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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11 00:45:40 조회 : 191         
자아 표준모델 베드로전서 4:14 200910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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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림(IP:223.♡.58.44) 20-09-12 22:33 
서울의존강의20200910a 베드로전서4장 14절(자아 표준모델)-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4장 12절-14절

12절,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절,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절,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여기 공격하는 쪽이 등장합니다. 공격하는 쪽이나 공격받는 쪽이나 다같이 어디에 속했느냐 하면 ‘시간’에 속했죠. 이 ‘시간’은 ‘빈 시간’이 아니다. 이 세상은 고요하게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빈 시간이라 하는 것은 시간이 비어있다고 보는 거죠. 빈 시간은 고요함이죠. (빈 시간이 아닌) 시간은 분주함. 성경에서 말하는 시간은 분주함이고 굉장히 바쁘게 돌아가요. 빈 시간은 고요함입니다.

자, 사람이 이렇게 있는데 사람의 하루 일과에 자기 계획이나 스케줄이 있겠죠. 9시, 12시, 2시, 3시, 쭉 하는데 사람이 늘 설칩니까, 어떻습니까? 9시에 하다가 한 2시간 일하고 10분 쉬는 시간 있죠. 10분 쉰다고 보면 이 쉬는 시간에는 뭘로 채웁니까? 그야말로 쉬는 시간이죠, 비어있는 시간.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있는 시간. 학교 수업도 그렇고 모든 것이 빈 시간이 있어요.

인간의 시간은 바짝 일하는 시간 있고 그 다음에 비어 있는 시간이 있어요. 제 말은 인간의 시간에서는 고요함이 가끔씩 허락된다 이 말입니다. 마련돼요. ‘인간의 시간은 꽉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밖에 나가 농사를 지어도 만약에 자기 몸이 피곤하다 하면 계획은 오후까지 밭을 다 간다 했지만 오전 하고나서 몸이 피곤하면 오후에는 집에 가서 그냥 자죠. 잘 때 그 밭을 천사가 와서 갈아줍니까? 아니잖아요. 내가 밭 갈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밭 갈지 않는다. 그 밭은 내 밭이고 내가 관리해야 될 밭이기 때문에.

이 시간이라는 것을 채우냐, 안 채우냐는 누가 결정한다는 말입니까? 내가 채우냐, 안 채우냐에 따라서 결정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평소 인간들의 세계이고 인간들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그럼 이 시간은 누가 주관하고 있습니까? 내가 주관하는 내 시간이죠. 그렇잖아요. 누굴 만나면 만나는 거고 내가 안 만난다 하면 안 만나지고. 하루 스케줄도 전부 내가 결정하는 거예요, 내가.

그런데 내가 결정하다 보니까 시간은 늘 빈 시간들이 있고 만약에 아침 9시 되서 일 끝나고 자고 나면 밤 10시부터 새벽 5시까지 내 시간은 누가 채웁니까? 채울 필요 없죠. 그냥 비어있죠. 나는 잠자기 때문에. 그러면 그 시간에 하늘의 천사가 곤히 잠드십니까, 내가 논다고? 내가 논다고 해서 하늘의 천사님도 그냥 주무시는 거예요? 그렇지 않죠.

애들 잠재울 때 동요에 보면 그런 게 있어요. 애들아, 밤 9시다. 이제는 잘 때 되었다. 왜 잘 때 되었나? 저 서산 밑에 넘어간 해님도 곤히 잠들고 있잖아. 그런 노래가 있어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파티 열 때 트랩대령이 애들을 잠재우러 가는 유명한 노래가 있잖아요 (‘So long, Farewell’). 집에 가서 한번 들어보세요. 계단 올라가면서 마지막에는 제일 큰 애가 잠자는 꼬마 들고 가는 그 장면이 있어요. 그 가사에 보면 해님도 잘 시간이니까 너도 잠자라 (The sun has gone, to bed and so must I)하는데 그러면 나 잠잘 때 해님이 주무십니까, 실제로는? 다른 지방에 보면 지금 해님이 팍 떠있어요. 여긴 밤이지만 유럽에 가면 낮이거든요.

평소에 사는 것은 내 중심으로 살면서 내 중심의 시간을 가지고 성경해석을 할 때 이게 뭔가 잘못된 해석이 아닌가를 돌아봐야 돼요. 평소에 하는 모든 행동과 마음가짐이 일방적으로 내 중심으로 하면서 성경도 ‘우리가 뭐 순종하면 성경 지켜주고 실천 안하면 성경은 소용없지 뭐’ 이러한 투로 성경을 볼 가능성이 있어요.

우리가 세상을 보고 약간은 화들짝 놀라고 겁내야 하는 이유는 내가 노는 시간에도 시간은 꽉꽉 채워진다는 거예요. 내가 아무것도 안하는 이 시간에도. 시간은 나의 결심과 별개의 내용으로 채워지는 거예요. 우리의 시간 채우기는 이것이 나에게 이익인가, 손해인가 그 계산하겠죠, 이익인가 손해인가. 그러나 실제로 이 세상을 채우는 그 모든 일들은 내가 이익인가, 손해인가 지금 자기 손익 계산할 때 그것과 전혀 관계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상관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바쁘다 해도 주님은 안 바쁘시고요. 우리가 한가하다 해도 주님께선 한가하지 않아요. 따로 논다 이 말입니다, 따로 논다. 이 세상의 움직임과 내가 움직이는 것이 따로 논다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언제든지 이 세상에 대해서 잘못된 해석을 내릴 소지가 다분히 우리한테 있는 겁니다. 우리는 평소에 너무나도 내 위주로 살기 때문에.

따라서 자기에게 뭔가 문제가 생기면 말씀으로 해결하려고 여깁니다. 나한테 문제 있다, 말씀으로 해결해야지. 하는데 내 문제 해결하려고 말씀이 있는 게 아니거든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우리한테 아무 문제 없으면 굳이 말씀을 볼 이유가 없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 논리가. 하나님이야 바쁘든 말든 난 상관없고 내가 바쁘면 바쁜 거고 내가 한가한 거면 한가한  거야. 우리는 일방적으로 자기 위주로 버티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평소 우리의 잘못된 생활 태도로 보게 되면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로 여기지 말라.” 이렇게 되어 있지만 우리는 이걸 보고 ‘언제요? 언제 나한테 이 불시험 왔습니까? 불시험 안온 지가 벌써 20년 넘은 것 같은데.’ 이렇게 생각한다고요. 오늘 이 12절 말씀은 지금도 쉬지 않고 벌어지는 사건인데 우리는 영 세상 보는 감이 떨어져서 내 하는 일에 정신을 팔다 보니까 ‘뭐 세상에 대해서 내가 굳이 알아야 되나’ 태도 자체가 그런 태도에요. 세상에 대해 내가 굳이 알아야 돼?

세상은 성경 말씀대로 움직이는데 우리는 나하고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면 세상을 잘못 해석하게 되고 세상을 잘못 읽게 되고 세상을 잘못 보게 되면 우리는 말씀보다 내가 더 중요하다는 정신으로 무장된 채 숨을 끊을 수가 있어요. ‘나는 말씀보다 내가 더 중요해.’ 라는 그러한 돈독한 자기를 향한 자기신앙으로 세상 끝까지 그런 자세로 달려갈 수가 있습니다. 완전히 노선이 별개지요.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할 때 ‘너희’라는 것을 일단 괄호에 넣고, “(   )를 시련하려고, 괴롭히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에 해당되는 “너희”는 누구일까요? ①번, ②번, ③번, ④번 이렇게 문제 낼 수 있어요. “불시험이 오는 것을 감지하고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할 때 ‘너희’를 아예 처음부터 그냥 이어버리면 나는 당연히 ‘너희’에 포함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당연히 포함된다고 여기기 때문에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하면 내가 불시험을 몇 년도에 받았더라? 그 때 한번 호되게 몸 아픈 적 있는데 그게 불시험인가? 그때 5년 전에 몸 아프고 그 뒤로 조용하지. 고요하게 지금 아주 평화롭게 인생을 살아가는데. 없네. 에이 또 오겠지 뭐. 이런 식이에요. 자기를 ‘너희’의 기정사실로 여기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너희’라고 하는 것은 쉬지 않고 오는 불시험을 늘 당하면서 그걸 당연한 걸로, ‘왜 이런 게 나한테 오지?’ 하고 당연하지 않게 여기지 않는 그런 부류가 따로 존재하는 거예요. 이 ‘너희’는 어떤 사람이냐 하면 ‘자기 시간이 없는 사람’. 자기 위주의 시간이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나만 편하면 그만이지’라는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 “주여, 오늘은 어떤 말씀을 저한테 적용시키겠습니까?” 라고 그걸 물을 수 있는 사람. 그게 ‘너희’에요. 왜? 인간은 놀아도 주께서는 놀지 않는다는 너무나 상식적이고 너무나 당연한 이 공식, 당연한 기본적인 원리원칙에 충실한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거든요.

나 쉬고 싶으면 쉬는 거고 나 바쁘면 바쁜 거지, 뭐. 나만 챙기면 되지 뭐. 그런 사람한테는 여기에 ‘시련’이라든지 ‘불시험’이라든지 ‘이상한 일’이라는 그런 단어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이게 해당되지 않으면 13절에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 이게 뭐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도 없어요. 이게 없다는 말은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표준모델과 상관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경에서 얘기하는 성도의 표준모델이 있잖아요, 성도의 표준모델에 부합되어야 되는데 인간들은 하나님이 제시하는 표준모델은 생각 안하고 내가 따로, ‘나의 나됨은 이러이러해’ 라고 내가 구성해놓은 나의 표준모델, 이것을 갈수록 공고히, 굳게 수립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가지고 남하고 들이대기 시작하고 투쟁하고 비교하기 시작합니다. ‘나는 이럴 때 나답다’ 라는 이런 표준모델을 본인이 그냥 고수하고 있는 겁니다.

이 표준모델을 고수할 때 이건 다니엘에 나오는 금신상이라고 보면 돼요, 다니엘의 금신상 (다니엘 3장). 느부갓네살이 자기 자신을 경외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찬미시키기 위해서 자기를 대리한 금신상을 만들어놓고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여기에 절하게 만들었죠. 누가요? 느부갓네살 왕이. 만약에 여러분들이 느부갓네살 왕만큼의 힘과 지위가 있다면 여러분들은 이 금신상 만들겠습니까, 안 만들겠습니까? 만들죠. 왕 되면 크게 만들지만 왕 되기 전까지는 작게 만들죠, 꿈속에서라도. 꿈속에서 작게 만들어요.

누구나 인간은 어릴 때부터 동화를 봤기 때문에, 여자애 같으면 동화를 보면서 자기가 예쁘게 레이스 달린 원피스 입고 있으면 못생긴 왕자는 저리 가고 잘생긴 왕자가, 흑마 말고 백마 타고, 우연한 기회에 백마 타고 자기한테 청혼하러 올 줄 알고 있어요. 자기는 레이스달린 볼록소매 원피스 입고 얼굴은 표백제처럼 하얗게 이렇게 있으면.

공주가 자기한테는 표준모델이 돼요. 표준모델이 되어서 어릴 때는 잘만 하면 막 날거 같아. 저 산에서 이 산으로 어떤 도움 없이 활짝 팔만 펴면 겨드랑이에 날개가 생길 것 같아요. 표준모델이 2살, 3살, 4살 가면서 수정에 들어갑니다. 아, 날개 있으면 안되겠구나. 난 날개는 없구나. 뭐 그럼 다른 표준모델 하지.

그러니까 인간이 평생 산다는 것이 뭐하며 사느냐 하면 자신의 이상적인 모델을 구축하기 위해서 평생의 시간을 다 소모합니다. 모든 시간은 나의 이상 모델 잡기, 확립하기. 자기 이상적인 모델, 표준모델.

세례요한은 도끼 들고 와가지고 작살을 내죠. 아작을 내버립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도끼 한방에 때려 쳐버리죠, 그 표준모델을. 때리게 되면 인간의 표준모델 안에 뭐가 들어있겠습니까? ‘자기 의’가 들어있죠.

그러니까 ‘자기 의’가 방어무기가 되는 겁니다. 외부에서 너 주제파악을 해라. 넌 아무것도 아니야. 라고 한다면 거기에 대해서 방어체제가 드디어 가동됩니다. 사드 배치가 되어있어 가지고. 내가 뭐 어때서? 우리 집안이 어때서? 나는 공부 못해도 우리 언니 법무부 장관이다! 이런 거. 뭐 추씨 집안인 모양이죠. 우리 오빠는 서울 의대 나왔다. 이게 뭐에요, 지금? 이게 뭡니까? 내 동생은 서울 법대 출신이다. 이게 다 뭐에요?

늘 이렇게 딱 건드리면 팍 튀어나오도록 만발의 미사일 준비가 다 되어 있어요. 우리 집에서 나만 농땡이지 우리 형들, 오빠, 동생 전부다 공부 되게 잘한다. 너는? 난 그때 드럼 친다고 좀 놀아서 지금 공부 못해서 안 그래도 후회하지만 그래도 우리 집안은 빵빵해. 그 이야기를 왜 해야 됩니까? 나의 표준모델에 대해서 함부로 침 뱉지 마라 이 말이죠. 안 그래도 신종코로나 걸리는데 침 뱉으면 그거 곤란하죠.

아무리 성장과정이 어렵고 아무리 힘들게 살아도 자기 나름대로의 자존심이라는 것을 뒷받침해줄 나름대로의, 남한테는 우사스럽지만 혼자만 간직하고 있는 표준모델이 있습니다. 그 표준모델에 대해서 인간은 항상 긴장을 늦추지 않고 누가 내 표준모델에 대해서 공격할까봐 늘 사방에 대해서 깨어 기도하는 게 아니고 깨어 경성하면서 살핍니다. 누가 날 욕하지 않는가? 가끔은 뒤로 확 돌아봅니다. 나 욕했지? 뒷담화 했지?

비록 작으나마, 변변히 가진 것도 없고 성장과정도 가난하게 살아도, 아무리 가난하게 살아도 ‘내가 사는 이유는 바로 여기 있어.’라고 할만한 그런 인형 같은 것이 마음속에 어릴 때부터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걸 쪼개면 뭐가 나온다고 했습니까? ‘자기 의로움’. 자기 의로움을 풀이하면 이거에요. ‘나는 정당하다.’ 누가 뭐라고 하면 핑계를 100가지 터지듯이 내놔요, 100가지를.

어젯밤에 왜 잠을 설쳐가지고 화장실 왔다갔다 해서 왜 남까지 못 자게 하느냐? 딱 한마디 하게 되면 어제 커피를 3잔 먹은 이유, 내력부터 해가지고 이야기하는데 2시간 반 걸려요. 내 그럴 줄 알았어, 그렇게 공격할 줄 알았어. 내가 뭐가 잘못됐는데, 내가?! 내가 뭐가 잘못됐는데?

모든 해석이 자기의 표준모델에서 미사일 쏘듯이 상대방을 공격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그 해석 자체가 베드로전서 4장에 나오는 말씀하고 아무 상관도 없는 거예요. 이건 그리스도의 고난이 아니고 자기 고난이라, 자기 고난.             

제가 오후예배에서도 그런 예를 들었는데요. 노래하나 제가 언급했잖아요. <걱정 말아요, 그대> 들국화가 불렀는지 코스모스가 불렀는지. ‘그대여 힘든 일이 많았죠’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이 가사 딱 듣는 순간에 눈물이 팍 쏟아진다니까요. 이게 남의 일이 아니라. 자기 표준모델을 지킨다고 평생 얼마나 힘든 일을 겪었습니까? 왜 세상은 요만한 나만의 기쁨마저도 그냥 두지 않고 흔들어 대냐 이 말이죠. 그걸 나는 죽어라고 지키고. 그게 얼마나 스트레스 받고 힘든 일입니까?

‘그대여 힘든 일이 많았죠 새로움을 잃어 버렸죠’ 노래 부르지 말라고 했는데...새로움을 잃어 버렸죠. 아, 나는 꿈도 많고 할 것도 많은데 왜 사회는 나를 이렇게 괴롭히느냐. 어떤 노래처럼, 나는 세상에게 진심을 다했건만 세상은 나에게 상처를 주네. 이 나이 먹도록 내가 세상을 몰랐나봐. <고맙소> 9월 10일 군에 갔는데. 이 나이 먹도록 세상을 몰랐나봐, 나는 진심을 다했는데 상대방은 나에게 뭘 줍니까? 상처를 준 거죠.

그러니까 그 진심을 다했다는 게 진심입니까, 뭐에요? 거래였죠. 내가 진심을 다하면 네가 내 진심 알아봐가지고 너도 내가 진심 다한만큼 호응해줘야 된다. 라고 기대하고 진심을 다했건만 상대방은 뭐했다고요? 상처를 줬죠. 상처받는 사람이 나쁜 사람이에요. 참내. 지 뜻대로 안되니까 상처받았대. 이건 오늘 베드로전서 4장의 말, 그리스도 고난하고 아무 상관없습니다. 이건 누구 고난이냐 하면 본인이 자처한 고난이에요. 본인이 자처한 고난. 원인은 어디에 있느냐?

성경에서 말한 ‘너희’는 죽은 자를 말합니다. 자기 표준모델하고 까불다가 주님의 십자가에 얻어맞아 죽은 사람이에요. 제가 울산강의에서 그런 얘기했잖아요. 어느 기도원에서 사람 병 고친다고 때렸는데 십자가 가지고 때려서 사람 진짜 죽었다고 했죠. 진짜 십자가로 때려가지고. 아니 뾰족한 걸로 때리면 사람 죽죠. 성령으로 때리지 않고 십자가라는 물체로 때려서 사람 죽었습니다.

그 기도원 원장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한 거예요? 나무 막대기 십자가로 때리면 십자가의 능력이 거기서 나올 줄 알았죠. 병 고칠 줄 알았죠. 그리고 그 기도원에 가서 병 고침 받겠다는 그 사람도 나빠요. 그 사람의 표준모델에 ‘나는 병들어서는 안된다’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는 거예요. 내 표준모델에는 ‘나는 병들면 안된다’가 있는데 병들었거든요. 그러니 빨리 뭐로 지금 복귀하려고 해요? 전처럼 병 안든 나로 복귀하려고, 그걸 해결하겠다고 어디를 갔다? 믿음 좋다는 기도원에 가서 십자가로 얻어맞아 죽은 거예요.

여러분, 죽은 자에게 병이라는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미 죽은 시체는 더 이상 병이라는 말을 할 자격이 못돼요. 그러면 이미 우리는 죽은 자인데 왜 산 자로 여기는가? 그것은 바로 무엇과 무엇이 분리되기 때문이냐 하면, ‘육’과 ‘영’이 분리되어서 그래요.

육과 영이 분리된 것을 가지고 ‘음란’, ‘간음’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육체는 욕망의 대상이거든요. 영혼이 하나가 되지 못한 상태에서 육체에게 뭔가를 한다는 것은 나는 네 영혼 모르겠고 네 육체는 나의 욕망, 탐욕의 대상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상대방을 볼 때 육과 영을 분리해서 보는 거예요. 사랑으로 보지 않고 자기 욕망의 대상으로 보고 육체를 탐하는 거예요. 이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고린도전서 6장 17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오늘 본문하고 아주 직결되는 말씀이에요.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얼마나 어려운지 한번 보세요. 주와 합한 자는 ‘한’ 영이지요. 두 영이 아니고 세 영이 아니고 따로 노는 영이 아니고 같은 영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영은, 육으로 보는 게 아니라, 영은 영끼리 통한다는 얘기를 하고 있어요, ‘영은 영끼리 통한다’가 되는 거예요. 이 말이 왜 어려우냐 하면 세상에서 인간이 자기 표준모델 중심, 쉽게 말해서 자기 중심이 되게 되면 그 안에 자기 영이 있을 거 아닙니까. 이 영은 어떤 경우에도 타인의 영과 하나가 될 수 없어요. 모든 인간을 자기 욕망의 대상으로 봐서 간음이라니까요. 모든 것을 자기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한 대상으로 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육과 영을 잘라서 보는 거예요.

나는 당신이 좋은 게 아니라 당신의 돈이 좋다든지, 나는 당신의 마음이 좋은 게 아니고 당신의 아름다운 미모가 좋다든지. 모든 것이 육과 영을 끊어서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영은 함께 하는 영이 아니고 뭘 고집하느냐 하면 내 영의 지배적인 위치만 고집하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어떤 경우라도 내 표준모델을 나는 고수하겠다는 그런 탐욕이기 때문에 그래요. 내 표준모델을 고수하겠다.

구약의 에스겔, 예레미야, 아모스 보면 이걸 가지고 음란이라고 하는 겁니다. 음란은 이방민족이 신을 섬길 때 신을 섬기는 이유가 자기를 위해서 하거든요. 자기를 위해서 할 때, 자기 자신에게 손해 본다, 안 본다? 어림도 없죠. 손해를 안보죠. 하나님 믿고 왜 자기가 손해를 봐요? 둘 주고 셋을 얻지. 셋 주고 열을 얻고. 내가 남한테 손해 볼 짓을 한다는 것은 바보짓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내 육체는 내 영혼이 지배하고 있고 내 영혼은 내 육체와 함께 있기 때문에, 그것이 나의 표준모델을 형성하기 때문에 하나님이든 타인이든 가족이든 부부든 자식이 되든 누구든지 이 정당한 나의 표준모델을 건드릴 권한은 없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베드로전서 4장 11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오죠.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뭐로 해라? ‘힘’으로 하라.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그러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이 있으려면 자기의 자체적인 힘이 있어야 되요, 없어야 되요? 전혀 없어야 되죠. 평소에 내 힘 가지고 내가 산다는 의식 자체가 있어버리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이 들어올 수가 없어요.

내가 죽은 자가 되어야 된다니까요. 죽은 자가 만약에 말을 하고 일을 한다면 이것은 누가 공급하시는 힘입니까? 주님이 공급하시는 힘이죠. 그러면 아까 고린도전서 6장 17절의 말씀처럼 주와 우리가 뭐가 된다? 한 영, 하나가 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영과 육이 하나가 되는 거예요. 이 몸이 내 몸이 아니고 주의 쓰시는 몸이 된다는 말이죠, 이 육이. 영도 하나가 되는 거예요. 그래야 매일같이 주님이 주시는 그 힘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 이 말이죠. 그럴 때 그 사람은 자기의 증인이 아니고 누구 증인? 공급하시는 주님의 증인으로 살 수 있는 겁니다.

사도행전 1장 8절 유명한 말씀 아닙니까.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이제부터는 땅끝까지 나의 증인이 되리라. 주의 약속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자기 시간이 없기 때문에 쉬는 것도 일하는 것도 전부다 꽉꽉 채워주시는 주의 일이 되어버려요.

내가 쉬는 것도, 잠자는 것도, 내가 꿈꾸는 것조차도 어느 시간도 틈이 없이 꽉꽉 채워주시는, 새벽 2시 41분, 42분, 43분 어느 시간도 주님의 활동력으로 꽉꽉 채워서 우리는 그 시간 지난 것도 모르고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 잠 잘 잤다’이러죠. 주께서 어젯밤에 시체로 만들었어요. 아무 생각안하고 푹 잠자도록 주님은 주무시지 않고 우리가 잠자도록 주께서 하신 거예요. 그래서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죠. 물론 설교시간에 잠을 자서 이게 또 문제가 됩니다마는.

우리 평소의 태도는 나의 표준모델을 우상으로 여기지 않고 고집스럽게 그걸 쥐다 보니까 자기 스케줄을 자기가 짜버려요. 그러니까 시간이 펑펑 비는 거예요. 노는 시간, 빈 시간. 첫째 시간 놀기, 둘째 시간은 아무 것도 안하기, 세 번째는 휴식하기, 네 번째는 체육시간. 이런 거. 애들보고 학교 일과표 짜라고 하면 전부다 1교시 축구, 2교시 농구. 남자애들보고 짜라고 하면 3교시는 공놀이. 여학생보고 하라면 첫째시간 줄넘기, 두 번째 시간 만화책보기, 세 번째 인형놀이, 뭐 이런 거. 그러면 수학, 영어는? 그런 거 없어요.

어린애들은 그래도 스케줄을 누가 짜줍니까? 문교부에서 짜주잖아요. 그러면 여러분 스케줄은 누가 짜요? 아직도 문교부 스케줄보고 짭니까? 성경에서는 바로 ‘너희’가 불심판이 오든 뭐가 오든 스케줄을 주님이 쉬지 않고 짜주시는 대로 움직이는 사람일 때 그때 ‘너희’라는 말이 너희에게 해당되는 거예요.

지금 신종코로나 이 스케줄 누가 짰습니까? 누가 짰죠? 제가 수요설교에서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사람이 사람을 때리면 누가 고소하잖아요. 저 사람을 고소하잖아요. 그러면 신종코로나 바이러스가 사람을 죽이는데 우리는 누구한테 고소합니까? 왜 그건 고소안하죠? 내 일가친척이 걸려서 죽었는데 왜 그건 고소안합니까? 고소한다고 또 우리나라 질병본부보고 고소할 일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왜 하나님보고 고소를 안 하냐 이 말이죠. 하나님보고 고소한다면 믿음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그렇잖아요. 하나님보고 고소한다는 건 뭔 뜻이에요? 신종코로나19, 이건 누가 주셨다? 하나님이 의도해서 주신 거 맞죠, 의도해서. ‘의도’를 집어넣어야 해요. 하나님이 의도해서 주신 것 맞죠? 이거 노리고 우리 잡아 죽이려고 한 것 맞죠? 이 정도 믿음 같으면 보통 믿음 아니에요. 만약에 그 정도 믿음 같으면요, 평소에 나는 놀아도 주님은 안 논다는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이에요.            

사람들은 마스크 써서 숨 막히고 힘들다면 누구한테 고소해야 됩니까? 하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라고 고소해야 되죠. 사람들은 고소는 안하고 아부를 할 생각하는 거예요. 어떻게? 하나님이여, 회개합니다.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이건 아부에요. 무슨 뜻이냐 하면 아, 우리가 뭔가 잘못한 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벌 내리는구나. 그러면 무조건 잘못했다고 치자. 이러고 지금 회개하고 잘못되었습니다. 회개합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부부 사이에 그런 대화가 많잖아요. 남편이 퇴근하고 보니까 아내가 화가 많이 나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남편이 “당신은 뭐 때문에 화가 났는데? 나도 들어와서 피곤한데 좀 화 풀지. 왜 화가 났느냐?” 그러면 아내가 하는 말이, “당신 몰라서 묻나?”, “모르니까 내가 묻잖아.”, “그러니까 당신은 나한테 관심 하나도 없다는 이야기야.”, “그럼 뭐가 잘못됐는지 이야기를 해라.”, “아니, 꼭 이야기를 해야 알아! 꼭 이야기를 해야 되나. 어떻게 남편이 되어가지고 아내가 뭐 때문에 힘든지를 왜 몰라?”, “그래그래. 내가 잘못됐다.”, “거 봐라. 이봐. 잘못한 것도 모르고 건성으로 때우려고 하잖아. 당신이 그게 문제야.”

아깐 또 문제가 이유를 모르는 게 문제라며 왜 또 문제가 하나 더 추가가 됐는지. “그러면 어떻게 하면 당신의 마음을 풀 수가 있어?”, “자~알 생각해봐라.”, “아 그래그래그래. 잘 생각할게.”, “잘 생각하는 게 그 자센가? 당신은 자세가 잘못되었어. 그러면 안되.”

지금 도대체 태극기 흔들고 하는 자세가 그 자세에요. 하나님께 무조건 잘못했다고 회개한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뭐가 잘못되었는데?” 그렇게 나오면 안돼요. 하나님께 따져야죠. 따져야지. 이거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신종코로나 이거 난 두 달 갈 줄 알았죠. 이게 뭡니까, 지금 경제 다 버려놓고. 월세 200만원 내는데 나라에서 10만원 보태준답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다 이거 하나님 잘못 아닙니까?’ 하고 하나님보고 따질 때 그게 믿음이라니까요. 회개할 생각하지 말고. 회개하는 건 불순해. 잘못된 거예요, 그 태도가. 따져야죠. 쉽게 말해서, 우리의 운명은 내 손에 달린 게 아니고 주님 손에 달렸습니다. 그걸 제가 인정합니다.

자꾸 요령을 부리려고 해요, 요령을. 믿음 없으면서 있는 척하려고 요령을 부리는 거예요. 우리 다같이 회개합시다. 그건 요령 부리기에요. 잘못도 모르면서 무조건 잘못됐대. 그 사태만 그냥 넘기려고.

베드로전서 4장 13절,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런 말씀을 딱 줄 때는 너희들은 다른 즐거울 거리를 너희가 따로 만들고 있다는 것을 지금 율법적인 차원에서 고발하고 있는 거예요, 율법적 차원에서. 그러니까 뭐냐 하면 ‘힘들다’를 우리는 용납 못해요. 우리는 자기 자신이 ‘나는 정당하기 때문에’ 힘든 것과 정당함이 매치가 안된다고요.

꼭 욥 같아. 나는 아무리 봐도 이렇게 정당한데 왜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힘든 것을 정당한 내가 정당을 유지하기 위해 방어하다 보니 내 성품이 점점 악해집니다. 그 책임을 하나님께서 지셔야겠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자기 성질 더러운 것도 또 하나님 책임이라.

가만 놔두면 참 점잖은 양반인데 괜히 하나님이 날 잘못 건드려가지고 요근래 코로나이후에 내 성질 다 버렸어. 전부다 핑계를 누구 핑계 댑니까? 하나님 탓, 세상 탓. 나는 착하게 살아보려고 얼마나 애를 쓰는데 내 성질 이렇게 더럽게 만든 것은 다 내 탓이 아니고 주님 탓이라는 거예요.

그렇죠? 그게 바로 해답이 나온 거예요. 그런 생각에 우리가 들어가야 되요. 그게 왜 해답이냐 하면 그리스도의 고난이란 그리스도가 어떤 고난을 받았는가를 체험케 하는 고난이에요. 바로 너 같은 그런 사고방식, 네 위주로 하는 사고방식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고난을 받았다는 거예요.

은혜 줄 거 다 주고 햇빛과 공기 줘가지고 그렇게 하나님 쪽에서 할 도리 다했지만 그 은혜를 받은 인간 작자들이 창조자에게 하는 행세가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에 그 모든 탓을 예수그리스도 탓으로, 하나님 탓으로 돌리는 그 아픔. 그 아픔에 참여하는 자가 바로 하나님의 힘으로 살아가는 성도다. 이 이야기를 베드로전서에서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머리좋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세요. 우리는, 나는 한성깔 하고 나는 나밖에 모른다. 나밖에 모르는데 하나님께서는 불시험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로 전환시키는 이 분주하고 쉬지 않는 일을 시간에 꽉 채워서 우리에게 주시는 거예요. 하나님의 일이 이 일이에요.

첫 번째 공식을 한번 만들어 봅시다. ‘시간은 말씀으로 꽉 채워져 있다, 빈틈없이.’ 시간은 말씀으로 채워져 있는 거예요. 빈틈이 없이 채워져 있어요. 그 말씀 중에 뭡니까? 오는 불시험이 여기 포함되어 있는 거예요. 쉬지 않고 불시험을 줌으로써 성도로 하여금 쉬지 않고 그리스도의 아픔을 체험케 하는 그러한 작품을 만드는 일에 주님은 조금도 쉬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쭙잖게 회개할 생각하지 마세요. 고집을 부리세요. 고집을 부리면서 우리는 말씀이 나를 때리는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공격하는 그 불시험을 우리가 받는다고 했는데 사실 받는 자가 아니라 우리가 주님에 대해서 불시험을 감행할 수밖에 없는 그런 자질이 농후한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우리를 발각시키는 일을 하시는 거예요, 주님께서.

그러니까 고난에 참여한다는 말은 고난에 참여하는 그 영광스러움, 직분에 감히 우리가 낄 수 없죠. 이렇게 못난, 나밖에 모르는, 못돼먹은 내가 감히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도록 말씀에 의해서 독려 받을 때 그것이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그 영광스러운 영을 14절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영광의 영’이라고 하는 거예요, 영광의 영. 여기 보면 14절에,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뭐가 있다? “복 있는 자로다” 그 다음에 뭡니까?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못 지킵니다. 우리는 시작점이 지킬 수 있는 게 시작점이 아니에요. 다만 우리가 감사한 것은 세상 사람과 우리가 다를 바 없이 똑같습니다. 내 표준모델 지키려고 평생을 살아온 인간들이에요. 이래야 난 나답다는 거예요. 왜? 난 정당하기 때문에. 그런데 동일하게, 지옥 가는 사람도 똑같아요, 천국 가는 우리도 똑같아요. 똑같은데 주의 말씀이 우리를 겨냥해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게 만들 때 이게 얼마나 놀라운 기적이에요. 이게 복이거든요, 복.

복은 내가 노린 게 아니에요. 복은 찾아오는 거죠, 그냥. 예상도 못했는데 찾아오는 거예요. 돈 버는 게 복이 아니고 남한테 인기 얻는 게 복이 아니라 주제파악을 하는 게 복이거든요. 내가 남을 욕할 입장이 못돼요. 남을 욕할 입장이 못 된다고요. 나는 내 가치 지킨다고 하다보니까 누굴 공격하는 셈이 됐어요? 이게 그리스도를 공격하는 셈이 됐다는 인식 자체가 복이에요.

아, 이거는 내 솜씨가 아니고 쉬지 않는 말씀의 솜씨다. 내가 말씀에 속했구나. 그럼 내가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것도 주님이 주시는 힘, 다시 말해서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라는 취지로 주시는 그 힘에 의해서 나는 이렇게 하나님께 봉사 안하고 싶어도 봉사해야만 하는 귀한 복의 자리에 놓여 있구나.’를 아는 겁니다. 그걸 13절에 보면 어떻게 하라? “즐거워하라” 내가 예상 못한 것이기 때문에 즐거워하라.

첫째시간 마치면서 덧붙입니다. 지옥 가는 사람을 더 이상 부러워할 필요 없어요. 지옥 가는 사람보다 우리가 낫다는 것이 아니고 똑같아요. 막상막하 그 나물에 그 밥이라. 지도 지밖에 모르고 나도 마찬가지인데 말씀의 역동성이 말씀대로 우리에게 적용을 시켰다는 점.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게 하신다는 점. 그리고 지금 불심판이 쉬지 않고 오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개안, 영안이 열려서 그걸 바라볼 수 있는 영적 사람이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나는 너보다 낫다’가 아니라 ‘나는 너보다 복 받았어’가 되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이것은 행운이에요, 행운. 행운이 찾아온 거예요. 우리 신앙생활 제대로 해야 됩니다. 신앙생활 내가 하는 게 아니에요, 주께서 하게 하셔요. 그 점을 알아야 돼요. 내가 하는 신앙생활 없습니다. 말씀대로 신앙인은 신앙생활 하도록 그렇게 주께서 이끄시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평소에 뭡니까? 내 자존심과 내 표준모델을 고집하다 보니까 저 사람은 신앙생활도 제대로 못하고 복음도 모르고 난 복음 아는데 이렇게 되게 되면 이것은 자기 방어죠, 주님 방어가 아닙니다. 이것은 자기가 주님을 공격하는 바가 돼요. 그것을 우리는 계속해서 되풀이하는 거예요.

두 번째 시간에 제가 하고 싶은 주제는 이겁니다. 왜 세상 문제를 말씀으로 해결하지 않고 왜 세상적으로 해결하느냐, 우리가. 뭐 믿음 좋다, 말씀 좋다 해놓고 막상 자기에게 어떤 난관이 들이닥치니까 아이고, 말씀이 무슨 소용있나. 이렇게 된다고요. 실컷 해놓고. 말씀은 소용없고 이것은 우리가 알아서 해결해야 된다고. 두 번째 시간에 그걸 다시 길게 이야기하겠습니다만 첫째시간 마치면서 다시 한번 봅시다.

육과 영이 분리된 이것이 바로 이 세상을 사는 간음한 자라. 간음이라는 것은 상대를 볼 때 육과 영을 끊어서 보는 거예요. 난 네 돈을 탐해. 난 네 영혼은 하나도 안 탐해. 이게 바로 상대를 간음하는 걸로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부부사이도 늘 간음이죠. 내가 너한테 시집왔으니 넌 호강한 줄 알아라. 이게 전부다 뭡니까? 상대를 그냥 밥이나 해주고 빨래나 해주는, 육과 영을 분리해서 보고 내 영을 위해서 기쁨조로 너는 시집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내가 하는 말이 “너는 나한테 해주는 게 뭐가 있는데?” 둘 다 뭐냐 하면 자기 표준모델을 지금 고집하고 싸움하고 있는 거예요. 검투사 둘이 만난 거예요. 완전 검투사에요, 검투사.

애들은 그 싸우는 모습을 보고 뭘 생각합니까? 내가 어느 편에 서야 용돈 많이 타겠는가. 애들은 그것만 발달해요. 애들은 아무 생각 없어요. 어느 편에 서야 나한테 이익이 있을까. 집안에 아이 4명 있으면 검투사가 4명이라. 글레디에이터 4명이 있어요. 그 중에 좀 순진한 게 뭐냐 하면 강아지. 그런데 강아지도 한 2년 키우면 이것도 검투사 다 돼요. 그것도 눈치 빨라가지고. 인간을 닮았거든요. 꼭 그 더러운 인간을 닮아서 인간처럼 아주 얍삽하게 돼요. 안락사 시켜버려야지.

육과 영은, 주님의 육과 영을 그대로 우리에게 다 준 거예요. 그만큼 우리는 주님을 평소에 힘들게 했다는 그런 육과 영인데 내가 말씀으로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체험케 함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아, 이 세상은 그리스도를 노리는 그 세력이 지금 작렬하고 있다는 것이, 눈이 활짝 열려서 보게 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이하림(IP:223.♡.58.44) 20-09-12 22:34 
서울의존강의20200910b 베드로전서4장 14절(자아 표준모델)-이 근호 목사

14절 보겠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이라고 되어 있죠.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아무도 예수님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고 욕의 대상이 되었다 이 말이죠, 이 세상 자체가. 둘째 시간 참 어렵긴 어려운데 여러분들 실력이 있으니까 그냥 갑니다. 어렵더라도 여러분들이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시간과 공간은 있는데 인간은 없어요, 이 땅에. 지금 인간이 있다고 생각해버리면 시간과 공간이 죽어버립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야고보서에서 인간은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이기 때문에. 인간보다 더 긴 게 뭐냐 하면 시간이고, 인간보다 더 넓은 세상이 뭡니까? 공간이에요.

이 세상의 모든 문제점은 뭐냐 하면 시간에 끼여서 내가 없는데 자꾸 내가 여기 있다고 여기는 것. 이게 문제가 되는 겁니다. 대구강의에 보면 이게 있어요. 창세기 강의하면서 이런 이야기했죠. 이미 우리는 죄인으로 태어났잖아요. 우리는 모친의 죄 중에 태어났죠. 죄인으로 태어났으면 죄가 우리를 지배하게 되면 지배하는 죄에서 우리가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이 육체는 도로 흙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이미 죽은 자이거든요. 사람들이 살아가는 게 성경에서는 이미 죽은 자인데 인간은 ‘자기가 안 죽었다’를 증명하는 식으로 살아가요. 나 여기 살아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본인이 살아있어 버리면 뭐가 죽어버리느냐 하면 시간과 공간을 주신 창조의 취지가 죽어 버려요.

빈 공간에 저렇게 아름다운 꽃이 있고 넝쿨이 있다고 봅시다. 그러면 저 꽃을 보는 순간 나는 여기 없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택배 왔습니다. 누구 계십니까?” 할 때에는 갑자기 없는 내가 생겨요. 누가 받아야 될 거 아닙니까? “네 있습니다.” 답변해줘야 되잖아요. 그 순간 꽃의 존재, 시간, 공간이 없어지고 관심, 의식의 집중이 나한테 꽂히는 거예요.

나한테 꽂혀 버리면 시간과 공간 안에 나는 없는 존재인데 모든 의식이 ‘나는 없는 존재’가 아니고 무엇으로 증명하느냐 하면 ‘나 여기 있습니다’ 라는 존재로 나오면서 시간, 공간이 있어야 될 그 의미를 내가 강압적으로 이걸 훼방하고 방해하는 작업이 개시되는 겁니다. 이것은 이 세상을 살면서 스트레스가 돼요. 내가 여기 있는데 왜 나를 안 알아줘. 이게 바로 암 걸리는 거죠. 말기암 걸리는 거죠, 뭐.

또 어려운 거 해볼게요.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고쳤죠. 병든 자를 고쳤습니다. 자, 생각해보세요. 병든 자를 고치는 예수님이 좋습니까, 아예 병 안 걸리는 게 좋습니까? 어느 쪽이 좋습니까? 아예 병이 안 걸리면 좋잖아요. 그런데 아예 병이 안 걸리면 이 분, 시간과 공간의 주인이 등장할 자리가 마련되지 않아요.

두 형제, 형이 있고 동생이 있습니다. 누가 세상을 제대로 파악했는지 여러분 맞춰보세요. 형은 멀쩡한 제비다리를 분질러놓고 고쳤어요, 형은. 동생은 제비다리를 그냥 고쳐줬습니다. 어느 쪽이 자신의 존재성이 드러납니까? 형이죠. 형이잖아요. 아, 이런 게 어려워요. ‘내가 정당하다’가 평소에 잘 안 나타나니까 일부러 악한 일을 해놓고 그걸 반성해보는 거예요, 내가. 이유가 뭡니까? 정당한 존재가 나 여기 있음을 과시하기 위해서 이 짓하고 있는 거예요, 과시하기 위해서.

정치적인 발언처럼 들릴지 모르겠는데 한 좋은 예가 되기 때문에 예를 드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다리가 아파서 군에 안가도 돼요. 군에 안가도 되는데 자기 엄마가 민주당 대표위원이나 되어가지고 엄마 위신 세워주려고 자기가 군에 갔어요. ‘안가도 되는데 군에 갔기 때문에 마음 놓고 휴가 써도 된다’ 라는 주장을 하게 되면 이게 뭐가 문제가 돼요? 내가 처음부터 많이 봐줬잖아. 좀 봐줘. 안가도 되는데 갔으니까 내가 휴가 몇 일간 더 써도 좀 입 다물고 봐줘. 내 쪽에서 양보했으면 너희 쪽에서도 양보해줘. 이런 식이에요. 그런 식이 되면 결과적으로 뭐가 부각돼요? ‘나는 정당하다’가 부각되는 거예요.

지금 흥부는 제비새끼다리 고쳐주면 제비 자기들끼리만 알고 아무도 몰라요. 그런데 놀부는 부러뜨리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다 보여주고 고치기 때문에 누가 부각됩니까? 놀부가 부각되죠. 우리는 모두 무슨 심보입니까? 놀부 심보에요, 표준모델이 있기 때문에. ‘나는 정당하다’를 날마다 보여주는 표준모델을 고수하기 때문에 우리는 놀부 심보라니까요.

그러니까 인간은 가만히 있으면 문제가 없는데 가만히 있는 게 아니고 자꾸 꼼지락거리는 거예요, 정당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나 여기 있음을. 다시 얘기하면 내가 여기 있어버리면 시간과 공간이 여기 있을 이유가 없어요. 시간과 공간은 배후에 주님께서 작용합니다. 시간과 공간이 작용해버리면 은혜가 거기에서 흘러 들어와요. 시간, 공간에서.

아까도 얘기했지만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 잠이라 하는 것은 ‘잠.자.자.’ 한다고 해서 잠이 후딱 오는 게 아니거든요. 하다보니까 그냥 잠이 오는 거예요. 세상의 모든 것은 내 의지대로 되어지지 않아요. 의지대로 되는 게 아닙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예를 들어 누가 지갑을 잃어버렸대요, 누가. 한 예니까. 지갑을 잃어버렸다. 그러면 지갑 찾기 위해서 나름대로 분주하게 뛰겠죠. 내가 지갑을 찾을 때 하나님께 감사기도 하겠죠. 하나님 고맙습니다. 이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감사기도 하는 순간 내 존재가 부각되죠.

그래서 하나님 감사기도 합니다. 고마워하고 기뻐하는데 밖에 나와 보니까 타이어에 빵꾸가 났어요, 오래 되어가지고. 그래서 그 타이어 갈아 넣을 판이에요, 너무 오래 되서. 그러면 정비소에 가면 또 타이어 장사해먹는다고 이건 하나만 교체하면 안되고 네 개다 갈아야 돼요. 이렇게 나올 가능성이 많아요. 균형이 맞아야 돼요, 이래가지고.

그러면 그 사람은 지갑은 하나님 은혜로 찾았다고 감사기도 했는데 그럼 타이어는 누가 바람 뺐습니까? 이건 시간이죠. 시간은 우리를 죽입니다. 아무것도 안하나 열심히 설쳐대나 늙으면 다 죽어요. 지금 이 이야기가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제가 예를 듭니다.

제가 어떤 사람을 그림으로 한번 그려볼게요. 머리 까져있고 이런 사람이 있다 합시다. 이 사람이 누구냐 하면 김정은입니다. 37살 먹은 김정은이에요, 철딱서니 하나도 없는. 자, 김정은은 뭐냐? 김정은은 시간과 공간에 의하면 진흙인데 돌출부분과 들어간 부분을 갖고 있는 진흙 덩어리에요.

그런데 북한 사람들은 이 진흙덩어리한테 꿈쩍도 못하고 있어. 이거 희한한 일이에요. 왜 그렇습니까? 왜 그러느냐 하면 시간과 공간의 원칙을 모르고 이것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인간 대 인간의 관계로 이걸 가지고 평생을 여기에 주눅 들어 살아왔거든요. 인간 대 인간의 관계. 영의 관계가 아니고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요.

유다 나라가 멸망하는 순서가 이래요. 처음에는 유다나라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였습니다. 중간에 언약이 들어가서. 이렇게 되어 있죠, 유다나라, 이스라엘. 그 다음에는 ‘인간 대 인간의 관계’로 갔어요. 임금님이 잘해야 되고 왕이 잘해야 우리가 잘 먹고 살지. 인간 대 인간으로. 제사장이 똑바로 해봐라. 그래야 우리가 복을 받지. 세 번째는 뭐냐 하면 ‘인간 대 대물’. 대물이라는 말은 다시 말해서 물건, 재물 또는 땅. 재산될만한 것과의 관계. 이게 바로 이방민족이에요. 잘 먹고 잘 사니까.

이제는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저게 나한테 얼마나 돈을 벌어줄 것인가를 생각하는 거예요. 결혼도 마찬가지고 애 공부시키는 것도 마찬가지고. 쟤를 공부시켜놓으면 쟤가 밖에 나가서 월급을 한 달에 얼마나 물고 들어올 애가 되는지를 생각하는 거예요. 나와 무엇의 관계?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사물로 보는 겁니다. 물체로 보는 거예요. 시장에 내놓는 하나의 상품으로 보는 겁니다.

여러분 초밥집에 가면 이런 비싼 초밥집 있죠. 한 접시에 3000원 하는 거. 내가 보기에 원가 200원도 안되는 걸 가지고 계란 지단 해놓고 돌아다니면서 3000원 받는 거 있잖아요. 아 참. 좀만 먹으면 3만원어치 나와. 아니 아까워 죽겠어요. 그거 조절한다고 애먹어서 밥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돈 3만원 나오고 말이죠. 그거 계산하느라 마음 놓고 먹지를 못해. 이건 얼마짜리고. 접시가 황금접시. 그 접시 돌아다니는 거 하고 접시에다가 이 세상에서 사람을 실어서 돌아다니는 거하고 차이점이 없어요. 저거 얼마짜리고?

바로 이스라엘이 이래서 망한 거예요. 잘사는 나라가 부러운 겁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는 언약이 주어졌고 시간과 공간은 누구 말을 듣느냐 하면 이 언약 말을 듣고 하는 거예요. 홍해가 갈라지고 요단강 갈라지고 가뭄이 오고. 농사지어도 가뭄이 오면 농사 안 되거든요. 이스라엘 백성자체가 농사지어도 약속의 땅에서는 말씀대로 살아야 농사가 되게 되어 있어요. 모든 자연재해도, 풍해나 메뚜기재앙이고 뭐고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고요, 하나님의 손에.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작용하는 말씀에 달려있다 이 말이죠. 그리고 인간이라 하는 것은 그 말씀의 생산물이에요, 인간이라는 것은.

사람은 풀이요, 모든 영광은 풀의 꽃 같으니. 이사야 40장. 무엇이 영원합니까? 풀은 마르고 영광은 없어져도 무엇은 영원하다? 말씀은 영원하다 (이사야 40장 8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요한복음 1장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또는 생명이 되었다. 생명이 왔으되, 빛이 왔으되 지금 우리는 ‘나’라는 것을 부각해버리면 생명이 왔으되 영접치 아니해버려요. 자기 주제파악을 못해서.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아들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것은 혈육으로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는 거예요.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된다. 이 모든 시간과 공간은 뭐로 가득 차 있다? 아까 공식했죠. 시간과 공간은 뭐로 차 있다고 했습니까? 말씀으로 가득 차 있는 거예요.         
14절 보기 전에 제가 얼마 전에 춘천을 다녀왔습니다. 우리 의존교회 교인들이 춘천에 많이 갔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갔다 오고 난 뒤에 했어요. 춘천강의,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그 강의에서 제가 강의한 것을 짧게 요약해드리면 이렇습니다.

시간과 공간은 보이지 않는 어떤 분으로부터 나와서 그 분으로 다시 소환된다. 시간과 공간은 인간 보기에는 그냥 허하고 망망하지만 성경에서는 어떤 보이지 않는 인물, 어떤 어르신이 있어요, 어떤 분. 그래서 시간과 공간이 더하기해서 어떤 인물로 나타나요. 그러면 날과 달, 절기 지키고 할 필요 없어요. 왜냐하면 율법에 나오는 날과 어떤 특정한 지점, 성소에서 지켜야 한다 이런 거 필요 없이 이게 인물로 집대성되면 우리 성도는 그 분을 사랑하면 돼요. 참 쉽죠?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이게 아무리 세상의 불심판 날짜가 언제냐 알든 모르든 관계없이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면 불심판이 오든 물심판이 오든 유황불이 오든 상관없어요. 왜? 주를 사랑하는 자에게는 복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라는 인물은 시간과 공간을 집대성한 거예요.

그렇다면 시간과 공간은 주님 쪽으로 가는데 인간들은 자기의 표준모델을 고집하다 보니까 시간공간을 누구 위주로 억지로 잡아당기느냐 하면 나 좋으라고 시간, 공간이 작용하라고 자기를 자꾸 돋보이게 만들어요. 자기 존재를 중심에 놓고 시간과 공간이 여기에 따라줘야 된다고 그렇게 억지를 부리는 겁니다.

10월 9일에 우리 교인 딸 결혼식을 하는데 만약에 그 집사님은 그전에 예수님 재림하면 싫은 거예요. 왜? 딸 시집 보내고 난 뒤에 재림하라고. 시간과 공간을 자기 위주로 보는 거예요. 우리 초등학교 때 그런 거 있잖아요. 왜 자꾸 소풍가면 비가 와요? 김밥 먹을 기회를 다 놓치잖아요.

제 국민학교 때 이런 일이 있었어요. 우리 5학년 때 6학년 한해 선배 되는 그 사람이 선도라 하는 거 있죠. 교문에서 선생님도 아닌 게 선생님 흉내 내면서 아이들 막 패는 거 있잖아요. 거기서 제일 독한 교관처럼 독한 선배가 있어가지고 모든 우리 국민학교 5학년 소원이 뭐냐. 걔 빨리 졸업하라고. 1년만 기다리면 졸업하니까. 6학년에서 중학교 가니까 우린 산다. 우리가 6학년 되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그 형이 뒷자리에 앉아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유급되어가지고. 끽소리 못하고, 동급생 되었으니까 가만히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시간과 공간이 인간들이 기대하는 순서대로 진행되지 않아요. 언제 죽을지 언제 태어날지 언제 건강할지 그것은 전도서의 말씀에 의하면 모든 것은 때가 있으매 그 ‘때’에는 손 떼라. 네가 정하는 게 아니야. 사랑할 때가 되고 미워할 때가 되고 그런 거예요. 그래서 남녀가 서로 사랑하는 것도요. ‘사랑하자 사랑하자’ 이래서 사랑하는 게 아니고 그냥 부딪쳤는데 그냥 지나가면서 사랑하게 되고 그런 거예요.

나이 서른다섯에 시집도 못가냐고 막 닦달낼 게 아니고. 명절, 추석날 온 집안에 딸내미 하나 붙들고 압력을 가하듯이 “나이 서른 다섯이 적나? 아이도 못 놓는다.” 합리적 이유를 대가면서 막 시집가라고 하는데 시집을 아무랑 합니까? 김정은이랑 할까요? 아무나 해요? 뭔가 마음이 딸려야죠, 마음이. 집안 빵빵하고 자기 오빠가 서울대학 나왔단다. 뭐 백날 해도 자기 오빠하고 결혼합니까? 막상 만나보게 되면 못났다. 헤어질 이유가 딱 하나, 못난 거밖에 없죠. 그래도 네가 교회 다니면서 믿음 좋다고 해놓고 조건 찾는 거봐라. 믿음은 믿음이고 조건은 조건이고 뭐 땡겨야 뭘 하죠. 믿음 좋다고 다 합니까? 노틀담 꼽추하고 할까, 그럼.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믿음이라 하는 것은 내 능력을 발휘하는 게 아니고, 말씀에 맞추는 게 아니고 말씀에 위배되었음을 인지하는 게 믿음이에요. 내가 어떤 경우라도 말씀과 합치될 수 없는 나밖에 모르는 인간이라는 그게 믿음이에요. 그래야 예수를 믿지 그럴 것 같으면 예수를 안 믿고 잘난 나를 믿지, 예수를 왜 믿습니까?

예수님이 욕을 봤다는 말은 어떤 뜻이냐 하면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이 율법을 지켰다고, 그 당시 예수님 태어난 그 유대나라가 율법을 지켰다고 자부했다는 말입니다. 율법을 지킨 사람은 천국에 안 넣어줍니다. 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은 율법을 지킬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지키죠.

수요설교처럼 서너가지 죄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불로 싸질러버렸는데 그러면 그 죄 안 지으면 어떠냐? 그 죄 안 지으면 다른 죄 찾아내요. 다른 죄 찾아놓고 또 서너가지라. 그럼 그 죄 안 지으면? 그 죄 안 지으면 또 다른 죄 가지고 서너가지 찾아내요. 어째든 저째든 간에 불로 심판하는 것을 네가 못 빠져나온다. 처음부터 인간은 죽을 죄인이기 때문에 그래요, 죽을 죄인이기 때문에. 이것은 변경사항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죽을 죄인이라는 말은 죽을 죄인값을 하면서 살아라 이 말이죠. 자꾸 의인인 채 하지 말고. 아, 나는 진짜 나밖에 모르네. 라는 고백을 왜 주님 앞에 못합니까? 그걸 하나님께서는 답답해하는 거예요.

‘저는 제 생각만 하는 그 순간에 나의 이익을 생각하기 때문에, 남한테 안 지려고 하기 때문에 주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르고 세상에 불평밖에 할 줄 모르는 그런 인간입니다.’ 라는 그런 말을 왜 못해? 그렇게 살아가고 있으면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으면서 왜 말을 못합니까? 다른 이중적인 것, 주님께 보여주는 나 따로 있고 꼬깃꼬깃 감춰놓는 나 따로 있고 그게 무슨 수작이에요? 뭐 그런 수작이 다 있어요. 주님께서 그걸 모를 리 있습니까?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영이거든요. 하나님께만 깊은 영이 아니에요. 우리에게도 깊은 영이 와요. 우리의 가장 깊숙한 곳에, 나도 못 찾는 곳에 성령이 깊게 들어가서 그걸 지적질 할 때 그건 복 받은 사람입니다. “네 안에 이거 있다. 네 안에 이 괴물 들었네.”, “아이고, 전 몰랐습니다.”, “걱정하지 마, 내가 찾아줬잖아. 내가 찾아줬어.” 그게 주님의 사랑이 아니고 뭐에요.

자, 율법은 못 지킵니다. 율법을 못 지키는데 율법을 지키겠다고 하기 때문에 지옥 가는 거예요. 왜냐하면 율법을 지키게 되면 가짜 천국이 만들어집니다. 율법을 지킨 사람은 들어갈 수 있는 천국을, 따로 표준모델을 만들어요. 세상에, 이거 가짜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했습니까? 율법의 위반자로 등장했죠. 그들이 율법 지키는 것과 동일한 것이 단 하나도 없어요. 안식일이면 안식일, 간음한 자를 돌로 치니까 때리지 말라 하고. 어떤 율법 말씀의 해석도 동일한 말씀이 단 하나라도 없는 거예요. 단 하나도 없어요. 저쪽에 금식할 때 주님은 뭐했습니까? 술 잡쉈어요. 저쪽에서 금식하고 고난 받을 때 주님께서는 술 잡숫고 노셨다니까요.

의도적으로 틀어지게 하는 거예요. 왜? 따라 오려면 따라와 봐! 너희들이 너희들 세계의 한계를 아무리 해도 절대로 주님이 하신 해석을 열두제자를 비롯해서 어떤 인간도 눈치 챌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 때문에. 율법 지켜서 가는 나라는 없어요.

그럼 천국은 뭐냐. 율법 지켜서 천국 못갑니다. 사랑으로 가요, 사랑. 사랑으로 가는 거예요. 사랑해주시는 분에 의해서 사랑 받으면 갈수 있어요. 그러면 사랑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어떻게 압니까? 참 쉬워요. 어렵다 어렵다 했는데 오늘 강의에서 이게 제일 쉬워요.

뭐냐 하면 사랑받은 사람한테는 율법에 대해서 부담 느끼지 않습니다. 부담 느끼지 않아요. 왜? 사랑이란 서로를 알고 싶어하는 충동이 강렬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사랑은 사랑해주는 사람, 그 인물에 꽂혀서 내가 얼마나 율법을 잘 지키나 자기한테 더 이상 꽂히지 않기 때문에.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면 누구를 사랑해야 돼요?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면 죽자 살자 나만 사랑해야 되기 때문에 그다음부터 나는 율법으로 무장합니다. 하나님이여, 한번 봐주세요. 이 정도로 저는 공부 잘합니다. 저 백점 맞았어요. 또 율법대로 살았습니다. 또 선한 일을 했고 모든 행동에, 매사에 조심 또 조심,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식으로 행동 하나 경솔하게 하지 않고 혹시 남에게, 이웃에게 피해 줄까봐 조심조심. 어디가도 마스크 턱에 안 걸치고 두손 가지고 코끝까지 꽉 막아서 비말 튈까봐 이 정도로 하는 걸 봐주시기 바랍니다. 이 정도로 남에게 배려밖에 할 줄 모르는 인간입니다. 지옥가거라, 인간아. 네가 지옥 가는 거야, 네가. 왜? 사랑하는 자가 없어요. 자기 외에는 달리 사랑하는 자가 없어요.

아, 이거 참 무서운 이야기에요.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받죠. 그런 이야기하면 저쪽에서 하는 말이, 주님이 사랑 안 되는데 어쩌란 말인가. 다른 말로 하면 내 사랑이 너무 강렬해서 다른 사랑은 내 자리에 끼어들지를 못하는데 어쩌란 말인가. 이런 뜻이에요.

사랑은 자기파괴에요. 사랑은 자기파괴입니다. 모든 사랑노래에 다 들어 있잖아요. 어쩌란 말인가 이 아픈 가슴을. 보고 싶어서 가슴 아픈 걸. 지가 거울에 비친 지 모습 보면서 가슴 아파요? 아니에요. 다른 사람 보고 싶은 거예요. 당신이 떠나면 내가 안보면 그만이지만 꿈속에 당신이 나타나면 난 어쩌란 말인가. <준비없는 이별> 녹색지대가 부른 노래 아닙니까. 당신이 보고 싶어도 앞에 안보이면 그만인데 꿈에 나타난 걸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꿈에 나온 걸 지울 수도 없고.

사랑은 나한테 미치는 게 아니고 그 사람한테 미쳐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고린도후서 5장에서 뭐라고 합니까? 사람들이 자기보고 “너는 미쳤다” 할 때 “그래, 나는 미쳤다. 미쳤는데 나는 예수님의 사랑에 미쳤다. 예수님께 미쳤다.” 와, 이게. 예수님의 사랑의 영을 받으니까 사람이 이렇게 되는 거예요.

지금 사랑이야기 나와 버리면 신앙생활, 교회생활 같은 거 없어요. 무슨 생활입니까? 사랑생활이에요. 뭐 교회는 어떻게 하고 헌금 어떻게 하고...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그냥 사랑하세요. 누구? 예수님을. 그러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사야 11장 봅시다. 1절부터 보면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죠. 2절, “여호와의 신”이죠. 장차 올 성령입니다. 여호와의 신은 어떤 신이냐 하면 지혜, 총명, 모략, 재능, 지식,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 그렇게 되어 있죠. 이런 것 가지고 자기 자랑하고 무장하라는 뜻이 아니고, 이사야 61장 1절,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했을 때” 분명히 이것은 아까 같으면 나는 지혜가 뛰어나고 나는 모략이 뛰어나고 자기 자랑하겠잖아요.

그러나 실제로 여호와의 신이 임하니까 “나를 보내서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라”했는데 포로 되었다, 갇혔다, 마음이 상했다. 다 무엇 때문에 그러느냐 하면 인간은 자기 잘난 맛에 살고 싶은데 하나님의 율법이 오니까. 율법은 왜 오느냐 하면, 어제 수요설교에서 그런 이야기했죠, 율법은 경찰이에요, 경찰. 죄가 있는 곳에 율법이 온 거예요. 율법이 온 것은 죄를 더욱 더 죄 되게 드러나도록 하기 위해 오는 거예요.

어떤 마을에 범인이 있으니까 여기 경찰이 온다고 했잖아요. 이 말은 율법이 온 것은 우리가 날 때부터 의인이라는 말입니까, 죄인이라는 말입니까? 날 때부터 범죄인이에요, 우리가. 아니 주제파악 해야 돼요. 우리는 착한 일하고 배려해주고 이웃사랑 필요 없어요. 우리는 무슨 짓을 해도 그 죄는 변경이 돼요, 안돼요? 절대로 변경이 안됩니다. 이게 성령이 임해야 알 수 있는 거예요. 아, 이게 안되는구나. 내가 천국 가는 것이 이게 안되는구나.

천국 가는 것은 한국 기독교가 만든 구라에요. 김구라, 박구라가 아니라 완전히 구라에요. 세상에, 사람을 보고 이야기해야지. 못가는 인간보고 간다는 말을 하면 안되죠. 열심히 기도하세요, 헌금 하세요, 교회 봉사하세요. 이런 구라 치면 안되죠. 원래 물 안 먹는데 물 한번 먹어야 되겠다. 이 사기에, 보이스피싱에 도대체 참지를 못해.

예배당 지으면 천당 갑니까? 마스크 쓰고 이웃배려하면 천당 가는 거예요? 마스크 쓰고 배려하면 악함이 약간이라도 착함으로 변합니까? 오늘 베드로전서 4장을 유념해서 보셔야 돼요. 이것은 우리 솜씨가 아니라는 뜻이에요, 이게. 말씀이 없는 게 아니고 이 시공간은 말씀으로 꽉 차있어요. 지금 굉장히 분주하게 움직여요. 그 분주함의 결과가 뭐냐.

너희가 바로 그리스도의 종이 될 수 없는데 종이 되었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할 수 없는데 참여했잖아. 그러니까 너희 복 받은 자야.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 것을 복 받은 줄 알라 이 말입니다. 그 말은 우리가 실력을 기르라는 뜻이에요, 키우라는 뜻입니까? 우리가 제대로 열심히 살라는 뜻이 아니에요. 주제파악 하라는 이야기에요.

이사야 61장에 여호와의 신이 임하면 바로 율법이 와서 우리를 망가뜨립니다, 율법이 오게 되면. 우리는 포로 잡힌 자가되고 마음이 상한 자가 되고 갇힌 자가 되고 가난한 자가 되고... 우리는 희망 없어요. 그런데 여호와의 신이 임한 자가 우리에게 무엇을 주느냐. 또 율법주면 안되죠. 율법이 안되는 게 뻔한데. 아니 바탕 자체가 인간은 안 되는데 인간 되라고 하는 게 말이 돼요?

공부하기 싫어 죽겠는데 공부해라. 이게 애한테 먹히겠던가요? 반항심만 늘어나지. 공부 좀 하라 하면 수영장 보내주면 할게. 이런 식으로. 애들이 원하는 것은 엄마의 잔소리가 아니라 엄마의 사랑입니다. 공부 못해도 이뻐해 주는 사랑 있잖아요.

자, 사랑이란 상호 가장 깊숙한 곳에 들어가는 것. 이게 아까 고린도전서 6장 17절, 그리스도와 우리는 한 영. 왜 가장 깊숙한 곳이냐 하면 성령은 하나님의 가장 깊숙한 곳이거든요. 그러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실 때는 빈손으로 오지 않고 십자가 피를 가지고 오죠. 이 피는 유월절에 의하면 무슨 피입니까? 심판과 저주를 차단시켜주는 cover에요. 막아주는 거예요. 위에는 막고 밑에는 생명수가 흐르게 하는 거죠. 그게 성전 아닙니까. 위에서 막아주는 거예요, 진노를. 그게 속죄소에요, 언약궤이고. 7월 10일날 피를 뿌려버려요.

자꾸 신앙을 모호하게 만들지 마세요. 객관적으로 성경에 보면 피를 뿌려서 유월절에는 발랐고 속죄소에서는 피를 뿌렸잖아요. 십자가는 뭡니까? 실제로 죽었어요. 그리고 그 분이 사흘 만에 실제로 살아났어요. 그게 신앙의 객관적인 유일한 토대이고 근거입니다. ‘내가 은혜 받았다’ 그런 거 생각하지 말고 주님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를 봐야 돼요.

그거 안보게 되면 자기 체험에 자기가 속아 넘어가는 수가 있어요. 나는 기적 6개했는데 너는 기적 몇 개 했나. 이런 식이에요. 나는 성경공부와가지고 빵 3개 먹었는데 배탈 안났다. 그것도 기적입니까, 기적이에요? 빵 3개 먹고 죽어버리면 마찬가지지 뭐. 적어도 기적이라면 ‘죽었는데, 죽은 게 맞는데 살게 되었다’ 이래야 기적답지. 그 정도 되어야 기적이죠. ‘죽었는데 무덤이 비어있다.’ 이정도 되어야 기적이죠. 몸 아프다, 시험 잘 쳤다, 그건 기적 아니죠. 시험 잘 쳐서 지옥 가서 시험 쳐라. 지옥 가서 시험 친다고 천국 보내주는 것 아닙니다.

천국에는 아무도 못갑니다. 그래서 예수님만 갔죠. 예수님만 의인이기 때문에. 그 의가 공통적인 의에요. 나 개인적인 의는 필요 없어요. 나의 의는 필요 없어요, 천국 가는데. 그 공통적인 의가 성령을 통해서 가장 깊숙한 십자가를 고루고루 분배받을 때 그게 하나님의 의가 들어와서 그 의 때문에 우리가 천국 백성되는 겁니다. 구원받은 거예요.

까짓 거 그 정도 받았으면 이 땅에서 예수님이 받은 수난 좀 받아도 괜찮아요. 예수님이 모욕당했던 그 모욕을. 모욕 당하고 목욕하면 그만 아닙니까. 때 밀면 되잖아요. 이 세상 더러워라. 그러면 되잖아요. 그 뭐 고소하고 너 죽고 나 살자 붙들고 싸울 필요 없어요.

고린도전서에도 나오지만 성도끼리는 세상일로 고소하지 마라고요. 차가 가다가 서로 접촉사고가 일어났어요. 따지고 보니까 저쪽엔 목사, 이쪽엔 장로라. 그냥 자차보험 처리하고 헤어지세요. 이 목사야, 네가 뭔데 들이대냐. 이럴 필요 없죠. 요새 목사가 성도인지 아닌지 분간 안됩니다만.

주님의 사랑은 먼저 우리가 사랑한 게 아니고요. 주께서 들어옵니다. 그러면 사랑은 뭐냐. 상대방을 더욱더 알아가는 거예요. 그러니 주님의 사랑이 오게 되면 네가 어느 정도로 괴물인가를 죽을 때까지 계속 알게 만들어 줘요. 그러면 주님에 의해서 까발려지는 나의 괴물성에 대해서 우리는 즐거워합니다. ‘아, 이 괴물이 주님을 힘들게 했구나. 내가 주님의 가해자구나. 주님이 고난을 이것 때문에 받았구나.’를 알면 알수록 우리는 내 걸 따로 가지려는 스트레스를 안 받아요.

누가 나 건드리면 가만 두지 않는다. 이런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왜? 천하의 죄인이 나인데 내가 주님한테 못되게 했는데 남이 나를 험담했다고 해서 그것가지고 내가 ‘너 죽어라. 나 살자’ 그런 식으로 달려들 필요 없거든요.

모든 인간은 인간에게 기대 걸지 마세요. 죄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어진 사람이 이 자리에 있다고 봅시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너무 순하게 생겨서 누가 봐도 저 사람은 욕심 하나 없을 것처럼 생긴 사람이 만약에 나타나서 이 자리에서 저를 흘낏 본다면 저는 여러분한테 이렇게 이야기할 겁니다. “저렇게 못돼먹은 사람 처음 본다.” 이렇게 말할 거예요. 그 말이 맞아요. 인상이 아무리 후하고 좋아도 주님 보시기에 못돼 처먹은 인간이라니까요, 흘낏 봤는데. 아이고, 나 소름 끼친다. 저 못된 괴물의 얼굴. 그 말이 맞는다니까요. 그 말이 맞아요.

방탄 소년단 7명이 춤추죠? 저 못돼먹은 얼굴들 한번 보세요, 저 못돼먹은 얼굴. 미주에서 2주 연속 1등한 노래 한번 들어보세요. ‘다이너마이트’인가. 얼마나 못돼먹었어요. 그 방탄소년단의 어느 누가 “방시혁 사장님, 저 죄인이에요.”, “왜?”, “이거 또 히트 쳐서 저 죄인이에요.” 이런 애 있습니까?

이 세상은 절대로 방탄소년단을 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욕할 사람은 따로 있기 때문에. 주님이 있기 때문에. 주님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죄인이라 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인간 쪽에서는 주님을 욕하는 거예요. 안 그러면 기독교처럼 가짜 예수를 만들든지.

진짜 예수님은 너는 죽어 마땅함을 이야기한다고요. 우리는 그게 듣기 싫은 거예요. 나한테 표준모델이 있기 때문에. 오늘 제목을 <표준모델>로... 우리는 날 때부터 표준모델이 있어요. 나는 착하고 이쁘고 나는 남한테 사랑받아야 마땅하고. 이게 나중에 커서도 40대, 50대에도 계속 가는 거예요.

내가 너한테 진심을 이야기했는데 감히 나한테 상처를 줘? 이런 식이라. 표준모델이에요. 우리는 죄인인 거 다 잊어버렸어. 이 세상 일도 혼자 지가 제일 바빠요. 주님은 하나도 안 바빠. 나는 내 일한다고 바빠. 내 자존심 간수한다고 바빠요.

이번에 태풍 불 때 참 이거 웃어야 될지 울어야 될지 모르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뭐냐 하면 부산에 어떤 60대가 태풍 부는데 유리창 깨진다고 뭐 덧대다가 깨진 유리창에 다쳐가지고 피 많이 흘려 죽었어요. 참 위험한 일이죠. 그러면 그 할아버지 가족은 누구보고 고소해야 됩니까? 하나님보고 고소해야지. 태풍을 보내준 분보고 고소하죠. 그런데 하나님보고 고소안하죠. 그만큼 믿음이 없는 거예요.

끝부분에서 아까 첫째시간 것 다시 이야기하는데 그만큼 믿음이 없는 거예요. 자꾸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인간 대 인간의 관계. 좀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면 인간 대 재물의 관계. 그러면 그 할아버지 가족은 누구한테 고소하느냐. 그 아파트 관리사무소에다가 하는 거예요. 뭐하려고? 교도소 보내려고? 아니에요. 뭐하러 관리소장을 교도소 보내요. 뭐하란 말입니까. 유리창 물어달라. 그리고 우리에게 적절한 위로금 달라. 물론 자기가 일부러 얇은 유리창 한 건 아닌지 알기 때문에 장례식에 와서 위로금 주고 유리창 좀 바꿔줘. 그래야 이 아파트 역시 훌륭한 관리사무소라 해가지고 집값 오를 게 아니냐. 결국은 집값 오르는 거예요. 결국 돈 문제에요, 돈 문제. 세상만사 모든 게 돈 문제에요.

사랑이라는 것은 가만 있어도 깊숙하게 십자가가 찾아와요. 왜? 가장 깊숙한 곳에 하나님이 제일 아끼는 것을 우리에게 심어주는 거예요. 그러면 그 십자가로 인하여 우리는 가장 깊숙한 나의 죄 중의 죄, 죄인 중의 괴수, 사도바울이 고백하는 것처럼 그걸 즐거운 마음으로 누구한테 고백합니까? 남한테 고백하지 마세요, 또. 사람 믿지 마라니까. 주님 앞에서.

주여, 누가 내 성질 건드린다고 또 화냈습니다. 아, 이런 괴물. 참 이런 괴물을 내가 그동안 강아지 키우듯이 키웠습니다. 잘 키웠습니다. 밥 주면서 키웠습니다. 그걸 노출시켜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주여, 나는 이미 죽은 자니까 주님의 몸이니까 시간과 공간만 있고 내 생각은 안 나게 하옵소서.

안 나게 할 수 있습니까. 또 하나님께서 사태를 주게 되면 분명히 너는 모든 게 은혜라 했는데 그 뭐 30분 가지도 않죠. 왜냐하면 주님께서 계속해서 내 안에 악마 들었다는 것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계속해서 사랑으로 오거든요. 이게 복 받은 자에요.

여러분, 다른 사람하고 비교해보세요. 성령 안 받은 사람은 그런 사람 없습니다. 자기 관리에 바빠요. 남에게 보여주는 자아와 감춰놓은 자아가 있어요. 제가 수요일에 기도하는데 기도제목을 제가 하거든요. 기도제목이 이거였어요. ‘탐심이 있으니까 질투가 생긴다’ 질투라는 것은 비교다. 지 혼자 있으면, 강아지하고 혼자 있으면 질투 안 나타나요.

그런데 여기 누가 오게 되면 갑자기 질투 생기죠, 비교하고. 왜 나는 저 사람처럼 되지 못하나. 탐심이 생기는 거예요. 갑자기 시간과 공간 속에서 주님의 은혜와 은혜의 결과물, 결산물로 자기를 봐야 되는데, 인간이 나타나니까 갑자기 자기도 같이 맞상대하기 위해서 인간이 돼요. 너만 인간이냐, 나도 인간이다. 그러면 인간 대 인간 관계 된다고요. 그 다음에 치고 가게 되면 누가 부자인가 한번 보자. 한답시고 이거가지고 따진다고요, 돈하고.

그런 일이 없다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그런 일이 일상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게 일상이 될 때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고난 받는 걸 네가 복 인줄 알아라, 복 인줄 알아라. 네가 성령 받았으니까 네 주제파악이 되고 주제파악이 되니까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공격하고 있다는 것이 눈이 활짝 열려서 볼 수 있게 되는 거예요. 왜? 본인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니까. 내가 그렇다하면 남들도 마찬가지인 거예요.

인생 뭐 있어요? 뭐가 인생입니까? 인생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최종 관리자가 되가지고 자기 가치, 자기 건사하는 거 그게 인생이지, 인생 뭐 복잡해요? 내 인생 내가 관리하고 내가 간직해서 보란 듯이 남한테 밑지지 않는 인생 만들겠다, 끝! 끝이거든요. 그게 바로 죄라는 것을, 성령 받은 사람은 뭐로 봅니까? 사랑이 오니까 보는 거예요.

방금 나 잘났다 이게 사랑입니까? 대상이 없는데 무슨 사랑이 있겠어요. 그러나 주님은 이 인간 같지도 않은 열두 제자들을 사랑하듯이 제자들 못지않게 남한테 지기 싫어하고 하늘나라에서 누가 높은지 그것만 생각하는 우리에게, 제자들에게 주신 성령을 그대로 우리에게 주시는 거예요. 그러면 제자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누구의 이야기 됩니까? 야, 이거 고맙다, 제자들아.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습을 시범조교로서 제자들이 주님과의 관계에서 그대로 보여줬잖아요. 그럼 주님과 제자의 관계. 그들은 성령 없으면 구원 못 받잖아요.

마찬가지로 제자들 못지 않게 자기만 생각하는 우리 관계에서 성령이 오니까 주님께서 사랑의 의도적인 조성한 환경 속에 우리가 놓여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게 되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뭐라고 했습니까, 베드로전서 4장에, 그게 바로 ‘영광의 영’이죠. 14절 다시 읽어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자, 성령 받았다. 참 성령 받았다는 말 많이 하죠. 어떤 사람이 성령 받은 사람일까요? 십자가를 보여주면 성령 받은 거예요, 십자가를. 그럼 십자가를 그냥 보여주면 안되겠죠? 그게 조를 이루어야 돼요. 십자가 앞에서 나는 어떤 수모를 당해도 감사해야 될 죄인 중의 괴수라는 것과 조를 짜서, 그게 한 조를 이루어서, 장갑의 오른쪽, 왼쪽처럼 한 조가 되어서 십자가를 증거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런 건 어떻습니까? “여보, 밥 먹으세요.”, “주여, 십자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이야기 할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니, 십자가 첨가해서 이야기한다고 모든 게 다...짜증 나 정말. 십자가를 너무 관용어처럼 남발해도 이거 또 수상해. “여보, 밥 먹으세요.”, “오늘 참 맛있네.” 이러면 돼요.

그 말이 뭡니까? 나의 죄인 된 분수에 맞춰서는 너무 밥이 맛있는 것 같아. 이거. 아 참 이런 이야기, 뭐 어떻게 목사님 하실 건가요? 내 주제에 이 죄인의 입장에서 오늘 밥은, 반찬은 너무 잘된 거 같아. 고맙소. 이 나이 먹도록 내가 아내를 몰랐나봐.

그게 뭐냐 하면 자기가 죄인이니까 모든 게 과분한 거예요. 강아지 있다가 죽었다. 그래, 그동안 잘 살아줘서 고맙다. 하고 쓰레기통에 갖다 버리면 되죠. 모든 게 우리 보기에는 나한테 손해라 하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과분한 거예요. 왜? 이미 생명을 얻은, 성령 받아서 천국 백성으로 파견근무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신앙생활 애초부터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오로지 사랑관계, 그것 뿐인 것을 이제는 우리가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너무나 큰 사랑받았기에 세상에서 욕을 먹는 것도 도리어 감사하고 기뻐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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