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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13 00:30:52 조회 : 437         
특수한 인간 191212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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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림(IP:124.♡.210.16) 19-12-14 22:29 
서울의존강의20191212a 베드로전서3장 18절(특수한 인간)-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3장 18절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여러 가지, 인간들이 자기 몸을 가지고 할 수 없는 것들을 이 본문을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인간이 치타처럼 빠르게 달린다/ 못 달린다.’ 그것도 인간이 못하는 거죠. ‘인간이 독수리처럼 날지 못한다.’ 그것도 인간이 못하는 것 맞습니다. ‘인간이 인공지능만큼 기억력이 없다.’ 그것도 인간이 못하는 것 맞죠. 인간이 못한다. 인간의 육신으로 할 수 없다.

인간의 몸이 있는데, 육체가 있는데 ‘인간이 이것까지는 한다/ 이것부터는 못한다’라고 했을 때 못하는 것들을 인간은 어디서 가져오느냐 하면, 인간의 욕심에서 비롯되겠죠. 인간은 날개가 없다. 인간이 날개가 없으니 스스로 못 난다. 인간은 지느러미가 없고 아가미가 없어서 물 속 깊이까지는 못 간다. 지느러미가 있으면 물고기죠. 날개라 하는 것은 공중에 나는 새를 말할 거예요.

그러니 인간은 주변의 새와 달과 별, 또는 이런 물고기, 짐승들 이런 것들을 보면서 어떤 욕심을 내느냐 하면 ‘내가 코끼리처럼 코가 길었으면 좋겠다’ 뭐 그런 욕심은 안내겠죠. ‘내가 하마처럼 힘이 세면 좋겠다’ 또는 ‘독수리처럼 가볍게 날고 싶을 때 언제든지 날아서 교통체증을 좀 면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을 거고 ‘물고기처럼 매끄럽게 바다를 헤엄쳐서 저쪽 바다에서 이쪽 바다로 건너보고 싶다’ 그런 생각들을 갖고 있습니다. 이걸 인간들은 자기의 육체의 한계라고 여깁니다, 육체의 한계.

자, 육체의 한계라는 말이 굉장히 상식적으로 잘 쓰여지는 말인데요. 육체의 한계라고 하는 것은 ‘이것까지는 한다’라는 게 있죠, 이것까지는 한다. ‘이 다음에는 못한다’부터 한계 아닙니까? ‘여기부터는 못한다’가 되어 있으면 ‘여기까지는 뭔가 할 수 있다’가 되겠죠. 인간에게는 그런 육체의 한계가 있다는 겁니다. 성경은 바로 이게 죄라는 겁니다. 인간에게 한계가 있다는 자체가 이게 죄가 되는 거예요.

인간은 정확하게 ‘아무것도 못한다’가 되어야 돼요. 아무것도 못한다 할 때에 개미처럼 못기어 가느냐, 토끼처럼 못뛰느냐 그런 것 가지고 비교하는 게 아니고 무엇과 비교해야 되느냐 하면 영의 세계와 비교해 볼 때 인간은 어떤 수를 내도 영의 세계에 못가니까 인간은 무능하고, 무능하다는 말은 아무것도 못하는 거죠. 인간이 자기의 육신을 가지고 아무것도 못한다고 인식을 해야 됩니다.

우리나라 국가대표 양궁선수가 양궁을 들고 표적을 향하여 10점 만점의 10점을 계속 쏘아대면서 혼자서 중얼거리면서 웃는 거예요, 옆에서. 저 선수가 뭐 때문에 저렇게 좋아가지고 그러나. “난 아무것도 못해” (쏘면서), 그럼 옆에 사람은 “당신은 양궁 잘 하네” 이렇게 하잖아요. “아니야, 아무것도 못해” (쏜 다음에) 옆에 사람은 좀 이상하게 느껴질 거예요. 그 사람은 양궁을 10점 만점의 10점을 맞힌들 그게 영입니까? 그게 영이에요? 아니죠.

인간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있어 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하면 ‘혼자서는 못하지만 여럿이는 잘해요’가 되어가지고 단결하고 협동할 가능성이 있어요. ‘혼자서는 못하지만 혼자서의 한계를 여럿이 달성할 수 있다’라고 되어 버리면 그 과정 속에서 뭐가 빠지게 돼요? ‘나는 무능하다, 나는 못한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런 것들이 다 거기서 빠져 버리죠. 누락이 된다 이 말이죠. 못한다,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런 것들은 마치 인간에게는 해당이 아닌 것처럼 그렇게 오해를 하게 되는 거예요.             

정말 인간이 영적으로 아무것도 아니고, 그리고 영적으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에서 멈추면 안되겠죠? 왜 영적으로는 인간이 영적 생활을 전혀 못하느냐 그 이유가 있어야 되고 근거가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 18절에, “그리스도께서 한번”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한번 죄를 위하여”했는데 그 죄가 하늘나라에는 없을 것이고, 주님한테는 없을 것이고 그 죄가 어디 있습니까? 인간 육에 있죠. 인간 육체에 죄가 있다 이 말이죠. 자, 어려운 이야기 해볼까요?

뭐가 어려운 이야기냐 하면요, 인간 육체가 있고 죄가 있다면 인간의 육체 중에 죄가 있다는데 죄가 어디 달라붙어 있습니까? 이 질문. 인간에게 죄가 있다면 죄가 어떻게 달라붙어 있어요? 죄가 새카맣던가요, 파랗던가요, 노랗던가요? 뭐 어떤 식으로 달라붙어 있어요, 죄가? 상당히 어려운 문제죠,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나쁜 생각, 나쁜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죄입니다.” 하는데 그것은 통하지 않아요. 이미 선악과 따먹고 난 뒤의 생각이기 때문에 그것은 인정받지 못합니다. 선과 악을 하나의 세트로 해서 ‘나는 이것은 착하다고 생각하고 이것은 나쁘다고 생각해’ 라고 본인이 알고 있는 선의 지식과 본인이 알고 있는 악의 지식은 아무리 내세워봤자 그 지식을 갖고 있는 자체가 죄가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죄가 무엇입니까? 지식을 말하는 게 아니겠죠? 나쁜 지식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코미디 프로에 이런 게 있어요. 어떤 중이 동창생을 만나는데 여자 동창생이 중을 막 유혹하고 꼬시니까 중은 머리 깎고 중복 입었으니까 그 유혹과 욕정을 이겨야 되지 않습니까? 갑자기 여기서 (자기 가슴을 치면서) “나쁜 생각, 나쁜 생각, 주지스님한테 욕하다가 얻어맞은 나쁜 생각...” 그게 뭐냐 하면 유혹이라는 너무 좋은 생각이 있으니까 좋은 생각에 자기가 빨려 들어가거든요. 빨려 들어갈 때는 어떻게 유화를 시키느냐 하면, 유혹이 왔을 때는 좋다고 덥석 물을 게 아니고 내가 아주 기분 나쁘고 마음이 괴로울 때를 상상하는 거예요. 상상하는 게 “나쁜 생각, 나쁜 생각” 하면서 끄집어내가지고. 또는 너무 기분 좋을 때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반대말이, “슬픈 생각 슬픈 생각, 차 타다가 오줌 눠서 바지에 오줌 싼 생각, 슬픈 생각, 은행에서 돈 찾았는데 엎어져서 돈 다 날린 생각...” 자꾸 상상해가지고 아주 참혹한 경우를 상상하면 너무 좋다고 나대는 것을 좀 완화시킬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자체적인 전략을 논리로 정리정돈 해보는 거예요.

중만 아니고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게 하죠. 만약에 고등학교 3학년인데 수능 발표가 났다 이 말이죠. 전부다 예상보다 10점 내지 20점 낮아졌는데 자기는 3번 쓸 걸 4번 잘못 써가지고 20점 높아졌어요. 워낙 공부를 못하니까 오히려 바꿔쓰는 게 정답이 다 되어 버렸다 이 말이죠. 본인은 320점 생각했는데 350점 나왔고 친구들은 320점, 340점 하다가 전부 270점 나왔단 말이죠. 그 때 그 자리에서 우리는 어떤 생각해야 됩니까? “슬픈 생각, 슬픈 생각”해야죠. 좋다고 좋아하면 욕 얻어먹잖아요. 그러니 슬픔과 기쁨, 죄와 선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상대적이다. 상대적이라는 말은 ‘전혀 다 죄가 되는 것도 아니고 전혀 다 선한 것도 아니고 선이 있다면 악도 같이 있다’라고 하는 생각. 그게 “나쁜 생각”.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 죄인이 된 생각이라는 겁니다. 그게 죄된 생각이에요.

그러면 한 번 정리해봅시다. 자, 죄가 무엇이냐? 죄란 하나님과 일치되지 않는 생각, 이게 죄된 생각이죠. 죄란 하나님의 생각과 일치되지 않는 것. 오늘 강의에서 사실은 제일 핵심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계속 할 거예요. 이것이 왜 중요하냐? 죄란 뭐라고 했던가요? 하나님의 생각과 일치되지 않는 게 전부다 죄입니다. 또 되도 않는 거 끄집어 내지 마시고요, 표절 안봤다 뭐 그런 소리 하지 마시고요. 하나님의 생각과 일치되지 않는 생각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의 생각과 일치되지 않는 생각이라고 한다 할지라도 아까 처음에 강의할 때 인간에게는 자기 한계가 있다고 했지요? 자기 한계. 자, 한계가 뭐던가요? ‘이것까지는 할 수 있고 이것까지는 못한다’가 자기 한계지요? 처음에 강의할 때 인간에게는 한계가 있다고 했지요? 한계가 있다는 말은 인간이 할 수 있는데 여기까지는 못한다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했을 때 ‘이것은 누가 뭐래도 긍정적이다, 이것은 좋은 것이다’ 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겠죠? 그러면 그게 뭐가 되겠어요? 선이 되겠죠?

‘하나님이여, 제가 온전한 선은 될 수 없지만 이것까지는 선할 수 있습니다’ 했을 때 할 수 있는 거죠? 선을 행할 수 있는 거죠? 그렇다고 해서 매사에 선하다고 지금 우기고 있는 게 아니잖아요. 나 천사도 아니고 뭐도 아니고 하나님 되는 거도 아니고. 모든 게 선하다고 교만하게 구는 게 아니고 ‘그러나 이 정도는 선일 것입니다’ 할 수 있는 것. 전부다 선은 아니지만 이 정도까지는 나쁘지 않고 선할 것이다 하는 것은 있을 수 있다는 말이죠. 그게 뭐냐 하면 자기의 한계가 되는 겁니다, 자기의 한계.

그러면 자기의 한계가 있다는 말은, 다시 얘기하면 죄란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생각과 일치되지 않는 게 죄죠, 일치되지 않는 것. 그러면 ‘이것까지는 선하지만 이거는 내가 잘못했어. 솔직하게 내가 잘못한 거 인정하고 이것까지는 내가 잘못한 게 없어.’ 라고 했을 때 그게 하나님의 생각과 일치되는 생각입니까, 아닙니까? 아니죠. 그러니까 죄가 되는 거예요.

인간에게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조차도 자기 딴에 굉장히 겸손한데 대단히 시건방진 생각이에요. 우리에게는 한계가 있다. 한계가 있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잘만하면 지금보다 더 우리의 성격과 모든 성질이 나아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비치는 거잖아요. 지금은 내가 모든 게 무지하고 성경도 잘 몰라가지고 제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못돌리는데 앞으로 성경을 알게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가능성이 있다. 그걸 내가 본다 이 말이죠. 다른 말로 하면 지금부터 내가 열심히 하면 초월할 수 있는 그 길을 갈 수 있다. 이 말 아닙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생각과 같을까요, 다를까요? 다르죠. 그러면 그 생각조차도 죄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생각이 다른 것이 죄라면 그럼 하나님의 생각은 뭐냐? 하나님의 생각은 여기 3장 18절에 나왔죠. “그리스도께서” 그 다음에 “한번” 무엇을 위하여? “죄를 위하여”.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과 일치됩니다. 하나님의 뜻과 일치된 것을 보니까 그리스도는 우리 자신을 뭐로 본다? 선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한계가 있다고 보는 것이 아니고 이 육체를 아예 뭐라고 봅니까? 죄덩어리로 보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생각이에요. 그러면 우리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생각과 다른, 죄가 되는 겁니다.      

아주 더 쉽게 말씀드릴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실 때 이미 죄가 무엇이며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이미 다 확정지어졌어요. 이제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뭡니까? 그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그냥 우리 것으로 받아들이면 되잖아요. 그걸 받아들이면 되는데 왜 거기에 대해서 시큰둥하고 기분 나빠하고 왜 못받아들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인 것은 죄가 아니라고 해주세요.’ 라는 그런 생각이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성경말씀대로 고분고분하게 믿는 것은, 내가 아무리 죄가 많지만 이 믿는 것만큼은 죄 아닌걸로 쳐주세요.’ 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에요.

예수 믿는 것도 죄라고 한다면 일말의 희망도 없잖아요, 우리가 구원받는데. 그렇죠? 그렇지 않습니까? 일말의 희망도 없죠. 아무리 내가 인생 막 살았고 하나님 보시기에 더럽기 짝이 없다 하지만 주께서 준비하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의 보혈을 주셨다면 그것을 겸손하게, 아주 마음 낮춰서 받아들이고자 하는 마음자세만큼은, 하나님 그것만큼은 시비 안걸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만큼은 점수를 좀 후하게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겠죠.

죄는 하나님 뜻이 아닌 거니까 죄가 아닌 것은 하나님 뜻이 합치된 거죠. 하나님께서 우리보고 죄인이라고 할 때 우리 인간이 “옳소이다, 맞습니다. 저 죄인 맞습니다. 나 그 생각을 받아들입니다.” 라고 할 수 있겠죠. 이 받아들이는 것은 죄냐, 아니냐 이 말입니다. 받아들이는 것은. 이 받아들이는 것도 죄가 되는 겁니다. 그래야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가 하는 어떤 것도, 우리가 내민 어떤 것도 죄라는 이 규정에 부합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믿음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믿는 것조차도 뭐다? 죄가 된다는 것이 믿는 거예요. 믿음이란, 내가 주에 대해서 믿고 십자가 믿고 구원받고자 하는 것도 죄가 된다까지 이걸 받아들여야 이게 죄가 죄스럽게 되는 거예요. 더 쉽게 말씀 드릴께요. 하나님께서 우리보고 죄인이라고 했으면 이제부터 우리의 할 일은 뭡니까? 죄짓는 거죠. 그래야 하나님 뜻에 부합될 거 아니겠습니까? 이게 어려워요? 좀 이상스럽기는 하지만 이게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죠.

아니 연탄보고 연탄이라고 하면 연탄이 가장 연탄다운 게 뭐에요? 예, 연탄입니다. 이러면 되지, 그래도 쓸모 있다고 자꾸 토를 달면 안된다는 말이죠. 토를 달면 안돼요. 이 연탄재, 어디서 이게 내 앞을 가로막아. 연탄재를 발길로 팍 차면 연탄재가 뭐라고 합니까? 함부로 연탄재 차지 마라. 너는 누구로부터 뜨거움이 되었던가? 뭐 이런...넌 누구로부터 자기 희생하면서 뜨거움을 준 적이 있느냐? 하면서 반말 나온다 이 말이죠.

그래서 베드로전서 3장 18절을 보면서 사람들이 제일 오해하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한번 죄를 위해서 죽었다고 하니까 아, 하나님께서 이런 극진한 사랑을 주셨기 때문에 이 사랑을 내가 마다할 수 없지, 외면할 수 없지. 주여, 나는 손듭니다. 이 사랑 받아들이겠습니다. 라고 나오더라 이 말이죠. 그게 죄인줄 모르고.

이 말보다 더 어려운 게 있어요. “한번 죄를 위하여” 그 다음에 뭐가 나와요? “죽으사” 나왔죠. 이게 얼마나 어려운 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들이 한번 해답내보세요. 하나님이 인간보고 죄라고 규정했지요. 규정했으면 “죄다” 규정하는 것이 옳습니까? 예수님이 죽는 것이 옳습니까? 어느 방법이 하나님 방법이에요? 1번 죄 규정한 거예요, 2번 예수님이 죽는 거예요? 어느 게 제대로 죄를 규정한 게 맞습니까? 1번입니까, 2번입니까? 2번이죠? 왜 2번이어야 하죠?  

예를 들면 학급에서 수학 시간에 담임 선생님이 “자, 8×3=24다. 알았지?” 이러면 끝나는 문제 아닙니까? 8×3=24다 해놓고 선생님이 슬슬 십자가를 딱 들고 “나를 못박아라!” 이거는 오버라. 선생님을 말립니다, 학생들이. “선생님 왜 이러십니까? 좋은 말씀으로 하셔도 우리 막 받아 적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죄인이라고 하면 “예, 맞습니다. 동의합니다. 죄인입니다. 우리는 충분하게 내 죄를, 주께서 말씀하시고 우리가 받아들이면 우리의 죄됨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그러한 낯선 사건, 참혹한 사건, 이게 왜 필요하죠? 하나님이 죽는다는 말은 왜 필요하죠?

선 볼 때, 커피숍에서 선을 보면서 “저는 아가씨 마음에 드는데 아가씨는 저 어때요? 좋아요? 그래요? 좋으면 나중에 우리 저녁 먹어가면서, 썰어가면서, 써는 거 있잖아요, 먹어가면서 서로 알아가면서... 저도 아가씨 너무 마음에 듭니다. 그러니까 고급 식당에 가가지고 썰면서 우리 결혼, 미래에 대해 생각합시다.” 이게 정상 아니에요? “아가씨 나 마음에 듭니까?”, “들어요.”, “그러면 제가 웃통 벗겠습니다.”, “아니 웃통을 왜 벗습니까?”, “십자가 죽어야 되니까”

아니 왜 마음에 드는데 십자가에 왜 죽느냐 이 말이죠. 이게 하나님이 인간들을 죄인이라 할 때 인간들이 죄인이라고 인정하더라도 그건 구라다, 인간은 거짓말이 된단 말이죠. 인간은 본인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하나님 뜻에 합치한다고 우기지만 분명히 본인 자체가 죄인이기 때문에 죄에서 나온 모든 이야기도 하나님은 안받습니다. 인정 못받습니다. 인간이 죽는다는 말이 아니잖아요. 이게 지금 하나님 쪽에서 오신 그리스도가 죽는 거잖아요. 인간은 있지만 그리스도는 없어요.

여러분, 그리스도와 인간의 차이점은 그리스도는 한 분이지만 인간은 여러 명이 돼요. 그게 차이점이에요. 여러 명이 하는 것이 진리답습니까, 한 명이 하신 것이 진리다워요? 하나님 뜻에는 단 한명이에요. 예수님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그러잖아요. 예수님이 진리잖아요. 예수님 한 분이 진리라는 말은 나머지는 진리다, 아니다? 진리가 아니고 그 반대로 거짓이 되겠죠. 예수님의 12제자가 전부다 거짓 제자에요. 예수님이 아무리 이야기해도 그들은 무슨 말인지 못알아듣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배신하고 다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제가 지금 계속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성경에서 “죄다, 뜻이다” 할 때 인간들은 아무 쥐뿔도 모르면서 그걸 동의한다고 나섬으로써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여기더라 이 말이죠. “아, 나 알았습니다.” 지금 아는 게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아,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는 방법은 예수님이 대신 죽으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구원되는 것. 아, 이제 알았어.” 그거 안다고 구원됩니까? 주께서는 “너를 알아라, 너를. 예수님이 어떻게 하는지를 아는 게 아니라 너 자신을 알아야 돼.” 내가, 예수님이 대신 죽었고 그 십자가를 믿음으로써 구원받는다는 그 생각 자체가 이게 엉터리다 이 말입니다, 그게. 모르면서 아는 척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께서 죄라면 나에서 나온 어떤 것도 죄라고 그걸 기분 좋게 받아들여야죠. 아, 나는 어떤 고백도, 어떤 신앙고백, 사도신경 백날 200번 해봐야 소용없는 거구나. 어떤 세례식에 참석하고 성만찬 해도, 예배 참석하고 십일조해도 이것은 전혀 무의미하고 의미 없고 허식이고 헛짓이라는 것을 알아야 된다 이 말이죠. 성경 공부하는 것도 물론이고요, 전도하는 것도 물론이고. 그러면 왜 전도하고 합니까? 헛짓인 것을 알기 위해서 본인이 나서는데 어떻게 합니까? 본인이 하고 싶어서 환장하는데, 전도하고 싶어서.

그 헛짓을 하고 싶어 환장해요, 인간은. 왜? 아까 처음에 했잖아요. 인간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기 위해서. 내가 천사처럼 되지는 못하지만 전도는 할 수 있다고. 이게 인간이 스스로 한계 있다는 말은, 전도하는 것은 선이 되고 또 내가 천사처럼은 못되니까 악은 저지를 수는 있지만, 선한 것도 있지만 악도 있다. 악도 있지만 선한 것도 있잖아요, 하나님. 이렇게 자기 자신의 존재감을 내세우고 싶은 겁니다. 이게 다 사기에요. 그러면 무슨 사기 아닌 게 뭡니까?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셔요. 인간이 죄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방법은 자기 아들을 죽이시는 거예요. 그러면 죽게 되게 되면 죽음의 효력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 효력이 자기 백성을 다스리고 지배할 때, 그것이 바로 오늘 말씀이에요. 인간의 어떤 도움도 필요 없이 말씀 스스로가 활동을 개시한다는 그런 취지로 주신 말씀이에요.

예를 들면, 어떤 며느리가 시갓집에 가서 혼잣말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오늘 저녁은 잡채를 해드릴까요?” 혼잣말로 했는데 시어머니, 시아버지, 시누이, 시동생까지 다 들었어요. 부엌에서 조용히 혼잣말로 했는데 다 들었다 이 말이죠. “잡채를 해드리면 좋겠지?”라고 혼잣말로 하는데 시어머니가 와가지고 “야야 내가 시금치 다듬어 줄게.” 그러면 손을 탁 때리면서, “내 혼자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언니, 내가 면 삶아줄까?” 그러면 “손 떼. 저리 가.” (혼잣말로) “잡채를 해 드릴까?” 이 말은 뭔 뜻이에요?

“하나님이 죄를 대신해서 죽으시고” 이거 누가 할 일이에요? 예수님이 할 일이고 그 아버지가 할 일이죠, 예? “예수님, 제가 믿어드리겠습니다.”, “저리 안가? 저리 가. 저리 가란 말이야. 니가 이 일에 낄 잽이 아니야, 여기 이 일에.” 모든 말씀은 하나님이 친히 홀로 이루시는 거예요. 그걸 반기면서 수용하고 반갑다고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게 아니에요. 자기 주제도 파악 못하면서 어딜 끼어들어요? 어디 이 말씀에 끼어듭니까?     

오늘 계속 어려운 이야기가 연발, 연발 이어지는데 또 계속 어려운 이야기 해 볼께요.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육체가 있는데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위해서 대신해서 죄를 씻어줬습니다. 그러면 자, 문제 나갑니다. 이 사람이 인간일까요, 인간 아닐까요? 어떤 인간이 있는데 보통 인간이죠, 죄지었죠. 예수님이 이 사람을 위해서 죄를 대신했다. 그러면 이 사람은 인간일까요, 인간이 아닐까요? (인간이 아닙니다.) 맞습니다.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인간이라는 것은 예수를 십자가에서 믿고 감사하는 게 이게 보통 보편적 인간들이 하는 일이에요. 하나님의 일에 반응을 나타내어서 “주여, 다른 사람은 안믿어도 저는 믿는 거 주께서 눈에 보이죠? 저는 믿어드리겠습니다.” 이게 인간이에요. 그래서 인간은 죄인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이 인간(예수님이 죄를 대신한 인간)은 본인의 의도 관계없이 주님이 일방적으로 만들어 낸 생산물이거든요. 이 생산물을 성도라고 하는데 성도의 특징은 뭐냐 하면 어떤 초월성도 추구하지 않습니다. 초월성 필요 없어요. 초월성이라는 것은 인간들이 하는 거예요, 인간들이. 그리고 시공간, 시간과 공간에 얽매이지 않아요, 성도는. 신분 자체가 시간과 공간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시간과 공간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예를 들어보면, 그 성도는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자기 모습과의 연속성을 가지겠어요, 단절되어 있겠습니까? 당연히 단절되어 있어야죠. 왜? 옛날에 자기가 인간이었다는 그 모습과 지금의 성도된 모습 사이에 뭐가 끼어든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끼어들었거든요. 그러면 죽으심의 의미를 드러내려면 옛날의 ‘과거의 나’가 성도로서 이어질 수 있다, 없다? 없다. 못이어지죠. 이어질 수가 없어요.           

지금 크리스마스 시즌 됐죠? 크리스마스 때가 됐다 이 말이죠. 되가지고 우연히 어떤 교회에 들어가 보니까 크리스마스 트리하고 선생님이 애들 한 열댓명 모아놓고 연극 연습시키고 성가대 노래시키고 유치부 율동시키고 하는 것을 봤을 때, 어떤 나이 한 오십쯤 된 사람이, 옛날에 젊었을 때 교회 봉사 꽤나 했던, 청년회 하면서 봉사 꽤나 했던 사람이 그 모습을 보면서 무슨 생각 들겠어요? 자기 과거에 했던 게 기억이 나죠. 나도 참 결혼하기 전에 취직하기 전 백수될 때 할 일 없어 교회에서 봉사 참 많~이 했다. 교회 시키는 대로 다 하고. 시키는 대로 다 하면 좋은 데 취직될 줄 알고. 좋은 아가씨 만날 줄 알고 열심히 했다. 그 모습 보면 마치 옛날에 자기가 했던 모습이 기억나죠. 그 땐 참 열심히도 했는데 이제 나는 뭐 이렇게 요새는 열심도 없고 왜 이리 됐냐. 라고 과거의 기억과 비교하면서 지금의 자신에 대해 초라함을 느낀다면 그럼 성도다워요, 성도답지 않습니까? 성도답지 않죠. 왜냐하면 과거의 기억이라는 것이 지금 자기에게 영향을 자꾸 주는 거예요. 이거는 단절된 게 아니에요. 계속 이어져나가는 거예요.

신학교 나오셨잖아요. 지금 나이 되가지고 옛날 다녔던 신학교 한 번 가보죠. 아, 이거 후배들 봐, 눈 초롱초롱한 거 봐. 이런 생각 들죠. 나도 그 때 한초롱 했지. 지금 맛이 갔지만 그 땐 한초롱 했다 그런 생각 들겠죠. 그러면 그 때 내가 이렇게, 과거에 순수하게, 누구 마음대로 순수인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순수하게 순결하게 오직 주님만 섬겼던 그 모습과 지금은 세상에 때 묻은 더러운 내 모습과 비교해서, 와, 내가 참 타락했다. 이렇게 한다면 그것은 성도다워요, 성도답지 않아요? 그건 성도답지 않습니다. 아직 성도가 뭔지도 몰라요.

성도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끼어들어서 과거에 있는 내 몸, 그 몸을 오늘 본문에서 육이라고 합니다, 육체. 오늘 본문에 육체라고 되어 있죠? 과거에 있는 육체가, 그 사람들이 과거만 회상하겠어요, 미래를 내다보겠습니까? 미래까지 보겠죠. 왜? 시간성이 있으니까. 내가 예수 믿게 되면 나중에 천국에 갈 것이라는 기대감이 들겠죠. 이 자체가 처음 강의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이 자체가 죄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죄를 발견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그렇게 규정한 거예요. 육체는 뭐다? 죄다. 끝! 얼마나 쉽습니까, 얼마나 쉬워요.

그런데 분명히 주님께서 죄라고 인정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참 내가 20대 그 때 열심히 했다’라든지 ‘내가 참 옛날에는 주님께 충성했다’라든지 자꾸 과거하고 지금 자기 형편하고 연계를 자꾸 시키려고 시도한다는 자체가 주님께서 죄라고 규정한 것, 그리고 의라고 규정한 그 규정에 위반되는 겁니다. 1번, 과거가 어쨌든 간에 그리고 2번, 앞으로 미래에 내가 얼마나 엉터리같이 살든 간에 이것과 성도의 신분은 전혀 별개의 문제라 이 말입니다. 별개의 문제다.        
     
그런데 제가 수요일에 예배드리면서 기도하는 시간에 기도제목을 제가 제시했죠. 자책하지 말라고. 아니 성도가 본인이 노력해서 얻은 겁니까? 자기가 애써서 성도된 거예요? 주제넘게 왜 본인이 만든 것도 아닌데 마치 자기가 마음 조심하고 절제하고 정신통일해가지고 도 닦아서 마치 성도가 된 것처럼 ‘이 성도된 것을 잘 간직해야지’ 하는데. 죄가 관리를 한들 그게 제대로 된 관리겠습니까? 자책하지 않는 게 그게 관리예요, 자책하지 않는 거.
      
오다가 중국집에 가서 짬뽕을 먹는데요, 저녁때. 아이고 저녁때 사람들 중국집 와서 짬뽕 먹으면 되지 온 테이블마다 소주병에다가 맥주에다가, 아줌마부터 해가지고 전부다 하는데 그 술 먹는 폼을 제가 보니까 한마디로 뭐냐 하면 허세와 허풍이에요. 술 먹을 때 꼭 허세, 허풍 부려야 됩니까? 이게 술잔이라면 왜 술잔을 이렇게 (두 손으로) 쥐고 왜 못 먹어요? 어떻게 쥐는 줄 알아요? 이렇게 (술잔 끝에만 잡고) 쥐어가지고. 그냥 먹지 또 박기는 왜 밑바닥을 받아가지고. 왜 그래요? 내 보기에는 허세와 허풍이라는 말이죠.

자, 허세와 허풍이 왜 생기느냐? 불안 때문에 생긴다, 불안 때문에. 내가 날 안지키면 누가 날 지키겠어요? 벌벌 떠는 거예요, 조마조마한 거예요. 왜? 미래가 보장이 안되니까. 지금 현재까지 과거부터 얼마나 애를 썼어요. 과거에 얼마나 노력해서 지금의 현재에 와 있습니까? 그러니 내가 현재 하나 유지하기 위해서 과거에 고생들을 그만큼 했다면 앞으로 내 미래가 더 나아진다든지 안정되려면 과거에 했던 고생만큼 더 해야 된다는 그러한 약한 마음을 갖게 되죠. 그 약한 모습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는 술잔을 이렇게 (술 잔 끝을 손가락으로 잡고) 들고. 이렇게 들면 (두 손을 모아서) 얼마나 착실하게 드는 겁니까? 이게 뭐고? 끝에만 들고 먹자. 허세와 허풍. 그만큼 불안해서 못살겠다는 거예요, 술 먹는 게. 불안해서 못살겠다. 속상해서 못살겠다. 왜 속상합니까? 나 잘났는데 세상은 나를, 나 잘난 만큼의 그 대우를 세상에서 안해 주더라 하는 거예요.

자, 그러면 “아이고 목사님 그거는 술 먹는 불신자들 이야기지요.” 이렇게 하거든요. 그러면 신자 이야기해볼까요? 신자라고 우기는 사람들. 교회에서 열심히 기도하는데 기도할 때 그냥 기도로 끝낼 인간들이 아니거든요. 기도했으면 또 헌금을 목돈으로 하든지 봉사했으면 반드시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잖아요. 속이 상한 거예요. “집사님 왜 속이 상합니까?” 내가 노력한만큼 기도한만큼 남이 안알아준다는 거예요. 솔직하게 그걸 안알아준다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교인은 없어요. 왜? 자기의 불신이 다 들통나는 그게 부끄러워서 말은 못하죠. 그러니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여튼 우리 교회에 신앙인이 없어.” 이런 식으로. 니나 잘하세요, 니나. 남 걱정하지 말고 니나 잘하세요, 네?

봉사를 해도 뭘 해도 꼭 남이 봐줘야 된다는 거. 남이 봐준다는 것은 남에 의해서 내가 규정받는 거예요. 남에 의해서 내가 좋게 규정받기를 원할 때 이 사람은 그게 바로 육체가 되는 거예요, 육체. 육체는 뭐냐 하면 좋은 쪽으로 내 몸이 좀 살았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이 좋은 쪽의 정반대 말이 뭐냐 하면 가차없이 죽는 거예요. 이 육체는 인간을 살리고자 하잖아요. 살리고자 하는 것의 반대는 뭡니까? 죽는 것. 그 죽는 것을 누가 했습니까? 주님이 하셨죠. 주님께서 말로 “너희는 죄인이다” “네, 주님이 하신 말인데 믿겠나이다.” 이렇게 되는 게 아니에요. 아예 죽어버리는 거예요.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할 때 예수님의 말씀의 전개를 잘 들어보세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할 때 베드로가 뭐라고 합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했죠? 지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질문을 유도해내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선지자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예레미야라 할 때 나, 인자가 누구냐고 사람들보고 물은 게 아니에요. 지금 제자들에게 묻는다고요. 제자들에게 문제가 있으니까. 가장 가까운 자들이 문제 있잖아요.

주님은 가까운 자들의 문제를 통해서, 계속 질문을 해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거든요.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어떤 사람은 선지자, 어떤 사람은 예레미야라고 이야기 할 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할 때, 제자들이 구성하고 구축하고 있는 예수님상이 있을 거 아니에요, 그쵸? 예수님상. 그러면 그 예수님상에 예수님이 아주 맥없이 초라하게 콱 죽는다는 내용이 이 제자들의 생각에는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지요.

하나 예를 들어볼까요? 수능 치고 난 뒤에 “수능 몇 개 틀렸나?”, “한 4개 틀리고 다 맞았습니다.” “그래?” “엄마, 한번 물어 볼께요. 세상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 하던가요?” 공부 잘하죠, 멋있죠. 수능 4개 틀렸으니까 의대 가기는 틀렸고. 만점이 15명. 1개 틀린 사람이 한 100명, 2개 틀린 사람이 한 500명? 3개 틀리면 한 천 몇 명? 4개 틀리면...끝났네. 전국의 의대는 못갈 수도 있겠네. 어째든 간에 4개 틀리면 공부 잘 한 거잖아요. “엄마는 사람들이 누구라 해?”, “엄마는 공부 잘 가르치는 엄마라 해가지고 칭찬하더라.”, “엄마 나 죽을께.” 이게 앞뒤가 맞는 이야기에요? “아이고 공부 잘하는 내 자식이 왜 죽어?” 이렇게 나오겠죠? 그게 제자들이 가진 생각이에요.

아까 죄란 뭡니까? 죄란 아버지의 생각과 뜻이 다른 거죠. 그 뜻이 다른 사람들의 대표자가 바로 예수님 옆에 포진되어 있는 12제자들이죠.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말이 전혀 무슨 뜻인지를 몰라요. 지 마음대로 해석해, 지 마음대로. 예수님은 훌륭하다, 자비하시다. 대단하다, 메시아다. 전부다 그렇게 고백을 함으로써 자신이 죄가 없고 허점이 없음을 전제로 깔고 예수님에 대해 그렇게 좋게 평하는 거예요.

‘내 자식은 훌륭하다, 내 자식은 공부 잘한다’ 할 때 엄마가 ‘나는 이거 문제 있어, 너무 과한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을 갖는 게 아니고 “내 객관적으로 이야기하는데 너 공부 잘 한다.” 이런 식으로 자기 딴에 객관에 대해서, 본인 객관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처럼 여기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죽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베드로는 뭐라고 합니까? “그러시면 안되죠.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하는 조로 나왔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베드로를 부른 호칭이 뭐였어요, 갑자기? “사탄아 물러가라” 그게 바로 내가 너하고 이야기하는 가운데 사탄의 생각이 어떻게 인류의 정신을 통째로 잠식하고 있는가를 내가 완전히 뽑아낸 거다. 사탄아 물러가라. 다시 말해서 사단의 생각=사람의 생각이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그 뒤에 나오죠?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니 그게 사탄의 일인 거예요.

갈라디아서 1장 10절, 외우시는 분이 계십니까? 1장 10절에 보면,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면 뭐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죠. 사람을 좋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죠? 이거 믿습니까? 그 사람 속에 누구도 포함되어 있어요? 나도 포함되죠. 나를 좋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일이 아니다 이 말이죠. 이미 규정됐잖아요, 죄인이라고. 육이라고. 그러니까 우리가 죽는 게 마땅하다고요. 그만 살고 죽어도 화내지 마세요. 슬퍼하거나 노하지 마세요. 인생이 나를 속일지라도. 우리가 주님을 속여 놨으니까 속임 당하는 것은 당연하죠.

갈라디아서 1장 10절 다시 이야기합니다. “내가 사람을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면 내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의 종은 철저하게 뭐를 비껴간다? 사람을 좋게 하거나 사람을 기쁘게 하는 그 짓은 때려죽여도 그리스도의 종은 하지 않는다. 성령 받은 사람은 그 짓하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자, 여기서 또 어려운 거 해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사람을 좋게 하랴는 말을 정확하게 말하면 뭐냐. 사람을 좋게 하랴는 게 아니고 여기에 뭐를 붙여야 하냐면 사람‘들’을 붙여야 되요. “사람들을 좋게 하랴” 이렇게 되어야 되요. 왜냐하면 사람이란 다 어디서 나왔으니까? 사람들 중의 일부이기 때문에. 사람들 중의 일부거든요. 이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반대다. 하나님 뜻을 모른다. 이렇게 보면 되죠. 그렇죠?

그래서 이 사람들을 오늘 본문에서 뭐라고 하느냐면 죄라고 하죠. 인간의 육신을 죄라고 하죠. 그 죄라고 할 때 인간들은 자기가 뭔가 아는 양 “맞습니다. 내가 죄입니다.” 이렇게 되어 버리면 어느 규정에 지금 위배되는 거예요? 어느 전제에 위배됩니까?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주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다는 그 전제와 완전히 맞지를 않죠. 따라서 “그러면 죄 아니라 할까요? 뭐라고 말할까요?”, “아니 뭘 해도 죄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여기서 건널 수 없는 다리를 놔버린단 말이죠. 그게 뭐냐? 예수님은 죽으셨다는 거예요. 예수님은 죽으셨다.

예수님이 죽었다는 말은, 우리가 예수님 죽음을 본받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니에요. 예수님 죽으셨으니까 우리도 죽자. 그러면 우리 죽음은 뭐 의미 있는 줄 알아요? 여기 보면 예수님 한 분이 그것도 한번에, ‘한번에’라는 말은 히브리서 10장 10절에 보면 그걸 다른 말로 ‘단번에’ 또는 ‘한번에’. ‘한번에’라는 말은 한 사람이 한번한 그걸로 모든 규정은 깔끔하게 결론지어진 거예요. 결론지어졌다 이 말이죠.

참 우리 육신의 미래지향적인 것과 과거 기억이 말썽꾸러기에요. 정말 우리가, 정말 말썽입니다. 왕년에 내가 이거했다, 앞으로 나는 이거 할 거야. 나는 그게 소망이야, 꿈이야. 이게 말썽이에요, 인생에. 여러분, 왜 인생이 힘들다고 느껴집니까? 말썽꾸러기가 있으니 힘들죠. 그 말썽꾸러기 왜 생깁니까? 본인을 하나의 옛날 사람으로 여기고 성도라고 여기지 않아요. 다시 말해서 ‘나는 사람이 아니무니다’. ‘나는 사람이 아니무니다’라는 생각을 못갖는 거예요. ‘사람이고 싶어. 아니 사람들 속에 끼어들어도 같이 어울릴 수 있는 그냥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고 싶어’ 라는 생각을 우리가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참 눈만 뜨면 고민하고 걱정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아는 이야기 할께요. 솔로몬이 기도했죠. 솔로몬 기도 내용의 핵심은 뭐였습니까? 자기의 목숨도 구하지 아니하고 수명도 연장 안하고 적들이 어서 죽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인데 그 하나가 뭐예요? 그 하나가 뭐였습니까? 이것도 아니고... 세 가지가 아닌 거예요. 내가 수명 오래 사는 것도 아니고 부자 되는 것도 아니고 나의 원수가 조기에 나한테 망하는 것도 아니고 세 가지의 ‘~아니다’가 있다면 ‘~이다’는 것이 뭐였죠? “하나님의 말씀을 알게 하옵소서. 주의 말씀을 알게 하옵소서.” 왜? 내가 왕이니까. 가르쳐야 되니까. 주의 말씀대로 가르쳐야 되니까 “하나님이여, 저 다른 거 안 바라는데 주의 뜻이 뭡니까?” 그거예요.

주의 뜻 알아서 오래 살려고 하는 겁니까? 그거 아니라 했죠. 주의 뜻 알아서 부자 되려고 했어요? 그거 아니라 했죠. 주의 뜻 알아가지고 자기 괴롭히는 사람을 보란 듯이 억누르는 어떤 쾌감을 얻으려고 했습니까? 그거 아니죠. 그러면 그거 아닌데 주의 뜻은 왜 주의 뜻입니까? 본인을 위해서에요, 아니면 하나님을 위해서입니까? 이 나라가 내 나라가 아니고 누구의 나라다? 주의 나라죠. 그러면 “저는 아닙니다.”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10분 쉽시다.
 이하림(IP:124.♡.210.16) 19-12-14 22:30 
서울의존강의20191212b 베드로전서3장 18절(특수한 인간)-이 근호 목사

아까 갈라디아서 1장 10절 계속 해보죠. 사도바울이 사람을 좋게 하고 기쁘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이야기했을 때 이것은 사람들을 꼬신다든지 설득할 의도는 전무하죠. 이게 설득해서 성도 될 수가 없다는 거예요. 만약에 사람이 설득해서 성도가 되어 버리면 그것은 성도가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에 대해서 정보가 없던 사람이 예수에 대해서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이 되는 거죠. 맨 그 사람이라니까요. 맨 육이 육이 되는 거예요.

육인데 육은 자기의 과거, 미래에 대해서 궁금해 하고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 하면서 뭐를 추구하느냐 하면 초월을 추구해요, 초월을. 인간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계속 초월을 추구하거든요. 초월을 추구한다는 말은 그만큼 이 육은 스스로 뭘 하느냐 하면 아까 한계라고 했죠. 한계는 이것까지는 내가 접수했는데 더 깊은 것까지는 내가 아직까지 미흡하니까 모르는 것은 악이라 하고 아는 것은 선이라 한다면 이것은 무슨 사고방식입니까? 여전히 선악지식에 그냥 매여 있는, 그 안에 놓여 있는 상태밖에 안돼요. 지금 이것까지는 알지만 더욱더 공부에 박차를 가해가지고 미진한 부분을 마저 채우면 내가 얼마나 훌륭하겠느냐 생각하겠죠. 얼마나 훌륭하겠나 하는 것은 바로 미래의식 아닙니까? 미래의식이죠.

아까 성도란 뭐라고 했습니까? 성도라 하는 것은 이 육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이 차단성을 가지고 발생되는 거잖아요, 차단성을 가지고. 차단성이 내부에 꽂혀 있는 거예요. 단절성이 꽂혀 있다 이 말이죠, 단절성이. 다시 말해서 내가 어떻게 해서 성도된 적이 없음이 그 성도 안에 계속 자리잡고 있는 거예요. 내가 전에 인간이라고 여겼던 그 인간이란 개념은 성도 안에는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런 인간 개념은 없어요. 그 인간 개념은 그저 자기 한계를 알고 더 발전을 도모하려고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지금 사도바울이 ‘사람을 좋게 하지 않고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겠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이 사도바울이라고 하는 그 인간성은 보통 인간하고 달라요. 성령 받았기 때문에. 그걸 가지고 오늘 본문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18절에. 이거 설명하려고 이렇게 길게 설명했어요.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그 다음에 뭡니까?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영으로 살리심을 받을 때 그 인간이 단절을 넘어선 새로운 인간 존재기 때문에 성도는 그냥 일반적인 인간이 아니고 전혀 특수한 인간이라고요, 특수한 인간. 오늘 제목이 ‘특수한 인간’이다. 특별한 인간이 아니고, 혼자 돛대라는 게 아니고, 특수한 인간. 특수한 존재로서 특수한 인간이죠, 성도라는 것은 특수한 인간입니다.

자, 특수한 성도의 특징은 뭐냐 하면 자기가 어떻게 시도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하나님의 허락에 의해서 자기 인생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본인이 알아요. 허락입니다. 예를 들면 이 집에 분재를 좀 키우네요. 분재 맞지요? TV로 기어 올라가 있는 거 저런 거 분재 맞지요? 분재를 키워가지고. 저 분재를 목사님이 키우고 있습니까? (사모님이 키우셔요) 사모님이 계셔야 되는데... 분재 있는데 내가 아이고 이걸 똑! 하고 가지를 아주 와장창 관절 꺾듯이 꺾어놨다. 그러면 분재에 몰두한 그 분이 얼마나 속상하겠어요? 그러면 멱살을 쥐고 “왜 내 분재에 손댑니까?” 하면 그 사람 하는 말이 “주님이 허락하셨기 때문에.”

주님이 허락하셨다는 말은 나한테 책임이 있다, 없다? 책임이 없는 거죠. 그게 성도의 신분입니다. 여러분, 놀랍게 들립니까? 터무니없는 망발로 들립니까? 어때요? 좀 터무니없는, 무책임한, 얍삽한 말로 듣기시는 거예요, 아니면 감격스러운 말로 듣기십니까? 우리가 육체로 있을 때 성도가 되는 것이 아니고 훌륭한 인간이 되고 싶어 했던 거예요, 우리가. 누구만큼? 예수님처럼.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처럼 훌륭한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훌륭한 ‘사람’.

그러면 나와 훌륭한 사람 사이에 단절성 있어요, 없어요? 단절성, 전혀 없지요. 분재 분질러놓고 주가 허락했다는 그런 막되 먹은 인간을 목표로 합니까? ‘나 이제 예수 믿고 분재 한번 작살내 봐야지.’ 이걸 목표로 성도 되는 거예요? 그렇게 하는 게 아니죠. 그게 왜 그러냐 하면은요. 성도의 의식 속에는 뭐냐 하면 내가 원해서 성도된 게 아니라는 게 자리잡기 때문에 그래요. 성도가 내가 원해서 성도되는 게 아니고 성도되는 것도 주님의 허락이 우선이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허락 때문에 성도된 거거든요. 그러면 이게 한 번으로 끝날까요, 계속 이어질까요? 계속해서 이어지는 거예요, 계속해서.       
                      
스데반 집사가 설교하다가 돌에 맞습니다. 돌에 맞을 때, 만약에 여러분들이 그 현장에 스데반 집사라고 생각해봅시다. ‘야 이거 내가 설교 잘못했나? 내가 이러려고 설교했나? 유명한 말처럼, 내가 이러려고 설교했나?’ 그런 생각 막 들겠죠. 그죠? 황교안이라는 자유당 대표입니까? 그 사람이 일주일째 청와대 앞에서 금식을 했잖아요. 만약에요, 아무도 안말렸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의식 없어졌는데도 안말리고 가만히 있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됐을까요? 죽었을까요, 아니면 에이씨하고 스스로 일어설까요?

아까 분명히 갈라디아서 1장 10절, 나는 사람을 좋게, 기쁘게 하는 게 아니죠? 그 사람 중에 누가 포함되어 있습니까? 본인이 포함되어 있는 거예요. 내가 전에 육체로 있을 때 은근히 기대했고 ‘나 이렇게 하면 성도 맞다’ 라고 여겼던 그 모든 것을 주께서는 죽음에다가 다 집어 넣어버린 거예요. 에라 죽어버려라, 인간아. 이 육체야. 니 육이야, 니 죄야. 따라서 너는, 그것은 죽어 마땅해. 그 육체를 어떻게 요리하고 거기다가 뭐 이렇게 아기자기하게 꾸며가지고 그것가지고 영의 성도라고 우길 생각 아예 하지 말라는 거예요. 성도는 육체로 있을 때 상상도 못하고 예상도 못한 겁니다.

오늘 제 강의의 핵심은 이겁니다. 성도는 우리가 인간으로 있을 때는 예상도, 상상도 못했다. 내가 이럴 줄을 몰랐다. 내가 이런 식으로 인생을 살 줄은 몰랐다. 착실해야 되고 스스로 관리해야 되고 자기 절제해야 되고 자기 조심해야 되고 살펴서 남들에게 해를 끼치나 안끼치나 늘 이렇게 고민해야 되고 남을 배려해야 되고. 남에게 빛과 소금,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주려고 애를 써야 되고. 이것이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육체로 있을 때 성경 보면서 성경에 나와 있는 모든 그 개념들을 종합해 볼 때에 성도라는 것은 뭐냐 하면 ‘천사처럼 사는 것이 성도다’ 라고 여기는 거예요.

성도가 안되었을 경우에는, 계속 우리는 그 천사 이미지가 나의 목표로 남아있는 겁니다. 나는 우리교회 권사님이 너무 천사같아. 언제 저렇게 기도해서 권사님처럼 본받을까. 하여튼 의존교회나 우리교회나 참 좋은 점은 본받을 자가 없다는 거예요. 아주 큰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교회에 기도할 때 기도하는 사람이 얼마나 겁내는지 몰라요. 생중계도 생중계지만 기도 한번 하고 난 뒤에 뒷담화, 얼마나 씹어댈까요? 믿음 좋은 줄 알았더니 기도하는 꼬라지 보니 믿음 없다는 이야기가 막 귓가에 기도하는데도 왕왕 들리는 것 같아. 자기 속에 있는 수준 완전히 다 엑스레이 찍듯이 다 노출되는 그 수치심 같은 게 있는 거 같아요.

기도할 때 이론이 그거거든요. 사람 보지 말고 누구만 보라? 주님 보라. 이론상 너무나 간단한 이야기 아닙니까? 예를 들어 설교할 때도 마찬가지로 ‘사람들 보지 말고 주님이 여기 앉아 계신다고 생각하고 설교하라’ 라고 설교하는데 아이 울고 휴대폰 울려가지고 “예예, 좀 이따 내 곧 갑니다. 가게 문 엽니다.” 뭐 이런 이야기 들리고 말이죠, 시끄럽게 할 때 “에이 때려치워라. 나 설교 못하겠다.” 이렇게 하겠죠, 인간인 이상. 그게 뭐냐 하면 사람을 의식하는 거고 사람을 의식한다고 하는 것은 은연 중에 기도나 설교할 때 사람을 만족스럽게 할 의도를 갖고 있었다는 티가 나버리는 거예요.

“인간은 인간이 전도해야 된다.” 이런 말도 안되는 소리하고 있는 거예요. 전도는 성도만 할 수 있어요. 인간이 못해요. 특수한 인간이 하는 것이지 인간이 전도하게 되면 그건 전도가 아니고 자기 동호회에요, 동호회. 동호회라고 하는 것은 쉽게 말해서 청소년 애들이 같은 커플 옷 입고, 옷 비슷하게 입고 같은 은어 쓰는 것 있잖아요. 자기들끼리 통하는, ‘깜놀’해가지고 줄여 쓰는 거 있잖아요. 찐남자. 찐남자가 뭔 뜻이냐 하면 진짜 남자라는 뜻이에요. 이거는 신천지랑 똑같아. 자기들끼리 노닥거리는 거예요, 자기들끼리. 공통언어 사용하면서 공통 관심사 해가지고 하나의 공동체 유지하는 거죠. 그거는 노는 거지 동호회, 친목단체죠.

그 조직이 자기를 대행하니까 거기서 그 질서에 순응하고 복종하죠. 그러면 그 공동체가 예수님을 대신하는 거예요. 예수 믿는 게 아니고 신천지를 믿는 거예요, 신천지 교인들이. 마치 오늘날 교회가 예수 안 믿고 교회 믿듯이 똑같은 거예요.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자꾸 조직을 내놓으라고 하는 거예요, 조직을. 왜? 조직이 있어야 사람들이 올 게 아니냐. 이게 뭔 뜻이에요? 조직이 있어야 조직 있는 자체가 사람들에게 기쁨이 되고 사람을 좋게 하는 요소가 되기 때문에 꼬시자 이 말이거든요. 꼬셔서 뭐 할건데요? 사람 꼬셔다가 사람밖에 더 됩니까? 성도됩니까? 거기에 어떤 단절이 있어요? 어떤 자기부인이 있을 수 있습니까?

아까 단절이라는 말을 했는데요. 마태복음 16장에 베드로 이야기 다시 한번 해봅시다. 베드로가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거창하게 했다 이 말이죠. 주님께서 아주 칭찬이 늘어졌어요. “네가 알게 한 것은 혈육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다” 했는데 지금 베드로에게 뭐가 빠졌느냐 하면 예수님이 죽는다는 이 사실이 빠진 채 이야기하는 거예요, 죽는다는 사실이. 왜냐하면 죽는 스승을 따라 다니면 자기는 지금 헛짓하는 거예요, 헛짓.

주님의 뜻은 뭐냐 하면 베드로야, 헛짓해라. 그게 교회야. 헛짓하란 말이야, 헛짓. 그동안 뭐했어요? 나를 기쁘게 하려고 성도 되려고 한 거예요. 나를 기쁘게. 죽어서 천당 가려고 성도 되고 싶어 했던 거예요.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을 포기를 못했어. 그러니까 죽는다 하니까 “그런 부정적인 것은 하지 말고” 이런 식으로 나온다고요.

강의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너무나 간단한 이야기에요. 너희는 죄인이다. 주께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주께서 죽으시고 영이 되었다. 여기 뭐 문제 있습니까? 문제 없지요. 뭐가 문제냐 하면, 문제는 없는데 그게 주님의 뜻이잖아요. 그러면 주님의 뜻이 여기 도달하면 그만인데 그게 아니고 그걸 자꾸 믿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걸 자꾸 내 것 만드려고, 내 소유화시키려고 하는 거예요. 나 이 정도로 안다고. 인간의 육이 있는데 육을 죽일려고 하는데 육을 안죽이고 육 안에 성도가 무엇이며 예수님이 무엇이며 십자가가 뭐냐 이걸 담으려고 하는 거예요. 육은 육대로 있으면서 이걸 담아서 뭐 할건데? 이거 담아서 뭐 할건데요? 이거 성도도 아닌데.

자, 진도를 나가봅시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성도는 어떻게 삽니까? 주님의 허락으로 삽니다. 허락이 뭡니까? 일체 자기 일어난 일에 책임지지 않는 겁니다. 그럼 불안하지 않을까요? 불안하다는 자체가 뭡니까? 역시 시공간에서 안죽었다는 뜻이에요. 시공간에서 죽어야 되는데 시간에 대해서 감각을 가지고 있고 공간에 대해서 감각을 가지고 있으면 이거는 죽었다는 증거를 어디서 찾습니까? 한국에서는 신자인데 미국 가서는 신자 아니고 미국 LA 카지노판에서는 신자 아니고 한국 오면 신자 되고. 뭐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어느 장소에, 북극에 가든 북한에 가든 중국에 가든 어느 장소에서도 그 사람은 뭐여야 한다? 성도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내가 뭐하려고 이곳까지 왔느냐?’ 이렇게 후회하지 않는 것. 주께서 허락해서 지금 중국에 왔다. 허락해서 지금 북한에 왔다. 허락해서 미국 갔다. 나는 주님의 허락 하에 지금 강남에 50억짜리 아파트에 산다. 이건 내가 지금 살고 싶어 사는 게 아니다. 주님이 허락해서 구차없이 할 수 없어 내가 사는기라. 아이고 이 넓은 아파트 귀찮아 죽겠다. 청소하려고 하니까. 로봇이 청소하지만. 이런 식으로 말이죠.

그러니까 성도가 되어서 이것은 할 일이고 이것은 안할 일이고는 성도한테는 그게 일체 없다 이 말입니다. 주님의 허락 하에 사니까. 자유 아닙니까? 자유. 내가 자유를 누리는 게 아니고 주님의 자유를 보여주자는 말이에요. 주님의 자유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성도된 거예요. 인간인데도 불구하고 특수한 인간이라서 인간이기도 하고 인간 같지도 않고 뭐 이런 거. 꼭 주님 같아요. 그걸 뭐라고 하느냐면 영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베드로가 여기서 표현을 ‘영’이라 하는 것은 귀신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뭐 라면 끓일 때 물 끓으면 안에 수증기 나오죠? 그 수증기, 영은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귀신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성도를 두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성도. 그 성도가 구약에 있었다, 없었다? 이미 성도가 구약에 있었다 이 말입니다. 여기 주님 이야기하죠. 19절에, “저가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으니”

아까 제가 허락이라는 말을 했죠? 주님의 허락입니다. 주님의 허락이 되게 되면 성도된 것도 허락이지만 성도의 반대말은 성도 아님이죠 뭐. 그렇죠? 참 쉽죠? 성도 아님도 주님의 허락에 의해서 성도 아닌 거예요. 이 성도 아닌 사람은 어디 가느냐 하면 지옥 갑니다, 지옥 가요. 이 사람은 심판 때의 염소같은 거예요. 성도는 마지막 심판 때 양과 같아가지고 영원한 영생을 얻습니다. 이게 전부다 누구 때문에 그렇다? 주님의 허락 때문에 그런 거예요.

따라서 주님의 허락 때문에 성도 아니고 성도라 한다면 하나님은 인간하고 상대합니까, 상대 안합니까? 상대 안하죠. 그걸 아는 사람이 성도다 이 말이죠. 주님은 나하고 상대 안해요. 나를 부리고 나를 활용하죠. 사용하지 내하고 상대 안하죠. 내가 고민하고 아까도 얘기했지만 자책하고 그럴 필요가 없어요. 자책을 왜 합니까? 자책하는 의도가 뭐에요? 허세떠는 겁니까? 아, 저런 실수만 안했으면. 너는 있는 자체가, 그렇게 생각하는 자체가 실수에요, 그게.

규정을 했다는 말. 이게 창세기 1장에 보면 인간을 흙으로 만드시고 흙에다가 하나님의 형상을 집어넣었잖아요. 그게 규정이에요.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이 만듭니까, 하나님이 만듭니까? 하나님이 만들죠. 하나님이 만든 그 형상에 대해서 인간이 반대하거나 저지하거나 훼방하거나 할 능력이 없지요?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바르게 이야기해볼까요? 인간은 하나님이 만든 거예요. 맞죠? 인간은 하나님이 만든 겁니다. 고로 인간은 자기 생각할 권리가 없다는 거예요.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염려할 권한? 없는 거예요. 참새를 보라, 들풀을 보라. 참새, 들풀 누가 만들었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만들었죠? 하나님이 만들었잖아요. 따라서 참새, 들풀 안에는 하나님이 만들었다는 그 권한이 가득 들어있죠? 그래서 참새나 들풀은 그걸 마음껏 보여줬다 이 말이죠.

마찬가지로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 사람은 마음껏 보여줘야 되는데 하나님의 허락 하에 천국을 가지 못하고 지옥을 가야되는 인간들은 성도 아님에 대한 표현, 성도 아닌 그러한 행위들을 주님의 허락 하에 뭐 원 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원 없이. 북한의 김정일부터 시작해가지고 우리 주변에 보면...여기 시장 있잖아요. 신곡시장 가보셔요. 거기 뭐 반짝반짝반짝 그래요, 전부다. 하나님의 허락 하에 지옥 가는 사람들이. 본인이 애쓴다고 예수 믿어지는 게 아니에요.

뭐 뻔한 이야기, 기본 중의 기본 같은 이야기를 지금 제가 계속 하는 이유는 구원받은 기쁨을 우리가 너무 얕보지 말자는 뜻이에요. 세상의 어떤 기쁨도 이 구원받은, 성도됨의 기쁨을 못 따라옵니다. 이 말은 성도됨의 기쁨이 있다면 생활에서 어떠한 짜증나는 일이 있더라도 그 짜증은 하나의 교만이에요. 짜증낸다는 게 교만입니다. 여기까지 여러분들이 아셨다 치고.

허락으로 살아갑니다. 허락으로 살아가니까 자책할 게 있다, 없다? 없지요. 여기가 어디냐? 묻지도 말아요. 지금 몇시냐? 묻지도 말아요, 그냥. 잠을 자야 될텐데. 잠 자지 마세요. 잠을 허락해야 자지, 허락도 안했는데 잠을...잠 자야 될텐데 해가지고 그거 한다고 밤새지 마란 말이야. 잠 자야 될텐데 한다고 밤 다 새버렸어, 벌써.

그 다음에 더 나아가 봅시다. 성도는 아무도 나의 운명을 도와줄 사람도 없고 그리고 나의 운명에 손 댈 위인도 없다. 이미 성도 자체가 완제품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주님의 말씀이 여기에 들어옵니다. 성도다움에 필요한, 거기에 합당한 말씀들이 성도에게 계속 주입이 되다 보니까 성도 말고 다른 인간들이 내 운명에 관여하거나 도와주거나 해치거나 할 그 어떤 경우도 없습니다. 그 어떤 경우도 없어요.

그렇다면 가룟 유다가 자살한 것은 누구 때문입니까? 주님께서 가룟 유다한테 이렇게 무서운 얘기를 했어요. 참 주님이 가룟 유다에게 한 이 말을 풀어낸 그 내용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만한 가치 있는 말씀이에요.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했다.” 마치 영화의 조커같아.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네게 좋을 뻔했다.” 자, 이 말씀을 오늘 특수한 인간, 성도 입장에서 한번 보세요. 성도 입장에서 보게 되면, 이 가룟 유다가 스스로 자기가 사탄을 물리칠 수 있어요, 없어요? 물리칠 수 없죠. 그렇죠?

사탄이 육에 왔다. 그러면 육은 사탄이 오게 되면 어떤 결과를 낳느냐 하면 불행 중의 불행이라는 결과를 낳아요. 차라리 안태어났었으면 불행하지 않을 운명을, 태어나게 함으로써 불행하게 되었죠. 그러면 하나님에 의해서 허락받고 불신자된 사람들은 가룟 유다와 동일한 평가를 받게 되어 있어요.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했다. 왜? 사람은 죽는 것은 한번 정한 것이고 그 뒤에는 뭐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거든요. 심판 없으면 니가 어디 가서 어떻게 놀든지 신곡시장에서 무슨 장사하든지 다이소하든지 니 마음대로 해. 다있다 하든지 다없다 하든지 마음대로 하란 말이죠.

그러나 그러한 일들을 한다는 것은 일단 어떤 경우입니까? 태어났다는 전제하에. 그러면 태어났음에 대해서 인간이 후차적으로 여기 운명에 손댈 수 있다, 없다? 손을 못대는 거예요. 손을 댈 수가 없는 거예요. 그쪽 인간의 운명도 마찬가지지만 성도 인간의 운명도 마찬가지라니까요. 주님이 성도되게 하신 허락 하에서는 내 성도됨에 대해서는 내가 어떻게 손질할 수 없어요. 그 운명을 수정하거나 변경할 그런 권한도 없어요.

그렇다면 가룟 유다의 평에 의하면 성도는 어떤 평을 받았겠습니까? “너 참 태어나길 참 잘했어.” 자, 보세요. 이게 우리가 잘한 거예요,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잖아요. 그러면 가룟 유다보고 한 이야기는 뭡니까? 사탄보고 이야기한 거예요. 가룟 유다보고 한 게 아니라 사탄보고, 물론 가룟 유다도 포함되지만. “사탄아, 니가 차라리 악마 안되었으면 좋을 뻔했다”와 똑같은 이야기에요.

아니 태어남에 대해서 태어나기 전인데 어떻게 태어난 당사자가 자기 태어남을 관여하겠어요? “이렇게 만들어주세요.” 이렇게 할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했다는 말은 불행의 모델 케이스가 되었다는 말이에요. 지옥가는 모델 케이스가 되었다 이 말입니다. 그 말은 반대로 이야기하면, 성도는 뭡니까? 천국가는 모델 케이스가 되었다는 거예요.

이 말은 “니가 잘하면 내가 너 칭찬해줄게”가 아니라 너 존재 자체가 나한테는 기쁨이 된다는 말이에요, 니 존재 자체가. 성도는 존재 자체가 기쁨이 되요. “내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 중에 평화로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니까 누가복음 2장에 나오는 말씀 생각나죠. (누가복음 2장 14절,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아무도 나의 운명을 도울 수 없고 나도 내 운명을 변경하거나 손댈 수 없어요. 이게 답답합니까, 고맙습니까? 어때요? 이런 고마울 데가. 얼마나 고마워요. 이 기쁨을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가 자꾸 놓치고 있는 거예요. 왜? 사람들같은 사람하고 똑같은 사람 되고 싶어서. 그들이 알아주는 사람이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우리는 특수한 사람인데 그 특수를 빼버렸어요. 자책하고 후회하고 그리고 자책, 후회 그런 것들이 남들한테는 그대로 핑계가 돼서 변명하고.

자, 베드로전서 더 해봅시다. 지금까지 제가 육에서 영으로 옮겨간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다음에 빠진 게 있었는데 아까 18절에 보면,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대신하셨다고 되어 있죠? 불의한 자를 대신 했다. 인간은 자기가 불의한 지도 몰라요. 죄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을 대신하니까,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잖아요. 아 그렇다면 나를 대신한 분이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다면 곧 이것은 주께서 대신 안했더라면 우리는 마땅히 버려지는 존재가 된다라는 사실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거예요. 마땅히 버려지는 존재에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안졌다고 한다면 내 스스로 이것을 알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나는 뭔가 조치가 있어야 돼. 알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모르죠. 왜? 인간은 여기까지는 괜찮으니까 그걸 키울 생각을 하죠. 여기까지는 선하고 여기부터는 악하니까 앞으로 선을 키우고 악을 줄이면 내가 뭔가 안되겠나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전적으로 누가 와서 나를 대신할 정도로 그렇게 무능한, 나의 죄에 대해서 철저한 죄인이라는 의식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대신하는 분이 있기 전에는. 그러니 주님이 고맙죠. 대신하러 안왔으면 아무리 내가 몸부림쳐도 소용없는 거예요.

이제 그 다음 문제, 자, 주님께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성도가 되었고 영이 되었고 우리가 의인이 되었다 하는데 어떻게 죽은 것이 우리에게 의가 됩니까? “당연히 믿죠” 하지 마시고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는 말이죠. 우리 전도사님 집에 강아지 있죠? 강아지 죽으면 전도사님의 죄가 씻어집니까? 만약에 어떤 사람이 굉장히 저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죽으면 내 죄 없어집니까?

여기에 사람1이 있고 사람2가 있는데 사람1이 죽으면 사람2 죄가 없어집니까? 이런 논리가 있어요, 없어요? 있을 수가 없죠. 니는 니고 나는 난데 어떻게 니가 죽는다고 내가 살아요? 말이 안되잖아요. 말이 안되죠. 뉴질랜드에 화산이 터졌습니다. 사람들이 오도가도 못하고 화산은 또 터질 건데, 또 터질 것 같은 분위기가 있는데 배도 없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때 어디서 구조대원이 와가지고 이 사람 태우러 와서 드디어 이 섬을 떠났습니다. 20분 후에 터져 가지고 서 있던 자리가 완전히 화산재 덮혀서 죽을 뻔했습니다.

자, 이 구조대원이 이 사람 대신한 거예요? 안그러면 구출한 겁니까? 대신한 거예요, 구출한 거예요? 구출했죠. 그러면 화산섬에 있던 이 사람이, 구출당한 이 사람이 인간이라면 구출당하고 난 뒤 영이 되었습니까, 성도되었어요? 아니죠. 이건 구원이 아니잖아요. 구출이죠. 그 인간이 그 인간 되었잖아요, 그 인간이 그 인간. 그 인간이 시공간이 여기 있다가 다른 데 사는 것뿐이에요. 북한에 있다가 남한에 내려왔다. 구원된 겁니까? 자본주의 찾아온 거예요.

어떤 철학책에 이런 이야기 있어요. 하나님이 죽었대. 하나님 만세! 이게 보세요. 앞뒤가 안맞는 이야기이죠. 하나님이 죽었대요. 이제 인간 마음대로 해도 된답니다. 그래서 그 고마움을 누구한테 표현하느냐 하면 하나님께 표현하는 거예요. 이게 말이 안되잖아요, 그쵸? 항상 인간은 자기 이익이 우선이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구원을 뭐로 보느냐? 자기 이익 중의 하나로 보는 거예요. 내가 천당가는 것을 자기 이익 중의 하나로 보는 거예요. 그 ‘나’. 그 나는 전혀 달라진 거 없어요. 그냥 성경에 나오는 정보만 획득했다 뿐이지 본인은 달라진 게 없어요.

따라서 주님께서 죽었다는 이 말은, 대신 죽었다는 이 말은 너의 목숨을 대신한다는 말이 아니고 너에게 주어질 하나님의 뜻을 예수님이 대신한다는 말이에요. 인간은 그냥 맹탕이 아니에요.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피조물 같으면 마땅히 누구에게 순종해야 될 책임이 있어요?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할 책임이 있지요? 순종할 책임이 있는데 선악과 따먹어버렸잖아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게 아니고 누구한테 순종하겠어요? 맨날 순종, 순종해봐야 누구한테 순종? 악마한테 순종하죠.

주께서 우리가 지켜야 될,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될 모든 것을 대신해버린 거예요. 따라서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한 순간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못벗어납니다. 왜냐하면 대신한 게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룬 자, 이룬 자 속에서 우리가 몸부림쳐도 못벗어나요. 예수 안에서 우리는 온전히 이룬 자가 되어버려요. 그걸 가지고 오늘 본문에 보면 뭡니까? 죄인이 아니고 의인이라고 하는 거예요. 의인.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온전히 말씀을 지킨 자가 되어버렸어요. 의인. 예수 안에서 의인이 된 겁니다.

하나님이 인간 구원 못시켜서 아주 환장한 분으로 여기는데 그럴 것 같으면 아예 선악과 자체를 심지도 않았을 거고 그 다음에 선악과 따먹은 거 또 만들면 되지 뭐 귀하다고 쫓아내고 땅에 들어오지 못하고 생명나무 들어오는 걸 감시를 하겠어요. 하나님께서 떼찌, 하고 혼내주고 “앞으로 그러지 마라” 할 수 있잖아요. 뱀을 허락한 분이 누굽니까? 하나님이잖아요. 그러면 하나님도 약간 책임이 있네. 그 뱀에 마귀가 안들어오도록 해야지. 너무 경비를 허술하게 섰는가.

하나님은 인간 구원하는 게 목적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주로 만드는 게 목적이에요. 그게 영광이에요. 모든 인간이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고 이름을 높임으로써 아버지께 영광이 되느니라. 빌립보서 2장 11절. 우리 정신차립시다. 우리가 해야 될 일이 있어요. 아버지께 바르게 살아야 될 일이 있어요. 그걸 대신 해주신 거예요, 그걸.

그러니까 이름이 우리 이름인데, 우리 이름에다가 예수님 자기 이름을 써버린 거예요. 그러면 우리 이름은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 이름 안에 녹아져서 들어가버렸죠. 그러면 나는 어디 있습니까? 누구 이름으로 있습니까? 주의 이름으로 있다면 우리가 빼도 박도 못하고 누구 안에서 살아야 돼요? 주 안에서 살아야 될 운명이에요. 그만한 능력 있어요, 주님의 능력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해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고 ‘아, 나는 너무 마음이 약해. 자꾸 죄를 지어. 이 죄를 누가 대신 씻어주는 사람 없나?’ 거기 가면 있어요. 목욕탕에 가면 대신 때밀어주는 사람 있어요. 주님이 목욕탕에서 때밀어주는 사람입니까? ‘아, 나 구원 받고 싶은데 죄가 많아서 천당을 못가는데 누가 대신 죄씻어주면 참 좋겠는데...’ 이거 무슨 생각입니까? 사람을 기쁘게 하고 사람을 좋게 하는 생각이잖아요.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걸 두 자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종교’라고 이야기합니다.

종교의 특징은 인간의 초월성입니다, 인간의 초월성. 인간은 이대로는 살 수 없다. 영적으로 저 하늘나라 도달하자, 높은 곳을 향하여. 그렇게 세운 탑이 무슨 탑? 바벨탑이에요, 바벨탑. 인간의 속성을 집약한 게 바벨탑 아닙니까? 그게 종교 아닙니까, 종교. 종교는 자꾸 높은 곳을 향하죠. 고딕건물 보세요, 대성당의 시대에 고딕체 성당 높이 올라가잖아요, 80m, 100m 막 올라가잖아요. 200년 동안 짓고 150년 동안 짓고 하잖아요.

종교라 하는 것은 신을 향하는 겁니다. 그만한 권한이 본인한테 있다고 여기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는 저 높은 곳을 향할 때 주님은 어디를 향했습니까? 예수님은 뭐냐? 현재 네 상태에서 아버지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네가 네 죄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거다 이 말이죠. 버림받는 거예요, 그게. 그게 아버지의 뜻에 부합돼요. 나같은 인간은 버림받아야 돼요. 나뿐 아니라 여러분 다 마찬가지로 첫 번째 아담에 속한 모든 인간들은 선악과 따먹은 그 죄로 인하여 버림받는 것이 합당합니다. 버림받는 게 합당해요. 그 버림받음 속에 주님도 끼어들어 같이 버림받았잖아요.

죄를 씻어준다고 세례요한이 물세례 베풀 때에 어떤 분이 훅 뛰어들었거든요. 세례요한한테 성령이 임하고 보니까 아, 저 분. 죄도 없는 분이거든요. 그래서 세례요한이 뭐라고 합니까? “아이고, 이러시면 안됩니다. 죄 있는 인간들만 들어오지 죄 없는 분은 들어오면 안됩니다.”라고 했을 때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뜻이다. 죄 없는 자가 죄 있는 자들 속에 들어오는 것이다.” 

대신했다는 말은, 나는 가만히 있는데 주님께서 알아서 다 때 씻어줬다는 말이 아니라 주께서, 죄 없으신 분이 죄 속에 들어왔다는 그 고역과 심적인 고통, 이런 것들이 다 포함되겠죠. 그걸 두 자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지난 수요일에 이야기했는데, 그걸 가지고 “쓴 잔”을 마신다고 하는 거예요. 쓴 잔. 예수님이 제자들보고 너희들 쓴 잔 마셔야 된다고 하니까 제자들은 쓴 잔이 뭔지도 모르고 아주 대답은 잘해. “예수님, 좋아요. 마시겠나이다.” 참 내. 다 도망가 놓고 마시겠나이다. “그래, 너희들 말이 맞다. 너희들이 마시는 게 아니라 내가 마시게 해줄 거다. 마시게 해줄 거다, 쓴 잔을.”

그 쓴 잔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버림받는 것이 합당하다는 뜻이에요. 구원이고 뭐고 어디 건방지게 천국을 가요. 자기 분수도 모르고. 우리 입장에서는 천국이고 뭐고 지옥에 가는 것이 가장 합당합니다. 뜨거운 지옥불이. 그래서 지옥이 있는 거예요. 이게 니 모습이라는 거예요. 지옥을 아는 거지 나사로는 거지로 사는 것이 지옥 가는 것보다 훨씬 낫기 때문에 굴하지 않고 거지로 살았어요. 의지의 거지. 부자가 뭣도 모르고요, 좋다고 날마다 연락하고 파티, 파티, 물론 아모르 파티는 아니지만, 파티를 열고 난리를 했죠. 지금 본인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보이는지도 몰라요.

성도됨이라는 것은 그 안에 주님의 대신 죽으심의 그 효과가 계속 살아있어요. 한번 헤헤거리고 피 발라 놓고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평생토록 그 안에서 주님의 죽으심이 들어 있으면 그 사람은 성도고 다른 말로 하면 영적 존재가 되는 겁니다. 특수한 인간이 되는 거죠, 특수한 인간. 시공간의 변동이 없는 것. 성도 자체의 신분이 시공간을 초월하기 때문에. 이미 죽었다가 주님 안에 있다 보니까 세월 흐른다고, 장소 바뀐다고 성도인 게 아닌 게 되고 그런 거 없어요. 어디 가도 성도고 어떤 시대에도 성도에요. 그래야 육이 아니고 영적이라 할 수 있죠.

자, 그 시공간을 초월한다는 모습이 어디 나오느냐 하면 여기 나오죠. 20절에 봅시다. “그들은 전에” 그 다음에 무슨 날입니까? “노아의 날에” 아이고, 어지간히도 멀리 잡았다, 참. 옛날 노아의 날을 끄집어낸다고요? 노아의 날은 한물 간 거, 옛날, long long ago 아닙니까? 옛날 전 아닙니까? 이건 뭐냐 하면 옛날이 아니고 성도 입장에서는 시공간의 구애를 안받으니까 그 때 성도나 지금 성도나 맨 같은 성도라는 거예요.

여기 그 때 구원받은 사람이 몇 명이죠? 8명. 숫자도 나와요, 숫자로. 8명이에요.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다시 말해서 주님께 구원받기로 허락된 자가 그 당시 그 때는 몇 명이다? 8명이었다. 숫자로 이야기한다는 것은, 인간들의 소원대로 구원되는 게 아니고 이미 허락된 숫자를 채우는 방식으로 성도가 된다 이 말입니다, 그 작업에. 그래서 인간은 성도되는 데에 어떤 보탬도 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하신 일이, 성령을 통해서 하신 일이 성도됨입니다.

19절 봅시다. “저가 또한 영으로서”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영으로서 그 다음에 공간에 얽매이지 않죠. 어디를 갔습니까?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공간에 얽매이지 않고 어디를 갔습니까? “지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했다” 자, “영들”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러면 성도가 지옥갔다는 말이냐. 그게 아니고 ‘영’이라는 말은 이 세상에서는 영이라는 게 존재할 수가 없거든요. 전부다 육입니다.

죽음에서는 육이 아니고 전부다 영들로 규정이 되는데, 영 중에 두가지가 있겠죠. 하나는 지옥갈 영이 있고 하나는 천국갈 영이에요. 우리는 아직까지 안죽었으니까 그냥 영=우리는 성도라고 할 수 있는 거예요. 천국 가기에 예비되어 있는 사람들. 이미 확정되어 있으면서 아직 죽지는 않은 사람. 이게 예수님처럼 우리가 영이 되는 겁니다. 특수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성도가 어떤 경우라도 우리가 의인되는 이유는 아까 말씀드렸죠? 단독으로 의인되는 게 아니에요. 누구와 함께 있기 때문에? 대신 죽으신 분과 함께 있기 때문에 그 분이 대신 우리의 하는 모든 것을 다 이루었어요. 율법을 다 이룬 거예요. 율법을 다 이루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 사랑이 나오거든요. 그럼 사랑 안에는 뭐가 들어있다? 율법을 다 이루었음이 들어있죠.

자, 율법을 다 이룬 것이 사랑이고 사랑 안에는 뭐가 들어있다? 율법을 다 이루었음이고 그러면 사랑 안에 있으면 어떤 잘못에 대해서 지적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지적 못하죠. 그래서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사랑은 모든 심판에도 두려움이 없다. 심판에도 두려움이 없으니까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두려움이 없죠. 신분상 변동이 없다 이 말입니다. 사랑 안에 있으니까.
                 
사랑 안에 있다는 말은, 이 사랑은 소유가 아니고 소유 당하는 거거든요, 소유 당하는 거. 내가 너를 사랑한다. 주님이 너를 사랑한다고 할 때 내 쪽에서 주님의 손을 막 비틀고 꼬고 할 수 있습니까? “너를 사랑한다” 손 내미니까 손가락을 다 빼버리고 할 수 있습니까? 사랑은 일방적으로 주는 거란 말이죠. 사랑은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 주는 게 아니고요, 받을 자격도 없는데 사랑이 와서 덮쳐버리죠, 사랑이 와서.

올해는 눈이 많이 안왔다마는 벌판에 보면 쓰레기가 있어요. 그런데 지난 밤에 하얀 눈이 와서 자고 일어나 보니까 아침에 온통 하애요. 뭐가 안보입니까? 쓰레기가 안보이죠. 시커먼 게 안보이죠. 눈이 하얗게 덮인 거예요. 만약에 우리 마음에 주의 사랑이 덮인다면 우리 안에 있는 이런 어두운 것, 시커먼 것 이런 것들이 사랑에 다 녹아져버리죠. 그러면 우리는 시커먼 걸 봐야 되요, 사랑을 봐야 되요? 사랑을 보고 다시 우리의 시커먼 걸 보게 되면 사랑의 깊이와 높이가 얼마나 대단한가를 알 수 있다 이 말이죠.

사도 베드로가 이런 이야기를 할 때 베드로 본인도 지금 이런 마음자세로 살아가는 중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베드로가 사도가 될 때, 뭐 거침이 없죠. 세상의 정권을 무서워하겠습니까, 사람을 무서워하겠습니까? 무서워할 이유 없죠. 그 사람들이 바로 스데반 집사처럼, 성령받은 사도 바울처럼. 성령받은 사람은, 다 성도는 이렇게 사는 거예요. 그러면 세상을 떠나서 산속에 들어갈까? 허락한다면. 그런데 내가 보기에 그런 거 허락한 적 없어요. 허락하신다면. 항상 성도는 허락에 의해서 그 현장에 등장하는 존재라 이렇게 보시면 돼요.

지금 주님은 감옥에 가서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전파했죠? 자, 이와 같이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이렇게 되어 있는데 이거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베드로가 노아의 날을 무슨 날로 보느냐 하면 심판의 날로 보는 겁니다. 심판의 날로 볼 때에, 하나님이 사람들을 심판할 때 물로 뿌려서 심판하는 게 아니고 물로 덮어서 심판했죠. 이거는 죽어라, 다 죽어라 이 말이거든요. 다 죽이기 위해서 물로 온 거예요. 따라서 노아가 구원받았다는 말은 그들도 죽어야 되는데 어떤 예표가 있어요. 예수님의 죽으심의 예표. 그러니까 정결한 짐승이 결국은 이 노아를 살리기 위해서 죽는, 홍수 끝나고 난 뒤에 방주에서 나올 때 정결한 짐승을 잡는 제사를 미리 보여주기 위해서 노아 때 구원받은 사람이, 특수한 혜택을 받은 사람이 달랑 몇 명? 8명. 산 8명하고 죽은 사람들하고 숫자로 비교가 되겠어요, 안되겠어요? 안되죠. 안되는 거예요.

이 8명이라 하는 것은 마치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 단독과 마찬가지에요. 숫자 1과 마찬가지에요. 다른 사람 다 망해도 예수님만은 살아났다하고 똑같은 거예요. 이 정도로 희박한 숫자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노아의 하는 일과 예수님의 하는 일이, 시공간적으로 동일한 일이 옛날부터 이미 있어왔다는 이야기를 베드로가 하고 있는 겁니다. 노아 때 숫자 8명이 1명은 아니잖아요. 하지만 이 많은 사람들이 있는 세상에서 예수님 단독으로만 했다는 그 말이나 그 당시에 딱 8명만, 여덟 명뿐이라 했잖아요. ‘뿐’. 이게 많다는 거예요, 아슬아슬하게 적다는 거예요? 아슬아슬하게 적은 거예요.

옛날 노아 때 한 일과 동일하게 예수님은 그걸 해내셨다 그 말이죠. 마땅히 다 멸망해야 되는데 구원의 길은 있었다 이 말입니다, 구원의 길은. 예수님이 모든 말씀을 대신 지킴으로 말미암아 이제 육이 아니고 영이 된 사람한테는 그 노아의 여덟 명처럼 그들도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이런 말씀할 때는 반드시 세상과 연계해서 이야기해야 돼요. ‘예수님 뭐하셨지? 나 믿어야지.’ 이렇게 하면 안되고 그렇게 생각하는 우리 자신과 결부해서 ‘니가 지금 성도야? 맞아? 성도라면 성도의 기쁨을 알아? 자유를 알아?’ 결부하면서 이 말씀 주신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만사 통해서 주께서 지금도 부지런히 일하심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간들만 부지런하게 일하는 줄 알았더니만 주님도 일하심을 깨닫고 그 일의 결과가 성도인 것을 이제는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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