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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09 00:26:51 조회 : 1126         
인솔 160708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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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성모(IP:211.♡.67.174) 16-08-06 18:37 
안양20160708a히12장 5절(인솔)-이 근호 목사

히브리서 12장 2절을 보겠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라고 되어 있지요. 앞의 11장에서 어떤 신앙의 긴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그 역사에서 제일 먼저 신앙이 나타난 사람, 믿음의 증인으로 제일 먼저 등장한 사람이 아벨이지요. 가인부터 등장하지 않고 아벨부터 등장하지요. 아벨부터 등장합니다. 아벨부터 등장하면서 아벨은 과거 가운데서 처음이 되고 아벨 다음에 등장하는 사람이 에녹이고 그 다음에 노아가 등장하고 그렇지요. 히브리서 11장이 그렇지요? 그러면 처음 등장하는 사람은 보다 더 전의 과거가 되는 겁니다.

과거에서 어디로 향하느냐? 미래로 나아가요. 그러면 히브리서 11장은 전체가 일직선으로 어디를 향하여 달려간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자, 그런데 달려가는 가운데 어떤 분이 있다고 한다면 이 사람이 달려갈 때 그냥 달려가는 게 아니고 도착 지점을 생각할 수밖에 없지요. 그 도달 지점이 어디 있느냐 이 말이에요. 그 도달 지점이.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교회에 다니십니까?” “그러면 교회에 다니면 그 목적이 어디까지 갑니까?”라고 물으면 전부 다 “천국입니다.”라고 하거든요. 그게 맞을까?

우리가 교회에 다니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게 천국이 목표냐 하는 겁니다. 천국이 목표냐.. 히브리서 11장에도 그렇게 이야기하더냐 하는 겁니다. 보험에 가입하는 사람의 목적은 보험을 타 먹는 것이 목적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보험금을 타기 위해서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고 한 푼 한 푼 아껴서 폰뱅킹으로 하든지 돈을 넣고 있지요. 그러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자기가 지금 교회에 오는 이것이 신앙생활의 끝이라고 본다면 이건 말이 안 되잖아요. 이렇게 적금 붓듯이 그 목적을 향하여 가는데 그 목적이 성경에서는 (2절에 보면) 십자가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천국이라는 것에 너무 성급해요. 그것은 교회에서 “천국이 목적입니까, 십자가가 목적입니까?”라고 했을 때 “천국입니다.”라고 하지 않고 “십자가가 우리의 갈 길입니다.”라고 한다면 교회에서서 도중 자진해서 이 노선을 철회할 사람들이 많이 나올 거에요. 많이 나오는 정도가 아니고 대부분 이 노선을 안 갈 거에요. 보험금을 넣는 것이 보험금을 타 먹어서 내 소유가 될 때, 다시 말해서 내가 지금보다 더 괜찮아진 내가 되는 것을 목표로 지금 내가 견디잖아요. 그런데 이 신앙의 선조들이 그렇게 견디고 아팠고 서글펐고 특히 외로웠고 남한테 욕을 얻어먹으면서도 견디고 견디는 그 힘은 어쨌든 간에 이 십자가에 참여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면 이 말을 오늘날 교회 교인들이 알아먹을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전에 여러분들이 알아먹었습니까, 지금 여러분들이 알아먹겠습니까?

그 십자가에서 죽으려고 그렇게 참고 했습니까? 만약에 어떤 보험 회사에서 “보험금 들으시면 뭐 주십니까?”라고 물었더니 “십자가 죽음입니다.”라고 했다면 이 보험을 누가 들어요? 아무도 안 들어요. 엄마가 딸한테 그렇게 기악(바이올린)시키고 피아노 가르치고 했는데 딸이 “엄마, 이거 왜 하는데?”라고 물었더니 엄마가 대답하길 “십자가에서 죽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애가 그 말을 못 알아듣겠지요. 그래서 이렇게 봅시다. 이 믿음의 조상들이 자기가 착해서 알아들어서 용기가 대단해서 따라가는 게 아니고, 이 십자가의 긴 그림자가 이들이 걸어간 길에 뻗쳐져 있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십자가가 이렇게 뻗쳐져 있으면 (이제부터 설명을 잘 들어야 돼요.) 우리가 천국을 바랐는데 천국을 바라던 우리에게 십자가가 나타났다면 이것은 기이한 겁니다. 이상한 거에요. 그렇다면 아벨 있잖아요. 그리고 에녹, 노아, 이런 사람에게 십자가의 긴 그림자가 덮인다면 아벨의 인생에서 기이하고 신기한 정도가 아니고 절망스럽다고 할까, 또는 낙망이 되고 좌절이 되는 그러한 일이 자기의 인생에 끼어들게 돼요. 제사를 잘 드렸는데 하나님이 받았다, 그 순간 자기는 어떤 포부를 가질 겁니다. ‘야, 이렇게 나가다가는 하나님께서 내가 잘 되게 해주시겠지.’

그런데 형이 뒤에서 와가지고 돌을 가지고 쳐죽였다.. 죽을 뻔했으면 또 몰라.. 아예 죽었잖아요. 죽을 뻔했는데 다시 일어나서 형한테 복수하는데 하나님이 도와줬다면 막장드라마인데 그게 아니고 아예 죽어버렸어요. 거기에서 아침드라마를 끝낸다면 그 드라마를 볼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뭔가 희망이 있어야 될 게 아니에요. 희망이.. 그런데 죽었다는 것은 이제 모든 희망은 손을 털고 없다는 말밖에 안 돼요. 죽었다는 말은.. 아벨이 무슨 희망을 갖겠어요? 아벨이 (특히) 형한테 죽었다는 이 사실은 장차 예수님께서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을 아벨을 통해서 십자가의 긴 그림자, 이 전봇대의 긴 그림자가 아벨의 인생을 덮어서 아벨에게 이런 기이하고 특이한 사항이 일어나는 겁니다.

성도는 자기가 예상도 못한 특이사항을 몸에 품고 가는 거에요. 이것은 이렇게 표현할 수 있어요. 성도가 하나의 화물 열차의 객차라면 하나님의 특이함이, 객차마다 시멘트, 모래가 쌓이듯이, 거기에 쌓여서 같은 형제끼리 조인트 되어서, 객차와 객차가 연결되어서, 칙칙 꽥 하고 예수님 품속으로 들어가요. 예수님 품은 이렇게 열려있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안 가봤습니다마는 거기에 유명한 동상이 있지요. 산꼭대기에 예수상이 있습니다. 그 예수상의 모습이 이렇게 팔을 벌리고 있어요. 마치 모든 걸 포용해줄 것처럼, 모든 것을 받아주는 것처럼, 자기한테 오는 사람들을 받아줄 듯이 팔을 벌리고 있단 말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이 기관차, 신앙의 선조들의 그 노선을 예수님의 품 안에 받아주는데 예수님의 십자가로서 받아줍니다. 이 말의 뜻은 너희들에게 일어난 일은 십자가를 나타내기 위해서 너희의 소원과 관계없이 일방적으로 너희 인생 속에 터져버려야 할 사건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들의 십자가 사건은 어떤 겁니까? 암벽 타는 거요? 어떤 것이 십자가 사건이지요? 하루하루가 십자가 사건과 연루되어 있습니다. 특별한 것을 십자가 사건이라고 간주하지 마세요. 그러면 그 사건이 우상화가 돼요. “나 이만큼 잘 났어.”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이 십자가의 바다에서 오는 그 은혜로 뒷받침이 된 인생이라면 우리의 일상 자체에.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이 특이함에서 오는 감사가 있어야 되지요. 전기 보일러든, 가스 보일러든 밑에 깔아놓고 돌리게 되면 어디에 앉아도 보일러가 둥글둥글하게 있어서 뜨뜻하지요. 우리는 어디에 가도, 집에서나 직장에 가든 어디에서든 십자가의 뜨끈뜨끈함이, 기이함이 올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놓쳐버리면 무엇이 주어지는지 5절을 한 번 보겠습니다. “또 아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주의 징계하심” “징계하심”이라고 되어 있지요.

이제부터 징계에 대해서 언급을 하겠습니다. 물론 그것을 하면서 3절과 4절을 다시 계속해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의 긴긴 선조들의 레일은 우리가 흔히 알듯이 천국에 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 속으로 전부 흡수가 돼요. 모음이 되는 겁니다. 그래야 내 인생을 가지고 천국에 가는 게 아니고 주님의 십자가 인생으로 그 성격이 규정된 채, 천국에 들어가야 됩니다. 지금은 모르지만 옛날에는 초등학교에서 소풍갈 때 “얘들아 어느 장소에 모여라.”고 해서 가지 않고 학교 운동장에 모여서 깃발을 들고 선생님이 앞장서서 인솔해서 소풍 장소까지 가잖아요. 예수님이 그들을 자기 앞으로 모으시고 앞장서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깃발을 들고 천국에 가게 되면 천국은 예수님 본인의 나라이고 본인의 회사이기 때문에 (회사가 자기 회사거든요.) 자기에 의하여 인도함을 받는 자들은 거기에 다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천국이 예수님의 나라, 예수님 자기 회사라는 말은 쉽게 말해서 아무도 들어갈 자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개인적 자격으로 예수님의 나라에 갈 수가 없어요. 그리고 예수님의 나라에 못 간다는 말은 천국에 못 가는 겁니다. 반드시 앞에 계신 예수님의 인솔을 받아야 갈 수 있는 나라가 천국이에요. 이곳은 인간의 자격으로는 갈 수가 없는 나라입니다. 이미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었기 때문에 갈 수가 없는 나라에요. 그래서 사실은 천국은 없는 곳이에요. 천국이라는 곳은 인간들이 자기가 이 세상을 사는 게 너무 힘들고 괴롭고 서글퍼서 죽고 난 뒤에 희망이 있어야 되겠다 싶어서, 상상해서 하늘나라, 천국, 극락이라고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자기의 자유이지만, 천국은 없어요. 없다는 말이 정답입니다. 왜 없어야 되느냐? 왜 없다고 해야 되느냐 하면은 그래야 자기의 주제 파악을 다시 하게 됩니다. ‘내가 없는 천국을 자꾸 생각하는 것을 보니까 ’나‘라는 것이 하나님이 생각하는 내가 아니고 내가 생각하는 ’나‘가 아닌가?’라고 하는 것을 되돌아볼 수 있어줘야 돼요.

노아 당시에 천국이라는 것은 없어요. 없는데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게 함으로써 기이한 날라가 장차 온다는 것이 노아를 통해서 표현되기 시작했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노아를 빼놓고 다른 사람한테는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세상이 보기에 쓸데가 없는 짓이에요. 더운데 모여서 한다는 이 자체가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쓸데없는 짓을 하는 거에요.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 것은 쓸데없는 짓을 하는 거에요. 심지어 노아 본인도 마찬가지에요. 안 해도 되는 짓을 하나님께서 시켜서 하는 거에요. 벌써부터 노아는 “자기의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라고 하는 그 규칙과 규정 안에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말씀대로 노아의 인생을 통해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거에요. 그 다음에 노아, 아브라함, 모세, ... 여러 사람들이 나오잖아요. 이들은 다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다 본인이 원치 않는 길을 가는 겁니다. 그래서 “천국은 없는데 알려주더라.” 이렇게 돼야 돼요. 그 천국이라는 말은 실재로는 아들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여기 징계라는 것은 어떤 경우냐 하면은 아들과 관련해서 징계가 주어지는 겁니다. 이것을 공식화시키면 이렇습니다. 성도란 아들과의 관계로서만 성도가 돼요. 그래서 징계를 언제 받느냐 하면은 아들과의 관계에서 이탈했다고 생각할 때 그때 징계가 주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2절에 어떤 아들이가를 소개했는데 그 아들은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워하지 않는 아들”이 근본된 아들이거든요. 진짜 아들은,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서, 그걸 참으시고 부끄러워하지 않은 거에요. 그러면 십자가에 대해서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중간에 뭔가를 강조해보면 “십자가를 참으사”로 되어 있지요. 이걸 다른 말로 제가 고치겠습니다. “죽음”.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죽는 것을 참으시고 그걸 부끄러워하지 않은 거에요. 이걸 아주 더 줄여보겠습니다. 살다 죽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죽는 것을 겁내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것이 얼마나 특이한 인생입니까?

모든 인생은 죽으려고 사는 게 아니고 살려고 사는 거에요. 이왕 사는 거 더 살려고 사는 거에요. 90까지 산다고요? “90까지 많이 살았으니까 욕심내지 마시고 이쯤 돌아가시지요?”라고 하면 “이 놈!” 하고 화내지요. 왜 90을 살았는데도 불구하고 더 살려고 하느냐.. 아이스크림 하드 있잖아요. 이건 많이 먹었다고 해서 만족하는 게 아니에요. 얼마가 남았는지 아까워해요. 아무리 많이 먹어도 막대 하드가 줄줄 흘러내리면 아까워해요.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산 만큼 남아있는 것이 아니고 산 만큼 이게 삭제가 되거든요. 꼭 여름에 먹는 빙과류 하드 같아요. 자꾸 녹아버려요. 그래서 그 폭이 딱 오늘 하루치밖에 안 남았어요. 오늘 아침에 눈 뜨고 (지금) 오후 3시까지만 남아있어요. 어제 산 것은 아무리 살아도 무효에요. “산 것은 산 것이고 앞으로 창창하게 내일 더 살고 싶어.” 이렇게 되는 거에요. 오래 살았다고 해서 포만감을 갖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왜 그렇습니까? 탄생부터 의미가 발생되는 게 아니고 인간은 어쨌든 저쨌든 죽어야 된다는 것부터 무의식적으로 의미를 강요받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만큼 살았으니까 이제는 네가 죽어도 원한이 없지?”가 안 돼요. “더 살았으면.. 더 살았으면..” 99세가 되어도 더 나아가서 이 사람은 100살이 되어도 “내년까지 더 버텼으면.. 계속 살았으면.. 살았으면..”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갈 수 없습니다. 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이 살았다고 하는 것은 이미 죽음이 결정되었기 때문에, 아직 죽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살았다는 그 성질이 인간 속에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는 태어나서 이만큼 살았다.”가 좋은 게 아니고 “왜 나는 자꾸 살고 싶어해?” 그것은 죽음이 있음을 전제로 해서 자꾸 살고 싶어하니까 계속 이 사람이 힘들고 스트레스를 받는 거에요. “이만큼 살았으니까 이제 나를 놔주겠다.”는 게 없어요.

쉽게 말해서 생존을 위한 인생이 아니고 죽음이 얼마나 강하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은 이 땅에서 이렇게 서글프게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죽음을 바탕으로 해야지, 자기 생일을 바탕으로 하면 안 되지요. 그렇게 되게 되면 이 사람은 비겁하고 자꾸 도망치려는 인생이 돼요. 피하고 싶은 거에요. 그런데 피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5장에 나오는 것처럼 죄가 왕노릇하게 되면 모든 게 죽음이 되고 말아요. 어차피 죽을 수밖에 없고 아프고 뭐하고 하는 모든 것이 전부 죽음의 힘에 의해서 휘둘리고 있는 겁니다. 몸이라는 것은 결국 흙으로 돌아갑니다. 죽었을 때 흙이 되는 게 아니고 흙의 기운, 흙의 힘이 현재 흙이 되기 전부터 여기에 계속 작용하고 있습니다. 태어났을 때부터 내내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누가 아시느냐? 예수님이 아셔요.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의 택한 백성에게 “네 근본을 내게 보여줄게.”라고 해서 보여준 사건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누가 십자가가 뭡니까?”라고 묻거든 여러분들이 이렇게 답변해주세요. 십자가라는 것은 홀로 죽은 게 아니고 죄를 가지고 와서 죄를 가지고 온 그들에게 죄+용서를 더불어서 제공해주는 게 십자가 사건입니다.

설에 떡방앗간에 떡을 뽑으려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요새는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쌀을 약간 물에 불려가지고 방앗간에 갖다주고 기다리잖아요. 옛날에 우리는 표를 받고 기다렸어요. 하도 명절 때 떡을 많이 해서요. 그래서 우리 할머니하고 어머니는 머리에 이고 앞집에서 가져 온 쌀이 있으면 그 다음에 자리잡아 놓고 말도 안 듣는 나를 보고 지키라고 하면 나는 그것 지킨다고 방앗간 돌아다니면서 구경하고 가끔 누가 안 볼 때 앞집에 해놓은 떡을 떼먹기도 하고 그러거든요. 쌀을 갖다주고 나중에 떡으로 되돌려받듯이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 속에 있는 죄를 가져가고 그 죄와 더불어서 용서를 주니까 성령을 받고 성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이제부터 주께서 어떠어떠한 죄를 가져갔는지 살아가면서 주께서 이미 가져가서 용서로 처리된 그 죄에 대해서 우리가 죽을 때까지 경험해야 되고 체험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겁니다.

내가 그 죄를 어떻게 압니까? 나쁜 짓을 해서 아는 것이 아니고 기이하고 특이한 사건들이 연속해서 일어나면서 그 사건 속에서 주께서 이미 우리의 허락도 없이 몰래 와서 다 가져간 그 죄, 그러니까 이미 처리가 끝나, 의로 달라져버린 그 죄를 도로 받으면서 그 죄 속에서 주님에 대한 고마움과 감사가 일어나는 겁니다. 수련회 간다고 둘이 싸운다고 하지요. 그것도 주께서 이미 가져간 거에요. 가져가놓고 우리에게 그것을 되돌려주게 되면은 ‘아, 이것 때문에 주께서 십자가를 지셨구나.’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사건은 그 사람을 안 만났으면 일어나지 않을 건데 주께서는 그 사람을 배치해서 반드시 일어나야 될 일만 일어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 사건이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현실 그 자체가 답이 된다는 말이 이 말이에요. 제가 지난 낮설교 때인가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특이한 답을 구하지 마세요.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 (개가 어디에 갔지요?) 개를 지금 안고 있다는 게 답이에요. 모든 것, 한 발자국, 한 발자국도 내 뜻대로 발자국을 옮길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지금 이대로 내가 살아야 되는 이것이 하나님 앞에 완벽한(perfect) 해답이 되고 정답이 되는 겁니다. ‘다른 사람한테는 쌍꺼풀이 있는데 나는 부모를 잘못 만났나, 왜 쌍꺼풀이 없어?’라고 하는데 부모를 만난다는 게 따지고 보면 기적이에요. 내가 이 땅에 존재한다는 것도 기적이에요. 이건 도대체 수억분의 일이거든요. 내가 태어난 것도 수억분의 일이지만 양쪽 부모도 수억분의 일로 계산하게 되면 수억분의 일×수억분의 일이 되지요. 그 할아버지까지 계산해보세요. 모든 인간이 태어남은 우연은 없고 예수님께서 뜻이 있어서 태어나게 한 하나님의 기적들이 다 담겨있습니다.

그래도 그렇게 남을 부러워하지 마세요. 잘 사나, 못 사나 결국 어디로 모이느냐 하면 성도는 십자가로 모이고 불신자는 지옥으로 다 모입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이 살아온 것은 지옥을 말하기 위해서 가는 거에요. 성경에서 우리가 자꾸 오해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그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은 나쁜 짓을 해서 지옥에 간다는데 나쁜 짓을 해서 지옥에 못 갑니다. 나쁜 짓을 해서 지옥에 가는 게 아니고 지옥에 가야 하기 때문에 나쁜 짓이 발생되는 거에요. 나쁜 짓을 하기 싫어도 나쁜 짓을 해야 돼요. 특히 지옥에 가는 이유에 대해서 고린도전서 16장에 나와 있습니다. “누구든지 □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했는데 □ 안에 들어가는 말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입니다. 여기에서 “주”가 누구냐 하면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누구냐? 예수님이거든요.

그렇다면 세종 대왕은 저주를 받아야 되는 거에요. 왜? 세종 대왕 때에 예수 이야기가 없었으니까요. 강감찬도 마찬가지고요. 이성계도 마찬가지고요. 지옥에 가야 돼요. 아니, 통째로 합시다. 이방 민족은 지옥에 가기 위해서 이방 민족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부흥사들은 이걸 몰라가지고 어떤 교인들이 이걸 물었던 모양이지요. “저, 목사님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 우리나라 조선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았지요?”라고 하니까 이제 구라가 시작되는 거지요. 김구라.. “그들은 양심으로 구원 받습니다.” 그 사람은 요한계시록 20장 마지막을 지금 거부하고 있는 거에요. “행함으로 하는 사람”은 예외없이 누구나 지옥에 갑니다. 양심도 행함이잖아요. 행함으로 사는 사람은 다 지옥에 가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천국은 (오늘 본문에 의하면) 아들이 되어야 되는데 아들의 원형은 출애굽기 4장에 나오듯이 이스라엘이 아들이에요. “이는 내 아들이요 내 장자다” 그리고 이 이스라엘 아들은 태어났다고 이스라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에요. 그들은 히브리인들이에요. 히브리인들+죽음이 만나게 되면 이게 아들이 되는 겁니다. 이 죽음에는 모세가 길에서 죽는 죽음, 그리고 유월절의 죽음이 다 포함이 되어 있어요. 히브리인들이 죽음을 맞이해야, 유월절을 맞이해야 아들이 돼요. 아담이 자손이 십자가를 맞이하게 되면 아들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5절에 있듯이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이라고 할 때 누구한테 이야기합니까? “징계하심” 앞에 뭐가 있어요? “내 아들아”라고 나오지요. 그렇잖아요. 잠언서 3장 11절을 인용한 말씀인데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이라고 할 때 거기에 나오는 “징계”는 아무나를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내 아들”이라는 조건에 부합되도록 주께서 이미 규정한 사람에게 하는 말인 겁니다.

그러니까 징계라는 말을 했다는 말은 이미 아들입니까, 아들이 아닙니까? 이미 아들입니다. 아들이기 때문에 내 말을 알아먹는다는 거에요. 징계라는 말을 자꾸 때린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징계라는 것은 본 노선으로 유지시킨다, 또는 확인시킨다라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 노선이 아들이에요. 아들의 노선은 조건이 있어요. 그 조건은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조건이 아들의 조건입니다. 그래서 앞에 있는 노아, 에녹, 아벨의 공통점이 뭡니까? 아브라함, 이삭, 모세의 공통점이 뭐겠어요? 그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일어난 그 죽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공통점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겠어요? 죽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겠지요. 내 인생 망했다고. 그런데 여기 11장 36절~37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칼에 죽임을 당하지요. 이럴 때 이런 신앙인이 그걸 굉장히 속상하게 여기고 부끄럽게 여겼습니까? 아니지요. 이런 일을 당했다는 자체가 이 사람에게 이미 천국이 미리 당겨서 왔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우리도 옥에 갇혀야 되고 시험을 받아야 되고 안양에 돌이 막 날아와야 되고 제재소 옆에 지나가다 끌려가가지고 톱으로 켬을 당해서 사지가 몇 개 짤려야 천국에 갑니까?’라고 생각을 하는데 사람이 기분이 나쁜 것이 꼭 톱으로 켜이고 돌에 맞는 것만 기분이 나쁜 게 아니에요. 된장에 고기가 나왔는데 자기가 고기를 먹으려고 할 때 다른 식구가 고기를 먼저 건져먹는 게 기분이 나쁜 거에요.

그 고기를 빼앗긴 “부끄러움을 참으사”에요. 모든 바닥은 십가가가 깔려있습니다. 보일러처럼.. 모든 게.. 사람이 기분이 나쁘다는 것이 돈을 빼앗긴 것만 기분이 나쁜 게 아닙니다. 구분 기다려서 차를 타고 가는데 내 바로 뒤에 같은 차가 뒤따라올 때 속이 상하지요. 오늘 십자가 경험하셨잖아요. 자기는 차를 잘 타고 있는데 뒤차가 가까이 왔다는 것 자체에서 구분 동안 땡볕에서 기다렸다는 그 억울함이 드는 거에요. 만약에 뒷 차가 구분 뒤에 오는 게 아니고 20분 뒤에 온다면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요런 못된 속아지를 이미 처리한 용서와 겸해서 우리한테 (이런 못된 속이 있다고) 택배로 보내주신 겁니다.

그게 바로 성도가 갔던 길입니다. 평소에 암벽을 잘 타다가 동영상을 찍을 때만 암벽에서 미끄러질 때 우사를 당하지요. 그래서 제가 대구 강의를 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망신당하지 아니하면 인간이 안 된다.” 망신의 정도는 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망신을 다른 말로 하면 실패에요. 그런데 실패라고 하고 “실패당하지 아니하면 인간이 안 된다.”고 할 때 어떤 사람은 “도대체 재산이 몇 백만 원, 몇 십만 원 없어져야 실패입니까?”라고 하는데 이 실패라는 것은 돈 문제가 아니에요. 어떤 부자는 1억이 날아가도 껌값이다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1만 원이 날아가도 실패로 봐요. 만 원을 가지고 하루를 사는데 그것을 바람에 휙 날려버리면 자기는 그걸로 죽는 거에요.

인간은 평소에 ‘나는 이 정도야.’라고 자아가 규정된 것이 있어요. 그 자아의 틀에 흠집이 나면 그걸 인간은 실패로 봐요. 이게 공식입니다. 자아는 ‘나는 이 정도야.’ 하고 규정한 게 있는데 그게 흠집이 나고 그것이 우사가 될 때 그것을 실패로 보는 겁니다. 그래서 진짜 밥을 굶어서 자살한 사람은 거의 없어요. 속이 상해서 자살한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못 먹어서 죽은 사람은 거의 없어요. 지금 우리가 히브리서 12장을 하고 있지요. 다시 한 번 정리해드리겠습니다. 정리해봐야 기억이 안 날 거지만 그래도 정리해드리겠습니다.

히브리서 12장에 보게 되면 12장 오기 전에 11장이 있었지요. 11장의 내용이 뭐였습니까? 믿음의 조상들이 마치 기차 객차처럼 고리에 고리를 물고 죽 이어져있지요. 제일 처음에 나온 사람이 아벨이었고 그 다음에 에녹이었고 그 다음에 노아였고 이렇게 줄줄이 쫙 이어져있지요. 그런데 그들이 이렇게 신앙적인 연줄로 연줄로 이어지면서 어떤 목표점이 있었는데 그 목표점이 히브리서 12장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그 히브리서 12장의 목표점이 2절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자”라고 되어 있고 그 예수님이 “□를 참으사”라고 되어 있는데 뭘 참았습니까? “십자가를 참으사”라고 되어 있지요. 이게 12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11장에 나오는 모든 믿음의 선조들은 무엇을 향하여 달려온 사람들이에요? “십자가를 참으사”를 바라보면서 달려온 거에요. 왜냐? 이런 주님을 바라보자고 했으니까요.

이들이 바라본 것은 자기가 잘되는 게 아니고 ‘도대체 왜 내 인생에 이러한 낭패적인 일, 이러한 희한한 일, 이런 기이한 일이 누구 때문에 발생되었는가?’ 그 주인공이 누구냐를 위하여 그들은 달려온 겁니다. 내 인생이 이렇게 남들하고 차이나는, 남들은 그냥 평범한데 왜 내 인생은 방주를 만들어야 되고, 내 인생은 왜 제사를 잘 드려놓고 돌에 맞아죽어야 되고, 야곱 같은 경우에는 요셉의 손자들에게 축복할 때 제대로 해도 되는데 왜 어긋맞게 하되 그것도 지팡이에 의지해서 해야 될 운명인지.. 어떤 사람은 톱에 켜였는데 톱에 켜이는 것을 희망사항 삼아서 사는 인생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광야에 유리했는데 광야에 유리하는 것을 자기의 인생의 목표로 삼아서 사는 사람은 없잖아요.

왜 이런 특이 사항이 일어나는가? 11장에 보면 중간중간에 그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되어 있어요. 믿음으로, 믿음으로, 믿음으로가 반복이 되어서 나오잖아요. 믿음으로 이런 특이사항, 믿음으로 이런 특이사항, 그런데 그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를 바라보기 위해서 달려왔는데 그 주님은 어떤 주님이냐? 십자가를 참으사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거에요. 그런데 십자가에 대해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은 (십자가는 죽음 사건이거든요.) 그러면 예수님을 빼놓고 모든 인간은 자기가 죽는 것에 대해서 그걸 자랑스러워하겠습니까, 부끄러워합니까? 부끄러워하지요. 인생 실패잖아요. 살아 있으면 성공이고 이만저만 해가지고 죽었다고 하면 이것은 집안에 웃음거리(우사)가 되지요.

그러니까 사람으로서 믿는다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생겨날 수가 없는 거에요. 어떻게 죽는 게 자랑스러워요? 이게 집안의 우사지요. 예수님은 32,3살에 돌아가셨어요. 아이고, 엄마인 마리아가 되게 자랑하겠네요. 우리 아들 죽었다고 자랑합니까? 슬퍼하겠지요. 그게 보통 사람이에요. 그래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영광을 위해서 바라보는 게 아니고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바라볼 수 없는 것을 바라보는 그것이 믿음의 목표라는 것을 11장과 12장을 통해서 말해주는 겁니다. 그 십자가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죽었다 이 말이지요. 그러면 그 예수님이 여기 죽었으면 뒤에 있는 아벨부터해서 에녹, 노아, 이 사람들은 어느 품속으로 달려온 거에요? 이 기관차가 칙칙폭폭해가지고 어디로 달려온 겁니까? 예수님 품안으로 들어오는 겁니다. 왜 이들이 들어와야 됩니까? 이들이 들어오지 않으면 이들은 천국을 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천국은 인간의 힘으로 갈 수가 없는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인솔하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겁니다. 오늘 제목을 인솔로 하겠습니다. 주님이 인솔하지 않으면 갈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그 주님이 인솔했는데 인솔하는 자격이 뭐냐? 히브리서 12장 5절에 보니까 이분이 “아들”입니다. 아들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이제 나타났어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사람들이 자기 품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누구의 인솔 하에 오는 자만 하나님께서 받는다는 겁니까? 아들의 인솔을 받아야 되지요. 그런데 아들은 이 땅에서 아들이라고 해서 아들이 되는 게 아니지요.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공식이 있는데 출애굽기 4장에 보면 히브리인들이 나와요. 아직까지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유월절 날이 되어야 이스라엘이 돼요. 히브리인들이 무엇을 만나야 이들이 아들이 되느냐 하면 “내 아들, 내 장자”는 죽음을 맞이해야 돼요. 이것은 내가 말을 하는 것보다도 직접 출애굽기 4장을 찾아보는 게 좋습니다.

출애굽기 4장을 한 번 봅시다. 22절에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고 되어 있지요. 23절에 “내가 네(바로)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고 이야기해도 바로가 들어준다, 안 들어준다? 안 들어주는 것을 미리 다 알고 계시지요. 그러니까 우리 인생에서 뜻대로 안 된다는 것을 누구도 알고 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도 알고 있어요. 혼자만 알고 하나님은 모른다고 자꾸 하나님한테 대들지 마세요. 이미 다 알고 있어요. 그 다음에 24절에 “여호와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시는지라”고 했지요.

아들이라면서요? 아들이라면 그냥 아들이라고 하지 왜 죽이느냐? 모세가 죽음을 맞이하지 아니하면 모세는 히브리인이 돼요. 히브리인인데 어디의 히브리인이냐? 애굽 나라에 속한 애굽인 중의 히브리인이 돼요. 지금 애굽 나라에서 히브리인들이 나오면서 나라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는데, 바뀌면서 그들의 성격이 하나님의 장자, 하나님의 아들로 바뀌어져야 되는 겁니다. 이들이 바뀌어지려면 필히 하나님이 준비하신 준비된 죽음과 결합이 되어야 돼요. 그래서 지도자인 모세부터 먼저 죽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죽어야 될 모세가 (하나님은 모세를 죽이려 하는데) 나중에 (죽지는 않고 죽으면 드라마(영화)가 끝나니까) 죽을 뻔하다가 다시 살아나지요. 살아나면서 개입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은 십보라가 자기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지요. 나중에 유월절 날 할례 받지 아니한 자는 어린 양의 피를 발라도 소용이 없게 되어 있어요. 출애굽기 12장에 유월절 행사를 할 때 조건이 있어요. 종이든 이방인이든 관계없이 문설주와 문지방에 피를 바른 집 안에 있는 사람은 일괄적으로 할례를 받아야 됩니다. 할례를 받지 않으면 그 사람은 이스라엘이 될 수 없어요.

할례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 의미를 알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을 일으키기 전에 먼저 모세의 죽음과 견주어서 할례의 의미를 끄집어 냅니다. 아내 십보라가 아들에게 할례를 하게 되면 고추 쪼가리가 나오지요. 그 고추 쪼가리를 가지고 모세의 고추에다가 접촉을 시켜요. 그러니까 모세가 나은 거에요. 이것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고추(생식기)라고 하는 것은 혈육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됨은 육에서 아들이 됨은 성립이 안 되고 육이 죽어야 하나님의 영적 아들이 된다는 겁니다.

할례라고 하는 것은 육을 중간에 끊어버리는 거에요. 그것을 끊어버리면 피가 나와요. 그래서 십보라가 모세를 보고 하는 말이, “당신은 어쩔 수 없이 내 남편이 아니고 피 남편이다.”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끼리 부부가 되는 것이 아니고 당신이 할례 속, 먼저 아들 속에 있어 당신이 아들이라면 아들과 할례 언약을 맺은 가족은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자격이 부여됩니다. 그렇게 되는 거에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을 보라”고 할 때 그 유월절의 반복이 신약까지 이어집니다. 그 유월절의 피를 흘렸을 때 그 날이 4월달인데 그 날짜를 1월달로 바꿔요. 그걸 아빕월이라고 하고 나중에 닛산월이라고 하는데 같은 말입니다. 이게 유월절 1월달, 정월 초하루입니다.

시간이 처음이 된다는 것은 없던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이고 없던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은 없던 나라가 새로 생긴 거에요. 그러면 이스라엘이 가면서 두 개의 시간이 생겼습니다. 이스라엘이 비행기라면 활주로에 비행기가 뜨면서 비행기 속에 흐르는 시간이 따로 있을 것이고, 비행기를 떠나보내는 활주로에 시간이 따로 있겠지요. 이 활주로의 시간이 우리 세속의 시간이에요. 천 년입니다. 그런데 비행기 안에는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아요.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 묵시 세계와 땅의 세계에, 비행기가 활주로를 떠나버리면 두 개의 층이 생겨 버립니다. 그걸 가지고 갈라디아서 4장에서는 두 개의 언약, 육에 속한 언약이 있고 하늘에 속한 언약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예루살렘이라고 했어요. 갈라디아서 4장에 나와요.

그러면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붕붕 떠가지고 다니느냐는 거에요. 이집에 올 때까지 허공에 떠가지고 휘저으면서 있다가 여기에 온 것이 아니잖아요. 하늘에 속했다고.. 하늘의 개념 자체가 달라져야 돼요. 안에 풍선이 들어있어서 붕붕 떠서 하늘의 개념이 아니고 하늘의 개념은 땅의 조건 속에 깊숙이 들어있는 개념이라서 이것은 기이와 특이성으로만 나타나는 거에요. 요모조모를 아무리 봐도 전혀 하늘답지 않아 보이는 것. 누가 알았으리요. 그냥 평범한데 십자가의 은혜이고 유난을 떨면서 신앙 생활을 잘하는데 지옥의 힘이고.. 진짜 이 소자한테 준 것이 곧 나한테 준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고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주었다고 했는데 그것을 준 게 특이한 겁니까? 대단한 겁니까? 그것을 주고 나는 갑자기 30배, 60배 복을 받는 거에요? 아니지요?

심지어 얼마나 특이성이 없든지 마실 것을 주었고 먹을 것을 주었는데 나중에 천국에 와 있어요. 받은 사람이 오히려 의아해 합니다. “저는 주님한테 한 게 없는데요?” 얼마나 평범했으면, 얼마나 사소했으면, 사소한 일을 했는데 그게 곧 주께 한 일이 될 때 다른 사람들이 주님을 알아볼 수 있는 그러한 낌새는 전혀 없지요. 왜? 너무 평범하니까요. 그런데 본인은 그게 특이성으로 나타나는 거에요. 그 특이성에 대해서 히브리서 12장을 봅시다. 다시 한 번 2절 끝에 보면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라고 하지요. 모든 신앙인들이 예수님의 이 심성을 그들 시대에 앞당겨서 그들의 인생 속에 부여받은 거에요.

예수님을 열심히 본받은 게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전봇대라면 그 전봇대의 그림자가 이미 저 에녹과 아벨까지 그들의 인생에 본의 아니게 덮은 거에요. 성도가 뭡니까? 이미 벌어진 십자가의 그림자가 성도의 삶 속에 (대구든 부산이든 관계없이) 덮어 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성도가 다른 사람과의 차이점이 있는데 그것은 성경 그대로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고”가 되는 겁니다. 곗돈을 좀 떼였다고 그걸 가지고 죽고 사네 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 내가 인생을 실패했니, 내 인생은 이런 게 아니었었어. 이럴 수가, 라는 것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가지고 나와 보세요. 그것은 고민거리도 안 되지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뭘 바쳤습니까? 예수님은 발가벗고 우사를 당하고 자기 엄마 앞에서 그렇게 죽음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부끄럽다고 여기지 않았는데 우리는 과속을 해서 5만원짜리 하나만 긁혀도 그걸 가지고 사흘 동안 고민하면서 ‘주여 이럴 수가 있습니까? 운전대를 쥐면서 기도를 열심히 했는데 기도발(운발인지 모르지만)이 다 어디에 갔습니까?’ 그런 식으로 하여튼 조그마한 흠집만 나도 길길이 뛰면서 쳘야하면서 땅을 쳐가면서 ‘어찌 이럴 수가, 이렇게 해주시면 제가 신앙 생활을 할 용기가 나지 않지 않습니까? 저에게 힘을 주옵소서.’라고 하는데 힘을 주긴 다 줬는데 울고불고 하는 것은 누구한테 하는 거에요? 그것도 주님한테 왔는데 무슨 힘이 또 필요해요? 그렇게 따질 힘이 있으면 감사하면 되지..

무시로 기도하랬잖아요. 범사에 감사하고.. 비행기 안의 시간이라는 것은 아침, 점심, 저녁, 오전. 시간에 맞춰 갈 게 없어요. 항상 주의 은혜, 주의 사랑에 쌓여서 살아가는 겁니다. 그 관계를 무슨 관계라고 하느냐 하면은 (제가 아까 무슨 관계라고 했습니까?) 아들의 관계라고 합니다. 여기에 징계가 나옵니다. 징계란 뭐냐? 이미 수립된 관계에서 이탈했을 때, 그 관계로 다시 집어넣기 위해서 취해지는 하나님의 작용입니다. 부자가 되라고, 교회에 헌금 갖다 바치고 봉사를 하라고 징계를 하는 게 아니에요. 교회 관계가 아니고 아들의 관계에요. 아들의 관계에 대해서 방금 이야기했습니다. 어떤 일을 당해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개의치 않는 관계, 아들이 학교에서 얻어맞는 일을 당해도 그것에 개의치 않고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제가 어제 잘 안 보는데 후딱 보니까 드라마를 하고 있는데 그냥 훅 지나갔어요. 보니까 아들이 학교에서 싸움을 해가지고 정학을 먹었어요. 그 아들을 보고 엄마가 교무실에 가서 처음에는 땡깡을 치다가 안 되니까 나중에는 꿇어앉아가지고 두 손을 모으고 제발 내 아들을 좀 살려달라고 빌어요. 그 모습이 뭐냐 하면 아들을 위해서라면 나이 50살 넘은 아줌마가 꿇어앉아서 비는 이것도 전혀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을 용기가 되어 있다 이 말이지요. 그 여자 친구가 나쁜 애들이 유혹해서 거기에서 빼내기 위해서 주먹질을 했는데 그 여자 친구를 때린 애가 아주 유력한 집안이 되어 가지고 거짓말을 하는 거에요. “그때 가만히 있었는데 오빠가 나를 구해준다고 때렸어요. 오빠가 나대서 그렇지 그런 거 아닙니다.” 이렇게 거짓말을 하니까 그게 분통이 터진 거에요. “함부로 애틋하게”라는 드라마의 한 장면에 보면 나와요. 그러니까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는다는 것은 까짓것 내가 꿇어앉더라도 다른 더 큰 관계, 확정된 관계가 있다면 이런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라는 것이고 이것이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모든 신앙(믿음)의 선조들이 그렇게 한 거에요.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그렇게 살아온 겁니다.

이제 그들의 삶이, 십자가의 그림자가 있는 우리들에게 똑같은 현상으로 일어나는 겁니다. 주께서는 우리의 죄를 가져가시고 그걸 용서+죄로 다시 우리에게 되돌려줌으로써 이런, 이런 죄 때문에 이미 용서했다는 것을 우리한테 확인시켜주는 그러한 생이 이제 우리한테 남아 있습니다. 10분 쉽시다.
 공은주(IP:218.♡.196.72) 16-09-07 19:31 
안양20160708b-히12장5절(인솔)-이 근호 목사

2절 끝에 보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았다는 말이 나오지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아까 제가 잠깐 설명했는데 비행기가 활주로를 떠서 하늘 하나님 쪽으로 가버렸어요. 그러면 이 지상에서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이 지상에서 보이겠어요? 안 보이겠어요? 안 보이겠지요. 비행기 안에서만, 가는 사람만 보이겠지요. 이미 두 층으로 완전히 갈라지니까.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겁니까? 자, 우리가 생각하는 예수 믿으면 어디 간다? 천국 간다. 그런데 제가 말을 바꾸겠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게 되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습니다. 별로 안 좋아지는 느낌이 들고 그 하나님 보좌 우편이라는 것이 그렇게 좋은 것인지를 잘 모르게 될 거예요. 이 말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대해서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천국이라 하는 것은 어디 있느냐 하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었어요. 언제? 창세전에.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뭐가 있었느냐, 의논이 있었습니다. 이 의논을 뭐라고 하는가 하면, 이걸 계약이라고 하고 이걸 언약이라고 합니다. 창세전에 이미 아버지와 아들이 의논한 바가 있었어요. 의논한바 속에 무슨 내용까지 의논이 돼 있느냐 하면 천국도 여기 의논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천국을 위하여, 하늘나라를 위해서 의논됐다 말이지요. 요한복음1장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지요. 요 의논된 것을 이제 구체화 할 필요가 있겠지요.

그 구체화한 걸 가지고 뭐라고 하는가 하면 천지창조라 합니다. 구체화 한 것을. 그러면 구체화된 천지창조 속에 모든 창조물속에 무엇이 녹아져있겠어요? 바로 의논된 사항이 전부다 다 녹아져 들어온 거예요. 그 하나의 예를 들면, 셋째 날에 바다가 생기고 땅이 생깁니다. 그러면 이 바다와 땅 사이에 뭐가 생기는가 하면, 경계가 생겨요.

경계라는 말은 바다가 함부로 땅을 넘어설 수 없다 가 돼요. 요 경계할 때 인간이 여기에 살고 있다면 사람들은 뭐라고 오해하느냐 하면 ‘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생존케 해주시려고 바닷물로 하여금 함부로 땅에게 범람하지 않도록 해주셨구나!’ 누구를 위해서?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 라고 했을 거예요. 우리의 생존. 물이 넘쳐버리면 우리는 물고기가 아니니까 죽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살기 위해서 하셨구나! 요것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것은 맞습니까? 틀림 겁니까? 틀림 겁니다. 왜 틀렸는가 하면, 제가 아까 전제가 천지창조 안에는 볼 의미가 뭐냐 하면 바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었던 의논된 것이 와서 여기 의미를 주는데 인간들은 자기가 여기에 태어났으니까 태어난 것부터 자기를 위한 의미가 자기를 둥둥 감아버려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도 나를 위해서 돌아가야 돼요.

이 명박 대통령 때문에 경제가 어렵게 됐다. 대통이 하는 것도 누구의 의미? 내 사업이 잘되느냐, 못되느냐, 나의 의미와 결부시켜요. 놀려가려고 하는데 비가 왔다. 비온 이유는 뭐냐, 모르겠고 하여튼 내가 놀러가는데 비가 와서 못가서 속상하다. 이게 비와 관련된 자기 의미에요.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윤 동주의 ‘별 헤는 밤’ 시에 나오잖아요. 그런데 그 별은 윤 동주 때문에 있는 겁니까? 별은 윤 동주 시 때문에 있는 거예요? 아니지요. 그런데 왜 그리 생각합니까? 그게 자기 존재의 의미에요. 이 의미가 있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의미가 자기의 존재함이 결국 훼방이 되고 방해가 되겠지요.

지금 여러분을 구원하는 방해자가 누군 줄 알아요? 여러분 자신이에요. 내가 태어날 때 둘둘 감은 나는 무조건 잘되어야 된다는 이 의미가 실제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는 하나님의 천국에 담긴 그 비밀이 오는데 이게 하나의 방해 막으로 형성되어 있어요. 방해 막으로.

그러면 복음은 뭐냐 하면 이런 겁니다. 사람이 태어났다. 중간에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하나의 의미가 있는데, 의미 막은 누구를 위한다? 여기에는 나를 위한 의미막이 있지요. 복음은 뭐냐 하면, 이 의미 막을 찌르던지 어떻게 하던지 뒤로 가든지 해서 이 의미를 이 안에서 찢어버리는 거예요. 찢어버리고 그 나를 위한 의미막이 있던 그 현장에 복음의 막으로 나를 둘러쳐버리는 거예요. 캡슐이지요. 뭔가 비누 방울 안에 들어있는 모습. 동화적으로, 만화적으로 생각나면 둥근 공안에 들어있는 것처럼. 그걸 신약에서는 ‘예수 안’이라 하지요. 그 바깥에는 “예수 밖” 예수 밖은 저주고 예수 안은 천국이 되는 겁니다. 하늘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고 성령 안에서 의와 거룩과 희락이라. 천국은 요 안에 들어있는 거예요. 천국은 성령 안이 처소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렇다면 그 보호막이 있으면 성도고, 없으면 성도가 아니지요. 그러면 보호막이 있다, 없다, 를 어떻게 이걸 확인할 수 있고 증명할 수 있느냐, 복음은 나의 막을 찢어버리고 만들었기 때문에 무슨 쓰레기가 남아있는가 하면, 찢어진 내 의미의 막들이 찢어져있겠지요.

그 중에 제일 잊지 않는 찢어진 막이 뭐냐 하면, 바로 첫 사랑입니다. 고등학교 때, 중학교 때, 또는 담임선생님을 좋아했던지 그런 첫 사랑을 나이가 70이 돼도 60이 돼도 늘 첫 사랑의 좋았던 시절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 당사자를 만나면 안 됩니다. 그 만나는 장소에 괴물 나와요. 절대로 만나면 안돼요. 분명히 그 쪽에서 만나자고 할 때는 이유가 있을 거예요. 만나면 정수기 사달라고 하던지 보험 하나 들어달라고 하던지. 첫 사랑 이런 것들은 사실은 걸레조각처럼 찢어져야 돼요. 이런 것들이 날아가지 않고 복음의 막 안에서 이게 누더기처럼 쓰레기처럼 여기에 흩어져있습니다. 평생 우리가 죽을 때까지 이것이 따로 이 안에서 그냥 뒹굴고 있어요. 놀고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이게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주께서 십자가라 하는 것은 우리한테 허락도 없이 우리의 죄를 미리 가지고 가서 그걸 전부다 용서로 처리해 놓고 가져갔던 죄가 이런 것들이야, 라고 우리에게 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나한테 이런 것들이 있었구나!’ 하는 것을 알고 십자가 안에서 감사하는 거예요.

그래서 창세전에 아버지하고  아들 사이에 의논된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인간을 만들어놓고 죄를 짓게 해서 그걸 죽음으로 이르게 하고 그 죽음 사이에 독생자를 집어넣어가지고 이 죄를 의로 바꾸는 그 능력이 주님이 되시고 이 주님이 된 요 효과만으로 만들어낸 나라를 아들의 나라, 천국이라고 이렇게 계획 잡은 거예요. 방금 내가 3초 동안에 요한계시록, 창세기 다 했어요. 이미 이야기 다 끝났습니다. 창세전에 의논된 것에 의해서 선악과 죽으리라는 요소가 에덴동산에 있어야 돼요. 에덴동산에서 한 번 만들어지면 못나가는 동네가 아니고, 조건만 안 맞으면 추방될 수밖에 없는 동산이 에덴동산이에요. 살겠다고 생명나무 달라할 때, 생명나무 그 것 거절해버립니다. 흙이 되어야 돼요. 쫓아버려요. 생명나무 안 줍니다. 선악과 따 먹은 이상 생명나무 안주어요. 생명나무 치워버립니다. 인간은 불멸을 원해요. 뭘 따먹던지 간에 영원히 안 죽었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안 죽는 것이 주의 뜻이 아니고 죽어줘야 돼요. 왜, 그 죽음이 있어줘야 예수님이 독생자가 그 죽음에 들어와서 죄마저 의로 바꾸는 그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는 동네가 이 천국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천국과 지옥을 위해서 그 소재로서 인간들을 만들어놓은 겁니다. 인간들은 듣기 민망하겠지만, 짜증나겠지만. 인간들은 자기를 뭐로 보는가 하면, 최고 존엄성을 두고 이야기해요. 김정은이 아닙니다. 우리가 만약에 김정은 자리에 앉으면 우리도 최고 존엄성 자리에 갈 거예요. 김정은 못지않게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최고의 존엄성을 우리는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이러한 첫 사랑이나, 아들을 잘 키웠다는 이런 모든 것들이 결국 한데 모이면 뭐가 되느냐 하면 나를 최고 존엄자로 만들어버려요. 이게 곧 나의 의미에요. 우리는 나의 의미를 잊을 수가 없어요. 우리는 매일 이 의미로 살기 때문에.

그런데 고마운 것은 주께서 이걸 복음의 막 안에서 이걸 걸레조각처럼 찢어버린다는 사실이 감사지요. “주님이여, 첫 사랑 만났습니다.” 이렇게 하면 주님께서 “그래서? 어쩌라고?” “만났다는 이야기죠 뭐~” “만났다는 이야기가 아무것도 아닌데, 그 이야기를 왜 하는데?” “하나님, 요번에 애 성적이 전교5등까지 올랐습니다.” 주님이 “그래서?” “뭐, 올랐다는 이야기조 뭐~” “그래서?” “그래서 올랐다는 이야기조 뭐~” “그래서 어떻게?” “제가 잘 키웠다는 이야기입니다.” “잘 키웠다. 그래서 어쩌라고? 안 죽나? 잘 키우면.” “저 훌륭한 엄마잖아요.” “그 훌륭해서 뭐할 건데? 훌륭하면 안 죽나?” 산다는 것은 결국 주님의 용서로 생명을 얻는 것이지 우리가 아무리 살아도 우리는 생명을 얻을 수 없는 입장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모든 천지창조 모든 것이 바로 누구를 보이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모든 세계가 펼쳐져 가는 겁니다. 가는데, 여기서부터 어려워요. 정말 어렵습니다.

어려우니까 질문을 먼저 해보겠어요. 자, 이 세상은 예수님을 위해서 만들어졌다. 골로새서1장 16절, 모든 것은 주로 말미암아 주를 위하여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이 사실을 알아낼 수 있습니까? 모든 것을 주께서 만들었다는 것을 내가 알아낼 수가 있느냐 말입니다. 이것이 실패로 끝나요.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나는 성경에 골로새서 1장 16절에 모든 것이 주를 위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을 보고 나는 모든 것이 주로 만들은 것을 저는 믿습니다. 라고 했다 칩시다. 그 믿습니다, 라고 했다 치면, 이것이 하나의 뭐냐 하면, 나의 존엄성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 되고 하나의 과정이 되지 절대로 이게 목적은 되지 않아요. 나 이 정도로 압니다. 나 이정도로 믿습니다. 저 괜찮지요? 라고 이것이 되돌아오게 되어있어요. 결국은 나에게로 되돌아오게 되어있어요.

이렇게 되어버리면 예수님이냐, 나냐 우열의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중요하냐, 내가 중요하냐를 마지막 최종 결승지점에서 올라오는데, 결승지점에서 예수님이냐, 내냐, 판정을 내려야 될게 아닙니까. 우리는 좀 안다고 “저는 아무것도 아니고 예수님이 승리자입니다.” 라고 예수님의 손을 번쩍 올릴 때, 올려주신 분이 누굽니까? 결국 내 몫이 남아있게 돼요. 내가 이렇게 주님을 올렸으니까 주님이 저를 섭섭하게 하시면 곤란합니다. 이 정도 했는데 지옥 보내면 안 되십니다. 이리 되면 곤란하다 말이죠.

주께서는 지옥 보내건, 천국 보내건 주님 소관인데, 우리는 주님 소관입니다, 를 믿음으로서 은근히 탈락되지 않고자 하는 마지막 노선의 최후의 어떤 결단을 내리는 주인공이 되고 싶은 거예요. 우리 자신이. 이 문제가 해결되어야 돼요. 이 문제를 해결해야지 안 하면 안돼요. 안하면 강의 자체가 의미 없는데 해결합시다. 자, 물놀이 계곡을 갔습니다. 산이 있고 물이 흐릅니다. 자, 물에 갔을 때, 100명의 사람이 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지리산 계곡에 물놀이 왔다. 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3자가 보기에는 본인이 그렇게 주장하던 말든 간에 이 계곡에 비해서 인간은 너무 작잖아요. 그러면 여기에 하나의 바위가 있다면 바위의 키가 180센티라면 물놀이 온 이 사람은 173센티밖에 안돼요. 그럼 누가 크냐, 이 풍경 속에서 바위가 이 인간보다 더 커요. 그런데 이 사실을 다른 사람은 아는데 누가 모르느냐, 본인만 몰라요. 이 계곡을 오늘 내 물놀이하는 식으로 삼겠다고 일방적으로 주장을 하기 때문에 그래요. 이 말은 뭐냐, 인간은 관측하는 순간 그 현실은 현실이 아닌 겁니다.

인간이 무엇을 관측하는 순간 인간 자체가 관찰한 것은 현실이 안 되는 거예요. 왜곡된 현실이 되는 거예요. 계곡에 놀러 왔을 때, 여기에 있는 관리인은 뭐라고 하는가 하면 여기서 놀다 가세요. 하지를 않아요. 제발 좀 쓰레기 좀 가져가세요. 한다고요. 이 말은 뭐냐, 이 사람을 관리인이 볼 때는 쓰레기나 흘릴 가능성이 있는 사람으로 보는 거예요. 그런데 본인은 절대로 쓰레기를 줍는 목적으로 온 게 아니고 물놀이 하러 온 거예요.  쓰레기를 버리고 줍는 훈련하려고 계곡까지 오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 모든 현실에 대해서 그 부분을 잘라서 전부다 나를 위한 현실로 다 왜곡되게 볼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냐, 백사람 세워놓고 물어보세요. 백사람 예수가 다 다른데요. 이것은 사람이 관측하는 순간 현실은 가짜가 되어버립니다. 그렇다면 내가 일단 어떠한 수작 부려서 구원받는 길은 일단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내가 여기 있는데 어떤 분이 등장했을 경우에 내가 그 분을 믿는다. 안돼요. 사랑한다. 안됩니다. 소망한다. 안돼요. 왜냐 하면 믿어봐야 나한테 오고 사랑해봐야 내가 사랑했다. 소망해봐야 내가 소망했다. 내가 사랑했습니다. 하나님! 옆 사람이 사랑한 게 아니고 내가 사랑했기 때문에 주께서 오시면 저를 구원해야 돼요. 사랑하지 않는 저 사람은 구원하면 안 됩니다. 가 항상 여기에 발생돼요. 고무줄 아무리 길어봐야 놓으면 고무줄이 따끔하고 나한테 되돌아오게 되어있어요. 여기에서 이게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위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인간에게는 뭐가 있느냐 ‘인간에게는 중심이 있다.’라는 말로 제가 합니다. “멀리 가면 안 돼! 갔다가 후딱 되돌아와야 돼!” 인간은 중심이 있고 중심에서 잡아당깁니다. 방법은 뭐냐, 예수님을 아무리 믿고자 해도 자꾸 되돌아오니 어떻게 하는가 하면 예수님 쪽에서 같은 능력을 발휘해서 이걸 예수님 쪽에서 몰고 가면 되잖아요. 이렇게 하면 되겠지요.

이 세상에 나는 할 수 없다, 로 확정을 지을 수 있는 어떤 분이 오시면 되는 겁니다. “야, 너 할 수 없어. 내가 해!”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예, 예수님만 하시고 저는 할 수 없습니다.” 라는 말을 내가 믿습니다, 가 되겠지요. 예수님만 하시고 나는 못합니다, 를 누가 지금 말하고 있어요? 내가 말하고 있잖아요. 이건 온전한 내가 할 수 없다, 가 아니에요. 할 수 없다는 말을 내가 할 수 있다는 말이 되니까. 이게 안 된다고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을 해봐야 소용이 없어요. 왜, 너무 착하니까. 믿습니다, 다 하겠습니다, 뭐~ 시키는 대로 다 하니까. 이런 사람은 천국에 못 가지만, 만약에 간다고 하면 뭐라고 하겠어요? 예수님, 제가 시키는 대로 다 했지요. 이 정도 되는 인간 별로 없지요? 이렇게 자기 자랑할 게 뻔하기 때문에 절대로 이는 천국에 못갑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요. 예수님이 오시되 이 인간을 없애버려야 돼요. 없애는데 뭘 없애는가, 나를 없애요. 나를 없애고 뭐만 남겨두는가, 몸은 남겨두는 겁니다. 나를 없애고 몸은 남겨두면서 몸에서 새로운 나를 만들어요. 요 나는 무슨 나냐 하면,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있던 그 아들관계, 아버지와 아들관계에 요게 편입이 되는 나로 만들어요. 아버지, 아들 할 때 아들 예수님이 아버지라고 불렀잖아요. 아버지라는 관계를 요 나가 같이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관계가 되면 요 관계에 들어오게 된 거예요. 요게 뭐냐, 양자의 영을 받은 거예요. 성령을 받게 돼요. 성령을 받게 되면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데 먼저 조건이 있어요. 먼저 깔아놓은 게 있어요. 뭐가 아니다? 종이 아니다,를 깔아놔야 돼요. 종. 갑자기 노예가 나옵니다.

우리는 노예 된 적이 없는데요? 로마서8장에 보면, 너는 종의 영을 받은 게 아니고 아들의 영을 받았으므로 더 이상 종이 아니고 아들이다. 그래서 너는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아들이 되었으면 장차 올 영광을 위해서 지금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리 이야기가 죽 된다 말이지요. 그러면 종이 아니고 아들 했을 때, 갑자기 우리는 누구 머슴살이 한 적이 없어요. 갑자기 종이 왜 나오느냐, 종인데 종 되게 만드는 방법이 있어요. 그게 뭐냐, 예수님 쪽에서 뭘 주는가 하면, 율법을 줘버려요.

저보고 말하기를 율법 폐기론 자라고 하는데, 율법을 폐기하는 게 아니에요. 율법이 다 필요해서 준 거예요. 율법을 폐기한 것이 아니고 율법이 있어야 뭐가 되느냐, 죄의 종이 되는 겁니다. 죄의 특징은 불안이에요. 불안정입니다. 왜 불안정 하냐 아무리 예수님을 믿음, 소망, 사랑해도 그것을 내가 믿었고 내가 소망하고 내가 사랑한 게 돼버려요. 내가 믿고, 내가 사랑하고, 내가 소망한 게 돼버려요. 그런데 내가 믿고 소망하고, 사랑해버리면 지금 말하는 순간에는 내가 믿는 것 같아요.

그런데 내가 나중에 치매 걸린다든지 내가 과속을 해서 걸린다던지 내가 갑자기 남한테 욕을 한다든지 해버리면 율법에 딱 저촉이 되어버려요. 그리고 이런 사람 있잖아요. 보기만 보아도 미운사람 있잖아요. 이유가 없어요. 드라마에 나오면 저 인간 또 나오네. 딴 데 돌려. 그 사람 사는데 용돈 준적도 없어요. 아무 준 것도 없이 보기만 봐도 기분나빠가지고 오늘 하루 종일 기분 나쁘다. 죽은 노무현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박근혜가 그런 종류지요. 뭐 말만했다하면 공격이 들어와요. 해외출장가도 욕해요. 기자회견하기만 해도 욕하고. 이유도 없어 무조건 싫어요.

그리고 무조건 좋은 사람이 있어요. 반대로. 예수 안 믿어도 좋아. 그 사람이 예수 믿던 안 믿던 지옥가도 좋아요. 그냥 좋아요. 이것은 몸은 주님의 것인데 그 몸에서 발생된 나의 과거의 체험을 기억의 다발에 담아놔요. 나의 안 좋은 트라우마가 현재 이 몸을 가지고 누구 특정 인간은 싫고 특정 인간은 무조건 좋아가 현재 이 몸에서 나온 자아가 그렇게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겁니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우리 형님은 무조건 잡채는 싫어해요. 맛있던 무조건 싫어해요. 왜냐 하면 잡채 먹다가 어릴 때 체해서 잡채를 못 먹어요. 저는 곱창 못 먹고, 개고기 못 먹고, 오리고기 별로 안 좋아하고 순대 못 먹고 요런 몇 개 안 좋아해요. 왜 안 좋으냐, 몰라요. 이유도 없이 그냥 안 좋아요.

그렇다보니까 문제가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고 이런 예수는 좋고, 이런 예수는 싫어요, 가 나오는 이게 더 큰 문제가 되는 거예요. 내가 이미지를 꾸미는데 예수에 대해서 좋은 이미지만 모아서 소재로 삼아서 가짜 이미지를 자꾸 만들어내 가지고 하는 겁니다. 그럴 때 그렇고 또 교회는 좋은데 교회 다니면서 교회 좋다고 다니다가 돈 꿔줬는데 사기 당했던지 아니면 교회에서 연애하다가 나 사랑한다, 해놓고 튀겨버려서 당한 아가씨가 있다면 교회만 안 좋은 게 아니고 예수도 싫어요. 나에게 아픈 상처를 준 예수도 기독교 자체가 싫어. 그렇게 되어버리면 이게 뭐냐 하면 몸은 주님의 건데 거기서 만든 자아는 자꾸만 하나님의 법에 의하면 무엇의 종이 된다고 했습니까? 내가 모르는 죄의 통치를 받고 성질의 욕망의 노예가 되는 상태로 내가 지금 움직이고 있는 겁니다.

이게 우리한테 불안과 우리의 인생에 안정감을 주지 못해요. 천억이 있다고 해서 좋은 게 아니고 심지어 70억 굴러 들어와도 별로 나중에 보면 불안, 불안해가지고 결국 구속당하 돼요. 롯데아줌마는 70억 받아가지고. 이 사람이 받을 때 세끼 못 먹어서 70억 받은 게 아니잖아요. 이게 불안한 거예요. 이게 뭐냐, 불안하니까 종이 되는 거예요. 자꾸 겁이 나요. 자꾸 뭔가 직장 다니면서 겁이 나는 거예요. 어떤 갑질 할까봐. 자식 키우면서 겁이나요. 자식이 내 말 안 듣고 빗나갈까봐. 시집가는데 시집도 안가고 나이 서른 넘을까봐 걱정이 된다니까요. 아들이 방구석에 앉아 있을까봐 겁이 나고.

또 교회가면 언제 또 돈 내라 소리 나올까봐 겁이 나고  그러면서도 안 갈 수도 없고 온 집안이 다 다니니까. 안 갈 수는 없고. 그것에 삐져가지고 거기에 안가면 또 그 다음 주일날 무슨 벌을 천배를 받거나 지진이 일어나거나 벼락을 받거나 해가지고 교회 안가면 벌 받을까봐 겁이 나고 결국은 뭐냐 하면, 종이란 말은 벌 받을까봐 겁난다. 이 말입니다.

그럼 교회 다니고 예수 믿는 이유가 뭡니까? 이 종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고 종을 그 때, 그 때 땜질하려고 교회 다니는 겁니다. “목사님 십일조 이렇게 받치면 됩니까? 이렇게 봉사하면 됩니까?” 전부 다 벌벌 떨면서. 세밀한 떨림. “앞자리에 앉으세요.” 하면 뒷자리에 앉으면 벌 받지. 앞자리에 앉아야지. 벌벌 떠는 거예요. 모든 것이 진동 없이는 되는 일이 없어. 벌벌 떠는 거예요. 벌 받을까봐.

그러니 율법의 종, 마귀의 종, 얼마나 이런 인간을 다루기가 쉽습니까. 욱! 당신 이래가지고 벌 받습니다. 이 한마디만 하면 알아서 갖다 바치는데 얼마나 좋아요. 오는 사람이 벌써 벌벌 떨고 오는데. 이게 전부 정보의 싸움이거든요. 아마추어들이 정보를 모르고 성경 신학을 모르잖아요. 정보가 미약하다고요. 그런데 이 목사들은 돈 빼내는 정보가 노하우가 있다고요. 사람 다루는 정보가 있잖아요. 이 전문가니까. 그러니까 사람들을 마음껏 정신적으로 희롱을 하는 거예요. 이것도 성추행이에요. 희롱을 하지요. 갖고 노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바로 계급이에요. 예수님은 이야기합니다. 세리와 창기가 저 바리새인보다 어디 간다?  천국 가는 거예요. 이걸 완전히 뒤집는 거예요. 깨어라. 왜 자유인이 언제까지 율법아래 딸려가지고 벌벌 떠느냐 이 말이지요.  율법은 내가 이루었는데 그리고 거룩은 니가 지켜서 거룩한 것이 아니고 율법을 이루신 분이 성령 안에 택배로 다 선물이 담겨왔어요. 여러분들이 택배 받아보면 선물이 다 오잖아요. 조립하는 게 아니잖아요. 조립하는 것도 있지만, 그냥 뜯고 그냥 받으면 된다 이 말이죠. 뜯고 받을 때 주의할 것은 절대로 제가 만든 거룩도 아니고 제가 만든 의로움도 아니고 제가 만든 천국도 아닙니다. 요것은 항상 명심해야 돼죠.

이렇게 의, 천국 하니까 추상적인데, 너무 추상적이니까 이걸 실제적으로 말을 바꿔보겠습니다. 뭘 해도 저주 없습니다. 흔히 말하는 나쁜 짓이라고 돼있는데 성경에서의 나쁜 짓은 뭐냐 하면, 주께서 하셨다는 것을 모르고 내가 했습니다. 가 나쁜 짓이에요. 심지어 어떤 욕을 해도 주께서 하게 하셨다 하게 되면 이게 의로운 일이 되어버려요. 야~~ 요거 위험한 발언이다. 이게 관계성이에요.

독자적으로 행동하게 되면 뭘 아무리 착한 일을 해도 나쁜 짓이 되고 주와 관련된 창세기 아버지와 아들사이에 있는 관계성 안에서 움직이게 되면 이게 결국 뭐로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기 위한 우리의 본심을 들추어낸 사태로서 하나의 사건으로서의 우리가 수긍해야 돼요. 아~ 또 하나 내가 욕하는 사건을 일으켰구나! 따지고 보면 시도 때도 없이 취미로 삼는 욕쟁이 할머니도 아니고 평소에 욕하는 게 아니잖아요. 점잖을 때 나왔다 말이죠. 그러면 나온 걸 사태를 살펴보세요. 어떻게 나왔는지. 무조건 싫은 사람 봐서 내가 화냈잖아요. 그럼 그 싫은 사람 누가 보냈습니까? 주님께서 보냈잖아요. 주님께서 왜 보냈습니까? 네 인간 성질 더럽다는 것을 들추어내서 보냈잖아요. 그게 하나님의 저주가 아니고 복인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 힘으로 저주에서 벗어나서 우리 힘으로 복된 자리에 가려고 하니까 그게 뭐냐, 종이 되는 거예요. 무슨 종? 죄의 종이 돼요. 그럼 죄 안 지으면 되잖아 하잖아요. 율법 앞에서 죄 아닌 게 없어요. 탐내지 마라, 앞에서 탐 안 낼 사람 아무도 없어요. 이게 제 이야기가 아니고 로마서7장에 나옵니다.  탐내지 마라는 것이 없었더라면 너희들이 아예 죄가 없었을 것인데 탐내지 마라는 순간에 탐내지 마라는 것이 탐조등이 되어가지고 이 어두움 세계에 다 비취는 거예요. 그것도 시도 때도 없이 새벽2시45분까지 꿈속까지 탐내지 마라 들어옵니다. 꿈속에서 탐내지 않는 사람 어디 있습니까? 꿈속이 전부 탐욕인데. 꿈속까지 탐내지 마라가 집어 넣어버리면 모든 것이 우리가 죄 아닌 게 없어요.

그래서 율법은 폐기하는 게 아니고 율법은 계속 추가적으로 있어야 되고 사도바울의 권면이나 명령도 전부 다 율법적 기능을 다 발휘하는 겁니다. 왜냐, 니가 더 이상 저주 받을 일이 없다는 거예요. 니가 행동하는 저주, 축복이 결정되는 그 시기는 이미 지나가버렸다. 너한테는. 행동에 따라서 지옥가고 행동에 따라서 천국 가는 그 시기는 이제 너한테는 해당 사항이 없어요. 이것이 하나, 하나가 성도라면 주께서 포크를 이렇게 이동시키고 이동시켜도 요것이 예수 안이라면 요 범주 안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우리가 미국 이민가나 북한 가나 러시아가나 관계없이 어디가도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 안에 있는 거예요.

탈북사람들이 북한도 천국인 거 알 것 같으면 남쪽으로 돈 보고 올 일이 없다니까요. 밥 먹고 살기 위해서 온 것이지, 믿음 때문에 온 게 아니고. 믿음 같으면 북한만큼 좋은 믿음 환경이 없어요. 주여, 어서 죽여주옵소서. 그게 사람 사는 데가 아니잖아요. 모든 걸 종으로 만든 나라인데 거기에 어떻게 살겠어요. 그러면 그만큼 하늘나라 가깝잖아요. 최고 사형 건으로 대번 가는데.

그래서 뭐냐 하면 이 세상을 통해서,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구원 받느냐의 문제가 아니고 이겁니다. 어두움이 빛을 가린 것이 아니라 흔히 우리가 빛이라 하는 이 세상이 사실은 숨어있는 세계를 가리고 있었던 겁니다. 나의 의미 때문에 복음의 의미가 둘러져 있다는 것을 잊어버려요.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주께서는 다시 한 번 우리를 징계를 하심으로서 아버지와 아들 관계가 너 라는 사실, 네가 양자의 영을 받았다는 사실을 복음의 막에 둘러싸여서 우리에게 양쪽으로 사방팔방으로 늘 쏘아대는 그 안에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어요. 이것을 가지고 뭐냐 하면, 아들이라 하는 거예요. 참 아들.

자, 한 번 봅시다. 8절 봅시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했지요. 이러한 사실이 된 것과 그러면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있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버리면 더 이상 관계 자리 이동이 안 됩니다. 우편에 앉아버리면 그 자리를 떠날 수가 없어요. 그걸 가지고 확정된 신분이라고 합니다.

신분은 다른 말로 하면 관계입니다. 어떤 관계? 확정된 아들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 우편에 앉아버리면 이게 주의 자리가 되어버려요. 주의 자리는 모든 피조 세계를 다룰 수 있는 자리가 하나님 우편의 자리입니다. 요 자리를 주님이라고 해요. 모든 피조물의 돌아가는 것은 주를 위해서 돌아가게 되어있어요. 이 오른편에 성도도 같이 앉혀줍니다. 이게 에베소서2장6절입니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맞지요. 여기에 2장 5절을 보면,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비행기 안에서는 시간 요소가 없습니다. 시간의 흐름이 없어요. 위치만 정해지면 시간은 그냥 부속으로 따라오는 거예요. 그 위치를 증명하기 위해서 시간은 그냥 흘러갈 뿐입니다. 이래서 내가 성도 맞구나! 확인해 주기 위해서 세월은 자꾸 흘러갈 뿐이지 세월이 바뀐다고 해서 위치가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제가 복음 아는지 모르는지 볼 때 묻는 게 있어요. “여러분, 예수님 믿습니까?” “믿습니다.” “치매 걸리면 어떻게 됩니까?” 이 질문을 하는 거예요. 치매에 걸리면 어떻게 할 거예요? ‘믿습니다.’를 믿어버리면 다 헛방이에요. 왜, 치매에 걸리면 예수 있는지를 몰라요. 그러면 거기에 대한 정답은 뭐냐, “당신은 예수 믿습니까?” “예, 내가 죄인인 것을 믿습니다.” 치매에 걸리면 치매에 걸려도 죄인이지요.

하늘에 앉힌 신분이 되게 되면 이 신분은 예수님의 주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죄인으로 되어야 되고 그 죄인을 주께서 인솔해서 천국 가기 때문에 이 신분은 우리는 죄인이고 주님은 의인이 돼서 예수 안에서 의가 되는 거예요. 이 신분을 위하여 세상에 우리가 지금 살아있는 이 안양이나 서울이나 대구나 이 모든 피조물의 움직임은 이 신분 됨의 관계를 증명해주기 위해서 세상이 모두 움직이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뭐가 되고? 아들이 되고 이 모든 피조물은 뭐가 되고? 종이 되고. 누구의 종? 주님의 종이 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사도요한이 천사한테 절을 하니까 천사가 하는 말이 있습니다. 사도요한이 천사한테 절을 하니까 “저한테 왜 하십니까? 저는 종인데. 아니 왜 저한테 절을 하십니까?”  그리고 히브리서2장에도 나오지요. 너희들은 아들이지 종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천사가 누구를 섬긴다? 우리가 부러워서 천사들이 우리를 위해서 절을 해요. 왜냐 하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 졌지 천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지 않았기 때문에.

세뱃돈 5천만원 받은 사람보고 부러워해야 되지, 세뱃돈 5천만원 받은 사람이 5만원 받은 사람에게 아이고, 부러워라~ 이럴 필요가 없잖습니까. 예수님의 생명을 받은 것은 우리지 천사가 아니지요. 그럼 천사라는 이 피조물은 누구를 위하여 바로 우리 신부를 위해서 어떤 노력? 종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가 잡혔을 때에 감옥 문 누가 열어줬습니까? 아이고, 어서 나가세요. 하고 천사가 흔들어서 감옥 문을 열어줍니다. 천사가 흔들어서 그만한 신분이 우리에요. 그래서 여러분 이웃에 성질 더러운 못된 인간이 왔거든 나 인간임을 확인하기 위해서 주께서 죄의 종 보냈다고 생각하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을 뭐로 보느냐 하면 빗자루 하나 보냈다고 생각합니다. 빗자루가 화 내봐야 빗자루거든요. 빗자루 1m50Cm되지요. 1m50Cm 아줌마 오거든 그거 빗자루에요. 아무 의미 없어요. 그거. 그런데 따지고 싸우지 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그냥 벽에 기대놓은 빗자루 되듯이.

예수 안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가 부리는 종이에요. 우리는 아들이고. 왜 아들이 종을 부러워합니까? 롯데 그런 거 부러워하지 마세요. 그건 종이고, 돈 속에 묻혀죽을 거예요. 이건희라는 그런 사람 그런 거 부러워하지 마세요. 이혼하던 말든 그런 위자료 부러워하지 마세요. 위자료가 1조가 넘든 대요. 변호사 수임료만 해도 천억이 넘는데. 하루세끼면 되지 천억까지는. 사람들은 그런 빗자루를 되게 부러워해요. 돈이 사람을 천국 보냅니까? 만약에 돈이 천국 보낸다면 이 짓하지 말고 돈 벌어야 돼요.

그런데 천국은 돈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는 그 관계, 죄를 완전히 의로 바꾸어 놓은 그 십자가의 관계기 때문에 우리는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성경 여러 군데 나와요. 십자가 복음을 아는 자는 부끄러워하지 마라. 왜냐 하면, 돈 억만금 갖다 줘도 십자가를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너희는 의젓해야 되고 띵까 띵까 해야 되지 그런 걸 부러워할 필요 없어요. 부러워하지 않고 꿇리지 않는다는 말은 뭐가 없다는 말이지요? 불안, 공포, 공포는 사물이나 어떤 상황을 통해서 벌벌 떠는 게 공포인데, 공포라 하는 것은 불안에서 나온 거예요. 불안을 공포를 기피하기 위해서 인간은 행동하게 되어있어요.

어떤 행동을 과하게 하는 것은 예를 들어 기도를 한다든지 헌금을 한다든지 이것은 뭔가 불안하기 때문에 하는 거예요. 오늘 참 말 많이 하지요. 교회 다니고 찬양한다는 것은 뭔가 불안하다는 거예요. 목사 섬기고 이런 게. 신분이 이미 아들인데, 아예 교회에서 갑질 하세요. 뭐가 불안하고 겁내요? 더 이상 저주는 없는데. 왜 협박 공갈에 넘어갑니까? 목사 뒤에서 욕하면 저주 받는다고. 더 욕해보는 거예요. 왜, 저주 받는지, 안 받는지.

시험해보라는 말이 뭔 뜻이냐 하면, 이미 구원받은 자 입장에서 시험해보라는 이야기에요. 시험해서 되거든 예수 믿으라는 말이 아니에요. 십일조 시험은 십일조를 안 함으로서 십일조 테스트가 되는 겁니다. 십일조 해서 창고에 쌓이는지 그것도 시험해야 되지만, 십일조 안함으로서 다 날아가는지 더 쌓이는지 그것도 시험해봐야 돼요. 시험은 양쪽 다를 해야지 왜 한쪽만 해요. 양쪽 다를 해야지. 십일조 안 해보세요. 망하는지. 안한 만큼 재산이 더 늘어나겠지요. 계산 나왔잖아요. 이미. 아무 변동사항이 없다는 말은 십일조란 율법의, 안식이라는 율법의 종이 되지 말라고 우리에게 니가 진짜 그런 인간이라는 걸 십일조에 안식일에 벌벌 떠는 불안한 율법의 종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그 말씀을 아직도 폐기하지 말고 유효한 거예요. 그 말씀이.

징계란 뭐냐 하면, 법 안 지켰다고 징계 내리는 게 아니고 왜 너는 자유인인데 어떻게 벌벌 떠느냐에 대한 징계에요. 왜 자꾸 눈치보고 누구한테 자진해서 을이 되느냐 말이지요. 뭐 목사님이 어떻고 저쩌고. 목사님이 십자가 졌습니까? 목사님이 우리의 죄를 의로 바꿔줘요? 안수하면 구원되는 거예요? 내 손가락을 자르겠다. 무슨 바이러스 묻은 손이 안수가 돼요? 제발 성령을 받았으면 이제는 아들입니다. 아들이면 하나님의 우편에 앉았어요.

그러면 세상은 어떠냐, 그래도 세상 힘들다. 힘든 이유는 환난과 핍박과 곤고와 기근과 적신이나 칼이나 위험이 와야 그 심지가 진짜 주님이 주신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게 이만큼 강렬하다는 것을 촛불이 얼마나 대단한 것은 바람이 불어봐야 알아요. 휙 불어도 안 꺼지면 그 촛불 괜찮은 촛불이에요. 그런데 훅 불어서 휙 꺼져버리면 그것은 자기가 내 소망, 내 믿음, 내 사랑, 내가 쥐고자하는 엉터리인데 그거 치매 걸리면 휙 날아갑니다. 치매 걸리면 예수고 뭐고 실컷 예수 믿은 거 소용없게 돼요.

정리해 봅시다. 하나님의 징계라 하는 것은 반드시 아들신분이다. 아들에서 벗어났을 때는 징계가 주어졌다. 그러면 아들은 뭐냐 이미 신분이지요. 자유인이며 초월자다. 어디에?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있으니까. 하나님의 우편에 앉았어도 우리가 풍선 들고 가지는 않잖아요. 붕 구름타고 날아가듯이 가지는 않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세상사람 보기에는 아무 특이성을 찾아낼 수 없어요. 예수 믿는다고 본인은 이야기하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니가 어디를 봐야 기도해서 복 받아서 아무 증거가 없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우리의 몸 자체가 늙어서, 늙으면 어디 가지요? 죽지요. 이게 바로 율법에 의한 값을 하고 있다는 것을 새로운 자아는 이것을 혼자 알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이 몸을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 맡겨버리면 사나 죽으나 소유권이 누구한테 있어요? 주의 것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고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사나니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로마서14장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성경에 있는 말씀이 우리가 듣는다고 해서 체험되는 건 아니고요, 이게 복음의 막이거든요. 복음의 막은 촘촘히 말씀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우리는 찢어진 쓰레기에요. 쓰레기는 무슨 의미라 했습니까? 나를 위한 둘둘 감은 나의 의미라고 했지요. 나한테 유리한 의미. 의미의 특징은 뭐냐, 이상하게 꼴 보기 싫은 사람, 이상하게 좋은 사람 따로 있는 거예요. 세상은 내 좋은 쪽으로 가는 것, 내 행복을 위해서. 다른 말로 하면 행복이에요. 이것을 말씀이 와서 찢어버리지요. 성도는 속 시원함을 느낍니다. 그런데 성도가 아닌 가짜라면 이 보호막이 없으면서 있는 척하는 사람은 미쳐버립니다. 환장해버려요. 더욱 더 마귀의 종이 됩니다.

이거 받치면 원상복귀 되겠습니까? 이거하면 원상회복 되겠습니까? 교회 오는 사람이 거의 90%가 자기 팔자 원상회복 하려고 온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요거 족집게입니다. 어떻게 섬기면 옛날에 괜찮았던 시절 좋았던 시절을 그 행복 시절을 집 떠난 남편 마음 다시 돌아오고, 장가 시집  가는 거 내가 결정하는 대로 다 가고, 뭔가 기대하는 희망 이런 것으로 오는데.

적어도 신분적으로 주의 복음 안에 있는 사람은 이런 말씀을 통해서 이미 내가 아들이라는 것을 더 이상 어떤 법에 억매이지 않는 죄의 종의 아니라 아예 예수님처럼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거예요.

자, 마지막 이 말씀하고 마치겠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하면서 누구 말 들었습니까? 예수님은 누구 말만 들었어요? 아버지말만 들었지요. 그런데 아버지의 말을 들을 때, 뭐와 충돌을 일으켰느냐 하면 율법을 지킨다는 그 대단한 율법주의자와 자연스럽게 대충돌을 일으켰지요.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너희 애비는 악마라고 했고, 그들은 예수님을 귀신의 왕초라 했어요. 소통이 없어요. 완전히 극대 극으로 대치했습니다. 똑같은 상황을 여러분들이 갖고 가셔야 해요. 각오하셔야 돼요. 걱정하지 마세요. 왜냐 하면, 아들이기 때문에 그러한 다니엘 세 친구처럼 그런 험악한 분위기속에 여러분들을 보낼 겁니다. 주위에서 여러분을 위해서 할 거예요. “당신 그렇게 하다가는 벌 받는데이. 저주받는다.” 이렇게 압력이 들어오거든 주께서 빗자루를 일부러 옆에 붙여주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인솔해서 천국 문을 열었는데 우리는 독자적인 행동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타고난 습성이 그렇고 모든 의미가 내 좋아라고 이렇게 살아온 그 버릇 때문에 생긴 줄 압니다. 성령께서 날마다 징계하셔서 아들됨의 자유함이 빼앗기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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