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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15 00:28:06 조회 : 1158         
의도와 우연 161014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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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은주(IP:119.♡.152.148) 16-10-19 15:12 
안양20161014a히12장22절(의도와 우연)-이 근호 목사

히브리서12장 18절부터입니다. “너희의 이른 곳은 만질만한 불 붙는 산과 흑운과 흑암과 폭풍과 나팔 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을 저희가 견디지 못함이라”이렇게 되어있지요. 이것은 어디에 나오는 이야기이냐 하면 모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히브리서11장에 보면 제일 먼저 나온 게  아벨부터 나와서 마지막에 구약 전체를 믿음의 선조들을 죽 나열한 것 기억나지요? 아벨부터해서 노아 나오잖아요. 그 때 모세에 관해서는 히브리서11장에 보면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모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임을 거절하고 자기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원했다, 이 정도로 해서 모세의 대목이 간추렸는데, 12장에 보게 되면 모세의 경우를 또 다시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21절에 보면, “그 보이는바가 이렇듯이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그렇게 되어 있잖아요. 그럼 여기서 이렇게 정리하면 돼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뭐다? 무섭다가 나오지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무서운데 어느 정도로 무서우냐, 심히 무섭다. 두렵고 떨릴 정도로 무섭다. 그런데 요즘 우리가 하나님 믿는데 왜 그리 편안하지요? 모세는 그렇게 무섭다고 했는데, 요새 우리는 하나님 안 만나고 있는 중입니까? 심히 두렵고 떨린다고 했는데 왜 21세기에 소위 신앙이라는 사람은 편하게 이렇게 무서움 없이 편하게 지낼 수 있는가, 둘 중에 하나가 문제겠지요. 그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신앙생활 안하던지, 신앙생활 포기해버렸던지, 포기했을 경우에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가 가상해서 내 편하려고 믿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것은 우상이기 때문에 아무 무서울 이유가 없지요.

무서운 하나님을 스스로 선택할 필요가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지요. 사람은 편하려고 살지 무서우려고 사는 사람 없잖아요. 하나님 믿고 “하나님, 나를 좀 무섭게 해봐!” 이런 식으로 그렇게 하나님을 일부러 찾는 사람 없고 사람들은 안 찾아요. 사람들이 찾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하면 이런 하나님이에요. 모든 교회가 다 이거 이야기하잖아요. 사랑의 하나님. 사랑이 무섭다하고 이렇게 연관 짓기가 상당히 힘들지요. 상당히 어려운 거예요. 사랑이 무섭다. 말이 안 되지요. 사랑은 무섭지 않아요. 왜냐 하면 사랑할 만하기 때문에. 사랑할 만해서 사랑한다는 말을 붙이기 때문에 그래요. 사랑할만해서. 영어로 cute, 귀엽다. 귀여운 것하고 무서운 것하고 정반대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사랑의 하나님을 찾다보니까 하나님마저 굉장히 요새는 귀여운 하나님이 잘 팔리는 것 같아요. 교회에서.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하면 무서운 하나님이에요. 그걸 모세가 경험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모세이야기를 왜 여기서 성경이 거론하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알고 있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직접 만난다는 그 사건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사건이 뭐냐 하면, 바로 십자가상이지요.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이유는 예수님에게 우리 죄를 대신 지었던 죄가 있기 때문에 버림받는 겁니다. 예수님이 본인이 지은 죄는 없지만, 대신 짊어질 죄가 있어서 그 죄 때문에 아버지께 버림받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갖고 있었던 그 죄가 예수님의 본인의 죄가 아니고 우리에게 가지고 간 죄라면 우리 입장이 만약에 예수님 자리에 서있다면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어떤 발언을 할 수밖에 없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시는구나! 이걸 할 수밖에 없지요.

그러면 여기서 뭐냐 하면 아까 제가 사랑의 하나님 했지요. 사랑의 하나님을 지워버리고 여기다가 우리를 버리신 하나님으로 바꿔야 마땅한 겁니다. 바꿔져야 합니다. 바뀌어져야 돼요. 버리신 하나님으로 바꿔지는 이것이 제가 방금 십자가위라고 했지요. 그러면 요것은 십자가라 하는 것은 신약에 있는 문제이고, 그러면 구약에서는 십자가 오기까지 신약과 연결되면서 구약에서부터 이미 출발한 게 있습니다. 그게 바로 구약인데, 구약의 히브리서12장에서는 무얼 언급하는가 하면, 모세가 보았던 것을 언급한 겁니다.

그러면 히브리서12장에서 하나님께서 모세가 시내산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은 지금 히브리서에 써진 신약에 우리를 버리신 하나님을 나타내기 위해서 구약부터 이미 이것이 관련돼 있다는 것을 알리시기 위해서입니다. 관련되기 위해서. 쉽게 말해서 모세가 경험했던 무서운 하나님을 경유해서 네가 진짜 하나님에게 다가왔는가를 묻는 거예요. 그냥 모세를 안 거치고 그냥 현대인들이 그냥 하나님을 찾아버리면 이것은 자기가 원하는 사랑의 하나님이 되니까 이것은 모세가 경험했던 그 하나님하고 같다는 말입니까? 다르다는 말입니까? 이게 다르다는 이야기에요.

자, 그러면 우리를 버리신 하나님을 가지고 히브리서12장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하면 이걸 가지고 ‘언약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언약의 하나님. 그게 어디에 나와 있는가 하면 바로 24절에 보면 나옵니다.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자, 피라는 것이 상황이 좋을 때 등장하는 거예요? 상황이 험악할 때 등장하는 겁니까? 이게 위기 상황이고 뭔가 상황이 굉장히 급박하게 돌아갈 때 피가 있잖아요. 공포영화에 피 나오지, 사랑하는 영화에 피 나옵니까? 안 나오잖아요. 애가 엎어져서 코 터져서 피 나오는 그것 말고.

진짜 피를 흘렸다는 말은 갈 때까지 가봤다는 겁니다. 갈 때까지 가봤다는 것을 두 자로 말하면 단절이다. 하나님 만나러 접근 접근했는데 결국 하나님은 그 하나님과 가까이 있는 자리에서 알게 된 것은 주께서는 우리를 내치시더라, 어떻게? 죽여서 내치시더라. 이게 나타난 사건이 뭐냐 하면 바로 ‘피’입니다. 그런데 그 피를 히브리서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언약의 피’라고 해요. 언약의 피.

뭐보다 더 낫다? 아벨의 피보다 더 낫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는 자꾸 무엇과 연관시키는가 하면 구약을 경유하고 오너라, 라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아벨과 모세를 거쳐서 오너라. 사태가 그렇게 만만치 않다는 겁니다. 사태가 심각하다는 거예요. 자, 어느 정도 심각한지 여기 20절 보겠습니다. “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을 저희가 견디지 못함이라”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니까 그 명령을 받은 인간들이 “아마 이 정도는 우리가 지킬 수 있다.” “이 정도로 감당하겠다.” 라고 했어요? 아니면 “감당을 못 하겠다.”고 한 겁니까?  당시 시내산 밑에 있는 백성들이. 너무 너무 무서워서 감당이 안 된다는 겁니다.

이게 히브리서 5장에도 나와 있어요. 무서우니까 모세가 대신 이야기하게 하세요. 하나님 앞에서 불 가운데서 이야기하니까 감당이 안 됩니다. 너무 무섭다는 거예요. 이게 집단적으로 모세를 따르던 그 50만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른 민족에게는 이런 하나님이 나타난 적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어요. 하나님의 택하신 민족이기 때문에 하나님만 이렇게 알려주는 겁니다. 이정도로 무섭다. 요걸 알려주는 거예요. 이 정도로 무섭다. 그걸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하게 된 거예요. 하나님이 무섭구나! 이 정도로 무섭구나!

그리고 그 무서운 정도가 뭐냐, 무섭지만 가까이 할 수 있다는 뜻인가? 아니다. 무서움의 극치가 뭐냐, 피였고 피는 무엇을 의미한다? 단절을 의미한다. 단절이 돼있다는 사실을 약속으로 내용으로 만들어버리면 이게 언약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언약의 하나님 앞에서는 자진해서 하나님 앞에서 구원해 달라는 소리를 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언약의 하나님의 특징은 뭐냐, 구원은 인간적 안목에서는 구원은 없는 것이 확정되었다. 구원은 없다. 구원이 없다는 말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천국은 인간들이 지가 갈 수 있다고 생각해서 만들어낸 가짜 천국이고 천국도 없고 구원도 없고. 왜, 인간들의 하나님은 큐티(cute)한 귀여운 하나님이기 때문에 있지도 않은 하나님을 만들었기 때문에 진짜 하나님은 아예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앞장세워서 단절을 앞장세워서 나타내 줄 때만 하나님을 만나지, 그 외에 하나님은 그냥 오락하는 자기가 즐기기 위한 하나님입니다. 가짜지요. 가짜 하나님을 두 자로 종교라고 합니다. 종교.

어떤 신학자가 칼 바르트의 제자로 자처하는 어떤 신학자가 이슬람교와 기독교는 하나다. 하는 말에 저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왜, 둘 다 가짜니까. 둘 다 가짜인데 그냥 오락이다. 오락인데, 오락에서는 무엇이 작용하느냐 하면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 그리고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싶다는 욕망, 이런 것들이 종교를 찾기 때문에 이것이 오락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오락이 아니고 진짜 하나님이 나타나게 되면 나의 것을 파괴시키겠지요. 그게 싫은 거예요. 나의 것을 인정받고자 하는 자에게 그걸 만약에 종이에 나의 것 써서 드리면 아이고, 착한 것! 이렇게 인정하면 좋겠는데, 만약에 찢어버리면 우리는 뭘 느낍니까? 버림받았다는 느낌 들겠지요. 그게 바로 버림  받았다는 느낌 들게 되면 이미 우리는 언약에 휩싸인 겁니다.

언약은 단절이고 하나님 앞에 제대로 버림받는 거예요. 우리가 제대로 버림을 못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신앙생활 할 줄도 모르고 교회에 나가서 오락생활만 하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뭐냐, 그걸 ‘교회놀이’라고 하는 겁니다. 사자성어로 교회놀이. 교회놀이의 특징이 있어요. 교회놀이와 신앙생활의 차이점은 교회놀이에는 항상 그러니까 나는 놓치면 안 돼! 나는 계속 유지해야 돼! 붙드러야 돼! 이것을 계속해서 확인받고 설교를 통해서 그걸 인정받고자 할 때 그건 철저히 교회놀이가 되는 겁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만 하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 당시에도 했어요. 그걸 가지고 예수님은 페인트라고 했어요. 페인트칠한 무덤이라고 했지요.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사람들의 심리를 알고 그들이 뭘 원해서 하나님을 찾는가를 알아요. 인정받고 싶고, 하나님한테 상 받아서 나중에 이 고해 같은 이 고생하는 세상 끝나면 불멸의 존재가 되어서 천국 가서 또 자기가 인정받고 산다는 그걸 희망한다는 것을 알고 인간이 행함으로 해낼 수 있는 그런 규칙 같은 것으로 성경 말씀을 조립을 해줘가지고 그걸 배분을 해줬어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나, 봐라. 되잖아. 너희들도 될 수 있어.” 희망을 준 겁니다. “나, 이렇게 거룩할 수 있잖아. 이렇게 거룩하게 되면 천당 가는 거야. 하늘나라 백성 되는 거야. 그러니까 나 되면 너희도 열심히 해봐. 아마 될 걸. 기도 빡세게 하게 되면 은혜 받을 걸.” 이런 희망을 계속 제공하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그걸 가지고 뭐냐 하면, 회칠한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살아있는 사람보고 너희는 페인트칠한 무덤이다. 속에 뭐가 들어있다? 해골이 들어있는데 너희들은 근사한 것으로 치장했구나! 주님은 반대로 갑니다. 어떻게 하는가 하면 주님은 마리아로 하여금 자기한테 향수 붓는 것을 허락했지요. 주님은 자기 자신을 시체로 보는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자기는 시체로 살아가는 거예요. 이미 버림받은. 목숨이 끊어져서 시체가 아니라 이미 버림받은 자로 살아가요. 이게 주님의 장례식입니다.

아버지의 뜻에 의해서 이 땅에 살려고 오신 분이 아니고 죽고자 오신 분이에요.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썩어지기 위해서 오신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 빼놓고 12제자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들은 이미 존재한 자기를 더 존재를 팽창시키려고 온 거예요. 그걸 확대시켜서 근사한 존재로 천국에서도 인정해줄 그런 존재를 원하고 있는 거예요.

저는 그러한 인간들의 사고방식이 노골적으로 잘 드러난 것이 젊은 사람들을 보면 참 많이 느껴요. 젊은 사람들의 모든 행동 하나 하나을 어떻게 바라보면 됩니까? 라고 만약에 누군가 물으신다면 자기 존재의 확정과 자기 존재를 키우기 위해서 그들은 어떠한 고생도 각오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이 젊은 사람들이에요. Koica 코이카 알아요? 코이카. 외국에 나가서 봉사활동 하는 것. 한국에서 무상원조를 해서 재정적으로 원조하는 것도 있지만 기능이나 기술이라든지 이런 것을 가르쳐주는 퇴직한 사람들이나 젊은 사람들 의료봉사도 다 주로 못사는 나라, 아이티라든지 페루, 아프리카 가서 봉사하는 젊은 애들이 많이 나가있어요. 일종의 나라에서 벌이는 선교라고 보면 돼요. 나라에서 벌이는 복음학교. 복음학교 뭐하는지 알지요? 젊은 사람들 모아가지고 기도 빡세게 해가지고 선교 보내는 것. 나라에서 하는 복음학교가 바로 코이카라고 보면 됩니다.

젊은 애들이 복음학교에 가는 이유가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 하나님이 쓰시느냐, 안 쓰시느냐, 그게 궁금한 거예요. 내가 구원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그게 궁금한 거예요. 꿈이 대단한 꿈이에요. 자기가 누군지를 몰라요. 무조건 자기는 건전하고 나는 무조건 존재해야 되고 살아남아야 되고 구원받아야 된다는 걸 베이스로 깔고 나는 그런 마음인데 이걸 하나님 쪽에서 인정을 받아야 할 게 아닙니까? 인정받는 방법은 하나님이 요구하는 그 극한의 고난과 아픔을 다 견디는 겁니다.

마태복음10장에 보면 뭐라고 되어있어요? 12제자한테 뭐라고 했습니까? 복음을 전하되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 두 벌 옷을 가지지 말고, 전대를 가지지 말라 했잖아요. 그걸 애들이 그대로 실천함으로서 이걸 해냈다는 데서 오게 되면 거기서 뭘 느끼는가, 역시 내가 주의 제자 맞군요. 성령세례 받은 거 맞군요. 자기 존재감이 확인되는 거예요. 그래서 CCC나 그런 애들을 보면 촌에 와서 일부러 돈 없이 복음전해 줄 테니까 밥 좀 주소. 이렇게 하는 거예요. 복음 전할 테니까 밥 좀 달라는 거예요. 민폐 끼치는 거죠. 민폐 끼치면 애들은 자진해서 극기 훈련을 하면서 쾌감을 느끼는 것을 가지고 그걸 주이상스라 해요. 프랑스말로 주이상스, 자기를 괴롭게 하면서 오는 쾌락을 의미합니다. 요 쾌락은 아주 화끈한 쾌락이에요. 마약보다 좀 더 세요.

자기를 때리고 학대하고 금식함으로 굶어가면서 기도하고 힘든 인생을 자진해서 일부러 더 낮은 곳, 더 내려놓기, 더 더 내려놓기, 더 더 더 더 내려놓기, 더 내려놓는데서 오는 극단의 희열을, 샘물에서 물 캐내듯이 더 극단으로 캐내는 겁니다. 일부러 고생을 사서하는 거예요. 사서하면서 미리 기대를 예상하는 겁니다. 내가 이것마저 이길 수 있다면 나는 주의 종이 맞다. 를 스스로 이미 회수해 있습니다.

그런 젊은 사람들의 심리에 대해서 아주 잘 표현한 시를 오늘 아침에 제가 십자가마을에 올려놓았습니다. 2016년도 노벨문학상을 받았던 밥 딜런이란 사람, 60살 가까이 있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한 대수, 송 창식, 소위 팝계의 전부다 영향 받았어요. 김광석부터 해서 모든 60년대 가수들이 다 영향을 받은 사람이에요. 미국에서 20세기 최고의 음악가로 칭찬받은 사람 밥 딜런, Blowin' In The Wind, ‘바람에 날려’라는 노래 그 가사를 올렸습니다. 젊은 애들의 심리를 얼마나 잘 묘사했는지 한 번 보세요.

“사람은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 봐야 진정한 사람이라 할 수 있는가.” 고생을 얼마나 하고 세월의 인생을 얼마나 살아봐야 참된 인간상을 찾겠는가, 이런 뜻입니다. “흰 비둘기는 얼마나 많은 바다 위를 날아봐야 백사장에서 잠을 청할 수 있을까.” 비둘기가 얼마나 먼 바다를 거쳐봐야 나는 세상을 알았다! 아~ 이게 진리구나! 이 진리를 알았으니까 나는 내 영혼을 편히 쉬자. 하고 백사장에서 잠을 편히 청할 수 있느냐. 묻는 거예요. 밥 딜런이.

“전쟁의 폭탄들이 얼마나 많이 휩쓸고 나서야 세상에 영원한 평화가 찾아올까.” 그 당시에 베트남전 했거든요. 폭탄들이 얼마나 많이 휩쓸고 가야 영원히 그치게 되는가. 그 다음에 후렴이 친구여, 그건 바람만이 알고 있다. 바람만이 그 답을 알고 있다. 이건 뭐냐 하면 바람은 알고 있는데, 사람은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돼요? 밥 딜런은 그 당시 자기도 젊었으니까 바람처럼 머물지 말고 떠돌아다니면서 진리를 찾아야지. 이거 들으니까 복음학교 생각납니다. 진리를 찾아서. 학교를 그만두고 휴학하고 진리를 찾아서 자기를 인정해주고 자기를 사랑해준다는 선교단체에 빠지는 거예요. 신천지에 빠지고. 아니면 개척교회 빠지던지. 기존교회에 빠지던지. 기존 교회에 빠지면 처음에는 돈 좀 주고 나중에는 돈 안 줘요. 돈을 많이 쓰기 때문에. 잘 압니다. 중국도 간다하면 돈 줘야 되고 처음에는 다 안 대주고 그래요. 요새는 선교도 요령이 생겨가지고.

“얼마나 긴 세월이 흘러야 높은 산이 씻겨 내려 바다로 내려갈까.” 산이 어느 세월에 깎여가지고 바다로 흘러가느냐 이 말이에요.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러야 사람들은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나.” 그 다음에 “사람들이 언제까지 고개를 돌려 외면할 수 있을까.”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어디 한군데 나 없다, 하고 숨고 싶은데 얼마나 세상을 알아야 남 앞에 군중 속에 있어도 남들 앞에 내가 안 들키는 존재가 될 수 있느냐. 얼마나 개인주의에요. 상당히 개인적이지요. 밥 딜런의 시입니다.

2절에 보면, “얼마나 많이 올려다보아야 진짜 하늘을 볼 수 있을까.” 이건 천국에 대한, 교회 가서 얼마나 기도를 해야 천국이 보이느냐, 말이지요. 그냥 시도해 보는 거예요. 행함으로. “사람이 얼마나 많은 귀가 있어야 타인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여러분들이 이걸 아셔야 돼요. 사회학에서 이야기하는데, 혁명에는 반드시 두 과정이 필요해요. 혁명에는. 두 가지가 되어야 혁명이 되는데.

하나는 기존의 권력을 독파할 수 있어야 돼요. 뚫고 째고 튀어나올 수 있어야 혁명이 돼요. 두 번째가 중요한데, 기존의 권력을 째고 독파해서 튀어나온 것만 혁명이 아니에요. 이건 혁명이 반대인 거예요. 나머지 반은 뭐냐 하면, 그래서 어떤 사회를 이룰 건데? 여기에 대한 실적이 있어야 돼요. 여기에 대한 실제적 구체화가 성립되어야 돼요.

예를 들면, 큰 교회에 어떤 목사가 있는데 그 목사가 맨날 미국이나 캐나다 놀러나 가고 맨날 필요하면 부목사 설교 맡기고 놀러 다니고 하여튼 뭐하면 세미나 한다고 핑계대고 무조건 돈하고 애 유학 보낸다고 돈 내놓으라고 하는 돈만 아는 목사, 문제 일으키는 목사가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장로들은 가만히 있는데 장립집사, 젊은 청년들이 혁명을 꾀하겠지요. 이 교회 전통이 흐르는, 순교자의 피가 흐르는 교회를 어떤 목사가 와가지고 지가 이렇게 독재를 하니 내보내자. 그런 경우 없었습니까? 그런 경우가 많이 있었을 건데요. 거기서 10억 주고 내 보냈다 칩시다. 원래 퇴직금 5억인데, 5억 더 달라 해서 좋은 게 좋다고, 은혜로 한다고 돈으로 떼서 10억 줘가지고 조건부로 그 대신 1키로 내에 개척교회 하지 마라 했는데, 그 말 듣습니까. 가자마자 100미터 안에 또 교회 만들어서 해요. 교인 다 뺐어갑니다. 어쨌든 간에 기존교회 큰 교회에서 내쫓았다 칩시다. 이게 혁명 성공한 겁니까?

자, 가고 난 뒤에 그래서 남은 큰 교회는 어떻게 운영할 건데? 이 문제가 남아있다고요. 기존의 젊은 애들이 한국교회 썩었다. 지옥 같은 이 세상에서 벗어나자. 정권을 문재인한테 바꿔야 된다. 박근혜는 그만하고. 이제는 노무현 정신을 따라서 정권 바꿔보자! 자, 정권을 바꿨다 칩시다. 바꾼 다음에 그 다음에 어떤 사회를 이룰 건데? 그러니까 어떤 사회라는 그 말을 안 한다니까요. 어떤 사회를 말해버리면 사람들이 고르게 되잖아요. 어떤 게 낫나? 그러게 되면 정권의 교체가 안돼요.

제가 라캉 강의에서 그런 거 했지요. 라캉강의에서 했잖아요. 사람은 적이 없으면 살맛이 안나. 씹어야 돼요. 뭐든지. 씹어야 자기 인생의 괴로움을 해소가 돼요. 씹어야 된다고요. 정 씹을 게 없거든 TV에 나오는 드라마에 나오는 탤런트를 씹고, 저거 이혼하고 또 나왔구나. 씹어야 되는데 하고 난 뒤에 뭐냐 이 말이죠.  모든 혁명에서 두 번째에서 실패한 거예요.

밥 딜런은 제시합니다. 이 두 번째를 실시합니다. 무정부주의. 이걸 두 자로 뭐라고 하는가 하면 히피의 세계, 일하고 싶은 능력대로 일하고 필요한 것은 얻을 수 있는 사회, 이건 레닌이 이야기한 거예요. 마르크스를 이용해서 레닌이 이미 1918년에 혁명할 때 했거든요. 그걸 다른 사람이 다 인용하지만. 능력 따라 일하고 원하는 것은 뭐든 얻을 수 있는. 그렇게 하니까 레닌도 이야기하고, 히피도 이야기했지만, 또 누가 이야기했는가 하면 정수라도 했어요. 정수라가 88올림픽 때 노래 불렀잖아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아! 대한민국.

바로 밥 딜런은 이걸 희망사항으로 한 거예요. 모든 종교의 차이를 없애고 모든 교리, 사상 없고 그리고 어떤 기준의 관료적이고 소위 꼰대의식을 이 사회에서 꼰대의식, 그걸 아버지 이름으로 하는데 4가지 대드는 게 있어요. 아버지에게 대들고 목사한테 대들고, 관료한테 대들고, 기존의 모든 자본주의에 대들고 이 4가지의 꼰대를 쳐부수자, 하는 그 때부터 후기 자본주의라고 하는데 혁명이 일어나서 동유럽이 넘어진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외쳤던 그 젊은이들이, 세월은 흘러가고 있지요. 흘러가니까 어떻게 돼요? 이 밥 딜런 말대로 계속해서 이것 찾으니 찾아집니까? 제가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문제가 어디 있던가요? 마지막하고 합시다. “얼마나 더 많은 죽음이 있어야 너무나 많은 희생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까.” 베트남전쟁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나가야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을까.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바람한테 물어봐라. 바람이 안다. 우리 인간은 모른다. 이게 노벨문학상을 받게 된 그 시거든요. 자, 이게 노벨문학상인데 세상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다는 뜻 아닙니까. 젊은이든 모든 현대인들이.

그렇다면 복음을 안다는 우리가 해답을 제시해야 돼요. 문제점을 제시해야 돼요. 지적을 해야 돼요. 결국은 뭐가 문제가 됐던가요? 밥 딜런의 주장이 뭐가 문제에요? 혁명 또 혁명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뭐가 문제입니까? 히피의 주장이 뭐가 문제입니까? 바로 자기의 죄를 모르는 거죠. 자기의 죄를 모르는 겁니다. 살 이유가 없다는 것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있으니까 살아야겠다고 억지를 부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뭐했노? 이러는 거예요. 예수님, 니 뭐했나? 나는 이렇게 살고 싶은데 예수 당신이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느냐, 이 말입니다. 꼭 예수님 주변에 있는 12제자의 사고방식하고 다를 바가 없어요. 똑같아요. 나는 모든 걸 버리고 처나 자식 재산 다 버리고 당신을 따랐으니까 따른 보상은 해줘야 되지 않느냐고 제자들이 예수님한테 압박을 가했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마태복음16장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죽는다고 이야기했어요. 그럼 제자들은 뭡니까? 아, 죽을 사람을 우리가 미쳤다고 따라 다니나? 죽을 사람을 왜 따라 다니냐 말이지요. 따라다녔는데 죽더라. 이 말은 뭐예요? 너도 같이 나 따라 죽자! 라고 선택했다는 겁니다. 예수님 생각이에요. 제자들은 왜 이제 와서 그런 소리를 해! 이제 와서 그런 소리를 하느냐. 우리를 창창하게 살날을 생각했는데. 진작부터 이야기했으면 안 따라 갔지요. 배신당한 느낌 들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덧붙입니다. 주님, 솔직히 그 심정 아니지요. 주님 당하도록 우리가 그냥 방치하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하니까 예수님이 베드로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사탄아 물러가라. 그게 바로 사탄을 나타내기 위해서 12제자를 뽑은 거예요. 니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탄의 일을 생각하는구나! 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결국 여기서 주님께서는 사람과 뭐로 일치시켰습니까? 사탄의 세계와 일치시켰습니다. 영생! 필요해? 그렇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죽더라도 그냥 죽지 말고 내 가는 곳으로 따라오너라. 아무도 안갑니다. 아무도 갈 수가 없어요. 왜, 그럴 능력이 없어요.

그 이유가 여기 사탄이 나오는데, 이거하고 연관시켜서 오늘 본문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천지창조를 몇 일만에 했지요? 7일 만에 했지요. 완료가. 그러면 첫째 날에 사람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첫 째 날 사람이 없었지요. 만든 것을 구경할 제삼의 존재가 없지요. 둘째 날 없지요. 셋째 날 만들 때 누구는 있었습니까? 천사들은 있지요. 천사들은 있었고 사람들은 없었지요. 넷째 날 해와 달을 만들 때 사람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없었지요. 다섯 째날 없었지요. 물고기하고 새 만들고 사람은 없었지요. 여섯 째날 사람이 등장했잖아요. 만들고 보니까 이미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다 이미 만들어진 거잖아요. 그런데 사람의 자리는 뭡니까? 이미 만들어진 것에 그냥 끼어 들어 간 거죠. 인간이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 만들 때 간여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완전히 배재되어야 되잖아요. 사탄은 천사입니다. 타락한 천사가 사탄입니다.

사탄은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 자리가 이미 다 주어진 자리가 인간자리인데, 이 인간 자리를 어디로 가지고 가는가 하면, 첫 째 날 정도가 아니고 처음에 있던 이 자리라고 이 자리에 인간을 잡아당겨버립니다. 이 선악과 따먹게 해서 이 자리로 가게 한 겁니다. 이 자리에 가니까 인간은 자기의 존재에 대해서 슬슬 하나님 앞에 토 달기 시작하고 관여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여, 저를 이렇게 만드시면 곤란하지요. 저를 이렇게 여자로 만들면 제 성격이 여자가 아니고 남자가 되어야 되는데 주께서는 실수하신 거 아닙니까? 이러고서는 이제 못 삽니다. 한 성질 합니다. 주님.” 사탄은 바로 주님께서 거저주신 은혜를 모독하고 망각하고 처음부터 창조를 내 말 듣고(사탄의 말이지요.) 사탄에 적합하도록 사람 만들어야 된다고 우기는 것이 인간의 현재 만든 생각입니다.

자, 밥 딜런의 생각은 결국 뭐예요? 누가 누굴 따지는 겁니까? 인간의 대표자로서 누구를 따지는 거예요? 하나님을 향하여 지금 따지고 있는 거예요. 진리를 나한테 달라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천국을 내 앞에 대령하라는 겁니다. 천국을. 말은 그렇게 안했지, 지금 교회 다니는 젊은 애들 다 그런 생각하고 있어요. 내가 힘들게 바쁜데 고시공부 안하고 이렇게 한순간 교회 나왔으니까 내 취직자리 대령하고 내 결혼자리도 대령하고 내가 원하는 인생, 비전, 꿈을 내 앞에 딱 갖다 바치라는 거예요. 누구보고? 예수보고. 왜? 내가 당신을 인정해 줄 테니까. 내가 메시야를 인정하노라. 지가 메시야를 인정해요. 그 젊은 애가 커서 어른된 거예요. 나이 많아서 교회 왔다고 해서 인생 알아서 왔다고 믿지 마세요. 그 안에 사탄 들었습니다. 악마 들었어요.

모든 게 전부 다 취미고 오락이고 본인은 절대 죽지 않아요. 자기 성질을 누가 죽입니까. 지가 보호하고 있지요. 이 성질을 감추기 위해서 이 더러운 성질을 본인도 알거든요. 알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겸손하라 하니까 지 성질은 그렇지 않고 겸손하라 하니까 어떻게 해요? 겸손의 페인트, 노루표 페인트해서 겸손해서 자기를 완전히 칠을 해버려요. 칠을 하고 가면을 만들던지 해서 겸손, 은혜 받음 이런 거 가지고 칠을 해보고. 환상 받음 이런 것도 하게 되고. 십일조 했음도 하고 파키스탄 선교 갔음 이런 것도 하고. 의료봉사도 했음 이런 것도 하고 이제는 너무 두꺼워. 두꺼워서 본인이 누군지를 몰라요. 자기는 안에 들어있고. 대책이 어떻게 돼요?

주께서는 모세와 그 단체에서 대책을 어떻게 했습니까? 오늘 본문에 해답이 나오지요. 간단했지요. 어떻게 했다? 무섭게 했다. 무섭게 해버려요. 무섭다는 말은 그동안 자기가 애굽에서 꾸미고 가렸던 모든 가면들이 아무짝도 없지요. 그리고 시내산은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흔들기죠. 흔들기를 해버려요. 흔들기를 하게 되면 가면과 위선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무리 숨어도 안 되지요. 20절 다시 보겠습니다. 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러 뭐로 한다? 돌로 침을 당한다. 짐승이라도. 이것은 얼마나 무서운지.

저는 이번에 미국가 있어가지고 경험을 못했습니다. 그런데 미국가 있는 동안 대구에 있는 사람들은 경험했답니다. 흔들어대는데 특히 고층건물에 있는 사람들은 이유도 모른 채 모섭다는 거예요. 나중에 두고 보게 되면 왜 무서우냐하면 내 것 빼앗길까봐 내 것 없어질까 봐 이만한 인생 살기 위해서 얼마나 눈물과 콧물 짜내고 얼마나 스스로 노고가 많았습니까. 다 그것이 한 줌의 잿더미 속에 날아갈까 봐 내가 없어질까 봐 내가 겁이 난 거예요. 단절입니다.

차라리 저를 없애버리세요. 이렇게 나와야되는데 그게 아니고 저를 지켜주옵소서. 하고 교회 나오는 겁니다. 교회 나온 목적이 그거에요. 이렇게 흔들기하는 이 세상에서 저를 안 흔들리도록 지켜주옵소서. 정말 그 교회에 주님이 계시면 “니가 뭔데? 니가 뭔데 너를 지켜줘?” 주님은 절대로 우리를 지켜주지 않습니다. 주님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복음밖에 나오지를 않아요.

주께서는 새 언약을 지킵니다. 이건 뭐냐, 말씀을 지킨다. 했고, 지난 낮 설교에서는 이걸 가지고 뭘 지킨다? 예언을 지킨다. 했지요. 과거가 중요하냐, 예언이 중요하냐,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니 속에 있는 예언. 예를 들면서 드라마 이야기를 했지요. 어떤 여자가 가방을 드는데 가방이 보물이야? 가방 안에 들은 게 보물이야? 남자가 웃기는 식으로 놀리듯이 이야기했거든요. 상당히 중요한 말이에요. 왜냐 하면 요새 여자들이 명품가방 좋아하잖아요. 니가 지금 가방을 보호하는데 그 명품가방이 보물이야? 그 안에 진짜 그 가방보다 더 귀한 보물이 들어있는 거야? 묻은 것처럼 우리가 우리를 지키는데 도대체 우리 안에 있는 이 십자가복음 이게 중요한 거예요? 껍데기인 우리가 중요한 거예요?

바로 하나님께서는 무섭게 하는 이유가 니가 중요해서 모세따라 애굽에서 나온 게 아니고 어린양의 피가 중요해서 너희로 하여금 어린양의 피의 혜택을 입고 이 광야까지 오게 했다. 이 시내산까지 오게 했다는 거예요. 그리고 네가 안고 있는 그 어린양의 피와 그리고 니가 받아야 될 그 언약, 십계명과 관련성이 있다는 겁니다. 어떻게 관련성이 있는가? 그 십계명과 이 구원받은 광야에서 바로 제사법이 등장해요. 그게 피입니다.

아까 24절 한 번 봅시다.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예수님의 흘린 피가 아벨의 흘린 피보다 더 나은데 그 피가 어떤 피인가 하면 중보의 피라는 거예요. 중보의 피. 중보의 피라는 말은 어떤 환경 속에서? 겁나도 너무 겁나는, 무서워도 너무 무서운 환경 속에 있을 때 비로소 어떤 피의 가치가 도드라지게 돋보인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주께서 지키는 게 뭐라고요? 나를 지키는 게 아니고 십자가 복음을 지킨다면 우리로 하여금 어떤 인생을 살 게 만듭니까? 늘 두렵고 무섭고 떨림으로 살 게 만들지요.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28절 봅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찌니” 어떻게 섬기라고요? 두려움으로 섬겨라. 두려움으로 섬기면 우리에게 어떤 혜택이 주어지냐 하면, 세상이 무섭지 않아요. 권력자가 무섭지 않아요.

그럼 그동안 주님이 안 무섭다는 것은 결국은 안 무서운 게 없는 게 아니고 뭐가 무서우냐 하면 타인이 무서워요. 남이 무섭고, 나이 들면 자식이 무섭고, 취직은 하지 않고 집에서 빈둥거리는 자식이 무섭고, 중2 중3 자식이 무섭고 사춘기가 무섭고, 주위에 가까운 사랑해야 된다는 그 윤리성이 무서워요. 부부기 때문에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그 윤리적인 압박감이 무서워요. 성질 같아서는 헤어지고 싶은데 헤어지면 안 된다는 외부의 따가운 시선이 무서워요. 그리고 이혼했다고 하면 친정에서 오는 무시 이런 게 무서워요. 그동안 쌓아온 자기 의와 자기의 성과가 하루 만에 무너지는 게 무서워요.

그래서 사람은 무서운 가운데 어떻게 사느냐,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파는데 이게 뭐냐 하면 된 통으로 무서운 걸 안 닥쳤기 때문에 그저 기존의 무서움으로 어쩔 수 없어 벌벌 떨고 사는 거예요. 그러면 노아는 어떻습니까? 노아도 역시 먹고 마시고 이런 게 무서워요. 무섭지만, 된 통으로 더 무서운 게 등장했습니다.  뭐냐 하면 앞으로 얼마 후면 온 지구상이 물로 덮인다는 그 소식이 더, 더, 더 무서워요. 그 앞에서 사랑의 하나님 그런 거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다 묻어버립니다. 하나님은 조폭이에요. 그냥 삽 들고 묻어버려요.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고 묻어주시는 하나님. 묻어주시는 조폭의 하나님.

묻어버리면 뭐가 날아가는가 하면 그렇게 애지중지했던 나의 지난 찬란했던 과거의 그 업적과 성과들, 그걸 얻기 위해서 내가 먹고 싶은 것 안 먹고 고이, 고이 간직했던 나의 도덕성, 이게 중요해요. 나의 도덕성. 도덕성을 뭐라고 하는가 하면 성경에서는 자기 의라고 하지요. 로마서10장3절에. 이걸 유대인들은 뭘 못 놓는다? 자기 의를 못 놓는다. 이 유대인들에게 아주 미사일을 쏴버리죠. 뭐 가지고? 갈라디아서2장에서. 율법으로 의인은 없나니, 율법으로 의 같으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공연히 죽었다고 되어있어요. 그러니 갈라디아서2장에서 주님께서 십자가 이야기할 때 앞에 먼저 쫙 깔아놓는 게 있지요? 율법으로서는 의롭다 할 위인은 있다? 없다? 없다. 없다 이 말이죠.

그런데 유대인들의 의인은 어디서 나온 겁니까? 율법에 대한 행함으로 나온 의지요. 왜 율법을 줬습니까? 바로 인간 속에 마귀 들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주께서는 율법을 준 거예요. 미끼지요.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어쩔래?” “지켜야지요.” “그래,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싹 잡아당깁니다.

모세의 율법이 전부인 줄 알았지, 바리새인들에게는 예수님의 나온 말씀이 산상설교가 율법인 줄 몰랐어요. 완벽한 율법은 오른손이 하는 걸 왼손이 모르게 하라. 이 앞에서 혹시 그걸 해 낸 사람 있으면 손들어보세요. 우리 가운데.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한 사람 있다면 그 사람은 IQ5 안됩니다. 정신병자든지. 왜냐 하면 두뇌가 오른편 왼편 다 연결되어있어 가지고 반드시 알게 되어있어요. 진짜 뇌사상태가 되면 몰라요. 이걸 지킬 위인이 없습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성령 받아서 지켰습니다, 하는 사람 있거든 그 사람은 정신병자라고 생각하면 돼요. 거짓말하고 있는 거예요. 오른손이 하는 걸 왼손이 알게 돼 있어요. 주님께서 그 말씀하는 것은 주의 말씀으로 단절하기 위해서입니다.

산상설교는 새로운 권세가 주어지는 겁니다. 이런 권세는 우리가 들어본 적도 없다. 새로운 권세가 주어질 때, 기존의 두려움 말고 낯선 두려움이 우리에게 와야 됩니다. 그 낯선 두려움은 우리가 피한다고 피하는 것이 아니고 그 낯선 두려움을 우리 내부에다가 그걸 아예 장착해버렸어요.

우리가 지키려고 하지 말고 아예 절개를 하세요. 우리의 마음을 절개해서, 우리의 양심을 절개해가지고 주의 그 귀한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와 버리세요. 지키려하지 말고 지켰다! 나는 하나님의 의를 따냈다! 소유했다. 나는 또 주의 말씀을 이만큼 성과를 거두었네. 하지 마시고 아예 그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와 버리세요. 들어와 버리면 그게 뭐가 되느냐 하면 그렇게 우리가 쥐고자했던 사랑이 되고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는가 하면 그렇게 기존교회에서 외치고 있는 거룩이 됩니다.

사람이 딴 사람이 돼요. 거룩이란 뜻은 분리됨. 다른 영역에 속함.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 되지요. 뭐로서? 우리 안에 지킬 수 없는 말씀이 우리 안에 꽉 차있을 때 이제는 그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껍데기 같은 우리를 주께서는 마구 다루실 겁니다. 10분 쉽시다.
 공은주(IP:119.♡.152.148) 16-10-25 18:06 
안양20161014b히12장22절(의도와 우연)-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은 제가 첫 번째 시간에 이야기한 게 있어요. 히브리서11장에서 믿음의 선조들이 아벨부터 죽 나와 있지요. 순서대로 아벨부터 노아해서 나와 있잖아요. 아브라함 나오고 이삭이야기 죽 나오는데 그건 순서대로 직선으로 나열한 거고 히브리서12장에서는 그런 자들의 공통점이 무엇이냐를 끄집어내는 거예요. 모든 조상들이 있는데 조상들의 공통점이 뭐냐는 겁니다. 자,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어요. 믿음으로 만들었다 하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지금 방주 만들면 돼요? 안 돼요? 안 되지요. 그럼 방주 만든 것이 공통점이 될 수 없습니다. 공통점 하나를 끄집어내자는 거예요. 어떻게 끄집어내는가, 이렇게 끄집어냅니다.

오늘 제목이 이겁니다. ‘궁지’ 둥지 아닙니다. 둥지를 틀어 봐! 아닙니다. 궁지와 자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궁지에 몰아넣습니다. 궁지의 특징이 뭐냐 하면, 막혀있다는 거예요. 할 수 있는 건 다 했는데 그 끝은 절벽이었다. 오도 가도 못하는 거예요. 그것을 이미 예수님이 공생애 때 십자가로 보여줬습니다. 그렇게 오병이어로 사람들에게 인기 얻고 그리고 물 위를 걸으시고 귀신 쫓아내는 소문났고 관중들을 몰고 다니시고 각색 병든 자들이 주님 앞에 병 낫기 위해서 왔고 메시아 나타났다고 예루살렘 입성할 때는 어린아이까지 종려나무 들고 호산나 부르고 대단한 인기지요.

그래서 유대인들도 요주인물로 설정했잖아요. 살려주면 안 되겠다고. 특히 요한복음11장에서 마리아, 마르다 오빠 어떻게 됐습니까? 죽었던 나사로를 나흘 만에 살려냄으로서 예수님은 유명인사 될 뿐만이 아니고 살아났던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덤벼들었다 했지요. 화려한 미래가 있는 것 같았는데 예수님께서 뭘 주목하느냐, 목자를 치니 양들이 흩어졌다. 그 많은 자들이 양이 아니었던 거예요. 양은 없고 목자를 이해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결국 홀로 된 자에요. 혼자 남았는데 누구 앞에서 홀로 된 자인가, 아버지 앞에서 혼자된 겁니다.

이 자리, 아버지 앞에서 혼자된 자리라는 것은 앞당겨 보여주는 심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가지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심판할 때 예수님의 인물이나 키 이런 거 보지 않고 예수님이 죄인이냐, 아니냐, 그것만 보지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심판받을 때, 우리가 죄냐, 의냐 그것만 보고 심판 받습니다. 직업이 뭐고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가는 일체 묻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죄냐, 의냐 할 때 반드시 주어지는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심판 기준이 주어지겠지요. 누가복음19장에 보면 성전에 두 사람이 등장했습니다. 하나는 바리새인이고 한 사람은 세리가 등장했잖아요. 그 때 주께서 제시한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기준이 되어서 제시된 거예요. 바리새인은 기준을 자기가 무엇으로 했습니까?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하고 구제했고 이것은 누가 들어도 구제까지 했으니까 굉장히 겸손하고 십일조 했으니까 돈을 사랑하지 않은 사람이 되고 그리고 평소에 말씀대로 살았다고 자처하니까 이 의는 누구의 의에요? 본인이 해서 얻어진 의지요. 본인이 심어서 얻어진 의잖아요. 자기 의가 자꾸 마일리지처럼 쌓인 거예요. 바리새인에게.

그런데 거기에 비해서 세리는 자기 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없다는 사실을 누가 알아요? 본인도 알지요. 그래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제가 이 정도로 성의를 표했으니까 주께서 이 정도로 보상해달라고 기도했습니까? 아니면 그냥 엎드려서 고개를 못 들었지요. 죽여주셔도 할 말이 없습니다. 이렇게 한 거예요. 예수님이 딱 오셔서 순회재판을 하면서 언약에 합당한 아버지와 예수님만 아는 언약의 합당한 사람은 바로 누구냐 하면 죄인이 합당한 거예요. 죄인이니까. 자기의 죄를 아는 죄인의 특징이 뭐냐 하면 보상이나 기대 같은 것을 일체 안하겠지요. 이거 했으니까 이만한 것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는 게 있어요? 없어요? 일체 없는 거예요.

어려워지니까 쉬운 것부터 해봅시다. 아까 창세기하면서 첫 째 날 둘째 날 했지요. 마귀가 뭐라고 했습니까? 마귀는 그 때 천사였으니까 이미 알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아담을 자기가 알고 있는 이 세계로 이 자리로 오게 하는 겁니다. 그리고 자리가 원래 아담의 자리가 아니고 어떤 자리인가 하면 바로 지금 하나님과 사탄이 싸움했던 그 자리로 인간을 잡아 당겨버린 거예요. 땡긴 거예요. 당길 때에 사탄이 하나님한테 대들었던 이유가 등장하는 겁니다. 뭐냐 하면 선과 악에 대해서 우리도 지식을 확보할만합니다, 하고 우겼던 거예요.

선과 악을 아는 자는 피조물은 다 죽게 되어있어요. 이게 싫다는 거예요. 사탄은. 자기만 그걸 아는 게 아니고 그걸 인간에게 심어줘 버렸지요. 심어주면서 선과 악에 대해서 하나님과 같은 레벨이 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 속에 뭐가 있습니까? 양심이라는 게 있는 거예요. 양심. 양심에 늘 쫓기고 살아갑니다. 시달려요. 우리가 교회 다니면서 가만히 자기를 살펴보세요. 뭐가 자꾸 단단해지느냐 하면 우리의 양심이 단단해지면서 결국 자기 양심 하나 관리하기 위해서 수십 년 교회 다닌 게 돼요. 적어도 교회 이만큼 했으니까 착한 일 선한 일 많이 했으니까 어중간히 과속해도 봐주겠지. 소소한 죄는 주께서 그냥 눈감고 질근 넘어가겠지. 라고 하는 요 기준이 무슨 기준이냐 하면 마귀가 우리한테 알려준 기준이에요. 선악 기준이에요.

그런데 이건 여러분이 아셔야 돼요. 선악기준으로 우리를 심판하지 않습니다. 생명나무로 심판해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면 그건 구원이고 양심을 갖고 있던, 선악을 갖고 있든 간에 주를 사랑하지 못하게 되면 저주를 받게 되어있어요. (고전16:22) 저주받습니다. 그러면 이 말이 우리를 궁지로 몰아넣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이 이리 있는데 아까 양심이라 하는 것은 어디에 들어있습니까? 인간 안에 양심 있지요. 그러면 양심관리를 내가 합니까? 남이 합니까? 내가 하지요. 내 소유니까 니 것이니까 내가 하는 거예요. 이건 타인이 필요 없어요. 내가 알아서 내 양심 바르게 살면 돼요. 인간 한평생 바르게 살면 된다. 내가 하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기준이 되면 내 기준을 내가 관리하기 때문에 저는 이만큼 열심히 살았습니다. 내면 되는 거예요. 하나도 어렵지 않고 성실하게 산만큼 이겁니다, 하고 내놓으면 되는데 문제는 예수를 사랑하는 것에 기준이 되면 예수는 우리 몸이 아니고 예수님은 딴 몸이 되거든요. 예를 들면 저 개가 있는데, 예수님께서 저 개를 사랑하면 천국 보내주겠다고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겠어요? 내가 내 양심조로 하겠지요. 개야 너를 사랑한다. 라고 나는 지금 착한일하고 있어. 개야, 너를 사랑한다. 라고 지금 착한 일하고 있어. 주님 제가 지금 개를 사랑하는 거 보이지요? 라고 자꾸 곁눈질하겠지요? 그러나 정작 사랑받을 개는 ‘저 아저씨가 뭘 그리 중얼 중얼 거리고 있는 거야.’ 한다. 말이지요.

인간은 무슨 행동을 하고 무슨 생각을 해도 자기 경계선 밖으로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갖고 있어요. 이게 문제거리에요.  처녀, 총각이 서로 사랑한다고 하는데 말은 전부다 거짓말입니다. 왜냐 하면 자기가 쓰는 단어하고 저쪽에서 쓰는 단어가 이게 안 맞아요. 이게 비켜지나간다고요. 살아온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그 단어를 구축하는 이미지가 같은 이미지의 내용이 안 담겨요. “우리 집에서는 이 말을 이렇게 해.” “우리는 집은 그렇게 안 해.” 결국은 말이 달라져요.

남자들이 결혼할 때, 여자보고 니가 나하고 결혼하게 되면 니 손에 물을 안 묻히겠다. 손에 물 안 묻히는 방법은 딱 2가지 방법밖에 없어요. 고무장갑 끼워주던지 손목 자르던지. 제가 캘거리 강의에서 했잖아요. 여자들은 결혼시작이 사랑시작인 줄 착각하는데 남자는 결혼시작이 사랑은 끝난 거예요. 내 건데 사랑은 왜 하는데. 공 들일 이유가 없어요. 내거 됐는데 공을 왜 들여요. 내거 되기 전에 공 들여야지. 이미 내 소유인데. 지는 밖에 나가 취미생활 해야지.

사람은 자기 공들인 것을 잊지를 못합니다. 절대로 잊지를 못해요. 공들인 것은. 내가 지금까지 내가 키웠는데 얼마나 힘 들었습니까. 그걸 왜 잊어버려요. 천국가기 위해서 얼마나 그동안 조심했고 자기 관리했고 자기 절제했습니까. 그놈의 온유, 화평, 자비, 그거 한다고 얼마나 손해 많이 봤습니까. 성령의 열매 맺는다고. 거룩질한다고 온갖 경건 다 했잖아요. 이거하면 복 줄까 싶어서. 이거 하면 기도응답 될까 싶어서. 얼마나 사전에 조바심을 내면서 많이 했습니까? 이제 또 수능 앞두고 있어요. 아들 수능 앞두고 권사들 또 행동 조심에 들어가요. 지 행동 때문에 성적 점수 하나 내려갈까 싶어서.

모든 게 자기한테 공들인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 바깥에 벗어날까요? 못 벗어날까요? 바깥으로 못 벗어나요. 이게 뭐냐 하면 자기를 위한 자기 언약이에요. 주님이 아무리 약속을 해도 이 약속을 누구 언약으로 바꾸느냐 나를 위한 나의 약속 언약으로 바꿔버려요. 왜냐 하면 나는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거 성공한 사람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도 이걸 성공할 수가 없었어요. 12제자? 마찬가지입니다. 배신 때리고 다 가! 가! 가! 다 가버려. 다 가버리고 난 뒤에 그들은 쳐다봤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유일하게 인정한 사람은 바로 죽음이 끝이 아니고 사흘 만에 도로 살려내신 그분, 그 분이 죽기 전에 내뱉었던 모든 말들은 이것은 아버지와 예수님만 아는 창조주의 비밀이었던 사실을 그동안 얼마나 마귀가 우리의 마음을 세뇌를 줬는지요. 얼마나 양육과 훈계로 우리를 벌벌 떨게 만들었는지. 목숨을 담보로 니 그러면 죽는다! 니 그러면 죽어! 니 그러면 인생 실패야! 이런 것으로 협박용으로 해서 얼마나 그동안 타인을 통해서 압박을 하고 협박을 했는지. 그런 선입관가지고 예수를 믿으니 그냥 예수님을 닭 쫒던 개처럼 돼버린 거예요. 그냥 홀로 가버렸어요. 다 가버렸어요.

제자들은 무능력한 자로 발각되었습니다. 아무것도 못해요.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 그것은 주님의 소원이지 제자들의 소원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자기 몸도 못 추리고 있는데 무슨 주의 증인이 되겠어요? 기다려라. 누굴 보내겠다? 예수님이 자기 영을 보내요. 여기서 문제가 큰 게 뭐냐 하면 성령이 안 오면 어떻게 합니까? 이 문제가 생겨요. 오겠다 했는데. 만약입니다. if. 만약에 안 오면 어떻게 해요? 믿어도 안 오면. 이걸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오늘 강의의 제일 중요한 부분입니다.

궁지에 너무 좌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궁지와 자유’ 둥지 아닙니다. 둥지라면 아닙니다. 궁지와 자유. 자, 어떻게 바뀌는지 보겠습니다. 궁지에 들어갈 때는 이유가 있어요. 영어로 인텐센 intention, 의도, 기대라는 뜻입니다. 철학의 현상학에서 중요시해요. 인텐션, 반드시 인간은 행동할 때 그냥 행동하는 것이 아니고, 생각할 때 그냥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의도를 가지고 행동합니다. 그런데 의도를 가지고 행동한다, 할 때 의도에 뭐가 붙는가 하면 시간관을 휘감고 기대를 해요. 자기가 알고 있는 시간관을 감고 의도합니다. 시간관이 어떤 시간관이냐 하면 과거(기억)에서 현재까지는 실선입니다. 현재에 와서 과거가 있기에 현재가 됐다고 확신합니다. 확신.

인간의 모든 믿음이라 하는 것은 사실은 미래라는 믿음이 아니고 과거에 토대한 믿음이에요. 이것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이 아니고. 술 안 먹는 운전수가 낫기는 낫더라. 왜? 음주운전해서 또 박아버리면 불에 타서 10명 죽을 수 있으니까. 졸음 안하는 운전수가 필요하거든요. 이건 뭐예요? 해보니까 확률 상 유리한 게 있지요. 사람들은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는가 하면 그걸 믿음이라 해요. 신뢰한다는 거예요. 신뢰한다. 이런 게 있어요. 퀴즈 내볼게요. 어릴 때 아버지가 자식들과 엄마한테 폭력을 행사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소리 소문 없이 떠나버렸어요. 자식들이 나중에 공부 잘해서 의사가 되어가지고 자립했습니다. 자, 아버지한테 양육비를 줘야 될까요? 주지 말아야 될까요? 안 준다. 가 정답입니다. 줄 필요 없어요.

그런데 반대로 자식이 부랑자인데 괜찮은 부모가 살아있다. 부양비를 줘야 됩니까? 안 줘야 됩니까? 반드시 줘야 돼요. 그 나쁜 아버지에게 부양비를 줄 필요가 없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왜 그런가 하면 이미 술과 도박으로 날릴 것이 뻔히 알기 때문에, 그걸 가지고 신뢰성이 떨어졌기 때문에 할 필요가 없어요.

그러면 교회에서 사람들이 목사님이 뭐라고 하게 되면, 사람들이 일단은 남의 눈이 있으니까 믿습니다. 하고 쌍시옷 넣어서 믿씁니다. 믿씁니다. 하니까 믿으려고 하고 아멘하면서 남발하면서 믿긴 믿거든요. 그러면 집에 가면 가만히 있습니까? 아니면 요걸 실습해봅니까? 자, 실습을 하는 이유가 뭐지요? 이론은 됐는데 실제로 내가 믿는지, 안 믿는지는 뭐로 측정해야 됩니까? 이론을 한 번 해보는 거예요. 새벽기도 연속으로 40일 나오면 은혜 받습니다. 하는 것을 확인해보기 위해서 해보고, 십일조 내면 창고에 넘칩니다. 하는 것을 확인해보기 위해서 십일조해보는 거예요.

실습하는 이유가 뭐지요? 안 믿기 때문에 그래요. 안 믿기 때문에 해보는 거예요.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믿는 것은 믿음입니까? 믿음 아닙니까? 그것도 신앙에 없는 거예요. 해보고 “아! 되네.” 라고 믿는 것은 그 다음에 계속해서 된다는 보장 하에 되다가 되어야 돼요. 그렇게 되어야 되는데 한 번은 됐는데 그 다음에 똑같이 했는데 안 될 경우에는 어떻게 할 거예요? 에이, 아니네. 되겠지요. 안수해서 감기 낫더라 말이죠. 그러면 뭐라고 합니까? 믿음으로 하니까 병이 낫지요? 그러면 그걸 듣고 에이, 못 믿겠다. 또 해봐라. 감기든 사람이 또 해보거든요. 될까요? 안 될까요? 될 리가 있습니까? 그냥 판콜 먹고 푹 쉬면 좋아요. 안되잖아요. 주변에서 뭐라고 합니까? “니 믿음 없네.” “이상하게 되던데.” 이리 해요.

또 예를 들겠습니다. 우연히 하다가 방언이 터졌어요. 미처 녹음할 생각을 못했네. 그 다음에 녹음 소리를 지가 듣고 싶어서 녹음 틀어놓고 해봅니다. 잘됐어요. 2시간 동안 잘됐어요. 이제 자랑질합니다. 친구 불러가지고. “내 방언 들어봐.” 이게 안 되네. 그럼 녹음기 틀어주는 거예요. “에이, 이거 니가 연습한 거다.” 누가 있든 간에 늘 되어야 되지요. 늘 안 되지요. 이게 믿음이 없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이 세상에는 믿음이 없습니다. 그럼 없는 믿음을 무엇으로 가짜로 채웠느냐, 경험담 중에서 괜찮은 것만 신뢰할 만한 것만 골라서 현재의 믿음으로 그렇게 장착한 겁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현재에서 미래는 뭐냐 하면 이게 실선일까요? 점선일까요? 점선이에요. 점선이라 하는 것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점선이 방향이 어떻게 되겠어요? 미래1, 미래2, 미래3 여러 가지 경우가 있겠지요. 그러면 여러 가지 경우가 있다면 현재의 자기가 확고한 믿음가지고 그 다음에 뭐하겠습니까? 아까 했던 인텐션, 기대하겠지요. 특히 젊은 애들 생각해보세요. 복음학교에 있는 애들 생각해보세요. 열심히 기도하잖아요.

자, 기대를 할 때, 이 기대의 내용이 무엇으로 채워지겠어요? 이미 과거, 현재에서 이건 누가 때려죽여도 이건 주의 일이라고 확정된 게 나름대로 있겠지요. 그걸 그대로 복사해가지고 그대로 요 점선에다가 옮겨 심으면 이게 뭐냐 하면 지금껏 주의 종으로 살아왔으니까 앞으로 주께서 이렇게 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라고 이야기해요. 그런데 믿습니다, 라는 말을 하나님이 들으면 솔직히 뭘로 듣겠어요?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하고 듣기겠지요. 왜? 그렇게 해줘야 지금 내가 신자 맞다, 라는 것이 스스로 확인되기 때문에. 스스로 확인되는 신앙은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자기 의가 되는 거예요. 이건 신앙이 아니에요.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자기 확신을 해왔겠어요. 그것도 유대인이 집단적으로 해요. 집단적으로 그렇게 자기 확신을 해온 겁니다. 지금도 하고 있어요. 메시아가 오신다. 감람나무에 온다. 스가랴에 봐라. 거기에 감람나무 서잖아. 계속해서 지금도 그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어요. 문자대로 오신다. 구름타고 오신다. 이미 오셨는데. 인정 안 해요. 구름타고 와야지. 구름타고. 예수님께서는 오죽 답답했으면 너희들이 내가 메시아인 줄 몰라? 봐라 인자의 구름타고 오리라. 하니까 돌로 치고 때려죽이려고 했지요. 마태복음25장에서.

문제는 현재의 우리가 기대를 갖고 있다는 것. 기대를 하고 있으면서 뭐가 생겼습니까? 갑자기. 과거, 현재, 미래라는 이 시간성이 있지요. 제가 방금 이 시간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있다고 이야기했는데, 이 말을 달리 이야기해봅시다.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그 이야기하고 싶은 거예요. 이러한 현재의 내가 있으나 과거, 미래에 대한 기대와 그리고 회상에 대해서 여기서 잊어버린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영화나 드라마에 보면 현실을 잊은 사람이 종종 있어요. 뭐냐 하면 기억상실증입니다. 갑자기 차로 박아서 기억상실증. 기억상실증에 걸리게 되면 이게 잊어질까요? 기억상실증에 걸려도 이 테두리를 안 벗어납니다. 왜? 기억나지 않는 대목만 빠지고 나머지 대목가지고 또 이 구조를 그대로 장착해서 똑같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을 사랑하고 나 자신이 구원받은 사람 맞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 자기 잘남이죠. 자기 의로움을 자기 자신을 상품화시켜서 천국에 자기가 스스로 자기가 집어넣기 위한 노력의 이 구조 틀을 그대로 가지고 교회 나와서 성경을 보는 거예요. 그대로. 보다 미래에 점점 더 접근해 가는 것. 이걸 가지고 성화론이라 해요. 성화론. 한 발작 조금만 더. 이걸 평편한 데로 가는 게 아니고  산으로 가게 되면 이건 무슨 역정? 천로역정. 계단으로 되어있어요. 요만큼 더 요만큼 더 깃발 다 보여. 천국 깃발 다 보여. 아주 나무뿌리 채 뽑을 것 같아.

그런데 올라가는데 성경에 보니까 먼저 된 자는 나중 되네. 뒤에는 벌써  쌩~하고 나중 된 자가 뛰어 올라가. 오호~ 추월을 당할 것 같아. 기도30분하는데 이건 늦게 와가지고 온지 한 달도 안 된 사람이 40분하는 거예요. 약이 올라서 속도를 더 냈다. 터보엔진 달아서 60분. 안 지려고1시간. 목사님은 새벽기도해서 빨리 갔으면 하는데.  두 시간째 둘이 버텨가지고 날로 기름 값만 날아가네. 개척교회 기름 값 날아가네. 누가 기름 값 주는 사람도 없는데 빨리 끄고 가야 될 텐데. 기름 아낀다고 끄면 또 교인 쫒아낸다고 소문나면 장사 안 돼. 눈치 봐서 5분 10분하고 가주면 기름 아끼고 목사님도 잠 좀 잘 건데. 누치 코치도 없이 계속 안가고 2시간째 버티고 있으니까 진짜 한나처럼 소녀여, 술 먹었나? 이럴 판이라. 요걸 어떻게 말하는가 ‘한 맺힘’ 한에 쫒겨. 한국의 기독교는 한에 쫒겨. 맺힌 게 많아요. 남편 때문에 맺히고 자식 때문에 맺히고.

자,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하면 시간을 반대로 돌려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 어떻게 했습니까? 성령이 오지요. 성령은 다 이루었다의 완성으로서 십자가의 영으로 오셨어요. 다 이루었다. 그래서 구원의 능력은 십자가에 있는데, 십자가의 특징이 뭐냐 하면 어리석고 미련하다고 되어있습니다. 어리석은 능력과 미련한 능력이 우리를 구원하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 한 것은 대개 똑똑한 거예요. 왜? 자기가 자기를 관리해야 되니까.

지금 현재에서 기도하면서 미래의 좋은 걸 얻기 위해서는 또 성경에 보니까 기복신앙하지 말라 해서 기복신앙 또 다 빼네. 주여, 남들은 지 가정 잘되고 교회 부흥되라고 기도하지만, 저는 그런 게 아니고 그저 하늘나라 확장을 위해서 그야말로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 맥아더의 기도, 강철 왕 카네기의 기도, 유명한 3종류가 있어요. 수도원에서는 프란치스코의 기도가 많이 걸려있고 보통은 십일조의 왕이라 불린 록펠러기도, 맥아더기도 있어요. 그 자기관리의 철저함이 무엇을 용납 안하겠습니까? 자진해서 어리석고 자진해서 미련할 마음이 있어요? 없어요? 턱도 없는 소리에요. 바보가 되면 기대를 접지요. 그러나 바보가 아닌 이상 자기 희망과 비전과 꿈을 스스로 포기할 의사가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주님께서 어리석고 미련하게 한 것은 이것은 뭐냐, 모든 인간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처음부터 애초에 어리석고 미련하다는 통보입니다. 이 통보를 현재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진모습인 것을 수용하면 됩니다. 그 수용하는 능력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난 뒤에 성령이 와야 되는데 성령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요19:30) 다 이루었기 때문에 뭐가 있느냐 하면 이미 미래가 끝난 상태에요. 이걸 가지고 뭐냐 하면 이게 역사거든요. 역사가 끝났으니까 이걸 뭐라고 하는가 하면 묵시라고 해요. 묵시.

역사의 틀에서 위에서 보는 것. 그렇게 되면 인텐션(의도, 기대)이 아니고 우연 또는 우발. 이걸 하나의 개념화 시키면 사건. 우연과 우발이라는 사건은 같은 말인데 특징이 있어요. 아까 인텐션은 기대지요. 기대는 연속적인가요? 끊어져있던가요? 과거, 현재, 미래가 연속되어있지요. 이 우연과 우발은 연속되어 있을까요? 끊어져있을까요? 끊어졌지요. 끊어졌으니까 우연이죠. 끊어졌으니까 똑같은 경우가 생긴다? 안 생긴다? 생길 것을 기대하면 안 되는 거예요. 왜? 그것은 내가 기대해서 벌어진 일이 아니고 낯선 일을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도발적이지요. 아까 해물전이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까? 안했지요. 아무도 기대 안했습니다. 그걸 가지고 우연이라고 합니다. 우연히 만났네. 그런 노래 있잖아요.

우연의 특징은 뭐로 이어졌느냐 하면 사건인데, 사건이 인간의 인식에 어떻게 인식되느냐, 은혜로 인식됩니다. 은혜는 나의 행함과 대립이 됩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행함 같으면 기대를 하기 때문에 연속을 계속 찾게 돼요. 자, 이렇게 행했으니까 요게 뭐가 되느냐, 주여 이걸 원인으로 쳐주시고 내가 이렇게 주님께 성심 성의껏 다했으니 주님 쪽에서 이제 제 기대에 부흥할 일만 남아있네요. 이렇게 금식까지 했으니 주께서 아시지요? 응? 응? 꼭 이걸 이야기하면 기복신앙 되니까 차마 말은 못하고 주께서 제 형편아시지요? 자식형편, 집안 형편 아시죠? 응? 응? 우리 교회 형편 아시지요? 응? 그럼 주께서는 뭐라고 하시는지 알아요? “뭐? 뭐?” “응? 응?” “뭐? 뭐? 말해! 뭐?” “말로하면 기복신앙 되는데.” “이야기 해봐!”

인간의 모든 것을 행함에서 성령이 와버리면 이건 뭐가 되느냐 하면 모든 행함을 은혜로 바꾸는 작업에서 미련하고 어리석은 존재로 우리를 이렇게 확정을 짓고 결정을 짓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이제 쉽습니다. 미련하고 어리석게 되려면 여러분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자, 갑자기 말이 바뀌었지요. 처음에는 어떻습니까?  아버지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할 때 그 거룩에 귀담아 듣고 주여, 어떻게 하면 거룩합니까? 어떻게 하면 긍정된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에베소서5장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을 수 있습니까? 어두움의 자녀에 속했다가 빛의 자녀가 되었으니 빛의 자녀가 되면 그 말씀을 어떻게 지킬 수 있습니까? 말로 시작했다가 이제는 무엇으로 바뀐다? 어떻게 하면 내가 보다 더 어리석고 보다 더 미련한 곰탱이가 되겠습니까? 라고 기본형이 바뀌겠지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걱정하지 마라. 날마다 너를 뭐로 보낸다? 둥지가 아니고 궁지로 몰아세운다. 날마다 궁지로 몰아세워요. 날마다 궁지로 몰아세워버리면 무엇을 꺾어버리느냐 하면 우리의 모든 기대를 다 우지직 작살내시는 분이에요. 매일같이. 버스 탈 때도 아마 5분 뒤에 올걸! 15뒤에 오고. 왜 늦게 왔습니까? 하면 파업해서 늦었습니다. 뭐든지 모든 것을 궁지로 몰아세워요.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가 소유하는 게 아니고, 우리가 그렇게 만들어지지요. 소유할 건 없어요. 우리는 성령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성령이 우리를 소유하기 때문에 우리를 그런 식으로 활용한다니까요. 울산에 한화케미컬 퇴직한 사람들이 중국 갔다 오면서 “여보게, 중국 잘 갔다 왔지. 이제 우리 울산 가서 다 죽자.” 이렇게 온 사람 누가 있어요? “아, 이상하다? 지금쯤 죽을 때 됐는데. 대구 지나고 경주 지나고 여러분! 이제 우리 20분 뒤에 죽는다. 우리. 불에 타서 죽는다. 다 같이 할렐루야 찬양하자.” 이런 거 봤어요? 없지요. 밤 10시 넘어서 잤겠지요. 피곤해서 잤겠지요. 10명 죽었잖아요. 7명다치고. 그걸 뭐라고 하는가,  사건.  액스던스 accident 우연히.

자, 여러분에게 물어봅시다. 이 우연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들이 나쁜 짓해서 이런 사건이 일어났습니까? 착한 일해서 일어났습니까? 나쁜 짓, 착한 짓 상관없이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상관없지요. 그러면 여기서 무엇이 깨지는가, 우연으로부터 나가버리면 여기서 뭐냐, 이것이 깨지는 거죠. 선과 악에 대해서 우리가 신경 쓰면 안 되지요. 제가 이야기한 것 중에 제일 어려운 이야기에요. 인간이 선과 악에 대해서 신경 쓰면 안 됩니다.

아까 성전에서 세리가 기도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죄인이라 했지요. 자, 묻습니다. 그렇게 엎드리고 죄인 되면 구원받습니까? 안 받습니까? 꼼수지요. 꼼수. 절대로 구원 안 됩니다. 왜? 모든 구원은 뭐다? 우연히. 모든 구원은 우연히 되어야 됩니다. 그렇게 자기를 낮추고 자기를 부인하면 구원 안 돼요. 절대로 구원 안 돼요. 하나의 꼼수를 부리는 거예요. 요렇게 하면 구원해 줄걸! 기대를 갖고 있지요. 기대가 항상 좌절시키는 것이 누구 몫이냐 성령께서 하실 몫이에요.

그 증거가 사도행전입니다. 사도바울이 손수건 들 때, 어떤 사람이 손수건을 가지고 왔거든요. 사도행전19장에서. 자, 내 손수건 가져갔으니까 분명히 병든 자 나을 걸. 사도바울이 기대했겠어요? 안 했겠어요? 전혀 기대 안했습니다. 사도바울도 깜짝 놀라요. 그걸 가지고 깜놀.

만약에 그걸 알았더라면 사도바울 교주됩니다. 내 손수건 25만불에 팝니다. 이렇게 나올 거예요. 이 손수건 가는 곳마다! 할 거예요. 마치 이 생수마시면 여러분 영생 얻는 생수다. 생수뿐만 아니에요. 어떤 특정 문장 외우시면 복 받습니다. 어떤 방언을 하면 복 받습니다, 있고 그건 가지, 가지에요. 교회 기와장에 돈 내고 이름 쓰고 올리면 여러분이 복 받는다는 것도 있고, 십일조하면 복 받는다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어떤 것을 얻고자 하는 자에게 어떤 형식과 제도를 제공한다는 그 자체가 이것은 완전히 기대를 부추기는 일 밖에 안 된다니까요. 기대가 만약에 삽입되어 버리면 지금까지 태어나서 살아온 모든 것이 누구 공로에요? 본인 공로가 되어버려요. 말씀대로 조심스럽게, 조심스럽게 또 조심 살았기 때문에 이만큼이나 살아왔다고 스스로 자기 행위를 자랑한다니까요.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착한 일을 했을까요? 예수 믿는 사람을 안 죽였다. 예수 핍박하는 척하면서 뒤에서 다 빼줬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 만났습니까? 어떠했습니까? 야무지게 죽였잖아요. 예수 믿는 사람들을. 그냥 체포만 한 게 아니고 야무지게 죽였어요. 야무지게 죽일 때 누가 가슴 아프겠어요? 예수 믿는 가족들도 가슴 아프겠지요. 야무지게 밟아줬습니다. 왜냐 하면 그것이 자기가 아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아는 방법이기 때문에.

그게 바로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다. 할 때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제가 질문 던지겠습니다. 사도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예수님 만나기 전에 죽였던 것은 그건 은혜였습니까? 은혜 아니었습니까? 은혜지요. 참 이런 정답이 나오면 왜 이리 기쁜지 몰라. 과거에 했던 모든 강도짓이 전부 은혜가 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돼요. 다시 말해서 성령이 행하신 일이에요. 다시 말해서 지난번 강도짓하고 예수 사람 죽인 것은 전부 다 내 생각에서는 필연이 없게 되어있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그것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으니까 은혜는 곧 뭐가 통한다? 우연입니다. 전부 다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에요. 더 나아가서 내가 이 땅에 태어난 것도, 여러분이 이 땅에 태어난 것도 꼭 해물전만 먹는 게 우연히 아니에요. 내가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도 개 안고 있는 것도 전부 다 우연이입니다.

그리고 이제 강의 마치고 바깥에 나가면 여러분들이 생각지 못한 우연이 계속 만날 거예요. 계속 우연이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있어요. 이걸 다른 말로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 여러분들을 기다릴 거예요. 그러면 그 은혜에 대해서 우리의 태도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요것만 하면 되지요. 감사 같은 말로 기쁨. 감사, 기쁨으로 살면 돼요.

그래서 성령 안에서 데살로니가전서5장 16절, 17절에 보면, 성령 안에서 모든 범사에 모든 일에 따지지 말고 모든 벌어진 일에 대해서 감사하라. 이것이 성령 안에서의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게 하나님의 뜻이에요. 이 긴긴 이야기하면서 뭔가 자꾸, 자꾸 삽입돼서 들어간 게 많지요? 아까 기대한 그것을 무엇으로 대체해버렸습니까? 기대를 우연으로 바꿨지요. 그 우연으로 바꾸기 위해서 뭘 한다고 했어요? 자꾸 궁지로 몰아넣지요. 우리를.

강의 처음부터 다시 돌아가 봅시다. 11장에 나오는 모든 신앙의 선조들이 나왔던 그 대목, 선조들의 특징을 보여줬던 모든 대목들은 결국 뭐였다? 궁지에 몰린 모습들을 쫙 깔아놓은 거예요. 아이, 어떻게 아버지가 자식을 죽입니까? 그것도 사랑하는 자식을. 차라리 자기보고 파키스탄 선교하라고 하면 하지요. 나 보고 죽으라하면 죽어요. 사람은 그만한 오기 있어요. 주의 뜻이라면 절벽에서 뛰어내리라 하면 뛰어내릴 오기 있어요. 인간들은. 미쳐버리면 뛰어내릴 수 있다고요. 주의 뜻입니다. 하고 빠삐용처럼 한다고요. 마지막 탈출하는 것처럼. 이게 자유다! 하고 뛰어내릴 수 있어요.

내가 스스로 나를 관리하기 때문에 나는 나를 죽일 수 있어요. 이 핑계대면서 자살할 수 있는데. 문제는 자살하지 말고 누구를? 니 사랑하는 자식을 죽여라, 이 말은 내가 사랑하는 자식을 죽인다는 말은 곧 누굴 죽인다는 말이냐, 내가 미워해서 죽는 것은 자살이고, 내가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을 없애라 이 말이거든요. 니가 니 속에 사랑 남아있는 한 그것은 구원 못한다는 뜻이에요. 천국도 없다는 뜻이에요.

그 믿음은 아브라함의 본인의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누가  봐도 어리석고 미련한 짓이에요. 그 능력은 베드로전서1장10절에 보면, 아브라함에 뭐가 들어있는가 하면 아들의 영이, 예수의 영이, 다시 말해서 성령이 들어가서 일찌감치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일을 하도록 연극배우로 그렇게 설친 겁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일 때, ‘주께서 수풀에 돌아봤을 거야! 아마도. 주께서는 이렇게 심하게 하지는 않을 거고 뭔가 대비책이 있을 걸.’ 하고 살펴보고 ‘에헤, 수양 있는 걸 보고 아이고, 아마 이쯤해서 스톱할 거야.’ 이렇게 해서 죽였다고 생각하는데 그걸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그건 신뢰라 했지요. 아까 과거에 있는 내가 알고 있는 경험담을 총동원해서 믿을만해서 믿겠다는 거예요. 젊은 사람들 보고 설교할 때 “이 정도 보상 주는데 여러분, 믿을 만하지요. 예수가. 사랑할만하지요?” “예, 사랑하겠습니다.” “여러분 취직도 시켜주고, 장가도 해준다면 예수 믿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예.” “여러분, 부처 믿겠습니까? 예수 믿겠어요?” “예수 믿겠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것은 믿음이 아니고 그들이 알고 있던 경험담을 그들의 기대를 마음껏 들어준다는 거예요.

그리고 거기에 또 말려드는 사람들은 또 뭐예요? 결국 그 둘의 만남은 뭐냐 하면 신앙이 아닌 것 가지고 신앙이라고 개념을 갖다 붙여서 억지를 부린 겁니다. 그런데 그러한 과정이 우리한테 필요할까요? 안 필요할까요? 죽을 때까지 필요해요. 왜? 왜냐 하면 알아서 우리가 그걸 고칠 능력은 우리한테 없기 때문에. 우리는 똑똑하기를 원하지. 절대로 미련하고 어리석기를 원하지 않아요.

계속 더욱 더 이성적으로 더욱 더 간교하게 일하고 싶어요. 생각하고 싶어요. 따라서 우리는 그 일을 할 수밖에 없어요. 그게 사기든 뭐든 나에게 희망을 주고 나에게 기대에 부흥한다면 뭐든지 할 용의가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막아서서 노선을 천국으로 바꾸시는 몫은 누구 몫이다? 그건 살아계신 예수님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이지, 우리가 할 수 있는 몫이 아닙니다.

다만, 공통점이 있어요. 그건 뭐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님이 이 정도로 무섭다는 것을 공통적으로 다 알게 될 거예요.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고난을 앞당겨 참여한 사람이 되었다. 이렇게 히브리서12장에서는 이야기한 겁니다.

12장 2절 봅시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뭐했다? 참으사, 그 뒤에 나온 단어가 뭐지요?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우리가 할 수 없기 때문에 성령께서 우리를 뭐로 한다? 우리를 점점 더 부끄러운 자로 궁지로 몰아세우는 겁니다.

어디 멀리 이민 가서 미국, 캐나다 가가지고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 얼마나 잠심하겠어요. “너희들, 나 무시했지. 고국에 있을 때. 나 캐나다 가서 성공했어! 나 미국 가서 성공했어.” 떠들고 싶지요. 그래가지고는 지옥 갑니다. 큰소리 못 치게 만듭니다. “니 요새 캐나다 어떻게 사노?” “말하지 마라. 지금 말할 입장이 못 된다.” “어렵구나?” “말하지 말라니까.” “요새 미국 가서 어떻게 살아?” “더 망했어! 망했어.” 여유 돈 벌어서 부모님께 전상서 돈 보낸다면, “형편 안 된다. 지금. 나도 못 먹고 산다. 지금” 지금 미국 경제가, 캐나다 경제가 어렵다는 거예요. 제가 요번에 캐나다 가서 들어보니까 석유 값 반 토막 나가지고 캘거리 동부 쪽에 경제가 한국 사람만 해도 3,500명을 쫓아냈다고 합니다. 외국 사람들 쫓아내는데. 기름 값해서 수지타산이 안 맞아서. 기름 회사가 운영을 못해요. 캘거리에 탑이 있거든요. 탑 앞에 보면 40몇 층짜리 건물이 있어요. 제일 높은 건물이 바로 그 캘거리의 석유회사입니다. 거기서 내가 사진 찍었는데.

보세요. 이게 이민 간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얼마나 내일이면~ 또 자랑할 걸, 과시할 걸 만드는데 주께서 또 궁지에 몰아넣네. 그런데 성령이 오니까 뒤돌아보니까 이런 어리석고 진짜 이런 미련 곰탱이처럼 살아가는 이것이 두 자로 뭐였다?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방식인 것을 알 때, 이게 뭐로 이어집니까? 감사와 기쁨으로 오는 것을 가지고 성령 안에서 기뻐하는 거예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 제외하고 우리끼리 열심히 나 혼자 스스로 혼자서 훌륭하게 사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주님과 동행하면서 궁지에 몰아넣는 그것이 바로 자유의 길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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