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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14 00:34:53 조회 : 158         
지정된 바닥 베드로전서 3:21 200213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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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림(IP:124.♡.210.16) 20-02-16 19:51 
서울의존강의20200213a 베드로전서3장 21절(지정된 바닥)-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3장 21절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베드로전서 3장 21절부터 하기로 되어 있는데 실은 18절부터 다시 들어가야 되겠죠.

말씀은 자체적으로 구성이 되어 있어요. 말씀은 스스로 구성, 그리고 완성. 말씀은 스스로 구성하고 스스로 완성해요. 그래서 말씀은 우리 말을, 또는 나의 말을 안듣습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말씀은 스스로 구성하기 때문에, 자기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기 때문에 말씀은 우리 말을 안듣습니다.

그러면 말씀을 스스로 가동시키고 움직이게 하시는, 말씀 안에 들어계신 분이 있죠. 그 분이 누구겠어요? 구약에서는 여호와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약속을 던져놓고 그 약속 안에 들어가서 약속을 스스로 움직이게 하는 겁니다.

장갑차가 움직인다. 그 안에 누가 들어있겠죠? 아무도 없는데 장갑차가 움직인다. 그런 장갑차는 아직 발명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겉으로 보기에는 장갑차는 아무도 보이지 않으니까, 차는 운전자가 보이지만 장갑차는 운전자가 안보이죠. 알아서 스스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겁니다. 다 깔아뭉개죠. 탱크. 보이는 건 다 깔아뭉갭니다.

그것이 여기에 바로 오늘 베드로전서 3장에 나오는 ‘노아’ 그 다음에 ‘홍수’가 나오죠, 홍수. 자, 홍수는 모든 것을 다 삼켜버렸습니다. 노아 홍수에 대해서 인간이 이의 걸 수 있습니까? 왜 이렇게 비가 많이 오십니까? 뭐 이런 거 있겠어요, 없겠어요? 안되죠, 안되겠죠. 그러면 노아 홍수는 왜 일어났는가? 방금 이야기를 그대로 적용시켜버리면 노아 홍수는 말씀이 스스로 움직이는 거예요. 그 말씀 안에 계시는 분, 여호와 하나님 또는 언약. 여호와 하나님께서 노아의 홍수라는 약속을 스스로 움직이는 거예요.

그러니 언약은 사람이 지키는 게 아닙니다. 언약은 사람이 지키는 게 아니에요. 주님이 알아서 움직여나가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뭐 간단하죠. 뭐가 간단하냐 하면 이 말씀하고 내 몸하고 맞바꾸면 되겠죠. 참, 말이 쉽죠? 그냥 바꾸면 되겠죠. 왜냐하면 말씀 안에 들어가면 주님이 알아서 해주고 말씀은 주님이 관리하고 내 몸은 누가 관리하고? 내가 관리하고.

그러면 말씀이 내 말 들어요, 안들어요? 안듣는다고 했죠? 그럼 자기 몸을 계속 유지하게 되면 동떨어지게 됩니다. 말씀의 완성과 별개가 되어버립니다. 그러면 말씀은 말씀대로 가고 우리는 우리대로 살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데, 문제는 이 말씀이라는 탱크가 노아의 홍수에 의하면, 이 탱크가 그냥 인간사는 동네를 완전히 밀어버리는 게 문제가 돼요. 말씀이 다른 동네가서 완성하게 되면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노시고 우리는 우리끼리 놀면 서로 win win하고 좋겠는데, 하나님이 말씀 가지고 어디서 노시느냐 하면 인간의 문명, 인간사회, 이 세상 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일으키시는 거예요. 그 증거가 노아의 홍수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난 비오는게 좋다. 내 취미가 비내리는 거야.” 그러면 인간사는 동네말고 저 황무지 있잖아요, 사람 안사는 데. 거기에 가서 실컷 물을 퍼붓든지 하시라 이 말이거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노아 홍수를 아무도 살지 않는 곳에 부은 게 아니고 어디다 부었습니까? 인간이 애지중지하고 또는 다른 사자성어로 오순도순, 가족끼리 애들하고 오순도순 살고 빡시게 일해서 겨우 결혼 15년 만에 조그만 빌라 1층 하나 장만한 그런 집. 어느 날 물 들어와가지고 가재도구 다 떠내려가고 사람까지 다 빠져죽게 만드시는 우리의 하나님. 15년 만에 집 한 칸 마련해가지고 이제는 한번 행복하게 살아보겠다고 다짐의 다짐, 손가락 있는대로 다 걸어가지고 ‘우리는 행복하게 살자’ 하는데 비가 와도 너무 와. 너무 오는 거예요. “이럴 수가 있습니까?” 대드니까 하나님께서 “이게 내 언약이다, 내 장갑차다” 그 말로 끝났어요.

알아서 바꾸지 왜 안바꾸냐, 네 몸하고. 네 몸 중심으로 살아가는 그 인생, 행복한 니 인생, 그 인생하고 말씀하고 왜 안바꿨냐 이 말이죠. 니가 독자적으로 살지 말라는 겁니다. ‘말씀은 난 몰라. 난 말씀하고 관계없어. 난 내 식으로 살거야’ 라고 고집하는 것은 오기라서 좋긴 좋은데. 좀 멋있어 보이고. 남자같으면 남자답잖아요. 좋은데 문제는 그 말씀이 건드린다는 게 문제입니다. 말씀이 건드린다는 겁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말씀이 다른 동네에 하면 되는데 하나님께서 집을 지을 때 아무도 없는 황무지에다가 집을 지어도 되는데 꼭 집을 지을 때 인간들이 오순도순 행복하게 다정하게 살려는 그것을 그냥 밀어버리고 거기다가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의 집을 지어버리니까 그동안 인간들이 애쓰고 수고한 것이 다 소용없죠. 인간은 신을 인정안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신을 인정하기는 하되 신을 절대화시키는 것은 인간 쪽에서는 용납못하겠다는 식으로 나오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님께서 왜 따로 말씀을 알아서 구성하시면서 사람들 사는 동네에 가서 그렇게 구성을 하느냐. 첫 번째 나오는 어려운 거예요. 하나님께서 말씀을 구성하실 때 그 장소가 어디냐? 그 장소가 썩은 곳이에요. 썩은 곳을 하나님께서 환원시킵니다. 썩은 곳을 환원시킨다. 환원이란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처음 있던 걸로 다시 회복한다, 처음 있는 것을 다시 발췌해낸다’ 그런 뜻이거든요. ‘환원한다’ 또는 ‘숨겨져 있는 근원을 발굴한다’.

환원이라는 말은 화학용어죠. 화학에서 환원이라 합니다. 수소(H) 2원자와 산소(O) 1원자가 만나면 물 1분자가 됩니다. 물(H₂O)을 환원시키면 2개의 수소원자와 1개의 산소원자가 되는 거예요, 환원시키면. 환원이라 하는 것은 ‘원래재료가 뭐냐’ 하는 거죠, 원래재료.

하나님께서 말씀을 성취하는 데에 있어서 그냥 따로 살림 챙기는 것이 아니고 “내 것 네가 망쳤다”라는 그 사실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인간 세계에 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이 알아서 점잖게 하나님 뜻에 맞춰서 착실하게 살면 되지 않겠느냐 라고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인간의 수고를 하나님의 말씀 성취로 간주하지를 않아요, 간주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체가 썩었다는 사실을, 아무리 외피로 둘둘 감아서 안썩은 척 해도 인간은 썩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내용은 뭐냐 하면 “인간은 어째서 썩었는가? 어째서 죽어 가는가? 망해 가는가?”. 말씀이 이야기하는 것은 항상 좋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기정사실화시켜요, 인간을. 죽어 마땅했었다. 망해야 했었다. 희망이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지시다. 인간의 힘으로 천국 가는 것은 애시당초 성립이 되지 않는다. 창세기 3장에 의해서,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막아놨으니까. 그런 것을 자꾸 이렇게 추궁해나가시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 쪽에서 “아닙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주의 말씀대로 삽니다.” 라고 우기고 나오겠죠.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신 포도원 비유를 제가 다시 말씀드리면, 이스라엘은 포도원이다. 옛날 미국영화에 보면 농장이름이 뭐냐, OK목장 있죠. 그럼 OK목장 주인, 목장주가 있겠죠. 간판을 걸죠. ‘OK목장’ 거기서 나온 유명한 결투가 뭡니까? ‘OK목장의 결투’에요. 이거 젊은 사람은 모르는구나, 그 영화를. 1960년대 나온 영화인데.

이 세상은 간판이 ‘하나님 나라’에요.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서 만든 OK목장이라고요. 그런데 포도원이 뭐냐, 하나님 나라의 포도원이에요, OK목장처럼. 여기 품꾼이 있는데 누구냐면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품꾼에게 일시키고 주인님은 한 번씩 소출 얻으러 간다 이 말이죠. 가는데 농부들이 주인에게 반란을 일으키기로 작심했어요. 전부다 한통속이 되어가지고. 그걸 사자성어로 노동조합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노동단결해가지고 소출 안주기로 마음을 정했어요.

주인님은 소출을 받기 위해서 종을 보냈습니다. 선지자죠. 죽였습니다. 또 보냈습니다. 또 죽였습니다. 주인님이 ‘설마 내 아들을 보내면 영접하겠지’ 하고 보냈어요. 그런데 농부들이 아들을 보니까 전에 있는 종하고 달리 보인다. 저 분은, 저 사람은, 아들은 상속자라고 보는 거예요. 회장님의 직원을 보내는 것은 하청업체가 거부할 수 있어요. 그건 거부할 수 있다고요. 또 직원 보내면 거부할 수 있어요. 그런데 재벌2세가 그 하청업체에 갔다. 그런데 하청업체에서 죽여버리자.

죽여버리자는 그러한 발상이 딱 떠오르는 이유가 아들만 죽이면 이 농장은, OK목장은 누구의 것이 됩니까? 그들의 것이 되겠죠. 그들의 것이 되면 포도원의 주인이 바뀌게 돼요. 하나님에서 인간으로 바뀌게 되는 겁니다. 그럴 때 아들을 죽였죠. 자, 아들을 죽였다는 말은 뭐냐 하면 그 농부들이 일치단결된, 하나같은 그 마음을 확실하게 점검할 수 있는 마지막 테스트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이 땅에 보낸 겁니다.

선지자 보내고 아들 보냈다는 것은 환원작업이에요. 인간이 어느 정도로 썩었느냐? 그냥 뭐 양심의 가책 정도냐, 아니면 하나님 안보이니까 하나님한테 한 번 대들어보다가 하나님 만나면 ‘아이고 하나님 잘못되었습니다’ 하는 그 정도냐, 아니면 원초적으로 하나님하고 한번 해보겠다는 식이냐. 그것을 오늘 제목으로 삼을 수 있는데요, 그게 뭐냐 하면 <바닥>입니다. ground. 최후의 마지막 바닥.

지금까지 설명에 의하면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어디로 찾아가고 방문하는데 뭐를 찾아가는 말씀입니까? 뭐를 찾아가겠어요? 바닥을 찾아가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의 심보, 정신상태 이런 것의 바닥, 그 지점을 찾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만약에 우리 자신이 내 몸을 내가 관리하는 것을 포기하고 말씀하고 맞바꿔서 이제는 말씀 안에 우리 몸을 실어버린다면, 말씀을 우리가 다룰 수는 없는 거고요, 말씀은 우리 말을 안들으니까, 말씀에 실려서 가게 되면 우리는 어디까지 내려가겠습니까? 어디까지 가게 되겠어요? 바닥까지 가는 거죠. 그게 바로 말씀 안에 있는 사람이 이 땅에 사는 이유입니다.

성도는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이 인간세계의 바닥을 들추어내는 용도로 말씀에 의해서 다루어지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저 높은 곳 아닙니다. 저 낮은 곳이에요. 저 낮은 곳입니다. 저 높은 곳 아니에요. 저 높은 곳에서 자기를 이상화하는 어떤 모델 같은 것 찾지 마세요.

인간 세계는 신을 인정한다고 했어요, 인정 안한다고 했어요? 인정해요. 인정하는데 신이 자기를 절대화해서 일방적으로 일하는 그런 신은 인정하지 않고 인간과 협의하기를 원해요. 좋은 게 좋다고 win win하자. 하나님도 살리고 인간도 같이 인간의 가오 또는 인간의 자존심도 살리고. 둘 다 살릴 수 있는 협의카드, 협상카드를 인간 쪽에서 계속 제시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 선지자를 보내가지고 인간 대표하고 협상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아들까지 보내버린 거예요. 아들을 보냈다는 말은 그동안 선지자를 죽였던 그 본색을 결국은 바닥까지 드러내고자 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인간세계의 바닥에 갈 때 하나님의 말씀은 멈추지 않죠. 어디서 멈춰지는가? 바닥까지 다 내려갔을 때 멈춥니다. 지하5층이 있다면 마지막 지하5층 내려갔을 때 엘리베이터가 스톱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이제 아시겠지요? 어디까지 내려간다?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께서는 바닥까지, 바닥의 바닥, 더 내려갈 자리 없는 그 곳까지 가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베드로전서 3장 19절에서 “그가 또한 영으로” 어디에 있는 영들에게? “옥에 있는 영들에게”. 감옥에 갇혀 있다는 식이죠. 죽음의 자리라 해야 되는데 그걸 죽음에 갇혀 있는 상황으로. ‘죽었다’하고 ‘죽음에 갇혀 있는’ 것하고 뉘앙스가 완전히 다르죠?

환원 조치하는 것, 세상의 가장 기본으로 내려가는 이러한 작업은 그동안 인간이 추구하는 것과 하나님이 추구하는 것과 방향이 완전히 서로 달랐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게 해줍니다. 이쯤에서 다시 한번 질문합니다. 노아 홍수 왜 일으켰습니까? 뭐를 찾아가기 위해서? 바닥을 찾아가기 위해서. 노아의 홍수 일으킬 때 얼마나 그 당시 사람들이 하늘을 보고 원망을 많이 했겠습니까? 한 사흘 비 내리고 멈출 줄 알았는데 끝도 없이 비가 오죠.

자, 홍수내린 비를 예수님께서 뭐로 보느냐 하면 ‘심판’으로 봅니다. 노아의 홍수는 심판이죠. 하나님의 언약이 스스로 구성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언약은, 말씀은 말씀대로 알아서 체제를 잡아가요. 그 체제의 방향성이 어느 쪽입니까? 심판이죠. 바닥 찾기죠. 바닥을 찾는 거죠, 심판. 그런데 인간의 몸은 본인이 알아서 바닥을 찾습니까? 스스로 “저 심판해주세요” 요청합니까? 안하죠.

내 아들 군에 보냈으니까 ‘군에서 지뢰 밟게 하옵소서’ 뭐 그런 기도합니까? 제대로 밟게 하옵소서. 자식한테 무슨 원수진 일 있는가. 이참에 군에 가서 보내버리려고 하는가. 그렇지 않고서는 그런 기도 안하죠. 그저 편안하게 잘 있게 해달라고 그런 기도를 많이 하죠, 새벽마다. 어떤 분은 자기 아들 월남전에 가고 난 뒤에 한시도 집에서 밤에 잠을 안잤어요. 왜? 내가 기도해야 2억만리 떨어져 있는 맹호부대, 대한 뉴스에 나오는 맹호부대에 있는 자기 아들한테 효험을 줄 수 있다고 보는 거예요.

양자역학에서 이거 나옵니다, 놀랍게도 양자역학에서. 두 입자가 있는데 하나는 시계방향으로 돌고 다른 하나는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고 있어요. 시계방향으로 도는 것을 up이라 하고 반대방향으로 도는 것은 down이라 해요. 두 입자가 서로 방향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만나면 상쇄돼서 환원되거든요. 환원 배웠죠? 이 두 입자를 백만광년, 엄청난 거리를 띄운다고 칩시다, 백만광년. 어느 입자가 어떻게 도는지 아무도 몰라요. 그런데 한쪽을 “아, 이 입자는 up이네” up이라고 보는 순간 백만광년 떨어져 있는 다른 입자가, 인간들이 이걸 관찰했다는 그 소식을 듣고 갑자기 이게 down되어 버려요. 서로 반대방향으로 간다고요. 이걸 가지고 ‘동시성’이라고 합니다. 양자가 서로 소통하고 있다. 연결되어 있다. 이걸 ‘양자 얽힘’이라고 하는 겁니다. 신기하죠? 참 신기한 거예요.

이 양자 얽힘을 가지고 만들어낸 새로운 컴퓨터가 양자 컴퓨터라고 하는 겁니다. 기존의 컴퓨터보다도 수천 배 더 빠르죠. 0과 1로 하지 않고 0과 1이상으로 하나의 숫자가지고 여러 가지를 다 할 수 있는 그런 원리를 이용해서 양자 컴퓨터가 새로 개발되고 있습니다. 눈도 코도 없어요.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뭐를 관찰했는지 어떻게 알아요? 그런데 서로 얽혀져 있는 거예요. 이런 비슷한 예가 바로 백지영 노래에 있어요. 미국에 이민 간 자기 애인에게, 몸은 떨어져도 같은 하늘에 있잖아. 같은 하늘에 있다는 거예요.

모든 것이 환원되게 될 때에 그 환원된 하나님의 원칙에 대해서 인간의 자기 몸의 관리는 그 어떤 경우라도 저항할 수가 없습니다. 바닥을 찾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강의한 것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방향이 있다. 그 방향은 바닥을 찾아간다. 그런데 바닥을 찾아가는 것은 인간 세계를 환원하기 위해서, 진짜 인간 세계의 내막이 뭐냐, 도대체 무슨 괴물이 들었는가를 다 도려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볼 때 이 언약, 말씀이라 하는 것은 개인적일까요, 아니면 보편적일까요? 특수한 개인에게 감정 있어서 이렇게 심판할까요? 인간의 잘잘못, 인격 그런 거 안따지고 전면적으로 다 관리할까요? 전면적이죠. 왜냐하면 사람하고 의논을 안하니까. 자 너가 얼마나 착한가 보자, 네 성적 얼마나 나왔어? 이런 거 묻지도 않습니다. 아시겠습니까?

따라서 자기 믿음 속에 자기 행함을 섞어 넣지 마세요. 섞어 넣으면 안돼요. 주님의 하신 일만 믿음의 내용이 되어야 되지, ‘내가 성심성의껏 주님께 충성을 다하지 않았습니까’ 하는 식으로 그 내용에 자기 걸 집어넣으면 안됩니다. 사람이 자기 걸 집어넣게 되면 아무리 하나님 하나님 하지만 무엇에만 자꾸 주목하느냐 하면, 자기가 거기에 한몫 한 것에 대해서 그게 우상화되어 버려요.

어느 교회에 피아노를 기증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은 무심코 하지만 그 피아노 기증한 사람은 예수고 하나님이고 그런 거 귀에 안들어오고 내 피아노에 누구 애가 올라가지 않는가 그것만 신경 쓰는 거예요. 교회에 만약 누가 꽃꽂이를 했다 그러면 그 주간은 말씀이고 뭐고 없고 꽃꽂이의 꽃이 시드냐 안시드냐, 꽃꽂이 스타일이 구도가 잘 맞춰졌나 그것만 신경 쓴다고요. 바짝 긴장되어 가지고. 그래가지고 머리 기른 애가 왔다갔다 하면서 꽃 부수고 그러면 “떼찌, 이놈” 하고 난리도 아니죠.

사람이 내 것을 하나님 앞에 섞어 넣게 되면 이것은 하나님 좋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보다 내가 더 우선적으로 좋다는 표시에요. 나는 하나님보다 내가 더 소중해요. 이 소중한 것을 하나님 키워주세요.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 속에는 무엇이 들어가서는 안된다고 했습니까? 내 것이 들어가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우리하고 의논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바닥을 찾기 때문에. 내가 찾을 수 없는 바닥을 계속 찾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왜 우리는 바닥을 찾지 못합니까? 그것은 우리의 잘못된 본성이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자꾸 자기의 가치를 향상시키려는 것에 대해 추구를 해요. 주님께서는 바닥, 끝을 향하여 계속 나가고 있는데 인간은 오히려 자기가 위대한 초월적, 절대적인 장소를 찾아 나서게 되는 겁니다.

지금까지 한 것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죠. 시작점에 대해서 하나님은 언약부터 시작해요. 인간은 어디부터 시작? 자기로부터 시작, 자기가치로부터 시작해요. 자 이제 기독교가 어떻고 침례교, 성결교, 장리교, 감리교 따지지 말고 이단이 뭐냐? 이단이 뭔지 확실해졌죠? 모든 이단은 뭐부터 출발합니까? 자기가치로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자기가치로부터 출발하는 대표적인 게 구원론이죠. 나 구원해달라는 거예요. 이게 바로 이단입니다.

시작점을 자기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자기로부터 시작하니까 아까 꽃꽂이하는 예처럼 신경을 어디 씁니까? 주님이 하시는 일에는 관심없고 얼마나 내 행동에 조심하고 절제하고 하나님 뜻에 위배되지 않기 위해서 항상 조마조마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자기관리에다가 바짝 신경을 쓰는 겁니다. 바리새인과 마찬가지죠.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하고. 이게 뭔 뜻이에요? 둘다 출발점은 같아도 나는 세리보다는 더 우수하다고 보고 있는 겁니다. <포드 V페라리>인가, 카레이스하는 겁니까? 교회에서 저 사람보다 낫고 이런 거 생각하면서 교회다닙니까?

인간이 신을 인정한다는 것은 신의 절대성을 인정한다는 것이 아니고 ‘신에 대해서 타협할 여지가 있다’ 라는 그런 주장이에요. 농부가 주인하고 “우리 좋은 게 좋지 않습니까” 하고 협상할 여지가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인보기에는 아주 시건방진 거예요, 인간이. 그걸 교만이라고 하는 겁니다. 자, 교만이라 하는 것은 자기 바닥을 감추는 게 교만이죠.

이런 건 어떨까요? “나는 부족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이것은 교만일까요, 교만 아닐까요? 교만이죠. 관심사가 내가 어디까지 낮아지는가에 관심 있는 거예요. 달리 말하면, “내려놓자, 또 내려놓자, 또 내려놓자”, “실례지만 지금 어디까지 내려놓으셨습니까? 아직 멀었습니까?”, “내려놓자”. 봉준호 감독 <기생충>영화에 보면 물이 났어요. 부잣집 아래층에서 반지하로 내려옵니다. 계단을 내려간다, 내려간다, 내려간다. 계단이 왜 이리 많은지 몰라, 그 영화 보면. 한참 내려가. 끝도 없이 내려가, 계단으로. 내려가고 내려가고 내려가고.

본인이 알아서 내려가는 바닥은 바닥이 아닙니다. 그것은 교만이에요. 자기 몸하고 주님 말씀하고 바꿔야 되는데 주님이 알아서 바닥을 찾아가 주는데 그 주님 못 믿겠다는 거예요. 내가 알아서 겸손한 자리를 가겠다는 거예요. 내려가봤자 그 지점은 주님이 시작한 지점이 아니고 본인이 자기 구원받기 위해서 새로 설정한, 자기 출발점이 되는 거예요, 자기 출발점. 이렇게 하면 됩니까? 이 정도 겸손하면 됩니까? 내가 이 정도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면 되겠어요? 제가 의사지만 의사 돈벌이 치우고 남수단에 가가지고 내가 흑인들 위해서 봉사하겠습니다. 내가 대장암 걸리더라도. 톤즈야 울지 마, 톤즈야 울지 마, 울지 마 톤즈. 이런 식으로. 남들 보기에 되게 내려간 것 같죠.

그러면 거기서 자기가 멈추는 그 곳이 주님의 말씀이 멈추는 곳이에요? 아니죠. 남수단에 가가지고 죽도록 의료봉사하는 것이 인간의 제일 밑바닥이에요? 아닙니다. 말씀하고 바꾸란 말이에요. 내가 생각할 때 가장 낮은 곳은 돈 많이 벌 수 있는 의사가 저 낮은 곳에 가서 무료 봉사한다. 이게 자기 딴에 낮다고 낮췄지만 성경 빌립보서 2장 8절에서 말하는 낮은 곳은 어딥니까? 딱 한군데밖에 없어요. 보편적입니다. 개인의 역량과 관계없이 딱 한군데에요. 그게 뭡니까? 십자가에 죽기 (빌립보서 2장 8절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다시 말해서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갑니까? 십자가로 가죠. 만약에 집에 십자가가 저 위 천장 가까이에 있다면 이건 낮은 곳일까요, 높은 곳일까요? 천장에 붙어 있더라도 이건 낮은 곳이죠. 자기 몸은 멀쩡한데 십자가가 생각난다. 이건 자기가 낮은 거예요, 높은 거예요? 그게 바로 낮은 거예요. 몸이 멀쩡하든 몸이 건강하든 수입이 쏠쏠하든 관계없이 십자가 생각하면 그게 낮은 곳이에요. 왜? 자기 있는 모든 것이 누가 데려갔기 때문에? 주님이 데려가신 거예요. 내가 거지꼴 되는 게 낮은 곳이 아니라 내가 남들 보기에 부자라는 소리를 들어도 십자가가 다가오는 그 순간이 더 이상 낮아질 곳이 없는, 주님께서 친히 “우리 같이 출발하자” 라고 하는 그 지점이 십자가입니다.

그것이 바로 21절에 나와 있어요.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이렇게 되어있죠. 여기서 노아 홍수부터 이야기하는 것은 바닥을 치고 오르신 분이 먼저 따로 계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선한 양심이라는 것은 누구의 양심을 말합니까? 자기의 양심이에요, 주님의 양심이에요? 주님의 양심이죠. 지금 말씀하고 누구하고 바꾼 거예요? 말씀하고 자기 몸하고 바꿨잖아요. 그러면 자기 몸 안에 스며들어오는 모든 것들은 뭡니까? 주님이 내려갔다가 올라왔을 때의 그 시각, 그 세상 보는 시선, 그것이 계속 흘러들어오는 겁니다.        
  
노아 때 방주 이야기 나오는데 여기도 20절에 나오죠. 자, 노아가 방주에 탔습니다. 그러면 노아가 방주 뚜껑 열지 않고 창문 열지 않고 그냥 안에 앉아있을 때 노아가 볼 수 있는 것들은 뭐에요? 비오는 광경 아니겠죠? 뭡니까? 잣나무로 만든 방주겠죠. 그러면 노아는 어떤 의미에서 방주 안에 갇힌 셈이 되죠. 그걸 성경적으로 말하면 “언약 안에 갇혀 있다”. 신약에 오게 되면 “주안에 갇혀 있다”. 그게 바로 21절에 보면 ‘구원의 표’가 되는 거예요, 구원의 표.

베드로전서에서 복잡하게 얽혀 있는데 다림질해서 쉽게 풀면 이렇습니다. 다리미질하면 이렇게 돼요. 구원이라는 것은 두 가지 요소가 필요한 거예요. 하나는 전면적인 환원, 다시 말해서 전면적인 심판이 필요해요, 구원이라는 것은 전면적인 심판. 전면적인 홍수가 아니고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심판이라는 거예요. 심판은 하나님의 의지가 담겨 있어요. “아이고 내가 하늘나라 수도꼭지를 안잠갔구나, 미안하다” 이게 아니고 노리고 들어가요. 뭐하라고? 니 주제파악하라고. 너는 무슨 대상이다?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을 전제로 해요, 심판의 대상이요.

그러면 보편적 심판에서는 심판하시는 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하면 바꿔치기하는데 우리의 몸과 말씀을 바꿔치기한다고 했죠? 그런데 우리가 바꿔치기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없어요. 주님의 언약에 의해서 바꿔치기하는 겁니다. 바꿔치기를 어떻게 하느냐? 너는 말씀에 의하면 무슨 대상이다? 심판의 대상이라는 겁니다. 심판의 대상이에요. 심판의 대상이니까 여기서 뭐가 탈락이냐 하면 구원에 대한 욕구, 구원에 대한 기대는 여기서 탈락이 돼요. 심판을 하겠다는데 심판대상인데 무슨 구원을 또 넌지시 기대를 해요? 안돼요.

십자가를 제대로 성령을 통해서 안 사람은 구원이라는 것을 입에서 꺼낼 개념이 아닌 것을 아는 사람이에요. 십자가 앞에서는 내 구원은 어림도 없다는 것을 발견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마저 아버지한테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십자가는 이 세상에 있다는 이유 때문에 모든 인간을 다 세상과 더불어 버리는 그런 하나님의 자기 의사표시기 때문에 그 앞에서 “살려주세요” 할 수는 없어요. 그냥 버림받아야 되는 거예요. 버림받은 것까지는 알고 구원은 손들고 해야지. 그런 꼼수는 쓰지 마세요. 그냥 버림받아야 되요. 버림받는 과정 안에 뭐가 보이느냐하면 바로 방주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 구원은 두 가지 요소에요. 하나는 뭐가 있다? 전면적인 심판, 두 번째는 구출의 방편 또는 구출의 방식. 구출할 수 있는 그런 바탕, 제도, 또는 형식이 심판과 더불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어두움이 없으면 뭐가 없다? 빛이 없는 거예요. 심판이 없으면 뭐가 의의가 없습니까? 구원의 의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구원의 방주, 노아의 홍수 나오니까 방주라고 합시다. 이 방주에서는 무엇이 가득 차 있느냐 하면, 우리는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유일하게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달랑 이 세상에 여덟 식구밖에 없는 거예요. 우리는 잃어버렸음을 목격하고 그걸 후대에 전하는 사명. 그것이 바로 노아가 구원받은 이유가 되겠죠. 잃어버렸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은 이렇게 진행된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후대에 전할 수 있는 복의 근원으로서의 자격이라고 할까요, 그만한 조건을 갖출 수 있는 것은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죽였다는 사실이 구원의 요건으로 들어갑니다. 왜냐하면 아들을 잡아 죽여야 그다음에 준비되어 있는 양으로 인하여 죽었던 아들이 살아나거든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죽이지 말고 죽이는 척이나 해라. 내가 수풀에 다 준비해놨거든. 너는 연기만 하면 돼. 이랬습니까? 근처 수풀 속에 양 있다는 이야기를 사전에 주께서는 넌지시 말씀해줬습니까? 안했죠. 그러면 아브라함의 믿음은 뭡니까? 그냥 ‘이 일은 내 일이 아니고 말씀 안에 들어있는 주님의 말씀의 일이다’ 하고 아들을 사정없이 죽여 버렸죠, 중간에 스톱했지만.

그럼 이런 건 어떻습니까? ‘내가 십자가 믿게 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심 해서 나는 죽는 척만 해도 구원받는다.’ 이 꼼수는 어떨까요? 이거 십자가 받아들인 거예요, 안받아들인 거예요? 안받아들인 거죠. 지금 십자가를 갖고 농락하고 있는 거죠. 십자가에 대해서 내가 잘 아는데 설명해줄까? 십자가는 죄인에 대해서 하나님이 대신 피흘려 죽은 것이다. 맞지? 합격. 나는 천당. 뭐 그런 공식 있습니까? 그런 공식 없어요. 지금 그렇게 십자가를 논하는 사람은 십자가의 구경꾼이에요. 관찰하고 있다고.

주님께서 십자가 지실 때 뭐냐 하면 같이 죽자는 이야기에요, 같이 죽자. 살아서 “주님 혼자 죽으세요, 나는 여기서 구경할게요” 이게 아니고. 십자가 달릴 때 같이 죽은 사람 있죠? 누굽니까? 강도죠. 강도가 예수님 십자가 죽고 자기는 슈퍼맨이 와가지고 못 다 빼가지고 멀쩡히 예수님이 대신 죽는 거 구경했습니까? 예수님, 힘! 힘내라 힘. 힘내세요. 예수님 죽어야 내가 구원받습니다. 이러면서 응원가 불러주고 찬미하고 이랬어요? 같이 죽었죠. 같이 죽는 것을 강도는 아주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왜? 그게 몸과 말씀을 바꿔치기할 때 내 실력, 기술, 스킬이 개입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의 진행 작업에 자기가 휘말려 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마치 뭐가 같냐 하면, 제가 옛날에 고추 빻으러 방앗간에 가는데 고추만 집어넣어야 될 걸 애가 철이 없어서 손가락을 집어넣으면 고추 빻았을 때 뭐가 같이 나오겠습니까? 이거 엽기적인데...DNA조사하면 걔 피부조직부터 해서 손가락 조직이 빻아져 나오겠죠? 그게 십자가 아닙니까. “주님 내 죄 잘 빻아주세요” 하고 박수치는 걸 가지고 고추가 손 잡아당겨서 같이 죽자고 집어 넣어버리는 거예요. 고추 빻을 때 같이 집어넣어버려요.

“나는 죽고 내 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산다”가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저는 손가락 멀쩡한대요” 그러거든요. 그러면 성령께서 우리의 일생을 고추 빻는데 집어넣는 일생이 되게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말씀이 우리를 떠나지 않아요. 내가 말씀을 지키는 건 없어요. 말씀이 나를 안떠나요. 십자가에 함께 죽었음을 늘 확인시키는 그러한 일생을 보내게 하는 겁니다. 누구한테만? 성령이 임한 사람한테만. 하나님이 택한 사람에게만.

성령은 노아 당시에 방주와 같은 거죠. 노아는 방주에 있으면서 자기 자신을 뭐로 본다 합니까? 잃어버린 자. 그것도 마땅히 잃어버려야 될 자로 보는 거예요. 어떻게? 슬프게? 우울하게? 통한의 가슴을 치면서? 아니죠. 신나게, 즐겁게, 고마워하면서, 감사하면서. “나는 잃어버린 자다. 99마리 양 중에서 내가 1마리 양이다. 내가 탕자다. 잃어버린 동전이다” 하면서 아주 즐거워하면서 주님의 방앗간에 고추 빻으러 가가지고 같이 주님과 섞여서 평생을 완전히 환원되는, 흙으로 환원되는, 잘게잘게 부셔지는, 잘게잘게 부서져서 산산히 부서질 이름이여. 내 이름 주욱 써서 찢어버리든지 가위가지고 오리든지 다 날아가버려요.

나는 죽고 내 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는 거예요. 그리스도 예수님은 이런 분이셨다는 것을 나의 일생을 통해서 발산하고 표현하고 보여주는 삶을 사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안돼요, 인간의 힘으로는.

홍수, 십자가, 그리고 주께서 십자가 죽으시고 부활되는 이 엄청난 내용을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못 만들어냅니다. 봉준호 감독도 못만들어내요. 엄청난 일을 성도는 성령을 통해서 안에서 겪고 있습니다. 사람으로 할 수 없는 것.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는 이것은 감히 상상치도 못한 엄청난 일을 우리가 감당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주일 오전에는 제가 부사로 표현했어요. ‘묵직하게’. 인간이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묵직하게 내려앉아요. 네가 생각하는 낮아짐, 네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첫 원천은 네가 찾아가고 가난한 자에게 다 주고 백날 따라와도 그건 소용없어요. 어떤 노력으로도 이 웅장한 드라마를 우리가 기획할 수 없습니다. 만들어낼 수 없어요. 그냥 맡길 뿐이에요. 하루하루 살면서.

어떻게 살아가느냐. 지금 내가 사는 것이 바닥이다. 내가 사는 게 바닥이다. 그냥 바닥이라고 하면 다른 사람이 볼 때 너무 염세적이라 하니까 뒤에 붙여요. “바닥이다” 다음에 “히히히” 또는 “ㅋㅋㅋ”.  “이번 달 나는 수입이 850만원이다, 바닥이다. 히히히”, “우리 애가 또 백점 맞고 또 전교 1등했다, 바닥이다. 히히히” 이렇게 되는 거예요. “ㅋㅋㅋ”

세상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십자가 알면 바닥이에요. 세상이, 내 형편이 어떻게 되든 관계없이. “오늘도 건강검진 받았는데 아무 탈 없다. 나는 바닥을 맛보았다. ㅋㅋㅋ” 이런 거. “그냥 우연히 사놓은 주식값이 백배 올랐네, 나는 바닥이다. ㅋㅋㅋ”.

꾸미지 마세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낮아짐을 스스로 연출하지 마세요. 이것은 악마가 그 짓하게 하는 거예요. 그 짓하면 악마가 그걸로 만족하는 줄 압니까? 더 낮아져야지, 더 내려놔야지. 너 용돈 지금 지갑에 5만원 있잖아. 저 봐. 저 노숙자 있는데 그냥 가면 너 안되지. 너는 나쁜 놈이지. 이게 바로 선한 양심이야, 야. 자꾸 그러는 거예요.

예수님의 선한 양심은 그게 아니에요. 뭐가 선한 양심이냐 하면, 여러분 한 수 배우세요. “나에게는 네가 원하는 금과 은은 없거니와” 이게 선한 양심이에요. 너희들이 원하는 것을 나는 절대 때려 죽여도 안줄 거야. 돈을 원한다는 이유 때문에 돈을 안줄거야. 이게 주님이 다녀갈 때의 마음가짐이에요.

병 고치러 모든 사람이 주님께 찾아갔다고 다 고쳐준 게 아닙니다. 예수님 생각과 너희들 생각이 다르다는 거. 너희들이 생각하는 바닥과 내가 생각하는 그 바닥의 출발점 지점은 다르다. 왜냐하면 나는 너희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일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이하림(IP:124.♡.210.16) 20-02-16 19:52 
서울의존강의20200213b 베드로전서3장 21절(지정된 바닥)-이 근호 목사

바닥에 가게 되면 우리가 바닥에 왔는지 안왔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게 십자가 안에 있는지 없는지, 혼자서는 바닥이라고 하는데 주님은 바닥이 아니라고 하면 어떻게 하는가 하는 문제가 있겠죠. 바닥에 도달했을 때의 특징은 이겁니다. 나의 평가는 소멸돼요. 내가 남을 평가한다든지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나를 평가하는 그 평가가 소멸됩니다. 쓸데없는 일이 돼요. 같은 뜻인데요. 따라서 두 번째, 나는 바닥에서는 무의미합니다. 무의미해져요, 의미 없어요.

내가 나를 평가하는 그 평가가 인간 자체를 불안하게 만들기 위한 악마의 비장의 카드에요. 니가 너를 평가해라, 너 자신을. 양심이라든지 뭐를 동원해도 좋으니까 네가 날마다 너를 평가해라. 너가 지금 제대로 사는지 안그러면 삐뚤삐뚤 사는지, 지옥가고 있는지 천국가고 있는지 니가 평가하지 않으면 누가 평가하겠나? 니 마음 니가 아니까 평가해라.

문제는 내 마음을 내가 모른다는 사실이에요. 내 마음 내가 몰라요. 오후 2시 46분과 47분의 마음이 달라져요. 날마다 이게 변화된다고요. 혼돈돼서 어느 걸 잡아서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오죽했으면 최백호가 그랬겠습니까?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자기 마음을 자기가 다독거릴 수가 없어요. 종잡을 수가 없다고요. 왜냐하면 상황에 따라서 내 마음이 액체 자아처럼 자꾸 울렁거리거든요. 아부성도 있을 것이고.

오히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평가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악마가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딱 하나에요. 그렇게 해서 결국 악마가 노리는 것은 이겁니다. “Please 제발, 복음을 잊으라. 복음을 잊어버려라”. 악마의 전략은 딱 하납니다. 악마는 한 놈만 죽입니다. 한 놈만 잡아요. 우리에게서 딱 한 요소만. 우리 어떤 인생 가운데 딱 하나만이에요. 몸이 건강하고 아프고  그건 문제도 안돼요. 아프든 건강하든 그런 것 가지고 문제 삼는 게 아니고 딱 하나만이에요. 복음에 대해서 외면해라. 복음에서 신경 끊어라. 재활용을 하든지 뭘 하든지 모르겠어. 어떤 수단을 해도 복음이 들리지 않는 곳, 복음이 없이 살아라. 내 니 모든 걸 다 책임질 테니까.

복음이 들리지 않고 복음 없는 곳에 산다는 말은 뭐냐 하면 니 인생은 니가 꾸려가는 거고 니가 가꾸어 가는 것이다. 니 인생은. 니가 지금 어떻게 하는지에 따라서 니 운명은 니가 결정하고 책임도 니가 지는 거다. 니가 만약에 미래의 운명을 기대한다면 지금부터 너는 정신 바짝 차리고 너 자신에 대해서 책임지는 행동을 해라. 악마가 내 속에서 그런 이야기할 때 뭐가 날아가 버렸습니까? 십자가 날라가 버렸죠. 예수님의 성과, 공로, 은혜 다 날라갔어요. 다 없는 겁니다. 그 삼킬 자를 찾는 거예요.

악마가 베드로에게 노리는 것은 그겁니다. 성의와 열심을 다해서 예수님 곁을 지켜라. 악마가, 예수님 곁을 지키라는 거예요. 그래서 베드로가 뭐라고 합니까? 제가 목숨을 바치더라도 예수님을 지키겠습니다. 예수님께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제가 책임지고 지키겠다는 거예요. 악마는 딱 한 가지만 노려요. 십자가의 공로나 십자가의 은혜와 연결되는 것을 악마가 제일 싫어합니다. 십자가의 공로.

니 인생을 인간 스스로 책임지게 만들지, 주님이 성도의 모든 것을 다 책임진다는 소리를 안들리도록 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려면 악마가 인간에게 뭐를 주느냐 하면 삶의 의미와 삶의 목표를 줘버려요. 삶의 의미와 목표를 줘버려요. 아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바닥에는 뭐가 없다? 무의미하다고 했죠. 그런데 악마는 인간을 무의미한 게 아니고 의미있게 하는 거예요. 니가 계획이 다 있구나. 니가 계획이 다 있어.

자꾸 계획 세우고 목표 세워서 목표를 달성할 때 내 존재의 의미를 찾게 만듭니다. 나는 글을 써서 당선돼서 문단의 작가로써 활동하고 싶어. 3년 4년 글 쓰고 해서 드디어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됐을 때 비로소 ‘그래 이게 바로 나였어. 나는 작가이어야 합당한 존재야’라고  거기서 자기 평가가 정당했다는 것을 움켜쥐게 되죠. 그러면 그 다음부터는 다른 사람이 나를 “아이고 이작가, 김작가” 그렇게 불러주기를 원하죠. 아니 책만 쓰면 작가입니까? 그럼 나도 작가게? 참내. 무슨 유시민이 작가에요, 신춘문예 당선됐어요? 뭐했다고 작가입니까? 유시민은 그냥 시민이에요.  

자기가 무의미한 사람과 자기에게 의미를 두는 사람이 논쟁을 한다면 누가 이기겠습니까, 누가 이기겠어요? 무의미가 이기는 거죠. ‘자기가 의미없다’부터 시작되는데 뭐. 그런데 자기에게 의미를 두는 사람은 논쟁에서 공격할 때 내가 의미를 챙기는 것처럼 너도 의미를 챙길 거지, 그치? 라고 상대방을 잘못 보고 공격해버리면 이게 허수가 되는 겁니다.

돈만 노리면서 직장을 다니는 과장이 있다 합시다. 그런데 대리도 지하고 똑같은 줄 알고 “너 나중에 오늘 퇴근하고 회식할 때 내 옆에서 술 따라라” 그럴 때 그 여자 대리가 “싫소이다. 난 집에 갑니다” 하고 집에 가버렸단 말이죠. “니가 승진안할래?” 이렇게 나오겠죠.“ 당신 방식으로 승진 안합니다.” 내 자체가 무의미한데 승진도 무의미하죠.

그런 멘탈이 있어야죠. 결국 세상은 멘탈싸움이니까. 기싸움이니까. 애가 좀 엇나간다 싶을 때 남편이 걱정이 되가지고 “당신이 엄마니까 좀 달래라” 할 때 엄마가 “놔둬라 거. 다 키워줬다.” 엄마가 멘탈이 이래야 되거든요. 그래야 자식한테 안휘둘리죠. 그러면 남편이 있다가 “당신이 엄마면서 엄마 책임을 다해야지”, “나? 엄마? 무의미해! 나 바닥이야.” 오히려 남편이 바들바들 떨고 있어요. 자식한테 못이겨 가지고. 해주라는대로 다해주고. 자식한테 농락당하고 말이죠.

노아 홍수는 옥에까지 가는 거예요. 인간이 갇힐 때까지 가는 거예요. 주님이 방면하는 겁니다. 죽는 게 공동묘지가 아니고 감옥이에요, 감옥. 인간은 죽는 것이 감옥이라는 말은 살아 생전에 악마하고 한통속이 되어 가지고 주님의 말씀이 주는 그 의미는 없고 스스로 자기가 의미 챙기면서 살아왔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스스로 자기가 의미를 챙겨온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의 정체를 다 폭로시킵니다. 그 폭로시키는 대목이 21절에 나옵니다. 여기 21절에 보면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또는 실체니” 그 다음이 중요한데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그 다음에 뭡니까? “아니요”.

베드로전서에서 베드로가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물질이 죄를 제거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어떤 형식이. 그 당시에 세례가 있었을 거 아닙니까, 세례의식이 교회에서. 이 세례의식이 그 사람의 죄를 씻어줄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냥 표하는 거예요. 표시하는 것이 씻어주는 게 아니거든요. 표시 백 개 했다고 죄 없어지는 게 아니란 말이죠.

이 이야기는 제가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십자가 목걸이 했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듯이, 십자가를 생각한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듯이. 십자가 목걸이를 해도 안되고 십자가를 연구해도 안되고 그럼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할 때 니가 뭘 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가, 말씀이 직접 너를 장악하고 삼켜야죠.

더 쉬운 예로 노아가 비오라고 굿했습니까? 아, 비와야 되는데 왜 안오지? 야, 굿하자. 우당탕탕 작두 위에 올라가 춤을 추면서 이쯤해서 대충 고집부리시고 비 좀 내려줘가지고 우리 여덟 식구만 구원받았다는 티를 좀 내주세요. 이렇게 요청했습니까? 안했죠. 구원은 누구 소관이에요? 하나님 소관에 그냥 노아가 말려든 겁니다. 말려든 거예요.

주님 스스로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주님의 삼킴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주님이 알아서 찾아와요, 주님이. “너는 이제 너 마음대로 못살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엄청난 이 기획, 프로젝트를 위해서 너는 내 손에 한번 놀아나봐라” 하고 찾아오는 거예요.

아까 베드로 이야기 계속 해봅시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자기는 예수님의 하는 일에 자기가 끼어들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만약에 예수님의 일에 끼어들어서 공로자가 될 수 있다면, 그런 일은 없지만 만약에 한다면, 기껏 베드로 네가 하는 것이 아니고 누가 하느냐 하면 꼬끼오 닭이, 미물인 닭, 진짜 돌대가리라는 그 닭, 새대가리라는, 아무것도 모르는 이 닭이 나한테 협조할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 돌멩이가 나에게 협조했을 것이다. 네가 만약에 도와준다면. 도와준다는 그런 아이디어라면 ‘나’라고 하지 말고 돌멩이도 가능하다고 이야기 해. 닭이 실제로 하나님의 일을 도와준 게 아니고 하나님이 닭을 이용했지만, 바로 닭과 너 사이에서 베드로야 너는 누가 가치 있다고 보느냐? 누가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도와준다고 이야기할 수가 있느냐 이 말이죠. 너가 닭보다 낫다고 할 수 있냐? 꼬끼오 꼬끼오 주님이여, 이쪽으로 오세요. 할 수 있겠어요?

닭은 무심해요, 아무것도 몰라. 왜 베드로 너는 네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스스로 그런 고백을 못하냔 말이죠. 닭을 봐라. 너보다 못한 닭이 주님이 시키는대로 울었잖아. 너는 나한테 협조한 게 뭐가 있는데? 그게 마귀야. 하여튼 마귀는요, 주님의 온전한 100%공로를 제일 싫어해요. 뭔가 섞어 넣기를 원해요. 섞는다는 말은 섞어탕 하는 거 있죠, 섞어 고기, 어떻게 요리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요리 있죠. 자꾸 섞는 걸 좋아해요, 자꾸 섞는 걸.

그러면 섞는 것을 거부해야 된다면 우리는 뭐냐. 자기가 무의미해져야죠. 무의미해진다는 말은 평소에 자기 행동하고 반성하고 반성하고 그걸 스스로 자기가 자기를 추궁하면서 ‘그 때 이랬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한 자기반성, 자기에 대한 탐색, 자기 닦달, 자기 못살게 굶, 이거 다 마귀 짓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자기 회한, 자기 가슴치기. 맨날 가슴쳐서 여기 쇄골 다 나갔어. 부족합니다, 부족합니다. 두드리지 마. 가만히 있어도 아니까. 니가 두드린다고 부족해지는 거 아니거든요. 가만히 있어도 부족한 거 알아요.

주님의 평가가 중요하지 내 평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말씀 안에 들어가야 돼요. 주께서 하실 계획이 있습니다. 우리를 가지고 계획이 있어요. 주께서는 무계획적이 아닙니다. 악마가 한 인간으로 신을 믿도록 악마는 자꾸 권하고 있어요. 신을 믿고 신의 존재를 인정하기를 악마가 자꾸 부추기고 권하는 이유는 인간이 신을 인정함으로써 인정했다는 그 공로가 인간에게 계속 남아 있다는 아이디어 때문에 그래요.

내가 다른 짓은 못해도 하나님 믿고 예수님 믿는 건 잘했다는 그 공로가 인간에게 자리잡기를 원하고 그 자리잡은 것을 자기 믿음의 내용으로 삼아버려요. 내가 잘한 것을 내가 그대로 가져가고 ‘나 이렇게 잘했습니다’를 유지하는 보람으로 교회 다니고 기도하고 그런 거예요. 여러분들이 해보지만 “통성기도하세요, 기도해봅시다, 철야기도합시다” 하면 기도하면서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게 뭡니까? 과거의 일들이 떠오르겠죠. 과거의 일 중에서 무슨 일이 떠오르겠어요? 믿음의 응답받은 사례들이 좌악 떠오르는 겁니다. 그 때 주여 응답도 잘되더니만 지금도 기도하오니 내 응답도 주께서는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제가 이렇게 두 손 모아서 기도하잖아요. 천사야 빨리 찍어라, 스냅사진. 기도하면서 주된 내용이 뭐냐 하면 내가 기도하는 폼이 얼마나 근사하고 굉장히 불쌍해 보이고 얼마나 절박하고 진지하게 보이는, 그런 모션을 취하는 데에 온 신경을 다 쓰고 있어요. 하다가 찌릿찌릿해서 자세 바꾸고 막. 시계보고 ‘아이고 30초밖에 안지났네, 5분 동안 어찌하라고.’

그래서 우리교회도 마찬가지고 사람들이 대표기도 하게 되면 참 자꾸 대표기도 들으면서 목사가 가슴을 치게 돼요. 다 내 탓이오. 저렇게 우리 교인들을 힘들게 한 내 탓이다, 내 탓이요. 그렇다고 누가 대신 기도할 사람도 없고 돌아가면서 하는데, 그래도 내 탓이요.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힘들까.

기도하면서 앞에 있는 같은 교인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나올지, 교인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를 본인이 지금 평가하고 있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 자기기도가 뭐 의미 있는 줄 알고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의미 없으라고 기도했는데. 내 기도가 주의 복음에 위반되지 않을까. 안그래도 위반했어. 뭐 모든 게 위반이기 때문에 위반 아닌 게 없는데 뭘 또 새삼스러워. 평소에 위반 안한 것처럼 착각하고 있네.

다시 이야기합니다. 노아가 홍수 올 때 노아는 뭘 보고 있었느냐 하면요. 잣나무로 만든 노아 방주 안에 안쪽 표면을 보고 있는 거예요. 짐승들하고 같이 있으면서. 뭘 느끼겠습니까? 저 잣나무 내가 했다. 그거 하겠어요? 바깥에 난리 났잖아요, 바깥에. 바깥에 난리 났다는 말은 지금 방주 안에 있는 내 마음씨를 주께서는 보지 않는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방주라는 그 막을 보는 거예요. 방주라는 그 자체를 보지, 그 안에 든 내 행동이 지금 방귀를 몇 번 뀌었느냐 그런 건 안본다 이 말이죠.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나를 안봐요. 그런데 마귀는 뭐를 보라고 하느냐면 자꾸 너를 보라는 거예요, 자꾸. 니가 십자가 똑바로 믿고 있는가를 스스로 자꾸 검토하고 생각해보라는 거예요. 그게 마귀 말이에요, 그게. 뭐 마귀 말을 목사가 대신하고 있지만. 니가 믿음이 있는지 스스로 확신하라는 말은 그 믿음이 어디서 왔는가, 출처가 어딘가를 보라는 거죠. 그걸 모르고 “믿습니다. 아니야, 시옷을 두 개 해야 돼. 믿씁니다. 아니야 이것도 모자라. 믿씁니다 믿씁니다 믿씁니다. 아니 세 번밖에 안했어, 열 번해야 돼.” 이게 무슨 짓이에요, 지금? 미쳤어요, 정말?

기도하는 방법이라 하면 좀 어패가 있지만 기도하는 방법은 굉장히 쉽습니다. 제가 그랬잖아요, 기도는 자기 생각의 연장이라 했지요. 그러면 있는 상황, 주께서 주신 상황을 그대로 하면 돼요. “주님이여, 지금 기도 순서가 되었습니다.” 벌써 3초 지나갔어요, 벌써. “기도해야 될텐데 뭘 해야될지 모르겠습니다.” 벌써 10초 지나갔어요. “기도하기는 해야 되는데 지금 기도하면 남들이 나를 놀리겠죠?” 벌써 15초 지나갔다고요. 15초 기도한 거예요. “끝날 때 또 뭣도 모르고 예수의 이름으로 그거 안해 가지고 그냥 내 혼자 끝내면 안되게 하옵시고...” 자기 솔직한 걸 이야기할 때 벌써 30초 지나갔잖아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아멘”한다고요. 참 쉽죠잉? 뒤에 이응 붙어요. 참 쉽잖아요.

방금 누구하고 대화했어요? 주님하고 대화했잖아요, 주님하고. 주님하고 대화한다고요. 사람하고 대화안한 거예요. “이렇게 기도할테니까 아멘 좀 해라” 이런 거 없어요. 그냥 주님하고 대화한 거예요. 사람들 속에서 주님하고 대화한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기도가 뭡니까? 이 세상 속에서 아버지께 기도했죠? 그걸 그대로 하는 거예요, 그대로. 보는 눈들이 많은 곳 가운데서 아버지만 생각하면서 하는 거죠, 아버지만 생각하면서.

또 기도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기도 안한지 너무 오래됐습니다.” 마치 천주교에서 고해성사 오게 되면 천주교에서 제일 먼저 신부가 삐딱하게 앉아서 묻는 게 뭡니까? “고해성사한 지 얼마나 됐어요?” 묻잖아요. 마치 해야 되는 것처럼. 신자는 두 번씩해야 되는 것처럼. “주님 기도 안한지 너무 오래되었는데 지금 하려고 하니 쑥스럽습니다.” 지금 벌써 기도 시작된 거예요. 지금 누구보고 대화한 거예요? 옆사람보고 대화한 거 아니죠? 신부보고 목사보고 대화한 게 아니죠. 누구 들으라고 한 게 아니죠. 사람 누구 들으라고 한 게 아니에요. 자기가 자기보고 한 것도 아니고, 그건 독백이고.

현재 자기의 감정, 심정 그대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진짜 그대로 이야기하게 되면 나중에 1분도 안되어 가지고 나올 것은 눈물만 터져요, 눈물만. 기도한다는 내 자체가 참...이 꼬라지에 기도가 말이 됩니까? 지가 울어버려요, 지가. 기도한다는 이 주제 넘는 짓을 한다는 이 자체가, 자기가 얼마나 부끄러운지요. 언제 주님 생각한 적 없잖아요.

그러면 이 말은 뭐냐. 여기 세례에 대해서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뭘 가지고 표라고 했습니까? 방주. 베드로가 엄청난 논리를 여기서 끄집어냅니다. 방주가 어디에 떠있다고 봤습니까? 물에 떠있다고 본 거예요. 물에 떠있다. 물에 떠있는 방주가 구원의 표라고 된 거예요. 그런데 이야기하기를 “아니요”라고 했죠? 구원의 표 자체는 죄용서가 된다, 안된다? 안된다. 왜냐하면 베드로에 의하면 이것은 구약시대이기 때문에. 그걸 오늘 본문에서는 모형이라고 해요, 모형.

자, 그럼 신약에 모형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구원의 표라는 말이 구원의 모형이라는 뜻이에요. 그럼 신약에는 모형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십자가 빼놓고 다 모형이에요, 십자가 빼놓고. 신약에도 물세례 주잖아요. 물세례 받는다고 구원되는 거 아니거든요. 베드로전서 1장에서 그러면 구원은 어디서 되는가? 노골적으로 되어 있어요. “피 뿌림”. 그래서 베드로전서가 어려운 거예요. 봉준호 영화보다 더 어려운 거예요. 피 뿌렸다.

문제는 그 피의 실체가, 예수님의 피가 현재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런데 피 뿌림을 받아야 죄용서가 되지요. 있어야 받지 없는데. 없는데 어떻할 거예요, 이거? 피 뿌림을 받았다는데 당사자는 피 구경도 못했는데? 아니 아담이 선악과 따먹고 죄지었다는데 우리는 그 현장에 없었어요, 태어나지도 않았으니까. 억울해요.

자, 이 점에 대해서 쉽진 않지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본문이 굉장히 어려워요. 실제로 읽어봐도 어려워요. 무슨 소린지 몰라. 왜? 베드로 입장에서는 일관성 있는데 보는 사람은 전혀 일관성이 없어요. 왜 일관성이 보이지 않느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으려고 우리 쪽에서 시도하기 때문에 이게 전혀 해석이 안되는 겁니다. 나 죽어서 내가 고스란히 좋은 데 갈려고 하는 노림수가 성립되었기 때문에 “뭘 하면 구원받습니까?” 라는 질문자체가 이 본문 해석을 방해하고 있는 거예요.

“어떻게 구원받습니까?”가 아니에요. 주께서 구원하게 하시죠. 처음에 얘기했잖아요. 몸과 무엇을 바꿔라? 몸과 말씀을 바꿔라. 말씀 안에 있으면 돼요. 내 몸 안에 있으면 안되고. 그러면 이 몸을 무슨 용도로 바치면 돼요? 말씀이 작용하는 몸으로 바치면 되는 거예요. 바치는데 우리 의지로 바칠 수는 없어요.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이 몸을 말씀 안의 몸 되라고 주님께서 지정을 해줍니다. 지정을 해주게 되면 우리가 생각하기에 지정된 이 몸은 우리가 우리를 해석할 수 없어요.

다시 말해서 아까 이야기한 내가 나한테 하는 평가는 그게 다 나라는 내 허상이 나보고 평가하기 때문에 주께서는 그게 어떤 평가든, 좋건 나쁘건 간에 주께서는 그걸 안받아줍니다. 그러면 말씀이 들어올 때 여기서 뭐가 등장하냐 하면 주님의 허락이 등장합니다. 주님의 허락 하에 이 몸은 말씀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정도로 하고 이제 시작해봅시다. 그럼 어떻게 피 뿌림이 성사되는지. 마태복음 16장 1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요.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여기에 key, 천국의 열쇠를 준다고 했죠, 천국의 열쇠. 누구한테 준다고 되어 있죠? 베드로에게 준다고 되어있죠. 사실은 베드로에게 주는 게 아니고 반석에게 주는데 천국의 열쇠를 준다고 할 때는 전제가 뭐냐 하면 천국의 열쇠는 인간들이 만들 수 없음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든 말씀은 출발점이 바닥에서부터 출발해요.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부터 출발해야 돼요. “인간은 무의미하다”부터 출발해야 돼요. 그러면 천국의 열쇠가 안되는 존재를 주께서는 천국의 열쇠가 되게 하시죠. 천국 열쇠를 되게 하십니다. 천국 열쇠를 되게 하시는데 마태복음 16장 19절부터 천국 열쇠 되는 과정 중에서 필수 요건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을 곡해해야 된다는 순서가, 절차가 꼭 필요해요.

다시 말해서 베드로가 ‘나는 천국 열쇠를 받았다’는 그러한 인식 자체가 옴팍 다 뽑혀져 나가는 과정이 필요해요. ‘나를 믿어라, 내가 천국의 열쇠다’라는 인식 자체가 하나님 일이 아니고 사탄의 일인 것이 밝혀지는 순서가, 필수 순서가 남아있습니다. 내가 예수님 믿어서 내가 구원받았다는 이것이 마귀 아이디어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순서가 꼭 필요해요.

예수 믿어서 나 구원받았다는 이런 아이디어가 바로 나 좋으라고, 주님 말고 내 욕심에서 나온 것이고 악마에서 나온 아이디어라는 사실을 내가 스스로 알게 되는 순서가 꼭 필요합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피 뿌림이죠.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뭔 뜻인지 모르겠죠? 그러나 이야기하면 ‘아, 그거 이야기구나’ 할 거예요.

피 뿌림이 있을 때 예수님이 혼자서 면도날해서 피 빼내서 스스로 피 뿌렸습니까, 피 뿌림이? 피 뿌림에 누가 관여했어요? 피 뿌림이 되려면 누가 관여해야 돼요? 예수님을 찌르는 자가 필요하죠. 그 찌르는 자에 베드로를 집어넣고 우리를 집어넣게 하는 거예요, 우리 인생 속에서. 예수님에게 피가 나올 수밖에 없는 정황과 상황 속에 우리로 하여금 거기 같이 섞여서 들어가게 만들어 버려요.

지난 수요일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실컷 복음 알고 전해봤자 우리 마음속에는 무슨 생각이 드느냐 하면 ‘그딴 거 무슨 소용 있노?’ 이게 우세하다 했죠. 이게 우열한 거예요, 우리 마음속에. 그딴 거 무슨 소용 있어요? 지금 편하니까 그렇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이게 급한데 그딴 거 십자가가 무슨 소용 있느냐 이 말이에요. 주례하는데 “주례사 있겠습니다” 하는데 갑자기 주례자가 십자가 끄집어내서 “주예수의 십자가를 믿으라” 이러면 주례사가 되겠어요? 그걸 보고 신랑 신부가 “아멘” 이렇게 하게 되면 사람들이 “아주 세트로 미쳤구나, 세트로.” 이럴 거예요. 결혼식에는 결혼식에 맞게 주례해야지, 왜 십자가가 거기에 끼어드느냐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왜 거기 십자가가 끼어드느냐.

주님의 하는 일에 십자가와 무관한 일이 있던가요? 예수님의 한 발걸음이라든지 말씀이라든지 기적이라든지 모든 것이 십자가와 무관하게, 십자가가 가는 방향이 아니고 엉뚱한 방향으로 간 일이 있던가요? 없죠. 그리고 예수님에 의해서 관계되어지는 제자들이 십자가와 무관한 인간들이 있던가요? 심지어 가룟유다까지. 다 십자가 사건에 적재적소에 필요하죠. 이게 시의적절하다고 하는 거예요. <기생충>에 나오는 대사 가운데 “참으로 시의적절하구나” 해요. 송강호가 그런 대사하는데.

적절한 거예요. 타이밍이 딱 맞다 이 말입니다. 주님만 주되기 위해서는 나머지는 주되게 하시는 데에 부정적 역할로써 전부다 가담이 되어야 돼요. 그래야 모든 인간은 십자가 믿을 어떤 자격이나 권한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구원하는 것은 순전히 누구 소관으로 넘겨집니까? 모든 사람으로부터 버림받았기 때문에, 모든 죽은 자로부터 주님이 죽음을 당했기 때문에 누굴 건지고 누굴 안건지고는 주님의 고유권한에 속하는 겁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만이 이것을 기쁨으로 고백할 수 있어요. 그렇게 고백한 사람은 자기 자신이 하는 평가에 대해서는, 애초부터 내가 나한테 하는 평가가 나한테는 굉장히 심각한 문제지만 주님한테는 전혀 심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심각하게 만드는 요소는 악한 영들이 내가 나한테 하는 평가에 대해서 오금을 저리게 만들고, 너 이제 죽었다. 죽었다. 너는 끝장났다. 이런 겁니다.

아까 안양강의에서 잠깐 언급했는데요. 인간이 있으면 인간들은 외부에서 뭘 배우나? 정보를 수집하죠. 정보를 수집하게 되면 이건 뭐냐 하면 합리성을 여기서 갖추게 되고요. 정보수집에 포함된 게 뭐냐 하면 합리성이에요. 합리성에서 뭐가 되냐 하면 예측이 되잖아요, 예상이 되잖아요. 아니 여러분 예상안하는 사람 있습니까? 차 운전할 때 예상안하고 운전해요? 지 맘대로 지 동네인 줄 알고 가면 안되잖아요. 저기서 차가 몇 대 온다, 몇 초후에 파란 불 끝나고 이런 게 다 정보 아닙니까?

정보를 가지고 논리성, 합리성을 끄집어내서 예측을 한다고요. 모든 분야가, 모든 인간은 하루 일과가 이래요. 여기서 뭐가 발달하냐 하면 인간의 지혜가 발달하게 돼요, 발달. 발달이라는 말은 어렵게 말해서 관련성이 농밀해졌다 또는 더 촘촘해졌다. 전에는 변수가 3가지였던 것이 7가지까지 늘어났다. 이게 지혜가 발달된 거예요. 예상되는 경우의 수를 많이 확보한 것을 가지고 이건 세상 제대로 본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에요. 경우의 수가 거의 없는 것은 바로 바보, 등신 축에 들어가는 겁니다.

옛날에 그런 이야기했죠. 우리 친척이 결혼식이 있어서 참석했는데 3살 먹은 애가 결혼식 케이크, 웨딩 케이크 있잖아요, 결혼식 아직 시작도 안했는데 애가 가서 그걸 먹고 있어요. 자, 애가 그 케이크를 왜 먹을까요? 경우의 수를 작게 가진 거예요. ‘나 저거 먹고 싶다. 따라서 가서 저거 먹으면 돼.’ 2가지만 생각했죠. ‘먹고 싶다, 먹으면 돼.’만 생각하죠. ‘성질난다. 근처 칼 없나? 칼 있구나. 저 사람이 밉다. 없애야 되겠다. 찌른다.’ 경우의 수가 몇가지입니까? 서너가지밖에 생각안하죠. 그래서 교도소 갇혀가지고 ‘후회한다’ 이러고 있다고요.

많은 경우의 수를 많이 아는 사람이 “침착하다. 사람이 경우가 있네. 사람이 생각하는 바가 깊네” 이렇게 이야기한다고요. 악마가 그걸 자꾸 부추기는 거예요. 이게 무의미한데. 사람이 성숙됐다든지 또는 성화됐다든지 남의 생각까지 고려할 줄 아네 이런 거. 역시 배운 사람은 달라 뭐 이런 거. 이게 바로 예측, 경우의 수가 굉장히 많아지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굉장히 침착하게 행동했다는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성급하게 행동한 게 아니에요. 이렇게 예수님을 처형했을 때 로마의 정권 잡은 자들이 그 다음에 어떤 식으로 대처할 것이라는 그걸 다 고려한 겁니다. 굉장히 저들이 신경 많이 썼어요. 신경 굉장히 많이 썼어요. 예수님을 죽였을 때 그 추종자들은 어떻게 나올 것인가. 빌라도는 어떻게 나올 것인가. 다 예상해가지고 빌라도한테 어느 선까지 압력을 할 것인가. 빌라도가 “아, 나 이 사람에 대해서 무죄하다, 손 씻었다.” 이렇게 나올 줄은 생각 못했죠. 그 때는 바리새인들이 강하게 나옵니다. “만약에 당신이 이 사람을 처형하지 않는다면 당신을 당신의 주군, 로마황제에게 우리가 고소하겠소.” 이렇게 겁박을 줄 정도로 그만큼 이 사안이, 예수님 죽이는 사안이 이스라엘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사안이라고 바리새인들은 생각해서 그것도 한두명이 아니고 산헤드린 칠십 명 내지 칠십두명이 의견의 합치를 본 겁니다. 거기에 민주당, 한국당 필요 없어요. 정의당까지 다 동의한 거예요. “아니오”라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전부다 동의했어요.

이 말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그 선에서 이탈할 사람이 누가 있겠나? 아무도 없어요. 베드로와 제자들은 비겁하게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꼬마숙녀한테 당해가지고 도망치고 말았죠. 그래서 상황 돌아가는 것이요, 일치된 의견에 의해서 주님은 피 흘렸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방주에요. 노아의 방주라니까요. 오늘날의 노아 방주에요.

선뜻 그 방주에 올라탈 의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피를 알아서 자기가 뿌리는 게 아니고 피 뿌림을 받아야 되는 거예요. 피동적이에요, 피동적. 피 뿌림을 받아야 돼요. 피 뿌림을 받을 때 “나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내가 바로 주님을 죽인 장본인이라고 고백하는 자가 피 뿌림을 받은 성도입니다. 내가 이 피 뿌림 사건에 대해서 “나는 주님 앞에 버림받아도 마땅합니다”는 고백, 그게 피 뿌림이에요.

피 뿌림을 과거 단회성으로 끝내는 게 아니고 그걸 현재형으로 만들어버렸어요. 베드로에 의하면 그걸 현재형으로 만들어버려요. 만들 때 거기에 같이 관련되어 있는 것이 뭐냐 하면 세례라는 겁니다, 세례. 세례를 가지고 죄씻음은 아니지만 그 물세례를 통해서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물세례라는 그러한 심판의 징표가 구원의 표가 될 수밖에 없는가, 구원의 모형이 될 수밖에 없는가? 그것은 실체가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 실체가 바로 성도의 일생 내내 주께서 말씀으로 그렇게 진행해 주는 겁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성도로서 자기가 피 뿌림에 참여했다는 이 사실을, 어떤 내용을 가지고 확인할 수 있는가? 그것이 22절에 나옵니다.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자, 22절 가운데서 성도 개인이 한 행동이나 개인에 관한 내용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러면 이걸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 평가를 내립니까, 안내립니까? 안내리죠. 평가 내리는 게 의미 없으니까. 나는 지금 재활용 몇 번하나. 이게 의미가 없죠. 나는 재활용 때문에 사는 게 아니니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그것 때문에 내가 이 땅에 살아가는 게 아니기 때문에. “피 뿌림이 피 뿌림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주께서 이 일을 하게 하셨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주군이 따로 있어요. 나의 주인이 따로 있는 거예요. 나는 종이 되는 거예요, 그냥. 주인은 따로 있고 주님의 시다바리가 되는 거예요, 하나의 종이, 하인이 되는 겁니다, 하인이.

맨날 고백하는 게 주님이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셔서 일한다. 다시 말해서 진짜 현실은 주님이 하신 일을 구심점으로 잡아야 제대로 현실에 대해서 묘사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이해가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주가 되시는 그 일을. 그래서 이 기록을 했거든요. 그래서 22절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우리 성도는 어떤 위치에 있는가. 21절에 있죠.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라 했죠? “육체의”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더러움이죠. 다시 말해서 이 육체가 알아서 제 더러움을 씻을 재간이 없어요. 그런 방식이 없어요. 우리 육체는 자체가 더럽습니다. 내가 더러운 걸 안다고 해서 그 자체로 씻어지는 건 아니에요. 그러나 이미 구원받은 사람은 무엇을 계속 받아들이냐 하면 내 육체는 더럽다는 사실을 잊지를 않습니다. 그래야 자기의 건전한 의미에, 자기 평가에 놀아나지 않죠.

“아, 나는 착하면 착할 수도 있어.” 이런 헛소리를 하지 않는 거예요. 더러운 인간에게서 더러움만 나오지 무슨 거기서 하나님이 받을 건전한 게 나올 수 있겠어요. 더러운 것은 더러움만 나오는 거예요. 더러운데 덜 더럽다, 조금 더럽다, 많이 더럽다 이런 거 필요 없어요. yellow면 yellow이지, 노란색이지 누리끼리하다 형용사를 자꾸 세분화시킬 필요 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 내가 얼마나 최선을 다하느냐가 목표가 아니고 피 뿌림이 목표기 때문에 그래요, 피 뿌림이. 피 뿌림의 영속성 때문에. 아직도 피 뿌림이 진행중이어야 구원되는 자가 있거든요.

한번 정리해봅시다. 노아의 방주를 언급한 것은, 노아의 방주는 지금 바깥이 홍수 물에 다 잠겼다는 사실, 그런 현실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노아 방주에서 안에 들어있는 사람은 비로소 구원이라는 것이 내 힘으로 혼자 되는 게 아니고 주님의 일관성 있는 자기 계획의 일환으로 구원이라는 것이 결과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알죠.

그렇다면 “내가 구원받았다”이것은 탈락이고요, “누가 구원해주시느냐”가 중요하죠. “나 구원받았다. 신난다.”가 아니라 “주께서 나를 건져주는구나. 신난다.”가 돼요. 같은 말이 아니에요. 주가 핵심요소로써 부각이 되어야 돼요. ‘내가 구원받았다’에서 내가 부각되는 게 아니고 ‘누구야? 누구십니까? 나를 이렇게 일방적으로 피 뿌림으로써 용서가 된다는 이 엄청난 기획, 엄청난 사태가, 엄청나다는 것을 인식하도록 하게 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 피 뿌림과 죽으심과 부활이 너무 엄청나기 때문에 우리 인생에 살면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 앞에서 다 사소한 일이 되어 버립니다, 사소한 일. 오늘 집에 있는 강아지 3마리 다 죽었다. 아이고, 또 사소한 일 벌어졌어. 3마리밖에 안죽었대. 이게 사소한 일이 되어버렸어요, 모든 게. 우리 부모님이 돌아가셨어. 아, 이거 또 나 사소한 일 맞이했네. 나중에는 아이고, 내가 이제 숨이 가쁘고 곧 끊어지네. 아, 주여 이 사소한 일을 사소한 일로 알게 하옵소서. 왜냐하면 주께서 죽일 때 돼서 죽이시니까.

이제 결론으로 들어갑니다. 그동안 겉으로는 우리가 주님을 안 돌아보고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누구 덩치가 크기 때문에? 나라는 이 몸을 내가 책임지고 관리하려고 하기 때문이에요, 몸. 우리는 겉으로 보면 내 몸 위주기 때문에, 나 위주기 때문에 그렇다고 할 수 있는데 성경에 깊이 보면 배후에 누가 있습니까? 악한 영이 있어서 나보다 더 세요.

구출이라는 이 개념은 처음에 구약에 보면 바로 애굽에서 나올 때 구출이라는 개념을 쓰는 거예요, 애굽에서 나올 때. 왜냐하면 애굽에서 나올 때 구출 개념은 집단 구출이거든요. 모세 혼자 달랑 나온 게 아닙니다. 모세가 나왔다는 말은 모세 따라 나온 사람들이 있듯이,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고 부활했을 때 예수님 혼자서 자기 좋으라고 본인만 달랑 구원받았겠어요? 그럼 백성이라는 게 의미 없잖아요.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신 것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신 것은 아들 본인만 구원받으면 되는 게 아니고 어떤 성과를 내는 거예요.

그 성과가 베드로의 말에 의하면 뭡니까? 성과를 냈다, 안냈다를 뭘로 봐요? 백성들이 보편적으로 자기 행위가 아니라 공통적으로 하나를 바라보는 게 있어요. 그게 뭡니까? 뭐로 죄씻음을 받았다? 베드로전서 1장 2절에? 피 뿌림. 피를 뿌린 거죠. 지가 쳐바른 게 아니고 피 뿌림이죠, 피 뿌림, 그 사건 안에 우리가 전부다 하나의 증인으로써 부름받은 거예요. 부름받을 때 우리는 뭐로 부름받습니까? 말리는 사람으로 할까요? 아니되옵니다. 예수님을 죽여서는 안됩니다. 그 역할로 부름받습니까? 아니죠. 베드로나 요한처럼 우리는 비겁자로써 내심 동조자로써 거기 가담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때부터 싫어하는 게 왜 이렇게 우리 힘으로 주님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우리는 부정적인 역할이냐. 바로 무엇 때문인가. 나는 누구 중심이다? 내 몸뚱아리 편하면 그만이에요. 내가 행복하면 그만이에요. 내가 밥 먹고 살면 그만이에요. 사람들은 그걸 가지고 ‘그것만이 내 세상’ 하는 거 있잖아요. 전인권 노래 있잖아요. 밥 먹고 사는 것만이 내 세상이에요.

복음, 십자가 그딴 거 무슨 소용 있다고. 밥이 나오나 돈이 나오나. 남이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불쑥불쑥 누가 이야기해요? 내가 나를 그런 식으로 설득한다고요, 내가. 니 복음 안지 십년 됐는데 니 얼마 벌었어? 니가 뭐 복음 안다고 해서 누가 도와주는 사람 있었어? 봐, 하나님 없잖아. 봐라, 예수님 없잖아, 봐라. 니가 그런 거, 그딴 거 자꾸 신경쓰지 말고 그건 심심하거든 천당 갈 준비할 때나 하고 지금은 다급하고 절박한 것은 복음이 아니야. 니 입에 풀칠하는 거야. 그 강한 설득력이 기본으로, 베이스로 깔려 있다고요.

그 베이스를 깔 때 주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귀를 잡아당겨요. 잡아당겨가지고, “니 바닥을 내가 보게 할게.” 그래서 그런 마음까지라도 우리로 하여금 고개 처박게 하는 거예요. “이게 니 본모습이야. 니가 알아서 구원되는 게 아니야. 너는 여기에 매여 있었어.” 바닥을 보게 하는 겁니다. “이것 때문에 나 죽었잖아. 지금 내가 또 당해도 나 죽이려고 달려들 그 고백이 방금 네가 한 고백이야.”

십자가, 그 십자가가 보일 때 그게 바로 주님의 말씀에 매여 있다는 거예요. 귀가 “아아~”꼭 교무실에 끌려가는 말썽꾸러기 아이처럼 모자 삐딱하게 쓰고 소매는 이만큼 걷어가지고, 교복 걷어가지고 있잖아요. 좀 노는 아이들, 침 좀 뱉는 애들, 선생님이 “이리와 이리와. 내 너 오늘 그럴 줄 알았어. 복장 하고 다니는 꼬라지 하고는” 잡아당길 때 “아~” 끌려가듯이 늘 주님께서는 우리를 바닥을 보게 하셔가지고 아무것도 아닌 나를 십자가 피 뿌림을 증거하는 그 고귀한 일에 참여시킨 자가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필수코스가 뭐냐? 예수님을 배신했다는 필수 절차를 통해서 자기 평가는 바이바이 작별하고 오직 예수님의 하신 일만 증거하는 주의 사도, 이게 바로 우리의 형제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어진 모든 것이 주님의 살아계심과 십자가 증거하라고 주신 것인 줄 알고 우리가 얼마나 내 것이라고 여겼던 그 악마성이 또 들추어지는 기쁨이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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