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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12 20:58:31 조회 : 834         
언약의 위력 161111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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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은주(IP:119.♡.152.148) 16-11-23 09:46 
안양20161111a히12장23절(언약의 위력)-이 근호 목사

히브리서12장22절해봅시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이 내용을 보게 되면 앞에 어떻다. 어떻다. 하는 앞에 붙는 형용사가 수식어가 많이 붙지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성경에서 어떤 지명이 나오고 어떤 명사가 나올 때는 그러한 지명과 명사는 그냥 한 순간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역사적으로 사건들이 계속 발생되고, 그 발생된 사건들이 집약되어서 어떤 특정 지명과 공간을 형성해요.

그래서 성경을 볼 때에 어떤 지명과 공간을 보려면 여기 현재 누가 있는가만 보면 안 되고 과거에 이 장소가 되기까지 어떤 일들이 누적되고 쌓였는가를 다 끄집어내줘야 돼요. 이만큼 쌓여있는 그 사건들을 하나, 하나 벗겨내어서 설명이 되어야 된다 말이지요.

그 한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쉽게 하겠어요. 천국이라 하잖아요. 사람들은 천국을 오해하기를 내가 여기 있고 천국 생각한다면, 대부분 이렇게 해요. 내가 죽으면 가는 곳이라고 해요. 이건 너무 직접적으로 이야기해요. 내가 죽으면 가는 곳. 죽으면 가는 곳은 천국이 아니고 저 세계지요. 저 세상이지 천국이 아니에요. 성경에서 천국이라 하는 것은 죽으면 가는 곳이 아니고 천국이 되기까지 구약이라는 게 있습니다. 천국까지 구약이 있고, 천국이라는 이야기는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 신약에 나와요. 그러면 구약에는 뭐가 나오느냐 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나와요. 그러면 신약도 하나님의 나라 나와요.

언제 나오느냐 하면, 구약과 예수님의 공생애, 마태복음, 마가, 누가 복음하고 그다음 요한복음 및 사도바울의 편지를 보게 되면 요 중간을 과도기라고 합니다. 구약에서 신약과 겹치는 부분. 여기에 하나님 나라가 많이 나와요. 특히 마태복음 같은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또는 천국은 이와 같으니, 천국이라는 말은 우리나라 말로 하나님의 나라에요.

그런데 여기 신약에 오게 되면 과도기 천국을 거쳐서 오게 되면, 이 나라가 아들의 나라로 바뀌면서 무엇으로 되느냐 하면 그냥 하늘로 되어버립니다. 하늘로. 그렇게 되면 구약의 처음에 시작할 때는 그냥 하늘로 시작해요. 하늘로 시작해서 하나님나라 갔다가 이게 비슷한 말로 천국 갔다가 그 다음에 요한복음 같은 경우는 영생의 나라 이리 이야기하고 하늘로 있거든요. 요한복음 같은 경우, 나는 하늘로 올라간다.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이렇게 되어있다 말이죠.

그러면 개념이 이렇게 변화될 때, 아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변할 때마다 뭐가 일어난다고 했습니까? 새로운 사건들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면 새로운 사건들이 일어나게 되면, 새로운 사건이 일어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가 처음 하나님의 말씀을 받음에서 받았던 인식이 있지요. 선입감. 선입감이 사건 없이는 안 바꿔집니다. 꼭 바뀌어져야 돼요.

내가 알았던, 죽으면 저 생 간다고 하는, 저 생이라는 개념 자체의 내용을 계속해서 바뀌되 진짜 성경에서 말하는 하늘 또는 천국, 하나님 나라 또는 아들의 나라 또는 영생의 나라 합치되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일어나는 고 사건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같이 되풀이 되어야, 우리가 가는 곳이 저 생이 아니고 천국이라는 사실을 알아요. 그래서 아까 본문에 보면 그렇게 뒤에 수식어가 많이 붙는 거예요.

다시 한 번 볼까요.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몇 가지에요? 이렇게 되어있다 말이죠. 제가 지금 요 이야기하면서 요한계시록은 여기에 포함 안 시켰습니다. 왜냐 하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용어와, 이 요한계시록 앞에 나오는 모든 용어들은, 같은 단어를 사용해요. 같은 내용을 사용하는데, 내용은 달라요.

같은 단어라도 내용이 최종 완성된 채 다시 회상하는 식으로. 단어는 옛날 단어고 보는 모습은 이미 완성된 입장에서 다시 과거를 돌아보면서 보는 겁니다. 쉬운 예를 들게 되면, 40~50년 만에 초등학교 동창생을 만났다. 그러면 이름이 생각나던가요? 별명이 생각나던가요? 별명이 생각나지요. 아이고~ 코찔질이 오래만이구나! 이렇게 되거든요. 그러면 나이 60돼가지고 지금은 코 안 흘린다. 이렇게 되거든요. 지금은 코 안 흘려요. 하지만, 부르는 용어가 옛날 그 때 용어 쓰잖아요. 이게 바로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사람이 전부다 거의 다 엉터리 해석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완성단계에서 봐야 될 것을 가지고 그 용어가 있는 옛날식에 내용을 끄집어내다 보니까 666 맞으면 지옥 간다. 666피해야 천국 간다. 이런 식으로. 용어는 옛날 용어인데 의미는 이미 구원을 받은 입장에서 봐야 될 것을 가지고, 억지를 해가지고 그 내용을 그런 식으로 설명하니까. 대표적인 것이 신천지지요. 그런 식으로 하니까 야! 말씀대로 풀이한다고.  뭘 말씀대로 풀이해요? 요한계시록은 말씀대로 풀이하면 안돼요. 완성된 입장에서 풀어야 돼요. 완성된 입장에서.

그래서 만약에 요한계시록을 우리가 흔히 아는 그 개념대로 해버리면, 버텨야 구원받아요. 구원 받았는가, 안 받았는가 그것도 미확정돼가지고 버텨야 되는데, 버티기 위해서는 죽도록 버텨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 요한계시록 공부하는 사람들은 전부다 불안, 불안해요. 구원은 못 받았지, 앞으로 지가 어떻게 대처할지 그건 암담하지, 3차 대전이 일어난다니까 3차 대전 피할 지하 벙커 만들어야지, 666 피해야 되지, 거기다가 짐승 피해야 되지, 국가도 주의해라. 교황도 주의해야 된다. 적그리스도 삼위일체를 주의해야 된다. 주의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마귀도 주의해야 되고. 마귀한테 이겨서 구원받은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은 마귀를 못 이겨요.

그런데 요한계시록 잘못 푸는 사람은 마귀 피한다고 난리라. 마귀의 힘을 우리가 피할 수 있습니까? 마귀 안에 있는데 무슨 마귀를 피합니까? 안되지요. 이 마귀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입장에서 ‘아! 옛날 그랬지.’ ‘옛날 코찔질 흘렸지.’ ‘옛날 구원 못 받아서 저런 되지도 않는 짓거리를 했지. 구원 받으려고 저렇게 애를 썼지. 다 헛짓인 것을.’ 그런 느긋한 마음으로 회상하는 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사도 요한은 얼마나 여유만만 했겠어요? 이미 구원받은 입장에서 귀향 살이 하면서도 세상에 대해서 연연해하는 사람보고 얼마나 안타까워했겠습니까? 아무것도 아닌데. 그냥 멸망 받을 도성인데.

그걸 아직까지 미련 있고 애착 두느냐 말이지요. 기대할 게 아무것도 없는데. 이게 바로 이미 구원받은 사도요한의 입장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보는 그 마음이.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제일 마지막에 있어요. 제일 마지막에.

자, 제가 어디까지 했느냐 하면, 성경에 나오는 개념들, 특히 천국개념이라 하는 것은 그 앞에 많은 사건들이 그 안에 접혀져있다. 부채 접으면 접히잖아요. 펼치면 활짝 펴지지요. 펼쳐있는 개념이 오늘 본문에서는 중첩하듯이 단어를 붙어놓은 거예요. 그래서 그걸 제가 지금 설명해 드리려합니다. 어떤, 어떤 사건들이 있었기에 사건 터질 때마다 하나, 하나씩 적당한 개념들을 천국을 묘사할 때 그런 식으로 묘사했는가를 제가 설명 드리는 겁니다. 설명 드리는 방법은 원리는 간단합니다.

언약 사건이 터질 때마다 +언약사건+언약사건+언약사건 이리 되지요. 이걸 영어로 하면, a and b 그리고 앤드지요. 우리말로 하면 또. 또. 또. 자꾸 플러스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 길에서 동창생을 만났다 칩시다. 제일 먼저 묻는 게 “요새 니 뭐하노?” “건축 일한다.” 그리고 끝났습니까? 또 “애들은 몇이고?” “아는 둘이고.” 또 묻지요. “몸은 아픈데 없고?” “몸은 건강해.” 또 “마누라 살아있나?” “그래 잘 있어. 잘 안 죽네.” 또. 또. 자꾸 오래 간만에 만난 사람을 규명을 하고 한 덩어리로 규정을 하려면 들어가는 요소가 한 두 개가 아닙니다. 그 때는 또, 또 이렇게 하지요. 자꾸 이렇게 들어가게 하지요.

그게 뭐냐 하면, 확고한 개념을 형성할 때에 이걸 하나의 틀이라 합시다. 빈 틀인데, 틀에다가 진흙을 부어버리면 진흙은 요 틀 모양대로 그대로 딱 뒤집어보면 그 모양대로 나오지요. 이미 자기가 가지고 있는 선입감에 맞추기 위해서 묻는 거예요. 그래서? 또. 그래서? 또. 그래서 10분 만에 헤어졌습니다. 누구한테 오늘 길에서 여보 누굴 만났는데 그 사람이 이런 사람이라고 방금 또. 또. 또. 더한 걸 다 합쳐서 그걸 하나로 죽 연결해서 이어보는 거죠.

옥경이의 가사 나오잖아요.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남자가 이렇게 물으니까 여자가 희미한 등불 밑에서 아무 말도 못하고 뚝 뚝 눈물만 흘리지요. 그것만 봐도 고생 많이 했구나. 나 싫다고 가고 난 뒤에 팔자 고치려고 했더니만 그래 내가 가고 난 뒤에 어떤 남자 만나가지고 신세 조저났구나. 그게 옥경이 아닙니까. 그게 바로 사람의 얼굴에 나타나는 거죠. 인간의 얼굴에는 그 사람의 과거가 겹쳐있다 이렇게 하는 겁니다. 제가 대구강의에서 한 것 같은데 최근에. 천국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죽어서 가는 저 세상이 아닙니다. 우리의 선입감이 얼마나 잘못됐는지 그 잘못된 선입감을 뚫고 기어이 우리를 생명나무 있는 천국으로 데려가기 위해서 주께서 또. 또. 또. 오늘 강의 제목을 또라고 할까. 또. 또.

계속해서 우리가 죄지은 것을 다 낫게 희생하시고 우리한테 핍박받고 구박받는 그런 선지자를 보낸 그런 아픔과 희생이 눌리고, 눌리고 중첩이 된 그것이 신약의 천국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천국 말할 때 앞에 한 단어가 붙어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천국은 심판의 나라다. 자기의 죄를 알지 못하면 가지 못한다. 다른 말로 하면 자기의 죄를 아는 사람은 천국 갈 수 있다. 그러나 스톱!

자기의 죄를 알고 바로 천국 못가고 자기 죄, 천국 그 사이에서 뭐가 있느냐 하면, 오늘 본문 24절,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뭐라고 합니까? 뿌린 피. 죄와 천국 사이에 뭐가 있다? 피가 있는 거예요. 피.

우리는 죽으면 저생 가잖아요. 아니야! 그 선입감이 바뀌어져야 돼요. 그건 불교에요. 교회 나왔으니까 천국 간다. 아니라니까요. 교회 나왔다고 천국 가는 거 아니에요. 교회 나왔으면 뭘 알아야 돼요? 내가 원초적으로 뭘 해도 죄인인 것을 알아야 돼요. 그래서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피 복음을 증거 할 때 ‘아! 교회가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죄인인 것을 아는, 지금 이런 잘난 체하고 나도 인간답게 산다고 남한테 내세울 만한, 그런 것에서 뭔가 달라져야 돼요.

나도 이 정도야! 니한테 밑지지 않아! 니 날 무시하지 마! 니 내거 건드리면 안 돼! 나도 과거사 있어. 자꾸 이렇게 자기 것을 가질 생각을 말고 무슨 과거사든 이게 예수님의 피 앞에서는 몽땅 죄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걸 이야기해줘야 돼요. 그러면 목사가 어디까지 이야기하게 돼요? “여러분, 오늘 교회 나왔습니까? 그것도 죄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교회에 한 30년 동안 봉사했지요? 그래서 장로 되었지요? 장로 그것도 죄입니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돼요. 목사가 강단에서.

왜냐 하면, 그들은 자기가 이 교회에 나온 것부터 해서 누적된 선행이 있잖아요. 그 선행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선행인 줄 알고 그 선행가지고 감히 저생을 가려는 무모한 짓을 할 수 있어요. 그것은 엉터리인데. 그동안 스님, 목사들이 그렇게 많이 이용 해쳐먹었지만, 격려해서 돈이나 빼먹었지만, 복음 아는 목사가 왔다면 절대로 그런 소리하면 안 되지요. 이 교회 지을 때 14억 바친 장로보고 그거 죄입니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목사가 과연 후임자로 올 수 있을까요? 오라 하겠습니까? 보따리 풀지도 못하고 굿바이해요. 역사와 전통이 있는 이 교회, 이 지역사회에서 제일 하나님의 역사가 크게 일어난 이 교회를 니가 뭔데 젊은 니가 무시해! 이러면 이거 뭐 보따리 풀자마자 싸고 나와야 됩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요령껏 전해야 되지요. 그런다고 복음 안전하면 구원도 통째로 되지를 않아요.

교회 갖다 바쳐서 천당가려고 하는 교인들이 그걸 삐! 하고 그건 이 길이 아니네. 그건 길이 아니거든요. 언약의 피가 보이는 길이 아니에요. 그건 자기의 잘남이 예배당 벽에 자기 잘남의 나르시시즘하지요. 벽을 볼 때마다 자기의 과거의 수고한 것이 그냥 보이면 그건 자기 전당이지, 자기를 모시는 신전이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붙어있는 벽돌이 아니잖아요. 교회의 당회장실에 보세요. 전임자의 사진이 죽 걸려있는 것 보면 나는 이게 검찰청인지 행정기관인지 분간도 못하겠어요. 뭐 이런 게 다 있어. 내가 이야기했어요. 친구 목사한테. 이러면 안 된다고. 내가 이야기한다고 말 듣나. 이 사진 다 떼어야 돼요.

어떤 사업체도 하나님이 안 받습니다. 교회 예배당 사업체도 안 받습니다. 교회라는 사업체를 주께서 받은 적이 없어요. 여기에서 말하는 교회는, 23절에서 말하는 총회와 교회라는 말은 총회를 말하는 교회입니다. 교회들을 말한 게 아니에요. 지상에 여러 군데 흩어져있는 교회가 아니고 하나밖에 없는 교회를 이야기합니다. 에베소서4장4절,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요,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라는 말을 왜 쓸까요?

지상에서는 절대로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방안이 없습니다. 이 지상에서는 어떤 수를 써도 서로 하나가 될 수가 없어요. 심지어 부부도 하나가 안 돼요. 부부는 하나가 아니에요. 하나님이 짝 지은 것을 니가 나누지 못한다는 말은 나누지 못한 부부가 따로 있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 부부라 하는 것은 영원한 부부에 대한 표상입니다. 아담 자체가 두 번째 아담에 대한 표상이잖아요. 그 말은 뭐냐, 진짜 예수님이 모든 마지막 최종적인 의미는 예수님에게 갖고 있고 거기서 미리 파생되어 있는 우리 인간들의 삶은 예수님으로 하나 됨을 보여주기 위해서 다양성으로 흩어져있는 겁니다.

그러니 이 다양성은 반드시 예수님을 경유해야 하나가 되지 그냥 둘이 붙어가지고 맞춘다고 부부가 아니에요. 부부가 되는 조건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 땅에 있는 부부가 정말 둘이 아니고 하나가 되려면 둘 다 주님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면 돼요. 그러면 둘 다 예수 안에 있으면 둘 다 하나가 되는 겁니다. 마치 여기에 음료가 있는데 재수 없지만 여기에 암컷 파리와 수컷 파리가 빠졌다면, 둘이 떨어져 붕붕 떠다니지만 같은 컵 안에서 하나가 되지요.

제가 지난 울산강의 할 때, 예수님 안을 가지고 너무 추상적이기 때문에 이걸 쉽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의 파우치라고 했지요. 파우치가 뭐예요? 지갑이지요. 여러분들이 지갑 한 번 보세요. 지갑 안에 보면 칸막이가 있잖아요. 카드 넣는 곳, 동전 넣는 곳 있다 말이죠. 칸막이는 달라도 한 지갑 안에 있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역할은 같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세상에서 인간 대 인간이 역할마저 하나가 되려고 강요를 하게 되면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남자의 역할 따로 있고 여자의 역할 따로 있어요.

남자는 돈 버는 일, 여자는 돈 쓰는 일. 주례할 때마다 말해요. 여자는 지가 벌지 않고 남편이 벌어다 준 쓰는 재미 느끼라고 여자가 있고, 남자는 지가 애써서 벌은 돈을 지가 쓰지 못하고 사랑하는 아내가 쓰는 데서 오는 즐거움과 쾌감을 느끼라고 부부가 있다 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남편 역할하고 우리 교회는 아내 역할해가지고 내가 구원받고자 하는 어떤 행동으로 구원받지 못하고 남편이 했던 그 언약의 피. 아버지와 유일하게 의견이 합일이 된 이미 합의를 봤던 그 내용을 아내가 되는 우리 교회에게 몽땅 그걸 넘겨줌으로서 아무 한 것도 없이 남편하나 잘 만나서 공짜로 가는 이것이 바로 복음이 이야기하는 구원입니다.

이게 구원이거든요. 그러니 구원파라 하는 것은 왜 이단인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해야 할 사람들이 “내가 예수 믿는다.”를 증거 하는 거예요.  내가 예수 믿는다. 내가 예수 믿는 것은 그것은 행함입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에요. 제가 지난 낮 설교에 했지요. 주여, 예수 믿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하라고 했지요. “믿어지게 하옵소서. 내가 예수 믿지 않게 하옵소서. 믿어지게 하옵소서.”

그러면 그걸 어떻게 하는가, 내가 믿는 것과 믿어지는 것과 어떻게 하는가, 하나님께서는 낯선 일을 발생시켜가지고 경쟁시켜 버려요. 내가 해결 하고자 하는 일을 사건으로 들이닥치게 되면 믿습니다. 믿습니다. 해놓고 막상 사건 나면 내가 해결하려고 해요. “주여, 내가 예수 잘 믿었는데 왜 이런 사건이 벌어집니까? 너무합니다.” 너무하다는 거예요. 그럼 주님은 “그동안 너는 나를 믿는다며. 니가 믿는 내가 이런 사건 일으켰어. 왜 갑자기 믿는다. 믿습니다. 해놓고 왜 나한테 원망 퍼붓지? 평소에 안 믿은 거 아니야? 너? 들통 났네. 본색 드러났어.” “그게 아니고요. 너무 해결하기 힘든 일을 주니까 제가 짜증 좀 부렸잖아요.” 주님께서 이야기합니다.

니가 하나님 믿어서 구원 받는 일은 없고, 예수님에 의해서 네가 믿게 하는 일이 벌어지는데 이 세상 그것보다 더 큰 일은 없어요. 그것보다 더 소중한 일은 없어요. 그게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덜 소중한 것들을 우리에게 사건을 유발시킵니다. 경쟁을 붙이지요. 그러면 “예수 믿는 것이 너무나 감사하고 고귀합니다.” 라고 한 5초. 한 10초 동안은 이렇게 고백하는가 하는데 갑자기 일 터져버렸다 말이죠. 아이고~ 이 가스 불 안 껐네. 그만 주의 감사를 찬양하다가 가스 불이 안 꺼진 걸 생각할 때, 가스 불 안 껐다. 어제 나왔는데. 그러면 집이 타면 내 집 타면 괜찮은데 남의 집까지 타면 다 물어줘야 되는데... 이런 걱정이 슬슬 들지요. “주여, 이러면 안 됩니다.”

평소에 옆집하고 잘 친해놔야 돼요. “아이고! 순이네 엄마! 부탁이 있는데 부엌에 한 번 둘러보세요. 냄비 타는가.” “아무 일 없어요.” “아이고~ 주여, 감사합니다.” 이리 되지요. 우리의 간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도대체 무엇의 기준에 의해서 간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합니까? 주님의 십자가입니까? 아니면 아직까지 연세가 안 들어서 정신 바짝 차리자! 이것 가지고 버티는 거예요? 나중에 70, 80 돼가지고 정신도 못 차리고 휴대폰을 냉장고에 집어넣고 온 집안 찾아다니고 치매 현상오고 아들이름은 영철이 벽에 붙여놓고 그 때쯤 돼야 정신 차리렵니까?

정신 차려서 예수 믿는 것은 예수 믿는 게 아니에요. 정신을 안 차리던, 치매에 걸리든 관계없이 평소에 우리가 소중한 주의 피로 인하여 오늘도 하루를 살았다. 하루를 살았다는 것은 너무 추상적인 것 같아서 오늘도 이 다리를 가지고 걸었다는 사실. 아파서 다리를 못 걸어보세요. 이 다리 걷는 것도 내 힘인 줄 알아요? 주께서 발걸음 인도한다고 시편에 나와 있어요. 주께서 발걸음을 인도하신다. 잠언도 마찬가지고.

우리 앞길은 이미 주께서 다 정해놓은 거예요. 소중한 성경 자체에 있어요. 어제 수요일 날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사람들은 성경이 이리 있으면 자기가 자기 자신의 필요한 것을 찾아서 가져온다고.  이런 것은 전부 다 엉터리입니다. 우리는 성경 밖의 인물이 아니에요. 우리의 진짜 모습을 알고 싶어요? 그러면 성경 안에 들어가세요. 성경 안에 들어가 보면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에요. 죽는 것이 그렇게 비극이 아니라는 말이죠. 요한계시록에 보면 성도가 죽는 것은 잠자는 일입니다.

야이로의 회당장의 딸은 죽어서 사람들은 울고불고 난리 났어요. 아이고~ 예수님 일찍 좀 오시지... 울고불고 난리 났을 때, 예수님은 이런 말씀하십니다. “잠 잘 자고 있는 아 왜 이리 말썽이냐?” “아이고, 예수님 잠자고 있는 게 아닙니다. 지금 의사가 말하기를 얘가 완전히 죽었어요. 그래서 장례 치르고 있습니다.” “니 눈에는 그리 보이지. 내 보기에는 얘는 자고 있다. 소녀야. 그만 자고 일어나!” 얘는 “아이고, 잘 잤다.” 이미 주 안에 있는 자가 주님에 의해서 성령이 와서 믿어지는 사람은 사나 죽으나 주 안에서 쉼을 얻고 있어요.

이 땅에서 사는 게 쉬는 게 쉬는 것처럼 안 보이지요. 왜, 날씨 춥고, 허리 아프고, 몸이 찌뿌둥하고 문제지만, 어쨌든 주 안에서는 쉼을 얻습니다. 자, 제가 방금 인용한 것이 신약들이거든요. 왜, 구약이 먼저 있고 신약이 나중 올까요? 구약은 현재 우리가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찾아와서 성령을 선물로 줘서 구원받기 이전에 우리가 하는 행세입니다. 우리가 죄인으로 하는 행세를 구약에 있는 우리 대표자들, 이스라엘이 꼭 오늘날 우리 모습으로 그 짓을 다했습니다.

그걸 4자성어로 종교놀이를 다했어요. 성전 짓지요. 십일조 했지요. 다윗은 찬양대 만들었지요. 온천지에 선교사 보내고 선교했지요. 인간이 할 수 있는 율법대로 십계명 가르쳤지요. 어릴 때부터 이마에다가 온 옷깃에다가 말씀을 도배해서 재봉틀로 박아서 말씀으로 애들을 가르쳤지요. 어릴 때부터 시편 다 외우게 했지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달달달 외우게 하는 거예요. 온갖 것 다 했는데 망했습니다.

그게 아무 소용없었습니다. 그 이유가 예레미야도 나오고 에스겔에도 나오는데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좋겠는데 딱 우리 앞에서 스톱이 됐어요. 문자가. 스톱이 딱 되니까 멀지않게 우리 코앞에 있으니까 우리의 양심과 선한 행동을 의지를 발휘해서 요거 딱 잡아서 당기면 들어올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함 팔 때, 함 사세요! 온 아파트 다 들리게 떠드는 게 있잖아요. 오징어 구워가지고 함 사세요! 하고 버티면 10만원 깔고 그러면 5미터 오고 또 깔고. 5미터 앞에 오면 확 당겨버리지요. 주님께서 함 팔러왔습니까? 십계명 사세요! 하면 간절히 기도해가지고 아이고, 그만 하시고 우리 마음에 들어오세요. 잡아 당겨서 구원받았어요? 침례교회에서 그러지요. 십자가 사세요! 십자가 사게요.  믿음으로 구원받으세요. 하니까 불교는 행함이고 자기는 믿음이니까 “그래, 눈앞의 십자가를 이제 내가 믿으면 되는 기라. 아이고, 이제 그만 약 올리시고” 십자가 확 잡아당겨놓고 진짜 예수 믿으니까 착한 일 시작하고 그러면 구원되는 겁니까?

요새는 침례뿐만 아니고 장로교회도 마찬가지고. 교리 상 5대 교리 하지만, 이게 침례교회인지 장로교회인지 분간도 안 되고 칼빈주의인지 분간도 없고 손님만 끌면 끝나는 거예요. 그런 건 없습니다. 그런 것 다 실패로 끝났어요.

고 칸막이에 율법이 우리 마음에 스톱이 된 것은 율법과 우리 마음 사이에 24절의 말씀처럼 새 언약에 뭐가 있어야 됩니까? 피 없이는 말씀이 우리 안에 못 들어와요. 피 없이는.

그런데 예레미야, 에스겔 같은 경우에는 성신이 들어오잖아요. 성신은요, 직접 오는 게 아니에요. 성신은 누구를 경유해서 와요. 누구냐, 예수님을 경유해서 성신 옵니다. 성령 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경유하면 성도다. 예수님 존재를 경유하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하신 다 이루심을 경유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십자가 사건을 경유해서 성령이 와요. 그래야 우리의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우리 안에서 고소할 수 있습니다.

율법이 온 것은 우리의 죄에 대해서 고발하기 위해서 온 거죠. 그 죄가 우리 바깥에서 고발하다가 우리 안에서 날마다 우리 안의 내부를 고발하는 거예요. 그 고발할 때 고발한 증거가 뭐냐, 바깥에 피로 나타난 거예요. 다시 말해서 유대인만이 예수님을 살해한 것이 아니고 유대인과 똑같은 아담의 속성을 지닌 우리도 유대인이 하는 행세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속성으로 이 땅에 태어났기 때문에 그 십자가 피가 오늘날 우리를 통해서 계속해서 십자가 피만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을 우당탕탕 우리의 내부적으로 이러한 현상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사도바울의 권면이나 사도의 말씀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우리는 변명과 핑계로 일관하지만, 그게 언제까지 변명으로 일관합니까? 좀 형편이 좋고 살기 편할 때는 “주님이여, 사랑합니다.” 하다가 갑자기 가정이 우환이 있으면 대번 입에서 뭐가 나와요?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 됐나? 말 대신에 내가 이러려고 예수 믿었나? 이런 소리가 막 나오지요. 내가 이러려고 목사 됐습니까? 이러려고 집사 됐습니까? 이런 소리 막 나오지요.

평소에 사실은 그런 것이 많이 깔려있었는데 꾹 참았지. “참, 내가 인간성 좋아서 참았습니다. 하나님! 다른 사람 같으면 벌써 원망했는데, 워낙 내가 기도 많이 하고 평소에 내가 한 성화하기 때문에 참습니다.” 그럼 주님께서 “그 참는 거 어디까지 참는가 보자.” “더는 못 참는다!” 이리 되지요. 더는 못 참는다. 이게 얼마나 아까운대 이것마저 가져가면 나는 무슨 낙으로 삽니까? 무슨 낙으로? 그 사건을 3자로 ‘세월호’ 그동안 갔다 바친 돈이 얼만데? 왜 이 금덩어리 같은 내 아들을 차가운 바닷물에 집어넣었냐고. 시신도 못 찾게. 세월호 유족한테 4억으로 하자. 하면 머리 다 뜯겨집니다. 그러면 4억 줄게 니 아들 죽어봐라.

바로 예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세월호를 미리 보게 합니다. 이것은 남이 죽인 게 아니에요. 누가 죽였느냐, 유병언이가 죽인 게 아니고 박근혜대통령이 죽인 게 아니고 아버지가 사랑하는 자식을 지가 바치게 하면서 “자, 어느 것이 믿음인가 보자.” 이리 나왔어요. 그게 바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에요. 조상이 그 정도 같으면 후손도 그 정도 되어야지요.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그런 믿음을. 내가 다듬어낼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교회 가서 철야해도 그런 믿음 안 나옵니다. 그럼 믿음 없으면 안 믿으면 돼요.

주께서 아예 쳐들어 와가지고 우당탕탕 우리의 내부를 성경 속에 있는 나의 내부로 전환시키는 작업을 다 이루었다! 하는 사건을 가지고 우리를 변모시켜버립니다. 변모시킨 게 아니고 사실은 우리 내부도 성경 안에 있는 처음부터 그 현실이었지요. 우리는 내 현실 따로 성경 현실 따로 괜찮은 것만 골라서 QT해서 나한테 복이나 건지려고 낚시 대를 놨지, 내 시커먼 모습이 사실은 성경 안에 벌써부터 예수님이 이야기했던 그 나라는 사실을 우리는 애써 안 들으려고 했지요.

목사가 설교해도 애써 안 들으려고 해요. 목사님 왜 자꾸 부정적인 이야기만 합니까? 애써 안 들으려고 했어요. 저는 설교해요. 애구, 가려면 가던지 어차피 가지도 않을 사람이 와서 점심만 축내지 마시고. 어차피 천국 못 갈 거 내가 붙들 이유가 없다 말이죠. 성경이 풀장이라면 풀장 바깥에서 폼만 잡지 말고 근육자랑하지 말고 풍덩 잠기자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 수영장 물이 색깔이 시커매요. 시커먼스. 들어가면 완전 잉크 물 돼요. 완전히 죄인 되어버립니다. 풀장에서 나와 서면 말끔한 고상한 교양 있는 신자가 돼요. 오늘도 교회 나왔다. 오른 쪽에 성경 책 끼고. 할렐루야! 할~렐루야! 이러면서 그게 교양인데. 성경 속에 들어가면 이러한 마네킹 짓은 못한다니까요.

요번 겨울수련회 교재 끝에 보면 ‘마분지 도시’ 단어가 있어요. 마분지 도시가 뭐냐 하면, 마분지가 어떻습니까? 마분지 종이가 별로 안 좋지요. 거칠고 더덕, 더덕 붙어있지요. 마분지 도시라는 말은 굉장히 살벌하고 냉혹하다 이 말입니다. 정이 없는 도시. 오늘날 현대인을 두고 저는 이렇게 표현한 거예요. 마분지 도시라고. 현대인의 냉혹성을.

그리고 너덜, 너덜 하잖아요. 정 둘 데가 없어요. 이 도시가. 어디가도 정이 있다 해도 자기 정을 들고 가서 사적인 정을 가져가지고 정을 풀어줘야 저쪽에서 약간의 반응을 나타내가지고 우리 모임 괜찮지 그치? 모임이 너무 즐겁다 그치? 이리 되는 거예요. 자기 정을 도시락으로 해가지고 한껏 남을 배려해서 드러내줘야 되지, 그 자체로서는 어떤 정도 없어요. 따스함도 없고. 거친 도시를 마분지 도시라고 표현한 겁니다.

마분지 도시의 특징은 뭐냐 하면, 여기에 살아있는 생물체가 없다는 거예요. 윤곽만 틀만 보이지, 이 말은 살아있는 인간은 왜 없는가, 인간은 무슨 존재이기 때문에? 오늘 이거 하나 배우세요. 인간이라 하는 것은 ‘잠정적인 존재’입니다. 있다가도 없고 잠정적으로 언제까지 이 도시에 살지 않습니다. 나이 90되면 다 죽어야 돼요. 이 도시는 잠시 나타났다가 살아가는 거죠. 그것도 한 도시에 규정되어 사는 사람 없고, “어디서 살다 떠돌아다니다 여기 안양까지 기어들어왔나.” 이러지요. 안양까지 기어들어온 그 인생, 5년 있으면 또 어디로 기어갈지 몰라요. 수원으로 빠질지, 다른 데로 빠질지 몰라요. 갈 데 없어서 죽치고 있는 거지. 어디 또 신도시 생기면 아파트 분양받아 이사 갈지도 몰라요.

그러니 이게 뭐냐, 잠정적 존재입니다. 잠정적 존재가 영원한 성경 말씀을 지킨다? 말이 돼요? 그게? 골라! 골라! 골라! 골라 지켜봤자 다 지킵니까? 이게? 다 안 지켰는데 천국을 넣어줘요? 성경말씀 100개 가운데 5개지키면 수고했다고 넣어줍니까? 구약 이스라엘 역사가 바로 인간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주의 말씀을 다 지킬 수가 없어요.

“아이구, 목사님 십계명 10개밖에 안되지요.” 십계명은 10개밖에 안돼요. 잠언서 한 번 보셨습니까? 잠언서 잔소리가 얼마나 많은 줄 아시지요? 잠언서 폈다하면 잔소리, 잔소리, 그런 잔소리가 없어요. 어디 가거든 너무 욕심내서 많이 먹지 말라. 토할까 두려우니라. 개미를 본받아라. 지혜로운 아내는 여호와께서 주신 거니까 귀히 다루어라. 동감을 안 하시는 것 같은데, 제가 눈감고 잠언서 아무데나 펼치겠습니다. 잠언서16장 무릇 지혜로운 자는 입술을 스스로 보호하되, 말조심하라 이 말입니다. 말조심 안하면 지옥 가는 거죠.

잠언서 누가 줬습니까? 하늘에서 줬잖아요. 왜 줬습니까? 지키면 축복, 못 지키면 저주. 누가 지킵니까? 그래도 최선을 다하면. 그건 니 생각이고. 그건 잠정적 존재의 생각이에요. 자, 잠정적 존재를 했는데 이 잠정적 존재의 정반대말은 뭐냐, 3자입니다. 성육신이죠. 성육신.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바로 오늘 본문 23절에 나옵니다. 하늘에 기록한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있어요?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 이 세상은 장자가 없어요. 이스라엘은 장자 되려고 했는데 실패했잖아요. 장자들의 총회. 그러면 어떤 변화해야 돼요? 장자 아닌 자가 장자 되어 버린, 장자된 자의 총집합체가 그게 뭐다? 천국이다. 그러니 우리가 생각한 것과 얼마나 달라요. 천국이라 하는 것은 어떤 장소개념인 줄 아는데, 장소개념이 아니고 인간들의 덩어리 개념. 다발개념. 더미개념. 집합개념. 이게 천국입니다.

그야말로 “아! 너도 여기 왔나?” 할 정도로 깜짝 놀라지요. “아, 왠일이고? 니가 여기 왔어. 니가 어떻게 왔는데.” “주님의 피를 믿게 되었어. 피가.” “아, 나도 그런데.” 그러니 거기에 모인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24절에 공통점이 있어요. 새 언약에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피. 예수님의 피가 나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받아주더라 이 말이죠. 합격! 하고 받아주더라 말이죠. 그것을 이 히브리서12장에 쓴 이유가 뭡니까? 그걸 죽어서 할 게 아니고, 죽어서 하게 되면 변화가 안 된 상태기 때문에 이미 그건 탈락이에요.

히브리서12장 고백을 살아서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은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겁니다. 사나 죽으나 장자들의 총회를 살아있으면서 미리 보여준다 이 말입니다. 지금. 미리 보여주는 거예요. 그게 뭐라고 했습니까? 그게 교회들이 아니고 교회라고 합니다. 그게 바로 교회라고 합니다.

자, 이제까지 교회가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설명 안 드리고 결과만 했는데, 미리 말씀드리면 교회라 하는 것은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패했던 그것을 계속 우당당탕 되풀이하면서 결과적으로 삐져나오는 것은 예수님의 언약의 피만 바깥으로 계속 고백되어지는 단체.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이러면 그래요. “목사님, 우리 그런 교회 한 번 해봅시다.” 이러는데 그런 교회 해봅시다. 해서 생긴 교회는 없어요. 왜, 우리가 못하는 이유가 우리는 다양성인데, 해봅시다! 라고 해버리면 그런 고백을 했다고 했는데 5개월 뒤에, 1년 뒤에 “그래도 어떻게 그것 가지고 천국을 가. 착해야지.” 이리 나오거든요.

“그러면 당신이 착한 것은 당신처럼 한다는 것이 착한 겁니까? 예수님처럼 하는 것이 착한 겁니까?” 한다면 “나처럼 해야 착하지.” 이 말은 왜 하느냐 하면, 본인이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확신해서 그래요. 당신도 나처럼 되면 우리 한 교회라고 쳐줄게. 이리 나오게 마련이거든요. 니는 왜 나처럼 못 착해. 그러니까 니는 지옥가지. 라고 판단기준을 본인이 행함 가지고, 형평가지고 판단기준을 내릴 가능성이 굉장히 많아요. 왜, 구약에서 그랬으니까. 그렇다면 10명 모여가지고 나중에 오야봉처럼 안되면 5명 떨어지고 나중에 지만 남고. 안되지요.

그러니까 진짜 교회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날마다 자기를 부인해야 되는데 남보고 부인하라 해요. 남보고. 자기도 부인 안하고 “니 그렇게 살면 안 돼! 니 지옥 가.” “니 걱정이나 하세요.” 지난 수요일인가 주일 오전에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최순실 자꾸 욕하는데 만약 여러분 이모가 최순실이고 여러분 친척이 최순실이라면 욕하겠습니까? 안하지.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우리 집안 누가 욕해?” 하잖아요. “이것들이 돈이 없으니까 욕하지, 돈 있어봐 욕하겠어?” 이러면서 싸고 돌지요.

안 그래도 경제가 안 좋으니까 화딱지 나는데 어디 씹을 거 없나 싶었는데 잘됐다. 해가지고 데모하고 촛불하고. 초 공장 대목도 이럴 때 대목을 보는구나. 수십만 개 만들어냈을 거 아니에요. 평소에는 절에만 팔리다가 이제는 데모 때도 팔리니 업자는 얼마나 좋겠어요. 최 순실이건 간에 유 병언이가 어떻고 하든 간에 그거 내 사람 아니기 때문에 욕하는 거예요. 내 사람 같으면 숨겨주고 변호해주고. 능력이 없으니까 그렇지 능력이 있어봐라. 나 같아도 이대 넣겠다. 능력 없어 이대 못 들어가 고 아직은. 나 같으면 돈 있으면 넣겠다. 사립대학이 뭡니까? 기부금 있잖아요. 기부금 줘서 넣으면 되지.

그렇게 남한테 해놓고 자기는 정의 실천 구현하고 있다고요. 인간은 정의 실천 구현 못합니다. 그냥 잠정적 존재일 뿐이에요. 그냥 못 가진 시기, 질투라 생각하시고, 나도 저런 환경이라면 독일이라도 어디라도 가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이 말은 그들을 칭찬하는 말이 아니고 옹호하는 말이 아니고 나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왜? 다 같은 잠정적 존재니까. 10분 쉽시다.
 공은주(IP:119.♡.152.148) 16-11-23 09:47 
안양20161111b히12장23절(언약의 위력)-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성육신이라 하는 것은 거룩한 분이 육신이 됐다는 요한복음1장에 나오는  말씀이지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이 세상에 인간들이 많고, 많을 것 같으면 그 중에서 천재도 있을 것이고, 뛰어난 사람도 있을 것이고, 경건한 사람도 있을 것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사람들 중에서 한 사람을 뽑아가지고 대표자, 중보자 삼지 왜 따로 하나님이 인간으로 따로 오셔야 되느냐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냥 하늘에 계시고 우리가 착하게, 성실하게 살아서 그 성실을 근거로 해서 하늘에서 봅시다. 만납시다. 이게 우리네의 아주 편한 상식입니다. 될 놈은 되고 시합 붙여가지고 잘사는 사람은 위에서 걷어내서 천당 가고, 못사는 사람은 들 떨어진 사람은 지옥 보내고, 중간쯤은 아주 잘사는 것도 아니고 아주 못 사는 것도 아닌 중상층에 해당되는 사람은 저 생을 따로 만들었으면 참 좋겠다. 하는 그런 생각인데, 그 생각이 바로 바벨탑의 생각이지요.

그 생각은 왜 잘못됐느냐 하면, 인간의 이름 자체가 자기를 정상으로 보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는 별 하자 없다. 정상으로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뭐냐 하면 이 세상 자체를 하나님 보시기에는, 인간다운 인간이 만약에 한 명도 없다면, 마땅히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다 저주 받아야 되고 멸망 받아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뭐가 문제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천지를 6일 만에 창조했던, 6일째 만들어놓은 그 인간자체도 같이 소멸해버려요.

하나님께서 처음에 창조하실 때, 그 계획 잡힌 대로 완성되는 것이 천국이거든요. 따라서 그 계획 잡힌 대로 되는데 마귀가 인간과 합작해가지고 파토내고 말았으니 하나님의 그 창조했던 계획이 그만 실패로 끝날 것인가, 하나님은 그럴 수 없느니라. 마지막 6일째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었어요. 그렇다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자체가 육신이 되어버리면 깨어진, 망가진 창조 세계가 그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새롭게 재창조가 되어버리면 더 이상 악마의 훼손, 악마의 방해공작 필요 없이 완성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렇다면 ‘처음부터 인간을 만들 때 마귀를 이길 수 있는 저항력을 갖고 있는 예수님만큼이나 믿음 좋은 사람을 만들지, 처음에 인간은 왜 그렇게 망가지게 했는가?’ 이런 생각이 또 들겠지요. 처음부터. 그게 뭐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형상 있다. 있다는 존재가 되고, 존재가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존재에서 어떤 기능이 나와야 돼요. 이 기능이 나와서 천국을 이루는 겁니다.

쉽게 설명하면, 성경에 나오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임금님이 아들의 혼인잔치를 마련했어요. 보니까 이 핑계, 저 핑계 다 빠졌습니다. 음식은 준비되었고 손님은 없다. 임금님 조치는 이거였습니다. 길에 가서 아무나 데려와라 했습니다. 길에 가서 아무나 데려오면 이건 그 있는 존재를 그냥 혼인잔치를 채우는 존재들로 가득 찰 거예요. 그래서 데리고 왔습니다. 데려왔는데 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나가라고 했거든요. 예복을 입지 않은 자. 그러면 예복을 입을 것 같으면 사전에 부르지를 말든지 불러놓고 쫓아내어버려요.

여기서 어떤 기능이 생기느냐 하면, 불러놓고 쫓아낸다. 두 번째 그 쫓아내는 기준은 뭐냐, 예복이었다. 세 번째 이 예복은 누가 제공한다? 이것은 주최 측에서 제공한 예복을 입어야 돼요. 본인이 예복을 입으면 안 됩니다. 입구에서 마련한 예복을 입어야 돼요. 그러면 불러놓고 쫓아낼 때 기준은 뭡니까? 예복이지요. 예복 없다고 쫓아내는 요러한 과정은 바로 인간들이 자기 세계를 마련하면서 예수님을 쫓아내면서 인간이 인간세계로서 유지되는 뭐를 제시한 셈이 되느냐 하면 어떤 기준을 제시한 셈이 돼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 대신 예수님의 존재가 천국을 만들면 되는데 여기서 무엇을 끄집어냅니까? 기능을 끄집어내는데 요 기능이 뭐냐,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창세전부터 있었던 기능이 뭐냐 하면 십자가 약속, 이 언약입니다. 언약인데 무슨 언약? 새 언약 때 그 본질이 드러나요.

새 언약이 뭐냐, 십자가 죽음이에요. 새 언약의 핵심은 두자로 하면 ‘죽음’ 누구의 죽음? 하나님의 죽음. 하나님의 죽음이 없는 사람은 천국에 못 갑니다. 하나님의 죽음이 없는 사람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없다. 그래서 복음은 뭐다? 예수님의 존재가 복음이 아니고,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십자가가 복음이 되는 겁니다. 저 죽음이 나를 살렸다는 거예요. 저 죽음이 나를 살렸다.

그래서 저 죽음이 나를 살림으로서 저 죽음 안에 들어가서야, 저 죽음 안에 내가 들어가 있어야 나는 살았다가 돼요.  그 이유가 뭐냐, 죽음에 의해서 새로이 만들어진 생명만이 생명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 영원한 비밀이었어요. 그런데 이 점에 대해서 사탄은 이 점을 공략할 수 없었던 겁니다. 그냥 사탄은 오히려 이러한 새 언약을 이루는 도구가 될 뿐이지요. 까부는데 그 까부는 것이 자기 유리한 대로 까불었지만 그 까분 것마저 예수님의 새 언약을 이루는 재료로 하나님이 사용해버린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 십자가 죽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 이스라엘을 아들 놓고 이야기하고, 그 아들은 내부 이스라엘이지요. 이스라엘이 아들의 죽음을 묘사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은 멸망을 해버려요. 이스라엘 나라 자체가. 다른 나라가 멸망하는 것하고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것하고 차이가 나요. 다른 나라의 멸망은 그냥 죽어야 될 인간이 죽지만, 이스라엘의 멸망은 아들의 멸망입니다. 그런데 아들의 멸망 그 자리에서 진짜 아들이 거기에서 모습을 출현시키게 됩니다. 죽는 자리에서 나와요. 그게 십자가 그 다음에 뭡니까? 부활이에요.

여러분, 죽어서 살랍니까? 아예 안 죽는 게 낫습니까? 어느 쪽으로 하겠습니까? 아예 안 죽는 게 낫지요. 죽었다가 살면 너무 깜놀, 깜짝 놀라잖아요. 아휴, 식겁했다! 이삭을 그냥 계속 살려주는 게 낫습니까? 죽여 놓고 살려주는 게 낫습니까? 아브라함의 아들이삭을.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이거 식겁할 문제지요.  잡으라 해서 자기 아들 진짜 죽는 줄 알았지요. 그 과정에서 무엇을 새롭게 뽑아낼 수 있습니까? 죽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
오늘 본문 23절에 의하면, 하나님의 장자가 될 수 없어요. 죽지 않고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면서 언약적인 것과 내용과 결부가 되면서 내 진짜 아들이다. 니는 내 기뻐하고 사랑하는 내 아들이다. 요단강 세례 받을 때 하늘에서 비둘기 같이 성령이 내려오면서 그런 말씀도 내려왔지요. 그러면 성령이 내려왔다는 말은 존재를 말하는 것보다도 그런 기능을 해야 돼요.

무슨 기능? 아들이기 때문에 아들다운 기능을 지상에서 펼쳐야 되는데 그 내용은 뭐냐, 아들인고로 아버지 뜻에 따라서 죽어라. 그것도 너의 죄가 아니고 택한 아들들의 죄를 위해서 니가 대신 죽어야 하느니라. 값을 치러야 하느니라. 여러분, 값을 치룬다는 무슨 말일까요? 값을 치룬다는 말은 이쪽에는 값을 치를 필요가 없다. 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거죠. 십자가로 인하여 죄 값을 치룬 사람은 자기 죄에서 오는 저주를 지워내기 위해서 추가적으로 뭐 할 게 남아있어요? 안 남아있어요? 남아있지 않지요.

‘이러면 내가 벌 받지 싶다.’ 그런 인식 드는 것은 이해합니다. ‘이런 나쁜 짓해놓고 내가 산다는 것이 너무 뻔뻔스럽다. 정말 이건 떼치 떼치 해야 돼!’ 충분히 가능한데, 실제로 자기가 자기 머리 때린다고 용서가 되는 건 아니에요. 다만 그러한 범죄를 저지를 때마다 이미 그 값을 치뤘다는 것을 잊어버렸던 그 사실을 계속해서 되풀이해서 확인하는 거예요.

그러면 뭐가 되느냐 하면, 성도가 이 세상에서 죄를 짓는 것은 바깥으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생큐! 고마움. 감사가 나오겠지요. 감사와 더불어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기쁨이 나오는데 이 기쁨은 어느 정도 기쁨이냐 하면 지금 땅이 꺼져서 내가 무덤에 파묻힌다 해도 거기서 웃고 있겠습니다. 할 정도에요. 그런 기쁨이어야 돼요. 근심, 걱정, 두려움, 공포, 불안, 삐질 삐질 땀흘림, 이런 거 없는, 조마 조마 없는 두근 두근 없고 아쉬움 없는 것. 모든 기쁨. 이 지상에서 어떤 것도 뺏어가지 않는 기쁨. 하늘이 준 기쁨이죠. 이것이 죄 사함, 용서해준 기쁨이란 말이죠.

그래서 그것이 바로 장자들의 총회가 기쁨으로 넘치기 때문에 천국가도 전혀 지루하지를 않습니다. 천국가도 지루하지 않고 복음에 지루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십자가 복음에 지루하다는 이유가 정신을 다른 데 팔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일단은 복음을 챙겼고 슬슬 내가 기뻐하는 본격적으로 나서 봐. 이 것 참 중요한 건데 그걸 지금 말씀드리겠습니다.

둘 중에 여러분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묻고 싶어요. 첫째는 내 인생을 내가 만들어가고 싶다. 두 번째, 나는 이것을 해야만 한다. 어느 쪽입니까? 내 인생은 내가 따로 만들고 싶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내가 이것을 해낸 것이 원인이 되고 결과가 뭐냐 하면 그렇게 해서 내 인생은 요렇게 아담한 인생을 따로 만들었다. 이리 돼요. 2번이 원인이 되어서 1번이 되고 싶습니까? 아니면 1번하고 관계없이 2번자체가 시작이고 2번자체가 결말 이어야합니까? 어느 것입니까? 성도의 모습은 어느 거예요? 2번은 주님의 지시가 있고, 1번은 나의 지시가 있어요. 내가 나한테 지시입니다. 니 인생 뭐야? 니 인생 니하기 나름이야. 니가 이렇게 해야 니가 니 아담한 인생 이렇게 잘 살았다. 따로 장만할 수 있어.  자꾸 나한테 윽박지르고 이걸 강요를 하는 거예요.

나이 50에 여자가 연기의 바다를 보았다. 연극도 있지만, 자식 키운다고 공부한다고 다 시켜놓고 몸은 늙은 줄도 모르고 젊은 줄 알고 착각했는데 자식 시집보내고 돌아서니까 아이고~ 허리야. 벌써 얼굴은 뜨끈 뜨끈 갱년이 와가지고 한평생 도대체 뭐하고 살았는지. 드라마 보니까 그런 이야기 있어요. 너하고 15년이나 살았다. 15년 살았는데 니하고 헤어지나?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여자가 하는 말이 그래 말이야. 내가 니같은 인간하고 15년 산다고 애먹었다. 이리 나와요. 남자는 15년 정을 봐서라도 있어달라고 하는데 여자는 니하고 15년 산 내가 끔찍하다. 니 나한테 욕하나? 퉁치자. 니 욕하고 나는 니 하고 헤어지고. 퉁치자 이리 나와요.

내 인생 내가 따로 이렇게 간직하고 있다면 어떤 일을 해도 이것이 가식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주의 사명 이 자체가 거짓이 돼요. 요거 주의 사명 잘 감당해서 이쁘게 포장해가지고 내 인생에 딱 장착해가지고 탑재해서 나 내 인생 이렇게 예쁘다! 이거 자랑하고 싶다면 이것은 사명감이 아닙니다. 이건 내가 나를 시킨 거예요. 악마가 나한테 시킨 거예요.

복음이라 하는 것은 1번을 제거하는 게 복음이에요. 왜냐 하면 하나님은 복음 아니면 다른 것을 지시한 적이 없습니다. 성도가 돼서 어떤 일을 할 때, 이게 주의 일이냐, 주의 일이 아니냐, 판단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이게 복음을 위한 것이냐, 참한 내 인생 따로 마련하고자 하는 일이냐, 둘 중에 하나입니다. 이쁘장한 내 인생이라면 이건 복음 아니고 어떤 일이라도 이건 평생 동안 해야 될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주의 지시가 되는 거예요.

주의 지시라 하는 것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이 1번을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2번 그 자체로서 만족해야 돼요. 그래서 우리들이 살면서 고민, 걱정 아니 될 수가 없지요. 안될 수 없는 게 아니라 눈만 뜨면 고민 걱정이지요.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걱정하면서 도대체 누구를 위하여? 무엇 때문에 고민하는지 걱정하는지 생각해 본 적 있습니까? 고민, 걱정의 특징이 뭐냐 하면 그걸 해서 어떤 성과를 내가 기대하는 성과를 소유하고자 하기 때문에 고민, 걱정이 되는 거예요. 시키는 대로 하는 되는데.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아니고 시킨 대로 했으니까 뭔가 따로 챙기고 싶은 거예요. 참한 내 인생, 그래서 자랑질하려고. 스스로한테 자랑하고 싶어서. 나 봐, 잘  살았잖아. 서로가 서로한테 토닥거려주는 거예요. 잘 살았잖아. 힘들었지만 너는 웃을 수 있는 자격이 있어. 이 가을에 홍시 먹을 수 있는 자격이 있어. 이런 거. 그래, 그래, 놀러가. 스페인 놀러가. 니는 한 평생 자식을 위해서 고생했으니까 놀러 가. 괜찮아. 그런 자격이 있어. 가. 가. 15일 남편 떼어놓고 가. 그만한 자격 있어. 스스로 자기가 갔다 오면 걱정거리가 와락 달려들어요.

가야 했었었요. 캐나다에. 놀러 가면 놀러 가도록 지시가 있었던 거예요. 자꾸 내가 가고 싶어 갔다고 생각하지 말고, 나부터 출발하지 마세요. 내가 이거 하고 싶다고 하지 말고, 주님의 복음을 알기 위해서 이런 기회를 준 거예요. 모든 것을. 좀 억지 같지요? 억지 같아도 괜찮아요. 억지라도. 억지라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나는 이것을 해야만 하는데. 그렇게 할 때 주께서는 이걸 복음적으로 회수를 해버립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하면서 1번을 생각 안할 수가 없지요. 바로 1번은 나쁜 것이고 2번은 옳은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기회를 준 거예요. 계기를. 그래서 언제 여행갈 때 기도할 때도 1번을 놓고 기도 할 것인가, 2번을 놓고 기도할 것인가, “주여, 가라해서 가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걱정이 없는데, “주여, 나 갈 동안에 가스 불 어떻게 되면..”이렇게 되면 이건 자꾸 아직까지 단도리 해야 될 1번을 꼭 쥐고 있는 게 되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 지켜주옵소서. 하는 게 다른 말로 하나님, 내거 지켜달라는 그러한 자기의 본색을 드러내버리지요. 내 것 지켜달라는 것.

그래서 이 전체를 1번, 2번을 왔다 갔다 해요. 성도한테만 해당되지만.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는가 하면, ‘변이’ 달라는 것. 우리는 이렇게 매일같이 1번 2번 늘 달라집니다. 달라지더라도 감사한 게 있어요. 달라지는 것을 변이라 했지만, 그래프로 이야기하면 올라갔다 내려갔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파동 같아요. 이게 바로 고비. 고비. 산이 있으면 계곡 있고 계곡 있으면 산이 있고. 매일 고비에요. 버스 늦게 오면 그것도 고비고, 일찍 와도 고비고. 늘 고비에요.

자, 그런데 감사한 것은 이 고비, 고비를 한데로 묶어가지고 일정한 방향으로 특정한 방향으로 주께서 이끄는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언약,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하는 겁니다. 약속의 능력, 위력입니다. 언약의 위력입니다. 언약의 위력에 의해서 끌려가는 우리는 끌려가면서도 어떻습니까? 하여튼 매일같이 요동치고 있어요.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라요. 주께서 시켜서인가 아니면 내가 요거해서 어떤 결과를 내 것으로 전환시키고 싶어서 할까, 매일 왔다 갔다 왔다 갔다 해요.

내가 원인이냐, 아니면 내가 결과냐, 지난주일 낮 설교에 그리 했지요. 우리가 우리를 보는 그 해석이 우리의 해석이 아니고 주님의 해석물이라고. 주님의 결과물로 살아가고 있는데 나는 내가 내 입맛에 맞춘 나를 내 인생을 바꿔보려고 쓸데없는 노력을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그 자체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쁜데, 안 이쁘다는 거예요. 내 인생이. 저 사람보다 안 이쁘고 잡히기 전에 최순실보다 안 이쁘고. 안 이쁘다는 거예요. 지금. 내 인생이 영~ 성에 안 차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게 요동치는 겁니다.

자, 이걸 어떻게 바꾸느냐, 이걸 남은 시간에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이 전체, 늘 왔다 갔다 하고 정신병자 다 된 것처럼 헷갈리는데 전체적으로 이걸 히스테리라 했어요. 라캉이 현대인들은 히스테리. 왜 히스테리냐 이유가 자본주의 때문에. 사람을 상대하게 되면 정이란 게 있잖아요. 그런데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돈을 상대해버리면 사람을 상대한 게 아니기 때문에 냉혹하게 굴어야 하기 때문에 본인의 정서에 안 맞기 때문에 정신적인 혼선이 일어나서 모든 현대인은 히스테리성 정신병자에요. 딱 맞는 이야기에요. 그냥 정신병자에요.

늘 긴장되어 있고 손해날까, 이익 날까 상대를 대하니까 당신 만나고 난 뒤에 돈 얼마 벌었느냐, 얼마 빼앗겼느냐 그거 보면서 사는 거예요. 자, 이런 걸 성경에서는 언약으로 끌어당깁니다. 어떻게 끌어당기는가, 처음에 이 전체한테 하나님이 복을 줘버려요. 언약을 주는데 그 언약이 무슨 언약인가 하면, 바로 율법이라는 모세언약을 줘버립니다. 모든 사람에게 다 줘버려요.

사람들이 난리 났어요. 못 지킵니다. 지킬 수 없습니다. 율법을 줬는데 율법대로 하면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 어떻게 아느냐 하면 이 이스라엘 외부에서 적들이 와요. 적들이 오는데 적들이 한결같이 이스라엘이 갖고 있는 군사력보다 세요. 군사도 많고 이스라엘은 청동기 문화인데 그 쪽은 철기문화에요. 청동기 문화와 철기문화는 싸움이 안 됩니다. 칼싸움하면 청동기 문화 다 부러져요. 저쪽은 멀쩡해요. 전쟁할 때, 칼과 칼이 부딪힐 때 이쪽이 깨지면 안 되거든요. 합금을 잘 만들어야 돼요. 온도를 잘해서 강철금을 잘 만들어야 돼요. 잘 만들어야 승리한다고요. 그런데 적들은 철기문화에요. 이스라엘은 쇠고랑 하려면 저 블레셋에 가서 주문해야 되고 쇠고랑도 못해서 주석이나 해서 청동기로 한 거예요. 구리 이런 거로 했다 말이죠. 이건 게임이 안돼요. 무기에서 뒤쳐져요. 이쪽의 적들은 마차, 전차가 있어요. 여기는 보병이에요. 게임이 됩니까? 화살로 막 쏘는데. 안된다니까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전쟁할 때 꼭 이렇게 숫자로나 무기적으로 발달된 무기로 공격하게 만듭니다. 해놓고 방법은 뭐냐 하면, 여호와를 믿어라. 말이야 쉽지요. 여호와를 믿어라. 이게 됩니까? 집이 부도나가지고 채권자들 몰려왔는데 기도하니까 여호와를 믿어라. 해결책이 없잖아요. 적들을 보내서 이스라엘을 당황하게 만들어요. 이게 사사기에 나와요. 그 뒤에 사무엘상에 굉장히 빈번하게 나와요. 사사기는 늘 반복되듯이 나오고. 그때 여기서 집단이 안 되고 내가 있잖아요! 나선 사람이 있었으니 그 사람을 가지고 사사라고 이야기합니다. 사사.

자, 그러면 한 번 봅시다. 이 원리. 율법은 누구한테 주었다? 모든 사람에게 주었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마땅히 지켰으면 아무리 적들이 위대하더라도 여호와의 말씀대로 살면 이기게 되는데 이 이스라엘이 말씀대로 안 살 때 꼭 하나님께서 가만히 있는 적들을 움직여서 공격케 한다 말이죠. 그러니까 한꺼번에 이 사람들 말씀 못 지켜요. 이미 개판됐다 말이죠.

그런데 여기 있잖아! 나선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성신을 받은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 사람을 뭐라고 했어요? 사사. 사사가 나가서 이것은 전쟁하는 방법도 아니에요. 웃기지도 않는 방법을 통해서 적들을 물리칩니다. 그러면 이 율법이 전체에 선 율법이 무엇으로 서서히 쏠리겠습니까? 한 사람으로 쏠리겠지요. 그 사사 중에 마지막 사사가 누구냐 하면 바로 사무엘입니다. 그리고 사무엘보다 더 노골적 사사가 사울이에요.

사울은 사사도 되고 왕도 되고, 사사가 왕의 과도기적 현상입니다. 사실은 사울은 왕이라기보다도 사사라는 말이 맞아요. 진짜 왕은 사울이 아니고 다윗입니다. 다윗부터. 왜 사울을 왕이라 할 수 없느냐 하면, 왕이 되려면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줘야 됩니다. 그런데 사울시대에는, 사무엘시대에는 모세율법이 적용 되는데에 대해서는 특정 왕에게 율법을 일임하는 아주 그쪽 언약의 시기는 아니에요.

그래서 사무엘이 말씀대로 살아서 하는데 이제 사무엘은 늙어갑니다. 그리고 늙어 죽습니다. 백성들은 당연히 사무엘을 왕으로 여겨서 누구를 보겠어요? 사무엘 아들 괜찮은 아들 보려고 했지요. 사무엘 아들은 사무엘만큼 말씀에 관심이 없어요. 그러니까 그들이 걱정되어서 우리도 왕을 뽑읍시다. 하고 인간 쪽에서 먼저 제안해서 뽑힌 왕이 바로 사울 왕입니다.  

그런데 사울 왕은 인간 쪽에서 제안했기 때문에 사고방식이 율법적이 않고 극히 인간적이에요. 그게 어디서 들통 나느냐 하면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분명히 배후에 사무엘이 다 죽이라고 했거든요. 아말렉은 다 죽여야 됩니다. 좋은 양,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다 죽여야 됩니다. 했는데 전쟁에 나가서 막상 승리 하는데만 급급해가지고 승리하고 보니까 탐이 나더라 말이죠. 이쁜 처자 있고, 살찐 양, 가축 그 옛날 재산이었잖아요. 그것이 탐이 나서 안 죽인 거예요.

그래서 사무엘이 와가지고 “전쟁에서 이겼다면서 이 소리는 무슨 소리입니까?” “아이구, 하나님이 주신 것을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서 실한 양하고 같이 남겨두게 되었습니다.” “이러지 말라 했잖아요.” “아각왕은 왜 안 죽입니까?” “저 왕은 또 우리가 이렇게 승리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자랑질하려고 포로 잡았습니다.” “안됩니다.” 하고 도끼로 아각을 죽이고 “사울 왕 당신은 삑! 끝났습니다. 당신 나라는 이제 끝났어요.” 하고 사무엘은 사울 왕 들키기 전에 몰래 이새의 집안에 가서 다윗에게 기름 부어주고 자기는 라마로 가버렸지요. 가고 거기서 죽어버렸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이스라엘 나라에 위기가 온 거죠. 레임덕현상이에요. 아직 임기가 끝나지 않았는데 대통령이 없어지면 혼란상태가 벌어진 거예요. 임기 끝부분에 뭐가 잘못되었어요. 왜냐 하면 지켜야 될 사무엘을 없어져버리고 백성들은 왕과 개선은 개판이고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적들은 쳐들어오고 블레셋에서는.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사울 왕이 죽은 사무엘을 불러냅니다. 자, 한바탕 놀아보자! 작두해서 무당을 하는지. 죽은 자를 불러내는 무당을 불렀는데, 무당이 겁나서 나 죽이려고 하지요? 아니야. 내가 진심으로 당신한테 부탁한다. 사무엘 좀 불러다오. 자기가 쫓아내 놓고 자기가 무당 없애면 복 줄줄 알고.

사울은 잘못됐어요. 뭐냐 하면 사울은 이 나라가 하나님 나라지 자기 나라가 아니거든요. 자기 소유의 나라가 아닙니다. 불러내지요. 불러내고 난 뒤에 사무엘 등장해가지고 “당신은 블레셋에게 죽어.” 이래요. 자, 보세요. 블레셋이 와서 이스라엘 왕 사울을 죽였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누구 나라가 됐죠? 이스라엘은 블레셋나라하고 동일한 우상숭배의 나라가 된 거예요.

그럼 이 나라는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나라가 이스라엘이 없어지게 되면 언약이 안 되겠지요. 여기서 중요합니다. 언약이란 율법을 준 이유는 인간의 힘으로 언약을 유지할 수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율법을 준 거예요. 오늘날 이 말씀을 우리에게 준 것은 오늘 본문 읽은 것은, 절대로 우리는 이 말씀으로 못 삽니다. 이걸 고백해야 돼요. “주님이여, 언약의 피가 이렇게 중요하지만, 우리는 별 시답지 않게 여기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고백하면 돼요. “우리는 나보다도 더 소중한 자식이 있고, 돈이 있고, 재산이 있고 이게 걱정되지 주님의 언약의 피는 생각도 안했습니다.” 이게 우리의 모습이죠.

그런데 우리로 하여금 블레셋이 쳐들어옵니다. 블레셋을 만나게 되면 우리는 “주여,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럴 수가 있습니까?”하다가 ‘아이고, 내가 미쳤지. 주신 은혜를 모르고 왜 이렇게 난리를 치나. 이게 신자도 아니고 불신자도 아니고 왜 이리 지옥 갈 사람도 아닌데.’ 하면서 다시 한 번 언약의 피를 생각하며, 중요한 것 받아놓고 물에 빠진 사람 살려놓으니까 보따리 내놓으라는 식으로 중요하지 않은 없어질 것에 대해서 너무 정신을 빼앗기고 거기서 내 인생 기쁨과 행복을 거기다 몽땅 다 걸었구나. 하는 그런 후회감이 밀려오십니까? 그런 후회감이 밀려와요? 한 2초 동안.

“이러면 안 되는데. 이것 때문에 죽으신 건 아닌데. 돈 몇 푼 아낀다고 이러면 안 되는데.” 이렇게 하지요. 그럴 때 어떻게 합니까? 주여, 용서하옵소서. 이리 나오겠지요. 용서하옵소서. 회개 없으면 천국 가는 사람 아닙니다. 그런 회개가 하나님에 의해서 유발되도록 우리가 이런 상황에 있습니다.

자, 아까 한 거 다시 해봅시다. 자, 사울 죽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해결책. 나라꼴 안돼요. 꼴이 안 되면 새로 시작하면 되겠지요. 새로 시작하려면 여기서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줘야 됩니다. 그게 뭐냐, 몽땅 다 주어지는 게 아니고 대표자가 하나님의 언약을, 이 율법을 대표자가 온전하게 지키면 대표자 보고 왕이니까, 왕을 보고 다른 사람들은 왕에 부속되잖아요. 왕이 잘되면 덩달아 잘되고, 왕이 못되면 덩달아 못되는 그런 새로운 구조에 놓이게 되는 겁니다.

그 구조를 가지고 뭐라고 하는가 하면, 처음부터 있었지만 기름부음이에요. 기름부음을 헬라어로 이야기하면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어떻게 부르지요? 예수 뒤에 뭘 붙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되지요. 이걸 번역하면, “나의 인생의 책임자여!” 이렇게 돼요. “책임자, 예수님이여.” 이런 뜻이다 말이지요. 책임자이신 것을 제가 잊었습니다. 이런 뜻으로 부르시면 돼요. 참 쉽지요. 예수 그리스도 외국말 한다고 되는 게 아니고. “내 인생에 이미 모든 걸 책임지신 분. 책임지신 분이여, 제가 감사하나이다.”

왕이에요. 기름부운 왕이 책임자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보지도 않아요. 다윗 니만 잘하면 영토와 백성이고 다 살려줄게. 이상하게 다윗이 가는 곳마다 승리를 해가지고 잃어버린 땅. 블레셋이고 뭐고 땅을 차지하는 정도가 아니고 그 주변에 있는 10족속이고 7족속이고 모두 다 와서 엎드려 절을 합니다. 누구한테? 다윗에게. 다윗 나갔다하면 100전 100승. 그 혜택은 차기 솔로몬 왕한테 혜택이 다 돌아갑니다. 전쟁의 피는 다윗이 흘리고, 그 혜택은 솔로몬이 입고. 그것이 바로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고, 그 혜택은 우리가 입는 그 다윗언약의 구조를 그대로 우리에게 펼쳐 보여주는 거죠.

지금 제가 강의하는 게 뭐냐 하면, 이 매일같이 요동치는 것에 대해서 언약이 어떻게 이끄냐 하는 그 이야기입니다. 지금 어디까지 이야기했느냐 하면, 다윗 입구에 막 들어섰어요. 자, 조건이 뭐냐, 왕 하나 잘되면 백성은 절로 잘돼요. 그래서 나중에 그 이스라엘 나라가 다윗죽고, 솔로몬 죽고 난 뒤에 남북으로 갈라질 때에 선지자가 하는 말이 있어요. 그저 다윗 같이만 해라. 더도 덜도 말고 다윗 같이만 해라. 다윗의 덕분 때문에 너를 봐주고 있다. 얼마나 다윗 약속이 끈질기게 너에게 효과를 주고 있다. 그걸 계속 이야기해요.

선지자들의 목표가 있어요. 다윗 같이만 하라. 그러면 우리는 이래요. “다윗이 어쨌길래?” “다윗이 뭐 어떻게 순종 했길래 다윗 같이만 해라?” 이렇게 했는데, 놀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윗이 한 것 딱 하나 있어요. 자기가 죄인인 걸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왕이면서도 왕이 아니고, 왕은 따로 있다는 거예요. 내 인생이 여기 있는데, 사실은 내 인생이 여기 있는 내 인생이 아니고, 내 인생은 주님의 인생이 내 인생이지, 내 인생이라는 것은 내 인생이 아니라는 것. 그걸 다윗이 알았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번제와 제사와 율법을 원하는 게 아니고 율법의 결과물을 원하는 거예요. 율법이 우리한테 오게 되면 거기에 뭐가 생긴다? 죄가 생긴다 했지요. 죄를 알아야 피를 묻힐 게 아니겠습니까. 율법이 우리한테 온 것은 율법을 지켰다가 아니라 내가 율법 앞에 죄인입니다. 라는 것을 알게 만드는 그 능력이 율법이 성신을 통해서 우리 안에 들어왔을 때나 우리가 느끼는 거예요.

그래서 가정이 어떻고 집안이 이만큼 살아가는 것도 죄인인 내 덕분에 살아가는 게 아니고,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자랑하고 책임자 따로 있음을 증거 하라고 우리로 하여금 내가 생각했다하면 무조건 내 욕심이고 내 인생 따로 챙기려하는 이 죄인을 불구하고 주께서 인생이라는 사명을 준 거예요. 사명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그냥 밥 먹고 사는 게 사명이라. 참~ 좋지요. 사는 게. 밥 먹고 사는 게, 살림하는 게, 설거지하고 사는 게 사명이에요.

김장 몇 포기 담글 거예요? 김장하는 게 사명이라. 제가 어느 강의에서 노래방 가는 것도 사명이라고. 놀러가는 것도 사명이고. 전부 다. 왜? 주께서 시켰으니까. 뭐하라고? 죄인 되라고. “집사님, 캐나다 가니까 의인되던가요? 죄인 되던가요?” 이 인간 어딜 가도, 죄인이 어딜 가도, 독일가도 죄인 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책임자가 넉넉하니까 든든하니까 뭔들 못하겠습니까? 뭔들 사랑이 아니겠어요.

이러했던 그것이 다윗이후에 솔로몬이 혜택을 너무 많이 받았거든요. 슬슬 혜택 받으니까 이걸 이제 소유하려 한 거예요. 소유하면 안돼요. 죄인이 소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당장 죽어도 우리는 할 말 없어요. 다 털고 오라하면, “예” 가야됩니다.

그래서 어떤 철학자가 인생을 이렇게 했습니다. 인생은 뭐냐, 추락이다. 인생은 태어날 때부터 있다가 죽을 때까지 계속 떨어지는 거예요. 기억도 떨어지고, 정신도 떨어지고. 애의 그 아름다움 나이 70되면 기력 다 떨어져요. 젊어도 다 떨어지고, 아름다움 미, 선 다 떨어지게 되어있어요. 떨어지는 속도는 아무도 못 말립니다. 매일같이 달라져요. 매일 추락이라. 뚝뚝 떨어져요.

솔로몬도 마찬가지입니다. 떨어지면서 내 것! 내 것! 그 솔로몬 말기에 있는 책이 뭐냐, 전도서입니다. 전도서 마지막 모습이 뭔 줄 알아요? 다 떨어져서 마지막 12장에 보면 나와요. 그냥 뼈들의 부딪치는 소리만 들릴 뿐입니다. 뚜두둑, 뚜두둑, 완전히 로봇 춤도 아니고, 뼈들의 부딪치는 소리만 들리니 이빨 부딪치는 소리, 맷돌 가는 소리, 자기를 기계로 봐요. 욕망의 기계로 봐요. 인간은 없고 그냥 기계덩어리에요. 뼈다귀 조립된 것. 겨우 힘 줄 얹은 그것도 문지방이 내려앉으면 같이 내려앉는 거예요. 전도서 마지막은 하여튼 비참하게 했어요. 추락이에요.

솔로몬이 여자가 천명됐어요. 다 소용없어요. 다 했지만 아무것도 아니고 인생 자체가 다 추락이에요. 가을로 가면 11월말, 낙엽처럼 떠나간 사랑~~추락했을 때 언약도 다 함께 어떻게 되겠습니까? 언약도 바이, 바이 되겠지요. 죄인입니다. 할 것도 없어요. 죄인인 것도 지도 이젠 지겨워. 지가 지겨워. 죄인도 한 두 번해야지. 주께서 죄인이라 해도 안 믿어줄 것 같아. 하도 거짓말 많이 했기 때문에.

고마운 것은 죄인이라고 해서 건강해지고 더 의인되는 게 아니고 그냥 구원 받은 채로 말은 횡성수설 무슨 말을 하던 간에 매일 요동치면서 지가 이해하던 안하던 소리 없이 주께서 일괄적으로 이렇게 언약으로 인도하는데 그게 다니엘 끝부분에 다윗언약이 나옵니다.

서양철학에 있어서 유명한 괴물 이름이 키메라가 있어요. 키메라 괴물 아십니까? 1960년도에 우리나라에 최초로 팝페라 가수 키메라라는 가수가 있었어요. 조수미 나오기 전에 한 때 유명했는데. 키메라 이 괴물은 앞에는 사자요, 몸 둥아리는 염소요, 뒤는 뱀. 그러니까 이것은 인간에게서 나타나지 않는 신들에 의한 창조물이 키메라라는 괴물이 신화에 나와요. 이 괴물이 다니엘 7장에 보면 바다에서 기어 올라옵니다. 한 종이어야 되는데 각자 다른 짐승의 종들이 올라오지요.

이건 뭐냐 하면, 그것이 인간을 지배했다는 말은 인간은 비록 하나님이 창조했지만 그 도중에서 괴물의 종으로 달라졌다. 예요. 인간 같은 인간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드디어 다윗언약에 마지막, 그게 묵시문학 쪽인데 마지막에서 그것을 보여주게 됩니다.

그러면 다니엘은 뭔데, 다니엘은 인간이 아닙니다. 다니엘은 인자에요. 인자. 인자가 뭐예요? 누구 이름이지요? 인자가 장차오실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인자는 이미 창세전부터 계셨던 사람이 되기 위해서 준비된 하나님이에요. 그 분이 이 땅에 오기만 하면 이름이 인자 돼요. 그 이름의 인자를 다니엘이 미리 앞당겨서 그 이름을 호칭을 부여받게 됩니다.

다니엘이 감사한 것은 장차오실 예수님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에요. 연결되어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연결되기 때문에 뭐가 보이느냐 하면,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봐요. 아이고~ 이 짐승들. 인간도 아닌 것들. 그래서 어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어요. 복음을 모르면 사람 아니라 했지요. 복음 모르면 사람 아니에요. 순실이고 뭐고 너무 욕하지 마세요. 처음부터 사람 아니었어요. 사람도 아닌 것을 괜히 욕한다는 것은 욕하는 지는 인간이라고 착각하잖아요. 복음 모르면 사람 아닌 겁니다.

그게 누구 눈이겠어요? 누구 안목이겠어요? 누구 관점이겠습니까? 장차 오실 예수님의 관점으로 볼 때 모든 인간은 어둠이에요. 거기서 자기 백성 만들어내는 임무는 주님한테 달려있고, 거기서 택한 백성 있고, 그렇지 않은 백성은 분류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아까 이야기한 다윗언약의 완성, 오늘 본문 24절에 맞는 새 언약이에요.

그런데 새 언약을 어떻게 창조하느냐,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한 피.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바로 그것을 창조해 내는 거예요. 이제 마지막으로 이 말씀합시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는 거예요. 오늘 강의 마지막입니다.

피가 어떻게 저주받아야 될 자를 낫게 하느냐 이 말입니다. 피가 어떻게 가능하냐.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려면, 매일같이 자기 생각만 하고 있는 사명이라는 핑계는 대지만, 돌아오는 것은 내 것 잘됐다는 그것, 이걸 뭐라고 하는가 하면 언약의 능력으로 이끌지요. 그러면 요 안에 바퀴가 있겠지요. 이스라엘 전체를 언약의 능력으로 이끄시는 거예요. 안에는 저희끼리 개판이죠. 하든 말든 보지 않고 언약대로 바퀴로 굴립니다.

그렇게 가게 되면, 뭐가 등장하는가 하면 이스라엘이 어디에 들어가는가 하면 바벨론에 들어가지요. 이스라엘이 바벨론 나라에 들어가면서 이 이스라엘 내부에 뭐가 침투하는가 하면 바벨론의 통치세력이 이 안까지 침투가 되겠지요. 이걸 바로 포로 잡혔다. 이렇게 해요. 그런데 몇 년 만에 돌아온다 했어요? 70년 만에 돌아온다 하다가 말을 바꿨지요. 70년이 아니고 70이레에 돌아온다고 했어요. 70년이라 하는 것은 1년, 2년 따지지만 이레라 하는 것은 현재 지상에 있는 시간으로 계산하는 게 아니고, 묵시적인 완료 성을 70이레라고 표현한 거예요. 이렇게 된다 말이에요.

그러면 바벨론이 이렇게 침투해 버리면 이스라엘은 흔적에서 날아가 버리고 이 전체가 바벨론 제국이 되겠지요. 그러면 언약을 이끌던 이 수레바퀴는 어디로 날아가 버렸습니까? 이게 바벨론 천지 됐으니까. 여기에 누가 등장하느냐 하면 다니엘과 세 친구. 다니엘 밴드. 다니엘 밴드가 등장해요.

다니엘 밴드는 다니엘의 통치를 받아요. 몸으로. 그런데 이 제국을 누가 포위하느냐 하면 묵시 언약이 포위를 해버려요. 그럼 누가 못 살게 구는가 하면 느브갓네살이 힘들어 죽어요. 잠도 못자고 그럼 누구한테 묻는가, 자기한테 포로 잡힌 다니엘에게 묻고 다니엘 세 친구에게 물어버려요. 다니엘에게 묻습니다. 물었을 때, 이 모습이 무슨 모습이냐 하면 그림으로 그려볼게요. 온 천지가 짐승의 나라인데, 짐승의 나라에서 내부 균열이 일어납니다.

내부균열의 중심점이 있지요. 중심점이 인자고, 인자는 3자로 하면 성육신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인자라고 오셔서 내부적으로 드라이버나 뺀찌로 쑤시면 깨지겠지요. 마구 깨져요. 그러면 인간의 나라, 짐승의 나라, 박 근혜 나라, 대한민국이 내부적으로 균열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교회는 무정부주의자가 아니고 무 국가주의에요. 국가라는 게 없어요. 왜냐 하면 이 안에 예수님이 왕이 되기 때문에 왕국이기 때문에, 이러면 또 여호와증인이라 하겠다.

이 안에 예수님 왕국이기 때문에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우리는 이방인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호와 증인은 군대를 안 가려고 하잖아요. 남의 나라 전쟁을 왜 하느냐고. 양심 때문에. 그런데 여호와 증인의 양심은 전부 다 더러운 양심이라서 나 같으면 10년 내리겠다. 지가 뭐라고 안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것은 우리의 죄를 알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여호와 증인은 독자적으로 지방교회나 워치만 리 교회나 여호와 증인은 자기들은 어떤 단체다? 자기단체는 완전히 온전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온전한데 왜 회개해야 되죠? 회개할 필요 없잖아요. 이 자체가 짐승나라에서 만든 또 가짜 짐승나라가 되는 거예요. 이게 요한계시록에도 나와요.  

여기서는 그냥 전 방위입니다. 흩어지는데 이 흩어진 성도가 전부 다 하나의 언약의 효과를 봅니다. 그 효과가 어떻게 하느냐, 예수님께서 이 짐승의 나라한테 살해당했습니다. 이게 마지막입니다. 살해당했지요. 살해당했으니까 뭐가 있겠어요? 복수와 보복이 있겠지요. 그게 요한계시록 1장에 나옵니다.

찌른 자도 볼 것이요, 찌른 자라 하는 것은 창을 찌른 자도 볼 것이요, 요한계시록은 보복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재림은 보복입니다. 심판이에요. 따라서 이 보복, 심판이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짐승의 나라인 것을 완전히 폭로시킨다는 점에서 이게 승리가 돼요. 승리가.

예수님이 세상 보는 것처럼 같이 세상을 보게 되면 어떤 형편에 살던 간에 한 달 수입에 관계없이 이미 그 사람은 이긴 자가 돼요. 요한계시록의 이긴 자가 된다고요. 뭐로 이겼다 했어요? 예수님의 어린양의 피로 이겼기 때문에 어린양만 졸졸 따라 다니게 돼요. 개가 졸졸 따라 다니듯이.

어린양만 졸졸 따라다니는 그런 사람이 전 방위처럼 온 천지에 불쑥 불쑥 튀어나오는 이런 모습인데, 그들은 따로 집합하는 게 아니고 세상 어떤 세상이라도 옳은 세상은 없다. 다 짐승의 나라인 것을 알고서, 그리스도의 용서의 그리스도의 언약의 피만 자랑하는 그런 식으로, 다니엘처럼 살아가는 운명이 오늘 이 시대의 운명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께서 흘린 피가 이 세상이 짐승의 나라인 것을 티를 내는 피기에 그것을 고백하는 안목을 우리가 성령을 통해서 받았기에 우리는 하나의 총회요, 교회인 것을 저희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대로 사는 게 아니고 주께서 말씀되게 하시는 그것에서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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