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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12 00:31:37 조회 : 266         
환타지 스가랴 5:2 210311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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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은주(IP:175.♡.135.128) 21-03-21 22:38 
안양20210311A슥5장2절(환타지)-이 근호 목사

 스가랴5장1절, “내가 다시 눈을 들어 본즉 날아가는 두루마리가 있더라” 두루마리 펴면 면적이고, 둘둘 말아버리면 원통이고, 그런 양탄자 같은 그런 두루마리가 날아간다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 4장11절에 보면 내가 그에게 물어 가로되 등대 좌우에 두 감람나무는 무슨 뜻입니까? 이리 되어있거든요. 두 감람나무는 고정성이에요. 고정되어있는 겁니다. 그리고 5장1절에 나오는 두루마리는 고정성과 반대되는 유동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정성과 유동성관계에서 어느 것이 더 원천적이고 원형에 가까우냐 고정된 것이 유동적으로 이렇게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고정된 것이 원형이다. 이 쪽이 원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고정된 것은 어디 안에 있느냐 하면 여기에 스가랴 4장에 보면 이건 성전에 있어요. 성전에.

그러면 두루마리는 어디 있느냐, 성전밖에 있는 거예요. 성전 밖이니까 이것은 바로 세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가랴에서 이 고정적인 두 감람나무. 두 말뚝이라 하면 제일 쉽지요. 두 말뚝. 꽉 박아버렸다. 확정된 거예요. 두 말뚝. 그리고 이건 두루마리니까 그냥 두루마리가 아니고 어떤 두루마리냐 날아가는 두루마리. 휙~휙~ 날아가는 두루마리. 그러니까 이건 고정적이라면 이 성전 밖의 이 세상은 끊임없이 날아가니까 유동적이니까 이건 변화를 유발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 어떤 변화라 할지라도 이게 변화된 게 원형이 아니고 성전에 있는 이 말뚝 같은 고정성이 원형이기 때문에 이 두루마리는 결국 이것은 이 원형에서 나왔다. 그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이 말은 이 성전 고정적인 원형을 모르고서 이 땅에서 어느 것도 아무리 진리를 찾고 애를 쓴다 할지라도 절대로 이 원형에는 접근될 수가 없습니다. 이 땅에 어떤 변화를 해가지고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이 스가랴도 물어요. 이 나무가 뭡니까? 물었어요. 물으니까 하나님께서 답변이 바로 스가랴4장14절에 나옵니다. “이르되 이는 기름 부음 받은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는 자니라 하더라” 이 나무가 뭡니까 하니까 이 나무가 인물이라는 거예요. 인물. 사람이라는 겁니다. 사람.

자, 방금 우리가 성경에 나온 대로 이렇게 한 번 펼쳐봤습니다. 성경에 나온 대로 죽 나열해 봤지요. 나열하면서 성경 해석에 있어서 나타나는 모양새를 가지고 전환하는 원칙 같은 것이 죽 나와 있는 거예요. 원칙이. 어떤 원칙이 있는가 아까 방금 봤지요. 고정인 것이 원형이고, 유동적은 나중이다. 이건 변화를 의미한다. 그리고 변화되는 이 세계는 그냥 세상이다. 세상인데 어떤 세상이냐 하면 세상은 곧 성전 밖이다. 그러면 성전 밖의 상황을 두루마리가 고정된 것에서 나와서 날아갔다. 이 말은 성전 밖의 세계는 결국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이건 소멸을 의미해요. 소멸. 제거. 또는 멸망. 이러한 운명을 갖고 있는 거예요. 이 세상에는.

그러면 이 감람나무가 두 인물이라면 거기에 대비해서 이 두루마리가 날아가면서 덮겠지요. 덮는다. 덮어있는 모든 것은 그냥 이 세상 산과 물과 바다 이 정도 세상이 아니고 여기는 무엇이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인물들, 인간들이 포함이 되어있는 겁니다. 그러면 무엇이 소멸대상이냐 하면, 제거대상이냐, 멸망대상이냐, 인물들, 인간들이 제거대상이 되는 겁니다.

자, 그럼 두루마리는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바로 쉽게 해서 말씀이라 할 수 있어요. 말씀. 5장 3절에 나와요. “그가 내게 이르되 이는 온 지면에 두루 행하는 저주라” 여러분들이 잘 아시다시피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저주할 때는 근거가 있어요. 그 근거는 로마서3장 같은데 잘 나와 있지요. 저주할 때 근거는 율법입니다. 말씀입니다. 그리고 신명기28장에 보면 이 말씀을 저주라는 것이 나타나려면 중간에 저주를 줘야 될 정당성으로 이 율법의 말씀을 안 지키면 저주받는다. 그리고 지키면 복을 받는다. 분명히 신명기28장에 그렇게 되어있지요.

나가나 들어가나 이 말씀을 지키면 나가나 들어가나 복을 받고, 안 지키면 저주받는다. 라고 되어있는데 그 신명기28장의 말씀을 여러분들이 한 번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우리 인간들에게는 어떠한 자율권이 없습니다. 어떠한 자율권이 없어요. 아주 엄한 아버지가 한 손에는 호빵, 한 쪽에는 회초리 들고 내 말 지키면 호빵주고, 내 말 안 지키면 회초리로 얻어맞는다고 할 때 그러면 아버지와 그 자녀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자녀는 철저하게 아버지의 의사에 종속된 관계입니다.

이건 자식을 독자적인 개인적인 견해나 의견을 일체 용납하지 않는 거예요. 그렇다면 저주받는다는 게 뭘까요? 바로 아버지의 일방적인 지시와 명령 말고 따로 내 생각 갖는 게 저주를 유발하는 요인이 되는 거예요. 호빵 줄까, 회초리 줄까를 아버지가 말한 게 아니고, 내 지시와 명령을 줄게. 라는 말을 하는 거예요. 내 지시와 명령.

그러면 그 엄한 부모의 자식은 자기 안이 텅텅 비어있어야 돼요. 내 생각이 있으면 안 됩니다. 이런 것도 안돼요. 나 호빵 먹을래. 안 돼요. 큰일 나요. 왜냐하면 나는 호빵 원합니다. 라는 자체가 뭐냐 자기 생각을 이미 갖고 있는 거예요. 이 말을 쉽게 말하면 “하나님 아버지, 저 천국 갈래요.” 이거 큰일  날 소리에요. 천국 갈 소리한다는 건 이건 곧 저주입니다.

어제 수요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중요한 이야기를 중간에 했는데요. 구원이라는 문제, 천국 문제는 어디까지나 개인적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 자기 문제다.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그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초반부터 이야기합니다. 성도란 무엇인가, 성도는 어떤 모습이 성도냐 하면, 성도란, 무엇을 해도 상관없다. 이게 성도에요. 그 다음에 경계하지 않아도 되는 자.

경계라 하는 것은 두루 두루 살피면서 어디서 공격 들어오는가를 자기가 조심하고 방어하는 그러한 태도를 경계라 합니다. 적이 어디서 오는지. 정신 바짝 차리고 경계에 나서는 것. 그 경계에 나서는 목적은 내가 지킬 게 있다는 거예요. 내 안에 나만의 것. 나만의 것. 이건 아버지 것도 아니고 엄마 것도 아니고 나만의 것이 따로 있다. 라고 그런 것이 있을 때, 인간이 나만의 것. 여러 번 했는데 자꾸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니까 다시 반복합시다.

나만의 것이 바로 자아에요. 자아는 실체가 없으면 형성되지 않습니다. 나만의 것, 내 소유한 것. 것 그걸 동그라미 치면 그게 자아에요. 그냥 말로 나 한다고 나가 되는 게 아니에요. 나를 헤쳐 보면 나만의 것이 있어요. 보따리 안에 소복이 오직 나만의 것으로 집합되어있는 게 있어요. 모여 있는 게 있다고요. 나만의 것. 그게 자아에요. 자아.

나만의 것이 형성되어 있으면 그 다음에 뭐하겠어요? 지키기 위해서는 뭡니까? 두루 두루 살펴야겠지요. 대비해야겠지요. 그게 경계하잖아요. 성도는 경계하지 않아도 되는 자가 성도입니다. 너를 정죄하는 자가 있더냐, 할 때 그 간음한 여인에게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는데 그 말씀도 설교시간에 다 설명을 못해요. 길어서.

니를 정죄한 자가 있더냐 할 때, 여자 입에서 뭐가 나옵니까? 없나이다. 하지요. 그 말씀이 오묘한 것은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그걸 성도한테 묻는 것이 그 물음이 주님의 것을 발언을 한다는 게 발언하는 그 도착지점이 새로운 성도의 자아가 되는 거예요.

제가 만약에 그 현장에 있으면 그 여인의 이름을 짓습니다. 여자이름은 없씨에요. 없나이다. 이름이 없나이다. 왜냐하면 내가 나의 것을 고집하는 게 아니고 주님께서 새로 집어넣어준 거죠. 집어넣어준 게 뭐냐 하면 말씀이다 말이죠. 요한복음8장에서 예수님이 땅에다 뭘 쓰셨잖아요. 그 쓴 말씀, 그 쓴 말씀이 그 바리새인들을 없게 만들고 이제는 그 간음한 여인을 성도로서 있게 만든 내용이에요. 그걸 함축해보면 뭐냐 성도 그 여자 안에는 없나이다. 가 있어요.

없음이 있어요. 아무것도 없나이다. 가 있는 것. 다시 말해서 내 것이란 일체 없는 그러한 대상이 된 것. 그러니까 무엇을 해도 내 일이 아니니까. 나만의 것이 있으면 뭘 해도 내 것이 되는데 내 것이 없으니까 무엇을 해도 나랑 상관이 없지요. 주님께서는 주님이 집어넣은 것을 지키기 위해서 성도 주변에 계속해서 변화를 유발하고 일거리를 만들고 계속 뭔가 자꾸 사태가 일어나는 겁니다.

성도에게 인생을 살면서 사태가 일어나는 이유는 아직도 니 안에 니 것이 들었느냐, 아니면 내 것만 들었느냐, 묻는 방법이에요. 그러면 사태가 일어날 때마다 우리가 한 답변이 이미 확정되었습니다. 아까 변화 나왔지요. 변화 말고 감람나무 뭡니까. 확정되었지요. 확정된 내용은 뭐냐, 에브리 바디 시작! “없나이다.” “내가 상관할 게 없나이다.” “일어나야 될 일만 일어났나이다.” 일어나야 될 일이.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 됩니까? 묻지 마라. 그런 거 묻는 게 아니에요. 일어나야 하기에 적절하게 일어난 일이에요.

그것은 뭐냐, 니가 아직도 성도냐고 묻는 겁니다. 너의 것이 나는 없는 걸로 여기는데 아직도 있다고 생각하느냐, 묻는 거예요. 하지만, 아무리 성도라 해도 어떤 일이 터져버리면 분명히 없어야 될 내 것이 생겨버립니다. 그게 뭐냐, 오늘 제목으로 삼고 싶은데. 이건 어디까지나 후보감이고. 내 일방적 생각이고. 10분 뒤에 무슨 사태가 일어날지 모르니까. 제목은 환타지. 환상입니다.

아~~ 계속해서 성도는 아무것도 없어야 되는데 자꾸 내 것이 만들어져요. 생겨나요. 그런데 성도도 마찬가지고 일반인도 마찬가지이고 뭔가 생겨나게 되면 내 쪽에서 생겨났기 때문에 제목은 이렇게 환타지고 환상이라 하지만, 사람들은 내 것에서 이러한 환타지가 일어나게 되면 이걸 뭘로 보느냐 하면 리얼리티 실제 또는 현실로 봐요. 이걸 현실로 본다고요. 어렵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평소에 현실이라 하는 것이 주님 보시기에 뭐냐 환타지에요. 환상인데 환상을 환상으로 보지 않고 생생한 절실한 현실 그 자체로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대표적인 것이 이가 아픈 것. 이게 환상인데 이건 우리가 이가 안 아프고 싶어도 아파요. 그래서 지난 오후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했지요. 웃음은 환상에 가깝고 고통은 현실에 가깝다. 하는 원형에 가깝다. 그 이야기를 내가 요약할 때 그 이야기를 집어넣었는지 모르겠어요.

인간의 고통스러운 것은 그 고통은 다 본인 때문에 고통스러운 거예요. 그러나 욥의 고통은 본인의 행위와 그 고통을 연계할 수가 없어요. 이리 짜맞추고 저리 짜맞추고 해도 내가 하는 행동 때문에 일어난 벌이란 차원에서의 고통과는 이게 이어지지를 않는 겁니다. 그러니까 욥의 놀라운 사실은 욥은 욥의 현실은 내 행동과 결과가 일치될 때에 현실이에요. 그런데 일치되지 않으면서 아프거든요. 그렇다면 이 욥은 뭐냐 이게 꿈이냐, 아니면 환타지냐, 이게 분간하기 곤란한 거예요.

현실은 내가 행동해서 결과로 이어져서 처음부터 그 과정이 추적이 가능할 때 그게 현실이 되는 겁니다. 요렇게 요렇게 해서 요렇게 됐다. 배고팠다. 라면 끓여먹었다. 배부르다. 딱! 요거 현실이네. 여기 계산이 딱 나오잖아요.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그런데 딴 일하다보니 배가 안 고프네. 그럼 배고픈 건 없어졌어요. 그럼 아까 배고픈 것은 그럼 뭐였나? 내가 꿈이었는가, 환상이었는가, 환타지였는가, 이렇게 되겠지요. 이질적인 겁니다.

내가 알고 있는 그 예상 범위 바깥에 있는 어떤 일이 터져버렸을 때는 우리는 뭐를 고집하게 되는가 하면 우리 본성이 자아는 타고났거든요. 이건 자기 안쪽으로 방향이 구심력이 있어가지고 모든 걸 내가 알아야 돼요. 내가. 내가 알아야 마음이 편해요. 그런데 내가 모르는 게 등장해버리면 그걸 쉽게 뭐라고 봅니까? 그걸 환상이라고 본다고요. 그래서 인간이 분석이 안 되면 무조건 UFO. 미확인물체라 하거든요. 확인되지 않는 물체. UFO 또는 외계인. 자꾸 그걸 끄집어내는 이유가 그게 전부다 SF소설이고 환상, 환타지 소설이에요. 환상소설이라고요. 환상소설.

사람들은 그 환상에 대해서 대체하는 방법은 동조를 할까요, 내거를 지킬까요. 환상의 환상이 오게 되면 비상근무에 돌입합니다. 그게 뭐냐 아까 이야기한 경계하는 거예요. 정신 바짝 차려 인간아! 내가 나보고. 정신 바짝 차려! 현혹되면 안 돼. 천만원 투자하시면 일년 이자를 이백만원 드리겠습니다. 어머~ 믿지 마. 믿지 마. 그거 환상이야. 그렇게 되겠지요. 저쪽은 환상 아닌 걸 납득시키기 위해서 “이건 내가 LH 토지공사 있을 때 아는 정보인데 요거 투자하시면 개발됩니다. 내가 벌써 정보 다 빼냈습니다. 변찬흠 그 사람한테 들어가지고 다 빼내고 이거 맞습니다.” 아무리 해도 내가 다룰 수 없는 대상일 때는 주춤하는 겁니다. 이거 사기꾼 아닌가, 다단계 아닌가, 이렇게 되겠지요.

그래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항상 긴장 상태에 있는 이유가 그게 목적이 있어요. 뭐냐 하면 내 것 지키는 거예요. 항상 두리번 살피면서 내 것만 사수하겠다는 겁니다. 굉장히 조심스럽고 신중하지요. 사는 게 매사가 신중해요. 뭐 남들이 덜렁 덜렁한다 해도 나름대로 신중해요. 굉장히 신중합니다. 그런데 그 신중한 것. 그 신중한 그것을 사람들은 뭘로 보느냐 하면 신중하고 따지고 따지고 묻고, 묻고, 다시 검토하고, 검토한 걸 사람들은 뭘로 보느냐 현실로 보잖아요. 이것이 성경에서는 스가랴에서 이걸 뭘로 봅니까? 환타지로 보는 거예요. 착각으로 보는 거예요. 환상으로 보는 겁니다.

왜? 그것은 억지이기 때문에. 어떤 억지냐 하면 요동치고 변화하는 세계에서 차 띠고 포 띠고 나하고 상관없는 것. 내 이익과 당신한테 해줄 테니 당신은 나한테 뭐해줄 거요? 나한테 이익으로 오지 않는 것은 다 잘라버려요. 나뭇가지 중에서 다 잘라버리고 내 이익만 딱 도려 놓고 하는 말이 나는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 이리 주장하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무수한 변화가운데서 나름 고정성을 따로이 내것이라는 이름으로 확보하는 것. 그걸 바로 성경에서는 뭐로 보느냐, 환상이다. 쉽게 말해서 거짓이다. 허풍이다. 허망하다. 허망이 적당하네요. 환타지 이건 허망함.

무엇과 연관이 안 되겠어요? 두 감람나무와 연결이 안 되는 거예요. 말뚝처럼 박아놓은 그 성전의 등대 옆에 있는 두 감람나무처럼 되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 두 감람나무가 감람나무였습니까? 인물이었어요? 인물이었지요. 스가랴의 눈에 그건 사람으로 보였습니까? 나무로 보였습니까? 나무로 보였지요. 나무로 보였으니까 두 감람나무가 무엇입니까? 물은 거예요. 왜 저기 두 나무가 왜 서있습니까? 나무로 보는 거예요. 감람나무가 뭡니까? 하는데 그건 환상적으로 질문을 한 거고 현실적으로 정답을 대게 되면 사람이다. 인물이다. 그거거든요.

그러면 스가랴의 해석을 우리가 제대로 알았더라면 우리는 이제는 환상에서 통용되는 해석을 버리고 환상적인 이 현실에서 제대로 된 현실로 옮겨지는 그 해석을 우리 안에 담아야 되겠지요. 세상을 무슨 중심으로 본다? 인물중심으로 보는 거예요. 인물중심으로. 세상을. 사물중심이 아니고. 여기 휴지 있다. 잔이 있다. 딸기 있다. 카메라 있다. 이게 아니라 여기에 주님계시다. 이렇게 인물중심으로 봐야 되는 거예요. 주님 계시다. 더 나아가면 주님만 계시다가 되어야 돼요. 주님만 계시다.

그러면 인간은 뭐가 되느냐 사물이 되는 겁니다. 실제로 두 인물은 감람나무로 이 세상에서 통하니까요. 스가랴보기에. 예수님이 어떤 소경 눈 뜨게 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뭐가 보이냐, 나무가 보입니다. 다시 한 번 씻어주니까 뭐가 보이느냐, 사람이 보입니다. 이리 되었지요.

성도가 단순히 눈감았던 성도가 눈 뜨는 것이 목적이 그게 다가 아니라 세상을 어떻게 보고 해석하고 이해할 것인가, 이 세상이 하나님께서 나무 벌목이나 하려고 오신 건 아니잖아요. 그렇지요. 쓰레기 처리하려고 오신 분이 아니에요. 환경문제 해결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고, 너! 너는 환상이야. 환타지야! 너가 나라고 여기는 그게 환상이야. 그거 지적하려고 주께서 오신 겁니다. 허깨비에요. 안개에요.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없는데 마냥 여기 내가 있다고 자꾸 우기는 괴물 같은 존재가 있어요. 그 사주를 받는 겁니다. 자꾸. 괴물 같은 존재를 받아요. 제가 어제 수요일날 예를 들면서 사냥개 예를 들었지요. 사냥개가 레이스를 할 때 코앞에 뭐를 던져놓는가 하면 먹잇감을 두고 죽을 판 살판 마구 달리지요. 그건 인간도 다를 바 없다고 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점잖고 예를 바라도 그 사람을 자극시키고 그 사람으로 하여금 본래의 자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는 딱 한 가지만 하면 돼요. 돈. 아무리 점잖은 인품으로 둘둘 감았어요. 두루마리처럼 둘둘 감고 아무리 훌륭하고 세상을 착하게 살아도 저 지리산 저런 기도원이나 지리산 깊은 산속에서 도를 닦아도 진짜 깊은 산골에서 도를 닦아도 그 사람이 그 사람됨을 가장 알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전기세 받으러 왔다. 전기세 나왔습니다. 와~ 이번 달 많이 안 썼는데. 많이 나왔습니다. 이게 자기의 모습이에요. 머리 깎고 개량한복입고 천하에 도 닦고 수염을 길러가지고 맨날 시냇가에 가서 윗통 벗고 해도 도 닦아도. “전기세 나왔습니다.” 이러면 “이렇게 많이!” 그 말에 그만 자기 본색 다 드러났어요. 자기 본색 다 드러납니다.

이 세상의 가장 나쁜 점은 변화하는데 그걸 한 점으로 고정시키는 노력들이 있다는 거예요. 이게 아주 수상한 노력이에요. 아주 음흉한 노력이에요. 악마의 노력이지요. 사람은 떡으로 없이는 못산다. 아~ 참, 악마가 하여튼 바른 소리 하지 않는 악마가 없어요. 다 바른 소리해요. 한 번 적어볼게요. 자, 이 악마의 말을 듣고 여러분이 뭐가 문제인지 알아 맞춰 보세요. “사람은 떡 없이는 못산다.” 할 때, 이 떡은 돈으로 바꿔도 되겠지요. 사람은 떡 없이는 못산다. 할 때 무엇이 문제입니까? 여기서 이 악마의 주장인데.

우리가 이것을 이 악마가 이게 문제다. 라고 아는 사람은 더 나아가서 현실 자체가 이게 엉터리고 환상이고 환타지다. 아는 사람이어야 될 겁니다. 요게 문제가 돼요. 요 뿌리가 그대로 확장되면 현실이 되거든요. 사람은 어디가도 돈 없이는 못산다. 이게 아무리 예술이나 문학이고 정치를 논해도 기본은 이거거든요. 사람은 떡 없이는 못산다. 이 문장에서 문제되는 점은 뭐겠습니까? 다 문제되겠지요. 그런데 문제되는 핵심은 뭐냐 하면 ‘못 산다.’ 였어요.

사람은 살라고 태어난 게 아닙니다. 사람은 살라고 태어난 게 아니거든요. 그런데 악마가 인간의 치명적인 약점을 탁 치고 들어온 거예요. 왜냐하면 살아야 된다는 말은 무엇을 의식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의식한 거예요.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했거든요. 하나님은 죽으라고 했으니까 이미 선악과 따먹은 아담에 대해서 하나님은 죽으리라. 했다 말이죠. 하나님은 죽으리라고 했잖아요. 악마가 거기에 대해서 인간은 자기편으로 들려면 뭐해야 돼요? 안 죽는다. 가 되어야 되지요. 안 죽는다, 에서 더 나아갔지요. 악마는. 안 죽는 정도가 아니고 니가 뭐가 될 수 있다? 절대자가 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너는 너가 될 수 있다. 너가 지향하는 너가 될 수 있다는 거예요. 너는 너가 될 수 있다는 거예요. 체하는 것도 환상이에요. 너는 너가 될 수 있다. 너가 뭔데? 물으면 곧 앞으로 차차 알아간다. 이러는 거예요. 이게 인간사는 거예요. 여러분 자녀보고 커서 뭐가 될래? 하면 차츰 살아보고요. 차츰 살아보고요. 라고 답변하는 것은 나는 나 되기를 포기합니다. 라는 말은 때려죽여도 안 나와요.

사람은 떡 없이는 못산다. 에다가 대입시켜 봅시다. 사람에다가 여기에 신처럼 되리라. 마귀 말이니까. 마귀가 너가 신처럼 되리라. 했잖아요. 신은 죽어서는 안 된다. 신이 죽으면 신이 아니잖아요. 신은 죽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 뭐냐, 힘 또는 떡. 돈. 다 같이 힘이지요. 나는 힘으로 살련다. 이게 악마가 인간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낸 공식입니다. 공식. 사람은 신이다. 신은 죽어서는 안 된다. 죽지 않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 끝. 이게 인간이에요. 이게 새끼 인간이든, 노인 인간이든, 젊은 인간이든, 남자, 여자 관계없어요. 다 마찬가지에요. 똑같아요. 전부다. 모든 인간은 다 이거에요.

신은 신이기 때문에 자체적으로는 하자가 없습니다. 오류가 없어야 돼요. 신은. 그러니까 인간은 늘 경계하면서 자기 방어, 자기변명에 일관하지요. 이러한 신이 된 대표자로서 예수님께서 상대자로 골라 본 대상자이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에요. 이들은 자기 의를 챙기는 사람이라고 되어있지요. 로마서10장에. 자기 의. 이게 남의 이야기겠어요. 대표자가 자기 의를 챙기면 그 아래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사는 것도 자기 의입니다. 그러니 나쁜 짓해도 궁극적으로는 자기가 의롭다는 거예요. 묻지도 따지지도 말라는 거예요. 나는 의롭다는 겁니다.

참, 이것은 안 믿는 남편들 보면 잘 드러나요. 그대로 나와요. 모든 행동이나 태도. 그대로 모든 게.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지만. 입만 벌리고 말하는 것, 행동하고 모든 것은 나는 의롭다는 거예요. 나는 의롭다에다가 방울 하나 딱 달았다고 상상해서 봅시다. 그러면 화장실에 갈 때도 딸랑, 딸랑 그래요. 의롭다. 의롭다. 의롭다. 갔다 올 때도 의롭다, 의롭다, 의롭다. 밥 먹을 때도 나는 의롭다. 반찬 이게 뭐꼬. 딸랑, 딸랑. 나는 의롭다, 의롭다. 말 할 때마다 뒤에 추임새 넣으세요. 딸랑, 딸랑. 이런 말 하는 나도 딸랑, 딸랑.

이 세상에는 변화무쌍한 세상이 아니고 변화무쌍한 세상에서 자기를 고정화시킨 겁니다. 인간의 본성은 번화무쌍한 속에서 나의 고정성을 위해서 가지자르기. 그건 나와 상관없고, 그건 나는 몰라도 되고, 그건 내가 알 필요도 없고, 내가 바라는 현실은 내가 신인 것을 증명하는 그것만 필요해. 라고 했으니까 이건 결국은 인간은 자기자아한테 갇혀있는 거예요. 인간이 자아한테 갇혔다. 이걸 성경에서는 인간은 죄 안에 갇혔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자, 5절을 봅시다. “내게 말하던 천사가 나아와서 내게 이르되 너는 눈을 들어 나오는 이것이 무엇인가 보라 하기로” 감람나무가 무엇입니까? 그건 두 인물이지요. 두 인물이에요. 그렇다면 그걸 응용해 보자. 그 해석을. 나무가 사람이라 했지요. 그걸 그대로 응용해 봅시다. 그러면 여기에 에바 나와요. 요건 한 말보다 약간 작은 부피를 재는 도량형 기구 에바에요. 도량 기구. 22리터쯤 된다는데. 어느 정도 되는지는 모르겠고요. 고 에바. 고 에바가 한 되, 두 되, 한 말, 두 말, 하는 말이거든요. 자, 그러면 사물이고 물체지요. 그러면 해석해봅시다.

아까 감람나무는 인물이었지요. 그러면 에바는 뭐가 되겠어요? 자, 나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 한 되, 두 되, 한 말, 하는 이 도량형은 뭐가 되겠어요? 인물이니까 이것도 뭐가 되겠어요? 인물이 되겠지요. 인물이. 해석을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뒤에 뚜껑이 있어요. 7절 봅시다. “이 에바 가운데에는 한 여인이 앉았느니라 하는 동시에 둥근 납 한 조각이 들리더라” 뚜껑이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그런 인격적 존재 악마지요. 악마를 표현할 때 뭐로 표현하느냐, 바로 사물을 가지고 표현하는 거예요. 사물을 가지고.

사물을 표현하되, 사물을 봐서는 안 되고 그걸 뭐로 환원되어야 된다. 어떤 인물로 봐야 된다. 인물로. 어차피 눈에 보이는 태양이나 별, 달, 산에 있는 사슴. 이런 모든 눈에 띄는 사물들, 물체들은 이건 인물들 속에 달려있는 악세서리 같은 거예요. 방울이라든지 가락지, 반지 같은 거예요. 어떤 보이지 않는 몸체에 붙어있는 장식물 같은 거예요. 보이지는 않지만 그 장식물이 뭔가 딸랑거린다. 소리를 낸다. 어디 변화가 일어난다. 하면 그 장식물을 외부에 장식물을 달게 한 보이지 않는 내부가 있는 거예요. 내부가.

우리가 일찍 시작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다시 해드리겠습니다. 스가랴5장하고 있습니다. 스가랴5장에서 거기에 감람나무 나오지요. 처음부터 하니 들어보세요. 딴 게 나오지요. 이 감람나무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성전 안에 있습니다. 성전 안에. 성전 안에 감람나무가 있는데 말뚝처럼 고정되어있어요. 고정.

그렇다면 이 고정된 세계가 이것이 뭐냐 이게 바로 현실입니다. 문제는 이게 안 보인다는 거예요. 현실은 안 보이니까 무엇이 현실을 대신하겠어요? 환타지가 현실 노릇하는 겁니다. 환타지가 현실 노릇합니다. 그러면 이 성전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아는 상식적인 이 세상에서 아는 성전은 뭐냐 하면 건축 구조물이지요. 건축 구조물인 거예요. 현실은. 사물이다 말이죠. 물체 손에 만져진다 말이죠.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 등대 안에 있는 등대도 그렇고, 거기 옆에 있는 두 감람나무가 뭐냐고 스가랴가 물었잖아요. “하나님, 이게 뭡니까?” 라고 물으니까 두 인물이었지요. 두 인물. 두 사람이었잖아요.

우리가 아는 현실에서는 사물체지만 하나님이 생각하는 현실에서는 이게 뭐냐 하면 사물체가 아니고 인물이 되는 겁니다. 어떤 인물? 이미 그 본질이 확정된 인물. 그 기능이 확정된 인물이에요. 확정된 인물, 고정된 인물이 아니면 나머지 인간을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간주하지를 않습니다. 사람이 되려면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이 집어넣어준 확정된 것이 있어야 돼요. 확정된 것.

그런데 이 환타지 특징이 뭐냐 하면 이 하나님의 현실을 모방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이게 놀라운 거예요. 이게 나 혼자 놀라고 있는데. 이 세상에 나타난 모든 현실은 인간들은 감히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없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전부다 하늘에 있는 그 실체를 베낀 거라 보는 거예요. ctrl+V. 이게 누가 함부로 베낀 거예요. 복사를 한 거예요. 누가 그런 짓 했겠어요? 아담에게 찾아온 악마가 그런 짓 한 거예요. 악마가 지가 창조주도 아닌 게 무슨 원형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만든 그 계획의 원형을 그대로 베껴가지고 유사품을 이 세상에다가 그대로 재조립을 만드는 겁니다. 만든 거예요.

만들어놓고 그걸 뭐로 보느냐 하면 현실. 이게 실제. 오직 이것만이 다라고 하는 전부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것만이. 그 중에 등장한 게 뭐냐 하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자아에요. 아까 한 거 물으면 답변해 봅시다. 자, 자아는 어떻게 구성된다 했습니까? 자아 것이라 했지요. 자아라는 것은 자아의 것이라고 했지요. 왜냐 하면 자아 것이 있어야 지킬 것이 있기 때문에. 지킬 것이 있어야 뭐가 생긴다 했습니까? 경계. 두리번 살피면서 매일 평생이 혹시 내 것 다칠까봐 두루 두루 살피는 겁니다. 마치 새가 새둥지에 자식들 낳아놓고 매일 뱀이나 맹독 짐승 올까봐 살피는 것처럼. 내 것이 있기 때문에 살피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내 것을 어디서 가지고 왔느냐 하는 겁니다. 내 것을 어디서 가지고 왔는가. 내 것은 현실에 있는 것 중에서 나의 절대성 또는 나의 절대적인 의로움에 유리하다고 여기는 것을 내가 가져온 거예요. 가져올 때마다 문닫아버리고 또 자아 만들고. 가져오고 문닫아버리고 자아 만들고. 중소기업 다닐 때 자아는 요만큼이지만 대기업 되고 난 뒤에 이만큼 하지요. 확장되는 거예요. 확장되는 겁니다. 대기업보다 더 큰 대기업 다니면 더 확장되고 문단속하고 내 것 지키고.

그렇게 바깥에 있는 현실과 내 안에 있는 현실이 같을까요? 다를까요? 동일한 겁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마귀가 예수님에게 뭐라고 질문합니까? 이미 마귀는 모든 자아를 이런 식으로 다 만들어놨잖아요. 만들어 놨다 말이죠. 그러니 마귀가 예수님보고 너도 마찬가지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아까 무슨 문장이 나왔습니까. 광야에서 마귀가 예수님한테 한 문장. 사람이 돈 없이는 못산다. 사람은 떡으로 산다. 떡 없이는 못 사는 취지로 이야기한 거예요. 떡 되게 하라고 이렇게 한 것은. 사람은 떡 없이는 못 산다, 했지요. 자, 이 문장에서 뭐가 문제라고 했습니까?

못 산다. 이게 자기가 현실이라고 우기니까 현실은 무너지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예수님이 보시기에 이건 뭐냐, 인간은 이미 죽은 거예요. 산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해당사항이 없어요. 인간은 죽어가기 위해서 태어난 거예요. 인간에게는 산다는 것은 아예 사는 요소는 없어야 돼요. 왜냐하면 창세기 2장에 보면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진실로 오로지 양보 없이 필연적으로 죽으리라. 에요. 부사를 너무 많이 집어넣었다. 반드시 죽으리라.

그런데 악마는 뭘 주장합니까? 반드시 니가 뭐하리라? 살리라. 싸움이 간단한 싸움이에요.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가 아니고 내가 지금 살아있는 존재냐, 아니면 죽은 존재냐, 그게 문제에요. 그 싸움이에요. 내가 지금 밥 먹고 잠자고 하는 모든 것이 죽음을 증명하는 것이냐, 아니면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냐, 그걸 보는 거예요. 그러나 이 현실에서는 어떤 것도 내 죽었음을 증명할 건 아무것도 없어요. 왜? 내가 그걸 원치 않았기 때문에. 십자가 복음 내가 다 치워버렸어요. 다 쫓아내버렸어요. 내 안에는 내 것이 뭐냐 하면 어제도 이야기했지만 딱 인간이 장기기억으로 아는 것은 뭐냐, 이거 내거다. 있잖아요.  그 내 것이 뭡니까? 나를 죽이는 거예요? 살리는 거예요? 이거 없이는 누가 죽는다? 내가 죽는다는 거예요.

내가 살기위해서 필요한 것에 대해서는 내가 절대로 양보 없이 용납이 안 됩니다. 그 자아가 기억이에요. 내 것이라고 있는 정렬된 그걸 아카이브(archive) 과거에 모아놓은 모든 기억들의 저장고. 기록 보관소. 여러분들이 아케이드라는 단어를 여러분들이 아시지요. 피렌체. 세계 최초의 아케이드 시장은 피렌체에서 만들어졌어요. 중세 때. 십자가전쟁 때. 아케이드는 제가 프랑스 파리에 가니까 시장이 아케이드에요. 아케이드라 하는 것은 둥그런 지붕으로 골목을 지붕으로 위에서 막아놓고 고가의 상점들이 죽 진열돼 있어요. 아케이드하잖아요. 재래시장도 그렇게 만들어놨잖아요.

그 아케이드의 특징은 뭐냐 하면 지나가면서 관찰하면서 필요한 것을 고르세요. 하는 거죠. 그게 뭘 닮았느냐 우리의 인생을 닮은 거예요. 내가 이 현실이라는 세상 속에 나라는 현실이 지나가면서 필요한 것을 구매하고 팔기도 하고 구매하고 사면서 지나가는 그게 뭐다. 그게 인생이라는 겁니다. 끝은 몰라요. 어디로 가는지를 모릅니다. 다만, 이것이 계속 유지될 거라는 기대는 갖고 있어요. 아케이드 속에서. 현실의 터널 속에서 지나가는 겁니다.

줄리 앤드류스의 유명한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 보게 되면 애들하고 트랩대령이 바깥에 선보러 갔을 동안에 애들 데리고 커튼가지고 옷 해서 입혀가지고 공원에 장미터널 앞에 춤추는 장면이 있을 거예요. 인간은 현실을 볼 때에 자기중심으로 둥글게 봐요. 아치형으로 둥글게 본다고요. 자기 인생을. 바깥에는 뭐가 있어도 상관없어요. 내 것을 내 것으로 지키게 되면 내 것을 지키는 그 범위까지를 우리는 현실이라고 봐요. 현실. 실제로 있는 거라고 봐요. 그게 뭐냐 하면 환타지입니다.

왜 환타지냐 하면 내가 가짜고요. 살아있다는 게 가짜고. 나라는 것이 절대적 나고. 그 다음에 그 이어주기 위해서 힘, 돈 힘이지요. 권력. 힘. 떡. 이런 것이 나를 살리기 위해서 필요한 그것이 바로 갖춰줄 때 나가 있고 살아있고 그 다음에 그게 갖춰줄 떡이 있을 때 그게 바로 인간의 현실의 구성요소 아닙니까. 마귀는 뒤로 빠져요. 왜 마귀는 빠지느냐 하면 여러분, 사냥하는 사람이 사냥개를 앞에 둡니까? 뒤에 둡니까? 꿩이라든지 뭘 사냥할 때 사냥개가 주인보다 뒤에 가요? 앞에 가요? 앞에 가지요. 악마는 인간을 앞에 보내고 지는 뒤로 빠져버려요. 인간들끼리 지가 감아놓은 거짓된 환타지를 완전히 자기 것으로 몸에다가 장착하고 그런 인간의 신체라는 사물끼리 마음대로 이 세상을 휘 젖도록 지는 뒤에서 배후 조종만 하면 되는 거예요.

그 환타지에서 만든 것 중에 하나가 교회고, 기독교고, 종교입니다. 환타지가 만든 거예요. 다시 아까 5장6절 봅시다. 거기에 에바 나왔다 했지요. 에바, 한 말, 두 말하는 말이에요. 그 말을 무엇입니까? 물어요. 또 물어요. 이게 무엇입니까? 물을 때 이게 뭐냐 하면 온 땅에서 그들의 모양이 이러하니라, 이리 되어있지요. 항상 사물체나 하나님께서 이 현실은 사물 따로 있고 보따리, 책상, 테이블, 사물체 따로 있고 무엇과 무얼 구분합니까? 인간 따로 구분하고, 사물 따로 구분해서 인간중심으로 아케이드를 쳐서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잖아요. 그런데 그 자체가 환타지고 허망한 거고요. 실제로 봐서는 거기에 있는 사물체 자체 속에 모든 인간이 거기에 다 포함돼 있습니다.

그래서 그 에바가 뭐로 나타나느냐, 인물로 나타나요. 인물이 뭐냐 하면 바로 그 안에 주인공이 들어있습니다. 그 부피니까 그 안에 공간이 비어있겠지요. 그 안에 누가 들어 있느냐 하면 여자가 하나 앉아있어요. 그런데 여자는 갇혀있는 여자. 폐쇄된 여자입니다. 왜? 납으로 뚜껑을 해서 닫아버렸어요. 자, 그러면 오늘 첫 번째 하는 강의 정리해 봅시다. 처음에 성전의 특징이 뭐라고 했습니까? 지금 세 번째 물어본다. 고정성이지요. 고정성인데 아까 악마는 뭐를 모방한다 했어요? 하늘에 있는 것을 악마는 영적 존재로 땅에서 모방하지요. 모방하니까 이 땅의 악마들은 인간을 성경을 현실을 해석할 때 뭘 고정성으로 하겠어요? 자기 자신을 영원한 고정센터로 잡는 거예요.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해줄 겁니까? 묻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걸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걸 사물화 시키는 겁니다. 왜 이 부피냐, 뚜껑이 필요하니까. 뚜껑이 납으로 되어있어요. 납은 아무리 들려고 해도 너무 무거워서 이게 들리지 않습니다. 그 납의 이름이 죄에요. 여자는 두꺼운 죄에 의해서. 자, 죄라고 했습니다. 죄. 죄인데 창세기 에덴동산에서는 죄가 뭐가 죄인가, 악마가 죄에요. 항상 로마서5장에도 악마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죄의 왕 노릇한다는 말이 죄가 인격화되어있습니다.

마태복음12장에서는 모든 인간은 어디에 매여 있느냐 죄에 매여 있다는 말은 뭐냐 하면 이 세상의 주인에게 매여 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주인에게 매여 있는 것을 예수님이 오셔서 주인을 꽁꽁 묶어놓고 어떤 인격을 묶어놓고 그 다음에 뭘 한다? 가재도구를 훔쳐가지고 가져간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되어있어요. 이런 식으로. 그러니까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의 현실은 사람 따로, 사물체 그냥 생명이 없는 것. 이리 분류하잖아요. 그러나 주님보시기에는 모든 세상은 뭐냐, 이미 모방 자체가 죽은 거예요. 하나님께서 안 받아 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것들로 마구 마구 살아있지요. 그러니까 살아있는 게 아니고 죄가 살아있고 악마가 살아있는 거예요. 우리는 거기에 노리개고. 그런 형편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체에서 그걸 뭐로 보느냐, 그걸 그들은 현실이라 하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보시기에는 뭐냐 하면 환타지지요. 그러니까 스가랴에서는 계시를 할 때 뭐로 계시를 합니까? 현실로 계시합니까? 환타지로 계시합니까? 날아가는 두루마리, 두 감람나무, 이 모든 게 뭐예요? 환상입니다. 환상에서 계시하는 그것을 요한계시록에서 그대로 해석법이 그대로 요한계시록까지 이어집니다. 10분 쉽시다.
 공은주(IP:175.♡.135.128) 21-03-21 22:38 
안양20210311B슥5장2절(환타지)-이 근호 목사

스가랴 해석이 환상해석이 참 어려워요. 그것은 우리가 주님 쪽에 서있으면 하나도 안 어려운데, 하나님이여 이 말씀 알아서 나한테 어떤 이익이 있습니까. 벌써 성경 보는 태도 자체가 이거 알아서 나한테 보움 되는 게 뭡니까. 라는 그 본성이 안 죽고 있다 이 말이죠. 이게 생생히 살아있으니까 이걸 해석할 때 다 바꿔야 되거든요.

또 중요한 것은 이 스가랴의 해석을 이렇게 해석 안하면 요한계시록의 해석이 하나도 되지를 않아요. 요한계시록이. 전부 다 환상이다 말이죠. 환타지다 말이죠. 그런데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면서 뭐냐 하면 사람들이 그냥 어떻게 들어가느냐 하면 죽으려고 해석하는 게 아니고 어떻게 하면 내가 구원 받을까 해석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어버리면 뱀 새끼가 천국 들어가는 셈이 돼요. 뱀 새끼가. 독사의 자식들이 천국을 점령한 바가 되어버려요. 그러면 천국에서는 뭐를 검증하겠어요. 이게 뱀 새끼인지 진짜 주의 것인지 그걸 갈음하는 검증이 있겠지요. 그 검증의 기준은 어디서 정합니까? 우리가 정합니까? 구원받는 우리가 정하는 게 아니지요. 바로 두 감람나무가 정하는 거예요. 두 감람나무가. 두 감람나무는 고정성. 이게 원형이고 그 다음에 두루마리는 유동성. 모든 것이 고정적이 아니다. 그럼 날아다니면서 뭐를 해체하느냐, 모든 고정된 것을 전부 다 해체로 만들어버려요. 다 흩어지게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어요. 다 찢어놓게 만들지요. 그게 바로 뭐냐 하면 말씀입니다. 그래서 두루마리는 곧 말씀이다.

말씀이 모든 고정된 곳에 삽입하는 게 요한계시록이에요. 그래서 사도요한이 그 단초를 못 풀어서 막 울어요.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을 해석을 해야 될 텐데 해석의 단초를 딱 떼면 되는데 떼면 다 풀리는데 그 펴는 걸 몰라가지고 이 세상 일어나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일거에 해석할 수 있는 그걸 달라고 그걸 몰라 막 울지요.

그런데 천사가 와서 뭐라고 합니까? 다윗의 자손 그리스도가 이것을 뗄 것이다.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예수님이 이 세상을 다녀가셨잖아요. 다녀갔기 때문에 알아요. 이게 하늘을 쳐다본다고 아는 게 아니고 다녀 가셔가지고 다녀가신 예수님의 몸에 뭐가 붙어있겠습니까? 세상의 모든 그 환상들이 붙어있겠지요.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한다는 것은 아까 신명기28장에 율법을 어겼을 경우에는 뭐가 온다? 저주가 주어지지요. 자기 몸에 붙어있던 환상을 떼어내면서 숨겨진 심판과 저주가 생산되는 겁니다. 그게 요한계시록이에요. 예수님이 다녀갔으니까. 예수님의 몸에 묻었다 말이죠. 그 예수님의 몸에 묻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 땅의 최후는 뭐였습니까? 처참한 십자가 죽음이잖아요. 십자가의 처참한 죽음.

스가랴 하다가 요한계시록 해석이 나와 버렸는데. 요한계시록의 해석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미 완성된 고정된 이 말을 여러분이 나중에 이걸 올려놓으면 여러 번 들어보셔야 돼요. 빨리 빨리 지나가기 때문에. 확정된 거예요. 이미 진리는 확정 났습니다. 확정된 진리가 두 감람나무 인물이지요. 인물이 되어가지고 이 땅에 파견돼요. 파견되면서 무엇이 묻겠습니까? 이 인물이 오기 전까지는 확정된 쪽에서 오기 전까지는 진리가 오기 전까지는 이 세상의 나름대로의 악마가 하늘나라를 모방해서 폐쇄된 거예요. 아까 폐쇄됐다 했지요. 뚜껑이 닫혔으니까. 폐쇄된 그 자체 내에서 뭐냐 자신의 절대성을 증명하는 식으로 세상을 돌아가게 만들었어요. 폐쇄해 놓고.

그러면 자체적으로 죄라는 것, 의라는 것이 이건 전부 다 환타지가 되는 겁니다. 아까 성도가 제일 처음에 할 때 이런 이야기했지요. 성도가 뭐라고 했습니까? 성도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야 된다. 또 하나는 성도는 경계할 필요가 없다. 성도는 무엇이든지 해도 상관없다. 그 다음에 또 성도는 더 이상 이 땅에서 경계할 뭐를 주시하거나 경계할 필요가 없다, 했어요.

왜냐하면 성도 안에는 나의 것이 아니고 무엇이 들어왔느냐 주의 것이 들어왔기 때문에 이미 주의 것은 고정된 것이고 확정적이고 결정 난 거예요. 이미 과거완료에요. 이미 다 된 거예요. 새삼스럽게 뭘 더 내가 추가할 필요가 없다고요. 그냥 미꾸라지처럼 설치기만 하면 돼요. 어떤 것도 구애받지 말고. 왜냐하면 내 안에 내 것이 아니고 주의 것이 확정된 것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래서 요한계시록12장에 보면 성도가 세상을 이겼으니 그 다음의 말이 뭐냐 하면 자기의 죽기까지 겁내지 않았다. 이 땅에서의 죽음이라는 것은 이건 환상이에요. 왜냐하면 이 세상 자체에서 나오는 모든 개념들이 환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걸 말해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는 죽었다가 하늘나라에서 어떻게 됩니까? 부활되지요. 둘째사망 부활되잖아요.

요한계시록11장에도 두 감람나무 나오지요. 그 설명을 전에도 했기 때문에 오늘 설명을 잘 안하려고 하는데 두 감람나무의 특징은 뭐냐 하면 그들이 분명히 죽었는데 세상이 붙잡아서 죽였는데 그 다음 어떻게 됐습니까? 그들이 나흘만에 살아났지요. 하늘로 올라갔지요. 하늘로 올라오라 하니까 그들이 하늘로 올라갔잖아요. 죽은 자가 올라갔지요. 사흘 반 동안 이 지상에 있다가 하늘로 올라갔잖아요. 그 사흘 반이 한 때 두 때 반 때고 42달이고 1260일이고. 자, 이것만 기억합시다. 이 세상은 누가 규정한다? 하늘에서 내린 숫자가 규정하는 겁니다.

이 세상 자체적으로 자체를 규정할 수 있는 어떤 것도 하나님께서는 안 받습니다. 내가 나를 나라고 규정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받지를 않습니다. 내가 나를 규정하는 것은 내 안에 있는 걸 지키기 위한 수작에 불과해요. 내 의를 지키는 것밖에 안되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규정할 그런 자격이 없습니다. 그건 왜 그런가 그것은 바로 다시 7절에 봅시다. 에바 가운데 한 여인이 앉아있지요. 그 여인의 특징은 갇힌 상태에요. 둥근 납조각이 들리더라. 가로되 이는 그 다음에 이는 악이다. 이는 악. 나쁜 거다 이 말이죠. 이는 악이다. 악이 갇혀있는 거예요.

요걸 뭐냐 하면 확정된 환상. 우리는 환상이지만 실제는 현실이지요. 하늘나라 성전에서 고정된 성전에서 봤을 때는 성전에서 봤을 때는 두루마리가 날아가는 이유는 이미 성전이 완공됐기 때문에 더 이상 지상에 있는 것들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파괴나 제거의 대상이라 했지요. 분명히 이야기했는데요. 그렇지요.

이미 확정된 게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변화되고 하는 것은 해체되어야 된다고 했습니다. 해체되면서 체포령을 내린 거예요. 천사가.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이 세상을 전부 다 멸망시키는 겁니다. 그러니까 진짜 주인이 이사 가고 난 뒤에 청소 용역이 와가지고 옛날 살던 집 어떻게 됩니까? 깨끗하게 청소하는 거예요. 심판하는 거예요. 그 심판이 신명기28장에 나오는 이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을 받되 말씀을 지키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는 이야기 해드렸지요. 그리고 엄한 부모와 자식이야기 해주었지요. 한 손에는 호빵 들고, 한 손에는 채찍 들고 할 때, 애가 그런 소리 하면 안 된다 했지요. 호빵주세요. 하면 안 된다 했지요. 내가 원하는 걸 달라고 하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왜냐하면 종속됐기 때문에. 이 세상은. 이 세상은 확정된 성전을 위한 종속된 거예요. 그런데 아이가 만약에 저는 호빵 먹고 싶어요. 채찍은 싫어요. 한다면 아버지는 가만두지 않는 겁니다. 그 권리를 용납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자식은 아버지를 모방하고흉내 냈기 때문에 인정하지 않는 거예요. 원천이 두 개가 될 수 없어요. 아버지만 원천되면 되지, 하늘이 원천된다면 땅에서는 가짜이어야 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환타지에요. 이 세상 자체가 환타지입니다. 그리고 곧 죽어야 돼요. 벌써 우리의 있는 자체도 죽음이고 죽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런데 죽을 땐 죽더라도 이유가 있어야 할 게 아닙니까. 그 이유는 한 자로 ‘악’ 악! 그냥 악으로 죽는 겁니다. 성도가 이걸 알아요. 나란 자아와 내 신체가 악이란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 사람은 이미 알기 때문에 그 기준. 그 기준은 누구한테 들었느냐 하면 이미 확정된 기준에서 들었기 때문에 그 관계가 믿음이고 그게 성도의 구원이지요. 구원이다 말이지요.

그러니까 이미 확정됐잖아요. 뭐로, 악으로. 그리고 뭐로? 하나의 환상으로. 그렇게 확정됐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해도 상관이 없는 거예요. 왜? 자체적으로 개선될 여지가 완전히 없으니까. 개선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나를 개선하거나 내 질을 좋게 할 하등의 이유가 없기 때문에. 내 것이 없기 때문에 내 것을 지킬 이유도 없기 때문에 뭐든지 할 수 있는 거예요.

이걸 사도바울의 편지로 공식을 세운다면 죄를 아는 자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다. 자기 죄를 아는 자는 이건 하고, 이건 안 하고 이런 거 없어요. 모든 일을 할 수 있다. 에요. 그걸 더 나아가면 모든 일에 뭐한다? 모든 일에 감사한다. 죄를 아는 자는 모든 일에 감사합니다. 모든 일에 감사해요.

어제 수요일에 했던 “나는 속도위반했다.” 좋다고. 속도위반했다고. 왜? 값을 치뤘으니까. 또 할 거야. 시속100키로 달릴 거야. 아무 상관없어요. 죽은 자가 죽기 전에 죽은 자를 해봐야지요. 자칫하면 이거 이상한 말 되지만. 후회스럽다. 죽어가면서 죽을 짓도 못해보고 되게 찝찝하다. 죽어가면서 죽을 짓을 해보고 살아야지 왜 살 짓만 하고 살았어요. 그래. 얼마나 주눅 들면서 발발 떨면서 살았습니까.

자,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지금까지는 쉬운 거고요. 어느 대목을 우리가 봐야 되느냐 하면요. 5장4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이것을 발하였나니 도적의 집에도 들어가며 내 이름을 가리켜 망령되이 맹세하는 자의 집에도 들어가서 그 집에 머무르며 그 집을 그 나무와 그 돌을 아울러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이리 되어있어요. 자, 두루마리가 파닥거리면서 요동친다 했지요. 이 두루마리는 그냥 정지된 두루마리가 아니고 날아다니지요. 두루마리 면적이 나와 있어요. 두루마리 면적이 장이 20규빗이고 광이 10규빗, 10.5m, 5.2m쯤 돼요.

요 면적은 어디 나온 면적이냐 하면 솔로몬 성전에 앞에 현관 면적과 동일한 면적입니다. 솔로몬 면적이. 그러니까 지금 스가랴가 짓고자 하는 성전의 모델이 솔로몬성전 모델이에요. 왜냐하면 다윗의 자손이 오기 때문에 그래요. 다윗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면 내 아들만이 성전을 지을 수 있습니다.

자, 성전은 뭐냐 하면 하나님과 자기 백성이 같이 기거하는 공간이에요. 성전은. 처음에는 그걸 성막이라 했습니다. 성막이 점차 발전해서 나중에 성전이 되거든요. 그러면 성막에서 자기 백성과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어떤 조건이 있어요. 그냥 못 만납니다. 만나는 조건은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 머무는 곳. 하나님의 이름이 머무는 곳이 바로 성전입니다.

자, 하나님의 이름은 뭐냐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의 차이는 이름이라는 것은 이것은 피조성을 지을 때 하는 거예요.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만들은 자가 만들어진 자에게 붙이는 게 이름이에요. 주님이 피조 됐다는 말이 아니고 주님이 무슨 사람이냐 하면 이 세상에 합류된 자기 때문에 이름이 하나님이지만 이름이 붙어요. 하나님이지만 이름이 붙습니다.

그 이름이 뭐냐, 이름은 구약 때는 없어요. 그냥 이름이에요. 이름의 내막이 없는 이름이 왜 이름이냐, 이게 뭐냐 function. 기능. 기능이에요. 이름으로 활동하게 되어있습니다. 보통 활동한다, 움직인다, 누구한테 해당되느냐 하면 인간에게 해당되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이지만 이 땅에서는 뭐처럼 활동한다? 인간들처럼 활동하는 거예요. 화내고, 분노하고, 기뻐하고, 찬양받으시고. 인간의 어떤 특정인물이 거기에 상주하는 듯한 그러한 인상을 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이름의 기능이 펑션이 뭐냐 하면 일방적으로 뭐냐, 심판하기에요. 심판하기. 심판하는 이유는 제가 첫째시간에 이야기했습니다. 현실은 따로 있기 때문에 현실의 가짜, 구라, 이게 뭐냐 하면 환타지지요. 그런데 인간세계에서는 자기 이름 중심이기 때문에 자기중심이기 때문에 자기한테 유리한 것을 뭐로 보느냐 하면 유일한 현실로 보는 거예요. 유일한 현실로.

실제감, 현실감은 누가 현실이냐 하면 현실의 센터 중심에 누가 있습니까? 내가 있는 거예요. 아무리 생각하고 공부를 해도 내가 있다는 나만은 부정할 수 없다. 이건 실제적이고 현실적이다. 데카르트가 이야기한 거 아닙니까. 나는 아무리 의심하고 의심해도 의심할 수 없는 그 단 한 가지. 의심한다는 그 생각한다는 그 사실은 의심할 수 없다. 따라서 나는 의심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왜 그런 소리를 했느냐 하면 신 따로 인간 따로 놀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걸 주체의식의 시작이라 본 겁니다. 데카르트가 주체의식. 신의 판단에 맡기지 말고 내 판단에 따로 하겠다는 거죠.

내 판단. 왜?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내가 존재한다는 말은 그저 존재 한다로 끝나는 게 아니고 내 존재함을 위하여 나는 모든 일을 할 거야. 모든 일을 내 존재함을 위해서 할 거야. 그게 바로 인간 자아중심이었습니다. 그게 이방민족 중심이고. 그래서 십계명에 보면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했잖아요. 여호와 하나님은 파내는 하나님이거든요. 계속 중심자리를 비워두는 하나님인데 이방 종교는 뭐냐 하면 그 신을 자꾸 자기 안에 채우는 거예요. 이야기해도 너무 모호하기 짝이 없으니까 더 모호하게 짝이 없이 합시다.

인간이 있으면 인간의 바깥을 현실이라 하잖아요. 바깥의 현실. 사실은 자기까지 포함해서 현실인데. 인간은 눈이 있거든요. 눈이 있어서 바깥을 보면서 바깥을 현실이라 한다 말이죠. 현실에 일어나는 현실은 어떻게 구성이 되고 조립이 되느냐 하면 이게 내 안에 나한테 유리할 때 현실로 조성이 된다는 겁니다. 나한테 유리할 때.

그러니까 이 바깥에 있는 모든 구조는 내 안에 마음의 구조로 그대로 들어올까요? 안 들어올까요? 그대로 들어온 거예요. 그래서 주의 이름은 참새도 다루시고 코스모스도 다루시지만 주의 이름은 집중적으로 어디를 겨냥하느냐, 율법은 어디를 겨냥합니까? 내 백성의 마음을 겨냥하는 거예요. 니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고. 처음부터 마음의 할례를 하라는 말이 없어요. 그냥 고추 자르라고 해놓고 나중에 가서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여야 한다고요. 계속해서 우리의 마음을 추궁해 들어가는 거예요. 추궁을.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은 바깥의 현실을 내가 재해석해서 자꾸 여기다가 내 것으로 만들어 집어넣는 어떤 창고 같은 게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내 마음은. 이걸 오늘날 보통 하는 단어는 뭐냐 하면 기억이라 하는데. 내 안에는 내가 필요하고 나한테 소중하고 내가 원했던 것. 내가 사모했던 것들로 가득 차 있어요. 모든 가득 차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여고 다닐 때 모든 친구 다 기억합니까. 다 안하지요.

그런데 어떤 아이들은 잊을 수가 없어요. 은별이 같은 애는. 보라한테는 은별이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를 괴롭혔으니까. 펜트하우스 드라마에 나오지요. 자기를 괴롭혔으니까 잊을 수가 없어요. 자기에게 잘해준 아이는 있잖아요. 그리고 자기가 보기에  집안이 너무 어려운 집안 애들. 특정 애들만 기억하고 있어요. 다른 동창생들은 지나가도 몰라요. 왜? 세월이 벌써 30, 40년 흘러가지고 전부 다 뚱뚱보 다되어가지고 못 알아보는데. 못 보거든요. 싸우다 보면 동창생이 나타나고 그래요.

기억할 것만 기억하는 것은 내가 기억하는 게 아니고 그것이 들어옴으로서 지금의 내가 된 거예요. 지금의 나는 계속 수출입이 돼요. 인풋 아웃풋 계속 들락날락 돼요. 그걸 누가 조정하느냐, 자아가 조정하는 거예요. 자아가.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은 뭐라고 했느냐 하면 내 율법을 잊지 말라 했잖아요. 아~ 하나님도 고집 세지요.

좀 인간이 인간답게 자기 필요한대로 살면 되는데 호빵 줄까, 회초리 줄까, 이걸 계속 이야기해요. 이걸 안 지키면 채찍 맞고, 지키면 호빵 줄게. 이걸 계속 이야기한다고요. 끝까지. 눈치코치도 없어. 그냥 일방적으로 밀어붙입니다. 그게 신명기27장에 나옵니다. 한 번 봅시다.

이 신명기27장은 지나간 일이 아니에요. 이걸 읽어보시면서 옛날 과거 지나간 일로 보시면 안 됩니다. 이게 유명한 그리심산과 에발산 이야기에요. 기회 있으면 그 산에 가봤으면 좋겠네. 그 산에. 저는 일단 한 번 가봤고요. 그 사이에 서서 에발산에 가가지고 그 사이에 서서 맹세를 합니다. 정실부인 출신들은 축복산에 그리고 종의 출신들은 저주산에 딱 세워놓고 상대방을 향하여 그래요. 자기를 향하여 하는 게 아니고 저주 쪽은 축복 쪽을 향하여 저주를 하고 축복 산에 있는 자는 저주 쪽을 향하여 축복을 하고. “인물이 우선이 아니고 율법이 우선이다. 인간들아!”

이 세상은 너가 점령해야 될 그 약속의 땅의 토착민들은 인간이 우선이 되지만, 그걸 접수해야 될 우리 이스라엘은 율법이 우선이다. 율법이 우선이다. 축복과 저주가 우선이 되는 거예요. 아브라함의 존재는요, 아브라함 존재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너를 축복한 자에게 복을 받고 너를 저주한 자에게 저주를 받는다. 축복과 저주가 우선이에요.

성도가 성도의 본인의 인생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성도를 통해서 축복과 저주가 이 땅에서 증거 된다는 게 중요하지요. 자기 게 아니고 주님의 것이 들어있으니까. 그래서 여기 세워놓고 여기 27장 14절에 보면 중간에 레위사람을 놓고, 레위 사람은 큰 소리로 이스라엘 모든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거기에 대하여 뭐한다? 아멘 한다. 그러면 말씀이 그들 속에 들어온 겁니다. 그러면 그들 속에 자아 속에 본인들은 없어요. 이제. 본인 속에 없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은 이스라엘은 뭡니까? 그 당시에 날아다니는 두루마리가 아니고 이제는 진격하는 두루마리, 걸어가는 두루마리 광야를 통과하는 말씀의 집단이 되는 거예요. 말씀의 집단. 개인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적인 개인은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 이 세상은 환상이지만 유일한 현실은 이스라엘 백성 마음 안에 들어있어야 된다. 말씀이 곧 유일한 현실이에요. 앞으로 이 말씀이 현실이 될 겁니다. 구약이니까. 신약 아니니까. 말씀이 현실로 전환될 거예요. 그들은 그것에 의한 운반체가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맹세에요.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봅시다. 스가랴5장에 4절 끝에 “내 이름을 가리켜 망령되이 맹세하는 자의 집에도 들어가서 그 집에 머무르며 그 집을 그 나무와 그 돌을 아울러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제가 지금까지 강의하면서 일단 기초는 됐다고 치고요, 내 맘대로지만. 기초는 됐다고 치고. 이제는 어떻게 저주할 것인가, 어떻게 축복할 것인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두 감람나무는 아까 분명히 두 인물이라 했지요. 그러면 첫 번째 인물은 여호수아에요. 두 번째는 멜기세댁인데. 여호수아, 멜기세덱도 이것도 하나의 환상이라 보시고 아까 그냥 기능이라 했지요. 기능. 하나는 대제사장기능, 하나는 왕의 기능입니다. 그러니까 두 감람나무가 이 세상에 두루마리 말씀을 남길 때 그 원천이 두 감람나무가 있는 곳으로부터 주어져요. 왜냐, 성전은 이미 완공되어서 고정되어있기 때문에 고정된 등대 옆에 있는 두 감람나무도 고정된 거예요.

그러면 뭐와 관련되어있는가, 제사장 기능이 고정되어있고, 왕 기능이 이미 확정되어 고정되어있는 겁니다. 고정되었기 때문에 무엇이 가능하냐 하면 심판이 본격화될 수 있는 근거는 이미 마련되어있어요. 유일한 심판의 기준은 뭐냐 하면 하늘나라에 누가 있느냐가 길이 되는 겁니다. 누가 있느냐, 왕과 제사장 기능이 하나로 결합된 것을 인정하지 못하면 이 세상에는 저주받아요. 이 세상은 저주받습니다.

모든 말씀은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있는 성전을 유리해서 모든 말씀이 있는데 그 성전에서 이미 완공이 된 상태입니다. 그래서 왕 기능과 제사장 기능이 이 지상에 두루마리를 통해서 나타나겠지요. 그러면 요한계시록이든 마태복음이든 로마서든 그 모든 성경이 창세기도 마찬가지고 소급해서 마찬가지고 모든 성경해석은 어떤 해석이 나오느냐 하면 제사장 기능과 왕기능이 나오면 성경해석은 되는 겁니다.

자, 제사장 기능은 희생이기 때문에 십자가. 왕 기능은 이미 왕 기능은 승리했기 때문에 이건 부활. 그래서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전한 것은 뭡니까? 십자가와 부활을 전한 거예요. 십자가와 부활. 이게 다 이루어진 겁니다.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것은 좀 더 상세히 하면 십자가라는 것은 우리가 보기에는 뭐냐 하면 죽음이죠. 십자가는 죽음을 말하지요. 죽음인데 이게 두 종류가 하는 거예요. 뭐냐 하면 현실에서의 죽음과 두 번째 환타지 속에서의 죽음. 이렇게 두 종류가 있는 겁니다. 환타지 속에서의 죽음이라 하는 것은 인간들의 자기의 죽음이라든지 남 타인의 죽음.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장례식의 죽음. 이런 죽음은 환타지 죽음이에요. 이건 그냥 헤어짐이지요. 그냥 아이고~ 아이고~ 형식과 격식을 갖추어서 그냥 헤어짐이에요.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그냥 헤어지는 거고. 숨 끊어지는 거예요. 이 죽음은.

그러나 현실에서의 죽음은 방금 이야기했습니다. 이 제사장직의 완성과 플러스 왕직의 완성을 모르는 사람은 살아있어도 이미 그 사람은 죽은 자에요. 살아있어도 이미 죽은 자입니다. 그러니 이걸 더 나아가서 제사장직과 왕직을 통해서 성전이 고정되어있으니까, 성전이 고정된 것을 이걸 말씀의 완성이라고 보면 되거든요. 말씀이 완성되어서 제사장과 왕이 되었다면 뭐가 악이고 뭐가 죄냐, 바로 이 사실에 갇혀있는 사람. 납 안에 갇혀있는 여인처럼 갇혀있는 사람 또는 그 현실이 우리 마음까지 들어오기 때문에 우리 마음에 복음에 닫혀있는 사람. 복음이 안 들리는 사람 그게 바로 죄가 되는 거예요. 이 땅에서 죄가 되는 거예요. 복음이 안 들리는 거예요.

복음은 뭐라고 했습니까? 제사장 + 왕. 왕이 되시는 분이 이 땅에서 희생제물이 되셨다는 그 사실. 그게 바로 복음입니다. 그러면 그 왕이 되신 분이 죽기는 왜 죽느냐 큰소리지지요. 왜 죽느냐? 이 세상 자체가 이미 환타지이기 때문에, 환타지 속에서 인간들은 그걸 현실로 오해해가지고 이 세상에서 죽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은 죽어도 봐! 살잖아. 되잖아요.

그러니까 너희들이 죽기를 무서워하는 것은 전부 다 허망한 착각에 불과한 겁니다. 환상에 불과한 거예요. 죽어도 사는 길이 있는데 왜 코앞에 죽는 것이 두려워가지고 벌벌 떨고 있느냐, 그건 마귀한테 속아서 벌벌 떨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속아 넘어갈 수 있는 근거는 뭐냐 하면 내가 나를 지키려고 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이건 사냥개가 마귀한테 단단히 훈련 받았어.

악마의 자기의 본성을 인간에게 그대로 거기에 심어놓은 거예요. 인간이 누구의 마음이냐, 마귀의 마음이에요. 나는 절대자다. 나도 신이다. 나는 누구한테 끌리지 않는다. 나도 신 좀 해보자. 왜? 니만 신하나? 나도 신 해보자. 이 마음이 인간에게 그대로 Ctrl+V 복사되어 그대로 들어온 겁니다. 인간은 자기가 신이라는 것을 근거해서 현실이냐, 아니냐를 또는 선이냐, 악을 그리고 지가 스스로 측정했고요. 그렇게 판정을 내린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대책은, 자기 백성도 마찬가지지요. 자기 백성을 뽑는 대책이 뭐냐, 대책이 나옵니다. 대책 없으면 큰일 나지요. 여기 또 여자 둘 등장합니다. 총 합해서 여자가 세 명 등장해요. 한 여자는 되 말속에 갇혀있는 여자. 또 두 여인은 바람 따라 나타난 여자에요. 9절 봅시다.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두 여인이 나왔는데 학의 날개 같은 날개가 있고 그 날개에 바람이 있더라” 눈을 들어본 즉 두 여인이 나왔는데  학의 날개 같은 날개가 있고 그 날개에 뭐가 있습니까? 바람이 있지요. 자, 자유롭다 이 말이거든요. 이 여인은. 날개 있고 자유롭습니다.

상대적으로 안에 갇혀있는 여인은 꼼짝 마라, 지요. 그래서 우리가 참 감사할게요, 세상이란 이 현실이 환타지인데, 환타지가 이렇게 막혀있는 환타지라는 거예요. 갇혀있는 거예요. 쭈그려 앉아있다고 보면 돼요. 여기 되 말하지만, 우리 식으로 하면 우리 토속 식으로 하면 가마솥 밑에 무거운 가마솥 뚜껑 안에 딱 백숙되려고 쪼그리고 앉아있는 그 모양새를 보세요. 그 안의 세계에요. 그 안의 세계에서는 그게 현실의 전부에요. 모든 현실의 전부는 그 안에 딱 갇혀있는 겁니다. 뚜껑이 납이 되어가지고 내 힘으로 들을 수가 없어요. 바깥을 몰라요. 우물 안의 개구리라는 말이 있잖아요. 뚜껑 덮힌 우물. 바깥으로 튀어나올 수가 없어요. 닫아놨어요.

요걸 저는 일종의 관이라고 봐요. 관. 죽은 사자를 오동나무 관으로 해가지고 운구할 때, 운구를 누가 하느냐 날개달린 여자 천사가, 여자 천사가 말이 안 되지만, 중성이기 때문에. 하여튼 두 여인이 날개의 바람을 타고 그걸 바짝 듭니다. 들어서 어디 가느냐 하면 장소가 있어요. 에바를 어디로 옮겨가느냐 물으니까 그들이 시날땅으로 가서 그를 위하여 집을 지으려함이라. 준공되면 그가 제 처소에 머물게 되리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두루마리의 면적이 세로 10.4m, 5.2m해서 이건 성전의 현관, 그걸 낭실이라 하는데 성전의 낭실은 이게 열왕기상6장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성전 낭실에 있는 그 두루마리 성전 입구에 있는 그 면적을 그대로 달랑 들고 갑니다. 두루마리가. 두루마리가 날아 가가지고 이게 뭘 하느냐 하면 불에 사른다 했지요. 4절 끝에 보면 그 집과 나무와 돌을 사르지요. 저주를 하는 거예요. 저주를 하겠지요. 요거는 일단은 요기 대비돼 있습니다. 딱 준비해 놓고.

그 다음에 다른 천사가 와서 해가지고 뭐를 들고 갑니까? 납의 뚜껑에 여인 하나가 꼬부리고 앉아서 있는 거예요. 눈은 못됐으니까 쫙 쬐지고. 여자 이름이 뭐라고 했습니까? 으악! 으악새 아닙니다. 여자 둘이 와서 달랑 이걸 운구하지요. 운구. 운구해서 어디로 가느냐, 시날땅으로 갑니다. 시날 땅으로 옮겨집니다. 시날땅은 뭐냐, 이건 바벨론제국이에요. 바벨론 제국에. 바벨론 제국에 가서 두 여자가 악을 옮기는 요 내용이 어디에 들어 있느냐 하면 여기 바로 두루마리 안에 내용에 실현을 위한 겁니다. 말씀을 현실로 옮기는 거예요.

그러면 지금 우리가 봐야할 것은 이러한 해석 납, 에바, 두 천사, 우리는 이걸 우리 인간 쪽에서 보면 이게 뭐냐 하면 환상 같지요. 이게 현실이 아니고 우리가 사는 내가 이 안에 들어있는 이 악 이게 현실 같지요? 제가 이렇게 묻는 것은 해석할 때에 이런 식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어떤 식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좋은 조치를 해주실 겁니까?” 라고 물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이게. 그렇게 되면 묻는 자체가 내가 마치 환상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내가 현실인양 우기는 셈이 돼요. 그 가짜인 고집을 안 버리고 가짜 고집을 계속 우기고 있는 셈이 되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릴게요. 진짜 실체는 하늘에 있고요, 우리는 모형이다 말이지요. 이건 악마가 베낀 거예요. 현실을 베껴서 환상으로 만들어 놨다 이 말이죠. 지금은 이제 악마의 지배에서 환상이 현실 노릇도 하고 있는 거예요. 매 뉴스 보세요. YTN 뉴스, 케이블 뉴스에 나오는 거 보면 전부 다 환상이야기에요. 그게. 현실은 하나도 없어요. 전혀 현실이 아니고 환상이라니까요. 그러면 환상을 없애버리면 되지 않느냐, 아니죠. 환타지가 있어줘야 거기서 현실을 뽑아내니까. 이 말씀을 뽑아내야 되는 거예요. 말씀이.

말씀이 이 땅에 환상세계 속에서 얼마나 많은 시련과 아픔과 곡해와 오해와 핍박과 버림을 당하는지를 이스라엘 이름으로 그들은 바벨론까지 끌려가야 되는 거예요. 그들이 바벨론 제국에서 멸망당하는 그것이 현실을 현실 되기 위해서 마땅히 거쳐야 될 프로세스 과정입니다. 하나의 과정이에요. 필히 걸쳐야 될 절차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보고 그래요. “아이고~ 목사님, 제 소원은 그냥 죽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죽는 게 소원되어가지고 그런지 유행이던지. 그냥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몸이 아픈 사람들 있잖아요. 목사님, 죽고 싶은데 하나님이 안 데려가요. 안 아프고 데려가서 뭘 얻겠다는 거예요? 고통을 빨리 면제했으면 좋겠다는 그런 식이지요. 그리되어버리면 본인 자체가 환상이 아니고 본인 자체가 마치 현실인양 행세하는 바가 되는 겁니다. 현실인양.

아까 욥 이야기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욥은 지금 해명이 안 되는 고통을 받아요. 그래서 자기는 분명히 현실인데 고통이 또 하나의 현실이 오니까 두 개의 현실 중에 어느 게 현실인지 자기가 지금 감당이 안 되어서 헷갈리는 겁니다. 그래서 이게 얼마나 안달이 났던지 죽고 난 뒤에 한 번 따져보겠다는 거예요. 죽고 난 뒤에 내게 구속자가 살아계시니 주님은 알겁니다. 내가 얼마나 어느 것이 현실이고 어느 것이 환상인지 내가 얼마나 고민하고 있었는지 이런 식으로 막 하나님께 기도할 때 그런 식으로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그런 기도했겠어요.

바로 그 욥의 과정을 우리가 겪어야 됩니다. 겪어야 돼요. 이 자아라는 것은요, 자아라는 이 환상은 내가 내 힘으로 벗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벗길 수가 없어요. 나는 죄인이며 아까 간음한 여인 이름이 뭐라고 했습니까? 없나이다. 이 여인이 없나이다, 라고 말한 것은 누가 이야기를 물어줘서 그래요. 누가 이야기했습니까? 주님이 이야기하니까 없나이다. 라고 답한 거예요. 자기는 없나이다. 존재에요. 없나이다, 존재. 없음이란 존재가 된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우리가 생각해서 우리가 노력해서 성공해서 그게 될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뭔가 그 정도의 낭패를 이 땅에서 막다른 그것을 계속 그런 사태가 일어나야 돼요. 성도로서 공통적으로 겪는 고민거리가 뭐냐 하면 복음도 얼추 알고 이제 십자가도 알고 누가 봐도 내가 성도인 거 같은데, 왜 일상에 일어나는 매일 매일의 사태가 나의 눈에 가시 같은 사태만 일어나느냐 이 말입니다. 이제는 꽃길만 있으면 좋겠는데 그 놈의 꽃길에 가시가 얼마나 많은지. 이렇게 아스팔트길에 가면서 그냥 큰소리 찬송가 부르면서 주님은 나의 소망이요, 하면 좋겠는데 이게 맨날 자빠져. 아스팔트에 뭔가 자꾸 돌출되는 요소가 있어요. 가다가 자빠지고 코 깨지고 맨날 깨지고, 화내고 싸우고 또 난리 났어요. 이제는 하루 하루 사는 게 겁이 나. 또 무슨 일이 터질까봐서. 사단 날까봐.

왜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아는데 성도 맞는데 왜 내가 안 겪으면 좋을 사태들이 자꾸 돌기처럼 앞에 돋아나느냐 말입니다. 우리의 환상성이 현실이라고 우기는 그 환상성이 내 소원대로 그렇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겪어야 돼요. 그 겪는 작업이 뭐냐 하면 바로 확인 작업인데, 여기서 주의할 것은 1번, 나는 구원 받았음을 확인 아닙니다. 2번, 내 안에 스가랴 말씀 들었음을 이거 확인하는 거예요. 말씀 확인이에요. 내 구원 확인이 아니고 내 말씀 확인이에요. 왜냐하면 내 구원이 되면 나는 여기1번에는 살아 있잖아요. 2번에는 말씀이 주인공이에요. 말씀을 위한 시다바리가 나다 이 말이지요. 나는 이미 엄한 아버지한테 종속되었어요. 찐빵을 줄지, 호빵을 줄지, 회초리를 줄지 그건 내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에요.

“아빠, 나는 호빵 먹고 싶어.” 이러면 이 자체가 현실이 되어버린다고요. 환상이 아니고. 현실은 아버지가 현실이에요. 나는 현실이 아니라고요. 그래서 일어나는 모든 사태를 통해서 스가랴5장에 나오는 그 말씀을 계속해서 무한 반복시키는 게 우리가 죽을 때까지 계속 반복시키는 겁니다. 이 땅이 바벨론 땅이에요. 바벨론 땅.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전력이 바로 악에 갇혀가지고 더 노골적으로 하면 악에 받쳤다 하지요. 악에 받쳐가지고 오직 나만을 위해서 내 것만 챙기는 그러면서도 그런 현실이고 싶어 하는 나의 소원, 나의 소망, 이게 계속해서 우리 속에서 이게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나타나야 돼요.

제가 부산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아담의 이름을 버리지 말라고요. 주님의 이름은 없다고요. 내 이름 버리지 말고. 그게 다 쓸모 있어요. 내 이름 있는 곳에 주님 있는 거지. 내 이름 버리면 주님 이름도 날아가 버려요. 내가 나를 못 버려요. 버리면 안돼요. 내가 버리면 주의 말씀이 날아가 버려요. 주님께서 나를 꼭 쥐고 있습니다. 나를 꼭 쥐고 내 안에 바깥에 있는 현실이 내 마음에 현실이 되어있음을 우리로부터 계속 들추어주는 그런 작업을 계속하는 겁니다.

말씀을 한 번 보고 일독하고 다 떼었다. 이러면 안돼요. 끊임없이 내가 아는 말씀 지식이  얼마나 현실에 작용하는 말씀과 괴리적이고 내가 아는 것이 얼마나 거짓된 것인지 잘못된 착각인지를 실제 일어난 사태와 마주치면서 계속해서 이게 내안에서 수정작업이 일어나면서 우리는 그 기준. 그러니까 왕 대신 주님께서 제사장 되심을 그것을 계속해서 고정된 것이 드러내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그 작업이 되는 거예요.

여기서 요한계시록 해석을 봅시다. 얼마 안 남았지만, 요거는 꼭 추가하고 싶어요. 요 이야기로 마무리 지어야 해요. 안 그러면 안 됩니다. 나가 있다 했지요. 나는 반드시 누구를 여기 빈자리에 누구를 호출하느냐 하면 너를 호출하게 되어있습니다. 나는 너를 호출하게 되어있어요. 나와 너가 있다는 이게 뭐냐 하면 환상세계에 환타지 세계에 구조입니다. 격가지 다 떼 내어 보세요. 나머지기 나는 뭐 어느 학교 나오고 다 떼고, 나는 재산이 얼마고 다 떼고, 아파트 다 떼고, 달랑 남아있다면 세상에 남아있는 경우는 없어요. 반드시 나 앞에 너가 있어요. 너와 나에요. 너와 나.

왜 그러느냐 하면 아까 성전에서 감람나무가 몇 개였습니까? 둘이지요. 그걸 그대로 악마가 여기서 복사를 했으니까 이 세상에는 딱 두 사람 나와요. 나와 그리고 너. 또 만약에 나와 너에요. 이걸 너희들이라 해도 너에요. 다 압축해보면 너가 된다고요.

그러면 요한계시록에서의 해석에 잘못된 예가 뭐냐 하면 그겁니다. 요한계시록 보면서 하나님을 불러요. 예수님을 불러요. 주 예수님을. 그러면 주는 뭐가 됩니까? 너가 되겠지요. 누가 부릅니까? 내가 부르지요. 이 자체가 요한계시록을 잘못 해석하고 있는 거예요. 나 자리에 주님이 와야 되는데 그렇지 않고 주님을 상대방 저로 보는 거예요.

그러면 요한계시록의 주님께서 진짜 자기 백성한테는 나에다가 무슨 이름을 집어넣느냐 하면 생명책에 자기 이름을 여기다가 집어넣어버린 거예요. 그럼 이름은 아까 제가 구약 이름은 기능했지요. 그러면 내 이름이 있으면 내 구원 받은 게 있다는 고집스러운 내 기능이 나오겠지만 이게 내 이름에 주님의 이름이 들어와 버리면 내가 이 시대에 두 감람나무처럼 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증인.

나와 너가 이렇게 되게 되면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성경말씀과 주님과 악마와 싸우고 모든 것이 그렇게 해석해버리면 이건 요한계시록 해석에서 나가 뭐가 되느냐 하면 현실이 되어버려요. 그럼 나만 현실이 아니고 내가 지목한 너도 현실이 되어버립니다. 환상은 없어요.

그럼 누구부터 먼저 환상이 되어야 돼요? 나가 환상이 되어야 되겠지요. 그럼 여기 나 자리에 누가 오느냐 하면 주님이 오시게 되면 주님만이 현실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해석이 왜 어려우냐 하면 요한계시록 해석에서의 오시는 주님의 현실이 전부 다 무슨 용어냐 하면 환타지 환상 용어로 되어있기 때문에 이게 어려운 거예요.

우리가 익숙한 것은 뭐냐 내 중심의 세계에서 통하는 그 단어가 주님한테 사용하니까 현재 내 중심으로 해석했던 그 해석이 주님 해석에는 이건 먹히지를 않아요. 먹혀들어가지를 않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자체 내가 환타지로 오히려 지적받아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요한계시록 해석하는 내 해석 내 자체가 지적받는 거예요.

그럼 요한계시록 해석은 어떻게 합니까. 아까 성도 어떻게 살라 했습니까? 그냥 아무 상관없이 구애받지 않고 살게 되면 뭐가 나온다 했어요? 계속해서 어떤 사태가 벌어지는 거예요. 그게 바로 요한계시록이에요. 나는 피하고 싶다. 피하고 싶다 하면 안돼요. 그냥 일어나요. 마치 내가 행동하는 것이 주의 일이듯이. 나한테 일어나는 일도 주의 일이에요. 그런데 만약에 내게 일어난 일을 나의 일로 간주해버리면 내 앞에 일어난 일은 너가 되어버립니다. “주여, 저기 저 사람이 나를 왜 괴롭힙니까?” 갑자기 환타지가 현실로 바뀐다고요. 그러면 안돼요.

나도 우연히 여기에 태어났고, 하루, 하루를 우연히 살아가는 걸로 여기시고 나를 우연으로 하나의 환타지로 봐야 이 땅에 보이지 않는 분이 요한계시록대로 실제로 작용하고 움직인다는 사실을 비로소 우리는 증거 할 수 있는 겁니다. 나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건 주의 일이기 때문에 내가 구태여 관여할 필요 없습니다. 이런 마음.

“주여, 주의 기능만 그냥 내 속에서 작용만 하게 해주옵소서.” 주께서 실제로 우리를 장악하는 방법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호빵 원하지 마시고, 채찍질 원하는 사람 없고, 그냥 아버지의 뜻을 위해서 그냥 우리 안에서 실현되게 해달라는 그것만 있으면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곳이 바벨론이요, 저주받을 멸망할 도성인 것을 우리는 이제 알고 이 땅에 태어났음을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완성된 십자가의 다 이루심과 부활의 이루심이 우리를 통해서 발현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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