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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13 19:48:30 조회 : 2976         
안산 5월 12일 강의 이름 : 이근호(IP:)

http://222.231.1.74/~woorich/study/ansan/ansan060512.mp3
http://222.231.1.74/~woorich/study/ansan/ansan060512.hwp

 우리교회(IP:122.♡.57.66) 06-11-14 15:01 
요한복음 안산강의 (060512 이근호목사 안산나라장로교회)

오늘은 요한복음 18장 36절을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8: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여기에 지구가 있고 이 나라 여기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나라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이 지구나라 외곽에 있습니다. 외곽에 있으면서 이 나라를 주시하고 관찰합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예수님의 나라는 이 바깥에 이렇게 포진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이라 할때 세상을 땅이라고 하는데요. 이 우주라도 땅인거예요. 이 물리의 세계 온 우주를 다 땅이라고 합니다. 산위에 있는 것을 하늘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저 구름이 떠 있는 것을 하늘이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다 땅에 속합니다. 안드로메다 성운 있잖아요. 그것도 다 땅이예요. 달도 해도 다 땅에 있습니다. 성경에서 땅이라고 할때는 현재 있는 이 물질적인 세계가 다 땅인데 예수님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이 땅의 세계 바깥에 있습니다. 혼동하지 마세요.

그런데 사람들이 교회와서 복달라, 내 남편 취직시켜 달라는 이런 소리를 했는데, 예수님은 이땅에 관해서 관심이 없어요. 왜냐하면 이땅은 하늘에 의해서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망을 당해야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소돔과 고모라에 와서 약국만들일이 없잖아요. 거기에 무엇인가를 건설하는 것들이 예수님에게는 다 의미가 없어요. 소돔과 고모라는 불심판의 대상일뿐입니다. 유황불이 떨어질 현장이예요.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에는 유황불이 떨어지는데, 그 소돔과 고모라가 확장되었다고 보는 겁니다.

애기 이름이 용욱이라고 했나요? 용욱이가 어디서 태어났냐면 태어날때부터 소돔과 고모라에 있는 거예요.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이 세상에 장차 올 심판에 비하면 소돔과 고모라에 떨어진 유황불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나옵니다.

(마태복음 10:1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소돔과 고모라가 확장된 거예요. 외곽에 있는 하늘나라에서 유황불이 떨어지기 위해서 대기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 이 땅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8장 36절에 있는 “내 세상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는 말은 이 세상것 때문에 나를 찾는다든지 이 세상것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나를 찾고 나에게 기도한다든지 하는 이런짓을 제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는 이 세상의 외곽 즉 하늘에 있는데, 너희들은 자꾸 이 세상, 땅의 것을 가지고 하늘에 있는 예수님보고 참견을 해 달라는 식으로 요청을 하면 안된다는 거죠.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삼층천에 올라갑니다. 그 삼층천이 바로 천국인데, 그 삼층천을 본 뒤에 사도바울은 이런 고백을 해요. ‘내가 소원이 있는데 이 땅을 속히 떠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자랑할것이 있는데 내가 이땅에서 별볼일 없는 이점을 아주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땅은 소돔과 고모라처럼 유황불이 떨어질 장소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 장소에서 서성거린다는 자체가 사도바울 입장에서 상당히 불쾌한 겁니다. 사도바울의 소원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유황불이 떨어지는 이 보일러실에서 빨리 외곽에 포진되어 있는 주님계시는 곳으로 빨리 훌쩍 떠나고 싶은 겁니다. 딱 좋겠다는 거죠. 이것이 고린도 후서 5장에 나오죠. 빨리 이 옷을 벗어 버리고, 주님과 함께 만나고, 주님 나라에 참여하고 싶다는 식으로 나오죠.

(고린도후서 5:1-4)
1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2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3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4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그렇다면 왜 왔느냐는 거죠.  37절이 정답입니다. 여기에 보면 이 불심판을 받아야 될 보일러 실 같은 석탄때고 기름때는 이런 장소인 인간세상에 천국 곧 이 외곽에 계신 예수님께서 왜 오셨는가? 요한복음 18:37절에 보면, “곧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멸망받을 이세상에 왜 오셨다고 합니까? 진리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오신겁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하면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고 진리에 대해서 증거하러 오신겁니다.

이것을 그림으로 다시 그려보겠습니다. “독생자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내 이름을 믿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구원 곧 이 세상 말고 다른 세상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그 구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란 말을 우리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아이디어에서 끄집어 내서 이해하면 그것은 엉터리 구원이 됩니다. 구원이란 것이 어디서 와야 하느냐면, 예수님께서 가져오신 진리라는 바구니에 담아가지고오신 그 진리안에 있는 구원이 구원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구원은 구원이 아닙니다. 이것은 세상 살기 더러우니까 튈려고 하는 거예요. “아~ 씨! 어디 다른 세상 없나? 여기서 살려고 하니 진짜 힘들어 죽겠네. 아이고 그만 죽어서 좋은데 가고 싶다”. 이것은 기독교 신자든 불교신자든 모든 사람이 다 가지고 있어요. “아버님! 돌아가셔도 걱정하지 마세요. 구원의 나라가 있습니다. 이땅에서 고생하셨지만 이제 편히 쉬세요”. 이것은 일반인들 모두가 다 가지고 있는 마지막 카드입니다.

사람이 그만한 소망도 없으면 낙이 없잖아요. 그래서 젊을 때 죽어 버린 영화배우 이은주 맞죠? 그사람 죽었을 때 동료 연예인들이 “언니 걱정마세요. 이제는 좋은 나라 가서 쉴거야”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말이죠. 이번에 유명한 사람 또 하나 죽었죠. “김형곤 아저씨 이제는 편히 쉴거예요” 그런데 그 김형곤 아저씨는 불교신자라는 말이죠. 그런 구원은 다 땅에서 사람들이 상상을 하는 겁니다. 땅에서 상상을 하는 것을 제가 점선으로 표시하겠습니다. 점선으로. 땅에서 살기 힘들고, 더럽고 한데 인간은 누구나 죽는 것을 아니까 땅에서 떠나면, 인간은 흙인데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도 영혼은 살아 남으니까 그 영혼끼리 모인 어떤 집단이 있고 그 집단이 모인 장소가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49제를 하고, 천주교에서도 49제를 하고, 기독교는 추도예배라는 형식으로, 제사일 닥치면 제사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아이디어의 확장이고 연장입니다.

“이목사! 당신은 그것이 허구에 불과하고 인간의 아이디어에 불과하다고 장담하는데 뭘 보고그렇게 장담하는가?”라고 따질수 있는데 장담할수 밖에 없지요. 왜냐하면 천국이 뭔데요? 몰라요. “우리 아버지 천국에 갔습니다”할 때 천국이 뭐냐고요? 몰라요. “진리가 무엇입니까?” 몰라요. 들은바 없대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데요? 몰라요. 그저 하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간대요. 하나님이라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 낸거예요. 애들도 하나님을 다 알아요. 애들도 기도하라면 기도 잘해요. 다 하나님을 알아요. 길가다가 엎어지면 “아이쿠 하나님 아버지!”한다고요. 인간의 도덕심리에 보면 인간은 누구나 신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신의 존재를. 물리학 박사들도 신의 존재를 인정해요. 그것이 맨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은 인간들이 죽어서 좋은 나라 가려고 하는것을 아십니다. 그런데 그것을 적극 막습니다. 가봤자 지옥이거든요. 이 땅이 지옥인데 확장해 봐야 지옥이 아닙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이 전하는 진리에는 아무 관심이 없고, 죽어도 안죽는 그런 세계, 아픈것도 없고, 슬픈것도 없고, 괴로운 것도 없는 그런 곳을 만들어 줘야 하나님의 값을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땅에서 돈벌이 하게 해주고, 취직시켜 주고, 장가나 보내주면 그것도 참 좋은 하나님이지만, 하나님이 스스로 인간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자기가 만든 인간을 책임지고 영원히 안죽게 만드는 그것도 해야 하나님값을 하는 것이고 하나님답다는 겁니다. 그것이 여호와의 증인 아닙니까? 여호와의 증인은 무엇이 없느냐 하면 지옥이 없어요.  왜 없느냐 하면,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것 때문에 지옥이 없다고 주장해요. 지옥이란 것은 빼도 박도 못하게 영원토록 신의 저주를 받는 곳이잖아요. 쉽게 생각하면 자기가 만든 애 (용욱이?) 자기가 만든 애를 꽉 발로 밟으면서 “아프지? 너는 아프겠지만 나는 기분 아쭈 째진다. 나는 아주 기분 좋아”. 이것이 바로 지옥 아닙니까? 

자기가 만든 피조물을 발로 꽉 밟아서 고생 되게 시키고, 심지어 물 한방울도 없는 그런 세계라는 거죠. 나사로가 죽을 때 보니까 부자가 간곳이 그런 곳이예요. 거기에 집어 넣는데 그것도 천국가는 사람들보다 더 많이 집어 넣어 놓고 그걸 보면서 “어이 고생 쪼깨 해. 영원토록 너희는 못빠져나와. 영원토록 저주할 거야” 이렇게 즐기는 것은 일종의 정신병 환자같은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남의 불행을 보고 좋아서 춤을 추는 식이니까요. 그래서 여호와의 증인들은 연구하다 연구하다 결론을 내린것이 뭐냐하면, 지옥이라 하는 것은 그냥 겁주기 위한 것이고 사실은 지옥이란 없고 신은 사랑의 하나님이기에, 믿거나 말거나 결국에는 천국에 다 넣어준다는 식으로 믿는 사람들이 여호와의 증인입니다.

천주교는 뭐냐 하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기에 거의 대부분 천국에 넣어주는데 살아 있을 때, 철이 없어가지고, 밥먹고 살다 보니 예수 믿는것도 소홀해져서 몰르는채 죽어서 막상 연옥에 가보니까, 그게 고생이 보통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연옥에 가서 패자부활전 하듯이 “하나님 정말 잘못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뜨거운 것도 모르고 까불었습니다. 연옥에서 회개하오니 용서하세요”라고 하든지, 그런 조건이 하나 있고요. 연옥에 간 사람을 위해서 남아 있는 후손들이, 예수도 모르고, 성당에도 안다니던 사람들, 절에 다니던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후손들이 ‘우리 몇 대손 할아버지는 성당에 안나니고 절에 다녔으니 지금쯤 아마 연옥에 가 있을 것이니 내 기도로 후원을 하면 우리 교황님이니 신부님이 혹은 마리아 - 이 마리아가 보통 실력이 아니거든요. 마리아가?  - 가 힘써서 연옥에서 빼달라고 간곡히 기도하면 그게 통해서 연옥에서 빠져 나온다’는 겁니다. 그것이 천주교입니다. 

그런데 천주교에도 아주 독한놈이 있을거잖아요. 그런 독한놈은 지옥에 가는데 그것도 연옥에 갈지 지옥에 갈지 살아 생전에는 알수 없고 그것은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겁니다. 결국 무슨 뜻입니까? 모든 사람은 지옥가는 것이 아니고 일단 연옥에 갔다고 생각하고 성당에다가 미사드리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그 후손들이 쌓아놓은 은덕에 의해서, 후손들의 빽으로 그들이 천국으로 간다는 것이 천주교의 사후론입니다. 인간이 죽고 난뒤에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이론입니다. 천주교는 사람들이 죽고나면 어디로 가는가에 대해서 아주 간단하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어디로 가느냐? 진짜 성자들이 있잖아요. 몇 안되는 진짜 성자들은 직접 하늘나라 들어가고, 그 다음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단 연옥을 거쳐서 들어가는데, 연옥에도 계층이 있어서 얼추 바르게 산 사람같으면 연옥에 가도 좀 편한곳으로 가고, 진짜 세상에서 못되게 군 사람은, 같은 연옥이라도 좀 힘든 데로 가게 해서 그 다음에 빼내준다는 겁니다.

혹시 신부에게 그런것이 성경에 있느냐고 묻게 되면 성경에는 없어요. 성경에 없는 사실을 어떻게 알수 있느냐고 하면, 살아 있을 때 성자들이 꿈속에서 신의 특별계시를 받아서 알게된 사항입니다. 성 누구 성 누구 이런식으로 특별계시를 받은 사람이 한두명이 아닌데, 그 특별계시를 종합해 보면 나오는 사항입니다. 이런 성자들이 기도발이 있어가지고, 기도하다 보면 천국의 내막 - 그렇게 받은 계시가 파노라마 처럼, 한편의 영화처럼 죽 펼쳐지니까  - 에 대해서 특별한 계시를 받는다는 거죠. 그들이 예수님도 아니고 마리아도 아니니만 성자이기에 예수님다운면이 보통 인간들보다 많고 마리아다운 면도 그렇기에 수준이 높으니까 뭔가 그들의 공통점을 캐내면 정답에 가까울수도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 공통점을 정리해놓은 것이 오늘날의 연옥설입니다.

왜 이런식으로 하냐면, 예수님께서 성경에서 뭐라고 말씀하시는가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관심이 없어요. 애초부터 관심사가 없기에 성경가지고는 사람들을 교회로 꼬시지를 못해요. 그래서 일단 사람들을 교회로 꼬셔놓고나서 그 다음에 성경이야기를 하겠다는 겁니다. 사람들을 꼬실때는 당신이 평소에 원하는 것이 뭡니까? 이런 저런 소원들이 있지만, 아픈데 병낫는것, 좋은 아파트 입주하는것, 자식 낳는것 이런것 많이 있지만 늙어보니 역시 최고는 죽어서 좋은데 가는것이니 바로 그것을 우리가 제공하겠으니 우리 성당에 등록하라는 식으로 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빌리다고 예수님께 “진리가 무엇이냐”고 하죠.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세요. 천국은 이 세상을 주시하고 있는 저 외곽에 분명히 있죠?  있는데 그 나라에 가려면 무엇을 알아야 한다? 천국이 있다거나 지옥이 있다거나 하는 사실을 안다는것은 일반 사람들 다 아는 사실인데 예수님은 진리를 알아야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이 예수님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이냐?”고 반응하는데 그때 예수님께서 답변을 해줍니까? 안해줍니까? 예수님께서 대답을 안해줍니다.

이것이 오늘 강의의 핵심입니다. 왜 진리에 대해서 정답을 말해주지 않느냐 하면, 정답을 예수님께서 발설하면, 그 사람은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천국에 와야 합니다. 고래잡을 때 쏜 화살은 화살만 날아가는것이 아니라 그 뒤에 뭐가 매여 있습니다. 줄이 있지요? 작살이 꽂히면 고래는 본능적으로 도망치려고 하는데 그때 화살에 꽂힌채 줄을 살살 풀어 주지요? 줄을 풀어주면 자기딴에는 해방되었다 싶어서 놓여난줄을 압니다. 그런데 줄을 잡아 당겨보면 “어? 어? 이것은 내뜻대로가 아닌데 내가 어디로 끌려가지?” 이렇게 되지요.

제가 세상 교회를 향하여 외치는 것이 그겁니다. 예수님께서 꽂아놓은 작살이 그게 효과가 없어요? 예수님에게서 나온 믿음이 그렇게 효과가 없습니까? 효과가 있지요! 그것을 칼빈이 “저항할수 없는 은혜”라고 합니다. 저항이 안되요 저항이. 지금 작살(은혜)로 구원을 하는데 사람들은 자꾸 내 행함으로 구원받으려고 하는 겁니다. 내 행함으로. 예수님은 고래잡는 작살을 가지고 있다고요. 이 작살 이것이 보통 위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작살을 가지고 복음이 무엇이냐? 진리가 무엇이냐 하는 것을 설명해 준다면, 우리는 아직 철이 없어서 “예 잘 들을께요. 노트 필기 할께요. 새겨들을께요. 잊으면 안되지. 잊으면 안되지. 이 배운것 꼭 기억해야지” 하면서 우리는 자꾸 자기 기억력으로 간직하고 이것을 꼭 자기 힘으로 믿어야 그렇게 해서 구원되는줄 알고 있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식으로 구원에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작살이 이미 “진리가 무엇이냐, 복음이 무엇이냐” 하는 식으로 날아왔다는 것은, 나는 이미 꽂혔다는 거예요. 꽂히고 나이가 팔십이 가든, 구십이 다 되든, 도망칠수가 없어요. 예수님을 잊을수가 없어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잘 믿을 때 예수님을 몇 번 부인했습니까? 누가복음 22장 31절을 봅시다.

(누가복음 22:31)
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으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사탄이 예수님의 수제자가 누군지를 알고 지목합니다. 그래서 사탄은 어떤일을 해야 하느냐 하면 베드로로 하여금 자기 힘으로 구원을 시도하도록 애쓰도록 자꾸 부추기는 일을 해야 되는 겁니다. 제가 지금 중요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뭐냐 하면 사탄이 여러분을 간섭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도 여러분을 사탄이 간섭하는데 어떻게 하느냐 하면, “예수님을 네가 쉬지 않고 잘 믿어야 그래야 네가 구원되는거야. 천국은 네가 열심히 바르게 살고, 게으르지 말고, 죽도록 충성을 다하고, 열심을 내서 농땡이 부리면 안되고, 그래야 네 구원을 위한 행위로 네가 구원받는거야”라고 누가 이야기한다고요? 사탄이 계속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누구를 통해서? 목사를 통해서.

요한일서 3장 1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바쳤으니 우리가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만일 형제를 위해서 우리가 목숨을 바치지 아니하면 그 안에 예수님께서 목숨을 바친 그 사랑이 없다고 보는 거예요. 그러면 사모님께서 옆에 계신 전목사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겠습니까? 미쳤습니까? 목숨을 바치게요. 안바칩니다. 세상에 어느 인간이 자기 살라고 사는 것인데 남을 위해서 목숨을 바칩니까? 안바칩니다. 보통 교회에서는 이웃사랑이라고 하면 어려운 사람들 라면 가져다 주고 애들 놀아주고 한다고요. 목숨을 바치라고 하면 안 바칩니다. 송 목사님보고도 목숨을 바치라고 하면 안바칩니다. “도와줄게 그냥 도와줄게” 이 정도죠. 시청에 잘 이야기해서 월 십만원씩 도와주면 되었지 미쳤습니까 목숨을 바치게. 그러면 돈 몇 푼주면 그것이 사랑입니까?

마귀가 노리는 것은 바로 그거예요. 마귀가 계속해서 노리는 것은 뭐냐 하면 열심히 해야 한다는 거예요. 열심히 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사랑이 거기에 없기에 너는 탈락했다는 식으로 하는 겁니다. 누가복음 22장 뒤로 가면 베드로가 뭐라고 하냐면, 내가 죽기 까지 주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합니다. 죽는 자리에도 가겠다고 합니다. 베드로가 지금 농담합니까? 아닙니다. 진심입니다. 마귀가 베드로를 넘어지게 하는 데에는 이런 충성심 외에는 없습니다. 인간은 제풀에 제가 넘어져야 합니다. 제풀에 제가 넘어지도록 하는 것이 마귀의 역사입니다. 기도 많이 했습니다. 전도 많이 했습니다. 십일조 안빼먹고 다 했습니다. 그러면 마귀가 뭐라고 하냐면, 그래 더 열심히 해라. 십일조 한것이 대수냐. 다른 사람은 십의 이조를 하는데 헌금도 더 열심히 해라. 남들은 교회를 건축하는데 집을 팔아서 헌금했는데 너는 무엇을 팔아서 바쳤느냐는 것이 마귀가 부추기는 일인데 마귀는 이렇게 열심히 해야 하는 겁니다.

참 마귀가 있는 것을 고맙게 여겨야 합니다.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내가 열심내고, 내 믿음대로 행해야 구원받는다고 마귀가 부추기는데, 이런 마귀의 활동에 대해서 감사해야 합니다. 왜 감사해야 하냐면, 놀랍게도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열심이 아닙니다. 베드로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뭘 하신다고요? 베드로는 마귀와 한통속이 되어서 놀아나는 식으로 함께 춤을 추고 돌아다녀도, 베드로의 구원은 예수님 손에 달렸다는 겁니다. 너의 구원은 네가 무슨 짓을 하고 무슨 농땡이 짓을 해도, 십자가에서 나오는 작살의 능력으로 나온다는 겁니다.

이것이 뭐냐? 예수님이 주신 믿음에서 우리의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함에서 믿음이 생긴다든지 혹은 우리의 믿음에서 행함이 생긴다든지 하는 이런것은 성경에서 구원이 안됩니다.  믿음에서 믿음입니다. 여기에 행함이 끼어들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일체 없습니다. 여기에 행함이 못낍니다. 작살로부터 끌려들어가야 됩니다. 어떤 사건, 계속 사건이 터지면서 알아지는 것은 “아하 이 사건은 힘을 좀 빼라고 하는 사건이구나. 고래야 힘좀 빼라. 네가 훌륭하다고 구원하는 이 예수님이 아니고, 네가 복음좀 잘 전했다고 구원하는 예수님이 아니다”는 거죠. 힘좀 빼고 살아라 힘좀 빼고. 완전하게 될 생각하지 말고, 완벽하게 될 생각하지 말고, 성경 다 지킬 생각하지 말고, 힘을 빼라는 말이죠. 힘을 빼면 작살이 보이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너무 열심히 할때는요. 오늘 또 내가 열심낸다! 우리가 열심히 할때는 예수님의 기도가 안보여요. 히브리서 7장 24절. 참 이걸 보면 오늘날 목사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히브리서 7:24-25)
24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이것을 좀 설명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직분이 갈리지 않는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제사가 우리 인간하고 의논한겁니까? 하나님 아버지하고 의논한겁니까? 누구하고 의논하신 겁니까? 하나님 아버지하고 의논해서 이야기 끝난 거지요. 예수님이 자기 아버지 하나님과 의논해서 예수님의 제사드림으로 자기 택한자 건지는데 하등 하자가 없지요? 이 이야기는 우리가 끼어들 사항이 아니죠? 건방지게 두분 계약 체결된 것이 우리가 끼어들 문제가 아니지요? 우리가 기도 혹은 전도 이런 것 가지고 끼어들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죠.

그 다음에 봅시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했기 때문에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간구가 뭐냐 하면 간절히 기도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누구를 위하여? 자기 백성을 위하여 간절히 가도했지요. 아까 누가복음 22장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누구를 위하여 기도한다? 베드로가 사탄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간절히 기도했기 때문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저주하고, 심지어 그 이상으로 다섯 번 저주한다고 해도 베드로의 구원은 이미 확정된 사항이죠. 이미 확정된 사항입니다.

여자분들 집에서 국수 끓여 보셨습니까? 참 여자분들에게 별소리 다한다. 멸치다시물 낼 때 다시통이 있잖아요. 다시물 내는 거요. 멸치를 넣고, 끓는 물에 둡니다. 그렇게 두면 다시통이 없으면 멸치는 밑으로 다 떨어지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다시통이 있기 때문에 멸치의 물은 밑으로 빠지고, 멸치 건더기는 안빠지지요? 다시통을 가지고 예수님 안이라 합시다. 그런데 다시통하고 물 빠지는데는 서로 내통 합니까? 안합니까? 내통 하지요? 그러니까 마귀가 와서 마음대로 시험하죠.

그러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을 몇 번씩이나 부인했다고요?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하고 아주 난리죠. 나 이제 예수 안믿는다면서 빠이 빠이 하고, 자기 멋대로 고기 잡으러 가고 난리입니다. 하나님 안계신것 이제 알았다고 하면서, 나 이제 예수 안믿는다고 하고 저혼자 난리를 피워내죠. 그런데 이 멸치통의 다시물은 누가 가지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가지고 있죠. 그럼 다른데 가서 사용해 볼까? 하면서 사용하는 겁니다. 우리물은 다빼요. 우리의 진을 다 빼는 거예요. 이걸 빼는 것을 죄라고 합니다. 자기밖에 모르고, 얼마나 이기주의인지, 돈밖에 모르고, 자기 집안밖에 모르고 자기 자식밖에 모르는 너무나 너무나 이기적인 죄인. 교회도 자기 교회밖에 모르고. 이런 것을 세상에 유감없이 발휘를 해요. 유감없이. 예수 믿는 자라도 아주 유감없이 아주 노골적으로 발휘를 해요. 아주 이상스럽게 끌려와요. 구원받는 것은 내 착함이 아니다. 구원받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피다 하는 식으로 이상스럽게 그게 더 우선적으로 중요하게 느껴져요.

출애굽기에 보면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 어린양 발린 집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있을 때 죽음의 사자가 와요. 죽음의 사자가 폭격하듯이 애굽의 전지역을 지나가면서 차례 차례 다 죽이는데, 안죽이고 그냥 넘어가는 집이 있죠. 그걸 유월절이라 하는데, 안죽이고 그냥 훌쩍 넘어 간다고 해서 “유월절”(逾越節, Pass over)이라 합니다. 안죽고 넘어가는 것은 무엇땝문입니까? 어린양의 피만 보고 넘어가는 거죠. 그러니까 죽음의 사자가 관심사가 무엇입니까? 나의 착함도 아니고, 훌륭함도 아닙니다. 그런 것은 누가 관심이 있느냐 하면 마귀가 관심이 있어요.

죽음의 사자의 관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너의 바깥에 피가 발려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피만 보고 넘어가지, “우리의 키가 몇센티인가?” 같은 것은 전혀 관심이 없어요. 그런데는 마귀가 관심이 있어요. ‘봐라 그러니까 네가 벌을 받지’ 이런식으로요. 정작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천사는 예수님의 피만 보고 결재하는 식으로 천국에 그냥 통과시킵니다. 그냥 통과예요. 통과! 피! 통과! 요한계시록에 있잖아요. 피로 말미암아, 즉 피를 받은 사람은 힌옷을 입고 종려나무를 흔들면서 어디에 집합한다고요? 천국에 집합한다고 나와 있잖아요.

(요한계시록 7:9,10)
9 이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힌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10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하니

오늘날 한국교회가 마귀들이기 때문에 예수의 피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뭐라고 하냐면, 예수의 피는 기본이고, 그 다음에는 반듯하게 살아야 된다고 나옵니다. 반듯하게 사는 여기에 동원된 인간들이 바로 양의 탈을 쓴 삯군의 목자들입니다. 이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반듯하게 사는 여기에 집중을 합니다. 집중을 해가지고, 가정화목은 성경의 이런 말씀을 이렇게 지키면 하나님이 축복해서 가정의 화목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그러면 어느 수준을 가지고 가정화목이라고 하는 겁니까? 가족이 모여 앉아서 코미디 프로 보면서 웃으면 그게 화목한 겁니까? 아니면 한달에 한 200만원 가지고 살면 그게 화목한 겁니까? 200만원 가지고 도시생활에 어디 축에나 들겠습니까? 그러면 애가 세명 있으면 가정이 화목한 겁니까? 화목하려고 세명 낳아 보세요. 네명 낳고 싶지. 내가 여유만 있으면 애 다섯명 여섯명 계속 낳고 싶다. 사는 낙이 그거밖에 더 있어요? 애가 보통 낙이 아니잖아요. 큰 애는 이제 밉상이라. 또 새로 낳아서 발발 기어다니면 그 생명의 움직임을 보면 하루 피곤이 다 풀리고, 스트레스가 다 날아가잖아요. 그러면 애를 몇 명 낳아야 합니까? 열두명을 낳아야 합니까? 계속 화목을 유지하려면 말이죠. 대체 어떤 것을 두고 가정을 화목하다고 하는 겁니까?

목표도 없고, 줏대도 없고, 주관도 없고, 표준도 없고. 무작정 무작정 추상적인 행복과 불행없음을 향하여 그냥 달려가는 거예요. 그냥 달려가는 거예요. 그게 마음대로 안되니까 하나님도 부인하고, 예수도 부인하는 겁니다. 진리가 무엇이냐를 이야기해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진리가 무엇이냐”할 때 왜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는가 하면요. 참, 이런것은 말로 하면 잘 이해가 안되고요. 약간 실례가 되겠지만 사모님이 좀 참아 주세요.

묻는 쪽에서 : 저! 사모님 진리가 무엇입니까?(진리가 뭐냐가 물으면서 때리는 제스추어? 상황파악이 잘 안되므로 정확히 묘사가 불가능함, 나중에 재차 이 상황을 설명해 주는데도 그래도 영 어떤 액션이었는지 재생불가---)

이러는 겁니다. 깜짝 놀랬지요? 오래 기억에 남으라고 이런 액션을 보여주는 겁니다. 지금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는쪽에서 누굴 죽입니까? 예수님을 죽이는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예수님! 믿습니다”하면서 칼을 들고 예수님을 죽이는 거예요. 우리가 매일같이. 적개심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집의 한달 수입은 500만원도 안됩니까?” 이것이 빌라도와 같아요. 예수님한테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어가면서 예수님을 죽이잖아요. “나는 사모님을 좋아합니다” 하면서 가서 때리는 거라고요. 그러니까 사모님이 지금 이야기를 못하잖아요. 못할수 밖에 없는것이죠. “저게 지금 미쳤나?” 예수님 입장에서 보면, 너는 지금 네 속에 있는 마귀로 인해서 나를 죽이고 있으면서 말하기를 “예수님 제가 지금 예수님을 믿고자 하는데 진리가 무엇입니까”라고 묻고 있으니 이게!

진리가 있으니까 천국에 간다니까 천국에는 들어가고 싶어서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고 싶은 겁니다.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고 있는 네가 나로 하여금 진리를 만들기 위해서 지금 도착하고 있는 거예요. 물론 악역이죠. 악역. 우리가 평소에 이렇게(아까 제가 액션으로 남편도 안때리는 사모님을 때린 것으로 연기를 한것처럼) 예수님을 때리고 있어요. “예수님! 복주세요” 하면서 때리는 거예요. 예수님은 진리가 뭐냐고 할 때 십자가가 진리인데, 그딴거 말고, 십자가 말고, 돈달라고 하는 거예요. 앞으로 예수님한테 잘해줄테니까 돈달라는 거예요. “당신이 먼저 날 때렸잖아” 이런 말입니다.

다 잊어버렸지요? 다시 할께요. 죽음의 천사가 무엇을 보고 넘어간다? 피 보고 넘어간다. 십자가에서 무엇이 흐른다? 피가 흐른다. 다 줬잖아요. 진리 다 줬잖아요. 그 피를 지금도 우리가 예수 이름을 들먹이면서, 우리가 칼을 들고 창을 들고, 예수님을 우리가 죽이고 있어요. 맨날 불평하고 짜증내면서. 그딴거 피 말고 우리가정 행복하기, 우리애 행복하기. 우리 교회 부흥되기. 내 몸 건강하기. 지난것보다 더 좋아지는것. 지난번에 오려고 했는데 비와서 못왔다든지 이런것.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자기 아들의 목숨을 내놓았는데, 우리는 예수님께 따지기를 내 아들의 목숨을 빼앗지 말라는 식으로, 내 아들을 빼앗아가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식으로 합니다. 예수님을 알기를 자기 아들의 목숨을 지켜주는 보디가드 내지는, 집지키는 셰퍼드로 예수님을 부리려고 해요. 그래놓고는 진리를 논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선언했습니다. 제가 선언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선언했습니다. 예수님이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진리 없이는 천당에 못간다고 했습니다. 진리 없이는 천당에 못들어가는 겁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죽어서 좋은데 가는 것인데 그것은 더러운 우리 생각의 확장일뿐입니다. 천국은 진리의 나라이기에 진리 없이는 못들어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얼굴예뻐도 못가고 돈으로도 못가고 절대 못간다는 것을 압니다. 오직 무엇으로 구원못받으면 절대 구원못받는다는 것으로 이미 아시기 때문에 자기 피로만 구원하시는 겁니다. 죽음의 사자가 피만 넘어갑니다. 그런 취지를 가지고 예수님은 오셨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모른채 다른 것을 내놓으라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그 앞에 보면 (갈 2:20)에 보면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이라고 되어 있지요? 성도가 무엇을 믿는다고요? 나를 위해서 자기 몸을 버리신 그 몸만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 성도라는 말입니다. 성도라는 것이 교도소를 몇 번 다녀왔다가 문제가 아니고, 키가 몇센티인지 그런것도 문제가 아닙니다. 성도는 우리를 위해서 자기몸을 버리신, 그 예수님의 몸을 믿는 사람이 성도라는 거예요. 2장 20절에 나오지요? 맞지요? 이거 이야기 끝난겁니다. 완전히 이야기 다 끝난거예요. 비디오 같으면 “감사합니다”(The end). 자막올라오는 시점입니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구원받지 못할것을 알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일부러 자기몸을 드려서 온겁니다. 왜 자기몸을 드려야 구원받느냐? 그 이유는 몰라요.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하고 아들 하나님하고 두분이 의논해서 결정한 사항이기 때문에 우리쪽에서 이런식으로 구원해 달라고 의견을 개입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을 언약이라 합니다. 언약이기 때문에 그것은 변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의 처음 약속대로 자기몸을 버렸고, 버리시면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하시고, 그래서 (갈라디아서 3:1)에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아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십자가가 있으면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십자가가 조금씩 느껴지고, 십자가가 있으면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이 믿어지도록 작살로서 능력으로 사건 사건을 일으키면서, 숱한 사건을 통해서 깨닫게 하는 겁니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우리 몸이 이렇게 있는데 여기에 과거의 때가 묻어 있고 또 현재의 때가 묻어 있고 미래의 때도 묻겠지요?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로 미래로 흐른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시간이 미래에서 현재로 그리고 과거로 사라진다고 생각해본적이 있습니까? 둘다 맞아요. 둘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서 미래로 시간이 간다고 배웠기에 그것밖에 모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미래에 일어날 일이 현재에 들이닥치고 과거로 사라지고, 또 우리는 미래의 바람을 맞이하고, 내일이 되면 내일을 맞이하는 식으로 사고의 전환을 한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사고의 전환을 해버리면 우리는 항상 미래 지향적입니다. 미래를 맞이 하고 있어요. 그것이 성경에 나옵니다. 지금은 희미하게 보이지만 나중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본다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3:12)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거기 누구세요? 어두워서 잘 안보입니다. 이쪽으로 좀 나와보세요. 조금 더 가까이 가까이 가보니까, 처음에는 어두워서 잘 안보이고 희미하게 보이던 것이, 점점 인생을 살아가다가 나중에 천국에 골인하고 보니까 “아이고 주님이십니까? 아이고 주님이여! 주님이십니까? 나를 구원하려고 이렇게 피를 흘리셨군요. 감사합니다” 하면서 그때는 면류관을 반납하면서 주님 발 앞에 엎드리는 것이 요한계시록에 나오죠?

(요한계시록 4:10-11)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앞에 던지며 가로되 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결국 이것은 과거가 현재에서 미래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고, 미래가 우리에게 보이도록 찾아오는 거죠. 이해되십니까? 미래가 우리에게 찾아온다고요. 미래가. 미래에 일어날 준비된 사건들이 하나 둘씩 현재에 도착하고 있는 거예요. 택배왔습니다. 미래를 담은 택배가 왔습니다. 딩동 딩동! 우리 용욱이가(정경애자매의 두돌 안된 아기) 7살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수 없죠? 용욱이가 7살이 되면 무슨 사건이 하나 터질거예요. 공부 못해서 한대 맞을지 어떨지. 또 스물 몇 살이 되면 장가간다고 할지 어떨지 그런 사건이 일어날수 있을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될지 몰라요. 미래의 준비된 사건인데 그 준비된 사건 배후에 누가 있습니까? 예수님이 계시죠. 그걸 합해서 뭐라고 하느냐? 진리라고 합니다. 진리! 그걸 진리라고 하는 거예요. 세상은 모든 것이 진리되거든요.

차--암, 빈틈이 없음. 완벽해! 이것이 진리거든요. 완벽하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합력해서 선을 이루는 완벽한 사건들이 지금 준비되어 있어요. 우리는 아직 미래가 되지 않았기에, 현재에 놓여 있기에 그것을 아직 맛볼수 없습니다. 내일이 되면 내일의 사건을 또 맛보게 될거예요. 그런데 그 사건은 누가 일으켰습니까? 주님이 일으켰지요. 주님이 일으켰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아느냐 하면, 그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이 일으킨 사건임을 깨닫게 될 때, 그때 진리의 작살에 꽂힌 사람임을 알수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 하면 질문이 나올수 있습니다. 불신자들에게도 그런 사건이 주어지냐 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요. 그렇다면 불신자들도 진리에 속해서 구원을 받습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불신자에게는 진리에 대해서 알려주시지를 않습니다. 불신자들은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아이고 재수없어”라고 하지,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려고 나를 기다렸다가 이런 사건을 준비해서 준비된 사건을 터뜨렸다는 식으로 보지 않고, “재수없다. 이런 사건이 내게 왜 일어나나? 우연이겠지. 역시 나는 나밖에 없어. 이 세상에는 내가 최고야”. 라고 보게 되는 겁니다.

과거에서 현재 그리고 미래로 가버리면, 맨날 과거의 때가 묻어 있으니까, “하나님! 왜 나에게 이런 사건을”하면서 과거의 때가 하나의 칼이 되고, 창이되어서 아예 주님에게 따지면서 찌르려고 작심을 하는 겁니다. 과거로부터 내 욕망이 안이루어져서 나의 불만족을 느끼게 하고, 나를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 이런 칼들, 총들을 마구 주렁 주렁 달고 이제부터는 따져 보겠다는 거죠. 왜냐하면 과거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죠. 과거에 억울하게 느껴진것, 갑갑하게 느껴진것, 속상하게 느껴진것, 따질것이 한두가지가 아니잖아요. 속상한게 많지 않습니까? 그걸 따지기 위해서 옵니다. 오다가 미래에서 오는 진리의 사건을 맞딱드리게 되지요.

과거에서 밀려오는 나의 욕망과 미래에서 다가오는 사건과 부딪히면서, 내가 예수님을 향해서 찌르려고 했던 칼이 주님앞에 녹아져 버리고, 무장 해제 당하면서 “잘못되었습니다. 나만 생각했습니다. 미래의 주님을 기다리는 것은 모르고 괴물처럼 탱크처럼, 과거의 욕망의 나, 덩치 큰 나만 들이대면서 내것만 챙기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잘못이군요”. 라고 그렇게 의미를 깨닫게 될 때, 그는 이미 구원의 작살에 꽂힌 사람입니다.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하는 거예요.

정리해봅시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하늘나라가 이 세상의 외곽에 있다는 말입니다. 외곽에 있는 겁니다. 그 증거가 어디 있냐고 하면 스데반집사님이 있습니다. 스데반집사가 죽을 때 무엇이 보였습니까? 예수님께서 스데반에게 “너 죽은것 봤다. 오너라 오너라”고 했다고요. 그러니까 외곽에 있어요. 있고 저쪽에서 스데반 집사가 죽는 것을 지켜 보고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직통으로 맞네. 어이 저거 죽겠네. 죽었네 완전히 갔네 갔어”. 예수님이 다 보고 있다고요.

죽을때에 “예수여 제 영혼을 받아 주옵소서” 할때에, “그래 받아줄게. 수고했어. 참 수고했어. 이제 편히 쉬라”고 받아 준다고요. 그렇게 받아 주는데, 예수님께서 그렇게 받아 줄때는 스데반 집사가 진리를 알고 천당에 들어갔지요? 그러니까 진리를 모르고도 천당가는 수는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죽고 좋은데가서 더 살려고 하는 욕심이 있다는 것을 뻔히 아는 입장에서, 예수님이 빌라도에게는 진리를 말해주지 않습니다. “너는 아니야, 너는 아니야 너는 오히려 나를 죽이는 자야” 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해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스데반 집사님은 죽으면서도 그것을 알지요. 둘이 합심을 하고 만납니다. 주님께서는 사건을 통해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평소에 스데반 집사님이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배후에 “예수님이 함께 있었다”를 알려 주는 것, 그런 일을 하기 위해서 베드로로 하여금 세 번씩 예수님을 부인하게 하고, 이런 저런 사건들이 터지게 하고, 그리고 저와 여러분이 여전히 이땅에 머물러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처럼 이 세상이 다가 아니라는 것. 주님께서 지켜 보시는데 중요한 것은 그 나라가 있다는 그 나라의 존재를 인정하면 된다는 뜻이 아니고,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했거든요.

진리가 자유케 한다는 말은, 진리를 알게 되면 세상의 모든 무거운 짐이 의미가 없어져요. 무겁다고 여겨지던 것이 가볍지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지요. 쉬게 해 주십니다. 의미를 안두게 해서 쉬게 해주시는 거예요. 사람들의 안목을 겁나지 않게 해줘서 쉬게 해주는 겁니다. 이게 어려운데 다시 이야기 합시다.

현재 우리 몸은 과거의 때가 묻어 있지요? 이걸 털어내야 되요. 털어내야 하는데 우리힘으로는 이걸 털어내지 못합니다. 우리는 계속 축적을 해 가죠. 어제는 이랬고, 또 이랬고 이런식으로 계속 경험을 쌓고 쌓아가지 털지를 않아요. 그런데 개를 보면 물뿌리면 몸을 마구 흔들어서 물을 사방으로 털어내지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미래의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을 통해서, 진리를 통해서 자유케 하죠. 날마다 진리를 통해서 우리를 털기를 시도하는 겁니다. “털기”. 훌훌 털어버려요. 아내라는, 짐 자식이라는 짐, 내가 살고자 하는 짐 다 털어버립니다. 털고 난 뒤에, ‘그러면 나는 왜 있느냐, 남편은 왜 있으며, 자식은 왜 있으며, 이 모든 것들은 나에게 왜 있느냐?’ 하는 이것은 주께서 주신 은혜입니다.

짐이 아니고 그 모든 것이 선물로 다가옵니다. 미래의 주님께서 주신 선물이고, 그선물을 통해서 “진리가 무엇이냐”를 더 넓게 알고 더 깊이 알기 위한 선물로서 제공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진리를 가지고 오시는데 “진리가 무엇이냐?” 하면 예수님하고 하나님하고 택정한 거죠. 그 택정한 것이 나타난 것이 “피”로 나타났습니다. 그 피는 여러분의 피도 아니고 제피도 아니고 예수님의 피입니다. 우리가 피흘린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피는 내 피도 아니고, 여러분이 피도 아니고, 예수님의 “피”만 하나님께서 용서를 해주고 인정해주는 겁니다.

이것이 조금 어려워요. 뭐냐 하면, 예수님의 “피” 앞에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전부를 알고 있습니다. 전부를 알고 있는데 예수님의 피가 전부를 알고 있는 우리 속에 그냥 들어오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귀하게 여기면서 안다는 것들, 심지의 우리의 목숨일지라도 하나 하나 제거하시면서 피가 여기에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 하나 제거하면서. 자식보다 “피”, 남편보다 “피”, 아내보다 “피”, 예수님의 “피”가 우리가 가진 어떤 것들을 다 제거하시면서 들어오시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가 진리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려고 합니까? 우리는 지금 구원을 받으려고 합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우리 나름대로 정리하고 책이나 잘 펴야 구원된다고 여겨지지 않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면 예수의 피로 구원받는다는 그것도 여기에 포함이 되어 있는 겁니다. 이게 오늘 강의하는데 제일 어려운 겁니다. 아마 제가 강의한 것중에서 제일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받고 싶어요. 구원받고 싶은데 방금 제가 강의한 바에 의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구원받지요? 그런데 우리가 지금 안다고 하는 것속에 무엇도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구원받는다는 지식도 갖고 포함되어 있잖아요. 이 피를 주님의 살아계신 “피”가 제거를 한다니까요?

제거를 해요. 왜냐하면 이것이 어려운데. 사람이 예수님의 피라고 했지만,  그것이 2006년도 5월 12일에 내가 정립한 예수님의 피예요. 2006년도에 5월 13일이 되면 또 내가 무슨 생각으로 따로 정립을 할지 알수 없지요? 그것은 누가 해줍니까? 미래에 계신분이 가져다가 주죠. 다시 한번 이야기 합니다.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로 미래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서 현재로 와서 과거로 흘러가 버립니다. 최후의 미래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지만, 지금은 희미하게 보이거든요. 희미하게나마 보이도록 징검다리를 놓아 주는데 그것이 내일이 되면 내일의 사건이 우리를 기다립니다.

그 사건이 뭐냐, 예수님을 똑똑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한 사건이 있습니다. 사건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서 미래로 가는 식으로 하면 내가 사건을 만들지만, 사건이 우리를 기다려요. 내가 만든 사건이 아니고 그 사건을 우리가 마중나갈뿐이죠. 우리는 과거에서 미래로 가고 있고, 미래에서는 주님께서 사건을 밀어 보내니까 두 사건이 맞딱뜨리겠지요. 그래서 우리 애가 고3때 일어날 사건이 있으면 그때 우리가 만나는 겁니다. 예레미야가 그렇게 고백합니다. 예레미야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작정된채 태어났다고 합니다.

(예레미야 1:5)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요셉이 꿈을 꿀 때 자기가 거역할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삼손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삼손을 준다고 예언이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보니까 그들만 그런것이 아니고 성도는 이미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다 아시는 상태에서 아예 작정하고 난뒤에 태어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새로운 사건을 만날 때 그 안에서 “예수님께서 보내셨구나”라고 생각할 때 그것이 진리의 작살에 꽂힌 하나님의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지금 내가 예수의 “피”라는 것은 오늘 지금 돌아가시면 적당하다고 준겁니다. 오늘밤에 죽으면, 오늘밤에 믿는 예수의 피 때문에 구원받아요. 그런데 내일이 되면 오늘의 피를 가지고는 내일 구원못받습니다. 내일이 되면 내일 마련하고 준비된 예수님의 피가 또 있어요. 그것으로 구원받습니다.

내것을 가지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15년전에 은혜 받은 것 그것 가지고 흔들지 말라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주님은 죽은 분이 아니고 지금도 일하시는 분입니다. 일할 때 “이제는 훌륭하니까 네가 알아서 해라”는 이런 주님이 아니십니다. 한시도 주님은 우리 곁을 떠난적이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조금 안다고 해서 “주님! 우리 잠시 헤어집시다”. 맨날 이러고 있다고요. “다음에 다음달 성경공부 할 때 그때나 봅시다”. 이러고 있다고요. 다음달 성경공부도 또 사건을 주셔야 만나게 되겠지요. 주님께서는 우리가 배가 부르다고 해도, 매일같이 은혜를 주십니다. 그때 그때 사건을 주셔서 매일 같이 은혜를 주시는 겁니다. 매일 같이. 

끝으로 하나만 더 해봅시다. 끝으로라고 하니까 서운한것 같은데 더 원한다면 더 해야지요. 아까 그 질문을 더 다루어 봅시다. “불신자에게 사건이 일어날 때 불신자도 그 사건으로 구원을 받는가?” 그 문제입니다.

(로마서 9:21-23)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시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3 또한 영광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찌라도 무슨 말 하리요

토기장이가 무엇을 만듭니까? 하나는 귀한 그릇과 하나는 천한 그릇을 만들지요. 토기장이가 이것을 만든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토기장이가 어떻게 변하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그 뒤에 22절에 보면 이 토기장이가 하나님으로 변하지요? 우리는 토기장이가 천한 그릇을 만든다는 생각을 안하잖아요. 이게 보통 토기장이가 아닙니다. 일반적인 토기장이는 상품화 시키기 위해서 귀하고 귀한 그릇만 만듭니다. 물론 토기에는 양반들이 쓰는 그릇있고, 천한 사람들이 쓰는 것이 있지요. 하지만 천한것과 귀한것을 만든다는 말이 하나님의 손에 들어가면 그런뜻이 아닙니다. 

토기장이가 천한것 만든다는 생각을 우리가 왜 안하느냐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 ‘지옥갈 사람을 일부러 만든다는 생각을 왜 안하느냐’ 이말입니다. 왜 안하느냐 하면 우리의 관심사가 나만 달랑 천당가면 되고, “진리가 무엇이냐?”, “하나님이 누구시냐?”에 관심이 없어서 그래요. 진리에는 관심이 없고 천국을 가려고 하는 이것이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이것은 주님에게는 관심이 없어도 천당은 가겠다는 말도 안되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된 사람만 천국에 갑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지금 엉터리 천국을 가지고 있기에 그것을 수정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가진 생각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진노받을 사람을 일부러 만든다는 생각을 우리 생각속에 안집어 넣는 겁니다. 제가 아까 천주교 이야기 하고 여호와의 증인 이야기도 했지요? 우리 아이디어에는 그게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을 알아야 천국가요. 무엇에 감사해야 하냐면, 하나님께서 지옥갈 사람을 만든 것에 대해서 우리가 박수를 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옥갈 사람을 기어이 만든다는 사실 그리고 지옥에 가도록, 사건 사건을 통해서 그 코스에서 안벗어 나도록 지옥에서 지옥으로 계속 가도록 미래에서 뭘준다고요? 사건을 주죠. 미래에서 계속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는 사건을 유발시킨다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가 박수를 치면서 그런 주님에 대해서 환영할 때, 그 사람이 진리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라고 볼수 있어요. 제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해서 욕을 많이 얻어 먹고 있습니다. 크로스 빌리지가 난리가 났어요. 하나님은 유기에 대해서는 관여 안했대요. 의도적으로 유기는 하나님께서 관여한 것이 아니고 사탄의 작품이랍니다.

질문) 유기를 적극적으로 작정 하신거잖아요.
답변) 유기 없이는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지요.

그런데 그것은 아니래요. 하나님은 사랑이 많기 때문에 그럴수가 없답니다. 얼마나 인간들이 진리를 모르면 그렇습니까? 관심이 자기에게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그렇게 하냐면 마귀가 그렇게 합니다. 계속해서 (로마서 9:22,23)을 보겠습니다.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라고 하죠. 그러니까 그릇이니까 뭘 담아야 하지 않습니까? 한쪽에는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잘하셨습니다” 하는 것을 담고 한쪽에는, 하나님을 욕할수 밖에 없는 진노를 담는 이런 그릇에 담아내는 일을 하나님이 하시는 이것이 진리인데, 이진리에 대해서 인정해 주는 사람만이 외곽에 있는 천국에 들어간다는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생각입니다. 

여기까지 한것 한번 정리하고요.

멸치다시통을 기억하세요. 멸치통은 멸치 바깥에 있는 세상하고 서로 통한다? 안통한다? 계속 통합니다. 계속 통해서 과거에 일어난 일이 계속 우리 가슴을 아프게 해요. 또 오늘 되면 오늘이 현재지만 내일 되면 오늘이 또 과거가 됩니다. 계속 통해요. 우리는 계속 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화가 나지요. 뿔따구가 납니다. 원망하고 싶고, 베드로처럼 몇 번씩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그렇게 진이 빠지도록 하면서도, 그러면서도 우리는 왜 구원받는가? 바로 이 통,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라고 이러한 죄를 우리는 세상에 퍼뜨리고 있는 겁니다. 십자가가 진리라고, 내 괜찮음이 진리가 아니라 십자가의 피가 진리라고요. 유월절에 죽음의 사자는 “피”만 보고 넘어갑니다. “피”만 보고.

얼마나 쉬워요? 그런데 왜 우리는 구원에 대해서 고민을 합니까? 주님은 우리가 하는일을 아무것도 보지를 않는데. 왜 우리 자신에 대해서 그렇게 신경을 씁니까? 피를 보고 넘어 가는데. 그게 뭐냐? 하나님께서 마귀를 동원해서 우리를 들쑤셔 놓아요. 우리의 행함을 의지하고, 또 “이래서는 안되지”하면서 반성하면서 혼자 발광을 해요. 멸치통 안에서 혼자 발광을 해요. 반성했다가 또 잘난체 하다가 반성했다가 또 잘난체 했다가. 하루에 열댓번씩 바뀝니다. 하지만 구원은 피보고 구원하지, 멸치의 완전함을 보고 구원하는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계속 이기적인 죄악을 내뿜으면서 살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가 작살처럼 꽂혀서 미래의 사건으로 땡기는 사람입니다. 내일 되면 또 내일에 얼굴과 얼굴을 맞대로 보지만 지금은 희미하게 보이니까, 뚜렷하게 보이라고 내일되면 내일의 사건을 또 준비해 놓으면, “아 주님이 살아계시지. 주님께서 다 십자가에서 이루었지!!! 아이고 바보같이” 그랬다가 또 5년뒤에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내가 곧 주님을 만나지. 내가 주님 만나는데 뭘 걱정을 해”하게 됩니다. 사건이 미래에서 현재로 그리고 과거로 빠져버립니다. 주님은 미래에서 현재로 작용하시는 분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빌라도의 질문 - “진리가 무엇이냐” - 에 대해서 답변을 하지 않는 이유를 알겠지요?

예수님 : 나의 세계는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다. 오직 진리로만 갈수 있다.
빌라도 : 진리가 무엇입니까?
예수님 : 답변 안해줘!

왜 안해주십니까?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는 네가 나를 십자가에 죽는 죽음을 유도하는 역할로 가담하기에. 자기가 진리를 안다고 해서 그 역할을 포기할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자기가 자기손으로 죽여가면서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고 있어요. 자기가 찌르는 그 사람이 바로 진리인데. 그것을 바로볼 때, 우리가 주님을 매일같이 슬프게 하지만,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그 놋뱀을 바라보게 하신 그 은총을 오늘도 깨닫게 하시고, 내일되면 내일또 깨닫게 하실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세상을 너무 좁게 보고, 나 중심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세상의 전체를 다 보고, 다 아시기 때문에 일관되게 은총과 용서로 우리를 이끄시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자신의 문제 때문에 너무 힘겨워 하지 말고, 훌훌 다 털어버리고, 내일 되며 내일의 사건, 모레가 되면 모레의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이 살아 계시고 용서 했음을, “피”흘렸음을 저희들이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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