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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01 23:53:49 조회 : 1141         
만남과 연결 160401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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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IP:14.♡.134.85) 16-04-08 10:24 
20160401a 울산강의-출애굽기 36장 : 만남과 연결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출애굽기 36장부터 39장까지 쭉 갑니다. 26장에서 28장 내용을 그대로 반복합니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브살렐과 오홀리압에게 하나님의 성소를 만들라고 했습니다. 출애굽이란 애굽에서 나오는 건데 나오면 그냥 나오지 성소를 만들 이유가 뭐가 있겠느냐? 성소를 안 만들고 애굽에서 나와서 바로 천국갈 수는 없겠습니까? 꼭 뭘 만들어야 되겠어요? 천국이란 하나님이 계시는 곳인데 애굽에서 나와서 그냥 가면 되지 않느냐? 보통 교회에서 그렇게 이야기하잖아요. 애굽에서 나와서 천국 갑시다. 그냥 빈손으로? 세상 것은 하늘나라에 못 들어가니까 그냥 빈털터리로 들어가면 되겠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성소를 만들라고 했단 말이죠. 그럼 만들어진 것으로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이 땅에서 공작시간이 있어서 너희들이 천국 올 때 그냥 오지 말고 뭘 하나 만들어서 천국 오라고 하나님께서 지시했어요? 뭘 들고 가야 됩니까? 아니죠. 어차피 놔두고 가야 되잖아요. 놔두고 갈 것을 왜 만들라고 이야기했느냐? 거기에 대해서 제가 지난달에 언급했습니다. 한 달이나 지났으니 무슨 소리했는지 모르겠지요.

그건 뭐냐? 성소를 만드는 게 아니고 인간을 만드는 거예요. 성소를 만들면서 인간 자체가 다른 인간으로 바꿔지는 방편으로 그러한 계기로써 성소를 만들라고 한 겁니다. 어차피 아무것도 못 들어가요. 천국 갈 때는 죽어서 가는 사람이 뭘 들고 가요? 그런데 인간 바꿔져야 됩니다. 그걸 사도 바울은 옛사람이 새 사람으로 바꿔진다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런데 옛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새 사람 된 사람만이 알아요. 그냥 보통 사람은 옛이고 샛이고 몰라요. 새사람 됐을 경우만 옛사람을 아는데 옛사람과 새사람이 어떤 차이가 나느냐 하면, 옛사람에서 새 사람으로 넘어서는 방법이 인간에겐 없습니다.

옛사람과 새 사람으로 가는 길에 이쪽 선 말고 따로 나가서 이걸 바라봐서 이건 옛사람이고 새 사람이라는 특정한 지역은 없습니다. 옛사람에서 이것은 죄니까 새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니까 죄에서 씻음 받아서 의로운 사람이 돼야지, 라고 생각한다면 이 사람이 생각하는 새 사람은 바로 옛사람에 해당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옛사람에서 상상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죄를 지었구나. 새 사람 되면 죄를 적게 짓든지 안 짓게 되겠지. 그게 바로 옛사람과 연결돼있는 새 사람입니다. 그 아이디어는 옛사람을 밑천으로 해서 만들어낸 새 사람입니다. 이것 가짜입니다. 이것을 종교라고 하지요. 또는 도 닦기.

인간에게는 아무리 경건하게 살고 거룩하게 살고 성경에서 바르게 살라고 해서 바르게 살아봤자 그것은 여전히 자기 자신을 자기가 다루는 방식에 불과합니다. 새 사람은 인간에게는 없어요. 왜 없느냐 하면, 인간은 거기서 거기기 때문에 없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새 사람이 아니에요. 인간 입장에서 질적인 차이를 논한다는 것은 아마 괴물일 거예요. 질적으로 자기와 전혀 다른 인간이라면 외계인 정도 쯤 될 때 “저게 괴물이야, 인간이야?” 할 때 그 괴물은 제대로 새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통점이 없으니까.

새 사람은 언제 등장하느냐 하면, 말씀이 육신이 될 때 새 사람이 등장합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그런데 요한복음 1장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는데 그렇게 될 수 있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수준이 돼야 되느냐 하면, 바둑돌이 있고 바둑판이 있는데 아침에 가보니까 그게 사람 돼있는 거예요. 그 정도 될 때 새 사람이라 할 수 있어요.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새 사람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밖에 없고 예수님 안에서 인간을 볼 때 예수님 빼놓고 다 옛사람입니다. 비로소 이것이 사도 바울이 말하는 옛사람과 새 사람이에요. 예수님이 바라볼 때 모든 사람은 옛사람밖에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의 영이 옛사람 속에 들어오게 되면 그 사람은 성령을 받아서 새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옛사람과 새 사람이 뭔가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의외로 새 사람 되신 예수님이 인간 속에 왔을 때 사람들이 새 사람이라고 이야기한 적 없어요. 목수의 아들이라고 했어요. 같아도 너무 같아. dna가 똑같아. 어딜 봐서 새 사람입니까? 새 사람 티가 안 나는데요?

세례요한이 탄생할 때 아버지 사가랴의 부인이 나이 많아서 아기를 못 낳아요. 그런데 성령이 약속해서 아기를 낳거든요. 그래서 세례요한이 태어났습니다. 그 세례요한이 보기에 마치 새 사람처럼 보이는데 헤롯 왕 입장에서는 세례요한을 보통 사람과 똑같이 봤지요. 특이하긴 했지만 광야에서 낙타 털옷 입는 그 정도 수준이지 다를 바 없습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옛사람과 새사람이 있는데 그 새사람을 둘로 나누자는 말이죠. 제 이야기가. 어떻게 나누느냐? 인간들이 상상하는 새사람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새사람과 나눠야 한다는 거예요. 인간들이 상상하는 새사람은 착한 사람, 거룩한 사람, 경건한 사람, 정말 태도가 돌변한 사람, 술 먹다 술 끊은 사람, 담배피우다 담배 끊은 사람, 교회 안 나오다 교회 나온 사람, 전도 안 하다 전도 열심히 한 사람, 그걸로 새사람이라 해요.

인간들이 상상하는 새사람을 조직신학에서는 거듭났다고 해요. 다시 태어났다. 교회마다 남한테 기죽기 싫어하잖아요. 맨날 묻는 게 “목사님, 저 거듭났습니까? 저 새사람 됐습니까? 중생했습니까?” 중생하고 남은 것은 성화 남았습니다. 중생에서 성화하겠습니다. 그런 식으로 스스로 자기를 사람 만들려고 하는 거예요.

오늘 출애굽기 36장 이야기하면서 바로 이 점을 우리가 생각해봐야 돼요. 천국 갈 때 아무것도 안 가지고 가요. 그럼 그냥 천국 보내시면 되는데 왜 이스라엘 사람 나라로 성소를 만들라, 제사장 복장을 만들라, 번제단 만들라, 금향단 만들라, 언약궤 만들어라, 진설병, 등대 만들고. 성소 만들고, 지성소 만들고. 그냥 천국으로 보내면 될 것 아닙니까? 왜 자꾸 그걸 만들라고 하느냐 말이죠. 만들어봐야 가져가는 것도 아닌데.

이야기가 어려울 때는 미리 쉽게 결론짓는 방법이 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진 것에 의해서 인간은 구원이 가로막힌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36장에 보면 성소를 만들잖아요. 36장 8절에, “일하는 사람 중에 마음이 지혜로운 모든 사람이 열 폭 앙장으로 성막을 지었으니 곧 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그룹들을 무늬 놓아 짜서 지은 것이라 매 폭의 장은 이십팔 규빗, 광은 사 규빗으로 각 폭의 장단을 같게 하여”

들어봐도 무슨 말이지도 모르겠고 보면 볼수록 점점 더 짜증나는 식으로 계속 전개되고 있어요. 띄어쓰기도 팍팍하면 눈이라도 덜 피곤하지 읽으란 말인지, 읽기 싫으면 때려치우란 말인지 복잡하게 돼있어요. 하여튼 친절을 베풀지 않아요. 읽는 즐거움을 허락하지 않아요. 읽는 재미 같은 것을 주지 않아요. 왜냐? 본다고 네가 아느냐 이 말이에요.

지금 여기 오홀리압과 브살렐이 실제로 성막 만들었잖아요. 사람이 만들었다는 말은 오늘날 우리도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제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 사람이 만든 그것이 인간의 구원을 방해가 되고 장애가 돼요. 인간은 예배당 지을 수 있지요. 예배당 지은 그것이 구원을 방해한다니까요. 사람이 뭔가 자기 손으로 만들게 되면 거기에 의미를 두게 마련이거든요. 의미를 둔다는 말은, 자기가 만들기 전에는 별 의미 안 두다가 하나님 지시로 만들게 되면 자기가 손수 만든 것 빼고 구원받는 것을 굉장히 싫어해요.

구약에 십일조 있었습니다. 신약에는 십일조가 없어요. 그런데 목사들이 십일조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십일조를 오십년 동안 한 사람에게 하루아침에 십일조 하지 말라고 했을 때 기분이 좋겠습니까? 기분이 찝찝하지요. 그동안 십일조를 안 빼고 했기 때문에. 자기가 십일조 했다는 그것이 자기 구원에 장애가 되고 방해가 되는 겁니다. 십일조 빼놓고 구원을 본인이 수용을 못해요. 왜냐하면 본인이 할 수 있는 것이 뻔히 눈앞에 있는데 그걸 왜 비켜 가요.

교회 앞자리에 앉으면 은혜 받습니다. 그래서 삼십년 동안 앞자리에 앉았다고 칩시다. 그런데 뒷자리에 앉으라고 하면 이상하게 찝찝해요. 앞자리에 앉아야 은혜 받는 것 같아. 뒷자리에 앉아도 천국 가는데 지장 없습니다. 장담할게요. 뒷자리에 가도 구원받는데 전혀 지장 없어요. 그런데 뒷자리에 가기 싫어해요. 앙금이 남아 있어요. 내 구원을 내 스스로 방해하는 요소가 내 속에 앙금처럼 찌꺼기가 남아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말씀은 왜 반대로 하느냐? 반대로 한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거든요. 세리가 바리새인보다 나아서 천국 가는 게 아닙니다. 일부러 왜 반대하느냐 하면, 할 수 있다는 것을 인하여 구원을 성사시키는 너의 모든 예상을 포기하라. 그게 바로 옛사람이에요. 옛사람은 예수님 빼놓다 다 옛사람입니다. 그러면 새사람은 말씀이 육신 된 분이 새사람이에요. 이 말은 곧 무슨 뜻이냐 하면, 어느 누구도 스스로 노력해서 자기가 자기를 설득하고 애쓴다고 해서 말씀이 육신 되는 건 아니잖아요.

제가 아까 예를 든 것처럼 내가 바둑판을 사서 바둑돌 놓고 아침에 보니까 여기에 어떤 도인이 앉아서 바둑을 두고 있다. 이런 경우는 없단 말이죠. 내일 아침 되도 바둑판과 바둑알 그대로 있듯이 사람이 아닌 이상은 물건은 그냥 그 자리에 있는 거예요. 그 물건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만들라고 했습니다. 성소라 하지만 따지면 물건입니다. 물체잖아요. 인간이 만들 수 있는 물체가 어디 갑니까? 물체가 사람 됩니까? 안 되는 걸 되신 분이 말씀이 육신 되신 예수님이라니까요. 이건 터무니없는 거죠. 우리 보기에 터무니없는 황당한 일이 예수님한테 일어난 거예요.

예수님은 본인을 성전이라 했어요.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46년 동안 지은 성전이 있다. 헐어라. 내가 사흘 만에 지을게. 나중에 보니까 자기 몸으로 성전이라 했다. 제자들은 처음에 이야기할 때는 몰랐는데 예수님 죽고 부활하고 난 뒤에 그 사실을 알았단 말이에요. 나중에 알았다는 말은, 그동안 내가 내 쪽에서 예수님에 대해서 이런 분이다, 저런 분이다, 라는 생각하는 모든 것은 나란 이름의 옛사람의 연장에 불과하지 내가 예수님을 아무리 그럴싸하게 존중하고 존대한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내가 새사람 되는 요소가 될 수 없다는 거예요. 옛사람이 새사람 되는 것은 단절뿐입니다.

지난 수요일 설교지요. 제가 손가락 세 개 제시해서 하나를 꺾은 것 기억나십니까? 한쪽은 가인의 계열, 한쪽은 아벨의 계열. 아담과 하와가 아기를 몇 명 낳았느냐 하면, 여호와와 관련해서? 하와가 남편과 동침했음에도 여호와와 동침했다고 이야기하면서 생긴 자식이 세 명이죠. 가인, 아벨, 그리고 셋이잖아요. 하나님께서 가인에서 셋으로 넘어가는 게 아니고 중간에 아벨을 가인에 의해서 죽였지요. 손가락 셋 있었는데 하나를 꺾어버리면 가인에서 아벨 계통으로 넘어가는 다리라든지 연결고리가 있어요? 없어요. 이걸 주일 낮 설교에서 복선이라 했어요.

주일 낮 설교 듣고 어떤 분이 저한테 메시지를 보냈어요. “복음 듣는데 속이 울렁거립니다.” 나쁘게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감사하다면서 했는데, “단선에서 복선으로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요?” 이게 죽어도 안 돼요. 아마 단선에서 죽으면 복선으로 넘어갈 것이라는 아이디어는 단선의 연장선에 불과합니다. 죽고 난 뒤에 좋은데 가겠지. 이것도 옛사람의 연결고리에요. 단선에서 복선으로 넘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선교단체에서 지상, 하늘나라 해놓고 십자가 그려놨을 때 대학생들이 뭘 생각합니까? 굉장히 쉬운 거예요. 십자가로 타박타박 걸어서 천당 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호주 시드니에 하버브리지라는 유명한 다리가 있답니다. 애들은 그 다리 건너고 싶어 하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천국도 다리가 있어서 주님 등에 올라타서 건너가면 된다는 겁니다. 이러한 아이디어가 오늘 성막 만들기 또는 방주 만들기에 해당되는 겁니다. 만들었기에 유용하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옛사람에 영원히 갇혀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물이 되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뭘 자랑하느냐 하면, 너희 조상들은 성막 안 만들었지. 우리 조상 모세가 지시해서 성막 만들었다. 너희 집 정수기에 얼음 나오느냐? 이런 식으로. 우리 집에는 성막 있다, 성전 있다. 성전 있다가 그들의 구원을 방해한 거예요. 성전 있으면 뭐 합니까? 성전이 방해하는데. 성전은 그냥 만들어놓고 끝나는 게 아니죠. 성전을 관리하잖아요. 지금도 성지순례하고 성전 구경하러 가잖아요. 골드 돔이라 해서 이슬람이 차지하고 있지만. 또 통곡의 벽에 가서 울고불고 하고.

만들었기에 그들은 자기의 분수를 아는 계시가 시작되는 겁니다. 시킨 데로 만들 수 있다는 그것이 스스로 꾐에 빠지는 계시를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만드신 겁니다. 천국은 손으로 만들어서 가는 데가 아닙니다. 만드나, 안 만드나 처음부터 갈 수 없는 곳입니다. 갈 수 없는 곳을 가게 할 때는 만든 그 자체가 무의미하게 되면서 사라진 그 현장에 없다고 여겼던 새로운 흔적이 등장할 때 그 흔적이 인간이 해놓은 그것이 사라짐으로 비로소 등장하는 그 무엇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성전이 있다고 자부하는 인간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고 살린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 죽는다고 구원되는 게 아니에요. 사람 손에 의해서 그것도 하나님의 구원을 자부하는 사람의 손에 죽임을 당한 그 메시아가 죽어야 그 죽음이 우리를 구원해요. 그냥 예수님이 구원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의 존재가 구원한다는 것은 이천년 신학이 거짓말한 거예요. 그러나 진짜는 십자가만이 우릴 구원해요.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지, 그냥 예수 존재가 우릴 구원하는 게 아닙니다.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도리어 인간은 옛사람에서 새사람으로 처음부터 건너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 이제는 들통 나게 돼있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방주 들어갔다 나왔습니다. 그게 구원의 전부가 아니죠. 방주 들어가 봐야 튀어나왔죠. 튀어나온 것이 천국입니까? 아니잖아요. 지금 하나님께서 세상에 살다 다른 데 사는 게 아니고 인간들이 옹기종기 사는 이 땅에 가는 것이 아니고 그건 여호와증인이고, 주님 가신 곳에 가게 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려면 옛사람으로는 못 가요. 새사람으로 바꿔져야 됩니다. 바뀌는 방법은 없어요. 새사람으로 바뀌는 방법이나 능력이 우리로서는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기껏 만들어봐야 옛사람의 반복에 불과하니까 새사람 되신 분이 옛사람으로 새사람 만드는 그 작업이, 인간이 만드는 작업과 겹쳐져야 돼요. 단선에 또 하나의 단선, 복선이 되지요. 두 개의 다른 시간 층이 겹쳐져야 돼요. 만드는 작업을 하면서 그 작업을 무의미하게 하는 또 다른 작용이 만드는 작업 가운데 계속 일어나줘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한 작업이 출애굽기 36장부터 39장까지 인간에게 손수 만들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만들라고 하니까 만들어봅시다. 어차피 구원될 것은 아니지만. 성소를 만들려면 일단 부동산, 땅이 있어야 되겠지요. 땅을 이렇게 그렸습니다. 성소가 사람의 아이디어라면 하나님을 상상해요. 상상한 하나님을 잘 모시기 위해서 건물의 설계를 자기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잘 만들기 위해서 멋진 아이디어를 공모하겠지요.

이스라엘 하나님은 인간이 상상한 하나님이 아니고 찾아오신 하나님이잖아요. 이것은 연속적인 만남이 이뤄져야 돼요. 그래서 성소가 만남의 장소에요. 기거한다는 것은 일단은 만나야 돼요. 나중에 성전에 기거하지 성막에는 기거하진 않아요. 그럼 성막의 주 기능은 거주하는데 있는 게 아니고 만남에 있겠지요.

사람과 사람이 만날 때 어떤 게 필요하지요? 우선 차 소리가 적게 들려야 되고, 여름엔 에어컨 있어야 되고, 겨울엔 히터 있으면 되겠고, 푹신푹신한 소파 몇 개 놔두면 되겠지요. 그렇다면 이 건물에 유리창 멋지게 하고 소파 들여놓고 에어컨하고 벽난로 만들어놓으면 하나님이 여기에 찾아오시겠습니까? 내가 인간이가? 너희들끼리 친목회, 동우회 하듯이 내가 찾아오나? 내가 어떻게 이런 데서 만나? 그러면 인간이 뭐라고 하겠어요? 그럼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와 만나는지 설계도를 제시하면 우리가 시키는 대로 만들어보겠습니다. 이야기가 이렇게 되겠지요.

그러면 백날 만들어봐야 만약에 하나님께서 삐져서 안 온다하면 문제가 돼요. 그럼 어떻게 돼야 됩니까?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 유지가 된 경우가 있을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단체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기 이전에 단독으로 그 대표자가 하나님과 만남이 실제로 성사되더라. 그런 사례가 있을 것 아닙니까? 그게 시내 산꼭대기에서 있었어요. 그래서 성소와 성막의 구조는 바로 위에서부터 시내 산에서 내려오는 거예요. 모세가 시내 산에서 내려올 때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 성사될 수 있도록 이미 배치나 시스템이 갖춰진 설계도면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겁니다. 그런데 거주가 아니고 그냥 만남입니다.

거주가 아니고 만남이라고 강조하는 뜻이 뭡니까? 성막은 이동성이 있어요. 거주라면 고정돼야 되는데 몽골의 유목민처럼 맨날 텐트 치듯이. 몽골에 가면 게르 있지요. 요새 그 시설이 너무 잘됐답니다. 요새는 유목생활인지 캠핑카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잘 됐답니다. 어딜 가도 <태양의 후예>나 한국드라마 다 볼 수 있답니다. 

이동성인 이유가 지상에서는 주님도 머물지 않고, 이 말은 내 백성도 이 땅에서는 머물 곳이 없다는 것을 요소를 표현해주는 장치가 성막 안에 장치로 갖춰져야 됩니다. 텐트 칠 때 꼽는 팩을 백 개 박았다 빼고 하면서 또 이동하는 겁니다. 그럼 여기서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 하는 겁니다. 어떤 루트를 통해서 가느냐? 적들이 있는 곳만 골라가게 되면 거기에 천국이 있습니다. 그럼 적들이 어디 있느냐? 적은 그때마다 만들어져요. 다시 말해서 성막은 전쟁용입니다. 의도적으로 전쟁을 만들어요. 그 전쟁을 통과 못하고 이기지 못한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새사람이 될 수 없는 겁니다.

그 전쟁은 어떤 전쟁이냐? 새사람이 됐느냐, 안 됐느냐, 확인하는 전쟁입니다. 그럼 어떤 종류의 적들과 싸워야 새사람인지 헌 사람인지 알 수 있느냐? 아까 이야기했듯이 말씀이 육신 된 분이 새사람이라 했지요. 따라서 신약에서 예수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갑자기 난데없이 돌발 사태로 계속해서 쉬지 않고 등장하는 주님의 적들이 있어요. 말씀의 적.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을 마귀가 싫어하잖아요.

그걸 언약(구약은 언약입니다)에 들어가야 비로소 알 수 있는 원수가 이스라엘 앞길을 막아요. 그 적들의 특징이 언약이 아니고 비 언약적입니다. 비언약적인 민족이 뭘 갖고 나오느냐? 칼과 활과 병거와 많은 숫자로 나와요. 여기에 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기는 칼, 활, 말, 이런 걸 들고 나가면 언약 대 비 언약의 싸움이 아니고 비 언약 대 비 언약의 싸움으로 승리하나, 패배하나 아무 의미가 없어요. 이 땅에서 장소 이동한 것뿐이지 주님 계신 나라로 합류하는 전쟁은 아니란 말이죠. 하여튼 복잡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전혀 무기가 구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쟁을 유발시켜 비 언약 대 언약의 싸움으로 의도적으로 몰아가십니다. 비 언약은 칼과 활이라 치고 그럼 언약의 무기는 뭐냐? 뭔가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 언약의 무기는 사건의 반복이에요. 모세 같은 경우에 지팡이를 쳐다보면 모세를 쳐다보면 이기게 돼있어요. 사실은 이겼다는 말은 어폐가 있고요, 이미 이기게 돼있는 싸움을 확인 차원에서 그런 거예요.

제가 십자가마을에 글 올렸지요. 의존교회가 있던 홀이 재개발되어 예배당 자체가 없어요. 목사님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게 됐는데 이미아 성도님이 서글픔인지 회한인지 모르지만 쓴 글을 봤습니다. 옛날에 좋았던 과거가 생각난다고. 뭔가 떠나면 아프잖아요. 기대하기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예배당이 미어터져서 교인 중에 재벌이 있어서 30억 정도 흔쾌히 내서 옆에다 고딕 건물지어서 옮겨가면 좋겠는데 그게 아니고 거덜 났어요. 예배당이 날아가 버렸어요. 그래서 제가 댓글 달았지요. 주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은, 이름이 의존교회거든요. 언제까지 의존하는지 보자. 이래도 의존하는지 보자.

이렇게 이야기했듯이 주께서 전쟁할 때는 본인이 할 수 있는 걸 하면, 내가 만들 수 있는 언약이나 성전, 내가 할 수 있는 걸 의지하면 그것은 그냥 이 땅에서 이 땅으로 수평 이동뿐이지 구원은 안 됩니다. 옛사람이 솜씨 발휘하는 것으로 천국에 넣어주지 않아요. 옛사람의 한계가 드러나요. 옛사람은 도저히 할 수 없는 곳에 가고 있다는 것, 옛사람으로선 들어갈 수 없는 그곳에 간다는 거예요.

그러면 가기 전부터 우리는 이미 바뀌어져야 돼요. 내가 나 된 것은 내가 할 수 없는 식으로 내가 지금 가고 있다는 것을 새로운 내 주체 내용으로 채워져야 된다 이 말이죠. 그것은 바로 주님과 싸웠던 원수를 앞당겨서(구약이니까 이스라엘 백성으로선) 그들로 체험케 하는 겁니다. 그게 주의 이름만 의지하는 거예요. 주의 이름 안에는 하나님의 의가 들어있어요.

이것은 전쟁의 문제가 아니고 이름의 문제고 하나님의 의의 문제라. 의가 바로 말씀이 완성된 걸 의라 해요. 착한 걸 의라 하지 않아요. 선을 의라 하지 않습니다. 의란 언약이 최종적으로 완성된 상태를 의라고 하는 겁니다. 분명히 이렇게 정리해드렸음에도 불구하고 딴 이야기하면, 참.

성소와 성막은 주님과 함께 만남이에요. 만남은 거주하는 것이 고정된 게 아닙니다. 어디로 떠나야 돼요. 어디로 갈 것이냐, 어떻게 갈 것이냐, 어느 경로를 통해서, 어떤 루트를 통해서? 그것은 적들이 찾아올 거예요. 찾아온 적들 속에 있어요. 하나님의 의는 죄 속에 있어요. 구원은 어디 있느냐? 반복된 실패 속에 구원이 있어요. 늘 우리는 구원에 반복적으로 실패해요. 헌금하면 은혜 더 줄줄 알고, 전도하면 복 줄줄 알고. 그게 실패로 끝나야 돼요. 헌금하고 기대했다는 것은 옛사람이 꿈꾸던 허망한 꿈에 불과합니다. 열심히 교회 봉사하면 자식이 잘된다. 그런 식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어요.

그래서 만드는 성소 안에는 만남이어야 되고, 두 번째는 고정적이 아니고 이동해야 되고, 세 번째는 전쟁에 승리하는 요소가 그 안에 장착돼야 한다는 것. 처음에는 만남, 두 번째는 이동성, 세 번째는 전쟁에서 승리하는데 승리하는 요소로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의는 성소 안에 제사가 이뤄지고 지성소에서 피를 바르죠. 결국 이 의란 피 흘렸은즉 사함을 얻느니라. 이 의는 인간이 알지도 못한 죄마저 이미 완료적으로(완료적입니다!) 깨끗하게 씻겼다는 것을 전쟁하면서 확인해주는 거예요. 이미 피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함을 십자가 이후에 우리가 평생 살면서 매일 일상 가운데 확인하는 거예요. 그럼 우리는 이동하는 성전이 되는 겁니다.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이 주와 만남의 장소고, 우리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고, 가고 있는데 방향은 어디냐? 매일같이 우리에게 무엇이 찾아옵니까? “네가 뭘 해야 잘될 것 아니냐, 네가 이렇게 해야 장래가 있어, 네가 이런 식으로 해서 뭐가 잘되겠어?” 계속해서 자기 행함에 의미와 가치를 두게 만드는 그 불안한 전쟁을 우리로 치르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십자가를 늘 보지 않는 사람은 뭐하는 사람이냐? 사실은 제목을 이것으로 하려고 하는데, 악행. 악행이 뭐냐? 십자가 생각하지 않는 순간이 악행이에요. 왜? 예수님의 적과 한 패가 되기 때문에. 어떻게? 내가 만들 수 있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계속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새벽마다 이렇게 목사가 되어 기도하니까 교인들이 복 받을 걸. 그게 악행이에요. 그 목사는 자기가 기도함으로 말미암아 자기 구원을 스스로 훼방하고 있고 장애요소를 발생시키고 있습니다. 옛사람에서 새사람으로 바뀌어야 되는데 옛사람이 할 수 있는 역량을 다 동원시켜요. 기도도 잘하고, 전도도 잘하고, 설교도 잘하고, 강의도 잘하고, 목회도 잘하고. 나처럼 훌륭한 목사가 어디 있느냐? 그게 자기 구원을 방해하는 거예요. 자기가 만들어낸 구원의 방식을 고집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단 터를 잡게 하시고 그 다음에 여기서 큐빗이라 하는데 1큐빗이 46센티미터 쯤 되는데 c라고 할게요. 100큐빗, 46미터. 이쪽은 50큐빗, 22.4미터 쯤 되고, 동쪽에 9.1미터의 문을 내요. 빈 터에. 여기다가 놋으로 울타리를 만들어요. 그리고 세마포로 둘러쳐요. 세마포 길이가 300큐빗. 울타리 밑에 놋으로 받침을 만들고. 전부 다 이동성이에요. 이것 20개, 이것 10개, 이것 6개.

그리고 입구에 번제단을 만들어요. 3c로 제물을 태우는 걸 만들어요. 들어오자마자 연기 피우면서 제물을 태웁니다. 그리고 물두멍이라 해서 세숫대야를 만듭니다. 여기 20큐빗, 10큐빗, 10큐빗이라 해서 앞을 성소라 하고 뒤쪽을 지성소라 합니다. 휘장이 셋이 있어요. 성막 뜰 문에 휘장1, 그 다음에 성소 들어가는 휘장2, 지성소 들어가는 휘장3, 이게 마지막 휘장입니다.

성소에 들어가게 되면 이쪽에 진설병이라 해서 떡을 열두 개 놓습니다. 금으로 턱을 만들어서 대접, 잔, 물 담는 병, 접시도 만들고. 이 앞에서는 가지가 일곱 나온 대를 만들어서 등대를 둡니다. 등대관리하려고 하면 불똥 집어내는 집게도 필요하고 하겠지요. 번제단에는 제물 잡으려면 고기를 거는 갈고리도 필요하고, 재 떠내는 삽도 필요하고 각가지 이런 것들이 필요합니다.

이걸 어떻게 만드느냐? 무너지면 안 되니까 조각목으로 10큐빗에 넓이 1.5로 두 개를 한 조로 다섯 개를 만들어요. 총 20개에 금박을 입혀서 금고리를 달아서 띠를 꿰게 하죠. 중간에 가로막을 걸 두르고. 여기는 놋기둥이 네 개, 금기둥이 다섯 개에 휘장을 둘러서 튼튼하게 만들어요.

그럼 여기는 붕 뜨잖아요. 사막에도 비 오고 바람 불고 하니까 뭘 덮습니다. 네 겹으로 덮어요. 처음에는 홍색, 자색, 가는 실로 만들어서 천사 수를 놓아 첫 번째로 덮습니다. 열 폭 짜리를 만드는데 5폭+5폭, 오십 개의 금 고리로 연결시켜서 열 폭을 만들어요. 백 개의 팩에 고정시킵니다. 밑에서 보면 천사의 그림이 있을 거예요. 두 번째는 흰 염소 털로 하는데 크기가 30큐빗*4큐빗, 처음(28큐빗*4큐빗)보다 더 커요. 세 번째는 붉은 물들인 수양의 가죽으로 덮어요. 네 번째는 해달의 가죽. 이러면 어지간한 바깥 온도와 관계없이 내부 온도가 유지가 되겠지요. 이렇게 해서 안정이 되는 겁니다.


10분 쉬고 합시다.
 한윤범(IP:14.♡.134.85) 16-04-08 10:25 
20160401b 울산강의-출애굽기 36장 : 만남과 연결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번제단 크기가 5c고, 높이는 3c고. 치수는 별 중요한 것 아니니까. 지성소에 가면 언약궤가 나옵니다. 언약궤는 뚜껑과 상자로 돼있는데 상자 안에는 돌 판이 들어갑니다. 속죄소에는 뚜껑이 있고 천사를 조각해서 마주보도록 돼있습니다. 이런 것이 36장, 37장, 38장에 다 나와 있거든요. 이것을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사람이 만들어내요. 만들어내니까 인간들이 의미 둘 수밖에 없어요. 물론 하나님이 시켰지만 우리가 만들었어. 하나님과 자기와 같은 입장에서 같은 목적으로 가고 있다고 그들은 자부심을 갖고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리고 성소 앞에는 향단이 있어요. 향단은 1큐빗, 1큐빗, 높이 2큐빗으로 향을 피우는 데를 만드는데 이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대제사장의 복장도 만들어야 돼요. 대제사장의 복장은 복잡합니다. 속옷부터 겉옷까지 뭔가 인간과 인간의 만남에서 있을 수 없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그 안에 무장돼있어요. 일종에 로보캅이라 보시면 되겠습니다.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올 수 없는 것, 머리 쓰는 것부터 남달라요. 정금으로 패를 만들고 여기에 이름이 새겨져있습니다. 39장에 하나님의 성결이라고 글을 써놨어요. 운동권 앞에서 손 흔드는 사람처럼 하나님의 성결이란 띠를 두르고 그 다음에 청색으로 만든 끈을 달고. 어떤 특이성을 생각해봐야 됩니다. 여호와의 성결이라고 띠 두르고 금으로 만든 패가 있고, 목이 조이게 돼있고 옷도 특수 옷이에요.

이 옷은 그 자체로서 제일 바깥에 등장하지 않고 걸치고 또 걸쳐야 될 그것을 배경으로 삼기 위해서 있는 옷이 바로 제사장의 옷입니다. 제사장 옷을 입고 난 뒤에 허리춤에 에봇이란 것을 입게 돼있어요. 에봇은 앞치마 두르듯이 합니다. 에봇을 돋보이기 위해서 옷을 입는 겁니다. 그 다음에 견대, 양쪽에 열두 지파 나이순대로 여섯 지파씩 이름이 새겨져 있고, 견대로부터 금으로 만든 고리가 나옵니다. 이 고리가 일종에 방탄조끼를 입을 때처럼 묶는 역할을 하고 판결 흉패란 것을 답니다. 열두 개의 보석을 답니다. 고리, 사슬은 금으로 돼있고.

그리고 우림과 둠밈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물건을 흉패 속에 넣어 놓습니다. 이게 어떤 기능인지 성경에 안 나오니까 어떻게 판결하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뜻을 받을 때 그것을 내놓을 때 색깔이 변하는지 어쨌든 간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통해서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겠다, 안 되겠다, 판결한다든지, 재판을 제대로 판정했는지 우림과 둠밈이라는 것을 안에 넣어둡니다. 그리고 밑에는 방울과 석류를 돌아가면서 달아놓습니다. 그리고 속옷조차도 특수하게 쌍방울표 일반 메리야스를 입는 게 아니고 특수하게 세마포로 따로 하나님께서 지정해서 만듭니다.

제사장 존재 자체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짓눌려있는 그런 존재로 보시면 돼요. 온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뒤범벅돼있는 그런 존재. 하나님의 말씀으로 있는 제사장이 갖고 있는 모든 장치가 한꺼번에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이스라엘이 최종적으로 추구해야 될 상태를 인간이 입는 옷으로 표현했다, 디자인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이 있는 위상, 입장을 옷의 디자인으로 마음껏 표현해낸 것이 바로 대제사장의 복으로 보면 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대제사장이 이스라엘이 운명을 짊어지고 간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그런데 이 제사장이 바로 아까 이야기한 성소 전반을 늘 관리하고 운영하게 돼있습니다.

제가 물어볼게요. 성소에서 활동하면서 의미 있는 인간은 누구겠습니까? 대제사장 한 사람밖에 없지요. 대제사장은 제사를 주관하면서 이스라엘의 죄를 의로 바꿔주는 일에 참여하게 되죠. 그러면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이스라엘이 죽고 살고 이스라엘이 용서받는 것은 대제사장이 열심히 활동한 덕분으로 보이겠지요. 성막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런데 막상 대제사장은 어떤 입장이냐 하면, 활동은 내가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죄용서, 하나님의 의라는 결과물을 낳는 것은 나, 아니야. 나, 절대로 아니야, 라고 날마다 외쳐야 될 입장에 있습니다. 이 옷도 내가 입고 싶어서 입은 게 아니야. 이 옷에 담겨있는 의미는 내 소관 아니야. 내가 열심히 한다고 해서 의미가 살아나는 게 아니고 이 옷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신 그분이 나로 하여금 효과가 나온단 말이야, 이 이스라엘 사람들아. 그걸 증거하는 일을 하겠지요.

그렇다면 대제사장은 경계선에 서 있는 사람으로 볼 수 있습니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사이의 경계에 서 있는 사람. 보이는 세계란 인간이 만든 성소, 성막, 제사장, 다 보입니다. 모자 쓰고 설치니까 보이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이 뭐라고 한다고요? 나, 아니야. 내가 하는 게 아니야. 나와 함께 계신 분이 모든 일을 하신다고 외침으로써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여주기 위한 그 경계에 서서 활동하시는 분이 되겠습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네가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고 네가 활동한다고 효과 없다면 너 빠져. 빠지란 말이야, 라고 칩시다. 만약에 제사장 빠지면 효과 있습니까? 효과 없지요. 제사장 없는 나라, 이스라엘은 성립조차 되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 두 가지 이야기를 연결시키면 이렇게 되겠습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움직이는 사람은 내가 했다는 소리를 해서는 안 되지만 내가 없어도 일은 안 되게 돼있어요. 그걸 합치면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내가 일한 것이 아니란 것을 위해서 필히 존재해야 될 입장에 있습니다. 그게 바로 오늘날 성도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아까 경계라고 했잖아요. 경계를 다른 말로 합시다. 연결. 오늘 강의 제목을 이걸로 하겠습니다. 연결이란 말은 그걸로 끝났다는 의미가 아니고 눈에 보이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그 뒤에 뭐가 있는 겁니다. 연결돼있으니까. 이렇게 와서 그 다음부터 점선으로 돼있으니까 보이지 않는 세계지만 보이지 않는 세계는 보이는 것에서 스톱되면서 보이는 않는 세계와 연결돼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세계에 가려면 바로 연결 지점으로 모든 것이 응집돼야 되겠지요.

이것이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를 꾀더냐? 여기서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이, 십자가가 눈에 보인다 했지요. 십자가가 눈에 보입니까? 사도 바울 당시에 십자가는 이미 25년 지났어요. 어딜 봐도 십자가가 안 보여요. 그런데 십자가 보이지,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나 십자가 보이잖아, 라고 이야기하는 사도 바울이 보이지요.

이것은 비밀은 이 땅에서 분명히 나타나요. 뭐로 나타나는가? 외치는 말씀으로 나타나요. 이것은 뭘 뜻하느냐 하면, 그 말한 사람이 어떤 행동을 똑바로 하느냐, 어떤 결과를 낳았느냐, 그게 아니에요. 그 사람의 행위가 보이는 게 아니고 그 사람의 말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로마서 10장 14절에 나오거든요.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전파하는 사람이 인물이 잘 생겨야 돼요, 행동을 똑바로 해야 돼요? 그런 게 문제가 안 돼요. 뭘 전파하느냐? 나 잘났다고 전파하면 안 되지요. 나, 예수 믿고 새사람 됐다고 전파하면 안 돼요. 왜냐하면 본인은 십자가를 진 적이 없어요. 사도 바울이 전한 것은, 모든 해석은 십자가와 관련돼있어요. 십자가와 관련됐다는 것은 십자가 지신 분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십자가 지신 분이 따로 있는 것이 눈에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느냐, 라는 말은, 십자가 지신 분이 따로 있는데 십자가 자리에 이미 25년 전에 예수님 돌아갔잖아요. 예수님은 이미 한물 간 사람이니까 더 이상 예수 찾지 말고 예수 잘 믿는 자기들을 보란 말이죠. 이런 사람이 등장하니까 사도 바울은 시비 거는 거예요.

지금 예수님을 대신할 사람은 이 땅에 없단 말이죠.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사람을 준 적이 없어요. 어떤 것도 예수님을 대신할 수 없는 거예요. 그것 하라고 전파하는 자 없이 누가 듣으리요. 그 다음에 15절에,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라고 해서 누가 보냈단 말입니까? 보이지 않는 예수님이 보이진 않지만 연결돼 있잖아요. 연결된 그분이 누굴 보냈느냐 하면, 오직 예수님만 증거하는 사람을 보낸 그들의 보이스를 듣고 난 뒤에 니 잘났나, 하지 말고, 우리 안 잘났어요. 하지만 우리가 뭘 증거하는지 들어보란 말이죠. 그 증거함을 듣게 되면 구원을 얻으리라.

이 말이 뭔 뜻이냐 하면, 사람들이 왜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하느냐 하면, 관심사가 보냄을 받으면 자기는 빠져야 되는데 맨날 생각하는 것이 나는 말씀대로 잘 살았나, 못 살았나? 이걸 따지니까 이게 뭐냐 하면,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성막을 만들고 성소를 만든 본인이 본인의 구원을 방해하고 있어요. 누가 너 잘났다, 못 났다는 것을 전도용으로 섞으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어요. 그게 뭐냐? 자기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게 악행이에요.

성경 전체를 봐서 율법의 완성은 뭐죠? 사랑이죠. 이제부터 사랑에 대해서 언급하겠습니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다. 그런데 사랑이란 하나고 연합을 추구해요. 사랑의 특징이 그래요. 연애할 때 남자들이 언제 여자한테 학을 띠냐 하면, 처음에 연애할 땐 튕기고 빼고 나 술 좋아하는 여자 아니에요, 나 쉬운 여자 아니라고 해놓고 나중에 깊은 사랑에 빠지고 난 뒤에 난 죽어도 당신을 못 떠나겠다고 할 때 남자는 기절해버립니다. 갑자기 부담이 확 오는 거예요. 그게 남자가 보는 여자와 여자가 보는 남자가 달라서 그래요.

여자는 하나 된 연합을 추구하는데 이건 사랑이 아닙니다. 욕망이에요. 사랑이란 이 세상에 없어요. 인간은 사랑이란 이름으로 자기 욕망만 계속 고대하고 추하고 기대할 뿐이에요. 욕망이란 자기 존재의 확대, 확장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사랑은 없느냐? 인간은 욕망만 추구하기 때문에 성경의 사랑엔 근처도 안 갔어요. 성경의 사랑은 잊으세요. 인간은 도달할 수 없습니다.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 사랑이 어디 있어요, 세상에. 그건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건데.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 했거든요. 도대체 어떤 인간이기에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 사랑이 있어요?

그러면 진짜 사랑은 이 땅에 없느냐? 있어요. 있는 사랑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바로 사랑은 두려움이 없나니. 따라서 사랑이 있어도 인간은 사랑을 찾아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등장하는 순간 인간의 모든 움직임은 두려움에서 행동에 나선다는 것이 들통 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이 주어짐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두려워하면서 살아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하는 겁니다. 그 두려움이 어디서 생겼느냐? 내가 잘못 행동하고 내가 죄를 짓게 되면 그 결과에 대해서 내가 책임져야 된다는 그것이 엄청나게 두려운 거예요.

내가 태도를 똑바로 안 했을 때 하나님께서 내 잘못된 것을 대외적으로 나중에 매스컴을 통해서 알리게 되면 나는 그 두려움을 피해서 어디로 도망치지? 도망칠 생각부터 먼저 해요. 들키기 전에 두려움이 먼저 찾아오는 거예요. 인간에게 두려움이 생긴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두려움뿐이라는 뜻이에요. 인간의 모든 행동은 두려움에서만 비로소 시작되는 겁니다. 왜? 사랑은 없으니까. 먼저 주님을 사랑한 사람은 없어요. 사랑이 없는 곳에는 그냥 사랑이 없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두려움 덩어리만 있습니다.

여기 나무가 있는데 화분 속에 흙이 있잖아요. 흙 전체가 두려움으로 보면 돼요. 두려움에서 인간이 나온 겁니다. 인간은 두려움의 태생이고 두려움의 생산물이에요. 두려움에서 인간이 된 겁니다. 모든 행동은 두려움밖에 없어요.

애들이 잠깨면 신호를 보냅니다. 그래도 가만있으면 고함지르면서 웁니다. 백일 안 된 애도 웁니다. 기어이 부모를 호출하게 만들어요. 그게 뭐냐 하면, 혼자 있다는 게 두렵다는 겁니다. 아무 이유도 없이 두려운 거예요. 배고픈 게 두렵고. 어린아이라도 생각 좀 해봐라. 젖 안 먹고 그냥 여기서 인생 끝낼게. 왜 그런 생각을 못합니까? 내가 굶고 있으면 언젠가는 찾아오겠지. 왜 그런 철난 생각을 못해요.

두려움이 어떤 행동을 낳게 되고 그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서 무슨 짓이라도 하게 마련입니다. 두려움을 벗어난 짓을 뭐라 하느냐? 윤리와 도덕이고 종교라고 하는 거예요. 앙리 오토가 하는 이야기가, 종교란 뭐냐, 신에 대한 경배가 뭐냐? 두려움이에요. 신이 두려워서 경배한다는 거예요. 특히 이사야 6장에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좀 망하면 어때. 망하게 되었다는 말은, 평소의 생활은 안 망하려고 애를 썼는데 드디어 막다른 길에 도달했다는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하고 망하게 되었다는 끝내 망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야구나 스포츠나 골프나 오늘부터 프로야구 시작하는데 야구를 왜 봅니까? 자기편이 있기 때문에 보는 거잖아요. 자기 편 아닌데 볼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자기편 응원할 때 그냥 보지 않습니다. 치맥하며 보는 이유가 뭐냐? 절대로 지면 안 된다는 거예요. 왜 지면 안 되는데요? 내가 응원하는 팀이 지게 되면 재수가 없다는 거예요. 왜 재수 없으면 안 되는데? 이유가 없어요. 사랑이 없어요.

사랑에 두려움이 없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게 되면, 제발 네 생각 좀 그만 해. 너는 보낸 자의 주님 이야기를 전파만 하면 되지 전파하는 자가 얼마나 잘 생겼느냐 못 생겼느냐, 얼마나 착했느냐,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했느냐 못했느냐, 그런 것들이 복음 전파를 방해하는 겁니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하파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롬10:15)

성소하면서 사랑을 왜 언급해야 하느냐 하면,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성소를 만들면서 제사장은 뭘 보여주는가? 두려움과 사랑의 경계선에 서 있어요. 극한의 두려움을 주면서 그마저도 이길 수 있는 사랑을 저쪽 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오직 제사장만 온 몸으로 느끼는 저쪽 편 세계의 사랑을 전달하는 전달매체로서의 복장이 제사장 복장입니다.

여러분이 안다 치고 제사장 복장을 다시 보겠습니다. 머리에 뭐가 있지요? 여호와의 성결, 이건 요한계시록 할 때 했습니다. 이미 완성이죠. 승리한 겁니다. 내일도 승리가 아니에요. 매일 승리에요. 승리한 자의 자태를 보여주는 겁니다. 백성들이 보고 있는 것을 제사장이 보고 있어요. 뭘 보고 있다? 여호와의 성결했음을 완성한 자태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이게 나타난 하나님이에요. 장차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면 예수님 머리에 모자 썼습니까? 아무것도 안 썼지요. 예수님이 만약에 제사장처럼 옷을 입었으면 사람들이 제사장이라고 오해하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옷은 너무나 평범하지요. 제가 강의 첫 번째에 이야기했잖아요. 새사람인데 전혀 옛사람과 다를 바가 없어요. 똑같아요. 니가 무슨 새사람이야?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새사람인 것은 바로 걸치고 복장 입는다고 되는 게 아니고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남으로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 몸이 성전이란 사실을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 한 뒤에 비로소 깨달았더라. 그렇다면 예수님이 부활하고 난 뒤에 제자들은 겁나는 게 있겠어요, 없겠어요? 사랑은 두려움에서 벗어났잖아요.

두려움은 자기가 자기 힘으로 구원되고자 했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 두려움이란 말이죠. 내가 이십 년 동안 예수 믿었는데 이런 짓을 하다니, 벌 받아도 싸. 벌 받고 안 받고 문제가 아니고 그렇게 하는 순간 보이스, 내용이 달라진다니까요. 그리스도의 승리를 증거하는 게 아니고 예수 믿고 제대로 된 신자를 증거한다니까. 그건 보낸 자가 아니에요. 그건 자기 자랑하는 동시에 벌벌 떨면서 좀 알아달라는 자체가 뭔가 떨고 있는 거예요.

나쁜 짓했다고 벌벌 떨면서 깨놓고 이야기해서 나쁜 짓 아닌 짓들이 있던가요? 한국과 일본과 축구해서 졌다. 막 기분 좋아 다니는 한국사람 봤습니까? 에이, 일본한테 지나. 그런 마음 품는다면 이미 그건 두려움이고 사랑 아니고 나쁜 짓이고 그 사람의 마음에서 나온 보이스는 여호와의 성결이 아니라 대한민국 좀 이기게 해주면 어떠냐? 이런 식이란 말이죠.

예를 들어 6회 말까지 삼성이 두산한테 6:1로 지고 있다. 예를 들면. 만약에 반대로 삼성이 6:1로 이겼다. 갑자기 설거지가 잘 되고 강의가 잘 되고 하는데 지고 있다…… 사람이 할 짓거리가 죄 아닌 짓이 없어요. 교사가 부부사이 좋으면 아침에 학생들이 보면 알아요. 싱글벙글하고 성적 내려가도 괜찮아, 이럴 때는 집안에 좋은 일 있는 모양이다. 야, 책상 똑바로 해, 하면 집안에 문제 있다는 걸 대번 알듯이 도대체 우리가 자기 기분을 자꾸 전파한다는 자체가 벌벌 떨고 있는 거예요. 사랑이 없으면 두려움에 떨고 있단 말이죠.

보이는 나에 대해서 더 심하게 이건 성결이 아니고 다만 성결을 추구하는 미완료가 돼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이 없어요. 왜. 어디까지나 미완료니까. 미완료는 사랑이 아니고 욕망이 돼요. 내가 되고 싶은 욕망, 이건 내 옛사람의 연장이에요. 지금 잘 됐지. 오년 뒤에 멋있게 되지, 십년 뒤에는 훌륭한 사람 되지, 이건 옛사람의 연속에 불과한 겁니다. 새사람으로 건너뛰지 않았어요. 새사람이 우리를 주관하게 되면 여호와의 성결은 이미 내 안에서 완료, 완성이 돼버립니다.

그리고 판결 흉패가 뭐냐 하면, 열두 지파의 이름이 있다고 했지요. 견대도 마찬가지고. 열두 지파의 이름은 시간의 요소를 받지 않습니다. 인격 자체에 장착이 돼버려요.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의 싸움은 열두 지파가 칼 들고 총 들고 나설 필요 없어요. 누가 나서면 되는 겁니까? 바로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에 경계선에 있는 사람이 나서면 되는 겁니다.

제사장이 장착되기 전까지 모세가 그 일을 했지요. 모세가 살아있을 때는 지팡이가 있기 때문에 모세만 있으면 이건 실패할 일이 없습니다. 모세가 있었는데 전쟁에서 진 적이 있습니까? 없지요. 그러면 모세의 권한을 여호수아가 받았지요. 여호수아가 살아있는 동안에 이스라엘이 진 적이 있습니까? 있기는 있지요. 아이성 칠 때 있지만 그건 뭐냐? 다시 회복됐잖아요. 사무엘이 있을 때 전쟁 어떻게 됐습니까? 거의 승리했지요. 사울 왕이 엉망이라도 사무엘이 나서니까 일이 되잖아요. 사무엘은 뭐냐? 연결돼있는 사람, 또는 경계선에 있는 사람이에요.

지금 울산 바닥에 의인 열 명 없으면 멸망한다면 만약에 의인 열 명 있다면 어떤 사람이겠어요? 착한 사람들이 아니에요. 경계선에 서 있는 사람들이에요. 보이스, 보내주신 십자가를 증거하는 사람 때문에 아직도 울산은 망하지 않는다고 저는 믿습니다. 새순 잘하세요, 새순. 여러분 책임이 큽니다. 복음을 전파하게 되면 울산은 견지됩니다. 그런데 이건 과한 아부가 되어 다른 사람이 화내지 싶지만 하나의 예를 들어서 하는 이야기니까. 만약에 새순교인들이 전부 잠잠하고 말을 안 했다. 그러면 울산 망할 수가 있어요. 등대교회 목사님 기분 나쁘겠지만 하여튼.

경계선에 있는 사람의 특징은 본인을 보지 마세요. 내가 어떤 행동을 하느냐, 앞으로 내가 착하게 살아야지. 일체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주님께서 애초부터 그걸 묻지 않아요. 우리가 제사장이 아니고 대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예수님이 여호와의 성결로 장착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를 대표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나는 죽고 내 안에 누가 살면 된다? 제사장이 여호와의 성결 띠 두르고, 흉패, 우림과 둠밈, 그게 바로 운명을 좌우하거든요. 그것이 우리에 내비게이션처럼 안에 장착돼있으면 주께서 날마다 우리로 하여금 구원받았음을 확인해줄 겁니다. 어떻게? 주님이 싸웠던 적들과 맞닥뜨리죠. 그 적들의 무기가 뭐냐? 똑바로 해. 우리는 뭡니까? 똑바로 안 해도 되는데. 이게 무기에요. 내가 왜 똑바로 해야 되는데? 똑바로 하라는 악마의 술책은 결국 벌벌 떨게 만들어서 예수님 십자가 증거하다가 그 다음부터 내가 똑바로 행동했다고 이걸 증거하게 만듦으로 복음의 광채를 가리는 것이 악마의 술책입니다. 거기에 말려들면 안 됩니다.

부부사이에 서로 예의를 지키고 똑바로 행동해야 부부가 화목 되지, 라고 하는데 그게 문제성 있어요. 서로의 욕망입니다. 우리 부부는 우리 가정은 괜찮다는 각자의 욕망을 마치 사랑이란 이름으로 위장한 거예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속인 겁니다. 어디까지 행복할 겁니까? 행복의 끝은 없어요. 어디까지 우리가 이 땅에서 평화롭겠습니까? 평화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깨질 위험도 많고, 많다는 말은 그만큼 그걸 예상할 때마다 두렵다는 거예요. 겁내지 말고 언약,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사실은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고 사는 그것이 복음을 가리는 악행일 수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만들어진 것으로 인하여 의미를 두지 말고 주께서 만들게 한 작업을 통해서 옛사람과 새사람이 어떻게 다른 가를 알려주시니 감사합니다. 주께서 친히 모든 말씀을 다 이뤘고 하나님의 의를 이뤘다는 사실을 늘 생각할 수 있는 우리의 생애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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