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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06 23:45:37 조회 : 998         
인간의 한계 160506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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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IP:119.♡.174.231) 16-05-10 10:32 
20160506a 울산강의-출애굽기 40장 : 인간의 한계
(강의:이근호 목사)


출애굽기 40장 1절부터 읽어볼게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정월 초일일에 성막 곧 회막을 세우고 또 증거궤를 들여 놓고 또 장으로 그 궤를 가리우고 또 상을 들여 놓고 그 위에 물품을 진설하고 등대를 들여 놓고 불을 켜고” 그리고 9절에 보면, “또 관유를 취하여 성막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에 발라 그것과 그 모든 기루를 거룩하게 하라 그것이 거룩하리라”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이것은 이해의 도를 넘었습니다. 왜냐하면 거룩이란 하늘에 속한 것인데 어떻게 땅의 것과 결합이 되느냐? 결합되는 방법이 뭐냐? 이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거룩을 이 세상에서 어떤 것으로 대신할 수 있느냐? 만약에 하나님께서 이 컵을 거룩하게 한다면 그 순간 거룩하게 되는데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아무리 요모조모 봐도 거룩하질 않아요. 전에 봤던 컵이기 때문에. 똑같은 컵이거든요.

그래서 저는 이것을 이렇게 적겠습니다. [거룩이 세속에 포섭되었다.] 포섭이 됐다는 말은 섞여버렸다. 여기 1절에 나오는 정월 초일일, 이건 새로운 시간이죠. 1월 1일. 그 다음에 회막 세웠는데 이 전체가 성막이고, 성막 안에 성소가 되고 지성소가 되는 겁니다. 성막은 원단이 세마포로 돼있어요.

세마포가 거룩합니까? 거룩하지 않지요. 옷이 뭘 거룩해요. 거룩이란 하늘에서 주어져야 되는데 옷감 하나가 땅에서 나오는 열매로 실을 만들었잖아요. 어느 부분부터 거룩이 돼요? 땅부터 거룩합니까? 땅도 거룩하지 않고 세속이고, 땅에서 세마포, 쉽게 말해서 천을 만드는 식물이 거룩하지 않지요. 그럼 실을 뽑아내는 아줌마의 손톱이 거룩합니까? 안 거룩하지요.

여러분들이 뜨개질하는 손이 거룩합니까? 만약에 스웨터가 거룩하다고 했을 때 우리는 추적에 들어가는 거예요. 스웨터를 짰던 실이 거룩할 것이고, 실이 거룩하게 되면, 거룩한 실과 거룩하지 않은 실이 외형적으로 차이가 분명히 나야 되잖아요. 그런데 구분될 수 없지요. 제자장의 발톱이 거룩해요? 목사의 가방이 거룩한가요? 목사의 가방은 명품인가요?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으로도 거룩을 대신할 수 없는 입장이 세상인 거예요. 세상은 그냥 세상입니다. 세속은 세속한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세속된 것을 거룩하다고 했으니까 이것은 필히 거룩한 것이 세속에 포섭이 되고 섞인 거예요.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냐? 재배치와 조립을 통해서 가능한 거예요. 여기에 상을 들여놓고 그 위에 물품을 진설하고 등대를 만들고, 이것은 원래 성막이 아니면 딴 자리에 있을 거예요. 그걸 이쪽으로 이동하니까 거룩한 공간에서 거룩한 테이블이 된 거예요.

보통 이렇습니다. 땅에 살 때는 더러운 겁니다. 그런데 죽어서 천국 가면 천사되잖아요. 천사 같이 되면 우리는 그걸 거룩이라 합니다. 천사는 날개도 있고 너무나 깔끔하고 깨끗하고 흠 없고 해 같이 빛나고 화려하고 누가 봐도 외형적으로 거룩한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천국 갔는데 거기에 거지가 있더라. 자, 묻습니다. 천국 간 거지는 거룩한 거지입니까, 더러운 거지입니까? 거룩한 거지지요. 그러면 그 사람이 거룩하냐, 안 하냐는 그 사람의 외형이 문제가 아니고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장소로 결정되는 거죠.

그러면 우리가 그건 상식으로 괜찮은 장소가 그 사람을 거룩하게 한다고 아는데 출애굽기 40장에 나오는 성막이 설치된 장소는 가봤자 흙, 자갈 있고 풀 나고 잡초 뽑아야 될 것이고 텐트 철거하면 다른 장소와 구별되지 않습니다. 똑같은 장소에요. 어딜 봐서 거룩이냐는 말이죠. 이리보아도 저리 보아도 거룩이 아닌 겁니다. 그런데 거룩이 아닌 것은 거룩 되게 했다는 말은 거룩이 변장해서 스며들었다는 것으로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증거궤가 아카시아 나무에 금박 입혔거든요. 그걸 분해해봅시다. 그럼 아카시아 나무는 전혀 거룩하지 않아요. 흔히 빠진 아카시아, 오월 되면 향기 날리는 아카시아, 그게 뭐 거룩합니까? 그냥 자생적으로 나오는 겁니다. 거기에 금박을 입혔거든요. 아카시아 나무와 금, 둘 따로 놓아도 거룩하지 않아요. 그럼 아카시아에 금박하면 거룩합니까? 마찬가지로 거룩하지 않습니다. 그걸 곽을 짜서 상자를 만들었어요. 거룩합니까? 전혀 거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걸 지성소에 갖다 놓으니까 하나님께서 거룩하다는 이야기한 거예요. 물론 여기 9절에 보면, 관유를 뿌리게 돼있는데 어쨌든 관유를 뿌려서 거룩한 상자가 된다 이 말이죠.

우리는 거룩이 보고 싶어서 거룩이 얼마나 다른지 보자, 해서 보게 되면, 저건 사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문젠데, 그러면 인간 손으로 만들었는데 그게 거룩이 됐다면 다음에 우리가 또 만들면 되겠네. 똑같은 상자를 만들면 거룩이 될까, 안 될까? 이런 생각도 들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거룩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하늘이 것이 이 땅에 세속이란 걸 통해서 들어오면 우리 능력으로 세속과 거룩을 구분할 수 있는 그러한 기능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거룩은 어디에도 없는 거예요. 착하게 살면 거룩이고, 나쁜 짓하면 살면 세속이라는 그런 구분 자체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냥 사세요. 그냥 평범하게 아카시아 나무처럼. 가끔 너무 허전하거든 손에 금가락지 껴보시든지.

세속 덩어리로 살아도 주께서 관여하시면 거룩 덩어리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거룩한 예수님이 거룩한 자태는 그렇게 이 땅에서 세속의 모습으로 자신의 거룩을 지탱했고 지켜냈고 그걸 유지했고 지속시켰습니다.

유대인들은 별난 메시아를 기다렸어요. 아주 놀라운 우리와 격이 다른 그런 분을 기다렸건만 정작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 그분은 세례 주는 세례요한도 못 알아봤어요. 성령이 오니까 그분이 그분인줄 알았지 너무나 평범해서 못 알아봤어요. 심지어 세례요한 옥에 갇혔을 때 이런 이야기했어요. “오실 분이 당신입니까?”

만약에 우리가 다 성도라고 한다면, 이 가운데 거룩한 성도가 여기 있어도 우리 능력으로 골라낼 수 없어요. “뭐 하십니까?” “장사합니다.” “에이, 세속이네.” 이렇게 판단할 수 없어요. “뭐 하십니까?” “목사입니다.” “아이고, 거룩하네.” 이런 판단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그래서 다시 새로운 문장을 적겠습니다. 세속의 창문이 거룩의 창문이 되는 겁니다. 거룩은 자신의 거룩을 드러내는데 세속적인 창문을 이용하죠. 창을 통해서 거룩이 뿜어져 나오는데 우리 보기에는 세속이 뿜어내는 모양새와 전혀 구별되지 않습니다. 왜 그래야 하느냐 하면, 거룩이 세속을 대신하기 때문에 그래요. 대신한다는 것은 똑같은 것으로 바꿔치기, 교체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몸은 분명히 거룩한 몸이죠. 그러나 외형적인 모습은 거룩합니까? 우리는 밥 먹을 때 예수님은 이슬 잡쉈습니까? 제자들이 침대에서 잘 때 공중부양하고 그랬습니까? 그냥 똑같아요. 로마 군병이 예수님의 뺨을 때릴 때 튕겨 나왔어요? 때려도 흉터도 없어요? 창으로 찔렀는데 피 안 났습니까? 피 났잖아요. 제자들이 봐도, 심지어 예수님의 어머니가 봐도, 누가 봐도 평범 그 자체, 너무나 평범해요. 거룩할 거리가 없어요.

성도가 되어 성경을 본다. 이게 거룩한 행동일까요, 아니면 아무 때나 일이겠습니까? 우리의 평가에 의하면 성경 그까짓 것 아무 때나 볼 수 있어요. 성경 보고 은혜 받는 것이 아무 때나 할 수 있어요, 안 그러면 뭔가 다른 요소가 있는 겁니까? 성경 보기만 보면 은혜 되는 겁니까? 대부분 잠만 오지요. 자다보면 침 흘려서 다 들러붙고.

좀 더 그 범위를 확대시켜봅시다. 아침에 숟가락 들고 밥을 먹는다. 이게 거룩입니까, 세속입니까? 이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인데 하나님은 이렇게 봅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보는 거예요. 하나님이 능력을 주고 은혜를 줘야 먹을 수 있는 거예요. 치매 걸리면 벌벌 떨면서 다 흘리고. 발걸음을 센다는 것, 머리카락이 자라는 걸 센다는 것, 헤아릴 수 있으니까 아무나 할 수 있네?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은혜 줘야 숫자가 다섯 개인지, 여섯 개인지 안다는 겁니다.

이걸 아는 게 거룩이에요. 거룩은 너무나 막 살고 보통으로 살고 평범하게 사는데 그걸 거룩으로 보는 안목이 거룩이고, 그걸 세속으로 보는 사람이 세속 그대로 머무는 겁니다. 오묘하지요. 어디 천사 열댓 마리 등장하고 하늘에서 기적이 일어나고, 다니엘서처럼 손목 잘린 손이 벽에 글자 쓰면 거룩이고, 중국에서 눈 덮인 곳을 찍다 보니까 예수님 형상 나오고, 소련에서 어떤 비행사가 보니까 구름 사이에 손가락이 나타나서 십계명을 지켜라, 이런 게 나와야 거룩이고, 아니면 시카고 어느 동방교회의 성화에서 기름이 떨어져서 만병통치가 되고, 그게 거룩일까요? 그게 바로 거룩을 위장한 악마의 작당이에요.

우리는 너무 거룩을 조작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것을 거룩의 가공이라 하는데 거룩을 자기가 임의대로 만들어내요. 거짓으로. 그러면 그 거룩의 출발점은 어디냐? 세속에서 출발된 거룩이기에 그 거룩도 세속과 같은 범위 안에 있어요. 그 거룩도 사실은 세속이에요. 인간은 내가 사는 지저분한 세상 말고 자기가 상상할 수 있는 상상의 극한, 너무나 깨끗하고 너무나 천사 같은 그걸 거룩이라고 연상하고 상상을 해대요.

그래서 자기가 상상한 대로 뭔가 깨끗한 게 오게 되면 바로 내가 기다렸던 거룩이야, 라고 하는데 꿈에 그런 경우가 많아요. 꿈속에 허연 영감 나오면 예수님인 줄 알고, 꿈속에 시커먼 것 나오면 마귀인 줄 알고. 지 혼자 놀라고 지 혼자 은혜 받고 난리 나는데 우리가 설정한 그런 배열 그러한 조건에 맞아 떨어지는 것은 거룩이 아닙니다. 진정한 거룩은 내가 아무리 사전에 기대해도 기대치를 넘어선 예상 밖의 거룩이 덮칠 때만 거룩이 되는데 어떤 경우가 그러냐 하면, 숟가락 들고 미역국 떠먹는 이것마저도 주의 은혜로 된다는 그 관계성을 가질 때 거룩이 되는 거예요.

해가 뜨는 것이 거룩일까요, 아닐까요? 성경에 보면 거룩으로 돼있어요. 달이 지는 것, 별이 반짝이는 것. 하나님께서 욥에는 하는 말이, 네가 별 만들 때 있었느냐고 묻지요. 우리가 지금 거룩을 보고 있어요. 그런데 거룩은 안 보고 인공적은 높은 건물, 아파트 그런 것만 본단 말이죠. 저게 얼마나 할까? 그리고 화려한 차, 벤츠 같은 차 그런 걸 보지요. 타고 싶다.

어떤 농부가 농사를 잘 되어서 창고 지었는데 흐뭇해서 하는 말이, 내 영혼아 걱정하지 말라 할 때 주께서 그날 밤에 그 영혼 데려가면 저것이 누구 것이 될 것이냐고 했지요. 그 이야기를 주님이 우리한테 한 게 뭡니까? 창고 뭔가 쌓이더라도 또는 은행통장 잔고가 넘치더라도 그걸 거룩으로 볼 수 있는, 그러니까 내 것이 아닌 주님의 것으로 볼 수 있는 안목으로 통장에 돈을 모아놓으란 말이죠. 그 영혼이 거룩한 영혼이기 때문에 오늘밤 데려가도 기분 좋지요. 감사하지요. 내일 데려가면 하루 더 살면 되고.

바로 그 마음가짐 자체가 바뀌어야 된다. 왜 바뀌어야 되느냐 하면, 주님께서 예상 밖의 모습으로 우리 인생 속에 스며들어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거룩이 세속이 못 하는 방식으로 이미 세속들이 있는 곳에 거룩이 들어왔단 말이죠. 누가 알아봤을까요?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어요. 왜 그렇게 했느냐?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방식을 하나님 쪽에서 채택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벌써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을 하나 알아챘어요. 하나님은 아무도 못 알아보는 방식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한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아무도 못 알아보는 방식으로 우리를 건지시고 구원하신다. 심지어 구원받는 자도 구원받는 방식에 대해서 미리 예측하거나 기대하거나 손댈 여지가 전혀 없는 겁니다. 그걸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이렇게 해요. 내가 나 된 것은, 그것까지만 하면 돼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다 알지만, 왜 내가 나 된 것은, 이라고 괄호를 넣느냐 하면,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는 사실을 내가 믿잖아요, 라는 세속적인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차라리 그럴 바에는 내가 나 된 것은, 그럼 하나님께서 그 뒤에 있는 말해 봐? 전 더 이야기 안 하렵니다. 내가 나 된 것으로 충분합니다. 내가 나 된 것이라는 이야기를 끄집어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내가 나 된 것은 결코 내가 아니란 것을 알기 때문에 시작을 내가 나 된 것이란 말을 주님 앞에서 끄집어낸 거예요.

처음부터 내가 나 된 것이 나라면 이걸 다시 새길 이유가 없잖아요. 봐. 내가 이만큼 잘 된 거야. 이러면 끝나는 문제지 새삼스럽게 내가 나 된 것은, 더 이상 말 안 하겠습니다.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러면 끝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내가 나 된 것은, 내가 예측한 대로 된 것이 아니고 주께서 계획한 대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거룩이 이 땅에 자리 잡기 위해서 허접스러운 우리의 육신을 사용했다는 고백입니다. 네가 나한테 거룩의 폼 잡고 오지 말고 거기 있어. 내가 갈게. 내가 네가 무슨 짓을 하던 네 자리를, 네가 더럽다는 걸 알지? 하지만 더럽다는 그것마저도 거룩한 것으로 사용할 테니 그 자리에 가만있어. 그렇게 되는 겁니다.

사도 바울 되기 전에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 잡아 죽이는 일을 했지요. 사도 바울이 회개하고 구원받았습니까, 반성하고 구원받았습니까, 자기 행동에 자책해서 구원받았습니까? 사울은 한참 예수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는 일을 해요. 결국 예수님을 핍박하는 일을 했잖아요. 그건 누가 봐도 세속적인 일이에요. 거룩을 핍박하니까. 그런데 그 일마저도 주께서 거룩한 일이 스며드는 환경으로 채택했단 말이죠. 주님이 그 일로 찾아온 거예요.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이, 내가 나 된 것은. 내가 옛날에 그런 짓한 것은, 같은 말이죠. 예수 핍박한 짓을 한 것도 주님께서 예상하지 못한 거룩을 세속에서 구현하기 위해서 죄인 중의 괴수인 나를 들어 사용했습니다.

더 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냥 하던 대로 사세요. 성경 안 본다고요? 보지 마세요. 그냥 하던 대로 하세요. 감당도 못할 걸 보다 침 흘리고 하지 마시고 하던 대로 하세요. 지금 내가 하는 것조차 나 된 것은 주의 은혜 속에 포함시켜버리세요. 라디오를 틀면 우리 젊을 때는 <별이 빛나는 밤에>, <꿈과 음악 사이에> 할 때 디제이가 음악 틀어주고 사연 읽고 하잖아요. 그런데 디제이 혼자 하는 게 아니고 뒤에 스텝들이 있지요. 그런데 그런 사람은 안 들려요. 별이 빛나는 밤에서 들리는 것은 이문세 소리밖에 안 들려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해도 주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스스로 뽑아내는 음성, 모양새만 드러내는 겁니다. 분명히 우리 보기에는 세속적인데 주님의 고유 권한으로 뽑아내는 겁니다. 주님께서 별이 빛나는 밤에, 듣고 계시는 거예요. 우리 보기에는 울산 꼬라지가 전혀 거룩한 게 없는데 주님께서는 자기 거룩을 모든 움직임 속에서 충분하게 실패 없이 합력하여 선을 이뤄서 뽑아내고 있는 중입니다.

이런 안목을 가져야 할 수 있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있어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이 오케이가 돼요. 영화 촬영할 때 감독이 마음에 들면 오케이 하잖아요. 그렇게 주께서 오케이 하는 거예요. 예수님 태어날 때 빈들이 있었고, 거기에 목자가 있었고, 천사가 와서 찬송가 불렀고 조명이 환하게 비췄고. 목자가 한 게 뭡니까? 그냥 새로운 환경 속에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오케이 싸인 낸 겁니다.

열왕기상 17장, 구약성경 545페이지에요. 길르앗 우거하는 중에 엘리야 그 당시 북쪽 왕 아합한테 쫓기는 그 대목입니다. 쫓기며 선지자 노릇하고 있는 데 참 세속되지요. 여기에 거룩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거룩의 오케이 싸인을 어떻게 내는지 보세요.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라히라 하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여기서 떠나 동으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그 시냇물을 마시가 내가 까마귀들을 명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저가 여호와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매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저기 시냇물을 마셨더니”

이 장면을 다른 사람이 봤다면 엘리야 신세가 속 편하게 호강한다고 봤겠습니까? 엘리야 입장에서 어제까지 까마귀가 떡을 물고 왔잖아요. 기적이라고 합시다. 기적의 문제는 개선의 여지가 없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한 번 오면 또 온다는 보장이 없는 게 기적이에요. 그러면 한 번 기적을 맛보고 그 다음에 또 온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기적이 열 번, 스무 번 와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불안도가 더 심하지요. 사람이 기적만 기다리는 가장 끝장난 삶의 환경을 상상해보세요. 비참합니다. 차라리 내가 나서고 말지. 까마귀 저게 뭘 안다고? 울산에 까마귀 몰려올 때 엘리야 같이 기다리는 사람 본 적 있습니까?

사람은 절대로 기적은 고마워하지만 두 번, 세 번 기적을 기다리기보다는 자신이 나서는 것이 속 편합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속 편한 것을 허락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엘리야는 북쪽 이스라엘이 완전히 가뭄이 든 그 이후 상황을 미리 앞당겨서 엘리야에게 임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뭄이 아직 완전하진 않지만 엘리야에게는 벌써 찾아왔어요. 그러면 가뭄에서 사람이 산다는 것은 전혀 못 산다는 것을 엘리야 선지자가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이게 거룩한 삶이에요.

그러면 반대말이 뭡니까? 자력으로 내가 날 살리는 것이 세속적인 거예요. 아까 그냥 사는 대로 살라고 했는데 그건 거룩 아니잖아요. 여러분이 귀 담아 들었으면 이런 의문이 생길 거예요. 생각해보세요. 매일 나 하는 대로 해도 엘리야에게 까마귀를 통해서 먹을 걸 준 것처럼 나에게 힘주신다고 생각하면 되잖아요. 내가 움직일 수 있다는 것도 절대로 내 힘대로 살 수 없는 환경이라는 사실을 미리 앞당겨서 대외적으로 증인으로 보여주는 삶을 주께서 거룩한 관계 속에서 실시하는 거예요. 그러면 울산의 엘리야가 여러분입니다. 오늘 제목을 울산의 엘리야들이라고 할까. 참 제목이 부끄럽다만 하여튼.
자력으로 내 힘으로 살지 않습니다. 내가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세속밖에 없기 때문에 거룩은 어림도 없지요. 아무리 천국이라 해도 그 천국마저 세속이고, 아무리 천사를 그려도 그 천사마저 세속이고, 내가 예상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세속입니다. 그런데 뭐가 거룩이냐? 내가 거룩을 상정해도 세속이 된다면 우리 힘으로 거룩을 상상해도 가짜가 돼요. 가뭄 된 거고 엉터리고.

그런데 엉터리인 그 세속이 주께서 거룩으로 바꿔준다면 우리는 예상 밖의 상황을 맞이한 게 됩니다. 우리는 분명히 세속인데 그걸 거룩으로 전환시키는 것, 그게 대신하심입니다. 그게 바로 주께서 너의 죄를 대신하심이거든요.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주께서 우리가 사는 현장 속에 뛰어든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아파트에 살면 아파트에 뛰어들고 전세방에 살면 전세방에 뛰어들고, 월세 살면 월세에 뛰어들고 오두막에 살면 오두막집에 뛰어들어요. 주여,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부엌도 없고 너무 허름한데 어찌 오신다 하십니까? 걱정하지 마. 네가 보기엔 세속이지만 내가 보기엔 거룩이야. 그냥 뛰어드는 거예요. 그게 바로 언약궤고 성막이고 성소고 그런 거란 거죠. 40장 이야기가.

그런데 제가 지금까지 이야기했지만 어떻게 그렇게 되는가? 메커니즘, 어떻게 세속이 거룩으로 바꿔지는지 이야기 안 하고 미루고 있는 중이에요. 우리가 세속으로 보는 그것이 주님 보시기에 거룩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세속 따로 있고, 우리가 생각하는 거룩을 주께선 거룩으로 간주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기도할 때는 거룩이고 기도 안 하면 세속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말입니다. 헌금하면 착한 일이고 헌금 안 하면 나쁜 일로 생각하지 마시라고요. 우리가 교회 오면 성령 받고 교회 안 오면 성령 못 받는 걸로 생각하면 안 되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또 말씀드릴게요. 대체했기 때문에. 표정들 보니까 이해 안 되는 얼굴을 하고 있는데. 지금 인간들이 세속적인 더러운 냄새를 풍기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선 거룩을 따로 만든 게 아니고 땅의 세속적인 것이 거룩의 재료가 되는 거예요. 아까 법궤 만들 때 흔히 있는 아카시아 나무고, 금이야 땅 파면 나오는 것이고. 그런데 아카시아 나무와 금으로 언약궤를 만드니까 하나님이 그걸 거룩한 장소에서 거룩 되게 했단 말이죠. 그러면 거룩은 따로 없어요. 세속을 조립하고 재배치해서 거룩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방법이 대신하심이에요. 다른 말로 대체, 바꿔치기하는 것. 대체가 어렵습니까? 바꾸는 것, 바꾸는 거예요. 너는 내 것이라고 바꾸는 게 아니고 내가 네 것이 되어 네 것 속에서 거룩을 유발시키면 주님이 세속에 들어와서, 엘리야에게 까마귀를 보내서, 같은 말이에요. 예수님을 핍박하는 사울에게 주님이 찾아오셔서, 같은 말이에요. 들어오셔서 세속 가지고 바꿔치기하는 거예요. 세속에다 거룩을 담으면 이 전체가 거룩이 되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하시는가?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시면서 마지막에 어딜 가시느냐 하면, 십자가 지고 가셨단 말이죠. 십자가는 죄인으로 죽어서 아버지로부터 부활의 영으로 말미암아 의인되는 그 내용이 십자가를 통해서 주께서 그렇게 마무리 지은 거예요. 그 마무리 되는 그 일을 앞당겨서 구약에 집어넣은 겁니다. 오늘날은 이미 완성된 것을 우리에게 집어넣고. 그러면 더러운 우리 속에서 교환, 교체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더러운 것도 그리스도가 손대면 거룩이 된다는 작업을 하는 거예요. 그 작업을 구약 이스라엘에게 앞당겨서 오늘 출애굽기 40장에서 성소 만들기, 성막 만들기를 실시한 겁니다. 이해하시겠어요?

그런데 우리는, “아이고, 꼬라지하고는? 이것도 신앙생활이라고 하는지. 성경 한 장도 안 보고. 내가 한가하면 기도 좀 해야지.” 이렇게 되면 우리가 평소에는 더러운 일이 되고 조용하게 말씀 듣고 하면 그건 거룩하다고 구분 짓는데 그렇게 되면 뭐가 빠지느냐 하면, 대체함이 빠져요. 이건 상상한 가운데 가짜 예수지 진짜 예수님이 아닙니다.

만약에 우리가 성의를 표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시간 내서 성경 보고 하면 아무리 성경 봐도 결국 마지막에 남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 저도 좀 했습니다. 나 같이 나름대로 생각해준 사람 누가 있습니까? 저니까 주님 생각해서 성경 보고 기도하고 헌금하지요. 다른 사람은 없습니다. 제가 한 것 알아주세요.” 그게 바리새인이잖아요. 뭐가 빠졌어요? 대체함이 빠진 거예요.

그럼 여러분에게 문제 하나 나갑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주지요. 그런데 그걸 성경에 보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냐 하면 우리도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주자고 하잖아요. 뭐가 빠졌습니까? 대체함이 빠졌지요. 왜? 우리가 할 수 있는 이웃사랑, 내가 예수님이 하신 말을 통해서 감 잡았어. 이웃사랑이란 내가 이웃을 돌봐주는 것이 사랑이구나. 착한 사마이라 사람처럼 우리가 착하게 자기 여비까지 바쳐서 살리는 게 이웃사랑이구나. 감 잡았어. 이것 내가 할 수 있다고 독자적으로 어떤 행동으로 나서는 순간 대신하심, 대체, 십자가 복음 다 날아가 버립니다.

그게 사랑일까요, 자기 의로움일까요? 그게 자기 의로움이고 세속의 극단, 극치입니다. 나 잘났다는 거예요. 그래서 복음서에 보면, 하나님이 널 사랑하듯 서로 사랑하라, 라고 할 때 그 사마리아 사람과 연결시켜서 우리도 낯짝이 있지 사랑을 그만큼 받았으면 보답을 해야지. 그게 인간된 도리지. 그래야 성도된 도리 맞지. 은혜 받았으니까 충성해야지.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그럼 은혜 적게 받은 사람은 적게 충성하고, 많이 받은 사람이 많이 충성해야 됩니까? 도대체 얼마나 충성해야 십자가 은혜와 비슷하게 할 수 있겠어요? 뭔가 보답한다는 것보다 십자가를 모독하는 것은 없어요.

십자가는 보답하라고 우리에게 나타난 게 아니고 너는 뭘 해도 세속이었다(과거형). 앞으로 뭘 해도 너는 세속이었다, 과거완료에 포함되는 거예요. 앞으로 네가 미래에 뭘 해도 그게 세속이었다는 과거완료에 포함돼있는 미래를 펼치게 돼있는 거예요. 이제 예수 믿고 정신 바짝 차리고 착한 일 해야지. 그게 바로 죄의 또 다른 모습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앞으로 행할 것은 죄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십자가 앞에서 미리 챙기면 그 죄마저도 주께서 바꿔치기한 이 사랑을 어찌 우리가 잊을 수 있겠습니까? 바로 그 사랑을 행동을 통해서 보여주게 되면 그게 바로 이웃사랑이 되는 거예요.

선한 사마리아인에 있어서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주고 착한 일을 했다는 그게 이웃사랑이라고 할 때 그 이웃사랑의 진짜 의미는 낯설다는 겁니다. 예상 밖이라는 거지요. 왜냐하면 강도 만난 사람 곁을 제사장이 지나갔고 그 다음에 레위 사람이 지나갔지요. 물론 강도는 뺑소니쳤고. 이 말은 집사가 오고 장로가 와도 그냥 지나갈 수밖에 없는 사태를 주께서는 예를 든 거예요. 그러면 강도 만난 사람을 다른 말로 하면, 그 현장에 예수님의 죽으심, 십자가 의가 살아나는 거예요. 그러면 어떤 인간이 열두 제자가 지나가도 십자가를 믿겠어요?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안 믿겠지요. 믿을 수 없겠지요.

강도 만난 사람과 선한 사마리아인의 조합은 어느 누구도 이해 못해요. 다른 말로 해서 주님이 제시한 사랑은 낯선 거예요. 우리가 예상한 사랑을 전부 비껴가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 힘으로 주의 사랑을 실천할 수 없다는 말을 제가 말씀드리는 겁니다. 사랑이라고 해봤자 그건 또 죄의 한 면에 불과해요. 우리는 사랑할 수 있는 자가 아니에요. 세속입니다. 철저한 세속이에요.

그런데 세속을 바꿔치기한 거예요. 어떤 경우에? 우리가 좀 가능성을 보일 때, 우리가 착할만한 기미가 보일 때? 아니요. 전적으로 세속 되었을 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우리가 전적으로 죄인 되었을 때 주께서 우리 대신 죽을 때 하나님이 자기 사랑을 확정하셨느니라. 이게 얼마나 놀라운 소식입니까? 이게 복음이에요. 일말의 가치도 없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 복음을 안 듣고 안 보고 그냥 가버려요. 왜? 자기가 낯설지 않은 예상한 것을 획득하기 위해서 쉽게 말해서 내가 피해 본 인생을 빨리 만회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고상한 일을 동원시켜서 내가 거룩한 일을 함으로써 그 반대급부로 내가 기대한 괜찮은 것을 얻음으로 말미암아 계속해서 내 행동의 가치를 유지하려고 애를 쓰게 마련이에요. 내가 기도해서 이만큼 우리 가정을 일으켰잖아요. 그때 얼마나 기도를 열심히 했는데. 자기 자신이 뿌듯하지요. 여기에 무슨 대신하심이 있습니까? 잘났는데.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이 옥에 갇힌 것을 들으시고, 너는 광야에 왜 나갔느냐 묻는 대목이 나와요. 하는 말씀이,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느냐?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누가복음 7장 24절)

여러분이 현재 이 세상, 울산바닥에 살면서 무엇을 얻으려고 교회에 나오셨습니까? 내 인생 만회해보려고, 팔자 한 번 고쳐보려고요? 무엇을 보려고 나왔습니까? 주께서 하신 말씀이, 화려하게 사치하게 고급 옷 입은 그런 사람은 여기 광야에는 없다는 거예요. 그럼 광야는 뭐냐? 너희들이 기대한 것과 어긋나는 분이 너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너희들이 예상하고 고대하고 희망하는 것과는 배치되는 분이 너희를 기다릴 것이다. 그게 누구냐? 세례요한이다. 그리고 하신 말씀이 그 선지자보다 더 나은 분이 누구냐? 바로 나니라.

그럼 선지자도 예상 못한다면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이 자리에 함께 있어도 더욱 더 우리의 예상치를 벗어나신 분이에요. 왜 그렇게 하십니까? 몽땅 바꿔치기하기 위해서. 네가 예상한 것에 공통점이 없어요. 이럴 줄 알았어? 이런 것 없어요. 그냥 살아. 깜짝 놀랄 정도로 완전히 바꿔치기해서 이건 내가 생각한 내 인생 아닌데, 그렇게 교체될 때 그게 바로 거룩한 성도입니다.


10분 쉽시다.
 한윤범(IP:119.♡.174.231) 16-05-10 10:33 
20160506b 울산강의-출애굽기 40장 : 인간의 한계
(강의:이근호 목사)


첫 번째 시간에 세속을 바꿔치기한다고 했지요. 가짜를 진짜로 바꿔치기해서 구원하는 겁니다. 세속, 더러운 것을 잡으려고 열심히 애쓰는 것이 아니고 거룩한 분이 오셔서 소매치기하듯이 낚아채서 바꿔치기하는 거예요. 바꿔치기해서 가져가면 거룩이 되는 겁니다. 순식간이죠. 이 말은 장소가 문제에요. 백화점에서 바꿔치기하면 천당 못 갑니다. 어떤 특정 장소에서 바꿔치기가 일어나야 돼요. 그게 신약에서는 십자가 위, 십자가 안인데 구약에서는 성전에서 바꿔치기가 돼야 됩니다. 그걸 제가 그림으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이 있는데 한 가운데가 성막이 있는 곳이에요. 주변에는 수많은 텐트들이 있어요. 난민수용소에요. 전쟁하면서 금방 보따리 싸서 떠나야 되니까. 성막에 있는 기구들은 인간이 쓰는 소품들이잖아요. 소품들을 재배치하고 조립하니까 거룩이 된 겁니다. 놋쇠 덩어리, 물두멍, 세마포 원단, 수달의 가죽, 전부 세상에 있는 거잖아요. 하늘에 있는 걸 가져온 게 아닙니다. 세속적인 것을 거룩으로 바꾸는 거예요. 두 번째 시간에는 어떤 과정을 통해서 바꿔지는지 그걸 설명해드릴 겁니다.

첫째는 장소가 이곳에 와야 돼요. 성막이 빠지면 아무리 언약궤 만들어도 말짱 소용없는 겁니다. 사물은 거룩이 안 돼요. 사물에 사건이 있어야 돼요. 사건을 머금은 사물이 거룩이 돼요. 예를 들어서 마당에 있는 놋 제단은 놋 덩어리에요. 여기서 제물 바치는 사건이 동반해야 거룩한 놋 제단이 됩니다.

인간에 있는 세포는 60개 조입니다. 머리카락, 귀, 코 있습니다. 거룩합니까?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결국 세포가 녹아서 죽게 돼있습니다. 십자가 사건이 들이닥치면 그 사람은 죽어도 천군천사와 같은 천국 백성이 되는 겁니다. 사건을 머금은 인간이 돼요. 그걸 성도, 거룩한 사람, 천국 사람이라고 한다고. 이걸 지금 출애굽기 40장에서 미리 성전을 통해서 이 모양새를 예고편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설명하면 여러분이 이해하시겠는데 문제가 뭐냐 하면, 물체와 사건을 결합시키는 방법이 뭐냐? 이것 제가 이야기 안 했습니다. 그냥 물체에 사건이 포함되면 거룩한 물체가 되어 거룩이 된다고 했지만 결합하는 방식은 아직 말씀 안 드렸지요. 그 방식을 위해서 40장 11절이 준비돼있습니다.

“너는 또 물두멍과 그 받침에 발라 거룩하게 하고 너는 또 아론과 그 아들들을 회막문으로 데려다가 물로 씻기고 아론에게 거룩한 옷을 입히고 그에게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하여 그로 내게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게 하라 너는 또 그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들에게 겉옷을 입히고 그 아비에게 기름을 부음같이 그들에게도 부어서 그들로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 그들이 기름부음을 받았은즉 대대로 영영히 제사장이 되리라 하시매 모세가 그같이 행하되 곧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행하였더라”

모세를 하나님께서 성막을 만들라고 텐트 친 중간에 따로 만들어서 성소와 지성소를 만들고, 거룩한 장소를 따로 만들라고 한 것은 이 장소가 있음으로 자동적으로 거룩하게 되는 건 아니고, 이 장소에서 어떤 특별한 사람이 여기서 일을 해야 돼요. 노동. 특별한 사람을 아까 읽은 본문에선 제사장, 네 자로 대제사장이 특수한 일을 해요. 우리는 특별한 일을 거룩한 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특별한 일이 뭐냐? ①기도하는 것이다. ②헌금하는 것이다. ③예배 참석하는 것이다. ④제사 드리는 것이다. ⑤아무것도 아니다. 5번이 정답이죠.

어떤 일을 해도 거룩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어떤 일을 해도 거룩하게 되질 않아요. 이게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에요. 제사장이 제사 드렸습니다. 거룩한 일입니까? 아닙니다. 제사장이 제사 드린다고 이 사람들이 구원받는 건 아니에요. 제사장이 제사 드리는 것은 바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극단의 일, 마지막 일을 보여주는 겁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경계선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것까지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줘요. 그 일에서 거룩으로 넘어가는 그것은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서 넘어갈 수 없습니다. 여기 남쪽에 있는 사람이 어디까지 갑니까? 임진강까지 가지요. 임진강 넘어서 북한 가는 것은 이건 죽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지가 풍선도 아니고 사람인 이상 체포되어 죽어요.

그처럼 어디까지가 속된 세계인지 마지막 경계선을 보여주고자 하나님께서 제사장 세워서 제사 지내게 하는 겁니다. 그만한 취지가 있어요. 해봐라. 그게 다가 아니거든, 이런 취지가 있는 겁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라 하니까 자기 재산을 교회에 헌납합니다. 그러면 그게 헌금일까요? 헌금 아니에요. 그냥 자기 재산을 교회에 바친 것이지 하나님은 안 받습니다. 교회는 날름 받지요. 괜히 헛수고한 것이지. 안 받습니다.

하나님께 응답 받는 기도를 인간이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기도하고 헌금하고 전도, 봉사해도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일이 아니에요. 그런데 왜 기도하라고 하느냐? 그게 극한이에요. 인간이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란 말이죠. 마태복음 5장을 보겠습니다. 29절에 보면,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오른 눈이 범죄 하거든 아예 도려내라. 뽑아내서 나머지 몸이 지옥에 끌려가지 않는 것이 타산에 맞는 일이다. 네가 만약에 오른 눈을 그냥 갖고 있으면 나머지 몸도 지옥 가는데 지옥 가면 끝장나는 거야. 지옥 불에 들어가면 더 이상 못 나와. 지옥 가는 나쁜 짓을 오른 눈이 하거든 빼버려라. 만일 오른 손이 지옥 가게 만들거든 잘라버려라. 도끼로 찍어버려서 나머지 몸이 구원받는 것이 계산상으로 낫지 않느냐는 말씀이 나와요.

그래서 교회사에 실제로 눈 빼고 찍은 사람이 있습니다. 바보입니다. 이게 그런 뜻이 아니거든요. 해보란 뜻이에요. 해봐라, 되는지. 오른 눈 빼면 왼 눈은 나쁜 짓 안 할까요? 똑같은 눈인데. 오른 손 잘랐다고 왼 손이 멀쩡할까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이야기가 뭔 뜻인지 알아요? 네가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내가 준 문제를 풀 수 없다. 네가 생각한 문제, 나는 이제 기도를 하루에 두 번 해야지. 네가 낸 문제는 100점 맞을지 모르겠지만 내가 낸 문제 앞에서는 0점이 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니들이 게 맛을 알아, 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알아? 알기는 뭘 알아.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자꾸 착하게 살자, 바르게 살자, 거룩하게 살자, 이런 것이 튀어나오는 거예요. 정말 하나님 만나서 하나님의 숙제 받으면, 이건 해도 너무합니다. 이렇게 해서는 천국 못 갑니다. 너무합니다. 이럴 수는 없나이다. 통촉하옵소서. 정말 이건 내가 못 지킵니다. 여러분이 바르게 살면 살수록 점점 더 바르게 못 산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의 끝은 없습니다. 아무리 애써도 안 돼요. 아무리 해도 따라 잡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앞서 가는 달그림자를 따라 잡은 적이 있던가요? 달이 잡혀줘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살게 한 이유는, 우리의 극한, 우리의 끝은 기껏 해야 아무리 해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 따라서 말씀을 못 지키면 주어진 것은 지옥과 심판과 저주가 합당합니다. 다른 군소리 하지 마셔야 돼요. 그게 우리한테 가장 합당한 거예요.

다시 출애굽기로 가봅시다. 거기에 제사장이 나옵니다. 이제부터 좀 난해해집니다. 여기 제사장이 제사를 드립니다.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제사장이 제사 드려봐야 하나님께 합당치 않아요. 신약 히브리서 7장에 나옵니다. 제사 드려야 그게 죄였다. 우리들이 구원받는 것은 제사장이 양 잡고, 소 잡아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어떻게 구원받는다고 했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이렇게 돼있어요. 나의 거룩과 주님의 거룩이 같은 입장에서 섞이겠어요? 주님만 거룩하고 우리는 죄가 될 때 그 거룩이 빛이 나는 거예요. 온전하게.

엄마가 잡채 만들 때 처음 재료준비부터 엄마가 다 했으면 그 잡채는 온전히 엄마의 영광만 드러낸단 말이죠. 그런데 엄마가 다 만들어놓은 잡채를 딸이 와서 그릇에 담는다고 해서, 잡채 맛있는데 누가 했지요? 제가 다는 아니지만 좀 거들었어요. 그러면 싸가지 없는 거죠. 그러면 안 되는 겁니다. 그릇에 좀 담았다고 한 게 아니에요. 100% 엄마만 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우리는 옆에서 가짜 잡채를 열심히 만들고 있는 겁니다. 백날 해봐야 쓰레기통에 직행할 지옥에 처넣어야 될 그 잡채를 열심히 만들고 있습니다. 왜? 지옥에 처넣으라고 니 인생 니가 만들라고 한 겁니다. 백날 열심히 해봐야 주께서 안 받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인생을 살면서 수시로 뭘 느끼느냐 하면, 내가 한다고 했지만 그 결과의 몫은 주님이 개입한 결과로 오늘도 살아왔다는 것을 계속해서 교환, 바꿔치기가 우리 안에서 일어납니다. 열심히 했는데 사실은 엉망이고 하지만 엉망인 것을 주께서 오늘 죽어도 천국 갈 수 있는 것은 주님의 솜씨라고 믿어지도록 조치하는 거예요.

제사 드렸는데 이건 엉망이다. 엉망인 제사 속에 거룩이 담기게 돼있습니다. 왱? 엉망이기 때문에. 오늘 강의제목을 ‘엉망’이라고 할까. 그러면 엉망에서 거룩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없어요. 엉망은 엉망이 잘난 엉망, 예쁘장한 엉망, 참한 엉망, 이런 것 전혀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이 엉망에 포크레인이 옵니다. 달랑 들고 가요. 엉망이 쇳덩어리라면 여기에 강한 자석이 붙습니다. 자석이 오면 밑에 쇠가 달라붙겠지요. 울산에 컨테이너 하역할 때 골리앗 크레인에서 자석이 내려와서 옮기잖아요. 들어 올리잖아요. 더러운 엉망, 죄라 합시다. 이동시켜요. 어디로 가느냐 하면, 신약의 예수님이라는 대제사장이 준비돼있습니다. 이 엉망이 대제사장한테 와요. 와서 여기에 부려놓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왔다 엉망, 죄를 주께서는 수용해요. 예수님 내부에서 이 죄를 의로 바꿉니다. 다시 처음의 자리로 가요. 이게 거룩이 됩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통로가 돼요. 뭔가 바꿔치기한 결과물이 통용되는 통로 역할을 제사장이 하고 있는 겁니다. 그걸 두 자로 언약, 약속이라 합니다. 약속은 파이프라인으로 보면 돼요. 거기서 주께서 하신 일이 이동한다고 보시면 정확합니다.

아브라함이 자기아들 이삭을 산 제물로 바쳤습니다. 바쳐서 아브라함이 구원받습니까? 아니죠. 자기아들을 바쳤던, 딸을 바쳤던 그건 엉망이에요. 죄에요. 그건 거룩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 이야기는 출애굽기 40장이잖아요. 아브라함 이야기는 창세기 22장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22장에 골리앗 크레인이 가 있어요. 그 엉망을 달랑 들어 올려서 십자로 가져와요. 다시 그 장소에 부려놓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이것이 시간이 흐른다고 하지만 언약 안에는 시간이 무시간이에요. 시간이 없는 걸 묵시세계라 합니다. 묵시 안에서는 원인과 결과가 같이 있어요. 그래서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이런 소리합니다. 내가 예수님 보기를 원했는데 내가 보고 기뻐했다. 미쳤어. 이상한 소리하고 있어. 아까 언약이 파이프라 했지요. 파이프 안에는 언약의 힘이 흐르고 있습니다.

또 하나 예를 들면 예수님이 변화산에 올라갈 때 선지자 두 명이 등장했지요. 한 사람은 모세고 또 한 사람은 아까 이야기한 엘리야죠. 그릿 시냇가에 있을 때 까마귀가 매일 물과 고기와 떡을 줬지요. 참 비참하게 살았어요. 쉽게 말하면 집에 가만있는데 짜장면 배달해준 것과 똑같아요. 내 힘으로 못 살게 해요. 이미 가뭄이 들었을 때는 먹을 게 없기 때문에 주시는 은혜로만 살아야지 자기는 못 산다는 그 상황을 엘리야가 미리 앞당겨서 체험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제사장은 뭘 체험하느냐?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자기 노력으로 자기 의로움으로 절대로 천국 못 간다는 것을 지금 체험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울산에 사는 우리가 해야 될 일은 결론이 간단히 났지요. 아무리 해도 구원되지 못할 일을 평생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다 지옥 가면 어떻게 하느냐? 지옥 가도 할 수 없지요. 그런데 미리 언약의 빈 통이 와서 나를 자석으로 달랑 들어 올린다면 그건 성령 받은 거예요. 성령 받게 되면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고 뭘 하든 간에 그건 내 구원과는 상관없고 내 죄와 관련돼있고 이 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일의 능력만 그 효력으로만 내가 의인이 된다는 것을 지금 죽기 전에 미리 늘 고백하게 돼있어요. 그게 바로 언약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 낮 설교에서 이런 이야기했지요. 일상 속에서 복음을 찾아내라. 평소 십자가 복음을 늘 찾아내며 사시면 된다는. 그럼 어떻게 되느냐? 평생 살면서 내가 뭘 해도 하나님 앞에 의로움이 되지 못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 점을 설명해드릴게요. 내가 뭘 해도 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 뭔 뜻이냐 하면, 뭘 해도 복을 받을 이유는 아니라는 것. 내가 아무리 착한 일해도 성실해도 이걸 근거로 내가 원하는 복은 찾아오지 않는다는 그런 뜻이에요.

같은 뜻인데 어떤 나쁜 짓을 해도 저주받거나 지옥 가지 않는다는 같은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어떤 실수를 하고 과속을 하고 딱지 끊고 어떤 나쁜 짓을 해도 그 행동으로 내가 너 저주받아, 너 지옥 가, 벌 받아, 이번 주에 사업 망했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주 안에서 정죄함이 없나니. 주 안에서는 저주가 없습니다. 오직 축복밖에 없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게 은혜고 축복입니다.

우리가 이런 생각을 가질 때 언약을 주목하는 거예요. 예수님과 우리 관계에 주목해야 돼요. 내 행동에 주목하지 마시고. 주님과 우리 사이에 통하는 관계에, 파이프에 주목해야 된다고. 그 파이프를 주님께서 설치했지요. 주님 쪽에서 설치했기에 낯설다는 것.

낯설다는 것은 매일 복음을 들어도 들을 때마다 복음이 낯설어져야 돼요. 만약에 복음이 듣고 아는 것이라면 이건 벌써 사적이 내 것이 되고 말았어요. 내 것이 되면 개선의 여지가 없습니다. 잘났는데 왜 개선하지요? 내가 복음 알고 고칠 게 없는데 잘난 폼 계속 밀어붙이게 돼있어요. 인간은. 지난날에 복음 알았다. 이걸 꼭 쥐어야지. 그래야 오늘밤에 죽어도 천당 갈 수 있어. 이건 개선의 여지가 없습니다.

소유가 되면 소유된 나를 또 소유하게 돼있어요. 그럼 나는 우상이 되고 잘난 맛에 살아가게 돼요. 주님한테 주목이 아니고 잘난 나, 훌륭한 나에 자꾸 집중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아까워지고 그걸 굉장히 귀하게 여기면서 예수님은 아무 의미 없이 돼요. 예수님은 그냥 시다바리 되는 겁니다. 잘난 나를 더 잘나게 해주기 위해서 잠깐 봉사한 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매일같이 새롭게 들리려면 내가 어제 알던 내가 아니라 매일같이 다른 나라는 것을 직감해야 되고 내가 느껴야 돼요. 매일같이 다른 나에요. 그렇다고 매일같이 미장원 가지 말고. 머리 바꿨다고 새 사람 되는 건 아니고. 매일 달라요. 내가 아는 내가 아니에요. 나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하고 새로운 낯선 면이 나에게 들이닥치게 되는 겁니다. 여기까지 잘 알았다 치고 언약에 대해서 약간 더 깊이 들어가겠습니다.

언약에는 기존의 시간 없습니다. 기존의 공간도 없어요. 예배당 앞자리에 은혜 받는다. 뒷자리도 은혜 오지 성령이 자리보고 찾아오고 이런 것 없습니다. 언약에 시간과 공간이 없다는 말은, 인간은 반드시 시간과 공간에 의미를 줘요. 우리는 이걸 좋게 이야기해서 추억이라 합니다. 오랜만에 흘러간 팝송, , 옛날 대학교 2학년 때가 생각나요. 그만큼 우리는 시간과 공간에 따라서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갑니다.

성재희란 가수가 부른 <보슬비 오는 거리>란 노래 기억납니까? 이게 1965년도에 나온 노래거든요. 약간 허스키인데 문주란이 그 선배 가수를 모델로 삼아서 자신만만하게 허스키로 가수 생활했다는. 그 노래들을 때마다 제가 잊을 수 없어요. 그때 내 인생에 큰 사건이 있었거든요. 그렇게 결부가 된다고. 우리 아들 처음 낳을 때, 이렇게 하잖아요. 이게 추억이 되고 시간과 공간에 의미를 주게 됩니다. 이것을 환상이라고 해요. 다른 말로 하면, 이게 허구입니다.

이걸 사람들은 허구가 아니고 이게 현실 자체로 봐요. 그렇게 함으로써 나 빼놓고는 의미 없다가 돼요. 모든 의미는 내가 현실을 가공하고 조작해내는 겁니다. 나는 매일같이 현실이란 이름의 환상들을 만들어내는 데 그걸 환상으로 보지 않고 현실이라고 보는 이유는, 내가 나를 잊지 않기 위해서 나는 어떤 경우라도 나만을 쥐기 위해서 우리는 일방적이고 무모하고 터무니없이 세상 모든 것이 자기중심으로 돌아가야 된다고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겁니다. 안 달라져요. 이건 어제도 안 달라지고 오늘도 안 달라지고 내일 되도 안 달라질 거예요.

어린이날 가야산에 놀러 가는데 왜 비가 오느냐? 비가 오면 왜 안 되는데. 기분 되게 나쁜 거예요. 그만큼 본인이 환상이에요. 비 오는 것은 현실인데 그 현실을 부정하는 거예요. 제발 내일 놀러 갈 때 비 오지 않게 하옵소서. 얼마나 억지를 부리는지 몰라요. 우리는 억지를 부려서라도 내 의미를 놓치기 싫어합니다. 그러니까 나는 달라지지 않아요.

그런데 차라리 반대로 해봅시다. 시간과 공간에 의미를 두지 말고 예수님께서 세속을 거룩으로 만드는 작업이 일어난다면 그 거룩 됨을 찾아보는 거예요. 어떻게 찾느냐 하면, 간단하게 해가 떴네. 뭐가 빠졌어요? 내가 보기에, 이게 빠져있는 거예요. 해가 떴다면 내가 살아있네. 해를 주님이 뜨게 했다면 나도 해와 같은 신세 아닙니까. 어, 내가 오늘도 눈 떴네. 해, 너도 똑같네. 늘 그렇게 살아가는 거예요. 이게 현실이고 실제에요. 그 외에는 다 환상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 글쎄요? 없지요. 없습니다. 날마다 자기를 자기중심을 지워버리고 예수님께서 세상을 움직인다는 걸 알고 나는 그 결과로 오늘도 살아간다는 그런 관계를 한다는 것은 참, 사람의 힘으로선 있을 수 없는 능력 밖의 일입니다. 능력 밖의 일은 낯설어요. 그걸 새롭게 느끼는 겁니다. 분명히 나는 내 중심이어야 하는데 짧은 순간에 내 인생은 내가 만드는 게 아니라는 것을 그 틈새에서 떠오를 때 이것은 환상 속에서 진짜 현실이 받치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는 겁니다.

젊은 엄마가 아기를 보면서 귀찮거나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기를 볼 때마다 “아이고 어디서 이런 게 다 생겼어?” 하고 자기의 피곤함도 잠 못 자는 것도 기저귀 갈 때 냄새도 아무 문제가 안 되고 이게 코앞에 있다는 것을 만끽합니다. 그 순간 뭘 잊어버리느냐 하면 내 중심을 잊어버려요. 니가 있음에 내가 행복하다. 내가 있으니까 아기야 행복하지, 이게 아니고
그냥 네가 있음에 네가 어떤 것을 나한테 강요하고 너로 인하여 내가 힘들더라도 내가 널 지켜줄게.

누구 중심이에요? 분명히 아기도 있고 나도 있지만 중심은 아기 중심이지 내 중심은 아닌 거예요. 나는 너 때문에 산다고 하잖아요. “아기 본다고 힘들지 않습니까?” “힘 안 들어요. 잠도 못 자고? 잠 못 자도 괜찮아요. 얼마나 예쁜데.” 물론 그때뿐이고 크면 애 먹이겠지만. 그때만이라도 나의 고집과 나의 주장과 나의 권리를 박탈해도 상관없는 것, 이게 현실입니다. 이게 주께서 죄인을 의인으로 만들 때 나타나는 체험이에요.

나는 어차피 죄인이잖아요. 이 죄인을 의인으로 만들어주기 위해서 주님이 오셨다면 저는 어떻게 되도 상관없어요. 장사 시작했는데 장사 안 되도 관계없고, 나이 오십, 육십에 노처녀라도 상관없어요. 암에 걸려도 상관없어요. 의사 선생이 육 개월밖에 못 산다고, 무슨 소리해도 주님 있음에 어떤 일이라도 관계없는 것, 이게 환상이 아닌 실제입니다. 주님으로 인하여 이 세상이 돌아간다는 것, 내가 암에 걸리든, 내가 어려움에 처할지라도 주님께서 의도해서 주신 것을 믿을 때 그게 바로 진짜 현실을 깨닫는 겁니다.

그러면 현실이 스물네 시간이겠습니까, 환상이 스물네 시간이겠습니까? 환상이죠. 꿈속의 주인공이 누군데? 내가 주인공 돼있는데.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이제부터 그 해결방법을 말씀드리고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개인구원은 없습니다. 개인구원이 없으면 구원이란 없는 거예요. 제가 젊을 때 산타클로스 만화를 본 적이 있어요. 수염 난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선물을 주는데 보따리가 특이해요. 입구는 좁은데 출구가 넓은 여기서 선물이 막 쏟아지는 것을 그림으로 본 적이 있어요. 나팔 모양으로 되어 부으니까 입구에서 쏟아지는 거예요. 분명히 입구는 좁은데 엄청난 출구에서 선물이 쏟아지는 걸 본 적이 있거든요.

왜 이 그림을 그렸느냐 하면, 개인구원도 없고 구원이란 없어요. 없는데 언약에서 구원을 쏟아내요. 이건 개인구원이 아니고 집단구원이 되는 겁니다.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구원받아요.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말은 같이 구원받는 사람 가운데서 개인적인 자질이나 주특기로 뽑혀서 구원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직업, 재산, 인물, 남녀, 나이, 병듦에 상관없이 오직 어린양의 피,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습니다.

처음에 출애굽에서 죽음의 사자가 왔을 때 문설주의 어린양의 피를 바르면 하나님의 명을 받은 천사가 와서 다른 것 안 봐요. 피 바른 것만 봐요. 우리가 주님의 구원의 기준을 분명히, 확실하게 알아야 돼요. 집달관이 빨간 딱지 붙이면 티브이고 뭐고 관계없이 빨간 딱지만 보고 가져가잖아요. 마찬가지로 피만 보고 가져가는 거예요. 빨간 딱지가 붙은 사람만 가요.

피를 어디에 바르느냐 하면, 문설주와 문지방에 바르죠. 그 말은 그 안에서 어떤 조건이든 안 보겠다는 거예요. 문지방 넘기 전에 문지방에 피만 보고 무조건 천국에 합격이에요. 문제가 쉬워도 너무 쉬워요. 그게 진실이고 그게 실제고 그게 현실입니다. 그런데 문지방 안에서 인간들은 뭘 하느냐? 매일같이 환상을 만들어요.

아버지가 내일모레 오락가락하는데 유언장에 보니까 모든 재산을 형님이 다 가져간다 하는데 형님은 그대로 할 거예요? 동생들한테 안 줄 겁니까? 정말 안 주면 재판 겁니다. 문지방 안에서 이런 이야기하고 있다고. 문지방 안에서 또 무슨 이야기하느냐 하면, 옆집 아이가 서울 의대에 들어갔다는데 우리 애는 세 번째 떨어지고, 지금 이런 이야기한다고.

자기중심이 되면 무조건 환상임에도 불구하고 그게 자기한테 죽고 사는 유일한 현실로 보는 거예요. 아예 천사가 문지방 안으로 들어오지도 않아요. 문지방의 피만 본다고요. 문지방의 피는 우리가 안 봐요. 우리는 지금 자기 잘남 자랑한다고 바빠서 십자가 피는 보지도 않습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 건데 그 중요한 걸 보지도 않아요.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이 문지방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 하면, “집사님, 이번에 기도 얼마나 해서 응답받았어요? 세상에 십일조해서 은혜 받았어요. 해야 되는데 돈이 궁해서.” 이러고 있단 말이죠. 헌금, 기도, 전도 이야기하지만 그걸로 복이 오는 게 아닙니다. 그런 것은 주께서 보지도 않아요. 십자가 피만 봐요.

왜? 그렇게 헌금, 기도, 자기가 하면 그게 개인 가치가 되고 개인중심의 현실에 의한 종교가 돼요. 그러나 주께서는 그런 환상을 인정하지 않고 오직 개인구원 욕구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구원해 버립니다. 일방적으로 구원한 증거가 뭐냐? 나는 어떤 조건과 신분과 재산이나 나이나 네가 이 땅에서 교도소에 몇 번이나 들락날락했는지 네가 얼마나 착했는지 일체 묻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지고 피에 담아서 이야기해버려요.

그러면 진짜 구원받은 사람은, 개인구원은 애초부터 없었다는 것, 이건 사기였다는 것, 예수 믿어서 구원받는 건 사기에요. 예수 믿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주께서 내 믿음과 상관없이 구원을 그냥 선물로 거룩함을 주신 거예요. 히브리서 10장 말씀처럼, 거룩함을 얻었노라. 그냥 공짜 얻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믿어지는 것, 바로 그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이게 개인구원이 아니고 집단구원이에요. 왜? 이 집만 그런 게 아니고 다른 집도 마찬가지거든요.

그 집이 뭘 했던 어쨌든 간에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예를 들어서 출애굽 끝나고 난 뒤에 어제 누가 다녀갔다는데 그 집 애는 멀쩡하네요? 그 집 애도 멀쩡한데? 어떻게 했어요? 그냥 모세가 시키는 대로 할례 받고 양의 파를 발랐어요. 우리도 그랬어요. 그런데 저쪽 집 애는 죽었다면서요. 왜 죽었어요? 양의 피를 안 발랐다나. 바르지, 그걸 왜 안 발라? 자기는 착하게 살아서 괜찮다나 뭐래나.

이게 뭐냐 하면 당신과 내가 구원받은 게 아니고 우리가 구원받은 거예요. 우리라고 할 때는 사적인 어떤 조건도 주께서 안 받았다는 것을 우리 안에서는 다 인정해버려요. 당신이 키 커서, 당신이 헌금을 많이 해서, 당신이 똑똑해서, 당신이 선교를 많이 해서 구원받았다는 우리끼리는 일체 인정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언약 대로 십자가 피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공통적으로 가질 때 그것 외에는 다른 구원은 없습니다.

그래서 언약 안에서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은, 걱정이 없어요. 왜냐하면 ‘나’가 없기 때문에 나라는 것은 그때그때 만들어지는 나거든요. 뭘 위해서? 너는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것을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우리가 사업을 하고 장사를 하는 것은 예수님만으로 구원받음을 드러내가 위한 하나의 재료가 되기 위해서 장사를 벌인 겁니다. 장사해서 돈 벌든, 잃든 구원과는 상관없어, 이런 고백이 나오도록.

목사들이 목회하는 것은 목회 잘하고 관계없이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느끼도록 목회하게 한 거예요. 장로, 집사된 것은 구원과 아무 상관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도록 장로, 집사 되게 한 거예요. 어떤 집은 아이가 넷이고 어떤 집은 하나밖에 없어요. 왜 그렇게 하느냐? 네 명 키우면서 네 명 잘 키운 것과 구원과 관계없고, 하나 키운 것과 구원받는 것과 관계없음을 깨닫도록. 그래서 네 명 키운 아줌마와 하나 키운 아줌마가 와서 그리스도 안에서는 우리가 될 수 있어요. 어딜 한 명 키우고 천당 간다고, 이런 소리 안 하거든요. 왜냐하면 자기 조건으로 그쪽 조건을 침범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 조건을 다 버려요. 그걸 스스로 인정하지 않아요. 그걸 자기를 미워한다 하는데 오직 사랑하는 것은, 내가 구원 안 되는 것을 구원되게 하신 언약의 선물 보따리, 마구 퍼주는 선물 보따리 때문에 당신과 내가 같이 천국 가게 되었다고 내놓을 때 이게 바로 문지방 바깥에서 일어났던 나와 관계없는 나의 현실과 관계없는 주님이 만든 현실, 십자가 피로만 구원받는 영원한 약속, 그 약속의 위력이 그 사람을 이렇게 문지방 안에 집어넣은 거예요. 너는 문지방에서 무슨 짓을 하든 살아라. 하지만 문밖에는 피가 있어야 돼, 라는 언약적 조건을 주님 쪽하게 그렇게 하게 만든 겁니다.

성막 만드는 것, 제사장 세우는 것, 인간이 할 수 있는 극한이에요. 다 했습니다. 그리고 그 성막 만들 때 40장 1절 봅시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정월 초일일에” 1월 1일 새로운 날, 그리고 성막은 아까 이야기했지만 이스라엘 한 복판이에요. 이 말은 뭡니까? 공간적 중심은 우리 집 텐트가 아니고 성막이 있는 곳이 내 인생을 좌지우지하고 결정하는 거죠. 우리는 중심의 변두리에 있잖아요.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의 중심은 예수님의 언약의 파이프가 중심이고 나는 그 중심을 중심되게 한 우리의 구원을 보여주기 위해서 변두리에 채택된 사람, 뽑혀 나온 사람, 주의 증인된 사람,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끝으로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주여, 나름대로 엉망으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이만큼 산 것이 뿌듯한 마음이 드는데 이것을 엉망인 것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만 이게 엉망이 돼요.

한 마디만 하고 오늘 시간 끝내겠습니다. 우리의 육체는 물체지요. 물체가 거룩한 사물이 될 때 사건이 있어야 되고, 사건을 머금은 육체가 됐죠. 이 사건은 언약 사건, 다 이루었다는 것은 오직 십자가에서만 다 이룬 거예요.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합니다. 이것만이 현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구약 때부터 이미 십자가가 관여해서 그들로 하여금 자기를 부인하게 하신 줄로 알고 있습니다. 자기가 죄인인 것을 성막을 통해서 깨닫게 해주시고 제사 드린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장차오실 메시아가 거룩한 피를 흘려야 우리가 거룩함을 얻는다는 사실, 그 관계를 저희들이 잊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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