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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지역강의 > 안양강의
2016-12-10 00:26:24 조회 : 960         
발치 161209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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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은주(IP:119.♡.152.148) 16-12-16 15:13 
안양20161209a히12장25절(발치)-이 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히브리서12장25절 이야기입니다. 땅이 진동한다는 이야기가 나와요. 땅이 진동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 나온 이야기가 하늘이 진동한다. 그럼 진동하면 지진인데, 땅 진동은 지진이니까 우리가 다 아는데, 하늘 진동은 우리가 경험하지 못하잖아요. 그러면 땅이 진동할 때, 요것은 보통 지진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특수한 땅의 지진이지요. 요게 어느 땅이냐 하면 시내산입니다. 시내산이 진동했다는 겁니다.

자, 히브리서에서 “시내산이 진동했다.” 를 이야기하면서 그 원인을 이야기해요. 그 원인이 뭐냐 하면 중보자의 피. 중보자의 죽음. 아벨의 피. 아벨의 죽음이 그 원인이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 이 성경이 보통 어려운 게 아니지요. 한 사람이 죽는 거하고 땅의 진동하고 무슨 관련성이 있겠습니까? 내가 만약에 여기서 죽으면 갑자기 안양천지가 막 지진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럴 리가 없지요.

이건 뭐냐 하면 세상은 어떤 한 인격에 의해서 일어나는 일에 종속되어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 종속된 한 인물에 어떤 일어나는 일이 같이 동반해서 이 지상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것을 무슨 관계냐 하면, 언약관계라 합니다. 가락교회에서 이걸 다른 말로 했지요. 계약관계라 했지요. 땅은 홀로 있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땅이 홀로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과학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과학에서.

예를 들어서 목성, 금성 있잖아요. 토성. 달. 달을 보면서 거기서 계약관계를 찾을 수 있습니까? 망원경가지고 달을 보면서 오! 계약이 저기 있네. 찾을 수 있어요? 토끼가 어디 있지? 절구통 어디 있지? 이런 것은 혹시 옛날 사람은 찾을 수 있겠지만, 달을 보면서 하나님과의 달과의 계약관계를 이렇게 망원경을 쳐다보면서 그걸 끄집어낼 수 있느냐 말이지요. 못 끄집어내지요. 성경은 계약관계에 있다고 이야기하고, 현대 천문학이나 과학에서는 달을 봐서는 하나님과의 계약관계가 발견되지 않는다면 그 잘못은 누구한테 있습니까? 달한테 있습니까, 달을 쳐다보고 있는 인간에게 있어요? 인간에게 있지요.

그 인간이 달을 통해서 계약관계를 보지 못했다는 말은 곧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피 흘려 죽게 만든 원인제공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원인 제공자. 그래서 언약이 떴다는 말은 땅이 진동한다. 하늘 진동한다. 이것을 배경으로 삼아서 인간 너한테 문제 있다는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어디서? 히브리서12장에서.

여기서 잠깐 우리가 아는 상식 이야기를 해봅시다. 내가 어느 동네에 산다. 가까운데 교회 있다. 나는 4살 때부터 친구 따라 소개 따라 교회 갔다. 그래서 나이 40, 50될 때까지 교회 다녔다. 교회 이야기 잘 들어보니까 어떻게 하면 구원받는다 했다. 그래서 나는 평소에 교회 다니고 설교 듣고 평소에 내 살림살이하고 그리고 지금 죽는다면 천국 간다. 이게 우리가 아는 일상이지요. 이게 성경에서 말하는 성도의 삶일까요? 겉모습이지요. 겉모습이 그렇지요.

어느 지역에 태어났다. 가까운데 교회 있다. 어릴 때부터 교회 다녔다. 받을 거 다 받았다. 집사고 뭐고 다 됐다. 지금은 나이 50인데 나중에 한 80, 90되게 되면 잘하면 100세까지 산다. 죽으면 주 계시는 천국 간다. 나는 그걸 믿습니다. 이게 성경에서 그렇게 살라고 우리보고 이야기했던가요?

성경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방금 이야기한 그걸 하나의 도배지라고 봅시다. 그 도배지에 있는 하나의 그림 같은 걸로 봅시다. 어릴 때부터 100세까지 있는 그림이 있다 합시다. 그 그림을 주먹으로 벽지 뒤에서 쳐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벽지가 찢어지겠지요. 그 찢어짐. 그게 바로 일종의 진동이라 할 수 있는 겁니다.

찢어져버리면 어떤 효과가 있는가 하면, 한 번 적어 볼게요. 나의 인생은 □□다. 라는 것에 주먹이 툭 튀어나온다 말이지요. 계약 주먹이 튀어나와버리면 뭐가 날아가느냐 하면 나의 인생 자체가 이게 내가 꾸며낸 거예요. 나의 인생이라는 것이 나한테는 설정되어있고 구성되어있는데, 하나님의 계약 관계에서는 그럴 여지가 없고 그걸 용납하지를 않습니다.

왜, 나도 같이 땅에 사니까. 땅에 사는 우리가 같이 뭐해야 되기 때문에? 같이 진동되어야 되기 때문에. 지진이 일어나면 어떻게 됩니까? 서랍에 있던 가지런히 있던 그릇 다 넘어지겠지요. 그 자리를 유지하지 못하겠지요. 왜? 기초가 흔들리니까. 기초가 흔들리면 마저 무너지면 우리도 죽잖아요.

그러니 우리는 땅을 사는 이유가 아직도 땅은 살만할 정도로 든든하다는 인식하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땅이 있고 그 위에 우리가 어느 곳에서 태어나서 그만큼 성장과정을 거쳤다는 말은 항상 그 전에 뭘 깔아놓습니까? 튼튼한 땅에서 태어났고, 튼튼한 땅에서 나는 성장해 왔고, 튼튼한 땅에서 어느 여고 졸업했고, 튼튼한 땅에서 직장생활하고, 모든 게 튼튼함이 있잖아요.

주님은 언약으로 뭘 흔든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 튼튼함. 튼튼함을 밑바닥부터 이렇게 흔들어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누구야? 이렇게 보면 예수 그리스도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인생을 가지고 우리는 뭐라고 오해했느냐 하면 내 나름대로의 그림, 도배지로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주님의 주먹이, 주님의 십자가 묻은 주먹이 내 인생을 찢지 아니하면 구원 못 받습니다. 천국 못 갑니다. 언제 태어나고, 가까운 교회 다녔고, 어떻게 했고, 집사 됐고, 봉사하고, 이것은 내가 기껏 아는 거예요. 그러한 내가 이렇게 살았고 저렇게 살았다 하는 인식이 어디까지 발달했느냐 하면 과학이 되고, 그 과학의 발달에 의해서 망원경 들었고, 망원경 들어서 달을 보니까 달에는 그냥 이 지구 같은 땅뿐이지, 거기에서 어떤 하나님과의 계약관계를 발견하지 못하지요. 발견하지 못합니다.

방금 제가 한 이야기 얼추 이해되시겠지요. 그러면 응용문제 나갑니다. 어떤 아주머니가 20대에 시골에서 올라와서 미용학원에 가서 미용사가 되었다. 그러면 그 미용사가 구원되는 경우는 어떤 경우인가요? 요거 응용문제입니다. 미용사가 매일같이 우리교회 우리 동네에 미용사가 있는데 우리교회보다 먼저 차렸어요. 그래서 세월이 12년이 다돼갑니다. 한결같아요. 같이 늙어가요. 저하고 그 미용사하고. 한 결 같이 오는데, 물론 교회는 안 다녀요. 이제는 아줌마 다됐지요. 보면서 저 사람은 어떻게 구원받을까. 늘 생각하거든요. 어떻게 구원받을까.

그 사람에게 만약에 교회 나오세요. 이렇게 되어버리면 그 사람은 나는 어릴 때부터 이렇게 살았고, 미용사 되었고, 거기다가 추가해서 더 보태서 교회 다니는 일을 보태서 나는 죽으면 천국 간다. 이렇게 나오겠지요. 그러면 그것은 주님의 계약관계가 성립이 안 된 거예요. 주님의 계약관계는 어디를 노린다 했습니까? 땅을 노리지요. 그러면 그 사람은 평소에 어디서 태어났고? 땅에서 태어났고. 어디서 성장했습니까? 땅에서 성장했고. 미용학원 땅에 있는 미용학원 다녔을 것이고. 미용사하는 것도 지금 보성1차 상가에 가게 있거든요.

그 미용사가 성령을 받았다면 내가 살아왔던 내 인생에 구멍이 나야 되지요. 이게 찢어져야 되지요. 찢어져서 미용사 망하고, 불나고 그런 뜻이 아니고, 그냥 똑같은 일상을 살아가면서 전에는 주님과의 계약관계 체결이 안 된 상태에서 살았다면, 하루, 하루가 주님의 계약관계와 사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그것은 나의 인생이라는 것이 나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는 어디 있느냐 하면, 나는 □안에 있던지, 뒤에 가던지 이리 돼요. 하나의 결과물. 결과물이고 또 하나는 과정 되고. 점점 어려움에 들어갑니다. 과정. 요 결과물. 과정은 바로 주체고요, 이 결과물은 자아라고 합니다. 말한다고 이해될 성질이 아니지요. 자아는 있는데 주체는 없어요. 주체는 그 때 그때마다 새로 생기는 겁니다. 주체는.

자아(다른 말로 하면 몸)가 주변에 있는 상황 따라서, ‘내가 이 형편에서는 나는 어떻게 대처하면 되고, 어떤 사람이면 되겠어.’ 라고 생각할 때, 자아는 이게 항상 숨어있고, 주체는 바깥으로 드러나면서 주체가 실망스러울 때는 다시 후딱 자아의 지점으로 돌아옵니다. ‘아이구, 내가 그런 인간이 아니었었나? 내가 이런 실수를 하다니? 내가 상상했던 내가 아니었구나. 아이고, 내가 그런 실수가 없었으면 나는 내가 그런 인간된다고 우길 뻔 했잖아. 아이고, 내가 이 정도밖에 안되다니.’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반대로 ‘내가 그렇게 유명했어? 나는 그리 생각 안했는데. 거리에 나가니까 사인해 달라 하고 내가 그렇게 유명했어?’ 그런 식으로 자아를 또 재편성할 수도 있고. 자아는 결과물이니까. 아~ 나는 이거다. 결과물이고. 주체는 요런 자아가 되기 위해서 거치는 일시적인 과정입니다. 일시적인 과정. 하나의 프로세스입니다.

예를 들면 딸이 왔는데, 엄마가 평소에 안하던 잡채를 해줬다. 평소에 딸은 엄마에 대해서 관심 없더니 “엄마, 오늘 잡채 너무 맛있어. 엄마가 이렇게 뭐든지 잘하는 엄마인 줄 몰랐어.” 할 때, 갑자기 자아에서 뭐로 바뀝니까? 내가 그렇게 잘났어. 어! 내가 그렇게 자식한테 인정받는 엄마였어? 내가 보람이 있네. 자식 키운 보람이 있어. 잠시 느껴요. 그게 오후2시45분이거든요.

그런데 7시 반, 8시 되가지고 엄마가 뉴스 보다가 “아이고, 대통령이 하야하는 게 아닌데.” 이리 나오니까 “나, 엄마한테 실망했어.” 이리 나온다면 갑자기 잡채 해준다고 좋아하다가 갑자기 실망해서 ‘내가 딸하고 이렇게 견해가 안 맞는 엄만가?’ 보세요. 과정을 거치니까 갑자기 내 자아에 대해서 주체를 한 번 거치니까 내가 이런 인간인가? 내가 저런 인간인가? 그 때, 그 때마다 이게 달라지지요.

제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은 종잡을 수 없다 말이죠. 왜 이 어려운 말을 꼭 해야 됩니까? 사람은 거짓말하기 때문에 그래요. 거짓말. 고 형편에 우기는 거예요. 나는 칼이 들어와도 이런 인간이라고. 나는 성경 보니까 나는 신자 맞아. 내가 성경 보니까 신자 맞아. 이게 뭡니까? 그 현장의 주체를 거친 자기의 고집스러운 자아의 모습이에요. 그런데 속으로는 알지요. 내가 아까 그 사람한테는 나는 신자라고 우겼는데 가만히 있어보니 내가 신자인지 헷갈린다. 그런데 이 소리 남한테 이야기 안해야지. 나만 알아야지. 본인만 흔들림이 있어요.

그러니까 그 흔들림이 성도로서 언제 주어지느냐 하면, 이럴 때 주어집니다. 오늘 본문과 관련되어 있어요. 공포. 두려움. 신자라고 그렇게 우겨도 무서운 일이 발생해버리면 세상 사람하고 다를 바가 없어요. 아이고, 주식 떨어져 나가면 안 되는데. 대통령 하야해서 수출 안 되면 못 사는데. 아이고, 어떻게 안 될까. 특히 장사하는 분들. 가게 해놓고 장사 안 되는 분들. 아이고, 서문시장 불났단다. 서문시장 장사 안 되면 어떻게 살지? 지금 대구 서문시장 상인들은 지금 안절 부절이에요.  보상해준다는데 얼마나 보상할지. 보상금 꼬라지 보니까 1%도 안 돼. 지금 하는 거 봐서는. 1000억 손해 봤는데 10억밖에 안 나왔다고. 그런 걱정할 때 그런 걱정하는 사람들이 소위 교회 다니는 사람 있겠어요? 없겠어요? 많아요. 거기 서문교회에 다 다녀요. 서문시장 옆에 서문교회 거기 다 다녀요.

공포심이 올 때, 30년, 40년 누적했던 그 신앙의 축적된 단단한 기초가 한 방에 훅~ 가요. 한 방에 훅 가고 얼굴이 파래지고 공포심이 아주 많을 때는 기도도 안돼요. 기도도 한 숨 돌릴 때 기도가 돼요. 정신 차리자. 정신 바짝 차리고 기도하자. 이럴 땐 기도하라고 하는 신호야. 이리 하지, 처음 놀랠 때는요 기도도 안돼요.

내가 사랑하는 엄마가 돌아가셨다. 기도 안 됩니다. 놀래버립니다. 충격 받아가지고. 장례식 치르고 난 다음에는 사는 게 사는 게 아닙니다. 붕 떠있어요. 수십 년 신앙생활 한 거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아무 짝도 소용없는 내가 취미생활 했구나! 이런 충격을 받아놓고 허겁지겁 허둥대는 내 꼴 모습이란 내가 봐도 한심한데, 한심스러운 건 아는데 종잡을 수 없는 건 마찬가지거든요. 한심하다고 반성한다고 정신을 바짝 차린다고 안정된 게 아니에요. 여전히 마찬가지에요. 혼이 나간다고 하지요. 자식이 갑자기 어디 아프다는 소식 들으면  혼이 나가지요.

그걸 오늘 히브리서12장에서 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땅위에서 신앙생활 할 때, 아~ 참, 이거 어려워서 우이 설명하지. 그대로 묵묵히 해나가겠습니다. 신앙생활을 이 자아가 자아한탄 조치였어요. 이런 신앙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니라는 거예요. 히브리서12장에서. 내가 하는 신앙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니에요. 그냥 객기 부려보는 거지. 하나의 몸부림 쳐보는 거고. 최선의 노력을 다해보는 거예요. 그냥. 안정된 땅위에서.

근원적이지 않아요. 근원적이지 않고 그냥 솜씨를 부려보는 거예요. 최선을 다하여 착하게 하고, 선하게 하고, 올바르게 살려고 애를 써보는 건데 공포가 들어오면, 두려움이 오게 되면 한 방에 훅 가요. 그게. 아무짝도 소용없어요. 그러면 성경의 신앙생활은 뭐냐, 신앙생활이 없는 거죠. 그러면.

자아가 있는 데서 주체 백날 해야 자아로 돌아올 뿐이고, 특히 예수 믿는 주체도 어려우면 자아로 돌아와 버려요. 신앙생활 자체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 신앙생활 없으면 천국은 어떻게 가는가. 땅을  흔드신 분이 한 방에 주먹을 쳐버린다니까요. 찢어져버려요. 한 방에. 팍 찢어지게 되면 나는 ~이다. 에서 내가 뒤에 가버리고 이 자리에 누가 오느냐 하면 계약이 와요. 또는 언약이 오고. 또는 주님이 오고.

주님이 온다는 말을 제가 하고 싶어요. 오는데 오늘 24절에 보면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했지요. 그냥 예수님이 나를 구원한다. 이리 되어버리면 이건 상식적인 흔히 교회에서 이야기한 나, 설교 잘하지요. 하고 목사들이 해대는 상식적인 문장에 불과해요. 문장.

예수라는 존재가 나의 존재를 살린다. 이건 신앙이 아니거든요. 이건 종교지요. 나 여기 있는데 예수 저기 있고, 예수님이 나를 도와주고 동행한다. 얼마든지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예수님의 존재가 아니고 뭐라고 했습니까? 피라 했지요. 피. 피는 존재를 말하는 게 아니고 존재의 마지막 파멸되는 순간이거든요. 이게 뭐냐, 죽음입니다. 여러분, 남 죽는 건 겁 안 나고 나 죽는 건 겁나잖아요. 그렇지요?

진짜 신앙의 공식은 내가 죽는 게 아니고 남이 죽는 것에 멀쩡히 살아있는 내가 그 분의 죽음 속에 들어가지 아니하면 나는 신앙인,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없다는 공식이 계약이고, 이게 언약이에요. 예수님이 구원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피가 구원해요. 예수님이 구원하게 되면 나는 존재가 있지만, 예수님의 피가 구원해버리면 나는 존재가 사라지고 나는 죄가 되어버려요. 야~~ 오늘 중요한 거 오늘 여러분이 듣고 있습니다. 맨날 나 죄 안 지으면 되지. 죄 안 짓는다는 말을 하지 말고 니가 죄라는 거예요. 너는 죄라는 말과 너는 죄를 지으면 죄인입니다. 이라는 말과 지금 완전히 마음 동네가 다른 동네에요. 진도 천천히 나가겠습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과학자가 망원경가지고 달을 봤다. 뭐가 보이지요? 그냥 달 보이지요. 달은 어떻게 생겼어요? 거기도 땅이 있다. 그걸로 끝인가. 끝! 이게 끝이에요. 하나님의 계약 관계가 달에서 안 보입니다. 그 말은 어디에 문제가 있느냐 하면 우리가 지구에 살고 있으면서 이 지구의 이 땅과 우리 말고 예수님과의 계약관계로서 언약관계로서 지구와 땅이 맺어있다는 것을 땅위에 살고 있는 우리가 모르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 멍청하고 엉터리로 살아가고 있다는 거예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남들 사니까 비슷하게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쇠고기무국 끓여 먹고 그게 사는 거고 사는 게 별거 있습니까. 그렇게 살다가 늙어 죽으면 그만이지. 이리 되는데 그렇게 되면 히브리서 12장에서 예수의 피, 아벨의 피가 우리하고 이게 엮여지지를 않아요.

그럼 제가 이렇게 하면, “저 예수님의  피 믿습니다.” 하거든요.  믿으려면 나라는 주체가 예수의 피 목적을 믿는 게 아니고 자리가 바뀌어져야 된다는 거예요. 이해되리라고 기대합니다. 이게 자리가 바뀌어져야 돼요. 예수님의 피 때문에 맛있는 국을 먹었다. 가 되어야 돼요. 나는 예수님의 피 때문에 나는 오늘도 망원경 들고 달을 보았다. “니 뭐로 보이노?” “땅 보인다.” “나는 주님이 만드신 걸로 보인다.” 이렇게 주체가 바뀌게 되면 토해내는 답변이 달라요.

“권사님의 머리는 갑자기 허여졌어요?” “주께서 그렇게 하셨어요.” 이거하고 “요새 스트레스 받다 싶더니만 허여졌어요. 염색하던지 해야겠다.” 그냥 자기 존재하고. 물론 말을 그렇게 남한테 할 필요는 없어요. 왜, 남이 못 알아들으니까. 개한테 진주 던져봐야 소용없고. 말을 그렇게 하게 되면 상대방하고 대화 자체가 안 되니까. 일부러 그런 것까지는 할 것 없는데. 속으로는 주께서 이제는 슬슬 준비하라고 희게 하는구나. 속으로 그렇게 알게 되면 그것이 계약관계에 있던 티를 내는 그게 바로 신앙생활이라는 거예요. 신앙생활.

그래서 신앙생활은 못해요. 왜, 내가 주체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다루는 주체가 아니기 때문에 신앙생활 못하고 주께서 나를 달 만들 듯이, 별을 만들 듯이 주께서 원하는 대로 만드는데 뭐로 만드는가. 예수의 피 안에서 만든다 이 말입니다. 예수의 피 안에서. 그럴 때 우리는 뭘 끄집어내도 예수의 피로 의식과 마음이 그걸로 초점이 맞추어지는 거예요. 예수의 피라 했습니다. 예수의 존재가 아닙니다.

예수의 존재라 하는 것은 예수님이 나와 함께 있어서 나는 은혜 받았다. 이게 되면 예수님의 존재를 경유해서 나는 건드리지 마! 나는 귀한 존재야. 역시 자기 주체로 되돌아오기 때문에 주체가 구멍이 안나요. 찢어지지를 않아요.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 이야기하면 우리는 죽여주옵소서. 저도. 주님 거니까 죽이던 살리던 죽던지 살든지 주의 것이로다. 마음대로 하시옵소서. 이리 되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인지, 성도 아닌지 주께서 구분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뭘 주느냐 하면, 깜짝 깜짝 카드를 사용하지요. 오후3시에 투표하게 만든다던지 4시에 발표하게 만든다던지 깜짝 깜짝 놀라게 만들지요. 지금 한국 땅에서 오후3시에 놀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오후3시 때 남편 암수술 받는 아줌마. 아무것도 관심 없어요. 남편 암수술이 중요하고, 오후4시 때 중요하지 않는 사람은 오후4시 때 그랜드호텔에서 자기 딸 결혼식 하는 사람들.

그건 뭐냐, 그 사람들의 자아는 다른 프로세스. 다른 주체의 과정을 경유중입니다. 뭐냐 하면, 신부의 엄마기 때문에 한복 입은 티가 나느냐, 안 나느냐, 그게 중요한 문제에요. 지금. 이게 아까 뭐냐 하면, 자아는 그 주어진 상황에 프로세스에 따라서 자아가 그 때, 그 때마다 정해지는 거예요. 왜 그게 정해지느냐, 주님께서 그 시간에 시집보내게 했기 때문에. 항상 주체가 뭐냐 하면, 주님이에요.

주님의 피가 주님의 용서와 주님의 죽으심이 나로 하여금 딸을 그 날 시집보내게 하게 하셔서 나는 딴 데 신경 쓸게 없어요. 지금. 한복 티가 잘 나와야 돼요. 사진 찍는데 잘 나와야 돼요. 아이고, 신부 엄마 예쁘더라. 그 소리를 들어야 돼요. 지금. 딸래미보다 신부 엄마 예뻐해야 돼요. 그리고 더 하나 추가해서 제발 내 딸 결혼식 때 비가 온다던지, 땅이 진동 안했으면 좋겠어. 날씨 참 좋고 이랬으면 좋겠어. 보세요. 얼마나 인간들 누구 중심입니까? 자기중심이지요.

여러분들이 알았다 치고, 들어갑니다. 예수님의 죽음 다시 해봅시다. 아벨의 피, 예수님의 죽음. 죽음을 아까 언약이라고 했고 이게 계약입니다. 이 계약으로 모든 피조세계가 다 계약관계에 놓여있어요. 그러면 주님께서 피를 흘렸고, 죽으시고 부활하셨잖아요. 그렇게 되면 예수님이 이 피조세계에 중심이라는 것이 다 완전하게 들통 났지요. 드러났지요. 그럼 뭐가 되냐, 그동안 예수님 중심으로 움직였던 이 세계는 부셔져야 돼요. 종이로 만든 조형물 눌러버리면 푸지직! 하고 찌그러지지요. 찌그러져야 돼요. 찌그러지는 그 과정을 그림을 먼저 구약에서 시내산을 가지고 이미 시범 모델로 보여줬어요.

시내산이 흔들렸거든요. 흔들린 이유가 계약판 때문에 그래요. 계약판. 시내산이 흔들렸다는 말은 시내산이 가만히 있는데 흔들린 게 아니고 주께서 무슨 작업을 하신 거예요. 계약을 성사시키면서 계약의 격에 맞도록 땅이 흔들린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졌을 때, 잠시 하늘이 어두워졌고 그 예루살렘에 있는 공동묘지에 있는 돌로 막아놓은 무덤들이 터지고 열리면서 죽었던 자가 살아났지요. 하늘이 캄캄해지고.

백부장은 이방인을 말합니다. 이방인이 전혀 유대인이 아닌 메시아를 안 기다리는 그 백부장이 진실로 저분은 죄인이 아니고 진실로 의인이다. 라는 신앙고백이 마구 터져 나오고요, 한 번 물어봅시다. 무덤을 돌로 막아났는데 자연적으로 이게 무덤이 열릴까요? 안 열릴까요? 안 열리지요.

그러면 어느 동네에 태어나서 학교 졸업해가지고 미용사로 일하고 있다. 이런 인간이 하루아침에 성도된다. 이게 자연스러운 일일까요? 기적일까요? 기적이지요. 동일한 기적이에요. 가만히 있는 무덤이 열리는 거나 어떤 사람이 자기 주체자를 바꾸어서 예수님께서 나를 태어나게 했고, 끝까지 예수님께서 천국도 이끄신다. 나는 행할 것은 아무것도 없고 주께서 알아서 자기 작품을 만든다. 라는 인식이 생기는 것은 기적에 속하는 겁니다.

그 예수님 십자가 돌아가셨을 때, 살아났던 그 무덤에서 나왔던 그 아줌마, 아저씨들 있었잖아요. 그 사람들 천년만년 살았습니까? 또 죽었어요? 또 죽었어요. 마리아, 마르다 오빠 나사로 살아났잖아요. 그런데 계속 살았습니까? 늙어죽었습니까? 결국 늙어죽었어요. 지금 가도 못 찾아요. 늙어죽었다 말이지요.

그러니까 뭐냐, 성경에서 살았다는 말은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 아니고, 기도해서 병 낫는 게 아니고 바뀌지 않는 것이 내부에서 바뀌어버린 현상이 일어났느냐 하는 거죠. 그러면 내 주체가 진동되어야 돼요. 내 주체가. 뭐로 증명되는가. 나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계약 때문에, 언약을 증거 하는 용도로서 내가 이 땅에 태어나야만 한다는 사실을 수용해야 됩니다. 그게 새 언약의 특징이에요.

구약은 스톱이지만, 돌판으로 우리 마음은 스톱되어 있지만 대기 상태에 있지만, 새 언약은 뚫고 들어와요. 마음에 점령하고 장악해 버려요. 2차대전 영화에 보면 독일군에 연합군이 장악하듯이 6.25 전쟁 때 평양에 미군이 진주하듯이 새로운 낯선 그동안 내 인생은 나의 것! 이리 하다가 그게 내 인생은 주의 것이에요. 비로소 주의 것 해놓고 로마서 딱 펴보니까 로마서14장보니까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아~ 이게 이걸 이야기하는구나! 고린도전서6장에 보면 먹든지 마시든지 니가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갈라디아서2장20절에 보면 너는 죽었고 니 안에서 그리스도가 산다. 아! 이게 비로소 성경말씀이 기적적인 성령을 받아야 기적적으로 성경해석이 되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담임목사 설교하는 거 들어보세요. 가관이에요. 사기도 그런 사기 없어요. 뭐 저런 게 다 있어. 저 내용이 아닌데. “행하시면 복 받습니다. 구원받습니다. ”그게 아니라는 말이죠. 왜냐 하면 복을 소유해버리면 나는 안 죽었어요. 나는 구멍 나지도 않았어요. 건전한 인간에다가 교양 하나 더 추가해서 다닌 것뿐이에요. 취미생활로. 혹시 이거 해놓으면 죽고 난 뒤에는, 이거 받으소서! 이거 받는 줄 알고. 지금 구원 받아야지 나중에 죽고 난 뒤에 천당 갈까, 지옥 갈까, 그 문제가 아니거든요. 성령은 이미 일찍 침투해버렸어요.

캘거리강의 마지막 강의에서 두 번째 강의 캘거리 강의가 다 그래요. 이미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해버리면 시간적으로 십자가이후를 끝나버린 상태에서 성령이 왔다는 말은 이미 끝 지점에 간 그 분이 다시 오다보니까 미래가 우리한테 덮친 거예요. 캘거리 강의가 줄곧 이 강의였어요. 미래가 왔기 때문에 본인도 본인의 달라짐에서 깜짝 놀라요. 깜짝 놀라면서 동시에 친한 동창생들 다 떠나버려요. “니 좀 이상해졌다.” 그럴 때는 이렇게 하세요. “니가 이상하다.” 고집부리지 말고 안 지려고 하지 말고 이렇게 하세요.

“그래, 이러는 나도 이상해. 나도 내가 돌아갔어. 이상해.” 차라리 이게 편해요. “너희들이 잘못이야. 너희는 지옥가고 나는 천당 가.” 이렇게 하지 마시고 나는 복음주의자다. 그렇다고 이렇게 하지 말고 “나도 이상해. 나도 자꾸 니 동네에 가고 싶어. 지금이라도 가고 싶어. 니들처럼 살고 싶어. 자식자랑하고 이것 자랑하고 나도 그게 편해. 그게 편한데 이상하게 점점 더 안 돼. 그게.” 그렇게 생각하시면 친구도 더 이상 떨어지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친구 없이는 우리가 외로워서 못 살아요. 자살해야 돼요. 자살하는 이유는 외로움 때문에 하는 겁니다. 돈이 없어서 자살하는 게 아니고 외로움 때문에 하는 거예요. 왜 외로우냐 평소에 친구가 너무 많아서 탈이에요. 너무 친구 있는 재미로 살다보니까 한꺼번에 훅 가니까 옛날 그 자아가 아니라서 견딜 수가 없는 거예요. 다른 병은 약으로 고칠 수가 있어요. 이런 외로움은 고칠 수가 없어요. 그런 분들을 많이 만나는데요. 저는 복음만 전할 수밖에 없어요. 요렇게 하시면 요렇게 치료됩니다. 하고 이렇게 처방전 내릴 자격도 없고 그럴 리도 없고요. 그냥 하나님이 만드신 인생이니까 주께서 뭐 어떻게 하시겠지. 하는 것밖에 없는데.

과거에 야심이 너무 강렬했다든지 뭔가 사회에 대한 막연한 복수심 이런 게 강렬할 때는 이것, 저것 안 되게 되면 나중에 충격적인 결말을 일으켜요. 뭐냐 하면 나는 이 정도만한 인기를 얻어야 돼! 수많은 사람이 나를 현재 기대하고 있으니 기대에 부흥해야 돼! 자살가능성이 상당히 높은 사람입니다.

성도가 되었으면 자꾸 자기를 티내지 말고 인기 얻을 생각하지 말고 스스로 본인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날마다 되새겨줘야 돼요. 내가 뭐 몇 명 전도하고 뭐 어떻고 그러지 마세요. 내 팬이 몇 개고, 니 펜은 볼펜 2개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을 쓰시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존재를. 발걸음을 세시는 것은 주님이지 내가 운동해서 걸어가는 게 아니거든요. 머리카락도 마찬가지고. 성경이 폼으로 있는 게 아닙니다.

사람이 인기 있을 때 주의해야 돼요. 지난 가락강의 때 2번째 동영상할 때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성도의 대인관계는 어떤 관계이어야 되는가, 사람이 전도하고 선교할 때, 상당히 주의해야 될 게 선교하고, 전도해서 사람이 삐져서 가게 되면 천만다행인데, 내 말을 고분, 고분 들어줄 때, 갑자기 그 사람에게 약점이 보이면서 그 약점을 노리고 싶은 욕심이 작동합니다. 돈으로 한 번 빼먹어볼까, 라든지 내가 필요할 때 함부로 다룰 수 있는 대상자가 된다는 어떤 자기 먹잇감이라는 생각을 가질 수가 있어요.

그래서 선교하고 전도하는 사람을 저는 좋게 안 봅니다. 사기꾼일 가능성이 99.99% 선교사나 전도사나 목사들은. 왜? 자기가 마음대로 가지고 부릴 사람이 몇 명 있다는 의식을 못 버리기 때문에 그래요. 성령이 와서 이걸 완전히 주먹으로 쳐버려야 돼요. 오늘 제목을 ‘주먹’이라고 할까. 찢어버려야 돼요. 니는 아무것도 아닌 걸 ‘아! 내가 의미 있구나!’ ‘내가 좀 살아가지고 전도해야 하늘나라 확장되는구나!’ 이러면 이미 사기5범 이상 됩니다. 사기10범 이상 되는 거예요. 정말 주의해야 됩니다.

쓰다가 폐기처분하면 그동안 쓰인 것만도 감사해야 되지요. ‘왜 요즘 이게 왜 안 먹히지?’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돼요. 이 말은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 자신이 늘 진동해야 돼요. 왜? 우리 자신을 흔들어줘야 그래야 뭐가 나옵니까? 바깥에 뭐가 나옵니까? 이 계약, 하나님의 언약, 예수님의 죽음이 나와요. 예수님의 살아있음이 나오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죽음이 나온다고요. 예수님의 피가 나와요.

죽어 마땅함 속에 주님이 죽었다가 나오기 때문에 주님은 나올 때, 피가 흠뻑 젖어서 나온다 이 말이죠. 그런데 멋있는 주님이 들어갔다가 나올 때도 멋있게 나오면 안돼요. 주님이 나올 때는 내가 품고 있는 죄 때문에 밖에 나올 때는 온 천지에 피가 흠뻑 젖었기 때문에 그 피 묻은 모습이 오늘날 우리가 살아나는 제2의 우리의 자아의 모습이 되어야 돼요. 뭘 해도 우리는 죄고 이 일 때문에 안 살아도 되는데 주께서는 살려주니까 오늘도 살아간다. 이런 거.

살려주니까 회쳐먹고 맛있게 먹고 하잖아요. 살려주니까. 주께서 그렇게 주셨으니까. 누구를 통하든. 하는데 그래서 먹을 만한 자격이 된다든지, 이거하고 뭐하겠다는 그런 생각은 또 다시 자아가 엉터리 주체를 거친 자아를 주께서 원하지 않는 결과물이 있어야 할 자아가 주인자리라고 자리로 와버리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늘 진동해야 되는 겁니다. 진동. 요기까지는 아셨다 치고.

더 어려운 데로 나갑시다. 어려우니까 과정 생략하고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시내산이 나중에 뭐로 바뀌는가 하면, 나중에 성전의 의미가 담겨있거든요. 성전의 의미는 뭐냐 하면, 알기 쉽게 후지 산으로 봅시다. 비어있습니다. 비어있음은 뭐로 나가는가 하면 채움으로 나가요. 비어있음은 채움으로.

성전자체가 아무것도 없는 곳이에요. 그래서 성전 자체가 비어있는 것을 나중에 채운다는 것은 나중에 예수님이 와서 이 자리를 채운다는 이 말이거든요. 성전은 아무것도 없는데 예수님이 와서 채워요. 성전에는 언약궤가 있잖아요. 언약궤를 놔도 언약궤는 없어져요. 성전 자체가 빈 곳이 되고 그곳에 예수님께서 그곳을 채웁니다. 이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는가 하면 기이하다.

시편104편 22절~24절 봅시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우리 눈에 어떻다고요? 기이하지요. 그 다음에 24절 제가 읽겠습니다. “이 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이 본문이 무지 무지 어려운 본문인데, 왜냐 하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으면 이건 시간이 아니고 어떤 지역. 공간을 이야기합니다.

공간을 이야기해놓고 기이하다고 해놓고 24절에 보면 이 날은 여호와의 날이라고 했지요? 공간과 시간은 공간은 공간대로 따로, 시간은 시간대로 따로 생각하는 거예요. 몇일이야? 하는 말과 여기 어디야? 같은 말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몇 일이야가 어디야가 통용되는 곳은 하나님의 계약,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는 통용이 돼요.

그러면 통용되려면 통용되는 만나는 장소가 있어야 통용되잖아요. 만나는 장소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성전이고 예수님이 곧 주의 날이 돼요. 시간이 거기는 고정되어있기 때문에. 그걸 수요일날 제가 멜기세덱이라 했어요. 멜기세덱. 결혼한 새댁이 아니고 멜기세덱.

멜기세덱은 고정되어 있고, 아브라함 역사는 나그네처럼 움직인다 했지요. 그런데 그 움직임은 무엇에 비취는가 하면 고정된 것에, 아래 땅에다가, 그걸 비춰버린 것이 아브라함의 역사가 된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역사 속에 아브라함의 자손 나오고 그 자손이 바로 멜기세덱의 반열에 속하는 거예요. 멜기세덱의 반차, 족보는 없어요. 그런데 족보라 했거든요. 멜기세덱의 족보를 누가 대신 보여주는가 하면 아브라함의 족보가 멜기세덱의 족보를 대신 보여줍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족보의 특징이 뭐냐 하면, 육적으로 이게 끊어져있어요. 단절되어있어요. 이스마엘은 안돼요. 왜? 아브라함의 몸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럼 뭐가 돼요? 이삭이어야 돼요. 그런데 이삭은 그냥 몸이 아니고 어디서 나온 몸이냐 하면 죽은 몸에서 나왔어요. 죽은 몸에서. 이게 지금 성경에 다 나오는 이야기인데, 연결시키니까 굉장히 논리적으로 빵빵하고 어려운 거예요. 이게. 전체다가. 

쉽게 말해서 전 세계는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서 전 세계는 만들어졌거든요. 결론은 간단한데 이걸 과정, 과정을 논리로 말로 설명하려하니까 성경의 모든 기준을 다 가져와야 돼요. 다 가져와서 연결시키는데 연결시키는 것에 대해서 저항하는 쪽이 누구냐 하면, 우리가 몸이 안고 있는 시간과 공간성 때문에 납득이 안 됩니다. 무슨 뜻입니까? 어떻게 그게 기이한 겁니까? 성경에서 기이하다 하면 기이한 거예요. 납득이 되는 것만 이야기해주세요. 납득이.

납득이 되는 것만 이야기해 주세요. 납득이 되는 게 뭐냐 하면 어느 동네에 살다가 미장원 하다가 가까운 교회 다녀 신앙생활 하다가 죽어서 천당 간다. 전부 다 납득이 되지요. 왜? 갖고 있는데다가 추가해서 교회 다닌 거 포함했으니까. 그것은 계약이 아니지요.

그리고 납득이 되는 게 뭐냐 하면 십계명 지켜라. 사도바울의 권면을 지켜라. 지키라는 것은 말씀이 요 앞까지 온 거예요. 그 다음부터는 내가 지키면 되고. 지키면 내 거 되고, 안 지키면 내 거 안 되는 거예요. 그렇지요? 말씀이 요 앞에 있을 때는.

그런데 말씀이 내 안에 들어와 버리면 뭡니까? 이건 강한 헤비급 주먹이 되어버려요. 주먹이 되어 들어오면서 우리는 찢어지고 찢어지면서 우리는 반항하지요. 왜 내 인생을 망칩니까? 니가 죄인이거든. 그러면 이건 로마서7장하고 연관되는 거예요. 우리는 죄인 줄 몰랐는데 율법이 와서 죄라하니까 우리는 비로소 저주받아 마땅한 죄고, 따라서 행함으로는 죄를 더욱 더 죄 되게 할 뿐이지 행함으로서 의로 이룰 수 없다.

그런데 율법 외에 한 의가 십자가고, 그 십자가에서 화목제물이 되셔서 그 십자가를 의지함으로서, 의존함으로서 거기에 몽땅 자기를 그 안에다가 던져 넣음으로서,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을 주님이 채움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믿음으로 의에 이르니 그래서 행함으로 믿음이 아니고 믿음에서 믿음으로 로마서1장17절. 이게 바로 복음이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다른 말로 번역하면 예수님에게서 우리로. 출발점이 예수님이고 우리는 그 결과물이 되고. 이게 어떻게 엮어지느냐 하는 겁니다. 엮어질 때 뭐는 아니고를 먼저 알아야 돼요. 뭐는 아니고. 지키세요. 믿으세요. 이건 아니다 이 말이죠. “믿으세요.” 하면 믿는 행동의 주체가 누구에요? 내가 또 나서야 돼요. 그런데 오후3시에 믿다가 오후 5시에 놓쳐버리면 어떻게 할 거예요? 안되잖아요. 치매 걸리면 어떻게 할 거예요?

그래서 기이하다. 이걸 하는데 비었음을 채우는 식으로 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시내산이 흔들렸잖아요. 그 안에 누가 계시다? 예수님인데 그 시내산에 가보면 아무도 없어요. 분명 시내산은 흔들렸는데 그 때뿐이고 그 다음에 올라가면 흔들리지 않아요. 이게 뭐냐 하면 이것을 ‘사건’이라고 합니다.

사건은 무엇의 반대말로 사건이냐 하면 존재의 반대말이에요. 내가 예수를 믿는데 예수 믿는 게 사건이 아니고 나라는 존재자체가 사건에 합류가 되어버리면 내가 인생 살아가는 게 사건입니다. 집사님이 살아가는 게 사건이에요. 80, 90까지 살면 길어 보이지요. 죽고 나면 잠깐 살다가는 거예요. 잠간, 순간, 찰라, 소량의 시간. 사건이지요. 옛날에 안양에 어떤 분이 있었는데 예쁘장한 분이 살았어. 그래 사건이었어. 그냥 사건이에요. 본인은 지겨워라. 지겨워라. 주여, 지겨워서 못 살겠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있어봐. 나이 들고 죽을 때 되면 다 뒤돌아보면 한 숨의 사건이었지요. 여기 개가 있는데, 개에게 미안하다마는 나중에 죽게 되게 되면 그 때 그런 개 있었는데 디게 남자 밝혔던 개 있었지. 그게 하나의 사건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합니다. 이름을 부를 때는 이미 없다고 생각하고 뒤돌아보는 안목에서 이름을 붙여라. 그러니 내 이름은 이미 죽은 자의 이름을 붙여라 이 말이에요. 죽은 자의 이름은 이름이 없어요. 죽은 자의 이름은 없는데, 죽은 자의 이름을 붙일 때는 죄인의 이름을 붙이는 거예요. 그래서 죄인의 퍼스트 이름이 근호고, 세컨드 이름이 이가 되는 거예요. 영어로 하게 되면. 근호리가 되는 거예요.  이게 죽은 자인데 없어질 이름. 잊혀진 이름. 기억날 필요 없는 이름. 잠시잠깐 이름. 그런 이름이죠.

어떤 목사 있었다. 서머나 교회 세웠다. 하지만 이미 죽고 난 뒤에는 잊혀진 이름이에요. 잊혀진 이름가지고 자꾸 거론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일반 역사에서도 어떤 사람을 저주하고 싶을 때는 그 사람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이름을 바꾸잖아요. 그리고 자기는 존재하기 때문에 자기 이름은 함부로 불러지는 게 싫어하고. 그래서 김기춘씨는 마구 이러면 김기춘씨는 기분 나뻐하는 거예요. 최순실을 압니까? 모릅니다. 어디 감히 박영선이 니가 감히 나한테 이름을 불러. 이런 식이에요. 그럼 이렇게 사진이 나와 있는데요. 아! 내가 착오가 있었습니다.

세상에 모든 것은 내 이름을 지키기 위해서 필요한 이름과 필요치 않은 이름을 구분하는 그런 작업에 사람 사는 거예요. 이웃집 누가 사는지 압니까? 모르지요. 알 필요 없습니다. 필요치 않은 이름이에요. 필요한 이름과 필요치 않은 이름을 구분해요.

그러나 하늘나라의 필요한 이름은 누구 이름밖에 없습니까? 사도행전에.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다는 말은 다른 이름은 털어버려라. 라는 말이지요. 박근혜고 뭐로 다 털어버리고 심지어 누구 이름까지? 나의 이름조차도 이미 죽은 이름이니까 그다지 자기 이름에 연연하지 말라는 거예요. 자기 이름에. 뭐 공뭐시기. 자기 이름에 연연하지 말고 그냥 주를 부를 때 그리스도 이름으로, 성도라는 이름으로, 그 죽은 자 이름 부르지 말고 살아있는 이름.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이름으로 부르는 걸 그걸 가지고 성도라고 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공은주(IP:119.♡.152.148) 16-12-21 16:32 
안양20161209b히12장25절(발치)-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 시내산이 화산처럼 진동한다. 나중에 여기에 채워집니다. 채움. 또는 채워짐. 예수님이 오셔서 채워지거든요.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이게 불가능하지요. 화산 속에 들어가서 어떻게 뜨거운데서 사느냐 하지만, 이게 전부 다 예수님과 계약관계에 있습니다. 화산도. 나중에 성전도. 나중에 예수님 몸으로 오심도. 전부다 하나님의 계약에 의해서 움직이거든요.

계약은 시공간에 얽매이지 않아요. 뭐든지 필요해서 사용하게 되면 다 계약적으로 쓸 수가 있어요. 가능해요. 풍랑이 움직인다. 그러면 제자들 입장에서 그냥 기다리면 되는데 예수님은 꾸짖어 버리지요. 꾸짖어버리니까 어떻게 됩니까? 개보고 가만히 있어! 하니까 개가 가만히 있는 거예요.  그것처럼 모든 게 예수님께서 못하실 게 없고 그리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의 그런 능력을 또 이용하려하는 거예요. 야~ 저런 솜씨 있으면 빨리 지하에서 위로 햇빛 비치는 곳으로 또 올라올 수 있겠다. 이리 생각하는데 주님의 기적은 하나의 기적밖에 없어요. 피 흘리는 기적밖에 없어요. 이건 뭐냐 하면 느그는 망하는 동네에서 망하게 될 때 그냥 망하면 기적이 아니고 망하는 이유를 알고 망하면 그게 계약관계 속에 놓여있는 채로 주님의 사람으로 살아온 바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별다르게 할 게 없고 그냥 사시면서 주님의 계약, 그 아벨의 피, 예수님의 피와 연관된 채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는, 예수님의 복음에 의해서 산다는 것을 늘 증거 하는 용도로 지금 우리가 이 세월, 이 나이를 먹기까지 계속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특별한 게 없어요.

자, 그럼 채워지는데, 이것은 예수님에 대해서 화산이 나중에 성전 되거든요. 나중에 제사로 변화고 성전의 장소가 예수님의 십자가가 되는데 이건 예수님 노선이고. 그러면 오늘날 우리의 노선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우리의 노선은 파헤쳐져야 되지요. 사마귀나 티눈 같은데 약 바르면 나중에 딱딱한 게 빠져나오면 옴폭 뚫리지요. 주님께서 계약을 성사시키려면 뭔가 우리 안에 딱딱한 게 들어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악마가 우리에게 심지를 박아났다. 이리 보면 돼요. 심지. 핵추진 원자로 같은 거. 그냥 우리 속에 집어넣었는데 그게 하나의 권력으로 집어넣었어요. 힘으로 집어넣었어요. 우리는 그 권력이 히브리서2장에 의하면 죽기를 무서워서 벌벌 떠는 거예요. 악마가 우리 속에 뭘 집어넣는가 하면 히브리서2장 말씀대로 하면, 우리 안에 뭐가 박혀 있느냐 하면 죽음의 힘이 박혀있어요.

죽음의 힘이 박혀있는데, 이 죽음의 힘 때문에 우리가 벌벌 떠는 거예요. 우리가 자꾸. 뭘 하면 눈물 나고 뭘 하면 무섭고 두렵고 하는 게 결국 마지막에 왜 무서워하지? 왜 떨지? 끝까지 논리를 까보면 죽으니까. 그럼 죽으면, 죽으면 되지. 왜 무서워하지? 내가 사라지니까. 그럼 사라지면, 사라지면 되지. 사라지는 게 왜 무섭지? 여기에 대해서 철학자나 많은 심리학자나 과학자들은 이게 모르겠다는 거예요. 철학에는 해답이 없어요. 신학도 마찬가지고. 해답이 없어요.

사람이 죽으면 죽는 건 좋은데, 왜 죽는 것을 무서워하고 왜 사는데 아등바등 집착을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행복이란 뭘까요? 행복이란 죽음에서 내빼는 게 행복이고요, 죽음은 멀리하고 보다 잘 살 수 있는 가능성을 많이 끌어 모으는 것을 행복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행복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점점 더 불행해져요. 그걸 심리학자나 철학자들은 그 이유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차라리 행복을 생각 안할 때는 행복한데 행복을 찾아다니면서 점점 더 초조해지고 불안해지고 행연아 이 행복을 남이 뺏어갈까 봐, 어떤 사태가 벌어져서 겨우 장만한 행복이 순간적으로 와해될 까봐 겁나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말이 있잖아요. “엄마, 우리가 이리 행복해도 돼?” 드라마 보면 그런 대사 나오지요. “이렇게 너무 행복해도 돼?” 너무 행복해서 불안한 거예요. 이게 언제까지.

그러니까 하나님의 계약은 뭐냐 하면, 고 악마가 집어넣은 무서움을 이걸 뽑아내버리는 거예요. 마치 이빨 뽑듯이. 발치하듯이. 이걸 뽑아내버리면 어떻습니까? 퉁하고 빈곳이 되지요. 허하지요. 비워있는 느낌. 구멍 난 것처럼. 총알 맞은 것처럼. 백지영의 노래처럼 구멍이 나버렸어요. 뻥하고 뚫려 버린 거예요. 그런데 그 뚫려서 뽑힌 발치된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 하면 행함의 자리가 돼요. 행함의 자리.

행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아야 그게 주님의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의 발견해야 될 진리입니다. 이게 기쁜 소식이에요. “주님, 뭘 행할까요? 주의 형상 본받을까요?” 이리 나오지 말고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내가 어떤 것을 행한다 할지라도 십자가 피를 더 많이 흘릴 수밖에 없는 원인제공자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원인제공자. 십자가 앞에 있습니다. 십자가가 뭐냐 하면, 채워진 거예요. 전에는 시내산 이야기하던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채워진 거예요. 꽉 찬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계약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악마로 꽉 차있어요. 악마로. 자, 십자가에서 능력이 오게 됩니다. 그럼 발치하지요. 우리를 이걸 뽑아내어버립니다. 뽑아내면서 뽑아내서 가져가는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가 눈으로 봐요. 이렇게. 나한테 뽑혀서 주님 쪽으로 날아가서 십자가 피안에 흡수될 때, 뽑힐 때는 행함으로 뽑혀서 날아갈 때는 무엇으로 변화는가 하면, 죄로 변합니다. 이 죄가 십자가 앞에 가까이 가게 되면 무슨 죄가 되는가 하면 예수님을 피 흘리게 만든 죄가 됩니다. 이걸 로마서10장에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자기 의라고 합니다. 자기 의.

보통 발치하게 되면 퉁퉁 붓기도 하고 홀쭉해질 수도 있는데, 퉁퉁 붓기보다는 그냥 웃지요. 그걸 다른 음성으로 이야기하면 허허. 필요하면 여러분, 호호로 가져가세요. 그냥 웃는 거예요. 뽑혀나가면서. 내가 행했던 모든 것이 주님의 그 원 펀치 한방에 맞고 난 뒤에 내 인생이 완전히 찢어지고 내가 뭔가 내 인생을 내가 소설을 쓰고, 그림 그리고, 만화 그리던 그것이 나는 저 뒤 쪽으로 가야 돼요. 내가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해 오셨던 것이고 나는 자아의 자리에서 주께서 프로세스, 주체되게 하는 프로세스를 거쳐서 맨날 오해하는 자아 붙들고 그것 가지고 뭐 해보려하는 그것을 주께서는 계약관계라는 것을 뚜렷이 만들어버리니까 이게 내 몸이 주의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주께서 함부로 다루시는 대상자가 되는 겁니다.

날마다 뭘 뽑아내는가 하면, 우리한테 행함을 뽑아서 그냥 뽑아서 자기 의라고 지목하면서 그걸 십자가 앞에서 죄로 전환시켜 버려요. 그럼 우리는 뭐만 하면 되느냐 하면 날마다 발치 당하면 돼요. 행함을 만드는 생산 발전소. 맨날 여기서 행함을 만들어내면 되는 겁니다. 행동을 만들어내는 말이 아니에요. 이런 게 참 어려워요. 행동을 만들게 되면 그냥 행동하면 돼요.

그런데 행동하고 행함하고 다른 게, 행동은 행동한 것에다가 자기 자아가 의미를 갖다 붙이는 거예요. 나는 오늘 이런 행동을 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함이었다. 또는 건전함이었다. 나의 순수함의 발로고 나의 신앙의 경건함의 증거물이다. 계속 그것을 내가 자꾸 마일리지 쌓듯이 그걸 계속 만들어내고 만들어낸 것을 셀카 찰칵! 찰칵! 웃으면서 찍어가지고 늘 쳐다보고 있는 거예요. 내가 나를 쳐다보면서 스스로 행복해하고 자만에 빠지고 자아만족에 빠지는 겁니다.

그럴 때 집게가 와요. 십자가로부터. 성령으로부터 집게가 와 가지고 고걸 들고 갑니다. 오! 오! 이거 내가 공들여서 잘한 착한 일인데. 가져가게 되면 우리는 이 자리가 완전히 북~하고 허하게 파여 버리지요. 그러면 우리가 남는 게 뭐냐 하면 아무 쓸데없는 자.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하잖아요. 매일 순간마다 쓸데없는 자가 되는 거예요. 이 쓸데없는 자.

쓸데없는 자가 허하게 파였지요. 그것에 무엇이 담기는가. 쓸데없는 것에다가 주님의 귀한 것이 와버리면 합체되어버리면 귀한 성도가 되는 겁니다. 귀한 성도. 귀한 성도의 받을 보너스가 뭐냐, 받을 혜택이 뭐냐 하면, 누구든지 나를 건드리면 소자를 건드리는 것으로 간주해야 돼요. 나를 건드리면.

그래서 아까 첫째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목사가 자기 말이 잘 먹힌다고 그 사람에 대해서 그 정신과 영혼에 함부로 건네고 건방지게 말을 함부로 하고 부하 직원처럼 다룰 때, 그 소자를 다른 게 돼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 사람의 말씀을 복음을 믿게 되게 되면 깜놀, 깜짝 놀라야 돼요. 배후에 누가 계시는가. 주님이 자기 스웨터 품에 안는 거예요. “얘는 내거야” 품어 있는 거예요.

그 사람을 건드리면 그 품고 있는 예수님의 팔을 건드리는 셈이 되어가지고 지지직 전기가 와가지고 진동이 와버려요. 안돼요. 그래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누구냐, 복음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이 목사인 제 입장에서는 제일 무서운 사람이에요. 마귀보다 더 무서워. 행여나 함부로 했을까. 행여나 이용해보려고 했을까. 행여나 내 사람처럼 생각한 적이 없을까. 조심스럽고 조심스러워요.

그런데 제일 편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복음도 개뿔도 모르면서 복음이란 정보 하나를 추가해서 하나 언진 사람들. 사정없이 이단입니다. 저는. 볼 것도 없이 이단이에요. 목사가 됐든, 장로가 됐든, 그건 이단이에요. 그거 뭐 막 욕해도 괜찮아요. 예수님도 욕했잖아요. 예수님께서 분명히 온전하라 해놓고 예수님 본인은 독사의 새끼들아, 했거든요. 원수를 사랑하라. 해놓고는 독사의 새끼들아, 라고 이야기했다고요.

그래서 여기에 보면 방금 설명한 것을 시내산 성전이라 하면 이걸 침묵하는 권력에서 이러한 모든 언약이 뭐라고 하는가 하면 말하는 권력으로 와요. 침묵하는 권력에서 말하는 권력으로 와요. 왜 이걸 이렇게 했느냐 하면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들이 평소에 자기가 갖고 있던 힘이 말로서 나오거든요. 이 말속에 침묵했던 그 권력이 말로 섞여버리면 두 종류의 말이 생겨요. 한 쪽은 다 같은 사람이 쓰는 말이고 헬라말이고 아랍어고 그렇게 히브리말을 써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예수님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권력의 층이 서로 두 개로 구분되었고 그냥 구분된 게 아니고 충돌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이 모든 것 자체도 언약 때문에 이렇게 권력이 말하는 권력으로 나누는 겁니다. 그래서 말하는 권력이니까 권력을 지금 지워봅시다. 그럼 뭐만 남지요? 말만 남지요. 그러니 복음을 전할 때, 말로 하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을 시시하게 본 거예요. 그런데 실제로 예수님은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한테 말을 해요. 나한테 잘 보이면 너 풀려날 수 있어. 나한테 말을 잘해. 내가 납득이 되도록 말을 해주면 내 권한에 내 권력에 당신을 풀어줄 수 있다. 하니까 주님이 하신 말씀이 지금이라도 천사가 와서 십자가에서 얼마든지 풀어낼 수 있다는 거예요.

왜냐 하면 아람군대가 엘리사 있는 곳을 포위했거든요. 포위했을 때에 그 게하시가 벌벌 떨었습니다. 아까 공포이야기 나왔지요. 백날 엘리사 종 되어 섬기면 뭐합니까? 안에 공포심을 발치를 못 했으니까. 뽑아내지를 못했는데. 벌벌 떠니까 엘리사가 하는 말이 기도를 해서 눈을 열어 보이니까 우리와 함께 있는 쪽이 우리를 둘러선 쪽 보다 더 많았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 대목을 보면서 여러분, 이런 생각이 안 들던 가요? 그 게하시한테 처음부터 그렇게 이야기했으면 좋았지 않았으냐 하는 거죠. 처음부터. 처음부터 왜 그렇게 이야기 안했느냐 하면 게하시가 프로세스를 거쳐야 돼요. 인간이 엘리사 말의 정보를 더 알게 되면 믿어지는 것 같은데 절대로 믿는 게 아니고 발치하는 그런 과정이 없어버리면 치아를 빼어버리는 과정이 없어버리면 그것은 그냥 정보를 획득하는 것이 되지 아예 그 비어있는 자리에 주님의 언약이 채워지지를 않아요.

이 빵을 보세요. 빵이 분명히 바깥이 노란색 카스테라잖아요. 이걸 자라보니까 안에 뭐가 들었습니까? 달콤한 앙꼬 들었지요. 앙꼬는 바깥에서 안 보여요. 주님의 언약은 바깥에서 안 보입니다. 성도가 걸어 다녀도 예수님이 걸어 다닌 것으로 안 보여요. 심지어 예수님이 걸어 다녀도 목수의 아들로 걸어 다니는 것을 봤어요. 그런데 안에는 뭐가 들었느냐, 이해 못할 권력이 들어있고 그 권력은 그냥 권력이 아니고 이 세상을 완전히 멸망시킬 그만한 능력이 있어요. 체포해도 천사의 동원령을 내릴만한 권력이 있더라도 주님께서는 그냥 곱게, 연약한 모습으로 그냥 돌아가시는 겁니다.

거지 나사로가 죽을 때, 그야말로 거지입니다. 부자가 와서 얼마나 무시했는지 심지어 지옥가도 무시했어요. 그 나사로보고 물 좀 보내라 하세요. 지옥가도 무시했어요. 무시했는데, 나사로 안에 나사로가 들어있던 게 아니고 아브라함의 언약이 들어있기 때문에 나사로는 죽어서 아브라함 품에 안긴 거예요.

현재 우리 안에 무엇이 담겨있는가가 사실은 우리의 원천입니다. 우리가 있는 것은 겉의 카스테라 밖에 안돼요. 모습이. 그래서 모양은 달라도 존재의 성격은 바뀌지 않는다는 말이 있어요. 모양은 각자 다 달라도 그 성격은 동일하다는 게 있어요. 그걸 보편성이라고 이야기하는데. 보편성. 상당히 말 붙이기가 상당히 힘들어요. 인간 말이 서로 대비되는 다른 내용들을 갖고 있기 때문에 복음을 설명하려하면 인간 말인데 그 같은 내용이라도 그 내용이 완전히 다른 정도가 아니고 차이나는 정도가 아니고 대치가 돼요. 서로 충돌을 일으켜요.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우리 자신이 대치되는 그것을 찾아내고 발굴할 수 있다면 우리가 자신이 이미 하나님의 언약관계 속에 있는 사람이고 십자가 피가 우리 안에 들어있는 사람이에요. 십자가 피가 있으면서 우리의 모든 행동은 행위 또는 행함으로 이걸 성경에 있는 용어로 바꾸어서 그걸 십자가한테 가게 하면 그게 자기 의가 되고, “주님이여, 그 기도하는데 사실은 얼마나 애를 썼다고요. 저거 아까운데. 저게 있어야 내가 보너스 받는데.” 그것마저 죄로 십자가 앞에서 완전히 십자가 용광로 앞에 풍덩 잠기면 그게 죄로 빠지는 겁니다.

나의 진수. 나의 진짜 내가 정말 요건 놓치기 싫은 것. 정말 이것은 주님이든, 누구 앞에서든 착하다고 인정받을 증거물 있잖아요. 그걸 자석으로 쏙 뽑아내십니다. 그러면 옛날에는 요렇게 파인 자리에 십자가가 더 많이 와버리면 요 자리가 더 많이 파이겠지요. 요 파인 자리에 항상 자기 의가 새롭게 생산된 창고입니다. 점점 파이겠지요. 점점 더 파이는 거예요. 남들은 모르는 자기만이 꼬깃 꼬깃 갖고 있던, 나 이거 죽으면 나 자살할거야. 그 무엇. 자살하는 사람이 결국 뭐가 없어서 자살해요? 이렇게 십자가 능력이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자살하는 거예요. 요기에 있는데 이게 남한테 들켜버리니까 남이 보는 데서는 더 이상 살 수가 없는 거예요. 주님한테 죽음을 당했으면 자살 안 할 건데 주님한테 자살 안하고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 했는가 거기에 자꾸 생각해보니까 결국 이 안에 뭐가 담겨있습니까?

이 안에 행복이 담겨있고 그 행복은 누구를 위한 행복이냐 하면 바로 only you~~ 오직 나만을 위한 행복이에요. 나만을 위한 행복. 나이 많으면 자식도 귀찮고 다 귀찮은 거예요. 오직 나만을 위한 행복을 끝까지 쥐고 있어요. 끝까지. 우리가 이렇게 할 권리자가 없어요. 우리는 주님에 의해서 계약된 피조물이기 때문에 주님이 방치할 수가 없지요. 앞에 뭔가 굴 파는 로봇처럼 기어이 파고 들어갑니다. 앉아서 주님께서 조종하고 있어요. 왼쪽, 왼쪽, 오른쪽, 오른쪽, 오른쪽 파 보아라....

그럼 마지막에 자아가 있어가지고, 자아가 신으로 있거든요. 왜냐 하면 산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자아가 신입니다. 그동안 최선을 다하여 살았기 때문에 이만한 자아가 어디 있느냐, 나정도 되는 자아가 어디 있어. 이렇게 하다가 벌써 끝까지 쳐들어와요. 여기 있네. 죄인 괴수 여기 있다! 쳐들어와가지고 파고 들어갑니다. 그러면 거기서 뭐가, 뻥하고 뚫리지요. 뚫리게 되면 허! 허! 그냥 웃지요. 또 다 강탈하였구나!

도적같이 온다는 말 알지요? 주께서 내가 귀하게 여기는 걸 다 털어가 버립니다. 귀한 자식 죽고. 귀한 남편 죽을 때 사람은 신자가 아니라 목사라도 정신이 나가버려요. 나는 못 산다. 같이 죽자. 죽자. 죽자. 죽여라! 차라리 날 죽이지. 세월호 네월호 간에 젊은 날에 자식 죽고 난 뒤에는 더는 못 산다. 다른 가족이 엄마 우리 있잖아요. 필요 없다. 필요 없다. 죽은 자식 말고 우리가 있잖아요. 나는 가 없이는 못 산다. 가가 나한테 어떤 존재인데. 엄마, 권사님이잖아. 목사가 위로할 말이 없네. 목사 입에서 하나님 소리 나오기만 하면 “하나님이 그래. 그렇게 나한테 그래. 내가 십일조 다 바쳤는데. 십일조 대가가 30배, 60배, 100배 이게 대가냐?” 손가락질 해대가지고 옆에 권사가 목사님 오늘 안되겠습니다. 다음에 나하고 가실까요.  완전히 뒤집어지지요.

나이 많은 부모 돌아가시면 흐흐헤헤 좋아라 웃고. 부조금 세고 좋아하지만. 젊은 아 죽어버리면 이건 혼절합니다. 혼절. 정신이 나가버려요. 서서히 우울증이 오기 시작합니다. 우울증이 뭐라고 했던가요? 외로움. 외로움이 뭐했습니까? 너무 그동안 얽히고설킨 관계성이 너무 많았어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십자가 끄집어낼 때는 칡뿌리 끄집어내면 칡뿌리만 달랑 하는 게 아니고 칡뿌리와 연결되어 있던 가는 뿌리가 두두두두 다 떨어지지요. 그게 얼마나 아파요. 얼마나 아픕니까?

복음을 안다는 것이 정말 우리로 하여금 감당되지 않을 정도로 외로움을 우리한테 허락해줍니다. 외로움. “그러면 목사님, 왜 주님이 그렇게 하십니까?” 가짜 색출작전이기 때문에 그래요. 복음을 정보로 알았는지 아니면 진짜 발치한 곳에다가 주님이 뽑아내고, 뽑아내고 뽑아낸 주님께서 자기 피를 거기다가 쏟아 부어서 하나의 피로 만든 새 작품을 만들었는지는 환란과 곤고와 핍박, 기근과 적신과 위험이나 칼이 이게 와야 돼요. 이런 현상들이 일어나야 된다고요.

그래서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복음 이야기하게 되면 너무 부정적이다. “너무 부정적이고, 다 말은 맞는데 사람이 그래가지고 힘들어 못 살지. 그리 살면 사람이 행복하냐?” 행복론이 나와요. 그래서 사람이 행복하냐?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야지 그러면 선교사로 갈까? 파키스탄에. 또 나름대로 제일 낮은 거. 선교사 가고 그러면 북한에 들어갈까? 이런 식으로.

“여러분이 진짜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북한에 들어가야 됩니다.” 가르치는 동네가 있어요. 4자입니다. 복음학교. 김용희 선교사. 아주 주의해야 될 동네에요. 이 동네가. 아주 주의해야 될 단체에요. 신천지만 나쁜 게 아니에요. 이 복음학교. 한국교회 썩었다. 복음만 전해야 되는데 복음은 안전하고 교회만 전하더라. 그러니까 기존교회가 야! 여기 복음 있구나! 다가요. 한 번씩 안 갔다 왔습니까? 복음학교에. 처음 들어요? 복음학교하고 비슷한 데가 김성수 마찬가지고 하지만. 이게 뭐냐 하면 사람은 자기가 보기에 바뀔 가능성은 없고 최고의 복음을 듣는 거예요. 최고의 복음. 정말 낮아지고 더 낮아지고. 가장 복음다운 복음을 내가 정보를 소지함으로서 죽을 때 담박 끄집어내놓으면 주님, 나 이거 믿습니다. 하고 내놓으면 패스가 되겠다는 거예요.

내놓으면 그게 죄가 돼요. 왜? 내놓는다는 그 행동이 행함이 되고 내가 이 정도로 나를 유지하려고 경건하게 유지하려고 이 정도까지 제가 낮추고 낮춥니다. 하는 자체가 자기 의가 되어버려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뽑아내어야 되는데 주님이 뽑아내는 게 아니고 진짜 안 뽑힐 것은 따로 챙겨요. 그건 자기 이름의 명예를 위해서. 자기 존재를 위해서 고거 놔두고. 자기가 뽑아낼 것은 미리 주님 손에 담아주는 거예요. 요거 가져가시고. 이것까지 낮춥니다. 이것 가져가라는 거예요. 주님의 집게가 그걸 받겠습니까? 가만히 있어보자. 더 나가지요. 그게 뭐냐 하면 아까 이야기한 사건이 되는 겁니다.

사건의 특징은 우발성이에요. 우발성의 특징은 뭐냐, 예측 못합니다. 예측 못하고 우발성할 때 사람들은 이리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망가지고 부서지고 불나고 사업 망하고 부도나고 애 죽고 이런 것만 생각하는데 성도는요, 하루, 하루 사는 게 예측 못함으로 살았다고 생각한다면 로또 될 수도 있고, 땅을 사놨는데 갑자기 10배  오를 수도 있고, 그것도 하나의 예측 못함이에요. 이것도 하나의 사건이에요.

사건과 우발성, 예측 못함은 이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처음에 제가 인간은 주님한테 계약되었다 했지요. 그럼 내 몸이 아니고 계약을 보여줘야 될 그런 몸이 되는 겁니다. 이런 계약 때문에 주께서는 있는 사람을 흔들어버렸어요. 왜냐 하면 계약은 니가 머리로 이해하는 게 아니고 가만히 있어. 내가 다가갈게. 내가 찾아갈게. 이리 되거든요. 찾아올 때 우리는 내 인생은 내 인생. 내 인생은 나의 것. 하는데 뒤에서 모든 것이 땅도 흔들리고 내 인생도 흔들리고 하는 이 모든 것이 우리한테는 뭐냐, 사건으로 우발성으로 예측 못함으로 오는 거예요.

그럼 예측 못함으로 온다면 이 사건이 오기를 우리가 예측해야 됩니까? 예측하지 말아야 됩니까? 예측하지 말아야 되지요. 그게 뭐냐 하면 그냥 막사는 거예요. 그냥 막. 그냥 살다보면 살다가 뒤돌아보면 전부 다 주께서 주신 사건이 되는 겁니다. 그것도 은혜의 사건. 고마움. 감사함. 그겁니다. 청바지를 찾을 때 단박에 찾을 수 있는데 온 천지를 다 휘 집어 뒤집고 아 붙들고 둘 다 울게 만들고 고 가까운데 있었던 걸 청바지가. 왜 그런 사건을 유발합니까?

우리의 토할 것, 발치할 것 다 발취하고 평소에 안 무서워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뒤돌아보니 화딱지 나고 뒤돌아보니 쓰레기통 같고 인간이 인간사는 것 같지도 않고 지겨워 죽겠고. 이걸 다 폭로시키고 그 때 여기 있네! 뭐예요? 돌아보니까 나라는 것은 없고 그냥 주님이 유발한 사건에 우리는 하나의 껍데기로 살아가는 거예요. 인생 자체가 껍데기로.

껍데기로 사니까 앙꼬가 되지 마세요. 제발 부탁하오니 껍데기는 껍데기로. 어떤 유튜브 보니까 동영상보니까 4살 먹은 아가 초코렛이 좋으냐, 껍데기가 좋으냐, 했더니 껍데기 그래요. 돼지 껍데기를 좋아하는 아이가 있어요. 이유가 뭔가 하니 할머니가 애를 키우면서 돼지 껍데기를 좋아하니까 애가 껍데기를 먹고 살았어요. 우리는 돼지 껍데기에요. 그것도 비싸겠지만 어떻든 간에.

그 다음에 이제 무엇을 채웠지? 우리는 예상하지 마세요. 예상하게 되면 그게 대비가 돼서 문제라. 사건은 예상 못하게 와야 되는데 자꾸 예상해버리면 그래서 제가 늘 평소에 하는 게 목적을 만들지 마세요. 하는 거예요. 목적을. 열심히는 살되 목적은 만들지 마세요. 제가 지난 수요일 날 그런 이야기한 적 있는데. 사람들은 참 헷갈릴 거예요. 목적이 없으면 그러면 그냥 놀까요? 이리 되거든요. 목적이 없으니까, 목표가 없으니까 그냥 놀면 되겠네. 하는 것이 평소에 얼마나 우리의 모든 행동이 목적을 만들어가면서 살아왔다는 것이 완전히 티가 나는 겁니다.

목적은 주께서 우리를 하게 만들어요. 계약이 언약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하루, 하루일이 주어져요. 우발적으로. 엄마 청바지 어디 있어? 이렇게. 뭔가 자꾸 할 일이 주어진다고요. 가만히 있는데도. 오늘도 뭐 별 다 무탈하게. 무탈 같은 소리하고 있네. 차가 막혀서 골목에 못 들어온다던지. 전혀 예측 못했어요. 그것 때문에 5분이나 지체하고. 그 때 할아버지 오토바이 타고 안 갔으면 어떻게 할 뻔했어요.

그러니까 돌아보면 발걸음을 세시고 머리카락을 세신다는 말이 맞아요. 우리는 목적을 만들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해야 됩니다. 잘 들어야 돼요. 어려워요. 그런데 우리는 목적 만들고 대비합니다. 이게 우리가 죽을 때까지 계속돼요. 아무리 하나님께서 너의 목적은 그리스도가 알아서하니까 너는 가만히 있으면 돼! 그 때 그 때마다 일감을 줄 거야. 니는 시키는 대로 하면 돼! 이게 사도바울의 가는 길이었거든요. 주께서는 니는 염려하지 마. 너는 로마에 가야된다. 모든 흔적들이 그야말로 사도행전이잖아요. 사도들이 갔던 행적이 시킨 대로 한 거예요.

그렇지만 사도바울 본인도 항상 행동할 때는 본인의 목적이 우선됩니다. 이리하면 안 되지, 저리하면 안 되지, 이건 조심해야 되지, 이건 이렇게 해야 되지, 이건 보통인데, 특이할 경우에 빌립집사의 네 딸인가 와가지고 허리끈 풀어가지고 “당신이 가면 이렇게 잡힙니다. 성령께서 알려줬습니다.” 사도바울이 “아는데 갈게.” 나도 아는데 잡혀야 되겠다. 잡힌다는 걸 가지말라, 고 해석했는데 잡히니까 가야된다고 사도바울은 해석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남들 보기에는 상황이 동일한 상황이에요. 해석을 예수 그리스도의 죽는 쪽으로 가느냐, 아니면 내가 살아서 행복한 쪽으로 가느냐, 그쪽은 그쪽 해석이고 우리는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왕 이리 사나, 저리 사나, 늙어 죽어 사나, 그냥 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지니까. 늘 어떤 우발적인 사건 속에는 우리로 하여금 내가 소멸되고 내가 있으나마나한 존재로 보이게 하는 쪽으로 주의 일을 그렇게 처리합니다.

몇 일전에 있었던 예인데요. 교회 일이 있어서 갔다가 집에 오는데 문이 안 열리는 거예요. 몇 년간 했기 때문에 비밀번호 잊어버릴 일은 없고. 두 번째 했는데, 세 번째부터는 스마트키가 열리지를 않아요. 마침 나한테 대기만 하면 열리는 키가 있어서 열고 들어갔어요. 그래서 나는 생각했어요. 고장 났구나! 고장 났던지, 건전지 나갔던지 둘 중에 하나로 생각했는데. 아내가 일 나가고 저녁 늦게 올 때가 되었어요. 나는 기다렸지요. “여보, 열어줘”하기를 기다렸어요. 기다렸는데 띵띵띵띵 소리 해봐도 소용없다니까. 몇 번 해도 안 된다니까. 뜨리링띵 하고 들어오는 거예요.

오! 이상하다. 이상한 거예요. 아무 문제없는 거예요. 아내가 있으니까 내가 밖에 나가서 문 닫고 해보니 또 안 되는 거예요. 아~ 골치 아프다. 왜 안 되지? 왜 아내는 되는데 나는 안 되지? 불렀어요. 비상키 들고 나와서 아내가 해봤어요. 아내는 돼요. 나는 또 안돼요. 딱 보니까 밑에 번호가 이쪽 자리인데 다른 자리로 한 거예요. 그래서 아내가 시키는 대로 하니까 열리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계속했던 그 번호라도 어떤 자리에 넣어주면 된다 하는 이것도 내가 잊어버린 거예요. 결국 이건 뭐냐 하면, 나는 나 홀로 살 수 있다. 가 안 되고 나 혼자는 집에도 못 들어가는 거예요. 이걸 다시 한 번 깨닫게 하신 거예요. 주께서. 이걸 통해서. 내가 실수를 안했으면 나는 항상 나는 나 혼자 살아. 주께서 붙여주는 사람 없으면 일이 안되게 되어있는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다음부터는 번호도 잘 알게 되면 건전지약 나갈 수 있어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앞으로 내가 번호를 적어가지고 다니면 열린다. 라는 보장은 없어요. 왜냐 하면 건전지 나갈 수 있고, 진짜 고장 날 수 있고 그럴 땐 그걸 또 벌벌 떨라는 말입니까? 공포심에 쌓이라는 말입니까? 아니에요. 이미 공포를 지나오면서 내 주체가 달라졌다면 앞으로 무슨 사건도 주님께 의미를 담아서 나한테 이런 유발시킨 사건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그 형편에 대해서 감사하면서 그 형편대로 살면 돼요. 고장 나면 고치면 되고 약이 떨어지면 건전지 넣으면 되고 그것도 주의 일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뭐냐, 내가 하면 나의 의가 되지만, 주께서 하게 되면 나는 못났다. 나는 못났다가 계속 증명이 되지요. 내가 못난 자 라는 것. 혼자 일하면서도 절대로 혼자 일한 게 아닌 거예요. 내가. 주께서 이 일을 하게 하신 것은 행복하게 살라는 게 아니고 주님이 살아계심을 증거 하라고 오늘도 하루, 하루를 살게 하신 겁니다.

그게 뭐냐 아까 이야기한 진동해서 파이게 만들고 발치하게 만들고 뻥하고 뚫리지요. 그럼 우리는 그냥 웃지요. 웃으면서 나는 어떤 존재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기 때문에 오늘 죽어도 아무 미련가질 이유가 없어요. 또 살게 하시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를 살게 해서 주께서 하시는 거죠. 그런데 이건 이론이고 실제로는 눈뜨면 허허가 아니라 헤헤. 허허가 헤헤로 바뀌어요. 오늘도 열심히 살아야지. 보람찬 하루 일과를 열심히 살아야지. 애는 내가 키운다. 우리 가정은 내가 책임지고. 촛불 켜고 또 하야하라 들어가는 거예요. 이제. 또 시작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이 나라는 내 나라. 나는 행복! 복음의 정보를 아니까. 또 다시 평범한 나는 어디서 태어나서 어떻게 하고. 벌써 히브리서12장 다 잊어버렸어요.

진동하고, 뽑아내고, 예수의 피 집어넣고 다 잊어버리고 “나는 그거 아는데요.” 이래가지고 또 헤헤거리며 사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계속해서 죽을 때까지는 안 죽어야 돼요. 왜? 죄를 더욱 더 죄 되게 하기 위해서. 흙에 속한 형상은 사라지고 내 속에 있는 하늘의 형상이 흙의 형상을 대신해서 새로운 형체로 몸이 될 때까지 주께서는 계속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 라는 말은 어디서 합니까? 그 사람은 날로 후패하는 걸 짝을 이루어서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행복이라 하는 것은 잊으세요. 행복은 없습니다. 행복이란 말을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불행해져요. 행복은 찾지 마세요. 니나 잘하세요. 행복은 너희들 찾으세요. 우리는 행복 찾지 맙시다. 그러나 교회가면 전부 다 설교가 행복 쪽이에요.

“여러분이 불행한 것은 말씀 안 지키고 헌금 안하고 교회 봉사 안하고 목사 안 섬겨서 불행해지니까 이번 차에 깨달아서 여러분이 잘 섬기시면 여러분의 떨어져나간 소유를 금방 회복됩니다. 여러분이 행복 됩니다.” 그런 쪽으로 결론이거든요. 그런 걸 하면서 이제는 그게 왜 아닌지를 아셔야 되겠지요.

그 다음에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28절 봅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찌니” 진동치 못할 나라를 언제 받았습니까? 받았은즉, 이라고 되어있는데. 받기는 언제 받았지요? 이게 뭐냐 하면, 아벨의 피 시대에서는 구약이지만, 새 언약이 신약입니다. 그러면 우리 몸속에 이미 진동치 않을 영원한 나라가 그 요소가 우리 안에 채우게 됩니다. 여기서 은혜로 주어지는 거죠.

은혜로 주어지게 되면, 은혜로 받았은즉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라. 여기에 두려움이라 하는 것은 대상이 달라요. 옛날에는 내 것 다칠까봐 두려워했는데, 이제는 주님의 하는 일에 엄청남. 그걸 지고함. 엄위함. 엄청난 규모. 엄청난 본질. 거기 앞에서 우리는 그 다음에 하나님을 어떻게 한다? 기쁘시게 섬길지라.

그러니까 하나님을 기쁘게 섬기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엄청남을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죠. 이걸 쉬운 말로 고치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있으나마나한 존재로 바꾸어버리면 그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된다는 거죠. 있으나마나한 존재로 바꾸는 것을 다른 문장으로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쓰레기다. 나는 껍데기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럼 어떤 분이 질문할 겁니다. “목사님, 아무것도 아닌 것하고 내가 죄인인 것하고 차이 납니까?” 결국은 차이 안 나는데 사실은 과정적으로 논리적 과정이 차이 많이 나요. 두 문장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가 되어버리면 아무것도 아니다가 나를 이미 점령해버렸어요. 아무것도 아니다가 점령해버렸어요. 그래서 나는 어디에 포함이 되느냐, 나는 아무것도 아닌 속에 이미 포함이 된 상태에요.

그런데 “나는 죄인이다.” 되어버리면 내가 응시하고 있어요. 누굴 바라보고 있어요. 시커멓게 된 나를 바라보게 되면 자칫하면 내가 죄인인 걸 알았으니까 나는 그만큼 똑똑하잖아. 이렇게 되어버려요. 그러면 똑똑한 나는 온전한 죄인은 아니지요. 똑똑하니까. 똑똑한 게 왜 죄가 되지요? 똑똑한 것은 총명한 거고 그것은 의로운 거죠. 선한 거니까.

선한 내 모습이 나를 죄인으로 본다면 죄인은 하나의 임시방편에 불과한 겁니다. 죄인인 척이 되어버려요.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게 되면 헤헤~ 나는 뭐가 된다. 나는 죄인이라고 우기면서 나는 의인이 되는 수단이 되어버려요. 나는 어떻게 하면 의인될까? 아! 죄인이라고 고백하면 내가 의인되는구나! 수단이 되어버리면 나는 죄인을 경유해서 결국 의인되니까 나는 내가 되고 싶은 대로 내가 되어버린 거예요. 나의 목적이 있어버려요. 나의 노림수가 성사되어 버린 거죠.

그런데 평소에 살다보면 나는 죄인이다. 이게 ①번이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게 ②번이라면 ①번 생각이 많이 들던가요? ②번 생각이 많이 들던가요?  ①번 생각이 많이 들어요. 아차, 이거 실수했구나! 목사님 설교에 의하면 나는 죄인인데 뭐~. 죄인이니까 죄 짓지 뭐~. 그냥 넘어가버려요. ①번 생각 드는 것은 충분하게 당연한 겁니다. ①번은 ②번을 들어오라고 일으켰는데 ①번에서 곧장 ①번으로 도로 돌아와 버리면 안 되지요. ①번에서 아하~ 내가 아무것도 아니구나! 이러면 ②번으로 가는 과정에서 뭐가 나오느냐, 여기서 생유! 감사가 나와요. 감사가. 주님 고맙습니다. 가 나와요.

이렇게 무거운 짐을 한방에 없이 만드니까 감사합니다! 자식이 만약에 수능치고 있다. 창살을 붙들고 엿 붙이면서 기도한다고 칩시다. 마음으로는 갈 수가 없어 가지는 못하지만, 마음으로는 천주교 신자 같으면 묵주 이렇게 잡아당겨가지고 하고, 기독교 신자는 성경 펴놓고 QT하는 선행을 그 시간에 맞춰서 QT가 추가로 또 들어가요. 그걸 경상도 말로 단도리라고 합니다. 단도리. 단단히 더 결속을 더하기 위해서 하는데.

하다보면 “주여, 내가 죄인입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이 못난 걸 보지 마시고 자식이 어떻게든...” 하다가 갑자기 성령이 임해버리면 ‘아하~ 요 지식 꼼수구나!’ 이게 꼼수에 불과한 거예요. 하나님이 자식을 낳게 하셔서 19년 동안 키우게 하셔서 요런 꼼수가 내 마음 속에 깊이에다가 또 깊이, 깊이에다가 또 깊이 있게 담겨있다는 것을 수능 치는 날을 통해서 결국 내가 주님한테 발각당한 거예요. ‘아~ 꼼수구나!’

내가 이렇게 QT하게 되면 뭔가 애한테 성적이 더 오른다 하는 것은 욕심이라면 생각만큼 만의 정도는 나오지 않겠느냐 또 주님하고 협상을 해요. 타협을. 내가 더 달라하면 도둑놈이지요. 하지만 생각한 만큼만 하게 해주세요. 생각한 만큼만 하면 애들 다 100점 맞습니다. 그날 생각 안 나서 문제지. 그저 찝은 것만 몇 개라도...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이런 짓거리 하는 것이 여전하게 이게 나의 껍데기인데 껍데기가 나의 본질마저 커버 할 정도로 덮을 정도로 내 일생이 엉망진창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아무 것도 하면 안 되고, 아무것도 아닌 게 또 자기의 이런 멘트가 장점이 되고. 엉망진창이니까 이걸 하나, 안하나, 이걸 안한다고 해서 괜찮은 게 아니고, 처음부터 나는 아무것도 아님을 또 애 수능 치면서 발각 당했습니다. 하면서 마지막에 나온 게 뭐다?

“주여, 자식 덕분에 내가 또 내 자신을 또 압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아까 QT 한 번 더한 거 고려해주시고 가만해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지 않으시면 우리가 기이하게도 천국 가는 길은 없을 겁니다. 주께서 간섭해 주셔서 천국 간다는 것이 말은 쉽지만 매일 매일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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