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으로 | 로그인 | 회원가입
 
통합검색

강의일정

광주강의

대구강의

부산강의

서울강의

안양강의

울산강의

대전강의

유튜브강의

강남강의

기타강의

HOME > 지역강의 > 안양강의
2017-05-13 19:04:38 조회 : 923         
법망 170512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음성1                          음성2

 

동영상1                       동영상2

 공은주(IP:119.♡.152.148) 17-05-26 14:44 
안양20170512a히13장20절(법망)-이 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히브리서13장20절, 히브리서13장이 끝인데요. 끝부분에 오면서 자꾸만 다시 1장부터13장까지를 정리하고 싶은 충동이 생깁니다. 제가. 그만큼 못 믿겠다는 말이죠.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니까. 마지막 이야기하기가 참~ 해도 소용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하는데.

1장부터13장까지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과거로부터 미래로 살지요. 그런데 1장부터 13장은 뭐냐 하면 이미 미래가 거꾸로 우리의 현재에 찾아와서 미리 방문해가지고, 미래에 계시는 분이 현재에 잠입해서 들어오셔서 쉽게 하면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시간이 모두 종결된 상태에 계신분이 “너희들 고생 많지.” 하면서 들어오시는 거예요.

들어와서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 그 길을 지난 시간에 Path 경로라는 패스. 통과. 경로를 이끌어가면서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아~ 내가 이랬었었지.’라는 과거완료지요. ‘이렇게 살았었었지.’ 우리는 현재를 살면서도 주님 입장에서는 뭐냐, ‘내가 이럴 수밖에 없었었지.’ 라는 모습을 드러내면서 주와 함께 있어버리면 우리는 현재에서 이미 모든 것이 종결된 상태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이게 히브리서13장까지의 경과, 통로, 길, 절차, 그걸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해석은 뭐냐하면 인간이 단독적으로 어떻게 사느냐 문제가 아니고 예수님과 함께 했을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예수님과 함께 했을 때. 우리에게 어떤 새로운 개념들이 우리를 둘둘 말게 되느냐. 그러면 방금 했던 요것을 약간 더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모든 인생을 다 끝냈다. 다른 말로 해서 우리가 지을 죄는 다 지어봤다. 성경에서 육십계명이니 하는 거 다 위반했다. 자, 죄를 다 지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죄 짓고 있지만 제가 말을 다 지었다고 했습니다. 다 짓고 난 뒤에 이쪽에 서자 말이죠. 서게 되면 평생은 하나님의 율법에 비해서 죄 아닌 게 없어요. 다 죄 지었어요.

죄 짓고 난 뒤에 다시 들어가는 거예요. 요게 바로 히브리서의 내용입니다. 그러면 남는 건 죄인이 그리스도와 함께 들어가게 되면 우리에게 관심 끄는 건 뭡니까? 이 죄를 어떻게 씻을 것이냐, 이 죄를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 그 문제가 남겠지요.

그래서 히브리서를 다른 말로 하면 ‘처리’에요. 처리. 어떻게 처리하느냐 에요. 존재+처리에요. 예수님 오실 때에 이 세상은 이미 종말에 성격으로 갑니다. 히브리서1장에 보면 마지막 때라는 말이 있어요. 마지막 때라 하는 것은 이 세상이 잘난 것 같으면 마지막 때라는 게 필요가 없어요. 결국 그대로 가면 돼요.

그런데 세상이 얼마나 못났고 세상이 얼마나 어설프면 필히 마지막 때가 있어요. 심판 때가 있어요.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보내셨다. 이렇게 시작해요. 히브리서를. 우리는 마지막 때라는 게 감이 안 온다니까요. 우리는 내가 늙어 죽으면 또 자식이 이 땅에 살겠지. 신중현이가 불렀던 작곡한 유명한 노래가 있지요. 아름다운 강산. 아름다운 강산의 가사를 보게 되면 세상은 아름다운데 인간만 바뀐다는 겁니다. 종말 개념이 없어요.

그런데 히브리서는 뭘 하느냐 하면 ‘웃기고 있네.’ 세상 자체가 끝나버리고 인간은 착각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 아름다운 강산을 후손에게 물려주자는 것이 신중현의 이야기고 히브리서는 물려주기는 뭘 물려줘. 니가 다루나? 내가 다루지. 끝장냈다는 겁니다. 마지막 때라서.

히브리서1장을 다시 한 번 보게 되면 10절, 11절 보게 되면,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바라 11절, 그것들은 뭐라고 합니까?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요. 멸망한다는 말은 이런 거예요.

어제 수요일날 그런 이야기했는데요. 수요일 설교한 거 잠시 중요한 부분 중의 하나가 이게 끝부분에 나오는데 중심부가 있다 했습니다. 중심부. 중심부가 있으면 다음에 뭐가 있겠어요? 주변부가 있겠지요. 주변부. 제가 설교하면서 이걸 산사태라 이야기했어요. 산사태. 홍수가 나게 되면 우리가 살던 집들이 밀리게 되지요. 오니까 자꾸 밀려서 주변으로 밀리게 되지요. 성도가 아닌 사람들은 주변으로 밀려요. 이걸 저는 잡다, 라고 해요. 잡다함 또는 잡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이런 겁니다.

그런데 성도는 뭐냐 하면 이 잡다한 곳에 살면서도 자꾸 중심부 복음에 의해서 이끌리게 돼요. 이끌리게 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뭐냐 하면 남들은 이렇게 가더라도 우리는 이렇게 중심부로 간다 하잖아요. 제가 잉어가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표현했어요. 수요일날. 잉어가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했지만 사실은 잉어처럼 거슬러 올라가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뭐냐, 어디에 가던지간에 이게 어디 지평에서 땅을 뚫고 여기서 나와 버려요. 중심이. 우리가 어디에 가는 게 아니고 내가 있는 현장에서 갑자기 갈라지면서 십자가가 불쑥 이렇게 돌출해버려요. 돌출한 상태에요. 그러니 이것이 한국이던 일본이던 대구든 관계없어요. 내가 있는 그곳이 종말의 현장을 보여주는 증거물이 있는 마지막 때의 모습들이 깔려있고 배치되어 있는 현장입니다. 

기도원에 간다. 이거 필요 없어요. 가정의 주부로서 살면 그 가정 일상 속에서 십자가 복음이 거기서 돌출한다니까요. 분출해버린다니까요. 성령께서 그렇게 만들어요. 성령께서. 이게 왜 그러느냐 하면 함께하기 때문에 그래요. 세상 끝 날까지 너와 함께 있으리라. 마태복음28장 마지막 대목이거든요.

세상 끝 날까지 함께 있으리라. 이 말은 세상에서 중심부를 찾지 말라. 성지순례하지 마라. 이 말이에요.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이 중심이 아니라는 거죠. 옴파로스가 아니에요. 배꼽이 아니에요. 땅 끝까지 너와 함께 있다는 말은 함께 붙어있다는 말은 다만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그 봤던 그 광경을 이제는 자기 백성에게 똑같은 광경을 보여주는 거예요.

물론 똑같은 광경인데 우리는 왜 못 봤느냐, 성령으로 말미암아 복음적 의미가 없는 상태에서 인생을 살다보니까 예수님이 중심부가 아니고 내가 사는 그 지점. 내 인생이 나의 중심부가 된 겁니다. 자기의 인생스토리. 인간의 경력. 살아온 인생. 그게 중심부가 된 거예요. 그래서 부부사이에 하나는 복음을 알고 하나는 복음을 모른다면 이건 중심부 싸움입니다.

반드시 이야기할 때는 자기 중심부에서 이야기 나오게 돼있어요.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고 이쪽에서는 뭡니까? 그리스도 중심으로 생각한다는 말은 똑같이 내 중심인데 내 중심은 찢어졌다. 폭탄 파편 맞아가지고 중심부가 찢어졌어요. 나도 니처럼 내 중심으로 살고 싶었고 그렇게 살고자 했었는데 주께서 가만두지 않고 폭탄을 일으켰어요. 뻥하고 분화구가 생겨버렸어요. 그리스도 중심으로 살고, 저쪽은 자기중심으로 사니까 대화가 맞을 턱이 있나. 대화가 안 맞는 거예요.

그저 아름다운 강산 후손에게 물려주세. 이쪽에서는 끝났는데 뭐가 아름다운데? 니 의미로 보니까 아름답지요. 그리스도로 보게 되면 이 세상은 폐기처분해야 될 세상입니다. 옛날에 우리 학교 다닐 때 공작시간에 만들었어요. 미술시간에 신문지 물에 개어가지고 그걸 입체적으로 산이나 들, 나무 만들었잖아요. 거기다가 색깔 칠하고. 숙제 내라하고. 그럼 입체적으로 도돌 도돌 나왔다면 주님께서는 뭐냐 하면 이걸 구겨버린다 말이죠. 이걸 사람들은 모르는 거예요. 왜? 이걸 구겨버리면 입체적인 그 자연세계위에 누가 소박하게 살아요? 조상 대대로 농사 지으며 살아왔던 그 모든 전통이 같이 구겨져버립니다. 같이.

이 개신교가 천주교와 똑같이 되어버렸어요. 왜냐 하면 천주교 반대해서 개신교 됐는데 개신교가 역사를 이제 따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역사를. 우리 교회는 역사가 몇 년 됐고. 당회장실에 가면 역대 목사들의 사진이 쫙 나열돼 있고. 검찰청장실에 온 것처럼. 주님이 보시기에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그 자체를 구겨버리는데.

구겨버리면, 내가 열심히 나의 아름다운 내 중심의 인생을 살기 위해서 열심히 자식 키우고 열심히 살려고 하는 모든 것도 이건 무의미하게 구겨져버리는 거예요. 무의미하게. 그래서 여기서 다시 한 번 정리해보겠습니다.

성도가 뭐냐, 성도란 ①번 착실하고 바른 존재가 아니에요. 성도란 뭐냐 하면 ②번 아무것도 아닌 존재에요. 만약에 성도가 착실하고 바른 존재가 되어버리면 반드시 이 인간은요, 어떤 결과물을 자기가 기대하게 되어있어요. 이렇게 착실하고 바르게 사는데 주께서 가만히 있을 분이 아니지. 반드시 내가 원하는 축복을 줄 거다. 이리 생각한다 말이죠. 그러면 그 축복이 오기 까지 결함이 있지요. 미흡 되지요. 미흡된 만큼 감사가 안 나와요. 기대가 나오지. 주는가 한 번 보자. 보자. 이리 된다니까요. 감사가 안 나오고. 감사가 유보된다니까요. 감사할 만하면 감사하겠다.

그러나 성령이 와버리면 착실하고 바른 존재를 이건 자기 의라고 완전히 짓밟아버립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아무것도 아닌데 쓰시잖아요. 아무것도 아닌데. 아무것도 아닐 때는 무조건 뭐냐, 100%감사가 나와요. 내가 아무것도 아닐 때 무조건 감사가 나와요. 범사가 감사한 게 ②번 경우에 아무것도 아닐 경우라는 것을 그걸 직관할 때 그 짧은 순간에 감사가 팍 튀어나옵니다.

그런데 인간은 어떻게 된 셈인지 아무것도 아닌데 감사 나오면 이 감사한 것을 ②번에서 ①번으로 된 자료를 집어넣어버려요.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늘 범사에 감사하니 나는 정말로 착실하고 바른 성도다. 다시 ①번으로 이게 들어가 버려요. 이걸 가지고 순환이라고 하고 다른 말로 하면 회귀라고 하고 어려운 말로 하면 동질성의 회귀라고 합니다.

동질성의 회귀라 하는 것은 기도원에 가서 이런 예를 들면 돼요. 기도원에 차 끌고 가가지고 기도원에 앞에 주차 세워놓고 기도합니다. ②번 되는 걸 목표로 해서 기도해서 드디어 ②번 됐다고 칩시다. 주여, 아무것도 아닌데 오늘 안 왔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이렇게 오늘 와서 기도해서 은혜 받아 감사합니다. 하고 있는데 저 뒤에 사찰집사가 “여기 7다에 5600번 차주 누굽니까?” 이리 나오면 갑자기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오! 내 차. 내 차. 내 차 누가 끌고 나왔습니까?” 다시 ①번으로 회귀해버려요. 내 소유의 차가 있다는 말은 내가 먼저 있어줘야 내 소유의 차가 또 있잖아요. 내 게 된다고요.

만약에 내가 진짜 아무것도 아니면 어떤 사람이 와서 내 차 발로 차면 “당신이 뭔데 내 차 발로 차! 내 차 물어내!” 이리 나온다 말이죠. 아무것도 아닌 게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지요.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한 번 모션 쳐봤는데 그게 이미지인 것과 성경의 차이점은 그런 점이 나지요.

만약에 성령 받고 난 뒤에 주차장에 누가 주차하다가 약간 긁혔다 하면 ‘아! 내 것도 아닌데 주님께서 주님차가지고 주님 차 박아났구나!’ 이렇게 생각할 거다 말이죠. 그것도 진정성 있게 하게 돼요. 그런 생각은 차마 하기 싫지요. 그래서 그런 기도제목은 처음부터 아예 삭제가 되어있습니다. 주여, 차 박더라도 감사케 하옵소서. 이런 기도제목은 안하지요. 그러다 보니 기도할 게 없어요.

자, 1장에서 13장까지 오는데 뭐가 있느냐, 그걸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원래 인간은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가요. 그런데 히브리 문법에 보면 ‘와우’하는 게 있어요. 와우연습법이란 게 있습니다. 이 와우연습법은 어떤 거냐 하면 히브리동사는 완료와 미완료밖에 없어요. 완료를 가지고 과거가 되요. 미완료는 미래가 됩니다. 동사가 시제가 이 두 개밖에 없어요. 현재는 상태 동사라 하는 게 있어요. 그대로 가는 거 이런 뜻으로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실력들이 있으니까 영어문법 해볼까요. 현재분사와 동명사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둘 다 모양은 같아요. 뒤에 ing붙이는 겁니다. 현재분사라 하는 것은 지금 하고 있는 것. play 같으면 즐기다. 놀다. ing  붙이면 playing놀고 있다. 스포츠를 즐기고 있다. 이때는 한 동작을 할 때는 현재분사가 되는 겁니다. 동명사라 하는 것은 이건 동사 성질은 없고 명사 성질이 있어요. 뭐냐 하면 I am playing soccer. 나는 지금 축구를 하고 있다. 현재분사인데, 앞에 동명사가 되어버리면 My hobby is playing soccer. 나는 축구가 취미다. 이렇게 되어버려요. 현재 자기 상태를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자기가 어떤 일에 관한 것 이런 이야기를 해요.

마찬가지로 히브리어에서의 완료와 미완료라 하는 것은 완료는 과거이고, 현재는 미래인데, 와우하는 게 뭐냐 and 그리고로 접속되어버리면 이게 연결되어버리면 과거가 뭐로 바뀌느냐 하면 미래로 바뀌고, 미래가 뭐냐 하면 과거로 바뀌어요. 신기하죠. 이게 무슨 관점이냐 하면 세상을 볼 때 이미 다 모든 게 마무리되고 난 뒤에 다시 세상을 보자 이 말입니다.

마무리되고 난 뒤에 다시 보게 되면 옛날 내가 꼬마로 있을 때 학교에서 이렇게 농땡이 부리고 말도 안 듣고 도망갔구나! 이런 게 느긋한 마음으로 보게 되지요. 그게 믿음 아닙니까? 믿음이란 이미 다른 시간 층에 속하는 존재, 이게 믿음이에요. 다른 시간 층. 인간의 힘으로 이건 불가능합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시간이 다른 시간 층으로 되려면 성령이 와야 돼요.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돼요. 성령은 예수님에서 나오거든요. 예수님의 몸이 무슨 몸이냐 하면 시간 층이 역사에 속하지 않고 묵시에 속하는 겁니다. 묵시란 말은 시간의 끝 이후에 상태, 세계, 그게 묵시의 세계에요. 고린도후서13장에 보면 그걸 삼층천이라 합니다. 삼층천. 묵시세계.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미래가 묵시에서는 과거가 돼요. 우리의 과거의 모습이 돼요. 이걸 한 번 쉽게 정리하게 되면 하나님께는 우리보고 이 땅에 살라는 거예요. 요한복음17장에 보면 니가 나처럼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를 데려가지 않는 이유는 내가 이 예수님이 이 세상을 어떤 느낌, 어떤 체험, 어떤 실감을 하며 살아왔는가를 너도 똑같이 겪어야 된다는 겁니다. 홀라당 나 따라오지 말고.

나는 먼저 갈 테니까, 같이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는데, 내가 속하지 않음과 같이 너도 속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지금 데려가지 않는 이유는 이 땅에 너희를 남겨놓아서 진리가 어떻게 살다가 어디로 빠져나갔는가를 세상에 알게 하려 함이라. 이리 되어있어요.

그럼 이러려면 이것은 우리의 요청이 아닙니다. 내가 기대했던 내 소망이 아니에요. 이건 순전히 일방적으로 주님의 소망이지요. 이게 뭐냐 하면 오늘 제목으로 적당한가 싶은데, ‘주님의 횡포’에요. 주님의 횡포입니다. 왜 내 남편을 만나야 되는가. 전에는 내가 골랐다고 보는 거예요. 그게 옛날에 과거 때 안목에서는 내가 고른 남편이고 내가 선택한 남편이에요. 뿅 갔지 뭐. 좋아 죽고 못 살았지. 이렇게 된다 말이죠.

그런데 새로운 예수님의 묵시적 관점에서 보면, 복음 전하기 위해서 현재의 남편을 만났었어야 된다는 거예요. 복음 전하기 위해서. 누가 누굴 전하는가.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하는 게 아니고 주님께서 나에게 복음을 집어넣기 위해서 주변에 적절한 환경을 조성한 겁니다. 그걸 성경에서는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로마서8장에서 아주 비정하게 이야기합니다. 하여튼 성경은 정내미라는 건 없습니다.

아브라함 언약 때문에 하갈은 쫓아내야 되고. 그래서 제가 수요설교하면서 했잖아요. 쫓아내서 보호할 것 같으면 애초부터 쫓아내지 말지. 무엇 때문에 쫓아내놓고 보호하긴 왜 보호하느냐 말이죠. 그러니까 도대체 본문을 봐서는 잘 모르잖아요. 언약 적으로 보면 이제 그게 보이는 겁니다. 주님의 횡포에요. 내 가는 길로 오지 않으면 아예 천국 없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내 가는 길. 길이 어디입니까? 길은 없어요. 길은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아까 분화구처럼 솟아 나온다고 했지요. 불쑥 불쑥 솟아나오는 겁니다. 이걸 세자로 이야기로 하면 도깨비에요. 도깨비. 도깨비는 예상 못했는데 불쑥 불쑥 튀어나와요. 도깨비는. 완전 공유. 공유 압니까? 연속극을 봐야 말하지. 도깨비가 사람 사랑하는 거예요. 그게 도깨비라는 드라마에요. 가슴에 칼 꽂고  사랑 아니면 뽑지를 않고 그런 내용이 나와요.

불쑥 불쑥 튀어나오는 거예요. 도깨비하면 너무 세속적이니까 이걸 그냥 성령.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다. 이리 보시면 돼요. 성령이 나오게 되면 바로 우리의 힘으로는 절대로 우리의 과거 관점, 과거를 생각해서 미래를 생각하는 관점을 우리 힘에 절대로 바뀌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까 철저하거나 착실하게 사는 것은 의미 없다 했지요. 우리 힘으로 주의 길을 갈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주의 길은 주께서 인도해야 돼요.

그 인도하는 자를 보혜사라 하고 보혜사라 하는 것은 우리를 환자 취급하는 거예요. 그 보혜사는 원뜻이 간호사라는 뜻입니다. 이 간호사 옆에 우리는 기브스하고 있지요. 화장실도 못가고 삐딱하게 해서 꼼짝 못해요. 링거를 끌고 가요. 주사 맞을 때는 엉덩이 까고. 그 때 그 때마다 성령 되시는 보혜사가 다 줘요. 다 준다고요. 그렇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생각하는 멋진 인간 만드는 게 아니고 비정하게도 주님이 어느 쪽으로 가는가를 보게 하는 거예요. 주님의 가신 길이 보이게 하는 겁니다. 일종의 뭐냐 하면, 이게 또 제목이 탐이 나네.

‘증강현실’ 3D. 삼성판매점에 가면 안경 끼고 있지요. 권투하라 하면 사람 없는데 저 혼자 권투하고 있다 말이죠. 3D. 실제로 입체로 나와 있으니까. 증강현실 속에 우리를 놓이게 하는 겁니다. 증강현실이 나타나게 되면 지금 제대로 주님의 길을 가는 거고, 갑자기 증강현실이 사라지고 ‘정신 차려! 이 바보야! 신앙 아무것도 아니야. 지금은 돈이 최고야! 돈이 있어야 사는 거야.’ 이렇게 제 정신 돌아오게 되면 히브리서 같이 날아가 버리죠. 히브리서가 무슨 소용이 있어요. 히브리서가.

히브리서가 밥 줍니까? 이게. 들여다보면 하늘에서 떡이 떨어집니까? 까마귀가 와서 짜장면 중자해서 떨궈 줍니까? 이거 보게 되면. 아무짝도 소용없는 거예요. 성경이. 이 현실에서 우리가 살아가는데 방해되지요. 이 시간에 돈 벌면 되지 이거 할 필요 없어요. 방해돼요.

그런데  도깨비 같은 성령이 나타나서 우리로 하여금 바로 이게 주님 가신 길이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길이 곧 진리에요. 우리는 자꾸 진리를 확보할 생각을 하지 마세요. 길이 열어줘야 그 열린 길이 진리가 되고 그게 바로 생명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진리, 생명, 어디 있고 우리가 따먹고 따내는 것처럼 그렇게 된다니까요. 기도 빡시게 하면 진리 막 들어오고 있고 기도 빡시게 하면 영생 얻은 것처럼 하는데, 그게 아니고 길이 갈라져야 돼요. 진도에 길이 갈라지는 게 달력보고 예측해가지고 관광객들 기다리면 오게 되어있어요. 진도에는 옛날에는 모세의 길이라 했거든요.

모세의 길은 양쪽에 물이 절벽이 되고 있었어요. 성경에 보면. 진도 안 가봤지만, 아무리 봐도 무슨 벽이 있어요? 바지락 잡는다고 전부 다 비닐봉지해가지고 발자국만 있지 무슨 벽이 있습니까? 홍해는 바다도 유효해요. 그냥 바다 속에 들어가는 거예요. 바다는 바다대로 유지하고 속에 길을 낸 거예요. 그래서 바다에 길이 났다는 것이 정상이 아니고 비정상이고.

차라리 정상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은 뒤따라온 애굽 군대들이 정상적인 생각을 했어요. 저희들이 미쳤구나! 오, 길이 있네. 저들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이다. 저들도 갔으면 우리도 갈 수 있겠다. 갔는데 바닷물이 합체됐지요. 그러면 빠져죽으면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왜 이렇게 우리를 빠지게 했습니까? 신이여. 이렇게 했을 거예요. 하나님이 답변할 필요 없지만, 굳이 답변한다면 “바다는 물고기 사는데다. 니 몰랐어?” “그럼 저 사람들은요?” “그러니까 저 사람들은 증강현실이지.” 바다 안에 3D나올 줄은 몰랐던 거예요. 바다 안에 길이 있을 줄 몰랐거든요.

똑같은 원리입니다. 이 세상에 길은 없습니다. 나는 길이요. 했지요. 이 말은 뭡니까? 너희들은 길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내가 성당 다니고 교회 다닌다고 해서 구원 받는 게 이다? 아니다? 아닌 거예요. 주님이 열어줘야 되지 교회 다닌다고 해서 성경 공부한다고 내가 길이 되는 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뭐냐 그냥 사시면 돼요. 사시면 도깨비 나타날 거예요. 도깨비.

자, 정리해봅시다. 도깨비가 나타날 때는 뭐가 달라진다? 보는 이 세상이 주님이 다녀간 세상으로 바뀌게 돼요. 이건 내가 살던 신중현의 선조들이 물려준 아름강운 강산이 아니고 이렇게 꾸겨지도록 처참하고 피 막나오네. 70억이 피가 막 나오네. 자식이고 남편이고 없어요. 구겨져버리는데 없어요. 멸망한다니까요. 증강현실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래서 범사에 감사한다니까요.

다시 한 번 봅시다. 이걸 성령이라 했는데 히브리서 쪽에서 하면 미래. 미래는 뭐예요? 이미 모든 역사가 끝나고 난 그 이후, 그걸 제가 다른 노래에서는 연극이 끝난 후. 연극이 끝난 뒤에~ 연극이 끝나고 주님께서 어떤 수모를 당했는지를 다시 방문하는 거예요. 수련회 때 이걸 시조로 했잖아요. 길재의 시조 「회고가」.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았더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네. 나오잖아요. 그것처럼 폐허가 된 이 세상에서 다시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예수님이 이런 고생했다.

그러니까 주님은 자기 이야기밖에 할 게 없어요. 우리 이야기 안 합니다. “내가 이 땅에서 창조주가 이런 수모를 당했거든. 그 때 니 고마운 줄 알아라. 내가 당한 수모 니도 똑같이 당해.” 요게 히브리서2장18절,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우리를 구원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 자신의 길을 열어놓기 위해서 하는 거고, 그 다음에 4장16절,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지요.

5장7절9절에 봅시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구원의 뭐가 되지요? 구원의 근원이 되지요. 근원을 틀어막을 수 있습니까? 못 틀어막지요.

그럼 근원에서 뭐가 나오느냐, 폭파하듯이 나오지요. 그걸 누가 틀어막습니까? 화산에서 터져 마그마 나오지요. 마그마를 누가 도로 화산에 주워 담습니까? 터지면 터지는 대로 흘러내려야지요. 그 흘러내림의 한바가지 뒤집어 씐 사람이 성도라 이 말입니다. 그 터져 나올 때 이미 역사이후 역사가 끝난 미래가 우리에게 한바가지 뒤집어씌우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거울에 보는 내 모습은 사실은 이런 식으로 구겨져서 또는 이런 식으로 늙어서 성형 보톡스해도 입만 튀어나오지 별로. 주저앉고 자꾸 구겨져요. 피부 자체가. 탄력 없는 정도가 아니고 뭉겨지고 구겨진다니까요. 자꾸 구겨지니까 그 미흡함을 메꾸기 위해서 자꾸 어린 손자, 손녀한테 뺨 대고 하잖아요. 손녀는 냄새난다고 밀어내는데. 중간에 엄마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당황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지만. 아이고~ 요거 이쁜 것. 그 탄력. 자기가 잃어버린 거예요. 이미. 생명이 다 빠져나온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이 세상이 죄값을 받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과학이라는 것은 바보들이에요. 과학하는 사람들이. 바보들이 뭐냐 하면 자기가 늙어가는 것을 모르고 지 아는 것만 자꾸 쥐고 있는데, 그거 안다고 해서 아인슈타인이 안다고 해서 구원받는 거 아니에요. 똑똑해도 휘발성처럼 빠져나가는 것. 그럴 때 우리는 뭐냐 하면 ‘아~ 이 세상이라 하는 것은 같이 멸망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구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 게 아니고 죽으라고 태어난 거예요. 죽으라고. 이렇게 살다가.

그러면 죽으라하면 일찍 자살시키지 왜 길게 살게 하십니까? 예수님의 길과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한 겁니다. 베드로에게 찾아왔을 때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면 찾아온 이유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찾아온 거고 사도바울에게 찾아 온 것도 다른 복음은 없다. 십자가 복음만이 복음이다. 이렇게 한 거예요.

사도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사람의 힘으로 이해할 수 있는 말을 한 게 아니에요. 사도들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인 것처럼 예수님의 제자, 12제자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을 한 게 아니에요.

천주교는 역사적으로 전체, 성령 받은 사람만 구원하는 게 아니고 국가 전체에 대한 이데올로기거든요. 국가 전체를 종교국가로 만들기 위해서. 사람들이 납득하고 있는 요소를 집어넣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양심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동일시해버린 겁니다. 양심이 있잖아. 이건 동양철학이지요. 동양철학이지만 양심이 있잖아요. 양심이.

양심을 그 사람들은 뭐라고 하는가 하면 생명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생명. 아까 생명을 뭐라고 했습니까? 길. 생명은 없는 거예요. 우리는 죽으라고 있고 쪼그라들고 늙고 죽기 위해서 있는 거예요. 생명은 없어요. 없는데 인간에게는 생명이 있다는 거예요. 이건 종교와 관계없이 모든 피조물은 다 주어진 거라는 거예요. 이런 요소가 있다는 거예요. 이런 공통 요소. 이걸 하나님의 형상으로 간주했어요. 간주했다 이 말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뭐냐, 이 형상을 회복하는 거라는 거예요. 형상을 회복하는 것. 그러니 인간의 생명, 양심을 분석해보니까 뭐가 있느냐 하면 이성적인 요소와 감정적인 요소와 의지적인 요소가 있다 이 말이죠. 그럼 옛날부터 천주교는 유식한 사람은 성직자나 언어를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은 고위직에 있으니까 이 사람들은 이성적으로 따지면 되고 그 다음에 못 배운 사람들은 의지적으로 또는 감정적으로 호소하면 신자가 될 수 있는 거예요. 요게 양심이 없으면 육이니까. 

그러니까 이때는 뭐냐 하면 비극을 아주 슬픈 비극을 교회에서 조성하면 되지요. 거기 조성하는데 필요한 게 뭐냐 하면 어머니의 무슨 사랑? 자식사랑을 집어넣으면 되지요. 사랑을 설명할 때 감정적으로 설명하면 되잖아요. 이건 무식하건 유식하건 관계없이 여자가 태어난 이유가 뭡니까? 자식 낳기 위해서 태어났잖아요. 자식 놓기 위해서. 자식 놓고 난 뒤에 남편은 발로 뻥 찬다 이 말이죠.

뉴질랜드 같은 경우에는요, 법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여성국가에요. 페미니스트국가인데, 여자가 이혼했다 하면 양육권은 남자는 아예 없어요. 남자가 양육하는 건 0%에요. 남자가 소득의 월급의 80%를 매달 영원한 아내한테 줘야 돼요. 그러니까 남자들이 어딜 가느냐 하면 남자는 미국에 가버려요. 못 살겠다고. 힘들어서. 법무장관해서 다 여인 천하였어요. 지금은 너무 심하다 해서 남자가 됐지만. 얼마전만해도 여자들 세상이었습니다. 뉴질랜드가.

그래서 남자들이 못 살아가지고 전부다 미국으로 가버리니까 딸들이 엄마를 달려드는 거예요. 엄마 때문에 결혼할 남자가 없어요. 다 도망가 버리고. 무조건 80%래요. 여자가 바람피웠던 관계없어요. 무조건 80%랍니다. 남자는 바람피우면 문제가 되지만 여자가 바람피우면 문제가 안돼요.

이 세상에서 자식을 놓는데 자식에 관심 있다 보니까 남편은 이제 가정의 뒷전이 되는 겁니다. 이게 육적인 본성이잖아요. 이러한 육적인 본성은 무슨 조건이 되어야 하면 이 세상은 영원토록 계속 유지될 것이라는 것을 전제로 할 때 이게 의미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까 히브리서5장에서 뭐라고 했던가요?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니가 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도와준다 했지요. 이게 바로 히브리서의 주제가 내가 이 땅을 다녀갔다는 사실을 니가 알아라. 그래서 히브리서 1장에 마지막 때라 한 겁니다. 그래서 앞에 11장에 나오는 신앙의 선조들이 있지요. 그 사람들 구원하려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 사람에게는 전부 다 한 뭉태기의 한 조각씩 뭐가 있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의 파편들을 갖고 있습니다. 파편들을. 노아 같은 경우에는 이 세상을 멸망시키는 심판주의 모습을 갖고 있고, 그리고 아브라함 같은 경우에는 뭐겠어요? 아브라함 같은 경우에는 육에 나지 않은 다른 아들을 이삭을 가졌다는 그 것.

그리고 야곱 같으면 요셉의 아들에게 어긋맞게 축복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어떤 수모를 받았지만 예수님은 수모당한 예수님이 오히려 창조주가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거고. 모세 같은 경우는 뭡니까? 세상의 모든 보화와 영화를 공주의 아들 됨을 거절할 때, 뭐와 함께 백성들과 함께 뭐 받기 위해서? 고난 받기 위해서, 고난 받는다는 그러한 내용을 또 품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사사기에 나오고 이사야 같은 경우는 톱으로 켰다는 것. 이사야의 톱으로 켰다는 건 전설이지만. 이사야의 톱으로 켰다는 것은 그 정도로 이 세상에 대해서 어떤 수모를 당한다 해도 세상이 오히려 가해자가 감당치 못하는 거예요. 히브리서11장에 나오잖아요. 감당을 못하는 거예요. 저 정신머리는 도대체 원천이 뭐야? 저 존재의 원천이 뭐냐? 우리 같으면 살려주세요! 라고 나올텐데 도대체 이건 후딱 떠나고 싶어서 환장을 한 거예요.

그래서 히브리서11장13절에 보면 뭡니까? 그들이 나그네지요. 나그네인데 갈 곳이 있지요. 주님께서 친히 예비하신 하늘의 큰 성을 예비했다. 되어 있잖아요. 이게 감동이 와야 돼요. 감동이. 이 세상 같으면 돌아갈 기회가 있겠지만, 명절날 다시 복잡하지만 고향 돌아가겠지만, 그게 아니고 저희에게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야~ 이거 설명해야 돼요.

이거 설명해야 됩니다. 자, 마태복음5장에서 니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 했는데, 하늘에 쌓아두는 방법 누가 적당한 방법을 이야기해보세요. ①번 돈을 내던진다. ②번 교회에 낸다. ③번 놓치지 않을 거예요. 자기가 꼭 쥐고 있는다. ④번 방법 없다. 몇 번이겠습니까? 방법 없어요. 전도서에 보세요. 이 세상에는 이왕 허무한 거 재미나게나 살아라. 일본이나 놀러가고. 그냥 재미나게 살아라. 미련두지 말고 살아라. 미련 둘 거 없어. 이거 뭐 아름다운 강산인데 자손에게 물려주고. 아~아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라. 자유롭게 이 세상을 포기한 모습으로 구애받지 말고 살아라 이 말이지요.

만약에 내일 밤에 유집사님이 이사 간다면 매일 평범하게 살다가 큰 넓은 아파트에 이사 간다면 내일 아침에 이사 차 온다면 오늘 저녁에 쓰레기 안내놓지요. 쓰레기 분리수거 그거 걱정 안하지요. 어차피 집안에 있는 게 전부다 쓰레기니까. 안하지요. 그것처럼 이 세상에 대해서 그다지 기대하지 마라. 대통령 누가 되던지 홍준표 안됐다고 서러워할 필요 없고. 이 동네 이야기 아닙니다. 저 대구동네 이야기입니다. 어차피 이 땅은 사는 쓰레기고 우리 사는 꼬라지보면 쓰레기에요. 우리 사는 게 쓰레기라니까요. 자기밖에 모르거든요.

강남이나 해외 명품 파는데 보세요. 쓰레기들이 쫙 나열되어있는데 이게 철따라 쓰레기가 바뀌어요. 쓰레기 트렌드가 바뀐다고요. 이왕 쓰레기 같은 거 이쁜 쓰레기. 어차피 쓰레기는 쓰레기고. 그러니까 좋은 거 뭐 너무 거절하지 마세요. 어차피 쓰레기니까. 이쪽 쓰레기도 해봤으면 저 쪽 쓰레기도 한 번 입어보면 되지요. 마음을 그리 잡숴라 말입니다. 그리.

그걸 가지고 뭐라 했는가, 고난이라 말이죠. 고난이라 해서 지질이 궁상 떨며 사는 게 고난이 아니고 요번에는 강남 쓰레기 가보고 캐나다 쓰레기도 한 번 구경 가보고. 스위스 로마 쓰레기도 이태리 쓰레기도 어떤 쓰레기 있나 가보고. 그리고 크루즈 지중해 쓰레기도 한 번 가보고. 그렇게 느끼는 안목. 예수님이 빠져나간 세상이 얼마나 개판 같은 세상이었는가를 우리보고 경험케 하는 거예요. 그게 그냥 니 마음대로 사세요. 그냥 사시면 되는 겁니다. 그냥 사세요.

지난 수요일날 이야기했지만 참 중요한 기도 이야기했어요. 절대로 신앙생활하지 말라고. 그러면 마귀한테 쫓기게 됩니다. 신앙생활하지 마시고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생활로 무장해버리면 자기 신앙생활 한 게 아까워서 자꾸 테스트를 하려해요. 내 기도발 어느 정도 될까? 이번에 헌금 목돈 했는데 어떤 결과 나올까? 막 시험하게 되면, 마귀가 “더 해야지. 그 정도 해서 먹히겠어. 더 해야 돼. 기도도 오래 해야 돼. 성경 석장? 두 장 더 해야지. 신앙이 늘어나면 성경도 더 봐야지.” 이런 식으로 자꾸 일곱 귀신이 와가지고 애를 먹여요. 아예 턱턱 숨이 막히게 한다니까요. 숨이 막혀가지고 뭘 할 수가 없어요. 부담되게 되지요.

그런데 여러분이 그걸 알아야 돼요. 마귀가 있는 이유가 그게 맞아요. 우리한테 딱 속성에 죄로 태어난 게 맞는데 그렇게 할 때, 숨이 턱턱 막히는 그것을 이제 오늘 본문 들어가 봅시다. 오늘 본문13장 20절 보면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언약의 피로 되어있지요. 언약의 피. 요거 이야기할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세상은 법망으로 짜여져 있다.” 앞에 부사를 붙인다면 촘촘히. 세상은 법망으로 짜여져 있어요. 007영화 마지막 대목쯤 보게 되면 007이 애쓴다. 007영화나 미션 임파서블을 보게 되면 그 요원들이 그걸 지키기 위해서 적외선 쫙 깔아놨는데 아주 곡예를 하지요. 기어갔다가 타넘고 갔다가 할 때 안경을 써야 보여요. 그냥 보면 경호에 다 걸리니까. 안경 써가지고 적외선 있지만 막 타잖아요. 이 법망이 쫙 깔려져있어요. 법망이.

법망이 깔려있는데 그 법망을 누가 이걸 인지를 하느냐 하면, 누가 느끼느냐 하면 바로 우리의 천주교에서 말하는 양심이 인지를 해요. 양심이. 어떻게 부모가 돼 어가지고 자식한테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까? 대번 법망 하나 걸렸어. 그러면 찍! 하고 억! 하고 그래요.

어떻게 남편이 배고픈데 밥을 안 해줘? 그럼 또 찍! 하고 걸린 거예요. 그것도 밥인가? 정성을 들여야지. 그럼 정성들여 했다. 반찬이 3가지야? 5가지는 해줘야지. 돈 번다고 고생했는데. 그럼 5가지한다. 신선한 재료를 사야지. 오늘 마트에서 사와야지. 이건 끝도 없어요. 끝도 없어.

KBS2에서 무슨 프로가 있느냐 하면 살림을 되게 못하는 아줌마가 하도 살림을 못해가지고 얼른 방송국에 요청을 했어요. 요청을 하니까 셰프가 와가지고 냉장고에 남은 반찬을 처리하면서도 맛있게 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그 프로가 있었어요. 남편은 아내가 반찬을 냉장고에 들어갔다가 그대로 가지고 오는데 1주일동안 그대로 가지고 와요. 반찬이 똑같아요. 여자가 요리를 할 줄 모르니까. 요리가 전혀 안 되는 사람이 있어요.

우유를 하면 벌써 유효기간 1주일 넘은 우유는 잘 안상하지만, 그래도 1주일 넘은 걸 가져와가지고 자식들 불안 불안한 거예요. 남편은 콘프레이크해가지고 우유해서 지가 먹고. 여자보고 반찬 좀 하라 하면 여자가 못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니 결혼했잖아. 니 먹고 싶거든 니가 알아서하던지. 어쩔 수 없어요. 왜냐 하면 자기는 요리를 못하니까. 만약 그 요리해보세요. 더 못 먹어요. 그럴 때 셰프가 다 요리해주잖아요.

지금 이 세상의 이 법망은 우리가 성취할 수가 없어요. 거기다가 마태복음5장 산상설교까지 더 추가시켜놨으니까 맹세하지 말라 했지요. 기도할 때 뭘 달라고 기도하지 말라는 거예요. 달라고 기도 안하면 기도할 이유가 없잖아요. 이것 달라 저것 달라 주께서 니한테 뭐가 있어야 될 것을 주께서 아시기 때문에 니 입을 통해서 이것 필요합니다. 저것 필요합니다. 하지 말란 말이야! 밤새지 말란 말이야! 하는 것처럼. 그런 기도 하지 말란 말이야!

그럼 기도 안하면 뭐 할 건데? 그런데 우리 교인들이나 어떤 사람을 보면 말을 여기까지 딱 들어요. 그리해놓고는 기도할 게 없다고 나한테 항의가 막 들어오는데. 기도할 거 없으면 안하면 되지 항의는 할 필요 없지요.

주의 법망에 대해서는 우리가 못 지킵니다. 기도 하나도 못 지켜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할 수가 없어요. 그 놈의 양심 때문에. 자, 이걸 어떻게 할 거냐. 이 법망 어떻게 할 거예요? 10분 쉬고 해야 되지요.
 공은주(IP:119.♡.152.148) 17-05-26 14:46 
안양20170512b히13장20절(법망)-이 근호 목사

자, 봅시다. 아까 법망이라 했지요. 법망. 갈라디아서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율법으로 전 세계를 율법으로 촘촘하게 깔아놨어요. 왜 깔아놓는가, 어떤 사람도 저주 받을 수밖에 없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율법을 준 것은 저주아래 있게 함이라. 법망이 쫙 깔렸지요. 그러면 제가 법망이 깔렸다 한다면,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할 거예요.

“목사님, 그건 예수 믿는 사람 이야기고. 안 믿는 사람은 지 맘대로 살데요.” 안 믿는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게 아니에요. 자기 욕망대로 살아요. 그런데 그 욕망대로 사는 게 자기한테 점점 자기를 불리한 쪽으로 몰아가는 힘이 됩니다. 가만히 있으면 별 탈 없는 것을 계속 욕망대로 설치면 설치는 대로 자기를 파면의 길로 몰아넣는 뭐가 되느냐 하면 짐이 돼요. 짐.

뭐냐 하면 안 믿는 사람은 인생 자체가 짐이에요. 자기 등위에 자기를 삼키는 독사 키운다. 이리 보시면 됩니다. 독사. 내면에서 나온 독사가 등을 타가지고 독사가 시키는 대로 갈 수밖에 없어요. 도박하는 주부들 보세요. 도박 왜 합니까? 돈 따려고 가는 거예요? 처음에는 그럴 수 있는데 그 다음부터는 돈 따려 하는 게 아니에요. 그 짜릿한 그 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독사가 등을 탄 거예요. 독사가.

술 중독된 사람들. 모든 중독이 다 그래요. 축구에 중독, 골프에 중독, 낚시에 중독, 등산에 중독, 사냥에 중독, 담배에 중독, 전부 다 독사 다 키운 거예요. 자기가 한 거예요. 자기는 지 맘대로 하는데 절대로 자기 마음이 아니에요. 독사의 마음이지요. 독사가 마음대로 시키는 대로 자기는 그럴 수밖에 없어요. 김유신장군 이야기 있잖아요. 전쟁을 해야 되는데 자기 말이 귀생 집에 턱하니 가는 거예요. 평소의 말은 입장은 이래요. 평소에 니 하던 대로 했을 뿐이에요. 그런데 어디 이게 칼 들고 말의 목을 쳐버리잖아요. 말이니까 목을 칠 수 있는데 인간은 자기가 자기를 지배하는 악마를 목을 못 칩니다.

인간은 악마가 이끄는 대로 가야 돼요. 그래놓고 하는 말이 나는 교회도 안다니고 좋다. 내 맘대로 한다. 이러거든요. 나는 하나님을 안 믿는 이유가 뭐냐, 나는 젊을 때 내 맘대로 살고 싶다는 거예요. 인간은 지 맘대로 사는 게 없어요. 지 욕망대로 살아요. 지 욕망대로.

돌아서서 말합니다. 내가 술 안 먹는데 내가 왜 술을 먹었지? 다시는 술 안 먹고 운전대 잡는다 하더니 내가 왜 잡았지? 사람은 피조물입니다. 여러분, 이 피조물 아세요? 뭔 뜻입니까? 자기가 창조 안 했잖아요. 그럼 창조를 누가 하느냐, 주님이 했겠지요. 주님이 했는데, 그 창조 세계에 주님만 계시는 게 아닙니다. 바로 악마가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주님은 악마를 통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악마의 종이 되게 만들었습니다. 악마의 종이 되고 다시 그 중에 얼마를 주님의 종으로 되게 하는 그 과정을 통해서 경로지요. 아까 패스. 경로를 통해서 예수님의 주되심을 증거케 하는 거예요. 방금 이야기한 이것이 성경 전체 복음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이름 주를 위해서 하는 거예요. 제가 이리 이야기해가지고 여러분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게 되면 여러분들이 이런 공격을 받을 수 있어요. 성경에 그런 게 어디 나오느냐, 시편135편4절, “그 이름을 찬양하라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로다” 명확하지요. 명백하지요.

교회 가는 사람들이 왜 교회에 갑니까? 나의 행복을 위해서. 나의 가정을 위해서. 아니지요. 아니지요. 아니다 말이지요. 성경은 뭐라고 되어 있느냐, 너를 위해서 주님이 계신 게 아니고 여호와라는 자기 이름을, 여호와 이름을 찬송하라. 여호와 이름을 한 자로 주라 해요. 하나님이 아니고. 장차 오실 주님이 여호와 이름이에요. 이름으로 오신다. 이 말이에요.

이름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세계에서는요, 보이지 않는 것이 인간세계, 피조 세계에서는 전부 다 뭘로 바뀌느냐 하면 보이는 것으로 바뀌어요. 보이는 것으로 바뀌어버리면 이게 한계가 있다니까요. 보이는 것을 표현하는 것을 언어라 하는데, 언어는 한계가 있어요. 그러니 성경의 원어라는 게  없어요. 그냥 언어에요. 히브리 언어, 헬라 언어지. 언어란 그 당시 살던 사람 이야기에요. 그냥. 무슨 이게 신비로운 능력이 나오는 게 없어요. 언어에 무슨 신비로움이 나옵니까? 각자 현미경으로 보면 점들의 연결일 뿐인데. 종이에 인쇄된 것뿐인데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쨌든 간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보이는 것은. 허상은 아니고 그냥 허상을 대리한 거죠. 이걸 가지고 아까 뭐라고 했느냐, 은유라고 해요. 알레고리라고 하는 거예요. 은유. 지금 이 세상은 은유의 바다에요. 은유의 바다고 꿈이라고 해요. 꿈. 꿈같은 거예요. 꿈꿀 때는 꿈이 현실인 줄 알지 꿈인 줄 몰라요. 꿈은 언제 꿈인 줄 아느냐 하면 꿈을 깰 때 꿈인 줄 알지요.

그래서 주님은 이 세상을 다 끝내고 난 뒤에 끝난 그 안목을 우리에게 줘버리면 성도는 알아요. 이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성도 아닌 사람은 나는 하나님도 안 믿고 나는 좋다. 내 마음대로 산다. 내 마음대로 사는 게 그게 꿈속을 헤매고 있는 거예요. 꿈속을 헤매는 거예요. 아까 종이를 뭉개져버리면 종이가 구겨져버리면 같이 구겨져서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이 세상에서 언어라 하는 것은 먼저 사물이 있고 허망한, 꿈같은 것이 먼저 있고 거기다가 아담보고 이름을 지으라 했다 말이죠. 그런데 유일하게 딱 실체가 있고 이름을 짓는 게 아니고 실체는 없는데 이름부터 나온 게 뭐냐, 여호와 이름뿐이에요. 여호와 이름은, 여호와 이름이 하는 일들은 이 세상 사람들이 납득이 안 돼. 납득이. 왜냐하면 바다가 갈라졌다는 것은 납득이 안돼요. 그런데 주의 이름으로 지팡이 하니까 갈라진 거예요.

사람들은 신기하다고 본거지요. 히브리인들도 신기하고 애굽군대도 신기한데 주님의 입장에서는 신기한 게 아니고 무지하고 어리석지요. 무지하고 어리석은 거예요. 인간은. 자기 보이는 것 그게 전부라고 아는 겁니다. 보이는 것을 요즘 말로 하면, 아까 꿈이라고 했는데, 요즘말로 하면, 이걸 과학이라고 합니다. 과학.

과학이야기는 내가 요번 주일 낮에 약간 설명을 했지요. 주일 낮에 아카시아향기 이야기했고 수력발전소 이야기한 거 기억나십니까? 5월달 되면 우리 동네에 아카시아향기가 퍼졌지만, 사람들은 거기에 머물지 않고 자기 입속에 아카시아 향기를 계속 하기 위해서 껌을 만든다고 했어요. 그러면 아카시아의 존재 의미가 껌 씹으라고 준 겁니까? 아니지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만들 때 껌이 돼버리고 아카시아 향기는 분명히 보이는 거지만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아카시아 향기를 줬건만 인간은 보이지 않는 쪽으로 가는 게 아니고 과학적으로 가버립니다. 향기 좋네. 저걸 아카시아 껌으로 만들면 더 좋겠다. 이렇게 나와 버려요.

물이 있다. 물이 왜 흐르는지 몰라요. 그런데 인간들은 위에서 아래쪽으로 에너지 위치 내에서 운동에너지로 바뀌게 되면 거기에 터진을 돌려서 구리에다가 전류가 흐르게 되면 팽팽 돌리게 되면 전자석의 원리에 의해서 회전해버리면 전기가 흘러요. 그 전기를 가지고 유지를 시키고 피라밋을 하게 되면 열을 강화하고 필라멘트로 빛을 유지하는데 백열전구를 1889년도에 만들었어요.

그걸 만들어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밤새 공장 밤 근무해도 괜찮아요. 그 밤 근무하게 되면 거기서 노동조합이 생겨요. “일 고만 시켜라! 우리도 이제 자고 싶다.” 그러니 사회라 하는 것은 기술발전이 에너지의 다룸에 의해서 사회가 변천이 된다는 이론이 나온 겁니다. 인류의 사회는 에너지를 어떻게 다뤘느냐, 곡물에너지냐 아니면 지하자원 석탄이냐, 석유냐 나중에 원자력이냐 이것에 따라서 사회 자체가 달라져요. 사회가 달라지면 아까 이야기한 양심도 달라져요. 양심도.

자, 하나님의 이름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생각했던 그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에요. 그럼 인간들 세계에서는 누굴 호칭할 때 뭘 부릅니까? 이름을 부르지요. 그럼 인간들 언어세계에서는 호칭을 부른 자가, 이름을 붙인 자가 갑이 되고 이름을 당한 사람은 을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목사나 대통령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 안돼요. 종속의 의미를 붙여서 해야 돼요. 문재인 대통령 그냥 하면 안돼요. 님 자를 붙여야 돼요. 문재인 대통령 각하. 대통령 님자를 불러야 돼요.

우리교회에 보면 결혼한지 30년 됐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자기 아내이름을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있어요. 이름을 불러요. 처음에는 좀 그랬는데, 이제 보니까 굉장히 이게 아가서 내용대로 같아요. 내 누이여, 누이같이 하는 거예요.  처음부터 가족이었던 것처럼 그렇게 호칭을 하더란 말이죠. 지금은 굉장히 아름답게 보여요. 처음 볼 때는 약간 이상했어요.

동등 됨이 훼손되지 않는가 생각했는데. 이상규 집사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아이고~ 이름을 이야기해 버렸네. 연선아~ 이렇게 불러요. 아내 이름을. 그런데 그 연선집사님은 아주 좋아해요. 이름을 표현하는데. 그런데 내가 생각하건데 한 번 바꿔보자. 상규야~ 라고 부른다면 참겠느냐, 저 쪽의 연선아~ 는 되는데, 상규야~ 라고 부를 때, 과연 상규가 가만히 좋아하겠는가,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종속의 의미가 있습니다.

아담으로 하여금 앞에 동물들 지나가면 이름을 불렀다는 말은 어차피 다 니한테 종속될 존재다. 니는 책임지고 저들로 하여금 영광 돌리게 하라. 책임을 지고. 아담의 이름으로. 그리고 여자가 먼저 태어났습니까? 남자가 먼저 태어났습니까? 남자가 먼저 태어났지요.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 때에 어차피 남자, 여자 만들 걸 처음부터 진흙가지고 두 개 만들면 안 됩니까? 두 개 만들고 두 개에다가 성령 집어넣고 만들면 되는데 왜 달랑 하나를 만들어놓고 갈비대가지고 왜 뽑아서 절차를 일부러 꾸며 나가느냐 말이지요. 그 절차에서 뭘 아느냐 하면 호칭하는 자와 호칭 받는 자를 생기게 만드는 겁니다. 이름의 의미. 내가 여자라 함으로서 여자는 남자가 있음에 여자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여자는 단독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남자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여자가 있는 겁니다. 남자 있음을.

물론 죄 짓고 난 뒤에는 그 남자가 예수님이지만. 남자가 예수님이에요. 남편 사랑하기를 주 안에서 해야 되지, 그냥 남편 사랑하면 안돼요. 그건 동업자가 되니까. 같이 사업해서 같이 털어먹고 할 동업자 되니까 안 되고 주안에서에요. 주 안에서 라는 말은 남자 여자 사이에 둘이 맺어준 관계가 주님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요번에 주례사 한 번 들어본 적 있습니까? 거기 주례사에서 제가 강조한 것은 ‘이상한 현상’이에요.

왜 남녀가 서로 사랑하느냐 말이죠. 모든 남자가 다 모든 여자를 사랑하지 않고요, 어떤 여자가 오면 튕겨버려요. 재수 없다고. 그런데 특정여자에 대해서는 사랑을 표시하는데 누가 그렇게 했고,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느냐 말이에요. 이게 특이성이다 말이죠. 원래 인간은 누굴 사랑하지 않게 되어있어요. 왜냐하면 태어나면서부터 자기 밖에 모르는 체로 교육받았어요. 가정에서. 자기밖에 몰라요.

자기밖에 모르는데 어떤 길을 가는 여자를 보고 반했다. 아낌없이 모든 걸 다 주고 싶어 해요. 아낌없이. 차 니 탈래? 니 해. 가방? 골라잡아. 두세 개 골라잡아. 물론 돈 있는 사람한테만 해당되지만. 저도 제 아내한테는 결혼할 때 그렇게 했어요. 대구 대명시장에 가가지고 먹고 싶은 거 마음대로 골라잡아 먹어. 뭐냐 하면 납작 만두, 떡볶이, 김밥, 요정도 됐어요. 오늘 마음대로 먹어. 오늘 내가 돈 뿌린다. 결국 납작 만두 먹는데요. 몇 년 후에 가봤는데 맛없어요. 그 때는 맛있었는데 지금은 맛이 없어요. 입이 돋았나봐. 입이 교만한 모양이지요.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에게 왜 아낌없이 주는 겁니까? 왜 주는 거예요? 여자도 마찬가지고요. 왜 그러는가, 이게 누가 개입했다는 겁니다. 개입한 거예요. 설명이 될 수 없어요. 개입한 겁니다. 그러니 부부가 된다는 것은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게 아니고 이건 하나님께서 그렇게 짝지어 준 거예요. 짝지어 줬지요. 인간은 이미 죄인이지요. 죄인에게 짝지어 줬으니까 거기서 뭐가 발생되겠습니까? 죄가 발생되지요. 시커먼 죄인 짝지어 줬잖아요. 그러면 관계가 뭐냐, 시커먼스가 나오겠지요. 여기에 뭐가 나오느냐, 희생이 나오면서 이 관계에서 주님이 등장합니다. 십자가 복음이.

그러니까 법망을, 사랑이 먼저고 그 다음에 헤어짐은 안 돼! 라고 이야기함으로 말미암아 도저히 이것은 같이 살아도 이미 헤어진 관계에요. 인간은. 도파민의 역할에 의해서 좋다고 하는 거 몇 개월 안갑니다. 몇 년 안가요. 그래서 제가 울산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차는 왜 5년마다 바꾸는데. 배우자는 5년마다 바꾸면 안 되는 이유가 뭔데? 나이50쯤 넘으면요, 야~ 우리 고만 살자 정말. 니나 나나 지독하다. 왜 이리 붙어 사는데? 서류가 복잡해서 그냥 사는 거예요. 자식도 있고 하니. 어차피 각방 쓸 거. 여름철에 덥다고 각방쓰기 시작해서 겨울 지나도 계속 쓰고 있고.

어떤 말씀도 한 몸이 한 몸 되는 인간 없어요. 이 땅에 없다니까요. 같이 살고 같은 침대에 눕다고 해서 사랑하는 거 아닙니다. 그냥 관성의 법칙이죠. 사랑의 물리학 하는 게 있거든요. 왜 질량은 부피에 비례하지 않는가. 이리 나온 시가 있어요. 도깨비라는 드라마에 나와요. 도대체 인간은 내가 어떻게 하는 게 아니고 나를 장악하고 있는 죄가 나를 마음껏 부린다니까요. 물론 그 죄는 뒤에서 예수님의 조정 받아요. 악마가 우리를 다룰 수 있지만, 악마의 모든 그것도 예수님의 허락 맞고 하는 거예요. “고것 까지만. 욥한테는 가서 욥의 생명은 빼앗지 마! 그건 내가 허락하지 않았어.” 허락 하에서만 마귀가 우리를 시험한다 말이죠.

그럼 마귀는 뭐라고 합니까? 그 못 지킬 것을 뻔히 알면서도 우리가 살아온 게 나 잘났어! 나는 남보다 더 착해! 이걸 어릴 적부터 계속 심어줬으니까 자기 의를 유지하고 그걸 지켜내는데 온 전력을 다해요. “참, 니 같은 여자니까 내가 평생 살아준다.” 이 말 자체가 뭔 뜻이에요? 그만큼 나는 인내성 있고 훌륭한 남편감이라는 거죠. “으이구~ 남 말하네. 나는 어디 니하고 살고 싶은 줄 아나. 나도 착한 아내 만만치 않거든. 나 신사임당이거든.” 결론은 이거에요. 주께서 붙여주니까 아직까지 헤어질 어떤 상황을 허락지 않은 거예요. 이게 법망입니다.

그건 왜냐, 우리에게 행복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법이 어떻게 작용하는가. 이걸 보여줌을 위해서. 이걸 두 자로 하면 ‘세상’이라 합니다. 이걸 세상. 우리는 이 어두움의 세상에 속해요. 세상에 속하는 것은 법을 확 집어넣어줘 버려요. 법망으로 확 깔아놓으면 그 법망가운데 인간이 얼마나 잘난 체하고 변명하고 구차한 핑계를 매일같이 아침, 저녁마다 핑계 대는데 아침, 저녁 핑계 대는 걸 가지고 4자로 ‘새벽기도’ 천주교 같으면 ‘새벽미사’ 아침, 저녁마다 핑계 대는 거예요.

오늘도 어려운데 나왔으니까 주께서 아시지요? 복은 알아서 주세요. 이런 식으로. 복 받을 자격도 없는데 계속 복 달래. 내 하나 정성 봐서.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이걸 봐서. 복 달래. 왜 줘야 되는데? 잘났으니까. 왜 잘났는데? 그건 묻지 말고. 하나님 그건 묻지 마세요. 타고난 보석이니까.

법망이 있는데 어떻게 잘난 사람이 있습니까? 로마서3장처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그러면 의인은 없나니 의인이 하나도 없으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처참하게 살아도 우리는 군말 하지 말아야 돼요. 우리가. 이 정도 망가져도 더 망가진들 우리에 대해서 반항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게 사도로 하여금 고난의 길을 가게 하신 거예요. 고난의 길을. 사람이 어려울 때는 밥 먹고 잠자는 것도 너무 너무 감사해요. 화장실에 뜨신 물 나오는 거 있잖아요. 6.25때까지 갈 거 없이 60년대만 해도 이런 부자동네 어디 있습니까? 그건 진짜 옛날 60년도에 구봉서, 서영춘이 나오는 영화에 나오는 부잣집 동네, 그 동네나 나올 일이지. 소파 이렇게 있고 비실용적인 소파 있잖아요. 들지도 못하는 거. 부자 흉내 내려고 하는 계단으로 해서 2층 올라가는. 그 동네만 뜨신 물 나오지 나머지 동네에는 연탄가스해서 그날 밤 안 죽고 살면 그 다음날 또 살고. 그 다음 또 연탄 피워서 또 연탄가스 안 체이면 그 다음 살고 그런 시절이었어요.

저는 연탄가스 마시고 3번 죽었다 살아났어요. 놀라지 마세요. 다들 그렇게 안 살았습니까? 전부 다 연탄가스 새는 거예요. 어머니가 늘 가는데 잊어버리면, 또 보일러 공사도 엉망으로 해서 군데, 군데 가스 다 새네. 턱 턱 갈라져가지고. 옛날 시멘트도 없었는 모양이라. 시멘트도 이상히 발라가지고. 군데 가스가 다 새가지고 온 식구가 다 캑캑 토하고 다 그랬어요. 어려울 때.

1945년도 2차 대전 미국에서 굉장히 어려웠었어요. 이 사람들도 전쟁한다고. 2차 대전 끝나고 난 뒤에 그 사람들이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옛날 어려울 때를 생각해가지고 노래가 열심히 일하자. 바르게 살자. 착실하게 살아야 하나님의 신의 복을 받는다. 이런 식으로 기독교 의식이 있어가지고 윤리로 했는데.

그 다음 2차 대전 이후에 경제가 급속도로 발달하고 난 뒤에 자식들이 고생을 모르는 거예요. 고생을 모르는데 어른들은 “우리 할 때는 힘들었는데 공부를 안 해! 이제는 이렇게 잘 사는데 공부도 안 해.” 막 따지니까 젊은 애들이 반항기 하면서 나온 장르가 뭐냐 하면 로큰롤입니다. 로큰롤의 대장이 누구냐, 엘비스 프레슬리에요. 반항과 저항이에요. 이게 계속 반복됩니다. 1990년도에 나왔던 랩입니다. 랩이 왜 나옵니까?

자본주의 격차가 생기니까 거리에 있는 아이들이 기존의 모든 노래 가락을 반항투로 막 내뱉는 것이 랩이잖아요.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 양화대교에서 매일 드라이버하는 지 아버지 생각하면서. 자이언티가 불렀던 랩있잖아요. 랩하는 것이 전부 반항기에요. 반항기.

우리집에는 매일 나 홀로 있었지
아버지는 택시 드라이버
어디냐고 여쭤보면
항상 '양화대교'

아침이면 머리맡에 놓인 별사탕에 라면땅에
새벽마다 퇴근하신 아버지
주머니를 기다리던
어린 날의 나를 기억하네
엄마 아빠 두 누나
나는
막둥이, 귀염둥이
그날의 나를 기억하네
기억하네

행복하자 우리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그래 그래

내가 돈을 버네 돈을 다 버네
엄마 백원만 했었는데
우리 엄마 아빠
또 강아지도 이젠 나를 바라보네
전화가 오네 내 어머니네
뚜루루루 아들 잘 지내니
어디냐고 물어보는 말에
나 양화대교 양화대교

엄마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그래 그래
그때는 나 어릴때는 아무것도 몰랐네

그 다리위를 건너가는 기분을
어디시냐고 어디냐고 여쭤보면 아버지는
항상 양화대교
이젠 나는 서 있네 그 다리 위에


행복하자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그래 그래

나이 많은 사람들은 저게 노래야? 저 랩은 벌써 우리 있을 때 있었거든요. 흥부가 어떻고! 흥부가 어떻고!

그러니까 뭐냐하면 이 세대가 반항하는 대상 찾아서 헤매는 거예요. 반항하는 대상 찾아서. 그래서 제가 얼마 전에 설교시간에 그랬잖아요. 모든 세상은 분노한다고요. 모든 게 분노해요. 젊은 아가씨들이 나이트클럽에 가는 게 지 분노를 푸는 겁니다. 기성세대에. 대구시내에 중소기업 사람들 없어서 난리에요. 일할 사람이 없어가지고.

그런데 서울에 오면 25%가 젊은 사람들이 실업자에요. 안가요. 중소기업에. 지 장래를 생각해서 안 간다고요. 이래가지고 내 몸 망가지겠다. 사실 중소기업에 다녀보면 몸 망가지는 거 맞아요. 환경이 장난이 아닙니다. 진짜 환경 나빠요. 시각, 청각, 촉각 다 나빠요. 중국에서 뭐 날아온다고요? 공장 안 가봐서 그래요. 공장에 가면 미세먼지 그거 양반입니다. 이렇게 맑은 하늘을 두고 마스크하고 이상하다. 공장에 가보세요. 왜 끝나고 난 뒤에 소주에 삼겹살 먹는 이유가 뭡니까? 진폐증 다 걸렸는데. 몇 년 하면 진폐증 다 걸려요. 그래야 거기서 단가 빠지는 거예요. 그래서 장사가 되는 거예요. 힘들기 짝이 없어요. 법망에서 인간은 주님이 주신 이 저주에 아까 뭐한다 했습니까? 반항한다 했지요. 오늘 제목은 반항입니다. 반항하는 세대. 반항하는 세상. 

자,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아까 이 세상은 뭐로 되어있다? 언어로 되어있다. 언어는 뭐로 되어있다? 은유다. 은유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식으로 설득시키지요. 그런데 거기에 예외의 규정이 있었습니다. 뭐라 했습니까? 주의 이름이죠. 주의 이름이 딱 오게 되면 이 세상은 갈라집니다.

세례요한이 오면서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니는 누구?” 하니까 “니는 누구야?” 세례요한은 말을 안 해요. 나 누구다. 라고 말을 안 해요. 자기가 눈에 실체가 있더라도 세례요한의 기능은 이 세상의 없는 쪽의 기능을 부여받아서 나와요. 그래서 나는 오실 분의 스피커다. 소리다. 오실 분의 소리에요. 이 오실 분이 소리니까, 그냥 오시는 게 아니고 이 세상과는 다른 세상을 몸에 감고와요.

그 세상이 무슨 나라냐 하면 그게 바로 심판의 나라입니다. 심판의 나라는 의미가 있어요. 뭐냐 하면 심판 없는 곳에 구원도 없어요. 유대인들은 심판 안 거치고 구원받으려고 한 겁니다. 이게 주님의 원리에 위배되는 거예요. 심판해도 마땅합니다. 하는 자에게만 구원이 주어줘요. 자기를 부인하는 자에게만 구원이 주어줘요.

“나, 부처 믿을까? 예수 믿을까? 예수 믿어야지.” 이런 과정 구원 없어요. 반드시 뭐가 됐던 목사가 됐던, 장로가 됐던 나는 심판 받아 마땅하다. 이러하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서는 구원의 나라가, 하나님나라가 안 나옵니다. 심판의 나라가 오지요. 뭐가 있다 했습니까? 이름은 없어요. 기능만 있지 이름은 없지요. 이름이 없다는 것은 이 땅에는 실체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름이 없고 다른 나라가 왔을 때 예수님을 통해서 이 땅에 오게 되면 결국 이건 뭐냐 하면 저항과 마주치지요. 마주쳐서 여기서 아까 뭐가 나온다고 했습니까? 저항이 나오고 반항이 나오는 겁니다. 이쪽은 뭐가 되느냐 하면 침노함이 되고, 하늘나라는 침노함이 되고 이쪽은 거기서 어디를 우리나라를 공격해! 반항하고 저항합니다.

요 가운데 마주침이 있겠지요. 고 마주침을 가지고 오늘본문 13장 20절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언약의 피’라고 설명합니다. 아~ 언약의 피하는데 이거 몇 분 걸렸어요? 80분 이상 걸렸어요. 언약의 피. 언약의 피를 이렇게 설명해야 돼요. 이렇게 설명하지 않고 “여러분, 예수님이 피 흘렸습니다. 피 믿으면 구원받아요.” 이렇게 되어버리면 어디 파운데이션 찍어 바른 것처럼 피 찍어 바르면 구원 되는 줄 알고 있어요.

그러니 뭐냐 하면 ‘아~ 행함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받는구나! 그러면 전에는 절에 가서 행함 했는데 나는 이제 교회 왔으니까 믿는 걸 소유해야지.’ 이리 되지요. 그럼 뭐가 가만히 있어요? 행하는 나도 멀쩡하고 가지는 나도 멀쩡해버리면 나는 멀쩡한 가운데서 구원받는 식이 되는 그런 법칙은 피 앞에서는 없어요. 그래서 교회건 성당이건 내가 이단이라고 하는 이유가 그 온 사람들로 하여금 심판 속에 집어넣어야 되는데 말씀으로, 전부 다 멀쩡하다고 장려하고 있어요. 독려하고 있어요. “아이고, 멀쩡하더니만 우리 교회 와서 더욱 더 멀쩡해지시기 바랍니다.” 그러고 있다 이 말이죠.

“옛날에는 몰라서 나쁜 짓했지만 이제는 알았으니까, 원래부터 양심이 있는 사람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하나님의 형상은 생명체니까 주께서 은혜 주셔서 교회까지 오셨으니까 이제는 소홀히 했던 하나님의 형상 본받기에 매진합시다. 나와 같이 1단계, 2단계, 제자 훈련받고 교육받으시고 피접하시고 이런 거 다 부흥회하시고 기도발 발휘하시면 여러분 전부다 훨씬 더 개선된 질이 개선된 사람이 되어서 천국 갈 겁니다.” 이렇게 되어버려요. 이건 유대교와 똑같은 거예요.

마주침이 없어요. 마주침이 없으면 뭐가 없다? 피가 안 생기지요. 주께서는 피가 기어이 생길 때까지 계속해서 그들로 하여금 니가 저항 안하고 배기나 보자. 하는 모든 종교가 몽땅 일어나서 하나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배신하는데 가표를 던지게 만들어요. 되지도 않는 바라바 살인강도를 해가지고. 어느 거 할래? 본디오 빌라도가 지 맘대로 하는 게 아닙니다. 주께서 하라 하셔서 하는 거예요.
예수를 죽일까? 바나바를 죽일까? 하니까 예수를 죽이고 저 자를 풀어주세요. 아까 이야기했지만 안 믿는 사람들이 지 맘대로 사는 게 아니에요. 지가 결정하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라 하는 그 힘에 의해서 모든 행동을 결정하는 겁니다. 명절날 모든 가족이 모여가지고 자, 고스톱한번 치자. 이건 여자들끼리 치고. 남자들끼리는 장기 할까? 바둑 할까? 하거든요. 뭐 지적으로 논다 이거지요. 자, 장기 할까? 바둑 둘까? 선택하는 거 무슨 힘입니까? 그것은 복음을 저항하는 힘이지요.

고스톱치자. 한 판 치자. 뭡니까? 저항하는 힘이에요. 고스톱칠 때 왜 칩니까? 그냥 하면 안 되고 형님, 내기 한 번 합시다. 10원 뺑이 할까? 100원뺑이 한 번 합시다. 10원뺑이는 노인정에서 하는 거고. 그럼 1000원짜리 하나 할까요? 오늘 형님 돈 내가 따먹는다. 나중에 형님하다가 술만 들어가면 그 때부터는 욕하고 싸움까지 가고.

이게 뭐냐하면 예수님 없이도 우리는 재미나게 삽니다. 하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나는 그리스도가 그렇게 아쉽지 않습니다. 복음이 그렇게 고귀하지 않고 나는 내 시간 행복하게 보내는 고스톱치고 바둑 두는 이 시간이 내가 선택한 내가 결정한 내 의지로 선택한 나의 행복 이룸. 행복 달성이란 말이죠.

그 사람들이 뭘 모르느냐 하면 이걸 모르는 거예요. 법망을 모르는 거예요. 법망을 몰라요. 그렇게 재미있으면 뭐가 재미  없어요? 십자가 복음만 재미없는 거예요. “자, 형님 한 번 쳐 봅시다. 화투 돌리고.” “그런데 말입니다. 빨간 단풍을 보니 예수님의 십자가가 생각나네요.” “그런 소리 하지 말라 했잖아. 니 나한테.” “자, 장군아! 십자가 받아라!” “니 그런 소리 하지 마!” “대마가 다 죽었네요. 십자가 죽음 앞에서 모든 인간은 185,000명이 죽었다는데.” “그런 소리 하지 말라 했지.”

자연스럽게 사는 게 뭘까요?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귀하고 사랑스럽다는 게 가장 자연스러운 거예요. 법망만 끊고 십자가만 없으면. 세상 그렇게 멋드러진 세상이에요. 그렇게 괜찮은 세상이에요. 구원받은 사람이 잘못이 있다면 복음을 알게 된 잘못 외에는 다른 잘못 없습니다. 복음만 안 들어가면 가족끼리 그렇게 행복하고 복음만 안 들어가면 자식까지 싸울 일 없고. 그래서 옛날 말에 그른 말 하나도 없어요. 종교가 하나가 되어야 가정이 화목하다는 거예요. 평안하다는 거예요. 그른 말 하나도 없어요.

제사지내라 하면 제사 지내면 되고 대대가문의 족보 있는 가정에 종갓집 며느리 돼가지고 살면 돼요. 문제는 종갓집이 이렇게 꾸겨진다는 거예요. 이게 문제라서 그렇지. 종갓집 불타  버린다 이게 문제래서 그렇지. 그것만 안 들었다 치면 언약만 안 들었다 치면 그렇게 편한 거예요. 만약에 시가집이 교회 간다. 그 교회 따라가면 되는 거예요. 가정이 화목하기 짝이 없어요. 그 시어머니, 시아버지 마음이 흐뭇한 거예요. “주여! 내 평생 농사 다 지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저 자식, 며느리 이 교회 나와서 주께 같이 봉사하게 됐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며느리 입장에서는 ‘아이구 그 까짓 거 효도도 해주는데 그것도 못해줄까?’ 할 수 있는 문제에요.

그런데 시어머니는 착각하고 있다고요. 교회 다니면 구원받는다고. 복음만 안 들어가면 아무 문제없어요. 아무 문제없어요. 복음만 안 들어가면. 그러면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복음을 안 믿으면 되는 거예요. 복음을 믿다가 안 믿어서 안 믿게 된다면 처음부터 성령세례 안 받은 사람이에요. 호기심으로 그냥 한 번 들어본 거예요. 호기심으로.

성령이 와버리면 주께서는 내기합니다. 빠져보려면 한 번 빠져보지. 주님 표정은 이 포스에요. 느긋하게. 그래 안 믿고 싶으면 안 믿어봐! 니 마음대로 해봐! 니가 십자가를 거부하고 싶으면 거부해봐! 이걸 가지고 목회라고 하는 거예요. 오지 마! 이게 목회라는 거예요. 너 오라했어?

지난 수요일날 인간은 교회 만들기 봉쇄돼 있다. 대전강의에서 했어요. 인간은 교회 만들기에 봉쇄돼 있어요. 교회는 절대로 인간이 못 만듭니다. 왜? 머리가 아니기 때문에. 못 만들어요. 그런데 요새는 사람 모이고 간판 걸고 교회라 하잖아요. 그게 엉터리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우리의 성도는 뭐냐 하면 앞으로 안 믿어볼까? 를 해보세요. 앞으로. 나는 이제 복음 모른다고 한 번 해보세요. 그게 되거든 처음부터 구라였습니다.

여기 오늘 본문에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히브리서13장20절에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 뭐했다고요? 이끌어냈지요. 여기서 살았다는 말은 언약의 피를 안 사람은 산 사람이고, 그걸 모르는 사람은 죽은 자에요.

그러면 이미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살았다는 사실을 스스로 한 번 취소해 보자 이 말입니다. 취소. 그게 취소가 되게 되면 자기가 알아서 믿은 거고, 가짜고, 취소가 안 되면 어떻게 됩니까? 진짜 주님이 나한테 찾아와서 언약의 피를 담은 거라고 보시면 돼요. 그런데 그게 한 번 아니라 해서 되는 게 아니고 한 번 하다가도 5년 뒤에 될 줄도 모르잖아요. 그러니 어차피 우리는 5년 뒤고 10년 뒤고 그건 우리가 할 바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미래에서 현재로 과거로 다가오는 쪽이기 때문에 미래에 대해서 미리 앞당겨서 걱정하려 하는 것은 그건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자, 21절 봅시다.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원하는 것은 누구 소원입니까? 예수님 소원이지요. 우리 소원 아니지요.

따라서 우리는 그냥 살아보란 말이죠. 살아보면 그리스도가 좋아지는 순간 올 거예요. 그러면 이건 내가 예수님 좋아야 구원 받는다는 내 의지가 아니고 누구 소원이 나의 모든 것을 장악했다? 순간. 그리스도의 소원이 히브리서13장21절 그 내용이 우리에게 강제적으로 우리에게 작용을 한 거예요. 이러한 입장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말씀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말씀의 사람.

말씀의 사람이라 하는 것은 말씀이 현재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사람. 그러니까 말씀의 사람에서 이 사람은 뭐냐 하면 종속이에요. 종속되고 말씀이 주인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종속된 종이 자기 목표나 자기 인생에 어떤 희망 이걸 가질 필요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그렇다면 이걸 한 번 현실화 시켜봅시다. 잠이 오지요. 오늘 배운 거 슬슬 정리해 봅시다. 인간은 보이는 것들 속에 쌓여있습니다. 이 보이는 것들 속에 쌓여있기 때문에 서로의 이름을 부르면서 이름을 지었다 했지요. 이 보이는 것을 가지고 사람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현실이라고 현실 세상이라고 하는 겁니다. 아주 자연스러워요. 성경공부 끝나자마자 느껴지는 그 세계. 오늘 뭐 했나? 이런 거. 아까 토마토 몇 개먹었는데 그것밖에 기억 안 나네. 이런 거. 토마토가 보이니까.

말씀은 아 보여요. 보이는 세계에 오는 거예요. 홍해를 통과했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통과하고 난 뒤에 홍해 생각했습니까? 아니면 물 없는 거 생각했습니까? 물 없는 거 생각한 거예요. 이게 인간이에요. 절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보여주지 아니하면 그건 길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주께서 보여주고 그 다음에는 니가 알아서 가라. 이런 건 없어요. 이런 구원은 없습니다. 처음과 끝이 한결같이 동행해서 이끄시는 거예요. 한 20년 신앙생활 했기 때문에 내가 알아서 잘 하겠습니다. 그런 거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하지 말라니까요. 밤새지 말란 말이야! 하는 거 나오잖아요. 신앙생활하지 말란 말이야! 신앙생활하지 마세요. 하게 되면 마귀가 7귀신 들끓어서 그렇게 간섭을 해대요. “기도하는 자세가 삐딱하니 똑바로 해!” 하고 간섭이 그리 많아요. “지난 번 전세금 받았잖아. 왜 목돈 받고 십일조 안 내!” 이런 식으로 공갈협박 들어오는데 “니 반만 내다가 니 나중에 부부끼리 다 죽을 수 있어.” 이미 죽었어요.

그 때는 이렇게 해야 돼요. “니 헌금 반 내서 죽을래?” 하면 “그래, 죽여라! 죽여.” 그래야 이게 성도가 성도됩니다. “그래, 죽으면 안 되지. 죽으면 자식 어떻게 돼?” 이런 걱정하면 안돼요. 이미 죽은 사람이에요. 우리는. 이미 죽은 걸로 간주하고 이미 우리는 어릴 때, 소학교 때, 중학교 때, 어떻게 살았는가, 우리는 필마로 돌아다니면서 폐허된 세상에 그냥 돌아다니는 거예요. ‘아, 주께서 이런 식으로 빠져나왔구나!’ 그걸로 우리로 하여금 체험케 하시는 거예요.

보이는 세상이 현실입니다. 이건 누가 봐도 안 믿는 사람도 동의할 거예요. 보이는 세계가 현실세계에요. 현실세계. 그리 믿을 것은 인간밖에 믿을 게 없어요. 과학자들은 아인슈타인 믿어야 되고요, 생물학자는 다윗 믿어야 돼요. 과학자니까. 똑똑한 사람이니까. 그리고 지금 젊은 사람은 대통령 믿어야 되고. 북한은 핵만 믿어야 되고, 하여간 보이는 세계만 믿어야 돼요. 집에서 노는 아내는 남편 돈만 믿으면 되고. 연금 탈 때 계산 잘해서 연금 누락됨이 없이 해야 되고 이런 것만 하면 돼요.

이게 자연스러워요. 자연스럽다. 같은 말로 전혀 이상스러운 게  없다. 요걸 빨간 걸로 씁시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이게 은혜 되네. 마지막에. 충만해요. 이게 되고 그 다음에 이렇게 해놓고 성경공부 해버리면 성경공부는 선택사항이에요. 필수과목 아니고 해도 되고 안 해도 돼! 이걸로 충분하니까.

그런데 보이지 않는 세계는 주의 이름으로 와요. 주의 이름. 주의 이름은 세례요한처럼 와요. 그러면 세례요한은 기능으로 작용해요. 기능으로. 기능으로 와버리면 이것으로 충분하다. 하는 이 자체가 주의 말씀에 의하면 이렇게 살다가 심판받고 이렇게 살다가 결국 끝은 넓은 길로 가고 멸망의 길로 간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알게 돼요. 알게 되면 그 아는 것 자체가 이미 기능이 개시된 거예요. 아는 것 자체가. 그럴 때 우리는 뭘 느끼는가 하면, 이게 바로 시간의 굴레에요. 시간의 굴레.

시간의 굴레에요. “살았던 과거 주워서 현재가 이루었으니까 미래는 이렇게 풀릴 것이다. 충분하다. 그것으로 끝. 내 앞에 딴 소리 하지 마! 나 이걸로 살겠어.” 하다가 “그래, 이제 살다가 죽으면 아~ 이게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인생. 이건 교회 다니나 안 다니나 다들 사는 인생. 그럼 내가 차이나는 게 어디있어요? 어떤 차이나요? 아무 차이나는 게 없어요. 그러면 이것으로 충분하다? 다시 옛날로 한 번 돌아가 봐.” 그럼 옛날로 돌아가 보세요.

돌아가 보는데 주께서 가만두지를 않지요. 왜냐 하면 말씀의 종이 되어야 되기 때문에. 그 다음에 오는 게 뭐냐, 기능으로 말씀이 장악하게 되면 “니가 지금 이것으로 충분하고 이리 살아도 나는 정상이고 이거 해도 더는 필요 없다. 이것에서 더 바램은 나의 죄가 됨이라.” 10월 어느 날에 가사 나오지요. 이것보다 더 바램은 죄가 됨이라. 나와요. 그걸로 충분한데 여기에 기능이 오게 되면 바로 이것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쪽으로 빠져나가 버렸어요.

그게 뭐냐, 인간들은 똑똑하고 지혜로운 자인데, 주께서는 오히려 반대로 도저히 믿지 못할 어리석은 분으로 가버렸지요. 그럼 우리는 닭 쫒던 개라는 것을 깨닫지요. 주님은 빠져나갔어요. 그럼 빠져나왔으면 그 빠져나온 것을 어떻게 알았지요? 찾아왔기 때문에 빠져나온 거예요. 주님께서 찾아오면 함께 있어요. 함께 있으니까 이제부터는 이 기능을 하는 거예요. 이 기능을.

이것으로 충분한 건 맞는데, 이게 바로 멸망에 예수님을 십자가 못 박아 죽었기 때문에 이게 주님 앞에 죄가 되고 옛날 조상 우리 아담의 행세그대로고 이것 때문에 우리는 지옥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요. 그 아는 자체가 행위로 나타나요. 인간은 반드시 행위는 아는 것에서 나오게 되어있거든요. 그럼 행동이 어떻게 나오느냐, 복음 전하고, 예수님 믿어라, 이리 나오는 게 아니고 그냥 똑같이 해요. 똑같이 하는데 재미가 없어. 이 세상이.

드라마 봐도 뻔하고 인간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그 다음에 어디 해외에 놀러나가도 “아휴, 집구석이 제일 편하다.” 알고 자식 잘돼서 좋네. 사법고시 합격해서 얼마나 부모로서 보람이 있나. 하는데 그래, 좋긴 좋은데 그게 다가 아니래. 사법고시 한다고 더 좋은 게 아니잖아요. 뭐 됐다고 좋은 게 아니고. 이상하게 이 세상에 대해서 어떤 미련이 없고 재미가 없어. 이 세상이.

재미가 없고 마음 같으면 그냥 자는 잠에 자다가 포근히 자다가 그냥 잠이 안 깨도 아무 상관없는 거예요. 그게 바로 고린도전서7장에 보면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같이 하고 돈 있는 자는 다 쓰지 못한 것같이 하라. 왜? 세상은 내가 늙어가는 것처럼 꾸준히 쉬지 않고 주께서 우리를 멸망시키는 기능을 지금도 충분하다고 여기는 기능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개도 늙어가고 있고. 다 모든 것이. 이젠 거울보기도 싫어. 사진 찍으라 하면 도망가. 귀신 나오면 안 되니까. 점점 더 우리는 차질없이 주의 법망대로 계획대로 실시하고 보고 계시고 있는 중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누가 이 세상을 폄하하고 이 세상을 욕하겠습니까. 그동안 나를 지켜온 세상, 고마운 세상, 아름다운 강산, 모든 것이 좋았는데 주님이 여기서 핍박을 받았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고 납득이 되지 않을 정도로 너무 세상 적이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도리어 예수님을 이해할 수 있는 신앙인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이전글   다음글 ▷
 
게시판
자유게시판
질문/답변
복음의 메아리
성도의 칼럼
사진첩
이전게시판글
이전질문/답변
개혁노회
도서출판후원회
성경신학
성경신학1
성경신학2
신학과철학
성경중심사상과 그 전개
성경강해
구약
신약
신학강의 1
신학강의 2
신학강의 3
자료
십자가를 아십니까?
하나님의 선택
기독교의 허상1,2
말씀의 조약돌
피와 성전과 교회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과학의 정체
50여명의 신학자들
인간 구원을 위한 신학
철학의 함정
교회사
지옥의 하나님
예수사회
 
 
지역강의
강의일정
광주강의
대구강의
부산강의
서울강의
안산강의
울산강의
대전강의
기타강의
블로그
블로그
 
Copyright ⓒ 2006 by 십자가마을, All rights reserved.
주소 :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로 91길 10-11 신동아빌라 1동 201호   전화 : (053) 986-0172   H.P. : 010-3511-0172   상담 : 이근호   이메일 : knowcross@hanmail.net
홈페이지 관련 문의: 관리자(sungjaepil@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