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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12 00:33:47 조회 : 250         
양과 목자 베드로전서 5:2 210311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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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림(IP:124.♡.211.180) 21-03-13 06:33 
서울의존강의2021311a 베드로전서5장 2절(양과 목자)-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5장 1절-4절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이 말씀 중에서 목자, 장로 또는 목자장이라는 말이 등장하죠. 목자장이라든지 장로 또는 목자는 전부다 양과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양과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지는데 여러분들 보기에는 ‘~하라’고 나와 있죠. 방금 한 것이 자칫하면 ‘1. 해야 할 일’ 이처럼 이해됩니다만 해야 될 일이 아니고 ‘2. 일어나는 일’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어떤 지시가 해야 될 일이 되어버리면 그 일의 성사가 인간들 손에 맡겨지게 되겠죠. 그러면 인간이 실패했다면, 인간의 손에 맡겼는데 목자에게 제대로 양 돌보라 했는데 제대로 양 못 돌보면 그럼 손해는 누가 봅니까? 주님이 손해 보는 일이 벌어지겠죠.

인간들은 ‘목자노릇 제대로 하려고 했는데 여건이 안돼서 못했습니다.’ 이렇게 하고 뒤로 빠져버리면 하나님께서 ‘아이고, 교회가 교회답게 되어야 되는데. 또 일꾼 없나? 아 또 내가 일꾼 찾아야 되나? 맡길 사람이 없네.’ 주님께서 막 머리 싸매고 고민하셔가지고 그렇게 일을 진행시키는 분이 아니거든요.

왜 그러느냐 하면 이 목자 이야기, 장로 이야기, 목자장 오실 때 양들을 제대로 섬기라는 이 모든 이야기가 무엇에 관한 이야기냐 하면 ‘부활의 상황 속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부활의 상황 속에서. 부활이라는 것은 예수님, 십자가 지신 분이 사흘 만에 부활한 거죠. 이렇게 보게 되면 그 부활의 상황이 예수님 개인한테만 국한되는 일처럼 보이잖아요. 그런데 신약성경, 사도행전이나 마태, 마가, 요한, 누가복음을 읽어본 사람은 예수님의 자기 부활을  누구한테 자꾸 알려요. 특히 요한복음 21장 같은 데를 보면 일곱 제자들에게 한꺼번에 나타났죠. 마지막 세 번째 “베드로야 네 양을 먹이라”할 때, 나타났단 말이죠.

오늘 초반부터 이것을 분명히 하셔야 돼요. 부활의 상황이란 것이 뭐냐고 물으시면 이 세 글자로 여러분들이 딱 박힐 수가 있어야 돼요. ‘일관성’. 일관성이에요, 부활의 상황은. 일관성이라는 것은 누가 일을 잘못했을 때 차질이 날까요, 안 날까요? 일관성은 차질나지 않습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오늘 베드로전서 5장에서 목자 이야기, 양 이야기, 목자장 이야기, 장로 이야기, 양들을 섬기라 너희들이 주장하지 말고 섬기는 자세로 하라고 할 때 딱 듣는 사람들은 우리 교회가 해야 될 일로 이렇게 이해가 된다 이 말이죠, 명령이니까. 하지만 그 상황이 어떤 상황이냐 하면 부활의 상황이에요, 부활.

자, 부활의 상황이라는 것을 무엇으로 표현하면 좋으냐면 ‘무덤을 여는 것’이에요. 부활이라는 것은 무덤을 여는 일입니다. 완전히 감이 다르죠?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 자신의 무덤이 열려서 거기서 살아나온 거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부활을 사적인 부활로 마감하는 것이 아니고 계속 부활을 사도바울이나 500명에게 줬죠. 그러면 부활을 받은 사람은 이미 자기 무덤에서 본인이 기어 나온 거예요. 그게 성령 아닙니까, 성령.

십자가 부활 없이 성령이 일 합니까, 안합니까? 안하죠. 성령은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을 그대로 재현해서 자기 백성에게 적용시키는 일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께 무슨 일이 일어났죠? 영어로 할까요? What happened? 예수님께 무슨 일이 일어났죠?

토지공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직원들이 토지 투기했잖아요. 걸린 것만 일곱 명인데. 토지공사 현재 밝혀진 것만 일곱 명인데 지금 조사받는 사람은 만 오천 명이란다, 뭐 이렇게 되는데. 토지공사에서 What happened,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러면 예수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몰라. 예수님에게 일이 일어나든 말든 나와 무슨 관계있나. 나는 토지공사 투기한 게 어느 땅인지 그것만 관심 있다.

이렇게 되면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그 부활의 일관성이 계속 인간들 쪽에서 내 쪽에서 살아있지를 못하는 겁니다. 외면해버렸으니까. 관심을 딴 데 돌렸으니까.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난 뒤에 무슨 일을 하셨는가. 부활이라는 것은 다시 말씀 드리면 무덤을 열어젖히는 일이에요. 더 이상 사망이 그 사람을 잡아둘 수가 없었던 겁니다, 사망이. 가스펠 송 가사에도 나오죠. 사망이 그 사람을 붙들어 둘 수가 없는 거예요.

옛날 우리나라 고전영화 신파극에 보면 <미워도 다시 한번>이란 게 있죠. 그 영화에서 남자가 못됐어. 굉장히 못돼가지고 여자가 이용당하다가 나중에 용기 얻어서 남자가 이제 와서 ‘가지마라’고 할 때 여자가 하는 말이 ‘놔라’. 문희입니다. 신영균이 붙드니까 문희가 놔라. 하고 붙잡을 수가 없는 거예요. 방금 제가 뭐가 못 붙잡는다고 했습니까? 사망이 붙잡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베드로전서 5장 말씀은 목자가 되라, 양을 쳐라, 이것은 인간이 해야 될 일이 아니고 2번,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그것을 부활의 일관성 또는 부활 상황의 일관성이라고 하는 거예요. 여기에 인간들의 행함은 끼어들 자리 없습니다.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서 부활 상황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교회들이 부활을 언급하면서 그것을 무엇으로 다 전환시켰어요? 인간 대 인간의 상황으로 다 전환시킨 겁니다. 전부다 엉터리죠.

인간 대 인간의 상황으로 우리 서로 목자가 목자답게 합시다. 베드로전서 5장에 보니까 목사 된 사람은 더러운 이를 위하지 말고 자기 즐거운 뜻으로 하고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본이 되어서 충성을 다합시다. 목자장 올 때까지 충성을 다합시다. 라고 여기 나오는 이 말씀을 부활의 상황이라는 것은 쏙 빼버리고 또다시 예수님 십자가 부활은 있거나 말거나 모르겠고 교회라는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그냥 인간 대 인간들끼리 서로 설득하고 격려하고 독려하고 힘주고 간섭하고 위에서 지시하고 밀어붙이는 것. 그래서 등장한 게 소위 목자들이잖아요, 목자들.   

처음부터 다시 합시다. 베드로전서 5장을 하고 있는데 5장을 보게 되면 “장로들아 양을 잘 섬기라”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나도 장로로서 고생 많이 했다. 그러니까 잘 섬기라. 그랬을 때 듣는 사람이 제대로 된 목자, 제대로 된 장로가 되려면 이것은 인간 대 인간관계에서 수립하면 된다고 오해한다 이 말이죠. 그렇게 되면 일이 안돼요. 인간 대 인간관계가 아닙니다, 부활 관계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은 그냥 부활해서 팔짱끼고 가만히 지켜보는 게 아니에요. 부활의 영을 뭐라고 하느냐면, 들어나 봤습니까, 성령. 성령이거든요. 성령은 저와 여러분들의 개인적인 무덤 뚜껑을 열어제끼는 거예요. 더 이상 나의 죽음이 나를 붙잡지 못하게. 가지 마오 가지 마 예~해도 소용없어요. 죽음이 우리를 붙들고 너는 죽음이 겁나지 않느냐. 제발 죽음과 바이바이하지 마. 가지 마오 가지 마 예~ 백날해도 놔라 이거. 부활의 영이 성령이거든요. 무덤 뚜껑을 연 거예요. 관 속에 들어갔다가 후다닥 튀어나온 겁니다. 더 이상 무덤의 관이 나를 덮지 못하게.

바로 그 자들이 누구냐. 그 자들이 바로 양입니다. 그럼 목자는 어디 있나? 목자는 없죠. 순서가 목자장이 목자 줘서 목자가 양을 섬긴다, 이 순서가 아닙니다. 중간에 끼어들 자리가 없어요. 목자 있고 양 있고 끝이에요. 그럼 원형 목자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잖아요. 예수님 계시고 양 있고. 그럼 됐잖아요.

그러면 여기 나오는 목자 또는 장로는 중간에 끼어든 거죠. 중간에 끼어든다는 말은 나 장로야, 나는 양 돌보러 왔어, 나를 무시하지 마. 이게 아니고 그 사람이 진짜 우리를 섬기는 목자인지 장로인지 하는 것은 누가 결정하느냐 하면 바로 좀 전까지 없었던 양이 결정하는 겁니다. 중요한 거예요, 양이. 목자는 양이 결정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양다운 양이 없을 때는 어떤 목자만 들끓겠습니까, 이력서 내겠습니까? 사탄의 종들만 이력서 막 들어오는 거죠. 양이 양답지 못할 때. 그런데 양이 양다우면, 다시 말해서 양이 성령을 받아서 더 이상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고 이미 죽음과 바이바이한 사람, 그런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성령의 안목으로 보겠죠. 그러니까 목자냐 아니냐는 누가 알아봐요? 양이 알아보는 거예요.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목자는 양을 알고 또 양은 목자를 알아요. 누구의 지시나 명령이 전혀 필요치 않습니다.

나 총신 나왔다. 나 장신 나왔다. 장신은 방배동 신학교, 총신은 사당동 신학교라 해요. 장로교의 양대 전통 있는 신학교. 총신 나왔다. 총신 중에서도 너는 어느 계열 나왔느냐. MDB냐 PHM이냐 있어요. 진골 따로 있고 밑에 계층들이 또 있어요. 백날 나와서 라이센스, 자격증 얻어가지고 나는 이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측 총회에서 인정해주는 목사다 하고 자격증을 딱 내밀거든요. 그럼 진짜 양 같으면 어떻게 생각합니까? 어쩌라고. 뭔데 이거. 찌익. 자격증을 쪽 찢어요. 뭐 어쩌라고. 성적 떼와서 all A다. 그 all A 바이바이해라, 쪽 찢어버렸습니다.

양이 목자에게 묻는 것은 딱 하나에요. “당신, 양입니까?” 그겁니다. 다시 말해서 “당신은 목자 아니죠? 양입니까? 당신의 무덤 뚜껑이 열렸습니까?” 이거 묻는 거예요. 성령 받은 양이 목사를 고를 때는 당신, 양이 맞아요? 왜냐하면 목자는 한분으로 족합니다.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족하기 때문에 목자는 필요치 않아요. 그런데 예수님 쪽에서 필요에 의해서 보낸 사람이 있을 거란 말이죠, 양들을 섬기라고 양들을 돌보라고.

이야기 다시 합시다. 목자와 양이 구축되어 있죠. 오늘 본문대로 하면 목자장과 양은 구축되어 있죠. 이것은 성령에 의해서 교제가 되죠. 그러면 목자장 되시는 예수님께서 필요에 의해서 목자를 보낼 경우가 있잖아요. 그러면 그것은 나는 주님이 보냈다고 우길 게 아니고 그 검증을 누구에게 받아야 된다는 말입니까? 양에게 받아야 되죠.

양이 “당신 목사요? 당신 목자입니까?” 묻는 게 아니고 “당신 양이요?”라고 묻는 거예요, 질문을. 그러면 목사가 “나는 양 아니야. 목자야. 나 총신 나왔어.” 이러면 처음부터 목자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금 모르고 있는 거예요. 목자는 양에서 나오는 거예요. 양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목자가 나오는 겁니다.

처음 출발점을 묻고 있는 거예요. “당신, 양이요?” “양입니다.” “그럼 당신은 죽어도 괜찮죠?” 대번 이런 질문 나와야죠. “우리 교회 당신 월급 한 푼도 안주고 죽으라면 죽을 거야? 그래도 오케이? 콜?” 그러면 미쳤나. 뭐 고린도전서 뒤적뒤적해가지고 소가 뭘 갈아서 일한만큼 뭘 주고 먹여야 사료를 줘야 일할 거 아니냐 이 본문 대고. 그럼 양이 있다가 당신이 뭐 줬는데? 당신이 우리한테 뭘 준 적이 있기는 있어? 우리한테 뭘 줬는데? 설교 들어봐야 내가 보니 아무 것도 안 주던데 뭐. 총신 때 배웠던 신학이나 나불대고 있고 신학이나 썰을 풀고 있지 뭐. 뭘 줬는데? 준 게 있어야지. 준 거 내놔봐.

목자 또는 목사는 양쪽에서 다 인정받아야 돼요. 주님에게서 혼자 은혜 받았다고 인정받았다 하면 안 되고 양들에게도 인정받아야 돼요, 양들에게도. 야, 저분은 설교 잘한다. 그렇게 인정받는 게 아니고 저분은 주님이 보내셨다. ‘저분은 주님이 보내셨다. 우리가 그 분 섬기라고 보낸 게 아니고 그분이 목자가 우리를 섬기라고 주님이 보내셨다’가 되는 거예요.

따라서 교회에 필요해서 장로나 목자가 있는 게 아닙니다. 교회는 결과적으로 나온 거예요. 목자장 되신 예수님 있고 양 있으면 벌써 교회에요. 이 교회를 위해서 주님께서 목자를 보냈다면 이미 구축된 양과 목자 사이에 양의 일부로서, 지금도 양이고 계속 양이면서도 목자 되는 은사를 발휘하는 사람을 하나 첨가하는 거예요. 그럼 기존에 있는 교회가 맨 그 교회가 되는 거예요.

새삼스럽게 눈에 보이는 교회 뭐 하겠다고 합동측 나온 목사 모시고 위임식해가지고 이웃 동네 목사 불러다가 마지막 하이라이트, 교인들 다 일어서게 해가지고 이제부터 맹세합니다. 여러분 손들고 하나님 앞에 맹세하세요. 여러분들이 위임한 목사에게 월급 따박따박, 따박따박이라 안하죠, 용어가 달라요, 의수히(정한 수에 따라서), 이름도 어려워요, 의수히 여러분들이 드리겠습니까? 제일 중요한 순간이 그 순간이에요. 여러분들이 위임목사 했으니까 정해놓은 월급을 제대로 의수히 기꺼이 드리겠습니까? 예. 그 다음에 부록으로 사모님한테 한복 한 벌, 목사님한테 양복 한 벌. 요새 한복 누가 입는다고... 옛날 촌에는 그랬어요. 갑자기 옛 추억이 밀려오는 것 같아.       
                   
 왜 위임식을 하느냐 하면 교인들이 이제는 자기 목사를 못 쫓아내게 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 맹세했기 때문에. 그 말은 뭐냐 하면 목사로 하여금 이제부터 교인들을 사람으로 보지 말고 그냥 발라먹을 양으로 생각하라. 그냥 양이 아니고 발라먹을 양. 찢어먹고 볶아먹고 뜯어먹고 뭘 해도 교회에서 입 다물 테니까. 내가 무슨 짓을 해도 교회라는 그 부동산, 부동산이면 돈이죠, 교회라는 부동산, 사택이라는 부동산, 의수히 드리는 1년 연봉, 매해 자동갱신 되니까 1년치 연봉에 대해서는 이미 권리를 위임목사에게 위임했으니까. 그냥 목사가 아닙니다. 목사는 목사도 아니에요. 위임목사가 되어야 목사다워요. 그냥 까분다고 다가 아니고 연~예인이 되어야 연예인이거든요.      
                     
아, 목사 위임식 할 때 목사 일가친척들이 얼마나 좋아들 하는지. 만약에 자기 동생이 목사 되었다 하면 누나가 너 마, 이제 땡잡았어. 쉿, 다른 데서 들으면 안 되니까. 너 이제 성공한 거야. 다시 말해서 동생 어렵다고 누나가 돈 대줄 일은 이제는 끝난 겁니다. 못 사는 동생, 돈 대줄 필요 없어요. 교회가 발라먹고 뜯어먹고 찢어먹고 볶아먹고 다 가능하니까. 그리고 뒤에 축도하는 목사가 마지막 결정적 멘트를 날리는 게 뭐냐 하면 주의 종을 건드리는 사람은 저주를 받는다. 아주 인테리어 마감재를 반듯하게, 주의 종을 건드리면 저주 받는다.

그걸 보고 후배 목사들이 뭐를 노리겠습니까? 주여, 나도 빨리 졸업해서 위임목사 되어야지. 빨리 이력서 많이 내서 위임목사 되어야지. 그게 희망이에요. 희망이고 교회가 안정되어가면 이제는 차, 사택, 전부다 교회근처 사택 말고 따로 나가가지고 아파트. 교회에 있으니까 짜증난다. 따로 마련해달라고 해서 아파트 그거. 온갖 누릴 것은 다 누리고 한 1년 지나면 설교밑천 다 떨어졌잖아요. 2년째는 부흥사로 밀어붙이고 3년째는 이웃목사한테 전화해서 우리 교회 바꿀까? 바꾸면 그 짓을 저기 가서 또 할 수가 있거든요.

그 위임식 할 때 이 본문을 거론해요. 마치 위임해주는 시찰장이라든지 노회장이 목사 편에 들지 않고 마치 양들 편에 든 것처럼 온갖 미사여구를 다 합니다. 여기 한번 볼까요? 2절에,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런데 여기 나오는 단어들 있잖아요. 이 단어 개념을 오직 목사들만 알고 있다는 겁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걸 일반 교인들은 이 단어가 뭔 뜻인지 몰라요. 목사들끼리 통하는 특별한 단어사슬이 또 있어요, 이게. 맡긴다는 게 무슨 뜻이며 섬긴다는 게 무슨 뜻이며... 그 모든 뜻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교인들이 순진하게 생각하는 아랫사람이 위를 섬긴다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섬긴다는 의미가. 너무 심하게는 다루지 마세요, 이 뜻이에요. 너무 심하게 다 발라먹지는 마세요, 그런 뜻이에요. 좀 적당히 눈치껏 발라먹으세요, 하는 그런 뜻이라니까요. 지금 동의를 안 하니 강의 진도가 안 나가네, 참내.

여러분들이 선뜻 동의 안 되는 이유는요, 이 두 차이를 여러분 한번 보세요. 첫 번째, 부활의 영을 받았습니다. 부활의 영은 무덤이 열렸잖아요. 무덤이 열려서 무덤에서 튀어나온 사람이에요. 사망이 더 이상 붙잡을 수 없어요. 그 무덤은 사망이었어요. 사망에서 벗어난 사람. 두 번째, 아직 사망에서 벗어나지 않은 사람.

둘 사이의 차이가 뭐냐 하면 아직 사망에서 벗어나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든 타인을 이용해서 누가 밥 빌어먹고 살려고 합니까? 사망에서 안 벗어나니까 뭔가 틈만 보이면 돈 빼내가지고, 사망에서 안 벗어났으니까, 계속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야 되는 거예요. 이게 그 사람의 본성이니까요.

여기 베드로전서 5장에 보면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했잖아요. 이 말씀을 그대로 해석해서 이익을 취하는 거예요.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더러운 이익을 취하지 않기 때문에 돈 내라 이 말이에요.

왜냐하면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베드로전서 5장 이 말씀 그대로 행동에 옮길 테니까 돈 내놔라 이 말입니다. 나는 주님이 인정하는 참된 목자이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위임식 할 때 어느 목사가 이야기합니까? 어느 목사가 이야기해주겠어요? 그 다음 차례가 지 차례인데 어떻게 그 조직사회에서요.

조직사회에서 정의? 그럼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너 혼자 정의하나? 이 바닥이 어떤 바닥인데 네가 철딱서니 없이. 너도 한 몇 년 굴러봐. 너도 똑같아. 네가 수고하면 양들이, 교인들이 알아줄 것 같아? 택도 없는 소리 하지 마. 안 알아줘요. 왜냐하면 양이 양이 아니기 때문에. 둘 다 똑같아, 양이 양이 아니기 때문에. 만약에 목사가 고생하잖아요. 거의 최저 임금도 안 되는 걸 받으면 양들이 그걸 알아줄까요, 안 알아줄까요? 알아준다? 택도 없는 소리입니다.

모든 인간은 기본이 무덤에서 열고 나온 사람들이 아니에요. 부활의 관계에서 성령 받았다 할지라도 한 번 성령 받은 것으로 나는 이제 어찌 됐든지 목자다, 라고 안돼요. 계속해서 성령께서 꾸준히 이 베드로전서 5장이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그 사람을 쳐야 되는 겁니다.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오늘 제목으로 할까, 제목으로 하기에는 좀 천박스러운데 <째려봄>. 째려보는 거예요.

인간의 주체, 인간의 자아를 규정할 때 가장 기본이 뭐냐 하면 째려보는 겁니다. 주시하는 거예요. 지켜보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 어른부터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어린아이부터 태어나죠. 어린아이를 바라볼 때 세 가지로 봅시다. 오늘 1,2,3 많이 나온다. 부모님이 1. 따스한 눈길을 아이에게 보낸다. 2. 전혀 아이에게 관심 두지 않는다. 3. 과도하게 아이에게 관심 둔다. 이 이야기하니까 갑자기 사자머리 교수 생각난다. 아동 심리하는 오 박사.

만약에 엄마가 직장생활 한다든지 무슨 이유 때문에 아이한테 정을 안주는 경우가 있어요. 어느 소설책에 보면 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 아가씨가 있었는데 주둔한 미군이 그 프랑스 아가씨를 사랑한다고 이야기했어요. 그래서 그 여자는 남자가 자기를 사랑하는 줄 알았죠. 주둔하니까 나라가 미군한테 그냥 다스림을 받는 그런 형편이었어요. 기가 죽었어요, 프랑스 국민이 미군한테. 전승국이니까 해방시켜줬으니까. 그런데 어느 날 술 먹고 그 남자와 같은 군인 동료들이 프랑스 여자를 좀 안다는 것을 빌미로 해서 강간을 해버린 겁니다, 집단으로. 그 남자부터 해서 그 동료들이. 그럴 때 그 여자가 임신이 되었어요. 임신이 되고 난 뒤에 아기를 낳았는데 그 아기 엄마인 프랑스 여자는 자기 아기를 보고 싶지 않은 거예요. 왜냐하면 그 아기 눈에서 자기를 폭력적으로 덮쳤던 그 남자의 눈동자가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아기를 거부하는 겁니다. 그 여자는 자기의 과거 아픔 때문에 그렇게 한다 치고 그럼 그 아이는 어떻게 돼요? 아이는 전혀 엄마의 관심을 못 받죠? 이게 뭐냐 하면 자폐증이에요, 자폐증, 정신분열 이렇게 되는 거예요. 과도해도 마찬가지에요. 과도해도 문제가 돼요.

인간의 눈을 그려보겠습니다. 눈이 무엇을 지켜보는데 지켜볼 때, 눈---a'(이미지)---a, 어떤 이미지를 보면서 방향이 있어요. 방향이 삼각형(Ø▷눈)이 되어가지고 Ø, 헬라어로 타이인데 이것이 뭐냐 하면 그 미지의 욕망을 달성한 그 무엇이 있다고 보고 그것을 지향하는 겁니다.

모든 인간이 다 그런데 왜냐하면 어릴 때부터 엄마의 시선이 자기한테 왔고 자기는 그 시선에 대해 마중을 나오면서 아이는 자아의식이 드디어 굳어지게 되어 있어요. 따뜻한 보살핌, 이런 것으로 인간의 자의식이 형성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게 만약 없으면 커서도 누가 자기를 째려본다든지 주의 깊게 봐버리면 자기가 감당을 못해요. 보지 마세요. 나를 관찰하지 마세요. 나를 주목하지 마세요. 하고 자꾸 기어들어가는 거예요. 눈 맞춤이 안 되는 거예요, 눈 맞춤이. 눈 맞춤이 안 되고 중간에 어떤 협상, 타협안이 제시되어야 되거든요.

여기서 누가 미지의 것이 왔을 때는 인간은 전적으로 감당이 안 되기 때문에 이 중간쯤, 이 삼각형(▷)에다가 이쪽에서 밀어내는 삼각형(◁) 이 겹치는 중간에 스크린이 발생되고 이 스크린까지 도달하고 그 다음에 넘어갈 생각을 안 합니다. 여기서 적당하게 협상하고 타협합니다. 숙제 해. 숙제 많이 했는데. 조금만 해. 오케이. 타협됐죠. 타협했잖아요.

‘나’에서 타협안까지가 자기가 할 수 있는 범주로 정해지는 겁니다. 이것을 응시로 인한 자아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응시, 누가 지켜보는 것, 그 시선에 대해 마중을 나오는 것. 그런데 항상 이렇게 타협을 해야 될 이유가 저 미지의 것이, 내가 감당 안 될 정도로 무섭고 공포스러운 것이 나에게 늘 덮친다는 것에 대해 우리는 늘 불안불안한 거예요.

그러면 덮치는 것이 왜 불안하냐. 모든 평소의 우리 행동이 나를 지키고 나를 살리려 하잖아요. 그런데 미지의 것이 덮쳐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나는 죽죠. 어떤 분은 젊을 때 두 번씩이나 강도를 만나서 지금도 공황장애를 일으켜서 기차도 못타고 비행기도 못타고 심지어는 버스도 잘 못타고 기껏 타면 택시타고. 어디 가려면 돈 많이 들어요. 공황장애라 하는 것은 공항에 못 간다는 뜻이 아니고 공황. 자동적으로 발작을 일으키는 거예요, 몸이. 벌벌 떤다든지 새파랗게 된다든지 어떤 사람은 높은 데에 못 가는 사람도 있잖아요.

그게 뭐냐 하면 몸은 자동적으로 나를, 생명을 지키려는 본능이 있어요. 그런데 지키려고 하는 이것이 어떤 협상카드나 내 쪽에 대안이 제시가 되어야 될 건데 내 쪽에서 나오는 대안은 없고 외부의 것은 밀어붙이니까 몸이 본능적으로 감당을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모든 것은 정신적 문제라 하는데 문제는 정신이 육신의 변화를 초래한다는 게 문제에요.

그냥 정신적으로 정신 차려라,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이러고 아무것도 아니고 끝나면 좋겠는데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보다 몸이 먼저 반응을 일으킨다니까요. 뭐 얼굴이 새파래진다든지 심지어 졸도하고 기절하고 죽어버리고 그래요, 비틀거리고. 차 타고 가다가 비틀거리면 큰일 나죠. 보통 문제 아니죠. 아 그냥 육체와 분리된 정신만의 문제가 아니고 신체가 정신에 억압되어가지고 자동으로 반응을 나타내는구나.        
   
자, 그렇다면 이런 일의 좋은 예가 무당들의 굿판입니다. 무당들의 굿판은 원래 소비자가 있기 마련이죠. 좀 굿 한판 해주세요. 그렇게 요청이 먼저 들어와요. 무당이 동네방네 다니면서 딩동~굿 한판 해드릴까요? 이런 무당 없어요. 무당들은 아주 깊숙한 데 있어도 일부러 소문 듣고 찾아가죠. 신 내림 받았다는 소문 들으면 찾아가는 거예요. 굿판 해달라고.

그러니까 굿판은 뭐냐 하면 그 사람에게 알 수 없는 유령이 온다는 거예요. 유령이라는 것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까지 감당하면서 살아왔는데 이번에 내 인생사에 터져버린 일은 내가 감당할 엄두가 안 나는 거다. 나의 본성은 내가 나를 지키고 더 살아야 된다는 살 일이 남아있는데 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난처한 일이 내 목을 조르고 정신적으로 압박을 가하니까 견디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 때는 굿판 벌이는 겁니다.

자, 굿판 벌일 때 무당들이 무슨 짓을 하느냐 하면...저기 귀신이 있습니다. 귀신을 한자로 ‘가’라고 하는데요, 귀신 있습니다. 그 귀신이 지금 쳐들어옵니다. 그럼 중개인으로서 무당이 귀신에게 눈요기 감을 제공하는 거예요. 온갖 천박한 색깔 있잖아요, 염색약 다양하지 않을 때 나왔던 원색적인 것, 특히 빨강색, 노랑색, 노랑색 염색도 잘하는 데 좀 하지, 분홍색도 아니에요, 파랑색 해가지고 온 깃대를 꽂아놓고 장대를 해놓고 거기다가 옷도 삼원색으로 해서 거기서 작두, 발 안 베일라고 일부러 뭉툭한 작두, 발 베어서 병원에 입원하면 지만 손해에요. 여기서 춤을 추면서 청중들도 놀라고 따라온 같은 엔터테인먼트 소속된 조가 같이 미치고 온 관람객들 같이 미치고 환자도 미치고 다 미쳐가지고 정신을 쏙 빼놓고 그 다음에, 귀신 물러갔습니다.

유령들에게 눈요기 판 해서 심술들을 완화시키는 이것을 가지고 네 자로 무당들의 ‘진정효과’라 해요. 진정하는 거예요. 애들 말 안 들으면 집에 생각의자 놔두고 앉히죠. 릴렉스 릴렉스 컴 다운~진정효과 하는 거예요. 애가 발작을 일으켰으니까 진정하는 거예요.

그거나 새벽기도 나가 기도해서 쭈여 쭈여 한번 흔들다가 조금 있으면 조용하게 되어버리죠. 자는 건지 아니면 기도 중얼중얼하다가 30분도 안 돼서 전부다 자요. 목사님, 이제 새벽기도 끝나서 들어가야 되는데. 아이고 뭐 이래서 침 이만큼 흘려가지고 보람찬~ 오늘도 새벽기도 했다고. 오늘 38일째, 39일째 카운트 들어가요. 그 카운트 왜 합니까? 39일째가 마지막이에요. 40일은 건방지다고. 예수님이 40일 금식했는데 지가 예수님과 동등된다고. 맡기운 자에게는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않고 이거 스스로 윤리 도덕적으로 겸손한 티를 내면서 그 짓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뭡니까? 무덤을 열고 나오는 영이 없어서 그래요. 성령이 없어서 그래요.

교회 운영은 해야 되겠지, 성령 받은 양은 없지, 사람은 끌어 모아야 되겠지. 그럼 하는 방법은 뭡니까? 기독교식 무당을 도입하는 거예요. 인간이 뭔가 조용하게 살다가 파란이 일어나게 되면 인간은 한없이 나약해지고 어쩔 줄을 모르거든요. 정신 나가죠. 뭐라도 붙들고 싶은 거예요.

예수든 하나님이든 무당이든 뭐든 하여튼 나를 좀 calm down, 안정되게만 해준다면 굿판 돈은 내가 심심치 않게 하겠습니다. 병원에서 손 놓은 환자를 무당들이 데려가서 안정시키는 겁니다. 안정시킬 때 보통 500만원 들어간다고 보거든요. 500만원 돈 낸 소비층이, 무당 지들이 500만원 받고 별로 하는 일 없다고 하는데 현장에 가보세요. 아니 이거 500만원 값을 하네. 값을 하죠. 얼마나 그동안 두 달 동안 못했던 체중조절 다한다고 전부다 뛰고 흔드는데 필라테스가 따로 없어요. 마구 흔들면 쏙 빠지죠. 빠지면서 신나게 땀 흘리고 고함은 고함대로 질러서 목 다 쉬고. 역시 정말 신 내림 받은 사람 맞다.

그 신 내림이나 부흥사들이 부흥회 돈 내라고 고함 질러서 목 쉬는 거나 차이가 뭐 있습니까? 똑같은데. 믿씁니까? 이거하고 차이가 뭐가 있는데요? 따라서 사람들은 성령 받은 사람 찾는 게 아니고 상담가를 찾아요, 상담가. 무당을 찾습니다. 교회는 운영을 그렇게 해야 되는 거예요. 무당답고 상담가를 찾으면서 카리스마 받았다, 이렇게 얘기해요. 영빨 센 목사, 그들끼리 그렇게 통용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알고 싶다. 이제는 알려주마. 

예수님만 있어도 충분해요. 예수님만 있어도 충분합니다. 예수님은 공황장애 있다는 이유로 지옥 안 보냅니다. 왜냐하면 공황장애라도 이것은 우리가 고쳐야 될 우리 일이 아니고 일어나야 될 일이기 때문에. 그건 성령 받아야 알아요. 성령 받아야 내가 이거 ‘나한테 문제 있다’가 아니라 처음부터 인간은 문제 있기 때문에 아예 인간에게 뭘 요구하지 않아요. 문제 있는데 뭘 요구해요? 죄인이 스스로 개과천선할 것 같으면 십자가 왜 졌습니까, 성령 왜 옵니까? 주님께서 죽었다가 부활하는 귀찮은 일을 왜 했겠어요?

이 세상에서 인간이 어떤 일을 해도 하나님은 안 받아줍니다. 이 지상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도 똑같이 그것은 다 쓸데없는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집에서 민화투 화투치는 일도 쓸데없는 일이고 판사가 재판하는 것도 쓸데없는 일이고 목사가 설교하는 것도 쓸데없는 일이고 의사가 병 고치는 것도 쓸데없는 일이고 전부다 동일한 일이에요. 전부다 똑같이 하늘나라에는 전혀 가치 없는 똑같은 일이에요.

인간이 했기 때문에. 인간이 하는 일은 어떤 경우라도 그것을 하나님의 목자의 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양이 아닌 목자는 목자가 아니거든요. 어떤 일도 양의 일로 하지 않습니다. 양은 일하지 않습니다. 양은 오직 주님만 양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주체가 내가 했다가 아니라 ‘주께서 하게 하셨다’. 주께서 공황장애 만들어 주셨다. 주께서 나한테 관심도 두지 않는 엄마를 만나게 해줬다. 난 그 엄마를 통해서 주께서 태어나게 하셨다. 모든 것의 주어를 주님께 다 돌려야 돼요, 모든 것을.

따라서 예수님이 등장하지 않는 한 이 땅에 양은 없습니다. 주님이 먼저 계시고 그 다음에 양들이 나오죠. 그 주님께서 무슨 일을 하셨느냐 하면 죽었다가 부활했습니다. 그것을 주님 자신의 일로 스톱, 마감했습니까? 아닙니다.

없는 양을 만들기 위해서 주께서 부활의 영을 천하 죄인에게 주니까 세상에 하루 아침에 그 죄인이 양이 되고 말았어요. 김양, 최양, 박양 양이 되고 말았어요. 더 이상 진정효과란 건 필요치 않습니다. 그건 성령 안 받은 자들이 추구하는 거예요. 상담? 무슨 상담이 필요합니까? 뭘 노리고 상담해요? 어쩌겠다고 상담합니까?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부활은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서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부활의 핵심이 뭐냐. 지금 세 번째 이야기합니다. 아까 들은 사람 이야기해주세요. 부활의 핵심은 뭡니까? 일관성이에요, 일관성. 초지일관 한결 같아요. 양이 혼자 있을 때나 목자가 올 때나 하나님의 일은 초지일관 똑같이 변동이 없습니다. 변동 없게 하기 위해서 목자를 보낸 거예요. 양 중에서 목자를 뽑아서 그 양을 치게 하는 이유는 주님의 완성된 다 이루심을 이루심답게 초지일관 유지하라고 목자를 보낸 겁니다. 그 내용이 뭘까요? 10분 후에.
 이하림(IP:124.♡.211.180) 21-03-13 06:33 
서울의존강의2021311b 베드로전서5장 2절(양과 목자)-이 근호 목사

부활의 상황은 일관성이다. 대체 이게 무슨 얘기냐. 무엇에 해당하는 일관성이고 어떤 내용의 일관성이란 말이냐. 그게 사도행전 20장 28절에 나옵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감독자 나오죠, 베드로 감독자, 사도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자, 여기 일관성 나옵니다. 일관성은 뭐냐 하면 부활은 반드시 피를 경유해야 된다는 거예요, 피.

‘나 이제 죽음을 이기는 영을 받아서 나 살았다’가 일관성이 아니라 ‘나 살았다’가 일관성이 아니라 내 안에, 산 사람 안에 일관성 있는 요소가 들어가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 우리 죄를 대신해 흘리신 피의 일관성. 피의 일관성이 없어버리면 이것은 예수님의 적입니다. 아까 첫째시간 끝부분에 이런 이야기했죠. 이 세상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일이 아닌 이유는 이 세상에 어떤 일을 해도 거기서 피를 생산 못해요. 간단하죠. 피를 생산 못한다고요.

목사가 설교할 때 피를 전했고 양들은 그 피를 들었다. 그러면 그게 교회냐. 아니요. 그건 그냥 이야기 들은 거죠. 그게 아니고 들었던 양이나 전하는 목사나 피의 고난을 경유해야 돼요. 그래서 아까 본문 베드로전서 5장에 보면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 다음에 그리스도의 무엇의 증인이라 합니까?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고난의 증인이에요.

고난하면 반길 사람 아무도 없죠.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 고난이라는 것을 경유하지 않으면 장차 하늘의 영광에 참여 못하는 사람이다 이 말이죠. ‘네가 고생 했구나’가 아닙니다. 일관성. 피의 일관성이에요. ‘베드로야, 네가 고생했으니까 천국 넣어줄게.’ 이게 아니고 베드로가 해야 될 일이 아니고 베드로에게 일어날 일이라니까요.

처음에 제가 적어놨잖아요. 부활이라는 것은 우리가 해야 될 숙제가 아니라 이것은 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필연적으로 일어날 일이에요. 필연적으로 일어나니까 그게 일관성이에요. 누가 격려한다고 일어날 일이 아니고 누가 방해한다고 금지될 것이 아니고 무조건 무조건 무조건 일어나야 될 일이 일어나는 그 일관성. 일어남의 일관성. 그것이 바로 주의 일이 되는 겁니다, 주의 일.

이 이야기가 엄중해야 될 이유가 사람들의 본능 상 자기 자신을 구원시키려 하거든요. 틈만 있으면 머리 굴리는 것이 어떻게 하면 천당 가느냐 자꾸 자기 살 궁리를 하는 거예요, 자기 살 궁리를. 그러다 보니까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 본인이 결정을 내려버리면 이것은 피의 고난에 참여한 자가 아니라 자기가 알아서 가려낸 셈이 돼요. 그것은 피의 일관성, 부활의 일관성, 십자가의 일관성이 아니라 나(자아)의 일관성이에요.

아, 이 지독한 인간의 본성이죠. 나의 일관성. 전에는 참 행복했었는데 지금은...이렇게 되거든요. 그러니까 이것은 지난 날의 나와 지금의 나와 자꾸 일관성을 유지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것도 좋은 일관성. 그 때는 참 행복했고 항상 웃었고 감사가 많았다. 고마워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게 없어요. 어쩌면 좋아요. 어쩌면 좋긴, 그조차도 주의 일로 생각하면 되지.

그것조차도 주님의 피의 일관성이잖아요. 피라는 말은 너희는 죄인이라는 뜻이에요. 죄인이 자기 권리를 자꾸 고집하면 안 되죠. 죄인이 나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조정할 수 있는 권한은 죄인이라고 규정된 이상은 이미 날아가 버린 거예요. 그런 건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건 ‘나’가 아니에요, 지금. 나 아니요, 양입니다, 양. 성경에 나를 위한 구절은 어디에도 없어요. 나를 위한 성경이 어디 있습니까? 없어요. 양이에요, 양. 양의 등장이지 나의 등장이 아닙니다.

내가 양 되기 위해서 나는 십자가와 부활의 죽음을 경유해야 되죠. 성령이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이미 부활, 사망을 이기신 영이 우리에게 오게 되면 우리는 그때부터 죽음으로. 나의 살해, 나의 죽음으로 누가 이끈다? 성령께서 이끄시는 겁니다. 그게 바로 고난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목자 이전에 양이어야 하는 거예요. 목자 이전에 양이어야 하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들 얼굴에 수심이 가득해가지고 예수 믿는 것도 힘들어죽겠는데 예수 믿고 또 십자가의 길 가려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라고 하는데 없는 집에 만약에 속도 위반 해서 5만원 나오면 참 고민거리죠. 그런데 어떤 집은 재산이 2조 있다. 2조 있는데 범칙금 5만원 나왔다고 머리 싸매고 고민하고 이럽니까? 아니죠. 이미 생명을 가진 자는요, 그 범칙금 5만원 정도는 껌값이죠. 내 몸 아픈 것은 아무것도 아니죠. 가진 자의 여유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외부에서 보면 고난 받는다고 이야기하거든요.

고난 받을 때 얼굴 찡그려가지고 억지로 고난 받으면 그게 부활의 일관성입니까? 내가 고난을 모면해보려고 그냥 몸부림치는 것밖에 안돼요. 이미 생명을 가진 자에게는 고난이 되든 뭐가 되든 오라 하세요. 오라고 하라고요. 왜냐하면 성령께서 이미 노리는 바가 있어요. 너는, 너 중심주의는 이제 천국에서 용납하지 않는다.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어떤 설계도를 가지고 성령이 찾아온다면 일하라고 하세요. 일하라고 하란 말이죠.

집에 인테리어를 업자한테 맡겨놨으면 맡겨놓지, 인테리어 하는데 이것저것 다 시비 걸고 그거 왜 고민을 해요? 맡겨놨으면 돈 줬으면 맡겨놓은 대로 하죠. 이 몸은 이미 죽고 산 것은 그리스도가 살았다면 인테리어 업자는 누구입니까? 주님께서 인테리어 하는데 목적이 양이 양다운 양이 되는 거예요. 그거 하도록 그냥 좀 내버려두면 되지 않겠습니까? 주께서 나를 가지고 주의 일을 하겠다는데 왜 우리가 주제넘게 거기다가 훼방질을 하느냐 이 말이죠.

치과에 가면 꼭 이런 환자들 있어요. 선생님, 안 아프게 해주세요. 이빨 자체가 썩었는데 어떻게 안 아프게 할 수가 있어요? 아픔을 겪어야 이빨이 뽑히지. 물론 뽑는 것은 아프지만. 그러면 의사들이 말하죠. 아이고, 마취했으니까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여튼 난 마취하고 안 아픈 경우를 못 봤습니다. 마취해도 아파요. 마취해도 아프죠. 이 뽑히는데 안 아플 수가 있어요?

예수 믿고 꽃길만, 예수 믿고 편한 길만...아닙니다. 이빨 뽑는 거예요. 지금 나를 뽑는데 그게 안 아플 수가 있어요? 주님은 어디 휘파람 불면서 인생 살았습니까? 주님은 우리보다 이 세상에서 더 고생했어요. 코로나 핑계대지 마세요. 주께서는 그보다 더 심한 걸 당했어요. 얼마나 심하게 고생을 했는데요, 우리 주님께서. 우리 고생은 고생도 아니죠. 욥 한번 보세요. 얼마나 고생했습니까? 된통으로 그냥 하늘에서 돌멩이 맞은 거예요. 하늘에서 얻어맞은 겁니다.

따라서 일관성을 위해서는 내가 갖고 있던 나다움의 일관성을 포기하세요. 그러면 어떤 일관성이냐. 이것은 여러분들 아시니까 일방적으로 제가 찾아볼게요. 요한복음 3장 27절,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다시 읽어 드릴까요? 하늘에서 주시지 않으면 인간은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다시 말해서 양은 뭐냐. 이질적인 것. 내가 못 만들어내는 것. 내가 예상 못한 것. 내가 기대하지 못한 것. 그냥 하늘에서 벽돌 기왓장 떨어지니까 아야! 하는 것. 보니까 기왓장이라. 내가 이런 인생이 되리라고는 사전에 예상도 못한 인생을 사는 것. 그게 양입니다. 하도 교회가 양, 양 하니까 그냥 사람들은 모방하고 흉내 내서 엇비슷하게 살면 뭐 양이라고 자꾸 우기는데 그것은 하늘에서 인정해주지도 않는 양이에요.

양의 특징은 하늘에서 이질적인 것을 주시는 것, 성령을 주시는 거예요. 이게 성령이야기거든요. 한량없이 주십니다. 성령을 주시게 되면 뭘 아느냐. 바로 일관성. 예수님의 피의 일관성. 이런 죄는 용서해주고 저런 죄는 용서 안 해주고 그런 것 없어요. 그냥 밀어붙여요. 피가 가는 곳에 죄 사함이 있느니라. 피가 있는 곳에는 다 죄가 사해지는 현상들이 일어나는 일관성.

따라서 양이 된 사람은 목자가 보고 싶은 것이 아니고 그 일관성이 보고 싶은 거예요. 사도행전 20장 28절을 다시 읽어보게 되면,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감독자의 임무는 감독자의 일관성이 아니고 피의 일관성이에요, 피의 일관성.

여러분들이 들었던 이 말씀, 아까 요한복음 3장 27절 그리고 사도행전 20장 28절, 그 대목을 가지고 아까 제가 예를 들었던 지금도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교회 위임식을 다시 한 번 생각해봅시다. 진짜 그 교회 교인들이 제대로 성령 받은 양이라면 목사가 위임했다는 말 자체가 의미가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들은 일관성이 없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붙드는 주인공이 될 수 없기 때문에 그래요. 바람 불면 흔들려야 되죠, 눈 오면 눈 쌓이죠.

그 인간을 좌지우지하고 잡고 있는 것은 바로 주님이지 목사가 아닌 거예요. 내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설교한다고 해서 제대로 설교 나오는 것 아닙니다. 그냥 목사는 맡겨야 돼요, 주님한테. 죽을 쑤면 죽을 쑤는 대로 팥죽이 되든 호박죽이 되든 그냥 맡기는 겁니다.

자기 부인이죠, 자기 부인, 피 앞에. 피의 일관성을 위해서 자기 자신의 일관성을 양보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희생을 위해서 내 희생을 걷어내는 겁니다. 내가 양을 위해서 고생한 걸 다 걷어치우는 거예요. 핀셋으로 다 집어내는 겁니다. ‘그리스도께서 피 흘리신 양입니다’ 하기 위해서는 ‘내가 그것을 위해서 이렇게 고생했습니다’ 라는 것을 다 뽑아내는 겁니다. 다 집어내야 돼요. 거기에 내가 끼어들면 안 됩니다. 그게 목자입니다. 그게 목자에요.

성령 받은 양은 바로 그런 목자가 나타날 때 그 목자가 훌륭하다고 말하지 않고 이렇게 이야기해요. ‘주님이 보내신 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주님이 보내신 분. 그러니까 양이나 목자나 모두 다 목자장의 지시를 따르고 그 지시, 주님이 하신 공로, 피의 공로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지탱하기 위해서 그들은 양으로 목자는 목자로 부르심을 입었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희생의 일관성을 위해서. 피의 일관성을 위해서.

여러분 이렇게 들으니까 ‘그런 목사 있으면 좋겠습니다’라는 생각이 들죠. 그런 목사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 하지 말고 여러분이 그런 양인지를 한번 보세요. 여러분이 그런 양인지. 무덤의 뚜껑이 열린 양인지.

부자 되게 해주겠다는 그런 설교보다도 부자 되게 하겠다는 그 자체가 그런 마음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징벌인 것을 알아듣는 양. 부자 되려고 사는 그 자체가, 부자 되어서 망해야 벌이 아니고 부자 된 그 자체가 하나님의 징벌인 것을 이해하는 양. 이 세상에 어떤 일도 인간은 주의 일을 하지 못함을 받아들이는 양. 어떤 일도 다 주께서 자기 일관성을 위해서.

바로 이런 것을 알아먹는 안목을 가진 그런 양들을 생겨나게 했습니다. 같은 인간이면서도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게 기적 아니고 뭐겠습니까? 이게 기적이죠. 어느 학교, 어느 유치원 나왔어요? 못 물어봐요. 그건 유치원에서 배운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대학교에서 배운다고 될 문제가 아니라 위에서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그것을 알 수가 없어요. 말씀이 말씀대로 현실화되지 않으면 생겨나지 않는 현상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내가 있는 게 아니고 뭐가 있겠어요? 말씀이 있는 거예요. 나는 말씀이 있고 난 뒤에 말씀이 현실화 된 결과가 나니까. 나부터 출발하지 말고 항상 하나님의 말씀부터 출발해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말씀대로 실행에 옮긴다는 거예요. 위에서 주지 않으면 아무도 받을 수 없다는 그 말씀을 실행하는 결과로서 우리가 양이 되었다면 우리 안에는 ‘내가 그걸 알았잖아요 받아들였잖아요’ 하지 말고 그 말씀, 요한복음 3장 27장 그 말씀이 이미 내 안에 자리 잡고 그 말씀의 효과를 충분히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를 계속 다루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생이 내 문제가 아니고 결국 인생은 양 같으면 주님의 문제이죠. 그것도 주님의 자기 일관성. 한결같아요. 죄 있는 곳에 피가 죄 사함 준다는 이 불변의 법칙. 십자가의 효과를 위해서만 하나님은 일하신다. 따라서 너도 너의 모든 일이 십자가복음을 증거하는 일, 그 범위를 못 벗어난다는 거죠. 그게 바로 양입니다.

지금 베드로가 오늘 본문 이야기하면서 자기 존경해달라는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정말 양 중에서 목자를 뽑는다면 그 사람은 자기 목자 됨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양...... 양의 기준을 다시 말하면 양이라 하는 것은 주의 일관성을 이미 여기 안에 주셔서 안에 들어있는 사람이죠.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주의 일관성, 성령이 주인공이 된 그 요건을 계속해서 유지하고 있는 목자, 그게 바로 목자가 되는 겁니다. 그 사람이 바로 목자가 되겠죠.

자,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봐요. 훌륭한 사람도 많고 점잖은 사람도 많고 학식 있는 사람도 많은데 왜 그 사람들에게 네 양을 섬기라고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고, 목자를 따로 뽑지 않고 양들 속에서 목자를 선택해야 하는 이유가 뭐냐고 하신다면 그 목자로 뽑은 사람이 옛날에 있었어요. 이것은 한번 찾아봅시다. 에스겔 34장. 에스겔 34장 초반을 보면서 이것을 남의 일로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탁합니다. 제가 저에게도 부탁하고요.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을 쳐서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자기만 먹이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찐저” 참, 이게 참 어려워요. 어려우니까 답변부터 이야기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목자를 세웠다는 그 자체가 율법적 기능입니다.

자, 율법적 기능은 뭐다? 지키는 것이 아니고 못 지킨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생겼죠. 목자로 하여금 목자 되게 하는 것은 너는 때려죽여도 목자다운 목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목자 되게 하는 거예요. 오늘날 목사가 목사 되게 한 것은 너는 때려죽여도 목사다운 목사 될 수 있다, 없다? 없다는 거예요. 그렇죠? 전적으로 동의하실 겁니다.

목사다운 목사라 하는 것은 엄두도 내지 마세요. 다른 사람은 장사해서 죄인 되는 사람도 있지만 자기는 목사 해서 죄인 되라고 목사 되게 한 거예요. 그걸 최적화 원리라고 하는데, 왜 나는 이 직업 말고 다른 직업은 안 되느냐. 그 직업을 해야 본인 죄가 나오니까! 죄가 나오는 방법이에요. 그러니까 그 직장이 일종의 율법적 기능을 갖고 있죠, 직장이.

어떤 직장이든, 목사를 비롯해서 심지어 직업 없는 가정주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주부라도 자기 하는 일을 통해서 자기가 배 부르려고 합니다. 인간은 일의 목적지가 있어요. 일을 하게 되면 노동을 하게 되면 그 결과에 기대하는 기대치가 있습니다. ‘이 일을 통해서 나도 좀 살아보자. 앞에 괄호 열고 남들처럼’. 인간은 비교하니까. 나도 좀 인간답게 살아보자.

이 이야기하니까 갑자기 주일날 제가 설교한 게 생각나요. 내가 나한테 추궁한다는 대목 나왔죠. 내가 나한테 묻는 거예요. ‘인간아, 그동안 니 뭐하고 이 모양 이 꼴로 사냐?’ 그럼 내가 답변하죠. ‘그래도 난 최선을 다했다.’ ‘최선을 다한 게 이 모양 이 꼴이야?’ 내가 나를 계속 추궁하는 거예요. 그 추궁하는 목적이 뭐냐. 이왕 사는 것 사람들만큼 살아야지. 사람들만큼 살아야 될 게 아니냐. 그럼 사람들만큼 사는 게 뭔데?

그게 아까 제가 그림 그렸던 바로 이겁니다. 인간이 눈썹 있고 눈 있고 쳐다볼 때 이 미지의 공백, 미지에 뭔가 진리가 있다는 것을 계속 주시하고 있어요. 그러나 도달되지를 못해요. 왜냐하면 그쪽에서 또 주시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협상을 하면서, 여기까지 딱 스톱하면서 스톱이 안 된다니까요.

끊임없이, 일단 이것은 내 것이고 그 다음에 더 전진 전진. 진짜 내 욕망을 만족할 때까지. 내가 원(願)이 없이 될 때까지 계속 진전하는데 이 원이 없는 경계선은 내가 가면 갈수록 지평선을 닮아가지고 내가 다가간 만큼 지평선은 제자리에 있습니까, 멀어집니까? 멀어지죠.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손에 잡히지 않는 욕망의 최후의 미지의 그 무엇. 그 미지의 무엇이에요.

따라서 이것을 말한 정신분석학자가 말합니다. 인간은 미쳤다. 인간은 자신의 욕망에 미쳐있다. 안 미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왜 미쳤는지, 왜 어릴 때부터 어린아이도 미치는지 거기에 대해서는 모르겠다. 그럼 정신분석학자들이 전부다 결론내리면 ‘모르겠다’. 모르겠는 거예요.

인간은 적당하게 멈추고 이것으로 됐습니다. 겉으로는 이야기해도 속에서는 내가 나를 추궁한다고요. 남자가 돼서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어야지, 이게 뭐꼬? “여보, 그만하고 한국 들어가자.” 남편 하는 말이, “여기 미국 아칸소 주까지 왔는데 내가 농장 한번 일구어보고 자식들 앞에 부끄럽지 않은 남자 한번 돼보고 가겠다.” 아내가 하는 말이, “그거 바라고 지금 우리 자식들하고 내 꼴 봐라. 되지도 않는... 우리는 그럼 뭐냐?” 이래가지고 <미나리> 영화 초반부터 싸운다고요. 어떤 사람은 <미나리>보다가 부부싸움 보고 애들 보기에 교육상 안 좋다고 중간에 나가는 사람도 있었어요. 초반에 싸워요. “한국 돌아가자.”, “이왕 온 거 한번 뭔가 나의 나다움을 보이고 가겠다.” 대판 싸웁니다. Don't fight! 써서 비행기 만들어서 막 던지고 하는 그 장면 나와요. 애들 미국에 살아서 한국말 모르니까 영어로 써서 막 띄운다고요.

그 이민사회의 모습을 우리는 같은 세상에서 안 겪고 예수님은 안 겪었을까요? 요한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의 배다른 형제들이 예수님이 뜨니까, 유명인사 되었으니까 빨리 엔터테인먼트 계약 맺으라고 당신 이 정도 하면 메시아 되니까 자기를 보이세요, PR하세요. 이게 뭐냐 하면 다 채워지지 않는 욕망입니다.                    

다시 이야기해서 인간의 노동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노동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목적이 있는 거예요. 재물을 비축하고 그 비축된 것이 나의 것이 되고 나의 것이 곧 ‘나’가 되는 그 희망을 보고 달려가는 겁니다.

그러니 아까 에스겔 34장에 나오는 그 목자들......다시 말씀 드릴게요. 목자들을 세운 것은 ‘목자들아 제대로 하라’가 아니라 목자로 세운 것 자체는 어떤 인간치고 ‘목자 같은 목자는 인간세계에 있다, 없다? 애초에 없었다’ 를 증명하기 위해서 목자를 세운 거예요, 어떤 인간도. 자기 배만 채우는 거예요.

에스겔 34장 3절에,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아까 제가 두루치기, 삶아 먹는 것 얘기한 게 너무 과도한 게 아니라니까요.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의 무리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뭐냐 하면 목자 좋으라고 목자 된 게 아니고 양 위주에요. 내가 맡긴 양 위주. 내 마음, 내 심정을 가지고 양을 돌보라고 목자를 세웠는데 거기에 적합하게 해당되는 목자는 존재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목자가 목자답지 않으니까 다른 목자 끼워 넣으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데 그게 아니고 목자가 목자답지 않을 때는 나라 자체가 망해요. 이것은 하나의 역사고 현실이 되는 겁니다. 이 말은 목자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 아니라 현실은 목자 중심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고 목자가 망했다? 그럼 너희들도 망했다. 그런 연관성을 가지고 밀어붙이는 그 주님의 일관성이에요.

에스겔 34장 이야기 보면서 여러분들은 아마 그 생각할 거예요. 요한복음 10장에 나오는 유명한 말씀 있죠. 그것 잠시 설명 드리고 목자 이전에 목자가 어떻게 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 보면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자, 삯군 목자와 선한 목자의 차이성은 양이 목자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목자가 양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죠. 그러니까 목자 같은 목자가 있을 리가 없죠. 왜냐하면 최초의 목자는 예수님이고 최후의 목자도 예수님이니까.

그리고 이 정신에 의해서 요한복음 마지막에 보면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예수님이 마지막 부탁하는 것은 “베드로 너 신앙생활 똑바로 해” 이것 한 게 아니에요. 베드로야, 신앙생활 잘 하세요. 그것 부탁하지 않았죠. 내 양을 돌보라 했어요. 왜? 베드로는 예수님을 노골적으로 배신했기 때문에. 그게 목자다운 자질이 되는 겁니다. 참 목자의 자질이 멋지죠? 한 때 양이었던 자가 자기 목자의 가치를 양의 입장에서 훼손시킨 거예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신한 이유는 살기 위해서 한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산다’가 두 종류가 되죠. 1번 2번 또 나온다. ‘산다’는 ‘1. 내가 나를 살리는 방식으로 산다’가 있고 ‘2. 내가 살리지 못하는 나를 누가 내 대신 죽음으로 살리는 나’ 두 가지 방식이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베드로가 무슨 일을 했습니까? 두 번째 방식으로 바로 가지 않고 참 재미있는 게, 내가 나를 살리는 방식으로 했다가 예수님이 십자가 돌아가셨잖아요. 그럼 십자가 안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 ‘베드로 나는 나를 살리는 방식으로 했던 그러한 인간이다’ 라는 사실이 십자가 안에 박혀 있겠어요, 안 박혀 있겠어요? 박혀 있겠죠. 그 십자가를 누가 자랑한다? 베드로가 목자로서 양들에게 자랑하는 거예요.

다윗이 누구하고 결혼했습니까? 자기의 어두운 과거가 있는 여자, 밧세바하고 헤어지고 다른 여자하고 결혼했습니까? 아니죠. 다윗의 본처가 누구에요? 밧세바죠. 밧세바 만나고 난 뒤에 밧세바를 왜 배제하지 않습니까? 밧세바가 있음으로써 자기가 살인자요, 간음자요, 포횡자인 것을 그대로 노출시켜주기 위해서 주님께서 나에게 붙여주신 사람이기 때문에. 붙여준 사람이에요.

그래서 다윗의 후계자가 압살롬이 되는 게 아닙니다. 바로 솔로몬이 되죠. 솔로몬은 누구의 자녀입니까? 다윗과 그 부인 이름이 뭐에요?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나온 여디디야. 처음에 나왔던 밧세바와 다윗의 아이가 죽고 그 죽음의 터 위에 태어나는, 죽음 위에 무덤을 열고 나온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나를 죄인 되게 하는 그 현장이 주님이 나를 사랑하는 토대가 되고 증거가 되는 거예요. 따라서 내 죄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성령 안에 그대로 있어주는 것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감사해해야 됩니다. 죄인이면 뭐든지 다 할 수 있기 때문에. 못하는 게 없어요. 그저 감사 외에는 아무것도 안 나와요. 죄인이었었는데 지금은 의인이 되었으니까. 얼마나 고맙습니까. 감격스럽죠.

돈 주고도 못 사니까요.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고 어느 도서관에도 나오지 않는 이야기에요. 지식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실제로 그게 느껴지는데. 죄 사함 받았다는 것이 실제로 느껴지는데. 세상 어느 곳을 가도 자신의 이 운명을 바꾸지 않을 거죠. 죄 사함을 어떻게 바꿉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돈 벌어봐야 죽을 때 다 놓고 가잖아요. 그러나 죽을 때도 안 놓고 가는, 함께 가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죄 사함밖에 없습니다. 생명밖에 없습니다.

그걸 왜 너희 목자들은 양들에게 안 줬느냐 이 말입니다. 왜 안 줬겠어요? 왜 안 줍니까? 그렇게 되면 목자가 양을 대하는, 양 때문에 내가 밥 먹고 살아야겠다는 내가 나를 살리는 방식이 주님의 목자 앞에서는 안 통하거든요. 통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교회마다 십자가복음을 배격하는 이유를 이제 아시겠죠? 왜 목사들이 십자가복음을 싫어하는지 아시겠죠. 자기의 생계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무슨 뜻이냐 하면 목사가 있으나마나한 목사 같으면 교인들이 자기를 알아줘요, 안 알아줘요? 안 알아주죠. 그런데 복음을 전하는 목사라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이 다 하셨고 나는 죄인으로서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그 고백하는 사람이죠. 그런데 지는 그렇게 고백했는데 양들이, 교인들이 ‘잘됐다. 너 오늘부터 월급 없다.’ 이러면 ‘괜히 말했어. 힝. 괜히 말했어. 완전히 나만 손해 봤네.’ 그렇게 후회 한다면 그 사람은 2번이 아니고 1번에 속하면서 복음 이야기한 사람이에요. 복음 전하면 은혜 받아서 나한테 월급 주겠지. 내가 나를 살리는 방식으로 꼼수 쓴 겁니다, 꼼수. 여러분 잘 구분하시기 바랍니다.

자, 그렇다면 이런 목자의 원형은 어디서 나오느냐. 그건 구약 이스라엘 역사에 보면 신명기 32장 10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10절, 11절 보셔야 돼요. 여호와께서 어떻게 했는지 한번 보세요.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그 다음에 ▭같이 하셨다. 자기 “눈동자”.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이게 목자잖아요, 이게 목자.

그러니까 양은 자기 안에 있는 눈동자가 아니고 자기 바깥에 튀어나온 자기 눈동자에요, 양을 볼 때. 어? 내 눈동자 저기 있네. 그게 양이에요. 그게 여호와께서 직접 목자가 되시는 원리에요. 그 다음에 11절 보게 되면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이 말씀들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아, 너희는 이미 나한테 종속되었어.” 그 이야기 하고 있는 거예요. 따로이 자아라는 개념을 갖지 말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미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인간의 자아는 그 자체적으로 독립적이 되었어요. 독립선언 만세, 알죠. 독립했다는 거예요, 독립. 인간의 본성은 독립에 있어요. 악마가 그 마음을 심어주었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은 긴 네모다. 긴 네모 안에 뭐가 들어가느냐 하면 잔소리를 싫어한다. 인간의 본성은 잔소리를 싫어하는 거예요. 아내가 남편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부부싸움의 1등 원인은 뭐냐. 잔소리. 잔소리의 의미는 했던 소리 또 하기가 잔소리입니다.

사람이 타인에게 뭔가 부탁할 때는 반드시 뒤에 영어로 하면 please, 우리나라 같으면 ‘~해주시겠습니까?’라고 결정권을 상대방에게 넘겨주는 게 이게 예의이고 배려잖아요. 그런데 부부사이에는 그게 잘 안돼요. ‘~해라’가 됩니다. ‘해라’가 되고 안 할 것을 대비해서 한번  더 강조를 해요. ‘이거 하세요. 이거 하세요’ 라고 강조하면 기분 덜 나빠요. 그렇게 하는 게 아니고 ‘이거 하세요. 보나마나 안할 건데 전에 안 해가지고 어떻게 됐지...’부터 해서 이야기가 시작돼요. 그러면 일을 언제 해야 되느냐 하면 잔소리가 끝날 때까지 다 듣고 있다가 일을 해야 되거든요.

화장실에 갈 때 ‘앉아서 누세요. 서서하면 안 됩니다.’ 이건 잔소리 아니에요. ‘내가 해봐야 또 설 거잖아.’ 이건 벌써 잔소리거든요. 그 다음에 세 번째는 뭐냐. ‘청소는 누가 하는데? 니가 해라.’ 이렇게 되거든요. 그럼 남편 하는 말이 ‘내가 할게.’ 이렇게 돼요. 그러면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청소 안하는 거 내가 뻔히 아는데’ 이렇게 돼요. 갑자기 오줌 누는 이야기에서 청소 이야기로 바뀌었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그렇게 이야기하고 나가면서 ‘하는 행세가 꼭 즈그 아버지 닮았다’ 갑자기 가만히 있는 시가집 들먹이면 게임오버. 게임 끝났어요. 거기다가 여섯 번째 덧붙입니다. ‘돈도 못 버는 게’ 인간도 아니다 이 말이거든요.

이유가 뭐냐 하면 그 사람이기를 원치 않아요. 나는 그 사람이 내게 종속된 사람이기를 원하는 겁니다. 다른 사람은 내게 종속되되 나는 누구에게도 종속되기 싫은 거예요. 서로가 다 그래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서 있을 수 없는 인간성을 심어 줘버립니다.

‘너는 무조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너는 네 자아를 추구하지 말고 무조건 나한테 종속되었다.’ 이게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없죠. 아담에게서 나온 인간치고 이스라엘 될 수 있는 능력과 자질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거예요. 그 잔소리가 싫어서. 잔소리란 말은 뭐냐. 나도 배알이 있는데 나도 나의 절대성이 있는데 왜 이걸 개무시하냐.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 목자상이요, 결코 우리 인간의 마음에 드는 목자상이 아니에요. 너무나 폭력적이에요, 목자가. 뭐 인자하고 자비롭고 그런 거 없어요. 그것은 하나님 쪽에서 이야기한 거고. 이것은 심해도 너무 심하게 이야기해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심하게 하는 이유가 뭐냐. 그게 아까 신명기 32장에 나왔습니다. 32장 10절 봅시다. “여호와께서 그를” 그 다음에 뭐가 나오죠? 여러분이 답변해 보세요. “황무지에서” 그리고 무엇의 부르짖음? “짐승”의 부르짖음이죠. 이걸 인간들이 모르는 거예요.      

바로 양 곁에는 짐승이 있다는 걸 몰라요. 우리는 짐승은 무슨 짐승. 얼마나 인간성 좋은데요. 교회는 안 나와도 복음 몰라도 사람은 좋다고요. 우리는 그 사람이 짐승인지를 몰라요. 나를 지옥 보내는 사람인지를 모르고 서로 시루떡 나누고 좋게 지내면 좋은 관계라고 여기는 겁니다.

우리는 나도 물론 모를뿐더러 나의 환경이 어떤 환경인지를, 주님은 아시고 우리는 모른다고요. 이 세상이 지옥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까마득히, 지식으로는 알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현실적으로 와 닿지를 않아요. 이게 문제에요. 그러니까 몽둥이를 든 목자가 필요한 거예요. 말로 안 되면 쥐어 패야 되는 거예요. 징계를 해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 정말 유명한 말씀이죠, 시편 23편 한번 보겠습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진짜 목자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인간에게는 목자다운 목자가 없어요. 목자가 되려면 반드시 양을 거쳐서 목자 되어야 되지 피의 일관성 아니면 목자 되지 못하는 신약 이야기를, 제가 구약에서 왜 목자가 못되는가를 말씀 드리는 겁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기 4절에 보세요. 내가 어디로 갑니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내가 이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인지를 분별력이 없어요, 인간은. 인간은 자기한테 잘해주면 천사인줄 알고 있어요. 아까 그런 이야기했던가요? 양의 적이 뭐라고 했습니까? 피가 없는 것 또는 양의 적은 일관성이 없는 것. 부활이 없는 것이라 했죠. 양이 된 사람만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해요.

그러나 양이 아닌 사람은 세상 얼마나 좋은데. 돈만 있으면 최고지 뭐. 스위스 좋더라. 조건이 있어요, 돈만 있다면. 캐나다 좋아요. 어떤 조건? 돈만 있다면. 돈만 있으면 북한도 좋아요. 중국도 좋고. 돈만 있으면 이 세상 어느 나라도 다 낙원입니다. 돈만 있으면.

곧 돈이 낙원이에요. 그만큼 인간은 이미 지옥과, 어둠의 세력과 친화력을 갖고 있어요. 자력으로는 떼어 내지를 못합니다. 너무 친해서. 너무 정들어서. 그쪽 세상이, 지옥 가는 사람이 너무 좋아서 부러워 미치겠어. 못 따라간 나를 야속하게 느껴요. 너는 뭐 했노, 인생? 저 사람 부자처럼 안 되고.

그러나 성경에 보면 부자가 천국 간다는 것은 글렀어요, 이건. 아니 아무리 낙타를 이렇게 쪼그라뜨려도 바늘 구멍 속에 안 들어갑니다. 바늘이 이따만하게 큰 바늘이 아니고서야 들어가지를 않죠.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이 그 정도로 어렵다는 말이죠. 왜? 자기 부인이 안 되니까. 이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부자기 때문에 독자적이고 독립적이에요. 누구한테 잔소리들을 쨉이 아니다 이 말이죠. 목자가 필요 없어요. 돈이 목자인데 무슨 목자가 필요합니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의 무엇을 가지고 있습니까?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현혹시키는 그 악마를 쳐부수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죄 사함밖에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죄 사함 모르는 인간과 놀지 마라 이 말입니다. 그게 목자에요.

시편 121편 보겠습니다. 1절-3절,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러분 잊어버릴까봐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미 우리는 개인의 자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완전히 종속되었습니다. 종속되어야 이스라엘이에요.

따라서 우리가 찾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노력해서 고생해서 인생 이만큼 살았다 하지 마시고 우리의 도움이 어디서 옵니까?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로부터 오는 거예요. 뭐 여호와께서 돈은 안 주시던데. 돈은 안 줘도 성령은 주시잖아요, 성령. 무덤에서 열어제낀 그 능력은 주셨잖아요. 그 에너지는 주셨지 않습니까? 그러면 됐죠.

그 다음 3절에,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그러니까 진짜 여호와 같은 목자는 뭐냐 하면 맨날 불침번이라. 잠을 안 자요. 맨날 숙직해. 우리 양들이 혹시 복음 모르는 쪽에 기웃거릴까 싶어서 그것 지키는 거예요. 그러니까 잠이 없으신 성령님이 하지 잠 있는 목사는 도저히 못해요. 교회를 위해서 기도해봐야 기도하다 잠자기 때문에 안돼요.

여기 나오네, 4절에.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우편에서 그늘이 된다는 말은 처음 너를 구원했던 그 능력이 능력의 일관성을 계속 너에게 유지시켜  주는 겁니다. 처음 지킬 때 주께서 힘으로 지켰습니까, 물로 지켰습니까? 피로 지켰죠. 예수님의 피가 계속 생각나게 만드는 쪽으로 주님께서 인도해내시는 그 일을 주께서는 멈추지 않는다는 말이죠. 피의 일관성. 너는 죄인이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일관성.

마지막 8절에,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네가 집밖을 나가면 안 지킨다가 아니고 출입. 네가 안에 있든 밖에 있든 간에 내가 너를 응시할 것이고 주시할 것이고 관찰할 것이고 살펴볼 것이라는 겁니다. 세상적으로서의 인간들은 그게 부모지만 우리 성도한테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지키시는 거예요.

그렇다면 나의 구원은 나의 개인적인 일이 아니되는 겁니다. 나의 구원은 주님의 일이지, 제발, please, 내 일되지 말게 하세요. 구원이 내 일이 되면 안돼요. 인간이 나서서 되는 일은 아예 없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모든 일의 주체를 주님께 돌리세요.

주께서 살게 하셨고 먹게 입게 하셨고 잠자게 하셨습니다. 어젯밤에 잠 한숨도 못 잔 것도 주께서 잠 한 숨도 못 자게 하셨습니다. 어제는 자식 때문에 깜짝 놀라서 심정이 온통 우울했던 것도 주께서 하셨습니다. 라고 하세요. 그렇게 이야기해야 돼요. 내 마음이 편치 않은 것도 주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만큼 우리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이 어두운 세상과 친하게 지내왔는가 사이좋게 지내왔는가. 그걸 우리에게 알려줬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이것하고 마치겠습니다. 나의 본성, 자아의 본성은 나를 내 식대로 지키는 방식, 이걸 계속해서 고집하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십자가 앞에서 죄인 줄 아신다면 바로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양이고 같은 양 중에서 같이 우리가 이런 것을 이야기하는 그 사람이 목자이고 우리의 목자장은 예수님이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눈동자같이 지키셨다는 말이 그냥 빈 말이 아니라 우리의 지금의 현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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