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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10 00:32:33 조회 : 243         
끝장 베드로전서 4:11 200709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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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림(IP:223.♡.58.44) 20-07-12 05:01 
서울의존강의20200709a 베드로전서4장 11절(끝장)-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4장 7절-11절

7절,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8절,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9절,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10절,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11절,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베드로전서 4장 7절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 끝장 보자는 이야기이죠. 세상 사람들은 이 마지막을 생각 안하고 있습니다. 끝이 없다고 여기고 부지런히 엑셀을 밟는 거죠. 차를 달리는 겁니다. 갈 때까지 가자.

만약 100m 앞에 끝장이 있다고 한다면 끝장 오기 전에 그 인간은 혼란에 빠집니다. 혼란스럽습니다, 끝이 있다면. ‘끝이 있는데 내가 지금 애써서 뭐할 거냐’ 이렇게 되겠죠. 만약에 끝이 있다면 인간은 현재 자기가 알고 있던 모든 사람들과 본인과 전부다 이별하게 되어 있습니다. 헤어지게 되어 있죠.

내가 끝으로 날라간다면 나하고 친하게 지냈던 사람, 내가 정 주었던 사람 또는 정을 받았던 모든 사람과의 안녕입니다. 그런 식으로 끝장을 이해하는 거예요. ‘내가 끝났다. 그러면 나와 관련된 모든 사람과 빠이빠이다. 뭐 속 시원하게 그래, 나 혼자 갈 데를 가지.’ 이렇게 쿨하게 마음을 잡을 수도 있을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하고도 이별하면 어떻게 될까요? 평소에 ‘예수님을 믿는다. 잘 믿는다. 예수님의 복음을 내가 믿었어요. 나는 그걸 귀하게 여겼습니다.’ 했는데 다른 사람하고 헤어지는 것처럼 주님하고도 안 헤어진다는 보장이 있을까요? 이 끝장에서.

지금은 끝장이 아니니까 마음 굳게 결심해서 ‘주님을 믿습니다’ 라고 이렇게 주장하거든요.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기 안정화 작업입니다. 내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어떤 분을 내가 의지하고 맡기고 믿는다. 그 든든한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자기 안정을 도모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자기 안정 도모해서 뭐 어디 써먹으려고? 그것은 내가 안정화되게 되면 ‘나’라는 것을 건실하게 지켜줄 수가 있고 건실하게 지킬 수 있는 이것을 영원한 세계, 천국과 연결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갖죠.

그런데 끝장이 온다면? 내가 100m 앞에서 없어진다면? 또는 1시간 48분 후에 없어진다면? 그때는 아까 말씀드렸듯이 세상 사람들한테는 정리할 것 정리하고, “혹시 내가 죽거든 닭 한 마리 빌린 것 사촌한테 대신 갚아주라고 이야기할게. 걱정하지 마. 나 닭 빌린 것 안 떼먹는다. 내 사촌한테 얘기해서 닭 한 마리 줄게.” 뭐 그런 식으로 할 수 있는 거예요. 소크라테스가 죽을 때 그런 유언을 했답니다. 닭 한 마리 걱정하면서 죽었답니다.

사람하고는 이렇게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는데, 살아있을 때는 예수님을 믿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만약에 예수님께서 나를 끝장내신다면 그때 우리가 “주님 저 알잖아요.” 분명 우리는 주님 앞에 선뜻 나서서 “주님 저 몰라요, 알아요? 복음 전하고 믿고 했습니다.” 할 때 “도무지 너 모르겠다.” 이렇게 주님께 이별 통보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진짜 끝장이죠, 진짜 끝장.

끝장이라도 예수 믿었으면 이렇게 다시 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런 걸 한번 생각해보세요. <2018>이라는 영화가 있었어요. <2018>이라는 영화가 무슨 영화냐 하면 샌프란시스코 근방에 지진이 일어나서 온 도시가 다 흙 속에 묻힐 때 주인공들이 지진에서 가족애를 살리면서 살아났다 뭐 그런 이야기예요. 영화 잘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영화가 늘 아슬아슬해요.

지진이 일어나고 하늘에서 유황불 떨어지고 해서 그 지역을 탈출하기 위해 비행장에서 온가족이 경비행기를 탔는데 비행기가 활주로 가는 도중에 지진이 나서 비행기 끝이 무너지고 있어요. 그런데 비행기는 뜨려고 하면 어느 정도 거리가 있어야 되는데 거리를 다 못 채우고 비행장이 무너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 관객들은 지금 조마조마한 거예요. 물론 거기서 영화가 끝나고 주인공이 죽는다고 생각은 안하지만 그래도 그 장면을 보면서 ‘야, 이거 비행장 다 갉아먹기 전에 비행기 떠야 되는데’ 하는데 과연 끝부분에 와서 비행기가 확 사라져요, 화면에서. 사라져가지고 ‘주인공이 여기서 끝나는구나. 영화 30분밖에 안됐는데 여기서 끝나나.’ 이런 생각하는데. 사라졌는데 비행기가 여기서 양력을 받아서 다시 떠오를 때 관객들은 전부다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야, 드디어 살았구나.’ 뭐 이렇게 좋아하는 거예요.

그 끝장에 주님께서 이 드라마처럼 내 인생도 ‘세상 모든 것은 끝장이다’ 했는데 주께서 “너만은 천국오너라” 해서 비행기가 양력 얻어서 다시 떠오르는 것처럼 떠오른다면, 아, 아슬아슬하긴 하지만 구원되기는 되었잖아요. 어쨌든 저쨌든 위기를 거치든 말든 구원은 되었잖아요. 그건 우리 생각이고, 우리 드라마이고.

세상 사람들과 이별할 때는 이별이 무슨 뜻인지 알아요. 나는 이제 간다. 너희는 남아 있거라. 마지막 임종 때 연세 많은 어른들 돌아가실 때 비록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가운데에서도 이별이 뭔지 알아요. 나 죽거든 큰 아들은 집하고. 뭐 이런 거 나오잖아요. 그게 제정신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거예요. 받아 적나, 지금? 반드시 내 주민등록번호 받아 적어야 된다, 안 그러면 법적인 효력 없어. 이 세세한 것까지 당부하면서. 큰 아들은 집 가져가라. 둘째 아들은 땅 사놓은 거 해라. 셋째 아들은 그저 내 빚이나 들고 가라. 이런 식으로 유언할 때 이별이라는 것을 본인은 아는 거예요.

너희들 세계와 나는 이제 끝난다. 세상은 아직까지 해 뜨고 해 지고 달 뜨고 지지만 본인의 죽음은 본인에게 무엇으로 다가옵니까? 세상이 끝장나지 않더라도 자기는 일찍 세상과 이별, 결별을 했죠. 이별했습니다. 과연 그 이별할 때 옆에서 또 목사님 결정적 순간에 심방와가지고 “집사님, 정신 있습니까? 정신 차리시고. 예수 믿습니까? 예수 믿어야 돼요. 주기도문 외워보려고요? 이렇게 한번 외워 보실랍니까?” 뭐 이렇게 하지만 “믿습니까?” 하는데 뭐 안 믿는다고 할 수도 없고 마지막 가는데 또 남을 위로해줘야죠. “예. 목사님 걱정 마세요. 믿습니다.”

하지만 ‘믿습니다’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끝장이 나지 않을 때 그때 내 기분이었고 지금 내가 끝장나는 그 지경에 와서도 내가 예수 믿는다는 것이 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무슨 효과가 있을까요? 소용없는 거 아니겠어요? 살아있을 때나 예수님을 상상해서 믿는다고 이게 가능한데 까짓 거 내가 없어지는 마당에 예.수.믿.습.니.다. 라는 6글자가 나를 살려 줄까요?

따라서 신앙이 있다 하는 이 모든 것이 끝장이 아닐 때는 의미 있는 것처럼 위로가 되고 마지막 때에 내가 죽어서도 내 구원을 보장할 것 같지만 막상 실존적으로 나에게 나의 끝이 왔을 때 다시 한 번 예수 믿는다는 것이 실효성 있는지를 의심할 수밖에 없어요.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존적으로 말하면 뭐냐. 죽는 나를 대신 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 그걸 실존적이라고 합니다. 머리가 길었는데 대신 이발할 사람이 없고 내가 목욕탕 가야되는데 나 대신 목욕탕 갔다 왔는데 내 몸이 깨끗하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들은 더불어 살고 화해롭게 하하거리면서 얼싸안고 우리는 가족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각 개인마다 전부다 실존적입니다.

자기가 한 단위가 돼요. 나는 숫자 1로 되지 어떤 경우라도 2가 될 수 없어요. 나는 나로서 1로 마감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한번 적어 볼게요. ‘나는 늘 나로 최종 마감된다.’ 친구도 많고 아는 사람 많고 가족도 많더라도 따지고 보면 나는 늘 나로 최종마감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강의하면서 계속 강조하는 것은 나로 마감이 되는데 ‘예수님을 믿는다, 예수님을 가까이 한다, 나는 예수님을 의지한다’ 하는 이 ‘예수님’이라는 실존도 내가 죽을 때 다른 가족들이 헤어지는 것처럼 그 헤어져야 될 가족 중에 예수님이 하나의 나의 대상으로서 있다면 나 죽는데 대해서 예수님도 따라온다는 무슨 보장이 있습니까? 아무런 보장이 없죠. 왜? 나는 나로 최종 마감되기 때문에. 예수님은 다른 내 사촌하고 차이가 없잖아요. 내 사촌이나 내 부모나 가족이나 이런 사람들하고 차이 없죠. 그들과도 헤어지는 마당에 예수님과 안 헤어진다는 보장 없잖아요.

진짜 죽는 마당에 예를 들어 “아버지, 이제 숨 끊어지는데 마지막 소원을 얘기해주세요.” 하는데 아버지 하는 말이 “예수를 불러다오.” 없는 예수를 어디서 찾습니까? “예수를 불러다오.” 예수님이 왔다고 칩시다. “김집사, 내가 예수네. 그래 뭐뭐?” 그러면 김집사 하는 말이 “아, 그렇게 예수님하고 친하게 지내도 나 죽는 마당에는 나 홀로 죽는구나. 예수님마저도 결별이구나.” 그렇게 안된다는 보장 있습니까?

신앙조차도 다 허구라는 사실을 우리가 감안해야 된다 이 말이죠. 지금 끝장나지 않는 상태에서는 상관없어요. 나는 계속 살아가기 때문에 오늘 안 믿으면 내일 믿으면 되고 내일 안 믿으면 모레 믿으면 되니까. 그런데 지금이 그 끝장난, 내가 모든 사람과 헤어지는 순간이며 그 순간에 나는 나와는 헤어질 수 없죠, 나니까. 죽을 때 나하고 같이 죽으니까 헤어질 수가 없죠.

그러나 예수님이 과연 죽을 때도 나와 같이 할 수 있는 예수님이냐 하는 것에 대해서는 확실한 증거도 없고. 예수님이 와가지고 “나 예수다. 같이 누워 죽어줄까?” 이럴 분도 아니고. 그냥 나한테 지금까지 했던 기억은 그냥 ‘예수 믿습니다’ 라는 그런 고백뿐이거든요, 고백. 고백이 무슨 그게 효과가 있겠는가 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 말이죠.

하나의 예를 들어봅시다. 이와 같은 경우가 있을 때 여러분들이 어떻게 처신할랍니까? 사람이 죽어도 다시 산다는 그런 이야기를 교회에서 들었다 칩시다. 그러면 이 사람이 만약에 시험을 해본단 말이죠. 내가 여기 있고 예수란 분이 여기 옆에 있다 치고 내가 밧줄로 예수님과 묶어요. 밧줄로 꽁꽁~밧줄로 꽁꽁 묶어요. 나는 죽었다가 부활 못되지만 예수님은 죽었다가 부활 되잖아요. 그럼 낭떠러지에 가요. 가서 내가 예수님을 떠밀어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밧줄이 아니고 고무줄 비슷한 밧줄이에요. 그럼 예수님 먼저 낭떠러지에 떨어져서 으악! 하고 내가 떠밀어서 죽게 되겠지요.

그러면 나는 도박을 한 거예요. 만약에 예수님이 죽었는데 다시 산다면 밧줄로 꽁꽁 묶었기 때문에 나도 따라서 부활하게 될 것이고 내가 떠밀었는데 아무 소식이 없어. 그러면 떠밀면 밧줄로 연결되어 있으니까 나도 같이 무의미한 추락, 죽음만 있을 뿐이에요. 떠밀어서 죽은 그 분에게 아무 능력이 없어. 그 분은 그냥 구라였어.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난 게 거짓말 되어가지고 그 거짓말에 홀딱 넘어가서. 진짜 죽었다가 부활 된다면 밧줄로 묶여있기 때문에 떠민 나도 같이 딸려 올라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 소식이 없네. 괜히 헛짓했어. 친구 따라 같이 죽을 뻔 했어.

그러니까 친구를 떠민 게, 밧줄로 묶었기 때문에 내가 나를 떠밀어서 나를 낭떠러지에 넘어뜨린 격이 되어 버렸죠. 그동안 그 친구한테 얼마나 많은 복음 이야기 듣고 교리며 삼위일체부터 온갖 괜찮은 이론 다 들었어요. 이야기 다 들었다 이 말이죠. 그 다음에 그 이야기를 내가 “믿씁니다” 하고 쌍시옷을 해가면서 얼마나 다짐에 다짐에. 친구야, 믿는다. 나는 너의 주장을 믿는다 하면서 우리 슬슬 낭떠러지에 같이 가자, 믿는다. 나는 못하지만 너는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날 걸 믿는다, 믿는다. 잠시 눈 감고 있을래? 예수님을 밀어버렸다 이 말이죠. 우리가 같이 살까요?

야, 이거는 대단한 모험입니다. 이렇게 모험을 하겠다고 나선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참 희한한 사람이죠. 왜냐하면 다른 사람은 복음은 듣고 성경말씀 보지만 그렇게 극단적인 모험까지는 안가요. 으응, 그런 이론이 있구먼. 그런 교리가 있구먼. 나중에 죽을 때나 “믿습니다” 하면 내 음성을 하나님이 들을 테니까 하나님께서 “오, 니가 예수를 믿는구나. 내가 살려줄게.” 아마 그러한 조치에 대해서 은근히 기대하면서, 그냥 내가 믿는다고 하는 그걸로 다 된 거 아닌가? 믿는데 추가해서 할 게 더 뭐가 있겠어? 이렇게 해가지고 믿으니까 천당 가는 것은 이제 됐고 살아있을 때는 나 즐거운 일, 나 행복한 일만 하면 된다. 보통 사람은 그렇게 할 거예요. 그게 요령을 부리는 거예요. 든든한 보험하나 해놨겠다. 이제 나는 내 일만 하면 된다.

그런데 아까 그 자기 친구 되는 예수님을 실제로 낭떠러지에 가서 말이 맞는지 안 맞는지 떠미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에요. 진짜 그 사람이 믿는 사람이죠. 믿는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믿는다는 흉내를 내는 사람은 뭐 죽었다가 부활할 수도 있겠지. 하고 나는 내 볼일 볼란다. 이렇게 되는데 진짜 죽었다가 부활하는 것을 내 인생과 바꿀 수 있는 그 정도의 대단한 일이라고 느낀다면 그게 진짜 진실이라면 대충 믿을 수는 없다는 거예요. 대충 믿는 척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확실히 가자는 거예요, 확실히. 확실한 방법은 우리가 예수님을 죽이는 수밖에 없죠. 실제로 부활했는지 죽일 수밖에 없어요.

자 그래서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정리하게 되면 예수님을 죽이세요, 매일같이. 예수님을 떠미세요, 낭떠러지에. 그 말은 뭐냐 하면 긴가민가하고 안절부절 못하는 나를 내가 낭떠러지에 떠미는 일이에요. 왜? ‘믿어볼까, 안 믿을까’ 이거는 믿는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닌 자가, 믿으려고 애쓰는 나 같은 인간은 살아도 소용없는 인간이에요. 그야말로 쓰레기 같은 인간이죠.

그러니까 제 말은 뭐냐? 믿으려면 예수님을 밧줄로 꽁꽁 묶어서 떠밀든지 아니면 이건 안 믿는 거라고 인정하든지 둘 중에 하나가 되어야 되요. 믿으려고 애쓰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이 말이죠. 그렇죠? 믿으려고 애쓰는 게 뭡니까? 한번 찔러나 보는 것이지 그게 무슨 믿음이에요? 한번 맛이나 볼까? 맛봐서 뭐 할 건데?

이 세상에 끝장이 없다면 예수님을 내 편 만들려고 사람들이 시도를 합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그렇게 하고 있고. 그러나 끝장이 있다면, 다시 말해서 끝장은 주님의 끝장이 아니고 진짜 당사자, 실존적 나의 끝장이잖아요, 나의 끝장이 왔을 때 과연 그동안 30년, 40년 예수 믿은 것이 무슨 효과가 있느냐를 끝장 가서 생각하지 말고 지금이 끝장이라고 생각하고 예수님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이 말입니다, 제 말은.

왜냐면 성경말씀이 바로 그 이야기에요. 성경에 이런 내용 있습니다. 받아들이겠습니까? 받아들이죠. 그 좋은 걸 왜 안 받아들여요. 이건 믿음이 아니라니까요. 왜? 그거 받아들이고 지는 자기 할 일 여유만만하게 할 사람이기 때문에 전혀 진지하지가 않아요. 예수님은 진지하게 십자가 졌는데 인간들은 전혀 진지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끝장, 세상 마지막 때가 되었다는 말은 이렇게 정리하시면 알기 쉬워요. ‘어떤 사람을 평가할 기준을 나는 잃어버렸다.’ 내 주위에 있는 사람, 또 어떤 사람, 제3자를 평가할 기준을 나는 잃어버렸다. 왜냐하면 ‘내가 나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나는 끝장이다. 내 자신이 움직이는 끝장이에요, 매일같이. 7월 7일, 7월 6일, 7월 5일. 매일같이 나는 그 날을 통해서 끝장이다, 끝장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럼 매일같이 나는 끝장이죠. 오늘은 오늘로써 끝장입니다. 그러면 내일 아침에 만약에, 그럴 일이 없을 수도 있는데, 만약에 눈을 뜬다면 이건 새로 시작한 거예요. 그게 부활이에요. 그게 부활이죠. 어제 분명히 끝장인데 오늘 왜 또 눈떴지? 아, 이게 내 인생이 아니고 주께서 새 날을 주셨구나. 이렇게 되는 겁니다. 주께서 새 날을 주신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시고 누가 베드로전서 4장 10절을 한번 읽어보세요.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됐습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우리는 어제 부로 끝장났기 때문에. 오늘은 부활의 날이기 때문에. 내가 남을 지적질 하거나 평가할 기준은 내가 잃어버렸어요.

사람이 살면서 피곤한 이유가 뭐냐? 남 지적질 한다고 피곤해요. 남 간섭한다고 피곤하다고요. 보통 남편이 아내한테 그러죠. “당신은 나 만나면 잔소리하는데 내가 힘들지 않겠나.”하면 아내가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당신은 당신 듣는 게 힘드나? 잔소리하는 나는 더 힘들어. 잔소리 들을 만한 짓을 안 하면 될 거 아니야.” 이렇게 나온다고요. 그럼 남편이 있다가 “네가 잔소리 안하면 될 거 아니야?”, 아내가 “눈에 보이는데?”

그러니 두 부부의 상황극은 둘 다 뭐를 안 느낍니까? 끝장이라는 것을 지금 빼먹었어요. 끝장을 삭제해버렸어요. 끝장을 생각 안합니다. 마치 내일도 같이 산다고 일방적으로 지금 우기고 있는 거예요, 일방적으로. 사모님, 목사님, 내일 사십니까? 내일 사시면 오늘 잔소리하세요. 그러나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잘해주세요. 왜? 내일이 없기 때문에. 내일되면 헤어지기 때문에. 실존적으로 헤어지기 때문에.

부부 이야기도 되지만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는 말은 뭐냐? 감사함으로 하라 이 말이죠, 감사함으로. 고맙게, 김호중처럼 고맙소, 고맙다. 하면서 살아가시라 이 말입니다. 뭐 주님의 은혜로 산다는 말만 하지 마시고 진심으로 진정성 있게, 진지하게 “고맙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은 끝장이라는 이 상황을 멀리 두지 마시고 바로 지금 이 순간, 내가 끝장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세요.

우리가 끝장이 아니고 내일이 만약 있다고 한다면 내일은 우리에게 고민거리를 안겨줍니다. 내일 뭐하지? 내일 아침은 뭐 해먹지? 맨날 주부들 생각하는 게 내일 아침 뭐해먹지? 콩나물국 끓이려고 하니까 벌써 두 달째 콩나물국이고 참, 안 먹으면 어떡하지? 볶음밥 해 먹을까? 또 텁텁하다고 할 건데. 아침에 간단히 빵 먹을까? 그 양반 또 빵 안 좋아해. 뭐 이런 거. 꼭 국 한 그릇에다가 반찬 3가지 다 내야 돼. 내일이 있으니까 계속해서 고민이 되는 거예요. 고민이 되니까 내일 아침 되서 밥해주면서 고맙다는 생각보다도 으이구, 참. 진저리나 진저리나. 일찍 안 죽나? 이런 식으로. 지긋하다 진짜. 질린다, 질려, 정말. 귀신 뭐하노,  안 잡아가고. 이런 거.

남 이별할 생각 말고 본인부터 본인과 매일같이 이별하라는 말이에요. 본인이 매일 이별이에요. 나와 이별하라고 하시는 말씀이에요, 이 말씀이. 남 따지지 말고 남 손가락질 하지 말고 니는 매일같이 너하고 이별해. 너 오늘이 마지막 주는 혜택이야, 이 밤이. 투나잇! 이 밤이 너의 마지막 밤이야. 내일? 부활된다? 죽고 난 뒤에? 누구 마음대로 부활돼?

그렇다면 아까 이별 문제를 해결해야 되는데 진짜 주님께서 구원 안 해주면 어떻게 되느냐? 진짜 어려운 문제죠. 이게 참 어려운 문제에요. 믿음이란 두 종류가 있어요. 첫째는 내가 믿는 믿음이 있어요. 내가 믿는 믿음은 마지막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믿음이에요. 가짜죠, 가짜. 믿음도 아니면서 흉내 내는 거예요. 현재 내가 죽을 때를 대비하고 심판 날을 대비해서 미리 대비할 때의 믿음이에요. 그 믿음은 누가 만들어 내냐? 내가 만들죠. 그러니까 이런 믿음은 사람들 앞에서는 그럴싸해 보이지만 막상 이게 예수님한테도 통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주님, 구원할 줄로 믿습니다. 해도 과연 믿습니다 하는 그 고백을 진정한 고백으로 받아줄지 안받아줄지. 뭐 안받아주죠. 받아줄 리가 있어요? 내가 나 단도리한다고 걱정이 돼서 한 이야기를 주님이 들어줄 이유가 없습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소급해서 주시는 믿음이에요, 소급해서. 우리는 오늘을 사는데 먼저 내일이 되시는 분이 거꾸로 시간을 거슬러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믿음이 있어요. 그런 믿음이 있다고요. 이거는 성령이 와서 주신 믿음이죠. 그러면 성령이 주시는 믿음이냐, 아니냐. 이 믿음조차도 내가 조작한 건지 어떻게 아느냐.

첫째 내가 믿는 믿음, 어제로부터 주어진 이 내 믿음을 어설프다고 실효성 없다고 이것을 공격하고 부정하는 힘이 돼요. “너는 믿는다는 것이 그냥 너 스스로 설득하는 것 밖에 안 돼.” 라고 공격하는 느낌. 다시 말해서 내가 믿는다는 건 아무리 봐도 이건 그냥 몸부림치는 것이라고 느껴질 때 이게 바로 어떤 분으로부터 공격받는 셈이 되거든요. 그 공격을 받는다는 것은 내일을 미리 가계신 분으로부터 아무 실효성 없는 믿음이라고 제거 대상으로 들어올 때 그 덩치 자체가 뭐냐 하면 이게 바로 ‘믿음’이고 다른 말로 하면 이게 ‘관계성’이라고 하는 겁니다. 주님과의 관계성.

이렇게 설명하면 너무 복잡하니까 쉽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비 온다는 소리 듣고 비 올거 같아서 우산을 준비하는 것. 어떻습니까? 이건 내가 대비하는 거죠. 그런데 비 온다는 소식이 없는데, 비가 안 오는 것이 분명한데 우산이 나한테 택배로 전달되었을 때. 그 때 우리는 이 우산이 아무짝도 쓸모없다는 걸 느껴요. 비가 온다는 소식도 없었으니까 우산은 천덕꾸러기가 되고 귀찮은 거고 이거는 쓸모없는 거고 집어던져도 될 것 같고 그런 생각이 들겠죠. 창세기 6장,7장, 8장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가 그런 겁니다, 노아의 방주.

그리고 어제 수요일도 이야기했지만 베드로에게 뭐라고 했느냐 하면 천국의 key, 천국의 열쇠를 준다고 했죠. 베드로의 관심사는 고기 잡는 거예요. 고기 잡아서 소득 얻는 겁니다. 자기의 소득을 챙기는 거예요. 그런데 천국의 열쇠라는 것은 베드로가 주님에게 요청한 게 아닙니다. 베드로 이름이 뭐였습니까? 시몬이죠. 시몬을 ‘반석’이라고 ‘베드로’라고 이름 지은 사람은 본인이 아니잖아요.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이름을 그렇게 바꿨다 이 말이죠. 네가 교회의 반석이 될 것이라 해서 반석이라는 이름을 지어 준거예요, 주님께서.

그러니까 신앙이라는 것은 내가 원치도 않는데 주님 쪽에서 준 게 있어야 신앙이다 이 말이죠. 그걸 오늘날 성령이라 하고 예수님의 영 또는 십자가라고 하는 거예요. 1번, 내가 믿는 십자가는 십자가가 아닙니다. 그 십자가는 내가 죽고 난 뒤에 천당 가려고 대비하는 십자가에요. 보험하나 들어놓는 것 하고 똑같은 거예요, 그거는. 그런데 이미 부활하신 분이 나에게 주는 십자가는 나로 하여금 지금 내가 끝장이라는 인상을 느낀다는 것을 나한테 확신시켜주는 겁니다, 주께서.

너 내일까지 걱정하지 마, 그거 욕심이야. 오늘 사는 것도 과분한 줄 알아라. 그리고 너 가족, 아내, 자식들? 죽을 때 이별한다고? 벌써 어제 이별했어. 어제 이별했다 이 말이죠. 벌써 이별했는데 아침에 눈뜨니까 옆에 자고 있고 애가 있다 이 말이죠. 이건 주께서 부활하게 하신 거지 뭐에요. 주께서 연장시켜 준거죠 뭐.

그러니 이게 뭐냐 하면 내 소유가 아니다 이 말이죠. 누가? 내가. 나부터 내 소유가 아니니까 자식이고 가족이고 전부다 그들을 내 소유라고 할 수 없죠. 내 소유가 아니면 내가 그들을 평할 수 있는 권한이 없는 거예요. 나도 나를 잃어버렸는데 뭐 남까지 오지랖 넓게 간섭할 필요 없잖아요. 내가 남을 평가할 기준을 내가 잃어버린 거예요.

그래서 믿음이 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믿음을 ‘상실’하는 거예요. 이게 믿음이 온 증거입니다. 심형래가 한 유명한 말이 뭐죠? ‘영구 없다’죠. “영구 없~다” 하잖아요. 심형래도 다 복음을 위해 태어났어요. 우리는 믿음 없다는 거예요. 물론 사랑도 없고 소망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왜냐하면 없어야 될 자가 나이기 때문에. 이미 끝장을 통해서 나는 모든 이들과 빠이빠이 한 걸로 주께서는 그렇게 보시고 믿음 주셔서 주위에 있는 가족들 모든 것이 새로 만난 새사람이고 날마다 새로 시작한다 이 말이에요. 오늘 제목은 <새로 시작>이에요. 날마다 새로 시작하는 거예요.

여러분한테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시절이 여러분한테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몰랐던 시절,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몰랐던 그 시절. 있죠. 여러분들이 갓 난 아기였을 때. 갓 난 애일 때 여러분들이 부모한테 뭐 달라고 했습니까? 여러분들이 6개월 되어서 이제 겨우 기어 다녔던 그 때 어머니, 아바마마, 젖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했던가요? 그러면 어머니가 말로 하지 말고 서류 결재 올려서 통과하면 내가 젖 줄게. 이런 게 있었어요?

천국에는 누가 갑니까? 누가 간다고 하지 말고 어떤 사람이 못갑니까? 예수님이 누가 간다고 하지 않고 못 간다고 했어요. 어떤 사람이 못 갑니까? 천국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못 가요.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못가요. 성인이 되어서, 어른이 되어서 나라는 것은 어떻게 구축이 되느냐 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찾아서 내 안에 비축을 하면서 나라는 것이 점차 점차 형성이 돼요. 소위 성인들, 무엇이 필요하며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내가 가져야 되는가를 요구한다는 것은 나를 따로 설정한다는 거예요. 나는 내가 구성하고 따로 설정한다는 거예요, 내가.

나는 죽어서 하늘나라 높은 자리에 가고 싶다. 이게 누구 토론이냐 하면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 제자들의 토론이었어요. 하늘나라에서 누가 더 높으냐. 그럴 때 하늘나라 개념 자체가 구성이 안 되어 있으니까, 정립이 안 되어 있으니까 주님께서는 어린 아이하나를 딱 데려와요. 데려와서는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못 들어간다. 천국에 갈 수 없다. 일단 천국을 가야 누가 천국에서 높은 자리인지 하는데 애초에 가지도 못하는 거예요.

그럼 천국 갈 때는 뭐냐? 누가 높으냐 누가 낮으냐 하는 남을 평가하고, 남을 평가하면서 그 기준으로 자기를 평가하는 그 모든 자아성이 끝장을 봐야 되겠죠? 그걸 잃어버려야 되겠죠? 누가 높으냐 낮으냐 하는 것은 일단 상대를 평가하면서 발생되는 현상 아닙니까? 따라서 이미 성인이 된 입장에서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가는 방법은 뭐냐?

아까 그 낭떠러지에서 밧줄로 꽁꽁을 다시 해봅시다. 내가 여기 있고 예수님이 여기 계시면 문제는 뭐냐 하면 ‘내가’ 밧줄로 예수님을 묶었다는 거예요. 왜? 예수님이 나한테 필요할 것 같아서.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예수를 소유하고 믿으려고 하는 거예요. 이게 내가 낳은 믿음이에요. 주님은 정말 나한테 필요하다고 믿는 거예요. 그래서 밧줄로 주님을 내가 묶었다.

그런데 구원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고 ‘주님’이 우리를 밧줄로 묶어버립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로 하여금 낭떠러지에 밀어버려요. 그러면 우리는 으악~! 하겠죠. 오늘 설교제목을 <으악>으로 할까. 우리를 이 세상에, 신곡시장 근처 이 동네에 양천구, 주께서 여기다가 떠밀어버렸어요. 우리는 사는 게 ‘으악’입니다. ‘으악’이라고요. 말은 쉽죠. 아이고 뭐. 양식 떨어지면 굶어죽지. 한번 떨어져 보세요. 너 죽이고 나 살죠. 남 떠밀고 지는 살겠다는 거지.

그러니까 양식 떨어지면 내가 죽는 게 아니고 남 죽이고 그 돈을 뺏는 것처럼 그런 본성을 가진 인간이 “내가 주를 위해서 죽겠나이다.” 하는 자기의 큰 소리, 그걸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주님은 베드로의 말을 안 믿었어요. 다른 사람은 다 버릴지언정 제가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베드로는 큰소리쳤죠. 자기 딴에는 그 순간에 진심이었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네가 닭 울기 전에 세 번씩이나 나를 부인할 것이다, 닭 울기 전에.

주님께서 알람장치를 만들어놨어요. 꼬끼오~라고 울 때 벌써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있는 겁니다. 닭이 울었다는 말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것이라는 걸, 네가 어느 수준이고 네 본성이 어떻다는 것을 익히 예수님이 알고 계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베드로의 큰 소리를 듣고 내가 너를 위해서 기도했기 때문에 네가 마귀한테 네 모든 것이 안 빼앗겼다. 내가 기도 안 했으면 너는 벌써 마귀한테 빼앗겼어.

그럼 예수님의 기도가 드러나려면 베드로가 자기의 오기, 자기의 결심, 거기서 출발한 자기의 멋진 기도, 이것은 뭡니까? 다 실없는 소리가 됨을 본인이 인정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주님이 왔다, 성령이 왔다는 말은 내가 하는 무슨 짓도 다 ‘부질없는 것’. <서울탱고>에 나오는 가사에요. 다 부질없는 것. 내가 하는 모든 것이 부질없는 거예요. 나 이제 교회 안 나갈래. 교회 안 나가도 부질없는 거예요. 교회 나와도 부질없는 것. 나 이제 양식 떨어지면 굶어 죽을래. 안 죽어요. 죽을 위인들이 아닙니다, 인간들이. 본인을 몰라도 너무 몰라. 남이 나를 죽이면 죽지. 코로나 와서 죽이면 죽었지, 본인이 스스로 안 죽어요. 죽겠다는 그것도 부질없는 것, 안 죽겠다는 것도 부질없는 것. 주님은 익히 우리 인간을 아십니다. 우리가 어떤 인간인지 압니다.

자, 주께서 우리를 묶어놓고 죽여 버리죠. 죽여 버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묶었던 이 밧줄, 이게 아까 ‘관계’라 했죠. 이게 주님 주신 믿음입니다. 믿음은 선물로 오는 거니까. 선물로 온 믿음이 선물 아닌 믿음을 내 안에서 추방시켜버립니다. 이게 어디서 또 구라떨고 있네. 그 말에 내가 감동받을 줄 알아? 아이고 쓸데없는 짓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남을 평가 못하듯이 나도 나를 평가하지 마세요. 왜? 나는 지금 마지막 날을 보내고 있기 때문에. 나를 평가해봤자 이거 아무 소용없어요. 평가해도 마지막 날이고 평가 안 해도 마지막 날이에요. 끝장이라니까 매일같이. 끝장이에요. 마지막에 먹는 그 저녁 식사는 맛있어요. 이거 먹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또 맛있는 걸 못 먹기 때문에. 그러니까 반찬투정하지 마세요. 마지막 식사입니다. 매일 저녁이 마지막 식사에요. 물론 야식타임이 있으면 그건 약간 미루겠죠. 밤 11시에 치킨 시켜가지고 피자 시켜서 먹으면 그게 또 마지막 야식이 돼요. 물론 이왕 죽는 거 이 야식 먹고 자면 그 다음날은 똥배 나온 뚱뚱보로 부활되어 가지고 보통 고역이 아니죠. 그거 뺀다고 또 애를 쓰죠.

주께서 떠미는 것은 무엇의 반복이냐 하면 그 죽음에서 살아나는 게 아니고 죽음 자체가 살아나는 거예요, 죽음 자체가. 그러니까 ‘나는 죽었다’를 기쁘게 발산하는 매일 매일이 남아 있어요. ‘나는 이미 죽었다’라는 사실을 계속 살리는 거예요. 죽은 것은 무효로 지나간 거고 ‘이제 살았다’가 아니라 ‘죽음’ 자체를 계속 살리니까. 이게 얼마나 신나는 일이에요.

이렇게 말을 어렵게 했지만 사실은 요한복음 3장 6절에 보면 간단하게 되어 있죠.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너가 내게 거듭나야 한다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주님이 하는 일이 거듭남이 빠져버린 일은 주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거듭남 없이, 지금 내가 괜찮은 고백하면 그냥 그대로 천국으로 직행하기를 바라는 거예요. 괜찮은 고백을 했으니까, 괜찮은 선한 일을 했으니까. 다른 사람도 안속아 넘어가는 걸 주님이 속아 넘어갈 리가 있어요? 우리 고백에 주님이 왜 안속아 넘어가느냐 하면 항상 내가 살아있을 때에는 살아있는 내 가치와 의미를 놓치지 않으려고 해요. 이걸 살려내려고 하는 거예요.

우리는 나 살아있음을 살려내려 하는데 주님께서 원하는 것은 ‘나 죽었음을, 나 잃어버렸음을, 내 것이 상실했음’을 계속 살려내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야 모든 일이 주께 범사에 감사함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이게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일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래서 “마지막 때가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라, 근신하라” 이 말 아닙니까?  이것은 네가 정신차리고 살라는 말이 아니고 주께서 어떻게 하는 그것이 너에게 드러나야지, 네가 어떻게 정신차렸다 가 드러나서는 안 되는 겁니다.

우리는 이로써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의 시작점이 아니고, 주님의 일의 시작점으로 다루어지는 거예요. 매일이 물론 나의 시작점이지만 그게 우선이 아니고 주님이 시작한 일에 나도 같이 새롭게 일상이, 하루가, 부활의 일상생활이 또 하루의 시작점이 되는 겁니다. 매일이 새롭죠.

그러면 지금까지 한 것이 이 한 문장으로 정리될 수 있어요. 어떻게 죽어서도 주와 함께 이별이 안 되고 같이 갈 수 있습니까? ‘살아있을 때 나의 빈자리가 마련되어야 됩니다’ 나의 빈자리. 보통 사람들은 내 것으로 꽉 차있어요. 전부다 내 것으로, 이빨부터 해서 머리카락, 모든 내가 갖고 있는 돈은 물론이고 옷부터 과거추억까지. 나의 추억이에요, 남의 추억이 아니고 나의 추억. 나의 기억이에요, 남의 기억이 아니고. 내 걸로 다 되어 있다고요. 그런데 주님께서 성령이 오게 되면 그걸 단절시켜요. 그 흐름을 끊어버려요.

끊어지게 되면 마치 요단강 위에서 물 내려오다가 요단강 건너가는 그 지점에서는 물이 어떻게 돼요? 끊어지죠. 홍해도 마찬가지고. 홍해 바닷물이 이렇게 흐르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건너갈 때 홍해물이 중간에 끊어졌으니까 길이 났을 거 아닙니까? 한쪽 물은 대기 상태. 저쪽도 흘러가지 않고 그냥 대기상태에 있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시간이 순간 고정되어 버린 거예요, 시간이. 시간 따라 이쪽 물 닫았으면 저쪽 물 없어야 되는데 바다가 되니까 쉽게 안되는 모양이죠. 그러니까 중간에 길이 있다 이 말이죠. 중간에 끊어지죠. 끊어지게 되면 중간에 생기는 그 자리가 뭡니까? 빈자리에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에 처음 섰을 때는 아무리 홍해 푸른 바다를 봐도 거기에 빈자리가 보이지 않았죠. 무슨 바다에 빈자리가 있습니까? 이건 말도 안되는 거죠. 바다에 빈자리가 없듯이 우리도 내 인생에 빈자리를 내가 찾을 수가 없어요. 빈자리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노래에는 있죠. 여기 둥지를 틀어 봐. 있지만, 실제로서는 빈자리가 없습니다. 그 빈자리를 친히 마련하시고 그 빈자리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주 앞에 쓰여지게 하는 거죠. 10분 쉽시다.
 이하림(IP:223.♡.58.44) 20-07-12 05:02 
서울의존강의20200709b 베드로전서4장 11절(끝장)-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나를 없애버리고 잃어버리는 것이 관건이 되겠죠. 모든 주범은 나한테 있으니까. 나한테 있거든요. 이것은 제 말이 아니고 예수님도 마찬가지에요. 예수님이 자기 백성에게 네가 죄와 함께 태어났다는 사실을 분명히 지적합니다. 그리고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거든요.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죄를 지적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나를 어떻게 잃어버리는가? 이것만 하면 간단해요. 나를 잃어버리는 방법, 알려드려요? 간단합니다. 현실을 뭐로 보느냐 하면 ‘환상’으로 보는 거예요. 현재 내가 알고 있는 현실이 환상인 거예요, 환상. 환상, 꿈. 꿈에서 깨어나면 되죠. 꿈속에 있으면 안 되고. 꿈에서 깨어나는 거예요.

요한복음 9장에서 소경을 데려왔죠. 제자들이나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소경이 소경이라고 여겼어요. 아까 첫째시간에 한 것 응용해 봅시다. 남을 평가한다는 것은 아직도 내가 살아있다는 거죠. 나는 소경 아닌데 저 사람은 소경이라고 평가하는 거죠. 그 평가는 이구동성으로 전부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게 현실이죠. 자기만 주장하는 거면 환상이라 하겠는데 남들이 다 이야기하니까 ‘이건 현실이 맞는 모양이다’ 이렇게 생각했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소경을 그냥 소경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고 데려와서 눈을 뜨게 해버렸어요. 그러면 ‘우리가 눈 뜬 것처럼 소경도 눈떴다’ 이렇게 되는 게 아니에요. 소경은 뭔가 경유를 했다 이 말이죠. 처음에 여기 전부다 눈 뜬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얗게 그리고 소경은 소경이니까 새까맣게 한 번 그려봅시다. 사람들은 평을 하는 거예요. 자기가 살아있다는 실존은 환상이 아니고 현실이라고 우기기 때문에 현실에서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눈 뜬 채로 살아있다는 이것은 정답이라고 여기고 누구를 평합니까? 소경을 보고 뭐라고 합니까? ‘소경’이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소경을 눈을 뜨게 했어요. 눈을 뜨게 하니까 사람들은 ‘우리가 눈 뜬 것처럼 소경도 전에는 소경이었지만 이제는 같이 눈뜬 사람 속에 하나 들어왔네.’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것은 뭐냐? 이 현실이라고 우기는 환상이 안 깨지는 게 되는 거예요. 안 깨져버려요.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다가 무슨 말씀을 하느냐 하면 “네가 본다고 하니까 소경이고 소경되었다가 눈 뜬 자만이 본다.”고 이야기해버리니까 그들이 알고 있던 모든 현실은 뭐가 되어 버립니까? 졸지에 뭐로 바뀌어요? 바로 환상이 되어버린 겁니다. 꿈이 되어버린 거예요.

인간은 꿈에서 못 벗어나는 거예요. 주께서 건드리지 않으면 꿈에서 못 벗어나요. 그리고 실제로 시편에도 그런 게 나와요 (시편 90편 등). 사람은 한평생 다 살아봤자 되돌아보면 한낱 꿈이었다. 꿈이었다. 참 백 년 동안 살려고 온갖 사기, 음모, 술수, 가족들 밥 먹여 주려고 온갖 더러운 짓을 다 했는데 그렇게 해서 힘 빠져가지고 마지막 순간에 성령 받았다면, “애들아”, “아버지, 집은 우리 중 누구한테? 죽기 전에 말씀해 주셔야 됩니다. 지금 서류에 싸인해야 됩니다.” 할 때, “애들아, 다 한낱 꿈이었느니라. 내가 네 아버지로 보이느냐? 사실은 아버지가 아니고 꿈이야. 너희들 꿈꾸고 있어. 이 세상에서는 죽는 것도 죽음이 아니야. 꿈속에서 죽는 거야. 인간은 안 죽어.” 요한복음 5장 말씀 (요한복음 5장 28-29절,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인간은 죽지 않습니다. 이게 화근이에요, 이게. 차라리 속상하다고 자살해서 죽으면 그만인데 죽어도 부활해요. 선한 자는 선한 부활로 악한 자는 악한 부활로 심판받기 위해서. 죽으면 하나님 빠이빠이하고 갈라서는 게 아니에요. 결국 다 불러 모읍니다. 주의 심판대 앞에 다 불러 모아요.

고린도후서 5장 6절,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방금 한 말들이 나오잖아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뭐로 행하지 아니한다? 보이는 것으로 하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전부다 현실을 구성하는 요소거든요. 눈에 보이는 게 현실이 아니야. 믿음의 세계가 현실이지, 보이는 세계는 믿음의 세계에 비하면 꿈이고 환상이야. 이렇게 되는 거예요. 8절,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10절,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드러날 때 우리가 성도라고 드러날 거예요. 아닌 사람은 불신자로. 그게 심판이에요, 고린도후서에서는.

요한복음 5장에서는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되어 있지만 (요한복음 5장 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고린도후서에서는 우리의 본질, 성령 받은 사람의 본질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주 앞에 다 나오게 되어 있어요.

마태복음에서도 주님이 심판대에 앉아서 오른쪽은 양, 왼쪽은 염소. 그리고 오른쪽 양보고 뭐라고 합니까? 너희를 위해서 예비된 나라에 들어가라. 그러면 양 쪽에 있는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죽기 전에 예수 믿어서 그런 게 아니죠. 살아있으면서 자기가 어떤 보통 사람에게 했는데 그에 대해서 예수님이 뭐라고 평가하느냐 하면 “저 소자에게,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물을 준 것, 옷을 입힌 것, 다 나한테 한 것이다.

주님부터 시작해서 주님으로 마감되는 일에 네가 동원되었느니라. 네가 거기에 대해서 나한테 다루어졌느니라. 이렇게 되려면 우리 자신은 어떻게 되어야 돼요? 아까 첫째 시간에도 얘기했지만, 우리 자신을 날마다 잃어버리고 주님에 의해서 붙잡힌 바 되어야죠. 이 말은 주님이 살아있으려면 우리는 필히 그 앞에서 산 자가 되면 안 되고 죽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성령으로 꽁꽁 묶어놓고 우리를 이 세상에 죽은 자로 이 양천구에다가 떠밀어버리는 겁니다. 한번 떠밀려봐라. 네가 왜 죽어 마땅한가를 삶의 현장에서 알게 될 것이다. 코로나 무섭다고 참석도 안하는 거 봐라. 이게 바로, 코로나가 환상이거든요. 자, 코로나 걸리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물어봅시다. 코로나 걸렸다. 나이 많다. 기저질환이 있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죽죠? 그런데 그 죽음이 죽음이 아니라니까요. 죽는다는 것은 환상에 불과한 거예요. 왜? 인간은 안죽기 때문에. 자꾸 마귀가 와서 겁박을 하고 협박을 한 거예요. 안 죽는데. 안 죽어요.

여러분, <톰과 제리>라는 만화가 있죠? 그 제리가 죽던가요? 트럭에 깔려도 죽어요? 만화 보는 애는 걱정도 안 해요. 납작하게 되도 다시 원상복귀됩니다, 완전 터미네이터처럼. 다시 살아나요. 안 죽는데 악마가 평생토록,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교육을 통해서, 국민교육을 통해서 기어이 그렇게 닦달내는 거예요. 죽는다. 죽으면 안되잖아. 따라서 죽는다 해도 모이면, 소규모 모이면 300만원 벌금! 이제부터. 대예배는 모여도 되지만 소그룹은 모이지 마라. 모이면 300만원 벌금 낸다. 그러면 의존교회는 이게 소그룹인지 대그룹인지 분간도 안돼요. 그게 그건데 뭐. 맨날 300만원 준비해야 돼. 안내면 되지 뭐, 벌금. 안내면 어떻게 되나? 안내면 죽겠지, 뭐. 그러면 죽으면 어떻게 되나? 죽으면 꿈에서 깨어나겠죠.

베드로와 열두 사도들이 그 당시에 로마에서 또는 그 시대에서 그들이 어떻게 살았습니까? 죽기를 무서워하면서 살았습니까? 사도바울은, “나는 이미 죽었다” 했지요? 이미 나는 죽고. 쉽게 말해서 “너희들 눈에는 내가 지금 산 걸로 보이느냐? 꿈 깨라. 나는 죽었어.” 그러면 사람들이 “어? 살았네.”, “내가 산 게 아니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아있는 거야.” 그러면 저쪽 사람이 뭐라고 해요? “저 인간, 도대체 뭐라고 하는 거야? 도대체 알아듣는 소리를 해야지.” 사도바울이 말합니다. “꿈속에 있는 인간들에게 왜 알아듣는 소리를 해야 돼?” 꿈속에 있는 사람은 꿈속에 있는 이야기만 알아듣고 진짜 현실 속에 있는 이야기는 못 알아들어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는 못한다고요. 아까 제가 코로나 이야기했죠? 아, 이거 무심코 이야기했네. 진짜 아무 생각 없이 무심코 이야기했어요. 주의 뜻인가 보오.

내가 나를 그냥 쥐고 있으면 안됩니다. 내가 나를 놔버려야 돼요, 날마다. 그러니까 빈자리가, 나에게 허한 자리가 있어야 돼요. 내 것이 들어오지 않는 자리가 있어야 됩니다. 그 빈자리가 마저 채워지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나는 꿈일지도 몰라. 자꾸 노래 가사가 생각나는데...이게 꿈일 수도 있어. 이거는 현실이 아니라 꿈일 수도 있어. 왜냐하면 내가 누군지를 매일 살아도 나는 매일 다르니까. 도대체 어느 게 진짜 나인지 알 수 없어요. 성질내는 나, 인자한 나, 찹쌀모찌 사주는 나, 도대체 뭐가 진짜인지 알 수가 없어요.

진도 나가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현실이 곧 환상이다. 환상을 환상대로 볼 수 있어야 되고 현실을 현실대로 볼 수 있어야 된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같은 말인데 1번, 무엇이 환상이냐? 2번, 무엇이 현실이냐? 이 두 개를 구분해야 되겠죠. 베드로전서 4장 해봅시다. 10절에,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이렇게 되어 있죠. 여기서 아주 쉽게 말씀드리면 진짜 현실에서는요, 더불어 있어요. 그러니까 내가 있고 남이 있는 게 아니고 나와 남의 구분이 의미가 없어요, 진짜 현실세계에서는.

그러나 현실이라고 우기는 이 환상의 세계에서는 남이 있는 게 아니고 나만 있어요. 나만 있다고요.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있더라도 내가 그 사람을 필요로 할 때, 나한테 의미가 있고 도움이 될 경우에는 남이 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남이라고 해서 그냥 스쳐지나가는 사람이 남이 아닙니다. ‘아, 저 사람은 남인데?’ 라는 것은 어떤 계기가 있어야 돼요. 뭐 부딪침이 있든지 내 발을 밟든지 뭐가 있어야 “왜 남이 내 발을 밟습니까?” 이렇게 할 때 남이 생기는 거예요. 아무나 남이 아니에요.

인간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내게 의미가 있을 때 남이 발생되는 겁니다. 제가 강남강의에서도 그런 이야기했지만 그냥 꽃이 꽂혀있을 때는 아무 생각 없었는데 저 꽃이 아름답다, 저 꽃이 어떻다고 내가 저 꽃에 대해서 내가 이름을 부를 때 “아이고, 이쁘다. 이름 뭐지?”라고 부를 때 그는 내게 와서 하나의 의미가 되는 겁니다. 결국 이 의미라 하는 것은 순전히 누구 중심의 의미입니까? 모든 의미는 내 중심의 의미체계에요, 내 중심의 의미체계.

그래서 다른 사람하고 이야기할 때 각자 자기 이야기만 하는 이유가 그렇습니다. 단어를 쓰더라도 그 단어가 똑같은 의미가 아니에요. 내 중심의 의미가 거기 다 담겨서 단어를 쓰기 마련이에요. 인간은 각자 자기 팔 흔들고 살아가는 겁니다. 남도 없어요. 이웃 사랑이 성립 안됩니다. 왜? 나밖에 없는데 무슨 이웃사랑이 되겠어요? 이웃을 도와주는 것은 내게 이익이 된다는 조건하에 도와주게 되죠.

부부도 마찬가지고 가족도 마찬가지에요. 그러니까 자식 걱정 너무하지 마세요. 자식들은요, 아주 자기 살 재주는 타고났어요. 뭐 그렇다고 해서 밥 잘 먹고 산다는 건 아니지만 살아보려는 의지 하나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타고난 거예요. 부모라 하는 것은 자기 이용대상일 뿐이지 자식한테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세요. 요리 붙었다가 조리 붙었다가. 간사하기 짝이 없어요. 누구 자식인데 안 그럴까.

결국 그 자식을 보면서 네가 너를 버리지 못한 그것이 바로 환상의 세계다. 현실은 모르고 꿈의 세계에서 너는 너밖에 모르는구나. 네가 꿈꾸는 세계. 네 의미체계를 사람들은 현실이라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 이야기 듣게 되면, 복음 이야기 듣게 되면 그걸 어디다가 집어넣습니까? 내 의미의 관계망 속에 일방적으로 복음의 의미를 교정해가지고 이걸 바꾸어서 집어넣어버려요.

그래서 '내가 환상을 만들어내는 주범이다.' 환상은 남이 나한테 강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만들어내요, 내가. 우리가 남을 평하는 것은 그냥 남을 평하고 싶어서 평하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함으로써 내가 얼추 훌륭하게 산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고 싶어서 평하는 겁니다.

“세상에, 음주운전해서 새벽에 마라톤 하는 세 사람을 죽이다니. 이 음주운전 한 인간은 죽어야 돼.” 이 말하는 순간 본인은 음주운전을 하지 않을 마음을 가진 괜찮은 존재라고 그 사건의 의미를 자기 잘남으로써 전환시켜서 내가 기억하고 있는 거예요. “그 뭐 새벽에 또 마라톤 하노. 마라톤 협회 그거 문제 있어. 새벽에 마라톤을 왜 해. 마라톤 하는 사람도 문제지, 시커먼데 안보이니까 차가 치었지.” 하면 나는 결코 새벽에 마라톤 할 생각이 없음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리고 내가 새벽에 마라톤하지 않는 그것이 나를 추가적으로 더 의로운 인간으로 만들어낼 거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바로 환상 속에서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이에요.

자기 잘난 맛에. 자기 우수한 맛에. 내가 인생을 조심스럽게 살았기 때문에 아직도 살아남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코로나가 있을 수 있는 소규모 모임에 절대로 참석안한 덕으로 난 또 내일 살아남을 거라는 괜찮은 결과를 도출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백날 해도 자기 자신을 못 놓는 거죠.

이것은 바로 내 기세에 내가 눌려 사는 겁니다. 내 기에 내가 눌려 사는 거예요. 누가 나를 괴롭히는가? 내가 나를 괴롭혀요. 더 똘똘하지 못하고 더 완벽하지 못하고 더 철저하지 못한다고 내가 나를 닦달내고 질책하죠. 그렇다면 성경에 나오는 성도들은 어느 기세에 눌렸는가?

누가 예레미야 36장 2절-4절 찾아 읽어보세요. “너는 두루마리 책을 가져다가 내가 네게 말하던 날 곧 요시야의 날부터 오늘까지 이스라엘과 유다와 모든 나라에 대하여 내가 네게 일러 준 모든 말을 거기에 기록하라” 되어있죠. 기록하라. “유다 가문이 내가 그들에게 내리려 한 모든 재난을 듣고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리니 그리하면 내가 그 악과 죄를 용서하리라 하시니라” 예레미야가 하는 말이 모두 성경책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세상의 모든 앞으로의 미래의 운영은 책에 의해서 결정되어 버려요, 책에 의해서. 책은 사람 아니죠? 환상뿐인 세상에 성령으로 기록된 책이 쑥 들어와요. 훅 들어온다고요. 들어오면 유일하게 환상의 기세에 눌리지 않고 현실을 현실답게 아주 어떤 저항도 없이 방해도 받지 않고 제대로 줄기차게 현실대로 눈치코치 받지 않고 드러내는 것은 바로 이 성경책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책을 이렇게 이야기합시다. ‘눈치없는 너’.

성경책을 예레미야 시대 때 유다의 마지막 왕인 여호야김이 말하는 족족 전부다 불태워버렸어요. 이것은 마치 뭐와 같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물질화 된거 거든요.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물질화되는 경우가 있었죠? 그게 에덴동산에 있는 나무, 선악과 나무였습니다. 물질화되었어요. 그것을 따먹기만 하면 선악을 아는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다시 말해서 네가 신이 된다고 그렇게 악마가 부추긴 겁니다. 주께서도 따먹지 말라고 이야기했고요.

그러면 오늘날 과학 같으면 성분분석에 들어갑니다. 그렇죠? 도대체 그 과실의 어떤 요소가 선악을 알게 하느냐 조사에 들어갈 거예요. 그러나 조사에 들어가도 소용없겠죠. 과학이 그래서 망상인 거예요. 과학은 그래서 환상인 겁니다. 아무리 과학적으로 따지고 분석하고 쪼개고 쪼개고 원자, 분자, 뭐 다 쪼개도 거기에는 어떤 진리가 들어있지를 않아요. 왜냐하면 환상세계에서는 어떤 진리가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선악과가 물질 같으면 하나님은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했잖아요. 그런데 악마는 물질로 본 거예요. 따먹지 말라 한 것을 따먹을 경우에는 뭐도 같이 날라가 버리느냐 하면, ‘죽으리라’ 하는 그러한 요소도 선악과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걸 따먹는 날에는 같이 날라가 버리니까 논리상 ‘죽인다, 죽인다’ 하는 것도 사라져버리는 거예요.

예를 들면 책상에 모기가 한 마리, 없는데 있다 칩시다. 모기가 하는 말이 뭐냐 하면 “날 잡으면 당신 죽어요.” 라고 모기가 모기만한 소리로 나한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게 어디 건방지게 감히 모기가 나한테...하고 탁! 때려잡았단 말이죠. 피가 탁 튀면서 때려잡으면 뭐도 같이 사라졌어요? ‘나 잡으면 너도 죽는다’ 는 그 말 자체도 때려죽이는 그 탁!하는 소리와 함께 날라가 버렸죠? 없죠?

그게 바로 세상을 눈에 보이는 사물의 집합체로 봤을 때 왜 보이는 것이 보이는 것이 아니고, 실질이 아니고 환상이냐 하는 이유가 되는 겁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여기니까 그런 보이는 것을 보이게 하는 배후에 보이지 않는 원리원칙을 놓치게 되는 거예요. 거기에 대한 지식이 닫혀 버리는 겁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과실을 따먹었다는 그 사실로 인하여 그 다음부터 인간과 악마는 하나님의 죽음에 시달리게 되어 있어요. 땅의 저주도 그 일부고 목숨 잃는 것도 그 일부에요. 전부가 아니라 일부에요. 결국 마지막은 악마가 영원한 지옥 불에 들어가는 그것이 바로 ‘죽으리라’의 모든 것을 총괄한 겁니다. 총 내용이 다 들어간 겁니다.

그러나 현대인에게 지옥은 안보이잖아요. 안보이니까 없는 거예요. 인간은 선악과 열매처럼 눈에 보이는 걸 원하는 거예요. 아까 여호야김이 예레미야가 하는 말씀을 보는 족족 난로불 피워놓고 다 집어넣었죠? (예레미야 36장 1절, “유다의 요시야 왕의 아들 여호야김 제사년에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이르시되”, 23절, “여후디가 서너 쪽을 낭독하면 왕이 면도칼로 그것을 연하여 베어 화로 불에 던져서 두루마리를 모두 태웠더라”, 28절, “너는 다시 다른 두루마리를 가지고 유다의 여호야김 왕이 불사른 첫 두루마리의 모든 말을 기록하고”)

제가 예수 믿을 때 예수 안 믿는 우리 형이, 지금도 안 믿지만, 그 형이 나 교회 간다고 열내서 성경책을 그만 찢어버렸어요. 성경책을 찢을 때, 저는 그런 생각 안했는데 혹시 이렇게 할 수 있어요. ‘감히 성경책을 찢다니. 이제 너는 저주받았다.’ 하는데 그게 마귀의 생각이라고요. 눈에 보이는 성경책 찢는다고 해서 저주받는 게 아니에요.

북한에 있는 군관동무들이 예수 믿는 사람을 색출할 때 예수님 사진 쭉 펴놓고 여기에서 밟고 지나가면 진짜 신자 아닌 줄 알고 살려주고, 밟지 않겠다 하면 신자인 줄 알고 죽이겠다. 그게 얼마나 유치찬란한 악마적 방식입니까? 눈에 보이는 것이 환상인데. 환상을 환상적 방법으로 환상이냐 현실이냐를 가려내겠다는 이 기준 자체가 환상이에요. 진짜 환상적이다, 정말. 진짜 환상적이죠.

신자라면 그 예수님의 그림을 안 밟습니다, 제가 만약 신자라면 밟지 않아요. 군관동지! 제가 화상을 안 밟겠습니다. 안 밟고 대신 그 그림을 저한테 주세요. 해가지고 화롯불에 집어넣어 버려요. 용광로 속에 집어던져버려요. 그러면 군관동지가, 밟는 것보다 어느 것이 더 화끈하냐. 예수님 얼굴 밟힌 것보다 예수님 전체를 통째로 화형시키는 게 더 화끈하겠죠. 바로 내가 살아가는 그 방식이 마귀에 물들어가지고 전부다 환상적이고 망상 속에 있어요, 망상 속에.

선악에서부터 출발해서 결국 선악으로 그냥 결과가 나온다고 하는 그 자체가 망상입니다. 왜냐하면 선으로 시작해서 선으로 하고 악은 악으로 한다 해봐도 이게 무엇이 취소가 안 되느냐 하면 ‘정녕 죽으리라’가 취소가 안돼요. 다시 말해서 우리 인생이라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가련해요. 왜? 결코 취소될 수 없는 그 원리원칙에 갇혀 사는 그 자체가 가련한 인생입니다. 아무리 해도 취소가 안 되는 그러한 법칙 안에 갇혀서 놀아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교도소가서 모범수로 착실하게 산다. 모범수로 착실하게 교도소생활 50년 할랍니까, 아니면 1년 살고 나올랍니까? 어느 쪽이 나아요? 1년 살고 나오는 게 낫지. 칭찬받는데 50년 더 살래? 필요 없잖아요. 코로나 걸리고 1년 살다 죽을래요, 안 그러면 여기서 안 걸리고 50년 더 살래요, 망상 속에서? 코로나 자체가 망상이에요, 이게. 왜? 코로나가 노리는 것은 뭐냐 하면 죽음이다 이 말이죠. 코로나는 인간을 숙주로 하잖아요. 코로나는 나 죽고 너 살자 가 아니라 나 살고 너 죽자는 겁니다. 마스크 안하는 것은 나 살고 너 죽자. 둘 다 똑같애. 바이러스나 인간이나. 둘 다 사는 게 똑같애. 둘 다 망상이야, 망상.

그러나 무엇이 망상이 아니라고 했습니까? 성경말씀. 세상 인간의 모든 인생은 풀의 꽃 같으나 모든 꽃의 아름다움은 사라져도 영원한 것은 오직 말씀만 영원할 것이다. 이사야 40장 6절에 보면, 외쳐라. 어떻게 외칠까요?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꽃이 아름답죠. 파릇파릇 합니다. 그러나 그게 끝입니까? 끝은 뭐에요? 꽃이 언제 있었나 싶죠. 또 언제 여기 풀이 있었나 싶죠? 그게 아까 이야기한 끝이에요. 제목을 할 게 많아서. <끝장>. 끝장이 되면 지난날에 얼마나 화려했느냐, 지난날에 얼마나 내가 영광스럽냐 그건 다 소용없는 겁니다. 끝이, 시듦이 현실이고 그 중간에 있었던 모든 영광은 환상이 되거든요. (이사야 40장 6-8절,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어떤 야구선수가 홈런 쳤다. 지금은 관중이 없지만 만약에 “우와~” 하고 동료들이 대단하다고 하는데 그거 홈런치고 집에 가다가 죽어버렸다. 그 홈런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홈런치고 좋아할 때 뭐를 생각해야 돼요? ‘내가 홈런 쳐도 지금 당장 죽을 수 있다’ 를 겸해서 생각해야 되죠. 환상이 환상되는 것은 현실에 두 발 딛고 서있기 때문에 현실이 현실로 파악이 되는 겁니다.

눈을 떴기 때문에, 눈 뜬 사람이 소경으로 보이는 거예요. 예수님만이 눈 뜬 사람이잖아요, 요한복음 9장에서.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소경으로 보이는 거예요. 바리새인이 소경되기 위해서 소경된 사람을 눈 뜨게 하고 이 모든 일에 누가 개입한 거예요? 예수님이 개입했다. 현실이 개입하니까 환상은 환상이 되고 꿈은 꿈이 되고 망상은 망상이 되고 예수님만이 유일하게 진리가 되고 길이 되고 생명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만이.

따라서 우리에게는 뭐가 필요합니까? 환상이 필요한 거예요. 꿈이 필요한 거예요. 꿈이라고 무시하지 마세요. 다만 꿈을 꿈이라고 말하고 환상을 환상이라고 말해서 거기에 대해서 주눅 들지 마세요. 이 망상에 기죽지 말고 쫄지 말고 주눅 들지 마세요. 망상의 끝은 기껏해야 죽는 것 밖에 없어요.

그러나 성경에 보면 인간은 죽지 않습니다.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거예요, 주께서. 심지어 마지막도 아니죠.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 같은 경우에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그 말씀이 우리 속에 개입되게 되면 우리가 사는 것은 그냥 목숨 연장이지 이것은 생명이라고 할 게 못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일단 지금까지 한 결론은 뭐냐 하면 현실은 무엇과 결부되어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느냐 하면 ‘현실은 하나님의 말씀과 결부되어 있다.’ 라고 결론 내릴 수 있겠죠. 말씀만이 현실을 품고 있으니까, 그렇죠?

여호야김 왕이 화롯불에 그걸 찢을 때에 선악과 따먹었다고 선악과의 벌칙이 사라지는 게 아닌 것처럼 말씀이라는 이 물체를 불에 넣고 이걸 태운다고 해서 이 세상 자체가 말씀대로 움직이지 않고 혼돈에 잠기는 게 아니다 이 말이죠. 성경책을 찢든 어떤 사람이 성경책을 안보든 어떤 사람이 복음을 안 듣고 귀 막고 어어어~이렇게 한다 할지라도 지가 귀 막고 흔드는 것도 성경에 다 나와 있어요.

모든 것이, 좋든 싫든 이것은 우리가 변경시킬 사항이 아닙니다. 주께서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일에 우리가 변경이 안 돼요. 착하다고 해서 더 성경적이 아니에요. 착하든 뭐든 관계없이 매일같이 우리는 망상에 주눅 들지 마라. 망상을 망상이라고 이해하는 그것이 바로 현실이 너와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에요. 그게 바로 성도로 산다는 증거가 되는 겁니다. 망상을 망상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삶에 대해서 무게 느끼지 않고 가볍게 사는 거예요.

가볍게 사는 방법, 알려 드려요? 남 평가하지 말고 내 평가 안하고. 그러면 가벼워요. 남 평가 안하고 내 평가안하고. 평가 안하면 자기가 의인될 일이 없어요. 사람이 힘든 것은 본인을 자꾸 의인이고 잘난 사람으로 생각하니까 힘든 거예요.

자, 그렇게 보시고 이제 11절 보시면 이해됩니다. 베드로전서 4장 11절,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보세요. 이게 망상의 현실에 있는 내가 말해버리면 이게 ‘나는 역시 잘났어’의 의미로 돌아와요, 이 망상세계에서는. 내가 있다는 것도 하나의 망상이거든요.

그런데 주의 말씀대로 돌아가려면 나를 이 망상세계에서 주님 보시기에 잃어버린 자로 인정해야 돼요. 내가 잃어버린 자로 인정한다는 것은 내 안에 주님이 살아계시고 주님이 살아있다는 말은 주의 말씀이 살아있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은 내 뜻대로가 아니라 ‘주의 뜻대로’가 되는 겁니다.

주의 뜻대로 하게 하시는 분. 그 분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도행전 4장 12절에서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기 때문에 그 분이 바로 ‘주의 이름’이 되는 겁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주의 이름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내 하는 모든 게 말씀이 되는 거예요. 내 하는 모든 것이 말씀대로 되는 겁니다.

말씀대로 되는 걸 처음부터 안다는 것이 아니고 처음에는 망상인데도 불구하고 현실로 우기다가 주의 말씀이 개입해버리면 이것이 내 뜻이 아니고 주의 뜻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그 주의 뜻은 무엇이냐고 물으면 주의 뜻은 나의 십자가로, 나를 부인하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일을 하셨다. ‘주의 증인이 되는 것’이 주의 뜻이죠. 주의 증인되는 것.

여러분 중국집 가면 중국집 들어갈 때부터 앉아있을 때부터 고민되는 게 뭐냐? 짬뽕 먹을까, 짜장 먹을까 고민이 돼요. 심지어는 다 짬뽕 먹고 나서도 마찬가지라. 짜장 먹을 걸. 짜장 먹으면 짬뽕 먹을 걸. 둘이 갔을 때는 둘 다 곱빼기를 시키세요. 짬뽕 먹는 사람에게 짜장 곱빼기 남은 분량을 주고 서로 윈윈하는 그 방법 쓰면 되겠죠. 이게 뭐냐 하면 선택을, 본인이 선택하죠. 둘 다 짬뽕 먹고 짜장 따로 먹고 나오면서 느껴야 되는 것은 뭐냐 하면 ‘또 내가 주의 뜻에 의해서 내 뜻대로 안되었구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항상 주의 뜻은 예상 못한, 예상 밖이에요. 내가 생각했다. 어떤 것을 해도 주께서는 그것을 그대로 안하고 예상 밖으로 되는 일을 준비해 놨어요. 예상 밖의 일을 준비해놨어요. 그렇다면 말씀만 그런가. 봉사할 때도 마찬가지에요. 봉사할 때도 주의 말씀에 의하면 내가 죽었다고 생각해라. 다시 말해서 나의 봉사로 하나님께서 영광 받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되려면 봉사도 내가 봉사합니까, 아니면 내 안의 그리스도가 봉사하게 하시는 겁니까? 내 안의 그리스도가 봉사하게 하시는 거예요.

그 조건이 뭐냐? 내가 하는 봉사는 망상에 불과하고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실질적인 일은, 망상을 망상되게 하시는 일은 주의 일이다. 청소하는 게 주의 일이 아니고 내가 현실과 망상을 구분하게 하는 지금 이순간이 주의 일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하루 일과 마치고 잠을 자죠. 잠을 자게 되면 잠자는 거, 이거 내 뜻 아니에요. 왜냐하면 사람은 잠을 잔다고 하는 순간 잠을 안자고 있는 중이에요. 지금 잠을 깨고 있는 중이에요. 나는 지금 잠을 잘 자고 있다. 이게 무슨 잠자는 모습입니까? 진짜 잠이 들면 뭘 몰라요? 잠자는 주체를 잊어버리잖아요, 잃어버리죠. 잠만 있을 뿐이지 누가 잠자고 있는지를 내가 의식하지 못한다니까요. 그러니까 잠자는 것은 일종의 죽음이에요. ‘내가 죽었다’가 성립 안되는 죽음 있잖아요. 잠자는 것은 죽는 일이다, 잠자는 것은 죽는 일이다, 한 백번 해보세요. 내가 죽는 게 아니고 그냥 잠자고 있어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게 하루다. 이게 창조의 원리입니다. 주께서는 우리 인간을 창조의 원리에다가 감아 넣어서 가동하게 만들었죠.

창조의 원리가 그렇다면 언약의 원리도 우리를 죽게 만드는 것이 언약의 원리입니다. ‘어제 살았으니까 오늘도 살겠지’ 가 아니라 매일 죽고 매일 ‘언약’으로 인하여 살게 하는 것이 새 언약의 기능입니다. 그래서 제가 강남강의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날마다 ‘재편성’한다고 했죠. 어제 써먹은 나의 인생관, 믿음관 오늘 못써먹습니다. 어제는 어제 치로 시효 끝났어요. 오늘의 새로운 원칙은 또 주께서 새롭게 마련해 주는 겁니다.

똑같은 단어라도 느낌이 달라요. 느낌 알죠, 여러분? 똑같은 단어라도. ‘십자가로 구원받는다’ 가 어제의 느낌 다르고 오늘 또 십자가로 구원받는다면 오늘 느낌 또 달라요. 주께서 주의 약속대로 맞닥뜨리게 하는 상황이 어제의 상황은 어제로 끝나버리고 오늘 상황은 따로 있기 때문에 그래요. 오늘 같은 빵 줄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몰랐죠. 간식의 느낌이 다르잖아요. 다음 9월달에 또 뭔지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교회 청소한다, 똑같은 봉사를 해도 그때그때마다 달라요, 봉사의 질이. ‘봉사를 통해서 인간 만든다’ 이렇게 보시면 돼요. 봉사를 통해서 무엇이 환상이며 무엇이 현실인가를 또 보게 하는 거예요. 내가 하면 망상이고 주께서 이 일을 시키셨다고 보면 그건 현실이죠. 그러면 주께서 일을 시켰다는 것이 정답이라면 그건 어제까지의 정답이지 똑같은 정답이 오늘까지 이어지지 않습니다. 오늘 되면 주께서 시켰다는 것이 또 색다른 느낌으로 주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 내가 주인공 안 되게 만들죠.

12절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이게 시험하러 오는 불시험이죠. 망상의 세계, 환상의 세계에서는 이걸 뭐라고 보느냐 하면 ‘고난’으로 봐요. 물론 베드로전서에도 이걸 고난으로 얘기하고 있어요. 그러나 ‘고난’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뭐냐 하면 ‘고생 되게 한다’가 되죠.

집에 돈이 많아서 정기적으로 골프 치는 것을 고난으로 누가 생각하겠습니까? 고난으로 생각하지 않죠. 로또 당첨되고 던져놓은 땅이 갑자기 재개발한다고 해가지고 백배가 오른 이걸 누가 고난 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어요? 돈이 갑자기 10억 더 생겼을 때에 어느 사람이 주여, 어떻게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 뭐 이렇게 고민하는 사람 있습니까? 고민할 거 뭐 있어요, 그럼 남 주든지 말든지 하지. 좋아서 입이 벌어지겠죠. 평소에 뭘 원했다는 겁니까? 평소에 원한 것이. 따로 돈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그 마음이 안 죽었다는 거예요. 이게 계속 살아있다는 겁니다, 우리 안에.

그렇다면 이걸 누가 관리하느냐? 서비스하는 악마가 주님이 시키는 시킴에 따라서 성도에게 이게 찾아오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세상적으로 망한 것만 시험이라고 보지 마세요. 만사형통한 것도 시험입니다. 의도적으로 칭찬받고 남한테 경외심을 받고 존경받는 것도 큰 불시험이에요, 이게. 갑자기 나 아니면 일이 안 될거 같고 내가 지금 당장 죽으면 안될 것 같이 앞으로 기여할 게 많은 것처럼 착각하는 것. 신종코로나 바이러스가 남한테는 다 가되 절대로 나한테는 오면 안되는 것처럼 본인이 그런 식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그것이 바로 내가 늘 망상이라는 자리에서, 말씀만이 현실인데 내가 현실이라고 자꾸 우기는 그런 망상, 그건 아주 못된 망상이죠. 남들은 망상이라도 나는 현실이라고 우기는 그런 망상. 약도 없어요.

내 안에서 유일하게 말씀이 자꾸 드러나야 그게 현실과 결부된 나가 되겠죠. 말씀을 내가 지켰다든지 내가 말씀대로 사니까 이런 복을 받는구나 이건 망상입니다. 나중에 그거 날라가 버리면 주님 앞에 대들어요. 13절에 보면 그걸 가지고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고 즐거워하라 했어요.

이 점에 대해서 마태복음 5장에서 아주 잘 나와 있습니다. 5장 10절-12절,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할 때 이 일이 우리한테 일어납니까, 안 일어납니까? 필히 일어나죠. 왜? 이게 현실이기 때문에.

현실을 마다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뭐 믿음 좋은 사람한테 가세요. 이러면 안돼요. 진짜 현실에 속한 성도라면 우리는 이런 말씀이 와줘야 기존에 내가 망상인데도 불구하고 망상 아닌 줄 안 그것이 말씀에 의해서 사정없이 다 깨져버리고 다 그 본색이 드러나죠. 노출되는 겁니다.

결국 우리가 오늘 한 것은 무슨 이야기냐 하면 모든 일은 주님께서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거예요. 심지어 성도한테 불 시험 오는 것도 말씀대로 스케쥴대로, 방송국에 편성표 다 짜인대로 시간에 맞추어서 그게 온 거예요. 따라서 그 시간변경, 현실변경을 하려고 시도하지 마세요. 그건 다 헛된 짓입니다.

끝으로 망상의 세계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그거 말씀드리고 끝내겠습니다. 망상의 세계에서는 악마를 나에게서 쫓아내기 위해 악마에게 요청하는 겁니다. 재수 없는 악마를 쫓아내기 위해서 우리 인간이 쓰는 방법은 기껏 아는 게 악마의 권역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악마가 제시한 방법을 우리는 사용해서 재수 없는 악마를 추방하려고 시도합니다. 점쟁이들 이야기만 하는 게 아니에요, 지금. 교인들 이야기하는 거예요. 물론 점쟁이도 포함하고 불교도 마찬가지고 종교 없는 모든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분투노력하고 있습니다. 재수 없는 것, 찝찝한 것, 제발 나에게서 떨어져라. 떨어지는 방법은 뭐냐 하면, 착하면 떨어지겠지.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괜찮으면 떨어지겠지. 자, 윤리적, 도덕적이 왜 문제냐? 평가를 한다는 거예요. 평가를 내려서 이것은 선이고 악이고 나한테 평가를 한다는 거예요. 평가한다는 자체가 이게 망상이거든요. 평가를 하려면 평가하는 내 기준은 엄연히, 살아있어도 괜찮게 살아있어야 돼요. 왜? 내가 똑똑해야 내가 사니까.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고 내가 알아서 하니까. 남은 죽어도 나는 살아남아야 돼요, 신종코로나 속에서도. 그래야 남을 평가할 수 있으니까. 남을 평가한다는 건 나도 그런 식으로 나를 평가하고 싶으니까. 내가 나를 평가하고 나는 나를 절대로 나쁘다 하지 말아야겠다.

이거 누구 뜻이에요? 주님 뜻이에요, 악마 뜻입니까? 누구 뜻입니까? 이게 바리새인의 자기 의 아닙니까? 악마 뜻이잖아요.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요. 그 방법을, 전통도 유구한 전통을 따라서 그대로 교인이든 교인이 아니든 모든 종교에 이게 다 파급이 되어 있어요. 종교가 없는, 길에 가는 사람 아무나 붙들고 해보세요. 재수 없을 때는 뭐하면 되지? 이런 식으로. 점 한 번 볼까? 궁합 볼까? 이게 뭡니까? 악마에 의해서 악마가 제시한 방법 중에서 골라가지고 악마를 퇴치하는 식으로 나만 현실로 살아남겠다는 그 작당을 하는 거예요.

다시 얘기합니다만 우리 자신을 망실(忘失)하세요, 잃어버리세요. 하루치 살고 잊어버리고 다음에 또 내일 주시면 주께서 주신 하루라고 생각하시고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시고 오늘 어떻게 차타고 가느냐 그거는 그때 가서 염려하고. 늘 범사에 감사하는 저희들 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시작도 끝도 모르면서 우리는 순전히 내 위주로 살아왔습니다. 내게 의미되는 일로 살아왔습니다. 이제는 잃어버린 자로 주에 의해서 살아났기에 주님이 살아있고 나는 그 안에서 주께서 움직이는 대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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