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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지역강의 > 안양강의
2017-03-11 00:18:40 조회 : 1066         
자기 고유화 170310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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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은주(IP:119.♡.152.148) 17-03-20 15:07 
안양20170310a히13장10절(자기 고유화)-이 근호 목사

히브리서13장10절, 제가 한 번 읽어볼게요.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그 위에 있는 제물은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이 이 제단에서 먹을 권이 없나니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그냥 하나님 존재를 인정하면 될 텐데 하나님 쪽에서 제시하는 것들이 뭐냐 하면, 제단, 제물, 장막, 대제사장, 짐승의 피, 성소 이런 게 있다 말이지요.

그러면 요걸 그림으로 그리면 우리의 생각은 뭐냐 하면, ‘오! 신이시여.’ 그걸로 끝난 거죠. 그냥. ‘오! 우리를 창조하신 신이시여. 제가 신을 인정하겠나이다.’ 우리는 너무나 간단해요. 우리가 평소에 어떤 어른을 모시듯이 임금님 섬기듯이 신은 위대하니까 위대한 신을 섬기는 거죠. 신 앞에 위대한 말을 누가 잘 붙이지요? 이슬람 또는 IC 테러집단들이 잘 섬기지요. 그래서 우리도 위대하다고 붙여주면 하나님이 기분 좋을 것 같은데 막상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야기할 때는 성경대로 해요.

성경에 뭐가 있는가 하면, 방금 읽었던 용어들이 나와요. 성소, 제물, 제단, 대제사장, 짐승의 피, 그게 무슨 의미냐 이 말입니다. 그림으로 그리면 우리 쪽에서 신에게 나아가는 길을 만든다고 봅시다. 우리는 길을 만듭니다. 만드는데, 성경에서는 우리가 시도하는 길 말고 다른 길로 와요. 다른 길로.

그러면 우리가 시도하는 길로 신에게 가면 신에게 도달되겠습니까? 도달되지 않겠습니까? 도달 안 되지요. 안돼요.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시한 방법대로 가야 되겠지요. 그 제시한 방법이 어디까지 오느냐 하면, 땅 위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제물, 짐승의 피, 제사, 성소, 장막, 땅의 일인데 그러면 우리는 하늘을 쳐다볼 게 아니고 인간이 뭘 쳐다보느냐 하면 땅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이 제시한 것을 쳐다보면 되는데 문제는 봐도 모른다는 겁니다. 봐도 몰라요. 요렇게 하나님께서 내려온 화살표로 탁 건너뛰면 되는데 건너뛸 수 있는 마음이나 능력이 없어요.

차라리 우리는 이렇게 해서 신에게 가고 싶은 것이 편합니다. 그 말은 뭐냐, 우리 속에 우리만 있는 게 아니고 괴물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속에 선악과를 따먹고 나도 신이다! 하고 우기는 그 괴물적인 심성, 악마적인 본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 식대로 신을 믿고 싶지 하나님 식대로 신을 믿고 싶지가 않은 겁니다. 그러면 어떤 누구도 방금 제가 이 하나님이 제시한 방법을 점프해서 갈 수 없다고 제가 분명히 언급했습니다.

그러면 이 땅에 같이 우리 인간으로 오신 분만이 이걸 점프해서 올라간 게 있어요. 누구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다 말씀을 다 이루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제시한 방법의 완성이 뭐냐 라고 한다면, 예수님께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알게 되면 바로 요 하나님께서 제시한 진짜 나는 길이요, 진리요, 하는 그 길에 해당되는 거예요.

지금까지 한 거 굉장히 싶지요? 믿느냐의 문제가 아니고 굉장히 싶지요. 인간 쪽에서 신에게 가는 이쪽은 이다? 아니다? 이건 아닌 거예요. 아니고 히브리서 13장10절, 11절 말씀처럼 이 땅에서 하나님이 남겨준 방식대로 가야 되는데, 우리 인간 쪽에서 이 하나님이 주신 방식의 의미를 모른다고 이야기했지요. 모르는 이유를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가 모르는 이유가 우리가 우리 홀로 있는 게 아니고 우리의 심성에 이 방식에 대해서 거부하고 이 방식에 대해서 저항하는 어떤 괴물이 있는 거예요. 속성이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못하고 누가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 방식대로 이루어서 아버지께로 가신 겁니다. 내가 아버지께로 간다. 이 말이죠.

자, 그럼 오늘 강의가 요게 굉장히 쉽게 납득이 되신다면 오늘 강의 할 것은 두 가지를 해야 돼요. 하나는 뭐냐 하면, 우리 쪽에서 신에게 나아가는 그 방식이 뭐냐를 먼저 알아야 돼요. 제가 우리 인간 쪽에서 나아가는 것은 아니라고 했는데, 아니라고 말을 해서 그렇다고 몰라도 된다는 말이 아니고 우리 인간 쪽에서 가는 방식을 충분히 알아야 돼요. 충분히 알아야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가는 방식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는 방식이 왜 서로 상반되고 섞일 수 없는가를 분명히 할 게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신에게 가는 방식에 대해서 제가 이야기할 테니까 이야기해보면 평소에 우리가 익숙한 거예요. 우리가 신에게 가는 방식을 복음 알았다 할지라도 여전히 우리 속에는 그게 차분하게 남아있어요. 요거 ①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는 방식은 ②번해서  다 해드리겠습니다.

우선 ①번부터 먼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인간 쪽에서 신에게 나아가는 방법은 육에서 혼과 영으로 나아가는 방식입니다. 육과 혼과 영. 어디서 많이 들어본 교리 아닙니까? 지방교회. 워치 만리 방식이에요. 그런데 그 원치 만리 방식이 오늘날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2000년 교회에서 하는 것을 그걸 집약한 거예요. 모아온 거예요. 워치만리를 사람들은 욕하지만, 욕하는 그들의 방식을 좀 너무 철저하게 했다는 것에 욕 얻어먹지 사실은 워치만리가 기존의 교회하는 방식을 더 철저하게 만들었을 뿐이지, 다른 교회들은 어설프게 했어요. 어설프게.

워치만리와 다른 교회와의 차이점은 다른 교회는 기도하면 복 받습니다. 하는 무속신앙, 불교적인 요소, 무속신이나 정성들이면 복 받는다. 그런 요소도 같이 집어넣어요. 사람들은 성경에 관심 없어요. 그냥 하나님도 관심 없어요. 하나님도 관심 없고, 성경도 관심 없고, 내가 복 받는 거, 내가 행복해지는 것, 내가 가장 편한, 여기에 관심 있어서 옛날에는 산속의 절에 갔는데 이제는 가까운 2층 상가에 올라가는 거예요. 교회라는 곳에 올라가기 때문에 그들의 목적은 성경도 아니고 하나님도 아니고 어떻게 하나님이 갖고 있는 그 초월적인 능력을 빼먹어보느냐, 내가 행복 하는데 잘 이용해 먹을 거냐, 그런 마음으로 오는 겁니다.

그런데 워치만리는 그걸 안하기 때문에 욕을 얻어먹는 거예요. 그걸 섞지 않고 순수하게 성경을 통해서 인간 쪽에서 신에게 가는 그 방법만 고수하기 때문에 다른 교회한테 욕 얻어먹는 겁니다. 그야말로 기복신앙을 거부하기 때문에 욕을 얻어먹는 거예요. 그런데 기존교회는 기복신앙을 거절한다고 하면서도 뭘 인정하느냐 하면, 기초반, 교회 처음 오는 초 신자한테는 마음껏 허용을 해주는 겁니다.

일단 고기를 던질 때, 일단 그물에 걸려야 1차 공작, 2차 공작, 3차 공작에 들어가잖아요. 처음부터 우리는 기복신앙 안 합니다. 이래버리면 처음부터 안하게 된다 말이죠. 그래서 지방교회 가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냐 하면, 기존교회 다녔다가 계속 기존 교회에서 육에 머물지요. 육에.  기도하면 복 받습니다. 교회에 충성하면 천당 갑니다. 상급 받습니다. 이렇게 하니까. 그들은 이제 성경에 좀 관심을 갖다보니까 성경에 그 내용이 없고 성경은 더 깊은 내용이 있는데 기존교회는 그 깊은 내용에 진도를 나가지를 못해요.

진도 나간다 하면 그 처음 모아놨던 사람이 “처음이야기하고 왜 다녔다고 다른 이야기하십니까? 아이고~ 나 안 갈란다. 절에 갈란다.”  이렇게 빠질 가능성이 있으면 돈도 같이 빠지니까 교회 운영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계속해서 부흥시키고, 전도해서 하기 위해서는 계속 모으기 위해서는 성경적으로 안 가야 되는 거예요. 성경에 못가는 것도 있지만, 안 가는 거예요.

철딱서니 없는 부목사가 와가지고 자기가 성경 강의하고 그러면요, 대번 소비자 고발 들어옵니다. “이러려고 교회 왔습니까?” 하는 것처럼. 소비자 고발 들어와요. 그 부목사 쫓아내세요. 기도해서 이렇게 복 받았으면 여러분 기도 훌륭합니다. 이런 쪽으로 설교를 해주고 격려를 해줘야지, 헌금한 행위를 격려를 해야 할 건데 어디에 우리 관심도 없는 성경 이야기를 왜 합니까? 당회장한테 압력 넣어서 교회 부흥에 저해되니까 나가세요.

그러면 당회장이 부목사 불러가지고 “니가 이 바닥을 모르는 모양인데 신학교에서는 그렇게 배웠더라도 여기서는 그리 하는 게 아니다. 니가 신학 하는 게 아니고 목회를 해야 돼!” 라는 식으로 구슬려가지고 바꾸도록 하지요. 안 바꾸면 재계약이 안 됩니다. 12월 달에 재계약이 안돼요. 4대 보험도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에 대해서 좀 이제 지루하다 할까? 깊이 알고 싶은데 안 알려줄 때에 이제 지방교회에서 나오면서 하는 소리가 있어요. “기존 교회는 썩었다. 이렇게 성경 말씀에 관심이 깊이 있는 것 보니까 우리는 거듭났다. 그래서 거듭난 사람끼리 모였으니까 누가 뭐래도 완벽한 100%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 그 자체다.” 그게 바로 지방교회라는 겁니다.

이름도 지방교회라고 해서 교회이름을 붙이지 않고 그 지방에 있는 어디에 있는 교회라야 성경대로 한다. 항상 성경이 기준이고 사람들을 어떻게 끌어 모으는 것보다 성경이 기준이 되어가지고 그 안에 들어가면 누가, 누가 성경 깊이 들어가나, 내기하고 시합하는 그런 재미로 다니는 거예요. 지방교회가.

지방교회에 기존교회에서 비판할 때는 딱 한 가지밖에 비판 안 해요. 뭐냐 하면 “너만 교회냐?” 요것 가지고 비판해요. 너만 교회냐? 왜냐 하면 그중에서 우리만 교회라고 했으니까. 너만 교회 아니다. 그래서 기존 교회에서 지방교회 공격할 때, “고린도 교회 봐라. 그 어설프고 간음자도 많고 죄인도 많았잖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비로워서 그걸 교회라고 했잖아. 그런데 너희들은 교회 중에 교회라 해서 따로 핵심, 엑기스만 끌어 모아서 교회라고 하니까 그것은 성경하고 다르잖아.” 라는 교회 쪽으로만 이야기를 해요.

왜 교회 그 이야기만 하느냐 하면, 가는 방향이 인간에서 신으로 가는 방향이 같은 방향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계속해서 보겠습니다. 워치만리가 기존교회보다 자칭 더 뛰어나고 완벽한 거듭난 교회라고 하니까 원치만리 이론을 해보겠습니다. 뭐라고 하는가 하면, 육에서 일단 육으로 왔으면 기존 교회 말입니다. 신에게 착하게 살면 나중에 천당 가고, 착하게 못 살면 나중에 지옥 간다. 그런 육을 혼으로 진급시켜야 된다는 거예요. 혼으로.

혼으로 진급시켜야 되고 혼에서 더 영으로 진급시켜야 된다는 거예요. 육에서 혼으로 진급시킬 때, 여기에 뭐로 되는가 하면 바로, 윤리와 도덕이 여기에 동원되는 겁니다. 윤리와 도덕. 그림을 수평으로 했지만, 사실은 수직으로 육에서 혼 단계로 넘어서야 돼요. 혼 단계 넘어 설 때 이미 여기에 뭐가 작용되느냐 거듭남이 작용합니다. 성령의 거듭남이 작용해요. 그래서 워치만리는 두 가지의 거듭남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육에서 혼으로 거듭나야 되고, 혼에서 영으로 거듭나야 되고. 이중 중생설이라고 합니다. 점프를 두 번 해야 돼요. 

그럼 윤리, 도덕에서 영으로 가야 되는데 윤리, 도덕에서 영으로 왜 가야 되느냐 하면,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나온 것은 영이기 때문에 육에서 영으로 한 번 더 점프를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워치만리에서 언급을 안 한 게 뭐냐 하면 이겁니다.

누가? 육에서 혼에서 영으로 누가 그렇게 되는데? 누가에요. 누가? 그건 본인들이에요. 내가에요. 그러니 끝까지 누구를 안 놓치는가 하면, 본인의 구원 욕구를 절대로 놓치지를 않습니다. 내가 나를 붙들고 내가 나를 관리해서 기어이 신의 나라, 천국까지 집어넣겠다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그러면 여기서 제가 한 번 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오실 때, 예수님께서 이 땅에 그냥 구경하러 오신 게 아니고 무슨 일을 하시러 오셨지요. 그 일은 제가 아까 언급했습니다. 이 성경 말씀을 지키는 분이 누구밖에 없다? 예수님 본인 밖에 없지요.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는가 하면, 고유성이라고 합니다. 고유성. 고유성은 오직 나만이.

성경 말씀을 다 지킨 증거가 뭐냐, 십자가에서 말하기를 “다 이루었다.” 그러면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 할 때에 옆에 다 이룬 사람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무도 없어요. 그게 새 언약이라 하는 것은 히브리서10장에서 했지만, 어느 누구도 성경을 이룰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이 준비하신 분을 보내서, 하나님이 보내신 준비하신 그 분만이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홀로 다 이루어서 그 분의 새 언약을 이루었다. 그게 히브리서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걸 뭐라고 했어요? ‘고유성’ 예수님만이 갖고 있는 것. 예수님만이 갖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고유성의 반대말이 뭐냐 하면, 반대발이 ‘대체성’입니다. 대체성이라 하는 것은 바꿀 수 있는 거예요. 그 자리에 다른 게 끼어들어도 아무 진리에 변동이 없는 걸 대체성이라 해요.

자, 신은 대체성일까요? 고유성일까요? 이게 인간에게 신은 대체성입니다. 신이라 하는 것은 두리뭉실해서 위대한 전능자에다가 어떤 이름을 집어넣어도 괜찮아요. 알라를 집어넣고 여호와를 집어넣었다 할지라도 고 내용은 위대한 전능자, 위대한 신, 그 의미만 담으면 이게 어떤 이름을 불러도 부처라도 괜찮고 브라만도 괜찮고 신은 같은 신이라고 대체 가능하다고 본 겁니다. 왜? 인간보다 위대하니까.

신한테 뭐가 붙는다고요? 위대한. 알라는 뭐하다? 위대하다 하잖아요. 유대교는 여호와도 위대해요. 위대하다는 것은 누구와 견줄 때 위대하다는 거예요? 인간보다 견주면서 천지를 창조하신 것만 위대한 거죠. 그러니까 인간이 신을 안다는 것은 이것은 그 신에게 어떤 이름이 주어지더라도 이건 대체가 가능한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습니다. 다른 이름으로. 그 다른 이름이 하나님 이름이 아니에요. 신의 이름이 아니에요. 그 다른 이름이 놀랍게도 여호와 이름이 아닙니다. 여호와, 알라하고 같은 계열이 아니에요. 그 다른 이름이 무슨 이름입니까? 주 예수 이름이에요.

그러면 고유성은 신에게 주어지지 않고 어디 주어져요? 예수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 뭐가 주어지는가 하면, 주 예수가 주어지는 겁니다. 다른 어떤 자라도 주의 자리에는 예수님이 주의 자리다. 심지어 여호와 하나님마저 아들 예수님을 주의 자리에다가 집어넣으신 거예요.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신의 자리에다가 고유성을 집어넣겠습니다. 자, 그냥 예수가 아니고 주 예수지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추상적으로 전능하신 위대한 분은 계셔요. 그것 말고 예수님이 주의 자리에 앉아있고 하늘나라는 무슨 나라인가 하면, 예수의 나라에요. 아들의 나라에요. 주 예수의 나라에 올 때에, 그러면 주 예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주 예수님이 육과 혼과 영을 이런 식으로 주 예수님이 오라고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이게 왜 없느냐 하면, 여기 지금 인간이 육, 혼 할 때 자기 고유성부터 출발한 거예요. 자기 고유성. “누가 구원받아?” “내가 구원 받아.” 를 꽉 쥐고 있는 겁니다. 내가 구원 받아. 내가. 그러니까 이런 사람에게 질문을 해야 돼요. “당신은 왜 꼭 천국 가야 합니까? 당신은 지옥가면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해 보세요.” 라고 한다면 지방교회에서는 할 말이 없어버려요. 지방교회 뿐만 아니고 모든 교회가 할 말이 없어버려요.

“왜 하필이면 당신이어야 됩니까?” 만약에 어떤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 되었다 했는데 내려오라 해서 내려오게 되면 그러면 대통령 자리는 자기 고유성이에요? 대체성이에요? 대체성이지요. 이제 대체성 알겠지요? 자리는 있지만, 그것은 들어가더라도 빠지고 또 빠지고. 미국 대통령도 마찬가지고. 그래야 될 입장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인정하는 고유성은 이미 확정되었어요. 주님의 자리에 예수님이 있습니다. 주님의 자리는 무슨 뜻이냐 하면, 심판 주를 말합니다. 심판 주. “니 지옥 가!” “니 천국 가!” 그러니까 이것은 천국, 지옥을 할당할 수 있는 권위를 갖고 계신 분이에요. 주 예수가. 그러면 예수님의 고유성을 인정한다면, 나의 고유성은 주님의 권위성 앞에서 이게 방해가 돼요. 주님께서 너, 너, 너, 천국 가! 지옥 가! 라고 했을 때에 천국 갈 자기 이름에 호명을 안 하게 되면 우리는 무슨 저항이 나오느냐 하면, “왜 저는 이름을 안 불러줍니까?” 이렇게 저항을 하게 되겠지요.

그러면 로마서9장에 나오는 것처럼 토기장이 이야기가 나와요. 토기장이가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하나는 귀히 쓸 것을, 내가 만드는데 “그게 싫은가?” 그렇게 나오겠지요. 그럼 우리는 “싫소이다! 나는 천국 가야겠습니다.” 그럼 주님이 뭐라 하느냐 하면, “왜 그래야 되는데 니가 설명해봐라.” 설명할 길이 없네요. 천지가 변해도 나는 꼭 천국가야 돼! 라는 정당성을 설명할 길이 없어요. 나니까. 나는 나니까.

제가 왜 이런 이야기하느냐 하면, 지방교회의 모든 사람들이 이 고유성을 감추고 교묘히 감추고 자기는 성경대로 퍼 붓는데, 어디다 퍼 붓냐 하면 자기 고유성에다가 전부 다 이 성경을 퍼붓는 거예요. 마치 튀김 닭 하게 되면 생닭은 그대로 있는데 조금 시간 지나면 노래져서 온갖 튀김옷을 입잖아요. 지방교회는 전부 다 지가 다 성경을 뒤집어썼어요. 성경구절을 보면서 온갖 것 뒤집어씌우면서 완전히 튀김 닭을 만들었어요. 성경 닭을 만들어서 들어가겠다는데 이건 자기 고유성이 그대로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 자기를 부인하라 했다 말이죠. 그럼 예수님이 자기를 부인하라고 한 이유가 있어요. 마태복음16장23절을 한 번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사탄아 니가 물러가라. 니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탄의 일을 생각한다. 이렇게 되어있지 않고 뭐로 되어있습니까? 니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누구의 일? 사람의 일이죠. 사람의 일=무슨 일입니까? 사단의 일인 거예요.

그래서 24절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 보고 자기를 뭐하라? 자기를 부인하라. 다시 말해서 인간은 홀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고 사탄에게 매이든지 아니면 주님에게 매이든지 둘 중에 하나에요. 악령에 매이든지 아니면 성령에 매이든지 둘 중에 하나지. 독자적으로 나는 나라고 버틸 수 있는 입장이 안 됩니다. 이걸 지금 누구보고 이야기했어요? 베드로보고 이야기했어요. 수제자인 베드로보고 이야기했다고요.

그러면 성도가 성령을 받고 난 뒤에 우리가 몸에서 내 뿜을 수 있는 건 뭐냐 하면, 바로 아까 읽었던 마태복음 16장 23절을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걸 배설물로 그냥 내놓으면 되는 겁니다. 김장할 때 배추에다가 소금 치면 물기 나오지요. 소금이 들어가니까 물기가 나온다 말이지요. 삼투압작용에 의해서.

말씀이 성령이 들어가니까 마태복음16장23절,24절을 우리가 매일같이 내 뿜으면 되잖아요. 배설물로. 우리 안에 들었던 것을 바깥으로 쏟아내면 되는 겁니다. 사장하고 싸운다든지 이런 거. 내놓으면 되는 거예요. “사장하고 싸웠습니다.” 이렇게 하면 주님께서 “니는 왜 안 싸워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너는 왜 점잖아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니는 지금 하나님 일을 생각지 않고 지금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은 우리 속에 들어있는 것을 바깥으로 노출시키는 일을 하는 게 하나님의 일이에요.

좀 이렇게 정신 이상한 80넘은 할머니하고 이야기할 때, 결국 그 할머니 입에서 자기가 부족하다. 그게 나온다면, 그런 기적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마는, 나온다면 그게 바로 성령의 일이에요.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이게 성령의 일이에요.

그런데 지방교회 보세요. 악착같아요. 악착같아. 완전히 말씀으로 자기 게 삐져나올까 싶어서 철통같은 보안에다가 이렇게 나는 육적인 인간을 내가 관리 잘해가지고 혼의 인간으로 드디어 접근해 갑니다. 점점 더 영의 세계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계속 전진 또 전진. 이게 바로 기존 교회에서 원하는 개혁주의 신학에서 말하는 성화론하는 겁니다. 성화론. 얼마나 악마적이고 마귀적이고 이단입니다. 모든 기존교회 다 그렇게 해요. 성화론이에요.

계속 자기의 고유성. 관심사가 주 예수가 아니에요. 결국은 나의 고유성을 위해서 예수 당신도 협조해야 된다는 겁니다. 내가 이렇게 천국가려고 성의를 보인다면 당신이 나를 내칠 이유 없다는 겁니다. 내치고 싶어도 못 내치도록 철저함을 기하는 겁니다. 마치 중들이 생명을 죽일까 싶어서 빗자루 들고 곤충 같은 거 쓸어서 생명 안 죽인다고 하는 것처럼. 그럼 바이러스는 안 죽입니까? 바이러스는 생명 아니에요? 철저에 철저를 기하는 겁니다.

온갖 악한 마음을 일체 품지 않고 정갈하다 하지요. 신사임당처럼. 이영애처럼. 생각하는 것도 깨끗하고 정갈하고. 누가 내 앞 차 가로막았다고 욕설하지 아니하고. 하여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이렇게 해서 육의 인간, 이 더러운 짐승 같은 그 마음씨가 혼에 담겨서는 윤리 도덕적 단계가 되는 거예요. 여기까지. 그런데 기존교회는 육에서 혼까지 오는 것밖에 못하고, 자기들은 혼에서 영으로까지 더 나아갈 수 있는 그 준비단계에 있다는 겁니다. 혼에서 영으로.

그러면 그 지방교회에서 말하는 혼에서 영의 문제는 뭐냐 하면, 여기는 아주 기괴한 해석이 들어갑니다. 성경 말씀을 해석하면서 요 해석이 어떤 해석이 되느냐 하면 이런 해석으로 들어가요. 우리 지방교회만이 교회다. 를 증명해주는 해석이 성경 전체를 통해서 동원되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뭐와 닮았느냐 하면 여호와 증인하고 똑같아요. 여호와 증인이 세상 적으로 그냥 기독교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고 여호와도 몰랐던 그들이 노량진시장의 고기만 팔고 회만 치던 사람이 드디어 여호와 증인 들어가게 되면 갑자기 남자는 넥타이 메고 여자는 긴 치마입고 교회 오지요. 그 여호와 증인 모습 보세요. 신사도 그런 신사 없어요. 신사도 19세기 신사. 많이 봐줘서 1950년도에 시골 아낙네들이 꾸미는 그 숙녀 스타일. 정갈해요.

그들도 똑같아요. 모든 게 똑같아요. 인간은 신에게 가는 방법이 육에서 혼으로. 이것뿐이에요. 윤리인데. 그들이 혼에서 영으로 가는데 그들은 144,000을 굉장히 강조해요. 여호와 증인들이. 이 해석으로 할 때 기괴한 해석으로 들어갑니다. 여호와 증인만이 참된 구원받은 자다. 라는 것을 증명하는 해석이 들어갑니다.

기존교회는 육에서 혼 될 때 돈 내지만, 여호와 증인이나 신천지나 지방교회는 혼에서 영올 때 이건 푼돈이 아니고 아주 전 재산을 바쳐버려요. 전 재산을. 가만히 보면 후반전이 전반전보다 돈이 돼요. 그래서 여호와 증인이나 신천지나 못 빠져나와요. 왜 못 빠져나오느냐, 단계가 육에서 혼의 단계로 끝나는 게 아니고 혼에서 영의 단계에 가려면 신천지에 목숨을 걸어야 돼요. 그런데 만약에 잘못 됐나 돌아서게 되면 이건 혼에서 머물기 때문에 영의 세계에 못가기 때문에 하늘나라에 못 들어간다. 이리 되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되지요. 그 동네에 가면 생전 이런 이야기 듣지도 못해요. 그냥 이게 전부인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그들에게는 그렇게 납득이 되고 그 꼼수에 완전히 매어드는 이유가 그것은 그들이 잘 가르쳐서가 아니라 본인의 고유성을 본인이 성령을 안 받아서 포기를 못해서 그래요.

모든지 내 잘되기 위해서 내 집안 잘되기 위해서 한다는 내 자식 잘되고 내 가정 잘되고 나만 잘되면 돼! 라는 것이 이렇게 확보된 이상은 이걸 위해서 계속해서 악마가 공작을 해놓으니까 내가 그걸 뿌리칠 수 있는 어떤 근거가 건덕지가 없는 거예요. 아, 교회가고 헌금하는 게 나 잘되라고 하는 것이지, 남들 눈치 볼 필요가 뭐가 있느냐, 육에서 혼까지 오는데 얼마나 애썼는데 이제 조금만 가면 되는데, 조금만 가면 승리하는데, 마지막 촛불 집회해야지 조금만 하면 승리하는데. 여기서 멈추면 안 되잖아요.

그동안 갖다 부은 돈도 아깝고 내 정성도 아까워서 다시 빠꾸를 못 하는 거예요. 육으로 다시 빠꾸하는 것은 주의 성령이외에는 안됩니다. 모든 사도들은 항상 육에서 못 벗어나게 만들어버려요. “니가 육이냐?” “육입니다.” “아니야 더 가야 돼! 니가 사탄의 앞잡이야.” 사탄 쪽으로 가야 돼요. 이제 성령이 성도한테 임하면 우리 쪽에서 뭐가 나타나느냐 하면, 성전에서 예수님을 힘들 게 했던 그런 요소들이 이제 나오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 주 예수의 이 자리가, 아까 신의 자리가 아니라 했지요. 주 예수의 자리라 했지요. 그럼 주 예수의 자리이니까 요걸 예수의 자리를 말로 이렇게 바꾸어보겠습니다. 요걸 새 언약, 또 다른 말로 하게 되면 성소, 또 다른 말로 하게 되면 짐승의 피 자리, 또 다른 말로 하면 대제사장자리, 요걸로 제가 바꾸겠습니다. 이 자리는 뭐냐, 예수님께서 이미 아버지로부터 이 세상에 갔다가 성공하시고 자기 구원에 성공하시고 보여주신 자리가 이 자리입니다. 새 언약 자리입니다.

이런 성소의 짐승의 피가 새 언약에서 누구의 피 입니까? 예수님의 피가 됩니다. 예수의 피 흘림에 담긴 의미를 아는 것이 바로, 의미를 알게 되면 바로 우리 속에서 혼과 영으로 가는 게 아니고 우리 속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이런 암 덩어리가 고름덩어리가 이 안에서 계속해서 들어있던 정도가 아닙니다. 생산되고 있습니다. 들어있는 거 하고 달라요. 들어있으면 빼내면 양이 줄어들지만, 생산된다는 것은 70이고, 80이고 70까지 사셔야 돼요. 계속 고름이 나와야 되니까. 주께서 부르실 때까지. 70아니고 90까지 살아야 돼요.

살아서 계속해서 세상 악마의 일, 인간 위주의 자기 위주의 일들이 삐져나와야 돼요. 삐져나옵니다. 주께서는 소금을 계속 치고. 우리는 악마의 성질이 계속 나오고. 자기의 고유성, 자기밖에 모르는 성질이 계속 나옵니다. 이게 바로 히브리서13장에서 복음이에요. 이게 바로 주 예수의 복음입니다.

히브리서13장 6절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지난 수요일에 이야기했지만, 이미 우리는 예수님의 소유가 되었으면 기존의 사람들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수요일에 언급했잖아요. 롯이 천사를 대접하기 위해서 어디까지 양보했습니까?

아직 시집도 가지 않은 곧 시집갈 두 딸을 마음대로 유린해라. 이 깡패들아. 하지만, 내 진짜 귀한 가족보다도 이 분들이 더 중요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그 말을 오늘 강의에 적용시켜 보면, “아이고, 내 두 딸 요렇게 이쁜 걸.” 라는 것도 이게 너무나 당연한 걸로 보이지만, 사실은 이것도 어떤 내 고유성, 나밖에 모르는 내 자식이니까 이쁜. 내 죄의 일부로서의 내 안에 이미 자리 잡은 겁니다. 그렇게 되면 마태복음10장과 관련성이 있지요. 누구든지 내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는 말씀을 예수님께서 우리 속에 집어넣은 그 순간이 되는 겁니다. 그 상황이 됩니다.

어느 강의에서 해삼이야기를 했는데, 겨울철에 해삼을 사면 다 썰어줘요. 초장 찍어 먹잖아요. 우리라는 이 인생에다가 말씀을 가지고 이렇게 삽입해버립니다. 아까 마태복음10장 말씀이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할 때, 해삼을 자를 때 우리의 단면, 해삼의 잘라진 단면이 나오지요. 우리는 단면보다도 치킨 튀김하기에 급급해요. 헌금했잖아요. 죄 지은 거 봐주세요. 자꾸 헌금, 기도, 전도 이런 걸 가지고 옷을 덧입기를 원하지만 주께서는 히브리서4장처럼 완전히 발가벗기지요. 관절과 골수를 쪼개거든요. 쪼개버린다고요. 쪼개면 단면이 나와요. 단면은 속일수가 없습니다.

육에서 혼에서 영으로 가게 되면 여기에 무슨 요소가 개입되느냐 하면, 시간 요소가 개입돼요. 시간이 흐릅니다. 시간이 흐르니까 인간들은 자꾸 시간을 지연시켜요. “다음에 잘할게요.” 지연시키는데 육에서 사탄의 일을 끄집어내는 것은 육에서 더 갈 데가 없어요. 그러니까 육에서는 무시간이에요. 시간이 없어요. 나이 50이 됐던, 60이 됐던, 70이 됐던 80이 돼도 여전히 주께서 말씀으로 다루는데 서는 지장이 없습니다. “나이 80인데 봐주세요.” 이런 거 없어요. 40 되면 40대에 알만큼의 죄를 끄집어내고 80되면 80돼야 아는 죄를 또 끄집어내고. 90되면 90까지 안 살았으면 모를 뻔한 죄가 또 끄집어내면서.

이렇게 끄집어낸다는 말은 이미 이 사람은 뭐와 같이 겹치고 있습니까? 이미 영속에 하나님의 성령 안에 속한 사람이에요. 육에서 혼으로, 혼에서 영으로 갈 필요가 없지요. 왜냐 하면, 이미 영이 우리를 덮쳤으니까. 그걸 침범이라 해요. 주님의 침범. 하늘나라 자체가 이 땅을 향하여 침노한 거예요. 우리는 하늘나라에 정복당한 겁니다. 마태복음12장에 보면, 도둑이 와서 주인을 꽁꽁 묶어 놓고 세간에 불과한 우리에게 보쌈해가지고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주머니 달고  우리를 거기다가 집어넣어 놓고 이 땅에서 빼내어 가는 거예요.

그러면 구원은 누구 소관입니까? 구원은 나의 소관이 아니고 구원은 누구 소관이에요? 구원은 주 예수님의 소관이에요. 헌금이라 하는 것은 “주께서 주셨습니다.” 라고 내어놓는 것이기 때문에 헌금은 누구 소관입니까? 주 예수님의 소관입니다. 전도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바로, 육에서 혼으로, 혼에서 영으로 나아가겠다는 사고방식 때문에 예수님께서 피를 흘렸잖아요.

유대인들도 이런 식이니까. 유대인들도 자기 구원하고자 하는 것 때문에 피 흘림이기 때문에 전도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바로, 이것이 바로 악마의 일이라고 육에서 혼으로, 혼에서 영으로 가겠다는 구원 받겠다고 하는 이것을 악마의 일이라고 지적당하는 그것이 누가 벌인 전도인가, 예수님이 우리를 향하여 벌이신 전도가 되는 겁니다.

기도라는 것도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잖아요.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니까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뭐냐 하면, 주님의 기도가 나의 기도를 이긴다는 것을 기도하는 가운데 그걸 수용하도록 해주는 거예요. 그러면 기도도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니까 기도도 누가 해요? 주님이 하지요.

기도도 주님이 하고, 헌금도 주님이 하고, 전도도 주님이 하고, 그리고 예배도 진리와 성령 안에서 예배하니까 주님이 하시고, 그리고 교회라는 것도 그리스도 몸이 교회니까 교회도 주님의 것이고. 교회, 예배, 전도, 선교, 찬양, 기도, 헌금, 다 누가 하십니까? 다 주님이 하시지요.

(질문) 워치만리에서 말하는 혼이라는 게 무슨 의미인가요? 혼이라 하는 것은 짐승과 차이나는 점.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성과 깨달음과 지. 정. 의, 지적인 것과 감정적인 것과 의제를 줬기 때문에 이것을 충분히 활용해서 나아가고자 함.

(질문) 원래 도 닦으면 갈 수 있잖아요? 이것은 모든 인간이 이렇게 가고 있어요. 지금. 어린 애들은 철이 없고, 어른들은 철났다는 말은 이만큼 이미 시간상 나름대로 높아진 거예요. 아무 큰 종교도 없는 몽골족에 가도(무당을 섬기지만), 어디에 가도 그 부족의 윤리가 있어요. 윤리, 도덕은 다 있습니다. 애들을 하여금 성인식을 해서 나무 위에서 던져서 이제는 하나의 성인으로서 사냥하는데 주체 자가 되고 하는 그런 부족들이 있습니다. 어디에 가도 어린애와 어른과의 차별은 다 둡니다. 

(질문) 그러니까 혼의 구원을 받으려는 생각이 틀렸다는 말씀이시지요? 혼의 구원으로 다 가고 있는데, 방향 자체가 예수님을 또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악마의 일이라는 말이지요. 사탄의 일인 거예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뭐했습니까? 이리 한 거예요. 우리는 예수님 몰랐다. 이제는 예수님 알았다. 이제 천당 가면 된다. 이게 바로 사탄의 일이고, 인간의 일이에요. 방향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그러니 이 방향이 어디서 나오는가, 육속에 악마랑 괴물이 들어있으니까 이런 방향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인간인 이상은. 좀 더 인간다운, 좀 더 성스러운 내일, 내년에는 더 착하게, 더 바르게살기.

(질문) 그러면 기존교회에서는 혼을 자극하는 거예요? 영을 자극하는 거예요? 영은 그 다음 단계고. 기존교회에서는 육으로 하여금 신사답게 살아서 거기서만 머물면 안 되고, 성령을 받아서 영으로 가야 된다는 거예요. 혼에서 영으로 가야된다는 거예요. 혼은 윤리, 도덕이라니까요. 짐승으로 차이나는 거예요. 짐승은 먹고 사는 것밖에는 모르지만, 인간은 인간답게 해야 된다는 거예요.

기존 교회에서 하는 혼이 되는 이유가 뭐냐,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라, 하는 것 때문에 여기에 들어간다. 아까 했잖아요. 모든 성경 말씀을 자기 닭튀김 하듯이 다 집어넣는 거예요. 이런 과정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한다는 것은 뭐냐, 에베소서에 보니까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고, 착하고 바르게 사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 혼과 영의 생활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지방교회는 이미 그런 생활을 하고 있고. 기존 교회는 혼에 머물고 있고.

(질문) 예수님이 그걸 허용하신 거죠? 당연히 허용해야지요. 그래야 예수님께서 다녀온 이유가 나오지요.

(질문) 허용한다면, 비판할 건 없다는 것이지요? 비판을 하는 게 아니고 증거를 한다니까요. 증거. 증거를 하게 되면 비판이 안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증거  게 되면 악마가 가만히 있는 게 아닙니다. 악마는 악마 나름대로 활동을 해야 돼요. 뭘 활동하느냐, 복음에 대해서 공격을 해야 돼요. 베드로처럼. “주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 공격을 해야 돼요. 공격을.

(질문)  목사님이 비판을 많이 하시는데, 비판을 하면 할수록 계속 비판이 나와요. 다 끌어 들여 다 비판하면 결국에는 누가 남는 건지 모르겠어요. ⇒ 예수님 자신의 모든 말속에는 뭐냐 하면, 기존에 대한 부정이 들어있어요. 이 세상에 대한 모든 부정. 마귀의 세계 부정이 들어있다고요. 부정이 되는 것을, 성경 말씀을, 끄집어낼 수밖에 없지요.

예를 들어서 만약에 부정을 안 들이고, 지금 설명해 볼게요. “짐승의 피로 제사장이 가지고 갔습니다. 우리는 짐승의 피를 믿읍시다.” 이러면 부정이 아니에요. 그러나 제가 설명한다고요. “짐승의 피가 왜 피를 흘려야 됩니까?” “왜 피를 흘려야 되지요?” 세상이 하나님이 제시하는 방식에 대해서 반발하고 저항하기 때문에 피를 흘리잖아요. 피를 믿으면 구원받아요? 안 받아요? 구원 못 받지요. 왜? 현재 자기가 갖고 있는 거기다가 피라는 닭튀김을 또 거기에 덮치게 되니까. 아직 속은 달라진 게 없어요.

“주님이여, 어떤 정보를 더 확보하면 구원받습니까?” 자기의 고유성을 주장하고 있고, “요번에는 피를 해볼까? 뭘 해볼까?” 여기에는 아무 비판이 필요 없어요. 끌어 모으면 되는데, 무슨 비판이 됩니까? 끌어 모으면 되는데. 정보를 끌어 모으면 되지, 비판이 왜 필요해요?

주님의 말씀에서 누가 비판하느냐 하면, 남이 비판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비판해요. 내가. 그게 70, 80 살 때까지 계속 비판한다고요. 우리가. 천사가 롯 집에 오긴 왜 와요? 안 왔으면 딸한테 좋게 지내지. 천사가 괜히 와가지고 그 소리를 딸이 들었으면 얼마나 섭섭해 하겠어요. 천사가 왔을 때는 모든 게 부정적입니다.

왜냐 하면, 우리는 짐승에서 탈피하고 싶어요. 인간답게 살고 싶어요. 인간답게 살고 싶은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나는 남을 비판하지 않는 점잖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게 마귀의 생각이라니까요. 안 다치고, 좋은 게 좋다고. 그런데 그런 마음 자체가 주께서 피 흘리게 만든 요인이 된다니까요. 그런 마음 자체도.

(질문) 주님을 증거 하기 위한 비판은 좋은데, 비판을 위한 비판이 되시면 안 된다는 거예요. ⇒ 주님을 증거 하는 비판도 죄고, 바른 비판이란 비판도 죄에요. 우리에게 나올 때는 죄 아닌 게 없음을 아는 것이 성령 받은 사람이에요. 우리는 자꾸 예수 믿고 이제부터는 죄를 적게 짓겠다는 그 사고방식이 계속 작동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 작동하는 걸 나는 오히려 박수치고 싶은데. 작동하는 그것도 사실은 제가 이런 강의를 하니까 삐져나온 거죠. 가만히 참지 못하고 막 튀어나온 거예요. 녹음되는데 막 튀어나온 거예요. 이 얼마나 감사할 일이에요. 입 다물고 있으면 울화병이 날 건데, 지금 슬슬 나오잖아요. 그러나 이것이 주께서 우리한테 그렇게 하신 겁니다.

우리는 그냥 하나님의 고요함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천국가게 됐는데 우리는 나한테 괜찮은 것을 가지고 자꾸 거기다가 들어붙으려고 하는 거예요. 보답을 하려고 하는 거예요. 주님에 대한 공로에 보답을 하려고 해요. 왜 보답을 해야 되는데? 그것은 평소에 내가 나로 인하여 흐뭇해하는 게 습관이 되어가지고 나로 인하여 내가 내 잘난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너무 보람을 느끼는 악마적인 습관이 여전히 남아있어 가지고, 예수 믿는 사람하고 안 믿는 사람하고, 어떤 차이를 자꾸 두려고 합니다. 우리의 차이는요,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다. 이 고백이외에는 다른 차이 없어요.

(질문) 목사님이 비판하면 사람들은 싫어하잖아요. 그 이유를 알겠다니까요. 자꾸 예수님을 증거 하려 비판이 나오는데, 사람들은 비판하지 말라. 너 하고 싶은 말만 하라. ⇒ 남들이 싫어하는 게 문제가 아니고, 히브리서13장6절 나오잖아요.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남들이 비판하는 게 아니고 나를 구원하신 주님을 비판한다니까요.

내가 여기서 100명한테 설교하는데 나중에 끝나고 난 뒤에 100명이 몽땅 나에게 욕을 하더라 말이죠. 그럴 때 갑자기 내가 보람을 못 느끼고 짜증이 나고 화가 나는 수가 있을 때,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그 자리에 세워주신 주님에 대한 내가 지금 도전, 반발하고 있는 거예요.

주께서 지정한 자리에서 그 결과가 뭐냐, 감사로 이어질 게 감사로 이어지는 게 아니고, 은혜 받은 사람 한 명도 없고, 이런 식으로 짜증이 나온다는 것은 이건 남 욕할 거 없어요. 바로 내 자신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그 악마적인 모습을 삐져내는 이 관계가 성령 받은 성도된 모습입니다. 10분 쉽시다.
 공은주(IP:119.♡.152.148) 17-03-23 12:08 
안양20170310b히13장10절(자기 고유화)-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예수님이 피를 흘렸다 말이죠. 하나님 쪽에서 제시하는 방법에 짐승의 피로 제사를 지내는 거예요. 짐승을 통째로 바비큐로 드릴 수도 있는데, 피를 흘렸다는 말은 하나님이 내놓으신 방식이 뭐냐, 인간의 저항을 필요로 해요. 곱게 구원하는 게 아니고 저항을 오히려 받아드리면서 그 안에서 구원의 근거를 주께서 마련하시거든요. 그게 하나님이 하시는 방식이고, 우리 쪽에서 하는 방식이 뭐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 우리가 이렇게 계속해서 선하고 착하고 성의를 가지고 나옵니다. 신이시여! 이 면면을 좀 받아주세요. 후원해 주세요. 이런 쪽으로 간다. 이렇게 제가 아까 강의를 했잖아요.

지금 올라가는 방식과 내려오는 방식에서 길이 따로 있으면 괜찮은데 같이 섞여버린 거예요. 섞여버리니까 충돌이 나고 거기서 예수님께서 피를 흘린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피가 구약에 보면 짐승의 피로서 이미 예고돼 있어요.

자, 그러면 피를 왜 흘렸느냐 이리 보면 간단하거든요. 죄 때문에 흘렸거든요. 죄 때문에 흘렸다. 할 때, 이 죄에 대해서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죄에 대해서 몰라요. 우리가 의인 같으면 죄를 알겠는데 이미 죄인이 알고 있는 죄의 개념이 오해를 했기 때문에 주께서 피를 흘렸잖아요.

그러면 죄가 뭐냐를 낱낱이 하는 거예요. 제가 낱낱이 하면서 뭘 하느냐, 죄라는 것은 뭔가 이미 고수한 것이 있고, 이걸 지키려고 하다보니까 죄가 나왔다. 그게 뭐냐 하면, 자기 고유성이라 하는 거예요. 자기 고유성. 남들은 어떻든 간에 나는 살아야겠다. 이게 고유성이다 말이죠.

우리가 생각하는 죄하고,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죄하고, 예수님 죄가 달랐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었거든요. 유대인들의 죄라 하는 것은 자기가 이것이 죄라고 함으로서 자기가 이걸 죄라고 알기 때문에 자기는 의로운 거예요. 수준 차가 나지만, 세리와 창기들은 죄도 모르지만, 우리는 말씀에서 죄를 안다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창기는 천국가고 너희들은 지옥 간다 할 때에 그들이 죄라고 하는 그 죄의 개념에서 본인들은 모르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니의 죄라는 것을 알려줄게 하면서 어떻게 아느냐 하면, 죄는 이것이라고 설명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과 대비하면서 죄를 알려줘요.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예수님이 베드로보고 이야기한 겁니다. 니가 나를 넘어지게 한다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과 만남이 없으면 죄를 알까요? 모를까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모르지요. 자기는 자기 딴에 똑똑하다고 여겼던 거예요. 그럼 똑똑하다고 하는 베드로가 죄는 계속 들어가는 겁니다. 예수님 만나기 전에 베드로가 하고 있던 그 똑똑하다 안에 뭐가 들어있는가 하면, 나는 이런 식으로 하면 나는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그 가능성, 그 고유성, 인간이 신을 향하는 그것에 대해서는 자기는 하자가 없다는 거예요.

과연 하자가 없을까요? 예수님 딱 만나고 딱 오면서 “니는 사탄아 물러가라. 니가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 이렇게 했잖아요. 그러면 베드로가 하는 일이 인간의 일인 동시에 무슨 일이에요? 사탄의 일이 되지요.  사탄의 일은 예수님께서 뭐가 일어난다? 예수님 십자가 죽음 앞에서 드러나는 거예요. 그럼 십자가 죽음 앞에서 죄 아닌 게 있을까요? 없을까요? 모든 게 죄가 되는 거예요. 모든 게.

그럼 예수님 십자가 피를 할 때, 히브리서13장 10절 봅시다.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그 위에 있는 제물은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이 이 제단에서 먹을 권이 없나니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의 성소 있고, 제단 있고, 제물 있고, 제사장이 있는 걸 그들이 그걸 자랑스럽게 여겼을 겁니다. 아마. 유대인들이니까.

그런데 그들이 짐승을 잡고 피를 흘리면서도 그 의미를 알았어요? 몰랐어요? 그들은 지금 잘하고 있다고 본 거예요. 왜냐, 짐승 잡아 피 흘려서 뿌리고 제단에 태우고 그리고 그 제물은 번제 같은 경우에는 일체 그 고기를 못 먹어요. 심지어 제사장도 그 고기를 먹을 권이 없다. 번제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그 제사를 드리면서 그 의미를 왜 모를까요? 제사 드리면서도 왜 실패할까요?  그것은 예수님 오실 때까지 유보되어야 돼요.

예수님 오셔서 그들은 다 그림자고, 예수님의 그림자에 불과한 거예요. 그러면 인간이 자기 영역을 너희들은 모든 것이 죄다. 너희들은 모든 것이 죄다. 라는 말씀에 대해서 하자가 있어요? 없어요? 하자가 없겠지요. 그런데 누가 여기서 반발하겠습니까? 방금 예수님 말은 잘못이 없다 했지요. 모든 인간이 다 반발해요. 그 반발하는 양상이 어떤 양상입니까? 반발할 때 뭐가 반발하느냐 하면, “나를 죄인취급하지 마세요.”라고 반발하는 거예요. 나를 죄인 취급하지 마세요.

지방교회 같은 경우에 육과 혼과 영에서 지방교회가 진짜 교회라면 우리가 이렇게 모인 거듭난 사람의 집합이고 완전한 교회입니다. 라는 이런 고백이 바로 예수님을 죽게 한 죄입니다. 라고 해야 되지요. 만약 여기에 지방교회 교인이 있다면 바로 지방교회는 이것이 죄입니다. 라고 지방교회 교인이 있다면 내가 이야기할 거예요. 이야기한다면 지방교회 교인이 앉아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목사님, 왜 그렇게 자기 이야기하지 남의 교회 왜 비판합니까?” 이리 나온다면, 그게 바로 감사할 일이지요. 왜? 감추었던 죄가 삐져나왔으니까. 감추었던 죄가.

그러면 내가 뭐라고 해요? “지방교회 교인님, 무엇을 지키고 싶습니까?” “‘이 선까지는 넘어오지 마세요.’라고 지키고 싶은 게 뭐가 있습니까?” 그러면 그 쪽에서 뭐라고 하는가, “목사님, 그리하면 믿을 사람도 안 믿잖아요.” 그래서 내가 뭐라고 하느냐, 전도는 누가 한다고 했지요? 전도는 주님이 하지요.

그러면 지방교회는 뭐냐 하면, “목사님이 저렇게만 이야기하지 말고 상당히 부드럽게만 이야기해도 많은 믿을 사람이 더 있을 건데.” 라고 하는 말은 뭐냐 하면, 내가 생각한 전도 방식을 나는 고집하겠다는 거예요. “부드럽게만 이야기해주면 사람들이 알아듣고 구원 받을 건데, 사람들에게 시비 걸 듯이 그렇게 해버리면 그러면 누가 구원받겠습니까?” 이렇게 하지요. 그럴 줄 알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전도는 주님이 하십니다.” 이렇게 한 거예요.

그러면 그 쪽에서 “전도는 주님이 하신다는 말은 틀렸다는 말이 아니고, 내가 보기에는 목사님이 지 복음 안다고 자랑질하는 것 같습니다.” 라고 할 수가 있어요. 그 말은 훌륭한 말이에요. 왜냐 하면, 얼마든지 그럴 죄가 나올 수 있기 때문에. 그러면 결국 말이 예수님 이야기하다가 누구 이야기됐느냐 하면, 니가 잘났나, 내가 잘났나로 이해해버린 겁니다.

내가 복음 전하니까 “목사 니는 뭐 잘났는데?” 이런 식으로 지금 반발 들어온 거예요. 결국 주님을 쳐다봐야 할 이야기가, 주님만 이야기할 이 자리에, 말씀으로 주님만 증거 될 말씀이, “그렇게 하는 니는 뭐 잘났노?” 그렇게 돼버려요. 저는 뭐냐 하면, 우리가 잘났다, 못났다, 관계없이 이 복음을 전하나 안전하나 관계없이 전도는 차질 없이 이루어져요.

내 말고 다른 사람이 전해가지고 얼마든지 예수 믿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주께서 그렇게 하면 안 되는데,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전도할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왜냐 하면,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전도한다고 하는 것은 여전히 뭐냐, 우리나라에 성도 숫자 아직도 염려 생각하고 있는 중이에요. 한 명도 없어도 괜찮은데.

(질문)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말이 뭐냐 하면 주님이 선포하시는 건데, 목사님이 선포하시는 거 좋아요. 얼마든지 하실 수 있어요. 들을 귀가 없으니까 못 듣는다 말이죠. 뭘 헛소리를 하면서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으면서  왜 그렇게 하시는지 모르겠다는 거죠. 들을 귀가 없는데 말이에요. ⇒ 지금 집사님이 오해한 게 뭐냐 하면, 내가 그렇게 전한 것은 그 사람을 꾀어서 구원 받게 하는 목적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 목적이 없으면 그럼 나는 어디 목적이 있습니까? 이 말씀과 예수님과 직접 연결시키지요. 그러면 내가 연결시키는 그 쪽을 봐야지 나를 보면 안 된다는 것.

내가 무슨 의도를 가질 것 같으면요, “목사님, 전하는 건 좋지만, 그런 방식은 틀려먹었습니다.” 하는 쪽으로 이야기해도 되는데, 내가 방식을 생각 안하고 있는데다가 방식 언급을 해버리면 나는 방식을 수정해야 될 입장에 있어요. 그런데 방식은 생각해야 수정하지, 방식은 생각도 안했는데 무슨 수정할 이유가 없어요. 수정할 필요가 없잖아요.

지금 히브리서13장 이야기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그 당시 유대인들이 제사를 드렸다 말이지요. 드렸는데도 불구하고 못 알아본 거예요. 왜 못 알아봤는가, 인간이 머리가 나빠서 못 알아본 게 아니고 못 알아봐야 돼요. 그리고 알아보는 사람이 나타나면 안돼요. 다시 말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전도가 되면 안돼요.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못 알아볼 사람은 못 알아보고, 알아볼 사람은 아는 방법으로 어떻게 하셨습니까? 제물과 자신의 몸을 연결시킵니다.

12절 봅시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되어있지요. 자, 집사님 이야기 같으면 이 성경공부 할 필요 없어요. 주님이 알아서 할 건데, 이거 왜 합니까? 할 필요 없는데 왜 하게 하느냐 하면,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우리가 해삼이라면 우리 속에 뭐가 들어오는가 하면, 바로 히브리서13장12절이 들어옵니다. 12절이 들어오게 되면, 우리가 아까 해삼의 이론에 의하면 우리의 단면이 드러나지요. 단면은 뭐냐 하면, 지킬 게 있는 거예요. 이 복음을 다른 사람한테 우리 딸한테 전해주지. 이런 식으로. 내 딸이니까. 항상 지킬 게 있어요.

왜 이걸 해야 되느냐 하면, 이렇게 해서 효과나 결과를 기대해서는 안 되고 이 말씀 자체가 우리 해삼 속에 내장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뒤돌아봐서. ‘아! 주께서 홀로 자기 피 가지고 영문밖에 불사르게 내어줬구나!’ 그 결과로 뭡니까? 우리가 도저히 못 알아보는 우리도 뭐 됐구나? ‘이미 영생을 얻었구나!’ 그렇게 되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 감사가 나오는 거예요. 감사가.

감사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주님과 나의 죄 됨 사이에서 감사가 나와요. 집사님은 뭐냐 하면, 불평이 나왔어요. 주님과 죄 사이가 아니라 이렇게 나를 보고 주님을 보려 하는 거예요. 지금 내 걱정하고 있는 거예요. 나를 보고 하니까 짜증난다. 나를 보니까 짜증이 나는 거예요. 감사의 환한 얼굴이 아니에요. 아이고~ 감사구나! 자기 죄인 됨과 주님 됨에 감사가 나와요. 감사의 근거가 있어요. 히브리서13장12절.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내가 한 게 전혀 없어요. 주님이 홀로 하신 일이잖아요. 주님 홀로 했는데 덕을 본 사람이 나라는 거예요. 왜? 어떻게? 째고 들어왔으니까. 박 근혜 이런 사람 이거 안 봅니다. 지금 이 시간에 볼 리가 없어요. 히브리서13장12절이 지금 4시12분에 들어왔다는 것. 이 자체가 감사할 일이에요. 왜? 다시 한 번 이것이 내 속에서 이 말씀의 결과물로 우리가 소급해서 인정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우리의 육은 이제 계속해서 없어질 육이에요. 제가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기적, 기적하지만 우리가 늙어 죽는 게 기적입니다. 왜냐 하면 우리는 안 늙고 싶고 안 죽고 싶어요. 하지만 지금도 열심히 일하셔서 우리가 늙어가잖아요. 주께서는 쉴새없이 매일같이 아침에 일어나면 하루치 늙고 그 다음날 되면 또 늙게 해주시고 주님께서는 지금 주물럭, 주물럭 계속 우리를 주무르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기적을 주옵소서! 하고 있다 말이죠. 아침에 일어나서 머리카락 빠지고 머리 허옇게 쉰 게 기적인데 주께서 기적인데 왜 기적을 모르느냐, 거의 적절한 말씀이 안 들어와서 그런 거예요. 그러나 시편에 딱 보게 되면, 우리는 점점 더 이 땅의 고생과 그 년 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이 말이 딱 떠오른다면 걱정과 근심만 있어도 당연한데, 가끔은 감사하잖아요. 가끔은 행복하잖아요. 이게 덤으로 주신 감사거리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해삼 같은 우리 속에 히브리서13장12절 집어넣자 이 말입니다.

주님과 우리 말고 주님과 죄인 된 우리 사이에 어떤 것도 끼어들면 안돼요. 그래서 제가 만약에 여기 있고 주님이 여기 있다면, 제가 만약에 강의자가 아니고 여기에 앉아있다면 저는 비판하면 이렇게 비판하겠어요. “목사님, 우리가 왜 죄인인가를 좀 더 깊이 있게 알려주면 안 됩니까? 더 깊이 있게.” 왜 그래요? 죄인임을 알려줘야 예수님께서 이미 구원하신 희생이 더 그 사랑이 넓어질 거잖아요.

(질문) 못 알아듣는데 뭐 하러 힘들게 해요? ⇒ 못 알아듣는 사람 생각하지 말라니까요. 우리 자신이 못 알아듣는 사람이에요. 우리 자신이. 못 알아듣는데 알아듣게 하신 거예요. 이것도 주님의 기적입니다. 그러니까 집사님이 이야기한 게 뭐냐 하면, 이 좋은 소식을 보다 많은 사람에게 전해서 많은 사람 구원하도록 좀 부드럽게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질문) 목사님은 비판을 하다 보니까 비판이 그냥 나오는데, 듣는 사람의 수위가 있어요. 들을 귀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좋은데, 처음 듣거나 어색해 하는 사람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 수위가 있다. 처음 듣는 사람은 어색한 사람이 있다. 그걸 왜 신경 쓰냐 말이죠. 지금 우리 관심사가 수위가 낮은 사람이 아니고 못난 사람이 아니고 관심사가 본인이 그런데 관심 두는 자체가 죄라니까요. 우리 자신이 주님을 쳐다봐야 할 건데, 그런데 신경 쓴다는 말은 보다 많은 사람이 들어서 숫자가 늘어났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잖아요. 그 생각이 바로 죄인의 생각이다 말이죠.

자, 13절 봅시다.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자, 영문 밖에 나가자. 했지요. 우리가 나가자고 나갈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면 누가 나가게 합니까? 고맙게도 주님이 해삼 속에 말씀이 들어와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살다보니까 이곳이 영문 밖이라. 누가 그렇게 몰아넣었어요? 히브리서13장13절이 그렇게 몰아넣은 거예요.

그리고 오늘 이 이야기가요,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도움 되는 줄 몰라요. 주고받는 이야기가. 얼마든지 필요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런 일을 일으킨 거예요. 하나도 버릴 게 없어요. 영문 밖이 어디냐 하면, 저 고생하는 데가 아닙니다. 파키스탄 아니에요. 잘사는 집에 혼자서 TV봐도 영문 밖이에요. 그게. 왜? 주께서 성도로 하여금 TV보면서도 마사지 받으면서도 영문 밖이에요. 그게. 왜? 그게 내가 죄인인 걸 알면 히브리서13장 1절부터 한꺼번에 범벅이로 지금 말씀이 들어오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할 때 우리가 어떻게 할 게 없어요. 주께서 이 말씀대로 그냥 가게 하시는 겁니다. 왜? 주는 나를 뭐하는 자니까? 돕는 자니까.

자, 그러면 13장6절에 주는 나를 돕는 자라 할 때, 돕는 자의 해석을 12절, 13절에서 새롭게 해석이 가능합니다. 돕는다는 것이 내가 원하는 사업을 도와주는 게 아니고 말씀의 핵심대로 말씀이 지금 살아있다는 것을 더 느끼게 하는데만 주께서는 도와주지요. 다른 데는 안 도와줍니다.

주님 있는 그것만으로 감사케 하는 일만 도와주지, 주님도 감사하고 내 것 챙기는 것도 감사하고, 이런 식으로는 주께서는 도와주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이렇게 해석하지 못하느냐 하면, 자기 고유성이 따로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 덕분으로 내 하는 사업이 잘 됐을 때, 감사하겠습니다. 역시 주님은 전능하신 분이고 돕는 자시군요. 이렇게 하게 되면 어떤 현상이 있느냐 하면, 내가 주님께 도움 받을 때 내가 무슨 일을 했지? 옳지. 기도를 했구나! 금식을 했구나! 헌금을 했구나! 이렇게 동원되는 겁니다. 

어제 오후에 어떤 분이 저한테 전화로 이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뭐냐 하면 왜 이 근호 목사님은 교회를 인정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 근호 목사님은 기도하라는 목소리가 없습니까? 전도하라는 소리가 없습니까?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은 이미 자기 고유성이 있어요. 뭐냐 하면 교회는 이 정도 되어야 되고, 기도는 이 정도 괜찮은 기도는 긍정적이 되어야 되고 전도는 충분히 인정해야 된다는 자기 고유성이 있는 거예요. 이 고유성은 바로 아까 집사님이 질문한 것처럼 자기가 지키고 싶은 거예요.

지금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다 지키고 싶은 게 있어요. 전부 다 지키고 싶은 게 있는데, 지키고 싶은 것이 있는 게 주님에 대한, 죄 용서에 대한 감사를 저항해요. 감사를 감소시킵니다. 별로 고마운 줄 몰라요. 주님께서 하신 일에 별로 주님이 좋아지지도 않아요. 이것 때문에. 이 지키고 싶은 것이 지켜지고 확정이 안 된다면 늘 짜증 덩어리로 돼요. 앵그리. 부엉이처럼. 늘 화난 표정을 하고 있어요. 앵그리하고 있어요. 내 평생 사는 게 왜 이 모양 이 꼴 이냐는 거예요. 화내고 있는 거예요. 지키고 싶은 거예요.

그 지키고 싶은 것을 강의 첫 번째 뭐라고 했어요? 그게 바로 나의 고유성이라는 말이에요. 강의 하나 하나할 때 다 연결 되게 되어있어요. 전부 다. 무심코 단어 던지지 않습니다. 나의 고유성이 있는 겁니다. 지키고 싶은 것. 남편하고 이혼했다. 그래도 지키고 싶은 게 있어요. 이혼한 것도 남편 탓이지 내 탓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수요일날 기도할 때 그걸 염두에 두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남한테 하소연하지 마세요. 제가 수요 기도제목에 남한테 하소연하지 마세요.

남의 교회, 남의 교회는 없어요. 남의 교단도 없어요. 남이라는 자체가 없어요. 왜그러느냐 하면 마귀 안에서 우리는 전부 다 한 통속인데 무슨 남이 있어요? 도매금으로 넣어요.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전부 다 도매금으로 넣어요. 너 할 때 나도 포함이라는 거예요. 너 공격할 때 나도 너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거예요.

오직 우리는 바라보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뭘 했느냐는 거예요. 우리가 주를 믿으면 구원 받지 못하는 이유가 내가 믿기 때문에 구원 못 받아요. 내가 믿기 때문에. 내가 믿게 되면 뭐가 생각나느냐 하면, 나의 고유성, 나는 주님을 믿었고 저 사람은 안 믿었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나는 이 근호 목사가 복음을 전할 때, 나만 믿었고 저 사람은 안 믿었어요.” 이리 되는 거예요. 그건 복음 근처도 안 간 거예요. 계속해서 나는 살아있어요. 나를 포기할 마음이 없습니다. 나는 나를 지키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그 나에다가 성령이 오게 되면 뭐한다? 말씀이 꽂히는 거예요. 말씀이.

포카 할 때 카드 있지요. 떡에다가 카드 던져보세요. 떡에 팍 꽂히지요. 말씀이 그렇게 꽂히는 거예요. 아침에 눈 떴는데, ‘참새도 키우시고 들풀도 키우시는구나! 오늘도 주님께서 오늘 하루도 또 키우시네.’ 이러면 마태복음 6장이 꽂힌 거예요. 하루 종일 6장이 꽂힌 채 살아가는 거예요.

각자 하나님이 주신대로 자기들 인생 살면 돼요. 그게 성도의 영문 밖이니까. 그걸 가지고 간추려서 “니 마음대로 하세요.” “막 사세요.” 막 사세요. 라는 말은 뭐가 깔려 있느냐 하면 남 눈치 보지 말고, 남이 나를 어떻게 평가 하는가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막 사세요. 구원 받을 사람은 주가 알아서 합니다. 전도한다고 구원되는 게 아니에요.

14절에 봅시다.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자, 여기서 오늘 강의에 또 중요한 부분이 있는데 예수님의 재림에 관해서 언급하고 싶어요. 나를 비판했던 그 사람이 예수님의 재림이 중요하다는 거예요. 그러니 이것은 기존교회에서 하는 것과 똑같이 하는 거예요. 왜 그 사람이 나를 공격하게 되었는가, 기존교회에 붙박이처럼 박혔기 때문에 그래요. 평생을 기존교회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복음을 전할 때, 그 사람이 박혀있는, 현재 이건 생화지요. 꽃꽂이 하는 것 보면 스폰지에 물 넣어가지고 생화를 꽂으면 오래가지요. 기존교회를 스폰지라고 한다면, 뽑혀서 그런 이야기가 십자가에 대한 피만 이야기한다고 공격한다고요. 그럼 나는 어디를 공격해야 돼요? 스폰지에다가 공격해야 되지요. 이게 바로 아까 이야기한 기존교회에요.

기존교회의 스폰지 이야기한 거예요. 자기 고유성 지키기 위해서 교회 다니는 것. 그럼 그 사람이 뭐냐 하면, 재림은 왜 이야기 안 하느냐 에요. 내가 재림을 이야기 안한 걸로 아예 단정지어 버려요.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 하면, 그들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기존교회에서는. 딱 당신들의 고유성을 인정해 줄 테니까 골라잡으라는 거예요. 어떻게 골라잡느냐, 필요한 것을 바구니에 담으라는 거예요. 십자가 중요하고, 부활 중요하고, 재림 중요하다는 거예요. 이걸 바구니에 담아서 하면 된다는 겁니다.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가락강의에서 정보라고 했어요. 정보.

정보는 무슨 적이라고 했습니까? 가산적. 가산적이지요. 계속 추가적, 가산적이지요. 그런데 가락강의에서 제가 가산적 반대말은? 서사적이라고 했지요. 예수님 이야기죠. 우리 이야기 아닙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계속 정보를 끌어 모으는데, 그럼 교회를 왜 가느냐, 본인이 노림수를 가지고 가요. 가가지고 균형을 맞혀야 된다는 거예요. 균형을. 십자가, 복음, 거기다가 헌금이야기, 기도는 이렇게 하고, 예배는 이렇게 하고, 균형을 맞추면 자기 바구니에다가 균형 있게 맞추는 거예요. 20:20:20:20:20 넣으면 자기는 100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근호 목사는 뭐냐 하면, 피만 전한다는 거예요. 피만. 피만 전한다 하니까 이 사람은 피를 하나의 뭐로 보느냐, 정보로 봐요. 정보로. 내가 구원 받는데 필요한 정보로 보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첫째 강의부터 지금까지 한 게 뭡니까? 피는 우리가 마귀에 속한 죄인이라는 것을 들추어낸다고 이야기했지요. 성령이 임하면 우리가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거죠.

다시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왜 죽었습니까? 좋게 이야기했는데 예수님이 왜 죽었어요? 좋게 이야기하면 되는데 왜 성전을 뒤엎고  폭력적으로 왜 했어요? 좋게 이야기하면 되는데. 예수님 왜 죽인 줄 알아요? 나를 때려죽이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예수님께서.

사도바울은 왜 순교했습니까? 좋게 이야기할 걸 가지고. 사도바울은 뭐라고 이야기한 줄 알아요? 내가 전한 복음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했지요. 건방집니까? 안 건방집니까? 독선적이지요. 건방지지요. 니가 뭔데? 이야기 듣겠어요? 안 듣겠어요? 그걸 의도적으로 유도했지요. 니가 뭔데? 그래서 고린도교회에서 사도바울 추출했습니다. 지 혼자 잘났다고. 좋게 이야기하면 얼마든지 구원 받을 수 있는데 왜 그렇게 이야기하느냐 말이죠.

세례 줘도 괜찮아요. 뭐라 한 줄 알아요? 나는 세례주려고 오지 않았다. 굳이 그 이야기를 왜 집어넣었습니까? 나는 가이오집 외에는 세례준적이 없다는 말을 왜 집어넣었어요? 세례가지고 구원이 된다? 안 된다? 구원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나 고린도교회는 세례 받으면 구원되는 것이 독자성을 갖고 있는 사람한테는 굉장히 편리한 거예요. 왜? 튀김통닭이니까. 받을 거 다 받으면 점점 더 든든해져요. 구원에. 그게 우리의 타고난 본성입니다. 정말 저한테 욕하려하면 이렇게 해야 돼요. “막 사는 소리를 하지 마세요.” 이렇게 해야 돼요. 막 사는 소리를 하지 마세요.

그 재림이 어려운 이유가 재림은 안 어려워요. 안 어려운데 제가 말만 하면 어렵다는 거예요. 왜 어려우냐 하면, 지금 장바구니 들고 재림이 뭔지를 알려주면 담겠다는 마음 준비가지고 “자, 나한테 이야기해봐. 이 근호 목사 나한테 재림 이야기해봐.” 내가 이야기를 끄집어내니까 무슨 말인지 못 알아 듣겠다는 거예요.

재림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만 재림이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만. 재림은 정보가 아니고 재림은 감사로 이어져야 돼요. 재림이 감사로 이어진다는 말은 어디에는 감사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 대한 집착과 이 세상에 대해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나는 전혀 이상하게 “목사님, 나는 이 세상 어떤 일이 일어나도 감사가 안돼요.” 복음 아는 성도들의 특징이 있어요. “목사님, 연속극이 재미 하나도 없어요.” 얼마나 감사한 말인지 몰라요. TV재미있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물론 몇 달 가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재미없는 이유가 뭐냐 하면, 그게 바로 성도 안에서 삐져나오는 재림의 현상이에요. 재림은 연결되게 되어있습니다. 어떤 연결이냐 하면, 십자가 지신 분의 재림이에요. 다른 사람이 재림이 아니고. 따라서 어떤 사람만 재림에 참석할 수 있느냐 하면, 십자가 안에 같이 있는 사람만 재림에 참석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마지막 대목에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뭐냐 하면, 장바구니 들고 예수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안에 있어요. 자기 안에 있어가지고 재림이야기하면 재림도 알고, 그래서 재림 안 빠트리고 재림 알아서 재림할 때 알아서 영접하겠다는 겁니다. 그걸 누가 이야기하느냐, 기존교회에서 다 그렇게 이야기해요. 기존교회를 비판 안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기존교회에서 그렇게 하는 거 감사해요. 왜, 비판거리가 있어가지고. 그렇지 않으면 비판거리가 없잖아요.

재림이라는 것은 십자가 지신 분이 오시는 거예요. 요한계시록1장7절입니다. 재림이 재림하는 게 아니고 창에 찔린 분이 오시는 거예요. 제일 알기 쉬운 게 그겁니다. 아들이 7살 때 가출했는데, 5살 때 넘어져서 뒤에 흉터가 있어요. 흉터가 있다면 엄마는 아들의 재림을 기다리는 게 아니고 흉터난 아들이 오기를 기다리지요. 아들이 보고 싶은 거예요. 어떤 아들? 흉터난 아들. 그러면 그걸 고유성이라 했거든요.

미국영화에 그런 게 있어요. 애를 잃어버렸는데, 걱정하지 마시고 괜찮은 애 줄 테니까 양자로 키우시죠. 거절해요. 대체성이 안돼요. 한 번 꽂혀버리면 주님한테 꽂혀버리면 대체성이 안돼요. 그 주님이 와야 돼요. 창에 찔린 그 분이 와야 돼요. 못 박히고 피 흘린 그 분이 와야 돼요.

어떤 경우가 되느냐 하면, 이 재림이라는 게 참 시간 요소가 재미있는 게 막상 재림이 되게 되면, 재림이 없어져버려요. 애들이 소풍날을 기다리잖아요. 소풍날이 되면 뭐가 날아가요? 기다림이 없어져버리잖아요. 왜? 그 날이 왔기 때문에. 그 날이 왔지요. 이제 소풍 가는 게 좋지, 1주일 동안 기다렸다. 그걸 다시 회상할 필요 없습니다. 그걸 가지고 길길이 뛸 필요 없어요. 짜증낼 필요 없어요. 소풍가면 가는 거고.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재림 자체가 생각나지 않아요. 그렇다면 주 안에 있는 사람은, 주 안에 있는 사람만 재림이 되지요. 그럼 이미 주 안에서 재림된 기쁨을 주님께서 주겠어요? 안 주겠어요? 주겠지요. 어떤 방법으로 주느냐 하면, 이 세상의 시간 흐름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려요. 세상에 대한 미련이 없어질수록 오실 주님만 더욱 더 고대하게 되는 겁니다. 더욱 더 고대하게 되지요.

남편이 출장하고 난 뒤에 형광등 가버리고 못 질 자리 또 생겨버리고 남편이 했던 그 분리수거, 아내는 누워서 TV보기 바쁜데 할 줄 도 모르는데, 밥도 남편이 하고 빨래도 남편이 한다고 칩시다. 그러면 뭘 기다리겠습니까? 남편오기를 기다리겠지요. 남편이 직접 오지는 않고 남편 자기 기능을 직접 오되, 밤에 몰래 와서 밥해주고 빠지고, 빨래하고 빠져버리면 뭘 생각이 나겠어요? 자기 드라마보다도 ‘아! 전에 우리 남편도 이렇게 밥 잘해줬는데. 오, 세상에! 계란말이하고 요 반찬, 가지 수가 어쩜 남편이 했을 때와 똑같네. 아이고~ 그리워라. 남편 어서 출장 끝나기를.’ 남편은 몰래 왔다 갔다 했는데. 자꾸 보면 볼수록 남편 생각이 더 난다 말이죠. 자꾸 생각난다 이 말이죠.

자꾸 생각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생각하다 보면 자기가 봤던 드라마 같은 거 안 본다 말이죠. 그러니까 뭐냐 하면 재림이라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확정됐으면 점점 더 세상으로부터 핍박, 고난을 일부러 받는 건 아니지만, 세상과의 정이 점점 더 떨어지겠지요. 그걸 가지고 환란과 고난과 핍박이라고 하는 거예요. 재림은 이미 작업이 개시되었어요. 누가? 예수님 본인이 재림이기 때문에 본인이 이미 개시된 겁니다. 이 방금 이야기가 사도행전1장에 나옵니다. “니가 뭘 자꾸 하늘을 쳐다봐?” 다시 오실 주님과 니 사이는 이미 주께서 쉬지 않고 계속해서 작업을 계속 벌리고 있었던 겁니다.

다시 한 번 히브리서13장 봅시다.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하잖아요. 아까 해삼에다가 포카 던지듯이 말씀이 꽂히듯이 꽂이는 것 해보겠습니다. 꽂이는 걸 제가 질문해 보겠어요. 우리가 여기에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라고 했을 때 이 말씀이 가장 꽂힐 때가 언제냐 하면, 바로 언제겠어요? 아파트 넓혀서 새집에 입주했을 때. 이 동네 충훈부를 떠났을 때. 넓은 아파트에 널널하게 살 때. 그 때 어떤 마음 들겠습니까?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고, 하겠지요. 그 때, 아차! 어떤 넓은 아파트라든지 어떤 넓은 고급 빌라라도 우리는 히브리서13장14절에 보면, 우리는 뭡니까? 여기는 영원한 뭐가 없다? 도성이 없다. 라는 것을 깨닫게 하면서 나는 뭐로 확인됩니까? 나는 죄인이구나! 다시 말해서 주께서 나를 죄인 되게 하기 위해서 7억8천만원짜리 아파트를 제공하신 겁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괜찮은 거래지요. 7억8천만원짜리 아파트 제공하고 우리는 뭘 알고? 히브리서13장14절 알고. 그러니까 우리가 말씀을 지켰다는 것은 주의 능력이 아니면 지킬 수가 없습니다. 막 사세요! 왜? 막 사는 것이 절대로 주의 말씀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말씀 안에서 막 살게 해요. 말씀 안에서.

그 다음에15절 봅시다.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 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참 얼굴 부끄럽지 않습니까? 우리가 제사를 드릴 때는 돈이나 헌금이나 몸 바쳐서 제사 드리는 게 아니에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제사를 받으십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드려야 돼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드린다는 말은 내 것 드린다는 말이 아니고 아버지가 주신 주님을 도로 드립니다. 하면서 아버지께 찬미가 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우리 쪽에서 올라간 화살표 이것은 더러워서 안 받습니다. 이건 악마의 것이니까.

주께서 내려온 걸 받아요. 내려온 걸 받는다고요. 내려오는데 끝이 피로 묻혀있습니다. 피로 묻힌 이유가 바로 우리는 육신이 있는 한, 계속해서 뭘 추구합니까? 지 잘난 맛으로 천당 가려 하기 때문에. 이 충돌에 의해서 계속 피가 유효하게 반복적으로 적용된다 말이죠. 이걸 가지고 여기에 20절에 보면,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무슨 피? 언약의 피. 요게 바로 ‘언약의 피’입니다. 오늘 강의가 어렵지 않아요. 오직 언약의 피로 구원받는 겁니다. 우리 행함이 아니고. 그겁니다. 어려워요? 이게 큰 소리 날 일입니까? 언약의 피 같으면, 이게 언약의 피 하나지요. 마지막에 언약이지요.

그러면 1일 되기 위해서는 2가 되어야 되고, 2가 되면 3,4,5,6 계속 나오지요.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이 복잡한 거예요. 아파트 사고팔고 복잡하고, 복잡한 이유가 결국 그렇게 복잡해서 우리는 울고불고, 나 혼자 울고불고, 혼밥 먹고, 혼술 까지 안 먹지만. 울고불고 하지요.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딱 한 개에요.  언약의 피. 피를 위해서 울어야 되고, 피를 위해서 웃을 때는, 웃는 이유도 모르면서 기분 좋아서 웃어야 되고, 싸울 땐 싸워야 되고, 누구하고 싸우던지 싸워야 되고, 이게 전부 언약의 피에요. 언약의 피라고요.

언약의 피 인데 어제 저한테 공격한 사람은 뭐냐 하면, 왜 재림을 이야기 안하느냐는 거예요. 이제 여러분들이 답변할 차례에요. 저는 언약의 피를 이야기했는데 그 사람이 말하기를 왜 이 근호 목사는 기도에 대해서 이야기 안하고. 전도에 대해서 이야기 안하고,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 한 적도 없고, 왜 재림에 대해서 이야기 안하느냐고 그랬어요. 그러면 여러분이 내 대신 답변해 보세요.

(답변) 그 사람은 언약의 관점이 아니고 구원의 관점이고. ⇒ 바른 소리 한 번 나왔어요. 바로 구원에 관점이 있어요. 구원에 관심이 있어서 그래요. 구원 받고자 하는 자는 베드로와 똑같습니다. 이건 사탄의 일을 할 수밖에 없어요. 온갖 고상한 것 다했는데 성경을 달달 외워도 구원이 시작되면 안돼요. 이것은 바로 언약의 피를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이 말씀을 주신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 행함이 동원되지만, 우리는 이미 주께서의 행함에 결과에 포함되고 거기에 완전히 덥혀 버렸어요. 이제는. 덮쳐져 있어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말씀이 왜 이렇게 짜여 졌는가를 그 이유에 대해서 납득만 하면 되는 겁니다. 아파트를 넓게 사가지고 ‘아! 아파트는 세상에 속하니까 미련두지 말라는구나!’

그걸 좀 자세히 이야기하게 되면, 언약의 피가 궁극적으로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 밑에 줄줄 연쇄돼 나오는 것이 기도고, 전도고, 예배고, 재림이고, 교회다 말이죠. 그러면 교회 의미를 우리 쪽에서 보면 안 되고 뭘 둘러 와야 돼요? 언약의 피를 거쳐서 오게 되면 기도, 전도, 예배 다 둘러지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그냥 해버리면 우리 행함이 동원되지만, 우리가 행한 행함의 결과를 보게 되지만, 이렇게 둘러오게 되면 현재 이 세상 돌아가는 모든 것이 주님의 기도고, 전도고, 예배가 된다 이 말이죠. 모든 게 예배가 돼요.

그러면 우리는 돌아갈 능력 없어요. 그냥 일단 육신이 있으니까 내 기도 해봐요. 내 기도 해보면서 주께서 내 기도에 주님의 언약의 피가 묻혀야 피가 피답게 돼요. 니 따위 같은 기도 때문에 내가 피를 흘렸다. 가 되어야 여기서 뭐가 나옵니까? 감사가 나오는 거예요. 아까 말에 대해서 꼬박 다 답변해드린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에 그런 겁니다. 이게 우리가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어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대변해서 할 수 있고. 또 이걸 처음 듣는 사람도 “아이고~ 내가 질문하고 싶었는데 대신 해주니 고맙다.” 이런 사람도 있을 거예요.

그러나 그 질문으로 끝나면 안 되지요. 답변으로 되어야 되지요. 답변이 없는 것은 뭐라고 합니까? 비판이라 해요. 답변 제시하는 것은 비판이 아닙니다. 그건 정답의 연속이지요. 그걸 비판으로 보면 안돼요. 정답의 연속입니다.

그 다음14절을 봅시다.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게 뭐냐 하면, 늘 감사하자는 이야기입니다. 그걸 범사에 감사하자는 이야기에요. 그럼 감사하게 되면 우리는 버릇이 “딸기 주스 감사하네.” 이리 하지 마시고 같은 색깔이지만 그냥 딸기 빨갛다고 보지 마시고 예수의 피를 가지고 감사하게 되면, “나 같은 죄인인데 주께서는 맛있게 먹으라고 빨간 딸기를 오늘도 주셨네요.”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과정을 설명하면서 뭐냐 하면,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주께서 하신다. 아까 집사님이 이야기한 그 이야기. 주님이 이야기한 복음 말고, 이 근호가 말한 복음 이야기 끄집어 낸 이유가 그렇게 또 시비 걸고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첫 째에서 늘여보면 다 이렇게 둘러서 이야기하는 건데, 바로 이야기한다고 오해하는 거예요. 바로 이야기해보면 자꾸 이 목사는 우리보고 행하라고 하는 것 같아. 행하라는 것이 아니고 진짜 구원 받은 사람 맞아요? 라고 확인 차원이지 행하라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둘러서 보면 돼요. 구원 받았기에 이러한 고백이 나온다 말이지요.

범사에 감사하자. “그러면 목사님! 감사하지 못하면 신자 아니겠네요?” 이건 아예 내가 질문할게요. 그런 질문 또 나올까 싶어서 내가 질문할게요. “감사 못하면 성도 아니겠네요?” 라고 할 때, 그건 본인만이 압니다. 자기가 신자냐, 아니냐는 본인이 너무 잘 알아요. 왜? 남이 거기에 대해서 비판할 필요가 없어요. 그것은 성경 복음이 아닙니다. 라고 비판하지만, “그래서 당신은 지옥 갑니다.” 라고 비판할 필요는 없어요. 그건 우리가 그렇게 할 권한이 없습니다.

이건 복음입니다. 복음 아닙니다. 라는 권한은 있지만, 복음 아니라고 해서 지옥 간다는 법은 없어요. 왜? 5분 뒤에, 10분 뒤에 어떻게 마음 달라질지 우리는 남에게 마음에 영향 줄 능력이 없어요. 주님이 알아서 하지요.

자, 14 절 다시 봅시다. 14절 끝에 보면, “장차 올 것을 찾나니” 그 점에 대해서 해보겠습니다. 장차 올 것을 찾나니. 그렇다면 여기 우리 시간은 어떻습니까? 아무리 흘러가도 시간이 흘러간 장차 재림 하시는 게 아니고 이건 처음 이야기하니까 잘 들으세요. 시간이 흘러가다 보면 주께서 재림하시는 게 아니고, 우리 시간은 이미 갇혀 있는 시간에, 바깥에 장차, 외부에 있는 장차, 주님이 오시는 거예요.

이미 우리의 시간은 2017년 돼도 장차고요, 2020년 돼도 장차가 되고요, 2050년 돼도 장차가 돼요. 2017년도 이후가 다 장차가 아니고,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한테는 계속 장차 오실 예수님 오실 그 때만 기다리면 된다 이 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한테는.

그럼 장차 오신다는 소식은 누굽니까? 약속을 누가 했어요? 주님이 이렇게 약속 했잖아요. 그럼 인간이 하는 약속, 인간이 아는 약속은 행함에서 나온 약속인데, 이 인간의 약속은 안돼요. “내가 믿습니다.” 하는 약속은 하지 마세요.

내일되면 몰라요. 내일 되면 모른다고 해가지고 “그럼 나는 어찌 되나?” 이런 말은 오늘 지금 믿는 것도 내 믿는 행함을 또 의지하게 돼가지고는 그건 복음적이 아니에요. 천당, 지옥 간다는 말은 안하겠습니다마는 복음적이 아닙니다. 기존교회에서 하는 거예요.

그러면 약속에 대해서 좋은 예가 있어요. 뭐냐 하면, 눈 오는 날에 첫눈 오는 날에 안동역 앞에서 만나기로 돼있거든요. 무정한 바람인지, 헛된 맹세인지 날아가 버리고. 첫눈 오는 날에 안동역 앞에서 만나기로 돼있는데, 눈은 오는데 무릎까지 차였는데 못 오는 건지, 안 오는 건지 오지를 않네요. 기적소리만 눈밭에 날리고. 그게 「안동역 앞에서」 노래의 가사에 나옵니다.

거기서 가사의 멋진 게 뭐냐 하면, 안 오는 건지, 못 오는 건지인데. 지금 정답은 뭡니까? 안 오는 거예요. 왜? 우리 쪽에서 신에게 찾아간 이 약속은 주께서는 이 노선을 통해서는 오지를 않아요. 죽도록 안동역  앞에서 서있어도 안와요. 이미 오셨거든요.

재림할 주님이 이미 오셨어요. 뭐로 왔습니까? 언약의 피로 왔어요. 우리가 예수 믿어서 구원 받는 게 아닙니다. 자기 믿음 믿지 마시고 이미 오실 예수님이 이 세상보다 더 좋아지는 것은 내 안에 기적을 따로 만들어요. 내가 그런 기적을 만들어내지 마시고 주께서 만들어내게 되면 우리는 범사에 대해서 하나님께 피 흘림을 감사하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그냥 사기성 있는 인간의 약속들만 난무하는 이 세상에서 주께서 성령 주셔서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말씀을 지켜서 우리 안에 집어넣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는 내가 행함보다도 내 속에서 작렬하는 주님이 매일같이 새록, 새록 새롭게 향기를 뿜는다는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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