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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14 00:30:37 조회 : 399         
혀 야고보서 3:6 200213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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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은주(IP:175.♡.135.128) 20-02-22 18:38 
안양20200213a야고보서 정리2(혀)-이 근호 목사

야고보서 총 정리하는 세 번째 시간이 되겠습니다. 야고보서3장부터 하겠습니다. 야고보서3장에서 혀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 있어요. 보통 구약에서는, 구약뿐만 아니고 인간에서는 그 사람의 특징들을 이야기할 때, 혀가 아니고 얼굴이지요. 선볼 때 헤~하고 혀 내밀고 선보지는 않잖아요. 선 볼 때는 얼굴보고 하지 혀보고 하지 않는다 말입니다. 사람이 이리 있는데, 보통 옷을 입고 꾸미고 얼굴은 화장을 해가지고 멋있게 하고 깔끔하게 웃으면서 만나잖아요.

그런데 철갑옷으로 싸매요. 혀를 빼고 온 몸을 다 가리는 거예요. 온 몸을. 차도르처럼. 이슬람 여인들이 온 몸을 다하는 것처럼 다 가리되 혀만  빼꼼히 내놓고, 혀만 내놓고 나머지는 다 가려버리는 겁니다. 야고보서3장에서.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좀 이상하지요. 혀만 내놓고. 입도 안돼요. 혀만 내놓아야 돼요. 나머지는 다 가린다는 것은 이상적인 모델 상을 찾지 마라, 에요.

야고보서에서 항상 인간보다 뭐가 우선이냐 하면 야고보서에서는 말씀이 우선이에요. 율법이 우선이에요. 말씀이 율법이 같이 쓰고 있는데. 이럴 때 인간세계는 뭘 원하느냐, 말씀이나 율법을 원하는 게 아니고 이상적인 모델이 본인이고 싶어 하는 겁니다. 이상적인 모델로. 본인이.

그래서 하루 온종일 아침 눈만 뜨면 늘 생각하는 것은 오늘 내 모습이 얼마나 근사할까, 남들 보기에 얼마나 근사하게 보일까, 그리고 3년 뒤에 5년 뒤에 모습은 어떻게 근사하게 이 세상 거리를 활보하고 있을까, 나는 어떤 멋진 집의 주인으로서 살고 있고, 내 가정이나 내 모든 직장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될까, 교회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될까, 그리고 자기가 자기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으로서 정립이 되어있을까, 그것을 사람들은 온 종일 생각합니다.

목표라는 거, 기대라는 거 있지요. 여러 번 제가 설명했습니다만, 인간의 자아라는 것. 어떤 사람은 자아라는 말만 하면 어렵다 해가지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자아라는 것은 매일같이 어디서 확인하느냐 하면 누구 앞에서 확인하느냐 하면 거울 앞에서 자아를 확인해요. 거울 앞에서. 아침에. 거울 보면 자기 모습이 비취잖아요. 자기가 자기 모습을 못 보니까. 전신거울 앞에 보는 거예요.

이 거울이 어느 날 깨졌다고 봅시다. 거울이 깨졌다. 거울이 집에 아예 없다고 봅시다. 그리고 이 지구상에 이상한 바이러스가 퍼져가지고 거울이라고 비취는 것은 다 녹아져 내렸다고 봅시다. 그렇게 되면 손거울이나 스마트폰거울이나 다 녹아져 내렸다고 봅시다. 하여튼 반사되는 건 전혀 없다고 본다면 자아를 본인이 알까요? 모를까요? 모르지요. 이게 바로 모든 전신을 다 가려버리고 혀만 내놓는 그거하고 유사한 겁니다.

야고보서에서 율법중심으로 말씀중심으로 나가야 되는데 인간은 정신을 어디에 팔고 있느냐 하면 오늘도 나 자신이 어느 정도 레벨이 올라와있는가, 어느 정도로 나는 잘 가꾸어져있는가에 거기에 정신이 다 팔려있는 거예요. 정신이 팔려있으니까 전신을 이 전체를 신경을 써야 되는 거예요. 머리부터 신발까지. 머리핀까지 전부 다. 모든 게 전부 다 나를 대변해 주고 있는 그런 사물들이에요. 머리부터 해서 전부 다.

만약에 그냥 대충 이렇게 머리 핀 꽂고 신발 신으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냥 가만있지 않고 속으로 하지요. ‘패션 감각하고는 참. 참 휘황찬란하다. 안 맞다. 바란스가 언바란스다.’ 사람이 그렇게 이야기하기도 하고 그렇게 이야기할까봐 사전에 밖에 나갈 때는 전신거울 앞에서 바란스가 제대로 인지 색깔이 맞는지를 보는 겁니다. 귀걸이는 벌건 거하고 신발은 시커먼 거 해가지고 바란스가 안 맞지요. 같은 브라운 계통을 하던지, 같은 초록 계통을 하던지, 나 자신을 근사하게 확립하는 여기에 모든 정신이 다 쏠려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서는 니는 딴 소리하지 말고 혀만 달랑 내놔라. 혀입니다. 얼굴이 아니고 혀입니다. 자, 거울 없어요. 거울 깼습니다. 거울을 깨버리면 뭐도 깨지겠어요? 자아도 별 볼일 없지요. 자아가 써먹을 데가 없어요. 거울이 없으면. 왜냐하면 내가 누군지를 모르니까.

기말치고 난 뒤에 성적이 나올 때 됐는데 애가 성적표를 엄마한테 보여야 되는데 “엄마, 나 머리 묶은 거 어때?” “애들이 머리 묶으니까 예쁘다고 하던데.” “내 안경 쓴 거 어때?” 엄마는 뭘 기다립니까? “야, 딴 소리 하지 마! 말 돌리지 말고 성적표 내놔 봐!” 엄마가 성적표 나올 애는 성적표 그 하나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율법의 완성도가 니 안에 들어있는지를.

그럼 혀는 뭐냐 하면 혀는 전신에 신체덩어리, 몸 덩어리는 필요 없어요. 뭐냐 하면 바로 육과 바로 몸이지요. 몸과 주님의 영, 영의 세계, 정신세계, 영의 세계의 매개체로 뭘 보느냐 하면 혀를 거론해버립니다. 혀. 혀가 매개체가 되어버려요. 희한하지요. 혀가 매개체가 됩니다.

혀에서 나오는 게 언어고, 말인데, 이 말에 불이 섞여있는지, 아니면 하늘의 것이 섞여있는지를 한 번 보겠다는 거예요. 불이 섞여있는지, 아니면 야고보서1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은사가 섞여있는지를 보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하늘의 은사는 이 세상에서는 성도의 혀를 통해서 전파된다. 또는 표현된다. 이렇게 지금 야고보는 정리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 자아가 얼마나 근사하냐를 묻는 게 아니고, 니 속에 들어있는 너의 본질이 혀를 통해서 언어를 통해서 바깥으로 나오는데, 그 나오는 것이 율법이 원래 원했던 그 내용과 일치되느냐를 보겠다. 이것이 야고보서의 진행 논리 과정입니다. 율법정신의 여기에 확산화 또는 확산되는 것, 발산되는 것을 야고보서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원하는 겁니다.

하늘의 은사 있잖아요. 야고보서1장17절 한 번 읽어볼까요.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모든 각양 좋은 것은 어디로부터 옵니까? 빛의 아버지로부터 오지요.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일괄적으로 욕심이라고 보고, 욕심이 있으니까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 사망의 지표, 사망의 환경 속에서 지금 모든 땅에 있는 것은 마지막 귀결이 사망으로 끝나요.

아무리 젊어도 나이 들면 다 죽습니다. 100살 넘었다고 좋아요? 우리나라에 현재 100살 넘은 사람이 약25천명됩니다. 많지요. 옛날에는 그렇게 안 많았는데. 그만큼 하나님께서 벌을 복역기간을 늘렸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 세상이라는 감옥에 하도 못돼먹었으니까 고생 더하라고 죽지는 않고 아파서 빌빌거리면서 치매 걸리면서 100살까지 계속 가는 거예요.

그것도 모르고 세상은 달리 해석해가지고 “야, 세상 좋아졌구나!” 이렇게 해석하는데 할 일없으면 가는 게 좋지요. 할 일없는데. 회사 할 일없어서 책상 빼고 의자 들고 갔는데 갈데없어가지고 퇴직하고 난 뒤에 퇴직금 받아놓고 갔으면 간 거지 맨날 할 일 없어 아침마다 와가지고 다시 그 회사 출근해서 턱하니 서서 지켜보고 있으면 그 직원들이 “과장님, 이제 퇴직했잖아요. 좀 꺼지세요. 가세요.” “갈 데가 없다. 놀던 데서 놀아.” 얼마나 귀찮겠어요. 그러니까 장수 앞에 효자 없습니다. 보통 병 앞에 효자 없다하는데 병 걸리면 다행인데 병 안 걸리고 오래있으면 더 골치 아파요.

치매 걸리고 오래 산다. 요거 괜찮아요. 요거 괜찮습니다. 간섭을 안 하기 때문에. 그런데 정신 말짱한데 오래 산다. 돈 가지고 자식들 줬다 폈다 놨다 해요. 정신이 온전하기 때문에. “너그 돈 때문에 나한테 찾아오지.” 아직 정신이 맑았거든요. 둘째 아들은 봉투에 얼마 넣었는데 니는 얼마 넣었는고? 이거 골치 아파요. 아주 골치 아픕니다. 자식들 온들 다 체크하게 되면 보통 문제 아닙니다. 아예 정신 없어가지고 요양병원에 지금 천구백 몇 년도인지 모를 때 편해요. 다 죽은 상태이기 때문에 있어도 없는 존재가 되기 때문에 편합니다.

그런데 말로는 오래사세요. 하지만 사실은 그거 본인한테는 세상에 대해서 이 욕심 많은 세상에서는 교도소 같은 동기들이 “형님, 출소하지 마시고 같이 있어주세요.” 하고 똑같은 이야기이기 때문에 안돼요.

계속 말씀드린다면 이 욕심이라는 것을 내가 달리 이야기했지요. 야고보서1장에서는 욕심이라고 되어있지만, 저는 이걸 이상적인 모델을 추구하는 것. 이게 욕심입니다. ‘아, 이거 아니야. 아니야. 이거 내 욕망에 충족되지 못해. 더 있을 거야. 오! 저 사람 좋네. 저 사람처럼 되고 싶어. 오! 저 가정 행복하네. 우리 가정도 저 가정처럼 행복해 지고 싶어.’이런 것.  ‘오! 저 차 뺐네. 천팔백 만원 주고 차 뺐네. 나도 중고라도 저거 한 번 해볼까.’ 김언중씨 백옥자 여사처럼. 중고차 산 거 뽑은 것처럼 그렇게 뽑고 싶은 거예요. 남 차사면 덩달아 지 차있는데도 또 차사고 싶어요. 어떤 사람은 차가 3대가 있는데 전기 차 산다고 떼 부리다가 또 세금으로 폭탄 맞은 사람도 있어요.

그러니 전부 다 뭐냐 하면 나의 이상적인 새로운 모델로 나한테 자꾸 다가오니까 욕심이 잉태하여 결국은 죄를 낳고 그 다음부터는 뭡니까? 죄가 장성하지요. 인격이 장성한 게 아니고, 야고보서에서는 내가 나의 주인공이 아니에요. 자아가 주인공이 아니고 이 세상이 있다는 이유 때문에 뭐가 주인공이냐 하면 유기체가 내가 아니고, 죄가 유기체가 되어버린 거예요. 내 안에 죄가 자라나는 거예요.

내가 자라나는 게 아니고, 내 안에 바이러스가 자라나는 것처럼 환자들에게는. 나는 나의 욕망을 내가 감당이 안돼요. 감당이 안돼요. 마치 집에서 강아지를 키우는데 어느 날부터 강아지가 주인행세하게 되면 감당을 못하잖아요. 주객이 바뀌었다 말이죠. 마찬가지로 죄가 들어오게 되면 주객이 바뀌어요. 죄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눈에 보이는 방법은 뭐냐, 보이지 않는 죄가 하나의 렌즈를 통해서 나오면 죄가 있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죄의 렌즈, 악마의 렌즈가 뭐냐 하면 인간은 자기 자아성을 욕망에 맞추어서 계속해서 키워간다는 거예요. 그리고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이 자아가 키워지는 것은 내가 키울 때에 본인 혼자 힘으로 키워지는 게 아닙니다. 주위에서 떠들어요. 동창생이 와서 옷 바꿔 입자. 신상 나왔다.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주위에서 떠들어요. 너무 구닥다리다. 옛날 패션이다. 그래야 팔리니까. 계속해가지고 ‘아, 그런가. 나는 이것이 만족한데. 아, 이거 만족한 상태가 아니구나! 아, 그래 내가 옷을 엉뚱하게 입었구나. 그러면 내가 이상적인 모델을 찾아가야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만약에 애가 성적이 2등하면 1등이 남아 있잖아요. 1등 남아있지만 전교1등 또 남아 있다고요. 대치동 학원에 몇 군데 다니느냐 그거 신경 쓴다고 자기는 엄마로서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하는데 그 할 일이 결국 추구하는 게 뭡니까. 이상적인 나, 이상적인 우리 가족 모델. 자꾸 이상적이 국가 모델. 자꾸 생각하는 거예요.

봉 준호 감독이 아카데미 작품상 4개를 타고 난 뒤에 일본에 있는 감독이 평하기를 같은 업종에 종사하면서 나는 봉 준호감독의 발밑에도 나는 못 들어간다. 이런 이야기했다고요. 발밑에도 못 들어간다. 그럼 그 사람은 감독을 그만 뒀습니까. 아니지요. 새로운 모델이 생긴 거예요. 그전에 서양인의 감독을 추구하다가 이제는 봉 준호감독을 추구하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이게 어떤 시상식이 있던지 우리 주변에 어떤 일이 벌어지면 모든 욕망은 거기에 좍 거기에 몰려오게 되어있어요. 모든 욕망이 거기에 몰려온다고요. 거기에 야고보서는 모든 그 욕망이 한 곳에 휩쓸리는 그 곳, 그 곳 자체에 대해서 뭐라고 반격하느냐 하면 여기 17절에 보면 각양 좋은 것은 어디서부터 오느냐 다 위로부터 오는 거예요. 위는 위라는 것은 뭐냐 하면 세상과 대립개념을 사용하고 있어요. 세상에서는 위를 모른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거예요.

그리고 세상에서는 위로 올라갈 수도 없어요. 아래는 따로고, 위는 따로에요. 위, 아래, 아래, 위 따로 놀아요. 야고보서에서는. 그러니까 이게 이미 나라는 유기체보다도 더 센 유기체가 죄인데 사실은 악령이라 보면 돼요. 악마. 악마가 인간을 장악해서 노림수가 뭐라 하던가요. 이상적인 모델상을 추구하는 겁니다.

반지하방에 살다가 호화저택 잔디밭 있는 그 호화저택을 들어가 보려고 하는 거예요. 그 쪽에. 거기에 들어가려고 하는 거예요. 거기에. 모든 사람이 그걸 추구하니까 상을 주는 거지요. 자기의 본질이 들킨 거죠. 인간의 모든 걸 가리고 혀만 있다면 혀에서 빠져나온 게 뭐냐 하면 아카데미 작품상이 빠져나온 겁니다. 모든 인간은 전부 다 한 통속이다. 동일했다.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공감하는 거예요. ‘그래, 우리가 원했던 바로 내용이 저거였었어. 그거다.’

그런데 야고보는 뭐냐 하늘이 있다. 그리고 하늘이 있기 때문에 땅에서는 하늘로 가질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여기 은사이기 때문에. 가장 좋은 것은 은사이기 때문에. 그럼 좋은 것은 하늘에 있다면 땅에 것은 뭡니까? 좋지 않다 정도가 아니고 악하다. 또는 나쁘다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나쁜 생각이 모아져서 자아가 만들어진 거예요. 나라는 게 만들어진 겁니다.

그래서 이 인간이 이 자아를 가지고 율법을 성취할 수 있느냐, 그런 방식은 이게 옛날 구약방식이라는 겁니다. 인간의 자아가지고 율법을 성취할 수 없어요. 자아는 이미 오염되어있기 때문에. 죄를 오염되어있기 때문에. 그렇다면 가장 좋은 은사를 받았다는 것은 이상적인 모델로 달려가는 게 아니에요. 다시 말해서 내가 하나님의 은사를 받게 되면 우리 가정은 행복할 것이다. 나는 건강할 것이다. 생활이 넉넉할 것이다. 이런 이상적인 모델은 야고보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뭐라고 하느냐 니 혀로 말해봐라. 자, 말해보자. 말해보게 되면 혀만 남고 나머지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나머지는 이것이 사라지겠지요. 그렇지요. 혀만 남고. 혀만 남고 사라지겠지요. 혀만 남고, 나머지는 전부 다 사라진다면 요 사라진 안에는 뭐만 남아 있느냐 하면, 이건 본질. 그 사람의 본질이 되는 겁니다.

이게 형체가 있느냐, 없느냐는 것은 야고보서에서는 따지지 않아요. 니 내부, 또는 니 내면, 내부에 하나님의 율법이 은사로 들어왔을 때는 그것이 혀로 통해서는 언어를 통해서 그 티가 나게 되어있다. 그 품새가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그대로 들어나게 되어있어요. “저 어때요?” 라고 하지 마라. 니가 뭐를 추구하고 니 입에서 나오는 관심사가 뭐냐를 니 혀로서 해봐라. 이 말이에요.

해보게 되면 그 혀에서 나온 말을 구분하겠다는 거예요. 지옥불이 나오는지, 하늘의 화목의 지혜의 말이 나오는지를 보겠다는 겁니다. 3장8절에 보면 독이 가득한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혜와 총명이 나오는지를 보겠다는 겁니다. 말입니다. 말.

많이 선생 되지 말라는 말은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모든 사람들이 결국은 남한테 자기의 의사를 이야기할 때 말로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기가 아는 사람한테는 자기가 제자가 하지만, 자기가 모르는 사람한테는 그 순간 자기는 스승의 기능을 하게 되어있어요.

여러분, 야고보 말고 갈라디아서를 한 번 봅시다. 갈라디아서1장8절을 보게 되면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지금 야고보서를 정리하면서 제가 제안해보는 겁니다. 여러분의 평소 입을 통해서 말을 통해서 저주가 거침없이 섞일 수 있는 말들을 할 수 있는 자신감이 있습니까? 사도바울은 이야기했는데. 이건 무슨 대단한 자심감이에요.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받는다는 말을 대인관계에 의해서 처음 보는 사람도 괜찮고, 대인관계에 의해서 아니면 TV생중계에 나가서 이것을 아주 신나게 아주 기쁘고 즐겁게 거침없이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거예요.

제가 무슨 이야기하느냐 하면 사도바울이 이 이야기를 할 때, 사도바울은 지금 신바람이 나서 이야기한다 말이에요. 신바람이 나서. 평소에 그의 본질은 도대체 어떻게 구성되었으면 이 저주 이야기가 아주 신이 났어. 시도 때도 없이 나는 이걸 이 저주이야기를 나는 노리고 있었다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이 그렇게 생각할 때 아까 사도바울이 이상적인 모델 상하고는 너무나 거리가 멀지요. ‘그래, 나는 이상적인 사도가 되어야 돼! 남들한테 존경받는 사도가 되어야 돼.’ 이런 마음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지요. ‘나는 훌륭한 목사가 되어야 돼.’ ‘나는 훌륭한 집사가 되어야 돼.’ 그런 마음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never, 결코 없어요.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은 뭐가 형성될 때, 바로 악마의 렌즈, 자아가 형성될 때나 신경을 쓸 문제입니다.

아까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야고보서에서는 율법의 완성, 말씀의 내용이 나온다고요. 그러려니 하지요. 하지만, 제가 갈라디아서1장8절 보니까 입에서 나오는 게 장난이 아니지요. 그래서 이게 뭐냐 하면 이렇게 표현해요. ‘현실 속에서 새로운 현실이 이 혀를 통해서 드디어 나온다.’ 술술 실타래 풀리듯이 나오는 거예요. 참 이게 성경이 장난이 아니지요.

그리고 갈라디아서1장9절에서 보게 되면,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 저주라는 단어를 거침없이 사용하고 있다는 거예요. 얼마나 자신감이 대단합니까. 자신감이라고 했지만, 더 정확히 말해서 자유입니다. 켕기는 게 없는 거예요. 자기 몸둥아리가 본질로만 되어있고 점선으로 되어있으니까 또는 다 가려졌으니까 아예 없는 거예요. 혀만 달랑 있고 혀 빼놓고 아무것도 없어요. 살, 팔, 다리, 정강이도 없고 엉덩이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혀만 달랑 있어요. 율법적 차원에서 볼 때에.

자아라는 게 없다니까요. 자아라는 것을 하나님은 인정을 안 해요. 니 혀 바닥에서 뭐가 나오는가 보자. 니 본질이 어떤가 보자. 지옥 갈 뉘앙스가 나오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화목과 지혜가 나오는지 진리가 나오는지 한 번 보자. 지옥의 말인지 아니면 지혜의 말인지 한 번 보자. 이것만 점검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선생된 자들이여, 조절해라. 니가 지옥불이 나오는지, 지혜가 나오는지 보자. 지금 그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니가 그 머리 염색 어디서 했어?” 이런 거 안 물어요. 천사들이 그런 거 묻지를 않는다고요. “어디 미장원에서 했는데?” 그런 거 안 묻는다니까요. “귀걸이 어디서 샀어?” 그런 거 안 물어요. “똥배는 왜 튀어나왔어?” 그런 거 안 묻습니다. 다이어트 제대로 했구나, 그런 거 안 묻는다니까요.

그 다음에 10절에 보면 뭐냐 하면 그걸 아주 확정을 지어버려요.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하나님과 사람을 이렇게 대비시켜놨어요. 같이 안 보고 대비시켜놨습니다. 해놓고,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의 혀가 아니다.

사도바울에서 있어서의 나라 하는 것은 말씀의 세계에서 내 입에서 나오는 본질을 누르면 뭐가 나오겠지요. 양갱이를 누르면 양갱이가 터져 나오듯이. 뭔가 누르면 그 내용이 입을 통해서 뭔가 나오겠지요. 왜냐하면 성령이 불의 혀같이 나왔으니까. 불의 혀. 오순절날 불의 혀같이 나왔으니까. 그만큼 언어가 중요한 거예요.

그러니 로마서10장에서도 같은 말이에요. 구원을 받는데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바위가 끊어지고 태풍이 불고 신종 코로나가 있고 그게 병이 낫고 그렇게 해서 그게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겁니다. 누구든지 내가 전한 복음을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되어있거든요. 로마서10장, 참 쉽지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되어있고. 전파가 중요해요. 전파하는 자가 없으면 어찌 들으리요. 되어있지요. 전파하는 자. 그리고 전파하는 자가 지가 전파하고 싶어서 전파하는 것이 아니고 보내심을 입은 자에 한해서만 전파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 로마서10장에서는 뭐냐 하면 성도를 하나의 빈 통으로 보는 거예요. 역시 자아는 없어요. 자아라는 것을 챙길 여유가 없어요. 그냥 말씀이 와서 쑥 통과하듯이 뭐 지나갔나? 쑥 지나간 거예요. 치킨 집에다가 치킨을 시켰는데 배달하는 총각이 이쁘다. “아이고, 총각 이쁘다.” 그런 거  물을 필요 없어요. 후딱 손에서 뭘 뺏어야 되느냐 하면 치킨만 뺏으면 되는 거예요. 그게 총각인지 결혼했는지 신경 쓸 거 없어요. 문제는 이쁜 총각인데 맛이 없어. 그러면 두 번 다시 전화 안 합니다. 아줌마든지 오토바이 탄 할망구가 오던지 관계없어요. 가성비대로 맞춰. 만오천원짜리 만오천원다운 치킨만 있으면 다음에 또 배달시켜 먹습니다.

하늘에서 온 은사는 야고보서에 의하면 율법의 완성 말씀이에요. 그 말씀의 내용은 원래 출처가 하늘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왜 땅이 아니어야 하는가. 땅은 왜 아닌가. 그건 야고보서 내용대로 땅은 지금 죄가 인간들을 전부 다 정신을 관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결국은 사망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세상이라서 여기는 각양 좋은 것은 이 땅에 찾아와도 살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봉 준호 감독이 작품상 받을 때 우리는 기뻐해야 돼요. 왜냐하면 그런 상 없어도 또 다시 그걸 확인하는 겁니다. 세상이 주는 상 없더라도 주면 받지만. 없더라도 그게 각양 좋은 건 아니거든요. 오히려 나를 이 자아를 더 이 세상에 머물고자 하게 만든다면 이건 좋은 게 아니에요. 하나의 빈 관으로 쓰신다면 이제 다 썼다 하게 되면 오히려 홀가분하게 이제는 퇴직하시면 되는 겁니다. 떠나면 되는 겁니다. 관으로.

다 쓰지도 않았는데 지가 알아서 자살하고 이러면 또 안 되고요. 주께서 다 쓰실 때 떠날 준비가 돼있다면 그 사람 입에서는 하늘의 것만 계속해서 평소에 나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모든 행위 같은 것도 나오지요.

다시 강의를 처음부터 하게 되면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이거에요. 자, 지금까지는 서론이에요. 한 사람 안 왔기 때문에 서론이에요. 본론은 다 오셔야 본론이 되는 겁니다. 주님의 지시와 나의 지시. 내가 누구 지시를 받고 사느냐를 보자. 내가 평소에 누구 지시 받고 사느냐. 인간의 지시는요, 항상 뭐와 관련되어 있느냐 하면 괜찮은 자아상과 관련되어있어요. 괜찮은 자아상과 관련되어 있는데, 주님의 지시는 이 자아상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아상을 인정하지 않아요.

그러면 주님의 지시와 나의 지시 사이가 함께 이 세상의 몸을 지니고 있으니까 여기에 악마의 작용도 함께 있지요. 이 가운데서 주님은 나에게 무엇을 지시하느냐 하면 나의 지시를 뭐하느냐 하면, 여기 나가 있잖아요. 내가 항상 주님의 있을 자리를 내가 건방지게 자꾸 빨리 이걸 치우는 경향이 있어요. 그런데 치운 경향을 이 인간의 육이 있는 이상은 이걸 어떻게 조절하거나 저항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나는 나대로 내 육에 충실하고 주님은 지시대로 작용한다면 나는 필히 뭐가 되느냐 하면 이단이 되어야 돼요. 내가 이단. 특히 야고보서에서의 율법은 역시 율법적 기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나는 성도다 하는 자리에다가 나는 이단이라고 할 때, 만약에 내가 나를 지시한다면 이단이 마귀가 나를 지시하는 게 되겠지요. 이 자체를 첫 번째, 즐겁고 고맙고 감사하다. 요런 생각이 들 것이고,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서글프다, 구원에 실패했구나! 어쩌지? 무슨 노력을 더 해야 되느냐? 나는 초조하다. 나는 불안하다. 이 두 가지 중에서 성도는 뭐로 보느냐 하면 내가 이단된 것을 기쁘고 즐겁고 감사히 여기는 것이 바로 성도되는 거예요. 이 두 가지 외에는 없습니다. 이 두 가지 외에는 없어요. 이 둘 밖에 없어요.

자기가 이단된 것이 즐겁고, 기쁘고, 감사한 거예요. 다시 말해서 자기가 강도가 되고, 세리가 되고, 창기가 된 것을 기쁘고 즐거워하는 거예요. 나를 없애는 게 아니고 주님의 지시가 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고 계속 나를 살려요. 한 번 물어봅시다. 나라는 것이 세상에 속했습니까? 하늘에 속했습니까? 나라는 것이. 내 몸이. 세상에 속했지요. 세상에 속한 것은 죄에 그리고 거기에 욕심, 죄, 사망, 여기에 속한 것 중에 일부가 나기 때문에 나가 나의 본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은 결국 누구와 함께 있다는 거예요? 하늘의 각양 좋은 것과 함께 있다는 뜻이에요. 주님과 함께 있다는 뜻입니다.

만약에 내가 이단이 아니고 성도의 어떤 이상적인 모델을 생각한다면 거기는 노골적으로 이야기하지만, 여기 가로에 누가 포함되어있습니까? 나를 집어넣겠지요. 자아를 집어넣는다고요. (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도다. 이리되면 내가 여기 들어가겠지요. 이게 바로 뭐냐 하면 악마가 노리는 거예요. 악마가 원했던 겁니다.

처음부터 다시 하겠어요. 야고보서에서의 원하는 것은 자아입니까? 율법입니까? 율법이지요. 예수님은 율법대로 오셔서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하늘의 각양 은사를 무상으로 우리에게 줬잖아요. 무상으로. 그렇다면 우리 안에서 뭐가 갑이 되어서 살아나야 돼요? 주님의 은혜가 주님이 주신 각양 은사가 갑이 되어야 되겠지요. 그럼 갑이 갑 되려면 무엇이 을이 되어야 됩니까? 내가 을이 되어야 되지요. 나는 욕망이기 때문에. 을로서 나타난다는 것. 이게 바로 구원받은 사람 아닙니까.

지금 내가 말장난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사실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디모데전서에서 이야기했지요. 그 이야기를 왜 합니까? 복음 앞에서 나는 그런 것을 내가 복음이 아니었더라면 이걸 어찌 알았는가 말이에요. 하나님의 은사를 받지 않고서는 내가 이단인 것을 어떻게 내가 인정하겠느냐 말이지요. 자꾸 성도되려하고 이스라엘 되려하고 내가 구원받으려고 안타깝게 손톱 다나갔어. 절벽 올라간다고. 손톱 다 날아갔어. 이거. 그래도 나중에 미끄러지거든요. 자기 몸무게에 의해서. 자기 세상의 당기는 중력에 의해서.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일곱 번 실패하면 여덟 번 또 시도하고. 그게 무슨 짓입니까. 이게. 아이고~~ 그게 무슨 짓이에요.

이걸 로마서9장에서는 간단히 표시합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사랑이, 미움 받는 사람은 애초부터 본인이 무슨 행동하는 거 관계없이 미움이 있는 거예요.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뭐든지 무슨 짓을 해도 사랑이에요. 시부모가 며느리를 미워한다. 어떤 짓을 해봐요. 그 마음은 안 바뀝니다. 니 내 아들 손잡고 처음 올 때부터, 결혼하기 전에 우리 집에 놀러올 때부터 나는 기분 나뻤어. 하면 죽을 때까지 기분 나쁜 거예요. 백날해도 소용없어요. 애초부터 첫 인상이 기분 나쁘면 기분 나쁜 거예요. 오히려 시어머니한테 잘해주는 그 꼴이 더 미워.

맨탈에서 이겨야 돼요. 니 미우면 나는 나도 한 미움하거든. 같이 미워해버려야 돼요. 같이 미워해야 되지. 그래야 공평하거든요. 한 쪽은 미워하는데 한 쪽은 그걸 달래려고 그러지 마세요. 남편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에요. 남편이 싫어한다. 같이 싫어하면 돼요. 남편이 잔소리 한 마디 하려하는데, 남편은 그 한 마디 했을 뿐인데, 여자는 부엌에 가면 부엌에 따라가 가지고 계속, 계속 이야기해요. 부엌에 가면 부엌에 가서, 거실에 가면 거실에 가서 김언중씨를 백옥자여사가. 계속 따라가면서. 고만! 고만! 질리게 만들어버려요. 한 번 다시 그런 헛소리 했다봐라. 그게 얼마나 길게 했던지 광산김씨 테이프가 빨리 돌아가요. 너무 잔소리를 많이 해서. 한 마디 했다가 식겁했어. 키 큰 사람이 키 작은 사람 따라다니는 모습이 희한하지요.

무시로 기도한다는 것은 내 사적은 모든 기도가 이단입니다. 라는 걸 내용이 포함된 기도가 무시로 기도에요. 그게 뭐냐 하면 몸 위주가 아니고 진리 위주, 또는 복음 위주. 그래서 기도는 복음을 위해서 기도하는 거예요. 내 몸, 내 자아위주 아니에요. 몸이 어떻게 됐든 간에 그냥 복음과 진리만 발산되기를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나의 모든 전신은 다 가려버리고 뭐만 빼꼼히 내놓는다? 혀만 내놓는 거예요. 혀에서 뭐가 나옵니까? 언어가 나오거든요. 말이 나온다. 말이라는 것은  니 속에 있는 본질을 눌러보니까 이게 혀의 말로서 튀어나오는 거예요. 말로서.

그 말이 하늘의 은사와 일치되는지, 아니면 세상에 있는 인간의 욕망의 내용과 일치되는지를 보자는 겁니다. 세상과 욕망되면 그걸 이미 지옥불이라고 표현합니다. 야고보서에서는 지옥의 불.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악마의 독이라고 표현합니다. 독물이 묻어있는 말을 한다. 아무리 말을 해도 그 밑에는 독이 서려있고 지옥불이 있는 것은 딱 이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뭐냐 하면 ‘자아 긍정’이에요.

내가 니한테 잘해주니까 니도 잘해줘. 내가 니를 사랑하기 때문에 니도 나를 사랑해줘. 자, 그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자기 자아 긍정이지요. 내가 니를 사랑하는 그 자체에 대해서 니가 부정하지 마라. 내가 얼마나 인간성이 좋았으면 너 같은 인간을 사랑했느냐. 이게 다 깔려있어요. 부부사이도 마찬가지고 자식사이도 마찬가지고 다 깔려있어요.

그러면 가정에서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러면 되지요. “나는 이단이다!” 나 이단 깔고 들어가요.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구원될 수 없다를 밑에 깔고 들어가면 돼요. 왜? 나는 개판이기 때문에. 이걸 깔고 이야기하면 상대방에 대해서는 어떻게 뭐 티 잡을 게 없어요. 본인이 괴물이라는데 뭐. 알아서 괴물이라 하는데 뭐. 그 뭐라고 티를 잡습니까. 인간은 움직이는 폭탄입니다. 폭탄이에요. 그냥. 뭐가 터져 나올지 몰라요.

그래서 이 모든 것을 제가 야고보서는 율법 했지만, 제가 지난 설교에서는 이걸 가지고 기록이라고 하는 거예요. 기록. 말로서 기록. 우리에게 나오는 것은 내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야고보서에 이런 말들이 있더라. 로마서에 이런 말들이 있더라. 갈라디아서에 이런 말들이 있더라. 우째 그 말이 이단 같은 내 몸을 통해서 어떻게 복음이 나오느냐 말이지요. 나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그런 내용이 나오느냐 말이죠. 모든 인간은 죄인이고 주님만이 구원자다. 하는 그게 인간의 구원은 소용없고 주님만이 나온다는 말이 어떻게 나같이 나만 챙기는 인간에게 어떻게 입에서 그런 하늘의 본질이 나오는지. 본인이 깜놀! 본인이 깜짝 놀랄 지경이에요.

이건 내가 한 게 아니지요. 나는 이단이니까. 내가 한 게 아니고 성령이 나로 하여금 이단을 이단 되게 하는 그 과정 속에서 여분의 것으로 튀어나와버려요.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항상 우리 잘난 체 하기 때문에. 잘난체하는 나를 아주 이단으로 만드는 과정 속에서, 이단으로 만드는 그 에너지, 하늘의 에너지가 입에서 튀어나와버리면 이건 자기를 미워하는 거고 자기를 부인하는 거죠. 자기를 부인하고 오직 그리스도만 증거 하는 모습이 되는 거예요.

다시 해볼게요. 갈라디아서1장에. 사도바울은 자기의 말 속에 무슨 단어를 아주 자신감 있게 집어넣었다고 했습니까? 저주. 그럼 천주교에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니가 남을 저주하다니 그럼 너는 저주 안 받나?” 하겠지요. 그럼 사도바울이 준비된 게 뭡니까? 나도 이 복음, 이 기록, 이 주신 말씀, 나도 이 말씀을 내가 받지 않으면 나도 저주받는다고 1장 8절에서 이야기했잖아. 심지어 천사라 할지라도 심지어 말씀을 전하는 천사라 할지라도 심지어 복음을 아는 우리라 할지라도 이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뭐가 된다? 저주를 받는다. 그 저주 속에 나를 집어넣었잖아. 됐냐? 할 말 없지? 그게 바로 당당함이지요. 자유지요. 당당함. 자기 자신을 이단 속에 집어넣는 것. 저주 속에 집어넣는 거지요.

어제 수요일 날 설교하면서 제가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복음을 언급하면서 뒤에다가 그러나, 그런데, 하지만, 제발 이런 말 좀 넣지 말라는 말이죠. 이런 말을 집어넣는다는 것은 주님 생각하다가 갑자기 본인 생각나가지고 저도 좀 넣어주세요. 갑자기 혀만 남는 게 아니고 혓바닥 빼놓고 다 뒤집어씌웠는데 갑자기 이걸 벗겨버려. 괜찮은 혀 가졌으니까 나머지도 건져주시옵소서. 이런 본전 챙기겠다는 시도밖에 안돼요. 그러나, 하지만,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 우리한테는 필요 없습니다.

사도바울이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면 끝날 문제지요. 예를 들어서 내가 만약 야곱이라면 “나는 태초부터 사랑받기로 작정됐어. 그래서 나는 지금 턱 괴고 편안하게 있는 거야.” 여기에 무슨 하지만, 그러나, 이런 거 없어요. 끝났어. 끝났다는 뜻이거든요. 모든 게 최종적 완결된 상태의 자신감, 자유라는 말이죠.

“그런데 목사님, 그래도 자꾸 그런데, 그러나, 하지만, 저는 뭐 자꾸 그런 생각나는 걸 어떻게 합니까?” 처음시작은 주님부터 시작을 했어요. 하다가 가만히 보니까 자기가 복음 전하는 이상적인 모델이 갑자기 생각난 거예요. 지금 나는 잘 전하고 있지. 지금 하나님께서 천사가 지금 지켜보고 있는데 나는 지금 제대로 설교하고 있는 거야. 그지. 자기가 이단이 되어야 되는데 이단이 안 되고 복음 전한다는 그걸 근거로 해가지고 이단에서 면제된 사람처럼 지가 지금 이상적인 모델로 자기 자신을 모델화시키는 거예요.

복음 전하는 중에도 누가 작용합니까. 악마가 막 작용하는 거예요. 그걸 야고보서에서는 욕심이라고 해요. 이왕이면 이거해가지고 이왕이면 많은 사람이 3명 4명 말고 삼천명, 오천명이 갑자기 욕심이 막 생기기 시작하는 거예요. 욕심이. 어떤 실적에 대해서. 결과에 대해서.

그러니까 설교하는 것도 죄가 된다. 기도하는 것도 죄가 되고, 무시로 기도하는 거요, 무시로 기도하는 거 죄입니다. 무시로 기도하는 거. 뭘 해도 성경의 어떤 단어를 다 집어넣어도 이건 나하고 정착될 게 아니고 내 속에 있는 본질 혓바닥하고 이렇게 정착되어야 되지 나하고 정착되게 되면 결국 남는 것은 나잘났다 밖에 안돼요. 남이 지적하기 전에  먼저 내가 나를 지적할 줄 알아야 돼요.

우리는 그 자체가 기록이 되어야 되고요. 몸이 아니고 진리가 되어야 되겠지요. 복음이 되어야 돼요. 진리, 복음이 되기 위해서 강도는 평생 강도짓 했어야 되는 겁니다. 강도짓 했어야 돼요.

그래서 첫 째 시간을 마감하면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겁니다. ‘묵직함’ 길바닥에서 낙엽을 주우면 낙엽이 빳빳하지는 않잖아요. 낙엽이 휘어졌잖아요. 낙엽이 휘어지고, 은행잎도 이렇게 구부러져 있다면 여고생이 이걸 책갈피에 넣고 위에 묵직한 벽돌 석장을 덮어버리지요.

이 사소함이 자아와 결부될 때는 절대로 사소한 문제가 아닙니다. 사소한 문제가 아닙니다. 집에 수도관이 샌다. 이거 사소한 문제 아니거든요. 부르면 몇 시에 오고 나가야 되는데 몇 시에 오겠나, 이런 사소한 문제가 아닌데, 이 사소한 문제가 아닌 게 뭐냐 하면 자아가 사소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이 내 몸이 아픈 걸 아픈데 그걸 사소하다 하는 것은 그건 속임수에 불과해요. 꿈도 아니고요. 정말 사소한 게 아니거든요. 어떤 분이 애를 가르치는데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애가 하는 말이 “선생님, 어제 꿈에 어떤 괴물이 따라와요. 괴물이 막 따라와서 나를 잡으려고 해요.” 이 꿈을 분석하게 되면 문제가 괴물이 대단해 보이지만, 사실은 누가 더 대단해요? 괴물 앞에 잡히는 내가 평소에 대단하게 여겼기 때문에 적이 발생한 거죠. 아닌가요? 맞지요.

괴물이 괴물답다는 것은 평소에 얼마나 내가 괴물 이상으로 나를 더 중요시 여겼다는 것이 다 뽄대가 난 거예요. 다 들통이 난 겁니다. 그러니까 날 잡아먹는 괴물이 왔지요. 그래서 이럴 경우에는 어떻게 상담해줘야 될지. 상담은 간단해요. 뭐냐 하면 앞으로 괴물오거든 자기가 괴물 속에 들어가면 돼요. 괴물 속에 뭐가 들었는가 보자. 내가 괴물의 일부로서 들어가면 돼요. 도망치지 말고 그 속에 들어가 버리는 거예요. 악마 속에 들어가 버리는 겁니다. “에이, 별거 없네.” 이리 되거든요. 왜? 악마 속에 들어간다는 말은 니만 악마인가 나도 악마거든요.

악마 속에 들어간다는 것은 결국은 이 자아가 아무것도 아닌 게 바깥으로 괴물 노릇하고 악마 노릇하면서 “나는 위대하고 위대한 사람이 될 거야.” 하고 떠버리고 다녔다는 거지요. 허구가, 아무것도 아닌 허구가 죽으면 그만인 것을. 아까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잖아요. 그걸 필름을 거꾸로 돌리면 처음부터 우리는 사망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었던 거예요.

사망이 지배한다는 것은 이미 우리는 안개같이 없어지는 거예요. 없어지는 것이 되도 않게 유명세를 떨면서, 없어질 것들이 마치 영원한 것처럼 행세를 했던 그 허세, 그 객기, 그게 꿈으로 나타난 거예요. 괴물로 나타난 거예요. 괴물로. 앞으로 그런 꿈을 꾸거든 “반갑다. 괴물아! 목 벌려라. 내가 니 속에 들어갈게.” 하는 것처럼.

우리의 이 땅의 삶은 피하지 마시고 그 속에 그 구멍 속에 들어가 보세요. 들어가면 되는 거예요. “기껏 이거야? 나한테 협박의 본질이 이것밖에 안 돼?” 하고 그냥 한 번 들어가 보세요. 10분 드리겠습니다.
 공은주(IP:175.♡.135.128) 20-02-22 18:38 
안양20200213b야고보서 정리2(혀)-이 근호 목사

첫째시간에 한 끝부분을 다시 이어보겠습니다. 내가 이단이다. 라는 말을 내가 이단이라는 말을 억지로 하느냐, 감격스러워서 하느냐, 이단이 구원받으려고 설쳤던 그 모든 시도가 후회스럽다. 할 필요도 없고 해도 소용없는 짓거리를 내가 왜 지금껏 해왔느냐 누가 나를 속였느냐, 정말 분통이 터진다. 이단이 이단다워야지 뭘 더 원해. 라는 거. 이것은 바로 야고보서4장에 나오지만, 두 마음을 품었다 하는 것은 인간에게는 두 마음을 품을 수가 없어요. 우열이 되는 거예요. 우열. 누가 위냐, 누가 아래 되느냐가 되는 거예요. 인간이 자기가 욕심이 있다면 율법은 뒷전이 되는 겁니다. 할 수 없이.

양궁 있지요. 양궁을 보게 되면 여기 엑스트라 만점. 10점, 9점, 8점, 7점, 6점 있잖아요. 인간의 마음은 마치 양궁의 표적 같아요. 제일 중심에 되는 건 따로 있어요. 따로 있고,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들여서 예수 십자가 믿어서 십자가를 중간에다가 두고 싶어요. 자기 딴아. 나는 중심에 십자가 있다, 라는 그 인간 마음, 이런 마음 자체가 이단이라는 사실. 이게 마귀가 그렇게 시켰다는 사실을 인간은 도저히 성령이 오지 않으면 모르게 되어있어요. 성령이라는 말이 여기 4장5절에 나오는데요. 이게 바로 교만 되는 겁니다.

이 자리에 예수님이 계시려면요, 잘 들어보세요. 계시려면 내가 여기 있는 십자가를 내가 지식으로 알아서 공부해가지고 내 손으로 이걸 집어넣을 수가 없어요. 이게. 논리상 모순이 된다고요. 내 가운데는 가장 나다운 것이 거기에 박혀있어요. 내 마음 한 가운데는 가장 나다운 것. 이거 없으면 내가 아예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 이게 있어야 계속 나로 유지되는 그 무엇. 나다운 것이 있다.

나다운 것이 있기 때문에 어떤 경우라도 이 중앙부위가 나다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내가 이걸 누굴 십자가든 예수든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더라도 내 자리를 비운다 하는 것은 성립이 안 됩니다. 이 중앙자리를. 왜? 거기 비워버리면 나다움이 없으니까요.

심지어 거지 나사로 앞집에 살던 부자가 지옥가도 나다움이 있었어요? 없었어요? 지옥가도 있었지요. 거지보고 물 찍어달라고 했잖아요. 나다움이 있는 거예요. 끝까지. 여러분, 이 논리를 잘 보셔야 돼요. 내가 교회 다녀서 복음 듣고 누가 믿느냐 하면 내가 믿는다고 이야기해요. 내가 믿는다. “내가 믿습니다. 주의 이름을 믿습니다.” 주님이 “왜 믿는데?” “구원받으려고요.” “누가?”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나와 버리면 예수님이 오는 게 아니고 구원받은 나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요. 구원받은 나가. 구원받은 나가 자리를 차지한다고요.

이건 바로 욕심입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신이 되고자 하는 그 욕망과 소위 성경내용이 죽이 잘 맞았다고 인간이 본인이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은혜 받았습니다. 아이고, 나는 이런 복음일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 안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구원 받은 본인이 들어있는 거예요. 구원 받은 본인이.

그래서 사람들이 와서 십자가 이야기하고 예수 이야기하면 성질 안 나요. 왜? 예수님 벌써 십자가 지식 부분에 쫓겨나가 있기 때문에. 그런데 나 구원받았다, 에 시비 걸게 되면 뭐라고 합니까? 와락 폭발해버리죠. 결국 건드려봐야 제일 중앙부분에 너는 무엇으로 분노하느냐를 따져봐야 내 평소의 마음속에 무엇이 한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가가 그게 드러나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뭐라고 했느냐 하면 니 속에 로마서 같으면 십자가의 영, 성령이지요. 또는 마태복음 같으면 자기 십자가를 죽고 나와 함께, 십자가죠. 십자가가 있어야 된다는 거죠. 여기서 십자가가 중앙에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내가 이 그림을 그려가지고 내가 십자가를 모셔다가 집어넣는 게 아니에요. 집어넣는 게 아니고 기존에 있던 내가 있던 자리를 누가 아시는가, 주님이 뻔히 알아요.

니 속에 나만 알고 있는 게 아니고 우리가 무엇에 분노하고 무엇에 화내는지를 뻔히 안다 말이죠. 말이 어려우면, 쉬운 것으로 갑시다. 노아홍수 때, 홍수 나기 전에 사람들이 뭘 했습니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했지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예를 들어서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노아홍수 빼고요 그냥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판다. 라고만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뭐? 어째서? 뭐 사람들 다 그리 사는 거 맞잖아요. 그리 안사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다 그리 살지.” “아이고, 예수님! 그런 말해도 나 하나도 기분 안 나빠.” 기분 하나도 안 나빠요. 먹고, 마시고... 기분 안 나쁘다고요.

그런데 노아가 홍수 나기 직전에 먹고, 마시고 하니까 노아홍수가 심판이죠. 심판의 이유가 뭐라는 겁니까? 심판의 이유가 칼 쥐고 사람 죽이고 이거 아니에요. 심판의 이유가. 도적질한 게 아닙니다. 심판의 이유는 뭡니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가 이게 죄가 아닐 것이라고 여기는 그 자아성이 바로 심판의 이유가 돼요.

먹고, 마시고, 월급 받고, 일하고, 사고, 나이 많은 만큼 놀러 다니고, 영화 보러 다니고, 이 모든 것이 죄라는 생각, 설교하고, 강의하고, 교회 다니고, 죄라는 생각을 전혀 못하고 있다는 그것이 심판의 이유가 되는 거예요. “세상 사람이 세상살이 하는 게 뭐가 나쁩니까?” 라고 이야기할 때 그게 죄가 되는 겁니다.

그런 예는요, 흔히 세상에서 특히 결혼한 여자 쪽에서도 친정 쪽에서 그런 이야기 많이 해요. 친정 엄마가 결혼을 반대했는데 기어이 지 딸이 어떤 남자와 결혼했다 말이죠. 했는데, 그 집안은 안동권씨의 8대 장손집안이다. 일주일 스케줄이 제사지내는 음식 만드는 스케줄인 그 집에 시집갔다 합시다. 그 엄마는 그 딸이 꼴 보기 싫어서 하는 말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래, 시집가니 좋디?” 시집가니 좋디? 하지요. 다시 말해서 “시집가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파니 그게 좋으냐?” 라고 묻는 거죠.

그게 뭐냐 하면 니가 소속이 다르잖아. 니는 교회 다녀야되지 그 집에 지금 제사 거기에 빠져야 되겠느냐. 니는 소속이 다르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엄마가. 니 그 시간에 교회 나가 성가대 찬양해야 되는데. 교회 한 번도 못 나가고 맨날 큰 일 치르고 제사한다고. 그러니까 엄마가 화가 나가지고 “그렇게 그 집에 시집가니까 좋디 그래? 응?” 여차하거든 빨리 갈라서라. 빨리 나와. 이렇게 요청하잖아요. 그게 바로 주님의 마음이에요.

왜냐하면 사람들이 다들 그렇게 살아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사니까. 이게 당연하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자기 할 도리 다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그걸 누가 그렇게 긍정하느냐, 중앙에는 인간은 뭐가 있는 줄 몰라요. 모르는데,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중간에 7점, 6점짜리 하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이거 할 때, “좀 도와드릴까요?” 아이고, 좋다 하는 거예요. 그러나 이것 자체가 죄라고 지적하면서 파고 들어갈 때는 여기서 강력한 마지노 저지선이 발동되는 겁니다. 발동.

내가 뭐 어때서? 내가 뭐 어때서? 밥 먹고 사는 게 그렇게 죄냐? 밥 먹고 살겠다는데 그렇게 죄냐?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죄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에라, 니가 죽어라” 하고 예수님을 죽인 거예요. 이 그림은 양궁 표적 그림은 이렇게 추상적으로 그린 거지만.

사람 모습은 이렇게 되어있어요. 사람은 거울 보면 신체로 이렇게 있잖아요. 눈, 코, 입 있잖아요. 이런 사람이 몸체를 지탱할 수 있는 정신력이 어디 있느냐, 어디서 나오는가, 자기 정당성에서 나오는 겁니다. 자기 정당성. 자기 의에요. 그리고 자기 의고 여기에 대해서 외부에서 뭐라고 하면 여기서 뭐가 되느냐 하면 합리성이 여기 아주 작동을 해요. 변명을 하는 거예요. 합리적으로 변명. 변명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 이건 눈에 보이는 거고, 눈에 보이는 이걸 야고보의 율법의 법칙에 의해서 이걸 치워버리고 남는 것은 표적. 나 자신이 여기에 들어있다는 거죠. 내가 있다면 내가 곧 신이다. 이리 되는 겁니다.

여러분, 신이라 하는 것이 인류의 역사상 어디서 만들어졌느냐 하면 신이라는 것은 상인들에 의해서 이것이 만들어졌어요. 처음에 채집 그냥 열매 따먹는 채집생활, 주워 먹는 것, 따먹는 것, 채집 생활하다가 그 다음에 같이 비등한 시기에 정착을 하게 돼요. 정착하게 되면 농업이고 그 다음에 계속 떠돌아다니면 유목이 되거든요. 유목이 되는데 여기에 농사지을 때 손으로 하면 안 되잖아요. 그러면 뭘 해야 하느냐 하면 야생에 있는 가축을 길들여서 그걸 옆에 두고 키워야 되는 겁니다. 창세기2장에도 그게 나와 있어요. 그럼 이건 유목이 되겠지요. 농업과 유목이 거의 같이 가는 겁니다. 농사하고 하게 되니까 여기서 농업이 발달 돼요. 농업이 발달되는데 농기구의 발달 여러 가지 경험상 발달되게 되면 여기서 남는 여분의 생산물이 생겨납니다. 여분의 생산물이.

전에는 그저 하루 먹고 하다가 점점 발달되게 되면 여분의 것이 남아요. 바닷가에 산다고 하루에 고등어 3마리 필요해서 3, 4마리만 잡고 살았던 파푸아 뉴기아 주민들 옆에 호주가 와가지고 고등어 다 잡아갔잖아요. 잡아가니까 왠일이라? 저 사람들 매일 고등어만 먹고 살아? 이리 되는 거예요. 고등어만 먹고 사는 게 아니고 하루에 3마리만 필요하지만 그쪽은 고등어해가지고 그거 팔아가지고 그들은 다른 거 사먹고 그런다 말이죠. 고급신발이나 모든 것들을.

그때부터 파푸아뉴기아가 미개를 벗어나서 문명으로 가버려요. 여분의 것이 남으면 여분의 것은 이것은 무엇의 상대냐 하면 상인들의 무역을 할 수 있는 대상이 돼요. 무역을 하게 되겠지요. 무역을 하게 되면, 장사를 하면 이윤 없이 장사를 안 하잖아요. 그러면 장사를 할 때 거리가 멀면 멀수록 장사할 욕망이 더 땡겨지는 겁니다. 이쪽에서 천원짜리가 저쪽에서는 오천원짜리로 갔을 때 이윤 사천원을 보고 가지요. 가보니까 저쪽에는 만원한데. 그러면 오천원에 머물겠습니까. 만원짜리로 가겠습니까. 더 멀리 가겠지요. 더 멀리 가게 되면 이쪽에 있던 도시국가, 도시국가란 도시가 국가처럼 행세하는 것을 도시국가라 해요. 도시국가에서 거리가 멀리 떨어지면 도시국가는 하나의 그 백성들을 묶기 위해서 지도자가 영적 카리스마를 주장하기 위해서 신의 아들로 행세하거든요. 제사장이 신의 아들로 행세하는 거예요. 그래야 단결이 되어 농업 지을 때 힘을 합칠 수가 있습니다.

비오는 것도 신의 뜻이니까 모든 사람 전부 다 자기 일 그만두고 이 관계 사업에 전부 다 충실하세요. 해야 이게 잉여 생산물이 많이 생산될 수 있습니다. 협업과 분업이 되면서 농사를 많이 지거든요. 갈 때 이쪽 신으로 가서 마을이 멀 떨어져 있으면 저쪽에 나름대로의 신이 있겠지요. 신의 이름이 다 다른 거예요. 신이란 인간을 만들기 때문에. 신의 이름이 다를 때 장사하는 사람이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자기는 신의 이름으로 안하고 다른 신의 이름을 부르면 자기가 저주 받는다고 자기 동네에서는 그걸 알았잖아요. 뭐든지 처음 할 때가 어렵지 그 다음부터는 쉽거든요.

진짜 이 동네가가지고 물건은 팔아야 되겠고, 만약에 다른 신을 불러버리면 다른 신이라고 배타해버리면 장사가 안 되잖아요. 그래가지고 한 번 해본다고요. 장사를. 이거 하기 전에 정보를 알고 그 다음에 수집을 하게 되고 그 다음에 예측이 되면서, 예측이란 말은 합리적인 이성이 발달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장사꾼들이. 왜? 다른 지역에 낯선 그 새로움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럼 이쪽 신에 가가지고 자기 신이 여호와인데 “에이고, 나 알라 믿습니다.” 이렇게 하면 장사가 잘 되는 거예요. 장사가 잘되면서 한 쪽은 무슨 생각이 들겠습니까? ‘아이고, 여호와 버려가지고 벌 받는가’ 싶었는데 한 번 어겨보니 개코. 벌이 안와. 무탈해요. 한 번이 어렵지 그 다음부터는 뭡니까. 쉬운 거예요. 여기서 알라 역할하는 거예요. 그 다음에 장사할 때 여기 다 팔아먹었습니다. 그 다음에 다른 곳으로 가지요. 다른 곳에는 다른 신이 있겠지요. 그 다른 신도 아, 존경하고 그 종교행사에 참여하고 그러지요. 아무 탈 없어요.

이 사람들이 본국에 들어와서 도시국가의 재정을 확보해 줍니다. 자본을 확보해주니까 진짜 신이라는 것은 뭐냐 돈이 신이라는 사실에 눈을 뜨기 시작해요. 돈이. 신을 인정 안하는 게 아니에요. 신은 여러 가지다. 여러 가지고 신이라는 특징은 뭐냐, 나한테 혜택을 줄 때 좋은 신이 되는 거예요. 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파는데 유리하게 해주면 그걸 편하게 들어오게 되면 이게 좋은 신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쪽의 기존의 신을 믿던 제사장이 있겠지요. 예를 들면 그 제사장이 하는 말이 여러분들이 고3이 있거든 기도하세요. 주께서 살아계셔서 응답합니다. 하잖아요. 그래놓고 제사장은 기도에 복채 얻어서 자기 고액 과외 하는 거예요. 누가? 제사장들이. 제사장들은 신을 믿으면 안돼요. 왜? 신은 있어야 돼요. 신은 있되 제사장들이 목사들이 신을 안 믿어야 돼요. 그래야 자기가 살 수가 있어요. 왜냐하면 지금 돈 가진 자는 누굽니까. 상인계급이기 때문에. 그들의 돈벌이가 없으면 나라의 돈의 회전이 안 됩니다. 신은 꼭 필요한 거예요. 그래야 정신적으로 전부 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신의 뜻이라고 한다면 자기의 모든 죄 지은 것이 용서가 돼요. 왜? 제사장에게 십일조를 바치면 용서가 되니까. 면죄가 되니까요.

종교라는 게 얼마나 좋은 줄 몰라요. 돈은 더럽게 벌어놓고 천국은 갈 수 있는 그러한 방안은 다 교회가 있음으로서 방안은 다 되는 겁니다. 주님 뭐라고 했습니까? 근원적으로 따져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파는 것이 무엇의 근거다? 심판받는 근거다. 야고보서4장에서 이 세상을 쫓아난 것은 다 악한 것이다. 이 세상에서. 이 세상, 인간이 생각한 그 세상에서 쫓아난 것은 다 악한 것이다.

신은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각 쪽 신마다 다 다르고 그 신을 신으로 전파하기 위해서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돈은 신을 믿지는 않지만 신의 이름으로 마음이 편해진 사람들의 돈벌이에 의해서 성직자들이 생활의 유지 종교가 되니까, 종교가 되어야 정신적으로 안정이 되니 나라가 돼요. 안 그러면 지 잘났다 하면 안 되거든요. 그게 방금 이야기한 이것이 이스라엘의 멸망의 동기가 되는 겁니다.

구약에 나와 있던 이스라엘이 자꾸 바알신을 믿지요. 우리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여호와 믿으면서 왜 바알신을 믿는가, 이게 자본이 되려면 외국과 무역이 되어야 돼요. 농사짓는 사람이 다른 신을 믿어버리면 만약에 다른 신을 외쳐버리면 이게 농사꾼이 계몽이 되면 안돼요. 지는 왜 왕 노릇하지? 잘못된 게 아닌가, 이성이 깨어지면 안돼요. 그래, 저 사람은 왕이 되어야 할 팔자고, 나는 농사짓는 팔자다. 이리 되어야 나라꼴이 돼.

만약에 여러분 직원가운데서 로또를 샀는데 로또가 당첨돼가지고 기분 좋아서 아침에 출근했는데 위에 부장이 뭐라고 한다. 그럼 어떻게 돼요? 더러워서 내가 이 회사 인수할게. 주식은 다 가져와. 이게 얼마야? 25억. 내가 40억에 인수할게. 더러워서 이 회사 사버린다. 이리 되지요.

계급이라 하는 것은, 회사가 되려면 어떤 보이지 않는 권위 같은 것을 해가지고 이건 내 팔자다. 이런 게 있어야 돼요. 그렇게 되려면 인간의 이성을 초월한 초월적인 것을 해야 되는데. 이미 인류의 사회는 자본이 들어옴으로서 자본에 의해서 모든 것이 운영됨으로서 더 이상 신이라 하는 것은 허울에 불과합니다. 가상에 불과한 겁니다.

자, 아까 다시 해봅시다. 양궁. 중앙에 보통 나가 있다 했잖아요. 사실은 나가 있는 게 아니에요. 악마가 있어요. 악마가 있습니다. 악마는 보이지 않거든요. 영적인 존재기 때문에. 인간을 앞장세웁니다. 앞장세워서 야고보서4장에 의하면 세상에서 자꾸 쟁취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세상에서 지면 안 된다고. 나보고 자꾸 닦달을 내요. 이 세상에 제일 중요한 것은 뭐다? 너다. 너 자신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 예수, 하나님 다 너 천당 보내려고 하는 거야. 왜? 너가 중요하기 때문에. 그리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종교라는 겁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가 그것 때문에 그런 거예요. 목사치고 하나님 믿는 사람 없어요. 하나님 안 믿습니다. 그것을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 믿지 않고 교회를 믿지요. 자기 사업체 업소를 믿는다고요. 나는 교회 불나도 좋아요. 예수님만 좋아요. 그런 목사 거의 없어요.

여러분, 교회 불나는 게 벌 받은 거예요? 여러분 몸 아픈 게 벌 받은 겁니까? 이게 벌 받았다고 생각하면 여러분 안에 뭐가 들어있어요. 악마가 들어있는 거예요. 벌 받는다는 자체가 시건방진 일이에요. 왜? 태어난 거 자체가 벌 받아야 마땅한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벌 받는다 소리 하지 마세요. 사는 게 벌이에요. 나 위주로 사는 게 벌이에요. 그런데 그 벌에서 스스로 빠져나올 어떠한 가능성도 없고 그런 아이디어도 떠오르지도 않아요.

아니 내가 없어지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예수님은 좋겠다. 지는 구세주라고 그래, 좋다.”라고 비꼬는 사람들이 지옥 갈 사람들이에요. “그래, 구세주 많이 해라. 나를 지옥 보내고. 내 지옥 보내니 기분 좋디?” 이러고 있다고요. 지금. 이 자본주의 사회 그 당시 도시국가에서는 신과 뭐가 성립되는가 하면 신과 돈과 거래가 돼요.

그 거래를 누가 주선하느냐, 제사장들이 주선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뇌물 바치면 복 준다. 이 말은 당신은 복 받을 자격 있다는 겁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그러니 당신은 사랑받을 만한 조건이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신의 세계가 아니고 뭐냐, 인간의 세계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날 교회에서 하는 짓거리는 뭐냐, 여러분들이 전자제품을 택배로 받게 되면 택배 오겠지요. 홈쇼핑해서 전자제품 많이 받아보지요. 거기에 TV모든 부품들 함께 다 오잖아요. 그걸 이렇게 박스 째가지고 부품들 늘어놓으면 그게 TV 나옵니까? 안 나오지요. 꽂을 때 꽂고 회로는 연결해야 되잖아요. 그죠?

오늘날 교회가 어떤 거냐 하면 성경에서 나오는 개념들 전부 다 이야기해요. 십자가복음 전부 다 이야기해요. 성경대로 야고보서, 누가복음, 요한복음..., 성경공부 얼마나 많이 한다고요. CBS에 보면 성경공부 많이 하잖아요. 다 부품들이에요. 부품들. 부품들인데, 나중심의 뒤에는 배후에 악마가 있습니다. 나 중심의 여러 가지 것들을 성경구절들, 용어들 막 와요. 그런데 십자가로 하나로 회로가 연결이 안 되네요. 성경 단어부터 해가지고 줄줄이 외우고 성경으로부터 성경을 푼다는 교회가 한군데가 아니에요. 말씀으로 말씀을 푼다는 교회가 많아요. 많이 하는데. 많이 먹으라 해.

많이 하는데, 그렇게 많이 하는데, 보세요. 십자가를 경유하지를 않습니다. 십자가는 여러 가지 전자제품 부품 중에 하나에요. 부활도 있고, 십자가, 재림, 연결 못하고 그냥 놔둬버려요. 필요할 때, 병 아플 때는 이 구절, 애 성적 나쁠 때는 이 구절, 천당 갈 때는 이 구절, 천당 갈 때는 십자가 피로 용서받는다는 이 구절, 그리고 뭐 할 때는 기도할 때는 기도하라, 이 구절, 회로가 십자가로 모여들지를 않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뭐라고 해요? 십자가외에는 너희들이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도대체 사도바울은 그 구약의 성경구절, 그 많은 것을 어떻게 촘촘히 연결해서 달랑 딱 하나를 이야기하지요. 십자가. 그 십자가는 뭐냐 하면 이게 과거 사건이 아니고 지금 주님이 살아 있는 현존의 방식이에요. 현존의 방식. 주께서 살아있을 때 십자가로 살아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은 이 땅에서 철저히 패배자. 철저히 이단으로 사라졌습니다. 십자가라 하는 것은 이 메시아한테 한 행세가 이거였다고 보여주는 거예요.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서 패배했습니다. 저주 받았습니다. 아버지께 버림받았습니다. 그게 복음이에요. 그게 우리의 본질이었습니다. 버림 받아야 마땅했고, 이 땅에서 성공하면 안 되고 패배하는 종자야 되고, 왜? 아담에 속했으니까. 마땅히 패배해야 되고, 악마가 이겨야 되고, 인간은 패배해야 되고, 실패해야 되고, 죽어야 되고, 지옥가야 마땅하고.

세리와 창기와 강도 그것이 그리고 귀머거리, 앉은뱅이, 눈먼 봉사, 우리가 그 사람들 가지고 동정할 이유 없어요. 그 사람들이 우리의 본질이에요. 눈 감아서 불편한 게 당연하고, 눈 떠서 보인다는 게 과분한 은총 같아. 이게 과분한 거예요. 이게. 이 내가 행세하는 거하고는 나 눈뜨면 안 되는데. 나는 지금. 청아! 이리 되어야 되거든요. 청아! 어디 있느냐 청아! 심봉사가 되어야 돼요. 요나는 물에 빠져야 돼요. 고래 속에 완전히 노량진수산시장보다 냄새 더 많이 나야 돼요. 고래 속에 빠져야 돼요.

그 자리에서 나는 내 안에는, 내 중심에 하나님의 주님, 성전이 나한테 있다는 것. 나는 거기에 대한 시다바리, 하나의 종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지요. 하라하면 하는데, 종에 불과하지 내가 10점 만점 엑스트라 직전에 있으면 안 되거든요.

악마는 그 중심에다가 자꾸 우리를 불러 모아요. “성경공부 했냐? 방금 끝났지. 이리 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이게 지독한 현실이다. 이거 말고 다른 현실, 니가 머리가 있거든, 깨어있거든, 니가 합리적이거든, 이성적이거든, 머리로 생각해 봐라. 이거 말고 다른 거 뭐가 있느냐, 신에게 빌어라. 잘 먹고 잘살고 잘 팔고, 잘 싸고 행복하기 위해서 그거 때문에 신이 있는 거야.

이건 인류 역사상 계속 반복해서 했던 그 악마가 이야기했던 것을 계속해서 지금도 나한테 속삭이고 있어요.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에게 지시를 내린다고요. 아까 나의 지시 했지요. 정신 차려! 착각하지 말고. 망상가 되지 말고. 몽상가 되지 마라. 진짜 현실은 뭐냐, 먹고, 마시고, 끝! 그것뿐이야.

그런데 야고보서에서는 그게 바로 세상이다. 그 세상과 짝하면 하나님과 원수다. 야고보서4장4절 말씀. 그러니까 이 야고보서의 말씀이 얼마나 무서운 말이에요. 이건 정말 기적 받은 사람만 골라 가겠다는 뜻이거든요. 니가 애쓴 사람을 골라가는 것이 아니고 정말 하늘의 은사를 받은 사람 혹시 계세요? 그런 입장에서 찾아보는 겁니다.

그 봉 준호의 기생충이란 영화에 대해서 제가 오늘 아침에 그 뒤에 댓글 달았어요. 다시 보기에 댓글 달았어요. 뭐냐 하면 세상을 어떻게 개혁하겠다는 뜻이 아니에요. 봉 준호는. 뭐냐 하면 세상 있는 그대로 보면 세상에는 누가 착한지, 누가 선한지, 누가 악한지가 이젠 혼돈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러니 이 세상은 답이 없다.

내가 영화로 할 수 있는 것은 그 영화에도 나왔지만, 잘사는 사람이 선한 사람이다. 자본주의에서는 잘사는 사람이 선한 사람이에요. 남한테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선한 사람이에요. 나쁜 놈은 남 빌어먹고 남 지하에 살면서 결국은 칼 가지고 마지막 장면에 죽이지요. 주인을 죽이는 그 놈이 은혜를 받아놓고 은혜를 악으로 갚는 그 놈이 나쁜 거예요. 못사는 사람이 나쁘다, 라고 메시지를 전해버려요.

그러면 지금까지 혁명을 외치고 자본주의를 타파하자는 이 세상에 대해서 생각도 못한 쇼킹한 내용이 되어버려요. 적이 누가 따로 있어야 혁명이 되거든요. 혁명의 전복의 대상이 있어야 되는데 혁명이 가능한데 누가 적인지, 누가 아군인지 분간도 안 되는 세계에서 혁명 자체가 무의미해진 이 혼돈의 세계를 그대로 묘사해서 상 탄 겁니다. 그 메시지가 강렬해서. 적과 아군이 불분명해요.

다시 말해서 봉 준호 감독은 이 땅에서 답이 없다. 그럼 답은 어디 있느냐, 나도 몰라. 자기는 모르겠데요. 그래서 지난 낮 설교에서 했잖아요. 이 땅에서는 질문만 있을 뿐이지 답은 없다. 답은 성도 자체가 답이에요. 하나님의 기적 받은 성도 자체가 답이에요. 그 답이 없어요.

야고보서는 바로 그 답을 너희가 답이라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희가 바로 흩어진 이스라엘이다. 하나님의 언약대로 주어졌다. 너희는 하늘의 성령을 받았다.’ 야고보서4장5절. 너희들은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스며져있다는 거예요. 성령이.

우리가 정답이에요. 우리 자체가. 정답인데, 우리가 정답인데, 우리가 정답인 것을 우리가 몰라요. 따라서 주님께서는 세상 속에 떠나지 않고 아직도 머물러 있는 것은 왜 이 정답의 고귀한 가치가 빛이 나는지, 왜 주님의 십자가가, 주님의 성령과, 주님의 예수님의 하신 율법을 이룬 것이 왜 정답인지를 확인하면 확인할수록 우리는 뭐냐, 하나님의 지혜와 진리에 대해서 감사가 절로 나올 수밖에 없다. 감사를 끄집어내는 겁니다.

여기 4장6절에 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주실 때, 바로 교만하지 말고 겸손 하라. 겸손 하라는 말은 뭐냐 하면, 니 자신에 대해서 관심을 둘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니 속에 있는 것이 더 중요하지, 너는 안 중요하다는 겁니다. 만약에 성령을 안 받고 겸손해 버리면 이 10점 만점이 뭐가 들어가겠습니까? 나는 겸손하다. 가 되겠지요. 삼백이란 유명한 외국 영화 있잖아요. 그리스와 바사나라하고 페르시아하고 전쟁했던 그 때 바사나라에 나왔던 그 왕 이름이 아하수에로왕이에요. 그 사람이 망했던 이유가 남 그리스 치다가 스파르타 300명한테 당해가지고 진 거예요. 그 사람이 이상한 수레를 타고 한 말이 있어요. “나는 관대하다.” 나는 관대하다 해가지고 도망갈 때는 막..., 관대하니 신의 관대함을 반영해주니 이 승리는 이 관대한 자의 겸손한 자의 승리라고 우기다가 완전 박살나버렸지요.

겸손을 무기로 삼은 거예요. 이 땅에서 살아남기 위한 먹고, 마시고, 장사하고, 사고, 팔고 할 때 여유 있게 하기 위해서 신이 원하는 성품을 내가 갖게 되면 내가 먹고 사는데 유리하지 않겠느냐, 꼼수를 쓴 거예요. 그 사람이. 그러니까 그걸 가지고 야고보서에서는 그게 바로 마귀다. 그게 바로 마귀가 그런 짓한 거예요. 마귀가.

자, 4장11절 봅시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했지요. 방금 우리가 배운 거 공식을 집어넣어봅시다.

나와 너는 피차가 되지요. 나와 너. 나와 너는 피차가 돼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야고보서에서 성령이 임하게 되면 나도 아무것도 아니고, 너도 아무것도 아님을 알아라. 아까 이야기한 공식. 나는 뭐다? 나는 이단이다. 이걸 슬프게 하면 안 되고, 아휴! 이제 종을 편안히 놓아주시는군요.

이단이 이단 아닌 체하랴 얼마나 힘들었고, 이단이 안 되고 천당 가려고 이건 교회의 목사 욕하지 마세요. 본인이 그렇게 속임을 당하려고 유난을 떤 거예요. 유난을. 날 잡수세요. 속아 넘어가세요. 하고 유난 떤 거예요. 아, 이거 빠져나와야 되는데. 나는 그냥 이단이에요. 전에는? 전에도 이단이었지요. 전에는 슬픈 이단이었지요. 지금은 기분 좋은 해방된. 이제는 나는 이단이다. 기분 좋은 거예요.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장 윤정 아들이 온 동네방네가가지고 뭐라고 합니까? “우리 엄마 장윤정이다!”고함지르는 거예요. 그 애가 좀 크면요, 부끄러워서 들어갔을 거예요. “느 엄마 장 윤정이다.” “하지 마. 하지 마. 조용히 해. 부끄럽다.” 이리 하지만. 철이 없기 때문에 그걸 굉장히 자랑스러워하는 거예요. “우리 엄마 장윤정이다.”

다시 전자제품 박스를 봅시다. 박스가 아무것도 없으면 안 나와요. 회로가 되려면 이 모든 주어진 일어난 모든 일 세상의 뉴스나 신종코로나, 전부 다 어디로 회로를 이어야 됩니까? 십자가로 회로를 이어야 되겠지요. 그래야 남을 피차에 비방을 안 한다니까요. 야고보서4장 11절. 피차에 비방을 안 하고 그 자리에 율법의 완성, 여기서 율법이지만, 사도바울은 십자가지요. 완성이니까. 율법의 완성이니까. 율법의 완성을 딱 놓게 되지요.

그러나 그 방법이 뭐냐 하는 거예요. 그 방법이. 인간은 돌아서면 어느새 10점 만점에 내가 들어가 있어요. 나는 이단인 걸 알기 때문에 구원받았다. 이게 들어가 있어요. 뭐만 들어오면 무조건 이게 들어있어요. 어떻게 아느냐 남이 시비 걸면, 십자가마을에 가가지고 시비 걸리면 화 확 내고 싸우고 있어요. 4장 11절에 보면 피차 형제들이 싸우는 이유가 바로 세상적인 것이 중간에 차지했기 때문에 싸운다는 겁니다. 그건 세상에서 온 거지, 하늘에서는 싸움이 없어요. 피차가 날아가 버렸기 때문에 없는 거예요.

그럼 나는 어디에 들어가느냐, 여기 6점, 5점짜리 비켜줘야 된다고요. 그러면 내가 이 자리에 나는 이단이다. 집어넣지 말고, 어떤 계기에 의해서 내가 쫓겨나야 되지요. 그래서 십자가로 회로가 연결이 되면 항상 십자가에 의해서 내가 나의 자리가 추방되고 쫓겨나야 돼요.

내 자리는 나한테 관심 없을 곳으로 추방되어버려야 돼요. 그럼 나한테 관심이 없으려면 없다는 말은 뭐냐 하면 이게 좀 어려운데요. 내가 5점, 4점짜리로 추방되려면 그 빈자리에 내가 있던 자리에 뭐가 있느냐 하면 주님의 주시는 일이 그 자리를 채워야 됩니다.

“오늘 저 뭐할까요?” 이리 되어야 되지. “저, 어때요?”하면 안돼요. 주님의 지시 “오늘 저 뭐할까요?” “이거 하게 되면 저는 이런 인간 되지요?” 라고 하지 말고 이런 인간 이건 없애버리고 “뭐 할까요?” “헤어질까요?” “뭐할까요?” 항상 뭘 할까요?를 생각해야 돼요. 뭘 할까요? 내일 생각하지 말고요. 지시 받는 거예요. 참, 이 말이 어려워요. 지시 받는다는 게  뭐냐 하면 말씀의 율법의 완성을 지시받는 겁니다. 율법의 완성을.

그 다음에 12절을 보게 되면, 첫 째 시간하고 연관해 보겠습니다. 첫째시간에 이야기한 거 다시 이야기하게 되면 우리의 자아는 마귀가 만든 거고 없어지고, 우리 입을 통해서 하늘의 은사에 그것이 집약체로 율법이 나온다 했지요. 율법이. 그 나온 율법을 봅시다.

12절에 보면,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누굽니까?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멸하기도 하시는 분이다. 구하기도 하시고,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되어있지요. 상당히 어렵지요. 나보고 피차에 나보고 하는 이야기 아니지요. 이건 묵직하게 되어야 되지요. 묵직하게. 나는 니하고 거래한다. 나는 니하고 흥정한다. 이거 아닙니다. 니 누고? 이리 되는 거예요. “하나님, 저요.” 니는 빠지고. 니는 누고? 니는 없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주일날 설교에 제가 삭개오 이야기를 한 거예요. 삭개오. 삭개오가 내가 4배나 갚겠나이다. 할 때, “저, 어때요?” 이런 거 없어요. 그냥 묵직하게 그냥 들어온 거예요. 내 집인 줄 알았는데 내 집이 아니고 누구 집이었습니까? 주님의 집이 되어버린 거예요. 들어온 순간. 주님이 오기 전까지는 내 집이란 말이죠. 내가 중앙에 있어요. 내가 돈을 누구한테 기만을 쓰던 내가 베풀던 내가 알아서 내 지시 따라서 내가 해요.

그런데 내 지시가 이게 할 필요가 없는 그 가벼움, 그 자유함, 그 고마움, 어떤 경우냐 하면 주님의 지시 따라 하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4배나 갚았잖아요. 이웃사람들은 주님이 안 보이니까 삭개오 마음을 모르니까 “아이고, 삭개오님 이렇게 인심도 좋고.” 개과천선했다고 뭐라고 자꾸 내 자아를 형성 시키려고 또 온갖 타인의 평가가 나오겠지요.

그러면 삭개오가 뭐하고 하겠습니까? “이 돈 내 돈 아니고 이 지시한 분 내가 아니고 주님이 하셨습니다.” 하면서 삭개오는 주님 전파가 되는 거예요. 혀 속에 묵직한 완성이 복음의 완성이 나온다 말이죠.

야고보서는 이리 하라는 말이 아니고 이미 복음의 완성으로 말미암아 피차가 의미 없이 날아가 버렸다고요. 피차가. 니는 잘났고 나는 못났다가 날아가 버렸다니까요. 피차. 니는 못났고 나는 잘났다가 날아가 버렸다니까요.

아까 그 꿈의 이야기를 다시 하게 되면 꿈에 뭔가 쫓긴다는 말. 누가 쫓긴다는 말은 쫓기는 당사자가 누굽니까? 나지요. 그 쫓기는 것이 좋은 게 아니고 불쾌하다는 말은 내가 소중하다는 것을 나의 육의 본성 때문에 꿈에서 이게 떠나지 않고 죽을 때까지 떠나지 않고 자꾸 떠오르는 거예요.

절벽에 떨어진다든지, 누구한테 쫓긴다던지, 그런 겁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실험을 했어요. 실험도 참 얄미운 실험인데. 꿈은 뭐 자기의 트라우마가 꿈에 나타나고 온갖 이론이 난무하니까 어떤 심리학자가 실험으로 보여줄게. 그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 하고 어떤 사람이 자고 있는 걸 랜덤해서 조사해가지고 꿈에 빠졌다는 걸 깨닫고, 스포이트로 물방울을 떨어뜨리는 거예요. 한참 잠들어 있는 사람에게 물방울을 딱 딱 떨어뜨린 다음에 얼마 안돼서 그 사람이 잠에서 깼어요.

꿈 이야기해보라 하니까 잠자고 있는데 갑자기 계곡에 물이 넘쳐가지고 산 꿈이 물 꿈이 되고 홍수 꿈이 된 거예요. 홍수 꿈이.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인간의 신체는 본능적으로 자기 조직화하게 되어있어요. 자기 조직화. 스스로 자기 방어체제가 가동되어있어요. 잠잘 때를 사실은 꿈을 가수면이라 할 수 있는데, 가수면 상태에서는 육체가 그야말로 대부분 정상적으로 가동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물이 왔을 때는 차갑다는 느낌을 봐야 물에서 방어체제에 딱 돌입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인간의 꿈이라 하는 것은 대부분 자면서도 자기를 스스로 자기를 지킴. 자기를 지키는 몸 자체가 이미 거기에 자기 지키는 걸로 완전 가동되고 있습니다. 그 자기 지키는 것이 사회적으로 빠져나오면 뭐가 되느냐 하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에요. 그래서 그 심리학자는 과학자 입장에서 뭐냐, 뭐가 진리냐,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그게 진리 다에요. 과학자를 들리지 않더라도 이건 본성적으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다 간다 말이죠.

그런데 성경은 딴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것 때문에 죽었다는 거예요. 우리가 이 땅에 멸망당하고 지옥 간다는 거예요. 그러면 어쩌라고? 우리보고. 우리 본성이 그런데. 방법은? 이단 되면 돼요. 성령 받아서, 이건 내가 고칠 문제이다. 가 아니고 개과천선할 문제가 아니고 죽을 때까지 100살 때까지 오래도 살려고 한다 하여튼. 주욱 이 조직으로 그냥 가는 거예요. 이걸로 그냥 가요. 이단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고 그냥 이단 되세요. 오늘의 복음입니다.

즐겁게 이단 되세요. 왜? 몸이 바로 복음 중심이 아니고 내 지킴 중심이기 때문에. 이걸 어떻게 속입니까? 못 속입니다. 그토록 은혜 받았다 해도 돌아서면 다 희석되고 증발되고 남는 건 노는 것 이것뿐이에요. 그럼 왜 목사님 그렇게 이야기합니까? 그래야 니가 손쓴 거 말고, 정말로 성령이 온 사람, 니가 손쓴 거 말고, 수작부린 거 말고, 복음 들어서 조립해가지고 지가 어설프게 전자부품 떼어가지고 십자가 나오지도 않는데, 해가지고 화면 나오지도 않아. 잘못 끼웠어. 결국 나온 것은 나는 관대하다. 이것만 막 나오면서도.

남들한테 건드리면 나 십자가 안다고 이렇게 우기는 그 본성. 그 본성이 최선이에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단 맞습니다.” 즐겨. 그것이 너무나 고마워.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깨닫지 못한 것을,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을 깨닫게 했을 때, 이건 혀를 벌려서 할 수밖에 없어요. 해야 돼요. 말할 수밖에 없어요.

시어른이 “니 시집와서 한 거 뭐 있노?” “아무것도 없어요. 헤헤” 헤헤 웃으면서. “아무것도 없어요.” “니는 남편이 벌어다 준 거 니는 쓰기만 했지?” “저는 쓰기만 했어요. 아이구~ 재미있게 쓰기만 했어요.” 이게 무슨 싸움이 됩니까. 자기 저주 받겠다는데 뭐. 자기 합리화, 변명 전혀 없잖아요.

얼마나 도를 닦아야 그게 나오는지. 막상 당하게 되면요, 또 이상한 꿈을 꾸고 시어머니 목 조르는 꿈꾸고 도대체 이 몸이라 하는 것은 죽어 없어져야 이게 벗어나지 몸이 있는 한, 지 잘났다는 것은 이건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야고보서에서는 지우지 말고 계속 봐야 된다는 거예요. 니가 입법자냐? 하나님은 살리기도 하고, 멸하기도 하는데 니가 뭔데 하나님을 갖고 이용하려고 하느냐. 야고보서에서 딱 하잖아요. 누구 구원하기도 주님 마음대로. 멸하는 것도 주님 마음대로인데 니가 왜 저 사람을 멸해야 돼. 저 사람은 구원 받아야 돼. 니가 자꾸 손가락질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미 완성된 것이 니 안에 있다면 너는 그야말로 10점 만점에 주님 계신다면 나는 그 변두리에 앉아가지고 이단 맞습니다. 하고 그것도 기쁘고 가벼운 마음으로 살아가지요. 그것이 이제 오늘 4장하고 마치겠습니다.

마지막에 이렇게 해놓고 야고보서는 이리 합니다.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라고 하지요. 이걸 평생 지우지 마세요. 이게 딱 누구 이야기입니까?

우리보고 하는 이야기에요. 우리. 신체보고 하는 이야기에요. 신체는 지적당해도 마땅한 겁니다. 왜? 예수님이 죽었기 때문에. 이 땅에서 죽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신체는 예수님을 밀치는데 한 몫한 신체기 때문에 그 티를 그 값을 죽을 때까지 우리는 보여주면 돼요. 그것도 기쁘게, 즐겁게 하세요.

아휴! 내가 이렇게 나쁘다니. 이렇게 뭐 후회해봐야 그 후회 같은 거 주님한테는 안 통합니다. 니가 후회 해봤자 돌아서면 헤헤할 인간인데. 내 니 회개 안 믿는다.

따라서 주께서 우리가 안 되는 것을 어떻게 해냈는가, 에요. 수요일날 했지요.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빼낸다고요. 내가 천당 가는 정보모아서 제시카는 외동딸 손가락 꾸려가면서 이렇게 노래 부르는 게 아니에요. 딩동~ 누르는 게 아니란 말이죠. 우리는 그냥 내 욕망대로 남하고 똑같아요. 그런데 빼내주는 것을 남한테 설명할 길이 없네요. 이 놀라운 기적을. 제 강의 듣고 나중에 결국 삐져 도망간 사람들은..., 이 강의가 굉장히 중요한 강의에요. 가라, 이 말이죠. 왜? 주께서는 구원하기도 하고, 멸하는 그 권능과 자격과 권리는 전도하는 나한테 있는 것이 아니고 누구한테 있습니까? 주님한테 있잖아요. 주님한테.

그러니 어떤 사람은 이렇게 해요. “남은 그게 믿어지는데 왜 나는 그 말이 안 믿어지니 나한테 납득하게 설명해 보라.” 이런 이야기해요. 미치고 환장하겠네. 오메~ 오메. 나도 설명이 안 돼.

나도 설명이 안 된다고요. 옛날식 같으면 설명했지요. 기도원에 기도했다 뭐. 이 근호 목사 설교 들었다. 그거 다 말짱 다 소용없다 말이죠. 주께서 일하지, 지시 받지, 우리는 결과물이지 내가 싸대서 구원되는 것은 이것은 악마의 수작에 불과합니다.

이제는 다만 여기서 하는 건 이단이니까, 내 이단 할게. 기쁘게 이단 할 테니까 악마의 쓸데없는 수작 부리지 마라. 오직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 자랑도 없다. 이상 모델은 나한테는 없다. 이대로 살다 죽어도 괜찮아. 이단이니까. 이런 마음으로 자유롭게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우리 자신이 우리를 그동안 속이고 왔습니다. 안 들킬까 싶었는데 이렇게 들키게 해주시니 이 얼마나 큰 은혜고, 얼마나 큰 사랑인지요. 이 사랑, 주께서 그 사랑의법 안에서 주께서 이미 성령의법 안에서 오직 주님만 십자가만 높아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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