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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9 00:33:27 조회 : 352         
마땅함 190308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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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IP:122.♡.170.138) 19-03-11 22:27 
서울의존강의20190308a 베드로전서2장 21-23절(마땅함)-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2장 21-23절

 

21절,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절,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23절,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베드로전서 2장 21절,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죠. 여기서 예수님이 가게 되면 그 뒤를 누가 따라간다고 했습니까? 그 뒤를 성도가 따라가는 걸로 되어 있죠. 그런데 누가 불러주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따라올 성도를 먼저 불렀죠. 예수님이 먼저 불렀다 이 말이죠.

 

그렇게 따라갈 때에 따라가기를 시작했던 그 지점, 예수님이 여기 계시고 우리가 여기에 있다면 주님이 우리를 불러주십니다. 주님이 불러주세요. 오늘 강의가 좀 난해하니까 잘 들으셔야 해요. 주님이 우리 성도를 부르신다 이 말이죠. 불러주신다. 그렇게 할 때, 이 ‘불러주신다’가 우리가 부름을 받고 반응을 나타나게 되면 이 ‘불러주신다’가 사라질까요? 아니면 우리 안에 흡수통합 이 될까요? 어느 쪽이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불러줄 때에 그 불러줌에 응답해서 우리가 따라간다면 이 불러주심이 도중에 사라져버립니까? 아니면 우리 안에 내장되어 있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이 불러주심에 의해서 우리가 움직였으니까, 이 불러주심이 우리 안에 내장되어 흡수통합이 되어 있다고 생각하겠죠. 이 불러주심이.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내린 결론이 뭐냐 하면 “나는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가 되겠죠. 근데 “나는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라는 이것이 옳은가 하는 겁니다. 이것이 성경일까요? 이것이 성경이고, 계시고, 바른 고백이냐 하는 것을 생각해봐야 하는 겁니다. 내가 부르심을 입었다, 이게 계시냐 이 말입니다. 내가 부르심을 입었다는 이것이.

 

문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모르면서 일방적으로 나는 나라고 우기는 데에 문제의 시발점이 시작이 됩니다. 쉽게 말해서 주께서 불러줄 때는 달라야 된다 이 말입니다. 달라야 된다. 부르심을 입기 전의 나와 부르시고 난 뒤에 내가 달라져야 한다. 그러면 여기 예수님에서 여기 우리까지가 한 100미터라고 봅시다. 그럼 100미터 이전에 부르심을 입었잖아요. 부르심이 있으니까 주님을 따라갑니다. 좁혀갑니다. 100미터 전에서 한 20미터를 왔을 때에 20미터의 내가 여기에 있죠. 20미터의 나. 그렇겠죠? 부르심이니까 우리가 주님께 가잖아요.

 

그럼 여기 100미터이전을 A라고 하고 20미터를 B라고 한다면 A와 B사이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느냐를 생각해봐야 한다 이 말입니다.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가를. 첫째는 똑같다. 두 번째는 달라졌다. 어느 쪽일까요? 나를 불렀으니까, 부르심이 중요하니까, 나는 별반 달라질 것이 없이 그냥 따라가면 된다는 생각을 할 수가 있어요. 그러나 주님의 부르심에는 변화가 없는 부르심은 없습니다.

 

변화가 없는 부르심이 없다면 A지점에서 B지점으로 왔을 때에 우리는 달라져야 하잖아요. 그 달라졌던 그것을 우리 자신이 인식하고 있겠느냐 하는 겁니다. 우리 자신이 그것을 알고 있겠느냐 하는 겁니다. 그럼 한 50미터를 더 갔다고 봅시다. 20미터에 30미터를 보태서 50미터 갔다고 봅시다. 그럼 50미터 왔을 때에, 20미터 다르고 100미터 전까지는 다르고 다 다르다 이 말이죠.

 

그러면 나는 부르심을 입었다고 할 때에 우리가 어디에 치중하느냐 하면은 도대체 나는 어떤 점에서 부르심을 입고 난 뒤에 변화되었는가를 고려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을 다시 정리하게 되면 부르심을 입고 난 뒤에 인간은 그냥 고정된 나를 주장할 수 없고 달라져야 된다는 것. 달라져야 되는데, 근데 그 달라져야 되는 그것이 나는 달라졌다고 이야기 할 때 그게 과연 정답일까? 하는 그것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나는 달라졌다고 할 때 제대로 뭘 알고 달라졌다고 하는지, 아니면 달라졌을껄! 해가지고 일방적으로 달라졌다고 우겨서 달라진 것인지, 그것의 원리를 생각해봐야 된다 이 말입니다. 어떤 점에서 우리가 잘못된 생각을 하는지, 먼저 잘못된 생각부터 말씀드릴게요. 잘못된 생각은 내가 달라졌다는 것이 잘못된 생각이에요. 그러면 안 달라지는가? 달라지죠. 달라지는데, 달라진 것도 모르고 무조건 내가 달라진 거 맞습니다, 라고 자꾸 우기는 버릇이 있다 이 말이죠. 주님 앞에 책망 안 들으려고. 뭐가 달라진지 몰라요. 모르고, 하여튼 달라졌습니다. 주여! 이런다 이 말이죠.

 

주님의 강조점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은 부르심을 더 구체화시키는 쪽으로 달라졌느냐를 묻는 겁니다. 나는 부르심을 입어서 구원받았다고 생각할 때에, 이 관심사는 뭐냐 하면 부르심에 관심사가 있어요? 아니면 자기 구원 받는 데에 관심이 있습니까? 나 이런 식으로 구원받았구나! 기분 좋다! 자기 구원받았다는 데에 관심이 있잖아요. 그렇게 돼버리면 부르심 자체가 도중에 소실돼버려요. 그리고 부르심을 입어서 구원됐다고 하면 한 번 부르심으로 모든 것은 그 다음부터는 안 불러주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는 거예요.

 

불러주셨다. 그래서 내가 달라졌다. 뭐 더 이상 불러줄 게 뭐가 있어요? 라고 생각한다 이 말이죠. 그러면 몇 번 부르심이어야 하느냐? 두 번. 그럼 까짓것 두 번 달라져보지. 그럼 두 번 달라지면 부르심이 없습니까? 에이, 그러면 세 번. 그럼 세 번 불러주고 달라지면 그걸로 종치는 거예요? 1학년, 2학년, 3학년, 어디 중학생입니까? 3학년만 하고 졸업하게? 에이, 모르겠다. 490번. 490번하고 끝나는 겁니까? 용서하되 490번만 용서하면 그 다음부터는 용서할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490번만 용서하고. 일흔 번에 일곱 번을 용서하면 490번인데, 그 490번만 용서하고 491번째는 용서 안 해도 되는 거예요? 그런 겁니까?

 

자, 어떤 사람이, 하린이 네가 490번 용서했다고 치자. 그러면 용서를 되게 많이 했잖아요. 490번이니까. 그럼 491번은 그전에 용서한 것이 많아가지고 491번째는 이제는 느긋하게 용서 안 해도 천국 가는데 할 수 있겠어요? 없겠어요? 490번이나 용서했는데. 됩니까? 안 됩니까? 주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마태복음 18장에서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했잖아요. 그럼 490번 했다 이 말이죠.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대단하지. 그중에 몇 개 빠질 수가 있는데, 야무지게 딱딱 장부에 적어서 드디어 26년 만에 490번! 이래 된 거예요.

 

여러분들 중에서 나이가 한 50넘게 되면, “목사님, 저도 어릴 때부터 계산하면 490번이 넘습니다.”라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닐 거예요. 인간성이 너무 좋아서 걸핏하면 뭐든지 용서해주는 거예요. 한 사람에게 490번이 아니고 여러 사람까지 계산해보면 그 정도 된다 이 말입니다. 490번. 용서는 처벌이 뒤따라오고 난 뒤에 되는 거예요. 한 대 맞아야 용서가 되지 그냥은 용서가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490번을 용서를 한다면 그다음부터는 용서를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용서를 해야 되겠죠.

 

그러면 용서를 해야 된다는 말은 490번 가지고는 미흡하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뭐가 추가가 되어야 해요? 계속해서 부르심이 추가가 되어야 되겠죠. 결국은 제가 하는 이야기는 여기서 부르심을 입었다고 할 때에, 지금 이 말씀이 너 이렇게 부르심을 받고 따라오면 구원받는다고, 구원을 챙기라는 구원의 위주가 아니라 예수님의 지속적인, 멈추지 않는 그러한 주님의 하신 일을 드러내는 말씀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초점과 강조점을 나 이런 식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에 두면 안 된다는 이 말입니다.

 

한 번 정리해봅시다. 주께서 불러줄 때 우리에게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그 변화가 뭐냐 하면 차츰 나아지기, 차츰 착해지기, 차츰 경건하기, 지금 이런 문제가 아니고 무슨 문제냐 하면은 내가 얼추 주님을 알고 주님의 부르심을 안다고 하는 것이, 여기 100미터에서 20미터 땡겼으니까 한 80미터 왔죠. 그 80미터의 상태가 나는 이제 부르심도 알고, 주님도 알고, 주께서 인도 하는구나, 라고 한다면 그것이 50미터에 왔을 때는 어떻게 된다? 그것마저 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마저. 그것마저 달라져야 해요. 그래야 계속 예수님의 부르심만 살아남죠.

 

하나의 예를 들게 되면 이런 겁니다. 어떤 사람이 죄를 짓는 경우가 왔었는데 정신 바짝 차려서 죄를 안 짓고, 주님을 부인하지 않고, 죄를 안 짓고 버텼습니다. 그래서 죄짓는 상황이 지나가버렸습니다. 유야무야 사라졌습니다. 그럴 때, “주님! 죄 지을만한, 시험들만한 경우가 있었는데 저는 거기서 이겨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부르심의 효과입니다.”라고 이렇게 했을 때에, 주님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너의 가치보다 말씀의 가치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니가 왜 모르느냐?” 우리는 말씀을 생각할 때, 결국 궁극적으로 자기 가치가 어떠냐에 대해서 치중을 하면서 말씀을 본 거예요. 나의 가치에다가.

 

반대로 생각을 해봅시다. 어떤 사람이 죄를 짓는 상황이 되었는데 그만 죄를 지었어요. 참지 못해서 시험에 들어 죄를 지었다 합시다. 그러면 “주님이여,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참으로 주님 앞에 회개를 합니다. 제가 나쁜 짓을 했습니다. 인정합니다.”라고 했을 때에 주님은 뭐라고 합니까? “그래, 인정해라. 회개하라.”라고 이렇게 이야기해요? 뭐냐 하면 “너의 가치보다 말씀의 가치가 더 낫다는 것을 니가 왜 모르고 또 다시 너는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느냐?” 다시 말해서 부르심의 효과를 니가 지금 곡해하고 있다고 하시는 겁니다.

 

주님께서 불러주게 되면 나는 지금보다 더 변화가 되되,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월등한, 월등하게 나아진 존재로서, 가치가 있는 존재로 달라질 거라고 생각하는 그 생각부터가 달라져야 한다는 이 말이죠. 그게 부르심의 효과거든요. 이렇게 고함질러서 천식 회복됐는데 다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닌지. 본문 베드로전서 2장 21절을 봅시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 자취는 인간이 연구하고 탐구해서 따라가는 것이 아니에요. 이미 자취는 누가 본을 끼쳤으니까, 모델이 되었으니까, 모델, 갑자기 모델이라고 하니까 전현무가 한혜진하고 헤어진 게 생각이 나네. 모델이 되었으니까, 주님께서 패션쇼에서 옷 입고 런웨이runway하는 거예요. 모델이 되었으니까 갔다 이 말이죠. 그러면 부르심을 입었다는 그 말은 뭐예요? 주님 가신 그 길만 용납이 되고 다른 길은 용납이 된다? 안 된다? 용납이 안 된다는 말이죠. 만약에 주님께서 자취를 벌여놓지 아니하면 우리 나름대로의 예수님을 재해석해가지고 “주님, 이렇게 가면 주님 가신 길이 맞죠?”라고, 결정을 누가하느냐 하면 본인이 결정을 해요.

 

근데 본인이 결정해서 가게 되면 그 사람은 조금도 달라질 게 없습니다. 자기가 알아서 잘 가고 있는데 뭐가 달라? 뭘 또 여기서 달라질 게 뭐가 있어요? 달라질 게 없죠. 결국 주께서 불러준다는 말은 뭘 잊으라는 말입니까? 나 조금만 더 하면 나 천국 간다는 생각, 그 생각을 잊어버려야 돼요. 그러면 자꾸 내 쪽에서 기대를 하게 되는데, 그 기대를 하게 되면 뭣이 뭉개지느냐 하면은 주님께서 먼저 선도해서 길을 냈고 자취를 갔던 그 의미가 자꾸 배척이 돼요. 그 가치가 밀어진다고요. 사라진다고요.

 

오늘 베드로전서 2장 21절을 보면서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고난의 길을 갔기 때문에 나도 이제는 주님을 믿었으니까 고난의 길로 가자, 라고 나선다면 백발백중 지옥 갑니다. 이거는 제가 장담하는데 지옥 갑니다. 고난의 길이라고 하는 게 예수님이 가신 길인데, 자기가 뭘 안다고, 예수님이 아마 이쪽으로 갔을 걸? 하고, 자기가 생판 천국으로 통하는 길도 애초부터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모르면서 왜 자기가 고난의 길이라고 우기면서 개척하듯이 그렇게 가냐 이 말이죠.

 

지금 제가 말을 짧게 하지만 이것가지고 온 교회, 한국교회 역사 속에 다 들어가 가지고 적용을 해보세요. 전부 다 이런 쪽이에요. 주님 가신 길, 고난의 길 해가지고 자기 딴에 개척교회하고 선교사하고 또 큰 교회는 큰 교회대로 고난이 있다고 하고 또 권사님들 집사님들 장로님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고난의 길을 안 간 사람이 없어요. 안 간 사람이. 전부 다 나름 고난이에요. 나름 고난. 오늘 제목을 ‘나름 고난’이라고 할까요? 전부 다 나름대로 고난이에요. 애 키운다고, 둘이나 낳고 키운다고 고난을 받죠. 세상에 고난이 아닌 게 어디에 있어요? 고난 아닌 게. 전부 다 고난인데.

 

그러나 고난에 가면 갈수록 누가 빛나요? 본인의 가치는 더욱더 강화가 돼요. 갈수록 못 놓아요. “이만큼 올라온다고 얼마나 공들였는데 이걸 놔! 미쳤나? 이걸 내가 왜 포기해! 지금까지 고생, 고생해서 왔는데.” 어디까지 갔는데? 지옥가려고 고생, 고생한 모양이에요. 고생, 고생해서 이렇게 교회를 번듯하게 부흥시켜놨는데 그 가치를 왜 무시해? 이래 나오더라 이 말이죠. 주님의 고난이에요? 자기 고난이에요? 자기 고난이죠. 자기 고난은 변화가 됩니까? 변화 안 됩니까? 변화가 안 되죠. 그걸 더욱더 간직하죠.

 

금요철야기도에 가서 방금 이야기한 것을 다 적용해보세요. 전부 다 적용이 다 됩니다. 금요철야기도 때 고생 얼마나 합니까? 커피 서너 잔 먹어가면서 그것도 고생이죠. 그리고 가족과 교회를 위해서, 우리나라 대한민국 기독교 국가가 되기 위해서 얼마나 간절히 기도합니까? 남북통일부터 시작해서. 자기 딴에 그게 주님 가신 길이라고 우기는 겁니다.

 

예루살렘에 가보세요. 거기에 겟세마네가 있거든요. 동영상 올려놨죠. 그 나무가 최근에 심은 뽕나무 아니에요. 전설이 아니고 실제에 의하면 그때 그 나무랍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그 나무가. 한 그루가 아니고 제가 보기에는 한 오십 그루는 넘는 것 같아요. 한 그루였다면 벌써 우상시되었을 거예요. 오십 그루 정도 되니까, 많으니까 어느 쪽이 주님이 하셨는지를 모르니까 아직까지는 멀쩡한 것 같아요. 그 옆에 주님 기도한 겟세마네 이름으로 교회가 또 세워져있어요.

 

주님이 이 나무 밑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했다. 그래서? 그게 고난의 길이다. 그래서? 나도 철야하면서 땀방울이 핏방울까지는 안 되지만, 뭔가 삐질삐질 땟물이라도 안 나오겠어요? 열심히 기도하면 땀이 쏟아지고, 땀 찌꺼기가 나오면 그거는 주님처럼 완전하지는 않지만 주님의 고난의 길이 맞다, 라는 거예요. 누구 맘대로 맞아요? 누구 맘대로. 그게 자기의 변화를 유도합니까?

 

지금 제가 강의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시종일관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기도하는 이것이 주님의 고난의 길이라는 생각을, 그게 바뀌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고생스러운 철야기도를 내가 한 이상은, 사람이 자기가 한 이상은 자기가 바꿀 마음이 없어요. 그 얼마나 큰 마음먹고 기도했는데. ‘나 오늘 실컷 장난치다가, 아무 의미도 없는 것 하다가 왔어.’라고, 이렇게 자기 자신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그 사람은 변화된 사람이에요. 변화된 사람입니다. ‘아무 부질없는 짓 하고 왔다. 다음 주 금요일에 또 부질없는 짓 해야지.’

 

보통 부질없는 짓은 안 하잖아요. 그런데 진짜 변화된 사람은 안 해도 부질없는 짓이고 해도 부질없는 짓이고 도대체 내속에서 무슨 부질없는 짓거리가 이렇게도 많이 쏟아져 나오는가를 확인하는 입장에서 기도합니다. “주여, 우리가족과 우리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러니 주님 마귀를 이기고 주님을 본받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근데 주여, 오늘도 부질없는 짓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부질없는 짓을 제가 또 할 겁니다.” 왜? 나는 뭘 해도 부질없는 존재기 때문에. 이게 부르심을 입은 거예요. 이게 부르심을 입었다고요.

 

주님이 고난 받은 길을 고생이라고 생각하니까, 나도 이제는 달라졌으니까, 이제는 달라진 내가 뭔가 힘든 일을 하는 고생을 해서는 안 돼, 라는 그게 아니에요. 그런 뜻이 아니다 이 말이죠. 표정들을 보니까 제가 지금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전혀 취지를 못 알아듣는 얼굴인데, 가정에 보면 실이 감겨있는 실타래(실패)가 있죠. 실타래에서 끝이 조금 풀어져 있잖아요. 그래서 집에서 누구 옷이나 기워주고 바지 단 떨어진 것을 할 때 이만큼 나와 있는 실을 땡겨 버립니다. 땡겨 버리면 실타래가 한 바퀴 돌겠죠.

 

여러분 등대 알아요? 등대. 등대를 보면 등대의 불빛이 돌 때마다 번뜩번뜩 빛이 나오죠. 늘 비추는 것이 아니고 동서남북으로 계속 돌아가기 때문에 내 쪽에 왔을 때 번뜩하고 저쪽은 꺼지고 하잖아요. 실타래가 한 바퀴 돌 때마다 풀려있는 끝이 점점 길어지겠죠. 또 한 바퀴 돌리면 길어지겠죠. 십자가를 등대라고 봅시다. 십자가가 한 바퀴 회전할 때마다 거기서 실타래처럼 새로운 십자가의 고난의 길이 허락이 되고 허용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자취를 본받게 하는 이 말씀의 주체자가 누굽니까? 인간입니까? 주님이십니까? 이 말씀을 성취하시는 것은 주님이죠. 주님이라면 누구는 아니다 라는 말입니까? 누구는? 누구는 아니다? 나는 아니다. 나는 그냥 당하기만 하는 입장인 거예요. 주님의 부르심에 의해서 그 난의 길을 따라오게 하는 그 주체가 내가 아니고, 내 구원받겠다고 설쳐대는 나의 욕구, 욕심이 아니고, 이거는 내 욕구욕심하고 관계가 없어요. 이거는 일방적인 주님의 말씀이 더 가치 있게 드러내기 위해서 부질없는 우리가 이 길로 가는 거예요.

 

우리나라에서 제일 짜장면을 맛있게 하는 그러한 짜장면 주방장이 짜장면을 내는 것하고, 저 큰애 몇 살이에요? 네 살. 네 살이 집에서 “나는 오늘의 요리사!”라고 하면서 짜파게티 라면 끓여내는 것하고, 이게 어느 것이 맛있겠습니까? 이거 말할 것도 없죠. 예수님이 제시하는, 제공하는 것과 내 몸에서 내가 제공하는 것과 어느 것이 하나님께 합당한 것이겠어요? 주님이 제시한 것이 합당하겠죠.

 

근데 이상하게 우리는 안 달라져요. 뭐냐 하면 자꾸 “오늘은 내가 짜파게티 요리사!” 지가 자꾸 아무것도 모르면서 계속 “주여 드시옵소서” 하면서 지가 자꾸 짜파게티를 만드는 거예요. 그러면 자기가 짜파게티를 만들면 만들수록 누구 가치가 자꾸 안 죽고 계속해서 살아나게 돼요? 누구 가치가? 자기가치가 계속 살아나죠. 오늘 제목을 실타래로 할까? 예수님의 실타래에서 방금 나왔던 것이 뭐냐, 십자가의 고난이 나오죠.

 

그런데 이 실타래가 우리 자신의 실타래로 봅시다. 우리가 주님을 향하여 온갖 종교적인 것을 하는, 한 바퀴가 돌 때마다 실타래가 풀려나와서 주님께 드리겠다고 나온다면, 이게 짜파게티인 거예요. 주님의 실타래는 짜장면이고. 이렇게 낸다면, 이렇게 낼 때마다 자기 자신에게 어떤 변화가 있어요? 없어요? 변화 없습니다. 꿈쩍도 안 합니다. 꿈쩍도 안 해요. 그러면 여기 우리 실타래를 풀리게 하면서 힘들어하죠. 힘드니까 그들은 자기를 보고 뭐라고 합니까? 자기가 뭐했다? 주님을 위해서 고난을 받았다고 우기는 거예요. 고난 받았다고.

 

이거 뭐 어떤 교회이야기를 하지 말고 우리 자신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리 자신을. 우리가 이 세상을 살 때에 어느 누구도 고생 없이 편안하게 산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 연세 많으신 분, 평생 나는 아무 고생이 없었다고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아니죠. 곡하나 내놓고 이게 될까 말까, 될까 말까 지금 얼마나 마음고생이 많습니까?

 

주님이 최초로 고난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주님이 고난이야기를 하기 전에 본인이 자기 고난에 굉장히 민감해요. 세상에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편히 잘만 살더라만, 도대체 내 인생은 전생에 약을 많이 잘못 먹었나, 전생에 죄가 많았나, 왜 이렇게 사는 것이 힘들고 구닥다리같이 이렇게 왜 내 인생이 지저분하냐 이 말이죠. 아스팔트가 아니고 한 고비 돌아가면 괜찮을 줄 알았더니만 이만한 자갈돌이 나오고, 자갈돌이 나오고 난 뒤에 진흙이 나오고, 진흙이 나오고 난 뒤에 비포장도로가 나오고, 왜 내 인생은 하나도 조용하게 넘어가는 날이 왜 없느냐?

 

그래서 하죠. “주님, 저 좀 위로할 말씀 같은 거 없습니까?”라고 자기가 질문해놓고 자기가 답변을 해요.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을 받는 것이다. ‘아, 그렇구나! 지금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 받으라고 내 인생이 이렇게 힘들게 사는구나!’라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는 잘못된 이유가 뭐가 없다고 했습니까? 자기 변화가 없죠. 자기변화가 없는 거예요. 자기변화. 내가 달라짐이 없어요. 아니, 우리는 발광을 합니다. 세상을 살기위해서. 발광을 칠 때마다 나라는 실타래가 조금씩 풀리죠. 노력을 하니까 조금씩 풀린다고요.

 

오늘은 이 가게 때려치우고 다른 곳 부천에 가서 딴 거 낼까? 그거 때려치우고 노래방을 할까? 서민들이 가게 문 닫고 딴 거 할 생각을 하잖아요. 그럴 때마다 자기 실타래가 조금씩 풀리는 거예요. 힘들게. 그렇게 할수록 무슨 실타래는 완전히 잊어버립니까? 주님의 십자가에서 조금씩, 조금씩 풀어져 나오는 실타래는 까마득히 잊어버립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말씀의 가치가 너보다 훨씬 더 낫다. 말씀의 가치가. 니가 좌절해서 주저앉는 것도 내가 보기에는 교만이고, 잘했다고 우기는 것도 교만이지만 못했다고 주저앉는 것도 교만이에요.

 

왜냐하면 달라진 게 없어요. 나는 온전히 자기위주에요. 조금도 안 달라졌어요. 끝까지 자기를 안 놓고 계속 자기한테 신경 쓰고 자기를 붙들고 자기방어하고 자기사수하고 그런 식으로 해가지고 성경말씀 보면서 뭐 위로받을 게 없는가, 희망 같은 게 없는가, 자꾸 엉뚱한 생각을 하는 거예요. 제가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천국 가는 좁은 길은 인간 앞에는 없어요.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길이 있어서 그 길을 가면 좋겠는데, 문제는 그 길이 인간에게는 없어요.

 

좁은 길은 어디를 경유해야 하느냐 하면은 등대를 경유해야 해요. 나의 실타래를 떠나서 주님의 실타래를 경유해야, 십자가를 경유해야 비로소 좁은 길이 사건으로 주어지는 거예요. 사건. 이제부터 오늘 강의가 본격적으로 시작이 되는 거예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말씀은 우리에게 뭘 준다? 변화를 주는데, 우리는 변화는 생각 안 하고 말씀을 이용할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다.

 

“주여, 우리에게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라고 하거든요. “우리 집안에, 나에게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가 있다는 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주님 보시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데, “문제가 있어? 아이고, 내 새끼 문제가 있으면 안 되지.” 허겁지겁 오셔서, 삐용삐용~~ 구급차가 와서 “뭘 도와줄까?” 지금 이런 생각, 이런 관계를 가지고 하면 안 돼요. 문제 있다는 그 자체가 문제에요. 따라서 문제가 있어요. 왜? 우리가 문제가 있다고 하는 순간 문제가 있는 거예요. 갑자기 누구 사람이름이 자꾸 생각이 나네.

 

뭐가 문제냐 하면은 우리가 회전목마에서 못 내리고 있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날마다 조금 좋으면 헤헤거리고, 조금 절망하면 주께 도와달라고 하고. 그러니까 이거는 원래 회전목마가 그냥 돕니까? 약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돕니까? 네 살 먹은 애들이 회전목마 손잡이 손에 잡고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뱅뱅 돌죠. 만약에 그 기계를 관리하는 사람이 퇴근해버리고 기계는 고장이 났다. 그럼 그 애는 높으니까 못 내리고 그래가지고 15년 동안 계속 있다가 그때 내려왔다면, 19살이 되어서 내려오겠네요.

 

그러나 문제는 19살에 내려온다는 희망이라도 있죠. 이 세상은 지옥을 닮았어요. 인간은 못 내립니다. 좋았다, 나빴다, 나빴다, 좋았다가, 나쁘면 고난이고 좋으면 주께 영광이고 계속해서 그 자리에서, 그 자리의 자체에서 내려와야 되는데 우리는 나 잘되기 위해서 주의 말씀을 이용하는 거예요. 이 말씀을. 성경공부해서 이 회전목마를 이왕이면 양탄자를 깔고 타려고 하고, 이왕이면 더 신나게 회전목마 타려고 하고. 회전목마 백날 타봐야 그 자리에서 그 자리에요. 순환구조라고 하죠. 그냥 뺑뺑이 도는 거예요. 뺑뺑이 도는 거.

 

적어도 회전목마에서 내려가지고 지옥 가는 사람을 즐거워하는 마음으로 지켜볼 수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회전목마에서 내려가지고, 애가 말 타고 빙빙 돈다면 그 바깥에서, 애가 가까이 오면 웃어라! 웃어라! 웃으라고 해서 사진 찍는 이 자리. 회전목마가 도는 이걸 지켜보는 이 자리. 주께서 회전목마를 타는 우리를 불러내시는 거예요. 그러면 어떤 변화가 있어야 돼요. 그 어떤 변화인데, 1번 나의 변화다. 2번 나의 환경의 변화다. 몇 번이겠습니까? 나의 환경의 변화죠. 인간은 못 달라지니까. 조금 어려우면 죽겠다고 난리고 뭐 좀 좋으면 살만하다고 하니까.

 

인간이 속해있는 회전목마 자체에서 내려야 돼요. 그 순화구조에서 내려야 된다고요. 그 순환구조에 처음에 누가 탔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본이 되셨어요. 본이 되셔서 주님께서 순환구조에 탔거든요. 탔는데, 주님도 마찬가지로 삶 자체, 살아있다는 삶 자체, 인간이 육신을 입고 산다는 것 자체가 자기가 내리고 싶어도 내릴 수 없는 회전목마에, 악마가 태워준 회전목마에 뭐가 붙었는지 철썩 같이 붙어가지고, 본드도 그런 본드가 없어요. 죽어도 못 내려요. 자살해도 안 돼요. 이게 안 내려가요.

 

거지나사로 앞집에 살던 부자가 지옥에 가도 그 행세를 그대로 하죠. 이 세상에서 살던 행세를. 그게 뭐냐 하면은 나 잘났다 이거거든요. 나 부자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거지나사로보고 물 가져오라고, 에비앙 같은 생수 좀 가져오라고 심부름시키잖아요. 그 부자는 안 달라졌어요. 변화가 뭔지도 몰라요. 변화가. 내가 다음을 계속 줄곧 밀어붙이면 되지, 왜 내가 이런 나와 전혀 다른 내가 되어야 될 그런 건덕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니까요. 그 부자는.

 

근데 거지나사로 같은 경우에는 내가 훌륭해서 달라진 게 아니고, 거지나사로를 일종의 예수님이라고 보면 돼요. 이 땅에 살면서 거지였지만 하늘나라에서는 영광스럽잖아요. 그게 뭐냐 하면 언약에 둘러싸였거든요. 그러면 이 환경이라는 것이 나왔네요. 나의 환경, 나의 배경, 나의 소속, 이게 결국 두자로 하면 이게 뭡니까? 하나님의 언약에 둘러싸였던 이스라엘이, 마지막 새 언약이 의하게 되면, 환경이 의하게 되면 달라지지 말래도 그 소속자체가 이미 달라진 상태로 소속되는 거죠.

 

새 언약에 그만한 위력과 그만한 효과가 있어요? 없어요? 있는 거예요. 새 언약은 우리에게 효과를 줍니다. 옛 언약은 뭡니까? 율법이잖아요. 율법에 올라탔을 때 그 이스라엘은 죽었죠. 율법을 못 지키면 뭡니까? 저주를 받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회전목마는 어떤 것이냐, 뿅 망치가 늘 정기적으로 때리는 그러한 회전목마에요. 뿅 망치가 뭐냐 하면은 바로 아람, 암몬, 모압, 그리고 나중에 앗수르, 바벨론. 하나님이 준비한 몽둥이. 몽둥이가지고 계속 이스라엘을 패는 겁니다. 팰 때 이유가 있죠. 니가 율법에 올라 타놓고 율법을 안 지키니까 맞는 것이 주의 법에 합당하다. 마땅하다.

 

언약이라는 환경. 언약환경 속에 있을 때는 어떤 단어가 나오느냐 하면은 마땅함이 나옵니다. 마땅함. 마땅함은 누구 탓을 할 필요가 없다 이 말입니다. 왜냐하면 나를 둘러 싼 환경자체가 마땅하기 때문에. 잘못했으면 매 맞는 것이 뭐합니까? 마땅하죠. 율법 어겼으면 저주받는 것이 마땅한 거예요. 이게 무슨 성질이냐 하면 언약의 성질이에요.

 

자, 그러면 회전목마에서 내리게 할 때, 이게 우리가 알아서 율법에서 내릴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오늘 정신 좀 차리세요. 어렵습니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율법의 회전목마에서 내릴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내리죠. 왜 못 내립니까? 뭣 때문에? 마땅하기 때문에. 못 내리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에. 그래서 이스라엘은 자기가 홀로 생각하기에는 내가 누군지 몰라요. 뭐와 결부시켜야 돼요? 율법아래에서의 우리. 오늘날 신약에서 십자가 앞에서의 우리와 똑같이. 구약에서는 율법아래에서의 우리. 우리는 뭐다? 마땅함인 거예요.

 

율법에 위반되면 저주받는 것이 마땅함이에요. 그 안목이 우리에게 새로운 율법관을 확고히 심어줄 수 있는 겁니다. 그 안목이. 오늘 강의 안 들었다고 칩시다. 지금까지 하나도 안 들었다고 치고,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안 들었다고 치고 우리가 하루 일과를 한번 생각해봅시다. 하루 일과를 생각하게 되면 항상 뭐냐, 마땅함이라는 게 없어요. 내가 잘하면 좋은 결과를 낳고 내가 게으르고 불성실해서 안 되면 나쁜 결과를 얻는 거예요.

 

그러면 거기에 마땅함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내가 하나 안 하나 마땅히 주어진다는 그런 개념은 없어요. 그게 달라져야 한다는 거예요. 그게. 오늘 목 다 쉬겠다. 한 달 쉬면서 공들여놨는데. 아껴가면서. 오늘 본문이 의외로 어렵습니다. 이것 제키고 저것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저건 엉터리라고 하고 이것 쫓아내고 저것 분리시키고 다 하면 뭐 건더기가 남는 것이 있어야 되는데, 오늘 본문을 보면서 건더기 남는다는 것이 뭐냐 하면 내가 달라지고 싶어도 달라질 수 없는 인간이라는 것이 건더기로 나와야 돼요.

 

그리고 변화는 언약이 알아서 그 다음 언약으로 스스로 셀프self에요. 스스로 자발적으로 그렇게 옮겨가는 것이지,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이 말이죠. 더 나가볼까요?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내가 지킬 게 없다, 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스라엘의 마땅함이죠. 이스라엘이 마땅하듯이 우리도 마땅한 거예요.

 

우리교회 어떤 분이 기도를 하는데, 그 마땅함이라는 단어를 여러 번 썼어요. 근데 여러 번 쓸 때, 그때는 몰랐는데 지나고 보니까 정말 정확한 단어를 쓰고 있는 거예요. 지금. 주여, 마땅합니다, 마땅합니다, 마땅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라는 뜻이에요. 왜? 내가 새삼스럽게 내 행위로 치고 들어갈 여지를 없애주시니 감사합니다. 내가 치고 들어갈 여지가 없으니.

 

내가 내 팔자를 고치겠다. 팔자를 고치겠다고 하니까 또 시집 두 번 간다고 보통 그러는데, 옛날 사람들이 왜, 시집 두 번 가는 것을 팔자 고쳤다고 하는지 아직도 그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그건 팔자 고친 것이 아니고 남자를 두 번 이용한 건데. 그렇잖아요. 한 남자 조지고, 또 남자 조지고. 지는 팔자 고쳤다고 하지만 남자는 죽을 똥 살 똥인데. 이왕 나온 김에 팔자 고쳤다는 말이 주로 어쩔 때 쓰이느냐 하면 아무 직업도 없이 노는 자들에게 쓰이는 것 같아요. 약사나 의사나 공직에 있는 사람들은 팔자 고쳤다는 말을 잘 안하는데, 비리비리 할 일도 없이 놀다가 남자 하나 물었다. 셰퍼드처럼 물었다. 팔자 고친 거예요.

 

우리하기 나름에서 어떤 결과가 주어진다. 우리는 일상생활을 하면서 그 생각을 이상하게 떨쳐버릴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아침에 출근하면서 은근히 세상은 그런 식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것을 확답을 받고 그 희망을 가지고 뭔가, 내가 오늘도 열심히 살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야, 손님이 오면 하나라도 고개 숙이고 친절하게 대하게 되면 더 효과를 볼 거라고 그렇게 생각을 해요.

 

어떤 사업하는 사람이 그렇게 이야기를 했어요. “과도한 친절은 하지 마라. 나중에 그 스트레스가 너한테 다 돌아온다. 너무 오버해서 손님에게 웃음 띠면서 해 줄대로 다 해주지 마라. 그게 사라지지 않고 니 화병으로 다 돌아온다.” 누가 이야기한지 다 알겠다. 백종원이가 이야기한 거예요. “사업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니가 할 수 있는 능력만큼 해야지, 너무 과도하게 친절한 것도 욕심이다.”

 

어쨌거나 우리의 일상은 마땅함을 별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루하루 살면서 안 달라질 거예요. 지 고집이 있어요. 어떤 고집이냐 하면은 내 미래는 내 손으로 한번 달라지게 해봐! 지는 달라질 생각 안 하고. 지 바깥 환경을 달라지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은 뭡니까? 바깥 환경은 요지부동이에요. 누가 달라져야 해요? 안 달라지려고 고집부리는 니가 달라져야 해요. 그게 마땅함이에요. 오늘 제목을 ‘마땅함’이라고 해야 되겠네요. 뭐가 마땅함이냐 라고 물으면 그냥 마땅함. 물을 자격도 없어. 모든 것이 당연함으로 니한테 뒤집어씌웠다고 봐. 모든 게.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율법의 마땅함 때문에 이스라엘은 필히 망해야 되는 거예요. 아무리 그들이 거기서 잘해보려고 몸부림치고 해도, 율법의 강력함, 율법의 요구조건이 계속해서 증가하거든요. 한 두 개가 아닙니다. 십계명만 지키면 되는 게 아니고 계속 추가적으로 주어지는 겁니다. 추가적으로 주어지는 이것을 무슨 수로 감당합니까?

 

혼자서 하는 어떤 방송을 뭐라고 합니까? 팟캐스트, 1인 방송. 그 방송을 보니까 한 5인분을 책상에 깔아놓아요. 한 20대 후반쯤 됐는데 바짝 애리한 남자가 쥐가 음식을 먹듯이 그 5인분을 현장에서, “아이고, 맛있다!” 천천히 다 먹어요. 우리나라에서 제일 돈 많이 버는 사람이에요. 밴쯔 먹방인가. 5인분을. 하여튼 5인분이 넘어요. 너무 많아요. 질리기는 질리는데 그걸 혼자 다 먹어요. 풍선 쏘고 좋아요! 누르고. 돈 막 버는 거예요. 그렇게 돈 버니까 이번에는 어떤 프로가 나오는가 하면은 여자가 한 4인분을 갖다놓고 먹는 게 있어요. 그것도 유행인 모양이라. 남자한테도 엄두가 안 나는데, 그것도 일종의 능력인데 5인분을 그 자리에서, 바짝 애리해요. 위의 기능이 뭔가 특수한 사람이 있어요. 세계 햄버거대회 이런 거 보면 특수한 사람이 있어요.

 

그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추가적인 율법, 한 5인분 먹으면, 그러니까 베드로가 용서를 몇 번 요구했습니까? 일곱 번 하면 배터지는 거예요. “아이고, 질렸다. 더는 용서 못한다.” 근데 주님께서 팟캐스트하면서 몇 개를 요구하는 하면 490번을 요구한 거예요. 그러면 억지로 꾸역꾸역 490번을 용서하게 되면 끝이에요? 아니죠. 결국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요구한 것은 뭐냐 하면 달라져야 한다는 겁니다. 달라져야 해요.

 

용서를 일곱 번 하면 됩니까? 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현재의 내 모습은 나는 절대로 고집스럽게 안 달라지겠다는 거예요. 이대로 가겠다는 겁니다. 그대로 가게 되면 자기 딴에는 착해도, 아무리 착한 지점에 왔을 때에도 그것을 죄로 만들기 위해서 율법이 추가적으로 계속 주어지는 거예요. 율법만 있는 겁니까? 사도바울의 명령까지 다 추가되게 되면, 이거는 예수님의 산상설교까지 추가돼버리면, 누가 그 마땅함을 이기고 저주의 회전목마에서 내려올 수가 있겠습니까? 못 내려옵니다. 내려올 수가 없어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가 율법을 못 지킨다는 생각은 못하고, 얼추 근처는 갔잖아요, 라는 것으로 버티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뭐냐 하면은 상당히 고집이 센 거죠. 마치 엄마가 애가 나쁘다고 등짝을 때리는데, 애가 뭐 산상설교를 잘못 봤는지 왼쪽 등짝을 때렸는데 오른쪽 등짝을 돌려대면 이거는 이제는 매로 맞는 거예요. 이게 개기니까. 일종의 반항심이거든요. 인간에게는 그런 요소가 있어요. 안 되면 될 때까지.

 

이거는 내가 속한 율법의 마땅함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의 마땅함이 아니고, 누구의 마땅함을 고집스럽게 우기고 있는 거예요? 나 자신의 절대성, 나 자신의 고귀함, 천상천하유아독존같이 나 자신의 최우선, 마지막 가치의 자아성, 독보적인 나 자신, 이 마땅함을 가지고 지금 주님 앞에 달려드는 겁니다. 뭐 이거 해결 나야 되겠죠. 해결은 10분 후에 합시다.
 이미아(IP:122.♡.170.138) 19-03-11 22:28 
서울의존강의20190308b 베드로전서2장 21-23절(마땅함)-이 근호 목사

 

율법의 요지부동으로 이스라엘을 장악했습니다. 마치 서울에 미세먼지가 장악한 것처럼. 미세먼지 날아왔는데 봉투에다가 한 오 만원을 넣어가지고 중국한테 주면 미세먼지가 사라집니까? 그런 거 없죠. 그냥 미세먼지가 만들어졌을 때에 어쩔 수 없이 갇혀있는 셈이죠. 그게 마땅함이에요. 운동을 하던 춤을 추든 뭘 하든 미세먼지는 속속들이 전부 다 스며들고 있으니까.

 

이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다른 나라는 상상도 못해요. 이스라엘은 모든 일상 속에 율법이 다 스며들고 있어요. 마치 미세먼지와 같아요. 그리고 바이러스 같이. 그리고 그것이 어떤 마땅함을 갖고 있느냐 하면은, 만약에 어기면 저주가 주어지고. 엄포가 아니에요. “저주받는다. 무섭지?” 이게 아니고 그냥 실제라니까요.

 

이게 엄포가 아니고 실제라고 하는 것은 다윗성에 언약궤가 올 때까지, 웃사가 만지다가 사람들 많이 죽었잖아요. 언약궤 자체를 건드리지를 못해요. 언약궤 자체를 인간이 뭐 건드리고 조절하거나 말릴 수가 없어요. 그걸 오늘 제목으로 한다고 했는데 뭐라고 했습니까? 언약궤가 뿜어내는 마땅함. 그걸 신약적으로 하면 십자가가 뿜어내는 마땅함.

 

그러면 구약 때 이스라엘에서는 언약궤의 위엄성과, 존엄성이죠. 위엄성과 위험성. 정말 이렇게 위험한 물건이 없어요. 이거 뭐 언약궤에서 나오는 그 말씀을 어겨버리면 이스라엘이 실제로 저주받는다 이 말이죠. 그 저주받기 위해서, 대기하고 있는 것이 주변에 있는 바벨론, 앗수르, 모압, 암몬, 아람, 특히 아람 같은 경우에는 얼마나 괴롭히지는 몰라요. 블레셋. 그들이 수시로 들락거리면서, 사사기에 보면 알아요. 들락거리면서 뿅 망치. 뭐 뿅 망치 같으면 장난이나 하지요. 이거는 실제로 죽여 버리는 거예요.

 

이스라엘 전체 역사를 보세요. 맨날 얻어맞고 죽고 조금 회개하게 되면 사사 보내서 숨통 트였다가 다시 그들이 다른 신, 우상을 섬기면, 시스라, 미디안, 온갖 이름도 낯선 이방민족들이 와서 완전히 짓밟아놓고 가는 거예요. 그리고 선지자들이 와서는 배후에서 하나님이 일부러 그랬다는 거예요. 너희가 여호와를 신봉하지 않고 바알을 섬겼기 때문에. 그럼 여호와 신봉하지 뭐? 이렇게 하는데, 여호와를 신봉할 때는 신봉하는 방법이 이게 바알 섬기는 것하고 달라요.

 

여호와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죽음을 전제로 해서 섬겨야 돼요. “죽어 마땅합니다.”가 되어야 해요. 바알은 살아있는 내가 살아있는 신과 어떻게 거래할 것인가, 흥정할 것인가와 관계가 있어요. 만약에 여기 시장, 신곡시장에서 어떤 사람이 콩나물을 팔고 있는데, 돈 주고 콩나물을 사면 돼요. 줄 것 주고, 받을 것 챙기면 되는데, 어떤 사람이 돈은 없는데 갓난아기 젖 먹여가면서 “아주머니, 집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지금 콩나물을 먹긴 먹어야 하는데, 그저 아줌마! 돈은 없는데 조금만 줄 수 없습니까?”라고 사정할 때, 이거는 뭘 의미하느냐 하면은 “나는 당신한테 내놓을 것 없고 그냥 죽여주옵소서.”하는 심정으로 나오는 거죠. 여호와 앞에서는 그렇게 나와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언제 이스라엘이 여호와 앞에 그런 혜택을 입었습니까? 자기가 자기를 의지했던 모든 것이 다 날아갔을 때. 이방민족한테 다 뺏겼을 때. 이제는 지 자존심이고 뭐 우쭐대고, 나는 착했다, 나는 한때 뭐 하나님 잘 믿었다, 라는 그런 큰소리마저도 바닥이 날 때. 자기 힘으로 버틸 수 있는 그런 어떤 여지도 남아있지 않을 때는 그냥 살살 빌듯이 “살려만 주이소”라고 비는 거예요. 그럴 때 주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너를 보고 주는 것이 아니고, 이방민족을 물리쳐주는 것이 아니고, 뭘 생각하느냐 하면은 “언약을 기억하느냐?”라고 먼저 물어요. “언약을 기억하느냐?”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제공된 마땅함을 니가 곱게 수용할래? 말래? 그걸 묻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니가 말씀이 우선되게 살래? 아니면 너 자신이 잘 되기 위해서 말씀을 이용하는 식으로 그렇게 살 거냐? 아니면 말씀을 위해서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할거냐를 들이대면서 묻는 거예요. 더 알기 쉽게 말씀드려서 내가 여기 존재하는 마땅함이 우선이냐? 아니면 내가 죽든 말든, 고생하든 말든 주님의 말씀과 언약의 마땅함이냐? 어느 쪽이냐 이 말입니다.

 

사무엘상 2장 6절에 보면, 얼마 전에 설교시간에 한 것인데 다시 봅시다. 여호와는 어떤 마땅함인지 한번 들어보세요. 들어보시면 오늘 강의하는 것이 아, 지금 이런 취지로 강의가 흘러가는 것을 아실 겁니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7절,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이게 뭐냐 하면 여호와의 뭐다? 여호와의 마땅함이죠. 이걸 고상하게 이야기하면 여호와는 이런, 이런 일이 자기와의 약속이거든요. 여호와 자기가 자기하고 약속하는 거예요. 누가 배제됩니까? 이스라엘은 배제되는 거예요.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에 있었던 약속을 하나님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실현되어나가는데 동원된 자들이 누구다? 이스라엘이잖아요. 그걸 달리이야기하면 하나님이 자기이름을 이 땅에 내려 보내시고, 땅에 있는 주의 이름과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의 약속을 구현하기 위해서 자기백성을 하나님께서 활용하신다. 이래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하고 차이점이 뭐냐 하면은, 다른 민족은 인간과 하나님과 상대하거든요. 인간을 배제하지 않고. 근데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속에 있는 주의 이름과 하나님과 상대해서 나온 결과가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이게 제가 지금 구약을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오늘날 우리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는 거예요. 오늘 본문이야기 한다고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주님께서 부르심을 입은 자, 본인보고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라는 말이 아니고, 니가 합당하게 살기 이전에 주님이 갖고 있던 마땅함이 너의 남아있는 인생 모든 것을 결정짓고 종결짓는다 이 말이에요. 그럼 가만히 있으면 되겠네.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가만히 있는 모습이 뭐냐 하면은 때로는 죽기도 하고 때로는 살기도 하고 때로는 아프기도 하고 때로는 건강하기도 하고. 이게 내가 생각하는 가만히 있는 것하고는, 이게 요동을 쳐요.

 

근데 그것이 주님보시기에는 주님의 마땅함의 여러 가지 변형체에요. 내가 사정이 어려워도 마땅히 어려워야 되고, 좀 잘 되도 마땅히 잘 돼야 돼요. 어느 대목이든. 아, 참 이걸 받아들인다는 것이, 얼마나 우리가 뻔뻔스러워야 정말 받아들일 수 있겠어요. 정말 뻔뻔스럽다는 말 외에는 달리 저는 말 할 수가 없어요. 보통 인간은 자기 일에 자기가 잘했다든지 잘못했다든지 자기가 책임을 지고, 잘했으면 칭찬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어요.

 

그러나 그것이 이방종교에 해당된다는 거예요. 이방종교. 인간은 자기가 자기를 칭찬 못해서 환장을 했어요. 자기의 꿈을 이루지 못해서 환장을 했다고요. 뭐가 없어져버렸어요? 자기가 자기 인생에 홀로 남았어요. 자기를 둘러친 마땅함의 환경이 날아가 버렸어요. 그런 상태에서 오늘 본문을 보니까, “주께서 고난의 길을 갔으니까 니도 고난의 길을 가라.” “예. 고난의 길을 가고말고요. 다 내좋아라고 하신 말씀인데. 나를 천당 가도록 한 이 길을 가겠습니다.” 이래 나오더라는 말이죠. 이게 무슨 마땅함입니까? 하등 달라질 게 없는데요. 지금 전혀 안 달라졌어요. 고집스럽게 내 가치를 지키겠다는 고집만 덜렁 있다 이 말이죠.

 

자, 칼빈의 사상이 이와 같은데 칼빈 사상을 이야기할 테니까, 여기 문제점을 이야기해보세요. 칼빈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 그럼 인간의 노력은 뭐냐, 인간의 노력이라는 것은 그 은혜가 은혜답기 위해서, 확인하기 위해서 인간은 노력하는 것이고, 성화하라고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노력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선택해서 구원받았다. 이게 칼빈의 사상입니다. 문제점이 뭐예요? 실컷 복음 듣고 실컷 공부해도 칼빈이 한마디 딱 던지니까 할 말이 없죠. 칼빈이 뭔가 좀 잘못되었는데 뭐가 잘못되었는지 몰라. 뭐가 잘못 되었는데요? 개인구원취지입니다.

 

칼빈은 달라져야 돼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고, 우리가 행한다고 은혜가 취소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우리가 노력하는 것은 그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알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다, 라는 칼빈의 생각. 제가 이렇게 이 이야기를 안 하고 그냥 이야기하니까 반박하기 힘들죠. 그렇잖아요. 어? 지금 칼빈이 이야기했어? 우리 십자가마을에서 이야기한 게 아니고 칼빈이 이야기했어? 칼빈의 이런 개인적인 구원사상은 뭐가 마땅함이에요? 내 구원이 마땅함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내 구원이. 그게 달라져야 된다니까요. 그게. 그게 성령님을 통해서 달라져야 된다고요.

 

“목사님. 저 구원받았어요. 구원받았으면 됐지, 뭐 필요합니까?”라는 사고방식이 달라져야 돼요. 근데 할머니 될 때까지 안 달라져. 이게 정말 나이 많이 먹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안 달라질 거예요. 이게. 이거 어떻게 할 거예요? 자꾸 자기 존재가 있으니까 자기 존재의 마땅함을 포기할 생각을 못하고 있습니다. 자, 마땅함을 계속해서 이야기해봅시다. 아까 언약궤를 이야기했지만, 구약에서 율법과 그 다음에 뭐냐 하면 언약궤 자체가 제사하는 것이잖아요. 제사하는 것.

 

그래서 선지자가 구원하는 것이 아니에요. 여러분 잘 보세요. 선지자는 잔소리하는 사람이지, 선지자는 구원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선지자로 하여금 그 이스라엘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것은 니 본래의 마땅한 자리로 가라는 거예요. 그 마땅한 자리가 뭐냐 제사하는 자리에요. 죽음이 있는 곳이에요. 죽음이 있는 곳. 그 죽음이 있는 곳에는, 우리의 마땅함은 죽음이 있는 곳에는, 죽음이 있는 제단 앞에서는 날아가 버려요. “너의 마땅함 같은 소리를 하고 있네. 죽어버려라.” 죽어버려야 돼요.

 

죽고, 거기서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요지부동의 작업을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들이 누구냐 하면은 제사장이에요. 그래서 말라기에 보면 레위언약이 회복이 됩니다. 제사장 언약이에요. 제사장이 하는 일이 뭡니까? 하는 일이 뭐예요? 사람을 살리는 일이에요? 죽이는 일이에요? 먼저 죽이는 거예요. 사람 죽이는 거예요. 죽은 다음에 보자. 니가 죽은 다음에 눈뜨고 한번 보자는 거예요.

 

그럼 순환하는 회전목마에서 잡아 땡기면 우리는 삽니까? 죽습니까? 죽지요. 뭐가 죽느냐 하면은 나의 존재의 마땅함이 깨지면서 이게 죽음으로 오는 거예요. 죽음으로. 사람이 자살할 때 왜 자살을 합니까? 자기 뜻대로 안 되니까 자살을 하잖아요. 자기 뜻대로 되는데 자살하는 사람을 봤습니까? 자기 뜻대로 잘 돼서 자살한 사람 봤습니까? 없지요. 자기 맘대로 안 돼서 자살하잖아요.

 

그러면 그 사람이 자살하기 직전에 생각했던, 자기는 뭘 갖고 있습니까? 자살한 어떤 목사를 생각해보세요. 그 사람이 자살을 했는데 자기 뜻대로 잘 돼서 자살했습니까? 목매서. 아니죠. “내가 복음을 전해줬으면, 진실을 전해줬으면 이 인간들아 좀 믿어도!” 지금 이런 마땅함이 있죠. 이런 고집스러움이 있는 거예요. “내가 거짓을 고하지 않고 진실을 이야기했으면 좀 이렇게 받아도!”라는 말이죠. 그게 안 되니까 자살한 거죠. 그게 안 되니까. 자기 마음먹은 대로 안 되니까.

 

제가 한 이야기는 억측이 아닙니다. 기분 좋은데 자살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없죠. 기분 좋은데. “아, 기분 좋은데 오늘 자살이나 하자. 퍼뜩 문 열고 투신하자.” 이런 사람은 없죠. 정신병자가 아닌 이상은. 기분 나빠서 뛰어내린 거예요. 기분 나빠서. 보통 여자들이 부부싸움하고 충동적으로 뛰어내린다고 하잖아요. 근데 아파트 살 때는 제발 1층 좀 하세요. 아파트 구입할 때는. 이 면상만 갈도록. 뛰어내릴 것도 없이. 괜히 충동적으로 뛰어내리니까 이게 5층인지, 6충인지 구분이 안 돼서 뛰어내리는 거예요.

 

세상에 중력의 마땅함을 누가 이깁니까? 중력의 마땅함을 누가 이겨요. 지가 뭔데 중력을 이겨요? 완전히 가루가 돼버리죠. 지구가 셉니까? 지 몸, 한 69킬로그램이 셉니까? 지구는 엄청 질량이 많은데. 과학도 몰라. 기분 좋아서가 아니고, 이미 자기만의 마땅함이 있죠. 그게 뭐냐 하면 나의 마땅함입니다. 나의 가치, 나의 의미, 나의 우수함, 나는 행복해야 돼. 앞에 있는 교회가 뭐예요? 행복 나눔 교회죠. 그 뜻은 뭡니까? 우리는 행복해야 마땅함이라는 뜻이잖아요. 그렇죠.

 

구원파가 뭡니까? 우리는 구원을 해주겠습니다, 라는 거죠. 도를 아십니까? 하는 것처럼 구원파가 언제 구원받았느냐고 묻는 것은 전제가 뭐가 깔려있어요? 전제가. 그라운드에. “우리는 구원받아 마땅합니다.”라는 게 깔려있다고요. 그러면 주님의 율법의 마땅함은 그런 인간을 죽여 버리잖아요. 그 구원의 마땅함을 죽여 버리고, 오직 언약의 마땅함을 앞장세우고자 그걸 교체하는 시스템, 그 시스템 자체를 바꾸는 작업을 이스라엘 성전 안에서 제사장들이 그 일을 하는 거예요.

 

마땅하지 않는 것을 붙드는 게 죄 아닙니까? 마땅하지 않는 것을 붙드는 게 죄거든요. 그러나 죄를 아는 것이 죄가 아닌 겁니다. 왜냐하면 다른 마땅함 자리에 서서 그 시선으로 보니까. 아, 내 위주의 마땅함이 죄구나! 라는 것을 아는 거예요. 그러니까 죄를 아는 것이 죄가 아닌 의에 자리에 이미 와있기 때문에 비로소 죄를 아는 겁니다. 선지자들이 구약에서 잔소리를 늘어놓는 것은 여호와를 잊었다는 거예요.

 

그러면 여호와를 잊었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여호와가 주신 언약을 잊었다는 겁니다. 그 언약이 뭐냐 하면 바로 제사에요. 당신은 무슨 근거로 해서 그걸 주장하느냐고 하면 바로 아브라함을 보세요. 아브라함의 믿음이 확인되는 지점은 어딥니까? 자기 집입니까? 아니면 모리아산이에요? 모리아산에서 누굴 바쳐요? 뭐 아무나, 이스마엘을 바쳤습니까? 이삭을 바쳤습니까? 이삭을 바쳤죠.

 

이삭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이삭은 누구 뜻이었습니까? 아브라함 자기 뜻이었습니까? 자기의 마땅함이 포함이 되어 있습니까? 아니죠. 이삭 안에는 아브라함의 마땅함이 들어가지도 않아요. 그럼 이삭은 뭐로 태어나는 거예요? 아브라함의 뜻입니까? 하나님의 뜻입니까? 천사가 이야기하죠. 이삭은 누구의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까? 누구의 마땅함이에요? 하나님의 마땅함이, 그걸 약속이라고 합니다. 약속의 자녀다. 약속의 자녀가 어디로 들어간다? 바로 하나님의 마땅함을 보여주는 제물로서, 거기에 유일한 제물로 들어간다고요.

 

그러니까 마땅함으로 성사가 되려면 인간은 배제가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자식 이스마엘은 배제되는 거예요. 뭐가 들어가요? 하나님의 자식이라야 할 수 있는 이삭이 죽음으로서, 제물로서 아버지의 칼 앞에 놓이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에 의해서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마무리가 되는 그 마땅함이 내 존재의 마땅함과 바꿔치기 되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사는 것이 마땅한 겁니까?

 

백 살 넘은 할아버지보고 이야기해보세요. “오래 사셨으니까 이제는 죽어도 마땅하죠?” “미쳤나! 내년에 또 살 건데.” 자기존재의 마땅함이죠. 그 사람한테는 무엇의 마땅함을 거부하는 겁니까? 죽음의 마땅함, 나한테는 죽어야 된다는 마땅함이 있다는 것을 애써 외면해버리는 겁니다. 제가 방금 백 살을 이야기했지만 우리는 어떻습니까? 천식 있는 마당에 잘 됐네. 복음 안 전하고 죽으면 되겠네. 미쳤어요? 약 여덟 가지 먹고 살아서 다시 낯짝 뵈었다 이 말이죠. 살아서 빵 먹고 박카스 먹고. 이 뻔뻔스러움,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것이 뭐냐 이 말이죠. 주님? 아니죠. 약속, 십자가 아니었습니다. 뭐냐 하면 나의 존재의, 나의 생계의 마땅함이었습니다. 따라서 이것마저 이게 엉터리고 죄라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성령 받은 의인입니다. 성령 받은 의인이에요. 우리가 일이 잘 풀릴 때는 하나님을 찬송할 용의가 되어 있어요. “아이고, 이렇게 잘 돼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우사스럽고 뭉개지고 망가지고 남한테 손가락질 당할 때에, 그것에 자기 자신한테 실망을 한다는 자체가 그게 잘못이에요. 우리는 자기 자신한테 실망할 자격도 없고 그런 권한도 없습니다. 그런 자격도 없어요. 우리가 우리 자신한테 바보같이 내가 그런 잘못을 하다니, 라고 생각한다는 자체가 이거는 주의 이름을 뭉개는 겁니다.

 

여러분이 다 아는 이야기지만 한번 정리해봅시다. 자, 주의 이름은 구약에서 무슨 작업을 하신다? 주의 이름은 제사작업을 하십니다. 주의 이름으로 내린 것이 뭐다? 언약이다. 그 언약을 구체적인 물체로 만든 것이 뭐다? 언약궤다. 그래서 그 언약궤가 있는 곳에 누가 있다? 주의 이름이 그곳에 계시는 거예요. 계시면서 이스라엘을 계속해서 뭐로 몰아넣는다? 죽음으로 몰아가서, 그 이스라엘을 죽음으로 몰아세움으로서 무엇의 마땅함이 등장하느냐? 언약 또는 약속의 마땅함이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면 크게 쓰겠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강의를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어요. “이스라엘은 만두의 속 재료” 그 이스라엘이 십자가를 통해서, 새 언약을 통해서 오늘날 성도라면, 교회라면 성도는 뭐다? 주님의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한 만두에 들어가는 만두의 속 같은 거예요. 영광은 누가 받습니까? 주님이 받고. 우리는 뭉개지든지 짓밟히든지 망가지든지 우리 일상에 관계없이, 우리는 만두피 안에 소복이 들어있는 거예요.

 

그것도 납작 만두 말고요. 군만두 말고요. 토실토실한 고기만두. 마치 눈사람같이 위에 불룩 튀어나온 고기만두 안에, 여러분 상상을 좀 해보세요. 고기만두의 만두피, 밀가루가 쪼개지는 순간 고기하고 두부하고 부추하고 막 들어있다고 생각하죠. 그것도 신곡시장에서 잘못사면 만두피만 이만하고 속 재료는 없을 수가 있는데. 우리 인생은 누구 속에 들어가기 위해서 만들어진 거예요.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그러니까 그 만두 속에 보면 어떤 사람은 고기로 들어간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두부로 들어간 사람이 있죠. 각각 주님께서 속을 빚은 데에 있어서 사람마다 똑같은 게 없어요. 어떤 사람은 목사로, 어떤 사람은 집사로, 어떤 사람은 그냥 평신도로, 어떤 사람은 교사로 여러 가지가 있더라도 그게 뭐 대수에요. 그 다양성은 하나의 단일성 속에 다 모이잖아요. 만두 속이라는 것.

 

자, 여러분들이 오늘 제 강의를 이해했는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내가 만약에 무슨 실수를 했다. 그러면 우리는 보통 나의 존재의 마땅함, 나의 가치의 마땅함 같으면 우리는 가슴을 치며 통곡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만두 속에 들어가기 위해서 주님의 마땅함의 결과로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합니까? 가슴 칠 일이 아니고, 다시 한 번 내 마땅함을 으깨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잘나야겠다고 우기는 내 마땅함을 박살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집안은 이정도 되어야 하고 내 아이는 공부 잘해야 된다는 그것. 스카이SKY정도의 대학은 가야 된다는 그것을 박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가 스카이인데, 우리 애는 그런 대학을 안 가도 좋습니다. 그저 하버드나 예일대나 이런 데. 또 잘못 가가지고 6만불 물어내고 하지 말고.

 

왜 우리는 누구 속에 들어가는 재료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못하고, 왜 우리는 그런 식으로 변화 못하고 있느냐 이 말이죠. 홀로 존재 못하는 거예요. 우리는 홀로 존재하면 안돼요. 부름 받았다는 뜻이 무슨 뜻일까요? 오늘 본문 처음부터 새로 들어가 봅시다. 도대체 주께서 불러줬다는 말은 뭐냐, 거기에 만두를 집어넣어야 해요. 갑자기 제목이 ‘마땅함’에서 ‘만두’로 바꾸고 싶은데. 우리를 왜 불러줬습니까? 우리를. 칼빈이 이야기한 것처럼 나 구원받으려고요? 그래서 내 존재의 마땅함을 긍정하려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네요.

 

우리는 아담에서 태어났어요. 아담의 본성이 몸에 배었습니다. 그리고 아담에서 태어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누구를 쳐다보느냐 하면은 세상에 나가서 다른 사람들을 다 지켜봐요. 지켜보니까 제각기, 제각기 자기 마땅함에 아주 충실해요. 아주 충실하다고요. 결혼하기 전에 총각들 모여가지고 뭐 이리 핑계다고 술 한 잔, 저리 핑계대고 술 한 잔 하다가 갑자기 결혼하고 난 뒤에는 오늘 회식 못한다. 나 들어가 봐야 한다. 우리 집사람이, 내 아내가, “오빠! 일찍 들어와!”라고 해서 일찍 들어가야 한다. 갑자기 술친구의 마땅함에서 가정의 만두 속이 되고 말았어요. 누구의 소속이 되고 말았죠.

 

아휴! 정말 성령 받아야 이런 변화가 있다고 저는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성령 받은 척 하지마세요. 성령 받은 척하면 이게 안 돼요. 성령 받은 척하면 이게 개인구원 돼요. 아까 칼빈은 개인구원이잖아요. 목사님, 이래, 이래가지고 구원되잖아요. 맨날 하는 소리가 이렇게 해서 구원되잖아요. 예수 믿고 은혜 받아 감사해서 봉사하면 될 게 아닙니까? 맨날 자기구원의 마땅함이에요. 자기 구원의 마땅함. 오늘 제가 마땅함이라는 단어를 백 개는 더 했지 싶다.

 

우리가 이스라엘의 그 율법의 마땅함에 의하면 율법을 통해서 죽어 마땅합니다. 그래서 제사의 율법에 들어가는 제물이 뭐냐 하면 이미 알아요. 우리가 율법을 못 지킨다는 것을 이미 안다고요. 알기 때문에 희생양을 준비하는 거예요. 어린양을 준비하는 거예요. 우리가 어디에 꽂혀야 되느냐 하면은 그 희생양에 꽂혀야 돼요. 자기의 가치에 꽂히면 안 됩니다. 그거는 자기 가치의 마땅함이에요.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의 언약의 구심점, 핵심은 어린양, 그 희생제물의 마땅함 그것만 고집합니다. 우리는 어린양 속에 죄인으로 기어 들어가면 되잖아요. 그게 뭐가 어려워요? 아니, 참 어렵구나! 그게 무척 어렵구나!

 

사람이 살아오면서 지 잘난 맛에 살아오기 때문에 그게 누적이 되어 있어요. 그 암 조직이. 우리 전체가 암 조직이에요. 나 잘났다. 나 잘났다. 그 세포를 하나하나 뗄 때마다 나 잘났다. 또 이거 떼면 나 잘났다. 어느 구석이든 나 잘났다, 에요. 나 잘났다가 뭉쳐서 우리가 육체가 된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제일 실례가 되는 것은 허락 없이 손으로 남의 육체를 건드린 게 이게 실례가 돼요.

 

우리는 굉장히 점잖은 체 하지만 허락 없이 누구의 몸을 만지면, 터치하게 되면 분노합니다. 국회의원들이 말로 하는 것은 괜찮아요. 뭐 이렇게 욕하는 것은 괜찮은데, 뭐 이렇게 해서 말로 하다가 밀잖아요. “어! 이게 어디서 손대고! 이거 폭행이다 빨리 찍어라! 폭행죄다.” 인간이 말로 하는 것보다 더 확실한 것은, 인간이 평소에 얼마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아야 하느냐 하면은 내 신체에 대해서 나 말고 아무도 허락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심지어 커서는 부모나 일가친척이나 가족도 자기 허락이 없이는 못 만져요. 만질 수가 없어요. 오래 함께했던 부부도 마찬가지에요. “여보! 오늘 고생 많이 했지?” “어딜 손대고 있어. 저리가! 침대에서 나가 밑에서 자! 내 허락도 없이 어딜 기어들어와! 어딜 베개 들고 와! 밑에 내려가!” 참고로 우리 집에는 침대가 없습니다. 우리집이야기는 아니에요. 비난하는 것은 좋지만 신체에 손대는 것은 용납이 안 돼요. 강제추행이 되겠죠. 그 정도로 나의 하나는 우리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던 나의 신체의 마땅함, 절대성 이거 계속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처음에 이야기를 했잖아요. 부르심이 20미터만 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요. 20미터, 30미터, 50미터, 계속해서 부르심. 부르심이라고 하는 것은, 불러준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육체 자체가 고집스럽게 자기의 마땅함을 포기할 줄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불러줄 때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의 실타래, 십자가의 등대가 반짝일 때마다 다시 한 번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만들어요. 알았다고 해서 내가 의인이 된 게 아니고, 그게 용서의 부르심의 의로움, 불러주심의 의로움이에요.

 

내가 의인이 되는 게 아니고, 나 여기 있는데 주께서 불러주심 자체가 말씀의 완성으로서 이게 의가 생산이 되는 거예요. 부르심 자체에서, 그 관계성 자체에서 의가 된다는 거예요. 관계성 때문에 죄인인 우리가 의인이 되는 거예요. 우리가 만약에 의인이 되면 이게 또 자기 의의 마땅함으로 전락해버립니다. “나 의인이다.” 이런 식으로. 그게 뭐다? 아까 이야기한 칼빈의 잘못이었다. 루터의 잘못이에요. 또 개인구원으로 가버렸어요. 개인구원으로. 만두 속이 아니고 지가 만두라고 우기고 있는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누구 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따로 놀겠다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늘 누누이 말했잖아요. 예수 안에서 구원받는다고. 그걸 만두 속으로 바꾸세요. 만두 속 안에 있기 때문에 구원받는 겁니다. 만두 속으로. 자 이쯤 했으면 오늘 본문이 이해된다고 제가 약간의 희망을 얻었습니다. 20절을 봅시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 선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에게만 주어졌다고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죠.

 

자, 21절을 봅시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독단적으로 마땅함을 갖고 있는 너희여! 그 자체가 죄고, 죄이기 때문에 주의 십자가가 등대처럼 반짝입니다. 십자가는 뭐라고 했습니까? 구약적으로 말하면 십자가는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이라고 했죠. 언약에서는 뭘 다룬다? 제사장들이 뭘 다룬다? 죽음을 다루죠. 예수님은 뭐다? 예수님 자체가 제사장이고 예수님 자체가 제물이고 예수님 자체가 성전이죠. 주님 자체가 주의 이름이잖아요. 그것이 이 땅에서는 확실한, 영원한 마땅함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 십자가의 마땅함이에요.

 

그게 피 흘림의 마땅함이라고 베드로전서 1장 2절에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죠? 예수 그리스도의 뭘 얻기 위해서? 피 뿌림이다. 피의 마땅함이에요. 아! 참, 이 피의 마땅함. 이 함축적이 된 것을 정말 여러분들이 아셨으면! 아시겠지! 여러분의 마땅함, 성령 받았으니까. 피 안에 함축이 되었으면 우리가 이 땅에서 축구를 하던 야구를 하던 뭘 하든 그게 피의 기능이에요.

 

야구장에 모자 쓰고 마스크 쓰고 야구 구경하면서도 그게 피의 기능이라니까요. 피. 롯데 이겨라! 두산 이겨라! 두산이 이겨야 마땅함이 아니고, 누가 이기든 그거는 마땅함이 아니다, 라고 아는 그 피의 마땅함. 야구를 해도 주의 피의 의미 안에서 야구하게 되어 있어요. 홈런을 몇 개 치느냐는 것도 주의 허락이 나야 홈런을 쳐요. 홈런인데 새가 와서 물어 가면 홈런이 안 되거든요. 그렇죠. 1회에 홈런 다섯 방 날려서 15대 1, 2회에 25대 1, 3회에 비가 오면 몰수 게임으로 없는 것이 돼요. 홈런 100개를 쳐도 홈런 다 날아가 버려요. 야구의 마땅함이 아닙니다. 남북경협의 마땅함이 아니고, 남북통일의 마땅함이 아니에요. 경제발전의 마땅함이 아니고, 내 생존이 마땅함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피가 마땅함이에요.

 

세종시에 사는 어떤 집사님은 아파트를 샀는데 아파트 준공검사가 안 떨어져서 못 들어가요. 전에 말씀드렸죠. 대전강의에서. 거기다가 온 재산을 다 넣어놨으니까. 그럴 때 우리 마음은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고, 나는 구원받은 거 맞다고 얼마나 우기겠습니까? 항상 어떤 사태가 오는데 그 사태는 십자가 등대에서 번뜩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실타래가 풀려서 뭘 유발한다고 했습니까? 사태가 유발되는 거예요. 실이 이만큼 풀리면 그만큼 새로운 사태가 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50미터 왔다가 이제는 또 20미터 들어간 거예요. 50미터 왔을 때 나는 십자가 아니까 구원받았구나! 생각했는데, 그 자체가 변화가 일어나야 되는 겁니다.

 

그 변화가 20미터 가니까 갑자기 아파트에 들어가지를 못해요. 입주가 안 되니까. 이거는 십자가의 고귀함은 절대 위로가 안 돼요. 아파트 입주를 해야 돼요. 지금 그 분이 입주를 했기에 제가 마음 놓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입주를 안 했으면 약 올린다고 할 텐데 입주가 됐으니까. 그런데 아무리 십자가로 은혜를 받는다고 해놓고 막상 사태가 일어나고 사건이 벌어지니까, 갑자기 내가 쌓아왔던 내 가치, 내 의미의 마땅함이 다시 불현 듯 내 전부를 지배하게 되었어요. 그거는 뭐냐 하면 내가 계속해서 연이어 달라져야 한다는 조짐을 보여주는 겁니다. 아, 내가 여기서 다 됐구나, 라는 것이 안 되는 거예요. 여기서 다 됐다가 아니라 이 말입니다.

 

그러니 제가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말씀의 위주입니까? 우리 개인의 행복위주입니까? 어느 쪽이에요? 내가 살아있습니까? 말씀이 살아있습니까? 말씀이 살아있는 겁니다. 말씀이 살아있고 그 말씀의 완성은 십자가고. 십자가의 그 자취를 밟아오기 위해서 내일되면 주께서 준비하신 화살이 뭐가 날아올지 몰라요. 아니 날아와도 괜찮아요. 왜냐하면 우리의 마땅함의 근거는 나의 존재의 행복에 있는 것이 아니고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의 이미 ‘다 이루었다’의 피에 있기 때문에.

 

만두가 내 만두가 따로 없어요. 내 만두를 없애버립시다. 우리 만두를 칼 가지고 찢어버려요. 우리 만두는 없고 오직 하나밖에 없어요. 주님 만두, 예수 안이 전부에요. 내 안에 예수님이 들어올 생각을 말고 주님 안에 우리가 들어가면 되거든요. 이렇게 볼 때에 다시 여러분들이 지난날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동안 우리가 무엇을 혼동하고 무엇에 무지하게 살아왔는가를 보세요.

 

은근히 내 구원을 챙기는 그 버릇을 되풀이하지 않았는지. “주님, 십자가 감사합니다.”라는 그것을 땡겨서 자기 구원에 유리하도록 나한테 달라붙게 만든 것은 아닌지. 어느 쪽의 마땅함을 버리고 어느 쪽의 마땅함 속에 우리가 들어가야 되는지를. 지난 과거를 한번 생각해보세요. 왜 지난 과거를 생각해보라고 하느냐 하면 앞으로도 그럴 거니까. 앞으로도. 내일 되면 무슨 사태가 또 일어날는지. 개가 또 내 손가락을 물지. 어떤 사태가 일어날지 모르는 거예요. 오토바이 타다가 오토바이 사고가 날 수도 있는 문제고.

 

치마를 샀는데 치마가 안 맞아서 반품하는 번거로움이 있을 수도 있고. 얼마나 왕짜증나겠어요. 하지도 못하는 홈쇼핑에 주문 겨우 해놨는데 와보니까 치수가 안 맞다 이 말이죠. 반품하려면 또 눌러서 “고객님!” 하면 짜증나는 거예요. 짜증나면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주여, 저를 왜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하고 으르렁대죠. 주님은 뭐라고 합니까? “니 뭐라고 하냐? 니 마땅함이 니 행복의 마땅함이냐? 왜 니가 왜 이렇게 발작을 일으키느냐? 암이 또 재발했다.” 우리는 맨날 암이 재발해요. 나 우선의 암. 나 위주의 암.

 

자, 그 다음에 22절을 봅시다. 여기 보세요. 여러분들이 이제 이해가 될 거예요.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23절,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주님 욕 안 했습니까?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주님 입에서 하신 적 없어요? 우리는 그것을 욕으로 해석합니까? 마땅함으로 해석합니까? 마땅함으로 해석해야 돼요. 욕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에 여러분 집에 어떤 탤런트가 집을 방문했다. 그럴 때 정말 솔직담백하게, 남 눈치 안 보고 용감한 9살 먹은 어린 조카가 하는 말이, “우리 탤런트 누님! 드라마에서 볼 때는 되게 예쁜데 현실에서 보니까 진짜 못생겼네요.” 이게 욕일까요? 솔직함일까요? 솔직함이죠. 주께서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한 것은 솔직함이에요. 독사의 자식이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솔직하게 하면 돼요. 뭐 일부러 욕할 필요는 없어요. 솔직하게 하면 돼요. 아닌 건 아닌 거거든요. 미워서가 아니라 그러함이 마땅함이기 때문에 할 뿐이에요.



23절,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24절,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보세요. 제가 마지막으로 이야기할 것은 이겁니다. 여기 목사님이 계시니까 물어봅시다. 목사님이 평생 동안 식구들을 위해서 봉사하셨습니까? 구체적이 아니라 아주 두리뭉실하게입니다. 가족을 살리기 위해서 애를 많이 쓰셨습니까? “예” 지금 정답을 알아서 ‘예’라고 하는 것 같은데, 무조건 이거는 아니고 보자, 겐또, 어림잡아서 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가장이 되면 누구나 가족들에게 신경을 많이 쓰게 되어 있어요. 봉사 많이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번 따져보세요. 가장이 되었으면 봉사를 많이 한 게 아니고 가족들로 봉사를 받았어요. 목사가 복음을 전한다, 이러잖아요. 목사가 복음을 전해서 교인들을 섬겼다고 하잖아요. 그러나 정말 복음을 전하는 목사는 오히려 교인들로부터 섬김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남한테 봉사한다고요? 우리가 주님한테 매일같이 봉사 받고 있습니다. 근데 주님한테 고맙다고 합니까? 아니면 짜증내고 반항합니까? 반항하잖아요.

 

왜 그러냐 하면은 내 마땅함 때문에 말씀위주의 마땅함이 계속해서 우리에게서 틀어지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지옥 가는 겁니까? 아닙니다. 그게 바로 죄라는 것을 매일같이 알게 하시는 거예요. 죄를 아는 것이 뭐가 아니다? 죄가 아닌 거예요. 죄를 아는 것이 죄가 아닌 거예요. 이 말씀대로 지켜라가 아니라 이 말씀의 마땅함 쪽으로 가게 되면 너는 얼마나 어설프며 그리고 니가 말씀보다도 내가 잘 되어야 되고 내가 구원되어야 된다는 그 마땅함이, 아직도 죽을 때까지는 내 몸에 계속 살아있다는 그 의심스러운 잘못된 그 모습을 내 눈으로 그것을 목격하고 체험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게 무슨 길이다? 그게 바로 좁은 길이고 영생으로 가는 길이에요. 영생으로 가는 길은, 주님 어디로 가셨습니까? 이게 아니라, 내가 지금 얼마나 엉뚱한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을 내가 눈으로 알 수 있는 그길. 그게 바로 영생의 길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좁은 길로 가는데 어느 바보가 넓은 길을 놔두고 좁은 길로 갈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러나 주님의 마땅함이 우리에게 오게 되면 내가 원치 않는 길로 가죠. 요한복음 21장 18절에 나오잖아요.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 원치 않는 길은 무조건 좁은 길이에요. 왜냐하면 내 원함은 여기서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재벌 집에 시집을 갔는데, 뭐 여기 계신 분들하고는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재벌 집에 갔는데 그 아가씨가 어릴 때 트라우마가 있어가지고 잡채를 못 먹어요. 그런데 그 재벌 집은 시도 때도 없이 잡채만 먹는 집안이라면 행복하시겠습니까? 바짝 말랐어요. 먹을 게 없어서. 우리 총수 재벌님이 잡채를 얼마나 좋아하던지 바짝 말랐어요. 혹시 오늘 오실 분이 안 보이는데, 그분 빵에 트라우마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닌지.

 

우리가 원치 않는 길로 가요. 50미터 왔으면 주께서 원하는 길을 들어줄만한데, 50미터 오든 80미터 오든 계속해서 원치 않는 길이에요. 왜냐하면 그것이 주님의 열심이고 주님의 고집입니다. “난 절대로 니 고집에 말려들 생각이 없다. 그리고 니도 니 고집 포기할 생각 없지? 그러니까 니는 죄고 나는 의가 되는 것이다.” 죄인이 갈 곳은 지옥밖에 없어요. 우리가 지옥가야 마땅함. 그게 바로 우리의 소속입니다.

 

왜냐하면 구약 율법이 저주의 마땅함이죠. 그 율법의 완성이 십자가죠. 십자가 앞에 우리는 지옥가야 마땅함이에요. 그런데 성령이 오셔서 주님의 그 율법의 완성이 우리가 아무리해도 벗어날 수 없는 내 육의 한계, 마땅함의 한계를 그냥 두고서, 그냥 그걸 둬요. 뭐, 이렇게 촉구하고 이런 것 없어요. 그냥 두고 주님의 의가 그걸 덮쳐서 그 못돼먹은 그것을 그냥 만두 속에 집어넣어서, 예수 안에서 졸지에 우리는 의가 돼버린 거예요.

 

내가 죄인인 줄 알고 정신 차린 것이 아니에요. 그냥 정신 차려도 소용이 없어요. 그저 며칠 가면 또 마찬가지가 되니까. 아무것도 내세울 게 없는데, 다만 달라진 게 뭡니까? 내가 착하게 살겠다, 나는 나쁜 짓 안 하겠다고, 내가 개인적으로 사적으로 달라진 게 아니고 있는 그대로 만두의 속이 되었다는 사실. 이런 안목이 바로 달라짐이에요. 이제 이 말씀을 알겠습니까? 이 말씀을 우리보고 지키라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부르심 안에 이렇게 절차가 주어지고, 이런 식으로 작용한다는 것이 주의 부르심 안에 포함이 되어 있어요. 포함이 되어 있다고요.

 

부조내면 그 안에 뭐가 포함이 되어 있습니까? 식권 딸려 나옴. 2장정도로. 이게 포함이 되어 있잖아요. 부조 냈는데 식권 달라고 하니까 따로 5만원이라고 나오면 이거는 이상한 거잖아요. 주께서 십자가 졌다는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은 죄인도 뭐 된다? 구원된다! 까르르! 이게 포함이 됐다 이 말이죠. 십자가 안에. 진짜 믿어지십니까? 정말 포함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주께서 우리를 원치 않는 길로 가게 하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런 식으로 내가 원하는 길로 가버리면 갑자기 주님의 십자가 이거는 뒷전이고 구원받은 내가 내 자랑거리가 돼버려요. 나는 내 구원받은 것을 증거 하는데 신경을 쓰고 있다 이 말이죠. 그건 개인구원이 되죠. 칼빈처럼, 루터처럼.

 

이제 주님의 십자가를 아시겠습니까? 안다고 치고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마땅함이 이미 둘둘 감겨있음이 우리에게 어떤 변화를 촉구함을 이제는 알게 되었습니다. 갈수록 죄인 중에 괴수가 되는 변화가 주님의 약속의 든든함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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