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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16 00:35:44 조회 : 618         
징후적 해석 스가랴 6:5 210415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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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은주(IP:119.♡.152.148) 21-04-28 15:52 
안양20210415A슥6장1절(징후적 해석)-이 근호 목사

스가랴6장1절에서 4절, “내가 또 눈을 들어본즉 네 병거가 두 산 사이에서 나왔는데 그 산은 놋산이더라 첫째 병거는 홍마들이, 둘째 병거는 흑마들이, 세째 병거는 백마들이, 네째 병거는 어룽지고 건장한 말들이 메었는지라 내가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 가로되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하늘의 네 바람인데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셨다가 나가는 것이라 하더라” 별로 어려운 건 없지요. 별로 어려운 건 없는데, 성경해석 할 때, ‘성경해석은 징후적이다.’ 징후라는 말 알지요?

허리가 안 좋다. 그러면 찍어봐야지요. 찍어보면 실체가 나오겠지요. 디스크 자리가 안 좋다든지 이리 나오겠지요. 허리가 아픈 것을 징후적이다. 또는 같은 말이 증상적이다. 증상이 있다. 그래서 한의학에서 진맥할 때 증상보고 하거든요. 느껴지는 거예요. 안에 있는 어떤 벌어진 일이 바깥에 나올 때 나오는 그 현상을 징후라고 하고 증상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럴 때는 눈으로 본다고 하지 않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진단한다,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의학에서 진단한다. 징후를 통해서 안에의 실체에 접근해 들어간다. 파악한다, 이리 되는 겁니다. 왜 이게 징후적이냐 하면 성경 자체에 저자가 있어요. 저자가 누구냐 하면 성령, 하나님이 저자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성경 저자가 되겠지요.

그러면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피조물들은 그 모든 활동이 징후적이에요. 하나님께서 인간 + 짐승 + 그리고 모든 꽃, 별, 등등의 많은 것들을 만들었잖아요. 그러면 이것도 뭐가 되느냐 하면 징후적 존재에요. 징후적 존재. 또 이쪽에 하나님은 뭘 주셨느냐 하면 성경을 주셨잖아요. 성경책이 있으니까 성경도 이 땅에 주신 거니까 인간들이 성경해석 할 때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그 안쪽에 들어있고 우리는 징후적으로 다가설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또 본문에 누가 나오느냐 하면 성경이 징후적이다, 징조다 이 말이지요. 그 징조의 현상가운데 성경 내용을 인간들이 직접 징후적으로 파악하려면 성경 내용에서 나오는 여기 이 세상에 관여한 점선으로 할게요. 이 하나님의 대리인, 하나님의 대리 존재. 하나님이 하시는 대리 존재가 여기서 이들이 무엇입니까? 물으니 “내가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 가로되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하늘의 네 바람인데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셨다가 나가는 것이라 하더라” 이는 하늘의 네 바람이다. 네 바람이다.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셨다가 나가는 것이라. 그 성경 내용과 이 인간의 현실 속에서 인간 자체가 징후적이다, 이 말이지요.

자, 징후적이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그 자체로서 독립되어있지 않다는 겁니다. 징후는 이 징후가 나타난 그 곳을 찾아가야 되겠지요. 허리가 아프다. 그러면 허리 아프면 “보자. 허리 아픈데 한 번 보자.” 보니까 피부는 고대로 있어요. 그런데 아파요. 그건 내부에 무슨 일이 있다는 이야기이지요. 그래서 이 바깥에 있는 피조세계를 뭐로 보느냐 하면 외부로 보자, 이 말이지요. 외부. 외부에는 징조가 있고 외부로 시작해서 어디로 가느냐 하면 내부로 들어가는 거예요. 내부. 내부로 들어가면 여기 마중 나온 분들이 있지요. 대리존재. 하나님의 일을 시키는 대로 대리하는 존재. 그것이 여기 5절에 보면 이것을 천사 나오고 그리고 이 스가랴 선지자가 누구와 대화를 합니까? 천사보고 대화하고 천사가 말하기를 저들이 누굽니까? 하니까 바람이다. 바람.

바람이니까 징후적이겠지요. 하나님은 안 보이고, 하나님이 보내신 내용이 바람이었다 말이죠. 그러니까 허리가 아프다 말이죠. 그러니까 바람이 분다는 뜻이에요. 오늘 허리 많이 써먹습니다. 의사가 환자를 진찰하듯이 성경을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겁니다. 그러면 바람이다. 바람이면 이것을 첫째는 바람을 징후적으로 독해한다. 또는 해석한다. 해석하는 경우 두 번째는 이걸 실체적으로 해석하는 경우. 실체적으로 해석하게 되면 바로 이게 뭐냐 하면 봄날에 바람 불 때 바람은 안 보이지만 옷깃 날리잖아요. 가수가 노래 부를 때 바람 부는 걸 묘사해가지고 자기 옷을 이리 떨지요. 빰빠밤바 빰빠바~~ 옷을 막 떠는 겁니다. 바람 분다 이 말이지요. 묘사를 그렇게 한다 말이죠. 바람이 불면 떨리지요.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모든 사물을 흔들고 지나갑니다. 그러면 그 나뭇잎이 떨리는 거. 내 머리카락이 날리는 거. 옷깃이 날리는 거 전부 다 이게 바람이라 하는 것을 실체로 보지요. “아~ 바람 많이 부네.”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아~ 천사가 활동을 많이 하는구먼.” 그렇게 이야기 안하잖아요. 그래서 바람 분다. 이것이 징후적이라면 여기서 뭘 나가냐 하면 어디로 나가느냐 하면 천사로 나아가는 겁니다. 천사로.

자, 여기서 힘들고 어려운 이야기가 천사라는 이 실체가 바람으로만 묘사된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뭐냐 하면 여기에 오늘 6장 2절에 보면, 첫 째 병거는 홍마 붉은 말, 둘 째 병거는 흑마 검은 말, 세 번째는 백마 흰말, 네 번째는 어룽지고 건장한 말. 요리 되어있거든요. 그런데 이 말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병거라고 되어있지요. 병거. 병거는 수레가 되지만 어떤 수레냐, 어디 놀러 다니는 꽃구경 다니는 수레가 아니고 전쟁하는 거예요. 전쟁하는 거.

그래서 여기 다시 봅시다. 천사는 뭐하는 중이다? 전쟁 중이다. 전쟁이 되려면 반드시 아군과 적군이 있고 그냥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아니고 아군이 적군을 공격하면서 보내지는 것, 이것이 바로 병거에요. 수레, 마차다 이 말이지요. 엘리야를 묘사할 때 하늘의 병거라 했거든요. 하나님의 무기요, 병거 그리되어있어요. 그래서 역사학자는 말하기를 기능이 있잖아요. 말이 있고 그 다음에 말과 결합되어서 수레 있는 병거가 나중에 나왔다고 보통 상식적으로 이야기하는데 그게 아니고 반대로 되어있어요. 병거가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기병이 나와요. 병거가 먼저 나오고 기병이 나오게 되어있어요.

그만큼 초장기의 전쟁에서는 수레를 앞장세워서 전쟁하는 겁니다. 그러니 공격하면서 한다는 말은 공격할 대상이 있다는 거예요. 바람=말들. 말들이 시들시들한 말이 아니고 어느 말이냐 하면 스트롱한 말. 건장한 말. 건강하고 건장한 말들이 씩씩하게 이 세상에서 나타났다는 말은 이것은 뭐냐 하면 이 세상이 끝났다. 이제는 총공격을 당할 그런 입장에 있구나! 하는 이 피조세계가. 끝났다. 총공격 당한다.

누가 보냈느냐 이 천사를. 하나님이 보냈다. 그러면 당하기는 누가 당하느냐, 인간세계가 당하는 겁니다. 이 사실을 미리 징후적으로 성경 말씀을 스가랴에게 계시를 주셔가지고 징후적으로 깨닫게 했다면 그 깨달은 편이 누구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아군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아군.

지금 뭐 2년 뒤에 대선이라든지 지금 이 문제가 아니에요. 지금 스가랴가 중요한 문제이지. 정치적 누가 이제명이 되는가, 지금 그 문제가 아니에요. 좌파, 우파 지금 그 문제가 아니에요. 그건 아무것도 아닌 문제라고요. 그게. 우리 일상에 나타난. 자꾸 우리는 이 세상을 징후적으로 볼 줄 모르고 실체적으로 봐요. 눈에 보이는 게 다라고 보는 겁니다.

허리가 아프다. 허리가 아프다는 뜻은 징후적으로 해석해서는 뭐냐 하면 처음부터 인간은 이리 죽든 저리 죽든 아파죽든 건강하게 죽든 죽게 되어있다 말입니다. 봄나물 뜯었으면 데쳐먹든, 볶아먹든, 끓여먹든, 쪄먹든 국에 넣어먹든 어떻든 간에 소비용이잖아요. 소비용. 그러니까 인간의 모든 것은 소비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하나님의 되시는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 땅에 필요에 의해서 이 땅에 출현한 겁니다.

아프다는 것은 나으면 해결되는 게 아니고 ‘내가 망가져서 소실되어야 되고 소멸되어야 될 대상으로서 주께서 그렇게 아프게 하셨구나!’ 이리 되어야 돼요. 아픈 이유가 아파야 합당하다는 뜻이거든요. 아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공격했다는 뜻이고, 공격했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이유는 뭐냐, 죄를 지었다는 이야기고, 그러나 인간이 기억하는 죄는 죄가 아니에요. 인간이 지었던 죄는 자기가 해석했던 실체적으로 해석했던 죄고. 실제적인 죄는 징후적으로 파악하는 것. 다시 말해서 내가 태어난 자체가 이미 죄라는 것을 아는 것까지 이르러야 그게 바로 죄에 대해서 아는 거예요. 태어난 자체가. 그러니 인생사는 자체가 죄에요. 죄.

오늘 또 얼마나 죄 짓는다고 보세요. 더 이상 이야기 안하겠습니다. 왜 바쁘냐, 안 죽으려고 바쁜 거예요. 왜 안 죽어야 되는데? 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우기는 겁니다. 왜 니는 살아야 되는데? 나는 의롭거든. 나는 그래도 완전한 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지은 죄보다는 선한 게 많다, 라고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거 자기에 대한 해석 잘못한 거예요.

실체는 나타나 줘야 되는 겁니다. 실체는 나타나 줘야 돼요. 그래서 이 징후라는 말은 이제 첫 번째 나오는 핵심적인 내용이 들어옵니다. 오늘 강의 핵심적인. 징후라는 말은 존재에 관한 것이 아니고 바로 사건에 관한 겁니다. 그래서 존재와 사건은 서로 반대말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일으키는 것은 전부 다 사건이라서 존재가 사건을 파악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스가랴 같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자는 사건에 대해서 그냥 넘어가지 않고 징후적으로 사건에 대해서 해석하려고 다가서는 동시에 뭐가 날아가 버리느냐 하면 나의 존재는 날아가 버리는 겁니다. ‘야~~ 이게 나 좋아라고 일으킨 일이 아니구나! 이게. 하나님이 하나님 일을 하기 위해서 벌어진 일이구나!’ 라는 것을 아는 겁니다. 스가랴 선지자가 이렇게. 오늘날 성도도 해당되고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애시당초 내 일이라는 것은 있지도 않았다는 겁니다. 나의 일은 이 땅에 없어요. 비를 내가 요청할 때마다 하나님이 비를 주시는 게 아니잖아요. 그러면 그거는 하늘이 아니고 샤워장에서 샤워하는 거지. 틀 때마다 물이 나오는 것은 그것은 샤워하는 것이지 그게 뭐 비겠어요. 비는 전혀 우리의 샤워와 상관없습니다. 그래서 비오는 것도 이건 사건이에요. 허리 아픈 것도 모든 배고픈 것도 전부 다 사건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를 실체로 보기 때문에, 징후로 들어가야 될 사건으로 접근해야 될 것을 전부 다 사건을 다 차단시켜버렸어요. 그래서 인간은 징후적 해석대신에 무슨 해석을 하느냐 하면 지식 모으기. 지식 모으기에 나섭니다. 지식을 모아 놓게 되면 내 존재를 단단히 할 수 있는 파워, 힘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힘 모으려고 애쓰는 겁니다. 힘 모으려고. 내 존재를 강화하는 거예요. 내 존재를. 아는 것이 힘이 되는 거예요. 아는 것이 힘이다.

마치 상대성 원리처럼. E=mc²같아요. 에너지는 질량과 교환되는데. 광속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이러한 원자력공식처럼 공식화된 거예요. 아이고~ 우리가 단체로 죄지은 것이 드러났다. 후딱 지워버리자. 방금 시작한 것처럼 지워버리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연기해도 소용없어요. 동영상 다 찍혔는데 뭐.

오늘의 관심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존재와 사건이에요. 존재와 사건이거든요. 존재라 하는 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존재란 말을 다른 말로 고치면 이걸 실체라고 이렇게 합니다. 실체. 손에 만져지는 거, 눈에 보이는 거 실체. 그래서 세상을 해석하는 방법은 모든 것을 눈에 보이는 관찰에서 법칙을 끄집어내가지고 내가 관찰하고 법칙을 끄집어내서 그 법칙을 누구한테 적용시키느냐 하면 나한테 적용시켜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내가 실체기 때문에. 내가 실체 중에 실체기 때문에.

그래서 구약에서 이스라엘 사람에게 하나님이 당부한 게 있어요. 인간들이 모든 것을 세상을 보면서 이해할 때 그것과 하나님이 세상을 이해하는 것과의 차이를 하나님은 이렇게 아주 명쾌하게 설명했습니다. 이게 이제 출애굽기32장에 보면 그게 나오는데. 뭐냐 하면 너를 위해서와, 하나님 나를 위해서와 단호하게 이게 구분된다는 겁니다. 제가 한 번 질문 던져볼게요.

하나님을 위한 것이 나를 위해서입니까? 하나님을 위해서입니까? 하나님을 위한 것이 나를 위한 겁니까? 하나님을 위한 겁니까? 둘 중에 하나에요. 뭡니까? 이건 제 말이 아니고 출애굽기32장에서 하는 이야기에요. 너희를 위하여 신을 믿지 말라 말이죠. 모세가 시내산 올라갔다가 내려오고 난 뒤에 시내산 밑에 있던 그 남자만 사십만 되는 그 사람들에게 했던 일을 두고 모세가 다시 내려와서 지적질하는 그 대목이에요.

거기서 하는 말씀이 뭐냐 하면 우상이란, 그들이 지금 뭘 섬겼어요? 금송아지 섬길 때 그 신의 이름이 뭐였습니까? 금송아지 섬길 때 그 신을 뭐라고 불렀지요? 여호와지요. 여호와. 여호와 섬겼지요. 여호와 섬겼는데 모세가 내려와서 하는 말이 우상이란 여호와를 섬기던 예수를 섬기던 무엇을 섬기던 간에 나를 위하여가 연계되어 있으면, 링크되어 있으면, 연결되어 있으면, 이건 무조건 이게 우상이라는 거예요. 나를 위하여. 시간 가는데 성경 찾지 맙시다. 다 아는 이야기에요.

나를 위하여. 왜 이런 말씀을 하느냐 하면 모세가 시내산 내려올 때 뭘 들고 왔습니까? 율법을 들고 왔지요.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율법이라는 것을 마주할 때 인간은 본인이 실체라 했잖아요. 반드시 뭔가 여기서 찌짓! 눈초리를 마구 쏘아대는 거예요. 율법을 해석하는 순간 인간은 해석을 경유해서 최종적으로 누굴 위한 해석이 되는가 하면 실체가 되는 나를 위한 해석이 될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이 타고난 한계라는 거죠. 이게 율법의 기능이에요.

율법을 인간이 지킬 수 없는 이유가 뭐냐 하면 아무리 제대로 지키려 애를 써도 그 마지막 결과물이 어디에 도달합니까? 마치 잃어버린 편지처럼. 항상 그 주소지가 자기에게로 온다는 거예요. 그 주소지가. 아무리 남의 집에 편지를 해도 그 어떤 사람이 편지를 받더라도 거기에는 반드시 수신인만 찍혀있는 게 아니에요. 발신자의 주소가 있지요. 그러면 그 타인은 발신자의 영역과 링크 연결되어있는 겁니다. 이걸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이든 예수님을 믿던 하나님을 믿든 뭐를 하던 간에 자기를 자기로부터 끊어낼 수가 없다. 라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뭘 주냐, 율법을 줘버린 거예요. 그래서 율법을 준 거예요.

그래서 이러한 공식을 하나 만들어 내봅시다. 실체하고 자아하고 맞지 않을 때 이 틈에서 나오는 게 뭐냐 하면 주체입니다. 실체하고 자아하고 맞지 않을 때 이게 주체에요. 나이 80넘은 권사님들보고 사진 찍으라 하면 거부하지요. 왜냐하면 사진에 나와 있는 그 모습을 자기가 평소에 꿈이라든지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자기 모습과 여기서 차이가 나요. 차이가 납니다.

여기서 어려운 게 뭐냐 하면 자아를 가지고 나라고 하고, 주체를 가지고 나라고 하거든요. 나가 졸지에 몇 개 됐습니까? 두 개가 된 거예요. 그럼 여기서 나의 내부는 격하게 투쟁합니다. 무슨 투쟁하느냐 하면 내가 생각하는 나와 요걸 상상하는 나. 상상하는 나와 요 주체는 뭐냐 하면 남을 대할 때 타인으로부터 변동을 받는 주체. 그 나가 주체에요. 이게 말로 하면 굉장히 어려운데 실제 오늘날 사정을 들어보면 굉장히 쉬워요.

왜냐하면 나는 나잖아요. 그러면 평소의 선택 결정은 최종 결정 선택은 누가합니까? 내가 하지요. 내가 한다고요. 그런데 요즘 시대에 옛날 한 3년 전에는 길거리에 마스크 쓴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환자 아니면 잘 안 쓰거든요. 그런데 작년부터인가 모든 사람이 취미가 마스크 쓰는 거였어요? 밥 먹을 때도 마스크 쓰고 먹고 이런 거 모든 것이 마스크 쓰는 것이었습니까? 언제부터 그렇게 됐어요? 주체를 파악하는데 요즘에 멋진 예가 돼요. 본인의 인생은 본인이 결정하잖아요. 나는 마스크 안 쓴 사람 보면 속이 안 편해. 이래서 다들 유행처럼 마스크를 쓰는 겁니까? 나는 잘 때도 마스크 쓰고 싶어. 잘 때도 두 개, 세 개씩 덮어 씁니까? 누가 시켰어요? 누가 시킨 거예요? 본인이 자발적이었습니까? 누가 시킨 거예요? 시켰지요. 그게 주체에요.

남을 타인으로 된 자아가 조정 받고 변동 받는 거예요. 변동에 들어가는 겁니다. 따라서 뭐가 허구냐 하면 이 상상한 내가 날마다 허구에요. 날마다 허구입니다. 요양병원에 가서 연세 많은 분이 곧 돌아가시는데 “아버지, 이제는 한 시간만 있으면 의사가 한 시간만 있으면 지금 숨도 못 쉬고 돌아가신답니다. 정신은 말짱하지만 한 시간밖에 안 남았는데 저 아파트 하나 하고 땅 있는 거 하고 빨리 결정을 해주세요. 도장 다 가지고 왔습니다. 주민등록증하고 사진하고 다해서 도장만 찍으면 됩니다. 아파트 있는 거 자식 누구 줄 거고, 땅은 누구 줄 거예요? 빨리 결정 하세요 .” 하면 “나는 10년간 더 살 거야.” 이게 뭐가 돼요. 이미 실체로서 의사가 확정해서 2시간밖에 못 산다고 확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자아는 뭡니까?

이 자아는 어디 속에 있느냐 하면 옛날 장기기억 살람미스라 하지요. 해마. 인간의 두뇌의 장기기억 속에 그대로 유령처럼 떠돌고 있는 거예요. 유령이. 인간의 자아는 유령이에요. 귀신이 따로 없어요. 내가 귀신이에요. 그 고집스러움과 자존감, 버티기, 만약에 이 유령 같은 자아가 손상이 온다. 그러면 어디에 가느냐 하면 서울의 관악산 옆에 유명한 절이 있는데, 그 절 뒤로 등산로 올라가가지고 조금이라도 손상이 되어버리면 자살해요. 이런 소리 한다고 좌파 아닙니다.  좌파 그거 따지는 게 아니에요. 우리 자신을 실체로 봤을 때 우리는 얼마나 환상적이냐를 보는 겁니다. 우리 인간을 실체로 볼 때. 그래서 여기서 내리는 결론은 뭐냐 하면 실체는 뭐를 유발한다? 실체는 환상, 허망함, 허구를 날마다 달고 다니는 거예요. 몸과 그림자처럼.

따지고 보면 우리의 이 근육질 있는 육신밖에 없잖아요. 그 육신밖에 없는 내가 실제로서는 몸이 내가 아니고 몸이 따로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실체만 있다면 상상된 허구라면 그러면 허구가 아닌 진짜 실제적인 거. 실제적인 나는 뭐냐 그건 이 사회에서 내가 정할 수가 없어요. 남들이 어! 하면 아~ 예! 그건 그 때 그 때 달라요. 그래서 이렇게 환경이 나를 그 때마다 맞춤양복처럼 맞춰주는 거예요. 환경이 맞춰주는 거예요. 마스크 쓰세요. 아~ 예. 예. 예. 써야 되는 거예요. 맞춰줘야 되는 거예요. “아내면 아내답게 해야지.” “예. 알았어요. 저녁에 뭐해드릴까요?”이런 거. 이 모든 것은 환경에 맞춰드려요.

나는 나 편한 대로 산다. 라고 자부하다가 우연히 길에 가다가 불쌍한 길 잃은 강아지 만나고 난 뒤부터는 강아지 데리고 산다고 그 다음부터는 강아지 시집살이하는 거예요. 갔다가 줘 버릴 수도 없고 죽여 버릴까. 안식사해서. 자기 마음대로 하지를 못하는 거예요. 이걸 어려운 말로는 관계성이라고 하고 쉬운 말로는 준비된 환경이 내가 예측 못한 나를 이렇게 작품으로 제품으로 만들어내는 거예요. 찍어내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에 존재 플러스 존재 말고 뭐가 있느냐 하면 사건이 주어지는 겁니다. 사건은 때려죽여도 존재는 이 사건을 이해를 못해요. 왜냐하면 존재는 뭐만 생각하느냐 하면 결국 나라는 실체로 돌아오기 때문에 나라는 이 몸둥아리 존재만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에서 사건으로 사건을 해석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이 모든 성경은 뭐냐 하면 존재밖에 사건이거든요. 존재밖에 사건이니까 이걸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모든 일어난 일을 하나님께서는. 자, 다시 배웠으니까 봅시다. 우상이란 뭐다? 우상이란 나를 위하여 세상을 해석하는 것. 요 앞에 뭐를 붙이느냐 나를 위하여. 나는 뭐냐 하면 이게 주체가 아니고 이게 자아가 돼요. 자아가 된다고요.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버리면 나라에서 마스크 쓰고 다니세요. 라고 했다 이 말이죠. 그러면 누가 강제했어요? 누가 강제로 한 거예요? 국가에서 했지요.

그런데 국가가 어디 있어요? 국가가 없지요. 국가가 없어요. 국가가 없는데 있다고 생각하는 이것을 무슨 세계라 하는가 하면 실제세계라 하는 거예요. 실제세계. 이것도 하나의 환상입니다. 국가가 죽을 때 나한테 뭐했다고 아무것도 하는 게 없어요. 그리니까 우리네 인생이라 하는 것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거기에 기능적으로 놓여있는 무대에서 한평생 연극배우로 살다가 그냥 늙어죽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유명한 노래가 있잖아요. 연극이 끝난 뒤에. 연극이 끝나고 조명이 꺼졌을 때에 연극이 끝났어요. 연극이. 연극이 끝났는데 남은 것은 캐릭터밖에 내 역할밖에 없어요. 나는 없어요. 애초부터 나는 없어요. 나는 알아요. 시름시름 알아요. 있잖아요. 나는 없어요. 아니 없어야 돼요. 그래서 어제 수요 설교에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이 공포에 휩쓸렸을 때에 인간들이 어떻게 살아간다고 했습니까?

내가 나인 척 한다고 했지요. 내가 나인 척 하고 있는 거예요. 환경이 나를 조성했잖아요. 그러면 성경에 나오는 모든 개념은 사건 개념이거든요. 죄가 무엇이냐, 의가 무엇이냐, 천국이 무엇이냐, 구원이 무엇이냐, 주님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사건이 터져야 알아요. 이미 사건은 터졌는데 그 사건을 내가 존재 때문에 내 존재로 데려오기 때문에 내가 우상이기 때문에 이해를 못했는데 다시 그 뒤에 그 사건을 이해하는 사건이 터질 때 앞에 있는 사건을 이해하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뭐냐 우리는 후 사건적 존재라 하는 거예요. 후 사건적 존재.

용어 자체가 어려운데 들어보면 쉬워요. 후 사건적 존재. 그러니까 성령을 받았고 십자가를 알고, 복음을 안다면 그 사람은 이제는 존재의 세계에서 벗어난 거예요. 그 전까지는 성령을 받기 전에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 전까지는 누굴 위해 살아갑니까? 이 허구적 나를 위해 살았지요. 저게 나한테 실익이 있는가, 손해가 되는가, 이익이 되는가, 나한테 얼마나 보탬이 되는가, 그래, 참자. 마스크 쓰고 참자. 그러면 좀 더 오래 살겠지. 그러면 사는 것에 주인공이 누가 사는데. 그건 내가 살지. 어떻게? 내가 나를 관리해서.

그러나 사건이 이어지게 되면 참새와 잡초도 키우시는 분이 누굽니까? 참새 하나님이 키우신다 하지 마시고요, 이제는 여러분이 성령을 받았으면 참새가 스스로를 살게 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해야 돼요. 부정적으로 설명해야 돼요.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누가 키웁니까? 일단은 주님이 키운다고 하지 마시고 뻔한 답변 말고요, 아닌 쪽으로. 누가 자기를 못 키워요? 잡초, 풀, 참새, 본인이 본인을 못 키웁니다. 솔로몬의 입은 옷은 누가 입은 거예요? 솔로몬 본인이 입었지요. 그러니까 솔로몬 입은 옷이 뭐보다 못하다? 들에 핀 들풀이나 백합보다도 오히려 하나님께 만족스럽지 않아요. 솔로몬 옷이 더 예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금으로 보면 이쁘면 이쁘겠지요. 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되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원인은 바로 자기의 있음, 존재로부터 존재로 마감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존재로 사건을 할 때 과연 내가 사건의 세계로 옮겨졌다는 것을 어떤 식으로 아느냐, 그게 바로 말씀을 해석할 때 징후적으로 해석해요. 징후적으로. 징후. 허리가 아프다. 오늘 몇 번이나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허리가 아프다. 눈에 안 보이지요. 아프다가 눈에 안 보여요. 아프다는 눈에 안 보여요. 증상이고 징후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게 아니에요.

다시 말해서 내가 느끼는 것뿐이지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어요. 징후적이라니까요. 징후적. 외부는 징후적이고 그 실체 이런 증상이 나타나는 실체는 어디에 있겠습니까? 내 내부에 있겠지요. 그 내부의 세계가 무슨 세계냐, 사건이 터져 나오는 세계. 오늘 스가랴6장 5절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하늘의 네 바람인데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셨다가 나가는 것이라 하더라” 자, 됐습니다. 어디 앞에 있다가 어디로 나가지요. 어디 앞에 있다가. 누구 분 앞에 있다가 우루루 지금 쏟아져 나갑니다. 나가는 거죠. 나간다.

나갈 때 여기에 스가랴6장 2절에 보면, 첫째 병거는 홍마, 둘째 병거를 말로 합시다. 말에 달린 수레니까. 둘째 말은 흑마, 셋째 말은 백마, 넷째 말은 아롱진 것, 그리고 건장한 것. 건장한 것은 사실은 말 넷이 다 포함되는 거예요. 스트롱. 건장한 것. 어디 앞에서 나가는 거예요. 어디 앞에서 나가는 거예요. 

그러면 이 세계가 그냥 말을 볼 때에 그냥 말로 보면 실체가 되잖아요. 말을 실체로 이해해 버리면 이게 어느 세계에서의 해석이냐 하면 존재의 세계에서 보는 게 말의 실체에요. 그런데 성경은 어떻게 해석하라 했습니까? 실체로 보면 안 되고 징후적으로 보라. 징후. 실체는 따로 있는 거예요. 실체는 따로 있다 이 말이지요.

그러면 이걸 징후, 증상적으로 보게 되면. 참, 이런 게 어렵다. 어려워요. 이왕 어려운 거 어렵게 하겠습니다. 사건은 존재의 입장에서 보면 없어도 되는 과잉입니다. 과잉. 또는 잉여. 과도한 거예요. 과도. “하나님이여, 사건을 일으켜 주옵소서.” 지금 과도한 것을 지금 기도하고 있는 거예요. “니가 평소에 니가 알아서 잘 했잖아. 니가 알아서 해.” “하나님 제가 힘이 딸립니다. 알아서 하려니 내 뜻대로 안됩니다. 그러니까 추가적이고 넘치는 여분의 것을 주시옵소서.” 라고 할 때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은 우리가 지금 배운 공부에 의하면 “그게 바로 니가 우상이라는 징후야.” 그러니까 우상이라는 징후를 지적 받음으로서 본인의 존재가 존재에서 뭐로 보느냐 하면 징후로 바뀌어요. 사건으로 바뀐다고요.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이 나를 위함이 아니고 그 누구를 위한 사건으로서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 참 다행스러운 복을 받은 거예요. 이런 안목을 갖고 있는 게 정말 천만 다행한 겁니다. 인간이 무슨 능력으로 자기가 여기 있음에서 벗어나겠어요. 들어봤지만 또 잊어버렸으니까 다시 한다면. 만약에 존재가 되어버리면 인간은 어디에 묶이느냐 하면 내 몸 실체에 묶인다고요. 그런데 실체는 필히 뭘 끄집어낸다고 했습니까? 허구. 허상. 허망한 것들을 끄집어내요. 실체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어제 수요 설교에서 이야기했습니다. 뱀의 실체는 배를 땅에 엎드려서 기는 거죠. 이게 저주지요. 왜 땅에 엎드리느냐 땅과 가장 가까운 사이에서 땅은 이미 저주받았어요. 왜냐하면 이 땅은 멸망 받을 땅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멸망의 이유와 원인이 거기서 마구 품어져 나와요. 그래서 땅에서 사는 모든 인간은 흙에서 와서 어디로 돌아갑니까? 흙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이걸 온 몸으로 제일 가까운 근접적인 거리에서 온 몸으로 받아내는 존재가 뭐냐 하면 뱀이고 악마다 말이죠.

악마는 극히 세속적이에요. 악마의 뜻은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비로소 악마는 자기의 본색이 드러났는데 딱 세 가지입니다. 사람은 배불러야 된다는 것과 두 번째는 뭐냐 인간은 초인적인 것을 노린다는 것. 세 번째는 모든 것을 지배해야 인간은 만족한다는 것. 이것이 광야에서 시험받을 때 세 가지 악마가 제안한 거예요.

배불러야 사는 맛이지. 그러면 뭐 돼지 되라는 말입니까. 배부르고 난 뒤에 뭐할 거예요. 내가 초과적인 존재. 남이 놀랠만한 존재가 될 때 사람 사는 맛이지. 성전에서 뛰어내릴 때 안 다쳐보세요. 이건 얼마나 초과적인, 초인적인 존재입니까. 세 번째는 뭐냐, 그냥 재주나 자랑하려고 하는 아니에요. 그게 되게 되면 세 번째는 뭐예요? 보이는 모든 것들을 그걸 소유화시켜서 거기 안에 있던 것을 그걸 통제하고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 가인의 후예들이 하고 싶었던 그 것.

그게 가인의 마음이 아니고 누구의 마음입니까? 가인의 존재의 마음이 아니고 실체의 마음이 아니고 배후에 악마의 마음이지요. 그걸 징후적으로 뽑아낼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징후적으로 보는 거예요. 악마는 이 존재가 다룰 대상이 아니에요. 악마라는 이 존재. 악마라는 이 실체를 다루는 것은 이건 따로 있어요. 주님이 그렇게 하는 거예요. 주님이.

우리는 악마가 시키는 대로 그 악마의 마음. 배불러야 되고, 남이 우러러보는 초인이 되어야 되고, 초인이라는 것은 남들이 부러워서 바라보는 거고, 마지막에 통치라는 것은 내가 좋아서 남을 지배하는 거고. 화살표가 다르지요. 좋아하는 것과 그걸 이용해서 그 사람을 지배하는 것. 그 일을 지금 누가 하고 있다? 악마가 그 이야기를 한다는 말은 예수님한테 그 이야기했다는 말은 누가 그 일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까? 악마가 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게 무슨 세계? 인간이 알고 있는 과학의 세계, 학문의 철학의 세계, 이 세상 눈에 보이는 세계 전부의 내용이에요. 그게. 악마의 세계라고요. 전부 다. 내가 그런 마음을 니한테 줬잖아. 자신감이 있어요. 악마한테는. “니가 그 세계 빼놓고 니 사는 보람 있으면 내놔 봐!” “그거 말고 그게 사는 목표가 아니고 나는 다른 목표야!” “있으면 내놔봐!” 없어요. 없다고요. 누가 있어요? 아무도 없어요. 그 세계에서 본질에서 빠져나갈 재주 있거든 한 번 빠져나가 보세요. 없어요.

아까 거 다시 하겠습니다. 이게 어려운 내용이기 때문에. 나는 나를 위해서 내가 결정할 절대적 권한이 있다. 라고 이야기하고 싶을 때 이게 바로 뭡니까?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을 보고서 그게 나라고 하죠. 이게 뭐냐 하면 이게 상상한 나다 말이죠. 이걸 자아라고 하고 에고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나가 있지도 않은 국가의 말을 듣고 마스크 쓰는 거 보세요. 마스크 쓴다고요.

내 본심은 뭐냐 하면 지금 봄날에 하와이에 여행가는 거예요. 하와이 여행 가는데 하와이 여행 가자마자 2주 격리 들어가는데요. 놀기는커녕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거예요. 뭔가 내 마음대로 안 됩니다. 사람들은 그걸 국가가 있다고 이야기 하거든요. 국가가 도대체 몇 번지에 있습니까. 국가가 어디에 있어요? 지배체제지요. 지배체제. 이걸 가지고 이데올로기라고 합니다. 이념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은 인간이 환경이 만들어 조성한 그 정신세계에 굴복당하기 전에 이미 굴복당한 상태에 있어요. 여자가 시집가면 이래야 되고 남자가 결혼하면 남편은 이래야 되고. 이래야 된다, 이래야 된다는 것은 전부 다 내가 습득한 게 아니고요, 이건 기성세대가 나한테 강요한 거예요. 거기에 맞추어서 내가 살게 되게 되면 나는 서브젝트라고 하는데, 나는 주체가 된 동시에 나는 알 수 없는 이념에 종속된 대상이 돼요. 종속된 대상에서 주어지는 것은 뭐냐, 밑에서 올라오는 알 수 없는 공포에요. 공포.

이 공포를 이용해서 뭐냐 하면 율법을 준겁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낸 결론은 뭐냐, 율법은 무엇을 공격하는 무기다? 존재의 세계를 공격해서 와해해서 불로서 멸망시키는 겁니다. 자, 한 번 물어봅시다. 물어본 질문이 좀 어려워요. 노아 때 홍수 나기 전에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았지요. 노아 때 홍수나기 전에 거기에 뭐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사람이든 짐승이든 뭐가 있었어요? 없었어요? 너무 쉽다 이거. 있었어요.

홍수 나고 난 뒤에 거기에 뭐가 있었습니까? 뭐가 있었어요? 없었어요? 아무것도 없지요. 이게 진리입니다. 왜 홍수라는 것을 링크해서 왜 세상을 볼 줄 모르느냐 이 말이에요. 홍수라는 걸. 홍수나기 전에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이게 그들의 전부라고 여겼던 거예요.

그러나 홍수가 오니까 있음이 뭐로 변했어요? 없음이지요. 유명한 말이 사자성어 뭐가 나온다 합니까? 영구 없다. 영구 없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그러면 뭐냐 하면 노아 같은 경우에는 자기 존재가 아니고 뭘 증거 하는 사람이냐 하면 홍수사건을 사건을 증거 하는 징후적 인물이 노아가 되는 겁니다. 오늘날 성도가 그래야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 입장에서.

내가 있느냐, 없느냐는 중요하지 않고 이 존재를 공격하는 사건이 활발하게 지금 활동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오늘 본문 스가랴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예언이고 계시의 내용이에요. 그 성경 말씀해서 천당 가라고 준 게 아니고 천당 갈 대상이 없어요. 이 땅에는. 왜? 존재자체가 없는데 천국 갈 사람도 없어요. 있는 존재는 오직 한 사람밖에 없어요.

이 세상에 영원한 이름은 오직, 이름이 있다는 것은 존재가 있다는 말이고 영원한 존재는 영원한 이름을 가질 때만 영원한 존재로서 하나님께 인정받습니다. 그 존재가 누굽니까? 누구 이름이에요? 예수님이라고 하지 말고 누구의 이름입니까?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이름은 이 세상에 있을 때만 붙이는 거예요. 하늘나라에는 이름이 없어요. 이 세상 피조세계에 들어올 때만 이름이 붙어요. 1:1 대응이 되니까. 대응이 되어야 이름이 있거든요.

이 땅에 개입했던, 잠입했던 그 분. 그 분의 이름이 바로 구원이 그 안에 들어있습니다. 그걸 바로 이사야 7장14절,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 이름의 내용은 임마누엘, 하나님이 나와 함께 있다. 그 인물 외에는 아무도 구원될 수가 없습니다. 10분 쉽시다.
 공은주(IP:119.♡.152.148) 21-04-28 15:53 
안양20210415B슥6장1절(징후적 해석)-이 근호 목사

자, 이 문장을 제가 쓸 테니까 이게 왜 차이가 나는지 잘 보세요. 첫째 시간을 잘 들었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가 죽는 것’ 이건 아니지요. ‘죽음이 나를 이용해서 살아있음을 증명하고자 한다.’ 자, 여기서 이게 맞는 말인데, 왜냐하면 내가 하는 자체가 이게 실체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실체가 없다는 말은, 징후적이라는 말은 실체는 따로 있는 거예요. 실체는 따로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육신이지요. 그러니 육신이 죽는다는 말은 이건 동어반복 하나마나한 이야기입니다. 내 육신은 죽는다. 이건 뭐 미장원 옆에 식당 있고 식당 어디 있나? 미장원 옆에 있다. 이건 같은 말 반복에 지나지 않아요. 그런데 문제는 육신이 죽는다고 보지 않고 사람들은 뭐로 봅니까? 내가 죽는다고 보거든요.

내 육신이 밥을 달라고 하는 말과 내가 배가 고프다는 말과 같은 말이 아니거든요. 육신을 내가 대표해 버리면 이건 징후가 안 되고 내 육체의 징후가 아니고 이게 나라는 존재의 세계에 들어가 버려요. 나라는 존재가 따로 수립이 되어버려요. 그러면 육신을 지키는 게 아니고 허구적인 나를 지키기 위해서 자살도 감행해버린다고요. 이건 바보 같은 짓이거든요. 있지도 않은 나를 왜 지키려합니까. 이 바보 같은 짓을 악마가 강요해서 영악해가지고 이미 성립된 이 자아에 대해서 자꾸 니가 집착하라고 우리한테 강요를 하는 겁니다. 부끄럽지? 부끄럽지? 이런 식으로요.

처음에 인간에게 뱀이 되고 난 뒤에 제일 먼저 생긴 감정이 뭐냐 부끄러움이에요. 숨었고 하나님이 나타날 때는 나뭇잎으로 가리고 이 모습이 하나님이 만든 그 인간의 모습은 절대 아닙니다. 뭔가 변질됐어요. 이건 뭔가 안 좋은 존재하고 같이 결탁이 되었어요. 그게 뭐냐, 악마지요. 그래서 이 부끄러움을 해소하는 방법은 악마 쪽에서 제시한 아까 3가지 이야기했습니다. 일단 배부르면 되고 그 다음에 내가 신처럼 아주 놀라운 능력을 행세해서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사면, 인정을 받으면, 이 부끄러움도 해소되고 세 번째는 거기서 머물지 않고 모든 걸 다가지는 것. 그리고 남을 통치하는 것. 이게 악마의 본인 심정이에요. 본인 마음이에요.

그 본인 마음이 그대로 인간에게 그대로 주어진 겁니다. 이걸 죄가 왕 노릇 한다는 뜻인데 로마서5장에 나와요. 죄가 이 마음을 우리에게 준 거고, 우리는 이 자아가 있기 때문에 어떤 경우라도 여기서 탈피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밥이나 주고 집에나 있어버리면 사람은 미칩니다. 코로나 1단계해서 일체 밖에 나가라하면 사람이 미쳐버리지요. 왜 그러느냐 하면 사람이 왜 밖에 나가는 것이 그렇게 힘들고 하는 이유가 강아지가 아닌 게 밖에 나가는 게 힘드느냐, 인정받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남한테 인정받고 싶어서. 타인이 없으면 내가 없거든요. 뭔가 말을 주고받는 사람이 있어야 되지 집에서 혼자 거울보고 이야기하면 그건 죽은 존재지 산 존재인지 분간이 안돼요. 정신병 걸린다고요.

최초의 정신병자 악마거든요. 완전히 미친 거예요. 피조물이면서도 신의 흉내를 내는 거. 그게 미친 존재 아닙니까. 미친 거 그대로 누가 본 받았어요? 인간이 본받았지요. 집착하는 거. 편집증환자. 내가 신이라고 우기는 거. 분열증 환자. 정신 분열증 아니면 집착증 둘 중에 빠지고 마는 겁니다.

그런데 정답은 뭐냐 하면 나를 징후로 보는 겁니다. 안 좋은 징후로 보는 겁니다. 안 좋은 상태의 징후로 보게 되면 죽음이 나를 이용해서 죽음 또는 죄, 저주, 심판, 이것이 살아있음을 증거,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걸 허용을 한 겁니다. 인간에게 허용을 한 거예요.

그렇게 되게 되면 그 다음에 자, 오늘 두 번째 시간에 할 것은 이렇게 첫 째 시간에 기초를 단단히 해줘야 돼요. 안 그러면 두 번째 시간을 전혀 이해를 못합니다. 두 번째 시간 첫째 시간에 연관해서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아까 스가랴6장5절, 주 앞에서 뭐가 죽 나왔다 했지요. 누가 나오느냐 하면 바로 말들이 나왔습니다. 말들이. 말들이 나왔는데 이 말들이 누구냐 하면 천사들이에요. 천사들.

지금 주님도 안보이고 말도 안 보이고 말은 제주도 가면 보이지만, 그 말은 그 말이 아니잖아요. 천사들 안보이지요. 안보이니까 인간세계에서 관찰되지 아니하면 어디에 있습니까? 있습니까? 없습니까? 존재의 세계에 들어올 수가 없어요. 관찰되지 아니하면. 현미경이든 망원경이든 전자 현미경이든 봐가지고 뭔가 있어야 돼요.

코로나라는 이 전염병을 일으킨 것이 누구냐 하는 거예요. 전염병을 일으킨 것이 누구냐. 그러면 사람들은 뭐라고 합니까? 코로나 바이러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다른 이야기하거든요. 요한계시록6장8절에, 조금 길지만 요한계시록6장1절부터 긴데 8절까지 제가 후딱 빨리 읽어볼게요. 시간관계상.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의 하나를 떼시는데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우렛소리 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2.이에 내가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아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3.둘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둘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니
4.이에 다른 붉은 말이 나오더라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 이거 전쟁입니다.
5.셋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셋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니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6.내가 네 생물 사이로부터 나는 듯한 음성을 들으니 이르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이건 경제적인 파탄, 가뭄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 하더라
7.넷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넷째 생물의 음성을 들으니 말하되 오라 하기로
8.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그들이 땅 사분의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들로써 죽이더라”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다시 말합니다. 코로나 누가 일으켰습니까? 바깥은 없어요. 왜냐하면 네 말이 사방으로 나오거든요. 스가랴6장에 보면 사방 동서남북 다 간다고요. 동서남북으로.

다 가게 되면 동서남북은 이 세상에 전부를 피조세계 전부를 말하는 겁니다. 그럼 피조세계 전부를 누가 이렇게 모퉁이마다 지키고 있느냐 하면 네 명의 천사가 선점해가지고 모퉁이를 지키고 있어요. 이게 사각의 링이에요. 사각의 링. 권투선수는 그 바깥에 못 나갑니다. 그러나 존재의 세계에서 코로나 누가 일으켰느냐 할 때, 세밀하게 전자현미경 들어다보고 누가 일으켰느냐 하면 바이러스 RNA 바이러스에 해당되는 그런 계열의 바이러스가 일으켰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존재의 세계에서 거기서 질문이 멈춤니까? 아니지요. 더 들어가야 되지요. RNA 그 다음에 전에는 바이러스는 DNA. 그럼 DNA, RNA는 어떤 구조로 되어있는가, 디오신리보핵산. 그게 뭔데? 분자구조. 그럼 분자구조는 뭐로 되어있는데? 원자. 그럼 원자는 또 뭔데? 원자와 전자핵. 전자핵은 뭔데? 중성자, 양성자, 중간자. 중간자는 뭐로 되어있는데? 쿠커. 쿠커는 또 뭔데? 몰라. 쿠커는 언제 생겼는데? 빅뱅 할 때. 빅뱅이후에 3분 내에. 누가 그 이야기합니까? 인간들이.

실체가 실체에게. 실체가 실체에게 하니까 이거 또 무슨 제목 같은데. 어른이 어른에게. 엄마가 신부에게. 이게 비슷하지요. 실체가 실체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면 머리 좋은 여러분은 이렇게 나와야 돼요. 코로나 19는 이건 실체가 아니고 징후입니다. 이렇게 해야 돼요. 징후. 징후에요. 뭔가 낌새. 낌새.

존재의 세계에서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사건의 세계에서 일으킨 징후가 돼요. 그럼 그 사건은 무슨 사건이냐, 여기서 요한계시록6장에 보면, 누구 앞에서 누가 나왔지요. 여기 스가랴6장에서는 여기에서 본즉 네 병거가 어디서 나왔습니까? 6장1절에 두산 사이에서 나왔지요. 그런데 그 산 이름이 뭐냐, 놋 산. 놋은 앞에 5장에 보면 뭐냐 하면 바로 무겁다, 라는 뜻이거든요. 무거운 물질이거든요. 이건 바로 저주의 무거움이에요. 저주의 무거움은 납이나 놋이나 다 마찬가지에요. 놋은 무겁다는 뜻이에요. 이것은 뭐냐 하면 그 민수기나 출애굽기에 보면 성막 만들잖아요. 그 제단을 놋으로 만들었어요. 심판의 무거움. 놋이란 무겁기 때문에 유동적입니까? 고정적입니까? 고정적이고 확정적이에요. 확정적입니다.

따라서 확정적이라는 말은 인간은 태어난 자체가 죄고 죽을 때까지 죄에서 벗어난다, 못 벗어난다? 못 벗어나요. 그러니까 고스란히 저주를 다 받을 수밖에 없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런데 어제 수요 설교할 때 이야기했지요. 수요설교나 아니면 부산강의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것은 일체 받지 않는데 그러면 구약의 민수기, 레위기에 나오는 제사는 왜 제물은 왜 받느냐, 거기에 뭐가 묻혔다 했습니까? 피가 묻혀있지요. 더러운 피가 아닙니다. 정결한 피.

하나님은 피를 받아요. 인간의 것을 받지 않습니다. 피를 받아요. 피 묻힌 걸 받아요. 피 묻힌 것을 받는다고요. 그러면 이건 뭐냐 하면 바로 피라 하는 것은 그 우리가 받을 심판에 누가 합세해서 같이 심판에 참여한 흔적이 징후가 바로 피 입니다. 또다시 여기서 오늘 강의 존재와 사건에서 이 징후적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 걸 알지요.

자, 피로서 죄를 씻는다고 이야기하니까 저 자유주의 계열 성경을 윤리 책으로 보는 그런 신학교가 있어요. 그 신학교에서 교수들이 조롱하면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피로서 우리 죄를 씻을 거 같으면 피를 한바가지 바케스 부으면 죄가 씻어지겠네. 이런 식으로 놀렸다고요. 그 사람은 그럼 피를 뭐로 본 거예요? 실체로 본 거죠. 실체로 본 이유가 본인이 본인을 어떻게 봅니까? 사건으로 보지 않고 존재로 보는 거예요.

내가 눈으로 관찰해서 내가 납득이 되고 지식을 알아가지고 내가 나를 평소에 관리하는 것처럼 내가 천국가기 위해서 나는 뭘 하면 되지. 라는 지식 끌어 모으는 식으로 본인을 성경을 보는 거예요. 그런데 첫째 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우상은 뭐라고 했어요? 우상의 공식은 E=mc² 우상의 공식은 나를 위해서 모든 성경을 보는 게 그게 우상이에요. 자아라는 존재, 자아라는 허구. 그 허구인 줄 몰라요. 그 나가 여기에 있는 줄 알고 있어요. 자기 육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여기 있는 줄 알고 있다고요. 그놈의 자아는 맨날 주위의 환경에 따라 바뀌면서.

여러분들이 대학교 다녀본 사람은 알겠지만, 교수들이 강의하는 내용보세요. 이거다, 하는 건 없어요. 이런 이론도 있고, 저런 이론도 있지요. 신학교에 대해서 잘 알 거 아니겠습니까. 질문하면 교수 되게 신경 쓰이지요. “질문하지 말고 내 이론은 이렇다는 이야기지요.” “목사님, 이 본문의 뜻이 뭡니까?” “이런 이론 있고, 저런 이론도 있는 거야.” 띵! 수업 끝. 후다닥 챙겨 나가지요. 왜 그럽니까? 정답을 내려버리면 자기의 교수직이 날아가 버려요. 교수직이 날아가 버려요. 왜? 본인이 개척한 교회가 없어. 자기는 이게 밥벌이에요.

자, 악마가 인간에게 준 첫 번째 마음이 뭐라고 했어요? 사람 사는 이유는 배불러야 된다. 그러니까 배부른 장소가 신학교 교수했고, 교수 했으니까 거기서 뭐냐 하면 신학 이론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자기의 본심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이론을 이야기해요. 이런 이론이 있으니까 자꾸 나한테 따지지 말라고. 비겁하지요.

주체라 하는 것은 바로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주체라 하는 것은 실체로서의 나하고 나 사이에 그 틈에서 나온 게 주체입니다. 틈에서 주체가 나와요. 자기는 자기하고 동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걸 아이덴티티 자기정체성이라 하거든요. 동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항상 나로 움직이지만, 남들 보기에는 나로 움직이는 것으로 보이는 게 아니고 주체로 움직이지요. 요령부리면서. 또는 끼 부리면서. 강한 자에게는 약하고 약한 자에게는 강한 끼를 부리면서 버텨내야 명예퇴직이라도 합니다. 가족들 밥이라도 먹고 삽니다. 사는 게 그거에요. 그게 사는 거예요. 뭐 정의로움, 필요 없어요.

악마의 최고가 되는 그 출세욕, 남한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 누가 거기서 탈피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세상을 향하여 공격합니다. 도마는 보이는 것을 손으로 예수님의 창자국을 만짐으로서 확인하려했지요.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도다. 하는 말은 추가적인 것이다. 추가적인 것.

다시 말해서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뭐를 포기한 거예요? 평소에 자기가 생활하는 삶의 태도. 나는 내 자아를 위해서 관찰해서 이익이 된다 싶으면 내가 얻겠다는 그 전체의 자아의 삶의 방식을 포기한 사람. 이게 바로 신앙인이에요. 보지 않고 믿으니까. 나는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에 종속되어있다는 것을 그걸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받아들인 거예요. 나라는 존재는 그냥 하나님의 존재의 사건에 징후에 불과한 것을 감사합니다. 이리 되는 거예요.

그래서 지난 오후에 제가 그런 이야기했지요. 괜찮은 사람 되지 말고 뭐되라고 했지요? 괜찮은 사람 되지 말고 천사가 되어라. 천사됐다고 백옥같이 피부 좋고 그런 거 말하는 게 아니고 시키는 대로 하는 거예요. 그냥 내가 여기 있음 자체도 주님이 있다는 증거로서 내가 이 땅에 있는 거예요. 주님이 계시다는 것을. 주님이 십자가 졌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여기에 존재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언제 잘라내느냐 하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했을 때, 이제 슬슬 잘라낼 때 된 거예요. 더는 하고 싶은 거 없지? 잘라버리지요. 나의 존재, 나의 존재됨, 내가 이렇게 잘났음을 충분하게 다 맛보게 해놓고 잘라버리지요. 뭐 더 하고 싶은 거 있어? 없어? 없지. 이제 데려간다. 잘라버려요. 하고 싶은 거. 니 막 살았잖아.

천사가 동쪽, 남쪽, 북쪽으로, 서쪽으로 가는 이유가 뒤에 나와요. 가는 이유가. 모퉁이 선점입니다. 니가 달려가고 달려갈 가봐야 사방의 모퉁이 있잖아요. 사각의 링. 이걸 누가 선점한다고요? 천사가 먼저 선점해버려요. 갇힌 거예요. 우리의 존재의 세계는 갇힌 거예요. 이 선점하는 것을 예레미야 49장 36절에서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바람’이라고 하는 거예요. 바람. 천사의 다른 말은 말이 될 수 있고 또 같은 말은 바람이 될 수 있고. 그걸 합쳐버리면 말들이 바람같이 다닌다. 그렇게 합성할 수가 있고.

그대이름은 바담, 바담, 바담. 김 범룡의 바람이에요. 전도서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바람이 모든 세계를 울타리를 쳐버린 겁니다. 프레임이지요. 바람이 프레임을 쳐버린 거예요. 아무리 달려가도 누구를 만납니까? 천사가 있어서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요. 천사가 가둬버렸어요. 쉽게 말해서 천사가 악마의 세계를 완전히 포위해버린 겁니다. 엘리사의 전쟁처럼. 아람군대가 엘리사있는 곳에 쳐들어왔을 때 엘리사 쪽이 전체를 다 공격해버리지요.

창세기32장에 보면 야곱이 형하고 분리되어가지고 따로 갔을 때 그 때 사다리에서 내려왔던 천사들이 야곱을 일단 만납니다. 그 천사의 집단 이름을 마하나임이라고 하지요. 그 마하나임의 기능이 있어요. 이 땅에 꽃구경하려고 온 게 아닙니다. “야, 봄철인데 인간세상 좋대이.” 이렇게 해가지고 온 게 아니거든요. 32장에 보면 야곱이 그들을 볼 때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더라.

이름이라 하는 것은 다시 말씀드리면 이름이라 하는 것은 바로 존재로 나타났을 때의 이름이에요. 그런데 그 천사들이 잠시 존재로 나타났잖아요. 그런데 그들이 계속 눈에 보였습니까? 휙~ 하고 사라졌어요. 꼭 뭐와 같으냐, 바람 같아요. 요한복음3장에서 성령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뭐라고 묘사했습니까? 성령이 임한다는 것은 성령에 대해서 니고데모가 모르고 있으니까 주님께서 그 징후적으로, 징조적으로 표현한 게 뭐냐 하면 성령은 마치 뭐와 같다? 바람과 같다. 실체는 보이지 않지만 흔적은 남긴다.

니는 바로 바람이 남긴 흔적이어야 한다. 그래야 니가 하늘나라를 볼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니는 뭘 고집하느냐, 니는 눈에 보이는 육을 고집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육은 영의 영역으로 못 넘어가요. 존재는 존재로 끝이에요. 우상이 될 수밖에 없어요. 내가 우상이고, 내가 믿는 예수가 우상이고, 내가 믿는 하나님이 우상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모든 출발점을 스타트를 존재로 시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를 실체로 보는 거예요. 그러나 인생 살아가면서 나는 실체일 수가 없었지요. 뭐로 바뀝니까? 나는 주체로 바뀐다는 것을 이제는 제가 이 주체를 용어를 썼기 때문에 이해되시지요. 나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고 아무나 와서 힘 좋고 권세 있고 돈 많은 자가 나를 함부로 대할 수 있는 대상이 되어버린 거예요. 그게 뭐라고 했습니까? 주체지요. 집에 혼자 있을 때는 자기가 나는 신이 되지만, 직장이나 회사나 바깥에 나가면 나는 뭐가 됩니까? 타인의 코치와 눈치를 봐야 돼요. 남을 생각해야 돼요. 나를 상실해야 돼요.

이 전체의 세계, 이 전체의 세계를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 전체를 오인의 세계, 착각의 세계, 뭔가 아닌 걸 알겠는데 해답은 없는데. 해답이 없어요. 교회에 백날 다니고 성경공부해도 해답이 없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해답을 찾을 필요도 없는데 해답을 찾아야 되겠다는 그 마음자체가 우상적 마음이에요. 그 해답을 알아서 뭐 할 건데. 해답을 알아서 뭐 할 건데.

“주여, 언제 오십니까?” 제자들이 물었지요.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니가 그걸 왜 알아야 되는데.” “주여, 그 때가 언제니이까?” “니가 그걸 왜 알아야 돼” 요즘 사람 같으면 “시간과 공간을 알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시간과 공간은 내 소관이야. 니 소관 아니야. 니는 징후야. 징후가 왜 이 세상 주님의 예수님의 돌아가는 시간과 공간을 니가 왜 알아야 되는데.”

그 때라고 했잖아. 그 때. 때. 주님의 때는 제자들은 어떤 시간과 공간을 흡수될 때로 보지만, 주님께서는 그 인간의 시간에 개입되지 않고 따로 독립적인 때를 이야기하는 거죠.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사건’. 영어로 하면 이벤트. 사건이에요. 이벤트의 특징은 그 때 뿐이라는 거예요. 소유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소유 대상이 되지 못해요. 주님이. 제자들은 자꾸 예수님을 자기 소유화 시키려고 했어요.

주님께서 강제로 어떻게 했습니까? 닭을 동원해가지고 강제로 제자들과 예수님의 그 소유성을 떼 냈지요.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먼 당신.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먼 당신이에요. 나는 너와 함께 있을 수 있으나, 너는 나와 함께 있을 수가 없어. 그 차이를 사람들은 몰라요. 가역적 반응이 아닙니다. 화살표가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반응이 아니에요. 주님은 찾아올 수 있으나 나는 주님을 찾아갈 수 없어요. 왜 그래야 되느냐 하면 그래야 종속이 된다고요. 종속. 그걸 어제 수요일날 뭐라고 했습니까? 구속. 김종서가 이야기한 아름다운 구속. 당신이 만난 건 행운이었어. 아름다운 수갑이에요. 아름다운 수갑. 그래서 내가 했잖아요. 자수하지 말고 체포되어야 된다고요.

사건을 내가 찾아가면 안돼요. 사건이 와서 나를 체포해 버려야 돼요. 꼼짝 말라고. 사랑의 포로에요. 이게 얼마나 이런 행운이 어디에 있습니까. 정말. 이건 정말 눈물 날 정도로 감격적인 순간이고 모든 복의 완료입니다. 드디어 골칫거리인 내가 누구한테 체포당했어요. 요 말성꾸러기인 내가. 까불락 까불락 거리는 내가. 우상적인 나 위주로 평생을 나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적, 개인주의적, 사고방식 나. 올챙이 같은, 미꾸라지 같은 내가 고맙게도 천사의 사건에 포로가 되고, 사건의 체포가 될 때 신약에서는 그걸 사랑의 포로, 이제는 너를 위해 살지 말고 너를 위해 죽었다가 살아난 나를 위하여 살아라. 하는 그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 앞에 하는 말이 나는 미쳤다. 사도바울이. 나는 미친놈이 맞는데, 나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미쳤다. 그리고 말하기를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거 정말 최후통첩 같은 이야기에요. 누구든지 사랑을 모르면 그 자체가 저주다. 희망 없다 이 말이에요. 니가 출세하고 성공하든 관계없고 희망 없다는 말이지요.

자, 이렇게 이야기했으면 이제 여러분들이 답변할 차례지요. 6장2절에, 첫째는 홍마요, 둘째는 흑마요, 셋째는 백마요, 넷째는 어롱지고 건장한 말이다. 왜 말의 색깔이 다릅니까? 왜 색깔이 따로따로에요? 그것은 이 세상이 저주로서 단일화 되어있고 동질화되어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세상이 단일화 되어있고 동질화되어 있어요. 몽땅 다 존재의 세계이기 때문에 존재의 세계를 가둬놓으면 이 안에 어떤 다양한 직장이 있고 직업이 있다 할지라도 그 상태는 다 같은 상태에요. 다 같은 상태. 스테이트를 상태라 하지요. 이 스테이트를 뭐가 되느냐 하면 바로 국가가 되는 겁니다. 국가.

국가는 모든 것이 그 안에 동질화되어 있어요. 똑같아요. 동질화되어있는 세계가 무슨 세계냐 하면 존재의 세계이고, 그 존재의 세계는 뭐냐 하면 수학으로 다루어지는 세계에요. 수학으로. 자, 딱 수학이라 하는 것은 둘로 나눕니다. 1과 그리고 다수. 그런데 성경 여기다 하나 더 넣지요. 바로 공백. 공백은 뭐와 관련되느냐 하면 사건이에요. 요게 사건이에요. 사건이 사건과 영이지요. 그걸 공집합이라 하는데. 공백과 빈자리. 빈자리는 인간 존재의 세계에서는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럼 사건은 어디서 생깁니까? 빈자리에서 생겨요. 빈자리에서 생기기 때문에 사건의 특징은 누굴 고발합니까? 모든 있음의 세계를 고발하는 거예요. 그럼 있음의 세계는 뭐냐 다수의 세계지요. 다수의 세계 맞지요. 다수의 세계라는 말은 이건 개별자의 세계고 개체성의 세계입니다. 개별자, 개체성의 특징은 뭐냐 하면 첫째 시간에 누누이 이야기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내 인생은 내가 결정한다. 내가 알아서 내가 판단해서 내가 선택해서 내가 결정하지요. 그런데 마스크는 왜 썼습니까? 취미에요? 이리 되지요.

아! 그렇다면 이 다수를 영적으로 다루는 1. 일자아닙니까. 1. 일자가 정신적으로 뭘 하고 있다? 통제하고 있고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 로마서5장에 나오는 죄가 왕 노릇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이게. 그런 의미입니다. 악마는 우리가 상대할 수 없어요. 왜? 우리의 어른이니까. 왜 우리는 악마를 못 이기느냐 하면 악마는 간교하고, 영악하고, 더 지혜로워요. 뱀처럼 지혜로워요. 그 지혜에 우리가 밀리게 되어있어요.

인간의 모든 지혜는 3+5=얼마지요? 8이지요. 진짜 말을 이상하게 하다보니까 이것도 이제 답변하기 불편해요. 2x6=은요? 12잖아요. 다 아는 이야기를 왜 입 다물고 있습니까. 12잖아요. 그런데 뭘 묻느냐 하면 왜 2x6을 이런 계산을 하고자 하는 의도가 뭐냐는 거예요. 의도가. 그 의도가 뭐냐 하면 밥 먹고 살려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인정받으려고 하고 남을 지배하기 위해서 공부하는 거예요. 의사 월급이 한달에 오십만원이고, 청소하는 분 월급이 한 이백오십만원 받는다면 의사 하고 싶은 사람 아무도 없지요. 그렇지요. 아무도 없을 거예요. 이 사회는 일자가 정해진 거예요. 일자. 일자가 정해졌다는 것은 피라미드처럼 되어있어 가지고 밑에 있는 사람들은 뭘 바라보느냐 하면 저 자리에 앉고 싶지? 저 자리에 앉고 싶지? 저 자리에 앉고 싶지?에 순서로 의자가 짜여있는 거예요. 중소기업하지 말고 삼성그룹에 가고 싶지? 가고 싶지? 가고 싶은 거예요.

여고 동창생 오래간만에 만났다. 나이 서른쯤 되어 만났다. “남자친구 있나?” “있다.” “어디에 다니는데?” “중소기업 다니는데 너무 좋대.” “그래?” “그럼 니는?” “나는 삼성그룹 대리야. 월급이 10배 차이나지.” 할 때, “아~ 부끄러워 미안하다. 삼성그룹밖에 못 들어가서 미안해.” “음매! 중소기업 기 살아!” 이런 사람 봤습니까. “니 친구 공무원 됐는데 몇 급 됐어?” “5급 됐어.” “니 친구는?” “신난다. 9급 세 번 만에 합격됐어. 9급.” 이걸 자랑삼아 하는 사람 누가 있어요.

이미 우리는 아무리 자아를 주장해도 이 주체밖에 인정하지 않는 세계에서는 우리는 이미 서열 속에 하나의 단계에 계단에 지금 서있는 겁니다. 이건 내가 원하지도 않는 스테이트 상태에요. 그래서 색깔이 있는 이유는 기능이 달라서 그래요. 기능이. 그런데 기능의 공통점이 있어요. 엎어먹든, 대처 먹든, 구워먹든, 이 모든 천사의 기능은 이 세상을 동일성으로 만드는 거예요.

대통령이든 비서든 하찮은 직업 백수든 관계없이 모든 인간은 똑같이 저주의 대상으로 불도저로 밀어붙이는 거예요. 노아홍수 일어나기 전에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필요 없이 물로 어떻게 합니까? 완전히 쏵 다 쓸어버렸지요. 그걸 예를 들 때 좋은 말로 예를 들지요. 탕수육 옆에 있는 소스. 꿀 소스. 돼지고기 조각을 튀겼잖아요. 그걸 찍어먹는 사람도 있지만 이걸 붓는다고 치고 확 부어버리지요. 소스로 다 덮어버리지요. 맛이 전부 다 동일한 거예요.

그러면 지금까지 강의한 거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사건은 인간 세계를 뭐로 만든다? 뿔로 만드는 거예요. 그 대표자가 악마가 되고. 이건 영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인간이 이 스가랴에 나오는 이 해석을 인간은 해석을 못합니다. 왜? 존재기 때문에.

그러나 스가랴 선지자는 이걸 알아 듣지요. 왜? 하나님의 신이 임했기 때문에. 성신이 임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뭐로 보느냐 하면 징후적으로. 증상이에요. 나는 주님의 일하심의 천사의 일함에 하나의 징후로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떤 징후? 존재 아니고 사건 세계에 속한 징후가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계속 보겠습니다. 자, 다시 하면 없음에서 침투가 되면 천사가 침투해서 이미 세상을 가두어놨지요. 그렇지요. 없잖아요. 주 앞에서 뻗어나갔지만 있음의 세계에서는 없는 분이잖아요. 그렇지요. 그렇다면 이 세상에 처녀가 아기를 잉태하기 전에, 마리아가 예수님을 임신하기 전에 예수님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이 있음의 세계에서는 예수님이 없었지요. 뭐만 있느냐 하면 말씀만 있고, 예언만 있지요. 예언대로, 말씀대로 성령께서 마리아에게 언질을 준 겁니다. 세례요한에게. “마리아야, 니가 임신할 것이다.” 마리아의 임신에 대해서 천사가 이야기하고, 또 남편 되는 요셉에게도 이야기했잖아요. 임마누엘.

그러면 예언 있고, 말씀 있는데 주님은 안 계시잖아요. 예수님이 안 계시잖아요. 오셨다. 오셨으면 여기 있음의 세계입니다. 있음의 세계에 침투가 될 때에 예수님이 찾아오게 되면 여기 모든 서열화, 피라미드. 뜀틀 있잖아요. 탁 집고 올라가는 거. 우리 초등학교 때 이 뜀틀 많이 했어요. 일단계, 이단계 높여가지고 많이 했거든요. 뜀틀 하듯이 죽 올라가있다 말이죠.

올라가있을 때에 세례요한이 왔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부정하고 세례요한을 공격했을 때 이 뜀틀 가운데 이 바닥에 있는 세리와 창기가 공격했습니까? 누가 공격한 거예요? 이 뜀틀의 우두머리가 자기의 정체를 드러냈지요. 이게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과 이런 사람들이지요. 요한복음8장에서 예수님은 이들보고 뭐라고 합니까? 너희애비는 뭐라고 했습니까? 악마라 했지요. 악마. 요한복음8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이 인간세계에 모든 피라미드는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가 이 세상을 이렇게 만들어낸 거예요.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 이야기하려고 뜸을 드리고 있습니다. 다니엘2장31절에서35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다니엘이 계시 받은 그 대목인데. 계시의 내용이. “왕이여 왕이 한 큰 신상을 보셨나이다” 자, 신상은 몇 개입니까? 제가 물어요. 몇 개입니까? 한 개입니까? 두 개입니까? 몇 개입니까? 신상이 몇 개지요? 하나밖에 없어요. 동일시 되어있다니까요. 전부 안에 들어있어요. 인간 역사가 통으로 하나밖에 없어요. 인간 역사는.

그걸 제가 응용해서 묻습니다. 당신의 기억은 몇 개입니까? 오직 하나에요. 어릴 때부터 오직 하나밖에 없다고요. 꿈속에서 그게 편집되어서 꿈속에서 중간에 툭 툭 튀어나오지요. 꿈은 우리가 죽는 기간이기 때문에 지 맘대로 기억이 살아있는 거예요. 내 실체는 죽고 꿈은 돌아다니고. 가끔가다가 이 꿈이 나를 깨우면 몽유병환자 되고 그런 거죠. 내가 살아있는 게 아니고 기억이 살아있는 거예요. 우리 평소에 대낮에도. 햇빛 장렬히 쬐는 이 대낮에도. 기억이 살아있는 거예요. 내가 살아있는 게 아니고. 아무개가 길에서 “어이, 어이, 니 가 맞지?” 라고 물으면 어떤 육체가 나한테 묻는 게 아니고 나의 뭐를 호소해요? 내 기억에 호소하잖아요. “누구신지요?” 이리 나오면 “모르겠나?” 이리 나오면 나중에 보면 빚쟁이 아니면 동창생이고 그렇죠.

기억이 떨어져버리면 자식도 못 알아봐요. 여러분들은 그렇게 안 되기를 바랍니다만, 그건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니고. 기억이 살아있는 한 여러분들이 살아있는 거예요. 그리고 기억의 특징은 자기위주에요. 자기 동질성. 자기 역사는 자기 소설책은 오직 하나밖에 없어요. 개인적으로 역사도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모든 인류의 역사도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느브갓네살왕이 다니엘이라는 하나님 편에 속한 하나님과 링크된 연결되어있는 사람을 체포하지 않았으면 몰랐을 상황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이 이스라엘 언약의 공동체를 의도적으로 호랑이굴에 기어들어가게 만든 거예요. 포로 잡힌 게 전략이었던 겁니다. 포로 잡힌 게. 트로이 목마 같은 거예요. 트로이 목마. 간교한 악마를 이기려면 이럴 수밖에 없어요. 십자가도 마찬가지에요. 살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전략대로 하자. 나랑 같이 죽자. 그러면 살리라.

마리아, 마르다 오빠가 죽을 나이도 안 됐는데 죽었지요. 누이동생 난리 났습니다. 기둥 같은 오빠였어요. 오빠! 오빠! 살려내라고 자칫하면 예수님 멱살 잡을 뻔 했어요. 그런데 전략인 줄 몰랐습니다. 존재로 사는 거 안되거든요. 존재에서 사건으로 바뀌려면 반드시 뭐를 경유해야 되느냐 하면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개입해줘야 존재에서 사건으로 넘어와요. 오빠 나사로는 이게 땡잡았어.

원래 아플 때 주님이 병 고치는 전문가로 알았기 때문에 아플 때 미리 불렀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기다렸어요. 죽을 때까지. 여동생이 예수님에 대해서 얼마나 비정하고 냉정하고 차가운 남자로 알았겠어요. 평소에 자기한테 얻어먹은 잡채와 탕수육이 얼마나 많았어요. 챙긴 용돈 얼마나 줬습니까. 그런데 정작 자기 아쉬울 때 내가 믿는 예수, 내가 믿는 하나님 어디 갔습니까? 없어요. 없어야 돼요. 그게. 없어야 돼요. 내 뜻을 응답해 주는 그런 하나님은 없어야 돼요. 그건 우상이 된다고요.

주께서 기도하는 내가 박살내는 그 타이밍, 그 때가 있어야 돼요. 내가 박살내는 타이밍. 내가 주님을 믿는다고 여겼던 내가 작살나는 그 타이밍이 있어야 돼요. 그래야 육에서 영으로 바뀌어요. 주께서는 그 가족을 체포해 버렸지요. 죽었어요. 오빠가 죽은 게 그 집안에 주신 그 집안을 징후로 만든 거예요. 징후로.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나를 믿는 자는 죽지 않을 것이고,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그러니 마지막 예수님의 액센트가 강점이 살겠고, 에 있는 거예요.

그런데 반드시 그 경유가 뭐가 있어야 돼요? 존재로서 죽어야 되는 거예요. 자살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니 주제파악을 제대로 하라는 거예요. 니 주제파악을. 니가 지금 악마에 매였다는 거예요. 주님에 매였다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를 경유해서 니가 다시 너를 징후적으로 너 자신을 다시 보라는 말이지요. 너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보라는 말이지요. 징후적 존재지요. 그럼.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지요. 그러니까 오빠가 죽은 것은 그건 주님 안에서는 소급해서 보게 되면 그건 자는 것이지 죽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사건이 터져야 앞에 있는 사건을 소급해서 해석이 되는 겁니다. 그 일도 주께서 알아서 했어요.

그래서 다니엘 계속해 봅시다. 왕이 보니까 큰 신상이 있지요. 신상이 있는데 머리는 뭡니까? 정금이지요. 가슴은 팔이고 은이지요. 배는 넓적다리고 놋이지요. 종아리는 철이지요. 발은 철이지요. 그러니까 오늘 네 번째 스가랴6장에 나오는 네 번째 그 말의 특징이 어롱진 거잖아요. 개별 색깔이 없어요. 앞에는 색깔이 있는데 뒤에는 섞여버렸어요. 하이브리드에요. 혼합체에요. 혼합체. 갈수록 혼합체에요. 그런데 그 신상을 무너뜨리는 것은 금이 아니고 은도 아니고 놋도 아니에요. 무너뜨리는 것은 그 혼합체 철과 진흙으로 된 그 발을 무너뜨리니까 앞에 있는 모든 역사가 존재에서 무 존재. 사라져버린 겁니다.

첫 번째 말이 붉은 말, 두 번째 말이 검은 말, 세 번째 말이 흰색 말, 네 번째 말은 어롱진 말. 얼룩덜룩한 말. 이건 인류의 역사가 아무리 호화찬란해도 결국은 죽도 밥도 아닌 그런 흐지부지한 그러한 존재감을 드러내면서 결국은 주님 앞에 산산조각 내버릴 것이다. 그리고 다니엘2장35절에 보니까 때에 철과 흙과 놋과 은과 금은 다 부서져 여름 타작마당의 겨와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서, 바람이 또 나오네. 바람은 존재를 없애는 게 바람이니까요. 존재를 흔들어버리고 사라지게 하는 거죠. 간곳이 그 다음에 뭡니까? 간곳이 없지요. 애초부터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애초부터 아무것도 없었어요. 애초부터.

그런데 없는 것에 있게 한 것은 바로 주님이 전쟁하는 신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악마를 불러내가지고 인간을 악마 편에 서게 해서 그걸 없앰으로 말미암아 없는 것이 되어야 없어져야 언약이 이루어져요. 이스마엘이 개과천선해서 이삭 됐습니까? 아니지요. 이스마엘은 따로 가고요. 아브람 아들은 이스마엘 밖에 없어요. 그 이스마엘 외에는 다른 아들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름이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뀌면서 이름은 분명히 자식이 많은데, 아브람에 있는 자식은 이스마엘 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이스마엘은 아브람과 관련되어있다면 아브라함과 관련된 자식은 없어요. 없는데 아버지가 먼저 생긴 거예요. 이 말은 자식이 등장함으로서 아버지의 의미가 새롭게 발생된다 이 말이거든요. 없음에서 나온 분. 예수님이 그런 분 아닙니까.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분. 남자, 여자의 수정에서 나오지 않는 분. 그 분은 누구밖에 없습니까. 박혁거세? 알에서 나왔다고요? 예수님밖에 없지요. 사건입니다.

왜? 인간의 물리학에서 사건이란 일회성이에요. 단회성이에요. 존재라 하는 것은 반복이 될 때 존재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단회성은 사건은 어디서 배제되느냐 하면, 법칙에서 배제돼요. 어떤 공간, 어떤 시간 뒤에도 동일한 결과가 나와 줄 때 법칙이 되는 겁니다. 만유인력 법칙같이. 그렇게 되어야 로켓을 목성까지 날려 보낼 수가 있어요. 그런데 사건은 어디에도 어느 물리법치에도 적용을 받지 않습니다.

성도가 사건이에요. 성도를 본인을 본인으로 물리적으로 이 세상 법칙으로 설명이 안돼요. 다만, 주께서 그렇게 하셨나이다. 그것뿐이에요. 성령이 와서 그렇게 했다는 것뿐이지요. 그럼 듣는 사람이 성령 빼고 이야기하자. 성령 빼고 이야기하면 이야기할 게 없어요. 그때는 이렇게 하세요. “나도 모르겠어.”

사도바울보고 “당신은 삼층천에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겠어. 내 말로 설명이 안 돼.” 여러분들은 설명이 되지 않는 사람으로 살아야 됩니다. 그래서 여기에 보면 결국은 그 동일성이 다 날아가 버리지요. 그래서 결론입니다. 이 세상은 언약이 끝날 때까지 언약이 주어질 때까지 유보적이에요. 한시적이고. 야고보서4장에 의하면 이 세상은 안개 같은 거예요. 있다가 없어지는 거예요.

연극이 끝났을 때, 그 연극무대 다 끝나고 난 뒤에 관객이 떠나고 난 뒤에 여러분, 유령이 되어서 연극무대에 다시 올라가 보세요. 재미없어요. 가끔은 그런 연극무대 찾을 때가 있어요. 아버지 돌아가시고 지는 사법고시 합격하고 난 뒤에 오징어 구운 거하고 술 들고 아버지 묘 찾아가서 “아버지, 아버지 소원대로 저 합격했습니다.” 하고 연극무대를 수유리 그 잔디밭에서 연극을 벌리잖아요. 아버지 없는데. 연극하고 있는 거예요. 상대역이 있어야 되니까. 왜? 나를 나 되게 했으니까.

우리는 이제 우리의 상대역은 주님의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찾아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기능을 하도록 천사같이 그렇게 하는 것이 성도의 위상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천사를 닮아가게 하옵소서. 이 세상을 주의 시키는 대로 이 세상을 네 모퉁이로 붙잡아 매고 심판할 수밖에 없는 당위성을 예수님의 십자가에 근거해서 징벌하는 최후 통첩하는 그 자유함을 저희에게 허락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보충강의  
보충강의에서 아까 내가 질문을 하고 답변을 안 한 게 있어요. 뭐냐 하면 국가가 없다는 이야기에요. ‘국가가 없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국가가 없다니 무슨 말이냐.’ 라고 여러분이 생각하기 때문에 그걸 제가 말씀드리면. 국가가 없다는 말이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국가가 있는 게 아니고 개별자가 있어요. 개별자. 국가는 없어요. 대학은 없어요. 그러니까 직원들하고 총장 있고 학생들 있고 건물 있지요. 건물은 인간이 아니니까 빼고. 캠퍼스 빼고. 학생들이 있다고요. 한 사람씩 보면 전부 개별자에요. 이게 무슨 신비냐 하면 개별자가 모이면 반드시 자기를 통제하고 자기를 지시 명령할 일자를 인간들마다 지어낸다는 겁니다. 이게 인간의 본성이에요.

개별자가 큰 소리 치기를 특히 남자가 객기 부리잖아요. 나는 나다! 이리 하잖아요. 20대 젊은 애들 전부 살아가는 게 뭡니까? 내가 나 되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세상은 나하고 만만치 안잖아요. 그러니까 뭐 키웁니까? 고양이 키우고 개 키우는 거예요. 지 말 잘 들으니까. 그거 안 키우면 정신병 날 거 같아서. 자기하고 대화 상대가 있어야 내 스트레스를 개한테 풀 수가 있는 겁니다. 외로워서. 외롭다는 말은 짝이 필요하다는 말이고.

옆에 개 키우는 게 좋을까요? 대통령 키우는 게 좋을까요? 대통령이 좋지요. 개는 매일 줘야 되는데 대통령은 알아서 나한테 권력과 취직자리와 내가 요구하는 거 어디 놀러가고 싶다 하면 그런 권한과 그런 월급을 주고 다 할 수가 있잖아요. 청와대 비서라든지. 권력을 주잖아요. 권력이 없는데 내가 요청하는 거예요. 내가. 권력이라는 것을 내가 요청한다고요. 이 개별자가 요청한다고요.

그러면 요청하게 되면 내가 대통령의 종이 됩니까? 아니면 대통령을 이용하게 돼요? 대통령을 이용하게 되어있다고요. 그러니까 국가라 하는 것은 누가 만드느냐 하면 내가 그 권력이 필요해서 내가 만들어내는 거예요. 내 안에 있는 악마가 저쪽에 있는 악마하고 흥정한 겁니다. 그게 국가에요. 그래서 말 잘 들어요. 이게 대통령만 있는 게 아니거든요. 그럼 뭐냐, 다른 사람도 있잖아요. 내 식구도 있고.

예를 들어서 애는 세 살, 네 살 밖에서 놀고 싶은데 엄마가 강제로 다섯 살 때에 학원에 보냈다. 그러면 애한테 타당성 있는 왜 엄마가 나를 강제하는 타당성 있는 논리를 제시해야 돼요. 첫째 애가 “엄마, 왜 저를 이렇게 영어 유치원에 보내십니까?” 할 때, 엄마는 이렇게 답변해야 돼요. “니는 나를 누구로 보느냐?” 이리 되는 거예요. 그러면 “방금 엄마라 했잖아요.” “엄마 맞지.” 그러면 엄마가 물어요. “엄마가 뭐지?” “나 없을 때 나를 낳은 주신 분.” 답변 속에 이미 종속관계 성립 됐지요. 나 없을 때 낳아주신 분이지요. 없을 때.

“그러면 니 배고플 때 누가 젖을 주었고 누가 옷을 입혔느냐?” 할 때 “엄마” 이러지요. 그러면 이미 엄마가 권리를 행사할 근거는 이미 바닥재는 마련돼 있는 거예요. 거기서 약간 더 보태는 거예요. 영어 유치원 약간 보태는 거예요. 만약에 엄마라는 존재의 관계를 끊고자 한다면 그 애는 다른 집에 입양가든지 뭔가 가출하든지 해야 돼요. 그러나 본인이 판단하는 거예요. 아까 했지요. 모든 개별자는 누가 판단한다? 내가 판단하고 내가 결정한다고요.

내가 판단하고 결정하는데 왜 국가의 권력이 왜 필요 하느냐 지금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만 있는데, 나만 최종적으로 있기 때문에 나를 위해서 국가가 필요하다는 그 논리를 제가 펼치고 있는 겁니다. 그 예로서 엄마이야기 든 거예요.

엄마가 요청을 해요. “영어 유치원 가라.” “더 놀고 싶어요.” “아니 가야 돼” “왜 가야 됩니까?” “일단 엄마니까 니한테 요구할 권리는 니가 인정했지?” “인정했습니다.” 제가 지금 이 논리를 아이한테 하라는 말이 아니고 엄마가 요런 걸 갖고 있으라는 말이지요.

“엄마 자격이 된다는 것은 니가 인정하지?” “인정합니다.” “그러면 엄마가 니가 유치원에 가서 영어를 배우게 되면 니가 다른 아이보다 초등학교에서 앞선다.” 애가  “앞서서 뭐할 건데요?” “앞서면 사랑을 인정을 학급에서 선생님으로부터 니가 독차지하게 된다.” 그러면 애가 그때부터 사랑, 인정받음, 여기에 대해서는 애가 눈이 바짝 뜨여요. 왜? 애 안에는 마귀가 들었기 때문에. “아! 맞아.”

그러니까 사랑 받는다는 말은 이게 경쟁적이에요. 혼자 사랑 받는 게 아니고 쟤보다 많이 받을 때 사랑이 되는 겁니다. 같이 사랑해 주면 동질성이 되면 안돼요. 차이성이 되어야 돼요. 쟤보다 많이 받을 때 나는 사랑 받는다,를 느끼는 거예요. 똑같이 받으면 사랑이 아니에요. 쟤보다 많이 받아야 돼요. 그런데 그게 유리해요. 왜? 공부를 잘하면 왜 선생님한테 사랑을 받느냐 하면 선생님 수준에 어프로치 접근해 가거든요. 선생님이 이야기하고 싶은 것에 짝짝 아구가 맞다 이 말이지요. 농땡이들은 지금 딴 짓 하고 있다 말이지요.

그런데 얘는 눈을 마주친다고요. 그러면 선생님의 아바타가 되고 대리자가 되면서 선생님이 다루는 그 권력에 얘가 그 권력에 맛을 봐요. 학교에 가는 것이 재미있어. 왜? 다 지 똘마니들이니까. 자기가 선생님이니까. 사랑을 받게 되면 점수가 후한 점수가 나오면서 그 동네에서는 자기가 최고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악마에서 엄마는 배고픔을 채워주고 두 번째 그 사회에서 내가 악마가 두 번째 주는 그 혜택을 맛을 보게 된 겁니다. 그걸 가지고 아주 쉬운 말로 “공부 참 잘한다.” 공부 잘한다, 이리 되는 겁니다. 그 다음부터는 처벌이 달라요. 공부 잘하게 되면 좋은 대학가고, 공부 못하면 빌어먹는 게 돼요.

빌어먹는 사례를 이제 엄마가 애한테 좍 하는 거예요. 사진을 보는 거예요. 우물 없는 아프리카 아이들. 깡패들 보고. 범죄애들, 성폭행부터해서 죽 보면서. “공부 못해서 그런 거다. 저 사람들이 이 사람들.” 그 다음부터는 양당 결정에 죽 나가지요. “엄마, 아빠한테 고마운 줄 알아라.” “그래도 가기 싫어.” “저리 빌어먹는 애가 너같이 이야기해서 다 그런 거다. 남들 놀 때 니 힘들게 하게 되면 나중에 성과가 주어진다.”

“그러면 공부하면 뭐 사줄 건데?” “스마트폰 사줄게.” 그 다음부터는 당근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이제 당근이 들어가요. 그런데 이게 장애물이 있어요. 그게 뭐냐 DNA에요. 이게 책보고 된다고 되는 게 아니거든요. 결국은 아무리 엄마가 나대도 엄마위에 악마가 있잖아요. 악마는 이미 모든 걸 서열화 시켜 놨어요. 모든 것이 피라미드 뜀틀로 조성이 되어있어요.

조성이 되어가지고 니 자리에서 나름 노력해봐라. 올라가게 한 만큼 올라가게 한다. 라는 그것을 하나의 동기부여, 이 세상을 계속 내가 살아가야 될 이유, 그것은 올라갈수록 보다 많은 숫자의 사람으로부터 사랑받고 인정받는 거예요. 그 사랑도 인정도 못 받거들랑 개나 키우라. 주인이 물어주는 먹이에 얼마나 사랑하겠어요. 돈 없으면 그것도 못 키우지만. 그런 자리에서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는 것.

그래서 인간은 그 결핍. 악마가 해주는 최고의 자리와 현재 자기 자리에 결핍. 그 결핍을 그 간격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주체라고 하는 겁니다. 자아는 뭐냐 내가 되고 싶은 모델과 일치시키는 것을 자아라고 해요. 내가 되고 싶은 나. 그러니 자아는 정신병적이에요. 정신병적입니다. 항상.

꿈꾸면 50대는 항상 40대로 나와요. 항상. 이게 착각이에요. 오인입니다. 오인. 잘못 생각한 거예요. 그게 자아고. 주체는 주변 환경에서 나를 정해줘요. 신입사원이 까불락 거리고 지 맘대로 했던 그 신입사원이 대학 졸업해서 딱 취직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완전히 회사에서 밟아버리지요. 그래서 그걸 못 견디는 사람은 일주일 안돼서 사표내고 인턴 할 때 사표내고 이거 아니면 내가 굶어죽나. 사표내고 “엄마 사업할래.” 이런 식으로 나와 버리지요.

그런데 일이 재미있다. 이리 되어버리면 그 자체가 하나의 국가가 돼요. 회사가. 내가 원하는 국가를 내가 찾고 있는 거예요. 인간은 혼자 살수 없어요. 나를 인정해주고 사랑해주는 국가라는 그런 환경을 내가 찾아다니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나만 있고 국가는 그 때 그 때 달라요.

만약에 나라에서 세금을 많이 뗀다 하면 그 사람은 어디 가느냐 국가 찾아 미국으로 캐나다로 후딱 살기 좋은데 캐나다, 뉴질랜드 있잖아요. 그런 데로 가버려요. 국가는 내가 정하는 거니까. 이상하게 말이 이상하지요. 모든 결정은 내가 정한다고 해놓고는 누굴 요청합니까? 나를 지배해줄 어떤 정신세계를 또 원하고 있어요. 정신세계를.

돌아가신 부모님이 그립다던지. 자꾸 이게 뭐냐 하면 자아의 허구성을 사회 환경에서 충족되기를 찾고 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이게 보충수업의 10분짜리 강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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