 언약에서는 생명책에 기록된 자기 이름을 담보로 언약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 생명을 담보로 저들을 용서하여 주세요. - 좋다. 그러나 조건이 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모세 말 들으면 살고 듣지 않으면 죽는다" 라는, 이것이 모세 언약입니다.  모세의 생명을 담보로 모세 말을 들어야 산다는 것이 언약이 된다면, 이것을 신약에 그대로 한번 옮겨봅시다.

◈ 새 언약 - 구약에서 모세 안에서 구원되듯이, 지금은 예수님 안에서 구원 !!

신약에 가면 원래 우리는 죄인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 이것이 새 언약입니다.  구약에서 모세 안에서 구원되듯, 지금은 예수님 안에서 구원되는 것입니다.  우리 공로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살과 피의 새 언약에 들어 있는 사람만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착한 행동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살과 피가 우리의 죄를 없애주고 우리를 의인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언약' 이라는 개념을 모르면 완전히 모릅니다.  만약에 언약의 개념을 모르고 예수님을 믿어 버리면 이렇게 됩니다.  "예수 믿으라고 하니 일단 예수 믿는 것은 기본이고, 그 다음에 내가 잘해서 복을 받자" 라는 식이 됩니다.  그래서 믿음, 그 다음에 인내, 성화, 양자, 칭의...

◈ 행함 - 내가 해야 한다 !!

이렇게 모두 다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음으로 되었는데 성화 단계에 들어가지 않으면 탈락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도 자기가 하고, 성화도 자기가 해야 되고, 이렇게 자기가 해야 한다는 것, 그 전체를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면, 그것을 믿음이라 하지 않고 '행함'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행함 속에 믿음이 포함되지요.  그러나 행함 속에 포함되는 믿음은 구원되는 믿음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행함의 일종입니다.  자기가 믿는다는 행함으로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은, 계속 행함 속에 있는 사람이지 언약 속에 있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언약 속에 있는 사람은 하나의 인형으로 있기에, 이렇게 저렇게 꼼지락거리는 것과 상관없이 어떤 공간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자기의 움직임이 무슨 문제가 되느냐는 것입니다.  방귀를 뀔 수도 있고, 오줌을 눌 수도 있고, 트림 할 수도 있지,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의에 좀 늦을 수도 있고 그렇지, 이게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는 거예요.  그런데 행함에 있는 사람은 잘 나가다가 실수 한번 했다고 낙담을 해 가지고, "나는 이제 죽었다. 십년공사 끝장났다' 라는 것입니다.  이럴 때 목사가 나타나서, 물론 그런 목사도 없겠지만, 뭐라고 합니까?

"기도해줄까요? 기도해줄 테니 헌금이나 좀 하시오. 교회도 어려운데 양심이 있지 받아먹기만 하고 돈도 안 내나? - 그러면 저 대신에 기도해주겠습니까? - 그래 내 기도 해줄게" 라고 하면, 그 목사도 나쁘지만 그렇게 하는 인간은 아직도 자기 행함으로 구원받는 줄 알고 착각하고 있으니, 그 착각을 노리고 온갖 마귀가 뜯어먹으려고 다 달려드는 것입니다.  

◈ 명저 - 지옥의 하나님 !!

이번에 나올 제가 쓴 책제목이 '지옥의 하나님' 입니다.  제목이 참 멋있지요.  그 책의 내용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교인들의 오기를 유발시키는데 어떤 오기냐 하면, 주의 종인 목사가 하는 말이, "목돈을 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평생에 성전을 한번 지어야지 이 뺀질이들아" 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교인들의 오기가 무엇이냐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진짜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한번 내기 해보자. 이만한 목돈을 내었는데도 불구하고 앞으로 내 팔자가 펴야지 아니하면 하나님 당신 탓이오" 라고 하는 식으로 판돈 걸듯이 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곱빼기로 얹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좋아하는가 하면, 장로나 목사입니다.  왜 그런가요?  또 한 놈 속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가 무엇이냐 하면 '오기' 라는 것입니다.  이 판에 하나님 있는지 없는지 한번 실험해보겠다는 것입니다.  "바쳐서 복 받는다고 하니, 나도 오기 있는데 나도 한번 목돈 바쳐서 팔자가 펴지면 내 행동 잘한 것이고, 팔자가 펴지지 않으면 하나님 자체가 잘못 된 것이기에 나에게는 과오가 없다" 라고 보는 것입니다.

◈ 오기를 유발시키는 목사는 악마의 하수인 !!  

그러한 오기를 유발시키는 장을 누가 만듭니까?  목사가 일종의 파티처럼 그런 장을 열어준다는 것입니다.  그 책에 이런 내용이 적나라하게 다 나옵니다.  목사와 교인이 싸우는 것 하나 하나 다 들추어내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미 예수님의 전도요, 예수님의 선교인데, 왜 자꾸만 그것을 인간의 전도와 선교로 바꾸느냐는 것입니다.  무슨 권리로 말입니다.  악마가 그런 짓을 할뿐이라는 것입니다.  5분만 쉽시다.  


2005. 5. 25일 이장우 녹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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