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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09 01:21:12 조회 : 2310         
투쟁적 형상 131108 이름 : 이근호(IP:119.18.9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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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은주(IP:175.♡.146.206) 13-11-21 17:14 
안양20131108a-히5장7절(투쟁적 형상)-이 근호 목사

히브리서5장7절,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라고 되어있는데 여기 앞뒤가 안 맞는 내용이죠.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라고 되어 있는데 이 말은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죽으시고 난 뒤에 능히 다시 되살아나신다는 것을 아셨다는 이야기입니까? 몰랐다는 이야기입니까? 이미 아셨다는 거예요. 아시면 조금만 참으면 되잖아요. 주사 맞을 때 들어갈 때 아프지만 조금만 참으면 주사기 빼니까 안 아프잖아요. 그러면 그 아픈 것도 못 참습니까? 주님이.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여기서는 아픈 정도가 아니고 그것보다 더 많은 내용을 이야기합니다. 구원이 반드시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아픈 소리하지 말고 기다리면 될 텐데 어떻게 기도하시는가 하면, 심한 통곡과 눈물과 간구와 소원으로서 구원해 달라고 기도를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죠. 자기 구원이 될까? 말까? 확정되지 않을 경우에는 “아버지, 어떻게든 살려주세요.”라는 게 성립이 되고 이미 구원될 절차에 불과한 것을 알 경우에는 가만히 있으면 되고. 그러면 통곡과 구원해 달라는 말은 구원 안 될 수도 있다는 말을 염두에 둘 때만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살려주세요! 라는 것은 자칫하면 구원 안 될 수도 있지요? 이런 뜻이다 말이지요. 그런데 이미 구원된 것을 이미 알면서도 살려주세요! 라는 말은 하나의 쇼였어요? 하나의 농담이고 장난 친 거예요? 도대체 예수님께서 이런 행동을 하셨을까요? 지금 히브리서5장에서 이 문제를 예수님에 관한 문제로 국한한 것이 아니고 이 문제를 어떤 문제화하는가 하면, 오늘날 우리 성도보고 같은 취지로 말씀하시는 거예요.

“성도 여러분, 여러분 나중에 천국 갈 것을 믿지요?” “예, 믿습니다.” “구원된 거 맞지요?” “네, 구원된 거 맞습니다.” "그러니 그냥 노세요.“ 이렇게 해야 앞뒤가 맞는데, ”여러분, 나중에 탈락됩니다.“ ”그러면 안 되지요. 그럼 어떻게 할까요?“ ”열심히 기도하세요.“ ”예, 탈락되면 안 되니까. 기도 안하면 탈락되지요?“ ”기도 안하면 탈락되지요.“ ”그러면 열심히 기도해서 구원에 성사되도록 애쓰겠습니다.“ 이렇게 돼버리면 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안 받은 사람이에요? 구원 안 받은 사람이죠.

그래서 사람은 둘 중에 하나밖에는 못 돼요. 구원이 안 됐으면 열심히 애쓸 거고, 이미 구원이 됐으면 애 안 쓸 것이다. 둘 중에 하나밖에 하질 못해요. 구원이 될 줄로 알면서도 열심히 할 필요 없다는 것이 우리들의 생각입니다. 시험에 합격했는데 세상에서 지금 수능 쳤는데, 고3책 들고 공부하는 애는 뭐예요? 재수할 걸 미리 하는 겁니까? 재수한다는 것은 이번 학교 안 들어가겠다는 경우에만 재수하려고 수능 쳐 놓고 미리 공부하라 말이지요. 그런데 수능하고 상관없이 서울대학교에 합격했다면 공부 왜 합니까? 놀러 다니지. 이게 오늘날 우리 인간의 한계입니다. 인간이 그것밖에 할 줄 몰라요. 그냥 앞일이 확정됐으면 놀 생각만 한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구원은 누구 좋아라고 하는 구원이에요? 자기 이익 챙기는 구원이지, 아버지 생각은 손톱만큼도 안했다는 게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아버지가 그 대학교 총장이다. 아들은 고3이다. 그것도 아버지의 사립학교다. 이럴 경우에 아버지가 “얘야, 니 요새 공부하기 좋으냐?” “하기 싫습니다.” “내가 총장이야. 내가 주인이니까 니 시험치나 관계없이 이름만 써내면 이미 니는 합격했어. 내 아들인데. 내 학교 못 넣어줄까. 니 전자과 좋아하나? 내가 합격시켜 줄게.” 이렇게 했다고 합시다. 그 때부터 그 애는 열심히 공부합니까? 친구하고 오토바이 타고 띵가띵가하고 돌아다니겠지요. 합격됐으니까.

하나님은 뭘 원하는가 하면, 이미 합격했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 합격했다는 소리를 듣고 열심히 공부하는 자식을 원합니다. 그게 구원의 진수에요. 그것을 모범적으로 우리보다 먼저 보여주신 겁니다. 합격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애가 공부하느냐 하면, 자기만 생각한다면 공부할 필요 없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합격해준다는 그 소리를 듣고 난 뒤에는 애가 마음이 바뀌었어요. 그 전까지는 뭐든지 내 좋아라고 내 편한 되로 내 이익 되는 대로 살았는데 아버지가 공짜로 구원해주니까 그 때부터는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이라는 게 중요하지 않고 아버지가 원하는 게 무엇인가를 중요시하는 거예요. 이제 오늘 이 본문 이해되십니까?

예수님은 자기 생각하지 않고 누구 생각한다? 아버지 생각을 한 거예요. 아버지께서 자신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는 예수님을 구원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을 따라야 될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모범을 보인 겁니다. 나처럼 해라는 거예요. 나도 이미 너희들처럼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고 구원받은 자에요. 그렇지만 지금 말할 수 없는 탄식과 간곡으로 통곡으로 기도했다 말이지요. 이것은 바로 내가 아들이면서 이렇게 하는 이유는 이미 나처럼 아들 된 사람도 나처럼 그렇게 해서 지 편한 데로 살지 말고 아버지 뜻이 무엇인가를 헤아릴 줄 알아야 그것이 진정 천국에서 아버지와 함께 영원히 살 수 있는 사람 맞다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게 되면 그 다음 반발이 또 나와요. “그럼 목사님 그렇게 안하면 어떻게 됩니까? 지옥 갑니까?” 이리 나와요. 그렇게 안한다고 지옥가지는 않아요. “그렇다면 내 하기 싫은 건 안 할 랍니다.” “그래, 니 하기 싫은 건 안 할 랍니다.” 하는 그것이 바로 지옥 가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지가 알아서 믿겠다는 사람 말고, 성령으로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은 성령이 예수님의 영이잖아요. 예수님의 영을 받았으면 그 때부터 자기 생각보다 무슨 생각이 더 중요한가 하면, 주님의 생각이 더 중요한 거예요. 왜?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마음을 받았기 때문에. 내 속에 내 마음만 있는 것이 아니고 누구 마음도 같이 섞여 있어요? 주의 마음도 섞여 있는데 주의 마음이 내 마음보다 우세가 돼가지고 내 마음이 얼마나 내 중심적인가를 지적하시는 그 능력이 우리와 함께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제 다음 문제가 뭐냐 하면, 왜 통곡을 해야 되고 열심히 기도해야 되느냐 그 문제가 남아 있겠지요. 그 문제는 간단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뭐냐 하면, 애굽이죠. 우리의 행동이나 습관이나 방식 이 모든 것은 애굽적인 방식입니다. 천국은 애굽입니까? 아닙니까? 천국은 애굽이 아니지요. 천국은 애굽이야말로 저주 받아야 될 도성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곳이 천국입니다. 아, 요 말 어려운데.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여기 책이 두 권 있습니다. 이 책이 천국이고 다른 하나가 애굽이라면 “어느 것이 천국이고 어느 것이 애굽이야?” 하면 “요 책은 애굽이고 요 책은 천국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한 책을 감추어 놓고 “이 책 아닌 거 어디 있어?” 하면 찾겠지요. “너는 애굽에서 살았기 때문에 이 세상에 살았기 때문에 애굽사람이야. 천국은 애굽사람 아닌 사람이 가는 거야.”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 사람은 그 때부터 천국에 살 사람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찾겠지요? 그 찾는 걸 담아서 기도하는 거예요.

우리보고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 하면, 아! 이게 천국이다. 하고 아는 척을 해요. 그런데 이걸 숨겨버리면 우리는 우리 기껏 아는 것은 애굽 밖에 몰라요. 그런데 천국은 애굽이 아닌 나라에요. 그래서 이것 아닌 걸 하기 위해서 이런 속성과 더러운 몫이 있을 때는 이게 짜증나야 돼요. 이거 싫습니다. 다른 마음 주세요. 라고 하면서 기도와 간구를 할 수밖에 없어요.

자식이 있다. 자식이 이번에 수능을 쳤다. 점수가 잘 나와야 될 텐데. 이미 가 점수 다 나왔지만. 그러면 그 다음 문제가 뭐냐 하면, 요 점수가지고 지가 원하는 대학 들어가는 것이 남았지요. 그런데 그걸 가지고 기도하는 거예요. 요거 애굽적인 마음입니까? 천국적인 마음입니까? 이건 애굽적인 마음입니다. 천국은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자식도 없어요. 자식도 없는데 수능이 왜 있어요? 천국에. 그런데 우리는 버릇이, 살아온 관습이 애굽에서 시험에 합격해야 애굽에서 마치 나다운 내가 살아가는 이유처럼 보람을 느끼는 것처럼 살아온 것이 온 몸에 익숙해져 버린 거예요. 이 점수 가지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라의 준비되신 그런 과에 들어가게 하옵소서. 기도를 한다 말이지요. 하게 되면, 기도하는데 아들이 와가지고 “엄마, 그건 점수가 안 된데.”할 때, 우리는 갑자기 어제 이야기한 것처럼 주님이 질문하고 내가 대답하는 게 아니고 내가 스스로 뭘 질문해야 될지 뭘 기도해야 될지를 알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애굽적인 뜻이 차단되는 사태를 맞이하게 되죠. 이 학교도 안 된다. 저 학교도 안 된다. 그럼 우리 애는 대학가고 싶은데 어디 갑니까? 그러면 군에 가야 돼요. 군에도 떨어지면 엄마, 그러면 공군 갈게. 공군은 쉬운 줄 아나? 공군은 그냥 되는 줄 알아요? 7:1이 넘는데. 해병대도 7:1이 넘어요. 카츄샤는 말도 못하고.  그러니까 기도 잘한다고 소문난 엄마 입장에서는 어떻게 기도할 줄 모르죠.

기도할 줄 모르는 그것이 바로 간곡의 내용이고 통곡의 내용입니다. 오죽 기도할 게 없으면 울겠어요? 주여, 어찌하옵니까? 기도를 해야 되겠는데 어떻게 기도할 줄을 모를 때 답답함. 뭐라고 한 소리해야 되는데 무슨 소리를 해야 할지를 모를 때의 답답함. 그게 바로 예수님이 말하는 통곡과 간구의 시간입니다. 그걸 성도만 할 수 있어요. 성도 아닌 사람은 그걸 못하는 거예요. 주께서 다 차단시켜 놓으니까.  이게 넓은 길이거든요. 넓은 길로 가고 싶은데 사실은 돌아서서 넓은 길로 가고 싶어요. 우리는 백날 설교 들어도 돌아서면 또 넓은 길. 내가 성공하는 길, 남한테 칭찬받는 길, 자랑질 할 게 많아 늘어나는 길, 날마다 늘어나는 것 있을 때, 이걸 주께서 전부 다 끊어버립니다. 끊어버리는 그러한 경우 그것이 바로 주의 뜻에 합당한 사람으로 다른 말로 하면 천국 살기에 적합한 인간형으로 변모가 돼가는 겁니다.

그 변모되는 예를 제가 어제 가락강의에서 이야기했지요. 제가 250억이 새로 생겼는데 거기에 대해서 주여, 저보고 250억 부자 돼 가지고 어떻게 천국사람으로 살란 말입니까? 정말 이런 벌을 내리셔도 되는 겁니까? 이런 거. 이게 바로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외제차를 4대나 굴리라면 어떻게 굴립니까? 저보고 이런 형벌을 왜 주십니까?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

지옥 가는 사람은 왠 떡이고? 하는 사람이 지옥 가는 사람이에요. 역시 기도의 응답되었군요. 이거 지옥 가는 사람들, 또 한 가지 예를 들었지요. 병들게 기도하니까 병이 낫아 버렸어요. 그러니까 주여, 저보고 어떻게 더 혹독하게 고생하라고 병을 낫게 하십니까? 빨리 죽이지 않고 왜 더 살란 말입니까? 왜 이렇게 병 낫기 있어요. 이렇게 나오기에요? 이런 사람들, 그렇지 않고 기적이라고 병 낫은 사람들 이거  지옥 가는 사람들이에요.

항상 애굽은 누구중심? 내 중심이거든요. 천국은 누구 중심? 주님 중심하지 말고 그것은 허당진 소리 하지 말고 내 중심 아닌 것, 아까 배웠잖아요. 끊어버린다고. 내 중심 아닌데 그게 뭔 줄 모르는 것. 그 기도는 누가 가르쳐줘요? 주님께서 가르쳐주는 거예요. 그 때 그 때마다. 그게 바로 통곡과 기도로 하는 거예요. 결국 제가 하는 말의 결론은 뭐냐, 통곡과 간구의 기도는 오직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성령이 와서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성령은 기도할 때 탄식하면서 하지요. 그 탄식이 내 탄식으로 전이시키면서 우리보고 성령에 입각해서 기도하시는 거예요. 이야기는 복잡했지만 들어보니까 간단하지요. 간단하지만, 완전히 우리의 발상을 뒤집어야 돼요. 사실은 애굽의 우리는 백날 교회생활해도 그 교회도 애굽인데 이 세상에서 애굽에서 못 빠져나와요. 그러니까 성령이 와서 사태를 그런 식으로 몰아넣지 않으면 우리는 성령에 의한 기도를 할 재주가 없습니다.

주님의 통곡하고 탄식했던 그 마음으로 기도하는 마음은, 성령이 와서 해야 되는 겁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예를 하나 들게요. 마르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모셨을 때에 마르다 언니는 음식준비에 바빴고 동생은 언니 안도와주고 턱밑에 앉아가지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언니가 보기에도 싸가지가 없지요. 싸가지가 없는 거예요. 싸가지가 없을 때 우리 주님입장에서 보게 되면 누가 주님의 원하는 기도를 할 수 있는 기회의 찬스를 누가 맞이했습니까? 동생입니까? 언니입니까? 언니에요. 싸가지 없는 동생을 보면서 마음에 울분이 생기지요. 그 울분이 생기는 그것이 애굽의 생활을 청산하고 천국의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일부러 주님께서 마련하신 겁니다. 동생이 얼마나 밉겠습니까? 저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때 내가 동생은 저래서는 안 됩니다. 하는 것이 어디서 기어 나온 사고방식이냐 하면, 애굽에서 살던 사고방식의 연장이었습니다. 연속적이었던 거예요.

주님이 와서 이걸 방향을 틀어주지 않으면 언니는 지가 잘한 짓했다고 주님 앞에서 옳은 일 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제부터 오늘 본문 강의의 어려운 거 나오는데 무슨 말인가 하면, 메시아가 우리 보기에 가짜 메시아로 오신 분이 진짜 메시아가 되는 거예요. 그걸 설명하겠는데 자, 마르다 입장에서 봅시다. 마르다가 동생에게 직접 이야기했습니까? 예수님을 경유해서 이야기했습니까? 예수님을 경유해서 이야기했지요. “예수님, 내 동생 좀 나무래 주세요.” 라고 경유했지요. 그러면 마르다 본인은 본인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이 일치된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러니까 경유해서 내 이야기를 전달해달라고 했을 거잖아요. 

그런데 누가 마르다 편을 들지 않습니까? 같은 편이라고 여겼던 마르다가 예수님이 마르다 편을 안 들지요. 아사라 말아라, 니 동생은 니보다 더 좋은 쪽을 택했다. 이리 나오지요. 그러면 마르다 자기의 진심과 주님을 위하는 마음에서 나왔던 그 마음까지라도 천국에 합당한 마음이에요? 애굽에 합당한 마음이에요? 애굽에 합당한 마음이지요. 우리는 이 세상이 애굽이라고 이야기하면서도 애굽의 진수, 애굽의 깊은 맛을 아직도 다 맛을 못 봤어요. 본맛을 다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버티고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애굽의 맛을 더 보라고. 애굽 맛 다보면 우리는 죽어야 돼요. 더 살 이유 없거든요.

아직까지 우리가 그렇게 주님이 싫어한다는 애굽에 정체에 대해서 우리가 모르는 게 너무 많아요. 주님을 위해서 음식을 대접하는 것이 나쁜 짓이 될 줄이야 마르다가 과연 생각했겠어요? 못했지요. 설마 이건 나쁜 짓이 아니라고 생각했겠지요. 그 나쁜 짓 아니라고 생각한 그것이 바로 애굽사상의 연속이란 말이죠. 마리아를 통해서 마르다야, 니가 지금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일러주는 겁니다. 그 잘못 생각한 그 잘못 생각에 입각해서 이 메시아 되는 예수님도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잘못 생각한 거예요. 아니 눈에 보고 있다고 해서 다 옳은 생각을 합니까? 남편 보고 있으면 남편마음 다 꾀뚫러 봅니까? 몰라, 한 20년 살았으면 대충 감은 잡힐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성경만 성경이 아니고 살아가는 자체가 성경의 연속이지요. 우리의 애굽에 있던 사고방식을 천국살기에 합당한 마음으로 바꿔주는데 그런 의미에서 애굽은 아직도 필요해요? 안 해요? 애굽 세상은 필요합니다. 직장생활 몇 가지 잘했어요. 노루하고 잘 놀고 이게 왜 다가 아닌지를 알기 위한 주님의 방석입니다. 만원짜리 방석이라니까. 이 방석 만원한답니다. 우리는 깔아놓은 방석위에서 위를 바라봐야지요. 이거하다가 치우지 마시고요, 주께서 거적을 깔아놨을 때는 그냥 거적 위에 지내세요. 그냥 막 사세요. 또 나왔다. 오늘 또 막 사는 거. 막 사시면 왜 그게 막 사는 게 되는지를 성령을 통해서 알아가게 하시는 겁니다.

자, 그러면 본격적으로 어려운 거 하겠습니다. 메시아가 이 땅에 오실 때는 반드시 반 메시아로 오게 돼 있어요. 반대의 엔티메시아로 오게 돼 있어요. 그래야 이 사이에서 뭐가 벌어지느냐 하면, 바로 십자가 사건이 일어납니다. 사울이었던 사람이 예수님을 잡아 죽이는 것이 그게 하나님께 충성이라고 여겼던 사울이란 사람이 그 당시에 예수님 믿는 사람 잡아 죽일 때 그 사람이 갖고 있던 예수의 이미지는 뭐였습니까? 부정적이었지요. 이건 하나님을 반대하는 이단이죠. 이단은 그냥 두면 안 되지요. 이단을 공격하는 그것이 자신의 충성심을 보이는 기회가 되니까.

그런데 다메섹에서 누구를 만났습니까? 그냥 몰랐던 예수가 아니고 자기가 반대했던 예수거든요. 그러니까 니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했어요. 핍박. 그 소리를 우리가 들어도 마땅하거든요. 자, 여기서 뭐가 어려운가 하면, 메시아께서 막상 오실 때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반 메시아의 모습을 가지고 보는 겁니다. 왜냐 하면, 이 세상사람 전체가 애굽을 형성하니까 애굽은 자체적으로 뭘 만들어내는가, 메시아도 만들어내요. 하나님도 만들고 여호와도 만들고 좋다는 건 다 만들어내요. 그러니까 그들은 유대교라는 것을 만들었잖아요. 이들이 메시아사상을 이미 알고 있다 말이지요. 오기만 와봐라, 우리는 대번에 알아본다. 자신만만했을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십자가 충돌이 일어났다는 말은 바나바냐, 예수냐 할 때 그들은 바나바를 선택했고 예수님은 버렸습니다. 따라서 버림받을 만했기 때문에 버린 거예요. 현재 우리는 애굽에 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이게 우리가 가짜 예수를 진짜 예수로 착각해서 믿을 가능성이 굉장히 농후한 거예요. 굉장히 농후한 겁니다. 뭐만 없다면? 십자가 사건을 잊는다면. 십자가 사건을 빼버린다면. 십자가 사건을 치워버린다면. 지금 모든 교회처럼. 십자가 알고 이제 잊어버리세요. 이젠 부활의 세계입니다. 이리 나올 때는 우리는 도저히 구원받을 길이 없지요. 왜? 우리가 아는 예수는 삼위일체는 다 가짜니까.

그러면 메시아의 반대하는 모습이 직접 와서 우리로 하여금 분통을 터트리게 만드는 사태가 일어나야 되겠지요. 핍박이라는 것이 성립되어야 되니까. 그러면 한 번 이야기해 봅시다. 예수님 당시에 있던 십자가가 그 다음에 되풀이 될 때는 어떤 형식이다? 나로 인하여 핍박받는 모양새로 우리에게 찾아올 때 진짜 우리의 가슴을 노크한 메시아입니다.

우리로부터 핍박을 받는. 그 핍박받는 이유는 뭐냐 하면, 바로 우리가 생각했던 그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아주 자신만만해요. “당신은 무조건 아니야.” 했는데 그 분이 도마에게 뭘 보여줍니까? 창 자국을 보여주지요. 못 자국 보여 줄 때, 도마가 그 창 자국, 못 자국을 보고 도마가 느낀 점이 뭡니까? 예수님 이 분이 맞다! 라가 아니라 이 창 자국 못 자국이 잠길 때에 결국은 주님이 이렇게 당했다는 것은 그 곁에 누가 없었다는 겁니까? 자기들이 없었지요. 자기는 걸음아 나 살려라하고 다 도망쳤지요. 세상권력이 무서워서 다 도망쳤잖아요. 도망쳤는데 도망친 철없는 양을 위해서 이사야53장에 보면, 양은 흩어지되 양은 제 갈 길을 알지 못했지만, 목자가 흩어진 도망친 양을 위해서 대신 죽었던 흔적이 창 자국 못 자국이잖아요.

그렇다면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더 이상 도마는 다른데 가겠어요? 안 가겠어요? 갈 때는 자기가 살 수 있다고 해서 갔는데 도망 가봐야 이미 죽은 존재라는 사실을 창 자국 못 자국으로 알겠지요. 그래서 십자가를 성령을 받아 제대로 아는 사람은 그 이상의 어떤 경우라도 주님의 십자가를 잊을 수 없고 버릴 수 없습니다. 버리기는  커녕 감사함으로 받아들여요.

십자가라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도망치는 놈이 나, 나는 도망쳤고 그나마 나는 내 살기 위해서 그냥 변변치 않은 내 목숨 건지기 위해서 나는 삼십육계 줄행랑 쳤는데 그래도 불구하고 탓하지 아니하시고 도망친 나를 위해서 대신 저주받으시고 이제는 천국 가는데 어떤 장애물도 앞에 두지 않게 다 모든 일을 조치하신 분, 그 예수님을 우리는 성령 받은 사람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나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죽었다가 살아나신 바로 그 분을 위해서 사는 것, 그것을 가지고 사도바울은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그렇게 정의를 내렸습니다. 쉽게 말하면, “니도 참 특이한 인간이다. 어디 그걸 믿냐?” 이런 식이에요. 다른 말로 하면, “이제 그걸 믿어지니까 세상에 어떤 부귀영화 같은 거 이제 눈에 안 들어오지? 나도 그런데 너도 그렇지?” 라고 하는 거예요.

이것을 창세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면, 창세기1장에는 안 나오지만 그 뒤에 나와요. 창세기 3장에 나와요. 이게 강의 제목이 됩니다. ‘투쟁하는 형상’ 하나님의 형상이 예수님이잖아요. 예수님이 들어왔다는 말은 투쟁할 것도 없이 거기에다가 앙꼬를 쏙 집어넣으면 된다. 우리 생각은 그렇거든요. 하나님께서 흙으로 만드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거기다가 쏙~쏙~ 집어넣으면 되잖아요.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었고 아담도 그렇게 알고 있었어요. 하나님의 형상이 임해가지고 우리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이제는 내가 모든 걸 판단해가지고 먹고 싶으면 먹고, 따먹기 싫으면 안 따먹고, 내 맘 대로하고 내 이름도 내가 짓고 코 길다고 코끼리, 앵앵한다고 앵앵이 지 맘대로 이름 지을 수 있는 자격도 있고 만물의 영장이고 만물을 다스리라는 명령이라 하거든요. 그것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생각을 하잖아요.

그런데 막상 이 하나님의 형상이 빠져나가면서 그냥 빠져나가는 게 아니고 쏙 들어갔다가 그냥 빠져나간 것이 아니고 빠져나가는 그 경로가 인류의 역사라는 그러한 모양새로 빠져나갈 때 인류의 역사는 무엇의 역사입니까? 투쟁의 역사고 그 투쟁의 역사는 창세기3장에 의하면 뱀의 후손과 여자 자손의 투쟁의 연속이었어요.

하나님의 형상, 오실 메시아는 투쟁하시는 인간과 투장하시는 메시아고 그 결과를 자기 몸에 창 자국, 못 자국 십자가로서 사건을 자기 몸에다가 자기 몸 자체를 십자가 사건 화시키는 모양새로 우리에게 찾아드시는 그 형상만이 주님의 형상입니다. 누가 그 분을 비참하게 만들었습니까? 바로 우리가 인간이란 이름의 우리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그런 식으로 천하게 천시하며 대우했던 거예요. 실제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고 실제 현실입니다.

우리는 뭐든지 괜찮은 거 같으면 쏙 집어넣고 소유하면 되는 줄 알았어요. 날 멱살 붙들고 같이 니가 죽는지 내가 죽는지 투쟁하자, 투쟁하는 그런 식으로 우리 속에 들어올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그런데 창세기3장 이야기는 우리 속에 쏙 집어넣으면 우리는 성경도 안 보고 성령이 와서 쏙 집어넣으면 구원받습니다. 이것만 생각해요. 그런데 실제 하나님은 구약이란 긴긴 투쟁의 역사가 우리의 역사로서 우리에게 적용시킬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사는 한평생이라 하는 것은 결국은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와 늘 싸우는 싸움의 흔적, 그리고 구약의 있는 모든 그 투쟁의 역사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오늘도 내가 겪어야 될 나의 팔자를 미리 그런 식으로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우리에게 미리 보여줬습니다. 남의 이야기 아니라는 이야기죠.

성경 볼 때 구약 볼 때, 남의 이야기로 보지 마세요. 다 우리 이야기입니다. 십계명 준 것은 우리에게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고 그걸 어기라고 주신 거예요. 그걸 어기라고. 어기라고 주셔놓고 내내 되풀이 되는 것이 너희들이 이 말씀을 지켜야 하느니라, 그럴 능력이 너희한테 있느니라,  말씀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니 코 앞에 있기 때문에 충분히 지킬 수 있느니라, 그렇게 이야기하셔요. 신명기30장14절,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와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행할 수 있느니라. 이 말은 행할 수 있다는 이 말도 우리는 행할 수 없는 것으로 우리는 받아줘야 돼요. 왜? 행할 수 있느니라, 라고 출발해서 니는 인간도 아니라는 것을 까발리는 거예요.

행할 수 있느니라, 라고 되는 대상은 인간일 경우에 되는 거고, 우리는 자기 스스로 인간이라 여기고 “그렇습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이 정도까지 설득한다면 저는 설복당하겠습니다.” “예, 저도 고백합니다. 주께서 이룰 수 있느니라 하면 예, 할 수 있습니다. 저도 지키겠습니다.” 그래서 망한 나라가 누굽니까? 이스라엘 망했어요. “못 지킨다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지킬 수 있다고 우리는 외치겠습니다.” 그래서 망했어요.

율법이 더한 것은 그들로 하여금 입을 막고 죄를 더하게 함이라, 모든 것을 입을 막고 저주아래 있게 함이라. 로마서 3장19절,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사람들이 몰랐던 것은 그거였습니다. 자기가 인간이라고 생각하는데 인간은 없어요. 인간은 육신밖에 없거든요. 육신과 인간과 말씀이 만나면 나는 할 수 있다가 돼요. 그런데 육신이 된 상태에서 말씀을 보게 되면, 못 지킨 게 맞구나! 가 돼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구원하려면 인간을 뭐로 바꿉니까? 육신으로 바꾸어서 말씀을 갖다 되게 되면 아! 우리는 지킬 수 없다. 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십자가 지고 가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가라 할 때, 십자가 지고가라 할 때는 가라했으니까 분명히 우리가 할 수 있기 때문에 가라 했으니까 십자가 지고 갈 수 있습니다. 라고 나온다면 그것은 자기가 육신인 것을 인정 못하는 사람이에요.

“십자가 질 수 있습니다.” 라고 할 때 그 뒤에 나오는 베드로의 반응은 이렇습니다. “제가 죽을 때까지 라도 주님을 따라 갈 수 있습니다.” 되는 거예요. 왜? 자기는 들은 구석이 있기 때문에. 자기 십자가 지고 날 따르라 했기 때문에. 야, 이거 봐라. 주님 돌아가시기 전에 내가 이 때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내가 평소에 구원받았다는 티를 내는 건데 그게 뭐냐, 십자가 지고 나를 따르라니까 십자가 지고 주와 함께 죽겠습니다. 하니까 주께서 하는 말이 “아사라 말아라. 니는 죽어도 구원 못 받아.” 왜? 처소가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럼 베드로는 어떻게 합니까? 진작에 이야기하시지. 이제 와서 아이 씨~ 이제 와서 들통 날 것 다 들통 내고 이제 와서 이렇게 하면 내가 부끄럽잖아요. 사람이 잘 한다 잘한다 할 때는 격려도 해줄 만도 한데 이것은 잘한다 할 때는 마치 된양하다가 결정적일 때 완전히 사람을 꿇어 박아버리면 나의 자존심은 어디서 찾습니까? 자존심이라 하는데 북한으로 말할 것 같으면, 존엄성. 이 존엄성을 어디서 찾습니까?

그리스도가 반 그리스도, 반 메시아, 엔티로 와요. 반 메시아로 오는 이유는 인간을 육신으로 바꾸기 위함입니다. 육신으로 바꿔줘야 되는 겁니다. 그 내막을 알아봅시다. 다윗언약 때는 인간이 자기가 인간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우기게 하는 것을 방치를 해요. 다윗언약 때는 다윗언약이기 때문에. 다윗언약은 십자가 진 언약은 아니에요. 다윗에게 약속만 준 언약이죠. 그래서 다윗의 상한심령이라 하는 것은 알고 그 다음부터 다윗언약이 뭐냐 하면, 니 몸에서 나온 자식이 왕의 자손이 되고 아들이 되고, 조건이 있어요. 니 몸에서 난 자식이 아들이 되는 조건은 말씀을 온전히 지키면 아들로서의 왕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잘린다고 돼있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솔로몬부터 해서 그 뒤에 말씀 온전히 지킨 사람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무도 없어요. 다윗언약에는 자손을 준다 해놓고 자손 값하는 자손은 없는 거예요. 그런데 로마서에 보면 드디어 다윗의 자손 나타났지요. 예수님이십니다. 제가 지금 다윗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를 두는 이유가 뭐냐 하면, 다윗언약시대에서는 내가 죽었다고 아직까지 드러날 시점은 아니에요. 잘못됐다. 참, 우리가 부족하구나! 정신 차려야지. 그게 허용되는 시대가 다윗언약시대에요.

그런데 십자가 딱 지고 난 뒤에 십자가 바라보는 순간에 이것은 우리한테 어떤 가능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없는 정도가 아니고 아까 사울이 예수님을 만난 것처럼 그냥 핍박했다는 것, 우리가 기껏 할 수 있는 것이 한 평생 주님을 핍박할 수밖에 없어요. 핍박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거예요. 도망 안치고 머물러 있는 양을 위해서 구원하는 게 아니고 내 걸음아 살려라 도망치는 양을 향하여 “그래, 도망쳐라, 내가 니 대신 죽을게.” 라는 분이 이사야 53장 6절에 나오는 그 말씀 아닙니까?  그게 바로 십자가 사건이거든요.

그러니까 도만한테는 그 창 자국, 못 자국이 그렇게 의미가 있는 거예요. “바보야, 바보. 정말. 나쁜 놈은 나입니다. 이런 주님을 모르고 이용할 생각만 했구나! 아이고, 이 나쁜 놈!” 내가 나쁜 놈인 줄 모르고 지가 좋은 인간인 줄 알고 주님하고 살면 좋은 인간이 더 좋은 인간 될 줄 알고 이랬던 거예요. 

주님 만나면, 교도소 수갑 채워 질질 안 끌려가더라도 수갑 안 채워도 이미 교도소에 있는 사람 못지않게 더 나쁘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사람이에요. 거리에서 몸 팔고 있는 그 창녀 아줌마보다 내가 더 나쁜 여자고, 강도보다 내가 더 나쁜 강도고, 그걸 바로 십자가의 창 자국 보면서 아는 거예요. 이것은 어떤 짓을 해서 나쁜 짓이 아니라 그냥 나빠요. 어떤 나쁜 짓을 한 게 아니고 그냥 나빠요. 그냥. 주님 생각할 때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해야 됩니다. 주님의 순종과 아픔이 뭐였는지를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거죠. 간구기도 제목 방금 들었지요. 기도 제목이 뭐라고요? 이 세상에 같이 살았던 그 분, 예수님, 예수님이 느꼈던 그 느낌을 저도 같이 느끼게 하옵소서. 느낌 아니까. 같이 느끼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당한 수모를 같이 당하게 하옵소서. 환난 가운데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뭘 낳는다? 소망을 낳잖아요.

주님 당했던 그 서러움, 저도 당하게 해 달라, 그 기도. 그 기도가 바로 주님 가신 코스에 같은 코스를 가고 있다는 근거입니다. 그래서 혹시 여러분 집에 그럴 리 없겠지만, 여러분 자녀가 사법고시 합격 했다든지 갑자기 유산을 50억을 남겨 줄 때, 우리는 기도해야 됩니다. 주여, 주의 아픔에 참여하게 하옵소서. 돈 세어가면서 주여, 내가 부자를 통해서 주의 아픔에 들어가게 하옵소서. 다른 사람은 가난해서 아픔 속에 들어가지만 막상 주어지면 그 사람은 그 쪽 사태고, 내 쪽 사태는 부자 된 사태기 때문에 부자를 통해서라도 간구하오니 십자가를 알게 하옵소서. 부자 되어 십자가를 안다? 그게 더 힘들지요? 부자가 천국가기 더 힘드니까.

하지만, 주께서는 가능하다고 믿고 간구해야 돼요. 이게 바로 이미 구원받았지만 애굽의 삶을 청산해야 돼요. 끊어야 돼요. 그래야 천국 가는 삶이 되니까. 그것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시키는 겁니다. 그 중간에 바로 예수님이, 우리가 아는 메시아가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메시아 안다고 하는 자로부터 핍박받는 반 메시아 이미지로서 우리에게 오신 건데, 그 사이에 뭐가 있었다? 투쟁이 있었고 그 투쟁에서 승리한 분이 주님이기 때문에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는 지금도 내 애굽적인 가짜를 끊으시고 진짜 메시아가 우리에게 도와주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믿게 할 수 있도록 하는 겁니다.

그 투쟁은 지금 우리하고 투쟁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찾아오는 마귀와의 투쟁이거든요. 아까 우리 집사님이 이야기하는 가운데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성경공부를 하는데 누가 서울대학교에서 와서 건강음료 판다 했지요. 저한테도 전화가 왔어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지요. 그거 팔지 마시고 그냥 성경공부 참석하세요. 이 분들이 천국을 안 가려고 하는 모양이라. 자기는 시음회라고 하는 거예요. 시음회라 하지 말고 참석하세요. 라고 했어요. 어떻게 예수 이용해가지고 물건 팔아먹겠다는 거, 우리는 그들에게 뭐라고 비난하지만 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 보세요. 그게 다급한 문제잖아요. 그 사람들이 기도하면 어떻게 기도하겠어요. 물건 많이 팔게 해달라고 기도할 게 아니겠어요. 바로 그런 기도 하지 않게 해달라고 통곡해야 되는 기도가 바로 이거다 이 말이죠. 

주님이 왜 아팠습니까? 물건 못 팔아서 아팠습니까? 예수 이름으로 환경운동하고, 예수 이름으로 북한 쌀 보내고 주님이 북한 쌀 보내려고 이 땅에 십자가 졌습니까?
주님 능력 같으면 아예 북한 자체가 미국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쌀 보낼 필요도 없어요. 그 쪽에서 쌀 줄 수 있는 나라 만들 수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능력은 내가 이 땅에서 보냈던 아픔에 참여하지 아니하면 천국 못 간다는 겁니다. 좁은 길이 거기에 있거든요. 거기에 바로 우리가 그런 것을 느끼고 같이 동참할 수 있도록 그래서 주님께 고마운 거 알라고 우리보고 이런 기도를 하는 겁니다. 언제? 주께서 육체로 계실 때.

지금 우리는 뭡니까? 육신으로 있잖아요. 그러니까 주님과 동일한 기도를 해야 된다. 그래서 그 가운데서 주님은 순종, 주의 아버지 뜻이 내 뜻보다 더 중요한 걸 배운 것처럼 지금도 우리는 그 기도를 통해서 우리도 내 뜻과 아버지 뜻이 무엇인가를 기도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지게 돼 있지요.

그러면 요 문제 끝나면서 내가 마지막 한 마디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그럼 기도를  어떻게 하면 됩니까?” 라는 문제가 나오겠지요. “그러면 주님의 아픔에 동참하는 기도를 어떤 식으로 하면 됩니까?” 라는 문제있겠지요. 그런 기도는 아까 지나가면서 했는데 분명히 우리가 못 합니다. 성령께서 해주기 때문에. “그러면 성령 아니면 못 하는데 우리는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까?” 기다리시면 애굽의 뜻을 차단시키는 사태가 벌어질 거예요. 내 뜻대로 안 되는 일이 벌어질 거예요.

그럴 때는 기도할 게 뭔지도 모르면서 오는 답답함, 이것이 성령께서 우리에게 기도케 하는 순간입니다. 기도응답에 대해서 제가 언급했습니다. “죽으라.” 이게 응답입니다. 니가 자꾸 기도하는 이유는 니가 살고 싶다는 니 심보를 드러내는 것뿐이 안돼요.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러면 주님께서 “죽어라, 하는데 뭘 또 이럴 수가 있어.” “제대하는데 뭘 또 기도해? 제대하라는데.” 사람이 지금 곧 죽겠다는데 무슨 다른 거 이렇고 저렇고 할 일이 없잖아요. 그렇잖아요?

우리 애가 어떻고. “니는 죽어라, 니는 죽고 애는 나한테 맡기고 니는 죽으면 돼.” 이럴 때 애한테 기도할 게 뭐가 있어요? 그러면 그런 응답을 직접 받게 되면 기도 끝나고 기분 좋지요. 기분 날아가게 좋지요. 자책하면서. 바보같이. 가만 보니까 내가 한 내가 고민했던 모든 것이 밑바닥에는 하루라도 더 살고 싶은 내 욕심인 걸, 내가 사실은 애굽이 더 좋아서, 더 개기고 싶어서 하는, 그러한 본심인 것을 내가 이제야 알았다는 그 기쁨.

9,10절에 봅시다.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사도바울이 히브리서 쓰면서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다고 한 것은 앞에 뭘 언급했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의 칭함을 받았다 했지요. 내가 성경 볼 때 반차를 좇는 할 때, 자꾸 반찬, 밑반찬이 생각나요. 멜기세덱의 밑반찬? 하나님의 구원의 밑반찬? 그게 멜기세덱? 반찬이 그 반찬이 아니고 족보라는 이야기입니다.

족보이야기는 제가 어제 이야기했습니다. 창세기5장에서 아담의 족보이야기 나왔지요. 그 족보가 하나의 전부다 기관차의 객실이라면 객실과 기차의 연결은 뭐라고 했습니까? 죽었더라, 죽었더라, 의 반복이잖아요. 죽었더라, 의 반복이에요. 그러니까 이 멜기세덱의 반열이라는 그 멜기세덱과 연결돼 있는 사람은 그 기차의 마디  마디처럼 그 마디에 살아도 결국은 릴레이 할 때 앞에 있는 선수한테 자기 몸을 맡깁니까? 자, 이 몸 가지고 가라 하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그 앞에 있는 선수가 뒤에 있는 선수 몸 들고 가려하면 더 무거워.

몸 대신 뭘 들고 가면 돼요? 바톤을 들고 가면 되는데, 몸을 들고 가려하니까 지 인생 살아야 되고 손자인생까지 다 살려 하니까 죽을 지경이에요. 바톤만, 뭐만 받으면 되느냐 하면, 죽었더라만 받으면 돼요. 우리가 아버지한테 받을 유산은 하나밖에 없어요. ‘아버지 돌아가셨다.’ 이것만 받으면 돼요. 아! 아버지 날 낳아 죽으시고 어머니 날 낳아 죽으시니, 이것만 받으면 돼요. 그 다음에 아버지 따라 나도 죽겠구나! 이것만 받으면 돼요. 이게 시조입니다.

아버지 날 낳아 죽으시고, 어머니 날 낳아 죽으시고, 나는 어디가 죽지....그 죽음을 바톤으로 삼아서 죽음을 전달할 때 고 죽음이 실 내용 없는 죽음이 되면 안 되지요. 그건 허무한 거니까. 그 내용에다가 뭘 집어넣는다? 멜기세덱을 집어넣으면 멜기세덱은 이 땅의 사람인데 사실은 하늘의 사람이라는 것. 그것이 죽었다, 라는 포장지 안에 실내용으로 담기게 되면 우리는 죽는 것이 곧 사는 것이 된다는 복음의 원리에 도달되는 우리는 매일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설국열차를 타고 가고 있는 중에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게 애굽 사람들은 살아야 되겠다는 그 가운데서 우리가 꼭 쥐고 있는 것은 ‘죽었더라.’를 꼭 쥐고 있어요.

누구한테 복음 이야기하면, 이걸 집어내어 “죽었더라.” 나 이런 사람이오. 나는 의사요가 아니라 나는 죽었더라. 그리스도와 함께 죽을 때, 그 사람만이 멜기세덱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의 생명은 이 땅에서는 죽었지만, 하늘에서는 살았더라.

우리가 내미는 “죽었더라.” 라는 말은 “지금 하늘나라에 내 생명이 있습니다.” 라고 내미는 골로새서 3장 3절의 말씀을 내미는 거와 동일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멜기세덱 이야기를 서서히 끄집어내는데, 그것은 10분 쉬고 합시다.
 공은주(IP:218.♡.193.179) 13-11-30 11:25 
안양20131108b-히5장7절(투쟁적 형상)-이 근호 목사

지금 사도가 편지 쓰면서 진행시키는 법칙이 있네요. 뭐냐 하면, 예수님과 그 다음에 예수님이 눈물로 기도했다. 그리고 이제 너희들 차례다. 그 다음에 예수님이 하는 모든 것은 멜기세덱의 원칙에 의해서 진행된다. 라고 하면서 “너희들 멜기세덱 모르지? 그러면 지금부터 내가 이야기해줄게.” 라는 것이 11절입니다.

멜기세덱에 관하여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에 초보에 지나지 않아서 내가 말해도 먹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멜기세덱의 이야기는 젖이나 먹고 단단한 음식을 못 먹는 사람한테는 감당 못할 이야기다. 이것은 하나의 성도에게 목표를 주는 거죠. 목표를.

성도되었으면 이제는 지가 하는 목표가 아니고 주께서 이렇게 해서 이런 코스로 빠져나가게 천국가게 한다는 주님이 제시한 밑의 카페트, 카페트를 까는데 까는 카페트가 빨강색인데 그 빨강색의 내용을 보니까 멜기세덱의 인생이 거기에 깔리는 거예요. 멜기세덱의 인생을 언급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깔린 그 인생을 멜기세덱도 같이 공유해서 누리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는 어디에 속하는가, 멜기세덱이 예수님과 관련돼 있다면 우리는 멜기세덱과 속해서 예수님과 관련된 존재로서 주께서 다루어주신다는 이야기죠.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예수님께서 구원의 근거가 되셨고 거기에 멜기세덱을 일차 얹힙니다. 얹히고 그 위에다가 우리를 얹어버리면 멜기세덱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라고 그렇게 하도록 초보는 모르고 날이 가면 갈수록 예수님과 멜기세덱의 일치감을 더욱 더 느끼게 한단 말이죠.

그리고 멜기세덱에서 뭡니까? 물으면 멜기세덱은 땅에 속했지만 실은 하늘에 속한 본적이 소속이 하늘에 속했다. 그 다음 우리는 묻지요. “하늘에 속한 분이 어떻게 땅에 속합니까?” 이런 질문은 바로 우리가 성령을 받은 사람에게서만 나오는 질문이에요. 하늘에 속한 사람이 왜 이 땅에서 왜 삽니까? 하늘에 그냥 계시지, 왜 내려왔습니까? 하는 그걸 언급한다면 그 다음에 히브리서 6장에 말씀이 나와요. 왜냐 하면, 그것은 두 가지 맹세를 이루려 함이라.

그러니까 뒤에 나온 질문과 아귀가 맞아야 돼요. 왜 멜기세덱이 하늘에 속하면 그냥 하늘에 살지 땅에 왜 있습니까? 하면 땅에서 이루어질 맹세가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면 우리는 묻지요. 멜기세덱이 그러면 맹세를 혼자 합니까? 아니다. 그러면 누구와 합니까? 아브라함하고 했다. 또 아브라함이 등장하네. 그럼 예수님 등장했다가 그 다음에 멜기세덱 등장했다가 너는 초보라 모른다고 나오다가 그 다음에 멜기세덱이 누구냐고 물으니까 거기서 아브라함이 등장하고 아브라함을 통해서 두 가지 맹세가 있는데 그 맹세는 사실은 멜기세덱이 이룬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이뤘다. 이리 되는 거예요. 그리고 난 뒤에 히브리서7장에 보면, 예수님이 그러면 맹세를, 약속을 어떻게 이루었습니까? 나올 게 아니냐 말이지요. 어떻게 이루었습니까? 나오면서 나온 게 뭐냐 하면, 십일조이야기 나와 버리는 거예요.

십일조? 십일조는 우리가 수입의 10/1을 드리는 게 십일조 아닙니까?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십일조는 받는 분이 있고 드리는 분이 따로 있다는 거예요. 받는 분은 멜기세덱이었고 드리는 분은 아브라함이었다. 아브라함처럼 되지 아니하면 십일조 자격이 없고 멜기세덱 되지 아니하면 십일조 받을 자격이 없고 이것은 바로 우리에게 땅에 있으면서도 하늘의 작업은 하늘다운 작업으로 이 땅을 통해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거예요. 하늘의 일을 하늘에서만 따로 하는 게 아니고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니가 그걸 파악해야 된다. 그게 바로 예수님의 흔적이었다는 말이죠.

예수를 본 사람도 많고 예수님과 같이 식사한 사람도 많고 예수님으로 귀신 쫒아낸 사람도 많고 예수님께 혜택 입은 5000명도 있었지만 땅에서 일어나는 땅의 일인 줄 알았지 하늘의 일인 줄 제자들도 몰랐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초보라면 이제는 그것은 이 땅에 일어나는 주의 일에 대해서 이를 모른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이 말씀을 통해서 알려주는 겁니다. 지금 전체흐름을 제가 5,6,7장 흐름을 휙 지나가듯이 언급했어요.

아까 집사님한테 물어봤어요. 어제 가락강의 기억나느냐고 하니까 기억나지 않다고 했어요.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그런데 다시 보게 되면, 아! 그래, 이 말씀 내용이다. 라고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고 주의 말씀도 살라하면 어떻게 살지 다 잊어버려요. 그런데 주께서 우리에게 주의 인생 살게 하면 그래, 이게 주의 인생이라고 자기 인생을 지적하게 되죠. 주여, 지금 내 사는 이것이 바로 주께서 일으킨 일입니다. 라고 다시 한 번 소급해서 파악할 수 있어요.

막상 내가 주의 일 뭐하지? 전도할까? 뭐할까? 하면 막상 주의 일이 분명치 않고 틀리지요. 그런데 내 하는 일이 막힐 때 아! 이 막히는 이것도 주의 일이구나! 하는 것을 아는 방식으로 주의 일을 날마다 우리에게 항상 깨닫게 하게 만듭니다. 멜기세덱이 어렵기 때문에 전체를 휙 한 번 언급을 했습니다. 그러면 자세한 부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5장 12절에 보게 되면,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이 무척 위험한 말씀입니다. 왜 위험한 말씀이냐 하면, 이런 게 위험하거든요.  목사한테 누가 교회에 처음 등록했습니다. 분명히 주의를 줘요. “당신은 이제 초보입니다. 인정하십니까?” “인정합니다.”태권도 같으면 흰 띠인데, 저 사람들 빨간 띠 봤죠? 당신도 나한테 계속해서 이 교회 다니면서 십일조 내고 내가 시키는 대로 다 하게 되면 당신은 흰 띠가 빨간 띠 되고 나중에 더 몇 십년해서 자격되면 검은 띠 되면 당신은 구원받습니다. 왜? 나는 띠 중에 띠, 검은 띠 두 개나 치고 목사기 때문에. 나는 수준이 높고 당신은 낮으니까. 당신은 나를 선생이라 생각하고 배워야 됩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이 교회에 담임하라고 맡겨줬기 때문에 이 목사의 말을 위반하는 것은 그것은 당신은 초보에 불과하거나 탈락할 여기가 있습니다. 이 교회는 바로 이 목사한테 맡겼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거 거의 우리나라 한국교회 100% 가까이 유지합니다. 그런 주장을 하는 근거는 바로 히브리서 5장 이 대목에서 나왔다는 사실, 그러니 이 대목이 얼마나 위험한 거예요.

노골적으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고, 그 다음에 노골적으로 보다 더 못된 게 있어요.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노골적으로 내가 목사니까 내가 선생이니까 너는 나한테 배워라, 노골적으로 하는 사람 같으면 이건 사기지만 따지고 보면 솔직한 사기인 반면에, 숨어있는 것은 찾아내기가 더 힘들어요. 숨어있는 사기꾼들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지방교회, 워치만리, 한국교회의 비리를 언급하면서 영적인 깊이를 언급하는 사람들, 영적인 깊이, 깊이 언급을 해서 그렇게 이야기함으로서 니는 낮고 나는 깊다는 것을 언중에 대조해서 기죽이는 사람들, 이거 말리는 시누이입니다. 그 사람들도 이 부분 이야기합니다. 제가 이 말씀 주는 것은 너무 딱딱하기 때문에 여러분의 이빨 깨질까봐 내가 못하는데, 이것은 당신들 재끼고 우리 아는 사람들끼리 합시다. 이렇게 돼 버리면 그것은 하나의 특수 엘리트 신앙이 돼요. 엘리트 신앙이 되게 되면, 그게 영적 계급화가 돼 버립니다. 그게 더 얄미워.

그러면 이 말씀이 무슨 뜻이냐 하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신앙에 깊이 있고 넓이 있는 그 능력은 우리 개인의 자질이 아니에요. 성령께서 하실 몫이지, 우리가 어떤 자질을 소유하는 게 아닙니다. “야, 니는 얼마나 공부했나?” “나는 초급반이야.” 초급반, 중급반 하는데 그것은 쥐고 있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성령은 우리의 소유대상이 아닙니다. 성령이 우리를 다루지요. 어떻게 다루느냐, 요 말씀이 피어나오도록 다루십니다. 성령께서 초보로 다루면 초보고, 깊이 있게 다루면 깊이 있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에게는 어떤 개인적인 자질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왜? 모두 다 무능하다는 점에서 공통점입니다. 모두 다 어떤 누구도 깊이 있는 영적사람이 되지 못하는 점에서는 아주 공평합니다. 주께서 이 말씀을 다루는 측면에서 어떤 사람은 초보로 다루시고 어떤 사람은 깊이 있게 다루시며 그것은 성령께서 그렇게 한 조치지 내가 깊이 있다. 네가 초보다. 라고 단정 지으면 절대로 안 됩니다.

아무리 복음을 많이 알아도 자기가 초보라는 것을 느낄 때가 있어요. 그게 증거입니다. 아무리 깊이 있더라도 바보야, 내가 그것도 모르고. 그 쉬운 것도 모르고. 미쳤어. 내가 초보인데, 초보를 부를 때 나를 부르소서. 대전공부하며 내가 은혜 받았어요. 죄인 오라 할 때 저를 부르소서. 다른 버전으로 바꿉시다. 초보 부를 때 저라고 손드세요. 초보 부를 때에. “여기 초보누구지?” “접니다.” “멜기세덱 모르는 사람 누구지?” “제가 모릅니다.” 손드세요.

성경의 모든 구절을 알게 하신 것은 사람의 설득력이 아니고 오직 성령의 역사입니다. 일하심입니다. 우리는 초보정도가 아니고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돌아서면 성령이고 뭐고 기억도 안 나요. 성령도 기억 안 나는데, 우리는 내 아르바이트 하기 바빠서 다 잊어버려요. 손님 하나 더 모셔야지, 성령 생각하다가 손님 놓치면 손해인데요. 안 되지요. 손님에게 성령에 대해서 아십니까? 하면 가버리지. “아, 나 무서워라, 신천지인가 보다.” 도망간다니까요.

모든 성경은 우리는 죽을 때까지 초보에요. 초보인데, 그 초보라고 여기는 사람이 깊이 있는 이유가 뭐냐 하면, 내가 이 말씀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 그대로가 나한테 와가지고 나를 덮쳐버리는 거예요. 우면산 산사태처럼. 아파트에서 저녁하고 있는데 갑자기 흙더미 들어와 버리면 아파트가 아니고 흙더미지요. 말씀이 산사태 벌어져가지고 “니가 초보야” 라고 나서면 “맞습니다.”하면 그만인 거지, 초보가 아니고  멜기세덱 압니다. 라고 나오면 안 돼요. 말씀이 그대로 우리에게 도화지로 사용해서 그림을 그린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림그리도록 전문가에게 맡깁시다.

말씀의 전문가는 주님이고 성령이지 우리가 아닙니다. 초보로 다루면 초보고, 깊이 있게 다루면 깊이 인데, 한 번 깊이 있다고 초보로 안 되는 게 아니고 깊이 있다가 초보 되고, 다만 멜기세덱에 대해서는 지금은 너희들은 뭐다? 모르니까. 왜 몰라요? 안 가르쳐 줬으니까 몰라요. 가르쳐 줘도 잊어버리면 도로 초보가 돼버리고. 멜기세덱이 누구더라?

우리교회 교인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실례지만 예수님이 누구시죠? 딱 물어보면, 단번에 나올 이야기의 순발력이 떨어져요. 단번에 뭐라고 이야기할지 몰라요. 평소에 늘 주님 생각하는 거 같으면 나오는데, 평소에 24시간 늘 주님생각 못하거든요. 수능 쳤다하면, 우리 애는 어떻게 했는데. 우리 애는 학원도 안 다니고 준비하려고 하는데 성령이 누구십니까? 물으면 갑자기 모르잖아요. 그 때 그 순간 초보에요. 말씀에 대해서 관심 없을 때 초보고 말씀이 깊이 있으면 이 말씀 전체를 초보라고 아는 그것이 말씀 깊이가 있는 겁니다. 기꺼이 초보가 될 수 있는 용의가 있으니까.  주의 뜻이라면 얼마든지 초보가 돼도 좋다. 그저 말씀의 사람만 된다면 황공무지로소이다. 이리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뒤부터는 6장 같은 경우는 멜기세덱에 관한 것이죠. 왜 7장에 멜기세덱이 나오니까. 그러면 6장에는 왜 나왔느냐 말이지요. 6장 이야기는. 아까 이 강의 제목이 뭐라 했던가요? 투쟁하는 형상. 창세기 14장 18절에 보면 멜기세덱이 나옵니다. 성경에 처음 나오는데. 창세기1장부터 죽 읽어 나오는 사람이 14장에 딱 와서 멜기세덱이 나온다면 순서대로 읽어 간 사람은 누구든지 멜기세덱이 등장한 걸 알지만 이게 중요한 인물이란 사실은 알 수가 없어요. 그 뒤에 반복해서 안 나오니까. 뭐든지 반복 안 한 것은 안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거든요. 아브라함은 뒤에 계속 나와요. 아브라함, 아브라함, 아브라함. 아브라함이 중요하고 멜기세덱은 그냥 아브라함이 만났던 어떤 아저씨정도. 어느 고을의 목사정도. 제사장 정도로 알았지 멜기세덱이 그렇게 중요한 인물이라 하는 것은 신약 때까지는 모르지요.

18절에 보면, 무슨 왕 멜기세덱이 나오지요? ‘살렘 왕’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 왕 멜기세덱을 줄여서 살렘 왕, 멜기세덱이 누굴 만났다? 아브라함을 만났다. 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사람을 찾아오게 되면 그 사람의 운명은 언약에 맞추어서 이게 각색이 돼있습니다. 각색정도가 아니라 확정이 돼 있어요. 지금은 새 언약 시대잖아요. 우리의 운명은 확정돼 있습니다. 니가 아무리 오래 살아도 니는 죄인이고 의인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고. 예수님의 의가 니 속에 성령을 줌으로서 너는 의인되었다. 이미 우리는 이름 다 떼고 남녀노소 다 떼버리고 공통적으로 다 똑같습니다.

죄인 오라할 때 나를 부르소서. 전부 다 똑같은 거예요. 그게 지금 이 시대에요.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이나 다 떼어버리고 목사 장로 다 떼어버리고 우리는 그냥 죄인이고, 죄인은 예수님의 용서로 구원받는데, 국회의원해서 구원받는 사람이 있는 줄은 모르겠지만, 국회의원해서 구원받는 사람은 국회의원하면서 죄를 알라고 하는 것이고 신학박사해서 구원받는 사람이 있다하면 혹시 입니다. 그 사람은 신학박사 하는 그것이 죄인 것을 알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목사하면서 구원받는 것은 목사 이 자체가 죄라는 것을, 목사를 해야 알 수 있기 때문에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멜기세덱이 살렘의 제사장하는 것이 뭐고,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선택받는 이유가 뭡니까? 바로 새 언약 관점에서 보면, 제가 너무 앞서 얘기해서 죄송합니다. 하고 난 뒤에 물어야 될 건데. 새 언약은 의인되신 예수님과 그 다음에 죄인된 택한 자의 관계잖아요. 이게 새 언약이잖아요. 맞지요? 그냥 의인이에요. 십자가니까. 저주니까. 죄인은 무조건 저주고 부활했으면 무조건 의인이고 이 관계밖에 없어요.

그렇다면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의 관계는 뭐냐 말이지요. 의인과 죄인사이는 새 언약의 관계고,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의 관계는 아브라함 언약이 이루어집니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을 만난 것은 행운이죠.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을 만난 것은 행운입니다. 그런데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난 건 행운일까요? 행운 아닐까요? 역시 행운입니다. 둘 다 만난 것은 서로가 다 행운이거든요. 아까 김춘수의 꽃 이야기했지요. 꽃을 부를 때 꽃은 나에게 의미 있지만, 꽃의 입장에서 보면 꽃이 우리보고 “아이고 꽃이 예쁘다.“ 하는데. 왜냐 하면, 의미라 하는 것은 나를 닮을 때 의미가 주어지거든요. 꽃을 꽃이라 보지 않고 인간으로 볼 때 우리한테 의미가 있고, 꽃은 자기가 꽃이라면 우리를 같은 꽃으로 봐야 꽃에게는 의미가 있어요. 서로 상통의 의미를 줘야하기 때문에.

멜기세덱의 입장에서 아브라함이 필요하고,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멜기세덱이 필요한데 아브라함은 뭐냐 하면, 아브라함 자손을 낳습니다. 아브라함 자손은 아브라함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언약을 통해서 나온 겁니다. 이건 안 어렵지요?

아브람은 그냥 아브람이에요. 아브라함이 안 된다니까요. 그런데 장차 올 메시아는 아브람 자손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자손이 오는 겁니다. 그러면 아브람의 자손은 없어요. 그런데 아브라함의 자손은 이삭이 나옵니다. 이삭은 누구 자식이냐 하면, 아브람 자손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언약의 자손이지요. 아브라함의 언약의 자손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아브라함 언약이 있다면, 아브라함은 아브라함 쪽으로 자손을 이루기 위해서는 멜기세덱의 입장에서는 아브라함이 행운입니다. 왜? 멜기세덱의 사는 방법은 자기에게 달린 게 아니고 아브라함이 누구를 낳아줘요? 이삭을 낳아줘야 자기가 살거든요. 그래서 아브라함 언약 속에서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은 하나가 되어야 됩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게 아니고 새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의인되시고 우리는 죄인 되어서 만나야 뭐가 이루어집니까? 새 언약이 이루어져요. 새 언약이.

하나님도 언약의 하나님이라서 언약을 위해서 하나님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언약을 위해서 하나님이 있어요. 예수님도 언약을 위해서 있습니다. 아버지 언약을 위해서 있는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이 히브리서6장 들어가기 전에 분명히 제가 하는 겁니다. 히브리서6장 들어가게 되면요, 한 번 비췸을 얻은 사람이 성령의 은사를 받고 빛을 얻었으면 멸망합니까? 아니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만날 이 질문을 수십 년째 이 질문을 하고 있고 나는 수십 년째 답변을 하고 있어요. 시작이 잘못된 거예요. 시작이 언약 중심이 아니고 누구 중심입니까? 나 살겠어요? 죽겠어요? 어디 미아리 점쟁이입니까? 살겠다! 어디 부채도사입니까? 질문을 할 때 성령이 주신 질문을 하는 게 아니고 자기가 출발점이 되어서 자기가 사는 것을 염두에 두고 어떻게 나에게 이득이 되겠습니까? 죽어서 천당 가겠습니까? 이런 질문을 하는 거예요. 점쟁이한테 가가지고 우리 딸이 혼사되겠습니까? 우리 딸이 시험 잘 치겠습니까? 물으면 점쟁이가 하는 말이 그거 하지 말고 십자가 믿으세요. 하는 점쟁이 못 봤잖아요. 새 언약이 중요하지 당신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못 하잖아요.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위해서 있어요. 그럼 우리도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예수를 믿게 된 거예요. 그러면 뭐가 중요합니까? 내 살기 위해서 믿는 예수는 애초에 언약에 해당이 안 됩니다. 언약에 해당이 안 되면 마귀에 해당되는 거예요. 우리는 마귀가 나보고 대신 질문하고, 질문한 질문을 우리가 주님 앞에 내뱉습니다. 히브리서 6장4절 봅시다. 하도 유명한 질문이 돼가지고.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되어 있잖아요. 현재 예수님을 십자가에 욕보이는 사람은 구원됩니까? 구원 안 됩니까? 하는 질문입니다. 요 질문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못 박아 죽은 사람은 지옥 갑니까? 구원받습니까? 그런 질문으로 막 이어지거든요. 주님의 십자가 목 박아 죽은 사람, 거기에 반대되는 사람은 지옥 갑니까? 그 사람은 구원받습니까? 구원 못 받습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찬성을 한 사람은 다 지옥 갑니까? 아니면 그 중에서 구원받은 사람 있습니까? 없습니까? 구원받은 사람 있지요. 사울도 그런 사람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 히브리서 6장 6절 말씀과 다르네요. 다른 게 아니고 니가 질문을 잘못한 거예요. 질문을.

새 언약 시대 되면, 새 언약은 이미 확정됐잖아요. 새 언약시대에 확정됐으면 옛 언약적인 그런 의식가지고 질문을 하면 안돼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취소가 안 되거든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취소가 안 되는데, 내가 예수님 십자가 믿고 타락해도 구원받지요? 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도 이제는 다시 취소될 수 있지요? 라는 질문과 동일한 질문이 되는 거예요. 확정된 것에 대해서 우리가 동의하지 않은 상태에서 예수님의 피를 이용해서 자기가 어떻게 살아 보겠다 하는 것은 아직도 언약에 포함이 안 된 사람이에요. 그저 피 찍어 발라서 구원 받겠다 하는 사람은 자기 생각이지 언약의 관점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예수님 피 흘리고 피 믿고 난 뒤에 다시 죄 지으면 구원받습니까? 안 받습니까? 라고 질문하는 것은 결국은 내 생각에서 다시 나한테 이야기하는 거니까 그것은 애초부터 구원하고 관계없던 인간이 구원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동의할 수 없는 거예요.

성경공부 마치고 난 뒤에 서울대학교 시음회에서 주스를 팔러 오겠다는 거예요. 약을 파는지 뭘 파는지 오겠다는 거예요. 저한테 전화를 했어요. 성경공부하고 난 뒤에 10분간 주시면 주스를 판매할 수 있습니까? 했는데 제가 성경공부 참석하세요. 라고 했지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 그 생각을 잊어라 이 말 아닙니까? 지금. 그 사람은 성경공부를 이용할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런 인간들이 이걸 가지고 질문을 해대니 질문자체가 잘못된 질문이에요.

말씀은 우리보고 이용하라고 있는 게 말씀이 아닙니다. 말씀은 오히려 이용당하라고 있는 게 말씀이에요. 히브리서4장 12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그렇다면 이 말씀이 맞다하면, 6장에 있는 이 말씀가지고 현재 우리가 뭐든지 예수님을 이용하려는 우리의 혼과 육을 지금 쪼개는 작업이 있는 사람 같으면 이런 질문을 할 수가 없어요. 마음껏 쪼개 주시옵소서. 다 쪼개주옵소서.

요번에 나온 ‘전도서 속의 그리스도’ 머리말에 ‘허무야, 같이 가자.’ 그 밑에 말에 읽어드릴게요. 무를 먹을 때 정말 맛있는 부분을 찾아내기 위해 칼로 깎아 들어가 보면, 나중에는 아무것도 남는 게 없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말씀을 하게 되면 결국은 남는 것은 뭡니까? 자기 자신밖에 없는 거예요. 그것을 말씀으로 잘라 들어간다면 결국 우리는 죽으면 사라집니다. 사라진다는 것은 없다는 뜻이에요. 처음부터 우리는 없는 존재에요. 없는 존재를 말씀을 말씀되기 위해서 잠시 이 땅에서 1900 해놓고 주민등록 앞에 있지요. 이 땅에 잠시 태어났다가 없어지는 거예요.


잠시 태어난 인간이 잠시 태어난 인간보고 니는 택함 받지 못했다고 고함지르는 겁니다. 그만큼 기대가 많으니까. 결국은 뭐냐, 결국 정답은 뭐냐, 참 우리가 너무 오래 나타나 있어요.  빨리 무대에서 퇴장해야 되는데. 앞으로 더 오래 살면 그것보다 더 심한 말도 있는 문제거든요. 참, 주님께서 좋은 따님 주셨습니다. 그런 쓴 소리하기 위해서 내 본색을 유감없이 드러내기 위한 기회로 삼았으니까. 그래서 후회하지 마세요. 왜냐 하면, 후회한다는 자체가 아직도 자기한테 미련이 있다는 뜻이거든요. 아, 그것만 안했으면 괜찮은 존재인데. 이리 된다니까요.

그러니까 이 새 언약시대에서 아직도 자기 생각하고 있잖아요. 주께서 이런 말씀을 주신 것은 더 이상 십자가 앞에서 더 이상 너는 없다는 겁니다. 십자가만 있으면 되지, 니가 꼭 십자가 때문에 살아날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십자가만 잠시 나타날 우리 속에서 죽을 때까지 나타나면 그만이지 용도가 다 끝났으면 우리는 폐기처분하면 되지 말씀이 주관할 문제지 우리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 말이지요.

아브라함에 누가 달라붙었습니까? 멜기세덱이 달라붙었지요. 멜기세덱이 일부러 찾아온 거예요. 그리고 아브라함은 자손을 낳습니다. 계속 자식을 낳잖아요. 멜기세덱은 달라붙고 떨어져서 관람하고 있다가 나중에 아브라함이 낳은 마지막 자손이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예수님과 멜기세덱이 하나가 돼버려요. 그동안 아브라함은 이용해 먹은 거예요.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이삭, 야곱, 야곱에는 아들이 몇 명입니까? 12명. 12명이 얼마나 몸부림 치고 살려고 했습니까?  그 모든 것을 멜기세덱은 지켜보는 거예요. 이 모습이 바로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미리 구약에다가 빨간 양탄자를 깔아놓았다는 그 취지를 멜기세덱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아브라함을 만났고 헤어진 것 같지만 헤어진 게 아니고 멜기세덱이 품고 있던 메시아의 그 본질을 이제는 누가 펼치는가? 멜기세덱은 가만히 있고 누가 펼칩니까? 아브라함이 역사 속에 남기면서 결국은 끝이 바로 멜기세덱 그 분으로 일치시키는 겁니다.

히브리서7장3절에 보면,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멜기세덱은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서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했잖아요. 없다. 없다. 전부 다 없다 예요. 그것에 비해서 아브라함은 있다. 있다. 있다 예요. 있다는 것은 없음을 위해서 봉사해야 된다, 이 이야기입니다. 지금 우리는 있잖아요. 없는 분을 위해서 봉사해야 되는 거예요.

주님은 지금 본적도 없고 의료보험증도 없어요. 없어요. 없지만 있는 우리가 없음을 위해서 존재했다는 것이 골로새서 1장 15장 16절 말씀입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그 분을 위하여 우리가 만들어졌다 이 말입니다. 없는 분을 위해서 있는 우리가 만들어진 거예요. 우리가 만든 건 아니고 투쟁하는 형상, 주님께서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증거 하라고 투쟁하는 겁니다.

히브리서6장에서 강조하는 것은 십자가입니다. 히브리서 전체가 마찬가지지만. 십자가 시대의 의미를 보여줄 수 있는 구약의 유일한 사람은 멜기세덱입니다. 왜, 그것은 지상에 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잠시 등장했다가 사라지잖아요. 아비도 없고 족보도 없고 이것이 새 언약에 부합되는 새 언약에 신분, 새 언약의 성도의 신분과 부합됐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 천사와 같이 방불 되는 천사와 유사한 사람이다. 이러한 존재입니다. 천사와 유사한 사람.

그래서 오늘날 이 시대의 우리들의 사고방식은 내가 천사다. 어차피 우리는 천사처럼 돼요. 나중에 죽어서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안가고 우리는 결국 천사와 같이 된다 했으니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잖아요.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라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천사와 같이 된다 하니까. 그러한 인식을 우리가 스스로 가져야 되는 겁니다. 그런 가짐을 위해서 이 세상에 우리 육신이 있잖아요. 그럼 육신이 있다는 것은 이건 있음이고 눈에 보이는 것이고 눈에 보이는 것은 결코 눈에 보이는 자체가 그 목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뭔가 배후에 있는 분을 위해서 지금 우리는 무대 밖에서 그림자 연극을 하고 있다, 이리 보시면 되는 겁니다. 

따라서 어떤 성경을 해석하더라도 멜기세덱을 거론하는 이유는 현재 너 자신을 위해서 말씀이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언급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뭡니까?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분의 맹세, 보이지 않는 분과 보이지 않은 사이에 일어난 맹세를 이루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이용한 것처럼 이제는 너희를 이용하겠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아브라함 언약을 위해서 아브라함이 이용당했다면 오늘날 우리는 새 언약을 위해서 십자가 사건을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서 철저하게 지금 이용당하고 있는 중입니다.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그 맹세의 특징이 뭐냐, 거짓말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18절 읽어보세요.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하나님은 거짓말 못한다고 했지요. 하나님은 거짓말 못한다고 했는데 제가 대전강의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속인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해명하라고 썼는데, 내가 문재인도 아니고 내가 왜 정상회담 초고를 내가 어디 위반하지 않으려고 해명해야 돼요? 내가? 참고인 조사를 받아야 됩니까? 8시간 동안.

안티, 반 메시아, 다른 메시아로 오시는 겁니다. 거짓말하지 못한다고 하니까 우리는 진짜 거짓말인지 아닌지를 측정에 나설 수 있는 입장이 못 돼요. 우리는 도리어 우리에게 거짓말하는 하나님으로 찾아와 가지고 참말이 어떻게 너에 의해서는 거짓말이 되는 원인이 바로, 문제는 바로 니한테 문제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그런 참말로 주께서는 오시는 거예요. 그런 맹세로. 그러니 맹세를 우리가 “야, 주의 맹세는 믿겠다.” 이런 것이 아니고 “아이고, 이런 맹세는 거짓말이야.” 라는 식으로 진짜 맹세가 우리에게 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참 어려운 문제가 있는 게 거짓말이라고 다 주의 뜻입니까? 그건 아니거든요. 거짓말이 섞여서 들어오면 어느 것이 진짜 거짓말인지, 우리는 가짜 거짓말인데 진리가 거짓말 티를 내는 것인지 분별할 수 있는 자질과 능력이 우리한테는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판정하느냐, 히브리서 6장6절에 보면 뭐냐,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은 사실이 맞잖아.” 이리 되는 거예요. 어쨌든 어떤 아저씨가 33살 아저씨가 죽었잖아! 죽었는데 그 사울이란 사람은 그것은 그냥 정치범이라, 예수라는 이름의 자칭, 자칭 메시아고 그래서 나는 자칭 메시아를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겠다는 것이고 그 뒤에 바뀐 사도바울은 뭐라고 합니까? 자칭 메시아가 자칭 메시아가 아니고 “아이고, 그게 진짜더라.” 이 말이죠.

그러면 누가 가짜에요? 하나님 잘 믿는 내가 한 번도 예수를 만나본 적 없기 때문에 나는 가짜인 줄 몰랐는데 막상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만나보니까 가짜가 따로 없더라. 내가 살았던 모든 여호와, 삼위일체, 내 뱉는 모든 것이 메시아가 전부다 가짜에서 나온 죄들밖에 아니라는 사실을 안겁니다. 죄들뿐이라는 사실을 자기가 비로소 알고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한 겁니다.

‘나는 항상 가짜다.’ ‘all unright' 그러니까 가짜를 통해서 진짜를 성립시키는 그 하나님의 솜씨를 보세요. 놀랍지 않습니까? 가짜로 가짜를 가지고 천국을 보내시는 이 놀라운 솜씨! 얼마나 대단합니까? 우리는 할 말을 잊어버립니다. 살아가는 게 가짜인데, 나 밖에 모르는데 이 가짜를 주님 중심으로 살아가야 될 천국 사람으로 바꿔주시는 이 놀라움. 그게 바로 말씀의 위력입니다.

그러면 그걸 어떻게 하는가, 그게 2~4절입니다.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갈찌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이게 가짜입니까? 진짜입니까? 진짜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진짜 하늘의 은사를 맛본 게 진짜지요. 진짜 맞잖아요. 그렇죠? 고거 가짜입니다. 분명히 성령에 참예를 받고 은사를 받았으니까 누가 때려서 죽더라도 나는 간다. 라고 여겼던 사람에게는 뭐가 누락됐어요? 십자가 새 언약이 누락 됐어요. 이 시대가 무슨 시대입니까? 새 언약 시대에요. 십자가로 결말지어야 되고 십자가 보이는 그 막장으로 가야될 걸 십자가 보기 이전에 중간에 새서 중간에 빠져버렸어요. 나는 구원받았다! 이러고 중간에 새버렸어요. 6.25때 폭탄 맞아 죽는데 나는 살았기 때문에 나 이제 부흥사다! 이거 옆길로 새버렸어요. 이것도 죄입니다. 하면 그 사람은 살았어요. 왜? 새 언약이 나와야 되니까.

아들, 딸에게 나는 못된 소리했다. 나는 나쁜 여자다! 이건 안돼요. 나쁜 여잔데 그래도 구원받았다! 이리 되어야 돼요. 이게 구원 받았어요. 그러니 걱정할 거 하나도 없어요. 원래 그래요. 원래 그렇고 앞으로 더 심하게 나올 수 있어요. 자기가 소스라치게 오그라들도록 깜짝 놀라요.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할 수도 있어요. 살날이 창창하니까. 어떤 경우라도 후회하지 말라했지요. 제가. 더 나아갑니다. 반성하지 마세요. 막살고 반성하지 말고 막살고 후회하지 마시고 그거 회개랍시고 하지 마세요. 그냥 회개 당하세요. 회개하지 마시고 회개당하시고 기도하지 마시고 기도 당하시고. 후회하지 마시고 후회 당하세요. 항상 수동형입니다. 항상 수동형으로 살아야지 능동적으로 나서겠다면 그건 안 됩니다.

예수님 십자가 증거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 주의 주권이야기하면 큰일 날 이야기입니다. 주권이 아닙니다. 새 언약입니다. 십자가 언약입니다. 우리 앞에는 모든 것이 죄가 되고 따라서 압니다. 성도는 압니다. 성도는 내가 두 번 세 번 망해져도 안 망할 때보다 똑같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요. 후회하고 그 짓하고 후회하고 또 그 짓해도 그 짓 안하고 10년을 버텨도 열 번한 거 하고 똑같이 십자가 앞에서는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 십자가는 변경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런 질문을 안 해요. “그런 짓을 해도 망합니까? 안 망합니까?” 그런 질문 자체가 나올 수 없는 시대에 우리가 도립한 거예요. 왜, 우리는 이용당했으니까. 이용당한 자가 왜 그리 말이 많겠습니까? 이용당한 자가.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야구를 너무 잘해요. 이 승룡 코치 아십니까? 우리는 복음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건 모르죠. 이 승룡이가 잘 치면 일본 가서 약 50억 받을 수 있는 선수인데 우연히 사기꾼을 만났다 칩시다. 사기꾼이 “너는 그렇게 해가지고는 야구선수는 끝났어. 그냥 백수야.” “아, 그러면 어쩌면 좋습니까?” “내가 연봉 한2000천만원 줄게. 계약하자.” “아이고, 고맙습니다. 내 생명의 은사입니다.” 그래, 2000받아도 니 실력으로는 2000도 가해. 속으로 웃겠지요. 니는 일본가면 50억 짜리야. 알지만 사기를 치기 때문에 2000만원도 내가 애써서 준거야. 하고 속으로 웃지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선생님, 제가 지금 폼을 이렇게 치면 됩니까? 어떻게 반성하고 어떻게 회개하면 됩니까?” 할 때 “아이고, 니 맘대로 해!”하잖아요. 이미 새 언약을 모르는 상태에서 제가 타락하면 돼요? 안 돼요? 타락 안하고 버티면 구원받습니까? 라는 말 자체가 십자가를 모르는 사람한테는 이게 해당된다? 안 된다? 아무 소용없는 짓이에요.

십일조를 떼어 먹었습니다. 떼먹은 거 다시 내년에 합해서 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이미 새 언약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런 질문 자체에 대해서 “아이고, 십자가만 아세요. 그런 소리하지 말고.” 이리 되어야 돼요. “제가 어떻게 애를 때렸는데 어떻게 나쁜 짓을 했는데 두 번 다시 안하고 제가 1년 동안 회개하면 되겠습니까?” 이런 질문 자체가 나온다는 것은 시대가 새 언약시대라는 것을 모르고 옛 언약시대인 줄 알고 구약인 줄 알고 그렇게 하는 겁니다.

구약은 뭔가 흐름이 있어요. 아브라함의 흐름이 있습니다. 그 흐름은 어디서 나오는가 멜기세덱에서 나왔어요. 멜기세덱에서 나와서 멜기세덱으로 옮겨가는 흐름이 있습니다. 그 흐름을 놓쳐버리고 멜기세덱을 놓쳐버리고 아브라함은 착했다. 우리도   착하자. 세상에 야곱도 착하다. 우리도 착하자. 이렇게 나와 버리면 뭘 놓친 거예요? 진짜 그 당시에 아브라함만 쳐다보고 아브라함의 언약을 놓친 거예요.

예수님만 본받자. 예수님만 보다 예수님의 새 언약을 놓쳐버렸는데 안 되지요. 그런 사람은 이런 질문 자체가 그건 이미 안 되는 거예요. 그것을 가지고 8절에서는 뭐냐, 가시와 엉겅퀴라고 하는 거예요. 새 언약시대에 이런 저주받을 짓들을 그런 식으로 계속 한 거예요. 새 언약도 모르고 자기 생각, 자기가 어떤 구원의 이득을 볼 생각에 거기에 매진하고 있는 겁니다.

5절에 보면,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은 우리 인간하고 타협이나 흥정하지 않고 철저하게 이용한다. 이용하는데 어떤 사람들을 이용합니까? 성령의 은사를 맛보고 버리더라도 그 사람은 나한테 항의할 수 있다? 없다? 항의 할 수 없어요. 왜 항의 할 수 없느냐 하면, 하나님은 우리 실력보고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하고 흥정합니까? 멜기세덱의 반차, 멜기세덱의 계열, 예수님과 의논해서 구원을 결정했기 때문에 우리가 타락하나 안하나 상관없이 우리하고 안 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배제한다고 해서 그 사람은 섭섭할 일이 있다? 없다? 섭섭할 이유가 없어요. 

이 비정하고 냉정한 시대가 새 언약시대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택한 자만 건지는 새대! 그 사람은 십자가라 하는 것은 절대로 양보 못하는 것을 능히 알기에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타락하고 안하고 의미 없음을 성도는 압니다. 왜, 십자가만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 타락 같은 것이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지가 타락했다고 생각하는 그 타락은 그건 본인이 잘못 오해한 타락이에요. 사람이 아무리 나쁜 짓해도 타락이 안 됩니다. 본인이 타락에 대해서 진정한 경험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래요. 한 번 성령 받은 사람은 타락이 성립 안 되기 때문에 자꾸 가짜 타락만 자꾸 염두에 둔다면 그것은 의미 없는 거예요. 기분 좋지요. 정말 세상에 이런 복이 어디 있습니까? 타락해도 타락이 안 되는 시대! 그런 사람의 존재가 된다는 사실.

그런데 가짜는 관심이 누구한테 있습니까? 내가 타락하겠느냐, 타락 안 하느냐,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이건 지가 셰익스피어도 아니고 만날 문제가 주님 생각 안하고 주님과 아버지와 이야기 끝났다는 생각은 안하고 만날 내가 어떻게 대체하느냐에 따라서 운명은 내가 결정한다는 식이에요.  내 계시는 내가 만든다. 이게 인간들의 생각 아닙니까? 내 살릴 방책은 내가 만든다. 이게 인간들의 잘못된 생각입니다. 인간이 못 만들어요. 만들 필요도 없고. 아브라함이 이삭 낳고 싶어서 낳는 게 아니거든요. 아브라함은 멜기세덱 때문에 만나고 난 뒤에 아이를 자꾸 낳아야 돼요. 낳아서 그 자식이 결국 멜기세덱과 만나도록 해줘야 그 아브라함의 반열이 곧 멜기세덱의 반열이 되거든요. 소급적으로 해석하면 그렇게 되는 거예요. 하늘의 철도가 땅에 철도를 깔았다 보면 돼요. 땅의 철도는 하늘 철도의 그림자라 보면 돼요. 하늘에는 구름 떠있고 땅에는 그 그림자가 가는 거예요.

아브라함의 자손 낳는 모든 과정과 또 이삭이 야곱 낳는 그 과정 속에는 그게 땅의 일이 아니고 사실은 하늘의 언약이 개입된 도장 파듯이 하늘의 계시가 예정된 계시가 미리 후벼 판 거예요. 도장 파듯이, 이름 파듯이, 이름을 새겨 보니까 다 같이 그 이름이 예수라. 다 예수이름이 새겨진 거예요. 멜기세덱의 이름이 새겨진 거예요.

끝으로 하나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이용당했어요. 이용당하기 때문에 저는 어떻고 라는 말 할 자격이 못되고 마음껏 주님에 의해서 이용당할 때 이미 우리는 거기서 천국생활은 이미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천국생활 하는데 이 세상자체가 지옥이기 때문에 애굽의 영향을 받잖아요. 이씨~ 나는 뭐 예수 믿고 얻은 것도 없고. 이런 생각하면 이용당한 게 아니고 수동적이 아니고 갑자기 누가 됐어요? 내가 평소에 예수님을 이용하려 하다가 잘 안되니까 입이 대발 나와 가지고 “나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도 됩니까?” 주님께서 “뭐가 비참한데?” “지금 내 모습 보세요. 비참하거든요.” “비참한 것은 잘 먹고 사는 이건희가 비참하다.” 그들은 복음도 모르지 성령도 안 받았지. 진짜 비참한 사람을 보지도 못했나? 복음 모르는 사람들이 비참한 사람들이에요.

그게 마지막 만찬이거든요. 마지막 그거 먹고 죽어요. 그들은 마지막 만찬 먹고 죽어요. 그들은 이 세상사는 게 그게 전부에요. 백날해도 나중에 요양병원에 다 모입니다. 잘 먹으나, 못 먹으나, 잘 나나, 못 나나, 요양병원에 가면 거기 다 있어요. 물론 요양병원도 차이가 있어요. 200만원짜리도 있고 다 있겠지요. 그러다가 죽을 때가 되면 객기 부리는 것은 집사고 장로고 관계없이 전부 다 똑같이 그렇게 다 되는 겁니다.

한 가지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이용당하는 거 죽을 때까지 주님 앞에 이용당해서 나의 증인되지 마시고, 주의 증인되시기 바랍니다. 새 언약 시대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저희들 이용하셨습니다. 안 봐도 되는데 돈 생기지도 않는 말씀을 봤습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통해서 세상의 전부를 알게 하시고 우리는 잠시 나타나 사라진 존재인 것을 실감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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