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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3 00:33:41 조회 : 505         
개별자 190412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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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IP:122.♡.170.138) 19-04-14 19:02 
서울의존강의20190412a 베드로전서2장 22-24절(개별자)-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2장 22-24절

 

22절,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23절,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24절,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여기 나오는 이야기가 누구 이야기냐 하면, 예수님에게만 집중해서 이야기를 하죠. 예수님이 당했던 일들을 보게 되면 그 예수님과 견줄만한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멀쩡하게 계셨으면 예수님도 괜찮은 분이지만 다른 사람도 괜찮다. 그렇게 되겠죠. 그런데 예수님을 묘사하는데 있어서 예수님이 주변으로부터 많이 당했다는 쪽으로 이야기를 해요. 이것은 예수님도 괜찮은 분이지만 우리도 괜찮다고 해주세요, 라고 할 건덕지를, 사도는 또는 하나님께서는 전혀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알고자 하거든 니가 예수님에게 어떤 가해자로서 살아가고 있는가를, 그걸 아예 염두 해두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거예요. 예수님은 인간에게 당했던 겁니다. 그러면 우리도 인간에게 속했어요? 안 속했어요? 우리도 인간에게 속했죠. 그렇다면 성도가 되었던 성도가 되지 않았던 한평생 살아가면서 내보이는 것은 우리로 인하여 예수님께서 당했다는 사실만 자꾸 보여주면 돼요.

 

신앙생활 어떻게 합니까? 뭐 어떻게는 어떻게 해요? 예수님을 힘들게 하는 것들이 내가 살면 살수록 계속해서 튀어나온다는 사실을, 그걸 고백해야죠. 예수님은 당하기만 하는 분이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당하셨는데, 그 뒤에 24절에 보면 “친히 나무에 달렸다.”라고 했죠. 자, 나무에 달렸으면 뭐 밑에 있는 세상 관람하고자 달리신 건 아니고, 달렸다는 말 자체가 이것은 뭘 뜻하느냐 하면은 죽으셨다는 이야기에요. 죽었다는 이야기죠. 나무에 심심풀이로 달리신 게 아니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과 상대를 할 수 있는 입장에 있지 않는 이유가 우리로 인하여 예수님이 돌아가신, 돌아가시게 한 원인제공자로서 우리가 살아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이 나무에 달려 죽은 자라면 우리가 과연 제대로 살아갔다고 할 수가 있겠느냐 하는 겁니다. 인간에 의해서 어떤 분이 억울하게 죽었다면, 누구 하나 억울하게 죽게 한 그 사람들은, “나는 지금 사는 게 당당해! 정당해! 나는 살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사는 거야.”라고 주장할 수가 있느냐 이 말입니다. 없지요. 살아도 산 자가 아닌 거예요. 죽음을 유발한 범죄자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진정 내가 누구냐 하는 그 사실에 대해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너무 좋게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 발각되는 거예요. 우리는 이 땅에서 악착같이 자꾸 살 생각만 하는 겁니다. 그 살 생각만 하는 그 생각을 그들은 옳다고 하는 거예요. “살고 싶다.” 이 생각은 뭐가 되느냐 하면 “옳다.” 이래 되는 거예요. 나는 살고 싶다. 이 생각은 옳다. 그래서 나는 살고 싶다는 이 생각은 하자가 없이 옳은 것이라고 하면서 여기에 뭐가 계속 투입이 되느냐 하면은, 투입되는 것들이 뭐냐 하면은 윤리와 도덕이죠. 윤리와 도덕들이 막 드나드는 거예요.

 

“나는 살고 싶다. 이정도 괜찮은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그래서 나는 살고 싶다는 이런 주장은 옳은 것이라는 겁니다. 가정주부가 애를 키운다. 애를 키울 때 제대로 열심히 키우려고 했다. 이게 윤리 도덕적으로 나는 옳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가정주부로 살아가는 이것은 옳은 일이다. 가정주부로서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우기고 싶은 거예요. 이 과정에서 뭔가 빠져버렸죠. 뭐가 빠졌습니까? 예수그리스도가 빠졌죠. 주님이 빠져버렸죠. 주님은 그냥 끼어들지 말라고 할 정도로 빠져버린 것이 아니고, 우리가 적극적으로 주님을 죽인 거예요.

 

주님을 죽였을 때에, 자, 잘 보세요. “나는 살고 싶다. 이 생각은 옳다.”라는 이것이 누굴 죽이게 했습니까? 예수님을 죽이게 했죠. 근데 만약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정당하다고 한다면 일괄적으로 누가 정당하지 못합니까?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은 정당하지 못하죠. 그러면 내 생각이 옳다는 것은 잘못된 거죠. 내 생각이 옳다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죠. 아무리 윤리도덕으로 처발라도 옳지 않죠.

 

그러면 이것이 옳지 않다는 것은 뭐가 옳지 않다는 겁니까? 나는 살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이거는 옳은 생각이 아니라 말이죠. 올바른 생각이 아니다. 살 이유도 없으면서 살겠다는 겁니다. 자기가 살고자 애쓰면 애쓸수록 그 결과는 예수님을 죽게 한 가해자로 드러날 뿐이죠. 제가 지금 중간에 뭘 집어넣었습니까? 예수님 이야기가 빠져있는 상태라면 내가 살고 싶다, 라는 이것이 너무나 당연하고 올바른 생각이라고 우기게 돼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내가 그냥 살라고 하느냐?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바른 일을 하면서 살고자 하잖아. 그러니까 내가 살고자 하는 것은 옳다고 좀 봐줘.” 이래 나오는 거예요. 뭐만 빠지면? 예수님만 빠지면 그렇다 이 말이죠. 교회에 충성하고 봉사하고 살겠다는데 그게 뭐가 잘못된 거예요? 그렇게 주장하는 거예요. 그러면 살고 싶다, 라는 것이 건강할 때만 살고 싶은 것이 아니고, 살고 싶다는 것의 정당성은 특히 병원에 누워있을 때, 요양병원이나, 병원에 누워있으면서 몸이 아플 때에 환자들이 이중플레이를 하는 거예요.

 

목사님이 오시게 되면 “목사님. 이제 나는 죽어 마땅해요. 나는 죽어서 천당 가고 싶어요.”라고 이야기해놓고, 자식들이 오게 되면 “애들아, 나는 살고 싶다.” 어느 게 본심인지 모르겠어요. 어느 게. 믿음도 개뿔도 없으면서 목사님 앞에서는 믿음 있는 척을 하고 있는 거예요. 성경에 나와 있는 이런 성도들을 흉내 내고 있는 겁니다. 일관되지를 못해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성도라고 흉내 내는 이유는 평소에 뭐가 있느냐 하면은 나는 이왕 사는데, 그냥 살라고 하니까 미안스러워서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그걸 근거로 해서 내 속에 있는 진짜 본심을, “나는 죽기 싫다. 나는 살고 싶다.”라는 것을 정당화하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나는 살고 싶다는 이 생각이 옳다, 라는 생각에 예수님이 끼어들었다 이 말이죠. 여기에 예수님이 중간에 끼어들어버렸어요.

 

예수님이 끼어들어버리니까, 여기 베드로전서 2장 22-24절에 보니까, 예수님을 “나 예수다.”라고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까? 예수님을 묘사하면서 뭐라고 되어 있어요? “나는 이렇게 사람들에게 당했다.”라는 쪽으로 예수님을 묘사하고 있죠. 그러니까 그냥 예수님, 예수님, 하지 말고 인간들에게 당했던 예수님이라고 이해를 하라 이 말이죠. 그리고 그냥 나쁜 인간들에게 당했던 예수님이 아니고, 나를 포함해서 모든 인간들에게 당했던 예수님이라고 이야기를 해야 돼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죽음으로 말미암아, 24절에 나오죠. 친히 나무에 달렸다 이 말이죠. 베드로 사도가 친히 나무에 달렸다는 것을 왜 강조합니까? 그 강조하는 이유가 있어요. 친히 나무에 달렸다는 말은 예수님의 모든 사역의 완료는 부활이 아니고 바로 나무에 달린 죽음의 사역에, 최종성이 거기에 있다고 본 겁니다. 24절에 보면,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 죄라는 말 앞에 뭐가 있습니까? 죄에 대하여 죽고 바로 앞에 있는 단어가 뭐예요? 우리죠. 우리.

 

우리가 남한테 죄지은 것 말고 우리가 예수님께 지은 죄가 있다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저는 예수님 구경도 못했습니다. 만나본적도 없습니다.”라고 이래 나올 거라는 말이죠. 그 문제를 풀어야 돼요. 예수님의 죽음이 그 당시에 있었던 하나의 시사,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는 사고사였나? 이 말입니다. 그 시대에 국한된 죽음이었나? 아니면 마지막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계속 그 죽음이 적용될 그런 죽음이었나? 그것을 따져봐야 돼요.

 

어떤 사람이 이순신 장군은 당신 때문에 죽었다고 한다면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나는 이순신 장군 만나본적도 없고, 나는 이순신 장군 별로 안 좋아해요. 안 좋아한다고 해서 그 것 때문에 돌아가셨는가? 내가 이순신 장군 죽으라고 총 쏜 그 왜군의 총잡이에게 내가 뒤에서 배후조종했습니까? 아니죠. 그때 저는 안 태어났어요. 비겁한 변명이 아닙니다. 이순신 장군이 죽을 때, 저는 어떤 책임도 없어요.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에 우리 책임이 없어 보입니다. 왜? 그때 안 태어났으니까. 아까 24절, “죄에 대하여” 앞에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라는 말이 나오죠. 우리. 우리라는 말이, 사실상 오늘날 우리라는 말이 없어요. 우리라는 말은 없고 개인들의 집합체밖에는 없어요. 개인들의 집합체라고 하는 것은 마치 우리라고 할 수 있는 다수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무슨 수가 틀어지면 다시 도로 뭐로 환원이 됩니까? 개인, 개인으로 환원해버립니다. “나는 거기에 책임 안 졌다. 나한테 거기에 대해서 묻지 마. 나는 그냥 구경만 했어.” 이런 식으로.

 

예수님을 처형할 때 동원되었던 로마군인들이 있죠. 그 사람들은 공직을 수행한 겁니다. 공무원들이잖아요. 공무원들. 경찰이 공무원들 아닙니까? 그들이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사람들이 자기가 살아가는 것이, 뭐 의사로서, 판사로서, 가장으로서, 주부로서, 자식으로서, 목사로서, 장로로서 살아가는 것이 정당하게 보이는 것은 평소에 개인의 가치를 자기가 늘 측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요. 나는 개인적으로 봐서 그다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그러니까 세상에서 어떻게 돌아가든지 간에, 그 돌아가는 그것이 내 개인의 가치를 높일 것이냐, 낮출 것이냐에 대해서 나는 잘 처신하고 있다는 겁니다. 북한의 제 2인자 최룡해(현재 김영남은 91세 고령으로 퇴진)가 있잖아요. 김정은이 도와주는 척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 사람은 북한에서는 북한의 국가운영에 희생적으로 봉사하는 기여자죠. 근데 그 사람이 한국에서는 환영을 받을까요? 맞아죽지 않으면 천만다행이죠. 왜 똑같은 개인인데 환경이 바뀌니까 평가가 왜 다르죠? 환경이 바뀌니까 평가가 왜 달라요? 동일한 개인이잖아요?

 

근데 전에 북한 제 2인자였던 김영남이가 집에서 자식 때리고 술 먹고 부인한테 행패부리고 그런 개망나니 짓을 할까요? 적어도 국가의 고위직이라면 안 하죠. 점잖죠. 인자하신 아버지, 훌륭한 남편감입니다. 적어도 공직에 있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전부 다 교양 있고 배운 사람들이에요. 아내가 자기 일 때문에 바쁘면 남편이 다 알아서 주식투자를 해주는 겁니다. 45억짜리를. 그 정도로 아내를 철저하게 외조하고 있는 거예요. “당신은 판사 일만 해라. 내가 다 알아서 45억 주식투자 해줄게.” 둘이 싸울 일이 별로 없죠. 싸운다고 머리끄덩이 잡아당기고 이러지 않겠죠. 그냥 말로 싸우겠죠. 그리고 말로 싸우는 것도 “여보, 내 의견은 이런데, 당신의 의견은 어떠냐?” 뭐 이렇게 재판하는 것처럼 아주 점잖게 했을 거예요.

 

항상 점잖고 바르게 살고 남한테 해코지 안 하는 그런 누구? 우리가 아니고 누구? 그런 우리가 아니고 누굽니까? 나예요. 나. 그런 나예요. 그런 나. 따라서 이순신 장군이 죽은 것에 대해서 내 책임이 없어요.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돌아가신 것에 대해서 지금 괜찮은 내가 그 당시에 태어난다 할지라도, 괜찮은 나는 그다지 나쁜 인간이 아닐 것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그래서 이거는 인간은 윤리도덕으로 무장되어 있고 자기 정당성을 확보할 여지를 항상 두기 때문에 개인으로 다가가서 아무리 주님의 십자가 바라봐도 여기서 뭐가 성립이 안 되느냐 하면은 죄인이 성립이 안 돼요. 죄인이라는 것이 성립이 안 된다고요. 죄인이라는 것이 성립이 안 되면 그거는 뭐 구원 못 받죠. 성령이 와서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해야 하는데, 성령이 안 오고, 성령이 안 오니까 누가 가는가, 본인이 가는 거예요. 어떤 본인? 괜찮은 가치를 갖고 있는, 괜찮은 인품을 갖고 있는 본인이 가는 거예요.

 

기존 교회의 장로들 한번 보세요. 복음 압니까? 모르죠. 모르니까 장로가 됐죠. 복음 모르니까 교회운영에 대해 목사에게 조언할 때 뭐라고 합니까? 괜찮은 자아의식으로 접근해요. “목사님, 저는 3대째 이 교회에 새벽제단을 쌓고 충성을 다합니다.” 이게 윤리도덕이 아닙니까? 품위 있고 괜찮은 자기 자신을 가지고 교회를 운영하려고 젊은 목사한테 조언한다고요.

 

“목사님, 천천히, 발걸음은 이렇게 조신하게 내셔야죠. 목사님, 강단에서 그렇게 사투리나 쓰고 쌍스러운 소리를 쓰면 안 되죠. 적어도 많은 사람들이 보는데서 인품이 드러나는 겁니다. 제가 나이 들어서 아는데, 젊은 기분은 알지만 이렇게 점잖게 하셔야죠. 목사는 교회에 어른인데, 어른답게 점잖게 해야죠. 아직 목회 경험이 없어 그런가본데, 제가 벌써 열두 명의 목사를 섬기고 있습니다.”이런다고요. 섬기는 건지 가르치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런 식으로 하게 되면 결국은 괜찮은 개별자들의 집합이 그 교회가 돼버린다고요. 그러면 죄인은 어디서 찾습니까? 없지요. 무슨 죄인이 있어요. 아니 교회에서 죄인 봤습니까? 교회는 죄인 없어요. 돈 뺏으러 온 교회 앞자리 노숙자가 나쁜 사람이지 다른 사람은 나쁜 사람이 없어요. 다들 한 점잔하시는 분들입니다. 은연중에 경쟁하고.

 

사도바울이 전하는 이 복음에 의하면 한국교회는 교회가 없는 거예요. 교회가 아닌 겁니다. 점잖은 개개인들 딱딱 따져서 질 좋은 사람들인데 무슨 그게 교회겠어요? 주님께서는 피해를 입었다는데 피해자가 아무도 나타나질 않아요. 희한한 현상이에요. 죽으신 분이 있는데 죽을 만큼 나쁜 놈은 예수님 근처에 하나도 없어요. 전부 다 잘났어. 예수님 죽이는데 가담했어도 잘났고 죽고 난 뒤에도 잘났어. 그 잘남의 역사, 그 잘남의 전통, 이게 오늘날 교회역사가 되고 말았어요. 신학의 역사가 되고.

 

신학을 한번 보세요. 전부 다 잘난 사람 만들기의 용도로 신학이 흘러가고 있어요. “여러분, 훌륭하게 될 수 있습니다.” 아까 안양강의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자꾸 어떤 계단을 생각하는 것 같아요. 어떤 계단을. 더 질 좋은. 진화한다는 것 있잖아요. 그래서 그런 논리를 인용했습니다마는, 한 계단 딛고 맹세하고 또 한 계단 올려놓고 언약하고. 이 노래 가사는 뭐냐 하면 ‘용두산 엘레지’라는 노래에 보면 나와요. 용두산아~~ 용두산아~~ 일백구십 사계단에~~ 부산 용두산에 있는 공원이거든요. 계단이 많아요. 제가 여러 번 올라가봤거든요. 올라가면서 맹세한 거예요. 점점 더.

 

인간 머릿속에 뭐가 있는가 하면은 신이 되고 싶은, 신에게 연결되는 어떤 계단 같은 것이 형성되어 있어요. 착하면 착할수록 자기가 천국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얼마나 마귀의 꼬임에 빠져가지고 정반대쪽으로 갑니까? 주님은 나락에 떨어졌는데, 주님이 떨어진 곳에서 주님을 만나지 않고 주님이 없는 곳에, 마귀가 유인한, 마귀가 최고의 자리에 앉았잖아요. 세상신이니까. 그 마귀 만나러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있는 거예요. 마귀 만나러. 기도해서 만나고, 선교해서 만나고. 주님은 그 잘난 인간들의 발에 차여서 나락으로 떨어졌는데, 십자가에, 저 용두산 계단 밑에 떨어져있단 말이죠. 쉬는 시간에 용두산 엘레지를 한번 들어보세요. 얼마나 애절한지.

 

베드로전서를 쓰면서 베드로사도가 언급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살 자격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그래서 살 자격이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안 해요. 베드로가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사람에게 억울하게 당했던 오직 예수님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 이야기만 했으니까, 그러면 예수님 혼자 잘나고 다른 사람은 아무도 구원받은 사람이 없겠네, 라고 생각할 수가 있겠죠. 다른 사람은 못나고 죄인이니까 뭐 그런 생각도 하지 말고 예수님만 생각하면 그만이네, 이래 하겠죠.

 

사도 베드로가 여기 24절에서 드디어 예수님의 효과를 이야기해요. “우리로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살게 하려 함이라”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친히 나무에 달려서”라고 되어 있죠. 이게 세상의 모든 학문을 동원해도 이걸 풀어낼 수가 없어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순신 장군이 죽었다고 우리가 천국에 갑니까? 아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석가모니 죽었다고 천국 가는 것 아니죠. 공자 죽었다고 천국 가는 것 아니죠. 왜 다른 사람이 죽었는데 우리가 천국 가는 효과가 없고, 왜 예수님이냐 이 말입니다.

 

이걸 어떻게 설명을 해야 되죠? 그걸 설명하려면 개별자로부터, 개별자의 자격으로 주님 앞에 나가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개별자의 자격으로. 왜냐하면 이 개별자라고 하는 것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윤리도덕으로, 항상 점잖은 것으로 자기를 분명히 잡고 스스로 자기를 부추기고 있어요. 아까 처음에 한 것을 다시 한 번 해볼게요. 살고 싶다. 왜냐하면 나는 정당하니까. 예를 들어서 가정주부라고 합시다. 나는 가정주부로서 살고 싶다. 왜? 가정주부로서 내가 완전치는 않지만 착실하기 때문에. 최선을 다하기 때문에.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이 그다지 나쁘지 않는다면 나는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나는 스스로 자부한다. 이거거든요.

 

이렇게 말이 많은 문장 같지만 평소에 사람들이 길에 다니면서 생각하는 것이 전부 다 그거에요. 나는 정당하다 이 말입니다. 나는 살아있는 것이 당연한 권리라는 생각을 장착하고 그냥 무심코 길을 가는 거예요. 길거리에 담배피우면서. 나는 길거리에서 담배는 피우지만 집에 가장으로서는 충실하다 이 말이죠. 따박따박 월급 가져다주니까. 까짓것 길거리에서 담배피우면 어떠냐는 겁니다.

 

항상 인간은 나는 정당하다가 있어요. 나는 정당하다. 뭐 나는 결백하다까지는 안 나가도 나는 정당하다는 것은 있어요. 그러니까 남들이 나에게 손가락질을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게 뭐라고 했습니까? 개별자죠. 개별자가 집단속으로 들어가도 개별자는 안 죽습니다. 개별자는 계속 개별자 의식으로 생생하게 살아있어요. 뭐 4.11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100주년이라고,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했죠. 기분 좋았죠. 1919년 3.1운동했으니까, 올 2019년 100년이 맞죠. 했는데, 그 사람들 서로 이권을 다투고 서로 양보합니까? 안합니까? 양보 안하죠.

 

나라가 독립하는 것은 좋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가 중요하느냐 하면은 내가 사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에요. 내가 사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라고요. 내 사랑이 깨졌는데 왜 세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느냐. 왜 파도는 치고 햇빛은 반짝이느냐 하는 노래가 있죠. 왜 새들은 짹짹거리느냐. 나는 사랑이 깨져서 세상종말인데. 왜 세상은 내 사랑 깨진 것은 생각도 안하고 돌아가고 있느냐 이 말이죠. 이런 의식이 뭐냐 하면은 세상은 내 뜻대로 되어줘야 마땅하다는 억지를 부리면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제 말은 뭐냐 하면은 이런 개별자로서는 우리라는 것이 성립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24절에 보니까 그가 친히 나무에 달렸다 이 말이죠. 달려서 그 효과를 누가 보느냐 하면은 우리가 보거든요. 여기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우리에요. 왜? 인간은 개별자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인간이고 이 세상이거든요. 개별자로부터 출발했다 이 말이죠. 개별자로 출발하는데, 개별자로 출발하는 그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우리에요. 우리 안에 개별자가 들어있어서, 개별자는 자기가 죄인이라고 여깁니까? 의인이라고 여깁니까? 자기가 잘났다고 여기잖아요. 자기가 잘났다고 여기는 사람한테는 어떤 용서도 없고, 어떤 대신 죽으신 그런 것도 없어요.

 

따라서 여기에 있는 우리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에 의해서 새롭게 만들어진, 나타난 우리입니다. 그리고 그 우리는 자기가, 참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것을 보니까, 그걸 근거로 해서 보니까, 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죄인이 맞네요, 라고 여기는 우리에요. 이게 어떤 철학과 과학과 신학을 동원해도, 정치경제 다 동원해도 이런 논리가 없습니다. 이런 논리가 성립이 안돼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공자가 죽는다고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잖아요. 부처가 죽는다고 우리가 사는 게 아니다 이 말이죠.

 

하지만 예수님이 나무에 달려 죽으면 이는 곧 예수님의 효과에요. 예수님의 효과. 제목을 예수님의 효과라고 합시다. 예수님의 효과는 무엇을 배제하느냐 하면은 나는 잘났다는 것을 완전히 배제해버립니다. 나는 정당하다. 나는 살고 싶다. 이걸 다 배제해버려요. 왜냐하면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나는 살고 싶다. 살아있는 내가 살고 싶다. 그러니까 삶에서, 살아있다는 것부터 출발하니까.

 

예수님의 효과는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은 예수님은 이미 사람들에게 죽었다. 사람들에게 죽은 거예요. 사람들에게 죽었으면, 예수님의 죽음 앞에, 죽음을 유발시킨 그 모든 주변의 속한 자들은 누굽니까? 아담에 속한 모든 인간이 돼요. 모든 인간은 예수님이 죽는 데에 가해자가 된 거예요. 이걸 증명하기 위해서 인간들이 모여서 의논 맞춘다고 증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때 니가 예수님 죽일 때 각도를 너무 심하게 했잖아!” “뭐? 나는 시킨 대로 했을 뿐이야.” “그냥 나는 멀리서 구경만 했어. 속으로 예수님 참 안됐다고 그렇게 생각은 했었어.” 이런 온갖 변명을 해도 하늘의 유황불은 그런 핑계에 구애받지 않고 그냥 다 떨어지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이 다 죽은 것이라고 이거는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 나오거든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렇게 되려면 이 십자가의 효과, 예수님의 효과가 그런 결과를 낳게 한 어떤 논리성 같은 것이 있어줘야 합니다. 논리성 같은 것이. 우리는 이런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내가 무조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죄인 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 이게 참 신기하죠. 신기한 일이에요.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는 뭐가 됐다? 우리가 죄인 되었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으면 그동안 우리가 윤리도덕을 장착하고 우리가 정당하다고 하는 그 말이 일단 쑥 들어가야 되겠죠.

 

“바쁜데 교회 한번 나오시죠?” “아이고, 바빠서 못 나오겠어요.” 자, 이 말이 무슨 말이냐, 바빠서 못 나오겠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어요? “나는 내 개별자의 일이 더 중요합니다.”라는 뜻이잖아요. 임금님의 아들이 혼인잔치를 벌이는데 오시죠? 나는 땅을 사서 못 온다. 나는 밭을 사서 못 온다. 나는 장가가느라 못 온다. 나는 소를 사서 못 온다. 왜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를 했습니까? 그 사람들은 뭘 이해를 못해요?

 

임금님이 내 아들의 혼인잔치에 오시라는 말은, 당신이 집에서 노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잖아요. 각자 자기의 바쁜 일이 있죠. 그 바쁜 일을 통해서 본인 개별자가 자기를 뭐로 봅니까? 바쁜 일을 통해서 자기는 정당하고 나는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점점 더 다지고, 다지고, 또 다지고 다져나가는 거예요. 따라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대해서 모든 인간은 예수님의 말씀이 지나가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뭐가 되느냐 하면은 발각당하는 거예요. 모든 것이 다 노출되는 거예요.

 

내가 죄인 되었다는 말을 평소의 의식으로 한번 전환시켜보면, 내가 죄인 되었다는 말은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지킬만한 어떤 가치도 손톱만큼도 내게 없다는 거예요. 나는 누구를 의지해야 하지 스스로 나 혼자 반듯하게 설 그러한 인품도 아니고 또 그런 시도도 해서는 안 될 존재다. 내가 스스로 나는 이만큼 내가 정당하게 살아왔다고 우길 수 있는 그런 자가 아니라는 것을 주님 앞에서 자인하는 거예요.

 

그거는 내가 나쁜 짓을 해서가 아니라 내가 알지 못하는, 발견하지 못하는 내 자신을 저쪽에서 미리 확정짓고 규정지어버린 거예요. 누가 와서?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이 그렇다는데 우리가 무슨 거기에 대해서 “아니오.”라고 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죄인이라는데. 하나님께서 “너는 죄인이기 때문에 더 살라고 하지 마. 오늘 죽더라도 합당한 조치인줄 알아라.” “예.”라고 하면 그걸로 끝나는 문제에요.

 

침대에 누워가지고, “이것들이 찾아오지도 않고 말이야. 조금 남아있는 재산 교회에 갖다 바쳐버릴라. 안 찾아오고 말이야. 니들 진짜 유산 안 받을 거야?” 그까짓 유산가지고 협박 공갈 칠 게 아니고. “주여, 내가 더 사는 것이 너무 주제 넘는 은혜가 아닙니까?” 이런 식으로. “너무 과분한 혜택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까? 살 가치도 없으면 빨리 데려가시는 것이 마땅한데, 저는 별 볼 일도 없는데 왜 자꾸 이렇게 시간을 질질 끄십니까? 차라리 제 소원이 있다면 빨리 육신을 벗어나서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입니다.”라는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이게 복음을 아는 사람의 정당함이거든요.

 

아직 예수님의 효과에 대해서 제가 한 마디도 안 했어요. 어떤 논리가 그렇게 되는가에 대해서. 다만 여기서 예수님의 효과라고 하는 것은 바로 죽음의 효과라는 사실. 우리 자신이 살 가치가 없다는 그 효과가 확산되는 그것이 선교죠. 그것이. 그래서 교회가 선교를 해야 될 텐데, 오히려 교회가 선교를 막고 있어요. 전부 다 잘난 사람들만 다 만들어놨어요.

 

그러면 이 예수님과 새로운 인간과 어떻게 만나는가, 산자들은, 보통 우리 살아있는 사람들은 살아있는 사람들끼리 만나요. 왜냐하면 자기가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산자들을 만나거든요. “당신 취미가 뭐냐?” “저의 취미는 비가 부슬부슬 오는 날에 공동묘지에 가서 거기서 산책하는 겁니다.” 이런 사람 별로 없어요. 공동묘지에 있는 아버지 후딱 하고 후딱 와야죠. 거기는 죽은 자들끼리 놀라고 하고 우리는 산자들끼리 같이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공동묘지 껴안고 살아가는 사람, 별로 없습니다.

 

산자들이 왜 산자를 만나느냐 하면은 서로를 만나서 자기가 살아있다는 것이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예요. 자, 어떤 사람이 낮술, 술 한 잔을 걸치고 지하철을 탔습니다. 술 냄새가 온 지하철에 퍼지겠죠. 그 사람이 술을 왜 마셨을까요? 그 사람은 누굴 상대했습니까? 그 사람은 평소에 누굴 상대했느냐 하면은 술과 술을 상대했죠. 술을 상대했습니다. 왜 술을 상대했습니까? 사람이 개를 상대하고 고양이를 상대하고 술을 상대하는 이유가 뭡니까? 다 자기 말을 잘 듣거든요. 자기 말을 잘 들어요. 술은 한 잔 부어서 그냥 마시면 되잖아요.

 

술을 먹는 이유는 자기를 위해서, 자기 취하기 위해서, 자기 즐겁게 하기 위해서, 자기만족을 위해서 하잖아요. 인간은 술을 먹는 기분으로 모든 사람을 다 만나요. 제발 나를 좀 만족시켜달라고 다 만나요. 그러니까 이것은 뭐가 나타나지 않습니까? 죄가 나타나지 않죠. 자기의 잘남만 자꾸 자기한테 적용이 되는 겁니다. 나는 이정도로 잘났다. “내가 만나는 친구들은 이정도야. 우리 카톡 방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는 줄 알아? 하여튼 빅토리도 있고 승리도 있고 다 있어. 우리 노는 가락이 이정도야.”

 

자기의 죄가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인간들은 살아간다 이 말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죄인으로 드러나지 않는. 복음을 알아서 ‘눈치 없는 너’처럼, 눈치 없이 명절에 복음을 이야기하지, 진짜 쉬쉬하고 전부 다 기피해요. 자기 죄가 드러날까 싶어서. 예수님은 죽으셨잖아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만난 사람이 누구냐 하면은, 이제 이게 논리에요. 우리가 탄생하는 논리입니다. 나무에 달림으로서 누가 죄 용서 받았다? 우리가 받았다.

 

그 우리는 없는 우리인데, 없는 우리를 주님께서 어떻게 만들었는가 하면은, 예수님이 죽은 자로서 죽은 자를 불러요. 죽은 자를. 멀쩡하게 살아있는데 주님께서는 죽은 자라고, 죽은 자로 호출되는 사람. 그 사람과의 만남에서, 여기서 뭐가 발생이 되느냐 하면은 예수님의 죽으심의 비-역사성이 드디어 정립이 됩니다. 비-역사성. 비-공간성. 죽음의 비-역사성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역사가 흘러도,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한결같이 예수님의 죽음의 효과는 적용되는 것, 비-역사성. 어떤 지역이든 상관없이 예수님의 죽으심이 적용이 되는 것, 비-공간성.

 

제가 이래 이야기하면 “목사님 진짜입니까? 실제로 그렇습니까?”라고 물으신다면, 저는 두 명의 여인을 예를 들겠습니다. 하나는 다비다. 하나는 루디아. 하나는 다씨집안. 하나는 루씨집안. 다비다는 다른 말로 하면 도르가라는 여인인데, 사도행전 9장 36절에 나옵니다. 그리고 루디아는, 루디아라는 이름이 괜찮죠. 루디아. 이루디아라고 해도 괜찮죠. 루디아는 사도행전 16장 14절에 빌립보라는 곳, 지금의 터키에서 건너가자마자 첫 번째거든요. 요새 그리스죠. 영역으로. 빌립보사람이에요.

 

이 두 사람의 같은 점과 차이점을 지금부터 생각해보겠습니다. 사도행전 9장 36절을 보겠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멀쩡하게 살아있는 사람을 죽은 자로 보시는 그 경우를, 그래서 우리라는 것을 어떻게 형성시키는지를, 그 논리를 제가 지금 제시하고 있는 거예요. 36절,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그 다음에 어떻게 됐습니까? 37절,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됐습니다.

 

자,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선행과 구제하는 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럼 이 사람은 굉장히 정당한 사람이에요. 더 살아야 될 가치, 오히려 죽인 것이 하나님의 실수처럼 느껴질 정도로 남보다 더 살아야 될 가치 있는 존재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37절에서 주님께서는 그 도르가를 또는 다비다를 죽여 버리죠. 자,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뭘 알 수가 있느냐 하면은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을 때 멀쩡해요. 착한 일을 많이 했죠. 그러나 예수님의 마지막은 안 돌아가시는 것이 아니고 돌아가셨잖아요. 돌아가셨다고요.

 

그런데 돌아가시고 끝. 이래버리면 이거는 예수님이나 이순신 장군이나 부처나 공자나 소크라테스나 똑같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공자를 부활시킨 것이 아니고 부처를 부활시킨 것이 아니고 소크라테스를 부활시킨 것이 아니고 누굴 부활시켰습니까? 예수님을 부활시켰죠. 그 예수님을 부활시키면서 그 정체를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오른편까지 올려놔버렸단 말이죠.

 

그분이 만유의 주였습니다. 만유의 주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주님의 적용의 대상이 되는 거예요. 주님의 사역에 묶여버리는 그런 관계망 속에 놓여버린 거예요. 개별자가 날아가 버려요.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그들이 만들어졌음이, 예수님의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를 보자 이 말입니다. 그 자리가 옛날에는 여호와의 자리에요. 세상의 모든 것을 만드시고 친히 관리하는 그 자리가 주님의 오른편의 자리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무엇이 주어졌느냐, 쏟아졌느냐 하면은,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졌거든요.

 

하나님의 언약이 출발한 자리에서부터, 언약의 완성자가 출발한 그 자리에 도착하게 되어 있어요. 도달하게 되어 있어요. 주로부터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 이게 전부 다 언약에 의해서 주로 말미암는 거예요. 어디로 돌아간다? 주께로 돌아가는 거예요. 주께서 주의 자리에, 자기의 본 자리를 차지하신 거예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주님으로 되는 거예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주님으로. 왜냐, 오른편의 자리는 하나님의 일하시는 곳이거든요.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가 예수님을 주되시게 하시는 겁니다. 이게 사도행전의 사도의 설교였습니다.

 

자, 사도가 사람들에게 설교해서 사람들을 구원했을까요? 주께서 일해서 구원했을까요? 주께서 일을 하셨죠. 사도가 이 세상을 적용할 수 있는 권한은 없어요. 내 설교빨이 좋다고, 내가 설교 잘해서 사람들이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편지 썼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에요. 신기하게도 주께서 친히 작용을 해야 돼요. 아주 신기하게도. 정말 신기해요. 신기하다는 말은 뭐냐 하면 이 세상의 어떤 원인도 그런 결과를 유발할 수 없다는 점에서 신기한 거예요. 애쓰고 용쓴다고 될 문제가 아니잖아요.

 

내가 살아온 것은 그리스도의 뜻이었다.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위해서 살아왔다. 이것은 흔히 교회에서 하는 말이에요. 그러나 말을 바꾸세요. 내가 죄인된 것은 예수님의 주되심을 위해서 이 잘난 나는 뭘 해도 죄인이어야 했다. 그리고 죄만 드러나야만 했었다. 왜? 그래야 주께서 주되시기 때문에. 그럼 여기서 뭐가 빠집니까? 자기의 잘남이 빠지겠죠. 자기의 잘남이 빠지면 뭐가 빠지느냐 하면은 나는 꼭 살아있어야 된다는 것도 어떻게 됩니까? 빠져야 되겠죠.

 

그러니까 이 사람은, 살아있어야 된다는 것도 빠져야 된다면 자기를 뭐로 본다? 산자로 보는 것이 아니고 죽은 자로 본다. 따라서 주님은 죽은 자와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이 모든 베드로전서이야기는 “죽은 자가 누구에요?” 죽은 자를 찾는 말씀이고, 거기에 희한하게도 반응을 나타내고 있다면, 정말 이거는 기적입니다. 신기한 일이에요.

 

우리가 세상 살아가면서 기쁨이라는 것이, 내가 예상되고 할 수 있는 것이 기쁨도 기쁨이지만, 진짜 기쁨은 예상치도 못했는데 기쁠 때, 그 기쁨은 오래갑니다. 오래갈 정도가 아니고 우리에게 영원한 기쁨이 있어야 돼요. 그거 없이는 성도는 못삽니다. 슬퍼서 못살아요. 슬퍼서. 뭐 어떤 노래에 보면 슬퍼서 행복하다는 노래가 있어요. 이건 말도 안돼요. 슬픈데 왜 행복합니까? 이승철이 불렀던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라는 노래에 보면 나와요.

 

우리가 죄인이라서 기뻐요. 이거는 그동안 내가 슬프고 두렵고 벌벌 떨면서 살아온 이유가 뭐냐 하면은 내가 잘난 존재라는 기억을 지울 수가 없어서, 그래서 내가 벌벌 떨고 살았던 거예요. 나는 항상 행동을 똑바로 해야 되고, 바르게 해야 되고, 그래야 내 점수가 유지가 되고, 향상되고, 점점 더 성적이 올라간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두려움과 공포는 더 찾아오는데요? 그것 때문에 분노는 더 크게 일어나요.

 

주님께서 사랑을 해줬다는 말은, 근원적으로 니가 죄인이라는 뜻이고, 죄인이라는 뜻은 뭔 뜻이냐 하면은 그동안 인생 잘못 살았다는 거예요. 잘못 살았다. 다시 말해서 죽는 것이 정당한데, 억지를 부리면서 나는 꼭 살아야 된다는 식으로 잘못 살아온 거예요. 이 의식 자체가. 죽으면 주님만나서 좋잖아요. 근데 주님 만나는 것이 싫다는 거예요. 나는 산사람하고 만나서 술 한 잔 먹고 싶다는 거예요. 내 잘남을 남한테 뽐내면서 사는 것이 자기의 소원이라는 것입니다. 주님 만나는 것이 소원이 아니고.

 

교회 가서도 잘난 맛에, 시장가서도 잘난 맛에, 무슨 동호회하고 친목회가 왜 그렇게 많은지. 가정주부들이 그런 데에 굉장히 바빠요. 옛날에는 세탁기가 없어서 집안에만 있었는데, 이제는 세탁기 있고 전자레인지 있고 난 뒤에는 할 게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청소기도. 청소기가 50만 원 짜리 청소기도 있고. 그것도 귀찮아서 자동로봇청소기로 하고. 로봇하고 개하고 자기들끼리 싸우든지 말든지, 자기는 청소했다고 바깥에 돌아다니는 거예요. 문화 활동, 뭐 복지관에서 여러 가지 활동하는 것. 자기계발하자는 것.

 

누굴 만납니까? 자기보고 죄인이라고 지적해주는 사람을 만납니까? 안 만나죠. 대전의 시민대학에서 제가 강의를 한 학기 했어요. 처음에 한 20명이 왔어요. 나중에 몇 명 안 남았어요. 왜? 죄를 지적하니까 다 그만뒀어요. 도르가가 착한 사람이 맞아요. 그리고 구제도 많이 했습니다. 누가 봐도 이거는 더 오래 살아야 하나님의 사랑답다고 생각했죠. 그러나 사랑하는 자를 죽여 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자 도르가를. 다비다를. 같은 사람이거든요.

 

죽였을 때에, 우리는 “왜 죽이느냐?”라고 하지마세요. 사실은 죄인이라면 마땅히 죽는 것이, 거기에 토 달 필요가 없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이미아(IP:122.♡.170.138) 19-04-14 19:03 
서울의존강의20190412b 베드로전서2장 22-24절(개별자)-이 근호 목사

 

자, 예수님께서 나무에 달려 돌아가셨다고 해놓고, 사도베드로가 말하기를 우리의 죄에 대해서 죽었다고 돼있어요. 우리의 죄에 대해서. 그러면 여기 우리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재해석된 세상에 우리가 속해있습니다, 라고 우리가 고백하는 사람이죠.

 

사도베드로가 보기에 예수님께서 뭐 이순신 장군이나 석가모니처럼 그냥 죽어버리면 예수님도 보통 일개의, 아담의 여러 가지 개인, 개별자 중에 한 사람일 뿐이에요. 전체를 다 포괄할 위치에 있지 않다는 말이죠. 그냥 죽어버리면. 모든 사람은 다 늙어죽으니까요. 그렇고 그런 죽은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일뿐이라 이 말이죠.

 

그런데 성경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사도베드로나 사도들이 설교할 때는, 죽은 자들 가운데 살아났거든요. 예수님의 개인자격으로 살아난 것이 아니고 죽은 자들 가운데 살아났다고요. 그러면 예수님이 살아남으로서 그 죽음의 이유가 밝혀진 거예요. 그 죽음의 이유가. 인간이 죽어야 될 이유는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들은 죽는 역할을 했어야 합니다. 죽는 역할.

 

운동회 때 보면 큰 깃발이나 태극기를 한 사람이 쥐고 있기 위해서 여러 사람이 보조로 이렇게 스크럼을 짜죠. 깃발이 하도 크고 길어가지고 혼자 쥐면 바람에 날리니까, 여기서 태극기나 큰 깃발이 날리지 않고 곧추서라고, 이렇게 똑바로 서라고 해주잖아요. 모든 아담 자체가 예수님을, 예수님이 주가 되심을 받쳐주기 위해서 모든 아담은 필히 죽었어야 된다는 것을, 뭘 보느냐 하면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난 거예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러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이 말이 그대로 증명이 되려면, 예수님에게 뭐가 적용이 되어야 하느냐 하면은 모든 인간에게 공히, 같이 적용되는 요소가 있어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은 율법이었습니다. 율법. 인간이나 예수님에게나 다 같이 적용되는 것이 율법이에요. 율법을 같이 해서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심으로 유일하게 율법을 지킨 자가 돼버리면, 모든 인간은 이방인이든 헬라인이든 원하든 원치 않던 간에 이미 율법아래서 그들은 시험을 쳤다는 것이 드러나는 거예요. 시험을 쳤는데 예수님만 백점이고 나머지기는 빵점이다 이 말입니다. 이 율법이라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언약이죠. 언약. 율법대로. 언약대로. 하나님의 에언 대로.

 

따라서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저 모든 사람을 더불어, 함께 생각해서 예수님을 믿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던 그 능력 있잖아요. 성령의 능력. 그 능력이 임해야 전체를 아울러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진 것이 되는 겁니다.

 

인간은 개인적 안목이 한계에요. 왜냐하면 살아오면서 했던 경험에 준해서 살아가기 때문에. 자기의 과거의 기억 속에서 미래이야기를 하고 자기의 현재를 판단하고 세상 판단을 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살아보지도 않고 겪어보지도 않고 자기가 없던 시절까지 아울러서 동일한 가치체제로 그렇다고 단정 지을 수 있는 것은 성령이 임해야 해요. 예수님의 영이 임해야 합니다.

 

미리이야기를 할게요. 아까 도르가 또는 다비다하고 같이 등장하신 여인이 있죠. 누구라고 했습니까? 루디아. 이름 이쁘죠. 사도행전 16장 14절이에요. 제가 두 사람을 비교한 이유가 있습니다. 다비다는 실제로 죽었죠. 죽었는데 누가 살렸습니까? 주님이 베드로를 통해서 살려냈잖아요. 그러니까 베드로의 설교가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서 구원하죠. 설교가 아니고. 설교 멋지게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그 설교를 이용해서 죽은 다비다를 죽은데서 살린 거예요. 그래서 다비다가 죽은데서 살아난 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그냥 폼 잡은 거예요. 성도의 신분이 어떤 신분인가를 개인이 죽었다가 살아남으로서, 모든 성도는 신분이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뭐냐 하면 죽었다가 살아난 자로 간주해준다, 라는 것을 이 다비다를 통해서 그걸 한껏 주님께서는 보여준 겁니다.

 

만약에 성도가 열 명 있다면 그 사람들이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았는지 관계없이 일괄적으로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가 있어요. “당신은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입니다.” 그러면 죽었다가 살아났으니까 죽은 것은 무효냐? 그게 아니고, 죽었을 때 왜 죽었느냐는 것을 알아야 하고요. 살아났을 때 왜 살아났는가를 알아야 돼요. 더 정확하게 해서 모든 성도는 죽었습니다. 그리고 살아난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해야 정답이에요.

 

모든 성도는 죽었는데, 살아난 적이 없는데, 뭣이 살아났느냐 하면은 그 안에서 예수님이 살아난 거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있어.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이 원리를 그대로 적용시켜보자 이 말이죠. 그냥 개인이 죽었다가 살아나버리면 이거는 개별자가 돼버려요. 나는 혜택을 입었다. 이래 되는 거예요. 혜택 입은 것이 아니고 개별자의식에서 벗어난 채로 살아나야 돼요.

 

죽을 때는 개별자로 죽지만 살아날 때는, “이거 나는 개인구원이 아니고 집단구원이었네. 나만 구원되는 것이 아니네. 이런 무조건적인 혜택은 나에게만 온 것이 아니고 그런 혜택을 입는 다른 분에게도 혜택이 주어졌네.”라는 것을 인식해야 돼요.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은 여러 사람을 위해서 죽었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차후에 어떻게 적용을 시키시느냐 하면은 개인의 자격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너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그냥 긍휼을 베풀어서 구원이 되었다.”라는 방식으로, 예수님이 나는 여러 사람 가운데서 홀로 구원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겁니다. 문장이 굉장히 길죠.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이 개인을 상대로 개인한테 당해서 하시는 일이 아니고, 이게 예수님 빼놓고 나머지기 모든 집단과 예수님 자체를 비교하기 위해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라도, 구원하실 때에도 개인적인 자격, 니가 잘나서 구원하는 그런 방법은 없다. 이 말이에요. 오늘 강의 듣는 사람들 머리 깨지겠네. 복잡해가지고. 다비다가 살아났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전부터 이미 구원되었어요. 다만 자기가 맡은 역할이 있잖아요. 역할이 뭐냐 하면은 죽었다가 살아나는 역할을 하는 거예요.

 

왜? 역할이 너무 맘에 안 들어요? “하필 저한테 시키세요. 다른 사람 시키지.” 이게 바로 개별자에요. 그러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 역할에 맡기고, 그 사람은 그 사람의 일을 하고 나는 이런 일을 하더라도 뭉쳐보면 이것은 집단의 일이고 주님의 일이에요. 그 집단을 아까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라고 했죠. 우리. ‘나’가 빠져버린 우리. 나를 용납하지 않는 우리. 그래서 개인적인 구원을 일체 허용하지 않는 우리. 그래서 각자 하는 일이 다르지만 우리가 하는 일은 똑같은 일이에요.

 

그게 뭐냐 하면 우리의 하는 일의 모든 것은 죽은 자가 한 일이고, 우리가 죽은 자라는 것을 알리는 일이고, 이 알리는 일은 우리 중에 유일하게 살아계신 분이 벌이는 일이다. 따라서 죽었다가 살아난 내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라고 하는 거예요. 내가 일한 게 아니에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일을 하지. 사도바울처럼. 베드로도 마찬가지고. 내가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누가 일하신다? 성령이 일하는 거예요. 성령은 개별자를 용납하지 않고 집단으로 일하는 거예요.

 

세상에서 일이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불공평합니다. 일 좀 잘하면 전부 다 몰아줘요. 여자 형제가 한 다섯 명이 있다고 칩시다. 있는데, 명절이나 무슨 일이 있으면 꼭 열심히 하는 여자 형제가 있어요. 그러면 모든 일은 그 애한테 다 갑니다. 부모가 “야야! 동생 하는 일 니가 가서 해라.” “나도 바쁜데?” “갸는 일 못한다.” “안 시켜놓고 그래.” “시켜도 시원찮다. 니가 가서 해라.” 그래서 일 잘하고 착실하면 모든 일은 다 자기한테 옵니다.

 

부모한테 효도하게 되면 집안대소사 일은 효도하는 그 딸내미나 아들한테 다 가요. 다른 형제들은 뭐하냐? 다 놀러 다녀요. 상당히 불공평해보이지만 그게 상당히 합리적이에요. 못하는 애가 해서 나중에 뒷손질할 거 같으면 다른 사람한테 맡기는 것이 당연하죠. 능력 없어서 안 되니까. 언니가 동생한테 일 시켜놓고 동생이 일 못하면 뭐하고 하잖아요. 그러면 동생이 “그러려면 언니 니가 일 다 해라!” 이러죠. 어디 뭐 그런 경험들이 없습니까? 뭐 그 반대에요?

 

이 세상의 일이라고 하는 것은 개별자한테 다 몰아붙입니다. 잘하는 사람에게 다 몰아붙여요. 뒤에서 평가나 하죠. 지는 아무것도 안 하면서. 그런데 주의 일은 높낮이가 없습니다. 똑같이 해요. 한 사람은 골프만 치고. 한 사람은 골프공이나 줍고. 똑같은 일을 하는 겁니다. 한쪽은 빌어먹고 한쪽은 돈이 남아돌고. 그래도 똑같은 일이에요. 주님이 맡기신 일이에요. 똑같은 일입니다.

 

그러면 팽팽 노는 사람이 기분이 좋겠네? 팽팽 노는 사람이 일이 적다고 감사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 때문에 감사하죠. 바쁜 사람도 일 많다고 불평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 때문에 감사하죠. 그런 점에서 주께서 일하지 인간은 일하지 않습니다. 공식하나 만듭시다. 모든 일은 누가 하신다? 주님 홀로 하신다. 주님 홀로 일하신 거예요. 우리는 일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주의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슨 자이기 때문에?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죽은 자이기 때문에. 죽은 자이기 때문에 죽은 자는 일을 못해요. 오직 주께서만 일하시는 겁니다. 어떤 식으로? 죽은 자를 통해서, 죽은 자가 살아났다가 아니라 예수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해주기 위해서 주께서 일하시는 겁니다. 그 확인해주기 위해서 동원된 자들이 누구냐 하면은 바로 우리가 되는 거예요. 우리.

 

자, 다비다에 대해서 그렇게 알고 있죠. 다비다는 부활했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구원이 됐고, 다만 주님이 하신 일의 역할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역할을 하셨다는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다비다는 죽었다가 살아난 거예요. 여러분, 이것이 상당히 기적처럼 보이죠. 기적 맞죠. 사실은 기적이 맞죠. 근데 여러분, 뭘 놓치면 안돼요? 아휴, 사람이 어떻게 죽었다가 살아나느냐? 이건 기적이다, 라고 하는데 기적을 거기서 찾으면 안 되고 그 전에 찾아야 돼요. 다비다가 예수 믿는 것을 기적이라고 봐야지, 다비다가 죽었다가 살아난 것을 기적으로 보면 안 됩니다.

 

우리가, 개인이 개별자로 사는 내가 우리라는 것을 인식하는 자체가 기적이에요. 개별자가 빠져있는 우리. 우리만 있는 우리. 나라는 것을 거기서 찾아낼 수 없는, 나라는 것을 거기서 찾아볼 수도 없는 우리. 하늘에 계신 무슨 하나님? 우리 하나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옵시고. 사적인 죄가 아니죠.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의 죄를 말하는 것입니다.

 

자, 그 다음에 다비다 말고 사도행전 16장을 봅시다. 16장 14절. 이번에 여인하나 등장합니다. 성경에서, 특히 사도행전에서 여인이 등장하는 이유가 그 당시의 사회의 편견을 깨기 위해서였습니다. 여자는 보조적인 위치에 있다고 본 거거든요. 여자가 나서서 구원받는다면 그것은 용납이 안 되는 시대였습니다.

 

여자가 나서지 않더라도, 여자나 남자나 종이나 자유자나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상관없이 누구든지 그리스도로 세례를 받은 자는 전부 다 그리스도의 형제가 돼요. 이게 우리잖아요. 우리. 동일한 유니폼을 입었다 이 말이죠.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거예요. 동일한 유니폼을 입은 거예요. 유니폼을 입은 우리집단이 되겠죠. 그리스도의 옷 입은 자. 다른 말로 하면 니나 나나 다 같이 죽어있는 자. 이래보면 되는 거예요. 죽은 자. 죽은 자고, 다만 우리가 살아있는 것은 우리 안에 동일한 그리스도가 일하신다는 조건하에 우리는 우리가 되는 겁니다. 살아있는 자가 되죠.

 

그러면 여기서 성도를 찾을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성도를. 성도를 찾을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내 쪽에서 성도를 찾아갈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외롭다고. 찾을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성도를 만나려고 하는 것은 내가 외롭다는, 내가 불행하다는 것을 메우기 위해서 내가 수작을 부리는 거거든요. 그러나 죽은 자는 수작을 부릴 자격이 없습니다. 만나게 해줘도 주님의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주께서 필요할 때만 만나게 하는 거예요. 성도라는 이름으로 자주만나지만.

 

주의 복음이 주님의 살아있음을, 우리가 죽어있음을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살아있는 거예요.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가 먼저 나서면 되지 않습니까? 인간이 나서는 게 아니라, 죽은 자가 나서는 게 아니라 살아있는 주님이 나설 때, 결과적으로 우리의 만남을 통해서 주님의 살아있음을 확인해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목사들이 교인들 꼬시려고 자꾸 오라고 하면 안돼요. 그렇게 만나봤자 쓰레기만 만나는 거예요. 아무 의미 없습니다. 개별자와 개별자의 만남은 절대로 우리가 될 수 없어요. 자기 개인의 이익과 그런 것만 계속 챙기고 계산하고 있다 이 말이죠. “내가 교회 와 줄 테니까 나를 위로해 달라.” 뭐 그런 식으로. 가치 인정해 달라, 그런 식으로 될 거면 그거 교회 아니죠.

 

여기 16장 13절부터 보게 되면, 13절, “안식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14절,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로서” 자주 빛 옷감, 염색약 또는 그런 것을 파는 모양이죠.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그 다음에 잘 보세요.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이렇게 되어 있죠.

 

자, 여기서 문제 하나 던집니다.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이 기적입니까? 아니면 사도바울의 말에 마음이 열리고 복음을 알아듣는 것이 기적입니까? 어느 쪽이 기적입니까? 둘 다 기적이겠죠. 그러면 어느 것이 보편적입니까? 성도로서 어느 쪽이 보편적입니까? 전부 다 꽥하고 죽었다가 다시 일어나야 됩니까? 아니죠. 더 보편적인 것이 뭐예요? 마음 문을 열어, 마음 문이 다 같이 열려야 돼요. 마음 문이 안 열린 채로 성도될 수는 없어요.

 

마음 문이 열리지 않은 채로 죽었다가 살아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있어요. 마음 문이 열리지 않은 채 암이 낫는다든지 기적을 받을 수 있죠. 하지만 그거는 천국 못 갑니다. 기적은 받았지만 천국은 못 가요. 하지만 마음 문은, 내가 죽었다가 살아난 것보다 더 근원적이고 보편적이고 공통적인 요소는 뭐냐 하면은 내 마음 문이 열려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마음 문이 열렸다는 말은 사도바울의 말씀이 오기 전에 인간은 마음 문이 열렸다는 말입니까? 닫혔다는 말입니까? 마음 문이 닫혔죠. 오늘 제목은 닫힌 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닫힌 문입니다. 닫혔는데 본인이 알아서 낑낑대면서 열었습니까? 아니잖아요. 여기 주어가 누굽니까? 누가 문을 열어줬어요? 주께서 열어줬죠. 그럼 주님이 일을 하신다는 말입니까? 안 하신다는 말입니까? 일하시잖아요.

 

주님이 일하신다는 말은 주님이 죽었다는 말입니까? 살았다는 말입니까? 살아계시는 거예요. 이순신 장군이나 공자는 이미 죽은 자예요. 그건 개별자니까. 예수님은 마지막 아담이에요. 개별자 아닙니다. 집단의 표상이라고요. 마지막 아담. 개인이면서도 그 전체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분이에요. 마치 아담 같아. 아담이 개인이면서도 자손대대로 자기의 속성을 계속 남기잖아요. 죄를 남기죠. 그런데 예수님은 뭘 남깁니까? 로마서 5장에 보면 죄 대신 의를 남기죠.

 

오늘 베드로전서를 봅시다. 2장 24절에도 나오죠.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사는 게 개별자로 사는 것이 아니고, 죽는 것도 개인적인 잘못 때문에 죽는 것도 아니고. 집단으로 죽어야 되고 그리고 집단으로 살아야 되고. 내가 죽는 이유는 집단적인 죄 때문이고. 내가 사는 이유는 집단적인 의 때문이에요. 그러면 우리가 앞으로 살아가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는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고 의에 대해서는 산자로 살아가는 겁니다.

 

이 말을 쉽게 하면 인간의 죄 때문에 우리는 죽어야 했고,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 하기 위해서 주께서 우리를 살려낸다 이 말입니다. 양쪽 다 뭐가 빠졌는가 하면 내가 개별자로서 내가 알아서 죽고 알아서 산다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는 애초부터 있을 수 없는 현상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현대인들은 자기를 어떻게 봅니까? 자기를 개별자로 보잖아요. 지금 현대인들은 완전히 자기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세상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전혀 모른다고 보시면 돼요. 세상 사람들은.

 

자, 16장 다시 봅시다. 사도행전 16장에서 제가 할 이야기가 많아요. 많지만 천천히 해봅시다. 베드로는 죽은 자를 살렸습니다. 물론 사도바울도 죽은 자를 살리고 본인도 죽을 뻔했다가 살아났지만. 여기 루디아라는 사람은 줄었다가 살아난 그러한 육체적인 기적이 구태여 필요치가 않죠. 그냥 마음 문만, 쬐끔이든 활짝이든 마음 문만 열면 되는 거예요. 누가? 주께서 열어줬다 이 말이죠.

 

자, 마음 문이 열리기 전에는 자기 생각만 하겠죠. 문이 닫혔으니까. 그 문 안에 있는 모든 생각은 자신의 가치와 자기의 의미, 자기의 잘남과 나는 꼭 살아남아야 돼, 라는 그런 이유들로 가득 차 있었겠죠. 나는 남한테 지면 안 되고, 나는 남보다 못한 존재가 아니고, 나는 살만한 그만한 가치가 있을만한 노력을 많이 하고 있다는, 자기의 노력과 자기의 애씀과 자기가 남한테 양보한 것, 남한테 베풀어준 사랑, 그리고 자기가 침착하게 인내하고, 참고, 견디고, 분노도 억누르면서 자기가 자기의 가치를 이정도로 키우기 위해서 애썼던 그런 것들이 가득 차 있죠. 그게 문에 갇힌 채 있다 이 말이죠.

 

문을 열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그것은 전부 다, 문이라는 자체가 그전에는 없다고 봤죠.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산다는 이것이 전부라고 여기지, 어디 문안에 있어가지고 문에 갇혀있다는 생각을 못하잖아요. 그런데 문을 딱 열고 보니까 주님이 주님 증거 하라고 내가 그동안 쓸데없는 개별자 생활을 하고 온 거예요. 문밖에 누가 계신 겁니다. ‘문밖에 있는 그대’는 아니고요. 박강성의 노래. 문밖에 누가 계신 거예요.

 

문이 있고 문밖에 누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아요? 마음 문이 열려버리면, 내가 뭐냐 하면 내가 개별자로, 나를 위해서 살았던 모든 것이 한꺼번에 전부 다 뭐가 된다? 죄. 아, 이거 죄만 짓고 살았구나! 나는 내 생각만 했구나! 세상에 미세먼지부터 해서 세상 돌아가는 것이 다 나한테 유리하도록 돌아가야 된다고 내가 은근히 기대했구나! 예측했구나! 인간이 하는 모든 기대와 예측은 전부 다 나 좀 편해보자는 것하고 관련되어 있어요.

 

여기서 가는데 버스정류장이 저쪽 한 100미터에 있다 말이죠. 그러면 뭘 기대합니까? 내가 버스정류장에 갈 때, 마침 내가 타야 될 버스가 택시처럼 대기하기를 기대하면서 가는 거예요. 기대하면서. 그러나 자기가 죽은 자라고 생각하고, 내가 죽었다는 말은 누가 대신 살아있다는 말입니까? 주님이 살아 있잖아요. 주님이 살아있어서 나로 하여금 지금 버스정류장까지 걷게 하신 거예요. 죽은 자를 어떻게 걷게 하십니까? 살아계신 분이 계속해서 걷게 하시죠.

 

하는데, 버스정류장에 딱 도착하는 순간 내가 타야 될 버스가 방금 떠나버렸다면, 그거 누가 그렇게 타이밍 맞춰서 하신 거예요? 주께서 그렇게 하셔서 주께 감사하죠. 어떻게 감사합니까? “주여, 제가 미처 몰랐던 내 속 욕심을 발각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뜻대로 안 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뜻대로 된다면 이거는 뭐가 되느냐 하면 개별자가 돼버려요. 우리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고, 그 우리 속에서 자기만 돛대처럼, 자기가 오야붕처럼 행세하는 그 버릇을 또 발휘하게 되는 겁니다.

 

지난겨울에 대전수련회에서 했죠. 아가서 했죠. 강의에는 안 나오지만 교재에 보면 나와요. 교재에 제가 대중가요 노래 가사를 잠깐 언급했는데, 무슨 노래냐 하면 가수 ‘이현’이 불렀던 ‘내 꺼 중에 최고~’라는 가사에요. 그런 노래가 있어요. 그게 아가에 보면 나오거든요. 여자 중에 최고! 또는 남자 중에 최고! 라는 것이 있죠.

 

아가의 주제가 뭐냐 하면은, 최후의 1은 뭐냐 하면은 바로 사람이 아니고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있고 나는 사랑받기를 원해서 사랑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랑 때문에 나는 없어져야 된다는 것. 나라는 것은. 1을 사랑에게 양보한 거예요. 사랑에다가 드리는 거예요. 사랑을 위해서 내가 존재해야 되지, 나를 위해서 사랑이 있으면 안돼요. 뭐 가수 김세환처럼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라고 백날 해봐도 ‘나를 위해서’에요.

 

나를 위한 사랑은 그 어디에도 없어요.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을 위해서 우리는 모든 것을, 나를 포기하는 쪽으로 나오게 되어 있어요. 고린도전서 13장이. 주님도 사랑 때문에 죽었잖아요. 사랑을 살리기 위해서 우리를 죽이는 거예요. 물론 주님 자신이 사랑이기 때문에 그렇지만. 그래서 사랑이 있는 사람은 뭐가 없느냐 하면은 두려움이 없다고 했습니다. 왜? 사랑만 있으면 더는 소원이 없으니까. 더는 소원이 없어요. 더 바라면 죄가 됩니다. 4월의 어느 날.

 

그러니까 마음을 열었다는 말은, 그 뒤에 보세요. 주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열고 그 다음에 뭐했습니까? 청종했죠. 15절 봅시다.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이래 되어 있죠. 자, 다비다 같은 경우에는 처음부터 봉사하고 충성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여기 루디아 같은 경우에는 처음에는 마음이 닫혀있어요. 닫혀있기 때문에 누구밖에 모른다? 누구 이익만 챙긴다? 자기 자신의 이익만 챙기죠.

 

여러분 오해하지 마세요. 루디아가 은혜 받고 난 뒤에 베풀었다고 하지 마세요. 베풀어도 내가 베풀면 그거는 마음이 열리지 않은 거예요. 내가 베푼 것이 아니고, 이게 나의 집이 아니고 우리의 집이라는 거예요. 갑자기 내가 없어지고 그 현장에 뭐가 생겨요? 우리가 등장해요. 우리가. 예수님 중심의 우리가 등장하는 겁니다. “내가 이렇게 섬기고 봉사한 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하게 하셨습니다.”라는 고백이에요. “주께서 하게 하셨습니다.”

 

교회에 교인들이 오니까 어떤 집사님이 알아서 커피를 타서 쭉 나눠주거든요. 그러면 “참. 은혜 받고 봉사 많이 하시네요.” “아닙니다. 주께서 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여기 커피 좀 더 주세요.” “못 주겠습니다.” “왜요?” “주께서 하게 하셨습니다. 욕심내지마라고.” 소위 일본말로 기마이(돈이나 물건을 선선히 내놓는 기질)쓰는 것이 아니거든요. 절대 기마이 쓰는 것 없어요. 돈 함부로 쓰지 않아요. 뭐 주의 돈이니까 니나 내나 다 뿌리고 다니는 것 없어요. 주께서 지시할 때까지만 해요.

 

그럼 주의 지시를 어떻게 아느냐? 내가 주의 지시를 따라서 하는 것인지를 어떻게 아는가? 개별자 의식이 도달되기까지가 주의 일이고, 그리고 갑자기 내가 한다는 생각이 들면 그것은 주의 일이 아니고 내 일이 되는 거예요. “주여, 믿게 하셨네요.” 주의 일이에요. “내가 믿었다. 드디어 나는 믿었다.” 이러면 벌써 주의 일 떠났어요. 내 일이 돼버렸습니다. 원래 감정이란 순간적이고 잠깐이니까. 감정이라는 것이 오락가락해요.

 

이 루디아를 통해서 무슨 일이 벌어졌느냐 하면은, 소위 산자들이 오는 것이 아니고 죽은 자들이 모이는 거예요. 죽은 자들이. 그걸 루디아가 받았던 세례라고 하는 겁니다. 세례가 뭐냐 하면은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그들이 어디 회관에서 모였습니까? 어디 노래방에서 모였습니까? 모인 장소가 어디죠? 사람들이 평소에 즐겁게 파티 하는 장소였어요? 안 그러면 휴가 보내는 장소였습니까? 식사하는 장소였습니까? 어디서 모였습니까? 세례요한에게 모인 장소가. 어디서 모였죠. 물속에서. 요단강에서 세례 받았잖아요.

 

성령은 어디서 세례 받느냐 하면은 십자가 안에서 세례 받아요. 무덤에서. 그러니까 거기에 참석한 사람들은 전부 다 어디에 와 있느냐? 무덤 속에 모이는 거예요. 그 무덤 속에서 산 채하면 그거는 어울리지 않죠. 무덤 속에 왔으면 살아있는 척을 하면 안 되죠. “어이구 김귀신!” “어이구 박귀신!” “어이 최귀신!” 이래 되어야 하잖아요. 그게 세례 받은 거거든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나는 죽고를 표면화시켜야죠. 나는 죽고를 양성화시켜야 됩니다. 나는 죽고가 아니에요. “김귀신! 어떻게 죽었어요?” “신종플루 걸려서 죽었어요.” “아이고 그랬어요. 다비다는 어떻게 되었어요?” “깜빡했는지 못 죽게 되었는지, 어떻게 해서 죽게 되었어요.” 이런 식으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법은 없습니다. 계속 죽어있는 거예요. 다만 살아있는 것은 죽은 자를 통해서 주님이 살아있는 겁니다. 그럼 이 몸은 언제 사느냐? 주께서 하늘의 몸을 입을 때 언제든지 사는 겁니다. 새 몸을 입을 때 온전히 사는 겁니다. 그때는. 근데 그것도 개별자 아니냐? 개별자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의 영광이거든요. 주님의 영광, 주님의 몸의 영광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거예요. 여전히 개별자는 없고 천국 가도 우리가 되는 겁니다.

 

그 일의 시작을 죽기 전에 이 세상에서부터 시작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원래 이 세상의 모든 신화에 보게 되면 내세에 대해서, 미래의 사후에 세계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신화세계에서 이야기를 했어요. 각 민족마다 공통점이 있어요. 뭐냐 하면은 살아있을 때의 그러한 환경과 유사해요. 살아있을 때의 환경과. 이 땅에 우물이 있으면 천국에도 우물이 있고. 저는 그걸 가지고 거울이라고 해요. 사후세계를 모르니까, 사후세계를 뭐로 하느냐 하면은 지상의 세계, 살아있는 세계를 반영을 하는, 되비치는 식으로 천국을 설정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환경의 풍류만 그런 것이 아니고, 살아있을 때 사람은 뭐로 삽니까? 윤리와 도덕으로 살죠. 착하면 복 받고 나쁜 일하면 벌 받죠. 그게 사후세계에까지 그대로 이어져서 착하면 천당 가고 나쁜 짓하면 지옥 간다고 본 거예요. 이러한 아이디어의 잘못은 뭐냐, 역시 개별자라는 거예요. 개인구원이에요. 오늘날 개혁주의 신학을 보세요. 개인구원입니다. 제가 지난 낮 오후설교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죠. 하나님의 예정론에서 ‘론’자 하나 떼기 참 힘들다고요.

 

칼빈주의 예정론이 왜 잘못되었는가? 그게 개인구원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개인구원. 칼빈은 집단구원 이런 거 몰라요.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준비하셔서 창세전에 예정했다는 겁니다. 예정된 자만 구원받고 예정되지 않은 자는 지옥 간다는 거예요. 그 뉘앙스가 뭐예요? 그렇게 말하는 취지가 뭡니까? 당신이라는 개별자는 예수님 믿으면 어디에 간다? 천국갈 수 있다. 이 이야기에요. 그거는 왕창 거짓말이에요. 개별자는 죽어야 되지, 개별자가 살아서 천당 가는 것이 아니에요.

 

그거는 신화의 세계와 사후세계와 똑같은 겁니다. 지상에 있던 사고방식을 그대로 계속해서 연속적으로 이어준다는 거예요. 천국까지. 목사님, 그렇게 이야기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그러니까 마음을 열어야 된다는 거예요. 지금 마음은 열 생각도 안하고 그냥 이 강의를 들을 생각만 하는데, 마음 문이 열려야 돼요. 마음 문이 열려야, 다시 복습해봅시다. 마음 문이 열리면 안에 뭐가 들어있다? 평생을 나는 누굴 위해 충성했다?

 

나 자신만의 미래와 운명과 나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서 평생 살아왔다는 것. 나밖에 모른다는 그 사실이 폭로당하는 거예요. 마음 문이 열렸을 때에. 안 열리면 그거는 당연한 걸로 여기죠. 그래놓고 마음 문이 안 열리면요, 그냥 착실하게 살라고 해요. 그냥. 남한테 해코지 안하고 성실하게. 남한테 싫은 소리 안하고. 니 싫은 소리 안하고 내 싫은 소리 안하고 그래 살면 그만 아니냐? 그래 살아도 괜찮지 않느냐?

 

심지어 노래가사에도 보면 그런 게 있어요. ‘신유’의 ‘시계바늘’이라고. 사는 게 뭐 별거 있더냐~~ 욕 안 먹고 살면 되는 거지~ 한평생 사는 게 뭐있겠느냐, 그저 남한테 해코지 안하고 살면 그게 잘 사는 게 아니냐. 가사 내용이 그래요. 소위 살았다고 우기는 사람은 다 납득이 돼요. 왜? 평소에 그렇게 살아가니까. 그러나 주님이 찾아와버리면, 주님은 그것 때문에 돌아가신 거예요. 그것 때문에.

 

강의 다시 하겠습니다. 주님의 모든 말씀은 세상을 하나로 묶어서 이야기해요. 모든 인간은 죽었다. 그런 취지를 담아서 말씀을 전하고 기적을 행사한 거예요. 근데 그걸 받아들이는 인간들은 전체를 보는 눈이 없으니까, 주님은 성령을 받아서 전체를 보지만. 인간들은 성령을 안 받았으니까, 내가 잘 되기 위해서 저런 말씀을 주셨다고 보는 거예요. 내가 잘 되기 위해서. 오늘 제목을 ‘닫힌 문’이라고 했는데 고치겠습니다. ‘개별자’로 해야 되겠어요.

 

베드로전서 2장 24절을 얼마나 많은 사람이 봤습니까? “예수님이 나무에 달리므로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단다. 나음을 입었대. 믿기지는 않지만 무조건 믿어야지 뭐.” 이러거든요. 믿자! 누굴 위해서? 나를 위해서. 그러니까 그게 믿음이 아닌 거예요. 그게. 착한 일 하나 더 하신 거예요. 착한 일을. 무슨 착한 일? 예수님이 나무에 달려서 내 죄를 용서한다는 그걸 믿어준 착한 일을 더 하신 거예요. 누가? 멀쩡한 내가. 그러니까 나는 더 살아야 되고 나는 천당 가야 된다는, 이런 개별자의 근본적인 욕망이 계속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교회 나오시죠?”하면 “뭐 복음 아는데. 바빠서 못 나오겠다.” 이런 식이라. 우리가 되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라는 뜻인데, 근데 뭐냐 하면 “당신 교회 나와서 개인적으로 이익을 얻으세요.”라는 그런 쪽으로 오해한 거예요. 우리가 되려면 우리는 바로 내 이익 자체가 뭐가 된다? 그게 바로 예수님을 죽게 한 죄가 된다는 것을 발견하는 거예요. 혼자 살게 되면 자연적으로 인간은 자기 편한 것만 생각하고 자기 행복만 생각하게 돼있어요. 내 편하면 최고지, 그거거든요.

 

그러면 왜 죽는데? 그렇게 살고 싶은데 왜 죽어요? 나 편하면 최고래. “남한테 간섭 안 받고 잔소리 안 듣고 내 편하면 최고지. 나는 사람 있는 거 딱 싫어. 나는 나 혼자 있고 싶어.” “그럼 왜 죽는데?” “개인적으로 늙어죽는다.” 아이고, 개인적으로 늙어죽는 게 아니고 집단적으로 죽는다니까요. 집단적으로 죽는 이유는 죄인 아닌 자가 없기 때문에 죽는 거예요. 다 죽이는 거예요. 다 죽이는 거. 개인은 다 죽이고 예수님이라는 개인만이, 그분만이 이런 일을 기획하고 획득했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라는 새로운 집단이 등장한 겁니다. 새로운 개인이 등장한 것이 아니고. 새로운 집단이 등장한 거예요.

 

그래서 그 집단은 뭐냐, 베드로전서 2장 24절처럼 친히 나무에 달림으로서 우리는 죄 용서를 받았다. 우리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함이라. 우리의 죄를 대신 뭐했다고 합니까? 담당했잖아요. 우리의 죄를 담당했다는 거예요. 뭐 우리의 죄를 알아야 담당했다고 하죠? 우리가 마음이 안 열린 채로 봐버리면요. 죄, 죄, 죄 하니까 인간은 선악을 따먹었기 때문에, 조상으로부터 선악을 인수인계 받은 거예요.

 

아무것도 없으면 차라리 나은데, 인수인계 받은 것이 화근이라. 선과 악이 있어가지고 선악을 지가 분별한다는 거예요. 자기가 분별한 것에서, 거기서 죄에 대해서 주께서 대신 죽었다는 거예요. 니 자체가 죄인 줄 모르고. 선악을 아는 것 자체가 죄예요. 선악을 알고 있는 내 몸 자체가 죄인데, 자기는 멀쩡하고 자기에게서 잘못 행동한 것을 죄라고 보는 거예요. 그것은 로마서 7장에 보면 위반됩니다.

 

로마서 7장에서는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일부 죄를 짓는 것이 아니고 아예 죄가 내 안에서 왕노릇 하고 있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거예요.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다. 나는 뭐 하고 싶어도 그게 전부 다 죄로 전환되는 그러한 속성을 발휘하고 있는 중이다. 이 곤고함을 어찌할꼬. 감사하리로다. 주어진, 준비된 사랑에서, 비로소 그 죄 속에서 사랑을 발견한 거예요. 일관된 죄 속에서 사랑이라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귀하고, 귀하고 귀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겁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러분들이 다 잘 아시는 말씀인데. 저는 에베소서를 보면 신기한 게, 사도행전을 보면 그렇게 바쁘다가, 그렇게 바쁜 사람이 어떻게 에베소서를 썼는가? 이런 편지를 쓸 시간이 있는가? 함축적으로 잘 썼거든요. 2장 1절에,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했죠. 허물과 죄로, 그 다음에 뭡니까? 죽을 것이다, 가 아니라 허물과 죄로 이미 우리가 산 자다? 죽은 자다? 이미 죽은 자예요. 죄와 허물로 인하여 이미 죽은 자예요. 너희를 살릴 때는 그냥 살리는 것이 아니고, 개인으로 살리는 것이 아니고 주님과 더불어 사는 거죠. 우리. 우리 속에서 살아나는 겁니다.

 

자, 오늘 본문 베드로전서로 다시 돌아와 봅시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내가 죽는다는 것은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제가 여러분한테 당부하고 싶은 것은 무섭고 벌벌 떨지 마세요. 무섭고 벌벌 떤다는 말은 뭐냐, 내가 뭔가 된 냥 여기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아무것도 아니면 제발 아무것도 아닌 자로 사세요. 아무것도 아닌데 왜 날 무시하느냐? 이거 앞뒤가 안 맞는, 모순된 행동 좀 보이지 마시고요. 아무것도 아니면 그냥 허허 웃을 뿐이죠.

 

애가 징징거리고 운다. 아무것도 아닌 게 징징거리고, 그러면 엄마도 아무것도 아니니까 달래주면 되죠. “이래 해가지고 니가 뭐가 되겠느냐? 이리 앉아봐라. 너는 글을 쓰고 나는 떡을 썰겠다.” 이게 말이 돼요? 엄마는 몇 년 동안 했는데. 이거 불공평한 경쟁이 아닙니까? “엄마 바꾸자. 엄마만 없으면 이런 거 할 일이 없잖아. 그 떡 내가 썰어도 되겠다. 내가 방금 배웠다. 엄마보다 떡 더 잘 썰 자신이 있다.” 한석봉이가 그렇게 안 하죠. 한석봉이가 얼마나 효심이 많은지. “어머님. 잘못했습니다. 더 노력하겠습니다.” 노력해봤자, 글씨 써봤자, 글씨 잘 썼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것도 아무것도 아닌데. “엄마 떡 잘 썰었다.” 그 떡 입에 들어가면 다 녹아버리는데. 떡은 맛만 있으면 되지, 떡 잘 썰었다고 맛있는 떡이 되는 게 아니잖아요.

 

인간 자체가 아무것도 아니에요. 근데 인간은 자꾸 위장해요. 아무것도 아닌데, 뭐 이만큼이라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게 우리 인생에서 분노를 유발하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사는데 갑자기 건드리니까,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아무것이 돼버렸어요. “이게 어디 감히 나를 건드려!” 우리에서 언제 또 개별자로 변신도 잘해. 변신도. 후딱 변신되었어요. 개별자 되었어요. “나와라! 이 적군아! 이 마귀야! 내가 이겨주마!” 지가 왜 싸워야 되는데? 개별자가 무슨 일을 한다고?

 

여기 보면,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할 때에는, 이거 해석 잘 해야 돼요. 나았다는 것은 몸 건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 받은 게 아니에요. 오래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형편 나아지고 몸 편해지고 행복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냥 나은 거예요. 그냥 나은 거. 그냥 멀쩡하게 된 거예요. 죄인이 뭐 됐어요? 그냥 의인된 거예요. 그냥. 어떤 짓거리를 해도. 파출소를 왔다 갔다 해도 의인된 거예요.

 

파출소 왔다 갔다 하는 그게 내 일이 아니고 누구 일입니까? 주의 일이에요. 참, 무책임하다. 정말 뻔뻔스럽다. 사람 패놓고 주의 일이라니. 주의 일인데 어떡해요? 사람 팼는데. 판사가 화가 나서 “사람 패면 어지간하면 집행유예나 벌금으로 하는데 니는 성질이 더러워서 징역 5년이다.”라고 하니까, “주의 일을 해주셔서 판사님 감사합니다.” 이러고 있는데요. 그야말로 말씀에 미친 거죠. 그렇게 미쳐야 돼요. “아이, 주의 일인데 좀 깎아주지.” 이러면 애초부터 자기 일이에요. 갑자기 개별자가 생각이 나는 거예요.

 

강도가 교육을 못 받아서 강도가 된 게 아니에요. 결국은 강도는 강도질해야 되고, 창기는 창녀질해야 되고, 세리는 세리질해야 되고. 그래도 그런 식으로 천국 가는 거예요. 남의 방식을 모방하거나 흉내 낼 필요는 없어요. 뭐 강도 흉내 내는 사람은 없겠지만. 교도소 생활이 얼마나 힘들겠어요? 창녀 생활하는 게 힘들어요. 돈도 안 되고, 몸은 다 망가지고, 병 생기고. 누가 하겠어요?

 

그러나 마음 문만 열면, 이것은 인생이 내 임의로 주관하고 내가 계획할 수 있는 인생이 아니고, 주님의 계획에 의해서 그냥 죽은 자에게 살아계신 분이 그냥 거기에다가 새겨 넣은 인생이라는 것을 아는 겁니다. 따라서 창기든 세리든 관계없이 나는 죽어있고 주님은 내 안에서 어떤 식으로든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것. 이것이 성령 받으면 오직 주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목적이 거기에 있어요. 내가 니를 훌륭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 증인이 되면 그걸로 게임오버다. 더 이상 우리가 아무것도 할 게 없어요.

 

그 주의 증인의 특징은 뭐냐 하면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너무 무리하게 자기 고민이라든지, 자기 걱정, 자기 방어에 나서지 마세요. 그거는 현장에서 주님을 모독하는 짓밖에, 주님의 의인됨을 모독하는 것밖에는 안됩니다. 이미 우리는 주께서 낫게 해주신 사람이기 때문에, 그 나음이 소중한 것을, 그 사랑이 얼마나, 내가 망가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 사랑만큼은 놓치지 마세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시작도 주의 일인 것을 우리가 놓쳐버렸습니다. 내 일을 시작하다가 주를 만난 것이 아니고, 뒤돌아보니 처음부터, 애초부터 주의 일인 것을 소급해서 우리가 증험되고 고백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해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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