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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09 01:28:39 조회 : 2233         
중심 131108 이름 : 이근호(IP:119.18.9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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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길(IP:180.♡.197.209) 13-12-28 20:05 
서울 의존교회131108a (중심)―이 근호 목사

 딤전 1:1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여기서 앞에 1절에 사도 된 바울이 등장합니다. 바울 이 사람은 사람인데 1장 1절에서 현재 우리자신을 여러분이나 저나 서로를 사람이라고 간주합니다. 개나 고양이는 아니고 사람이니까 우리는 사람이라고 우리는 인정을 하는 겁니다. 그렇게 인정해 주는 그 범위를 우리는 세상 또는 현실이라고 간주할 수 있는데 1장 1절에서 ‘구주 하나님’ 그 뒤에 나오는 말이 뭐냐 하면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이것은 우리가 실제로 우리가 느껴지고 손에 잡히는 그런 대상이 아니잖아요.

하나님, 그리스도 예수, 있으나 마나한 존재, 사람이 아니니까 이것을 지워 버려도 우리 사는데 전혀 지장이 없을 것처럼 느껴지는 분, 우리가 지금 주목하는 것은 바울이라는 우리하고 똑같은 사람에게만 주목을 하고 앞에 사도 바울이 일방적으로 걸치고 있는 구주 하나님,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걸치고 왔는데 같은 이 세상에서 인간대 인간의 관계에서는 내가 뭔가 걸치지 않는 이상은 너도 걸치지 않고 너 자신 단독으로 내 앞에 와라 하는 그런 느낌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예를 들면 신월동 시장에서 난전에 시금치를 파는 할머니인데 ‘할머니, 이 시금치 얼마입니까?’ 물으면 시금치가 한 단에 2천원이라 하면 우리는 아무 거리낌 없이 주고받습니다. 그런데 ‘할머니, 이 시금치 얼마입니까?’ 물으면 그쪽에서 하는 말이 ‘나는 여기 근처 보림사의 보살인데 우리 지주스님이 얼마나 영음이 많은지 내가 늙은 게 집에 혼자 있는데 지주님이 신월동에 가서 시금치 장사하면 잘되게 해서 시금치 팔려고 내가 이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시금치를 떼어왔는데 한단에 2천원에 팔겠습니다.’할 때 우리가 듣는 것은 할머니가 이야기한 앞에 있잖아요. ‘시금치가 얼마 입니까?’ ‘시금치가 한 단에 천원입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이 말만 필요하고 뒤에 붙어있던 보림사 주지가 어떻고 내가 어떻게 하고 그런 것은 어떻게 됩니까? 전부 다 삭제하고 싶지요.

그렇잖아요. 현실이라는 것이 뭡니까? 현실이라는 것은 누가 많은 것을 걸치고 온 것, 그런 것을 원하는 것이 현실이 아니고 내가 필요한 부분만 이야기 해 줄 때 우리는 그 사람과 관계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 전서에 있어서 우리 구주 하나님, 그리고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 그것을 다 떼시고 가자 이 말이에요. 다 떼어버리면 남는 것은 뭐냐? 바울아! 당신의 이 세상 보는 어떤 견해를 갖고 있고 당신은 이 세상을 어떤 식으로 보느냐?  당신이 이야기한다면 나는 그것을 참고로 들을 꺼야! 나한테 필요하다 싶으면, 내 이익이 되면 취득할 것이고 내 생존에 보탬이 안 되면 나는 거부할 거야! 당신이 의견을 제시하게 되면 나는 또 다른 데서 의견을 얻어서 어느 쪽이 이익이 있을까? 내가 판단을 해서 나는 당신과 교제를 나눌것인가 말 것인가를 그때 가서 결정하겠다! 라는 것이 일상생활의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렇죠? 제가 하는 말은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이라 하는 이러한 수식으로는 쓸데없는 수식을 붙였다 이 말입니다. 이것을 붙였다고 해서 더 말이 먹혀지고 더 권위 있어 보이는 것은 절대로 아닌 거예요. 왜냐 하면 우리 자신이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에 대해서 그런 것이 우리앞에 붙이는 것을 우리자신이 원치않습니다. 당신의 집안에 자식이 몇 명입니까? 두 명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원하지 우리집에 자식이 두명이 있는데 이 두명다 내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뜻이 거기서 나타났고 하는 이런 앞에 구차스러운 그런 것을 세상을 향하여 이야기한다는 자체가 내가 남한테 욕 얻어먹을 짓을 사서 하는 것 밖에 안 되잖아요.

당신의 키가 얼마입니까? 172입니다. 하면 될 것을 내가 172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예정하신 뜻이고 이런 구차스러운 것을 붙일 필요가 없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이렇게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이러한 수식어를 붙이는 것은 거추 상스럽게 들리시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가 구차스러운 수식어가 아니고 빼도 되는 그런 수식어가 아니고 정말 이런 사도를 찾고 싶었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사람이냐 하면 내가 여기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제가 여기 있습니다. 라고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에 한해서 사도가 이런 수식어 붙이는 것에 대해서 기뻐하고 반기고 동의하게 될꺼죠. 맞죠? 

아까 신월동 보살 이야기 한 번 더 할까요? 내가 절에 다녔는데 그 할머니가 하는 말이 ‘아이고 이 시금치는 우리 보림사 주지 스님이 좋아하시고’ 할 때 ‘그래요? 그 어느 절입니까? 아이고 나도 시금치 좋아하는데 만날까요?’ 내가 은근히 불교에 대해서 호응을 나타낼 때 저쪽에서 불교 이야기할 때 우리는 돈 2천원이 아니라 삼천 원 주고 살 수 있는데 내가 평소에 살아하는 모습이 나는 하나님 걸치는 것도 싫고 예수 그리스도는 싫고 그저 나는 내 편한대로 내 행복만을 위해서 오직 나만 잘되기 위해서 살아간다. 라는 이런 심중으로 살아가는 일반 현대인에게서 사도 바울이 ‘하나님과 우리구주 그리스도 소망’ 이런 되지도 않는 소리를 붙여 버리면 우리보고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우리는 짜증나게 마련이에요. 당신은 의견만 이야기해 판단은 내가 하겠어! 우리는 이런 마음인데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를 집어넣어버리면 이게 어떤 의미에요? 강요, 또는 협박, 공갈, 당신은 내 말 안 들으면 당신은 지옥가! 라는 이런 협박성 발언처럼 들려서 듣는 나는 우리는 굉장히 기분이 상한 거예요. 예를 들면 저는요 바울이라는 사람인데 제가 하나님께 특별히 택해서 사도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 의견한번 들어보세요. 이렇게 나와는 것 하고 하나님과 우리 소망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보냈습니다. 이 말 하는 것하고 듣는 느낌이 달라요.

한 쪽은 나는 이렇게 살아가는데 당신은 어떻게 사는지 당신이 알아서 제 말을 참고 해서 우리 좋은 게 좋은 거니까 내가 믿는 예수 한번 믿어보세요! 이거하고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면 당신은 지옥가! 이게 어감도 틀리고 뉘앙스가 틀립니다. 지금 이 디모데전서 1장은 어느 쪽일까요?  앞에 꼭일까요?  제가 예수 믿는데 당신도 내가 좋아하는 예수를 한번 믿어보시오! 이런 쪽입니까? 아니면 나는 사도인데 하나님 뜻으로 보냈기 때문에 내 말 안 믿으면 당신은 여지없이 그냥 지옥행이야! 어느 쪽입니까? 앞입니까? 두 번째입니까? 두 번째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듣는 순간 우리는 뜯고 싶은 거예요. 너나 그렇게 사세요! 니나 그렇게 살고 나는 내 행복과 내 평안과 내 잘되는 것만 챙기는 사람이니까 잘난 사도 당신이나 그렇게 살고 우리는 앞에 그런 것 붙이지 말고 나한테 이익이 되는 것만 챙겨서 이야기하세요. 라고 나올 때 디모데전서 1장 1절은 그런 식으로 이미 초장부터 충돌을 합니다.  충돌이 성경 내내 충돌로 이어 집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1장 15절에 미쁘다, 미쁘다는 말은 믿음직스럽다는 뜻입니다.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이야기했잖아요. 그러면 구원은 어디와 매치가 되지 않으면 구원이 되지 않으면 구원이 안 되는 겁니까?

어떤 단어와 매치되지 아니하면 구원이 안 되지요?  하나님께서 그냥 구원이 아니고 누구를 구원하러 왔습니까? 이 본문에 의하면 누구를 구원하러왔지요? 죄인을 구원하러 왔지요. 구원이라는 것이 성사 되려면 앞에 뭐와 매치되어서 구원이 성사됩니까? 죄인이 등장해야 되고 그 죄인을 건져내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나님다움으로 등장하겠지요.  그런데 만약에 어느 누구도 자진해서 나는 죄인이 아닙니다. 라고 나온다면 이 세상에 구원이라는 것이 성립이 될까요?  안될까요?  성립이 안되죠. 왜? 구원이라 하는 것은 죄인을 건져야 되는데 죄인과 엮여져서 되는데 죄인이 없다면 그리고 자기를 죄인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구원 자체가 성립이 안되는 겁니다.

세상에서 성립되는 구원은 뭐냐 하면 잘난 나를 나보다 더 잘난 하나님께서는 나도 잘났으니까 나를 천국에 넣어주면 내가 하나님께 섭섭하지 않게 헌금이나 봉사를 해 드릴 용의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 1장 15절에서 죄인을 구원하러 왔잖아요. 그러면 우리보고 우리가 나를 잘난 나로 간주하며 살아가는 우리를 뭐로 바꿀 필요가 있습니까? 죄인으로 바꿀 필요가 있는데 여지서 자진해서 죄인되고 싶은 사람 손 들어보세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각자 최선을 다하여 살기 때문에 모자란 것도 있고 부족한 것도 있지만 죄인이라는 소리를 듣기 원하는 존재는 아니에요. 절대로 그런 존재는 아닙니다. 누가 누가 잘났나! 그런 경쟁 마당에서 살아왔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실패는 있을 지언정 전적으로 죄인은 아니다 이 말입니다. 내가 실패했지만 그래도 아직 까지 나는 잘난 존재가 될 수 가능성이 있는 씨앗은 아직 까지 나한테 있다고 자부하고 싶은 그 자부심으로 희망을 걸고 살아온 거예요.  그런데 여기 보니까 죄인을 구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이 무슨 뜻이냐? 사도 바울은 구원은 성사 될 수 없다는 거예요. 구원은 성사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이야기이라는 거예요.

구원은 인간을 상대로 구원이 성사 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어느 인간도 자기를 범죄에다가 집어넣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인이 되게 되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게 됩니다. 할 말이 없기 때문에 이 세상에 어떤 천벌을 받더라도 거기에서 반항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자기가 죄인이라면 그 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천벌을 내리고 저주를 내리더라도 거기에 대해서 반발을 할 수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죄인이기 때문에 벌을 내렸는데 그것을 왜 반발합니까? 자기가 잘난 존재인데 벌을 내리면 제가 뭐가 잘못됐습니까? 하고 반항할 수 있는데 내가 죄인인데 천벌을 내리면 반항을 못하죠.

그러면 정리해 봅시다. 내가 죄인이냐 아니냐를 어떻게 구분한다? 하나님이여! 저에게 천벌을 내려 주시옵소서! 라고 자진해서 호소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러면 그것은 죄인이 없는 거예요. 우리는 분명히 해야 돼요. 하나님이여! 천벌을 내려주옵소서! 왜?  저는 죄인이기 때문에 합당하게 죄에 대해서 천벌을 내려주옵소서 나는 그것을 희망으로 삼겠습니다. 라는 나서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지요. 어떻게 천벌을 피해 볼까 싶어서 교회 와서 헌금 드리고 십일조 내 주고 봉사 꽤나 하면서 그저 수능 시험쳤는데 점수 나오게 해 달라고 빌고 전부 다 어떻게 하면 천벌을 어떻게 하면 될 수 있는 대로 천벌을 요령껏 피할 수 있는 그 방법만 연구하는 거예요.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나는 절대로 기죽지 않겠다는 거예요. 나는 절대로 남한테 고개 숙이지 안 하지겠다는 거예요. 내가 못난 인간이지만 그래도 잘난 희망만큼은 포기 할 수가 없다는 것, 내 안에 씨앗이 있는데 비록 내가 실패하고 못났지만 마지막 꺼져가는 불길이지만 그 불길 속에는 언제가 나는 잘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하는 희망 하나 붙들고 우리는 이 험한 세상을 버티고 살아온 거예요. 누가 못났다고 해도 나는 내 보기에 나는 잘난 존재에요. 그 잘난 존재에 구원이라는 그것은 성사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디모데전서를 보면서 바로 그동안 우리가 세상을 나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자기 파악도 안 된 상태에서 함부로 성경을 자기에다가 적용하는데 바빴다는 사실을 한번 생각을 해 줘야 되는 겁니다. 이 디모데전서를 언제 써셨느냐? AD63년경에 사도행전 마지막에 사도 바울이 체포 되지요. 체포되고 난 뒤에 잠시 풀려나옵니다. 사람을 오래 가둘 수가 없기 때문에 잠시 풀려나오는데 풀려나올 그때에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지 않고 어디로 갔느냐 하면 바로 아가야 마케도냐 쪽으로 왔었어요. 아가야가 어느 동네이고 마케도냐가 어느 동네냐?  그리스를 그리스라는 나라를 남북으로 생각해 봅시다. 남쪽은 아가야, 북쪽은 마케도냐 그 널린 지역을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 지역을 찾아갔어요. 그 지역을 찾아갔는데 에베소라는 동네가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 동네가 아니고 바다 건너 지금의 터어키동네입니다. 이태리가 여기 있고 이 사이의 바다를 아드리아 바다라합니다. 현재 이 나라는 크로아티아 나라라고 해요. 크로아티아 나라를 거쳐서 여기에 그리스가 있습니다. 필로시스 반도라고 해서 이 두 개가 나뉘어졌는데 지금은 여기가 다리로 이어졌어요. 고린도가 있고 스피디타 하는 동네가 있고 여기에 올림픽  성화가 열리는 아테네가 여기 있고 이 동네를 아가야라 하는데 이 동네가 마케도냐가 있는데 지금은 마케도냐 나라가 북쪽에 따로있어요.

여기는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레야 하는 이 동네의 지명은 옛날에 로마의 사도 바울이 AD63년경에 잡히고 난 그 전에 이미 한 바퀴 쭉 돌은 동네에요. 한바퀴 돌면서 그들은 여기 옥에 갇치면서 이 동네에 편지를 날렸습니다. 편지를 날렸는데 여기 바다 건너 지금의 터키라는데 여기 에베소있고 옆에 골로새서가 있어요. 골로새서, 빌립보, 갈라디아 이 동네에 편지를 보내요. 그 편지를 옥에서 보낸 편지라 해서 옥중 서신이라고 해요.

여기서 우리가 중요한 것을 알아야 돼요. 뭐냐 하면 하나님의 모든 계시는 틈이 갈라지지 않으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강의의 첫 번째로 제일 중요한 언급을 한 거예요. 하나님의 계시가 실감 나려면 우리 자신의 뜻이 하나님 앞에 거부당하는 그 틈새가 있어서 틈이 갈라지면서 미쳐 내가 몰랐던 하나님의 뜻이 거기서 솟아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그 뜻을 파악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우리한테 적용시켜여요. 그것은 전부 다 위선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그 내막을 조사해 보면 그게 하나님 좋으라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순종하는 나 잘되라고 나의 행복을 위해서 그 말씀을 지킨다고 지키는 거예요. 어떤 성경 말씀도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우리를 보호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호하는 것은 교회를 보호하지 나를 보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내가 교회에 들어가면 하나님에게 보호받는 게 맞잖아! 이런 논리가 되지요? 하나님은 나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를 보호하지요. 그렇다면 교회를 보호하다면 내가 그러면 여기있다가 교회에 들어가서 등록을 하던가 교회에 소속되면 되잖아 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준비한 교회는 우리의 힘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요. 왜 들어갈 수가 없느냐 하면 하나님이 교회에 들어간다는 것은 곧 구원을 의미하는데 그 구원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죄인이 되지 아니하면 구원이 되지를 않습니다. 잘난 체해서 들어가는 교회는 많아요. 하지만 천국과 연결된 교회는 전부 다 자도가 죄인인줄 아는 사람만 교인이 돼요. 그리고 그 머리위에는 피가 묻혀있고 그 죄인에게 피가 묻혀있으면 그 피 묻은 죄인을 주께서 건져 올려오게 되면 그것이 바로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이 되는 겁니다. 이러한 원리원칙은 구약부터 계속 내려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죄인 되면 되잖아! 죄인 되려면 우리는 그냥 있으면 죄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항상 의인의 기반에서 살아가거든요. 내가 잘났기 때문에 지금 살 자격이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잘났다는 나를 의인 만들려면 어떻게 하느냐 하면 영어로 crack, 금, 한자로 말하면 균열, 우리 자신이 가뭄에 밭이 갈라지듯이 쫙쫙 갈라지는 지진사태가 벌어져야 돼요. 쫙쫙 갈라지면 우리가 쭉쭉 쪼개지죠. 쪼개지면 그 쪼개지면서 숨어 있던 발에 밟혀서 숨도 못 쉬고 있던 하나님의 복음 진리가 깨진 그 틈을 통해서 우리에게 올라오게 되면 그것이 마그마처럼 우리에게 퍼져버리면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죄인이 되는 겁니다.

택한 백성은 하나님께서 예정된 자이기 때문에 이미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 밑에 깔려있습니다. 깔려있는데 그리스도의 용서와 복음을 우리는 알 길이 없었어요. 왜냐 하면 내가 너무 잘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누구한테 용서 받는다는 자체가 우리는 굉장히 기분나쁘게 하고 우리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어요.  내가 무엇이 못나서 내가 용서받아야 됩니까? 시키는 대로 하면 되지 뭐가 문제가 돼서 용서를 받아야 돼요?  용서한다는 것은  기분좋은 말 같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어떤 말이에요? ‘우리 성도님 용서 받아야 돼’ 하면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어린 애가 와서 용서 받아야 돼 하면 우리는 쥐어박고 싶지요. 뭐뭐뭐 내가 무슨 짓을 했는데 용서를 받아야 돼?  내가 얼마나 잘났는데 예수 믿을 정도로 잘났고 교회 갈 정도로 잘났고 나는 남이 하기 어려운 전도와 선교와 헌금, 십일조, 주일성수 까지 할 정도로 잘났는데 뭐가 내가 문제라?  위선이죠. 그거 위선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 교회에 등록을 했고 지금 장로가 됐고 목사가 됐다. 신학박사가 됐다. 뭐가 문제인데?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할 거야. 보호 안 합니다. 틈을 갈라지게 하죠. 착한 백성, 틈을 갈라지게 하게 되면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주님이 이미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 용서는 우리의 위선에 숨이 막혀있었는데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우리가 모든 자기 뜻이 안 깨지고 다 조각조각 나면서 내가 여기 있고 내가 기대하는 꿈이 있는데 전에는 꿈과 내가 결속이 되었다고 여겼는데 지금 잘난 나와 지금 보다 더 잘난 내가 저쪽에 있는데 손잡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갈라집니다. 쭉 갈라지면서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느낄 때 다시 그 갈라진 틈에서 올라오는 주님의 용서를 다시 보게 됩니다.

내가 나는 내 생각만 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내 생각만 했습니다. 하는 것을 느끼면서 주께서 교회라 하는 것은 자기 생각을 하지 않게 되는 사람의 집합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자기 생각을 하지 않아요. 왜 그래야 되느냐 하면 천국의 삶은 가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지상에서 이미 천국의 삶이 계시가 돼야 돼요. 그럼 천국의 삶은 내가 산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누구와 더불어 사느냐가 중요 하거든요.  누구와 더불어 사느냐?  예수님과 더불어 살아야되는데 예수님과 더불어 산다는 것은 일체 내 자랑과 내 공로가 일체 모든 것이 입도 뗄 수 없는 그런 분위기 속에 사는 거예요. 너무 주님이 좋아서 감히 내가 뭐를 했습니다. 라는 말을 못할 정도의 그러한 환희 속에 살아야 되는 게 천국이다 이 말이죠.

만약에 내가 내 자존심이 살아있다면 그것은 천국은 가지도 못할뿐더러 가서도 못살아요. 가서 살 수 없습니다. 천국 보좌 광장에서 촛불 시위할 수 있어요. 데모할 수 있어요. 그것은 천국이 아니고 지옥이겠죠. 이 땅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구원이라든지 천국이라든지 교회는 우리의 능력으로 성사될 수가 없습니다. 안됩니다. 그래서 ‘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에 따라’ 할 때 이 말이 나오는 것은 어떤 누구도 나처럼 하나님이 좋고 예수님이 무조건 좋아요 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기정사실화 시켜서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을 하는 겁니다.
 
이 편지를 보는 것은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 디모데전서는 아무도 이 편지를 알아듣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알아 들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전부 다 왜곡할 뿐이지 이 진수를 알아듣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무도 구원 받지 못하잖아! 라고 하실꺼예요. 힌트를 드리겠습니다. 아무도 구원하지 못하는 이 말씀이 이 말씀에 합당한 사람을 새롭게 창조해 냅니다. 말씀에 의해서 새롭게 창조해 내요.

그렇다면 디모데전서를 알아듣는 사람은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나는 디모데전서를 알아들었다, 나는 사도의 편지를 알아들었다.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었는데 이 말씀 자체가 나에게 힘을 발휘하고 영향력을 주니까 말씀에 의해서 내가 깨어지고 보니까 나는 없고 말씀을 위한 말씀을 증언하기 위한 그러한 다루어 지는 말씀이 있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나를 택하여서 새롭게 나를 다룬다는 사실을 고백하게 되는 겁니다.

‘말씀으로 인하여 저는 이 말씀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나는 이해됐습니다.’ 가 아니라 말씀에 의해서 말씀 자체에서 나오는 쏟아지는 능력에 의해서 나는 이 말씀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말을 듣는 여러분들은 역시 나처럼 못 알아 들을 것입니다. 만약에 알아 듣는다면 여러분의 신앙연륜이아니라 그것은 지금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주님의 능력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 두 사람은 자기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둘다 어디서 공통점이 만납니까? 당신이나 나나 둘다 말씀의 영향력 때문에 우리 둘은 성도가 되었고 교회가 되었고 복음을 알아들었다 라는 고백을 하겠죠. 그러면 모든 영광은 누구한테 돌립니까? 그런 작용을 하신 예수님께 돌리죠. 그것이 바로 지금부터 이미 시작되는 천국의 삶입니다. 일체 자기 자랑이라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게 하는 겁니다. 그게 천국의 삶이에요. 지금부터 천국의 삶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가지 못하지요. 지금은 딴 짓하다가 죽어서 하겠다는 것은 그런 것은 성립이 안 됩니다.

이미 지금부터 말씀에 의해서 해야 되는 겁니다. 말씀은 먼저 있고 내가 다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움직여서 나를 고정자리에 있다고 간주하고 말씀이 우리를 다루죠. 말씀이 다루어지게 되면 우리는  아무리 활동해도 나는 내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을 서슴없이 이것을 고백하게 되어 있어요. 내가 서울 갔다 부산 갔다 아무리 뛰어다녀도 역시 내 자리는 나만 사랑하는, 나만 잘되면 좋다는 그 죄의 자리에서 그냥 한 발자국도 벗어난적이 없었습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말씀이 찾아와서 말씀이 스스로 찾아오기만한 것이 아니고 말씀이 찾아와서 우리에게 능력이 임하니까 이것이 바로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내가 죄를 져서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구원받아야 된다는 구원의 법칙에 우리가 말려들어간 거예요.

구원이라는 방정식을 성립하기 위해서 되지도 않는 나를 택하여 세워버린겁니다. 어떤 역할로?  죄인의 역할로 세우고 주님은 구원자 역할로 세워서 주님과 우리의 만남으로 말미암아 죄인을 구원했다는 그 말씀 자체가 성사되도록 그렇게 주님께서 조치를 해 버린 거예요. 우리는 그냥 당해 버린거예요. 마치 강간당하듯이 성폭행 당하듯이 그냥 주님한테 당해 버린거예요. 무슨 팔자가 이런 팔자가 있어요? 열심히 노력해서 말씀 믿고자하는 것은 위선이라고 제껴 버리고 그것은 위선이라고 차 버리고 그냥 아무 것도 없는데 그냥 제가 죄인이거든요. 라고 손들고 나올 수 있는 것, 그럼 저쪽에서 네가 무슨 죄를 지었지?  저는 죄 짓고 없고 관계없이 무조건 죄인입니다. 이런 고백이 나온다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나올 수 없는 고백입니다.

오늘 안양 강의에서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반성하지 마시고 반성을 당해야 되고 회개하지 마시고 회개를 당해야 됩니다. 우리는 수동적이에요. 성경에 나오는 모든 회개는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지 내가 하는 회개는 그것은 회개하는 나를 아주 대견스럽게 보는 남들은 회개 안하는데 나는 회개했다 하는 것을 얼마나 자부심을 느끼는지 그것은 위선의 또 하나의 변형입니다. 위선의 또 하나의 모습이에요. 그것은 본인도 알고 주님도 알고 귀신도 알고 남들만 모를 뿐이지요.

내가 안 믿다가 예수를 믿음으로 지금 보다 더  잘난 존재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에 흐뭇해하는 그 자부심은 주님도 알고 귀신도 알고 나도 알아요.  그 자체가 전혀 성경과 구원과 관계없는 나의 하나의 취미 오락생활이라는 사실을 알아요. 에베소에 디모데를 보내놓고 이 편지를 보냅니다. 왜 보내느냐 하면 사도 바울이 지나갔던 모든 교회가 전부 다 이단들이 차지했어요. 이 말은 복음을 뿌리면 반드시 마귀가 등장하겠끔 뿌립니다. 복음을 뿌리는 자리에 마귀가 자기의 얼굴을 내밀게 되어 있어요. 왜 그러느냐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여자의 후손, 그게 곧 하나님이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반드시 뱀의 후손이 그  현장에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성경은 우리를 구원하려고 준책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기의 프로젝트가 곧 현실인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들러리로 인간들을 이 땅에 만들어 낸 거예요. 이것을 한번 정리해 봅시다. 지금 까지 이야기한 것을 간단히 이렇게 정리합니다. 중심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창조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중심이 있고 그 다음에 화살표이고 창조가 있는 것이 성경적인데 우리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창조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중심 잡으려고 하는 겁니다. 이 창조 중에 누가 있느냐 하면 내가 있어요. 하나님이 어쨌든 저쨌든 하나님이 나를 만들어 놨잖아요. 만들어 놨으면 저를 구원하라 말이에요.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되고 자식이 됐으면 자식의 팔자, 장래, 운명에 대해서 아버지가 책임 안 지면 누가 책임집니까? 아버지는 사랑이 많으니까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만들어 놨기 때문에 나를 구원하라 이 말입니다. 하나님이여! 라고 주장하는 거예요.

이 출발이 뭐에요? 이미 창조했으니까 책임지라는 이야기잖아요. 뭐가 빠졌습니까? 사람들은 말해요. 하나님께서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는데 이것은 창조 아닙니다. 이것은 철학적 창조의식이에요. 물론 여기서 신학이 나왔지만 그러니까 신학이나 철학이나 전부 다 성경하고 상관없는 거예요. 인간의 입맛을 돋우워주는 겁니다. 인간의 이성에 납득되는 소리를 한 거예요. 여러분 없는데서 있었습니다.  없는데서 있다는 뜻은 없다는 무, 있다는 유, 없다! 있다! 어디서 판단하느냐 하면 이미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내가 없는 경우를 무라고 하고 내가 생긴 뒤를 유라고 하는 출발점이 뭐냐 하면 나부터 출발하니까 이게 아무리 성경용어를 입혀놔도 이것은 하나의 인간들의 철학에 불과합니다.

성경에 창조는 무에서 유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창조는 예수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다라고 골로새서1장 15절, 16절 말씀입니다. 지금 나에게서 출발하게 되면 모든 구원이고 예수이고 간에 결국 좋은 소리 다 해도 마지막에 돌아오는 것은 나, 잘되기로 돌아와요. 나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나에게 귀속, 되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부메랑이라 해요. 내가 휙휙휙 던지면 그 칼날이 결국 나한테 톨아오잖아요. 이것을 가락교회에서 강의 할 때 뭐라 했습니까? 이게 초월적의식이 아니고 초월론적의식이라 했지요? 

사람의 모든 행동은 보상받기 위해서 하는데 그 보상하기 위해서는 빈터가 있다.  그 빈터가 뭐냐?  내 욕망이 세상이 내 욕망을 마저 채우지 못할 때는 빈 공간으로 남겨둬요. 빈 공간을 남겨두는데 그 빈공간이 뭐냐 하면 비전이 되는 겁니다. 꿈이 되고 소망이 되는 거예요. 인간은 자꾸만 빈 공간을 남기고 그 빈공간을 일치시키고 접근해 나가려고 분투, 노력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빈 공간을 마저 채울 때 우리는 그것을 보상 받았다고 하는데 결국 신에게 나와서 기도 하는 것은 내가 내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신으로부터 행운과 보상을 얻어먹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예요. 그런데 보상이 안될때는 나오는게 뭐냐? 복수가 나오죠. 그래서 인간의 모든 행동들은 복수심에서 나온 행동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기도 한 것도 신에 대한 복수이고 이웃을 사랑한 것도 복수이고 왜 내 고귀한 것을 건드리느냐 이 말이야!  그러니까 나를 건드리지 마란 말이야 하는 복수심이에요. 애들이 엄마 앞에서 공부를 잘하는 것도 복수심이에요. 보란 듯이 내가 얼마나 잘난 존재인가를 보란 듯이 그래서 내가 나머지 미진한 보상에 대해서 채우려고 하는 거예요.

이 모든 것이 성경을 봐도 마찬가지이고 교회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부 다 복수심의 화신이 되어서 교회에 와요. 이렇게 비는데 복 안줄 꺼야?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이래 바쁜데 교회 나오는데 복 안줄 거야? 남보다 더 성공하지 못할 거야? 이래 나오는 거예요. 성경은 전혀 이러한 종교적인 노림수와는 관계없습니다. 성경은 모든 것이 보이지 않는 현상 곧 예수님 중심으로 창조되었어요.

요한복음 1장에 보면 태초에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태초에 말씀이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제시하는 창조는 우리인간이 아닙니다. 말씀이 있었어요. 그것은 잠언서 8장에 있는 이야기 예언한 것인데 잠언서 8장에 보면 태초에 지혜가 있는데 그 지혜가 모든 걸 다 만든다고 했고 그 지혜를 모르는 자는 생명을 잃은 것이라고 되어 있어요. 그동안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출발점을 나로부터 출발시켰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받기 원하는 사람이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했어요. 사랑받기 원할 것 같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려면 십자가 보내주고 그런 소리 하면 안돼요. 아예 뭐부터 없애야 되느냐 하면 지옥부터 없애고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해야 돼요. 지옥 놔두고 사랑한다는 말 하면 안돼요. 지옥에 가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개입니까? 코끼리 갑니까? 지렁이가 지옥가요? 지옥에 가는 사람이 누구지요? 지옥에 가는 사람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 만들었잖아요. 하나님이 만들어 놓고 자기 자식을 지옥에 보냅니까? 차라리 여호와 증인처럼 지옥이 없다하는 것이 솔직하지 않겠어요? 

지옥이 없애는 것이 너무 심하다면 선악과를 없애야 돼요. 괜히 선악과 만들어 놓고 선악과를 따먹고 죽게 하는 그런 행포는 무슨 행포에요?  어린 애 장난질도 아니고 장난이 심해도 너무 심하잖아요. 그리고 선악과를 따먹더라도 심은 놓은 것까지 좋아요. 철조망을 쳐 놓던지 전기 줄로 해 놔서 접근을 하지 못하던지 그렇게 해서 못 따먹도록 해 줘야 되지 않습니까? 집에 농약이 있는데 애 보고 농약 먹으면 죽는다 소리를 할 때 그러면 책임 다 한거예요? 엄마가 농약을 어떻게 해야 됩니까? 애 키가 닿지 않는 곳에 보이지 않는 곳에 치워놓아야 엄마가 엄마 노릇을 다 했잖아요. 

그런데 먹으면 죽으리라 한 것을 하나님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것을 동산 한 가운데 심워놨죠. 그러면 어떻겠습니까? 보기만 해도 진저리나도록 피하게 만들었습니까? 어떻게 했습니까? 보암직도 하고 그 다음에 뭐에요?  그 다음에 무슨 말입니까? 먹음직도 하고 탐스럽기만한 누구 놀릴일있습니까? 실컷 따먹지 말라는 말은 뭐고 따먹으라고 유도 하는 것은 또 뭐에요?  그것은 에덴동산부터 해서 모든 선악과와 생명나무는 그 만들어진 이유가 인간을 사랑해서 만든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사랑해서 예수님중심이었습니다.

인간은 선악과 보기 전부터 마귀가 와서 예수님의 중심을 뭐로 바꿨느냐 하면 내 중심으로 바꾼 거예요. 나를 구원할 때 좋은 하나님이고 나를 지옥 보내면 싫은 하나님인거예요. 그래서 지옥간 사람은 전부 다 자기 하나님이 그 인간을 싫어하게 하는 것도 맞지만 본인들이 하나님을 안 좋아 했던사람들이 지옥가는 겁니다. 왜냐 하면 너무나 하나님은 자기 밖에 모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밖에 모르고 우리의 사정은 고려하지도 않는 하나님입니다.

디모데전서는 모든 교회가 다 바뀌어졌습니다. 모든 당회장들이 이단들입니다. 사도는 그것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것을 하나의 절차로 보고 복음이 복음답게 드러나는 하나의 효과로 보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시장에 가서 장갑을 살 때 한 짝만 삽니까? 아니면 양쪽으로 삽니까? 장갑 주세요. 하면 그 주인이 한짝 들고 장갑 얼마입니까? 예 2천원입니다. 저거는요? 저것도 2천원입니다. 합해서 4천원입니다. 이렇게 팝니까? 하나 들면 둘다 들지요.

하나님의 계획은 뱀의 후손만이 아닙니다. 여자의 후손과 짝을 이루어요. 항상 짝을 이루어서 일을 하십니다. 여자의 후손도 영적이고 뱀의 후손도 영적이에요. 인간은 빠집니다. 인간의 구원이라 하는 것은 두 쪽의 싸움의 여파로서 그러한 부산물로서 또한 전리품으로서 우리는 이긴 쪽에 속해 버립니다. 그러면 그게 구원되는 거예요. 이게 구원이 내가 천당 가는 내 싸움이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 싸움에서 우리는 중지되어야 되고 금지돼야 됩니다. 손을 떼야돼요.

구원은 주님이 그냥 우리를 사하는 권세에 의해서 용서하시면 되는 거예요. 다만 우리는 그 구원의 근거가 오직 십자가에 있다는 것을 성령을 통해서 알면 돼요.  복음 깔끔하지요? 깨끗하지요?  모든 것에 손을 떼고 주께서 하신 것을 그대로 공짜로 얻어먹으면 그게 바로 천국이요 그게 구원입니다. 마치 포도원 비유에서 제일 마지막에 온 사람 특징이 뭡니까?  마지막에 온 사람이 한 데나리온 주니까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주인에 대해서 원망했습니까? 감사했겠습니까? 당연히 감사했지요. 세상에 한 시간 일했는데 하루치 임금을 주는데 세상에 이런 횡재가 어디 있어요? 그런데 제일 앞에 온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앞에 온 사람은 분명히 약속대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화를 내고 있어요. 그래서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된다 이야기했거든요. 그리고 그 이야기하면서 단 단서가 뭐냐 천국은 이와 같으니 뒤 바꿈이라는 현상이 없이는 천국이 드러날 수가 없다는 거예요.

바뀌어져야 되는 거예요. 사도가 복음전하고 난 뒤에 나중에 전부 다 이단들이 차지했습니다. 그래야 돼요. 그래야 디모데전서의 의미가 생겨요. 복음 전하고 난 뒤에 ‘야, 복음대로 해서 건전한 교회된다.’ 이런 교회 없어요.  여러분, 십계명을 알지요? 아는데 그러면 성경에서 출애굽기 20장 지워버릴까요? 아는데 지워버려야지 성경 왜 둡니까? 성경은 십계명은 우리가 아는 것과 상관없이 매일같이 우리에게 우리의 허락도 없이 지금도 십계명 가지고 우리를 되풀이 합니다. 왜?  말씀이 영향력으로 우리가 구원받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말씀을 지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그 십계명의 완성으로서 계속 우리에게 주어지기 때문에 구원받는 거예요. 십계명을 가지고 우리를 치면서 너는 간음했고 너는 살인했고 아무 것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너를 위해서 이 십계명의 완성으로서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너를 사한다. 그 안식일의 결과가 뭐냐 하면 자비입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한다는 그 말씀 앞에 뭐가 있냐, 나는 안식일에 주인이다. 내가 주인장이 와서 너희 죄인에게 그냥 용서를 하게 되면 이게 안식의 마지막 종점이 되는 거예요. 더 이상 안식일의 자체가 없습니다. 안식일이 없으면 주일도 없어요.

안식일 마지막에 뭐냐 하면 용서해주는 주인공이 나타나서 우리를 용서해 주면 그것으로 안식이 다 지킨 게 돼요. 십일조 같은 것은 몇 % 했느냐는 말이 아니고 십일조를 하신분이 있어요. 우리 대신 누가 하느냐 하면 예수님을 자기 몸을 십일조로 바치기 때문에 십일조 바치면 복이 오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안 받쳤지만 자기가 맏아들이기 때문에 주님이 십일조를 하심으로서 받았다는 증거로서 우리에게 복이 주어지는 겁니다. 돈 한 푼 안들이고 우리는 십일조 한 모든 축복을 우리가 공짜로 다 받는 거예요.

십일조가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십일조를 한다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에 침을 뱉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참 쓸데없는 짓 했다! 우리가 십일조할 건데 왜 자기가 앞서서 하느냐? 참 주님도 오지랖이 넓어! 이렇게 되어 버려요. 복음을 모독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바로 율법을 지키는 자체가 복음을 모독하는 겁니다. 다 이루었는데 율법 외의 의가 나왔는데 A형 문항 있고 B항 문항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은 이미 A형 문항으로 시험을 쳐놨는데 새삼스럽게 B형 가지고 B형 시험 잘 쳤습니다.  들이대면 하나님께서 거기에 대해서 합격을 해 주시겠습니까? 문제가 다른데요. 주께서 내신 문제는 그 문제가 아니고 십자가에 의하여 율법말고 율법외에 의로 우리를 구원하는데 율법 들고 와서 율법 지킬 만큼 지켰습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노력했습니다. 하고 들고 오게 되면 복을 주겠느냐 말입니다.

이미 복은 다 주고 없는데 야곱에게 복을 다 줬는데 예수한테 복이 하나도 안 남아 있어요. 그렇다면 십일조 하지도 않았는데 복을 받았다니 그 받은 복이 뭡니까?  그 받은 복은 딴게 아니죠. 이미 우리는 이 땅에서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다는 골로새서 3장 1절에서 4절의 복이죠.  그 말은 뭐냐 하면 ‘그만 살아도 돼!’ 이런 뜻이에요. 안 살아도 돼! 네 처소가 하늘에 있어!  네 자리 마련해  놨어! 이미 예약되어 있다 말이야!  그러니까 네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도 상관없어! 괜찮아! 자식이 애 먹여?  그러면 자식이 애 먹여도 죽어도 괜찮아! 왜?  이미 네 자리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바로 복입니다.

이건희 회장이 돈을 얼마나 내야 그 자리를 얻겠습니까? 이미 그 자리는 예약은 끝났어요. 주님이 다 알아서 배분했기 때문에 새삼 돈 준다고 그게 차지할 것은 안 됩니다. 디모데전서 이야기 다시 합니다. 이미 모든 교회는 이단으로 물 들었습니다.  따라서 디모데전서를 통해서 복음이 무엇인가를 이미 온 천지가 진흙구덩이 된, 모든 교회가 이미 진흙 구덩이가 된 그런 입장에서 그 위에서 다시 한 번 복음을 알았다는 여기는 그 이단들 위에 진짜 이단이 왔을 때 둘 사이는 어떤 충돌과 어떤 괴리가 있는가를 너희들이 봐라 이 말입니다.

전에는 복음도 모르고 말씀도 모르는 그것 가지고 생판으로 야, 주의 말씀이다. 바르게 살아야지 라고 순수했던 그 교회가 이미 복음이 뭔지 다 아는 상태에서 그들은 복음에 반하는, 반대하는 그런 모습들이 등장했을 때 그 모습에 견양해서 디모데전서가 주어지게 되면 디모데전서뿐만 아니라 옥중서신이니까 로마서, 갈라디아서, 골로새서, 빌립보서, 디모데전서 전부 다 로마에서 썼거든요. 로마라고 한 것은 이미 한 버튼 거치고 난 뒤에 쓴 편지다 이 말이죠.

따라서 거치고 나서 이게 문제가 안 된다면 이 사람들한테 맡기고, 당회장한테 맡기고 편지를 쓸 이유가 없어요. 이미 여기서 문제가 일어난 거예요.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성령, 이미 여기서 확산되고 있습니다. 전염병처럼 말입니다. 로마서 갈라디아서 이렇게 ‘그게 아니야 그것은 이단들이 씨를 뿌린 거야, 그게 아니야’ 하고 수정하고 교정하는 그런 편지들을 쓸 수 밖에 없었습니다. 히브리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양쪽을 처음에 준 것, 디모데전서, 데살로니가 전후서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거기에다 겹쳐서 주는 디모데전서를 우리가 받습니다. 받을 때 사도 바울이 디모데전서1장 15절 마지막에 뭐라 했습니까? 죄인 중에 내가 괴수입니다. 하는 말이 무엇을 염두해 두고 하느냐 하면 복음 안다, 성경 지켰다, 말씀지켰다 그래서 우리는 잘났다 하는 그 당시에 모든 이런 이단들을 염두해 두고  너희들이 잘났어?  그러면 나는 죄인의 괴수할게,  어느 쪽이 복음에 있는 사람인지 편지를 통해서 내가 너희들에게 말해 줄게, 그래서 이 편지를 보낸 겁니다.

디모데후서는 아주 더 심하게 이야기해요. 디모데후서에서는 사도 바울은 이미 떠날 준비를 다 했어요. 사도 바울이 AD67년경에 로마에서 죽어요. 아마 바로에 의해서죽었다고 짐작은 되는데 죽기 전에 마지막 편지를 날립니다. 디모데후서에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마지막 부음이 되고 뭐 이런게 나와요.  마지막 죽으면서 나에게 생명의 면류관이 준비되었다고 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너희들이 이단이 되니까 진짜 복음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서 얻는 부귀와 성공을 원한 것이 아니고 진짜 주께서 준비한 것은 세상적인 성공과 출세가 아니라 생명의 면류관의 준다. 이것은 내가 이것을 얻고 자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얻고자 그렇게 모아 놓은 거예요.

사도 바울이 그것을 얻을 수 있다가 아니라 주께서 사도 바울을 사용하다보니까 결국 사도 바울 머리에 남는 것은 생명의 면류관, 떨어진 것은 세상적인 모든 부귀영화는 다 떨어지고 남는 것은 생명의 면류관, 그거 하나 남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러한 사도의 모습을 보여 주면서 따라오려면 따라와! 하는 겁니다. 자진해서 따라갈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나님도 나를 위한 하나님이지 하나님애해서 내가 몸 바칠 용의는 그러한 용기는 우리에게는 애초부터 없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와 후서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딱 적합하게 주어집니다. 왜?  회개용으로 …….

여기에서 지적 하는 모든 것이 남이 아니고 바로 저와 여러분을 향하여 다시 한 번 이 말씀은 우리를 벌거벗게 만들어 내는 겁니다. 디모데전후서를 우리가 외면하지 맙시다. 바로 네가 이단이라고 지목하는 사도 바울의 마지막 편지입니다. 10분 쉽시다.

서울 의존교회131108b (중심)―이 근호 목사

지난 시간에 제가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 하면 중심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그 중심을 퍼뜨리기 위해서 창조가 피조물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내가 피조물이고 창조물이기 때문에 창조에서 중심을 찾아가는 방법으로 화살표가 중심을 찾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피조물이 이미 있는 존재잖아요. 내가 있으니까 있는 이것을 내가 스스로 무가치하게 만들 수가 없어요.

남들은 어떻든 나는 잘난 거예요. 내가 있는 존재가 신을 찾아가는 방법이, 중심을 찾아가는 방법 중의 하나가 창세기 4장에서 뭐라 하느냐 하면 제사를 드립니다. 가인이 제사를 드릴 때는 누가 나을 만들었으며 나는 어떤 존재이며 나는 어떻게 하면 구원받으며 어떻게 하면 신으로부터 복을 받을 수 있는가에 나름대로의 마지막 최선을 다한 것, 할 수 있는 전부가 뭐냐? 제사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 가지고 추수해서 제사 지내는데 하나님이 받았습니까? 안 받았습니까? 안 받았죠. 끝났지요. 구원은 없는 거예요. 그러면 아벨은 구원받았잖아 하면 아벨은 구원받은 방법이 복잡해요. 왜 복잡 하느냐 하면 먼저 창조가 중심을 찾아가는 이 되지도 않은 짓, 이 짓을 한 사람이 나를 죽이고 때려줘야 그게 하나님의 중심이 되는 겁니다.

복잡하지요. 십자가 빼고 구원받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면 십자가를 통해서 가려면 십자가 사건이 유발돼야 되고 그 십자가 사건이 유발되려면 이 땅은 전부 다 가짜가 돼야 됩니다. 가짜가 돼야 되고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진짜를 쏙 뽑아낼 때 기다렸다는 듯이 뭇 매를 가해야 돼요. ‘이게 어디서 우리하고 다른 소리를 해’하고 때려주면 아벨은 어떻게 죽었습니까? 형이 때려죽였지요. 그 때려죽인 피가 있잖아요. 그 피가 스가랴의 아벨의 피의 노선에 따라서 예수그리스도 오게 되어 있어요.

복잡하지요. 우리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지요. 내가 여기 있는 것은 신이 창조했다 따라서 나는 신에게 최선을 다하여 바르게 살면 된다. 그 나라 의를 구하라 했으니까 그 나라 의를 구하면 된다. 이런 식이 아니라니까요 ‘십계명 주셨다, 지키면 돼지’ 이게 바리새인들이 하는 짓이거든요. ‘율법은 지키면 돼지’이게 아니고 절차가 그 과정이 중간에 누가 트는게 있어야 돼요. 어떻게 트는가 하면 인간이 자기 본성대로 창조물이 중심을 찾아가는데 그게 화근이 되어서 진짜 하나님의 중심에 속한 사람을 때려 죽이는 그런 사건이 있어야 되고 그 사건을 통해서 그들은 비로소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겁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이 구원을 받을 때 먼저 태어나자마자 구원받는게 아니고 먼저 뭘해야 됩니까?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여야 되는 작업을 했지요. 자기가 그렇게 하는 것은 자기가 알고 있는 여호와 앞에 극단적인 신앙심을 보이는 것으로 자부했습니다. 그 신앙심 끝에서 주님을 만나고 주님은 뭐라고 했느냐 하면 사도 바울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했어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했습니다. 그 전까지의 사도는 예수는 하나의 이단이에요. 그냥 과대망상증 환자였습니다. 미친 사람이에요. 괜히 데들다가 맞아죽어 마땅한 존재에요. 성령이 안 보면 다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예수님이 나타나서 그냥 에고 불쌍하다가 아니라 너는 나를 뭐했다?  핍박했다는 거예요. 가인은 누구를 핍박했습니까? 제사를 거부 당은 가인은 유일하게 제사를 받은 아벨을 핍박했죠. 죽였잖아요. 똑같은 방정식입니다. 그 방정식 외에는 천국갈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그 방정식만 반복해서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핍박을 했고 그 핍박당한 피해자가 예수님이고 피해자가 도리어 자기를 피해를 입힌 가해자를 용서하는 식으로 우리를 구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구원받게 되려면 먼저 주님에 대해서 핍박하는 과정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을 본적이 없습니다. 본적도 없는데 무슨 주님을 멱살을 쥐고 주님께 침을 뱉고 할 수 있습니까? 주님을 봐야 뭐 핍박을 하는데 본적이 없어요. 본적이 없으니까 핍박이 없을 것이고 핍박이 없으면 핍박하는 자가 나를 구원한다는 그런 방정식이 적용 안된다면 우리는 구원을 못 받는데 어떻게 될까요? 

뭐 핍박할 수 있는 기회라도 줘야 되는데 괜히 어떻게 해야 됩니까? 유리창 깨고 기독교 단체에 가서 예수는 하나의 보통 인간이라고 외치고 그렇게 할까요? 핍박하기는 우리는 매일같이 주님을 핍박합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세상에 창조물이 중심을 찾아간다는 것은 창조 중심과 나는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있다는 선입감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약에 한계의 중심된 기업이 무슨 기업이죠? 여러분 잘 아시는 삼성그룹이죠. 만약 여러분이 자녀를 키웠다 키웠는데 공부를 잘했다 그래서 대학을 졸업했는데 취직자리가 나왔다. ‘엄마, 나 삼성 그룹에서 나오라 하는데 갈까?’‘가지마!’ ‘왜?’ ‘거기는 한국의 중심이 아니야’하면 그 아이가 ‘엄마 돌았나?’ 할꺼예요. ‘엄마  삼성 그룹이 현재 한국의 중심이야!’ 기업뿐만 아니고 심지어 이번에 야구팀도 1등했어요. 삼성인되면 출세한 거야! 그러면 엄마가 ‘그래? 그러면 거기에 원서 내야지’이 말은 내 아이라는 피조물은 중심과 끊기지않고 연결되어있는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가인은 신에게 제사 드렸습니다. 이 세상에 중심과 연결됐다고 생각하고 제사 드린 거예요. 주님께서는 뭐라 하느냐 하면 그것은 너의 일방적인 생각이고 이 중심은 어떻게 되어 있다?  끊어져 있다는 거예요. 그 끊어져있는 사태를 어떻게 이 지상에 새기느냐 하면 바로 아벨의 죽음이라는 형식으로 이 땅에 새겨버립니다.

그러면 이 땅이 뭡니까? 무죄한 피가 흘러지게 되면 그 무죄한 피가 천국과 이 지상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가 됩니다. 십자가 외에는 다른 구원의 능력은 없습니다. 그게 바로 사도 바울이 이야기했던 내가 봐온 복음 외에 다른 것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냥 하나님의 죽음이 아니고 십자가 사건이에요. 이 모든 십자가 사건은 피조물이 건방지게 중심을 찾겠다는 모든 종교적인 시도를 차단시키고 그것을 끊어져 있다고 통보하는 그 사건이 십자가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육체를 입고 왔어요. 이 육체 입은 그 막장 종말이 뭐냐 하면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육신을 입었다는 자체가 버림받아야 될 마지막 운명입니다. 그 다음에 그 간격, 죽어있는 간격은 누구 소관입니까? 이것은 아버지 소관입니다.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이 저한테 적용되게 하옵소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이 적용되게 하옵소서! 하니까 주께서 죽은 지 사흘만에 부활시켰습니다. 그렇다면 그 죽음과 그 부활 사이에 개입할 수 있는 분은 오직 누구밖에 없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밖에 없겠지요. 그래서 아버지의 뜻에 의해서만 우리가 구원됩니다.

들어보니까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같은데 다시 새롭지 않습니까? 나는 구원받아야 돼 라고 생각하고 아버지의 뜻대로 구원했다는 소리 하고 나는 구원과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인데 아버지 뜻대로 나는 구원받았다 하고 어느 쪽이 천국에 합당한 사람이 되겠어요?  두 번째죠. 나는 구원받을 그것도 없는데 그냥 아버지 뜻이 옴팡 뒤집어써서 구원받는 이것도 내 숙제가 아니고 누구 숙제다? 바로 하나님의 숙제이고 예수님의 숙제라할 때 우리는 조금도 우리의 자랑이나 우리의 의지 같은 것은 거기다가 집어넣을 수가 없는 거예요.

이게 이미 시작된 천국의 인생이고 천국의 삶이고 천국 백성의 모습입니다. 이게 천국의 삶입니다. 모든 일에 자기를 부인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만약에 여러분 가정에 갑자기 2백억이 생기게 되면 여러분들은 도리어 화를 내야 돼요. 처음에 주여 어찌하여 이런 핍박을 나한테 주십니까? 저보고 어쩌란 말입니까? 저는 천국을 바라보는데 이거 2백억 줬으면 그 다음부터 돈을 바라볼 건데 이것은 나보고 지옥가라는 소리 하고 똑같은데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돈을 줘놓고 너는 위선자야, 사실은 주여! 주여 하지만 그것은 다 입에 발린 소리이고 실제로 너한테 정작 세상이 원하는 것을 주니까 해 벌래 해가지고 이게 웬 떡인가 싶어서 ‘주여 감사합니다. 뚝 떼서 십일조 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나오더라 이 말이죠. 받은게 있으니까 주겠다 이 말아닙니까? 돈 놓고 돈 먹기인데 산에가야 범을 잡고 물에 가야 고기 잡지 야바이 하고 똑같이 돼요. 주와 흥정하고 거래하고 협상하고 타협하고 정치노름하고 주님을 어떻게 협상테이블에 앉혀요?  있을 수도 없는 거예요.

이럴 때는 2백억 주거든  감사히 받으시고 아, 주께서 이런 쪽으로 나를 죽이시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세요. 다들 한번 받아봐야 되는데 만약에 아이가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아 주께서 우리 가정을 이렇게 망하게 하는구나! 이런 식으로 망하게 하는구나! 앞으로 이 애가 변호사하면서 지 잘난 체 할건데 앞으로 쟤 영혼이 걱정된다 이렇게 돼야 된다 말이죠. 그런데 얼굴보니 그럴 얼굴들이 아니네요.

사람이 20등하다가 갑자기 1등하면 그 얘가 무서워요 잘했다가 아니라 20등하다가 15등하면 착하고 귀여워요. 그런데 20등하던 얘가 1등하는 것은 분명히 시험지 빼돌렸어! 아무리 내 자식이지만 이것은 뭔가 수상해 신고 대상이다. 이처럼 주님께서 우리를 건드리고 우리의 본성을 알아낼 때는 우리가 예상 못하는 낮선 사태를 발생시킵니다. 그게 무슨 사건이냐?  그게 바로 십자가 사건이에요.

십자가 사건이 우리에게 올 때는 울고 불고가 아닙니다. 울고불고 할 것도 없이 그냥 놀랬킵니다. 그냥 놀래버려요. 암에 걸렸다, 주께서 갑자기 낫게 했다! 우리는 놀랩니다. 주께서 제대시키지 않고 또 고생시키는구나! 이렇게 돼야 됩니다. 나는 이 세상을 제대하려고 하는데 이것은 완전히 말련 병장으로 연장 시켜서 뭐 어쩌라고? 지금 나는 편히 쉬고 싶은데 우리를 놀랬킵니다. 그래서 우리가 청개구리 같다 합니다. 우리가 해 달라하는 것은 절대 안 해 주고 안됐으면 좋겠는 것은 그렇게 되게 돼요. 이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가 되고 싶은데 말로는 안 해 줬으면 좋겠다고 해 봐야 두 번째 트릭 써봐야 주께서  세 번째 트릭을 써서 아무 것도 안되게 만듭니다.

백날해도 들었다 놨다 하는 것은 주님이에요. 주님이 요물이에요. 이게 살아계신 주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의 어떤 노력과 의지와 꿈도  우리 구원에 요만큼도 계획하지 않도록 피해하면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겁니다.

자, 이제부터 어려워요. 창조주가 중심으로 하는 것은 다 차단시킵니다. 그러면 뭐가 정답이냐? 중심에서 창조를 시작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창조는 창조물이 중심이 되어 가는 길은 없어요. 주님의 하시고자하는 일 때문에 피조물들이 있는 겁니다.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선인과 악인에게도 햇빛과 비를 내리시죠. 보세요.  거기에 누가 포함이 됍니까? 악인이 포함되어 있죠. 악인에게 왜 비를 내립니까? 비를 주지 말아야지.

사람들이 기도 하는 심성이 이래요. 하나님이여! 비가 와야겠습니다. 하나님이여! 날씨가 너무 춥습니다. 앞에 뭔가 생략됐어요. 우편에 뭐가 생략되어 있느냐 하면 하나님, 내가 있는 이 땅에 비가 가뭄입니다. 내가 있는  이곳에 날씨가 춥습니다. 우리는 앞에 있는 것을 빼놓고 이야기를 해요. 주여! 비가 와야 되겠습니다. 너무 날씨가 춥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거든요.

바로 욥기에 보면 황무지에 비가 내리는 이유를 너희가 아느냐?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그러면 황무지에 누가 있어요?  아무도 없어요. 욥아! 너는 아무도 없는 황무지에 채소도 가꾸지 않고 경작하는 사람도 없는데 거기에 비를 내리는 이유를 네가 아느냐? 욥은 몰라요. 왜?  그 자리에는 누가 없기 때문에? 본인이 거기 자리에 안 서있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로 인간은 자기 밖에 몰라요. 하나님을 상대할 때 꼭 자기를 바탕으로 삼고 상대해요. 제가 살기가 어렵습니다. 아픕니다. 힘듭니다. 우리애가 골골합니다. 우리교회 교인 수 반이 빠졌습니다. 헌금은 1/3로 쫙 줄었습니다. 이래 가지고는 교회 문 닫습니다.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하늘나라 확장하기 위해서는 교인이 필요하고 그냥 돈 들어보면 안 되고 노숙자 오면 안 되고 돈 꽤나 되는 교인이 필요합니다. 주여! 이런 식으로 합니다.

노골적으로 하면 천박하니까 그것을 빙빙 동려서 이야기하죠. 주의 일에 힘되는 성도 보내 주옵소서. 이렇게 하지요. 빙빙 돌려 이야기하지만 따지고 보면 돈 주세요! 돈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모든 자리 앞에 생략된 게 있어요. 거기에 누가 있습니까? 내가 있을 때는 기도를 해요. 그런데 어떤 교회 장로가 목사님, 나가세요! 능력도 없이 와서 교인 반으로 줄고 퇴직금도 반으로 받고 나가시오! 한다면 그 목사는 나가면서 뭐라 하느냐 하면 ‘이 교회 저주 받게 하여 주시옵시고 이 교회 다 지옥가게 하옵시고 감히 주의 복음을 전하는 주의 종을 몰라보다니 주여, 이런 자는 마땅히 저주받아야 마땅합니다.’ 기도가 쫓아내면 갑자기 뭐로 바뀝니까? 퇴직금을 반으로 깎는 이 교회는 저주 받게 하옵소서! 이렇게 나온다니까요.
그러니까 그 교회는 누구 교회였습니까? 십자가 지지도 않은 인간이 십자가 진 예수를 가로막았던 목사 개인의 사업체 였던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왜 교인들이 모르느냐?  교인들은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누구를 믿느냐?  눈에 보이는 목사를 믿기 때문에 목사를 통해서 복이 오고 목사를 통해서 저주가 온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천주교입니다.  루터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루터는 모든 사람이 다 사제라 했습니다. 루터 근처도 안 간 사람들이에요. 천주교하고 똑같은 겁니다.

이 중심이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입니다. 안 보여서 이 창조물들, 피조물들이 서로 서로를 보면서 거기서 지혜와 어떤 행함과 진리를 끄집어내려고 하는데 이게 실패에요. 왜냐 하면 모든 인간의 피조물들은 누구 중심이기 때문에?  내가 있는 곳에 비가 와야되고 나를  쫓아내면 그 회사 망해야 되고 나를 구조 조정한 그 회사는 폭싹 망하고 내가 소속되어 있으면 무조건는 그곳은 잘 돼야 되고 모든 세상 돌아가는 것이 내 중심이 돼야 되는 겁니다. 내가 곧 태양입니다.

어떤 시인인가가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하도 권력 잡은 자가 안 나가니까 시인이 이런 식으로 우회적으로 표현했죠. 저 놈의 태양은 식지도 않나? 얼마나 핍박을 받고 학대를 받았으면 원래 태양은 안 식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제발 안 식는 태양이지만  언젠가는 식게 해 달라고 간곡하게 기도 하는 겁니다.

주님을 누가 핍박하느냐?  내 뜻대로 안될 때 바로 핍박당사자가 우리 자신들입니다. 내 중심으로 사는 우리 자신들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주님을 핍박하고 있으며 주님은 우리에게 원망을 다 듣고 불평 다 듣는 그런 모양새로 오셔서 ‘그런 너를 내가 용서할게’ 이렇게 오십니다. 그러면 주님이 안 오시던데요?  이런 사람이 있거든요. 안 오는 것은 우리가 원망의 강도가 약해서 그래요. 우리가 아직 까지 숨을 쉴만해서 그래요. 진짜 주님께서 우리의 숨통을 쪼고 마지막 남은 나의 자존심 있잖아요. 그 자존심, 그 자존심이 만약에 탁구 선수 같으면 손모가지를 뿌러뜨린던가 하는 이런 것, 양궁 선수같으면 팔이 고장 나는 것 같은 것,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건드릴 때는 어느 누구도 반발하게 되어 있어요.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부자 청년이 영생 얻겠다고 나오죠. 그럴 때 주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무엇을 건드립니까? 자기도 감추고 있던 마지막 자존심이 있었습니다. 뭐냐 하면 나는 뭐다?  나는 부자다. 그래서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 모든 것을 팔고 나를 따라 오라 하니까 그 부자가 어떻게 했습니까? 우리 같으면 다 팔고 따라가겠는데 그게 아니고 근심하지요. 그러니까 처음부터 그 부자 청년은 주님에게 찾아올 때부터 ‘주여! 다른 것은 건드려도 이것은 만은 건드리면 안 됩니다. 우리가 그런 쪽에서 우리가 협상합시다.’라는 쪽으로 온거예요.

그러니까 협상을 그것 그렇게 하면 안 되잖아요. 모든 것을 다 팔라고 할 때 근심하고 돌아   갔어요. 만약에 어떤 사람이 미스코리아 출전하는 사람 같으면 주께 저 미스코리아 나갔던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겠습니까? 하면 주께서 뭐라 하시겠습니까? 너 미스코리아 그거 죄라고 인정하고 난 뒤에 나를 따르라 이렇게 할 겁니다. 이대 나온 여자 같으면 이대 나왔다고 주장하면 나, 이대 나온 여자야 하면 그 이대 나온 거 퇴학 당한 줄 알고 그것도 죄인줄 알고 나오너라! 전 목사인데요, 너 목사된 것 자체가 죄인줄 알 경우에만 너는 나를 따라 오너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왜?  구원은 무엇과 연결된다?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죠. 구원은 여기 1장 15절에 예수께서 뭐를 구원하러왔다?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이 짧은 문장, 이 간단한 문장, 이것은 교회 한번만 다녀도 아는 그 문장인데 그게 지식으로만 알았지 평생 동안 이게 걸쳐서 우리에게 실감나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 적이 없다 이 말이죠.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말씀이 우리를 구원하지 내가 말씀을 지켰다고 구원 받는 게 아니다. 이 말이죠. 내가 지키는 그 말씀은 내가 중심을 찾아가는 이 방법인데 이것은 차단되고 말씀 중심이 우리에게 말씀가지고 찾아오게 되면 우리는 그 앞에 내 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되는 겁니다.

성경 해석이 아주 간단하죠. 이 모든 말씀은 바로 나를 지적하기 위한 기어이 죄인 안 되려고 하는 나를 죄인 만들기 위해서 이 모든 말씀이 주어진 거예요. 우리는 골라잡으려고 하는  겁니다. 아, 이것은 김집사가  지켜야 되고 이것은 박 집사가 어긴 것이고 이것은 딱 나네. 이것은 내가 지킨 거고 내가 어긴 것은 별로 없네! 이거 하나 있구나!  뭐 요거 하나 있네! 이런 식으로 우리는 마치 슈퍼에서 물건 고르듯이 성경 말씀 듣고 내가 지킨 것, 안 지킨 것을 골라잡으려고 하는데 이런 사고방식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선악과를 따 먹었기 때문에 이것은 선이고 이것은 악이고 악은 멀리하고 선은 가까이 하겠다는 인간의 선악과 따먹은 그 행세를 그대로 발휘한 것밖에 안됩니다.

주님을 그런 식으로 하면 바리새인밖에 안됩니다. 사두개인밖에 안됩니다. 그러니까 말씀자체가 우리한테 올 때는 뭐가 오느냐 하면 바로 피조물 자체를 죄인으로 만드는 중심이 찾아와서 하는 겁니다.

자, 이제부터 이야기할 것은 이 중심이 뭐냐 하는 겁니다. 이 중심이 뭐냐 할 때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은 뭐냐? 아, 중심은 예수님이다. 그렇게 생각 할 거예요. 중심이 지져스입니까? 예수입니까? 중심이 예수라고 할 때  한국말로 할 때 예수인데 영어로 하면 지져스가 되거든요. 그러면  어느 쪽이 더 중심일까요?  이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되지요? 그렇죠?  아, 중심은 십자가이다. 크로스입니까? 십자가 입니까? 이것도 분명치 않지요?  제가 정의 내리겠습니다.

중심은  뭐냐 하면 중심은 예수님이다. 십자가다 언약이다. 이렇게 하면 그것은 정답이 아니에요. 제가 아까 장갑 이야기해드렸는데 다 잊어버렸어요. 중심이 실제로 찾아올 때는 나을 괴물 만드는 능력으로 들어설 때 그것이 바로 중심입니다. 멀쩡하게 생긴 나를, 제가 멀쩡하게 생겼습니까? 멀쩡하게 생긴 나를 괴물로 만들 때 그것이 바로 중심입니다.

이 중심이 이사야 6장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사야가 원래 말씀 전하는 전문가이고 성전 제사하는 선지자인데 이 사람이 성전에 가서 무엇을 체험했습니까? 진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난 다음에 뭐라 했습니까?  화로다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적어보겠습니다. ‘나는 의사다’아니에요. ‘나는 변호사다’‘나는 목사다’이것도 아니에요.  나는 뒤에다 무엇을 넣습니까? ‘나는 망해야 될자다’라는 고백을 하는 것은 앞에 무엇이 등장하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앞에 빛나는 주님의 영광이 등장했기 때문에 그렇지요. 이게 바로 중심이에요. 이사야가 여호와라 그것을 몰라서 그랬습니까? 이사야가 언약의 중심이라 그것은 자기가 너무나 잘 알아서 다른 사람에게 가르쳤던 사람이에요. 하지만 그것은 남을 가르치기 위한 하나의 지식이고 교과서에 나오는 정답이고 수학정석 뒤에 보면 정답이 나오잖아요.

우리는 우리의 자신이 뭐가 문제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냥 빨리 정답만 봐요. 수학 정석에서 제7번 문제 정답은 1/3,  1/3이 어떻게 나왔습니까? 뭐 어떻게 1-2/3 해서 나왔는지 아니면 1을 3으로 나누니까 1/3일인지 모르잖아요. 우리는 자꾸 해답만 외우는 거예요. 그런데 실제로 그 해답이 나올 수 있는 문제의 현장에 우리 자신이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자꾸 빼먹어요. 왜? 나는 건전하니까, 나는 마음 됨됨이가 항상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만 추구하면서 살아가니까 설사 이런 나를 가지고 아마 문제 삼을 하나님은 아닐 것이라고 우리를 재조정, 재 조립하고 항상 건전한 모습으로 항상 재 장착을 해요.

‘나는 훌륭하다, 오늘도 나는 큐티까지 할 정도로 기도 할 정도로 나는 이렇게 나는 내가 봐도 너무 착실해 미치겠어! 나는 왜 죄 지을 줄을 몰라’ 이런 식으로 자꾸 자기 자신을 미화하는데 그게 이사야에요. 이사야는 완벽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 완벽한 사람이 주님을 만나니까 어떻게 됐습니까? 자기를 뭐라? 나는 망해야 되는 사람이 맞습니다. 라고 고백한 겁니다. 이게 중심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러면 우리가 이사야처럼 그런 분을 만나야 되는데 천사가 안 나타나는데 어떻게 합니까? 천사 나타나세요! 하고 빌어도 안 나타나는데 어떻게 합니까?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누구한테 한 것이다?  나에게 한 것이다. 마태복음 25장에 딱 있습니다. 내가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줄었고 내가 배 고플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 이게 천국가는 사람입니다. 이 소자한테 한 것이 곧 누구한테 한 것이다? 곧 나한테 한 것이다.

예수님과 제자가 여러분, 생각이 공생애 때에 같았어요?  달랐어요?  달라요. 생각이 다른 겁니다. 다르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한 하면 전부 다 곡해 했어요. 하늘나라에 간다하니까 제자들이 야, 하늘나라 갈 때 누가 높아? 선생님은 우리 중에 누가 높습니까? 이게 하늘나라 말은 들었는데 자기가 아는 하늘나라에다가 편집을 해서 자기 마음대로 해석을 한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를 집어넣느냐 하면 길에 가는 어린 아이를 집어넣었어요. 그러면 예수님 제자가 아니라 예수님, 그 다음에 뭡니까? 예수님, 어린 아이, 그 다음에 제자가 되겠지요.

그럼 제자가 예수님과 하나가 되려면 그냥 직접 옮겨오지 못하고 무엇을 경유해야 돼요? 제자, 그 다음에 어린 아이, 그 다음이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제자가 어린 아이를 경유하게 되면 제자가 됩니까? 어린 아이가 됩니까? 질문했습니다. 예수님, 제자 사이에 어린 아이가 있다면 그 경로, 노선이 제자에서 어린 아이를 경유해서 예수님에게 온다면 제자가 일단 어린 아이에게 오게 되면 이미 제자 입니까? 어린 아이입니까? 어린 아이가 돼야 돼요.

그래서 누구든지 어린 아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들지 아니하면 결코 하늘나라에 갈 수가 없다 하는 거예요. 그러면 제자가 의지 한다는 것은 이것은 기존 제자를 주께서 버리고 우리 마음에 변신이 일어나야 된다는 거죠. 어른인데 어른이 도로 어린 아이가 될 수 있겠어요? 그럴 마음이나 있겠습니까? 없지요. 무시할 만한 어린 아이인데 에이 어린 아이가 어디 어른들 노는데 하고 쥐어박다가는 차라리 소자를 연자맷돌로 묶어 바다 깊숙이 빠뜨려서 죽이는 잔혹한 살인범과 동일한 짓을 한것이라고 그 뒤에 나와요. 죄 없는 아이를 목에 연자 맷돌로 묶어, 완전범죄되니까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넣을 때 그 범죄나 나 어린 아이되기 싫어 하는 생각이나 동일한 생각이라는 겁니다.

내가 천국을 가요? 바뀌어야 됩니다. 출애굽이 왜 있습니까? 애굽에서 나와서 약속의 땅을 거쳐서 가야돼지 그냥 애굽에서 나오니까 뭐 앞이 약속의 땅이 등장한 게 아니에요. 광야를 통해서 애굽에 있던 습관, 습성들이 전부 다 죄라는 것을 알고 난뒤에 그래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오직 주님만 바라보면서 살 수 있도록 교체돼야 되거든요. 현재 우리는 우리 자신만을 바라봅니다.

울산에서 어린 애가 10살 먹은 애가 계모한테 맞아서 죽었습니다. 생모가 있었어요. 생모가 하는 말이 5년 전에 애를 내가 키웠다면 애는 계모한테 안 맞아 죽었을 텐데 아빠가 키운다고 맡겼더니 계모가 들어와서 개 패듯이 패 죽여 그렇게 애가 죽었다, 불쌍하다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그러면 그 이야기에 대해서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것을 다시 비디오를 5년 전으로 돌려서 5년 전으로 왔습니다. 아빠가 이야기합니다. 아빠가 못 키우겠다, 엄매된 네가 키워라 하면 엄마가 5년 뒤를 생각해서 내가 이 아이를 아빠한테 맡기면 계모가 올 것이고 계모가 패서 갈빗대가 16개가 부러져 죽을 것이고 아이고 안되지, 내가 키워야지! 그래서 내가 키울 수 있는 사람 있어요?  없어요? 

없습니다. 인간의 미래라고 하는 것은 과거가 조작해 낸 거예요. 과거에서 모자란 것만 미래에서 채우려고 하기 때문에 그저 이 남자의 품에서 떠나는 그것만 생각하기 때문에 애의 문제는 그것은 뒷전인거예요. 그래서 또다시 그 아이를 맡아 키울 생각이 없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아는 범위 내에서만 세상을 바라보게 되어 있고 하늘을 바라보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인간은 절대로 중심이 원하는 대로 살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정당화, 합리화밖에 못합니다.

따라서 이사야가 선지자 때문에 구원받은 게 아니고 이사야는 뭐라고 고백합니까? 과거, 미래를 다 통틀어서 하나님 앞에서 나는 무슨 자?  나는 망해야 될자가 맞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겁니다. 이것은 과거  현재 미래 한꺼번에 통틀어서 언급하는 겁니다. 이것을 디모데전서 1장15절은 나는 죄인중에 괴수다 하는 겁니다.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들은 우리가 자꾸 자기 정당화, 나는 잘났다 나는 남보다 더 믿음 좋고 경건하게 산다.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니까 화로다 망하게 하는 쪽으로 가기 위해서 그에게 율법을 줘 버린 거예요. 율법을 줘 버리면 그 율법에 해당되는 것이 지금은 내가 그 율법을 지킨 것처럼 보입니다. 왜?  지금은 내가 어길만한 사태가 벌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너는 저 빵집에 가서 빵을 훔치지 마!’라고 하는 것은 지금 배부른 나에게는 전혀 그 법은 나한테는 해당이 안 되는 법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왜? 내가 배고플 일이 없기 때문에 들어갈 일이 없는데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고 만약에 5년 후에 정말 쫄딱 망해서 허기가 져서 장발장처럼 배는 고프고 돈이 없을 때 몰래 빵 훔치고 나오다가 걸렸다, 그럴 때 5년전에 알았던 도둑질 하지 말라는 말이 5년 뒤에 해당이 된다면 5년 전에 그 인간이나 5년 후에 그 인간이나 그게 딴 인간입니까? 같은 인간입니까? 같은 인간 아닙니까?

그러면 이 말씀은 지금은 나한테 해당 안 된다고 생각하고 지금 내가 죄인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15년, 20년 뒤에 결국 나에게 되돌아와는 거예요. 그 말씀이 나에게 되돌아오는 거예요. 어제도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지금도 오늘도 나는 화로다 망하는 거예요. 무엇을 입을까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했는데 이 염려라는 문제는 도둑질 정도가 아니고 염려거든요. 마음이잖아요. 마음으로 염려하는 것도 그게 주의 법에 어긋난다면 우리는 의롭다 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제가 주일 낮에 설교했지요? 저는 소위 율법 지겼다는 사람을 보면 먼저 오른 눈과 오른 팔부터 먼저 본다고요. 저 사람이 애꾸냐? 그것부터 먼저 본다고 했죠. 왜? 성경에 보면 오른 눈이 범죄하면 빼라 하는데 안 빼고 있다는 말은 둘 중에 하나에요. 완전하든지 아니면 자기만을 위해서 살던지 둘 중에 하나에요 그러면 오른쪽 빼면 남는 게 왼쪽이죠. 그러면 왼쪽 눈은 범죄 안합니까?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어요.

왼쪽 눈 오른쪽 눈, 왼 팔, 오른 팔 할 것 없이 마음 자체가 주님의 마음이 점령되어 있는 사람은 그 사람에게 복이 있다는 겁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나니 천국이 누구의 것임이라? 그 마음 자체가 예수님은 어린 아이 같은 마음, 그 어린 아이의 마음을 집어넣는 것은 주께서 평소에 어린 아이를 데려오는 것이 아니고 제자들이 누가 높으냐고 그 되도 않는 소리를 할 그 순간에만 필요한 어린 아이입니다.

그래서 다른 데 가면 또 다른 게 필요해요. 예를 들어서 예수와 함께한 우리는 죄 없지요?  하니까 주께서 지나가는 소경을 부르지요. 소경을 불러다가 이 소경의 죄가 부모의 죄냐?  자기의 죄냐?  이렇게 따지게 해서 자기가 소경인 것을 아는 사람만이 눈뜬 사람이라는 것을 이야기 해 줍니다. 그러니까 이 복잡한 이야기, 우리는 간음하지 않았다고 자부할 때 간음한 여인을 불러다가 뭐라 했습니까? 간음한 여인을 불러다가 소위 간음하지 않은 사람들을 예수님의 곁에서 다 추방시키고 말지요. 돌 던지다가 돌 놓고 다 가 버렸다 말입니다.

내가 만약에 현장에 바리새인이라면 저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이렇게 할 때 우리는 돌놓고 도망가지 말고 돌 놓고 주여,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제가 바로 간음한 인간입니다. 하고 이렇게 나와야 될 텐데 이 인간들이 기어히 안 들키려고 기어히 착한 자아를 유지하려고 주님 멀찍이 주님이 아예 보이지 않는 곳으로 도망치고 마는 거예요. 왜? 자기끼리는 다 잘난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한꺼번에 이야기를 하면 뭐냐 하면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그 다음에 구원할 때는 그냥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방정식이 있다, 그 방정식이 뭐냐? 우리로 하여금 일체 우리의 행함이나 공로나 의가 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우리를 천국에 데려간다. 이게 바로 복음입니다. 섞이지 않는 방식으로, 그러면 섞이지 않는 방식이 뭐냐? 그게 바로 여기 9절에 나옵니다.
 
오직 법은 불법한 사람에게만 필요하다, 여기 법이 나와요. 율법이 등장합니다. 지금부터 율법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율법은 뭐냐 하면은 율법은 지상에 깔린 그림자입니다. 자, 지상이 이렇게 있고 하늘이 있다면 하늘에 있는 창조에 중심이 있다고 했죠. 창조의 중심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나타날 때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하는 거죠. 이사야 같은 경우 에는 너무 눈 부셔서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사도 바울 같은 경우에는 십자가, 너희는 나를 핍박하는 사람이다. 십자가 이 새 언약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죄를 지적 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가 되거든요. 같은 차원이에요. 너무 눈부셔서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내가 너무 더러워서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그것도 맞고 십자가 앞에서 나는 내가 바로 죽을 죄인입니다. 내가 강도입니다. 고백하는 거나 다같이 하나님의 방정식에 합한 사람이에요. 방정식에 말려든사람입니다.

율법은 뭐냐 하면 연필에는 뭐가 있죠?  연필 안에 뭐가 있죠? 심이 있죠. 창조에는 심지가들어 있습니다. 그것을 창세기 1장에는 뭐라 했느냐 하면 형상이라 하는데 이 형상은 무슨 물건처럼 쏙 집어넣는 것이 아니고 형상은 어떤 형상이냐 하면 투쟁하는 형상입니다. 형상 자체가 인간과 싸우면서 우리 속에 들어오는 겁니다.

그냥 쏙 집어넣는 것이 아니고 우리와 집어넣을 사람과 들어갈 사람과 늘 갈등과 충돌과 마찰을 일으키면서 아벨 같은 경우에 가인에 의해서 얻어맞아 죽는데 그 가인의 모습이 장차 오실 예수그리스도의 형상입니다. 그 죽는 모습이 사건화 되는데 그 어떤 형상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중심이 되는 겁니다. 이 중심 밑에 그림자가 있어요. 실체가 있으면 실체 그림자를 가지고 이것이 율법입니다. 쭉 가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이스라엘 역사를 관통하면서 쭉 가니까 이것은 ktx, ktx가 뭡니까? 고속 열차죠.

설국열차, 열차처럼 쭉 갑니다. 율법이 쭉 가요. 모든 율법은 누구를 증거하는 것이다?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향하여 칙칙폭폭 가죠. 그런데 율법에 있는 그 객차에 실릴 수 있는 그 내용은 율법이 지나가면서 이 율법은 실체가 뭐라 했습니까? 우주의 중심, 예수그리스도의 고난이죠. 십자가죠. 십자가가 율법이라 하니까 여기서 나는 것이 뭐냐 하면 직접 연결되는 것이 제사법이죠. 제사법은 반드시 뭐가 있어야 돼요 뭐가 있어야 됩니까? 제물이 있어야 되고 제물이 어떻게 됩니까? 제물이 피를 흘려야 되지요. 흠 없는 어린 양이 피를 흘려야 그게 제사가 되는 거예요.

피 없는 제사는 제사가 아닙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피 없이는 뭐가 없다? 죄 사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새 언약 십자가 이후에는 두 번 다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용서할 수 있는 제사는 더 이상 제사, 예배는 없어요. 여러분 죄 지었으면 예배드리세요. 라는 것이 없어요. 앞으로 계속 죄를 지을 건데 모든 죄는  우리의 죄를 새삼스럽게 추가 해서 드릴 예배는 없습니다. 추도예배 이런 것 없어요. 혼인 예배 그런 것도 필요 없어요. 예배 자체에 십자가가 활성화되고 현상화 되면 그게 예배에요. 현상,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이 지상에 있는 율법 사이에 눈으로 보이는 모습은 피 있는 제사, 피 있는 제사가 율법입니다.

어찌됐던 간에 열차는 달립니다. 그런데 여기서 약간 난해 한 것이 율법이 일관되게 가는 것이 아니고 여기서 자꾸 내용이 추가 돼요. 율법이 있는 곳에 주변에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장갑을 하나 사면 왼쪽 장갑을 사면 오른쪽 장갑이 같이 딸려 오듯이 여자의 후손이 일하면 거기에 누가 등장한다? 뱀의 후손이 발작을 일으키잖아요. 주여! 우리를 멸하러 오셨군요? 괜히 예수님께서 병 고치는데 속에서 마귀가 튀어나오는 거예요. 영적은 영적으로 통하니까 예수님이 시험들 때 마귀가 오잖아요. 율법은 그냥 일관된 내용이 아니고 내용이 추가가 되는데 그 추가 된 내용이 바로 주변에서 율법이 있는 곳에 여기서 범죄가 일어납니다.

싫어! 나, 사랑 안 할거야! 그거 너무 혹독한 법이야! 하고 반항과 불평이 일어나면  그것을 인하여 율법이 더욱더 더 참혹한 현실을 만들어 가면서 앞으로 진격합니다. 그 참혹의 끝은 바로 하나님마저 맥없이 사람에게 얻어맞아 죽는 그 참혹한 사건, 그 중간에 누가 죽습니까? 그 중간에는 스가랴같은 선지자들이 돌에 맞아 죽잖아요. 요아스왕한테는 누가 맞아아죽습니까? 요아스왕한테 스가랴 선지자가 맞아 죽고 그리고 엘리야김왕한테는 우리야라는 선지자가 맞아 죽었지요. 애굽으로 도망가니까 도망간 애굽으로 따라 가서 잡아 죽여 버렸어요.

무수한 선지자가 돌에 맞아죽고 톱에 켜 죽고 많이 죽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이 죽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미 하나님의 법이 있다는 증거예요. 하나님의 법이 있기 때문에 주께서는 그러한 수난을 겪는 겁니다. 수난을 겪어서 지금 뭔가 분명히 세상이 반대하는 뭔가 낫선 요소가 들어왔다는 것을 본거죠. 이 그림자입니다. 이 그림자가 돼서 나중에 이 그림자가 실체와 만나요. 예수그리스도의 형상이 여기 육신이 되어 그림자가 율법이 돼어 만나버리면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고 말씀이 육신이 되었고 그분이 십자가 죽음으로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고 괴물이다. 그것을 육신이라 해요.

육신이기 때문에 어떤 인간도 인간이 아닙니다. 그냥 흙이 될 뿐입니다. 인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아들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뭐라 하냐 하면 아담이라 해요. 어떤 아담? 마지막 아담, 또는 두 번째 아담, 이 두 번째 아담의 성령을 받은 사람만이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그런 혜택이 폐쇄적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성령 안에서만 해당이 되고 나머지는 죄송하지만 배제가 됩니다.

누가 구분하고 구분 안하고는 그 주도권과 그 나눠주는 주도권은 오직 예수님만 갖고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예수님이 불러주지 아니하면 우리는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그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나는 구원받고 싶지도 않은데 주님이 십자가 알게 해 주셔서 나는 엉뚱하게 이렇게 구원이 되어 버렸네요. 라는 고백을 하는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어지간히 노력했더니만 주께서 알아주시더라 하는 이것은 수상한 사람이에요. 내가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그것은 전혀 주님과 관계없었는데 내 노력과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찾아오셔서 십자가 알려 주시니까 ‘이 못자국과 창자국이 너 때문에 피흘렸어! 너는 도망 쳤잖아’라고 할 때 비로소 구원은 내가 소원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소원에 의해서 내가 다루어지고 붙잡혀 와야 내가 구원된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내가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그게 디모데후서 1장에도 나옵니다. 디모데후서 1장 9절에 보면

딤후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전체가 자기가 복음 전했던 교회가 전부 다 이단으로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사도는 사기다, 사도는 거짓 사도다! 사도 바울을 잊어라 그거 맞아 죽어도 싸다 라는 그런 것이 대세가 되고 말았어요. 기가 막히죠. 그 이야기가 고린도전서 11장에 나옵니다. 사도는 거짓말하는 사기꾼이니까 절대 잊자마라 라는 그 고린도교회에다가 사도 바울이 두 번째 편지를 보냅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인간들이 악마의 종이고 가짜 예수이고 가짜 복이고 가짜 성령이다. 내가 진짜 사도인 이유는 내가 이 땅에서 고난 받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 교인들을 자기 직원처럼 부리고 있고 뺨을 치더라도 교인들은 아멘, 할렐루야 하고 있다 이 말이에요. 나처럼 목사님이시니까 순종해야 된다는 것이 가짜이고 나처럼 나는 가난하고 좋으나 너희들은 부유하고 나는 죽은 자 같으나 너희를 살리는 자요, 나는 날마다 죽으나 내 죽음으로 너희가 살아라! 나 하나죽고 너희 살아라! 나죽고 너희가 살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도무지 사도 바울은 자기 것이 없어요. 자기 것이 없으니까 뭐 이 교회 내 교회다 하는 노림수가 없어요.

사도 바울 뿐만 아니라 열두 제자 사도가 다 그랬어요. 자기께 없어요. 왜 없느냐?  자기는 사도기 때문에 없습니다. 자기는 주님이 소유된 사람이기 때문에 없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자기께 없기 때문에 자기 이익을 위해서 사람을 속이거나 이용할 어떤 의도가 없어요. 다른 교회 가지 말고 우리교회 오세요. 하는 게 성립이 안 돼요. 헌금 우리교회 내시고 다른 교회에 내지 마세요가 성립이 안돼요. 헌금하고 교인수가 문제가 아니고 자기가 외칠 것은 우리는 죄인인데 오직 주님께서 이 죄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는 그 십자가 복음외에는 아무 것도 외치지 않았습니다.

디모데전서에 보면 사도 나오고 목사 된 자 나오죠. 집사 된 자 나오고 장로 나오잖아요. 그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바로 자기와 동일한 복음을 외치는 사람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직분주고 복음주는게 아니고 복음 줬기 때문에 복음이 어떤 사람은 목사로 어떤 사람은 장로, 어떤 사람은 집사로 세운 거예요.  따라서 그 사람 입에서 복음 떨어지면 그거 가짜입니다. 자격증이 소용없습니다.

그 사람 입에서 10년 동안 복음 나왔잖아요. 10년 그 다음 주에 복음 안 나오면 그거 다시 한 번 생각해야 되고 그 다음 주에도 복음 안 나오면 이것은 맛이 갔어요. 신경 딴 데 쓰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일반인으로서 아까워하지 마세요. 우리는 또 다른 사람 이용해 먹으면 되니까 목사는 이용해 먹으라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또 이용해 먹으면 되니까 복음이 안 나오는데 복음이 안 나온다는 것은 주님이 함께 있지 않다는 뜻이기 때문에 더 이상 옛정 가지고 좋은 관계유지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때 좀 냉정하게 돌아서세요.

냉정하게 돌아서시고 우리가 바라는 것은 복음으로 인하여 우리가 그리스도만 바라보게 하는 거기에 있지 우리가 협동하고 우리가 단결하고 서로 사이좋게 지내가지고 멋진 이상적인 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그것은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주장이고 그것은 주님 소관이지 절대로 안지들이 그것을 시도해서는 안돼요. 두 세 사람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이 바로 그게 바로 교회입니다.

두 세 사람이에요. 쉽잖아요. 사모하고 자기하고 아이 하나하고 그것도 교회인데 목사가 뭘 걱정합니까? 노아가 몇 명 건져냈어요. 자기 식구 밖에 전도 안 했어요. 주께서 잘 했다 하십니다. 디모데전과 후서의 핵심은 이겁니다. 구원은 여전히 주님의 소관이다. 그것만을 우리가 고백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의 생각은 오직 주님께 가 있는 사람이지 자기 자신에게 가있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게 바로 성도입니다. 이게 디모데전후서의 전체적인 대략적인 내용입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지금도 일 하시는데 우리는 착각하기를 내가 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먹고 마시고 숨 쉬는 것이 다 주님의 도움인데 내가 애써서 기도해서 숨 쉰다고 여기는 철없는 우리, 이제는 모든 것을 주께 맡겨서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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