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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03 23:54:02 조회 : 1184         
사람과 아들 160603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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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IP:221.♡.126.31) 16-06-07 10:18 
20160603a 울산강의-출애굽기 40장 : 사람과 아들
(강의:이근호 목사)


출애굽기 40장 17절부터 하겠습니다. 40장에 들어가면 출애굽기가 끝납니다. 출애굽기 40장에 들어가면 성막을 만들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출애굽기 초반기에 애굽에서 탈출하는 이야기가 나오지요. 그러면 애굽이란 장소에서 탈출하게 되면 구원이 되느냐는 문제입니다. 이 지역에서 살다 다른 동네에 살면 과연 구원이 되느냐? 이런 아이디어는 오늘날 이 동네 살다가 죽어서 딴 동네 가면 구원되느냐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여기서 살던 인간이 장소 바뀌어서 다른데 살아봐야 집에서 새던 바가지 밖에서도 새지요. 울산에 사는 사람이 대구에 가서 산다 해도 사람 자체가 바뀔 리가 없겠지요.

그런데 이 책이 출애굽이거든요. 애굽에서 탈출했다는 겁니다. 애굽은 히브리인들이 살던 동네에요. 애굽은 세상입니다. 애굽이 사람이 사람 같이 사는 동네에요. 애굽이 제일 잘 살았습니다. 주변에 있는 나라들도 사람 같이 살려면 애굽에 와야 되잖아요. 한국에서 젊은 애들이 나중에 공부 좀 하면 서울로 가잖아요. 서울로 가야지 사람 사는 것처럼 보인단 말이죠. 강원도 갈까요? 원주 갈까요? 저 거제도 갈까요? 요샌 거제도 자랑스럽지 않습니다만. 무안 근처 섬에 산다고 자랑스러워할 사람 없지요. 지역에 있는 것이 나로 하여금 사람 사는 것 같이, 다시 말해서 내가 인간인 것을 확인해준다는 사고방식, 이것은 애굽뿐만 아니고 모든 사람이 다 그래요. 다 그렇고 그런 사람들입니다.

애굽이 살았던 사람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하느냐 하면, 애굽에서 잘 살게 하는 게 아니에요. 애굽에 살던 히브리인들이 애굽을 버리고 밖에 나가는 걸 희망으로 삼는 게 아니고 애굽 땅에서 출세하는 게 희망이에요.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왜냐 하면 살아온 것이 애굽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애굽 바깥의 생활에 익숙한 게 아니고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애굽에서 살았기 때문에 거기서 희망이라는 것, 꿈이라는 것, 거기서 출세라는 것, 다 어디서 배운 거예요? 애굽 안에서 나름대로 출세, 성공하는 이상적인 모델을 애굽 안에서 얻겠지요.

울산에 고층 아파트 있다고 합시다. 난 울산에 안 살고 언양의 빌라에 살래. 그걸 출세라 하지 않습니다. 울산에 고층 아파트가 좋은 곳이라고 소문나면 은근히 주변에 낮은 곳에 사는 사람들은, “난 언제 고층 아파트에 살지?” 희망을 가지겠지요. 자체적으로 조달된다 이 말이죠. 인간이 어떻게 사는 게 참된 인간이며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목표가 되는지 자체적으로 조달돼요. 왜? 그 안에서 서로 비교가 되기 때문에. 저 사람은 고층 아파트에 살고 나는 낮은 곳에 살고. 그 안에서 비교되기 때문에 애굽에 사는 사람들의 희망이라는 것은 애굽에서 산다는 것은 애굽밖에 나가는 게 아니에요. 네가 잘났나, 내가 잘났나, 상대적으로 우열을 갖는 게 자연적 사람 사는 희망이고 목표가 되는 겁니다.

한국에 공부하는 학생들이, 네 목표가 뭐냐고 할 때 나이지리아에 가서 장사한다는 사람 없어요. 더운데 가서 뭘 할 건데? 나이지리아 가서 보코하람한테 맞아 죽을 일 있습니까. 거기 왜 가는데? 한국에서 태어났으면 한국 자체적으로 목표가 그 안에서 정해진다는 말입니다. 애굽에서 밖으로 나온 다는 것은 히브리인들의 소망도 아니고 소원도 아니에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출애굽에서 애굽에 사는 사람들이 너 앞으로 어떻게 살래, 하면 애굽에 있는 조건들 자체적으로 조달되는 거예요. 애굽밖에 살래가 아니라 애굽 나라 바로 왕처럼 살래, 애굽의 귀족처럼 살래, 그렇게 되는 것이지 나는 애굽밖에 좋은 곳에 있겠다. 애굽밖이라 해봐야 사막 밖에 없는데 뭐 좋은 게 있겠어요? 그래서 출애굽은 오늘날 우리와 똑같은 거예요. 너 뭐하고 싶나, 하면 세상 떠나고 싶어요. 이런 인간 없거든요. 한국에서 태어났으니까 유엔총장 했다가 내년에 대통령 해볼 랍니다. 이게 목표란 말이죠. 성을 온으로 하던 반으로 하던 그게 목표가 되는 거예요. “난 달에 가서 살래.” 이런 애는 없어요.

우리가 출애굽을 보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희망과 얼마나 어긋나는 일을 하고 계시는 겁니다. 집에 돈 좀 있고 터 있어서 50평 땅에 집을 짓겠다고 건축 설계사무소에 가서 건축비 얼마 나오겠냐고 물으니까 그것 포기하시고 다른 동네 가서 사세요, 하면 그 사람과 계약 안 합니다. 내 계획은 이 땅에서 몇 층짜리 건물 짓느냐는 거. 이게 우리의 목표입니다. 우리 인생의 마지막 설계자가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은 우리 인생 설계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출애굽을 그렇게 많이 보면서도 얼마나 근본적인 사고방식이 틀어져 있다는 것을 언제나 짐작하겠어요? 출애굽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가 그래요. 성경 전체가 우리의 소박한 꿈마저 완전히 짓밟아버립니다. 어디서 개꿈 꾸고 있어? 인정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인들이 모세를 통해서 애굽에서 나올 때 그 사람들 희망은 뭐냐? 적어도 애굽 사람들보다는 낫겠지, 라는 희망을 가지고 나온 거예요. 만약에 그것이 옳다면 애굽에서 나와서 애굽보다 훨씬 좋은 옥토에다 좋은 오피스텔, 완전히 마련된 그곳에 가야 돼요. 그럴 때 애굽에서 나올 때 노래 부르면서 나올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애굽에서 나왔는데 광야에서 40년 동안 뺑뺑이 돌면서 다 죽었잖아요. 홍해에서도 안 죽은 인간들이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다 죽었어요. 도대체 하나님의 뜻은 뭡니까? 그렇게 하나님, 하나님을 찾는데 언제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우리가 관심이나 있었습니까? 출애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이 뭡니까? “몸만 오너라. 내가 다 해줄게.” 그게 아니었어요. 애굽에서 나오면 됩니까? 그것도 아니었어요. 애굽에서 나와도 안 돼요. 왜? 그 인간이 나왔기 때문에. 애굽에서 살던 그 인간이 그대로 변동 없이 나왔기 때문에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출애굽기 40장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성막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성막 아이디어는 애굽에서 나올 때는 없었어요. 성막의 구조는 시내 산꼭대기에서 하나님과 모세와 만나서 구체적인 내용이 하달된 겁니다. 애굽에 있을 때는 성막이라는 것은 생각도 못한 거예요. 성막을 왜 만들어요? 그냥 살려고 왔지 성막 만들라고 온 게 아니잖아요. 성막 만들기는 애굽에서 나올 때 그런 것은 없었던 거예요. 모세만 알았어요. “네가 시내 산에서 나를 섬기기라.”

그렇게 되면 문제가 심각해져요. 간단히 해봅시다. 애굽에서 나오면 구원이냐? 아니죠. 여기가 애굽이라면 밖에 나온 걸 애굽밖이라 할 수 있지요. 애굽 바깥에 구원이 있으면 좋겠는데 자동적으로 구원이 안 되는 겁니다. 맨날 애굽에서 나왔다 하는데 그게 뭔데? 성막을 만들게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새로운 안과 밖을 준비했습니다. 성막 안이냐, 밖이냐로 구원이냐, 구원 아니냐를 확정이 돼버립니다. 신약에 오면, 성전 안이냐, 밖이냐. 사도 바울은 예수 안이냐, 밖이냐. 그걸로 결정된다고요. 광야에서 40년 동안 사람들이 다 죽었다는 말은, 애굽에서 나왔던 사람들이 죽었어요. 애굽에서 나왔는데 성막의 정신에 못 들어가서 죽은 거예요. 애굽 밖, 성막 밖, 이건 바로 저주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보시면 돼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구원을 생각하고 교회 나온다든지 구원을 생각하고 하나님 찾으면 애당초 잘못된 거예요. 그건 사기 당한 겁니다. 보이스피싱 당했어요. 구원을 생각해서, 누구 구원? 내 구원을 생각해서 성경을 본다든지 교회에 나온다든지 출애굽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엉뚱한 것을 쳐다본 겁니다.

출애굽기 4장 22절에,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고 하나님께서 정답부터 제시했습니다. 사실은 여기에 어떤 물음이 있어야 되고 거기에 대한 답변이 있어야 되는데 주님께서는 정답부터 먼저 던졌습니다. 너는 내 아들이고 내 장자라. 그러면 우리는, “언제 물어왔습니까? 저 압니다. 저 인간입니다.” 이렇게 되겠지요.

“저, 사람이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해줘야지요.”라고 한 거예요. 이 말은 질문을 으레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살려줄 의무가 있고, 나는 하나님에 의해서 살려질 권리가 있다고 나온다면 그 사람은 질문을 잘못한 겁니다. 사람이 뭐냐, 부터 질문해야 돼요. 내가 과연 인간인지 먼저 질문해야 돼요. 인간을 구원하시는 건 맞아요. 과연 인간의 자리가 우리가 포함될 정도로 인간이냐는 문제는 우리가 성급하게 끼어들면 안 돼요. 우리는 인간이 아니무니다. 우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사람 같으면 건지지요. 그런데 사람이 아니에요. 사람이 아니란 말은 제 말이고요. 성경대로 하면 우리는 아들이 아니에요.

야, 이제 문제가 어렵습니다. 우리는 사람으로 시작해서 태어날 때부터 사람이고 사람으로 마감되고 싶어. 사람으로 살다고 사람으로 마감된다면, 우리는 충분히 고마워하고 거기에 만족하고 싶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만족하지 않아요. 하나님은 뭘 원하느냐 하면, 사람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아들을 원하거든요. 이게 우리 생각과 하나님 생각과 다른 점이에요. “저, 울산에 사는 시민입니다.” 그것 하나님이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쩌라고?” “저는 울산에 사는 아들입니다.” “그래에에?” 사람에서 아들로 바뀌어야 됩니다.

그러면 이 문제는 쉬울 거예요. 사람인 인간이 아들 되려면 어떻게 됩니까? 이건 어떻게 보면 굉장히 간단한 문제에요. 밖에 나가면 사람들 많잖아요. 그중에 아들 있습니까? 없지요. 어떤 집단에 한 무리가 있는데 그중에 아들이 있느냐는 것은 아버지가 등장해서 아들을 골라야 그게 아들이에요. 지금 하나님의 목표는 사람 찾는 게 아닙니다. 아들을 찾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 아들 되고 싶다고 해서 아들 되는 게 아니거든요. 중도에 아들 되는 법이 없어요. 출생부터 처음부터 아들이어야 돼요. 중간에 어떻게 주워온 아들 키워주는 것은 드라마에나 나오는 이야기지 처음부터 아들인 자를 아들로 건지는 겁니다. 그러면 아들이냐, 아니냐는 우리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고 모델이 있으면 돼요. 하나님의 아들은 종말 때, 마지막 때 나타납니다. 그분이 예수님이죠. 요단강에서 세례 받을 때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분이 아들 같으면,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아버지 되는 건 아니고, 아버지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예수님만 아버지를 알고 다른 사람은 몰라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내 아들이라 할 때 예수님만 알고 있는 아버지와 예수님의 관계가 있어요. 그 관계를 일찌감치 출애굽에 집어넣게 되면 집어넣게 된 장치, 시스템, 구조가 오늘 공부할 성막인 거예요. 아시겠습니까?

다시 할게요.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는 예수님만 알아요. 그 관계가 모세를 통해서 약간 맛보기로 예고편으로 보여주게 되면 그것이 모세 시대에 성막 구조로 나타나는 겁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살다 나왔지요. 그 사람들은 출애굽, 다시 말해서 자기가 살던 동네에서 기꺼이 나가고자 했습니까, 거절했습니까? 거부했지요. 왜냐하면 내가 평생 살아온 내 추억과 기억 전체가 내 삶의 목표가 애굽 자체적으로 조달된다 했지요. 나는 애굽의 귀족처럼 되고 싶어. 딴 희망 없어요. 서울대학 가고 싶어. 하늘나라에 서울대학 있습니까? 없지요. 나는 재벌 되고 싶어. 하늘나라에 재벌 있습니까? 없잖아요.

하늘나라에 없는 걸 왜 목표로 삼습니까? 그러고도 아들입니까? 웃음이 납니다만. 우리가 그러고도 아들이에요? 무슨 하늘나라에 수능 380점, 390점이 있습니까? 하늘나라에 없는 왜 그리 찾는지 몰라요. 기도랍시고 한 내용 뜯어보면 전부 다 하늘나라 없는 것만 찾고 있어요. 기도할 때 “주여, 주의 의와 복음을 위해서 핍박받게 하옵소서.” 왜 그런 기도를 못합니까. 그게 마태복음 5장 10절에 분명히 나오잖아요. 그것도 복 중에서 제일 큰 복, 팔복 중에서 마지막 복이 그겁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5:10~12)

분명히 성경에 나와 있는데 왜 그걸 기도 제목으로 안 삼습니까? 이 연사는 정말 외치고 싶습니다. 좁은 길로 하옵소서. 억지로 끌면 가주지, 이게 아니고 “주여, 좁은 길로 가게 하옵소서.” 영생은 그 끝에 있으니까. 좁은 길로 가고 싶어 환장한 사람을 나는 지금까지 못 봤어요. 그래놓고도 기도 하지 말라고 왜 하느냐, 우린 기도해야지.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진다는 디모데전서에 있거든요. 그 말은 뭐냐? 말씀에 입각한 기도를 하란 말이죠. 하나님의 약속에 부합된 기도를 하란 말입니다. 그게 요한일서에 나와요.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은 다 이루리라, 해놓고 조건이 있어요. 뭐냐? 아버지 뜻대로 구하는 것은 다 이뤄진다. 아버지 뜻이 뭡니까? 아들이잖아요. 사람에서 아들로 바뀌는 거예요.

홍해에 잠겨 죽었던 애굽 군인들이 사람입니까, 지푸라기입니까, 악어였습니까, 오징어였습니까? 죽기 전에 서로 모여서 술 한 잔 할 때는 사람이에요. 홍해 건너기 전에 히브리인들과 애굽 사람들과 모여서 노래방에 가고 나이트클럽 가고 해보세요. 다 사람이에요. 자기는 분명히 사람이지요. 그런데 홍해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명칭 하에 아들만 홍해를 통과시키고 다 죽인 겁니다.

사람이 갈 수 없는 곳, 왜 갈 수 없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안 닮았기 때문에 못 가는 거예요. 옛 아담에 속했기 때문에 못 가는 겁니다. 새로운 아담, 마지막 아담, 예수님처럼 되지 못해서 못 가는 거예요. 천국은 사람인 고로 가는 게 아니고 누구든지 예수님처럼 아들이 되지 못하면 갈 수 없는 세계가 바로 천국입니다. 함부로 못 가요. 갈 수가 없습니다. 시험 쳐서 들어가는 곳이 아니고 돈 먹인다고 교회 섬긴다고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에요. 남 따라 간다고 뒤에 끼여서 가는 게 아니에요. 거름지고 장에 간다고 따라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어떤 인간도 심지어 열두 제자 가운데 하늘나라 성공한 사람 아무도 없어요. 베드로가 자기 목숨을 내놔도 못 갔습니다. 그런 목숨 아무 쓸데없거든요.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의 목숨을 원하지 않습니다. 이게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베드로의 목숨을 원하지 않는다면 오늘날 우리 목숨도 원하지 않습니다. 니 목숨 갖고 평생 동안 막 살아라. 그걸 막 안 살고 고이 바친다고 받으시는 분이 아니거든요. 어차피 안 받는 목숨 마음대로 사세요.

제가 지난주일 낮에 그런 이야기했는데 인간의 생명은 한 마디로 말해서 지저분하다고. 지저분한 걸 어디다 내밉니까? 하나님이 받겠어요? 주님만 받아요. 거룩한 예수님만 받아요. 그리스도 받고 우리는 거룩함을 얻어 챙기는 겁니다. 뻔뻔스럽지만. 히브리서 10장 10절에.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하나님에게 제물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분명히 합시다. 제물을 받으시고 우리에게 거룩함을 주시는 거예요. 자기 아들의 명예를 걸고 우리에게 그냥 주는 겁니다. 예수님 보고 줘요. 우리 보고 주는 게 아니고. 이것 이해 안 되면 답답해서 혼자 발로 차고 굴려요, 저는.

유명한 마르틴 루터가 잘못한 게 뭐냐 하면, 우리는 죄인이고 의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의인 만드는 게 아니고 우리를 하나님의 의 되게 했지요. 의인+사람, 이게 아니고 사람은 떼버리세요. 우리 자체가 하나님 의가 되게 하심이라. 고린도후서 5장 21절. 우리가 죄인이든 관계없어요. 우리로 아우라를 끄집어내요. 하나님의 의를 끄집어내는 겁니다. 날 받으소서? 안 받습니다. 하나님은 아들만, 예수님만 받아요.

예수님이 하는 일이 바로 죄인, 탕자인 시커먼 우리에게서 뭘 끄집어내느냐? 하나님의 의를 끄집어내는 솜씨는 오직 예수님만 갖고 있고 우린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복음의 진수에요. <너에게 묻는다>(안도현, [외롭고 높고 쓸쓸한], 문학동네, 1994)라는 아주 짧은 시가 있습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고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우리는 분명히 죄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타버린 연탄재인데 연탄재를 통해서 주께서 뜨거운 용서와 은혜와 자비와 인자하심과 긍휼을 다 타버린 끄집어내시는 솜씨가 대단합니다. 우리 자신에게 너무 발길질하지 마세요. 이래봬도 아들입니다. 주님과 동행하고, 관계성 때문에 아들이에요.

나를 구원한다? 그런 것 없습니다. 우리 속의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하지요. 동행하시는 분에 속하지요. 왜냐하면 그분만이 아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사실은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고 탕자 내지는 그냥 양자. 양자기 때문에 우리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데 조건이 있어요. 성령이 임할 때, 성령이 임한다는 말은, 예수님의 영이 임한다고 보면 됩니다.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의 협약, 계약이 있어요. 그 계약이 완료됐기 때문에 주어진 영, 쉽게 말해서 계약서가 바람에 날려서 두 바퀴 반 날려서 우리 가슴에 붙은 거예요. 출애굽기 12장에서 문설주에 피 바르지요. 그게 아버지와 아들만 아는 계약서 내용이에요. “피만 발라라. 구원해줄게.” 우리는 그 계약서 때문에 구원받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사는 것은 그 계약이 유효하기 때문에 살아주는 거예요.

오늘 낮에 어떤 전도사님이 제게 질문을 했어요. 주기도문에서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해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해주옵소서, 라고 요구하는데 이것이 이미 성령 받은 성도라면 주기도문  대로 기도해야 되고, 두 번째, 기도만 할 것이 아니라 정말 형제를 사랑해야 되고, 그런 조건 하에서만 우리가 구원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됩니까? 네게 죄를 지은 자에게 죄를 사해주는 조건 하에 하나님이여, 저의 죄를 사해주옵소서, 라고 돼있는데 그 절차를 우리가 지금도 그대로 유효하게 반복해야 되지 않느냐는 조로 저한테 질문한 거예요.

그 질문에 답변에 제가 가스펠펠로우십 교회에서 이년 전에 주기도문란 설교해서 이미 했습니다, 라고 마지막에 그런 이야기하면서 앞서 설명해줬어요. 예수님께서 그 기도하기 전에 인간이 한 두 가지 기도를 거부했습니다. 바리새인 한 기도를 거부했잖아요. 그들은 티 나도록 기도했고. 두 번째, 이방인들이 한 기도도 배격했어요. 많이 하면 응답을 많이 받을 것이라는 사고방식.

뭐가 문제입니까? 유대인 바리새인이나 이방인이 뭐가 문제냐 하면,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자격자라고 전제하고 들어간 게 문제된 거예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니까 아버지가 아들 기도를 안 들어줄 리가 없지. 집안에서도 아들의 요구를 다 들어주는데. 그리고 난 뒤에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거기에 우리란 말이 나와요. ‘우리’는 아들인 예수님을 중심으로 삼을 때 파생되어 번져서 새롭게 발생된 집단이에요. 기존에 우리는 기껏 바리새인이나 이방인밖에 안 돼요. 그들은 예수님 오시기 전에 아들이라고 자처하지요. 자처하지만 아들은 아니에요. 그들은 아들도 아니면서 천국 간다고 우기고, 아버지도 아닌 것을 아버지라고 섬기는데 그들의 아비는 악마입니다. 그들은 지금 마귀를 섬기고 있어요.

진짜 아들은 직접 아버지가 아니에요. 반드시 예수님과 공유의 자리, 공유란 말도 참 건방진 말이지만,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고 변두리로 나가야 됩니다. 전에도 그런 예를 들었지만 솜사탕 만들 때 페달을 밟으면 둥그런 통 안에 중심에 설탕 한 컵 넣으니까 뭉실뭉실 구름 같은 것이 피어나면서 솜사탕 하나 되잖아요.

예수님이 중심에 있고 예수님이 아버지와 뭘 하니까 주변에 없던 것에서 새로 생긴 자가 누구냐 하면, we우리가 되는 거예요. 그게 창조에요. 예수 안에서 새롭게 하는 창조입니다. 처음 창조는 흙에서 만들었지요. 두 번째 창조는 예수의 피에서 만들어져요. 예수님의 계약서가 그래요. 어린양의 피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것만이 천국에 갑니다. 그래서 피에서 만들었기 때문에 항상 성도는 무엇이 중심이냐 하면, 예수님의 피 중심인데 예수님의 피는 예수님만 아는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 계약된 모든 계약서가 응축되면 피가 되고 그 피가 우리한테 묻히면 우리 인생은 예수님이 원하는 인생으로 현실화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게 우리가 집 나갔다 돌아온 탕자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이야기 기억하시죠. 집 나갔다 돌아온 탕자, 다 털어먹고 오는 것. 헌금은 큰 교회에 다 바치고 다 떨어지니까 작은 교회 오고. 탕자 아닙니까. 장로 시켜주고 하니까 대단한 줄 알고 조희팔한테 걸려서 돈 다 날리고. 헌금 안 해도 된다니까 오잖아요.

그럴 때 이 탕자가 아버지 집에 와서 끝났습니까? 아버지와 같이 살면서 탕자이어야 합니까? 계속 탕자이어야 아버지의 사랑이 계속 나오지요. “너, 오년 전에 집 나갔다 돌아왔다면서? 이제 오년 지났으니까 괜찮겠네.” 그러면 탕자가 뭐라고 합니까? “무슨 소리고. 진짜 지금까지 오년이나 산 것도 은혜야.” 이렇게 나와야지, 오년 전에 실수였고 이제는 다 내 거야. 이렇게 건방 떨면 피라는 계약서를 찢어버린 거예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우리 속에 계약서, 예수님의 피가 온다면 계약서에 담긴 내용, 내용 중에 탕자도 포함되었잖아요. 그 내용대로 멀쩡한 우리, 잘난 우리, 공부 좀 한 우리, 살만큼 산 우리가 예수님에 의해서 성령에 의해서 천하에 탕자가 나 말고 또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점점 더 그런 마음으로 깊숙이 빠져 들어간다 말이죠. 죄인 오라 하실 대 날 부르소서.

성령께서 그렇게 하세요. 그런데 성령을 안 받으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십자가 필요하지. 하지만 십자가 지나고 그 다음에 다른 것도 해야지. 맨날 십자가에 머물면 되겠느냐. 십자가 이후에 성령의 열매 맺고 부활의 새 생명에 참여해야지. 이렇게 나와요. 그 사람들은 뭘 모르느냐 하면, 하나님의 계약서가 언약의 피로써 모든 구원에 관한 문제가 끝나버렸어요. 뭐로? 피로. 피로써 죄를 씻는 게 아니고 피로써 의 된다니까요.

예수님의 피는 우리가 무죄 상태가 되는 아니고요. 무죄 상태 돼봐야 또 죄 지으면 죄고.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예수님의 화목제물로 의 됐잖아요. 그러면 구원 받고 난 뒤에도 계속해서 죄인 돼야지요. 왜? 죄인 되고 예수님의 화목제물과 결합해서 우리가 의인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가 되는 거예요.

야구하는데 타자가 하도 잘 치니까 투수가 위협구를 던집니다. 그래서 몸에 맞는 볼로 출루합니다. 그러면 기분 되게 나빠요. 그래서 화난다고 야구 방망이로 투수를 패면 돼요, 안 돼요? 투수가 먼저 공격했기 때문에 야구 방망이로 맞아도 싸다는 생각이 들지요. 그러면 뭐가 안 돼요? 사적인 감정을 풀면 야구 자체가 안 되지요. 개인의 원통함을 푸는 건 좋은데 전체 야구가 안 되잖아요. 우리는 개인의 구원을 위해서 하는 게 아니고 전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해서 우리가 있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 누가 찾아보세요.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울산이나 대구나 애굽에 살 때 우리의 목표가 뭐냐 하면, 내가 사는 고향땅에서 출세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건 하나님 뜻이 아니죠. 내 뜻이잖아요. 우리는 왜 자꾸 출세하는 데 관심 있느냐 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내 욕망과 내 욕구대로 살 뿐이에요. 그런 것을 두 자로 사람 또는 인간이라 했단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선 사람과 인간을 천국에 안 받지요. 하나님은 아들만 받잖아요. 그런데 요단강에 오셨을 때 아들은 의인이에요. 예수님의 의가 우리한테 없으면 예수님과 합력하여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제가 지금 약 올리려는 게 아니고 정답이에요. 정답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참 삼성그룹에 가서 이런 이야기하고 재벌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어요. 사람 소용없어요. 돈 많은 사람 소용없고.

출세밖에 모르는 우리에게 누가 실시했어요?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이 모든 일이 누구 아이디어고 누구 계획입니까? 하나님 쪽에서 손을 내밀었잖아요. 우리가 발견하는 게 아니에요. 실시한 것을 우리가 감지하는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고 부활했다는 그걸로 감지될 뿐이에요. 숨어있는 독생자가 지상에 나타났으니까.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가 나타난 거예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이건 도 닦는 게 아닙니다. 바르게 살아서 이웃사랑하자. 그거 아니에요. 그건 유대인들, 절에서 많이 한 거예요. 이렇게 해서 구원받자. 그것도 아니라니까요. 독생자가 나타났다는 말은 믿자가 아니라 그분께서 믿도록 조치한다 이 말입니다. 왜 나는 조치 안 하느냐? 네가 지금 앉자 있는 그게 주님의 조치에요. 펑퍼짐하게 엉덩이 깔고 앉아 있는 게 주님의 힘으로 앉아 있는 거예요.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이 벌인 야구가 되게 함이라. 사적인 감정 풀지 말란 말이죠. 네 야구가 아니고 내 야구란 말이죠. 돌아가는 모든 것이.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란 거예요. 돈 좀 벌고 부흥사 온다고 감사하라는 말이 아니고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자체로 감사해야 된다. 다시 말해서 인간으로 감사하지 말고 인간이어야 되는데 아들로 바꾼 것에 대해 감사하란 말이에요.

그렇다면 아까 주기도문에서 용서하란 말은 누구 이야기냐 하면, 이미 예수님께서 다 조치하신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게 되면 우리는 걸어 다니는 주기도문이 되는 겁니다. 우리로 주기도문을 외우란 말이 아니고 그대로 실천하란 말이 아니고 성도는, 성령이 있는 사람은 뭘 해도 그 자체로 주기도문의 내용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띠고 있는 겁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했지요. 재산이 30억 있어도 그게 일용할 양식이에요. 남은 30억 있어서 좋겠다고 하지만 난 일용할 양식밖에 없어, 저쪽에서 무슨 일용할 양식이 30억이나 되느냐, 30억을 하루 만에 다 쓰느냐 해도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시는 자도 하나님이요. 그게 바로 재산이 얼마든 관계없이 하나님의 아들다운 모습이란 말이죠. 너, 착하다, 하면 나 안 착해. 죄인이야. 죄인과 함께 하시는 주님께서 의되게 하신 거예요. 하나님도 의로우시고 우리도 의인되게 하신 거예요. 합쳐서 의가 된다고.

이걸 출애굽을 통해서 나타낸 거예요. 애굽에서 살던 사람 나왔다. 자칭 인간이라 여겼다. 그러나 홍해에서 원망한 사람이 누구였어요? 애굽 군대였어요, 히브리인들이에요? 히브리인들이 모세를 원망한 거예요. 우리가 물고기냐, 어떻게 인간이 물을 건너갈 수 있느냐? 주께서는 너는 왜 자칭 잘난 인간으로 보느냐? 죽으려고 이곳에 온 거예요. 인간으로 죽어서 아들로 태어나는 겁니다. 어떻게? 피를 바름으로써.

출애굽기 4장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면서 길에서 모세를 죽이는 거예요. 누가요? 하나님이 모세를. 우리 같으면 하청업자 죽여서 무슨 이익이 되겠느냐고 하지만 하청업자 필요 없어요. 하나님은 아들을 원하지 모세를 원한 게 아닙니다. 아들이 된 모세를 원하지요. 모세를 누가 살립니까? 모세 아내가 할례를 행했지요. 피를 냈지요. 피 남편이라 했으니까.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피를 생산하는 일을 해놓고 그 일, 할례가 완성됐을 때 베어낸 양피를 모세의 사타구니에 던졌어요. 그래서 모세가 살아났어요. 희한하죠.

그것을 때마다 하는 게 아니고 이벤트 식으로 하는 게 아니라 고정된 장소에서 행사하라고 고정된 장치를 만든 게 성막입니다. 성막 안에 언약궤가 고정돼있습니다. 언약궤의 특징은 고정성이에요. 영원히 불변한다. 완료성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끝났다. 시간적으로 끝난 게 아니고 하나님의 원칙은 끝났다. 원칙의 완료성을 미리 앞당겨서 보여주는 거예요. 그게 바로 언약궤라는 거예요.

요한계시록 11장 19절에 보면,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고정돼있지요. 그리고 난 뒤에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하나님의 언약궤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성막을 세운 날자가 오늘 본문에 언제로 돼있습니까? 정월 초일일, 1월 1일. 카운트 새로 시작하는 거예요. 이 세상은 잊어라. 이제는 성막이 그 영원함을 찾아가는 미래만 남아있는 거예요. 성막의 완성을 보는 미리의 시간만 남아있습니다. 카운트에 들어갔어요.

이 앞에 책이 있지요. [생명의 신호]라는 이 책에 보면, 고정성에 대해서 제가 언급한 대목이 나옵니다. 영원히 확정된 거예요. 확정된 것을 전기밥솥으로 본 거예요. 기억나지요. 손대지 않더라도 전기밥솥이 때가 되면 밥을 하지요. 이미 전기밥솥을 눌렀다는 자체가 완성됨을 이미 경험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킬까요, 어떻게 할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을 시작할까요? 그게 아니고 우리 자신을 밥솥으로 삼는 거예요. 우리 머리 위에 스위치가 있어서 주께서 누르면 우리는 울산 바닥에서 시한폭탄을 두른 채 채깍채깍 너희들이 모르는 다른 시간대가 흐르는 거예요. 마지막 때를 향하여. 이건 우리 손으로 풀 수 없어요. 타이머에 장착된 하나님의 계약서가 움직입니다. 주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움직여요. 이게 바로 아들입니다.


10분 쉽시다.
 한윤범(IP:221.♡.126.31) 16-06-07 10:19 
20160603b울산강의-출애굽기 40장 : 사람과 아들
(강의:이근호 목사)


첫째 시간 마지막에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의 성막에서 요한계시록 11장에 나오는 말씀대로 우레와 지진과 번개, 우박이 쏟아진다 했습니다. 언약궤에서 나온다는 겁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일의 완료고 완성입니다. 하나님께선 눈에 안 보이잖아요. 보면 인간은 죽어요. 그러면 뭐로 보느냐 하면, 말 또는 말씀으로 주십니다.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난 뒤에 말의 내용과 자기 자신이 일치되기 위해서 인간 쪽에서 행동에 나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말만 주시는 게 아니고 그 말씀에 합당한 행동이 나옵니다.

행위가 나오는 모습이 이 세상이 어두운 죄악이기 때문에 심판의 형식으로 주어지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행동과 심판으로 주어졌다면 구원은 어디 있고 축복은 어디서 나오느냐? 말씀에서 행동으로, 행동에서 심판으로. 심판에서 복이 나오고 구원이 나오는 게 아니고 심판 받아 마땅하다는 자에게 구원이 되고 복이 된다 이 말입니다.

원망해서 불 뱀이 왔습니다. 불 뱀 저리 가라고 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고 불 뱀의 형상을 만든 놋 뱀을 쳐다보는 자에게만 불 뱀에 물린 병에서 낫게 하셨어요. 불 뱀을 불 뱀으로 치료하는 거예요. 어떻게? 뱀에 물려도 우리가 합당한 존재입니다. 불 뱀을 보낸 하나님의 조치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한 행위적인 조치인 것을 제가 믿습니다, 하고 받아들이면 구원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바로 구원받은 자는 말씀의 실현태, 말씀의 현실 상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심판받는다고 하니까 너무 억울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죄도 없으신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이유가 뭡니까? 죄도 없는데 왜 아버지한테 저주받았어요? 그것은 우리 죄를 대신 가져갔기 때문에 예수님이 저주받았잖아요. 아버지로부터 저주받을 때 예수님은 죄인이 된 거예요. 억울한 죄인이죠. 죄도 없으면서도 남의 죄를 자기 것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 죄가 있는 곳에 저주가 퍼부어지기 때문에 그 저주를 받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구원은 어디서 이뤄집니까? 그 저주, 그 심판에서 예수님의 구원이 일어나는 거예요. 저주받으신 분이 아버지로부터 사흘 만에 부활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예수님이 받으신 저주에 합류하지 않으면 구원은 물 건너갔습니다. 구원은 없습니다. “그러면 죄 지을까요? 우리가 죄 지으면 되겠네요.” 아니에요. 가만있어요. 십자가 영이 우리에게 찾아오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무리 착하고 경건하고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을 죽게 한 죄인으로 일괄적으로 다뤄지게 돼요. 우리가 이 땅에서 뭘 해도 우리끼리는 내가 잘나 보이지만 나쁜 짓하지 않고 바람피운 적도 없고 살인한 적도 없고 뭐든지 깨끗해 보이지만 주님과 비교할 때는 마땅히 저주받아야 할 죄인입니다. 주님이 내 죄를 가져가서 저주받았기 때문에 나한테 뭐가 있는지 몰랐는데 주님께서 내 것을 가져가니까 아버지로부터 저주받은 거예요.

우리는 가상적인 아버지만 생각하고 가상적인 하나님만 생각해서 이렇게 건전하면 하나님이 복 줄줄 알았는데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은 우리가 몰랐어요. 오직 예수님만 알아요. 만약에 내 볼펜을 예수님이 가져갔다면, 내 볼펜을 주님이 차고 있으니까 내 볼펜이기 때문에 주님이 벼락 맞는 겁니다.

따라서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가 울산 바닥, 대구 바닥에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기적입니다. 감사할 일이죠. 마땅히 살아야 할 권리가 없습니다. 오늘밤에 우리 영혼 데려가도 우리는 할 말이 없어요. 아들 장가 둘 다 보내고 이제 할 일 다했다는, 전도사님 기도가 이제는 종을 편히 쉬게 하옵소서, 이렇게 되겠는데 만약에 아들이 내일 장가간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런 기도 나오겠습니까? 서른 살까지 키웠는데 아들 장가가는 건 보고 죽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요새 수요일에 그런 설교합니다만 노아 보세요.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이게 뭐가 나쁩니까? 이게 나빠요, 안 나빠요? 안 나쁜데 벌 내릴 일이 있습니까? 이게 나쁘니까 벌 내리잖아요. 그래서 이것에 대해서 지난주일 낮에 이것을 자기 동질성이라 했어요.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거예요.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하는 것은 사실을 주께서 우리를 살려내는 거잖아요. 동질성은 예수님만 동질성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예수님만 아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이 아들 되기 위해서 매일같이 살려냄을 당하고 있는 겁니다. 참새를 키우고 들풀을 키우듯이 예수님이 자기 명예를 걸고 우리를 계속 살려내는 거예요. 우리가 살아있어야 하나님의 의가 살아나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따라서 애굽에 있던 히브리인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따라 나왔어요. 모세가 좋은데 간다고 하니까 그냥 따라 나온 거예요. 애굽보다는 더 좋겠다고 생각하고 따라 나온 겁니다. 오늘날 교인들이 교회 오는 것과 똑같아요. 멋도 모르고 따라 온 거예요. 그런데 그건 사람이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아들은 아니에요. 아들이 되려면 하나님의 계약서가 붙어 있어야 돼요. 피를 내야 돼요. 죽어야 돼요. 본인이 자살하면 안 되고 장차오실 메시아의 죽음에 합류될 경우에만 그것이 아들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정된 성막 안에 양을 잡는 지점이 있어요. 제단 뜰에서 양을 잡아요. 양이 죽을 양이 아니지요. 양이 무슨 잘못했습니까. 양에다 백성들의 죄를 얹어주니까 양이 죽는 거예요. 양이 대신 죽었다는 말이 뭔 뜻이냐 하면, 진즉에 죽어야 될 자는 양이 아니고 누구다? 양을 바친 그 인간들이 하나님의 제단에서 저주의 심판을 받아야 되는 겁니다.

다시 묻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는 어디서 온다 했어요? 아까 요한계시록 11장에서 언약궤에서 오지요. 하나님의 궤가 완성된 게 예수님이죠. 예수님에 비교해볼 때 우리는 죽어 마땅한 죄인이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죽이고, 그럼 우릴 죽이면 구원 못 받잖아요, 하지 마세요. 우리가 예수님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그 자리에서 뭐가 나오느냐? 그 죽음을 이긴 사망을 이기고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는 자리가 우리의 구원의 자리에요. 그걸 피해 도망치면 안 돼요.

그러면 지금도 우릴 죽입니까? 죽여요. 어떻게 죽입니까? 한 달에 오백만 원 정도 나와서 죽이고, 가게 세 한 달에 60만원 나와서 죽이고, 아들 몸 튼튼해서 죽이고. 보너스 타서 죽이고, 계 모아서 일본에 놀러 가면서 죽이고, 놀러가는 자체가 죽이고, 온천에서 뜨시다는 그 자체로 죽이는 거예요. 우리는 날마다 죽노라. 우리의 죄를 만끽하면서 죄 안에서 즐거워하며 죽고 있습니다. 죄 지어서 죽는 게 아니고 죽은 자기 때문에 그렇게 죄가 즐거운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야지 이야기하지.

우리가 이미 죽은 티를 낸다 이 말입니다. 주님도 성경 보기도 싫어요. 그러나 제주도 놀러가자 하면 성경 덮고 놀러가는 거예요. 이게 죽은 티를 내는 거니까. 좁은 길로 가면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러다 갑자기 땅값 올라가면 할렐루야 하고 있습니다. 그게 원래 내 욕망이고 내 몸이 원하는 바기 때문에. 뭐든지 주께서 원하지 않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에 완전히 매료되게 하신 그것이 내 죽은 몸이라는 것을 성령을 통해서 인식할 때 그 죽은 몸을 통해서 십자가를 바라보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식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죽음을 통해서 첫 번째 부활하신 주님이 계속해서 중심 지주, 중심 말뚝으로 우리는 그 변두리에 등장한 양자로써 그 관계가 돈독해지는 겁니다. 그래서 일부러 죄 짓진 마시고 하던 대로 사세요. 시장에서 새 이불 사서 덮어보세요. 가볍고 얼마나 좋은지. 뜨뜻하고 좋지요. 초막 셋을 짓고 여기가 좋사오니 하잖아요. 이불 덮고 살겠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또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 아니면 구원 못 받는 티를 팍팍 내고 있는 겁니다. 그게 바른 인간 된 거예요. 이것 때문에 돌아가셨구나. 새 이불이 좋아서 탐욕해서 하늘나라는 없고 이불 여기가 좋사오니, 이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거예요.

그래서 성도의 특징은 성령이 임하게 되면 항상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과 형제우애가 만끽해서 발산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게 온유한 거거든요. 나, 죄인입니다. 나, 주님 아니면 인간 안 됩니다. 이게 온유에요. 아무리 세상이 험하고 악하고 사람이 온유지게 되면 충분하게 선교사, 전도자 역할을 다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마음을 낮추면.

17절 보면, “제 이 년 정월 곧 그 달 초일일에 성막을 세우니라 모세가 성막을 세우되 그 받침들을 놓고 그 널판들을 세우고 그 띠를 띠우고 그 기둥들을 세우고” 이렇게 합니다. 일차적으로 성막을 세웠다고 했습니다. 성막 안에서 성소가 있고 양을 바치는 제단이 있다. 그러면 그런 장치로 자동적으로 복을 받느냐, 용서되느냐? 아닙니다. 여기에 누가 들어가야 되느냐 하면, 40장 12절에 보면, “너는 또 아론과 그 아들들을 회막문으로 데려다가 물로 씻기고 아론에게 거룩한 옷을 입히고 그 에게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하여 그로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

물질적 장치만 갖추면 되는 게 아니고 여기에 인간이 등장해요. 그 인간 앞에 뭔가 붙어요. 거룩한 인간 종류가 들어가요. 이게 바로 아론 계통의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이 양을 잡고 1년에 한 번씩 지성소에 들어가고 관리도 하고 하는데 이게 좀 어려워요. 여기서 설명이 난해질 겁니다.

애굽이란 어떤 지형적 장소가 있지요. 문답으로 해봅시다. 애굽에서 나오면 구원입니까? 아니지요. 뭐가 문제에요? 애굽에서 나와서 지정된 장소에 들어가면 애굽에 살던 그 인간이 옮긴 셈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받아주질 않습니다. 장소가 중요한 게 아니고 인간 자체가 바뀌어야 되겠지요. 그러면 이동식으로 설치돼있는 장막의 기구들과 특정 장소가 중요합니까, 여기서 활동하는 제사장이 중요할까요?

결국 제사장 앞에 거룩하다 할 때 어떤 물건이 거룩한 그것을 구체화시키면 어떤 인물이 거룩한 거예요. 인물이 거룩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시는 이곳에서 같이 활동해도 멀쩡하게 살아있다는 것이 어느 정도 해야 그렇게 되겠느냐? 하나님의 거룩이 인물과 결합이 되는 그것을 모델케이스로서 제사장이 있는 겁니다.

금으로 만든 시계와 금박 시계와 다르지요. 금박 입힌 시계는 벗기면 스텐이 나오지만 금으로 만든 시계는 아무리 벗겨도 금 나오잖아요. 거룩으로 치장하면 어설퍼요. 인간 자체가 거룩해져야 한단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물질이란 장치에다 제사장을 결합시켜서 활동시킨 것은 물질도 한시적이고 임시적이지만 제사장도 완료된 거룩한 성도가 아니다. 가짜고 어설프고 제사하는 죄인으로 제사장을 세운 겁니다. 이게 히브리서에 나와요. 그리고 그 이야기는 지난 시간에 했습니다. 제사장이 있는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죄 짓기 위함이라고 했지요.

인간과 사물에 비춘 거룩이 전부 실패로 끝납니다. 그래서 특정 장소에 있다고 해서 거룩해지는 것도 아니고 제사장처럼 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이러나저러나 실패하기는 마찬가지에요. 그러면 구약의 율법을 통해서 제사장 세우고 성전 준 건 뭐냐? 율법을 준 것은 더욱더 죄를 죄 되게 함이라. 왜 그러냐 하면, 인간에서 거룩한 인간 되려면 사람들이 연속성을 설정하게 마련이에요. 이렇게 하면 돼요, 이렇게 하면 돼요? 점점 더 거룩해지고 점점 더 거룩한 거예요. 점점 더 거룩해지려면 점점 더 센 바람을 받아서 자기가 자신에 대해서 가혹해야 되는 겁니다. 착한 짓들을 아예 안 해본 사람은 이해 못해요. 바르게 살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아주 미미한 것조차도 하찮은 것조차도 분석해서 물을 이쪽으로 마시면 거룩할까, 요쪽으로 마시면 거룩할까, 이런 것까지 다 따진다고요.

소위 배운 뼈대 있는 집안과 상견례 할 때 조심해야 돼요. 수준이 맞아야 결혼하지. 사랑과 전쟁 등에 나오는 드라마에서 수준 안 맞아서 혼사가 깨지는 경우가 있어요. 상견례 할 때는 상대방이 어느 정도 교양이 있는 사람인지 고상한 사람인지 그걸 탐색하는데 집중합니다. 옷 입은 것, 저건 얼마짜리고, 어느 백화점에서 산 것이고, 아니면 서문시장에서 샀는지 이리 보고 저리 보고 살피고, 모자 테가 60년대, 70년 대 유행한 것인지 최신 물 건너 온 것인지 따지고 밥 먹을 때 보고. 상견례 할 때 사람이 긴장해서 교양 있는 척하다 진이 다 빠져요. 그게 연속성이에요. 집에선 츄리닝 입고 돌아다니지만 상견례 할 때는 무슨 가방 온갖 것 끄집어내서 치장하고 우리 집안 이 정도라고 기 안 죽으려고 하거든요.

그러나 집에 있는 그 인간이나 식당에서 한식집에서 상견례 하는 그 인간이나 맨 똑같습니다. 중간에 끊어짐이 없어요. 하나님께서는 삑- 어떤 인간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너희들이 추구하는 것이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경건과 거룩과 고상함을 떨면 복 주시겠지, 라는 그들의 기대감을 한껏 높이기 위해서 율법을 줘버려요. 율법을 주니까 제사장들은 한껏 기대에 부풀어서 깨끗하게 하려하고 백성들은 성막하고 십일조 꼬박꼬박 내고 온갖 율법, 십계명 다 지키려하고 하지만 그 모든 것이 허세로 끝나고 허무로 끝나요. 그게 안 돼요. 왜? 인간은 자기가 다루려기 때문에 실패로 끝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다루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줘서 말씀으로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 주셔서 행위로 주셨어요.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하실 분을 따로 보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산상설교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포기해야 된다는 것을 늘 상기시켜야 돼요. 말씀을 안 보게 되면 자기 잘난 체해요. 어떻게 잘난 체하느냐 하면, “하나님이여 나름대로 열심히 했는데 왜 저한테 안 좋은 일이 자꾸 생깁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네가 무슨 기준에 의해서 열심히 했는지 네 기준이 뭐야?” “저는 이웃을 사랑하고 헌금도 했고 교회 청소도 다하고 열심히 주님 섬기려고 애를 썼습니다.” 성경 어디에 그런 대목이 있느냐고 물어요.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했잖아요.” “그게 그런 뜻이야?”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우릴 죄인 되게 하는 것이지 우릴 정당화하기 위해서 성경이 있는 게 아닙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들이 있거든요. 네가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느냐? 하나님께선 말씀하시고 그 다음에 행동하신다고 했지요. 그럼 우리가 믿음이 있으면 행동을 주께서 요구합니다. “네가 믿음이 얼마큼 있느냐?” “호박씨만큼 있습니다.” “겨자씨만큼 있느냐?” “그 정도는 있지요.” “그럼 산을 옮겨봐라.” 산을 못 옮깁니다.

중국 고사에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고 있습니다. 어떤 할아버지가 친구 집에 왕래하는데 불편하니까 산을 옮기려고 작정했습니다. 어떻게 하느냐? 삽으로 산을 파는 거예요. 그 사람의 아이디어가 조금씩 파 들어가면 산이 없어질 것이라는 겁니다. 자기 때에 못하면 후대에 파면  되고. 이게 믿음 있는 겁니까? 그냥 열심히 하면 산이 옮겨지는 거예요?

성경에서 소위 믿음 있다는 사람한테 이야기합니다. 네가 믿음 있느냐? 있으면 옮겨봐라 이 말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은 행위로 현실화 되거든요. 네가 내뱉은 믿음이 진짜 현실이고 정답이라면 산을 옮길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돼요. 인간에게 그런 능력이 있습니까? 없지요. 없다고 끝나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심판을 받아야 돼요.

아까 공식이 뭐였지요? 말씀을 하시고 행동, 그 다음에 심판하시고, 마지막 방정식이 뭐였던가요? 심판 속에서 구원이 거기 있잖아요. 사람들은 구원받는 것을 뷔페식당에 온 것처럼 뭘 먹지? 이러고 있다고. 뭘 먹는 제삼의 자리를 우리한테 허용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주의 말씀 안에 들어있어요. 주께서 말하고 행동하고 심판할 때 우리가 여기 있어서 “그래 나는 이 행동을 믿어.” 이래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이 안에 이미 포함돼있단 말이지요. 이미 심판받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고 안 받고는 하나님이 실시할 나름이지 우리가 시도한다고 구원되는 건 아닙니다.

아까 제가 이야기했지요. 죄도 없는 분을 우리에게 주심은, 모든 시작을 주님부터 시작한 거예요. 주님부터 시작하면 난 놀면 되겠네. 이렇게 답변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아요. 우리 동네는 없지만 다른 동네. 주께서 시작했다는 말은 뭐냐? 지금 내가 있는 것이 주님의 행위의 결과기 때문에 이게 바로 산을 옮긴 내가 나를 변환시킬 수 없는, 변화되지 않는 나를 이토록 변화시킨 결과물이 지금의 나다, 이 말입니다. 이게 얼마나 큰 믿음이에요. 큰 믿음 아닌가?

홍해 갈라진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여리고 무너졌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거든요. 신약의 어린애가 구약의 선지자보다 더 큰 자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산을 옮기고 뭘 할지라도 내가 구원받아야 될 나로 바뀐 것은 순전히 주님의 솜씨라고 그게 믿어진다는 이것이 대단한 결과물이라는 된 거예요. 주님의 솜씨물, 주님의 작업 결과물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편하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냥 막 사시라고.

여러분 잔치국수, 막국수 보세요. 그릇이 있고 돌돌 만 국수가 있지요. 그리고 고명을 얹잖아요. 막국수를 맛있게 먹어주시는 분이 따로 있는 거예요. 그런데 막국수가 답답하다고 혼자 비틀고 그러면 안 되지요. 그냥 잡수시는 분이 잡숫게 맛있는 국수로써 족하잖아요. 우리가 어떤 형편에 있던지 간에 그 자체가 주님의 맛있는 막국수가 되는 겁니다. 우리의 미래는 10년 뒤에도 맨 막국수에요. 20년 뒤에도 마찬가지에요. 우리 자신이 수입이 많다고 해서 착한 막국수 되는 법은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지금 성도라면 사후적으로 이미 구원받았기에 지금도 우리는 구원받고 있는 겁니다. 그걸 지금 상태에서 되돌아보면서 과거까지 다 하나님의 손길이었고 하나님의 개입에 의해서 우리는 이 길을 갈 수밖에 없고 앞으로도 그렇게 될 거예요. 그런데 믿음이 없는 사람은 복음, 이게 진짠가? 내가 지금 홀린 게 아닌가? 내가 알아서 살아야지. 자기가 알아서 살면 동질성, 연속성이 된다고요. 내가 뭔가 해보겠다는 것은 아무리 해도 율법에 가로막혀 단절이 일어나서 주께서 원하시는 아들이 안 돼요. 끊어진다고. 가봐야 십자가로 가로막히게 됩니다.

이 책에 제일 앞에 머리말이 나오는데 이렇게 돼있어요. [복음의 경계선에는 늘 초조하게 서성이는 가짜들이 있다. 죽음의 언저리에 가서야 십자가를 포기하는 이탈자들을 보게 된다.] 자기가 죽음의 언저리에 갔을 때 죽을 뻔했을 때 그래 예수도 다 헛짓이었어, 라고 비로소 본색을 드러낸 자들이 있는 거예요. 지금 약간 배부르니까 교회에 충성하고 하지만 막상 집안 거덜 나고 죽게 돼보세요. 예수가 무슨 소용 있어, 하나님이 어디 있어, 라고 솔직하게 자기의 본색을 드러낼 자들이 있단 말이죠.

그 다음에 [자신들이 고백했던 것을 스스로 회수하고, 얼굴에는 면포로 두르고, 그제야 염치없는 고백들을 닫는다.] 나 이제는 예수 안 믿는다. 그동안 사람들이 믿은 건 예수를 믿은 게 아니고 자기 미래의 연대기를 믿었지요. 하나님을 믿으면 더 나은 미래가 있을까 싶어서. 그게 바로 애굽이란 장소에서만 나오면 세상과 결별되면 곧 그게 구원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맨 그 인간이 나왔을 뿐인데. 인간은 스스로 달라질 수 없어요. 자아는 자아 스스로 다른 자아가 될 수 없습니다. 스스로 자아를 비자아로 고백할 사람 없어요. 자기를 부인할 사람 없습니다. 자기를 백날 부인해도 부인된 자신을 자기라고 우기기 때문에.

베드로 자기 목숨 바쳐도 주께서 안 받아준 이유를 알겠지요. 네가 목숨 바쳐도 그 목숨 자랑할 건데 그 목숨을 왜 천국까지 가져갑니까? 천국 갈 때는 천국에 들어와서는 안 될 모든 것이 세관에서 걸려서 다 폐기처분 돼버려요. 철저하게 검열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건 다 빼버립니다. 시계, 스마트폰, 옛날 아름다운 추억이고 뭐고 다 없애버려요. 빠짝 마른 뼈가 되는 겁니다. 우리는 빠짝 마른 뼈인데 보기에는 머리하고 색깔 잘 나왔잖아요. 얼마나 감사합니까? 진짜 빠짝 마른 뼈라 해서 [채식주의자]처럼 있지 않고 빠짝 말라서 있지 않고 바짝 마른 뼈인데 왜 밥맛이 있고 얼굴이 통통하고. 어딜 봐서 바짝 말랐어요. 다이어트 합니까? 빠짝 마르게.

주께서 우릴 죽은 자로 봐요. 이 말은 제발 죽은 자를 네가 손댄다고 산 자 되는 게 아니니까 주께서 십자가에 죽은 것을 안다면 너의 자리가 구원이 되는 바탕이 되는 심판의 자리에요. 우리는 죽고 우리와 함께 있는 주님이 같이 살아남으로 주와 함께 살아나리라. 이게 로마서 6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라. 반드시 그리스도가 들어가야 돼요.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주님이 중심 지주가 되고 우리는 변두리, 결과물이 돼야 돼요. 솜사탕처럼 앞에는 싣고 뒤에는 결과물이 나오는 것처럼 우리는 주님의 작품이에요. 쉽게 말해서 주님의 것이에요. 주님의 것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성막을 통해서 보여주지요. 그 당시 백성들이 얼마나 감격했겠어요. 자기가 아는 수준에 있어서는 물질로 만든 지정된 터에 거기에다 금박을 입힌 아카시아 나무 재료로 성막을 만들고, 40장 34절 보세요. 누가 읽어보세요. “그 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보세요. 얼마나 폼 납니까? 이렇게 신비할 수가 어디 있어요. 참 신비하지요. 분명히 나무 조각으로 만들고 금으로 만들었는데 갑자기 아우라가 퍼지면서 하나님 영광이 드러나니까.

새순교회 합기도도장 할 때 갑자기 아우라 남겨놨습니까? 만약에 남겨놨으면 얼마나 놀라겠습니까? 만약에 그것으로 놀란다면 그것이 올무가 되는 거예요. 왜? 만약에 이 책상에 천사가 나타났다면 이 책상 못 치웁니다. 아까워서. 어떤 책상인데. 세상에 어떤 작품도 천사를 유도하는 작품이 없잖아요. 천사가 앉았던 그거잖아요. 놋 뱀을 음란이 섬기고 기드온의 에봇을 섬기고 언약궤를 섬기고, 그게 다 물질이죠. 그게 다 우상이에요. 예배당을 섬기고. 큰 예배당 파이프오르간을 섬기고.

그 당시 수준이 이 정도 수준밖에 안 됐어요. 우리 제사장 멋있다고, 제사장은 대단하다고. 그런데 하나님은 제사장, 나답과 아비후를 죽여 버렸는데. 그게 뭐냐 하면, 고정된 성막은 맞아요. 그런데 고정된 성막은 진짜 고정된 언약궤, 영원한 성전을 향하여 그들은 멈추지 않고 이동해야 됩니다.

여러분은 이동이라 할 때 뭘 생각합니까? 이동이란 반드시 공간 이동, 장소 이동을 말하지요. 그런데 시간 이동을 생각해봤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시간을 통해서 이동시킵니다. 이게 어렵다는 것이 뭐냐 하면, 우리는 시간이 있다고 생각하잖아요. 오늘이 6월 3일이죠. 우리는 내일 되면 6월 4일이 있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러나 이건 성경적이 아닙니다. 시간은 미리 있는 게 아니고 그때그때마다 예수님이 시간을 만들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시간의 주가 되시기 때문에, 역사의 주가 되시기 때문에.

내일에 일어날 어떤 일도 예수님의 허락 없이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내일에 일어날 모든 일은 주의 허락이 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에요. 어떤 것도. 그래서 발걸음을 세시고 참새를 키우시는 머리카락을 세시는 이유가, 네가 키를 한 자나 자라게 할 수 있느냐?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 그건 네가 걱정할 권한이 있지 않다. 내일은 내가 만드는데 네가 주제넘게 왜 끼어드느냐 하는 거죠.

자살하는 사람이 어리석은 이유가, 내일 희망이 없다고 자살하거든요. 그런데 사람이 오늘까지 있었던 것도 자기 힘이 아니었어요. 성령이 안 받다보니까 악령이 달렸으니까 악마한테 시달린 거예요. 지금껏 네가 이룬 게 뭐가 되는지 봐라. 다 소용없잖아. 살아야 뭐하나. 차라리 죽어라. 네가 이래서 인간 대우받고 살겠어? 공무원시험에 또 떨어졌지. 그래서 아파트 옥상에서 떨어져서 곡성 공무원을 덮쳐서 같이 죽었어요. 그 공무원이 타이밍 1초만 어긋났으면 안 죽었어요. 그런데 아이는 살고 아내는 뒤에서 그 광경을 보고 남편은 죽어버렸어요.

세월호도 마찬가지고 참새도 하나님 뜻이 아니면 떨어지지 않습니다. 참새가 아직 안 떨어진 것은 주님의 허락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어젯밤에 영혼을 안 데려가서 지금 계신 거예요. 데려가서 이 모든 것이 누구 것이 되겠습니까? 그 말은 평소에 잘하라는 말이 아니고 지금 있는 이것이 나 때문에 내가 있는 게 아니고 주님 자기 숙제한다고 우리가 만들어지고 지금까지 살려온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내 걱정은 내가 왜 합니까? 참 말은 쉽다. 이론은 쉽네요. 내 걱정을 내가 왜 하지. 집값 내려갔다고 왜 걱정합니까? 말은 굉장히 쉬운데 우리는 그건 이론이고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애굽에서 나왔던 사람들에게 성막이나 제사장 같은 수준을 내세우는 이유가 그들은 보지 않고는 못 믿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은 모세가 산 위에 올라갔을 때 모세가 안 보이지요. 아무것도 안 들고 가서 한 이틀 만에 내려올 줄 알았어요. 일주일 지나도 안 내려와요. 골든타임 지났어요. 72시간 지났어요. 죽었어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애굽에서 나왔을 때 알았던 상식들은 다 끌어 모아야 돼. 모세가 말하기를 여호와란 분이 우리를 애굽에서 끄집어냈데. 홍해를 갈라지게 하고 어린양 피 바르라고 했데. 그렇다면 그들이 할 일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여호와란 신을 나름대로 섬기면 돼요.

섬기는 방식은 뭐냐? 애굽에서 하던 그 방식을 그대로 하면 돼요. 애굽에서 신을 어떻게 섬겼습니까? 중간 매개물 없이는 안 섬겼거든요. 귀한 것을 드리지 않고 신을 섬기는 법은 없다고 느꼈거든요. 그래서 그들은 금가락지를 뺀 겁니다. 귀한 패물을 빼서 녹이니까 아론 말로는 불 속에서 금송아지 나왔다고 하지만 그건 너무 과장되고, 녹여서 뭔가 형체를 만들었을 것 아닙니까. 자비로운 형상, 그 형상은 인간의 뇌리에 기억하고 있는 것 중에서 괜찮은 형상을 모방해서 만들었단 말이죠. 그게 뭐냐? 금송아지에요. 금송아지를 우상이라 해요.

그런데 뭐가 우상이에요? 사실은 금으로 만든 게 우상이 아니고 그런 게 나왔던 출처, 우리 자체가 보이지 않는 모세가 보기에 우상이 되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모세가 세상에 40일 만에 살아 내려옵니다. 세상 신기록인데 아직 누구도 깨지 못했어요. 40일 만에 물도 안 마시고 잠도 안 자고 멀쩡하게 뭔가 들고 나올 힘이 있었으니까 대단한 에너지지요. 내려오면서 돌 판을 깼습니다. 너희들은 계약을 모른다.

결국 그들은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모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언약을 대체해서 애굽에서 익히 들었던 들은풍월로 신을 기쁘게 할 만한 것들, 십일조 바치고 주일성수하고 이런 것들 끌어 모으면 그걸 하나님이 받아 줄줄 알았어요. 뭘 몰라요? 하나님의 언약을 몰라요. 새 언약을 몰라요. 새 언약은 우리가 바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흘린 피,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그 언약을 몰라요.

그러면 십자가 피라 하면 그들이 믿습니까? 안 믿어요. 이렇게 합니다. 피 믿어줄게, 합니다. 피는 믿어주는 게 아닙니다. 그건 옛날에 바쳐서 구원받는 똑같은 방식으로 피를 믿는 것밖에 안 돼요. 피를 믿어주는 게 아니고 우리 자신이 피로 인하여 현재 존재하는 전부가 주님의 피의 작품이다. 그걸 다른 말로 죄인의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겁니다. 죄와 피의 만남, 거기서 감사가 나오고 모든 것에 대해서 고마움이 나오죠. 이게 영원히 고정돼있는 성전입니다. 언약궤가 고정돼있기 때문에. 언약이 완성된 그것이 발현된 것이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에 고정된 거예요.

그래서 이건 뭐냐? 이동된 시간과 공간은 고정된 장소에 응집이 돼요. 초점이 됩니다. 그 초점이 뭐냐? 시간과 공간을 친히 만들어내시는 분에게 초점을 맞추는데 독생자 예수님에게 맞춰집니다. 예수님의 성전이 완성됩니다. 예수님이 영원한 성전입니다. 예수의 영원한 성전에서 성령이 와버리면, 예수님이 성령을 보냈다는 말은 월남치마를 입었단 말입니다.

여자들이 큰 치마를 입고 앉으면 치마가 면적을 많이 차지합니다. 화투 칠 때 조심해야 됩니다. 속임수를 쓸 수 있습니다. 치마가 성령입니다. 성령이 멈추는 범위 안에서는 모든 성전은 하나의 성전으로 고정됩니다. 그 안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반복해서 발현되지요. 그게 능력을 행사하게 되는 겁니다. 그 지점을 향하여 지금 성막은 시작된 겁니다. 1월 1일에. 그리고 7월 10일이 하이라이트지요. 성전에서 전체 모든 백성의 죄를 용서받고, 1월 1일이 되면 시간이 다시 처음으로 돌아오죠.

이 시간은 그냥 목적 없는 시간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하면 시간도, 공간도 날아가고. 그래서 예수님이 오시면 지구에 모든 공간, 지점들은 몽땅 다 사라집니다. 마치 노아홍수 때 눈에 보이는 것은 다 사라지는 것처럼 예수님 오시면 이 세상은 불타서 다 사라집니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주어지게 됩니다. 주어지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그걸 믿는다고 구원되는 게 아니고 그 새 하늘과 새 땅에 누가 들어가는지 알아야 돼요.

누가 들어가느냐? 이미 그전에 예수님에 의해서 작품화된 사람만 들어가죠. 주님의 성령의 인치심을 받아서 너는 네 것이 아니고 예수의 것임을 알아챈 사람만 “주여, 어서 날 데리려 오시옵소서.” 그래서 앞으로는 빨리 죽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마시고 아예 날 데리러 오라고 하세요. 그 말은 뭐냐 하면, 공중에서 불 떨어질 때 밑을 보면 얼마나 아찔하겠나, 재미있겠나, 그런 뜻이 아니고 나는 땅에 있으나 공중에 붕 뜨는 주의 것이라는 고백이죠. 범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성막을 생각하면서 지정된 장소와 시간이 있었던 그 시절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음을 이제는 알았습니다. 예수님 오실 때까지 모형과 그림자로서 주어졌던 그것임을 깨닫고 오늘날 우리도 이 땅에서 주의 증인으로 모형으로 산다는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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