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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0 00:28:02 조회 : 352         
말씀의 매트릭스 190919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음성1             음성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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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IP:119.♡.87.190) 19-09-20 01:22 
동영상 두번째 강의 초반 약 15분은  녹화 실패해서 상실되었습니다.
 공은주(IP:175.♡.135.128) 19-09-28 17:29 
안양20190919a야5장13절(말씀의 매트릭스) - 이 근호 목사

야고보서5장13절이요,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 이리 되어있지요. 여기 즐거워 한다의 반대말은 뭐라고 되어있지요? 고난이라 되어있어요. 그러면 야고보서 입장에서의 어떤 경우를 고난이라고 하느냐 하면 신체적이 불편함을 느낄 때 고난이라고 하는 거예요. 야고보서에서. 신체적으로. 상당히 현실적으로 이야기하지요. 추상적으로 정신이 어떠냐 그런 거 생각 안하고 현실적으로 몸이 아프면 고난이고, 편하면 즐거움이고.

상당히 실질적으로 이렇게 이야기할 때, 그것은 무엇을 전제로 하느냐 하면 야고보서에서는 우리의 몸은 우리 것이 아니고, 그냥 알다시피 우리 몸은 우리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알고 있잖아요. 그거 말고. 우리 몸은 우리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라 할 때에 그걸 달리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야고보서에서는 뭐냐 하면, 내 몸은 누구의 것이다? ‘내 것 아니고 주님의 것이다.’ 라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요, 소유가 아니라,  ‘주님의 것이다가 아니고 주님이 사용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는 겁니다. 차이점 아시겠어요? 차이점을. 내 것이 아닌 내 소유가 아닌 사용하는 것.

평소에 나는 내 것이다. 라는 말을 하지만, 더 정확하게 말해서 ‘내 몸이 나를 위해서 꾸준히 사용해 왔다.’ 라는 것을 평소에 인간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이 말이지요. 그럼 사용하게 되면 내 몸이 내 것으로 사용한다면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고난 나오고, 기쁨이 나오는 겁니다. 기뻐할 때는 뭐냐 하면 바로 찬송하겠지요. 기분 좋으니까 노래한다 말이에요. 슬퍼할 때는 뭐하느냐 하면 기도하겠지요.

그런데 여기 기도하고 기뻐한다는 것은 전부 다 결국은 누구 좋아라하는 거예요? 내가 사용한다는 조건하에 나는 슬프면 안 되고 병나면 안 되고 아프면 안 되고 나는 안 아파야 된다. 늘 기뻐해야 된다. 이러한 논리가 성립되겠지요. 상당히 욕심쟁이 같아. 야고보서에서 그렇게 이야기한 욕심.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다는데 꾸준히 욕심을 이런 식으로 하면 욕심을 부리는 거거든요.

그러면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그러면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았으니까 그러면 욕심을 안내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 거죠. 내가 욕심을 내지 않으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데 욕심 안내는 나, 그것도 누굴 위함이에요? 나를 위함이지요. 그러니까 이 야고보를 아무리 봐도 인간은 야고보서1장 말씀처럼 하늘에서 은사를 주지 아니하면 자꾸 자기 위함에서 벗어나지를 않아요.

그러면 여기서 건너가면 되지 않겠느냐, 어디로? 나를 사용하는 게 주께서 사용하는 것으로 건너가면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하지요. 당연한 거잖아요. 그죠. 주께서 사용하시는 걸로 건너간다. 건너가는데 건너가는 방법이 없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주님을 위하여, 주님을 위해서 나를 사용하자, 아무리, 아무리 해도 그게 또 하나의 나만을 위한 일이 되는 겁니다.

특히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하겠다, 하는데 막상 마음은 그렇게 가져도 육신에 병이 오고 아파지게 되면 싹 무슨 마음이 가시느냐 하면 주님 챙기기보다 우선 내 몸 챙기는 게 급하다, 라는 마음으로 다시 원상복귀가 탁 되어버려요. 금방 되어버려요. 교회를 40년 다니고 50년 다니고 아무리 해도 이상하게 내 쪽에서 주님으로 건너간 적이 없는 괜히 내가 열심히 설쳤는데 전혀 내 몸은 나에게서 떠날 생각이 없네. 열심히 설쳤는데.

자식이 애먹이니까 “야, 이제 넌 내 자식 아니다. 결혼하면 남남이다.” 백날해도 자식들은 그 부모가 하는 이야기가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 걸 자식들이 다 압니다. “두 번 다시 내 니 안 본다. 이렇게 손자 키우는 게 힘들 것 같으면 10년 키워줬으면 그만 키우게 해라.” 라고 한들 “또 봐줄게.” 쫓아가서 기회가 있으면 봐줄게. 내 자식은 내리 사랑인데 그래 내가 아니면 누가 해줘? 이런 식으로. 그렇게 되지요.

이상하게 자아라는 굴레에서 뭔가 지남철이 있는지. 안 그러면 쥐 잡는 찐드기가 발렸는지. 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떠날 수가 없어요. 야고보서에서 그런 것을 구박하기 위해서 엄청나게 말씀으로 우리에게 압박을 해왔잖아요. 율법을 다 지키지 않으면 하나를 어기면 그건 죄인이다. 이렇게 야고보서2장10절에서 그렇게 이야기했지요. 누구든지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면 다시 말해서 하나를 어기면 그건 온전히 지킨 게 못된다. 따라서 못 지키면 저주 받아 마땅하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했고요. 그리고 그것도 안 먹힌다면 야고보서4장에서 사람이 뭘 하겠다는 자체가 이게 죄다. 차라리 주께서 허락하시면 이것저것도 한다. 이 말입니다.

제가 분명히 야고보서4장 안개 이야기할 때 주께서 사용한다는 이야기를 제가 분명히 한 거 같아요. 그런데 오늘에서 이야기한 차이점이 뭐냐 하면 내 것이 아니고 주께서 사용한다니까요. 주의 것이다, 가 아니에요. 주께서 사용하시는 거예요. 주의 것이라고 되면 어떤 오류에 빠지느냐 하면 “내 몸은 내 몸이 아니고 주의 것이니까 내가 착하고 바르게 살아야지.” 이리 되어버린다니까요.

취지는 받아놓고 취지에 대한 실제적으로 취지를 성취하는 것은 누구한테 달렸다? 역시 내 솜씨에 달렸다는 식으로 정리가 되어버린다는 말이죠. 기존 교회처럼 그리 되어버려요. 알아. 내 몸 주께서 창조했고 주의 것이라는 거 알아. 그러면 그냥 손 놓고 놀 수는 없잖아. 뭔가 꼼지락거리며 해야지. 영광을 위해서. 성경에 명령이 많으니까. 그래. 내 몸은 내 꺼 아니야. 주의 명령이 있으니까 주의 명대로 했어. 뭐가 나빠? 이리 된다고요. 뭐가 나쁜 거예요? 주께서 쓰셔야 될 것을 자기의 어떤 명령을 받았다고 본인이 여전히 본인을 쓰겠다는 그러한 의지를 포기하지 못한 거죠. 벗어나지를 못해요.

인간이 자기 몸을 자기가 사용해 버리면 어디에 저촉을 받느냐 하면 몸이 불편할 때 짜증내고 몸이 건강하면 아주 신이 나요. 컨디션 괜찮으면 주의 영광을 위해서 찬송가 열 번이고 메들리로 막 부르다가 몸 아프면 ‘아이고, 뭐 찬송가고 다 귀찮고 나훈아의 홍시나 부를까.’ 홍시가 열리면..., 막 이 노래가 아주 저도 편안히 나오잖아요. 편하게 막 노래가 나오는 거예요.

평생 동안 교회 봉사한 권사님도 몸이 아프니까 몸이 불편하니까 찬송가는 그만! 하지 마! 교회에서 위로한답시고 신방 와서 찬송하지 마. 나는 나 훈아 듣는다. 실제상황입니다. 제가 겪었거든요. 제가 겪었다니까요. 권사님이 찬송가 듣기 싫어해요. 그래서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까 그 돌보는 따님이 하는 말이 권사님 어머님이 유행가를 좋아한데요. 처음부터 유행가가 좋아요. 좋은데, 이렇게 가리기 위해서 찬송가로 한 50년은 가렸어요. 그런데 치매 걸리니까 “저리가!” 발로 차버리고 역시 유행가가 딱 맞아. 몸에 맞춤 가락이에요. 몸에 맞춤 가락. 뭐예요? 그동안 믿는 척 그럴싸한 게 다 날아가 버렸죠. 없지요.

그래서 제일 먼저 이야기한 것은 뭡니까? 주의 것이다가 아니고 주께서 사용하시는 거예요. 주께서 사용하시는 겁니다. 자, 그렇게 되면 기쁨과 고난을 내가 어떻게 해볼까를 두 가지를 어디로 가져오느냐 하면 주께서 사용한 걸로 가져오면 돼요. 그러면 여기서 몸이 아플 때에 고난이라 하지요. 몸이 아플 때 고난인 거예요. 이 고난은 뭐냐, 주께서 사용하시면서 몸이 아픈 거예요. 이제 야고보서5장 그 뒤에 말씀. 초장에 완벽하게 해석됐지요.

누구든지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해가지고 기도하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라. 그것도 그냥 이름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으로 기름 바르고, 되어있지요. 자, 이런 이야기할 때 여러분들이 지금 믿음도 좋고 머리도 좋으니까 내가 한 취지를 이해하실 거예요. 어떤 취지냐 하면 내 것 아니고 주의 것. 이거 1번 내가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사용한다. 이걸 2번으로 한다면 1번 의식을 가지고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하면 교회에서 병들어서 누가 아픈 사람이 있다 하면 주일날 예배 마치고 장로님 죽 해가지고 나가가지고 야고보서 5장 13절, 14절 말씀처럼 기름은 없으니까 참기름 할까요? 아니면 무슨 기름할까요?

기름은 없으니까 기름은 생략하고, 주님이름으로 목사님 필두로 해가지고 여전도사 한복 입은 여전도사 해가지고 장로들 가가지고 병든 자를 기도하면서 나중에 다음 주 광고시간에 야고보서5장13절, 14절대로 했으니까 우리 교회는 참된 교회입니다. 말씀대로 하는 교회입니다. 라고 떠버리게 되겠지요.

그럴 때 교인들은 야고보서5장13절 보니까, 어? 맞네. 너희 중에 병자가 있을 때에 교회 장로들을, 야~ 이 장로님들이 기도하는 꼴이나 보니까 영 장로 같지도 않고 평소에 말하는 태도나 품새 보니까 영 장로인지 몰랐는데, 아 그래도 교회가 장로가 꼭 필요하네.  교회가 장로가 필요하다는 말은 그 장로 건드리면 누구한테 벌 받을 수 있다? 주님한테 벌 받을 수 있어. 장로 하는 꼬락서니 보니 밉지만 그 교회가 장로가 있어가지고 이렇게 하게 하니까 그럼 나는 이 교회 속에 있으니까 나는 죽으면 어디 간다? 천당 가는구나! 아, 교회 등록해서 천당 가는 구나! 왠지 안심이 되지요. 논리가 죽죽 걸어가는 거예요.

장로가 좋은 게 아니에요. 우리교회 장로는 오후 예배마치고 심방 가서 야고보서5장13절, 14절하니까 우리교회는 진짜 교회고, 나는 진짜 교회에 등록했으니까 진짜 구원받는 사람이고. 그러면 안 믿는 남편이나 구슬려가지고 안 믿는 친구 같으면 돈을 줘서라도 또 구슬려가지고 앉히면 간단하지요. 벽돌하나가지고 저쪽은 지옥이고, 벽돌 속에 들어오면 천당 가는 거고. 안 들어오려 하면 마구 잡아당겨가지고 경계선, 휴전선도 아니고 DMZ도 아니고 들어오면 앉았으니까 “주여, 감사합니다. 구원받았습니다.” 이리 되고.

그럼 목사가 그걸 낌새를 보고 “여기 처음 온 사람 손들어 보세요. 앞으로 나오세요.” 그러면 한 번 머뭇거리면서 나오면서 손들면 인제 등록하면 구원받는 거예요. 거기다가 확실하게 꽂아주는 것은 성만찬. 이 떡을 먹고 이 살을 먹은 자는 이미 하늘나라 생명책에 등록됐습니다. 마치 절에 가서 기왓장 하나 얹으면 그 사람 이미 극락에 이름이 있는 것처럼. 엄마가 대신해서 절에 가고 자식이 열 명 같으면 절에 대표로 가고 이름은 전부 다 자식 이름을 다 올려버리면 나중에 다 극락 가는 그러한 아주 손쉬운 정책적 방식이 경제적 방식이 있잖아요.

지금 제 이야기가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게 아니에요. 이건 지금 교회가 다해요. 이런 식으로. 목자가 앞장서서 장로 데리고 오후예배 마치고 지도 피곤한 줄 알지만 가가지고 한 번 갔다 와야 하얀 봉투 나올 수도 있고. 그래서 한 번 갔다 오는 거예요. 왜냐하면 성경대로 하는 교회가 지금 여러분들이 다니는 교회니까 안심 푹 놓고 다니시면 여러분 천국 보장됩니다. 천국 가는 유일한 여행사. 그것도 저가 여행사. 대한항공 이런 거 말고. 개척교회 저가한 거. 그게 왜 잘못됐는가, 1번 노선입니다. 1번 노선. 죄송합니다. 10분 일찍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늦게 오시면 또 해드리는 리필 하듯이. 많이 들었다고 아는 거 아니에요. 다 잊어버렸어요. 이 분들도.

다시 합니다. 야고보서5장13,14절에 보면 여기에 고난당한 자는 기도할 것이고, 즐거워하는 자는 찬송하라 했지요. 이 말 딱 듣고 그 다음에 14절에 보면 고난이야기 나오잖아요. 여기서 나온 고난이라는 것은 육체적 고난인데, 그게 여기서 대표적으로 뭡니까? 병든 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병들은 거. 병들은 거 이야기할 때에 병 들 때, 그냥 교회가 가만히 있으면 되지 않고 교회 장로들을 초청해가지고, 그럼 장로들인 멀쩡하게 구경하면 안 되지요. 그저 뭐 박카스 하나 사들고 베지밀만 들고 가면 되는 게 아니고 뭘 하랍니까?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준비했다가 기름을 준비해서 그 아픈데 바르고 기도하라 돼있거든요.

그럼 15절 봅시다. 믿음의 기도는 뭡니까? 병든 자를 구원하지요. 제가 지금 거기까지 설명한 거예요. 그러니까 하라, 하라, 되어있으니까 우리가 만약에 진짜 교회라면 말씀대로 할 필요가 있고 그 말씀은 야고보서5장13,14,15에 아주 구체적으로 나와 있으니까 아마 그런 교회 같으면 교회 누구 아프기를 기다릴 거예요. 목사님 교회는 누구 아픈 사람 없어요? 이 폼을 한 번 내야 되는데. 아프기를 기다려요. 아파서 장로는 없지만 장로인 사람 데려 가가지고 장로 대솔해가지고 집사님네 가가지고 다 아는 분들이니까 미리 연습 실습하는 걸로 계약직으로 해가지고 데려 가가지고 기름은 없지만. 기름 없잖아요. 기름 없고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게 되면 곧 기도하고 난 뒤에 이젠 기다려야 될 필요가 있지요.

기다리면 벌써 심방간지 한 나흘 되어가지고 목사님이 두근 두근한 마음으로 전화를 걸어요. “집사님, 어떤 차도가 있습니까?” “차도 있어요. 장로님 모시고 주의 이름으로 기도한 덕분에 나은 거 같아요.” 라고 했을 때, 나머지 그 교회 교인들은 바로 야고보서5장 15절이 이게 현재화 되었다는 감격을 누리고 있습니다.

특히 아픈 사람이 나았을 때 그들의 기쁨은 배가가 아니고 3배 4배 돼요. 왜냐하면 돈 없이 나았으니까. 장로 초청보다 장로 초청해서 커피만 끓여주면 그만이지만 병원에 가면 아무래도 돈 들잖아요. 아프기만 하면 이제 장로 초청하는 거예요. 장로들은 교회 차 몰고 올 거니까 지 기름 안내도 되니까. 나중에 감사의 예의로 헌금 한 몇 만원 넣으면 되니까.

결국은 사람들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돈 때문입니다. 돈. 돈 때문이지요. 인간은 돈이 기본이에요. 그걸 야고보서에서는 뭐냐 하면 세상과 짝하는 것은 하나님과 뭐가 돼요? 원수가 되지요. 그래서 이 야고보서5장을 보면서 먼저 전제가 뭐냐, “하나님의 원수라는 거 너희가 알지? 그지? 그리고 욕심이 잉태하여 죄가 되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 낳는 거 너희들이 다 알지?” 라는 전제가 야고보서5장 오기 전에 이미 1장, 2장, 3장, 4장 다 한 거예요.

“니 안개인 걸 알지? 그리고 2장에서 모든 율법을 50%지켰습니다. 이런 소리 하지 마라. 하나를 어기면 다 어긴 게 되고 어기게 되면 거기에 대한 저주와 형벌은 니 각오했지?” 그걸 전제로 하고 이 말씀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 이 말씀을 하면서 그냥 교회에서 흉내 낼 수 있는 그 차원이 아니에요.

첫 번째는 뭐냐 하면 교회냐, 그 교회가 오늘날 교회가 교회냐, 하는 문제. 두 번째 주의 이름을 외칠 수 있는 자격이 되느냐 하는 그 문제. 그 다음에 세 번째 기름이 없다는 사실이에요. 참기름 바를 것도 아니고 기름이 없잖아요. 네 번째 만약에 병이 안 나았을 경우에의 문제에요. 만약에 우르르 가가지고 감기 같은 거야 주의 이름으로 하면 나을 수가 있어요. 그거 뭐 판콜A 하나 먹으면 자고 나면 다 낫는 거. 그거 말고 췌장암 4기 이런 거 있잖아요. 간암, 위암 말기 그 때 우르르 가가지고 그 때는 또 쪽수를 늘려야 돼.

장로가 한 둘이 가는 게 아니고 장로 총동원해가지고 그것도 기도도 10분씩 돌아가며 기도했다 칩시다. 심방 갔다 온지 이틀 만에 죽어버리면 어떻게 돼요? 부도나잖아요. 부도. 부도나면 결국 그건 뭐냐 하면 그 망하는 장로가 있던 그 교회는 교회가 아닐 수가 있다. 가 되겠지요. 그 수습을 어떻게 하려고요. 병 안 나으면 수습 어떻게 하려고요? 여기에 15절에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나니 그 다음에 16절에 보면,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 했지요.

그러면 교인들마다 성만찬 참석한 사람은 자신들이 예수 믿고 의인이라고 다 자부한 사람이죠. 그 자부하는 사람 열 명이 가가지고 그것도 빡시게 주의 이름으로 기도했는데 췌장암4기가 안 낫드라. 낫기는 커녕 오히려 무엇에 정신이 산란했는지 갑자기 병세가 더 악화가 되어가지고 일주일 살 걸 심방 갔다 온지 2시간 만에 죽어버렸어요. 죽었을 경우에 앞으로 그 대책 어떻게 할 거예요? 그거 어떻게 해명할 거예요? 그 목사 어떻게 할 겁니까? “그건 간 장로가 알지 나는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이럴라고요? 그럼 오촌 조카가 알고 내 아내는 알지 나는 모른다. 그런 식으로 빼려고요? 그럼 본인이 참석했다면. 그 병든 말기에 참석했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여기에 대한 명확한 해석이 없어요. 하기는 해요. 한 100번 하면 혹시나 한 번은 될까 싶어서. 그러면 백번마다 한 번 됐으니까 실패는 몇 번 했습니까? 99번 실패했잖아요. 99번 실패했다가 한 번 한 것은 된 거예요? 그거 소 뒷다리로 쥐 잡는 식으로 그게 됐다고 할 수 있습니까? 99번 실패했는데. 저울한 번 달아볼까요. 99번 실패하고 1번하고. 수학문제 100문제 가운데 1문제 맞춘 게 그게 수학 잘하는 겁니까? 아니잖아요. 100번을 맞춰야 되지 않습니까. 주의 말씀인데. 그럼 한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그 교회나 그 목사나 뭘 부각시킵니까? 한 번 된 것 가지고 완전히 치유 전문교회가 되어버려요. 병 고침 전문교회. 치유 전문교회가 된다고요. 그런 것을 여러분들이 교회에서 보면서 왜 그동안 의문점도 없고 입을 왜 다물고 있었어요? 그 이유가 뭐냐, 아예 야고보서5장을 모르기 때문에 그래요. 몰랐기 때문에 그래요. 그만큼 야고보서5장을 보더라도 “뭐, 딴 게 더 중요한데, 병 고치는 게 중요한데.” 이런 식으로 얼렁뚱땅 구차한 변명하면서 그냥 넘어가서 그래요.

그러면 정확한 이 본문의 내용은 뭡니까? 아까 우리가 해야 될 게 교회냐 하는 문제, 주의 이름, 기름, 그 다음에 뭡니까?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한다는 그 뜻, 그 다음에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 하는 그런 내용.

야고보가 누구의 제자입니까? 예수님의 제자지요. 예수님의 동생이니까. 예수님의 사도라 보면 돼요. 예수님의 제자가 열두 명이지요. 그러면 예수님이 일으킨 기적과 제자들이 일으킨 기적과 차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왜냐하면 그들의 능력이 아니니까. 심지어 가룟 유다도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냈다 말이죠. 마태목음10장에 보면 나와요. 열 두 제자를 보내서 하니까 그 당시에 예수님이 없을 때도 있었거든요. 그래서 제자들이 와서 좋다고 하는 거예요. 귀신이 하늘에서 막 떨어지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귀신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좋아하지 말고 니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한 것을 좋아하라. 이렇게 한 거예요.

자, 그러면 귀신이 물러가고 병이 낫는 것을 왜 좋아했겠는가를 생각해 보세요. 그게 아까 1번은 뭐냐 하면, <내 몸은 주의 것이다.> 이게 1번이었지요. 2번은 뭐였습니까? <내 몸은 주님이 쓰신다.>죠. 주의 것이 되어버리면 주의 것이니까 앞으로 제가 잘할게요. 가 남아있는 반면에 주께서 쓰신다면 이건 내 생각을 여기다가 투입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투입 못하지요. 우리 인간의 생각이 투입할 때는 뭐냐 하면 이것은 옳다, 그르다를 이건 옳은 것이다, 이건 나쁜 것이다. 라는 판단을 누가 하느냐, 내 개인이 그걸 정리해 놓고 내 몸을 거기에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데 투입을 시키겠지요. 옳다고 투입시키겠지요.

그러면 이것은 주님이 쓰시는 겁니까? 본인이 자기 몸을 관리하는 거예요? 본인이 자기 몸을 관리하는 것이죠. 문제는 이런 식으로 열 두 제자가 병을 고쳤느냐 하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하면 병이 절대로 낫지 않습니다. 열 두 제자들은요, 예수님의 능력으로 해야 되지 본인의 능력으로 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본인의 능력으로서는 안 나갑니다.

그런 예를 마태복음17장에 나오지요. 변화산에서 내려오고 난 뒤에, 그 대목을 잠시 볼게요. 변화산에서 내려오고 난 뒤에 어떤 사람이 예수께 자기 아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 자주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집니다. 마태복음17장15절, 16절 죽 나오거든요. 계속해서 나와요. 이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예수님께 가라사대 우리는 왜 못합니까? 이러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능력을 줄 경우에만 능력을 너한테 줄 경우에만 제자들이 병을 고치지, 단독으로 아무리 예수님 제자라 하더라도 병을 고칩니까? 못 고칩니까? 못 고치지요.

그러니까 생각을 우리가 이렇게 먹으면 돼요. 인간은 병을 고친다, 못 고친다? 못 고친다는 거예요. 특히 야고보서5장 봅시다. 15절에 보면,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있어요? 구원하지요. 자, 우리가 아는 상식에 의하면 구원자는 인간입니까? 주님뿐입니까? 주님만 구원자가 되는 겁니다. 주님만 구원자인데, 주께서 자기 백성을 사용하게 되면 구원은 주께서 하시고 남들 눈에 보기에는 그 사람이 일했고. 그렇게 되지요. 그럴 때 그 과정 속에서 정말 그 사람이 믿는 자고 의인 같으면 필히 거기에 무엇이 나와야 되느냐 하면 자기 부인이 나와야 되지요. “제가 한 게 아닙니다.” 그렇게 나와야지요.

요 병든 것을 확대시켜 봅시다. 확대를 시켜보게 되면 여러분, 뾰루지 하는 거 알지요. 피부에 나는 거. 만약에 손등에 뾰루지 나면 그 사람 죽여 버려야 됩니까? 아니 발밑에 물집생기면 발을 잘라야 돼요? 발목 전체를? 그럴 필요 없지요. 그것만 짜면 되지요. 병들었다는 말은 무엇을 인간은 구원되어야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시그널 같은 겁니다. 시그널. 신호 같은 거예요. 병들었다는 말은 구원됐다는 말이에요.

한 쪽이 병들었다는 말은 그 병 든 채로 가면 그 육체와 신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안 받는다는 겁니다. 시그널, 신호라는 말을 알겠습니까. 손등에 뭔가 뾰루지 생기면 손등 자체가 뭔가 온전하지 않다는 하나의 신호, 징후라 하지요. 징후. 증상, 징후지요. 머리에 열이 난다. 모가지 잘라버릴까요? 아니지요. 그냥 뭔가 컨디션이 안 좋다는 징후잖아요. 징후.

교회 내에 어떤 사람이 병든 사람이 있다는 말은 그 사람 지옥 간다는 말이 아니고 항상 인간은 네가 안 아파도 내가 아플 수 있고, 네가 아프다는 것은 곧 나도 언젠가는 아플 수가 있다는 거예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뾰루지처럼 어떤 아픈 사람을 주께서 쓰시니까 아픈 경우를 발생시켜가지고 나머지 교회로 하여금 자기를 돌아보게 하는 거예요. 과연 나는 나를 부인하고 있는가.

주께서 쓰시는 사람으로 유지되고 있느냐, 아니면 내 몸은 주의 것이다. 로 머물러 있는지. 1번과 2번의 차이를 아신다면 여러분은 지금 제 말이 이해됩니다. 나는 주의 몸이니까 제가 알아서 바르게 쓰겠습니다. 가 옳은지, 아니면 그것 자체가 시건방진 일인지를 여러분들은 구분할 줄 알아야 돼요.

사람이 자기 몸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돌린다고 한다면 항상 되지도 않게 고상하게 살 생각을 해요. 고상하게. “저는 방귀도 뀌지 않아요. 호호호” 웃을 때도 호호호. 선보러 가가지고 젓가락가지고 깨짹 깨짹. 알탕도 알 하나 깨짹 먹고. 육개장도 고기 하나, “고기는 너무 아파~ 나는 나물만 먹을 거야.” 이리 해가지고는 나중에 집에 가가지고는 “아이고, 배고파라.” 양푼에다가 고추장 이만큼 해가지고 입을 벌개해가지고. 아이고 내숭 떤다고. 아이고! 두 번 다시 선 볼일이 아니야. 왜 선 볼 때 그렇게 조심스럽습니까. 평소에 나는 얼마나 자제할 수 있고 절제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을 티내기 위해서 하는 거죠.

교회는 보편적입니다. 보편적인데, 보편적이기 때문에 전체 다를 볼 수가 없어요. 다 볼 수가 있다, 없다? 다 볼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 볼 수가 없으니까, 만약에 산이 하나 있는데요. 산에 가가지고 어떤 도시를 볼 때, 내가 사는 도시가 어디까지인지가 넓을 때는 다 안보여요. 다 보이지를 않는다고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내가 있는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교회 첨탑에 올라가서 교인들 다 봐도 다 보이지를 않아요.

그리고 교회는 보편적이니까 내 교회만 있는 게 아니고 다른 교회도 있잖아요. 그 전부를 해가지고 그 전부를 다 종합해서 교회는 이렇다고 낼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교회라는 단어가 있더라도 교회가 뭔지를 전체를 다 알 수가 없어요. 인간의 지적인 한계 때문에. 그 때 여기서 뭐냐 하면 시그널, 신호가 일어나는 겁니다. 신호를 뭐라고 했습니까? 이게 육체의 병든 자. 이게 병든 자가 오는 거예요.

병 든 자가 온다는 말은 그 사람만 계속 병들까요? 아니면 나도 마찬가지겠습니까? 나도 마찬가지지요. 이걸 뭐라고 할까요? 이걸 제목으로 정할까요. 매트릭스. 보일러 깔린 거예요. 어떤 밑에 보이지 않는 보일러가 깔린 거예요. 그 보일러가 뭐냐 하면 말씀의 매트릭스입니다. 말씀의 매트릭스니까 교회라는 단어도 어디에 포함돼요? 말씀에 포함되는 거예요. 교회라는 말씀에.

그러면 야고보서에서 말씀의 주인공은 누굽니까? 우리 주님이지요. 주님께서 교회를 교회답기 위해서 시그널을 보내는데 그 중에 하나가 어떤 사람이 병 들었다. 그러면 매트릭스를 간단히 그리면 이렇습니다. 씨실과 날줄, 가로와 세로 줄이 쫙~ 이게 매트릭스 세계 아닙니까. 혹시 이 중에 매트릭스 영화 본 적 있어요? 매트릭스 하는 것은 침대 뜯어보면 나와요. 촘촘히 세로, 가로 쭉 있지요.

그러면 어떤 사람이 A라는 지점에 어떤 사람이 병들었다는 말은 나는 B지점에 있다면 A라는 지점이 시그널이거든요. 그러면 B지점에 있는 사람이 병 든 그것을 생각한다면 남이 아니고 같은 사람이라면 이건 무엇과 연결이 돼요? 사다리 타기 아닙니까. 차타고 내비게이션 해가지고 여기 찾아오듯이. 전부 다 연결되어있는 거예요. 이 통째가 뭐냐, 교회라는 이름의 말씀의 매트릭스가 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병 들었을 때, 14절 한 번 읽어보세요.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병든 자가 장로를 통해서 그 다음에 뭡니까?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매트닉스 이름으로 그 다음에 뭡니까? “기름을 바르며” 기름을 바르고 그 다음에 뭡니까?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기도하지요. 기도하는 거예요.

이것은 뭐냐 하면 마태복음10장이나 열두제자나 예수님 사이에서 결코 열 두 제자는 단독으로 병을 고칠 수도 없고 귀신을 쫓아낼 수도 없습니다. 그들은. 마태복음17장에서 어떤 아들이 빠졌으니까 예수님이 오셔서 고쳐줬거든요. 그럴 때 아버지가 하는 말이 “왜 당신의 제자는 못 고칩니까?” 했어요. 이건 또 하나의 시그널 신호에요. ‘아~ 마태복음10장에서 제자들이 병 고치니까 마치 예수님의 능력을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오해했는데, 막상 성경에 보니까 단독적으로 그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자’라는 것을 깨닫는 거예요.

그렇다면 제자들의 역할은 뭐냐, 나 능력 있다가 아니라 뭔가 중간 파이프의 연락책에 해당되지요. 본인들이 귀신 쫓은 거 맞아요. 우리가 귀신을 쫓아내니까 하늘에서 귀신 떨어지더라. 하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하늘에 귀신 쫓아내는 거 좋아하지 말고 니 이름이 하늘 생명책에 기록된 걸 좋아하라, 해서. 니는 지금 니 능력으로 귀신 쫓아낸 걸 오해하지 말고 나 예수와 너와 이미 창세전부터 명단이 매트릭스가 연결되어있다는 것을 좋아해야 된다.

그러면 병이 낫고 귀신을 쫓아낸다는 것은 또 솜씨를 부리라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과 제자들과 연결된 결속된 매트릭스 그 연결된 고리에 더 주목하라고 그러한 일들이 일어난 거예요. 아니 병이 나야 병을 고치지요. 혹시 여기서 뭐 병든 분 고쳐드릴까요. 여기.  고장 난 라디오나 TV 고칩니다. 돌아다닐까요? 그럴 필요 없다 말이죠. 병이 났다는 말은 주께서 일하라고 하시는 신호거든요.

그래서 이 두 개를 나눠보지요. 첫 번째는 내 몸은 주의 것이다. 맞아요? 틀려요? 틀리지요. 내 몸은 주의 것이다. 틀립니다. 두 번째가 맞지요. 내 몸은 주님께서 쓰신다. 이게 맞지요. 만약에 내 몸이 주의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또다시 여기에 자기의 윤리 도덕이 가미돼 버려요. ‘아휴, 주의 것이니까 나는 내 맘대로 쓰면 안 돼. 잘 써야 돼. 잘 써야 돼.’ 밥도 막 퍼먹지 말고 아침이슬만 먹어야 돼. 아침이슬 술을 먹나. 주의 것이라고 조심하게 돼요. 조심한다는 게 이게 불신앙이거든요.

제가 어제 수요일날 이야기했잖아요. 시험에 빠지지 말고 시험에 빠지는 시험은 빠지지 말라고. 그걸 시험에 시험이에요. 시험에 안 빠지려고 하는 그게 시험 드는 거예요. 안 빠지려고. 왜냐하면 본인이 관리하겠다는 거예요. 주께서 넘겨진 몸이 얼마나 귀한 몸인데. 앞으로 잘 쓰겠습니다. 영광을 위해서. 이건 땡이에요. 2번이지요. 니 몸이 아닌데 니가 왜 신경 써. 그래서 수요일날 중간에 그런 이야기했지요. 내가 문제 삼지 않는데 니가 왜 문제 삼아. 이 시건방진 인간아! 내가 니한테 문제 없다하는데 니가 왜 너 자신에 품행이나 자세나 미래에 대해서 그렇게 염려하느냐 말이죠. 어두운 얼굴을 하고.

교회에 어두운 얼굴을 하고 오는 권리는 없다고 했지요. 무슨 자격으로 어두운 얼굴 합니까? 무슨 자격으로. 그런데 야고보서에는 어두운 얼굴로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주님의 신호로서. 왜냐하면 변비 되어있거든요. 병 들었거든요. 본인이 원해서 병 든 게 아니에요. 주님의 신호에요. 매트릭스 밑에 보일러 깔렸다는 신호라는 말이죠.

자, 이렇게 되어버리면 그 다음에 어려운 문제가 등장하는데요. 여러분이 잘 아는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요한복음5장에 보면, 베데스다 못가에 38년된 병자가 나았습니다. 이 38년 된 병자가 걸을 때에 의도적으로 주님께서는 안식일에 병을 낫게 했거든요. 안식일 지키기 위해서 병 고치는 걸 잠시 중단했던 바리새인 앞으로 지나가게 만들었어요.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만든 안식일에 법에 적용해 보면 뭘 들고 가지 마라 했거든요. 들고 가는 방식으로 가게 만들었어요.

자, 만들었을 때에 제가 묻는 것은 이 38년 된 병자를 누가 고쳤습니까? 하는 거예요. 제가 묻는 것은. 여러분 답변 나오지요. 누가 고쳤습니까? 주님이 고쳤지요. 그 다음 문제. 어떻게 고쳤습니까? 어떻게? 그저 믿음으로. 아니에요. 뭘 믿어요? 38년 된 병자가 예수님을 믿은 적이 없는데 무슨 믿어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말씀으로 고쳤습니다. 이게 말씀의 능력이라고 되어있어요. 말씀의 능력. 그러면 야고보서에서는 이걸 뭐라고 하느냐, 말씀의 능력이라고 하지 않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있도다. 이렇게 되어있거든요. 의인의 능력되어있어요. 의인의 능력.

그럼 의인의 능력은 아까 제가 말한 의인의 특징이 뭐냐 하면 ‘자기 부인’이 되는 사람. “너, 나 보이지? 나, 아무것도 아니야. 껍데기야.” 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 “내 키가 얼마인지 보이지? 내가 누굴 위해서 기도한 거 다 보이지? 기도 지금 내가 하는 거 보이지? 내가 한 거 아니야!” 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의인이에요.

이 38년 된 병자뿐만 아닙니다. 여기 누가복음13장 10절봅시다. 그것도 안식일 나오거든요. “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이리 되어있지요. 이 이야기는 조금 더 복잡해요. 18년 이 여자가 18년 동안 병 들지 않은 다른 옆집에 있는 아줌마보다 죄를 더 지었습니까? 적게 지었습니까? 지금 죄 지어서 18년 된 게 아니거든요. 죄 지어서 18년 같으면 지금 정권 잡은 이런 사람들 38년 동안 꼬부라져야 되고 지금 우리가 만만치 않고요. 화성연쇄 살인범은 2000년 살아야 돼요.

이 본문의 18년 된 병자는요, 주께 감사해야 돼요. 왜냐하면 본인이 될 수 없는 본인이 된 겁니다. 이게 뭐냐 아무리 해도 주여, 저한테 18년 동안 병 들어서 꼬부라지게 해달라고 요청할 수 없는 자인데 주께서 쓰시기 때문에 18년 동안 병든 자가 됨으로서 의인이 되어버린 거예요. 자기부인이 가능한 존재가 되고만 겁니다. 안식일에.

온전히 주님을 온전히 드러내는 사람이 된 거예요. 18년 된 병든 자 복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알면서도 18년을 사양하겠지만. 이틀도 우리는 그냥 밀 거예요. 쳐들어오지 마세요! 아이구~ 겁납니다. 1년도 아니고 2년도 아니고 18년 동안. 생각해보세요. 20살 때 병들었으면 언제 낫다는 말입니까? 38년. 이건 기가 찰 거 아닙니까. 청춘을 돌려다오! 나올 만하잖아요. 이게 숫자에 불과한 게 아니에요. 이게 고통스러워요.

야고보서에 고난이오지요. 야고보서의 고난은 뭐냐 하면 병든 자가 바로 의인을 알아본다는 거예요. 의인을. 병든 자가. 우르르 와서 기도해 줄 때, “당신 기도 때문에 구원받은 게 아니요.” 라고 병든 자 쪽에서 이게 해석이 되고 설명이 되어줘야 되는 거예요.

강도만난 사람이 있는데 처음에 한 제사장이 그냥 지나갔어요. 두 번째 레위인도 그냥 지나갔어요. 세 번째 이방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고쳐주었습니다. 우리가 강도 맞았다 칩시다. 그럼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은 누가 선택하고, 누가 알아챕니까? 강도 만나야 그걸 아는 거예요. 우리가 18년 동안 병 들어야 알아요. 당신의 기도 덕분에 나은 게 아니고 주님 덕분에 낫다는 것을.

주님의 만남은 내가 부인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함으로서 주님을 만날 계기를 주님 쪽에서 만나게 하는 거예요. 그게 매트릭스의 신호, 시그널입니다. 매트릭스를 한 번 더 그려볼까요. 촘촘히 말씀의 보일러가 깔렸고, 그 깔린 곳에 어떤 사람은 지금 병들어있고, 어떤 사람은 지금 재벌 되어있고, 어떤 사람은 지금 파산되어있어요. 어떤 사람은 교도소에 가있고, 어떤 사람은 법무부장관 되어있다고요. 매트릭스 위에 쭉 되어있거든요. 우리는 여기에 있다고요.

매트릭스 깔렸으니까 각 사람이 각각의 몸이라고 여기고 바르게 사는 게 아니고 주께서 쓰신다니까요. 1번, 2번 차이점을 모르면 오늘 강의 헛방입니다. 주께서 내 몸, 니 몸이니까 잘해라가 아니라 우리는 율법을 못 지켜요. 야고보서2장에 못 지킵니다. 주께서 친히 쓰시는데 이 사람은 병 들게 쓰시고, 이 사람은 이걸 병 든 사람을 기도하게 하면서 쓰시고, 역할이에요. 역할이 다 달라요.

그런데 공통점이 뭐냐, 공통점은 다 주님의 능력으로서 산다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주의 이름이라고 하는 거예요. 주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이란 말은 “기도하는 내 이름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주여!” 라고 할 수 있는 기도.

이것은 주께서 쓰시고자 병 든 자를 우리가 관장할 수 없고 우리는 다만 기도할 따름입니다. 할 때 그 기도가 자기기도 능력 발휘하라는 말이 아니고, 자기기도 능력하면 2번이 아니고 뭐가 돼요? 1번이 되겠지요. 나는 주의 몸이다. 따라서 내 기도 주께서 알아줄 거야. 내 기도 얼마나 솜씨 있는지 발휘해 봐! 이건 자기 부인이 쏙 빠졌잖아요. 이건 주의 이름 아니에요. 이건 가짜입니다. 거짓입니다.

말씀 자리에 누가 차고 들어간 거예요? 지 잘남이 차고 들어간 거예요. 그걸 구분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교회에 병든 자를 발생시킨 겁니다. 10분 쉽시다.
 공은주(IP:175.♡.135.128) 19-09-28 17:29 
안양20190919b야5장13절(말씀의 매트릭스)-이 근호 목사

불신자라는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을 개입하지 않더라도 해석이 가능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불신자입니다. 하나님을 개입하지 않더라도. 그럼 하나님을 거론해도 불신자냐, 불신자가 돼요. 하나님을 자기 논리의 외곽에 세워두면 되지요. 그냥 시작을 하나님이 하셨다, 해놓고 나머지는 자기가 다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주셨다, 해놓고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알아서 잘하겠습니다, 해놓고 나머지는 자기가 다 하는 거예요. 여기 모든 과정 순서 자리에 주께서 들어오지 않고 본인이 원인이 되고 본인이 결과를 유발하는 식으로 해석할 때, 세상을 나아갈 때에 그게 전부 다 불신자들입니다.

그러면 불신자가 아닌 건 뭐냐 하면, 어떤 원인 결과에다가 예수님이 하셨다, 해도 이게 불신자에요. 우리 교회 주님이 세웠다, 해도 불신자입니다. 그게 왜 그러느냐 하면 자기 부인이 안 되면 이게 불신자에요. 하나님이고 온갖 미화를 하고 하나님 전능하시고 백날해도 “너 뭐야?” 거기에 대해서는 입 다물고 이 정도로 하나님을 퍼붓듯이 나는 완전히 하나님 앞에 몰입돼있다. 하나님과 나와 함께 있다. 함께 있고, 좋은 거 있잖아요. 더불어 산다. 나는 동행한다. 어디서 들은 구석은 있어가지고 온갖 것 갖다 붙이는데 아무리 해도 자기 부인이 안돼요.

야고보서4장14절 봅시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우리를 뭐라고 봅니까? 내일 일을 모르는 사람으로 보고, 그래서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안개지요. mist. 그걸 내용으로 표현하면 empty 비어있는 것. 텅텅 비어있는 것. 또는 nothing 아무것도 아닌 것. 이렇게 되는 거예요. 사도행전3장6절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낫게 했을 때 그 멋진 예가 나와요. 분명히 뭐 했어요. 오늘 본문처럼. 야고보서5장처럼. 예수 이름으로 걸으라 했다 말이죠. 예수 이름으로. 그런데 사람들 보기에는 뭐냐 하면 어떤 사람이 예수 이름이라는 단어 사용한 걸로 보이는 거예요.

실제로 주님은 안 보이고. 주님의 개입은 안 보이고. 그러면 차이가 뭐냐, 어떤 사람이 진짜 예수님을 통해서 그 사람이 병을 고치는 것과 예수 이름이라는 주술적인 그걸 사용해서 어떻게 병이 낫게 하는 것과 차이점이 뭐냐, 고 뒤에 나와요. 내가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부인이 나와요. 자기 부인.

이 말은 병 고치는 사람은 시그널에 불과하지만, 병을 고치겠다고 목격하고 그 사람에게 다가간 본인도 병자 못지않게 둘 다 공허하고 빈(empty) 사람이고 자기 부인을 해야 될 존재에요. 둘 다. 고침 받는 자나 고치는 자나 둘 다 처지가 동일하다고 고백이 나와 줘야 그게 주님의 말씀의 매트릭스 위에 점멸하는 깜빡 깜빡거리는 각자 자기의 자리에서 위치하고 있는 주님의 시그널의 일부가 되는 겁니다. 해석을 그렇게 봐야 되거든요.

아까 이야기한 거 다시 이야기하면 안식일에 누가복음13장10절에 18년 동안 병든 자가 있었다. 자, 이걸 하나님을 개입하지 않고 불신자로서 이 성경을 본다고 칩시다. 뭐 교회는 다 불신자들이니까 자연스럽게 생각하면 돼요. 보니까 이걸 보는 교인들이 집사나 장로나 목사 마찬가지로 안됐다. 누구 누구가 18년 동안 여성이 18년 동안 병들어 꼬부라졌다. 참 안됐다. 그러면 거기에 나오는 제일 첫 번째 반응은 뭐냐, 우리교회 교회가 뭐냐, 착한 일하는 단체가 교회다. 도와주자. 이리 나오지요.

그게 뭐냐 돼요? 동정이 되지요. 동정. 동정은 뭐냐 하면 정을 주는 거예요. 정을 주는 겁니다. 문제는 이게 동정을 하고 정을 주는 것이 이게 그 사람을 구원하는 구원의 능력이 안 된다는 거예요. 구원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야고보서5장에 의하면 뭐가 안 되느냐 하면 의인이 아니에요. 왜냐,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나오는데 어떤 힘? 구원하는 힘이 나오는데 이건 동정만 쳐 바를 뿐이에요.

그리고 그 쳐 발라는 동정은 언젠가 회수하기 마련이고 누굴 동정했을 때는 어떤 인간도 손해 보는 장사 안합니다. 그 사람이 만약에 우연히 그 사람을 도와줬는데 그 사람이 너무 너무 잘 되어가지고 한달 수입이 10억이 넘는다. 이리 나오면 “내가 니 인간 만드는데 얼마나 애쓰고 널 위해서 철야기도 했는데 니는 지금 잘됐다고 건방을 떨고 말이야.” 이리 나오게 되어있어요. 본전 찾는 거예요. 본전. 본전 찾는다 말이죠.

다시 본문 돌아봅시다. 야고보서5장 13절,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나오지요. 주께서 어떤 사람을 사용하여 어떤 순간에 병이 나는 시그널을 보냈었었다면 거기서는 교회 전체 매트릭스가 기도를 다시 유효화하는 기도가 다시 살아있는 경우로 사용하기 위해서 누구 하나를 병 들게 한 거거든요. 그리고 어떤 사람이 그걸 보면서 찬양을 한다면 전체 보편적인 기도 전체가 또 다시 하나님 앞에 감사와 찬양을 부여하는 계기로 삼기 위해서 이런 병든 자 또는 기뻐하는 자가 발생되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병들지 않고 갑자기 뭔가 예상치 않은 큰 행운이 왔다면 그 사람은 찬송하라. 찬송할 때 사촌이 논 사면 갑자기 복통이 나잖아요. 그런 소리 할 것이 아니고 다 같이 찬송하라는 말이죠. 같은 말씀의 매트릭스 위에 있으니까.

15절 봅시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자, 여기서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렵고 중요한 자리에 왔습니다. 병이 들었는데 죄가 등장해요. 그 다음에 저가 일으키시리니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죄 사함을 얻는다. 이리 되어있지요. 여기서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 설명을 위해서 제가 의도적으로 누가복음13장10절을 언급했고요, 18년 동안 병 들었다. 또 38년 동안 병 들었다. 그동안 18년 동안 논 게 아니었고, 38년 동안 논 게 아니지요.

그 당시 유대인이니까 하나님 이름하에서 이 병을 고치려고 얼마나 애를 썼고 본인도 노력하고 주위에서 동정이라든지 가족들 같으면 측은해 하면서 얼마나 도와줬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다 18년 동안, 38년 동안, 이 기간의 의미가 뭐냐 하면 한 마디로 하면 ‘예수님 만날 때까지.’ ‘만나기 이전까지.’ 이런 기간이 되겠지요. 예수님 만나기 이전까지.

그런데 제가 아까 첫 째 강의에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의 것이 되기까지가 아니라 예수님이 쓰시기까지. 예수님이 쓰시기까지의 기간입니다. 예수님이 쓰시기 까지니까 18년, 38년 동안 병 들었다는 것이 병자 본인에 관한 일입니까? 주님의 일입니까? 주님에 관한 일이지요. 요걸 알아야 돼요. 주님에 관한 일이에요.

이 논리가 너무 어렵기 때문에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병이 낫는 최종적인 상태는 무엇일까요? 이건 사도바울 서신에 나옵니다. 죽음입니다. 죽으면 안 아파요. 죽으면 감기도 안 걸리고 암4기는 암에 걸렸어요. 그런데 죽어버리면 암에서 나아버려요. 희한하지요. 암에서 낫지요. 죽어버리면. 아이고! 이런 방법이 있다니! 이런 방법.

왜냐하면 병이 나아봤자 계속해서 죽을 때까지 계속 병이 또 생길 가능성이 굉장히 많아요. 그리고 병 안 들어도 쇠약한 자체가 이것이 사는 게 고난 같아. 고생 같아요. 그야말로 안개가 안개 값을 다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이런 죽는 것이 병든 거거든요. 그러면 주님께서 궁극적으로 우리를 낫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겁니다. 우리로 하여금 안개니까. 죽어 마땅하니까. 오늘도 주께서는 열심히 우리를 죽음 쪽으로 몰아넣습니다.

이게 뭐냐, 병을 영구히 낫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요 대목에서 한 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다음 내용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결국 궁극적으로 뭘 하느냐 하면 이겁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죽음을 극복하고 허락한 자리에요. 우리에게 구원이라는 게. 구원은 죽음을 극복하고 허락한 자리에요. 죽음을 극복했으니까 이 말을 제대로 아는 사람 같으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 인생이 우습게 되어도 상관없습니다.”가 그대로 나와야 돼요.

병이 들었다. 낫게 해달라, 하는 것이 아니고 이참에 아예 병든 자는 “잘됐습니다. 그냥 내 목숨 데려가 주시옵소서.” 라고 하게 되면 그 사람은 죄에서 사함을 받았다는 새로운 다른 시그널을 병든 시그널을 통해서 뽑아낼 수 있다니까요. 어차피 사도바울에 의하면 교회들 보고 날마다 죽어라. 이미 너희는 죽었고, 라는 말을 반복하거든요. 사도바울에 의하면. 그걸 야고보서 식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병 들었다는 말은 우리의 창조 자체가 온전하지 못하다는 의미다. 그러니까 시그널로 병이 들었다. 따라서 병에 집착하지 말고 우리의 진짜 본질은 누구냐를 되돌아 볼 수 있는 계기로 삼자. 이 교회들아! 이리 되는 거예요. 교회들아!

자기 부인이  안 되는데 ‘아! 주께서 되지도 않는 부인을 되게 하시도록 우리 예상 없이 주의 뜻대로 병을 일으켰구나!’ 그러면 그 사람에게 있는 병은 병이 들었다는 말은 하나의 뾰루지니까 피부에 난 뾰루지니까 그 사람 병이지만, 나한테는 병이 아니고 죽을 수도 있거든요. 그럼 언제 죽어도 괜찮지요. 안개니까.

그 사람 병들어서 나았다고 좋아할 거 없지요. 그러면 병들지 않더라도 죽지 않더라도 이미 죽었다고 치고 매일같이 찬양하면 되잖아요. 그게 주께서 원하는 거잖아요. 고난 통해서 찬양된다면 아프기 전에 찬양하면, 우리 사는 거 자체가 고난이기 때문에 아프기 전에 찬양한다면 주께서 뽑아내실 것은 다 뽑아낼 수 있다 말이죠. 보여 줄 수 있는 것은 다 보여줄 수 있으니까.

그렇게 되면 우리가 뭘 포기해야 되느냐 하면 이걸 포기해야 돼요. ‘내 자리 없다’ 유명한 말로 “영구 없다” 영구 없다. 이게 내 자리 없다. 다른 말로 하면 내 이름의 자리는 없다. 그래서 장로들이 기도할 때 14절에 보면 뭐로 기도합니까? 기름 붓고 뭐로 하지요? 무슨 이름으로 한다고 되어있어요? 주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으로 내 자리가 없는 거예요. empty, 또는 nothing. 공허함, 이리 되는 겁니다.

‘그러면 내 자리가 없는 데도 내 몸은 있잖아요? 그게 어떻게 앞뒤가 잘 연결이 안 됩니다. 이해가 안 됩니다.’ 이렇게 생각하겠지요. 그러면 그 때는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임시적 활주로를 생각해 봅니다. 임시적. 임시적 활주로. 평소에는 고속도로에요. 임시적 활주로가 고속도로에 군데, 군데에 있어요. 전쟁을 대비해서 할 때 고속도로가 칸막이도 있고 한데, 어떤 고속도로 달리면 옆에 칸막이가 없어요. 없고 임시로 시멘트 블록으로 막아놓은데 있어요. 영주에도 그런 게 있어요. 풍기, 영주 그 동네 내가 살아봤기 때문에 아는데.

도로가 나있는데 임시로 되어있어요. 뭔가 군사 훈련한다 할 때는 치워버리면 이게 뭐로 되느냐 하면 활주로로 사용한다고요. 그렇다면 나라는 자리가 임시적인 활주로 되기 위해서 이동성 블록이 되는 거예요. 어제는 서울 살다가 오늘은 안양 살다가 그 때 그 때마다 이동한다는 말은 그것은 주님의 말씀의 매트릭스가 니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말씀이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너희 인생이 어떻게 우습게 되거나 망가져도 그것은 상관없는 존재인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고정적으로 살던, 이사를 자주 가던 상관없이 이걸 뿌리를 발목을 잘라내 버리는 거예요. 뜯어내버리는 거예요.

내가 이 땅에 뿌리 박혀 살겠다는 그 세상에 대한 집착과 미련을 잘라버리는 겁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좋은 세상이라도 눌러 앉아 있으면 이것은 기도가 찬양으로 바뀌는 게 아니고 찬양이 불만과 불평으로 바뀌게 되어있어요. ‘아이고~ 지겹다. 처음 살 때 아파트 좋았는데. 이건 뭐 새 아파트 다 들어서고 그동안 내 인생 뭐 나 왜 이리 사나. 남들은 잘 사는데 평소 50평 100평 이사 가는데 처음 올 때 18평 아파트 그대로. 이게 사는 기가. 지하 살다 이제 겨우 20평짜리 마련했는데 이게 사는 거야? 아이구,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아들아! 미안하다. 돈 못 벌어서’ 이런 식으로.

대개 겸손해 보이고 또 거기에 하나님 앞에서 “주여, 이 정도로 나는 욕심 없습니다.” 라고 이렇게 내숭을 떨지만, 그 떨 수가 없는 게 뭐냐 하면 아까 했잖아요. 불신자는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 개입하지 않고 본인이 모든 걸 본인 위주로 세상과 자기 자신을 해석해 버려요.

해석하니까, 해석자가 멀쩡하니 살아있으니까 자기 부인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해석자가 어떤 해석을 해도 항상 마지막에 남는 것은 이런 괜찮은 해석을 했으니까 나는 정당하다. 나는 의롭다. 이리 되어버립니다. 그건 주님의 능력을 가려버리지요.

주께서 의인이라 하는 것은 자기 분수를 알고 자기 주제파악이 되는 사람 의인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마태복음10장 11장에서 열 두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쳤는데 그들은 그들의 능력이 아니고 주님의 권세라고 되어있어요. 주님의 권세.

주님의 권세 앞에서는 우리는 앰프티(비어있는) 우리는 완전히 구멍이 뚫려있어야 돼요. 하수구가 막혀있으면 물이 안 통한다고요. 하수구가. 주님의 능력이 물이라면 하수구가 막혀있으면 그 능력이 제대로 안되지요. 왜곡되지요. 주님이 능력 줬는데 지 자랑하고 있다 말이죠. 설교 잘한다. 교인 수 몇 명이다. 자기자랑하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첫 째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교회가 예배 마치고 우르르 가가지고 장로들이 아픈 사람 만나면서 자기 능력이 있는 게 실험거리 잘됐다는 식으로 가지고 막 간절히 기도한다고요. 쭈여! 야고보서에 나와 있잖아요. 의인의 기도는 간구하는 힘이 있다. 가만히 보자, 우리교회에서는 누가 의인이고, 김장로 니가 할래? 나, 의인 아니야. 그럼 최장로할래? 아니야. 역시 우리 교회는 당회장 목사님밖에 없어. 당회장 목사님 오셔서 기도하세요. 하면 뭐 같이 합시다. 아니에요. 야고보서5장에 목사님은 말씀도 안 믿습니까?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 하는데 까짓 거 평신도기도 하는 것보다 주의 종 목사님이 기도하는 게 능력이 있지요. 한 번 해보세요.

목사님은 그 때 걱정이 되는 거예요. 지가 구라는 쳐놨지 나중에 췌장암 4기 안 나으면 이건 뭐 우리 목사 능력 없으면 그럼 나는 나가야 되나, 또 이 자리 뽑혀가지고 딴 데 또 가야 되나. 걱정이 되는 거예요. 그럼 이제 목사가 교인들 앞에서 의인의 능력이 뭔가를 본대를 보이기 위해서 기도도 아니고 간구거든요. 간절히 기도합니다. 쌍시옷이 많이 들어가요. 쭈여! 믿씁니다. 쭈여! 그거에 신바람 나면 헬렐루야! 랄라라라. 그래야 남들 보기에 그게 기도가 아니고 일상적인 기도가 아니고 간절함이 묻어있는 그런 간구처럼 모션을 취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병든 사람은 시끄럽다. 가라. 하고 나훈아의 유행가나 들을란다. 하고.

다시 말씀드립니다. 병이 문제가 아니고 죄 사함의 문제입니다. 죄 사함의 문제라면 예수님께서 죄 사함을 위해서 주께서 병든 자로 쓰시고 또 병 고치라고 병 달려들어서 병 고치는 자로 쓰신 거예요. 그 쓰실 때 그들의 갖고 있는 마음 자세는 나의 자리는 없다, 가 되게 됩니다. 그럼 내 자리가 없다는 말은 이건 일시적이라고 했지만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유동적이다. 나의 자리는 유동적이다.

왜 주님에게서는 우리 자리를 허락하지 않느냐 하면, 주님은 우리 인간을 너무 잘 알아요. 자기가 자리에 있으면 처음에는 불평하다가 그 자리에 오래 있으면 마치 그 자리가 무엇이 되느냐 하면 이게 돼요. 소유화돼요. 소유화. 그 자리가 소유화 된다고요. 그러면 소유화되면 여기서 무슨 현상이 있는가, 그 소유의 주인공이 있어야 되겠지요. 소유화라는 것은 동그라미 치는 거니까. 여기서 여기까지 내꺼. 여기서는 니 꺼가 되거든요. 이게 소유잖아요.

그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고 동그라미 칠 수 있는 그 범위 내에서는 주인공이 있어야 되잖아요. 그 주인공은 누가 해야 돼요? 내가 소유하니까 내가 주인공이 되지요. 내가 주인공이 되게 되면 나는 자기 부인이 과연 방향, 그걸 수학에서는 벡터라고 해요. 벡터라 하는 것은 어떤 양이 방향을 화살표 방향을 갖고 있는 걸 벡터라 해요. 어떤 방향을 지니게 되는데 그 방향은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한테 방향이 꽂히게 되어있는 거예요.

나는 이렇게 많은 기도해서 많은 사람이 나았다든지 나는 주의 말씀을 안다. 라든지 나는 몇 년을 믿었다든지, 나는 이 교회에 충성을 다해서 이 교회가 나 때문에 교인수가 500명 됐다든지, 여기 있는 교육관 내가 돈 내서 지었다든지, 방향성이 있어요. 교인 아니더라도 이 회사 내가 세웠다. 우리 어머니 병은 내가 고쳤다. 우리 아버지 내가 요양원에 데려 갔다.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무엇이 강화되느냐 하면 자기 부인이 되지 못한 부인들이 계속해서 찾아오고 쌓이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건 뭐냐 하면 그 자체가 병든 거예요.

그렇게 되면 누가 와서 그걸 건드리면 공포를 느끼고 얼굴이 어두워지면서 얼굴이 불안해지지요. 자기 부인이 안 될뿐더러 엠프티 비어있는 게 아니지요. 내 걸로 꽉 차있고 그것을 지키기 위한 아주 발악을, 참 강의해서 더 확실한 표현이 있는데 차마 못하고 여러분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아주 발악을 해요. 발악을.

그런데 발악하는 사람을 귀신들릴 때는 그걸 발악이라 하지 않아요. 발악 말고 다른 말이 있어요. 차마 말 못해요. 이렇게 하고 또 이야기해준다고. 아니 오늘 이야기 못해요. 너무 말이 거칠기 때문에, 성경에 보면 말을 고르게 하라는 게 있어요. 하여튼 성경 말씀 아는 것도 문제라. 말을 고르게 하고 좋은 말로 하고 이리 있어가지고 차마 상스러운 말 하지 말라고 해서 내가 말을 못하는데. 아이고, 이러려고 하니까 내 마음이 아까 그 병 비슷하게 닮아간다.

형식이라는 것이 형식이 자체적으로 내용을 가지면 안 됩니다. 형식은 형식다워야지 자체적으로 내용을 가져버리면 이건 소유화돼요. 나는 이런 형식이 내게 딱 맞다. 아니에요. 형식은 주께서 임시로 유동적으로 주신 거예요. 따라서 형식을 줬을 때 감사하는 것이, 형식보고 감사하게 되면 이건 자기 죄 사함과 무관해 버립니다. 형식에 따라온 내용이 무엇이었던가를 봐야 돼요.

형식은 단편적이고 파편적입니다. 단편적, 파편적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애들 퍼즐 게임에서 한 조각이다 말이죠. 한 조각. 그러나 내용은 모든 거와 연결되어 있는 매트릭스에요. 보편적이어야 돼요. 보편적. “아, 니 형식 좋겠다. 뭐 내 형식은 슬프다.” 이 말은 가능해요. 하지만, “니 내용은 좋겠다. 내 내용은 니 보다 못하다.” 이러면 안돼요. 왜, 모든 교회는 동일한 내용을 가지고 형식만 각각 단편적으로, 파편적으로 차이 날 뿐이지 내용이 차아나면 안됩니다.

그러면 성경 자체가 이건 특정사람에게만 주어진 것이지 모든 죄인에게 주어진 성경이 안 돼버리잖아요. 성경이 모든 사람에게 건강한 사람이나, 아픈 사람이나, 장로나, 장로 아닌 사람이나, 모든 사람에게 공히 되려면 이러한 것이 하나의 사례들이 되어야 되지 이것이 모델이 되면 그게 하나의 전체적인 이상적인 목적이 되면 안 된다 말이죠.

교회에서 누가 간증집회하고 암4기인데 기도해서 나았다 하면 은근히 사람들이 어떤 영웅주의에 빠지느냐 하면 나도 병 나아서 돈도 안 들고 기도해가지고 내가 병 낫고 내가 안수기도해가지고 간구해가지고 나도 의인됨을 증명하는 기회로 삼았으면 얼마나 좋겠느냐, 병이 아팠는데 내가 내 기도해가지고 내가 간절히 했더니만 병이 나았습니다. 이래가지고 폼 나게 교회 좀 다녀보면 좋겠다. 라는 은근한 질투심이라든지 경쟁의식이 또 발생돼요.

이건 뭐다? 내용과는 관계없이 형식을 보고 질투를 느끼고 탐을 내는 겁니다. 형식을 보고. 그건 임시 활주로가 아니에요. 그건 완전히 활주로에다가 자기 집짓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비행기가 와서 확 밀어버립니다. 주님이 오셔서.

좀 더 깊이 있는 거 해봅시다. 야고보서5장15절 봅시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했으니까 이건 제가 여러 번 설명했듯이 예수님의 제자들 예를 볼 때 절대로 그들이 그들의 힘으로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구원할 수 있는 능력 없습니다. 다만 제자들은 하나의 파이프. 막힌 배수가 아니고 뚫린 배수관이 쭉쭉 되겠지요.

그런데 만약에 예를 들어 봅시다. 그 하수관이 막혔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막혔으면 그 사람들을 버리겠지요. 왜, 주께서는 자기 일이 방해 받으면 안 되니까. 그러니까 이게 유동적인 거예요. 임시적인 거예요. 사람은 본능상 한 자리에 있으면 마치 자동적으로 능력이 나오는 것처럼 생각하는 겁니다. 설교는 툭 건드리면 설교가 나오는 줄 알아요.

자기 부인이 안 되면 복음 설교가 나올 리가 없어요. 자기 부인이 안 되면 안 되거든요. 그런데 어떤 목사님이 복음이 나오더라. 복음이 나온다고 해서 그 사람이 자기 부인된다고 착각하지 마세요. 형식적인 담론이나 아, 어렵다. 담론 나오면 어렵거든요. 담론 잘 안 들어봤지요. 미셀푸코, 신영복, discourse라고 하는데 개인의 의견을 말하지 않고 여러 사람들의 동의를 얻는 동의를 취득한 진리로서 인정받는 분위기에 맞춘 화제거리를 담론이라 해요. 그걸 다른 말로 하면 대세. 대세여론. 그걸 국가적으로 이야기하면 이데올로기. 이념이라 합니다.

그래서 국가는 대체로 반대되는 좌파, 우파, 두 개의 담론이 있다 이리 생각하면 담론의 이해가 확 오지요. 인간은 자기가 어디 고정돼있으면 자기 스토리, 자기 역사를 차근, 차근 꾸미기 시작하는 겁니다. 아파트 사는 사람 말고요, 주택에 사는 사람들이 수박을 먹고 수박을 턱 던져 놓으니까, 어! 예상도 못했는데 다음해 여름에 보니까 수박 새싹이 나온다면 그걸 집사님은 밟아버립니까. 한 번 키워볼까? 이런 생각이 들겠어요.

뭔가 땅에 박히면 그걸 새로 ‘하루 세끼 한 번 결실을 한 번 맺어 봐!’ 라는 생각이 자동적으로 들게 되어있어요. 고정성은 반드시 자기 부인이 아니고 다른 벡터, 다른 방향을 가지고 있어요. ‘야~ 이 식대로 잘하게 되면 내가 편안히 남은 여생을 살 수 있겠네.’ 라는 생각이 절로 나게 되어있어요. 그게 나의 바운드리에요. 나의 나우바리라니까요. 나의 영역이 돼요.

그렇게 되면 이건 무엇이냐 하면 배수관이 막히게 된 겁니다. 배수관이 막힌 거예요. 주님께서 일 안하지요. 막혔는데 억지로 뚫어서 일할 필요 없고. 그냥 딴 데로 가는 거예요. 딴 데로 간 현상이 뭐냐,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병들었다는 이런 소식을 들을 때, 이게 하나의 신호로서 아차 싶은 거예요.

“병들었어? 그렇지 내처럼 신앙 좀 좋지 그래. 평소에 신앙생활 자기 부인하고 살지 그래.” “니나 부인하세요. 니나.” “저리 사니까 저리 벌 받았구나!” 이게 어떤 망대가 무너져서 18명 죽었을 때에 제자들의 생각은 그거에요. 어떤 소경이 소경되고 지나가니까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저 소경은 자기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조상 죄 때문입니까?” 참, 주님이 보시기에 가찬지도 않아요. 주님의 답변은 간단했어요. “주께서 쓰신단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장님이 된 거예요. 죄 지어서 장님이 된 게 아니고. 죄 지어서 장님이 되는 게 아니에요. 그건 개인적인 죄잖아요. 그래서 개인적인 죄는 여기서 내린 결론은 뭐냐 하면 개인적인 죄는 놀랍게도 없다가 됩니다.

개인적인 죄는 없어요. 괜히 마귀한테 농락당하지 마세요. 마귀가 우리보고 합니다. “니 죄지어서 그런 벌 받았다.” 마귀는 그 말 뒤에 뭘 남겨 놓습니까. 앞으로 바르게 살면 니는 그 고난이 없어지고 잘 될 거야. 이거거든요. 마귀의 주특기는 우리로 하여금 자기만의 소유성을 확보하라. 소유성. 소유성을 지키라. 그러면 너의 것이 되고 너의 것이 되면 곧 너의 절대화가 가능하다는 거예요.

그러면 마귀가 뭐라고 합니까? 예수를 믿게 되면 너는 소유가 늘어난다. 이걸 뭐라고 하느냐, 복이라 하지요. 복을 주는 걸 축복이라 합니다. 소유하게 되면 소유하는 순간 이게 뭐가 돼요? 마귀에 의하면 이게 누구 것이 돼요? 나의 것이 되지요. 나의 것은 안 빼앗기고 싶지요. 안 빼앗기고 싶은 것이 뭐냐, 나의 절대성이에요. 나의 절대성이에요. 이 이야기를 제가 아까 뭐라고 했느냐, 이걸 가지고 나의 이야기. 나의 담론. 내가 소설의 주인공이 되는 나의 역사가 되는 겁니다. 나의 역사.

그런데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하면, 갑자기 매트릭스 저 쪽 편에 누가 병이 들었다. 병은 무엇을 무효화 시킵니까? 아무리 재산 많아도 병 들으니까 기쁨이 없어요. 몸이 아프니까. 집에 곶감부터 해서 맛있는 게 있어도 입맛이 없어. 몸무게가 마구 줄줄 빠지기 시작해. 밥을 같이 먹어야 입맛이 있는데 혼자 먹으니 입맛이 없어. 홈쇼핑에서 육개장 시켜놨는데 입맛이 없어. 마트에 가가지고 볶음밥사서 해도 입맛이 없어. 그냥 때 때우고 치워버리자. 빨리 내 할 일이 바쁘다. 이런 식이에요.

아프니까 나의 것 하는 절대성이 이게 의심이 들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면 나의 절대성은 건강한 나이고 싶어요. 비실 비실한 나는 내가 꼴보기 싫어. 그러니 불신자들의 특징이 뭐냐, 자기가 자기를 미워한다는 거예요. 비실한 내가 꼴보기 싫어요. 92살 할머니가 있는데 외손녀가 할머니를 모십니다. 왜 모시느냐 하면 엄마가 도망가고 할머니가 키워줘서 그 은혜를 못 잊고 나이 28살에 결혼해가지고 사위하고 같이 할머니를 자기 집에 모시는데 일부러 오라해서 모시는데 그 외손녀가 자꾸 사진을 찍어요. 사진을 찍으니까 노인네의 심정을 모르니까 할머니가 찍지 마라. 이리 되는 거예요. 왜 자꾸 찍느냐. 노골적으로 찍으면 싫어해서 몰래 찍고, 밥 먹는 거 찍고. 방송기자가 물었어요. 왜 그렇게 외손녀가 할머니 사진을 찍습니까? 이렇게 하니까. 이 이야기가 인간극장 지금 하고 있는 거예요. 경기도 광주에 사는 이야기인데.

물으니까 날마다 내가 달라지는 게 내가 싫다는 거예요. 내가 달라지는 게. 달라져도 플러스 쪽으로 달라지는 게 아니고 마이너스로 달라지거든요. 날마다 뭉개져가는 모습을 찍으니까 차라리 젊을 때 사진 이것이 위로가 되지 지금 찍은 이 사진보고 자기가 깜짝 놀래요. 왠 귀신이고? 가만히 보니 귀신이 자기가 되거든요. 아직 그럴만한 연세들이 안됐지만, 정말 나이 많은 사람들은 뭐냐 하면 동영상 사진 제발 찍지 말라고 해요. 찍으면 신뢰가 되겠지요.

이 말은 뭐냐 내가 나를 꼴보기 싫은 거예요. 늙음 자체를 뭐로 보느냐 하면 병듬으로 보기 때문에. 늙었다는 게 병듬. 자살 왜 하지요? 자기가 자기를 꼴보기 싫어서 자살하는 거예요. 자기 앞에서 자기가 사라지게 하면 내가 마음이 더 편하다. 내가 나를 의식하는 것보다 내가 없다는 것이 나한테 더 유리하다 싶어서 자기가 죽어버리잖아요.

나의 절대성이 이렇게 훼손되니까 여기서 노골적으로 악마가 작용합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훼손되기 싫지? 너가 싫지?” 너를 기쁘게 하는 방법은 뭐냐, 만회해야지. 만회하는 방법은 기도와 열심, 헌금, 전도, 봉사, 모든 목적은 결국 제가 지난 수요일에 이야기한 것처럼 인간은 자기 유리한 것에서 발걸음을 멈추는 거예요.

자기의 달려감이 주님의 만족을 거쳐서 결국은 자기만족에서 스톱해요. 이게 브레이크가 고장 났거든요. 악마로 인하여. 밑에 기름을 발라났어. 자꾸 미끄러져. 주님께 영광하고 끝나야 되는데 그래서 수요일에 했잖아요. 음녀가 아니면 하나님의 혼인잔치에 참석할 수 없다고요. 왜냐하면 이 자체가 나의 역사 자체가 안에 내부에 바탕이 형식 바탕이 뭐냐, 나는 잘났다! 나는 잘났다! 나는 의인이다! 나는 의인이다! 나는 정당하다! 이게 이미 내용으로 안 들키게 딱 있고 바깥에 형식으로 딱 갖춰 있는 거예요.

나는 못 났어요. 저는 부족합니다. 입만 띠면 거짓말하는 거예요. 입만 띠면 거짓말하면서 그런 소리 할 정도로 나는 겸손하다가 밑에 깔려 있습니다. 교회 다니나 안 다니나 마찬가지에요. 교회 안 다녀도 굉장히 겸손한 사람 한 둘이 아닙니다. 많아요. 소위 교육을 배웠고 가정교육 잘 돼있고 남한테 싫은 소리, 남한테 절대로 피해 주는 일은 하지 말라고 철떡 같이 믿은 사람은 입에 발린 소리나 마나 행동하나 마나 반드시 남을 먼저 배려하는 태도가 나옵니다.

하지만 그 안에 뭐가 들어있어요? 뭐가 안 됩니까? 도무지 자기 부인이 안돼요. 자기 부인이. 자기 부정이 안 된다고요. 도무지에요. 도무지. 어떤 대책도 수가 없어요. 그리고 누가 지켜요? 나를 지켜야 되잖아요.

그런데 신자는 뭐냐 하면 영생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거든요. 영생보다. 영생 받았으면 망가져도 괜찮아요. 38년이 아니고 58년 돼도 괜찮아요. 영생 얻었으니까. 영생이 뭡니까? 나는 영생 얻었다가 영생이 아니고 주께서 나를 쓰신다는 겁니다. 주님의 구원을 위해서 내가 죄인으로 태어나서 나의 죄마저 주님이 주님 되기 위해서 쓰임을 받는다는 그 사실로 모든 기쁨과 고마움이 스톱이 되지요.

나의 기쁨보다 주님의 기쁨으로 사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십자가 외에는 나는 자랑할 게 아무것도 없다. 예수님 죽으심 외에는 아무 것도 자랑하지 않겠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서 나의 내용은 앰프티 비어있는 거예요. 내가 만회할 것도 없고 보상 받을 것도 없고, 나는 텅텅 비어 있는 내용, 다시 말해서 나는 죽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산다가 나의 내용이 된다 말이죠.

그게 뭐냐, 그게 바로 구원이에요. 병들었다는 그 신호, 신호를 통해서 어디까지 이어진다? 구원과 이어지는 그런 과정 속에서 무엇이 발생되느냐 하면 소위 의인이 발생되고 의인은 하나님의 배출구이기 때문에 의인의 기도는 뭐가 되느냐, 곧 주님의 기도가 되는 겁니다.

왜, 지 마음대로 안 하기 때문에. 쓰시는 대로 하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병이 나아도 주께서 낫게 하신 거고, 병이 안 나아도 주께서 안 낫게 할 뿐이고, 나는 오직 주의 이름만 증거 하면 돼요. 주의 이름이 죽었다 살아난 주의 이름이거든요. 주의 이름은 주의 기능을 이야기하거든요.

예수님의 죽으심과 살으심을 병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면 나머지 결과는 내 소관 아니지요. 만약에 내가 어떤 사람에게 해서 병이 나서 병이 나아버리면 온 동네에서 소문난 거예요. 용하다고 소문이 났는데 그 용하다는 소문 배후에 뭐가 담기느냐 하면, 돈 없이 낫는 다는 것. 역시 돈이 최고거든요.

병원에 가는 비용보다 헐게 친다는 데서 용한 어떤 목사 없나. 용한 목사. 특히 귀신 쫓아내려 하면 돈이 많이 들거든요. 귀신 쫒아내려 하면 누구한테 가느냐 하면 송가인 엄마한테 가면 된다. 인간문화재 아닙니까. 무당으로서. 그 무당도 자기 딸한테는 못 이기지요. 딸이 학교 때 공납금이 없으니까 뭐를 팔아서 공납금을 댔느냐 하면 무당 하는 제단 있지요. 신 내림하는 장소 있잖아요. 그걸 팔고 딸 공부시켰어요. 역시 무당보다 조상신보다 누가 더 세다? 자식이 더 세요. 자식이. 될 만한 자식이 더 센 거예요. 우리의 인간의 본색을 너무나 잘 보여줍니다. 전라도 진도에서. 그러니까 TV를 틀면 복음이 나와요.

복음을 아는 사람에게는 TV 어느 홈쇼핑 뭘 틀어도 복음이 나온다니까요. ‘아, 저게 내 모습이다.’ 자식 잘되면 표정이 다르고 말씨가 다르지요. 어떻게 속일 수 있을까요. 이게 뭐냐 보편성이에요. 인간의 죄의 보편성. 이게 병든 거예요. 주님이 의인되셔서 기도함으로 말미암아 그 의인의 기도의 간구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 사함을 얻은 겁니다.

죄 사함은 뭐냐 나 구원받았다, 가 아니라 주께서 영생을 위해서 매트릭스에서 하나의 전등이 깜빡 깜빡하는 신호로서 주께서 계속 활용해 주신다는 그것이 감사할 때 그게 찬양이 되는 겁니다. 그게 야고보서5장의 이야기에요. 복음 전하는 이야기에요.

자, 그 다음에 16절을 봅시다. “이러므로 서로 죄를 서로 고하여” 아~ 나오네. 딱 나오네요. 그러니까 병든 사람이나 병 고치려고 덤벼든 사람이나 둘 다 보편적으로 주께서 니 병은 니가 들었지만 마치 내가 병들었다고 치고 다시 병들어 버리면 나의 뭐가 깨진다? 나의 절대성을 포기해야 되겠지요. 여기서 여기까지는 내 꺼! 라는 걸 포기해야 되겠지요.

아픈 마당에 죽는 마당에 창고에 있는 모든 곡식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무 소용없잖아요. 그 나한테 잘해줬던 효도하겠다는 자식이 무슨 소용이 있어요? 인간은 안개인데, 평소에 자기가 안개 아니고 독자적인 나는 인간이라고 우기기 때문에 자기 스케줄을 계속해서 고집하는 거예요.

그럼 나의 스케줄은 누구의 영광입니까? 결국은 내 자존심과 내 명예와 위신, 체면을 지킨 용도지요. 그걸 지금껏 지켜버리면 이게 뭐냐 하면 나의 역사가 되고 이건 나의 역사는 나의 절대성이 되면서 가면 갈수록 이걸 아까워서 이걸 흠집 날까봐 싶어서 벌벌 떨면서 얼굴을 어두운 얼굴로 하고 교회에 나오는 겁니다.

혹시 이것이 훼손될까봐 혹시 훼손되었으면 빨리 기도해서 만회하려고. 관심사가 자기밖에 없어요. 자기 절대성밖에 없어요. 있음이 문제에요. 엠프티 텅텅 비어있고 낫싱 아무것도 아니어야 되는데, 그 말씀의 매트릭스를 극히 거부한다고요.

다시 말씀을 드리면 이런 말씀의 매트릭스 위에 걸치면 안 되는데 자꾸 하나의 점멸이거든요. 오늘 여기 있다가 내일 여기 갈 수도 있고. A지점에서 B지점으로 돌아갈 수 있는데. C지점에서 오래 있었다고 해서 여기서 자기의 캐슬 자기의 스카이 캐슬, 자기의 둥지를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하고, 하나님 앞에 협상에 나서는 겁니다. 하나님 잘 해줄 테니까 내가 그만큼 평생 투자하고 노력한 내 자식이나 내 자산만큼 손 안 댔으면 좋겠습니다. 내 명예와 체면 이런 거 좀 안 다쳤으면 좋겠습니다. 할 때, 주께서는 어떻게 합니까?

그게 바로 야고보서5장에서 이게 병 든 거란 말이죠. 사랑하기 때문에 병들었다고 이야기해주는 거예요. 사랑하기 때문에. 남의 자식 같으면 이야기 안 해줘요. 사랑하기 때문에. 그게 병 든 거예요.

그럼 우리의 인생이라 하는 것은 매일우유처럼 매일 아침 되면 우유 오잖아요. 매일 우리는 병들었어요. 하루 살면 하루만큼 병 들어있고. 또 하루 살면 병 들어있고.

주께서 말씀의 매트릭스가 작용해 줘야 말씀이라는 내용과 예수님의 영생이란 보편성과 나의 사적인 형식과 또 하루를 살면서 마주치게 함으로서 ‘아~ 내가 병들었구나! 내가 죄 지었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이 누가 아플 때에 그 사람 찾아가서 뭡니까? 당신 죄 지었어요. 하지 않고 누구 죄부터 먼저 이야기하느냐, 내 죄부터 먼저 이야기해요. 그게 바로 16절에 뭐냐, 서로 죄를 고백하는. “형제여, 걱정하지 마세요. 나도 지금 멀쩡한 게 아니라 내가 속이 문드러졌습니다. 한 달 수입은 1억 5천이지요. 이거 관리 어떻게 합니까. 펀드 하나 지금 들어갔는데 사촌 조카가 지금 망해가지고 이게 문제 됐지요. 우리 애는 지금 의대전문대학에 있는데 지금 쫓겨날 판이고, 이게 자랑인지 죄인지 모르지만, 아~ 이거 다 죄입니다.” 라고 자기 부인을 할 수 있는 사람.

참,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죄 사함을 받은 교회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 기도는 결국 타인의 기도입니까? 자기를 포함한 기도에요? 저 쪽 병든 자만 죄인이 아니고 나도 죄인이니까 우리 손잡고 같이 나의 이름, 나의 역사지요. 나의 찬란한 나의 역사 포기하고 주께서 그냥 쓰시고자 한 일이라고 여기고 주의 이름, 주의 십자가와 부활을 다시 바라보는 계기로서 주께서는 교회를 그렇게 친히 지금 운용하고 계시는 겁니다.

17절에 한 번 봅시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나오지요. 성정이 같은 사람 나오지요. 요걸 살짝 이렇게 이해하세요. 예수님은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고 이해하시면 되는 겁니다. 엘리야는 물론 우리와 같지만. 예수님도 우리와 같은 모든 조건이 같은 성정이 같다는 말은 형식 조건이 똑같다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마귀한테 속아 넘어가가지고 자기 절대성을 취하고 주님은 마귀한테 이겨서 아버지의 뜻대로 자기 부인, 자기 버림, 이 땅에서는 마음껏 내가 소멸 돼도 괜찮아. 라는 자유를 가지고 우리를 구원했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있으니까 그 힘이 우리에게 오게 되면 나는 힘을 가졌다가 아니라 나는 비어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그 비어있을 때 바닥에 있는 매트릭스의 힘이 팍 올라오잖아요. 그게 찬양이라는 모습으로 튀어나오는 겁니다. 확 올라오는 거예요. “주여, 나 같은 인간도 쓰시옵니까? 마음껏 쓰시옵소서.” 이게 확 올라오는 것. 이게 의인의 기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못났다고 충분히 인정하지만, 체험상 경험상 정말 못 났는지 아니면 수시로 못났지만 잘난 구석이 있는지 우리도 알고 주께서 너무 잘 아실 줄 믿습니다. 소원이 있는데, 그것은 주의 복음만 증거 되는 사람으로 쓰여 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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