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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13 23:48:15 조회 : 258         
기름부음 요한일서 2:27 240613 이름 : 이근호(IP:112.165.48.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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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림(IP:180.♡.164.155) 24-06-15 06:20 
서울강의20240613a 요한일서 2장 27절(기름 부음)-이 근호 목사


오늘은 요한일서 2장 27절부터 하겠습니다.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여기 이 말씀에서 우리 일반 인간들로서는 수긍하기 힘든 단어가 나옵니다.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한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거한다’ 많이 들었던 이야기고 ‘예수님의 정신과 양심이 네 속에 거한다’ 잘 생각하면 수긍이 되는 이야기인데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한다 했으니까 굳이 기름 부음이 우리에게 올 이유가 없다는 말이죠. 이유가.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알게 되면 적어도 기본적으로 인간에게는 양심이라는 게 있는데 예수님으로부터 그만한 많은 은혜와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받았으면 이제는 누가 나설 차례입니까? 이제 인간이, 정신 차린 인간이 나서서 주님을 위해서 섬기고 봉사하고 충성하고 헌신하는 게 우리에게 기본적으로 남아있다 하죠. 그게 남아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은혜를 받았으면 그다음에 뭐가 있느냐? 뭐와 뭐가 있다. 윤리와 도덕적인 삶. 윤리적 삶과 도덕적 삶을 우리가 의무감을 가지고 살아야 된다. 윤리적 삶, 도덕적 삶을 의무감을 가지고 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성령을 받고 은혜를 받은 모습을 드러내고 이런 윤리적 도덕적 삶의 의무감이 쇠퇴하거나 이것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은혜를 안 받은 것이다, 이렇게 단정 짓죠.

위의 이것, 이것이 바로 악신의 주장입니다. 이게 악령의 주장이에요. 왜 이런 게 추가가 되느냐? 이게 뭐가 무서워서냐 하면 실패가 무섭다는 거예요. 내 인생 실패가 무섭다. 그래서 ‘윤리적 도덕적 삶을 의무로 장착하게 되면 나는 이제 앞의 것도 갖추고 뒤의 것도 갖췄으니까 둘이 합쳐서 온전한 게 아닌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전반전 뛰고 후반전 한 골 넣고. 예선 3차 진출하고. 이래야 온전하게 구색은 다 갖췄다고 생각하거든요.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은 계속해서 뭘 추구하느냐 하면 천국을 가고 구원을 따내는 데 있어서 실패할까봐 무섭고 두렵다는 그러한 본인 심정의 표현이에요, 이게. 그리고 이것이 모든 교회사(敎會史)에, 사람들에게 먹힙니다. 이것 때문에 교회가 운영되고 이것 때문에 교회가 부흥되고 교회가 유지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뭘 모르느냐 하면 ‘아무도 옳지 않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아무도 옳지 않아요. 아무도 옳은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이 자기에게 가능성이 있으면 ‘실패하면 안 돼’ 이렇게 되거든요.

집안에서 안정된 직장을 권해서 학원비 대가면서 ‘너는 공무원 해야 돼. 공무원 해야 돼.’하고 공무원 시험 준비할 때, 준비하는 내내 공무원 시험은 에듀윌? 공무원 시험에 열중한다는 것은 뭐가 무서운 거예요? 자기 인생이 꼴아박거나 망하거나 실패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왜 실패하면 안 되죠? 왜 내 인생에 실패가 없어야 되죠? 그 근거를 한번 제시해보죠. 그 이유가 있습니까? 왜 우리는 구원에 실패해서는 안 되죠? 거기에 대해 자신 있게 답변할 수 있는 사람 있어요?

은혜 받았으면 윤리적 도덕적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악신이 그동안 이 기독교라 하는 것을 자기가 주물렀다는 거예요. 지배했다는 겁니다. 이게 악신이고 악령의 주장이라면 그럼 성령의 주장, 주님의 생각은 뭐냐? 지금까지 쓴 것은 싹 다 지우겠습니다. 이게 악령의 주장이라면 자신 있게, 성령의 주장은 뭐냐?

로마서 11장 35절,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갚으면 안 되는 겁니다. 갚으면 안돼요. 우리가 받은 은혜에 대해서 갚으면 안 되는 겁니다. 갚겠다는 것은 악마의 노림수에요. 악마가 인간보고 배후에서 그렇게 시킨 겁니다.

성도에게는 의무감이란 자체가 성립 안돼요. ‘은혜 받았으니까 선교하고 은혜 받았으니까 헌금하고 은혜 받았으니까 봉사하라.’ 이런 것은 성령의 세계엔 없어요. 악령의 세계엔 있어요. 인간은 자기 인생에 구원에 혹시 실패할까봐 늘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기 때문에 실패할까 하는 그 두려움을 자기 나름대로 하고 있는 의무감으로 총동원해서 이 실패 가능성으로부터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어내기 위해서 평생을 분투노력합니다.

예를 들어서 한국 교회에 어떤 목사가 이와 같은 주장을 한다 합시다. ‘한국 교회는 비성경적인 주장을 한다. 뭐냐? 믿음으로 구원 받으라 해놓고 그다음부터는 행함은 없다. 따라서 그것은 반쪽짜리 복음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친 바가 아니다.’라고 이야기할 때, 그 사람은 지금 뭘 모르고 있느냐 하면 하나님에 대해서는 인간이 이 세상 어떤 누구에게도 피해 보상을 해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어요.

피해 보상을 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남에게 피해 보상할 입장에 있지 않고 그러한 자격이 없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모든 인간의 행위는 타인과의 행위가 아니고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죄로 집결되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 같으면 한 20퍼센트, 속건제에 나오잖아요, 20퍼센트 갚아주면 되는데 하나님에 대한 범죄는 갚을 길이 없다는 게 기쁜 소식이에요. 이게 기쁜 소식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이 거기에 혹했으면 여러분들은 쏙았어요, 쏙았어요. 여러분들 속은 겁니다. 본인이 속은 거예요. 왜 속아 넘어갑니까? 행여나 내 구원에 실패할까봐 하는 공포와 두려움, 마귀의 꾀임에 놀아난 거예요. 협박, 공갈과 겁박에 놀아난 겁니다.

율법 수행과 성령 수행의 차이점은 율법 수행은 우리에게 피해 보상을 요구합니다. 예를 들면, “네가 맹세했거든 갚아라” 이렇게 나와요. 그런데 산상설교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맹세해도 안 갚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 아예 원천적으로 차단시켜요. “맹세하지 말라”

맹세하지 말라,가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맹세하지 말라는 율법을 지키고 싶어 해요. 참 이게 왜 그러느냐 하면 우리는 구원에 실패하지 않고자 하기 때문에. 그러니까 ‘맹세해서는 안 된다. 맹세 안해야지. 안해야지.’가 우리에게 공포와 두려움과 실패에 대한 겁을 제공합니다. 복음이 복음으로 들어와야 되는데 복음을 가지고 뭘 하려고 해요. 내 인생을 스스로 만회하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악신의 말이 인간세계에 다 먹혀들어가요. 제가 여기에 악신의 말을 크게 한번 써보겠습니다. 이게 욥기에 나오는 건데요. 빌닷이 이야기한 거예요.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에는 창대하리라(욥 8:7)’ 다단계 회사에서 얼마나 좋아하는 구절이겠습니까. 약간만 투자하시면 나중에는 다이아몬드 됩니다. 이런 다단계 회사의 속임수, 빌닷이 주장하는 이게 다단계인지 교회인지 분간도 안 됩니다만, 왜 이런 데에 말려드는가? 뭔가 내가 창대해야 될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거예요. 창대해야 될 자격이 있다고.

율법은 모든 인간을 죽이는 기능이에요. 율법은 모든 인간을 죽이는 기능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명기에서 율법을 지키면 복을 받고 율법을 못 지키면 저주받는다 했죠. 그 대목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로마서 3장에서 그걸 어떻게 해석합니까? 율법을 지키면 복을 받고 율법을 안 지키면 저주받는다는 그 율법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에서 뭐라고 해석하느냐 하면 이렇게 해요. 율법을 준 것은, 모든 인간은 의인은 없고 하나도 없으며 입을 막고, 입을 아예 틀어막고 저주 아래 있게 하려 함이라.

다시 말해서 율법을 제시한 것은 복과 저주가 균등하게 공평하게 주어졌다고 하는 것인데 사도 바울은 이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저주만 주어졌다고 해석 내려버려요.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그 당시 유대인한테 이단 소리 들어도 싸죠. ‘너는 눈도 없나? 성경을 성경대로 해석해. 네가 율법을 준 하나님이 아닌 이상은. 감히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반토막내고 네 맘대로 해석하면 안 되잖아.’ 하는 게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에 대한 비난의 근거였습니다.

그런데 그 율법을 곧이곧대로 해석하지 않는 분이 사도 바울보다 앞서 계셨죠.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예수님이었어요. 예수님이 왜 율법을 곧이곧대로 해석하지 않고 그 당시 통용되는 율법을 왜 거부했습니까? 그래야 십자가에서 인간한테 매 맞아 죽게 되니까. 죽을 수 있기 때문에.

그러면 ‘율법을 어떻게 해석하자’가 아니라 장차 오실 메시아는 먼저 주어진 율법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그 문제죠. 율법을 인간들이 받기 전에 인터셉트, 새치기하고 들어온 분이 계셔요.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 먼저 율법을 주신 분이고 율법을 주셨기에 율법의 정신, 취지에 대해서 예수님만큼 아는 분은 없어요.

유대인들은 복에 빠져가지고 ‘내가 율법 따내면 그 보상도 같이 주어진다’ 여기에 몰두해서 다이렉트로 직접 이 율법을 본인이 해석하려고 덤벼든 겁니다. 왜 그런가? 본인의 인생의 가능성을 도박으로 걸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사도 바울은, 그러지 마라. 네 인생을 율법에다 말씀에다 걸지 마. 왜? 너는 애초부터 죄인이니까. 네가 그럴 자격도 없다는 거예요. 저주받아 죽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 네가 뭐 밑천이 있나? ‘하나님 이거 받으소서.’ 안 받아, 그거는. 더러워서 안 받아. 더러워서 안 받아요. 주님께 바칠 것도 없고 내놓을 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맹탕이라. 차라리 세리와 창기가 너보다 먼저 천국 간다. 왜? 내놓을 게 없기 때문에 그래요. 내놓을 게.  

예를 들면 우리가 타인에게 경제적 피해를 줬다든지 뭐 욕설을 했다든지 진단서 끊을 만큼 신체적인 상처를 줬다 합시다. 상처를 줬잖아요. 그러면 상대방에게 피해 보상을 하라 하잖아요. 그러면 그 사람이 아파서 일 못하는 일당부터 해서 병원비 다 갚아줬어요. 그게 피해 보상 된 겁니까?

인간사회에서 인간 대 인간끼리는 예를 들어 차를 좀 긁어놨는데 차 견적이 2만원 나왔어요. 그래서 최태원이 한 1조 2천억 줘버렸습니다. 2만원 나왔는데 1조 2천억 줘버렸어요. 그럼 피해 보상됐습니까? 2만원짜리 나왔는데 1조 2천억 받고 하는 말이, 나는 돈을 원한 게 아니고 진심어린 사과를 원한다고 하는 거예요. 참… 돈은 돈대로 챙기고.

진심어린 사과를 원한다. 네가 뭔데? 아니, 진심어린 사과가 됩니까? 내가 네가 아니고 네가 내가 아닌데. 다시 말해서 네가 사과하면 내가 감동의 눈물을 흘리리라. 눈물 흘리지 말고, 시중에 약국 가서 만원만 주면 인공눈물 있어요. 그거 사서 넣으면 돼요.

지금 인간이 어느 정도로 악하냐 하면 자기 인생 조진 것에 대해 남한테 피해 보상을 요구하고 있어요. 그 정도로 악해요. 그게 어디에 속하느냐? 하나님에 대한 범죄로 직결되는 태도에요. 그 마음 자세가. 모든 인간의 행동과 생각은 하나님을 창으로 찌르는 행동이에요, 그 행동들이.

내 인생 조진 것 남편 잘못 만나서 그렇다 하고. 그 남편 만나라고 뭐 강제로 집어넣었습니까? 옆에서 김정은 인민군 와가지고 그 남자하고 동침하라고 결혼식 하라고 뒤에서 총가지고 위협했습니까? 이 남자 아니면 못 살겠다고 못 살겠다고~ 죽겠노라고 죽겠노라고~ 술 한 잔 먹고 창문 두드리면서 창문을 열어다오. 나는 당신한테 꽂혔으니까 내 인생 책임지라고 책임지라고 해가지고 남자가 사천만 땡겨주면 가줄게 해서 사천만원 주고 결혼해놓고, 내 인생 조진 것은 너 때문이다. 뭐 어쩌란 말이에요, 그럼?

지금 인간사회가 어느 정도 개판인가 하는 것은 기독교 교리가 어느 정도 개판인가와 똑같은 거예요. 기독교는 인생 만회를 위해서 만든 사이비 종교입니다. 은혜 받았으니까 의무감으로 책임을 다하면 하나님이 구색 맞췄다 해서 천국엘 간다. 그렇게 은혜로운 구원 받고 행함으로써 상급 받고. 보너스 받고.

주님의 뜻은 간단해요. 아예 죽여 버려요. 아예 죽여 버린다고요. 왜? 이런 짓 하니까 죽일 만하죠. 이런 짓 하니까.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유가 자기가 제사에 실패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실패하니까 복수할 사람이 필요하잖아요. 누구한테 복수합니까? 아벨에게 복수하죠. 아벨에게 복수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하나님 자신에 대한 공격이라고 간주할 수밖에 없어요.

인간 대 인간의 행위가 보이지만 아닙니다. 인간의 행위 모든 것은 하나님에 대한 범죄로 집결되어 있고 연결되어 있어요. 전기가 지지직 하고 주님에 대한 공격으로 연결되어 있어요.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내에 율법을 확장시켜 놨고요. 율법의 촘촘한 망이 결국 십자가 사건으로 완성이 되어버립니다. 거 봐. 내가 뭐랬어. 율법의 망에 걸려든 모든 인간들은 평소에 율법에 대한 인상과 그 태도가 결국 마지막에 어디서 집약됩니까? 메시아를 죽이는 쪽으로 집약되죠. 메시아를 죽이는 쪽으로.

로마서 12장입니다. 로마서 12장 19절,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갚지 말아야죠.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네가 남한테 피해 보상을 요구한다든지 너는 내 손에 죽어야 한다든지 네 인생 때문에 내 인생 조졌다고 할 수 있는 자격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왜냐? 아무도 옳지 않기 때문에.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인생 살면서 어렵고 힘든 건 뭐냐? 타인을 통해서 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범죄한 순간 순간을 내 인생으로 채우고 있다는 것을 만나는 타인을 통해서 깨닫게 하는 거예요.

자식을 키우면서 진심으로 엄마가 할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아들아, 너한테 몹쓸 짓을 했다. 아들아, 나는 너를 너무나 사랑하고 귀하게 여겨서 내가 하나님 앞에 몹쓸 짓을 했다. 나는 하나님보다 내 자식을 우선시하는 그런 나쁜 짓을 난 매일같이 너한테 행사하고 있다. 매일같이.” 수학여행 보내줘, 학습지 사줘… 중학교 진급 안하고 밖에 공장 보내서 앵벌이 시켜도 되는데 중학교 넣어줘.

어떤 의미에서 부모가 자식을 키운다는 것은 자식을 앞장세워서 하나님이 저지른 망가진 내 인생을 하나님한테 보란 듯이 복수하는 행위에요. 복수하는 행위. 결혼 안 한 사람은 좋아서 히 웃는다. 잠재적 결혼입니다. 언젠가 좋은 사람 만나면 하게 되어 있어요.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의 요구는 이겁니다. “나한테 갚지 말라.” 나한테 갚을 생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게 복음이에요. 갚을 자격이 안 된다면 우리는 뭐냐? 쪼다죠. 그게 복음이에요. 얼마나 네가 무능한가를 네가 알란 말이죠. 자꾸 예수 믿고 유능하게 되었다고 생각하지 말란 말이에요.

무슨 비유? 달란트 비유? 한 달란트? 아이고 참 내. 아니, 달란트 비유를 제대로 알고 또 그 말씀대로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열두 제자 가운데 있습니까? 다 토꼈어요. “목자를 치니” 그다음에 뭡니까? 양다워야 되죠. 목자를 치니 그중에 두 마리 양은 헌신했다, 그런 건 없어요. 목자를 치니까 양다움이 뭡니까? “각기 제 갈 길로 갔거늘”. 거 봐.

너는 그런 식으로 평소에 살아왔잖아. 그런 식으로. 목자를 언급하는 것은, ‘좀 이용해볼까? 예수님을 통해서 인생 만회해볼까?’라는 꿍꿍이속이 있었던 거예요. 오늘날 교인들하고 똑같아요. 전혀 다를 바 없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사람들 뭐라고 하는 줄 압니까? ‘그렇다면 내가 교회 안 나간다.’ 이러거든요. 처음부터 너는 교회를 음흉한 마음으로 갔기 때문에 와도 의미 없고 안 와도 의미 없는 거예요.

그러면 목사가 교회를 세운다? 이거 뭐 다단계죠. 하나 걸리기만 해봐라. 사기 칠 인간 걸리기만 해봐라. 딱 물면 그거잖아요. 은혜 받았으면 적어도 양심이 있으면! 인간적으로! 우리 인간적으로 합시다. 양심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피까지 흘려줬는데 피까지 흘려줬으면 적어도 김천 대학교 하나는 인수해야 될 거 아니냔 말이죠. 박옥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복음 전파에 무슨 감? 사명감을 감당해야 하늘나라가 확장되지. 확장을 왜 니가 해? 니가 왜 신경 쓰는데? 니가 나폴레옹이가? 정복욕에 빠져가지고.

뭐 한국 교회 썩었다고? 한국 교회는 썩은 게 아니고 없어요, 아예! 뭐 있어야 썩든지 말든지 하지. 아예 없는데 무슨. 썩을 것이 없어요. 한국 교회는 없어요. 교회는 있어요. 그런데 한국 교회는 없어요.

자, 주님의 십자가 이후에 인간들이 이 십자가에 대해서 어떻게 나올 것을 주께서 뻔히 아시면서 미리 설정(設定, setting)을 한 겁니다. 설정이란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날 더울 때 집에 있는 에어컨 온도를 미리 설정해두면 그 온도보다 낮을 때 안 돌아가죠, 자동적으로. 그게 설정이에요. 딱 정해 놨다. 확정지어 놨다. 그게 뭐냐 하면 기름 부음이에요. 기름 부음.

성령께서는 철저하게 예수님에 종속돼요. 예수님에 예속됩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미움 받았죠. 성령은 더합니다. 왜? 똑같이 예수님의 미움 받음을 내용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난 뒤에 성령은 그 십자가를 이 세상에 들이댑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뭐냐 하면, 너는 나를 ( )했다. 뭐겠어요? 너는 나를 핍박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 질 때까지 예수님을 만나본 적이 없어요. 그 동네 안 살았어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 동네 살지도 않았는데 왜 예수님은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사울이라는 사람에게 왜 찾아왔는가? 사울은 예수님의 성령 받은 사람과 관련성이 있어요.

어떤 관련성이 있느냐 하면 스데반 집사를 핍박했거든요.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 사건에 그야말로 준책임자로 현장 책임자로 거기 있었단 말이죠. 현장 책임자로. 일종의 그걸 증인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돌로 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바른 행동을 한 것이라는 것을 증인으로서 대변해줄 사람으로 사울이란 사람을 한 거예요. 왜냐하면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고 쉽게 말해서 우리 당이다. 우리 당. 우리 편이니까 우리하고 한통속이니까 그렇다는 거예요.

그러면 스데반 집사는 지금 누구하고 있느냐 하면 성령이 충만했죠, 스데반 집사가. 성령이 충만했다는 말은 스데반 집사가 어디에 충실했다는 말입니까? 주님이 하는 설정에 충실한 거죠. 주께서 설정했다는 말은, 어떤 인간도 나한테 갚을 수 있는 자격자는 없다는, 아무도 없음에 충실한 거예요. 어떤 인간도.

그러니까 ‘예수 믿고 훌륭하게 되어라’가 아니라 예수 믿기 전에도 훌륭하지 않았고 예수 믿고 난 뒤에도 훌륭한 사람은 없음을 설정한 거예요. 그게 기름 부음입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얼른 잘 이해하기 힘들죠.

창세기 4장 4절에 보면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했다. 제물을 열납할 때는요. 아벨의 정성을 보고 열납하지 않아요. 제물 자체에 하나님의 뜻, 장차 행하실 하나님의 계획이 들어있으니까 그 함축된 계획을 하나님 자기 계획이니까 하나님께서 수납한 거예요. 앞으로 그런 식으로 이 땅에서 일할 거라는 것을 아벨이 드린 제물을 통해서 그걸 확인하고 인정해주는 겁니다. 그럴 때 아벨과 주님 사이에는 관계가 성립되는 거예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벨하고 하나님하고 관계가 없어요. 관계가 없는데 아벨이 드린 그 제물이 관계없는 아벨과 하나님 사이를 잇게 만든 겁니다. 그 이음에서 투입된 것이 뭐냐? 예수 그리스도에요.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중보자가 되는 겁니다. 아무 상관없는 아벨과 하나님 사이를 이어버린 겁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하고 무슨 관계있습니까? 관계없어요. 모든 사람은 하나님하고 관계없어요. 끊어졌어요. 끊어졌는데,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의 중보자란 사실이 원인도 모르고 이유도 모르는 채 그냥 와버린 겁니다.

물리적으로 이야기해서 아리스토텔레스(BC 384-BC 322, 고대 그리스 철학자)라는 철학자는 혼자 측정하고 분석해보니까, 왜 움직이는가? 왜 변화하는가? 물질은 왜 변화하는가? 가만있는 이것(음료수 병)이 왜 이렇게 움직이는가? 그리고 내가 움직이지 않더라도 이거 한 3년 6개월 간 있으면 못 먹죠. 자체적으로 세균 때문에 변하죠. 왜 변하는가? 왜 움직이는가?

전부다 운동으로 설명할 수 있어요. 이걸 운동이라 하는 거예요. 운동. 네 가지 원인(존재의 4원인)을 이야기했어요. 작용인, 형상인, 목적인, 또 운동인. 누가 외부에서 건드려주니까 이것이 움직였다고 하는 거예요. 철학에서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이건 맞는 말이라 하는데, 성경적으로는 어떻습니까? 성경적으로 그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자의 말이 맞습니까? 누가 여기서 건드려줘야 움직이잖아요. 건드려주면 움직이잖아요. 그러니까 맞잖아, 이렇게 하잖아요.

내가 성질난 것은 네가 나한테 욕설했으니까 화낸 거다. 이것은 작용인이죠. 작용인. 왜 아들이 아버지를 닮았는가? 아버지의 형상이 아들에게 전수돼서 그렇다. 요새 말로 하면 DNA가 있어서 그렇다. 이게 다 틀린 말입니까, 맞는 말 같아요? 이게 다 맞는 말 같죠.

그런데 성경에선 틀린 말이에요. 왜? 성령의 기름 부음의 설정에 의하면 인간은 죽음에 변함이 없어요. 왜? 똑바로 있어도 죽었고 누워 있어도 죽었고 애가 되어도 죽었고 나이 들어도 죽었고. 이 죽음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벨은 변함이 없어요. 변함이 없는데 변화를 주는 것은 아벨과 하나님 사이에 중보자가 끼어들어서 비로소 아벨로 하여금 변할 필요도 없는, 아벨은 구원받을 필요도 없어요, 구원받을 필요가 없는데 아벨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이 아벨에게 찾아온 거예요.

여러분 표정 보니까 뭐 안 믿는 눈친데…. 뭐를 빼는 거예요? 이 설정에서 뭘 빼는 겁니까? 인간으로 하여금 죄인으로 확정짓는 거예요. 죄가 뭐냐? 모든 인간의 존재 자체가 주님에 대한 공격이고 핍박이고 배후에 원수 악마가 있으니까 대적해서 핍박하는 것으로 설정을 해놓았기 때문에 인간은 설정한 범위를 벗어날 수 없어요. 21도로 설정해놨으면 그다음부터는 19도로 안 내려가요. 에어컨 틀어도. 21도가 한도기 때문에.

이미 인간은 범죄했기 때문에 인간은 전혀 달라지지 않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인간은 죄인이에요. 그리고 그 결과 죽어요. 뭐 잘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는데… 때깔 있으니 뭐합니까? 죽게 되면 똑같은 건데. 아무 상관없어요.

주님이 이야기한대로 왜 간단하게 못 삽니까? 은혜 받았으니까 은혜에 대한 의무감으로 바른 생활해야 된다, 이러니까 이제 복잡해지는 거예요. 복잡해지는 이것이 얼마나 이게 사기에 걸려든 안타까운 모습인지. 제가 예를 들 테니까 여러분 답변해보세요. 이게 얼마나 사기꾼에 속아 넘어간 건지.

인간의 행함의 경우 수가 많습니까, 아니면 율법의 성경의 계명 수가 많습니까? 어느 쪽이 많습니까? 어느 쪽이 많아요? 인간 행함의 경우수가 많죠. 이게 많아요. 왜? 율법은 뭐 369가지밖에 안되는데. 인간의 행함의 경우 수, 예를 들겠습니다. 어제 새벽 2시 반부터 3시까지 꾼 꿈. 그 꿈이 율법에 저촉되었어요, 안 되었어요? 인간이 행한 모든 것이 율법이란 그물에 포착됩니까? 이리 빠지고 저리 빠지고 다 빠져요.

예를 들어서 순진한 교인이 목사한테 묻습니다. “목사님, 기도할 때 어떤 자세로 하는 기도가 가장 경건합니까? 두 손을 쫙 펴서 모을까요, 깍지를 낄까요? 안 그러면 고개를 들까요, 반만 숙일까요, 90도로 숙일까요? 무릎은 꿇어앉아야 될까요? 내가 지금 관절이 안 좋아서 꿇어앉지는 못하고. 양반다리를 할까요? 한쪽 다리를 세우고 교차로 다리를 꿇어서 할까요? 도대체 뭘 해야 됩니까? 기도를 어떻게 해야 됩니까?”

거기에 대해서 목사가 뭐라고 합니까? 여러분이 목사님이라면 뭐라고 이야기해주겠어요, 순진한 교인이 그렇게 이야기하면? “기도는 나쁜 기도가 있고 좋은 기도가 있는데, 좋은 기도가 있고 나쁜 기도가 있는데, 기도 자세와 관계없이 나쁜 내용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만약 하면 그다음부터 그 순진한 교인이 어떻게 나오겠어요? 턱 괴고 다리 하나 걸치고 이럴 거란 말이죠. 세상 제일 편한 자세로. 그러면 목사가 “그건 아니고.” 그럼 도대체 규격을 제시해. 규격을. 어느 정도는 되고 어느 정도는 안 되는지 이야기 해달라.

자, 순진한 교인이 그걸 묻고 순진하게 그걸 요청하는 이유가 뭡니까? 하나님께 보복하려는 마음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께 보복하려는 마음. ‘하나님은 내 인생을 조져도 나는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성의를 보이니까 이제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답할 차례입니다. 복 줄 차례입니다.’ 이거잖아요.

진짜 우리가 하나님 같으면 총 쏴 죽여 버려요. 두두두두두두. 오늘 제목을 ‘두두두두두두’로. 우리가 숨 쉬는 것조차도 주님에 대한 도전인데 하나님께서 그걸 은혜로 숨 쉬게 하잖아요. 히말라야 산맥 꼭대기에 한번 꽂아져봐야 아, 숨 쉬는 것 이게 큰 선물이구나. 산소통 메고 나중엔 머리 어지러워서….

주님의 은혜를 어찌 평생 다 갚으리오. 갚으려고 하지 마. 갚지 마! ‘갚으리오’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못 갚지만 그러나 마음가짐은 갚을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 생각도 하지 마. 그 생각도 하지 마. 그 생각 가지면 주께서 뭐 복 줄줄 알고? 아, 네 마음이 가상하도다. “이 도끼? 금도끼?” “제 거 아닙니다.” “은도끼는?” “제 거 아닙니다.” “쇠도끼?” “내 겁니다.” “아이, 가상하도다. 보너스로 금도끼, 은도끼 다 줄게.” 은근히 그거 노리는 거 아니에요? 노리죠.

어떤 아들이 부모한테 효도한답시고 기초생활 연금을 받는 부모한테 전기 자동차를 사줬어요. 자식은 효도 참 잘했어요. 그 부모가 기초생활 잘렸습니다. 차가 사천만원 이상 되게 되면 기초연금이 안 나와요. 아주 큰일 했어요. 부모 위해서 큰일.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뭔가 나보다 더 큰 대상이 있으면 인간은 거기서 힘을 뽑아낼 대로 뽑아내는 식으로 기생,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있죠, 기생해가지고 들어붙어서 자기 살 길을 챙기는 것.

거기에 대해서 강의 제목이 뭐라고요? 두두두두두두. 두두두두. 주님은 돌아가셨는데 인간은 지 살 궁리하고 있어요. 십자가 피 찍어 발라가지고. 십자가가 어디 뭐 파운데이션입니까? 기초 화장품이에요?

기름 부음의 특징은 인간에다가 메시아의 흔적을 새겨 넣는 방법이 기름 부음이에요. 그게 설정이에요. 확정이에요. 장차 메시아는 이 설정에 맞추어서 오신다는 것을 자기의 택한 백성을 가지고 주께서 미리 사용하신 겁니다. 이제 기름 부음이 감이 오십니까? 기름 부음은 구원하러 온 게 아니에요. 주님이 기거할 자기 집 설계도가 기름 부음이에요. 나 네 몸 좀 빌릴게, 그래서 오는 게 기름 부음이라고요.

주님 자신의 일을 위해서 기름 부었는데 이거 뭐 성도가, “저를 성령으로 기름 부어주니 고마워서 성의 표시로 제가 마르다처럼 주님 오실 때 섬기겠습니다. 주님 뭘 좋아하십니까? 짬뽕 좋아하십니까? 탕수육 좋아하십니까?”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그런 쓸데없는 거 하지 말고 네 동생처럼 딱 턱 밑에 앉아가지고 싸가지 없이 말씀이나 들어라. 마리아처럼.”

왜 자꾸 은혜에 보답을 생각합니까? 이것은 아직도 자기 가치에 대해서 그렇게 낮추어 보이기 싫다는 거예요. 내가 진짜 벌레보다 더 못한 그러한 무가치한 인간되기는 내가 용납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이 신에게 복수하는 방법은, ‘누가 감히 내 가치를 망가뜨려?’ 이거는 노골적으로 예수님, 하나님 이렇게 비난하지 않더라도 이러한 자존감, 자존심이 있어요. 모든 인간이 다 그렇습니다. 이게 없는 인간이 없습니다.

심지어 베드로는요. 예수님 사랑한다 해놓고는 돌아서서는… “너는 네가 원치 않는 죽음으로 죽을 것이다.” 할 때에 “그러면 저 제자는?” 하고 사도 요한보고 얘기하니까 주님께서 그 심보를 아시고 “내가 올 때까지 살아진다 할지라도 너는 너 할 일만 하세요. 그딴 거 신경 쓰지 말고.” 그랬다고요.

이건 자신의 가치를 운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런 자를 구원할 때 뭐라고 하겠습니까? “너의 가치보다 우월한 능가하는 가치로 찾아갈게.” 이거잖아요. 그게 바로 히브리서 1장에 나옵니다. 기름 부음입니다. 히브리서 1장 한번 보겠습니다. 1장 9절, “네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였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너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 부어 네 동류들보다” 그다음 뭡니까? “동류들보다 승하게 하셨도다”

이건 예수님보고 한 이야기거든요. 예수님을 위한 예언입니다. 예수님으로 하여금 이 세상의 어떤 인간의 가치보다 월등한 가치를 줬다는 증거로서 기름 부음이 있습니다. 기름 부음이 뭐라고 했습니까? 설정한 것, 확정짓는 것. 이래야 네가 다른 것과 차이나는 구별된 것입니다. 이게 거룩이라는 겁니다. 거룩.

그래서 출애굽기에 보면 제사장들을 일반 백성과 차이 나게 할 때 제사장에게 바르는 게 있어요. 출애굽기 28장 41절에 보면 “너는 그것들로 네 형 아론과 그와 함께한 그 아들들에게 입히고 그들에게 기름을 부어 위임하고” 기름을 붓는데 그럼 인간+뭐가 돼요? 인간+기름이 되겠죠. 인간+기름이 되기 때문에 그 기름이 같은 인간 동류보다 월등하고 우월한 거예요.

그러면 아론이 기름을 가진 겁니까, 기름이 아론을 사용하는 거예요? 기름이 아론을 사용하죠. 기름은 어디서 나왔는가? 제물에서 나오죠. 그러니까 아론은 제물화 된 인격화. 제물 인간. 제물화 된 인간.

제물은 그 당시 모세 율법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자기 백성과 소통하는 매개체입니다. 그게 제단의 제물이에요. 제물 없으면 하나님과는 연락이 안 됩니다. 그 제물의 모든 규모와 그런 모든 종류는 하나님이 친히 없는 데서 나온 율법을 통해서 주신 거예요.

그러면 아론과 모세는 그 율법에 낚인 거죠. 율법에 낚인 거죠. 율법에 낚일 때, 그걸 기름 부었다 하는 거예요. 그럼 오늘 본문도 그렇지만 “너희에게 기름 부음이 있어”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네가 바로 제사장이라는 거예요. 뭐 제사장 된다고 해서 월급 더 줍니까? 월급 더 주는 게 아니고, 아까도 얘기했죠. 내 쪽에서 하나님께 추가적으로 뭘 갚는다든지 할 게 전혀 남아있지 않아요.

그러니까 이 기름 부음의 취지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사람은 평생 동안 수고하고 무거운 짐에서 해방되죠. 나라는 짐에서. 나. 나의 가치라는 허망한 환상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우리도 한 10분간 벗어나 볼까요?
 이하림(IP:180.♡.164.155) 24-06-15 06:21 
서울강의20240613b 요한일서 2장 27절(기름 부음)-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이야기하실 때) 우리가 기름 부음 받았다는 것은 네가 너한테 보복하지 말라는 거예요. 네 인생에 대해서 네가 평가할 자격이 없다는 겁니다. 이미 기름 부음이 압수해갔는데 무슨 내 게 남아있습니까? 내 인생 이랬으면 좋겠다 저랬으면 좋겠다, 콩 내놔라 팥 내놔라, 내가 관여할 수 있는 대상이 없어요.

영적 전쟁에서 주님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전쟁에 나서게 만들어버렸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다윗이에요. 골리앗을 이기고 난 뒤에 사무엘상 18장 10절에 “그 이튿날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힘 있게 내리매 그가 집 가운데서 야료하는 고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그가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 하고 그 창을 던졌으나 다윗이 그 앞에서 두 번 피하였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돌았나. 나라의 충신을 왜 이렇게 창으로 찔러 죽이려고 했는가? 사울에게 악신이 임했다는 거예요. 악신이. 그러면 성신의 반대말은 뭐가 되죠? 악신이죠. 성신과 악신이 어떤 경우에 그게 현실화되어서 나타나느냐 하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간단하게 말씀드리려 했는데 또 갑자기 복잡해져버렸어요. 언약은 그냥 약속이에요. 어떤 구체화된 게 없어요. 언약 보여줘. 뭐 언약이 있어야 보여주지. 언약은 눈에 보이지 않는 거잖아요. 보이는 방식이 뭐냐? 사람 대 사람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사울이라는 사람이 다윗이라는 사람을 향하여 창을 던졌다 이 말이에요. 죽이려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가인과 아벨 사이에서 가인은 아벨을 죽이려고 한 게 아니라 아예 죽였죠. 아예 죽여 버렸다고요. 죽일 때 죽이려는 자(사울, 가인)와 죽임의 대상이 되는 자(다윗, 아벨) 이 사이에서 뭐가 나오느냐? 이 가운데서 뭐가 나오느냐 하는 거예요.

다윗은 성신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사람이 있는 게 아니에요. 악신 받은 자와 성령 받은 자, 딱 둘의 영적 싸움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게 신약에도 나오는데 신약 누가복음 12장 10절. 9절부터 보면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으리라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이 ‘인자’는 아직까지 영광을 받지 못한 상태의 예수님을 인자라 합니다. 사람의 아들로 왔기 때문에 사람으로 오셨단 말이죠.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것으로 왔을 때는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성령.

왜 그러느냐 하면 예수님의 인자의 시대가 끝나고 그다음부터는 무슨 시대가 되느냐, 본격적으로? 성령의 시대가 된다는 거예요. 성령의 시대가 되게 되면 인간이 어떻게 되느냐? ‘모든 인간은 옳지 않다’가 돼요. 의미 있게 행동할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게 돼요.

뭔가 선하게 행동이 나올 수 있는 인간은 예수님 십자가 이후에, 그 이전도 마찬가지지만, 인간 중에는 아무도 없음이 십자가로 최종 확정이 되었어요. 그러면 성령은 뭐라고 했습니까? 설정하심이죠. 설정되는 거죠. 확정되는 거고. 뭐로 설정했어요? ‘어떤 인간도 의인은 하나도 없다’를 확정하는 게 성령입니다.

그러면 성령을 모독한다는 말이 뭐에요? ‘나 착할 수 있는데…’ 이게 성령을 모독하는 거예요. 아직도 자기 가치에 대해서 미련을 못 버리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욕하는 게 아니에요, 지금.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기 위해서 설정했고, 성령께서는 그 십자가를 유일한 내용으로 해서 확장시키는 그것으로 성령님을 통해서 확정시켜 놨고. 하나님이 누굴 미워하고 자시고 할 건덕지도 없죠.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일을 하면 그만이에요. 그 기준에 부합되지 않으면 사하심을 얻지 못하는 거예요.

아직까지 우리는 기름 부음의 본론에 접어들지 않았습니다. 지금 서론 부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 두 번째 시간이니까 바로 본론 부분에 들어가겠습니다. 요한복음 7장 37절-39절,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여기서 이 말씀이 요한복음 7장에 쭉 나와 있죠. 나와 있을 때에, 어느 대목에서 우리가 끼어들어야 되는지. 어느 대목에서. 끼어들 위치가 어디인지를 인간으로서는 파악하기 힘들고 또 끼어들 수가 없어요. 초등학교 애들 줄넘기할 때 타이밍 맞춰서 줄에 끼어들잖아요. 인간은 이 말씀 속에 끼어들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그래, 예수 믿어서 성령 받아서 구원 받아야지.’ 할 수 있는 그 장소가 인간에겐 허용된 적이 없다 이 말입니다. 성령께서는 인간의 선택이나 인간의 뜻을 반영해주지 않습니다. 성령께서는. 이건 뭐 성경 찾아볼 필요 없어요. 다 아는 이야기니까. 마태복음 3장 16절,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받을 때.

요단강에서 세례 받을 때 성령은 독점적이에요. 왜냐하면 그 당시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한테 예수님이 세례 받을 때 성령 세례 받은 사람은 예수님 말고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단독적이에요. 단독적. 여기서 성령님의 단독적 위치에 대해서 분명히 해야 돼요.

‘성령 나눠주세요.’라고 우리가 요구할 수 없어요. 성령은 우리 말 듣는 게 아닙니다. 성령은 철저하게 예수님 종속적이에요. 예수님이 십자가 지기까지는 철저하게 예수님은 아버지의 영, 성령에 종속적이었습니다. 일종의 짜고 치는 고스톱이죠. 성부, 성자, 성령 사이에. 자기들만의 세계에 폐쇄적입니다. 거기에 인간은 끼어들지 않아요.

그러니까 세 분의 하나님이 손을 잡고 그 자리에서 그냥 맨 땅에… 흙먼지 나는 맨 땅에서 ‘마징가 제트’ 해가지고 한번 휙 빨리 돌아보세요. 그럼 흙먼지만 팍 일어나지, 인간들이 거기에 끼어들 수 없죠. 주님께서 그렇게 협력한다고 해서 거기서 새로운 피조물 생기고 그런 거 없습니다. 그걸로 닫혀져요. 닫혀진 구조가 되는 거예요.

왜 그렇게 원리가 되느냐 하면 그게 구약 레위기까지 가야 돼요, 이게. 생각하는 것은 간단한데 거기에 대해 준비된 말씀은 복잡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어요. 그래서 하나 하나 찾으면 지루하기 때문에 내가 대충 읽고 설명하고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레위기 3장 15절, 16절에 두 콩팥과 콩팥 위에 있는 기름을 다 긁어내서 그걸 단 위에 불살라버려요. 불사르면 그건 하나님이 맡으시는 향기로운 냄새가 되는 겁니다.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근방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취할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단 위에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로 드리는 식물이요 향기로운 냄새라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그럼 제물의 기름은 소모용이 되는 거예요. 있었는데 불타고 이게 냄새가 되어서 하나님을 흐뭇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양식이 된다 이 말입니다. 여기서 기름이란 소모용이다. 소모용이기 때문에 인간이 터치하면 안돼요. 인간은 피와 기름을 먹어서는 안돼요.

피+기름이다. 피는 바로 생명이에요. 제물의 생명으로 하나님께 바치고 제물의 생명의 피와 같이 연루되어 한 몸체를 이루고 있는 기름은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하는 그 증거로서 기름을 태워서 하나님께 가져와요. 그러면 하나님이 기름을 받으시고, 기름을 낸다는 말은 이 생명은 죽어야 돼요, 살아야 돼요? 죽었다는 뜻이죠. 자기 아들의 죽음이 효과적으로 성공했다는 것을 아버지 하나님은 기쁘게 받는다는 거예요.

역시 하나님 자기 세계에 폐쇄적이에요. 자기 세계에 폐쇄적이라는 말이 로마서 11장 36절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주로부터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간다. 제가 강강술래 이야기했지만 그게 하나의 자기끼리 세상입니다. 그 세계를 확장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는데 이렇게 끼어들 생각하면 안 된단 말이죠. ‘저 구원해줘야죠, 삼위일체 하나님. 제 인생 책임지셔야죠.’ 요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제켜버려요. 다 제켜버린다니까요.

그런데 아까 제사장이 뭐라고 했습니까? 제물의 인격화라 했죠. 제물에 있는 기름을 제사장이 와서 발라요. 아까 출애굽기 본문 봤죠? 제사장이 발라요. 그럼 제사장은 성막 중심의 하나님 입장에서 제사장이 여기에 끼어들 수 있어요. 끼어들 때 조건이 뭐냐? 기름 바르지 않는 존재와 차별화시키는 겁니다.

그럼 제사장이 끼어들면서 여기서 등장하는 것은, 백성들 있고 특히 성막 있으면 제사장은 동쪽에 끼어들잖아요, 그럼 이게 ‘거룩한 구역’이에요. 거룩한 구역. 이게 거룩이 되면 나머지는 자동적으로 세속, 더러움이 되겠죠.

우리가 왜 더러워? 할 때, 거룩한 구역에서 뭐가 발사됩니까? 제사장이 백성들에게 뭘 가르치죠? 율법을 가르치죠. 율법은 누가 받아왔습니까?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아온 율법을 여기(세속)에 산포해버려요. 흩어버려요. 제공합니다. 그럼 율법이 화살표처럼 백성들의 심장에 꽂히고 되돌아오면서, 나갈 때는 거룩한 율법, 들어올 때는 거기에 백성들의 죄를 품고 들어오는 거예요. 죄를 품고.

인간의 모든 경우의 수가 율법을 지키겠다 하는 사람 같은 경우에는 내가 하는 행동이 옳았냐, 기도할 때 어떤 자세냐, 그런 것은 율법에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안 나오죠. 그래서 인간의 숫자만 하면 경우의 수가 율법보다 많아요. 그러나 그에 대한 환경을 보게 되면 율법의 세계가 인간의 경우의 수보다 훨씬 월등하고 인간 경우의 수를 전부다 덮게 됩니다.

왜냐하면 ‘네가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라.’ 율법이 몇 개에요? 달랑 두 개인데 이 두 개를 못 빠져나가요, 모든 인간이. 모든 인간이 못 빠져나간다는 말은 결국 인간은 율법에 대해서 아는 바 없고 아는 바 없으니까 지킬 수도 없는 거예요.

내가 지켰다 안 지켰다 판정을 내가 내리는 것은 실패입니다. 이건 인정하지 않아요. 그러면 판정관이 따로 와야 되는데, 율법에 대한 판정관이 따로 와야 되는데, 그 분은 율법을 다 이루신 분이에요. 율법을 이루신 분이 왔을 때, 어떤 인간도 그 예수님 앞에서 의롭다 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 증거가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께서 그냥 글씨만 썼어요, 땅에다가. 봐봐. 봐. 봐. 뭔가 싶어서 나이 많은 사람부터 본다고요. 이거는 내가 돌에 맞을 짓이네. 이거는 내가 죽을 짓이네. 야, 빨리 피하자. 아직도 젊은 애들은 모르고, 뭔데? 어? 보니까 전에 오토바이 탈 때 헬멧 안 쓰고 탔네.

모든 율법이 왜 너는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느냐? 왜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지 않았느냐? 그것과 직결되니까 주님께서 쓰시는 글을 보고 나는 그 정도로 했지롱 하고 버틸 수 있는 인간이 아무도 없는 거예요.

이건 프라하 설교에서 했지만, 피하지 말고 ‘주여, 죄인입니다.’ 이러면 될 텐데. 일단 토끼고 보자 하고 다 토껴버린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 쪽에서 쓴 글을 피해 나가면 인간에게 뭐가 유지됩니까? 아직도 나는 건전하고 이성적이며 가치 있는 인간이라는 게 남겠죠.

이게 평소에 인간이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갖추고 있는 행동방식입니다. 어떤 누구도 자기 의를 포기하고 주께 올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 프라하 설교 제목이 ‘강제 소환’이에요. 이리 와. 강제 소환. 여기서 강제 소환에 적절한 것은 마동석. 딱 붙들고 그대로 패죠. 이게 뭐냐 하면 “여자야, 너는 이제부터 너와 너 자신과 헤어져야 돼.” 헤어져야 되는 거예요.

주님께서 때린다는 것은, 주님이 대제사장이거든요. 기름 부은 자니까 제사장은 장차 오실 메시아를 미리 모형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대제사장의 특징은 같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제단에서 나오는 기름 부음이 있는 그것 때문에, 기름만 붓는 게 아니고 피도 발라요, 피와 기름 때문에 백성을 대표하면서도 차이나는 사람이에요.

제사장 복장에는 하나님의 성결한 이름이 쓰여 있는 거예요. ‘노동자여 단결하라’ 이런 거 쓰여 있는 게 아닙니다. ‘전국 의료인들이여 단결하라’ 이런 게 막 쓰여 있는 게 아니에요. 그냥, 내가 기거하는 곳은 거룩한 곳이 되어야 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설정된 하나님의 결정이다. 이 공간은 거룩한 공간이다.

죽어야 되는 제단에 피와 기름을 바르지 아니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피는 죽어야 될 주체를 이야기하고 그 효과가 기름이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은 주체로 죽고 그 효과로서 우리에게 성령의 기름 부음이 오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살아있는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고 그게 한 지체가 되는 겁니다.

이걸 쉽게 예로 들면 이거에요. 옛날 빼빼로는 초콜릿만 있었어요. 그런데 새로 나온 개발된 빼빼로는 땅콩 부스러기가 묻어있을 거예요. 그 땅콩에 해당되는 것이 성도입니다. 기름 부음에 흡입력이 있어서 딱 땡겨버리면 몸부림쳐도 주의 기름 부음에서 발을 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제 궁금한 게, “목사님 듣기엔 참 기분 좋은데 내가 기름 부음 받았는지, 안 그러면 참기름만 발랐는지 그걸 어떻게 압니까?” 그건 제가 아까 다윗과 사울에서 이야기했어요. 악신 들린 자가 눈치를 채요. 악신 들린 자가.

그래서 제가 아까 첫째 시간 초반에 악신 들린 자의 교리를 이야기했죠. 뭡니까? “은혜 받았으면 값을 해야지. 소위 인간이라면, 네가. 네가 인간이라면 은혜 받아 처먹었으면 보답을 해야 네가 인간이지.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고 갈수록 그리스도에까지 자라나야지.” 이 주장. 갑자기 내가 왜 흥분하나.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이 뭐 폼이냐? 성경 다 잘라버리고 필요한 것만 갖다 붙이면 되겠어?” 라고 했을 때, 그 이야기할 때, 그건 뭘 의미합니까? 뭘 의미해요?

지금 제단에 제물이 있잖아요. 제단에 제물. 제단의 제물이 죽어가면서 기름 생산했죠. 피 생산했죠. 피, 소모용입니다. 기름도 다 태우고 나니까 소모용이죠. 소모될 기름의 일부가 소모되어야 마땅한 것의 일부가 제사장에게 주어졌다면 제사장의 존재의 기능은 하나님 앞에 소모되어야 돼요.

마치 장차 오실 예수님처럼.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저는 소모되겠습니다. 저 사라지겠습니다. 그저 주님의 진노하심만 제게 주어지면 진노하심과 제 목숨을 맞바꾸겠습니다. 저는 죽어가면서 하나님의 진노하심, 일괄적인 진노하심만 드러내시면 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의미잖아요. 십자가 앞에서 아무도 의롭다 할 사람이 없어요.

당신은 십자가 사랑은 빼놓고 왜 자꾸 진노하심만 강조하느냐? 당신 그 의도가 뭐냐? 의도는 뭐냐? 십자가가 율법의 완성이거든요. 그럼 아까 사도 바울 말씀드렸듯이 사도 바울은 율법을 어떻게 해석합니까? 지키면 복 받는다 그 이야기했어요? 아니면 율법의 기능, 존재하는 이유는?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의인은 없고 진노 아래 있게 하려 함이라.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사도 바울에게 얼마나 달려들겠어요? 성경을 왜 반토막 내냐? 복 받는 게 있잖아. 그걸 빼놓고 왜 진노만 이야기하느냐? 사도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네 속이 육이거든. 네 속은 이미 악마가 점령해있다는 거예요. 악마가.

악령이 없는 성령은 활동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활동하면 악령의 실존을 끄집어내는 용도로 악령이 작용해요. 그러니까 내가 기름 부음 받았다, 기름 부음 받지 못했다는 것을 뭐로 아느냐 하면 성령 받은 사람은 뭐가 눈에 띄는가? 악령 받아 설치고 외치는 사람들이 눈에 띄고 드디어 느끼게 되어 있어요.

악령은 보이지 않습니다. 성령도 보이지 않아요. 그러나 성령 받은 사람은 보이고 악령 받은 사람은 보입니다. 인간의 가치에 대해서 계속해서 그걸 붙잡으려는 자들. 붙잡으려는 자들, 인간의 가치에 대해서. 십자가로 구원 받고 성령의 열매를 추가해야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자들. 그들은 성령의 열매가 뭔지도 몰라요.

분명히 성령의 열매는… 갈라디아서 한번 봅시다. 제가 이렇게 자꾸 설명해도 막상 그쪽 이야기 들으면, 그럴듯한데? 그것도 서울말로. 그럴듯한데? 왜 그땐 또 서울말인지 모르겠어. 그럴듯한데잉? 전라도말 이런 거 없어요. 갈라디아서 한번 봅시다. 5장 24절,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죠. 그러니까 뭐만 나와요?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그 취지만 계속 나오는 거예요, 반복해서.

자아? 그거 정과 욕심이죠. 그러니까 이 자아는 없어지는 게 아니고 ‘내가 죽을 자아를 가지고 지금껏 계속 살아가고 있습니다.’를 추가적인 십자가 사건화로… 십자가가 십자가 되려면 죄 있는 육신과 같이 만나야 사건이 나오거든요. 아까 제가 옮기는 것 봤죠? 성령은 악신과 같이 옮기면서 거기서 그 의의 취지가 드러나죠.

성령은 왜 있는가? 악신을 공격한다. 십자가는 왜 있는가? 모든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에. 너무나 간단한 논리에요. 너무나 간단한 논리입니다. 그래서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은 자기가 속해있는 죄가 계속 나오면 나올수록 어때요? 기뻐요, 슬퍼요? 아니면 슬프다 기쁘다 조울증 걸린 겁니까? 어떤 거예요?

인간으로서 최상의 쾌락은 자신이 죄인 됨을 아는 순간입니다. 자신이 죄인 됨을 아는 순간이 최고의 쾌락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죄인으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가 아무리 착해도 애초부터 인간은 죄인으로 설정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내가 죄인이라 하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비로소 나는 나를 알게 되었다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사울이라는 사람이 예수님 만날 때 갖고 있던 그 쾌감이었습니다. 그 기쁨이었습니다. 얼마나 기쁜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못할 게 없다. 그래서 빌립보서 4장에 보면 그걸 다른 사람에게 권해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고 감사하라.(4:4-6) 이제는 주께서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 우리를 다루고 있는 이 관계보다 더 월등한 쾌감, 쾌락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술을 먹는다. 술 먹되 기쁘죠. 전에 이야기했지만 술 먹는 것과 성령 취함을 에베소서 5장에서는 서로 같이 다루면서 차이점을 이야기하는데요. 공통점이 뭐냐 하면 술 취하는 거나 성령 취하는 거나 모두 자기 자신에 대해서 신경을 안 쓰고 있다는 데에 있어요.

그 정도로 인간이 자기를 다독거리고 자기를 관리한다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도 그런 짐이 없어요. 뭐 몸무게 많이 나가서 무거운 짐 아닙니다. 아까도 했잖아요. 매사에 내가 실패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꼭 성공해야 된다는 것. 이거는 자기에게 묻어있는 피와 기름을 모독하는 겁니다.

자, 그다음에 계속해봅시다. 누가복음 11장 13절,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주님 말씀입니다. 자식한테는 좋은 것만 주고 싶어요. 좋은 것만. 그럼 자식한테 좋다는 말은, 자식이 원하는 걸 준다는 말입니까, 아버지 보시기에 자식에게 꼭 필요한 걸 준다는 말입니까? 자식이 원하지 않더라도 아버지 보시기에 자식에게 최고의 최상의 것을 부모는 놓치지 않아요.

그 앞에 보면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그다음 뭡니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이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하시는 기능이 있어요.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대신 죽으심’이거든요. 대신 죽으심. 대신 죽으심의 예가 유월절 어린 양입니다. 유월절 어린 양이 유월절 어린 양 본인만 구원되기 위해서 유월절 어린 양으로 죽은 건 아니거든요. ‘양 한 마리 죽고 양의 피를 너희가 바르면 산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유월절 어린 양’ 이게 율법의 정수(精髓), 율법의 최종 상태에요. 특징은 뭐냐?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우리가 산다,가 아니라 앞에 뭐가 붙어요? ‘대신’ 죽으심이죠. 그러면 율법의 내용은 뭐냐? ‘너희들은 죽어도 구원 받지 못한다’와 관련된 내용들이 율법에 촘촘히 거기에 다 깔려있습니다.

죽을만해서 죽지, 뭐 억울하다느니 ‘이럴 수는 없습니다.’라든지 그런 소리는 해선 안 된다는 거예요. 속되고 더러운 것이 죽는 건 마땅하고 당연한 거지, 그걸 뭘 억울해하느냐. 그러한 예가 바로 문둥병 예에요. 레위기에 나와요.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뭐 때문에 자꾸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것 때문에 그래요. 새 언약을 구현하기 위해서 성령의 기름 부음이 오는 거예요. 지금까지 내가 새 언약 언급 안했어요. 예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성령이 오신다. 성령은 예수님께 십자가에 철저히 종속되었다. 십자가 이야기했잖아요. 그런데 십자가가 새 언약이거든요. 십자가를 새 언약으로 구체적으로 확산시켜 보자 이 말이죠. 확산시켜 보자.

히브리서 13장에 나오는 겁니다. 13장 20절에,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이렇게 되어 있죠. 여기서 예수님을 어떻게 끄집어냈다 했습니까? 죽은 예수님을 뭐로 끄집어냈죠? 피인데 어떤 피입니까? 영원한 언약의 피로 끄집어냈다.

이 방식 외에 천국 백성이 채워지는 방식은 없습니다. 언약의 피 외에는. 아버지와 아들 관계가 이미 설정되어 있어요. 이미 확정이 되어 있습니다. 성령은 아주 고집스럽게 이것만 채웁니다. 이것 외에 다른 성령의 일은 없습니다. 그냥 새 언약을 적용시키는 거예요. 새 언약을.

새 언약을 적용시키니까 새 언약을 적용시킬 때 우리는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새 언약으로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새 언약에 그런 내용이 없다니까요. 새 언약은 우리를 구원하는 게 아니에요. 새 언약을 기입시킨다. 새 언약을 거기다 새겨 넣는 방식이에요. 새 언약을.

초등학교 애들이 모래사장에서 놀 때, 집에서 유리병을 가져왔다. 애들이 이 유리병을 가만 놔두지 않죠. 모래를 꽉꽉 담죠. 애들이 손장난하면서 유리병에 모래를 담잖아요. 여기다 새 언약을 담는 거예요. 그래야 새 언약이 그대로 유지되는 거예요. 그 집어넣는 일을 누가 합니까? 성령이 하시는 거예요. 예수님은 새 언약을 이루었으니까 이제는 예수님의 영이 되셔서 예수님이 시키는 대로 그 새 언약을 집어넣는 거예요.

제가 여러 번 이야기했는데, 고추튀김. 제가 설교할 때 고추튀김을 예로 들었더니만 대전의 어떤 권사님이 고추튀김을 해왔어요, 또. 왜냐하면 제가 구체적으로 이야기했거든요. 큰 고추를 잘라서 씨는 빼고 거기에 당면에 돼지고기, 두부 다져서 넣고 꼭꼭 집어넣어 튀기면 고추튀김 된다고. 그런 수고할 필요 없어요. 장날에 가면 한 개에 천원만 주면 사요. 오일장에 가면.

주님은 꼭꼭 담아요. 담을 때 뭐를 빼내겠어요? 갚아야 된다, 우리의 의무감, 우리는 선교해야 돼, 헌금해야 돼, 전부다 빼버려요. 새 언약의 주인공은 우리가 아니고 오직 유일하신 주님의 공로만 그 새 언약에 담아야 된다고요. 그 작업을 위해서 빼는 작업도 필요한 거예요. 그걸 성령이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성령은 말씀을 가지고 우리를 책망하시는 겁니다. 빼라 했어, 안 빼라 했어? 빼라 했지? 네가 왜 스스로 충성해서 구원받으려 해? 그럼 뭐가 죽어요? 대신 죽으심이라니까. 대신 죽으심. 대신 죽으심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대신 죽으심에 해당되는 사람을 뽑아다가 대신 죽으심을 거기다 기입하고 집어넣는 거예요. 고추 튀김 한번 먹어봐야….

그러니까 하나님은 융통성이 하나도 없어요. 인간이 뭐 병들고 아파도 봐주는 거 없어요. 봐주기야 봐주지. 하갈이 울 때 봐주죠. 울어도 하갈은 아브라함 품에 못 돌아가는데요. 저주받는 쪽을 또 주께서 살려두기 위해서 가까운 데에 물을 줬지. 그러니까 아브라함 품에 돌아가 구원받아라, 그런 거 없어요.

지금도 하나님께서 김정은 살려줍니다. 선인과 악인에게 햇빛과 공기를 주시잖아요. 그래서 우리한테 묻는 거예요. “햇빛 주니 좋지?” “좋습니다.” “양식 주니 좋지?” “좋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싫소이다!” 참… 싫소이다. 그 배후에 누가 있어요? 악령이 있어요.

따라서 악령은 누구 편? 인간 편. 성령은 누구 편? 예수님 편. 그래서 그 둘 사이에 십자가 사건은 되풀이해서 터져 나오는 거예요. 그럼 한 가지 더 물어봅시다. 나는 누구 편? 악령 편? 성령 편? 답변 곤란하죠. 나는 짐승, 악령 편이죠. 악령 편입니다.

그런데 성령은 어떻게 합니까? 대신 죽으심을 꽂아 넣기 위해서 네가 네 것이 있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말씀으로 우리에게 제공하죠. 그러면 우리는 감사하고 기쁩니다. 내 행함을 안 받는 이유를 비로소 우리는 알고 나의 행함의 무거운 짐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내 행한 것은 일체 받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이 악신이 굉장히 끈질겨요. 끈질겨서 사도 바울의 편지 가운데 1장부터 3장까지는 교리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그다음 4장부턴가 5장부터는 그러므로! ‘그러므로’부터는 복음을 알았으면 이제는 실천에 옮겨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된다,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해오고 있어요. 그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로이드 존스 목사님. 후에 그 추종자들. 한국에 추종자들 한두 명이 아니죠. 박영선 목사부터 해서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죠. 아주 이것들이 끈질겨요.

그렇다면 사도행전 한번 봅시다. 5장. 사도행전 5장 보면 최태원 나옵니다. 최태원 언제까지 써먹을지 모르겠다. 사도행전 5장에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이렇게 되어 있죠.

여기서 3절에 보면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그다음에 나온 단어가 뭡니까? 악마죠. 사탄이죠.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그다음에 네가 누구를 속이고? “네가 성령을 속이고” 성령은 사탄과 대비해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베드로가 하는 이야기는 베드로 이야기고 베드로 말고 일반인들은 보면 뭡니까? 저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가 뭘 하고 있다, 지금 교회 와서? 귀하게 지금 헌금을 하고 있는 거예요. 헌금을. 아니 헌금을 하면 교회에서 감사하다고 돈이나 받아 챙기면 되지, 네가 무슨 마음으로 헌금 했는가 그걸 왜 시비 겁니까? 있는 돈도 날아가게. 참.

베드로가 목회를 하려나 말려나. 아니, 주는 돈 일단은 콜! 받고 그 사람 마음은 하나님한테 맡기고 하나님이 알아서 하면 되고. 그럼 되지. 왜 시시콜콜 베드로한테 헌금까지 일일이 검열 받아야 돼요? “가만있어 봅시다. 혹시 이거 반 숨긴 거 아니에요?” “우째 알았지?” “가져가세요.” “숨긴 거 아니에요. 안 숨겼습니다.” “그럼 가져오고.” 이럴 권한이 베드로한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없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요. 인간이 헌금을 하나 안하나, 베드로가 잔소리를 하나 안하나 이 세상은 딱 두 종류의 실제적인 힘의 세력이 존재한다는 거예요. 악령 아니면 성령. 성령 아니면 사탄. 그렇게 존재한다는 거예요.

그럼 교회가 하는 것은 교회가 어떻게 운영되는가, 헌금을 모으느냐 가 아니에요. 교회가 보여줄 것은 바로 인간들이 상식적으로 보지 못하는 것을 교회가 보여주기 위해서 거기서 사건이 벌어져야 돼요. 사건이. 이 일 이후에, 아나니아 삽비라 사건 이후에도 그 교회에서는 여러 사람이 죽어나갔다, 뭐 그런 일이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없습니다. 헌금을 하든 이후에 또 3/4을 속이고 1/4을 하든 관계없이 모든 인간은 이미 죽은 존재에요.

그래서 아나니아 삽비라는 감사해야 됩니다. 감사해야 돼요. 뭐 감사해서 죽었는지 아닌지 그건 모르겠는데 어쨌든 간에 하나님이 나를 다루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돼요. 이 세상은 인간의 세계가 아니고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닌 것을 보여주는 계기로서 활용시켜주는 것, 이것보다 더 영광스러운 게 있겠어요?

고린도전서 5장 한번 보겠습니다. 하여튼 참 난처한 구절들을 성경에 딱딱 필요에 의해 넣어놨습니다. 5장 1절,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같이 이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 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이 대목 확 안 들어옵니까?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뭐 구원 받았다는 이야기에요, 구원에 실패했다는 이야깁니까? 간단한데. 구원 받았다는 이야기에요, 실패했다는 이야기에요? 구원 받았다는 이야기에요. 만약에 이런 사람이 구원 못 받았으면요. 진즉에 사도 바울 본인은 지옥 갔어요.

자, 한번 봅시다. 아까 한 것을 다시 기억해봅시다. 인간이 벌이는 경우의 수, 같은 말로 행함의 수, 행함의 경우의 수와 성경 말씀, 율법이 아닙니다, 성경 말씀 중 범위가 어느 쪽이 더 넓어요? 성경 말씀이 더 넓죠. 성경 말씀은 뭐로 되어 있습니까? 악령의 기름 부음과 성령의 기름 부음으로 나뉘어졌죠.

그러니까 인간은 어느 용도입니까? 악령에 속한 자는 악령은 이렇다고 이야기할 거고 성령에 속한 자는 성령은 이렇게 한다, 그 기능만 했을 뿐이죠. 그래서 인간은 누구나 자기가 알아서 자기 이름하에 책임지고 하나님께 갚아주는 것, 그게 있을 수 있어요, 없어요? 있을 수 없는 거예요. 타인에게 갚아주는 것도 제대로 못 갚아줘요. 맨날 진정한 마음으로 사과부터 해야지, 이렇게 나오는데 사과를 어떻게 해요?

음주운전해서 아이 쳐놓고 교도소 갈 때 뭐라 합니까? 음주운전한 사람은 판사한테 반성문 올리죠. 판사한테 반성문 올리는데 피해자에게 사과합니까, 안합니까? 사과를 안합니다. 안하는 이유가 뭔 줄 알아요? 사과를 안하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저쪽은 사과를 받아줄 마음이 안되어 있어요. 분노하니까요.

그래, 당신이 내 아이 죽인 것도 하나님 뜻인데 어떻게 합니까. 그럴 경우에만 사과해요. 그럴 경우에만. 인간과 인간관계에서 애가 죽든 누가 다치든 간에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내 아이 목숨이 아니고 내 자존감, 내 가치에요. 이 정도로 인간은 못됐어요. 못돼 먹었어요. 인간은 이 정도로 악해요.

다시 말해서 나는 선한데 하나님의 하는 일이 옳지 않아. 이거 누구의 발언입니까? 악마의 발언이죠. 악마의 대변자입니다. 그래서 모든 불신자의 공통점은 모조리 악마의 대변자에요.

한 가지 예를 하고 마치겠습니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 폴란드 천문학자, 신부)라는 사람이 있어요. 이 사람은 연구하고 연구하다 도저히 참지 못해서 지구가 중심이 아니고 태양 중심으로 지구가 돈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이게 15세기, 1400년경이거든요.

그럴 때 누가 그 코페르니쿠스에 대해서 욕을 하느냐 하면 두 사람의 대표자가 있어요. 여러분 잘 아는 사람이에요. 한 사람은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독일 종교개혁가, 신학교수)에요. 또 한 사람은 누구게요? 칼빈(Jean Calvin, 1509-1564 프랑스 개혁주의 기독교 신학자, 종교개혁가)입니다.

루터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성경을 안 믿고 그런 점성술 말을 믿느냐? 이렇게 나왔어요. 점성술 말을 믿느냐. 그런 이야기했어요. 칼빈도 비슷한 이야기했습니다. 성경 시편에 나오잖아, 이 지구는 고정되어 있다고. 지구는 확정되어 있다고. 시편 93편에 나와요. 이 지구는 항상 고정되어 있다. 성경에 지구가 고정되어 있다면 지구가 왜 돌아? 고정되어 있는 것 맞지.

자, 칼빈과 루터가 어느 대목에서 오해했습니까? 끝나는 시간인데 중요한 것 던졌죠? 어느 대목에서 칼빈과 루터가 엄청난 실수를 하고 있는 거예요? 뭐를 실수하고 있는 겁니까? 그래서 칼빈과 루터를 가지고 신자이냐 아니냐에 대해서 자꾸 내가 의심을 거두질 못하겠어요. 그거 하나 때문에 그런 게 아니고 전체 신학자체가.

뭐냐 하면 영적으로 세계를 볼 줄 몰라요.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중심이 아니에요. 칼빈은 틈만 나면 십자가 이야기했는데 실제로는 이 십자가가 실제로 이 땅에서 교인 수나 사람들의 인식 속에 이것이 구체화되어서 우리가 납득되는 현상을 보이겠다는 거예요.

이것은 크게 잘못 생각한 거예요. 십자가는 나의 죄인 됨을 통해서만 드러나지, 십자가 믿는 사람의 숫자가 늘어나는 걸로 십자가가 증명되는 건 아닙니다. 지금 칼빈과 루터는 무엇을 외치고 싶냐 하면 ‘성경이 맞잖아.’를 과학적으로 증명하고 싶은 거예요. 이게 바로 마귀의 꾀임에 빠진 거예요.

그걸 왜 과학이 증명해야 되죠? 왜 과학이 십자가를 증명해야 돼요? 하나님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왜 증명해야 돼요? 과학 지가 뭔데 왜 증명해요? 증명하면 그게 비밀이겠습니까, 아니면 인간의 지식이겠어요? 기껏해야 지식에 불과한 거예요. 지식 붙들고 구원을 받을 수 있어요? 안되는데.

*성경적으로 이 우주는 여전히 한결같이 지구 중심 맞습니다. 하나님께서 오셔서 시간과 공간의 중심지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삶 중심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예수님 삶 중심으로 생각하세요.*

아까 구원을 어떻게 받는다 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죠. 공로를 누가 쥐고 있다? 성령의 기름 부음이죠. 그 외에 다른 방식으로 구원 됩니까, 안 됩니까? 안되죠. 안 되는 이유가 뭐냐? 모든 인간은 이미 죽어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죽어있는 인간이 자기가 살아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몇몇 구절이 필요하다, 몇몇 정보가 필요하다. 도대체 사고방식이 뭐가… 아니 도대체 성령 받은 사람에게서 이런 사고방식이 나오나? 입만 떼면 십자가, 칼빈은 입만 떼면 하나님의 영광. 이게 무슨 소용 있어요? 아무 소용없는데. 또 가톨릭은 한술 더 떠서 갈릴레오가 옳았다고. 무슨 갈릴레오, 뉴턴이 옳아요? 참 내.

십자가의 지혜는요. 인간의 모든 지혜와 상관없어요. 오직 구원의 능력은 어디 있습니까? 십자가의 능력에만 있고 십자가를 앞장세운 성령의 능력에만 있지, 인간이 이것저것 지식 챙긴다고 그것으로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성령의 충만함은 우리 속에서 성령이 물같이 나옴은 물같이 터져 나옴은 누구 몫이에요? 우리가 죄인임을 알 때 적재적소에 성령이 나와서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 공로로 갚을 것이 없는 존재이었음을 증명할 때 십자가의 기름 부음은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십자가를 증거하는 명목 하에 나 자신을 증명하고 나 자신이 구원 받았다를 증거하는 이 모순점에서 벗어나게 해주시옵소서. 바로 그것이 우리가 성도라고 하는 그것이 바로 마귀의 술책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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