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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지역강의 > 안양강의
2019-12-13 00:27:11 조회 : 358         
꿈과 현실 191212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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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은주(IP:119.♡.152.148) 19-12-23 16:45 
안양20191212a야고보서 정리(꿈과 현실)-이 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야고보서를 다시 한 번 정리한다 했지요. 야고보서를 일단 하긴 했는데 야고보서를 백날 해봐야 여전히 남는 게 있어요. 그건 뭐냐 하면 야고보서를 천 번을 해도 끝까지 버티고 남는 게 있습니다. 나라는 존재, 이건 끝까지 버티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야고보서 1장 1절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건 나가 아니고요. 나가 아니고, 뭐냐 하면 이스라엘입니다. 

이게 이스라엘을 이야기하는 거거든요. 이스라엘에 대해서 꾸준히 이야기했던 그 이야기한 바가 신약에 야고보서를 통해서 그게 완성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야고보서에서 하고 있습니다. 구약에 있던 이스라엘. 그 이스라엘이 대단히 미흡했고 문제가 있었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이스라엘을 완성시켰다는 겁니다.

그럼 여기서 우리가 현실적으로 우리가 느끼는 것은 늘 마음속에 느끼는 것은 이스라엘일까요? 나일까요? 나이지요. 나. 그 나가 이스라엘 구성에 대해서 이걸 방해물이 되는 겁니다. 야고보서 만 독해도 소용없어요. 하나님은 관심사에 이스라엘에 있는데 우리는 나를 포기를 못하고 있는 거예요. 성경을 아무리 봐도 포기가 안 되는 겁니다.

이러한 차이성, 이러한 대립구조가 이미 구약 때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출현하면서 이스라엘이 망했던 이유가 바로 그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뜻하는 이스라엘 말고 계속 나를 포기 못한 그 이유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망하거든요. 그래서 야고보서를 끝내고 난 뒤에 다시 야고보서를 정리하면서 이스라엘이 도대체 무슨 동네인데 이스라엘이 뭐기에 일체 나를 인정하지 않는가, 그거부터 우리가 아셔야 되겠지요. 방해할 때 방해하더라도 도대체 내가 왜 방해하는지, 하나님의 계획에 왜 방해되는지, 아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구약에 보면 인간은 두 번째서 태어난다 했어요. 첫째는 뭐냐 하면 인간은 흙에서 태어났다. 흙에서 태어난 이유가 죽을 때는 어디로 돌아가지요? 흙에서 왔기 때문에 흙으로 죽는 것이 흙으로 돌아감, 이게 죽음인데요. 왜 죽어야 되느냐 하면 환원된다는 거예요. 흙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흙으로 돌아간다. 이게 창세기3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니가 왜 흙으로 돌아가느냐, 흙에서 나왔기 때문에 흙으로 돌아간다. 흙이 인간을 만든다. 이게 창세기2장 그리고 3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도 이렇게 생각을 합니까? 이게 맞다고 생각해요? 성경대로. 아멘이지요. 

두 번째. 사람은 여자가 만든다. 갑자기 2번 나오니까 도중에 어느 게 맞는지 혼란이 일어나지요. 인간은 여자가 만든다. 이 둘 사이에 연결될 수 없는 이 갈등이 이스라엘을 망하게 한 거예요. 여러분들이 유명한 요한복음3장에서 니고데모가 예수님과 대화하는 장면이 나오지요. 그 장면에서 다시 태어난다고 할 때에, 니고데모는 1번 흙에서 태어난다고 주장한 게 아니고, 2번을 주장했고, 주님은 1번을 주장한 거예요. 왜, 이게 십자가 죽음이니까.

지금 니고데모는 안 죽고 다시 태어나는 방법을 이야기했고, 주님은 십자가 죽음 안에서 다시 태어나야 된다는 겁니다. 십자가 죽음 안에서. 벌써 니고데모하고 예수님하고 의견 차이가 나잖아요. 거기서 니고데모는 책망을 받고, 책망을 받는데 책망 받는다고 될 문제가 아니거든요. 오히려 니고데모가 예수님한테 이의를 걸지요. how?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어떻게?

이것은 니고데모가 예수님보고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우리가 태어난 것은 내가 태어난 것이 여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엄마로 태어났기 때문에 엄마로 태어나는 방법 외에는 우리는 모릅니다. 어떻게 태어납니까? 라고 할 때에 우리 주님의 뜻은 뭐냐, 어떻게 니가 이스라엘 유대인 선생이면서 어떻게 그걸 모를 리가 있느냐, 양쪽 다 어떻게. 양쪽 다. 어떻게 니가 율법의 선생이라고 자처하면서 그런 기본적인 것도 모르느냐 이 말이죠. 기본적인 것도.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말이지요.

요번에 수능 만점이 15명이죠. 15명 모아놓고 한 번 내가 수능문제를 출제하면 이렇게 내겠어요. 인간이 거듭 태어난다. 다시 어떻게 거듭 태어나는가, 인간이 다시 태어난 다면 어떻게 태어나는가, 그 똑똑한 애들한테 한 번 물어보라고요. 인간은 태어나는 그 지점을 흙에서가 아니고 여자로 태어난다고 보지요. 이게 뭐냐 하면 육에서 육의 연속 또는 영속되는 그것이 우리가 인간이 알고 있는 전부입니다. 육에서 육으로.

그래서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육으로 난 것은 결국 뭐냐 하면 육의 구조 밖에 못 벗어난다. 육에서 난 거 육이다. 이건 말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육에서 난 건 육일 때, 여기서 이게 뭐냐 하면 도대체 이스라엘이 인간들이 생각한 이스라엘과 하나님이 생각한 이스라엘이 다르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들이 생각한 이스라엘은 육의 연속성을 두고 이스라엘이라고 본 거예요. 육의 연속성을 두고. 부모님이 나를 낳고 내가 자식을 낳고, 결혼해서 애를 낳고. 이게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역량 또는 한계에 머물러 있는 것이 인간이 여기까지 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그 육에 속한 인간을 하나님을 보려면 그런 육은 안돼요. 교회 열군데 개척하고 얼마나 봉사하고 소용없어요. 목사 돼도, 장로 돼도, 집사 돼도 소용없습니다. 육에서 육으로 같으면 옛날 이스라엘이 안 망했지요. 망할 이유가 있습니까. 아브라함 자손인데. 망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의식 그 자체가 아무리 해봐야 하나님이 생각하는 아브라함 자손에 도달되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배척해버리지요. 아브라함 자손을.

진짜 아브라함의 자손을 거부해 버리는 요소가 이 육 안에 들어있는 걸 이스라엘은 몰랐던 거예요. ‘우리가 이스라엘이다.’ 라는 생각 안에 문제 있다는 생각을 감이 해본 적이 없는 거예요. 그 인간은. ‘나는 교회 다닌다. 따라서 구원 받는다.’ 라는 생각이 이게 하자가 있고 문제 있다. 이게 오류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오류라는 생각을 감이 교회 다니는 사람이 해본 적이 없는 거예요. 오류 있는지를.

여러분들이 실력이 있으니까 진도를 팍팍 나가보겠습니다. 다시 한 번 친절함이 동원되어야 돼요. 친절함이. 친절함이 동원됩니다. 이스라엘은 육의 영속성이라 합니다. 영속성이 어려우면 연속성이라 합시다. 체인. 연속성이거든요. 그러면 나는 어디 있느냐 하면 아버지 계시고 자식 있고, 같은 동료들 있으면 나는 이게 후손들이 있으면 조부가 있으면 육의 연속성 속에 내가 여기 놓여있지요. 육의 연속성 속에.

이게 뭐냐 하면 아까 이야기한 사람이 어디서 태어난다? 여자로 인하여 태어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육의 연속성 속에 있기 때문에  이 육에서 만약에 영의 세계로 가려면 뽑아내려면 양쪽에서 다 잡아당기겠지요. 양쪽에서. 연속성이니까. 체인, 연결되어있으니까. 몸 하나 못 빠져 나와요. 빠져 나갈 수가 없다고요. 나를 있게 한 이 분이 누구냐 하면 아버지거든요. 아버지. 그래서 구약 이스라엘은 두 개의 아버지를 알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고 육신의 아버지. 두 개의 아버지를 섬기고 있었던 거예요. 두 명의 아버지를. 두 명의 아버지를 섬기면서도 두 명의 아버지가 모순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그게 문제인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 섬기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데 하나님 아버지는 만나면 죽어요.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면 죽는다고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서운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있으면 자기가 죽는다는 사실은 물론 듣기는 들었지요. 기드온도 그런 이야기했고, 마노아입니까. 삼손의 아버지도 그리 생각했어요.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버리면 우리는 죽는다. 야곱도 마찬가지에요. 밤에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고 난 뒤에 천사와 만나고 난 뒤에 자기는 어떤 처지에 있었다? 나는 이미 죽었다. 라는 것을 이미 기정사실화 시켜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함께 있으면 죽는데 문제는 뭐냐 하면 왜 안 죽느냐가 문제가 돼버려요. ‘왜 안 죽지?’ 가 돼요. 왜 안 죽지?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게 되면 죽게 돼있는데, 만나면 죽게 되어있는데, 왜 안 죽지? 라는 그 질문부터 다시 해야 되는 거예요. 성막, 성전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있으면 이스라엘이 다 죽어야 돼요. 죽어야 되는데 성막에 있는 그 일하고 있는 레위인이나 제사장들은 벌벌 떨면서 하지만.

어쩠든 간에 성막 안에서는 벌벌 떨고 무섭고 두렵던 간에 바깥에 텐트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은 멀쩡하잖아요. 그 연유, 그 이유가 뭐냐를 그들은 제대로 파악을 해야 되는 겁니다. 그 이유가 뭐냐, 이방민족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저는 땅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땅에 올 리가 없다는 게 이방민족의 우상들이에요. 마치 예배당 세워 놓고 우리 예배당에 오늘 예배드리는데 주님이 거기에 있을 리는 없어. 우리 인간들 모였잖아. 왜, 인간들의 연속성이니까. 보통 교회가면 자기 집안들 많이 오잖아요. “아이고, 아재요!” 언니, 올케 막 오잖아요.

그러나 주일날 가가지고 예수님 만나고 오십니까? ‘아이고, 예수님 하늘에 계신데 뭐. 귀찮게 땅까지. 이 천한 이 땅에 미세먼지도 많은데. 오셔가지고 마스크 쓰고 오실 리는 없지.’ 그게 편한 거예요. 이 연속성이 편한 거예요. 여자로 인하여 태어났다는 게 이게 자기 현실을 생각하는데 이게 아주 맞아 떨어진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래서 망한 거예요. 하나님 아버지가 왜 육의 아버지를 섬기는 이스라엘을 이렇게 계속 살려주는지 그 이유를 놓치면서 살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결국 멸망한 겁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고 하면서 이 안에 뭐가 있느냐 하면 다른 이스라엘을 생각한 겁니다. 다른 이스라엘.

인간들이 육의 연속성 속에 있는 생각하는 이스라엘 말고 다른 이스라엘을 육의 이스라엘 속에서 계속해서 끈기 있게 그게 구성해 왔던 거예요. 구성했던 거예요.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성경에서는 남은 자. 레멘트. 남은 자. 깎아내고 남아 있는 거예요. 계속 깎아 나가는 거예요. 계속해서. 콩나물 한 소쿠리에 얼마입니까? 삼만원입니다. 깎아주세요. 이만원입니다. 더 깎아주세요. 만원입니다. 오천원. 더 깎아주세요. 삼천원. 더 깎아주세요. 천원. 더 깎아주세요. 에이, 다 가져가거라.

깎고, 깎고, 깎고 하게 되면 뭐가 돼요? 삼만원하던 가격이 얼마였습니까? 콩나물 가격이 제로가 되지요. 이게 뭐냐 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육적인 이스라엘과 만나면서 육적인 이스라엘을 뭘로 만드느냐 하면 제로로 만들어요. 제로는 뭐냐 하면 바로 흙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무로 돌아가는 거예요. 없음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없음으로 돌아가야 없음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진짜 하나님의 아버지가 기대한 이스라엘을 없음을 통해서 새롭게 만드시는 거예요.

그러면 육적인 이스라엘은 뭐냐 깎는 과정이에요. 삼만원, 이만원 계속 깎는 거예요. 깎을 때 남은 자에서 또 남게 되고, 남은 자에서 또 남게 되겠지요. 그렇지요. 여러분이 수준이 있더라도 성경을 찾아봅시다.

이사야6장13절 한 번 봅시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아멘. 거룩한 씨가 남아있다. 제가 지난 낮 설교 때 헬렘이라고 이야기하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드신 이유는 이스라엘 전체가 아니고 그 중에 진짜 하나님께서 뽑아내고자 하는 그 귀한 것들이, 귀한 것이 있어요. 귀한 것들이 아니고 귀한 것이 있어요. 단수에요.

그 귀한 그 분은 뭐냐 하면 제대로 하나님 아버지가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그럴 때 그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 관계가 되는 거예요. 아버지와 아들 관계. 하나님 아버지는 자기 아들 외에는 아무 생각이 없어요. 나머지는 깎아내기. 성도라 하는 것은 성도 자격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몸의 지체라는 몸의 구성 요소라는 이유 때문에 예수님의 몸의 한 부분이라는 이유 때문에 성도가 구원받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예수 안에서 구원 또는 성령 안에서 구원, 십자가 안에서의 구원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 여러분들이 혹시 칠곡의 가시나들 하는 다큐멘터리 들어봤습니까. 다큐멘터리 있어요. 그게 유명한 영화제에 초정 받은 건데요. 80넘은 할머니 7명이 새삼스럽게 뒤늦게 한글 배우면서 한글사랑에 빠진 다큐멘터리로 찍은 거예요. 여성감독이 했는가. 그걸 보니까 받아쓰기를 하거든요. 받아쓰기를 하는데 저한테는 의미 있는 받아쓰기였어요.

받아쓰기하면서 젊은 선생님이 문제를 냅니다. “자, 받아쓰기 하세요.” 여러 가지 죽 이야기하면서 ‘매실’ 하면 할머니 7명이 받아 적는 거예요. 선생님이 매실 할 때 아에 이와 어에 이를 구분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그 선생님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고, 고 작대기가 바깥으로 나와 있는지, 아니면 안으로 들어있는지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하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할머니는 ‘메실’ 이리 썼다 말이죠.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 유념하라. 유념하라 에요.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다면 우리가 뭐가 되느냐 무가 되어버려요. 이게 죽음이 된다고요. 죽음. 또는 제로. 이건 점. 포인트가 돼요. 그냥 점. 점은 위치만 있을 뿐이지 딴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 사람이 재산이 얼마인지, 키가 몇 센티인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니가 지금 어디 있느냐를 표시하는 징후가 되는 겁니다. 표현방법이 점이에요. 점.

예수 안에 있다는 말과 예수 밖에 있다는 말이 이것으로서 예수님과 함께 있는 운명 또는 미래가 보장되고, 예수 밖에는 지난 수요일 어제 이야기했지만, 내가 없는 곳에 너희가 있게 하리라. 예수님이 없는 곳에 그들이 있게 한다는 말은 결국은 그들이 어디에 간다는 말입니까. 예수 밖에서 쫓겨 가는 게 돼요. 그 쫓겨 감이 육적인 이스라엘 역사에서 충분하게 보여준 거예요.

내가 쫓아낸다는 것. 이 약속의 땅에서 쫓아낸다는 것이 니가 무슨 의미이냐를 알아야 된다는 말이에요. 그게 간음이에요. 니가 있기도 싫어하고, 나도 너하고 있기도 싫어하는 것. 서로가 있기를 싫어하는 거예요. 마음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 이 말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무가 아니니까. 나는 있음이니까.

있음이니까 내 것으로 꽉 차 있는 있음을 나는 우선적으로 생각하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이 파고들어오면 내 있음의 영광과 있음의 즐거움이 훼손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자기 바깥에 세워두는 겁니다. 하나님을. “나부터 우선이지 뭐 하나님 들어올 자리 없습니다.” 이리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그 사실을 몰랐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육의 연속성이기 때문에. 타고났기 때문에. 그냥 하나님 계시고 나 여기 있고 잘 섬기면 되고 실천하면 되고 순종하면 되고, 순복하면 되고, 사랑하면 되고, 주님에게 겸손하면 되지 않느냐, 이리 생각해요.

다시 말해서 나 있음과 하나님 있음으로서 이것이 이스라엘이 될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이 과거 이스라엘의 실패성입니다. 잘못된 거예요. 주님이 있음이 있으면 나는 있음에서 포기하고 없음이 되어야 돼요. 주님이 있음으로서 그게 내 존재에 충족되어야 돼요. 주님 한 분만 있으면 저는 더는 소원 없습니다. 주님으로 만족해야 되는데 그걸 성령의 충만이라 합니다.

스데반집사가 돌아 맞더라도 성령에 충만하기 때문에 자기 걱정 안했잖아요. 더 맞다가는 내가 죽을 수가 있겠구나! 그런 걱정 안했지요. 성령에 충만하기 때문에 돌이 날아오던 주님이 이렇게 하늘에서 기다리는 거 보고 그걸로 만족한 거예요.

고린도후서12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삼층천에 올라갔잖아요. 삼층천에 올라갔었다는 또 있다는 주장이 있어요. 전광훈 목사라고 지도 삼층천에 올라갔었다고 하는데 그건 믿을 게 못되고. 삼층천에 올라갔을 때 특징이 뭐냐 하면 나를 나라고 보지 않고, 그라고 it 그라고 표현했다고요. 어떤 분이 있는데 어떤 he 또는 어떤 그가 있는데, 그는 봤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나라는 것은 예수님이 대신하면 되니까. 주님 안에 내가 있다면 그 주님의 나가 내 나를 충분히 대체할 수 있다 이 말이죠. 그러려면 갈라디아서2장20절이 적용되지요. 나는 죽고 끝이냐, 아니죠.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다른 식으로 표현한다면 주님께서 날마다 나를 없애고 있어도 무로 돌리는 방식으로 주님은 내 안에 계시다.

밥을 먹더라도 주님이 주신 거, 잠을 자더라도 주께서 잠자게 했던 거, 주께서 하신 작용은 그 나가 아니라 주님에게 그 의미가 도로 회수가 되는 그런 방식으로 주께서 일하십니다. 주님 덕분에 잠을 잘 잤습니다. 가 아니라 “주께서 잠을 자게 하셨는데 그것이 주께서 하신 일입니다.” 라고 주님께 돌려드리는 거예요.

이것은 신약에 성령 받은 교회가 할 일이지, 구약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이것을 성사시킬 수가 없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본으로 해야 됩니다. 이 구약 이스라엘을 이런 식으로 철저하게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모른다. 라는 것이 이렇게 전제가 확실하게 알고 있어야 평소에 우리의 삶이 우리의 평소의 삶이 예수님하고 일대일로 맞먹는 식으로 되는 게 아니거든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항시 십자가를 앞장세우지 십자가 빼고, “주님 거기 계시지요. 나 여기 있습니다. 또 연락할까요?” 이런 식은 없어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하나님 만나면 죽습니다. 이 원칙을 이렇게 한 번 봅시다. 하나님 만나면 죽습니다. 똑같은 말이 하나님의 언약을 만나면 죽습니다. 이리 되는 거예요. 하나님 만나도 죽고, 하나님 언약을 만나도 죽어요. 이건 변동이 없어요. 변동이 없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우리는 지금 육에 있기 때문에 육은 영을 만나면 죽게 되어있어요. 이미 선악과 따먹었다는 그 원리를 위반했기 때문에 죽게 된다는 말보다도 더 정확한 말은 내가 죽었음이 확인되지요. 멀쩡하게 숨 쉬고 골프치고 운동해도 그 자체가 죽은 거예요. 쫄바지 입고 다이어트 한다고 뛰는 게 이게 지금 죽어있는 거예요.

죽어있다는 말은 육 안에 육만 있고 영은 없다는 상태가 죽어있는 상태에요. 아까 이스라엘의 연속성이지요. 좌우를 둘러봐도 전부 다 똑같은 인간들밖에 없는 거예요. 그 자체가 주님은 발견되지 않지요. 주님은 발견할 수 없지요. 살아있는 자가 발견될 수 없지요. 주님을 만나면 죽으니까. 그리고 주님의 언약을 만나도 죽습니다. 그런데 차이점이 있어요. 하나님을 만나면 죽지만, 언약을 만나면 죽이고 이 안에 살리지요. 죽은 채로 다시 주님과 만나는 게 성사되도록 하나님의 언약이 작용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레위인들이 벌벌 떨고 제사장이 벌벌 떨면서 그들의 어린양의 피를 하나님의 성막에서 잡을 때,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제물을 제단에서 벌건 불로 받을 때, 아무것도 모르고 바깥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편안하게 농사 잘 짓고, 편안하게 결혼식도 하고, 뛰 놀기도 하고, 공부도 하고, 아무 문제없는 거예요. 아무 문제가. 농사도 잘 짓고.

그래서 이스라엘은 그 농사 지은 것 중에서 십분의 일을 누구한테 바쳐라? 레위인에게 바치고 레위인은 십분의 일을 제사장에게 바치고, 제사장은 십분의 일을 누구한테 바쳐라? 하나님에게 바쳐라. 왜? 그 모든 소득은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는 과정 속에서 살렸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너희에게 풍성한 소출을 줬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답게 되려면 항상 무엇이 차질 없이 가동되어야 되고 제대로 엔진이 움직여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제사, 바른 제사가 계속 가동되어야 되겠지요. 그리고 사람들은 어디를 쳐다봐야 돼요? 그 피 흘린 제사에 효과에 효력에 자기의 모든 걸 다 걸어야 되겠지요.

만약에 예를 들면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과 전쟁을 한다. 전쟁하게 되면 자기 전쟁 아니지요. 자기는 죽었으니까. 전쟁을 한다면 누구 전쟁입니까? 주님과 그리고 이방민족과의 전쟁이죠. 그러면 그들은 뭐만 의지해야 돼요? 주님의 자기를 살렸던 그 방식이 바깥에 이방민족에게 동일하게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가를 봐야지요.

구약의 여로보함 이후에 남쪽의 유다왕 아사왕이 있습니다. 아사왕일 때, 그 때 여호사밧, 아사왕 자기 딴에 믿음 있다는 사람들이거든요. 믿음 있다는 사람인데 공통적으로 대군이 쳐들어왔어요. 이집트의 백만대군. 아랍나라, 모압 여러 가지 주변나라들이 쳐들어왔다 말이죠. 그럴 때 선지자들이 한 말이 있어요. 뭐냐 하면 찬송하세요. 그리고 겸손하세요. 자, 겸손이란 말은 나대지 말라는 말이지요. 손 털고 그 전쟁에서 벌벌 떨지 말고 주께서 어떻게 일하는가, 손들고 나오라 이 말입니다.

골리앗 전쟁에서 골리앗 할 때, 사울 왕을 비롯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군사들은 뭐했습니까? 골리앗을 쓰러뜨릴 때 뭐했어요? 아무것도 안했지요. 아, 했구나! 쳐다봤지요. 그것도 벌벌 떨면서. 그러니 죽은 자가 떤다는 말도 성립이 안 되는 이야기지요. 무슨 시체가 벌벌 떨어요. 걱정 근심이 늘어진 거예요. 소년 하나가 또 객기 부리다가 아주 개죽음 당하는구나! 아이고, 애가 오지랖이 넓어도 너무 넓다. 골리앗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고 소년 다윗을 걱정하지요.

그런데 소년 다윗은 누굴 걱정합니까? 어른들, 사울왕과 그 백성들을 걱정하고 있지요. 다윗이 하는 말이 뭐냐 하면 이번 전쟁은 사람 대 사람이 하는 전쟁이 아닙니다. 이건 하나님의 원수와 하나님과의 전쟁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존재이유입니다. 내가 구원받으려고 하는 것이 성도의 존재 이유가 아닙니다. 주님은 지금 어떤 식으로 자기 승리를 달성했는가, 그걸 우리가 남은 인생가지고 그걸 온몸으로 절감하라고, 느끼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거예요.

옛날 이스라엘처럼 그렇게 벌벌 떨면 안돼요. 이스라엘은 왜 벌벌 떨었느냐, 이스라엘이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본인이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존재가 있어버리면 존재는 반드시 뭘 요청하느냐 하면 소유를 요청한다고요. 소유를. 소유성을 발휘한다고요. 하나님이여, 내 편 돼 주셔가지고 이 이스라엘을 지켜주시옵소서. 이리 나온다고요.

태극기 부대 12월 14일날 지금 문재인 끌어내린다고 난리인데. 태극기 부대가 기도하는 이유가 뭡니까? 하나님이여, 그것도 살아계신 하나님이여!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사 이 대한민국을 좌파에서 살려주시옵소서. 나라 망하는 되서 살려 달라 하잖아요. 그 이 잘못을 누가 했다? 구약에서 누가 했어요? 이스라엘이 꾸준히 해 온 거예요. 꾸준히. 그 짓을 월급 받고 전문적으로 해 온 자들이 누구냐 하면 바로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에요. 가짜지요. 가라에요. 가라. 가짜들이에요.

이스라엘한테 월급을 받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위해서 존재하게 되는 겁니다. 병원에 가면 누가 있지요? 원목. 학교에 가면 누가 있지요? 교목. 군에 가면 누가 있지요? 군목. 교회에 가면 누가 있지요? 당회장. 이 거 다 뭐하는 짓들입니까? 이 사람들이. 뭐하는 짓들이에요? 자기 교회 지키고, 자기 나라 지키고, 자기 군대 지키고, 자기 사립학교 지키고. 자기 병원 지키고. 이게 구약 때 이스라엘이 망하면서 했던 짓이 이 짓이에요. 망하면서 하는 짓이.

이러한 선지자의 기도 속에는 뭐가 없느냐 하면, “우리는 죽어 마땅합니다.” 가 없어요. 내가 나를 치는 게 없어요. 내가 나를. 내가 기존의 육의 연속성이 있다는 이 자체가 주의 일에 대한 방해물이라는 사실이 없어요. 내가 여기 있다는 의식 때문에 주의 일은 지금 훼방 받고 있고 방해되고 있다는 그러한 죄책감도 없어요. 세상 돌아가는 것이 전부 다 어느 정도 나한테 건질 게 있어줘야 그게 세상이라고 우기는 겁니다. 그 자체가 주의 일에 훼방하는 짓인데.

제가 아까 받아쓰기 모습보고 예를 들었지요. 모습보고. 점, 선, 점, 선 할 때, 점과 점은 이스라엘 존재라 보고요, 존재와 존재 사이에 선이 있다 말이죠. 주께서 일을 하시는 거예요. 주께서 일을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의 존재는 점선에 불과한데. 점이 선 역할을 해버리면 주님의 일은 가려지고 없어져버리고 날아가 버리지요. 그냥 나 여기 이유도 모른 채 여기 있습니다. 있음으로 되는데 있어줘야 일은 누가 합니까? 이 점을 가지고 당기던지 밀던지 하던 그건 누가해요? 그건 지금 살아계신 주께서 그렇게 하시면 되잖아요. 논리적으로 봐서 이게 더 수월하지 않습니까?

인간들은 이 점선으로 해가지고 이걸 선형적 역사, 또는 선형적 역사 발전이라고 하는 거예요. 선형적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라이너 선으로 쫙 되어있는 거예요. 선으로 했는데 이건 안 끊어지겠지요. 예를 들면 “당신 교회 역사 몇 년 됐습니까?” 할 때, 그 역사. 주님께서는 다 토막내버리는 거예요. 전부 다. 이 선은 누가 가져가야 돼요? 주님이 가져가야 될 그 선을 인간들이 자기 예배당이나 자기 사업체나 자기 가정을 만들어놓고 이걸 선으로 쪼개버려요. 그냥 점에 불과한데.

야고보서 한 번 봅시다. 야고보서4장14절, 이건 너무 많이 해서 이거 할 때마다 자꾸 안양 모였던 그 광경이 생각나요. 그 때 이 대목 했거든요.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질문을 던져요. 너희의 생명은 무엇이냐. 너희 생명은 제로다. 또는 점이다. 또는 없다. 생명 자체가 없는 거죠. 왜? 잠시 있는 거 같은데 목숨이 붙어있는 거 같은데 돌아서니까 없어요. 올해도 얼마나 유명한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까. 함중아 죽었지요. 그 밖에 많은 사람이 죽었다 말이지요. 대우그룹의 김우중.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하고 김도올 하고 붙어 다니는 거. 도올 김용옥하고 붙어서 책도 나온 거 있어요.

없지요. 발인예배하고 요란하게 하지만 돌아서면 자기 선 긋기 바쁜데 남의 선 그거 기억 안합니다. 지 부모 돌아가셔도 1년만 되면 우리 어머니가 언제 돌아가셨더라. 이쯤 됐는데. 몇 일이더라. 제사 챙기는 불신자들은 그걸 또 꾸역 챙겨가지고 “형님, 오늘 아닙니까.” “아, 그런나.”

사람이 점이 업적을 남겨버리니까 수십년 지나도 계속해서 기념하고 그 사람을 또 회상하고 그래요.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김광석. 김광석이란 이 가수는 죽은지 몇 년 됐어요. 33살 때 죽고 난 뒤에 지금 매회 계속해서 되풀이하거든요. 노래는 남아있으니까. 그런 점에서 동영상도 없애야 되는데. 제가 한 게 아니니까 걱정은 안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지금 제가 강의한대로 의하면 이스라엘을 구원함이 아니고 무엇을 세우고, 무엇을 완성하기 위함이냐 하면 언약을 완성하기 함이라. 하나님은 육적인 범죄한 인간들을 들어가서 그 범죄한 인간이 있어줘야 언약이 돼요. 범죄한 인간이 죄가 없으면 의가 나오지를 않아요. 의가 따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죄를 이겼다는 그것이 의가 돼요. 죄 따로, 의 따로가 아니라 악마를 이겼다가 의가 되고, 죄를 이겼다가 되고, 용서가 죄를 이겼다. 그게 의에요.

그래서 인간은 죄 속에 있어야 되고 주님이 찾아와야 돼요. 주님이 찾아와서 주님의 아버지와 나라는 육신의 아버지와 또 내가 다시 아버지가 되니까. 육신의 아버지를 찾는다는 것은 이것은 육신적으로 존재감 있는 안정감 때문에 그래요. 안정감. 아버지가 없으면 어느 조직이든 아버지 같은 권위, 아버지 같은 위치가 없으면 어느 조직이든 혼돈에 빠져버립니다. 혼돈에 빠져요.

부부싸움 할 때 하잖아요. 남자들이. “이 집안에 도대체 어른이 누구고?” 어른이 누구고 백날 쳐도 세월가면 “저 어르신네 세상 버렸습니다.” 이런다고. 한 번 적어볼게요. 장례식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어르신네 그 다음에 세상 버렸습니다. 하지요. 세상을 포기했다. 이 말 아닙니까. 세상을 손을 놨다 이 말 아닙니까.

이걸 하나님을 만나면 죽으니까 또는 하나님의 언약을 만나면 죽으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냥 죽지 않고 언약을 통해서 죽게 하셔서 세상 버렸다는 사실을 언약 속에다가 완성태로 이 안에다가 같이 동참시켜 버리는 거예요. 언약 안에서 우리는 이미 세상을 버린 사람이에요. 날마다 죽노라, 하는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세상을 버린 사람이에요. 세상 버렸는데 자꾸 세상에서 벨이 죽은 사람한테 자꾸 오네요.

자, 주님의 언약이란 말씀을 안 보게 되면 또 이해 못하게 되면 인간은 아버지가 없으면 혼돈에 빠지잖아요. 그러니 어쨌든 간에 나의 존재의 안정성을 위해서라도 아버지 역할 하는 사람을 찾아 나서게 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인간을 의지하고 인간에게 기대는 거예요. 인간을 의지하고 인간을 기대요. 교회에서 목사를 의지하고, 회사에서는 사장님을 의지하고, 그 책임자를 의지하고 이렇게 해서 사람에게 기대는 겁니다. 좋아서 기대는 게 아니고 자신의 육적인 안정감을 도모하기 위해서 기대는 거예요.

자신의 육적인 안정감을 도모하지 못할 때 그 때 나온 감정은 3자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걸 가지고 ‘외로움’이라 해요. 외로움. 외로움의 반대는 뭐냐 하면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이겁니다. 외로울 때 우리는 주께서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요. 주께서 함께 있었던 사람의 고백이 이겁니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외로움이고 뭐고 다 날아갔어요. 외롭다는 말은 아직 배부르다는 말이에요. 아직 나 육적인 안정감을 포기 못하겠다는 뜻입니다.

여기 나라는 것은 그냥 나가 아니고 육적인 나. 이걸 기본으로 한 그게 나에요. 영적 나가 아니고 육적 나를 내가 포기 못하겠다는 이야기에요. 나는. 이 육적 나를. 있는 육을 왜 포기해? 이런 식이에요. 나는 지킨다. 뭘 지키느냐, 육적인 나는 나를 지키고 싶어. 평생토록. 이건 구약 이스라엘이나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고요.

혈육에서 우리는 벗어나는 법을 몰라요. 그리고 벗어날 수도 없고요. 벗어나가지고 친구들 떠나면 갑자기 여기에 허전함과 외로움이 나타나는 거예요. 감사합니다. 가 아니라 외로워진 거예요. 외롭다는 것은 내가 나의 지분을 일부를 제공한 그 쪽이 내 앞에 눈에 띄지 않으니까 갑자기 나한테 결핍이 생기는 거예요.

70년 동안 한 부부로 살다가 남편이 먼저 죽었다. 그러면 여자가 뭘 느낍니까? 외로움을 느끼겠지요. 이 말은 인간의 자아라 하는 것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에요. 인간의 존재의 의미는 혼자인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것이고 타인의 것이에요. 그 타인이 없으니까 자기의 살 이유를 없어져버린 거예요. “아이고~ 이 영감쟁이. 영감쟁이. 그렇게 병들었다고 나를 애를 먹이더니 왜 그렇게 훌쩍 가노.” 죽은 사람에게 없는데, 훌쩍 가노.

그것은 바로 지독한 영감 사랑이 아니고 지독한 자기 사랑이다. 당신이 없으면 내가 구성이 안 되니까. 나의 안정성 있는 내가 구성이 안 되니까. 이것들이 모여서 구약의 뭘 이루느냐, 이스라엘을 이루었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이것들이 오늘날 교회를 이루거든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망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이 바로 주의 일을 방해한다는 거예요. 방해 놓았다.

자,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일을 어떻게 하시는가, 육으로 된 인간 연속성. 다시 해볼게요. 육의 연속성. 육의 연속성에서는 육적인 아버지를 존경하고 아버지를 찾고 있지요. 육적인 아버지를. 그게 바로 권위자. 권위자를 찾는 거예요. 권위자를 찾는 것은 권위자를 존경하기 위함이 아니라 나의 육적인 안정감을 확보하기 위해서 나는 소속이 어디며, 나는 누구 자식이며, 나는 누구의 아버지라는 이 결속력. 육적인 결속력.

이 결속력 안에서는 옷도 비슷하게 입고, 애들도 애들이 그렇거든요. 애들이 자기들이 하게 되면 자기들끼리만 쓰는 언어, 은밀한 단어, 말, 새로 만들어 내고 그리고 옷도 같이 입고. 옷의 컨셉도 비슷하고. 자기들끼리 어떤 결속력을 다지려는 공동체의식을 갖고 있는 거예요. 저희들끼리 그들끼리 육적인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오늘날 신천지 같은 거. 나는 성경도 모르는 교회에서 시련을 많이 받았다. 이게 바로 하나의 결속력을 제공하는 그들의 단결심이 되는 겁니다. 기존교회 이단에서 신천지 이단이 돼버린 거예요.

계속 누가 포기를 못합니까? 나는 여기 있다를 계속 이걸 붙들고 있는 거예요. 나는 여기 있다. 나는 구원받아야 되겠다는 기어이. 기어이 나는 구원받아야 되겠다. 이게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인데.

그러니까 여기에 누가 찾아온 사람이 없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뭐로 오신다 했어요? 하나님 그냥 만나면 죽이잖아요. 여기서 하나님께서 생각하는 것은 진짜 이스라엘을 구상하는 거예요. 진짜 이스라엘을. 진짜 이스라엘은 죄 속에서 끄집어 낸 사람. 또는 죄 속에서 남은 자들이 현재 진짜 이스라엘을 구상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서세요. 있다가 보면 주께서 끄집어내 주시는 겁니다. 끄집어내주시는데 끄집어내는 방식이 도저히 육적으로서는 믿을 수 없는 내용으로 끄집어내주는 겁니다.

예를 들면 사라가 나이가 90이 넘었는데 임신을 했다. 이런 거요. 사라가 임신을 해버리니까 이스마엘은 뭐가 돼요? 이건 자식이 아닌 게 판정 나버리고 진짜 자식은, 이삭이 아버지가 이삭을 죽이려고 했잖아요. 죽은 데서 부활했잖아요. 죽은 데서 새로 생긴 자식. 또는 없던 데서 왜냐, 임신을 못했으니까. 아예 없던 데서 하나님의 뜻이 약속이 내장되어서 새로 임신해서 잉태된 사람.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는 그런 방식의 언약만 여기다 들이미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 있는 육의 사람은 끔쩍도 안하지요. 다시 태어나야 된다. 어떻게 태어날까요. 니고데모가 하는 말이 “엄마 뱃속에서 다시 태어납니까?” 솔직하게 자기의 본심을 유감없이 발휘하고만 거예요. 주님이 찾아갔을 때 우리도 그렇게 솔직해야 돼요. “저는 저 포기 못합니다. 저는 하나님보다 제가 우선이에요.” 하나님께서 “요거 기특한 거. 요거 기특한 거. 요거 죄 봐! 요거. 요렇게 기특할 수가. 요렇게 솔직할 수가. 이 천하의 괴수 봐! 이거 얼마나 예뻐. 요거. 니는 나를 핍박하는 자로다” 아멘. 대화가 돼요. 대화가. 대화가 된다고요. 대화가.

상상의 하나님을 백날 상상해봤자 그것은 도로 육의 안으로 다 떨어져요. 이게 하나의 자기들끼리의 종교적인 언어를 나누는 거 뿐이에요. 그냥 놀이지요. 종교놀이라니까요. 중요한 것은 혈육의 연속성이 중요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떻게 하느냐 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인간의 버티고 있는 육신의 아버지 사이에 뭘 하냐, 틈을 만들어버려요. 이걸 사이. 틈을 내게 만들어요. 틈을 내버리면 요건 뭐가 되느냐 하면 요건 끊어짐. 단절이 되는 겁니다.

니와 내 사이는 니가 내 쪽으로 건너올 수 없다. 분명히 하자. 베드로가 예수님 따라갈 때, 예수님이 하는 말이 “니는 현재 니가 있는 그 입장에서는 니 있을 곳이 없다. 니 자리는 없어. 내가 자리를 마련하게 되면 내가 니가 만든 게 아니고 니가 애쓰고 헌금하고 그런 거 말고, 내가 십자가 피로 만든 그 자리에 니가 있도록 내가 조치해 줄게.”
10분 쉽시다.
 공은주(IP:119.♡.152.148) 19-12-23 16:45 
안양20191212b야고보서 정리(꿈과 현실)-이 근호 목사


둘째 시간하겠습니다. 첫째시간에 사람들은 우리는 여자에게서 태어난다. 엄마에서 태어난다. 주님은 흙에서 없는데서 만들어진다. 이리 의견차이가 있었지요. 주님께서는 여자에게서 태어난다는 그것을 어떻게 언약 안에다가 흡수합니다. 그러면 그 여자는 뭐냐 하면 결혼하지 않은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방법이에요. 임신하지 못하는 여자가 임신이 되는 방법이에요. 아까 언약은 육이 갖고 있던 도저히 육으로서는 믿고 싶어도 못 믿을 내용만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언약을 만나면 일단은 다 죽어야 되니까. 그런데 문제는 안 죽고 말씀대로 살려고 애를 쓰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아버지가 아들을 낳고 자식을 낳게 되면 그 사이에 그냥 빈 공간이 아니고 여기서 무엇이 계속 투입되느냐 하면 언어가 투입되고, 언어투입과 자식은 언어습득이 일어나는 거예요.

언어투입과 언어 습득은 그런데 언어 단어 하나 하나마다 뭐가 있느냐 하면 개념들이 붙어있겠지요. 이 개념들이. 아버지가 준 이 단어 개념에 아들이 갖고 있던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그런 죄성, 욕망, 선악적인 욕망, 나밖에 모르는 나의 절대성, 이것으로 아버지가 준 언어를 캐취를 하는 겁니다. 내 것으로 만들지요. 겉으로는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 하면 아버지가 없으면 자기 인생에 혼돈이 일어나기 때문에. 충분히 이용할 가치가 있을 때까지는 아버지의 말을 듣는 척, 흉내 모방하는 식이에요. 여기서 아버지와 아들 관계는 무슨 관계냐, 언어를 투입하고 언어를 받는 관계. 언어를 받을 때 애들을 보면 애들, 갓난아기의 모든 말 90%가 뭐냐 하면 이게 명령어입니다. 명령안에는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권위가 포함되어 있어요. 권위.

이 권위가 아버지의 권위가 아들에게 나오게 되면 아들은 그 뜻도 아버지의 뜻도 무슨 뜻인지 몰라요. 그냥 순종해야 이 신상에 편할까 싶어서 여기에 그냥 말씀을 듣는 척하고 있지요. 이건 뭐냐 하면 바로 억압된 것. 억압되어있어요. 인간에게 계속 내부로 누적이 되어있습니다.

억압됐다는 말은 쉬운 말로 뭐냐, 늘 부모한테 주눅들어있는 거예요. 주눅 들고 억압이 되어있고 나중에 애가 크면서 주눅든 그 아버지의 말씀 단어는 내부적으로 억압하니까 자꾸 숨기고 감춰버리고 이걸 억눌러버리고 자기 나름대로의 자기 이상을 펼치기 위해서 또 사회에 나가서 어떤 일을 하지만, 그 내부에는 뭐가 있습니까. 아버지의 소리. 아버지 이름으로 주어졌던 자기의 그라운드. 존재의 바탕이 늘 하나의 족쇄처럼 깔려있는 거예요. 족쇄처럼.

아버지의 그 권위의 힘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거예요. 똑같은 방식으로 이스라엘이 자체적으로 하나님이 믿는다 하니까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서 그들은 주눅들어있는 거예요. 주눅들어있으니까 겉으로 여호와 믿는 척 계속해서 흉내 내고 모방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어디에 가있느냐 하면 자기 신을 이기고 싶은 신이 하라 한 것을, 아버지가 하라 한 것을 예를 들어서 꺾는 그걸 무시하고 그걸 뚫고 나오고 싶은 욕망이 있겠지요. 그게 무슨 신이냐 하면, 바알신인데. 바알신의 특징이 뭐냐 하면 바알은 본인들이 고른 신이에요. 여기는 하나님의 언약이 없어요. 바알신은 하나님의 언약이 없어요. 그저 주고받는 거예요. 얼마면 돼? 이런 식이에요. “얼마면 돼?”

그까진 사랑 얼마면 나를 사랑하겠어? 그 총각들이 아가씨가 자기 마음에 들기 위해서는 결혼하기 전에는 계속 퍼주고, 사주고, 음식 값 내고, 하는 이유가 그 좋아서가 아니라 자기 거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하거든요. 그런데 그 아가씨는 실컷 얻어먹고 가방에다 옷에다 얻어먹고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이건 데이트 폭력 안 일어날 수 없어요. 패죽이고 싶어. 실컷 얻어먹어놓고는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그러니까 뭔가 해준다는 말은 그걸 그냥 해준 적이 없어요. 자기 거 만들기 위한 작업에 나선 겁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이 함께 있다 하니까 하나님은 말씀대로 율법대로 해요. 그러니까 구약 성경을 보게 되면 사울왕도 하나님의 전쟁에 나갈 때는 반드시 제사를 지내라. 하는 그 법을 따라요. 따르는데 사무엘이 일부러 약속시간에 안 갑니다. 급하니까 제사드릴 자격이 없는데 본인이 제사 드리다가 그때 때맞춰서 타이밍에 맞춰서 깍꿍부터 해가지고 “니가 해야 할 짓을 안했다. 나는 너를 버렸다.” 이리 되거든요.

사울 입장에서는 굉장히 억울한 거예요. 사울은 뭐냐 하면 아버지의 시키는 대로 했다는 거예요. 시키는 대로. 그 언어가 투입됐고 나는 그걸 나한테 받아들였다는 거예요. 그러나 바로 그러한 자세 내가 하나님의 율법을 지켰다 하는 그 자세가 바로 뭐냐 하면 이건 패역한 자식이에요. 패역한 자식이에요.

이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거든요.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하는 그것이 이건 하나님의 뜻과 전혀 동떨어진 주장을 하는 겁니다. 율법을 준 것은 니 속에 얼마나 이 아버지한테 대항하고 싶은 꿍꿍이가 들어있음을 니가 몰래 감추기 위해서 말씀을 지켜주는 겁니다. 그냥.

지켜줘 가지고 아버지로 하여금 더 공격당하지 않도록 자기 방비에 나선 거예요. 그동안. 중요한 것은 아버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본인이 중요하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꼼장어 뱀장어 기다란 이스라엘을 행하여 계속 언약을 주십니다. 이스라엘을 향하여 언약을 주게 되면 여기서 뭐가 일어나느냐 하면 바로 전쟁 내부전쟁이 일어나지요.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지폐가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잘 흔들어보면 사진이 한 장인데 잘 해보면 뒷장 쪼개지잖아요. 이스라엘이 하나인데 계속 언약을 주니까 이스라엘이 이스라엘1, 이스라엘2로 내부적으로 갈라지는 겁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내부전쟁이에요.

이게 갈라지게 되면 오늘 본문에서 제일 중요한 주제 테마 나옵니다. 틈을 통해서 언약이 들어오게 되면 여기서 뭐가 생기는가 하나는 꿈, 하나는 현실입니다. 오늘 제목은 꿈과 현실이에요. 이게 야고보의 주제입니다. 꿈과 현실.

이 틈의 언약을 통해서 꿈과 현실이라고 있을 때 이 인간들이 생각하는 이게 하나님의 언약적인 꿈과 현실이라면 인간들이 생각하는 꿈과 현실은 또 따로 있겠지요. 이걸 전복, 거꾸로 뒤집어서 찾아와요. 꿈이라는 것이 현실이고 현실이 꿈이라는 방식으로 하나님은 자기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을 다루십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요셉의 꿈이지요. 요셉의 꿈. 요셉이 꿈꿨다고 하니까 형제들이 “꿈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래, 그 꿈이 얼마나 작살나는지 얼마나 무효화되는지를 내가 뽄대보여줄게.” 해가지고 꿈꾼 당사자를 죽여 버리지요. 요셉을 형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니까 그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라는 것이 얼마나 그 기대가 꿈에 불과한 것인지를 우리가 한 번 뽄대를 보여줄게. 해가지고 그 유대지도자와 백성들은 예수님을 제거해버립니다.

그 예수님을 제거함으로서 예수님이 주장했던 그 모든 것도 헛말이 되도록 그렇게 제거하는 거예요. 그렇게 될 때 인간세계와 하늘세계는 틈 또는 다른 말로 하면 단절성이 형성되어있다 라는 것을 드러낼 수가 있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이스라엘을 구약을 충실히 봐야 될 이유는 무엇 때문에 그러느냐 하면 인간들이 생각하는 현실이 뭐고 꿈이 뭐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것이 이스라엘뿐만 아니고 오늘날 우리도 여기에 이런 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우리가 말하는 현실은 바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에요.

꿈은 뭐냐 하면 그 나라 의가 꿈입니다. 돈도 안되고 현실에 전혀 보탬이 안돼요. 꿈같은 거예요. 일단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마실까가 보장된 상태에서 그 다음에 뭐 정의로움도 찾아야 되는데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와 교체되는 그 나라 의는 이건 거지 나사로 같으면 모르지만, 스데반 집사 같으면 모르지만 다른 사람한테는 이건 어림도 없는 짓이지요.

아, 교회가도 일단은 밥을 먹고 교회 가자는 말이지요. 돈도 없는데 무슨 교회 갈 때 기름 값도 없는데 교회를 가겠습니까. 순서라는 게 있잖아요. 순서. 문제는 우리 잘못은 뭐냐 우리의 현실에서는 교회 갈 때 내 앞에 내가 붙어요. 내가 교회 가잖아요. 내가.

그러나 주님의 현실에서는 주께서 교회가게 하셨다. 이리 되는 거예요. 이게 둘 사이에 단절되는 겁니다. 내가 교회 갈 때는 옷도 챙겨야 되고 바빠요. 헌금도 준비하고 가야 되지만. 주님께서는 교회에 오고 싶어도 내 뜻이 아니면 올 수가 없다가 되어버립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는 자기 성도를 이 땅에서 뭐로 보느냐, 주님이 보는 현실 속에서 우리를 뭐로 보느냐, 개로 봅니다.

그게 개무시가 되는데 우리를 아주 개로 봐버려요. 사람취급을 안합니다. 죽은 놈인데 내 뜻 실으라고 계속 개 같은 존재로 내가 봐주고 있다.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의 현실에서는 뭐냐 하면 내가 안정돼있고 내가 영웅 되고 내가 번듯하면 이것이 나의 소망으로 자리 잡고 이게 현실이 되는 겁니다.

자,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을 이렇게 보면 되지요. 의자가 있다면 의자에 나 홀로 앉아있어요. 혼자. 양보할 수 있지만 오래 있으면 안돼요. 궁댕이 차버리고 나가야 돼요. 여기서 모든 게 파생돼 나갑니다. 모든 것이. 회사도 있어야 되고, 자식도 있어야 되겠고, 돈도 있어야 되겠고, 교회도 있어야 되겠고, 교회가면 자기 공통적인 언어, 그리고 유니폼, 성가대 같은 유니폼입지요. 그리고 같은 말을 하지요. 거기에 같은 나이대에 권사나 집사 만나가지고 애들 유학간 이야기, 지한테만 재미있지만. 외손녀, 외손자 이쁜 거 보여주고, 스마트폰으로 해서 보여주고 이렇게 하지요.

이게 뭐냐 하면 외롭지 않은 나만의 현실을 행복하게 다잡는 하나의 나의 삶의 요령이고 방식이에요. 이게 현실이라. 이게 현실이라니까요. 그 외 것은 다 현실에 들어오지 못한 걸 꿈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입장에서 목사가 설교한다면 그 설교는 설교의 의미는 이 현실을 확장시키고 번창되고 안정되게 하는 그 의미만 여기서 더 추가적으로 받아들이지요. 5년 교회 다니면 요만큼, 10년 교회 다니면 이만큼, 50면 교회 다니면 내가 얼추 성경 말씀 안다는 의미로 이렇게 내 영역이 확장이 되는 겁니다.

나는 적어도 모태 신앙이다. 이런 거 있잖아요. 여기에 나오는 모든 성찬식이나 성례식 이런 것들이 내 건전한 의미를 도와주는 확장시켜주는 하나의 동기 부여가 되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하면 천국도 멀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는 지옥이 멀지 않았는데.

이렇게 되기 때문에 점점 더 이건 몸집이 커졌기 때문에 여기보고 회개하라는 소리도 소용없어요. 깨어지지 않아요. 어떤 목사가 회개하라 하면 요만큼 내줘요. 요만큼. 이건 놔두고. 진짜 가지고 싶은 나는 여기에 번듯하게 유지하고 있고. 지난 토요일날 내가 뭐 또 장보러 가가지고 누구 아줌마와 싸웠습니다. 요런 것만 되지도 않는 아무것도 아닌 것만 달랑 내놓고 나 회개했다. 이렇게 띄우는 거예요.

또 고난주일에 오라 하면 약간의 밥을 세끼 먹다가 두 끼로 줄이고 그리고 금요일 날 뷔페가 왕창 다 먹고. 보충하고. 해 달라 하면 해줘요. 제발 이것만큼은 건드리지 말라는 겁니다. 여기는 건드리지 말리는 거예요. 이게 유일한 현실의 낙이니까. 현실의 낙이 여기 있어요. 교회가면 이런 사람들이 끼리 끼리 모인 거예요.

나의 의는 건드리지 마! 나의 의는 건드리지 말라. 나의 의는. 내가 원하는 고난도 받아주고, 철야도 다 할 수 있는데 내가 의롭다는 거. 내가 우수하다는 거, 내가 괜찮은 존재라는 이걸 건드리면 나는 진짜 뭐 하나님이고 뭐고 예수고 뭐고 없다 나는. 그렇게 돼버린다. 나는. 공격에 나서겠지요.

이게 나를 건드리지 마라. 이게 선악과 따먹고 이게 뭐냐 하면 악마의 마음씨지요. 악마의 마음씨. 인간은 무슨 보물을 신주단지 모시듯이 악마가 주는 그 마음씨를 이건 지켜야 될 가장 최고의 것이라고 여기고 다 쥐고 있습니다. 자긍심 또는 자존심. 자존감. 이거 막 꼭 쥐고 있어요. 이거 없으면 나는 천국가도 슬플 것 같아. 이거 없으면 지옥 같은 거.

주님의 언약은 언약이 바로 어디로 겨냥하느냐 하면 이것을 겨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약을 뭐로 봤습니까? 나한테 필요한 것만 찾고 나머지는 꿈, 드림 하나의 허구로 봤지요.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서 그 허구라고 여겼던 것들이 실제 이스라엘의 국가의 운명과 자연현상을 동원시켜 버립니다. 이게 이제 미치는 거예요.

무시할 만한 선지자의 대수롭지 않은 그 불길한 말. 부정적인 선지자의 그 눈빛, 태도, 어디 감이 내가 구축한 이걸 건드려! 라고 내쫓을 때는 쉽게 내쫓는데 쉽게 죽여 버렸는데 죽은 자가 외쳤던 그 예언이 나중에 300년 후에 나중에는 몇십년 후에 그게 그대로 이스라엘의 역사가 돼서 이스라엘을 아주 말아먹게 되는 겁니다. 이건 뭐냐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모든 것은 파멸이라는 원칙.

하나님 만나면 죽는다. 하나님 언약 만나면 죽는다. 마찬가지거든요. 똑같아요. 그러면 언약이 오게 되면, 이 언약을 거부하게 되면 파멸이에요. 파멸이지만, 언약 안에서 미리 이야기한다는 말은 파멸을 인정하는 사람에게는 데려가겠다는 거예요. 언약이.

십자가 예수님이 지시고 등장했다는 말은 우리가 어떻게 살든, 지 자존심 챙기든 안 챙기든 관계없이 어차피 이 세상은 이미 파탄의 시기에 이미 진입했어요. 신약의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말은 이 현실세계는 이미 붕괴의 모드에 돌입한 겁니다. 파멸의 모드에 들어간 거예요. 해체 모드에 들어간 거예요.

수능 잘 치고 소용없습니다. 인간들은 현실을 지키기 위해서 유대인들은요 메시아를 기다렸어요. 메시아는 뭐냐 하면 실패하기를 대비해서 자신의 대리인을 기다린 거예요. 대리인. 이건 뭐냐, 내거를 부수지 않고 지켜줄 대리인 있잖아요. 또는 변호사 같은 거. 그래, 내가 지켜줄게. 위로해 주는 거예요.

요 대목에서 성경 한 번 찾아봐야 되겠지요. 미가 한 번 봅시다. 미가3장10절에서 11절,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는도다. 그들의 우두머리들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들의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들의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치면서도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임하지 아니한다. 그들의 현실관입니다. 그런나 실제로 주어진 현실은 그들은 망했습니다. 망하는 게 현실이에요.

왜냐하면 꿈이 현실로 되면 기존의 현실 노릇했던 것은 이제는 은퇴해야 돼요. 현실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이 붙들고 자기 몸 자존심을 여기면서 나는 건전해. 나는 살아야 돼. 나는 살아남아야 돼. 라는 것이 이건 그야말로 새벽2시에 꾸는 한밤꿈속의 이야기에요. 꿈속에 우리가 잠겨있는 거예요. 꿈속에 잠겨있는 거예요. 수조 속에다가 물이 있고 여기 젓가락을 놓게 되면 젓가락이 이렇게 곧게 물 부분에서는 곧게 있지만 위에서는 어떻게 됩니까. 꺾어진 것처럼 보이지요. 어? 젓가락이 끊어졌네. 하고 굽어서 열어보면 다시 똑바로거든요. 집어넣으면 또 굽어졌어요.

그건 우리 시각이 들어오는 빛이 물의 분자로 인하여 왜곡돼서 우리 눈에 들어온다 말이죠. 굽어진 걸로. 빛은 똑바로만 고집하기 때문에 물 분자에 의해서 왜곡된 상이 나오잖아요. 이것이 인간의 현실이라 하고 이게 인간들은 꿈이라 하지만 실제 현실에서 오는 그것이 이 인간의 현실 속에서는 뭡니까? 전부 다 왜곡되고 이걸 고린도전서에서는 뭐로 보느냐 하면 어리석은 이야기로. 어리석은 이야기.

어리석은 이야기라 하는 것은 내 현실 도모에 전혀 보탬이 안 되고 쓸모없는 이야기에요.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처럼 들리는 거예요. 돈이나 줘!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마실까만 달라는 말이야! 신앙생활은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 찾을게. 이런 식이다 말이죠. 이런 식. 배부르게 하면 하나님 찾지 말래도 구제하라면 구제할게요. 그런 식이다 말이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뭐냐 하면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하는데 그 나라 의가 함축한 누구냐 하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하라는 이 말이에요. 예수 그리스도를 구하라, 이 말이에요. 예수님을. 다시 말해서 나는 안 되고, 나는 아예 아니니까 주께서 나를 가지고 일을 하시옵소서. 이걸 구하라 이겁니다. 주께서 내 사이에 들어오셔서 주께서 일하시옵소서. 이걸 구하라 이 말이죠.

사도행전16장 보면 주일학교 때 그런 설교를 했지만, 간수가 죽으려고 했을 때, 사도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주 예수를 믿어라. 그러면 너희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지요. 그 말은 뭐냐, 간수는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처리한다고 본 거예요. 내가 죽을 수도 있고 살수도 있고, 이 문제는 내 지식과 내가 현실에 습득한 모든 지혜들이 그동안 이만큼 나를 살렸으니까 앞으로 내가 가는 길도 내가 알아서 내가 나한테 손대는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게 바로 속임수에 빠진 거예요. 미가를 여러분이 보셨지만, 그 당시에 있는 월급 받는 이 사람들이 그 백성들에게 뭐를 보상했느냐, 백성에게 돈 받고 뭘 보상했습니까? 긍정적 사고방식을 보상했지요. 잘 될 겁니다. 복 받으실 거예요. 희망을 가지세요. 꿈은 ☆이루어진다.

그러나 야고보서 다시 봅시다. 야고보서4장4절에 보면,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뭐가 된다? 원수지요.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이 인간 수조에 물에 들어오듯이 하나님이 왔건만, 우리가 그렇게 지키려는 이 세상은 무언가 안목 자체가 완전히 이건 악마적으로 무장되어서 반대로 생각해서 그 예수님을 우리의 원수로 본 거예요.

도대체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기에 인간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원수로 보고 구약 이스라엘도 마찬가지고 옛날 선지자들이 그렇게 했건만, 선지자를 자기 흠집 내는 내 것 지키려는 나의 잘남을 그걸 흠을 내는 나의 철천지원수로 간주해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지난 낮 설교 할 때 이랬잖아요. 우리가 속아야 된다고. 안 속으려하지 말고 속는 자가 구원받는다는 말은 내가 안 속으려고 똑똑하는 그 자체가 헛똑똑이에요. 십자가라 하는 것은 예수님 피하고 어떤 그런 논리하고 문제가 아니고 십자가 자체가 지금 틈을 만든다니까요. 우리가 있잖아요. 우리가 이걸 현실로 보잖아요. 그러면 주님께서 언약과 우리 사이에 꿈과 현실사이에 틈을 내가지고 틈을 통해서 계속해서 주의 십자가 쏟아지게 되면 단순히 뭐 예수님 십자가 어떠니 설명한다고 믿는 사람이 아니고 매사 모든 일에 있어서 주님께서는 나를 없애고자 하는 일을 하신다는 것에 대해서 모든 일에 감사하는 사람이 십자가를 제대로 보여주는 사람이에요.

나를 이 땅에서 없애는 거예요. “손 털고 가자 그만. 여기서 오래 살 생각하지 말고.” “우리 애가 요번에 수능 만점이에요.” “만점 먹고. 더러운 세상 더 살던 말던 니는 가자. 그만. 니 아는 애한테 맡기고. 만점 맞았으면 됐네. 지 먹고 살겠네. 그럼 너는 떠나자. 그것 붙들고 지 애 자랑하지 말고.” 이것을 주님의 징조라고 하는 거예요. 징조. 하나님의 증인이죠. 그리고 이 전쟁 이 영적 전쟁이 일어나는 겁니다. 우리 내부가 주님의 영적 전쟁에 전쟁터에요. 매일같이. 우리는 실패하는 걸 못 보고 두려워하고 짜증내고 제일 괴로워하는 게 실패하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은 “니 실패는 실패도 아니다. 나는 더 실패했어.”

그러면 우리는 “주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에서 나옵니까?” 물어본다면, 공동묘지에서 혼자 눈 뜬 마음이지요. 전부 다 자고 있는데 잠에 깨어보니까 전부 다 공동묘지에요. 볼록 볼록해. 눈 뜨고 앉아있는데 전부 다 볼록, 볼록, 볼록..., 다 죽었어. 전부 다. 조국도 죽어있고, 문재인도 죽어있고, 다 죽었어. 태극기 흔드는 사람 다 죽었고. 전부다 공동묘지라. 공동묘지니까 느낌이 어떻습니까? 그들 나름대로의 현실 속에 충실 한다고 와글, 와글, 와글하는데 이 성도는 어떠냐, 조용. 죽은 놈이 죽었으니 조용해.

판사가 권위 잡고 뭐라고 하는데 성도 입장에서는 그 죽은 시체가 이야기하는 거예요. 조용~.  남편이 뭐라고 열 내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해골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저 지금 무슨 소리하는 거야. 지금. 저 양반 꿈과 현실도 구분 못하고. 내가 보기에는 꿈인데, 자기는 유일한 현실이라고. 이거 놓치면 죽는다고 길길이 뛰고 난리도 아니에요.

“여보, 이거 집 계약하면 완전히 우리 이거 이사 가야돼. 그거 잡으면 요번에 강남에 진짜 내 친구인데 큰 특강 나왔는데 그거 아파트 하나 잡으면 우리는 3억 그냥 넘기는 거야.” 이런 식으로 나오면 우리는 “마음대로 하세요.” 뭐 말릴 필요도 없어요. 말린다고 의미 있는 거 아니거든요. “우리 요번에 3억 올렸다.” “잘됐네요.(짧게)” 떡이나 사먹어라. “당신은 뭐 같이 기뻐하고 해야지.” “무슨 기뻐해? 아직 전쟁 끝나지도 않았는데.” 언약이 들어왔다는 말은 이 세상은 파멸모드에요. ‘아, 파장은 저런 식으로 파장이 되는구나!’ 전부 다 주께서 저렇게 뒤엎어버리는구나!

그들은 자기를 숨기고 감출 자리만 찾고 있어요. 요한계시록에. 자기 몸 하나 숨길 자리만 찾고 있습니다. 왜? 육적인 연속성에서 얻은 것은 배운 것은 내 한 몸 챙기는 게 다다. 그게 육의 속성이 철두철미하게 있기 때문에. 육에서 나오지를 못하니까. 이 자체가 죽음인 거예요.

그래서 언약은 안 믿는 사람을 육에 가두어두는 거예요. 콘크리트로 육이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가두어 두는 거고. 언약이 있는 사람한테는 우리로 하여금 니가 전에 거기 현실에 가두어졌던 죄인 중에 하나다. 라는 것을 깨닫게 해요. 깨닫게 해버리면 죄인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내 구원 받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원래 점으로 가고, 이 점을 천국까지 이어지는 선은 누구 몫이냐 하면, 주께서 하실 몫이에요.

주께서 하실 때 그걸 뭘 하느냐 야고보서에서는 뭘 하느냐 하면, 말씀으로 율법으로 말씀으로 해요. 야고보서의 특징은 이걸 말씀은 살아있고, 우리는 죽어있고. 말씀 살기 위해서는 우리는 늘 죽어있는 것이 셋팅이 되어야 된다는 것이 야고보서의 내용입니다.

여러분들이 야고보서를 다 끝내면서 전체적인 윤곽은 그래요. 꿈과 현실이 뒤바뀌었다. 그 꿈같이 여겨지던 것이 현실에 가는 것은 이건 주의 말씀이 살아있어야 되지 우리가 펄떡 펄떡 살아있으면 안 된다. 말씀이 우리를 가지고 주의 현실, 주의 천국이라는 현실에 우리를 가게 하신다. 이것이 바로 야고보서의 전체의 흐름 내용입니다.

여기에 보게 되면 1장 2절 봅시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시험이지요. 시험을 만난다는 것은 틈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거예요. 시험이 유혹이라는 것을 감지하는 것은 성도에게만 감지가 되지요. 진짜 이스라엘에게만 감지가 돼요. 다른 사람은 감지를 못해요.

이 세상은 연속성이라니까요. 틈이 없어요. 꽉꽉 연결되어있어요. 무슨 틈이 있어요. 꽉 꽉 연결되어있는데. 그 하나가 덩어리인데. 외국에 가면 식빵 큰 걸 줘요. 그걸 집에 와서 칼로 적당히 잘라서 잼하고 소시지 갈라놓고 하거든요. 소시지 별로 맛도 없고 한국 소시지가 최고에요. 일단 덩치가 크잖아요. 덩어리가 틈이 없어요. 우리는 그걸 우리끼리 인간들끼리 하나의 현실로 보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의 현실은 예수님의 몸이 틈이 없어요. 예수님의 몸덩어리가 하나의 이미 완전한 빵덩어리가 되는 겁니다. 내 살이고, 내 피가 돼요. 주님의 피가 우리에게까지 다 흘러들어가니까. 이게 하나에요. 하나인데 우리가 이 땅에 사는 것은 뭐냐 하면 그 하나 이미 완료된 하나를 보여주는 징후, 또는 증상, 징조로서 일어나는 겁니다.

요거 좀 설명을 해드릴게요. 어떤 사람은 제 말을 들으면 24시간 늘 믿음 생활해야 되느냐, 그게 아니고 24시간 늘 그러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이 땅에서는 단절돼있어요. 은혜 받아도 돌아서면 마찬가지에요. 이 점과 이 점. 오후2시와 오후4시 사이에 우리는 다시 세상 드라마보고 좋다고 히히 걸걸 웃고 좋아합니다. 99억 누가 가지고 가느냐. 그런 드라마 있어요. 이 이야기에 푹 빠져있어요.

점과 점 사이에 선을 이어주는 거. 선을 이어주는 것은 우리 몫이 아니고 주님의 몫입니다. 이 선에서 내가 하나의 주님이 주신 진짜 전선으로 된 주님의 몸의 일부다. 몸의 덩어리다. 어떤 내 존재감을 못 느낄 때, 나에 대해서 나를 생각 안할 때 이게 하나의 징후라 하는데 그걸 증상이에요. 증상. 감기 들릴 때 콧물 나잖아요. 콧물이 늘 나지는 않잖아요. 그럼 숨도 못 쉬게요. 기침도 늘 나는 게 아니고. 기침하다가 10분 뒤에 기침하잖아요. 그 처음 기침과 끝 기침 사이에 이게 하나의 점이 되는 거예요. 증상이 생기고 또 그런 증상이 생기고. 또 증상이 생기는 거예요.

내 힘으로 이걸 메꾸면 안 된다니까요. 정신 바짝 차리고 오늘부터 신앙 생활한다. 그건 말도 안 되는 거예요. 그냥 막 사세요. 주님이 살아계시니까. 내가 살아있는 게 아니고. 나는 증상만 보이면 된다고요. 그저 세상 식구들하고 놀러갈 때는 펜션 놀고 즐기고 하다가 “여보, 이거 전에 있었던 사람이 오만원짜리 놓고 갔네. 횡재했다.” 남편이 이렇게 하면, “좋겠네. 당신이 하세요.” 이러면 되지. “니 같이 안 좋으냐. 그게 뭐 좋아. 그게.” 그 순간 갑자기 우리는 꿈에서 오백만원 주은 사람들 많아요. 꿈에서. 깨보면 개꿈이에요. 오백만원 줍고 천만원 주워도 그게 영생이 아니라니까요. 지옥이죠.

반면에 이 세상은 전부 다 지옥의 연속성이에요. 지옥의 연속성. 왜냐, 마지막 언약이 오게 되면 지옥의 지옥다움이 더욱 더 발악을 하기 시작합니다. 우는 사자와 같이 이제 마지막 때가 다 됐으니까 정말 이런 말 상스런 말을 쓰면 안 되지만, 지랄발광을 떤다. 지랄발광을 다 하는 거예요. 제목으로 할까.

우는 사자와 같이. 이미 최종점을 찍어버렸잖아요. 그게 내 집입니까. 주님의 몸에다가 확정됐으면 우리가 사는 것은 뭐냐 우리는 증상만 남아있고 나머지는 그냥 주께서 다음 증상까지 이어가는 그것을 우리가 바라보는 겁니다. 그걸 쳐다보는 거예요. 그럼 그냥 쳐다보는 게 아니고 세상에서 우리가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되지요. 그들의 언어. 언어를 우리는 습득하면서 그 의미가 그 의미가 아닌 것을 점점 알아가지요. ‘아, 이런 뜻이 아니구나!’

그전까지는 전부 다 내 호강하고 내 행복하고, 죽어서 천당 가는 말씀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이 모든 말씀은 예수님이 자기 언약을 다 이루었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너는 못 했는데, 나는 했어! 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일부러 우리가 보는 꿈의 세계에서 들어와 보니까 남들은 이걸 꿈이라고 보지만, 나한테만 유일하게 유일한 현실이 되는 겁니다.

야고보 말씀이 움직이는 거예요. 말씀이. 말씀이 굉장히 번잡하게 움직여요. 활발하게. 연못에 올챙이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연못 속에 깊이 들여다보면 그 작은 송사리들이 뭐 그리 바쁜지 나라 세울 일도 아닌데 뭐 그리 바쁘지요.

주님이 그렇게 바빠요.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늘 바쁘다고요. 늘. 오게 되면 커피 또 준비해야 되지. 이것도 준비해야 되지. 우리는 별 준비한 것도 없는데 주인이라고 뭐 여러 가지 청소도 해놓고, 생전 청소도 안하다가 청소도 해놓고, 신경 쓸 게 하도 많아서 말씀도 은혜 못 받고. 신경 쓸게 많아가지고. 나의 자존심과 내가 이만큼 최선을 다했습니다. 라는 그거 답도하기 위해서. 그게 꿈인데. 잠시잠간 그게 나의 잘남이 현실인 줄 알았던 거예요. 나는 없는 존재인데. 나는 잠시 있다고 착각한 거예요.

주님은 이 땅에 계십니다. 그런데 현실에 꾸준하고 현실에 그걸 유일한 현실이라고 보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은 보이지 않아요. 성령도 보이지를 않습니다. 따라서 성도도 보이지 않아요. 아무도 안 보여. 그들은 교인들은 보이지 성도는 보이지 않아요. 주님은 보이지 않고 아버지는 물론 안 보이고.

지금도 주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식으로 이 꿈속에서 일하지요. 그런데 이 꿈이 자기가 보이지 않는 그것이 유일한 현실인 것을 그들은 알지를 못했습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요셉 같은 경우 보세요. 정말 요셉은 너무나 하나님 앞에 원망을 많이 했지요. 하는 일이 제대로 되지를 않아요. 그리고 자기가 아무 내가 이러한 대우를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까 터무니없는 대우를 받는 것 자체가 오히려 하나님이 지금 제대로 나에게 현실로 꿈이 아니고 현실로 밀착해서 나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껴지는 순간, 순간이 되는 겁니다.

처음에는 “하나님 나한테 간섭하지 마세요. 힘듭니다.” 하다가 밀어내다가 오히려 밀어내는 게 아니고 오히려 내 뜻대로 잘될 때 ‘야, 이거 믿음 떨어졌구나!’ 이제 반대로 생각하는 거예요. ‘아이고, 주여! 뭔가 일이 잘못되었습니다. 이리 되면 안되는데. 왜 갑자기 우리 가정에 평화가 옵니까? 이건 말도 안  는 나한테 너무 분에 넘치는 대우십니다. 혜택입니다. 주여! 정말 싫어요. 이거. 너무 조용해요. 조용해서 무섭습니다.’

욥 같은 경우에 생각해 보세요. 욥은 나중에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아, 이게 내 인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에요. 나는 껍데기에 불과하고 포장지에 불과하고 내 용무는 장차오실 메시아를 미리 나한테 담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욥 이야기가 친구들 보기에는 현실로 보지 않고 우기는 걸로 보이는 거예요. 꿈같이 우기는 거.

그래서 친구들이 계속해서 욥에게 압박합니다. 제발 현실로 돌아오라. 그러면 욥의 친구들 현실 속에 들어오게 되면 무엇이 있느냐, 거기는 운명론자에요. 운명론자. 하나님은 주권이시다. 이런 게 있어요. 신은 모든 것을 다 하셨다. 이거 소용없는 이야기에요. 왜, 나를 건드리지 아니하면 나를 반대로 몰아가지 아니하면 이것조차도 개꿈에 불과합니다.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야고보서2장 한 번 봅시다. 25절,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기생 라합이 현실세계에서 거짓말했지요. 인간들이 말하는 현실세계에서. 인간이 말하는 현실세계에서 거짓말하는 것이 주님의 현실에서는 이것이 정의로운 일이에요.

인간들이 쓰는 단어를 예수님이 사용하시는데요.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전부 다 구라입니다. 거짓말입니다. 왜냐 하면 그 논리가 이 논리가 앞뒤가 맞는 게 하나도 없어요. 베드로도 이걸 이해 못해가지고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나오지요. 죽으시면 안 됩니다. 베드로도. 분명히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니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알게 하신 것은 니가 아니고 하늘에 있는 내 아버지라 했거든요. 니가 아니고. 너의 혈육이 아니라고 했어요. 혈육.

주님은 또 혈육하고 싸웁니다. 니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가 너에게 알게 했다. 이 말이에요. 이건 베드로가 아니라 반대로 생각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베드로는 솔직하게 자기의 본심을 드러내니까 베드로에게 하는 말이 “사탄아! 물러가라.” 니는 그동안 사탄이 경영하고 있고, 운영하고 있는 그 가게의 점원이었다. 니는 지금껏 들어온 것이 사탄의 이야기만 들어온 거예요.

주님한테 이야기 들어도 해석은 누가 합니까? 사탄 식으로 해석을 해버리는 거예요. 그러니 베드로는 결국은 예수님을 배신했지요. 하지만 나중에 누가 옵니까? 나중에 성령이 오시지요. 성령이 예수의 마음이 오게 되면 비로소 자기가 과거에 죄지은 것에 대해서 죄 지은 것을 아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죄 지은 것에 대해서 감사하면 감사 안 할 게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어요. 죄 지은 것도 감사한데, 착한 것은 말할 것도 없지요. 착하게 한 게 별로 없지만. 죄지은 것도 감사하게 되면 모든 일에 감사가 되는 거예요. 모든 일에. 감사 못할 게 없어요. 괜히 주첨 주첨 놀라지 마세요. 멈추지 마세요.

감사의 반대말은 뭐라고 했어요? 주일날. 복종의 반대말은 주저하지 않는 거예요. 그냥 주저하지 않는 거예요. 우리 속에 내가 말하는 게 아니고 성령이 이야기하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이제 이런 이야기를 다른 사람이 들으면 미쳤도다. 비현실주의자. 니 꿈속을 헤매는구나! 우리도 니 같이 믿는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다. 이게 운명론자에요. 욥의 친구들과 똑같은 사고방식이에요.

그 백날 신앙 믿으면 뭐합니까? 그게. 자기가 단절되어있는 사실을 폭로시키는 능력이 없는데요. 능력이라는 것은 내가 나를 지키는 자체가 주님과의 단절된 상태에 있는 그런 왜곡된 이 세상에 모습이다. 하는 것을 깨달을 때 그게 주님의 지금 주께서 일하시는 징조가 되는 겁니다.

사도행전3장1절 봅시다. 제 구시 기도시간에 나오지요.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낫게 했습니다. 자, 앉은뱅이를 낫게 할 때 앉은뱅이의 심정을 우리가 이해해야 됩니다. 앉은뱅이는 뭘 달라했습니까? 나에게 돈을 달라고 했지요.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뭡니까? 그 말을 딱 받아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나한테는 니가 달라는 것을 나는 절대로 주지를 않는다. 아시겠지요. 여러분, 일가친척가운데 돈 빌리러온 사람에게 분명히 이야기하세요. 니가 달라는 이유 때문에 니 달라는 것은 절대로 주지 않겠다.

“한 푼 주소.” 그러니까 못 주겠다. 왜, 니 입에서 한 푼 주소. 라는 말이 나왔기 때문에 못 주겠다. “성공하게 해주세요.” “그래서 나 성공 못 해주겠다.” 그러면 “실패하게 해주세요.” 그러면 주께서 “진짜가?” “솔직하니 이야기해! 실패를 빌미로 해서 성공을 우회적으로 얻으려 하는 거 아니야?” “예, 그렇습니다.” 하면 안준다. 일체 우리가 달라는 것도 협조해서 주께서 일 안합니다.

일단은 주께서 앉은뱅이를 찾아간 것은 앉은뱅이 수준이 돈밖에 모르는 수준이라는 점이 아주 정확하게 주님의 징후를 드러내는데 멋진 모델이 되는 거예요. 베드로와 요한을 보냈습니다. 니가 달라는 것을 주지 않는다. 그러면 내게 있는 거 줄게. 이게 꿈같은 거죠. 예수님을 너한테 줄게. 다른 사람이 들었으면 욕 되게 얻어먹었을 거예요. 비현실적인 이야기한다고.

이처럼 전도라 하는 것은 비현실적이에요. 그냥 비현실적이 아니고 일단은 그 쪽 받고, 콜하고 이쪽은 아무것도 안주고. 주께서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안 줌으로 말미암아 이미 우리가 넉넉하게 받고 있음을 그 현장에서 깨닫게 합니다.

왜? 그게 우리 소유가 아니고 주님의 징후기 때문에. 주님이 함께 있다는 징후기 때문에 함께 있음의 주도권이 주님께 있어야지 내가 주와 함께 있다고 나에게 주도권이 옮겨오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그 사람들이 병 낫고 난 뒤에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당신이 그렇게 했잖아.” 봤다고 이야기하죠. 그들은 현실에 속했으니까 봤거든요. 무슨 말을 주고받고 해가지고 벌떡 일어나는 걸 다 봤다 말이죠. 그럴 때 그 기적 받고, 콜! 받고 난 뒤에 그 뜻대로 안 해주고 반대로 나가버리지요. “우리는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하지요.

계속해서 그들의 의도를 안 받아주는 거예요. 이것은 바로 보이지 않는 주께서 살아계셔서 직접 그 사람을 낫게 했습니다. 3장16절입니다. 그들은 뭐냐,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다.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 살렸지요. 누구를? 예수님을 살렸지요.

그러면 예수님은 지금 죽은 거예요? 살은 거예요? 살아있지요. 예수님이 살아있으면 살아있는 티를 내야 될 거 아닙니까. 그 티가 세상을 꿈으로 만들고, 꿈을 현실로 만드는 그 작업에 주님은 지금 충실하게 부지런하게 지금도 일하시는 거예요. 오늘날 우리들 가지고. 그래서 우리의 몫은 뭐냐, 우리의 몫은 맨날 현실에 충실하지요. 나의 자존심에 충실하고, 내 것 밖에 모르지요.

그런데 이런 나이기에 돈밖에 모르는 나이기에 우리에게 뭐가 나오는가, 주님의 살아계시는 징후와 징조가 나온다는 게 이게 얼마나 단절을 넘어서는 놀라운 기적입니까. 어떻게 감이 세상과 동일하게 살면서도 예수님이 살아있다는 말을 어떻게 진심으로 할 수 있겠어요.

여기에 16절에 보면,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이 사람이 성하게 하였으니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있어요? 어떻게 됩니까? 믿음이 무슨 믿음입니까?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지요.

믿음의 제공 주체가 주인공이 누구지요? 예수님이지요. 예수님은 지금 눈으로 안 보이지만, 주인공으로 계신 거예요. 내 인생에 있어서 예수님은 그 나라의 주인공이에요. 그 주인공이 있고 우리는 앉은뱅이 같은 처지에 있는 겁니다. 돈을 받는 게 아니에요. 몸을 건강하게 받는 게 아니고. 앉은뱅이가 받은 것은 예수님과 앉은뱅이 사이에 연결고리, 믿음이라는 관계, 그 관계를 받은 거예요. 주께서 넣어주신 거예요. 그 관계가. 도로 앉은뱅이 되던, 빌어먹든 상관없어요. 이것이 바로 사도요한과 베드로가 똑같이 경험했던 겁니다.

자, 기생 라합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기생 라합은 분명히 무섭고 떨리고 그런 상황이 있었을 거예요. 현실이니까. 거짓말해서 잡히면 교도소 간다는 걸 뻔히 알아요. 알지만, 주께서 기생 라합으로 하여금 자기가 숨겨준 사람이 하나님의 진짜 이스라엘에 속한 사람이라는 걸 하나님이 우리에게 쳐들어 올 때, 여리고성은 파멸이거든요.

우리를 파멸하러 오신 그 파멸의 시대적 정신 속에서 살길은 뭐밖에 없습니까? 그 분을 대접하는 수밖에 없지요. 내 어떤 수모를 당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내 수모보다 더 우선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남이야 거짓말을 하든 말든 아낌없이 주께서 오신 분을 아낌없이 숨겨주듯이 이 전쟁 매일같이 우리가 치루고 있는 전쟁입니다. 그걸 통해서 우리는 이겼다가 아니라 주께서 또 나를 통해서 주님의 살아있다는 그 흔적, 징후를 날마다 드러내시는 겁니다.

“세상은 끝장나니까 세상에 발두지 말고 가자! 니는 원래부터, 처음부터 안개였잖아.” 라는 이야기. 야고보의 전체 내용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스라엘을 생각하면서 그들이 왜 실패했는지 똑같이 답습하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때에 주께서 찾아오셔서 우리가 그들과 똑같은 모습인 것을 깨우쳐주시니 더 이상 이 세상에 미련두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주님의 살아계심을 우리를 통해서 드러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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