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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11 00:33:47 조회 : 1105         
재앙과 징계 160610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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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성모(IP:222.♡.181.173) 16-06-21 13:33 
안양20160610a히12장 1절(재앙과 징계)-이 근호 목사

첫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히브리서 12장을 할 차례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절에 보면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증인들이 있으니까 이들의 공통점을 생각해보면 이렇습니다. 공통점이라고 하는 것은 이들의 개성은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 다시 말해 개성의 차이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겁니다. 키, 인물, 학력이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인간들끼리의 차이는 하나님 앞에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러면 천국의 차이는 딱 하나밖에 없어요. 예수님과 우리의 간격이 있어야 되고 그 차이를 지니고 천국에 가야 돼요. 그래야 증인이 돼요.

일단 본인의 증인이 되면 안 되잖아요. 제가 분명히 증인들끼리는 차이가 없다고 했지요. 차이가 없다는 말은 각기 자기의 자랑질 하는 모든 것이 금지되어 있다는 겁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선악과를 따먹지 않은 아담의 후손들도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들이 어떻게 살든지 간에) 전부 다 죄인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죄가 있는 곳에는 죽음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다 죽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일반적인 죽음 속에서 특이한 죽음을 끄집어내는 방식을 사용하십니다. 죽음은 동일한 죽음인데 이 동일한 죽음을 일반적인 죽음과 특이한 죽음으로 나눌 수 있어요. 창세기 4장에 보면 아벨의 죽음이 있고 또 하나, 가인의 죽음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똑같이 보이지만 아벨의 죽음과 가인의 죽음은 차이점을 드러내는데 이 아벨의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을 증거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인의 죽음은 아담의 죄를 증거하겠지요.

그렇게 되면 이제 머리가 명석한 분들은 아실 거에요. 아무리 색다른, 개성 있는 인간들이 등장을 하더라도 인간은 질적으로 딱 두 종류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죽음을 증거하고 또 하나는 아담의 죽음을 증거합니다. 딱 두 종류에요. 어차피 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의 질이 다르다는 거지요. 죽을 때 그 죽음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연계가 되어 있으면 그 사람은 예수와 더불어 살 것이고, 아담의 죽음과 연계되어 죽게 되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상관이 없는 죽음이기 때문에 그 사람은 죄에 그냥 머물러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일단 모든 바탕을 아담의 죽음으로 만들어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래서 아담의 죽음을 전부라고 보는데 이것은 일반 상식이고 보편적이지요. 그런데 여기에 아벨의 죽음이 등장을 하게 되면 이것은 특수한 죽음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이 특수한 죽음이 아담의 죽음과 다른 특수한 죽음인 이유는 나중에 그 안에 예수님의 죽음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그래서 증인이라고 하는데요. 이렇게 될 때에 이 죽음에 누가 관여를 하는가 하면 아담의 죽음이 관여를 하게 돼요. 그래서 아담 계통의 죽는 자들은 가해자가 되고 특수한 죽음을 죽는 자들은 이것의 반대말로 피해자가 되는 겁니다. 이걸 일반화시켜 버리면 이 세상에 충만해 있는 악마의 죄로 인하여 피해를 보는 그런 죽음을 보여 주는 자를 두 자로 성도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다 죽는다

  모든
 인간이
 죽는다

예수님이 죽으신다
특히 요한계시록에 이게 많이 나오지요. 짐승에 속한 자와 어린 양에 속한 자가 있는데 어린 양에 속한 자가 순교하고 죽는 이유는 스스로 자살을 해서 그런 게 아니고 짐승에 속한 자들이 예수님을 미워해서 그들을 미워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제가 다음에 두 개의 그림을 그릴 텐데 이 두 개의 그림 중 어느 것이 맞는 그림인가를 한 번 보세요.













모든 인간이 죽기 때문에 왼쪽의 경우에는 A라는 사람도 죽고, B라는 사람도 죽고 다 죽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어 버리면 그냥 모든 사람은 다 죽는다는 것만 달랑 남겠지요. 그러면 어떤 특성이 없는 밋밋한 무늬가 되어 버립니다. 예수님이 죽으신다고 할 때는 기존에 있던 모든 인간이 죽는다는 그림하고 다른 그림이 돼요. 예수님의 죽으심은 그냥 죽으심이 아니고 모든 인간이 죽게 되는 그 원인이 되어서 그 결과로 예수님이 죽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른쪽 경우에 모든 인간은 주변이 되고 예수님의 죽음은 중심이 되지요. 그래서 세상은 예수님의 죽음심 중심으로 모든 게 돌아간다는 사도 바울의 복음이 여기에서 나타나는 겁니다.

옛날 궁중요리에 보면 신선로라는 게 있지요. 가운데 부분이 튀어나와 있고 주변에 음식물을 올려서 밑에 불을 지펴서 데워먹는 음식이지요. 이 신선로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중간이 되고 다른 것들은 주변에 배치가 되는 사고방식이 맞습니까, 아니면 모든 사람은 동일하게 죽는다는 사고방식이 맞습니까? 모든 인간이 죽는다는 사고방식을 A라고 하고 신선로처럼 예수님의 죽음이 중앙에 오는 사고방식이 B라면 어느 것이 세상을 제대로 보는 현실입니까? A입니까, B입니까? B가 되겠지요.

그런데 성령이 아니고서는 B가 맞는다는 사고방식이 생길 수가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간다면 우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심지어 마귀든, 북한의 김정은이든 간에 그들은 이 중심과 관련이 되어서 일어나야 돼요. 성도가 사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이 B의 구조가 증인의 구조에요. 12장 1절에 봅시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내가 믿는 것의 증인이 되라는 뜻이 아니에요. 내가 이렇게 신앙생활을 잘한다는 것을 박수쳐달라는 증인이 아니고 내가 중심이 아니고 누가 중심이란 말입니까? 예수님을 중심으로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작은 원 주위에 구름들이 끼어있다고 보시면 되잖아요.

그러니까 히브리서에서 성경을 이렇게 기록한 것을 우리가 그냥 이해하자고 하지 말고 히브리서의 성경을 성령에 의해서 쓰신 그 사도 바울이 세상을 보는 관점과 현재 히브리서를 보는 우리의 관점이 동일한가를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모든 것이 예수님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그 사고방식이 평소에 우리의 일과냐 이 말입니다. 우리가 밥을 하든, 설거지를 하든, 빨래를 하든 간에 모든 중심은 예수님의 신선로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그 생각을 유지하고 있느냐를 성경이 묻는 거에요.

그런데 우리가 이런 생각을 안 하면 어떻습니까? 만약 이런 생각을 안 하면 우리가 가해자임을 우리가 알지를 못해요. 내가 주와 함께 있을 때는 예수님과 함께 있는 우리 주변에서 예수님을 향하여 지금도 끊임없이 모독하고 무시하고 “세상을 그렇게 보는 게 아니야, 왜 그렇게 봐. 모든 인간은 똑같애.” 이런 식으로 모두 핍박한다는 것이 감이 오는데 우리의 사고가 신선로처럼 주님 중심인 것을 평소에 잊어버리거나 포기해버리면 “그래, 너는 너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살고..” 아무 사는 의미가 없어요.

저도 어릴 때 그런 놀이를 했습니다마는 학교에 왔다갔다 하는 길이 지루하니까 동생이나 형이나 친구들을 데리고 하는 놀이에요. 자기는 눈을 감고 앞에 있는 사람을 붙잡고 “어디까지 왔나?” “어디까지 왔나?”를 자꾸 묻는 거에요. 그러면 앞에 있는 아이는 “지금 미장원까지 왔다.” “가게까지 왔다.”라고 이야기를 해주지요. 사람들이 오늘날 살아가는 것이 그냥 앞만 붙들고 “어디까지 왔나?”를 묻는 겁니다. 증인 중심의 사고방식(B)이 원이라면 “어디까지 왔나?”(A)는 직선입니다. A는 직선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실제적인 해답이 없어요. ‘갈 데까지 가보다가 천국이 있으면 가는 것이고 없으면 그만이고..’ 노선에 이탈이 될 줄을 모르고 가는 그냥 단선이에요. 그런 반면에 B는 원이에요. 우리가 여기에서 몇 년을 살든, 암에 걸려 죽든 상관없이 그것마저 예수님 중심의 세계에 증인으로 살아온 것이 되는 겁니다.

교회에서, “여러분 이렇게 사세요.”라고 말하는 것이 의미가 없는 이유가 세상 자체를 다르게 봐야 될 문제이지 ‘내가 어떻게 하면 주님과 가깝게 될까?’는 단선적인 자기 노선에 불과하거든요. 하나의 직선상에서 어디까지 왔는지를 논하는 것은 하나의 내기와 시합밖에 되지를 않아요. B에서는 내기도 필요 없고 시합도 필요 없고 각자의 개성에 따라 살면 돼요. 그냥 막 살면 돼요. 너는 이렇게 살고 나는 이렇게 살지만 구원은 이렇게 저렇게 사는 게 아니고 중심이 무엇으로 바뀌느냐의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은 기생으로 살고 어떤 사람은 농사지으면서 사는데, 기생이니까 지옥에 가고 농사를 짓다보니까 천국에 가는 게 아니에요. 어떤 사람(아벨)은 양을 치고 어떤 사람(가인)은 농사를 지었어요. 그들의 직업을 묻는 게 아닙니다. 우리한테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가, 그 중심이 무엇인가를 묻는 겁니다. 아담의 입장에서는 각자가 중심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미 중심을 잡고 시작을 하는 겁니다. 여기까지는 여러분들 충분히 이해가 되시지요?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죽고 난 뒤에 어디에 갑니까? 이것을 수십 번 이야기했습니다마는 여전히 들을 때는 아는 것 같지마는 돌아서면 다시 또 희미해지지요. 자기를 증거하는 아담의 세상에서 개념을 끄집어냈기 때문에 주님 중심의 개념으로 바꾸는 데에 상당히 그것이 수월히 바뀌지를 않아요. 12장 1절에 봅시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그 다음에 2절에 “믿음의 주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을 우리가 방금 읽었잖아요. 이 본문을 제대로 이해하시려면 이 관계만 아시면 여러분은 성공한 겁니다.

세상(삶)을 죄로 보고 죄의 해결자인 믿음의 주와 관련해서 세상을 보는 겁니다. 신선로, 예수님 중심의 세계에서 주님이 내세우는 개념은 항상 죄부터 이야기해요. 그리고는 어디로 가느냐 하면 그러니까 믿음의 주를 온전히 바라보자로 가야 돼요. 그런데 신선로, 예수님 중심이 아니고 아담 중심의 경우에는 ‘내가 무엇을 행할 것인가’가 나옵니다. 행함의 경우에는 행함 이전에 의도(마음)가 있을 것이고 어떤 의도가 있어서 그것이 행함으로 나타나고 행함이 나타나면 이것이 권력이 되는데 (행함 앞에 나를 집어넣으면) 나의 행함이 나의 권력이 되는 겁니다.

“현재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삽니까?” 이렇게 대답하면 돼요. 자기의 행한 것으로 권력을 만들어서 그 안에서 삽니다. 이렇게 답하게 되면 이것이 모든 인문학의 정답이 돼요. 인문학뿐만 아니고 자연과학도 마찬가지고 모든 전공과 관계없이 다 그렇게 답할 수 있습니다. “오늘 낮에 무엇을 열심히 했습니까?” “설거지를 하면 뭐 합니까?” “설거지를 함으로써 나는 이 집 안에 주부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주부는 남들 앞에 무엇이 됩니까?” “이 집 안에 여주인이라는 권력 안에서 내 자리가 확보가 됩니다.”

아까 식당에서 아이들이 엄마와 함께 밥을 먹고 있었습니다. 한, 두 살 되어 보이는 아이들인데 그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듭니까? 행함이지요? 힘들게 키운 그 자식이 나중에 나한테 자랑거리가 될 때 잘 된 자식이 갖고 있는 그 권력에 나는 엄마의 자격으로 지분을 갖고 있는 거에요. 하나의 권력이 되는 거에요. 모든 세상에 이것만 딱 적용시켜 버리면 돼요. 이것을 가지고 ‘마스터 키’라고 해요. 이것으로 모든 문제가 다 풀리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세상은 행함으로 권력을 생산해서 그것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전체(의도, 마음, 행함, 권력)를 신선로에 나오는 우리 주님은 죄로 봅니다. 제가 분명히 강의 시간에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마는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것은 나도 각오합니다. 그렇더라도 마스터 키는 무엇인가 하면은 내 행함으로 내 소유의 권력이 있고 그 권력이 나의 자리가 돼요. 내 소유의 자리가 된다는 말이지요. 이렇게 되는데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 쪽에서는 이걸 죄라고 했다 이 말이에요. 죄라고 이야기했다는 말은 A라는 사고방식과 B라는 사고방식이 맞지를 않는다는 뜻이에요.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어느 교회가 있는데 2000명 되는 교인들이 다 합세를 해서 새벽기도에 나와서 열심히 기도하고 헌금을 해서 예배당을 새로 지었다면 그것은 기도하는 나의 그 행함으로 말미암아 남의 교회가 아닌, 내 교회라는 권력에 자기의 자리를 잡는 거에요. 이게 주님이 보시기에 죄가 되는 거에요. 모든 인간에게 일어나는 일은 전부 죄가 되는 이유가 내가 행하고 있음을 본인이 의식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이큐가 한 15쯤 되는 바보가 있다고 합시다. 자기가 일해놓고 남한테 자기의 권력을 빼앗기는 사람이 바보에요. 서해안에 아이큐 낮은 사람들을 끌어모아다가 염전과 새우잡이를 시키지요. 그러면 일당 10만원씩 쳐줘야 돼요. 얼마나 힘든지 몰라요. 그런데 그 사람들의 일 년 연봉이 십만 원이에요. 그러면 나머지는 누가 가져갔습니까? 다른 사람이 다 뺏아갔지요.

이게 마르크스 공산주의 사상(이론)이에요. “바보 아니야? 일은 네가 해놓고 돈은 왜 놀고 있는 자본가가 가져갔는데?” 그러면 자본가가 말하지요. “어디 자본 투자하는데 놀면서 하는 줄로 아나? 나도 신경 되게 썼다. 그냥 편하게 일하면 스트레스나 안 받지.. 돈 투자 해놓고 장사가 안 되면.. 경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느냐 그것 완전히 도박이다. 거기에서 그만한 이윤을 얻는 게 뭐가 나쁘냐?”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마르크스가 “그러면 돈을 투자하면서 예상된 이자만 챙겨라. 만약에 경제 성장이 5%라면 이자 5%만 받아라.”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자 5%만 받고 투자하는 인간은 없는 거에요.

은행 이자가 요새 2.2%에요. 새마을금고는 2.3%고요. 2.2% 건지려고 투자하는 바보는 없습니다. 그러면 은행에 그냥 맡기지요. 20% 건지려고 투자하는데 2.2%를 가지고 자족하는 인간은 없잖아요. 그만큼 도둑놈이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문제는요 도둑놈이 없이는 나라가 안 돼요. 왜냐? 베네수엘라를 보세요. 베네수엘라라는 나라는 석유값이 100달러일 때 사회주의 국가가 되어가지고 가난한 사람에게 차베스가 무상으로 주택을 주고 무상으로 교육과 의료를 다 제공했어요. 그러니까 달러의 가치가 100달러에서 20달러로 반타작 정도가 아니고 1/5로 내려갔어요. 국민들은 쓰레기를 뒤지고 있습니다.

자전거는 달려야 되고 달려야 맛인데 자전거를 세워놓고 자전거 뒤에 있는 짐을 풀어가지고 거기에서 자기들이 가진 것을 자기들이 다 나눠먹었어요. 더 이상 내일을 보장할, 투자할 수 있는 것을 남기지 않고 다 갈라먹은 거에요. 그래야 인기가 있어서 표를 얻으니까 그런 거에요. 이걸 포플리즘이라고 하잖아요. 그리스도 그렇고 표를 얻으려고 공무원의 숫자를 늘여가지고 이제는 숫자가 늘어난 만큼 연금, 사대보험도 같이 늘어버렸는데 돈은 없지.. 인기와 권력을 쥐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겁니다.

성경에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했어요. 노인이 되어서 돈이 없으면 복인 줄로 아시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을 사는 게 재앙입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죄로 봤고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이 죄는 반드시 재앙을 낳게 되어 있어요. 실컷 고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요한계시록에서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외칩니다. 요한계시록의 제일 마지막 대목이 이 대목이에요. 이런 고백이 나왔다는 말은 이 세상에서 나 안 살겠다는 이야기에요. “이 세상 좋으냐? 좋은 너나 살고 우리는 안 살란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안 살겠다는 고백은 인간이 죄인인 이상 나올 수가 없어요. 이 논리가 어려운데요. 죄인이 “이 세상에서 안 살겠습니다.”라고 하는 것도 죄가 돼요. 죄가 죄를 수정하지 못해요. 죄인이 자기가 죄인인 줄로 규정하거나 죄를 의로 바꿀 만한 안목이라는 게 없어요. 왜냐하면 철저하게 죄인이 되어야 되기 때문에 그러한 안목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장에 보면 “성령이 너희에게 하는 말을 들으라”고 되어 있어요. 이 죄인 안에 예수님의 영이 들어와 버려요. 그러면 성령께서 마지막으로 고백케 하는 것이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입니다. 여기에 “사는 게 재앙이군요.”라는 고백과, 그 동안의 내 모든 행함은 죄가 된다는 것도 더불어 한 셋트로 고백하게 만들어요.

내가 이 땅에서 연금 10만원밖에 없는 이것도 당연한 재앙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1000만원인데 나는 10만원밖에 안 되니까 너무나 감사합니다. 왜? 그것이 “어서 오시옵소서.”이다 이거에요. 만약에 연금이 1000만원이 된다면 이건 재앙입니다. 돈이 없어서 그렇지 돈이 한 번 있어보세요. 돈이 있다는 게 얼마나 나를 힘들게 하는지 몰라요. 힘들게 하더라도 있어봤으면 좋겠지만요.

지금 집사님 집에 개가 한 마리 있지요. 만약에 어떤 사람이 이 좁은 집에 개를 100마리 준다고 한다면 어떻겠어요? 재앙이지요. 아마 미쳐버릴 거에요. 개가 자는데 다 몸에 올라올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겠지요. 그러면 많은 것이 복입니까? 적당해야 복이에요. 많은 것이 복이 아니고 적당해야 된다니까요. 그런데 사람들은 돈을 주면 “나는 적당하게 할 겁니다.”라고 하는데 본인이 적당한지 아닌지 자기는 큰 소리를 치는데 실제로 적당한지 아닌지를 본인은 몰라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감당할 만큼 적당하게 주세요. 그런데 내 마음은 뻔하지요. “돈 100억을 줘도 저는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라고 큰소리를 치는데 주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한테 100억을 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요.

이게 전도서에 나옵니다. “너희들이 감당할 수 있다는 돈으로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 내가 희망하는 것을 다 해봤는데 이게 골치가 아프고 사는 것 자체가 재앙이라는 것을 새로운 체험을 통해서 느꼈다.”라고 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공부 많이 해서 박사가 되면 좋을 줄로 알았지요. “나도 그것 해봤는데 그것도 재앙이다.”, 또 어떤 사람은 여자가 많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나도 여자 1000명을 누려봤는데 그것도 재앙이다.”라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구제를 하고 싶어하는데 이 구제가 도박이나 놀음하고 똑같은 거에요. 구제를 안 하면 미쳐버려요. 이것은 마약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의 행위는 절대로 잊을 수가 없어요. 그게 문제에요. 내가 구제를 해놓고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잊으면 다행인데요 사람이 한 것은 자기의 기억 속에 잊지를 못해요. 그래서 그 다음부터 본인이 본인을 자책하는데 ‘작년에 고아원에 10만원 줬는데 또 10만원을 주면 얼마나 욕을 할까?’라고 본인이 그렇게 생각을 해요. ‘그저 어려워도 한 15만원 해야지.’ 지금 자기의 화투를 치고 있는 거에요. 룸살롱 아가씨나 화류계에 있는 아가씨들이 낮에 손님이 없으면 화투를 친다는 거에요. 이들이 ‘오늘 손님이 오겠는가’를 가지고 점을 치듯이 구제에 몰두하는 사람들은 구제를 가지고 점을 치는 거에요. 마약 같은 겁니다.

그런데 구제가 되잖아요? 엔돌핀이 돌아요. 이것은 술을 먹는 것과 똑같아요. 마리화나를 피우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구제도 감당할 만해야 되는데 성경에 나오는 이런 이야기가 아까 이야기한 전도서입니다. “주여, 이 구제나 돈이 있는 것이나 여자가 있는 것이나 공부를 한 것이나 포도원 같은 부동산을 많이 가진 것도 다 헛되고 헛되고 헛된 짓입니다.”라는 고백이 나오는 경우에만 주께서 그걸 허락해 주십니다. 주께서 돈을 안 주시는 게 아닙니다.

돈을 주시고서는 “주여, 제가 죄인 맞군요.”라는 고백이 나오게 하십니다. “다 헛것이군요. 이 세상을 산다는 것 자체가 아담의 죄 안에서 재앙을 받는 합당한 조치니이다.” 그런 고백이 나올 때 주께서 그 적절한 상황을 우리에게 주신 거에요. 돈 100억을 주어서 나에게 “내가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이 나올 때 주께서 100억을 주시는 거에요. 그런데 “100억을 가지고 교회를 도와주고 잘 쓰겠습니다.”라고 한다면 이것은 마귀가 준 거에요. 아까와 같은 고백이 안 나온다면 말이에요.

왜냐하면 사람은 무엇을 하게 되면 그걸 기억한다니까요. 그러면 죄인은커녕 점점 더 잘난 존재가 되어 버려요. 그래서 자식이 잘 될 때 부모들은 조심해야 돼요. 여기에는 그것이 해당되는 사람이 없지만요. 자식이 너무너무 잘 되고 과외도 안 시켰는데 자기가 알아서 “공부가 제일 쉬워요.” 이렇듯 모든 게 잘 될 때 ‘이건 내가 키운 것도 아닌데? 주님이 키웠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라는 생각이 들지요. 그것은 “주변에서 자식 잘 키웠다고 칭찬하더라도 네 자랑하지 마라”는 뜻이거든요. 우리는 그런 경우가 없습니다. 그런 짐을 덜었습니다.

여기 1절에 보게 되면 “모든 무거운 것과”라고 했는데 이 말과 같은 말이 “얽매이기 쉬운 죄”에요. 이것을 벗어버리라고 했어요. 벗어버리라는 말의 뜻은 이 세상이 재앙인 이유가 죄 때문에 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엮여진 이 방정식(공식)을 모르고 재앙이니까 더욱 더 열심히 하는 거에요. 그리고 열심히 하는 것보다 더욱 나쁜 지경에 빠지는데 그것은 바로 ‘바르게 살면 복을 받겠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꾸 벗어버려야 되는데 벗어버리는 게 아니고 자기 손에서 감당도 안 되는 것을 가지고 해결하려는 거에요. 죄와 재앙의 감당은 예수님의 담당이에요. 예수님께서 그것을 담당하는 거에요. 그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겁니다. 여기까지는 여러분들이 이해가 된다고 치고 이제부터는 어려운 것을 하겠습니다.           

재림, 예수님의 다시 오심이 무슨 의미인가 하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왜 그렇게 일을 복잡하게 하십니까? 오시면서 건질 자를 딱 건져가면 깔끔하게 끝나는 거잖아요. 다시 오실 이유가 없는데 다시 오신다는 거에요. 에프터서비스(A/S)인가요? 차가 고장 나서 정비소에 가서 차를 맡겼는데 차를 다 고쳤다고 합시다. 그러면 돈을 주든지 카드를 끊고 차를 몰고 집에 가면 되잖아요. 그런데 집에 가고 있는데 뒤에 있는 정비소에서 또 “아저씨, 아저씨.” 하면서 차를 몰고 온다는 말은 뭔가 일이 지금 잘못 될 경우가 아니면은 그런 상황은 벌어지지 않거든요.

십자가로 다 이루었으면 다 끝난 문제인데 왜 예수님이 다시 오셔야 됩니까? 그 논리는 뭡니까? 구원이 안 되었다는 이야기에요? 만약 구원이 안 된 것이라면 십자가로써도 구원이 안 된다는 말이 되고 이것은 십자가로 만족스럽지 않다는 뜻이 되어 버려요. 십자가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다가 재림까지 보태야 구원이 된다면 이것은 온전한 구원이 아닙니다.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는 말은 거짓말이 되는 거에요.

그런데 이러한 재림에 대해서 제대로 언급한 책이나 글은 지금껏(누가 있을지는 모르지요. 하나님께서 제대로 하셨는지는 모르지만 제가 제한적으로 보기에는) 없습니다. 재림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이 없어요. 주님이 왜 오셔야 되는지에 대해서 답변을 하는 사람이 없어요. 심판을 하러 오신다고요? 그러면 처음 오실 때 심판을 다 하시지 왜 다시 오셔야 합니까? 이게 문제에요. 처음에 오실 때 다 마무리를 짓지 않으셨다는 거에요. 차가 고장이 났잖아요. 그래서 정비소에 갔잖아요. 뒤에 무엇을 남길 것 없이 그 자리에서 다 고치면 되잖아요. 심판도 처음 오셨을 때 하시면 되셨잖아요. 천군천사들을 보내가지고 십자가에서 깨끗하게 처리하면 되잖아요. 왜 심판의 시기를 따로 하십니까? 그 이유가 분명치 않다는 것은 논리의 고리의 출발점이 엉터리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잘못 시작했다는 것이죠. 신학의 논리 자체가 엉터리라는 거에요.

예를 들어서 “여러분 십자가를 믿으면 이제는 주님 오실 것을 기다리면 됩니다.”라고 하면 교인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만약 기다리다가 못 기다리면 어떡해요?” “그러면 탈락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믿는 효과가 없네요. ‘십자가를 믿는다, 믿는다, 믿는다..’ 하다가 점심을 먹고 잤어요. 그런데 자는 사이에 예수님이 오셨다면 헛방이네요. 그래서 빨래집게를 볼탱이에다가 찝어가지고 “깨어라. 졸지 말고 깨어라.”라고 하면 됩니까? “도적같이 오리니”라는 말씀처럼 말이에요.

예수를 믿어도 안 된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예수 믿는 것 +착한 일(깨어라에 해당되는 자기를 깨우는 착한 일)을 해야 되는데 이 착한 일의 양과 강도를 어디까지 해야 돼요? 낮시간에만 착한 일을 합니까? 만약 새벽 2시 42분에 오시면 자고 있으니까 그때는 빨리 일어나서 착한 일을 해야 되겠네요. 새벽에 자다가 일어나서 방바닥 닦고 기도해야 되겠네요. 아무도 이야기해주는 사람이 없어요. 아무도.

“완벽한 믿음을 요구하는 게 아닐까요?” “만약 그렇다면 십자가가 완벽하지 않다는 게 돼요.” “앞으로 시대적 배경, 세상이 계속 악해지니까..” “세상은 똑같이 악합니다. 지금 예수 믿는다고 갑자가 경찰이 잡아가지 않지요? 그러나 초대교회에는 잡아갔거든요. 사도 바울이 사울이 되기 전에 그런 일을 했잖아요. 그러면 지금보다 그때가 더 악하네요.” 악함의 기준이 시대마다 그때그때 새로 설정되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모든 게 통합된 악함의 기준은 인간 쪽에서 포착할 수 없습니다. 이게 보통 문제가 아니지요. 오늘 이것을 한 번 풀어봅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사후세계하고 내세하고 달라요. 사후세계 앞에는 죽음이라는 게 있어요. 이때의 죽음은 사적죽음, 개인의 죽음입니다. 내가 죽고 난 뒤에 어디에 가느냐에 관한 문제와 이 세상이 없어지고 어떤 세상이 되는가의 문제는 같은 문제가 아니에요. 이걸 같은 문제로 취급하니까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혼동이 일어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죽고 난 뒤에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리라”고 했거든요. 그러니까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면 자기는 지금 편안하게 쉬고 있는 것이고 그 사람을 요한계시록에서는 “잠자는 자”라고 했잖아요. 가락 교회에서 강의할 때 잠자는 것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그것이 내세입니까? 오는 세대, 이 세대 말고 또 다른 세대, 내세에 해당되는가에 관한 문제는 개인의 죽음과 상관이 없이,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이 되어 있어요. 왜 차이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그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아시고 가장 어려운 재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세계가 있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이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뭘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하시는 일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언약의 세계가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하늘나라에 올라가실 때에 우리의 눈에는 혼자 올라가는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예수님의 몸이 달랑 올라간 것으로 되어 있어요. 그런데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예수님의 몸이 올라갈 때 구름을 타고 올라가지요. 그 구름이 나타나는 이유는 다니엘 7장에 보면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온다고 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우리의 눈에 보기에는 예수님의 몸이 혼자 올라가는 것으로 되지만 사실 예수님이 올라가실 때 예수님이 이루었던 그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가지고 올라가는 거에요.

저는 술을 아예 안 먹습니다마는 드라마나 영화에 보면 포도주를 딸 때 코르크 마개가 있어요. 그러면 그 코르크에 나선형으로 생긴 코르코 따개를 꽂잖아요. 그러면 꽂을 때 분명히 나선형 마개 따개를 꽂지만 이걸 뺄 때는 그냥 따개만 달랑 뽑아지는 게 아니고 코르크 마개 전체가 같이 뽑혀서 떨어져 나가지요? 예수님이 오실 때에 아기 예수 달랑 홀몸으로 왔어요. 우리가 보기에는 홀몸으로 와가지고 홀몸으로 가는 것으로 보이지만 여기에 예수님이 이 땅에서 그냥 지내신 게 아니고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새로운 세계를 형성하셨는데 (이것이 코르코 마개에요.) 이 코르크 마개는 인간 세계에는 없는 거에요. 이게 중요한 거에요. 이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것인데 그것은 이것(코르크 마개)이 없는 세계라는 거에요.

인간 세계에 없는 세계를 예수님께서 눈에 띄지 않게 만든 거에요. 제자들도 이 세계가 있는 줄을 몰랐어요. 그냥 예수님이 혼자 활동하고 있지 예수님 주변에 뭔가 새로운 세계가 만들어지는 것을 몰랐던 거에요. 주님이 재림하실 때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말은 예수님의 세계가 이미 모든 구약 성경을 다 이루었다는 뜻입니다. 구약 성경을 이루었다는 말은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그 세계를 예수님께서 다 만들었다 이 말이에요. 만들어가지고 뭘 하셨습니까? 승천하셨거든요. 하늘로 올라가신 거에요. 예수님이 만든 세계가 올라가실 때 다 희어지고 해체되고 사라지고 부숴지는 게 아니에요. 그냥 그대로 올라가요. 예수님이 올라가셨을 때 제자들은 뭐라고 했습니까? “아이고, 혼자 올라가셨네.” 하고 쳐다보는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무엇이었습니까? “왜 쳐다보느냐?”였지요. 그런데 쳐다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인간 세계는 현재 엄연히 상주하고 있기 때문에 (이 세계 속에 제자들이 살고 있잖아요.) 이 세계를 없다고 할 수가 없어요. 왜? 눈에 보이니까요. 그런데 제자들이 보니까 예수님이 혼자 올라가고 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세계는 없는 거에요. 그렇지만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나름대로의 세계가 있기 때문에 이 세계는 이미 없어진 세계에요. 없어진 세계에 제자들이 현재 멍청하게 앉아있는 거에요. 120 명이 기도하고 있는 거에요. 살던 세계가 이 세계거든요.

만약에 주님께서 안양에서 공중으로 지금 부양해서 승천했다고 하면 갑자기 안양이 날아갑니까? 갑자기 안양천 물이 끊기고 그렇습니까? “갔냐?” 하고 끝나요. “무슨 일이 있었어?” 아무 일이 없어요. 그러나 주님이 보시기에, 말씀에 의하면 이 세계는 있지만 없어질 세계에요. 없어질 세계라고 하면 너무 복잡하니까 그냥 없는 세계라고 하겠습니다. 이 세상이 없는 거에요. 그리고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냅니다. 성령을 보낸다는 것은 이 없는 세계에서 자기 백성을 골라낸다는 의미에요. 전도라고 하는 것은 세력을 확장하는 것이 아니고 어린 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만 집어서 골라내는 겁니다. 그걸 수요일날 기도할 때 특채라고 표현했지요. 특채는 시험을 쳐서 되는 것이 아니고 그냥 빽으로 되는 거지요. 특채되었으니까 특채라는 말만 들어도 아침에 일어나면 기분이 썩 좋아져요. 아침에 일어났다. ‘오늘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은데.. 아! 주께서 특채해서 구원했구나.’ 이것 하나면 오늘 무슨 일이 있더라도 겁이 나거나 공포가 생기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요.

왜?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하는 모든 것은 주님이 보시기에 있어서는 안 될 세계에요. 없어서는 안 될 세계보다 더 좋은 표현이, 있어서는 안 될 세계, 없애고자 하는 세계에요. 이 말을 하는 근거는 이미 따로 이 세계가 마련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에게 성령을 보냅니다. 성령을 보내게 되면 성령은 놀랍게도 예수님과 똑같은 안목을 가지고 자기 주변 세상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여기에 노루표 페인트 공장이 있지요? 그러면 ‘아이고, 그 페인트 공장이 있어서 페인트를 만들어내면 뭐 하겠노? 만들었다고 좋다고 소고기 사먹겠지.’ 그게 의미가 없는 거에요. ‘이장 됐다고 좋다고...’ 의미가 없는 거에요. 성령을 받게 되면.

“엄마, 나 이번 시험에 합격했어.” 하고 아들이나 딸이 오면 “그래, 좋으냐?” “엄마, 너무 좋아.” 좋다고 하다가 돌아서서 싫다고 하면 체면이 안 서요. “취직하면 뭐 하겠노? 좋다고 또 뭐 하겠지..” 성령을 받게 되면 엉덩이가 들썩들썩 해서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요. 이 사람이 특채되었거든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아요. 왜 그래야 되는지 이유가 없어요. 성령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이 “나는 없는 자 같으나..” 이쪽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개뿔도 재산도 없어요. 그러나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저쪽 세계에서 모든 것을 가진 자에요.

“내가 죽은 자 같으나 산 자요, 내가 약한 자 같으나 강한 자요, 내가 가난한 자 같으나 모든 사람을 부요케 하느니라” 넉넉하게 하는 이 일을 하는 거에요. 재림은 이 칸막이를 뜯어내는 게 재림이에요. 새삼스럽게 만들었다가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칸막이를 뜯어버리는 거에요. 그리고 자기 새끼들을 구름을 타고 다 불러내는 겁니다. 휴거시키고 그 자기 자식들이 그때 구원을 받는 게 아니고 이미 성령이 오면 구원을 받은 거에요. 이걸  그림으로 설명하면 좋아요. 옛날 어릴 때 이런 걸 많이 봤는데 일본식 목욕탕에 가면 물통이 있는데 물통을 만들 때 나무판을 가지고 겹겹이 붙여서 만든 일본식 바가지를 아십니까? 아니면 나무를 촘촘히 연결해서 아래를 뚫어가지고 물을 담는 목욕통 말이에요. 옛날 애도시대 때의 일본 그림이나 평풍을 보면 이런 게 나오잖아요.

이렇게 나무막대기로 촘촘히 연결했는데 나무막대기를 연결하고 있는 끈을 딱 끊어버리면 나무막대기가 다 부서지겠지요? 그런데 재림이라는 게 인간들이 갖고 있던 모든 악마의 힘을 주께서 끊어놓게 되면 통에 있는 물이 와락 쏟아지게 되고 그러면 여기에 있는 물이고 권력이라고 하는 게 다 흘러넘치게 되어가지고 한데 모을 수가 없지요? 이게 큰 성 바벨론이에요. 짐승. 자체적으로 인간들이 권력을 모아서 국가라는 나라(짐승)를 만들지만 재림해서 예수님이 다시 오시게 되면 이 권력은 처음부터 있어서는 안 될 세상 속에 나름대로 노력한다고 자기 딴에 되게 노력해서 살아보려고 애쓴 하나의 자구책에 불과한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것은 (이 세상 말고) 주께서 이미 다 꼼지락꼼지락 해서 다른 세상을 만들어서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그냥 언제든지 없어질 수밖에 없는 대기상태에 있다가 주께서 재림하시면 자기 백성을 그냥 데려가는 거에요.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재림하실 때에 믿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십자가로서 주께서 말하는 내세는 이미 다 완성되었다는 그런 관점을, 여기 이 멸망될 세상에 살고 있는 성도는 성도로서 동일한 그런 안목을 가지고 살아가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내 소원은 이 몸을 떠나서 저쪽에 가는 것이다”라고 하는 겁니다.

아파트를 하나 마련해놓았는데 여기는 한 30년이 되어서 재개발지역이라서 물도 잘 안 나오고 모든 것이 어설프다라고 합시다. 하지만 아파트가 있기 때문에 이 집에서 아파트를 부술 때까지 그냥 참고 견디는 거지요. 참고 견딘다는 말은 “나는 여기에다가 내 목숨을 걸고 여기에다가 내 희망과 비젼을 걸지 않겠다”는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 이 땅에서 아무리 조금씩 좋은 일이 생기더라도 그것은 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된 짓에 불과한 겁니다. 이게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이 세상 모든 것을 죄로 보는 거에요. 그리고 내가 살아가는 것을 재앙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는 거에요.

100세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100년 동안 재앙을 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60세에 부르거든 고맙다고 가야 되지, 아직까지 젊었다고 못 가고 이렇게 반발을 하는 것은 이 세상에 미련이 있다는 거에요. 100년 동안 산다는 말은 100년 동안 재앙을 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할 수 있으면 사도 바울처럼 빨리 이 땅을 떠나는 게 좋아요. 오래 있어봐야 주책만 부립니다. 주책을 부리면 그 효자도 나중에는 등을 돌립니다. 부모가 아무리 착하다고 하지만 부모의 입에서 욕이 나오면 ‘처음부터 우리 부모가 저렇지는 않았을 건데 누가 부모를 저렇게 망가뜨렸지?’ 하고 실망할 수밖에 없어요. 차라리 그러한 더러운 모습을 보이기 전에 후딱 갈 때 자식한테 좋은 이미지가 남을 것입니다. 그 남아 있던 좋은 이미지가 치매에 걸리면서 다 소모되어가지고 악녀적인 엄마와 그런 아빠로 원수지간이 되어가지고 장례를 치러버립니다. 젊을 때 부모가 죽어야 울기나 하지 나중에 90이 넘어가지고 애를 먹이다가 죽으면 울지도 않아요. 속만 더 상해가지고 “이렇게 죽으려면 진작 죽지 고만.. 재산 3억 남겨놓은 것을 자기 병치레하느라고 다 써버리고.. 진작 죽었으면 3억으로 아이 셋 앞에 1억씩 돌아갈 건데..” 이건 재앙이라고 할 수밖에 없어요. 이건 재앙입니다.

죄로 보기 때문에 지금 죄의 해결책이 없어요. 그런데 이 세상에 와서 천국까지 만든 그분을 보라는 것입니다. 어떤 분입니까? 히브리서 12장 2절에 나오지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이미 온전케 하신 증거가 있는데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예수님에게 십자가가 목표라면, 동일하게 우리도 십자가가 목표가 되어야 돼요. 재림이 목표가 되면 안 돼요. 십자가가 목표가 되어야 돼요. 십자가 안에 들어온 사람은 재림을 고대하게 되어 있어요. 재림이 안 되면 탈락이 아니고 십자가로 이미 구원이 완성되었어요.

아까 특채라고 했는데 이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 특채라는 말은 나의 행함으로 구원을 받은 게 아니라는 뜻이잖아요. 십자가 지신 분이 특채하신 분이고 십자가 지신 분이 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바라봤다면 우리는 뭐만 바라보면 돼요? 예수님이 바라봤던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면 그게 예수님과 같은 시선으로 동일하게 보는 거에요. 그렇다면 그냥 사후세계가 아니고 내세라는 것은 이미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두 층으로 이미 만들어진 거에요. 만들어지고 성령이 오시니까 우리는 이 땅에서 인간 세계에 살지만 이 세상에서 낯선 내세에 속한 사람이 되어서 히브리서 11장 13절, 16절에 보면 “우리는 나그네요”, “우리의 본향은 하늘에 있는지라”라고 되어 있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충성모(IP:211.♡.67.188) 16-06-28 20:13 
안양20160610b히12장 1절(재앙과 징계)-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합시다. 12장 2절 끝에 보게 되면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그 뒤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했지요. 이게 바로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던 그것이에요. 재림은 칸막이에 불과하다고요. 지금 주님이 어디에 계십니까?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지요? 그럼 이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아실까요, 모르실까요? 다 아시잖아요. 그러니까 주님이 어디에 갔다고 해서 주님과 우리 사이에 칸막이가 있다는 생각을 가지면 돼요, 안 돼요? 그런 생각을 가지면 안 돼요.

신선로를 다시 그려봅시다. 지금 주님이 중심에 있다 이 말이에요. 중심에 계신 분이 지금 어디에 계시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은 예수님이 온전케 하시는 주요,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셔서 모든 것을 완성하셨으므로 지금 우리는 이미 믿음으로 연결이 되어 있는 겁니다. 이게 증인인 거에요. 그러니까 이렇게 보면 그 다음이 쉬운데 그 이유는 우리가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 이전에 앞서서 예수님 본인(당사자)이 이 땅에서 증인의 모습은 이렇다는 것을 미리 다 보여주신 거에요. 그렇게 겁을 줘도 예수님께서 겁이 안 나는 이유가 오늘날 우리가 주님이 옆에 계시니까 겁이 안 나는 것처럼 그런 거에요.

예를 들어서 옆이 지금 방입니다. 방에서 예수님이 소곤소곤하면 다 들립니다. 다 들리게 되어 있어요. 재림이라는 것은 이 벽이 허물어지는 거에요. 야고보서 5장에 보면 “내가 문 밖에 서 있다”라고 했어요. 이것은 하나의 칸막이이고 이것은 의미가 없다는 거에요. 칸막이는 세상사람들이 마음대로 까불라고 해놓은 거에요. 주님이 안 보이니까 그저 눈에 보이는 자기의 세상이 가치가 있는 줄로 알고 전부 사는데 성도는 이 세상은 없는 세상이라는 것을 알거든요. 칸막이가 있을 뿐이고 칸막이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아요. 왜냐하면 성령께서 직접 내통하고 있기 때문에 “예, 예?, 아, 예, 알겠습니다.” 지금 전화통화 하고 있는 입장이기 때문에 성도는 칸막이가 있으나 없으나 관계가 없이 주의 증인으로 그냥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이라면 (지금 이곳이 5평이라면) 5평 되는 이 안에 살지만 성도는 끝, 저 하늘나라까지 포함해서 세상을 보니까 세상을 느긋하고 여유만만하게 보는 거에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뇌물을 받지 마라. 거짓말 하지 마라.”고 하는데 이 말은 다른 말이 아니에요. 현실의 범위를 넓혀서 보라는 뜻입니다. 현실의 범위를 넓혀버리면 우리는 우리가 행해서 사는 게 아니고 사나 죽으나 주의 것으로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요. 내가 행한 만큼, 돈을 번 만큼 사는 게 아니라 죽는 것도 사는 것이라는 현실이 이 칸막이 너머에 통합이 되어 있으니까 그게 훅 들어온 거에요. 들어와야 우리가 주님의 증인이 되지요. 내가 무엇을 꼼지락꼼지락거리면 아무리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도 나의 증인이 되는데 성령께서 확 들어오셔서 성령을 받았으니까 주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주의 증인은 내가 새삼스럽게 행할 이유가 없습니다. 내 발걸음을 세는 것과 같은 모든 것을 주께서 행하시는 것이지 내가 따로 행할 필요가 없어요. 그래서 2절에 보면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라고 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 성도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같이 있는 겁니까, 따로 있는 겁니까? 제 질문은 간단한데요. 주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있다면 우리 성도는 앞으로 앉을 겁니까, 이미 와있는 겁니까,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미 와있지요. 그게 에베소서 2장 6절에 나옵니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과거 완료로 되어 있어요. 이미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그걸 어떻게 압니까?” “칸막이만 없애면 된다니까요. 칸막이만.” 이쪽에 침실이 있는데 저걸 부숴버리면 그때 보고 아는 게 아니라 벽이 있더라도 침실이 있다는 것을 알아요. 투시인가? 투시라고 할 게 없어요. 요한계시록에 천군천사 이야기를 이미 현재성으로 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칸막이가 있으나마나 지금 이 자리에 이 순간 같이 있어요. 지금 이 순간 함께 있는 거에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라고 했는데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게 되어 있어요. 칸막이가 없는데요. 뭘. 주께서 지금 우편에 있고 우리도 같이 우편에 있기 때문에..

그러면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이, “우편에 있다고? 꼬라지 좋다. 우편에 있다고 하면서 지금 이렇게 사느냐?”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 옆에 있으면서 예수님의 나라 속, 천국에 함께 있다는 것을 예수님을 보면서도 못 봤어요. “예수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이야기했거든요. “내가 지금 십자가에 체포 되더라도 내 마음(뜻)만 먹으면 천군천사가 와서 풀어준다.” 제자들의 입장은 자기들의 눈으로 한 번 천군천사를 보고 싶다는 거에요. 그들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보게 될 겁니다. 왜? 재림하실 때는 칸막이가 허물어지기 때문에 천군천사와 함께 있는 것을 보게 될 거에요. 그리고 정 그들이 보고 싶으면 우리가 죽으면 돼요. 우리가 몸을 떠나면 천군천사와 함께 영원히 삽니다. 지금 엘리야와 모세, 아브라함이 갔던 그곳에 삽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사적 죽음이 없어요. 오직 내세, 오는 세계만 있다고요. 오는 세계는 시간 끝에 오는 게 아니고 지금 이 세상과 오는 세계가 중첩, 같이 나란히 엮여져 있다니까요. 하나님의 보좌가 지금 있어요. 지금 구원 받은 거에요. 마귀는 지금 이 이야기를 가리는 거에요. 지금 있다고 하니까 그러면 내가 더 착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하는데 “내 착한 행함과 상관없이 지금 있습니다.”라고 하려면 내 착함이 지금 있음의 근거가 되면 안 되고 내 행함 말고 다른 행함이 여기에서 근거가 돼야 돼요. 그 행함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는 말이지요. 예수님께서 어떤 행동을 해도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행동하듯이 예수님의 증인도 무엇을 하든 간에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이미 특채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빵을 주신 것도 주님의 십자가의 희생 덕분이고 방울 토마토도 십자가의 희생 덕분이고 전부 다 십자가의 희생 덕분에 오는 거에요.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입니다.

그러면 십자가 안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십자가 안에는 두 가지 죽음이 있는데 하나는 육신의 죽음이 있고 하나는 십자가 죽음이 있습니다. 십자가 죽음은 생명이 돼요. 다른 말로 하면 영생이 됩니다. 그런데 육신의 죽음에 몰두하는 사람은 생명이 아니고 불멸적 존재를 생각하게 됩니다. 모든 이 세상의 인간들은 종교를 생각할 때 불멸적 존재로 생각을 해요. 그 불멸적 존재가 되는데 그 주체(주인공)가 누구겠어요? 지금 자기 자신을 두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내가 천 년,만 년 오래 살면 그게 영생인 줄로 알고 착각을 하고 있어요. 그것은 창세기 3장에서 그게 아니라고 분명히 당부했어요. “네가 선악과를 따먹은 채로 생명나무를 따먹어 버리면 너는 영생의 존재가 아니고 불멸의 존재가 된다.” 불멸의 존재를 원해요? 해줍니다. 어디에서? 지옥에서. 십자가 죽음이 생명이라면 그 반대말은 지옥이 되는 겁니다.

지옥은 죽는 데가 아니고 불멸의 존재로 살되, 예수님의 저주를 받으면서 불멸의 존재가 되는 거에요. 그런데 여기에서 “예수님께 저주를 받으면서”라고 하는 것을 빼버립시다. 그러면 뭡니까? 불멸의 존재가 된다만 남지요? 그게 지옥이에요. 어떤 상태로? 지금 불멸의 존재를 원하는 이 상태로 오래 사는 게 지옥입니다. 지금도 사는데 더울 때는 덥다고 난리에요. 이게 재앙인데 이 재앙된 채 불멸의 존재로 계속 사는 거에요. 원래 세상은 물로 만들어서 물로 심판 받잖아요? 그러면 왜 두 번째는 물이 아니고 불이냐 하면 이게 지옥과 관련이 되어 있기 그렇습니다. 지옥은 불의 세계입니다. 불의 세계를 이 세상이라는 이름으로 미리 우리에게 맛을 보게 하신 겁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 끊어지면 칸막이가 없어지고 칸막이가 없어지면 원래 지옥이에요. 이 세상이 지옥인데 재림하실 때 두 개의 칸막이, 한 쪽은 천국에 가는 칸막이가 없어지고 한 쪽은 지옥에 가는 칸막이가 없어져 버리면 그냥 마귀가 지배했던 세상이기 때문에 마귀는 불못에 던지우지요. 그러면 마귀가 가는 곳에 우르르 따라가게 되어 있어요. 왜? 마귀의 종이니까요. 마귀의 종 아니면, 어린 양의 종이니까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어린 양을 졸졸 따라다니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은 천국에 가고 그 다음에 어린 양을 졸졸 안 따라다니고 그냥 가만히 있는 사람이 있는데 가만히 있다는 말의 뜻은 가만히 있는 그것이 짐승의 나라이기 때문에 따라 다닐 필요가 없다는 것이에요. 그냥 살던 대로 사시면 돼요. 막 살면 돼요. 막 살면 지옥에 갑니다. “하여튼 목사님 여기에서 또 딴 소리를 합니까?” 딴 소리를 하는 게 아니고 이 땅에서 막 살면 지옥에 갈 자는 지옥에 가고 천국에 갈 사람은 천국에 가니까 막 살자는 말입니다. 사는 대로 살면 돼요. 특채 되지 않으면 지옥에 갑니다.

마태복음 11장을 한 번 봅시다.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이 본문에서 의미하는 것은 자기의 힘으로 아들을 아는 자가 없다는 말이거든요. 그렇다면 제가 질문을 하겠습니다. 아버지만 알면 왜 구원이 안 되고 아들이 꼭 끼어들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 “아버지의 소원대로”로 충족하지 않고 아들이 자꾸 끼어드느냐 이 말이지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냥 건져주면 되지 않습니까? 아들이 왜 끼어듭니까?”라고 하는데 천국은 예수님이 몰고오기 때문에 그래요. 자꾸 하나님을 생각하지 마세요. 하나님에게는 하늘나라, 천국이 없어요. 천국은 아들의 나라에요. 그래서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고는 천국이라는 나라가 가짜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인정하게 되면 내 인생이라는 게 없어요.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인생이라고 이미 흡수, 통합을 시켜놓았기 때문에 내 인생이 아니고 예수님이 자기의 인생을 위해서 우리를 예수님에 맞도록 맞추어 가는 거에요.

그런데 우리는 자꾸 하나님에 맞추려고 하는데 하나님에게 맞추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에게 맞추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이 땅에 살았잖아요. 우리도 실제로 이 땅에 살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에 맞추고 자꾸 상상해서 하나님을 생각하지 말고 예수님이 이 땅에 어떻게 사셨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살았습니까? 아버지께서 시키는 대로 살지요.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아버지가 시킨 것이 있는데 그것은 “네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증인이 되라고 내가 뽑아서 세웠다.” 거기에 조명발을 받고 그냥 살면 돼요. 이것도 저것도 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하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는 게 아니고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되어 있지 “하나님을 믿으라 구원을 받는다”라고 되어 있지 않아요.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다 믿는데요. 이슬람이 믿는 알라신도 번역하면 하나님이에요. 그들이 다 천국에 갑니까?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이라는 말은 부정형으로 “이렇게 하세요.” 가 아니고 “올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올 수 없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아버지께서 내게 보내지 않으면 아무도 올 수 없는 거에요.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어가지고 갈 수 있는 나라가 천국이 아니라는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만을 증거해야 됩니다. 싫으면 말아야지 어떻게 하겠어요, 특채인데..?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서산에 가게 되면 개불잡이인지 개불인지 요새는 예를 들어도 자꾸 엉터리 예를 들어서 돌아서서 녹취를 자꾸 바꿔야 돼요. 상하이 홍구 공원에 투척한 사람이 윤봉길인데 이봉창이라고 했거든요. 이봉창은 천황에게 수류탄 두 개를 던진 사람이에요. 녹취를 고쳐놨는데요. 그것을 모른다고 교육을 잘 못했다고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내가 교육을 잘 못 했어요. 하여튼 제가 서해 바닷가에 보니까 그냥 모래사장에 구멍만 나 있고 안에 뭐가 안 나와 있어요. 그런데 젓가락에다가 소금을 묻혀서 쏙 집어넣으니까 안에서 개불인지 뭔지 네모난 조개가 나오는데 (맛살이라고 합니까?) 개불은 치우고 맛살 조개가 튀어나오더라 말이지요. 이게 우리가 했던 요한계시록에 나왔던 우물파기에요. 세상은 아무 일이 없어요. 주님이 자기 새끼에게만 복음이라는 소금을 집어넣어서 빼내주는 겁니다. 빼내보니까 그제서야 나는 죄인이었는데 특채를 받은 것을 아는 거에요. 칸막이가 없이 주님이 보좌에 앉으시고 나도 보좌에 앉았기 때문에 성령이 오게 되어 있어요. 주께서 보좌에 앉아계시지 않으면 성령이 안 오게 되어 있어요. 성령은 우리가 찾아가서 받아내는 게 아니고 우리 마음에 도달하게 되어 있다고요. 주께서 스파이더맨처럼 쭉 뿌린 거에요. 뿌리셨으니까 온 겁니다. 그래서 그것을 끄집어내니까 나의 이러한 세상보기, 이러한 현실보기는 시킨다고 시키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이걸 말릴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아버지와 아들이 계시 외에 아버지를 아는 사람이 없다”라고 부정적으로 이야기해요. “하라.”고 한다면 행함에 대해서 이미 긍정을 해준 것입니다. “제대로 해. 똑바로 해.” 이게 아니고 올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그러면 인간의 행함 자리에 주님이 침범해서 일을 하는 거에요. 그런데 왜 하나님이 침범을 해서 일을 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입니까? 예수님의 일은 십자가로 규정이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일은 모호해요. 비오는 것도 하나님의 일이니까 “비오는 것을 믿으라. 구원 받았다.”라고 하면 안 되잖아요. “파도 치는 것을 믿으라.” 이게 아니고 십자가가 복음이지 (비가 오는 것은 물론 하나님의 뜻 맞는데요.) 비가 온다고 구원을 받는 게 아니고 파도가 친다고 구원을 받는 게 아니고 몸이 아프니까 안수를 받아서 건강한 게 구원을 받는 게 아니고 전도해서 천 명을 데려왔다고 구원을 받는 게 아니에요. 십자가라니까요. 십자가 앞에서 구원을 받은 사람은 죄인이 되어야 되거든요. 그 죄가 뭐냐 하면은 “나는 내 행함으로 나만의 권력을 행사하는 식으로 살아오고 있습니다.” 하는 것을 고백하는 거에요. ‘예수를 믿으나 안 믿으나 나는 내 행함에 대해서 잊을 수가 없고 나는 그것을 귀히 여기고 내가 준 사랑은 귀하고 남이 준 사랑은 개떡 같고.. 이게 접니다.’ 부부가 맨날 그것 때문에 싸우잖아요. “네가 나한테 뭘 해줬는데?” 싸워도 한 쪽이 입 다물고 있으면 싸움이 될 수가 없어요. 한 쪽이 입을 다물고 있는데 어떻게 싸움이 됩니까? “예, 예, 예, 예. 아이고 이뻐라.” 이렇게 하면 끝이 날 문제를 가지고 잘났다, 못났다고 하는 거에요.

그 다음에 3절을 봅시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이게 중국 무협 영화에 나오는 모습입니다. 그것도 옛날 정통 무협 영화 말입니다. 강호의 고수들이 등장하는 것 있잖아요. 거기에 보면 회전하는 무술, 태극 몇 권인지는 모르겠는데 이런 게 있어요. 여자 무술사가 있습니다. 그 주위에 건장한 남자들이 여자라고 무시하고 “누가 더 쎄냐?”라고 합니다. 대나무 숲에서 많이 싸우지요. 그때 여자가 어떻게 하냐 하면은 장풍을 한다고 손을 내밀면서 자체적으로 회전을 해버려요. 그리고는 팽이처럼 막 돌면서 슉 올라가지요. 예수님께서 팽 돌아버리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십자가에 참으사”가 막 나와요. 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지금 신약의 이야기가 전부 다 십자가를 이야기하는 거에요. 십자가 안에 이런 내용들이 들어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십자가 안에서 예수님이 돌아줘야 이러한 내용들이 바깥으로 나오는데 인간들은 자꾸 십자가를 믿으려고 하는 거에요. 그런데 십자가를 믿으려고 하면 자기의 선입견을 가지고 믿어요. ‘주님은 저렇게 인내했구나. 우리도 인내해야지.’ 그런데 인내를 해봐요. 어디까지 가는지.. 어디 인내가 됩니까? 사람이 자기가 행할 만해서 지켰다고 이야기하지, 행하지 않은 것은 중간에 반칙이라고 다 뺐어요. 다 뺀 거에요. “나는 이웃을 사랑했습니다.” “어떻게?” “구제 헌금 5만원 냈습니다.” “5만원 내지 말고 심장 떼주지.” “그건 안 됩니다. 이것은 부모한테 받았는데 모르는 사람에게 왜 떼어 줍니까? 말도 안 되지요.” “그러면 요한일서 3장 16절,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마땅하니라’는 왜 되는데?” “그건 믿음이 좋은 사람보고 하라고 그러세요. 나는 믿음이 안 좋으니까 나는 빼주세요.” 이렇게 나온다 말이지요.

자기가 되도 않을 강호의 고수인양 흔들어 봐야 여기에서 뭐가 나옵니까? 그냥 죄만 나와요. 썩은 냄새만 나오지요. 이래가지고는 안 되고 예수님께서 자체적으로 십자가를 흔들어버리면 이 땅에서 십자가의 효과를 받아요. 왜? 이 세상은 십자가 지신 그 환경이기 때문이에요. 십자가 지신 것이 이 세상이기 때문이에요. (이쯤하면 또 잊어버릴까봐 내가 걱정이 된다마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정리해봅시다. 이 칸막이가 남들 보기에는 다 있어요. 세상 사람한테는 눈에 보이는 이 우주가 전부에요. 그러나 성령을 받은 사람한테는 우주라는 게 없고 이 칸막이가 없고 재림하느냐, 안 하느냐에 관계없이 이미 예수님의 세계와 다 통하게 되어 있어요. “사나 죽으나” 죽어도 괜찮고 살아도 괜찮아요. 왜냐하면 우리 자체가 이미 생명이기 때문에 그냥 인간의 육신의 죽음은 여기에 적용이 안 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2장에 죽기를 무서워 종노릇한 사람을 예수님께서 오셔서 빼내줬다는 거에요. 그러면 빼내주고 난 뒤에 상황이 뭡니까? 무엇을 무서워하지 않겠어요? 죽기를 무서워하지 않겠지요? 왜? 죽기를 무서워한 그곳에서 빼내줬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인간의 모든 행동에는 무엇이 담겨 있습니까? ‘혹시 죽을까 봐.’라는 공포를 가지고 행동을 조심스럽게 하잖아요. 그러면 그것은 결국 마귀로부터 놀림감이 될 뿐이에요. “예수 믿는다고 해놓고 꼴 좋다, 얼레리 꼴레리.” 하고 마구 놀리는 거에요. 그때 다시 한 번 주님께서 어떻게 합니까? 후닥닥 무술(십자가)을 또 사용해버려요. 그렇게 사용하면 어떻게 되는데요? 사용하면 5절이 나옵니다. 5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4절부터 봅시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예.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않았습니다. 그러면 지옥에 갑니까? 아니지요. 드디어 예수님께서 요술을 부리는 상태입니다. 5절을 보세요. “또 아들들에게 권면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라고 되어 있지요.

왜 주님께 타이밍을 맞춰서 징계가 와야 됩니까? 누구의 자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남의 자식이 아니고 진짜 내 자식이기 때문에 그렇게 요술을 부리는 겁니다. 7절에 보세요.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징계하시면서 그것을 대우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라고 오히려 반문하시지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너는 몰랐었어?”라는 식으로 반문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뭡니까? 우리는 주님과 칸막이가 터져서 성령을 받았으니까 주님과 늘 함께 있는 거에요. 아까 이야기하던 것을 다시 이야기해봅시다.

열두 제자가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예수님을 어떻게 봤습니까? 예수님은 저기에 있고 자기는 예수님 옆에 붙어있다고 생각했지요. 자기 딴에 그걸 함께 있는 걸로 봤는데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제자들이 함께 했습니까, 다 도망갔습니까? 다 도망갔지요. 도망갔다는 말은 평소에도 사실 함께 있었던 게 아니고 따로따로였다는 말이지요. 개인적인 생각을 한 거에요. “예수님,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높겠습니까?” 이런 질문이 나온다는 것은 따로 놀았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봅시다. 사도행전 2장에 성령을 받고 난 뒤에 어떻게 됐습니까? 사도들이 뭉쳐서 돌아다니지 않았지요? 전부 각자 흩어졌지만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성령 안에서 하나요”라고 했어요.

백지영의 노래에서도 나오잖아요. “같은 하늘에 있다” 지금 몸은 헤어졌지만 같은 하늘에 있다는 말이에요. “잊지 말아요.” 그게 하나밖에 없는 교회에요. 캐나다에 가나, 미국에 가나, 복음을 아는 사람은 같은 하늘에 있어요. 주님이 신선로 아닙니까? 아까 시간은 직선이 아니고 이미 중심이 확정되어 있는 원이라고 했지요. 원에서는 동일한 시간에 다 저촉을 받아요.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아요. 옛날이 지금이에요. 왜? 옛날 있었던 일이 반복이 되니까요. 그때 주님을 싫어했던 것처럼 지금도 싫어해요. 또 반복돼요. 그러니까 인간의 연대기는 이렇게 직선으로 달립니다. 연대기가 아니라고 했지요. 연대기가 아니고 성령 안에서는 항상 반복이 된다. 이게 요한계시록의 해석법이라고 했습니다. 『생명의 신호』라는 책에 보면 나와 있어요.

주께서 우리를 아들로 여기시고 함께 살지만 제자들이 성령을 받기 전에는 따로 놀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는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따로 노는 게 아니고 늘 징계가 와야 돼요. 어떤 징계? 내 솜씨를 부려서 주의 일을 할 때마다 이것이 실패작으로 끝이 나도록 하는 겁니다. 말(발)을 잘해서 성도를 시키고 뭘 해서 기쁘게 하고 이것이 전부 다 실패로 끝이 나게 해요. 그러면 실패가 아닌 경우는 무엇입니까? 실패 다음에 성공이 오는 게 아니고 실패가 곧 성공인 거에요. 그래서 저는 실패와 성공이라는 말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그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죄인인 것이 드러나는 현장에서 비로소 발견된다.”

오늘 아침에 어떤 분이 저한테 이런 질문을 했어요. “옛사람을 지나서 새사람이 되었는데 옛사람을 생각할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모든 사람이 궁금하면서도 체면을 차린다고 차마 이야기를 못 하고 있는 질문이 그 질문이에요. “새사람이 된 입장에서 옛사람을 신경 쓸 필요가 없고 생각하지 않아야 되는데 왜 생각해야 됩니까?”라는 질문이에요. 새사람이 되었는데 왜 자꾸 옛사람의 모습이 나오느냐는 식으로 고린도후서에도 그렇게 되어 있어요. “옛사람을 버려라”라는 그런 잔소리를 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옛사람을 버리라는 말이 나왔다는 말은 지금 늘상 옛사람이 생겨난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면 새사람 값이 안 되잖아요. 새사람이 되었으면 옛사람을 버리고 이제는 빠이빠이해야 되는데 왜 자꾸 빠이빠이 하지 않고 계속 나오느냐 이런 질문을 한 거에요.

그래서 제가 답변했어요. 새사람은 소유하는 대상이 아니고 옛사람이 등장하면서 새사람이 함께 등장한다고요. 나는 이미 새사람이라고 하지만 어느새 보면 옛사람이 되어 있고 그 옛사람 속에서 새사람과 옛사람 사이에 십자가 복음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주께서 반복해서 옛사람과 새사람을 계속해서 감응(try)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날마다 죽노라” 이게 말이 안 되잖아요. 날마다 죽다니요. 어제 죽었으면 끝나는 이야기잖아요. 그러니까 오늘 살아났으면 이제는 날마다 사는 게 아니고 계속 사는 것인데 계속 사는 사람에게 날마다 죽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런데 날마다 죽는다는 말은 날마다 죽었다가 살아나고 죽었다가 살아나고가 계속 되는 거에요. 왜? 그 작업이, 시간을 초월한 묵시 세계에 우리가 놓여있기 때문에, 지나간 모든 것이 지금 현재가 되어서 날마다 반복하는 거에요.

한 10년 전에 처음에 교회에 다닐 때 술을 끊는다고 애를 먹었다. 술을 안 끊으면 상급이 없다고 해서 술을 끊었다, 그리고 나서 그때부터 술을 안 먹게 되었지요. 그런데 10년이 지났는데 누가 술을 권해요. “예수도 포도주를 잡쉈는데 한 번 잡숴봐요. 십자가로 구원 받는 거지 포도주 먹는다고 죄를 짓는 거 아니잖아요. 포도주를 안 먹는 것도 당신의 자기 의 아닙니까? 자기 의를 너무 내세우지 맙시다. 자기 의는 주께서 싫어하십니다. 술 먹으라고 권하는 것도 주의 일입니다. 지금 주께서 시키는 거니까 한 번 잡숴보세요.” 그럴 때 “술을 저는 안 먹습니다.” “왜 안 먹어요?” “새사람이 되었으니까 술을 안 먹습니다.” 이렇게 되면 “새사람이 된 근거가 술을 안 먹는 것에 있습니까?”라고 차고 들어올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럴 경우에 술을 먹어야 됩니까, 안 마셔야 됩니까? 그런데 그 질문에 대해서 제 답변은 벌써 나와 있어요. “막 사세요.”거든요. 이 말은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먹기 싫으면 안 먹으면 되고 먹고 싶으면 먹으면 되는데 다만 이것을 예수님하고 빗대지 마세요. 이걸 예수님이 시켰다는 소리를 하지 말고 우리는 어차피 막 살게 되기 때문에 내 본성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옆에서 술을 권하게 된 거에요.

그러면 내가 술을 안 먹게 된 것은 내 본성에 안 맞아서 안 먹게 된 거에요. 여기에서 주의할 것이 있어요. 10년 후에 누가 유혹을 했는데 술을 안 마셨다면 그것이 15년 뒤에도 유효하냐 이 말입니다. 절대 유효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15년 뒤에 “만약 내가 시키는 대로 술만 먹어주게 되면 나는 너와 결혼해줄게.”라든지 “너에게 많은 유산을 남겨줄게.”라는 유혹이 왔을 때 “그 까짓 술 한 잔, 그게 뭐라고.”라고 하면서 술을 홀딱 마실 수 있는 상황이 언제든지 벌어질 수 있다는 거지요. 그건 유혹도 아니에요. 그때 술을 안 마시게 했을 뿐이지 그런 상황이 언제든지 벌어질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안 마셔도 괜찮은 사람이야.”라는 식으로 오도하지 마시라 이 말입니다. 그렇게 자기를 자신하지 말라는 겁니다. 내가 나를 자신해버리면 이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게 아니고 내가 나를 믿는 게 돼요. 이 사람은 나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면 됩니까? 사는 것 자체를 징계로 보면 돼요. 징계로 본다는 말은 징계하는 자가 따로 있고 징계를 받는 자가 따로 있는데 징계를 받는 자는 나고 징계를 하시는 분은 칸막이를 쳐놓고 지금도 지켜보고 징계를 하시는 거라는 거에요. “그런데 징계를 하면 아프잖아요?” 아프기는 뭐가 아파요. 안 아프지요. 왜 안 아프지요? 참 아들이기 때문에 징계한다는 이 말씀이, 잃어버린 특채를 받은 기쁨을 다시 새롭게 느끼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크게 기쁨이 왔다거나 크게 슬픔이 왔을 때 이것이 성도가 다시 한 번 성도인 것을 만끽하는 기쁨의 찬스가 되는 겁니다. ‘아이구, 슬퍼라.’ 하더라도 ‘슬퍼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지? 그러면 원래 내 것이었어? 주의 것인데..’ 이렇게 하면서 주께 감사하게 되지요. 또 좋은 일을 했다고 좋다고 그램그램(상호명)에 가서 소고기를 사먹어봤자, ‘이걸 좋아한다는 것은 내가 이걸 은근히 기대했다는 말이 되고 이것은 예수님보다도 이걸 더 원했다는 것인데 이게 하나님 앞에 징계구나.’라고 하면서 자기 자신이 평소에 얼마나 부끄럽게 살아가는지 티를 내는 거에요.

그 다음에 5절을 봅시다. 이것이 잠언서 3장 11, 12절의 말씀입니다.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잠언서는 대구 강의를 할 때 늘 하고 있습니다. 인천 녹매교회 목사님께서 고맙게도 녹취를 해주시는데 잠언서 3장 11절, 12절에 나오는 그 말씀이거든요. 여기에서 이것을 한 번 설명해봐야 되겠습니다. 잠언서 이야기는 솔로몬의 이야기입니다. 솔로몬 때에 하는 이야기가 여기 히브리서 12장에 나왔다는 말은 아까 이야기한 직선적 시간관이 아니고 신선로처럼 그때나 지금이나 주님이  중심인, 같은 시간대의 삶의 현장이라는 뜻으로 보면 돼요. 그렇다면 제가 물어볼게요. 잠언서가 여기에 적용되었잖아요. 그러면 시편은 적용이 안 됩니까? 적용이 되지요. 그러면 창세기 1장은 적용이 안 됩니까? 적용이 되지요.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 적용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는 말씀의 풀장에 속해있는 거에요. 이게 중요합니다. 내가 말씀을 지키는 겁니까, 아니면 내가 말씀의 늪 속에 풍덩 빠져있는 겁니까? 풍덩 빠져있지요. 그러면 성경 말씀을 본다는 말의 뜻은 “하나 지켰다, 두 개 지켰다.” 이게 아니라 전체 말씀 속에 포함이 되어 있으니까 이 말씀이 여기 검뎅이처럼 또 여기에서 나를 통해서 오늘은 이 말씀이 튕겨 나오고 내일은 저 말씀이 또 등장되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이 말씀을 하는 것은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의 실재성을 우리를 통해서 드러내게 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 아들의 존재 이유라는 것입니다. 금붕어가 어항 속에서 헤엄치는 겁니까, 사는 겁니까? 사는 거지요. 그렇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어항에 빠졌다면 헤엄을 쳐야 돼요, 살아야 돼요? 큰 어항 속에는 인간이 사는 게 아니고 그냥 헤엄을 쳐서 나와야 되겠지요. 우리는 말씀을 지키는 자가 아니고 말씀이 지켜진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 안에 이미 푹 잠겨버린 거에요. 어항 속의 금붕어처럼 꼬불꼬불 하면서 사는 거에요.

그러면 한 번 물어봅시다. 어린애가 엄마와 같이 살아요, 엄마 품 안에 사는 겁니까? 갓난 어린애는 엄마 품 안에 놓여 있지요. 애를 보고 “야, 돈 벌고 살아라.”라고 하지는 않잖아요. 품 안에 품어주잖아요. 그게 시편 131편에 나오는데 우리 하나님께서 품어주게 되면 성도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우리 주님이 다 품어주셨지요?”라고 하면서 시선을 마주칠 때 그게 바로 성도의 삶이 된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왜 자꾸 말씀을 지키라고 하느냐? 그것은 생활이 어렵다 보니까  ‘야, 징계 받는 모양이다. 성경을 안 본다고 주께서 또 봐줄 수도 있는데 그걸 때리는구나. 에잇.’ 성경을 지켜가지고 전에 손해본 것을 빨리 만회해가지고 다시 원상복귀시키려는 마음을 갖고 그렇게 하고 있는 거에요. 그런데 그것을 누가 간파하느냐 하면 목사들이 간파해가지고 이참에 헌금 그 동안에 밀린 것을 다 뽑아내고 봉사 뽑아내고 충성 뽑아내 가지고 “여러분 저주 받으려고 환장했습니까? 주님께서 살아계신데 그렇게 믿음이 없습니까? 이제 믿음대로 사시길 바랍니다. 어린 애 같은 믿음으로 사셔가지고 빨리 하나님의 복을 받아가지고 여러분이 그리워하는 그 미래상을 찾으시기 바랍니다.”라고 해놓고 그냥 있지 않아요. 그 다음부터 간증집회 들어갑니다. “내가 옛날에 이렇게 살아서 애를 먹었는데 이렇게 잘 되었습니다.” 그게 설교 끝이에요. 설교는 그게 끝이에요. 마지막에 설교를 듣고 난 뒤에 그 다음부터 ‘그래, 지켜야지.’

인간은 지킬 만한 것만 골라잡아요. 뷔페에서 음식을 다 먹는 그런 배불뚝이(배뿔레기)는 없습니다. 음식을 골라먹듯이 성경도 골라 먹으면서 자기는 먹었다고 치지요. 어떤 드라마에 보니까 그런 게 나오던데요. 뷔페에 가면서 친구가 속였어요. 쟁반을 주면서 “이 뷔페는 딱 한 번만 먹어야 된다.”라고 장난삼아 얘기하니까 애가 욕심을 내가지고 쟁반에다가 음식을 산만큼 담았습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가지고요. 여러 번 가져가도 되는데 한 번에 가져갈 욕심으로 말이지요. 예수를 믿고 난 뒤에 보통 욕심을 내요. 성경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한 번 읽어본다고요. 그런데 성경을 한 번 읽었다고 그걸 다 먹습니까? 성경은 지키는 게 아니고요, 주님 쪽에서 우리한테 실습을 시키는 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지킨다고 지켜지는 게 아닙니다. 내가 지킨 그 말씀이 어떤 상황이 되면 ‘내가 지켰다고 여기는 그 뜻이 아니고 이런 뜻이구나.’ 하는 것을 실감나게 해요. 그렇게 하면서 항상 그 결과로 이미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로 구원을 받은 상태라는 것을 알게 해요. 왜?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요. 이 죄에 대한 해결은 이미 끝났다. 주님의 피로써 끝났고 그럼으로써 우리가 아들로 특채되었음을 깨닫게 하는 식으로 항상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그것이 말씀이 말씀대로 드러난 지킴이 돼요. 나는 못 지키는 죄인으로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보시기에 여전히 말씀 안에서 아예 사는 존재인 것을 확인케 했으니까 얼마나 감사합니까? 지킬 게 없어요.

우리가 따로 골라잡아서 ‘이건 나중에 지키고 이건 지키고..’ 이렇게 되면 이건 자기 의가 되잖아요. 살아가는 것이 다 지킨 분의 혜택으로, 죄 많은 우리를 위해서 죄 없는 분의 혜택으로 오늘도 목련화는 앞에 피고 햇빛은 비춥니다. 전부 다 죄인인 나는 감당할 수 없는 복인데 내 대신 남이 지켜가지고 은혜의 선물로 주시니 우리는 그냥 감지덕지로 받아챙기기만 하면 되는 거에요. 욕심을 내니까 “저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라고 하는데 그렇게 되어 버리면 이것은 주님의 말씀을 지키겠다는 것밖에 안 되는 거에요.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진다는 대목이 디모데전서에 보면 나와요. 그런데 이걸 사람들은 두 바퀴가 있다로 보는 거에요. 여기에서 두 바퀴 이론이 나왔어요. 말씀만 지켜도 안 되고 기도와 합해서 나란히 두 바퀴가 가야 된다고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네 바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여덟 바퀴라고 하고 난리가 났어요. 그 말씀의 뜻은 말씀대로 하지 않는 기도는 응답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말씀대로 모든 게 되어간다는 것을 네가 믿게 되면 그게 말씀을 지킨 게 된다는 거에요. 말씀을 어차피 우리는 못 지킵니다. 그러나 다 지킨 분이 우리를 이렇게 결과물로 만들어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지금 이 자리가 말씀의 현장화가 되고 실현된 상황이 되는 거에요. 그걸 주 앞에 감사와 찬양으로 올리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매일같이 징계 받는 즐거움이 있게 하옵소서. 주와 함께 있는 즐거움이 그런 즐거움이오니 늘 주님과 시선을 맞대면서 주님과 우리 사이에 담이 허물어지면서 주께서 시키는 대로, 은혜를 준 대로 움직인다는 것을 나타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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