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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12 00:43:31 조회 : 1289         
현실재조정 160311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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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길(IP:118.♡.121.36) 16-04-07 23:24 
서울 의존교회160311a (현실 재조정)―이 근호 목사

디모데후서 3장 5절부터 하겠습니다.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이 한 구절 그 다음 한 구절 그 다음 구절이 전부 다 같은 이야기입니다. 이 성경 구절이 다 같은 이야기가 되려면 성경의 표면에 올라오는 그 밑둥치가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 강의 제목을 미리 적어드립니다. 오늘 강의 제목은 “악의 연대기”입니다. 지금 디모데후서가 복음에 관한 이야기에요. 디모데후서 이야기에서 3장이 쭉 나오면 거기서 뭐까지 도달, 접촉되어야 됩니까? 이러한 복음에 도달되어야 되겠죠. 표면에 디모데후서1절부터 쭉 이렇게 표면에 있다면 성경 말씀이 어디서 나왔느냐? 이게 복음에서 나왔거든요. 그러면 여기어 뚫고 나올 때 첫 번째는 복음에 접촉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복음을 끄집어내야 됩니다. 이유가 뭐냐 하면 복음에서 디모데후서 3장 1절부터 쭉 나왔다 이 말이죠.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그냥 디모데후서 3장부터 쭉 보게 되면 일반적인 도덕과 윤리가 돼 버려요. 일반적인 도덕과 윤리의 속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인간의 자기 의가 들어 있습니다. 표면에 나타난 여러 가지 성경 구절은 자기 의 앞에서 무슨 기능이 되느냐 하면 마치 율법처럼 작용을 해서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율법을 대하는 그런 심정으로 이 말씀을 대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십자가가 인간의 자기 의와 충돌되기 때문에 생긴 것이 십자가 가거든요. 예수님의 의를 로마서 1장에서는 이것을 뭐라 하느냐, 이것을 복음이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의는 자, 이게 의다! 이렇게 툭 던져지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 부딪치면서 예수님의 의가 생겨나요. 어디에 부딪치느냐하면 율법을 지킨 유대인의 자기 의와 부딪치면서 생겨난 것이 바로 복음이라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대해서 자기 의를 끄집어내고 이 자기 의에 대해서 이게 의롭다, 의롭지 않다는 것을 뭐로 증명하고 싶어 하느냐 하면 기적입니다.

요새 말로 하면 업적, 실적 어떤 실적? 복 받은 실적입니다. 뭔가 자기 형편에서 유익이 되었다는 것을 벤담의 공리주의라고 합니다. 공리주의 라고 하는 것은 유쾌함과 불쾌함이 인간의 도덕, 윤리의 뿌리이다.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명확한데 윤리, 도덕이라 것은 내가 기분 좋으면 그게 선이고 나쁘면 악이다. 이 말이죠. 모든 인간의 주체적 사상이죠. 그러면 기분 좋아지려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 자기의 요구대로 뜻대로 잘되면 기분 좋죠. 그러면 그것을 가지고 복 받은, 선을 행한 결과물로 그렇게 보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이라 하는 것은 내가 웃는다는 것은 연결 관계를 추적해 보면 내가 웃는 것 때문에 남이 울고 있다는 사실과 관련되어 있어요. 이 동네에 치킨 집이 한  5군데 있다면 한쪽이 장사가 잘된다는 말은 4군데 치킨 집이 문을 닫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재개발 된다면 여기 아파트 들어서면 아파트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웃겠습니까? 그런데 의존 교회 교인들은 안 울지만 여기가 천국이지만 오늘 여기 이 장소에서 마지막입니다. 제가 아까 시작 하기 전에 말씀드렸지만 교회가 커졌는지 안 커졌는지 저는 모르지만 복음으로 하나님의 의로 행복하다면 이것은 보상금 받는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돈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에요. 천국은 죽어서 가는 것이 아니고 살아서 이미 천국 사람으로 바뀌어져야 돼요. 그러면 이 천국 사람은 돈을 주고도 바뀔 수 없는 문제이거든요.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고 소출이 없어도 행복해야 될 그것이 어떻게 바뀝니까? 세상의 행복이라는 것은 간단합니다. 제가 주일 낮에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행복하자!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아프지 말고! 안 아프면 행복한 겁니까?

이 뿌리가 윤리 도덕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남한테 자기 자랑하는 겁니다. 나는 이렇게 의로웠어! 이런 효과와 이런 결과를 낸다. 따라서 내가 의롭다고 너희들이 인정해 줘! 이것이 예수님과 충돌했던 바로 구약 유대인들이 이런 오류를 범했는데 그 유대인들의 그러한 생각은 사실은 모든 인류를 대표하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대표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주변에 먼저 유대인들이 있고 그 다음에 이방인들이 있는 겁니다. 이 이유가 뭐냐 예수님은 뭐냐, 예수님은 새 언약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언약은 반드시 어떤 결과를 나타
내는데 언약과 관련된 민족이 그 수를 충족하지 못할 때 그 미진한 숫자를 그 주변에 있는 이방인들에게 넘겨진다. 넘겨지게 되면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언약과 넘겨 오면서 새 언약의 취지를 뿜어내면서 이 안으로 들어오게 되어 있어요. 그냥 숫자 모자란다고 막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혼인 잔치에 아무나 오라해 놓고 아무나 온다고 버틸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뭘 입어야 됩니까? 예복을 입어야 되죠. 그 예복이 갈라디아서 3장에서 뭐냐 하면 바로 성령으로 옷 입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말은 언약적 취지로서 덮어 씌우면서 당하면서 이렇게 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 있는 유대인들은 뭐냐 하면 남은 자가 돼요. 그러면 남은 자 앞에 뭐가 붙느냐 이게 행함이 아니고 은혜로 남은 자가 됩니다. 그러면 은혜로 남은 자를 어떻게 확인하느냐 하면 행함이 박살낼 때 나의 모든 행함, 노동, 율법을 지킨 이 모든 것이 아무 짝에도 소용없음을 알게 되는 취지로 말미암아 이들은 은혜로 남은 자가 되죠.

그러면 여기 유대인도 은혜로 남은 자 이렇게 이방인이 유대인으로 유대인의 빈자리에 이렇게 찾아 들어온 것도 언약의 취지를 발휘한다면 에베소서 2장에 의해서 결국 이 집단은 뭐냐 하면 십자가, 다시 말 해서 하나님의 의, 십자가에 근거해서 이들이 새로운 이스라엘이 되는 거죠.

바로 그것이 복음의 연속적이고 계속하는 활동입니다. 그 활동 중의 하나가 디모데의 편지속에 담겨 있는 겁니다. 오늘 우리가 할 것은 디모데후서 3장 5절, 6절, 7절, 1절부터 다시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부 다 여기 나오는 항목들이 동일한 하나님의 의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첫째가 여기를 뚫어서 복음에 접촉하는 것 하나, 두 번째는 이 복음에 했던 것이 다시 어떻게 통로로 나오느냐? 1번 내려가는 것과 2번 올라가는 것, 두 가지를 우리가 해야 됩니다.

복음을 안다고 해서 그냥 올라오는 것이 아니거든요. 복음을 안다고 올라오는 것이 아니고 복음을 아는 순간, 이 표면에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하는 것을 드러내는 거예요. 가짜를 들추어낸다는 것은 이미 진짜가 확보되어 있다는 뜻이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올라가는 작업, 이 두 가지 작업을 저는 악의 연대기라는 제목으로 지금부터 강의를 할 겁니다.

첫째는 그 파고 들어가면 복음이 나와야 되고 두 번째 그 복음에서 시작해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다 이 같은 자에서 네가 돌아서라는 그 구절이 어떻게 복음에서 나오게 되었느냐 말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기 전에 복음과 관계없이 표면에서 이해를 해 버리면 이것은 인간의 자기 의의 능력으로 이것을 지키려고 할 겁니다. 그러면 여기 나오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를 하려면 경건이 무엇인가를 본인이 그 개입에 대해서 안다고 자부해야 되겠죠. 그런데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무조건 좋은 것은 자기 자신은 일단 거기에  들어갔다고 그렇게 자부를 해 버려요. 좋은 것, 천국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이미 천국에 들어갔고 라고 전제 조건으로 하고 시작을 해 버려요.

모든 말씀은 예수님을 경유해서 우리한테 와야 되는데 예수님을 경유하지 않고 그 출발점을 나는 이미 천국에 왔고 자, 천국이 무엇이지 라고 시작을 해 버린다는 겁니다. 경건한 자를 이야기를 하면 나는 경건한 자이고 하고 시작을 해 버려요. 그러면 예수님을 통해서 주어지는 그 경건과 나중에 충돌되면 뭐라고 이야기를 할 건데요?

이야기 할 수 없죠. 그러면 계속 찾는 거예요. 예수님이 경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우리 노트 필기 하자! 하면서 뭐만 듣기를 원하느냐 하면 그래서 너도 경건한 자야하는 그 이야기만 나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는데 끝까지 안 나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에이 나는 주님이 나는 싫어! 이렇게 되죠. 그래서 이 본문을 하기 전에 먼저 이것부터 규정이 되어야 됩니다.

복음과 나는 무슨 관계가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복음과 나는 무슨 관계에 있느냐 하면 첫째 우리가 알고 있는 나는 우리 부모로부터 내가 태어났다. 따라서 관계라 할 때는 부모하고 우리하고는 관계가 있다. 형제가 있다. 형제와 나는 관계가 있다. 그 관계라면 복음은 낄 자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매라든지 형제, 부모는 혈연관계인데 혈연관계는 우리의 의사에 의해서 내가 조작한 겁니까? 아니면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겁니까? 태어나면서 이미 주어진거죠. 그러면 간단한 결론입니다. 우리의 관계는 이미 태어날때부터 그 관계속에 놓여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거죠. 그런데 만약에 그 관계가 우리가 어쩔 수 없이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주어진 관계가 자동적으로 이 복음을 수용하게 되어 있어요? 아니면 거부를 합니까? 복음을 수용하는 힘입니까? 거부하는 힘입니까? 육에 속한 자는 영을 수용하게 되어 있어요? 거부하게 되어 있어요? 거부하죠.

그리고 우리가 아는 관계는 복음은 무슨 관계냐 할 것도 없이 튕겨져 나와 버리죠. 왜? 우선되는 것이 내 가족과 내 혈연관계 나가 우선인데 복음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건데 지금 내 자식도, 내 가족도 그런데 예수님까지 챙길 여력이 어디 있습니까?

교회가 이사를 가는지 이사인지 모르겠지만 교회가 간다. 그러면 급선무가 뭐냐 하면 예수님을 챙기는 것이 아니고 교회가 어디로 이사를 할 것이냐? 그게 급선무가 되겠죠. 우리는 그런 관계가 지당하고 당연한 것처럼 그렇게 살아 온 겁니다. 그런데 복음이 우리한테 올 때는 있는 관계가 그냥 오는 게 아니에요. 기존 관계를 무산시키고 그 기존 관계를 부정하게 만들어 버리고 그것을 끊어 버리고 그 빈 자리에 복음이 들어오거든요.

저 뒤에 예수님의 형제와 동생들이 와 있습니다. 하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그래, 동생들아, 이리 오너라 같이 말씀 복음듣자! 하면 같은 말이라도 얼마나 좋습니까? 갑자기 퉁명스럽게 누가 내 형제고 누가 내 모친이냐? 그런 무례한 이야기를 엄마 아빠 있는데서 꼭 하야 되겠습니까? 뭐 억하심정 있는 것도 아니고요.

마태복음 8장 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21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이것은 관계를 끊고 나한테 오라는 이야기에요. 물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런 이야기한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관계를 끊을 위인이 아닙니다. 어떤 인간도 주어진 혈연관계를 자력으로 끊어낼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도 우리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주께서 말씀으로 먼저 툭 던져놔요. 던져 놓고 난 뒤에 주의 말씀은 우리 힘으로 안 되네요? 라는 그러한 반응을 얻어서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주님은 자기 것을 품어서 안 되는 것을 되게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다 그래요.

그렇게 생각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이해하기가 굉장히 쉬워요. 네가 믿음이 있느냐? 그러면 산을 들어 옮기라 하면 옮길 것이요. 그 말씀을 왜 하십니까? 기도 한 세 시간해라! 우리는 빡세게 합니다. 이렇게 좀 할 수 있는 숙제를 내야지, 네가 믿음이 그것도 그냥 믿음이 아니고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어도 산을 옮기라했으면 옮겨서 바다에 빠질 것이라는 엄청난 불가능한 숙제를 내 버려요.

그러면 그것을 못한다는 말은 무슨 믿음이 없다는 이야기입니까?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그 믿음이 너는 자꾸 믿는다하지만 그것은 끊어지지 않는 육의 관계에서 도출된 그런 믿음인거예요. 현재 갖추어진 육의 혈연관계에다 그냥 믿음하나 더한 샘이 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아무리 예수님이 이야기해도 경건하면 그래! 내가 할 수 있어! 경건이 이렇게 되어 버려요. 그런데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만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은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나는 무조건 경건한 자에 포함되었어! 끝! 이것을 전제로 하고 이야기를 한다 말이죠. 그런데 그것은 예수님이 나는 무조건 경건해! 예수님한테만 해당될 이야기이지 예수님을 빼 놓고 어떤 누구도 나는 경건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가 있는데 고기를 잡아줬습니다.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라. 그때 베드로가 하는 이야기가 뭡니까? 엉뚱한 이야기를 했어요. 요새 말하면 베드로에게 갑자기 로또 사게 해서 한 50억 당첨되게 했을 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주여! 고맙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베드로 입에서 뭐라 했습니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이것을 바로 한 것과 연장해서 풀이를 하면 나는 고기만 기대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따라서 나 같은 인간은 상종할 가치도 없습니다. 그저 고기를 많이 잡으면 그냥 헤벌레할 그런 인간에 불과합니다. 나는 고기 많이 잡는게 좋다는 이 관계를 내 힘으로 끊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주님은 정말 나같은 인간을 건질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은 다른 관계에 속하고 나는 이 고기만 있으면 좋다 하는 관계인데 어떻게 주님과 상관할 수 있겠습니까? 나를 떠나소서! 풀이하게 되면 그런 이야기에요.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베드로에게 신임을 받죠.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되도다 했잖아요. 그런데 그 뒤에 보면 예수님이 고난 받는다는 이야기를 하니까 그럴 수 없나이다 할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뭐라고 호칭 했습니까?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라” 베드로가 무슨 말을 심하게 했는데 오는 반응이 그렇게 심하게 다가오는 겁니까?

예수님, 예수님에게는 고통이 오지 않을 겁니다. 베드로야 네가 몰라서 그래! 고통 받아! 좋게 좋게 같은 편이니까 좋게 이야기할 수 있는데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라! 베드로가 뭐한다고 넘어져요? 베드로가 떠밀었습니까? 베드로와 함께 있는 세력이 베드로 너에게 그런 발언을 하게 한 그것이 정작 예수님께서 아무도 모르게 실시하려는 남은 업무거든요. 예수님이 해야 될 남아 있는 일을 베드로는 몰라요.

베드로는 그냥 내 뱉었을 뿐이에요. 사단이 그런 짓을 한 거예요. 그래서 거기서 예수님의 적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사단이고, 보이지 않죠. 또 하나는 인간이 예수님의 적이 되는 겁니다.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도다, 그 다음에 무슨 말입니까?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누구의 일을 생각한다?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 그런데 사단은 배후 조정자이고 인간은 뭐가 돼요? 그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로봇이 되겠죠.

인간은 사단에 매여 있다는 이 관계를 본인 힘으로 청산할 수가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청산할 수가 없는 겁니다. 쉽게 정리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주었을 때 말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 딱 오게 되면 이 말씀 자체가 우리에게 찾아와서 우리가 지금 어떤 관계와 노닥거리고 있으며 어떤 관계속에서 우리는 이 말씀을 지켜보려고 시도를 하면서 우리와 엮여져 있는 불순한 관계를 노출시키게 되어 있다 말입니다.

경건? 일단 나는 경건한 자이고, 이것부터가 문제가 되는 거예요. 마치 유대인들이 십계명? 당연히 우리가 백성이니까 지킬 수 있다고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예수님의 산상설교에 보면 이혼문제에 대해서 유대인들이 하는 말이 이혼증서를 써 주면 합법적으로 하나님 보시기에도 정당하게 이혼할 수 있습니다. 라고 언급할 때 주님께서 뭐라 했습니까? 이혼이 안 된다고 이야기를 했던가요? 아니면 간음이라 했던가요? 간음이라고 했죠. 그렇게 몰아세우죠. 왜냐하면 주님의 시선은 두 가지 적을 동시에 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제자들이나 유대인들에게 하면서 그것을 뚫고 여기 앞에 있는 인간의 몸체를 뚫고 그 뒤에 숨어 있는 귀신에게 도달되는 말씀을 준거예요. 이 말은 인간아! 나는 너하고 상대 안 해! 주님은 누구하고 상대한다? 주님은 마귀하고 상대해요. 마귀하고 상대해서 싸워서 승리하게 되면 마귀한테 가서 승리한 그 효과와 결실, 승리 능력을 주게 되면 이 사람은 구원 받는 겁니다.

주님은 우리하고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빗겨간다 이 말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라 이 말은 똑바로 하라는 말이 아니고 네가 똑바로 할 수 없도록 만든 배후세력을 경유해서 네가 너한테 이 말씀을 주게 되면 너는 저, 경건하죠? 라고 하지 말고 일단 뒤돌아봐서 내 뒤에 누가 있었던가를 보면서 그것을 보고 그것을 어떻게 십자가에서 처리했는가를 보고서 그 다음에 경건은 나의 능력이 아니고 주님의 경건이 밀고 들어왔군요.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게 고린도전서 3장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해서 이미 인간들이 평소에 누구의 평가와 누구의 기대를 늘 의식하면서 살아갑니까?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의식을 하죠. 그런데 사람을 자랑하지 마라! 누가 나를 이렇게 인정해 주더라, 누가 경건한 사람으로 인정해 주더라! 그것을 신경 쓰지마라 만물은 다 너희 것이니라!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입니까? 이게 굉장히 무서운 거죠.

만물은 다 너희 것이라 그러면 이 말을 간단히 이야기를 하면 성도는 영어로 말하면 VIP가 되는 겁니다. Very Important Person 대단히 중요한 사람, 롯데호텔에서 초특급에 앉아도 마땅한 VIP가 되는 겁니다. 비록 예배당이 없어 가지만 VIP가 되는 겁니다. 어느 나라에서? 거지 나사로처럼 천국가면 VIP가 되는 거예요. 세상 어느 인간이 자기 힘으로 안 되는 변화를 붙드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VIP 이기 때문에 특별대우를 하신거예요.

그런데 그것을 할 때 무엇이 동원이 되느냐 하면 엘니뇨현상 동원 됐죠. 김정은의 핵실험 동원 됐죠. 만물에 일어나는 모든 것, 오바마 대통령 동원됐죠. 이세돌 동원됐지 알파고 동원됐지 세상에 일어났던 모든 것들이 우리가 구약 피라는 것을 증명하는 식으로 세상은 이렇게 물결치고 있었던 겁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누구의 것이다? 너희 것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멈추면 안돼요. 왜냐? 내것이라는 것에 멈춰 버리면 우리는 힘들어버려요. 아무 것도 안 힘들어요. 누가 그랬어? 보니까 이미 우리와 상관 없이 주님께서 알아서 우리의 배후의 조정자를 처리를 해줬어요.

 하나님의 나라는 것인 뭐냐 하면 어떤 사람이 집안에 가재도구를 모아놨는데 어떤 도둑이 들어왔어요. 도둑이 담을 타 넘고 들어와서 집주인부터 꽁꽁 묶어놓고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이게 중요해요. 스스로 탈출이 불가한 움직일수 없는 냉장고 같은 가재도구를 그분이 와서 꽁꽁 묶어서 자기가 담 넘어 오기전에 있었던 자기 세계로 데려갈 때 그게 하나님의 나라라는 겁니다.

이 말 뜻이 어려운 것이 보통 하나님의 나라라 하면 우리가 대번 묻는 게 뭐냐? 그곳이 지역이 어디 입니까? 공간, 언제 옵니까? 시간, 공간을 물어요. 이것을 오성적 틀, 오성이 나타나는 그러한 경험이전에 터진다고 칸트라는 철학자가 이야기를 했는데 인간이 뭘 할 때 시간과 공간을 틀로 잡아놓고 이야기한다고 했습니다. 이게 맞는 이야기입니다.

데카르트라는 철학자는 그 유명한 좌표를 만들었어요. 어떤 것이든 X, Y 하면 기준이 나온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공간개념입니다. 좌표개념을 인적 개념에 우리가 적용시키면 너는 지금 너의 가치는 이쯤 된다고 정량적으로 계산해서 한국에서 내신 몇 등급, 그리고 월 소득에서 너는 몇 등급, 이게 딱 나오게 되어 있어요. 이게 바로 우리가 벗어날 수 없는 인간 대 인간의 육의 관계로 꽉 짜인 세계입니다.

경건 한다면 지금 보다 노력하면 경건을 한 단계 더 높일수 있다. 이렇게 되거든요. 사고방식 자체가 좌표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게 바로 유대인들이 했던 7단계, 7계급이에요. 율법에 의해서 율법을 잘 지키는 쪽과 안 지키는 쪽으로 7 계급을 나누어서 제일 밑바닥에는 이방인, 제일 위에는 사두개인 이렇게 나누는 겁니다.

하나님이 법을 주게 되면 우리는 나와서 공간과 시간개념으로 그것을 해석해 버려요. 나는 지금 3등급이다. 4등급이다. 내년에는 2등급으로 올려야지, 그게 성화론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올라갈수록 자기 의는 더 많아지고 내려가면 자기의가 적어졌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복음은 그런게 아닙니다. 복음은 우리 가지고 볼륨을 높이듯이 하는게 아니에요. 이미 하나님의 의, 예수님의 의로 꽉 차이는 겁니다.

하나님의 의로 꽉 차 있으면 우리 밖으로 나오는 게 뭘까요? 그동안 내 자리를 점령했던 나의 의가 주님의 의에 밀려서 밖으로 삐져나오죠. 삐져 나오면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은 없는 자라, 이게 전에 복음 들어오기 전에 내 안에 자리 잡았던 나의 주체 내용이 복음이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이것은 쫓겨 가는 겁니다. 내가 바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라고 외쳐버리면 그것은 뭐냐, 내 안에 주님이 계십니다와 같은 말이 되는 겁니다.

참 쉽죠. 밀어내는 거예요. 더덕더덕 갖다 붙여내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가지고 자를 위치하는 것을 밀어내는 거예요. 바리새인들은 자기를 볼 줄 모르고 남을 비판한다. 그게 바로 우리라니까요. 바리새인이라는 말을 할 때 그게 바로 우리입니다. 왜? 바리새인이 경건하면 무조건 우리는 경건한 사람이라고 치고 시작 했던 그들이나 오늘날 성경 말씀 들으면서 나는 구원받고 경건하다고 치고 시작하는 사고방식이 동일한 사고방식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죽은 자에게 죽은 자에게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라 보라고 했을 때에 너는 죽은 자에 해당되지 않는 자로 내가 그렇게 이끌어 줄게 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나는 아버지 장례를 치러야 되겠습니다. 라고 네가 나에게 의사를 개진하는 것 자체가 예수님이 죽은 자와 산자를 분간하는 그 기준과 동일치 않다는 겁니다. 너는 죽은 아버지는 죽은 자고 살아 있는 나는 살아있다고 여기는데 제자야, 내 말 듣고 해 봐라. 죽은 자는 죽자로 장사 지내라는 말은 네가 만약에 아버지의 장례를 지낸다면 아버지를 죽은 자, 나를 산 자로 규정 했던 그 자체가 내가 볼 때는 모두 다 죽은 자에 해당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이 제자가 아버지가 돌아 가셨는데 나로도 장사지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그 제자는 주께서 끊고자 하는 관계를 계속 붙들고 있는 겁니다. 혈연관계, 말을 조심해야 되는데 아버지 죽든 말든 나는 교회에 갑니다. 이런 말로 이해하지 마세요. 아버지 죽어도 나는 교회에 선다는 이런 사람 있어요. 저야 동생이 있으니까 알아서 하겠죠. 설교 준비하고 빨리 올라가야죠. 나 혼자 있으면 안 그랬지만 다른 형제 있는데요. 당장 올라가지는 않고 그 다음 주에 올라가겠죠.

자기가 주님 보시기에 죽은 자에 포함이 되어 버리면 그다음에 어떻게 되느냐 하면 세상의 모든 만물이 너희 것이라는 말이 이게 납득이 된다니까요. 왜냐하면 내가 나를 산다고 규정해 버리면 세상이 모든 것이 나의 것이라는 것이 실제적으로 감각이 와 닿지를 않아요. 왜? 세상은 나를 잡아먹으려고 난리인데 사기치고 난리니까 그런데 세상 모든 것이 나를 위해서 했다고 하면 저 사람은 내 돈을 떼어 먹은 사람인데 그것도 나를 위해서 그랬단 말이냐? 이렇게 된다 말이죠.

그러니까 내가 죽은 자에 속한다면 결국은 이 세상은 나를 뭐로 만드느냐 하면 나로 같이 죽어줘 그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세상은 나에게 다가온 세상이에요. 세상을 얻어서 내가 살았다가 이게 아니라 온 세상이 나와 더불어 같이 죽음으로서 세상이나 나나 똑같은 처지에 있다는 것을 우리보고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어떤 관점에서? 이미 구원받은 사람의 관점에서 옛날에 네가 세상, 남 탓할 필요 없어! 경건? 너도 마찬가지야! 라고 세상 모두가 부정당할 수 밖에 없는 그 부정속에 내가 포함이 되어 있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어렵게 이야기해서 뭐라 하느냐 하면 “현실 재조정”입니다.

현실 재조정이라는 말은 세상이 나의 대상이 아니고 이미 내가 대상해 줬던 현실 속에 한 패로 내가 포함되어 있다는 겁니다. 물레방아가 돌아가게 되면 우리는 여행 가면서 어, 물레방아가 있네! 제가 전에 합천에 갔는데 물레방아를 구경하게 만들어 놨습니다. 그러면 물레방아가 돌아갑니다. 나는 서 있습니다. 물레방아가 돌아가면 그러면 나도 돌아갑니까? 나는 멀쩡하죠. 나는 구경하고 있죠. 그러면 물레방아는 나의 대상이 됩니다. 그런데 내가 만약에 물레방아의 물방울이라면, 내가 사람이 아니고 물레방아에서 튕겨져 나오고 같이 흡수해 있는 물방울이라면? 물레방아 속에 내가 포함이 되어 있잖아요. 물레방아의 물줄기에 누가 기여하고 영향력을 입힙니까? 바로 내가 세상이라는 이 곳에 내가 기여하고 보탬이 되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고 어떤 단체가 썩었다고 합시다. 진짜 부정이 많은 썩은 단체라고 할 때 이 단체는 썩었어! 할 때 자기 빼놓고 썩었죠. 그런데 이 사람이 여기에 포함이 되어서 우리 단체 썩었어 라고 한다면 썩어있는 단체에다가 썩었다는 그 정보가 포함이 되면서 보다 더 썩어요. 한 표에요. 썩었는데 내 표 하나가 더 던진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썩은 단체 하지 말고 밖으로 나가 있으면 되지 않느냐? 밖에 나가 있을 사람은 오직 누구밖에 없느냐? 예수님입니다. 왜? 모든 세계에 우리가 포함되어서 이 세대를 형성해서 썩어 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음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것이 누구를 위함이다? 바로 너희를 위함이다가 되는 겁니다. 그 중에 바로 네가 포함되어 있던 그 세상마저도 네가 죄인되는데 네가 보탬이 되었고 거기에 영향력을 입혔다는 겁니다.

알파고가 있죠. 인공지능이라 하죠. 알파라 하는 것은 알파, 베타, 헬라의 첫 자 알파이고 고라는 것은 바둑을 영어로 고라고 해요. 첫 번째 바둑이라 뜻이에요. 최고의 바둑인데 알파고가 이세돌이라는 현재 랭킹 우리나라 2위인데 하지만 그동안 따지면 세계 최고에요. 세계최고 하고 바둑을 둘 때 이세돌이가 알파고를 자기의 대상으로 본 거예요. 자기는 알파고 하고 바둑을 둔다고 생각한 거예요. 벌벌 떨면서 저 괴물이 무슨 소리를 낼까 벌벌 떨면서요. 알파고는 지난 수요일에 제가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진 사람은 있어도 이긴 사람은 없다고요. 알파고는 바둑을 두는게 아니에요. 이 말은 신문에 나와야 돼요. 바둑을 만들어 가요. 마치 오늘날 우리가 썩었다고 외치는 이 세상에 그 썩음에 나도 한 표 기여하는 것처럼 말이죠.

바둑을 만들어 가는데 어떻게 만들어 가느냐 하면 바로 자기 하고 두는 이세돌을 자기 새로운 바둑으로 진화하는데 바둑 두는 이세돌의 그 모든 수가 보탬이 된다니까요. 이해하겠어요? 다시 할 게요. 세상이 내 앞에 대상으로 있으면 내가 썩었다 말았다 할 수가 있어요. 그러나 썩은 세상에 내가 포함이 되어 있으면 세상 썩었어! 이거 개혁되어져야 돼! 라는 것이 더 세상을 썩게 만드는 겁니다. 왜? 나는 안 썩었다고 자부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들 본인만큼은 지옥 안 갈만한 가치라고 하는 것이 모여서 전체가 지옥을 지금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에요. 남은 망해도 나는 안 망해야 된다는 그 생각이 계속 지옥을 유발하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뭐라고 했습니까? “현실 재조정”입니다. 우리는 내가 이기주의가 되면서 나는 빼 놓고 남이 전부 다 타인이 되고 대상이 돼요. 나 빼고 타인이 되어 버리면 남는 것은 뭐냐? 저 사람이 나에게 어떤 손해를 줄 것인가? 나한테 어떤 이익을 줄 것인가? 그것만 생각합니다. 왜 그 생각을 하느냐? 나는 잘났기 때문에 너만 잘났나? 바로 내가 보는 그 사람도 마찬가지거든요. 잘난 사람들, 그게 자기 의의 보편적 속성인데 자기 의의 보편적 속성들이 모여서 집단적으로 예수그리스도를 비난하고 저주했습니다. 심지어 그중에 누가 포함되어 있습니까? 베드로가 포함되어 있죠. 사단아 물러가라 한 소리 들으면 정신 차릴 만 한데 그 소리를 듣는다고 정신차릴 베드로가 아니죠.

결국 예수님을 다 저주한다고 했죠. 그 모든 인간이 다 모여서 모르는 게 딱 한 가지 있어요. 뭐냐 하면 그 모든 인간이 아무리 의견을 막 내봐야 뭘 모릅니까? “나는 죄인이다”그러면 복음에 접촉하려면 주께서는 어떤 작업을 해야 되겠어요? 바로 내가 죄인이다. 죄인은 구원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나는 죄인이라는 것 까지 주께서 만들어 내는 작업이 어떤 표면에서부터 복음의 접촉할 때 까지 내려오는 그 작업이 되는 겁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그 작업을 어떻게 하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본 것이 디모데후서 3장이죠. 이것은 창세기, 구약, 십자가, 그 다음에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사도행전, 로마서, 바울의 편지가 있죠. 어디에 있습니까? 디모데후서니까 편지에 있죠. 그 편지를 해석할 때 우리가 응용해 봅시다. 우리가 이 성경을 대상으로 보고 직접 다가서 쓰면 돼요? 안돼요? 다가 쓰면 안 되죠. 방금 이야기했잖아요. 이게 다가 쓴다면 나는 천국 구원받아야 되겠고 왜? 나는 구원받을 자격이 있기 때문에 내가 천국 가야 되겠고 왜? 나는 구원 천국 자격 있다는 그것을 나가 그렇게 보장해 줍니까? 우리 배후에 누가 되겠습니까? 사단이 있죠. 사단이 그것을 보장해 주는 거예요. 사단의 조정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적이 누구라고 했습니까? 아까 베드로 이야기를 할 때 마태복음 16장에서 사단이 적이고 또 하나의 적은 누구라 했습니까? 보이는 적은 인간이고 또 보이지 않는 적은 사단이죠. 그래서 사단아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해서 사람도 예수님의적과 맞은편이 있다 했죠. 둘다 들이데는 이유가 바로 십자가 사건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고난받고 영광받아야 된다 그 이야기를 한 난 뒤에 그런 이야기가 나왔거든요. 심지어 베드로도 여기에 포함이 되는 겁니다.

사단은 자기가 멸망한다는 것을 알아요. 인간은 사단이 조정해서 인간은 옳다 시작합니다. 이것을 제일처음에 뭐라 했습니까? 이것을 자기 의라고 했죠. 자기 의가 있다고 여기고 또는 양심이 있다고 여기고 성경말씀을 하나의 대상으로 본겁니다. 그러면 바로 디모데후서 3장을 보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는 자라고 한다면 바로 직접말씀을 쓴다면 우리는 뭐면 배양하면 경건의 모양에다가 뭐만 채우면 돼요? 경건의 능력만 채우면 되겠죠. 그렇다면 거기서 말하는 경건이라 하는 것은 어디서 나온 경건입니까? 자기가 할 수 있는 경건입니까? 자기가 할 수 없는 경건입니까? 자기가 할 수 있는 경건이죠. 그러면 두 사람을 뽑아서 이야기를 해 보면 이 사람은 경건은 하루에 7시간 기도 하는 것이 경건이라고 여기는 사람과 하루에 5초는 너무 하고 하루에 10초 기도하는 것도 나름대로 경건이라고 여기는 사람과 비교해 볼 때 어느 경건이 FM 입니까? 어느 것이 정답입니까?

자기 둘끼리 비교하면 7시간이 모델처럼 되죠. 7시간하고 좋다고 하는데 옆에서 14시간하는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안되죠. 그런데 옆에서 기도를 해도 금식까지 해서 기도하는데 어떻게 합니까? 안되죠? 그 옆에 기도하는데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더 뛰어나겠죠. 그런데 그 옆에 만약에 예수님이 겟세마네 기도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앞에 있는 모든 것은 다 뭐가 됩니까? 기도 잽도 안되죠. 왜? 주님의 기도는 응답됐지만 그때 기도는 응답이 안되잖아요. 언약적이지 아니기 때문에 언약에 합치가 안됐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인간이 어떤 것을 자기를 중심으로 대상을 볼 때에 여기에 주님께서 먼저 십자가로 마중을 나온다 이 말이죠. 이 이야기를 간단한 이야기이에요. 성령이 와서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느냐? 성령이 와서 우리를 십자가로 데려가요. 십자가로 데려갈 때 유대인이 하는 말이 “어찌할꼬”이 말은 가르쳐 주시면 잘 하겠습니다. 그런 뜻입니까? 끝났네! 그런 뜻입니까? 우리를 고려로 할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없다! 그런 뜻이거든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더 이상 없는 겁니다. 이 얼마나 기쁜 소식이에요.

생각을 이렇게 하세요. 우리가 얼마나 경건할 것이냐를 생각하지 말고 주님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는 자라는 그 말씀을 현실화시키기 위해서 우리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주께서 십자가에 데려갔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지금 뭐가 힘들었느냐 하면 이 디모데후서 3장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이 없다는 것을 내 실력으로 이루려고 하니까 우리는 조마조마한 거예요. 이러다 치매 걸리면 어떻게 하려고? 말이 안 되잖아요. 그렇죠? 치매 걸려서 오줌싸는 것이 경건입니까? 말이 안된다 이 말입니다.

경건을 하는데 하루에 몇 시간 경건 할 겁니까? 보복 운전하는데도 경건할 겁니까? 그런 인간이 있습니까? 제가 안양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어떤 아가씨가 같은 또래 대학생보고 보자마자 볼이 발그래졌다 이거 경건입니까? 경건 아닙니까? 볼때기야! 좀 잠잠해라! 나대지말고! 이런다고 볼이 안 빨갛습니까? 도대체 인간은 본인을 몰라요. 인간은 환경 따라서 본인이 조정이 안되게 되어 있어요. 욱하는 성질인데 자기가 알았을 성질 같으면 욱하는 말 자체도 없어요. 욱 한다는 말은 그런 상황이 터졌다는 이야기잖아요. 

부부간에 이야기할 때 그래, 조심해서 참아야지, 몇 번 참을까요? 7번 참을까요? 7번의 7번 참을까요? 491번에 한 번에 터지는데 490 한 번에 하면 490은 많이 참았다고 경건이라고 쳐줍니까? 쳐주지 않습니까? 안 쳐워요. 왜? 경견의 모양은 있으나 491번만에 경건의 능력이 빠졌기 때문에 그래요. 계속해야지 왜 491번 가서 욱 했느냐? 이렇게 되면 할 말이 없는 거예요.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어설프게 못 지키는 자를 통해서 주께서 봐라, 말씀을 능력이 이 정도잖아! 라고 드러낼 때 세상이 모든 것이 VIP 성도를 위해서 존재하는 거예요.

그리고 왜 그렇습니까? 물으면 세상의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고 너희는 누구를 위함이라? 예수그리스도를 위함이라 되어 있잖아요. 주님께서 처음부터 세상 모든 것은 나를 위해서 라고 하시지 않고 한 단계 거치죠. 세상의 모든 것은 너희를 위함이라 할 때 우리가 얼마나 우쭐되면서 그렇지! 주께서 내가 고난 받는데 안 도와 줄 일이 없지! 그것은 땡이라 했죠. 왜? 현실 재조정, 물레방아 물방울, 기억하세요. 현실이 악한 현실이 되는데 우리가 이미 포함이 된 겁니다.

이세돌 때문에 알파고가 힘이 더 세졌어요. 그게 바로 인공지능의 연속되는 가지치기입니다. 한 마디로 괴물이에요. 이것은 말릴 수가 없어요. 마치 누구와 같이? 우리와 같이, 인공지능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바로 인간이 만들었죠. 인간이 바로 인공지능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인간은 인공지능이었습니다. 인간은 제가 장담합니다. 인간은 결국은 자기한테 지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힘들어서도 예수를 못 믿어요. 너무 힘들어서요. 지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지라고 인간은 패배하라고 몰아넣습니다. 그런데 성도와 성도 아닌 사람 사이에 성도는 패배됨도 아니고 아예 죽은 자가 되는 그것이 주님이 제자들을 찾아 온 것처럼 주님의 현실재조정에 주님도 괴물이거든요. 주님이 하늘나라를 만드는데 우리 죄인이 주님이 앞에 기회가 되는 식으로 가져간다고 인정해 버리면 그 사람은 산자가 돼요. 의인이 되어 버려요. 다시 말해서 내가 이렇게 죄를 짓는 것도 누구에 기여한다? 주님이 하늘나라 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일어나야 될 사태인 것을 주님이 주체된 그 나라의 부분인 것을 그 현실에 보탬이 된 것을 인정한다면 이미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10분 쉽시다.
 
서울 의존교회160311b (현실 재조정)―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제가 첫 번째 시간에 이런 이야기를 했죠. 그리스도의 영이 오게 되면 우리 밖으로 밀려 나오는 게 있죠. 그게 뭐냐 하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은 없다는 그것이 우리 속에서 밀려 나온다는 뜻이죠.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면 밖에 오물 또는 그동안 우리 내부를 차지했던 더러운 것, 다시 말해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을 부인하는 것들이 독소처럼 밖에 나오게 되는 겁니다.

말을 들어보면 간단한 문제이거든요. 마치 독소쥬스처럼 나오는 게 간단한데 실제로 제가 한 것처럼 경건의 모양과 능력이 이렇게 나쁘게 나오는 게 아니고 뭐가 나오느냐 하면 “나는 경건한 자다!”“나는 이렇게 경건해! 나는 신자 맞아!”이게 밖으로 나와요. 그래서 나는 신자 맞다 말이야! 나는 주님 만났다 이 말이야 그래서 나는 경건한 자야! 이게 막 나온다 말이죠.

그것은 뭐냐, 예수 믿고 자기가 잘난 사람이 되어 버려요. 주 안에서 우리가 예수 믿게 되면 바깥세상에 대해서 아, 내가 이래서 죄인이구나! 하는 것을 소급해서 받아들여야 되는데 예수 믿고 이제부터 나는 잘난 사람이다. 이렇게 되어 버리면 바리새인이 했던 그 오류를 똑같이 반복하게 되는 겁니다.

이러한 잘못된 것이 어디서부터 생겨났느냐 하면 하나님의 법, 또는 하나님의 복음 능력이 우리를 통해서 복음의 능력이 나와야 되는데 우리가 복음을 소유해 버리면 복음을 소유한 잘난 내가 바깥에 튀어나온다 이 말이죠. 다시 말해서 복음이 왔을 때 우리가 여기서 나라는 것이 변화가 있어야 되는데 변화 받지 않고 그냥 나와버리면 전에는 복음이 없던 내가 이제 복음을 아는 더 잘난 내가 돼서 거봐 난 복음까지 알잖아! 이렇게 되어 버린다 말이죠.

그러면 아까 바리새인들이 우리는 율법을 잘지 켜 너는 못 지키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들 전공분야이기 때문에 율법을 잘 지킨다고 볼 수 있죠.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바빠서 못 지키잖아요. 그것을 가지고 도토리 키재기처럼 재가지고 잘났다고 할 수는 없는 겁니다. 여기서 말씀이 들어가게 되면 말씀이 나와야 될 텐데 말씀이 들어서 말씀이 나오려면 다시 말해서 경건한 주님이 들어와버리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라 하는 이런 말씀의 부정적인 그것이 나오면 되는데 말씀이 들어왔다고 해 놓고서는 그래서 나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 잘났잖아! 라고 나와 버리면 이 가운데 말씀을 변화시킨게 아니고 내가 말씀을 소유한게 되어 버려요. 나는 복음까지 챙겼다. 이렇게 된다 말이죠.

그러면 자기 자신은 전혀 변화된 게 없어요.

디모데후서 3장 5절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복음의 접촉이 되고 올라오면서 뭐가 나와야 된다? 예수님이 죄라고 규정한 사단과 인간이 바로 주님의 적이라는 이 사실이 올라오려면 여기서 무슨 변화가 있어야 되느냐 하면 자아는 죽었다는 변화가 있어줘야 돼요. 자아를 안 죽여 버리면 예수님 복음을 알아차린 멋드러진 자아가 되어 버려요. 나는 이제 경건의 모양뿐만 아니라 경건의 능력도 있어, 그런 자아야! 그런 나야! 이렇게 되어 버리면 누구를 증거해요? 주님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를 증거합니까? 결국 나 잘났다! 증거하게 되고 너는 못났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아까 베드로 이야기했지만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고난 받는다 하니까 주님, 제가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됩니까? 제가 말리겠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을 소유해 버렸어요. 소유하고 자아는 멀쩡한 겁니다. 그 정도 같으면 제가 알아서 막겠습니다. 이게 뭐에요? 본인이 나서서 설치겠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들 다 떠난다 하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다 떠날지라도 누구는 떠나지 않는다? 저는 목숨 내놓고 떠나지 않겠습니다.

목숨을 걸고 주님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아니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주님을 따라 가겠습니다. 라고 할 때 예수님이 그런 소리를 한다고 해서 사단이 아이고 무서워라! 겁나라! 이러지 않는다 이 말이죠. 그게 바로 사단과 한 통속이라 말이에요. 같은 편이에요. 왜? 뭐가 살아있기 때문에? “나”가 살아 있기 때문에 그래요. 사단은 자기가 멸망하는 줄 알고 사단이 가지고 있는 속성을 인간에게 그대로 부여해 줬습니다. 그 부여한 것이 뭐냐 하면 신이면 다냐는 거죠. 하나님이면 다야? 하나님이 창조주고 우리가 피조물 같으면 그게 다야? 피조물도 당신한테 종속될 수 없다. 우리 피조물도 피조물 할 소리를 다하겠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 사단에게 누구를 제시합니까? 네가 어디서 까불어! 이것을 제시한 것이 아니에요. 사단이 누구를 인정하느냐 하면 하나님을 인정해요. 그러면 사단을 묵살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이 제시한 분이 있는데 그 분이 누구죠?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사단은 예수님의 적이에요. 하나님의 적이 아니고 예수님의 적입니다.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네 원수를 네 발등상으로 삼을 때 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이런 것이 진짜 어려워요. 우리는 나 있고 하나님이 있으니까 좋게 지내면 되는 줄 아는데 그게 아닙니다. 중간에 예수님이 끼어들므로 서 모든 것이 다 뒤바껴져야 돼요. 예수님도 그냥 하늘에서 왔다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죽음으로서 인간의 모든 것을 부정함으로서 하나님의 의, 복음을 낳아버렸다 말이죠.

하나님의 복음은 어디서 생긴다고 했습니까? 인간의 의와 충돌됨으로서 나오는 거예요. 출돌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지 않아요. 인간과 충돌되어야 되고 인간의 의는 배후에 누가 있습니까? 사단이 그렇게 한 겁니다. 그러면 인간은 하나의 매개체이고 배후에 누구끼리의 싸움이에요? 예수님과 주의 원수, 사단의 싸움에 인간은 들러리로 여기에 연극배우로 있는 겁니다.

사운드 오브 뮤직에 보면 막대인형극 나오죠. 그 인형처럼 인간은 그냥 주변에 둘러싼 권세에 의해서 그냥 움직일 뿐이에요. 그 인간이 움직이는데 하나님께서 사람이라고 할 때는 하나님이 쓰시는 관계 때문에 사람이라고 인간은 할 수 있는데 인간이 나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성립이 안 됩니다. 내가 내 몸을 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없이 내가 내 몸을 내것이라고 여길 경우에만 나라고 쓰면 돼요.

내가 뭐했다. 내가 밥을 먹었다.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배고프게 한 존재가 배고픈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배고프게 한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위함이에요. 모든 세상은 누구를 위함이다? 성도를 위해서 성도는 누구의 것이다?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것이고 이게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루시는 하나의 단계입니다. 중간에 예수님을 빼면 안돼요.

그런데 우리는 뭐냐, 주께서 배고프게 한 게 아니라 내가 배고프다고 이야기를 한 겁니다. 그게 언어적 습관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몸은 누구 꺼야? 내꺼야! 우리꺼 아니거든요. 로마서 14장에 누구겁니까? 나사 죽으나 누구의 것이에요? 주님의 것이에요. 그런데 주님의 것이라는 것이 우리는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아요. 사단이 네 몸은 너의 것이라고 이미 철저하게 태어날 때부터 혈연관계 속에서 주어졌거든요. 내 아버지가 죽었는데 내가 장사 치러야 됩니다. 주님께서는 너 아버지는 없는 거야. 뭐라 부릅니까? 너까지 포함해서 죽은 자라고 규정을 해 버려요.

그 규정은 예수님과 관련되었기 때문에 나온 규정이다 이 말이죠. 성경규정을 우리는 자꾸 이해하려고 하는데 이해할 수 있는 건더기가 없어요. 이해해 봤자 나는 잘났다부터 시작되니까 이것은 잘못된거예요. 주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는 어떤 것도 이해될 수 없는 존재인 것을 인정해 줘야 됩니다.

그 이유는 뭐냐, 내가 사단의 조정을 받으면서 무조건 나만 최고로 시작점도 나고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로 말미암아 마지막도 나만 챙기고 나만 행복하면 그만이라는 것이 철두철미하게 마귀의 조정에 의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가, 내 몸이 어디 있습니까? 이것을 질문을 하면서 답변할 사람 아무도 없어요. 내 몸이 어디 있죠? 내 몸이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나라고 하는 것은 허구적 개념인데요. 

그러면 내가 없으면 누구 것인데? 내가 없으면 누구 것이냐 하면 하나님이 주신 법 있잖아요. 하나님의 말씀, 말씀과 그 말씀과 대적하는 사단이 접전하면서 거기서 파생되어서 나오는 게 나에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관계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시 말해서 알파고라는 그 인공지능이 누가 바둑을 뒀죠? 이세돌이죠. 알파고에서 이세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알파고는 누구랑 둔겁니까? 본인이 본인하고 둔 거예요. 그러니까 이길 수가 없는 거예요. 이세돌이 뒀잖아요. 두고 난 뒤에 이세돌은 없어졌어요. 왜? 이세돌이 뒀던 그 바둑의 정보가 이미 알파고에 흡수돼서 알파고는 새로운 현실을 재조정한 겁니다.

그 만큼 정보의 양이 많아진 거예요. 그런데 그 알파고의 생리가 이 인간 세계가 멸망할 수밖에 없는 생리하고 똑같아요. 교회 있잖아요. 그 교회가 다 악마의 날에 다 필요한 거예요. 악마가 그 교인을 만듦으로서 그게 악마의 한 수작에 포함이 됩니다. 그런데 그 안에 누가 들어있습니까? 인간들이 있죠. 인간들이 하는 모든 것이 집결되어 버리면 그것이 바로 인간들이 원했던 세계, 유토피아 세계를 형성합니다. 그게 사단의 나라입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을 근거가 있어야 되고 증명이 되어야겠죠. 제가 증명한다고 증명이 되는 게 아니지만 근거는 있어야 되겠죠. 복습해 봅시다. 내가 여기 있다. 세상에는 성경이 있죠. 이 전체를 뭐라 했습니까? 이것을 나의 대상이라 했죠. 그러면 나는 이 속에 포함이 된다? 안 된다? 대상이기 때문에 포함이 안 되죠. 나라는 이 괴물은, 이 알파고는 세상을 뭐로 본다? 나를 키우기 위해서 내가 어떻게 요리를 할 것인가 하는 대상이 된다 이 말입니다. 내가 어떻게 요리를 하면 내 몸짓이 더 커지느냐! 거기에 관련되어 있어요. 아닌가은 스스로 진화하니까요.

이 이야기를 조금 더 심도 있게 해 봅시다. 꿈에 내가 여기 있고 떠나왔던 고향의 예배당, 어릴 때 놀던 예배당에 놀던 친구 봉순이도 보이고 친척들도 보였다. 꿈에 내가 이렇게 봤다 이 말이죠. 그러면 나는 여기 있고 꿈에 나타난 어린 시절은 하나의 뭐가 됩니까? 하나의 대상이 되죠. 그런데 실은 그 꿈 풍경 속에 누가 포함되어 있어야 돼요? 내가 쳐다볼 것이 아니고 내가 같이 여기서 놀아야 되겠죠. 내가 놀아 버리면 꿈이 안 돼 버려요. 왜냐하면 꿈에 지켜 볼 수 있는 내가 없으면 이런 것이 내가 당장 죽는다면 이 꿈도 사라져 버리거든요. 

그러면 내가 죽으면 과거의 현실이 없던 시절이 됩니까? 내가 죽더라도 그때 그 시절 동네 친구들과 놀았던 것이 과거에 있었던 일이 되는 겁니까? 내가 지금 죽더라도 내가 40에 죽더라도 내가 7살 때 있었던 그 일들이 지구상에서 갑자기 사라지는 겁니까? 아니면 그 때 일들이 내가 죽더라도 여전히 남아 있는 겁니까? 옛날 그때 일이 남아 있죠.

그러니까 이 말은 내가 어떤 것을 기억하고 생각한다는 것은 나 빼놓고 내가 나를 볼 때 내가 일방적으로 생각한 것이지 실제로 제 3자가 볼 때는 너도 같이 놓았잖아. 너도 같이 논게 돼요. 다시 말해서 현실을 조성하고 만들어 놨는데 내가 보태어놓고 나는 마치 빠져있는 것처럼 세상을 일방적으로 보는 이유가 나라는 것을 중심을 재편성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세상은 누구를 위해서 있다? 나를 위해서 있다. 이게 바로 괴물이에요. 이게 사단의 모습입니다. 여기에 누가 끼어들었습니까? 여기에 예수님이 끼어드니까 세상은 예수님의 중심으로 돌아갈 것이냐 내 중심으로 돌아갈 것이냐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는데 성도 마음속에 죽을 때 까지 계속돼요.

교회를 옮겼다. 이게 누구 좋으라고 하는 겁니까? 누구 좋으라고 일어난 현실입니까? 주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었잖아요. 그런데 교회를 대상으로 보면 누가 마음이 찹찹하고 서글픕니까? 나 여기 있고 교회를 대상으로 보면 누가 50억만 줘서 잘 지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요. 그런데 실제로 주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이 교회가 재개발되게 하셨잖아요. 묻습니다. 주께서 잘하고 계신 거예요? 지금 주님이 못하고 계신겁니까? 잘해도 잘-하시는 일이 되죠. 그러면 잘하시는 일이 되려면 우리가 교회를 대상으로 바라보는 일을 철회를 해야 되죠. 생각하지 말고 주께서 잘 하신 일에 풍덩 뛰어들어서 박수를 쳐야 되죠. 미쳤습니까? 박수를 쳐야 되죠. 주께서 이렇게 예쁘게 일을 잘할 줄 몰랐습니다. 이렇게 되어야 되겠죠.

그렇게 되려면 평소에 무엇이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내가 존재하지, 주님의 대상으로서 내가 되어야지 나의 대상으로서 주님은 애초부터 내가 있기 때문에 주님은 없는 겁니다. 제가 지난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사랑이 나타나면 누가 사라진다? 사랑이 나타나면 내가 사라지고 사랑이 사라지면 누가 그 자리에 누가 등장한다? 내가 또 등장하죠. 그대 앞에 서만 나는 작아지잖아요. 지금 당장 죽어도 그녀만 있다면 나는 아무 관계없어요. 이게 뭐냐? 뭐가 없어져요?  내 중심에서 누구 중심으로? 그대 중심으로 바뀌게 된다 이 말이에요.

바뀌어 버리면 나는 그대의 현실을 확장하는데 내가 소모품이 되는 것을 본인은 아주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거죠. 주님의 현실에 나를 끼워 넣어 주니 아우 고마워라! 이렇게 되죠. 그런데 주님이 나한테 한게 뭐가 있다고? 하면 주님을 하나의 대상으로 보게 된다 이 말입니다. 지금 까지 신앙 생활한 것을 다시 한번 정리합시다. 그동안 신앙생활 잘한다고 한 것은 결국은 주님을 하나의 대상으로 봐서 잘 섬기고 잘 순종하고 사랑하고 전부 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엉터리입니다. 이미 우리는 주께서 조치한 현실에 소급적으로 포함이 되어 있어요. 포함이 되었는데 뒤늦게 우리가 알아차릴 때, 인식할 때 이미 성도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시간에 뭐라 했습니까? 우리가 하나의 나가 없는데 이미 주 앞에 포함된 현실 속에 옛날 봉순이 있던 그 시절을 내가 꿈으로 구경할 것이 아니고 봉순이 있던 그 현실 속에 나도 이미 포함이 되어 있어요. 누가 그렇게 했다? 주님이 그렇게 했어요. 주님이 그 전체를 성경이라는 것을 보여 줬죠. 그러면 우리는 대상이 되지 말고 여기에 들어가야 되겠죠.

이것은 쉽죠. 들어갈 때 어디로 들어간다고 했습니까? 사도행전에서 이방인이게 성령세례 올 때 그 성령이 누구의 이름입니까?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오신 영이거든요. 베드로가 이렇게 했어요.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고 하나님의 우편에 계시기에 주의 영, 성령세례를 받게 되면 성령을 증거합니까? 예수님을 증거합니까? 우리 모두도 예수님의 현실을 구축하기 위해서 우리를 주께서 자기 재료로 뽑아 세웠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성령을 통해서 인식하게 됩니다. 이제 내 중심은 끝났어요. 무엇을 해도 주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겁니다. 베드로하고 실라가 옥에 갇혔을 때 풀려났잖아요. 풀려났는데 그 때 풀려날 때 교인들은 뭐하고 있었어요? 기도하고 있었죠. 그러면 기도할 때 베드로가 오게 되면 롯데라는 그 여자가 베드로가 왔습니다. 하니까 앞에 기도 하는 사람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래 우리 기도 대로 응답됐다 했습니까? 아니면 네가 귀신을 봤냐? 이렇게 했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베드로 풀리라고 기도해 놓고 그들은 기도한 당사자를 본거예요. 다시 말해서 베드로는 그들의 기도의 대상이 된 겁니다.

베드로를 위해서 기도하도록 하신 주님의 그 연결 작업을 그들은 몰랐던 거예요. 이쪽은 기도하고 베드로는 풀려나고 양쪽다 주님께서 하셨는데 저들이 말하기는 우리가 기도를 하게 되면 납득이 되는 식으로 풀려날 것이다 했는데 납득이 되는 식이 아니고 그냥 풀려나니까 그들은 자기가 하는 행위와 연결고리를 찾을 수 없었던 거예요. 네가 미쳤구나! 베드로가 옥에 갇혔는데 어찌 나왔다 하느냐? 나중에 베드로가 눈앞에 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들은 그 기도 덕분에 나온 거예요? 아니면 기도하게 하신 주님 덕분에 나온거예요? 기도 하게 하신 주님 덕분에 나온거예요. 

그러면 그들의 기도는 뭡니까? 우리 기도 빨은 아무 짝도 소용없다. 그 말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주인공 되는 기도는 이것은 주의 현실에 도움이 되지 않지만 되지도 않는 기도가 주님의 새로운 현실 조성에 부정적이던 어떻든 간에 그것도 필요해서 엉터리 기도이지만 하게 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그냥 사세요. 주께서 무슨 이유가 있어서 하신겁니다. 그 이유를 나한테 당기지 마세요. 그것은 반칙입니다. 코스를 잘못 받은 거예요.

주께서 십자가로 들어갑니다. 십자가에 들어가면 십자가는 언약의 완성이죠. 십자가 들어가는 순간, 십자가 양쪽에 뭐가 보입니까? 옛날에 뭐가 보이고? 옛날에 창조와 옛날 구약이 보이고 신약이 보이겠죠. 그러면 우리가 주께서 성령에 의해서 십자가로 들어갑니다. 성령이 아니면 십자가를 알수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능력을 덧입게 되면 신약, 디모데후서 3장 5절 그 말씀도 이것은 누구의 작품이 됩니까? 이것은 예수님이 스스로 알아서 우리를 가지고 하실 작품이 되겠죠. 우리가 한 것이 아니죠.

그러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다는 말이 들어오는 순간, 진짜 경건의 능력이 들어오게 되고 우리 바깥으로 삐져 밀려 나오는 것은 뭡니까?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이 없다가 나오죠. 그렇게 되면 죄인을 의인되게 한 그러한 내용이 주어진 말씀을 따라서 뭐만 튀어나와요? 십자가, 십자가가 튀어나오겠죠. 그러면 이 십자가를 위해서 주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자마자 어린 아기 예수가 낑낑 거리면서 “아빠 십자가 하나 만들어 주세요!”이러면서 십자가 지셨습니까? 그것은 코메디죠.

십자가 지기 위해서 지리적으로 시간적으로 두 가지를 해야 돼요. 하나는 뭐냐 하면 베들레헴과 갈릴리, 12km에 예루살렘이 있어요. 갈릴리는 여기서 몇 킬로냐? 100키로입니다. 여기 사해바다 꼭대기와 갈릴리 바다 끝하고 딱 100키로입니다. 예수님을 임신한 마리아가 어디로 가느냐 하면 갈릴리호수가 근처에서 약 20키로 떨어진 나사렛 동네에 가요. 나사렛 동네에 갔다가 호적 하러 어디로 가느냐 하면 예루살렘을 거쳐서 베들레헴에 옵니다.

수평으로 보면 이렇게 보이지만 옆에서 보게 되면 600미터 700미터 800미터 점점 갈수록 고지가 높은 그런 산지지역입니다. 산 위에 길이 나있어요. 베들레헴에서 산기가 나서 예수님을 낳습니다. 베들레헴 지역이 유다지역이에요. 유다지역은 하나님의 메시야가 온다가 예언된 지역이라고 특별지역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나사렛 동네는 뭐냐, 북쪽 이스라엘 동네로 이방인의 피가 섞인 어두움의 곳이에요. 이사야 11장의 하면 빛이 없는 곳이에요. 이곳은 어두운 곳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의 부모가 나사렛 와서 베들레헴 유다에서 태어나요. 그러면 약속대로 다윗의 언약에 의하면 베들레헴에서 메시야가 태어납니다. 태어난 뒤에 어디를 가느냐? 태어날 때 헤롯이 2살 이하 죽인다 하니까 어디로 밀립니까? 애굽으로 가요. 온 길로 가지 않고 해안길을 거쳐서 나사렛 본 고향으로 가요. 나사렛에 갈 때 마태복음에서는 뭐라 했느냐 하면 어두움이 있던 곳에 빛이 등장했다 하는 겁니다.

여러분 동방박사가 예수님을 따라 올 때 별을 따라서 왔죠. 이것은 뭐냐, 이미 이 세상은 어두운 세상으로 볼 때, 별이라는 것은 주님의 예언이거든요. 예언 따라 세상이 어둡게 되는 그 환경을 조성하면서 별은 오게 되어 있어요. 이 말은 죄가 있어야 거기서 의가 나온다는 겁니다.

미국의 이상형 목사님이 참 중요한 말을 했죠. 하나님의 의는 죄 속에서 피어난다. 이 말은 의를 나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없다? 아니죠. 우리가 어디 가야 됩니까? 우리가 죄 속에 들어가게 되면 우리는 드디어 의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원초적으로 박탈당해요. 그 다음에 의를 주고 안 주고는 누구의 권한이냐, 예수님의 권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저주 받아야 되기 때문에 저주 받아야 되는 자가 구원해 달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말이 안돼요. 저주 받는 자가 되고 난 뒤에 계속 저주에 있을 것이냐 아니면 저주 받아 합당한데 건져 줄 것이냐 하는 그 문제는 저주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본인만의 고유권한입니다.

이것은 뺏을 문제도 아니고 정치적으로 협상할 문제도 아니에요. 협상 같은 것은 필요없어요. 요청한들 필요없어요. 저주로 가야 되는데 어디까지 저주로 가야 되느냐? 우리는 구원 안 해 줘도 상관없어요. 까지 가야 돼요. 그렇게 되려면 주님께서 이 갈릴리 지역은 원래부터 어둠의 곳이에요. 남아 있는 곳이 어디냐 하면 원래부터 나사렛은 어두운 곳이고 그 다음에 자칭 빛이라고 남아 있는 유다 이것을 어두움으로 만들어 버리면 온 천지가 어둡게 되겠죠. 어둡게 되어 버리면 이것은 동방박사와 같은 상황이 됩니다.

어두운 곳에 뭐만 움직인다? 빛만 움직이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세상에 온 빛이죠. 예수님이 가는 곳 마다 어두워요. 가는 곳 마다 어두워지면서 원래 어둡기 때문에 예수님은 어두운 가운데 빛이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갈릴리 이쪽에서 빛의 동네라는 말이 아니고 어둡기 때문에 빛이 보인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는 자칭 빛이라고 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무시당한 거예요. 주께서 이쪽을 뭐로 만들어 버립니까? 어두움으로 만들어 버려요. 갈릴리로 가셔서 갈릴리 바닷가에서 어두움 속에서 빛의 특이성을 갈릴리 바다 근처에서 있으면서 마태, 마가, 누가 복음에 나온 이야기가 여기서 나옵니다. 해 놓고 그 다음에 어디로 가겠어요? 드디어 예루살렘으로 가요. 예루살렘 성 여기에 기드온 골짜기 옆으로 들어가고 일하시고 쉬고 또 들어가고 마지막 때는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십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제가 경건이라는 말을 하면서 이것을 뭐로 이어졌습니까? 예수님의 공생애를 바탕으로 깔아야 경건이다 말입니다. 경건하라를 만들기 위해서 이렇게 예수님의 공생애가 있어야 된다는 그 이야기를 제가 하는 거예요. 우리는 경건이라 하면 경건하면 되지 이렇게 하는데 그렇게 되면 나의 경건이 돼요. 나의 경건이 되면 복음이 나오지를 않아요. 잘난 내가 나오죠. 그 다음에 복음에서 경건위에 우리의 죄가 드러나려면 누가 밀어줘야 돼요.

밀어주려면 주님이 우리의 자아자리에 계셔서 주님의 경건이 밀어주게 되면 바깥에 뭐가 나옵니까? 오직 더러운 우리의 모습만 밖으로 떠 밀쳐 떠오르죠. 쓰레기들이요. 그 쓰레기가 원래 우리 안에 주차 되어 있던 내용들입니다. 주님이 계시기에 밀려 나온 거예요. 그 모습이 바로 이 공생애의 반복이라고 제가 이야기하고 싶다 이 말입니다. 왜? 성령 안에서 주님의 공생애가 늘 반복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반복이라는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이 공생애 때에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많이 부딪쳤잖아요. 그 부딪침이 오늘날 우리가 죽을 때 까지 우리 내부에서도 여전히 매일같이 일어나야 돼요. 경건이 뭐냐! 목사님, 경건이 뭡니까? 경건이 뭔지 딱 한 가지만 이야기 해 보세요. 내가 경건치 않다는 고백이 경건입니다. 내가 경건치 않다. 나는 죄인이다. 이게 경건입니다. 왜? 말씀이 우리를 복음으로 인도하기 때문에 복음이 나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경건치 않습니다. 어떻게 경건치 않습니까?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은 없는 자입니다. 이게 딱 나와야 돼요. 그렇게 되면 말씀을 위해서 우리를 가지고 노신 게 돼요.

우리가 경건할 수 없는 이유가 우리 자신이 아예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몸은 누구의 몸입니까? 주의 몸이잖아요. 그게 아까 고린도전서에 나왔죠. 세상은 우리의 것이고 우리를 위함이고 우리는 누구를 위함이라? 예수님을 위한 몸이 되잖아요. 이런 긴긴 이야기를 지금 까지 강의 한 것을 모른다고 치고 디모데후서를 한번 봅시다.

4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여기에 네가 나오죠. “네가 돌아서라”이 너는 어디 안에서 발생된 “너”입니까? 바로 복음에 의해서 발생된 너가 되죠. 돌아서야 되는데 그 사람이 나한테 돈 20억 원 줬다면 돌아 설 수 있습니까? 없겠죠. 그러면 내가 원하는 나는 여기서 빠져야 되겠죠. 그러면 어떻게 빠지느냐 그것을 설명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하시면서 여기에 12제자가 있었죠. 주님께서 계속 나오면서 점점 더 12제자가 처음에는 한 덩어리를 봤는데 나중에 십자가 갈 때는 누구만 남았습니까? 로켓에 캡슐만 달랑 올라가는 것처럼 12제자 가운데 누가 올라갔습니까? 예수님만 올라갔죠. 그 양쪽에 누가 있었습니까? 강도 둘이 달려 있었죠. 강도 둘이 제자였습니까? 아니죠. 예수님하고 강도 둘이 십자가에 올라간 거예요. 그러면 떨어져 나온게 뭐가 떨어져 나왔을까요? 목자를 치니 양들이 흩어져야 되죠. 안 흩어지고 옆에 붙어 있는 막달라 마리아는 곤란하죠. 있으면 안돼요. 흩어져야 되죠. 하여튼 말씀대로 돼야 되니까요. 예언대로 되어야 되거든요.  

예언대로 되어야 되는데 누가 와서 방해합니까? 뒤 늦게 와서 우리들이 방해하는 겁니다. 아, 내가 그때 있었으면 내가 안 떠날 건데! 꼭 자기가 협조할 수 있는 것처럼 하는데 그때 있었으면 하지 말고 지금 이나 잘해야죠.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목자를 치면 양들이 흩어진다고 했잖아요.

이사야 53장 6절 봅시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갈 길로 갔거늘”우리가 양 같아서 그릇 행했다고 됐는데 만약에 양인데 그릇 행하지 않고 주님을 졸졸 따르는 양이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 양 있어요? 없어요? 그런 양은 없습니다. 김양 최양 박양 그런 양은 없습니다. 어떤 양도 그릇 행하도록 되어 있어요. 왜냐, 그래야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간의 협조나 도움이 일절 없이 예수님은 홀로 이루어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중심을 바꿔야 되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중심을 일체 다 바꿔야 됩니다. 예수님이 50 했으니까 나 50, 이렇게 지분을 나누면 안 됩니다. 100% 주님에 의해서 우리가 살아가야 돼요. 그게 경건의 능력이고 복음의 능력, 십자가의 능력이고 성령 세례의 능력입니다. 능력은 우리가 끄집어내고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주님께서 계속 부여해 주시는 겁니다. 양 같아서 그릇행하거늘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를 그에게 담당시켰죠. 이게 바로 복음이잖아요. 이 복음이 디모데후서 3장 3절 4절 5절에 밑바탕에 이렇게 깔려야 되죠. 깔리게 되면 드디어 뭐가 나옵니까? 바로 이런 자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는 현상이 일어나겠어요? 안 일어나겠어요? 일어나죠.

네가 돌아서라 했잖아요. 내가 저 사람에게서 돌아서야 돼 하면 그것은 돌아선 거예요? 돌아선게 아니에요? 돌아선게 아니에요. 내가 판단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주께서 경건의 능력이 동원되어서 내가 어떤 사람과 갈라섰다면 주님에 의해서 돌아선게 돼요. 그러면 친구하고 헤어질 때, 애인하고 헤어질 때 자기 마음대로 헤어지지 마세요. 헤어지면서 누구도 돌아서야 됩니까?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의 힘으로 돌아설 수 없는 자를 주께서 돌아서게 하셨다는 들어 있는 그런 상태에서 세상과 돌아 설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계속해서 주께서 주신 능력 속에 우리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세상 친구하고 열심히 사귀세요. 저거는 교회 안 다녀서 헤어지겠다! 하지 마세요. 세상친구라는 것은 내가 판단한 겁니다. 세상 친구가 나중에 주의 종이 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다만 헤어질 때 누가 헤어지게 하십니까? 주께서 그렇게 헤어지게 하실 때 그때 나중에 돌아보면 주께서 헤어지게 하셨구나 하게 됩니다.

이혼할 때 성격 안 맞아서 하지 마시고 법원에서 이혼 사유가 뭡니까? 하면 주께서 돌아 서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적으란 말이죠. 성경이 안 맞니 뭐 폭력이 있었니. 이렇게 쓰지 말고 주께서 돌아서게 하셨다. 이렇게 하세요 폭력도 그중 이유가 되겠지만 세상에 애가 죽어도 안 돌아서요. 애가 죽여도 두 사람이 같이 합세해서 애를 죽이잖아요. 어디서 사건 벌어졌잖아요. 보세요. 애 죽여도 이혼감이 아닙니다. 죽이 잘 맞아서 했으니까요.

그런데 세상에서 돌아서게 하는 것은 반드시 누가 개입을 해야 된다? 복음으로만 돌아서게 해 줘야 이게 바로 이 말씀이 주의 힘에 의해서 성취된 게 되는 겁니다. 그 와중에 내가 주인공이 되는 행위의 주체가 되는 것은 삭제 되어야 합니다. 그 증거가 8절에 나옵니다.

8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저희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이라

얀네와 얌브레는 그 당시 유대인의 옛날 책을 보게 되면 모세가 열 가지 재앙을 베풀때에 모세 흉내 낸다고 어설프게 속임수로 흉내를 낸 애굽의 마술사 둘을 두고 얀네와 암브레라는 것이 사도 바울 당시에 그런 책들이 유행이 됐어요. 그런 설이 있다는 것을 따온 거예요.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했죠. 이 때 이 사람들의 거짓을 드러내는 것이 모세입니까? 하나님이십니까? 이 사람들이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이라 하는 것은 누가 그렇게 그들의 실체를 드러나도록 누가 조치한 겁니까?

모세를 앞장세워서 하나님이 했죠. 이게 뭐냐 하나님의 개입이다 이 말이죠. 그런데 제가 하나님의 개입이라 했는데 아까 우리가 공부했습니다. 그냥 하나님의 개입이라 하지 말고 예수님의 공생애의 반복이라 하자 이 말입니다. 공생애의 반복이 되게 되면 예수님의 적이 누구라고 했습니까?  사단과 인간이 적이죠. 예수님 빼놓고 다 적이에요. 이게 악의 연대기라 했죠.

심지어 12제자 보고도 예수님께서 사단아 물러가라 했잖아요. 그것을 가잖게 여기면 안됩니다. 그 말을 들을 때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참 이해해야 돼요. 예수님 본인 빼 놓고 모든 것이 적으로 둘러 싸여있다 그런 입장으로 보라 말이죠. 스데반 집사가 죽을 때 용감하게 이 사람은 주의 사람이라고 나선 사람이 누가 있어요? 집사가 죽는데 12사도는 뭐했어요? 12사도가 이 사람 살려야 된다고 운동 벌렸습니까? 그런 게 필요 없어요. 스데반 집사는 지금 주님 앞에 간다고 신났어요.

성령 충만 받아서 설교하는데 장돌 들고 설치는데도 신났어요. 주여, 저들이 하는 짓을 저들이 알지 못합니다. 스데반 집사는 성령 충만 받았기 때문에 중심이 누구 중심입니까? 이런 일을 꾸미게 된 것도 다 주님께서 하신 것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 사람과 그 사람들이 만나서 예수님의 공생애의 의미가 자기를 통해서, 자기를 통해서 다시 한 번 계속 반복해서 현장에 남기는 겁니다. 그것을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시켜 봅시다.

우리가 성도가 되어서 이 세상에 주님 보시기에 VIP로 산다는 것은 우리 주변에 무슨 사건의 반복이 일어난다? 예수님 공생애에 일어났던 그 현상을 우리를 통해서 우리를 앞장 세워서 계속해서 반복해서 일으키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물어 봅시다. 그들이 이 사람들이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 버리운 자라 했는데 마음이 부패했다는 증거가 뭡니까? 갑자기 어려운 질문이죠.

마음이 부패했다는 증거가 뭐냐? 정답은 간단해요. 복음을 믿지 않으면 다 마음이 부패한 겁니다. 초등학교 동창회에 모였다. 대부분 마음이 부패한 자들이에요. 왜? 그들이 왜 모였겠어요? 술 먹는데 핑계꺼리 없어 모인거예요. 동창회 핑계로 실컷 술 먹으려고 온 거예. 복음에 관심있어서 동창회 가는 사람은 없어요. 저는 아예 안 가요. 물론 회비도 아까워서 안가지만 가봤자 술 먹을 구실만 만들어 내는 겁니다. 회의 마치고 1차 노래방 가고 순서도 모르겠네요. 목사님도 모르죠. 해봐야 알죠. 저녁 먹고 그 다음에 2차가 뭡니까? 술먹고 노래방 가고 4차 있겠죠. 그러면 동창회 모여서 1차하고 2차 음악회 참여하고 3차 봉사활동하고 집에 간다. 그러면 마음이 부패한 거예요? 부패 안 한 거예요? 그거 부패한 거예요.

경건, 윤리, 도덕이 아닙니다. 이것은 지금도 주님은 능력으로 살아있다는 것을 바로 이렇게 부패로 사는 우리가, 우리 모습이 우리를 통해서 삐져나오는 것을 통해서 복음을 증거하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요 예수 믿었다고 안 보면 안돼요. 예수믿고 난 뒤에 매일같이 들여다봐야 돼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이유가 뭡니까? 모세한테 돈 빌려주고 돈을 못 받은 적 있어요? 모세가 무엇이 그렇게 미운거예요? 모세를 언제 봤다고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미워하는 겁니까? 이 사람은 모세를 미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자신이 자기로서 자리를 정립하는 것이 뭐냐? 애굽 바로의 권력이죠.

강의 처음으로 돌아갑시다. 나라는 것이 형성되게 되면 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 하느냐 하면 권력의 힘이 필요해요. 그 권력을 누가 제공하는 거예요? 바로 왕이 제공했죠. 모세는 얀네와 얌브레를 시비 걸려고 온게 아니고 모세가 누구하고 싸웁니까? 바로 왕과 싸우죠. 그 바로 왕이 무너지면 누구 자리가 위태로워요? 얀네와 얌브레의 본인도 자리가 위태로운거예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바로왕과 한 통속이 돼서 모세를 대적할 수밖에 없습니다. 애굽 왕을 위해서? 아니에요. 애굽 나라를 위해서? 아니에요. 누구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나를 위해서 내 중심으로 산다는 것이 그게 바로 부패한 마음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내가 구원받은 티를 내기 위해서 그것을 지키는 것, 그게 바로 부패한 마음입니다. 이것은 지키는 게 아닙니다. 이것을 지키면 지킬수록 점점더 우리는 부패한 존재로 부패하면서도 부패 안한 척하는 그런 인간이 되어 버려요.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런 식으로 우리를 이 말씀대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예수, 예수 하지만 만약에 직장에서나 사회에서 정치적 권력과 결탁이 되었을 때 네가 우리 편에 서게 되면 저 사람을 내 치게 되면 너한테 한 자리 줄게! 신곡시장은 국회의원이 누가 나올지 모르지만 국회의원이 목사님한테 잘해 주면 예배당 하나 줄게 이렇게 나온다면 그 사람이 좋아서가 아니라 내가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부패한 행동이 나올 수밖에 없죠. 나올 수밖에 없다는 말은 언젠가는 나올 수도 있겠지요. 상황이 바뀌면 그때 지옥 갔다 생각하지 마시고 진작 나와야 될 것을 주께서 이렇게 몰아세우셔서 주여! 참 일을 잘 하십니다. 주여, 내가 이렇게 부패한 마음이 있음을 이제서 내 자신을 알게 해 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이게 감사가 된다면 부패한 마음이 안 나와도 또 안 나온 대로 감사 하면 됩니다. 범사에 감사 안할 일이 없어요. 망해도 감사, 남들에게 칭찬을 받아도 감사, 범사에 모든 것이 감사, 이 말씀을 통해서 주께서 일하게 중심에 잡으신 것을 늘 감사합시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중심이 예수님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이 어두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을 우리의 이런 모습을 통해서 마음껏 드러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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