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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지역강의 > 안양강의
2017-04-15 00:32:06 조회 : 919         
신분변화 170414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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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은주(IP:119.♡.152.148) 17-04-28 15:36 
안양20170414a히13장16절(신분 변화)-이 근호 목사

성경말씀은 오늘 히브리서13장16절부터 보겠습니다. 히브리서13장16절에 보게 되면, 거기 제사라는 말이 나오지요. 히브리서가 1장부터 해서 13장이 끝입니다. 줄곧 신나게 달려왔지요. 엑셀을 밟으면서 죽 달려왔는데 13장 마지막까지 오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나왔습니다. 그 느낌을 한 마디로 이야기한다면 성도는 떠나야 될 세계에서 온갖 것을 다 겪는다.

다시 할게요. 히브리서를1장부터 죽 오면서 느낌이 뭐냐 하면, 떠나야 될 세계, 우리 동네가 아닌 거예요. 우리 동네 아니면서 떠나면서 회고하면서 ‘아! 나 이런 동네 살았어.’ 하는 그 느낌으로 히브리서를 보시면 됩니다. 놔두고 떠나야 될 곳이에요. 이걸 가지고 김광섭은 말하기를 점점 더 멀어져간다. 점점 더 멀어져가는 거예요.

성도가 그렇게 가야 될 이유가 예수님의 공생애가 그래요. 예수님이 자기 땅이 아닌 어두움의 땅에 와가지고 온갖 수모는 수모대로 다 당하면서 떨쳐버리고 잘 먹고 잘 살아라! 하고 떠났잖아요. 고 떠나는 코스를 성령을 통해서 성도에게 줍니다. 그러면 성도는 예수님이 어떤 코스를 밟아서 어떤 경로를 밟아서 떠났느냐, 그 경로가 성도 본인의 하루, 하루 인생의 가고 있는 고 길이에요. 그 하나의 코스다 말이죠. 코스.

그러니까 히브리서 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봅니까? 느긋하고 편안하게 보는 겁니다. 꽃구경하듯이. 꽃이 참 예쁘구나! 하지만, 꽃을 꺾고 가지고 올 필요는 없지요. 이게 경로인데, 이 예수님의 경로에 특징은 뭐냐 하면, 세상 것에 대해서 소유는 안 됩니다. 소유는 안 돼요. 몸만 떠나야 되요. 몸만 떠나야 됩니다.

히브리서11장에 나오는 신앙인의 특징을 보면, 가족 위주가 아니에요. 가족 위주가 아니고. 모세도 마찬가지에요. 모세 가족이 원래 누구입니까? 애굽의 바로의 가족이지요. 바로의 공주 아들 됨을 거절하고 새로운 구성인들이 모입니다. 구성인들이. 어떤 뮤지컬 같은 데 보게 되면 뮤지컬 무대가 있는데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그런 영화도 보면 뉴욕 후진데서 놀던 청바지 입고 놀던 청년들, 아가씨들 이야기입니다. 애 하나가 공터에서 놀고 있으면 시간 좀 지나면 약속한 듯이 저녁 무렵에 이쪽에 비슷한 같은 또래의 남자 친구들 나오고 이쪽에는 또 청치마 입은 아가씨들 또 나오지요. 한바탕 노래 부르고 춤추잖아요.

처음에 무대에 보면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노래가 진행되게 되면 이쪽 구석에서 무대 세트 뒤에서 한두 명 나오고 또 노래 지나고 나면 이쪽에서 한 서너 명 나오고 나오다보면 무대가 출연진으로 한가득 되지요. 강물이 흘러가는데 시냇물들이 끼어들잖아요. 처음에는 작은 강물인데 가면 갈수록 강물이 점점 더 불어나가지고 한 모듬이 되지요. 이게 바로 히브리서에서 그걸 이야기한다 말이죠. 외로워요. 상당히 외롭습니다.

그리고 우리가족은 살자! 가 안돼요. 히브리서도 마찬가지고 다른 성경도 마찬가지지만, 가족과 가족끼리 구성되어 있는 그 관계성, 그 관계성과 하나님의 백성끼리 모아지는 그 관계성이 같을까요? 다를까요? 이게 다릅니다. 달라요.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의 부부라 생각합시다. 옛날 60년대나 우리보다 연세 많은 70이나 80된 할머니들에게 묻습니다. “시집와서 가족들에게 왜 그렇게 잘해줬어요?” 라고 물으면 그 질문 자체가 이상해요. 시집왔으면 그 시집 귀신 돼야지. 이렇거든요. 무조건이지. 내가 잘해줄까? 말까? 라는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무조건 시집 왔으면 그 집 귀신 되어야 돼요. 제사는 기본적으로 다 드리고. 옛날 우리나라의 가정의 관계는 제사 중심입니다. 아들을 왜 좋아해야 되느냐, 아들이 제사를 연속할 수 있어요. 딸은 저쪽으로 시집 가버리면 이쪽 대가 끊어져버리면 제사 지낼 사람이 없어요.

제사를 지내면 그냥 가만히 앉아서 제사를 드립니까. 음식을 해야 될 게 아닙니까. 그러면 여자의 할 일은 그 중점이 뭐냐, 제사 지낼 때 그 제사음식을 거기에 참여하고 주도적으로 함으로서 영원히 그 시집집안에 며느리가 되는 겁니다. 맞지요? 제사를 중요시하는 겁니다.

그런데 왜 그리 잘해줬어요? 하면 생뚱맞은 질문이에요. 그 질문 자체가. 흔히 말하는 말이야? 막걸리야? 하는 것처럼. 그리 이야기해요. 어떤 사람은. 무슨 뜻이냐, 이렇게 생뚱맞게 이야기하는데. 만약에 어떤 문제가 있어가지고 한 번 이혼했다 칩시다. 이혼까지는 안가고 이혼직전까지 갔는데 다시 남편을 받아들여가지고 같이 합친다고 시도를 해본다고 합시다. 자, 어떤 차이가 있느냐 하면, 헤어지기로 작심했는데 자식이 말리고 장가갈 때 엄마 없으면 안 되잖아. 이리 달래고 해서 헤어지기 직전에, 냉각기간 4주 조정기간 지나서 다시 합쳤다고 칩시다. 칠 때, 그 때 뭘 발견하느냐 하면, ‘내가 저 남자와 왜 살아야 되지?’ 가 발견되지요.

처음에는 무조건이에요. 무조건 시집에서 하면 다 해야 돼요. 그것은 어떤 내가 저 남자와의 관계는 어떤 관계지? 라는 게 없어요. 그건 뭐냐 하면 주체가 없어요. 독자적인 주체가 감각이 없다니까요. 주체 감각이. 그러니까 나는 시집사람 됐는데 다만 내가 약간의 희망이 있다면 시집에서 마구 칭찬이 날아오는 것. 우리 집 며느리 참 잘 들어왔어. 저 며느리가 들어와서 우리 집이 너무 잘 됐어. 우리 집 보물 같아. 그 칭찬과 그 시집의 사랑에 고마워가지고 뼈가 부서지도록 더 더 더 봉사 충성하겠습니다. 이리 나온다 말이죠. 이리.

그런데 중간에 어떤 문제가 있어가지고 헤어지기 직전에 다시 합쳐버리면 전에 안 나오던 질문이 나와요. “내가 저 남자한테 아침식사를 왜 마련해 줘야 되지?” “자기가 옷 벗어놓은 거 내가 왜 빨래를 해줘야 되는가?” 없던 뭐가 생겼습니까? 주체가 생긴 거예요. 주체가.

전에는 주체가 없었어요. 주체가 생겨버리면 뭐가 생기는가 하면, 주체가 발생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소유가 생깁니다. 전에는 주체가 없을 때는 그냥 소유 당함으로서 만족스러웠어요. “니 시집 안 갔지? 우리 시아버지 시어머니 나한테 너무 잘해준다.” 이렇게 만족스러웠는데 만족의 이유도 모르면서 만족스러웠는데 그 다음부터는 주체가 생기면 내가 내 것을 챙겨요. 가만히 있어봐라. 내 이름으로 된 통장이 몇 개나 되지? 저 차는 남편 차고. 집은 누구 이름으로 돼있지? 그 다음부터는 소유 감각이 생겨요.

소유 감각이 생김으로서 뭐가 발생되느냐 하면, 주체에서 이게 발생돼요. 자유가 발생돼요. 자유라는 것은 자율적 선택권을 이야기합니다. 어떤 결정할 때 누가 뭐라고 이야기해도 일단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참고는 될 수 있어도 내 결정 앞에서 나란히 그냥 후보감으로만 있을 뿐이지 어떤 명령이나 강요도 내 자유의 영역까지 침투하지는 못해요. 개한테 “가만히 있어!” 누가 명령해도 “가만히 있어.” 이리 되는 거예요. 주체가 있을 때는.

그런데 옛날에 주체가 없이 그냥 시집에 살 때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시키만 주이소.”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 때 주체는 뭐냐 하면, 살아계신 시아버지, 시어머니가 제사 지내는 그 어른이 모든 주체를 혼자 다 독점하고 있어요. 니 주체 다 가지고 와! 내가 너를 사랑받는 우리 식구로 만들 테니까. 다 가지고 와! 그러면 우리는 온 식구 앞에서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가정을 위해서 희생하는 줄도 모르고 희생당하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그 상태가 더는 원한이 없이 그러면 대단한 만족 상태에 빠지는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돼버리면 여기서 뭐가 생기는가 하면, 길들여지기 시작해요. 제가 수요일 날 기도할 때 기도제목을 이걸로 한 겁니다. 인간은 주위로부터 길들여진 존재이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나다움의 내용을 절대로 우리가 내가 골라서 자율성을 발휘해서 내가 알아서 채우질 않고 주위에서 그걸 원한다면 원하는 것만 쓰레기통에 담듯이 다 담아서 “저 어때요?”라고 남한테 숙제 맞듯이 그렇게 살아온 겁니다. 이게 길들여진 거예요.

길들여지기 때문에 본인이 화가 난다든지 슬프다. 기쁘다. 하는 그 내용도 본인 본래의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슬퍼야 되고 눈치 볼 때 기뻐해야 되고 이래야 돼요. 바로 그것이 도저히 인간이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인간의 타고난 육성입니다. 육입니다.

히브리서는 그걸 끊어냅니다. 처음에 제가 히브리서를 강의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남의 동네라고 했어요. 남의 동네. 그런데 우리는 이미 길들여졌어요. 우리는 남의 동네라는 생각은 안 갖고 사나 죽으나 이 동네 귀신 되어야 돼요. 이 동네 사람으로서 이미 길들여져 있어요.

우리는 나그네고 객이라는 히브리서 11장 말씀이 우리는 오히려 낯설게 느껴집니다. 낯설게. 성경에 있는 것은 알겠는데 별로 뭐 현실감이 뚝 떨어지네요. 현실감이 뚝 떨어져요. ‘나그네로서 어떻게 살지?’ 이런 생각 안 들고 성경에는 나그네라고 했는데 나는 오늘도 우리 집안의 우리 식구들 좋아하는 무슨 오뎅탕을 끓일까? 이런 식으로. 떠날 생각을 하는 게 아니고 더 이렇게 보쌈으려고 하는 그것이 길들여진 속성에서 계속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이 길들여진 내가 울고불고 하는 그 우는 이유도 웃는 이유도 떠나는 게 좋아서 웃고, 머물러 있는 게 슬퍼서 우는 게 아니고 정반대입니다. 행여나 이 땅에서 떠밀까봐 울고 떠나지 마라하니까 그게 좋아서 웃고.

히브리서 전체 내용은 예수님 가신 길로 가게 된다고 분명히 언지를 했지만, 막상 우리의 정서, 우리의 이상적인 감정은 스폰지에 물을 담그면 어떤 게 스폰지인지 물인지 구분도 안돼요. 얼른 보면 스폰지 안보여요. 뭐 집혀서 던져보면 두둑 두둑 물 떨어지는 거 건져내듯이 이미 우리는 스폰지 전체가 구멍이 숭숭숭 나있어요. 세속아 들어오너라. 세속을 담는 그 구멍들로 다 튀어져있어요.

지난 주일 오후설교인가 젖 짠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이걸 가지고 젖을 한 번 짜보란 말이죠. 짜보면 뭐가 있겠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한 죄가 두두두둑 떨어지지요. 길들여졌으니까. 스폰지니까. 안에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내용들로 가득 차 있는 거예요. 왜? 우리는 주님을 의식하는 것보다도 현재 나에게 행복을 준다는 그 공동체, 가족 공동체가 이미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우리의 목적, 사는 이유, 목표 전부다 여기서 다 공유된 거예요. 공통적으로.

뭔가 주체가 있어야 내 개인의 목적과 의미가 있는데 이미 그 집의 며느리 되고 시집 와버리면 내 목적은 없고 시집의 목적이 내 목적이 되니까 “시집이여, 내 몸 하나 바치겠습니다.” 당신을 위해서 남편을 위해서 몸 바치고 자식을 위해서 몸 바치겠다는 거예요. 엄마의 삶은, 내 삶이 뭐 필요한데? 아, 여자의 일생이 그런 거지 뭐.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이 그런 거잖아요. 여자는 자기가 어디 있어요? 여자는. 누구 누구의 여자고, 누구 누구의 어머니고. 나중에 좀 되면 외손자 본다고. 외손자, 외손녀 봐야 돼요.

저임금에 시달리는 삶인데. 애 본다고 허리고 뭐고 다 뭉개지면서도 자식은 그걸 모른다고요. 우리 어머니는 손녀를 너무 좋아해. 이래 놓고는 돈 한 푼도 안주고. 매일 병원 가는 것도 모르고. 엄마가 자기 애 때문에 아프다고 하면 “엄마는 평소에 건강관리 왜 안 해?” 건강 관리하는 시간을 줬습니까? 엄마가 못한다고 하면 엄마는 너무 냉정해! 엄마는 너무 차가와! 나 엄마 보면 밥맛 떨어져! 실컷 키워놓으면 나중에 그런 소리나오게. 다른 엄마는 뭐 해주고, 다른 엄마는 희생하는데 우리 엄마는 왜 희생을 몰라. 너무 얍삽해! 이런 식으로 마구 나온다 말이죠.

도대체 내가 이 땅에서는, 어떤 인간도, 이 세상에서부터 마음으로는 자기 인생 꾸리고 싶지만 이 세상은 우리를 놔두지 않습니다. 발목을 잡아버리지요. 발목만 잡기만 하는 게 아닙니다. 강제로 잡아당깁니다. 물속에 있는 스폰지처럼. 내가 물속에 있더라도 지금 내 위치가 어디인지도 몰라요.

세상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이 전체 세상에서 자기 위치가 어디 있는지를 몰라요.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고 성경을 본다는 것은 뭡니까? 우리 위치가 어디 있는지를 성도는 알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하니까 오늘 히브리서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는 느낌이 들어요.

이 세상이 동그라미라면, 우리의 위치는 어디 있는가, 우리의 위치는 없어요. 없다는 말을 로마서나 갈라디아서, 고린도전서하면 우리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없다고 그래요. 히브리서는 여기 없다고 하지 않아요. 우리가 있기는 있는데 히브리서는 어떻게 보느냐 하면, 이 세상에 있는데 이 세상에 따로 나와 있지요.

현재 이 세상이 하나의 접시이고 쟁반이라면 우리는 여기에 없어요. 우리가 신자가 아니고 이 세상 사람이라면 우리는 어디에 있느냐 하면, 이 세상의 중심이 서구니까 미국이 중심이죠.  미국 서구, 뉴질랜드, 캐나다, 유럽 이런 걸 중심으로 느끼는 이유가 돈만 좀 되고 여유만 있다면 어디에 여행가고 싶어요? 나이지리아 가고 싶어요? 아니면 케냐가고 싶습니까? 캐나다 가고 싶습니까? 여행 간다면. 뉴질랜드 가고 싶어요? 아니면 캄보디아 가고 싶습니까? 어디 가고 싶습니까? 돈 좀 있다면. 좋은데 가고 싶지요. 그게 서구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현재 중심은 어디입니까? 서구 미국. 돈 많고 잘사는 나라가고 싶어요. 이걸 20대에서 30대 중반까지 아가씨들이 잘 표현하고 있어요. 그 사람들은 시집가는 걸 무서워해요. 지금 여러분 연대하고 달라요. 20대는 시집가는 게 무서워요. 왜냐 하면 어릴 때부터 집안에서 자기를 뭐로 만드는가 하면 자기를 집안을 일구어 세울 주체로 만들었어요. 그러나 여러분 나이 때는 여자는 고등학교만 나오면 돼요. 아니 중학교 나와 가지고 그냥 여상 나와 가지고 뭐하다가 나이 돼가지고 부모가 정해준 총각하고 그냥 선바가지고 시집가서 숟가락 하나 바꾸는 거예요. 여기서 밥 먹다가 식솔하나 떼어내는 거예요.

그리고 거기서 네가 얻어맞든 죽이 되던 밥이 되던 그것은 니가 타고난 니 팔자 여자의 팔자기 때문에 니 알아서 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옛날 말이 뭐냐 하면 하여튼 화장실하고 친정은 멀리 할수록 좋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 거예요. 그 전에 이야기지만, 명태하고 여자는 사흘마다 패야 인간된다 하는 거예요. 그래야 딴 생각 안한다는 거예요. 여자가 딴 생각 안한다는 말은 옛날의 윤리, 삼강오륜인가 나오잖아요. 여자는 항상 주체가 된 적이 없어요. 어릴 때는 부모한테 양육 받고 시집가서 남편한테 양육 받고 늙어서는 자식한테 양육 받고. 항상 여자는 양육 받는 입장이란 말이죠.

그런데 지금은 여자가 교육을 받아요. 교육을 받으니까 현재 젊은 딸들을 교육시키는 엄마의 뜻과 교육받는 딸의 뜻이 너무 다른 거예요. 엄마의 뜻은 뭐냐 하면 내가 못 배워서 시집에서 무시당했는데 결혼을 별로 안 좋은 남자하고 억지로 막 번개에 콩 구워먹듯이 해서 한 평생 인생을 조저났는데 니는 괜찮은 남자 만나라고 교육을 시켜놨더니만 20대가 지금 괜찮은 남자 만나기는커녕 아예 남자 자체를, 남자가 왜 필요한데. 자기 자체로 주체인데 남자가 왜 필요해요.

그리고 남자하고 결혼한다 하면 남자가 잘못되면 자기가 책임져야 된다는 이런 느낌이 든다니까요. 60대쯤 되면 책임져도 남자가 책임지지 여자가 책임 안 져요. 여자가 찔찔짜고 울기만 하면 된다 말이죠. 바람피워 누가 첩이 오게 되면 좋게 잘 지내면 되지 찔찔 몇 달 울다가 ‘아이고, 형님’ 인사하고 끝나는 거예요. 지금은 왜 내가 남자가 잘못한 것까지 내가 챙겨야 되냐, 이게 논리적으로 지금 자기한테 정리를 잘한 거예요.

그러면 뭐냐, 돈 벌어가지고 현재 세상의 중심은 어디라고 했습니까? 서구지요. 유럽에 배낭여행가요. 미국, 캐나다. 영어연수라는 핑계대고 영국으로. 이거 안가면 효녀입니다. 혹시 이 바람 안 들리면 고마워할 줄 알아야 돼요. 지금 돈이 없어 못가요. 형편 되면 다 갑니다. 가서 셀카 막 찍고요. 유럽이 마치 자기 세상인양. 지중해서 막 찍고. 그러면 나이 31, 32 넘어갑니다. 그 다음부터는 뭐냐 하면, 지가 주체니까 자기를 무조건 이뻐해야 돼요. 이걸 가지고 ‘절대자유’라 해요.

절대 자유가 뭐냐 하면, 내가 사랑하는 자는 무조건 나만 사랑하고 다른 데는 절대로 다른 선택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내 자유가 상대방에게 강요하게 되어있어요. 어떤 경우에? 주체가 있는 사람의 경우에는. 옛날 여자들은 주면 주는 대로 먹고 때리면 맞는 대로 얻어맞겠습니다. 왜? 이거 하라고 시집왔기 때문에. 내가 얼마나 오래 잘 참느냐에 따라서 시집에서 그걸 테스트하기 때문에. 역시 니는 우리 집안에서 대단하다. 니가 우리 집안을 키운다. 이리 하지만.

지금은 본인이 시집이고 나발이고 없어요. 본인이 주체라니까요. 따라서 내가 내 말 잘 듣는 남자를 내가 내 자유로 선택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오직 나만 사랑하는 그런 남자랑 결혼을 하겠다면, 이 말은 어떤 모순이 있느냐 하면, 내 자유가 상대방의 자율권을 침해하는 게 되지요. 이걸 강제한다. 일종의 속박하는 게 되지요. 그러면 그것은 상대방은 인간이 아니고 기계가 되요. 컴퓨터는 뭐냐 하면, 명령을 시행한 대로 실행하게 되어있어요. 명령준 대로.

이것은 뭐냐 하면, 사람이 아니고 기계가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또 안 되잖아요. 내가 사람하고 살아야지 기계하고 살면 안 되잖아요.” 그런데 사람하고 살게 되면 어떤 부담을 주느냐 하면 저 쪽은 나 같은 자유가 없잖아요. 또 저쪽 나름대로 절대 자유를 원하는 거예요. “니는 무조건 내 시키는대로 하면 내가 참 기쁘겠어. 그러면 내가 니한테 맛있는 거 사주고 돈도 더 줄게.”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그러니까 현대인들은 주체가 있는 이상 결국은 기계하고 살든지 아니면 결혼을 안 하든지 둘 중에 하나밖에 없어요. 기계하고 살든지, 주체가 있는 사람하고 살든지. 

그런데 이 세상의 주체는 어디서 나왔습니까? 이 세상에서 나왔지요. 이 세상 중심은 현재 어디라 했어요? 남자가 중국여자하고 결혼하는 환장한 사람 봤어요? 없지요. 그러나 서구 여자라면 집안에서도 그러면 그럴 수 있다. “덴마크 여자인데” “괜찮네.” 왜? 국민소득이 우리나라보다 3배 넘으니까. “스위스 여자 사귀는데.” “아이구 니가 언제 영어를 공부했니?” 칭찬이 늘어져요. “엄마, 나이지리아 여자인데?” “아이구, 니가 미쳤다. 아 손녀를 시커먼 손녀 볼 일 있니?” 잘사는 소녀하고 흑인소녀하고 대우가 달라요.

인간이 무심적으로 서구를 선망하는 중심으로 되어있다 말이죠. 제가 주체를 설명하면서 왜 이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우리 주체는 그냥 주체가 아니고 주체 나름대로의 목적과 지향점이 있다는 걸 제가 설명하는 겁니다. 지금보다 더 잘사는 그 세계 특히 복지국가. 복지가 잘 된 국가. 이 나라 김정은이 뭐 이리하면 여차하면 처갓집으로 튀면 되잖아요.  덴마크여자하고 결혼했다. 그러면 이중국적 할 수 있잖아요. 이 나라가 전쟁이 일어났다 하면 “여보, 빨리 갑시다. 애들을 위해서.” 자꾸 핑계를 대요. 그럼 후닥닥 가요. 덴마크는 전쟁 일어날 일이 없잖아요. 복지 잘돼 있고, 실직해도 80%, 퇴직해도 연금으로 수입이 보장되니까. 퇴직해도 우리나라 사람보다 2배나 잘 사는데. “아이고, 잘 물었다. 야~ 야~ 잘 물었다. 우이 그런 재주가 있네.”

여자도 마찬가지에요. “아이고, 키 크고 잘생겼다. 약간 외국 남자치곤 그런데. 독일 남자라고? 뭐하노? 독일남자.” “변호사” “아이고, 잘 물었다. 공부한 보람이 있구나!” 서구중심입니다. 그러면 이게 현대 20대 후반 30대 초반의 아가씨들이 이런 사고방식 갖고 있다는 것. 자기 자유는 절대 양보할 생각 없습니다. 자율권을 양보해버리면 본인이 주체가 없어요. 기계가 되어버려요. 그래서 요새 같은 연배들이 시어머니끼리 모여 뭐라고 합니까? 며느리 잘 들여야 된다는 말이 옛날하고 뉘앙스가 다른 거예요. 지금은 며느리 잘 들어와야 내 아들이 이혼을 안 당해요. 그러니까 딸은 걱정이 없는데 아들 있는 사람은 걱정인 거예요. 왜냐 하면 한마디로 “이럴 거면 헤어져.” 아무리 잘해줘도 소용없어요. 주체를 양보를 안 하니까. 요새 아가씨들이 결혼했다고 해서 주체를 양보합니까? 오빠 사랑해. 이건 결혼할 때고, 나중에는 엉뚱한 오빠가 된다니까요.

히브리서는 바로 여기에서는 성도는 없습니다. 중심이 서구 중심이기 때문에. 그러면 그림으로 그리면 어떻게 하느냐, 평면으로 보지 말고 옆으로 봐야 돼요. 옆으로 한 번 더 그려보겠습니다. 요걸 쟁반이라고 한다면 쟁반하나 더 그리겠습니다. 방금 그렸던 것이 시커먼 이 세상이고 여기다가 성도는 공중부양. 오늘 설교제목을 공중부양이라고 할까. 붕 떠나 있어요. 히브리서에서는. 붕 떠 있다고요.

그런데 위에서 보면 어떤가, 성도를 점으로 하지 않습니까? 아까 이야기했지요. 무대에 처음 한 명 나왔지만, 복음 때문에 주께서 주시는 믿음 때문에 하나 둘 모이게 되면 그게 하나의 새로운 가족을 구성해요. 요 밑에 시커먼 세속에서는 아까 무슨 중심이라 했습니까? 가족중심이지요. 가족이 내 주체를 대신한 거예요. 가정이 내 주체를 대신해요. 나는 누구, 누구 집안에 며느리지, 내가 따로 독자적으로 나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내가 독자적으로 나를 느낄 경우는 언제 어느 경우인가 하면,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갈라서고 다시 결합하면서 도대체 내가 이 집안하고 무슨 일이 있다고 내가 계속 이 집에서 살아야 되지? 이렇게 돼요. 예를 들면 실제로 있는 이야기인데요.

20대 초반에 어떤 아가씨가 결혼했어요. 친정이 어려워서 자기 집안 사는 게 지긋지긋해. 자기 살아온 집구석보니까 황을 느껴요. 시집가서 팔자 고쳐가지고 이런 동네에서 안 살고 정말 제대로 살아보겠다고 결혼을 하거든요. 하는데 남편이 죽었어요. 20대인데 남자는 30대쯤 됐는데 차사고로 죽었어요. 죽고 난 뒤에 가해 쪽에서 보상금을 무척 많이 줬습니다. 3억 가까이 줬어요. 시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시어머니하고 세 식구 살았어요. 신랑, 자기, 시어머니 세 식구 살았는데 하나 죽었지요. 남은 건 며느리하고 시어머니뿐 안 남았지요. 꼭 룻기 같아. 나오미하고. 보상금이 3억6천 얼마 나왔어요. 시어머니도 탐을 내고 며느리도 탐을 내고. “우리 싸울 거 없이 같이 살자.” 이 며느리가 택 택 택도 없는 소리.

지금 이 나이에 또 시집가면 되지. 시집가면 돈이 있어야 할 거 아닙니까. 뭐하려고 재미도 없는 시어머니하고. 나중에 시어머니 치매에 걸려서 뒷바라지 어떻게 하려고. 안 합니다. 조금 줘! 조금도 못 줍니다. 법으로 나왔어요. 시어머니는 한 푼도 못 받았어요. 왜냐, 이미 독립한 가정이기 때문에. 그리고 애도 1명 있어요. 시어머니는 자기 아들 죽은 것뿐만 아니고 그렇게 대를 잇겠다고 우기는 그 자식까지도 남의 자식으로 떨어지고 그 새댁이 다른 남자하고 결혼해버리면 그 애도 그 집 사람 되는 거예요. 실제로 있는 일인데 드라마 보면 그런 게 많이 나와요. 못 놓는다. 저 건 내 손자다! 행패부리는 거 있지요. 드라마 안 봤지만, 후딱 보니까 그런 게 있긴 있어요.

이게 뭐냐 주체문제입니다. 어디서? 이 시커먼 세상에서 나온 주체 문제에요. 니만 자율권 있나? 나도 자율권 있다! 내 자율권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은 내게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지금 제 이야기 보면 당연하지만, 당연하다면서 한 번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이 살아왔던 젊었을 때 보세요.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 왜 그 때는 문제가 안 됐던 게 뭐지요? 아무것도 모르고, 그래서 시집갈 때 어떻게 갔습니까? 아무것도 모르고 갔잖아요. 살려만 주이소. 밥만 먹여 주이소. 그러면 시집 쪽에서 아들만 낳아! 이러지요. 아들 낳으면 내 집사람 해줄게. 이런 묵계적인 조건하에 간 거예요.

성경을 보면서 뭐를 알아야 되느냐 하면,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를 알아야 돼요. 그래야 성경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이 어떤지를 모르고 성경을 보게 되면 이 세상의 주체에다가 성경을 억지로 맞지도 않는 걸 억지로 끼어 넣어요. 그러면 그것은 교회 다니는 것은 오락이 됩니다. 그냥 동우회가 돼요. 그걸 클럽이라 해요. 노는 친목단체.

교회가 아무 중요하지 않고 예수도 안 중요해요. 우리 시집이 중요해요. 나보다 우리 시집이 더 중요해요. 왜? 거기다가 자기 모든 명예와 자기의 모든 자존심을 저기에 이미 인수인계 다 넘겼어요. 그러면 저 어른들 죽고 난 뒤에 누가 챙겨주느냐, 내 자식이 이 집의 여자인 어머니를 자식이 챙겨주기를 은근히 원하고 있습니다. 왜? 나는 그렇게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나의 독자성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그런데 이 공중부양 속에 속할 때, 여기에 뭐가 개입되느냐 하면 이 세상에 누가 왔습니까? 예수님 오셨지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뭘 이야기했습니까? 너는 내 백성이라고 했지요. 그럼 내 백성 할 때, 이 세상도 인정하고 했습니까? 이 세상 백성 아니고 내 백성이지요. 그럼 이 세상 백성으로 길들여짐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떨쳐버려야 되는데 우리한테는 그런 능력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러니까 여기서 뭐가 있느냐 하면 히브리서에 제사가 주입되는 거예요. 제사가.

오늘 본문 13장 16절,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언약적인 제사. 하나님의 모세 언약의 율법에 의한 제사 말이죠. 제사가 본문에 나오는데. 그전에 히브리서13장 오기 전에 처음부터 12장까지 제사 이야기 나왔잖아요. 그 제사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이냐를 제가 지금 설명해 드리는 겁니다.

그 제사 이야기는 니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위해서 제사 드렸다. 지금 제가 그 말씀 드리는 거예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말이죠. 마치 누구처럼. 예수님처럼.

우리가 지금 궁금한 게 뭐냐 하면 어떻게 공중 부양하느냐, 이거예요. 허 경영 같으면 돼요. 내 눈을 바라 봐! 내 눈을 보면 뜨는데. 어떻게 다른 속에 속할 수 있느냐 말이에요. 그런데 제가 힌트 드렸습니다. 제사라고요. 더 힌트 드리면 제사에 합류하면 되는 거예요. 정답나왔습니다. 제사에 합류하면 돼요.

그런데 제사에 합류하는데 실패했던 그것부터 히브리서가 먼저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구약 때 이스라엘이 제사장이 했던 제사는 성공했습니까? 못했습니까? 못했지요. 히브리서5장했잖아요. 매일같이 제사 드렸는데, 매일같이 드려봤자 그 구원 안 되지요. 왜냐 하면 그게 그림자고 그건 모형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히브리서 7장, 8장, 9장 10장 할 때는 이런 취지인지를 몰랐지요. 지식 하나 더 아는 걸로 했는데 가만히 보니까 이 이야기가 우리 문제지요. 하나님이 제사하게 했는데 실패했구나. 이게 아니고 현재 지금 우리 신분 문제에요. “니가 지금 어디 있느냐?” 우리 위상을 묻는 겁니다. 우리 위상을.

여기 시커먼데 속했느냐, 아니면 여기(공중부양)에 속했느냐 이 말입니다. 세상에 길들여져 있느냐, 아니면 주님한테 길들여져 있느냐, 그걸 묻는 겁니다. 니가 어디에서 니 주체가 만들어졌느냐를 묻는 겁니다. 어디에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주체가 만들어지게 되면 그 중심이 어디라고 했습니까? 지금은 서구라고 했지요. 지금 안 믿는 사람들 이야기하는 겁니다. 어른도 마찬가지에요. 돈 좀 벌면 아담한 초가집 지으려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전부 다 뭐 짓습니까? 그저 유럽 여행가서 봤었던 노르웨이, 필란드에 있는 유럽식 주택, 돈이 얼마나 들겠습니까? 미국에도 가보니까 좀 사는 사람은 평범하지 않아요. 유럽식 주택을 갖고 있습니다. 저택을. 그만큼 돈이 많이 드는 거예요.

그럼 우리나라는 돈 벌어서 집 지을 때 뭐로 짓습니까? 저택 짓거나 돈 좀 못하면 전원주택 짓지요. 식구 전원 산다고 전원주택 아니에요. 이건 개그입니다. 다 서구적이에요. 그만큼 중심이 돼있는 거예요. 몰라요. 국악에 미쳐서 옛것이 좋아요. 옛것이 좋다~ 하는 사람은 빼놓고는.

그런데 성경에서의 새로운 나라의 중심은 뭐냐 하면, 중심이 서구가 아니고 보이지 않는 나라에요. 히브리서11장14~16절 나오지요. “14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15절,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절,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15절 봅니다. 그들이 시커먼 쟁반 요 쟁반 같으면 고향을 떠났으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어요. 왜냐 하면 같은 평지기 때문에. 요 지점에서 태어났다면 만약에 돈 벌려고 도시 갔다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잖아요. 같은 지점이기 때문에. 같은 차원이기 때문에 돌아갈 기회가 있었는데.

우리는 돌아갈 기회가 없다. 우리는 어디에 본향 한다? 어디에 있다? 하늘에 있는데 그 하늘에 성을 예비했잖아요. 하늘에 성을. 그럼 히브리서11장 오기 전까지 앞에 있는 모든 내용은 뭡니까? 모든 내용은 모든 말씀과 모든 제사는 우리로 하여금 이 시커먼 세상에서 나그네로 만들어서 객으로 만들어서 어디로 보낸다? 본향 예루살렘에 가게하기 위한 책이 바로 히브리서인 거예요. 우리가 지금 공부해 왔던. 지금 몇 년 째에요? 여기에 가야 돼요. 여기에.

여기에 가야 되는데, 이 동네가 어떤 동네이지를 모르겠다 할 때에는 중심을 보면 돼요. 이 세상에서는 제가 하나의 예를 들면, 서구화된 돈 벌면 유럽처럼, 미국처럼, 호주처럼 이렇게 하는데 이 세상(하늘)은 누구처럼? 중심이. 예수님처럼이에요. 예수님처럼.

그게 뭐냐 하면 히브리서13장에 나오는 겁니다. 히브리서13장 14절,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OK. 우리가 여기는 할 때, 여기가 어디입니까? 떠나야 될 곳이지요. 우리가 평생 길들여져 온 곳이잖아요. 길들여져 온 곳.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떠날 수 없는 이유가 이미 길들여졌는데 어디에 길들여졌습니까? 이 세상 혈육이라는 곳에. 가족에 길들여졌어요. 가족에.

그리고 가족에 길들여졌다는 이 말을 여러분 말고 다른 안 믿는 사람한테 이야기하게 되면 “아니, 당연히 길들여져야지. 가족을 벗어나다니? 니는 호로 자식인가?” 이리 나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산다는 게 뭐예요? 자기 새끼 건사하고 그 집안 일구는 게 사람 사는 게 아닙니까. 특히 남자는 몰라도 여자 같은 경우에. 시집와서 매일 지루박 밟고 나이트 다니고 이러면 안 되잖아요. 가정을 내팽개치고. 결혼하기 전에도 가족에 속했고, 결혼하고 난 뒤에 새로운 가족을 만나서 행복하게 사는 거, 인생 뭐 있어? 이거지. 이게 인생이지.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떠나라는 거예요. 떠나라! 그러니 도대체 “떠날 방법은요?” 사람들 안 물어요. “떠나긴 미쳤다고 떠나니?” 이리 나오지. 떠날 마음조차도 없어요. 하나님 덕분에 우리 가정 잘 되기만을 바랍니다. 그것뿐이지 떠나긴 왜 떠나요.

떠나려면 여기서 주체가 성립돼요. 주체가. 그 떠나는 주체를 누가 만들어줍니까? 제사를 통해서 주님께서. 주님이 중심이니까 새로운 식구로서 우리에게 주체가 주어지게 되면 누가 강력하게 반발하고 반항하느냐, 내가 반발해요. 내 자신이. 성경에 나와 있는 그 믿음의 사람 되기를 우리 자신이 늘 거부하지요.

강아지가 주무시네요. 저 강아지를 사람 만들겠다고 작심하고, 사람 만들려고 하면 우선 기본적으로 컴퓨터를 할 줄 알아야 돼요. 자고 있는 강아지를 깨워가지고 컴퓨터 키 판에 놓고 요것은 ㄱ이고 ㄴ이고 가르치면 멍! 멍! 멍! 뛰쳐나갈 거예요. 아무리 주인의 마음이 그 개를 위한다고 하지만 막상 개는 어디에 길들여져 있습니까? 개에 길들여져 있어요. “제발, 내가 개임을 좀 감안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리 나온다 말이죠.

우리가 마찬가지에요. 주님은 억지로 우리를 주의 백성 삼으려고 하지만, 제발 우리 형편 좀 감안해 달라는. 이 천국 사는 것보다도 오히려 길들여진 것이 어디에 편한가 하면 어떤 것이 자연스럽냐 하면 시어머니 잘 모시는 게 자연스러워요. 내가 시집에서 온 일가  친척으로부터 모여가지고 나를 칭찬해주는 그 재미로 길들여져 있어요. 그게 보람이에요. “아이고, 엄마 너무 훌륭해. 엄마는 장한 상 받아야 돼! 그렇게 고생 고생해서 우리 애들 셋 키우고.”

진짜 주님한테 길들여지면, “치워라! 니는 니고 나는 나야! 엄마 너무 섭섭해! 엄마 너무 무서워! 엄마 어디서 그런 거 배웠어. 너는 몰라. 모른다 말야. 엄마 왜 그리 인간이 변했어. 너무 무서워. 나는 누구 의지하고 살아?” 찔찔 울고.

그것을 가지고 히브리서에서는 뭐냐, 믿는 자에게는 환란이 온다는 뜻이에요. 고난 받는다. 히브리서12장, 13장1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자기 고난을 받으셨듯이. 12장4절에 보면,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이 말은 자꾸 주님을 우리로 하여금 떼어놓으려고 해요.

자, 다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떼어 놓을 때 없는 뭐가 생겼다? 주체가 생겼다. 주체가 생기면 우리에게 뭐가 주어진다? 세상에 대한 자유. 그리고 그 주체는 우리가 원했던 것이 아니고 주님이 주어졌기 때문에 그 사랑이 오는 곳이 있지요. 그 사랑을 누가 줬습니까? 주님이 제사를 통해서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우리를 위해서 살리기 위해서 지옥 불에서 끄집어냈지요. 그러면 그게 사랑이지요.

그러면 그 사랑 어떤 사랑이냐, 절대 사랑입니다. 그럼 제가 아까 강의한 것처럼 절대 사랑에서의 정의는 나한테 자유권이 있다? 없다? 없습니다. 사랑해주신 분의 절대 사랑에 대해서 우리가 호응하고 반응할 뿐이고 거기에 예속될 뿐이에요.

다시 말해서 주님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게 뭐냐 하면, 내가 니를 사랑한 그 사랑을 니가 절대사랑을 이해하느냐, 이럴 때 우리는 예수의 증인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공은주(IP:218.♡.196.72) 17-04-30 18:35 
안양20170414b히13장16절(신분 변화)-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해봅시다. 제사 이야기를 계속해 봅시다. 전에 있는 제사는 제사장이 양을 잡습니다. 주님이 시켰습니다. 이렇게 받았는데 오늘 13장에 들어와서 제사라고 할 때는 ‘아, 이 제사가 그냥 형식적으로 양 잡고 한 그게 제사가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가 이미 예수님이 행했던 제사에 우리를 집어넣는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겠지요.

자, 한 번 물어봅시다. 예수님이 태어나자마자 쫓아가서 갈보리에 올라가서 십자가 졌습니까? 아니면 사시다가 십자가 졌어요? 사시다가 십자가 졌어요. 그러면 제사라는 것은 십자가만 달랑 제사하지 말고 태어나서 사셨던 모든 것을 주님의 제사로 보셔야 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사실 때 주위에서 주님에 대한 수많은 공박과 비난과 핍박과 고난이 있었잖아요. 그게 제사요건에 포함이 돼요. 제사 요건에.

그러면 오늘날 우리가 제사 드린 건 아니고 제사 안에 들어있으면 주님이 당했던 그 넓은 의미의 제사를 우리도 한평생 반복하면서 다 부여받게 됩니다. 그걸 가지고 뭐냐 하면 선을 행하다. 선을 행하되, 17절 한 번 봅시다. 조금 어렵습니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오직 선을 행하되, 그 다음을 이야기해 보세요. 선을 행하되, 그 다음 단어는? 서로.

이 서로는 가족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혈육적인, 태어났다는 이유 때문에 자연적으로 이미 나보다 먼저 대기하고 있던 그 분 아니에요. 동생으로 태어났으면 나보다 누가 먼저 있습니까? 태어나자마자 형이 있지요. 그렇게 있는 서로를 말하는 게 아니고 내가 태어났기 때문에 나를 태어나게 한 아버지, 어머니가 먼저 우리 가정을 선점하고 있지요. 그 서로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여기서 서로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의 그 공중부양, 예수님의 새로운 초대된 사람들의 묶음, 뿌리, 집합, 그게 서로에요. 그러니 이 대목이 얼마나 어려워져요. 이건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서로가 서로 되기 위한 실천자는 오직 하나밖에 없어요. 누굽니까? 예수님이라는 주체밖에 없어요. 예수님이란 주체.

아까 끝 시간에 제가 한 이야기를 다시 하게 되면, 절대 주체는 예수님이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게 되면 우리는 그 절대 사랑에 대해서 아무것도 할 게 없지요. 만약에 우리가 사랑에 대해서 내 나름대로의 자율권을 발동해 버리면 주님이 절대 주체가 안 돼버려요. 그저 사귀는 게 되니까. 주님, 우리 좋게 지냅시다. 그리해서는 구원이 안돼요. 가만히 있어보자. 주님이 내가 믿을만한지 안 믿을만한지 믿는다는 자율권을 발동해! 아! 즐길 테니까 우리가 한 번 믿어봐! 이러면 나의 주체가 여전히 살아있어요.

그런데 야곱도 마찬가지고 아벨도 마찬가지고 노아 방주 자기 아이디어입니까? 하나님의 주체가 완전히 노아에게 침범했지요. 장악했지요. 장악하니까 노아는 졸지에 무슨 사람이 됐느냐 하면, 믿는 사람이 되고 말았어요. 믿는 사람.

믿는 사람이라는 말은 기존의 믿음하고 다른 것은 이게 뭐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가 되는 겁니다. 이걸 그림으로 설명하겠습니다. 인간이 이리 있다. 인간은 자기의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발휘해서 뭘 끄집어내느냐 하면 여기서 믿음을 끄집어내요. 따져보니까 믿어도 이익 될 것 같은 지성, 그 다음에 저 사랑은 내 사랑으로 가져와서 나도 얻게 사랑할 수 있겠다 하는 기대, 그리고 의지. 내가 결정했어! 라는 의지. 이게 맞는 믿음은 나에게서 나온 거예요.

그런데 히브리서11장의 믿음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점선으로 표시해야 돼요. 바라는 것들의 실상, 보지 못하는 것. 보지 못하는 것에서 여기서 시작이 되어서 나에게 이게 꽂혀버린 겁니다. 노아 방주 아이디어 어디서 나왔습니까? 노아에서 나온 게 아니거든요. 뭔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온 거예요.

그러면 이 이야기를 신자들만 알아듣는데, 만약에 불신자가 이 이야기를 들었다 칩시다. 그러면 불신자는 뭐라고 오해하느냐 하면 “내가 아는 요 현실을 바깥에 다 보이지 않는 세계이냐?” 라고 물을 거예요. 그건 아니에요. 왜? 여기 보이지 않는 세계가 실제로 있으면서 보이지 않는 세계지, 이 밑의 불신자처럼 보이지 않는 세계라 하면 내가 챙긴 것 외에 다 보이지 않는 세계라 하면, 이건 허구의 세계에요.

무슨 말이냐 하면, 예를 들어서 캐나다에서 어떤 먼 친척이 나한테 편지 와서 캐나다에 놀러오라는 편지가 왔다. 하면 진짜 편지 받은 사람은 캐나다 모든 남자가 나보고 놀러오라고 한 게 아니고 그 자기 친척이 따로 있다는 걸 실체를 입고 거기에서 너무 멀어서 눈에 안 보이는 그쪽에서 편지가 온 걸로 되어있어요.

그런데 캐나다에 아무 친척이 없는 사람은 ‘야! 좋겠다. 니 캐나다 놀러가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캐나다 어디가도 다 갈수 있는 것처럼 오해하는 거예요. 캐나다 가봤자 딱 친척집에만 갈 뿐인데 이쪽에서는 뭡니까? 우리나라 아닌 캐나다니까 캐나다 전부가 어디 후보감 되는 줄 알고 있다 말이죠. 교회에서 성령세례 받지 않은 사람의 믿는 믿음이 이런 믿음이에요. 자기 세계 말고 전부 다 천국인줄 알고 있어요. 죽으면 천국 간다. 이 바탕이 이런 의식이라니까요.

그게 아니고 죽으면 천국 가는 게 아니고 천국에서 딱 집어서 편지가 나한테 와야 돼요. 그게 믿음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진짜믿음과 가짜 믿음과 어떻게 구분하느냐 둘이 싸우게 되어있어요. 가짜 믿음은 타고난 거예요. 가짜 믿음은 진짜 믿음에 대해서 반항하게 되어있어요. 아까 뭐라고 했어요? 길들어져있기 때문에. “내 인생 이렇게 엉망진창 만들어도 됩니까? 신이면 다요?” 이런 식으로 반항하게 되어있어요. 그러면 “지금 너는 누구 보고 이야기하는데?” “니는 몰라도 돼!” 이게 진짜 믿는 자에요. 어떻게 남한테 설명할 수가 없어요. 

내가 아는 주님한테 편지받은 이 사항을 저 사람에게 뭐라고 설명합니까? 예수님 계시거든. 예수님이 하늘나라에 계시는데 예수님의 영이 나한테 와가지고 그 때부터 나는 이상하게 되었어. 나는 이 세상 가족 사람이고 가족과 친해지고 싶은데 이 가족이란 이게 내가 영원히 같이 살 사람들이 아니고 나의 가족은 천국 갈 가족은 복음으로 하나 된 가족이 따로 있어. 그런데 이건 내가 그러고 싶은 게 아니야. 진짜야. 좀 믿어줘! 내가 일부러 동생, 엄마 싫어! 이게 내 취미가 아니고 나는 남한테 욕 얻어먹는 거 진짜 싫어. 싫은데 주께서 주님 가신 길로 핍박받는 길로 가다보니까 나도 모르게 내가 원치 않는 인생을 가게 되었어. 너희들이 이런 내가 싫지? 나도 이런 내가 싫어!

갈무리라는 노래를 보면 나훈아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던 이런 내가 싫어! 가사내용이 이미 헤어졌는데 깔끔하게 헤어져야 되는데 헤어져놓고 자꾸 보고 싶다. 누구야! 그러는 내가 정말 싫어!

여러분, 아브라함이 이삭이 야곱이 흥흥거리며 즐거워하는 기쁨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오죽했으면 자기 아내를 자기 누이동생이라 해가지고 성상납까지 해가면서 살고자 했겠어요? 지난 수요일날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마지막에 뭐라고 했습니까? 제발 성도가 되었으면 비겁하게 살아라. 추잡이란 말은 차마 말은 못했지만, 추잡스럽게 비굴하게 얍삽하게 살아라. 우리가 할 건 그것밖에 없어요.

그게 아브라함이에요.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라니까요. 자기 아내를 거짓말해가지고 그런데 매매는 누가 맞습니까? 거짓말한 사람은 안 맞고 누가 매를 맞아요? 억울하기 짝이 없어. 아비멜렉이 벌을 받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이 보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검은 먹지로 보는지 아시겠지요. 까~만 먹지에 똑같은 먹지에 자기 백성을 끄집어냈는데 끄집어낸 백성이 먹지에 살다보니까 먹지가 그립고 더 자연스러워. 자꾸 주님은 안 바라보고 자기 떼어놓은 것에 대해서는 어떤 아쉬움 같은 게, 미련 같은 게 가득 들어있어요.

그러나 주님은 기어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이끄시는 것. 그게 바로 이게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이런 말이 있어요. 제사. 죽으라는 거예요. 우리보고. 반항하는 그것을 이미 제사 안에서는 죽이는 겁니다. 쓰레기를 재활용할 때 먼저 쓰레기를 그냥 재활용하지 않고 파쇄하지요. 파쇄하는 그 기계가 제사입니다. 우리의 이 혈육적인 것. 남한테 인정받고자 하는 것. 이걸 세자로 크게 쓰겠어요. 남한테 인정받는 이걸 뭐라고 하는가 하면, ‘자존감’ 이걸 첫 째 시간에는 두자로 이야기했지요. 이게 주체에요. 주체는 자존감입니다. 개꼴이 자존감입니다. 강아지도. 사람에게 길들여져서 그래요. 주체는 자존감이거든요.

이 자존감 때문에 누가 돌아가셨어요. 이것 때문에 누가 돌아가셨어요? 우리 예수님. 그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나 때문에 살해당한 거예요. 나 때문에. 고 연결될 때 그 연결이 바로 제사에요. 그게 바로 선행이라는 겁니다. 왜 선행을 하느냐, 선행할 때, 서로라는 낯선 인물들이 생겨요. “당신도 그랬어요?” “당신도 호출됐어요?” “나도 호출됐어요.” 서로가 주님한테 호출될 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생각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어떻게 살까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어떻게 죽을까를 이제부터 연구해야 돼요. 고구마 먹고 죽을까, 안 그러면 어디에 놀러가서 죽을까, 태국가 죽을까, 항상 어떤 걸해도 이건 이 세상에서 죽어도 여한이 없는 그런 마음을 허락해 주신 겁니다. 그게 바로 주님이 서로를 만나게 한 주님 보시기에 선행이라 하는 겁니다. 오직 선의 행함이라. 아시겠지요.

그 다음에 17절에 봅시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너희를 인도하는 자에게, 했지요. 인도한다는 말 자체가 얼마나 우리를 기분 더럽게 하는 일인지를 몰라요. 왜 인도를 해요? 지가 알아서 가면 되는데. 인도를 왜 하는 겁니까?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 같이” 이 사람들이 인도하는 사람이 틱 틱하는 사람이에요. 왜냐 하면, 주께서 본인들을 인도하면 되잖아요. 각자 인도하면 되는데. 자기가 거기에 끼어드는 거예요. 끼어든다고 뒤에서 참고하듯이 하는 거예요. 왜냐 하면 이 사람에 대해서 자기 잘못을 인도하는 사람의 내부 문제로 전환시켜버려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옆집 몇 호이지요? 301호. 301호에 있는 그 부부문제를 가정문제를 관계도 없는 나한테 이걸 왜 묻느냐 말이죠. 그럼 주님이 “인도하는 자거든.” 요 내용이에요. 분통터질 일이라니까요.

스데반집사가 왜 돌아 맞아 죽어야 됩니까? 누구든지 돌에 맞아야 구원받는 겁니까? 그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돌에 맞았습니까? 입 다물고 있었으면 돌에 안 맞았어요. 뭘 했습니까? 설교를 했잖아요. 설교는 자기를 위해서 하는 게 아니에요. 누구를 위해서 하는 겁니까? 들어 줄 서로라는 사람. 아까 했던 그 서로. 누군지는 몰라요. 하여튼 주께서 마련하는 천국 가는 준비된 서로를 위해서 설교를 해야 그 사람이 ‘아, 주께서 나를 구원하는구나!’ 깨닫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 사람들을 위해서 하는데 돌은 누가 맞아요. 본인이 맞는 거예요. 이게 인도하는 사람이에요. 남의 집 사정에 주께서 나를 집어넣고 내가 얻어터지고 내 잘못 때문에 고생하는 게 아니고 남 때문에 고생은 내가 하는 식의 사람이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이건 하고 싶다고 될 일이 아니에요. 자처하고 지가 하고 싶다고 만약에 인도하는 사람 목사 되어버리면, 내가 당신을 협조해줬으니까 당신도 나한테 보상해 놔라. 이리 나옵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백성을 자기 백성이라고 착각해가지고 나는 영혼의 스승이니까 니는 내 말 들어! 이리 나올 수 있다 말이죠.

그게 아니고 남의 일인데도 혼은 본인이 혼을 당하는 본인이 매매 맞는 그런 역할이 인도하는 자에요. 그 관계, 그래서 인도하는 자라는 것은 바로 사도를 두고 이야기합니다. 그 당시에 성령 받은 감독자들, 장로들, 집사도 마찬가지고. 모든 사람이 집사고 모든 사람이 장로, 감독은 아니잖아요. 하지만 구원 받기는 몽땅 다 구원받아요.

중간에 이런 은사를, 이러한 은사라 하면 또 좋은 건 줄 알고 그냥 역할, 배역을 맡은 사람들을 집어넣습니다. 사도 바울도 대표적인 사람이고. 이런 사람들이 어떤 경우에 즐겁겠습니까?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이 말은 뭐냐 하면 내 영혼을 내가 걱정하는 게 아니고 나 말고 다른 분이 걱정하는 분이 있어요. 자, 요 점이 이해가 잘 안될 것 같으면 요거 이야기하면 대번 이해가 됩니다. 사도행전 20장 28절 한 번 봅시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자, 감독자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감독자가 있지요. 본인이 하고 싶어 합니까? 성령이 임해서 합니까? 성령이 임해서. 자, 정리해 봅시다.

성령이 지정한 감독자 있다. 이 말은 뭐냐, 성령이 오지도 않은 감독자 있다? 없다? 성령이 오지도 않은 감독자 있어요. 성령 받은 감독자 따로 있지요. 자, 남은 것은 성령 받은 감독자와 성령 받지 않은 감독자의 차이만 알면 되겠지요. 문제 간단하지요.

그러면 성령 받은 감독자 한 일이 나와요. 하나님이 그 다음에 뭡니까?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다. 이걸 그림으로 그리면 이리 됩니다. 교회 중간에 뭐냐 하면 십자가. 하나님의 피니까 예수님의 피지요. 예수님의 피로 십자가 있지요. 울타리를 쳐버린 거예요. 그러면 이 안에는 뭐만 남아있어요? 하나님의 자기 피만 남아있지요.

그리고 여기에 감독자를 세웁니다. 각 지역에 감독자를 세우게 되면 각 지역의 감독자들은 각 지역의 교인들에게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피로만 세워지거든요. 피로만. 피. 예수님의 행함이 아니고 예수님의 피로 세워졌기 때문에, 피로 세운다는 말은 이미 교회에 필요한 것은 하나님 쪽에서 줄 것 다 줬다는 겁니다. 교회 세우는데 하나님이 주고 너희 것도 필요하고 이게 없고 너희들은 이미 손 털었고 오직 하나님이 주신 것만으로 충분하고 더는 필요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뭐만 감독하면 돼요? 100%예수님의 피로만 교회 되는데 사람들이 여기 종교성을 가지고 올 것 아닙니까. 교회를 M 자로 하든지 뭘 하던지 해가지고 뭔가 이리 해야 교회 된다. 하거든요. 이것이 바로 이리라는 거예요. 이리.

이리가 어디 나오느냐 하면 여기 나와요. 29절에 나옵니다.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떠난 후에 무슨 이리? 그냥 이리가 아니고 흉악한 이리가 오지요. 그러니까 이 양떼를 노리는 건 뭐냐 하면 이 중심을 인간의 행함으로 점령하자는 겁니다. 이 중심을.

교회 지붕에 십자가 있잖아요. 십자로서는 모자랍니까? 아니 십자갈 피로 구원하는데 모자랍니까? 십자가 피만도 안 되고 피를 알고 우리가 행함에 구원받습니까? 그런 겁니까? 그런 거예요? 아니지요. 인간들이 하는 행세를 알아요. 인간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죽였는가를 주님이 아시잖아요. 아니까 절대로 피에 딴 걸 섞어 넣을 생각들이 주변에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감독자는 뭡니까? 스데반 집사 할 일이 뭡니까? 여러분, 이래서는 안 됩니다. 그거 하다가 돌아가신 거예요. 완전히 전차가 포크레인이 와서 밟고 지나가듯이 밟은 거예요.

이 말은 감독자는 뭐냐, 피와 같이 더불어 니도 복음을 위해서 죽으라는 거예요. 이게 바로 인도하는 자에요. 인도하는 자는 살려고 하면 안돼요. 자, 그러면 이 교회에 주님이 지키는데 주님이 지킬 능력이 있어요? 없어요? 있지요. 있으니까 이 교회는 절대로 이단한테 흉악한 이리한테 먹히지 않을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돼요? 이 세상은 마귀들이 이것과 유사한 교회를 어떻게 합니까? 만들겠지요. 우루루 다 몰려가겠지요. 그러면 이 진짜 감독자들이 스데반집사처럼 돌에 맞을 각오하고 십자가 피만 이야기합니다. 하게 되면 저 쪽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무슨 말인지 몰라요. 어떻게 십자가 피만으로 구원되는가, 그럼 이 쪽에서 감독자가 말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없는 거예요.

내가 믿을만해서 지성으로 감성으로 의지로 요 건 나한테 이익 된다. 죽어서 천당 가겠다. 라는 말만 골라서 내가 의지로서 주체 자유로서 믿고자 결심한 거예요. 주님의 성령이 와서 난데없이 믿게 한 게 아니고 요거 하면 나도 잘되고 우리 집안 잘되고 죽어서 천당 가서 모이겠다. 라는 그러한 상품화된 성경에서 해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만 모은 그것에 혹하고 땡기는 거예요.

물론 성도도 이 감독자가 너무 섭섭해. 왜? 사도바울 같은 고린도후서 다음 주일 설교할 건데 미리 합시다. 이 사람들이 사도 바울에 대해서 사람들이 사도 바울에 대해서 얼마나 싫어했는지 몰라요. 그래서 고린도교회는 사도 바울은 사도가 아니라고 했어요. 그런데 고린도전서에 보면 사도 바울은 내가 전한 복음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했거든요. 사도 바울은 죽기 살기에요. 왜? 십자가 죽고 부활한 게 맞기 때문에. 이게 새 언약이기 때문에. 이게 제사의 완료이기 때문에 없어요.

사람이 거룩하게 된 것은 히브리서10장10절에 보면,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사람이 거룩하게 된 것은 단번에 됐지요. 단번에. 그리스도가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거룩함을 입었다. 되어있지요. 그리고 히브리서10장29절에 보면,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때는 다 알아요. 인간 세계에서 어떤 종교가 인기 있다 하는 것을 다 압니다. 다 알고 줄곧 사도바울은 뭐만 외칩니까? 언약의 피만 이야기합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계속 이 이야기만 하는 거예요.

그러니 사도바울이 교인이 몇 명 됐겠어요? 몇 명 되지도 않아요. 왜? 그 편지 뒤에 보면 명단 몇 명 안 됩니다. 어디 사는 누구, 안양에 사는 누구 해가지고.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명단에 몇 명 안됐어요. 사도바울 중심으로 도와준 사람도 중심으로 적었겠지만, 그 외에도 많겠지만. 그다지 많지는 않아요. 그다지.

그만큼 그 세상이나 오늘날 지금 2017년 4월 14일이나 담쌓는 건 똑같아요. 편지 보낸 이 시대나 지금 시대나 과학이 발달된 것과 아무 상관이 없어요. 과학이 로봇이 어떻게 됐던 관계없이 복음은 계속 오직 하나의 복음 십자가의 피 밖에 없어요. 하나님의 피로 끝! 그걸 지켜라. 니가 목숨 걸고 그걸 지켜라. 절대로 인간의 행함이 섞이지 않도록 해라. 이걸로 교회 끝이에요. 2명이 되던, 한 명도 없어도 괜찮아요. 숫자로 교회되는 거 아닙니다. 두 명이든 한 명이던 교회 불나도 괜찮아요. 교회 불나도 십자가는 불 안 나니까. 이것뿐입니다.

그런데 이쪽은 뭐냐 하면 인간의 행함을 지켜서 하기 때문에 숫자로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측정을 해야 돼요. 숫자가 많고 헌금이 많이 모이면 하나님이 우리 교회와 함께 있고 교인 뚝 뚝 떨어지고 헌금 안 나오면 마귀에게 시험 들었다고 그렇게 해가지고 교인들 또 자꾸 강요를 해요. 어차피 사업이니.

그래서 인도하는 사람이나 인도받는 사람이나 하나만 생각하면 됩니다. 오직 예수만 생각해야 돼요. 예수만 생각하라. 자, 예수만 생각하라는 말을 설명 드리고 그 다음 진도 나가볼게요.

예수만 생각하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비 오는데 예수님만 생각하면 저절로 우산이 나옵니까? 안 나오지요. 그렇지요? 어린 애가 고추장 매운 것도 모르고 기어가는데 예수님만 생각하면 애는 괜찮은 거예요? 아이고! 매워! 하고 치워야지요. 예수님만 생각하고 횡단보도 걸으면 덤프차가 박아도 예수만 생각할까요?

자, 예수만 생각하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궁극적으로 예수님께서 벌이신 일인 쪽으로 우리의 마음이 생각이 거기에 응집되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응집되게 되어있어요. 어떤 일을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낙담하거나 절망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 일 때문에. 고구마를 삶는데 고구마가 밤인 줄 알았는데 먹어보니 물이더라. 나 죽을란다. 이러지 말라 이 말입니다. 예수만 생각해야 되는데 고구마가 물 되는 거하고 왜 생각해. 그렇다고 고구마 삶지 말라는 뜻은 아니고 뭘 해도 나한테 주어진 일은 주께서 주어진 일인데 왜 주어졌는가? 그게 사는 목적이 아니라는 사실. 그걸 명심하라는 거예요. 네게 일어나는 모든 것에 니가 거기에 목숨 걸지 말라는 거예요. 사소한 일에 목숨 걸지 말라는 말이 있잖아요. 거기다가 목숨 걸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일을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에서 다 이룬 거예요. 이미. 예수님의 피로 다 이룬 거예요. 그게 바로 히브리서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이 갔던 길이 그 길입니다. 온갖 실연당해도 절망하거나 낙담할 어떤 의무가 권리가 없어요. 왜? 내가 추진한 프로젝트 같으면 아이고~ 안 되네. 이렇게 하겠는데 기도해도, 헌금해도 내가 생각한 건 아니고 아무것도 내가 기여한 게 없다면 이건 실망할 이유도 없어요. 그리고 나를 생각하면 실망하겠는데 처음부터 나를 생각 안했기 때문에 나에 대해서 실망할 대상으로 여기지도 않아요. 내 자신에 대해서. “바보같이 내가 왜 그런 실수를 했을까” “니는 원래 바보야! 니 바보 아닌 줄 알았어? 예수님만 생각해. 니는 원래 바보야!” “내가 그런 실수 하다니?” “너는 처음부터 실수했어. 실수 안한 게 천만다행이지. 실수 안한 거 끄집어내면 없는 줄 알아? 다 실수야!” 모든 게 인생 자체가 다 실수에요. 실수.

주일 낮에 제가 시편51편 설명했잖아요. 다윗이 죄를 진 게 아니고 죄가 다윗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했다 말이죠. 그러니까 내가 하나님께만 죄를 지었지 니한테 죄를 지은 게 아니다. 그런 뻔뻔스러움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여전히 나의 구원을 방해하는 자는 납니다. 나의 잘남에 대해서 아직도 미련을 갖고 있어요. 예수 믿고 착하게 살고 선하게 살고 하나님 보시기에 “저, 어때요? 믿음 괜찮지요.” 라고 점수 받을 대상으로서 자기 주체를 아직도 우리는 죽을 때까지 못 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사태를 주셔가지고 잠시나마 남이 뭐라고 하던지 간에 자기 생각 안하고 예수님만 생각하는 그 짧은 순간들을 주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과정을 누가복음15장 이야기 유명한 이야기 나옵니다. 탕자이야기 나옵니다. 자, 제가 한 번 이렇게 이야기를 해볼 테니까 틀리면 틀렸다고 해 보세요. 탕자니까 새카맣게 그리겠습니다. 탕자 옆에 아버지 하얗게 그리겠습니다. 키 큰 하얀 형님 그리겠습니다. 지금 세 식구가 살고 있습니다. 이 세 사람이 살면서 이 둘째 아들 탕자는 자기가 이 가족에 사람으로 생각했습니까? 아니면 자기를 위한 가족이라고 생각했습니까? 자기를 위한 가족이라고 생각했지요. 예수님의 탕자 이야기는 인간이 타고났다는 거예요. 인간이 타고 난 거예요.

탕자 이야기하면서 처음 시작을 빼버리면 탕자 이야기가 이게 말이 안돼요. 처음부터 보면 얼마나 우리하고 꼭 닮았는지. 사람이 아무리 이웃을 사랑하고 남을 사랑해도 자기가 아플 때는 자기만 생각하게 되어있어요. 자기가 아플 때는 자기만 생각한다고요. 이걸 이기주의라고 욕할 필요 없어요. 원래부터 이기주의에요.

그러면 그동안 왜 남편 챙겨주느냐, 안 아프거든요. 고 순간까지는 안 아프니까 자기는 멀쩡하니까 어여삐 여겨 불쌍히 여겨 “내가 도와줘야지. 남편 돈 번다고 고생하는데 나라도 맛있는 거 해줘야지.” 이리 되는 거예요. 만약에 본인 몸이 아프다. 누가 제일 불쌍해요? 천상천하 내가 제일 불쌍해요. 저것 때문에 낫지도 않는 골병이 들었다. 한약 먹어도 못 고치는 골병이다. 너희들 때문에 치여 가지고 이 몸 망가졌다. 어쩔건데. 책임질래? 아이고~ 불쌍해라. 사람이 일을 힘들게 하다보면요, 눈물이 나와요. 본인이 본인을 보기에 너무 불쌍해. 이 불쌍한 거 보고 나한테 티내려하면 그쪽에 분노가 폭발할 지경입니다. 내 사연도 모르고. 그런데 자기가 자기에게 불쌍하게 본다고 해서 주께서 이걸 착하게 봅니까? 그렇지 않지요.

이게 주님의 자기 이야기에 시작이 스타트가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게 탕자 이야기 아니고 예수님이야기에요. 우리는 예수님 이야기를 엮어내기 위해서 배역을 맡은 겁니다. 나밖에 모르는 인간. 두 번째 아들이 자기 딴에 견딜 만큼 견뎠어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아버지 재산해가지고 여기서 나와 버립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시커먼 탕자 혼자 나왔지요. 그러면 여기는 두 식구 남았고, 여기는 이제 자기는 단독 했습니다. 하면서 이 탕자가 자기 안 나갔을 때는 자기 세계의 환경이 형이 있고 아버지가 있던 환경인데, 이제는 독립했기 때문에 자기 환경은 누가 만드는가, 자기가 만들어요. 요게 현대인들이에요.

내가 있기에 내 욕망이 있고, 내 기대치, 내 사랑이 있기에 내가 끌어당기는 모든 소유와 모든 선택사항, 친구는 어떠해야 되고 직장은 어디 해야 되고 내가 미장원의 머리는 이렇게 나와야 되고 옷은 이거 입어야 되고, 모든 선택사항은 누가 결정합니까? 본인이 결정하는 거예요. 본인이.

그 탕자가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탕자가 돈 가지고 어떻게 삽니까? 허랑 방탕이지요. 나라도 먼 나라 갔어. 허랑 방탕하게 살았지요. 그러면 허랑 방탕이라는 말은 자기가 억지로 살았다? 자기가 좋아서 원해서 살았다? 자기가 원한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허랑 방탕지간에 자기는 자기 세계를 구축한 겁니다. 이게 현대인들의 주체입니다. 현대인들은 어른 돼서 인간 망가진 게 아니고 어릴 때부터 이미 그 싹이 있었어요. 그 싹이 노골화된 겁니다. 한국 살다가 미국 이민 간다. 인간됩니까? 아니에요. 한국에서 연, 고대 나오고 서울대 나왔잖아요. 적어도 내가 일류인데 “나 이대 나온 여자야!” 이럴 때 세탁소 안하지요. 이대 나와 가지고 세탁소하는 거 봤습니까? 한국에서.

그런데 미국가면 뭐합니까? 다 숨기고 세탁소에다가 생선가게 모든 허드렛일을 다 하지요. 간병인하고 다 하지요. 부끄럽지 않아요. 왜? 이건 독자적인 자기만의 현실이고 세계이기 때문에. 아하! 그런데 뭐가 다 떨어졌지요? 돈이 다 떨어졌지요.

자, 여기서 한 번 봅시다. 인간이 스스로 살려고 한다면 하나님이 되었으면 좀 도와줘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실제 어떻습니까? 도와주기는커녕 아버지 재산 다 떨어지게 했지요. 그러면 유추해 봅시다. 자기가 꾸몄던 모든 허랑 방탕이 사라지고 달랑 뭐가 남았느냐 하면, 본인 주변에 원치 않는 환경이지요. 원치 않는 환경.

자기가 나올 때는 포부가 있었고 목적이 있었고 나는 보란 듯이 아버지, 형이 보란 듯이 역시 내 자식 잘났다. 내가 봐도 내가 잘났어. 자랑질하고 싶어 나갔는데 원치 않는 환경이 오면 본인만 시커먼 게 아니고 자기 환경도 시커머진 거예요. 이때가 중요합니다.

전에는 내가 스스로 착각한 거예요. 나는 멋있다. 나는 훌륭하다. 그게 자존감이라 했지요. 주체가 있는데 환경이 딱 달려드니까 아! 내가 스스로 대단한 놈이라고 한들 이게 아무짝도 소용없다는 걸 깨달아요. 그 사람이 처한 환경이 나를 그렇게 만든 겁니다. 아까 길들여졌다고 했지요. 그 잘난 며느리가 오게 되면 시어머니들이 길들이기 애먹어요. 언제 저 콧대를 꺾나. 이리 하는데 그 환경이 나를 그렇게 만들어요.

그래서 이것은 내가 되고 싶어도 나보다 더 센 환경, 이걸 제가 전에 강의할 때, 권력구조라 합니다. 권력구조. 이 권력구조에서 인간은 벗어날 수 없습니다. 못 벗어납니다. 탕자가 그 이야기합니다. 못 벗어납니다. 그러면 탕자 홀로 돌아온 게 아니에요. 탕자가 빙빙 감고 있는 권력구조, 권력구조를 가지고 그대로 탕자가 아버지께로 옵니다.

다시 우리가 주님 앞에 나올 때는 혼자 나오는 게 아니고 그동안 나 여기에 길들였고 나는 이것밖에 안됩니다. 하고 돌아오는 거예요. 그래서 나갈 때는 그래도 아들입니다. 라고 했다가 돌아올 때는 뭐라고 합니까? 내가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라고 되어있지요. 19절에 있지요.

바로 뭐냐 하면 왜 하나님께서 이 이야기하고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성도로 하여금 나갔다가 들어오게 하십니까? 탕자처럼 왜 그렇게 하십니까? 안 나가면 본인이 아버지 아들이라고, 성경에 나오는 개념 있잖아요.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 신자, 성도, 좋은 거, 교인, 믿는 자. 전부 좋은 건 지한테 다 뒤집어씌워놓고 내가 마땅히 지금 그런 사람이라고 착각하게 만들어요.

그런데 그런 사람이 이단교회 가는 거예요. 가가지고 이 권한은 내가 내 선택사항이 아닌 거예요. 빼도 박도 못해요. 내가 이렇게 저런 기도하면 복 받습니다. 이런 곳에 얼추 내가 이미 길들여졌고 뭔가 착한 일하면 복을 더 받는 것 같고 나쁜 짓하면 요번 또 징계 받아가지고 있는 재산 날리는 것 같고. 나의 행복만 생각하는 그게 시커먼 본성이었어요. 이게 본심이었어요. 본심. 뭐 하나님 앞에... 다 거짓말이에요. 인간의 본심은 나한테 딱 맞는 교회를 갔다가 와야 돼요. 신천지 같은데. 죽어서 예수한테 환영받아가지고 죽어서 남한테 갑질하는 그런 거 마구 생각하는 거예요. 자기밖에 몰라요. 내가 나를 너무 증오하게 사랑하는 그 사랑도 자기에 대해서 주께서 호응해 줄 거라고 생각하는 그게 나의 믿음으로 채워져 있는 그 것. 몽땅 다 가지고 옵니다.

오면서 하는 고백이 있어요. 이 고백을 내가 중요시 여기는 이유가 신자냐, 아니냐를 그 사람 어떻게 아느냐 이걸로 알 수 있어요. “제가 개입니다.” “주여, 저는 개입니다. 아들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래도 주님 부스러기 떨어진 것이라도 개한테는 주잖아요. 그저 이 집 개만 된다면 이집 테두리 안에 이 집 범위 안에 들어오는 것만 해도 저는 이 은혜가 왠일인가, 이런 큰 은혜가 어디 있는가 생각합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들어와야 이 세상이 천국이 되지요. 나의 세계가 아니에요.

지금 하나님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고자 하지 내가 가는 나라 만드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이런 경험을 못한 인간들은 자기 생각하지요. 자기 생각을 사적 구원이라 합니다. 내 개인만 구원받으면 되니까 천국가도 나만 잘살고 나만 행복하면 그만이지. 자기 행복한 게  천국이라 생각하는 거예요.

탕자가 되면 “저 행복 생각하지 마세요. 주님. 주님께서 평생동안 이 땅에서 살 때, 저의 행복과 저의 안위와 제 건강 아~ 그거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그런 축복을 받을 자격이 못됩니다.” 라는 마음으로 주님과 동행하게 만드는 게 이미 시작된 천국이에요. 이미 시작된 천국입니다.

기도했는데 응답 안 해줍니까? 십일조 했는데 내 아들 성적 왜 내려갑니까? 이런 소리 나오는 게 아니고 지금보다 더 내려가고 지금보다 집이 홀라당 불타도 십자가 피로 구원해 준 것만 해도 저는 아이고~ 뭐 더 할 말이 없습니다. 저는 범사에 감사할 뿐입니다. 라는 고백이 나온다는 것은 이미 자기가 누군 줄 알았어요. 나라는 인간은 환경에 따라서 얼마든지 길들여질 수밖에 없는 내놓은 자식이라는 걸 알았어요. 죄의 종이에요. 자기가 죄 지은 게 아닙니다. 이 밖에 있던 죄가 기다렸다는 듯이 인간을 이렇게 만들어버리고 말았어요. 반갑다. 친구야! 해가지고 완전히 만들어버렸어요.

그리고 우리도 호응했고. 왜? 내 위주니까. 악마가 우리한테 제의한 게 뭡니까? 니가 따먹는 날에는 니가 뭐처럼 된다? 신처럼 되게 해줬잖아요. 신처럼 된다는 게 뭐예요? 우리가 평소에 죄악된 악마의 그 선악과 따먹은 그 본심이 나도 신처럼 되어야 되는데. 신처럼 되는 게 이게 본심이잖아요. 그걸 딱 교회가 맞닥트려주니까 얼마나 감사합니까.

지방교회는 구호가 이거에요. 신이 인간되었은즉 너희도 신이 된다. 그게 구호입니다. 워치만 리 위트니스. 그게 구호에요. 거기서 벗어난 사람이 있답니다. 얼마나 놀랐는지. 제가 심방 갔던 그 집입니다. 지방교회에서 나왔어요. 지방교회는 못 나옵니다. 기존교회를 전부 다 세속적인 더러운 교회라고 보는데. 최고인데. 나를 신으로 만든다. 거기서 나왔다는 말은 뭘 포기했다는 말입니까? 저는 신이 될 권한이 없어요. 그걸 아는 사람만 거기서 나올 수 있어요. 신이 되지 말고 차라리 주님의 성전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시편84편. 이리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신천지나 거기에 빠져있는 사람들은 뭐냐 하면, 신이 되어주겠다는데 아주 신이 났어. 주님의 전략이라. 한 번 실컷 해봐라. 언제까지 있어야 되는가. 성도 아닌 사람은 할 수 없고, 성도이면서도 거기에 빠져야 될 이유는 고백이 “주여, 주님의 나는 개만도 못합니다.” 라는 고백이 나올 때까지 숙성되어야 돼요. 죄가 숙성되어야 됩니다. 숙성되고 난 뒤에 나오게 됩니다.

저한테 지금 편지 보낸 사람이 있는데 정말 제가 이야기한 것보다 더 구구절절하게 “나는 개판이었습니다.” 목사님 보신대로 답장하지 마시고, 제목이 “불량품 중간보고” 이리 나오는데, 세상에~ 답장하고 싶어요. 당신 이야기고 내 이야기입니다. 이 목사 이야기에요. 제가 그런 사람입니다. 하고 같이 서로, 주님에 의해서 서로가 제사에 참여된 것을 티내고 싶어요.

돌아옵니다. 갔다가 돌아올 때, 이때부터 중요합니다. 돌아왔으니까 처음에 왔을 때는 저는 아들 되지 못합니다. 했지요. 그 다음부터는 준비된 게 있지요. 준비된 게 예상 못한 겁니다. 가락지 끼우고 소 잡고 잔치했지요. 그러면 이 탕자가 헤헤거리면서 “그렇지, 역시 나는 결정 잘했어.” 나의 자유권을 잘 발동해서 이리 생각했겠습니까? 어떻게 생각합니까? 하나 하나가 뭐겠어요? 주의 은혜겠지요. 그러니까 가락지 자랑하면서 “봐라, 돌아오니까 주잖아.” 돌아온 자기 자랑한 게 아니지요.

그 가락지를 끼고 있으면서 보면서 뭘 느끼겠습니까? 더욱 더 부끄럽게 느끼겠지요. 이게 내가 낄게 아닌데. 이미 낀 것은 할 수 없지요. 이미 주신 것은 주께서 빼지를 않습니다. 주신 주님의 약혼반지를 빼지를 않아요. 잡힌 고기는 먹이를 주지 않는다. 해당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미 주님에 의해서 잡아넣은 고기이기 때문에 이미 가락지가 있는 이상은 내가 낀 게 아니고, 주께서 끼었기 때문에 가락지가 나의 주도권을 쥐고 있어요. 내가 가락지를 빼고 자시고 할 게 아니고 그 가락지가 요구하는 그 율법의 완성대로 나는 거기에 따라서 새로운 내용물이 나오면서 기존 내용물은 빠지고 그걸 수요일날 빌립보서 3장 8절 배설물로 여기지요.

배설물로 여기고 주님의 은혜만 나한테 차고 그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주께서 마음껏 줘도, 헌금이 뭐냐 하면 헌금이라 하는 것은 돈을 내는 게 아니고 헌금하는 내 자체가 주님의 헌금이라는 고백이에요. 내가 주 앞에 드린 게 아니고 드린 내 자체가 주님의 선물이잖아요. 라는 고백이에요.

주께서 선물로 이런 인간 만들어놨잖아요. 탕자를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게 주님이 행하신 선물이라. 자기 자체가 선물 받은 거예요. 거기에 비해서 형은 뭡니까? 아직도 탕자가 안 됐기 때문에 주체가 남아요. 주체가. 자기가 주체에요. 주체기 때문에 따지는 거예요. 왜? 나는 아버지 효도했는데. 나한테는 지금까지 한우 한 번 안 줘놓고. 잔치한 적 없고. 왜 가락지 안 주고. 이게 뭡니까? 라고 주체가 나오는 겁니다. 형은. 따라서 형은 바리새인을 의미하는 거고, 탕자는 사실은 누가 탕자 되고 싶은 사람 아무도 없지요. 없는 자에요.

없는 자인데, 탕자로 나왔으니까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없을 무(無)라고 합니다. 무는 자기의 본질이 없어요. 자기의 자유가 없고 자율권도 없고 선택권도 없어요. 이런 것은 전부 탕자 할 때 다 써먹고 이제는 그 칸에 무, 아무것도 없는 본질을 예수님의 자기 본질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 내용물로 채워 넣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탕자는 곧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거예요.

자,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옵시다. 본문 17절 끝에,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라. 즐거움으로. 즐겁다는 말이 뭐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살아가는 그 모습을 보고 인도하는 자는 기뻐하는 겁니다.

18절에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라. 인도자지요. 사도바울이 인도자니까.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를 위하여 너희 기도함을 더욱 원하노라” 기도한다는 말은 뭐냐 하면 이미 기도내용은 정해져있다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기도 내용은 정해져있는데 너희들도 나처럼 이렇게 기도하고 있는 거지? 맞지? 라고 묻는 거예요. 사도바울의 기도내용은 뭡니까? 예수님만 생각하는 거예요. 예수님만 생각한다는 게 13장 13절에 나오지요.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어디에게로 나아가자? 그에게로 나아가자. 이게 뭐냐 하면 예수님만 찾는 거예요. 15절도 마찬가지고.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그러니까 이 모든 선행의 내용은 윤리, 도덕적 선행이 아니고 예수님으로만 관심 갖는 게 선행이죠. 그게 드디어 나옵니다.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영원한 언약의 피. 히브리서 전체 내용이 아까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 이제 기억나시지요. 감독자는 뭐냐, 그 언약의 피. 예수님은 누구와 했습니까? 혼자 했습니까? 바톤이 있었습니까? 혼자 했어요. 혼자 다 이루신 그 예수님의 피를 이룬 우리는 거룩한 백성으로서 천국 가는 겁니다.

이 이야기를 히브리서에서 다룬 거예요. 히브리서 오늘 끝난 것이 아니고 다음에 계속 히브리서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사도바울이 했던 그 복음을 저희들이 같이 공유하고 그리고 공감했습니다. 그동안 복음을 방해한자가 우리 자신인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뭔가 잘난 체하고 남한테 밑지지 않는 자존감이 예수님만 바라바야 될 그 선행을 우리가 가렸습니다. 이제는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주님만 쳐다보는 돌아온 탕자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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