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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지역강의 > 안양강의
2020-11-13 00:26:18 조회 : 210         
순 스가랴 3:8 201112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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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은주(IP:119.♡.152.148) 20-11-18 16:32 
안양20201112a슥3장8절(순)-이 근호 목사

스가랴3장8절 보겠습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들이라 내가 내 종 순을 나게 하리라” 그렇게 되어있지요. 스가랴 전체가 신비입니다. 신비. 신비는 두 가지 중에서 어느 하나를 우리가 생각해야 되는데 하나는 신비가 오면 기쁨이 올 수도 있고, 또 신비가 오면 두려움이 올 수 있어요. 그것은 이 신비가 일상을 깹니다.

선지자 같은 경우에는 선지자가 살아온 나름대로의 어떤 인생관이 있을 것이고, 자기도 남들처럼 살고 싶은 생각이 있을 거예요. 그런데 이 스가랴 선지자에게 신비로움이 와버리면 그의 일생은 기쁨 아니면 두려움 둘 중에 속하게 되는데 보통 성신 받은 선지자들은 두려움보다도 기쁨이 주가 됩니다. 물론 두려움이 없는 게 아니에요. 에스겔이나 예레미야 이 사람들도 많이 두려워했는데, 태반은 인생의 대부분은 기쁨입니다.

왜 기쁘냐 하면 난데없이 진리가 주어졌기 때문에 난데없이 하늘로부터 진리가 주어졌다. 여러분, 진리가 주어지게 되면 우리 마음이 어떤 변화가 생길까요? 진리가 주어지게 되면 겁이 없지요. 세상 살아가면서 겁을 낸다는 말은 마음 둘만한 진리를 안 받았다는 그러한 우회적인 표현이 되는 겁니다. 진리를 앞장세우고 진리로 인하여 살아가는 사람은 그 누구한테도 주눅 들거나 부끄러워하거나 겁을 집어먹을 하등의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이 말은 진리 앞에서 진리가 너무나 소중하고 귀중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누가 안 소중하냐 하면 내 인생 내가 전혀 소중하지 않아요. 내 인생이라는 게. 내 인생이 어떻게 된다 한들 그게 신경 쓸 이유도 없고 그럴 필요가 없어요. 왜냐 하면 나는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진리가 오게 되면 내 일상은 진리가 아니었다, 를 알지요. 진리가 오면 특징은 뭐냐, 진리가 온 사람의 특징은 뭐든지 한다, 입니다. 뭐든지 한다는데 이렇게는 오해하지 마세요. 뭐든지 된다. 이렇게는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뭐든지 된다는 건 노림수 가지고 있는데, 노림수 가질 이유가 없어요. 뭐든지 한다, 가 됩니다. 뭐든지 된다, 가 아니고.

안 돼도 상관없는 거예요. 진리가 앞장서있기 때문에 나는 그 진리를 졸졸 따르는 똘마니거든요. 어릴 때 시장이나 어디 길거리에서 혼자 다니는 것보다도 집에 어른 듬직한 형이나 어른이나 이렇게 다니면 애들이 아주 신나지요. 안하던 까불거리기도 하고 평소에 친구에게 기죽다가 기 팍 살아서 하지요. 천하에 눈에 뵈는 게 없잖아요. 이게 진리를 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모든 것이 된다고 하면 안 됩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모든 걸 성취한다는 말이 아니에요. 진리를 알게 되면 무엇이 없어지느냐 하면 성취해야 될 부담도 날아가 버려요. 성공, 실패, 그거 무슨 소리에요? 그게 뭐예요? 이리 되는 겁니다. 성공, 실패가. 진리가 나를 대체해버리니까. 그걸 영어로 instead of. 나를 대신하기 때문에 그냥 졸졸 따라가는 식으로만 하면 되는 겁니다.

사람이 갑자기 주눅 들고 가슴이 억압을 받는 이유는 인생을 본인이 해결하려고 하는 거예요. 믿을 구석이 나밖에 없기 때문에 나라도 뭘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나라도 하게 되면 그게 목표가 생기고 그 목표가 나를 정신적으로 더 압박을 해가지고 쪼그라들게 만들어요. 위축되게 만들어요. 그러면 사람이 위축되게 되면 여기서 반발이 나오잖아요. 내부적으로 반발이 일어나가지고 위축되니까 더 과격한 행동으로 반발심으로 튀어나오게 되어가지고 남한테 피해를 주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전혀 안정감이 없다고 하거든요. 진리가 없는 사람의 특징은 안정감이 없어요. 설교 틀어놓고 집에서 진리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걸 막 쏴대고 하는 것은 다른 식구들이 쏴대는 것은 본인이 안정감이 없다는 것이 그만 튀어나왔어요. 듬직하지 못하고 불안해서 어쩔 줄을 모르는 겁니다.

요새 혼자 사는 분들이 늘어났는데, 혼자 사는 분들을 대충 조사를 해보니까 대체로 삶이 만족해요. 둘 사는 것보다 혼자 사는 걸 만족하는데. 보니까 조건이 하나 붙었어요. 주거가 안정이 될 때는 혼자 사는 게 만족하다는 거예요. 이사 할 거라든지, 전세 마련 그런 거 없이 내 집에 있어서 내 혼자 살면 천하에 그게 그렇게 좋답니다. 밥 뭐해줄꼬. 생각할 필요도 없고. 자기 외에 다른 사람 때문에 걱정할 필요도 없고요. 주거 안정성.

진리가 오게 되면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는 그 상황 속에 안정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걸 뭐든지 한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주눅 들지 않는다. 어떤 사람에게나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이 쪼그라들지 않는다. 위축되지 않는다. 주눅 들지 않는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게 선지자의 특징이죠.

그런데 선지자가 외부적으로 고생을 많이 해요. 외부적으로 고생을 하는데 왜냐, 워낙 적들이 많으니까. 어제 수요일 기도 내용처럼 복음으로 조롱을 받거든 감사해야 돼요. 마태복음 5장에 보면 나와 내 복음을 위하여 미움을 받거든 기뻐하라. 선지자들의 계열이다. 오늘 나올 수도 있는데 계열. 선지자 계열은 공통성이 있어요. 진리를 알았기 때문에 진리 계열이기 때문에 세상은 진리 계열 아니잖아요.

진리를 하늘에서 주셔야 된다는 말은 이 땅에서 아무리 찾아도 이 땅에서는 없다는 말이고 진리가 없다는 말은 모든 개인 개인은 아무리 재산이 많고 건강하고 화목해도 주눅 들고 자체적인 불안감을 억제하는 상태에서 살아가는 거예요. 불안정해요. 진리가 없으면.

그런데 선지자는 개코도 아무것도 없으면서 진리가 있으니까 누구 앞에서도 겁이 없는 겁니다. 마태복음2장에 나오는 동방박사 있지요. 동방박사가 뭐 따라왔습니까? 별 따라 왔어요. 진리 따라 온 거예요. 자기가 진리 계열인 것을 알게 된 겁니다. 예루살렘에 헤롯왕에게 기죽었습니까? 기 안 죽었어요. 거짓말 팍 쳤어요. “예~ 예. 베들레헴에 가서 왕 만나면 내가 알려드릴게요.” 그런데 그건 빈말이고요. 그 동방박사가 몇 명인지는 모르겠지만, 단체로 사기 친 겁니다. 왕을 상대로.

그래서 헤롯왕이 화가 나가지고, 헤롯왕이 화가 났던 이유가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이렇게 나와요. 성경에는. 어떻게 속였는지는 자세히 안 나왔지만, 나중에 헤롯왕이 속은 줄 알고 그 다음에 베들레헴 애들 2살밑으로 다 죽였잖아요. 화가 나서. 속은 줄 알고. 화풀이한 겁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게 되면 진리는 어떻게 온다? 계열을 형성하면서 오게 되어있어요. 계열을 형성하면서. 그런데 진리가 오게 되면 좋은 점은 이게 신비롭다니까요. 세상 사람은 두렵지만, 우리에게는 뭐가 됩니까? 두려움을 지워버리면 우리에게는 기쁨이 오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진리, 다른 말로 신비로움. 신비로운 진리.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공부해도 좋은 대학 다니고 아무리 공부해도 알지 못하는 그게 만약에 이 기쁨이 없다면 여러분들은 평소에 세상 기쁨으로서 기쁨을 찾는다고 두더지 노릇하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주님이 주신 진리의 기쁨이 없으니까. 그저 인간의 육적인 본능대로 기쁨을 찾아내는 주로 하는 게 술. 여러분들은 술은 입에도 안대니까. 무슨 뭐 놀러가는 거. 젊은 애들 맨날 배낭매고 해외 놀러가는 거. 거기에 무슨 신비가 있는 줄 알고. 니 왜 가느냐고 하면 거기서 뭐 배울 게 있는 줄 알고, 진리가 있는 줄 알고, 진리는 이 땅에는 어디에도 없어요. 저도 해외에 나가보니까 눈에 뵈는 게 뭐냐 하면, 저 사람은 아침에 몇 시에 일어나고, 스케줄 어떻게 되고, 돈을 하루에 얼만 벌었느냐, 그것만 보인다고요. 어디에 가도. 왜? 돈 벌이 하는 방법은 똑같거든요. 돈벌이 하는 방법이 똑같아요.

신비로운 인간, 별다른 인간이 없다는 것이 뭘로 증명했느냐 하면 코로나19로 증명됐어요. 코로나 19로. 동양형 바이러스가 전 세계용 바이러스로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중국의 우환 바이러스가 전 세계 다 먹힌 것을 어떻게 알았겠어요. 서양 사람들은 오히려 치명적이지요. 이 바이러스 앞에서 모든 인간은 똑같은 아담의 후손들이라는 게 드러나게 되어있습니다.

우리가 스가랴 공부하고 보면서 먼저 전제할 것은 모든 인간은 똑같다. 모든 인간은 다 불안 불안하게 살고, 불안하기 때문에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에요. 불안하기 때문에 그들이 의지하는 것이 어디에 의지하느냐 제국에 의지합니다. 힘이 실린 나라를 제국이라 하지요. 힘이 실려서 사람들이 없는 기쁨을 힘을 제공할 수 있을 것 같은 여력이 있는 나라. 그게 바로 제국이지요. 이 세상에 미국이 제국이 되겠지요. 가끔 옆에 일본도 되는데. 일본의 촌에는 너무 못살아요. 일본의 도시도, 촌도 못 사는데 나라만 잘 살아요. 희한해요. 개인적으로 일본사람들은 되게 못 삽니다. 늘 아껴야 되고, 그저 사는 재미라는 것은 뭐냐 하면 맛 집 찾아다니는 거예요. 고독한 미식가지요. 맛 집이나 찾아다니면서 그렇게 사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인간은 똑같다. 신비가 없고 진리가 없으면 인간은 전부다 힘에 압축이 되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쥐포처럼 눌려서 살아가는 거예요. 눌려서 사는 것을 아주 간단하게 표현한 사람이 있었어요. 최근에. 몇 달 전에. 인생을 눌려 사는 걸 이렇게 표현했어요. “아프다. 테스형!” 테스형 2절 가사에 나와요. 아프다, 에요.  다른 긴 말이 필요 없어요. 세상은 이렇고 저렇고 다 필요 없어요. 한 마디로 하면 돼요. 세자로. 아프다. 너도 아프고 나도 아프다.

세상은 왜 그래? 그냥 아파요. 테스형? 소크라테스에게 물어봐야 지도 압니까. 그냥 아파요. 눌려서 아파요. 기쁨이 없어 아파요. 아프니까 아픔을 해소하기 위해서 힘센 사람에게 굴복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그 굴복하는 나라가 스가랴에서는 뭐냐 하면 첫 번째는 바벨론이고, 두 번째는 바사나라에요. 누가?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바벨론이란 제국의 지배를 받고 바사나라라는 제국의 지배를 받아요.

이 말은 이스라엘 자체에서 뭐가 빠졌느냐 하면 힘이 빠져요. 하나님의 진리의 힘도 빠지고, 기쁨도 빠지고, 자유 할 수 있는 힘도 빠지고, 다 빠져버렸어요. 이게 여호와를 약속을 버리니까 다 빠진 거예요. 약속이 진리 아닙니까. 진리 없어 한 번 살아볼까 하다가 진리 없이 자유롭게 하다가 오히려 이 세상에 제국에 억압이 된다고요.

선악과 없이 선악과라는 그러한 규칙이 없이 한 번 살아볼까 하다가 결국은 누구한테 억눌립니까? 마귀의 힘에 눌려 살잖아요. 창세기4장 가인 같은 경우는 동생 안 죽이고 싶어도 동생을 죽일 마음이 그래서는 안 되는 마음보다 더 강렬하게 일어나서 죽여 버린 거예요. 꼭 술 먹은 것처럼. 술김에 한다고. 내 마음이 아니고 술이 나로 그 짓하게 만들었다. 이리 되는 겁니다. 악마가 노리는 것은 바로 뭐냐 하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를 제거하는 거 이게 악마의 필생의 숙원입니다. 없애는 거. 사다리를 걷어차는 게 악마의 평생의 숙원사업이에요.

왜냐하면 이 땅은 악마가 접수했다고요. 진리가 아니고 비진리가 이미 접수했습니다. 비진리가 접수했기 때문에 이 모든 인간을 슬픔 속에서 아프다 속에서 통제하고 있는 거예요. “아프냐? 그러면 덜 아픈 쪽으로 네가 한 번 내 말에 순종하면 덜 아픈 쪽으로 한 번 해줄게.” 이런 쪽이다 말이죠. “사는 게 아파? 그러면 죽어서는 천국가야지.” 이건 누가 하는 짓거리입니까? 교회 악마가 하는 짓거리에요. 교회에서 하는 수단 아닙니까. “가난해? 기도해. 그러면 복 받아.” 전부 다 그거 교회 마귀들이 하는 짓이에요.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기쁨을 내가 객관식으로 내가 바구니에 요거 기쁘고, 요거 기쁘고, 기쁜 것을 내 바구니에 담겠다는 것은 이미 이건 악마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뜻이에요. 그러나 진리는 뭐냐 하면 내가 기뻐할 요소가 없는데 그냥 들이닥친 거예요. 그냥. 알프스 산에서 양치고 있는 하이디. 올라레리오~~ 하이디가 꽃바구니에 만약에 온갖 에델바이스부터 해가지고 온갖 아름다운 꽃들을 바구니에 담으면서 나름대로의 기쁨을 하다가 만약에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가 나타났다. 그 꽃바구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집어던져버리지요. 그러니까 진리라는 것은 내 인생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요. 라는 큰 기쁨이 선도한다 할까. 앞서서 이끄는 거예요.

지금까지 제가 한 것은 뭐냐, 기존의 이스라엘 계열과 스가랴 계열의 차이점. 그렇다면 이스라엘로 하여금 바벨론, 바사 이런 제국에게 압제를 받게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출애굽부터 나오는 원칙이 있지요. 구원 다른 말로 하면 구출. 구출은 구원의 의미가 있으려면요, 갇혀있어야 돼요. 갇혀있는데 뭐 하나가 어떤 내가 원하는 힘이 아니고 생소한 힘이 딱 꽂혀버리면 졸지에 해방이 되고, 졸지에 구원이 되고, 졸지에 구출이 된 거예요. 구출이 되면서 자기가 전에 살던 것을 물끄러미 내다볼 수 있습니다.

오늘 제목 후보. 물끄러미. 부사 이거 괜찮네. 물끄러미 바라볼 수가 있는 거예요. 물끄러미. ‘아, 인간아, 니 왜 저래 사나?’ 이런 거. 구출을 할 때 주님께서 스가랴를 통해서 뭘 구출하느냐 하면 바벨론 그 다음 나라가 바사거든요. 바벨론 70년 동안 잡히다가 70년 끝났으니까 바사나라 다리우스1세에 의해서 성전 지으라고 해가지고 오는데, 구출하고 구원할 때 사람들은 뭐를 구원하고 구출하느냐 하면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구출하고 구원한다고 하는데 이스라엘을 구출하는 게 아닙니다.

뭐를 구출하느냐 하면 성전을 구출해요. 성전을. 빨건 걸로 써볼게요. 구출하는데 뭐를 구출한다고요? 성전을 구출해요. 성전을 구출합니다. 이스라엘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인간들만 있지만, 구출된 성전은 누구와 함께 있느냐, 마태복음 1장 23절 한 번 읽어보세요.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임마누엘 뜻이 뭐지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는 거예요. 인간들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는 겁니다.

그러면 마태복음의 주제가 뭐냐 하면 그 우리가 누구냐 하는 거예요. 그걸 갈라내는 이야기가 마태복음입니다. 마태복음의 모든 이야기들은 이미 하나님은 오셨고, 그 오신 하나님의 속성에 동질 속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우리라는 이름으로 끄집어내어서 함께 있겠다는 것이 마태복음 1장부터 28장까지 한결같이 통하는 유일한 맥이에요. 그게.

마태복음28장에 보면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했지요. 그 와중에서 너는 아니고 너야! 너도 아니고 너야! 이런 건 아니고 이런 거야. 계속해서 선별작업에 나서는 겁니다. 골라내는 거예요. 과수원의 사과 농사 딸 때 다 상품화 되는 거 아니에요. A등급, B등급, C등급 다 나와요. A등급은 상품화하고, B등급은 많이 친한 사람에게 보내고, C등급은 별로 안 친한데 보내고. 그런 것처럼 골라 선별하는 작업이에요. 누가요? 이 땅에 오신 주님이.

그 선별할 때는 기준이 있을 게 아닙니까. 기준. 그 기준을 마태복음에서 축약하면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 기준이 뭐냐 하면 ‘너를 잊을 정도로 내가 소중하다.’ 그게 기준입니다. 너를 잊을 정도로. 너를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예수님이 너보다 더 소중하다. 이게 기준입니다. 주일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천국이란 나를 지켜주지 않는 곳이 천국이다.

나가 두 개 있거든요. 옛사람 나를 계속 발로 차버립니다. 내가 나한테 새로운 나에게 달라붙지 않도록 끝까지 차버려요. 내 것인 듯 내 것 아닌 내 것 같은 나. 나는 내가 아닌데도 자꾸 옛날 살아온 관행이 있어가지고 거울에 비친 내가 자꾸 나라고 고집을 부려요. 그런데 막상 누가 와서 너가 누구냐 라고 물으면 몰라요. 모르고 남이 누구라고 알려줄 때 비로소 어, 그게 나인모양이야. 하고 임시방편으로 그게 나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이 와서 니는 이렇게 되어있어. 하면 어, 그게 나야. 하고 또 고민에 빠져가지고 난리하다가, 누가 또 격려해주면 그게 바로 나였어. 이렇게 하고. 미친 것도 아니고. 도대체 종잡을 수 없는 나.

주께서는 버려버려라, 하는데 안 버리고 계속 버릴 패를 버려야 되는데 주님은 버렸는데 내가 안 버려. 내가 나를 안 버리고 있는 거예요. 붙들고 있는 거예요. 스가랴 말씀에 오늘 3장 8절 읽었잖아요. 읽어 보면 스가랴 말씀의 완성이 순이지요. 순. 새싹. 새싹이라는 뜻입니다. 스가랴 말씀의 예언의 완성은 인물입니다. 인물. 어떤 인물이 등장해요. 인물이 등장해버리면 인물은 무엇을 몰고 왔느냐 하면, “모든 것은 벌써 다 지나갔느니라.” 이거 됩니다.

내가 90이 안 돼도 80이 안 돼도 내가 평생 살다가 지금까지 안 죽어도 이미 죽은 자로 되는 이유가 instead of 나와 교체할 그 분이 이미 등장했으면 나에게 일어난 어떤 일도 이미 과거완료입니다. 이미 버스 간 거예요. 찾지 마세요. 나에 대해서 어떤 의미도 찾지 마세요. 다 나에 일어난 모든 일은 내가 한 모든 일은 무의미합니다. 내 목표, 내 목적, 내 기대, 다 무의미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의도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온갖 일을 만나게 합니다. 온갖 사람 만나고 온갖 경우를 평생에 만나게 하는데 만나봤자 수요일날 설교한 것처럼 만나봤자 안개입니다. 안개. 안개에요. 안개는 무서운 거 없어요. 그냥 그 때 되게 되면 시간 지나면 다 지나가는 거예요. 이런 노래 있는데 가사 바꿔야 돼요.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의미가 없죠. 있죠가 아니라 의미가 없어요.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의미가 없기 때문에 지나간 거예요. 왜냐 하면 그 의미라 하는 것은 나한테 지독하게 딱 들어붙은 의미거든요. 그런데 새로 나를 대체할 새로운 인물이 등장해 버리면 나한테 달라붙은 모든 의미는 무의미가 되는 겁니다. 의미가 없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현재 대제국의 그리고 바벨론, 바사나라의 치하 속에 그 지배 속에 있으면서 이스라엘은 이제 이스라엘을 잊어야 돼요. 옛날의 화려한 홍해를 건너오고 어떻고 다 잊어버려야 돼요. 주님은 이스라엘 편이 아닙니다. 주님은 인물편입니다. 그 인물이 이 땅에 오는 표적이 뭐냐, 인물이 왔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새 성전입니다. 새 성전.

그 점에서 잠시 스가랴6장 한 번 보겠습니다. 역시 신비로움이 있지요. 6장 12절을 보게 되면, “말하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순이라 이름 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보라, 순이라. 순, 새싹. 새싹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뭐를 건축한다?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는 거예요. 다른 사람은 건축할 수 있다? 없다? 다른 사람은 건축할 수 없습니다. 13절에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그 위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그러니까 새로운 이스라엘의 특징은 이 사람들이 아쉬워서 사람 건지려고 아등바등 애쓰시는 분이 아니고 치워라! 다 치워라! 니 라는 인간은 과거 존재지. 다 없애버려라! 그런 겁니다.

이 바벨론, 바사 나라가 아무리 바사 나라가 성전 지으라고 이렇게 후원금 대줘도 바벨론이 다니엘에 보면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짐승이에요. 짐승. 그러면 짐승이 새끼 놓으면 짐승 새끼. 그 새끼 놓으면 새끼. 욕하는 게 아니에요. 그냥 자식이라는 뜻이에요. 이게 하나의 계열이에요. 무슨 계열? 짐승의 계열입니다. 짐승의 계열.

인간은 인류 역사 끝날 때까지 짐승의 계열이기 때문에 악마의 계열이죠. 짐승이라 표현한 것은 이 땅에 악마가 있음을 구체화시키기 위해서 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짐승이라고 한 것은 이 짐승, 이게 하나의 제국이죠. 이걸 인간들의 용어에 의하면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정치적 집단이라고 하는 거예요. 정치적 집단.

그러면 여기 주께서 약속하신 순이라는 분은 이 악마의 성향과 정 반대가 되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실 분은 어떤 성향이냐 정치적 성향이 아니고 그 앞에 뭘 붙이느냐 하면 비정치적 성향이지요. 반대 한다, 의 반정치적 말을 제가 하지 않는 이유가 자꾸 반정치가 되면 쿠데타 같은 뉘앙스를 줘요. 기존의 세상을 엎어버려라. 이런 거 있잖아요. 그건 아니에요.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이 이슬람교도 많고 불교도 많고 기독교는 조금밖에 안되는데 우리 하나님께서 위대한 기독교 영웅을 보내주셔 가지고 전 세계를 기독교 복음으로서 통치되기를 바란다든지, 그게 너무 면적이 넓으면 요쪽만  광명 요쪽만 33번지 요쪽만 이렇게 안 되겠습니까. 요쪽만 이렇게 안 되겠습니까. 우리 아파트만 안 되겠습니까. 안되겠다고요. 그러면 요쪽 줄 아파트만 안 되겠습니까. 안됩니다. 그러면 우리 집은요? 우리 집도 안 된다고요. 자꾸 이렇게 정복력, 정치적 정복력은 뭘 낳느냐 하면 미흡감을 줘요. 미흡감을 주게 되면 그 비워있는 만큼 초조감을 유발하고 초조감을 유발해버리면 아까 처음에 이야기한 진리의 기쁨은 다 날아가 버려요. 없어요.

자, 다시 이야기할게요. 인물이 왔다는 것은 모든 것은 벌써 지나간 거예요. 잊어도 상관없어요. 어제 내가 뭐했지? 몰라도 돼요. 아, 우리 점심 때 뭐 먹었어요? 몰라도 돼요. 육개장4인분 시킨 거 그거 몰라도 돼요. 그러니까 이게 왜 몰라도 되느냐 하면 주께서 누구를 부각시키기 위해, 돋보이기 위해서 하는 겁니까? 순을 순 또는 순의 계열, 새싹이라는 분을 돋보이기 위해서 이런 제국들, 짐승들, 악마까지 전부다 친히 다 다루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악마가 또 이걸 모를 리가 없어요. 알아요. 악마는 도사거든요. 알기 때문에 아까 했지요. 마귀가 하는 일은 뭐만 하면 된다? 사다리만 걷어차면 돼요. 천국과 이 지상과의 사다리만 걷어차면 돼요. 그래서 악마가 걷어차는 방법은 스가랴3장 한 번 봅시다. 1절에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탄은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탄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뭘 합니까? 대적하지요. 누굴 대적한다고요? 여호수아를 대적하지요.

여호수아가 누구냐 하면, 바벨론 70년을 압제당하고 그 다음 나라가 바사나라거든요. 바사나라의 다리우스1세에 의해서 너희 집에 가라, 해서 갈 사람은 가라, 해서 오는데 여기 4인방이 와요. 4인방. 스룹바벨이 오고 이건 왕입니다. 왕(총독).  그 다음에 여호수아 나와요. 이건 누구냐 하면 대제사장입니다. 여기서 또 누가 나오느냐 하면 선지자가 나오지요. 선지자가 스가랴만 나오는 게 아니고 투톱이에요. 두 사람와요. 학개, 그 다음에 스가랴. 스가랴가 이스라엘로 돌아올 때가 2살에서 3살쯤 돼요. 그리고 예언을 하게 될 때가 한 20살쯤 됩니다.

그런데 그 때는 이미 학개는 늙어죽었다고 보시면 돼요. 나이 많은 학개가 성전 다시 지으라고 잔소리를 했고, 그리고 학개 1장 2장 남기고 돌아가셨고, 그 다음에 계시가 끊어졌고, 학개를 이어서 스가랴를 하는데. 스가랴가 이어서 하거든요. 스가랴는 그냥 성전 지으라고 끝나는 게 아니고 성전의 완료까지 이야기해요. 아까 성전의 완료가 뭡니까? 인물. 어떤 인물. 순이라는 인물까지 언급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인물만 등장하게 되면 나머지 모든 것은 다 지나가버렸다. 그런데 이 순이란 인물이 등장할 때, 그 순 안에 뭐가 들어있겠어요? 성전이 들어있겠지요. 그러면 성전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성전 안에 지나온 성전에 연류 된 성전의 과거가 다 담겼다고 보니까 이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온 우주가 다 들어있는 거예요. 성전 안에. 예수님의 세계가 펼쳐지는 겁니다. 예수님의 세계가.

어제 수요 설교를 하고 난 뒤에 수요 설교에 참여했던 우리교회 집사님이 끝나고 난 뒤에 저한테 “목사님, 다른 건 다 이해가 되는데 락키산맥의 호수에 잠긴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잘 안 됩니다.” 라고 이야기 했었어요. 록키산맥이 2000m높이가 있고 호수가 이리 있어요. 둘러싼 설산들이 마치 물속에 잠긴 듯 명경지수잖아요. 다 잠기겠지요.  그러니 사람들은 뭘 생각하느냐 하면 이 호수에 비췬 것은 이건 허상이고, 실제로는 뭐가 실제냐, 리얼리티냐 하면 설산이 이게 진짜다. 라고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자, 이렇게 생각한다고 이게 기쁩니까. 이게 안 기쁘지요. 왜 안 기쁘냐 하면 이게 산이 실상이 되어버리면 누구도 실상이 되느냐 하면 그 산을 관람하고 있는 나도 실상이 돼요. 그런데 나는 실상이 되는데 내 마음은 기쁘지 않고 늘 두려움과 주눅 들고 있어요. 잘난 사람 있으면 기죽어요. 그리고 캐나다 여행 갔다 오게 되면 아이고~ 오백만원 날아갔다. 아깝다. 뭐 이런 거. 그 때는 좋았는데 또 아깝다 할 수 있고, 다음에 또 돈 모아서 또 가야지 할 수도 있고. 전부 다 걱정하고 고민하는 것이 실제로 있는 것 가지고 고민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사실은 그 원인이 내가 가짜가 아니고 진짜다. 라고 나는 안개가 아니고 진짜로 있다, 이것 때문에 된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 누가 끼어드느냐 하면 예수님이 끼어들었거든요. 이 세상에. 예수님이 끼어들었다 말이죠. 예수님이 끼어들었는데 예수님은 이 전체를 뭐로 보느냐 하면 이 전체를 허상으로 보는 겁니다. 허상 정도가 아니고 진짜 있는 하나님에게 도전하는 불순한 힘이지요. 불순한 힘으로 보는 겁니다. 그리고 이 전체가 뭐냐, 어제 설교에 의하면 불로 멸망해요. 불로 멸망한다고요. 불로 멸망해버리면 하나님의 창조하신 그 창조의 취지는 어디서 살릴 것인가, 바로 이거 물속에 있지요. 왜냐, 이 호수가 죽음의 세계, 죽음의 세계인데 예수님의 모든 활동은 무엇을 앞장세우느냐 하면 자신의 빈 무덤을 앞장세우잖아요. 빈 무덤.

무덤인데 다른 무덤은 다 뼈가 있는 무덤인데 이건 빈 무덤이에요. 제가 어제 미이라 이야기했지요. 인간이 아무리 그럴싸하면서 사무실에 쇼파 앉아서 김양한테 커피 시켜 먹으면서 앉아있어도 결국은 나중에 쪼그라 들고 바짝 마르지요. 미이라가 되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미이라가 아니고 부처도 미이라고, 테스형도 미이라인데, 예수님은 뭡니까? 그 무덤에 예수님이 있었어요? 없었어요? 없었지요. 어디 가셨어요? 어디 가셨습니까? 예수님 어디 가셨어요? 없는 분이 그러니까 무덤에 계시지 않을 뿐, 없음이 있는 모습으로 있음의 세계에 인간이 있다고 여기는 실제 세계에 나타나셔서 홀연히 자기의 실상을 가지고 이 땅을 떠나버린 거죠. 그 남은 흔적은 빈 무덤이고. 그러면 어느 게 가짜입니까? 무덤에서 이 뼈 조각이 남아있는 게 가짜 아닙니까.

그럼 여기서 물음이 질문이 뭐냐, 왜 인간은 죽는가, 인간은 잠시 있어 보였는데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다가 왜 지금쯤 우리 선조들은 어디가 있는데? 없는데? 이 질문에 대해서 답변이 없지요. 그럼 답변이 없으면 진리입니까? 아닙니까? 답변 없는 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라는 것은 이미 답변 자리에 그 안에서 사는 게 그게 기쁨이지 답변도 없이 문제지만 들고 있는 게 뭐가 진리겠어요.

내 아내하고 왜 아들은 죽입니까? 해가지고 바이든 이라는 사람이 Why me?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이 불렀던 도 있지요. Why me? 주여! 왜 하필이면 나입니까? 이렇게 하는데 주님의 응답이 Why not. 너는 왜 안 되는데. 이런 답변을 했다는 거예요. 주여! 왜 접니까? me가 없음으로 뭐로 바뀌어야 돼요? not없음으로 바뀌어야 된다고요. 없음으로.

그래서 어제 수요설교에서 했잖아요. 주여! 왜 저를 자꾸 살리십니까? 따져 물어야 돼요. 저를 왜 자꾸 살리십니까. 이유는 너가 있음이 아니라 진리가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너를 앞장세우기 위해서 살려주신 거예요. 빈 무덤이 주도권을 갖고 있고, 꽉 찬 무덤은 주도권이 없어요. 보이지 않는 분이 주도권을 쥐고 보이는 사람은 이건 백날해도 의미가 없다니까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집에 강아지고 뭐고 간에 의미 없어요.

어떤 건물에 부동산 주인이 부동산 세받아 먹는 거 외에는 할 짓이 없다는 것을 뭐로 알 수 있느냐면 그 집에 키우는 고양이가 살이 찌면 그 사람이 할 일 없는 사람임을 알 수 있어요. 왜냐하면 고양이는 그 주인 닮아가지고 지도 가만히 앉아있거든요. 고양이 가만히 앉아있으면 뭐 됩니까. 살만 찌지요. 살만 찌는 거예요. 그것처럼 성도라 하는 것은 나에게 의미 있으라고 살려준 게 아니고 보이지 않는 분을 증거 하라고 살려주신 거예요.

그래서 이 순 계열은 순에게 새싹계열의 특징이 뭐냐 하면 항상 무엇과 동반하느냐 하면, 사람들이 그렇게 난리치고 그렇게 머리 싸매고 고민하고 걱정하는 이 짐승 안에 있는 눈에 보이는 유일한 현실이라고 우기는 이 현실과 대비되는 관계를 유지하면서 이 순의 계열이 등장하는 겁니다. 순의 계열.

다시 말씀드려서 순이라는 분이 하실 일이 스가랴 6장에서는 성전 짓는다 했지요. 성전. 그러면 옛날 이스라엘 생각해 봅시다. 이스라엘이 최종점에 이를 때에 솔로몬이 뭘 지었습니까? 성전 지었지요. 사실은 솔로몬 성전이 아니고 이게 다윗하고 하나님하고 계약에 의해서 주신 성전이에요. 솔로몬 성전하면 잘 못됐어요. 사실은 다윗성전이에요. 계획은 아버지가 했거든요. 다윗성전이에요.

다윗성전인데, 사무엘하7장 읽으면 너무 복잡하니까 읽지 않고 그냥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성전은 사람의 손으로 지어진 성전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건 뭐냐 하면 다윗의 아들이 성전 돼요. 다윗의 아들이 성전 됩니다. 다윗의 아들이 성전 될 때 이것을 로마서1장에 보게 되면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복음이라고 해요. 복음.

복음이 나타났으니, 다윗이 아들을 낳는 게 복음이라는 거예요. 어떤 사람들이 고대하고 있는 어떤 건물을 지을 거 같으면 우리가 건물에 들어가면 구원받아요. 그런데 어떤 인물이 등장했다는 말은 인물이 복음으로 등장했다는 말은 나냐? 너냐? 이걸 묻는 겁니다. 다윗의 아들이야? 아니면 지금 니가  붙들고 있는 너야? 어느 게 기뻐? 어느 게 진리야? 어느 게 영구적이야? 어느 게 영원해? 우리한테 묻는 겁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몸이 영구적이지요. 그러면 너는 니 할 일은 뭐냐 하면 늘 하루, 하루, 잠깐, 잠깐, 이 세상을 살면서 늘 소실된다는 거. 사라진다는 거. 나는 망가져서 지워진다는 것을 증거 해야 될 임무가 있지요. 의미 없음을 알리는 차원에서 의미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까 가사 다시 고쳐야 돼요.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의미가 있죠. 의미가 없다고 했다가 다시 의미가 있다.

뭐냐 하면 이스라엘에게 주께서 허락한 것은 순, 새싹을 허락한 것은 이스라엘에게 돌아갈 곳을 주시는 겁니다. 돌아가라고. 돌아갈 곳은 니가 성전 짓는 그거 아니야. 순이라는 분이 오시는 그 성전이 있는 그 이스라엘  그 약속의 땅이 영원히 너희가 돌아갈 그곳이야. 돌아갈 곳이 있다는 말은 주께서 받아들이겠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인정하겠다는 겁니다.

한 때 공개적으로 졸혼, 결혼 졸업한다 해가지고 화제를 끌었던 백일섭이라는 사람이 자기는 졸혼을 이제는 선전하지 않고 이걸 사람들에게 권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졸혼 할 때 그렇게 떠들더니만 왜 졸혼을 좋다고 광고를 안 합니까? 졸혼 하니까 돌아갈 곳이 없다는 거예요. 그 이야기 듣고 지난 낮 설교 생각났어요. 인간 몸에서 나온 배설물은 돌아갈 곳이 없지만, 주님께 나온 살과 피는 주님께서 다시 거두어버려요. 내 살과 내 피를 마시면 네가 영생을 얻으리라.

그렇게 보시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어요. 영생은 어디서 나오는가, 질투심에서 나온다. 질투심이라는 것은 성경에 여러 군데 나옵니다만, 사람들이 잘 주목을 안 해요. 하나님도 삐지나? 이런 생각이요. 하나님도 참 마음이 좁아가지고 삐질 수가 있느냐, 하는데 하나님께서 불심판할 때 그냥 심판하는 게 아니고 질투심으로 심판하거든요.

그 질투심이라 하는 것은 내 옆에 같이 있을 사람이 딴 데 가있기 때문에 질투를 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빈자리에 들어와야 될 사람이 들어오지 않고 못 들어오기 때문에 질투심을 해가지고 질투심으로 하나님께서 불심판을 내리는 겁니다. 신명기4장24절, 내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시는 불이시오, 그 다음에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다. 질투하시는 하나님 이리 되어있어요.

질투라는 말은 아가서에 보면 사랑입니다. 사랑과 질투 그거는 10분 쉬고 합시다.
 공은주(IP:119.♡.152.148) 20-11-18 16:32 
안양20201112b슥3장8절(순)-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영생은 질투심에서 나온다, 라는 말은 질투는 하나님 곁에 누가 있어야 되는 누락을 의미해요. 하나님께서 자기 있으니까 1이잖아요. 하나님은 1로 일하시는 게 아니고 자기 곁에 빈자리를 두고 1이 아니고 2가 되겠지요. 1이 아니고 2가 될 때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관계성이 성립되는 겁니다. 관계성. 하나님은 예수님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했어요. 내 사랑하는 아들. 사랑하는. 아가에 보면 이 사랑하는 이것을 사랑하는 자. 사랑=질투, 이 질투의 힘을 가지고 아가에서는 이게 죽음의 힘이라 합니다. 죽음의 힘.

그러니까 이걸 사람이 죽을 때 왜 죽느냐 하면 죄 때문에 죽는다는 거죠. 그러면 인간의 죄는 무엇인가. 죄는 주님의 사랑이 아닌 것이 죄가 돼요. 그럼 주님의 사랑이 아닌 게 죄라는 게 무슨 뜻인가, 하나님이 마련하신 그 빈자리에 차고 들어올 수 없는 것, 채워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사랑의 대상이 아닌 것. 버릴 카드지요. 들어오지 마라는 겁니다. 여기 아가8장6절에 보면, “너는 나를 인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이리 되어있습니다. 질투, 사랑, 죽음 그리고 심판.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질투심에서 비롯된 거예요.

이 말은 하나님은 뒤끝 있다는 거예요. 뒤끝. 다시 말해서 “내가 선악과 따먹지 말라고 했잖아! 내가 에덴동산 망치지 마라 했잖아!” 하고 하나님께서 그냥 안 봐주고 그냥 안 넘어간다, 라는 식으로 오는 겁니다. 마태복음13장39절에 보면,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데려갈 자와 남겨둘 자를 가려내는 그 활동에 빈 무덤으로 활동하시는 주님도 지금 오늘날도 쉬지 않고 일하십니다. 선별 작업하는 거예요.

사랑으로 데려갈 자와 빈자리 채울 자와 사랑의 대상이 아니고 밀어야 될 대상, 그것을 날카롭게 구분하는 겁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질투 작업은 바로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일에 대해서 다 드러났었어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하고 하나님의 그 질투심이 얼마나 대단했으면 자기 아들을 사흘 만에 도로 살려냅니다. 살려내는 것이 생명이거든요. 생명은 질투심에서 나와요.

“니는 죽어있으면 안되지. 일어나! 일어나! 잠자는 자여! 일어나 깨어라.” 하고 주님께서 진리가 우리한테 침투해버린 거예요. 진리가. 생명이 침투한 거예요. 사랑이 침투한 거고, 주님의 질투심이 가득한 사랑으로 와버리면 더 이상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미련 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되던, 어떻게 망가지든 없어요. 지금 죽어도 상관없어요. 다만 내일 사는 것은 주님의 주의 일을 하기 위해서 살려주는 거예요. 내 일하라고 살려주는 게 아니고 주의 일을 하라고 하기 때문에 목표나 목적이라든지 기대 이 모든 것은 주님의 몫이지 우리의 몫이 아니에요.

선지자의 특징이 그거 아닙니까. 어디 가서 무얼 하라 할 때, 자기의 재정적으로 이익을 얻기 위해서 그렇게 했습니까? 아닙니다. 거기 가서 주님의 진리 증거 하라고 거기 가게 하신 거예요. 어느 과부 집에 가서 얻어먹어라. 엘리야, 엘리사 이 모든 활동이 나아만 장군의 문둥병 낫는 것, 이 모든 활동이 장차 하나님께서 주님께서 어떤 입장에서 일하시는가를 그 선별 작업을 무슨 기준으로 하는가를 미리 선지자를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그 기준은 이겁니다. 순.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 없던 혈육입니다. 없던 혈육.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혈육입니다. 순. 다윗의 혈통인데 다윗의 혈통이 아니에요. 아까 말한 중복성이지요. 1이 아니고 2가 되는 겁니다. 2가 될 이유는 다윗의 혈통과 이 순의 혈통 사이에 2개가 중복되어 있어서 순의 혈통에서 다윗의 혈통에 있는 자를 질투심으로 사랑으로 건져주는 자만이 이 계열에 들어올 수 있는 겁니다.

어제 수요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나부터 출발하는 것은 어떤 경우도 하나님께서 넣어주지 않습니다. 나부터 출발하는 것. 그런데 십자가부터 출발하게 하신 것은 십자가부터 출발해서 나한테 오신 분 그 분에 의해서 우리는 합류되게 되면 그건 바로 성도가 되는 겁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부터 출발하게 되면 자꾸 이익과 손실을 생각하게 돼요. 어떤 경우라도 만회하려고 하고 손해 안 보도록 빨리 보상하고, 다시 회복되려고 애를 씁니다. 내가 나다운 것을 자꾸 자체적으로 설정을 해가지고 내가 나다움에서 조금이라도 이렇게 모자람이 있으면 괴로워서 어쩔 줄을 몰라 해요. 잠도 자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거예요.

그런데 버릴 카드인데, 우리는 버릴 카드에 자꾸 신경을 쓰는 거예요. 그러면 스가랴가 받은 계시는 뭐냐, 버릴 카드는 온 옷 전체가 시커먼 때 묻은 그 여호수아의 옷이 버릴 카드에요. 동일한 여호수아인데 여호수아가 중복성을 갖고 있어요. 더러운 옷도 있었고, 하나님이 악마가 보는 앞에서 새 옷을 입혀버립니다. 제가 지난 강의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악마의 특징은 새 옷이 없다 했지요. 복음 모르는 사람은 새 옷이 없어요. 철따라 옷은 해 입는데 백화점에 옷은 사 입는데 주님이 주신 새 옷이 없어요.

죄 씻음이 깨끗하게 천국가도 통하는 천국가도 패스가 되는 그 옷이 없어요. 그 옷 어디서 팝니까? 마트에서 팝니까? 있으면 사게요. 롯데백화점에서 팔아요? 안 팔아요. 주셔야 돼요. 질투심으로. 그 옷의 모양이 오늘 본문 나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느니라 내가 거기에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하리라” 그 옷이 어떤 옷이냐, 일곱 눈이 있는 옷이라 보면 돼요.

여호수아가 보기에는 한 돌이 있지만, 그 돌에 있다는 말은 곧 그가 입은 옷의 교체, 옷의 교체의 취지가 살아있는 돌. 옷이 교체되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는 돌의 일곱 눈이 있지요. 요 일곱 눈은 요게 요한계시록에 보면 일곱 영이에요. 요한계시록5장6절, 3장1절에 나와 있는데,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일곱 영이에요.

그 일곱 영의 특징은 이사야11장1~2절,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여호와의 신까지 합하면 7가지 알 수 있는데. 한마디로 말해서 이건 뭐냐, 함축하게 되면 지혜, 총명, 모략, 재능, 지식, 합치면 뭐가 되겠어요? 진리의 영이에요. 진리의 영이 누구한테 오느냐, 요단강 예수님 세례 받을 때 주님에게 이게 통합해서 온 거예요. 따로 따로 온 게 아니에요.

그 순이라는 분. 통합해서 온 거예요. 그래서 이사야 11장에서는 뭐냐 하면 계속 힌트를 주는 겁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메시아가 온다. 또 메시아냐, 아니냐를 알아보려하거든 그 사람에게 진리의 신, 영이 임했거든 그 분이 바로 메시아다. 자, 흩어져서 보물찾기. 찾아봐라. 못 찾습니다. 왜? 주의 말씀은 혼합되어있기 때문에. 인간의 언어로 풀 수 없게 만들었어요. 왜 인간의 언어로 못 푸느냐 하면 인간의 모든 의미는 나 안 더럽다고 하는 악마의 사주를 받은 마음이거든요. 성령이 주의 마음이라면 하나님만 마음이 있는 게 아니에요. 인간의 마음도 있어요. 인간의 마음도 일곱 마음, 악마의 마음이 일곱 마음만 되겠습니까. 엄청나게 많지요. 마태복음9장에 귀신들린 청년 있지요. 귀신 들린 청년 해봤자 몸무게 많이 나가봐야 많이 되어봐야 60Kg 키는 1m60 그 한 몸에다가 귀신이 있다면 귀신은 몇 마리나 들어갈 수 있을까요? 산수시간. 무한대지요. 무한대다 이 말이에요.

그 귀신이 나오면서 예수님한테 눈꼴치고 나왔잖아요. “그새 못 참고 우리를 멸하러왔습니까?” 눈 팍 치켜뜨고. 니 청년 잡았다 싶었는데 당신 때문에 방해받았다는 거죠. 그리고 어디에 들어갔느냐 하면 “여기 청년에서 나와” 들어가라 하니까 갈 데 없습니다. 하거든요. 갈데없다고. 이 말은 뭐냐 하면 모든 인간은 누구나 바이러스 코로나19에 걸릴 수 있는 것처럼 모든 인간은 전부 다 귀신 들렸어요. 아담에 속한 모든 인간은 귀신들린 자에요.

그 당시에 귀신에 악마의 대장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서기관들이고요, 근접해서 노골적으로 한 거예요. 노골적으로. 그들의 유식과 배운 것이 그리스도를 노골적으로 직접 공격하는 거고 일반인들은 그 악마의 예수님을 공격하는 그들의 지식인의 지배를, 그 권세에 통치를 받으니까, 짐승의 나라에 통치를 받으니까 그것도 역시 귀신의 통제를 받으니까 귀신 들린 거고. 이리 보시면 돼요. 성령 없으면 무조건 귀신 들린 거예요. 간단한 문제입니다.

영적 세계에서 인간의 몸은 빈 몸으로 가만 두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뭐로 채워도 채워진다 말입니다. 뭐로 채워도. 불신자보고 인품 좋다고. 인품 좋을 수 있어요. 착하다, 이럴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귀신 안 들린 건 아니다 말이죠. 주님의 통제에 의해서 귀신이 덜 귀신답게 게거품 안 물어서 그렇지. 나중에 어떻게 되면 게거품 물 수 있다 이 말입니다. “아이고, 우리 남편은 사람은 좋은데 술만 안 먹으면 참 좋은데.” 술 먹겠다는 그 자체가 이미 귀신들린 거예요. 술 먹는 마음을 그리워하는 거예요. 그 사람은 지금.  술 먹는 사람이 되고 싶어 지금 찬스를 보고 있는 거예요. 찬스를. 틈만 나면 술 먹으려고 돌아다니는 거예요. 혼자 맛이 없으니까 친구 전화해가지고 맨날 술 먹고. 지금 와서 초등학교 동창회 왜 모입니까. 술 먹으려고 모여요. 다른 거룩한 명분대지 마세요. 그게 술 먹으려고 다녀요. 왜 교회 안 나옵니까? 술 안 주니까 교회 안 나오지.

인간은 인간마음을 인간 마음대로 못합니다. 마귀가 부리는 대로 할 수밖에 없어요. “아휴, 열심히 일해요.” 열심히 일하는 이유가 여유롭게 술 먹으려고 열심히 일하는 거예요. 틈만 나면 술 먹으려고. 왜? 술은 나를 기쁨을 주기 때문에. 쾌락을 주기 때문에. 그걸 사람들은 선이라 하지요. 요번 교재 봤지요. 교재 초반에 그런 이야기 나오잖아요. 쾌락이 선이고, 불쾌한 게 악이고.

이 일곱 영이, 진리의 영이 된다는 말은 다시 말씀드립니다. 악마는 옷이 없어요. 이 말은 뭐가 없느냐, 진리의 영이 없다 말이죠. 진리의 영이 없으니까 이건 거짓이지요. 거짓. 그러면 진리는 뭐냐, 3x5=15이건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라 하는 것은 죄 사함 된 상태가 진리에요. 악마는 IQ가 250이다. 진리를 압니까? 수학 천재, 서울대 수석 합격 법대, 이거 진리 아는 사람이에요? 악마지요. 악마. 악마의 발악이다. 공부 잘한다고 진리 아는 게 아닙니다. 악마가 노골화된 거죠. 아니까. 포기하기가 더 힘든 거예요. 지 딴에 아니까.

다시 정리합시다. 여기서 정리하고 들어가야 돼요. 하나님의 뜻이 뭐냐, 하나님의 옆자리가 비어있다고요. 이 빈 자리에 누가 들어가느냐, 주님이 들어가야 돼요. 예수님이 들어가야 돼요. 그래서 스가랴에서는 예수님의 자리에 뭐라고 들어가요? 순이라고 하고. 이 순은 그냥 하나님 안이라고 쓱 들어가는 게 아니고 이 인간의 역사, 죄의 역사에서 악을 악으로 들추어내고 정복을 하는 조건을 가져야 심판주로서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심판하는 게 아니고 이 세상을 경험했던 그 아들로 말미암아 심판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숨겨진 영원한 비밀이에요. 창세전부터 숨겨온 비밀입니다. 시크릿. 비밀이에요. 왜 그러느냐 하면 악마가 하나님을 알아요? 몰라요? 악마가 하나님을 알지요. 그러니까 야고보서2장에 보면 유명한 말씀 나옵니다. 2장19절에 보면,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네가 하나님을 한 분인 줄을 믿느냐, 하나님이 최종적이고 절대적이고 유일한 분임을 믿느냐, 그거 귀신들도 믿고 귀신들도 두려워서 떠느니라. 뭘 모르느냐 하면, 진짜 신앙인이라면 주님이 우리에게 뭘 해주느냐가 보여야 돼요. 주님이.

주님이 뭘 해주느냐 하면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치듯이 우리에게 대신 희생했다는 거. 대신 희생했다는 거예요. 기생 라합의 행동을 통해서 뭘 끄집어낼 줄 알아야 되느냐 하면, 기생 라합을 위해서 대신 희생하신 요소가 있어줘야 돼요. 그게 뭐냐, 정탐꾼이에요. 위험을 무릎 쓰고 여리고까지 왔던 정탐꾼을 기생 라합은 메시아로 본 거예요. 나를 구출할 수 있는, 구원할 수 있는 주님의 질투심의 파견자라고 본 거예요. 사랑의 파견자로 본 겁니다.

예수님은 안 보이잖아요. 하나님께서는 누굴 사용한다고요? 내일 죽어야 되는데 오늘까지 살고 있는 우리를 통해서 예수님이 자기의 하시는 현재 지금 일하고 있음을 우리를 통해서 계속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됩니까? 나를 밟아야지요. 시몬 너는 아느냐, 니 망가지는 소리를. 두 개의 나중에서 하나는 망가지는 즐거움이 있어야 돼요. 더 이상 나를 안 챙겨도 된다는 그 여유만만함. 자유함이 있어야 돼요.

누구한테 기죽을 필요 없잖아요. 마태복음 주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임마누엘이라 했지요. 하나님은 홀로 계시기를 싫어해요. 자기의 짝이 되는, 사랑의 대상이 있고 싶어 해요. 그 사랑의 대상에 바로 원조가 누구냐, 바로 순입니다. 그래서 이 순이라는 분은 다윗의 혈통을 통해서 이 땅에 태어나셔야 돼요.

자, 다윗의 혈통은 인간의 혈통입니다. 인간의 혈통은 뭐가 흐릅니까? 여기에 저주가 흐르지요. 그래서 주님은 저주를 맛보아야 되는 겁니다. 저주를 맛본다는 것은 정말 힘든 거죠. 벨기에 공주가 다음 차기 왕권을 인수 받을 그 공주가 벨기에 육군 사관학교에 입사해가지고 벅벅 기었다 했잖아요. 훈련을 다 받는 거예요. 흙 한 번 안 묻힐 그리고 험한 일을 일체 안해야 될 그 왕이 여왕이 일부러 왕은 자기 딸을 제일 밑바닥 제일 힘든 유격훈련까지 군대생활까지 다 거치게 한다 말이죠. 뭐 군대생활이겠습니까. 그냥 폼 낸 거죠.

요 원칙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시킨 겁니다. 스가랴1장16절을 보게 되면 여기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먹줄 나오지요. 여호와께서 건축하리니 예루살렘위에 뭐를 치리라? 먹줄. 먹줄 친다는 것은 디자인하겠다는 거예요. 디자인. 디자인하는데 그 디자인하면서 또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19절에 보면, 내가 또 보니 뿔이 보이지요. 먹줄 알지요? 건축할 때 밑에 벽돌 같은데다가 미리 탁탁 쳐 놓으면 검은 줄 쳐놓고 거기에 맞추어서 그 기초위에 건물 올리잖아요. 그거 하면서도 같이 뭐하느냐 하면, 누가 이 성전을 박살 내났는가, 박살낸 4뿔이 나와요. 4뿔. 이게 짐승의 권세 제국들입니다.

 그러니 짐승은 뭘 노렸다? 이스라엘의 건드리지 말아야 될 것을 건드린 거예요. 뭘 건드렸습니까? 하나님, 여호와 계신 집을 건드린 거예요. 벌집을 쑤셔 놓은 거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성전이 없는 그러니까 임마누엘이 아닌 하나님이 함께 계심이 아닌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에요. 오직 하나님 자신이 설 집을 주님과 함께 있을 자격이 되는 사람만 함께 있겠다는 그 목표는 하나님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 자격자는 어떠냐, 누가 너를 망하게 했던가에 내력을 아는 자만이 당한 자만이 다시 예루살렘을 돌아올 수가 있어요. 그 절차를 예수님이 몸소 체험하신 거예요. 그냥 하늘에서 왕이 아니라 이 땅에 와서 모든 수모와 모든 더러운 대접은 다 받으셨기 때문에 심판을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신 심판주로서 영원한 아버지의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누가? 그리스도께서.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의 몸께서.

그 몸에 누가 달라붙어있지요? 바로 알곡들, 지체들, 성도들이 내 몸이 없고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겁니다. 이제는 우리 아담의 몸은 바이바이에요. 흙에 속한 몸은 이제 이별입니다. 주께서 승천하신 영광스런 그 몸을 입게 되는 겁니다. 천사와 같이 입게 돼요. 부활의 몸을 입게 되는 겁니다. 부활의 영광스런 첫 번째 열매는 예수님이고, 그 다음에 우리고. 예수님은 우리를 형제라 해서 자신을 스스로 맏아들로 여기시고 우리를 양자 삼으셨잖아요.

그러한 계획이 뭐냐, 딱 하나에요. 뭐냐 하면 하나님이 같이 살고 싶은 사람만 산다. 그런데 하나님이 같이 살고 싶은 사람은 하나님의 질투심이 도달된 사람. 사랑이 도달된 사람. 다시 말해서 누가 너를 건드리더냐? 라고 묻는 거예요. 스가랴1장21절에서. 누가 건드리느냐? 그 건드린 자들이 뿔이지요. 뿔이 몇 개입니까? 4뿔이죠. 그 뿔들이 유다를 해쳤다 말이죠. 공장. 공장이란 말은 업자지요. 업자. 대장장이들. 4대장장이들이 와가지고 뿔들을 열국의 뿔들을 떨어지게 하지요.

그러니까 요 스가랴1장 16절, 21절만 봐도 주의 하는 일은 뭐냐 하면 “에이~~ 떨어져라!” 하는 일을 하시는 거예요. 지금도. 오늘 지금 이 시간에도 에이~~ 떨어져라! 뭘 떨어져라? 너의 옛날의 미련 갖던 것. 너를 너에서 떨쳐버리고 니가 미련 갖는 너와 동일하게 사고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너희들 식구부터 해가지고 자식부터 남편, 아내, 전부 다 떨어져야 될 것과 동일한 사고방식은 다 떨어져라는 작업을 하는 겁니다. 관계를 다 끊어버리지요. 집안 식구가 니 원수니라, 하는 겁니다. 천하 자식이나 처나 나보다 합당치 않다. 전부 다 이게 뭐냐, 떨어질 걸 다 떨어지는 거예요.

그걸 이 말씀 들었다고 우리가 또 알아서 떨치면 안 됩니다. “가라, 이태야!” 이런 식으로 안 되고. 주께서 하게 해야지 내가 나서면 안돼요. 내가 나선다는 것은 내가 뭔가 노리고 있는 거예요. 내가 뭔가 노리고. 복음도 모르는 남편을 이혼하자. 이리 나서면 안 되고요. 뜻이 있어 붙여 줄때는 다 뭐 뜻이 있어서 붙여줄 거 아닙니까. 붙여주는 게 있다 말이죠.

주께서 떨쳐줘야 되지, 내가 떨친다는 것은 나의 목적이 되고 목표가 되고 이게 내 행동의 하나의 의미가 생겨버리면 안돼요. 떨어질 인간이 무슨 의미가 생겨요. 주님의 질투심이 내 질투심이고, 주님의 사랑을 내 사랑으로 일방적으로 하면 그건 육탄전이고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고요.

그리고 난 뒤에 2장5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불로 둘러싼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에서 영광이 되리라” 불 이야기는 수요일에 말씀드렸기 때문에 더는 안하겠지만, 주께서 완전히 접근불가, 선별작업을 했다는 말은 알아서 못 오게 불로서 울타리를 바운더리를 불로서 쳐버린다 말이죠. 에덴동산과 그리고 이 지상과 분리하듯이 그런 식으로 분리를 하게 하는 그러한 성전이 세워지는 겁니다. 나중에 천국과 지옥도 마찬가지에요. 지옥에서 못 벗어나요. 우리는 천국에서 못 벗어나는 것처럼. 지옥에서 못 벗어나옵니다.

지옥에도 지정된 사람만 가요. 아무나 지옥을 못 갑니다. 지옥 가야될 사람만 지옥가게 되는 거예요. 주의 일은 배제될 사람만 배제되고 배제 안 될 사람은 지옥 가고 싶어도 주께서 질투심으로 강한 질투심과 죽음보다 강한 생명의 힘으로 결국 받아줘요. 그래서 우리가 누가 구원받고 안 받고 신경 쓰지 말고 주께서는 지금 나에게 무엇을 떨쳐버리게 하느냐 자기 떨쳐버릴 거만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 다음에 2장 말고 3장에 보면, 여호수아 나오지요. 여호수아를 뭐라고 했습니까? 대제사장이라고 했지요. 원래 대제사장 계열의 제일 원조가 누구냐 하면 모세가 아니고요, 모세의 형이에요. 아론입니다. 아론이 아들 4명을 낳았는데 나답과 아비후 어떻게 됐습니까? 술 먹고 소주 먹고 들어가 가지고 첫째 아들, 둘째 아들 다 날아갔어요. 그 다음에 세 번째가 엘르아살 4번째가 이다말인데 이게 다윗까지 경쟁해요. 나답과 아비후는 잘렸고, 엘르아살하고 그 다음에 이다말이 둘이 남았는데 여기에서 후손 중에 유명한 사람이 사독이 나오고 여기에 이다말 계통에서는 아비아달이 나와요. 아비아달 제사장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이다말 계통에 나온 중에서 사무엘상 초반에 유명한 제사장 나와요. 힌트를 준다면 뚱뚱하다, 목이 부러져 죽었다. 엘리제사장. 이건 철없는 소년 사무엘에게 당한 제사장이죠. 그래서 이 계열은 중간에 안돼요. 그리고 사독계열은 빛을 발하나, 여기 엘르아살 계열은 비느하스가 나와요. 비느하스 선지자는 민수기25장에 보면 창으로 그 우상 섬기던 남녀를 죽일 때에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11절에 보면,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 노를 돌이켜서 내 질투심으로 그들을 소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그 다음에 뭡니까?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그러니까 하나님의 여백, 하나님의 빈자리를 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일로 충족되는 게 아니고 자기 옆에 둘 사람을 제대로 둘 사람을 찾는 그 작업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알아요. 사랑의 대상을 찾는 것. 사랑의 대상은 주님이시지요. 주님인데, 그 주님이 하나의 계열을 맞이한다. 주님인데 주님의 계열 또는 그리스도의 몸 같은 말입니다. 주님의 계열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사독에서 그 다음에 이제 오늘 본문 3장에 나오는 여호수아까지 어떤 계열이 있느냐, 그 중에 유명한 사람은 바로 여호야다라 해가지고 죽었는데요, 아달랴 반란을 일으키고 그 다음에 스가랴가 요아스 왕한테 죽었어요. 처형당했어요. 그 때 죽을 때 스가랴는 피를 흘렸거든요. 그래서 예수님이 창세기4장에는 가인에게 죽은 아벨 피와 그리고 스가랴의 피와 이제 마지막 피. 예수님 자신의 피가 계열을 이룬다. 고 같은 계열에 속했다는 거예요. 어떤 계열? 세상이 이만큼 악하다는 것.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의 짝이 등장하는 것은 악마가 극구 반발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인으로서의 역할. 증인의 역할만 해야만 그 계열에 소속이 됩니다.

처음에 이야기했지만 선지자가 제가 이리 이야기하면 여러분은 또 걱정이 되어가지고 ‘나는 그저 집에 저녁 해야 되는데. 선지자 노릇도 못하고. 애 학교 마치면 빨리 저녁 해줘야 되는데. 학원 갔다 오는데 어쩌지. 나는 그저 일반 주부로서 그렇게 거룩하게 못 사는데.’ 이런 걱정들을 하시겠지만, 아까 했잖아요. 선지자들이 일을 할 때, 그냥 해야 된다 해서 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기쁨으로 해요. 기쁨으로. 고맙소! 또는 감사함.

이게 되게 되면 그 사람이 밥을 해주든 안 해주든 관계없이 주의 증인이고 선지자계열입니다. 뭘 하든지 간에. 밥 해주지 말고 시켜먹자. 이 말이 아니고 시켜 먹더라도 감사와 고마움이에요. 하나님께서 살려주셔서 여전히 이 일을 하게 하시는구나! 그러니까 내가 일한다가 아니라 내 안에서 누가 일하신다? 주께서 일하신다는 것을 그렇게 보여주는 겁니다.

스가랴2장11절에서 13절 봅시다. “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네 가운데에 머물리라 네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네게 보내신 줄 알리라 여호와께서 장차 유다를 거룩한 땅에서 자기 소유를 삼으시고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시리니 모든 육체가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의 거룩한 처소에서 일어나심이니라 하라 하더라” 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아까 했지요. 선별작업에 의해서 임마누엘이 가능한 그 사람들, 나는 그 가운데에 거하리라. 이게 전부 다 뭡니까? 질투심.

그래서 아까 생뚱맞게 이야기했지만, 영생은 곧 뭐다? 질투심. 누구의 질투심? 하나님의 맹렬한 질투심. 질투심이라고 제가 언급하는 이유는 질투심은 목표에 이르지 않는 한 멈춰지지 않습니다. 나하고 있어야 될 사람이, 살아야 될 사람이 니가 왜 거기에 가있느냐 말이죠. 질투 확 올라오지요. 니가 왜 거기서 나와. 확 올라오는 거예요. 니는 내 사람이지 저사람 아니잖아. 그러나 아담이 선악과 따먹고 전부다 절로 다 가버린 거예요. 그래서 질투심이 동한 창세전에 예정된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만 족집게로 뽑아내는데 그 뽑아내는 작업을 통해서 뽑힌 사람들은 중복성을 갖고 있지요. 버릴 나와 채택되는 나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버릴 나는 아담의 원칙 따라 아담의 기준 따라 살아가는 나는 버릴 나고, 여호수아 대제사장의 옷을 벗기듯이 주님께서 새 옷으로 갈아입히는 그 작업, 진리. 진리에 기쁨을 주면서 하는 그 작업은 영원히 주님 옆에 하나님 오른편에 있어야 될 그러한 성도입니다.

예수님께서 12제자에게 말씀하실 때에 니가 나와 함께 12나라를 통치할 것이다, 했잖아요. 통치한다고 하니까 예수님과 같은 동일한 생각을 갖고 있어야 이게 통치가 되는 거예요. 그렇잖아요. 그리고 난 뒤에 이제 오늘 본문 순 이야기 들어가 봅시다. 순이 등장한다는 것. 아까 이사야11장에 보면 누굽니까? 이새의 아들이죠. 전에 제가 이 점을 언급했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언급하지 않겠습니다마는 이새의 아들이라는 것은 룻기 할 때도 이야기했고요, 룻기할 때, (자식자리) → (아버지자리),(엄마자리) 괄호 3개 해놨어요.

요번 새 책이 나오는데 <천국의 틈>이라는 책에 보게 되면 우리 최지영씨가 디자인을 잘해가지고 여기 괄호에 세 사람을 집어넣어놨어요. 요 자리가 뭐냐 하면 자식 자리고, 아버지, 엄마 자리에요. 그런데 보통 우리에게서는 아버지, 어머니가 있어야 자식이 나오는 줄 아는데. 자식이 먼저 나와야 아버지, 엄마가 비로소 자식에게 종속된 상태로 자기 자리를 갖추게 되는 겁니다. 빈자리가.

이삭이 있어줘야 아브람에서 벗어나서 아브라함이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돼요. 그러니까 그것은 아버지는 어디에 종속된다? 자식에 종속되지요. 그러면 아브라함의 일대기가 있으면 여기에 뭔가 수직으로 여기에 침투가 되지요. 그러면 이건 혈육이 두 동강 나는 거예요. 혈육이 두 동강 나야 옛사람이 생기고 새사람이 발생되는 거예요. 약속이 와서 잘라버리는 거예요. 아브람 시대하고 아브라함 시대가 달라요. 아브람 시대는 혈육의 시대라면, 이스마엘이 용납되는 시대라면, 아브라함 시대부터는 약속의 시대기 때문에 약속의 시대는 계속해서 뭘 공격하느냐, 육을 공격합니다.

아브라함의 318명 자기의 사병을 동원해가지고 전쟁해서 자기 조카 롯을 구원했지요. 거기에 등장했던 왕이 있어요. 살렘왕 멜기세덱. 멜기세덱은 히브리서7장에 보면 이건 뭐냐 하면 족보가 없어요. 족보가 없다는 것은 이 땅에 육의 혈통의 계열이 아니고 수직계열이에요. 영원한 하나님의 제사장이라는 겁니다. 그 제사장이 바로 여호수아3장에 보면 바로 여호수아고 그 여호수아 계열에 누가 난다? 순이 메시아가 등장해요. 그러면 이건 여호수아가 메시아를 난 게 아니고 순이 누구 자리를 확정해 준 거예요? 여호수아 자리. 제사장 자리를 메시아가 확정해 준 겁니다. 이걸 누가 이야기하느냐, 바로 선지자 스가랴가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기 제사장 있고, 여기 선지자 있으니까 빠진 것은 뭐밖에 없습니까? 왕 자리가 빠졌지요. 그 왕 자리가 마저 채워지는 거예요. 그래야 퍼즐이 그림이 맞으니까. 이게 왕입니다. 왕은 마지막에 오는 거고, 그 마지막이 사실은 처음이 되는 거예요. 새롭게 규정된 처음이에요. 스타트 지점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나부터 살면 안 되고 우리의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고 우리의 처음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부터 다시 우리가 규정되어야 돼요. 십자가로부터. 십자가란 뭐냐, 우리는 이미 죽었고, 우리 안에 사셨던 분이 같이 사는 거거든요. 그걸 갈라디아서2장20절에서는 우리는 죽었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 믿음이 뭐냐, 아까 제가 이야기한 관계입니다. 관계. 질투가 통하고 사랑이 통하는 하나의 수도관, 파이프관, 관이 형성돼요. 관. 그럼 뭐가 의냐, 그 관이 의에요. 내가 안 중요하고요, 내가 안 중요하고 주님이 주신 관이 중요한 거예요.

여러분, 한방에 가면 등짝이 아프다, 결린다 하면, 여기에 뭐 뜹니까? 부항 뜨지요. 부항 모습이 좀 흉직하게 생겼지요. 관 모습이지요. 흉직하다 해가지고 떼면 효과 없잖아요. 그것처럼 관이 거기에 달라붙어있는 거예요. 관이 꽉 달라붙어있는 거예요. 주님의 관이. 그게 성령의 관이라고 하는데. 일곱 영의 감시를 받고 있다. 좋은 의미의 감시입니다. 진리의 영이 우리를 주도하지요.
진리께서 우리를 인도한다는 말은 우리의 자리를 늘 확인시켜 주는 겁니다. 주눅 들지 마라. 기죽지 마라. 어차피 그건 버릴 카드야. 너는 나의 택한 카드잖아.

자, 그러면 이 여호수아 성전 세우는 이 스가랴는 결국은 성전을 세우면서 성전을 중건하라고 독촉을 하거든요. 계시를 통해서. 측량해서 성전 세워라. 성전을 세우면서 이 성전 말고 중복되어 있으니까. 눈에 보이는 성전 말고 또 다른 성전이 있지요. 땅에 세우는 성전은 이거는 제거될 성전이에요. 마치 우리의 몸은 성전이면서도 우리의 육신은 잘리고 우리의 성전은 영원한 것처럼. 성령의 전이 영원한 것처럼. 요걸 그대로 스가랴가 이야기해준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이 성전은 나중에 어디서 박살나느냐 하면 그 다음 제국, 메대파사, 그 다음에 헬라 마케토니아, 그 다음에 로마, 로마한테 성전은 나중에 어떻게 됩니까? AD70년경에 마사다 대전 있기 전에 이미 성전은 불타버립니다. 성전이 불타버리지요. 예수님은 스가랴 예언의 스케줄대로 그대로 차질 없이 가는 거예요. 헐어버려라. 46년 동안 지은 성전 헐어버려라. 헐어버리는 자체가 니가 구원받았다는 거예요. 니가 너를 챙기지 말고 니가 너를 무너뜨려버려라. 우리가 무너뜨리면 주께서 친히 세우시는 우리가 또 그 현장에 느껴지고 다가오는 겁니다. ‘아, 내 몸 좋아라고 한 것이 아니고 관계, 주님의 그 관계, 믿음, 그 믿음이 이렇게 실제적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계속 우리는 이 짐승의 제국, 이 세상 속에서 지금도 꾸준히 어쩔 수 없이 살아가야 되는 겁니다.

여기에 10절에 봅시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하셨느니라” 되어있지요. 포도나무, 무화과나무라는 것은 여러분이 다 알다시피 젖과 꿀이 제대로 약속의 땅에 기능이 축복의 기능이 제대로 가동될 때 나타나는 소산물들입니다.

열왕기상4장24절에 보면, “솔로몬이 그 강 건너편을 딥사에서부터 가사까지 모두, 그 강 건너편의 왕을 모두 다스리므로 그가 사방에 둘린 민족과 평화를 누렸으니 솔로몬이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았더라” 이리 되어있어요. 솔로몬은 뭐냐, 다윗언약의 위대성이 확인된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함께 임마누엘 했다, 이 말이죠.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좋은 관계를 이루어질 때는 그들에게 포도나무도 무성하고 무화과나무도 무성하게 된다, 하고 된 겁니다.

그럼 지금도 어떤 사람이 복음 알고 과수 농사 지으면 포도나무 잘 됩니까. 라고 한다면 이것은 이 세상에 있는 우리의 육신, 아까 락키산맥 이야기했지요. 눈에 보이는 이런 것은 다 불로 태워져야 돼요. 자기 집 포도농사 태풍불어 날아가도 괜찮아요. 허상이니까. 안개니까. 죽음이후 빈 무덤. 빈 무덤 가지고 모든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아주 독특하게 일하시잖아요. “너희는 죽었잖아. 나는 살았어.” 그거 앞장 세워서 일하시는 거예요.

주님이 우리에게 찾아올 때도 마찬가지에요. 니 지금 죽는다고 죽으라고 고생하고 원망스럽지. 나 봐! 살았잖아. 살아있는 내가 네 속에 박히면 되잖아. 부항 뜨듯이. 그게 니 사명이야. 스가랴의 선지자의 사명. 그러니까 이게 포도나무, 무화과라는 말은 이미 우리는 예수님이 등장해가지고 성령을 주시는 한 이건 무슨 일원이다? 이미 완료된 상태다, 이 말이에요. 개코도 돈도 없고, 먹을 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지만, 하여튼 간에 우리는 지금 풍성한 가운데 있어요.

그래서 어제 수요일날 바로 죽음의 세계가 더 풍성하고 더 깊어서 거기서 찬미와 찬양이 마음껏 나온다는 거예요. 영원히 끊임없이 감사할 거리가 계속 나와요. 거기서. 그러나 이 세상에 호수 따로 있는 이 현실세계에서는 영원히 나오는 게 있지요. 짜증 지대로다~. 어떤 걸 봐도 짜증나. 뭘 해도 짜증 나. 뚝 하면 차 막혀서 짜증나고. 어떤 걸 해도 테스형! 해가지고 짜증내가지고 세상이 왜 이래? 이런 식으로 뭘 해도 짜증나. 집구석 들어가도 짜증나고 나가도 짜증나. 자꾸 왜 짜증나나. 자기 일을 최종적 일로 간주해서 그래요.

자기가 선악과 따먹어가지고 자기가 신이 됐기 때문에 자기 홀로 최종 승자가 되고자 하는 겁니다. 그걸 승리자의 귀환이라고 되어있지요. 요번 수련회 교재에 보면 앞에 보면 있어요. 승리자의 귀환. 나만 최후에 승자가 되고자 하는 욕구가 생긴다고요.

그러면 오늘 결론은 뭐냐, 오늘 제목이기도 한데. 성전의 합류에요. 성전의 합류. 성전의 합류라 하는 것은 신약에 오게 되면 이 성전이 누구라 했습니까? 예수님과 합류. 예수님 안에는 예수님이 인자가 되고, 인자 + 백성. 이게 포함돼 있지요. 인자+백성=성전. 예수님+백성.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가 어떻게 만나면 됩니까? 못 만나요. 만날 수가 없어요. 왜냐, 하나님이 스가랴의 약속대로 순되시는 주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야 돼요. 진리의 영을 보내게 됩니다.

그럼 진리의 영은 누구한테 오는가, 약속된 자에게 오는 거예요. 약속된 자가 바로 이스라엘이지요. 이스라엘은 주님의 솜씨에, 결과물이기 때문에, 결과물을 원인자로 바꾸지 마세요. 우리는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이 주님의 솜씨이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해서 구원받았다고 남한테 전도하지 마시고, 주께서 보이지 않는 분에게 원인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요란스럽게 일하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평온한지요. 여전히 우리가 옛사람에게 기대 걸지 않습니까. 우리의 기대와 목적과 희망이 다 좌절된다 할지라도 그게 주의 주신 복인 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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