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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2 23:42:24 조회 : 1181         
산제물 161202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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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IP:119.♡.174.48) 16-12-06 14:12 
20161202a 울산강의-레위기 4장 : 산 제물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레위기 3장을 안 하고 4장 속죄제, 속건제를 하겠습니다. 왜 3장을 안 하고 4장 하느냐 하면, 속죄제, 속건제를 먼저 드리고 그 다음에 번제 드리고 화목제 드리고. 순서가 그렇게 돼있고, 레위기에서는 번제는 소제와 같은 거죠. 전부 다 태우니까. 3장에 화목제 나오고 4장에 속죄제 나오고 그 다음에 5장 13절부터 속건제에 나오고 그렇습니다.

제가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말하기니까 여러분은 복잡하다는 생각이 안 듭니까? 하나님 섬기기 힘들다. 하나로 끝내면 되는데 왜 그렇게 복잡하냐? 원래 제사가 하나에요. 번제 하나인데 최초의 제사도 번제뿐입니다. 가인의 제사도 번제고 가인은 곡물로 드렸지만 다 드린 거죠. 아벨도 마찬가지고. 번제가 세분화된다 할까요? 속죄제, 속건제는 하나님의 계명이 주어지면서 세분화됩니다.

출애굽기 20장에 모세가 시내 산에 가기 전까지는 전부 번제밖에 없어요. 번제 또는 화목제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서 계명을 받고 난 뒤부터는 구체적인 죄가 성립되는 겁니다. 이걸 어기고, 저걸 어기고, 과하게 어길 때마다, 번제 드려도 속죄제 드려도 돼요. 계명이 추가적으로 주어지면 그 계명에 따라서 제사도 덩달아 투입이 됩니다. 그러면 번제를 무효화시키는 게 아니고 번제의 내용이 더욱 더 깊어지지요. 번제의 내용은 제사 드려서 죄 용서 받는다는 겁니다. 이게 말은 굉장히 쉬운데 가당키나 한 일이냐, 그걸 믿으란 말이냐, 할 정도로 너무나 파격적이에요.

하나님께 제사 드리고 받게 되면 오는 과정에 우리에게 있는 죄가 제사에 포함이 돼버리면 죄를 품은 제사가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내려오는 과정에서 죄가 의로 바뀌는 거예요. 인간의 생각은 그거에요. 죄를 지은 당사자가 그 분량만큼 착한 일을 더 많이 하면 플러스, 마이너스 계산해서 상쇄되어서 죄를 20 짓고, 착한 일을 30 하면 30-20=10에서 10만큼은 10이라는 선이 남아있으니까 그 사람이 죽을 때 장사해서 이익 남겼구나. 네가 나쁜 짓도 했지만 착한 일을 더 많이 했기 때문에 나쁜 일은 착한 일로 퉁 치고 나머지 10으로 천국 가라. 이게 우리네 계산법이에요. 인간 대 인간의 계산법은 그렇게 돼요.

그런데 우리가 아는 선악 사고방식에서는 선과 악이 공존하기 때문에 손 장갑과 마찬가지입니다. 짝이 하나 있으면 안 되거든요. 선이 있다는 말은, 악이 아닌 게 선이고 악은 선이 아닌 게 악이 되는 겁니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선과 악을 나란히 병행할 수 있는 문제인데 선악 자체를 안 받겠다는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선과 악이 나란히 있겠다는 의식 자체가 통째로 악이 돼요. 어차피 생명나무 못 따먹으면 악이 돼요. 어차피 저주에서 못 벗어나면 악이 되고 아무리 착해서 생명나무 과실을 못 따먹으면 영생 얻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영생은 열심히 노력해서 가져가라는 게 아니라 어디를 논박하는 식이에요? 네가 인간이냐? 너희는 안 돼. 이런 뜻이에요. 네가 인간으로서 생명나무를 생각해? 그럴 권리나 그런 자격은 애초부터 없어. 생명나무 과실을 못 따먹으면 영생은 없는 겁니다. 이 두 가지 말을 합치면 인간이란 이유 때문에 영생은 없습니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네가 인간이냐? 그러면 영생도 없고 구원도 없어요. 왜? 인간이기 때문에,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에. 아담이 못 먹으면 우리도 못 먹는 겁니다. 이야기가 그렇게 돼야 돼요.

교회에서 영생 준다는데 나는 이해가 안 돼요. 하나님이 안 주겠다는데 교회가 무슨 힘으로 교회가 무슨 비선실세입니까? 지가 왜 영생을 줘요? 최진실이면 몰라도 최순실이잖아요. 줄 분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어요. 착한 일 남기면 천국 간다고, 보너스까지 챙겨준다고. 사기입니다.

죄가 의로 변하는 방식에 대해서 인간은 그냥 죄만 지으면 되는 거예요. 이걸 사자성어로 ‘기쁜 소식’이라고 합니다. 복음이에요. 착한 일이라고 해봐야 선악을 안다는 죄에서 나온 착한 일이기 때문에 그 착한 일은 내가 선악을 알기 때문에 지은 착한 일이기 때문에 그 착함은 선악체계로 도로 회수당해서 선악체계 안에 갇히게 만들어요. 따라서 하나님 보시기에 죄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게 창세기 3장 이야기에요. 아무리 착하고 순종 백날해도 소용없어요. 예수 믿고 뭘 해도 그것은 다 죄에서 나온 거예요. 내가 예수 믿는다는 것은 내 자체가 죄인이에요. 죄인이 예수 믿는 것을 하나님께선 죄로 간주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그럼 어떻게 되느냐? 주님 쪽에서 내려오는 게 있어요. 하나님은 의를 찾아 온 게 아니에요. 죄인을 찾으러 왔습니다. 왜 죄를 찾으러 오시느냐? 죄가 있어야 의가 생산되는 재료가 돼요. 이걸 원자재라 해요. 원자재가 죄에요. 마지막에 의가 나오는데 여기에 조건이 있는데 하나님이 제시한 조건에 걸려들어야 됩니다.

죄인을 주님께서 건사하시고 거두시게 되면 공정과정에 재료로 들어가요. 하나님의 의 만드는 공장이거든요. 이걸 언약이라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 공장에 들어가게 되면 제사가 마련돼 있고, 죄인이기 때문에 제사에 제물이 동원돼요. 흠 없는 제물이 동원돼요. 흠 없다는 말은, 야생종은 안 됩니다. 산에서 키운 건 안 되고 집에서 키운 것 중에서 상처 난 건 안 되고, 흠 없는 것으로 제물로 할 때 안수를 하게 됩니다.

속죄제 같은 경우 제사장이 범죄 했을 때는 제사장이 수송아지에 안수하고 일반 회중이 범죄 해서 속죄제 드릴 때는 회중을 대표해서 장로가 안수를 합니다. 그리고 족장들이 죄 지었을 때는 역시 제사장이 안수를 합니다. 안수 하게 되면 그것으로 죄가 제물로 이전 되면서 여기서 빠이빠이 해야 됩니다. 아들 키워서 스무 살 되면 논산훈련소에 보낼 때 입영열차 타고 새벽에 가잖아요. <이등병의 편지>에 보면 나오지요. 이렇게 빠이빠이 하는 거예요. 이제는 자기 자식 아닙니다. 나라에 바친 자식이에요. 울고 머리 깎고 하지요.

제물이 제사에 가게 됩니다. 공장이라고 했지요. 공장이니까 분쇄기가 필요하겠지요. 아무 작살을 내버립니다. 다 태우는 것을 번제라 합니다. 그런데 기름 태우는 것은 달라요. 이건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도 다 태워요. 고기는 번제에서는 고기를 못 먹어요. 다 태우니까. 속죄제에서는 제사장이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먹을 수 있는 고기도 따로 있어요.

장소가 성소거든요. 50*20미터짜리 성소. 동쪽에 문 있고, 불 피우는 제단, 대수대야 비슷한 바다, 그 다음에 천막을 4중으로 해서 비가 와도 괜찮아요. 또 여기에 휘장이라는 게 있어요. 문은 없고 커튼이 쳐져있어요. 커튼에는 종려나무와 천사들 문양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쪽에 테이블이 있는데 빵이 여섯 개씩 두 줄로 나란히 있고, 여기엔 조명시설이 갖춰져 있는데 일곱 촛대가 은은하게 비추고 있고 또 그 앞에 아침마다 향을 피우고.

대제사장의 속죄제에선 성소에 수송아지를 잡아서 피를 일곱 번 뿌리고, 일곱 번 바르고, 일곱 번 쏟아버리고 하는데 지성소에는 7월 10일 외에는 못 들어가요. 지성소는 성소와 커튼으로 구분돼있어요. 여기서 제물이 이렇게 갔다가 다시 돌아오게 돼있어요. 그런데 대제사장이 잘못했을 땐 그렇게 하고 일반 회중들이나 족장들의 경우에는 성소까지 안 가고 제단에서 처리해버립니다. 이럴 때 나머지 고기는 제사장이 먹게 됩니다. 제사장 자기 봉급이 돼요. 현찰 거래하는 게 아니고 현물로 해서 제사장이 먹게 돼요.

이런 과정에서 아무리 성경 읽고 신앙생활 50년 해도 여전히 남는 게 있어요. 어떻게 제사 지냈는데 죄가 없어지느냐? 믿자, 믿습니다, 백날 해도 본인이 그걸 이해가 안 되면 주님도 그 수작에 안 넘어가거든요. “믿습니다.” “뭘 믿는데?” “그냥요.” 이게 말이 되겠어요. “제물 바치면 우리 죄가 용서되는 걸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가능한데?” “그냥 믿습니다.” 그게 말이 되나? 이건 하나에 무당 주술 같은 거죠.

피 찍어 발랐는데 용서됐다. 하나님이 물었을 거예요. “왜 그게 가능하냐?” 우리는, “하나님이 한다고 약속했잖아요.” “약속해도 네가 납득이 돼야 되지. 이해를 하고 믿어야지.” “아닙니다. 저는 겸손해서 그냥 믿습니다.” “겸손한 건지, 관심 없는 건지 분명히 하라. 너, 관심 없지? 챙길 것 챙겼으니까 끝났다는 식이지? 솔직히 이야기해봐. 어떻게 죄가 의 되는지는 관심 하나도 없고 용서받고 구원받아 천당 가면 끝났지. 그런 마음이지?” 이렇게 닦달하면 어떻게 하렵니까? 자꾸 하나님이 이용할 생각 마세요.

분쇄기로 완전히 들어가 버리면, “양아, 네가 알아서 해라. 난 집에 간다.” 이러면 안 돼요. 우리는 양이 가는 코스 따라 가야 됩니다. 그러면 양이 여기서 난도질당해 피 흘리고 내장, 기름 태우고 할 때 그 양의 죽음이 아니에요. 산산조각 나고 해체된 우리의 모습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어떻게 죄가 의 되는지 궁금해요? 이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없는 백성인데 새로 만들어진 그들을 위해서 제사로 의 되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일반 사람들을 예수님 피 또는 제사의 피로 용서하는 게 아니에요. 이 땅에 용서받을 사람은 아예 없습니다. 레위기 자체가 없는 인간을 새로 만드는 작업까지 합류가 돼있습니다. 그게 어디에 표시 돼있냐 하면, 제물의 성결과 관련돼있어요. 조사해보면 대부분이 수컷으로 돼있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수컷이 아니에요. 암컷이 시발점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보는 것이 레위기 4장이잖아요. 3장은 나중에 하고. 속죄제 하는데 제사장 제물이 수송아지에요. 회중들 통째로 수송아지입니다. 족장들 제물은 숫염소에요. 수컷입니다. 번제도 마찬가지고. 레위기 1장에 보면 나오거든요. 그리고 유월절 어린양도 수양이거든요. 화목제는 수컷, 암컷 관계없이 다 돼요. 민수기에서도 수양의 비율이 많아지는데 레위기 앞에 출애굽기에서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십계명 받기 전에 아브라함 때에도 제사가 있었는데 그때는 속죄제, 속건제는 없다 했지요.

왜냐하면 속건제, 속죄제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법령이 늘어나고 증가하면서 거기에 따라서 같이 늘어나는 그 죄에 맞추어서 더욱 더 세밀하고 조밀하게 세분화된 제사 제도가 번제에서 더 세분화되고 다양화되어서 번제 안에 품고 있던 속죄제, 속건제로 보면 돼요. 사람 신체가 있는데 신체 안에 췌장, 간, 위 있듯이 번제라는 덩어리를 해부해보니까 그 안에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로 세분화된다 이 말입니다. 전체 덩어리는 번제고.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세분화시킨 이유가 뭐냐? 제물 바쳤으니까 볼 일 보세요. 나는 농사짓겠습니다. 이렇게 관심 없이 소에 양에 안수했으면 알아서 의가 나온다 했으니까 나는 믿습니다, 하고 결과를 맡기면 된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말이죠. 세탁소 옷 맡기면 나중에 찾아오던지, 배달해주잖아요. 세탁소 뜨거운데 있어야 됩니까? 맡겨주면 다 알아서 할 건데 나중에 배달만 해주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되면 십계명부터 해서 자잘한 이웃관계, 이웃을 사랑하라, 형제를 사랑하라, 혼방 옷을 입지 마라, 난간을 세워라, 누굴 맡길 때는 어떻게 하고, 노인은 도와주고 하는 그렇게 세세한 항목들은 구원받은 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지키는 게 아니에요. 네가 받은 구원이 얼마나 세분화되고 어떤 죄가 죽을 때까지 계속 나오기에 선과 악의 양으로 죄가 없어지는 게 아니고 대신 희생제물이 필요한가를 회상하듯이 후차적으로 주님의 희생제물의 의미를 더 깊이, 그 사랑의 높이와 넓이를 풍성하게 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계명을 주는 거예요.

사도 바울의 권면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 믿었으니까 주께 영광 돌려서 하나님 형상 본받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고 십자가 믿었으면 십자가가 얼마나 큰 용서인가를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를 그 다음부터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세세한 계명들을 투입해요. 술 취하지 말라, 분을 품되 해 지도록 하지 마라, 이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같이 서로 사랑하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계속해서 추가적으로 줌으로 말미암아 모든 말씀 앞에서 우리는 점점 더 죄가 많아지고 예민해지는 거예요. 섬세해지는 거예요.

우리가 생각하는 선악과 따먹은 입장에서 죄란 개울가에 징검다리 건너는 것 같아. 이걸 건드리면 죄고, 안 건드리면 죄 아니고 착한 일이고. 개울가에 징검다리가 있는데 이렇게 건너가면 죄고, 이렇게 건너가면 의가 되고, 죄도 아니고 의도 아닌 중간은 중립이고. 이런 것을 설정해놓고 죄는 피하고, 술 먹고 마누라 개 패듯이 패는 건 죄로 보는 거예요. 그런데 마누라한테 생일이라고 목도리 사주고 소원대로 스페인여행 가주면 남편 된 도리로 희생한다고 보는 거예요.

이것도 문제지만 더 문제가 때리지도 않고 선물도 안 주면 중간이라고 보는 겁니다. 중간은 없어요. 교인들이 맨날 목사한테 묻기를, “죄도 아니고 의도 아닌 중간은 괜찮지요?” 자꾸 중립지역을 만들고 그걸 확인받으려 합니다. 성경에 그런 게 없으니까. “빨간불인데 바빠서 건넜습니다. 목사님, 이게 죄입니까?” 가만있어보자, 예레미야 보자. 예레미야 아무리 봐도 빨간불, 파란불 나오질 않네.

심지어 “목사님, 담배 피워도 죄입니까?”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담배이야기 안 나와요. 네 신체에 연기 피우지 말라든지 비슷한 거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그것도 안 나와요. 잠언에도 안 나와요. 하나님의 성전이니까 담배연기 들어가면 성령이 에취, 에취 하면서 하나님이 알레르기 일으켜서 담배피우면 내 몸이 허옇게 되니까 성령께서 답답해서 못 참겠다고 성령이 충만하다가 갑자기 튀어나가 버리면, 그래서 담배피우지 말라는 거예요?

이런 사고방식이 참 지난 이천 년 동안 성당과 교회, 지금도 계속 되고 있어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어요. 그 이유가 뭐냐? 증거가 뭐냐? 나이 60 넘으면 기억도 안 나고요, 차 열쇠에 집에 놔두고 찾고요, 머리, 어깨, 무릎, 팔 다 쑤시고요, 60 돼서 성경 공부하니, 참. 계단도 못 올라오는데. 뒤늦게 연금 받고 살 나이에 성경공부 참석하니까 잠만 오는데. 기초도 안 돼 있고.

인간이 주저앉아요. 관절이 나빠서 주저앉는 것이 아니고 그동안 자기가 중립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다 죄였던 겁니다. 죄 아닌 구석이 없습니다. 촘촘히 다 깔렸어요. 마치 보일러 배선 깔아놓은 같아. 평생을 살아가면서 죄 안 지은 순간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죄 지은 순간이에요. 왜냐하면 내 인생을 내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내 인생을 내 것이라고 여기는 순간 어떤 일을 해도 먹든지 마시든지 자기 영광을 위해 살았거든요. 자기의 의와 자기의 자존심과 자기의 자존감과 자기의 명예와 그리고 여분이 있으면 자기 가족의 명예, 자기 가문, 더 여분이 있으면 자기 교회의 영광, 교회를 위해 희생하고 더 있으면 안중근이나 이봉창처럼 조국을 위해 희생하고.

그 전부가 내가 여기 있음을 근거로 한 그걸 핵으로 잡고 나머지는 둘러싼 동심원들이에요. 모든 먹고 마시는 것이 그 가운데 내가 있기 때문에. 인간은 꼭 종기 같아. 자꾸 커져. 근지러워서 긁으면 더 커져요. 고약 붙이든지 해서 빼내야 돼요. 종기 나을 때 보면 한라산 분화구 같잖아요. 뻥하고 붕 뜨지요. 주께선 그걸 원하는 거예요. 뭐냐? 없음. 없음의 자리가 구원의 자리에요.

유월절 어린양을 먹으란 말은, 우리 큰 아들은 이번에 양 때문에 살았다는 이야기를 하라는 게 아니고 큰 아들이 있었던 자리 자체를 완전히 빈 공간으로 만들어서 그 자리에 어린양이 장자의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 아들 되는 겁니다. 그 장자는 더 이상 자기 이름으로는 살 수 없어요. 어린양의 이름으로 장자가 살아야 되기에 그 장자는 1년에 세 번씩 유월절과 맥추절과 수장절에 성전에 있는 곳에 와서 제사장한테 세미나 받아야 됩니다.

그런데 열왕기상하, 역대기상하에 보면, 그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오질 않아요. 가까운 높은 산에 갑니다. 거기에 산당이 있어요. 산당에는 제사장들이 있어요. 바알과 아세라 제사장들. 이방종교의 성직자들이 거기에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때그때마다 점을 쳐주고 행운을 안겨주는 거예요. 성전을 안 가고 산당 가는 이유가, 날마다 홈이 파여야 되는데 그건 싫고 멀쩡하게 있는 나는 올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산당에 있는 성직자들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와서 정성을 다해 빌면 5월에 귀인을 만날 것이다. 7월엔 아들을 낳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 주변 나라들이 다 부강한 나라가 됐어요.

그러나 성전에서는 피가 남발하고 그 광경 자체가 부정적이에요. 나를 긍정해주지 않아요. 그리고 자기 죄를 덧입은 양과 소, 염소들이 분쇄기에 난도질당하니까 그걸 보면 내가 양 같은 느낌이 들어요. 내가 제단에서 완전히 불태워지는 거예요.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겠습니까? 사람은 행복하기를 원하는데 그게 무슨 행복이겠습니까? 처참한 거지.

그래서 하나님의 제사장을 가까이하지 않지요. 가까이하지 않는다는 것은 십일조를 안 낸다는 뜻이에요. 자주 가야 헌금도 하는데 자주 안 가니까 헌금도 안 들어오는 거예요. 목사들이 교인 하나 빠지면 이것도 걱정되지만 목사들이 정작 걱정되는 것은 교인들이 몇 번 빠지면 돈이 안 나와. 이런 소리하면 사이다 같지 않습니까. 한꺼번에 낼까? 걱정 되는 거예요.

구약 보세요. 십일조를 내지 않으니까 제사장들이 직업이 없어. 그래서 사사기에 보면 사설 점쟁이로 취직하는 거예요. 숙식제공에 유니폼 받고 하는 일이 그 단체와 조직을 위해서 빌어주는 겁니다. 그게 바로 원목이고 교목, 군목들이에요. 무슨 복음을 전합니까? 복음 전하면 잘릴라고.

다시 생각해봅시다. 최초의 제사는 번제에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 번제로 드리라 해요. 창세기 22장에 보면. 그리고 아브라함과 같은 연대에 속한 이야기가 욥기에 나옵니다. 욥기 1장에 보면 욥의 아들들이 생일에 잘 챙겨 먹었어요. 생일마다 친구, 형제들 불러서 파티를 열었는데 그 소식을 듣고 욥은, 예를 들어서 큰 아들이 생일잔치를 벌였다면 욥이 번제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큰 아들이 파티 한다고 정신이 해이해져서 하나님 싫어하는 죄짓지 않게 하옵소서.” 이렇게 나와요.

욥 시대에는 아브라함 시대거든요. 그때는 계명이 없어요. 계명이 없는데 어떻게 죄를 아느냐? 그건 욥기에 나옵니다. 고아와 과부를 학대하는 것은 범죄고, 가진 사람이 너무 설치는 것도 범죄고, 여러 가지 범죄조항이 욥기에 나옵니다. 욥기 1장에서 욥이 자식들을 위해 번제를 드렸잖아요. 누가 봐도 욥은 부자란 말이죠. 그 부자면서도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행여 자식들이 범죄 할까 염려되어 까불 때마다 제사 드렸단 말이죠. 그러면 누가 봐도 욥은 그 당시 선악체제에 의하면 욥에게는 벌이 있겠어요? 벌이 없겠지요.

그런데 욥이 고난을 받습니다. 하나님이여, 제가 제사 드렸잖아요. 제가 가난한 자한테 요구한다든지, 욥기 나와요. 내가 이웃집 처자한테 마음을 뒀다면 제가 이런 고난과 벌을 받아도 아무 군소리 안 하겠는데, 내가 남을 탐내는 정도가 아니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줬단 말이죠. 아무리 봐도 선악체제에 입각해서 내가 이런 벌을 받을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친구들도 너는 생각 안 나지만 죄 지은 게 있으니까 이런 벌을 받을 거야. 이렇게 닦달 내니까 욥은 황당하기 짝이 없는 거예요.

욥이 몰랐던 게 있었습니다. 물론 욥기를 보는 우리는 알아요. 욥은 아무 죄 없고 하나님께서 사탄과 내기 했다는 걸 알잖아요. 보통 내기처럼 돈 걸고 내기한 게 아니고 욥의 목숨 내놓고 내기한 거예요. 욥의 신앙을 놓고 한 거예요. 하나님과 사탄은 즐기는데 욥은 죽을 판이라. 그런데 그 내기에 중요한 게 있어요. 내기를 걸고 그 내기에 사탄이 말려듦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이 욥의 인생, 지상까지 흔적을 남기는 계기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번제가 제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번제가 그 시대의 현실을 구성하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 당시 욥을 중심으로 일어나야 될 사건, 사건들은 마치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이면 범죄로 모입니다. 누가 저지른 범죄냐 하면, 욥기 마지막에 보면, 친구를 위하여 욥이 번제를 드리게 돼요. 그 효과로 욥의 세 친구가 용서를 받게 돼요. 이게 어렵습니다.

욥의 세 친구는 욥이 고난 받을 때 욥도 동의하고 본인들도 동의한 자기가 아는 한 욥에 대해서 말다툼을 시작한 거예요. 말다툼이 42장까지 이어지는 게 욥기입니다. 말다툼할 때 욥의 친구들은 아무리 해도 자기 죄를 알지 못해요. 그리고 덩달아 욥도 아무리 고생해도 자기 죄를 알지 못합니다.

결국 죄라는 것은, 이게 어려운 게, 죄를 지어서 죄를 아는 게 아니고 그건 선악체제라는 한계, 생명나무 못 따먹는 범주 안에서 그 인식의 틀 안에서 엉터리 같은 오류 많은 죄지만 생명나무를 따먹어야 될 새로운 피조물의 죄는, 인간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 죄를 몰라요. 하지만 그 죄에 대한 용서의 장치, 용서의 생산 기능과 제사라는 모습으로 제공이 되면 의미 주어진 용서체제를 체제답게 옹호하기 위해서 그걸 증거 하기 위해서 이들에게 죄가 발생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의 상식은 그겁니다. 순서가 죄 짓고 죄 지은 우리를 후차적으로 용서하게 되면 우리는 구원받는다. 아담의 후손들이 알고 있는 건 다 그런 겁니다. 심지어 그것이 이천 년 교회 조직신학까지 확정적인 진리처럼 돼있어요. 아담이 선악과 안 따먹었으면 십자가도 필요 없었다. 아담이 선악과 따먹는 죄 짓는 걸 보고, 하나님께서 마귀에 속하면 안 되지. 그럼 천국은 누가 차지하지? 천국 사람 되기 위해서 내가 뭘 준비하지? 마귀에 속했으니까 자기 힘으론 안 되고, 내가 아들을 보내서 대신 피 흘리게 해서 그 피를 믿기만 하면 용서해줘서 천국백성 채울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일이 터지고 난 뒤에 허겁지겁 후차적인 아이디어로 끄집어낸 게 십자가라서 십자가 믿고 구원받으면 된다는 거예요. 개신교도 개혁주의 신학도, 장로교, 침례교도 전부 그런 식이에요. 그럴 거라면 내쫓지 말지. 아브라함, 이삭, 야곱 복잡하게 뭘 보내요. 그냥 아담이 선악과 따먹고 쓰러질 때 주께서 독생자가 와서 내 피를 마셔봐. 이렇게 구원하면 되잖아요. 아브라함, 이삭 왜 보냅니까? 처음부터 예수님 오셔서 건지면 되지.

그게 아닙니다. 그럴 것 같으면 너희가 독약을 먹었구나. 가만있어 봐라. 내가 해독주스를 만들어야지. 이랬을 거예요. 그게 아니에요. 단 한 명의 아담의 자손들은 구원 못 받습니다. 단 한 명도 천국 못 가요. 천국 간 엘리야, 모세, 아브라함, 이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될 경우에만 천국 가는 거예요. 아브람이 아브라함, 야곱은 이스라엘로. 이삭은 아예 없는 존재고. 없던 존재가 천사 셋 나타나서 이름 먼저 지어놓고 이름에 맞춘, 세상에 월계수양복점이 따로 없어. 양복부터 만들어놓고 거기에 맞춰서 사람 만들어버렸어. 세상에 이걸 누가 믿습니까? 성령세례 안 받으면 못 믿어요.

구원받을 사람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거 할 인물로 십자가의 능력으로 앞당겨서 능력이 와서 아브라함 때 만들어지고 모세 때 만들어지는 겁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21세기 지금 우리가 만들어지고. 성령이 임했단 말은, 옛사람은 죽었다는 것.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다시 말해서 내가 예수님을 소유해서 사는 게 아니고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은 내 안에는 없고, 그리스도를 삽니다, 이걸 보여주는 껍데기가 우리에요. 내 안에 새로운 발전기가 장착된 거예요. 엔진이 가동돼요. 껍데기는 경운기인데 안에는 벤츠 엔진이에요. 경운기가 시속 200 나와. 이상해. 너무 빨라서 휴거해버려요. 우리가 펄쩍펄쩍 뛴다고 휴거되는 게 아니고 엔진이 달라서 그래요. 성령이란 엔진을 달았어요.

성령 안에 십자가 완성이 들어있거든요. 십자가 완성을 증거하고, 갈라디아서 6장 말씀처럼 오직 나는 그리스도 외에는 일체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오직 그리스도 외에는 자랑할 게 없나니.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자랑하지 않기를 원해서 새롭게 만들어진 피조물이 성도라고 하는 겁니다. 성령 받아야 그게 가능해요.

그러면 성도가 하는 일은 내 일을 반복하는 거예요. 죄를 지어줘야 돼요. 죄 지은 내가 용서받는 게 아니고 이미 용서받은 내가 있기에 그 다음부터 용서가 용서답게 하기 위해서는 그 용서받은 인간의 이름으로 죄를 지으니까 말씀 전체 통째로 죄니까 죄 아닌 게 없네. 전부 다 죄에요. 심지어 미장원 나오면서 머리 잘 된 것 좋아하는 것도 죄라. 오늘 머리 왜 이리 잘 됐는지 몰라. 그 순간 이 머리는 누구 머리다? 내 머리다.

항상 우리는 육신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내 것으로 돌아와요. 내 소유로 돌아와요. 어느 한 순간도 잠시잠간, 광주에서 그런 이야기했는데 소량의 순간이라고. 소량의 순간이 지나버리면 다시 내 것이 돼버려요. 예수 믿고 은혜 받았다. 누가? 내가. 갑자기 나로 돌아가요. 나 무시하지 마라. 방금 5초 전에 은혜 받았어.

은혜 받았다는 말은 범사에 감사하다는 뜻이에요. 이제는 감사할 것만 있다는 거예요. 왜? 우리는 죄 짓기 위해서 세상에 나서야 되고 그 지은 죄를 이미 한 번의 용서로 끝냈다는 그 관계를 유지하면서 이런 죄 때문에 내가 헌금한다고 용서받는 것도 아니고, 봉사한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고, 선교한다고 되는 게 아니고 오직 십자가 피로만 되는 이유가 바로 내 힘으로는 내 죄를 씻을 수 없다는 것을 죽을 때까지 반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어떤 목사가 만약에 구원받았으면, 교인이 천 명에서 20명 됐는데 석 달 지나니까 달랑 자기 마누라와 두 명 남았어요. 둘이 좋아서 “여보, 우리 너무 기쁘지, 그지?” 이렇게 되지 않는 한 그 사람은, 혹시 20명에서 30명 되면 우리는 생각하기를 30명 되도록 내가 얼마나 설교 잘하고 심방 잘하고 새벽마다 제단에 엎드려서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자랑질 할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걸 감안해서 계속 내보낼 겁니다. 그것도 돈 되는 사람부터 내보내고 나중엔 돈 안 되는 청년들만 남고. 헌금 천원 내고 사천 원짜리 점심 먹고.

그러면 주께서 바로 그렇게 하신 이유가 십자가만 자랑거리다. 목회 성공이 아니고 그 사람한데는 그런 방법을 사용하신 거예요. 다른 사람은 빌딩 네 채 세워서 부자 되는 방법으로 구원하는 방법이 있어요. 한 달에 수입 5억 들어오니까 얼마나 고민거리겠어요. 하지만 그 고생해야 되고 이쪽 편한 것은 편한 것이고. 남 편한 것 부러워하지 마시고 5억 들어오는 것을 너무 기피하지 마세요. “나는 안 줘도 됩니다.” 그러지 마세요. 주면 받아야지 할 수 없어요.


10분 쉽시다.
 한윤범(IP:119.♡.174.48) 16-12-06 14:13 
20161202b 울산강의-레위기 4장 : 산 제물
(강의:이근호 목사)


제물에 있어서 수컷이 많다는 것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제사장의 제물은 반드시 성소를 닿고 그 다음에 분향단 거쳐서 제단에 붓게 돼있어요. 하나님 계신 곳까지 갔다 왔다는 것은 이스라엘 중심이 제사장 중심으로 뭉쳐야 한다는 겁니다. 지난 수요일에 우리교회에서 설교한 것처럼 제사장 중심은 제사 중심이에요. 제사 중심은 희생제물이 필요한 존재만 천국 간다는 이야기입니다.

희생제물이 필요하다는 말은, 그 희생제물 앞에서 우리는 그 취지와 의미를 살리는 관계로서 우리는 죄인이 돼야 거예요. 따라서 우리가 아는 선악의 죄는 잊어버리세요. 선과 악, 윤리, 도덕적 죄를 알아봐야 지옥 갑니다. 그러지 말고 새롭게 나타난 십자가 기준, 십자가 앞에서 진정 몰랐던 죄인, 그 죄는 성령세례 받아야 가능합니다.

성령세례 받게 되면 한꺼번에 죄인 돼요. 죄 지은 것도 없이 그냥 죄고, 이걸 전라도 말로 기양 죄에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죄인의 괴수에요. 단 번에 죄인이에요. 그냥 죄인이 되면, 그 순간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쓰레기는 폼 낼 이유가 없어요. 죄인이 폼 내 봤자 죄인이니까 자기를 꾸밀 필요도 없고, 안 꾸민다는 말은 자존심도 챙길 이유도 없고, 자기 인생을 자기가 다듬을 이유도 없고. 그냥 주님의 용서, 주님이 날 구원해줬다는 사실을 그냥 보여주는 평생을 살면 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새로운 피조물의 모습이에요. 착한 일 한 게 새로운 피조물이 아니라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라는 고백이 웃으면서 즐겁게 감사한 마음으로 서슴없이 나오는 거예요. 툭 치면, 나는 죄인입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냥 죄인이기에 다른 사람을 절대로 용서하지 마세요. 용서하면 안 돼요. 같은 형제니까 봐주는 것 없습니다. 돈 빌려줬으면 꼬박꼬박 이자 다 받으세요. 용서해주면 마치 용서할 자격이 되는 것처럼 구는데 용서는 주님한테 찾아야지 인간 대 인간으로 용서를 찾지 마세요. 우리는 남을 용서할 권리도 없고 더구나 남으로부터 용서받을 권리도 없습니다.

그 사람이 날 내친다면 그건 내가 하는 짓거리에 합당한 하나님의 조치입니다. 만약에 누가 나를 돌보지 않고 굶긴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더러운 세상 빨리 떠나라는 하나님의 알람이에요. “갑니다, 예. 간다니까요.” 후딱 보따리 싸고 가면 돼요. 알아서 고려장 가면 돼요. 자식한테 전화하지 마세요. 그냥 산 속에 들어가면 되는 겁니다. 찾든 말든.

이게 우리의 평소 삶이 된다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는 다 내게로 오라. 그리고 말하기를 내게 배워라. 아버지 장례 치른다고 하는데 필요 없다. 죽은 자로 장례하라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자기 십자가 지고 나랑 같이 가자. 그러면 너한테 쉼이 있으리라.

어떤 분이 상담하는데 예수 믿었는데 왜 힘듭니까, 하니까 상담자가 하는 말이, 구하라 주실 것이요, 부르짖으면 된다는 겁니다. 어디서 들은 건 있어서. 성경 마태복음 7장에서 그리고 누가복음에서 구하라 할 때 뭘 주느냐 하면, 빨리 죽으라는 그런 명령을 받아요. 기도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좋은 것 주는데 그 좋은 게 뭐냐?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성령을 주지 않겠느냐.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이 땅을 살아가는 걸 말합니다. 예수님 이 땅에서 사실 때 성령 받았잖아요. 자기 백성에게도 예수님에게 주었던 성령을 자기 백성에게 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 가신 그 인생에 합류하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는 모든 성경을 하나로 뽑아내게 되면, 다시 말해서 콩을 갈아서 간수를 부으면 액체가 고체 형식이 되지요. 세상에 있는 모든 액체 같은 사건, 사건들을 고체로 만든다면, 뭔가 형체로 뽑아져 나온다면 그게 예수님의 공생애입니다. 모든 성경해석은 예수님 생애로 해석되어져야 돼요. 내가 뭘 하는 게 아니고 이 말씀이 모아져서 구체화되면 예수님 형체가 되어 구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그 과정을 우리한테 뽑히듯이 뽑혀 가는 거예요. 내가 어떻게 하겠다는 그 쪽으로 성경해석하시면 안 됩니다.

이번 시간은 어렵습니다. 첫째 시간에 문제 던져놓고 해결 안 된 게 있어요. 어떻게 제물로, 그냥 죄가 의 되진 않아요. 하나님을 경유하니까 의가 되느냐? 제물에 무슨 짓을 했기에 의가 되는지 그 문제입니다. 그 힌트를 저는 암컷과 수컷으로 이야기한다고 했지요. 여기서 창세기 15장을 잠시 봅시다. 창세기 15장을 왜 같이 보자는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거기에 아브라함이 나와요. 우리가 지금 하는 건 레위기잖아요. 레위기 4장 속죄제. 그러면 아브라함 이야기는 창세기 이야기로 레위기 400년 전에 이야기에요.

창세기 15장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게 있습니다. 아브라함언약, 이삭언약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안테나 뽑아내면 안에서 뭉쳐 있다가 가늘게 뽑혀 나오잖아요. 아브라함언약에서 뽑아내면 이삭언약 나오고, 이삭언약에서 뽑아내면 야곱언약 나오고, 야곱언약에서 뽑아내면 모세언약 나오고, 모세언약에서 뽑아내면 다윗언약이 나오는 거예요. 안테나처럼. 그래서 처음부터 언약은 하나에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서 미리 아브라함언약, 이삭언약 등이 뽑혀 나오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언약으로 예수님 오시면 되는 왜 이삭언약이 또 필요 하느냐? 아브라함언약이 발전하는 겁니다. 왜 발전해야 하느냐? 아브라함언약 안에 뭐가 들어있기에 아브라함은 죄인의 존재, 육의 존재임도 불구하고 천국에 합류하는 인생을 사느냐? 그 이유가 뭐냐? 그 이유는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남긴 역사를 통해서 보면 그 내막이 나와요. 속에 있는 내장이 바깥으로 나오듯이 내장들을 줄줄이 뽑아내면 아브라함이 구원받는 이유가 나옵니다. 마지막 뽑힌 내장이 예수님이에요. 그래서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예수님 보기를 고대했다가 그 다음에 보고 기뻐했다고 돼있어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하는 말이, 네가 나이 오십도 안 됐는데 네가 언제 아브라함을 봤느냐? 앞뒤로 그렇게 깔려있습니다만, 아브라함이 나를 보고 기뻐했다니까. 아브라함보다 예수님이 먼저 있다는 말이거든요. 먼저 있다는 말이 뭔 뜻일까요? 아브라함은 나를 위해서 먼저 시종처럼 ‘물렀어라!’하는 것처럼 나보다 먼저 역사 속에 출현해야 될 존재가 되는 겁니다. 앞서 가는 전령이라 할까요, 가이드라 할까요, 그런 입장이란 말이죠.

그러면 아브라함은 자기 인생은 없어요. 예수님을 보여주는데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뀌면서 아브람이 죽어요. 죽었다는 말은 이삭 낳는데 쓸데없는 존재로 전락해버립니다. 아무짝도 소용없어요. 쉽게 말해서 아브라함 본인이 구원받는데 본인이 아무 역할을 못해요. 그러나 천사가 와서 복의 근원의 자격으로 아브라함에 덮치니까 비로소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일을 저지르려고 하시는구나.

아브라함은 그냥 장기판이나 바둑판이라 보면 되고 그 위에 게임을 즐기는 것은 아브라함 소관이 아니고 그 위에서 졸을 어떻게 하고 차를 움직이고 포를 움직이거나 돌을 어떻게 놓고 하는 것은 장차오실 예수님의 공생애의 여러 가지 일거리가 미리 앞당겨서 얼룩덜룩 무늬를 놓는 거예요. 아브라함은 예수님 오기 전에 얼룩무늬가 있는 인생을 살았고, 울산에 있는 저와 여러분은 오시고 난 뒤에 십자가의 얼룩무늬가 현재 우리에게 주어졌고. 그러니까 둘 다 그리스도의 형제이긴 마찬가지에요. 둘 다 예수님 덕분에 구원받는 거예요.

그 얼룩무늬가 뭐냐 하면, 우리가 안 죽고 있으면, “나는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아요?” 자꾸 되바라진 소리가 나오기 때문에 주께서 “그 입 다물라! 내가 너를 저주받으라고 에덴동산에서 추방했는데 추방된 주제에 감히 어디를 넘봐. 그 입 다물라.” 군홧발로 우리의 입을 밟아버리죠.

그게 우리 인생에서 내가 뭔가 은근히 기대했다하면 일이 안 돼. 뭔가 목적과 기대를 걸고 한다면 안 된다고 봐야 됩니다. 혹시 여러분 목적대로 된다면 마귀가 한 거예요. 내가 은근히 노린 것은 다 안 돼요. 스토리 전개가 내 뜻대로 시나리오가 안 짜져요. 왜냐하면 우리는 내 인생 소설에 주인공이고 싶어 하거든요. 이건 죽을 때까지 이 자의식이 없어지지 않거든요. 주께서 간여하지 않으면 주께서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발걸음을 세신다는 말이 욥기에 두 번 나오고, 우리의 머리카락을 세신다는 말은 마태복음 10장에 나와요. 키가 한 자나 자랄 수 없다는 것은 마태복음 6장에 나옵니다. 어느 한 순간도 주님께서 자기 사람은 눈을 뗀 적이 없어요. cctv도 그런 cctv가 없습니다. 밥 먹다가 숟가락 놓는 것까지 다 찍혀있어요. 우리가 한 모든 짓거리를 다 알고 있어요. 지난여름에 네가 한 짓을 내가 알고 있다. 따라서 그것으로 여러분이 움찔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감사해야 되지요. 움찔한다는 것은, 지금 죄 따로, 의 따로, 중립지역 따로 있고 지가 아예 전을 펴놨어.

누가 창세기 15장 9절을 읽어보세요.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수양과” 됐습니다.

암소와 암염소와 암양, 전부 암컷이지요. 아브라함언약의 성취에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아브라함은 나이가 백 살이라도 아기를 낳을 능력이 있어요. 육이 안 죽었어요. 아브라함이 죽었다는 티는 암컷 되는 아브라함 부인 사래가 사라로 바뀌면서 아기 낳을 능력이 없습니다. 그 여자의 태가 죽었어요. 죽었는데 자궁이 살아서 아들을 낳습니다. 죽은데서 아들, 수컷이 나왔어요. 그 토대, 원천이 뭐냐? 누구 죽음이냐 하면, 아브라함이 죽은 게 아니고 부인, 여자에요. 여자의 후손이라니까.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워요. 창세기 3장 15절에.

하나님께서 아담을 선악과 후로 저주받게 한 이유가, 저주로 끝내는 게 아닙니다. 저주 안에서 죄 안에서 의가 나오는 생산 공장을 천국에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저주받는 세상 따라와서 그 안에서 뱀과의 전쟁에서 승자의 이름으로 뱀을 치는 모양새로 하나님의 의가 생산됩니다. 죄를 이기지 않으면 의가 없어요. 그리고 죄를 이길 수 있는 실력자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아담은 안 돼요. 두 번째 아담, 마지막 아담만 가능하지 어떤 누구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믿으란 말이 아니에요. 우리가 복음에 의해서 만들어져야 되지요. 내가 하나님을 이용하거나 소유하지 마세요.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사람이어야 되고 예수님에 의해서 만들어져야 되지 내가 믿고 붙들고 의지하고 백날 해도 이건 지 수작에 불과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내가 나를 이끌어서 구원시키는 그런 작동을 계속해서 실패로 끝나고 예수님의 공로를 재료로 해서 죽은 자가 팔팔하게 천국 갈 수 있다는 예수님의 자기 솜씨를 구현하는 일종에 공작시간, 예수님의 자기 그림그리기 미술시간이에요. 또는 예수님이 작곡해서 작품화시키는 그 시간이 우리의 한 평생입니다.

이게 고린도전서 15장에는 이렇게 돼있어요.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주님의 작품입니다. 그리고 그 계획은 이미 창세전부터 예정된 겁니다. 하나님께서 구원받기로 작정한 계획에 의해서 아버지와 아들이 의논한 대로 이렇게 괜찮은 작품이 나왔습니다. 조건이 있어요. 나는 이미 죽고 죽은 내 안에서 이게 세워집니다.

도자기 만들 때 진흙으로 만들잖아요. 창세기 2장에. 우리를 늘 매일같이 죽게 만들어요. 죽게 만들고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빗어내는 거예요. 뒤에서 여자가 붙드는 것은 데미 무어가 나오는 영화고. <사랑과 영혼>에 나오는 한 장면이죠. 도자기 만들 듯 주께서 부어내는 거예요.

그런데 주께서 제대로 만들었는데 쟤는 좋은 그릇 만들고 나는 투박한 그릇으로 만들었습니까, 하니까 로마서 9장에 나오지요. 토기장이가 뭘 만들든지 지옥 가라고 만들든지 그건 오야 마음대로지. 똥 피를 주던, 팔월 공단을 주던 이건 화투 가진 오야 마음대로라니까. 사랑하기로 한 자는 사랑하고 미워하기로 작정한 자는 미워하고. 이건 주님 마음대로란 말이죠. 어차피 세상의 모든 것은 주를 위해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 돌아가는 거예요.

누가 먼저 주께 드려서 거래하듯이 갚음이 되겠느냐. 먼저 바쳐서 복 받는 건 없어요. 로마서에 나오죠. 이건 욥기에 나온 것을 로마서에서 성취한 건데, 바쳐서 복 받는 게 없어요. 안 받습니다. 만들어낸다니까요.

어떤 사람은 십일조 낸다는데 십일조 받을 사람이 없다니까요. 그게 문제에요. 계산기 두드려서 십분의 일을 계산은 돼요. 그런데 누구한테 줍니까? 공중으로 던집니까? 하나님, 받으소서. 받을 사람이 없어요. 예물을 받을 사람이 없다니까요. 십일조라는 게 없는 이유가, 받을 사람이 없는데 누구한테 줘요? 그럼 지가 써야지. 감사합니다하고. 왜? 우리는 하나님 작품이니까 내가 써도 주의 일을 쓰는 주의 일인데. 맛있는 것 사먹는 것도 주의 일이고, 탁구 치고 당구 치는 것도 주의 일이고.

아브라함언약은 암컷입니다. 암컷에서 수컷이 생산됩니다. 이건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수컷이 없는 상태에서 암컷만 있는 제사에서 드디어 레위기 4장에 보면 수컷이 되는 겁니다. 수컷의 대표자가 제사장이에요. 제사장은 거룩의 구체적인 인물이에요. 이건 왜 그러냐 하면, 제사장 자체가 구약시대라는 장기판에 얼룩덜룩한 장차오실 예수님의 무늬에요. 여자 원피스나 치마에 무늬가 있잖아요. 그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가 제사장 모습으로 오는 거예요. 그들의 존재 자체가 무늬라면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도 무늬가 되는 겁니다.

레위기 4장 13절에 보면, “만일 이스라엘 온 회중이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여 허물이 있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다가 그 범한 죄를 깨달으면 회중은 수송아지를 속죄제로 드릴지니 그것을 회막 앞으로 끌어다가 회주의 장로들이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하고 그것을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

처음에는 어긴 줄 몰랐는데 나중에 말씀을 다시 보니까 어긴 것을 알 경우에는 어겼으니까 반성하면 되지 않습니까? 지금 반성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게 참 어려워요. 반성해서 새사람 되는 게 아니에요. 경유를 해야 돼요. 자기 혼자 반성해서 잘못됐습니다. 이래서 되는 게 아니고 법을 어겼단 말이죠.

요새로 하면, 디모데전서 6장에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교회 두 번 나와선 몰라요. 디모데가 누군지도 몰라요. 몇 년 다녀야 안다고요. 강제로 성경 읽어보니까 이런 말이 나온단 말이죠. 내가 전에 얘 성적 내려간 것도 돈 사랑해서 벌 받아서 그런 거구나. 돈을 사랑하면 안 되겠구나, 이렇게 알잖아요. 먹는 것 입는 걸로 족한 줄 알라.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해놓고 막상 성경 보니까 사람을 옭아매서 숨이 막히게 만들어버려요. 안 족하면 뭐가 돼요? 죄가 돼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예예. 잘못됐습니다.” 이런다고 될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아이고, 진짜 더러워라.” 잘못됐다하면 구원이 취소된다. 또 히브리서 6장 나오죠. 한 번 비췸을 얻고 다시는 구원하지 못한다. 베드로전서에 개가 토한 것을 도로 먹고. 잘못됐다고 해서 선악으로 퉁 쳐야지요. 그날은 헌금 이만 원 더 넣고. 이걸로 퉁 칩시다. 갑자기 봉사하고 청소하고. 11시 10분에 오던 사람이 10시 50분에 오고.

지금 이 문제가 아니고 일부러 말씀을 보도록 주께서 몰아세운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그 말씀을 보는 순간 갑자기 나는 예수 믿고 착하다고 룰루랄라 하다가 내가 구원받은 걸로 기뻐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이걸 청교도라고 해요. 청교도가 이단입니다. 자기 구원론에 빠진 거예요. 청교도가 이단이면 그 밑으로 다 이단이죠, 뭐. 구원받았으니까 구원을 잘 유지해야 된다는. 구원을 무슨 수로 유지합니까?

원수를 사랑하라 했는데 원수가 다섯 명 있었습니다. 다 사랑해버렸어요. 원수가 친구 됐어요. 그 다음부터 구원됐어요? 주께서 여섯 번째 원수 만들어요. 그러면 뭐라고 합니까? 자기 구원에 집착하는 사람은, 에이 씨. 스물일곱 살까지 착했는데 서른두 살에 걸리네. 또 찾아가서 형제여, 하면서 갖다 바치고. 무슨 이런 짓이 다 있어요.

마음속으로 간음하지 마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일했는데 거긴 여자도 없어. 간음하려 싶어도 할 수 없어. 육십에 퇴직해서 촌에 오니까 세상에 촌 다방에 사십 대 마담들이 앉아서 쌍화차 팔면서 하니까 마음이 동하는 거예요. 노래도 최백호의 <낭만을 대하여> 나오고. 갑자기 육십 넘어서 간음자가 되는데. 지금 이 순간 주께서 재림하시면 지옥 가. 재림 안 하시니까 천만다행이다, 빨리 처리해야 돼. 이게 바로 이단 아닙니까.

주께서 예수님이 갖고 있는 주님의 사랑이 그것마저 처리했다는 것을 나는 이만큼 아는 걸 점점 그 사랑의 깊이와 높이를 더 많이 알게 하시는 겁니다. 살아가면서. 차라리 기다려야 돼요. “주님이여, 아무리 생각해서 죄 지은 게 없는데 내일 되면 나오겠지요?” 기다려 돼요. 말씀을 보고 설교를 듣게 되면 정말 주님의 은혜로 살아가요. 그냥 거저주시는 용서의 힘에 밀려서 살아가요. 이걸 지난 수요일에 센 물살에 떠내려간다고 했는데 용서라는 물결에 우리가 떠내려가요.

그런데 우리는 모든 일에 감사해야 될 텐데 잠깐 보고 난 뒤에는 남들은 어떻게 돈 벌었는지 거기에 빠져서 자기 딴에 빡세게 기도해서 새로운 감사거리를 자신이 만들고자 하는 거예요. 보란 듯이 취직하고 보란 듯이 장가가고 보란 듯이 성공해서 주님께 기도 많이 해서 복 받아서 번듯하게 성공했다. 이건 자기 자랑이지 십자가 자랑 아닙니다. 그걸 주께서 성도라면 그러지 말라고 말리시는 그것만큼 좋은 사랑이 없어요.

여러분, 거지 나사로가 죽을 때 재벌 됐습니까? 끝까지 거지였지요. 드라마라면 벌써 재벌 돼서 회장 되어 죽었을 거예요. 기생 라합이 끝까지 기생으로 죽었어요. 탈출하고 난 뒤에도 기생인지 모르겠다만 하여튼 구원될 때까지 기생이었습니다.

암컷에서 출발한 것이 수컷으로 되는 것은 모든 것을 완전히 죽음의 보편성으로 만들어버려요. 십자가에 죽었음으로 너희는 나와 함께 죽었고, 죽은 모습이 어떤 모습이냐? 평소에 우리가 직장생활하고 가정에서 주부로 살아가는 이게 죽은 모습이에요. 목사 하는 것도 죽음 목숨으로 하는 거예요. 죽은 목숨이 될 때 안 죽었다면 주의 힘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베드로전서 4장에 보면 뭘 하든지 간에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하고 용서받은 힘으로 하는 것처럼 하라는 것이 그 말이에요. 죽은 자인데 봐줘서 주의 일하라고 계속 살려두는 거예요. 사도 바울의 소원을 죽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너희들 때문에 주께서 안 죽이고 계속 일하게 하신다.

방금 길게 이야기한 것을 신약에서 이렇게 합니다. 오늘 제목입니다. 산 제물. 산 제물이 있는 장소가 성전입니다. 너희는 거룩한 성전이다.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새로 조성된 하나님의 성령이 거주하시는 성령이 자기 집으로 스스로 만들었어요. 해비타트운동, 가난한 사람에게 집 지어주는 것처럼 주께서 집을 만들었어요. 만들어놓고 우리 안에 거주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뭐냐? 로마서 14장에 나오는 것처럼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천국이 그런 거예요. 죽어서 가는 나라가 아니고 지금 이미 성령세례 받아서 꼬락서니는 이래도 주의 사람으로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예수님의 십자가로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것을 증거 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성령세례 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행함이 아니죠. 그 상태를 믿음, 소망, 사랑,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 자체가.

그 다음에 레위기 4장 13절에 그릇 행한다는 것은, 나중 문제에요. 나중에 보니까 내가 몰라서 했구나. 그러면 알고 한 건 뭐냐? 이건 안 돼요. 왜 안 되느냐 하면, 알고 행하면 일단 해치우고 뇌물 내는 식으로 제사 드리면 될 것 아니에요. 욱하는 성질에 해치우고 하나님 잘못됐습니다, 라고 나중에 하면 된다?

예를 들어서 딸을 시집보내는데 혼처가 두 군데 나왔어요. 한쪽은 의사고 또 한쪽은 공무원이고. 9급 공무원은 복음을 알고 의사는 복음을 몰라. 그런데 딸은 공무원을 좋아하는데 엄마가 우겨서 의사를 잡으라 하고. 마음속으로 평소에 믿음으로 하는 건 아는데 일단 결혼시키고 난 뒤에 잘 구슬려서 복음 믿게 하면 될 것 아닙니까. 이런 식으로 하면 그걸 용서할 제사가 없어요. 이미 그 죄도 용서받았어요. 지가 괜히 제 발 저린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화목제물이거든요. 이미 모든 제사를 마무리 지은 거예요. 제 말을 잘 들으셔야 돼요. 아무리 의사고 내가 돈 좋아하지만 복음을 아는 가난한 공무원한테 보냈다 해도 그게 죄에요. 무슨 죄냐? 하나님께서 너 왜 네 성질대로 안 했는데? 그렇게 믿음대로 하면 의롭다고 봐줄 줄 알았어? 니 성질대로 해. 다음에 다시 하겠습니다. 필요 없어. 끝났어. 우리는 성질대로 살아야 할 것을 지가 통박 굴려서 이렇게 하면 믿음이라고. 뭘 해도 죄에요.

그럼 죄 아닌 게 없는 게 뭡니까? 안 믿는 의사와 결혼한 것을 감사하면 돼요. 복음이 얼마나 편리한지. 자기 행동 정당화하는데 얼마나 편리한지. 뭘 해도 감사하면 돼요. “주여, 이런 횡재를 감사합니다.” 주께서 의사가 의료법에 걸려서 의사면허 취소됐다면, “봐라. 니 뜻대로 안 되지?” 그러니까 의사와 결혼하길 잘했다. 왜? 네 목적 부셔버릴 거야.

순간순간 범사에 감사해야 돼요. 그런 의사 되든 말던 지금 감사하면 돼요. 미래에 대해서 내 미래 아니니까 내가 나서서 주제넘게 걱정하는 것은, 내 인생이 마치 자기 인생이라고 착각해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늘 내 인생일 수밖에 없어요. 죄인이기 때문에. 하지만 주님께 감사하라는 인생이라고 돌리기 때문에 늘 밀당, 우리 몸은 하나인데 대부분 이리 갔다가, 또 한 순간 저리 갔다가. 어떻게 하든지 자기한테 유리한 쪽으로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는 식으로 하는데 모든 인간이 다 그렇습니다. 그게 죄 지은 아담다워요.

그래서 주께선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온 거예요. 고난 주일에 밥 굶으며 금식해봤자 금식한 우리를 칩니다. “누구십니까?” “나, 주님인데 밥 먹으러 온나.” 그게 바로 유대인들이 금식할 때 마태복음 9장에 나오는 이야기 아닙니까. “나하고 같이 밥 먹으러 가자.” “왜요?” “신랑이 함께 있을 때 잔치다. 나만 있으면 되잖아요.” 네가 스스로 도사되려고 도 닦지 말고 나와 함께 있는 이게 혼인잔치, 축복의 잔치, 하늘나라에요.

성령이 임하면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희락은 기쁨이에요. 그 기쁨은 어디서 나오는가? 기쁨을 예상하면 절대로 안 나와요. 슬픔의 현장에서 비로소 기쁨이 나와요. 따라서 슬펐다가 기쁨으로. 이 이야기가 고린도후서 4장에 나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지만 모든 걸 가진 자고, 네가 보기에 내가 죽은 자 같지만 나는 살은 자고 내가 너희들 보기에 가난한 자 같지만 부요한 자고 또 남을 부요케 하는 자다. 우겨 쌈을 당해도 싸이지 아니하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그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이것이 바로 날마다 주님께서 나를 죽는 자리에 집어넣는 것은 나는 죽고 내 안에서 예수의 생명이 살아나게 함이라. 그게 바로 고린도후서 4장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내가 못한다는 게 없다. 왜? 지금 하고 있는 것이 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주께서 일으킨 일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탁구치고 머리 안 나면 내게 능력 주시면 머릴 바꿀 수 있나요? 염색하고. 돈 들여 염색하지 마세요. 염색하는 것도 주님의 십일조입니다.

그걸 아까 산 제물이라 했지요. 베드로전서에선 이걸 제사장이라 합니다.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다. 어두운 세계에 다른 법칙에 매이지 말고 새로운 법칙으로 제사장이 살아가는데 그 제사장이 하는 모습이 그냥 마음대로 사는 거예요. 내 마음대로 아니죠. 그러나 남들 보기에는 지 마음대로 사는 것 같아요. 그러나 본인은 알아요. 주님 마음대로.

그러니까 남들한테 반성하거나 그러지 마세요. 회개는 주님 앞에서만 하지 남 앞에서는 할 필요 없어요. 물론 미안하다고 인간적으로 할 순 있지요. 하지만 눈물 줄줄 흘리면서 그 사람을 감동시키거나 이런 짓하지 마세요. 자칫하면 그 사람의 종이 될 수 있어요. 주님의 종이 돼야지 사람의 종이 되면 안 돼요.

심지어 사도 바울은 엄청난 말까지 했어요. 요새 같으면 돌 맞아 죽었을 거예요. 남편들아, 절대로 아내 좋은 쪽으로 행동하지 마라. 어떻게 네가 여자의 종이 되느냐. 여자한테도 남편의 종 되지 마라. 주님의 종이 돼야지 되도 않는 남자 시키는 대로 하느냐 말이죠. 주님 시키는 대로 해야지요. 둘 다 서로의 종이 되지 말고 주님의 종이 된다면 그건 가정이라 하지 않습니다. 교회라고 이야기해요.

교회 같은 가정, 최고의 가정이에요. 서로가 어떤 행동을 해도 당신이 그 일을 했지? 주의 일인지 안다. 어떻게 알았어. 그렇게 심오한 진리를. 둘 다 다 하는 짓거리가 주께서 시킨 일로 존중할 줄 알아야 돼요. 결혼은 사랑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존중으로 하는 것이지. 사랑은 욕정이지. 사랑이란 말을 인간의 욕정에다 붙이는 게 아닙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해. 거짓말입니다. 갖고 싶다는 뜻이에요.

그 사람에게 존경할 게 없으면 사실은 부부생활하기 힘들어요. 뭔가 늘 새록새록 새로운 존경할만한 것들이 나와야 돼요. 그런데 일부러 못 만들어냅니다. 주께서 유발시켜줘야 되고 유발시켜줘도 상대방이 못 알아 봐요. 그런데 주의 종이면 알아봐요. 머리 하나 바꿨을 뿐인데 오버하듯이 반응을 보일 때 주께서 그렇게 하셨구나, 하는 거죠.

이처럼 성도의 삶 전체가 이스라엘 같은 그리스도만 증거 하는 삶으로 살자가 아니라 살도록 조치를 해주십니다. 그래서 항상 뒤돌아보면서 감사하지요. 사실은 이만큼 우리 가정이 살아온 것도 하나님 은혜라는 것을 늘 서로한테 이야기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하나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무릇 잘못 행해서 했습니다. 그래서 또 다시 죄인 되었구나. 제사 드리고 반성할 필요 없어요. 확인만 하면 되니까, 십자가에 이것 때문에 죽었구나. 주여, 참 제가 죄인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짓을 또 했어. 똑같은 짓을 똑같이 했어요. 그러면 삼 세 판이라고 또 할까요? 그렇게 백 번을 했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너는 가만 보니 내 십자가를 이용하는구나. 한 번만 더하면 지옥 보낸다.” 이랬습니까? 주께서 어떻게 해주십니까?

그게 바로 베드로가 질문한 거예요. “주님이여, 나한테 죄 지은 자를 일곱이라도 용서해주면 되겠습니까?” 할 때 주님께서 일흔 번에 일곱 번이라고 용서해주라.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사랑하되 아무리 반복해서 천 번, 만 번을 해도 이미 주어진 용서기 때문에 그리고 용서받을 인간, 천 번을 해도 용서받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만든 자기 인형이기 때문에 천 번, 만 번 반복하면 반복할수록 그 고마움은 더 커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면 그걸 이용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하시는데, 우리는 매일같이 똑같은 죄를 저지릅니다. 우리가 기억나지 않을 뿐이지 사실은 똑같은 죄를 평생 살아있을 동안에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럼 그걸 어떻게 하는가? 성경을 들여다보면 어떤 구절은 마음에 와 닿을 때도 있고 어떤 구절을 그냥 놓치고 이년 뒤에 다시 볼 때 이런 구절이 있었어, 라고 나올 때가 있을 거예요. 그때는 주님께서 그때그때 몰아넣어요. 그 말씀과 마주치도록.

야고보서 4장에 보면, 세상과 짝하는 여인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했거든요. 처음 교회에 나온 아가씨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고 넘어가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에 세상과 짝했다는 것을 온 몸으로 짜릿하게 느끼는 어떤 순간이 올 거예요. 어떤 남자와 사귀다가 헤어져서 질질 짜고 울 때 이때를 위함이라고 올 거예요. 물론 그때뿐이겠지만.

결국 우리가 있으면 껍데기고 사실은 십자가 중심으로 파견 나온 말씀들이 우리를 치고 침처럼 쑤셔 넣고 쑤셔서 얻어진 생산된 죄를 다시 십자가로 모아서 십자가 영광만 드러내는 도구로써 우리를 충실하게 사용한다 말이죠. 어떤 때는 이 말씀, 어떤 때는 저 말씀. 어떤 찬송가는 은혜 되다가 두 달 뒤에는 4절까지 있고 왜 이렇게 길어, 하고 넘어가고. 이건 그때그때마다 주께서 발걸음을 인도하십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주님을 믿고 그냥 막 사세요. 그냥 막 살아도 다 주께서 막 사는 그걸 아주 존재의 가벼움을 주시면서 하루하루가 내가 놓친 은혜를 구석구석에서 찾게 되는 경우들을 우리한테 할당하십니다. 살면서 가끔은 늘 만나는 아내와 남편 사이라도 우리끼리 사십 년 산 것도 웬 은혜인가 그런 생각이 들어. 그런 소리도 두 번 되풀이하면 식상하지만 어떤 때는 그게 나올 때가 있어요. 어떤 때는 같은 소리인데 아내가 감격해서 “여보, 당신 같은 남자는 없을 거야.” 하고 잡채 막 해주고. 그 순간순간이 감사할 거리

그래서 결론은 뭐냐? 성도의 특징은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감사와 기쁨이 늘 주어지도록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는 실패할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마음껏 안심 푹 놓고 실패했다고 치고 이왕 실패한 것 막 실패하세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없는 데서 새로 수컷으로 만들어서 저희들로 하여금 산 제물 만들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 안에서 유성처럼 날마다 주의 말씀이 떨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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