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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14 00:40:22 조회 : 2264         
구원의 요건 131213 이름 : 이근호(IP:119.18.9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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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은주(IP:218.♡.193.179) 13-12-28 22:50 
안양20131213a-히6장9절(구원의 요건)- 이 근호 목사

히브리서6장9절을 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이리 되어 있지요. 구약에서의 구원이라 하는 것은 먼저 애굽나라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애굽나라에서 어떤 단체가, 나라가 나왔을 때에 그게 구원이 되는 겁니다. 구원이 되려면 애굽나라가 먼저 있어야 되고 그 어느 누구도 애굽나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겁니다.

고구마 하나 삶는 것도요, 솥이 있어야 되지요, 물이 있어야 되지요, 가스 불 켜야 되지요, 고구마 삶는 것도 빽빽빽 시끄럽게 돌아가야 되듯이 구원에도 요건이 있습니다.  구원의 요건이 무엇이 있는지 알아볼까요. 먼저 무엇부터 있어야 되겠습니까? 솥이 있어야 되지요. 애굽이란 솥이 있어야 되고, 10가지 재앙이 있어야 돼요. 애굽에서 압력이 압력밥솥에서 압력이 가해져야 돼요. 압력이 가해지면 신음소리, 픽픽 소리가 나지요.  극도로 신음소리가 나야 되지요. 지금 제가 이야기한 것이 구원의 요건입니다. 

나중에 애굽은 이 세상은 어두운 세상을 말합니다. 어두운 세상의 압력이 있어야 되고 압력밥솥의 신음소리가 있어야 되고 그 신음소리가 시끄럽다고 하늘에 상달돼야 되겠지요. 하늘에 상달되면 하늘에서 10가지 재앙을 내리 게 돼있습니다. 10가지 재앙을 내리면서 압력을 행세한 쪽은 구원에서 제외가 되고 압력을 받은 신음소리를 냈던 자는 여기서 빠져나오는 방식이 구원의 방식입니다.

가만히 앉아 성경공부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이러한 요건이 주워져야 돼요. 그렇다면 여기서 압력을 할 때 사람들이 오해를 한 게 있어요. 뭐냐 하면, 원래 주인이 종한테 압력을 가합니까? 종이 주인한테 압력을 가합니까? 어느 쪽이 맞습니까? 채찍 들고 설치는 것이 주인이고 얻어맞는 것은 종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누가 주인이고 누가 종이냐 하면, 아브라함 언약을 받은 사람들이 주인이고 그 외에는 저주 받아야 될 종이 되는 겁니다. 주인이 채찍을 휘둘러서 지배를 해야 정상인데 오히려 하나님을 모르는 저주받을 종들이 채찍을 가지고 주인장 되시는 히브리인들을 이렇게 횡포를 부리는 거예요.

횡포를 부릴 때, 상당히 말이 안 되잖아요. 주인이 종 되고 종이 주인 됐으니까 상당히 억울하잖아요. 그런데 그러한 억울함을 겪어서 진짜 주인은 여기 히브리인들도 진짜 주인이 아니고 애굽인들도 진짜 주인이 아닙니다. 진짜 주인은 주되시는 분이 따로 있어요. 주 예수 그리스도에요.

어제 수요 설교할 때, 애굽에서 출애굽했던 것이 이스라엘이 아니고 하나님이 출애굽했다는 이야기를 했지요. 보통 출애굽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빠져나왔는데 이스라엘은 오해했어요. 자기들이 애굽에서 나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를 들면, 서울대공원에 있는 사자가 우리에서 빠져나오면 그게 인간됩니까? 아니지요. 우리에서 빠져나와도 맹수잖아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오해한 거예요. 애굽에서 빠져나온다고 자기가 백성이라고 오해한 거예요. 인간이 안 된 주제에.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뭐냐, 애굽에서 빠져나와 약속의 땅에서 살면서 진짜 헤딩을 하는데 팍! 하고 박치기를 하는데, 제대로 박치기를 하는데 바벨론이라는 벽에다가 박치기를 하지요. 박치기를 하니까 튕겨 나오잖아요. 박치기 하니까 무섭잖아요. 무서우니까 기껏 도망가는 것이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 아니고 애굽을 그리워해요. 내 몸이 애굽을 기억해요. 하는 것처럼.

누리려고 해도 못 누려요. 내 몸이 애굽을 기억해요. 예를 들면, 코미디 프로에 있어요. 옛날 포장마차 했던 사람들이 갑자기 돈 벌어 놓고 고급 식당에 가서 누리고 싶은데 이 몸이 포장마차를 기억해가지고 자기가 손님인데 “아이고, 손님 어서 오세요.” 하고 갑자기 튀어나오는, 옛날 버릇이 나오는 것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원은 하나님께 했다고 백날 이야기하지만, 실제로서의 해결책은 보다 더 돈 많고 보다 더 힘세고 보다 더 세상적인 것에 의지해서 자기를 압제하는 것에 대해서 구원을 해볼까하는 시도를 하게 되는 겁니다. 들어보니 옛날이야기 아니지요. 오늘날 우리 이야기 아닙니까?

살기 힘드니까 주님께 붙들어야 되는데 살기 힘드니까 돈 많은 홀아비 없는가, 이런 생각하는 거예요. 아내는 죽자고 악착같이 한 푼 두 푼 모아서 집 한 채 마련하고 살아보려고 애를 쓰는데 겉만 번지르르한 백수 남편은 회사 들어갔더니만 했는데 높은 젊은 이사하고 눈맞아가지고 실컷 농락해놓고 나중에 팬티바람으로 쫓겨 나오는 그런 것도 있어요. 왕가네 식구들 주말연속극 있어요.

보다 더 돈 많은 사람, 보다 더 권세 있는 사람, 보다 더 건강한 사람이 주어지게 되면 이게 하나님의 구원인양 생각하지요.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끄집어 낼 때, 몸만 나온 게 아니지요. 애굽적인 종교, 관습과 사고방식, 세상관 다 가지고 나왔어요.

그 애굽이 갖고 있던 종교관이 뭐냐 하면, 약속의 땅에서 그들은 우상을 보고 좋아서 환장한 거예요. 그것은 마치 창기가 멋있는 남자보고 자기 몸을 스스로 루즈 칠하고 멋있게 꾸며서 어떻게든 그 사람의 여자가 되고 싶어서 환장한 것처럼 그렇게 설치는 에스겔23장의 내용입니다. 그 내용과 똑같이 되는 거예요.

그 내용이 그거에요. 비로소 니 본색이 여호와 구원, 십계명, 제사 어떻고 저떻고 백날해도 소용없고 니 몸이 애굽을 기억해요. 대중노래 가사에도 그런 게 있어요. 당돌한 여자라는 노래가 있거든요. 술 한 잔 사주실래요. 당신여자이고 싶었어요. 그거 보면 에스겔23장이 생각나요.

구원의 조건이 이미 구약에서 이렇게 마련을 했으면, 구원의 조건을 경험했다고 해서 구원의 조건을 만드는 존재는 아니에요. 누구한테 경험했다고 해서. 내가 이발을 했다고 해서 이발 깎는 이발사는 아니잖아요. 이발 깎였지. 머리카락 깎였을 뿐이지 머리카락 깎는 사람이 아니다 말이죠. 이발을 했다고 해서 이발 기술을 갖고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들이 구원받았다고 해서 구원하는 요건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기술은 없는데 이 사람들이 오해하는 거예요. 구원받았기에 이제는 그 구원을 자기 힘으로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오해도 이런 엄청난 오해가 없어요. 기존교회도 마찬가지에요. “여러분, 구원받았습니다. 구원을 유지해야 됩니다. 유지하는 방법을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십일조내세요.” 이리 계속해서 하는데 자기가 스스로 구원하는 요건을 만들어 내지를 못하면서 만드는 척하는 그것이 애굽의 종교로 우상숭배자로 이스라엘 전체를 변질시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사울 왕이 전쟁을 할 때 반드시 제사를 지내면 효과 있더라, 알았던 거예요. 전쟁을 하기 전에 무조건 여호와 앞에 제물 드리고 제사 드리면 반드시 이 전쟁은 승리하더라, 하는 그런 것을 한 번 경험했기 때문에 구원을 경험한 거죠. 경험했다고 해서 제사 드리면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인간의 본색이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제사를 드릴 때가 됐는데 사무엘이 오지를 않는 거예요. 제사장이 오지를 않는 거예요. 약속시간이 됐어도 오지를 않았어요. 누가 약속을 어겼느냐 하면, 사무엘 선지자가 약속을 어겼어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사울 왕이 제사를 드렸지요. 드렸는데 완전히 하나님한테 책망을 받지요.

사무엘이 와가지고 “내가 오지도 않았는데 왜 제사를 드렸습니까?” “약속시간이 지나서 왔잖아요.” 누가 잘못하고서는 우리한테 따지기는 하며 싸운 거예요. 제사 드린다고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예수 믿는다고 얘기함으로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제가 여러 번 이야기하지만 구원받을 방법은 우리한테는 없습니다. 이미 쫓겨났는데 구원은 없습니다.

신천지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구원 받는 방법을 정보를 자기가 입수한데 문제가 있는 거예요. 처음부터 잘못 됐어요.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출발점이 잘못된 거예요. 출발점이. 기존교회도 다 마찬가지이고. “어떻게 구원받습니까?”가 아니라 “이발 깎인 사람들 손 들어보세요.”이게 바로 교회에요.

그러니까 주님한테 구원받은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주님한테 구원을 받으면서 구원받은 당사자가 구원의 요건에 포함이 돼있습니다. 사람에게 버림받은 분이 모퉁이 돌이 되었지요. 그러면 그 모퉁이 돌에 합세해서 구원을 받으려면 같이 사람들한테 버림받은 벽돌이 되어야 돼요.

예수님을 버릴 때, 사람들이 버린 이유가 “우리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겠습니까? 천국 가겠습니까?”에 대해서 예수님이 일체 말을 안했지요. “너희 애비가 마귀인데 무슨 구원을 받아.” “너희 애비가 마귀인데 마귀도 구원하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네.” 이렇게 해서 튕겨 나왔거든요.

구원받은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구원받긴 개뿔이나 구원받아, 주님이 찾아와야 구원받지. 구원받을 방법 없는데.” 이러다가 이상한 사람이네 하고 같이 튕겨져 나가는 거죠. 그렇게 튕겨져 나온 벽돌 하나, 하나가 모아서 성전이 되는 거죠.

우리나라가 우주선 매일 실패하잖아요. 나로호. 연기했다가 성공하고 돈만 날리고 하는데. 거기에 부속품 하나, 하나가 작은 부속품 하나가 고장 나도 날지를 않아요. 어떤 때는 날아 가다가 애들 폭죽 올라가다가 풍선 바람 빠지듯이 픽! 하고 바다에 빠져버리지요. 부속품 하나가 고장 나면 그리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천국을 받아들일 때 부속품 하나라도 신중히 해서 받아들입니다. 자기가 머리 깎고 온 사람 안 받아줍니다. 노아방주 보세요. 노아방주 할 때, 방주 만드는 것은 노아가 만들었잖아요. 누가 탔습니까? 만든 사람이 들어갔고 안 만든 사람들, 바로 옆집 사람도 가진 않았어요. 통장도 못 들어갔어요. 못 들어갔다니까요.

노아가 만든데 간 거지요. 노아가 구원 받은 자체가 방주의 요건이 된 겁니다. 방주를 만들면 만들수록 느껴지는 것은 ‘아! 이거 아무도 이 방주에 안 들어오는 것이 정상이다.’ ‘인간으로 생겨먹은 인간들이 이 예수 믿는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야, 어떻게 인간이 예수를 믿어.‘ 라는 생각이 들으시면 여러분들은 구원의 방주에 타신 겁니다.

‘내가 예수를 믿다니? 이 딴 거 안 믿어도 되는데 왜 믿어? 이건 말도 안 돼.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라고 느낄 때,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구원은 어려운 게 아니고 불가능이에요. 그래야 오늘의 본문이 설명이 돼요. 안 그러면 오늘 복음의 설명이 안 됩니다. 본문은 조금 있다가 들어가 봅시다.

구원에서 구약이 중요하니 다시 이야기할게요. 사울이 전쟁을 할 때, 제사를 드려야 된다, 라는 것은 자기가 어떤 효능, 효과 하나님의 축복의 효과를 자기 쪽에서 생산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 그것이 바로 애굽에서 나올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들고 나온 거예요.

그래서 애굽에서 두 가지 나왔어요. 애굽적인 요소도 나왔고 하나님도 같이 나왔고. 하나님의 모습은 어린양으로 나왔고, 애굽적인 요소를 가진 자리에 튀어나온 그들이 바로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온 게 아니고 사실은 이스라엘 속에 애굽이 담겼으니까 애굽에서의 탈출이 아니라 애굽의 이동이 되겠지요.

애굽의 이동이고 가나안 땅의 애굽의 정착이고 결국은 이스라엘 자체가 애굽나라화 되면서 거기서 빠져나온 사람들이 듬성, 듬성 있었는데 그들이 누구냐 하면, 바로  ‘선지자들’입니다.  선지자의 팔자와 운명이 꼭 출애굽 그 당시의 히브리인들의 팔자 같아요.

신음을 하게 돼있고 억압을 받고 신음을 하고 하나님께 호소할 때, 하나님이 그들을 건져내시고. 그 요건 있잖아요. 다시 할게요. 원래는 억압은 누가 해야 돼요? 주인이 종한테 해야 되잖아요. 야곱에게 축복했잖아요. 에서에게는 저주를 했지요. 지난 낮 설교가 그거였어요. 야곱은 축복 받았고 에서는 저주받았다. “저한테 돌아올 남은 축복은 없습니까?” 할 때 이걸 몽땅 털어서 축복을 준다 했지요. 주인과 종의 관계지, 양쪽을 챙기고 각각 가는 게 아니라 했지요.

천국과 지옥은 같이 엮어져 있어가지고 만약에 어떤 사람이 지옥에서 불쌍하다고 지옥에서 10년 살다가 “아이고, 고생 많이 했다. 나와라.” 하고 풀어주게 되면 지옥에 가는 문제가 아니고 지옥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고 천국에 10년 살다가 “많이 살았지? 이제 나와! 그만 살아.” 이렇게 돼버려요.

그러면 천국 간 우리는 뭐예요? 안되잖아요. 아예 우리가 천국에 영원히 살기 위해서는 어느 쪽도 저 쪽에서 영원히 못 빠져나와요. 지옥에 가서 영원히 못 빠져나와야 돼요. 그걸 어린이 놀이터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시소라고 했지요. 시소는 특징이 혼자서는 못 놀아요. 절대로 혼자서는 못 놀아요. 한 쪽에서 내려가 줘야 한쪽이 올라가게 돼 있어요. 한 쪽이 땅바닥을 쳐야 한 쪽은 위에서 바라보게 돼 있다 말이지요. 위는 복 받은 자고 땅바닥은 저주받은 자고 저주받은 쪽이 지옥이고 이쪽이 천국이고 그런데 이 세상은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했지요.

천국 갈 사람은 이 땅에서 핍박을 받고 지옥 갈 사람들이 대장질하게 만드는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장차 오실 예수님께서 구원의 증표로 징후로 유일한 구원이 과연 있고 천국이 실제로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일한 사인, 그 증거물이 뭐냐,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려면 예수님 삶은 이 땅의 모든 인간들과는 반대로 거꾸로 사는 삶이 돼야 되지요. 그 분은 본체 하나님이시나 하나님 되심을 거절하시고 도리어 무슨 형체를 가졌다 했습니까? 하나님의 형체 영광을 가져야 할 분이 갑자기 종이 돼버려요.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고 오히려 섬기려고 왔다 했어요. 완전히 졸지에 종이 돼버렸어요. 종이 되었으니까 그만큼 우리를 진짜 주인 되심이 종이란 말은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종이면서도 주인도 아니면서 되지도 않는 주인 노릇을 해왔냐 이 말이죠. 

주인이 행세하게 되는 특징이 뭐냐 하면, 바로 ‘자리’인데 이걸 다른 말로 하면 ‘터’ ‘자리’ 하나의 민족 국가라 하는 것은 추상적인 말이 안 되려면 터가 있어야 되고 자리가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국가가 돼요. 그런데 지금도 분명히 집시는 민족이잖아요. 민족인데, 그들을 국가라 하지 않지요. 왜 이 사람들이 국가가 아닙니까? 뭐가 없어요? 자리가 없고 터가 없어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히브리서11장에 보면, 그들은 이 땅에 뭐가 없습니까? 자리, 터가 없어요. 그래서 그 후손들도 결국은 애굽나라에 갔는데 애굽나라에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터를 자리를 허용치 않지요.

사람이 자기가 주인 노릇하려면 뭔가 이렇게 월세 방이라도 전세방이라도 뭔가 터가 있어야 요거 안에서는 자기가 선악 따먹은 그 행세를 해요. 우리 몸이 선악과를 기억해요. 우리 몸이. 그걸 따먹는 날에는 천하에 누가 와도 나만은 내가 주인공이 되고 이 역사의 주인공, 이 현실의 주인공, 실제 살아있는 지금 현재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나인 거예요. 

엄마들이 자식이 나쁜 짓을 해서 남한테 해 곶이해서 운전해서 사람을 죽였다든지 남한테 해괴한 짓을 해서 온갖 타인에게 상처를 입혀도 자기 자식이 유치장에 앉아있으면 면회 갑니다. 면회 가서 “누가 니보고 아무나 욕해도 나는 아이고, 나는 내 새끼! 내 강아지! 나는 니가 뭐라도 니를 끝까지 사랑할거야.” 그렇게 하지요. 어머니의 사랑은 과도하지요.

과도한 어머니의 사랑이지요. 제일 비싼 거, 애들 용품 외제, 애들 옷도 제일 비싼 거, 뭐라도 내 새끼한테는 남한테 기죽지 않게 제일 좋은 거, 스마트폰도 제일 일찍 사주고, 자식 사랑 그게 뭐냐 하면, 우리 애 기죽지 않게 내 몸이 선악과를 기억해요. 선악과 따먹을 때 마귀가 뭐라고 했습니까? 니가 따먹게 되면 지옥 간다, 이리 했습니까? 마귀는 거짓말만 할 줄 알아요. 왜 참말을 못 합니까?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이거 따먹으면 나처럼 지옥 간다. 이랬더라면 아담이 따먹었을까요? 안 따먹었을까요? 안 따먹었지요. 이게 구라를 해도 김 구라보다 더해.

구라를 쳐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선악을 따먹는 날에는 니가 정녕 하나님처럼 된다.” 처음에 아담은 그랬지요. 이미 우리가 아담 후손인 이상은 우리는 따먹었던 그 본성에서 그게 우리의 터가 돼요. 우리의 자리가 되는 겁니다. 이제는 말릴 수도 없어요. 이건 신도 아니면서 신인 것처럼 행세하고 싶은 이 욕망, 이 탐욕에서 우리는 발을 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일진회 같고 조폭 같아요. 돈이 없어 힘이 없어 조폭 못하지 돈 좀 있고 힘깨나 쓰면 조폭하지 말라 해도 다 조폭해요. 집사님이 갑자기 이 집에서 20층 빌딩을 세우면 이 동네 조폭 할 거예요. “이 부동산들, 나 때문에 빌어먹고 사는 인간들, 똑바로 해!” 이렇게 된다고요.

그걸 우리의 모든 인생의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그동안 말을 표현 못했는데 이제는 표현하세요. 우리는 조폭들, 우리는 내가 주인이 되는 것. 내가 스스로 나 있음으로 자족하는 주인공으로 사는 것, 역사의 주인공, 시대의 주인공, 영웅이 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숨길 수 없는 우리의 포부입니다.

이것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나 교회에 가나 교회에 가도 노골적으로 더 들통 나지요. 엎드려서 울면서 기도하는 게 뭐냐 하면, 언제쯤 저로 하여금 신이 되게 해 주실 겁니까? 언제쯤 내가 일대에 이 시대에 영웅이 되겠습니까? 내 자식은 언제 커서 민족과 국가를 교회를 위해서 영웅이 되겠습니까? 매일 그런 거 가지고 십자가 들고 빌고 십자가 보고 비는 게 말이 돼요? 그게?

십자가가 뭡니까? 종이 되는 거잖아요. 왜 선악과는 따먹을 줄은 알면서도 선악과는 따먹으면서 왜 그 따먹는 손길가지고 십자가는 왜 안 따먹어요? 선악과 따먹어  입에 꿀꺽 삼키지 말고 십자가 입에 집어넣어가지고 따먹으란 말이죠.

성령이 오게 되면 선악과가 본인이 아니지만 성령에 의해서 들어오게 돼요. 들어오게 되면, 미국영화에 헐크라는 게 있어요. 갑자기 얼굴이 변화면서 몸집이 커져요. 속옷 다 찢어지고 바지 다 찢어져요. 호르몬의 작용 이상이 생겨서 두루루 다 찢어지지요. 성령이 임하면 나라는 내 자리가 두루루 다 찢어져요. 갈기갈기 다 찢어져요. 그래서 뭐든지 내 뜻대로 안되면 성령이 임한 줄 아시기 바랍니다. 뭐든지 내 뜻대로 안돼요. 니 주인이 따로 있다는 거예요.

주인이 나로 하여금 예수님처럼 살게 하기 때문에 바깥으로 떨어져 나가는 속옷이나 바지는 뭐냐 하면, 어떻게 하면 나는 주인공이 될까, 어떻게 하면 이 시대에 영웅이 될까, 이런 것들이 완전히 헝겊조각 넝마처럼 다 찢습니다. “영웅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래서 하나님 뜻은 이거에요. 제가 글에 댓글을 남겼지만, 이 땅에서 도시 한복판에 주차하고 싶어요. 어떤 주차자리에 주차하고 싶어요. 왜냐 하면, 그게 누구 터입니까? 그거는 내 자리입니다. 주차 잘했다고 하는 순간 어느 날 성령이 오셔서 밤중에 견인해 가지고 폐차장에 집어넣어버리는 거예요. 그 폐차장이 십자가에요. 폐차장에서 너를 다시 발견하는 겁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 예수님 믿었으니까 그만 됐습니다. 이제는 건드리지 마세요. 조용하게 살겠습니다. 하고 있는데 조용하긴 어딜 질질 끌어가지고 십자가에 완전히 폐차 만들어버리지요. 폐차의 특징은 어느 게 엔진인지 어느 게 자동차인지 구분이 안 된다는 거예요. 온통 뒤죽박죽이 돼버려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성령 받고 살아가게 되면, 청소를 해놔도 안 한 거 같기도 하고 뒤죽박죽이라, 애들 양말은 어디다 놨더라, 내복을 어디다 개놨더라, 엉망진창이에요. 매일 복음만 생각한다고. 다른 건 생각도 안나. 다 잊어버려요. 깔끔하게 살림 살려하면 성령이 가만두질 않아요. 깔끔하게 청소해놓으면 그 청소자리가 뭐가 됩니까? 나의 터가 되기 때문에. 남이 오거나 동에서 오기나 해봐라, 동이고 뭐고 아무도 못 들어와. 딱 요건 내 터니까.

그래서 20대 청년들이나 처녀들이 제일 그리워하는 것이 바로 터 확보, 그래서 30대 초반에는 총각들이 빨리 전세라도 마련해가지고 터를 마련해서 여자를 모셔오려 하는데 이건 아파트라도 있어야 여자를 모셔오던지 장가를 들던지 하지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 총각들이 아무리 무대포가 아닌 이상은 여자라도 데려오려면 같이 살 수 있는 방이라도 있어야 될 거 아닙니까? 그거 마련하는데 20대 후반부터 밤 잔업까지 해가면서 죽자고 돈 버는 거예요. 그리고 심지어는 여자도 마찬가지에요.

남자하고 결혼하는 게 아니고 남자와 결혼한 번 해보고 이거거든요. 결혼이 아니라니까요. 한 번 해보고. 해보고 잘해주면 살 거고 두 발을 다 딛지를 않아요. 한 발은 들여놓고 다른 한 발은 빼놓고. 또 돌싱이 인기 있다네. 여자들한테는. 엄마 같고 누나 같고 총각들한테는 인기 있다네. 노총각들이 돌싱을 그렇게 좋아한다네요. 해보고 빼려고. 시대가 참 이래요. 전부 다 내 자리 확보입니다.

그래서 이 내 자리 확보 이것을 인간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을 가나안 땅을 내 자리 확보 차원에서 했는데, 일단 약속의 땅을 주니까 그 다음부터는 여호와하고 잡동사니가 된 거예요. 자기 몸이 애굽을 기억하니까 애굽적인 종교, 자기가 애굽에 있을 때 했던 그 종교를 그대로 가지고 왔는데 그 종교 중에서 아주 우수한 종교가 뭐냐, 주변에 있는 강대국들이 누리고 있는 종교입니다.

그러니 그 종교에 대해서 부러워하고 그걸 흠모하고 그걸 외교적인 정책으로 해가지고 서로 교류하고 하나님은 이제 하나의 귀찮은 형식이고 그저 세상과 물들고 큰 것, 잘 된 것, 높은 것, 이런 것들과 결탁해서 세상처럼 한 번 살아보겠다고 나설 때, 그것이 바로 애굽적인 요소를 데리고 나온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계속 어린양으로 계시고.

인간의 속성이 또 잘 드러난 것이 뭐냐 하면,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바벨탑이에요. 바벨탑에 보면 우리 이름을 하늘에 닿게 하자. 우리 몸이 그걸 또 기억해요. 그러니 이름을 하는데 터가 있어야 되고 터를 높이 쌓으면 하늘까지 이어보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들이 신을 찾는 원리는 이렇습니다. 대자연과 자기 사이에 매개체로서 신을 도입합니다. 인간이 신을 좋아하는 게 아니고 인간은 뭐를 좋아하는가 하면, 대자연을 좋아해요. 이 웅장한 모든 것이 다 내 품안에 어서 오라, 세상을 내 맘대로 다루고 싶다. 할 때 맘대로 안 되니까 헬라 신 같으면, 자연을 조각 조각내요. 퀼트처럼 누벼요. 헬라의 신화는 자연을 조각, 조각 조각보처럼 다 꿰매요.  하나, 하나 전담 신을 만들어요.

전담 신을 만들어서 바다의 신은 요 신에게 빌고 곡물의 신은 요 신에게 빌고 그게 바로 가나안 땅의 바알인데, 바알의 담당은 폭풍 또는 곡물, 농사가 잘되는 곡물이 바알신이에요. 여호와는 목축과 관련된 신이라고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신을 전부 주관하지 않고 우리는 목축하는 조상의 신은 여호와고 현지인들이 농사지을 때 동원되는 신은 바알신인 거예요.

그러니까 신이라 하는 것은 애굽에서 나왔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전체를 통괄하는 신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기가 지금 막상 눈앞에 보이는 것에 필요한 신들을 그 때 그 때 채용하는 거예요. 성경에 보면 궁합보는 예수님은 안 계시잖아요. 성경에 예수님이 궁합 보는 거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안 나오니까 교회 다니는 권사가 궁합보려고 하니까 점쟁이 찾아가는 겁니다. 왜, 그게 전공이니까.

예수님은 죄를 용서하는 게 전문이고 결혼 잘 되겠습니까? 하는 것은 그 쪽 중심이고 그리고 또 자손 잘되는 것은 제사중심이기 때문에 이건 조상에게 제사지내야 되고 그러니 천주교나 기독교에서는 그게 너무 찢어지니까 교회 식으로 통합하면 안 되겠나 해서 추도예배라는 것을 만들어가지고 조상에게 비는 사람은 추도예배로 대체하고 또 궁합보는 것은 상담하는 목사한테 찾아가가지고 대체하려고 하고 이런 식으로 뭐든지 기독교 성경 말씀 붙이면 다 기독교 되는 줄 알고 그런 식으로 한 것이 바로 옛날 가나안 땅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렇게 한 거예요.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 봅시다.

하나님의 이름이 애굽에서 나왔다. 나올 때 하나님의 이름이 어린양으로 나왔는데 누구와 동반했느냐 하면, 약속의 백성인 이스라엘과 함께 동반해서 나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가 구원받았다고 여겼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애굽을 아예 통째로 어깨에 메고 하나님 앞에서의 진정한 애굽의 정체가 무엇이냐를 보여주는 역할을 하면서 약속의 땅에서 살다가 결국은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서 멸망당하고 전 세계에다 유골을 뿌리듯이 전 세계에게 다 뿌려놓은 거예요.

유대인들이 이렇게 멸망했다는 것을 사탕 뿌리듯이 뿌리는 거예요. 전 세계에 유대인들을 뿌려놨다는 말은 전 세계 사람들이 뭘 압니까? 여호와의 백성들이 여호와에 의해서 전부다 추방되었다는 사실을 전 세계 사람들이 알게 되겠지요. 그들이 모여 봤자 가짜니까.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지금까지 강의한 거 정리해 보면, 이미 구원은 하나님께서 이미 구원을 알고 있지요. 갖고 있지요. 이스라엘만 몰랐을 뿐이죠. 그런데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흩어짐으로서 진짜 주의 이름만 구원받는다는 사실, 그리스도 몸만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가 있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그 원리를 신약까지 한 번 가지고 와 봅시다.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이니까 잘 들어보세요. 새 하늘과 새 땅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언제 온다 했느냐 하면, 예수님 재림할 때 새 하늘과 새 땅이 온다고 알고 있지요. 요한계시록 21장에. 그 때 하늘에서 신부가 내려오지요. 보통 예식장에서 신부가 2층에서 내려오는 게 있어요. 신부가 단장해서 2층에서 내려와요. 하여튼 호돌갑을 떨어요. 하여튼 너무 까부는 것도 뭐해요. 여러분들 빙판길에서 제발 까불지 마세요. 빙판길에는 까부는 게 아닙니다. 대통령이라도 누구라도 빙판길에서는 소용없어요. 대통령이니까 안 넘어지겠지. 이런 거 없어요. 참으로 대자연은 점잖아요. 사람의 외모에 대해서 절대로 봐주질 않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위에서 내려오게 돼있는데 저는 이렇게 봅니다. 묵시적으로 봐가지고 이미 예수님 오실 때 그 안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미 있다고 간주하고 오늘 성경을 보자는 겁니다. 봐버리면 이 자리가 애굽같은 어두운 세계라 하면 예수님이 오실 때, 우리는 예수님이 땅에 오셨다. 이리 하잖아요. 그러지 말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딛고 오셨다고 보자 이 말이죠.

그러니까 새 하늘과 새 땅이 예수님이 올라 갈 때 구름타고 올라가지요. 신천지에서는 구름 타고 올라간 것이 무슨 뜻인지 아냐, 이리 말해요. 그런 것 가지고. 오직 구원파들이 “당신은 몇 월 몇 시에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그것 가지고 따지는 것처럼. “구름의 진정한 의미를 아십니까?” “실제로 구름타고 온 줄 아십니까?” 이리 하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은 아이고, 새로운 게 있는가 보다. 하게 하려는 기라.

구름이라 하는 것은 이 지상과 주님의 세계의 층을 나누는 가리게 역할을 해요. 땅에 있는 사람은 구름 위를 볼 수가 없어요. 쳐다보게 되면 천사가 와서 “어딜 쳐다봐. 왜 쳐다 봐. 올라가신 대로 내려오는데. 쳐다본다고 니가 그 나라 가는 줄 알아?” 현재 인간들이 인간으로 그냥 사는 게 아니잖아요. 옛 하늘과 옛 땅의 주변에 둘둘 감고 살아가고 있어요. 현재 우리가.

우리가 생각하는 게 전부 다 시간과 공간 이 자체가 옛 시간과 옛 공간 전부 다 그런 겁니다. 옛 하늘과 옛 땅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거예요. 시간은 어디서 생깁니까? 시간은 별과 달과 그런 것들과 생겨요. 별과 달이라 하는 것은, 1시간은 60분이죠. 초는 60초지요. 60으로 나눈 것이 수메르왕국 BC2300년경에 현재 이라크 나라에 있었던 수메르 왕국이 처음으로 60을 나눈 거예요. 왜 나눴는가, 농사짓기 편해서 하는 거예요.

농사짓기나 혹은 어부들이 밀물 썰물을 잘 조정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예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대자연과 인간 사이에 합리적인 질서를 부여하면서 종교도 생기고 신도 생기고 문명도 생기고 우리는 그렇게 했던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문화와 문명 속에 푹~ 젖어 사는 겁니다.

우리 몸을 한약 달이듯이 짜보면 물이 줄줄 떨어지면서 전부 다 문화와 문명이 우리의 이 세속적인 문명이 줄줄 다 떨어져요. 그러니까 그 말은 항상 우리는 옛 하늘과 옛 땅에 둘둘 쌓여서 시간마저도 하늘의 별과 달의 움직임이라면 공간도 시간도 우리는 거기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 인간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주님을 알아본다는 것은 이리해야 돼요. 거기서 벗어난 적이 있을 때는 우리가 아, 옛 하늘과 옛 땅이라 생각했는데 벗어난 적도 없는 인간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생각한다는 것은 기껏해야 옛 하늘과 옛 땅보다 약간 더 좋은 것, 더 멋있는 것, 이쪽에서는 잔디밭이 죽어 가는데  그 하늘나라에는 잔디밭이 파랗게 있는 것. 이쪽에서는 분수가 한 2시간 켰다가 전기 값 아깝다고 끄는데 거기는 늘 분수가 있는 곳.

그리고 불교의 극락이나 이슬람교의 낙원 같은 곳은 귀에 의하면 천국에 가면 여자가 그리 많데요. 여자가 많더라도 뚱뚱한 여자, 못생긴 여자 말고 눈이 주저앉은 여자 이런 여자 말고, 거기서 말하는 여자라 하는 것은 일단 못생긴 여자는 제외하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못생긴 여자라 하면 그건 지옥이죠. 안 되지요. 그 꼬라지 또 봅니까? 만약에 천국 가서 못생긴 여자, 아주 싫은 여자를 만났는데 가만히 보니 자세히 보니 자기 부인이에요. 아하, 이거 잘못 왔구나! 왜냐 하면, 남자들이 천국 가는 것은 새로운 여자 만날 수 있는 희망 때문에 그런 거예요. 갈아 치우는 것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모든 보석이 있잖아요. 이 용어가 기존에 있는 옛 하늘과 옛 땅에 있는 용어들을 가지고 저 쪽을 묘사한 거예요. 그러니까 실제 저 쪽하고 달라요. 다른데 기껏 표현하자면 그것 밖에 표현 못해요. 이게 언어의 한계에요. 철자 언어라는 자체는 의미가 없어요. 의미는 없는데 이걸 하나, 하나 주워 모으면 거기서 의미의 집합이 되거든요.

그 주워 모을 때 그 의미를 어디서 주워 모으겠습니까? 기존의 쓰임새, 옛 하늘과 옛 땅에서 쓰였던 그 의미를 뚝딱 뚝딱 떼어가지고 타일처럼 갔다가 발라 놓으면 그 타일의 모든 모양새가 천국이다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전부 다 옛 하늘과 옛 땅에 있던 그런 일들, 사건들, 사항들, 그런 것들을 조립하고 만들어 놓은 모아 놓은 그거다 말이지요.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거.

그러니 예수님도 표현하실 때 사도바울이 계시자체가 언어니까 언어의 한계가 있어요. 그리고 사도바울이 말한 고린도후서12장에 보면, 언어가 없어요. 뭐라고 표현할 말이 없네. 삼층천을 표현하는데 묘사하는데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어떻게 묘사할 단어가 없다는 거예요. 왜, 기존 단어는 이 세상 가게에서 온 물건이거든요. 이쪽이 아니다 말이지요.

그래서 그것은 뭐냐, 그럼 새 하늘과 새 땅이 어디 있느냐, 그럴 때는 우리도 뭘 하느냐 하면 욥의 식처럼 당하지요. 바로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는 거예요. 그냥 죽었다. 또는 기껏 이야기한 것이 이사야가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라는 식으로 천국의 그 영광을 묘사할 뿐이죠. 천국을 봤다. 헉! 또는 두 자로 하면 허걱! 또는 헐! 으악! 이사야처럼 화로다, 내가 망하게 되었구나!

그러면 이 천국을 주께서 구원받은 사람은 다 보여주느냐, 그걸 보여주는 게 아니고 로마서에 보면 누가 너를 데리고 천국까지 올라오게 하시느냐, 예수님이 어디 엘리베이터도 아니고요, 하늘에 올라가게 할 수 있느냐, 누가 지옥을 데려가게 하겠느냐, 니 눈앞에 있는 십자가 피, 그 피를 통해서 우리는 허걱! 내가 폐차란 말입니까?  “그래, 폐차였어.” 예수님이 죽었으니까 폐차 아닙니까? 예수님이 폐차해서 죽었잖아요.

그러니 예수님이 폐차란 말은 누가 곧 폐차다? 내가 바로 폐차다 말이지요. 특히 전목사님은 매일 같이 느끼는 거예요. 왜, 고물이니까. 흑, 내가 고물이란 말입니까? Kg에 32원 받는 고물이지만, 이것은 값도 안 나가는 아무도 누가 보아서 누가 믿었으리요, 누가 돌아 보리요,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누가 믿으리요. 쓰레기 중에 쓰레기로 취급받는 주님. 선지자도 그렇게 대우 받았고 모든 성도도 그렇게 대우받았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재벌 같으면 더 많은 사람이 왔을 거예요. 그러나 사도 베드로 있는 교회에 돈 있는 사람도 가면 죽어 나오더라, 라는 소문이 들어버리면 어떻게 되겠어요? 아나니아, 삽비라 막대한 헌금 내놓고 둘 다 죽고. 베드로는 완전히 사람 죽여요. 완전히 오로라 공주도 아니고. 무조건 등장했다하면 죽여 버리고. 개까지 죽어요.

그러니 이 히브리서 대목을 할 때는 주님만 생각하지 말고 새 하늘과 새 땅과 함께 내려와 놓고 누가 이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존재냐, 그렇다면 정답은 나왔지요. 옛 하늘과 옛 땅이 지긋지긋한 사람, 그만 살고 싶은 사람, 세상이 좋다고 프라다, 구찌 그거 좋다고 나 더 이상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하는 그 사람들 꼴 보기 싫은 사람들, 그런 것들이 하나의 이 세상의 성공이 영광스럽고 영웅 되는 것이 목표가 된 이 세상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없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린도후서6장10절 말씀처럼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나는 것은 어떠한가 한 번 보자 이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어야 하느냐, 그건 10분 쉬고 합시다.
 공은주(IP:218.♡.193.179) 13-12-28 22:55 
안양20131213b-히6장9절(구원의 요건)- 이 근호 목사

히브리서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이 되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되느냐, 10절에 보면,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12절에 보면,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여기 12절에 보면 중요한 단어 나오지요.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사람들을 본받는 자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해서 처음에 이야기한 것처럼 성도라 하는 것은 본인이 구원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성도 자체가 새로운 존재로서 구원의 요건이 되게 하신다 말이지요.

구원의 요건이 되게 하시니까 기존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떤 변화가 일어나야 되느냐에 대해서 예수님이 안 보이잖아요. 실제로 예수님이 보인다 해도 문제가 돼요. 예수님이 보여 봤자 유대인들이 본 예수님을 오해한 것처럼 오해하기 마련이에요. 

그러면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려면 옛 하늘과 옛 땅에 대해서는 안 맞고 어디에 맞느냐 하면,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야 딱 맞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면 그 맞는 사람들을 자력으로서는 그렇게 못 만들고 무엇이 그렇게 만들어내느냐 하면, 12절의 말씀처럼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다. 기업이라 하는 것은 부모가 돌아가시기 전에 자식들을 불러놓고 “얘야, 2층 건물은 큰 아들이 하고, 촌에 있는 땅떼기는 둘째 아들이 하고 셋째 아들은 내 빚이나 갚고.” 하면 서럽겠지요. 약속은 상속입니다. 기업이란 말이 어렵기 때문에. 기업하면 현대그룹 이런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에. 상속이라 보면 돼요. 약속을 상속한다. 이리 되는 겁니다.

약속을 상속하게 되면, 약속을 소유할 수 없어요. 다른 것은 소유가 대상이 되지만, 소유하려면 내 것을 모아놓는 창고 같은 내 터가 따로 있어야 되겠지요. 그런데 약속은 소유가 안 되는 이유가 약속이 들어오게 되면 현재 내 것이라는 것이 폭파되어 버립니다. 일종의 인화물질 또는 폭약 물 같은 위험한 거예요. 휘발유 이런 거. 집안에 휘발유 갔다가놓고 잠 잘 오겠다. 가스만 터져도 폭발하는데요.

터질 수밖에 없는 폭탄 같은 것을 품게 될 때, 이것은 아까 말한 주인과 종의 관계가 내가 더 이상 선악과 따먹은 주인이 될 수 없고 나는 그 분의 약속의 종이 되는 겁니다. 그 분이 내 전에 있던 주인의 자리에 그 분이 독차지하게 되는 입장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선악과 따먹은 것이 손해다. 에이~ 괜히 따먹었네. 실수였다. 할 필요 없어요.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옛날 아담을 삭제할 수가 있습니다. 방금 제가 어려운 말을 했어요. 선악과를 안 따먹은 상태에서 생명나무를 따먹어버리면 그 생명나무 따먹은 것이 본인 게 돼요. “나, 따먹었지롱~” 하고 주장할 수 있는 주체 자가 내가 될 수 있어요. 

선악과 따먹은 상태에서 생명나무 와버리면 이게 폭파당해가지고 주님의 소유가 돼버리고 내거라고 따로 챙길 하등의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럼 정리해 봅시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누가 간다? 내 것이 없는 사람. 내 것이 없는데도 내가 있다는 것은 그러면 내가 누구 것이냐, 약속의 것이 되는 겁니다.

약속, 구원의 요건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다루어지고 있다 이렇게 설명하면 제일 적당하지요. 하나님이 이 땅에 약속이 이런 것이고 구원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를 다루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다루어진 사람들은 그 약속 때문에 다른 삶을 살아가는데 거기에 10절 끝에 보면,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 그러니까 예수님을 위하여 또는 예수님의 뜻을 위하여 사랑이니까 이건 양보, 배려 그런 종류겠지요.

“내가 예수 안 믿었으면 너는 죽었어! 예수님 때문에 내가 참는다. 참아.“ 이런 거. 그런 경우에 고린도전서 보면 차라리 니가 사기 당하거든 차라리 속는 것이 더 낫다. 내가 예수만 아니면 니 내가 총 구해서 너는 죽었어! 이런 식으로 하는 거죠. 주님 때문에 자기의 행동하는 것이, 나의 것은 어떤 경우라도 사랑이 아닙니다.

아, 내가 이건 너무 성급하게 이야기했는데. 이미 나의 것이 있으면 나의 것에서 나온 어떤 것이라도 사랑이 될 수가 없어요. 왜냐 하면, 나의 것은 그냥 외부에 주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뒤에 고무줄이 달려가지고 줬는데 결국은 그것이 나의 의미와 가치로 되돌아오게 돼있어요. “내가 너한테 돈 빌려줬지? 그러니까 똑바로 하란 말이야! 앞으로 내가 부탁할 때 니가 잘 들어줘. 알았어? 돈 줬어.” 나의 것이 있으면 이것이 이웃이 되던 남이 되던 심지어 하나님이 돼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예수님 믿어줬잖아요. 안 믿는 사람 많은데 나만 믿었다고요. 그러니까 주님이 나 섭섭하게 하면 안돼요. 알았지요?”이리 된다고요. 완전히 조폭도 아니고 깡패해가지고. 애들 유자식이 상팔자라는 그 프로에 보면 애들보고 나중에 자식을 낳겠느냐, 안 낳겠느냐 질문해보니까 자기는 자식을 낳는 게 낫다는 겁니다. 자식이 있다는 게 낫다는 거예요. 왜냐고 하니까 나중에 나이 많을 때 손 벌일 수 있기 때문에. 자식 없으면 지가 나이 많을 때 손 벌일 수 없잖아, 이리 되는 거고.

무자식이 상팔자라고 하는 애의 주장은 뭐냐, 내가 돈 벌었는데 내가 내 돈 벌어가지고 마음껏 여행 다녀야 되는데 애하나 키우는데 3억이 든다는데 내가 돈벌어가지고 자식한테 주는 것이 아까워서 못 주겠다. 그래서 자식 없는 게 낫다, 이리 나와요.

그러니까 뭡니까? 나의 것이 있는 한 절대로 사랑은 없습니다. 남편을 사랑했어요? 남편이 사랑 받을 짓을 하나 관계없이 이게 내 남편이라고 여긴다면 사랑은 끝났습니다. 내 남편 아닙니다. 어떤 어슴아지, 내 남편 아닙니다. 어떤 머슴아가 아직까지 붙어있지요. 물에 젖은 낙엽이라고 보면 되지요. 문데도 잘 안 떨어져요. 가라해도 가지도 않아요. 바짝 보도블록에 붙어가지고. 물에 젖어서 떼도 안 떨어져요. 자꾸 기어 붙어 와요. 나의 것이 있는 이상 사랑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랑의 은사라 하는 것은 고린도전서13장 유명한 가사 있지요. 김 세환이 부른 유명한 노래있지요.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 세상에 이 사랑하는 사람 나오라고 해요. 없어요. 아무도 없습니다. 손해 볼 짓을 미쳤다고 합니까? 자기 유익을.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랑하게 되면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선물이지요. 은사지요. 은사란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선물입니다. 사랑해서 고구마라도 얻는 게 은사가 아니고 사랑하는 그 자체가 선물이에요.

그러면 헌금해서 복을 받는 게 아니고 헌금하는 그 자체가 복이다 말이지요. 예수 믿어서 어떤 걸 얻는 게 아니고 예수를 안 믿어도 되는데 믿어지는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 때문에 예수님을 믿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믿는 그 자체가 주님의 사랑이죠. 예수님 믿는 그 자체가.

나의 것이 있는 이유가 도로 나의 것으로 다시 회귀하기 때문에 그래요. 부메랑 있잖아요. 던지면 휙 돌아서 자기한테로 다시 오잖아요. 절대로 나에게 나왔는데 도로 나에게 안 돌아와요. 그게 은사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일은 뭐냐 하면, 내 뜻대로 안되는 게 하나님의 일이에요. 기억하세요. 내 뜻대로 안될 때. 분명히 일은 터졌어요. 일은 터졌는데 고구마 터지듯이 터졌는데 분명히 아깝지가 않아요. 왜? 내가 산 고구마가 아니라서. 별로 우리는 아깝지가 않아요. 이게 사랑이 주의 일이니까.

제가 주일날 이런 예를 들었잖아요. 아파트가 폭삭 가라앉았는데 그것이 재미 나. 왜냐 하면, 뭔가 신나는 일이 벌어져야 재미있거든요. 자기 것은 손곱만치도 다치지 않았는데 남은 망할 때. 어떤 아저씨가 공개총살 당할 때 장 성택이 아저씨, 신나는 거예요. 왜, 우리 삼촌, 우리 이모부 아니거든요. 그게 주의 일처럼 느껴지는데 진짜 주의 일이라 하는 것은 주께서 내거 건드릴 때 내가 화나고 일주일동안 왈칵 악성이 터져 나올 때 ‘야, 내가 주의 일을 했다는 게 아니었구나! 내 생각만 하고 있었구나!’들통 나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 밖에 모르는 걸 들통 내는 그것이 주의 일입니다. 이게 주의 일이에요.

“내가 다시 내 것 주장하면 개다.” 이런 욕이 막 저절로 자기 자신이 미워질 때 그게 바로 주의 일입니다. 그런 사람이 옆에 있으면 그 사람은 지금 사랑을 솔솔 받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같이 공유하고 누리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이 우리 주변에 누가 있느냐고 하겠지요.

사도께서는 아주 친절하게도 사도가 친절한 게 아니고 주님이 친절하시 게도 거기에 해당하는 예를 들었습니다. 그 다음에 누구냐 하면, 아브라함이 등장합니다. 야, 아브라함 이야기하려하면 이야기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몇 시간 수 시간 이야기해야 할 건데. 아브라함 이 이야기는 요번 대전수련회에서 창세기할 때 반드시 거쳐야 되겠지요.

아브라함이야기를 하면서 생각해야 할 것은 아브라함은 누구하고 싸우는가 하면, 바로 아브람하고 싸워요. 아브람과 아브라함의 싸움. 아브람은 옛 하늘과 옛 땅에 속한 존재입니다. 이것이 옛 하늘과 옛 땅의 존재가 새 하늘 새 땅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마치 예수님이 구름타고 올라갈 때, 구름을 얼른 집어 밑바닥을 자근, 자근 밟고 주님과 함께 같이 구름 타는 그 정도의 능력이 돼야 아브람에서 아브라함 되는 겁니다.

구름이 어디 헬리콥터입니까? 잡고 올라타게. 불가능하지요? 불가능합니다. 왜냐 하면, 예수님이 구름타고 올라가고 내려오고 하는 그것은 십자가지신 분의 특혜거든요. 십자가지시고 아버지께서 인정해 주신 유일한 아들로서의 주신 특징이고 특혜고 능력이다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아담에 속해서 죄인인 주제에 어디 감히 사흘 만에 부활돼요?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우리는 죽어도 사흘 만에 부활 안 됩니다. 그건 예수님 혼자의 몫이지 예수님 빼놓고는 아무도 그렇게 못해요. 아담이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부활했습니까? 창세기5장보세요. 아담죽고 난 뒤에는 그 아들 셋만 낳았지 아담 당사자가 사흘 만에 부활했습니까?

아브라함 죽고 난 뒤에 이삭이 가만히 기다려보니까 아브라함이 죽고 난 뒤에 무덤이 빈 무덤이 됐어요? 안 되잖아요. 이 땅에 무덤 없는 사람은 두 사람밖에 더 있어요? 에녹하고 엘리야하고. 모세는 무덤을 가져갔겠지요. 누군가. 마귀가 가져갔던지 천사가 들어가긴 했지만. 어쨌든 인간은 예수님이 아닌 이상은 누구나 죽어서 부활되지를 못합니다. 살 수 없어요.

그러면 죽어서 부활되지 못하면 어디 떨어져요? 옛 하늘과 옛 땅에 그대로 돌아가지요. 흙에서 왔으니 그냥 흙으로. 이 땅과 이 하늘이라는 그 범주 내에서 인간은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뭐했습니까? 약속을 했어요. 약속을.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할 때에, 아브라함에게 약속이 주어졌어요. 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이 아브람을 아브람 되게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으로 바꾸었는가 하면, 아브라함 되게 만들었어요.  그러면 약속은 아브라함에게 왔습니까? 안 왔습니까? 왔는데 아브람을 뭐로 변질시켰어요? 아브라함으로 만들었지요.

디즈니랜드에서 만든 만화가 있는데요. 과장되게 한 게 참 많잖아요. 약한 마우스 쥐가 고양이가 쫓아오면 약한 쥐는 잡힐 듯 잡힐 듯하지만, 고양이를 약 올리면서 결국 살아남고 나중에 헤헤거리며 승리자로 남는 거 있잖아요. 고양이가 왔을 때 솥뚜껑으로 막으니까 고양이가 솥뚜껑인 줄 만져보니까 벌건 솥뚜껑 돼가지고 손이 탔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약속이 아브람에게 왔을 때 아브람이 시커멓게 타가지고 아브라함 됐다 이리보시면 돼요. 아브람이란 솥뚜껑이 벌건 아브라함된 거예요. 자기는 계속 아브람 쪽으로 약속을 자기가 간직하고 싶은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보관하거나 저장하거나 할 수 있는 그러한 자기만의 터, 터전, 자리, 그건 일체 용납이 안 됩니다. 이것은 찢어져야 되고 폭파되어야 돼요.

그러면 아브람과 아브라함의 차이가 곧 뭐가 된다? 찾아왔던 약속이라 보면 되겠지요. 그러면 아브람과 아브라함의 차이가 뭐냐 하면, 그것이 제물입니다. 창세기15장8~9절에 보면,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유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하나님의 약속의 증표가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삼년 된 암소와 삼년 된 암염소와 삼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니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이게 뭐냐 하면, 제사할 때 필요한 제물이죠. 요즘 같으면 문어하고 대추하고 문어를 그냥하지 않고 문어를 오려서 모양내서 하고 전 구워놓고 이런 거 시키는 거죠. 홍동백서 해가지고 소주 바쳐서 하고요. 여자들은 뒤에 서서 앞치마 두루고 보고 있고 남자들은 손자나와해서 남자만 하고 밤 12시에 그 짓하고 있고.

제가 아까 보통 세상의 신화라 하는 것은 자연과 인간 사이에 매개로 뭐를 뿌린다 했지요? 신이 들어오지요. 인간은 대자연을 정복하고 싶어요. 정복해서 이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인간이 오야봉 되고 자기 이름을 내고 싶은 거예요. 이걸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제물이야기는 좀 이따 하고요.

자, 종이를 구겨놓아 봅시다. 종이에 이 땅과 하늘, 바다 다 포함되고 여기에 아브라함이 있다 봅시다. 그럼 아브라함은 옛 하늘과 옛 땅에 소속돼 있지요. 그런데 우리가 아는 것은 예수님께서 오실 때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둘둘 감아서 병행해서 주신다고 아까 언급했잖아요.

그러면 아브라함 때도 예수님이 찾아오십니다. 왜, 선지자이기 때문에. 요한복음 8장56절에 보면, 아브라함도 예수님을 보고 기뻐했다 했지요. 자, 새 하늘과 새 땅을 어떤 식으로 주느냐 이 말입니다. 전부 옛 하늘과 옛 땅밖에 없는데. 이거 풀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주님이 찾아오시면 주님만 달랑 오는 게 아니고 분명히 새 하늘과 새 땅과 다른 요소가 들어와야 된다 말이지요. 아브라함이 여기서 양을 잡고 제사를 드립니다. 하늘을 향하여 손을 벌리고 제사를 드립니다. 그렇다면 요 제물이 아브라함이 드린 제물이, 아브라함이 제사 드림과 동시에 아브라함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많아지니까 아브라함이 숱한 자손을 낳더라도 그 자손을 낳을 수 있는 능력은 인간의 능력이 아니고 요 약속의 능력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 때문에 하늘의 별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많으리라, 약속했거든요. 창세기15장5절에 나옵니다.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느냐 하면, 이 제물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그 문제입니다. 이 제물을. 처음에 삼년 된 소부터 해서 그냥 소도 아니고 암소, 삼년 된 암염소, 삼년 된 수양, 이렇게 계급의 단계가 소가 제일 높아요. 그 다음 높은 게 염소고, 그 다음 낮은 게 양 이거든요. 양인데 제일 높은 첫 번째, 두 번째는 수컷이 아니고 암소, 암염소였다가 세 번째 와서 수양이 되는 겁니다. 이런 제물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를 바쳐라 되어있는데 물론 이 제물을 쪼개는 거예요. 지금 이걸 설명하려고 하는 겁니다.

상당히 설명할 때 컴컴해 보이는데, 아까 말한 ‘구원의 요건’ 기억하십니까? 구원의 요건. 구원의 요건 할 때 고구마 찌는 거 생각했지요. 고구마를 솥에다가 집어넣고 그 다음에 압력가하고 부르짖고 할 때 주인이 종 되고, 종이 됐는데 그게 주인인 줄 모르고 학대하니까 학대했다는 그것을 근거로 삼아서 소위 종이 주인 노릇하는 그 인간을 죄앙을 내리고 거기에 있던 진짜 주인 되신 어린양을 주인으로 제대로 보여주는 그런 역할을 한다 했지요.

아브람은 아담에 속했습니다. 죄인이죠. 죄인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임해요. 그러면 아브람은 옛 하늘과 옛 땅 속에 시간과 공간이 있기 때문에 아브람은 뭘 기대하는가 하면, 아브람은 그대로 종속된 채 내가 어떻게 잘 될 가를 생각해요. “야, 내 자식이 많아지고 야, 내 나라가 잘 될 거야.” 항상 나, 그렇다면 제물을 받아도 이 제물은 현재에 있는 나가 잘되기 위해서 동원된 축복의 제물일거야. 라고 하는데 오해입니다. 그건 오해에요.

자기가 제물을 간직할 수 있는 자리나 터는 없어요. 제물에 의해서 아브람의 세계는 깨어져야 합니다. 이것은 죽어야 돼요. 같이 죽어야 돼요. 제물이 불에 탈 때 같이 아브람도 사라지고 그 탄 제물에 의해서 다시 태어난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아브람의 이름이 아니고 오실 메시아의 이름이죠. 오실 메시아의 이름이에요. 이름이라는 것은 기능으로 생각한다면 제일 알기 쉬워요. 아브라함처럼 기능하시는 분이 장차 오실 것입니다. 야곱의 이름이 바뀌지요. 이스라엘로 바뀌었는데.

야곱의 이름은 사기꾼, 뺏는 자, 그래서 형도 동생이 자기를 속일 때, “아버지, 보세요. 동생이 동생 이름값 하잖아요. 저번에도 뺏더니 요번에도 뺏었습니다. 억울합니다. 내 것을 동생이 뺏었는데 아버지 뭐하십니까?  이게 아버지의 정의로움 입니까? 이게 하나님께 속한 아버지라 할 수 있어요?”따질만하지요.

여기서 여러분들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이 주신 땅이다. 그리하는 인간들이 도둑놈들입니까? 원주민이 도둑놈입니까? 누가 도둑놈입니까? 들어가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도둑놈이죠. 그런데 하나님은 누구 편이 됩니까? 도둑놈편입니다.

아니, 살고 있는 주인에게 나오라 하면 나쁜 사람이죠. 죽자고 싸울 수밖에 없지요. 당연히.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원래 집주인을 추방해버리고 엉뚱한 사람으로 메우잖아요. 왜 그렇게 하십니까? 그게 바로 구원 요건의 약속의 표시입니다. 그래서 장차 오실 예수님은 마치 도둑으로 와가지고 집주인을 묶어놓고 세간을 주인의 허락도 없이 그냥가지고 와서 아주 질 나쁜 도둑놈같이 그렇게 하는 거죠. 왜냐 하면 그 이야기할 때 바리새인들이 니가 마귀의 고수라고 이야기했기 때문에 “그래, 나 질 나빠. 질 나쁜 내가 한 번 이야기해 볼까?” 해가지고 담 넘어 들어가서 묶어놓고 도둑질하는데 이게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누가 나빠요? 누가 정의롭습니까? 예수는 안 믿고 복음도 모르고 예수도 안 믿지만, 가만히 보게 되면 시장 통에 가게 되면 참 어질게 생긴 우리 박 집사님처럼 어질게 생기고 참 곱게 생긴 분이 호호 불어가면서 나물 하나 더 팔겠다고 해보면 ‘아이고, 저 사람 지옥가면 참 얼마나 억울하겠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 분이 뭐가 잘못됐어요? 그래서 돈 벌어오면 술 먹는 남편이 돈 줘 소리를 버럭 지르고 소주한 병 먹고 마누라나 때리고 분명히 그럴 건데. 그러면서도 자식 3명 내가 키울 거야. 이렇고 있는데 그게 인간시대에 나올만한 착한 사람이 뭐가 잘못돼서 지옥 갑니까? 지옥은요, 나빠서 가는 데가 아니고 다 가요. 다 가.

다 가는데, 안 간 게 이상해. 이걸 이야기하고 싶어요. 안 간 게 이상하다니까요. 내보고 누가 지옥가라고 하면, OK. 그러려무나. 그랬어? 응 알았어. 이런 식으로. 그렇게 넘겨야 돼요. 바른 소리하기 때문에. “지옥 갈 이단아!” 하면 “응, 옛날부터 이단이었어. 아담부터 이단이었어.”

아브라함이 제물을 바칩니다. 바치게 되면 여기서 아브라함과 제물은 하나가 되면서 이게 죽어요. 죽고 이 제물을 하나님께서 관통해 버립니다. 관통해 버리면 이 제물에 실체, 찐빵 같으면 앙꼬 같은 것. 밀가루 껍데기 먹는다고 찐빵을 먹는 게 아니지요. 앙꼬를 먹어야 제 맛이 나거든요. 제물의 중앙을 보여주기 위해서 둘 다 쪼개서 서로 마주보게 했어요. 밤이 되었습니다. 왠 횃불이 나타나서 그 가운데를 지나갑니다. 하나님께서 이 제물에 실체가 된 동시에 이 제물에 담긴 실체가 곧 앞으로 새로운 아브라함의 이어진 역사로서 전개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아브라함은 약속한테 납치당한 셈이 되는 거예요. 인질로 팔린 겁니다. 빼도 박도 못해요. 하나님은 자기 자손을 만들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데리고 아브라함 몸을 통해서 자기 자손들을 배태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들이 공수부대에 비행기 있잖아요. 공수부대에서 낙하산을 떨어뜨릴 때 밑에서 보면 어떻습니까? 꼭 거북이 알 낳는 것 같지요. 하나씩 뚜두둑 떨어지잖아요. 아브라함역사가 죽~ 이스라엘로 바뀌면서 교회로 바뀌면서 뭔가 계속 떨어지는 게 있어요. 그게 아브라함의 백성들이 떨어진다고 생각해도 되고 하나님의 약속이 떨어진다고 생각해도 되고 하나님의 제사 제물이 떨어진다고 봐도 되고 그 제물들의 공통점이 있어요.

전부 다 3년 된 암소, 3년 된 암염소, 3년 된 수양의 본질을 품고 낙하산 하나, 가슴에 품고 캥거루 엄마가 캥거루 하나씩 품었듯이 진짜 주의 약속을 품고 낙하 강하! 해서 이 땅에서 떨어진 거예요.

다시 한 번 해 봅시다. 주께서 이렇게 옥토에 씨앗 뿌리듯이 뿌리는 거예요. 뿌리게 되면 거기에 줄음 지어 접혔던 약속이 스스로 전부 다 성도로서 약속받은 아브라함의 부분들, 아브라함의 모자이크 된 타일조각들이 하나씩 펼쳐지는 겁니다.

미국영화의 터미네이터 보면, 처음에 외계에서 온 사람들이 옷도 안 입고 턱 앉아 있지요. 처음 장면에. 어느 술집에 가가지고 기계니까 죽~ 보니까 저, 치수는 내 치수와 맞다 하면 패서 옷 다 벗기고 안경도 쓰고 철커덕 철커덕 돌아다니잖아요. 처음부터 외계인이 와서 한국 사람들 옷을 입듯이 주께서 말씀이 어떻게 된다? 말씀이 육신을 입듯이 성도도 예수님이 육신을 입는 것과 똑같이 성도도 아담의 껍데기를 입고 안에는 약속이 차지하고 약속된 그 모양새로서 새로운 피조물로서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 그게 바로 아브람이 아니고 아브라함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 뒤에 봅시다. 히브리서6장 13~15절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이미 약속 속에 아브라함이 포함이 돼버렸어요.

아브라함이란 존재 자체가 이미 약속이 내장돼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성도가 이 아브라함 약속과 관련된 사람이 아브라함으로 이게 모델이 됐다면 오늘날 성도는 어떻습니까? 성도도 이 아브라함과 똑같은 팔자와 운명을 가지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특별한 것은 자기보다 더 큰 자가 없다 했지요.

그러니까 우리에게 약속을 하신 그 분은 우리보다도 더 크신 분이에요. 갓난애가 엄마 품속에 있잖아요. 엄마 품속에 몇 년 동안 있어요? 한 10년 있습니까? 한 2~3년 있다가 나오잖아요. 이제는 엄마 품에 있지 않지요. 왜 나옵니까? 현실은 그보다 크니까.

그래서 우리 성도된 사람은 옛 하늘과 옛 땅에만 이게 전부인 줄 알고 여기서 복 받으면 되는 줄 알았다가 어느 날 옛 하늘과 옛 땅보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나는 어떤 자세로 살아가게 되는가, 그렇게 될 때 그건 약속이 그만큼 키워 준 거예요. 반드시 그렇게 하나님의 맹세대로 할 겁니다.

항상 우리가 생각한 이상대로 큰 분이 계시고 그 큰 분이 내가 생각하는 작은 내 인생을 관리하고 그렇게 조립하고 구성한 거예요. 남편이 죽고 울고불고 해도 큰 분이 있어 보게 되면 나중에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미 들어앉아가지고 이렇게 보시게 되면, 그것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한 거예요. 그렇게 해야만 집사님이 구원받는 거예요.

하나님은 구원받기 적합하도록 내일의 습도 날씨까지 딱 적합하게 항상 모든 것이 구원받기에 약속 증거 하는데 합당하게 그렇게 돼야만 우리가 더 이상 옛 하늘과 옛 땅에 마음 붙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만드신 거예요. 집에 가서 남편 잘해주세요. 고맙다고 하세요. 당신 아니었으면 내가 구원 못 받았다고 이렇게 해주면 갑자기 왠 아부를.  아부가 아니고 진실 된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 그것은 어렵다고 보지 말고 큰 분에서 보게 되면 딱 맞춤이라. 세상에 그렇게 맞추는 집 없어요. 딱 그래야 우리가 십자가만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거지, 만약에 그런 일이 없었으면 우리는 십자가 말고 세상 영광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푹 빠져가지고 페로가모나 구찌나 돌아다니면서 그걸 부러워서 그런데 백화점에 사치하는 아줌마도 고민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신상품이 나오고 분명히 내가 산 것보다 더 좋은 게 있을 때 자기는 참을 수가 없습니다. 뭘 팔아가지고 저걸 살까? TV에 나오는 쇼핑에 중독된 아줌마 있잖아요. 집에 풀지도 않은 것이 있는데 또 들여다보고 있어요. 5분 만에 완판! 하면 또 사려고 하지요.

이 말은 맹세가 큽니까? 우리가 큽니까? 우리보다 뭐가 더 큽니까? 맹세가 더 커요. 우리가 중요해요? 맹세가 중요해요? 맹세가 중요한 겁니다. 18절에 보면,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맹세는 거짓말할 수 없는 두 가지가 있다.

거짓말할 수 없는 두 가지라 했는데, 여기에 두 가지가 뭡니까? 약속과 반드시 지킨다는 그것이 증거입니다. 하나는 약속을 줬다는 사실과 지킨다는 사실, “약속? 나 안 봤는데. 약속 몇 시에 던졌는데? 남산 위에? 나는 약속 못 봤어. 나보고 약속 하지 마. 나는 약속 못 봤어.” 라고 나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아브라함이 약속을 받았는데 약속 못 받았다고 하게 되면 어떻게 해요? “니가 얼마 전에 나한테 제사 드렸잖아.” “아! 제사, 제물.” 그게 장차 예수님이거든요. 높은, 높은 분 그러니까 암소, 암염소, 수양, 높은 자리에서 이게 뭐냐, 수소, 수 염소, 수양이 아니고 암이지요. 암컷. 암컷이 뭔가 누락된 거예요.  빠져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암소, 암염소, 수양 이것이 바로 아브람을 대신하는 아브라함이 되는 거예요. 또 예수님이 되고. 빠져있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가 되고.

그게 암소, 암 염소 있다가 구체화 된 것이 수양이니까 수양은 바로 예수님의 어린양이 아들이니까, 예수님이 아들이니까 그러니까 나중에 창세기에는 여자의 후손이라고 되어있지만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여자가 낳은 아들, 아들을 강조하며 써놨어요. 이게 수양이니까 이런 역사가 있기 위해서 묵시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게 되는 겁니다. 어쨌든 이게 약속이에요.

그럼 아브라함이 제사를 드릴 때마다 뭘 생각합니까? 약속을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오늘날 우리에게 증거가 뭐냐, 갈라디아서 3장1절에 사도바울이 하는 것처럼 십자가가 니 눈앞에 보이는데 무슨 또 언제 약속을 받았느냐, 나는 본 적 없다, 어떤 사람은 기도해서 부자 됐다는 약속이 있는데 나는 집에 돈 한 푼도 없는데 무슨 내가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내가 어떻게 확정하느냐하는데 사도바울 같으면 뭐라고 했습니까?

“이 바보야. 십자가를 봐라. 십자가를. 십자가가 코앞에 있는데 누가 돈 현찰이 약속이다. 애가 잘되는 게 축복이다. 누가 그렇게 사기를 치더냐.” 그런데 약속은요, 반드시 약속을 주게 되면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들어야지 그런 돈이나 공부 잘하고 고부간에 갈등해소하고 병이 낫고 이런 거 줘버리면 자기는 잘난 사람이 돼버려요. 자기가 죄인이 안 된다니까요.

자기가 죄인이 안 되면 자기 자신에게 십자가가 증거 되겠어요? 잘남이 증거 되겠습니까? 자기 잘남이 증거 되겠지요. 그것은 약속 아닙니다. 세상 교회에서 축복을 이야기하는 것은 왜 엉터리냐 하면, 그게 기복신앙이라서 그런 게 아니고 십자가를 가리기 때문에 십자가를 대체하기 때문에 그게 문제에요. 그게 마귀들이 하는 짓이라니까요. 십자가를 대체해요.

그런 목사들이 하는 이야기가 있지요. 아니 십자가 이야기로 어느 놈이 교회 오느냐 이 말이지요. 그럼 저는 그러지요. 교회 안와야 그게 교회가 된다는 거예요. 왜, 성경에 교회라는 말이 있잖아요. 성경에 교회라는 말이 있는데 그 성경에 말이 있다면 뭐든지 성경 말씀대로 되지요.

여기 거짓말 안한다는 게 뭐예요? 약속을 줘놓고 줬다는 게 거짓말 안하는 것이고 약속대로 반드시 변치 않고 이루어진다는 것이 또 하나의 거짓말 안 할 거잖아요. 그러니까 성경말씀에 교회 나왔잖아요. 일단 교회 있는 거 맞고 교회는 교회답게 나타나지요. 주님이 그렇게 하시잖아요. 그럼 교회 있잖아요. 뭐 교회 안 되기는 무슨?  그럼 지금 무슨 교회를 생각하고 있는데? 무슨 교회를 생각해서 교회가 안 된데요.

십자가를 증거 해서 사람 안 오면 그것은 안 와야 될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옛 하늘과 옛 땅에서 사는 사람이겠지만, 새 하늘 새 땅에는 못 들어갈 사람이에요. 그럼 못 들어갈 사람은 안 들어와야 되지 못 들어갈 사람이 안 온다고 걱정하는 그 마음은 무슨 심보예요.

일류호텔에서 파티해 보세요. 들러리해서 근처에 가면 “뭔데요?” 하면 “파티에 가려고요.” “초청장 봅시다.” “없는데요.” “저리 가!” 십자가 초청장 없으면 참석을 못한다니까요. 주께서 주신 증거가 뭐냐, 십자가에요.

부자가 아니고 부자는 지옥가지요. 부자가 지옥 간다는 것이 틀린 말이 아닌 것이 부자가 천당 간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 속에 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것은 어쨌든 못 들어간다는 뜻이거든요. 주의 뜻이.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이 반드시 지킨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아브라함은 뭐든지 자기 뜻대로 되는 게 없어야 돼요. 그러면 아브라함은 자기 뜻대로 안되니까 뭐만 쳐다보겠어요? “아이고, 약속만 쳐다봐야지.” 하는 것처럼 오늘날 우리가 우리 뜻대로 안될 때 “아이고, 이거 해도 안 되고 저거 해도 안 되고 에이 씨~ 십자가만 봐야지.” “고래. 맞다. 그거야.” 고거예요. 고거.

그래서 하늘나라 천사가 보이스피싱 이라면 “고객님, 십자가 믿었습니까?” 이래 가지고 믿겠다하면 그것은 쏙! 빼는 거예요. 다른 거 안 해요. 십자가 믿으십니까? 그거만 한다고요. 십자가 믿으십니까?

그러면 교회가 그거만 증거 해야지요. 처음부터 새 하늘 새 땅에 못 들어갈 사람이라면 슬슬 빠지겠지요. 빠지면서 그냥 안 빠지겠지요. “목사, 니가 나가라.” 해서 목사 지가 나가겠지요. 나갈 때 한 푼도 못 받고 나가겠지요.

하나님의 약속이 사람으로 하여금 절대로 자기 뜻대로 안됩니다. 왜냐 하면, 나의 맹세보다도 누구 맹세가 더 세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우리 주님의 맹세가 더 세기 때문에 절대로 우리한테 양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복음 전하는 목사한테는 복음 모르는 사모를 붙여놨어요. 복음 모르는 사모가 이해하는 복음은 반드시 돈이 될 때, 복음 지나고 돈이 들어올 때, 비로소 ‘아! 복음이 좋구나.‘ 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지금 집사님이 웃으시는데 만약에 남편이 지금에 와서 정신이 돌아와 가지고 신학 한다 해가지고 복음만 전해보세요. 환장합니다. 이게 꿈이냐, 생시냐, 이제 나는 죽었다. 돈을 벌어줘야 내가 복음을 아는데, 돈 안 되는 복음을 전해버리면 그러면 나는 애 새끼 둘하고 우이 살꼬. 동네 통장해서 삽니까? 알아서 다 해주신다고요? 그 이야기를 복음 아는 사모들에게 해보세요. 욕 얻어먹습니다. 그럴 줄 알고 10년 기다리고 20년 기다렸더니만 결국은 낭패. 결국은 나중에 안 되지요. 

제가 어느 강의에서 그런 강의했잖아요. 아, 시민대학에서 했어요. 하나님께서 참새를 친히 기르시잖아요. 하나님께서 친히 들풀을 기르시잖아요. 들풀이 갖고 있는 종교가 뭐죠? 참새가 무슨 종교 믿었습니까? 신천지 믿었습니까? 친히 길러준다면 뭐가 필요 없어요? 종교가 필요 있어요? 없어요? 종교 필요 없잖아요. 그런데 왜 기독교가 필요해요. 이것은 뭔가 잘못된 거예요. 그러니까 기독교를 믿습니다, 하는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그냥 참새는 늘 길러주는 그 분을 감사하면 됐지, 왜 종교를 가지고 종교가 매개가 돼가지고 하나님을 거기다가 섬기고 만나고 왜 그래야 되느냐 이 말이죠. 그게 뭐냐 하면, 참새로 만족치 못하기 때문에 그래요. 다른 사람은 참새가 아니거든요.

참새같이 빌어먹고 사는 그것은 너무 처참하고 이제는 번뜩 솔로몬처럼 살고 싶은데 주께서는 솔로몬이 입은 옷이 백합보다 못하다 했잖아요. 그러니까 솔로몬 부인이 갖고 있던 페로가모 그 가방이 백합의 줄기보다 못하다 말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백합줄기 뜯어가지고 들고 다니면 이건 바보고.

그러니까 제가 다시 이야기할게요. 아브라함이 받았던 맹세가 우리가 성경 보면 ‘아브라함 좋겠다. 좋겠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니가 한 번 맹세 받아봐. 니 인생 조졌어. 이제는.” “아이고, 목사님 사모님은 좋겠다. 매일 복음 듣고.” “니가 한 번 사모해봐. 돈도 되지 않는 거 가지고.” 피아노 레슨해서 애 키웠는데. 어디 복음 전해서 키운 줄 아나. 피아노 레슨해서 시집보내고 곱빼기 고생가지고 했는데. 그렇게 하지요.

그러니까 그 뒤에 다음시간에 할 거 그 만큼 신앙의 선배들이 이건 고생했다 이야기할 수도 없고요, 생각도 못할 인생을 살았다, 이렇게 봤지요. 고생한다 하면 미리 고생이 예상되잖아요. 이리 빌어먹고 저리 빌어먹고 이게 아니고 도저히 하루, 하루가 상상이 안 돼. 하루가. 내일 또 무슨 폭탄이 터질지 몰라요. 하루, 하루가 상상이 안돼요. 그냥 그 말대로 오늘 치만 기르시나니로 적합해요. 기르시나니. 어떤 사람이 들풀을 베어가지고 내일 아궁이에 넣을 때 “내가 어떻게 키운 들풀인데 이걸 아궁이에 집어넣어!” 하고 하나님이 말리십니까? 안 말리시지요. “보내. 보내. 불 속에 집어넣어.” 하는 것처럼.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오늘 주께서 기르시나니, 지금 예수님이 진심으로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예수님 말씀은 다 진심이지만. 하물며 너희들도 그렇게 키운다.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시는 것을 염려하는 그것은 은혜 받아 놓고 모르는 배은망덕한 이방인들이 하는 것이고 너희들은 그 나라 의를 구하라. 도대체 내가 이렇게 살았는데, 누구 덕분에 무엇을 매개로 해서 살았느냐, 그게 바로 제물입니다. 하나님의 자기희생입니다.

하나님의 자기희생으로 우리가 하루, 하루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17절하고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하지요. 참, 이것은 일주일동안 통곡해도 울어도 시원찮을 정도로 우리로서는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다.

우리한테 주신 주의 약속이 변치 않는다는 말은 결국 뭡니까? 앞으로 니가 생각하는 모든 것은 내가 다 분질러 놓을 거야. 왜, 이 아담이 육신에서 나온 모든 것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잖아요.

다른 사람은 그런 걸 잘해도 놔두지만, 맹세가 있는 사람은 전부다 그걸 분질러 놔요. 지금 저도 어깨 분질러졌어요. 지금 3주째 해도 치료가 안돼요. 아파요. 뭐든지 뜻대로 안돼요. 안 돼! 15년 동안 안 생겨요. 내 뜻대로 안돼요. 개콘을 봐야 알지. 15년 동안 여자 친구가 안 생긴다는 거와 마찬가지에요.  내 뜻대로 되는 법이 없어요. 뭐든지.  

둘이 알콩달콩 살면, 그래 알콩달콩 살아야지 하는데 또 전화와가지고 싸웠다. 해가지고 시집가도 걱정 끝났습니까? 아니지요. 또 싸워 삐져가지고 있으면 뭐든지 세상만사가 내 뜻대로 안돼요. 혹시 되거든요, 되거든 주의하세요. 이거 마귀의 시험이다. 이건 아니야. 이건 안 돼. 뜻대로 안되어야 돼. 분명히 이건 안 되는 거야. 아들이 합격했다. 이건 말이 안 돼. 우리 집안에 행운이라 하는 것은 전혀 어울리지 않아. 왜? 우리는 내 뜻대로 안 돼야 뭐가 보입니까? 주님의 십자가가 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 지고 나를 따르라 하신 말씀이 우리는 빈말로 들렸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줄 알았는데 행하지 않더라도 주께서 직접 일을 실행시키시니 그저 놀랍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십자가만 날로 크게 보이는 저희 인생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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