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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5 00:36:42 조회 : 411         
소명의 폭력적 침입 190614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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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은주(IP:119.♡.152.148) 19-06-26 09:58 
안양20190614a야5장10절(소명의 폭력적 침입) - 이 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야고보서5장11절부터 하겠습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우리가 누구로부터 계속 도움 받고 있다는 것. 그 느낌 때문에 우리가 교회 다닙니다. 그리고 신이라 하는 것을 믿고자 하는 겁니다. 이 세상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혜택을 입고 있다는 그 느낌만 해도 장래에 우리가 희망이 생기지요.

혼자서 뭔가 세상을 꾸며나가면 엎어지고 자빠질 때 우리를 일으켜 줄 절대자가 없을 때 상당히 우리는 좌절을 느낍니다. 그런데 우리가 누구로부터 늘 도움을 받고 있다고 한다면 그 분과의 좋은 관계가 우리의 장래까지 보장해 줄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되지요. 그러면 도움을 받게 되게 되면 상당히 우리가 기쁜데, 그러면 어떤 생각까지 하게 되느냐 하면 도움 받고, 도움 받고, 또 도움 받고 해서 나중에 죽어서 이 세상보다는 훨씬 더 월등하게 좋은 세상에 갈 때까지 도움 받게 된다. 그건 횡재한 겁니다.

특히 그런 마음을 가지고 내가 여기서 고생을 하지만, 나중에는 행복한 미래가 내세가 주어졌다는 그런 마음을 일단 가지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성경을 창세기를 보게 되면, ‘아~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인간을 낙원에 살게 했구나!’ 그게 딱 들어오잖아요. 낙원. 우리 조상은 낙원에 살았던 적이 있는 사람인데, 뭐 우리 인간은 그 위에는 없었고요. 조상이 낙원에 산다면 그게 낙원에 살도록 한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참 좋은 결정이라는 생각을 갖게 돼요. 내가 이런 사실을 몰랐으면 어쩔 뻔 했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든다 말이죠.

낙원에 보내주신 하나님을 내가 안다. 그러면 나의 미래는 보장된다. 아이고~ 이거 기쁘다. 우리는 그것을 굉장히 좋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 창세기2장 낙원 에덴동산이 있다는 것은 기쁜데 오늘 본문 11절을 보게 되면 여기 욥이 나온다고요. 10절에 보면,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이리 되어있지요. 선지자라고 하고 선지자의 특징을 뭐로 보느냐 하면 고난으로 보는 거예요. 선지자들은 무엇을 받은 사람이다? 고난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면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하나님께서는 좋은 분이라서 우리를 낙원에 보내준다. 그 생각하면 즐거운데 실제로 하나님과 함께 있던 사람들은 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즐거움이 유지되는 것이 아니고 연속되는 것이 아니고 뭐를 대표로 내세우는 거예요? 선지자의 삶이라는 것을 대표로 말한다면 고난 받은 적이 있던 사람 또는 고난 속에 있는 분. 이게 그들의 특징이 대표가 된다 말이죠.

낙원이 있을 때는 좋았지요. 희망이 있다는 건 좋은 겁니다. 그런데 이 고난 없이는 갈 수 없겠느냐 하는 겁니다. 고난 없이. 여기서 이제 살짝 갈등이 오는 겁니다. 하나님은 좋은 분인데 왜 고난을 주지? 고난 없이 우회해서 다른 길로 빙 돌아서라도 고생 없이 천국 가는 그런 방법을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왜 고난을 주시지? 그런 생각이 들고, 또 선지자들이 하나님과 함께 있어 고난 받았다면 이건 무슨 공식을 쓰느냐 하면 뭐 없이는 뭐 없다? 고난 없이는 뭐 없다? 구원 없다가 돼요. 고난 없는 구원은 있을 수 없다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느 정도까지 가야 되느냐 하면, 낙원이 있다. 낙원이 요새 말로 하면 천국이겠지요. 낙원이 있다, 즐겁다, 기쁘다, 에서 어디까지 포함을 시키느냐 하면 고난 받게 된 것이 기쁘고 즐겁다로 까지 나아가야 돼요. 고난 받는 것이. 왜냐하면 이 코스 말고는 다른 코스는 없기 때문에. 여기서 이제 소위 예수 믿고 하나님 믿고 천당 가려는 사람 많이 떨어지지요. 여기서 우수수 다 떨어져나가요. 다 떨어져나간다고요. 천국 가는 건 좋은데 고난까지 즐거워하라는 것은 너무 인간의 능력을 오버하는 것입니다. 그런 인간 없습니다. 따라서 나도 그 정도까지 감내할 마음은 없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이리 되는 거예요.

그렇게 자꾸 성경내용대로 피할 것이 아니고 제대로 될 사람 같으면 물어봐야지요. “왜 고난 없이는 고난이 없습니까?” 물어 봐야 된다고요. 성경을 보고 묻던지, 목사님보고 묻던지. 먼저 아는 사람에게 묻던지, 자꾸 물어봐야 돼요. 물어봐서. 그냥 고난 있다는 것은 이건 특별한 사람, 믿음 되게 좋은 사람에게 해당되고 나머지는 고난 없이도 갈 수 있겠지. 라는 그러한 지 마음대로 그렇게 구원에 코스를 설정하지 마세요. 그건 반칙입니다. 고난 없이 무슨 구원이 있습니까? 성경을 아무리 봐도 고난 없이도 구원이 된다는 구절은 없어요.

“너가 예수를 믿느냐?” “예” “믿는다면 주님의 십자가 가는 길을 니도 가라.” 그게 성경 줄거리 아닙니까? 저는 그렇게 보이는데요. “예수 믿습니다. 예수 믿고 천당 간다면서요? 행함이 아니고 믿음이라고. 믿습니다. 끝.” 이게 아니라 “믿냐?” “믿습니다.” “그럼 니 차례” 왜? 선지자들도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그리고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이름 나오지요. 스데반집사. 집사 중에 집사. 스데반집사가 많은 구제를 하고 성령을 통해서 전도도 많이 하고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았지요. 그러나 인생 끝이 어떻게 끝장났습니까? 돌에 맞아죽지요. 우리는 스데반집사 보고 장하다, 훌륭하다, 믿음 좋다, 정말 순교자구나! 성령 받은 사람 티를 팍팍 내는구나! 아, 정말 대단하다. 지금 이러고만 있을 거예요? 성령 받은 집사가 이 길로 간다면 성령을 받은 성도가 이 길을 회피하거나 기피하도록 하나님께서 그냥 두시겠어요? 스데반집사 가는 길을 가게 하시지요.

성경에 나오는 모델케이스는 그야말로 모델케이스에요. 시범케이스라고요. 시범케이스. 시범이라 하는 것은 우리는 니는 안 해도 된다는 게 아닙니다. 니가 예상 못한 길을 가게 할 것이라는 뜻이에요. 이게. 선지자, 오늘 본문 욥의 인내. 욥이 갑자기 등장하는 거. 하나님은 욥을 쓰레기 취급했어요. 욥은 스스로는 쓰레기 아닙니다. 믿음 좋지요, 부자지요, 아이 열 명 믿음으로 신앙으로 잘 키웠지요. 어딜 봐서 쓰레기입니까? 어딜 봐서 남한테 욕 얻어먹을 일이 뭐가 있어요? 어딜 봐서 벌 받고 고난 받을 그런 건덕지가 없습니다.

친구들이 아무리 분석하고 탐색해도 도대체 욥이 고난 받는 이유를 몰라요. 욥이 고난 받는 이유를 모른다는 말은 한마디로 말해서 그들은 하나님을 잘못 섬기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아는 기존의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었다. 아니었다 하는 겁니다.

이야기를 처음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내가 여기 있습니다. 뭔가 누구로부터 혜택 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그것은 아마 신일 것이라고 여기고, 전능하니까. 그 신이 어떤 뜻을 갖고 있는가 성경을 펼치니까 낙원이 등장하더란 말이지요. 그리고 요한계시록22장에 보면 거기에 마지막 낙원 나오지요. 천국이란 이름의 낙원. 낙원과 낙원 사이에 인간이 끼어 있잖아요. 그러면 하나님 말씀대로 믿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나는 어디 간다? 천국 가니까 이런 장사를 내가 마다할 리가 없지요. 이런 혜택을. 죽기 살기로 믿어야 되겠다는 마음이 들지를 않습니까.

자, 그런 생각이 들 때, 이런 생각을 내가 이건 분명히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까요? 안 들까요? 추호도 들 리가 없지요. 게다가 교회에서 목사, 집사, 장로들이 계속해서 부추기는 게 뭐냐 하면 하나님 믿으면 잘된다. 잘 풀린다. 하나님 믿어서 복 받은 사람 사례를 한 바가지로 들어도 그 숫한 사례들이 있다. 그러니까 당신도 용기를 가지고 하나님만 믿으면 하나님은 복 주시는 하나님이고, 사랑이 많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당신이 어떤 오류를 하더라도 주께서는 당신을 지켜주셔서 당신의 원대로 편안한 인생을 보장한다. 그런 식으로 위로와 위로 덤버기 포기 위로 더하기 위로. 위로 포하기 위로. 위로. 위로. 격려, 격려 외에는 할 일이 설교에 나올 게 뭐가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니 교인들은 자기가 잘나고 있고 정상적인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교회 가서 무슨 자랑하느냐, 누가 누가 복 받는 자랑 그거 내놓고 배틀 경쟁에 나서는 겁니다. 그거 없으면 음메 기죽어! 있으면 음메 기살어! 하고 그 재미로 가는 거죠. 집에 문제 있으면 교회에 안 나오고요. 교회에 안 나오면 무슨 문제 있다고 보시면 돼요. 뭔가 자랑거리 있으면 씩씩한 보람찬 발걸음을 해서 교회에 나와서 기도해서 티 다 내버리고. 감사헌금해서 티 다 내버리고. 뭔가 이 자체가 이게 옳지 않거든요. 이게 지금 속은 거예요. 이게. 방금 이야기했던 이 자체가 속고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어떤 근거해서 속고 있느냐를 말씀드린다면 그것이 뭐냐, 말씀이 나 자신을 안 건드리기 때문에. 성경 말씀이 내 내부에 감추어진 것을 안 건드려주고도 천국 가는 방법을 이 교회에서 하고 있어요. 회원 모집하는 게 급하기 때문에. 교회 부흥이 급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근원적인 것을 안 건드려요. 아니 건드리고 싶어도 몰라요. 인간 안에 인간 속에 뭐가 있는지 마귀가 들어있다는 것을 애써 감추기도 하고 또는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를 수도 있고. 성령 받아 새사람 되었습니다. 하니까 진짜 새사람 된 줄 알고 있어요.

여러분, 새사람 되었다는 생각을, 자부심을 왜 갖느냐 하면 무엇을 피하고 싶은 충동을 있기 때문에 그러냐 하면 이 고생, 고난을 어쨌든 간에 피하고 싶은 발악입니다. ‘내가 이렇게 바르게 살면 설마 바르게 사는데 하나님께서 고난과 고생을 면제해 주겠지.’ 하는 그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자, 이런 구원은 성경에 없습니다. 이런 구원은 성경에 없는 거예요. 성경에는 없고 기독교나 종교에는 있어요. 교회는 있는데, 성경에는 이런 구원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지 않아요. 구원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하고 거래 안 나왔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이 있다는 그것만 보지마시고 3장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추방했습니다. 추방했기 때문에 추방했다는 것은 나는 니하고 이야기 안한다는 뜻이에요. 나는 니하고 거래 안한다는 뜻입니다. 기도 백날 해봐야 나 그거 안 받는다는 뜻이거든요.

그래서 인간이 헌금하던지 뭐 할 때는 노림수가 있어요. 이거 받으시고 저 구원해 주시고 고난 줄여주시고 나중에 천국 보장해 주세요. 그 노림수하고 내미는 거거든요. 일종의 흥정이지요. 이만큼 드리면 이만큼 채워주시겠지요. 라는 흥정인데, 하나님은 인간하고 흥정하지 않습니다. 이 구원이라는 것도 역시 없습니다. 구원은 망상에 불과한 거예요. 인간이 세상이 너무 힘들다보니까 지어낸 것이 바로 구원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구원은 어디 있느냐 하면 하나님이 자기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속에 있는 여분의 것이 바깥으로 나온 게 구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자기 일을 하면 하나님이 다른 한 분이 있어서 일을 해야 돼요. 다른 분이,  다른 하나님이 또 있어야 돼요. 다른 하나님이 있어야 되겠지요.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서 아들에게 나타나셔서 이 땅을 떠나면서 남겨진 여분의 것이에요. 그러면 그 구원이라는 것은 어디에서 흘러나온 거예요? 인간의 소망에서 욕망에서 나온 겁니까? 아니면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에서 나온 거예요? 어느 쪽이에요? 구원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사이에서의 그 관계에서 약속에서 흘러나온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으면 구원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구원이 없고, 구원으로 인정 안 해주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기본적으로 내 구원은 내 망상은 하나님께서 듣는다? 안 듣는다? 아예 안 듣는다는 것을 기본으로 해야 됩니다.  더 쉽게 말씀드릴게요. 구원은 성령이 주지 아니하면 우리한테는 얻을 수 없는 거예요. 누가 주지 아니하면 우리가 얻을 수 없는 거예요.

그러면 언제 구원 받는 걸 아느냐, 이미 줬기 때문에 알아요.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안다고요. 구원에 대해서 안다고요. 구원을 안 주게 되면 내 욕망의 구원만 계속해서 내가 조작해 나가는 겁니다. 이걸 어떻게 잘 유지하고 보존하고 백날 이렇게 행함이 아니고 믿음이라고 하니까, 그래 믿습니다. 믿습니다. 계속 믿겠다는 거예요. 그 믿음이 치매현상으로 끝났습니다. 치매현상으로. 알츠하이머 들리는 순간 그 다음부터는 그 사람은 내가 언제? 언제 믿었는데? 자기 자신도 자기 관리 못합니다. 끝나요. 젊을 때 잘 믿었는데 나이 들어서 끝장났어요.

그것은 내가 믿는 믿음을 내가 쥐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행함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하니까 그 천당 가는 동아줄, 믿음이란 동아줄을 내가 꼭꼭 쥐고 있는 거예요. 그래, 믿어야 돼! 믿어야 돼! 아~ 어떤 경우라도 환란과 곤고가 올지라도 나는 믿어야 돼! 믿어야 돼! 계속 믿음을 쥐고 있는 거예요. 그 믿음은 하나님이 받지도 않는 믿음인데. 지가 용을 쓰는 거예요. 어디 변비 걸린 거 같아. 계속 하는 소리가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는 소리가 그것 밖에 없어요. 천국 구원 받는데 아무 상관없는데요.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낙원은 물 건너갔습니다. 낙원은 하나님 쪽에나 있지 인간 쪽에는 없습니다. 낙원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생명나무만 남아 있잖아요. 다른 나무는 훼손돼도 생명나무는 남아있지요. 생명나무가 있는 곳은 인간은 간다? 못 간다? 근처도 못 가요. 그러면 인간에게는 있다? 없다? 생명나무가 없는 거예요. 성경 제대로 봅시다. 생명나무는 인간 쪽에는 없다. 인간 쪽에는 구원도 없다. 천국도 없다. 인간은 없는 것 밖에 있을 뿐이에요. 없어요. 그냥 살다 죽는 거예요. 그냥 끝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천국 안 간다고 너무 억울해하지 마세요. 원래 인간은 그래야 되니까. 사랑의 하나님 찾지 마세요. 구원의 하나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옆 동네에 집 짓고 할 때에 시끄럽지요. 우리 동네에 3개월째 뜯고 부글부글하고 시끄러워요. 잠도 못자요. 하여튼. 시끄러운데 이 구조물을 지을 때 인부들이 왔다 갔다, 왔다 갔다 굉장히 바쁘지요. 인부들이. 어떤 때는 포크레인이 와서 땅을 팠다가 콘크리트를 실은 레미콘차가 왔다가 굉장히 바빠요. 나중에 건물이 완성돼서 보세요. 그 인부들 다 어디 갔습니까? 하나도 없지요. 하나도 없어요.

하나님께서 생각한 것은 구조물은 말씀이라는 건축 구조물입니다. 말씀의 건축 구조물에 개미같이 온갖 사람들 다 동원시켜요. 그런데 건축 구조물이 딱 되고 난 뒤에는 여기에 아무도 없어요. 완공됐기 때문에 아무도 없습니다.

자, 여러분들이 아신다고 생각하고 물어봅니다. 여러분, 천국을 여럿이 만들었습니까? 홀로 만들었습니까? 홀로. 그 분이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그게 아버지와 아들의 약속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천국 짓는데 여러 가지 모세와 엘리야고 아브라함이고 들락 달락 하면서 지었잖아요. 이 사람들의 존재 의미는 뭐냐, 홀로 짓는데 대해서 그들은 전혀 보탤 수 없는 존재였음을 대조하고 비교하기 위해서 주의 일에 참여된 사람입니다.

그 신약의 대표적인 사람이 열두제자지요. 열두제자가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에 거기에 십자가 못 박지 말라고, 십자가 못 박아 죽으실 때에 그 십자가 못 박아 돌아가실 때에 그 때에 실질적으로 보탬 준 제자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 현장에 있던 사람도 겁나서 이리 있었고, 사도요한 세 명의 마리아만 있었지 나머지는 전부다 근처도 안 갔습니다. 도망쳤습니다. 목자를 치니 그 다음이 뭡니까? 목자를 치니 양이 흩어졌지요. 흩어지면 누구만 남아요? 매 맞는 목자만 남지요. 그 목자 되신 예수님만이 아버지의 약속을 다 이루어서 천국을 만들어 놓은 거예요.

말씀이 완성되면 천국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일점일획을 다 이루면 천국이에요. 일점일획을 누가 이루었습니까? 예수님이 이루었지요. 그러면 천국은 예수님이 이룬 거예요. 십자가 지실 때 다 이루었다, 했다 말입니다. 이루었다 했고, 다 완성된 마감된 그것을 자기 백성에게 성령을 통해서만 줘요. 성령을 십자가영이라 하는데, 예수님의 영인데, 예수님의 영이 와서 주게 되면 이 받는 사람은 천국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면 내가 더 보탤 게 남아있다, 안 남아있다? 남아있지 않은 걸로 이해하게 돼요. 성령 받은 사람 특징이. 지금 논리가 그렇게 정리되는 겁니다. 논리가.

그렇게 하게 되면 이 받은 인간은 우리하고 똑같은 다 같은 육이고 아담의 자손이니까 나름대로의 처음에 이야기한 인간은 자기의 좋은데 천당 가야지. 이런 욕심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많겠지요. 굉장히 많겠지요. 그 많은 그것과 예수님 홀로 이룬 그것과 대조하면서 누구를 부인합니까? 내 행함이나 믿음도 행함이니까, 내 믿습니다. 내 소망, 사랑, 이 모든 것은 이 모든 것의 덕분으로 내가 천당 가는 것이 아님을 알지요.

그 이야기를 예수님의 포도원 비유에서 계속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아침 10시에 온 사람, 12시에 온 사람, 오후3시에 온 사람, 5시에 온 사람, 그 아침 10시에 온 사람부터 1데나리온 줬으면요, 10시에 온 사람 삐지지 않습니다. 고맙습니다. 하고 집에 가면 돼요. 뒤에 어떤 계산하던지. 그런데 일부러 포도원 주인이 일부러 집에 처음부터 온 사람 주는 게 아니고 품삯을 제일 마지막에 온 사람을 1데나리온을 줘가지고 앞에 온 사람으로 하여금 기분 업되게 만든 거예요. 1시간 일했는데 1데나리온. 6시간 일했으면 6데나리온. 기대를 반짝하게 만들었는데 늦게 온 사람이나 나중 온 사람이나 똑같이 1데나리온을 줬을 때 그 의미가 뭐겠어요?

그 의미가 뭐겠습니까? 포도원 비유의 앞에 이렇게 있어요. 천국은 이와 같다. 이 바리새인들아, 너희들이 생각하는 천국은 인간적인 갈망에서 자기 좋은데 가려하는 천국인 반면에 예수님을 통한 천국은 이런 거예요. 천국이라 하는 것은 놀고 있는 사람입니다. 포도원에 일하고자 애쓰는 게 아니에요. 그냥 놀고 있는 사람을 찍어서 포도원에 집어넣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포도원에 일하는 것조차도 선물입니다. 주의 일 하는 것도 선물이에요.

그래서 이 선물을 받았을 때 우리 하는 것은 뭐냐, 뭐를 평생 동안 대조해야 돼요? 내가 열심히 추구하는 것과 이미 주께서 주시는 것과는 이것이 엄청난 차이가 있다. 차이가 있고 천국은 내 욕심의 차원에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기 숙제라는 사실입니다.

제가 지난 오전 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지요. 하나님은 스스로 출몰하시고 스스로 퇴장하신다고요. 끝부분에서 하나님은 스스로 출몰하시고 스스로 퇴장하시면서 알을 깠다 했습니다. 그 알이 뭐냐,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주님이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가면서 이 땅에 없는 것을 내놓은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여러분 자신을 어떻게 생각해야 됩니까. 내가 평생 공부 이만큼 했고 어떻게 했고, 어떻게 고생했고 라는 내가 있고, 있고, 있고의 연쇄 고리로서의 나를 보면 안 되고, 도대체 나 같은 것이 어디서 튀어나왔지? 자기를 이상스럽게 봐야 돼요. 자기를 이상스럽게 봐야 돼요.

특히 다른 사람과 대조해서. 친구들과 만나서 대조해서. 동창회 참석해가지고. 그들은 모였다 하면 이바구를 푸는데 그거 전부다 자기 자랑 아닙니까. 자식 자랑하고, 지 잘사는 거 자랑하는데 전부 다 그러한 결과는 누구 때문이다? 자기가 애써서 고생한 결과로서 이러한 혜택, 그것도 하나님까지 집어넣어서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고생하니까 봐줘가지고 은혜로 축복해서 이렇게. 그런 걸 채운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성령을 받은 성도는 그걸 가만히 듣고 있으면서 뭘 어떤 생각을 해야 돼요? ‘아, 내가 알던 저 모습이 내 모습이었구나!’ 내가 나를 비춰보던 나가 바로 저 친구로 인해서 나로 하여금 또 확인시켜주는 거예요. 친구가 나 자신이라는 말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친구가 내 자신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했어요. 쉬운 이야기지만, 아리스토텔레스를 또 집어넣어야 이게 또 무게 있는 내용이구나.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안다. 그런 뜻이에요. 쉽게 말해서.

그 친구와 만나면서 세상의 친구지요. 낯설음. 낯설다는 것을 느껴져야지요. 낯설다. 아, 나도 저런 생각을 가졌었었지. 나도 저게 정상인 줄 알았었었지. 그게 다인 줄 알았었었지. 하지만 그럴 경우에는 고생 뒤에 낙이 온다는 식이 돼요. 그냥 거듭나지 않은 새로운 피조물이 아닌 사람들의 집합체로서의 교회의 설교의 주 내용은 뭡니까? 고생 뒤에 낙이 온다에요. 동양철학과 똑같아요. 고생 뒤에 낙이 온다.

여러분들이 고생스럽게 한 교회 봉사, 헌금, 전도, 선교, 다 여러분 대에 복을 받거나 여러분 대에 복을 안 받으면 여러분 자식들에게 복을 받습니다. 이게 무슨 사상이냐, 이게 불교사상입니다. 이걸 가지고 업보사상이라고 하는 겁니다. 업보사상. 불교신자보고 거듭났다고 하면 안돼요. 그들은 고생을 인내하면서 노림수가 있어요. 이 고생은 언젠간 보답되겠지. 부처님 살아계신다면. 그럼 그 부처님에다가 예수님이나 하나님이나 삼위일체를 대입해 보세요. 하나님 살아계시면 내가 이만큼 고생하는데 낙을 보겠지. 이 땅에서 낙을 못 보면 나중에 천국 가서 상급주시겠지. 뭐 이런 거. 내 대에 아니면 내 자식 대에 잘 되겠지. 그만큼 성과급을 했으니까. 이게 바로 인간들이 생각하는 엉터리 고난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서도 은혜 받았다 하는 것은 뭔가 수상해요. 왜냐하면 성경은 나를 건드려줘야 된다고요. 내가 쓸모없다고. 내가 쓰레기라고. 그러나 어떤 인간도 자기가 쓰레기라는 것을 알고 성경 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가능성이 있는데 성경까지 더 추가해서 가능성이 현실화 시키는데 보탬 되라고 성경 보잖아요. 우리가.

내가 양심은 착한데 어떻게 해야 하나님 앞에서 착한 줄 모르는데 성경을 통해서 참고로 해가지고 착한 나를 더욱 더 착하게 만들겠다. 그거 하는 게 열두제자였고, 그게 바리새인들이었고, 그게 멸망했던 유대인들이 했던 거예요. 이미 인생 선배들이 했던 거고 우리 주변에서 교회는 안다니지만 그런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교회는 안 다니지만 언젠간 낙을 보겠지. 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없는 사람들이 없어요. 다 그래요. 전부 다.

인간의 할 도리를 다하고 그 다음에 뭘 기다린다? 천명,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 진인사대천명. 그게 그 뜻 아닙니까. 진인사대천명이. 좀 적어놓으세요. 고급스러운 이야기를 할 때는. 세상에 우리는 그 마음가지고 교회에 간다고요. 그 마음가지고. 이게 무슨 신자입니까? 그게. 이게 교인이지요. 이만큼 고생했으면 주님도 양심 있으면 어느 정도 내 소원 하나 들어주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어디서 누구하고 건방지게 거래를 해요? 거래를. 쫓겨난 주제에.

잘 들어보세요. 욥의 인내는 뭐냐, 욥 본인이 욥의 문제성을 몰랐던 겁니다. 어렵게 이야기할까요. 욥과 욥의 친구 사이에 주님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마귀가 찾아온 전까지는 그것을 가지고 연속성이라 해요. 니하고 내 생각에는 그다지 멀리가지 않고 대충 딱 맞다는 식의 연속성. 그러니까 찾아온 4명이 뭡니까. 욥의 프랜드 아닙니까. 욥의 친구잖아요. 의견이 통했다? 안 통했다? 의견이 통한사이었어요. 누가 오기 전에.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마귀가 오기 전까지는 욥은 욥의 친구와 차이 남을 몰랐던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내가 뭐가 문제인지를 모르는 거예요. 내가. 내가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고 우리는 성경보고 있는 거예요.

문제는 나한테 있는데 나를 해코지하는 저 이웃 사람이라든지 누구 내 돈 떼어먹은 사람이 문제 있고, 나는 문제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 욥 이야기가 구약에 있습니까? 신약에 있습니까? 구약에 있지요. 욥의 이야기는 구약에 있다고요. 신약 적으로 뭐냐 하면 우리는 죽은 자에요. 죽은 자. 죽은 자는 남을 평할 권한이 없습니다. 모든 불행과 비극은 남을 평하기 때문에 오는 거예요. 모든 비극은.

평생 자기가 불행하게 살았습니까? 그건 남에게 평했기 때문에 그래요. 남을 평하는 자세로 남을 타인을 보기 때문에 그래요. 남을 평할 수가 없어요. 왜? 내가 나를 평할 자격이 없기 때문에. 내가 나를 모르기 때문에. 갑자기 김국환 노래가 생각나네. 니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한치 앞도 모두 몰라... 내가 나를 모르는데 어떻게 남을 평하겠습니까. 평하니까 누구 탓이다? 다 남 탓이 되는 거예요. 남 탓 그것을 해서 우리가 행복해집니까? 살림살이 나아졌습니까? 우리가 들 비극적이었습니까? 아니에요. 남 평하지 마세요. 모르는 주제에. 우리는 먼저 남 평하면 안돼요. 이 말은 내가 나를 평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남도 평하지 말고, 누구도 평하지 말라? 나를 평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신약에서 이미 규정을 해줬어요. 니는 이미 십자가에서 죽고, 니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입장에서 죽은 자의 특징은 남을 평하지 않는 것. 죽은 자의 전제는 이미 자기가 죽었다는 것을 확인만 하면 되기 때문에 남을 평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여기 야고보서에 욥이 나오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욥 이야기를 해야 되거든요. 성경대로.

다시 신약입니까? 구약입니까? 구약이지요. 그러면 욥은 뭘 몰라요? 자기가 죽은 자라는 것을 알아요? 몰라요? 모르고 있는 거예요. 자기는 죽은 자인지를 모르는 거예요. 왜 잘 살아있는 나를 힘들게 합니까? 이렇게 나온 겁니다. 그런데 이 욥의 고백을 들어보니까 이게 욥만의 고백이 아니지요. 매일 아침 눈만 뜨면 하는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보고 하는 고백을 지금 그냥 구약 욥을 통해서 보여주지 않습니까. “왜 내 뜻대로 안 됩니까? 만사가.” “주여, 왜 침묵하십니까?” 이런 식으로 대들고 반항하거든요.

어제 어떤 분이 저한테 전화를 한40분 동안 했는데요. 하면서 뭐냐 하면 왜 남들은 건강한데 내 몸은 왜 이리 아픕니까. 그날이 자기 생일날인데 남들은 뭐 생일 축하합니다. 하는데 자기는 생일날 기도하면서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고 아무리 하나님을 내가 영광 돌리고 싶어도 내 몸이 아픈 이유를 내가 모르고 있는 이상은 원망과 불평과 짜증과 그리고 도발하는 그 마음밖에 안  오니 목사님 어쩌면 좋아요? 라고 저한테 전화를 해줬어요.

제가 제시한 것은 이거에요. 믿음 없는 신앙. 이게 참된 신앙이에요. 신앙인데 어떤 신앙이냐, 믿음 없는 신앙. 그러니까 그 분은 뭐를 통과하고 있어요? 자기의 본색을 통과하고 있는 중입니다. 욥을 통과하고 있는 중이에요. 우리 안에 다 구약 들어있어요. 우리는 성질 급해가지고 정답부터 신약부터 들췄는데, 예수 십자가 믿으면 천당 간다고, 용서받는다고, 뜻도 의도 모르고 피로 용서받는데. 이제 내 맘대로 살자. 이리 끝나는데.

하나님께서는 이 분을 너무 사랑해가지고 구약부터 찬찬히 뚫고 나가는 거예요. 자신의 믿음이라고 여겼던 것을 전부 다 긁어내는 겁니다. 그걸 고상한 말로 위세척이라고 합니다. 다 긁어내는 거예요. 다 긁어내야 돼요. 장래에 나쁜 일이 올까봐 미리 해서 착한 일 모아놓은 거 있잖아요. 다 긁어내요. 3년 뒤에 사업 망할까 싶어서 미리 십일조 조치하는 거 다 끄집어내요. 그 헛된 짓을 다 끄집어내요. 아무짝도 소용없는 것들. 마치 이것이 뭔가 내 인생을 책임질 수 있는 것 같고 인생을 내가 편안하게 갈 수 있을 거라고 여겼던 그 모든 것, 내 생각 모든 것, 다 끄집어내요.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과 형제우애라고요? 성령의 열매가? 그게 욥에서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안 나오지요. 뭐가 아프기 때문에? 자기 육체, 신체가 아프기 때문에 그래요. 욥의 곤란한 점은 지금 뭐가 곤란한가 하면, 자기 신체는 아픈데 자기가 지금 못 죽고 있다는 거예요. 욥의 소원이 뭐였습니까? 죽여 달라는 거잖아요. 누구 맘대로 죽여요? 쓸모 있는데. 주님 보시기에 쓸모 있는데 왜 죽여요. 왜 죽어야 됩니까? 죽겠다는 것도 주께서 응답을 안 해줘요. 철저하게 써먹을 대로 다 써먹는 거예요. 꼭 오늘날 저와 여러분 같아요. 꼭 여러분과 저가 그렇습니다. 다 써먹는 거예요. 우리는 인부거든요. 인부.

우리는 구원도 없고 천국도 없어요. 없는데,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소명의 과격한 침입’ 뭔 뜻인지 아시겠지요? 이미 창세전부터 예정된 자에게 소명입니다. 이 이야기는 로마서8장에 나오는 거예요. 미리 아신 자를 뭐한다? 미리 아신 자를 부르지요. 부르는 걸 소명이라면 그 앞에 뭐가 있어요? 미리 아신 자가 있잖아요. 미리 정한 자. 정해 놓은 자. 또 미리 아신 자, 그 다음에 부르시지요. 소명이지요. 그 절차에 의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불러서 오는 게 아니잖아요. 주님이 뭐 대리입니까? 대리기사입니까? 주님이 콜택시 아니잖아요. 우리가 부른다고 오시는 게 아니에요.

우리의 시작은 우리의 출생부터 시작해서 사단난 거예요. 주님의 시작은 우리가 출생하기 전에 창세전에 시작한 거예요. 출발점이 달라요.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할 때가 언제입니까? 에서와 야곱이 태어난 뒤입니까? 그 전입니까? 그 전이잖아요. 이 이야기 동창회에 가서 이야기해 보세요. 완전 미친 사람 듣지요. 인생이란 것은 니가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정해진다. 우리가 아는 상식은 그래요. 내 운명? 그거 내가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 우리의 상식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를 도와준다. 신이라 하는 것은 내 뜻이 우선이고, 그 다음에 신의 뜻은 내 뜻을 보좌하는 역할로서 우리는 열심히 기도하고 하잖아요. 그게 엉터리라는 말이지요. 제가 지금 그게 엉터리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성경에는 그렇게 돼있다? 안 돼 있다? 성경에는 그렇게 안 된 겁니다. 에덴동산 좋았지요. 창세기2장. 3장에 보세요. 3장에는 기약도 없어요. 에덴동산 다시 준다는 보장도 없고. 추방하고요, 그 다음 조치가 뭐냐, 들어오기만 해봐라! 하고 철저하게 두루 도는 천사로서 막아놨어요. 막아놨으니까 막아놓은 것을 함축해서 말하면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단절’ 이걸 4자로 하면 ‘불연속성’이라고 합니다. 끊어짐. 3자로 하면 ‘끊어짐’이에요.

이미 끊어진 상태에서 인간은 끊어진 상태에서 이 안에서 온갖 망상과 상상과 종교를 다 만들어내요. 기독교라는 것도 만들어내고, 불교도 만들어내고, 천주교 만들어내고, 이슬람교 만들어내고, 온갖 다 만들어낸다고요. 그게 이 단절을 뚫을 수 있겠어요? 인간들이 유대인들이 그렇게 애썼으면 그들이 천당 가야 돼요. 하지만, 누군가 따로 하늘에서 오시지 아니하면 인간 구원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지요. 따로 오실 때 그냥 옵니까? 우리하고 차이나는 걸 가지고 옵니까? 아니면 우리하고 같은 걸로 옵니까? 차이나는 것을 가지고 와요. 왜냐, 차이나는 것을 가지고 왔기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했습니까? 죽여 버렸잖아요.

죽음이라는 것은, 모든 의미는 죽음부터 출발해야 돼요. 끊어졌다. 부터 출발해야 돼요. 그러면 끊어졌으면 양쪽 편에 개념들이 다 다르겠지요. 내 기도 있으면 누구 기도 있겠습니까? 주님의 기도있겠지요. 같을까요? 다를까요? 다르지요. 인간의 기도는 뭐냐, 주시옵소서! 에요. 마태복음6장에서. 자꾸 이방인들이 기도할 때 어떻게 기도한다? 자꾸 달라고 기도한다고요. 그런데 주님의 기도는 뭡니까? 니한테 무엇이 있어야 할 줄로 미리 아시느니라. 미리 아신다 했어요.

참, 여러분들이 다 아는 이야기를 나 혼자 한숨 쉬면서 안 믿는 것처럼 이야기해서 죄송합니다마는, 하나의 예를 들어볼게요. 하나님의 뜻이 어느 정도인가 보세요. 어떤 사람이 마약상습범입니다. 계속 마약을 했어요. 몰래 옆집 아파트에 있는 사람이 봤다고 칩시다. 계속 택배가 왔는데 택배를 가만히 보면 창문으로 보면 택배 봐가지고 허연 가루를 뜯어가지고 먹어가지고 헬레레 해가지고 누워있다. 아, 마약을 많이 했구나! 실제로 행동을 보면 비틀거리고 어지럽고 난리에요. 그 다음에 한 달 되어서 마약을 몰래 또 택배로 받아 했다 말이죠. 그래서 옆집에서 경찰에 신고를 한 거예요. 신고를 딱 해가지고 경찰이 그날 또 택배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와가지고 과연 택배는 딱 왔고, 택배를 경찰 앞에서 보는데 뜯어보니까 하연 가루에요. 그래서 경찰이 먹어보라고 했어요. 딱 먹어보니까 경찰도 맛을 보니까 설탕이었어요.

어찌된 일이냐 하면 그날만 설탕이에요. 그날만. 그날만 설탕이었어요. 배달이 잘못된 거예요. 마약 하는 입장에서는 운이 나빠 가지고 배달이 잘못된 거예요. 택배원이 실수해가지고 설탕을 보냈는데 현장에 있던 경찰한테는 그전에 아무리 마약을 해도 그 현장에서는 뭡니까? 잡을 수가 없는 거예요. 왜? 현장에 설탕을 먹는데 잡아가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신고한 사람도 헛방이 되고 경찰도 헛수고한 거예요. 자, 그렇다면 우리가 매일같이 범죄 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를 어기면 다 위배가 되지요. 하나를 어기면 다 범죄자입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범죄 하는데, 그런데 어느 날 이제는 악마가 니는 지옥 가. 하고 왔는데 하필이면 그 때 성령이 와 버렸다 말이죠. 우리 체포할 날만 기다리는데 와 보니까 성령 보니까 예수의 피로 용서가 택배로 된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훌륭한 거예요? 배달 사고가 난 거예요? 배달 사고 난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그래서 우리는 좋았다. 구원받았다. 가 아니라 주님은 자기 택한 백성을 어떤 식으로 건진다? 배달 사고처럼 느껴지도록 그런 식으로 주님이 자기의 공로를 위해서 우리에게 마약 대신에 설탕. 우리 죄의 심판 대신에 피의 용서를 우리에게 택배로 해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통해서 누구의 공로만? 주님의 공로만 드러내는 거예요.

그래서 옆집에서 와가지고 “아저씨, 마약 하는 거 맞잖아요.” “맞아.” “그런데 왜 하필이면 그날은 설탕이 왔어요?” “나도 몰라. 가만히 보니까 나한테 설탕 준 사람은 이 설탕의 자기 영광을 위해서 준거야. 나는 마약쟁이인데.” 경찰이 와서 안 걸린 거예요. 그 예가 바로 십자가 옆의 강도 이야기입니다. 강도질했어요. 지옥가야 됩니다. 그런데 주께서 창세전에 예정된 자라서 니가 오늘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고 해버린 거예요.

그러면 그 강도가 죽었지만, 강도가 죽기 직전까지 자기는 누구 공로만 돌리겠어요? 예수님 공로만 돌릴 거예요. 주님이 원하는 건 바로 그겁니다. 이 모든 일이 너의 일이 아니고, 너의 이 구원이 너가 소망한 구원, 니가 계획한 구원이 아니라 치밀한 구원받기 위해서 내가 뭘 해야 되고, 뭘 해야 되고, 치밀한 계획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그냥 소명의 뭐라고 합니까? 소명의 과격한 침입이죠. 침입. 침입이라는 말이 좀 이렇게 심심합니까. 그럼 용어를 고치겠습니다. 난입. 난입이 뭔 뜻이지요? 주인 허락도 없이 쳐들어 온 게 난입이죠. 우리 허락도 없이 갑자기 성령이 용서를 가지고 쳐들어 와버렸을 때 우리는 뭘 느낍니까? 신난다는 느낌입니까? 아니면 뭘 느낍니까?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떠나소서. 베드로가 한 고백 나오지요.

사도바울이 사울일 때 주님 만난 순간을 사도바울은 3번이나 이야기했습니다. 거기서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주님 이럴 줄 알았어. 이랬습니까? 뭐라고 했느냐 하면, “누구십니까?” “Who are you.” 누구십니까. 주여, 누구십니까? 주님의 답변은 간단했습니다. “니가 핍박하는 나다.” 니가 핍박하는. 그러면 사울은 한평생 지 나름대로 하나님 영광 돌린다고 애썼던 그 모든 일들이 진짜 하나님이 보시기에 무슨 요소가 가득했다는 거예요? 주님을 핍박하는 짓거리만 해온 거예요. 폭탄이었습니다. I am 폭탄. 나는 폭탄이었습니다. 주님을 피 흘리게 할 수밖에 없는 그 폭탄. 사도가 그걸 알고 그 다음부터 로마서, 갈라디아서, 편지를 씁니다. 쓰면서 뭐냐 하면 나의 의가 아니고 주님의 의라는 말로 표현하지요.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그 의를 주님의 의를 로마서1장16절에서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복음이라고 이야기하고, 복음이 나타났으니 나의 의가 아니고 누구의 의? 주님의 의. 주님의 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것이 복음이다. 이 하나님이 자기 숙제, 자기 과제, 자기 일을 하면서 아까 여러분 건축 구조물 이야기해 봅시다.

건축 구조물 말씀에 의해서 완성된 건축 구조물에 엘리사, 엘리야, 아브라함, 이삭, 모세, 요나, 온갖 선지자 막 나왔지요. 투입할 때 그들이 그 일이 주의 일에 도움 됩니까? 안 됩니까? 도움이 되지 아니하고 주님의 일에 전혀 보탬이 되지 않고 대조하는 거예요. 인간의 할 수 있는 한계를 그들이 보여 준 겁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나타날 때 그 옆에 누가 모세, 엘리야 등장했지요. 등장할 때 멍청하게 가만히 있었습니까?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어요? 어떤 쪽입니까? 그 이야기 먼저가 누가복음에 나와요. 그게 뭐냐 하면 “주님, 죽으셔야 되지 않습니까.” 주님의 별세에 대해서 이야기한 거예요.

내가 선지자 노릇한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고 아브라함이 아들 바친다고 구원되는 게 아니에요. 그게 믿음이 아니라는 말이죠. 뭐가 믿음이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셔야 우리가 구원되는 거예요. 그 연결망. 그게 바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성령을 주신 믿음입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욥은 뭐가 문제였다. 자기 자신이 누군지를 몰랐다. 신약 적으로 하면 욥은 죽은 자지만, 이건 욥은 구약이기 때문에 아주 멀쩡하게 살아있다고요. 그럼 내가 살아있으면 뭐도 살아있겠어요? 나의 잠재력, 나의 가능성, 나의 선함, 나의 추억과 나의 기억, 남한테 과부한테 돌봤던 그런 추억들이 남아있겠어요? 안 남아있겠어요? 남아있지요. 그래서 욥기에 보면 친구들이 욥을 그렇게 괴롭힐 때, 욥이 자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어려울 때 고아와 과부를 내가 도와줬다. 내가 이런 고난 받을 이유 없다. 너희들은 나를 몰라. 내가 얼마나 착하게 살았는지를 모르잖아. 나 이 정도로 착하게 살았어. 그런데 고난이 왔다. 하나님이 주셨다. 너희들은 내 심정을 몰라. 이런 식으로 나오고.

저 친구들은 뭡니까? “아이고, 분명히 고난 받을 때는 나쁜 짓을 했을 건데. 한 번 찾아봐라.” 이런 식인 거예요. 욥이 찾고자 하는 것은요, 잘 들어보세요. 욥이 찾고자 했던 자기 죄. 자기 죄는 내가 착할 가능성이 있다는 근거해서 나올 자기 죄에요. 실수, 오류, 아차, 이런 거. 이걸 죄라고 본 거예요. 근본은 착한데 정신이 좀 미미해서 치매 걸려서 나쁜 짓했다. 이런 거. 내가 미처 몰라서 알지를 못해서 잘못된 오류를 죄라고 본 거예요.

그런데 욥이 하나님을 만나고 난 뒤에 죄는 뭡니까? 근원적으로 먼지를 뒤집어쓰고 죄를 뒤집어쓰고 근원적으로 나는 뭐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뭐예요? 죄인으로 태어난 것을 내가 감사하지 못한 게 죄에요. 이 욥의 모습이 바로 예수님의 모습이라서 욥은 친구들을 위해서 마치 예수님처럼 십자가 지는 대속의 제물을 친구를 대신해서 바칩니다.

고난은 우리가 생각하는 고생과 그런 게 아니에요. 고난은 무엇이 고난이냐 하면 내가 헛바람 들어서 나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고 남의 평이나 하고 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고 내 평가한 기준가지고 남을 평가하고, 세상을 평가하고 국가를 평가하고, 죽은 존재가 평가한다는 그 자체가 얼마나 나 자신에 무지했는가를 내가 뒤늦게 새삼 알 때 내가 몰랐던 죄를 알 때 그 죄로 인하여 주께서는 죄인을 부르러 오시기 때문에 그 죄로 인하여 구원받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공은주(IP:119.♡.152.148) 19-06-26 09:59 
안양20190614b야5장10절(소명의 폭력적 침입)-이근호 목사

제가 첫 번째 시간에 그런 이야기했지요. “소명의 과격한 침입” 또는 난입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스케줄을 갖고 있는데 누가 여러분에게 전화를 건다든지 갑자기 아침에 눈을 딱 떴는데 갑자기 찾아온다든지 하면 여러분 어떻습니까? 기분 더럽지요. 그걸 한 번 분석해 보세요. 요거 내 나우바리 아닙니까. 내 영역이지요. 내 영역 같으면 사람이 몸만 영역이 아니에요. 내 될 것을 증명해 줄 것들이 놓여있는 그 공간이 나에요. 나의 나됨을 증명해 줄 것들이 놓여있는 공간. 그게 나에요.

내가 키우는 개가 만약에 안 보이면 나는 개 찾아와서 개가 있던 자리까지 딱 나에요. 왜? 개가 있다는 요소까지 합쳐서 나가 되는 거예요. 가장인데 과년한 딸이 밤10시가 됐는데 안 들어온다. 그러면 잠을 잘 수가 없어요. 왜냐 하면 나라는 것은 딸이 10시 이전에 딱 자기 방에 들어가서 자야 그게 나의 테두리라고요. 나의 영역이다 말이죠. 그러면 그 영역을 계속 유지하는데 어떻게 하느냐 하면 여기서 어려운 용어 하나 나옵니다.

어려운 용어지만 이건 필수적인 용어인데 그게 뭐냐 하면 바로 ‘반복’입니다. 반복의 특징은 갇혀있다는 거예요. 갇혀있는 거예요. 한 번 가족끼리 있잖아요. “여보, 오늘 기분 좋은데 외식하자.” 외식해서 기분 좋았지요. 그 다음 또 외식합니까. 아니지요. 외식은 자주하면 맛이 떨어집니다. 돈만 나가고. 인간의 행동의 본질은 반복에 있어요. 계속해서 자기 영역을 자기 과수원을 계속 관리하는 거예요. 특징이 뭐냐 하면 갇혀있기 때문에. 갇혀있기 때문에 늘 뱅뱅이 도는 식이에요. 평생을 자기 영역 속에 계속 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까 이야기한 반복이니까 순환되잖아요. 순환될 때 여기서 순환되는 코스가 있어요. 그게 뭐냐 스케줄입니다. 이야기를 좀 더 해볼게요. 가구가 제자리에 놓여있고 다 큰 딸이 제 시간에 오고 남편도 오면 이게 나의 공간이라고 생각되는데, 그 때 갑자가 밤 10시에 전화 온다. 그러면 내 스케줄에 그 10시에 자는 시간인데 전화가 와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이것은 과격한 침입이 되는 거예요. 과격한 침입.

그렇다면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내 허락도 없이 과격한 침입이 왔을 때 여기서 제가 문제 삼는 것은 뭐냐, 그게 기분 나빠요? 기분 나빠요? 기분 나쁘지요. 그게 왜 기분 나쁘지요? 그게 참 이상해. 그게 왜 기분 나쁘지요. 자기가 절대화기 때문에, 자기가 우상이기 때문에 그래요. 나한테는 내 스케줄이 늘 자연스러운 스케줄이 우상화됐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그 스케줄이 왔을 때 반복적인 행위니까 어쨌든간에 빨리 무마해서 메꾸려고 하겠지요. 그럼 전화 빨리 받고 다음에는 문자로 남기세요. 이렇게 하고 빨리 전화를 끊어버리면 뭐가 됩니까. 다시 고요하게 다시 나만이 오지요. 사람은 안 바뀌는 거예요. 사람은 바뀌지를 않습니다. 반복적인 성향 때문에 어떤 고난이 오고 고생이 와도 다시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나요. 옛날로 돌아가요. 그런데 안 바뀌면 천국을 못가요. 안 바뀌면 천국을 못가고, 우리 인간 삶은 절대로 내 중심이라는 사실을 포기할 줄 모르고. 어떤 어려움이 와도 내 자신이 포기됩니까. 그 전에 어려움이 없을 때는 내 중심이었다가, 어려움이 있고 난 후에는 내 중심이 안 되고 그런 일이 있습니까. 없어요.

어려움이 오던 관계없이 무슨 본능이 작용하느냐 하면 빨리 옛날처럼 행복하고, 하하 웃음이 넘치는 그 때 그 시절로 빨리 회귀하려는 본능이 강하게 작용해서 여기서 오버가 일어납니다. 그 오버에 노리고 하는 게 뭐냐 하면 바로 “부동산 투자하세요.” 이런 겁니다. 사기 당해서 사업 날린 거. 한꺼번에 만회해야 되지 않습니까. “부동산 투자하세요.” 하는 그것이 세상적인 속임수라면 소위 영을 빙자한 속임수는 뭐냐 하면 교회입니다. “40일 금식 기도해 보세요. 다시 행복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당신 되찾는 게 목적이잖아요. 십일조 하지를 않아서 당했으니 요번 십일조하시면 다시 원상회복 해주실 겁니다. 아니 30배, 60배, 100배 채워줄 겁니다.” “어떻게 그렇게 됩니까?” “믿기만 하면 됩니다.” “어떤 믿음이요?” “어린애 같은 믿음만 하면 됩니다.” 이런 거요. 그럴 때는 그러면 목사님이 하세요. 나무 하나 뽑아가지고 바다에 빠지는 시범 보여주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겨자씨만한 믿음 있으면 나무가 뽑혀서 어디에 빠진다? 바다에 빠진다면서요. 그러면 당신부터 시범보이라고요.

교회에서 그런 시범보이는 거 없지요. 기도해서 장사 잘되는 거 있지. 미장원 잘됐다. 그런 건 있는데 나무 뽑혀서 바다에 빠지는 시범은 왜 안 해요? 물위를 걷는 건 왜 안 해요? 병 고쳤다는 기적은 그렇게 많으면서도 포항제철 용광로에 불속에 뛰어 들어가는 것은 왜 안 하는데. 이게 얼마나 사기인지를 여러분들이 상상도 못해요. 얼마나 사기인지. 전부 다 사기입니다. 전부 다. 우리의 약점을 노린 사기에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뭐냐 우리를 이렇게 난입한 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감추고 있는 약점. 그 약점이 우리를 구원하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는 그 약점을 감추기 위해서 너무 강점들을 바깥에 포진해 시켜놨습니다. 마치 벙커처럼.

이것도 잘하고, 저것도 잘합니다. 그러니까 봐주세요. 지금 이런 식이에요. 봐달라는 식이에요. 앞으로 열심히 할 테니까. 봐달라는 식이에요. 주님께서는 욥에게 찾아온 것은 욥이 본인도 모르는 문제성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권한은 악마의 침투는 욥의 스케줄한테 물어보면 안돼요. 갑자기 쳐들어와야 돼요. 쳐들어오게 되면 받는 사람은 움쩍거리지요. 당황스러워요. 특히 욥의 아내는 매우 당황했어요. 많이 당황하셨습니까? 많이 당황했지요. 애 열 명 다 죽었으니까요. 열 명 다 죽였잖아요. 애 하나 하나 키울 때 그냥 키웠습니까? 공들여서 키운 애 다 죽었어요. 그들을 위해서 얼마나 기도를 했습니까. 사회에 나가서 나쁜 짓 하지 말라고. 그 기도할 때 이건 너무 놀라운 기도기 때문에 주께서 필히 들어주실 줄 알았지요.

멀리 외국에 나간 우리 아기 그저 아무 나쁜 짓하지 말고, 열심히 해가지고 저와 이 인류를 위해서 큰 공헌하게 하옵소서. 기도 안하겠어요? 애들 외국에 보내고. 그런데 부고장 날아와 가지고. 광부일 하다가 죽었습니다. 해가지고 <수상한 그녀> 의 영화에 나오지요. 하얀나비 노래 부를 때 나오는 배경처럼. 애 임신하고 광부하다 죽었어요. 영화 이야기 나왔으니까 영화 이야기 더 하게 되면 <천국을 향하여> 2005년도 영화가 있어요. 둘 사이가 친구사이인데 정비공입니다. 배경은 이슬람 나라에요. 이슬람 팔레스타인 지역입니다. 이슬람 국가의 이슬람 청년이에요. 정비공인데, 자기 단체의 나라에서 뭐라고 요구하느냐 하면 니 젊으니까 니가 몸에다가 폭탄 띠를 두루고 저 앞에 보이는 이스라엘 지역가가지고 니가 위장해 가가지고 사람 많은데 가가지고 니가 자폭해서 죽어라.

그걸 지시한 거예요. 그 두 청년은 이거 안 해도 죽고, 해도 죽는 거예요. 과격 테러집단이 그렇게 시켰으니까. 그럴 때 영화에 보면 이런 질문이 나옵니다. 마지막 다하고 난 뒤에 자폭하고 죽고 난 뒤에는 어떻게 되나요? 라고 물었어요. 두 청년이. 그 일을 시키는 테러 지도자한테. 자폭하고 죽으면 어떻게 되나요? 나는 어떻게 되나요? 한 번 적어보겠습니다. “자폭하고 죽으면 나는 어떻게 되나요?” 물으니까 그 테러 지도자가 “당신들은 두 천사를 만나게 됩니다.” 당신들은 죽고 난 뒤에 하늘의 두 천사를 만나게 됩니다. 해요. 대화가 거기서 끝나지 않아요. 마지막 대화가 있어요. 영화에서 마지막 대화가 이거에요. “정말 그럴까요?”

그 제목이 재미있잖아요. <천국을 향하여> 그러니까 이슬람에서도 뭐냐 하면 천국가려면 뭐해야 돼요? 고난 받아야 간다. 고난 없이는 천국을 못 간다 해요. 그래서 천국에 일찍 가기위해서 젊은 날 천국가야 공로를 하게 되면 천국 가서도 좋은 자리 가니까. 가기 위해서 고난을 받는데. 그 청년의 마지막 이야기가 뭐냐 하면 “정말 그럴까요?” 라고 질문을 해요. 그 의문이 우리한테는 그 의문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있지요. 있다는 이유가 우리의 신체의 본성은 내 것을 지키는데 전력을 다하는 거예요. 이건 타고난 거예요. 내 것을.

그리고 하나님은 시다바리에요. 내 것 지키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고, 내 것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 예수님 믿는 겁니다. 내 자식 잘되기 위해서, 내 사업 잘 되기 위해서, 내 하는 일 건강하기 위해서, 몸이 아프니까 건강하기 위해서 예수님 믿고 하나님 믿는 거예요. 계속 보는 거예요. 하나님 믿고 난 뒤에 철야하고 난 뒤에 내 몸이 어떻게 되었는가, 저울에 올라가고 측정하고 심전도 측정해가지고 기도한 효과, 철야한 효과, 새벽기도 연속한 효과, 성경 쓰라 해서 성경책 다 써요. 십일조하고 다 해요. 하면서 얼마나 내가 원하는 것을 얼마나 얻었는가를 늘 측정에 나서는 겁니다.

측정에 나선다는 말은 그 뒤에 무슨 말이 계속 붙는다? 과연 그럴까? 과연 그럴까? 과연 그럴까? 믿는 사람은 의심하지 않는다고 목사들이 이야기하잖아요. 그러면 그 이야기를 듣는 교인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맞아. 의심하지 말아야지. 그래, 어린 애 같은 믿음으로 순전한 믿음 믿어야 돼! 의심하지 말아야지. 작은 믿음은 나무가 뽑혀서 바다에 빠진다면 믿으면 믿음대로 되는 거야. 기도에 두 말하면 안 돼! 믿음으로 해야 응답이 된다고 야고보서1장에 나와 있으니까. 그것도 다 들었어요. 믿음으로 믿습니다! 해 놓고 기도 끝나면 과연 그럴까? 이걸 어떻게 말립니까? 이걸 어떻게 가위로 째낼 수 있어요? 못 떼어내요. 떼어낼 수가 없습니다. 그런 뉘앙스를 남기는 거예요.

제발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거예요. 과연 그럴까, 가 늘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대외적으로 남들 앞에서 믿씁니다! 하는 쌍시옷만 넣으면 믿음이 되는 줄 알고 자꾸 자기 위장을 어떻게 한다? 반복적으로 하는 거예요. 자, 반복은 어디서 나온다고 했습니까? 인간의 행함에서 나오지요. 인간은 인간 자체가 행함이고, 행함 자체에서 뭐냐 하면 반복밖에 안 나와요. 이거 못 벗어납니다. 2005년에 나왔던 <천국을 향하여> 결국은 갔는지 안 갔는지 아무도 모르지요. 테러 입장에서는 두 사람만 잘 이용했으면 그만이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찾는 게 뭐냐, 그 사람이 죽을 때 얼굴이 환했다. 평온했다. “어머니, 요번에 90에 돌아가셨다면서요?” “네, 돌아가셨어요.” “어떻게 돌아가셨어요?” “마지막 때 사도신경 다 고개 끄덕했고요. 평안했어요.” 참~ 내. 그것도 증거라고. 얼마나 증거가 없었으면 그 하나 꼬투리라도 잡으려고 과학수사대에서 증거물 찾듯이. 조금이라도 증거 찾아가지고 우리교회 40년 섬긴 권사님 천국 갔다고 그 알려주려고. 목사는 어떻게? 어떻게? 낌새는 없었어?

여러분, 그 낌새를 찾으면 안돼요. 인간이 죽을 때 믿음 없는 신앙으로 죽어야 돼요. “주여, 이것까지가 나의 한계입니다.” 라고 고백해야 됩니다. 그걸 가지고 성경에서는 어찌할꼬? 라고 하지요. “저의 믿음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었군요.” 이건 하나의 조작이었고 이건 속임수였습니다. 남들이 그렇게 나를 그렇게 속이면 된다고 그동안 줄곧 교회 다니면서 그렇게 가르쳤던 거예요. 그 가르침이 우리 행함을 마중 나와서 그걸 받은 겁니다.

영화관에 들어가면 내부가 어둡지요. 처음에는 어둡지 않아요. 광고 나올 때는. 영화가 시작되면 캄캄하지요. 캄캄한데 견딜 수 있는 것은 화면 자체가 환하게 밝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도가 인생을 살면서 사는 이유는 뭐냐 하면 내 쪽이 안 밝아도 괜찮아요. 나를 비추는 그 새로운 예상도 상상도 못한 새로운 빛이 성령을 통해서 쫙 들어오게 되면 나는 오히려 실컷 어두워야 좋아요. 기뻐요. 감사가 돼요. 내가 천하에 죄인이 될 때 감사가 돼요.

하루는 <사울>이란 영화를 봤는데 영화를 딱 보고 있는데 뭔가 분위기가 상당히 불편해요. 딱 보니까 영화가 세계에서 제일 재미없는 영화에요. 다큐멘터리인데 유대인이 포로수용소에서 했던 그걸 다큐멘터리로 만든 영화에요. 찍찍 거리는 소음부터 시체 치우는 소음까지 다 나온 거예요. 그 영화가 상을 받았으니까 좋은 영화라 싶어서 아침에 조조에 집에서 노는 아주머니들이 애 유치원 보내고 온 거예요. 와가지고 재미하나도 없거든요. 줄거리가 하나도 없으니까. 문자질하고 있는 거예요. 문자질하는 그 빛이 15도 각도로 들어온 거예요. 저쪽에 집중을 해야 되는데 저쪽에서 빛이 자꾸 비치는 거예요.

교회에서 목사가 십자가 피만 이야기해야 되는데 자꾸 행함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누구 복 받았다는 이야기만 하는 거예요. 위로해 줄려고. 오는 고객 안 놓치려고 그 짓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의 공로를 다 가려버리는 거예요. 쓰레기가 집합한 것이 교회이어야 돼요. 우리가 쓰레기 되면 구원받는 게 아니고 처음부터 쓰레기였어요. 쓰레기였는데 쓰레기가 어떻게 아느냐, 빛이 와야 쓰레기인 줄 알지요. 우리가 차이나도 보통 차이나면 안돼요. 얼추 차이나서는 안 된다니까요. 주기철가지고는 안 돼요. 송영훈가지고는 안돼요. 주님이 오셔야 돼요. 주기철 만나서 무슨 구원이 돼요. 훌륭한 목사님, 톰스야 울지마라. 그런 거 와가지고 구원 안돼요.

제가 이리 앉아서 여러분을 보니까 봉준호 감독 기생충 포스터 보는 느낌인데. 포스터에 그 많은 스포일러, 유튜브가 있어도 이거 이야기하는 사람 한 사람도 없어요. 왜 봉준호 감독이 눈에다가 새카만 칠을 했는가. 이거 이야기하는 평론가 아무도 없는 거 같아요. 이거 본 적이 없어요. 수백개 올라왔는데 수백개 보지는 않았지만 이걸 이야기 안 해요. 수석이 어떠니, 의미가 어떠니 하는데 왜 얼굴 눈을 가리는지. 왜 시커먼 게 있는지. 봉준호 감독도 이야기 안하고, 아무도 이야기 안 해요. 그게 뭐냐 하면 송강호가 수해났을 때 체육관에서 아들하고 이야기할 때 “아버지, 계획이 뭡니까?” 그건 줄거리를 게시판에 올려놓은 게 있어요. “계획이 없는 게 계획이다. 왜? 계획 세워놓으면 계획대로 되는 일도 없고 그러니까 아예 계획 없으면 실망도 안을 거니까 우리 집안은 계획 없는 게 계획이다.” 이게 영화의 핵심으로 등장해요. 할 때 그 표정이 뭐냐 하면 팔로 눈을 가려버려요. 현대에 사는 인간들은 계획 세워놔야 봐야 소용없고 그렇고 그런 인간들의 집합체. 그래서 포스터에 눈마다 다 가려놨어요. 부자사람, 가난한 사람 다 가려놨어요. 그냥 이거까지는 제 의견이니까 너무 신뢰하지 마세요. 봉준호한테 물어봐도 내 느끼면 그만이지.

이 세상 인간들은 똑같습니다. 왜? 다 같은 아담의 후손들이기 때문에. 주께서는 개인적으로 구원하지 않습니다. 집단화시켜요. 훌륭한 사람은 구원받으세요. 아닙니다. 훌륭한 게 어디 있어요. 교회 가나 안 가나, 절에 가나, 이슬람이나 똑같아요. 똑같이 봅니다. 다만 주님이 그 사람 허락 없이 그 사람 스케줄 허락 없이 침입을 했는지 아니면 자기 계획대로 계속 죽을 때까지 계속 반복해서 일상을 살아가는, 누구 침입 없이 내가 열심히 애써서 이만큼 살림살이 이뤘다. 그것만 붙들고 사는 것인지 그 차이입니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내놓을 게 “내가 인생사느냐고 힘들었습니다. 애썼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힘들었습니다.” 그걸 내놓는 사람인지, 그건 불신자지요. “왜 내 허락도 없이 내가 알아서 착하게 살아서 교회 목사 잘 듣고 천당 가는데 왜 저한테 오셔가지고 제 모든 스케줄을 모든 내 전부를 완전히 욥처럼 박살내는 겁니까? 완전히 깨지게 만듭니까?” 여기서 박살이라는 말은요, 살림살이 어렵게 되고, 인생이 험하고, 그게 박살이 아니라 그 다음부터는 내가 뭘 한다는 게 이게 옳은 일인지, 자신감이 뚝 떨어지는 걸 말하는 거예요. 자신감이. 계획 세워봐야 소용없어요. 또 주님이 호락질 할 건데 뭐. 내 뜻대로 안될 건데 뭐. 소용없어요.

그러면 우리는 뭐라 합니까. 사도바울도 똑같아요. “왜 당신은 뭔데 내 일에 내 허락도 없이 줬다 폈다, 내 인생인데. 내 인생인데 왜 주님이 맘대로 갖고 노십니까?” 이렇게 물으면 주님이 이렇게 할 거예요. “운명을 너가 조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미래까지 우리의 과거, 현재까지 운명을 내가 조작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내가 조작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가짜인데. 이게 가짜거든요.

야고보서4장14절 읽어보세요. 열 번도 더 읽었다마는.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안개라는 말 대신 3자를 집어넣읍시다. 물안개. 물방울. 안개가 물방울 아닙니까. 앞에 없어지는 것과 이렇게 연관되어있어요. 없어지는 뭐라고요? 물방울이에요. 없어지는 물방울이에요. 이번에 독일에 갔을 때 외손녀하고 논다고 애를 먹었는데요. 퍼즐 할 때 힘들었는데. 퍼즐 맞춰놓으면 다 엎어놓고 또 맞추라하고. 비누거품을 내서 후 불면 비누방울 생기잖아요. 비누방울을 딱 보니까 나올 때는 많이 나오는 거 같아요. 볼록볼록. 30센티 안가서 톡톡 다 터져버려요. 그게 물방울이에요. 우리 인생은 뭡니까? 물방울이잖아요. 여기 소파에 앉아있지만, 60년 후에 여기 아무도 없어요. 소파도 늙고 우리도 늙고.

그러면 우리의 후손들이 소파를 치우면서 뭐만 생각하겠습니까. 이 자리에 우리 어머니가 앉았는데. 라고 하겠지요. 그러나 추억뿐이지요. 실체는 이미 사라졌어요. 사라진 거예요. 주의 말씀대로 맞아요. 사라진 존재가 열심히 자기 운명을 평소에 어떻게 한다고요. 사라지고 있는 존재가 시건방지게 이 운명을 조작을 한다? 제작을 한다? 왜 이런 헛짓 합니까? 이거 외에는 다른 방법이 생각이 안 나니까요. 인생을 사는 게. 이렇게 조작해도 죽고, 안 조작해도 죽거든요.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예요. 어쩔 수 없이. 이거 외에는 다른 인생사는 방법을 달리 모르겠어요.

그러면 주님께서는 거기서 그냥 방관하지 않고 말씀을 주지요. 뭐냐 하면 운명은 니가 조작하는 것이 아니다. 할 때에 아까 한 것을 후딱 지나갔기 때문에 다시 하겠습니다. 아까 영화에서. 자폭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뭐냐 하면 내가 어떻게 될까? 하지요. 자, 여기에 테러범한테 잡혀가지고 자살 폭탄 할 사람이 뭐라고 합니까? 나라는 걸 집어넣은 거예요. 내가, 라는 걸 집어넣었지요. 내가, 집어넣으면서 무슨 걱정하느냐 하면 내가 앞으로 어떻게 됩니까? 걱정하니까 그 테러범 지도자가 하는 말이 니가 죽으면 너희들은 두 천사를 만난다, 했잖아요. 두 천사 만날 때 누가 있어요? 역시 내가 있지요. 이게 뭐가 문제냐 하면 내가 문제에요. 내가. 내가 들어갈 자리가 아닌데 내가 집어넣고 시작해요. 아까 야고보서4장14절에서 나는 뭡니까? 물방울이지요.

그러면 여기서 물방울을 집어넣어봅시다. “내가 자폭하고 난 뒤에 물방울은 어떻게 됩니까?” 그 테러범 지도자가 답변을 이렇게 대답해야 돼요. “물방울이 뭘 그런 걸 걱정해. 물방울이 물방울 되면 그걸로 끝나는 것이지.” 이렇게 답변을 해줘야 되지요. 야고보서4장14절에 그런 게 있다! 그런 거 안 믿겠지만. 안 믿겠지만 그런 이야기 아니지요.

우리는 지금 성경을 믿는다고 여기 앉아 있잖아요. 그럼 우리는 평소에 야고보서4장14절을 나 대신 야고보서4장 14절에 물방울을 집어넣습니까? 이 위선자들. 이런 거짓말쟁이들. 복 받으려고 교회에 가는 사람. 누가요? 옆 사람이. 아니 우리 장로님이 복 받아요? 아니 누가요? 또 내가 복 받아요. 또 내가. 내 복 받으면 내 자식 잘되고 우리 집안 잘되고 우리 집안 기둥처럼 일어나고 옛날 과거에 잘 나갔던 거 빨리 회복되고. 천천히 회복되는 거 지겨워. 빨리 회복 되어야 되고.

그래서 다른 사람이 “야, 믿음 좋으네. 복 받았네.” 이런 소리 듣고 싶어서. 그럼 그런 소리는 누구의 자랑으로 나옵니까. 나의 자랑으로 덧 되기 하겠지요. 누더기 옷처럼 계속. 백날 해봐야 우리는 죽으면 모든 것도 다 사라지는데. 야고보서 성경이 무서운 이유를 아시겠지요. 이렇게 성경은 무서워요. 왜 무서우냐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게 한 개도 없습니다. 단 한 개 도 못 지켜요. 성경은. 안 지키고 구원받는 겁니다. 아니 안 지켰다는 것을 계속 신나게 확인해 가면서 천국가고 있어요. 누구 공로로? 난입한 내 인생에 내 허락 한 번도 없는 난입한 주님 때문에 하는 겁니다.

제가 지난 낮 설교 때에 이런 이야기했어요. 마태복음25장에서 예수님께서 양과 염소를 나중에 나눈다 했지요. 그럼 중앙 자리에 누가 있다고 했습니까? 예수님이 중앙자리지요. 우리는 설교시간이기 때문에 그걸 몸으로 못 보여줬는데 강의시간이기 때문에 몸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내가 나가 이리 있습니다. 평소에는 누구한테 의논해요? 나하고 의논하지요. 나한테 의논해가지고 내 반복적인 스케줄 따라, 반복적인 스케줄을 왜 그렇게 하느냐, 몸이 그만큼 거기에 적응됐기 때문에 그래요. 아침에 뭐하고 점심에 뭐하고, 이게 틀어져버리면 내 몸이 아파요. 여러분도 마찬가지잖아요. 있는 자리에 그 자리에 있어야 돼요. 남편이 양말 벗어서 다른데 벗어던지면 짜증나. 왜? 양말을 동시에 같은 자리에 놔줘야 되지 그 찾는다고 짜증난다니까요. 모든 것이 착착착 내게 정돈된 내가 관리할 수 있는 그 자리에 다 있어줘야 내가 편해요. 내가. 그게 비틀어지면 안돼요. 밤에 전화 오면 짜증나는 이유가 그거 때문이에요.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나인데, 그 기준이 있다 말이죠. 그런데 내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 내 중앙 자리를 내어줘라 했지요. 내 스케줄 있는 자리에서 내가 비켜가게 되면 뭘 쳐다보게 돼요? 내 있던 자리가 꽉 차 있다가 내가 없으니까 비어있는 자리지요. 그 비는 자리를 누가 계시다? 주님이 계셔줘야 오른 쪽에는 양, 왼쪽에는 뭐가 돼요? 염소가 되는 겁니다. 그렇게 비켜준 사람이 뭐라고 고백하느냐 하면, “제가 언제 주님을 위해서 먹을 걸 줬습니까? 마실 걸 줬습니까?” 이렇게 해요.

왜냐하면 본인이 중앙자리에서 본인이 결정해서 누굴 섬긴 게 아니기 때문에. 그러면 중앙자리는 양이 있는 천국 가는 사람을 계속해서 본인도 의식하지 못하도록 주께서 계속 이끌어왔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 사실을 머리는 이해되는데 이게 안 믿어지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보통 이게 성령이 와서 믿어지게 되면 내 자리가 있던 자리를 비켜주게 되면 이 자리는 누구 차지냐, 주님의 자리가 되지요. 그럼 우리 가정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주님이지요.

그러면 내가 어떤 뭐 빨래를 하던 밥을 하는 것은 내가 하는 게 아니고 내가 이 자리에서 하는 게 아니고 주님이 시켜서 이거하라고 죽기 전까지는 물방울되기 전까지는 이거하라고 주께서 시켜줬다는 그 관계망이 형성되겠지요. 여러분, 고객 끄덕였습니다. 별로 어려운 논리 아니지요. 상식적으로 맞는 이야기잖아요. 중앙자리를 비워주고 나는 있고 시키는 대로 하는 거. 그러니까 “저는 주께서 시켜서 했습니다. 제가 한 게 아닙니다.” 라는 고백이 앞뒤가 맞는 이야기라는 말이죠. 머리는 되는데 성령이 안 와서 안 믿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은 뭐라고 이야기하겠습니까. “내가 있다는 걸 느끼겠는데 내 옆에 어떤 분이 계시다는 걸 안 느껴지면 나 어떻게 하면 좋아요?”이렇게 되겠지요.

진짜 비키면 성령이 오게 되면 내가 그렇게 원했던 자리에 누가 턱하니 양반자리해서 차지하는 게 신앙적 관계거든요. 주님이 주신 믿음인데. 만약에 누가 안 찾아왔다고 칩시다. 그러면 옮겨봤자 이 또 내 자리가 중심자리가 되어버려요. 옮겨봤자. 그러면 내가 나에게 그럴싸한 신앙적 행동 안하면 내 운명은 불안해서 못 견디는 거예요. 또 성경공부하고, 또 신학공부 해야 돼요. 그거 모아가지고 내 천당 보내달라고 할 수밖에 없어요. 누가 안 찾아오면.

오늘 성경에서 5장9절 누가 크게 읽어보세요.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자, 형제들아만 있는 게 아니고 또 제3의 인물이 있지요. 그 3의 인물이 누굽니까? 심판주가 어디 있다? 문 밖에 있지요. 문 밖에 주님이 계시다 합시다. 그럼 제가 보이지요? 보이지요? 이렇게 하고 있다고요. 그런데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보기는 뭘 봐. 누가 와? 하고 대화가 통하겠어요? 안 통하겠어요? 대화가 안 통하지요.

그래서 복음은 구원받으라고 하는 게 아니고 죽은 자들에게만 복음을 전합니다. 왜? 못 알아듣는 게 복음이에요. 알아듣는 것은 성령이 온 사람이라는 그 표시를 드러내게 되면, 죽은 자에게 해가지고 만약에 그 말을 알아들으면 왠 기적이에요. 이건 기적이 일어난 거예요. 아~ 저 사람! 진짜 예수 믿는 자기 자신을 믿는 게 아니고, 잘 들으세요. 예수 믿는 자기 자신의 믿음을 믿는 게 아니고 진짜 자기는 생각 안하고 주님만 믿는구나! 그렇다면 누가 그 사람을 누구를 평할 잽이 안 되지요. 그 사람 나쁘다, 좋다, 평할 필요가 없지요. 평을 안 하면 나를 평을 안 하고 내가 나쁜 걸 기정사실인데 내가 왜 평해요.

만약에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진다면, ‘왜 그런 나쁜 짓을! 해서는 안 될 짓을! 하고 맨날 가슴치고 부족합니다. 부족합니다. 주여! 부족합니다.’ 맨날 이러고 있을 거다 이 말이죠. 이게 무슨 해프닝이에요. 이게. 그만큼 내 가슴 치는 거만 좀 사진 좀 찍어 달라 이 말아닙니까. 천사들이여. 헌금 낼 때 폼 잡으면서 벌벌 떨면서 사진 좀 찍어달라는 거예요. 귀한 십일조 낸다고. 손모가지를 자르던지 해야지. 손모가지 자르는 거 제 이야기 아닙니다. 오른 손이 하는 걸 뭐해라? 왼손이 모르게 하라. 손목을 자르라. 이 말이거든요. 오른 손이 하는 걸 왼손이 모르게 하는 거예요. 그 말을 누가 지킵니까? 못 지킵니다. 지킬 수가 없어요.

그래서 말합니다. “전에 니는 나한테 헌금했잖아.” “제가 언제 했습니까?” 이리 나오는 거예요. 제가 언제 했습니까? “니 전에 도둑맞았잖아.” “아, 도둑  맞은 게 헌금이구나!” 성경은 주님이 지킵니다. 우리가 이 성경 보면서 인간은 가만히 있을 인간들이 아니고 나서서 지켜야 돼요. 왜 그렇게 하느냐, 내가 중심에 서있거든요. 지켜서 그 결과의 복은 누가 챙긴다? 내가 챙긴다는 노림수를 가지고 해요.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바로 그 일을 누가 시켰다? 주님이 시켰는데 시킨 이유가 내가 이 정도로 어설프다는 것. 이 정도로 나만 사랑한다는 것. 내가 나의 절대자고. 내가 나만 섬기는 우상숭배자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성경 보고 이 성경을 내가 지키겠다고 나서는 그런 객기를 부리게 하는 겁니다. 그런 오버를 하게 만들어버려요.

오늘 아침에 제가 산책을 하는데 연기가 나는 거예요. 그냥 지나갈 내가 아니지요. 갔어요. 산책 코스를 이탈해서 스케줄에서 이탈한 거예요. 가가지고 할머니가 있는 거예요. 할머니 집에서 연기가 나요. 쓰레기 태우면 신고하려고 왔습니다. 못 사는 할머니들이 쓰레기 아끼려고 막 태우는 거예요. “신고하러 왔습니다.” 하니까 “아니 쓰레기 태우는 거 아니에요. 연탄 땐다고 연탄 불 붙이다보니까 연탄 불쏘시개 연기가 나서 그렇습니다.”이렇게 했어요. 예, 쓰레기 태우면 안 됩니다. 환경단체는 아니지만 하여튼 부탁을 하고. 왜냐하면 내가 그 동네 지적을 한 적이 있기 때문에. 나한테 걸린 사람이 있어가지고 그렇게 하거든요. 하는데, 연기가 난다 해봅시다.

자, 연기가 날 때, 어느 집들이 있는데 연기가 났을 때는 뭔가 다른 집하고 다른 점이 뭘 태우는 거잖아요. 여러 집들이 있습니다. 마치 유월절처럼. 애굽에 있는 유월절 할 때. 한쪽이 연기가 난다고 합시다. 이쪽집이 갑자기 안하던 짓을 해요.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문지방에 바른다 칩시다. 이건 다른 집이 안하는 애굽에 있는 다른 집은 안하는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럼 이 집은 뭐냐 하면 주께서 난입한 거예요. 스케줄대로.

그러면 성도가 뭐냐 하면 성도가 성도를 만나서 대화한다는 말은 뭐냐 하면 그 사람이 얼마나 자기 착실에 열중하고 자기 완벽에 추구하느냐가 아니라 혹시 니 인생에 불난 적 있느냐, 그걸 물어보는 거예요. 니 인생에 불난 적 있는가, 니 스케줄 완전 꼬이고 엉망 된 적 있는가, 물어보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살아보려고 얼마나 악바리처럼 살립니까. 남의 일은 몰라도 자기 일을 방치하는 인간은 이 세상에 없어요. 목마른 자가 우물판다고. 우물 파기가 얼마나 힘들어요. 남은 안파도 제일 급한 사람이 누굽니까. 목마른 자가 곡괭이 들고 파게 돼있어요. 그만큼 내게 급한 일은 내가 미루고 양보한 적이 없습니다. 모든 인간이 그렇게 자기 나름대로의 자기 인생을 살아가는데 거기에 누가 주님이 와서 침범해버리면 스케줄은 다 깨집니다.

그 깨지면 완전히 자기가 공들였던 것이 다 날아가 버려요. 그게 연기입니다. 그 연기난 사람 성령이 찾아오고 닌자 거북이처럼 사무라이 찾아간 거예요. 유월절 하나님의 천사가 죽음의 천사가 찾아간 거예요. 뭐라고 하느냐, 너는 이미 스케줄 관리하지 마라. 이미 죽어있다는 사실을 그런 식으로 통보해 주는 겁니다. 니가 잘 살고 못 살고 자체도 의미가 없어요. 죽은 놈이 뭘 잘살기 위해서 뭘 의미가 있어요? 바짝 마른 뼈인데요. 더 극단적으로 말해서 옆에 누구 남편 자고 있거든요. 해골하고 동거한다고 생각하면 돼요. 바짝 마른 해골하고. 자식 침대에 자고 있거든 해골 두 개가 같이 누워있다고 보면 돼요. 형제간끼리. 그리고 확인하고 난 뒤에 해골이 어이이이~ 부두둑 깨어나 가지고 해골이 있는 거예요. 에스겔37장 말씀입니다. 바짝 마른 해골이에요.

인간들 보기에 그럴싸하지요. 삼성그룹이 어떠니, 세상에 10승을 던지고, 20세 이하 월드컵에서 내일 모레 되면 치킨집 난리 났다. 현재 대단하게 보이지요. 이강희 천억이고 손흥민 좋겠다. 이정료가 4천억이고. 전부 다 돈. 돈. 돈... 매일 뉴스가 그런 거 밖에 안 나오지요. 누구는 안됐다. 물에 빠져가지고. 놀러가 가지고 물에 빠져가지고 안됐다. 그런데 도대체 그 이야기를 누구한테 배웠습니까? 물방울 여기 달랑 짧게 나오고, 온종일 24시간 23시간 59분59초는 어디서 나온 겁니까? 전부 다 그런 이야기 나오거든요. 캄캄한 세상입니다.

백날 요란스러워도 캄캄해요. 그걸 저는 이렇게 표현해요. ‘요란스러운 정숙’ 이 비슷한 제목이 제가 요한계시록 강의할 때 그 강의 제목이 요란한 정숙. 자기 딴아 굉장히 바빠요. 성경 볼 시간도 없고 교회 갈 시간도 없어. 너무 바빠. 바쁜데 그게 반복이에요. 똑같은 거 계속 반복, 체바퀴식 왔다, 갔다, 왔다, 갔다. 놀 수가 없어요. 바쁜 게 취소가 없으니까 노는 게 없어요. 대한민국 특징이 뭡니까? 빨리. 빨리. 히딩크도 아는 거예요. 발음도 안돼요. 빨리. 빨리. 뭘 위하여.

성도냐, 성도 아니냐를 질문하나로 대박 확인이 돼요. 무엇을 원하십니까? 당신은 무엇을 원하십니까? 제가 전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아이보고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그런 질문하지 말라고. 질문을 바꾸라 했지요. 니는 아빠를 닮고 싶어. 엄마를 닮고 싶어. 질문을 요렇게 해야 돼요. 네가 원하는 상이 둘 중에 누구냐 이 말이에요. 내가 원하는 상. 인간은 기본은 뭐냐, 자기가 원하는 거예요. 그걸 욕망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욕망이 그 사람의 모든 걸 말해줘요. 뭘 원하십니까. 뭘 원하시는 거예요? 정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살고자 원합니다.

여러분, 살고자 원해요. 그래서 사단난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자기 자신의 문제를 모르는 거예요. 사는 걸 기본으로 잡고 그 다음에 성경이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살릴 것인가, 지가 먼저 정답인지 아닌지 확인에 들어가 보지도 않고 들어간 겁니다. 그런데 그 사는 게 정답으로 여겼던 그것에 주께서 성령으로 십자가로 난입해버리면 내가 기본으로 여겼던 이것에 재수정이 이루어지지요. ‘아, 이게 내가 살아서 살아온 것이 아니구나! 지금까지. 살려주니까 꾸역 꾸역 살려주니까 살아온 것이구나!’ 주님은 일찍 우리를 죽여 놓고 범인을 두 다리 잡고 끌 듯이 우리를 강제로 지금 이 시간까지 계속 지근 지근 끌고 온 거예요.

그리고 우리는 착각하기를 어느 순간에 주님께서 난입했다는데 그것은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도 착각이었습니다. 매순간 안 끼어든 적이 없었습니다. 발걸음을 세시니까. 이방인들은 말해요.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지금껏 내가 알아서 내가 쌓았기 때문에 내일 되면 또 걱정합니다.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걱정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뭡니까? 참새를 봐라. 들풀을 봐라. 그것은 현재 들풀, 현재 참새가 노래하는 게 아니고 지금껏 그런 노력하기 전까지부터 이미 참새 의견을 묻지 않고 참새와 의논하지 않고 꾸준히 참새 되게 했고, 내일 아궁이에 들어가는 들풀을 지금껏 살려온 거예요. 소급해서 보자는 거예요. 소급해서 보자는 겁니다. 어디까지. 창세전까지 소급해서 보자는 거예요.

그러니 주님의 난입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합니까. 여러분 집에 나이가 60이 넘고요, 60가까이 된 사람, 이런 사람들, 우리교회에 보면 갓난애들이 있어요. 젊은 엄마들이 애 업고 교회에 오잖아요. 그러면 나이 좀 된 사람들이 그렇게 애기를 좋아해요. 애 엄마한테 뺏어가지고. 예배 종일 안고 다녀요. 이뻐서. 참 이쁘지요. 왜 하느냐 하면 자기의 모습과 비슷하면 안지를 않습니다. 자기 모습과 비슷한 사람이 자꾸 안고자 하면 발로 차버리지요. 저리 가! 각방 써버려요.

뭐냐 하면 막 쩌낸 뽀송뽀송한 생명을 머금은 생명을 가득 머금은 애는 무조건 이뻐요. 자, 여기서 한 번 보세요. 우리는 골라가며 이쁘잖아요. 우리 대에 골라가며 이쁘다고요. 그러나 애는 뭡니까. 혓바닥부터 음식 먹는 것부터 똥 싸는 것까지 똥도 이뻐요. 왜 그럴까요. 왜 예쁠까요. 생명이라는 것은 부분을 나누지를 않습니다. 통째로 이뻐요. 그 생명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 지금 하나님이 우리를 갓난애로 여기시고 새로운 피조물이니까. 그렇게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이쁘게 봅니다. 교회 빠진 것도 이쁘고, 헌금 떼어먹는 것도 이쁘고, 과속해서 창문열고 욕을 해도 이쁘고, 하는 짓거리 모든 것이 이뻐요. 아이구, 저 저 죄 짓는 것 좀 봐라. 아이구, 저 이뻐라. 저 고집부리는 것 좀 봐라. 저 얼마나 이뻐. 일찍 죽는 것도 이쁘고, 늦게 오래 사는 것도 이쁘고, 그 안목이 우리 눈에 안 박혀 있는 게 문제에요. 그 안목이.

내가 나를 보니까 최선을 다하려 해요. 그럼 자꾸 우리는 속아 넘어가는 거예요. 돈이나 빼먹고 하는 그 노림수 도둑놈한테 자꾸 교회에 가서 속아 넘어가는 거예요. 돈을 안 바쳐서 이런 벌을 받는다. 자꾸 속아 넘어가는데. 주님의 안목으로 봐버리면 그냥 가만히 있어. 가만히 있어도 이뻐. 폼을 이렇게 할까요? 옷을 이렇게 할까요? 아~ 폼 재지 마! 어색해. 어색해. 그냥 편한 대로 사진 찍어. 이뻐. 이뻐. 다 찍는 거예요.

들판에 목자가 있었잖아요. 목자를 개인적으로 불러가지고 과거에 니 뭐했어? 니가 7년전에 일을 저질렀잖아. 남거 훔쳤잖아. 그걸 따졌습니까? 천사가 뭘 따졌어요? 천사가 목자한테 이야기한 게 뭡니까? 불러가지고 꿇어앉혀가지고 니가 7년전에 이런 일 했잖아. 지난 여름날에 한 일을 내가 알아. 이렇게 따졌습니까? 천사가.

뭐라고 했습니까? 하늘에서 음성이 나왔잖아요. 찬송가. 빨리 누구한테 가보라. 방금 베들레헴에 구유에 누가 태어났어요? 아기 예수가 태어났지요. 그럼 천사가 그 목자를 하늘에서는 기쁨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댐탱이로 입은 사람에게 뭐라? 평화가 된 이유는 너보고 하는 게 아니고 니가 만나야 될 아기 예수 보고 그 아기 예수와 결부해서 너를 본다는 거예요.

그럼 우리는 뭡니까? 내 행동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주님의 행위로 우리가 구원에 그냥 걸려든 거예요. 주님의 구원에 우리가 그냥 그 소용돌이에 말려든 거예요. 기뻐하심으로서. 엘리야, 모세, 선지자들, 욥도 마찬가지고, 아브라함도 마찬가지고 그들은 누구 오기를 기다렸습니까? 메시아 오기를 기다린 거예요. 왜? 자기는 안 되니까. 

12절 봅시다.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아, 맹세하지 마라. 스케줄 좀 제발 쫓아가지 마라. 스케줄. 이거 목표 정하고 40일 금식하는 이러지 마세요. 이거 달성하기 위해서 이제부터 헌금 안 빠진다. 그러지 마세요. 이제는 주일날 꼭 교회 간다. 그러지 마세요. 맹세하지 마세요. 우리는 맹세할 수 있는 역량이 되지를 못합니다. 하루에도 골백번 바뀌는데 무슨 맹세를 해. 그냥 사세요. 그냥.

그냥 사는 게 죄고, 죄 안 지으려고 하는 것은 더 심한 죄고요, 어차피 우리는 구원은 가만히 있어도 안 되고 설쳐도 구원 안돼요. 주께서 쳐들어왔기 때문에 우리는 이 사실을 압니다. 이미 우리가 들판의 목자가 됐기 때문에 이 사실을 알아요. 주님은 나를 보는 게 아니고 구유에 태어난 예수님 보면서 같이 엮여서 구원한다는 것을 아니까 우리는 내 자리를 아낌없이 중심자리를 아낌없이 비워주고 우리는 무슨 재미로 사느냐, 주님이 다 이루신 그것 보는 재미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것 보는 재미로.

설거지 하면서 이것도 주께서 시켰는데 “아이고, 시킨 것은 다음에 하겠습니다. 주님.” 이러고. 그냥 항상 나 말고 누구를 의식해야 되는 거예요. 나 말고 주님을 의식해야 돼요. 그러면 뭐냐 하면 이것은 혼자 사는 게 아니고 같이 사는 거예요. 이걸 동행이라 합니다. 그걸 연합이라 하지요. 그걸 로마서6장에서는 세례라고 해요. 세례. 연합되어있다. 혼자 사는 게 아니고 같이 산다.

우리는 뭐냐 같이 사는 분을 동거인을 자랑해야 되고, 증거 해야 돼요. “나 이런 분 알고 있습니다.” “어떤 분?” “내 대신 십자가 피 흘리신 그 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안 믿는 사람은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 분을 니가 어떻게 믿었는데?” 이렇게 하거든요. 이건 믿음 문제가 아니에요. 그 분이 나를 살린다는데 이건 믿음 문제가 아니에요. “니가 그런 믿음이 있는데, 나는 그런 믿음이 없는데, 당신은 어떻게 그런 믿음을 가졌느냐?” 니가 무슨 행동을 어떤 조작을 해서 그런 믿음을 가졌느냐, 어떻게 행동을 열심히 했더니만 믿음이 오느냐, 자꾸 그걸 묻는데 그건 우리가 답변해 줄 수 없어요.

왜, 내가 한 게 없기 때문에. 내가 믿고 사랑할 때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믿는 척 했을 뿐이고, 사랑한 척 뿐이지, 내 재수 좋아라 했을 뿐이지, 내 좋아라 했을 뿐이지, 내 이익을 위해서 했을 뿐이지, 나를 쓰레기 취급하고 나를 죽어 마땅합니다. 이런 식으로 행동한 적이 없거든요.

남은 죽어도 나는 안 죽어야 되고, 남의 가정 망해도 나는 안 망한다. 그런 고집을 부리면서 살아왔다 이 말이지요. 혹시 재수 옴 붙을까봐 착한 일 하는 척하고, 그 이 자체가 몽땅 우리는 엉터리잖아요. 그 엉터리가 뭐냐 하면 아시고 성경에서 맹세하지 마. 욥의 인내가 찾아올 거야. 이제부터 너는 욥의 인내 속에 살아가고 있어. 니가 욥이야. 이제는 니 문제점은 너는 몰라. 내가 와서 하나, 둘 뜯어낼 때, 아, 내가 평소에 얼마나 위선자인 것을 여러분이 아시게 될 겁니다.

오늘 제목은 ‘욥의 인내’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욥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기를 원합니다. 우리 이야기임을 원합니다. 욥이 나쁜 짓했다고 생각하지는 못했지만, 주님보시기에는 나빴습니다. 욥이 자기의 흠집을 찾아낼 수 없었지만, 주님보시기에 그 자체가 흠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십자가 피 흘리면서 주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가 그것이 우리의 이젠 관점이 되게 하시고 세상 보게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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