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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3 00:34:08 조회 : 306         
몸의 여분 190712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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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림(IP:61.♡.247.43) 19-07-16 06:14 
서울의존강의20190712a 베드로전서3장 1절(몸의 여분)-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3장 1절

1절, 아내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아내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하나의 인간의 몸을 갖고 있으면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몸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몸이죠. 자기 몸이니까 자기로부터 의미가, 모든 것이 모아지는 겁니다. 내 몸이니까. 그러면 내 몸이 있는 이상은 내가 살아가는 이유 같은 것도 자기 몸 중심으로 구조가 되는 겁니다. 가정이라 하는 것은 나를 위해서 가정이 존재한다. 이러한 생각이 지극히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죠.

누구의 아내라고 한다면 갑자기 무엇을 상실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느냐 하면, 내 몸이 내 주인이라는 점이 날아가 버리고 ‘누구의 아내입니까’, 그 남편에 종속되었다는 느낌이 들죠.  어떤 입장에서, 아내라는 지위, 위치를 갖고 있으면서 ‘내가 ~에 종속되었다’라고 문장을 쓰게 되면, 이 문장의 문제점이 뭐냐 하면 ‘종속되었다’하고 ‘내가’가 어울리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종속되었으면 ‘내가’라는 말을 구태여 할 이유가 없어요. 이 문장을 이렇게 해야 돼요. ‘~에게 종속된 나’, ‘남편에게 종속된 나’라고 했을 때 이것이 아내가 되는 겁니다. 아내는 뭐가 앞에 나오면 안돼요? ‘내가’ 누구의 아내라고 말을 하면 곤란하죠? 마치 남편이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그런 생각이 든다 이 말이죠.

현대에서 누구의 아내라고 했을 때는, 내가 누구의 아내라고 말하기 싫고 내 남편이 누구라고 이야기하고 싶어해요. 자기는 어떤 경우라도 종속되었다는, 한 수 아래 있다는 의식은 우리 내부에서 용납을 안하려고 애를 쓰는 겁니다.

이러한 생각이 성경적으로 옳은가 그른가는 아예 안따져 보는데 베드로전서 3장에서는 현대인들의 이러한 사고방식에 대해서 전혀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냥 “아내된 자들아” 이렇게 시작해요. ‘독립할 생각하지 말아라’ 그런 뜻이죠. ‘아내된 자들아. 너희들은 너희들의 몸이 있더라도 독자적으로 나를 위한 몸은 아니고 가정이라는 조직에 필요한 몸으로 네가 거기에 살고 있다. 이 점을 놓치면 안된다.’ 그런 뜻입니다. 베드로전서에서는 네 몸보다도 뭐가 더 중요하다는 거예요? 가정이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너는 너를 위한 몸이 아니고 가족 속에 있을 때 비로소 너는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아내된 자들아” 이렇게 하는 겁니다.

현대인들이 베드로전서 3장을 보면서도 상당히 기분이 별로 안 좋죠. 독자적인 자기의 존재가치를 애초부터 인정하지 않으니까 그 뒤에 아무리 좋은 이야기해도 별로 달갑지 않은 겁니다. 예를 들면 1절 끝에 보면 “자기 남편의 말로 말미암지 않고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이렇게 되어 있죠. 구원을 얻게 한다는 것은 아내로 인하여 남편이 구원을 얻으면 아내된 자로서 기분이 좋지 아니하냐, 기쁘지 아니하냐라는 조로 기분 좋으라고 이 말씀하신 게 아니에요.

천당가면 되지 꼴 보기 싫은 거 같이 가서 여기서도 살기 싫은데 천당가도 같이 만나야 되나 해가지고... 남편이 구원 받든 말든 나만 구원 받으면 되지 왜 남편 구원까지 신경을 써야되냐 이 말이죠. 왜냐하면 나는 남편에게 매인 몸이 아니고 종속된 몸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나고 니는 니다 이 말이죠. 그런데 베드로전서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내가 초반에 이야기 했죠? 아내라는 그 몸은 독자적인 몸의 의미를 가질 권한이 없다는 말이죠.

이 베드로전서 성경 말씀을 볼 때에 현대인들이 보기에 상당히 거북스러운 거예요. 3장 1절 , “아내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순복하라” 되어 있어요. 여기 네거리에 보면 열녀비 하나 있거든요. 옛날에 열녀비를 왜 세워놨겠습니까? 아내는 절대로 독자적으로 튀면 안된다는 것을 그 사회가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여자로 태어났으면 반드시 결혼해야 되고 결혼했으면 반드시 열녀가 네 삶의 표준이 되어야 된다. 열녀냐를 가지고 여성의 가치를 측정하는 사회, 그런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라고 해가지고 열녀비를 세운 겁니다.

열녀 중에서도 이런 열녀가 있을 거예요. 카메라 위치를 잘 잡아놓고 2살 아이하고 구석에 딱 앉아가지고 남편이 때릴 때 다 찍히도록 하는 열녀, 남편 팔뚝의 문신까지 다 찍혀 나오도록 하는 열녀. 베트남 열녀. 열녀났다 열녀났어, 베트남 열녀. 남편 하나 구원시키겠다고 지는 얻어맞는 열녀... 남편 구원 때문에 자기가 카메라 찍고 했겠습니까? 얻어맞았으면 왜 고소 안하고 왜 신고 안했는지, 그 전부터 그렇게 했으면. 무슨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어떠한 자기 노림수의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여러 가지가 예상될 수 있죠?

그 모든 것이 뭐냐 하면 아내라는 자체를 ‘아내다운 나’가 아니라 ‘내가 한번 아내 해볼까? 아님 말고’ 아내라는 자리를 위해서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간단히 말해서 사랑이라는 것은 일단 나부터 사랑하고 남는 여력으로 남 사랑해요. 모든 인간이 다 그렇거든요. 지부터 챙겨야지 지 손해 보면서 남 사랑할 거 어딨어요.

구원 받는다 그러면 일단 나부터 구원시키고 남는 시간 있으면 남편 구원시켜볼까 이거거든요. 중요한 것은 나는 어디에 소속되거나 어느 구조의 일부가 되기를 내가 거부하는 거예요, 모든 인간의 몸은. 그래서 여기 베드로전서 3장에 나오는 이 “아내된 자들아”하는 것은 일반적인 인간의 몸이 아니에요. 베드로전서 1장에 나오듯이 성령받은 사람들에게만 이해가 되고 무슨 뜻인지 수긍이 되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특히 3장 1절에 보면 “남편에게 순복하라” 하는데 순복이라는 말이 오랜만에 듣지 않습니까? 누구 개 이름인 것 같기도 하고. 옛날 촌이야 딸이 순복하면 밥이나 먹고 산다고 애 이름을 순복이라고 지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은, 순하게 복종하라고. 지금은 아내가 남편에게 순복해가지고 집안 꼴이 되겠습니까? 남편이 기고만장하게 설쳐가지고 잘된게 뭐가 있어요? 아내가 단도리 잘해줘서 그나마도 자식하고 밥먹고 살지, 남편 지 혼자 돌아다니면 맨날 나가서 논다, 등산 간다고 해서 자기가 돈 벌었다고 혼자 다 써버리고 나중에 실패하면 아내한테 기어 붙어가지고 살려줘 하고 달려오고...남자나 여자나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모든 기력은 내 사랑에 다 몰입시키고 혹시 남는 거 있으면 그 다음에 남 사랑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내가 남편에게 순복할 때는 여기서는 그냥 순복이지만 오늘날 사람들에게는 순복할 때도 순복하는 이유가 있어요. 네가 나한테 순복할만한 짓거리를 하게 되면 순복하지 말라고 해도 내가 너한테 재롱부리고 뿌잉뿌잉하든지 할 용의가 있지만 네 하는 행세, 꼬라지가 영 마음에 안든다 하면 재롱이고 뭐고 각방 쓴다, 넌 끝났어, 나 너 용서하지 않아, 내가 너 같은 남자 만나가지고 내 인생 조질 이유가 없어. 내 인생 뜻대로 될 조건 하에 너는 내 남편이고 안그러면 우리는 언제든지 갈라설 준비를 하자. 이런 식으로. 그러한 사고방식에서는 순복이라는 것이 무슨 이야기이죠? 거기에 순복이 왜 튀어나옵니까?

순복이라는 것은 나는 누구에 종속될 존재, 이럴 경우에만 순복이라는 말이 의미가 있지, 모든 것은 우선 나부터 챙기기, 그런데 거기에 무슨 순복이라는 것이 같이 결합이 될 수 있는 뜻이겠어요? 안되죠. 그리고 순복하는 것도요, 같이 신앙생활 잘하고 아내가 보기에 존경할 만한 어떤 요소가 있으면 순복하죠. 현대인들에게 진짜 이상적인 남편감이란 뭐냐하면 아내가 보기에 날마다 새로운 존경할 것이 새록새록 나오는 사람, 가장 이상적이죠. 존경스러운 게 나온다는 말은 ‘나는 그대 앞에 서면 왜 이리 작아지는지’ 그거거든요. 내가 못하는 걸 다하는 거예요. 형광등도 어디 고장났나, 착착착 뭐 다 고쳐. 못하는 게 없어요. 개똥 다 갈아주고.

그러니까 현대 여자에게 가장 좋은 남자라고 하는 것은 말하기 전에 아내가 뭘 원하는지 미리 캐치해가지고 두 말 안하더라도 착착착착 내 속을 훤히 꿰뚫어서 미리 딱 해놓으면 저녁에 콩나물밥이고 뭐고 원하는 거 내가 다 해줄게, 순복하지 말라고 해도 내가 알아서 순복할게. 존경스러운데 뭘 못해, 존경스러운데. 내 눈치 착착 챙기고 해야 하는데 이거는 남편이라는 게 눈치가 있나 코치가 있나, 대화가 되나. 복음이야기 하면 절이야기 해버리고...안되잖아요, 이게?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이 말은 뭐냐 하면 말빨 세운다고 남편이 감동받아서 예수 믿는 게 아니고,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야, 네 행위 보니까 나도 예수 믿어야겠다’ 그런 태도를 아내 쪽에서 가져야 된다는 그런 이야기거든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내 구원도 바쁜데 남편 구원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어요. 남편 구원 신경 쓰다가 내 구원에 소홀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안되죠.                      
                
그래서 여기서 우리가 첫 번째 알아야 될 것이 뭐냐 하면, 여기 성경에 나오는 아내의 특징은 이렇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여유’. 같은 말은 ‘심리적인 안정성’. 여유와 안정성. 남편되는 당신이 아내되는 나에게 이렇게 해주면 당신에게 해주겠다는 것은 아직도 이건 결핍이에요. 미비해요. 당신이 어떻게 하든 상관없이 나는 내 아내된 도리를 다하겠다. 왜? 나는 이 집안의 구조상 독자적인 것이 아니고 당신한테 아내라는 연결망으로 얽혀있기 때문에 내 포지션의 역할은 다 해주겠다.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남자인지 그런 것에 나는 신경쓰지 않고. 이게 뭐냐 하면 안정성, 여유잖아요.

그러면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어떻게 구원했습니까? 조건보고 구원했습니까? ‘똑바로 하면 구원해주고, 천당가고 안 그러면 지옥간다’ 그렇게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드로전서에서 제시한 것은 한글로 딱 한 자에요, 뭐겠어요? 뭐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 또는 거룩하게 된다, 씻음 받는다. 뭐였습니까, 딱 한 글자로? 빨간 건데. 예수님의 피로! 베드로전서 1장에 나오잖아요. 1장 2절,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피로 말미암아 모든 죄를 씻어서 영생을 얻었지 않습니까? 아니에요?

이런 게 참 오늘 강의 어렵게 하려면 정말 어렵게 되요. 어렵게 하면 이렇습니다. ‘몸으로 표현될 수 있는 복음의 실제성’, 몸으로 표현될 수 있는. 복음이라는 것이 허황된 거예요. 손에 안 잡혀요. 그러면 주님께서 ‘나는 복음을 전하러 왔다’ 하면, 사람들이 ‘뭐 내놔봐, 복음이 어딨는데? 어디에 감춰뒀는데? 어느 동굴에 복음있어? 내가 찾으러 갈게’ 이렇게 할 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내 몸에서 흐르는 피, 내 몸에서 나오는 그 살점.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영생이 없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복음이라는 것은 허황된 것이 아니고 이것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고, 어느 특정 몸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그 사건과 결과들. 이게 상당히 구체적이지 않습니까, 복음이라는 게.

복음이라는 것이 몸이 존재함으로써 구체화되는 거예요. 몸+복음=구체성, 구체화. 몸에 복음이 결합되게 되면 나오는 것이 여유와 안정성이에요. 그렇다면 여성의 몸이라는 것은 내가 지정한 몸이 아니고 가정이라는 곳에 어떤 포지션, 위치가 있는 거예요. 내가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의 가정’이라는 포지션을 위해서 이 여성이 있으면 이것은 남편에게 종속된 게 아니고 누구한테 종속된 거예요? 가정이라는 몸으로 표현되어야 될 복음의 실제성에 여성이 종속되는 겁니다. 복음에 종속된다니까요, 복음에. 남편에게 종속되는 것이 아니고. 남편에게 순복하는 것이 아니고 복음에 순복하는 거예요. 남편 볼 거 뭐있다고 순복해요. 자기는 지 좋다고 바깥에 돌아다니는데. 그러니까 복음에 순복하는 거예요.

자, 여기서 가정이 갖는 특수한 구조에 대해서 성경 한 구절 찾아봅시다. 여호수아 7장 24절,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사람과 더불어 세라의 아들 아간을 잡고 그 은과 그 외투와 그 금덩이와 그의 아들들과 그의 딸들과 그의 소들과 그의 나귀들과 그의 양들과 그의 장막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고 아골 골짜기로 가서” 이렇게 되어 있죠. 자, 우리가 여호수아, 아간을 보면서 하나님의 물건을 훔친 사람, 아간이죠.

그러면 우리는 아간 혼자 잡아다가 죽이면 그만이라 생각하죠. 그러나 하나님께서 뽑고 뽑고 계속 뽑는 가운데서 최종적으로 유다지파에서 계속 선택하고 또 선택했는데 그 선택이 17절에 나오죠. 여호수아 7장 17절, “유다 족속을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세라 족속이 뽑혔고 세라 족속의 각 남자를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삽디가 뽑혔고” 이스라엘에서 제일 큰 지파, 유다지파가 뽑혔고 그 다음에 유다지파 중에서도 세다 족속이 뽑혔고 세다 족속에서 삽디가 뽑혔고 18절, “삽디의 가족 각 남자를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이요 삽디의 손자요 갈미의 아들인 아간이 뽑혔더라” 아간이 뽑혔으니까 아간만  죽이면 된다 생각하겠죠. 그러나 아까 24절에 보니까 그의 아들들과 딸들도 죽죠. 가족이 죽는 거예요. 그래서 이 말은 뭐냐 하면 구원의 최소단위가 가족 단위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개인이라는 것은 없고 네 가정에서 구원의 포지션을 제대로 수행했는가를 우리에게 묻는 거예요. 우리의 위치의 구원이지, 내 구원이 아니고 내가 속해있는 위치 구원이라고요. 어떤 인간이든 가족 없이는 태어난 사람이 없죠. 흔히 교회 안 믿는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눈에 보이는 아버지나 제사지내지 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섬기냐고 하잖아요. 그들도 무슨 중심입니까? ‘니 아버지, 어머니 없으면 너 없잖아. 그러면 아버지께 효도해야지 왜 하나님 섬기느냐, 아버지께 효도 안하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아버지 효도하는 것하고 하나님 섬기는 것하고 이게 충돌되는 겁니까, 같은 겁니까? 하나님께서는 같이 보는 거예요. 문제는 효도가 뭐냐, 효도의 질이 뭐냐 그게 문제되는 거예요. 아버지 술 드시는데 술값 드리는 게 효도냐 이 말이죠. 안 그러면 아버지보고 ‘지옥갑니다’ 이야기 하는 게 효도냐, 어느 쪽이 효도겠어요? ‘아버지, 그리 살면 개같이 사는 겁니다.’ 이게 효도입니까, 아버지 헝가리 여행 보내가지고 물에 빠져 죽게 하는 게 효도입니까, 어느 쪽이 효도에요? 아버지가 원하는 걸 해 주는게 효도입니까? 그것은 효도가 아니고 아버지 개인적인 욕심을 한 패되어서 같이 들어주는 거예요. 아버지의 욕심에 대해서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주 안에서 부모를 섬기는 게 아니죠, 주 밖에서 섬기는 겁니다, 주 밖에서.

주 밖에서 섬기는 것과 주 안에서 섬기는 게 다르죠. 주 밖에서 섬기면 나는 아버지의 이름을 위해 존재하지만 주 안에 들어오면 주의 이름을 위해서 존재하는 내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주의 이름을 위해 존재한다고 해서 나혼자 천당가는 것을 노리라는 말이 아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주님을 위해서 살지만 내게 준 하나님의 위치, 포지션은 뭐냐. 누구의 아들 포지션, 누구의 아내 포지션, 누구의 남편 포지션을 줬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 위치는 나 하나 즐거우라고 준 게 아니고 바로 복음이라는 것이 구체화되는 몸을 통해서 이 몸은 복음을 구체화시키는 데에 필요한 사회적 최소단위에 나를 위치시킨 거예요.

논산 훈련소 마치고 난 뒤에 군인들이 제대하는 게 아니고 자대에 간다고 하죠. 훈련소는 어디까지나 훈련이고 훈련받은 것을 써먹어야 되지 않습니까. 국토를 지키기 위해서 필요한 요새에 자리잡고 있는 그 부대를 자기부대, 자대라고 해요. 군 생활을 마무리 지을 거기에 가서 군 생활을 하는 겁니다. 군에 있다는 말은 본인의사와 관계없이 함부로 집에 오고 외출하는 게 안돼요. 그 조직에 매여 살아야 되요, 힘들지만.

부대에 끌려가는데 부대에 있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힘들지만 다 군대에 가는 겁니다, 유승준 빼놓고. 유승준은 미국가서 내가 군에 가기 위해서 반드시 오겠습니다 서약서 쓰고 간 사람이에요. 내 진짜 안 오면 개입니다 할 정도로 가면 옵니다 해놓고는 가서 안 오잖아요. 내가 비겁하게 군에 빠질 그런 남자 아닙니다 해놓고. 이제 군에 가고 싶은데 40살 넘어서 군에 못가게 됐어요. 얼마나 군에 가고 싶겠어요. 그게 뭐냐면 한국이 주는 포지션이 없어요, 그 사람은. 위치가 없어요, 자기 몸은 있어요.

몸은 있는데 그 위치가 없으면 그것은 구원의 구조에 의하면 마찬가지에요. 몸은 있는데 구원을 보여주려고 하는 장소가 없어버리면 그것은 구원에 대해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나만 천당가면 되지 이런 식이 돼요. 얽히고 설킨 게 있어야 되는데... 예수 믿는다고 해서 기도원에 가서 혼자 도 닦는다고 혼자 천당 갈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직장 같으면 내가 알아서 빠질 수도 있고 들어갈 수도 있는데 가족이라 하는 것은 그게 아니라니까요. 부모 없이는 못 태어났잖아요. 태어나보니까 부모란 분이 내 눈앞에 보이더란 말이죠. 그리고 부모는 내가 너를 낳았다고 이야기하고. 그런 줄 알았더니만 그다음에 보니 나를 낳은 게 아니라 길러줬고, 낳은 엄마는 돈보고 뒤늦게 와가지고 내 니 낳았다 해가지고 니 아프면 생명보험 내가 탄다 이런 식으로 나오죠.

혼자서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고 이미 있는 육이라는 토대 위에서 나왔기 때문에, 구원은 육에서의 영이죠. 육이 없으면 영이 나올 수 없습니다. 육이 있고 난 뒤에 영이 나오는 겁니다. 예수님 같은 경우에는, 몸+α에요. 이 몸은 분명히 마리아의 몸에서 나왔지만 성령으로 만들어진 몸이기 때문에 +α, 여분의 몸을 통해서 천국의 여분의 것이 여기서 방출되고 발산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도라 하는 것은 뭘 받았습니까, 성령 받았죠? 따라서 성도가 하는 이 몸에서 성령이 하시는 일이 거기서 필연적으로 나와야 되는 겁니다. 성령이 하는 일이라는 것은 말씀에 관한 일, 또는 말씀과 엮여졌다는 그러한 관계가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아까 아간만 처벌받은 게 아니고 아간의 가족이 처벌 받죠? 아버지 아간의 잘못으로 그 가족이 다 처벌 받잖아요. 이 가정이라는 것은 가장한테 종속되는 거예요. 자, 그런데 여기서 여러분께 한 번 질문해 볼게요. 아간의 몸이 돌무더기에 쌓여서 처벌 받았죠. 그러면 아간의 몸에서 보여줄 수 있는 복음적 요소, 영적 요소가 뭡니까? 처벌받음이죠, 처벌받음 아닙니까? 그렇죠?

그러면 아간은 자기 아버지한테 매인 것이 다에요, 아니면 하나님의 율법 아래 매인 것이 진정한 아간의 위치입니까? 율법 아래 매인 것이 진정한 위치죠. 아버지 같으면 자기 아들이 그랬다 해도 ‘내 아들 왜? 내 아들이 좀 욕심냈다 그래. 갚아줄게. 외투 가져가. 됐지? 내 자식이 누가 뭐래도 제일 귀하다.’ 이렇게 나오면 할 말 없잖아요. 아무리 아들이 나쁜 짓해서 이웃에게 해악을 끼쳐도 춥다고 나중에 솜내복 사가지고 유치장에 넣어줄 사람이 누굽니까? 엄마죠. 엄마가 ‘아들아, 누가 뭐라고 해도 내 아들은 귀하다. 누가 아무리 욕해도 나는 너를 믿는다.’ 뭘 믿는데? 그걸 약간 더 길게 이야기하면 ‘네가 언젠가는 개과천선할 줄 믿는다, 아니 개과천선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너는 천성적으로 착해, 난 이걸 믿는다.’ 그렇게 착한 자식이 술먹고 나쁜 짓해요?

부모가 자식을 얼마나 일방적으로 영적 요소를 빼버리고 육적 요소만 했으면, 자식이 술을 먹어도 그걸 방치한 거예요, 어릴 때부터 술 먹어도. ‘아이고 내 아들 술 먹는다’ 그걸 자랑스럽게 여겨요. ‘드디어 남자 됐다, 남자. 남자는 술 먹어야 큰일한다’ 큰일하지. 강지환도 성폭행했다고 뉴스에 크게 나왔잖아요. 모두 술 먹고 하는 짓이잖아요. 여자 패는 것도 술먹고 하는 짓이잖아요.

부모가 왜 안 말립니까. 자식이 하는 일은 무슨 일을 해도 다 이뻐. 왜? 그게 부모의 포지션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영적인 요소가 없어요, 구원의 요소도 없고. 무슨 요소 입니까? 육적인 요소에요. 결국 믿는 사람에게 구원의 가정의 포지션을 가졌다는 것은 영과 육이 싸우라 이 말이에요. 싸울 때 몽둥이 들고 싸우고 야구 방망이 들고 싸우는 게 아니고 여유와 안정성을 가지고 싸우는 거예요. 여유와 안정성. 차분함. 호들갑떨지 않는 것. ‘아이고, 어짤꼬’ 이러지 않는 것. 긴장되지 않는 마음자세. 흔들림이 없는 것. ‘뭐 죽으면 그만이지’ 이런 것. 죽으면 천국이지 뭐. 이런 자신감.

그걸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하도 믿음이라는 말이 왜곡되기 때문에 믿음이라고 말하기가 겁이 나요. 믿음을 가져야 된다고 하니까 또 지 혼자 천당간다고 설치는 게 믿음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좋은 말인데도 요새는 쓰기가 뭐해요. 그 대신 자신감, 안정감, 담대함 이런 식으로 다른 걸로 해야 되요. 요동치 않는 흔들림이 없음. ‘집에 불났어? 그럼 다 탔겠네’ 이런 거. 세상에 미련과 집착하지 않는 것. 이 땅에서 죽었고 우리 생명은 하늘나라에 있다는 걸 늘 체험하면서 살아가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 남편이라는 것은 뭐냐? 그것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주 하나님께서 허락한 아내라는 위치가 제대로 영적으로 아내다운 모습을, 복음도 모르는 사람 앞에서 대비하면서 충분하게 보여줘라. 이게 베드로전서 3장에서 아내된 자에게 말하는 이야기에요.

제가 처음에 베드로전서 3장 강의하면서 오늘날의 아내에 대해서 언급했지요? 여기서 기억을 다시 새롭게 한다면, 나는 누구의 아내가 아니라 남편의 아내가 바로 나다. 그래야 종속의 의미가 살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만약에 누구의 아내라고 내 중심으로 세워버리면 남편이 만약에 제대로 남편값을 할 경우에만 아내할 용의가 있다가 되어버려요. 그러면 그 포지션, 위치는 누가 정해요? 내가 정한 거잖아요. 내가 정하고 싶고. 왜? 영적인 사람이 아닌 사람들은 사랑을 나부터 먼저 사랑하고 남아도는 사랑, 기력이 있으면 남한테 주는 거거든요, 인간의 본성상.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신 거예요. 예수님께서 자기 챙기고 남아도는 찌꺼기를 구원하라고 준 게 아니고 예수님께 가장 귀한 게 뭐냐면 예수님의 살과 피잖아요. 그걸 우리에게 허락하신 거예요. 주님께서는 그 말씀을 얼마나 친절하게 해주시냐면 컵에다 포도주를 담아놓고 “이것이 너희들 보기에 포도주로 보이냐?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피다. 이 피를 마시라.”고 한 거예요. “네가 방금 마신 게 내 피야.” 이게 무슨 뜻이에요? 피라고 하는 것은 너는 나 없이는 영생없다는 뜻이거든요.

왜 그런 말씀을 하셨냐 하면, 12제자들은, 오늘날 우리들은 공통적으로 나부터 챙기는 거예요. 내가 우선이에요, 내가. 이 세상은 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몸을 줬는데 생각하는 것은 나보다 귀한 게 없다고 하니까 주님께서는 나보다 귀한 것은 없다는 그런 정신이 몸에 붙어있는 것을 강제적으로 찢어야 되지요. 찢어서 ‘예수님의 생명보다 귀한 건 없다’로 이동시키는 그 작업을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서 하시는 거예요.

육이 없으면 영이 없다고 아까 얘기했으니까 그건 말씀 안 드리고... 육이 있어요. 세상은 육입니다. 그냥 살면 똑같이 모방하고 그렇고 그런 흉내내는 거예요. 그러면 말씀을 왜 줬냐하면 말씀 세계가 따로 있어요. 말씀 세계가 따로 있는데 육에서 그냥 못나오고 찢어져야 되요. 찢어진 틈에서 몸은 몸인데 말씀의 세계에 속한 몸으로 벗어나는 안목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야 된다. 그러면 주께서, 영적인 분이 주신 너의 위치와 입장을 거기서 네가 알게 될 것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일상생활을 할 때, 시장에 가서 누구를 만나거나 할 때, 길에서 동네에서 아는 아줌마를 만나든지 누구를 만났을 때 이것을 그대로 적용시켜 보세요. ‘아이고, 철희네 엄마’하고 수다 떨려고 준비하고 있다면 이쪽의 영적인 사람은 ‘주께서 저 아주머니를 왜 만나게 하셨지?’ 주께서. 보세요, 생각으로. 같은 육인데 찢어져서 벌써 그걸 탈출했잖아요. 탈출한 입장에서 주님의 안목으로 ‘저 분을 왜 만나게 하셨지?’라고 보게 하는 거예요.

이론상 어렵지 않은데 실제로서는 같이 저 사람과 같이 육이 되어가지고 열내서 얘기하는 거예요. 일본 때려 죽여야 돼, 일본여행도 가지 말고. 같이 열불 낸다 이 말이죠. 가만히 얘기하다보면 안 찢어졌어. 그 육이 그 육이라. 한통속이 되어버렸어요. 일본 아주 심각하고 어떻게 해. 한다 이 말이죠.

또 한가지 예를 들면 함부르크 팀에 있다가 영국의 토트넘으로 간 선수가 있어요. 손흥민이라는 선수가 있거든요. 손흥민 선수의 팬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영적일까요 육적일까요? 그 사람들의 모든 관심사가 자기가 원하는 토트넘 축구가 우승하는 것에 다 쏠려있겠지요, 하루 일과가. 그들의 모든 관심사는 내가 응원하는 팀 오늘 이겼나 졌나 그것뿐이죠. 아침에 나오면 축구공차기 바쁘죠. 아침에 나와서 기도하고 성경보는 것 원하지 않아요. 그런 사람 많거든요. 아버지, 엄마는 교회 다니는데 아들은 교회 가라고 하면 힘들다고 해놓고 아침에 보면 일요일마다 축구하러 가는 거예요.

그게 뭡니까? 그게 육이죠. 육에서 찢어지지 않고 영의 세계로 못온 거예요. 그러면 복음적인 부모의 안목으로 보면, 저 아들과 나는 영원히 결별해야 됩니다. 하지만 부모로서 그 아들과 함께 지내고 있는 그 포지션은 뭐냐는 그 일은 여전히 남아 있는 거예요. ‘그래, 지옥 잘 가라’ 그러니까 자식이 교회 안다녀도 ‘뭐 알아서 하겠지. 이근호 목사님 말씀 들으면 하나님이 선택하지 않으면 구원 안 받는다고 하는데 뭐 내가 선택하나. 하나님이 선택하는데 하나님 책임이지 내 책임이야?’ 이렇게 하거든요.

말은 이론적으로 맞는데 감정적으로는 뭐냐 하면, 자기자식이 지옥가고 저주받게 되면 ‘잘 갔다 잘 갔어, 내 말 안듣더니 잘 갔어’. 과연 그 정도로 초연할 자신이 있어요? 어디 아프다는 소리 들으면 보약해서 어디 아프냐고 하는데. 아픈 건 저주 아닙니까? 이 땅에 사는 것 자체가 징벌 아닙니까. 사는 것 자체가 저주거든요. 그런데 육적인 자식은 저주받고 있으면서 저주받는 이유도 모르고 그 저주가 어디서 날아온지도 모르는 거예요. 하나님의 안목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죠. ‘이론상 말은 맞는데 내가 한다고 됩니까?’ 그러거든요. 그런 얘기를 할 때마다 본인이 이 영적 구조의 주인공이라고 여기는 거예요. 자식 구원하라는 실적 올리라는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제가. 그 위치, 영적인 위치를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가를 보라는 것이지, 내가 말한다고 듣습니까? 내가 말한 것 들어서 구원받은 자식은 이 세상에 단 한명도 없어요. 왜? 성령이 임해서 하기 때문에. 이 말은 부모가 자식을 구원하는 게 아닙니다. 부모는 부모 노릇을 하면 되요, 부모 노릇을 하면 된다고요. 자기 위치, 주님께 종속된 위치를 감당하면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감당한다는 것이, 내가 말 잘 했더니 교회 나왔다고 꼬시는 실적을 올리는 게 아니에요. 현재 자식은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늘 생각하는 거예요. 현재 자식은 어떤 위치에 있는가. 지옥에 떨어지는 넓은 길로 가면서, 그렇게 술담배 하지 말라고 했는데 술담배 하면서, 넓은 길로 가게 되면 우리가 아는 마태복음 7장의 말씀에 보면 구원의 길입니까, 멸망의 길입니까? 찾는 사람이 많은 넓은 길은 멸망의 길이죠. 그러면 엄마의 위치는 뭡니까?

마태복음 7장에 나오는 말씀이 여기에 장착되어 있어야 된다는 말이죠. ‘엄마, 이번에 백점 맞았어’, ‘엄마, 이번에 사업 성공했어’ 할 때, ‘사업 성공하면 뭐하겠노, 멸망할 걸’. ‘그래 우리 아들 최고다’ 같이 좋아한다면 이건 같이 육적인 거예요. ‘그래, 주께서 돈 좀 벌게 해준 모양이구나. 그러면 뭐하겠노. 너는 지옥 가는데 그냥 가지 말고 부자되서 지옥가라는 뜻이구나’ 그렇게 이해할 때, ‘엄마는 왜 나 돈버는데 안 좋아해?’ ‘내가 평소에 너 돈버는 것을 원했던가?’ 이렇게 진지하게 얘기하는 그런 부모-자식 간의 관계입니까? 그런 영적인 안목을 가지고 봅니까? 내 자식 최고되어야 되고 부자 되어야 되고 돈 벌어야 되고 자랑거리 되어야 되고. 자식걱정하기는커녕 자기도 자식 못지않게 육적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새끼기 때문에 피해자는 관계없고 내 새끼가 누구 패고 와도 피해자는 신경 안쓰고 네가 안맞으면, 때렸으면 잘됐다. 자기 자식 싸고도는 육적인 본성, 그게 전부 아니에요?

그러니까 오늘 베드로전서 3장에서 “아내된 자들아” 이 말은 아내라는 포지션, 위치는 네가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것에 아내가 있다면 이것은 뭘 의미하느냐 하면 가정구원이라는 구원의 최소단위가 성사되는 거예요. 어차피 구원받은 사람은 전부다 한 가족이에요, 남이라도. 남이라도 한 가족이거든요. 그러나 그 가족이 부상, 떠오르기 위해서는 우리의 몸에서 +α가 나와야 되요, 여분의 것이 나와야 된다고. 몸에서 흔한 세상적인 행위가 나와 버리면, +α가 안나오고 영적요소가 안나와버리면, 저게 진짜  신자 맞는지 의심해봐야 됩니다.

육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육적인 벽이 있으면 거기에 부딪치게 되어 있어요. 여기에 절망하게 되고 실망하고 울고불고 난리입니다. 그런데 육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영이 함께 있는 사람은 이 벽을 뚫고 그 다음 세계의 안목을 가지고 이 벽을 바라보게 되죠. 나에게 벽이 있다는 것은 내가 육적인 사람이 아니었구나를 알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점검차원에서 주신 벽이에요. ‘충분히 실망하고 낙담하고 좌절할 만도 한데 그다지 심각하게 여겨지지 않네요.’ 하는 것은 자기 생각이 아니고 성령의 생각입니다. 그게 자유거든요.

이 벽이 오기 전까지는 영적 사람이라도 조마조마하죠. 감당할 수 있겠나. 이런 일이 터져버리면 나 어떻게 살지, 어떻게 살아. 나 이제 죽을 거 같아. 자살할 거 같아. 더 이상 살 힘이 없는데. 그런데 성령이 함께 했을 때는 네가 육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나는 못산다, 자살한다, 더는 세상 살 힘이 없다는 것이 영의 깨달음을 주고 보니까 ‘그것도 별일 아닌 걸 가지고 괜히 호들갑을 떨었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되요, 세상이라는 것이. 주님의 안목으로 볼 때에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닌 거예요.

오늘 본문 성경말씀 3장 6절 봅시다.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그의 딸이 되었다고요?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로 칭함으로써 그의 딸이 되었다는 거예요. 왜 딸이 나와요, 부인 아닌가요? 사라는 아브라함의 부인으로 알고 있는데 갑자기 그의 딸이 되었다 이 말이죠. 그것도 순복함으로, 복종함으로.

구원이라는 것을 다시 할게요. 인간의 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양상을 보이길 원합니다. 그게 몸의 기능이에요. 그냥 내 몸 하나 천당 가는 게 아니고 몸을 통해서 영적인 기능이 발산될 때 이미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인데 그 때 그 사람은 나 혼자 천당 가는 게 아니고 구원이라는 조직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한다. 여기까지 얘기했잖아요, 그쵸? 하나님이 부여한 위치에요.

그런데 아내한테는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해서 구원의 구조에 기여하는 셈이 되고, 드러난 셈이 되고 남편은 이렇게 해서 드러나는데, 주로 3장 1절부터 6절까지는 아내에 대해서 이야기 한 거고, 7절부터는 남편이 아내에 대해서 어떤 포지션을 해야 되는가에 대한 거예요. 베드로전서 3장 7절,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무슨 그릇입니까? 연약한 그릇이에요, 연약한.

그러니까 아내는 아까 여유와 안정감이죠. 그 여유와 안정감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내가 품에 안겨도 그걸 받아줄 수 있는 더 여유로운 어떤 사람에 의해서 누구의 아내로서 그 여유로움 속에서 그 여유로움을 그 아내가 누린다면 그걸 누가 제공해야 되는가? 남편 쪽에서 더 여유로움을 제공해야 된다. 그 관계가 바로 몸으로써 표현할 수 있는 구원의 모습이다, 실제성이다 이 말입니다.

10분 쉽시다.
 이하림(IP:61.♡.247.43) 19-07-16 06:15 
서울의존강의20190712b 베드로전서3장 1절(몸의 여분)-이 근호 목사

몸이라는 것이 있고 몸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위치를 받는다고 했는데 그러면 이 몸이 몸의 기능과 맡겨진 것을 제대로 안했을 때는 이 몸을 어디 갖다 버려야 되요. 이 몸이 제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 몸을 갖다 버리는 그 작업 자체를 통해서 진정 몸은, 우리는 왜 있어야 되는가 이유가 밝혀지는 겁니다. 아무 소용없이 그냥 몸을 덜렁 줄 일은 없지 않습니까? 몸의 주인은 하나님이거든요. 그냥 네 쾌락이나 즐기라고 몸을 주지는 않았을 거라 이 말이죠.

우리가 과학적으로 보면 몸이에요. 세포가 60조개고 뭐 있는데 지금 과학적으로 봐서는 뭐가 안 나오느냐 하면 몸에서 나오는 +α, 이게 뭔지가 안 밝혀지는 거예요. 몸을 왜 주셨는가 이유가 안 나타난다고요. 몸이 그냥 60조개 같으면 우리는 칼 가지고 죽이면 되요. 어차피 흙이 될 거 내가 일찍 없애주면 되잖아요. 일찍 없애서 제주도에 던지던지, 오며가며 물고기 밥되라고 전부다 비닐봉지에 해서 다 던지면 되요. 실제로 러시아 공산주의 이론에 의하면 인간의 몸은 기계이기 때문에 한 1500만 죽여도 괜찮다는 거예요, 기계인데 뭐. 노동력만 빼내면 기계라니까요. 쓸모없는 노인네들 죽여 버리고 병든 거 다 죽여 버리고. 중요한 건 국가 발전에 도움되는 생산력만 빼내면 되니까요.

그게 유물론이에요. 인간은 물질이다, 끝. 이게 공산주의적인 사고방식에 국한될까요, 오늘날 한국에 있는 초등학교나 교육과정에 그게 있을까요? 한국의 모든 교육과정이 유물론 아닙니까? 학교서도 기독교 이런 영적인 것 못 가르치게 하잖아요. 창조론 이런 건 미쳤다고 못 가르치게 하잖아요. 진화론이 뭡니까? 인간은 물질에서 나왔다는 게 진화론이잖아요. 암모니아의 죽 같은 형식에서 나왔다. 진화론에서 생명출현의 가설을 그런 식으로 세웠거든요. 그들은 가설이라고 하지 않아요. 그들은 그걸 진실이라고 보는 겁니다.

우주는 102~109개 근본 원소로 되어 있는 거예요. 원소로 되어 있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인간은 물질에서 나왔던 우연적인 조립이거든요. 우연적인 조립인데 그 우연에 긴 시간만 투자하게 되면 언제든지 거기서 진화라는 매커니즘이 작용해서 생명체가 나온다는 거예요. 학교에서 다 그렇게 가르치잖아요. 아이들이 공룡 좋아하잖아요. 자연사 박물관 가보세요. 전부다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처음에는 꼬부라져서 걷다가 나중에는 펴서 걷게 되었다고. 오스트랄로 피테쿠스부터 시작해가지고 나오잖아요.

영적인 요소를 빼버리니까 남는 것이 유물론인 거예요, 유물론. 유물론의 특징은 뭐냐 하면 나는 단독적인, 독자적인 하나의 개체이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것은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겁니다. 술, 먹고 안 먹고는 내가 결정한다는 거예요. 담배, 내가 결정한다는 거예요, 애들. 나 기분 좋으면 피우고 기분 좋으면 마신다는 거예요. 내 몸이 받고 내 몸이 좋다는데 부모님이 왜 간섭하고 기성회에서 왜 반대하느냐. 술 먹으면 사람이 개 되서 그런다 하면 내가 알아서 할게, 개 안되도록. 이러거든요.
                   
사람 죽이려고 음주운전하는 사람 없습니다. 술 먹다 보니까 정신 없어가지고 브레이크 밟아야 되는데 엑셀 밟아가지고 사람 죽이잖아요. 술을 왜 먹습니까? 기분 좋으라고 먹습니다. 누구 좋으라고? 내가 좋으라고. 인생 뭐 있어? 그런거지, 술먹고 사는거지, 그게 인생이지. 아, 세상 뭡니까? 인생 뭡니까? 술 먹고 기분 좋은게 인생 아닙니까? 술값이 문제되니까 빨리 돈 벌어가지고 술 쳐먹고 밤에 들어가서 자고 아침에 운전한다고 걸려가지고 음주단속 걸리고.

사람들이 몸을 자기의 유물이고 물질이라고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몸이 죽으면 어디 가는지를 몰라서 그래요. 사람들은 눈으로 보이는 것만 보니까 몸이 죽으면 어디 간다고 봅니까? 화장터에서 확인해보니까 몸은 죽어서 가루가 되고 가루가 하나의 연기가 되고 없어져서 가루는 뿌리면 그만이라는 거예요. 그럼 일찍 뿌려줘? 어차피 뿌려줄 거 일찍 뿌려줘? 그래서 자기가 알아서 일찍 뿌리겠다는 사람들이 자살한 사람들 아닙니까? 번개탄 피워놓고.

자살한 사람보고 ‘당신은 자살하면 안돼요’라고 말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가 없다니까요, 이 세상에서는. ‘왜 자살합니까?’ ‘기분 나빠서’ ‘자살하지 마세요’ ‘당신이 왜?’ ‘그러면 자살하면 기분 좋습니까?’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운데 피할 곳은 뭡니까? 내가 고통스러운데 이 몸을 내가 알아서 죽이는 것이 나의 마지막 대안이라는 거예요.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조치가 자살이다 이 말이죠.

몸이 그렇게 물질로 된 게 아니에요. 성경에서 몸은 주님의 속성을 증거하기 위해서 몸이 있습니다. 주님의 속성은 두 가지에요. 하나는 긍휼이고 하나는 진노지요. 하나님의 불쌍히 여김과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준 겁니다. 그래서 인간의 몸이 죽으면 +α, 어디다 갖다 버리나? 장례식에, 화장터에 버리는 게 아니고 거지 나사로와 부자 이야기에 보면 어디다 버려집니까? 지옥가는 거예요. 지옥가기 위한 몸이 있고 거지 나사로는 천국 가기위한 몸이에요. 이 몸은 방향성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대로 보게 되면, 아내된 자는 남편에게 그 몸은 그냥 남편과 아내와 같이 산다, 그게 남편, 아내 몸의 기능이 아니에요. 영적인 요소가 나와야 되거든요. 한 쪽이 버려져서 지옥 간다면 한 쪽은 긍휼의 나라, 천국 가는 몸이잖아요. 그러면 천국 가는 몸이 나온다면 그 긍휼이라는 요소가 살아있는 이 몸에서 계속 풍겨 나오는 게 지극히 당연한 거죠.

아내하고 남편이 한 몸이라는데 인간의 몸은 한 몸이 될 수 없어요. 동상이몽이라고 하죠. 같이 자도 꿈을 따로 꾸는 겁니다. 우리가 아는 하나는 생각하는 것부터 해서 모든 게 하나될 때 하나 된다고 하는 거예요. 하나라는 말은 생각이나 목적이나 모두가 하나에요. 취미, 성격. 아내하고 남편하고 중국집에 가서 자, 우리 뭐 먹지? 하나,둘,셋. 하나는 짬뽕, 하나는 짜장면. 같이 될 수가 없어요. 우리 이번에 피서 어디로 가지? 하나는 산에, 하나는 바다에. 안된다니까, 이게.

몸의 성격은 부모로부터 받은 거예요. 부모의 DNA, 성격을 그대로 받았기 때문에 양쪽의 부모가 동일한 부모가 아닌 이상은 부부는 모든 게 틀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내, 남편이라고 하는 것은, 베드로가 이야기하는 것은 그런 성격 말고, 성깔, 성질 말고 영적인 요소가 하나로 만나지는 그것이 바로 부부다 이 말이죠. 영적인 요소, 몸+α, 여분의 것.

그렇다면 그것은 세속적이 아니고 이 세상을 훌쩍 떠나는 다른 원리와 다른 질서에 속하면서 몸을 거기서 사용하는 사람. 어떤 아내가 있는데 그 아내는 지상의 질서, 세상이 좋아하는 게 아니라 하늘나라가 원하는 몸으로 그 몸이 방향, 모든 목적이나 의미가 나올 때 그럴 때 그것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영적 포지션에 부합되는 아내의 몸이라 할 수 있어요.

그 이야기가 3절에 나옵니다. 베드로전서 3장 3-4절,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무엇과 무엇을 대비시켰느냐 하면, 자기 외모를 치장하고 머리 꾸미고 금을 차고 하는 것은 어디서 흘러들어온 풍습입니까? 바로 지옥 갈 인간들이 몸을 굴릴 때 나오는 필연적인 발상이라는 거예요.

자, 강의를 상큼하게 한 번 정리해 봅시다.
눈에 보이는 것은 몸이죠. 가시적인 몸이 있더라도 눈에 보이지 않는 끈은, 같은 몸이라도 서로 다른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한 끈은 천국이고 다른 끈은 지옥이죠. 천국의 요소, 지옥의 요소가 이 몸을 통해서 발산될 때, 지옥 가는 사람의 몸에서 발산되는 것과 천국 가는 사람의 몸에서 발산되는 것이 달라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야 몸을 통한 복음의 실제성이기 때문에.

아까 처음에 강의했죠? 복음 어딨나? 복음 어딨어? 복음 어디 있냐고 자꾸 찾지 말고 몸에서 발산되는 어떤 원리, 질서, 추구하는 것, 목적 이걸 통해서 복음을 보여주는 그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일을 하셨다는 거예요. 누구한테?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지금 5절, 6절에 시범조교 나왔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신 몸이, 아브라함과 사라가, 개인구원입니까, 가족단위에요? 가족단위지요. 왜? 사람은 혼자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닙니다. 어린왕자 아닙니다. 별에서 온 게 아니에요, 외계인 아닙니다. 그냥 부모 몸에서 태어났다 이 말이죠. 그러한 가족단위의 위치가 있을 것 아닙니까? 그 위치에서 아내, 남편, 부모, 자식 이런 거. 이런 위치에서 각자 하나의 가족이 몸과 몸은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어요. 하나가 될 수 없는데 +α가 만남으로써 하나의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게 사라가 아브라함의 말에 순복하니까 갑자기 사라가 아내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딸이 되었다. 딸이 되었다 하니까 아브라함보다 레벨이 낮다는 뜻이겠어요, 아니면 아브라함의 전수자라는 뜻이겠습니까? 그 아버지의 그 딸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아브라함의 패밀리가 된 거에요, 하나의 가족. 부모-자식을 떼놓을 수 없듯이 아브라함의 딸이라는 말은 그 세계, 하나님이 맺어준 관계는 인간의 힘으로는 끊어지지 않는다 이거에요.

여기서 더 진도 나가기 전에 먼저 창세기 3장에 아담과 하와의 주고받는 이야기를 한 번 생각해봅시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분명히 부부인 줄 알고 있고 우리도 둘이 아니고 한 몸인 줄 알고 있는데 범죄하고 난 뒤에는 각자 놀아요. 누가 따먹었냐고 하니까 이 비겁한 남자가 누구 탓을 하느냐 하면, 자기가 따먹었으면 내가 따먹었다 해야지요. 책임을 남자가 져야지요. 교회가 여자고 남편은 누구입니까, 주님 아닙니까. 그러면 주님이 교회보고 닦달냅니까? 똑바로 해, 인간아. 이렇게 닦달내요? 니가 똑바로 안하니까 니가 지옥가는 거야. 이렇게 잔소리하려고 예수님이 오셨습니까? 잔소리나 하려고 오신 거예요? 아니잖아요.

주님은 잔소리하려고 오신 게 아니고, 잔소리를 하더라도 이미 구원해주고 잔소리를 하시잖아요. 구원을 하셨잖아요. 예수님의 피와 살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네 살과 네 피 흘리라고 닦달내시고 욕하신 게 아니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묻지 않고 앞서서 자기 살과 피를 내줬다는 말은 일체 너의 구원에 대해서 내가 묻지 않겠다. 다만 교체하겠다.

니 몸에서 마음껏 육이 나오고 그 육 때문에 내가 죽었다는 것을 통해서 긍휼의 관계로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맺어지는 거예요. 진노의 관계가 아니고 사랑의 관계라니까요, 사랑의 관계. 복음은 결국 지금까지 이야기 한 것을 보면, 몸에서 +α인데 이 +α가 방금 이야기 한 것처럼 뭡니까? 사랑이죠, 사랑.

몸의 대표가 얼굴이에요, 머리 부분이에요. 이것은 에베소서 1장에서 교회 이야기할 때 예수님을 교회의 머리라 하죠. (에베소서 1장 22-23절,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머리가 중요해요, 지체가 중요해요? 머리가 중요한 거예요, 머리가. 여러분들이 결혼할 때 남편 발보고 이야기했습니까, 손가락보고 이야기했습니까? 대화할 때 뭐보고 이야기합니까? 몸의 대표자리가 어디에요? 얼굴보고 이야기하죠.

그래서 시편 13편에 나오지요. 시편 13편 1절,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그럼 얼굴 보여주면 몸 다 보여준 거예요. 모세가 하나님 만났는데 출애굽기33장에서 얼굴을 못보고 하나님의 등을 봤죠, 등짝을 봤다고요. 얼굴을 가리고 봤어요. (출애굽기 33장 20-23절,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왜냐하면 그 하나님의 얼굴은 예수님이기 때문에. 마지막에 성령이 와야 주님의 얼굴을 봅니다.

요한계시록 1장에 보면 예수님의 얼굴 나오죠, 해 같이 빛나는 얼굴 (요한계시록 1장 16절,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마태복음 17장에서 보면, 변화산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뭘 봤습니까? 예수님의 해 같이 빛나는 얼굴을 봤죠? (마태복음 17장 2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자, 봤을 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의 몸은 분명히 자기 몸이죠. 몸인데 +α가 나온 거예요.

이 몸이 유물이 아닙니다. 그냥 물질이 아니에요. 몸을 통해서 일을 하시는데 몸이 몸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그 몸에서 하늘나라 요소, 영적 요소를 몸을 통해서 뽑아내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니까요. 여러분 지금 뭘 뽑아내고 있습니까? 땀냄새만 나요? 뭔가 포지션을 통해서 육적인 사람이 보여주지 못하는 다른 게 나타나야 된다 이 말이죠.

아까도 강의 첫 번째에서 이야기했잖아요. 여자가 단독적으로 자기 몸을 자기 것이라고 여긴다면 남편에게 순복해도 조건보고 순복해요. 무조건 순복한다는 것은 바보, 등신이나 하는 짓이다 이 말이죠. 니가 내한테 남편노릇 제대로만 하게 되면 순복하지 말라고 해도 순복해줄게. 따박따박 돈 해주고 아이와 놀아주고 또 갖다 와서 설거지 다해주고 이불 다 펴주고. 그럼 지는 뭐하노. 연속극, 드라마만 보고. 내가 뭐 필요한지 시키기 전에 눈치 딱 때려가지고 아내가 지금 이걸 원한다 말하기 전에 알아서 딱딱 해놓으면 내가 왜 순복을 안하겠느냐 이 말이죠. 조건보고 순복하겠다.

그러니까 그게 누굴 위한 순복이에요? 물질적인 자기의 육을 위한 순복이지 영적 요소를 위한 순복이 아니잖아요. 남편도 마찬가지에요. 남편도 아내에게, ‘나는 고생 되게 하는데 니는 나한테 한 거 뭐 있노’.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갑자기 ‘나하고 살기 싫어?’ 아내가 그렇게 나오면 ‘아니, 그건 아니고’. 음매 기죽어서 쑥 들어갔지만, ‘따져보자. 니하고 내 둘 중에 돈 누가 많이 버는지’. 또 갑자기 돈 이야기로 흘러가버리면 보통 문제가 아니거든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내가 되는 것도, 남편이 되는 것도 ‘아내 됐다, 아싸, 성공했다’ ‘남편 있다, 아싸 성공했다’ 하시면 안돼요. 그렇게 쾌재를 부르는 것도 자기 몸 중심입니다. 육에서 +α가 없어요, 그 사람은. 그저 내 아내, 내 남편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자기 행복을 더 증가시키겠다는 그런 자기 노림수 뿐이지 진정 ‘주여, 제 몸은 어떤 몸입니까?’ 그런 차원에서 아내하고 남편 엍었다고 좋아하진 않잖아요.

그러니까 이 말씀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꾸짖는 말씀이에요. 우리의 본성을 지금 지적하는 말씀이에요. 사실 이 말씀을 보면 엄두가 안나요. 엄두가 안 나는 것을 제가 이렇게 쉽게 조정하면, 바로 영적인 여자들은 육적인 여자와 차별을 보이는데 육적인 여자는 세상에서 좋고 아름다운 것들을 몸에 걸치고 다니는 거예요. 그리고 그 육이 죽어버리면 금도 은도 다 같이 소용없잖아요, 몸이 썩었는데.

몸이 아픈데 고급 드레스 입어봐야 그게 폼 나겠어요? 링거 코에 꽂고 드레스 입고 명동거리에 나가보세요. 꼴도 참 희한하다, 정말. 말도 안되잖아요. 병원에 가야되잖아요, 환자복 입고요. 환자복 중에서 미니스커트 입은 환자 못 봤습니다. 남자고 여자고 똑같이 바지입고. 여자고 남자고 관계없이. 사회적으로 쓸모짝이 없기 때문에 병원 침대에 누워 있으라고 붙들어 매려고 하는 겁니다. 

세상 것은 세상에 대한 집착과 미련이고 그것은 세상에서 흘러 들어온 거예요. 요한일서 2장 16절 말씀입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from. 뭐로부터 온 거예요. 그러니 우리의 몸은 단독적인 몸이 아니고 세상으로부터 영향받는, 세상과 더불어 짝짜꿍이 되는 몸으로 살아온 거예요. 영적인 +α가 없지요.

그러면 영적인 +α가 뭐냐하면, 세상이 어떻다는 걸 알아요, 충분히 안다고요. 알면서도 그것과는 다른 질서, 다른 원리가 여기 이 몸에 덮치는 겁니다. 그게 뭐냐면 바로 드디어 세상이 그렇게 부럽지 않다는 거예요. 세상 자랑 많이 해라 이 말이죠. 세상에서 인기 얻고 유명세 많이 떨어봐라. 그것으로 인하여 내가 구원되는 건 아니니까. 예수님의 피와 살로 구원되었다면 예수님께서 이 땅을 지나치시면서 뭐를 남겼나 보자 이 말이죠. 그것은 바로 죄인을 불쌍히 여겨서 구원한 거잖아요. 그러면 그 내용을 장착하는 거예요.

남편 보기를 죄인으로 보는 거예요. 아이고 이 불쌍한 인간아. 남편으로 하여금 ‘여보, 금 사줄까, 은 사줄까’ 이렇게 되어버리면 남편은 안 그래도 금은 좋아하고 옷 좋아하고 보석 좋아한다면 세상에서 태어나서 세상 사람으로 끝장내게 만드는 거예요. 아까도 얘기했잖아요. ‘몸을 어디다 버릴까’가 몸의 영적 요소라고. 세상적으로 살면 지옥 가잖아요. 그것은 순복이 아니죠. 남편을 죽이려고 목을 조르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여보 당신, 뭐해줄까? 골프용품 사줄까?’ 그럼 아예 목을 졸라. 남편한테 약 타지 마시고 남편 좋아하는 것 다 주시면 남편 속히 망하게 하는 겁니다.

남편으로 하여금 그런 세상적인 것에 대한 미련두지 말라는 쪽으로 자기 모습을 보여주는 거예요. ‘당신은 이렇게 살아가지만 나는 이런 원리와 이런 초월적인 가치를 위해서 살아갑니다. 이런 세상적인 평가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맙시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베드로전서 3장 4절,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온유하다는 말은 아까 여유있다는 뜻으로 생각하면 되고요.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아, 이거 썩지 아니할 것으로. 썩는 것이 이 세상의 이치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만은 속사람은 썩지 않지요, 날로 새로우니까.

오히려 속사람은 그 사람이 썩으면 썩을수록 속사람이 오히려 더 빛을 발하게 되어 있어요. 뭐 암이냐. 암이면 뭐 어때. 죽겠지 뭐. 이런 거. 그 사람이 암에 걸린다 할지라도 속사람은 영향이 없고 구원받는 데에 전혀 영향이 없음을 암 걸리는 순간을 통해서 재확인되는 겁니다. 자기가 몸이 아픔으로써. 이게 아내 할 도리다 이거에요.

‘홍도야 울지마라’ 하는 노래 있지요. 그 가사에 보면 이게 아내의 도리라는 게 있어요. 홍도야 울지마라 오빠가 있다. 니가 시집 잘가서 아내의 도리 잘하는 것이 여자의 할 일이다. 옛날 노래에 그런 게 있거든요. 집에 가서 한 번 들어보세요. 아내의 나갈 길은 남편한테 순복하는 것이다.

<홍도야 우지마라> 1939년 김영춘 노래   
 
 사랑을 팔고 사는 꽃바람 속에
 너 혼자 지키려는 순정의 등불
 홍도야 우지마라 오빠가 있다
 아내의 나갈 길을 너는 지켜라

 구름에 싸인 달을 너는 보았지
 세상은 구름이요 홍도는 달빛
 하늘이 믿으시는 내 사랑에는
 구름을 거둬 주는 바람이 분다              

그것은 +α가 아니죠. 남편을 조지는 것이지. 그 따위 식으로 하면 지옥 간다고 제대로 말을 해주는 거죠. 기준이 달라요, 세상 보는 기준이. 장착된 기준이.

그 다음에 누가복음 13장 15-16절 보겠습니다.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십 팔년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18년 동안 귀신 들려서 꼬부라진 여인을 안식일에 주님께서 매임에서, 그 다음에 뭡니까? 매임의 반대말은 해방시켜주는 것, 풀어주는 거예요. 그러면 매였다 하는 것은 부자유지요. 풀어준 것은 자유죠. 누가 자유케 하신다? 주님이 자유케 하신 거예요.

예수님의 몸은 자유를 효과있게 드러내는 능력을 발산하시면서 그 몸을 주께서는 이 세상에 나타내 보였습니다. 진정한 자유를 가진 사람은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을 보여준 거예요. 여기서 오늘 본문 베드로전서 3장을 봅시다. 사라가 남편에게 복종함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딸이 되었죠. 아브라함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느냐. 예수님에게 무슨 일이 벌어져서 그 18년 된 여인이 사탄으로부터 풀려났느냐.

누가복음 13장 15절, 1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이룬거죠. 안식일이라는 율법을 완성했다 이 말이죠. 안식일을 지킬 때 인간의 방법으로 지키는 것과 예수님의 방법으로 지키는 것이 다르다는 겁니다. 인간이 지키는 것은 노동을 안하면 지킨 걸로 되어있어요. 시간이 있는데 노동 없는 시간, 노동 안한 시간이 안식일을 지키는 거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의 안식일 방법은 뭡니까? 사탄에게, 악마한테 매인 자를 풀어주는 게 안식일 지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의 방식으로서는 예수님 방식에 접근이 불가한 거죠. ‘이상하다, 안식일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지키면 되지. 사탄, 귀신 나오는 것과 무슨 관계 있느냐? 전혀 관련성을 찾을 수가 없네.’ 안식일이라는 율법 지켜도 이거는 지가 할 수 있는 것만 해요.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자기 내부의 한계를 보여주는 겁니다. 안식일이라는 율법 앞에서 기껏 우리는 이 정도밖에 못합니다. 하고 자기 내부의 한계를 보여준 거예요.

자, 안식일날 쉬었습니다. 그러면 옆집에 있는 귀신들린 자가 해당됩니까? 내가 직장 나갔는데 저쪽에서 갑자기 구원 받아요? 아니죠? 연관성 없죠? 이제 어려운 거예요. 연관성 없다는 말은 내 몸에서 어떤 짓을 해도 저쪽 몸까지 효과가 미친다, 안 미친다? 효과가 전달된다, 안된다? 전달이 안되는 거예요, 우리의 몸은. 이게 우리 몸의 한계라니까요.

아내가 남편한테 아무리 잘해줘도 절대로 남편은 아내의 몸에서 감동받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한다고 해서 이제부터는 금가락지 전부다 팔아버리고 ‘온유하다, 나는 천사다’ 이래 돌아다닌다고 남편이 감동먹고 교회오고 그런 짓 안합니다. 몸에서 +α라는 것은 여유에요, 여유. 그런데 여유라는 것은 언제 드러나는 거예요? 평온할 때는 여유가 등장하지 않아요.

벽에 부딪칠 때, 인간의 힘이 어떤 한계를 느낄 때. 아, 여기서 같이 약 먹고 죽자. 온가족이 한단위로 자살을 할 때. 그 때 비로소 자기 몸의 한계를 느낄 때, 벽을 의식할 때 내 몸이 기껏 이렇게 해서 자살할 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요, 성령이 오게 되면. 내 뜻대로 안된다고 내가 죽일 수 있는 이 따위의 몸을 우리가 하나님께 부여받은 게 아니에요.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긍휼을 담는 그릇입니다. 긍휼, 자비이죠. 다른 말로 하면 사랑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되비쳐 나오는 거울, 또는 담고 있는 그릇의 역할을 하라고 우리의 몸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국회의원 되라고 하는 게 아니에요. 의사 되서 출세하라고 있는 게 아니고 판사 되라고 있는 게 아니고 똑똑해서 박사학위 서너 개 따라고 있는 몸이 아니고 긍휼만 보여준다면 거지라도 천당가요. 강도라도 천당갑니다. 참 쉽죠? 굉장히 쉽잖아요.

우리의 몸은 긍휼을 보여주는데 긍휼은 무엇과 짝을 이루어야 합니까? 불쌍히 여기려면 우리가 죄인이 되어야겠죠. 따라서 우리의 몸은 주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무엇이 죄냐를 마음껏 발산하게 하심으로써 결국 예수님의 피, 긍휼, 예수님의 목숨, 피뿌림과 연관지으려는 복음적 +α의 복음적 요소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의 몸은 이 땅에 있는 겁니다.

아내 노릇하라는 말이 아니고 이미 아내에요, 그 사람은. 남편 노릇하라는 말이 아니고 그렇게 되면 이미 남편 노릇 하게 하십니다. 누가? 성령께서 베드로전서 이 말씀대로 우리로 하여금 이 내용대로 되도록 그렇게 하신 거예요. 우리가 설치지 않더라도.

베드로전서 3장 3절에 보면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고” 이렇게 되어 있잖아요. 그러면 이것만 빼버리면 영적 사람 되는 겁니까? 아니죠. 어떤 여성분이 너무 등산을 좋아해서 이제는 에베레스트까지 정복하겠다고 나설 때 그것도 세상적이잖아요. 그리고 판사 된 아내가 판사 그만두고 국회의원 되서 당대표 되겠다고 설칠 때 이것도 너무나 세상적이죠. 그렇죠?

여기서 말하는 아름다운 옷이라 하는 것은 사치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고 그저 계속해서 세상적으로 출세 지향적인 거, 남들 보기에 내가 이 정도로 능력있는 여자, 남자라는 것을 내비치기 위해서 애쓰는 것. 그만큼 세상에 대해서 아직도 노림수를 가지고 있다는 거예요. 세상에 대해서 만족을 못하고 한이 맺힌 여자에요. 귀곡산장의 여인같이.

그런 여자들 많습니다. 목포에 부동산사업 하는 손혜원 의원인가... 사업하면서 밥 먹고 살잖아요. 그런데 자꾸 뭘해요. 자기 딸 이름 팔아가지고 16억 받아챙긴 김혜수 엄마 같은 사람들, 장윤정 엄마 같은 사람들. 김혜수는 자기 재산 7년 전에 엄마 빚 갚는 데에 다 줬어요. 엄마 개과천선 안됐습니다. 7년 동안 16억 또 벌여놨어, 지 빚을. 이제는 못 갚아준다고 선언한 거예요.

남편 빚 갚아주려고 아내가 고생하는 게 아닙니다. 남편 사업자금 대라고 아내가 맞벌이 하는 게 아니에요. 남편에게 순복해야 된다고...뭐 그런 순복이 다 있어요? 그럼 그 사기의 동업자이지, 같은 사기꾼 가족이지 그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뭐냐 하면 세상에서의 번영과 성공이 하찮다는 것을 아는 마음을 가지는 거예요. 그냥 마음을 단정히 한다고 맨날 아침에도 한복입고 저녁에도 한복입고 잘 때도 아니되옵니다 그래서 밀어내고 지는 혼자서 도 닦고 있고.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니고 생각하는 것이, 5절에 보세요.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라고 했죠?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거예요. 그러니까 베드로의 이 말이 따지고 보면 굉장히 모순되요. 남편에게 순복하려면 소망을 남편에게 둬야 되잖아요, 남편의 출세, 건강, 보약 달여 먹는 거, 주스 해먹는 거 이런데 여기서는 소망을 어디에 둔다고 합니까? 남편에게 순복한다면서 하나님께 소망을 두죠.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데.

남편하고 놀러갈래, 교회갈래? 맨날 불신자 남편한테 받는 시험 아닙니까? 니 내하고 대천 해수욕장 갈래, 수련회 갈래? 이런 거. 니는 하나님만 알고 니 남편은 모르지, 그치? 내 말하는 거보니 참 섭섭하다. 니 옆에 있는 남편 사랑하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 사랑하나. 어디서 들은 구절이 있는가. 요한일서 들었는가. (요한일서 4장 20절,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그걸 또 모방해서 그렇게 하는지 모르지만. 그럴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되요?

첫째, 친절하게 천사처럼 설명해준다. 둘째, 엎드려서 기도한다. 안그러면 일단 그 쪽 말 들어주고 다음에 기회봐서 교회 가준다. 몇 번이에요? 남편한테 이렇게 해야죠. “말 같지도 않은 소리하고 있네. 그러니까 당신이 세상밖에 못 보지.” 그렇게 충고하는 것이 거룩한 부녀에요. 원하는 대로 다해주는 게 아니고요.

그러면 영적인 아내가 육적인 남편한테 어떻게 해주는가. 그건 하나님이 하신 방식을 요령껏 해주면 되요. 하나님의 방식은 뭐냐? 우리가 달라고 하면 절대로 안 해줘요. 그런데 우리가 달라고 안했을 때만 주께서 해줍니다. 그러니까 남편이 식혜 해달라고 하면 해주면 안되요. 남편이 지쳐가지고 이제 아, 하지마라. 할 때 해주면 되요. 그래야 하나님 은혜인줄 알지. 해달라고 하면 안해주고 안해달라고 하면 해주면 되요. ‘와이셔츠 이거 좀 꿰매줘’ ‘안해줘 안해줘’ ‘그래, 니 마음대로 해라’ 하면 해줘.

왜? 소망은 남편이 소망이 아니고 누가 소망이다? 주님의 여유있음. 주님이 나를 구원했음이에요. 이미 그 여유스러움을 보여줘야 됩니다. 안정적인 거죠. 자, 앞에는 아내가 안정적이고 남편은 불신자인 경우죠. 이쪽에서는 남편인 아브라함이 안정적이고 사라는 거기에 종속된 거예요. 아까 이야기 계속 해봅시다.

18년 된 귀신들린 자가 어떤 신분이 되었느냐 하면, 아브라함의 딸이 된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 한 번 물어볼게요. 이 여인이 몸에 병이 나은 거예요, 영적인 몸이 된 겁니까? 어느 쪽입니까? 몸이 치료가 된 거예요, 몸 자체가 본래의 자리에 간 겁니까? 아브라함의 딸 되었다는 말은. 영적인 몸이 된 거예요, 영적인 몸.

문둥병자가 10명이 있었는데 주님께서 다 낫게 해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로 돌아온 사람은 1명이었죠. 이것은 무엇을 의미해요? 몸의 병이 나았다면 그 몸은 지옥 갈 몸이에요. 몸이 아파도 지옥가고 병이 나아도 지옥가고 그런 겁니다. 그게 의사의 한계에요. 유물론적 과학자들의 한계가 그겁니다. 병을 고쳐요. 고쳐봤자 그 몸 영생 얻습니까?

병 못 고친 아내가 복음을 갖고 있다면 아내가 영적인 의사에요. 비록 암은 못 고치지만 죽어도 괜찮다는 여유는 주잖아요. ‘여보, 나 암4기래’ ‘죽어. 죽고 난 뒤에 암을 주신 주께 감사해, 이 교회오빠야’. 교회 백날 다니면 뭐하냐 이 말이죠. 맨날 교회 다니면서 몸이나 건강하게 해주시고 이따위 기도나 하고 그게 지옥가는 거죠, 넓은 길로 가잖아요. 세상적이다, 세상적. +α가 안나오는 거예요, 몸에서.

세상이라는 것은 유물주의 아닙니까. 인간은 물질이고 쾌락이다. 그게 전부라는 분위기에 대해서 ‘아니오’라고 할 수 있는 요소가 우리 쪽에 있어줘야 영이라 할 수 있는 거예요. 그게 아니야, 몸이라는 것은 보이는 게 다가 아니야. 그거는 하나님께서 그 몸 버릴 때 그냥 죽는 것이 아니고 지옥으로 갖다 버릴 몸이야. 니 몸 죽으면 지옥가는 거야.

지옥이라는 것은 쓰레기장이거든요. 지옥은 쓰레기장입니다. 게헨나(gehenna)잖아요, 지옥이라는 게. 불타는 곳입니다. 진노의 불. 그러니까 이스라엘 제단이 있으면 옆에 쓰레기장이 있어요. 그게 게헨나에요. 지옥은 하나님의 성막 안에 같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올라간 사람은 하늘에 올라가고 올라가지 못한 건 태워버립니다. 하늘에 못올라갔다는, 하늘에 올라갈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필히 불타는 지옥은 있어야 되는 겁니다.

인간의 몸은 두가지 이질적인 하나님의 계획을, 두 패로 나누어서 보여주는 기능입니다. 베드로가 지금 그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아브라함은 아브라함의 언약에 속한 분이죠. 그러면 사라는 남편 좋다고 붙드는 게 아니고, 남편에게 순복하는 것이 아니고 남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에 마음껏 순복한 거예요. 그 언약의 완성은 뭡니까? 천국이죠. 천국의 sign과 이미지가 남편에게 주어졌는데, 남편에게 벌어진 사건을 내가 마다할 이유가 없지요. 남편의 몸을 통해서 영적인 요소가 마구 쏟아지는데 아내가 나는 그 꼴 보기싫다 할 이유가 전혀 없죠.

6절에 한 번 봅시다.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주가 뭐냐 하면, 아브라함 안에 주님의 요소가 들어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예수님 아닙니까. 그러니까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이 말은 사라가 아브라함에게만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십보라, 모세의 아내가 남편되는 모세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당신은 피 남편이라고 했습니다. 뭐 모세 성이 피씨입니까, 피모세에요? 당신은 피 남편이라고 했습니다. 피를 보여주는 기능으로서의 내 남편이라는 말입니다. 모세가 피 남편이라면 자기는 피 아내 되겠지요. 하나님의 할례언약, 피를 내는 할례언약 안에 종속된 하나의 패밀리, 가족이 되는 겁니다.

자기의 포지션이 내 몸을 위한 포지션이 아니고 언약을 보여주기 위한 할당받은 위치 속에 내가 있음을 십보라는 굉장히 감격하고 좋아하죠. 이것은 사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에요. 복의 근원인데 옆에 아내라는 이름으로 붙어있어요. 세상에 이런 복이 어디 있냐는 말이죠. 남편 가는 세상, 천국에 아내라는 포지션을 가지고 남편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그 결부된 것을 인정하는 걸 가지고 여기서는 순복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 남편이 없으면 그건 아까 불신자, 도에 순종치 않는 남편을 이야기한거고 여기는 남편이 이미 영적인 사람일 경우에 아내는 어떤 처신을 해야 되느냐 하는 거예요. 아내는 자기 단독자의 입장에 있으면 안돼죠. 남편이 내 몸 대신 하면 되요. 그러니 자기 주장, 자기 존재를 스스로 철회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사랑이고 긍휼이에요. 사랑이라는 것은 자기 몸을 감추는 거예요. 자기 몸을 없애버리는 겁니다.

요한복음 12장 25절,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자기를 미워하지 아니하면 생명이 없다고 했죠?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생명을 잃을 것이고 자기를 미워하는 자는 생명을 얻는다 했죠. 그 말은 나보다 더 좋은 것이 내 눈앞에 서있다는 거예요.

제가 강남강의에서 “여러분, 사랑하고 있습니까?” 질문한 적이 있는데. 진짜 현대인들은 사랑할 줄을 몰라요. 사랑을 모르고 사랑할 줄도 모르고. 이유가 뭡니까? 우선 내 사랑에 몰입하고 혹시 남아도는 게 있으면 남 사랑하는 거예요. 그러니 근본적으로 결혼을 했는데 사랑할 줄 몰라요. 이거 참. 귀신들려도 보통 들린 게 아닙니다. 사랑이 안나오는 인생. 그거는 자기를 물질화시키는 거예요. 자기 쾌락만 추구하는 거죠.

자, 정리해봅시다. 아까 몸의 대표가 뭐라고 했습니까? 몸의 대표는 얼굴이죠. 그러니까 부부가 이야기할 때는 얼굴 표정을 보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표정 보면 저 사람 기분이 어떤지 다 알 수 있죠. 그런데 내가 남편한테 이야기했는데 남편이 얼굴을 안 돌아보면 이건 나를 개무시하는 거죠. 그럼 벽보고 이야기할까요? ‘얼굴 좀 돌려봐라, 얼굴. 뭐하노, 지금 게임하나. 얼굴 좀 돌려봐. 나하고 이야기하자. 나하고 이야기하기 싫어? 그럼 나도 싫어’. 얼굴을 달리 하는 거예요.

두 사람 몸이 몇cm가까이 있느냐는 중요한 게 아니에요. 얼굴이 마주보고 있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마주보고 대화가 된다면 주고받는 게 있을건데 그 주고받음은 몸+α, 몸의 여분의 요소가 나와야 되요. 그의 표정을 보게 되면 이 세상에 집착하고 있는지 아니면 이 세상을 초월하고 있는지 얼굴의 표정을 보면 나타나죠. 하루세끼 먹는 것 똑같고 뭐 목욕탕에서 목욕하는 모습, 잠자는 모습, 코고는 모습 다 똑같아요. 다 똑같은데 하루하루 주어진 사태와 사건을 통해서 그 사람이 짓는 표정 같은 것을 보게 되면, 영적인 사람인지 아니면 유물론적, 인간은 육체에 불과하다는 생각인지 구분이 된다니까요.

그래서 인간은 영적인 것을 못 끄집어내죠. 못끄집어내니까 사랑하지 않죠. 사랑하지 않으면 대화는 남을 공격하고 하인으로 부리기 위한 대화밖에 안돼요. 남을 내 밑에 복종시키기 위한, 부하 만들기 위한 대화밖에 안된다고요. 그러면 진정한 대화는 직장에서 이루어지지 않나 하는데, 직장에서의 대화는 지시와 명령, 순복만 있을 뿐이기 때문에. 그러면 집에 가서 대화하면 되지 한다면, 집에 가면 전부다 얼굴 다른 데 해서 관심사가 다른데 대화가 없죠.

그럼 대화는 누구보고 하느냐. 고양이, 개보고 하는 겁니다. 고양이, 개는 말을 안해요. 그러면 인간은 대화 되면서도 내 말 잘듣는 방법으로 내 속에 있는 신을 끄집어내서 내가 만들어내면 되는 겁니다. 그게 인공지능+로봇이에요. 현대 4차 산업혁명 시대는 이렇게 갑니다. 사랑이 없어가지고, 외로워서. 상대가 없으니까 인공지능+로봇이에요.

인공지능은 아파트 요새 새로 분양하면 이런 거 준다는 거예요. ‘오늘 출출한데 요리는 뭐하면 되니, 지니?’ ‘스파게티가 좋습니다.’ 대화가 되요. 그런데 여기다 로봇까지 첨가해버리면 움직이는 나의 연애대상자, 사랑의 대상이 되는 거예요. 외로울 때, 우울증 걸릴 때, 심심할 때, 치매 걸릴 때 대화가 되는 거예요. 뭐 똥을 쌉니까. 그냥 밧데리만 갈아주면 되거든요.

그러니 결국 이건 로봇이라는 내 안의 신이 바깥으로 나온 거예요. 그러므로 나는 내가 신이면서 동시에 물체고 썩어가는 흙에 불과한 거예요. 뭘 모르는가. 내 몸을 어떻게 치울지를, 내가 죽으면 어디 갈지를 모르는 거예요.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겁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에요. 안 죽으려고 하지 마세요. 암에 걸리나 뭐에 걸리나 죽는 것은 주의 뜻이기 때문에 그냥 수긍하세요. 중요한 것은 한 번 죽는 것은 주의 뜻이고 그 다음에 불지옥, 심판이 있으리라. 우리는 그런 안목을 장착하고 세상에 나갑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괜히 말씀이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영적인 몸으로 살기를 원해서 주어진 몸인 것을 이제는 알았사오니 여유만만하게 안정된 가운데서 꿀리지 말고 하나님을 소망하면서 마음껏 복음을 발산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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