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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08 00:27:18 조회 : 223         
선입견 공략 191107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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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림(IP:124.♡.210.16) 19-11-10 07:35 
서울의존강의20191107a 베드로전서3장 16절(선입견 공략)-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3장 16절

16절,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17절,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선한 양심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주목하겠다는 겁니다, 그 사람의 마음. 그런데 인간은 인간의 그 마음을 알게요, 바깥의 행동을 봅니까? 행동을 보죠. 이러니 오늘 본문을 통해서 참 신기한 게 뭐냐 하면, ‘고난’이라는 말이 나와요. 이 고난이라는 말이 어디에 소속되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일 또는 주의 일의 일부 또는 절차가 된다는 겁니다.

선한 일은 하나님의 일이 되겠죠. 선한 일을 하면 뭘 받는다? 고난 받는다고 되어 있잖아요. 그러면 이 고난 자체가 하나님의 일에 필수적으로 여기서 나타난다는 거예요. 그래서 고난 받는 이것이 굉장히 행복한 현상이어야 한다 이 말이죠, 성경에서. 굉장히 행복한 현상이에요.

그러면 악한 양심, 악한 마음이 있는 사람은 고난을 기피하겠죠? 고난 안받는 쪽으로 가겠죠? 그럼 고난은 하나님 일에 필수적인데 고난을 제거하고 없애겠다는 말은 하나님 일이 아니고 누구의 일이 되느냐 하면 본인의 본색이 그만 그대로 노출된 겁니다. 인간의 일은 뭐냐, 선을 행하면 고난 받기가 아니라 선을 행하면 고난도 사라지기. 이러한 과정을 어떤 사람이 그 마음에 품고 있다면 그 사람은 단독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지, 하나님의 일에 참여된 사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여기에 선한 양심을 가지라 해놓고 그 뒤에 이는 너희라는 말 앞에 무슨 말이 있어요? 그냥 너희가 아니고 앞에 뭐 붙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다 이 말이죠. 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에 있어서 정말 너희 마음이 선한 양심, 선한 마음이라면 반드시 고난은 일어나게 되어 있다 지금 그걸 언급하는 거예요.

네가 얼마나 사는 게 힘드냐, 어려우냐 지금 그걸 묻는 게 아닙니다. 나는 너를 통해서 주 안에 있는 사람의 그 흔적을 난 보고 싶다는 거예요. 네가 홀로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와 함께 같이 살고 있다는 어떤 증빙 같은 것, 그런 것을 보고 싶은데 그 하나님이 함께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증빙이 다른 게 아니고 고난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고난 받으면 다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까? 라고 하겠죠? 그래서 베드로는 고난에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악행을 해서 받는 고난이 있고 하나는 선행을 해서 받는 고난이 있는데, 악행을 해서 받는 고난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게 아니고 선행을 해서 받는 고난이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고난이다 그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 흐름이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렇게 되어 있을 때, 우리가 두 종류로 한 번 나눠봅시다. 첫째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 고난은 필수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아니한 사람이 고난은 필수다 라고 이야기할 때 이 둘 사이에 어떠한 차이가 있느냐 그걸 따져 봐야 되겠죠.

첫 번째로는 뭐냐 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고난이 있는데 그 고난은 필수적이다 라는 겁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그렇다. 성경에서 그렇게 되어 있죠? 그러면 그걸 이해하는 우리 쪽,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 특정인이 아니고 보편적, 일반적으로 규정을 했는데 우리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싶은 사람이고 싶어 하잖아요. 그렇다면 나는 고난 받을래요 라고 나선다고 해서 그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단정 지을 수 없다 이 말입니다, 지금 제가 하는 말은.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고난은 필수다 라고 이해하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서 흉내내기, 그냥 성경말씀이니까 나도 이렇게 얼추 비슷하게 한번 흉내나 내보려고 뭐 말이야 예수 믿는 사람은 고난이 필수다 라고 하는 그 차이점이 뭐냐?

그 차이점은, 여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포괄적이에요. 포괄적인 반면에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서 고난이라고 우기는 사람은 개인적입니다. 사적인 욕망이 있어요, 사적인 욕망. 그 욕망이 뭐냐 하면 어떻게 하든 내가 구원받고 싶은 욕망 같은 것이 있어요. 성경말씀을 가지고 구원받고 싶은 욕망이 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고난 받으라면 고난도 받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고백도 해보고 하여튼 성경에서 하라고 하는 건 다해요. 그럼 하라고 한다 해서 다 해버리면 그 사람은 성도입니까? 성도가 아니죠.

자, 이 문제에요, 이 문제. 인간의 마음이 개인의 마음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이야기하는 포괄적인 마음 중의 하나가 되어야 될텐데 인간은 사적인 자기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그런 역량이나 그런 힘이 있느냐 하는 겁니다. 인간이 자기 마음을 변경시킨다든지 빼고 다른 마음을 집어넣을 수 있는 그러한 자질이 있어요, 인간에게? 그런 자질이 있습니까?

가끔은 노래 가사에 보면 자기 마음을 종잡을 수 없다 하죠. 내 마음은 갈 곳을 잃어. 가을엔, 이렇게 해놓고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내 마음을 종잡을 수 없다 이 말이죠. 내 마음을 종잡을 수 없다. 그래서 이 양심, 마음. 그리스도가 만든 마음과, 선한 양심이죠. 그리스도가 안 만들어주면서 자칭 자기가 선한 마음이라고 우기는 사람과의 그 구별도 해야 되겠죠, 그 구별을.

그 구별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위해서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스키타이의 전사들은요 자기의 노예가 있는데 노예를 다룰 때 두 눈을 뽑아요. 사람이 눈이 없으면 맥을 못 추잖아요. 그러니 노예가 노예답기 위해서는 두 눈을 빼고 그 다음부터는 채찍가지고 계속 후려치면서 일을 시키는 거예요. 옛날에야 뭐 계급사회고 그리고 그 노예들이 다 전쟁에 이미 패배했기 때문에 실은 죽은 자인데 밥 먹고 살기 위해서 노예로 팔려 온 겁니다.

이스라엘도 그런 것 있죠? 전쟁에 패배할까 겁이 나서 미리 고개 숙이고 물 긷는 사람 되는 거 있죠? 기브온 사람인가. (여호수아 9장) 예, 우리 살려만 주신다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그래 물 긷는 사람들이 되어라 그래서 이스라엘과 함께 살게 되었다 하는 그런 대목이 나옵니다. 알아서 기는 거죠, 뭐. 전쟁에서 힘이 없으니까.

이 스키타이 전사가 노예를 아주 가혹하게 다뤘어요. 행여나 그들이 노예되기 전에 뭐였는가. 노예되기 전에 자기 나라, 자기 민족에서는 자기가 자유자였잖아요, 그쵸? 자유자였는데 전쟁에서 졌다는 이유로 갑자기 노예생활 할 때 속에 있는 응어리 진, 내가 언젠가는 두고 봐라 하는 게 있겠어요, 없겠어요? 있죠. 그러니 그걸 사전에 없애기 위해서 두 눈을 다 빼는 거예요. 이제는 그냥 인간으로의 가치를 아주 없애 버리는 겁니다. 우리들이 밥 먹이니까 너는 살아 있는 것이지 너 식대로 두 눈뜨고 열심히 네 가치를 높이던 그 시절은 이제 끝났다 그러니까 너는 어쩔 수 없이 노예 하는 걸로 그만 감사해라 이렇게 가혹하게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스키타이 사람들이 다른 나라 전쟁한다고 전쟁하러 전부다 나가 버렸어요. 노예들은 전쟁 안나가니까. 전쟁을 하러 나갈 때에 스키타이 노예 어른들은 두 눈을 잃었지만 스키타이 전쟁에서 낳은 아이들은 어떻게 됩니까? 눈이 멀쩡할 거 아닙니까? 멀쩡하겠죠. 걔들이 드디어 민족의식이 싹트는 거예요.

출애굽기 초반에 보면 모세가 비록 바로 공주의 아들이지만 그 마음 속에는 뭐가 움틉니까, 싹틉니까? 언젠가 히브리 민족을 해방시키겠다는 마음이 싹트죠. 싹트네 싹터요~ 하는 노래 있어요. 싹이 났죠.

그래서 드디어 그 애들을 앞장세워서, 그들은 눈이 있으니까, 아버지가 얘야, 앞에 나가서 적들이 언제 오는가 봐 전쟁에 나갔으니까 반란을 일으키죠. 내란을 일으켜 가지고 그들이 언제 오는가 봐라 해가지고 그들은 열심히 창을 준비하고 있으니까 전쟁하고 왔는데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켜가지고 주인들을 대항해서 무기를 다듬어서 달려드는 거예요. 그럴 때 스키타이 전사들이 창을 들고 그들과 싸우는 게 아니고 채찍을 들고 탁탁 쳐버리니까 들고 있던 무기 다 놔 버리고 다시 돌아왔어요.

왜냐하면 그 채찍 소리가 자기가 노예라는 사실을 자각시켜가지고 그래 우리는 노예야. 노예되는 거예요. 아, 우리 노예지. 이러면 안돼. 이거는 채찍소리만 듣고 손 다 놔버린 거예요. 일본을 이긴다. 한국사람이 일본을 이긴다하죠. 그러면서 스끼다시 하나 주세요. 하고 후루꾸가 어떻고 뭐. 갑자기 일본 뭐라고 하면 예. 자기 본성, 일본에게 우리는 밀린다는 한국 사람이 잊을 수가 없어요.

제 말은 인간의 마음이 본인이 만든 게 아니고 꾸준히 그동안 우리에게 누적된 거예요, 인간의 마음은. 누적된 마음을 가지고 성경을 본다든지 교회에 와봤자 그 마음, 새 마음 아닙니다. 그 마음 새 마음 아니에요. 새로운 마음 아닙니다. 옛날 마음 가지고 흉내내고 있는 거예요. 옛날 마음 가지고 흉내내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고난 받는다 하니까 그 이야기가 듣기 싫은 거예요. 나 예수 믿고 잘되기를 바랍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 자체가 착한 일인데 그 착한 일 했으면 복을 줘야지 고생을 하다니 이건 말도 안됩니다. 버티고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안 믿는 사람의 특징을 내가 말씀드리면 개인적인데, 개인적인 것들, 개인적+개인적+...하면 그들은 무슨 결론에 이르냐 하면 ‘나는 내가 착한 사람인 줄 알았다’ 이겁니다. 나는 내가 착한 사람인 줄 알았다. 시장통에 가서 아주머니들 이야기하는 것 쭉 들어보세요. 그 이야기 쭉 들어보게 되면, 뭐 세상 이야기, 여러 가지 자식 이야기 하지만 그 밑바닥에 늘 깔려 있는건 뭐냐 하면 난 어디까지나 착한 사람이라는 의식입니다.

그 착한 사람이라는 의식을 가졌으니까 어떤 사람이 만약에 교회가자고 하면 에이, 착한데다가 더 착하게? 착해봐? 착함의 절정에 한 번 이르러 봐? 교회 안다녀도 착한데 교회 다녔으니까 나는 착함의 업그레이드 해봐? 그런 마음으로 교회 오겠죠. 그러면 교회가 행복한 교회 같은 경우에, 당신은 사랑받기에 합당하고 행복합니다 하면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가 바로 그 이야기라. 착한 인간에게 복 준다는 거. 다른 사람들은 말을 안하는데 교회 오니까 그걸 노골적으로 이야기해주니까 나 이제부터 이 교회 다닐래, 나 이 교회 다녀서 천국 갈래. 이게 바로 영업 비밀 아닙니까. 영업 비밀까지는 아니지만 그게 영업 방식이거든요.

착한 사람이라고 하는 의식이 기본으로 모든 인간에게는 그게 전제로 되어 있어요, 착한 사람. 착한 사람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만약에 착한 사람이 이 성경을 보게 되면, 아 예수 이름으로 말미암아 고난 받는다 이렇게 하면 그래 내가 착한데다가 또 추가해서 예수까지 믿는 착한 짓을 했기 때문에 내가 고난 받을 때 나는 드디어 천사 레벨이다, 천사 수준에 이른다 라고 얼마나 자긍심이 커지겠습니까? 그게 뭐냐 하면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서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서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면 본인이 뭘 제거해야 돼요? 착한 사람이다. 나는 원래부터 엄마도 그러고 누구든지 나는 착하대. 그러니 나는 내가 착한 사람이다 그렇게 알고 있다 라는 이것을 제거하지 아니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볼 수 없잖아요, 그렇죠? ‘착하지도 않는데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이유 때문에 내가 고난을 받는다’ 이렇게 되어야 되는 거예요.

나는 고난이고 뭐고 고생이고 와도 합당한데 다만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이유 때문에 고난을 받게 될 때 이것이 성경에서 규정하는 성도의 규정과 내가 받아들이는 성도의 규정과 이게 합치가 되는 거예요. 선한 양심이라는 게 뭐냐 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만 선한 양심이에요. 선한 양심이, 그리스도 밖에서도 선한 양심인데 예수 믿어가지고 선한 양심을 더 보태는 게 아니고 나의 선함이 예수 믿는다는 그걸 유인하는 게 아니고. 아 선한데 이왕 선한 거 더 착한 일 없나? 그렇지 예수까지 믿어줘야지. 이렇게 나의 선함이 스스로 시발점이 되어서 예수 믿어가지고 추가하는 게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이유 때문에 그걸 선한 양심으로 본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아니하면 어떻게 규정받습니까? 선한 양심 있어요, 없어요?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아니하면? 선한 양심이 아니죠. 양심이라는 말을 쉽게 하지 않았습니까? 마음이라 했지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 마음 씀씀이, 그 마음가짐이 예수님의 뜻과 합치돼요, 합치 안돼요? 합치가 안된단 말이죠. 합치가 안되면서 자기 딴에 선하다고 우기니까 이게 더욱더 하나님의 뜻에 위반하고 방해하는 자가 된다 이 말입니다. 오늘 분위기 너무 고요하다, 지금. 고요해요. 마치 메시아가 오기 직전같아. 사방에 눈이 오고 마리아는 안에서 기도하고 있고 천사가 곧 내려올 거 같아. 이 천사 분위기에요, 너무 조용해가지고.

죄의 규정을 지을 분이 하늘에서 따로 내려와요.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은 자기가 죄가 뭔지 의가 뭔지를 규정할 수 있는 자격이 없어요. 죄만 주어지는 게 아니에요. 죄와 더불어서 같이 이것이 죄다 라고 알려줄 그 분도 같이 하늘에서 이 땅에 내려오신 겁니다. 예수님은 뭘 증거했겠어요? 바로 죄를 증거하는 거예요, 이 땅에서. 너희들이 알고 있는 죄 규정은 엉터리라는 거예요. 또 뭘 증거하겠어요? 의를 증거하겠죠, 복음 증거하겠죠. 예수님은 그 자체가 하늘나라 증거하시는 분입니다. 천국 증거하죠.

그런데 증거했는데 이 땅의 사람들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자동적으로 자기를 뭐로 봅니까? 선한 사람으로 보죠. 갑자기 이 땅에서 두 개의 선함이 배틀, 경쟁하게 생겼습니다. 인간들은 자기를 선하게 보거든요. 자기 부모들이 자기를 그렇게 했어요. 아이고 착하기도 해라.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가 착한 줄 알아요.

초등학교 앞에 가가지고 꼭 인터뷰 해봐야 압니까? 초등학교 가가지고 자, 의존교회에서 나왔는데 하나 물어볼게. 설교에 의해서. 네가 착하다고 생각하나, 악하다고 생각하나? 저 착하다고 생각해요. 그 다음. 너는 착하다고 생각하나, 악하다고 생각하나? 착하다고 생각해요. 근거를 대라. 우리 엄마가 나보고 착하다고 해요. 네가 악하다고 생각해본 적 없나? 그런 건 없어요.                              

제가 물어볼게요. 대부분이 착한데 하나가 악하면 착한 사람입니까, 악한 사람입니까? 대부분이 착한데 조금, 한 구석이 악하다면 그 사람이 착한 사람이에요, 악한 사람이에요? 들어오자마자 질문해서 죄송합니다만. 인간의 마음은 같은 마음 아닙니까? 같은 마음에서 악한 마음이 나왔다는 말은 비율이 다수가 착하다고 해도 항상 악한 마음이 있다는 것은 그것을 온전한 착함으로 봐주지 않습니다.

온전한 착한 마음이 아니면 거기서 죄가 무엇인가 하는 규정은 오류가 일어나요. 기계가 고장 났으면 제품이 하자가 있기 마련이거든요. 내 마음이 착한 마음이 아닌데 착한 마음도 아닌 게 성경 보면서 자기가 이거는 죄고 이거는 죄가 아니고 성경이나 세상을 보면서 저거는 죄고 저거는 죄가 아니라는 그 판정을 우리가 믿으면 안돼요. 믿을 수가 없어요.

다른 분을 초청해야 돼요, 다른 분을. 제대로 죄, 제대로 의를 아는 분을 초청해야 되는데 우리는 그렇게 초청할 마음조차 없어요. 왜냐 하면 죄와 의에 대해서 나름 내가 알기 때문에 이거는 죄다 아니다 자꾸 우기고 싶은 겁니다. 그러면 내가 아는 죄 규정으로 인하여 무엇이 발생되느냐 하면 이게 발생돼요. 저런 놈은 감옥에 집어 넣어라 하는 게 발생돼요. 내가 아는 죄의 규정에 따라서 감옥을 만들어 놓고 저런 나쁜 놈은, 이 안에 있는 놈들은 나쁜 놈이 돼요. 저런 나쁜 놈은 교도소 집어 넣어야 된다 이렇게 규정을 하는 겁니다.

예수님 재판 받을 때 죄인으로 판정났습니까, 의인으로 판정났습니까? 재판 결과가. 죄인이죠? 그 말은 뭐냐 하면 이 세상 자체에 따로 교도소가 필요치 않다는 거예요. 왜? 세상 자체가 교도소이기 때문에. 세상 자체가 감옥이거든요. 여기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이게 다 어디서 이루어집니까? 감옥 안에서 이뤄지죠, 감옥 안에서.

포괄적이라니까요, 포괄적. 이 안에서 사람들은 전부다 개개인 자기 가치와 자기 생각만 하고 있는데 높다란 벽에 갇혔다는 생각을 그들이 하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들은 하지 못하고 뭘 만드냐 하면 교도소 안에 교도소를 만들어 놓고 교도소 갇힌 인간들은 나쁜 사람, 정경심 같은 사람, 나쁜 사람. 나는 교도소 안 잡혔으니까 나는 어느 부류다? 착한 사람. 둘을 이렇게 나누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어디 갔습니까? 교도소 안에 들어갔거든요. 하늘에서 오신 분이 교도소 안에 죄수로 잡혔잖아요. 요새 같으면 수갑 채웠잖아요.   

제가 여러분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 성령받지 않은 다른 사람들에게 일반 교회 다니는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하게 되면 그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렇게 이야기해요. 나 예수 안 믿을래 이렇게 나온다고요. 이 세상이라는 교도소 안에서 예수 믿는다는 게 죄에요. 왜 죄냐 하면 교도소 안에 있다는 것을 이 사람들은 인식을 못한 나쁜 마음, 온전하지 못한 마음, 착한 양심이 아닌 상태에서 예수 믿겠다고 하는 것도 하나의 폭력이고 주님에 대한 모독이라니까요, 이게.

제가 유튜브 강의에서 교회 기둥에 뭐 붙이라 했는데, 기둥 두 개에 표어를 하나씩 붙이라 했죠? 한 쪽은 믿지 마!, 한 쪽은 오지 마! 기둥에 한 번 붙여 볼까요? 만약에 예배당에 기둥이 여기 있다면 보통 예배당 기둥이 있다면 뭐 써붙이잖아요, 뭐 선지자에게 잘해라 그런 거 붙이잖아요, 성경구절. 여기에 오지 마, 여기 한 쪽에는 믿지 마. 쌍으로 마, 마. 오지 마, 믿지 마. 이렇게 이야기하게 되면 야, 사람들이 그래 나 예수 안 믿을게. 이래 나오죠.

내가 예수 안믿을 수 있다는 그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예수 믿는다는 그것은 가짜 믿음이에요, 그게. 언제든지 나는 예수 믿는 것을 철회할 수 있는 자율권이 나한테 있다는 그 자체가 이거는 예수님하고 장난치는 거예요. 그건 친목모임단체죠, 그거는.

예를 들면 진도 트롯 가수 송가인 가는데 보통 송가인이 이동하게 되면 대형버스 4대에 아줌마, 아저씨들이 뒤따라가요. 방탄소년단 아미 팬 못지 않습니다. 대형버스에 4대, 시작부터 끝까지 다 따라 다녀요. 뭐 봉 만들고 하면서 다 따라다닌다고요. 그런데 그 중에 한사람이 만약에 그 송가인이라는 가수가 악수를 해야 되는데 악수를 안해줬다 그러면 삐져가지고 난 당신 팬 안할래. 그러면 그만인 거예요. 그만이죠, 뭐. 송가인 팬도 있지만 홍자 팬도 있거든요. 홍자 팬은 홍일병이라 해요. 그 사람들은 어딜 가든지 다 따라가요.

꼭 베드로 같아, 정말. 주님 가신 길에 다 따라가는 거예요. 어떤 마음으로? 선한 마음으로. 선한 마음으로 가요. 문제는 제자들이 선한 마음으로 갔기 때문에 결국은 예수님을 배신할 수 밖에 없었던 거예요. 자신의 선한 마음을 주님께서 호응을 해주지 않았던 거예요. 동조를 안한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내가 예수님 사랑하고 예수 믿습니다’에 대해서 예수님이 거기서 동조를 안한 거예요. 호응을 해주지를 않는 거예요.

자, 강의 처음부터 다시 들어갑니다. 예수도 안 믿으면서 오늘 성경 본문을 보는 사람들은 뭐냐 하면, 선한 양심을 갖게 되면 고난이 온다, 아니면 있던 고난도 사라진다. 어느 쪽을 원하겠어요? 선한 양심이라면. 왜? 선하잖아요. 선한 양심이 되면 고난이 오는 게 아니고 있던 고생도 끝이어야 되는데 성경은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선한 양심이 있다면 필히 뭐가 온다? 고난이 온다는 거예요. 이래도 믿을래? 그래서 사람들은 나 예수 안 믿을래. 이렇게 한다고요.

자, 여기서 일단 정리해봅시다. 죄가 뭐냐? 할 때 ‘이것이 죄라고 내가 생각합니다’ 라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죄가 돼요. 죄는 어디서 생기느냐 하면, ‘이거 혹시 죄 아니야?’ 할 때 죄가 생겨요. 왜냐하면 이것이 죄이다 할 때 긍정적 개념이 아니거든요. 사람이 죄라고 생각할 때는 이것은 필시 그 뒤에 뭐가 배치되느냐 하면 이거 자칫하면 내가 손해보는 거 아닌가 라는 두려움과 걱정을 수반해서 죄가 뭐지? 이거 혹시 죄 아니야? 라고 생각하기 마련이에요.

죄짓고 싶어서 환장해가지고 또 죄 없나? 이러지는 않는단 말이죠. 죄를 즐겨 짓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어요. 아이고 이거 혹시 죄 아니야? 내가 실수해서 죄 지은 거 아니야? 걱정이 되어서 죄가 뭐냐 라고 공포에 휩싸이면서 죄에 대해서 묻지 않습니까? 그렇게 묻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평소에 하나님 뜻은 관심이 없고 나한테 어느 것이 이익이냐 내 인생에 뭐가 손실이 올까를 늘 염두에 두고 살아갔던 자기의 모습이, 자기의 본색이 톡,하고 들켜 버린 거예요.

제가 신학교 다닐 때 기차타고 가면서 늘 뭘 보느냐 하면 기차 바깥에 풍경들이 있지만 어디가 눈에 들어오느냐 하면 바로 교회에 눈이 들어와요. 바로 예배당. 나도 빨리 졸업해가지고 저렇게 조그만 예쁘장한 예배당에서 단독목회하면 얼마나 좋겠노. 교인들은 많아도 골치 아프니까 그저 한 오십 명, 오십 명이 거저 되는 줄 알고. 그 때는 오십 명 거저 되는 줄 알았죠, 순복음도 있으니까. 욕심 팍 줄여가지고. 그냥 외치면 오십 명 되는 줄 알았지. 뭐 개 눈에는 똥밖에 안보인다고.

사적인, 개별적인 기대가 그 많은 건물들 속에 교회만 보게 했죠. 결국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교회를 골라 본다는 것은 이미 출발점이 나의 은근한 기대와 목표를 거기서 전제로 깔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제시하는 기대와 목표는 나에게 손실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해서 목표를 세웁니까, 내 가치를 높여 준다고 생각해서 그런 목표를 정하겠어요? 나의 가치를 높이죠. 그러니까 나의 가치를 높인다는 생각 자체가 이게 뭐냐 하면 내가 악한 자로서 세상이라는 감옥에 갇혔다는 생각 자체를 완전히 거부하고 있는 거예요. 그 자체가 죄라니까요, 논리적으로.

그냥 내가 사는 것도 이 발걸음을 세시고 모든 공기 마시고 사는 것도 선물이니까, 공짜로 얻은 거니까 주님께 감사합니다. 이렇게 사는 것하고. 아, 내가 오늘 강의 잘했을까, 못했을까 혹시 내가 실수 안했을까? 혹시 내가 말 잘못해서 남한테 상처를 주지 않을까? 아, 내가 그런 죄를 짓다니 라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그렇게 생각이 번뜩 떠올랐던 그 자체가 갑자기 주님 생각에서 방향을 돌려서 누구 걱정하고 있는 거예요? 내 걱정하고 있잖아요.

그 동안 내가 내 걱정해서 내가 이만큼 살았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다, 선물로 살았다고 이거는 소위 교회 조금 다닌 사람들은 입에 달고 하는 소리 아닙니까? 입에 달고 사니 무슨 소용 있습니까? 결국 은혜라고 언급을 하면서 자기의 마음은 나한테 손실이 될까, 이익이 될까 그것 계산만 하는데요.

주님께서 의도적으로요, 우리에게 죄의식을 남기는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공로가 우리한테 기어이 못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해놓고 ‘실수했다, 아 그것만 없었으면 완벽했는데. 아 그때 진짜 그 말 왜 했을까’라는 어떤 실수했다, 잘못했다 라는 자기 자신의 부족함에 대해서 굉장히 애통해하게 하는 것, 그러한 감각을 의도적으로 집어넣어요. 그러니까 인간이 인간 힘으로 의인될 수 있고 죄인 아닐 수 있는 방법은 있다, 없다? 없는 겁니다.

제가 죄라는 것은 죄의식을 느끼는 그 자체가 죄라고 한 것은, 그런 짓 하지 마세요가 아니라 주님께서 그런 경우를 의도적으로 발생시킴으로 말미암아 내가 나된 것은 결코 나의 철저한 자기 관리가 아니고 완벽에 완벽을 기해서가 아니라 못난 인간, 주의 은혜에 감사하라고 우리로 하여금 실수를 인식하게 하는 겁니다. 실수를 인식하는 거예요.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은 선한 일을 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고난을 받는다 했을 때에 그 말씀을 지켜라가 아니라 네가 아무리 완전하게 살아도 고난 받는 것을 누가 그리워하고 누가 원하겠습니까? 자기 생의 목표가 고난 받는 겁니까? 일생의 목표가? 고난 받는 거다, 자식 출세하는 거다. 몇 번입니까? 자기가 고난 받는 게 목적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일이 잘 안되면 어? 당황스럽죠. 그게 우리가 독자적으로 온전치 않다는 뜻이에요. 독자적으로 온전치 않게 하시는 그 분이 온전치 않다고 여기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이 되는 거예요. 왜? 스스로 만족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그 구조가 내 스스로 완벽함에 의해서 훼손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아들 장가보내놓고 가끔 아들하고 며느리하고 오게 되면 시어머니, 시아버지가 늘 신경쓰이는 것이 아들한테 신경 안쓰여요. 혹시 며느리가 우리 집에 왔다 가면서 우리가 어른다운 행동을 못했을까, 허점을 보이지 않았을까 내가 말을 잘못해서 화가 나가지고 우리한테는 못따지지만 집에 가서 자기 남편을 아주 삶아버리던지 쥐어 뜯는다던지 괜히 우리 때문에 아들한테 해코지한다던지 자기 분풀이를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죠.

걱정이 될 때, 그러면 그 며느리 누가 보낸 겁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거죠. 그러면 그 걱정을 통해서 뭐가 좌절되느냐 하면 나는 시가집 가족으로서의 모든 완벽함이 누가 왔다 가면 그게 한 곳이 무너져요. 그래서 걱정이 되어가지고 전화 해본다고요. 며늘 아가야, 네가 너한테 뭐 없었나? 아이고, 그저 감사하죠 앞으로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내가 평소에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런 말 들어야 이제 안심이 된다 이 말이죠. 그래 내가 생각한 것보다 며느리가 화가 덜 났구나.

따라서 인간은 결국 며느리 또는 딸 이렇게 하지만 결국 인간은 누가 누구를 감시하는 거예요? 누가 누구를 감시하는 겁니까, 끊임없이? 내가 나를 감시하면서 선한 양심이 유지되도록 계속해서 자기를 점검하는 거예요. 그러니 그렇게 되니까 뭐가 날라가 버려요? 은혜 다 날라가죠, 은혜 날라 가니까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다 날라가 버린 거예요. 쥐고 있는 것은 나는 완벽해 그것만 쥐고 있는 거예요. 나는 완벽하니까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너무 책벌하지 마세요. 나는 할 도리 다 했으니까.

그러면 죄 안짓는 방법은 10분 후의 감정을 미리 생각하지 않는 거예요, 10분 후의 감정을. 10분 후에 그 사람이 어떤 감정인지, 10분 후에 내가 어떤 감정인지 그건 아예 생각하지 않는 거예요. 지금 내가 할 도리가 뭐냐. 그것만 내뱉어 버리고 그것만 할 뿐이에요. 10분 후 되어봐야 그 10분이라는 기간 동안에 하나님께서 상황배치를 어떻게 바꾸어 놓을지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지금 그 상황 그대로 간다는 보장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가 이런 이야기했어요. 들뢰즈라는 학자가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상당히 음미할만한 이야기를 했어요. 인간은 희극과 비극을 반복해요. 이 말이 맞는 이야기인게, 한 번 웃었다는 기준이 설정되게 되면 그 웃음의 조건이 나중에 희미해져버리면 계속 못 웃게 되니까 상대적으로 뭐가 돼요? 비극이 되는 거죠. 그러니 이미 비극이 됐죠. 희극에서 비극이 됐죠? 비극 됐는데 갑자기 뭐하나 생기면 갑자기 기분이 업, 좋아지죠. 그러면 뭐 됩니까? 희극이 됐죠. 희극과 비극이 계속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인생을 산다 이 말입니다, 반복해서. 새로운 상황 속에서.

아무리 나쁜 일 있어도 좋은 일이, 열 가지 중에 한 가지는 있다고 사람들이 그렇게 억지 주장을 하는데 희극과 비극이 반복된다는 말은 이렇게 (일직선으로 죽) 가는 법은 없다는 말입니다. 그냥 죽 이렇게 가는 법은 없다. 왜 그러느냐 하면 처음부터 인간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기 때문에 이걸 똑바로 펼 수는 없어요. 이미 올라갔으면 내려가는 것을 걱정하고 내려갔으면 올라가는 것을 또 기대하기 때문에 똑바로 가는 게 없어요.

자, 그러면 희극은 왜 생기느냐? 결핍에서 생기고 비극은 과잉에서 생긴다는 말을 했어요. 이것은 왜 웃느냐? 무식해서 웃고요. 왜 슬프냐? 과잉지식이 있으면 아는 게 너무 많아서 우는 거예요. 아는 것이 많으면 목표가 많아지게 되거든요. 지식의 과잉 때문에 운다는 거예요, 지식의 과잉. 이 비슷한 이야기가 전도서에 있어요. 책을 많이 보고 공부를 많이 하고 책을 많이 써도 아는 게 많으니까 기대하니 기대치가 높아지겠죠? 그러나 결과는 조용하죠.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아요. 그러면 상대적으로 실망이 되죠. 비극 아닙니까? 실망.

지금 이 들뢰즈라는 철학자가 뭘 빠뜨리고 있어요? 하나님의 은혜, 다 빠뜨리죠. 그러니 소소한 감사를 위해서 그저 희극이나 원한다 이 말이죠. 그러니 희극할 때는 왜 웃느냐 하면 손을 이렇게 긁어요 (뒷통수를 긁으면서). 이히히 이렇게 웃거든요. 아이고 그건 몰랐네 그러면서 웃는다 이 말이죠, 겸연쩍어서. 미안한 투로. 아이고 내가 미쳐 몰랐어, 아이고 웃고 넘깁시다. 이렇게 웃을 때가 내가 그것까지는 몰랐다 할 때 웃는 거예요. 엄마 나 100점 맞았어. 평소에 수학을 20점 맞는 애가 갑자기 100점 맞으면 걔가 100점 맞을 줄 몰랐잖아요. 아이고, 그거 잘했네 이러잖아요. 그런데 걔가 늘 100점 맞는데 엄마, 나 100점 맞았어 하면, 어쩌라고 뭐. 니는 원래 100점이잖아. 뭐 또 나한테 무슨 소리를 듣기를 원하는데? 너무 많이 안다는 것이 탈이 난 거예요. 너무 많이 아는 게 말썽을 일으키는 겁니다, 많이 아는 게.

그런데 사람은 그럼에도 더 알기를 원하는 것은 뭐냐 하면 자기의 완벽함에 실수를 줄이기 위해서 완벽에 완벽, 철저에 철저를 기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자기 수비 자세로 나가는 거예요. 죄는 멀리하고 선은 가까이 하고. 그렇다면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어서 죄는 멀리하고 선은 가까이하고 악은 멀리하겠죠. 그러면 하나님의 방법은 어떻게 됩니까? 반대로 되죠. 공격적으로 죄지어라 이렇게 됩니다.

이것이 죄라고 만약에 성경에서 이야기하게 되면, 성경도 죄라는 항목이 많잖아요. 뭐 간음, 음란, 탐욕, 당짓기 나오잖아요. 이것이 죄가 되어 버리면 인간은 그렇지 않아도 수비형으로 나가요. 죄 안짓는 쪽으로 도망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이것이 죄다 하는 것은 이 세상 자체가 이미 빠져 나갈 길 없는 하나의 감옥, 교도소로 이미 확정을 지어 놓은 거예요. 교도소에서는 출세해도 죄수에요, 출세해도. 이 세상에서 우리가 먹고 있는 것은 전부다 흰 두부라고 보면 돼요. 흰 두부 아시죠? 죄짓고 난 뒤에 먹는 두부.

다시 말씀드립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올 때 빈손으로 오신 것이 아니고 어떤 규정을 갖고 왔는데 뭐냐 하면, 이것이 죄다. 나를 모르는 것이 바로 죄고 그것이 지옥행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언약을 이루도록 왔기 때문이에요. 예수님께서 언약을 이루러 왔다는 것을 사람하고 의논한 적도 없고 일방적이죠. 그래서 일방적인 것에 대해서 마음 열고 안 받아들이면 너는 일방적으로 당한다. 이것이 성경의, 주님의, 하나님의 취지입니다.

내가 기다 하면 긴거야, 이런 거예요. 내가 그렇다 하면 그런 거야. 포괄적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의 증인이에요. 자, 예수님이 죄의 증인이라면, 의의 증인도 물론 되죠, 천국 증인도 되고. 예수님이 죄의 증인이라면 그러면 성도는, 예수와 함께 있는 성도는 무슨 증인이 되어야 할까요? 예수님이 죄의 증인이라면 성도는 뭐가 되어야 될까요?

죄의 증인 돼야 되죠.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바로 여기 나옵니다. 베드로전서 3장 16절에 보면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뭐를 당한다? 부끄러움을 당한다. 따라서 우리를 이 땅에 남겨두는 이유는 우리 주변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기 위해서. 그 부끄러움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일종의 그들의 무지함, 그들이 잘못 생각했음. 그들이 자기 처지도 분간 못했음. 그런 것을 성도를 통해서 노출시키죠. 노출시킬 때 그 사람들이 개과천선하고 잘못되었습니다. 할까요, 아니면 핍박을 할까요? 당연히 핍박을 하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고난 받죠.

자, 성도가 고난 받는 이유는 예수님이 고난 받는 이유와 동일합니다. 규정이 달라서 그래요.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규정이 세상 사람들의 규정과 달라서 그래요. 자, 세상 사람들의 규정과 왜 다른가? 세상 사람들은 뭐가 잘못 되었는가? 자기 자신을 뭐로 본다? 착한 사람으로 보는 이 시발점이 잘못 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자기를 착한 사람으로 여기는 그 출발점 자체가 잘못 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에게 고난과 핍밥을 가할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18절 봅시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이렇게 되어 있죠? 참, 이런 말은 정말 어려워요. 함축해도 너무 함축이 많이 되어 있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죄가 필요한 이유가 나타나요. 이 세상이 죄의 바다가 될 이유가 있어요. 그건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뭘 받기 위해서? 죽어야 하기 때문에. 참, 이걸 이 고요한 분위기에서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 걱정 되는데요. 다시 한 번 천천히 하겠습니다. 그냥 하려고 하니까 참 논리가 너무 어려워서 그런데 쉽게 가겠습니다.

인간의 관심사가 어디 있느냐 하면 자기 죄에 있는 게 아니라, 죄가 뭐고 의가 뭐고 그런 거에 관심 없어요. 그냥 밥 먹고 사는 거예요, 인간의 관심사가. 일단 밥 먹고 살고 남한테 욕 안얻어먹고 남한테 사랑받고 사는 거. 그게 다예요. 밥되고 건강되고 사랑되고. 이거 합치면 행복이지 뭐가 있어요? 밥을 다른 말로 하면 돈되고 건강되고 남한테 우대받고.

악마의 첫 번째 시험, 두 번째 시험, 세 번째 시험 아닙니까? 뛰어 내려라, 받쳐 줄 것이다. 네 몸 아픈 거 너 무섭지? 천사가 와서 안 다치게 한다면서? 이게 시험이잖아요. 사람은 무슨 힘으로 삽니까? 밥심으로 산다고 하잖아요. 그러면 주님은 무슨 힘? 복음으로 산다. 지금 이게 맞을 리가 없죠. 우리가 성경에 관심이 없으니까 이게 밥으로 살고 건강하고 사랑 받으면 된다 이걸 아주 정상으로 본다, 정상. 이게 바로 우리가 이런 걸 안하는 것이 선하다고 할 수 있는 증거라고 여기는 거예요. 우리는 나 잘남의 증인인 거예요.

10분 쉽시다.
 이하림(IP:124.♡.210.16) 19-11-10 07:35 
서울의존강의20191107b 베드로전서3장 16절(선입견 공략)-이 근호 목사

그리스도 안에서는 죄가 없는데 내가 이게 죄가 아닐까 하는 순간, 없던 죄가 추가적으로 생산되는 거예요. 죄가 없는데 아, 이거 죄일거야 하는 순간 죄가 죄책감에 확 다가오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주님께서는 뭐냐 하면 죄를 유발하는 그 중심이 바로 너라는 말이죠. 주님 안에서는 죄가 없어요. 없는데 본인이 걱정되는 거예요. 본인이 왜 걱정되느냐 하면 죄가 무엇인가 궁금한 게 아니고 혹시 죄짓게 되면 이틀, 사흘 뒤에나 앞으로의 일, 내가 벌여 놓은 일에, 나한테 손실을 줄까봐 싶어서 겁을 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손실이 문제가 아니고 내가 죄가 뭐냐 하는 순간 내 것, 내 영역을 따로 챙겼다는 이게 죄가 되는 거예요. 내 것이 없어도 되는데. 그리고 다 주님 거거든요. 주님 것이다 이 말이죠. 마음이라 하는 것은 이미 자기가 살아오면서 누적된 거거든요.

그러면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의 마음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이 주신 거잖아요. 내 마음이 아닌 거예요. 예수님이 주신 마음 아닙니까? 예수님이 주신 마음에는 죄냐 의냐 하는 것을 이미 넘어선 생명나무 세상에서 제공된 마음인 거예요. 죄가 있을 리가 없지요. 왜냐하면 죄 씻고 난 뒤에 주신 마음이기 때문에 그 안에는 ‘죄가 없다 의밖에 없어’ 하는 그 내용만 줬는데, 그렇게 받고 난 뒤에는, 주님께서 너 죄 없다 할 때에는 결국 무엇을 포기하라는 말이에요? 나만의 영역, 나만의 개인적인 세계 자체가 무의미하다. 의미없음을 네가 인식하라는 이야기거든요. 이게 무슨 마음이냐 하면 선한 마음이에요.

마음이 선하다는 말은, 이 선은 누가 가져다 주는 선이냐 하면 우리가 선하게 해서 선이 아니고 주님이 우리 만날 때 주님의 선함이 여기에 온 선함이에요. 그래서 이 선함에는 뭐가 없습니까? 일말의, 조금의 악도 이미 해결된 거예요. 해소된 마음이에요, 그 마음이. 그런데 그 마음을 가지는 순간 이미 그게 악한 마음이 된다니까요.

이 선한 마음은 우리가 가질 이유가 없어요. 주시는 것이지 우리가 달라 해서 주는 게 아니거든요. 왜냐면 우리가 달라해 버리면 내 영역이 또 따로 형성이 되어 있어야 한다 이 말이죠, 형성이. 아까 저한테 빵 주셨잖아요. 나는 빵 대신 짬뽕 주세요. 이게 성립이 됩니까, 안됩니까? 이게 중국집도 아니고 갑자기 짬뽕을 왜 찾아요? 이 말은 주는 대로 먹어라, 인간아. 주는 대로 먹어야 돼요. 주는 대로 먹으란 말은 내가 뭘 먹고 싶다는 것을 주최측에서 완전 개무시해버렸다는 거예요.

주님은 우리를 몰라요? 우리를 알아요. 교도소 안에 있는, 감옥소 안에 있는 인간이 어떤 줄 알거든요. 자기를 뭐로 봅니까? 선한 인간이라고 까불락대잖아요. 강남강의에서 했잖아요. 아직 까불이 안잡혔다고. 공효진 불쌍해 죽겠어, 아직 까불이 안잡혀가지고. 우리는 지금 까불까불대는 거예요, 지금. 라이터 놓고 사료해서 흔적만 남기는데 누가 죽인지 몰라요, 하여튼. 언젠가는 잡히겠지.

이미 우리는 잡혔어. 우리가 감사한 것이 까불대다가 우리가 까불이라고 이미 체포됐어. 체포됐기 때문에 용서를 해주시는 거예요. 네가 앞으로 잘할 가능성 있다, 없다? 없어요. 주님 보시기에 없는데 왜 우리한테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 우리가 가능성을 둡니까? 잘할 거라고. 잘될거야. 뭘 잘돼, 잘되기는? 뭘 잘돼요? 잘될 구석이 있어야 잘되죠, 까불인데. 나밖에 모르는데 뭘 잘돼요? 이런 인간을 세상에 보냈으니까 주변의 까불이들이 고난을 안주겠어요? 주죠.

성도라는 이유 때문에 우리는 이 땅에서 핍박을 받는 것을 감사하세요. 선악이라는 그 논리구조를 넘어서버렸다니까요. 생명나무 영역에서 선악을 보고 있는 입장이에요. 그래, 내가 참 저기에 시달렸지.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의 이 모든 말씀은 결국 무엇의 공격이냐 하면 나의 선입견에 대한 공격이에요. 선입견을 문제 삼습니다. 저 사람은 교도소 가야 돼,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야 또는 내가 이런 행동 하는 것은 참 나쁜 것이다 할 때 주님께서 하는 말이, 내가 의롭다고 하는 건데 네가 뭔데 나서서 그걸 죄 있다 하느냐 네 몸, 네 마음이 네 거 아닌데, 나는 너를 의로운 몸이라고 간주했는데 너는 도대체 무슨 기준으로, 엉뚱한 기준을 가지고 와가지고 그걸 악하다, 나쁜 짓했다, 죄인이다라는 말을 왜 하냐 이 말이죠. 그건 네 선입견 자체가 주님의 의견을 지금 모독하는 행동이 되는 거예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성도라고 하면서도 고난 받기를 기피하는 이유가 뭐냐? 그 이유는 간단해요. 나같이 착한 사람, 고난 받는 게 아니고 상을 받아야지 하고 피해버리는 거예요. 예를 들면 교회에서 전기공사를 하는데, 재료값만 주고 공사를 하는데 한 사람은 열심히 붙들고 공사해요. 그런데 다른 사람은 나는 힘들어 안할래 도망쳤다고 합시다. 자, 도망친다는 것은 현장에서 피한 거죠. 현장에서 왜 피한 겁니까? 이유는 간단해요. 힘드니까. 힘드니까 피한 거예요.

아까 악마 유혹의 3종 세트 이야기했죠? 뭐가 필요하다? 인간은 밥심으로 살아간다. 지극히 상식적이고 누가 들어도 옳은 거죠. 그 다음에 인간은 건강하고 싶다. 세 번째는 세상으로부터 나는 이쁨받고 사랑받고 싶다. 다른 말로 하면 사랑은 곧 뭐냐 하면 보험이다. 누가 나를 보호해줬으면 좋겠어, 지켜주고. 관심 가져주고 내가 힘들 때 도와주고 그랬으면 좋겠어요 라고 생각하죠.

아가씨들이 남자를 원하는 이유는 보디가드, 충실한 보디가드 하나 얻기 위해서 결혼하는 거예요. 내가 어려울 때, 심심할 때 말동무해주고 내가 울고 싶을 때는 위로해주고 기쁨이 있을 때는 같이 나누고 그런 것을 여자 입장에서는 짝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남자 입장에서는 뭐냐 하면 빨래해주고 밥해주고. 말 잘 듣고 남편 시키는대로 하고 밥해주고 빨래해주고. 밥도 그냥 해주는 게 아니라 맛있게 반찬해서 주고 남편이 무슨 짓을 해도 잔소리 안하고 호응해주고.

그런 여자? 없습니까? 없습니다. 무슨 그런 여자 있겠어요. 그런 남자 있습니까? 없어요. 없을 수밖에 없죠. 전부다 개인의 사적 자기 욕망이 있기 때문에. 사적 욕망이란 자기 과거가 누적된 거거든요. 그러니까 내 과거 누적된 것과 네 과거 누적된 것이 만났으니까 제대로 합치될 수가 없죠. 기껏 하는 게 정치적인 협상, 타협 그런 겁니다.

자, 이렇게 되는데 고난 받는다는 말은 이 세 가지 중에서 어느 것 하나가 손실이 난다는 뜻이잖아요. 전기공사 하는데 힘들다. 왜? 건강이 힘들다, 나 빠질래. 피했죠? 고난을 피했잖아요. 왜 피합니까? 바로 뭘 지키기 위해서? 나만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서. 내가 생각한 나의 세계를 그냥 유지하기 위해서 하는 거죠. 그럼 왜 유지하느냐 물어보면 나는 원래부터 착하기 때문에. 이 안에서는 항상 나는 착한 존재가 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양심으로 고난 받는다는 말이 우리 인간의 행함으로 달성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지금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제가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첫 시간 끝부분에 이렇게 했죠. 공격적으로 나가라 했죠.

뭐냐 하면 사람이 자꾸 피해버리면 자기가 착한 사람 돼요. 그런데 공격적으로 나와 버리면 노출되어 버리죠. 그러면 주위에서 네 행동은 나쁜 행동이야, 너 저래서는 안돼 라고 공격이 오겠죠. 오히려 죄인이라는 소리를 들으므로 말미암아 내가 과연 어느 선입관에 의해서, 주님의 선입관과 내 선입관 어느 것에 나는 지금 마음을 갖고 있느냐가 드러나는 기회가 되는 거예요. 주위로부터 포화를 받고 주위로부터 잔소리를 들어가고...

그러니 공격적이라는 말은 나 착해, 그건 실수였어. 자꾸 비실비실 도망치지 말고, ‘그 때 그 일은 내가 어떻게 하고 싶었네. 안하게 되면 후회할 것 같아서 했어’ 이렇게 공격적으로 나오라 이 말이죠. 나오게 되면 주변에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16절 다시 읽겠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하여금 그 비방하는 일이 뭐가 된다? 부끄러움을 당하는 거예요.

저 사람은 진짜 때려죽일 사람이다 라고 욕했는데 주님이 나서서 뭐라고 합니까? 요한복음 8장에, 간음한 여자를 현장에 데려와서 돌로 쳐죽이려고 하기 직전에 주님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들 가운데 죄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했죠? 그들이 그 소리 듣고 떳떳할 것 같으면 그 자리에서 돌 던졌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 말씀 하는 것은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에요.

밧세바라는 사람 아시죠? 밧세바. 밧세바가 다윗한테 당해가지고 복받았어요. 다윗한테 안당했으면 지옥갈 거예요. 밧세바가 자기 이해를 넘어서서, 다윗이 남편이니까 누구까지 이해가 됩니까? 남편의 세계까지 이해가 된 거예요, 남편의 세계까지. 밧세바가 우리아 죽였다고 삐져가지고 따로 삽니까, 어떻게 삽니까? 전남편 죽고 난 뒤에 전남편한테 너무 미안해가지고 같이 수절하거나 따라 산위에 가서 뛰어내리고 투신자살하고 이랬습니까? 전남편 우리아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으로? 사랑같은 소리 하고 있어요. 현남편은 왕인데? 죽은 놈은 죽은 놈이고 팔자 고쳐야지. 옛날 남편은 이미 없어요. 주위에서 뭐라고 했겠습니까? 수절해라, 이 과부야. 그래, 니 남편을 죽인 원수와 결혼하나? 진짜 니는 나쁜 여자다. 뭐 그런 소리하겠죠? 거기에 대해서 당당하다 이 말입니다, 밧세바가. 당당한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마리아가 임신하고 난 뒤에 요셉 있잖아요, 요셉이 가만히 끊고자 할 때에, 그 요셉이 얼마나 사람이 신사적입니까? 자기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 만나서 임신을 했는데... 그 동안 가방 사줬지, 옷 사줬지 철따라. 그게 아까워서 데이트폭력도 할 만한데 사람이 얼마나 침착하고 양심적인지 그냥 문자로 보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왕 임신한 거 할 수 있나. 그래, 니 좋아하는 남자 있는 모양인데 우리 여기서 조용히 헤어지자, 내 문제 삼지 않을게. 이렇게 나온 거예요. 이렇게 나오나 폭력적으로 나오나 마리아하고 떨어지겠다는 생각은 한결같잖아요.

그런데 능히 누가 개입했느냐? 바로 하늘의 천사가 와서 개입해버립니다. 요새 말로 하면 예수님이 개입한 것과 똑같아요. 예수님이 개입해 보니까 내가 알았던 이 선입관이 얼마나 허술한 선입관인지. 내 잘못된 판단 때문에 내 아내 임신한 것에 대해서, 기존에 내가 알던 것을 다 주워 모아서 너는 나쁜 여자라고 규정했던 그 규정, 그 죄와 의에 대한 규정 자체, 죄, 선, 악에 대한 규정 자체가 이게 바로 죄가 되고 악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거예요. 누가 누굴 욕해요? 다같은 수용자 입장에서, 다같이 교도소에서 지금 지내고 있는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왜 모든 인간을 죄 아래 가두어 두었습니까? 왜 죄라는 감옥에 집어 넣었습니까? 어느 하나 문제없는 인간 없고 어느 하나 제대로 된 인간, 아무도 없다는 이야기에요, 어느 인간 하나. 다 문제 있는 거예요. 그럼 누가 옳은 사람이에요? 그런 문제점을 용감하게 드러내는 사람이죠.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이 말이죠.

문제는 지금 교회라고 하면서 너무 조심스럽게 살아가고 있어요. 죄 지으면 하나님의 거룩이 손상되고 영광에 이르지 않고. 에이, 그게 더 영광에 이르지 않아, 그게. 그게 더 미워.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그게 뭐냐 하면 피하기에요, 피하기. 그걸 대구강의에서 꾀부리기, 요령 부리기. 교회 50년 다녔으면 50년 다니는 동안 배운 것은 뭐냐? 요령 부리는 것밖에 안 배웠어요, 요령. 변명거리를 만드는 요령. 어쩔 수 없었습니다. 라고 핑계대는 요령.

나 원래 죄인입니다. 라는 말을, 주님 보시기에 죄인입니다 라는 말을 하지를 못하고 벌벌 떠는 그것이 뭐냐 하면 어릴 때부터 교육을, 교도소에 있는 엄마로부터 태어나가지고 교도소 교육을 받아가지고 엄마가 나보고 착한 사람이래. 평생 지워지지 않는...나 착한 사람이래.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어느 엄마가 너는 나쁜 딸이라고 얘기할 엄마가 누가 있겠어요? 긍정적 마인드를 심어 준다고.

진짜 할머니들이 애 키우지도 못해. 뭐든 좀이라도 해로운 거, 밀가루도 못 먹이고...먹일 게 없어, 먹일 게 없어, 전부 다. 아토피 생긴다고 다 빼가지고. 인터넷 찾아봐가지고요, 새싹보리부터 해서 온갖 거 오메가3, 좋다는 거, 애들한테 필요한 거...그것도 모르고 엄마가 키우다가 몰래 애 엄마 없을 때, 먹어라 초콜렛, 사탕 막 먹이고...아이는 좋다고 할머니 최고. 영문도 모르고 아들은 니가 왜 할머니 최고지? 아들은 몰라, 할머니 최고. 해로운 거 다 먹여놓으니까 할머니 최고죠.

소위 진짜 자식이나 모든 걸 최고로 키우겠다는 그거, 그렇게 되면 이건 수비형이 돼요, 공격형이 되지 않고. 자꾸 변명의 꼬리가 길어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잘해보려고 하는데 상황이 그런 걸 봐주세요. 아주 비겁하게 나서는 겁니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선물됨, 감사됨이 나올 수 있는 근거를 본인 쪽에서 철회시키는 겁니다.

자, 그러면 공격적으로 자기가 죄됨을 드러내야 되는데 이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은 위에서 내려와야 되겠죠. 그 내려오신 분이 있습니다. 성경 한 번 찾아볼까요? 요한복음 3장 27절,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세례요한의 관심사는 하늘에서 주신 것에 관심이 있어요. 아, 진짜 선지자 맞죠, 예? 사람들의 관심사는, 밥심과 건강과 사랑은 내 노력에 따라서 얻었다 이러잖아요. 하늘에서 주신 게 아니고. 자기가 쪼다 안되려고. 내가 착한 인간이니 착한 값을 한다고. 착해서 성실해서 돈 벌었고 건강하고 그 다음 사랑받을만 해서 사랑받는다 우기잖아요.

그러나 세례요한은 그렇게 봅니까, 안봅니까? 하늘에서 주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 완전히 대비적이죠, 대조적이죠? 그 세례요한, 세례요한이 하늘에서 왔을 때 세례요한의 몸 자체가 새로운 선입견, 새로운 규정을 갖고 온 거예요. 그래서 마태복음 3장에 보면 세례요한이 굉장히 공격적입니다, 용감해요. 옷차림도 남달라요. 옷차림은 뭐 한독모피입었어. 광야에서 모피입고,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가죽이 양가죽인지 소가죽인지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다. 이게 상당히 돌발적이죠? 교도소에 갇혀 있는 그러한 균질성,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냥 평범하게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것과는 다른 튀는 옷차림이죠? 형식만 그럴까요, 아니면 내용도 그럴까요?

여기서, 아 참 어려운데, 세례요한의 인간성을 문제삼지 맙시다. 인간성은 빠져요. 세례요한이 있다면, 거기서 형식+내용이라면 형식은 아까 봤잖아요? 튀는 복장에다가 튀는 생활을 했다, 광야에서 생활했다고. 내용은 뭐냐? 이것은 하늘에서 주신 거죠. 중간에 뭐가 빠졌어요? 세례요한의 인간됨. 이거는 빠져요, 이건 빠진다고요. 그래서 이 말은 뭐냐? 나는 죽고 내 안에서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산다와 똑같은 원리에요. 나는 챙길 게 없다니까요. 챙길 필요도 없고 챙길 이유도 없고.

내가 지금 주에게 받은 사명이 있는데 사명 앞에 나라는 인간은 무슨 가치가 있겠어요? 주님의 선함은 딱 한가지 밖에 없어요. 복음에 지장되지 않도록 해라, 이거 아닙니까? 복음에 지장되지 않도록! 네가 무슨 짓을 해도 관계없는데 복음을 복음답게 드러내라. 그러면 복음이 복음답게 드러나려면 우리는 뭐가 됩니까? 죄인이 죄인답게 굴어야죠. 뭘 죄를 피해서 도망쳐요? 누구 좋으라고. 무엇이 허물어지는데? 복음이 허물어지는데. 복음이 허물어지면 주님께서 가만 두지 않습니다. 여우 피했더니 범 만난 꼴 되지요.

지금 천국과 지옥을 가름하는 기준은 십자가 복음뿐이에요. 교회 천 명 모이고 예배당 평수가 몇 평이고 그런 데에 여러분 속아서 가지 마세요. 그건 교도소입니다. 충현 교도소, 충현 교회, 영락 교도소, 소망 교도소. 교도소장 바뀌었다고 난리고 교도소장 연금 많이 받는다고 난리고. 연세 교도소, 또 세습 때문에 말썽났던 데 뭡니까? 명성 교도소. 그들의 형식은 종교적 형식인데 내용은 어디서 가져온 겁니까? 전부다 그 형식과 내용은 전부다 세상에서 가져온 거잖아요, 세상에서.

그걸 어떻게 장담합니까? 그 교인들이 개인의 잘남을 포기를 못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교회 괜찮다, 나 괜찮다, 우리 가정 괜찮다. 교회 왔으면 세례요한이 되어야 하는데 세례요한이 되는 게 아니고 여전히 연속적으로 이 ‘착한 나’가 교회 다녔다는 그걸로 인하여 착함에다가 더 강화된 거예요.

그리고 강화되었기 때문에 고난 받는 것하고는 점점 더 내가 상관이 없을 걸? 내 인생 이제는 편하게, 평탄하게 갈 걸? 이제 꽃길만 걸을 걸? 이렇게 나오고 있다 이 말이죠. 왜? 기도를 많이 하니까. 기도한 애씀과 그 축복을 물물교환하려고 하는 거예요. 거래한 거죠. 기도 많이 했으니까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옵소서. 상거래하고 있는 거예요, 상거래. 하나님을 상대로요. 그래서 누구 좋으라고? 자기 밥심과 건강과 사랑. 자기 칭찬받는 거. 그런 거를 목표로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마귀의 밥이죠. 악마가 얼마나 좋아하겠어요. 자기가 시킨 것만 기억하고 있으니까. 악마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만 기억하고 살거든요. 인간의 선입관이 뭐냐 하면 악마를 이길 선입관은 하나도 없고 악마에게 질 수 있는 선입관들로만 가득 무장되어 있어요. 

여러분, 제가 글 쓸 테니까 이게 누구의 구호인지 한 번 보세요. ‘차카게 살자’ 이거 누구 구호입니까? 조폭구호 아닙니까? 착하게 사는 인간이 목욕탕에 문신하고 와요? 남한테 피해주고, 문신해서 겁주고. 그 인간들이 ‘차카게 살자’나 영락교도소라든지 명성, 새문안 교도소라든지 ‘착하게 살자’나 차이점이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세례요한 보세요. 반대로 나갑니다. 성경을 제대로 한번 보세요. 내가 착하다고 보면 절대로 이게 안보인다니까요, 이게. 성경을 백독을 해도 안보여요. 나는 망해야 되는데 왜 구원받지? 이상하네. 이런 마음으로 봐야 되는데. 나는 지옥가야 되는데 주께서 나한테 무슨 짓을 했지? 그런 식으로 봐야 돼요. 보니까 이게 개인적인 자질이나 그런 것을 아예, 주께서는 아예 묻지도 않아요.

시험칠 때 이름도 쓰지 말래요. 주님이 자기 싸인을 해서 천국 보냈기 때문에 주님 싸인에다가 네 이름 쓰면 주님 싸인이 죽어요. 주님 이름이 죽는다고.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어요. 주님 싸인으로 합격이에요. 그런데 거기다가 그거 지우고 왜 ‘차카게 살자’ 이걸, 착한 나를 왜 거기에 씁니까? 목사님, 칭찬해주세요. 저 착해서 건강해요. 우리 집안이 돈 번 것은 다 내가 기도 많이 해서 그런 거예요. 이걸 거기다가, 주의 이름에다가 왜 그걸 씁니까? 그 피흘림에다가, 그 위에다가 왜 베껴 쓰느냐는 말이죠.      
                     
성도는 고난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고난 받는 걸 자꾸 고생이라 여기지 마시고 바로 악마가 나의 가치를 계속 깔짝깔짝 건드리는 거예요. 너 오늘 살면서 나쁜 짓 몇 번 했어? 자꾸. 나쁜 짓 자체가 나쁜 짓 되는 순간이거든요. 그거 생각안하면 나쁜 짓은 없는데, 아이고 그래 맞아 내가 성도답지 못하게 그런 행동을 하다니. 그러니 그 자체가 이미 주님의 싸인을 모독하고 있는 거예요. 생명나무에서 짜낸 피로 와서 썼다고요. 그런데 인간은 거기다가 지가 선악과 따먹은 지식으로 도배를 해버리면 그건 뭐냐 하면 예수님을 핍박하는 일밖에 안되잖아요.

그러면 목사님, 뻔뻔스럽게 살라는 말입니까? 하는데 주님께서 수시로 우리로 하여금 뻔뻔했다가 자기 단도리하다가 이걸 반복시킵니다. 아까 그랬죠? 의도적으로, 지금 상황에서는 내가 버틸 수 있는데 막상 갑작스럽게 새로운 상황이 터져 버리면, 이건 내가 죄지어서 그래, 맞아 요새 내가 기도를 안해서 이런 일이 터져버렸네. 다시 한 번 이런 현상이 일어나게 하셔요. 왜냐하면 모든 구원의 경로에 대해서 내가 조심스럽게 주의 말씀을 경청했다는 그 공로를 빼기 위해서. 내가 침착하고 착실한 덕분에 나는 계속 구원, 구원, 구원을 유지했다. 이 정도로 난 대단해. 라는 그것을 없애기 위해서 우리는 매일 실수투성이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이건 세례요한도 예외가 아니에요. 예수님 증거해 놓고 뒤늦게 뭐합니까? 뒷북치죠. 오실 분이 당신입니까? 이러고 있다고요. 그 말은 세례요한의 그 행함이 세례요한을 구원하는 게 아니고 그 약하고 결핍된 세례요한을 위하여 십자가 지는 거예요. 십자가 안질만큼 깨끗하고 괜찮은 존재는 이 세상에 아예 없다는 겁니다.

아직까지 오늘 본문 안들어갔는데 세례요한 이야기하고 오늘 본문 해야 돼요. 그 본문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뭐가 어려우냐 하면 “그리스도께서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이 대목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제가 세례요한을 경유하는 겁니다. 자, 세례요한 이야기 해봅시다. 마태복음 3장에서 세례요한이 그렇게 형식은 튀는 복장, 내용은 자기 것이 없고. 그러면 사람들이 야, 세례요한 니는 잘났어, 잘났어. 이렇게 하겠죠? 니가 나하고 다른 게 뭐가 있는데? 이렇게 하죠. 여러분들이 만약에 어떤 친구나 가까운 사람에게 복음 전할 때 꼭 그런 시선을 받게 되죠. 그게 바로 세례요한이 받는 고난이에요.

고난이라 하는 것은 반대세력과 마주침이 있어줘야 됩니다. 복음 전하는데 아이고 훌륭하다 뭐 잘한다 이런 소리만 듣는 게 아니에요. 사실은 인사치레로 듣더라도 속으로 그래, 잘났다 이 인간아. 이렇게 속으로 욕을 하고 있는 순간이에요, 그 사람들이. 듣고 있으면서도. 노골적으로 욕하면 착한 인간이 나쁜 인간 소리 들을까봐 그걸 또 계산해가지고 항상 눈을 이렇게 이쁘게, 하회탈처럼 이렇게 해가지고 아이고, 복음을 아네, 나는 그걸 왜 몰랐을까? 이렇게 하면서 뒤에서 욕하고 있다고. 사람이 복음에 호응하면 믿는 사람 아닙니다. 그거 수상한 사람이에요. 이중인격자될 가능성이 많아요. 거기에 속아 넘어가면 안됩니다. 좀 핍박 좀 해줘야 아, 이거 믿을 가능성이 있겠다. 이런 생각 해야 되지 갑자기 호응해버리면 많이 수상해요. 아 이거 완전히 나를 엿먹이는구나 복음의 가치를 모독하고 있는 거구나.

자, 그 다음에 세례요한을 보면 그 때 누가 옵니까? 마태복음 3장 7절에,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먼저 공격하려고 나서죠. 피하지 않고. 권력자가 오는구나, 내가 말조심해야지. 이런 것 없죠? 그걸 선방이라고 합니다. 오늘 제목을 선방. 선방 날리는 거예요. 선빵 날리는 겁니다. “독사의 새끼들아” 날려요. 그 독사를 개로 바꾸면 적절하게 의미가 있어요.

이 얼마나 나올 수도 없는 말이 성경에 나와요. 그러니까 언론이 감옥소죠. 자체적으로 검열하잖아요. 성경은 그런 검열 없습니다. 그냥 날려버려요. 검열 누가 하는데요? 하나님이 말씀하는데 무슨 검열. 검열할 자격자가 누가 있습니까? 역사검열은 주님 쪽에서 해요. 유다민족이 역사를 검열해요. 이번 에스더 교재에 벌써 나왔습니다. 막간에 수련회 홍보하고. 백날 해야 오지도 않는데 뭐. 안가기로 작심을 한 모양이죠, 아예.

뭐냐 하면 "독사의 새끼들아" 날리죠. 너무 과한 이야기 아닙니까? 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얼마나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들이에요? 어른이에요. 그 사회의 어른입니다. 막가는 깡패들 아니에요. 개, 독사하고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고 기어이 독사 안되려고, 개 안되려고 누구보다 노력했던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세례요한은 아예 선방을 날립니다. 독사의 새끼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저쪽에서 뭐라고 합니까? 너는? 그렇게 하겠죠?

그래서 세례요한은 말합니다. 나보고 뭐라 하지 마. 나는 소리다. 아니 스피커보고 따지면 안되잖아. 가수가 마이크 쥐고 하면 마이크보고 욕하면 안되지. 가수가 노래 부르면 가수보고 나가라고 해야지, 마이크보고 ‘마이크야, 나가라’ 이게 말이 되겠어요? 그러니까 세례요한은 마이크로 사용되는 거예요. 얼마나 베짱 편한 인생입니까? 사명 받았다는 것이 그렇게 힘든 게 아니에요. 나는 마이크다. 이러면 끝나는 문제에요. 나는 마이크다. 복음의, 죄의 증인이고 의의 증인이고 하늘나라 증인이고 참된 교회의 증인이고 주님의 증인이다. 나는 마이크니까. 그렇게 하면 되거든요.

전에 내 설교에 그런 게 있지만 권투 체육관에 샌드백이 있단 말이죠. 출연자들이 샌드백 막 치잖아요. 애들이 여기에 무슨 스티커를 붙여뒀습니다. 탐정 스티커를 붙였든 뭐 껌도 있을 거고 막 치면 스티커가 아프다 하면 안돼요. 왜냐면 스티커는 폭이 얇으니까, 딱 붙어 있으니까. 지금 스티커를 공격하는 게 아니라 샌드백을 공격하잖아요. 예수님이 예언하기를, 제자들아, 세상이 너를 미워하거든 자꾸 나를 미워한다고 오해하지 마. 그렇게 되면 나름ㄷ로 폭이 이만큼 되면 이 스티커가 벽돌이 되고 완전 덩치가 되니까 딱 갖다 붙어있어야 되죠. 아예 습자지처럼.

나의 것이 없어야 돼요. 나를 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을 칠 때 그게 뭐냐 하면, 죄란 주님의 복음됨을 거스르는게 죄고 의란 주님 복음 증거하는 게 의죠. 나는 내 개인적인 자질이나 성격 같은 것은 상관없고요. 지난 강남강의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주님께서는 자질을 보고 구원하는 게 아니라고요. 주신 성령을 회수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게 주의 일이 되기 때문에 인간을 배제하거든요. 어른들 하는 일에 끼어들면 안돼요. 어른들 고스톱 칠때 아이들이 끼어들면 배제시키잖아요.

우리는 배제당해도 괜찮아요. 우리는 그 정도로 무의미합니다. 자꾸 무의미한 나를 의미를 가중시키지 마세요. 그래놓고 고민 있다고 상담하고 그러지 마세요. 우리는 고민 있는 것도 사치인 줄 알아야 돼요. 고민 있다는 자체가 좀 수상하기도 하고. 어째든 간에 세례요한이 전한 복음은 내 입장이 아니고 주님의 입장만 전한다. 너희들 보기에 너희들이 훌륭하지. 그런 네 선입관 자체가 잘못됐어, 독사의 자식들아. 이제는 독사의 자식이라는 선입관으로 바꿔. 이게 주의 명령이야. 나는 마이크이니까 나보고 따지지 말고. 나 스피커니까 따지지 말고.

그 다음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희들이 회개해?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여기지 말라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뭐되게 한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일을 전할 때 나는 완료시점에서 전하고 있는데 너희들은 아직도 완료가 뭔지를 까마득히 모르고 완료에 대해서 받아들이지도 않고 우리가 뭔가 최선을 다해보자는 식으로 나왔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아무리 최선을 다해봤자 다시 말해서 이 돌들이 사람 되는 절차에 대해서 너희들이 설명해봐라, 설명할 수 있는가. 나는 설명하는데 너는 설명되는가 한 번 봐라. 안되죠. 백날 해봐야 돌이 사람되는, 아브라함 자손되는 그 원리에 대해서. 출제를 한 거예요, 세례요한이. 물론 자기 뜻이 아니고 주의 뜻이죠.

할 때 바리새인이 인간을 인간 만드려고 개조했지 인간도 아닌 돌멩이를 천국가는 사람 만드는 것이 그게 가당키나 합니까? 안되죠. 그 정도로 사람이 천국간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 불가능을 저와 여러분들이 받은 거예요. 그러니 짬뽕이면 어떻고 빵이면 어떻습니까? 그게 무슨 대수입니까? 내 인생이 밥심 없고 건강 안하고 사랑 없다 해도 그게 무슨 대수겠어요? 그게 뭐 문제가 됩니까? 지킬 것은 복음이지 나의 자존심이 아니잖아요. 나의 가치가 아니잖아요. 뭐 아멘 좀 해야 되는데 진짜 독사의 새끼들인지. 그건 아니겠죠.

왜 한평생 살면서 자기 선입관을 지키려 합니까? 지키지 말아야 될 선입관을 계속 쥐고 있어요. 그게 오류를 일으키는데도 갖다가 폐기처분할 생각을 하지 않고 아이고 내 인생이 얼마나 귀한데 자꾸 껴안을 생각한다고요. 나훈아가 불렀던 노래 가운데, 나훈아 별로 모르는데, 이런 노래가 있어요. ‘십팔세 순이’라는 노래가 있어요. 나훈아 노래 몇 개 몰라요, 십팔세 순이라는 노래가 있는데. 가사가 살구꽃이 피면 온다고 했는데 왜 안왔어 이래 되는 거예요. 살구꽃이 필 때면 돌아온다는~ 살구꽃이 폈는데 순이가 안온 거예요. 지금 나훈아는요, 복음에 관심이 없어요. 지금 뭘 지키려고 하느냐면 내가 18세 순이를 사랑하는, 내 사랑을 내가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보세요. 온 세상이 복음을 찾으려고 하면 찾을 거리가 다 널려 있잖아요. 대중가요가 세상에서 나오기 때문에 평소에 살아가는 것이 왜 저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닌가를 선입관만 바꾸면 보여도 다 보입니다. 다 보여요. 전부다 자기 가치, 자존심 챙기려고 하는 그 자체가 제2, 제3의 바리새인들의 물결이에요, 전부다.        

자, 그러고 난 뒤에 선방 때리고 도끼 이야기 아시죠? (마태복음 3장 10절,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그거 하고 오늘 본문 한번 봅시다. 베드로전서 3장 18절, 그리스도께서 한번 죄를 위하여 죽었다했죠? 죄가 뭐냐?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여기서 ‘죄는 포괄적이다’ 이 말이죠, 포괄적. 다시 말해서 교도소 전체가 죄가 돼요. 개개인을 문제 삼는 게 아니고 너 똑바로 해, 저 사람처럼 착해. 이런 거 없어요. 인간과 인간하고 비교하지 않습니다. 너는 저 사람처럼 왜 착실하지 못해? 너는 왜 착하지 못해? 그걸 문제 삼지 않아요. 포괄적이라니까, 전체적이에요, 전체적.

죄를 위하여. 이 세상은 착한 사람, 착한 사람이 전체라고 보는데 정상이라고 보는데 사실은 뭐냐, 한마디로 이 세상은 뭐다? 죄다 라고 규정짓기 위해서 주께서 뭘 하셨다? 죽으셨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 죽으셨는데 말리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잖아요, 아무도 없죠. 신기하지 않습니까? 도대체 예수님이 무슨 잘못을 크게 저질러서 강도, 바라바보다도 더 가치없는 인간으로 봤습니까?

우리가 십자가를 정말 아십니까? 안다면 그 현장에, 예수님 재판 현장에 갔을 때 우리는 손들고 저 예수님은 죄가 없습니다, 풀어주세요. 라고 손들고 나올 수 있겠어요? 아까 세례요한 이야기했는데 세례요한은 사명이 자기 목숨보다 우선했죠. 스피커니까. 세례요한 죽을 때 어떻게 죽었습니까? 처참하게 죽었죠. 왜 하나님께서 세례요한을 여자의 말 한마디에 목이 날아가게 하셨습니까? 그 당시에 여자는 별로 가치없는데 가치없는 여자의 한마디에 그냥 몰래 죽은 것도 아니고 공개적으로 죽었어요. 쟁반에다가 목이 담겨 죽었다고요.

세례요한이 분명히 부모가 있었을 거 아닙니까? 그걸 보고 이거는 기절하겠죠. 세례요한을 남의 자식이라고 보지 말고 집안에 있는 내 자식의 일부라고 보자 이 말이죠. 그 부모가 하나님 믿겠습니까? 저런 짓을 한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겠어요?

세례요한은요, 제가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인간이 넘을 수 없는 경계선을 깔아버린 분이에요. 인간이 넘을 수 없는. 따라오려면 따라와라. 못따라온다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것도 완전하지는 않지만. 완전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완전하지만.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기 때문에 인간들이 감히 흉내낼 수도 없는 극단 한도까지를 보여준 거예요. 세례요한이 무슨 나쁜 짓을 해서 그렇게 처참하게 죽어야 되는 겁니까? 살인강도도 그렇게 안죽겠습니다. 그것도 공개선상으로. 보이는 겁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사람들은 이 세상이 극악무도한 죄의 세상이라는 것을 어느 누구도 인정할 줄을 모르고 있어요. 그저 소소한, 내 외손자, 외손녀, 내 밥심, 내 건강, 코 앞에, 눈 앞에 있는 그것만 챙기면 내 할 도리 다했고 나는 남한테 욕 안얻어 먹는다 그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그것만.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 백종원의 골목식당 같아. 그 골목에서는 제일 맛있지, 그 골목에서는. 조미료 치고 설탕 쳤으니까 맛있을 수밖에 없죠. 우리는 각자의 골목식당에서 대장질하고 있다니까요.

성경을 볼 때 착한 사람으로 보니까 성경이 보일 리가 없고. 세례요한을 죽여도 남의 일로 여겨요. 나와 연관을 못시킨다니까요. 예수님 죽어도 남의 일로 본다니까. 예수님 죽으심과 내가 속해있는 이 세상이 어느 정도로 거리가 먼지를 깜짝, 깜놀, 깜짝 놀라야 되는데 안 놀라고 죽을까 싶어서 겁을 더 집어먹고 권력을 더 붙들고 있다니까요. 제자들처럼, 제자들하고 똑같이. 믿는 건지 안 믿는 건지. 우리가 이 세상을, 그 자체가 먹고 마시고 시집장가 가고 할 때 지옥불 와도, 뭐 어떤 일이 일어나도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라고 하는 그 마음자세가 이미 고난을 받고 있는 중이에요, 그게. 세상 사람들에게. 왜? 사람들의 선입관과 성령 안의 선입관이 너무 대조가 되니까.

복음을 아는 사람이 교회가게 되면요, 진짜 돌 맞아 죽는 수가 있어요. 돌까지는 안맞지만 성경책으로 얻어맞을 수가 있어요, 뒤통수라도. 나가라 꺼져라 인간아 하고. 너는 입 다물고 있어 이런 식으로, 미가야한테 한 것처럼. 미가야 선지자가 뺨맞았잖아요. 예수님도 귀싸대기 맞았죠? 이게 남의 이야기입니까? 그걸 보고 우리는 이렇게 합니다. 나 교훈 얻었어. 난 나대지 말아야지. 또 도피하고 피하고 수동적이고 기피하고 내 밥심과 건강과 사랑만 챙기면 그만이지 뭐 이런 식이에요.

예수님께서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말은 예수님의 죽으심 앞에서 우리가 그렇게 집착을 하고 미련두고 있고 떠나기 싫어하는 이 세상이 지금 침몰하는 중이다 이거예요. 배는 커요. 큰 배라고 침몰 안하는 게 아니고 기어이 침몰시키는 그러한 사건, 사태를 주께서 의도적으로 몰아넣습니다. 탈출하라 이 말이죠. 벗어나라. 탈출됐거든 너는 더 이상 다른 거 더 원하지 마라. 너는 의인이다. 네가 잘해서 의인이 아니라 나의 새로운 선입견, 너에 대한 의가 있음으로써 악마가 어떤 수작을 부려서 너 모자란다 그러면 너 죄인이야 경건치 않으니 거룩한 인간이 아니야 어떤 수작으로 이렇게 하나님의 복음을 흐릿하게 만드려고 노력하더라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제대로 보면서 먼저 이걸 버려야 돼요.

나의 선입관을, 나의 선악적 선입관을 날마다 폐기처분해야 됩니다. 내가 남에 대해서도 모르고 나에 대해서도 잘못되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주님이 구원했는데 내가 나를 닦달내다니. 내가 그럴 자격이 있어?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그만 괴롭히세요, 자기 자신을. 아이고 목사님, 뭘 우리가 우리를 괴롭힙니까? 그건 너무 오버다 이렇게 하는데요. 우리가 남을 괴롭히기 때문에 우리를 괴롭히는 그것이 남탓으로 나오는 거예요.

우리가 남탓하는 이유는 본인이 본인을 괴롭히고 있는 중이라는 뜻이에요. 내가 이렇게 시집와서 고생하는 것은 다 당신 때문이야. 당신 만나서 인생 조졌어. 나 좋다는 남자 얼마나 많은데 왜 당신이랑 아다리 되가지고 무를 수도 없고. 남자는 물러 물러! 하면 너 혹시 무슨 다른 여자? 기어이 이기려고 허물을 또 덮어씌워가지고 기어이, 하여튼 대인관계에서 기어이 안져. 뭐로 이깁니까?

나의 선으로 저쪽 선을 이기려고 하는 거예요. 십자가를 지켜야 될 사명을 받은 자가 십자가 자리에 뭐가 있느냐 하면 나 이렇게 안졌습니다. 이겼습니다. 그게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때 그거는 악마는 좋아하고 주님은 싫어하겠죠.

여러분 한복판에 주님의 십자가, 꽂혀 있습니다. 꽂혀 있기 때문에 여러분으로 하여금 여러분의 선입관으로 밀어붙이도록 주님께서 호락호락 그냥 방치하지 않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내가 죄라고 생각한 자체가 이게 욕심이라는 것, 주님의 복음을 훼방하는 모습이라는 것을, 죄의식이 안나온다는 게 아니라 나오더라도 이 죄가 나온다는 이것이 또 내가 나를 지키는 수작인데 십자가 대비해보니까 아 이게 죄였구나 그럼 여기서 나올 것은 뭐밖에 없습니까?

날마다 감사가 나온다는 거죠. 주여 나같이 나만 챙기는 인간을 어찌 죄인이라 하지 않으시고 의인이라 칭해주시는지 저는 이 순간부터 나는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그 순간이 5초 갑니다. 이 순간부터 나는 십자가만 자랑하겠습니다. 주께서 또 새로운 사태를 주게 되면 그 마음도 없어지고 또 자기방어에 나서겠죠.

기도하겠습니다. 우리의 방어 나서더라도 말씀이 살아있어 성령으로 살아있어 날마다 말씀대로 우리를 지적질 해주는 그것을 오히려 감사히 여길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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