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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지역강의 > 안양강의
2018-05-12 00:22:15 조회 : 534         
교환 180511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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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은주(IP:119.♡.152.148) 18-05-25 15:51 
안양20180511a약2장12절(교환)-이 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야고보서2장12절 할 차례입니다. 2장12절에 보면,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심판의 반대말이 긍휼이에요. 성경은 심판부터 먼저 이야기해요. 심판부터 먼저 딱 이야기하게 되면 “어머야? 큰일 났네.” 이렇게 이야기하잖아요.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쫙 깝니다. 일단은.

심판을 쫙 깔아 놓고 그 심판을 깔 때 그 원칙이 있어요. 어떤 인간의 행함도 심판을 이길 수 없다. 요건 제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그 위에 10절, 11절 이야기에요. 왜냐하면 누구든지 율법을 지키다가 하나를 어기면 다 어긴다고 분명히 10절에 나와 있잖아요. 그렇지요.

그 말씀하는 것은 일단 깔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어떤 인간도 행함으로 모든 율법을 지킬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거예요. 요게 야고보서에 나오잖아요. 요게 신약이라는 말이죠. 신약이라면 그러면 구약 적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노아 외에 모든 사람들은 어디 갔느냐 하면, 다 물속에 잠긴 거 아시지요? 노아 외에. 그러면 심판이 오기 전에 홍수 오기 전에 노아와 다른 사람을 비교해 보세요.

노아와 다른 사람과 비교하게 되면 노아에 있는 것이 그들이 없는 것이 뭘까요? 지금 심판이 딱 터지니까 노아 빼놓고 나머지 다 물속에 잠겼습니다. 그 물속에 잠긴 사람을 가지고 성경에서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했어요. 그런데 먹고 마시는 게 잘못입니까? 그러면 노아는 안 먹었어요? 노아는 장가갔으니까 자식들이 있을 게 아닙니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그 다음에 사고팔고. 장사해야 될 게 아닙니까? 생산이 남게 되면 나머지는 물물교환 하던지 팔고 사고  해야 된다 이 말이지요. 그게 일상생활인데 일상생활을 나쁘다고 이야기하게 되면 안 나쁜 게 뭐가 있겠어요? 뺄 게 없어요. 일상생활인데. 일상생활을 충실히 하는데 이게 뭐가 나쁘냐는 말이죠.

어떤 가정에 애가 태어났는데 10년 동안 부모 밑에 있다가 20살 돼서 정성했다. 갑자기 하늘에서 물이 떨어졌다. 홍수가 떨어졌다. 그 애가 20살 동안 살면서 그다지 나쁜 것을 뽑아내려 해도 뽑아낼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부모가 주신 돈 가지고 공부하면서 이제 20살 돼서 살았기 때문에. 자기가 나쁜 짓 할 수 있는 기회조차도 없잖아요. 태어난 지 6개월 됐다. 태어난 지 1년 됐다. 애가 기저귀에 오줌 누는 게 잘못입니까?

그런데 제가 하는 말은 뭐냐 하면, 노아라는 인간의 행동과 노아 말고 다른 사람의 행동 사이에 잘잘못을 따질 수 있는 어떤 것도 우리가 찾아낼 수 없다는 이야기를 제가 하는 겁니다. 그런데 노아는 다른 사람과 똑같이 살았어요.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 없는 게 있어요. 없는 게. 그걸 창세기6장에서는 두 자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뭐가 있느냐 하면 “노아는 은혜를 입었더라.” 라고 되어있습니다. 은혜를 입었더라.

실험실에 콩이 열 개가 있는데, 콩과 콩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없어요. 같을 수는 없지요. 약간 찌그러진 것, 동그란 것, 납작한 것 있지만, 그래도 납작된 콩이고 동그란 콩이고, 콩 콩 콩이에요. 똑같아요. 다 콩이란 점에 똑같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핀셋을 가지고 이쪽에 있는 콩 열 개중에 그 중에 한 개를 끄집어내서 이쪽으로 옮겼다면 같이 옮김을 당하지 않은 콩들이 그 옮기는 콩보고 뭐라고 하겠어요? “니는 뭐가 잘나서 저쪽으로 가느냐” 라고 따지겠지요. 따질 때 그 옮겨가는 하나의 콩 입장에서는 “나는 이래서 너희보다 더 훌륭해.” 하는 말을 할까요? 못할까요? 못하지요. 그러면 여기서 정리할 수 있습니다.

행함에 속하지 않는 그 무엇, 그것이 바로 노아한테는 뭐냐 하면 은혜가 되는 겁니다. 은혜. 그러면 앞에 뭐가 있느냐 하면 요건 붉은 걸로 할게요. 하나님의 심판이지요. 아까 노아의 물 심판 했잖아요. 야고보서2장 10절에서는 뭐로 심판한다 했습니까? 야고보서2장 10절에서는 이걸 모든 율법을 지켜도 하나를 못 지키면 다 못 지키지요. 이게 율법이지요. 노아 때는 물로 심판하던 것이 신약 때는 율법으로 심판하는 거예요. 율법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심판하는 겁니다.

말씀 앞에서 모든 인간은 자기 행함으로는 구원이 된다? 안 된다? 안 된다는 이야기를 2장10절에서 하고 있는 겁니다. 이걸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말씀을 주신 적이 없다는 것. 인간이 지킬 수 있는 것은 주신 적이 없어요. 아무리 말씀대로 살고 모이기에 힘쓰고 성경 듣기를 원하지만, 동창생이 미국가자 하면 후다닥 갑니다. 성경을 언제 봤는지...., 미국 갑니다. 미국 갈 때 그래도 성경책 들고 가야지. 그런 일 없습니다. 이게 우리의 평소지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으로 지킬 수 있는 말씀을 준 적이 있다? 없다? 없어요. 인간이 지킬 수 있는 말씀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말씀은 예수님만 지켜요. 그래서 다 이루었다 하시고 그 지킨 것을 뭐로 주느냐 하면 행함 차원이 아니고 뒤에 하나 더 있는 것. 은혜 파이프를 통해서 은혜를 줘버립니다. 이게 바로 선물이에요. 마지막 심판할 때 “니 어떻게 살았느냐?” 를 묻는 게 아니에요. “내가 준 선물 아직도 있느냐” 라고 묻는 겁니다.

내가 준 선물. 그런데 주님이 준 선물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인간의 행함과 별개로 주신 거거든요. 이걸 로마서3장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율법 외라고 해요. 율법 외. 율법 있고 그리고 율법 외 있고.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얻지 못했지만, 율법 외로 뭘 얻는다 했습니까? 의인이 돼요. 그러면 내가 의인됐다면 내 행함이 끼어 들 것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어요. 내 행함이 끼어 들 게 전혀 없습니다.

그러면 행함이 끼어 들 게 없는데도 끼어 들겠다할 때에 그것에 관한 방법이 뭐냐 하면, 주님께서는 율법을 들이대 버립니다. 들이댈 때 이렇게 합니다. “야, 너 이리와.” “너, 율법 몇 개 지켰어?” “한90% 지켰는데요.” “그러면 10% 못 지켰잖아.” “그건 뭐 인간인 이상 못 지켰지요.” 하나를 어기면 다 어긴 거예요. 자기 딴아 99%지키면 대단하지 않습니까? 다 어긴 게 돼요. 하나님의 구원 방법이 인간이 뭐에 집중한다는 것을 하나님이시니까 모를 일이 없지요. 그걸 간파하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문제를 아주 쉽게 했는데,  문제가 그냥 쉬운 게 아니에요. 여기 복잡한 문제가 있습니다. 행함으로도 의로움을 얻지 못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데 은혜를 오늘 12절에서 13절에서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은혜하고 같은 말인데 여러분이 답변해보세요. 은혜가 뭐라고 되어있지요? 긍휼. 긍휼은 불쌍히 여김이거든요. 불쌍히 여긴다는 거예요. 불쌍히 여긴다는 것은 “내가 손을 안대면 니는 끝났어!” 이게 불쌍히 여김이에요. 불쌍히 여기는 거예요. 불쌍히 여김이 계속 유지되어야 되겠어요? 사라져야 되겠어요? 계속 유지되어야 돼요.

요한계시록2장에 보면 에베소교회에 하나님께서 지적하기를 첫사랑을 잃어버렸다 하는 거예요. 첫 사랑을 첫 긍휼로 바꿔봅시다. 그러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고. 처음에 왔을 때는 “하나님의 은혜로 긍휼로 구원받았습니다.” 하고 자신만만하게 말을 해놓고 한 10년, 20년 복음알고부터는 그 다음부터는 헤헤거리면서 “나는 저 사람보다 낫습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뭘 잃어버린 거예요? 첫사랑을 잃어버린 거예요. 내가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사랑이란 이유가 없다고요.

여러분, 구약에 보면 율법 없이 구원된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냐 하면 욥이에요. 율법 없이 구원된 사람이에요. 본인은 율법 없이 구원된 줄 몰랐어요. 몰라가지고 자체적으로 할 수 있는 행함을 가지고 자기한테 쫙 깔아놨습니다. 아들7명이고 딸3명이었습니다. 철없는 애들이 생일잔치를 하잖아요. 그러면 욥이 아버지가 되어서 불러요. 그냥 단체로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씩 불러가지고 그 애를 위해서 번제를 드립니다. 번제.

최초의 제사는 번제에요. “하나님, 얘가 철딱서니 없어서 함부로 까불고 촐랑댔던 것을 제 번제를 받고 어여삐 여겨주세요.” 하고 이렇게 했어요. 한 명씩 한명씩 불러서 다 그렇게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사를 드릴 때 그 욥의 입장에서는, 처음에 욥이 잘못 생각한 거죠. 욥의 자기 행함이 섞였겠어요? 안 섞였겠어요? 당연히 섞이지요. 정성을 그렇게 했잖아요. 정성을.

흔히 말하는 교회에서 중보기도가 그거 아닙니까. 저 자식을 위해서 내가 얼마나 중보기도를 했는데 만약에 그 자식이 신천지에 빠졌다 하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얼마 전에 신천지 이야기했지요. 우리 아는 집안에서 약사 돈 갔다 바쳐가지고 납치해가지고. 아직도 납치해있어요. 경찰 찾아오고.

그럴 때 내 자식을 이만큼 서른 살까지 키워났는데 그것도 잘 키웠는데 신천지에 빠졌을 때 부모심정이 굉장히 아프지요. 남의 자식 신천지에 빠져도 상관없어요. 내 정성이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욥의 시작은 이상하게 욥이 믿음이 있는 거 같은데 이게 믿음에 테두리는 있어요. 테두리는 있는데, 믿음 있는 건 맞아요. 하지만 알맹이는 자기 행함으로 꽉꽉 채워놨어요. 욥이 처음에. 꽉꽉 채워놨습니다.

주께서 그 행함을 다 들어내십니다. 다 들어내면서 뭘 하느냐 하면, 일이 이렇게 잘 된 것과 내가 하나님 앞에 정성을 바친 것과 연결돼 있던 연결고리를 다 끊어버려요. 니가 이렇게 잘된 것은 니 행함 의로움이 아니라는 그걸 다 들추어내버립니다.

그래서 중간에 욥이 뭐라고 하는가 하면 이럴 것 같으면 차라리 저를 태어나지 말고 일찍 죽이셔야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 발언까지 해요. 자기 창조했음에 대한 거부로 나와요. 그러니까 제일 마지막 친구 엘리후가 드디어 욥 입에서 하나님의 창조하심에 대해서 시비거리가 터져 나오게 하는 겁니다. 토할 때 신물까지 나오듯이 액이 나오듯이 속에 있는 게 다 나왔어요. 욥도 죄인이었던 겁니다. 욥도 죄인이었습니다.

그걸 종교로서 카바를 했는데, 다 드러내니까 나 잘못 없고 이런, 이런 일은 누구 잘못이다? 하나님의 조치가 불합리합니다. 하나님이 뭔가 문제 있습니다. 라고 했을 때 엘리후가 세상에 하나님이 만드신 그 피조물이 자기를 만든 창조주를 보고 저렇게 뭔가 문제 있다고 욕을 하는 저런 사람이 드디어 욥의 본성이었다고 다 드러내는 겁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있어요. 그쯤하면 하나님께서 욥을 버릴만한데 하나님의 긍휼이 잘해서 플러스로 주님의 은혜를 주는 게 아니고 잘했음을 바닥을 드러냅니다. 

뭐로 보느냐 그냥 니가 못난 존재라고 드러내고 그 다음에 긍휼을 은혜를 줘버려요. 줘버리면 나중에 욥기 42장에 보면 나오지요. 그렇게 말 잘하던 욥은, 얼마나 욥 이야기가 욥기에 가득 차 있습니까. 그렇게 말하더니 마지막에는 제가 할 말이 없습니다. 라는 거예요. 할 말이 없어버려요.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까요? 왜냐하면 구원된 자는 변화가 있어야 됩니다. 세상에 살 때는 누구하고 비교하느냐 하면 같은 교인들하고 비교해요. 같은 교회 다니는 사람으로 비교하고, 목사하고 괜찮은 목사하고 비교하고 그리고 나하고 비교하고. 이 땅에 비교가 된다 말이죠. 그게 변화되어야 돼요.

욥이 왜 그렇게 욕을 했느냐 하면 친구하고 자기하고 비교한 거예요. 욥을 보면서 우리가 세상체제에서 발견할 수 없는 것을 뽑아낼 수 있습니다. 그건 뭐냐 하면 사탄이 뭐냐 하는 거예요. 사탄이. 욥기1장에 나옵니다. 사탄이 이렇게 이야기해요. 사탄의 그 생각을 이렇게 알려준 주님께 감사합시다.

사탄이라는 게 얼굴 시커멓고 퍼렇고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사탄이 한 내용이 성경에 이렇게 알려줬어요. 그 사탄의 이야기를 한 번 적어볼게요. 요 생각이 사탄입니다. ‘까닭 없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것이 인간이다.’ 이게 사탄입니다. 사탄은 인간을 알아요. 인간은 자기 위주입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서 있어요. 원래 인간을 사탄이 그렇게 변하게 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늘나라가려면 변해진 인간을 또 바꿔야 돼요.

자꾸 제가 일방적으로 변한다 해가지고, 괜찮은데 왜 그러느냐 하지 말고 지금 괜찮다고 여기는 것이 이게 벌써 우리의 본래의 내가 아니라니까요. 본래의 내가 아니에요. 본래 주님이 만드신 인간들이 아닙니다. 그걸 우리가 부모의 죄에서 태어났다고 이야기합니다.

그걸 성경 크게 보게 되면 요번 수요일에 했지만, 내가 어떠함이 아니라 했지요. 아담이 어떠했다. 라고 해야지 나는 이런 짓을 했어요. 나는 맴매 맞아야 돼! 나는 나쁜 사람이야. 이러지 말라는 말이지요. 아담자체가 나로 하여금 그런 바닥을 냈는데 왜 개별자로 자꾸 머물고자 하느냐 말이죠. 이건 진짜 중요한 거예요. 개별자, 보편자 이 내용은요, 우리는 개별자에서 개별자는 가짜에요. 가짜는 이미 가짜기 때문에 진짜의 나라는 못 갑니다. 개별자에서 보편자로 바꿔야 돼요. 바꾸려면 개별자를 믿지 말아야 돼요. 보편자를 믿어야 돼요. 나를 믿지 말고 보편되신 두 번째 아담 예수님을 믿어야 돼요. 예수님의 행함이 우리를 구원한다니까요.

내 어설픔이. 내가 100점이 안돼요. 99점까지 가도 99점해도 아까 나왔잖아요. 야고보서2장10절, 모든 율법을 지키다가도 하나를 어기면 빵점이다. 빵점이에요. 사탄을 통해서 욥은 다른 사람하고 비교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욥이 어려웠을 때 친구 세 명이 찾아오잖아요. 세 명 찾아오면서 욥이 자기의 구원을 받았느냐 인데 구원 테두리는 사실은 욥이 잘해서 구원받은 게 아니고 주께서 이미 정해놔서 한 거예요.

욥을 통해서 뭘 끄집어내느냐 하면 예수님의 고난을 영을 통해서 미리 보여주는 겁니다. 그리고 고난 뒤에 뭐가 나오느냐, 고난 + 영광이 나오지요. 그러면 고난이 없다면 영광의 길로 간다? 안 간다? 못가지요. 고난 가야 그 길이 영광의 길인데, 고난 안 들어가는 길이 무슨 영광이에요.  그건 길이 끊어져있습니다. 가짜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어려운 게 고난을 임의로 하면 되느냐, 안 되느냐, 고난을 임의로 하면 안돼요. 왜 성질대로 살아야 되느냐 하면 성질대로 살게 되면 사람은 성질만 부리는 게 아니고 성질 + 뭐를 겨냥하느냐 하면 기대하는 바가 있어요.

성질은 두 가지가 있어요. 선악과 따먹었으니까. 나쁜 성질 발휘는 나쁜 결과를 낳을 것이다. 요거 하고, 이것도 참 나쁘지만, 더 심각한 문제가 좋은 일을 했으니까 내가 기대한 것이 엄청 빠른 시간 내에 성취될 것이라는 이 두 번째 이거 어떻게 할 겁니까? 내가 교회 가서 착한일하니까 자식들한테 복이 올 것이라는 그 기대. 누가 이걸 부정할 거예요? 이게 본심인데. “아니야. 아니야. 이건 기복신앙이야.” 여러분, 기복신앙을 없애는 것도 기복신앙이에요. 기복신앙을 없애는 그 착한일이 기복신앙 안했을 때 주어질 보너스 까지 다 줄 거라는 기대를 인간은 하게 마련이에요. 

주님께서 욥을 어디까지 낮추느냐 하면 아예 모든 기대가 자살로 이어지는 지점까지 가게 만드는 겁니다. 욥에 나오는 이야기고 내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고. 이제는 나는 소망 없다. 이걸 욥기에서 한두 번 이야기한 게 아닙니다. 나는 이제 소망 없다. 끝났어! 친구들한테 이야기합니다. 친구들아! 잘 먹고 잘 살아라. 나는 요걸로 얼마 안가서 죽는다. 욥은 얼마 안가서 죽는 줄 알았어요. 죽는다.

하나님하고 사탄하고 했던 내기 중에서 딴 거는 다 건드려도 생명은 건드리지 말라, 를 욥이 알았을까요? 몰랐을까요? 처음에. 처음에 몰랐어요. 하나님께서는 사탄으로 하여금 까닭 없이 하나님을 안 믿게 되어있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은 까닭 없이 안 믿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욥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뭐를 제거하느냐 하면 요걸 제거하는 거예요.

아무 이유 없이 하나님을 믿는 방법은 ‘이유 없음’ 이게 바로 뭐냐 하면 ‘사랑’이라 하는 겁니다. 사랑. 그리고 다른 말로 하면 아까 했지요. 요걸 본문에서 긍휼이라 했습니다. 이게 긍휼이에요.

새로운 손님이 오셔서 시간이 지났지만 처음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이건 다시 해도 괜찮아요. 야고보서2장12절부터 하는데, 12절하면서 제가 10절과 연관시켰습니다. 10절에 뭐라고 했던가요? 온 율법을 지켜도 하나를 어기면 다 날아간다. 그걸 제가 밑에 깐다 했지요. 그걸 제가 율법을 깐다 했지요. 율법을 깐다했는데 처음에 구약 때 노아 때는 뭘 깐다고 했어요? 물로 깔았지요. 물로 깔았을 때 물에 빠진 사람과 노아의 평소의 행함에 차이가 있다? 없다? 전혀 없어요. 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았으니까. 그러면 노아가 그들에게 없는 게 하나가 있어요.

그게 뭐라고 하느냐 하면 창세기6장에 보니까 노아는 뭘 입었더라? 은혜를 입었더라, 라고 되어있어요. 은혜. 그런데 은혜를 입은 것을 이걸 신약의 방식으로 한다면 신약에 율법을 깔아버려요. 전에는 아까 뭘 깐다고 했습니까? 물을 까는 거죠. 소돔과 고모라에서는 뭘 깔았다? 불을 깔아버렸어요. 불을 깔았는데 신약에서는 율법을 깔아버립니다.

율법을 깔아놨는데 그럼 율법을 지키면 되지. 하는데 10절에 보니까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것도 10년 이상 지키다가 하나를 어기면 다 말짱 도루묵이 되어버려요. 율법은 12절에 보니까 율법이 무슨 역할을 하느냐 심판의 역할을 해요. 심판 받을 자처럼 말하기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이리 되어 있잖아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만약에 여러분이 저한테 묻는다면 12절이 무슨 뜻인가, 물어보면 이런 거예요.

성경에서 좀 아는데, 말씀에 비하니까 말씀이 딱 와보니까 “나는 심판 받아야 마땅한 존재다.” 라는 그 고백을 하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심판받아 마땅하다. 왜? 온 율법을 지켜도 하나를 어기면 다 위반이 되니까. 율법 위반자로서 무빙, 움직이는 거예요.

그러면 이건 뭐냐 하면 심판받을 자로서 무빙, 움직이는 겁니다. 심판받을 자로 움직인다는 말은 “그러면 가다가 엎어지고 자빠지고 하늘의 천벌 받고 저주받으면 너는 어떻게 살래?” 이리 되잖아요. 그게 바로 신약의 13절이 문제에요. 심판을 먼저 깔아놔야 심판 안 깔린 곳에는 뭐가 의미가 없냐, 긍휼의 의미가 없어요. 긍휼이란 뜻이 뭐라고 했습니까? 불쌍히 여기는 거죠.

그렇다면 사랑은 뭐라고 했어요? 이유 없는 게 사랑이죠. 그런데 긍휼은 왜 이유가 없어야 되느냐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왜 없어야 되느냐 하면, 불쌍하니까. 탕자비유 알지요. 탕자가 아버지 집에 돌아왔습니다. 탕자는 저기 서있고 아버지는 여기 있어요. 탕자가 먼저 이야기합니다. 아버지라는 말도 못하지요. 나는 나를 아는데 아버지의 아들 되지 못한다는 것을 제가 인정합니다. 라고 서있어요. 그게 끝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가 그를 아들로 안 받아줘도 탕자는 불평한다? 아니에요. 불만스럽다? 아니에요. 왜? 자기 자신을 아니까. 지옥가도 가야 되는 걸아니까.

그 때 아버지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라는 사람은 긍휼이기 때문에 잃어버린 자를 찾는 방식을 사용하기 때문에 고 모델이 어떤 모델이냐 하면 바로 찾아야 될 인간의 모델로 아주 적합한 거예요. 자기의 행함과 의가 삽입이 안 되었으니까요. 오늘 아침 뉴스에 어떤 사람이 법원에서 14년형을 받았는데 그 아들이 어떤 짓을 했느냐 하면 아버지가 카드 값을 안 갚아준다고 해서 아버지를 죽여 버린 자에요. 18년인가 14년인가 그렇게 해요.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아버지가 왜 아들의 카드 값을 갚아야 되지요? 경상도 말로 호로 자식이지요. 그런데 모든 인간이 다 호로 자식입니다.

구원 받을 자격도 없는데 구원하겠다고 교회오고 있어요. 이게 무슨 시추에이션이 있어요. 제가 설교할 때 했거든요. 교회 올 때는 구원 받으러 오면 안 된다고요. 처벌해달라고 와야 되지요. 왜냐하면 주님은 처벌자고 나는 처벌 받아야 마땅한 죄인이기 때문에. 그리 와야 되지 갓 바위에 비는 것처럼 교회 왔으니 복 달라. 무슨 이런 시추에이션이 다 있느냐 말이죠. 누가 이렇게 만들었어요? 교회가 이렇게 만들어놨어요. 성경도 몰라요.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구원하는지 몰라요.

그럼 교회에서 뭐냐, 댓다 행함을 강조해요. 법을 해가지고. 그럼 모델이 누구냐, 목사가 모델이 돼버리지요. 나는 언제 나중에 목사처럼 되면 내신 성적이 우수한 등급이 되겠지. 교지를 받으면 되겠지. 이렇게 되는 겁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성경은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걸 이야기했다고 했어요? 행하지 못하는 걸 이야기했어요? 행하지 못한 걸 이야기해서 행함이냐, 믿음이냐를 구분시키는 기준이 바로 성경이에요. 그래서 율법 외에 한 의입니다.

“니 봐, 못 행하지. 하지만 이 율법은 누가 가지고 간다?” 주님이 가지고 가지요. 주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버리면 주님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선물로 줘버려요. 그러면 우리는 탕자가 됩니다. 성령이 왔을 때 비로소 우리는 무조건 이유도 없이 탕자가 되어버려요. 심판받아 마땅함을 아는 사람에게 이것을 가지고 12절의 자유함의 율법이에요. 아, 참 이 내용이 어렵지요.

율법 앞에 율법은 자유를 안 줍니다. 안 주는데 율법 앞에 자유를 붙였다는 이 말은 율법의 기능이 결국은 무엇을 양산한다? 우리에게는 자유를 나타내요. 자유라는 말이 어려우면 당당함, 더 노골적으로 뻔뻔스러움, 탕자만큼이나 뻔뻔스러움. 아버지 재산 다 날려놓고 무슨 낯짝을 들고 이제 와서 종으로 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탕자가 주님의 하시는 긍휼에 절대적인 재료가 돼요. 사례가 된다고요. 왜? 더 이상 내 행함과 내 의 자랑거리가 없음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걸 철학적인 용어로 적합품. 적합성 적절하다. 적절성이란 말을 한 거예요. 적절성이란 예를 어느 강의에서 한 적이 있습니다. 울산강의에서 했어요. 유리가 아름답다. 유리가 아름답지요. 유리가 아름답다고 해서 톱으로 쓰면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안되지요. 철은 투박하고 보기 싫지요. 하지만 톱으로 쓰는 데는 유리로 만들면 안 되지요. 철로 만들어야 되지요. 모양을 떠나서. 아름다운 미적 감각을 떠나서 그렇게 되잖아요.

그러면 천국에는 아름다운 세계에요. 그러면 천국이 아름다운 세계라고 이쁜 사람들 미스코리아 출신들이 가는 데가 아니지요. 그럼 뭐냐, 천국의 적합성이 있어야 돼요. 천국의 적합성은 예수님이 갔던 코스로 그대로 밟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들어올 수가 있어요. 그럼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았어요. 아버지여, 어찌하여 버리시나이까? 했잖아요. 버림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우리보고 뭐냐, 자기 십자가 지라고 했겠지요. 그 십자가라는 말이 예수님이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 안지고 제자들보고 강조하는 게 아닙니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모든 말씀은 우리가 지킨다? 못 지킨다? 못 지키지요. 못 지키는 말씀하신 거예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 이거 돼요? 안 돼요? 안 되는 이야기를 했다고요. 제자들이 그 이야기 듣고 예수님 다 떠나버렸어요. 나중에 십자가 질 때 다 떠나버렸습니다.

그러니까 그걸로 이야기가 풀어서 이야기가 끝난 게 아닙니다. 다시 성령이 올 때 성령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예수님이 모든 율법을 다 지켜서 완성했던 예수님의 일대기가 들어있지요. 그 일대기 성령의 일대기를 선물이란 이름으로 또는 은사라는 이름으로 제자들에게 덮쳐버려요. 덮쳐버리면 제자들은 본인이 결정하지 않고 주께서 가신 길을 안 갈래야 안 갈 수가 없어요. 갈 수밖에 없게 만들어요.

그 가면서 제자들은 더 이상 자기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고 가면서 내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과 예수님이 이루었던 것과 같이 병행해서 보여줍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뭐냐, 죄인 중에 괴수가 되는 거예요. 성령 받고. 성령 받고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게 아니고 죄인 중에 괴수가 되는 겁니다. 그게 시편51편에 다윗이 성신 받고 하는 고백이 뭐냐 하면, 주께서는 번제도 원치 않고 제사도 원치 않고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이잖아요.

상한 심령을 원한다는 말은 본인이 본인을 뭐라고 본다는 말입니까? 뭐로 본다? 상한 심령으로 보는 거예요. 그랜드케냐 가서 찍은 사진 말고 엑스레이 사진을 내놓는 거예요. 엑스레이 사진 시커멓지요. 폐병 한 5기되면 암 말기쯤 되면 어떻게 됐습니까? 시커멓지요. 다 썩었지요. 상한 심령이지요. 그걸 자랑스럽게 내놓는다니까요. 그게 자랑스러워서. 그게 뭐냐 뻔뻔함이라니까요.

뻔뻔함. 이 말은 뭐냐 하면 늘 무릎 치면서 “주여, 오늘도 왜 내가 살아있는 게 이상합니다.” ‘왜 살아있지? 오늘도. 이상하게 왜 살아야 되지?’ 이걸 통해서 볼 때 모든 사람들이 말씀을 못 지키는 이유는 억지로 살아야 되겠다 하는 그것 때문에 마귀한테 납치당해서 모든 말씀을 자기 잘난 맛으로 지키기 때문에 말씀을 지켜도 안 지킨 게 돼버려요.

그럼 내가 살 이유가 없다면 그 이유는 어디서 와야 됩니까? 사랑은 이유 없다 했지요. 오늘 논리를 여러분이 연결을 다 시키는지 모르겠습니다. 실력 믿고 갑니다. 사랑은 이유 없지요. 그럼 이유 없으니까 이유 없다는 이야기를 하지요. 그게 어떤 사람이냐, 그게 사랑 받은 사람이거든요. 내가 왜 사는지 모르겠다. 이유 있어요. 어느 쪽으로. 긍휼. 긍휼로 가버리면 내가 왜 살아야 되느냐 하면 천하의 죄인이 나 같은 죄인이 또 있을까? 라는 것을 드러내면서 예수님의 긍휼이 현존하고 있다는 겁니다. 실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이 세상에 전하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오늘 제목이 될 수가 있는 문제인데요. ‘싹쓸이 염원’입니다.

이게 예상보다 굉장히 말이 어려워요. 싹쓸이라는 말은요, 고만 하나님 같이 이 순간에 유황불에 전부 다 안양이고 뭐고 대구 간에 홍수에 물 휩쓸리듯이 핵 미국 김정은 싱가포르 싹 쓸어 다 보냈으면 좋겠다는 생각. 니 죽고 내 죽자는 이야기죠. 그런 생각 드신 적 있지요? 에이~ 이참에 싹 쓸어버렸으면 좋겠다. 아주 말은 어렵지 않고 쉬워요. 싹쓸이염원, 그러니까 기대 희망이 뭐라고요? 내용이? 니 죽고 나 죽자. 싹쓸이 해버리자 에요. 자식이 결혼하고 뭐, 딸하고 살고, 뭐고 간에 싹쓸이 다 해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이 말을 아주 어렵게 하면 이렇습니다. ‘미래를 앞당겨 주옵소서.’ 이리 되면 굉장히 이게 설명이 어렵게 돼요. 미래라는 말은 도달되지 않았잖아요. 도달되지 않은 것을 지금 성령을 통해서 지금 나에게 이미 도달된 거예요. 그러면 싹쓸이 되고 난 뒤에는 뒤에 남는 건 뭘까요? 오직 주의 백성과 천국과 지옥으로 남겠지요. 그 삶을 미리 벌써부터 시작이 된 거예요. 벌써부터.

그렇게 되게 되면 누가 입맛이 없느냐 하면, 아까 욥기1장에서 하나님께서 고맙게도 사탄의 생각을 우리에게 알려줬다 했지요. 그게 뭐냐, 까닭 없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것이 인간이라 했지요. 어느 인간이 까닭 없이 하나님을 섬기겠습니까? 이리 했어요. 뭔가 챙기는 게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는 것이 그동안 줄곧 사탄이 인간을 지배하게 된 그런 노하우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와버리면 모든 것이 일이 마감됐어요. 끝나버렸어요. 싹쓸이 됐으니까. 더 이상 꿈틀거리는 지렁이 하나도 없어요. 다 끝나버린 미래를 내가 미리 삶을 살게 되면 그 휩쓸려 간 사이에 거기에 누가 휩쓸려갔어요? 까닭 없이 하는 이것도 같이 휩쓸려 가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이유 없이 구원된 겁니다.

그동안 정말 교회에 속았다. 목사에게 속았다. 하는 이유가 사실은 목사나 교회에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니고 내가 어떤 기대감, 이익 요 기대는 내가 요쪽으로서 이렇게 뭐 바치고 약간의 성실하고 착하면 그런 기대가 나한테, 하나님은 정의로우시니까 착하시니까 설마 착한 걸 배제하지 않으니까 30배까지는 너무하지만 10배까지는 주시겠지. 라는 어떤 기대감과 엮어져있던 거예요. 그게 악마의 밥이었던 겁니다. 그게.

내가 문제 있어요. 내가. 앞에 하나님께서 이상한 목사를 보낸 이유가 너한테 문제 있다고 그렇게 보내줬건만, 우리는 눈치코치도 없어. 나는 문제가 없는 것처럼 느껴져요. 나는 천하에 제일 믿음이 좋고, 다른 사람은 개판이고. 다른 사람은 지옥가고 나는 천당 가고. 지금 착각한 거예요. 속 시원하게 동탄에 보면 택지개발해 보면요, 밭 있는 거 밀어버리면 깨끗해요. 그것처럼 시원하게 살아보면. 앞에 거칠 것이 없는 아예 모든 걸 포기해버리면. 자살하려하지 마시고 자살 했다 치고 삽시다. 이미 자살했어. 자살하고 다시 살아났어요.

그게 누구냐 하면 마리아 마르다 오빠 나사로거든요. 죽고 난 뒤에 나흘만에 다시 강제로 제대했는데 다시 입대해가지고 앞에 눈에 거칠게 없어요. 알아요. 세상은 미래가 어떻게 마감된다는 것을 마리아, 마르다는 모르지만 오빠는 알아요. 그걸 가지고 12절에 율법 앞에 뭘 붙인다고요? 자유. 자유케하는 말씀입니다.

자유케 하는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우리로 하여금 심판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아주 이 꼬리가 이렇게 죽 올라갈 정도로. 너무 좋아가지고. 기분이 좋아서. 제가 수요일에 했잖아요. 내 일어난 일은 내 어떠함이 아니고 내 속에 아담의 어떠함을 보여준다고요. 그동안은 나의 어떠함 때문에 내가 인생이 꼬이고 인생이 완전히 꼬라박았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내 죄가 아니고 나도 물려받은 거예요. 누구한테 물려받았어요? 부모님들한테 물려받았는데 그 부모의 부모 죽 소급해서 오늘 보니까 아담한테 물려받은 거예요.

그런 아담이 범죄 해놓고 죄도 없는 내가 고생, 고생을 하는데 그렇게 됨으로서 우리는 하나님과 보편적 원칙 속에 놓여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원칙은 아담 잘못해서 후손을 고생시키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원칙이잖아요. 그 원칙을 성경의 로마서5장에 나와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게 실제로 체험이 안 된 거예요.

그러려니 했고 성경은 뭐 보면 잠만 오지 그래도 살아가는 것은 내 힘으로 내가 알뜰히 살아야 자식이라도 하나 더 살리고 뭐 이런 식으로 살아왔는데 자식도 주님이 알아서 살리고 모든 걸 주님이 알아서 하고 나는 쪼다고 바보 등신으로 만들어 놓은 이 자유 함을 악마가 그걸 엿보고 우리로 하여금 율법의 굴레 안에 살게 만들었습니다.

율법 외에 의가 구원됐는데 율법 외를 못 보게 만들어요. 이야기를 해도 우리가 안 봐요. 왜 그러느냐 하면 기대감 때문에. 지금보다 인생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내가 착실하게 살고 십일조만 하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이런 어떤 기대감 때문에 하는데 그 기대감을 수요일 날 뭐라고 했느냐 하면, 바로 그걸 가지고 ‘개별성’이라 했거든요.

개별성에서 출발해서 개별성으로. 개별성이라 하는 것은 이것은 원래 하나님이 만든 게 아니고 악마가 그렇게 우리를 조저 놓은 거예요. 하나님은 보편적 아담을 만들었지, 개별자는 안 만들었는데, 개별자 되는 것은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는 그 다음부터는 “저 여자가 따 먹으라고 해서 먹었습니다.” “여자여, 니는 왜 따먹나?” “악마가 따먹으라고 해서 따먹었습니다.” 전부 다 개별자 의식으로 돌아섰어요.

이것은 진짜 도끼로 쪼개도 남은 몸 가지고 또 개별자 주장할 거예요. 이걸 아예 이리 쪼개고 이리 쪼개면 남아 있는 사분의 일이 꿈틀거리면서 “저는 잘못 없어요.” 이럴 거예요. 인간의 세포가 쪼개면 세포 하나, 하나 살아나가지고 꿈틀거리면서 요만큼 남은 자존심은 살렸다. 이런 식으로 살 거예요. 아이고, 얼마나 인간이 마귀적인지. 이건 완전히 쪼개고, 쪼개고 완전 도마에 쪼개도 하나, 하나가 전부 개별자로서 따로 살아있어요. 그러면 한 번 보세요. 내 머리카락이 또 지 알아서 지 자존심세우고 있다니까요.

주님께서 욥에게 한 이야기를 제가 여기서 잠깐 그 비슷한 취지로 언급한다면, 우리가 잠자는 시간에도 밭에 자라는 들풀의 소리가 있어요. 여러분, 밤에 자라나는 식물의 소리를 들어본 적 있습니까? 나는 자고 있는데. 저 들판의 곡식은 자라고 있잖아요. 그걸 가지고 시편19편에서는 그 소리를 무슨 소리냐 하면 들리지 않는 소리, 침묵의 소리라 하는 거예요. 침묵의 소리하니까 사이먼 & 가펑클 노래가 생각나네요. The sounds of silence 침묵의 소리.

그게 침묵의 소리에요. 들리는 소리는 없으나 서로 통하고 있는 거예요. 인간 빼놓고. 인간은 왜 거기에 못 들어갑니까? 보편자가 되지 못하고 자기부터 시작하니까. 자기 자족. 내 새끼, 내 자식, 내 남편, 내 아내, 나 밖에 없어요. 개별자부터 나와요. 악마가 그렇게 인간을 자폐증환자로 만들어놨어요. 자폐증환자로. 교회 교인이 10명이다. 자폐증환자 10명이에요. 20년 나오다보면 목사가 뭐라고 하면 목사님 저 보고 이야기했지요? 지금 이런 이야기하니까 기억납니다만, 어느 오후 설교할 때 어떤 예를 들면서 제가 예를 들면서 마음이 편합니다. 왜냐 하면 이 예에 해당되는 경우가 지금 현재로서는 우리교회에 해당되지 않기 때문에 마음 놓고 이야기합니다. 만약에 누가 하나 걸리면 “목사님 저보고 이야기했지요?” 이리 나오기 때문에 마침 그게 없기 때문에 이야기합니다. 이리 이야기를 제가 앞에 서술을 크게 달아서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이 싹쓸이 염원을 누가 방해하고 있느냐 하면 아까 개별자 했지요. 이 개별자에서 나온 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게 ‘도덕’이라 하는 거예요. 도덕. 이 도덕이 싹쓸이 염원을 방해하고 있어요. 아브라함이 그리 이야기했지요. 두 천사가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한다 하니까 아브라함이 기도를 연거푸 합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이렇게 기도하는 걸 참 용납을 해주신다면 기도하겠습니다. 어떻게 의인을 악인과 더불어서 멸망시킬 수 있습니까?” 그런 이야기 창세기18장에 나오지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도덕적 관점이에요.

개별을 하나, 하나를 개별자로 보자 말이지요. 그러면 보다 더 착한 사람이 있을 것이고 보다 덜 착한 사람, 악한 사람이 있단 말이에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구분해서 착한 사람은 착한 식으로 취급해야 되고, 악한 놈들만 처벌해야 하나님의 공의에 합당하지 않습니까. 이런 질문을 한 거예요.

이건 2000년 기독교 신학가운데 이런 문제가 계속 나와요. 어떻게 하나님이 살아계시는데 악이 횡횡하느냐, 악이 승리하고 의인이 패배하는 가운데서 어떻게 하나님 살아계심을 변호할 수 있는가, 그걸 변호론이라 합니다. 신을 변호한다. 어떻게 하나님이 이런 분입니다, 하고 할 수 있느냐. 라고 계속 궁금해 했어요. 광주 사태 일어났을 때 성당이나 운동권 목사들이 다했잖아요. 감리교 목사들이.

어떻게 하나님이 이러한 전두환의 악마 같은 짓을 자기 시민을 죽이는 이걸 왜 하나님은 기분의 하나님입니까? 혀 짧은 하나님이에요? 그 순박한 광주 시민을 무차별적으로 재판 없이 변호인 없이 고등법원 대법원 없이 어떻게 사형을 시킬 수 있는 이걸 왜 하나님은 방치하십니까? 신에 대한 변호론이 흔들릴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걸 의인은 의인대로, 문제가 결국은 어디서 된 거예요? 지금 뭐가 문제에요? 착한 사람 따로 있고, 악한 사람 따로 있다는 거죠.

그런데 야고보서2장10절에 보면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하나를 지키지 않으면 모두 뭐가 돼요? 범법자가 되지요. 이 말은 뭐냐, 모든 인간은 위에서 헬리콥터로 총을 쏘든 지진이 나서 20만 명이 죽든, 땅이 갈라져서 죽든, 세월호에 빠진 애들 중에서 교회 다니는 애들이 한 둘이 아닌데 그 애들이 같이 물고기 밥이 되던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토 달 수 있다? 없다? 토 달 수가 없다는 겁니다.

시작을 우리는 정상이라는 것이 잘못된 거예요. 악마에 의해서 인간을 조진 인간인데, 그래서 천국가려면 악마에서 더럽게 만들어진 인간을 처음사랑가지고 그게 바뀌어져야 돼요. 붕어빵 구울 때 그냥 한 쪽만 구우면 시커멓게 타잖아요. 가끔 두 바퀴 돌고는 한 바퀴 다시 돌려줘야 마침맞게 익잖아요. 뭔가 뒤집어져야 돼요. 육이 영이 되어야 된다 말이죠.

그 변화는 누워 있는 인간이 알아서 뜨거우면 뒤집는 게 아닙니다. 고기보고 알아서 돌아서겠지. 그건 안돼요. 60년대 개그 합니다. 지가 뜨거우면 돌아눕겠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에 밭에 식물 자라는 소리를 듣고 살아가는 사람이 누가 있고, 하늘의 별 보면서 주의 자비하심을 시편145편입니다. 자비하심을 느끼는 것이 누가 그런 게 있겠어요. 그것도 가끔은 미국 가서 별을 봐야 미세먼지 없는데서 봐야 그게 보이지. 한국에서 오늘도 미세먼지 가득 있는데 그게 보이겠어요?

왜 그걸 못 보게 합니까. 개별자는 내가 잘되어야 된다는데 온 신경을 다 쏟아 붓기 때문에. 지금보다 더 잘난 편안한 행복한 내일을 앞두고 내가 관심사를 지금 엉뚱한데 두면 안 되잖아요. 그것이 바로 주의 긍휼을 잃어버리고 주의 첫사랑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악마의 수작인 겁니다. 10분 쉽시다.
 공은주(IP:119.♡.152.148) 18-05-25 15:54 
안양20180511b약2장12절(교환)-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미래가 미리 도달된다. 아까도 제가 설명했지만, 싹쓸이 염원이라고 했는데, 미래가 미리 도달되는 이유가 성령오심이 십자가 승천하고 난 뒤에 그 다음이 성령이 오십니다. 그런데 십자가 승천이 돼버리면 제가 울산강의에서 했지만, 다시 하게 되면 제가 그 때 월남 치마이야기 했지요. 승천하신 분과 지상의 성도 사이에서는 한 치마 안에 무늬라고 보면 됩니다.

널다란 외국의 공주 드레스 있잖아요. 그 무늬가 얼마나 화려합니까. 예수님이 입은 그 화려한 드레스에 꽃무늬처럼 박혀있는 것이 성도에요. 이것을 가지고 예수 안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은 본인이 잘못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고 궁극적으로 예수님이 지금 승천하셔서 연결되어있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실존 또는 실제성이라고 합니다. 주님이 지금 살아있어요.

살아있는데 그 내용은 뭐냐 하면 마태복음25장에 지극히 작은 자. 이걸 소자로 하는데. 성경대로 하겠어요. 지극히 작은 자한테 한 것이 누구한테 한 것이다? 나한테 한 것이다. 지극히 작은 자는 세상에서 되게 무시당해요. 그런데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지극히 작은 자의 모양새를 가지고 왔기 때문에 그 예수님의 같은 옷의 무늬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무늬에 있는 사람은 지극히 작은 자가 돼요.

그러면 그 사람 속에 하나님이 실존해 계시는 겁니다. 살아계시는 겁니다. 살아있으면 누가 우세하느냐, 주님이 우세하고 나는 어떻게 돼도 상관이 없어요. 예를 들어서 로또를 그냥 주웠는데 50억 되었다. 별로 신경 안 써요. 50억 될 수 도 있지 뭐. 와!! 이게 아니고. 나는 주님의 그 소중함보다도 50억이 영 못 미쳐. 이렇게 되는 겁니다. 물론 50억 없으니까 마음 놓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걸 연결시키는 거예요. “주님이여, 저 달라지도 않았는데 50억이 왜 생기게 하십니까?”라고 오히려 되묻는 겁니다. 이걸 질문의 연속성이에요. 성도의 삶은 질문의 연속성이에요. 계속 묻는 거예요. 옛날에 설교할 때 제가 여자 애들 줄넘기하는 예를 들었지요. 이 쪽 여자 애하고 이 쪽 여자애 하고 고정돼 있잖아요.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이천봉...., 이미 두 개가 고정되었어요. 확정된 상태에서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 변화는 어떻게 하느냐, 성도로 하여금 질문을 계속해서 하도록 해요.

질문을 계속 한다는 것은 내 뜻이 아니고 주의 뜻이 맞잖아요. 내가 계획한 거 아니잖아요. 주께서 아십니다. 주께서 계속 이런 일이 생기도록 하십니까? 하면 옆에 사람이 지금 당신 누구보고 이야기하는 거야? 니는 몰라도 돼. 혼자 있는 게 아니고 같이 있으니까 대화가 되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겁니다. 쉬지 말고 기도인데, 기도제목이 끝났어요. 뭐냐, 싹쓸이입니다.

주여, 싹쓸이인데 왜 아직까지 이건 저 건물은 왜 신축 건물로 올라갑니까? 싹쓸이해야 되는데. 싹쓸이해야 되는데 우리 남편은 왜 승진했어요? 승진이고 뭐고 전부 다 싹쓸이해야 되는데. 어제 TV 드라마 보니까 맨날 부장으로 있다가 상무로 승진해가지고 동네에 난리가 났어요. 드라마 제목이 나의 아저씨. 그런데 성도가 그걸 드라마 보면서 내가 그 입장이 되어볼 때에 우리 동생이 그렇게 승진되니까 좋다 하지요. “주여, 좋은데 왜 저걸 싹쓸이 하십니까?” 라고 질문을 해야 되지요.

내 남편이 요번에 회장님이 되었다. 좋은데 이 좋은 것도 주께서는 왜 싹쓸이해서 노아의 홍수 물에 쓸어가듯이 이걸 왜 쓸려가야 됩니까? 라고 늘 질문이 나오도록 유도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미완성의 질문이 아니고 완성되었기 때문에 그냥 데려가지 왜 자꾸 이렇게 일을 일으키십니까? 라고 느긋한 완료성에 입각해서 나오는 느긋한 질문들을 하는 겁니다.

그냥 싹쓸이해야 되는데 왜 제 딸은 왜 남자 바꿨다고 이 남자는 어떠냐고 소개시켜가지고. 그러면 딸아! 이 남자 저 남자 중요한 것은 주님의 심판날 가까운 것이 중요해. 라고 할 때 엄마는 내 말만 하면 이상한 소리해 싸서 대화가 안 돼! 나도 니처럼 옛날에 그렇게 했는데. 이미 확정됐거든요. 이미 고무줄이 끝나버렸어요. 미래의 삶이. 그게 바로 뭐냐, 안식일이라 하는 겁니다. 내 생각 안하는 거죠.

만약에 내 생각하게 되면 우리는 나의 의를 생각하게 되고 도덕적으로 나의 착함을 생각하게 되고 착한 거리가 있으면 반드시 이걸 밑천으로 해가지고 지금 보다 없는 걸 더 달라고 요구하게 돼요. 그걸 흔히 세상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기도라고 하거든요.

기도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에요. 빨리 어서 오시옵소서. 그게 기도지. 개인적으로 더 달라고 하는 것은 그건 갓바위한테 빌 뿐이지 그건 기도는 아닙니다. 시집가던 장가가던 제발 좀 세상 이미 마감됐다는 것을 서류마감, 합격자 마감 됐어요. 마감된 걸 알게 해 달라. 이런 식으로 주님하고 질문을 하면서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런 생각을 늘 하느냐, 못하지요.

못하니까 성도한테는 자꾸 질문이 나오도록 사태가 일어나요. 이번 일은 내가 잘못도 안했는데 왜 이렇게 갑자기 과속도 안했는데 다른 사람은 다 넘어가고 나는 경찰한테 걸려가지고 삼만원 떼어 가십니까? 또 질문했잖아요. 그럼 주님께서 싹쓸이하겠다는데 니 또 돈을 사랑하는구나! 이리 된다 말이지요. 싹쓸이 하는 게 좋다며. 왜 갑자기 싹쓸이하는데 돈 삼만원이 왜 아까워? 그 질문을 통해서 내 자신이 아! 다른 존재구나! 신분 자체가 다른 신분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하고 달리 다루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그 다음 해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과정에서 무엇이 일어나야 되느냐 하면, 이제 그 다음 두 번째 이야기할 것은 변화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변화가 일어난다고 한다면, 어떻게 변화됩니까? 변화하고 난 뒤에 내 모습과 그 전의 모습은 어떻게 차이 납니까? 하는데 변화는요, 모델이 없어요. 예수님을 본 받아라 하는데 예수 봤습니까? 예수 못 봤잖아요. 모델이 없는 거예요. 변화가 아니고, 변화에 속아 넘어갔어요. 변화가 아니고 변화라 하면 사람들이 미완성이 되어버려요. 성화론 되어 버립니다. 이건 큰일 나요. 이건 마귀적 이에요.

도덕은 싹쓸이를 감춘다 했지요. 도덕적으로 계속 나가버리면 이게 불안해서 못 살아요. 나중에 도덕 수준에 도달 안 될 때 재림해버리면 나는 탈락이 되어버려요. 이 불안감이 계속 있다고요. 도덕은 이미 끝난 상태를 자꾸 아닌 것처럼 아주 일이 남아있는 것처럼 착각해 하는 거예요. 그런데 변화한다 하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뭐냐 하면 도덕적인 변화를 생각하잖아요. 윤리적 변화.

그럼 뭐냐, 변화가 아니고 교환입니다. 오늘 강의 제목이에요. 교환하는 거예요. 교환. 바꿔치기하는 거예요. 두껍아, 두껍아, 헌집 다오. 새집 줄게. 아~ 이거 정말 복음입니다. 주께서 고생을 한 것과 내가 자식들 키운다고 고생한 거 하고 물물교환, 바꿔치기 하는 거예요. 니가 고생했다. 고생했다. 하지만 니 나처럼 고생해봤어? 니 편안하게 놀러갈 때 주님께서 고생했지만. 그랜드케냐 무슨 케냐를 보여주든 간에 주께서 고생했다고요.

우리는 내 고생만 기억하고 있지 주님의 고생은 기억을 안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죽고 난 뒤에 20초 내지 30초 이상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가, 주마등처럼 다 지나가는 걸로 나와 있어요. 과학적으로 검사를 해보게 되면. 주마등처럼 죽죽 빠른 시간에 지나가는데 어떤 것만 기억나느냐 하면 획기적이고 충격적이고 자극적인 것만 쫙쫙 지나가요. 자극적인 것이 죽죽 지나가는데 그 특징이 뭐냐 하면 자기가 주인공 되어서 잘난 맛에 살아갔던 것만 좍 나와요. 그러니 죽기 전까지라도 지 중심입니다. 나 잘났다 중심이에요.

그걸 우리는 미리 꿈속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꿈의 내용이 주로 주인공이 본인이 주인공이고 그 꿈의 주인공은 전부 다 자기의 정당함과 관련되어있어요. 자기 정당함과. 나 이렇게 착실하게 사는데 아휴~ 일이 이렇게 꼬이면 안 되잖아!! 하면서 꿈에서 깼어요. 아이고, 식은땀이야. 모든 꿈은 자기만 억울해요. 특히 억울할 때마다 꿈이 심도가 더 깊어져. 평소에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꿈을 통해서 다 나타나거든요.

하나님께서 교환을 해줄 때 내가 이만큼 고생했으니까 더는 고생 안하겠지. 하면서 교회에 나옵니다. 지금 고생한 걸로 퉁쳤다. 지금 내가 살아온 걸로 내 집안 망한 걸로 퉁치고 이제부터 이제 착실하게 마음잡고 교회 나왔으니까 앞으로는 룰루랄라 남은 평생 다 하겠지. 결국 뭐냐 하면 나의 노고를 알아달라는 거지요. 나의 노고를. 나의 희생과 정성과. 그럼 이건 뭐냐 하면 결국은 주님의 복음을 훼방하게 되는 거예요. 모독하는 게 돼요.

십자가 달릴 때 제자들 다 떠났습니다. 남아있는 것은 정말 아무 행함도 없는 사람이 남아있었지요. 직업이 뭐지요? 강도지요. 강도입니다. 천하에 뻔뻔한 인간이에요. 옛날의 강도는 그냥 훔치는 강도가 아니에요. 살인강도에요. 훔친다고 사람 죽이고 그런 거 아니에요. 사람 죽였을 때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람을 죽였을 때 살인강도가 되지요. 그런 인간이니까 십자가에 매달린 거예요. 옛날 노예들이 반란했을 때 십자가에 매달고, 살인 강도할 때 십자가에 매달았어요. 예수님처럼 정권에 대항했을 때도 매달렸어요. 그런데 그 강도가 어디 갔습니까? 죽어서. 그냥 천국 갔다 하지 마시고 어느 나라에 갔다? 예수님의 나라에 간 거예요. 그럼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의 행함에 대해서 일체 안 묻는 분이에요.

내 행함에 대해서 기대 걸고 행함에 대해서 심사숙고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남들보고 내 자랑 안 알아준다고 그렇게 불평하잖아요. 여러분, 부부싸움의 원인이 뭔 줄 알아요? 니는 내 사정 모른다. 이게 시발점되는 거예요. 이게 부부싸움의 시작점이 되는 거예요. 어떻게 내가 이렇게 아픈데 친정일 때문에 골치 아픈데 니는 놀러 갈 생각을 하느냐. 이런 것이 씨앗이 돼가지고 난리도 아니지요.

그리고 부부싸움의 씨앗은 내 사정 니가 안 알아줘서 그렇다는데 이게 말이 안되는 게 뭐냐 하면 인간은 마귀로 인하여 각자 절대적이 돼요. 폐쇄적이에요. 그럼 이걸 뭐라고 했습니까? 수요일날 개별자라고 했지요. 개별자는 어느 누구도 들여다봐도 이게 밝혀지지 않아요. 왜 그러느냐 하면, 개별자가 들여다보는 이 인간도 자기 개별자로 구축된 의식관 세계관을 가지고 내 속을 들여다보기 때문에 그래요.

순수하게 보는 게 아니에요. “여보, 당신 아파? 에헤, 엄살이구먼.” 이건 뭐냐, 자기 몸은 건강하다는 말이지요. 건강한 상태에서 나 같으면 그 정도는 이겨낼 수 있겠는데. 하는 그 쪽의 인생관과 그동안 살아온 인간관으로 들여다보니까 위로는 하는데 위로가 아니고 그냥 시간 때우기에요. 어느 누구도 남의 사정을 이해 못합니다.

이해 못한다는 말은 이게 싸움의 시작이라 했잖아요. 결국 인간은 싸우려고 부부된 거예요. 이해를 좁히려고 그렇게 애를 써요. 스카프해주고 결혼40주년 맞이해서 링도 꼽아주고 예비 링 하나 더 꼽고 남편이 산악경찰이거든요. 오늘 아침에 인간극장에 나왔어요. 백날 해주고 여자 좋다고 뽀뽀해주고 해봐도 조금만 시가집 뭐해서 또 다 해준 거 다 날아가 버려요. 전부 다 무효가 됩니다.

자, 시작은 남이 나의 사정을 안 알아줘서 시작했다. 그러면 부부싸움의 끝은 어떻게 끝날까요. 이건 지난 오후때 했습니다. 끝은 1번, 진리로 끝난다. 진리가 승리한다. 택도 없는 소리지요. 2번, 많이 우는 자가 이긴다. 아니지요. 옳은 것도 아니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도 아니에요. 3번, 내가 찼느냐, 차였느냐, 똥고집으로 끝납니다. 끝에는 무조건 내가 차는 구조가 되어야 돼요. 그리고 손해 보더라도 내가 찼을 경우에는 내가 감당이 돼요. 이 고난을 이겨낼 수가 있는데 이상하게 재산 좀 받고 해도 차였을 때는 기분 더러워.

그걸 가지고 세상에서는 뭐냐 하면 재벌 아들이 주는 매 값이라 하는 겁니다. 니 7대만 맞자. 내 칠천만원 줄게. 대한항공 사태 알지요. 때려놓고 돈으로 하면 되잖아. 이 말이에요. 그런 일이 있을 때 그걸 누굴 탓하지 말고 그게 우리한테 있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12절, 13절 그 다음에 유명한 14절 봅시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하는데 이 말씀을 이해하는데 하~ 너무나 오랜 세월이 걸려요. 이 말씀이. 이 말씀이 이렇게 행함이 있는 믿음이야 구원받지. 로마서하고 다른데. 로마서는 행함이냐, 믿음이냐, 둘 중에 하나만 골라라. 했는데. 여기서는 같이 결합시켜서 행함이 없는 믿음과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나눠버렸으니까 그러면 행함이 필요 없는 게 아니고 야고보서에 보면 행함이 필요 있네.

그러면 믿음을 보이라 하는 게 아니고 행함을 보이라 하는 그것이 믿음을 보이라 하는 것을 이걸 대변해 주는 거네. 그러면 교회에서 교인들이 신앙생활 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것은 믿습니다. 하는 것은 아무 짝도 소용없고, 뭘 보여야 돼요? 얼마나 충성했는가, 돈을 얼마 냈는가, 목사는 섬기는가, 얼마나 희생하는가, 시간 바치고 돈 바치고 평생 바치고 자식 바치고 다 바치고, 그걸 하면 믿는 자의 모델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이건 믿어도 믿는 게 아니고 이건 지옥가는 믿음이다. 이렇게 이야기했을 때, 그게 아마추어들이 반발할 수 있겠어요? 프로들도 마찬가지지만. 뭐라고 반박하겠어요. 반박 못한 세월 40년 보내고. 반박 못한 세월.

이것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교환하는 그걸 행함이라 합니다. 바꿔치기하는 고 과정. 여러분들이 마술사들이 컵을 해가지고 장날가면 바람몰이 하면서 있잖아요. 자, 여기 동전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사위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산에 가야 범을 잡고. 이건 돈을 타라 이 말입니다. 이렇게 할 때에 그 사람이 컵을 세워 놓고 하던가요? 손놀림이 움직이던가요? 뭔가 손놀림이 바삐 움직이지요. 행함은 움직이는 거예요. 교환은 움직입니다. 몇일 동안. 아니 매일같이.

매순간마다 주께서는 교화하는 겁니다. “아이고, 나 오늘 행동 이렇게 하다가 벌 받을까 싶다.” 이렇게 하다가 이게 아니잖아.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 내가 상한 심령 안 되려는 요 심보가 더러운 심보네. 가만히 있어 보자. 내가 상한 심령 안 되려하는 것은 만약에 상한 심령이 됐는데 지금 내 딸이 공무원시험 치고 있는데 내가 상한 심령이 되게 되면 내 죄 지은 것 때문에 내 딸이 떨어지면... 안되지. 안되지. 이리 된다고요.

이건 뭐냐 하면 상한 심령이 되게 되면 무엇이 문제냐, 상한 심령이 문제가 아니고 이렇게 착해야 비로소 내가 본격적으로 달라 하는 것을 당당하게 주 앞에 내놓을 수 있는데 죄 지어 놓으면 그걸 못 내놓게 되면 내 안에 계획에 차질이 벌어질 때 미리 당겨서 생각해보니까 아찔한 거예요. 지금. 딸애가 3번 떨어지면 우짜지? 배운 건 그 가락밖에 없는데. 시집은 보내야 되는데 공무원해서 뭘 벌어야 되는데. 약사를 시켜 놨다. 그럼 의사를 만나야 되는데 신천지에 빠질 줄은 몰랐지요. 약사 월급 그건 빼놓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리 교회에 혹시 의사 들어오면...., 이게 전부 다 내가 얼마나 착실하냐와 결부된다고 본 거예요.

그러면 이건 뭐냐 하면 교환이 아니고 붙드는 거예요. 나 이대로. 나 이대로 가겠다는 거예요. 꼭 붙들고 이걸 못 놓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 같으면 주님께서는 어떻게 합니까? 강제로 감싸고 있는 팔을 후딱 제켜 빼는 거예요. 이 뗄 때의 아픔이 지옥의 아픔입니다. 사람은 행복이라 하는 것은 소유가 전부에요. 돈만이 아니고 내 명예, 나에 대한 칭찬, 나에 대한 사랑이 자꾸 들어올 때 이걸 행복이라 여기고 나가는 것을 불행으로 봐요. 우싸스럽고 돈 나가는 것은 기본이고 누가 아프고 다치고 이런 것으로 봐요.

그러니까 이건 다 어디서 나왔다고 했습니까? 이게 무엇 때문에 그렇다고 했어요? 자폐증 환자에요. 자폐증. 원래 인간은 이런 게 아니고 이리 안 만들어놨어요. 마귀가 와서 나밖에 모르는 자폐증 환자기 때문에 계속 끌어 모아야 돼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인간을 주님으로 바꾸기 위해서 주님은 십자가 져도 부활하셨잖아요. 사실은 십자가 졌기 때문에 부활하셨지만.

자기를 부인하고 뭘 지라 했습니까? 십자가를 지고 가라고 했는데. 우리는 한 3미터 지고 던져버린다고요. 십자가 안지고 구원 받기를 원해요. 십자가를 지게 되면 뭐가 사라지느냐 하면 개별자가 사라져요. 십자가를 지는 게 고생이 아니고 뻔뻔함이라니까요. 뻔뻔함이 십자가 진 거예요. 그런데 뻔뻔함이 아니고 조심스럽게 살면 십자가 갖다 내버린 거예요.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야지. 미래는 나한테 달려있어. 나하기 나름이야. 갑자기 최진실이 확 생각나네. 남자는 나하기 나름이야. 인생은 나하기 나름이야. 아니에요. 여러분하기 나름 아닙니다.

우리는 내 키 한자도 자라게 못하고 앞에 무슨 일이 있을지 그것도 예상 못해요. 우리는 떠미는 대로 살았지 내가 알아서 한 게 아닙니다. 우리를 그냥 놔둬버리면 우리는 높이 쌓는데 열중해요. 백날 높이 쌓아도 키 차이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쌓는 사람은 자꾸 높이 자기 잘되고 높이 쌓아지면 뭘 잊어버리느냐 하면 자기의 기초가 반석인지 모래인지를 신경도 안 써버려요. 눈이 높아가지고.

서울에 개포동인가 저런데 57층쯤 살게 되면 1층이 뭐 보이겠습니까. 빌라 살아야 아래층 다 통하지요. 높이 올라가는 게 좋은 게 아니에요. 불행해요. 자기의 원판을 기초가 잊어버리니까. 높으니까 더 높은 사람만 보이는 거예요. 골프 치러 다니면, 말이 좀 안 된다. 골프 치면 같이 골프 치는 사람과 옷매무새가 어떻고 그게 보이는 거예요. 점점 더 자기 모든 게 날아갈 싹쓸이 하는 그 생각이 안 난다니까요.

그래서 주님께서 행함은 야고보서의 행함은 움직이는 겁니다. 그 움직일 때 알아서 움직이면 내 계획이죠? 그런데 내가 예상 못한 일이 일어났을 때는 내 움직임이 아니고 강제조치지요. 강제. 강제로 움직이게 하지요. 강제조치 한 번 봅시다. 야고보서2장25절,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기생 라합이 그 이스라엘 스파이가 오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까? 아니면 어떻게 됐어요? 갑자기 나타났지요.

기생 라합이 교체를 합니다. 무엇을? 자기의 조국을 버려요. 지금이나 조국하지, 옛날에는 조국이 아니고 자기의 혈통을 버립니다. 혈육을 버립니다. 자기가 살던 땅은 부동산이에요. 미국에 가보셨지만, 미국 간 사람들 그렇게 자수성가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더러 있을 거예요. 하지만, 뿌리는 미국이 아니에요. 아무리 거기서 풀장 가진 저택에 살더라도 문만 나가면 외국이에요. 고 안에서는 지 동네인데 밖에 나가면 한국의 그 냄새가 없습니다. 자기 동네만 자기 집이지 바깥에는 이방인이에요. 남의 나라에요. 그래서 나이 들면 다시 한국에 들어오려고 기웃거립니다. 실패해서 그런 게 아니고 성공해도 마찬가지에요.

기생 라합은 몽땅 버립니다. 왜냐하면 싹쓸이 염원을 갖고 있어요. 기생 라합이 오기 전에 소문을 들었습니다. 풍문으로 들었어요. 이미 모압 부터 있었는데, 모압 부터 무슨 소문을 들었느냐 하면 뭔가 애굽에서 나왔던 어떤 일단의 집단이 있는데 이것은 뭔가 하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이 움직이는 민족이란다. 그래서 거칠 것이 없다는 거예요. 거칠 것이. 대들 다가는 작살나는 경우를 계속 소문으로 누적이 된 채, 어디까지 왔느냐 여리고성까지 온 거예요.

이스라엘 가봤다고 또 그림 그리는 거 보세요. 애굽이고 여기 홍해가 있습니다. 이게 시나이반도라 했는데요. 여기 지중해고. 이렇게 와서 이렇게 가는 겁니다. 여기에 갈릴리바다보다 열배가 큰 바다가 있어요. 이게 죽음바다인데, 사해입니다. 사해 끝 여기가 소돔과 고모라에요. 소돔이에요. 그리고 여기에 갈릴리 바다고 100Km에 요단강이고 세례요한 세례줄 때 여기서 세례 줬고, 여기 홀몬산 2500미터 되는 산에 여기 흰 눈 있지요. 흰 눈이 잠시 보였는데.

여기서 사하라 빌립보라는 것이 강물이 흘러가요. 겨울에는 물이 많고 여름에는 물이 마르고 그래요. 여리고가 여기에 있어요. 요단강 요쪽에 여리고가 있어요. 여기에 모압 있고 이 동네는 암몬. 여기는 에돔이 돼요. 야곱의 형의 살던 세일산, 세일산이나 에돔이나 같은 지역으로 보면 됩니다. 이렇게 해서 올라오면서 소문이 계속 있는 거예요. 이방인들이 가나안10족속들이 이미 정보가 다 통해요. 무서운 놈들이라고 하면서 다녀요.

그러니까 그들이 무서운 이유가 딴 게 무서운 게 아니고 그들이 혼자 있으면 안 무서워요. 숫자가 힘으로 하는데. 하나님이 홍해를 가르고 왔다는 거예요. 신과 함께 있는 민족이다. 그래서 진짜 그들을 이기려면 그들보다 월등히 힘이 세던지 알아서 기든지. 기생 라합은 손들어버렸어요. 그걸 제가 뭐냐, 미래가 일찍 망하기도 전에 망했다! 라는 망했을 때의 내 위치는? 망했을 때의 그쪽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나는? 이리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까 이야기했지요. 지극히 작은 자에 하는 것이 곧 누구한테 한 것이다? 나한테 한 것이다. 정탐꾼에게 한 것이 누구한테 한 것이다? 그 쪽의 하나님한테 한 것이에요. 이걸 가지고 뭐냐 하면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 하는 겁니다. 윤리 도덕하고 아무 상관없습니다. 교회 섬기는 거 하고 아무런 상관없습니다. 교회가 아니고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 뿐만 아니고 이 세상에 있는 나가 어떻게 보느냐, 나와 엮여서 나와 세상을 주님보시기에 어떻게 보이겠는가. 천하 죄인 중에 괴수지요.

그게 바로 행함으로 마구 나오는데 그 행함이 뭐냐, 잘났다가 나오는 게 아니고 교체하는 과정, 중도과정이 나와요. 교체하는 중도과정이. 그렇게 되면 남들은 신경 안 써도 되는 일을 본인이 신경 쓰고, 남들은 죽어라고 신경 쓰는 일이 자기한테는 무슨 일이 되느냐 하면 남들이 그렇게 심각한 문제가 오늘 칠판 가득 쓸게요.

‘사소한 일’입니다. 이게 행함입니다. 세상 볼 때. 딸하고 엄마하고 손님 온다고 잡채를 하는데 잡채를 태웠어요. 딸은 죽었다. 평소의 엄마 성격 같으면 나는 죽었다. 할 때 엄마가 은혜를 받았는지 기생 라합이죠. 은혜를 받았어요. 엄마가 들어와서 괜찮아요. 마트에 가서 잡채 뭐 얼마 한다고 사가지고.  그렇게 실수해야 그 다음부터 배우는 거야. 누가 놀래느냐 하면 딸이 놀래버립니다. 평소의 엄마가 아니에요. 평소의 엄마가 아니네. 교체됐어. 방금 교체 됐어. 어머, 어머, 저 행함! 그래, 이 행함이 뭐냐, 믿음에 합당한 행함이에요.

그동안 여러분 어떻게 배웠어요? 참 개판으로 배운 거예요. 개판으로. 이거 행하면 장차 복 줄까 싶어가지고. 내 심보하고 딱 맞아 떨어지잖아요. 교회 부흥되면 그 교회에 소속된 나도 덩달아 잘 될 줄 알고. 하나님 살아계시니까. 여기에 또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21절입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아들을 그것도 미워하는 아들이 아닙니다. 저 인간 저 아들 때려죽여야지! 이런 인간을 아들이 아니에요. 너무나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너무나 사랑하는 아들을 여러분들이 꼭 일치하지는 않지만 여러분들이 상상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자식 가운데 사랑하는 아들 있습니까? 후딱 이야기하면. 없다고 치고. 그러면 여러분 손자 손녀 가운데 그것도 30개월 이전에 사랑하는 손자나 손녀 있습니까? 상상해 보세요. 그 중에 제일 사랑하는 손자, 손녀를 제단에 칼 들고 가가지고 죽이려고 한다면 이건 미친 겁니다. 이건 미친 거예요.

제가 갑자기 성경 책 옆에 책이 하나 있는 이유는 잠시 읽어볼게요. 무슨 내용이냐 하면 초대교회 때 셀수스라는 안 믿는 로마의 철학자가 예수 믿는 사람을 놀리면서 하는 이야기에요. “이처럼 어리석고 무식한 자 만이 하나님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하는 자체가 그들이 얼마나 어리석고 멍청하다는 증거가 아닌가?” 하고 놀리는 거예요. 그 당시 안 믿는 철학자가. 고린도전서1장이야기에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은 세상 사람보기에 어리석고 미련하다는데 그 사람 셀수스라는 사람이 생각하기를 신이 있다면 똑똑한 자가 신의 나라에 쓸모 있지 않느냐. 공부 많이 한 자가 쓸모 있는데 어떻게 이 로마바닥에 예수를 믿는다는 작자들이 어떻게 한결같이 무식하고 막 대먹고 논리 앞뒤도 없고 십자가 피의 능력이 구원한다는 막가는 소리를 하느냐. 그들은 바보와 무식쟁이 노예와 여자와 아이들만을 유혹한다. 이리 되어있어요.

이것 들어보니까 이 이야기하고 오늘날 교회 목사 설교하고 한 번 비교해 보세요. 목사들이 똑똑한 사람 복 받는다는 식이 아니겠어요. 그러나 초대교회는 그렇지 않았어요. 이들이 이렇게 무식하고 드러냈어도 그들은 사단의 밥이 되고 잡혀가면서도 그들은 아주 당당했고 뻔뻔했어요. 그래, 무식하다 와? 그래! 무식해서 구원 받는다 와? 니는  무식할 줄 모르지? 이 바보야! 이리 되는 겁니다. 니가 자진해서 어리석을 줄 모르지? 자진해서 무식할 줄 모르지? 이 박사들아! 아까 했잖아요. 무슨 박사? 개 박사. 그래, 미국 가서 학교 땄지. 그래, 똑똑하지. 그게 그들의 믿음의 행함이 그런 것들인 거예요?

아까 했잖아요. 하나님의 안식과 거룩은 누구 생각하지 않는다. 내 생각, 내 잘남을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탕자에요. 그냥 긍휼 안줘도 괜찮아요. 구원 안 해줘도 괜찮아요. 만약에 우리가 구원받고자 싸대면 길에서 누굴 만나느냐 하면 구원파를 만나요. 또 누굴 만나느냐 도를 아십니까? 그걸 만나요. 그러니까 박진영처럼 구원파 만난다고요.

이게 왜 그러느냐 하면 똑똑한 나를 천국까지 내가 스스로 집어넣기 위해서 더 정보 수집할거라는 그 생각이 잘못된 생각이에요. 초대교회는 그렇지 않았어요. 욕을 얻어먹었어요. 복음으로 고난 받으면 성령이 너희들 머리 위에 있다. 데살로니가 전서4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성령이 있다, 없다는 어떻게 안다? 복음으로 고난 받으면 100% 성령 있는 거예요. 고난으로. 지 자존심으로 고난 받는 게 아니고 복음으로.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어떤 자가 복된 자냐 하면 심령이 가난한 자, 의에 주린 자, 긍휼을 아는 자, 이런 자들이 바로 복음 때문에 그렇게 된 거예요. 베드로전서4장보고 갈까요. 방언 터지니까 성령 받은 것이냐고 자꾸 이런 질문을 해왔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답변해 주세요. 베드로전서4장 14절, 방언을 얼마나 해야 됩니까? 안수해서 병 낫으면 그건 성령 받는 겁니까? 그런 질문들을 하기 때문에.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아까 제가 구라 친 게 아니지요.

내가 착하니까 성령 받은 게 아닙니다. 뭔가 고난 받는다고 해서 고생한다 생각하지 마시고, “니 좀 이상한 거 같아.” 이런 거 있잖아요. 일부러 해꼬지하고 돈 뺏고 막 추방당하고 그런 쪽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평온하게 그냥 안 믿는 사람들하고 친할 수 있는데 다만 어떤 결정적 순간이 와서 “니 사고방식이 우리하고 좀 다른 거 같아.”라는 느낌. 성령 받은 거예요.

벌써 저 쪽이 알아요. 마귀 쪽이 알아요. 마귀 쪽은 공통점이 있어요. 인간은 잘난 맛에 산다는 게 공통점이에요. 니 이거 내놔라. 내 이거 내놓을게. 너그 자식 잘됐지? 내 자식 이만큼 잘됐다. 니 남편 승진했지? 내 남편 상무됐다. 이렇게 잘난 맛이 공통점인데, 그게 아니고 나는 복음 앞에서 잘난 것도 없고 전부 다 어리석고 바보 같아. 자진해서 자수하는 거죠. 자수해서 광명 찾자. 는 것처럼. 알아서 자수하는 거예요. 십자가 피하고 우리 행함하고 비교할 것을 비교하세요. 주님 저 고생 많이 했습니다. 어디 십자가 앞에 피 앞에 들이댑니까? 고생해도 욥만큼 고생한 게 어디 있어요? 죽음 직전까지 갔는데. 죽을 살판인데 어떻게 그걸 우리와 비교합니까?

켈수스가 몇몇 그리스도니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니까 이렇게 조롱했다. 몇 사람은 그들이 믿는 것에 관해서 해명도 하지 않고 해명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파헤치지 마시고 믿으시오. 그리고 당신 믿음이 당신을 구원할 것입니다. 라고 하는데 현실생활에서는 지혜는 악이고 어리석은 신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라고 조롱하고 있는 거예요. 물론 초대교회야 믿음이 요새 교회의 믿음은 아니고 초대교회는 많은데, 이게 뭐냐 하면 아까 까닭 없이 믿는 것이 인간 아니다. 라고 누가 이야기했어요? 악마가 이야기했지요. 악마가 지금 켈수스에요. 켈수스로 그 시대에 악마로서 이야기한 거예요. 그러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 주위에 이런 악마적인 것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매일 만나지요.

흔히 안 믿는 남편들이 “니가 복음 안다고 해놓고 행동하는 꼬라지 보니까.” 맨날 듣는 소리가. “복은 아는 니가 예수를 좀 닮아서 양보 좀 하지. 니 어찌 복음알고 난 뒤에는 기가 살아가지고. 우찌된 셈이야. 양보를 모르네. 너는.” 이런 식으로. “니가 그렇게 교회 다니고 복음 알고 기도했으면 딸이 저렇게 안 뻣나가지 하는 꼬라지 봐라. 기도 무슨 소용 있노? 그래서 내가 예수 안 믿는다.” 그럴 때 여러분 어떻게 답변해야 됩니까? “성령을 아무나 주나?”

로또가 아무나 되는 게 로또가 아닙니다. 지금 그걸 횡재라 하는데. 울산강의에서 횡재라고 했는데. 아무나 오면 횡재가 아니지요. 노력해서 얻은 것 같으면 횡재가 아니지요. 이렇게 이야기하세요. “나는 똑같애. 다른 점은 똑같은데 구원됐다는 그것뿐이야. 나 달라진 게 없어. 똑같은데 구원되었어.” 똑같아요. 행함이건 똑같은데 바로 행함이라 하는 것은 이게 믿음이 살아있다는 거예요. 믿음이 나로 하여금 낯선 행함을 우리가 기대하는 행함이 아니고 낯선 행함을 새삼스럽게 사건을 유발해서 나타내게 했다는 그것을 행함이라 하지요.

남들이 할 수 있는 건 행함이 아닙니다. 어떻게 자기 아들을 그것도 귀한 손자, 손녀를 죽입니까. 그것도 못난 게 아니고 제일 이쁜 것을. 생각해도 끔찍해요. 뭐라고 해요? 차라리 내가 죽지. 그 죄 없는 걸 왜 죽여? 그러니 내가 죽지. 아브라함은 아무 소리 안하고 아들을 데리고 갑니다. 거기다가 아들이 더 아버지의 가슴을 찌르지요. “아버지, 불쏘시개는 있고 칼은 있는데 불과 불쏘시개는 있는데 제물은 어디 있습니까?” 오늘 이거 이야기하고 강의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사소한 일 + 하나님의 언약(복음) = 구원 또는 영생이 됩니다. 그러면 언약은 누구와 만나느냐 하면 그냥 사소한 것만 만나요. 따라서 우리가 사소한 것을 우리가 이렇게 고귀한 것으로 끄집어내면 안돼요. 아브라함은 뭘 생각했느냐 하면 자식이 있고 사랑하더라도 자식을 무슨 자식이라 하느냐 하면 없는 자식의 자리에 자기가 되돌아가야 되는 겁니다. 이건 이삭의 싸움이 아니고 누구 싸움이냐 하면 아브라함 본인의 믿음의 투쟁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아! 이삭을 바쳐라.” 라는 말은 “아브라함아! 니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이 뜻이에요. 오늘날 우리의 원래의 자리가 뭐냐 하면 바로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눈만 뜨면 십자가 잊어버려요. 안 돌아갑니다. 미쳤어요. 나도 살만큼 살아야지요. 절대로 십자가 좋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빼놓고 다 도망간 그 사건이 사건을 좋아하지 않아요. 우리가 해낼 수 없는 사건이에요.

우리가 모방한다고 그게 되는 게 아니에요. 인간은 자기를 부인하라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자기를 부인하게 되면요, 그 자기 부인했다고 의시 대는 그 자아를 긍정하게 돼있어요. 불교의 딜레마가 그거에요. 머리 깎고 다 깎았는데, 도를 닦는다고 바깥에서 자물쇠 잠겨 놓고 다했는데 조그만 개구멍에 밥만 넣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밥도 안줘요. 밥만 넣고 바깥에서 열어줘야 열릴 정도로 오직 정신 일도에 들어갔는데 그게 몇 년 하겠어요? 5년 하겠어요? 10년 하겠어요? 그거 할 때 40일 내지는 한 두달 하고 석달 하거든요.

석달 뒤에는 묵인데 무슨 묵이냐, 도루묵이 돼요. 인간의 의식이 남들과의 만남에서 새롭게 쌓인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몰라요. 기도원에 올라가서 나무뿌리 뽑을 때는 나무만 보이고 사람은 안보이지요. 기도 끝나고 응답받았다고 좋다고 내려오면 누굴 만나요? 벌써 버스 탈 때 사람만나지요. 운전사 만나지요. 집구석 들어가면 누굴 만납니까? 기도하기 전의 사람들 그대로 만나요. 기도의 효험 받아서 좀 달라지겠지. 관찰해보면 하나도 안 달라지고 본인은 기도 소용없네. 내가 의인이 아닌가, 기도발이 없나. 이리 돼요. 자기가 조작해 내는 행함이에요.

믿음이 있다는 것을 티를 내서 지가 괜찮은 믿음을 자꾸 조작하는데 그게 기대감이 너무 앞섰어요. 그건 본래의 자리가 아니고 여전히 악마의 기뻐하는 자리, 개별자의 자리에 있는 겁니다. 십자가는 개별자를 죽여 버리고 보편자 안의 존재로서 바꿔치기 하는 겁니다. 월남치마의 무늬처럼. 십자가 안의 죽으면 나는 죽고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사는 거예요.

어떻게 산다? 지극히 작은 자에요. 지극히 도곡동 47층에 살지만 남들은 성공했다고 치지만 100평짜리 아파트 20억짜리에 살지만, 본인은 은혜 받아버리면 그런 좋은 넓은 집에 살더라도 지극히 작은 자에요. 49평 아파트 개하고 혼자 살아도 지극히 작은 자에요. 그게 행함이에요.

아이고, 요번에 아들이 사법고시 합격해서 얼마나 좋겠습니까? 합격은 합격이지만, 내가 그런다고 해서 지극히 작은 자에서 지극히 약간 큰 자가 되는 게 아니에요. 왜? 본래의 자리는 십자가 자리가 내 자리이기 때문에. 괜찮은 자식, 돈 많은 남편 이게 내 자리가 아니고 그건 항상 모든 것이 싹쓸이해서 없어지면 주신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갈 수도 있는 문제거든요.

어제 어느 분이 카톡으로 라인인가 왔는데 늘 복음을 찾는 그 분인데, 캘거리에 살다가 디트로이트로 잠시 가족이 여행을 갔어요. 거기에. 전에 살던 사람이 있어 갔는데. 잘 갔다왔는줄 알았는데 차가 유리창 깨지고 도둑을 만났어요.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으로 있으니까 복음 믿고 까부는 거예요. 갔다가 오는데 예상 밖으로 깨졌을 때에 그 집사님이 하는 말이 “내가 얼마나 내 자리를 찾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게 바로 믿음의 합당한 행함이라니까요. 이게.

나는 절대로 나를 부인 안 해요. 그런데 부인하게끔 돌발되는 사태가 벌어지게 해서 나로 하여금 참 내가 개별자가 아니잖아. 아담 때문에 죄 지은 것처럼 예수님 때문에 의인됐잖아. 미쳤어. 바보야. 내가 그걸 왜 잊어버렸어. 라고 그걸 알게 하는 것이 바로 행함입니다. 주님 몫이에요. 우리 몫이 아니에요.

기다려보세요. 집에 가서 기다려보세요. 주께서 또 일 일으킵니다. 뭔가 또 일이 있어요. 이 세상은 내가 꾸려가는 게 아니고 대구강의에서 한 거 마지막 그 이야기 드리겠습니다. 제가 그 때 문제를 냈거든요. 넓은 길과 좁은 길을 그림으로 그려보세요. 문제를 냈어요. 내가 답변을 했지만. 넓은 길은 쉬워요. 길이 커서 찾는 사람이 많다 말이죠. 이건 문제없어요. 다 그래요. 멸망할 사람은 넓은 길로 가잖아요.

그럼 좁은 길을 그려보세요. 보면 사람들은 대부분 좁은 길이니까 요렇게 좁게 그려요. 이거 아닙니다. 좁게 그리면 오기가 있어가지고 요렇게 해서 들어가요. 좁은 길은 없어요. 벽이에요. 벽. 길이 없어요. 벽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모든 길이에요.

그런데 주께서 사태를 일으키면 여기서 길이 없으니까 자기 부인이 일어나요. 아까 사태를 통해서 “참, 내 자리가 십자가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지.” “그런데 십자가 믿고 구원 받았던 내가 이상하게 내가 좋아질까? 주님이 더 소중해야 되는데 예수님 덕분에 혜택입고 나는 구원받았다! 하는 내 개별적인 내 자신이 더 좋아질 때, 야! 이게 또 못돼먹은 먼저 된 자 나중 된 것처럼 또 까불었구나! 하는 순간 그 때 바로 이 길은 좁은 길이 아니고 혼자만 가는 널따란 길로 찾아오지요.

자기를 부인했을 때 넓은 길이 열린 이유가 천국이 자기를 부인한 자만 들어가기 때문에 그래요. 그 교체는 누구 몫이다?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성령께서. 어떻게 하신다? 율법 깔아놓고, 저주 받아 마땅합니다. 깔아놓고 긍휼이라는 것을 늘 있는 긍휼이지만, 새삼스럽게 긍휼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는 작용.

주의 일은 주께서 합니다. 우리가 하는 게 아닙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긍휼 받아 놓고 별로 탐탁지 않게 여겼고 오히려 긍휼이 나의 주특기를 무시한다고 여겼습니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거 세상 사람과 다를 게 없는 똑같은 우리를 십자가 지게 하셔서 성령 보내셔서 다시 한 번 내 신분이 소속이 어딘가를 깨닫게 해주시니 이 은혜만 자랑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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