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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지역강의 > 안양강의
2018-10-13 00:49:43 조회 : 408         
마귀 대적 181012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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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은주(IP:119.♡.152.148) 18-11-01 11:05 
안양20181012a야4장6절(마귀대적)-이 근호

야고보서4장6절입니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찌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그리 되어있습니다. 방금 한 이야기 따지게 되면 복잡한 이야기가 많이 있는데 간단히 이야기하면 이겁니다.

‘당당하라’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고개를 들라’ 숙이고 살 필요 없다. 좀 더 신나게 이야기하면 이거에요. 뻔뻔하라. 대차라. 그런 뜻이지요. 뻔뻔하라. 대차라. 당당하라. 그럼 왜 그러냐 하면 세상은 마귀가 쥐고 있고, 우리는 그 마귀의 족쇄에서 마귀의 권세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은 사람하고 상대할 필요 없어요. 마귀하고 상대하고 마귀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 마귀에게 눌려있는 사람은 당당 하라가 안되고 고개 들라가 안되고 뻔뻔 하라가 안돼요. 늘 조심해야 돼요. 조심해도 해결책 없어요. 하여튼 조심해도 쫓기고 또 쫓기고 쫓기는데 왜 그러느냐 하면 악마가 인간의 약점을 갖고 있습니다. 악마는 천사에요. 악마라고 하니까 얼굴이 시커멓게 생기고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냥 천사입니다. 천사인데, 예수님께 대들어요. 악마가 종교를 만들 때 하나님을 섬기라고 만들었어요. 누구는 제키는가 하면 예수님은 감춰버려요. 왜, 악마의 적은 예수님이지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 찬양하세요.” “하나님 섬기세요.” 하면 마귀가 즐기고 좋아하는 거예요. 막 후원해 줍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 딱 나오면 악마는 안 그래도 시커먼 얼굴 더 시커머지지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돌이거든요. 사람에게 버림받은 분이 메시아라면 사람에게 일체 희망이라는 게 없기 때문에 악마로서는 인간을 다룰 수 있고 지배할 수 있는 건더기가 날아가 버려요. 인간을 협박을 해줘야 돼요.

협박을 하려면 하나님 섬기는데 뭐하고 있느냐 빨리 이렇게 부추겨야 되는데 닦달내야 되거든요. “하나님이 당신을 창조했습니다. 당신을 지었습니다. 이제 죽으면 하나님을 만나는데 이런 식으로 살 거예요?” “이제는 모든 걸 버리고 하나님을 위해서” 자꾸 뒤에서 독촉을 하는 겁니다. 자꾸 밀어붙이지요. 떠밀 듯이 하고 하나님이 영광 되는 거 3가지가 있어요. 진.선.미에요. 진실하고 아름답고 선하고. 이 3가지를 가지고 계속 밀어붙입니다.

진선미는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BC500년경에 플라톤에서 나온 거예요. 플라톤이란 철학에서 나온 겁니다. BC500년에 헬라철학, 그리스철학이라 하는데 소크라테스 이후에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쪽에서 나온 겁니다. 왜 나왔느냐 하면 그 당시 도시국가인데 도시국가가 매일 전쟁만 했어요. 그리스 시대에. 아테네 근처에 서쪽에 가면 그 쪽 도시들이 많거든요. 산이기 때문에 작은 소규모였어요. 싸움하니까 나중에 싸우다가 지쳐버렸어요. 환멸을 느낀 겁니다. 환멸을 느끼니까 그 때 나온 전쟁이 지겹다! 할까요.

남의 것을 잡는 이유는 노예 때문에 해요. 노예를 확보하기 위해서. 요새 말로 노동력 확보. 해외 근로자 확보하는 거예요. 그것처럼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전쟁을 하는데 하다 보니까 그냥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본인들도 막대한 피해를 입는다 말이죠. 그러니까 다들 지친 거예요. 지쳐가지고 국가가 어떻게 될 것인가가 우선시 됐던 것이 내가 어떻게 하면 행복할 것인가에 관심이 있었어요.

내가 어떻게 행복할 것인가, 출발점은 뭐냐 하면 내가 있는 이 자리에서 행복하다는 그 당시에는 다신이기 때문에 그리스, 헬라 신들이 있잖아요. 신이기 때문에. 전에는 신에게 제사를 드렸어요. 그걸 신탁이라 합니다. 신탁에서 무녀들이 이상한 마약을 섭취해가지고 오는 고객들에게 점을 쳐주는데 그 델포이 신탁의 현관문에 있는 글이 뭐냐 하면, 니 자신을 알라는 겁니다.

그걸 누가 인용했느냐 하면 소크라테스가 인용한 거 잘 아시지요. 니 자신을 알라. 니 자신을 알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 자신의 본질을 알아야 행복하다는 뜻이 아니고 신 앞에서 너는 너를 알라는 겁니다. 신 앞에 서거든.

여러분, 구약 성경에 이방민족들이 나오잖아요. 이방민족의 특징은 그 때는 민족국가를 하나로 봤으니까. 우리민족을 신이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의 본성의 보편성은 뭐냐 하면 결국 인간 속에 뭐가 있다는 말이에요? 누구나 신성의 보편성이 있다고 여러분이 아시면 돼요. 로마서1장21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이게 구약 성경에 나오는 이방민족을 포괄해서 다 이야기하는 겁니다.

불교도 신이 있잖아요. 처음에 부처는 인간이었지만, 그 부처를 삼위일체로 만들었어요. 불교에서. 법신 이렇게 해가지고. 부처 자체에서 부처를 초월해서 삼위일체가 되는 거예요. 항상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의 정신의 극치는 뭐냐 하면 신이에요. 신인데, 그 모델을 누가 하느냐 하면 인간을 모델로 삼아서 신이 되는 겁니다. 인간의 모델.

나 닮은 신. 나는 부족하지만 나를 닮은 나의 모든 것을 채워주는 월등한 신. 이것은 불교도 마찬가지고 모든 종교가 마찬가지고 심지어 종교가 없는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종교가 없는 사람은 노골적으로 본인이 신이지요. 나 건드리지 마라. 술집에 술 먹는 사람들 보세요. 전부다 나 건드리지 말라고 술 먹잖아요.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요. 딸 시집 보내려하거든 남자 3가지 안하는 남자한테 보내야 한다. 술, 담배, 낚시 이 3가지만 안하면 된다.

술 먹으면 허세 허풍 늘고, 술 먹으면 술친구 만나고 술친구 보증 서 달라 이야기하고 그래서 집안 다 말아먹어요. 아예 술친구를 안 만나야 돼요. 술, 담배 친구를 안 만나야 되고 낚시는 뭐냐 하면 결혼했음에도 불구하고 총각 때 취미를 이어가는 사람들. 스포츠 좋아하는 사람들 이런 거요. 그러면 안 되지요. 오토바이 타고 해가지고 과부될 일 있습니까. 안 되지요. 그런 총각이 없어서 문제지만.

모든 인간은 나를 건드리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가 섬기는 신이 자기를 건드리면 인간은 어떻게 할까요? 신을 바꿔버려요. 그래서 다신이에요. 그래서 신이 많아져요. 로마, 그리스 신화에 보면 신이 굉장히 많습니다. 인간과 신 사이에는 이건 하나의 교양이니까. 인간과 신 사이에는 어떠냐 하면 인간과 신 사이에 그냥 그대로 똑같이 가는 거예요. 인간이 인간을 다룰 때의 방식과 인간이 신을 다룰 때의 방식과 똑같아요. 그래서 그 인간 다룸을 표시한 것이 창세기 6장에 보면 신의 아들이 인간의 딸을 좋아해가지고 혼인했다고 나와 있어요. 이 대목은 사람들이 어떻게 해석할 엄두가 안 나는 거예요.

그런데 구약에서는 이 본문은 굉장히 쉬운 본문이에요. 구약 그 당시에는. 모세 당시에는. 왜냐하면 신의 아들은 주로 국가에서 높은 자리에 있는 요새는 재벌3세 급들 입니다. 모든 자연에서의 가뭄이나 태풍이나 이런 혜택에서 모면하려면 신에게 잘 보여야 되거든요. 그 신에게 잘 보이는 것은 위에 계급이 높을수록 신과 첫 번이 되는 겁니다. 그들의 자녀들이 신의 아들이에요. 그들의 자녀들이. 이건 따라하는 것은 천한 자들의 딸이에요. 옛날에는 계급화 되어가지고 신의 아들은 소위 고급진 아들은 고급진 집안끼리 결혼하고 아랫동네는 결혼 안 해도 되는데 여자들을 이렇게 함부로 결혼해가지고 자식들을 낳았다 말이죠.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그렇게 자식들을 낳게 되면 그 국가가 점점 더 인간 영웅 중심으로 나아겠지요. 영웅중심은 라멕이라 해서 방금 이야기한 것은 창세기6장이고 4장에 보면 가인의 족보가 나와요. 가인의 족보의 특징은 뭐냐 하면 눈에 보이는 인간이 마치 신의 노릇을 하는 겁니다. 백성들은 사람들은 신을 보고 싶어 하는데 자기가 노골적으로 신이라 이야기를 하지 않아요. 신의 아들이라고 이야기해요. 임금을. 왕을. 이제 다 풀렸지요. 신의 아들로 이야기한다고요.

지금도 아프리카나 미개한 민족이나 심지어 선진국도 마찬가지지만, 대통령이란 왕을 신의 아들로 치찮아요. 대표적인 것이 태국 아닙니까. 그리고 그것보다 약간 약하지만 일본 천왕, 영국은 뭐 별로 인정하지는 않지만. 태국 같은 곳은 왕의 말장난한다고 징역10년이에요. 존엄한 분이란 말이죠. 또 있네요. 북한 김정은. 우리가 이 땅에서 지금 50, 60 사는데 인생을 살아보면서 내 가정, 내 자식들 키우고 이것만 생각하는데 약간 범위를 넓혀보게 되면 세상이 구성이라는 게 어떻게 구성되어 있다 하는 것은 성경에 제가 이리 이야기하니까 또 로마 이야기하니까 그리스 이야기하니까 뭐 별로 변한 거 없지요.

세상 하나를 신이 주신 그러한 나라로 만들고 신이 있다고 염두에 두고 거기에 대한 흉내 내기. 모방하는 것으로 한 살 때부터 지금까지 죽 살고 있습니다. 죽 살고 있어요. 누가 나를 신이 지켜준다든지 이런 거. 그런데 진짜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셔가지고 추방될 때, 추방됐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모든 구성 체계 있잖아요. 인간이 편하게 친근하게 아무 반발 없이 받아들였던 이 정신사고 체계가 누가 이거 거짓말 한 거다 말이지요. 누가.

배후에 어떤 존재가 이걸 사기를 친 거예요. 신이 있고, 신이 우리 민족을 키웠고, 우리가 태어난 것도 신의 뜻이고. 이 모든 이야기가 이건 부담 없이 받아들였는데 부담 없이 받아들인 이 자체가 뭔가 지금 우리가 진짜 놓치고 있는 거예요. 가짜한테 속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이걸 성경에서 보니까 진실이 등장하지요. 악마가 그동안 꾸준히 인간을 속여 온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그 악마를 대적하라 할 때에, 첫 번째 등장하는, 어쩌면 제일 중요한 이야기인데 지금 하겠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악마를 대적할 때에 개인으로 대적하면 안돼요. 개인으로. 집단으로 대적해야 돼요. 집단. 교회 자체가 집단이기 때문에. 이걸 지금까지 어떻게 가르쳤냐 하면 “니 개인이 신앙력으로 이겨라.” 이렇게 가르친 거예요.

악마를 개인이 달려들면 웃기는 이야기에요. 모든 개인은 이미 악마한테 이미 지게 되어있어요. 다윗이 골리앗과 붙을 때, 다윗은 결코 혼자 이긴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긴 거예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기 단체가 있어요. 자기 집단이 있다 말이죠. 개인이 집단화 될 때는 개인 + 개인 모은다고 집단 되는 게 아닙니다. 개인이 죽어야 집단 돼요.

왜냐하면 집단은 인간들이 우리 팀 모아라 해서 집단이 아니고 주께서 따로 모아놓은 집단이 있어요. 그게 교회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이 같이 모은다고 힘이 생기는 게 아니에요. 그건 악마가 되게 좋아하는 거예요. 자, 다 오셨으니까 다시 하겠습니다.

악마를 대적하는 것은 개인이 대적하는 게 아니고 집단이 대적하는 겁니다. 제일 중요한 거예요. 오늘 강의에서. 내 이름으로 악마야 물러가라. 안 물러갑니다. 이미 개인으로 구원받는 것은 악마가 그동안 가짜 구원으로 계속 세뇌시킨 가짜 구원이었습니다. 내 개인이 구원받는 것은. 우리의 구원은 개인 구원이 아니고 집단구원입니다.

개인구원이 집단구원으로 가려면 개인의 가치는 날아가 버려야 돼요. 내 훌륭해서 내 구원받고 내 믿음 좋아서 구원 받는 거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소속이 되어야 돼요. 그 소속이. 이건 신약뿐만 아니고 구약 내내 이야기해왔던 겁니다. 구약 내내. 이스라엘이 되지 아니하면 구원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집단입니다. 개인이 아니에요.

야곱이 자식이 몇 명입니까? 12명이지요. 12지파인데 집단 됐지요. 야곱에게 구원의 체계를 준 게 아니고 야곱의 자식들에게 이 집단에게 하나님께서 뭐냐 하면 내 택하신 아들이라고 한 거예요. 아들들이 아니고 아들이라고 한 거예요. 아들이라 할 때는 이게 집단적 개념이에요. 집단적 개념.

그동안 우리는 내 개인이 악마를 이기려고 대적하려고 덤벼들었다 말이죠. 백전백패지요. 개인 같으면 뭘 유지해야 돼요? 개인의 가치, 개인의 의미, 개인이 살고 싶은 생존의 바램, 희망 이거 다 있잖아요. 이건 악마의 밥입니다. 그거 아무 소용없어요. 개인에서 집단 되려면 여기서 이미 집단화 시킨 구성, 집단을 집단으로 구성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되는데 그 힘을 로마서4장에서는 은혜라고 합니다.

이 은혜가 나 개인에게 오게 되면 개인의 자격으로 이 집단, 교회에 가는 것이 아니고 “너, 원래부터 이 집단의 일원이었어.” 라는 소식과 더불어서 개인의 모든 가치와 개인의 의미는 사라지고 죽고, 이미 집단된 것을 눈뜨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겁니다. 그게 구원이에요. 내가 기도해서 내가 응답받는 그런 건 성경에는 없어요. 반드시 성경의 기도는 집단기도입니다. 이게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성도들의 기도가 제단한테 가는 거예요. 그런데 그 성도라 하는 것은 개인을 성도라 하지 않습니다. 144000이란 집단의 숫자로서 성도를 표시한 거예요. 그러니까 교회가 이야기하는 게 딱 마귀가 전달해준 그것만 그대로 발설하고 있어요. 마귀가 전달해준 것만. 마귀가 목사한테 가가지고. “야, 고객들 지 잘난 체하고 싶어 환장했다.” 목사부터 계속해서 “이렇게 하시면 당신은 훌륭한 신자 됩니다.” 하고 계속 알려주는 거예요.

은혜라는 것은 항상 처음 태어났다는 그 기쁨에 만끽되어야 됩니다. 그러면 자, 개인에서 집단으로 가게 되면 우리는 죽었다고 그러는데 죽었다 하면 숨 쉬지 말라는 말입니까. 송장되라는 말인가, 이런 뜻인데 성경에서 개인이 죽었다는 말은 개인을 그려보겠어요.

개인이 있지요. 개인 안에 집단성이 안에 들어있어요. 집단성은 살아있고 개인은 집단성이 부각되다 보니까 이 개인은 존재 의미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전에 이걸 이야기했지요. 우리를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운반체’ 성도는 운반체에요. 본인의 가치를 전달하는 게 아닙니다. 본인만 있으면 본인의 가치만 내세울 수밖에 없지요. 성도 아니지요. 그건 도 닦는 사람이에요. 나 이렇게 살았다고 지 자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안되지요.

우리의 의는 안 받습니다. 주님의 의를 받아요. 따라서 우리가 운반해야 될 운반체는 우리의 의가 아닙니다. 나 말고 나보다 못난 사람도 천국 보내는 그런 집단적으로 보편적으로 다 적용되는 주님의 의의 운반체입니다. 그래서 이 운반체라는 말이 편하지만 더 알기 쉽게 이야기하면 성도는 뭐냐 하면 택배기사에요.

택배기사의 특징이 뭐냐, 바람이 부나 눈이 오나 날씨가 추우나 상관없이 내 물건 아닌 것을 누구에게 전하라고 하는 그 임무에 대해서는 주님이 양보도 없고 봐주는 것도 없습니다. 이 핑계 저 핑계대지 마세요. 뭐 집안이 어려워서, 뭐 남편이 방해해서 되지도 않는 소리 하지마세요. 반드시 택배기사는 이 물건이 내 물건이 아니고 주께서 십자가로 피로 흘린 물건이기 때문에 우리는 운반체거든요. 택배기사 직원이다 말이죠.

반드시 택한 백성에게 같은 집단 일원이지요. 나는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걸 전달해야 됩니다. 그런데 배달사고 나면 안돼요.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 전하라는 것을 그 물건을 전해야 되지 내가 만든 것을 가지고 전하면 안돼요. 간증집회 상당히 주의해야 됩니다. 나를 본받으라 하면 안돼요. 왜냐, 또 개인으로 돌아섰기 때문에.

그러면 이 택배기사에 대해서 이걸 악마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가만두겠습니까? 방해 놓겠습니까? 온갖 방해를 다 놓는 거예요. 방해 놓을 때 뭐냐 하면 “니 개인의 가치를 놓치지 말라.” 이걸 모토로 끌어낸 겁니다. “니 그러면 망가져.” 마귀가 제일 크게 협박하는 모토가 뭐냐 하면, “이리 살다 망신살 당하면 어쩌려고?” 이런 것. 이 망신살이 인간 개인에게 평생을 따라다니면서 악마가 주는 협박성 개념입니다.

인간은 왜 사느냐 망신 안당하려고 사는 거예요. 망신이란 말은 뭐냐 하면 개인이 개인으로서 자기의식이 아주 응축이 되어있을 경우에 망신이 더욱 더 깊어져요. 나 여기 있고 외부가 뭐냐 하면 타인이 있어요. 나는 타인에 둘러싸인 거예요. 그러면 나를 지키면 지킬수록 타인의 눈은 더욱 강렬하게 내가 요청하는 오류를 범한 거예요. 요청한 모순관계에 있는 거예요. 내가 나에 대해서 더욱 더 절실하게 내 것을 간직하게 되면 타인의 존재가 강렬하게 더 의식이 돼요.

‘야, 이거 자랑해야 되는데.’  아들 미국 가서 성공했다 하면 이거 자랑 못하면 속이 열불 나서 안돼요. 나기 때문에 이때는 뭐냐, 작은 교회 다니는 것보다 큰 교회 다니는 게 유리해요. 왜냐하면 우리 아들 미국 가서 변호사 됐다. 이걸 큰 교회에 크게 퍼드리면 영향력이 크잖아요. 이걸 개척교회 2, 3명, 5명 있는 교회에 해봐야 이건 티도 안 나. 그런데 단점은 뭐냐 하면 망신살 되었을 때에 큰 교회가 불리해요. 이건 망신살이 너무 유명하기 때문에 빨리 작은 교회로 숨어들어가야 돼요. 큰 교회에서는 뒷자리 왔다 갔다 해야 돼요.

개인이 개인을 계속 쥐고 있는 한 이건 악마의 꼬임에 더욱 깊이 함정에 계속 빠지고 있는 겁니다. 조마조마할 수밖에 없어요. 계속 잘되어야 되고 못되면 망신살이 뻗은 거죠. 자기 아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연예인들이 왜 마약하고 연예인들이 왜 그렇게 힘들게 살아갑니까? 인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인기가 떨어질까 싶어서. 처음부터 인기 없었다고 생각해야 되는데 그게 아니고 인기 맛을 봤다가 그게 없어지니까 나는 이제 무슨 낙으로 사나. 그런다 말이죠.

그걸 보면 안 유명한 인터넷 이름 쳐도 뜨지도 않는 이런 공포에 사람들보다 아주 편하지요. 묻혀 사는 사람이 그렇게 좋아요. 남편이 유명인사 돼가지고 검찰청해가지고 모자 눌러쓰고 이래가지고 별로 안 좋아요. 검찰청 백날 왔다 갔다 해도 신문기자 한명 안 오는 게 좋아요. 개인은 몸이 하나이기 때문에 항상 악마로부터 몸을 중심으로 해서 너 개인의 가치에 대해서 악마가 계속 독려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아무리 촌에서 박혀 살아도 일가친척 몇 명은 되잖아요. 그러니까 그 사이에서 뭐가 있습니까? 나름 망신살이라는 게 있어요. 집안 대소사하게 되면 또 소문 돌면 안 되잖아요. 니 얼마나 못났으면 장가를 못 갔으면 필리핀 여자하고 결혼했나. 이렇게 그런 것도 촌에 가면 이게 망신살이 될 수 있어요. 우리 집안이 뼈대 있는 집안인데 이래가지고. 이 소리 촌사람 들으면 또 욕하겠다마는. 어쨌든 간에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화를 낸다는 자체가 이미 자의식에 너무 빠져있다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를 감당이 안돼요. 내가 나에 대해서 감당이 안돼요. 하루 왼 종일 24시간 직장에서나 집에서나 항상 자기만 생각하고 있어요. 자기만. 이것은 남한테 뭐냐 하면 내거 어떻게 남한테 잘 보일까 하는데 주님은 뭡니까? 니 거가 아니고 니 안에 니가 만든 거 말고 주님이 집어넣은 게 있어요. 우리는 운반체고 택배기사다 말이지요.

운반체니까 이걸 누가 아느냐 하면 악마가 알고 있어요. 그래서 여기에 7절 봅시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되어있지요. 마귀를 대적하라 할 때 제가 강의 처음 할 때 뭐라고 그랬습니까? 당당 하라. 그 다음에 뭐라고 그랬지요? 고개를 들라. 좀 낯짝 두꺼워라. 이런 뜻이거든요. 이게 뭐냐 하면 나는 그냥 택배기사에요.

지금 중요한 것은 내가 안 중요하거든요. 지금까지 결론내리면 나는 하등 내가 안 중요하다는 생각을 견지해야 돼요. 그게 마귀를 대적하는 방법입니다. 나는 하등 중요하지 않아요. 자, 내가 안 중요하다면 나와 관련된 사람들 안 중요하겠지요. 내 자식 안 중요해요. 내 남편, 내 아내 안 중요해요. 내 교회, 내 직장 안 중요해요. 내 인생 안 중요해요. 내 과거 권력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택배회사 기사기 때문에 그거 뭐 택배 받는 사람이 아저씨 고향 어디에요? 이런 거 안 묻겠지만, 애가 몇 명입니까? 도와주려고 하면 몰라도 그거 안 묻잖아요. 물건 봅시다. 이리 하잖아요. 우리 집에 오는 택배기사는 얼굴도 안 봐요. 문 툭툭 두드리고 앞에 보면 택배 와있어요. 왔다 갔어. 물건 보니까. 툭툭 두드려 놓고.

우리가 그렇게 나를 귀신처럼 여겨야 됩니다. 나를 산송장처럼, 나는 죽은 존재가 되어야 돼요. 그래야 악마가 주먹으로 때려도 이게 허공을 때리는 거예요. 나를 때리는 것이 마치 허공을 때리는 것처럼 되어야 돼요. 우리는 남이 주는 시선에 아프면 안돼요. 야, 오늘 참 어려운 걸 요구한다. 제가. 아프면 안돼요. 남이 욕하는 거, 뒤 담화 듣고 그걸 잠 못 들면 안돼요. 그건 평소에 내 역할을 지금 안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운반체인데도 불구하고 택배회사 기사인데 불구하고 지가 뭐 공장장인 줄 착각하는 거. 하나님은 내 인간성보고 구원하는 것처럼 자꾸 그런 착각을 하는데 마귀가 온 인간을 다룰 때 바로 그 방식을 사용하는 겁니다.

그건 지금까지 죽 이야기했지요. 인간에게는 누가 있다? 신이 있다. 신의 모습은 누굴 모델로 했다? 우리 자신을 모델로 삼았다. 마치 인간이 인간을 다루듯이 우리는 하나님을 다른 사람 다루듯이 다른 사람과 관계하듯이 하나님의 신을 그런 식으로 관계했는데 그게 뭐냐 하면 로마, 그리스 신화였고 구약 성경에 나오는 구약의 이방민족이라 했지요.

그러나 구약에서의 하나님에게서 보시는 것은 죄인이 아니고 집단이 돼요. 집단. 이스라엘은 집단이에요. 집단의 이름으로 그들은 출애굽기19장 너희는 거룩한 내 백성이에요. 백성. 죄인 아니지요. 백성이지요. 백성이란 개념은 복수개념이에요. 다수개념이에요. 개인개념 아닙니다. 내 백성이라. 내 백성.

예수님도 이야기하십니다. 내가 온 것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왔다. 이스라엘 중에서 그 빠진 부분을, 빠진 대목을 보충하러 왔다는 겁니다. 참, 야고보서4장 7절에 이 마귀이야기 안 나왔으면 정말 우리는 계속 속을 뻔 했잖아요. 내 훌륭하면 천당 가는 줄 알고. 내 훌륭함에 전력을 다하고 평생을 내 훌륭한데다가 투자를 다한 거예요.

기도해놓고 하나님 기도했습니다. 또 티내고. 헌금해놓고 잘 보세요. 카메라 찍었지요. 헌금했습니다. 나, 전도 5명했습니다. 계속 자기관리와 자기 완벽함, 자기 충실, 완전한 자아 만들기, 그러니 뭐 마귀의 밥이지요. 밥.

마귀를 어떻게 이깁니까? 공포라는 거, 겁이 난다는 거, 전부다 뭐냐 하면 이게 귀신이 들려서 그래요. 완전히 죽은 귀신 되면 이미 죽었잖아요. 죽었는데 더 죽을 리는 없지 않습니까. 팔팔한 산 낙지가 되어서 그래요. 진짜 소금 쳐서 주께서 죽여야지요.

그러면 4장 7절에 보면 마귀가 현존하고 있다는 그 이야기하는데, 소위 교회 몇십년 다녀도 상당히 우리가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 뭐냐 하면 마귀가 살아있다는 겁니다. 뭐 모르는 사람 누가 있겠어요. 교회 다니는 사람 다 알지요. 아예 안 다니는 사람도 알아요. 마귀 살아있다. 어디에? 어떻게? 마귀 살아있다며? 마귀 살아있는지 언제 봤어? 또 어디에 나타나는데? 혼자 새벽 막차 끊겨서 혼자서 걸어올 때, 조용한 길을 걸어올 때 마귀가 처벅 처벅 따라오고 뒤돌아보면 없어지고 이런 거. 드라마에 보면 그런 거. 꼭 범인은 모자를 써. 모자를 쓰고 따라오잖아요. 그거 마귀입니까?

마귀한테 쫓기고 하는 것은 그것은 뭐냐 하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내 인생을 내가 지키겠다는 백성개념이 아니고 나 개념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잡귀신, 군대귀신 지가 불러 모은 거와 똑같아요. 내 생각하고 집에 있으면 그 집에 띵동~ 해가지고 잡귀신 한 열대마리 벌써 들어와 있어요. 내 생각에 몰두해가지고.

그러면 그 귀신을 우리가 어떻게 대적하고 물리칠 수 있는가, 그럼 마귀 만남의 반대말이 뭐냐, “당신을 보면 경탄이 일어납니다.” 내가 아니고 마귀에 대해서 내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당신을 보게 되면 경탄이 일어난다. 이 말은 뭐냐 하면 같은 백성을 만나서 그 사람이 은혜 받은 걸 생각한다면 마귀가 살아있는 것보다도 더 월등하게 주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또 다시 확인하게 되면 어느새 마귀는 어두운 그림자는 그 집에서 없어져요.

성도가 와가지고 나 이렇게 복음도 모르고 나 이렇게 엉터리로 살았는데 복음을 알고 난 뒤에는 “아휴~ 나 같은 인간을 구원하다니!” 듣는 순간 집에 들어왔던 열대마리 나갔어요. 왜? 나로부터 떠난 이야기잖아요. 내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내 이야기가 아니란 말이죠.

뭐가 경탄스럽냐 하면, 성도가 실제로 있다는 것이 경탄스럽고 감탄할 일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성도가 십자가 피로 모든 죄를 용서받아서 다 이루었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 생겼다는 그 자체가 더 이상 내 인생에 구애받을 필요 없다. 오늘 죽어도 낙원에 간다는 그 기쁨으로 산다는 이런 사람이 있어버리면 성경 말씀 자체가 살아있기 때문에, 성도 자체가 살아있기 때문에, 마귀는 뭐냐 아무 상관없는 거예요.

다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악마는 인간의 약점을 알고 있고, 주님은 악마의 약점을 알고 있어요. 그럼 우리는 주님 편에 섰기 때문에 악마가 내 약점을 개인적인 약점을 막 쑤실 때에도 우리는 고개를 들어야 돼요. 당당해야 돼요. “아휴~ 지적 잘하시네요. 아이구 옳은 소리만 다하지.” 이러면서도 싱글 싱글 웃어야 된다니까요. “아휴~ 나는 매일같이 망신살 당하는데 어떻게 알았어요?” 이런 거. 마귀가 “아이씨! 재미없어.” 협박이 통하지 않는.

나 자신을 보면서 감탄이 일어나는 거지요. 어떻게 나 같은 인간을 다, 아까 집사님이 말씀했잖아요. “주님, 실수하신 거 아니에요? 어떻게 나 같은 걸 구원하시다니. 실수하신 거 아니에요? 저, 뭐했다고 구원하십니까?” 야고보서에 나오는 하나님은 기존의 하나님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하나님이에요. 그냥 주님이라 보시면 돼요. 그리 알면 쉬워요. 야고보서의 하나님.

마귀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게 아니고 마귀의 대적자는 예수님입니다. 왜냐하면 악마는 계속 인간들을 자기 종으로 부리듯이 숨었고, 품었고, 예수님은 품었는데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받고 성공함으로 십자가로서 빠져나갔잖아요. 빠져나가신 분에 의해서 백성이 됐다는 말은 악마가 더 이상 그 인간을 다룰 수 있는 어떤 허점이나 약점을 가질 수 없어요.

성도가 만약에 온 몸에 참기름을 발랐다고 봅시다. 그러면 손을 잡으면 이게 미끄러진다니까. 어떻게 잡아서 흔들어서 이걸 괴롭혀야 될 텐데 미끌미끌해. 시비 걸어서 앞다리, 뒷다리 걸어서 넘겨야 되는데 성도는 말하기를 나는 이미 죽었다는 거예요. 여러분, 안 죽어봤지요? 만약에 의사가 아픈데 실수해가지고 죽었다고 칩시다. 자기는 잠시 잠을 잤는데 의사가 성질 급해서 따로 게임한다고 프로야구 본다고 정신나가가지고 그만 숨을 안 쉬니까 1분 안 쉬니까 죽었다 해가지고 그런 의사 없지만. 요새 의사는 기계가하기 때문에 없지만. 옛날처럼 그냥 죽었다 합시다.

죽었는데 자고 일어나니까 관이 되어있다 말이지요. 그래서 두드려가지고 옛날에 그런 사람 많았어요. 관에서 깨어난 사람 많거든요. 깨어났다 칩시다. 이미 죽음을 경험했잖아요. 요새도 그런 게 있어요. 수면내시경 같은 게 있어요. 이미 죽었어요. 죽고 난 뒤에 다시 깨어난 거예요. 깨어났을 때, 본인이 본인 인생 살아가는 게 아닙니다. 세상에서의 졸도해서 살아나면 또 꾸역꾸역 내 인생 살아야 돼요.

또 얼마 대출 받아야 되고, 이거 몇 평입니까 물어야 되고, 집이 지금 빚이 얼마고 은행 빚이 얼마고 계산해서 여기 올 수 있겠다. 합칩시다. 할 수 있는데, 이미 죽은 자 입장에서는 그 모든 그 사람의 하루, 하루 일과 스케줄을 죽였다가 살려준 택배기사 직원이기 때문에 회사 차원에서 사장님이 사는 형편을 알아서 조종해줘요.

중요한 것은 물건이 중요하기 때문에 어떤 때는 거지로 살아야 되고, 어떤 때는 부자로 살아야 돼요. 왜냐하면 물건이 중요하지 내가 얼마나 잘 살았느냐, 못 살았느냐 라는 것은 구원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이야기거든요. 있는 형편이 죽었는데 주께서 다시 살려서 이 자리에 오게 하셨다.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제가 말을 이렇게 하니까 지금 눈치가 목사님 우리가 무슨 재주로 그렇게 삽니까? 하는 눈치인 줄 아는데, 이건 우리 재주가 아니고요, 마태복음13장을 한 번 봅시다. 우리 재주 같으면 이거 성경공부 할 필요 없어요. 우리가 못합니다. 38절,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마귀 나오지요. 마귀가 지금 뭘 뿌렸지요. 그 다음에 19절,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 말은 뭐냐 하면 씨 뿌리는 사람이 뭘 뿌리느냐 하면 말씀을 뿌려요. 씨를 말씀이라 예수님이 말씀하셨거든요.

말씀을 뿌릴 때에 다른 인간들은 등신 같아요. 인간들은 돈이 중요하지, 말씀 안 중요해요. 그런데 누가 눈치가 빠르냐 하면 악마가 눈치가 빨라요. 그래서 말씀이 뿌려지면 돈은 안 건드려요. 건강도 안 건드려요. 집안도 행복하라고 놀러가라고 하는데 딱 뭐를 건드리느냐 하면 예수님의 복음에 대해서는 건드려버려요. 그걸 “니 들은 적 없다. 들은 적 없는 거야.” 하고 우리 머리에서 우리 뇌리에서, 마음에서 말씀을 빼앗아 간다는 말은 악마가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이건 인간선이 아닌 악마 선에서 이미 다 알고 있어요.

예수님께서 이걸 하나님이 하신 게 아니고 예수님이 이야기했거든요. 결국 예수님이 이 말씀하시고 이 세상에서 버림받아서 쫓겨났잖아요. 그럼 예수님이 한 것은 때가 되매 말씀에 응하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 죽었잖아요.

그러면 이 전 세상에 교회, 성당, 이 세상 자체에 대해서 악마가 무엇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은 악마가 알고 있어요. 그게 뭡니까? 십자가입니다. 교회부흥이 아닙니다. 예배당 짓기 아니에요. 교인들 은혜 받고 교인들 부자 되는 게 아니에요.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목사들이 십자가를 기를 쓰고 속아내려고 하지요. 십자가 아는 교인들 속아내 버리고 십자가 아는 사람을 이단으로 취급하는 이유가 십자가 해버리면 교회 안 된다는 거예요. 너무 부정적이라는 겁니다.

부정적이고 교회 안 된다는 것은 무엇에 근거하느냐하면 바로 개인의 가치, 망신살 안 당하려고 하는데 있어서 이게 십자가와 매치가 안 된다고 해서 악마가 그렇게 협박하는 거예요. 십자가를 알면 개인의 가치가 완전히 없는데 니 그래도 좋으냐고 악마가 계속 들이미는 겁니다.

그런데 성도는 개인이 아니고 뭐냐, 백성이에요. 어떤 백성이냐 하면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는 새로운 집단의 기초가 뭐냐, 십자가에요.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죄 용서에요. 이걸 목사가 받아들이려면 목사가 뭘 포기해야 하느냐 목회를 포기해야 돼요.

“교회 안 돼도 좋으니까 주여, 이 죄인을 받아주시기만 하면 교회 날아가도 저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이 정도 되어야 그 십자가 아는 목사에요. 십자가 이용해서 교회하려고 하는 그건 마귀의 종입니다. 교인들 확보하려는 그 수작들입니다. 이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하면 굉장히 좋아해요. 그런데 그들이 복음을 알아서 좋아하는 게 아닙니다.

전에는 교회하고 자기 집 두 살림을 하다가 이제는 교회는 손 놔도 되겠다는 거예요. 이제는 내 집 관리, 내 자식 관리만 하면 된다는 거예요. 내 노후를 위해서 빌딩 사놨는데 이제 빌딩의 임대료만 관리하고 그것만 기도하는 거예요. 이쪽 교회 귀신이 아닌데, 저그 집구석 귀신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그것도 개인적이잖아요. 그것도 개인적이라. 야! 헌금도 안 해도 된다. 이게 전부 다 자기 집만 생각하는 거예요. 자기 집만. 여러분 앞에 눈치도 없이 과감하게 이야기했습니다.

마귀가 바보가 아니에요. 인간이 교회라는 게 짐스러우면 어디 도피하는 줄 알아요? 그 도피안에 보면 또 자기가 개인이 절대화되어있습니다. 나라는 개인이 절대화되어있어요. 다른 방식으로 절대화되어있어요. 남편들이 나이 많아서 이제 낚시하러 가잖아요. 낚시 놓을 때, 집에서는 천덕꾸러기입니다. 청소할 때, “궁딩이 비켜라. 이 인간 나가지도 않고 친구도 없나.” 그럼 투덜거리면서 나가는데.

만약에 그 사람이 취미라 하면 낚시터에 가면 그 부인한테 설움 받던 거 거기가 아예 신나. 특히 등산을 좋아한다 하면 등산할 때 지가 제일 빨리 하고 “아이고, 어르신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이신다.” 하면 이러면 또 기분 좋아. 특히 아주머니들 등산가서 운동하러 가는 게 아니에요. 가면서 살 빼는 게 아닙니다. 술 먹고 내려와요. 낮술 먹고. 지하철 이렇게 가보세요. 술 먹고 등산복입고 얼마나 많이 탄다고요. 그게 바로 마귀의 세상입니다.

항상 자기 개인밖에 몰라요. 악마가 말씀이라는 복음 그 말씀을 제키는데, 그럼 성도는 개인을 이야기하지 마라 했는데 또 나오는 질문은 “성도는 개인적으로 자기를 어떻게 관리해야 됩니까?” 라는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지요. 그걸 위해서 뭐가 있느냐 하면 바로 요한복음4장에 보면 사마리아여인이 나와요.

사마리아여인의 특징이 뭐냐 하면 자기 안에 우물을 갖고 있어요. 그런데 우물이 어떤 우물이냐 하면 목마르지 않는 우물이에요. 목마르지 않는 우물을 세자로 이야기하면 ‘새롭다’ 성도는 매일 삶이 새로워요. 그릇에 물을 반을 떠놓으면 손을 안대면 아침에도 반이 있잖아요. 저녁에도 반이 있잖아요. 만약에 저녁에 보니까 수면이 좀 올라왔다면 이거 진짜 신기한 일이지요. 우리에게 주는 은혜가 주님에 의해서 조금씩 수면이 올라가요. 우리가 보기에 똑같다고 보는데 주님은 똑같은 걸 가지고 새로운 것을 생산해 내는 솜씨를 발휘해버립니다. 똑같은 사람이 아니에요. 늘 새로운 삶이 되도록 하는 겁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물 길러왔다가 그 사마리아 여인이 그 다음부터는 메시아를 증거 하는 사람이 된 이유가 본인 뜻이 아니에요. 주께서 택배회사에서 택배 할 물건을 업그래이드 시켜주는 겁니다. 늘. 늘 어제보다 더 예쁘게. 더 참하게. 그리고 그렇게 하다 보면 참한 것을 전하는 본인의 전달하는 요것이 전에 보다 훨씬 더 많은 보람을 느끼는 거예요.

더 쉽게 말해서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당연한 걸로 여겼는데 가면 갈수록 이 세상에서 살려준다는 것만 해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살려주시는 것만 해도. 때로는 전쟁영화보고 난 뒤에 아~ 전쟁할 때 먹을 것도 없고 내가 전쟁하지도 않았는데 남이 벌려가지고 고생은 내가 하고 하는데 막상 영화관밖에 나와 보세요. 영화관에는 쏘고 시끄럽지요.

퉁퉁 퉁탕탕! 고지를 점령하려하는데 밖에 나오면 벌써 맥도날드 햄버거냄새 확 나면서 2층에 내려오면. 얼마나 고요하고 평화롭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평소에 맥도날드 냄새 안 좋은 줄 아는데 영화보고 전쟁 실컷 2시간동안 전쟁 상태에 완전히 정신이 빠졌다가 나오게 되면 평화라는 것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지. 이게 새롭잖아요. 이 은혜가 얼마나 새로운지요.

나중에는 그 정도가 아닙니다. 죄인인데도 불구하고 살려주시는 그 은혜가 늘 새롭게 일어나게 되어있어요. 그게 바로 제2의, 제3의, 제4의 사마리아 여인이에요. 안에 우물이 가만히 있지를 않아요. 그런데 우물이 나 즐기라고 있는 게 아니고 퍼다 남한테 전달하라고 남한테 택배로 우물을 전하라고 우리로 하여금 우물을 만든 겁니다. 10분 쉽시다.
 공은주(IP:119.♡.152.148) 18-11-01 11:07 
안양20181012b야4장6절(마귀대적)-이 근호

두 번째 시간합시다. 아까 첫째시간에 택배회사 직원이라고 했는데, 그 전달하는 것이 마태복음13장에 보면 그게 말씀이었습니다. 마귀가 인간과 말씀이 연결되는 것을 마귀가 차단시켜요. 죽으라고 그걸 끊는 거예요. “원하는 건 다 줄게. 세상 영광도 주고 건강이고, 자식 잘되는 거 다 줄 테니까 제발 예수님이 이 땅에서 쫓겨났다는 이야기는 하지 말라.” 왜냐하면 하나님이 쫓겨날 리가 있겠냐고 이야기해요.

다시 합니다. “예수님이 인간들에게 밀려서 나갔다는 이야기는 하지 마라. 예수님과 인간은 친하게 지내면 지낼 수 있다고 이야기하라.” 이리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은 기존의 이방의 종교에서 말하는 신하고 똑같이 되어버려요. 인간을 위한 하나님이 되겠지요. 인간을 위한 하나님. 자비하고 어진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인간이 부족한 것을 채워줄 수 있는 분으로서의 좋으신 하나님이 되어버릴 겁니다. 옛날에 순복음 교회도 그렇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이 착하고 착한 나로부터 쫓겨났다는 이야기는 제발 좀 하지 마라 이리 되는 겁니다.” 이건 개인 개인이 살던 데로 살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계속 살아남겠다는 것을 우기는 겁니다. 히브리서2장15절에 보면,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이리 되어있어요.

마귀가 뭐냐 하면, 혈육을 근거로 잡고 인간들을 협박해왔다는 겁니다. “그러면 니 육이 죽어!” 이런 식으로 협박해 온 거에요. 그런데 그 협박에 누가 끼어들었느냐 하면 예수님이 끼어들었거든요. 예수님이 끼어 들어서 맞아 죽었어요. 맞아 죽었지만 사흘 만에 부활했잖아요. 지금 살아계시잖아요. 우리와 함께 있다 말이죠. 그걸 악마는 싫어하는 거예요.

“꼭 죽어서 살 필요 없다. 니가 안 죽고 유지되는 게 낫지 아니 하냐”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고집을 부리는 겁니다. 그런 소리를 어디서 듣느냐 하면 바로 안 믿는 사람들에게 말을 들어보면 전부 다 그 이야기에요. 될 수 있는 대로 오래 살자. 안 다치고. 불행 없이. 그걸 저는 사자성어로 광산김씨라고 이야기하는데. 광산김씨 왜 좋아하느냐 하면 말 한마디 행동 하나 하나가 다 마귀적이에요. 마귀적인데 다른 사람이 들으면 너무나 평범해요. 우리 살아가는 거와 똑같아요.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세상의 마귀를 우이 저렇게 적나라하게 잘 묘사했는지 행동 하나, 사고방식 하나, 전부다 마귀적입니다.

요번에 수요일날 프로그램은 지 아들 요가 선생님 좋아해가지고 예쁜 선생님 찾아가서 또 잘 뵈려고 할 때 아버지가 광산김씨가 끼어 들어가지고 우리 며느리 되게 되면 제사도 포기하겠다. 이런 식으로 나오지요. 그러니까 우리 집사람이 된다면 내 자식 행복하다면 내가 아버지로서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 얼마나 일상에서 많이 만날 수 있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히브리서2장에서는 혈육이에요. 혈육, 내 집안, 내 족보, 우리 가문, 내 가정, 내 육신의 출처, 육의 출처, 여기에 대한 집착 그게 나에 대한 집착, 나 자신, 그게 바로 악마에요. 그런 식으로 악마를 못 이겨요. 악마를 못 이긴다고요.

그러면 악마를 이기는 방법을 첫째시간에 했는데 그걸 요번에는 칠판 색깔을 바꿔서 해보겠습니다. 백성개념이라 했지요. 백성개념은 거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개인 개인개념이 아니고 뭐냐 하면 장소개념이 나와요. 장소 개념. 장소개념이 뭐냐 하면 바로 예수 안이에요. 이게 예수 안입니다. 예수 안.

사도바울의 편지에서 신학박사 아니라 누구라도 어려운 대목이 뭐냐 하면 예수 안이 어디냐 하는 거예요. 왜 예수 안을 무시를 못하느냐 하면 의로워도 예수 안, 구원도 예수 안, 그 예수 안을 다른 말로 하면 갈라디아서6장에서는 십자가 안이라고 되어있고요, 또 다른데 가면 이걸 가지고 요한복음14장 같으면 성령 안이라 되어있어요. 성령 안, 십자가 안, 예수 안, 다 같은 이야기입니다.

특히 ‘십자가 안’ 하는 것은 이것은 더더구나 어려운 이야기지요. 제가 설교시간에 그런 이야기했지만, 사도바울의 개념은 성령 안에 있는 사람만 알아듣는 개념인데, 그 개념을 세상 적으로 확장시켰다는 이야기를 했거든요. 십자가 안이라는 하는 것은 십자가는 사건이다 말이죠. 그러니 이 말이 얼마나 어려울까요. 사건 안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입니까. 왜냐하면 사건은 바람 같아요. 한 번 일으켰다 하면 보면 지나간 거예요. 차가 사람을 치었다. 결과만 남지만, 사람 친 그 순간은 그 순간뿐입니다. 다시없어져요. 그걸 억지로 하는 게 현장검증이라 하는 거잖아요. 현장검증은 인형가지고 하고 어설프지요. 그 실감 안 나지요.

십자가 안이라 하는 것은 사건 안임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안에 있을 수가 있다는 이것이 우리한테는 정말 터무니없이 들리고 희한한 일이지요. 이 전체가 결국 뭐냐 하면 ‘불가능성’이에요.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와서 목사가 시킨 대로 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이건 전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교회 가서 시킨 대로 해봐야 백성이 되는 게 아니고 개인이 더욱 더 개인에게 응축이 되고 개인에게 집착을 할 뿐이지요. 나중에 골치 아파요. 그동안 구원받는다고 공들이고 투자한 것이 한 방에 다 날아갈 수가 있을 때, 그 때 나 어떡하지? 내가 나한테 신주단지 모시듯이 나한테 충성을 다했는데 나한테 투자와 헌신을 다했는데 그 내가 지금에 와서 망신살 당해버리면 그 마음, 그 투자한 거 어디서 찾지? 라고 또 염려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7년전, 7년후 그런 이상한 해석하는 거 있지요. 그 모든 해석이 뭐냐 하면 백성을 살리는 장소가 아니고 그 모든 것은 나를 살리기 위한 장소를 찾으려고 하는 겁니다. 마지막 때 핵폭탄 일어나면 벙크 만든 장소가 나를 살리기 위한 장소에요. 나 또는 내 가족, 또는 내 교회 하여튼 나와 관련된 장소로 가는 겁니다. 백성이 아니고.

백성의 장소개념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나부터 출발하고 나에서 백성으로 갈 때는 여기서 죽어줘야 돼요. 죽어줘야 되는데 그 죽는 방법이 뭐냐, 자살이나 넥타이 번개탄 그 방법이 아니고 뭐냐 하면 어린양입니다. 어린양의 피를 구약에서 모세는 뿌리게 되어있어요. 백성들 머리위에 양푼에 담아 머리위에 확 뿌린다고요. 피를 뿌리는 것은 유월절 사건의 반복입니다. 유월절 사건에서 문지방과 문설주에다가 피를 발랐잖아요. 그 피가 한 때의 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계속 가는 겁니다. 그 피가 뭘 만드느냐 하면 공간을 마련해요. 장소를 마련합니다. 피  있고 백성이 있으면 그 다음에 장소가 만들어져요. 그 장소가 무슨 장소냐 하면 이게 만남의 장소입니다.

악마가 노리는 것은 하늘과 땅이 만나는 그 장소를 없애버리는 거예요. 구원이 아닙니다. 우리는 장소에요. 우리는 움직이는 장소지 내 구원이 아니에요. 주께서 만들어내신 주님이 백성을 만나는 장소, 이걸 성전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움직이는 성전이에요.

성전이기 때문에 무슨 사건이 일어나야 하면 십자가 사건이 그 안에서 반복해서 일어나야 됩니다. 십자가 사건이라 하는 것은 쉬운 말로 하면 머리를 끄적 끄적 긁는 거예요. 참, 나 죽었잖아. 남편이 잔소리한다. 왕 왕 개 짖어댄다. 내 개는 뭐 괜찮은 실없는 개인 줄 아나. 같이 짖어대고, 애는 울고 엄마, 아빠 싸우지 마. 싸우고 있다. 가만히 두고 보니까 이상하다. 마귀가 짖는데 내가 왜 같이 짖었지. 머리를 긁적, 긁적 긁는 게 내 위신과 체면을 살리기 위한 장소가 아니다. 나를 위한 장소가 아니다 말이죠. 나를 위한 장소는 하나님이 만나주지를 않아요. 이걸 전부 다 한꺼번에 다 통합해서 이야기한다면 하나님은 언약을 통해서 만난다. 이리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통해서 만난다.

그 언약을 통해서 만나는 그 실례가 있습니까?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제가 부상강의 때 한 것을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부산강의에서 이런 이야기했거든요. 아브라함이 있었다. 아브람은 아버지 데라에서 나왔어요. 아브라함은 아버지가 없어요.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아버지가 아니고 이삭에서 나왔어요. 이삭에서.

아브람 같으면 혈육이기 때문에 과거를 거쳐서 현재에서 미래로 나아갑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삭은 뭐가 없느냐 하면 이게 없음을 보여주기 위한 있음이 돼요. 참, 말을 어렵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 없는 존재. “없었어” 말하기 위해서. “있네!” 라고 하는 그게 이삭이에요.

바로 이삭의 본질을 아브람이 알고 있는지를 시험하기 위해서 있는 이삭을 없음으로 니 손으로 없음으로 없앨 수 있는가를 시험한 것이 바로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죽이는 겁니다. 없다는 말은 제가 아까 했던 뭐냐 하면 불가능성이지요. 있음에서 없음으로 못가요. 죽어도 못가요. 자살해도 안돼요. 있음은 계속 있음이에요.

나중에 예수님이 심판하시면요, 악한 자도 지옥 가는 사람도 부활돼요. 있음은 계속 있음이에요. 존재는 계속 있음이라고요. 있음은 그냥 있음이 끝이에요. 거기서 어떤 사건이라는 것. 하나님이 원하는 사건은 유발할 수 없습니다. 사건은 없음에서 오신 분이 있음을 다룰 때 그 때 비로소 십자가사건이 일어나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아들 바치는 것은 아버지 이름으로 십자가 사건을 지금 유발하는 거예요. 죽었는데 옆에 수풀에 있는 준비된 여호와이레입니다. 준비된 그 분 때문에 죽은 아들이 죽었는데 다시 살아났잖아요. 이 땅에서의 구원은 뭐냐, 일단 죽어야 돼요. 죽고 난 뒤에 살아나야 그게 성도입니다. 그게 바로 성령이 오게 되면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그 말이다 말이죠.

죽은 놈이기 때문에, 죽은 존재기 때문에 죽은 놈에게 잔소리했을 때 죽은 티를 내야지 안 죽은 티를 내게 되면 부부싸움 일어납니다. 참, 말은 쉽다마는 참 이건 어렵다. 누가 욕하게 되면 우리는 갑작스럽게 반발을 일으키지요. 내가 주일에 했잖아요. 개한테 돌 던지면 확 달려든다고. 우리가 아무리 복음 안다 죽었다 하지만 개 같아. 조금만 치면 확 달려들어요. 5를 주면 10으로 되갚아줄 정도로 우리는 복수심으로 강렬한 사람입니다. 한 성질들 다하고 있어요. 한 성질 하거든요.

그런데 한 성질을 우리가 그냥 한 성질을 죽이라 하면 니 성질을 죽이라 하면 우리는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죽어도 나이 60, 80돼도 곧 돌아가도 성질 안 죽어요. 봤잖아요. 제가. 요양병원에 가보세요. 성질 안 죽습니다. 그런데 이걸 역으로 생각해 보세요. 그 성질 난 것도 주께서 사건을 일으키기 위한 재료라고 생각해 보세요.

너무 사람이 점잖고 참아야 하느니라. 여자의 이름으로 참아야 하느니라. 은장도해서 허벅지를 이리 사는 게 아니고, 욱! 왁! 있는 대로 나오지만 돌이켜보면 이게 주께서 뭐 때문에 돌아가셨느냐를 새록 새록 알리기 위한 사건 형성에 있어 필요한 조치를 안 믿는 사람을 통해서 약 올리게 만드는 거예요. 불신자를 통해서 바짝 독이 오르게 만들어요.

독이 오니까 아~ 은혜 받았고 이제는 복음 알고 성경공부 했으니까 참아야 한다. 내가 언제 참아야 한다고 한 적도 없는데 본인이 알아서 ‘아니야, 성도는 참아야 하는데. 점잖아야 하는데.’ 이렇게 하다가 아이구 점잖고 뭐고 도저히 못 참겠다. 나올 때 내가 점잖아서 십자가 사건 되는 게 아니에요. 불가능성이에요. 내가 십자가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없어요.

택배기사가 택배 할 물건을 지가 집에서 가내공업처럼 만들면 안돼요. 주께서 주실 거예요. 니는 아무것도 아니다. 니 요것만 운반하면 되지 니 나름대로의 가치와 의미는 챙기지 마라. 나 니 직원으로 뽑을 때 니 잘남을 챙기라고 뽑은 게 아니다. 요 물건 제대로 배달사고 나지 않고 고대로 그냥 전하라고 너를 뽑았다. 하는 그것을 알아요. 알지만, 내일되면 또 모른다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매일같이 사마리아 여인의 우물처럼 늘 사건이 터져야 돼요. 아침에 눈뜨고 기다리세요. 욱하는 사건, 성질나는 사건이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주께서 살아계시니까.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제 아시겠지요. 없음에서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럼 다시 이야기해봅시다. 자, 개인에서 백성이 될 때 나중에 백성에 들어가 보니까 백성이 있는데, 개인의 입장에서는 이 백성은 뭐가 되느냐 하면 백성이 안 되고 타인이 돼요. 남. 어렵게 말씀드려서 나에게 남이 있다는 말은 내가 나를 적극적으로 그야말로 목숨 걸고 지켜야 된다는 야심을 더욱 돈독하게 만들어요. 혼자 집에 있을 때는 옷을 아무거나 입어도 되지만, 딩동~하고 누가 오게 되면 옷을 하나 뭐 걸쳐야 되지 않습니까. 남이 있다는 것은 나에 대한 의식을 더욱 고취시키는 겁니다.

“뭐~ 사람 사는 게 이렇지요. 뭐 있어요.” 다 그렇다 말이죠. 예를 들어서 남편하고, 제가 지금 아주 나름대로의 심도 있게 공부하고 있어요. 아가에 대해서. 진짜 아가에 대해서 할 말이 많아요. 제가 지금 공부한 바에 의하면 엄청 많은데. 남편하고 아내 있을 때, 미리 조금만 이야기합니다. 남편과 아내는 절대로 하나가 아닙니다. 어떤 경우라도 인간은 남하고 하나가 될 수 없어요. 이걸 하나라고 함으로서 하나 될 수 없음을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만드는 기회를 여러분 부여받은 거예요.

‘야~~ 하나가 아니구나!’ 하나라고 믿었던 내가 바보다. 믿었기 때문에 기대할 게 많아지잖아요. 기대할 게 많고 의지하고 싶고, 의지한다는 말은 쉽게 말해서 이용하고 싶은 거거든요. 시집이 잘살아보세요. 결혼 잘했다는 생각이 들지요. 그런데 시집이 시누이 일 생기고, 시동생 놀음하다 잃고, 시누이 밑에 동생 음주운전하다 걸리고 보상금 있고, 이건 내가 잘못했구나. 사람을 잘못 봤구나. 거기다가 잔소리했더니 잔소리한다고 폭행 또는 폭언, 폭행의 자세 취하고. 이 모든 것이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느냐 하면 결혼했으니까 둘이 하나라고 일방적으로 지가 철딱서니 없이 생각한 거예요.

하나라고 생각하니까 기대가 너무 큰 거예요. 그런데 그 하나가 각자 딴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남편은 남편대로 하나라고 생각하고, 이쪽은 이쪽대로 하나라고 생각해가지고 그 하나에 걸맞게 했는가를 늘 감시를 하게 되고 측정하게 되고 검색에 나서게 되고 이걸 수치를 맞춰보는 거예요. 하나 된 꼬라지 보고. 실망감이 드니까 괜히 자기가 잘못 생각해 놓고 그 탓을 하나 될 수 없는 남 탓으로 돌리는 거예요. 니 때문에 내 인생 조저 났다. 서로가 그러는 거예요. 이건 지금 몰라도 한참 모르는 거예요. 양쪽 다.

주님께서 사랑해가지고 만나게 하신 것은 이렇게 이런 오해를 통해서 십자가사건을 유발하기 위해서 그런 겁니다. 불가능이거든요. 불가능을 주님께서 가정에 개입해가지고 성도될 수 없는 사람을 성도되게 하기 위해서 그러한 일상의 결혼과 이런 것들을 사항을 주께서는 아주 협력하여 선을 이루어서 만드신 거예요.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부족함이 없어요. 그런데 우리가 그걸 몰라요. 매일 하나님께 요게 다입니까? 에그 쪼게. 매일 불평  불만 한다는 그것은 이미 기대가 너무 많아서 그래요. 자기 본자리를 찾지 못하고 너무 기대가 많아서 그렇습니다. 지금 어려운 대목하고 있습니다. 뭐냐 하면 백성에서 뭘 뽑아내느냐 하면 장소 뽑아내는 거예요. 이건 어려워요. 이 장소는 있는 장소가 아니고 없는 장소입니다. 없는 장소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실은 속은 거예요. 뭐라고 했느냐 하면 약속의 땅이라 한 거예요. 약속의 땅. 분명히 했지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의 땅에 간다는 거예요. 그들은 약속의 땅이 요기서 바로 옆에 있는 줄 알았어요. 속은 거예요. 약속의 땅인데 땅은 맞아요. 그게 광야입니다. 이게 뭐예요? 그게 광야인데 그냥 있음이 아니에요. 광야는 노림수가 있어요. 뭐냐 하면 사람을 죽여요. 사람을 죽이는 곳이에요. 물론 노골적으로 광야에서 불 뱀 나와서 죽은 적 있지만, 그게 아니고 집단적으로 죽여요.
 
어떤 보통 사람이 100명이 있다면, 살 사람 따로 있고 죽을 사람 따로 있거든요. 김 병만처럼 장거리에서 살아남을 사람 같으면 몇 명 살 것이고, 능력 없는 사람은, 몸이 약한 사람은 일찍 죽고 그러는데 이게 아니고 광야에 들어선 모든 이스라엘은 어느 누구 하나 예외 없이 다 죽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애굽에서 살던 그 방식이 모세는 빼고, 인간이 나는 살았다, 에 그동안 결속되어 있던 사는 방식이었거든요.

애굽에서는 농사 지었잖아요. 그것도 애굽에서 제일 좋은 땅을 분양받았어요. 요셉덕분이죠. 요셉덕분에 제일 좋은 땅을 분양 받았다고요. 다음 수요일날 땅과 풍년에 대해서 제가 언급할 거예요. 지난 수요일은 요셉의 꿈에 대해서 제가 해석했잖아요. 다음에는 대책안을 이야기할 건데. 땅이 있다. 그 자체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땅은 있다=나는 살았다’입니다. 이게 창세기3장에서 아담이 살던 방식이에요. 토지가 있으면 살 수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땅이 나를 죽일 수 있다는 땅으로 절대로 이해 못해요. 여러분 실력이 있으니까 어렵게 나가보겠습니다.

정리해 보면, 땅은 우리를 살 수 있다 지요. 그런데 한 가지 더 이야기했지요. 죽을 수 있다 했습니다. 땅은 죽은 자를 묻는 기능도 있다. 죽었다는 뭐냐 하면 땅에서 하나님께로 호소가 되어버려요. 땅에서 흘린 죄 값이 땅에 묻히면 이 땅은 하늘에 호소를 해가지고 하늘에서 이 살고자 하는 인간을 죽여 버립니다. 이게 창세기4장에 나오는 가인과 아벨이야기에요.

땅이 죽은 게 아니에요. 땅이 살아있어요. 땅이 살아있어서 땅은 CCTV입니다. 그걸 예레미야에서는 뭐냐 땅에 언약이 살아있다. 이리 이야기하지요. 언약이 살아있다. 하나님의 언약이 땅에 살아있기 때문에 파도가 쳐도 뭍에 까지 올라오지 않는다. 이리 되어있어요. 시편도 그렇고. 해운대나 가까운 인천 송도에 가면 보면 알잖아요. 땅은 땅이고, 여기까지는 바다고 땅인데, 만약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면 인도네시아 이천명 죽는 겁니다. 갑자기 밀려왔으니까.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지진을 가지고 뭐냐 하면 땅은 이제는 살 곳이 못 됨을 확실하게 확정되었다는 표시로 일곱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으로 이 땅에 지진이 일어나고 땅이 갈라져버려요.

땅에서 불이 나고, 땅에서 사람이 아프고 멸망하는 거예요. 땅이 살 곳이 못돼요. 전에는 땅에서는 건강하고 이리했는데 땅이 살 곳이 못됩니다. 옛날에는 땅이 없는 사람이 힘들었어요. 이제는 땅에 있는 사람을 이제는 저주하는 도구로서 수단으로서 사용하는 겁니다. 땅이 곧 지옥이에요. 여기서 가을야구할 거예요. 앞으로. 여자들 가을 야구 잘 모르지요. 가을 야구합니다. 미국부터 한국에. 롯데, 기아 마지막 가려고 애를 쓰잖아요. 남자들 보면 매일 야구이야기에요. 가을 야구하고 세일합니다. 불판위에서 지금 세일하고 있고 야구하고 있어요. 남북회담하고 있고.

사도바울 같으면요, 그리 봤을 거예요. 그리 보는 겁니다. 너희는 이미 죽었고 우리의 이 생명은 어디 있다? 하늘에 있다고. 그러니 보세요. 마귀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는 말이 사도바울이 내뱉는 그 말 하나 하나에 전부 다 십자가 사건을 유발시키는 엑기스가 들어있기 때문에 마귀는 복음의 광채를 못 들리도록 그렇게 온 노력을 다하고 있는 겁니다.

“교회에 부흥하면 되지 뭘 더 원해! 복 받고 건강하고 잘 먹고 잘살고 돈 벌고 그러면 됐어. 그만 딴 소리 하지 마! 하나님께 은혜 받은 거야.” 맨날 이런 쪽으로 몰아간다니까요. 그 자체가 점점 길이 멀어지는 걸 모르고. 땅을 포기 안하게 되는 것이 문제에요. 후딱 떠날 생각하면 되거든요. 그저 민기적 민기적 안 떠나려고 미련 갖고 복수하고 갈 랍니다. 복수할 거 없어요. 그냥 떠나면 돼요. 복수는 주께서 알아서 할 거예요.

내가 손 좀 보고 갈 랍니다. 뭘 손볼게 있다고. 니나 잘하세요. 남 손 보지 말고. 광야는 죽는 곳이에요. 애굽에서 살 때는 씨 뿌리고 거두어서 살았습니다. 그걸 전체 허용하지 않는 동네가 광야입니다. 죽으라는 이야기에요. 물 없어요. 물이 왜 있어요. 물이 있을 때 있을 거 아니냐. 물이 없을 때를 골라서 갔어요. 구름기둥과 유황불이. 불 없는 곳으로 골라가요. 물 없는 곳으로. 아~ 죽으라는 이야기에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게 뭐냐, 같이 죽자는 이야기에요. 일가친척 다 버리고. 자식들 다 생각하지 말고. 다음 주에 설교할 거예요. 누가 내 모친이며, 누가 내 자식들이냐!

다음 주 제목이 ‘신앙의 가족’이에요. 신앙의 가족은 없어요. 없는데서 만들어낼 때 있는 거예요. 같이 가족 전도해가지고 손자, 조카 다 왔다고 그게 신앙가족 아닙니다. 찬송가에 그런 게 있데요. 고마워라 임마누엘 예수만 섬기는 우리 집. 복되고 즐거운 하루 하루. 세상에 불가능을 한꺼번에 다 줄 수가 있겠어요. 혜택을 줘도 너무 많이 줬다. 어떻게 한 번 일어나기 어려운 불가능을 4식구 다 일어나고. 정말 복된 가정이네요.

부부라도 마찬가지고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어떤 자식 부모라도 하나가 안 됩니다. 혼자밖에 없어요. 그래서 자식도 키우면 대화가 안 되는 겁니다. 대화가 안 되고요, 대화 안 되는데 또 부모는 옛날에 자식들 말 잘들을 때 해가지고 억지를 부리게 되어있어요. 나이 들면. 내가 니 키웠는데 이럴 수 있느냐. 내가 대준 니 공낙금 다 기어내라. 아파트 사 준거 다 내라. 안 내놓으면 재판 걸어가지고. 부모가 자식에게 재판 걸었어요.

어릴 때 아버지가 이혼하면서 자식보고 부양비 준다고 하고 안 주고 어릴 때 애들 아내에게 맡기고 자기는 지 재미 차렸어요. 부양비 한 푼도 안 주고 나중에 나이 들어 늙어가지고 사기 당해가지고 돈 다 날아간 뒤에는 재판 걸어가지고 자기 자식보고 월 100만원씩 내라고 재판 걸었어요. 인간이 자기밖에 몰라요. 아버지도 엄마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그 정도는 알아야 돼요. 아~ 인간은 내가 좋아서 해주는 건 좋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떤 기대나 보상은 일체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내가 해주면 해줄수록 그 자식은 나 때문에 더 망쳐요. 아버지는 의례히 해주고 엄마는 아 키워도 안 아픈 줄 알고. 지 아 키우면 아프지만, 엄마는 안 아픈 줄 알고. 인간은 자기밖에 몰라요. 백날 해줘야 자기밖에 모릅니다.

그런데 자기밖에 몰라도 나는 해주고 싶은데 어떻게 하느냐, 그 때는 그냥 해주세요. 그냥 오리를 가달라 하면 10리를 가주고 속옷은 주되 기대는 하지 마세요. 내가 미쳤지 하고 가주세요.

광야라는 곳이 그냥 죽일 것 같으면 진작 죽었지요. 죽는데 이 죽음이 삶의 기초로서 죽어요. 죽이는데 하나님이 함께해서 죽인다는 점에서 이 죽음이 무슨 절차에 포함되느냐 하면 영원한 삶의 절차에 개시점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광야에 있는 것이 복인 줄 몰라요. 광야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원망이 나와요. 원망. 안 나올 수 있습니까? 뭐 점잖다고요? 그럼 주님께서 더 어려운데 가 봐요. “이래도 아직까지 점잖 빨래.” “그래도 저는 점잖습니다.” “그럼 이래도?” 점잖이 어디 있어요.

나오는 건 악 밖에 안 나와요. 진작 나와야지. “그래, 그게 악이야. 원래 너 그래. 니가 악마에 속했기 때문에 그건 니 본 모습이야. 원래 그게 니 자리야. 니는 죄인이야.” 라는 것을 광야를 통해서 이걸 유발시킵니다. 광야를 통해서. 유발시키는데. 여러분이 광야를 쉬우니까 잘 아시겠지요. 물 없는 곳으로 갔지요.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요새 말하면 성령이 인도하는 대로 물이 없어요. 당연히 원망 나올 수밖에 없지요. 당연한 거예요. 원망에서 그 다음에 물이 나왔다 말이죠. 물이 나왔거든요. 이 물이 인간이 찾는 그 물이 아닙니다.

물이 있어버리면 소유대상이 되어버리잖아요. 전에 물을 소유하듯이. 이 중간 사건에서 십자가사건이 나옵니다. 이게 고린도전서에 나와요. 고린도전서10장3절,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다 신령한 식물을 먹으면 다 신령한 음료를 마셨지요. 신령한 음료지요. 신령한 음식물이지요. 그리고 이 음식물은 요한복음6장에서는 내가 산 떡이라 했어요. 내 살과 내 피가, 너희들은 만나를 원하는데 내가 하나님의 생명의 떡이다. 내가 만나다 했어요. 그것도 하늘에서 온 내가 만나다. 했거든요.

뭐냐 하면 십자가사건이 내포된 물, 그냥 물이 아니고 성분조사해보면 둘 다 H2O지만, 이 물이 십자가 사건이 포함된 물이에요. 주님의 아픔이 포함된 물, 주님의 희생이 포함된 물, 그런데 그 희생은 대상이 뭐냐 하면 원망하는 자에 대해서 원망해서 하나님께 대드는 원수를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자기희생이 포함된 물, 양식 이걸 광야를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아침에 하루세끼 주신 것도 하나님 맞아요. 맞습니다만, 세끼 먹는다고 천당 가는 건 아니에요. 세끼오기까지 우리는 십자가 사건 안에 있음을 확인하라고 우리에게 세끼를 준겁니다. 성도가 먹는 이 하루 세끼는 불신자가 먹는 하루 세끼하고 다르다는 말이죠. 성도가 보는 TV하고 불신자가 보는 TV가 달라요. 성도가 보는 광산김씨 이야기하고 불신자가 보는 광산김씨는 달라요. 성도가 보면 마귀에요. 마귀인데 재미있어요. 왜? 내가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에. 내 위주로 살고 있기 때문에.

내가 불편하면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편하면 불평하고, “에게게 이게 은혜입니까? 이게 저주지.”하면서 입에서 불평이 쏟아지는 그것을 대신 지금 광산김씨에서 다 보여주는 거예요. 광산김씨 안보는 사람은 불만이 많아요. 나 안 보고 지나가려고 하는데 그만 합시다. 다른 프로 놔두고 왜 광산김씨 강조합니까? 이리 하는데 광산김씨는 거의 연출을 한 게 아니고 인간 본성이 그대로 나와요. 70넘은 아저씨가.

세상에 우리가 사는 모습을 그대로 다 보여준다고요. 대사를 적어주는 게 아니에요. 자기 아내 백씨부인이 대게를 사왔는데 자식 둘이 있는데 40, 38살 노총각 아들이 있는데, 딱 보더니만 광산김씨가 대게! 그래? 아무 소리 안하고 부인하고 물어보지도 않고 광산김씨 형제들 다 불러가지고 대게 다 먹어버렸어요. 이게 왜 그러느냐 하면 남자의 허풍입니다. 남자의 허풍이에요.

자기 집안이라는 타인에게 나라는 이 가정이 우리 집안에게 얼마나 다복하고 아버지를 아버지답게 요즘 세대에 이렇게 높여주는 우리 가정이 얼마나 대단한 가정이냐를 과시하기 위해서 영덕대게를 사용한 거예요. 그걸 다 먹은 거예요. 그건 남자의 허풍이거든요. 그걸 보통은 요새는 감추잖아요. 그런데 그걸 노골화시켰다는 것이 얼마나 고맙다! 광산김씨야.

이게 남자들이요, 자기 딴에는 이렇게 허풍을 하는데, 꼭 집안 대소사 있을 때는 꼭 남자들이 앉아가지고 허풍 떨고 있습니다. 제사상 앞에서. 제사 지내는 것이 대단한 벼슬을 한 것처럼. 그걸 그대로 다 보여주잖아요. 그러면 여자들은 같잖지요. 끝나고 한 번 보자. 끝나고 롯데백화점에서 옷 하나 사버린다. 세일하니까 사버린다. 이게 보복이에요.

그럼 그 보복하는 여자는 또 뭐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원망의 사건을 유발시키는 거예요. 남자가 내 뜻대로 안 된다는 원망. 니가 뭔데 니 뜻대로 되어야 돼? 그럼 우리는 할 말 없지요. 백성이 가는 곳에 장소가 있는데, 장소는 없는 장소가 우리를 살립니다. 없는 장소로 없이 가기 위해서 과정을 거쳐야 돼요. 뭐냐 하면 있는 장소 모든 백성이 “오! 저기 좋은 거 있네요. 저기 목초지가 있네요.” 있는 장소는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서 이게 뭐로 바뀌는가 하면 원망의 장소, 있을 수 없는 장소로 바뀌어야 돼요.

내가 너희들을 영원히 사는 장소는 저 장소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돼요. 백성들은 자기 개인적으로만 편하게 사는 그것만 하면 되는 거예요. “아휴, 삼성골프장 근처로 이사와 가지고 이런 좋은 세상에.” 멋지지요. 백날 멋지면 뭐합니까? 오늘 저녁에 부부싸움하면 엉망인데. 집이 좋으면 뭐합니까? 집안이 화목해야지. 가정 화목하면 뭐합니까? 더욱 가정 화목하고, 이사 가자. 뭐하노 돈 좀 더 벌어가지고 터 옮기자. 또 그럴 건데. 인간의 욕심이 멈출 리가 없잖아요.

이 장소는 주께서 말하는 장소는 우리의 행복을 위한 장소가 아닙니다. 따라서 나에게 행복을 좌절시키는 장소가 필요해요. 나의 꿈과 희망과 나의 포부와 나의 기대가 다 부질없는 것! 다 부질없는 거예요. 전에는 저 장소에 아파트에 살면 행복하지만, 그 가면서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몸은 허리 아파. 인대가 끊겼어. 몸이 아프면요, 아무리 좋은집 줘도 조그만 아파트에 살아도 내 몸만 건강하면 소원이 없겠다. 또 이리 나오거든요. 몸이 또 나으면 딴 소리 하고. 

주께서 인도하시는 것은 뭐냐 하면 나를 좌절시키는 곳으로 데려갈 때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백성입니다. 하나님께 절로 원망이 나오고 불평 나오고 차라리 죽여주옵소서! 아까 했잖아요. 마귀 만남의 반대말이 뭡니까? 감탄했지요. 고마움에 의한 감탄. 이게 안 되면요, 우리는 억지로 참을게. 참는 것은 이것은 성령의 일이 아니에요. 기쁨이 있어야 돼요. 고맙고 감탄 되어야 돼요. 언제 적 상황인지 모르겠습니다마는. 매일같이 감탄하고 매일같이 고마워하면 참 좋겠어요. 제 희망사항입니다마는.

주께서 할 때, 내 뜻이 좌절되지 않으면 감탄과 고백이라는 것은 이건 버스길이 달라요. 이건 다른 동네입니다. 내 자리, 내 포부가 기대가 있어버리면 절대로 고마움과 감사가 안 나옵니다. 고마워하고 감사하는 것은 자기가 엉망진창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그 때 그 순간에만 나오게 되어있어요. 내가 안 깨지고 내가 무너지지 않는데 감사 감탄하는 것은 이건 거짓말입니다. 그런 것은 다 잘못된 거예요.

아까 했잖아요. 은혜가 모자람이 없다고요. 은혜가 모자람이 없는 데서 오는 감탄 같으면요, 현재에 있는 어떤 형편에 있던지 그건 고맙습니다! 되어야 돼요. 그런데 지금 요거 시비 걸고 저거 시비 걸고 저거 짜증내고 요거 짜증내버리면 억지로 감사해봐야 표정이 이상해져버려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이제 마지막 이거 해야 되겠지요. 어떻게 방법을 해야 되겠지요. 아까 나왔습니다만, 개인에서 집단 행위를 하게 되어있어요. 자, 개인으로 할 때는 힘들고 어려울 때는 사람이 짜증납니다. 그런데 다 같이 힘들고 어려우면 어떻게 됩니까? 견딜 만하지요. 다같이. 군대 가면 다 같이 견디기 때문에 힘들어도 해요. 어려울 때.

애 넷을 낳고 힘들게 살 때는 그래도 크는 동안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그런데 다 성공해가지고 각자 있을 때는 만나지도 못하고 이상하게 옛날보다 덜 행복한 거 같아. 그런 느낌 저만 느끼는 겁니까. 분명히 객관적으로 다 잘 사는데 전에 그냥 허물없이 지내던 사이가 더 좋은 거 같아. 왜냐, 나를 잊어버리고 나를 잊어야 돼요. 나를 잃어버려야 돼요. 나 어디 있지? 이리 되어야 돼요. 내가 없을 정도로 동일한 체험과 동일한 현상을 겪는 그 집단 행위를 겨냥한 하나님의 일이 준비돼있습니다.

그건 뭐냐 하면 제일 마지막 중요한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은혜는 이게 아니에요. 개인용이 아닙니다. 이건 주께서 분배한 거예요. 믿음도 그렇고, 소망도 그렇고, 사랑도 그렇고, 나만 믿은 게 아니고 나만 소망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택한 백성한테는 똑같은 걸 주시는 거예요. 예수님이 똑같은 걸 줬다 말이에요. 똑같은 거 줬다는 말은 결국 내 실력이라든지 내 행함이나 내 성실함이나 내 노력으로 얻었다? 안 얻었다? 얻을 수 없는 공짜로 얻은 거예요.

주님께서 그냥 은혜로 분양한 거니까. 배양한 거니까. 우리는 그냥 그릇이고 주께서 꽃을 심기 위해서 꽃씨를 이렇게 심은 거니까. 주님의 꽃이 자라나니까. 이게 내 인생이 아니고 누구 인생이냐, 주님의 인생이 되는 겁니다.

주님의 인생인데, 개인적으로 해도 주님의 인생으로 감사한데, 감탄이 언제 나오느냐 하면 나 같은 일이 나한테만 일어나는 특이한 현상인 줄 알았는데 이건 비슷하구나! 똑같이 그런 현상이 일어나게 되면 그 사이에서 집단적인 모습을 통해서 감탄이 강하게 나와요.

‘야~~ 이게 정말 나만 착각해서 주님 살아있다는 걸 혼자 살아있다! 살아있다! 내 최면 걸어서 된 게 아니고 아무 행함도 없이 그냥 공짜로 천당갔다는 이야기가 이게 나만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보니까 같이 알고 있는 특이한 사람이 등장할 때에 세상에~ 이게 맞을 수도 있겠구나! 이게 진짜일 수 있겠구나!’ 그래서 상대방을 시험해본다고요.

“에이, 착각이지요. 잠시 어디 머리 다쳤습니까?” 이런 식으로. “어떻게 죄만 지었는데 천당 갑니까?” 라고 해봤을 때 그 사람이 막 화를 내면서 뭐 무시합니까? 이리 나올 때는 “아하, 그렇지요. 네. 네. 기적이야 뭐 늘 오겠어요?” 했는데 정말 그 사람이 진지하게 그걸 이야기할 때 뭐냐 하면 그 사람 앞에서 타인 앞에서 나만 했다는 이것이 쑥 들어가지요. 나를 잊어버리지요. 전체 그 순간 개인이 아니고 전체가 한꺼번에 확~ 다가오는 겁니다. 이게 지난 수요일날 설교한 거예요.

개인이 아니고 집단적으로 전체적으로 생각해야 된다고요. 꿈의 해석은. 전체적으로 해석해야 돼요. 전체적으로 해석하면 기쁨이 오고 감탄이 오지만, 이게 개인으로 돌아가게 되면 우울과 짜증과 원망이 다시 고질병이 다시 도집니다. 내 생각하는 고질병이 있고요. 나를 잊어버리면 행복하고 그래요. 오늘 행복이란 말 처음 했는데 긍정적으로.

자, 장소는 어디 있느냐, 없습니다. 장소는 없는데 사건이 일어나요. 사건이 일어나면 이미 우리는 특정한 장소에 놓여있음을 후차적으로 일이 터지고 난 뒤에 후차적으로 우리가 깨닫게 돼요. ‘아~ 내가 희한한 공간에 와있구나!’ 내가 희한한 공간에 와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난 뒤에 갈라디아서나 로마서나 죽 읽어보세요.  히브리서 읽어보세요. 이해 안 될 수가 없어요. 죽은 귀신인데 뭘.

죽은 귀신이 되어가지고 현재 귀신들만 모인 집단공간이 따로 있어요. 그게 예수 안이고 십자가 안이고 성령 안입니다. 그 안에서 단독적으로 의로운 게 아니고 더불어 의로워요. 더불어. 머리가 하나고 지체가 있으니까 문어발이니까 머리가 의롭잖아요. 의로움을 분배했으니까 분배하는 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렇게 이야기해요. 은사라고 이야기해요. 은사.

은사가 오게 되면 나는 잊어버려요. 내 사랑 없어져요. 우리 사랑밖에 없어요.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서로 미워하지 않는 게 내 사랑이 없어요. 내 소망이 없어요. 우리의 소망이고 내 믿음이 없고 우리의 믿음이 되어버려요. 사실은 하나밖에 없는 믿음을 주께서 이렇게 문어발식으로 분배해서 준겁니다. 본사는 주님이고 우리는 지점이에요. 파리바게트 비슷하게 해서. 우리는 대리점입니다. 택배회사 대리점을 운영하고 있어요. 다음에는 여기서 하다 어디로 옮길지 몰라요. 대리점이 또 어디로 옮길지 모릅니다.

그렇게 하면서 이미 우리는 주님의 사건을 이동시키는 겁니다. 사건을 이동시키면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뭘 알 수 있느냐, 전에는 어떻게 살았느냐 하면 너와 나를 구분했습니다. 전에는 나와 너를 구분했지요. 니 이만큼 살았지? 나 이만큼 살았다. 니 불행하지 나 행복하다. 나와 너를 구분했지요. 니 이만큼 살았나? 나 이렇다. 니 불행하지? 나 행복하다. 너와 난데 이제는 너가 없어지고 나를 잊어버리니까. 우리라는 개념이 새롭게 등장합니다. 이게 백성개념이에요. 집단개념이고. 그리스도의 몸의 개념입니다.

물론 우리라는 것을 잘 못 만나보지만, 어쨌든 성경에 보니까 내가 온 것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왔다. 우리라는 이스라엘 집단을 이야기하는 거죠. 집단이고 저쪽의 남들은 뭐냐, 개인을 위해서 살아요. 그들은. 그들의 자신의 개인을 위해서 살아요. 기껏 그들이 말하는 우리라는 것은 지 혈육과 관련된 것. 지 자식이고 부모, 혈육 간 제사지내고 이런 것. 이건 혈육에서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새로운 우리가 나와요. 이건 기적이 없이는 안돼요. 이건 성령 받은 기적이 없으면 도저히 이런 일이 벌어지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성도끼리 돈 관계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거기에 있어요. 고린도전서6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돈 빌려줘 놓고 받을 생각하지 말고 사기 당하고 고소할 생각하지 말고 성도한테 피해 입었다 하는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왜 그러느냐 하면 주님이 이 지체를 나를 나의 원망을 바꾸기 위해서 다른 지체를 가지고 나를 원망케 하는 일이 벌어지게 한 거예요.

주님보시기에 나를 못 잊어서 그러니까 내 돈을 못 잊은 거예요. 돈을 못 잊으니까 사기꾼성도, 사기꾼성도 말이 안 되지만, 성도를 통해서 내 돈을 어쩔 수 없이 사기 치게 만들어서 나로 하여금 다시 십자가 안에 있다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그 사람을 그렇게 사용한 거예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기 칠 인간이 성도일리 없습니다. 사기를 친다는 것은 돈을 사랑한다는 뜻이잖아요. 그런데 어쩔 수 없었어요. 애가 5명인데 굶어죽게 되어가지고 거짓말해서 돈을 가져갔다면 그건 돈을 받을 생각하지마세요. 그건 산상설교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요즘에도 그런 사람 있는데 정말 굶기 직전에 가가지고 그러니까 수술비가 십만원 모자랐는데 수술비하면 복잡하니까 일주일후에 십만원 갚는다고 해놓고는 다음날 이사 갔다. 뭐 이유가 있겠지.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수천만원 같으면 이건 사기꾼이죠. 왜냐하면 그건 장사하겠다는 목돈을 챙기겠다는 이야기고. 십만원, 오만원 이런 거 있잖아요. 이천원. 저도 이천원 가까이 사기 친 적이 있습니다. MP3 약이 다됐어요. 한윤범 목사님이 바데리 가져온 걸 아직 안 갚았어요. 복음이란 핑계대고.

이제 여러분이 사람을 잘 알아야 돼요. 성도 없습니다. 그걸 기정사실로 하세요. 있거든 감탄하세요. 저 사람 미친 거 아닌가. 나도 어지간히 미쳤는데 저 사람은 나보다 더 미친 거 같아. 인간으로서는 나올 수 없는 고백이 나와 버리니까. 저 사람 혹시 복음이란 택배회사 같은 직원 아닌가.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다 예정된 자를 건진다 할 때에 우리는 그것을 교회에서 찾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하지 말게 하옵소서. 우리 자신부터 해서 우리 주변에서 주께서 형제라고 붙여준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는, 주께서 살아있을 수 있다는 그 가능성, 그걸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안에서 나를 잊어버리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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